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불협화음
아이의 침구를 세탁하고, 미뤄 뒀던 청소를 끝내니 어느새 해가 뉘엿뉘엿 저물어 갈 시간이었다. 소파에 늘어진 채 핸드폰을 만지작대던 여준의 손끝에 사진첩이 걸렸다.
“…….”
핸드폰 앨범은 거의 아이 사진으로 가득했다. 굳이 의식하지 않고 습관적으로 찍은 사진들이었다. 자는 모습, 손을 잡고 따라오는 모습, 어린이집에서 장기 자랑을 하고 있는 모습이나 부러진 장난감을 쥔 채 서럽게 우는 모습 따위였다.
메신저 프로필 사진도 아이였다. 운 좋게 찍었던 활짝 웃는 사진으로 설정해 둔 지가 벌써 반년은 넘은 것 같았다. 프로필 수정 버튼에 엄지 끝을 댔다 떼기를 반복하며 여준은 잠잠한 생각에 빠져들었다.
차라리 데리고 도망칠까.
모아 둔 돈이라면 있다. 어딜 가든 뭐라도 해서 자리 잡고 살 자신도 있다. 여차하면 싱가포르로 갈까 싶었다. 부모님이 나란히 퇴직하신 후 은퇴 이민지로 선택한 나라였다. 계절마다 전해지는 안부에는 여유롭고 따사로운 부부의 삶이 고스란히 묻어났다.
아이를 데리고 가면 반가워하시겠지. 상상만으로도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은아가 죽었을 때, 장례식 이틀 후에야 한국에 도착한 어머니는 여준을 붙들고 한참 울다가 말했다.
‘여기서 이러고 있지 말고, 지오 데리고 너도 건너와라. 거기서 같이 살자. 혼자 회사 다니고 애 키우고, 그거 너 못해. 어쩌려고 그래.’
그때 갔어야 했나. 여준은 두 손으로 미간에 자리 잡은 후회를 닦아 냈다. 그때는 어쩐지 이상한 오기에 가득 차 있었다. 애를 혼자 키우겠다고? 너는 못 해. 모두가 그렇게 말했기에 오히려 반발하고 싶었다. 왜 못한다고만 말해? 나는 할 수 있어. 내가 남부럽지 않게 잘 키울 수 있어.
“…하아.”
이제야 알 것 같았다. 그때 갔어야 했다. 장인장모도- 차라리 지오가 눈에 안 보였다면 지금처럼 병들어 있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외동딸이 남겨 두고 죽은 손자가 얄밉고 야속하게 느껴지는 것이 부모 마음이라면, 그 또한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
그러자 또 마음이 아팠다. 아이를 두고 이런 생각까지 해야 하는 상황 자체가 신물이 났다. 여준이 두 눈을 꾹 감은 채 미간을 여러 번 눌렀다. 하염없이 우울한 감상에 빠져드는데 머리맡에 둔 핸드폰이 울렸다. 모르는 번호였지만 우선 받아 들었다.
“예, 여보세….”
- 도련님 지금 댁으로 가고 계십니다.
여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윤 기사의 목소리였다. 살짝 어눌한 발음에서 사현이 그에게 낸 상처가 보이는 듯했다.
“지오가요?”
- 예, 여사님께서…. 직접 운전하셔서….
차마 더 이어지지 못하는 말에 여준이 대신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언제 출발하셨습니까?”
- 십 분쯤 됐습니다.
더 이상 말을 섞고 싶지도 않았다. 전화를 끊어 버린 여준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섰다. 도대체 사람이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집에 네 살짜리 어린애를 무턱대고 데려오는 이유가 뭐란 말인가. 그것도 매번.
차가 막히지 않는다면 처가에서 여준의 집까지는 이십 분쯤 걸린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초조하게 기다렸지만 도저히 올라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답답함에 비상계단으로 향한 여준이 계단을 두 개씩 뛰어내렸다.
안 되겠어.
발을 디딜 때마다 결심이 굳어졌다.
어떻게든 해야 해. 뭐라도 해서 이 상황을 해결해야 해. 지오가 아니라 나를 위해서라도….
중얼거리던 여준의 발끝이 마지막 계단 턱에 미끄러졌다.
“엇…!”
중심을 잃고 꺾인 무릎이 바닥으로 쿵, 떨어졌다. 악, 외마디 비명을 지르고 몸을 웅크린 여준은 한동안 일어서지 못했다. 무릎부터 발목까지가 반대로 비틀린 듯 욱신거렸다.
“아, 씨…. 정말 별….”
다행히 계단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절뚝대며 계단 문을 열고 나선 여준에게 경비원이 목례를 해 보였다.
“어디 다치셨어요?”
“괜, 괜찮습니다.”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나선 여준의 눈에 막 정문을 빠져나가는 차가 보였다. 번호판까지는 못 봤지만 장모의 차가 틀림없었다. 재빠르게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지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지오야!”
크게 부르며 놀이터로 향했다. 이전에도 장모가 아이를 놀이터에 내려 두고 혼자 돌아간 적이 있었다. 노을이 저물기 시작한 아파트 놀이터는 한산했다.
“지오야, 성지오!”
아이를 발견한 것은 그때였다. 모래 장난 장판에 앉아 뭔가 열중한 자그마한 뒷모습이 보였다. 하아, 안도의 한숨을 내쉰 여준이 아픈 걸음을 재촉하던 때였다.
“…….”
차가운 칼날로 신경을 긁는 듯 섬뜩한 감각이 닥쳐왔다.
“…….”
언뜻 그림자처럼 보였다. ‘그’는 노을이 드리운 보랏빛 그늘 끄트머리에 발을 대고 서 있었다. 언제나 그랬듯 새카만 정장 차림이었다. 심장이 튀어나올 듯 강하게 뛰고 온몸에 식은땀이 솟았다.
사현이었다. 놀이터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 선 사현이 아이를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읏.”
눈을 질끈 감았다 떴지만 사현의 모습이 사라지는 일은 없었다. 여준은 발의 아픔도 잊고 아이에게 달려들었다. 와락 끌어안아 품으로 감추자 깜짝 놀란 아이가 얼떨떨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아빠.”
그러더니 곧 보호자를 알아보고 자그만 두 손으로 여준의 목을 끌어안았다. 여준은 두 팔로 아이를 빈틈없이 안은 채 사현을 똑바로 노려보았다.
“아빠, 아빠 심장 엄청 빨리 뛰어.”
아이가 재밌다는 듯 말했다. 여준의 눈가로 굵은 땀방울이 툭 흘러내렸다. 사현은 아직도 미동 없는 모습으로 여준과 그의 아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아빠, 할머니가 이거 줬어.”
아이가 품에서 꼼지락거렸다. 여준은 쉿, 하며 아이의 동그란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사현이 한 걸음을 내디딘 것은 그때였다.
“…….”
숨을 잔뜩 들이켠 여준이 앉은 채 뒷걸음쳤다. 그러자 사현의 얼굴로 짧은 미소가 번졌다.
“누가 보면….”
거리는 제법 벌어져 있다. 그러나 인적 드문 공터라 사현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똑똑히 들렸다. 고막을 바늘로 긁는 듯 날카롭게 쉬어 버린 목소리였다.
“귀신이라도 본 줄 알겠어요.”
“…….”
“좀 너무하네…. 선배.”
“…네가.”
“‘왜 여기 있어?’”
“…….”
“그 질문 질리지도 않는지.”
겁먹은 말투를 그대로 흉내 낸 사현이 사납게 웃었다. 마른침을 삼킨 여준이 서서히 일어나다 그대로 주저앉았다.
“…가까이 오지 마.”
짧은 경고를 내뱉고 주위를 살폈다. 기묘하리만큼 인적이 없었다. 초조해진 여준이 아이를 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아이가 갑갑함을 참지 못하고 칭얼대기 시작했다.
“아빠, 숨 막혀….”
여준의 등줄기가 식은땀으로 축축해졌다. 머릿속엔 오로지 한 가지 생각밖에 없었다. 내가 저 남자에게서 아이를 지킬 수 있을까? 도저히 희망적인 관측이 떠오르지 않았다. 남자는 너무나 새카만 존재였고, 아이는 터무니없이 작고 연약했다.
“뭘 그렇게까지 겁을 내요?”
“…….”
“내가 애한테 해코지라도 할까 봐?”
“가까이 오지 말라고 했어!”
여준이 벌컥 소리를 지르자 안겨 있던 아이의 어깨가 딱딱하게 굳었다. 이대로 안고 경비실까지만 도망치면 괜찮지 않을까. 곁눈질로 뒤를 살피던 그가 아이를 힘껏 안아 올린 순간이었다.
“조심…!”
어마어마한 통증이 들이닥쳤다. 달군 쇠꼬챙이가 무릎부터 발목까지 박힌 듯했다. 낮은 비명을 내지른 여준이 아이를 끌어안은 그대로 쓰러지고, 달려온 사현이 몸을 숙였다.
“으윽….”
낮게 신음한 여준의 시야로 크고 거친 손이 쑥 들어왔다. 진저리치며 물러섰지만 다시 엉덩방아를 찧을 뿐이었다.
“가만히 있어요, 좀!”
딱딱하게 외친 사현이 여준의 어깨를 잡아 상체를 일으켰다. 아이는 여준의 품에 푹 파묻힌 채 미동조차 없었다.
“왜 일어서질 못해? 어디 다쳤어요?”
“…….”
“다리 내 봐요.”
“저, 저리….”
“제발, 말 좀 들으라고!”
내지른 목소리 끝이 섬뜩하게 갈라졌다. 여준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그때 아이가 크게 딸꾹질을 하더니 흐느끼기 시작했다.
“…….”
이어 뜨뜻하고 미지근한 액체가 여준의 배로 스며들었다. 내려다보니 아이가 한껏 눈치를 보며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오래 외출할 땐 기저귀를 꼭 채워 달라고 그렇게 말을 했는데. 여준은 그만 허무하게 웃어 버렸다.
“아, 아빠…. 나 쉬…. 아빠, 미안….”
“…괜찮아.”
“아빠, 미안…. 아빠….”
“아니야, 괜찮아. 그럴 수 있어. 우리 지오 아직 아기니까 그럴 수도 있어. 울지 마.”
우습게도 살짝 제정신이 돌아왔다. 여준은 천천히 숨을 들이마셨다. 겁낼 것은 아무것도 없다. 아무리 사현이라도 이런 탁 트인 아파트 단지에서 뭘 어쩔 것인가. 이제는 더 이상 십 대도 아닌데.
“지오, 걸을 수 있겠어? 아빠 무릎이 아야해서 지오 안고 못 갈 것 같은데.”
“응, 걸을 수 있어….”
“그래, 걸어서 집까지만 가자? 착하다.”
아이를 떼어 내자 스멀스멀 올라오는 지린내에 코가 매웠다.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인간의 몸이 배출하는 온갖 노폐물에 익숙해지는 일이었다. 여준은 젖은 셔츠를 툭툭 털어 낸 뒤 한쪽 발만 딛고 섰다. 무릎이 여전히 아팠다. 아무래도 병원에 가 봐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전에 옷을 갈아입고 아이를 씻겨야 했다.
“선배.”
듣지 못한 척 돌아섰다. 절뚝대며 걸어가는 내내 아이의 손이 자꾸만 미끄러졌다.
“병원부터 가요, 선배.”
사현이 끈질기게 따라붙었다. 여준은 그의 시선을 외면한 채 아이를 잡아끌었다.
“…선배!”
낮게 뇌까린 사현이 여준의 팔을 붙들고 돌려세웠다. 여준은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한 입을 굳게 다문 채 그를 노려보았다. 사현은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시선을 내리깔고 있었다. 그제야 여준은 그가 자신의 발끝을 빤히 보고 있음을 알았다.
“병원부터 가자고요.”
그 시선 끝을 쫓아가 보니 핏물에 척척하게 젖은 발이 보였다.
“…….”
찢어진 무릎에서 흐른 피가 바짓단을 온통 적시고 신발 밑창까지 스며 있었다. 머리가 아찔해졌다. 멍하니 입술을 짓씹던 여준이 남은 힘을 짜내 그의 손을 뿌리쳤다.
“…놔.”
“…….”
“가더라도 내가 가.”
어떤 상태인지 눈으로 확인하고 나니 오히려 마음이 편해졌다. 많이 찢어져서 그렇게 아팠구나. 하지만 뼈가 부러진 건 아니다. 못 걸을 이유도 없다. 욱신거리긴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 쉽게 나을 상처다. 여준은 사현에게서 눈을 돌린 채 조심스레 아이를 안아 들었다. 아이는 순순히 그의 목을 감고 매달렸다.
“선배.”
“너한테 선배 소리 들을 이유 없어.”
“그럼 뭐라고 부를까요.”
“아무 말도 하지 마. 아무것도. 제발….”
“…….”
“제발 내 눈에 띄지 마.”
쥐어짜듯 말한 여준이 한 걸음을 더 옮겼다. 사현이 주머니에 손을 넣고 선 채 그런 여준을 빤히 바라보다 툭 던지듯 물었다.
“뭐가 그렇게 무서워요?”
명백한 비웃음이 스민 목소리였다.
“내가 선배나 애한테 해를 끼칠까 걱정되면 도움을 청하는 게 낫지 않을까요? 가족이든, 경찰이든….”
“…입 닥쳐.”
“지금도, 얼마든지 소리 지를 수 있잖아? 뭘 그렇게 쉬쉬하고 있는 걸까?”
“…….”
“뭐가 두려워서?”
“…….”
“내 존재가? 왜? 내가 당신에게 손을 댈까 봐? 아니면….”
“그만….”
“알려질까 봐?”
“그만하라고 했잖아….”
“내가 왜 그런 짓을 했는지.”
고개를 돌린 순간 눈이 마주쳤다. 어느새 가까워진 사현의 얼굴에서 두 눈이 형형히 빛난다. 귀신의 눈도 이렇지는 않을 것이다. 선명한 흉터 양쪽으로 날카롭게 쏘아보는 시선에는 어떤 감정도 비치지 않았다. 홍채와 동공이 구별되지 않을 만큼 새카맣게 물든 눈동자, 심연을 둥글게 감싼 파르스름한 눈자위에 소름이 끼쳤다.
“차라리 빌어 보지 그래요?”
허옇게 트고 피 맺힌 입술은 뱀처럼 비열한 말을 뱉고.
“‘사현아, 제발 부탁이니까.’”
“그만해….”
“‘우리 장모님한테만은 알리지 말아 줘.’”
“…사현아.”
여준의 고개가 점점 밑으로 떨어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여준의 말투를 마음껏 흉내 내는 사현의 혀끝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네가 나 좋아해서 내 와이프 죽였다는 거.’”
“…임사현!”
얼른 아이의 귀를 막은 여준이 크게 헐떡였다. 뚝, 거짓말처럼 비웃음을 멈춘 사현은 여전히 싸늘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다 고저 없는 한마디를 덧붙였다.
“…와, 정말인가 보네.”
“…….”
“정말 그게 무서워서 이러고 있는 거였어?”
그것은 여준이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끔찍한 결말이었다. 2년 전의 사고를 일으킨 장본인과 자신이 어떤 관계인지 처가에 알려지는 것. 이어질 지옥도 충분히 예상이 갔다. 금쪽같은 딸을 하루아침에 잃은 이유가 알고 보니 사위의 치정이라니. 그것도 남자끼리의.
아직까지 들키지 않은 이유는 짐작이 갔다. 사현이 고등학교 재학 중 퇴학당했고, 주소지가 여준과 아예 달랐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사현이 이런 식으로 활개치고 다닌다는 사실이 처가 식구들의 귀에 들어간다면 전부 들통나는 것도 시간문제다.
“…너.”
아이는 얌전히 여준의 손에 귀를 맡기고 있었다. 그래도 여준은 최대한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바라는 게…. 뭐야.”
“…뭐라고요?”
“바라는 게 있…, 있어서 이러는 거잖아. 뭐야? 뭐가 필요한데? 돈이야?”
“…….”
사현은 잠시 말없이 여준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디까지 가라앉았는지 가늠조차 되지 않는 시선이었다.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한 침묵이 흘렀다. 한참 후에야 픽 웃은 그가 입술을 비틀어 열었다.
“돈, 재밌는 생각이네. 뭘 얼마나 줄 수 있는데요? 이 아파트라도 내줄 건가.”
“…최대한 빼내 볼게. 못해도 1억…. 정도는….”
“선배, 경고하겠는데요.”
고개를 돌린 사현이 멀리 한숨을 내뱉었다. 여준이 어깨를 움츠리며 한 걸음 물러섰다.
“나 같은 인간한테 그런 말 함부로 꺼내지 말아요.”
“…….”
“내가 바라는 게 돈이었다고 쳐요. 1억? 당신 정도 되는 사람한테 꼴랑 그거 긁어내고 만족할 것 같아? 바닥까지 탈탈 털어서 당신과 당신 애새끼, 양가 친척 사돈의 팔촌까지 알거지로 만들 때까지 절대 안 떨어져 나가지.”
“…읏.”
“그 나이 먹었으면 알 때도 되지 않았어요? 세상 무서운 거.”
여준의 아랫입술이 수치심으로 파르르 떨렸다. 사현은 그를 외면한 채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번호 찍어요.”
“…뭐?”
“바라는 게 뭐냐면서요.”
“…….”
“바라는 거. 번호. 다른 말로 연락처.”
간단히 말한 사현이 어깨를 으쓱했다. 여준은 한참을 망설인 뒤에야 그가 내민 핸드폰 액정에 손끝을 가져다 대었다. 어깻죽지부터 와들와들 떨려 똑바로 입력하기가 쉽지 않았다.
“전화하면 바로 받아요.”
“…그건 힘들 수도 있….”
“노력해 봐요. 내 기분 거스르지 않게. 그 정도 각오도 안 돼 있어요?”
“…….”
“비밀 지키고 싶잖아요.”
샐쭉 웃은 사현이 핸드폰을 도로 챙겨 넣었다. 가칠한 뺨으로 길게 보조개가 팬다. 여준은 떨리는 손끝을 꾹 말아 쥐었다.
사현이 어쩌다 한 번 웃을 때마다 그 뺨에 패는 보조개에 눈을 뺏기던 때가 있었다. 신기하다고 생각했었다. 웃는 일이 거의 없는 사현이, 웃을 때면 그렇게 환한 얼굴이 된다는 게.
“그럼 갈게요.”
덤덤한 작별인사를 끝으로 사현이 드디어 한 걸음 물러섰다.
“전화 받아요.”
“…사현아.”
그 걸음을 붙드는 여준의 목소리 끝이 갈라져 있었다. 사현은 눈썹을 까딱이며 멈춰 섰다.
“내가….”
여준에게 있어 사현은 십 년이 지나도록 미지의 영역에 있었다. 언제나 묻고 싶었다. 한순간도 빠짐없이.
“내가…. 너한테.”
“…….”
“뭘 그렇게 잘못한 거야…?”
사현은 두 눈을 천천히 깜빡이고 서 있을 뿐이었다. 노을의 끝물을 속눈썹 끝에 매단 채, 아직도 아파 보이는 흉터를 사이에 두고.
***
나는 너에게 뭘 그렇게 잘못했을까.
달빛이 스며든 골목을 홀로 걷던 열여덟의 어느 날, 내내 여준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던 의문이었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을까.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왜….
…내가 왜 그렇게 미웠을까.
“선임님, 팀장님이 부르시는데요.”
문득 날아든 목소리에 여준이 퍼뜩 정신을 차렸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돌아보니 심각한 표정을 한 팀장이 열심히 눈짓하고 있었다. 여준은 들고 있던 서류를 내려놓고 얼른 자리에서 일어났다.
“왜 그래? 텐션 안 돌아와?”
“아닙니다, 잠깐 딴생각 좀 하느라고…. 죄송합니다.”
“아냐, 아냐. 그런 얘기하려고 부른 게 아니고…. 잠깐 나가서 얘기할까?”
팀장이 먼저 일어나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기분이 나빠 보이지는 않는다. 여준은 의아함을 감추고 그의 뒤로 따라붙었다.
“무슨 일이신지….”
“혹시 있잖아. 지난주에 무슨 일 있었어?”
사무실 문을 닫자마자 팀장이 물었다. 여준의 가슴이 쿵 내려앉았다. 지난주에? 당연히 일이야 많았다. 그 결과 무릎에 커다란 반창고도 붙였다. 여준이 입술만 달싹이고 서 있자 팀장이 얼른 말을 바꿨다.
“아니, 다른 게 아니라…. 은 주임 말이야.”
“아, 네.”
당연하고 다행스럽게도 회사 내 이야기였다. 여준이 얼른 고개를 끄덕였다.
“오늘 아침에 갑자기 그만두겠다고 하더라. 근데 죽어도 이유를 말 안 하는 거야.”
“…네?”
“묻지 말고 그냥 퇴사하게 해 달라는데 그게 말이 돼? 아무튼 여자들은 남직원에 비해 책임감이 없어. 기껏 일 다 가르쳐 놓으면 이리 빠지고 저리 빠지고….”
“…….”
“근데 성 선임도 알다시피 은 주임이 원래 좀 예민하잖아요. 그치요? 남자 사원들 하는 말에 툭하면 이리 삐치고 저리 삐치고. 이번에도 아마 뭐 수틀린 일이 있어서 저러는 거 같거든.”
“…….”
“그래도 남자 사원 중에는 성 선임을 제일 잘 따르잖아, 은 주임이.”
팀장이 달래듯 말하며 여준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부하 직원의 문제를 맡아서 해결하는 것도 업무의 일환이지만, 정작 여준도 퇴사를 염두에 둔 상황인지라 선뜻 대답하기 망설여졌다.
“은 주임도 참…. 말로는 그렇게 남자들이, 남자들은, 어쩌고 하면서 성 선임한테는 살가워. 어차피 잘생기면 다 된다 이거지.”
“…그런 문제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알아, 알아. 해 본 소리야. 아무튼 한번 데리고 가서 얘기 좀 들어 줘. 알았지? 진급 얘기도 넌지시 꺼내 보고.”
어차피 잘생기면 다 된다 이거지. 하여튼 여자들은 얼굴만 보지. 여준이 살면서 동년배 남자들에게 숨 쉬듯 듣는 레퍼토리 중 하나였다. 그들은 그런 식으로 은밀하게 여준의 장점은 오로지 외모 하나라는 듯 이야기하곤 했다. 여준이 사람을 대할 때, 특히 여성을 대할 때 얼마나 말 한마디 한마디를 조심하고 몸가짐에 신경 쓰는지는 관심도 없다는 듯이.
“진급이라니…. 이번에는 은 주임 차례 아니라고 하지 않으셨나요?”
“아니지, 아닌데. 혹시 고과 때문에 판 까는 건지 떠보라는 소리야.”
“은 주임이 그럴 사람은….”
“글쎄, 안다니까. 그냥 이건지 저건지 있는 대로 푹푹 찔러 보라고. 성 선임한테는 솔직하게 말할 거 아냐.”
팀장은 슬슬 이 화제가 귀찮아진 듯했다. 더 이야기해 봐야 소용없을 것이 뻔했다. 가볍게 한숨을 내쉰 여준이 사무실로 돌아갔다. 문을 닫자마자 복사기 앞에 서 있던 은 주임과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여준이 무슨 말을 듣고 왔을지 다 안다는 듯 살짝 미소 지었다.
***
“무슨 일 있는 거예요?”
한참 업무가 바쁠 시간이라 다행히 휴게실이 비어 있었다. 여준은 은 주임에게 앉아 있으라 손짓하고 커피 두 잔을 내렸다. 그녀는 전에 없이 시무룩한 얼굴로 가만히 여준을 기다리고 있었다.
“나한테 말하기 좀 그러면 책임님 불러 드려도 되고요.”
“아니에요. 그러지 마세요.”
“그러면….”
“…그냥 아무것도 묻지 말고 사표 수리해 주셨으면 좋겠는데, 그건 역시 어렵겠죠?”
은 주임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여준은 말없이 그녀가 이야기를 꺼내 주길 기다렸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 은 주임의 입은 다시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은 주임도 알다시피…. 지금 우리 인력 부족이잖아요. 팀장님이 은 주임 그만둘까 봐 걱정이 많으신가 봐요. 나 지금 스파이짓하러 온 거예요. 은 주임 잡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기필코 알아 오라고 해서.”
담담하게 늘어놓는 아부의 말에 은 주임이 피식 웃었다. 그 미소를 본 후에야 여준은 그녀의 낯빛이 어딘가 예전과 다른 것을 느꼈다. 묘하게 핏기가 없어 보였다.
“은 주임, 혹시….”
“…….”
“우리 팀이 문제인 거예요?”
그러자 은 주임이 흑, 하며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마른 어깨가 한껏 들썩이기 시작했다. 여준은 당황하지 않고 미리 가져다 두었던 티슈를 내밀었다. 은 주임은 한참을 흐느낀 후에야 입을 열었다.
“선임님, 저 더 이상 이 팀에서 근무 못 하겠어요….”
“문제가 뭔지 말해 줘요. 내가 최대한….”
“저희 저번 주에 프로젝트 왜 갑자기 엎어졌는지 알고 계세요?”
알고는 있었다. 경쟁 회사에서 지나치게 비슷한 상품을 출시했던 탓이다. 그 외에도 여러 요인이 겹쳤지만 그것이 주된 이유였다. 맥이 빠지긴 했으나 자주 있는 일이었기에 딱히 이상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KL에 전화 돌린 게 저였어요. 장기 연금 신상품 출시 계획 있냐고.”
“…아.”
“그런데요, 선임님. 그 사람들이 말 안 해 준 건 제 탓도 아니고 그 회사 탓도 아니잖아요. 말해 주면 호의로 받는 거고, 아니면 아닌 거잖아요.”
“맞아요, 그렇죠.”
“근데 팀장님이 저더러 그러시는 거예요. 너는 그쪽 담당자 만나서 술 한 잔도 안 따라 줬던 거냐고. 그게 아니고서야 그쪽에서 어떻게 그렇게 매몰차게 뒤통수를 쳤느냐면서.”
여준은 턱 아래까지 올라온 한숨을 간신히 도로 삼켰다. 어느 정도는 예상했던 바였다. 팀장이 퇴사 이유를 묻는데 대답하지 않았다는 건, 팀장 자체가 퇴사 이유였기 때문이리라고.
“선임님, 저요. 그동안 많이 참았어요. 팀장님 말끝마다 여자가 어쩌네 하고, 농담이랍시고 금감원 사람들이 우리 은 주임 얼굴 한 번 보면 일 편해질 텐데 하고, 거기다 불편한 티 내면 예쁘다고 칭찬한 건데 뭐가 문제냐는 식으로 저만 예민한 사람 만들고.”
“…그래요, 그랬죠.”
“제 얼굴이랑 업무가 대체 무슨 상관이에요? 왜 제가 이런 소리 계속 들어 가며 회사 다녀야 해요? 이제 팀장님 얼굴만 봐도 구역질이 나요. 근데 이런 이유로 팀 옮겨 주지도 않을 거고, 더는 제가 못 버틸 것 같아서….”
차라리 사원끼리의 트러블이라면 일 처리가 쉽다. 경력이 더 짧은 쪽을 다른 팀으로 배치하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팀장이 문제라면 어떻게 해도 은 주임의 입장만 난처해질 터였다. 한참 고민하던 여준이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은 주임. 팀장님만 문제인 거면 내가 계리 교육 알아봐 줄게요. 다음 달쯤 공문이 뜰 텐데, 그거 합격해서 미국 계리 따면 반년간 미국 연수 다녀올 수 있어요.”
“…….”
“은 주임 이번에 진급 순서 아닌 건 알죠? 그래서 안 그래도 올해 고과 뜨기 전에 권하려고 했어요. 이게 직전 고과가 안 좋으면 신청이 안 되는 거라서.”
은 주임이 천천히 두 눈을 깜빡이기 시작했다. 눈동자에도 서서히 빛이 돌아왔다. 다행히 반가운 소식인 듯했다.
“교육 들어가면 팀장님이랑 마주칠 일 많이 없을 거고, 운 좋으면 연수 가 있는 사이에 팀장님이 다른 팀으로 가실 수도 있고요.”
“일이 그렇게 잘 풀려 줄까요…?”
걱정스럽게 말하는 얼굴에는 어느새 약간의 장난기가 돌아와 있었다. 여준도 그제야 조금 웃었다.
“잘 풀려 주길 바라야죠. 아무튼, 내 말대로 하겠다는 거죠?”
“으음….”
“팀장님께는 내가 잘 말씀드릴게요. 이렇게 그만두면 아깝잖아요. 은 주임 지금까지 쌓아 온 게 있는데.”
입을 꾹 다문 채 한참 손끝만 만지작대던 은 주임이 이내 큰 숨을 들이쉬었다. 그러고는 여준을 향해 고개를 살짝 숙였다.
“죄송해요…. 부탁드릴게요.”
“그래요, 너무 걱정하지 말고요.”
“감사해요, 선임님. 선임님 안 계셨으면 정말 진작 그만뒀을 텐데….”
“…….”
“직장 생활 그렇게 오래 한 건 아니지만…. 선임님 같은 사람은 정말 처음이에요. 부하 직원한테 함부로 대하시는 법도 없고, 저한테도 아직까지 꼬박꼬박 존댓말 써 주시고….”
여준은 대답 없이 슬쩍 웃었다. 은 주임이 조금 착각하는 부분이 있었다. 여준이 존댓말을 고집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여직원 한정이었다.
결혼 직후, 은아는 툭하면 회사 앞까지 찾아와 여준을 기다리곤 했다. 대로변에 차를 대 놓고 버티고 있는 통에 건물 보안 팀에 불려 간 적도 여러 번이었다. 그녀는 여준이 퇴근하면 그의 핸드폰을 낱낱이 훑어 검사하고 나서야 돌려주었고, 여자 이름이 메신저에 떠 있으면 대뜸 전화를 거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정말 왜 그래? 뭘 의심하는 거야?’
‘왜 이름을 부르냐고! 얘랑 무슨 사인데!’
‘신입이라 아직 직급이 없으니까 그렇지. 이름 좀 불렀다고 다 이상한 사이야? 그게 말이 돼?’
‘뭐라도 붙여서 불러! 존댓말 꼬박꼬박 해! 남자가 여자한테 이름 부르고 반말 쓰는 게 무슨 뜻인지 정말 몰라? 이 계집애가 왜 이렇게 대놓고 꼬리를 치겠어? 다 당신이 여지를 주니까 그러는 거 아냐!’
은아는 한번 흥분하면 도저히 말이 통하지 않았다. 여준은 점차 포기하고 은아가 원하는 대로 따르게 되었다. 여직원과는 절대 개인 메신저로 연락하지 않았고, 연락처도 저장하지 않았다. 은아가 새벽 나절에 난데없이 여준의 핸드폰 기록을 뒤지다 무턱대고 전화를 걸어 생사람을 잡는 것보다는 그게 나았다.
가린과 멀어진 것도 그 시기였다. 가린은 은아가 어떤 성격인지 파악한 뒤로는 절대 먼저 여준에게 연락하지 않았고, 여준은 일과 은아에게 번갈아 치이느라 바빴기 때문에 자연히 서로 연락이 끊어졌었다.
‘우리 성 주임이 너무 잘생겨서 그렇지 뭐. 와이프가 불안해할 만도 하지.’
팀장은 술자리에서 툭하면 은아가 한 짓을 안줏거리로 삼곤 했다.
‘근데 형수님도 예쁘시던데요. 전에 한 번 주임님 태우러 오셨을 때 봤어요.’
‘아, 맞아, 맞아. 연예인인 줄 알았어요. 얼굴 너무 조그맣고 하얗고, 청순한 스타일?’
팀원들이 애써 은아를 좋게 포장해 주는 것도 민망하긴 마찬가지였다. 그 모든 상황이 불편했지만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여준은 애써 웃으며 영혼 없는 사과의 말을 늘어놓았다.
‘제가 좀 믿음을 못 주나 봐요. 앞으로 조심하겠습니다.’
그러면 팀장은 그때서야 만족한 듯 다른 화제를 꺼내 오는 것이었다.
“…아무튼 감사해요, 선임님. 말씀하신 대로 제가 좀 더 힘내 볼게요.”
잠시 딴생각에 빠져 있느라 은 주임의 말을 놓쳤다. 여준은 깜짝 놀란 티를 내지 않으려 조심하면서 의례적인 미소를 띠었다.
“아니에요, 내가 더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없어서 미안하네요.”
“그런 말씀 마세요. 얼마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는데요.”
“…….”
“저 들어가 볼게요. 감사했습니다.”
몇 번이나 고개를 숙여 보인 은 주임이 먼저 휴게실을 나섰다. 여준은 문이 닫히고 나서야 커피 잔을 쥔 채 소파 등받이에 파묻혀 누웠다. 높은 천장의 격자무늬를 하나하나 세고 있자니 점점 머리가 멍해진다. 그는 눈을 천천히 감았다 뜨며 방금 전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그러자 웃음이 나왔다. 그토록 철저하게 ‘좋은 사람’의 스탠스를 유지하는 대화라니. 당장 회사부터 때려치울 고민을 하고 있는 와중에도 상사에게나 후배에게나 밉보일 짓을 하지 않으려는 스스로가 우습고 경멸스러웠다.
주머니에 넣어 둔 핸드폰이 울리기 시작한 것은 그때였다.
“…….”
여준의 눈동자가 스르르 가라앉았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발신자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았다. 진동은 일정하고 낮게, 그러나 끈질기게 이어졌다.
***
“늦었네요.”
조수석 문을 열자마자 담배 냄새가 훅 끼쳤다. 여준은 얼굴을 찌푸린 채 한참을 가만히 서 있었다. 사현은 그러거나 말거나 손가락에 담배를 끼운 그대로 여준을 빤히 올려다보았다.
“안 타요?”
“…장소를 알려 줘. 따로 갈게.”
“성가시게 하지 말고 타요.”
간단한 명령의 말에 여준이 주먹을 꾹 쥐었다. 어차피 선택의 여지가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꾸물거리다간 회사 사람들의 눈에 띌지도 모른다.
주위를 한 번 살피고 차에 올라탄 여준이 문을 닫자마자 밭은기침을 했다. 사현은 다 태운 담배를 재떨이에 던져 넣고는 운전석 창문을 끝까지 열었다. 잠시 망설이던 여준이 사현을 향해 말했다.
“창문 좀 닫아 줘. 여기 내 회사 앞이고….”
“선배, 꼭 그거 같네요.”
“……?”
“스폰 만나는 여배우.”
“…….”
“남의 담배 냄새 향수 냄새 밸까 안절부절, 차에 같이 탄 모습 누가 보기라도 할까 안절부절…. 그 나이에 자의식 과잉이 그 정도로 심하기도 쉽지 않은데.”
거침없는 비웃음이 담긴 말들이 가슴을 푹푹 찌른다. 여준은 아랫입술을 사리문 채 사현에게서 시선을 돌렸다. 자신을 깎아내리고 후려치는 이들에게 그동안 충분히 익숙해졌다고 생각했지만, 사현이 내뱉는 폭언은 그 양상이 조금 달랐다. 그의 힐난은 얄미우리만큼 여준의 본질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퇴근하기 어렵다더니, 어떻게 나왔어요?”
침묵은 오래가지 않았다. 테헤란로에 접어들자마자 사현이 아무렇지 않게 물었다. 늘 만나던 사람인 양 친근하고 일상적인 말투였다.
“잠깐…. 저녁 약속 다녀오겠다고 했어.”
“저녁 약속.”
“…….”
“…여덟 시까진 다시 들어가야 해.”
“뭐, 힘내 봐요.”
의미를 모를 말이었다. 여준이 눈썹을 찡그린 채 고민하는 사이 차는 커다란 호텔 주차장으로 접어들었다. 무릎에 얹어 놓은 여준의 손끝이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차 키를 직원에게 건넨 사현이 먼저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여준은 그 앞에 멈춰 선 채 한참을 머뭇거리고만 있었다. 사현은 재촉하지 않고 그저 여준을 빤히 바라볼 뿐이었다.
시간이 지나자 엘리베이터 문이 스르르 닫히기 시작했다. 사현은 꼿꼿이 선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문이 완전히 맞물리기 직전, 결국 버튼에 손을 뻗은 것은 여준이었다.
“…….”
도로 열린 문 너머로 사현의 입술에 걸린 미소가 보였다. 여준은 차라리 고개를 돌려 버렸다. 끔찍했다.
***
최고층의 클럽 룸에 들어서자 달큼한 냄새가 났다. 자세히 보니 방 한가운데 커다란 테이블 위에 온갖 열대 과일이 바구니에 담겨 놓여 있었다. 어안이 벙벙해진 여준에게 의자를 내준 사현은 익숙한 몸짓으로 옷을 정리해 넣어 두고 건너편 자리로 돌아왔다.
“이게…. 뭐 하는….”
“아, 이건 호텔 쪽 서비스니까 신경 쓰지 말아요. 사정이 좀 있어서 장기 투숙하고 있는데 일주일에 한 번씩 올려다 주더라고요.”
“…….”
“필요한 거 있으면 가져가도 되고.”
신사적인 몸짓으로 과일 바구니를 가리킨 사현이 씩 웃었다. 여준은 이를 악문 채 그의 시선을 피하며 긴 심호흡을 했다.
“…나랑 뭐 하자는 거야, 너.”
“뭐가요?”
“할 얘기가 있다고 했잖아. 그런데 왜 사람을 이런 데로….”
“내가 묵는 호텔로 온 게 불만이에요? 선배 회사 근처에 탁 트인 카페 하나 잡아서 만났으면 괜찮고?”
“…….”
“겁먹은 건 알겠는데, 선배 지금 나한테 사사건건 칭얼거릴 계제가 아니지 않나?”
덤덤히 말한 사현이 포도 한 알을 따서 여준에게 내밀었다. 여준은 본 척도 하지 않았다. 별 미련 없이 손을 거둬들인 그가 포도를 제 입에 넣더니 한쪽 눈썹을 찌푸리며 탄식했다. 더럽게 시네.
“난 분명 선배 집 근처로 먼저 찾아갔었어요. 질색해서 쫓아낸 건 선배고.”
“…….”
“얘기 좀 하자는 말은 수십 번도 더 한 것 같네요. 눈만 마주쳐도 저승사자라도 본 양 생난리를 친 게 누군데?”
마침내 울컥한 여준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내가 안 그러게 생겼어?”
테이블을 내리치며 뱉어 낸 비명은 어떤 힘도 발휘하지 못했다.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포도 한 알을 더 따다 제 입에 넣은 사현이 슬쩍 웃었다.
“알았으니까 얘기 좀 해요.”
“…….”
“앉아요.”
사현이 손을 슬쩍 내려 보였다. 여준은 씨근대며 풀썩 주저앉았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지금 여기서 뭘 하고 있는 건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뭔데, 할 얘기가.”
최대한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고픈 마음뿐이었다. 쥐어짜듯 내뱉자 사현이 셔츠 앞주머니에서 담배를 빼냈다.
“한 대 피울래요?”
“…….”
“최근에 별일 없어요?”
맥락 없이 이어지는 질문에 순간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여준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눈가를 찡그렸다. 그런 여준의 반응엔 아랑곳없이 담배에 불을 붙인 사현이 긴 숨을 들이쉬었다.
“무슨 소리야? 무슨 일…?”
“아무거나요. 평소랑 뭔가 다른 일.”
“…지금 놀리는 거야?”
“나 만난 거 말고요. 선배가 항상 마주치는 주변인이나 환경이 갑자기 달라진 점 없었냐고요.”
연기를 뱉어 내며 똑바로 마주쳐오는 눈동자가 여전히 검었다. 여준은 어떻게든 사현의 의중을 짐작해 보려 했지만 쉽지 않았다. 그러고 보면 사현은 병원에서 우연히 마주쳤을 때도 ‘얘기 좀 하자.’고 말했었다. 주차장에서 만났을 때도, 집으로 찾아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본론을 말해.”
“박영재랑 아직 연락해요?”
여준이 기어코 다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성큼성큼 걸어가 문고리를 쥐었지만 곧장 따라붙은 사현의 손에 팔이 붙들리고 말았다. 놔, 거칠게 어깨를 흔들어도 허사였다. 사현은 아예 여준의 멱살을 틀어쥔 채 문에서 떼어 냈다.
“이거 놔! 이 미친 새끼…!”
허리가 꺾인 채 끌려가는 모양이 된 여준이 있는 대로 악을 쓰기 시작했다. 사현은 개의치 않고 그를 소파 위로 처박아 놓았다.
“윽…!”
곧장 일어서려던 여준은 뒷목을 잡아 누르는 손에 아예 얼굴을 파묻고 엎드린 모양이 되었다. 등을 보인 채 꼼짝할 수 없게 되자 순간적으로 뺨부터 허리까지 새파란 소름이 돋았다. 소파 등받이를 쥐려고 뻗은 손은 그대로 꺾인 채 허리 위로 짓눌렸다.
“…….”
무거운 돌에 깔린 것 같았다. 땅속에 홀로 파묻혀도 이보다 두렵지는 않을 것이다. 머릿속이 하얗게 번지는가 싶더니 언젠가의 어두운 반지하 방이 떠올랐다.
“…읏….”
열여덟 살의 여름이었고, 어둡고 습한 방이었다. 매트리스에서는 곰팡이 냄새가 났다. 등 뒤에는 목을 조르고 어깨를 물어뜯는 괴물이 있었다. 셔츠 단추를 뜯어내고 몸을 마구 주무르는 손은 거칠고 단단했다. 엎드린 채 짓눌려 꼼짝도 못하는 사이 점점 엉덩이 골 사이를 파고드는 살덩이가 느껴졌다. 단 한 번 겪어 본 적도, 상상해 본 적도 없는 일이었지만 여준은 괴물이 무슨 짓을 하려 하는지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대로 내버려 둬서는 안 된다는 것도.
하지만 아무리 소리를 지르고 몸을 비틀어도 소용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대로 끔찍하게 강간당하고 죽을 거라는 강렬한 예감과 무기력한 절망만이 마음을 잡아먹었다.
“하지 마….”
간신히 내뱉은 목소리는 부드러운 소파 가죽에 묻혀 스며들 뿐이었다. 딱딱하게 굳어 버린 팔다리가 파들파들 떨리기 시작했다.
“…선배?”
의아한 목소리가 내려앉았다. 여준의 몸이 점점 더 거세게 떨리기 시작했다.
“선배, 왜 이래요.”
사현이 뒤늦게 손을 놓았지만 여준은 꼼짝도 하지 못했다. 고개를 파묻고 엎드린 채 온몸을 떨고 있을 뿐이었다. 핏기가 빠져나간 얼굴은 창백하다 못해 새파랬고 손끝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선배.”
몸을 낮춘 사현이 여준의 어깨를 쥐어 돌려놓았다. 여준의 숨이 점점 거칠어졌다.
“선배!”
크게 뜨인 눈동자에 확장된 동공이 한순간 새카맣게 가라앉았다. 의식이 꺼져 드는 것을 느끼며 여준은 끝없이 되뇌고 있었다.
내가 뭘 잘못했을까, 뭘 얼마나 잘못했기에 너는…. 내게 그렇게까지 했을까.
***
여준에게 있어 열여덟의 여름은 시작부터 끝까지 의문투성이였다.
‘와, 덥다. 벌써부터 이렇게 더울 수가 있나?’
교실로 뛰어 들어온 영재가 에어컨 온도를 있는 대로 낮추었다. 카디건을 껴입고 있던 여자아이들 사이에서 원성이 새어 나왔다. 여준도 오답 노트를 쓰다 말고 영재를 향해 외쳤다.
‘뛰다가 막 들어왔으니까 덥지. 조금만 참으면 시원해.’
‘오, 성여준. 오늘도 여자들 대변인 노릇 하느라 고생이 많으셔.’
입술을 비틀어 웃은 영재가 못 이긴 척 온도를 다시 높여 놓았다. 여준은 혀를 차면서도 땀을 뻘뻘 흘리는 영재를 향해 물병을 내밀었다.
‘축구 어땠어? 이겼어?’
‘야, 장난 아니야. 가람 형이 오버헤드 킥 쐈어.’
‘또 오버….’
‘진짜라니까. 민가린이 영상도 찍었어.’
영재의 말을 듣기라도 한 듯 가린이 교실로 들어섰다. 그녀 역시 바람막이 점퍼를 껴입은 채였다. 여름의 교실은 늘 에어컨 온도를 건 전쟁터였다. 어깨를 움츠린 채 척척 걸어온 가린이 대뜸 여준을 향해 말했다.
‘세계사 책 좀 빌려줘.’
‘여긴 이과반인데.’
‘아, 맞아, 나 맨날 이러네.’
그러더니 영재의 자리에 털썩 앉는 것이었다. 애초에 교과서를 핑계로 놀러 온 듯했다. 한두 번 있는 일도 아니었기에 여준은 잠자코 책상에 넣어 두었던 초콜릿 하나를 내밀었다.
‘가람 형 오버헤드 킥 쐈다며? 네가 영상 찍었다던데.’
‘찍어 놓긴 했지. 웃겨서.’
보여 줄까? 가린이 실실 웃으며 물었지만 여준은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축구에는 별로 흥미가 없었다.
‘근데 여준아, 너 다음 주에 뭐 해?’
초콜릿을 입에 넣은 가린이 눈을 반짝이며 물었다. 여준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대답했다.
‘다음 주에…. 뭐…. 학교 다니고 학원 다니고 하겠지?’
‘아니, 아니, 그런 거 말고.’
‘……?’
‘토요일에 뭐 하냐고.’
토요일? 스케줄을 곰곰이 짚어 보던 여준이 이내 아, 하며 눈을 깜빡였다. 그러고 보니 생일이었다.
‘어…. 음.’
모처럼 집이 비는 날이라 혼자 조용히 보낼 계획을 세운 날이기도 했다. 가린이 굳이 물어본 것은 아마 학생회 사람들끼리 만나서 놀자는 뜻인 듯싶었다. 한참 망설이던 여준이 천천히 대답했다.
‘그날…. 나 집에 있으려고.’
‘정말? 그냥 혼자?’
‘응, 모의고사 때문에 이번 주말에도 학원 가야 해서…. 다음 주엔 좀 쉬고 싶어.’
‘그래, 알았어. 그럼 생일 파티는 월요일에 할까?’
가린이 산뜻하게 대답했다. 여준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는데 그새 체육복 상의로 갈아입은 영재가 불쑥 끼어들었다.
‘다음 주에 우리 여준이 생파하는 거야? 토요일?’
‘아, 아니. 토요일 아니고 그다음 월요일에.’
‘뭐? 왜? 너 생일은 토요일이잖아.’
갑자기 높아진 목소리에 여준이 두 눈을 둥글게 떴다. 함께 놀란 가린이 영재와 여준을 한 번 번갈아 보고는 대신 답했다.
‘내가 월요일에 하자고 했어. 생파인데 애들 다 있을 때 하면 좋잖아. 주말에 학원 가는 애도 있는데.’
‘뭐 얼마나 여러 명 모아서 한다고 그래? 우리끼리 만나면 되지.’
대놓고 삐뚜름한 대꾸였다. 얘가 갑자기 왜 이러지? 여준은 의아함을 감추고 애써 웃었다.
‘하긴 그러네. 그럼 그날 오후에 볼까?’
‘이제 와서?’
이번에는 여준과 가린의 표정이 동시에 굳었다.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먼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건 영재였다.
‘…왜 저러지?’
가린이 소리를 낮춰 물었다. 여준도 영문을 모르기는 마찬가지였다. 오답 노트를 접어 두고 쫓아 나가 보니 영재는 이미 복도 저 끝을 걸어가고 있었다.
‘영재야, 박영재!’
달려가며 부르자 못 이긴 척 돌아본다. 그러나 표정에는 여전히 서운함이 가득했다. 에어컨이 없는 복도를 잠깐 달렸을 뿐인데 금세 등줄기에 땀이 배었다. 여준은 손부채질을 하며 영재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왜 그래? 내가 뭐 잘못 말한 거야?’
‘…….’
‘말을 해 줘야 알지. 그렇게 나가 버리는 게 어딨어.’
‘난 계속 말하고 있어.’
영재가 뾰로통하게 내뱉었다. 한 번에 알아듣지 못한 여준이 뭐? 하며 목소리를 조금 높였다.
‘계속 얘기했잖아. 그 녀석이랑 가까이 지내지 말라고.’
‘그 녀석이 누군데…. 가린이?’
‘…멘톤지 멘틴지, 그 양아치 말이야.’
‘……?’
‘토요일에 왜 시간 안 된다는 거야? 그날도 그 자식 만나?’
난데없는 추궁에 여준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영재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 건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멘토…? 사현이 말하는 거야?’
‘내가 어제 뭘 봤는지 알아?’
‘어?’
‘그 자식, 밖에서 우리 학교 애들 삥 뜯고 다녀. 억지로 돈 빌려줘 놓고 두 배 세 배로 갚으라면서 두들겨 팬다고. 진짜야.’
‘어어…? 잠깐만, 좀 천천히 말해 봐. 삥을 뜯어? 그것도 우리 학교 애한테? 어디서?’
그러자 영재가 얼른 입을 다물었다. 날은 말도 안 되게 습하고 더웠다. 셔츠 앞섶을 쥐어 부채질을 하던 여준이 재촉하듯 말했다.
‘정말 그런 사실이 있으면 선생님께 보고해야 해. 멘토링 기간 중에 문제 일으키면 장학금 취소돼. 어디서 본 건데?’
‘너 말 이상하게 한다?’
‘…뭐?’
‘정말 그런 사실이 있으면? 그럼 내가 없는 말 지어냈을 수도 있다는 거야, 지금?’
영재가 눈을 부라리며 따져 물었다. 여준은 할 말을 잃고 그의 얼굴만 빤히 바라보았다. 그게 그런 말이 되나? 덥고, 습하고, 갑작스러운 갈등 상황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영재야, 일단 좀 진정하고….’
‘니 마음대로 해. 어차피 내가 뭐라든 안 믿고 안 들을 거면서.’
‘…영재야.’
‘놔, 갈 거니까.’
팩 돌아선 영재가 계단을 쿵쿵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여준은 그 뒷모습을 보다가 의아한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다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었다.
‘대체 뭐야….’
발밑으로 진흙 같은 예감이 밀려드는 듯했다. 불길한 전조였다.
종례를 마치자마자 영재는 제 가방을 들고 벌떡 일어났다. 쫓아가서 말을 걸어 보려 했지만 허사였다. 말 붙일 틈도 없이 쌩하니 멀어지는 영재의 뒷모습을 보다 여준도 비척비척 교실을 나섰다.
믿어 주지 않아서 화가 난 건가? 그건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뭐든 부풀려 말하는 건 영재의 습관이었다. 한 번은 영재가 갑자기 결석한 적이 있었다. 걱정되어 전화를 해 보니 계단에서 구르는 바람에 다리뼈가 모조리 부러졌다고 했다.
‘다리뼈가? 정말로? 그래서 어떻게 했어? 지금 병원이야?’
놀란 여준이 학원 시간을 빼고 병문안을 갈 생각으로 물었다. 그제야 영재는 조금 주춤해서 말을 바꿨다.
‘아, 아니, 병원은 안 갔어. 집에서 찜질했더니 나아졌어.’
‘…어? 부러진 거라며. 그럼 병원에….’
‘글쎄, 괜찮다니까.’
다음날 영재는 다리를 절며 등교했지만 오후쯤엔 멀쩡히 뛰어다녔다. 진심으로 놀랐던 여준으로서는 황당했으나, 좋은 게 좋은 거라 생각하며 그냥 넘길 수밖에 없었다.
근거가 있어 하는 말이라 한들, 단순히 시비가 붙어 싸우고 있는 모습을 보고서 충분히 오해할 수도 있는 상황이 아닌가. 정확한 사실을 다시 확인하겠다는 게 저렇게까지 화를 낼 일인가? 곱씹을수록 마음이 불편해지고 조금씩 화가 치밀었다.
‘뭐야, 대체….’
끝내 마음을 다잡지 못한 여준이 침울한 얼굴로 교실을 나섰다. 코앞으로 다가온 모의고사에 안 그래도 신경이 예민해져 있었다. 게다가 영재가 갑자기 화를 내는 바람에 오답 노트도 끝까지 보지 못했다. 오늘은 학원에 좀 일찍 가서 자습할까, 고민하는데 멀리 익숙한 뒷모습이 보였다.
‘…….’
사현이 양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운동장을 가로질러 걷고 있었다. 휘영청 크고 판판한 등이었다. 목부터 허리까지가 곧게 뻗어 꼿꼿하면서도 탄탄해 보였다. 여준은 잠시 멈춰 선 채 그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처음부터 영재의 말을 믿을 수가 없었다.
사현에 대한 흉흉한 소문은 영재의 입에서만 나오는 건 아니었다. 학생회 후배인 아진은 임사현이라는 이름을 듣자마자 숫제 경기를 일으켰다.
‘오빠, 그거 취소하세요! 저랑 같은 반인데 걔 완전 쓰레기 양아치예요!’
다만 사현에 대해 나쁘게 말하는 이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왜? 너한테 나쁘게 군 적 있어?’
아주 당연한 사실을 물으면.
‘아뇨, 제가 직접 보거나 한 건 아닌데…. 애들이 다 걔 조폭 따까리 양아치랬어요.’
모두가 비슷한 대답을 했다.
‘사현아.’
단단한 등이 더 멀어지기 전에 슬쩍 불렀다. 들릴까, 싶은 정도의 거리였음에도 사현은 우뚝 멈춰 서서 돌아보았다. 날카로운 눈동자가 여준을 발견하자마자 부드럽게 풀어지는 것이 보였다.
‘…….’
영재와, 그 외의 모든 이들을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은 바로 저 눈 때문이었다.
‘안녕하세요, 선배.’
사현이 허리를 꾸벅 숙여 공손히 인사했다. 여준은 얼른 일어나라 손짓하면서 그의 곁으로 다가갔다.
‘이제 가는 거야? 늦었네.’
‘…아.’
‘응?’
‘찾아…, 보다가요. 잠깐.’
‘…….’
몇 주 되지 않는 시간 동안 사현의 화법에도 제법 익숙해졌다. 여준이 씩 웃으며 물었다.
‘나 찾았다고?’
‘…네.’
‘왜?’
‘그냥…. 오늘 안 보이시길래.’
간단한 대답 속에 포함된 많은 말이 들리는 듯했다. 거리를 지키는 선망(羨望). 그것은 당시의 여준이 가장 필요로 하는 호의의 형태였다.
‘바로 집에 가는 거야?’
‘그렇기는 한데….’
‘나 학원 가기 전에 컵밥 사 먹을 건데, 같이 가자.’
학교 후문 앞에는 방과 후마다 컵밥 노점이 섰다. 여준은 늘 제일 양이 적은 컵밥 하나를 골라 먹고 학원으로 향하곤 했다. 밥에서 이상한 냄새가 난다며 모두가 기피하는 간식이었지만 여준의 입맛에는 꽤 잘 맞았고, 사현은 여준이 컵밥을 사서 건넨 이들 중 유일하게 아무 불만을 말하지 않은 상대였다.
‘어떤 거 먹을래?’
‘저 그냥 똑같은 걸로….’
‘치킨마요 두 개요.’
확실히 평범한 맛은 아니다. 특히 밥알을 씹다 보면 묘하게 후각을 자극하는 화학 성분 냄새가 났다. 영재는 화장품 맛이 난다고 했고, 가린은 플라스틱을 씹는 것 같다고 했다.
‘불량 식품을 좋아하세요?’
여준이 채 반을 먹기도 전에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운 사현이 물었다. 여준은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어, 하며 눈을 굴렸다.
‘좋아하는 건가…? 아무거나 잘 먹긴 하는데.’
‘항상 이런 거 드시고 계시잖아요. 길에서 파는 밥이나 꼬치나….’
내가 그랬나. 고개를 갸웃한 여준이 남은 밥을 마저 입에 털어 넣었다. 삼시 세끼 챙겨 먹는 것만으로는 부족한 때였다. 학교와 학원, 과외와 독서실을 오가며 그때그때 들고 먹을 만한 걸 챙겨 먹다 보니 자연스레 노점상 단골이 되었을 뿐이다.
‘왜, 너는 별로 안 좋아해?’
‘저는 주면 뭐든 잘 먹어요. 워낙 뭘 못 챙겨 먹고 다녀서.’
덤덤히 뱉는 말에서는 어떤 의도도 읽어 낼 수 없었다. 만약 같은 말을 영재가 했다면 그래서 뭔가 좋은 걸 사 달라는 건가, 생각했을 것이다. 영재에 대한 고민을 이어 가다 멈칫한 여준이 그대로 고민에 빠졌다.
혹시 나는, 영재가 불편한 걸까.
그 전까지는 한 번도 떠올려 보지 않은 가정이었다. 묘하게 핀트가 안 맞는다고 느껴지는 순간은 꽤 있었지만 그것이 영재 자체에 대한 감정으로 이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막상 까칠한 태도를 보이는 영재를 보니 그동안 무심히 지나쳤던 온갖 말들이 하나하나 되살아나는 듯했다.
‘…….’
나도 참 나다. 그거 잠깐 싸웠다고 이런 생각까지 하고 있다니. 상념에 잠겨 있던 여준이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사현이 들고 있던 컵밥 포장지를 차곡차곡 접더니 제 주머니에 넣는 게 보였다.
‘그걸 왜 챙겨?’
대뜸 물으면서도 황당해서 그만 웃음이 터졌다. 그러자 사현이 당황한 듯 두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챙, 챙기려는 게 아니고요. 버려야 하는데, 쓰레기통이 없으니까….’
‘나 줘. 소스 묻어 있는 건데 주머니에 넣으면 어떡해.’
‘괜찮아요. 어차피 오늘 바지 빨 거라서….’
사현이 민망한 듯 얼른 변명을 주워섬겼다. 여준은 힘겹게 웃음을 참고 걸음을 좀 더 천천히 했다. 멀리 버스 정류장이 보였다.
‘그런데 사현이 넌 어디 살아?’
사현은 항상 여준을 먼저 버스에 태워 보내고는 했다. 몇 번 버스를 타느냐고 물어도 말을 돌리거나 묵묵부답이었다. 혹시 사는 곳을 알리고 싶지 않은 걸까 생각했지만 다행히 사현은 쉽게 입을 열었다.
‘저 N동이요.’
‘진짜? 멀리서 다니네.’
N동이라면 시내버스를 타고 한참을 가야 하는 동네였다. 고등학교 배정 운이 대단히 나빴던 게 틀림없었다. 속으로 혀를 찬 여준이 나름의 위로를 건넸다.
‘힘들겠다. 난 마을버스 잠깐 타는 것도 힘들 때 있는데.’
그러자 사현이 살짝 웃었다.
‘아뇨.’
여준에게 옆모습을 보인 채였다.
‘안 힘들어요. 다닐 만해요.’
곧은 이마와 콧대, 유연하게 올라가는 입꼬리와 보조개. 하나하나 뜯어보면 그렇게 순할 수가 없는 얼굴이었다.
‘학교 오면 선배도 있고.’
그 얼굴로 아무렇지 않게 뱉는 말에는, 묻거나 따져 볼 것 없이 믿고 싶어지는 힘이 있었다.
‘…….’
가만히 바라보고 서 있자 사현이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왜요?’
‘아…. 아니. 그, 나는…. 저기 살아, 저 아파트.’
당황한 여준이 얼른 멀리 보이는 대단지 아파트를 가리켰다. 뜬금없는 말에도 사현이 아아, 하며 고개를 끄덕이자 여준은 더욱 초조해졌다. 나 지금 뭐 한 거야, 자랑하는 것도 아니고. 한참 먼 데 사는 애한테 우리 집은 바로 저기라니.
‘…그, 저기….’
엉뚱한 말이 나온 것은 그런 이유였다.
‘놀러 올래? 그러니까, 다음 주에…. 우리 부모님 여행 가셔서 주말에 나 혼자 있거든.’
뱉어 놓고도 여준 본인의 어안이 벙벙해질 만큼 어처구니없는 제안이었다. 이렇게 갑자기 집으로 초대해 버려도 되는 건가. 부담스럽게 여기지 않을까. 사현은 전에 없이 놀란 얼굴이었다. 길고 날카로운 눈을 둥글게 뜬 채 입을 헤벌린 표정을 보자 여준은 간절히 일 분 전으로 돌아가고 싶어졌다.
‘다음…, 주에요?’
‘아, 응. 나 그날, 어…. 집에서 혼자 영화 볼 거거든. 주말 내내 나 혼자 있으니까, 음…. 편하게 놀러 와도 돼.’
간신히 말을 마친 여준이 씩 웃었다. 그래 봤자 대단히 어색한 미소였을 것이다. 그러나 사현은 순간, 아주 찰나였지만 환하게 웃었다.
‘…….’
그러더니 금세 표정을 지우고 잔뜩 걱정스러운 눈빛을 띠는 것이었다. 그 변화에서 여준이 읽어 낼 수 있는 결론은 하나뿐이었다.
‘왜? 약속 있어? 그럼 무리하지 말….’
‘…아뇨, 그런 건 아닌데요.’
사현이 얼른 손사래를 쳤다. 평소답지 않게 고개를 숙인 채 제 목덜미를 문지르다, 입술을 핥다 하며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에 여준까지 어리둥절해졌다.
‘그냥…. 아는 사람 집에 가 본 적이 없어서….’
‘…….’
‘이런 게…. 덥석 물어도 되는 얘기인지 그런 거 잘…. 모르겠어서요.’
심호흡을 해 가며 한 자씩 내뱉는 말에 여준은 하마터면 크게 웃을 뻔했다. 하여튼 가끔 보면 되게 엉뚱할 때 있어. 아랫입술을 꾹 깨문 여준이 안심하라는 듯 미소 지었다.
‘뭐야, 아는 사람? 나 너한테 고작 아는 사람이야?’
어깨를 툭 치자 사현이 또 입술만 달싹였다. 여준은 그가 때때로 보이는 서툰 모습이 싫지 않았다. 자신을 바라볼 때의 순하고 맹목적인 시선도.
‘하다못해 친한 형이라고 해야지, 아는 사람이 뭐야.’
‘…친한….’
‘어, 뭐야? 나만 우리 이제 친하다고 생각한 거야?’
‘…….’
‘그런 거 좀 상호 합의 하에 해야 하는 말이긴 해, 그치.’
너스레를 떨며 걸음을 재촉하던 여준이 얼마 가지 못해 멈춰 섰다. 사현이 한 자리에 가만히 선 채 고개를 떨어뜨린 탓이었다.
‘사현아?’
흘러내린 앞머리 때문에 눈이 잘 보이지 않았다. 조심스레 다가간 여준이 그의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왜 그래?’
‘…아뇨.’
사현이 금방 시선을 피했지만 붉어진 눈자위를 감출 수는 없었다. 여준은 깜짝 놀라 사현의 팔을 붙들었다.
‘왜 그래? 너 왜 울려고 그래?’
‘…안 우는데요.’
‘안 울긴, 눈이 엄청 빨간데. 왜 그러는데? 내가 뭐 실수했어?’
‘아니에요, 우는 거 아니고…. 꽃가루 알레르기 있어서….’
사현이 멀쩡한 얼굴로 얼토당토않은 소리를 뱉어 놓았다. 여준은 황당함을 굳이 감추지 않고 슬그머니 주위를 둘러보았다. 꽃 같은 건 여름을 알리는 소나기에 모조리 쓸려나간 지가 오래였다.
‘…괜찮아? 약국이라도 갈까?’
그래도 변명하는 대로 믿어 줘야 할 것 같았다. 다른 것도 아닌 눈물의 이유였으니까. 사현은 코를 한 번 훌쩍이고는 살짝 먹먹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어떤 영화…, 보실 건데요?’
‘…응?’
‘다음 주에….’
뒤늦게 여준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하루 종일 집에 처박혀 영화나 보려 했던 건 맞지만, 그 자리에 사현을 초대할 계획은 없었다. 때문에 예약해 놓은 영화 DVD는 모조리 여준의 특이한 취향을 있는 그대로 담은 것들뿐이었다.
‘…아, 음, 맞다. 나 영화 취향이…. 좀 그런데.’
‘왜요?’
‘좀…. 잔인한 영화 볼 거거든. 호러나, 스릴러나…. 아니면 재난 영화 같은 거.’
한 번은 영재가 놀러 왔을 때 부모님 몰래 소장한 DVD를 몇 개 골라 함께 본 적이 있었다. 친구와 함께 보는 거라 그나마 대중적인 타이틀만 골랐음에도 영재는 시종일관 눈살을 찌푸리며 탄식했다. 야, 넌 이게 재밌냐? 사람 자르고 다치는 게?
짐짓 장난인 듯 위장한 힐난의 말이 끝없이 이어졌다. 이런 거 사이코패스들이나 보는 건 줄 알았어, 근데 내 바로 가까운 곳에 사이코패스가 있었네. 낄낄대며 바닥에 드러누운 영재가 여준을 향해 턱을 까딱이며 물었다. 이런 거 말고 야한 건 없어?
‘…그러니까, 너 혹시 그런 영화 싫어하면…. 다른 거 빌려 놓을게.’
‘아뇨, 그럴 것까지는…. 영화 원래 많이 안 봐서요. 아무거나 괜찮을 것 같아요.’
덤덤한 대답에 안도한 여준이 씩 웃었다. 사현도 살짝 웃고는 시선을 피했다.
‘저기 버스 오는 것 같은데요.’
‘어? 어디…. 진짜네.’
멀찍이 달려오는 버스에 여준이 조급하게 발을 굴렀다. 저걸 놓치면 꼼짝없이 학원에 늦을 판이었다. 다행히 사현이 먼저 달려가 버스를 붙잡아 주었다.
‘연락하자.’
가볍게 인사를 건넨 여준이 힘껏 손을 흔들었다. 사현은 잠잠히 고개만 한 번 숙여 보였다. 신경질적으로 출발한 버스가 흙먼지를 일으켜도 미동조차 없었다. 여준은 백미러에 비친 사현의 모습을 오래도록 훔쳐보았다. 창밖으로 머리를 내밀어 대놓고 보더라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을 것을 알면서도.
***
학원과 독서실에 있는 내내 꺼 두었던 핸드폰을 켜자 수십 개의 읽지 않은 메시지가 떴다. 학생회 단체 채팅방과 학원 팀 과제, 그 외 잡다한 말들이었다. 스크롤을 내리다 엄지 끝이 멈췄다. 영재에게서 온 메시지가 있었다.
「여주니~ 잘 들어갔엄? 전화 꺼져 있네. 보면 연락주」
버스에서 내리던 여준이 저도 모르게 한숨을 푹 쉬었다. 안도가 되는 한편 짜증스러웠다. 이렇게 쉽게 풀어질 일이라면 애초에 왜 사람을 피곤하게 하는 걸까.
마음 같아서는 그대로 무시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러지 못하리란 것도 알고 있었다. 영재는 여준이 학교에서 가장 가깝게 지내는 친구였다. 그 관계 자체가 중요했던 건 아니다. 그를 아는 누구나 ‘성여준의 가장 친한 친구’로 꼽는 영재와 틀어졌을 때 주변에서 흐르는 말을 수습하고 상황을 정리해야 한다는 게 싫었다.
아파트 단지 앞에 선 채 한참이나 마음을 가라앉히고 나서야 통화 버튼을 누를 수 있었다. 영재는 몇 번 신호가 가기 전에 전화를 받았다.
- 어, 여준아. 자습 끝났어?
‘…응.’
- 있잖아, 나 좀 물어볼 게 있는데 우리 물리 수행 평가 말야. 네가 예전에 나 추천해 줬던 책 읽고 요약하는 거잖아. 그치.
‘응? 어….’
영재가 말하는 것은 200페이지짜리 물리 이론서를 A4 한 장 분량으로 요약해 오라는 숙제였고, 과제로 나온 책은 물리와 화학에 특히 약한 영재가 한참 우는소리를 했을 때 여준이 추천해 준 기초 도서였다. 뇌리를 스치는 불길한 예감에 여준이 입을 다물었다. 영재는 잠시의 망설임도 없이 본론부터 꺼냈다.
- 그거, 네가 한 장 더 해 주면 안 돼?
‘뭐…?’
- 저번에 국어 수행 때는 내가 너 자료 찾아다 줬잖아.
‘…….’
여준이 한껏 미간을 찌푸렸다. 분명 그런 일이 있었다. 다만 이 상황과의 차이가 있다면 여준은 그런 일을 요청한 적이 없다는 것과, 영재가 마음대로 찾아다 준 자료는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는 점뿐이다.
- 부탁 좀 하자. 시간 내로 못 읽을 것 같아서 그래. 대신 다음에 국어나 영어 수행 때는 내가 또 도와줄게.
‘…내가 해 놓은 거 빌려줄게. 보고 참고해서 하면….’
- 그대로 베끼라고? 그럼 티 나잖아.
‘…….’
더는 할 말이 없었다. 대충 대화를 끝내고 전화를 끊었다. 아파트로 들어서 집으로 올라가는 내내 머리가 지끈거렸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뇌가 쥐어짜이는 기분이었다.
‘왔니?’
웬일로 어머니가 집에 있었다. 소파에 눕다시피 앉아 텔레비전을 보고 있던 그녀가 인자하게 웃어 보였다. 여준의 얼굴에도 늦은 미소가 번졌다.
‘어떻게 왔어요? 당직이라고 했잖아.’
‘최 선생이 다음 주에 일 있다고 한 번 바꿔 달래서. 우리 아들 얼굴 오랜만에 보네?’
여준의 부모님은 집에서 삼십 분 거리에 있는 사립 고등학교에 근무 중이었다. 맞벌이인데다 둘 다 수험생 반 담임을 맡고 있었기에 평소엔 진득하게 얼굴 볼 시간조차 없을 만큼 바빴다. 신이 나서 소파에 주저앉은 여준이 어머니를 향해 물었다.
‘근데 엄마, 그렇게 바빠서 다음 주에 여행은 갈 수 있어?’
‘얘는, 그게 무슨 여행이야.’
‘집 떠나면 여행이지.’
‘아니야. 여행은 좋은 거야. 근데 다음 주말에 내가 니 아빠랑 함께 향하는 곳은 너희 할머니 댁이잖니. 거긴 엄마한테 전혀 좋은 장소가 아냐. 그러니까 여행도 아니지.’
알 듯 말 듯 한 말에 여준은 그냥 웃어 버렸다. 그런 아들의 양 뺨을 쥔 어머니는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너 밥은 잘 챙겨 먹고 다니지? 급식 안 남기고 다 먹고?’
‘응, 그러엄.’
‘아줌마가 아침 잘해 놔? 내가 얻어먹질 못하니 아는 게 있어야지.’
‘잘해 주셔. 걱정하지 마요.’
‘근데 왜 갈수록 우리 아들 얼굴이 반쪽이 돼 가? 뭐 안 사 먹고 다녀? 용돈 부족하면 엄마 카드 하나 줄까?’
‘아, 카드는 무슨…. 잘 먹어요. 잘 먹는다니까. 키 크려고 그러나 보지.’
걱정과 당부를 담은 잔소리는 그 뒤로도 한참을 이어졌다. 자정이 넘어서야 간신히 빠져나온 여준이 간단히 샤워를 마치고 침대에 누웠다. 핸드폰을 켜 보니 그새 또 메시지가 한가득 쌓여 있었다.
「여준아 내일 학생회실…」
「오빠 혹시 김재아 선생님 시험 문제 패턴…」
「나 아는 애가 너 소개해 달라는데…」
「있잖아 내일 할 말이 있는데…」
무엇 하나 지금 듣고 싶은 말은 없었다. 핸드폰을 내려놓은 여준이 컴퓨터 앞에 앉았다. 혹시 어머니가 문을 열 때를 대비해 한 손을 전원 버튼에 올린 채로 새로 나온 영화 타이틀을 훑었다.
날이 더워서인지 호러 영화 개봉 소식이 몇 가지 눈에 띄었다. 타이틀을 메모해 두고 창을 닫았다. 당장 찾아가서 볼 수는 없어도 어떤 스토리인지 찾다 보면 직접 볼 때와 비슷한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처음 취미를 갖게 된 건 중학생 때였다. 친구 집에 모여 놀다가 아무 생각 없이 TV를 튼 일이 발단이었다. TV에서는 철 지난 호러 영화가 나오고 있었다. 저주 받은 인형이 잠든 저택에 보물을 훔치러 잠입한 커플이 끔찍한 경험을 한다는 이야기였다.
잔인하고 직접적인 장면은 모조리 편집됐지만, 정체 모를 목소리에 미쳐 가던 주인공들이 지하실에 갇혀 벽을 마구 긁는 신은 여준에게 적지 않은 충격을 안겼다. 습하고 어두운 지하실에 꼼짝없이 갇힌 채 귀곡성에 시달리는 상황을 상상하니 오싹했다. 친구들은 하나같이 센 척을 하느라 이딴 게 뭐가 무서우냐며 큰소리를 뻥뻥 쳤지만 낯빛이 창백하긴 마찬가지였다.
만약 여준이 살던 집이 주택이고, 지하실이 딸려 있다면 감상이 조금 달랐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집은 오래전부터 고층 아파트였다. 인형을 숨길 공간도, 사람을 가둬 놓을 지하실도 없다. 아파트 입구부터 1층 로비까지 경비원이 배치되어 있고, 길 바로 건너편에는 지구대 건물도 있다. 그 집에서도 여준의 방은 특히 안락하고 따뜻했으며 늘 깨끗하게 세탁된 침구가 덮여 있었다.
따뜻한 물에 샤워하고 이불에 파묻혀 눕자 묘한 느낌이 들었다. 좀 더 나중에서야 여준은 그 느낌에 어떤 이름이 붙는지 알게 되었다. 안도감.
여준이 딛고 선 자리, 잠드는 장소에는 어떤 위험도 없다. 귀신 따위는 오로지 브라운관 안에만 존재한다.
‘나는 안전해….’
이불에 파묻혀 눈을 감았다. 끝없이 꿈으로 잠겨 드는 동안 얼핏 사현의 목소리가 들린 듯했다.
‘나는 괜찮아요.’
언제 그랬더라? 곰곰이 떠올려 보았지만 정확히 걸리는 기억은 없었다. 하지만 어쩐지 확신할 수 있었다. 사현이라면 아마도- 여준과 함께하는 거의 모든 순간에 같은 말을 했으리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