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5/21)

#05. 안도의 공식

“…래서 언제까지 준비되는데?”

속눈썹이 뭔가에 눌려 있었다. 눈을 뜨려고 애쓸 때마다 눈꺼풀이 간질거린다. 여준은 힘없이 손을 들어 제 얼굴을 더듬었다. 이마부터 눈 아래까지 차가운 수건이 덮여 있었다.

“그래, 최대한 빨리 가져오고…. 죽은?”

손끝에 힘을 주어 수건을 끌어 내렸다. 지나치게 높고 호사스러운 천장이 보였다. 두통은 가라앉았지만 속이 울렁거렸다. 여준은 차게 식은 미간을 문지르며 기억을 더듬었다. 내가 여기서 뭐 하고 있었더라….

“계란 빼라는 말도 전달했어?”

그때 낮게 쉰 목소리가 들리고 눈이 번쩍 뜨였다. 상체를 벌떡 일으켜 앉은 여준이 다급하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푹신한 이불이 무릎 위로 떨어졌다. 사현에게 불려 왔던 클럽 룸이었다.

“…아니, 그냥 아예 넣지 말라고 해. 조리 과정에서 계란 비슷한 것도 못 들어가게 하라고.”

사현은 뺨과 어깨 사이에 핸드폰을 끼운 채로 현관 쪽에 삐딱하게 서 있었다. 여준은 최대한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발을 내렸다. 그러나 노력이 무색하게도 접힌 이불을 걷는 순간 바스락,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울렸다.

“…….”

말을 멈춘 사현이 천천히 돌아보았다. 여준은 흠칫 놀라 시선을 피했다. 꿈에서 본 사현의 모습과 같은 듯 전혀 다른 얼굴이 여전히 낯설고 두려웠다.

“…일어났어요?”

“…….”

“아는 의사가 와서 봐 줬는데 별 이상은 없대요. 스트레스성인 것 같다고 하던데.”

“…….”

“요즘 바쁜가 봐요? 얼마나 일이 힘들면 스트레스 때문에 기절을 다 하지.”

더는 화를 낼 기운도 남아 있지 않았다. 사현의 시선을 피한 여준이 벽에 걸려 있던 재킷을 집어 들었다.

“밥 먹고 가요.”

“비켜.”

“특별식으로 주문해 놨는데.”

“…내가 너랑 마주 앉아서 밥이나 먹을….”

“기분이 아니겠지만 매몰차게 거절할 처지도 아니잖아.”

“…….”

“먹고 갈 거죠?”

우우웅, 낮은 진동음이 서늘한 침묵을 갈랐다. 여준과 사현의 시선이 동시에 여준의 재킷으로 향했다.

“받아요.”

사현이 턱을 까딱 올렸다. 여준이 마지못해 재킷 안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에서 걸려 온 전화였다.

“괜찮아요, 받아요.”

사현이 짐짓 여유로운 미소를 지었다. 핸드폰을 쥔 김에 시간을 확인하니 8시 반을 막 넘긴 시간이었다. 아마 회사에서 온 전화 같았다. 사현이 들으란 듯 크게 한숨을 내쉰 여준이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

- 선임님! 지금 어디세요?

높고 맑은 목소리가 카랑카랑하게 뚫고 나왔다. 여준이 흠칫 놀라 사현을 바라보았다. 사현은 담배 한 개비를 빼물었을 뿐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 선임님? 듣고 계세요?

“…으응, 아, 아니. 네.”

- 어디세요? 저 퇴근했는데 팀장님한테 전화 오더니 혹시 선임님이랑 같이 있냐고 물어보셔서…. 일단 제가 맞다고, 제 얘기 들어 주다가 막 들어가셨다고 했어요.

“아….”

- 괜찮으세요? 무슨 일 있으신 거 아니죠?

방은 개미 발자국 소리까지 들릴 듯 고요했고, 핸드폰 음량을 아무리 줄여도 은 주임의 목소리가 새어 나오는 것 자체를 막을 수는 없었다. 여준이 손가락을 헛돌리며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사이 담배를 이미 반이나 태운 사현이 조용히 여준에게로 손을 뻗었다.

“…….”

- 선임님?

투박한 손끝이 여준의 팔목에 닿았다. 차가운 손목시계를 손톱으로 살짝 긁어내리고는 서서히 손목굴을, 이어 손가락 사이를 짚어 벌린다. 여준은 속수무책으로 사현의 손에 제 손을 내주었다. 귀에서 떨어진 핸드폰 화면에서는 여전히 은 주임의 목소리가 재잘재잘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 지금 바로 복귀 가능하세요? 아니면 제가 팀장님한테 전화드릴까요? 무슨 핑계든 대서….

‘핑계’부터 갑자기 목소리가 커졌다. 사현이 중지로 스피커폰 버튼을 누른 탓이었다. 마른침을 삼킨 여준이 그를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그러거나 말거나 사현은 제 할 일을 다 했다는 듯 여유로운 태도로 새 담배를 빼 물었다.

“…아, 아니에요. 바로 복귀할게요. 내가 차…, 에서 잠깐 쉬다가…. 잠이 들었어요.”

- 어머, 그러셨구나. 많이 피곤하셨나 봐요.

“그냥 좀…. 네. 신경 써 줘서 고마워요.”

- 네, 선임님. 참, 그리고 오늘 일은….

“-끊을게요. 바로 올라가 봐야 할 것 같아서.”

얼른 통화를 끊은 여준이 아예 핸드폰 전원까지 꺼 버렸다. 사현은 웃고 있었다. 입꼬리를 한껏 올린 채 송곳니까지 드러내며.

“땡땡이 도와주는 여직원도 있어요? 얼마나 잘 구워삶아 놨으면.”

“그런 거 아니야.”

“하여튼 옛날부터 이런 거 참 잘해. 사람 하나 녹여다가 입 안의 혀로 굴리는 일.”

콕콕 찌르고 들어오는 가시 돋친 말이 견디기에 버거웠다. 눈을 꽉 감았다 뜬 여준이 사현을 똑바로 쏘아보며 말했다.

“…설령 내가 그런 사람이라 해도, 너한테 이런 말 들을 이유는 없어.”

치이익, 대답 없이 담배 연기를 끝까지 빨아들이는 사현의 양 뺨이 홀쭉해졌다. 그러자 입가에 진 옅은 흉터도 선명하게 드러났다. 여준은 잠시 말없이 그 얼굴을 바라보다 사현을 지나쳐 문고리를 쥐었다.

“하고 싶은 말은 아까 그게 다야?”

“……?”

“주변에 뭐 이상한 일 없냐고…. 그게 네가 물어보고 싶은 거였어?”

연기를 한 움큼 삼킨 입술은 여전히 고요했다.

“…사현아.”

여준이 느릿하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사현은 고개를 살짝 내린 그대로 시선만 올려 여준과 눈을 맞췄다.

“내 인생은 늘…. 안락하고 평온했었어.”

“…….”

“…너를 만나기 전까지는.”

“…….”

“너만 사라지면 아무…, 아무런 일도 없어. 내게는.”

그러자 사현이 슬쩍 웃었다. 눈은 여전히 검고 조용했다. 입술 끝만 어설프게 끌어 올린 억지 미소였다.

“선배.”

툭, 뱉어 내는 말에는 어떤 힘도 담겨 있지 않았다.

“요즘도 계란 알레르기 심해요?”

이어 흘러나온 뜬금없는 질문에 여준이 한껏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너랑 무슨 상관인데?”

“밥 먹고 가요.”

“…뭐?”

“한 술이라도 뜨고 가요. 저녁 안 먹었잖아요.”

헛웃음을 지은 여준은 대답 없이 문고리를 비틀어 열었다. 또다시 붙들릴까 등골이 오싹했지만 다행히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마침 띵, 하며 엘리베이터가 멈춰 서고 룸서비스 카트가 내렸다. 카트를 지나쳐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여준이 저도 모르게 복도 저편을 곁눈질했다. 카트는 사현이 잡아 놓은 클럽 룸을 향해 똑바로 굴러가고 있었다.

“…….”

밥 먹고 가요. 특별식으로 주문해 놨는데. 희미한 미소를 띠고 있던 입술이 머릿속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힘껏 머리를 흔든 여준이 눈가를 벅벅 긁었다. 계란 소리만 들어도 몸이 가려운 것 같았다.

***

“선임님!”

택시를 잡아타고 회사 앞에 내리자 근처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놀라 돌아보니 은 주임이었다.

“왜 택시를 타고 오세요? 아까는 차에 계셨다고….”

다가온 은 주임이 의아한 얼굴로 물었다. 여준이 선뜻 할 말을 찾지 못해 망설이는 걸 보면서도 못내 궁금한 기색이었다. 그녀의 시선을 피하려 갖은 애를 쓰고 있자니 문득 화가 치밀었다.

“…은 주임.”

잔뜩 싸늘하게 낮아진 목소리에 은 주임의 표정도 딱딱하게 굳어졌다.

“내 생각해 준 거 고맙고, 아까 거짓말한 것도 미안해요. 그런데….”

“…아.”

“다음부턴 업무 외의 일로 먼저 전화하거나, 이런 식으로 사적인 일 캐묻거나 하지 않았으면 좋겠네요.”

한 손을 입에 댄 채 놀란 얼굴을 하고 있던 은 주임이 곧 고개를 푹 숙여 보였다.

“…죄송합니다, 선임님. 주의하겠습니다.”

그 외의 어떤 변명도 붙지 않았다. 뭐라 말을 덧붙일까 고민하던 여준은 마음을 고쳐먹고 그냥 돌아섰다. 업무도, 인간관계도 결국은 본인 스스로 해결해야 할 일이었다. 이 이상 개인적으로 가까워지는 것은 여준 쪽에서 원치 않았다.

“…….”

무엇보다도 사현이 마음에 걸렸다.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돌아서는 은 주임이 뒤늦게 안쓰러웠지만 끝까지 붙잡지 않은 것은 그런 이유였다.

***

“아빠, 이거.”

지오가 아침부터 분주했다. 옷장을 다 뒤집어 가며 이걸 입겠다, 저걸 입겠다 난리를 피우던 아이는 결국 여준이 새 곰돌이 티셔츠를 꺼내 입혀 주고 나서야 얌전해졌다.

“모자 써야지, 지오야.”

“으응, 그거 답답해.”

“답답해도 써야 해. 우리 지오는 아직 너무 조그매서 선생님이 지오를 찾기 힘들 수도 있어. 혹시 길 잃어버렸을 때 선생님이 지오 못 찾으면 아빠랑 영영 못 만나는데, 그래도 괜찮아?”

차근차근 타이르자 아이는 울상을 지으면서도 순순히 노란 모자를 머리에 썼다. 아이의 손을 쥐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내내 여준의 마음은 편치 않았다.

어린이집의 체험 학습 날이었다. 공문을 받은 바로는 동물원에 간다고 했다. 아이는 시터가 만들어 준 도시락까지 야무지게 챙겨 넣고 한껏 신이 나 있었다.

“지오야.”

“응?”

“동물원 꼭 가고 싶어?”

그러자 아이가 눈을 크게 뜬 채 여준을 올려다보았다. 몇 년 안 되는 인생 경험으로도 이미 여준의 질문이 어떤 의미인지 짐작하고도 남는 모양이었다. 당장이라도 울 것처럼 일그러지는 얼굴에 여준이 얼른 고개를 저었다.

“아니, 아니야. 가면 안 된다고 말하는 거 아냐, 지오야.”

“…그럼…?”

“음…. 지오가 혹시…. 동물원 별로일까 봐, 아빠랑 더 놀고 싶을까 봐 그랬지. 그럼 아빠가 회사 안 가고 지오랑 놀아 주려고.”

되는대로 주워섬긴 말이었지만 지오는 진지하게 고민에 빠졌다. 자그마한 뺨을 한껏 부풀린 채 끙끙대며 고뇌하던 아이가 이내 여준에게 잡힌 손을 붕붕 흔들었다.

“으응, 오늘은, 동물원 가고 싶어.”

“…그래? 응, 그래도 돼.”

“근데, 아빠랑도 놀고 싶어. 오늘 동물원 가면, 어, 이제 아빠랑은 못 놀아?”

불안한 듯 묻는 말에 여준이 살짝 웃었다. 아니야, 왜 못 놀아. 무릎을 굽혀 앉은 그가 아이의 모자를 한 번 고쳐 씌워 주었다.

“모자 잃어버리지 말고, 선생님 말씀 잘 듣고. 무슨 일 있으면 주변에 지나가는 어른들한테 도와 달라고 하고. 알았지?”

“응.”

“착하다, 우리 아들. 똑똑하네.”

아파트 입구에 이미 유치원 차가 도착해 있었다. 여준은 아이가 제 자리에 앉아 안전벨트를 채우는 것까지 확인한 뒤 교사를 향해 조심스레 물었다.

“저…. 혹시 인솔 인원이 얼마나 됩니까?”

“4세 반 참가자는 열 명밖에 안 돼요. 제가 잘 데리고 다닐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생글 웃어 보인 교사가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마주 허리를 숙여 인사한 여준이 창 너머 아이에게도 손을 흔들었다. 아이가 자랄수록 이런 식으로 더 멀리, 오래 내보내는 시간이 많아지겠지만 아직까지는 불안하기만 했다.

하다못해 비라도 쏟아지면 일정이 취소되지 않을까. 간절한 소망을 담고 올려다본 하늘은 웬일로 구름 한 점 없이 맑았다.

***

“좋은 아침입니다.”

사무실에 들어서며 인사를 건넸다. 거기까지는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순서였다. 그러나 평소대로라면 저마다 함께 인사를 건네 왔어야 할 목소리들이 들리지 않았다. 의아함에 고개를 들자 급히 시선을 피하는 팀원들의 뒷모습이 보였다.

“……?”

슬쩍 바라보다 우선 자리로 향했다. 짚이는 구석이 너무 많아 무엇부터 떠올려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은 주임의 자리는 비어 있었다.

“성 선임.”

해결사는 빠르게 등장했다. 사무실 문이 열리고 고개를 빼꼼 내민 팀장이 느릿하게 손짓했던 것이다. 여준은 덤덤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제 저녁 시간에 어디 가느라 연락 두절이었어?”

“죄송합니다.”

“사과하라는 소리가 아니라, 성 선임. 아니, 여준 씨. 야근 복귀 시간이 늦어졌으면 늦어진 이유를 말해야지. 앵무새처럼 똑같은 사과만 늘어놓으면 뭐해?”

“…무슨 문제라도 생겼습니까?”

복귀 시간을 초과한 건 따질 것도 없이 잘못이지만, 서로 피곤한 처지임을 아는 만큼 어지간히 업무가 쌓였을 때가 아니면 지각 정도는 대충 눈감아 주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었다. 때문에 여준도 애초에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던 문제였다.

“어제 말이야, 은 주임 만났던 거 아니라면서.”

팀장이 잔뜩 은밀한 주제라도 되는 양 속삭였다. 어리둥절해진 여준이 두 눈을 느릿하게 끔벅였다.

“무슨….”

“은 주임이 김 책임한테 아침에 상담을 좀 했는가 봐. 근데 김 책임이 화가 나서 난리를 피우는 바람에….”

“예?”

“성 선임. 내가 남자끼리니까 툭 까놓고 물어볼게. 어제저녁 시간에 업소 갔었어?”

“…예…?”

헛웃음을 뱉은 여준이 이마를 쓸어 넘겼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꼬였기에 이런 난데없는 추궁으로 돌아오는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제가 김 책임님 뵙고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그게 빠르겠네요.”

“어, 그래. 근데, 말 잘해야 하는 거 알지? 김 책임은 은 주임보다 훨씬 더 한 거, 응? 알지?”

팀장이 여준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위로하는 건지 조롱하는 건지 모를 동작이었다. 여준은 한숨을 푹푹 내쉬며 복도를 가로질러 옆 부서 파티션을 두드렸다. 김 책임이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삐죽 들었다.

“상담실 가서 얘기하죠.”

김 책임은 삼십 대 후반의 베테랑으로, 사내 성폭력 근절 위원회 수행 위원직을 맡고 있었다. 그런 그녀와 단둘이 상담실에 출입하는 상황 자체가 여준에게는 큰 부담일 수밖에 없었다.

“미리 말씀드리고 싶은 건.”

서류나 필기구 없이 자리에 앉은 김 책임이 차분히 입을 열었다.

“나는 성 선임을 추궁하려고 여기로 데려온 게 아니에요. 어쩐지 오해가 생긴 상황 같아서 도와주려고 하는 거지.”

“…네에.”

“성 선임도 알죠? 지난달에 연금 팀에서 남직원 두 명이나 잘린 거. 접대한답시고 룸살롱 가서 법인 카드 긁었다가.”

“…….”

“그리고 이건 비공개로 진행됐지만 옆옆 부서 직원 하나도 경고 받았어요. 저녁 시간에 그…. 오피라고 하죠? 성매수 행위를 한 게 들통 나서.”

“거기 가서도 카드를 긁었다던가요?”

“네?”

“아니, 어떻게 들킨 건지 궁금해서요. 룸살롱 건이야 법인 카드였다고 쳐도.”

정말로 듣다가 순수하게 궁금해진 부분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김 책임은 질문 자체를 다소 공격적으로 받아들인 듯했다. 가만히 여준을 노려보던 그녀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성 선임 그럴 사람 아닌 거 알아요. 나도 도우려고 하는 거니까 협조적으로 나와 줬으면 좋겠어요.”

“…그럴 생각입니다.”

“그 직원은 그…. 오피스텔에 사는 여직원이랑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는 바람에 걸렸어요.”

코미디가 따로 없군. 여준이 희미하게 웃었다. 김 책임이 흠, 한 번 헛기침을 하고는 말을 이었다.

“그래서요? 제가 무슨 오해를 받고 있다는 겁니까?”

“어제 왜 야근 복귀가 늦어졌어요?”

김 책임이 드디어 본론을 꺼냈다. 하아, 허공에 대고 긴 숨을 내쉰 여준이 차근차근 대답했다.

“개인적인 사정이 있었습니다. 제 사생활을 시시콜콜 보고해야 합니까?”

“원래라면 안 그래도 되죠. 하지만 어제는 은 주임에게 알리바이 공작까지 부탁했잖아요.”

“…그건 제가 부탁한 게 아니라.”

“은 주임 입장에서 생각을 해 봐요. 남자 선배가 야근 복귀 시간이 지나도록 연락이 안 되다가, 차에서 잤다느니 이상한 변명을 하더니 갑자기 택시를 잡아타고 회사 앞에서 내린 상황이에요.”

“…….”

“바로 얼마 전에 비슷한 수법으로 성매수를 하다가 적발된 직원이 있었고요. 의심할 만한 정황이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그래서, ‘했다’는 증거도 없는데 ‘안 했다’는 걸 증명하라고 무턱대고 잡아다 앉혀 놓은 이 상황이 옳단 말인가. 무릎 위에 고이 올려 둔 손끝에 딱딱한 거스러미가 걸렸다. 당장 뜯어 버리고 싶은 충동을 참느라 여준은 마른침을 여러 번 삼켰다.

“그런 적 없습니다. 살면서 한 번 발 들여 본 적도 없어요. 회사 들어온 후에도…. 책임님도 아시다시피 우리 회사 이런 문제에서 철저하잖습니까.”

“성 선임, 그냥 어제 왜 늦었는지만 말하면 돼요.”

“…….”

“쉬운 길이 있는데 왜 어려운 선택을 하려 해요? 그런 태도가 의심을 키운다는 걸 모르겠어요?”

김 책임은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는 기색이었다. 그녀의 입장도 이해 못할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사현과의 일을 밝힐 수 없는 것은 둘째치더라도, 이런 식으로 근거 없이 신문당할 이유 자체가 여준에게는 없었다.

“은 주임이 봤다던가요? 제가 성매매 업소에서 나오는 걸?”

“그렇게 감정적으로 말하지 말고….”

“도저히 이해가 안 갑니다. 다른 증언이라도 있다면 납득하겠지만, 지금 저한테 이런 잣대를 들이미는 이유가 오로지 야근 복귀가 늦어져서라는 건….”

“성 선임.”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여준이 상담실을 나섰다. 복도는 텅 비어 있었다. 성큼성큼 걸어 사무실로 돌아가는 동안 잊고 있던 두통이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지끈, 지끈. 사방에서 머리뼈를 누르는 듯한 통증에 안구까지 뻑뻑해졌다.

‘밥 먹고 가요.’

그 순간 떠오른 것은, 여전히 우습게도 사현의 목소리였다.

“…….”

탕비실로 들어선 여준이 냉수 한 컵을 훌쩍 들이켰다. 때려치우자. 거칠게 컵을 내려놓자 다짐은 더욱 강해졌다. 때려치우고, 지오를 데리고 떠나자. 집이고 차고 다 팔고 싱가포르로 가서, 부모님에게 가서….

희망적인 상념을 칼로 베듯 진동이 울렸다. 움찔, 어깨를 굳힌 여준이 주섬주섬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액정 화면에 떠오른 것은 이번에도 모르는 번호였다.

여준은 기본적으로 여자 번호를 저장하지 않았다. 어떤 식으로 아는 사람이든 마찬가지였다. 은아가 살아 있을 때 생긴 습관이다. 그녀가 세상에서 사라지고 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도통 고쳐지지 않았다.

받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 것은 오히려 그 때문이었다. 어딘가 눈에 익은 번호였기 때문이다. 조심스레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댄 여준이 소리를 낮춰 물었다. …여보세요?

- 여보세요? 지오 아버님이시죠?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는 분명 어린이집 교사였다. 여준의 손끝이 살짝 흔들렸다.

“예, 제가…. 네. 무슨 일로….”

- 죄송합니다. 작은 사고가 좀 있었어요.

“…네?”

- 커브길에서 버스가 넘어졌는데…. 아이들은 다 무사해요. 기사님만 조금 다치시고…. 지금 병원에 와 있고요, 간단한 검사 후에 귀가시킬 건데 데리러 오셔야….

“어디…. 어딥니까? 어느 병원인데요?”

인솔자로서의 변명을 오래 듣고 싶은 생각은 없었다. 여준이 다급하게 묻자 교사가 더듬더듬 병원 이름을 불렀다. 그는 전화를 끊자마자 자리로 돌아가 차 키를 집어 들었다.

“선임님? 어디 가세요?”

옆자리의 후배가 질겁한 목소리로 물었다. 여준은 아랑곳하지 않고 엘리베이터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어째서 하루도 평화롭게 지나가지 못하는 걸까.

억울하다 못해 약이 오를 지경이었다. 누군가 자신을 점점 더 진득한 구렁텅이로 몰아넣으며 즐기고 있다는 기분마저 들었다. 여준은 이를 악문 채 엘리베이터 버튼을 여러 번 눌러 대었다. 차라리 이 문 너머에 있는 것이 시커먼 구덩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축축한 흙에 온몸을 묻은 채 처음부터 없던 존재인 양 사라지고 싶었다.

***

「선임님 지금 어디 계세요?」

「정말 죄송해요 상담내용 전달과정에 오해가 있었던 것 같아요」

「뵙고 자세히 설명할게요. 전화 좀 주세요」

정신없이 달려 병원에 도착해서야 핸드폰을 다시 열어볼 여유가 생겼다. 은 주임의 문자메시지가 쏟아지고 있었다. 이어질 내용은 궁금하지 않았다. 끝없이 울리는 진동이 성가실 뿐이었다. 핸드폰을 도로 재킷 안주머니에 쑤셔 넣은 여준이 응급실로 달려 들어갔다.

“이게 다 뭐냐고요, 대체!”

응급실은 놀라서 우는 아이들과, 더 놀라서 소리를 지르는 부모들과, 그 모습에 또 놀라 오열하는 아이들로 아수라장이었다. 여준은 한눈에 아이를 찾을 수 있었다. 침대 하나에 아이들을 서너 명씩 앉혀놓은 와중에 꾹꾹 눌러쓴 샛노란 모자가 눈에 띄었다.

“지오야.”

얼른 달려든 여준이 아이의 손을 쥐고 이곳저곳을 살폈다. 아이는 여준을 보자 그제야 아빠, 하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지오야, 괜찮아? 아야 한 데 없어?”

“아빠, 모자.”

“응?”

“모자 잘 쓰고 있었어. 어, 그래서, 선생님이 나 안 잃어버렸어.”

“…….”

“잘했지?”

아이가 눈물을 매단 채 배시시 웃었다. 여준은 한참이 지나서야 긴 숨을 내쉬며 아이를 끌어안았다. 작고 연약한 몸이 품에 안겨 오자 뒤늦게 오싹했다. 버스가 넘어지다니. 안전벨트를 채워놔서 망정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그러자 화가 났다. 도대체 운전을 어떻게 했길래, 차 관리를 어떻게 했길래!

“지오야, 정말 아픈 데 없어? 모자 이제 벗어도 돼. 아빠 왔잖아.”

“나, 요기. 요거.”

지오가 기다렸다는 듯 팔을 내밀었다. 팔꿈치가 벌겋게 달아올라 피가 맺혀 있었다. 그 모습을 보자 뜨거운 납을 삼킨 듯 목 아래서부터 불길이 치밀었다.

“바로 아이 데리고 가겠습니다.”

당장 터져 나오려는 분노를 삼킨 것은, 일 분이라도 빨리 아이에게 치료를 받게 하고 싶어서였다. 응급실에서 순서를 기다리는 것보다는 다른 병원으로 옮겨 일반 진료를 보는 것이 빠를 듯싶었다. 아이를 안고 일어서는 여준을 향해 교사가 다급히 다가왔다.

“아버님, 아이들 일단 기본적인 검사는 하고 가셔야 해요.”

“다른 병원으로 데려가려는 겁니다. 여기서 차로 십 분만 가면 원래 다니던 병원이….”

“그래도 저어, 잠시만…. 원장님도 곧 오실 거고….”

교사가 안절부절못하며 자꾸만 여준의 앞을 막아섰다. 여준의 인내심도 점점 한계에 달했다.

“왜 이러시는 겁니까? 제가 데려가서 치료를 받겠다는데.”

“뻔하지, 뭐! 여기서 한꺼번에 검사해 놔야 나중에 가서 딴 말 못 한다 이거지!”

대답은 바로 근처에 있던 학부모에게서 나왔다. 잔뜩 성이 난 그녀가 교사의 어깨를 밀치며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애들 태우고 가던 차가 멀쩡한 길에서 자빠졌다는 것도 어이가 없는데, 뭐? 아까 나더러는 뭐라 했어요? 다른 병원 가서 검사한 걸로 피해보상 청구하면 보험 적용이 안 될 수도 있다고?”

“어머님, 그건….”

“어떻게 요즘도 이런 어린이집이 있어? 세상 무서운 걸 몰라도 이렇게 모를 수가 있나? 당신들 다 내가 가만두지 않을 거야! 우리 아버지가 누군지 알면 너나 니 원장이나-.”

오가는 고성에 아이들이 다시 울기 시작했다. 곳곳에서 터지는 큰소리에 머리가 울렸다. 여준은 아이를 꼭 끌어안고 귀를 막아 준 채 그들에게서 등을 돌렸다. 다행히 응급실을 빠져나오는 동안 더 이상 그를 붙잡는 사람은 없었다.

아이를 카시트에 앉히고 몇 번이나 벨트를 확인했다. 차를 몰아 다른 병원으로 가는 내내 마음이 울렁거렸다. 아이가 안전벨트를 매고 있지 않았다면, 넘어진 버스를 다른 차가 들이받기라도 했다면….

“…….”

왜 하필 또 교통사고여서. 얼굴을 쓸어올리는 손바닥 가득히 식은땀이 맺혀 있었다. 여준은 여러 번 심호흡을 하고 나서야 차를 출발시킬 수 있었다.

“그냥 살만 좀 까진 거구요, 아무 이상 없습니다. 보시면…. 깨끗하죠?”

아이의 팔 엑스레이 사진을 가리키며 의사가 말했다. 여준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못내 불안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도 교통사곤데, 정밀검사 안 해 봐도 괜찮을까요?”

“지금으로선 굳이 이 이상의 검사를 권해드리지 않아요. 원하시면 사진 좀 더 찍어볼 수는 있지만요.”

“…부탁드립니다.”

아이는 착하게 다시 검사실로 향했다. 여준은 복도 벤치에 앉은 채 상체를 허물어뜨렸다.

“아….”

머리를 감싸자 절로 앓는 소리가 나왔다. 한계야. 속으로 중얼거린 여준이 재차 다짐했다. 떠나자. 더는 못 버티겠어. 더는….

“…….”

우우웅, 또 다시 재킷 안주머니에서 전화가 울렸다. 보나마나 은 주임이나 회사일 터였다. 핸드폰을 꺼내 화면을 보지도 않고 귀에 가져다 대었다.

“…여보세요.”

상대는 잠시 말이 없었다.

“여보세요…?”

- 목소리가 왜 그래요?

놀란 여준이 허리를 세우고 앉았다. 자칫 떨어뜨릴 뻔한 핸드폰을 꼭 쥐고 화면을 확인하자 생전 처음 보는 번호가 떠 있었다.

- 무슨 일 있어요?

“…….”

- 선배.

“뭐… 야. 너는 무슨…. 일인데.”

- 지금 어디예요.

높낮이 없이 덤덤히 던져오는 질문조차 버거웠다. 이를 꽉 사리문 여준이 혀 아래 고인 신 침을 꿀꺽 삼켰다.

- 선배.

머릿속이 가득해졌다.

“…사현아.”

여준은 아직 기억한다. 장마가 시작되기 직전의 여름이었다. 희게 빛나는 햇빛, 지상의 모든 것은 청량했으며 여준에게 잔잔한 호의를 보내고 있었다.

“너 내가…. 뭘 어떻게 해야….”

알량한 전능감으로 가득 찬 세계, 한 걸음 떨어진 자리에서 보폭을 맞춰 걷는 사현이 있었다. 열일곱의 외로운 소년은 검은 눈동자에 애정 어린 충성심을 빽빽이 심어 놓은 채 소리 없이 많은 말을 건네 왔다.

“…어떻게 해야 내 인생에서 사라져 줄래…?”

그 얼굴이 아직도 이토록 선명해서.

“나 너무…. 소름이 끼쳐. 너…. 진절머리가 나….”

그토록 바닥없이 넘치는 마음을.

“…바라는 걸 말해. 내가 어떻게 해야….”

이전에도 이후로도 단 한 번을 겪어보지 못해서.

- 선배.

낮게 쉬어 버린 목소리. 얼굴 한가운데에 섬뜩하게 찍힌 흉터. 그 모든 흔적에서 자꾸만 은아가 보였다. 세상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고통을 겪으며 죽어갔을 거라던 의사의 말이 귀를 맴돌았다.

얼마나 아팠을까. 얼마나 무서웠을까. 어떤 때엔 차라리 처가 사람들이 지독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마저 아니었다면 고요한 새벽에 갑자기 찾아드는 죄악감을 도저히 버텨내지 못했을 것이다.

- 선배, 지금 어디예요.

“…….”

- 회사 아니죠? 집도 아니고. 설마 운전 중이에요?

여준은 손등으로 입가를 누른 채 숨을 삼켰다. 터진 눈물 때문에 입을 열 수 없었다. 흐느끼는 소리 따위는 들려주고 싶지 않았다.

- 차 세워요. 세우고 어딘지 말해요.

“…….”

- 선배, 성여준. 정신 차리라고요.

“…아니야, 어디 좀…. 와 있어.”

한참이나 숨을 고르고서야 간신히 대답할 수 있었다. 젖은 눈가를 훔치고 치민 울음을 삼켰다.

- 어디요? 왜 이 시간에 회사에 안 있고?

사현의 목소리 중간중간 분주하게 부스럭거리는 잡음이 섞여들었다. 이어 철컥, 열린 문이 세게 닫히는 소리가 났다. 돌아가는 상황을 눈치 챈 여준이 다급하게 말했다.

“나오지 마, 만날 생각 없으니까.”

- 잠깐만 봐요. 괜찮은지만.

“너….”

- 제발요.

“…….”

- 제발…. 진짜 미치겠으니까.

그때 검사실 문이 열렸다. 간호사의 손을 잡고 나오던 아이가 여준을 보고 히쭉 웃었다. 여준은 잠시 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아이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

하루가 끝났을 때, 아무런 걱정도 찜찜함도 없이 편안히 잠들고 싶다.

호텔 방문 앞에 선 여준은 한참이나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다시 보니 새삼스레 위압감이 느껴지는 문이었다. 침을 꼴깍꼴깍 삼키다 축축한 손바닥을 바지에 문질러 닦았다. 벨을 누를 수 있을 만큼 손을 들어 올리기까지 또 한참이 걸렸다.

마침내 떨리는 손끝을 벨에 대고 온몸으로 눌렀지만 문 너머에선 아무 반응이 없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다시 한번 눌렀다. 차라리 반가운 마음마저 들었다. 이번에 안 나오면 돌아가는 거야. 여기까지 찾아왔으니까 그래도 할 말 없을 거야. 마른 입술을 축이고 한 걸음 물러섰다. 3, 2, 1…. 영원처럼 느껴지는 카운트를 되뇌고 돌아섰을 때, 그 순간만을 기다렸다는 듯 거대한 문이 아가리를 벌렸다.

“너무 칼같이 가는 거 아니에요?”

사현이 한 손으로 문고리를 쥔 채 상체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젖은 머리카락에서 물방울이 뚝뚝 흐르고 있었다. 가운 앞섶이 온통 벌어져 아랫배까지 보였다. 샤워 중에 급하게 뛰쳐나온 모양새였다.

“들어와요.”

그 와중에 문을 끝까지 열고 청하는 몸짓은 신사적이었다. 입을 꾹 다문 여준이 거칠게 그를 지나쳐 방 안으로 들어섰다. 옅은 담배 냄새가 났다.

“앉아요. 마실 것 좀 줄까요?”

“필요 없어.”

“술은 좀 해요?”

“…어차피 듣지도 않을 거면서 뭘 자꾸 꼬치꼬치 물어보는 거야?”

여준이 짜증스럽게 받아치자 사현이 살짝 웃었다. 잠시 후 테이블로 돌아온 그는 아이스 버킷과 캔맥주 두 개를 들고 있었다.

캔맥주라니. 어울리는 듯 어울리지 않는 선택이었다. 여준의 시선을 느낀 듯 사현이 캔을 살짝 흔들었다.

“밀봉된 채로 출고되는 음료수 아니면 안 마시거든요. 누가 뭘 탔을지 몰라서.”

“…….”

“그러니 선배도 걱정할 거 없어요.”

고작 술 한 잔을 마시면서 그런 사태를 걱정해야 하는 삶이란 뭘까. 다시 한번 사현이 낯설게 느껴졌다. 여준은 차가운 캔을 두 손에 쥔 채 만지작거리고만 있었다.

“어차피 안 믿겠지만…. 나는 선배를 괴롭히려고 이러고 있는 건 아니에요.”

정말이지 믿어지지 않는 말이었다. 여준은 대답 대신 픽 웃어 버렸다. 그로써 자신이 얼마나 사현을 경멸하고 있는지 전달되면 좋겠다고 생각하면서.

“나도 그만하고 싶어요.”

“…뭐?”

“때려치우고 싶다고, 전부.”

딱, 사현의 손끝에서 튀어 오른 캔마개가 경쾌한 소리를 냈다. 여준의 눈동자가 짧게 흔들렸다.

“너 지금 뭐라고….”

“그러게 좀 잘 살지 그랬어요.”

맥주를 삼키는 사현의 목울대가 크게 일렁였다.

“그랬으면 나랑 다시 볼 일도 없었을 텐데.”

아침부터 터무니없는 추궁을 받았다.

차 사고가 나서 놀란 아이를 베이비시터 손에 맡겨 놓고 나와야 했다.

평안한 밤은 오래전에 사라졌다. 잠들 수 없는 새벽이면 지난 세월 동안 망가진 것들의 모서리가 뱃속을 찢는다. 햇빛 아래서 아무 걱정 없이 웃어본 적은 언제였지. 힐난의 시선, 비난의 언어로 가득한 일상은 하루하루 더 처참한 방향으로 어그러져가고 있을 뿐이다.

분명히 느끼고 있었다. 매일 정신이 깎여나간다. 이러다 언젠가는, 언젠가는….

“…너, 이 개새끼…!”

언젠가는 정말로 미쳐버리는 게 아닐까….

“이 좆같은 새끼야!”

사현은 순순히 여준의 손에 목을 내주었다. 여준은 온몸으로 그에게 달려들었다. 쏟아진 맥주가 사현의 머리카락 끝을 적셨다.

“지금 그딴 걸 말이라고…! 어떻게 나한테 그딴 소리를 해! 어떻게!”

사현의 상체를 깔고 앉아 목을 움켜쥐었지만 그게 다였다. 주먹이라도 날리고 싶었으나 사람을 때려 본 적이 없어 방법을 몰랐다. 한껏 치켜 올린 주먹이 바들바들 떨렸다. 사현은 그저 잠잠하게 그런 여준을 올려다볼 뿐이었다. 검은 눈동자에는 한 점의 동요조차 깃들어 있지 않았다.

“누구 때문인데….”

퍽, 주먹을 내리쳤지만 그뿐이었다. 여준의 주먹은 물렀고 사현의 피부는 딱딱했다. 벌어진 가운 자락 사이로 바늘 자국도 채 가시지 않은 흉터가 보였다. 긁히고 찢기고 부러지고 얼기설기 붙기를 반복한 몸이었다. 남에게 손을 올리기는커녕 험한 말 한 번 변변히 뱉어보지 못한 여준이 상처 입히기엔 이미 지나치게 닳아 있었다.

“내가 누…, 윽, 누구 때문에, 이러고 사는데….”

“…….”

“…누구, 누구 때문에…. 내가…. 내가…!”

주먹을 내리치던 여준의 고개를 푹 숙였다. 쏟아진 앞머리에 가려진 눈에서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기 시작했다. 사현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여준은 그의 몸이 제 손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진 걸 알고서야 주저앉아 두 손으로 바닥을 짚었다. 한 번 터진 눈물은 멈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선배.”

부드러운 부름과 함께 거친 손이 뻗쳐왔다. 뺨을 감싸는 손바닥은 막 쪼갠 장작처럼 딱딱하고 거칠었다. 사현은 몸서리치는 여준을 기어코 끌어다 제 품에 눌러놓았다.

“…으…!”

여준이 앓는 소리를 내며 제 몸과 사현의 어깨 사이에 손을 끼워 넣으려 했지만 허사였다. 사현은 이제 곧 세상이 끝나기라도 한다는 듯 죽을힘을 다해 여준을 끌어안았다. 단단하게 얽힌 팔은 지금 당장 운석이 떨어진다 해도 여준을 놓아주지 않을 것 같았다. 몸부림치던 여준의 어깨에서 점차 힘이 빠져나갔다.

“…….”

한참 후에야 완전히 포기한 여준이 몸을 축 늘어뜨렸다. 그러자 사현은 한 손으로 여준의 뒤통수를 감싼 채 다른 한 손으로 그의 등을 넓게 안았다. 땀에 젖은 뒷머리, 소름이 돋은 목덜미와 바짝 굳어 버린 어깨를 천천히 쓸어내리는 손끝은 턱없이 부드러웠다.

“…….”

여준은 차라리 눈을 감았다. 그의 관자놀이로 사현의 뺨이 닿았다. 차가운 손끝이 땀에 젖은 이마를 쓸어올린다. 아이를 재울 때처럼 고요하고 조심스러운 동작이었다.

나는, 우리는 어디서부터 잘못되어 있었을까.

마음 같아서는 사현을 만나기 전이라고 하고 싶었다. 시답잖은 멘토링 이야기를 칼같이 거절하거나, 하다못해 다른 후배를 지정했더라면. 하지만 늘 여준의 의식이 마지막으로 닿는 지점은 그 여름의 반지하 방이었다. 새카맣고 눅눅한 방, 옴짝달싹 못 한 채로 짓눌려 두려움에 떨던 늦은 밤.

“…내가.”

여준의 입술이 힘없이 열렸다. 축축하게 쉬어 버린 목소리에 사현의 손끝이 멈칫했다.

“내가 그렇게 미웠어…?”

어둠 속에서 형형히 빛나던 눈을 기억한다. 여준의 숨이 조금씩 거칠어졌다.

“내가 그…, 그때, 너한테서 도망쳐서….”

“…선배.”

“너를 그때…. 무섭…. 다고 생각해서….”

조심스러운 몸짓, 떨어질 줄 모르던 시선, 한 점의 의심조차 묻어 있지 않은 맹목적인 애정을 아무런 대가 없이 취할 수 있다고 믿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토록 무시무시한 시험에 들게 할 필요가 있었을까.

“선배, 숨 천천히 쉬어요.”

“나는 그때….”

“천천히요.”

“그, 때 너무, 갑작스러웠고, 그래서, 놀라고…. 나는….”

“선배.”

남에게 내 마음의 소리가 안 들린다는 건 참 다행스러운 일이죠.

사현이 했던 말이었다. 정확히 언제였는지도 여준은 기억하고 있었다. 어쩌다 보니 사현을 집으로 초대해 함께 영화를 봤던 날이었다. 영화는 타인의 생각을 읽을 수 있는 초능력을 손에 넣은 남자가 자신을 둘러싼 추악한 현실을 알게 되면서 점차 악마로 변해가는 내용이었다.

창밖은 어두웠고, 매끄러운 콧날에 반사광을 얹은 사현의 옆모습은 고요했다. 뭐? 한창 영화에 집중하고 있던 여준이 뒤늦게 돌아보자 사현은 불현듯 놀란 얼굴을 했다.

‘어…. 지금 뭐라고 했어?’

다시 묻자 두 눈을 튀어나올 것처럼 크게 뜨고는.

‘…들렸어요?’

라는 거였다.

‘응?’

‘내가, 선배…. 아, 아니, 방금 들렸…. 그….’

더듬더듬 말을 내뱉는 얼굴은 어둠 속에서도 확연히 보일 만큼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만 울어요.”

하지만 눈앞의 남자는 더 이상 열일곱의 임사현이 아니다. 손끝이 잘못 닿으면 얼른 거둬들이고, 시선을 오래 마주치면 고개를 돌리고, 말 한마디 제대로 뱉지 못해 턱끝을 떨고 서 있던 그 애송이, 너무나 서툴고 거칠어서 사랑스럽기까지 했던 모습은 끝조차 보이지 않을 만큼 깊고 어두운 과거의 구렁텅이로 사라졌다.

사실은 묻고 싶었다. 왜 그래야 했어? 왜 그렇게까지 해야만 했어?

눈을 감으면 떠오른다. 서로의 간격을 지키며 함께 파묻혀 있던 평화로운 시간. 눈을 뜨기 직전이면 스친다. 타인의 피를 뒤집어쓴 채 귀신처럼 미소 짓던 얼굴이.

그 모두가 사현이었다. 은아를 죽인 것이 사현이듯이.

“선배.”

여준의 양 뺨을 감싼 사현이 그의 입가를 살짝 핥았다. 짭조름한 눈물을 머금으며 눈가로 향하는 입술에 민감해진 피부가 잘게 따끔거렸다. 여준이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눈물에 가닥가닥 뭉친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성여준.”

사현의 엄지가 여준의 눈두덩을 느릿하게 쓸어내렸다. 움트기 직전의 꽃봉오리를 독려하듯이.

“나도….”

여준은 그것이 입맞춤의 전조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나도 이제 그만 선배를….”

맞닿은 혀끝이 청하는 대로 입을 벌린 것은, 이어질 말이 궁금해서였다.

기대와 달리 섞여든 혀는 그 이상 어떤 말도 담지 않았다. 사현은 여준의 등을 한 손으로 감싼 채 고개를 한껏 꺾어 올렸다. 여준의 상체가 점차 뒤로 기울어졌다. 사현은 그의 몸이 어떤 충격도 없이 바닥에 닿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아.”

뒤늦게 제정신이 든 것도 그때였다.

눈을 번쩍 뜬 여준이 헛숨을 삼켰다. 마주친 사현의 눈도 굳어 있었다. 무심코 사현을 밀치려던 손을 힘겹게 거둬들였다. 어차피 사현이 마음만 먹으면 자신의 힘으로 이 자리를 벗어나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여준은 알고 있었다. 과거의 경험으로, 또 사현을 다시 만난 후에 느꼈던 바로.

“…….”

사현의 눈동자에 처음으로 동요가 깃들었다. 살짝 일그러진 눈가가 미세하게 경련하는 것이 보였다.

“…왜?”

여준이 한껏 비웃음을 담고 물었다.

“마음대로 해 봐. 내가 뭘 어쩔 수 있다고.”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지금 벌어진 일을 수습할 도리가 없을 것 같았다.

“…방금 건 실수였어요.”

예상대로 사현이 먼저 물러섰다. 손을 놓고 일어선 그의 어깨에서 가운자락이 흘러내렸다. 널따란 등은 불그죽죽한 흉터로 성한 곳이 없었다. 후들거리며 간신히 몸을 일으킨 여준이 쓴 침을 삼켰다.

“실수?”

고작 키스 따위에 운운하기엔 이미 나이를 먹어 버린 단어였다. 여준은 입술을 비틀어 웃으며 사현을 향해 사납게 물었다.

“…그럼 예전 일은?”

가운을 벗고 셔츠를 집어 들던 사현이 멈칫했다.

“옛날에…. 그 일도 실수였어?”

떠올리는 것만으로 욕지기가 올라오는 기억이었다. 말을 뱉어내는 순간순간조차 견디기 어려웠다. 사현은 잠잠히 셔츠에 팔을 꿰고 단추를 채웠다.

“임사현.”

“아뇨.”

단호하게 대답하는 목소리는 이미 모든 동요를 씻어낸 듯 깨끗했다.

“난 그때 당신한테 실수한 거 없어요.”

“…….”

“…알아서 돌아가요. 먼저 나가 볼 테니.”

커프스단추까지 빈틈없이 채운 사현이 미련 없이 방을 나섰다. 쾅, 무거운 문이 닫히는 소리에 머리가 울렸다. 홀로 남은 여준의 눈앞으로 빈 맥주캔이 굴러갔다. 여준이 그것을 집어 들어 벽으로 힘껏 던졌다. 캉, 요란한 파열음이 났지만 기분은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

「선임님, 정말 죄송합니다. 잠깐만 전화 좀 받아 주세요.」

「여준 씨, 이거 보면 바로 연락 줘요.」

「성 선임, 지금 뭐 하는 거야? 아무리 그렇다고 이렇게 애처럼 구는 법이 어디 있어? 회사가 무슨 학교야?」

차례로 은 주임, 김 책임, 팀장이었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메시지는 마치 한 칸씩 줄어드는 올가미 같았다.

여준은 침대에 모로 누운 채 시간을 확인했다. 오후 두 시를 막 지나고 있었다. 족히 일 년은 지난 것 같은데 아직도 하루가 끝나지 않았다니. 눈을 깜빡일 때마다 시트에 스치는 속눈썹이 바스락 소리를 냈다. 방 안은 고요했고, 귀 뒤에서 뛰어 오르는 맥박만이 아직 몸에 숨이 붙어 있음을 알게 했다.

‘실수였어요.’

그런 말을 이제 와 입에 담을 거라면.

‘선배.’

그렇게 쉽게 철회할 수 있는 것이었다면, 그때는 왜.

***

‘이번 모의고사 중요한 거 다들 알고 있지? 니들이 1학기에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가 여기서 나오는 거야. 보충 수업 반이 성적순으로 배정되는 건 다들 알 거고, 여기에 전교 15등까지는 개인 자습실을 하나씩 제공해 줄 거다.’

담임의 전달 사항이 끝나기도 전에 교실이 떠나갈 듯한 원성이 터져 나왔다. 말인즉슨 예체능계 학생들을 위해 새로 지은 기숙사를, 방학 기간 동안 성적 우수자들의 보충 수업 후 자습실로 제공해 주겠다는 거였다. 방마다 에어컨이 딸려 있고, 오후 일곱 시까지 사용할 수 있다고 했다.

‘진짜 너무한다. 이렇게 대놓고 차별해도 되나?’

‘쌤, 그럼 공부 못하는 애들은 자습시키지 말고 집에 보내 주세요. 방학이라고 교실 에어컨도 잘 안 틀어 줄 거면서.’

‘시끄러, 이 자식들아. 억울하면 열심히 해서 개인실 따내. 이게 다 니네 동기 부여 되라고 학교 차원에서 투자하는 거야.’

오답 노트 마지막 장을 넘기던 여준은 슬그머니 미소 지었다. 개인 자습실이라니. 말만 들어도 황홀한 특전이었다. 전교 15등이면 커트라인도 여유로웠다. 그런 여준을 빤히 보고 있던 영재가 그의 책상을 톡톡 두드렸다.

‘야, 좋겠다. 너 자습실 받으면 나 놀러 가도 돼?’

‘아직 시험 치지도 않았어.’

‘와, 진심? 이게 지금 입학 이래 전교 1등 한 번도 놓쳐 본 적이 없는 성여준 님이 하실 말씀?’

장난스럽게 놀리는 말에 조금 안심이 되었다. 여준은 슬쩍 주변의 눈치를 보며 목소리를 낮췄다.

‘그러지 말고 너도 노려 봐. 저번에 20등인가 했잖아. 충분히 가능할 것 같은데.’

‘야, 턱도 없어. 당장 오늘이 시험인데 이제 와서 무슨.’

‘그래도….’

‘난 수학이 안 돼서 최상위권까지 못 가. 너랑은 다르잖아.’

영재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지만, 여준으로서는 뭐라 대답해야 할지 난처해지는 화법이었다. 결국 애매하게 웃은 여준이 영재의 옆구리를 툭 치며 너스레를 떨었다.

‘넌 미인점이 있으니까 괜찮아.’

‘아, 뭐래?’

다행히 영재는 경쾌하게 웃었다.

국어와 영어 난이도는 무난했다. 답안지와 시험지를 두 번이나 맞춰 보고도 시험 문제를 처음부터 끝까지 다시 검토할 시간이 남았다. 국어에선 아리송한 문제가 한두 개 나왔지만 영어는 만점을 확신할 수 있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답안지를 제출하고 급식실로 향하는데 멀리 사현의 모습이 보였다.

‘어….’

무심코 소리쳐 부르려던 여준이 멈칫했다. 바로 옆에 영재가 있었기 때문이다. 눈치 빠르게 상황을 읽어 낸 영재는 여준이 들으란 듯 크게 한숨을 쉬었다.

‘너 아진이 얘기 들었냐?’

그러고는 뜬금없는 이름을 꺼내는 것이었다. 아진이? 여준이 되묻자 영재가 한껏 목소리를 낮췄다.

‘어어, 우리 학생회 서기 말이야. 1학년.’

‘아…. 그 아진이.’

‘걔가 임사현이랑 같은 반이잖아.’

물론 잘 아는 사실이었다. 멘토링 이야기를 들었을 때 영재와 더불어 가장 격렬한 반응을 보였던 아이였으므로.

‘아니, 사실 이번 주에…. 학생회 애들이 너 깜짝 파티해 주려고 했었거든. 토요일에.’

식판을 들고 자리에 앉자마자 영재가 한 번 더 한숨을 쉬었다. 여준은 숟가락을 쥔 그대로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토요일이라면 사현을 집으로 초대한 날이었다.

‘그래서 아진이가 임사현한테 부탁을 해 봤대. 너 좀 학교로 데려와 줄 수 있느냐고.’

여준의 두 눈이 크게 뜨였다. 아진은 처음 학생회에 들어왔을 때부터 선배들 사이에서 유명했다. 동그랗고 쌍꺼풀진 눈망울에 입가에는 늘 미소를 띠었고 시종일관 애교가 넘치는 아이였다.

‘…….’

그런 아이가 다가갔을 때, 사현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학교에서는 사현에게 말을 거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모두가 사현을 두려워했고 멀찍이 피해 다녔다. 그러므로 여준만이 알고 있었다. 사현이 얼마나 부드러운 말투를 지니고 있는지, 사람의 눈을 바라볼 때 얼마나 깊고 차분한 시선을 보내오는지.

‘…데 엄청 면박을 줬나 봐.’

뒤늦게 이어지는 말을 인식한 여준이 퍼뜩 고개를 들었다. 다행히 영재는 고개를 숙인 채 밥을 한가득 퍼먹던 중이라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멘토고 나발이고, 그딴 게 뭐라고 사람 귀찮게 하냐면서 꺼지라고 했대.’

‘…어?’

‘어떻게 여자애한테 그럴 수가 있냐? 그것도 아진이한테…. 우리 학주 같은 여자면 여자보다야 돼지에 가까우니까 그럴 수도 있겠지만, 아진이는 아니잖아.’

‘…….’

‘아진이 학생회실 와서 엄청 울었어. 너 생일파티 꼭 해 주고 싶었는데 너무 서운하다면서. 생각을 해 봐. 아진이가 얼마나 무서웠겠어? 그 덩치 크고 험악하게 생긴 새끼가 눈앞에서 그 지랄을 하는데.’

달각, 식판을 긁는 숟가락 끝이 자꾸만 헛돌았다. 여준은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밥을 성의 없이 씹으며 사현을 떠올렸다. 아진처럼 애교 있고, 귀엽고, 인기 있는 여자애가 건네는 말에 꺼지라며 면박을 주는 임사현이라니. 쉽게 상상이 가는 모습은 아니었다.

‘왜…. 그랬을까?’

‘왜긴, 원래 그런 새끼라니까. 내가 몇 번을 말하냐?’

‘…….’

‘혹시 그 새끼가 또 아진이한테 해코지하면 내가 가만히 안 둘 거야. 이건 너도 알고 있…. 어라?’

주절주절 말을 이어 가던 영재가 문득 여준의 숟가락을 움켜쥐었다.

‘너 지금 뭐 먹고 있냐?’

‘…어?’

여준은 그제야 꽉 쥐고 있던 숟가락을 내려다보았다. 반쯤 남은 동그랑땡이 있었다. 정체를 확인하자 벌컥 소름이 돋았다.

‘너 계란 들어간 거 먹으면 안 되잖….’

입을 틀어막은 여준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급식실에서 본관까지가 한없이 멀었다. 잠깐 달렸을 뿐인데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지나가던 1학년들이 의아한 얼굴로 여준을 곁눈질했다. 다행히 그중에 사현은 없었다.

‘……!’

화장실 문을 걸어 잠그자마자 입 안에 손가락을 쑤셔 넣었다. 목젖을 강하게 누르고 가슴을 두드렸다. 다행히 먹은 것이 고스란히 쏟아져 나왔다. 위장이 통째로 꼬이는 듯했다. 기침을 할 때마다 온몸이 뒤틀리도록 아팠다.

‘여준아, 괜찮아?’

영재가 문을 두드리며 물었다. 그 와중에 밥 먹다 말고 쫓아와 준 게 고마웠다. 입을 막고 밖으로 나간 여준이 억지웃음을 지었다.

‘와, 영재야. 니 덕분에 나 살았다. 오후 시험 못 볼 뻔했네.’

농담으로 넘어갈 셈이었지만 영재의 표정은 심각했다. 눈썹을 한껏 찌푸린 채 여준을 살피던 영재가 조심스레 물었다.

‘…너 진짜 괜찮아?’

‘응…?’

‘거울 좀 봐 봐. 난리 났는데?’

그 말에 세면대로 다가서자 온통 울긋불긋해진 얼굴이 거울에 비쳤다. 팔뚝이며 목덜미가 미친 듯이 가려웠다. 목도 부었는지 잔기침이 계속 흘렀다.

‘안 되겠다, 보건실 가자’

‘…아, 너는 가서 밥 마저 먹어. 나 혼자 갈게.’

‘괜찮겠어?’

‘바로 갈게. 걱정하지 마.’

애써 영재를 도로 보내고 입 안을 헹궜다. 그러는 동안에도 알레르기 증세는 점점 심해지고 있었다. 눈이 따끔거려 제대로 뜰 수도 없었다.

평소에 그렇게 조심했으면서, 왜 하필 시험 날에 이런 멍청한 짓을 했을까. 여준은 보건실로 향하는 내내 자괴감에 휩싸였다.

‘약 평소에 어떤 거 먹는데? 보건실에 있는 건 이게 다인데.’

‘아…. 이거면 될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보건 교사가 내민 알약들 중 그나마 익숙한 것을 집어 든 여준이 약을 단숨에 삼켰다. 점심시간은 20분도 채 남아 있지 않았다. 조금이라도 가라앉혀야 오후 시험에 집중할 수 있었다.

‘얘, 얼음팩도 좀 줄까?’

‘얼음…, 네, 감사합니다.’

경험상 찜질은 별 도움이 안 된다는 걸 알고 있지만 뭐라도 해야 마음이 편할 성싶었다. 여준은 교사가 내민 얼음팩을 목에 댄 채 창가에 붙은 침대에 걸터앉았다. 짧은 휴식시간에 신이 나 뛰어다니는 아이들의 갖가지 소음이 들려왔다.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팔마디며 손목에도 그새 발진이 올라왔다. 긁지 않으려면 딴생각을 해야 했다. 여준은 창밖을 멀리 내다보았다. 보건실은 1층에 있었고 운동장과 가까웠다. 급식실에서 나오는 아이들, 삼삼오오 모여 공을 차거나 시답잖은 게임을 하는 무리들, 뜨거운 운동장은 여름의 움을 한꺼번에 틔우기 위해 웅크린 커다란 생물처럼 보였다.

‘…….’

그 한가운데에 사현이 있었다.

‘……?’

잘못 보았나 싶었다. 그늘 한 점 없이 뜨거운 운동장 한가운데, 혼자 키가 훌쩍 솟은 인영 하나가 천천히 여준 쪽을 향해 걸어오는 중이었다.

여준은 저도 모르게 주머니 속 핸드폰을 쥐었다. 생각해보면 별일도 아니었다. 그저 점심시간에 운동장을 가로질러 걷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별했다. 목소리를 크게 내고 과장해서 움직이는 행위만이 자신의 존재를 증명해 줄 거라 믿는 설익은 십 대의 틈바구니에서, 단지 입을 다물고 평소처럼 걷는 것만으로 사현은 눈에 띄는 존재였다.

「시험 잘 봤어?」

여준은 행여 그 모습을 놓칠세라 조심하며 문자를 찍었다. 전송 버튼을 누르자마자 고개를 번쩍 들었다. 사현이 멈춰 섰던 것이다. 그는 제 주위를 분주히 뛰어다니는 녀석들이나 여기저기서 날아오르는 공 따위에는 관심도 없다는 얼굴로 핸드폰 화면을 확인하고는.

‘…….’

난데없이 설탕 덩어리라도 삼킨 사람처럼 얼굴을 무너뜨리고 웃었다.

「저는 항상 대충 봐요. 선배는 잘 보셨어요?」

정작 답장은 건조하기 짝이 없었다. 사현은 여전히 입술 끝을 말랑하게 위로 당긴 채 핸드폰을 뚫어져라 내려다보고 있었다. 바로 답장을 보내지 않으면 언제까지고 저 땡볕에서 기다리고 있을 것 같았다. 다급해진 여준이 얼른 손가락을 움직였다.

「나도 그럭저럭^^ 점심 맛있게 먹어!」

무조건적인 호의에는 익숙하다. 여준이 살면서 만난 이들은 누구나 여준과 가까워지고 싶어 했다. 또한 자신들이 쉽게 보낸 호의에 여준이 성의 있게 보답해야 한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네 선배도요」

그래서 사현이 특별했다. 사현은 무엇도 강요하는 법이 없었다. 말의 이면에 다른 말을 숨겨 놓지도 않았다. 적은 말로 오롯이 진심만을 말했다.

여준은 핸드폰을 쥔 채 사현이 교실 쪽으로 사라져 가는 모습을 끝까지 지켜보았다. 영재의 말이 계속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아진이한테 윽박을 질렀대, 귀찮게 하지 말라고 했대. 그 이야기가 불러내는 감정은 더없이 복잡한 것이었다. 여자애에게 함부로 대하는 사현의 모습은 별로 상상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혹시 사현이 아진의 부탁을 받고, 토요일에 자신을 학교로 데려가려 했다면.

‘…….’

상상만으로도 가슴이 뻐근하리만치 불쾌해졌다.

오후 시험을 치는 동안 컨디션은 조금씩 좋아졌지만 집중력은 도저히 돌아오지 않았다. 궁여지책으로 가장 취약한 화학을 맨 뒤로 미뤄 두고 다른 탐구 과목 답안 작성을 마쳤을 땐 시간이 아슬아슬하게 남아 있었다. 가려움이 가라앉지 않는 와중에 마음이 초조해지자 식은땀이 났다. 여준은 몇 번이고 턱 아래를 손등으로 훔쳐 가며 다급히 답안지를 채워 나갔다.

‘종료 5분 전이다.’

감독 교사의 말에는 하마터면 엉뚱한 답안을 체크할 뻔했다. 마지막 한 칸을 채웠을 땐 이미 종료 2분 전이었다. 어쨌든 끝났다는 생각에 순간 마음이 놓였다. 여준은 어지러이 널려 있던 시험지를 반으로 접고 그 위로 답안지를 올려 두었다.

‘……?’

시험지 맨 뒷장에 시선이 간 것은 그때였다.

‘어….’

저도 모르게 샌 소리에 얼른 입을 틀어막았다. 피가 한꺼번에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맨 뒷장에 한 문제가 더 남아 있었다.

‘…….’

다급히 답안지를 하나하나 살폈다. 중간에 체크를 안 하고 넘어간 번호가 그제야 보였다. 홀수 장에서 끝난 문제와 답안지 숫자가 딱 맞아떨어져 확인조차 해 보지 않았던 것이다. 답안은 아예 5번 문제부터 고스란히 한 칸씩 밀려 있었다.

‘자, 끝! 다들 책상 아래로 손 내려!’

우렁찬 목소리가 들렸다. 여준은 저도 모르게 답안지를 꽉 쥐었다. 실수인 척 구겨 버리면 다시 작성하게 해 주지 않을까? 하지만 차마 실행할 수는 없었다. 의아한 얼굴로 다가온 감독 교사가 여준을 향해 물었다.

‘왜 그러니?’

신뢰가 묻어나는 다정한 목소리였다. 여준은 순간 벌어지던 입을 얼른 다물었다. 교실 안의 모든 시선이 자신에게로 쏠려 있었다.

답안지를 밀려 썼다고 하면 분명 다시 작성하게 해 줄 것이다. 모의고사일 뿐이고, 그 정도 편의를 봐주는 일은 흔하다.

하지만 이번 시험은 달랐다. 성적 상위권이라면 누구나 원하는 특전이 달려 있었다.

‘…아…. 아뇨.’

힘없이 손을 놓은 채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렸다. 다른 과목에서 얼마나 틀렸을까? 1등은 당연히 물 건너갔지만, 화학 배정 점수는 50점뿐이니까 어쩌면 15등 안에는 들 수 있지 않을까….

‘왜 그래?’

영재가 펜 끝으로 여준을 쿡 찌르며 물었다. 여준은 아픈 미간을 꾹 누른 채 힘겹게 말했다.

‘밀려… 썼어.’

‘뭐? 뭐를? 전부 다?’

‘…화학만…. 근데 점수 다 날린 것 같아. 5번부터 밀려 써서….’

‘야, 다시 작성한다고 하지! 아깝게….’

절로 목소리를 높이는 영재를 향해 여준이 얼른 쉿, 하고 입에 가져다 대었다. 이 이상 시선을 모으고 싶지 않았다.

‘어쩔 수 없지. 나머지를 잘 봤기를 바라야지.’

‘오? 너 이번에 시험 완전 잘 봤나 보다? 화학 점수 하나쯤 날려도 15등쯤은 문제없다 이거지?’

그러나 여준의 의도와 달리 영재의 목소리는 점점 높아질 뿐이었다. 당황한 여준이 얼른 손을 내저었지만 이미 시선이 쏠릴 대로 쏠려 있었다.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부럽다, 부러워. 하긴 저번 모의고사 10등이 430점쯤 되지 않았나? 야, 여유 있네. 나머지 싹 다 만점 맞았으면 되는 거네!’

모두가 자신과 영재의 대화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는 것, 지금 나누는 대화는 언젠가 있는 대로 과장되고 윤색된 형태로 돌아오리라는 것을 여준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재의 말을 가로막지 못한 것은 또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 걱정되어서였다.

‘고마워, 근데 아마 안 될 것 같아. 수학도 좀 버벅거려서….’

‘아, 국어랑 영어는 만점? 확정?’

‘…….’

‘어우, 성여준. 속 보이는 거 진짜. 그래, 그래. 너 공부 잘해.’

영재와의 대화는 가끔 여준에게 찜찜한 의문을 남기곤 했다. 입으로는 나를 칭찬하고 있는데, 있는 대로 찬양하고 치켜세우고 있는데, 나는 왜 이렇게 기분이 나쁜 걸까.

‘…나 먼저 갈게. 병원 가 봐야 해서 자습 못 할 것 같아.’

‘응? 그래.’

영재가 쉽게 손을 흔들었다. 여준은 잔기침을 하며 가방을 둘러매고 교실을 나섰다. 기분이 한없이 가라앉았다. 스스로 저지른 멍청한 짓이라 원망할 구석도 없었다. 평소엔 혹시 몰라서 과자도 먹지 않는데, 어쩌다 계란 범벅에 기름투성이인 음식을 아무 생각도 없이 입에 넣어서.

「사현아 나 오늘은 자습 안 해서 먼저 갈게 내일 보자^^」

교문을 나서자마자 문자를 보냈다. 혹시나 예전처럼 무턱대고 기다릴까 걱정스러웠다. 핸드폰을 도로 주머니에 넣는데 갑자기 긴 진동이 울렸다. 도로 화면을 보니 사현이었다.

‘응?’

여준이 의아함에 눈을 깜빡였다. 사현에게서 전화가 온 건 처음이었다. 신기한 마음에 얼른 받아들었지만 수화기 너머에선 아무 말이 없었다.

‘여보세요? 사현아?’

재차 부르자 그제야 부스럭대는 소리가 나더니 사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 …어, 선배. 안녕하세요.

‘응, 무슨 일이야? 급한 일 있어?’

- 네?

어리둥절한 반문에 여준까지 덩달아 넋이 빠졌다.

‘네가 전화했잖아. 문자 보고 전화한 거 아니야?’

- 문자…. 하셨어요?

‘못 봤어?’

- 아, 지금, 지금 봤어요. 아…. 그렇, 그렇구나. 그 핸드폰을…. 주머니에 넣어 뒀는데, 문자 떴을 때 뭐가 잘못…. 눌렸나 봐요.

그제야 여준이 아아, 하며 조금 웃었다. 사현은 어지간히 당황한 듯 몇 번이나 헛말을 내뱉었다. 눈을 크게 뜬 채 쩔쩔매는 모습이 그려지는 듯했다.

- 어디서 선배 목소리가 들려서 저는 환청인 줄 알았어요.

한숨 쉬며 뱉는 말에는 그만 소리 내 웃어 버렸다. 아하하, 여준이 웃자 사현은 민망한 듯 헛기침을 했다.

- 아무튼…. 죄송해요.

‘아냐, 죄송할 건 뭐 있어. 오늘 못 보니까 내가 미안하지.’

- …….

그러자 사현은 잠시 말이 없었다. 수화기 너머로도 뭔가 할 말을 머금은 침묵임을 알 수 있었다. 여준은 잠시 걸음을 멈춘 채 주의를 기울였다.

- 저…. 선배.

머뭇머뭇 꺼내 든 말에 어떤 질문이 따라올지 벌써 알 것 같았다. 여준은 슬쩍 웃으며 도로에서 조금 떨어져 섰다. 차 소리에 뒷말을 놓칠까 걱정스러웠다.

- 그게…. 혹시…. 아닐 줄은 아는데…. 혹…, 시나 잊으셨을까 봐….

‘응, 뭔데?’

- 멘토링…. 말인데요. 그거 저번 주로 끝인 거…. 맞죠?

우리 이번 주에 보는 거 맞죠? 선배 집에서 영화 보기로 했죠? 정도의 질문을 기다리고 있던 여준이 입을 쩍 벌렸다. 멘토 활동 보고서를 제출한 것이 고작 사흘 전이었다. 설마 그 사실을 그새 잊었을 리가. 뭘 묻고 싶은 건지 감을 잡을 수가 없었다. 여준이 잠시 말이 없자 사현이 재차 물었다.

- 다른 건 아니고요. 그, 저 놀러 오라고 하신 것도…. 혹시 멘토링 때문에 그러신 거면….

‘…….’

- 신경 쓰실 필요 없다고…. 그 얘기를….

그러자 가슴에 울컥 일어서는 감정이 있었다. 누군가 쇄골 한가운데를 날카로운 바늘로 꽉 누른 느낌이었다. 어떤 이름이 붙는 마음인지는 단번에 알아챘다.

‘그런 말이 어디 있어. 약속은 약속이지.’

서운함이었다.

‘너 그럼 멘토링 끝났다고 나 안 보려고 했어? 그게 말이 되냐?’

- …아, 저는….

사현은 또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말을 잃어버렸다. 여준은 사현에게 들리지 않도록 핸드폰을 조금 떼어 낸 채 낮은 한숨을 쉬었다.

‘왜? 그날 뭐 바쁜 일 있어?’

- 네?

돌려 묻는 말에 사현의 목소리가 살짝 낮아졌다. 여준은 다시 걸음을 옮기다 말고 길가의 돌멩이 하나를 툭 걷어찼다.

‘너야말로 너무 부담 갖지 마. 나 원래 혼자서도 영화 잘 봐.’

- 네? 아, 제가 가기 싫어서 하는 말이라고 생각하시는 거예요?

갑자기 푹 찌르고 들어오는 직구에 이번엔 여준이 할 말을 잃었다.

- 왜 그렇게 말씀하세요? 제가 선배에게 그런…. 생각을…. 하게 할 만한 행동을 했어요? 제가 억지로 선배 말을… 따르는 거라고?

‘…….’

- 그랬다면 알려 주세요. 조심할게요. 왜냐면 전….

한여름의 주택가엔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멀리서 매미 울음소리가 길게 들렸을 뿐이다.

그래서 마음 놓고 주저앉을 수 있었다. 한 손으로 이마를 감싼 채 슬쩍 웃을 수도 있었다.

- 저는…. 그냥 선배가….

점심나절부터 몰아친 일들로 응어리진 마음이 스르르 풀어지는 듯했다.

- …아무튼 정말 아니에요. 정말로.

천천히, 그러나 또렷한 해명을 늘어놓는 사현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가능하면 직접 만나서 그 눈을 보고 싶었다. 비를 기다리는 강처럼 고요하고, 해를 기다리는 나무처럼 차분한 눈. 지난 새벽을 오롯이 담은 새벽의 이슬 같은 그 시선을.

***

‘너 시험 망했다며?’

1교시가 끝나자마자 불쑥 들이닥친 가린이 물었다. 여준은 책상을 정리하다 말고 손을 멈췄다.

‘영재가 그래?’

‘아니, 카페에 올라왔더라. 익명게시판에 온통 이번 시험 얘기밖에 없어. 그놈의 개인실이 뭐라고.’

‘…….’

K고에는 전교생이 이용할 수 있는 인터넷 카페가 있었다. 평소에는 입시 정보나 연예인 이야기가 주를 이루지만, 가끔 교내에 이야기할 만한 사건이 생기면 익명게시판이 가장 활발해지는 곳이었다. 이미 몇 년 전부터 있던 카페이고, 운영자는 졸업생 중의 하나라고 했다. 여준도 가입되어 있긴 하지만 자주 접속하지는 않았다.

‘어차피 독서실이나 개인실이나 뭐가 달라? 그게 뭐라고 분위기 그 모양이 됐는지 모르겠어.’

‘많이 심각해?’

‘안 들어가 봤어?’

놀란 듯 되묻던 가린이 얼른 입을 다물었다. 여준은 그제야 가린이 불쑥 들이닥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익명게시판에서 이번 시험 순위를 두고 말이 오가는 와중에 성여준은 시험 망쳤다더라, 하는 말이 나왔을 테고 그 글에 대놓고 안도한 마음을 감추지 못한 녀석들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가린은 여준이 그 꼴을 당연히 다 봤을 거라 생각하고 모른 척 위로하러 왔던 듯했다.

‘…괜히 말했네. 미안해.’

‘아냐. 니 말마따나 그게 뭐라고. 신경 쓰지 마.’

‘앞으로도 보지 마. 난 그 카페 그냥 없어졌으면 좋겠더라. 익명이라고 지들 시시콜콜하게 싸운 얘기 일일이 써놓는 애들도 있고…. 거기서 뒷담화하다가 싸우는 애들도 있고, 문제 많아 보였어.’

알았지? 응? 신경 쓰지 마? 가린은 몇 번이나 당부하며 돌아갔지만, 한 번 들은 말은 쉬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여준은 결국 참지 못하고 쉬는 시간을 틈타 컴퓨터실로 향했다.

포털에 접속해 로그인을 하자 가입한 카페 목록 맨 상단에 이라는 타이틀이 보였다. 클릭하자마자 최근 인기가 많은 아이돌 가수의 노래가 배경음악으로 흘러나왔다. 얼른 스피커를 끄고 카테고리를 한 칸씩 훑었다. 새 글 알림이 떠 있는 것은 오로지 <익명 공간>뿐이었다.

기숙사실은 50개나 되는데 왜 하필 15등까질까?

게시판에 들어가자마자 맨 처음 보인 제목이었다.

하다못해 10등이면 이해라도 하겠어. 15등은 애매하잖아.

문과에서 15등, 이과에서 15등이니까 합치면 30명이잖아. 그럼 적당하지.

아 그렇구나 그 생각을 못 했네

시시한 이야기였다. 우려했던 바와 달리 여준의 이야기는 보이지 않았다. 글을 하나씩 클릭하던 여준이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리던 그때, 네 번째로 클릭한 글 제목이 어쩐지 신발에 낀 자갈처럼 걸리적거렸다.

하여튼 성적에 목숨 걸면서 안 거는 척하는 놈들이 젤 문제임

마우스를 쥔 손끝이 잠시 흔들렸다. 기분 탓이겠지, 애써 부정하며 컴퓨터 전원버튼에 손을 가져다 대었다. 하지만 누르지는 못했다. 다음 순간 여준은 결국 그 제목을 클릭하고 말았다.

이번 시험결과 중요한 건 다들 알 테고, 특히 개인실 들어가느냐 마느냐 하는 애들은 성적표 나올 때까지 똥줄 탈 텐데 누가 봐도 안정권인 애들이 괜히 시험 망쳤네 뭐네 하는 거 솔직히 꼴 보기 싫은 거 나뿐임?ㅋㅋ 이런 애들이 꼭 평소에 남이 수행 도와주는 건 넙죽 받아먹으면서 반대로 한번 도와달라 했을 땐 싫은 티 팍팍 내는 것도 그렇고 쩝 여러모로 맘에 안 들어…

re: 헐 재수 없네 뭔데 누군데?

re:re: 아 그냥 있어 그런애ㅋㅋㅋ 친구니까 참는다 내가

re:re:re: 그런 애랑 왜 친구를 해줘 너 착하네ㅋㅋ

뜨겁고 걸쭉한 액체를 삼킨 듯 속이 울렁거렸다. 여준은 바르르 떨리는 손을 마우스에서 떼어낸 채 심호흡을 했다. 어쩔 수 없이 영재의 얼굴이 제일 먼저 스쳤다.

‘…….’

기분 탓일 거야. 애써 되뇌며 이마를 쓸어 올렸다. 여준이 화학 답안지를 밀려 써서 시험을 망쳤다는 건 그때 가까이 있던 아이들 대부분이 안다. 수행평가 이야기도 우연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의심이 확신이 되는 데엔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익명’이라는 글자를 클릭하자 ‘작성자의 다른 글 보기’가 떴다. 글 제목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대부분은 평준화 입시에 대한 불만이나 성적 스트레스, 교사들의 뒷담화였다. 그 영문 모를 악의의 중간중간에 낯설지 않은 이야기들이 섞여 있었다.

천사병에는 약도 없음ㅋㅋ 뺑뺑이 때문에 학교에 질 떨어지는 양아치들 흘러들어온 거 안 그래도 짜증 나는데 양아치가 뭔지도 모르는 놈들이 싸고도는 게 더 짜증 남 우웩

왜 그런 애들 있잖아? 싫은 소리 하는 건 남한테 다 떠밀어놓고 자기는 입바른 소리만 하는 놈들. 내 친구가 딱 그런 타입인데 예를 들자면 이런 식임. 교실 더워서 에어컨 온도 좀 낮추려 하면 여자애들 추우니까 그러지 말라고 졸라 각 잡고 말하는거ㅋㅋㅋ 꼭 여자애들 다 들을 때만 큰 소리로 얘기함

말하는 것도 졸라 교묘하게 한다? 저번엔 나더러 ‘니 말이 다 사실이라면~’ 뭐 이딴 소리를 하는데 이게 뒤집어 말하면 네가 지금 구라를 치고 있을 수도 있다 그거잖아? 평소에 사람 은근히 무시하고 엿 먹이는거 모를 줄 아나봄

여자애들 엄청 의식하면서 아닌 척 관심 없는 척~ 나는 그냥 가만히 있는데 알아서 챙겨준다는 척~

예비종이 울렸을 때에야 정신이 들었다. 황급히 로그아웃 버튼을 누르고 컴퓨터를 끈 여준이 다급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컴퓨터실을 나와 교실로 향하는 내내 관자놀이의 맥박이 쿵쿵 울렸다. 손끝이 굳어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다행히 영재는 교실에 없었다. 여준은 자리에 앉자마자 책을 펴고 고개를 처박았다. 떠올릴수록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목이 뜨끈하도록 화가 났다. 그게 정말 영재라면,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을까. 이름만 말하지 않는다고 모를 거라 여겼다는 것도 어이가 없었다. 어금니를 악물며 치미는 화를 달래는데 눈앞으로 불쑥 콜라캔 하나가 들어왔다.

‘여쭈니, 쉬는 시간 내내 어디 갔었어?’

앞자리에 앉은 영재가 싱글벙글 웃는 얼굴로 물었다. 여준은 눈을 크게 뜬 채 콜라캔만 빤히 바라보았다. 영재도 그제야 이상한 기색을 느낀 듯 고개를 기울였다.

‘왜 그래? 어디 아파?’

‘…….’

‘또 뭐 잘못 먹었어? 얼굴 되게 빨간데, 보건실 갈래?’

조심스레 묻는 목소리에 걱정이 함북 묻어났다. 그러자 다시 혼란스러워졌다. 어어…. 애매하게 대답한 여준이 콜라캔을 집어 들었다. 손이 시리도록 차가웠다.

‘진짜 괜찮아?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 아냐, 그냥 컨디션이 좀 안 좋은가 봐.’

캔을 목에 가져다 대고 애써 웃었다. 너무나 화가 나면 머릿속이 시뻘게진다는 것을 그때 알았다. 여준은 조금씩 마음을 진정시키며 생각을 정리해보기로 했다.

‘…….’

그게 영재라는 물증은 어디에도 없다. 그저 최근 영재와 있었던 갈등 상황이 몇 가지 겹쳤을 뿐이다. 영재가 바보가 아니고서야 그렇게 대놓고 글을 썼을까? 아니, 정말 영재가 쓴 거라면 지금 이렇게 당당하게 말을 걸 수 있을까?

영재가 그럴 만한 인간이라는 것을 믿고 싶지 않았다. 어쨌든 가장 가까운 친구였고, 무슨 일이 있을 때 누구보다 먼저 편을 들어주고 힘이 되어줬던 것도 영재였다.

하지만 최근 분위기가 이상해지는 때가 많은 것도, 우연이라기엔 지나치게 상황이 겹치는 것도 사실이었다. 여준은 완전히 차가웠던 캔이 미지근해지도록 뚜껑을 따지 못했다. 머리가 복잡해 입술이 말랐지만 아무것도 입에 넣고 싶지 않았다.

***

영재를 어설프게 피해 다니는 사이 토요일 아침이 밝았다. 여준은 집 안을 정리하고 에어컨을 튼 뒤 빌려온 DVD를 차곡차곡 쌓아 놓았다. 사현이 오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좀 있었다.

‘아, 밥 먹고 오냐고 물어볼 걸….’

배달 전단지를 뒤적이다 말고 생각이 미쳤다. 그때 기다렸다는 듯 핸드폰이 울렸다. 사현일 거라 지레짐작하고 집어 들었지만 액정화면에 뜬 것은 영재의 번호였다.

시간을 확인하니 오전 열 시였다. 늦잠을 잤다고 얼버무릴 수 있을 만한 시간대다. 모르는 척 전화가 끊기도록 내버려 두었다. 그러고 나니 사현에게 전화하기도 껄끄러웠다. 그때 벨 소리가 다시 울리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영재였다.

‘…….’

고민하던 여준은 결국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전화를 받자마자 경쾌한 목소리가 스피커를 뚫고 나왔다.

‘여보세….’

- 여쭈니! 지금 뭐 해! 나와!

난데없는 초대였다. 여준은 영재에게 들리지 않도록 한숨을 쉬며 소파에 기대앉았다.

‘나오라고?’

- 지금 학생회 다 모였어. 나와, 케이크 자르고 노래방 가자.

‘…케이크?’

- 여기 어디냐면 사거리 쪽에 새로 생긴….

여준이 아랫입술을 꾹 물었다. 주말에 난데없이 친구들이 불러내는 일은 자주 있었다. 여준 역시 별생각 없이 갑작스러운 초대에 응하곤 했다. 다만 이미 선약이 있었고, 영재를 만나는 일도 꺼려졌다.

‘영재야, 나 오늘은… 좀 힘들 것 같은데.’

어렵게 꺼낸 거절의 말에 신이 나서 떠들던 영재의 목소리가 뚝 끊겼다. 금세 분위기가 굳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여준은 초조함에 손톱 거스러미를 물어뜯었다.

- 왜? 집에서 쉰다고?

‘음…. 오후에 만날 사람도 있고….’

- 만날 사람 누구? 임사현?

덜컥 튀어 나온 이름이 당황스러웠다. 물론 사현과의 약속이긴 하지만, 무슨 연유로 넘겨짚고 추궁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여준이 대답하지 않자 영재는 들으란 듯 한숨을 푹 쉬었다.

- 멘토링 끝나지 않았어? 언제까지 그 양아치한테 휘둘리려고 그래.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덜컥 말을 뱉어 놓고도 여준 스스로가 더 놀랐다. 뒤늦게 입을 막아 봤지만 이미 엎어진 물이었다.

- 뭐?

영재의 목소리가 단번에 싸늘해졌다. 여준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싸 쥐다 결국 참고 있던 말을 마저 꺼내 놓았다.

‘사현이가 너한테 뭐 나쁘게 한 게 있다고 자꾸 그래.’

- …….

‘들은 말뿐인 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나는 어쨌든 걔를 직접 겪어 봤고, 그래서….’

- 너 그 말 후회 안 하지?

차가운 경고에 여준이 입을 다물었다. 영재는 잔뜩 수틀린 투로 목소리를 높였다.

- 야! 여준이 안 나오겠대. 그 양아치랑 약속 있다는데?

‘…영재야.’

- 어, 여준아. 잘 놀아. 우리가 잘못했네. 이 주말에 학원까지 빼먹고 모여서 니 생파 준비한 우리가 싹 다 병신이네. 그치? 시키지도 않은 짓이나 하고, 우리가 나빴어.

‘너 저번부터 왜 자꾸 말을 그런 식으로-’

- 주인 없는 생일케이크 처먹고 우리끼리 잘 놀게. 너는 그 양아치랑 잘해 봐. 끊는다.

툭, 미련 없이 끊어진 전화에 머리가 다 어지러웠다. 나오느니 한숨이요 떠올리니 화뿐이었다. 이를 꾹 다문 여준이 소파에 모로 엎어졌다. 그때 또 핸드폰이 짧게 울렸다. 가린이었다.

「여준아, 너무 신경 쓰지 마. 영재가 너 생파 엄청 해주고 싶었나 봐. 내가 잘 얘기할게.」

가린에게는 미안한 마음뿐이었다. 아, 탄식하며 돌아누운 여준이 애꿎은 소파 등받이를 툭툭 걷어찼다. 사현이 나타난 뒤로 영재는 확실히 이상했다. 그 전에도 여준에게 가까운 친구가 생길 때마다 장난처럼 질투하곤 했지만 이번처럼 대놓고 적의를 드러낸 적은 없었다.

혹시 정말로 뭔가 알고 있는 건가? 여준은 깨끗한 천장을 올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단순히 사현에 대한 소문이 나쁘다는 이유만으로는 납득하기 어려웠다. 여준이 아는 한 사현은 교내에서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었다. 아웃사이더이긴 했지만 그뿐이었다.

사현이 어떤 나쁜 짓을 했는지, 그게 왜 나쁜 짓인지 아무도 정확하게 말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런 식으로 배척하는 게 정말 옳은 일인가?

‘짜증 나….’

두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던 여준이 이내 다짐했다. 월요일에 영재와 이야기를 해보자. 대화를 나눈다고 풀릴 문제인지는 모르겠지만, 서로 오해하고 있는 부분이 분명 있을 테니까….

불편한 마음으로 멍하니 시간을 보내던 중 현관 벨이 울렸다. 그제야 사현이 집까지 오기로 했던 것을 기억해 낸 여준이 튕겨 오르듯 벌떡 일어났다. 다급히 현관으로 나가는데 잔뜩 헝클어진 머리며 구겨진 티셔츠가 거울에 비쳤다. 얼른 머리를 정돈하고 티셔츠 끝도 붙잡아 펼쳤다.

문을 열자마자 바깥의 더운 기운이 훅 끼쳐 들었다. 장마를 앞둔 공기는 물 먹은 듯 습하고 후텁지근했다. 반갑게 사현과 눈을 마주친 여준은 어서 와, 더운데 오느라 고생했겠다, 준비한 인사말을 입에 담기도 전에 깜짝 놀라 내뱉었다.

‘얼굴이 왜 그래?’

땀 한 방울 없이 멀끔한 얼굴에, 표정은 언제나처럼 무덤덤했지만 터질 듯 벌게진 눈동자에 눈물이 출렁이고 있었다. 흠칫 놀란 사현이 고개를 돌리고 헛기침을 했다. 여준은 저도 모르게 그의 얼굴을 따라 고개를 기울이며 재차 물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알레르기요.’

이 더운 날, 여기까지 오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길래 이렇게 온 숨구멍에 눈물 냄새를 달고 왔을까. 의아하고 궁금했지만 사현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예의 그 어리둥절한 변명뿐이었다. 여준은 그 이상 캐묻는 것을 그만두고 우선 사현을 안으로 들였다.

‘오는 데 힘들진 않았어? 점심 안 먹었지?’

에어컨 온도를 있는 대로 낮춰둬서 다행이었다. 거실에 들어선 사현의 얼굴색이 조금이나마 편안해 보였다. 여준은 시원한 주스 한 컵을 사현에게 내밀고 괜히 배달 책자를 뒤적거렸다.

‘뭐 먹고 싶어? 배달되는 게 뻔하긴 한데….’

‘그냥 아무거나요.’

‘그러면 짜장면 시킬까? 울면 먹고 싶네. 아, DVD 보고 싶은 거 골라 봐.’

그 말에 사현이 DVD 타이틀을 하나씩 손으로 훑기 시작했다. 대부분이 호러, 재난, 서스펜스 영화였다. 마음 같아서는 그동안 친해진 DVD방 사장님이 몰래 빌려준 청소년 관람 불가 슬래셔물로 채워 놓고 싶었지만 사현이 괜히 겁먹을까 걱정스러웠다.

‘이건 무슨 내용이에요?’

개중 사현이 집어 든 것은 토네이도 재난물이었다. 여준은 중국집 전화번호를 입력하다 말고 활짝 웃었다.

‘아, 그거 재밌어. 샌프란시스코에 역대급 토네이도가 와서 학교 하나가 통째로 날아가는데 주인공이 막 오토바이를 타고 탈출하거든.’

‘토네이도가 왔는데 오토바이를 탈 수 있어요?’

‘토네이도라는 게 태풍이랑 좀 달라. 이렇게 좁은…. 뭐 좁다고 해봤자 마을 하나 너비긴 한데, 아무튼 좁고 긴 바람의 소용돌이가 생기는 거거든. 그래서 멀리 토네이도가 보이면 거기 휩쓸리기 전에 도망치는 거야.’

‘헤에….’

설명을 마친 여준이 커튼을 꼼꼼히 치고 홈시어터를 켰다. 사현은 머리 양쪽에서 소리를 내는 스피커를 신기한 듯 번갈아 쳐다보았다.

‘진짜 영화관 같네요. 신기하다.’

‘그치, 좋지.’

전교 1등을 유지하는 조건으로 아버지가 마련해 준 기기들이었다. 이번 시험결과가 나오는 날 이별해야 할 물건이기도 했다. 여준은 조금 우울해지는 마음을 되잡으려 영화 볼륨을 좀 더 키웠다.

영화는 여타 재난물의 클리셰를 고스란히 따라가고 있었다. 반항적인 십 대 주인공이 부모님과의 갈등이 생긴 날 토네이도를 만나고, 오토바이로 화려한 액션을 선보이며 도망치던 중 위험에 처한 아이를 구하러 뛰어들고, 그렇게 자기가 더 큰 위험에 빠진 주인공을 위해 항상 미워했던 아버지가 달려오고…. 생명의 가치와 가족의 소중함을 깨달으며 해피 엔딩.

허리케인이 턱끝까지 쫓아와 온갖 기물을 부수는 순간마다 여준의 손바닥에 식은땀이 배었다. 사현은 별다른 말 없이 영화에 집중하고 있었다. 가지런한 옆모습에는 아무 감흥이 없어 보였다. 여준은 조금 초조해졌다. 재미가 없나? 영화가 끝날 즈음 슬그머니 곁눈질을 하는데 문득 돌아본 사현과 눈이 마주쳤다.

‘…….’

먼저 웃은 것은 사현이었다. 부드러운 미소를 띤 얼굴에 여준이 꼴깍, 마른침을 삼켰다.

‘아까부터 선배 때문에 내가 숨을 못 쉬겠어요.’

‘…응?’

‘이런 거 좋아한다길래 재밌어서 보는 줄 알았더니, 그렇게 긴장하고 겁먹을 거면 왜 보는 거예요?’

악의 없는 질문임을 알면서도 순간 철렁했다. 이런 영화가 뭐가 좋아? 사이코패스냐? 정작 들었을 때는 농담으로 웃어넘겼던 영재의 말이 이제 와 가슴을 찌른 탓이었다.

‘아…. 음, 뭐랄까…. 뭐라고 설명해야 하나….’

이런 걸 왜 봐? 치우고 야한 거나 내놔봐. 빙글빙글 웃던 영재와는 다르다. 사현은 정말로 ‘왜’ 이런 영화를 보느냐고 묻고 있었다. 여준은 옆머리를 긁적이며 고민에 빠졌다. 말해도 될까? 이해해 줄까?

‘…안심이 돼서…?’

슬그머니 눈치를 보며 꺼낸 말에 사현이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강아지처럼 유순한 반응이었다. 뒷말을 언제든 들을 준비가 되어 있다는 듯이.

‘재난이나 살인마나 귀신이나…. 결국 다 영화 속 얘기잖아. 그러니까, 아무리 무서운 장면을 보고 있어도 사실 나는 안전하잖아.’

‘…….’

‘근데 보면서 무섭기는 무서우니까…. 다 보고 나면 아…. 진짜 내가 이렇게 안전한 집에서 무사히 잠드는 건 운이 좋아서구나, 그런 식으로…. 우울한 게 좀 없어진다고 해야 되나?’

여준이 호러 영화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아는 친구들은 제법 있었지만, 그 이유를 누군가에게 설명해보기는 처음이었다. 천천히 속엣말을 뱉어내는 여준의 등줄기로 식은땀이 한 줄기 흘러내렸다. 혹시 영재처럼 무턱대고 비난하면 어쩌나 뒤늦게 두려워졌다.

그러나 뒤늦게 입을 연 사현은 뜻밖의 질문을 해왔다.

‘우울했어요?’

담백하게 묻는 말에 순간 여준의 말문이 막혔다. 가만히 시선을 맞춰 오는 까만 눈동자는 우유를 잔뜩 탄 코코아 같았다. 부드럽고 달콤한 걱정이 알알이 박혀 그 자체로 위로의 말이 되었다.

‘…….’

여준은 확신했다. 영재가 분명히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사현을 아는 모든 이들이 잘못 알고 있다. 하지만 여준만은 알 수 있었다. 이 세상 누구도 모른다 해도 여준만은 알아야 하는 일이었다. 사현이 얼마나 다정한 사람인지.

‘별일은 아니고…. 요즘 좀 그렇긴 했어. 성적도 떨어지고, 영재랑도 싸우…. 아니, 싸운 건 아니고…. 아무튼 뭐 문제가 있는데 잘 풀기가 쉽지 않네.’

‘성적….’

흐르듯 지나간 단어를 굳이 잡아낸 사현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혹시 저 때문이에요?’

‘어?’

‘성적 떨어진 거요. 저 때문에 선배 공부할 시간 모자라서….’

‘어어? 아니, 아니야. 전혀 아니야.’

여준이 얼른 손사래를 쳤다. 이런 식으로 생각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그러나 사현은 여전히 석연치 않은 얼굴이었다.

‘진짜 아니야. 그게, 나 계란 알레르기 있잖아. 근데 우리 모의고사 보던 날 급식에 동그랑땡 나온 거 아무 생각 없이 먹었다가 탈 나서….’

‘…아.’

‘그래서 그랬어. 정신이 쏙 빠져가지고 오후 시험 쳤더니.’

답안지를 밀려 썼다는 말까지는 나오지 않았다. 아무 생각 없이 내뱉기엔 너무 한심한 실수 같았다. 다행히 사현은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알레르기가 심하신가 봐요.’

‘컨디션 따라 조금 달라. 어떨 땐 조금 섞인 정도는 괜찮고 어떨 땐 냄새만 맡아도 간지럽고 그래. 입시 끝나면 다시 치료받으려고.’

‘치료가 되는 거예요?’

‘완화시킬 수는 있대. 지금도 많이 나아진 거야. 어릴 땐 너무 심해서 응급실 실려 간 적도 있어.’

사현이 두 눈을 둥글게 떴다. 그럴 때면 또 세상 순한 얼굴처럼 보였다.

‘진짜 괜찮아. 성적 떨어진 것도 뭐, 평소보다 못 봤다는 거지 엄청 망친 건 아니야.’

‘그래요?’

‘응, 정말로.’

‘다행이네요.’

그리고 한동안 침묵이었다. 창밖으로 해가 조금씩 저물고 있었다. 무지개색 반사광을 띤 낙조가 얇은 커튼 틈으로 스며들었다. 사현은 말이 없었고, 여준은 다음으로 재생할 DVD를 손에 쥔 채 그런 사현을 천천히 돌아보았다.

뒤늦게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언제나 혼자 있던 공간, 가장 친한 친구의 초대도 거절하고 틀어박힌 거실에서 노을을 받으며 앉아 있는 사현의 존재가 문득 낯설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이상하지는 않았다. 사현은, 비유하자면 꿈에서 갑자기 만난 신묘한 동물 같았다. 원래 알고 있던 무엇과도 다르지만 그렇기에 눈을 뗄 수 없는 것.

‘…….’

천천히 다음 DVD를 재생하는 여준의 손끝이 조금 떨렸다. 이름을 모르는 감정이 가슴 속에서 한 올씩 날실로 걸리고 있었다. 씨실까지 걸려 완벽하게 짜였을 때 어떤 무늬가 나올지는 여준 자신조차 알 수 없었다.

창밖은 곧 완전히 어두워졌다. 마지막으로 튼 영화는 SF호러였다. 타인의 속마음이 들리는 초능력을 손에 넣은 남자가 서서히 미쳐가다 살인마가 된다는 내용이었다. 영화는 절망한 주인공에게 끝없이 퍼부어지는 악의를 실감 나게 그려 냈다. 그러나 마지막에 가서는 그 모든 것이 주인공의 망상이었을 가능성 역시 남겨 놓았다. 심각한 표정으로 영화에 집중하고 있던 사현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물었다.

‘결론이 뭐예요? 초능력 같은 건 없었고 그냥 저 남자가 미친 거였다고요?’

‘그건 아무도 몰라. 친구가 자기를 죽이려 했던 건 진짜였잖아.’

‘……?’

‘이런 걸 오픈 엔딩이라고 하는데, 간단히 설명하자면…. 이렇게도 볼 수 있고 저렇게도 볼 수 있는 결론을 내는 거야. 정말 초능력이 있어서 복수한 걸 수도, 그냥 미쳐서 애먼 사람 죽인 걸 수도 있다고.’

‘왜 그런 스토리를 써요? 영문을 모르겠네.’

사현의 어리둥절한 얼굴에 여준이 조금 웃었다. 모양 좋은 머리통 위로 물음표가 둥둥 떠다니는 것이 보이는 듯했다. 설명을 듣고도 영 납득이 가지 않는지 사현은 테이블에 올려두었던 DVD 패키지를 뒤적이기 시작했다.

‘이거 설명엔 초능력이라고 나와 있는데요.’

‘시놉시스니까. 진짜 결말은 영화를 봐야 알지.’

‘잘 모르겠는데…. 아무튼 믿고 싶은 대로 믿으면 된다는 거죠?’

무심코 끄덕이던 여준이 순간 멈칫했다. 천천히 시선을 맞추자 까마득한 눈동자가 조용히 따라붙었다.

‘어떻게 믿고 싶은데?’

사현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정신병이었던 걸로요.’

‘그거였으면 좋겠어?’

‘끔찍하잖아요. 남의 속마음이 들리는 초능력은.’

어떤 점에서? 여준은 덧붙여 묻지 않았다. 화면 속 주인공이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해 절벽으로 향하는 장면이 막 흘러나왔기 때문이다. 차가운 공기로 가득 찬 거실은 곧 다시 고요해졌다. 무거운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던 사현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다행이죠.’

그 소리는 너무나 미약하고 가늘었기 때문에.

‘안 들린다는 게….’

여준은 아주 뒤늦게야 돌아보았다.

‘응?’

놓친 말을 되잡으려 묻자, 돌아본 사현의 눈동자가 커다랗게 뜨였다.

‘방금 뭐라고?’

사현이 마른침을 삼켰다. 크게 요동친 목울대에 소름이 돋아 있었다.

‘…들렸어요?’

짓눌린 목소리로 묻는 말에 여준은 느릿느릿 두 눈을 깜빡였다. 뭐가? 방금 또 뭐라고 했어? 재차 묻지 못한 것은 사현이 당장 숨이 넘어갈 듯 창백하게 굳어 있어서였다.

남의 속마음이 들린다는 건 끔찍하잖아요. 그 뒤로도 오랫동안 여준은 사현에게 묻고 싶었다. 뭐가 그렇게 끔찍했니? 남의 속마음이 네게 들릴 상황이? 아니면….

네 마음이 내게 들릴 상황이?

구태여 그 자리에서 묻지 않은 것은 얼마든지 기회가 있다고 생각해서였다. 사현과 학교에서 함께 보낼 시간은 1년도 넘게 남아 있었다. 조금 더 친해지고, 가까워지고,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게 될 테니까 괜찮다고.

여준은 이후로 오랫동안 후회하게 된다. 안일했던 어린 날, 앞으로도 이 세상이 자신에게 그리 나쁜 방향으로 움직일 일은 없을 거라고 무턱대고 믿었던 어리석음에 대해.

사현은 자고 가라는 권유를 극구 뿌리치고 늦은 밤 여준의 집을 떠났다. 당시의 여준이 알 리가 없었다. 사현과 웃는 얼굴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던 마지막 밤을 그렇게 끝내서는 안 되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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