#06. 여름 밤의 퇴락
“정말 죄송합니다, 선임님.”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은 주임이 허리를 꾸벅 숙여 보였다. 여준은 잠시 멍한 눈으로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쏟아지는 모양을 바라보고 있었다.
“잠깐만 시간 내주세요. 다 설명 드리고 책임도 확실하게 지겠습니다.”
“이제 됐어요.”
“선임님….”
“일 마무리됐으면 그만하죠. 더 이상 거론하고 싶지 않네요.”
더 늦기 전에 팀장에게 사정을 설명하고 퇴직계 운을 띄우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여준이 대화를 끝내려 시선을 돌리자 얼른 따라붙은 은 주임이 다급하게 말했다.
“선임님, 저 퇴직하기로 했어요.”
“…….”
“유학 결정됐거든요. 팀장님께도 아까 말씀드렸어요.”
여준의 마음이 또 금방 어지러워졌다.
“작년에 투고한 논문이 좋은 평가를 받았어요. 영국에서 장학금 제의가 와서…. 일단 그쪽으로 가려구요.”
축하의 말은 도저히 나오지 않았다. 여준은 가만히 직접 내린 커피잔만 바라보고 있었다. 머릿속엔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비슷한 시기에 팀에서 퇴직자가 둘이나 나오는 꼴을 팀장이 두고 볼 리가 없을 텐데.
“오전 일은 정말 죄송해요, 선임님. 다 제 탓이에요. 그런데 정말 맹세코 제가 선임님을 의심한 건 아니었어요.”
“…….”
“제가 처음부터 김 책임님께 말씀을 드린 게 아니고 옆 부서 친구…. 그러니까 박 주임이랑 이야기를 하다가요. 요즘 회사 생활 힘들다고 푸념하면서, 선임님께 제가 실수한 것 같다고 그 이야기를 한 건데….”
“…….”
“이 얘기가 옆 부서에서 입을 몇 번 거치면서 김 책임님 귀에 들어갈 때쯤엔 그게….”
“알겠습니다.”
은 주임을 믿지 못하는 것은 아니었다. 있을 법한 이야기이고, 여준이 살면서 수도 없이 겪은 일이었다. 다만 그녀의 진의나 일의 흐름 따위가 더 이상 궁금하지 않았을 뿐이다. 의자 등받이에 기대는 여준의 얼굴에 나른한 피로감이 어렸다. 한참 안절부절못하던 은 주임이 어렵게 말을 이었다.
“책임님이나 팀장님께는 제가 다 설명 드렸어요. 팀원들에게도….”
그게 다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여준이 석연찮은 행동을 하다 복귀가 늦었고, 그래서 업소 출입 의심을 받았다는 이야기는 이미 퍼졌을 텐데. 은 주임의 해명은 큰 의미를 갖지 못할 것이다. 어차피 소문은 다수가 믿고 싶은 방향으로 남을 테니까.
여준은 문득 은 주임을 마주 보았다. 종알종알 이야기를 이어가던 은 주임이 멈칫했다. 예쁘장한 얼굴, 곧고 날씬한 몸매, 높은 학력, 상냥한 말투, 친화력과 사교성…. 은 주임은 세상에서 말하는 좋은 조건을 있는 대로 때려 넣어 만들어진 인간처럼 보였다.
“…선임님?”
살면서 손에 넣지 못했던 게 없었겠지. 부모의 사랑도 친구들의 신뢰도 이성의 관심도. 마음껏 똑똑하게 굴 수가 있었겠지. 주위에 너는 그래도 될 인간이라고 떠받들어 줄 사람이 가득했을 테니까.
“저….”
여준 자신이 항상 그랬듯이.
“얘기 끝났어요?”
“…네?”
“그만 일어나도 될까요?”
“아, 네, 네.”
커피잔을 쥐고 일어선 여준이 두 번 돌아보지 않고 휴게실을 나섰다. 은 주임이 다급히 따라붙는 것이 느껴졌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얼마 되지도 않는 복도를 가로지르는 내내 지나치는 모든 사원들이 자신을 쳐다보는 것 같았다. 비웃는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가끔 사현과 함께 본 영화를 떠올릴 때가 있었다. 그래서 그 남자는 정말 초능력이 생겼던 걸까, 아니면 단순히 미쳤던 걸까?
“성 선임, 괜찮아?”
사무실로 돌아오자마자 이번에는 팀장에게 붙들렸다. 두꺼운 안경 너머 잔뜩 일그러진 눈동자가 보였다. 은 주임의 퇴직을 막을 수가 없게 된 상황에 팀장도 어지간히 다급해진 듯했다.
“얘기 들었어. 은 주임이 큰 실수 했던데.”
“아닙니다. 그 일 때문에 급하게 나갔던 게 아니고, 애 어린이집에서 사고가 났다고 해서 갔었습니다.”
“응? 사고? 무슨 사고?”
“말씀 못 드리고 나가서 죄송합니다. 애들 태우고 가던 버스가 전복 사고가 났다고 해서…. 너무 놀라서 정신이 없었습니다.”
어느새 주변으로 다가온 팀원들까지 한꺼번에 침묵에 휩싸였다. 한참 후에야 얼른 입을 뗀 것은 팀장이었다.
“저… 전복 사고? 괜찮은 거야? 애는?”
“괜찮습니다. 찰과상 정도여서 치료받고 집에 데려다 놨습니다.”
“이러고 있지 말고 집에 가! 반차 처리할게! 아니, 무슨 그런 소리를 애가 가다 넘어졌다는 것마냥 하고 있어?”
“…….”
“어우, 깜짝이야. 난 내가 잘못 들은 줄 알았잖아. 차 사고라니, 성 선임 와이프 그렇게 된 지 얼마나 됐다고 또….”
여준의 얼굴이 새파랗게 얼어붙었다. 모여 있던 팀원들도 마찬가지였다. 팀장이 뒤늦게 제 실언을 도로 삼키려는 듯 입을 틀어막았지만 때는 늦어 있었다. 여준은 그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고, 모여든 팀원들을 하나씩 훑어본 뒤에 말없이 제 자리로 가서 앉았다.
“…….”
사무실은 무섭도록 고요한 침묵에 휩싸였다. 벽돌을 삼킨 듯 가슴이 답답했다. 여준은 손바닥으로 명치께를 누른 채 마른침을 삼켰다. 자꾸만 발밑이 뜨는 느낌이 들었다. 무엇 하나 현실 같지 않았다.
***
사현은 함께 영화를 봤던 날 이후로 연락이 뚝 끊겼다. 학교에서는 도통 모습을 볼 수 없었고, 보내는 메시지에도 응답하지 않았다. 하루 이틀쯤은 그럴 수 있겠거니 했지만, 사흘째 되어서는 걱정되기 시작했다. 결국 점심시간을 틈타 1학년 교실에 찾아간 여준을 반긴 것은 아진이었다.
‘오빠! 웬일이세요? 저 보러 오셨어요?’
애교 있는 질문도 웃으며 받아 줄 여유가 없었다. 아진의 등 너머로 교실을 살피던 여준이 조심스레 물었다.
‘혹시 사현이 학교 안 나왔니?’
그 이름을 듣자마자 아진의 얼굴이 한껏 구겨졌다. 그녀는 교실을 돌아보더니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모르죠? 언젠 성실하게 학교 다니는 애였다고.’
‘평소에도 무단결석 자주 해?’
‘모른다니까요. 그런 애 알 게 뭐예요. 근데 임사현은 왜 찾으세요?’
‘아니, 갑자기 연락이 안 되니까…. 어디 아프거나 무슨 일 있나 해서.’
얼핏 듣기로 사현은 아버지와 둘이서 살고 있었고, 그나마 아버지도 집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고 했다. 여준은 점점 더 초조해졌다. 혹시 몸살이라도 걸려서 쓰러져 있는 거라면. 어디 다치기라도 해서 학교에 못 나오고 있는 거라면….
‘근데 걔한테 왜 그렇게 신경 쓰세요? 멘토링 기간도 끝났잖아요.’
두 손을 뒤로 모아 쥔 아진이 뾰족하게 말했다. 여준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푹 쉬었다.
‘그게 무슨 상관이야. 멘토링 끝났다고 하루아침에 모르는 사이가 돼?’
‘…아무튼 오빠는 사람이 너무 좋아서 탈이에요. 그런 애는 진짜 오빠가 챙겨 줄 필요도 없는데.’
‘…….’
여준은 영재나 아진을 보고 있자면 가끔 진심으로 의아해졌다. 이들은 대체 왜 사현을 이렇게까지 흰 눈 뜨고 보는 걸까. 그가 알기로 그들은 사현과 변변히 이야기 한 번 나눠본 적이 없었다.
‘근데 아진아, 너는 왜 그렇게까지 사현이 싫어해?’
‘…네?’
‘너 평소에 웬만하면 다른 애들 나쁘게 말하지 않잖아. 근데 사현이한테만 유독 그러니까 혹시 내가 모르는 일이 있었나 해서.’
눈을 동그랗게 뜬 아진이 곧 입을 꼭 다물었다. 속눈썹이 예쁘게 올라간 눈이 이리저리 흔들렸다. 사현과는 다른 눈이었다. 사현의 속눈썹은 곧고 길었다. 눈을 내리깔고 있을 때면 눈 밑에 검고 짙은 그림자가 졌다.
‘저 본 적 있어요.’
한참 후에야 아진이 입을 열었다. 여준은 재촉하는 대신 고개를 까딱 기울였다.
‘임사현이요. 친구들이랑 N동에 새로 생긴 케이크 집 갔다 오는 길에 봤었어요.’
‘N동?’
‘걔 정말로 조폭들이랑 어울려 다녀요. 팔에 칼자국 엄청 빼곡하게 있는 사람이랑, 뺨에 이렇게 큰 흉터 있는 사람이랑…. 여럿이 무리 지어서 다니고 있었어요.’
‘…….’
‘제 친구도 봤어요. 쟤 임사현 아니냐고 걔가 먼저 그래서 저도 봤는데 임사현 맞았어요. 거기서 호떡 파는 아저씨한테 물어봤는데 그 사람들 유명하대요. 그 지역 재개발 얘기 나오면서 터 잡은 깡패들인데 완전 악질이라고 했어요. 임사현은 걔네가 데리고 다니면서 키우는 새끼 조폭 같은 거래요. 진짜 위험한 사람들이니까 절대 가까이 가지 말랬어요.’
‘…언제 봤는데?’
‘일요일에요.’
일요일이라면 사현이 여준의 집에 다녀간 다음 날이었다. 잘 들어갔냐는 문자에도 하루 종일 답장이 없던 날이기도 했다. 여준이 옆머리를 감싸 쥐었다. 마음이 금방 복잡해졌다.
‘미리 알았으면 절대 말도 안 걸었을 거예요. 어떻게 그런 애가 멀쩡히 학교를 다닐 수가 있어요?’
‘아진아.’
‘조폭이랑 어울리면 그 자체로 퇴학감 아니에요? 솔직히 너무 무서워요. 선배도 걔한테 더 이상 신경 안 쓰셨으면 좋겠어요. 그러다 진짜 무슨 일 생기면 어떡해요.’
진심 어린 걱정의 말인 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여준은 애써 대화를 끝내고 돌아섰다. 핸드폰을 들고 사현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지만 신호조차 가지 않았다.
어디가 아픈 거라면, 사고라도 난 거라면…. 거기에 아진의 말까지 더해져 한 가지 레퍼토리가 추가되었다. 그렇게 위험한 사람들과 어울리는 게 사실이라면, 그 사람들에게 휘말려서 크게 다치기라도 했다면.
「사현아, 문자 보면 답장 좀 줘. 연락이 안 되니까 걱정되네.」
조심스레 찍어 보낸 메시지에도 당연히 답장은 없었다.
금요일, 결국 여준은 교무실을 찾았다. 갖은 핑계를 댈 각오를 했지만 담임은 아주 순순히 사현의 주소를 알려 주었다.
‘그런데 사현이, 학교 잘 나오고 있던데?’
메모를 건네며 덧붙인 말에 여준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네? 머뭇거리며 되묻자 담임이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선생님이 1학년 수업도 들어가잖아. 수업 빠지는 거 본 적 없는데.’
‘…….’
‘내가 본 건 뭐지? 유령인가?’
덧붙이며 웃는 말에도 여준은 웃을 수 없었다. 학교에 잘 나오고 있다고? 그것도 한 번을 빼먹지 않고?
아진이 사현을 못 본 척한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사현과 눈을 마주치고 싶어 하지 않는 아이들은 많았다. 하지만 여준이 1학년 교실에 찾아갈 때마다 볼 수 없었던 것은, 모든 연락을 차단하고 응답하지 않는 것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
여준은 사현의 주소를 주머니에 넣고 터덜터덜 교실로 돌아갔다. 다른 아이들과 떠들고 한참 떠들고 있던 영재는 여준을 보자마자 입을 다물고 모르는 척을 했다. 냉전은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영재는 여준이 먼저 굽히고 사과하기 전엔 어림도 없다는 태도를 고수하고 있었고, 여준으로서는 영재에게 그렇게까지 숙이고 들어갈 마음이 들지 않았다.
「사현아」
여준은 책상에 앉자마자 또 핸드폰을 쥐었다. 영재가 힐끔거리는 기색이 느껴졌지만 고개를 들 생각은 없었다.
「사현아 혹시 내가 뭐 잘못」
썼던 글자를 도로 지우며 아랫입술을 잘근거렸다. 하루만 더 지나면 코빼기도 못 본 지가 일주일째였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현이 여준을 피하고 있었다. 그것도 명백히 노골적으로.
뭘 잘못한 거지? 여준은 천천히 사현과 함께했던 토요일을 떠올렸다. 얼떨결에 초대했고, 같이 밥을 먹고 영화 네 편을 보았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눴다.
무슨 실수를 한 거지? 했던 말을 하나하나 떠올리느라 머리에 쥐가 날 지경이었다. 메시지 화면을 띄운 채 글자를 썼다 지우기를 수없이 반복하는데 앞문이 벌컥 열렸다.
‘모의고사 등수 붙었대!’
여준의 손끝이 흠칫 굳었다. 어릴 적 묻어 놓고 까맣게 잊어버린 지뢰를 난데없이 밟은 기분이었다. 식은땀이 솟고 피가 말랐다. 제일 먼저 달려간 것은 영재였다. 여준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유령처럼 교실을 빠져나갔다.
‘…….’
복도에 붙은 등수표 앞은 이미 장사진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1등의 이름은 그 뒤에서도 잘 보였다. 언제나 여준에게 밀려 2등에 있던 옆 반 반장이었다.
‘어….’
누군가 여준을 알아보고 낮은 탄식을 배었다. 아이들의 머리 위로는 정확히 14등까지의 등수가 보였고 그중에 여준의 이름은 없었다. 여준의 가슴이 튀어 나올 듯 세게 뛰기 시작했다. 떨어졌을 것은 예상했지만 설마하니 14등 밖으로 밀릴 줄은 몰랐다. 살면서 한 번도 받아본 적이 없는 등수였다.
마른 입술을 앙다물며 아이들을 헤치고 나아갔다. 옆으로 비켜서는 머리통 사이로 드디어 마지막 등수가 보였다.
15등 박영재 435
16등 성여준 432
‘…….’
충격을 받은 것은 영재의 등수가 아니라 여준 자신의 점수 때문이었다. 아무리 한 과목을 날렸다고 하지만, 지난 시험보다 60점이 떨어졌다는 것은 화학 외의 과목들에서도 조금씩 실수가 나왔다는 뜻이었다. 머리가 지끈지끈 아파왔다.
개인실을 얻지 못한 것은 상관없었다. 하지만 여름 보충 수업 내내 장난과 진담, 또는 그 반반이 섞인 온갖 말들을 듣게 될 것을 생각하니 돌아버릴 것 같았다. 여준이는 왜 여기 있지? 정신 차려야지. 제대로 해야지. 그나마 걱정이 섞여 있던 말은 점점 카페 익명게시판에서 보았던 악의에 얼룩졌다. 잘난 척하더니 꼴좋다, 성적에 목숨 안 건 척, 고고한 척은 혼자 다 하더니 쌤통이다….
절로 새어 나오는 한숨을 간신히 삼켜 내고 돌아서는데 덜컥 영재와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지는 누구보다 여준이 잘 알고 있었다. 여준은 애써 웃고 입 모양으로 축하해, 말했다. 영재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을 뿐이었다.
***
수업이 끝나고, 학원 수업을 듣는 내내 머릿속이 텅 비어 있었다. 여준이 가져간 성적표를 들고 한숨을 푹푹 쉬던 강사는 기어코 화학 답안지를 밀려 썼다는 고백까지 받아낸 후에야 닦달을 멈췄다.
‘정신 똑바로 차려야지. 시험도 실전인 거 몰라? 그동안 잘해왔다고 안심하면 안 돼. 성적 미끄러지고 멘탈 터지는 거 한순간이고, 네가 그러고 꾸물대는 동안 밑에서는 팍팍 치고 올라온단 말이야.’
‘…네.’
‘똑바로 해, 응? 똑바로. 여름방학 때는 웬만하면 특강 신청하고. 개인실 못 땄으면 자습 분위기 어수선할 텐데 거기서 괜히 마음 못 잡고 있지 말고.’
‘부모님께 말씀드려 볼게요.’
‘그래, 이거 가져가서 설명 드려. 답안지 얘기도 솔직하게 해. 그래야 차라리 안심을 하시지. 실수한 게 부끄러우면 다음부턴 조심하면 돼.’
강사가 건넨 유인물에는 여름방학 기간 동안 강릉에서 진행되는 합숙 특강 커리큘럼 안내가 나와 있었다. 4주 예정, 특강비 200만 원…. 헛웃음이 나와 그대로 반으로 접어 버렸다. 보내 달라고 하면 당연히 보내 주겠지만, 이 돈을 써가면서까지 갈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학원을 나와 친구들과 인사를 나누고 버스 정류장에 섰다. 시간은 밤 아홉 시를 막 지나고 있었다. 하늘은 새카맣고, 공기는 후텁지근했다. 뉴스에서는 시종일관 열대야 타령을 했다. 며칠째 열대야가 계속되어, 열대야로 인해, 열대야 속 시민들은…. 찜통 속에 갇힌 듯 갑갑한 공기였다. 코점막에는 장마 냄새가 달라붙는데 비가 올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멀리서 마을버스가 다가오고 있었다. 집에 가면 부모님 앞에 엉망진창인 성적표를 내놓아야 한다. 침울해진 여준이 양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그때 뭔가 바스락 소리를 내며 손끝에 잡혔다.
꺼내 보니 사현의 집 주소가 적힌 메모였다. 멍하니 그것을 바라보던 여준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마을버스가 매정하게 정류장을 지나쳐 떠나가고 있었다.
‘아….’
마을버스는 15분 간격으로 운행되고, 15분이면 걸어서 집까지 갈 시간이었다. 어떻게 할까. 아쉬운 한숨을 토해 내던 여준의 눈에 이번에는 시내버스가 걸렸다. 멀리서 다가오는 버스 정면에 큰 글자로 ‘N동’이라고 적힌 것이 보였다.
‘…….’
다시 손안의 메모를 내려다보았다. 사현의 주소 역시 N동으로 시작했다. 복잡한 주택가 번지가 적힌 종이를 엄지로 매만지던 여준 앞에서 버스가 멈춰 섰다. 치익, 경쾌한 소리와 함께 열린 문 안쪽이 유난히 어두워 보였다.
운전기사의 피곤한 눈동자가 여준을 슬쩍 훑어보았다. 탈 거야, 말 거야? 묻는 듯한 시선이었다. 망설임은 길지 않았다. 메모를 움켜쥔 손에 힘을 준 여준이 훌쩍, 버스에 올라탔다. 쿵, 계단을 딛는 발끝에서 유난히 큰 소리가 난 것 같았다. 늪으로 빨려드는 듯했다. 뒤늦게 제정신이 들었을 때는 이미 문이 닫힌 뒤였다.
바깥 풍경이 빠른 속도로 바뀌었다. 버스는 높고 깔끔한 건물에 일정한 간격으로 가로등이 서 있는 거리를 지나 늦게까지 불이 번쩍이는 유흥가에 멈춰 섰다. 종점인 듯했다. 머뭇거리던 여준이 반쯤 구겨진 메모를 들고 운전기사에게 다가갔다.
‘저…. 혹시 이 동네 어떻게 가는지 아세요?’
버스를 세운 채 앞주머니를 뒤적이고 있던 기사가 한껏 눈살을 찌푸리고 메모를 들여다보았다.
‘N동…. 돌길이면 요 바로 위네.’
다행히 맞게 온 모양이었다. 여준은 그가 주머니에서 찾아낸 담배를 입에 물기까지 기다렸다가 다시 물었다.
‘위요? 얼마나 가야 해요?’
‘쩌기, 길 건너에 보이지. 언덕에 집들 다닥다닥 붙어 있는 거.’
‘아….’
고개를 든 여준이 입이 절로 벌어졌다. 8차선 도로를 사이에 두고 한쪽은 불이 번쩍이는 유흥가였고 반대쪽은 무섭도록 고요한 주택가였다. 좁고 가파른 골목 양옆으로 낮고 낡은 집들이 따개비처럼 달라붙어 있었다.
‘주소만 보고 찾기는 좀 힘들 텐데, 마중 나와 줄 사람 없어?’
‘괜찮아요.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얼른 고개를 숙여 보인 여준이 버스에서 내렸다. 어디선가 술 냄새가 나는 듯했다. 길바닥은 온갖 난잡한 전단지며 쓰레기들로 빼곡했다. 멀리서 높고 활기 어린 웃음소리가 들렸다. 늦은 시간에 이런 동네에 와 보기는 처음이었다. 마른침을 삼킨 여준이 가방끈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신호를 기다려 길을 건넜다. 등 뒤에서 번쩍이는 네온사인 불빛이 멀어져감에 따라 소음도 줄어들었다. 마침내 골목 초입에 도착했을 땐 사위가 완전히 고요해져 있었다. 길을 한 번 건넜을 뿐인데 다른 세계에 온 듯했다. 기묘한 느낌에 슬그머니 돌아보자 여전히 여러 빛깔로 번뜩이는 도시의 파편이 보였다. 검고 거대한 바다에 홀로 뜬 새우잡이 배 같았다.
이런 곳에 사는구나. 주택가는 하늘로 뻗어 오른 가파른 언덕임에도 우물처럼 보였다. 조심스레 한 발을 들여놓자마자 어디선가 컹! 큰 개가 짖는 소리가 들렸다. 깜짝 놀란 여준이 걸음을 멈춰 세웠다. 다행히 갑자기 개가 덤벼드는 일은 없었다.
여준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누른 채 다시 언덕을 오르기 시작했다. 희끄무레한 가로등 불빛에 의존해 집집마다 붙어 있는 번지수를 읽어 봤지만 이렇다 할 규칙이 보이지 않았다. 이래서야 찾을 수 있을까. 시간이 늦었으니 집에 있긴 할 텐데…. 이마며 목덜미로 금방 땀방울이 맺혔다. 밤이라지만 더웠다. 긴장된 마음에 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후우….’
손등으로 턱 아래를 훔치던 여준의 눈에 마침내 메모에 적힌 것과 비슷한 주소가 보였다. 다행히 곧 찾을 수 있을 듯싶었다. 핸드폰 불빛까지 동원해 담벼락을 훑는데 갑자기 쨍강, 뭔가 깨지는 소리가 들렸다. 흠칫, 어깨를 움츠린 여준이 숨을 죽였다. 이어 들려온 것은 사람의 목소리라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악에 받친 비명이었다.
‘나가 뒤지든가, 이 씨발년아아!’
‘네가 죽여! 네가 죽이라고! 맨날 피만 말리지 말고 차라리 제발 죽여!’
서로에게 쏘아대는 독기 어린 말, 깨지고 부서지는 소리에 심장이 쿵쿵 뛰었다. 싸우는 건가? 가정 폭력? 경찰에 신고해야 할까? 손에 쥔 핸드폰이 자꾸만 땀에 미끄러졌다. 112, 번호까지 찍어 두고 안절부절못하고 서 있는데 곧이어 다른 집에서도 소리가 튀어 나왔다.
‘이 개 같은 연놈들아, 그만 좀 해! 허구한 날 질리지도 않냐? 그렇게 못 살겠으면 둘이 같이 쥐약이라도 처먹고 뒈져! 그럼 조용하겠네!’
그러자 놀랍게도 거짓말처럼 조용해졌다. 소란과 침묵이 기형적인 형태로 공존하는 공간이었다. 마른 입술을 축인 여준이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낯선 장소에 자갈처럼 흩어진 두려움을 밟지 않으려면 온 신경을 집중해야 했다.
아마도 그렇게- 신경이 잔뜩 곤두서 있던 탓일 것이다.
‘…어?’
익숙한 인영이 시야 끝에 살짝 걸렸다 금방 사라졌다.
‘……?’
같은 교복이었다. 그러나 사현은 아니다. 사현은 키가 더 크고 어깨선이 곧았다. 의아함에 눈을 깜빡인 여준이 얼른 걸음을 재촉했다. 단순히 이 동네 사는 같은 학교 애가 더 있나 보다, 하기엔 지나치게 낯익은 느낌이 들었다.
골목을 꺾어 멈춰 섰다. 막 언덕 위의 다른 골목으로 사라지는 등이 보였다. 유령과 숨바꼭질을 하는 기분이었다. 여준은 힘주어 가방을 고쳐 매고 조금씩 달리기 시작했다.
쓰레기봉투가 늘어선 좁은 골목길에는 악취가 가득했다. 조금씩 속도를 내는 여준의 뺨으로 땀이 비처럼 흘러내렸다. 마침내 다음 골목에 도착했을 땐 등줄기가 온통 축축해져 있었다.
같은 교복의 인영은 이제 가로등 불빛이 닿지 않는 곳까지 멀어져 식별조차 어려웠다. 더는 쫓아갈 기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멈춰 선 채 희미해진 뒷모습을 바라보던 여준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영재?’
뱉어 내고 스스로 놀란 말이었다. 그럴 리가. 영재가 왜 여기 있겠어. 영재는 여준과 같은 아파트, 다른 동에 살았다. 한 번 놀러 간 적도 있었다. 후우, 긴 숨을 내쉰 여준이 땀에 젖은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손끝이 미끄러웠다.
헛것을 본 게 아닐까. 어깻죽지에 얼굴을 닦아 내고 숨을 골랐다. 영재로 인한 스트레스가 많았던 탓이다. 애써 생각하고 주소를 다시 확인하려는데 어느새 손이 텅 비어 있었다.
‘아….’
혼이 빠져 달려오는 사이 놓친 것 같았다. 순간 정신이 멍해졌다. 아랫입술을 짓씹은 여준이 애꿎은 제 이마를 툭 때렸다. 대충 기억하고는 있지만 확실하지 않았다.
‘미치겠네….’
치솟는 짜증과 함께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내가 지금 뭐 하고 있는 거야….’
손목시계를 보니 어느새 열한 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이런 시간에 다짜고짜 집으로 찾아가려 했다니, 스스로 믿을 수가 없었다.
손바닥으로 옆머리를 탁탁 두드렸다. 잠깐 이성을 잃었던 게 분명했다. 사현이 학교에 멀쩡히 나오면서 자신을 피해 다녔다는 사실에, 영재와의 일에, 형편없이 떨어진 성적에, 이 고요함에.
돌아가자. 어렵지 않게 마음먹은 여준이 몸을 돌렸다. 온몸의 힘이 쭉 빠져나간 느낌이었다.
‘오빠.’
가냘픈 목소리가 귓가에 파고든 것도 그때였다.
‘오빠, 순정이 애기 볼래?’
여준은 소리가 난 방향으로 무심코 시선을 돌렸고, 동시에 숨을 멈췄다. 산발머리를 한 여자가 쓰레기봉투에 기대앉은 채 여준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언제부터 있었지? 여자는 도무지 사람 같지 않은 몰골이었다. 허리까지 긴 머리카락은 가닥가닥 뭉치고 갈라져 빨다 만 걸레처럼 보였고 허벅지 위로 말려 올라간 원피스는 이미 그 원형이 짐작되지 않는 모양새였다. 퀭하니 튀어나온 눈동자는 각각 다른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덜컥 겁부터 집어먹은 여준이 주춤 물러섰다.
‘오빠, 순정이랑 결혼하기로 했잖아.’
‘…엇.’
‘우리 애기 이름 지어 줘. 우리 애기는….’
‘아니에요. 사람 잘못 본…. 자, 잠깐만요.’
여자가 뼈만 남은 팔로 바닥을 짚고 무릎을 직직 끌어 여준에게로 다가왔다. 머리가 어깨보다 아래로 내려가 있어 날개뼈가 위로 툭 튀어 나온 모양은 덫에 걸린 먹이를 앞에 둔 거미와 닮아 있었다.
‘오빠!’
벌컥 소리친 여자가 이어 경쾌한 웃음을 터뜨렸다. 아하하하, 아하하하…. 여준의 표정이 창백하게 굳었다. 도망쳐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다리가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그 사이 여준의 발치까지 다가온 여자가 그의 팔을 덥석 쥐었다.
‘-아!’
식은땀이 가득 밴 살갗으로 거칠고 두꺼운 손톱이 파고들었다. 귀신이 아닌 것은 확인했지만 사람인 쪽이 훨씬 두려웠다.
‘순이 죽었어. 순이 죽어. 오빠 우리 애기 이름 알아? 우리 애기 이름 순이야.’
‘놔, 놔주세요. 저는 정말로 그쪽 모르….’
‘순이 죽었어! 순이 죽었어! 순이 죽었어! 뭐가 무서워서 죽였어?’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면 좋지? 머릿속이 뒤죽박죽 엉켜 들었다. 차라리 개 짖는 소리나 싸우는 소리라도 들리면 덜 무서울 것 같았다. 잡힌 손을 빼내려 힘을 줄 때마다 여자의 손톱이 더욱 강하게 파고들었다.
누가 좀 도와줘, 제발. 절박한 심정으로 고개를 들어 올린 여준의 시선이 우뚝 멈췄다. 멀찍이 가로등 아래, 키가 훌쩍 큰 그림자가 보였다. 심지어 같은 교복 셔츠를 입고 있었다.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사현이었다.
‘…선배?’
그때 구름이 걷히고 달빛이 흘러내렸다. 가로등 불빛과 달빛을 한 번에 받은 사현은 완벽하게 구세주로 보였다. 서운했던 마음이나 품고 있던 의문은 순식간에 휘발되고 반가움과 안도감이 터질 듯 넘쳐 올랐다.
‘사현아, 어, 사현이 맞지? 이분이 사람을 잘못, 보신 것…. 악!’
다급히 말을 거는데 팔에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졌다. 내려다보니 여자가 눈을 잔뜩 부라린 채 여준을 노려보고 있었다. 자신과 대화하다 말고 딴 눈을 판 것을 용서할 수 없다는 듯이.
그러자 달려든 사현이 여자의 뒷덜미를 움켜쥐고 떼어 놓았다. 여자는 그때까지 보여 준 힘이 무색하게도 종잇장처럼 덜컥 끌려가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놀란 여준이 무심코 여자를 향해 손을 뻗었지만 사현이 막아섰다. 여자는 히익, 하며 몸을 움츠리더니 여준에게 다가올 때 그랬듯 엉금엉금 기어 도망치기 시작했다.
‘다쳤어요? 좀 봐요.’
아무리 그래도 사람을 저렇게 내팽개치다니. 순간 그간 사현에 대해 들었던 말들이 머리를 스쳐 지났다. 조폭이랑 어울려 다닌대, 완전 양아치에다 여자애한테도 인정사정없이….
‘아니, 나는 괜찮은데 저분….’
‘왜 소리 질렀어요? 어디 다쳤어요? 저 미친년이 뭘 어쩐 거예요? 아니….’
‘사현아, 좀 진정해 봐.’
‘왜 여기 있어요?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예요?’
벌컥 내지르는 소리에 귀가 울렸다. 눈을 크게 뜨고 굳어 버린 여준이 밭은 숨을 내뱉었다. 사현의 얼굴에도 뒤늦게 아차 하는 기색이 스쳤다.
‘…….’
모든 것이 이상하고 낯설었다. 알고 있던 사실들이 모조리 뒤집힌 느낌이었다. 여준이 크게 호흡을 골랐다. 하고 싶은 말은 많았다. 학교에서 안 보여서 걱정이 됐어. 네가 조폭 같은 놈들과 어울려 다니는 걸 봤다는 애가 있어. 나는 멍청하게도 답안지를 밀려 썼고 성적이 추락했고 이상한 뒷담화 현장을 보게 됐고 나를 아는 모든 사람들이 날 비웃는 것 같고….
‘나…, 나는.’
걱정했어, 정말 많이.
‘네가…. 요즘 학교도 잘 안 나오고, 연, 연락도 안 되고, 그래서 나는, 그게….’
너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겼을까 봐….
‘그래서 나는, 내가 혹시 너한테 뭐라도 잘…, 잘못해서, 그래서 화가 나서 그런, 그러는 거 아닌가 하고, 그게…. 그래서….’
사현을 마주쳤을 때 차분하고 덤덤한 태도로 어른스럽게 늘어놓으려던 변명은 새카맣게 잊어버렸다. 굳은 혀끝에 더듬더듬 걸린 것은 한심하고 비좁은 속내 그대로였다. 한 글자씩 뱉어 낼 때마다 짙은 회의감이 밀려들었다. 자칫하면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미쳤어, 정말 미쳤던 거야. 왜 안 하던 짓을 해서. 여준이 어금니를 악물었다. 한마디라도 더 했다간 돌이킬 수 없을 만큼 한심한 꼴을 보이게 될까 겁이 났다.
‘…….’
사현이 보일 듯 말 듯 옅은 한숨을 내쉬었다. 여준은 그가 그대로 돌아서 가버릴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사현은 여준이 흘려 놓은 날것 같은 감정에 질색하고 돌아서는 대신 손을 뻗어 왔다.
‘우리 집에 가서 얘기해요.’
팔을 감싸는 손바닥은 딱딱하고 차가웠다. 그래서 여준도 간신히 이성을 붙들 수 있었다.
‘…아버지 집에 안 계셔? 갑자기 가도 괜찮아…?’
‘그런 게 걱정되는 사람이 이 시간에 찾아왔어요?’
덤덤히 정곡을 찌르는 말에 속이 쓰렸다. 어쩐지 점점 작아지는 기분이었다.
‘학원 끝나고 바로 온 건데, 길을 좀 헤매다가….’
‘여기까진 용케 왔네요. 이 동네 길 찾기 진짜 힘든데.’
여준이 다시 입을 다물었다. 팔목이 붙들린 채 끌려가는 내내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사현이 향한 곳은 바로 근처의 2층짜리 주택이었다. 어둠 속에서 봐도 지은 지 삼십 년은 훌쩍 넘겼을 듯 낡아 보였다.
‘이쪽이에요.’
멍하니 2층을 올려다보던 여준의 팔을 잡아끌며 사현이 낮게 속삭였다. 건물 오른쪽에 지하로 통하는 작은 계단이 나 있었다. 아마 얼기설기 건물을 지어 올리느라 이상한 구조가 된 듯했다. 계단이 어찌나 좁고 가파른지 뒤꿈치만 간신히 댈 수 있었다.
익숙한 듯 성큼성큼 내려간 사현이 녹슨 철문을 열어젖혔다. 끼이익, 듣기 싫은 소리가 났다. 얼떨결에 따라 들어간 방 안은 눅눅하고 어두웠다. 사현이 형광등을 켜자 매트리스 하나 덜렁 놓인 단칸방이 드러났다.
‘…….’
여준의 눈에는 도저히 사람이 살 만한 환경으로 보이지 않았다. 벽지는 온통 곰팡이가 슬어 시커멨고 천장에 거의 달라붙은 작은 창은 먼지에 뒤덮여 있었다. 언뜻 깔끔해 보였던 것은 집 안에 가구라고 할 만한 것이 없어서였다. 멍하니 서 있는데 먼저 집 안으로 들어선 사현이 여준을 힐끗 돌아보았다.
‘저뿐이에요. 들어와도 돼요.’
‘어? 아, 응.’
여준이 얼른 신발을 벗어 가지런히 놓아두었다. 그 사이 방 안을 둘러보던 사현이 여준의 팔을 돌아보고 낮은 한숨을 쉬었다. 여준도 그제야 제 팔을 내려다보았다. 여자가 할퀴어 놓은 자리에 살짝 피가 비쳤다.
‘앉아 봐요.’
사현이 매트리스를 가리켰다. 남의 침대에 막 앉아도 되나? 걱정스러웠지만 그 외의 앉을 만한 곳이 보이지 않았다. 엉거주춤 매트리스 끄트머리에 엉덩이를 붙이자 사현이 부엌 찬장을 뒤적여 연고 하나를 가져왔다.
‘팔 줘요.’
‘…….’
여준이 순순히 손을 내밀었다. 사현은 한 손으로는 여준의 손목을 쥔 채 다른 손으로 그의 상처에 연고를 짜 발랐다. 차가운 손끝이 스칠 때마다 긁힌 자국이 따끔거렸다. 여준은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사현의 무표정한 얼굴이나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 하나하나가 마음에 걸렸다.
‘…내가 갑자기 찾아와서 화났어?’
연고 뚜껑을 갈무리하던 사현의 손이 멈칫했다. 여준은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고 쥐어짜듯 말했다.
‘미안해. 근데 너랑 연락할 방법이 없었어. 전화해도 안 받고, 학교에서도 볼 수가 없고, 반 애들한테 물어봐도 모른다고만 하고, 그래서…. 주소는 그…. 멘토링 담당 선생님이 알려 주셨는데 선생님도 걱정되신다고….’
‘뭐 그렇게까지 애를 썼어요. 연락이 안 되면 안 되나보다 하면 되지.’
쉽게 나온 대답이 여전히 냉랭했다. 여준은 순간 울컥 치미는 눈물을 참기 위해 턱이 아프도록 이를 사리물었다.
멘토링 기간 끝난 건 알고 계시죠? 언젠가 사현이 물었던 말이 이제 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멘토링 기간도 끝났는데, 그 양아치한테 왜 그렇게 신경을 써? 영재도 아진도 다 같은 말을 했다.
여준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방 안이 어두워 다행이었다. 아마도 벌겋게 물들었을 눈가를 사현에게 들키지 않기를 바라며 조금씩 말을 가다듬었다.
‘내가 괜한 짓 한 거야?’
사현과 함께 보냈던 모든 시간 속에서 여준은 한순간도 그가 보내는 선망이나 애정을 의심한 적이 없었다. 말은 꾸미거나 만들어 낼 수 있어도 눈빛은 그럴 수 없을 거라 믿었기 때문이다.
‘사현아, 내가…. 너한테 뭐 실수했어?’
‘아뇨, 그런 게 아니라.’
‘근데 그렇다 해도, 내가 뭘 몰라서 너 섭섭하게 했어도, 나랑 먼저 얘기할 수 있는 거잖아. 이런 식으로 갑자기 생까는 게 어딨어. 그러면….’
그게 다 착각이었나? 다들 하는 말마따나 그 잘난 멘토링이 끝나면 아무 의미 없어질 관계였을 뿐인데, 나 혼자 착각하고 오버한 거였나. 최악의 가정이 떠오르자 스스로도 믿을 수 없을 만큼 빠른 속도로 마음이 무너졌다. 입술 새로 비어져 나오는 말을 붙들 힘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면 상처 받잖아.’
와르르 솟아오른 감정이 미간에 맺혔다. 기어코 방울진 눈물에 여준이 다급히 눈가를 닦아 냈다.
‘아, 쪽팔리게….’
침묵하던 사현이 여준의 팔을 잡아 내렸다. 여준이 얼른 고개를 돌렸다. 걱정으로 잔뜩 일그러진 검은 눈동자를 마주하자 숨이 막혔다. 사현은 무릎을 꿇고 앉은 채 가만히 여준의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아씨, 이게…. 왜 안 멈춰….’
‘눈물이라는 게.’
마침내 흘러나온 목소리는 이상하게 그리운 울림을 품고 있었다. 여준은 눈물을 훔쳐 내던 손을 멈춘 채 사현을 내려다보았다.
‘불에 뎄을 때 물집 잡히는 거랑 똑같은 거래요.’
‘…어?’
‘그냥, 저희 아버지가 했던 말인데….’
‘…….’
‘너무 화가 나거나, 너무 슬프거나, 너무 기쁠 때 눈물이 나는 건…. 그러니까…. 뜨거운 거에 데면 물집이 잡히잖아요. 그게 살이 타들어 가는 걸 방지하려고…. 그 부분을 식히려고 생기는 게 물집이잖아요.’
‘…….’
‘눈물도 똑같대요. 내가 감당 못 할 만큼 큰 감정이 일어났을 때, 그 감정 때문에 열이 나지 않게…. 몸 상하지 말라고 생기는 게 눈물이랬어요. 그러니까 참으려 한다고 참아지지 않는 것도, 멈추려 한다고 멈춰지지 않는 것도 당연하다고.’
조곤조곤 말을 이어 가던 사현이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여준은 멍하니 눈을 깜빡이며 그의 손이 제 뺨에 닿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러니까…. 제가 하고 싶은 말이 뭐냐면….’
‘…….’
‘제가….’
‘…….’
‘…제가 다 잘못했어요.’
여준은 하마터면 살짝 웃을 뻔했다. 꾹 눌러 참은 것은 듣고 싶은 이야기가 많아서였다. 그래서, 내 연락은 왜 무시했어? 학교에서는 왜 코빼기도 볼 수 없었어? 조폭이랑 어울려 다닌다는 건 진짜야?
우리 집에 왔던 날, 왜 울고 있었어?
‘연락 못 받은 건 핸드폰이 고장 나서 그랬어요. 변기에 빠뜨려가지고….’
다행히 사현은 여준이 가장 궁금했던 점부터 짚어 주었다. 다행스러운 한편으로 실망감을 감출 수 없었다. 핸드폰이 망가졌다니, 그럼 앞으로도 바로 연락할 수 없다는 걸까.
‘학교에서는 그냥 타이밍 안 맞아서 못 본 거예요. 제가 일부러 먼저 안 찾은 것도 있어요. 멘토링 기간도 끝났으니까 이제 선배 귀찮게 하면 안 될 것 같아서….’
주절주절 이어지는 변명은 지나치게 앞뒤가 맞았다. 여준은 잠잠히 그의 얼굴을 바라보다 어렵게 물었다.
‘진짜야?’
‘네?’
‘정말 그게 네 진심이야?’
사현은 잠시 말이 없었다. 까맣고 반질반질한 눈동자를 여준에게 고정한 채 숨소리조차 내지 않았다.
‘왜 그런 걸 물어보세요?’
한참 후에야 되묻는 말에는 언젠가 사현이 건넸던 그 질문이 묻어 있었다. 왜 내게 그런 걸 물어요? 내가 당신에게 그런 생각을 하게 만들었나요?
‘연락이 안 된 건 핸드폰이 고장 나서고, 일주일 동안 학교에서 머리카락 한 올 볼 수 없었던 건 그냥 우연이고…. 그럼 네가 잘못한 건 뭔데?’
‘…….’
‘미안할 것도 잘못한 것도 없잖아. 괜히 나 혼자 오버한 건데….’
여준이 점점 고개를 숙였다. 그대로 또다시 침묵이었다. 한심해, 쪽팔려. 속으로 되뇌며 여준은 몇 번이고 입술을 짓씹었다. 시간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남은 수명의 반이라도 바칠 수 있을 것 같았다.
사현 앞에서는 언제나 여유롭고 멋진 선배이고 싶었다. 이런 꼴이나 보이자고 별의별 욕을 다 보며 여기까지 온 게 아니다. 치밀어 오르는 자괴감에 여준이 얼른 손을 내저었다.
‘…아니, 이런 말을 하려던 게 아니라…. 그게, 나는.’
‘저는.’
사현이 다시 여준의 손을 잡았다. 사현의 손은 차가운 찰흙 같았다. 여준은 자신의 손이 사현에게 너무 뜨겁게 느껴질까, 오로지 그것만이 걱정스러웠다.
‘선배가 안 웃으면 그게 다 내 잘못 같아요.’
여준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사현의 말은 대단히 이상하게 들렸다. 꿀꺽, 입 안에 고인 신 침을 힘겹게 삼키자 코끝까지 쓰라렸다.
‘선배가…. 뭐가 안 풀린다고 하면 그것도 내 잘못 같고, 힘든 일이 있다고 하면 그것도 내 잘못 같고….’
‘…….’
‘급식이 맛없다고 해도 내 잘못 같아요.’
듣는 여준의 머릿속에서는 소용돌이가 치는데, 정작 내뱉고 있는 사현은 덤덤했다.
‘그건 아주 이상한 느낌이라서…. 가끔 다 때려치우고 싶어요.’
사현이 낮은 한숨을 쉬었다. 그의 시선은 어느새 여준의 팔에 난 상처에 고정되어 있었다. 마치 그 상처조차 제 탓이라는 듯이.
‘그래서 한 소리예요.’
‘…….’
‘…일어나세요. 정류장까지 데려다드릴게요.’
팔을 잡아 일으키는 손길은 여전히 조심스럽고 부드러웠다. 여준은 얼떨떨한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어떻게 신발을 구겨 신고 집 밖으로 나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정신을 차려 보니 달빛이 가득 찬 좁은 골목을 함께 걷고 있었다.
‘이 동네는 오지 마세요. 밤에 위험해요. 아까 봤던 미친년도 있고 양아치도 많아요.’
손이 언제 떨어진 건지도 알 수 없었다. 여준은 휑하니 비어 버린 손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몰라 괜히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마치 태어났을 때부터 누군가와 잡고 있던 손을 이제 처음 놓은 사람처럼.
‘너는 여기 살잖아.’
‘전 태어났을 때부터 이 동네 살아서 익숙해요. 근데 선배는 아니잖아요.’
‘…핸드폰은 그래서 어떻게 했어? 수리 맡겼어?’
‘완전히 죽었어요. 다시 사려고 알바하고 있어요.’
‘알바? 언제 다시 살 수 있는데?’
‘모르죠. 돈 다 모으면 사겠죠.’
그럼 우리는 어떻게 연락해? 가장 궁금했던 점은 물어볼 수 없었다. 갑자기 밀어닥친 많은 말이 뱃속을 휘젓고 있던 탓이다. 제가 다 잘못했어요. 선배가 웃지 않으면 내 탓 같아요. 그건 너무 이상하고 힘겨운 감정이어서….
다 때려치우고 싶어요. 도망치고 싶어요.
‘사현아.’
여준은 생각했다. 사현은 알고 있을까? 다 알고서 입에 담은 걸까?
‘…….’
넌 지금 나를 좋아한다고 말한 거잖아.
‘…갈게.’
‘네.’
‘학교에서 보자.’
하고 싶은 말은, 묻고 싶은 말은 너무나 많았다. 꾹 참고 손을 흔든 것은 달이 너무 밝았기 때문이다. 고요한 어둠, 어슴푸레 내리비추는 달빛에는 그런 효과가 있었다. 아무리 말도 안 되는 일이라도 빠짐없이 현실로 만들어 줄 듯한 착각.
어서 헤어지지 않으면, 손을 흔들고 멀쩡해 보이는 얼굴로 돌아서지 않으면 터무니없는 짓을 저지르게 될 것만 같았다. 어떤 직접적인 말 한마디 없이도 벅차도록 또렷이 전해지는 커다란 마음에 닿았던 손끝이 타 버리기 전에 눈물 같은, 물집 같은 대답을 내뱉고야 말 것 같았다.
‘나는….’
여준이 누구에게도 들리지 않을 만큼 작은 소리로 뇌까렸다.
‘나도….’
힘없는 말은 공기 중으로 사라지고, 달빛의 편린이 내려앉은 발끝에는 어떤 대답도 묻어 있지 않았다.
***
성적 문제는 의외로 무탈하게 넘어갔다. 아버지에게 한바탕 설교를 들어야 했지만 우려했던 대로 홈시어터를 빼앗기거나 기숙 학원으로 유배되는 일은 없었다. 여준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마음을 다잡았다. 안 그래도 생각해야 할 일이 많았다.
‘영재랑 아직도 화해 안 했어?’
동그란 뺨 가득 사탕을 욱여넣은 가린이 물었다. 여준은 문제집을 정리하다 말고 힐끔, 창가를 곁눈질했다. 영재는 쉬는 시간마다 아예 창가 쪽 자리로 달려가 붙박여 있다 돌아오곤 했다.
‘그러게, 얘기해 봐야 하는데.’
‘오래 싸우네. 영재랑 뭐 쌓인 게 있었던 거야?’
‘…응?’
‘영재나 너나, 누구랑 싸우더라도 이 정도로 오래 간 적 없잖아. 솔직히 별일도 아니었는데 둘 다 전혀 굽히질 않으니까 이상해서. 학생회 일도 해야 하는데 언제까지 안면몰수하려고 그래.’
지당한 조언이라 받아칠 말이 없었다. 끙, 입술을 꾹 깨문 여준이 한 번 더 영재 쪽을 살폈다. 영재는 집요하리만치 시선 한 번 주지 않았다.
‘사실은….’
‘응.’
‘…아니, 아니다. 영재랑 먼저 얘기할게.’
여준이 뒷머리를 벅벅 긁었다. 가린은 더 캐묻지 않고 그래,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예비종이 울리고 가린이 일어섰다. 영재도 자리로 돌아오려는 듯했다.
‘얘기해 보고 잘 안 되면 언제든지 헬프 쳐. 내가 은근슬쩍 네 편 들어줄게.’
‘그래, 그래.’
목소리를 낮춘 가린이 씩 웃고는 영재에게도 손을 흔들었다. 영재는 가린의 인사도 받는 둥 마는 둥 자리로 돌아오자마자 핸드폰만 내려다보았다.
‘영재야.’
여준이 톡톡, 영재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제야 돌아보는 눈동자에 여러 가지 감정이 섞여 있었다. 여준은 일단 그가 무시하지 않았다는 점을 다행스레 여기기로 했다.
‘점심시간에 우리 얘기 좀 하자.’
‘…….’
‘나도 할 말 있고, 너도 그럴 거 아냐.’
영재가 말없이 고개를 돌렸다. 승낙인지 거절인지 애매한 몸짓이었지만 다시 묻기 전에 수업 종이 울렸다.
‘내 생일 파티 준비해 줬는데 못 나간 건 미안해. 나도 선약이 있는데 갑자기 불러내니까 좀 난처했어. 그 부분은 너도 이해해 줬으면 좋겠어.’
조용히 이야기할 만한 장소를 찾다 보니 자연스럽게 학생회실이었다. 영재는 창틀에 걸터앉은 채 입을 꾹 다물고 있을 뿐이었다. 여준은 치미는 답답함을 참고 재차 말을 걸었다.
‘영….’
‘너 그날 정말 그 새끼 만난 거야?’
마침내 영재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여준이 눈살을 살짝 찌푸렸다. 영재의 입으로 굳이 ‘그 새끼’가 누구인지 들을 필요는 없었다.
‘사현이랑 약속 있었던 거 맞아. 내가 먼저 보자고 했어.’
‘근데도 내가 왜 화가 났는지를 모른다고?’
‘뭐?’
‘몇 번을 말했어? 그 새끼 완전 쓰레기 양아치고 위험하다고. 가까이 안 했으면 좋겠다고. 그런데 너는 처음부터 내 말 완전 개무시하고 너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있잖아. 내가 그 꼴을 보면서 마음이 좋겠어? 넌 왜 네가 날 무시한 사실은 쏙 빼놓고 뭐가 문젠지 모르겠다는 식으로 굴어?’
‘…….’
말문이 막혀 버린 여준이 헛숨을 뻐끔거렸다. 영재는 잔뜩 억울한 눈을 한 채 여준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쯤 되니 더는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너 대체 임사현에 대해서 뭘 알고 있는데?’
‘뭐라고?’
‘정말 궁금해서 물어보는 거야. 네가 이렇게까지 할 정도면 정말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 같아서. 근데 내가 본 사현이는 그런 애 아니었으니까, 물론 모범생도 아니지만, 그래도 남한테 피해 주는 일 없이 학교 다니는 애를 왜….’
‘그 새끼가 낙태시킨 여자가 있어.’
영재가 차갑게 내뱉었다. 여준은 잠시 그에게서 나온 엄청난 증언과 이어 가던 대화를 연결시키지 못하고 두 눈만 깜빡였다.
‘말했지? 임사현 조폭 끄나풀이라고. 그 새끼들 허구한 날 하는 짓거리가 남의 돈 뜯고 여자들 몸 팔게 만드는 거야. 그러다 여자 임신하면 낙태 수술시키고.’
‘…영재야, 지금 무슨 소리….’
‘우리 삼촌이 N동에서 산부인과 해. 거기에 임사현이랑 어울려 다니는 양아치들이 툭하면 여자 데리고 온대. 한두 번이 아니라고 했어.’
‘…….’
‘그게 무슨 뜻이겠어? 이런 것까지 내가 다 설명해 줘야 하는 건 아니지?’
순간 여준의 머릿속을 스친 것은, 사현의 집을 찾아가던 중 마주친 여자였다. 머리를 풀어 헤친 채 자신의 아기 이름을 말하던 여자.
여준이 마른침을 삼켰다. 사현은 아무렇지 않게 그녀를 두고 ‘미친년’이라고 말했다. 미친년도 살고 양아치도 많아요. 그러니까 이제 오지 마세요.
‘난 삼촌 때문에 N동 갔다가 몇 번 봤었어. 그 동네에서 유명한 조폭 있어. 팔뚝에 온통 칼자국 있는 놈이거든. 그 새끼가 임사현 데리고 다니면서 일 가르치고 있다고.’
‘…….’
‘제일 친한 친구가 그런 새끼랑 어울리는데 걱정되고 말리고 싶은 게 당연한 거 아니야? 그런데 너는 시종일관 그 새끼 편만 들고 내 말은 안 듣잖아. 왜, 지금 하는 말도 못 믿겠어? 사진이라도 찍어 올까?’
여준이 할 말을 잃어갈수록 영재는 더욱 기세등등해졌다. 여준은 마른 입술을 축이고 몇 번이나 주먹을 쥐었다 펴며 할 말을 찾으려 했지만 허사였다.
영재의 말은 이상할 정도로 앞뒤가 맞았다. 믿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정말로 조폭과 관련이 있는 데다가 낙태니 어쩌니 하는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단순히 싸움질을 하고 다닌다거나 행실이 불량하다는 선에서 끝날 문제가 아니었다.
‘…일단…. 알았어. 무슨 얘기하는 건지 알아들었어.’
여준이 뜨거워진 이마를 쓸어 넘겼다. 어쨌든 영재의 입장도 간신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현의 말을 먼저 들어봐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내가 사현이랑 얘기해 볼게. 정말 상황이 안 좋은 거면 어떻게든 도움을….’
‘뭐? 너 미쳤어?’
영재가 벌컥 소리를 질렀다. 깜짝 놀란 여준이 입을 다물었다. 영재의 두 눈은 튀어나올 듯 크게 뜨여 있었다.
‘뭘 도와주겠다는 거야? 무조건 멀리해야 한다니까!’
‘사현이 거의 혼자 살아. 집 환경도 너무 안 좋아. 그런 애가 조폭들이랑 어울리고 있다면 위험하잖아. 선생님한테 말씀드리거나, 경찰에 신고를 해서….’
‘안 돼! 안 된다고. 그냥 두 번 다시 엮이지 마. 연락도 하지 마!’
영재는 숫제 숨이 넘어갈 듯한 표정이었다. 시뻘게진 얼굴로 외치는 말들은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주장이 담겨 있었다. 임사현과 엮이지 마. 임사현과 떨어져. 그래야만 나와의 친구 관계를 유지할 수 있어.
여준이 이질감을 느끼는 것도 바로 그 부분이었다. 정말로 여준이 걱정되어 하는 말이라기엔 임사현 자체에 대한 영재의 적대감이 너무 강했다. 무슨 말을 해도 빙빙 돌려 설명하는 듯 느껴지는 것도 그런 이유였다.
‘N동….’
그러자 얄궂게도 머릿속을 스친 것은, 사현을 찾아갔을 때 언뜻 보았던 인영이었다.
‘너 혹시…. 저번 주에 N동 갔었어?’
특별히 다른 생각이 들었던 건 아니다. 영재가 지나치게 사현을 적대시하고 있다는 사실과, 사현의 집 근처에서 영재로 추정되는 뒷모습을 봤던 기억이 합쳐져 한 가지 가능성이 떠올랐을 뿐이다. 혹시 영재와 사현 사이에 정말 안 좋은 일이 있었던 게 아닐까 하고.
‘내가 그런 델 왜 가!’
그러나 영재의 반응은 또다시 여준의 상상을 빗나갔다. 찢어질 듯 큰 소리를 지른 영재가 씩씩대며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어안이 벙벙해진 여준이 마른침을 삼켰다.
‘아니, 그러니까 내 말은….’
‘내가 그딴 거지 같은 동네에 왜 가? 너 방금 그거 무슨 뜻으로 한 소리야? 좆같은 소리 좀 하지 마, 병신 같은 소리 좀 작작하라고!’
‘…영재야?’
‘존나, 씨발, 씨발!’
영재는 끝없이 욕설을 뱉으며 한 발로 바닥을 쿵쿵 내려찍기 시작했다. 지나치게 흥분해 날뛰는 모습에 덜컥 겁을 먹은 여준이 애써 영재에게 다가가 팔을 잡았다.
‘영재야, 네가 말했잖아. 삼촌 때문에 N동에 자주 간다고, 그런데 내가 지난주에 거기 갔다가 너랑 비슷한 사람 본 것 같아서….’
‘…….’
‘…그래서 한 말인데…. 영재야, 괜찮아?’
발을 구르는 소리, 쉼 없이 내뱉던 욕설이 사라지자 학생회실은 싸늘한 침묵에 휩싸였다. 한참이나 숨만 고르고 서 있던 영재가 이내 제 얼굴을 마구 문지르기 시작했다.
‘어…. 괜찮아. 미안, 내가 잠깐…. 흥분했네. 안 되겠다, 나중에 다시 얘기하자.’
‘잠깐만, 내 말 아직….’
‘미안한데 나중에 하자. 나중에.’
여준의 손을 거칠게 떼어 놓은 영재는 말릴 틈도 없이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타앙, 미닫이문이 거칠게 닫히고 낡은 학생회실에는 여준만 홀로 남았다. 여준이 참았던 숨을 훅 내쉬었다. 뒤늦게 다리가 후들거렸다. 창틀을 짚고 저린 무릎을 문지르는 내내 이게 다 무슨 일인지 알 길이 없었다.
사현의 모습 또한 여전히 볼 수 없었다. 여준은 운동장 스탠드에 앉은 채 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언젠가 운동장을 아무렇지도 않게 가로질러 걷고 있던 뒷모습이 떠오른 탓이었다.
‘여준, 뭐 찾아?’
함께 실기 시험 순서를 기다리고 있던 기호가 물었다. 여준은 애써 웃고 고개를 저었다.
‘아냐. 참, 너 3점 슛 넣을 수 있지?’
‘나 세 번 쏘면 한 번쯤?’
‘어떻게 해야 돼? 나 아무리 연습해도 골대에만 맞지 들어가질 않던데 넌 잘 넣더라.’
내신을 완벽하게 관리하려면 체육 점수도 잘 받아야 했다. 매일 해야 할 일은 많았다. 수업을 듣고, 복습을 하고 선행 학습 학원에 가고, 친구들의 메시지에 응답하고 농구 연습까지 해야 한다. 사현을 만나기 전까지는 딱히 버겁다고 느껴 본 적이 없는 일상이었다. 그러나 사현에 대해 고민하는 시간이 많아지면서 하나씩 손에서 놓치는 기분이 들었다.
‘그냥 가볍게 던져. 다섯 번 던져서 한 번만 들어가면 만점이니까 부담 갖지 말고.’
‘진짜로? 다섯 번 중에 한 번만 들어가면 돼?’
‘아까 쌤이 그랬잖아. 못 들었어?’
여준이 아, 하며 고개를 들었다. 체육 수업을 좋아하는 편은 아니지만 선생님의 말을 놓친 적은 없었다. 그런 여준을 의아하게 올려다보던 기호가 장난스레 웃었다.
‘너 요즘 자주 정신 놓고 있더라.’
‘아….’
‘영재랑 싸워서 그래?’
‘이러다 전교생이 다 알겠다. 나랑 영재 싸운 거.’
여준의 말에 가까이 모여 있던 녀석들도 함께 웃었다. 마침 영재가 농구공을 들고 골대 앞으로 다가가고 있었다. 시험은 2점 슛을 다섯 번, 3점 슛을 다섯 번 시도해서 한 번씩만 성공하면 만점이었다.
‘둘 다 넣으면 A, 3점 슛만 넣으면 B고 2점 슛만 넣으면 C, 한 번도 못 넣으면 D.’
‘미치겠다…. D는 피해야 하는데.’
‘에이, 설마 D 맞는 놈이 있겠어. 사람 손이 달려 있다면-.’
그때 영재가 시험을 시작했다. 여준의 신경이 순간 골대로 집중되었다. 영재는 열심히 공을 던져 올렸지만 좀처럼 골대 근처로 가지 않았다. 시도 횟수가 늘어갈수록 찌푸려지는 얼굴에 여준까지 초조해졌다.
‘침착하게 하지….’
‘어, 어!’
그때 이를 악문 영재가 거칠게 공을 던졌다.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었다. 골대 모서리에 맞고 튀어 나온 농구공이 영재의 얼굴 위로 내리꽂혔다. 뻐억, 엄청난 소리가 나고 영재는 그대로 뒤로 고꾸라졌다.
‘어…!’
벌떡 일어난 여준이 운동장으로 달려 나갔다. 여기저기서 걱정하는 목소리와 키득대는 소리가 섞여 들렸다. 대박, 방금 봤어? 쪽팔리겠다…. 여준은 소리가 난 방향으로는 눈길도 주지 않은 채 영재에게 다가갔다.
‘영재야, 괜찮아?’
‘아…. 씨.’
주저앉은 채 낮은 욕설을 뇌까린 영재가 코를 감싸 쥐었다. 코피가 줄줄 흘러 바닥을 적시고 있었다. 여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보건실 가자. 일어설 수 있어?’
‘…놔 봐, 혼자 가도 되니까.’
‘그래도….’
‘괜찮아. 냅둬.’
영재는 재차 여준의 손을 뿌리치고 일어섰다. 몰려든 아이들이 한 마디씩 건네는 장난이나 걱정에도 전혀 대답하지 않았다.
‘저 새끼 요새 진짜 이상하네.’
멀어져 가는 영재의 뒷모습을 가만히 보고 있던 기호가 중얼거렸다. 여준은 뭐라 대답할 말을 찾지 못한 채 망설이다 체육 교사에게 물었다.
‘저…. 잠깐 따라갔다 와도 될까요?’
‘어, 그래, 여준아. 근데 수업 끝나기 전엔 와야 된다?’
‘감사합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고 돌아섰을 때 이미 영재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두리번거리던 여준은 우선 보건실로 향했다. 그러나 보건실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바깥에서 잠긴 걸 보니 안에 누군가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
의아해진 여준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수업 중인 시간이라 복도는 조용했다. 보건실이 잠겨서 교실로 갔나? 코피를 줄줄 쏟고 있던 얼굴이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그는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올랐다. 그러나 교실에도 영재는 없었다.
길이 엇갈린 건가. 옆머리를 긁적인 여준이 다시 계단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그때 어디선가 탁,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걸음을 멈추고 유심히 보니 컴퓨터실 명패가 보였다.
‘…….’
여준은 최대한 발소리를 죽여 컴퓨터실 창문으로 향했다. 이유도 모르고 가슴이 뛰었다. 조심스레 창에 달라붙어 안을 들여다보자, 텅 빈 컴퓨터실 맨 뒷자리에 앉은 영재의 모습이 보였다.
영재는 잔뜩 집중한 얼굴로 타자를 두드리고 있었다. 모니터까지는 보이지 않았다. 어쩐지 말을 걸 수 없는 분위기였다. 눈은 튀어 나올 듯 부릅떴고, 코에 쑤셔 박은 휴지는 핏물에 절어 있었다. 고민하던 여준은 컴퓨터실까지 올 때 그랬듯 조심스러운 걸음으로 돌아섰다.
머리가 복잡했다. 사현을 만나고 싶었다. 잠깐 얼굴이라도 보면 기분이 나아질 것 같았다.
일이 터진 것은 그날 저녁이었다.
「니네 카페에 올라온 글 봤어?」
기호가 단체 채팅방에 올린 한 마디가 시초였다. 이어 반 아이들이 모두 한 가지 이야기로 들끓기 시작했다. 학원 수업을 마친 여준은 버스를 기다리지 못하고 집까지 달려갔다. 텅 빈 거실에 가방을 던져두고 컴퓨터를 켰다. 학교 카페의 익명 게시판이 통째로 들썩이고 있었다. 기폭제가 된 글은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수백 개가 넘는 덧글이 달려 있었으므로.
제목: 여학생들 조심하세요….
글쓴이: 익명
제목에서부터 불길한 예감이 강렬하게 들었다. 여준은 손등으로 지끈대는 미간을 누른 채 글 제목을 클릭했다.
쓸까 말까 오래 고민하다가 씁니다. 혹시 익명이 밝혀질까 쓰면서도 두려워서 손이 벌벌 떨리고 가슴이 두근거리지만 미래의 어머니, 학교의 꽃인 여학생들이 악랄한 마수에 빠져 소중한 몸을 망칠까 걱정스러운 마음이 앞서 결국 이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최근 저희 자랑스러운 K고의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다는 점은 모두가 아실 겁니다. 그 원인으로는 뺑뺑이 배치에 따른 신입생 학력 저하 현상이 아무래도 대표적이겠지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2학년 이상 된 K고 학생 입장에서는 대단히 억울하기 짝이 없습니다. 성적이 인생의 전부냐고 묻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하지만 성적은 학생이 얼마나 학교생활을 성실히 이행했느냐에 대한 지표이고, 성적이 좋다고 해서 양아치가 아닐 거란 보장은 없지만 성적이 나쁜 학생이 양아치일 확률은 비교도 못 할 정도로 높다는 사실에는 모두가 동의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그렇습니다. 진짜 문제는 성적이 아닙니다. 최소한의 커트라인조차 없을 때 밀려드는, 명백히 타인에게 나쁜 영향을 끼치는 양아치들이 문제입니다. 저는 이 글에서 1학년 학생 중 가장 질이 나쁘고, 명백히 학교에서 배제시켜야 할 인물에 대해 말해보고자 합니다.
평소 조폭과 어울려 다니는 학생 A에 대한 소문이 학교 내에서도 암암리에 돌았던 걸로 압니다. 다만 뚜렷한 증거가 없다는 이유로 학교 측이 방관해온 것이지요. 그러는 사이 무럭무럭 싹을 틔운 그의 악의는 마침내 가장 약하고 가장 상냥한 존재에게로 향하고 말았습니다.
N동에 거주하는 A는 평소 그 동네의 조폭들과 어울려 다니며 갈취 및 겁박 행위를 일삼는다고 합니다. 거기다 만으로 16세의 나이에 이미 퇴폐업소에 드나들며 수많은 여자들을 건드렸습니다. A에게 평소 친근하게 말을 걸어 주던 같은 반 여급우에게 입에 담지도 못할 폭언을 내뱉기도 했습니다.
여성은 가장 보호되어야 할 존재, 가장 소중히 여겨져야 할 존재라는 것을 저를 비롯한 보통의 남학생들은 모두 알고 있습니다. 여학생 여러분도 언젠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아기를 갖기 위해서는 자신의 몸을 소중히 아끼고 사랑해야 한다는 것을 아실 것입니다.
그런데 현대의 여성들은 옛날의 미덕을 잊고 자신의 몸을 소중히 할 줄 모릅니다. A는 바로 그런 여성들의 방만을 파고들어 사치품으로 유혹하고 몸을 팔게 만들며 임신하면 낙태를 강요합니다. 이에 억지로 아이를 떼고 폐인이 된 여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A는 비록 아직 어리지만 이미 저지른 짓들이 끔찍한 수준이며 앞으로 얼마나 더 타락할지 아무도 알 수 없습니다. 그런 위험한 인물을 계속 학급에 둬도 되는 걸까요? 아니요, 저는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지금 이 순간에도 그와 같은 학급에서 한 공기를 마시는 미래의 어머니들, 가장 연약하고 가장 소중한 여학생들이 위기에 빠져 있기 때문입니다. 가냘프고 사랑스러운 여학생들을 우리가 지켜 주지 않는다면 K고의 미래도, 나라의 미래도 없는 것이 아닐까요?
re: 세줄요약좀
re:re: 1학년에 개쓰레기 양아치가 있다 여자 친구 낙태까지 시킨 새끼다 퇴학시켜야 마땅하다
re:re:re: ㄱㅅㄱㅅ
re: 나 이새끼 누군지 알 거 같은데 진짜 쓰레기임 본문 다 동의함 어떻게 멀쩡히 학교 다니는 건지 알 수가 없어
그 아래로는 끝없이 최근 학교 분위기에 대한 성토 글이 이어졌다. 이상한 점은 덧글 내용이 본문과 아무 관련이 없더라도 결국은 A에 대한 비난으로 마무리된다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요즘 성적이 떨어져서 짜증이 나는데 그게 다 A 때문이라는 식이었다.
re: 확실히 공부할 때 ‘물’이라는 거 무시 못 하지. 한 반에 양아치가 있을 때랑 없을 때 얼마나 큰 차이가 나는데.
하지만 그 분위기 속에서도 사현이 구체적으로 누구에게 어떤 피해를 끼쳤는지 말하는 이는 없었다. 언제나 그랬듯이.
글을 훑어 내리던 여준은 조심스레 ‘익명’ 글자를 클릭했다. 가장 먼저 확인해야 할 문제가 있었다. ‘작성자의 다른 글 보기’ 항목을 누르자 스크롤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
바로 얼마 전 보았던 제목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개중 가장 최근 글의 제목은 이랬다.
제목: 성적 올랐는데 괜히 눈치 보는 중
친구가 이번에 성적이 많이 떨어져서 나보다 등수가 낮아졌거든. 나도 전교권이지만 걔는 최상위권이어서. 말로는 축하한다고 하는데 눈빛부터 쎄한 거 있잖아. 나도 열심히 해서 성적 잘 나온 건데 맘대로 좋아하지도 못하고 기분이 좀 그러네 쩝
re: 뭐 하러 눈치 봐? 당당하게 굴어 친구 성적 네가 뺏은 것도 아닌데
re:re: 근데 뺏겼다고 생각하는 거 같더라고ㅋㅋㅋ 약간 말하는 거 하나하나 나한테 열폭하는 게 느껴진달까…. 자세히는 못쓰겠지만
여준이 아주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마우스를 쥔 손이 떨려 커서가 자꾸만 헛돌았다. 간신히 컴퓨터를 끄고 바닥에 주저앉았다. 땀이 배어난 얼굴을 거칠게 쓸어 올리고 숨을 골랐다.
혹시, 설마, 속으로만 막연히 되뇌던 불길한 예감은 어느새 확신이 되어 가슴에 들어앉아 있었다. 무언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 사현이 나타난 후로, 영재가 이상해진 후로.
핸드폰을 쥔 여준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현을 만나야 했다. 그러지 않고서는 어떤 일도 해결되지 않을 것 같았다.
***
집을 뛰쳐나오기까지는 5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현관을 나서자마자 축축한 공기가 느껴졌다. 우산을 가지고 나와야 할까, 잠시 망설였지만 여준은 곧 어금니를 꽉 문 채 걸음을 빨리 했다.
큰길로 향하는 내내 그는 사현의 집을 떠올리고 있었다. 다시 찾아갈 수 있을까. 자신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앉아 있을 수는 더더욱 없었다.
‘얘! 얘, 아들!’
익숙한 목소리가 발목을 잡아챈 것은, 막 아파트 단지 정문을 나서던 순간이었다.
‘여준아! 너 어디 가니?’
여준이 흠칫 놀라 멈춰 섰다. 양손 가득 교재를 든 어머니가 의아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엄마.’
‘어딜 그렇게 급하게 가? 왜 그래? 집에 불이라도 났어?’
‘…….’
‘일단 이거 좀 받아 줘. 엄마 무거워.’
다가온 어머니가 여준에게로 교재의 반을 넘겼다. 얼떨결에 받아 든 여준이 잔뜩 초조한 얼굴로 입술을 물어뜯었다.
‘엄마…. 저기, 나…. 잠깐 갈 데가 있는데….’
‘이 시간에 가긴 어딜 가? 얘가 겁도 없이.’
사현은 그런 글이 올라왔다는 걸 알고 있을까? 아마 모를 것이다. 아예 그런 카페가 있다는 사실조차 알지 못할 것이 뻔했다. 알려 준다고 당장 어떻게 할 수 있는 건 아니지만, 내일 사현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로, 어떤 대비도 하지 못하고 등교하는 일만은 막고 싶었다. 필사적으로 핑곗거리를 찾던 여준의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여, 영재. 영재 만나기로 했어요.’
‘영재…?’
‘박영재 있잖아요. 옆 동 사는 내 친구. 내일 수행 평가 때문에 급하게 줄 거 있다고 해서…. 잠깐 만나서 그것만 받아가지고 올게요.’
횡설수설 늘어놓긴 했지만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어머니는 금방 표정을 굳힌 채 눈을 가늘게 떴다.
‘영재를 어디서 만나기로 했는데?’
‘네? 어, 그…. 제가 영재네 가서 받아 오려고….’
‘일단 들어가자. 들어가서 얘기해.’
뭐라 말을 덧붙이려 해 봤지만 허사였다. 차가운 태도로 돌아선 어머니는 이미 집을 향해 걷고 있었다. 고민하던 여준이 결국 그 뒤를 따랐다. 손에 가득 들린 교재가 유난히 무거웠다.
‘너 영재 얘기 아무것도 못 들었니?’
신발도 벗지 않고 선 여준을 향해 어머니가 한숨 쉬며 물었다. 여준은 여전히 의아한 얼굴로 눈만 굴리고 있었다.
‘일단 들어오라니까.’
‘엄마…. 정말로 가 봐야 돼요.’
‘갈 필요 없어. 영재 이제 그 집에 안 사니까.’
발목 아래로 물컹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어리둥절해진 여준이 느릿하게 두 눈을 깜빡였다.
‘한 달 전인가…. 그 애 집에 일이 좀…. 생겨서 가게도 날아가고 집도 뺐어. 당연히 전학 갔을 줄 알았는데 아직 학교에 나오니?’
‘…….’
한 달 전. 영재가 이상해진 시기와 얼추 맞아떨어진다. 영재는 처음부터 사현에게 이 정도로 적대적이지는 않았다. -임사현이면 완전 양아치잖아, 우리 여준이 드디어 타락의 길로 들어선 거야? 반쯤 농담으로 던지던 위협들이 구체적인 형태를 띤 것이 언제부터였던가.
‘일이 생겼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
‘자세한 것까지 네가 알 필요는 없어.’
‘엄마.’
‘…엄마도 네 아버지가 엮인 게 있어서 아는 거야. 영재 아버지가 여기저기 돈을 많이 빌렸어. 그래도 수습이 안 돼서 도망친 걸로 아는데…. 아무튼 너도 신경 쓰지 마. 영재가 어떻게 아직 그 학교 다니는지는 모르겠지만 너무 가까이 지내지도 말고.’
‘…….’
‘들어와, 계속 그러고 있을 거니?’
여준은 끝없이 N동에서 봤던 뒷모습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건 영재였을까? 그러자 닿을 듯 닿지 않고 있던 생각의 끈들이 분명한 형태를 이뤄 등 뒤로 쌓이기 시작했다. 영재의 집이 망했다. 영재의 아버지는 야반도주를 했다. 그런데 가장 가까운 친구인 여준 자신조차 그 사실을 여태 몰랐다.
그것이 영재가 필사적으로 감추고자 했던 비밀이라면,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아 예민했다면.
‘…….’
N동에서 본 뒷모습이 정말 영재라면.
여준은 힘없이 교재를 내려놓았다. 땀으로 흠뻑 젖은 손바닥이 미끄러웠다.
***
아이를 잃어버리는 꿈을 꾸었다. 미아 보호 센터 앞에 선 여준은 단번에 자신이 꿈을 꾸고 있음을 알아챘다. 일이 밀렸을 때, 불안할 때, 컨디션이 나쁠 때 종종 꾸는 꿈이었다. 장소는 은아가 살아 있을 때 주말마다 함께 가던 대형 마트였다. 장을 보고 집안일을 해 주는 고용인이 따로 있음에도 은아는 꼭 여준과 함께 마트에 가기를 좋아했다.
한 번도 그 마트에 지오를 데려간 적은 없었다. 은아가 살아 있을 때 지오는 아직 젖먹이였다. 그러니 지오가 좁은 통로를 가득 채운 커다란 쇼핑 카트 사이로 아장아장 걸어 사라지는 풍경 자체가 꿈이 아니고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매번 식은땀이 났다. 아이를 찾는다는 방송을 내보내고, 이리저리 사람이 치여 가며 거대한 마트 안을 헤매는 일련의 과정은 여준에게 극한의 초조함을 안겼다. 양 주먹을 꼭 쥔 채 목이 터져라 아이의 이름을 부르다 보면 얼마 가지 않아 소스라쳐 깨어나곤 했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멀리서 자꾸 아이의 모습이 보였다. 아이는 여준을 한 번 돌아보지도 않은 채 작은 발로 그에게서 멀어지고 있었다. 지오야, 지오야. 여준은 두 손을 뻗은 채 아이를 향해 달렸다.
그리고 마침내 아이의 어깨를 붙들었을 때, 손에 남겨진 것은 운전대였다.
그는 불빛조차 없이 컴컴한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뒷자리에는 지오가 보였다. 어디로 가는 거지? 속도를 늦추려 했지만 브레이크가 어디 있는지 찾을 수 없었다.
그때 멀리서 다가오는 검고 커다란 물체가 보였다. 여준은 눈을 아주 가늘게 뜨고 나서야 그것이 시커먼 세단임을 알아보았다. 중형차 한 대가 전조등을 완전히 끈 채로 달려오고 있었다. 그대로 있다가는 정면으로 충돌할 판이었다.
……!
여준이 있는 대로 비명을 지르며 핸들을 꺾었다. 손에는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다. 세단은 눈 깜빡할 사이 범퍼가 맞닿을 거리까지 와 있었다. 여준이 켜 놓은 전조등에 운전자의 얼굴이 비쳤다.
미간을 가로지른 섬뜩한 흉터, 시커먼 눈을 한 사현이 어떤 표정도 없는 얼굴로 여준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윽…!”
여준의 상체가 파드득 경련했다. 눈을 번쩍 뜨자 바깥 가로등 불빛에 어슴푸레 밝아진 천장이 보였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던 그는 한참 후에야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가슴에 댄 손바닥 아래로 튀어나올 듯 거세게 뛰는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목 아래가 뜨거웠다. 심장이 그대로 조각날 것만 같았다.
손끝을 말아 쥐고 숨을 몰아쉬었다. 온몸이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침대를 짚어 몸을 구부린 여준이 힘겹게 바닥에 발을 디뎠다. 곧바로 무릎이 푹 꺾여 주저앉아야 했다.
“…지오야.”
안방 문을 열고 아이 방으로 가는 길이 천릿길처럼 멀기만 했다. 몇 번이나 비틀대고 넘어질 뻔한 위기를 넘기며 간신히 아이 방문을 잡았다. 조심스레 열린 문 너머 아이는 모로 웅크린 채 새근새근 잠들어 있었다.
하아아…. 긴 숨을 내쉰 여준이 발소리를 죽여 아이에게 다가갔다. 무릎을 꿇고 아이의 숨을 확인했다. 그때 돌아눕던 아이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아빠.”
여준을 발견하고 배시시 웃은 아이가 두 손을 뻗었다. 여준은 순순히 아이 옆에 누웠다. 안겨드는 아이에게서 달큼한 우유 냄새가 났다. 숨구멍 가득히 밴 생명의 냄새.
“아빠, 잠이 안 와?”
여린 손이 여준의 등을 감싸며 물었다. 여준은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의 뒤통수를 매만졌다.
“응, 아빠 잠이 안 오네.”
“아빠, 그러면, 내가 자장가 불러 줄까?”
“응….”
은아가 죽었을 때, 아이가 없는 친구들은 쉽게 말했다. 처가에 보내. 아니면 네 어머니에게 맡기든지. 너 혼자서 절대 못 키워. 그 말들에 묻은 것이 진심 어린 걱정임은 여준도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아이에게 여준이 반드시 필요한 존재가 아니라는 전제하에 내뱉는 모든 말들은 여준에게 아직까지도 깊이 남은 상처가 되었다.
맞아, 너에겐 내가 꼭 필요하지 않겠지. 오히려 내가 없는 편이 네 인생에 득일지도 모르지. 여준은 아이를 안은 손끝에 살짝 힘을 주었다.
“자장자장….”
하지만 여준에게는 아이가 필요했다. 부성애라거나 내리사랑 같은 고아한 단어로는 설명할 수 없는 치졸한 감정이었다. 아이를 키워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른다. 어떤 생명에게 절대적인 존재로써 인정받을 때의 안도감을.
“아빠, 이제 잠 와?”
몇 소절 부르지도 않은 아이가 물었다. 목소리에 졸음이 잔뜩 묻어났다. 살짝 웃은 여준이 고개를 저었다.
“잠 안 와. 더 불러 줘.”
“나는 졸린데에….”
“지오도 맨날 아빠 졸린데 괴롭히잖아.”
“아닌데에, 그런 적 없는데에….”
꾸벅꾸벅 감긴 눈에 긴 속눈썹이 가라앉았다. 여준은 조심스레 아이의 눈가를 쓸어 주었다. 아이의 눈매는 은아와 똑 닮아 있었다. 눈뿐만이 아니라 전체적인 생김새가 외탁이었다. 특히 웃는 얼굴이 지나치게 은아를 빼다 박은 아이라, 처가 사람들이 아이에게 집착하면서도 괴로워하는 이유를 충분히 알 것 같았다.
“지오야.”
“…….”
“지오, 아빠랑 멀리 갈까? 비행기 타고…. 우리 지오는 비행기 타본 적 없지?”
임신 6개월이 됐을 즈음, 은아는 태교 여행을 가고 싶어 했다. 휴가 일정을 맞추고 비행기와 숙소까지 예약했지만 팀장은 여준의 휴가 일주일 전 일방적으로 태스크포스 인원 발령을 내렸다. 다음 달에 원하는 날짜로 맞춰 주겠다며 구슬리는 팀장에게 여준이 할 수 있는 말은 많지 않았다.
“그때 네 엄마가 하도 불같이 화를 내서, 혹시나 너 잘못될까 봐 얼마나 겁났는지 몰라….”
아이는 이미 숨소리를 내며 깊이 잠들어 있었다. 여준은 아이의 이마에 입 맞추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막 새벽 네 시를 넘긴 시간이었다. 도저히 다시 잠들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
“성 선임, 부모님이 싱가포르에 사신다고 했나?”
오전부터 몰아치는 일에 정신없이 돌아가던 계산기 위로 팀장의 난데없는 질문이 날아들었다. 숫자로 꽉 차 있는 머릿속을 일상 회화로 돌리는 데엔 잠깐 시간이 필요했다. 한 템포 늦게 고개를 든 여준이 멍하니 되물었다.
“예?”
“싱가포르 말이야. 부모님이 거기 사신다며.”
“예? 아…. 그거 어떻게….”
“왜, 자네 와이프 일 때.”
아무렇지 않게 대답한 팀장이 뒤늦게 입을 다물었다. 여준도 그제야 아, 하며 한숨을 쉬었다. 은아의 장례식 때 찾아온 팀장이 아이를 어르느라 정신없는 여준을 보고 물었던 것이다. 자네 부모님은?
“예, 어머니 먼 친척분이 거기 사셔서…. 부모님 두 분 다 퇴직하시고 나서 같이 건너가셨습니다.”
“아, 그래, 그래. 은퇴 이민이라는 거지?”
“네. 그런데 왜….”
“아니, 거기 살기에 좀 어때? 우리 애가 그놈의 어학연순지 뭔지 보내달라고 드러누웠는데, 거 내 입으로 말하긴 그렇지만 똑똑하긴 하거든. 학교에서 만날 1등하고, 영어 말하기 대회에서 대상도 탔어. 근데 남자애도 아니고 기집애를 아무 데나 보낼 수가 없잖아.”
“…예….”
여준이 모니터를 흘끔 바라보았다. 오전 내내 여준을 괴롭히던 엉킨 함수가 드디어 풀릴 기미를 보이던 차였다. 팀장의 시시껄렁한 가정사를 듣고 있을 때가 아니었다.
“원래는 유학 같은 거 안 보내려고 했어. 근데 어차피 보낼 거면 필리핀 뭐 이런 데는 불안하잖아? 그렇다고 유럽권으로 보내자니 너무 멀고. 영어 쓰면서 치안도 괜찮은 데 없나, 알아보는데 싱가포르가 그렇게 좋다면서.”
“…그게 저는 가 본 적이 없어서…. 부모님도 시외에 사시고요.”
“싱가포르 애들은 영어 발음 어때? 거기 사는 사람 반 이상 중국인이라며. 그럼 중국어 배우기에도 좋을까? 물가는 어떻….”
“글쎄요, 잘 모르겠습니다.”
뱉어 놓고도 아차 싶었다. 빨리 대화를 끝내고 싶은 마음에 지나치게 딱딱한 말투를 써 버렸던 것이다. 슬쩍 올려다보니 아니나 다를까 팀장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다.
“성 선임은….”
“…….”
“본인 가정사엔 그렇게 민감하면서 팀원들 가정사엔 손톱만큼도 관심이 없어. 그쵸?”
씩 웃은 팀장이 차갑게 돌아섰다. 여준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 이마를 쓸어 넘겼다. 다시 모니터로 눈을 돌렸지만 잡힐 듯 가까워졌던 해답은 이미 의식 너머로 사라진 뒤였다.
“오늘 다들 술 한잔할까? 시간들 어때?”
제자리로 돌아간 팀장이 큰 소리로 물었다. 여기저기서 괜찮다는 대답이 튀어나왔다. 여준은 아파 오는 머리를 감싼 채 심호흡을 했다.
“우리 성 선임이 입사 당시에 완전 스타였지. 전 부서에서 다 구경 왔었잖아. 창립 이래 최고의 꽃미남이 들어왔다고.”
자리를 잡은 지 한 시간 만에 거나하게 취한 팀장이 목소리를 높였다. 옆 테이블에서까지 힐끔대는 시선이 느껴졌다. 어설프게 말리거나 부정했다간 길어지기만 할 화제인 것을 여준은 이미 알고 있었다.
“지금도 그렇잖아요. 신입들 들어올 때마다 선임님 얘기밖에 안 해요. 어떻게 저런 사람이 연예인 안 하고 회사원이나 하고 있냐고.”
은 주임이 넉살 좋게 팀장의 말을 받았다. 퇴사 날짜가 잡힌 후로 그녀는 매일 웃는 얼굴이었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성 선임 계속 그렇게 살 거야?”
차라리 더 먹여서 아예 보내 버리자. 작정을 한 팀원들이 끝없이 채우는 잔을 좋다고 받아먹던 팀장이 급작스레 여준을 향해 물었다.
“아니이, 내가 걱정이 돼서 하는 소리지. 남자 혼자 어떻게 애를 키우나? 그건 못하지.”
“…….”
“애 딸려 있는 게 페널티긴 하지만 뭐 재산 있겠다, 직장 빵빵하겠다, 전문직이겠다…. 무엇보다도 성 선임은 이게 있잖아, 이게.”
팀장이 웃으며 제 턱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이혼도 아니고 사별인데 뭐. 더 나이 먹고 얼굴 망가지기 전에 빨리 새장가 가야 한다니까. 내가 괜찮은 자리 알아봐 줘?”
“팀장님, 취하셨네요.”
애써 웃은 은 주임이 아예 소주로 팀장의 맥주잔을 채웠다. 여준은 대답 없이 눈앞에 놓인 술잔을 비웠다. 새삼스레 화가 나지는 않았다. 이런 시비에 일일이 울컥하기엔 그동안 쌓인 말들이 너무 많았다.
“은 주임도 그러는 거 아니야. 말은 뭐? 회사 문제가 어쩌네 하더니….”
“네, 네. 제가 잘못했어요. 제가 죽일 년입니다. 잔 받으세요.”
유난히 가볍게 넘어가는 술에 금방 배 속이 뜨거워졌다. 여준은 묵묵히 소파에 등을 기댄 채 채워 주는 대로 잔을 넘겼다. 회식 분위기를 띄우느라 고생할 후배들에게는 미안했지만 아무런 기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선임님, 괜찮으시겠어요? 택시 잡아 드릴까요?”
몇 번이나 가게를 옮겨 가며 이어지던 술자리가 끝난 것은 새벽 한 시가 지나서였다. 마침내 뻗은 팀장을 몇몇이 부축해서 나가고, 고개를 푹 숙이고 앉아 있던 여준에게 은 주임이 다가와 물었다. 여준은 고개를 젓고 비틀대며 일어섰다.
“술 많이 드시는 것 같던데….”
“괜찮아요. 은 주임도 들어가 봐요.”
거절하는 목소리는 여준 스스로도 놀랐을 만큼 멀쩡했다. 살짝 놀란 듯 눈을 크게 뜬 은 주임이 조심스레 가게 앞까지 그를 따라 나왔다.
“저…. 선임님. 일전에는 정말 죄송했어요.”
여준이 슬쩍 그녀를 돌아보았다. 늦은 시간에도 거리는 술에 취한 직장인들과, 그들을 꼬여내기 위해 전단지를 들고 뛰는 호객꾼들로 북적였다.
“제가 아마 선임님 좀 좋아했었나 봐요.”
“…….”
“그래서 오버하다가…. 폐 끼친 것 같아요.”
네온사인의 불빛, 알콜 섞인 숨으로 가득 찬 거리에서 그녀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덤덤한 고백을 뱉어 놓았다. 마치 이런 건 별일도 아니라는 듯이.
“선임님도 사실 다 아셨죠? 그래서 저한테 그렇게 칼같이 선 그으셨던 거 맞죠?”
“…….”
“그런데요, 선임님. 저 이제 회사 그만두면…. 그럴 이유도 없으신 거잖아요.”
여준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지저분한 거리, 빽빽이 들어찬 건물 사이로 시커먼 하늘이 보였다. 달조차 없는 밤…. 그럼에도 어지러운 불빛들이 가득 차 하나도 어둡지 않았다.
“혹시 연락드려도 돼요?”
그 사실이 순간 참을 수 없을 만큼 이상했다.
여준은 그대로 돌아섰다. 한마디 대답도 없이, 돌아보지도 않고. 예의 없는 행동이란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다행히 은 주임은 그를 부르거나 쫓아오지 않았다.
거리는 커다란 물고기의 배 속 같았다. 어지럽고 축축하며 까딱하면 소화될 것처럼 보였다. 머릿속이 어지럽고 속이 울렁거렸다. 못해도 두 병 이상은 마신 듯했다.
하릴없이 걷다 보니 처음 보는 골목이었다. 다행히 멀리 편의점 간판이 보였다. 뭐라도 마시고 정신을 차려서 집에 가야 했다. 베이비시터가 내일 아침까지 있어 주겠다고 했지만, 그래도 아이는 여준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비척비척 걸어가던 여준의 무릎이 푹 꺾였다. 주저앉아 땅을 짚은 채 현기증을 가라앉혔다. 갑작스레 속이 울렁거리기 시작했다.
“윽….”
차라리 나왔던 술집으로 돌아가서 화장실을 쓸까. 토해야 제정신이 들 것 같은데…. 고민하며 돌아보았지만 어느 길로 왔는지도 떠오르지 않았다. 택시를 잡아야 해. 주머니를 뒤져 핸드폰을 쥐었다. 화면을 누르자마자 손끝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모서리부터 떨어진 핸드폰이 퍽, 불길한 소리를 냈다.
“아….”
액정 모서리부터 요란하게 금이 가 있었다. 한숨을 내쉰 여준이 주섬주섬 다시 손을 뻗었다. 그때 커다란 손이 시야로 쑥 들어왔다. 부서진 핸드폰을 집어 든 손의 주인을 알아보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여준은 조금 웃어 버렸다.
“너…. 나 따라다니는 거야?”
사현이 한숨 쉬며 여준의 핸드폰을 내밀었다.
“나 마주치기 싫으면 길바닥에서 이러고 있지 말아요.”
“…….”
“일어나요.”
여준은 덜컥 억울해졌다.
“대체 왜 그랬어?”
은아가 죽었다. 아이는 평생 엄마 없이 자라야 한다. 사현이 죽였다. 그토록 인정사정없는 방법으로, 그렇게 잔인하고 처참하게.
“은아가 너한테 뭘 어쨌다고, 너한테 뭘 어떻게 했다고….”
“선배.”
“차라리 나를 죽이지 그랬어. 나를 그렇게 차로 밀어 버리지 그랬어! 그때, 그때도…. 고등학교 때도 너…. 사실은 나한테….”
다가온 사현이 한 손으로 여준의 입을 틀어막았다. 코와 입을 한 번에 덮은 손에 순간 숨이 막혔다. 읍, 눈을 꾹 감은 여준이 사현의 팔을 잡아 내리려 했지만 허사였다.
“입 다물어요. 남들이 듣잖아.”
“…흐읍.”
“비밀이잖아요. 아니에요?”
사현은 침착하기 짝이 없었다. 이성을 잃은 것은 그의 검게 가라앉은 눈동자에 비친 여준뿐이었다. 여준의 숨이 차차 가라앉았다. 손을 놓은 사현이 여준에게 그의 핸드폰을 쥐여 주었다.
“일어나요. 태워다 줄 테니.”
“…….”
“거절할 생각은 하지 마요. 다시 말하지만 당신이 제 발로 멀쩡히 집에 갈 수 있는 상태였다면 앞에 나타나지도 않았어요.”
여준이 천천히 고개를 떨어뜨렸다. 어두운 아스팔트 바닥이 녹은 아이스크림처럼 물컹거렸다. 그가 대답이 없자 사현은 아예 여준의 허리를 감아 일으켰다. 가까워진 사현의 품에서 옅은 소독약 냄새가 났다.
***
차는 아파트 단지 입구에 멈췄다. 사현은 브레이크를 걸자마자 창문을 내리고 담배를 빼 물었다. 여준은 시트에 푹 기대앉은 채 침묵을 지키고 있었다. 사현이 내리라 말하지 않았고, 여준이 인사를 건네지 않았기에 차 안은 잠시 애매한 교착 상태로 빠져들었다.
“왜 내 주변에서 얼쩡거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알 수 없었다. 힘없이 묻는 말에도 사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두 번째 담배를 빼 문 채 연기를 삼키는 일에만 집중했을 뿐이다.
“바라는 게 있어서 이러는 거잖아….”
여준이 깨진 액정을 매만지며 중얼거렸다. 바라는 것. 스스로 입에 담아 놓고도 우스운 말이었다. 사현이 자신에게 바라는 게 무엇인지, 그는 십 년 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사현아.”
“…….”
“임사현.”
너는 나를 좋아하는구나. 마음이 무너지도록 열망하고, 이성을 잃을 정도로 욕망하는구나. 불에 덴 듯 타들어 가던 마음이 끔찍한 기억으로 오염되어 덮이는 데엔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아직도 그날을 떠올리면 소름이 끼쳤다. 여준은 마른침을 삼키고 짓눌린 목소리를 냈다.
“…내가 너랑 자면.”
사현의 손끝에서 필터까지 타들어 간 담배가 떨어져 나갔다.
“한 번 자 주면…. 그럼 내 앞에 안 나타날 거야?”
돌아본 사현은 비웃음을 잔뜩 담은 얼굴이었다. 눈동자에는 경멸이 가득했고 입가는 파르르 떨렸다. 여준은 모든 것을 체념한 채 그가 조수석 시트를 짚고 상체를 들이미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
“무슨 뜻인지는 알고 지껄이는 거예요?”
사현이 웃으며 여준의 옆머리를 쥐었다. 그대로 머리 가죽까지 쥐어뜯을 듯 위협적인 몸짓이었다. 여준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자 사현이 손에 힘을 주었다. 기어코 도로 시선을 맞추고서야 내뱉는 말끝이 뾰족했다.
“참 끝까지 대단한 사람이야. 한 번 자 주면?”
“사현아.”
“어차피 못 할 거라 생각해서 막 지르는 거죠? 당신이 벌벌 떨면서 우는 시늉 좀 하면 내가 끝까지는 못 그럴 줄 알고. 아니에요?”
“사현아, 아파. 이거 좀 놓고….”
여준의 뒤통수가 조수석 시트로 처박혔다. 입을 꾹 다문 것은 반사적인 반응이었다. 그런 여준의 턱을 잡아 뽑을 듯 강하게 쥔 사현이 그의 아랫입술을 물어뜯었다. 여준의 손끝이 바짝 오므라들었다. 힘없이 벌어진 입 안으로 사현의 혀가 거칠게 파고들었다.
“읏….”
한껏 꺾여 올라간 고개가 짧게 경련했다. 소독약 냄새, 피 냄새, 담배 냄새에 입 안에 남아 있던 알콜 향까지 섞여 어지러웠다. 후들거리는 손을 간신히 들어 올린 여준의 사현의 어깨를 밀치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사현은 더욱 강하게 여준을 짓눌렀다.
“정신 좀 들어요?”
간신히 입술이 떨어진 것은 여준의 몸에 힘이 완전히 빠져나간 뒤였다. 축 늘어진 채 헐떡이는 여준을 보며 사현이 물었다.
“그러니까 겁 없이 덤비지 말아요. 후회하고 싶지 않으면.”
툭, 여준이 뺨을 가볍게 두드린 사현이 상체를 뒤로 물렸다. 손등으로 입가를 훔친 여준이 창백한 숨을 몰아쉬었다. 운전석에 앉은 사현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멀쩡한 얼굴로 새 담배를 빼 물고 있었다.
“후회는 옛날에 할 만큼 했어.”
사현과 닿았던 모든 부위가 얼얼했다. 욱신거리는 옆머리를 누르며 여준이 느릿하게 중얼거렸다.
“네 마음대로 해. 하고 싶은 대로 해…. 그 대신 한 가지만 약속해.”
아이를 잃어버리고 헤매는 악몽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성이 풀리면 사라진다고, 두 번 다시 내 앞에 나타나지 않는다고.”
사현은 이번에는 돌아보지 않았다. 무섭도록 정면만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한참 후에야 담배를 한 모금 빨아들인 그가 사이드 브레이크를 내렸다. 여준은 거칠게 출발하는 차에 몸을 맡긴 채 젖은 눈을 깊이 감았다.
***
엘리베이터를 타고 방까지 가는 내내 섬뜩한 침묵이 흘렀다. 벽에 기대선 여준이 넥타이를 조금 풀어냈다. 내뱉지 못한 숨이 코끝까지 가득 차 있었다. 머리가 펑 터질 것 같았다.
띵, 경쾌한 소리에 여준의 어깨가 흠칫 튀어 올랐다. 사현은 그를 한 번도 돌아보지 않고 열린 문 사이로 걸어 나갔다. 고급스러운 복도는 강박적으로 조용했고 희붐한 조명에 눈이 아팠다.
“그 여자랑 자요?”
복도 끝에 다다라 문고리를 쥔 사현이 물었다. 말뜻을 이해하지 못한 여준이 느릿하게 두 눈을 깜빡였다.
“무슨 소리야.”
“저번에 전화했던 여자. 선배한테 푹 빠져 있는 것 같던데.”
여준이 저도 모르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복도에 나와 있는 사람은 없었지만 굳게 닫힌 문들이 신경 쓰였다.
“그럴 일 없어. 빨리 문이나….”
“여자한테 서긴 해요?”
“…뭐?”
“아니, 갑자기 궁금해서.”
사현의 뒷모습에서 아까 본 초조함이나 열망은 더 이상 한 톨도 찾을 수 없었다. 차가운 비웃음만이 담긴 목소리가 여준의 뱃속을 쿡쿡 찔렀다.
“여기까지 오는 내내 생각해 봤거든요. 이 사람 왜 갑자기 안 하던 짓을 할까.”
두꺼운 객실 문에 옆머리를 댄 사현이 눈동자만 굴려 여준을 향했다. 나른한 웃음이 떠오른 입술에 여준이 어금니를 꾹 깨물었다.
“많이 쌓이죠? 근데 여자랑 잘 만큼의 기력은 없고.”
“너….”
“나라면 괜찮을 것 같아요? 가만히 누워만 있으면 알아서 온몸 구석구석 빨아 주고 좆물도 짜 주고, 참 편하겠다 싶죠?”
“…….”
“잘 모르나 본데 다음부턴 업소 가는 게 빠를 거예요. 시간당 열다섯 장이면 당신이 원하는 서비스 다 해 주거든. 병은 조심해야겠지만 그 정도야 뭐.”
뒷걸음질하던 여준이 홱 돌아섰다. 동시에 달려든 사현이 그의 팔을 붙잡아 객실 문으로 밀쳤다. 쾅, 요란한 소리와 함께 여준의 고개가 푹 꺾였다. 가까워진 사현이 짓씹듯 말했다.
“그러니 제발 정신 좀 차리고 살아요. 도대체 나를 뭘 믿고 여기까지 쫄래쫄래 따라오는 거야?”
“…윽….”
“당신 눈엔 내가 아직도 10년 전의 그 병신 같아? 지금 이 문 안으로 들어가도 아무 일 없이 무사히 나올 수 있을 것 같냐고.”
말을 마친 사현이 손을 놓자마자 여준이 미끄러져 주저앉았다. 드러난 목덜미가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여준은 거칠어진 숨을 억지로 삼키며 몇 번이고 입가를 훔쳐 냈다. 눈앞의 사현이 지나치게 검고 거대해 보였다.
“네가….”
간신히 뱉어 내는 말끝은 형편없이 떨렸다.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어. 아니, 그래…. 알고 싶지도 않아. 언제나 너는, 내 예상 같은 건 보기 좋게 깨부수고…. 나는, 나는 이제 그냥….”
사현이 한쪽 무릎을 바닥에 대고 앉았다. 시선을 맞추려는 몸짓이었지만 여준은 아예 고개를 돌려 버렸다.
“궁리하는 거야. 어떻게 해야 네가, 나한테서 관심을…. 흥미를 거둘지. 내가 뭘 어떻게 해야 더 이상 너와 상관없는 인생을 살 수 있을지, 그래서….”
“그래서 기껏 생각한 게 그까짓 섹스 한번 해 주자?”
사납게 웃은 사현이 여준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여준이 반사적으로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뭘 겁내는 거예요? 때리기라도 할까 봐?”
“…….”
“일어나요. 그래야 문을 열 거 아니에요.”
우악스레 당기는 힘에 여준이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그를 옆으로 치워 놓은 사현이 익숙한 몸짓으로 카드키를 대고 문을 열었다.
“들어가요.”
활짝 열린 문 너머는 동굴처럼 어두웠다. 여준은 창백해진 손끝을 힘껏 말아 쥔 채 마른침을 삼켰다. 사현은 재촉하지 않고 가만히 기다리고 있었다. 그림자 진 얼굴에서 형형히 빛나는 눈이 두려워 여준은 결국 도망치듯 방 안으로 발을 들였다.
쿵, 문이 닫히고 잠금쇠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그게 무슨 신호라도 된 듯 여준이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뱉어 냈다.
“잠깐….”
재킷을 벗어 아무렇게나 던져 놓은 사현이 여준에게로 다가섰다. 여준은 애써 그의 손을 피해 뒷걸음질했다.
“샤워부터 할게. 하루 종일 밖에 있었어.”
사현이 픽 웃었다.
“어딜 씻어야 하는지는 아는 거예요?”
주춤 물러선 여준의 등으로 차가운 욕실 문이 닿았다. 사현은 한 손으로는 욕실 손잡이를 쥔 채 다른 한 손으로 여준의 등허리를 쓸어내렸다.
“사….”
“대충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려 줄게요.”
“…….”
“선배 뒷구멍에 내 좆을 쑤셔 넣을 거예요.”
딱딱한 손이 여준의 엉덩이를 꽉 움켜쥐었다. 긴 손가락 끝이 골 사이를 깊이 누르자 여준의 뺨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이 구멍에 내 좆을 끝까지 처넣고 좆물 나올 때까지 쑤실 거예요. 선배도 여자한테 좆 박아 봤으니 알죠? 혹시 여자 뒷구멍도 써 본 적 있어요?”
“…….”
“똑같아요, 남자나 여자나. 달린 구멍으로 남의 좆 조일 줄 아는 건.”
등 뒤로 욕실 문이 열렸다. 밀어내는 손에 힘없이 물러선 여준의 턱이 가늘게 떨렸다. 사현은 그런 여준을 향해 눈을 한껏 접어 웃어 보이고는 다음 순간 표정을 굳히고 돌아섰다. 욕실 안에 홀로 남은 여준이 비틀대며 세면대를 짚었다.
거울에 비친 얼굴은 창백하고 초췌했다. 저린 손으로 얼굴을 쓸어 올린 그가 한 겹씩 옷을 벗어 내려놓았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았지만 그것만은 필사적으로 참을 수 있었다.
미지근한 물을 맞고 선 채 거품을 냈다. 몸을 닦아 내는 손이 덜덜 떨렸다. 섹스일 뿐이야. 별다를 일도 아니야. 애써 되뇌며 물 온도를 낮췄다. 도저히 정신이 돌아오지 않았다.
가운을 걸치고 욕실을 나서자 창가에 앉은 사현의 뒷모습이 보였다. 손에는 언제나처럼 담배 한 개비를 쥐고 있었다. 그의 돌아보는 시선을 피해 여준은 고개를 돌렸다. 담배를 끄고 일어난 사현이 냉장고를 열고 물었다.
“마실 것 좀 줄까요? 술이라거나.”
“필요 없어.”
“참, 아까 이미 많이 드셨지.”
가볍게 웃은 그가 여준에게로 다가갔다. 가까워진 사현에게서 여전히 소독약 냄새가 났다.
“기분이 어때요?”
포식자의 입장에서 내뱉기엔 지나치게 감정 없는 질문이었다. 여준은 입을 꾹 다문 채 고개를 숙였다.
“자꾸 눈 피하지 말아요.”
“…할 거나 해.”
“누가 보면 억지로 끌고 온 줄 알겠어. 까짓거 한 번 자 주고 말자는 생각으로 여기까지 온 게 누군데.”
사현이 여준의 턱을 쥐어 정면으로 돌려놓았다. 여준은 차라리 눈을 감아 버렸다. 그런 여준의 관자놀이에 손을 댄 사현이 검지 끝으로 그의 눈가를 노크하듯 톡톡 두드렸다.
“올라가요.”
침대를 가리키며 내뱉는 명령은 싸늘하기 짝이 없었다. 여준은 머뭇머뭇 걸음을 옮겼다. 그러는 동안 사현은 무미건조한 동작으로 콘솔 서랍을 열어 불투명한 유리병과 콘돔 따위를 꺼내 올려놓았다. 침대에 무릎을 대긴 했으나 그 이상 어찌해야 할지 몰라 굳어 버린 여준을 향해 사현이 슬쩍 웃었다.
“뭐 해요? 안 벗고.”
여준의 목덜미가 흠칫 떨렸다. 굳은 손으로 허리띠를 쥔 그가 주섬주섬 앞섶을 풀어내기 시작했다. 어찌나 단단히 묶어 두었는지 매듭을 푸는 데만 한참이 걸렸다. 사현은 급할 것도 없다는 듯 팔짱을 끼고 선 채 그런 여준의 등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
가운 자락이 흘러내리고 어깨와 날개뼈, 등허리가 차례로 드러났다. 긁힌 자국 하나 없이 깨끗한 등이었다. 전라가 된 여준은 애써 태연하게 가운을 접어 내려놓았다. 사현이 유리병을 다시 집어 들었다. 달각, 고요한 방에 유난히 크게 울리는 소리에 여준의 어깨가 조금씩 붉게 달아올랐다.
“돌아앉아요.”
“그냥 빨리….”
“내 쪽을 보고 앉아요.”
여준의 뺨이 움푹 패었다. 이를 꽉 악물고 있는 것이다. 사현은 모르는 척 병 입구를 열었다. 힘겹게 돌아앉는 여준의 눈가가 시뻘겋게 물들어 있었다.
“어깨 펴요.”
“…….”
“다리 벌리고.”
“…….”
“선배 다치지 말라고 하는 거니까 말 들어요.”
높낮이 없는 말에 여준이 천천히 등을 곧게 폈다. 꾹 감은 눈가가 느릿하게 경련했다. 사현은 병을 기울여 쥔 채 그런 여준을 천천히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젖은 머리카락, 붉게 물든 단정한 얼굴, 선명하게 뻗은 쇄골과 날씬하고 판판한 아랫배를 지나 억지로 벌어진 허벅지 사이, 축 늘어진 살덩이 위로 병 입구를 가져갔다.
“……!”
미끄러운 액체가 페니스 위로 쏟아지자 여준이 반사적으로 다리를 오므렸다. 사현은 아무렇지 않게 그의 허벅지 사이로 제 무릎을 쑤셔 넣어 도로 벌려 놓았다. 아낌없이 쏟아진 젤이 여준의 앞을 흠뻑 적시고 음모 사이로 스며들었다.
“자위는 좀 해요?”
“읏….”
식사 메뉴라도 의논하는 듯 무심한 질문과는 다르게 여준의 페니스를 움켜쥐는 손바닥은 뜨거웠다. 더운 숨을 토한 여준이 양손 가득 침대 시트를 그러쥐었다. 사현의 손이 움직일 때마다 찌걱, 찌걱, 젖은 마찰음이 들렸다.
“…하지…마.”
간신히 말을 쥐어짠 여준의 사현의 팔목을 쥐고 밀어냈다. 그러나 그럴수록 늘어진 페니스를 움켜쥔 사현의 손에 힘이 가해질 뿐이었다.
“그만해, 그래 봤자 안 서.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미안한데 통나무에 좆 박는 취미는 없어서요.”
기둥을 살살 굴리던 손끝이 고환을 쥐고 부드럽게 문지르기 시작했다. 여준은 눈을 감은 채 필사적으로 다른 생각을 했지만 반복해서 가해지는 자극에 반응하는 몸을 끝까지 통제할 수는 없었다.
“반응 오는데? 아예 불능은 아닌가 보네요.”
슬슬 뻣뻣하게 일어서는 페니스를 툭 치며 사현이 비아냥거렸다.
“마지막으로 써 본 게 언제예요? 기억도 안 나나?”
“제발 그만 좀….”
“다리 벌리라고 했잖아요.”
사현이 위협적으로 뇌까리며 오므라든 무릎을 툭 밀어 놓았다. 여준의 눈자위가 수치심으로 붉게 부풀어 올랐다. 그는 그대로 울음과 맞닿은 숨을 고집스레 악문 채 입을 다물었다.
“엎드려요.”
손을 놓은 사현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덜덜 떨리는 손으로 침대를 짚은 여준의 등 뒤로 찌익, 콘돔 포장지를 찢는 소리가 들렸다.
“빨아요.”
꺼낸 콘돔을 검지와 중지에 끼운 사현이 여준의 눈앞에 손을 들이밀며 명령했다. 여준이 말을 듣지 않자 아예 입 안으로 쑤셔 넣었다.
“윽, 흡….”
“정성스럽게 핥아요. 당신 뒷구멍에 들어갈 거니까.”
투박한 손가락에 씌워진 콘돔에서 옅은 비린내가 났다. 포기하고 잇새를 여는 여준의 뺨을 타고 기어코 눈물이 후드득 떨어져 내렸다. 여준은 힘겹게 울음을 삼키며 입 안을 거칠게 누르는 손가락을 달래듯 혀로 감아 핥았다. 자칫하면 이성을 잃고 사현의 손을 마디째 물어뜯어 버릴 것 같았다.
“더 적셔요.”
사현이 여준의 턱을 쥔 채 손마디 끝까지 밀어 넣었다. 입천장 안쪽 여린 살까지 헤집는 통에 신 침이 왈칵 돌고 욕지기가 올라왔다. 콜록, 여준의 상체가 크게 요동치자 그제야 사현은 손을 빼냈다.
“허리 들어요.”
“흡, 흐으….”
“무릎을 대고 허벅지에 힘줘요. 구멍이 잘 보이게.”
사현은 철저하리만치 여준의 다리 사이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 외에는 관심도 없다는 듯이. 여준이 비틀대며 양 무릎을 대고 허리를 들어 올렸다. 빨리 이 악몽을 끝내고픈 마음뿐이었다.
“깨끗하네. 열심히 씻었나 봐요?”
낮게 쉰 목소리가 머리 위로 떨어질 때마다 심장이 쥐어 짜이는 듯 아팠다. 여준은 어깨를 잔뜩 움츠린 채 양팔 사이로 얼굴을 묻었다.
“읏….”
침대로 올라선 사현이 여준의 등을 제 몸으로 덮었다. 여준의 머릿속에 덜컥 떠오른 것은 어둡고 습한 지하 단칸방이었다. 그때도 사현은 엎드린 여준의 등을 덮어 누른 채였다.
“으읏, 아….”
여준이 신음하며 고개를 마구 저었다. 그사이 사현은 여준이 적셔 놓은 손으로 그의 항문 주위를 문지르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안으로 파고들어 배 속을 망쳐 놓을 듯했다. 덜컥 겁이 난 여준이 상체를 일으키려 했다. 사현은 예상했다는 듯 그런 여준의 목덜미를 움켜쥐고 가볍게 눌러놓았다.
“…사현아. 사현아.”
“가만히 있어요.”
“사현아, 그만. 그만!”
사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젖은 구멍으로 손가락을 찔러 넣었다. 아, 하며 여준의 팔이 푹 꺾였다. 뻐근한 감각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 감전된 듯 찌릿찌릿했다. 굵은 눈물을 매단 채 거친 숨을 몰아쉬는 여준을 차갑게 내려다보며 사현이 손가락 하나를 더 밀어 넣었다.
“흣, 아, 아니야, 그만…. 아파.”
“징징거리지 말아요. 누가 시작한 일인지 벌써 잊었어요?”
“사현아, 제발, 그만할게. 아니, 그만하자. 이런 건, 이건….”
별일도 아니야. 그냥 섹스일 뿐이야. 애써 다잡았던 마음은 스스로도 믿기 힘들 정도로 쉽게 무너졌다. 여준이 버르적대며 머리 위로 팔을 뻗었다. 어떻게 해도 그날의 악몽을 떨쳐 낼 수가 없었다.
“선배.”
“흐읏…!”
여준의 등으로 몸을 바짝 붙인 사현이 낮게 속삭였다. 동시에 깊이 넣은 손가락을 슬쩍 벌렸다. 여준의 손끝이 바짝 굳었다.
“예전에 내가 아는 사람이 그러더라고요. 짝사랑 그딴 거 부질없다, 그래 봤자 한 번 따먹으면 식게 돼 있다고.”
“…읏, 아파, 아프….”
“당신이 나를 두고 한 생각이랑 똑같지 않아요? 그러니 조금만 참아 봐요. 여기까지 올 땐 좋았잖아. 까짓거 한 번 자 준다, 그럼 이 새끼 나한테 질려서 떨어져 나가겠지, 실컷 패기 부렸잖아.”
“…흣….”
“나도 궁금하거든. 정말 그럴지도 모르잖아요. 당신 한 번 따먹으면 그래, 어쩌면…. 이 좆같은…. 개 병신 같은….”
천천히 말을 이어 가던 사현의 목소리가 천천히 가라앉았다. 방 안은 다시 찔걱대는 마찰음과 여준의 느린 신음 소리로 가득 찼다. 놀란 마음이 진정되고, 밑을 벌리는 뻐근한 감각에도 익숙해지자 조금씩 이성이 돌아왔다. 고개를 돌린 여준의 눈에 들어온 것은 미간을 잔뜩 찌푸린 사현의 얼굴이었다.
“…….”
이마부터 뺨까지 찢어졌다가 아문 흔적이 섬뜩했다. 보고만 있어도 제 얼굴이 다 쓰라린 것 같았다. 여준이 느리게 손을 들어 올렸다.
열일곱이었던 사현은 정말이지 말이 없었다. 그럼에도 한 번씩 들려올 때가 있었다. 애절한 갈망이 담긴 눈동자, 대답을 망설이며 다문 입술, 솜털이 채 가시지 않은 얼굴의 숨구멍마다 흘러나오던 간절하고 달콤한 언어들. 그것은 오로지 여준만이 알 수 있는 것이었다. 열일곱의 사현이 사랑한 사람이 바로 여준이기에.
여준이 떨리는 손끝으로 사현의 이마를 짚었다. 고스란히 요철이 진 상처는 딱딱하고 거칠었다. 그때 사현이 불에 덴 듯 눈을 떴다.
“윽…!”
여준의 손목을 쥐어 뿌리친 그가 상체를 바로 세웠다. 철컥, 풀어낸 바지 버클의 금속성이 신경을 긁고 지났다. 구멍 안을 헤집던 손가락이 빠져나가고, 뒤이어 벌어질 일은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아, 아…. 악…!”
젖은 구멍 위로 묵직한 살덩이가 닿았다. 여준의 허리를 틀어쥔 채 무턱대고 구멍을 벌리며 들어가는 움직임에 여준이 낮은 비명을 내질렀다. 흠뻑 젖은 구멍이 빠듯하게 벌어지며 귀두를 삼켰다. 여준은 저도 모르게 배에 잔뜩 힘을 준 채 침대 헤드를 쥐었다. 핏기가 빠져나간 이마에 식은땀이 흠뻑 배었다.
“사현, 아, 앗…! 아!”
“힘 빼요. 선배만 힘들어지니까.”
“흐읏, 그만, 조금만…. 천천….”
말을 채 끝맺기도 전에 사현이 허리를 강하게 내리찍었다. 순식간에 끝까지 쑤시고 들어온 페니스를 감싸듯 내벽이 진득하게 달라붙었다. 흐으, 흐으, 여준이 신음하며 고개를 흔들었다. 벌어진 입술 새로 끈적한 타액이 길게 방울졌다. 완전히 죽어 버린 여준의 페니스가 경련하는 허벅지 사이로 힘없이 덜렁거렸다.
“다시 세워요.”
사현이 여준의 손을 잡아다 축 늘어진 페니스를 쥐게 했다. 여준이 몸서리를 쳤다. 온몸의 신경이 사현과 닿은 부분에 집중돼 있는 것 같았다. 그 외에는 어떤 감각도 느껴지지 않았다.
“안 돼, 너무…. 아프….”
“세워요. 선배가 쌀 때까지 안 끝나니까.”
“흐읏….”
“주로 혼자 했을 거 아니에요. 어떻게 주물렀는지 잘 기억해서 세워 봐요. 다시 말하지만 당신이 쌀 때까지 안 끝나요.”
여준이 흑, 하며 울음을 삼켰다. 어쩔 수 없이 제 것을 쥐고 주무르기 시작했지만 도저히 세울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때 페니스를 끝까지 박은 채 몸을 낮춘 사현이 여준의 목덜미를 약하게 물었다.
“안 돼, 자국….”
“여긴 셔츠 깃으로 가려져요.”
경추 위를 길게 핥고 깨물었다가 빨아들이기를 반복하는 입술이 여전히 뜨거웠다. 간지러운 감각이 척추를 훑어 내리고 여준의 손끝이 한껏 오므라들었다.
“으응….”
참았던 숨과 함께 터져 나온 것은 스스로도 놀랐을 만큼 젖은 신음성이었다. 얼른 입을 다문 여준이 두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그때 허리를 뒤로 빼냈던 사현이 강하게 페니스를 처박았다.
“아, 아! 으읏, 흑…!”
피스톤질에 상체가 흔들릴 때마다 짧은 신음이 터졌다. 한결 풀어진 몸이 부드럽게 휘어지고, 빳빳하게 일어선 페니스 끄트머리가 젖어 들기 시작했다. 뱃속에 불씨가 들어앉은 것 같았다. 퍽, 퍽, 몸이 흔들릴 때마다 사현의 골반과 부딪치는 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읏! 흐으, 응….”
아픔 말고는 무엇도 느낄 수 없던 단계가 지나자, 이번에는 손끝 발끝까지 모든 신경이 예민하게 살아났다. 시트에 페니스 끄트머리가 닿을 때마다 눈앞에 스파크가 튀었다. 사현의 잇새로도 조금씩 거친 숨이 새고 있었다.
정신이 아득하리만치 시간의 흐름이 느렸다. 사현의 움직임에 따라 위로 밀리고 좌우로 흔들리며 여준은 그저 빨리 이 행위가 끝나기만을 빌었다. 무력하고 비참했다.
“잘 조이네. 재능 있는 거 아니에요?”
한참 후에야 사납게 비웃은 사현이 여준의 허벅지를 감싸 잡아당겼다. 순식간에 균형을 잃고 푹 엎드린 여준의 페니스가 침대 시트에 한껏 비벼졌다.
“…아!”
비명에 가까운 신음성이 터지고 구멍이 한껏 오므라들었다. 뜨거운 내벽이 빈틈없이 달라붙어 조이는 감각에 사현의 관자놀이에 굵은 핏줄이 섰다.
“후우….”
사정감은 길고 짙었다. 그대로 여준의 등을 감싼 채 토정한 페니스를 담그고 있던 사현이 한참 후에야 몸을 일으켰다. 굵은 페니스가 쑥 빠져나오자 젖은 구멍이 움찔대며 수축했다.
“…….”
콘돔을 벗겨 내 쓰레기통에 던져 넣은 사현이 수건을 집어 들고 여준을 일으켰다. 힘없이 주저앉은 여준의 몸에 묻은 정액을 대충 닦아 낸 그가 천천히 여준과 눈을 맞췄다.
“이제 좀….”
눈물 자국으로 엉망이 된 와중에도 여준의 눈동자는 차분했다.
“후회돼요?”
마치 그러기를 바라고 묻는 듯한 질문이었다.
“너는?”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몸을 고스란히 드러낸 여준은 어떤 의식을 앞둔 독실한 신자처럼 보였다.
“너는 후회해?”
“…….”
“아니면 만족해?”
부윰하게 부푼 눈동자에서 눈물 한줄기가 툭, 흘러내렸다. 사현이 대답하지 않았기에 고요는 오롯이 여준의 몫이 되었다.
“너를 어째야 할지 모르겠어.”
온몸이 때려 맞은 듯 얼얼했다. 여준은 손등으로 눈물을 훔쳐 내고 말을 이었다.
“너는 나를 어쩌고 싶어?”
사현은 여전히 대답하지 않았다. 또한 무엇도 읽을 수 없었다. 그는 더 이상 사랑에 빠진 열일곱의 임사현이 아니고, 자신 역시 사랑에 취한 열여덟의 성여준이 아니었기에.
***
학교는 발칵 뒤집혔다. 등굣길에 이미 ‘학생 A’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조폭 아들이라더라, 낙태시킨 여자만 두 자릿수라더라, 그 동네에서 걔 얼굴 모르면 간첩이라더라. 익명성은 너무나 유약했고 소문을 즐기는 이들은 너무 많았다.
‘임사현? 그게 누군데?’
교실 문을 열던 여준이 멈칫했다. 기호와 그 친구들이 한참 목소리를 높여 떠들고 있었다.
‘왜, 여준이가 멘토링하던 애 있잖아.’
그 중심에 영재가 있었다.
‘아, 네가 막 양아치라고 하던 걔?’
‘그렇다니까. 우리 삼촌이 N동에서 변호사 사무실 하거든. 그 새끼 고소하고 싶어서 찾아오는 여자들이 한둘이 아닌데 아직 소년법 적용되는 나이라서 아무것도 못 해 준대.’
산부인과 의사라고 하지 않았나? 여준은 그만 살짝 웃을 뻔했다. 참을 수 있었던 이유는 곧바로 영재와 눈이 마주쳤기 때문이었다.
‘여쭈니, 너 괜찮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경쾌하게 묻는 말에 어안이 벙벙했다. 여준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자 영재는 아예 그의 어깨에 팔을 두르고 큰 소리를 냈다.
‘내가 그 새끼 안 된다고 했잖아. 그래도 이제 괜찮아. 소문 쫙 나서 두 번 다시 학교에 발도 못 붙일걸.’
‘…….’
그 새끼 가까이하지 마. 그런 새끼는 학교에서 쫓아내야 해. 두 번 다시 학교에 발도 못 붙이게 만들어야 해.
여준은 결국 씩 웃어 버렸다. 그렇구나, 네가 바란 건 처음부터 그거였어. 네가 모든 걸 잃고 그 어두운 동네로 쫓겨났다는 사실을 끝까지 감추는 것. 그러기 위해서는 임사현을 배제해야 했던 것이다.
확신에 가까운 가정은 어느덧 ‘진실’이라는 형태로 여준의 머릿속에 눌러앉았다. 그러자 참을 수 없이 화가 났다. 사현이 정말 영재의 비밀을 알고 있다 해도 사현은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여준이 알았다 한들 영재를 전과 다르게 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을 마음대로 판단하고 통제하려 든 영재에게 화가 났고, 그런 영재 때문에 사현이 이런 피해를 입었다는 사실에 또 화가 났다.
‘여준아?’
‘그 글 말인데.’
여준이 입을 열자 모여 있던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에게 집중되었다. 여준과 사현이 가깝게 지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아이들이었다.
‘누가 쓴 걸까?’
여준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매끄러운 미소를 띤 채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물었다. 영재가 눈썹을 까딱 치켜세웠다.
‘누군지 몰라도 임사현에 대해 정말 잘 아는 사람인 것 같은데.’
‘…글쎄. 워낙 요란하게 활개 치고 다녔으니 알 사람은 다 아는 거 아니겠어?’
‘아냐, 내 생각엔 임사현이랑 꽤 가까운 사람일 것 같아. 그게 아니고서야 모를 말들이 너무 많았잖아.’
한동네에 산다든가, 학교 밖에서의 모습을 자주 볼 수밖에 없었다든가. 이어지려던 말을 멈춘 것은 앞문이 열리고 가람의 목소리가 날아든 탓이었다.
‘여준아, 너희 담임 선생님이 부르시는데.’
덕분에 여준은 자신이 손톱이 휘도록 주먹을 꽉 쥐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숨을 몰아쉬며 돌아보자 잔뜩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가린이 보였다.
‘오해는 하지 말고, 여준아. 너를 못 믿어서 하는 말이 아니니까.’
담임은 난처한 듯 눈썹을 휜 채 웃고 있었다. 여준이 마주 웃지도, 대답하지 않자 그는 후우,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너도 충격이 크겠….’
‘무슨 근거가 있어서 징계 위원회가 열린다는 건가요?’
공격적이지 않은 태도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그야말로 무진 애를 써야 했다. 담임이 느릿하게 손부채질을 했다. 교무실은 시원했지만 식은땀이 나기는 여준도 마찬가지였다.
‘익명 게시물 하나가 올라왔을 뿐이잖아요. 그것만 믿고 징계 논의를 한다는 건….’
‘옛말에 틀린 거 없는 법이야. 아니 땐 굴뚝에 연기 안 난다는 말이 왜 있겠니?’
‘선생님. 카페 익명 게시판 들어가 보셨으면 아시겠지만 거기서 잘못 퍼진 소문이 한두 개가 아니에요. 고발이 있었으니 조사를 해 보겠다는 단계라면 모를까, 징계 여부부터 논의한다는 건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본인이 인정했어. 1학년 주임 선생님이 이미 면담 마치셨다.’
눈앞이 꺼멓게 번졌다가 도로 밝아졌다. 입술만 달싹이던 여준이 느릿하게 반문했다. 네?
‘주임 선생님이 글 보여 주고 어떻게 된 거냐 물어봤더니 너랑은 상관없는 일이라면서 순순히 징계 받겠다고 했다더구나.’
‘…네? 주임 선생님께 너라고 했다고요?’
‘아니, 그게 아니라…. 다 맞는 소린데, 여준이 너랑은 아무 상관없는 일이라 그랬다고.’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여준이 멍하니 눈을 깜빡이자 담임이 흠, 헛기침을 했다.
‘그러니까 그것만 말해 주면 돼. 너, 사현이가 그런 비행을 저지르고 다닌다는 거 전혀 몰랐지?’
‘…….’
‘여준아, 수업 시작하잖아. 그냥 빨리 네, 하고 교실로 올라가. 응?’
본인이 인정했어. 그런데 여준이 너랑은 상관없는 일이라고 했어…. 들은 말을 곱씹던 여준이 짓눌린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어떤 징계를 받게 되는 거예요?’
애들 삥을 뜯고 다닌다더라, 깡패들이랑 어울린다더라, 사현에 대한 소문은 원래도 좋지 않았다. 하지만 이토록 구체적이고 더러운 이야기를 본인이 인정했다면 이야기가 다르다. 가벼운 징계로 끝날 리가 없었다.
‘우선은 무기한 정학인데, 아무래도…. 전학 가게 되지 않겠니? 퇴학은 함부로 못 시키니까.’
그 사실이 대단히 아쉽다는 말투였다.
짧은 장마가 찾아왔다. 아침저녁으로 습한 공기를 들이마시며 기계적으로 등하교를 반복하다 보면 같은 자리를 맴도는 금붕어가 된 느낌이었다. 영재는 사현이 나타나기 전에 그랬던 것처럼 밝고 쾌활한 모습으로 돌아왔고, 아무렇지 않게 여준에게 인사를 건넸다.
선배가 뭘 하든 다 내 잘못 같아요.
거르고 걸러 정제시킨 말에서도 숨기지 못한 진심은 모서리가 뾰족한 자갈이 되어 여준의 마음에 들어앉았다. 조금이라도 흔들릴 때마다 이리저리 구르며 마음을 할퀴는 통에 도무지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찰칵, 찰칵, 샤프심을 끄집어낼 때마다 일정한 리듬에 맞춰 상념이 떠올랐다. 찰칵, 밥은 잘 먹고 있을까. 찰칵, 여전히 그 집에 혼자일까. 찰칵, 아르바이트를 한다고 했는데….
‘…….’
아르바이트. 불현듯 머리를 스친 단어에 여준이 두 눈을 크게 떴다. 사현이 아르바이트를 한다면 아마 근무지는 N동일 것이다. 학교를 다니면서 할 수 있는 걸 찾았을 테니 저녁 시간이나 주말이겠지. 학생이 할 수 있는 일도 한정되어 있다.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주치면 무슨 핑계를 대야 할까. 아무런 보장도 없는데 가슴부터 두근거렸다. 여준은 초조하게 시계를 보았다. 벌써부터 시간이 느려진 것 같았다.
***
자신의 어리석음을 깨닫는 데엔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이 동네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을지 모르니까 무조건 돌면서 찾아보겠다니. 빼곡히 들어선 상가 건물에 빈틈없이 걸린 편의점, 카페, 고깃집 간판들에 시작부터 막막해졌다. 말도 안 되게 습한 날씨에도 거리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이래서야 사현과 스쳐 지난다 해도 알아볼 수 없을 듯했다.
여준은 한참을 행인들에 치여 가며 헤맨 뒤에야 그나마 인적이 덜한 골목을 찾아 참았던 숨을 내쉬었다. 핸드폰이 울린 것도 그때였다. 받아 보니 가린이었다.
- 여준아, 너 어디야? 왜 학원 안 와?
가린과는 학원에서 영어 수업을 함께 듣고 있었다. 여준이 아, 하며 뒤늦은 한숨을 토했다.
‘나 오늘은 못 갈 것 같아.’
- 왜? 어디 아파? 학교에선 괜찮았잖아.
‘아픈 게 아니라….’
무심코 대답하던 여준이 입을 다물었다. 아픈 곳은 없다. 하지만 제정신이 아닌 것은 확실했다. 핸드폰을 쥔 손에 힘을 준 채 서서히 쪼그려 앉았다.
‘아픈 건 아닌데….’
-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진짜 아픈 건 아닌데, 나도 내가…. 지금 뭐 하는 건지 모르겠어.’
뱃속이 덜걱거린다.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마모되기는커녕 날카롭게 벼려지기만 하는 마음이었다. 여준은 한 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심호흡을 했다.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어.’
- 여준아. 괜찮아?
‘나 지금 진짜 멍청한 짓 했어. 진짜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데, 여기 올 때까지 그게 말이 안 되는 것도 몰랐어. 나도 내가 좀 이상한 것 같아. 지금 이게 다 뭔지….’
- …….
‘…모르겠어.’
여준이 고개를 푹 떨어뜨렸다. 모르겠어. 지금 이게 다 뭘까. 만나서 어쩌고 싶은 걸까. 아니, 아니야. 만나서 뭘 어쩌고 싶은 게 아니야. 그냥….
그냥 만나고 싶은 거야. 그 이후로 어떻게 되어도 좋으니까, 그 만남이 아무것도 아니어도 좋으니까.
- 너 어딘데? 내가 데리러 갈까?
가린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조금씩 머리가 차가워졌다. 여준은 이마에 배어난 땀을 훔쳐 내고 고개를 저었다.
‘…아냐, 갑자기 미안해. 선생님께는…. 나 오늘 못 간다고만 전해 줘. 내가 전화 드릴게.’
- 알았어. 근데 정말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 진짜 괜찮아.’
애써 강조하고 전화를 끊었다. 어느덧 밤 열 시를 지난 시간이었다. 거리에 깔리는 전단지가 점차 퇴폐적인 색으로 변해 가고 있었다.
‘…….’
학원 땡땡이라니, 태어나서 처음 저질러 본 비행이었다. 기말고사도 다가오는데…. 초조함에 입술이 바짝 말랐다.
사현을 만나야 했다. 그것만은 분명했다. 만나서 어떻게 해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는 전혀 알 수 없었지만 이대로 있을 수도 없었다. 소문이 사실인지, 사실이라면 왜 그런 짓을 했는지, 사실이 아니라면 왜 부정하지 않았는지, 잘 지내고 있는지…. 모든 것이 궁금했고 모든 것에 안달이 났다.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거리를 헤맸지만 당연하게도 사현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여준은 도시의 토사물에 떠밀려 비척비척 N동을 빠져나왔다.
다음 날부터는 아예 학원 자습을 빠졌다. 집에 가서 과외를 받기로 했다는 말을 감독관은 순순히 믿어 주었다. 집에는 학원 자습 시간을 늘렸다고 말했다. 학원 수업을 마치자마자 달려 나와 버스를 잡아타고 N동으로 향했다. 아예 주택가 길목에서 기다려 보기도 했다. 하지만 일주일이 넘도록 사현의 모습을 발견할 수는 없었다.
역시 집으로 찾아가 볼까. 몇 번이나 망설였지만 사현의 집을 찾아가다 마주쳤던 여자의 섬뜩한 모습이 매번 발목을 잡았다. 여자가 두려웠던 건 아니다. 그녀가 몇 번이고 중얼거리던 ‘우리 아기’라는 말이 떠올랐던 탓이었다. 행여나 다시 마주쳤을 때 제일 알고 싶지 않은 사실을 확인하게 될까 무서웠다.
‘진짜….’
다행히 날은 하루가 다르게 서늘해졌다. 그러나 네온사인의 물결 속을 흐르듯 걷다 보면 어김없이 어지럽고 식은땀이 흘렀다. 턱 아래를 훔쳐 내며 시간을 확인했다. 또다시 자정이었다.
‘진짜 이게 뭐 하는 짓이냐….’
차라리 웃고 싶었지만 그럴 기력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고개를 푹 숙인 여준이 허정허정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걸음을 옮기는 내내 한 가지 생각만이 머릿속을 지배했다. 그만두자. 때려치우자. 뭔가 잘못 돌아가고 있어. 이 이상 어긋나기 전에…. 다 그만둬야 해.
그러자 불현듯 떠오른 것은 사현의 목소리였다.
‘…….’
그건 너무 이상한 감정이어서, 다 때려치우고 싶어요.
걸음을 멈춘 여준이 제 뺨을 툭 내리쳤다. 아니야. 그만두자. 이 이상 생각하면 안 돼. 이런 멍청한 짓도 오늘로 끝내야 해….
‘그래, 사현이 잘 들어가고.’
그때, 불빛에 취한 머릿속으로 누군가 얼음물을 들이부은 듯했다. 여준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리다 얼른 걸음을 옮겼다. 인파에 섞여 들며 슬그머니 돌아보니 익숙한 뒷모습이 먼저 보였다.
반팔 티셔츠에 청바지를 입은 사현은 처음부터 모르는 사이였던 듯 낯설었다. 그는 공손한 자세로 선 채 제 앞에 선 남자의 말을 경청하고 있었다. 남자의 모습을 확인한 여준이 은연중에 표정을 굳혔다. 흰색 민소매 티셔츠를 입은 남자의 양팔은 온통 흉터투성이였다. 보는 것만으로 섬뜩한 위압감이 느껴졌다.
‘이거 가져가라. 잠 안 올 때 한 모금씩 마시면 좋아.’
심지어 그 뒤로 늘어선 남자들은 대놓고 팔뚝의 문신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들이 영재나 다른 아이들이 그토록 목 놓아 주장하던 양아치, 깡패, 혹은 조폭이라는 사실은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괜찮습니다, 아직 이런 건….’
‘마, 형님이 주면 그냥 인사 꾸벅하고 받는 거지. 말이 많아?’
사현이 마지못해 받아 든 것은 척 봐도 고급스러운 양주 병이었다. 조폭과 어울리는 데다가 술이라니. 말로만 듣던 것들이 하나씩 사실로 확인되는 순간에도 여준의 머릿속에는 한 가지 생각뿐이었다.
언제 말을 걸어야 하지?
어떤 표정으로, 어떤 말투로 알은체를 해야 우연처럼 보일까. 하지만 평일, 자정을 넘은 시각에 교복 차림으로 N동을 배회하던 이유를 뭐라 대야 할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러자 한층 더 스스로가 한심해졌다. 우연히 본다 한들 이렇게 될 일이었는데.
사현은 한 손에 양주 병을 든 채 거리를 빠져나가 길을 건넜다. 무심코 따라붙었지만 신호는 곧장 바뀌었다. 여준은 손거스러미를 뜯으며 어두운 주택가 입구로 접어드는 사현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사현은 아주 익숙하고 자연스럽게 오르막을 걷기 시작했다.
다행히 사현의 모습이 완전히 사라지기 전에 다시 파란불이 들어왔다. 힘껏 달려 길을 건넌 여준도 이번에는 망설임 없이 오르막길을 올랐다. 한 번밖에 와 보지 못했음에도 가야 할 길이 훤히 보였다.
미행은 오래지 않아 끝이 났다. 여준은 사현이 대문을 밀고 들어선 지 한참이 지난 후에야 그가 세 들어 사는 주택 담벼락으로 다가섰다. 낮은 담 너머 불이 들어온 반지하 방의 창문이 보였다.
‘…….’
당연히 문을 두드릴 용기는 없었다.
‘하아….’
담벼락에 두 손을 댄 채 주저앉은 여준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시간은 하염없이 흐르고 있었다. 반쯤 열린 철제 대문과 담벼락, 제 스니커즈를 번갈아 보던 여준이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켰다.
어차피 가장 꼴사나운 짓은 이미 저지른 뒤였다. 마음을 다잡고 대문 손잡이를 쥐었다. 끼이익, 최대한 조심스레 당겼는데도 요란한 소리가 났다. 놀란 마음을 가라앉히며 안으로 발을 들였다. 이전에 왔을 때의 기억을 살려 건물 오른쪽으로 돌아가자 좁고 어두운 계단이 보였다. 망설이던 여준이 어렵게 첫발을 디뎠다. 핸드폰 불빛에 의지해 조심스레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목덜미가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마침내 마지막 계단을 내려선 그가 주먹 쥔 손을 들어 올렸다. 쿵, 쿵, 노크를 해 봤지만 문 너머에선 아무 반응이 없었다.
‘사현아.’
조심스레 부르고 다시 두드렸다. 쿵, 쿵, 쿵. 사현은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그새 잠든 건가? 밖에서 시간을 끌긴 했지만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지는 않은데. 고개를 갸우뚱하던 여준이 무심코 손잡이를 비틀었다. 그러자 철컥, 경쾌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어?’
끼이익, 열린 문 너머로 희끄무레한 형광등 불빛이 새어 나왔다.
‘사현아…? 집에 있어?’
혹시 씻는 중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제야 들었다. 그러나 슬그머니 들여다본 방 안에서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낡은 매트리스 위, 등을 돌린 채 누워 있는 사현의 모습이었다.
‘…….’
형광등 불빛이 짧게 점멸했다. 사현은 모로 누운 채 미동조차 없었다. 옷차림도 바깥에서 봤던 그대로였다. 고민하던 여준이 우선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섰다.
‘사현아, 자? 문은 잠그고 자야….’
가까이 다가서자 묘하게 달큼한 냄새가 났다. 주위를 둘러보던 여준의 눈에 들어온 것은 뚜껑이 열린 채 고이 놓인 양주 병이었다. 양주 냄새가 원래 이런가? 여준의 고개가 갸우뚱 기울어졌다. 코를 찌르는 알코올 향 사이로 뭐라 설명하기 힘든 끈끈한 향이 났다. 불길하리만치 달고 깊었다.
‘사현아. 사현아?’
무릎을 대고 앉은 여준이 사현의 어깨를 흔들었다. 그러자 사현은 여준 쪽으로 툭, 떨어지듯 돌아누웠다. 굳게 닫힌 눈꺼풀은 평생 열리지 않을 듯 고요했고 낯빛은 시체처럼 창백했다. 숨은 쉬고 있었지만 기묘할 정도로 호흡이 느렸다.
‘사현아, 왜 그래?’
순간 섬뜩한 예감에 소름이 돋았다.
‘무슨…. 왜 이러는 거야? 사현아!’
마구 흔들어 깨워 봤지만 그때마다 사현은 밀고 당기는 대로 흔들릴 뿐이었다. 어떡하지? 어떻게 해야 하지? 우왕좌왕하던 여준이 우선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구급차. 떠오른 단어를 되뇌며 키패드를 마구 누르는데 낮게 앓는 소리가 들렸다.
‘으….’
내려다보니 사현이 얼굴을 잔뜩 찌푸린 채 두 눈을 껌뻑이고 있었다. 여준은 하마터면 놓칠 뻔한 핸드폰을 바닥에 내려둔 채 그를 향해 몸을 낮췄다.
‘사현아, 괜찮아? 너 어디 아픈 거야?’
‘…….’
‘응급실 갈래? 119 부를까? 근데 이 집 앞까지 구급차가 못 들어올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
‘…선배?’
흘러나온 목소리는 잔뜩 쉬어 있었다. 눈자위도 실핏줄이 터져 벌겠다.
‘선배.’
‘어, 응. 마음대로 들어와서 미안해. 문이 열려 있었….’
‘선배.’
같은 말을 되뇌며 사현이 천천히 두 손을 뻗었다. 여준의 목덜미에 닿은 손은 델 듯이 뜨거웠다. 놀란 여준이 사현의 이마를 짚었지만 이마에서는 특별히 열감이 느껴지지 않았다.
‘사현아, 너 지금 진짜 이상해. 왜 그래?’
그러나 사현에게는 들리지 않는 듯했다. 선배, 선배. 같은 말만 되뇌며 여준의 목을 끌어안는 몸짓이 어리고 절박했다. 얼떨결에 사현에게 안긴 여준이 두 눈을 크게 껌뻑였다. 가까워진 사현의 숨에서 예의 그 달콤한 향이 한층 진하게 풍겼다.
‘너 혹시 술 마신 거야? 저 병에 있는 거?’
사현이 몸을 일으킨 것은 그 순간이었다.
‘……!’
중심을 잃은 여준이 매트리스 위로 푹 쓰러졌다. 이어 머리통이 붙들리고 사현의 얼굴이 불현듯 가까워졌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아채기도 전에 입이 벌어지고 뜨거운 기운이 훅 끼쳐 들었다.
‘읍….’
여준이 반사적으로 사현의 어깨를 움켜쥐고 밀어내기 시작했다. 사현은 아예 여준의 머리를 제 팔 사이로 가둔 채 그 입 안을 낱낱이 탐하려 들었다. 여준이 고개를 돌리자 입술을 물어뜯으며 쫓아왔다.
‘…아!’
아랫입술이 찢겨나가는 감각이 서늘했다. 여준이 무심코 사현의 뺨을 내리쳤다. 그러나 온몸이 짓눌린 채 휘두르는 힘은 터무니없이 약했고 사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그만해, 뭐 하는 거야!’
간신히 입술이 떨어진 틈에 여준이 벌컥 외쳤다. 원인이 무엇이든, 사현이 지금 제정신이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알 수 있었다. 그 점이 더욱 여준을 두렵게 했다.
사현이 자신을 어떤 식으로 생각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모를 수가 없었다. 눈만 바라보고 있어도 들렸다. 좋아한다는 말이. 좋아서 어쩔 줄 모르겠다는 진심이. 하지만 그 마음이 이런 식으로 발현될 거라고는 상상조차 해 보지 못했다. 그러기엔 너무나 고요한 소리였다. 해 저문 계곡의 물소리와 닮은 눈이었다. 언제까지고 먼 자리에서 존재만으로 사랑을 말할 것 같은 음색이었다.
‘선배.’
중얼거린 사현이 여준의 목덜미로 입술을 가져갔다. 송곳니가 턱 아래를 파고들고 축축한 혀가 핥아 올리는 감각에 고스란히 소름이 끼쳤다. 몸서리친 여준이 힘껏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그만, 그만해. 그만해!’
여준의 셔츠 깃을 쥔 사현의 손은 돌처럼 단단했다. 투둑, 단추가 뜯겨 나가는 소리와 함께 여준의 얼굴에서 핏기가 빠져나갔다.
‘사현아, 제발, 정신 차려. 사현아!’
차라리 재앙이었다. 여준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사현의 손을 마구 붙들어 밀쳐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사현은 아예 여준의 허리 위로 올라타 그의 상체를 짓눌러 버렸다.
‘그만….’
여준의 관자놀이로 시퍼런 핏줄이 섰다. 실컷 용을 쓰다 힘이 빠져 버린 목덜미가 맥없이 뒤로 꺾였다. 이건 꿈일 거야. 내뱉고도 허탈한 현실 도피였다. 헛웃음이 터지는가 싶더니 곧이어 눈물이 차올랐다.
젖은 눈을 껌뻑일 때마다 여러 빛깔이 어지러이 섞여들었다. 날카로운 유리 조각이 눈을 지나 뇌까지 박힌 듯했다. 여준은 필사적으로 의식을 멀리 보내려 했다. 도망칠 수 없다면 정신이라도 잃고 싶었다. 그러나 팔다리를 속박한 채 짓누르는 육체의 감각은 치밀하고 선명한 현실 속에 있었고 의식이 까마득해질 때마다 뜨거운 손길이 뒷목을 잡아끌었다.
‘윽…!’
사현은 묵묵히, 그저 해야 할 일을 한다는 듯 무감하고 기계적인 손길로 여준을 끌어다 엎어놓았다. 셔츠를 밀어 올리고 바지 앞섶을 풀어 헤치는 손은 여전히 기이하리만큼 뜨거웠다. 이런 손과 계속 닿아 있다간 화상을 입지 않을까? 여준은 덜컥 두려워졌다.
후우, 하아, 여준의 숨이 점차 거칠어졌다. 이미 몸 곳곳에 물집이 잡힌 것만 같았다. 사현의 손이 스쳐 간 모든 살이 타들어 가고 있는 듯했다.
‘그만해….’
그런 영화를 본 적이 있었다. 억울한 누명을 쓰고 수감된 남자가 다른 죄수들에게 찍혀 온갖 고초를 겪고 결국 복수에 성공하는 이야기였다. 남자끼리도 삽입 행위가 가능하다는 것, 남자에게 성욕을 느끼는 부류가 있다는 것도 그때 처음 알았다. 자신에게 닥칠 줄은 상상도 해보지 못한 상황이지만, 이제부터 벌어질 일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다. 등에 닿은 사현의 중심이 팽팽하게 부풀어 있었기 때문이다.
날것의 욕망, 적나라한 성욕, 이성을 잠식시키고 수면 위로 드러난 폭력성이 두려웠다. 두려웠지만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말이 통하지 않는 데다가 힘은 더더욱 통하지 않았다. 무서운 속도로 들이닥친 공포와 무력감에 여준은 빠르게 판단 능력을 상실해갔다.
‘그만….’
울먹이며 끝없이 중얼거렸다. 도와주세요, 살려주세요, 누구라도 제발. 영재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런 새끼들은 애초에 가까이하면 안 돼. 태생이 양아치인 놈들을 네 기준으로 판단하지 마.
있지, 드라마에 허구한 날 그런 장면 나오잖아. 화가 나면 사람 싸대기부터 날리는 거. 그런 걸 볼 때마다 궁금했어. 살면서 남의 뺨을 세게 때려 본 사람이 이 세상에 몇이나 될까?
난 그렇게 생각해. 이 세상에 남을 때릴 수 있는 사람은 분명 따로 있어. 일단 너는 절대로 아니지. 그런데 임사현은 손으로 뺨을 치는 게 아니라 각목을 들고 뒤통수부터 날릴 수 있는 인간이야. 너 정말 그런 놈이랑 엮일 셈이야?
그 말에 뭐라고 대답했더라. 여준은 팔오금에 얼굴을 묻은 채 비명을 참았다. 우습게도 그 순간조차 영재의 말을 들을 걸 그랬다는 후회는 들지 않았다. 그저 두렵고 서글펐다.
‘하지 마…. 제발….’
그때, 날카로운 폭발음이 들렸다.
퍼엉, 귀를 찌르고 들어온 소리와 함께 눈앞이 새까맣게 물들었다. 사현이 고장 난 로봇처럼 움직임을 멈췄다. 여준은 한참이 지나서야 고개를 들었다. 방 안은 컴컴했고, 희미하게 탄 냄새가 났다. 파직, 파직, 낡은 형광등에서 자잘한 스파크가 튀어 오르고 있었다.
‘…어…?’
이어 들려온 것은 잔뜩 잠기고 쉬어 버린 사현의 목소리였다.
‘선배…?’
화들짝 놀란 여준이 얼른 몸을 돌렸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에 들어온 것은 황망하게 가라앉은 사현의 얼굴이었다. 드디어 정신을 차린 것 같았다.
‘…….’
차분하게 이야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일단 놓고, 무슨 일이 있었는지 캐물어야겠다고. 왜 그런 사람들과 어울리고 있었는지, 왜 술 같은 걸 마셨는지, 왜….
‘…사현아.’
그러나 빠듯하게 들어 올린 혀끝에 맺힌 것은 자존심이나 겉치레 따위를 가볍게 날려버리고도 남을 만큼 압도적인 두려움이었다.
‘제발…. 놔, 놔줘. 이거 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제정신을 차린 것은 여준도 마찬가지였으므로.
‘선배, 이건….’
중얼거린 사현이 손을 뻗으며 비틀거렸다. 여준은 저도 모르게 악, 비명을 지르며 사현의 어깨를 떠밀었다. 사현은 그때까지 버티고 있던 힘이 무색할 만큼 쉽게 엉덩방아를 찧었다. 지금 도망쳐야 해. 지금뿐이야. 머릿속에서 경보음이 울렸다.
도망쳐야 해. 기다시피 달려가 문고리를 쥐었다. 덜걱, 덜걱, 문고리는 헛돌기만 할 뿐 열리지 않았다. 쿵, 쿵, 아예 몸으로 들이받아도 마찬가지였다.
‘선배.’
등 뒤에서 울린 목소리에 여준이 문고리를 놓치고 주저앉았다. 다행히도 사현은 여전히 매트리스 위에 팔을 늘어뜨리고 앉아 있었다.
‘…오지 마.’
이를 악물며 내뱉은 여준이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자 사현의 얼굴에 시커먼 그림자가 졌다. 그의 등 뒤, 거의 천장에 달라붙은 작은 창 너머로 달빛이 스며든 탓이었다.
‘문…. 열어 줄게요.’
이어 흘러나온 목소리는 터무니없을 만큼 서글프게 들렸다.
‘옷도…. 크겠지만, 내 거…. 라도….’
말을 이어가던 사현이 앞으로 푹 고꾸라졌다. 그대로 죽은 듯 미동조차 없었다. 여준은 문과 사현을 번갈아 보다가 우선 제 스니커즈를 찾아 신었다.
‘사현아…?’
불러도 대답은 없었다. 이대로 두고 가도 괜찮을까, 걱정스러웠지만 도저히 사현에게 가까이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웅크린 채 침묵하는 사현은 반쯤 파묻힌 수류탄 같았다. 손끝 하나라도 닿는 순간 방금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무서운 상황이 펼쳐질 듯했다.
‘…….’
괜찮을 거야. 괜찮겠지. 여준은 떨리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키고 돌아섰다. 지금은 도망쳐야 했다. 도망쳐서 집으로 가야 했다.
어떻게 돌아왔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정신을 차려보니 아파트 입구였다. 비틀대며 엘리베이터에 올라서자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이 보였다. 벌겋게 부어오른 눈, 피가 맺힌 입술, 뜯겨지고 구겨진 셔츠, 목덜미 이곳저곳에 남은 멍이며 잇자국에 순간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다행히 부모님 두 분 다 당직인 날이었다. 아무도 없는 집에 들어서자 절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동시에 긴장이 풀려나간 몸이 후들후들 떨리기 시작했다.
다음 날은 학교를 쉬어야 했다. 다른 것보다도 셔츠가 엉망으로 망가진 탓이었다. 여분의 하복 셔츠는 모조리 세탁소에 있었다. 감기에 걸려 쉬어야겠다는 전화를 하자 담임은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 등교도 못 하겠니? 조퇴를 하더라도 출석 일수는 채워야지. 개근 못 하면 내신에 영향이 얼마나 큰데.
여준은 핸드폰을 귀에 댄 채 느릿하게 두 눈을 껌뻑였다. 출석 일수라니. 너무 오랜만에 듣는 현실적인 단어였다.
학교에 빠지지 않고, 학원 수업을 빼먹지 않고, 선생님 말씀에 거역하지 않고, 친구들과 나쁜 관계를 만들지 않고, 누군가 말을 걸면 친절하게 대답하는 삶. 전화를 끊고 엎드린 채 여준은 내내 비틀어진 일상을, 이어 사현을 생각했다.
잠들 수는 없었다. 사현의 꿈을 꾸게 될까 두려웠으므로.
***
‘여쭌, 이제 좀 괜찮아?’
꼬박 이틀을 쉬고서야 간신히 학교에 나갈 수 있었다.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영재가 말을 걸어왔다. 여준은 대답하지 않고 그를 지나쳤다. 그래 봤자 자리가 붙어 있으니 별 소용은 없었다.
‘아팠다며? 독감이야?’
‘…….’
‘담임이 그러던데. 너 독감 걸려서 애들한테 옮길까 봐 쉰다고. 고생 많이 했나보다, 얼굴이 반쪽이 됐네.’
신경에 거슬리는 목소리였다. 여준은 귀를 막고 싶은 충동을 내리누르기 위해 서랍에서 노트를 꺼내 펼쳐놓았다. 애석하게도 영재는 여준의 반응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듯했다.
‘오늘 집에 같이 갈까?’
그 말에는 여준도 손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러고 보면 사현이 나타난 후에도 종종 영재와 함께 하교했었다. 영재는 아파트 입구까지 동행했다가 여준을 먼저 들여보내고 사라지곤 했다.
‘그러고 보니 너희 집에 플스 있지?’
공격적인 충동이 치미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여준이 느릿하게 묻자 영재의 얼굴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응?’
‘나 사촌 형이 새로 나온 게임 빌려줬거든. 너희 집에 가서 같이 할까?’
‘어? 아…. 우리 집에?’
영재가 한 손으로 입을 막더니 눈알을 이리저리 굴리기 시작했다. 변명거리를 궁리하는 기색이었다. 그는 음, 하며 한참 고민하다 마침 생각났다는 듯 손가락을 딱 퉁겼다.
‘어떡하지? 우리 집에 지금 할머니 와 계시거든. 게임하는 거 할머니가 보시면 혼날 거야.’
‘그래?’
‘…어.’
‘그렇구나.’
여준이 아무렇지 않게 노트 필기를 시작했다. 영재는 그런 여준을 한참 바라보다 천천히 몸을 돌려 앉았다. 그대로 침묵이었다.
흘러가는 시간은 무료하기 짝이 없었다. 너무나 많은 일이 일어난 여름이었다.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 아무 일 없이 안전하고 평온한 하루하루는 여준에게 매 순간마다 사현과 있었던 모든 시간을 떠올리게 했다. 감정의 요동, 실각된 이성의 끄트머리에 매달린 불씨가 조금씩 뱃속을 태우고 있었다.
몸에 새겨진 멍과 잇자국은 금방 사라졌지만 사현이 물어뜯은 입술은 쉬이 낫지 않았다. 멍하니 아랫입술을 매만지다 딱지를 뜯어내기를 반복한 탓이었다. 부모님에게는 성적 스트레스 때문에 혼자 물어뜯었다고 둘러대었다. 걱정 어린 설교가 뒤따랐지만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방학이 다가오고 있었다. 즉 금방 기말고사였다. 1학년 때 이미 3학년 과정까지 끝내 놓은 여준에게는 복습만 하면 끝나는 일이었다. 영재가 게시판에 쓰는 글 따위는 이제 아무래도 좋았다. 무사히 시험을 치르고 쓸데없는 참견들에서 벗어나고픈 마음뿐이었다.
선배를 좋아하지 않을 사람은 없어요.
때때로 사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다 내 잘못 같아요.
그 애달픈 말투 밑에 그토록 날카로운 욕망이 잠재해 있었다는 사실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여쭌, 오늘도 혼자 갈 거야?’
영재는 지치지도 않고 말을 걸어왔다. 여준은 그를 한참 올려다보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학원가야 돼서.’
‘그럼 교문까지만 같이 가자. 나도 오늘은 삼촌 보러 갈 거거든.’
속도 없이 청하는 말을 거절할 핑계도 더 이상 남아 있지 않았다. 여준은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아싸.’
해가 높았다. 내리쬐는 볕이 따가웠다. 운동장을 가로질러 교문까지 가는 동안 영재는 쉴 새 없이 궁금하지 않은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대체로 장황하고 앞뒤가 맞지 않는 허언이었다.
‘그래서 기호는 완전 헛물 켠 거야. 그 여자애가 좋아한 게 자긴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나 아님 너라는 거지. 나는 당연히 너일 거라고 했는데, 걔가 하는 말로는 키가 별로 안 크다고…. 근데 설마 너겠지. 어떤 정신 나간 여자애가 널 두고 날 좋아하냐?’
‘왜, 그럴 수도 있지.’
‘아니지. 사람이 눈이 있으면 당연히 너지. 키 크겠다, 잘생겼겠다, 전교 1등 학생회장님인데.’
영재의 이런 말들이 온전히 그의 진심이라 믿던 때도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알 것 같았다. 과한 추앙의 말은, 사실 언제든 그 상대를 깎아내릴 준비가 되어 있는 자들이나 입에 담는 것이다. 여준은 대답 없이 슬쩍 웃었다. 영재는 그것이 청신호라 생각한 듯 신이 나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햇볕에 탄 모래 냄새, 피어오른 먼지에 목이 깔깔했다. 여준은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들었다.
‘…….’
익숙한 인영을 발견한 것도 그때였다.
‘어…?’
멀리서 사현이 다가오고 있었다. 손에는 나무로 된 야구 방망이를 움켜쥔 채였다. 여준이 입을 열려는 찰나 영재가 멈춰 섰다. 사현은 여준 쪽으로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사….’
새파란 무표정, 날카롭게 부릅뜬 검은 눈에 담긴 것은 마주하는 것만으로 소름이 끼치는 살의였다. 날 죽이려는 건가? 여준은 멍하니 생각했다. 그러나 성큼성큼 다가온 사현이 잡아챈 것은 영재의 멱살이었다.
‘아악!’
영재가 비명을 지르며 뒷걸음질했지만 허사였다. 사현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동작으로 영재의 목덜미를 잡아당기더니 그의 정강이를 걷어차 쓰러뜨렸다. 영재는 힘없이 머리를 감싼 채 엎드렸다. 사현이 그런 영재의 머리 위로 방망이를 내리쳤다.
‘사현아…!’
뻐억, 섬뜩한 소리가 울렸다. 아아악, 영재가 목이 찢어져라 소리를 질렀다. 여준은 무심코 사현의 팔을 붙들고 매달렸다. 사현은 쉽게 그런 여준의 팔을 뿌리치고 다시 방망이를 들어 올렸다.
‘임사현!’
여준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은 익명 게시판의 고발글이었다. 그 글을 누가 썼는지 사현이 알고 복수하기 위해 찾아온 거라고. 그러나 어떻게? 사현에겐 컴퓨터는커녕 핸드폰도 없었다. 누가 쓴 글인지 추정해서 알려줄 만한 친구도 없었다.
사현은 흥분한 기색이 아니었다. 차갑고 창백한 얼굴에 떠오른 것은 그저 고요한 분노였다. 방망이를 휘두를 때마다 영재의 피가 튀어 올랐다. 사현은 제 얼굴에 튄 피를 손등으로 슥 닦아내고는 아예 한 걸음 물러서서 한 팔을 치켜 올렸다.
‘안 돼!’
여준이 달려들었다. 사현은 그런 여준의 팔을 낚아채 바닥으로 밀쳐놓았다. 후웅, 공기를 가르는 소리에 온몸으로 소름이 돋았다. 퍽, 달걀 껍데기가 조각나는 듯한 파열음이 들렸을 때는 꼼짝없이 영재가 죽었다고 생각했다.
‘…….’
다행히 부서진 것은 영재의 머리뼈가 아닌 방망이였다. 영재는 머리를 감싸고 웅크린 채 덜덜 떨고 있었고, 사현은 산산조각 난 방망이를 멀리 던져버리고는 그런 영재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영재가 히익, 쉰 소리를 내며 몸을 움츠렸다.
여준이 얼른 사현의 앞을 막아섰다. 걸음을 멈춘 사현이 여준을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무감하고 차가운 눈이었다.
‘너 지금 뭐…, 뭐 하는 거야?’
여준의 목소리가 마구 흔들렸다. 사현은 고개를 까딱 기울이더니 단호하게 말했다.
‘비켜요.’
‘지금 뭐 하는…. 이게 대체 무슨….’
‘비켜.’
‘뭐 하는 거야, 뭐 하는 거냐고!’
열없이 가라앉은 눈동자에서 애정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다. 여준의 머릿속으로 희미한 가능성이 떠올랐다. 어쩌면 사현은 화풀이를 하고 있는 게 아닐까?
‘…….’
상처 받은 게 아닐까? 자신을 믿지 못하고 겁먹고 도망쳐버린 내게. 내가 널 무서워해서, 두려워해서, 그 어둡고 캄캄하고 좁은 방에 쓰러진 너를 두고 혼자 돌아와 버려서.
사실 임사현은, 박영재가 누구인지도 모르는 게 아닐까? 그저 나더러 보라고 저지르는 폭력인 게 아닐까? 사실은 나를 이렇게 만들고 싶었는데 그럴 수가 없어서, 내 머리를 박살 내고 잡아 죽이고 싶은데 차마 내게는 그럴 수가 없어서. 이런 식으로 괴로워하라고….
‘저 새끼는….’
뒤늦게 사현이 영재를 향해 중얼거렸다. 그 말에 더욱 확신할 수 있었다. 여준이 바닥을 기어 영재에게 다가갔다. 그대로 피투성이가 된 영재를 끌어안고 사현을 노려보았다.
그 순간 여준의 뱃속을 채운 것은.
‘너….’
놀랍게도 배신감이었다.
‘두 번 다시…. 내 앞에 나타나지 마.’
때문에 여준은- 사실 자신이 언제든 사현을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실수였다고, 정신이 나갔었다고 사과했다면. 왜 그런 짓을 저질렀는지 설명했다면. 두 번 다시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했다면.
그랬다면 용서했을 것이다. 그의 욕망을 이해하려 애썼을 것이다. 적어도 한 번은 그럴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순간 사현이 저지른 짓은 영재와 진배없었다. 더 이상 무엇도 돌이킬 수 없고, 돌이켜서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든 것은 그 때문이었다.
‘두 번 다시 네 얼굴 안 보고 싶어…. 사현아.’
멀리서 경비원과 교사들이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선배.’
사현이 낮게 뇌까렸다. 여준은 이를 악문 채 고개를 돌렸다. 마음이 무너졌다. 가슴 속에서 덜걱대던 사현의 말도 쓸려 나갔다.
여름의 끝에 망가진 애정이 내걸렸다. 끔찍한 결말이었다. 사현과 함께 보낸 모든 시간에 피 냄새가 덧씌워졌다. 여준은 눈을 감고 다시금 되뇌었다. 이거야말로, 이번에야말로 꿈이었으면 좋겠다고.
***
새벽빛이 어슴푸레 스며들고 있었다. 여준은 누운 채 천장을 올려다보다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삐걱거렸다. 절로 앓는 소리가 샜다. 욱신거리는 허리를 누른 채 바닥을 디뎠다. 찬 기운이 척추를 타고 올랐다. 소름이 끼쳤다.
“으윽….”
신음한 여준이 힘겹게 욕실로 들어섰다. 위잉, 환풍기 돌아가는 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불을 켜자 얼굴을 잔뜩 찌푸린 초췌한 남자가 거울에 비쳤다.
“…….”
거울을 보는 순간마다 자신의 모습이 낯설어진다. 여준은 가운을 벗고 샤워부스로 들어섰다. 온 사방에서 망치로 뼈를 내리치고 있는 것 같았다. 양치를 하려 입을 벌리자 아랫입술의 상처가 벌어지며 날카로운 통증이 들이닥쳤다.
대충 비누칠을 하고 몸을 헹구다 조심스레 뒤로 손을 가져갔다. 구멍 주위는 팽팽하게 부어 있었지만 상처가 난 것 같진 않았다. 따가움을 참으며 샤워를 마치고 벗어 놓았던 가운을 다시 걸쳤다.
시간은 오전 다섯 시를 막 지나고 있었다. 바로 집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회사에 가야 했다. 입고 온 옷은 드레스룸에 고이 걸려 있었다. 수트를 갖춰 입고 지갑과 핸드폰을 챙겼다. 로비에 가서 택시를 불러 달라 요청할 셈이었다. 아픔을 참고 서둘러 나서던 여준이 멈칫했다.
“…….”
팔짱을 낀 사현이 고개를 푹 숙인 채 거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고른 숨소리도 들렸다. 깊이 잠들었는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거실은 싸늘했고, 사현은 셔츠에 정장 바지 차림이었다.
침대 위에는 여준이 덮었던 블랭킷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머뭇거리던 여준이 우선 침실로 향했다. 그러나 끝내 그 이상 어떤 행동도 하지 못하고 돌아섰다. 경비견 같은 모습으로 잠든 사현을 좀 더 그대로 두고 싶었다.
탁자 위에 놓인 메모지 앞에서도 한참을 망설였지만 그만두었다. 말을 보태기엔 이미 지나온 강이 너무 깊었다. 다정해지기엔 너무나 차가워진 관계였다. 여준은 조용히 문을 열고 나섰다. 어디로든 사라지고 싶었다. 사현이 있는 곳만 아니라면 어디라도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