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02. 그리고 Lust
나연은 따뜻한 찌개를 두고 한참을 바라보다 결국 집을 나왔다. 운전대를 잡고 재문으로 향하는 길을 잡았다. 오늘 결혼기념일이라고 둘이서 오붓한 시간을 좀 보내자 생각했는데 그가 갑작스러운 전화를 받고 집을 나갔다. 이럴 때면 늘 심장이 쪼그라들고 손발이 떨렸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니겠지. 아닐 거야.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자꾸만 걱정이 앞섰다.
연애 시절이라고 하긴 뭐하지만, 그와 결혼하기 전에도 좋지 못한 일로 그가 하루 내도록 집을 비운 적이 있어 걱정이 더했다. 그의 일은 위험을 동반한 일이니까, 마음을 졸일 수밖에.
“네. 비서실장님, 저예요. 혹시 지금 연석 씨 사무실에 있나요? 제가 간섭할 일이 아닌 건 알지만 걱정이 되어서요. 네. 제가 지금 회사 쪽으로 가는 길이에요.”
잠깐 회사 내부에 일이 있었지만 걱정할 것 없다는 답에 나연은 그나마도 안심이 들었다.
회사 앞에 차를 세우자 성식의 명령으로 대기하고 있던 새까만 양복의 남자가 나와 그녀에게서 차 키를 받아갔다.
나연은 서둘러 이사실로 향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마자 총알같이 올라탔다. 하필이면 꼭 이럴 때 시간 참 안 간다 싶다.
문이 열리는 소리에 나연은 빠르게 내려 이사실로 향했다. 시커먼 사내들이 이사실 앞을 지키고 있었다. 연석의 비서이자 그녀와도 안면을 튼 적 있는 남자 하나가 고개를 숙였다. 날카로운 인상의 남자는 깍듯하게 각을 세워 그녀를 대했다.
“이사님께서는 아래층 회의실에 계십니다.”
“알아요. 방금 비서실장님이랑 통화하고 오는 길이거든요. 회의 마치는 시간을 몰라서 혹시 실례할까 봐 여기로 왔어요.”
“들어가서 기다리시겠습니까?”
“네.”
나연은 남자가 열어 주는 문으로 들어가 익숙하게 소파로 가 앉았다.
그 어느 누구도 그가 없이는 열리지 않는 철통같은 문이었다. 온갖 중요한 서류들은 금고 안에 있다 하여도 이 사무실 자체가 타인에겐 금기시되는 장소였다. 하지만 나연에겐 달랐다. 그녀만이 출입을 허가받았다. 당연히 연석의 지시 아래 이루어진 일이었다.
그나마도 큰일이 일어난 건 아닌 것 같아 보여 다행이었다. 혹여 그가 또다시 전쟁터 같은 곳에서 싸움에 휘말린다면, 칼이라도 맞는다면….
나연은 창백한 얼굴로 침을 꿀꺽 삼켰다. 그게 아니라 얼마나 다행인지 몰랐다. 같은 건물 안에 있다는 것 자체로 안심이 됐다.
그의 사무실 창문에선 반짝거리는 도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나연은 물끄러미 창밖을 보다 이내 비서가 내어 주는 차를 마시기 시작했다. 회의가 생각보다 길어지는지 시간은 계속해서 흘러갔다. 따뜻한 차도 어느새 바닥을 보여 가고 있었다.
나연은 가물거리는 눈을 반쯤 올려 떴다. 흐릿한 시야 안으로 책상 앞에 앉아 있는 연석이 보였다. 깜빡 잠이 들었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의 신변이 걱정되어 왔으면서 졸기나 하다니.
근래 약국 개업 문제로 며칠 신경을 썼더니 그 잠깐을 못 참고 잠이 들었다. 나연은 자신이 덮고 있는 연석의 슈트 재킷을 슬그머니 끌어 올렸다. 언제 또 덮어 준 건지 집을 나설 때 그가 걸치고 나갔던 재킷이 그녀의 몸을 덮고 있었다.
그는 회의를 끝내고 돌아와 남은 일을 처리하는 모양이었다. 흰 셔츠를 반듯하게 입고서 펜을 쥐고 있는 그를 보자니 더없이 마음이 놓였다.
나연은 인기척을 내지 않으려 숨을 죽이고 그를 관찰했다. 이제 잘생겼다는 말로는 입이 아플 지경이니까. 늘 아낌없이 사랑을 퍼부어 주는 입술과 조건 없이 안아 주는 가슴팍으로 시선이 옮겨 갔다. 하루 종일 보고 있으래도 있을 수 있겠지만 그의 사무실에서 한가롭게 누워 있을 순 없었다. 천천히 몸을 일으켜 연석에게로 다가가 뒤에서 그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먼저 덮치니까 좋은데.”
한가롭게 농담이나 하고 있는 걸 보니 정말 별 탈이 없는 것 같아 한편으론 다행이라 생각했다.
“걱정했어요.”
“걱정 마. 너 두고 어디 안 가니까.”
“하지만….”
꼬옥 그의 목을 끌어안으며 쇄골에 얼굴을 묻었다. 그는 어린애 같은 투정이라 생각하겠지만 나연에게 그가 어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은 형용할 수 없는 불안이었다. 너의 걱정을 모르지 않는다는 듯 그가 하던 일을 놓아두고 나연을 당겨 안아 왔다. 그의 다리 사이로 들어가 섰다.
“그런 걱정은 키스라도 해 주면서 하든가.”
“…나도 오빠한테 잘해 준 거 하나 없지만 죽은 오빠가 생각이 나서 더 그런가 봐요.”
사실 연석에게 티는 안 냈지만 한동안 태성의 죽음으로 밤잠 못 든 적이 있었다. 누구보다 태성이 사라지길 바랐지만 막상 눈앞에서 그렇게 죽고 나니 알게 모르게 마음의 짐처럼 남았었다.
동시에 연석 역시 누군가에게 그리될 수 있다는 사실이 두려움으로 다가왔다. 태성은 남보다 못한 남매였지만 연석은 그녀에게 하나뿐인 남편이자 하나뿐인 사람이었다. 태성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존재였다.
“네 오빠랑 나는 달라. 어딜 감히 나랑 비교를 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건 그랬다. 차연석은 제 한 몸 지키지 못했던 태성과는 다르다. 죽어서도 벌떡 살아서 돌아올 남자가 차연석이니까.
“당신 없인 이제 하루도 살지 못하게 만들어 놓고 나 두고 가면….”
말을 잇지 못하고 숨을 크게 고르자 그가 나연의 스커트 안으로 손을 넣어 엉덩이를 어루만졌다.
“널 위해서라도 불로장생 해야겠네.”
“네?”
그는 보던 업무를 옆으로 미뤄두고 슈트 재킷을 챙겨 들었다. 조금 다급하다시피 나연의 손을 잡고 회사를 나왔다.
어서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건 그 역시 마찬가지인 듯해 보였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그는 한 숟갈도 먹지 못하고 내버려 두고 나온 밥상을 보며 혀를 찼다. 그를 사지로 보내놓은 기분에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냐고 말을 하려다 말았다. 어차피 말은 저리해도 왜 그녀가 밥 한 숟갈도 못 뜬 건지 그는 알 것이다.
식어 버린 찌개를 보면서 그는 시계를 풀었다. 그러고는 나연의 윗옷을 훌렁 벗겨 올렸다. 곧이어 그가 자신의 셔츠를 벗었다.
나연이 좋아하는 샤워를 함께 하자는 소리였다. 단박에 알아들은 나연은 금세 기분이 좋아졌다. 늦었지만 남은 1주년 결혼기념일을 챙기자는 그의 속뜻을 모를 리 없었다. 한번 샤워를 시작하면 밤까지 이어질 섹스는 각오해야 했지만 그래도 좋았다.
샤워부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그와 몸을 포갰다. 쏴아아, 쏟아져 내리는 따뜻한 물줄기 아래서 나연은 기분 좋게 머리를 쓸어 넘기고 그와 마주 섰다.
온몸이 노곤해지는 온수보다도 그와 함께 있다는 것이 더욱 따뜻했다.
불안해하는 그녀의 곁에 언제나 있어 주겠다고 말하기라도 하듯 그의 입술이 나연의 뺨으로 달라붙었다. 나연은 다가온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내가 뭐라고 했어.”
“항상 옆에 있어 주겠다고요.”
“또. 또 하나 있었잖아.”
“다른 남자 생각하면 벌준다고.”
“그래. 까먹어도 벌이야.”
그 벌이 무엇인지 나연은 묻지 않아도 잘 알고 있었다.
“변태.”
그렇게 말하면서도 떨어지지 않을 것처럼 더욱 붙었다. 늘 그녀의 곁에서 온기를 채워 주는 건 지금 이 남자였다.
어디에도 가지 않겠다 한 약속을 늘 맹세하며 안아주는 남자.
나연은 화답하듯 온 힘으로 그를 마주 안았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