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전조
“어떻게 된 거야? 지오는?”
급히 달려온 가린이 숨을 몰아쉬며 물었다. 여준은 멍한 눈을 들어 그녀를 훑어보고 도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밤이 깊은 시간, 병원 앞은 오가는 사람 없이 황량했다.
“데려갔…, 가셨어. …장모님이.”
“왜? 또 뭐가 문제래? 그보다 너 옷 입은 게 왜 그래? 춥지도 않아?”
추워? 그러고 보니 여준은 와이셔츠 한 장에 정장 바지 차림이었다. 그나마도 단추가 뜯겨 나가고 군데군데 핏방울이 튀어 엉망이다. 몸을 낮춘 가린이 안타까운 몸짓으로 여준의 어깨며 팔을 주물러 주었다. 따뜻한 손이 닿자 잊고 있던 서글픔이 불현듯 치밀어 올랐다.
“…가린아.”
“그래, 말해 봐. 왜 그래? 무슨 일이야?”
“…….”
“어제는 전화 못 받아서 미안해. 내가 요즘 며칠 계속 밤새우다가…. 아니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라, 아 정말 못 살아, 너 꼴이 왜 이래?”
꼴이 왜 그래요? 왜 이따위로 살아요?
경멸과 동정과 회한과 의문이 복잡하게 뒤섞여 있던 검은 눈동자가 떠오른다. 한때는 선망과 애정만으로 반짝이던 눈이었다. 열일곱의 사현이 보내는 맹목적인 동경에 취해 있던 시절이 여준에게는 있었다.
“…나 그렇게 꼴사나워?”
“어? 지금 그런 소리가 아니라….”
“가린아, 나 처가에 지오 보내면…, 나는 집에 가면 아무도 없어.”
하지만 어렸다. 어리석음이란 어렸다는 변명이면 면죄될 수 있는 정도의 실책 아니었던가? 이 세상이 내 것이라는 착각, 자신을 좋아하는 이의 애정에 취해 잠시나마 안주했던 것이 이런 결과를 초래할 만큼의 과오였단 말인가?
“지오가 있으면, 지오는…. 자다가도 문 여는 소리 들리면 달려 나와서…. 나한테 이…, 인사하고, 뽀뽀하고…. 아빠 보고 싶었다면서….”
“여준아.”
“나도 아…, 알아. 애가 무슨 강아지도 아니고, 그런…, 그런 것 때문에 애 붙들고 힘들게 하면 안 된다는 거, 나도 알지만….”
“아니야, 무슨 소리야. 누가 그런 소릴 해? 당연히 지오도 너랑 있는 게 행복해. 걔가 얼마나 널 좋아하는데. 지오는 너 없으면 못 살아, 여준아.”
“하지만 지오 내가, 내가 지금까지 키웠고, 나도 내가 좋은 아빠 아니라는 건 알지만 지오는…. 지오는 나한테 유일한….”
여준이 고개를 푹 떨어뜨렸다. 안타까운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면 가린이 몸을 낮춰 여준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여준은 그녀의 팔에 얼굴을 묻은 채 입술을 짓씹었다.
“일단 들어가자, 아니, 우리 집으로 갈래? 집 지금 지저분하긴 한데 우리 오빠도 있고 내일 영재도 온다고 했어.”
“…영재가?”
“응, 저번 주에 서울 올라왔대. 당분간 면접 보러 다녀야 해서 오빠가 자기 방에 재워 주기로 했나 봐. 갈래?”
“…….”
“가자, 나 너 혼자 집에 보냈다가 무슨 일 날까 봐 무서워 죽겠어. 가자, 응?”
아무도 없는 집. 은아도 지오도 없는 넓은 아파트. 여준 역시 그 어두운 공간으로 혼자 돌아갈 자신은 없었다. 한참 후에야 그는 어렵게 고개를 끄덕였다.
***
“이야, 우리 회장님 오랜만이네.”
문을 열어 준 가람이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여준은 민망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목례만 해 보였다. 가람은 여준의 고등학교 재학 시절 학생회 직속 선배였다.
“요즘 바쁘다며. 얼굴 보기 힘들더라.”
“죄송해요.”
“알면 연락 좀 하고 살아. 들어와, 들어와.”
평소였다면 아이는 잘 크는지, 왜 안 데려왔는지부터 물었을 사람이다. 아마 집으로 오는 동안 가린이 먼저 연락을 해 놓은 것 같았다. 여준은 가칠해진 얼굴을 쓸어 올리고 집 안으로 들어섰다.
“초대해 놓고 미안한 소린데, 박람회가 얼마 안 남아서 좀 어수선해.”
“아니에요, 제가 갑자기 온 건데….”
“그건 그렇지? 이거 봐 봐, 어때?”
가람이 넉살 좋게 웃으며 거실 한가운데의 거대한 모니터를 가리켰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친구들과 함께 게임 개발 회사를 차렸다. 몇 년은 삽만 뜨는 것 같더니 얼마 전에 완성한 새 게임이 제법 업계의 입소문을 타고 있다는 모양이었다.
“전 게임은 봐도 잘 몰라서….”
“아니, 성의 있게 봐 봐. 이거 머리카락이랑 치마가 회오리처럼 흔들리잖아. 얼마 전에 새로 사 온 건데 2D 그림이어도 3D인 듯한 착시현상을 일으킬 수 있게 해 주는 프로그램이야. 그림도 죽이지 않냐? 이 그림 그린 일러레가 제리라고 진짜 유명한 사람인데, 원래 국내 작업은 잘 안 한다고 하는 거 사정사정을 해서 어렵게….”
“그런 얘기는 좀 말이 통할 사람한테 하시고, 지금은 밥부터 차리세요. 여준아, 이리 와. 앉아.”
열을 올려 설명을 시작한 가람에게서 여준을 빼낸 가린이 그를 식탁 의자에 앉혀 두었다. 가람은 투덜거리면서도 순순히 냄비에 불을 올렸다.
“급하게 준비할 게 궁색해서…. 카레에다 콩나물국 괜찮아?”
“…아, 네.”
“너 밥도 제대로 안 먹고 다니지? 얼굴 홀쭉해진 거 봐라.”
가람과 가린이 함께 사는 집은 서울 중심부에 위치한 방 두 개짜리 빌라였다. 전과 다를 것 없이 좁고 따뜻한 집을 가만히 둘러보던 여준이 물었다.
“그런데 영재가 오기로 했어요?”
“어, 맞아. 너 영재 못 만난 지도 오래됐지?”
“…네, 아마…. 저 결혼식 때 보고 못 봤는데.”
“결혼식? 그럼 너 와이프 그렇게 됐을 때도 영재….”
의아하게 되묻던 가람이 얼른 입을 다물었다. 식탁 밑에서 가린이 옆구리를 세게 찌른 것이 틀림없었다. 여준은 애써 웃고 고개를 끄덕였다.
“어쩔 수 없죠. 제주도가 그렇게 쉽게 오갈 거리도 아니고…. 한창 바쁠 때였으니까.”
“그, 그렇지…. 영재도 우여곡절 많았나 보더라. 몇 달 전에 제주도에서 중국인들 싹 빠지면서 회사가 하루아침에 주저앉았대.”
“…아….”
“다행히 몇 군데 면접 제의 온 곳이 있어서 서울 와 있는다고, 찜질방이며 피씨방이 어쩌구 하길래 내가 그러지 말고 여기 와 있으라 했어.”
가람은 변한 게 없었다. 넉살 좋고, 사람 챙기고, 후배들에게 너그러운 모습 그대로였다. 여준이 고등학교 시절 가장 가깝게 지낸 친구는 영재였지만,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지금 당장 연락할 수 있는 상대는 가람과 가린 남매뿐이었다.
“…….”
은아와의 결혼식 날, 영재는 제냐 정장을 입고 루이비통 브리프케이스를 들고 왔었다. 팔목에는 크고 화려한 롤렉스 금장시계를 차고 있었다. 여준을 비롯한 동창들이 입을 모아 야유 섞인 환호를 보냈다.
‘야, 너 무슨 신랑보다 튄다. 우리 영재 요즘 잘 나가나보다?’
그러자 영재는 여준을 힐끔 보며 말했다.
‘나야 뭐 누구처럼 반반한 얼굴로 돈 많은 와이프 만날 것도 아니고, 내가 열심히 벌어야지.’
잠깐의 정적이 흐르고, 크게 웃음을 터뜨린 것은 가람이었다.
‘맞아, 맞아. 여준아, 부럽다. 너 신혼집도 강남에서 시작한다며. 니들도 부러우면 여준이 보고 배워라. 이제부터라도 얼굴을 단련해.’
그가 농담으로 넘겨주지 않았다면 분위기가 어디까지 가라앉았을지 상상만 해도 아득해졌다. 여준은 쓰게 웃고 젓가락을 집어 들었다. 가린의 말마따나 변변한 식사를 못 한 지가 하루가 되어 가지만 놀랍도록 입맛이 없었다.
“왜 그래? 맛이 없어?”
가린의 말을 듣고서야 여준은 자신이 멍하니 밥공기만 내려다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한 술이라도 입에 넣었다간 고스란히 뱉을 듯했다. 그는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미안…. 나 일단 좀…. 잤으면 좋겠는데.”
“어어, 그래. 그렇게 해. 오빠 방에서 자.”
“…미안해.”
“아까부터 뭐가 그렇게 자꾸 미안해. 괜찮아. 갈아입을 옷 줄까?”
“아냐, 그냥 잠깐 눈만 붙일게.”
침대 하나 덜렁 놓인 가람의 방은 휑하고 깔끔했다. 가린은 그녀가 이끄는 대로 침대에 모로 누운 여준의 목까지 이불을 덮어 주었다.
“푹 자, 아예 자고 가도 되니까.”
“응….”
“…너무 걱정하지 마. 지오 네 아들이고, 아무도 너한테서 못 뺏어 가. 여차하면 확 소송 내버려. 접근 금지 신청? 어? 그런 거 때려 버리라고.”
뭐라 말하려 입을 열었던 여준이 금방 몸을 웅크렸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한, 아마도 평생 말할 수 없을 비밀들이 혀끝을 저리게 했다.
“…나는 장모님한테 그렇게 못 해. 은아가…. 나 때문에 그렇게 됐는데….”
“그게 왜 너 때문이야? 니 와이프 죽은 거야 사고고, 지오는 네 아들인데.”
아니야, 나 때문이야. 은아는 나 때문에 죽었어. 여준은 당연히 내뱉었어야 할 대답 대신 입을 꾹 다물었다.
사현이 죽길 바랐다. 행여나 정신을 차리고 입이 열리는 순간, 그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나오는 순간, 어떤 일이 일어날지 상상조차 하고 싶지 않았으므로.
“…가린아, 나는.”
“그래, 뭐. 하여튼 니네 장모 진짜 웃기는 사람이야. 도대체 너한테 뭘 얼마나 지랄을 해 댔으면 네가 이 꼴이….”
“나는…. 장모님이 정말로 지오 귀여워하시고, 잘 봐주시겠다고 하면…. 그러면 지오 보낼 수도 있어.”
은아의 이야기를 지우기 위해 꺼낸 말이었다. 그럼에도 가린이 금방 울 것 같은 표정을 짓자 가슴이 아팠다.
“…물질적으로 호화스럽게 해 주길 바라는 게 아냐. 그런 건 나도 해 줄 수 있어. 은아 보험금도…. 전부 지오 앞으로 신탁 걸었어. 그건 지오 거고 난 안 건드릴 거야. 그러니까, 그 집 식구들이 정말 지오를 아끼고 예뻐하고 사랑해 준다면…. 그럼 나는 지오 아예 보낼 생각도 많이 했을 거야.”
“…….”
“그런데 안 그래. 그 사람들 못 그런다고. 한 번씩 발작이라도 온 것처럼 지오 내놓으라고 난리를 치는데, 그럼 한동안 데리고 있으시라고 보내 놓으면 어떻게 되는지 알아? 일주일 데리고 있겠다고 해 놓고 사흘 만에 돌려보내. 사람도 없는 집에 애를 떨궈 놓고 당신들끼리 돌아가 버려.”
“세상에….”
가린이 한 손으로 입을 가렸다. 떠올리기도 힘든 이야기였다. 하아, 긴 숨을 내쉰 여준이 한 손으로 미간을 꾹 눌렀다.
“장인어른 말씀이…. 장모님이 지오를 그렇게 예뻐하다가 갑자기 우신대. 은아 생각이 난다고, 은아가 그때 지오를 데리고 갔어야 외롭지 않게 갔을 텐데 애만 떨어뜨려 놓고 혼자 간 게 생각할수록 가엾대. 그래서 지오가 떼쓰거나 울면 그렇게 화가 난대.”
가린의 얼굴이 경악으로 얼룩졌다.
“니네 장인이라는 사람은 그 소리를 들으라고 하는 거야? 너한테?”
진심으로 공감하고 대신 화를 내는 말에 여준의 콧등이 금방 시큰시큰 달아올랐다. 손으로 눈가를 덮은 그가 이를 악문 채 목소리를 짜냈다.
“…그런 집에 내가 지오를 어떻게 보내.”
“여준아.”
“그런 사람들한테 어떻게 애를 맡겨 놔. 그냥, 내가 좀 모자라더라도 내가 어떻게든…. 그런 소리는 안 듣게 키워 보겠다는데 왜 자꾸만 나한테 애를 내놓으라고, 왜 나를 이렇게 시시때때로 괴롭히려고 왜….”
“여준아…. 아 정말 속상해 죽겠다….”
가린이 탄식하며 여준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여준은 아파 오는 미간을 주먹으로 누른 채 간신히 눈물을 참았다.
“내가 잘못했어. 다신 너한테 애 줘 버리라느니 그런 말 안 할게.”
“…아니야, 그러라고 한 소리가 아니라…. 내 걱정해 주는 거 아는데….”
“알아, 알아. 근데 그렇게 말할 때도 진심 아니었어. 알지?”
“응, 알아…. 나도 알아….”
진실을 절묘하게 깎아 내 유리한 방향으로 뭉쳐 놓은 말이나마 내뱉지 않았을 때보다는 나았다. 여준은 마음껏 가린의 동정을 취하며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 지오를 데리고 와야 하는데. 지금쯤 언제 또 마귀할멈이 될지 모르는 할머니의 눈치를 살피느라 전전긍긍하고 있을 텐데….
‘아빠, 나 언제 또 할머니한테 가야 해?’
무릎을 꼭 끌어안은 채 또박또박 말하던 아이의 얼굴이 떠오른다. 여준의 감은 눈가가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
“…래서 오늘…. …사는 …중에 하고….”
까무룩 잠겨 든 꿈은 언제나 그랬듯이 내용조차 떠오르지 않는 악몽이었다. 번뜩 눈이 뜨인 것은 순간 주위가 밝아진 탓이었다. 한껏 찌푸린 채 살펴보니 반쯤 열린 방문 밖으로 낯선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괜찮다니까요. 내일 다시 올게요.”
“그런 말이 어딨어. 충분히 잔다니까. 이불 많아.”
“아녜요, 그냥 미리 연락을 주셨으면 제가 다른 숙소 잡았을 텐데….”
익숙한 듯 낯선 목소리였다. 부스스 몸을 일으킨 여준이 침대에서 내려섰다.
“여준이 대하기 불편해서 그래?”
가람이 목소리를 낮춰 묻는 말에 여준은 걸음을 멈췄다. 영재는 대답이 없었다. 의아함에 눈을 껌뻑이던 여준이 저도 모르게 콜록, 기침을 내뱉자 말소리는 한순간 끊겼다.
“…….”
하아, 여준은 깊은 한숨을 내쉬고 방 밖으로 나섰다. 가람과 영재가 현관에 멀뚱히 선 채 여준을 바라보고 있었다. 가린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영재야, 오랜만이네.”
억지로 웃어 보려 했지만 가식적인 미소조차 힘겨웠다. 영재도 마찬가지인지 입을 여는 움직임이 딱딱해 보였다.
“어…. 이, 있었어?”
“응, 근데 이제 가야 돼. 내일 출근이라.”
각오는 했지만 예상보다 훨씬 더 어색한 재회였다. 여준은 화제를 돌리기 위해 재빨리 가람을 향해 물었다.
“저 가 볼게요, 형. 가린이는 자요?”
“응? 어어, 아까 잠깐 쉰다고 들어갔어.”
“깨우지 마세요. 제가 연락할게요.”
간단히 짐을 챙겨 신발에 발을 꿰던 여준이 멈칫했다. 신발장 거울에 비친 제 행색이 지나치게 초라했던 탓이다. 자다 일어나서 머리는 흐트러지고 와이셔츠는 구깃구깃했다. 씁쓸한 마음으로 돌아보자 그새 집 안으로 들어선 영재가 복잡한 시선을 보내오고 있었다.
“…여준아.”
“영재야, 너도.”
“어…?”
“연락할게.”
물론 현재 연락처 따위는 모른다. 영재도 알려 줄 생각이 없을 것이다.
***
터덜터덜 빌라를 나서는 발걸음이 무거웠다. 가슴을 꽉 채운 한숨을 조금씩 나눠 뱉으며 여준은 영재와의 마지막 통화를 떠올렸다. 은아와 결혼한 후, 한동안 연락이 끊겼던 영재는 어느 날 갑자기 다급한 전화를 걸어 왔었다.
‘여준아, 나…. 저기…. 돈 좀 빌려줄 수 없을까?’
여준은 일주일째 야근 중이었다. 전화를 받으려면 팀장을 비롯한 팀원들의 따가운 시선을 피해 휴게실까지 가야 했다. 잠시만, 하고 자리를 옮기는 사이 영재는 들리지도 않을 만큼 작은 목소리로 온갖 변명을 늘어놓았다.
‘내가 지금 돈이 없는 게 아니라…. 그러니까 이 돈을 절대 못 갚을 상황인 게 아니고, 거래하다가 뭐가 꼬여서 계좌가 막혔는데 그게 다음 주에 풀리거든. 그러니까 다음 주면…. 그때 꼭 바로 갚을 테니까….’
‘얼마나 필요한 건데? 당장 보내 줘야 해?’
휴게실 문을 닫자마자 되물었다. 영재는 잠깐 말이 없었다.
‘어…. 빌려줄 수…, 있어?’
‘얼만데? 내가 빌려줄 수 있는 금액이면 해 줄게.’
고등학교 때 가장 친했던 친구인데다 결혼식 때 보여 줬던 화려한 차림이 뇌리에 남아 있다 보니, 돈을 돌려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들지 않았다. 영재는 또 한참을 망설인 후에야 조심스레 말했다.
‘그게…. 이…, 천 정도?’
‘…….’
기껏해야 삼사백 정도를 예상했던 여준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이천이라니. 아무리 친구 사이라도 선뜻 빌려주기엔 지나치게 많은 돈이었다.
‘…힘들까? 안 되겠냐?’
‘힘…, 들다기보단 내가 당장 그 정도 돈을 융통할 수가 없는데….’
모아 놓은 돈이 없지는 않지만, 개중 당장 현금으로 빼서 쓸 수 있는 돈은 천만 원 정도가 한계였다. 당황스러운 마음에 여준이 쩔쩔매는 사이 그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이 영재가 몰아붙였다.
‘그럼 천은? 천도 안 될까? 나머지 천은 내가 사채라도 써서 메꾸면 되는데.’
‘…사채? 너 그렇게 위험한 상황이야? 무슨 일인데?’
‘설명할 시간도 없어. 천은 돼? 천은 지금 바로 보내 줄 수 있어?’
그때부터 스멀스멀 불안감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사채라는 단어 자체가 여준에게는 낯설고 충격적이었다. 가만히 아랫입술을 짓씹는 사이 영재가 한층 더 다급해진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오백은? 그 돈이라도 있으면 일단 송금 일정 딜레이 시킬 수 있을 것 같아.’
‘…아.’
‘지금 바로 부쳐 줄 수 있어? 부탁 좀 하자, 여준아.’
휙휙 바뀌는 말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여준은 뭐에 떠밀리기라도 한 듯 폰뱅킹을 켜고 영재가 불러 주는 계좌로 오백만 원을 송금했다. 영재는 몇 번이나 고맙다면서 인사를 한 뒤 농담처럼 말했다.
‘근데 여준아. 너 보내 줄 수 있는 게 꼴랑 이 돈이면서 그렇게 선뜻 빌려주겠다고 인심 쓴 거야?’
‘…어?’
‘좀 너무하네. 아, 웃자고 하는 소린 거 알지?’
영재가 호탕하게 웃더니 전화는 끊어졌다. 화면이 새카매진 핸드폰을 쥔 채 여준은 한참이나 얼떨떨하게 서 있었다.
그 뒤로 영재가 먼저 전화를 걸어 오는 일은 없었다. 약속했던 다음 주는 물론,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도 마찬가지였다. 석 달이 지난 후에 다시 걸어 봤을 땐 없는 번호라는 안내가 흘러나왔다.
“여준아!”
택시를 잡기 위해 큰길로 나서는데 등 뒤에서 가린의 목소리가 들렸다. 여준이 돌아보자 잠옷 원피스에 카디건 하나 덜렁 걸친 가린이 급히 달려 나오고 있었다.
“그냥 가면 어떻게 해.”
“깜짝이야…. 너야말로 이러고 나오면 어떡해.”
그녀를 가볍게 타박한 여준이 얼른 가린의 빌라 방향으로 앞장섰다. 집까지 도로 데려다주고 다시 나올 셈이었다.
“영재 때문에 가는 거야? 불편해서?”
“…아냐, 가 봐야지. 내 집 두고 왜 굳이 여기서 자.”
“그런 거면 얘기해. 나는 영재 말만 들어서 영재 입장밖에 몰라. 너도 억울한 부분 있으면 이제라도 얘기하고 다 털어. 응?”
“…….”
영재와의 연락이 끊겼을 때 여준이 먼저 취한 행동은 당연하지만 동창들에게 전화를 돌리는 것이었다. 빌려준 돈도 돈이지만, 그보다는 영재가 혹시 정말 위험한 상황에 처해서 연락이 끊긴 건 아닌가 걱정스러웠다. 바뀐 연락처를 묻는 과정에서 대놓고 돈을 빌려주었다고 털어놓진 않았으나 영재의 전화를 받았던 다른 동창들의 입에서 별수 없이 말이 새어 나갔다.
“아니라니까…. 억울하고 그런 거 없어.”
“혹시 고등학교 때 일 때문에 그래?”
“…….”
“그런 거면 마음 고쳐먹어. 옛날 일은 옛날 일이고, 난 그때 그게 네 잘못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지만…. 설령 잘못이라 해도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지.”
“알아, 알아.”
어느새 빌라 입구였다. 뭐라 더 말하려는 가린을 억지로 입구로 밀어 넣고 손을 흔들었다.
“괜찮아, 가린아. 오늘 고마워.”
“말로만 괜찮다고 하지 말고 거울 좀 봐라. 너 지금 그 얼굴이 사람 꼴인가.”
“알았으니까 들어가. 니네 동네 사람이 볼까 봐 간 떨려 죽겠어.”
입술을 삐죽이던 가린이 결국 물러섰다. 그녀를 들여보내고 오던 길로 돌아서며 여준은 아픈 머리를 감싸 쥐었다.
돈을 빌려 가고 연락이 끊긴 뒤, 영재가 말을 어떤 식으로 퍼뜨리고 다녔는지는 여준의 귀에도 빠짐없이 들어왔다. 일에 치여 동창 모임에 소홀했던 잠깐 사이 여준은 사채 빚에 떠밀려 죽을 지경이 된 친구에게 푼돈을 독촉한 파렴치한이 되어 있었다. 물론 누구나 듣는 순간 어딘가 이상하다고 생각할 이야기였지만, 돈 많은 아내를 얻어 유복하게 살고 있는 여준을 아니꼽게 보던 이들도 적지 않았던 탓에 분위기는 금방 영재 쪽으로 기울었다.
‘동창 사이에 돈 빌려 달라는 소리 꺼내고…. 애초에 영재가 잘못한 거긴 한데.’
‘그래도 여준이 네가 영재한테 그러는 건 더 안 되는 거 아니냐?’
손을 아무리 흔들어도 택시는 좀처럼 멈춰 서지 않았다. 긴 한숨을 내쉰 여준이 결국 콜택시 번호를 찍었다. 되는 일이 하나도 없다. 한 번에 풀려 주는 일도 없다. 언젠가부터 그랬다. 언젠가부터…. 그래, 어쩌면 딱 그날부터.
***
‘너 그 멘토인지 뭔지 정말 계속하려고?’
모의고사가 얼마 남지 않은 시점이었다. 아침부터 단어장을 들이파고 있는 여준의 눈앞으로 영재의 손이 쑥 들어왔다. 여준은 그 손에서 초콜릿을 날름 받아먹으며 고개를 들었다.
‘수시 추천장 써 준다고 그랬다니까.’
‘그거야 해 줄지 말지도 모르는 거고…. 걔 진짜 위험한 놈이야. 1학년 애들한테 물어봤는데 완전 차원이 다른 양아치 깡패 맞대. 수틀리면 사람도 막 패고.’
‘그런 느낌 아니었어. 착하다니까.’
여준은 짐짓 덤덤한 척을 했지만, 한 번 의식하고 나니 학교 어디를 가든 사현의 모습이 보였다. 사현은 주로 혼자였다. 영재를 비롯한 주변인들의 평판에 따르자면 그를 대하는 이들의 주된 정서는 두려움인 모양이었다. 임사현의 소문은 상상 이상으로 험악했다. 당연히 모두가 그를 어렵게 여기고 쉽게 말 걸지 못했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어쩐지 미묘한 감정이 들었다. 여준 자신과의 삶과는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 아침에 일어나 보면 늘 친구나 선후배들로부터 온 메시지가 가득했고, 학교 어디를 가든 먼저 인사를 건네고 말을 거는 사람이 있었다. 누군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상대의 인사를 받아 주면서 그 자리를 모면할 궁리를 하는 것도 일상다반사였다.
귀찮고 성가실 때가 많았지만, 그런 만큼 안심이 되었다. 친분과 애정을 확인하기 위해 던져 오는 의미 없는 인사들. 하루 종일 웃으며 대답하다 보면 금방 입꼬리가 욱신거렸다. 그래도 멈추거나 끊을 수가 없었다. 조금이라도 인간관계가 틀어지면 불안했으므로.
‘넌 걔 몇 번이나 봤다고 그렇게 확신하냐?’
영재가 못마땅한 듯 물었다. 여준은 대답 대신 애매한 미소를 지었다. 상대와의 대화가 원치 않게 길어질 때 자주 써먹는 방법이었다. 영재도 더 묻지 않고 고개를 돌렸다.
뭘 봤다고. 어떻게. 영재의 말이 백 번 맞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누군가를 향한 비방이나 욕설에 절대 동조하지 않는 것은 여준의 오랜 습관이었다. 그에게 남의 말을 하는 이들은 지나치게 많았고, 시종일관 중립적인 태도를 유지하지 않으면 뒷담화에 동참했다고 순식간에 말이 퍼졌다.
그런 점에서 사현은 편한 상대였다.
‘…안녕하세요.’
눈이 마주치면 머뭇거린다. 손을 들어 인사를 건네면 그제야 허리를 푹 꺾는다. 그의 세세한 언행 하나하나에 담긴 것이 스스로도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커다란 애정 또는 경애라는 것을 여준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그 원인도 대충 짐작할 수 있었다.
사현은 학교에서 여준 외의 그 누구와도 인사하지 않았다. 누군가와 붙어 있는 모습도 볼 수 없었다. 자발적으로든 아니든 철저히 고립되어 있었다. 그런 상대에게 일방적으로 추앙받는 것 또한 여준에게는 익숙한 일이었다.
‘점심 먹었어?’
‘네.’
‘뭐 먹었는데?’
‘그냥요, 급식….’
사현을 대할 때면 무엇도 신경 쓸 필요가 없었다. 건네는 말이 다른 사람에게로 새어 나갈까 걱정할 필요 없이 최근의 일들이나 신변잡기를 주절거릴 수 있었다. 사현은 말수가 적었기에 대화는 주로 여준이 이끌었다.
‘…그래서 저번에 스승의 날 이벤트 준비한다고 새벽 두 시까지 학교에 있었는데…. 사실 난 그거 별로 하고 싶지 않았거든. 나 좋게 보던 선생님도 아니어서.’
묵묵히 듣기만 하던 사현이 눈을 살짝 크게 뜨고 돌아보았다. 여준은 아차 싶어 입을 다물었다. 너무 속을 보였나 싶었다. 그러나 조심스레 열린 사현의 입에서 흘러나온 것은 그보다 더 뜻밖의 말이었다.
‘선배를 안 좋게 보는 선생님도 있어요?’
‘…….’
정말이지 마음이 편했다.
‘…그게, 작년 2학기에 있었던 일인데 왜, 선생님들이 꼭 분위기 잡으려고 누구 하나 불러서 쥐 잡듯이 모는…. 그런 경우 있잖아?’
‘그래요…?’
‘응, 근데 그걸 나로 하고 싶으셨나 봐. 칠판에 엄청 어려운 수학 문제 써 놓고서 나를 불러내서 그걸 풀어 보라는 거야. 딱 봐도 고등학생 수준이 아닌 그런 거. 근데 그게…. 내가 올림피아드 준비할 때 학원에서 풀어 봤던 문제였거든. 숫자까지 똑같았어.’
‘그래서요? 풀었어요?’
‘풀었지. 지금 생각해 보면 그냥 못 한다 그러고 마음대로 하시라고 냅뒀으면 좋았을 텐데 나도 오기가 생겨서….’
‘그게 왜 오기예요? 할 줄 알아서 한 건데.’
사현이 턱을 괴며 물었다. 온순한 눈동자가 검게 반짝였다. 사현의 입장에서는 재밌을 게 전혀 없는 이야기뿐이었는데도 그는 한순간도 딴청을 피우거나 한 귀로 흘리는 법이 없었다.
‘혼자 힘으론 못 하는 거였어. 운이 좋아서 푼 거라니까.’
‘나한테는 수학은 외운 게 다 실력이라고 그랬었잖아요.’
‘…….’
‘그럼 선배도 그게 선배 실력이었던 거잖아요.’
사현은 살짝 웃은 것 같았다. 여준에게 건넬 말이 생겨 기쁜 듯했다. 여준은 잠시 말없이 그를 바라보다 이내 침묵이 길었던 것을 깨닫고 습관처럼 웃었다.
‘뭐 말이야 그렇지…. 암튼…. 그랬는데 막상 이벤트 해 드리니까 너무 좋아하셔서…. 혼자 꽁해 있었던 게 좀 죄송하더라고.’
‘죄송할 건 뭐 있어요. 선배가 선생님 면전에 대고 싸가지 없게 굴었던 것도 아닐 텐데.’
‘…응, 그냥…. 혼자 좀 그랬다고.’
‘하여간 혼자 그런 것도 참 많네요.’
대수롭지 않게 말하며 시선을 돌리는 사현의 옆얼굴은 잔뜩 말라 있었다. 키도 크고 어깨도 넓게 벌어져 티는 잘 나지 않지만 쓸데없는 군살이라고는 한 점도 없이 마른 체형이었다.
‘뭐 좀 먹을래?’
여준이 무심코 물었다. 사현이 의아한 얼굴로 돌아보았다.
‘왜요?’
이어 나온 물음이 지나치게 정곡이라 여준이 뜨끔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게, 이런 말을 왜 했지.
‘…그, 내가 배고파서.’
‘아…. 그럼 식사하러 가세요. 전 집에 갈게요.’
사현이 아무렇지 않게 대답하고 자리에서 일어날 태세를 했다. 당황한 여준이 얼른 그의 바지 자락을 붙들었다.
‘어? 왜? 같이 먹자는 거였는데….’
그러자 사현이 살짝 눈썹을 찌푸렸다. 난처한 기색이었다.
‘저 돈이 없어서….’
‘응? 아, 아아.’
여준은 그제야 제 실수를 깨닫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가정 형편이 어려워서 멘티를 받아들인 경우라고 했었다. 기억하고 있는데도 시종일관 여유로운 사현의 모습을 마주하다 보면 금방 뇌리에서 그 사실을 지우곤 했다.
‘에이, 내가 너한테 쏘라고 하겠어? 당연히 사 준다는 거지.’
‘저번에 아이스크림도 사 주셨잖아요.’
‘괜찮아, 괜찮아. 선배잖아. 원래 이런 건 다 선배가 사는 거야. 부담 갖지 마.’
머뭇거리는 사현을 억지로 끌어다 매점으로 향했다. 사현은 망설이면서도 천천히 여준의 뒤를 따라왔다. 방과 후의 매점에는 아무도 없었다. 여준은 얼마 남지 않은 빵이며 김밥 따위를 눈으로 훑다 말고 뒤늦은 후회를 했다. 학교 매점으로 오는 게 아니었는데. 차라리 분식집이라도 데려가서 제대로 된 걸 사 줄걸.
‘뭐 먹을래? 근데 다 팔려서 뭐가 없다….’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선배 드세요. 배 안 고파요.’
‘그러지 말고 골라 봐. 혼자 먹으면 뻘쭘하잖아.’
‘…그럼 그냥 선배 드시는 거…. 똑같은 거요.’
여준은 한참을 고심한 후에야 샌드위치 두 개와 김밥 두 줄, 우유 두 개를 골라 들었다. 그동안 사현은 있는 듯 없는 듯 가만히 선 채 그의 뒤를 지키고 있었다.
‘이거 받아 줘. 손 모자라.’
‘네.’
제 몫의 간식을 받아 든 사현이 고개를 꾸벅 숙여 보였다.
‘감사합니다. 잘 먹을게요.’
영재의 말을 믿을 수 없는 것은 사현의 이런 모습 때문이다. 말수가 적고 먼저 나서는 일이 없을 뿐, 건네는 말에는 정성스레 답했고 여준을 대하는 행동이나 말투에는 정갈한 깍듯함이 묻어났다.
‘너 혹시 형 있어?’
여준이 무슨 맛인지 알 수 없는 샌드위치를 한 입 물며 묻자 이미 김밥 반 줄을 해치운 사현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래? 왠지 형 있을 것 같았는데…. 동생은?’
‘없어요.’
‘그럼 외동이야? 나돈데.’
사 온 것들 중 먹을 만한 맛을 내는 건 커피 우유뿐이었다. 하지만 공기가 청량했고 기분 좋은 바람이 불어왔기에 아쉽지는 않았다.
‘진짜 외동인지는 모르겠지만….’
‘응?’
‘어머니는 저 아주 어릴 때 집을 나갔고, 아버지는 일 때문에 거의 지방에 계셔서 얼굴 못 본 지가 한참이거든요. 어쩌면 어딘가엔 동생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사현이 워낙 덤덤하게 말했기에 여준은 고민해야 했다. 이건 농담일까 아닐까. 자조일까 아닐까. 다행히 사현은 여준의 반응에 별로 개의치 않는 기색이었다.
‘…동생 있었으면 좋겠어?’
‘아뇨.’
머뭇거리다 물은 말에는 망설임을 포함해 어떤 감정도 묻어 있지 않은 대답이 돌아왔다. 여준은 그제야, 그가 단순히 자신의 물음에 최대한 성실하게 대답하려다 답변의 진위 여부를 따지는 지경에 이르렀을 뿐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난 있었으면 좋겠는데, 동생.’
때문에 마음 편히 웃을 수 있었다. 사현은 샌드위치 포장을 벗기다 말고 멈칫했다.
‘…전.’
부드러운 바람 속, 대화는 아주 천천히 이어진다. 사현과 함께하는 순간이 대체로 그랬다.
‘형…. 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적은 있어요.’
안온했다.
***
택시에서 내리자마자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아파트 입구까지 달려가는 짧은 새에 온몸이 흠뻑 젖었을 만큼 거센 비였다. 척척하게 달라붙는 셔츠를 몸에서 떼어 내고 있으려니 어금니가 딱딱 부딪쳤다.
먼지 쌓인 집 안은 써늘하기 짝이 없었다. 보일러 온도를 있는 대로 올리고 젖은 옷을 벗었다. 핸드폰과 지갑이 무사한 걸 확인하고 커튼을 닫기 위해 창가로 향하던 여준이 순간 그 자리에 멈춰 섰다.
“…….”
지상 주차장 입구 쪽에 길고 새카만 그림자가 보였다. 혹시, 하면서도 창 옆으로 몸을 숨긴 채 유심히 살펴보았다. 아무리 봐도 사람이었다. 온통 검은 옷을 입은 남자가 장대비를 고스란히 맞고 서 있었다.
차를 병원에 둔 채 택시를 타고 돌아왔기에 여준은 주차장이 아닌 아파트 출입구를 통해 집으로 들어왔다. 심장이 쿵쿵 뛰기 시작했다. 불길한 예감, 떨쳐지지 않는 공포가 등줄기를 타고 올랐다. 혹시, 자신이 차를 타고 돌아올 거라 생각해서 저기에 서 있는 거라면.
“…윽.”
재빨리 커튼을 끝까지 치고 주저앉았다. 심장이 입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온몸의 혈관이 벌떡벌떡 날뛰는 듯했다. 들어 올린 두 손이 사정없이 떨리고 있었다.
아이가 처가에 가 있어 처음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불조차 켤 수 없었다. 바닥을 기어 아이 방으로 들어 간 여준이 턱 밑까지 차오른 숨을 조금씩 나누어 뱉었다. 며칠째 잠은 부족하고 먹은 것은 없고 비까지 맞았다. 이미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혹시 환영을 본 건 아닐까? 여준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싼 채 머릿속을 정리하려 애썼다. 애초에 저게 정말 임사현일까? 그 이전에 인간이긴 할까? 덜덜 떨리는 손에 얼굴을 묻은 채 애써 생각의 방향을 돌려 보려 했지만 창밖을 두 번 확인할 용기는 없었다. 다시 내다보는 순간 눈이라도 마주칠까 두려웠다.
그 와중에 참을 수 없이 추웠다. 비몽사몽 끌어내린 아이의 이불에서는 아직도 비릿한 냄새가 났다. 이불을 머리에 뒤집어쓴 채 웅크리고 있으려니 자꾸만 코끝이 시큰해졌다. 너무나 많은 일이 벌어진 이틀 사이 참고 있던 서러움과 두려움이 울음으로 차올랐다.
“하아….”
흘러나오는 눈물을 하염없이 떨어뜨렸다. 미미한 진동음이 울린 것은 그때였다. 여준이 깜짝 놀라 방문을 열었다. 거실 테이블에 올려 둔 핸드폰 액정에 불이 들어와 있었다.
“…….”
조심스레 일어서 거실로 향했다. 우르릉, 천둥소리가 들렸다. 흠칫 놀라 움츠린 손끝에 걸린 핸드폰에는 민가람이라는 이름 석 자가 떠올라 있었다.
“…여보세요?”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최대한 낮추어 받았다. 수화기 너머에서 흘러나온 것은 가린의 목소리였다.
- 어, 여준아. 집에 잘 들어갔어?
“…….”
익숙한 목소리가 건네 오는 다정한 안부의 말에 얼어붙어 있던 손끝이 와르르 녹아내렸다. 여준은 숨을 잔뜩 들이켜고 이를 악물었다.
- 여준아? 안 들려?
“…….”
- 여준아?
“…들, 들려. 잘 들어왔어.”
- 응, 다른 게 아니고 영재가 자기 그냥 모텔 잡겠다고 나가서…. 너 며칠 우리 집 와 있어도 된다는 말하…, 려는 거였는데 여준아? 너 울어?
“아니, 안 울어. 울긴 무….”
- 오빠! 어떡해? 얘 우는 거 같아!
“아, 안 운다니까….”
다급하게 만류해 봤지만 이미 가람이 달려온 후였다. 가린에게서 제 핸드폰을 넘겨받은 가람이 벌컥 소리를 질렀다.
- 울어? 왜? 무슨 일 있어?
“…글쎄 안 운다니까요….”
- 집이야? 형이 지금 갈까?
“오지 마요, 위험….”
무심코 내뱉던 여준이 얼른 입을 다물었다. 이런 말은 하면 안 되는 건데. 제 입을 때리며 소리 없이 자책했지만 이미 때는 늦어 있었다.
- 위험해? 뭐가?
“…아니.”
- 여준아.
“느, 늦었고, 비도 오고, 그래서 위험하다고요.”
- 여준아, 내가 지금 갈까? 아니면 경찰에 신고해서 너희 집에 좀 가 달라고 할까.
“아니, 아니에요. 정말 그런 거 아니고, 형.”
- 지금 오라고 말 안 하면 나 전화 끊자마자 신고한다, 진짜야.
단호한 목소리에 그만 기가 눌렸다. 여준은 애꿎은 입술만 잘근거리다 체념하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가람은 전화를 끊은 지 이십 분 만에 벨을 눌렀다. 여준은 인터폰을 자세히 들여다본 뒤에야 문을 열어 주었다.
“으아, 비 엄청 오네.”
벌컥 들이친 가람이 여준을 보자마자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왜 불이란 불을 다 꺼 놨어? 자려고?”
“…형, 잠시만….”
여준은 그의 말도 들은 체 만 체하며 수동 자물쇠에 체인까지 재빨리 걸어 놓았다. 그 모양을 가만히 보고 있던 가람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너 진짜 무슨 일 있지?”
“아니라니까요. 하여간 형도 가린이도 걱정만 많아서…. 걱정 인간들이야.”
시간은 새벽 두 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내일 출근은 어쩌지. 가람이 도착하고 긴장이 풀리자 뒤늦게 현실적인 걱정이 들었다. 가람은 딴생각에 빠져 있는 여준의 시선을 억지로 제 쪽으로 돌려놓았다.
“뭔데, 형한테 말해 봐.”
“정말로 아무 일….”
“여준아, 우리 진짜 너 걱정돼 죽겠어. 이런 말까진 안 하고 싶은데, 아까 전화 받고 너 무슨 나쁜 생각이라도 하는 거 아닌가…. 아주 그냥 심장이 덜컹하더라.”
“…….”
“말을 해 봐. 말이라도 하면 좀 나아지잖아. 나한테라도 해 봐. 나 아무한테도 말 안 할게. 가린이한테도 그냥 너 괜찮았다고 할게. 응?”
여준이 천천히 고개를 떨어뜨렸다.
오지 말라고 했지만, 사실은 누구라도 와 주기를 바랐다. 괜찮다고 말했지만, 허울 좋은 대답에 상관없이 끈질기게 물어 주길 원했다. 뱃속에서 꽁꽁 얼어 버린 응어리를 조금이라도 깎아 내고 싶었다.
“일단 좀 앉아서…. 아니, 너 몸은 왜 이렇게 차가워?”
“…아.”
“찬물로 씻었어? 이 날씨에? 당장 들어가서 뜨거운 물로 몸 좀 녹이고 나와. 내가 뱅쇼 만들 재료 다 가져왔어. 맛있게 해 줄게.”
“그게, 형….”
“들어가, 빨리.”
억지로 떠밀려 욕실로 들어섰다. 어쩐지 고등학생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그때 가람은 수험생이었음에도 하루도 빠짐없이 학생회실에 얼굴을 비추고 후배들을 챙겨 줬었다.
거울 속에는 여전히 핏기 없이 창백한 남자가 비쳤다. 그 모습이 보기 싫어 일부러 더 뜨거운 물을 틀었다. 따뜻한 수증기가 욕실을 채우고, 물줄기를 맞고 서자 손발의 떨림도 차차 가라앉았다.
***
샤워를 끝내고 문을 열자 조금 전과는 완전히 달라진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환히 불을 켠 주방은 따스해 보였고, 절로 군침이 돌 만큼 달콤한 냄새가 풍겼다. 피리 소리에 이끌린 어린애처럼 주방으로 향하던 여준의 얼굴이 순간 새파랗게 굳었다. 거실 커튼이 활짝 열려 있었다.
“엇…!”
다급히 달려간 여준이 얼른 커튼을 도로 닫았다. 그래 봤자 다시 뛰기 시작한 심장이 쉬이 진정되지는 않았다. 허옇게 질린 채 숨을 몰아쉬고 선 여준의 곁으로 가람이 심각한 얼굴을 한 채 다가왔다.
“왜 그래?”
“…….”
“진짜 무슨 일이야?”
커튼을 꽉 쥔 여준의 손등으로 가느다란 핏줄이 툭툭 돋아났다. 가람은 그의 떨리는 손 위로 제 손을 덮은 채 재차 물었다.
“커튼 걷으면 안 되는 거였어? 미안해, 답답해서 그랬어.”
“…….”
“여준아.”
“…….”
“…일단 이리로 와.”
가람이 한 손으로 여준의 어깨를 감싸 끌어당겼다. 천천히 걸음을 떼던 여준은 커튼을 쥐었던 손을 풀고서야 하아, 참았던 숨을 힘껏 내쉬었다.
“이리 와, 앉아.”
여준을 식탁 의자에 앉혀 놓은 가람이 인덕션에 올려 둔 냄비 뚜껑을 열었다. 동시에 달콤한 향이 좀 더 진해졌다. 가람의 특기인 뱅쇼였다.
“원래 더 끓어야 맛있는데…. 못 먹을 정돈 아닐 거야.”
가람이 건네준 머그잔을 쥔 채 여준이 천천히 심호흡을 했다. 가람은 더 묻지 않고 건너편 의자에 앉았다. 뭐라도 말해 주기 전까지는 굳건히 자리를 지킬 기세인 가람이 원망스러운 만큼 고마웠다. 여준은 주먹 쥔 손으로 미간을 짚은 채 혀끝까지 차오른 말을 여러 번 골라냈다.
“…형, 올 때 뭐 타고 오셨어요?”
한참 후에야 나온 생뚱맞은 질문에도 가람은 스스럼없이 대답했다.
“뭐 타고 오긴. 차 끌고 왔지. 이 시간에 택시 잡을 수도 없고.”
“…….”
“주차장에 자리 없어서 가로로 대 놨어. 가린이가 너 도로 데려오라고 하도 난리라, 어차피 오래 안 있을 것 같았고.”
과일을 넣고 끓인 와인에서 풍기는 달콤한 냄새에 벌써부터 취할 것 같았다. 여준은 머그잔에 입을 댄 채 천천히 뱅쇼 한 모금을 삼켰다.
“…들어…. 오다가.”
“응?”
“차 끌고 들어오다가…. 이상한 사람…, 같은 거 못 봤어요?”
제 입으로 뱉어 놓고도 어이없는 질문이었다. 그러나 가람의 표정은 금방 심각해졌다.
“여준아, 혹시….”
“…….”
“니 처가에서 너 해코지하려 그래?”
두 모금째를 입에 대려던 여준이 눈을 여러 번 깜빡였다. …네? 느리게 되묻자 가람은 누가 듣기라도 한다는 듯 목소리를 낮췄다.
“아니, 애 때문에 갈등이 있다며. 처가에서 애 내놓으라고 막 협박하고 그런다면서. 혹시 지금도 누가 밖에서 감시하고 있고 그런 거야?”
“…아뇨, 그런 건 아니고….”
“그럼 왜 그렇게 벌벌 떨어? 뭔데 그래?”
가람답다면 다운 결론이라 순간 힘이 빠졌다. 헛웃음마저 나왔다. 가람은 여전히 세상 가장 진지한 얼굴로 여준을 살피고 있었다.
“형. 우리 고등학교 때 일 기억하세요?”
“고등학교 때? 그때 있었던 일이 뭐 한두 갠가. 어떤 거?”
“가린이한테는….”
“안 할게. 얘기 안 해. 말해 봐, 뭔데?”
사려 깊은 사람은 대체로 상대가 하고픈 말을 이미 다 알고 있다. 여준은 가람을 만날 때마다 그를 닮고 싶다고 생각했다. 살면서 그런 느낌을 받아 본 상대는 딱 둘뿐이었다. 사현의 얼굴이 떠오르자 또다시 등줄기가 싸늘해졌다.
여준에게 있어 가람이 표방하고픈 대상이라면, 사현은 동경의 대상이었다. 타인과의 관계를 끊지 못할 거라면 가람처럼, 아예 포기하고 갈 길을 가겠다면 사현처럼 살고 싶었다.
“영재가….”
그토록 어렸고 어리석었다.
“크게 다친 적이 있었잖아요.”
사현은 바로 그 여준의 어린 날이 불러낸 괴물이었다.
“…아.”
가람이 한 템포 느린 대답을 했다. 떠올리기 힘들어서가 아니라 미처 생각지 못한 화제였기 때문인 듯했다. 그에게서 시선을 떨어뜨린 여준이 낮은 숨을 들이켰다.
“그때 그…. 영재가….”
“…….”
“너랑 멘토링인가 뭔가 하던 애한테 맞았던 일 말이야?”
머그잔을 쥔 여준의 손이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다. 지금까지도 생생히 떠오른다. 흙먼지가 피어오르는 운동장, 영재는 피투성이가 되어 나뒹굴고 있었다. 웅크린 채 머리만 간신히 감싼 영재의 앞에 선 것은 부러진 야구 배트를 든 사현이었다. 얼굴이며 옷 이곳저곳에 영재의 피를 묻힌 채 귀신처럼 시커먼 눈을 하고 있었다.
그 일로 사현은 퇴학 당했고, 영재는 꼬박 2주를 입원해야 했다. 팔에 금이 가고 코뼈가 부러졌다. 어렵게 문병을 간 여준을 향해 영재는 차가운 말을 반복했다.
‘그러게 내가 뭐랬어, 여준아.’
내가 뭐랬어. 그 새끼는 괴물이랬지.
“그때 너네가 하도 심각해서 뭐라고 말은 못 했지만, 나 솔직히 궁금하긴 했었다. 그거 대체 뭐가 어떻게 된 일이야?”
“…….”
“네가 멘토링해 주던 애가 왜 갑자기 영재한테 그 난리를 친 거야?”
“…영재가 아무 말 안 했어요?”
여준이 얼떨떨하게 되물었다. 당연히 가람도 알고 있을 줄 알았다. 같은 반이었던 동창들에게는 이미 유명한 이야기였으므로.
“영재한텐 내가 일부러 안 물어봤어. 걔도 나한테 먼저 그 얘기 꺼낸 적 없고.”
“…….”
“걔가 좀…. 너한테 쎄하게 굴 때 많잖아. 너도 그렇고…. 고등학교 땐 둘이 그렇게 절친이더니 왜 그렇게 된 거야? 그 일 때문이야? 난 예전의 그 돈 문제 때문인 줄 알았는데.”
정곡을 찌를 듯 말 듯 묘하게 비껴가는 말들에 점점 긴장이 풀어졌다. 여준은 잔을 내려놓고 마른세수를 했다.
“형, 지금부터 얘기하는 건…. 어디까지나 제 중심적으로…. 제 입장을 말하는 거니까요….”
“그래, 그래. 알아.”
그 와중에도 도망칠 구석을 만들어 놓고 시작하는 스스로가 혐오스럽기까지 했다. 그러나 가람은 그런 심정마저 다 안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괜찮아, 말해 봐.
“그때, 멘토링 시작할 때요. 처음부터 영재가 저한테 경고했었거든요. 임사현…, 그러니까 제 멘토링 상대가 정말 질 나쁜 걸로 유명하니까 조심하라고, 웬만하면 멘토링도 그만뒀으면 좋겠다고요.”
“어.”
“근데 제가 그 말을 안 듣고 계속 가깝게 지냈는데…. 한 번은 학교에 이상한 소문이 났어요.”
“무슨 소문?”
“임사현이 조폭…, 이랑 어울리는 녀석인데 여자도 여럿 임신시켰고…. 근데 자기 여자 친구가 임신하니까 억지로 낙태를 시켰다고요. 그래서 그 여자가 자살했다고….”
뱉어 놓으면서도 현실감이 없는 이야기였다. 애초에 여준이 살아온 인생과는 티끌만 한 접점조차 없었어야 맞을 별세계의 사건이었다. 가람에게도 다르지 않았던 듯, 쌍꺼풀 없이 길쭉한 두 눈이 어벙하게 끔벅였다.
“진짜로?”
“소문이었어요. 그리고 그 소문이 난 게 그때 학교 애들이 쓰던 익명 카페에 올라온 글 때문이었거든요. 엄청 장문의 글이었어요. 구구절절 임사현이 얼마나 악질인지 고발하는 글.”
“응.”
“그런데…. 제 생각에는 그게 아무래도 영재가 쓴 글 같아요.”
가람의 두 눈이 아예 튀어나올 듯 크게 뜨였다. 여준은 그가 뭐라 말하기 전에 재빨리 손사래를 쳤다.
“증거는 없어요. 그냥 제 느낌에요.”
“…어, 어어….”
“그러니까, 영재가…. 임사현이 얼마나 위험한 놈인지 아무리 말해도 제가 안 들으니까…. 그래서 벌인 일 같아요. 근데 임사현이 그걸 알았던 게 아닐까….”
“어떻게? 익명 카페였다면서.”
“…모르죠. 그냥 제 생각이라니까요.”
“으음….”
턱을 쥔 채 의자에 등을 기댄 가람이 한참 앓는 소리를 냈다. 여준은 마른 입술을 축이며 행여나 말실수한 게 없는지 되짚어 보았다. 아무리 그래도 모든 진실을 숨김없이 말할 수는 없었다. 상대가 누구라도 그건 안 될 일이었다.
“그럼 영재가 너를 구해…. 아니, 이건 말이 좀 이상하네…. 도와주려다가 그런 일을 당했단 말이야?”
“…네.”
“허어….”
잠시 침묵이 흘렀다. 여준은 어색한 순간을 견디기 위해 다시 뱅쇼를 홀짝였다. 조금씩 졸음이 오는 것도 같았다.
“근데 여준아.”
“네.”
“그래서 지금 니 상황이 그 일이랑 무슨 상관인데?”
“…….”
모든 사실을 토해 내고 편해지고 싶은 욕망이 시시때때로 혀끝에 걸어 놓은 브레이크를 건드린다. 여준은 마음을 다잡기 위해 어금니를 꽉 물었다 풀기를 반복했다. 그의 뺨에 패는 근육의 움직임을 유심히 지켜보면서도 가람은 그 이상 재촉하지 않았다.
“…어제…. 지오 데리고 병원에 갔을 때 우연히 다시 봤거든요.”
“누구를? 사현이라는 애를?”
“…네. 근데 갑…, 자기 저한테 시비를 걸어서, 아까도…. 창밖을 봤는데 왠지…. 저기 서 있는 것 같고….”
“…….”
“그래서 좀…. 무서워서….”
마음이 약해지는 순간마다 떠오른다. 기억이 선명할수록 섬뜩한 지점은 따로 있었다. 야구 배트를 쥔 사현은 집요하리만큼 영재의 머리만을 노리고 팔을 휘두르고 있었다. 도자기처럼 매끈한 얼굴에는 분노는커녕 짜증 한 점 묻어 있지 않았다. 오로지 해야 할 일을 한다는 듯, 가장 효율적인 폭력을 휘두르는 사현은 그 순간 사신과도 같았다.
으음, 앓는 소리를 내던 가람이 벌떡 일어나 창가로 다가갔다. 커튼을 살짝 열어 밖을 한참 밖을 내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저으며 돌아온다.
“아무도 없어.”
“…네?”
“비 그쳤는데 아무도 없어. 봐.”
여준이 머뭇머뭇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람은 아예 커튼을 다시 펼쳐 놓고 여준을 기다리고 있었다. 다가갈수록 뺨이 따끔거리는 것 같았다.
“…….”
희끄무레한 가로등 불빛이 비추는 주차장에는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여준이 한숨을 내뱉고 고개를 떨어뜨렸다. 역시 환영이었던 게 아닐까. 정신을 조금 차리고 보니 아까 느꼈던 공포가 모두 꿈만 같았다.
“근데 그 녀석이 여기 와 있던 게 맞다고 해도…. 왜 그렇게까지 하는데?”
“…….”
가람이 석연찮은 기색으로 묻는 말에 여준의 손끝이 멈칫 굳었다.
“여준이 네가 아까 말한 일 말야. 영재가 애들끼리 쓰는 카페에 헛소문을 흘렸고, 그래서 그 임사현이란 녀석이 화가 나서 영재를 때렸고…. 그 과정에서 너랑 영재랑 친구니까 너한테까지 악감정 가졌을 수 있겠지. 근데 다 그럴 수 있는 일이라고 쳐도, 그거 벌써 10년 전 일이잖아. 그 일 때문에 널 해코지하려 쫓아다닌다고? 그것도 이제 와서?”
“…그, 러게요.”
여준이 얼른 가람의 말을 막았다. 뒷머리가 바짝바짝 일어서는 느낌이었다.
“그러게요, 선배 말이…. 맞네요. 제가 너무 신경과민이었나 봐요.”
“응? 아니, 난 그런 뜻이 아니라….”
“그러게요, 그럴 리가 없지…. 진짜 무슨 생각을 한 거지….”
제 얼굴이며 목을 마구 쓸어내리던 여준이 어색하게 웃었다. 가람은 뭐라 더 말하려다 그만두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요즘 피곤해서 과민 반응한 걸 거야. 그래도 영 불안하면 경찰에 한 번 상담을 해 보면 어때?”
“네, 그래야겠어요. 그럴게요.”
“말 나온 김에 말하자면…. 너 지오 문제도 변호사랑 날 잡고 얘기 좀 해 봐. 자꾸 니네 처가에서 애 문제로 월권행위 하게 내버려 둬서 너나 지오한테 좋을 거 없어.”
“…네.”
“내 친구 중에 큰 로펌 다니는 애 있어. 이쪽 문제 잘 다루는 사람 있나 알아봐 달라고 말해 줄까?”
“네, 그러…. 그래요. 부탁드릴게요.”
무슨 말을 지껄이고 있는지 자각도 없었다. 그저 일 초라도 빨리 대화를 끝내고 가람을 내보내고픈 마음뿐이었다. 그 마음이 전해졌는지 가람은 곧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래, 그럼 나 그만 가 볼게. 얼른 자.”
“…아.”
가져온 짐을 정리하는 가람의 등을 보고서야 뒤늦은 탄식이 새어 나왔다. 이 시간에 걱정된다고 여기까지 달려와 준 사람인데, 이런 식으로 대하는 건 아니지 않나…. 머뭇거리던 여준이 얼른 그의 팔을 붙들었다.
“자…, 자고 가세요, 형.”
“응? 아니야, 괜찮아.”
“그러지 말고 자고 가세요. 시간 너무 늦었잖아요. 손님방도 비어 있어요.”
“근데 너 내일 출근해야….”
“괜찮아요. 네?”
여준이 팔을 끌어당기며 간절히 권했다. 그제야 가람도 짐을 내려놓았다.
“신경 안 써도 되는데.”
“어떻게 신경을 안 써요. 잠깐만요. 갈아입을 옷 드릴게요.”
식탁을 정리하며 여준은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았다. 누구에게든 더 이상 흐트러진 모습을 보일 수는 없었다. 정신 차려야 해. 속으로 중얼거리고 감은 눈에 힘을 주었다.
***
눕자마자 잠이 들고, 또 꿈을 꾸었다. 꿈속의 여준은 열여덟 살이었다. 이 세상에서 못 가질 것도, 욕심낼 수 없을 것도 없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던, 전능감과 고양감으로 가득했던 황금기.
여준은 가만히 멈춰 선 채 저보다 두 걸음 앞에 선 사현의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훌쩍 큰 키와 평평하게 벌어진 어깨, 안쓰러울 정도로 말라 있던 팔뚝이 가슴을 파고들었다. 사현아. 부르며 손을 뻗었다.
돌아본 사현의 얼굴은 피범벅이었다. 미간을 가로지른 커다란 상처에서 끝없이 피가 벌컥대며 솟고 있었다.
“…헉…!”
비명을 지르며 깨어났을 때,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놀란 가람의 얼굴이었다.
“깜짝이야.”
“아…, 형.”
“가위눌리는 것 같더라. 괜찮아?”
“괜, 괜찮아요.”
허둥대며 일어나던 여준이 순간 숨을 멈췄다. 벽시계가 오전 아홉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골이 띵하니 울리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헉, 이런, 지각…!”
“…아참, 아까 니네 팀장한테 전화 왔길래 내가 대신 받았어.”
“형, 저 지각이라, 먼저, 아, 옷 다려 놓은 게….”
“여준아, 내 말 먼저 들어. 니네 팀장이 오늘 연차 낸 걸로 처리해 준다고 했어.”
세수하고, 옷을 입고, 당장 회사로 달려가야 한다. 뒤죽박죽 얽힌 머릿속을 정리하느라 가람의 말은 아주 뒤늦게야 들렸다. 칫솔에 클렌징 폼을 짜다 말고 고개를 든 여준이 멍청하게 되물었다. 네?
“아까…. 한 일곱 시 반쯤? 전화 왔는데 네가 통 못 일어나길래 내가 받았어. 팀장님이라고 떠 있어서 혹시 중요한 일일까 봐.”
“…아.”
“안 그래도 너 컨디션 안 좋을 것 같아서 전화했다고, 오늘은 연차 쓰고 쉬라고 전해 달래. 문자도 와 있을 테니까 확인해 봐. 그리고 너 그걸로 이 닦으려는 거 아니지…?”
여준은 칫솔을 입으로 가져가다 말고 풍기는 향긋한 냄새에 얼른 고개를 흔들었다. 가람이 내민 핸드폰을 보니 문자며 메신저 알림이 가득 쌓여 있었다.
「성 선임! 항상 고생 많고 미안하게 생각해. 오늘은 연차 처리했으니까 주말 끼고 푹 쉬어. 항상 파이팅!」
팀장에게서 온 메시지에는 하마터면 눈물이 날 뻔했다. 입술을 깨무는 여준을 보며 가람이 씩 웃었다.
“더 자, 더 자. 아까 하도 꿀잠 자고 있어서 짠하더라.”
“아니에요, 일어나야죠…. 이제 개운해졌어요.”
빈말은 아니었다. 얼마 만에 중간에 깨는 일 없이 푹 잤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샤워를 마치고 보니 거울 속 얼굴도 오랜만에 멀쩡해 보였다.
한때는 자신의 외모를 꽤 좋아했었다. 중학생 때부터 길거리 캐스팅도 심심치 않게 받았고, 졸업 사진이 인터넷에 퍼져 잠깐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쇼핑몰 모델 일을 해 본 적도 있었다. 부모님에게 들키면서 금방 그만둬야 했지만.
‘그만두길 잘했네. 괜히 연예인 해 보겠다고 헛바람 들어갔을 수도 있잖아. 자기가 매력 있는 얼굴은 아닌데.’
괜찮은 아르바이트였는데 아깝다, 라고 말했을 때 은아가 대뜸 뱉은 말이었다.
‘향기 없는 꽃이라고 하나? 자기는 잘생기긴 했는데 그냥 그게 다야. 연예인은 얼굴만으로 하는 게 아니잖아.’
은아는 너무나 악의 없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자기 눈에도 내가 별로야? 언제나 그랬듯 농담으로 받기 위해 떠올린 말은 끝내 여준의 혀끝에 걸리지 못했다. 은아가 아무렇지 않게 별로라고 대답할까 두려웠다.
잡념에 너무 오랜 시간을 쓸 순 없었다. 꼼꼼하게 면도를 하고 나오니 가람이 돌아갈 채비를 마친 뒤였다. 놀란 여준이 얼른 새 티셔츠를 꺼내 입었다.
“벌써 가시게요? 아침이라도 드시고….”
“나 집에 가서 가린이 밥 차려 줘야지. 걔 내가 안 먹이면 또 종일 굶는다.”
“아….”
“참, 나 차 바로 빼도 돼? 어제 경비 아저씨 없길래 그냥 들어왔는데.”
“확인증 받아 드릴게요. 같이 내려가요.”
급한 대로 아이 방에 처박아 두었던 야상 재킷을 걸쳤다. 신발까지 신고 기다리고 있던 가람은 그런 여준의 모습을 보고 픽 웃었다.
“너 그렇게 입으니까 고등학교 때 같다.”
“네?”
“귀엽다고. 요만할 때 봤던 게 언제 이렇게 컸냐.”
가람이 제 가슴께에 손날을 댄 채 씩 웃었다. 여준도 애매하게 웃고 앞장섰다.
금요일 오전의 아파트 주차장은 먹다 만 옥수수처럼 듬성듬성 이가 빠져 있었다. 사이드 브레이크를 내려둔 채 세워 둔 가람의 차는 여러 번 밀렸는지 거의 주차장 입구에 붙은 채였다. 여준은 경비실에서 받아온 주차 확인증을 가람에게 내밀고 손을 흔들었다.
“감사했어요, 형.”
“그래, 푹 쉬고. 무슨 일 있으면 나나 가린이한테 언제든 전화해.”
“네.”
“대답만 꿀떡같이 하지 말고, 어?”
“알았어요, 정말로.”
잔소리를 있는 대로 장전한 가람을 간신히 뿌리쳐 보내고 섰다. 재킷 주머니에 손을 넣고 선 채 긴 숨을 들이쉬자 폐를 도는 찬 공기에 머리가 개운해졌다. 머리가 아프지 않고, 몸이 무겁지 않은 상태는 정말 오랜만이었다. 한편으로는 씁쓸했다. 여섯 시간 내리 잔 것만으로 컨디션이 이렇게나 좋아지는데, 왜 이런 간단한 사치 하나 누리고 살기가 그렇게 힘든 걸까.
“운동 좀 해야겠어…. 체력이 없어서 그래, 체력이….”
여준이 혼자 중얼거리며 아파트 입구를 나서 마트로 향했다. 냉장고가 텅 비어 있었다. 간단히 장을 보고 아이가 좋아하는 간식도 채워 둘 생각이었다. 뜻하지 않은 휴일이 생긴 김에 미뤄 뒀던 집안일을 처리하고 아이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
장바구니에 이것저것 담다 보니 금방 심란해졌다. 가람의 말마따나 친권이나 양육권은 빠짐없이 여준에게 있었다. 법적으로 처가 사람들이 아이에게 접근하지 못하게 만드는 건 일도 아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그렇게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도저히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은아를 죽인 사람이 누구인지 알기에.
‘그 녀석이 이제 와서 너한테 왜 그러는 건데?’
그 이유를 알지만,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