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9. 교접점 (10/13)

09. 교접점

“젊은 아가씨가 혼자 묵기엔 불편할 텐데.”

“괜찮아요. 며칠만 묵고 갈 건데요. 뭐.”

“그럼 편히 머물다 가요.”

여관방에 짐을 내려놓고 밖으로 나왔다. 잔잔한 바닷가를 바라보며 알사탕 하나를 물었다.

어차피 짐이라고 해 봐야 몸뚱어리 하나뿐이었다. 예전, 모텔 장사를 하기 전에 아빠와 함께 트럭에 과일을 싣고 자주 팔러 왔던 어촌 마을이었다. 돌아가신 할머니가 살아생전 계셨던 곳이기도 했다.

차라리 여기서 일을 시작할까. 마을에서 조금만 나가면 읍내에 약국도 꽤 있다. 이 마을을 떠난 게 오래전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눈에 익은 마을이라 생활하기에는 나쁘지 않았다. 아마 마을 안쪽으로 들어가면 돌아가신 할머니를 아시는 분들도 많을 테지.

비가 오려는지 하늘이 흐렸다. 지긋지긋한 비. 나연은 입 안에 넣어 둔 사탕을 반대쪽 뺨으로 돌리며 찰랑거리는 파도를 바라봤다.

오랜만이었다. 북적거리는 사람 없이 아무랑도 살 맞대지 않고 이렇게 혼자 있는 거. 사람이란 참 간사하다. 태성에게 시달릴 땐 사람들 틈에 아무렇지 않게 섞이고 싶었는데 태성과의 문제가 해결되고 나니 이젠 혼자 있고 싶어진다. 또 혼자 오랫동안 있으면 그 남자가 생각날까.

툭툭, 방파제 위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우산을 사러 마을 어귀에 있는 슈퍼까지 갈까 하다 조금 있으면 더 큰 비가 쏟아질 것 같아 나연은 곧장 여관으로 돌아왔다.

삐걱, 문을 열고 바닥을 살폈다. 주인 할머니가 보일러를 올린 건지 바닥이 따뜻하다.

나연은 담요를 깔고 그 위로 몸을 눕혔다. 창밖으로 비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오랜만이다. 혼자서 누워 비 오는 소리를 듣는 게. 하긴, 오래전이라고 해 봤자 고작 몇 달 전인데. 연석과 함께 지냈다고 그새 혼자 있는 게 어색하게 느껴진다.

가만히 누워 빗소리를 듣다 똑똑 방을 두드리는 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누구세요?”

“먹을 것 좀 가져왔어요.”

주인 할머니 목소리였다. 이불을 걷고 일어서 문을 열자 할머니 손에 모락모락 김이 나는 고구마와 감자가 담긴 소쿠리가 있었다.

“맛있겠어요. 감사합니다.”

“저녁 안 먹었으면 같이 들어요. 이제 막 하려던 참인데.”

“아니에요. 전 괜찮아요.”

“혹시 더 필요하면 말해요. 많이 삶았으니까.”

“네. 감사합니다. 할머니.”

소쿠리를 받아 들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정말 예전에 할머니가 삶아 주셨던 고구마가 생각났다. 맛있는 냄새. 나연은 바로 자리에 앉아 뜨거운 고구마를 후후 불어 먹기 시작했다.

허겁지겁 단내가 진동하는 고구마를 먹는데 며칠 전 퇴근길에 고구마케이크를 사 온 연석이 떠올랐다. 케이크 박스에는 M호텔 유명 베이커리 이름이 찍혀 있었다. 사업차 M호텔에 갔다 사 온 모양이었다.

“…….”

나연은 먹던 고구마를 두고 이마를 만져 보았다. 몸살 기운이 있다 생각은 했지만 별거 아닐 거라 생각하고 약 몇 알만 챙겨 먹었는데…. 몸이 뜨끈뜨끈한 것을 보니 쉽사리 꺼질 열은 아니었다. 감기도 아닌데 몸살이다. 이틀 전 혹사를 해서 그런 걸까.

조금 쉬겠다고 내려왔는데 정말로 쭉 누워 쉬게만 생겼다.

나연은 먹던 것을 내려 두고 이불 안으로 들어갔다. 따뜻했다. 눈물이 날 만큼 따뜻했다.

솜이불을 끌어 올려 목까지 덮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걸까. 하루는 꼬박 지난 것 같은데, 일어날 수가 없어 시간이 속절없이 흐르는 걸 알면서도 눈을 감고 있었다. 몸이 한없이 가라앉는다. 전형적인 몸살기였다. 기운이 허약해지고 몸에 힘이 빠진다. 그래도 어차피 하루 이틀만 쉬면 나을 테니까.

기억 속 어딘가에서 어렴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너 나 본 적 있어?”

“며칠 전에 여기 오셨을 때….”

“말고.”

“없는 거 같아요.”

연석과 두 번째로 마주했던 그날이었다.

“없으면 됐어.”

“…그간 사귄 여자 친구분 중에 닮은 분이 있으신 거 아닐까요.”

“뭐, 그럴지도 모르고.”

그렇게 웃던 얼굴. 나연은 그렇게 유연하게 올라가는 입술과 서늘한 그의 눈매를 되짚어 보았다. 우리가 어디서 만난 적이 있었던가.

불현듯 스쳐 지나가는 날, 하나가 떠올랐다.

그날은 하태민에게서 대답 없는 전화가 오던 날이었다. 죽음의 문턱에 있는 아빠의 병실에 며칠째 붙어 있던 나연은 그 전화를 받으러 병실 밖 로비로 나왔었다.

그날도 하태민은 전화를 끊을 때까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연은 끊긴 핸드폰을 주머니 안으로 집어넣고서 에스컬레이터로 올랐다. 시커먼 슈트를 입은 남자 여럿이 나연을 스치고 지나갔다. 병원과는 다소 이질적인 차림새에 고개가 돌아갔다. 에스컬레이터에서 내려 왼쪽으로 꺾은 남자들은 한 곳을 향해 걸었다. 같은 슈트를 입은 남자들이 병실 앞을 지키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중 한 사람이 성식이었다. 문신이 새겨진 손으로 사납게 사진을 들이밀었던 남자는 성식이 맞았다.

조직의 남자들이 문 앞을 지키고 서 있는 걸로 보아선 꽤 높은 위치의 조직원으로 추정됐다. 그리고 그 병실 문을 열고 나왔던 남자는, 차연석이었다. 문 앞을 서성이던 남자들이 그를 향해 고개를 깍듯하게 숙였다.

슈트를 입은 남자들은 차연석이라는 남자를 향해 무어라 보고하는 듯해 보였다.

진갈색 머리칼의 남자는 가만히 보고를 들으며 가끔 이마만 짚을 뿐, 크게 미동치 않았다. 그러다 답답한지 목덜미를 쓸어 문지르며 고개를 기울이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나연은 놀라 고개를 돌리고는 병실로 돌아왔다. 그리고 갑자기 심정지가 와 생사의 문턱에 선 아버지를 살리고 있는 의사를 발견했다. 병실에서 정신없이 울었다. 하늘 아래 오직 하나뿐인 아빠. 끝내 그날, 아빠가 돌아가셨다. 나연은 눈을 감고서 흐르는 눈물을 닦았다.

도피하듯 시골 마을로 내려온 지 이틀째 되는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여전히 빗소리가 들려왔다. 나연은 거의 이틀 만에 눈을 떴다. 식은땀이 나 등허리 아래쪽이 축축했다. 이틀 밤낮을 누워 있어 몸을 움직이기만 해도 끙끙 소리가 나왔다. 뻐근한 머리를 겨우 가누고 옆으로 고개를 돌리는데 묵직한 남자의 스킨 냄새가 났다.

차연석. 그의 향기.

하지만 그가 여기에 있을 리가 없다. 나연은 손으로 옆자리를 더듬었다. 텅 빈 옆자리가 쓸쓸하게 만져진다. 당연하다. 근데 자신이 이부자리를 두 개를 폈었나. 텅 빈 자리엔 담요와 베개가 놓여 있다.

슥슥 눈을 비비고 완전히 허리를 일으켰다. 어지럼증이 돌아 잠깐 담요를 짚었다. 먹은 건 고구마 하나라 그런지 머릿속이 울리는 기분이다.

역시 비가 오는 건 싫다. 뼛속까지 외롭게 만든다. 왜 지금 생각나는 게 차연석 그 사람뿐인지 모르겠다. 무서운 사람인데, 하태민을 두고 그런 짓까지 아무렇지 않게 한 사람인데. 그게 무서워 도망치다시피 한 건데, 외로우니 생각나는 게 그 사람뿐이다.

조금만 더 쉬었다가 다시 떠나야겠지. 약국도 연석이 손을 써 놓긴 했지만 언제까지 비워 둘 순 없었다. 이대로 여기 정착한다면 여기서 잘 살 수 있을까.

“무슨 생각 하는지 맞혀 볼까.”

난데없이 침입한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홱 꺾었다. 그녀의 머리맡에 앉은 연석이 대놓고 그녀를 지켜보고 있었다.

“…이사님?”

셔츠 단추는 쇄골이 언뜻언뜻 드러날 만큼 풀려 있었고 늘 깔끔하게 만졌던 머리 또한 자연스레 흐트러져 있었다. 그의 분위기가 다른 때보다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거짓말. 여기 어떻게….”

“이대로 그냥 숨어 버릴까. 어차피 잡힐 거 돌아갈까.”

옆자리에 놓인 이부자리에서 그가 잤던 모양이었다. 그 사실에 왜 안심이 되는 건지 모르겠다.

“여기 어떻게 알고 오신 거예요?”

“모를 거라고 생각한 네가 순진한 건 아니고?”

처음부터 이건 도피도 뭣도 아니었던 거다. 그의 손바닥 안에 있었을 뿐.

그도 내내 그녀의 옆에서 잠을 청했던 건지 목소리가 조금 갈라졌다. 격한 섹스 후 잠이 든 그가 자다 깨면 이런 목소리를 하곤 했었다. 나연은 무릎걸음으로 그에게 다가갔다. 비틀거리며 고꾸라지는 팔을 그가 단단하게 잡아 준다.

“저 이사님 어디서 봤던 건지 기억났어요. 예전에, 그러니까 몇 달 전에 아빠 병원에 있을 때 병원에서 한번 본 적이 있어요.”

“알아.”

“기억하고 계셨어요?”

“어. 너랑 두 번째 섹스 하던 날 기억났어.”

농담 반 진담 반, 그의 어조는 그러한데 나연은 웃을 수가 없다.

옷깃조차 스치지 못했던 처음이었지만 뇌리 어딘가에 남을 만큼 강렬했던 시선이었다.

“근데 이사님은 왜 그때 병원에 계셨었어요? 어디 아팠던 거예요?”

“내가 아니고.”

“…네.”

엉거주춤 앉아 있던 나연은 슬쩍 고개를 들어 그와 눈을 맞추었다.

“저 할 말 있어요.”

“그래. 있어야 할 거야.”

여느 때의 그처럼 조금, 아주 언뜻 보인 웃음기에 나연은 마음이 놓였다.

“거짓말한 건 아니었어요. 처음엔 전 애인 잊으려고 이사님 만난 거 맞아요. 어쩌면 내 상처 잊기에만 급급해서 이사님 곁을 피신처로 택한 것도 맞아요. 이사님 곁에 있으면 뭐라도 결론이 나겠지, 싶었거든요. 하지만 마음에도 없는데 이사님 곁에 있었던 건 아니었어요. 그랬다면 처음부터 자지도 않았을 거예요.”

그렇게 말하며 나연은 이불을 바투 쥐었다. 태민이 돌아와 눈앞에 나타났을 때 연석을 떠나갈 생각을 아예 하지 않았던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그를 마음에도 없이 대하진 않았었다. 제가 못됐던 것도 알고 있다. 물론, 그 마음을 그에게 들키고 그날 그 사달이 난 거겠지만. 하지만 지금은. 지금은….

“근데요. 이사님 만나면서 그 사람 생각 크게 해 본 적 없고 생각나지도 않았어요. 그건 정말 진심이에요.”

“계속해.”

“그러니까… 제 말은….”

식은땀에 눌어붙은 머리를 쓸어 넘겨 주는 그를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그를 떠나 여기까지 용기를 내어 왔지만, 허탈감과 공허함이 물밀듯 밀려들었다. 그가 무서워 도망 와 놓고 결국 생각나는 게 그 사람뿐이라니. 잠이 들기 전까지 오랫동안 몸을 뒤척이는 편인 그녀를 안아 얼러 주던 그의 손이 떠올랐다. 그나마도 혹사에 가까운 섹스를 한 탓에 기절하듯 잠이 드는 나날이 많아져 잠자리에서 몸을 뒤척이는 날은 많이 줄었다.

그렇게 무섭도록 몰아붙이는 섹스가 끝이 나면 언제 그랬냐는 듯 그녀의 다리 사이를 꼼꼼하게 닦아 주었다. 물론 주로 혀를 쓰긴 했지만.

그토록 무섭던 사람이 유하게 반응할 땐 입맛이 없어 밥을 남기거나 섹스가 끝이 나고 온몸에 힘이 풀렸을 때가 전부에 가까웠다. 다른 사람에겐 칼날처럼 차갑던 사람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이 허탈감과 공허함은 그의 빈자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지금 제가 좋아하는 건 차연석이라구요.”

“뭐, 내 몸?”

“그것도 좋지만….”

큭큭 웃는 그의 웃음소리가 그리웠을 줄이야.

“하여튼 솔직해서 좋아.”

“그것도 좋지만 그냥 당신이 좋아요. 지금은 차연석이 좋아요. 그러니까….”

울컥 차오르는 눈물을 간신히 참고 있는데 그가 손을 뻗어 왔다. 그녀를 안기 위해 뻗는 그의 팔을 뿌리쳤다.

“땀 많이 흘려서 더러워요. 씻고 나올게요.”

“같이 씻어.”

“여긴 화장실이 엄청 좁아서….”

“좁으면 더 좋지.”

그녀의 윗옷을 벗기며 싱긋 웃는 그를 보며 결국 나연도 덩달아 웃었다. 하여튼.

같이 하는 샤워도 오랜만인 것 같다. 샤워기 아래서 쏟아지는 물을 맞던 나연이 그를 올려다보았다. 나연은 그와 같이 하는 샤워를 좋아했다. 쏟아지는 물 아래 이렇게 그를 올려다보고 있으면 어김없이 그가 살을 치대 왔다. 물기에 젖은 살이 맞붙는 그 느낌이 좋았다. 그런 나연을 그가 모를 리가 없었다.

가슴을 주물럭거리며 고개를 숙여 젖꼭지를 입 안에 담아 빠는 그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응….”

외롭지 않게 다른 쪽 유두까지 남김없이 쪽쪽 흡입하며 달래 주는 그의 뺨을 감쌌다. 혓바닥에 흡착했다 떨어지는 유두에서 그의 침이 질질 늘어져 내리는 모습마저 야해 괜히 얼굴이 화끈거렸다. 물기가 남은 얼굴로 그녀를 쳐다보는 그의 품으로 답삭 안겼다.

“오늘따라 애틋한데. 가끔 엄하게 다그칠 필요가 있겠어.”

하여튼 농담을 꼭 진담같이 하는 재주를 가졌다. 아니, 어쩌면 농담이 아닐지도.

“오늘 여기서 자고 가요?”

“그래. 비도 오는데 하루 더 있다 가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도 그러고 싶다며 그를 꽉 끌어안았다.

서로를 향해 마주 보며 누웠다. 먹고 싶다고 해 그가 나가서 사 온 김밥도 싹 비웠다. 늘 그의 곁을 그림자처럼 지키던 성식과 수하들까지 놓고 온 그는 그녀를 위해 손수 나섰다.

나연은 좁은 여관방에 그와 나란히 누워 있는 게 어쩐지 낯설었다. 아니, 그가 이런 여관방에 누워 있다는 게 어색했다. 혼자 누워 있을 땐 비가 오는 게 너무도 외롭고 싫었는데 함께 있으니 빗소리가 괜스레 분위기 있게 들린다. 희한한 일이다. 단지 그가 옆에 있을 뿐인데. 단단한 성벽 안에 누워 있는 것처럼 무서운 것 하나 없이 든든하다.

“아픈 건.”

“많이 괜찮아졌어요.”

“약사라는 애가.”

“약사도 의사도 몸살까진 어떻게 못 해요.”

그렇게 몸을 혹사시켰는데 몸살이 안 걸리는 게 이상한 거다. 그도 더는 아무 말 않았다.

“비타민은 챙겨 드셨어요?”

“내 비타민 걱정할 때야, 네가?”

같은 샴푸 냄새, 같은 샤워 젤 향기가 났다. 언제부턴가 그와 같은 향을 공유하는 데 익숙해졌다. 지금은 여관에 있던 제품이라 싸구려 냄새가 나지만. 이런 향기가 아무렇지 않은 자신과는 달리 그는 싸구려 샴푸 냄새가 어울리지 않았다. 그래도 시답지 않게 생각하며 그녀를 끌어안고 잠을 청하려는 그가 좋았다. 맨바닥에 앉지도 못했던 남자였는데 이젠 싸구려 샴푸 냄새까지 풍기다니. 모두 송나연 때문이었다.

나연은 용기를 내어 그의 눈가를 만져 보았다. 다른 이들을 시선만으로 압도시키는 눈매다. 재문의 후계자. 그 바닥에서 감히 그를 꺾는 사람은 없다는 소리였다. 그런 남자의 품에 안겨 있다니.

“얌전히 자자. 여기서 더 앓아눕고 싶지 않으면.”

나연은 불끈거리는 그의 가슴을 느끼며 두 눈을 감았다.

그녀가 죽은 듯이 잠이 들어야 지금 발딱 서 있는 그의 성기도 사그라들 거라는 걸 예감했다. 아까 욕실에서 분위기에 취해 한 번 입으로 빼내 줬지만 한 번으로는 끝나지 않을 남자였다. 굳건한 심지가 곧장이라도 그녀의 다리 사이로 들어올 것만 같았다. 나연은 두 눈을 꼭 감았다.

몸 상태도 몸 상태지만 먹던 피임약도 며칠 건너뛴 데다 콘돔까지 없어서 오늘은 얌전히 자야만 했다.

내일은 또 기운찬 몸으로 출근을 해야 하니까.

나연은 그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잠을 재촉했다.

***

다시 돌아온 약국은 평화로웠다.

그간 사정이야 어찌 됐든 결근을 한 그녀에게 인상 한번 찌푸리지 않고 다정하게 말을 건넨 약사들이 에너지 드링크를 내밀었다.

“아프면 그냥 쉬어도 되는데, 약혼자분이 직접 약국까지 오셔서 깜짝 놀랐어요.”

“약혼자요?”

“약혼자 아니에요? 완전 잘생겼던데. 송 선생님 사정을 잘 말해 주셔서 우리도 큰 걱정 안 했어요. 그래도 안색 보니까 많이 좋아진 것 같네요.”

나연은 약사들이 말하는 잘생긴 남자가 연석이라는 것을 바로 알았다.

“쾌차한 기념으로 오늘 회식하려고 하는데, 소고기로. 어때, 송 선생?”

“저 때문에 그러시는 거면….”

“아휴. 약국장님이 사 주신다고 할 때 덥석 물어요.”

진 약사가 나연의 어깨를 두드리며 빙그레 웃었다. 덕분에 계 탔다는 표정이었다.

“보니까 우리 송 선생님 몸보신 좀 해야겠는데. 이렇게 팔목이 가늘어선.”

“그럼 오늘 제가 디저트 살게요.”

엄밀히 따지자면 연석의 돈이었지만. 나연은 수표로 들어찬 자신의 지갑을 생각하며 어색하게 웃었다.

소고기에 맛있는 딸기케이크까지 먹고 나서야 주머니 깊숙이 넣어 두었던 핸드폰이 생각났다. 포크에 묻은 딸기 과육을 아쉽게 바라보는 진 약사를 보며 조금 웃었다. 하나 더 시켜 먹자는 말을 건네자 화들짝 놀라 고개를 젓는다. 괜찮은데.

깔깔 웃는 약사들 틈에서 함께 웃다 문득 연석이 생각났다.

아까 회식 자리로 오며 연석에게 연락을 하긴 했지만 그래도 혹시 몰라 핸드폰을 꺼냈다.

모르는 번호로 부재중 전화 한 통이 와 있었다. 1분 전에 전화가 왔다는 표시를 빤히 보고 있는데 다시 한번 벨이 울렸다.

“네. 여보세요.”

답이 없는 상대의 입에선 쌕쌕거리는 소리만 들려온다.

- 송나연.

“…태성 오빠?”

완전히 잊고 살고 있던 태성이었다. 그녀의 전 재산을 들고 간 반쪽짜리 오빠. 인연을 끊는 대가로 지불한 거라 여겼다. 다신 만나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 너 지금 어디야?

“그게 왜 궁금한 건데?”

- 너 그 재문 전무이사랑 같이 있는 거야?

나연은 커피를 마시다 말고 그녀를 쳐다보는 약사들을 피해 카페를 나왔다.

“그게 왜 궁금한 거냐니까.”

- 혹시 같이 있는 거라면 피해. 석도파가 곧 그 새끼 죽이러 가니까.

“…뭐?”

나연은 핸드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간신히 되물었다. 지금 뭐라고 했어?

- 같이 있으면 너까지 죽어. 그러니까 피하라고.

연석과 성식이 그녀의 모텔방에 잠입했던 날, 성식이 했던 말이 불현듯 떠올랐다.

“석도파 개새끼들. 큰형님 생신날만 일부러 기다린 게 분명합니다. 케이호텔에서 큰형님 생신 회동 때, 형님께서도 참석하시는 걸 아니까 일부러 오늘을 기다렸다가 몰래 사람 푼 겁니다.”

그때 그를 해치려 한 것도 석도파라고 했었다.

나연은 핸드폰으로 연석에게 전화를 걸면서 그길로 곧장 다가오는 택시에 올라탔다.

“재문건설 본사로 가 주세요. 빨리, 빨리요.”

찰칵, 택시 뒷문이 잠겼다. 나연은 펄떡거리는 가슴을 움켜쥐다 말고 운전석에 앉은 남자를 보았다.

“…오빠.”

“오랜만이야. 나연아.”

태성이 룸 미러를 통해 웃고 있었다. 웃고 있는 그의 손목 한쪽이 없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