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7. 태풍의 눈 (8/13)

07. 태풍의 눈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다. 휘몰아치는 폭풍 한가운데 선 기분이었다.

다가오는 택시에 올라탄 것 같은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차연석, 그 사람의 회사 앞에 와 있었다. 저녁 같이 하기로 했는데 예상한 시간보다 조금 늦었다. 오늘 늦는다고 했으니 아직 사무실 안이겠지. 아무것도 머릿속이 정리되지 않았으면서 어쩌자고 이리로 온 것인지 모르겠다.

한참을 단축 번호만 바라본 채 망설이던 나연은 번호를 꾹 눌렀다.

“아, 이사님. 저 나연이에요.”

수화기 너머로 남자들의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희미하게 배경처럼 깔린 목소리들.

회의라도 하고 있는 건가?

“저 회사 앞인데요….”

- 16층으로 올라와.

네, 작은 대답과 함께 끊긴 전화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데 로비에서 시커먼 남자 하나가 그녀에게로 걸어 나왔다. 제 핸드폰의 까만 화면을 보고서야 연석이 그녀에게 보낸 남자라는 걸 깨달았다.

남자를 따라 엘리베이터로 올라탔다. 어쩐지 주눅이 드는 회사다. 대리석 벽에, 시커먼 정장을 입은 남자들이 외부인을 단숨에 알아보고 그녀를 힐끔거린다. 혹시 해코지를 할까 싶어 그녀를 16층까지 안내하는 남자의 뒤로 바짝 붙어 섰다.

16층 앞에 도착하고 나서야 나연은 땀이 송골송골하도록 조이던 긴장을 풀었다. 익숙한 얼굴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성식이 문 앞을 지키고 서 있었다.

그에게 다가가 꾸벅 인사를 했지만 성식답지 않게 미간을 구기지도 욕을 퍼붓지도 않았다. 잠깐 지시 사항을 기다리는가 싶더니 이내 노크를 하고 문을 연 성식이 그녀를 사무실 안까지 인도했다. 묵례를 하고 사무실을 나가는 그를 멀뚱히 쳐다보고 있던 나연은 상석에 앉아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연석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늘 목 끝까지 채우고 있던 단추가 몇 개 풀려 있었다. 목 아래에서 느슨하게 풀어진 채 매달려 있는 넥타이를 가만 보고 있는데 그가 물고 있던 담배를 지져 껐다.

“숨차 보이네.”

느릿하게 퍼지는 담배 연기만큼이나 톤이 다운된 목소리였다. 그러고 보니 사무실 입구에 있던 성식부터 분위기가 좋지 않았다.

“…그냥 좀 빨리 걸었더니. 바쁘신데 죄송해요. 제가 너무 늦게 왔죠.”

“뭐 하다가 늦었는데.”

“아… 약국 뒷정리 하느라요.”

하태민의 우는 목소리가 그녀의 머릿속에 맴돌았다. 그가 잡았던 손목을 만지작거렸다.

“심심해?”

“네?”

“심심하면 재밌는 거 보여 줄까?”

살짝 떨고 있는 손을 감추는데 그가 무릎 위를 탁탁 두드린다. 오라는 말인가. 그의 양옆으로 텅텅 비어 있는 소파를 두고 굳이 무릎 위로 오라고 지시했다.

어차피 하루 이틀 있는 일도 아니긴 한데. 태민을 만나고 와서 그런지 선뜻 그에게로 다가가기가 쉽지 않았다.

뭐지. 정말 하태민에게 흔들리는 건가, 아니면 죄책감? 하지만 우리가 죄책감을 가질 만한 사이인가. 우리는 연인도 아니고 그저… 뭐지. 우리 사이는. 뭔데 연석에게 죄책감이 드는 걸까. 왜 우리가 연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와 눈을 맞추자니 자괴감이 드는 걸까.

코트를 벗으라는 듯 그가 나연의 코트를 툭 열어젖힌다.

“바지 벗고 와.”

평소보다 톤이 가라앉은 목소리에 목덜미 아래가 빳빳하게 경직됐다. 뚫어져라 쳐다보는 눈매가 날카로웠다. 일전, 욕실에서 팬티까지 벗고 엎드리라고 했을 때완 판이하게 다른 어조였다. 술집에서 그와 마주했던 그날과 흡사하게 얼어붙은 찬기. 사무실 입구에 있던 성식부터 좋지 못한 공기가 온몸으로 느껴진다.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나연은 밤색 코트를 벗어 가지런히 소파 위에 두고는 그 위로 슬랙스를 벗어 올려놓았다. 맨다리로 서늘한 공기가 붙었다.

“팬티도 벗고 와.”

“속옷도… 요?”

그의 앞에서 수십 번도 벗었던 팬티지만 장소가 장소니만큼 팬티까지 벗자니 망설여졌다. 그렇지만 눈으로 채찍질을 하는 그의 재촉에 벗을 수밖에 없었다. 멀리 떨어져 있을 땐 담배 냄새가 강했는데 가까이 붙으니 그의 향수 냄새가 난다.

나연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아랫도리로 그의 허벅지 위로 올라가 앉았다. 자연스레 그의 허벅다리에 엉덩이를 붙여 앉고 몸을 지탱했다. 다리가 민망하리만치 벌어지며 동시에 구멍이 빠끔 열리는 느낌이 들었다.

물끄러미 내려다보기만 하던 그의 손가락 두 개가 예고 없이 안으로 움푹 들어왔다.

“아응!”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안을 휘저으면서도 엄지론 음핵을 문대며 능숙하게 애액을 뱉어 내게 한다. 기어이 마디까지 몽땅 넣어 팡팡 쳐올리던 그가 나연의 반응을 유심히 관찰했다. 급작스럽게 손을 넣는 바람에 아직 풀지 못한 질구는 그의 손가락 두 개도 버겁기만 했다. 그가 돌연 손가락을 빼냈다.

“그새 딴 새끼 좆 맛이 든 거 같진 않고.”

뭐라 중얼거리는 그의 말을 들을 여력도 없이 연석의 가슴팍으로 얼굴을 기대었다.

나연의 엉덩이를 끌어안아 올려 원하는 대로 자리를 잡고 나서야 그가 오른쪽에 놓인 전화를 들었다. 사무실용 전화를 쓰는 것으로 보아선 이 회사 안에 있는 사람일 것으로 추정됐다.

“데리고 들어와.”

누굴 데리고 들어오라는 것일까. 그의 팔을 꾹 누르고 있다가 연석과 눈이 마주쳤다. 냉랭한 눈자위는 미동도 없었다. 순식간에 입 안이 버석하게 말라 버린 기분이었다.

문을 열고 들어온 남자는 둘이었다. 한 사람은 전화를 받은 사람인 것 같았고 그 사람에게 등 떠밀려 들어온 또 다른 한 사람은 두 손이 묶인 상태로 하반신은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맨몸이었다.

나연은 허겁지겁 걸칠 것을 찾아 손을 뻗었지만 연석이 그를 제지했다. 몸을 숨길 곳은 그의 품뿐이었다. 나연은 그의 가슴을 꽉 끌어안고 그녀의 앞쪽이나마 불청객들이 보지 못하도록 애썼다.

연석은 손가락에 묻은 애액을 가볍게 빨아 먹은 뒤 나연의 두 엉덩이를 자신 쪽으로 바짝 당겼다.

“아, 안 보이게 해 줘요. 엉덩이.”

“괜찮아. 곧 죽을 앤데, 뭐.”

“그래도 두, 두 사람이잖아요.”

“그럼 쟤도 같이 죽일까?”

진지하게 고민하듯 눈썹을 모으는 그가 농담이라며 곧 울 것 같은 나연의 이마를 툭 쳤다.

그가 문을 향해 손을 뻗자 문 앞에 서 있던 성식이 다가와 연석의 코트를 내밀었다. 성식까지 보고 있었어. 언제부터 있었던 거지. 모르겠다. 나연은 망연자실했다. 연석이 코트로 나연의 엉덩이를 가려 주었다. 이제 그녀의 치부를 볼 수 있는 건 연석 혼자였다.

나연은 그제야 찰싹 붙여 놓은 몸을 떼어 냈다.

“잘 봐 봐. 쟤 말이야.”

연석이 턱짓하는 남자에게로 슬쩍 고개를 돌렸다.

입술이 찢어지고 시커먼 멍이 들어 눈두덩이 떡이 된 남자가 서 있었다. 결박당하지 않았지만 더 이상 말하지 못하는 입, 이미 망가져 쓸 수 없는 손. 비틀거리며 선 남자의 발목엔 쇠사슬 같은 것에 묶여 있던 자국이 선연했다.

“너 보여 주려고 일신은 최대한 보존해 뒀어.”

“네?”

“잘 보고 있어.”

연석의 눈짓에 멍이 든 남자 옆으로 성큼 붙어 선 덩치가 순식간에 남자의 머리통에 총을 겨누었다.

나연은 화들짝 놀라 연석의 어깨를 콱 붙잡았다. 영화에서 본 적이 있었다. 소음기가 부착돼 몸체가 길어진 총.

“왜, 왜!”

“총이면 땡큐지. 총이 들이밀어지면 저 새끼는 뭐라고 해야 하는지 알아?”

표정 한 번 안 변하고 고개를 모로 꺾은 남자는 붉은 입술을 혀로 쓸었다.

“총으로 죽여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사, 연석 씨.”

“혹시 너 놀라기라도 할까 봐 특별히 칼도 안 쓰는 건데.”

나연은 휙 고개를 돌렸다. 연석의 어깨를 부둥켜안고 그의 쇄골에 얼굴을 묻었다.

“왜, 무서워?”

“…….”

“그러지 말고 좀 봐. 쟤 살려서 데려온다고 성식이가 고생 좀 했는데.”

나연은 그의 쇄골께에 얼굴을 묻고 거칠게 숨만 내쉬었다.

“이번 사업이 탐이 났는지, 정보 좀 빼먹겠다고 기어들어 온 스파이였더라고. 그렇게 불쌍하게 볼 거 없어. 덜미가 잡히니까 내 수하 하나를 죽이고 도주했었거든. 차로 애를 박아서 애 얼굴을 알아볼 수가 없더라고. 근데 마무리가 총이면 감사하다고 내 구두라도 핥아야지. 안 그래?”

하루 종일 연락도 없이 집에 들어오지 않았던 것도 그 일 때문이었을까.

나연은 그의 목을 있는 힘껏 끌어안고 최대한 총이 겨눠진 남자에게서 등을 돌렸다.

“쟤가 왜 죽는지 알아?”

“…….”

“내 뒤통수를 쳤으니까. 감히 날 갖고 놀았잖아. 나연아.”

심장이 터질 듯이 뛰었다. 이유 모를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너무 무서워 온몸이 바들바들 떨렸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여기서 의지할 곳이 이 남자뿐이었다.

“봐, 빨리. 보라니까?”

거의 감은 눈으로 힐끔 남자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살려 달라고 빌고 싶은 얼굴은 아니었지만 남자의 얼굴엔 두려움이 가득했다. 피멍이 들어 눈도 못 뜨는 상태였지만 표정만 보아도 알 수 있었다.

소음기가 부착된 총 특유의 묵직한 발포 소리가 들렸다. 여러 발의 총알이 남자의 머리를 향해 발포됐다. 무자비했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 대는 동안에도 그의 심장 박동은 변화가 없었다.

나연은 넘어가는 남자를 제대로 보지도 못하고서 다시 연석의 쇄골에 얼굴을 묻었다. 아무리 볼 꼴 못 볼 꼴 다 보아 왔지만 사람이 눈앞에서 죽는 것은 처음이었다. 더 이상 제정신으로 버티고 있을 수가 없었다. 머릿속이 혼미해졌다. 축 늘어진 나무늘보처럼 꿈쩍도 않고 있었다.

***

침대 위에 축 늘어져 있던 나연은 일요일의 단잠조차 즐기지 못하고 눈을 떴다. 그에게 안기다시피 사무실을 나왔던 건 생각이 난다. 그가 그녀를 침대에 눕히고 샤워를 하러 나설 때까지도 죽은 듯이 눈을 감고 있었다. 그가 나와 나연의 머리칼을 쓸어 넘겨 주는 것이 느껴졌다.

아침 일찍 나간 연석의 뒷모습이 생각났다. 새벽까지 잠들지 못하고 별을 세던 나연이 눈을 비비며 허리를 일으켜 앉았다.

언제나 그렇듯 속옷은 입지 않고 잔다. 아니, 사실 이 집에 오고 나선 평소에 하던 것이라 해도 신경이 쓰여 팬티 정도는 입고 잤었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그는 평소대로 편히 하라며 입은 것을 벗겼다.

덕분에 걸친 거라곤 예전 집에서부터 입던 부드러운 수면 원피스 하난데 그것마저 말려 올라가 하반신이 훤히 드러났다. 나연은 올라간 원피스를 내리고 콘솔 위에 놓인 수표 여러 장을 보았다. 넘치도록 풍족한 돈이 늘 콘솔 위에 있었다. 물론, 쓰라고 놓아둔 사람은 차연석, 그였다.

돈이야 많으면 좋겠지만 그녀에게 돈은 넘치도록 필요한 것은 아니었다. 직장에서 잘 자리 잡고, 머물 곳만 있다면 족했다. 돈이 필요충분조건 같은 것은 아니란 소리였다.

이 집이 필요했던 것이 아니라 그의 곁이 필요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외로워서, 전 애인의 흔적을 지우려 그의 옆에 머물길 택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 누구도 쉽게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그 남자에게 제가 감히 무슨 짓을 한 걸까.

처음부터 모텔방이나 빌라 원룸을 구해 월세를 내며 지내야 했었나. 이제 와 해 봐야 늦은 고민이었다.

차연석과는 몇 번의 유희로 끝내는 것이 옳았던 걸까. 분명 그녀도 좋았다. 그와 몸을 섞는 것이 좋아 몇 번이고 스스로 옷을 벗고 다리를 벌렸다. 그 순간이 주는 미칠 듯한 짜릿함을 갈구해 도움을 받은 것도 사실이었다. 그런데 이제 와 이런 생각들이라니.

그는 대한민국을 쥐락펴락하는 조직의 거물급 인사다. 그가 누구였다는 것을 간과했던 건 아닌데…. 머리가 아프기만 했다. 남자의 머리통에 박히던 총알, 꺾여 넘어가던 몸뚱이. 어제의 일이 떠올라 쉽게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나연은 다시 침대 위로 올라가 누웠다. 민아에게서 전화가 올 때까지 그렇게 밤새 자지 못한 잠에 빠져들었다.

“어, 나연아. 여기야!”

3주 만에 찾은 학교였다. 학교 앞 호프집에서 졸업생 파티가 있다고 민아에게 연락이 왔다. 점심 내내 침대에서 쓰러진 듯 잠을 자다 오후가 되어서야 밖으로 나왔다.

이번에 졸업을 한 나연의 동기들은 파티를 핑계로 제대로 허리띠를 풀었다. 그 자리엔 상윤도 있었다. 졸업생은 아니었지만 상윤도 나연처럼 불려 나온 모양이었다. 민아에게서 종종 그에 대한 소식이 들려오긴 했다. 상윤은 그녀가 고백을 거절한 이후 확연히 연락이 뜸해졌다. 나연이 그를 불편해하는 것을 알기에 자제하고 있다는 것을 나연도 알고 있었다.

“어, 나연아.”

멋쩍게 손을 흔드는 상윤에게로 다가가 그가 내어 주는 자리에 앉았다. 상윤은 태민이 그녀를 찾아온 것을 알고 있을 테지. 태민에게 그녀가 일하고 있는 약국을 알려 준 게 상윤이라고 했으니까.

아마 마지막이라고 상윤을 잡고 늘어졌겠지. 그를 잊지 못해 힘들어하던 나연을 지켜본 상윤이기에 거절하지 못했으리라, 대충 짐작은 했다.

“선배, 오랜만이에요.”

“그러게. 약국 들어갔단 말은 들었어. 일은 할 만해?”

“아직 배우는 단계인데요. 뭐.”

선후배 사이에서 나올 수 있는 겉치레뿐인 말들만 오고 갔다. 누구 하나 태민에 대해서 먼저 말을 꺼내지 못하고 있는데 바로 옆 테이블에서 태민의 이야기가 들려왔다.

“참, 태민 선배 한국에 돌아온 거 알고 있어?”

하태민이 학교에서 유명 인사였다는 걸 깜빡하고 있었다. 일명 약학과 얼굴마담이었던 남자는 한 달에도 몇 번이나 고백을 받을 만큼 인기 있던 사람이었다.

“M제약사에 들어갔다고 하더라. 교수 집안이라 당연히 교수 할 줄 알았더니 대기업에 취직할 줄은 몰랐어.”

“나도 얼마 전에 조교실에서 선배 봤었는데, 여전히 잘생겼더라.”

“나연이랑은 헤어진 거지?”

“헤어진 게 언젠데. 헤어지고 난 뒤에 선배 미국 갔을걸?”

“야, 너희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나연이 있는 데서.”

민아의 눈치에 그제야 애들이 나연이 있는 테이블로 눈길을 줬다. 상윤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 갔다.

“아, 미안.”

“…아냐. 다 지난 일인데, 뭐.”

어차피 학교 다닐 때도 유명인이었던 하태민 때문에 입방아에 많이 오르내렸었는데, 이것쯤이야.

“야. 저기… 태민 선배 아냐?”

누군가의 사소한 한마디에 호프집 안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하태민이 웃는 낯으로 손을 흔들며 들어왔다.

나연은 멀찍이 앉아 있는 태민을 신경 쓰지 않으려 맥주만 내리 마셨다. 어차피 오래 있으려고 한 게 아니니까. 이것만 마시고 가야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거의 빈 맥주잔을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힐긋힐긋, 태민의 은근한 시선이 느껴졌다. 그럴수록 술을 비우는 속도가 빨라진다.

상윤이 옆에서 괜찮냐고 물어 와 조금 흐리멍덩한 정신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집에 데려다줄게. 가자.”

“아녜요, 선배. 괜찮아요. 저 안 취했어요.”

아무 말 없이 웃어 주는 상윤도 그런 태민의 시선을 눈치챈 게 분명했다.

“저 그럼 먼저 가 볼게요. 민아한테도 먼저 간다고 전해 주세요.”

나연은 부어라, 마셔라, 정신없이 노는 민아를 보며 작게 웃었다. 사회로 나가기 전 마지막으로 친구들과 노는 기분을 내는 건지 민아는 연거푸 술잔을 기울이는 데에 바빴다.

정말 혼자 갈 수 있겠냐는 물음에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인 뒤 호프집을 나왔다. 쌀쌀한 바람이 코 안으로 들어오자 그제야 조금 정신이 깨는 기분이다.

잊고 온 것이 없나 코트 주머니며 가방을 뒤적이는데 흰색 차량 한 대가 그녀의 앞에 멈춰 섰다.

“나연아, 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태민이 웃으며 운전석에서 내려 조수석 문을 열어 주었다.

“늦었지만 약국 들어간 거 축하해. 졸업도 축하하고.”

“비켜 줘. 집에 갈래.”

“그래. 그러니까 타. 집까지 데려다줄 테니까.”

“취한 애들 안에 많더라. 걔들 데려다줘.”

그를 지나쳐 지하철역을 보며 걸었다. 괜히 안 신던 구두를 신고 나와 발이 아팠다. 구두 체질이 아니라 살면서 구두는 몇 번 신어 본 적도 없는데. 직장인이라고 기분 내어 사 신은 구두는 역시 제 발에 맞지 않았다.

나연은 가던 길을 멈추고 입고 있는 코트를 내려다봤다. 갓 사회에 나와 처음으로 구두를 사 신은 그녀를 알아챈 연석이 사다 준 첫 입사 선물이었다. 괜찮다고 손사래를 치는 그녀는 무시한 채 그가 백화점에서 이것저것 옷을 사 뒷좌석에 던지듯 놓았었다.

“송나연.”

어느새 다가온 태민이 그녀의 손을 잡았다. 차연석과 다른 촉감의 손이다. 잡힌 손을 놓으려는데 그의 손아귀에 힘이 들어갔다.

“한 번에 화 안 풀릴 거 알아. 나 이 정도는 각오하고 있었어.”

“집에 가서 쉴래. 좀 놔줘.”

“그래. 집에 가자. 데려다줄게.”

“집에 오빠랑은 못 가.”

“…나연아.”

“나 같이 사는 사람 있거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동거하는 집에 어떻게 전 애인을 데리고 들어가. 안 그래?”

술 때문인가. 두통이 찾아오고 눈가에 졸음이 어렸다. 잡힌 손을 뿌리치고 비척거리며 지하철역을 향해 걷는데 무서운 얼굴로 태민이 그녀를 막아섰다.

“뭐 하는 거야?”

“너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나 못 잊고 있었어. 내가 전화했을 때, 너 난 거 알면서도 받았지. 그게 무슨 말인지, 너나 나나 둘 다 잘 알고 있었지 않아? 근데 얼마 되지도 않은 새에 마음이 바뀌었다고. 그 새끼 때문이야?”

“미주 언니 말이 도움이 되긴 됐네.”

“뭐라고?”

“이거 놔줘.”

“너, 따라와.”

그가 그녀의 손목을 거칠게 잡고 차로 끌고 갔다. 구두 굽이 갈리다시피 아스팔트에 끌렸다. 반항 같은 건 무의미했다. 뿌리치려는 손을 쥐고 조수석으로 밀어 넣었다. 차는 반짝거리는 간판들을 지나 칠흑 같은 어둠 속으로 들어갔다.

“어디로 가는 거야, 대체. 나 내려 줘.”

그는 핸드폰으로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네. 모텔이죠. 거기 103호 투숙객 아는 사람인데요. 혹시 전화 좀 바꿔 줄 수 있을까요?”

103호면 미주 언니 방.

“오빠, 지금 뭐 하는 거야?”

“미주 씨, 저예요. 하태민. 지금 나연이 거기 살고 있나요?”

- 네가 여길 어디라고 전화해. 철면피 같은 새끼. 나연이 존잘 조각 같은 남자랑 같이 떠났어. 걔 인생 폈다고. 그러니까 다신 전화하지 마. 우리 나연이 찾지 마! 이 새끼야!

쩌렁쩌렁한 미주의 욕설이 수화기 너머까지 전해졌다. 욕을 한 사발 퍼부은 미주가 전화를 끊었다.

“차 세워. 세우라고, 세워. 이 자식아!”

퍽퍽, 그의 어깨를 때렸다. 차는 철옹성처럼 두꺼운 벽으로 이루어진 차고에 주차됐다. 직감적으로 이곳이 어디인지 알았다. 여긴, 그의 집이었다. 모텔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고급스러운 그의 집.

나연은 굳게 닫힌 현관문을 곁눈질했다. 커피를 내리는 그의 손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일단 술부터 깨고 얘기를 하자며 그가 향긋한 커피 두 잔을 내렸다. 술은 깬 지 오래됐다. 운전을 했으니 그는 술을 마시지 않았을 것이다.

나연은 핸드폰을 찾아 코트를 더듬었다. 마지막으로 핸드폰과 지갑을 확인한 게 가방 안이었다. 거의 끌려 나오다시피 했을 때 가방을 그의 차에 두고 온 게 떠올랐다. 한숨이 흘렀다.

“그래. 솔직하게 말할게. 오빠 없는 동안 오빠 생각 하면서 힘들었던 건 맞아. 그러다 그 남자 만났고, 지금은 잘 지내고 있어. 거짓말처럼 오빠 생각하는 시간이 줄었고, 나 간만에 좋아. 행복해.”

드디어 털어놓았고 털어 냈다. 그동안 한 말이 스스로에게 하는 최면에 가까웠다면 이번엔 진심이었다.

“뭐 하는 사람인데.”

“알 거 없어.”

“네 팔자가 필 정도로 대단한 남자면, 대기업 아들이라도 돼?”

“그래. 엄청난 사람이야. 오빠랑 비교 안 되는 사람. 그러니까 이제 그만하자. 제발.”

그가 이마를 짚었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입술을 만지작거린다.

“너 이런 속물이었어? 내가 너랑 결혼 안 해 줘서 화가 났던 거야? 그래, 어떻게든 재벌 남자 잡았네. 좋겠어, 송나연. 몸으로 잡았니? 그 새끼가 네 몸 보고 환장을 해? 네 가슴이 죽여주게 커서 좋대? 허리 놀림이 남다르대?”

“…닥쳐.”

“왜, 돈 많은 남자 잡았으니 밤낮이고 흔들어 줬겠지. 그래서 그 재벌 남자 잡은 거 아냐?”

며칠 전만 해도 예고도 없이 나타난 첫사랑에게 흔들렸다. 다시 그와 잘해 볼 생각, 솔직히 아예 없던 건 아니었다. 그의 말대로 밤낮없이 차연석과 몸을 섞었으면서도 돌아온 하태민에게 흔들려 다시 돌아갈 생각, 해 본 적 없었던 거 아니었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었고 금방 정신을 차렸지만, 잠깐이나마 흔들렸다는 것만으로도 자괴감이 들었다. 그런데 이제 그 쌀 한 톨만 한 미련도 완벽하게 정리가 됐다.

“날 이렇게 만든 게 누군데 그래. 갈게. 더 이상 찾지 마. 가방은 잃어버린 셈 칠게. 안 돌려줘도 돼.”

손도 대지 않은 커피를 두고 현관으로 빠르게 걸었다. 문손잡이를 잡는 순간, 그에게 허리가 끌려갔다. 거실 바닥으로 몸이 넘어간 건 순식간이었다. 바닥에 깔린 러그가 등에 닿으면서 니트 원피스가 올라갔다.

그의 손이 급하게 스타킹을 찢었다. 지이익, 스타킹이 찢어지는 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렸다. 거실 바닥에 쓰러지며 머리가 부딪혀 어지럼증이 돌았다. 그와 지난날 했던, 달콤했던 섹스가 거짓말처럼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다. 거칠게 그녀의 몸을 만지고 옷을 벗기는 지금의 그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싫어. 놔!”

“죽어도 그 남자한테 너 못 줘. 알아? 그놈이 재벌이든 이사든 나는 너 못 놔.”

나연은 팬티까지 벗겨져 구석으로 처박혔다. 원피스 안으로 머리를 들이미는 그를 발로 찼다. 그러자 곧 뺨으로 그의 눅진한 숨결이 아래로 달라붙었다.

키스를 시도하는 그를 피해 몇 번이나 고개를 돌렸다. 익숙하지만 낯선 숨결이었다. 낯설었다. 몸을 만지는 이 손이, 남자의 숨결이, 모든 게 낯설었다. 얼마나 기다렸던 손길인데 눈물이 날 만큼 낯설게만 느껴졌다.

차연석의 체향이 아닌 타인의 냄새가 싫다. 흐릿한 시야 안으로 널브러진 코트가 보였다. 첫 출근에 다른 약사들에게 기죽을까 기어이 사 입힌 코트였다. 그가 아니면 이제는 키스도 섹스도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아. 한참이나 늦은 깨달음이었다.

“…이사 …이사님.”

눈물이 흘렀다. 두 손으로 눈물이 흐르는 눈을 가렸다. 거칠게 숨을 몰아쉬기만 하던 그가 고개를 들었다.

“그 이름 입에 올리지 마. 그러지 마.”

태민이 되레 상처받은 목소리로 울먹인다.

“우리 사랑했잖아. 거짓말. 너에겐 아직 나뿐인 거지. 그렇지, 나연아.”

무엇이 어디서부터 잘못된 것일까. 지금 할 수 있는 건 그저 무기력하게 눈물이나 쏟아 내는 것뿐인 자신이 한심했다. 어디든 꺼지고 싶다. 땅으로 꺼지든 하늘로 솟든, 눈을 감고 사라지고 싶다.

가물거리던 시야에 갑자기 앞이 잘 보이지 않을 정도로 강한 섬광이 일었다. 조금 전 부딪힌 충격 때문인지 머리 한쪽이 멍했다. 정신을 차리려고 눈을 뜨려 애쓰는데 그 순간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그녀의 몸 위로 태민이 무너져 내렸다. 동시에 어지러움을 이기지 못한 나연 또한 기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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