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6. 올가미
“송 선생님.”
“네, 지금 가요.”
나연은 약국 문을 닫고 카디건을 여몄다. 이력서를 넣고 난 다음 날 바로 면접을 보러 오라는 연락이 왔다. 다음 주부터 출근하라는 연락을 받고 몇 번이나 허공으로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나연은 침대에서 앙앙대며 그 소식을 연석에게 전했었다. 목이 쉬어 제대로 전하지도 못하고 그의 품 안으로 무너져 내렸는데 그는 출근 날 아침, 개인 기사를 붙여 주었다. 물론, 운전을 하는 남자 역시 연석의 수하였다. 조폭이란 소리였다.
살다 살다 조폭이 운전기사 노릇까지 해 주는 차를 탈 줄이야. 나연은 문을 잠그고 약국을 나오며 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상했다. 어젯밤, 연석이 집엘 들어오지 않았다. 연락도 없었다. 그를 기다리다 깜빡 잠이 들어 눈을 뜨니 아침이었지만 그는 없었다.
“송 선생?”
“아, 네. 저도 같은 걸로 할게요.”
습관적으로 주머니에 손을 넣어 핸드폰을 찾아 더듬던 나연은 주머니가 비어 있다는 걸 알았다. 약국에 핸드폰을 두고 온 건가. 혹시 그에게서 연락이 올까 내내 쥐고 있던 핸드폰이었다. 나연은 따뜻한 커피를 두고 다시 가방을 고쳐 멨다.
“저 약국에 잠시 두고 온 게 있어서요.”
“다녀와요.”
나연은 꾸벅 고개를 숙이곤 카페를 나왔다. 약국 안으로 들어가 놓아둔 핸드폰을 들었다. 역시 연락 온 곳은 없었다. 일은 할 만하냐는 민아의 문자 하나. 전화를 해도 받지 않는 그 남자는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어두컴컴한 약국에 앉아 핸드폰만 들여다보고 있는데 거짓말처럼 전화가 왔다. 저장해 둔 번호는 아니었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에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 …….
“이사님?”
수화기 너머는 말이 없었다.
“이사님 괜찮으세요? 연석….”
거듭 이어지는 침묵에 나연은 순간 소름이 돋았다.
- …나연아.
“…태민 오빠?”
하태민. 그가 떠난 후 지난 2년을 그리워하고 원망했던, 하태민.
자신을 버리고 그렇게 떠났으면 매정하게 살 것이지 꼭 마음 약하고 정에 약한 자신을 이렇게 후벼 파고 건든다. 매정하게 밀어내지 못하도록.
그런데 국제 전화번호가 아니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건가.
“전화 왜 한 거야.”
- 나연아, 우리 잠깐 볼 수 있을까? 내가 너한테로 갈게.
“…할 말 없어. 2년 전에 끝난 사이에 무슨 볼일이 있어서 만나.”
- 난 아직 안 끝났어. 너도 그렇단 거 알아. 나 진작에 파혼했고 너한테 돌아가려고 어머니 아버지까지 다 버렸어. 이제 이깟 집안 아무것도 필요 없어. 너 하나 보려고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다 보여 줄 거야. 너 하나 빼곤 다 버렸어. 나연아.
“…그만해. 어차피 다 지난 일이잖아.”
- 아이 하나 낳고 남들처럼 평범하게 살고 싶어 했잖아, 너. 그렇게 살자. 그래서 돌아왔어. 우리 이젠 그렇게 살자. 내가 너한테로 갈게. 만나서 얘기해.
“나 바빠. 끊을게. 오지 마. 와도 안 만날 거야.”
나연은 떨리는 손으로 연거푸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고 놀란 마음을 다독였다. 그가 떠난 이후 하태민이 이별의 후폭풍을 거세게 맞길 바랐었다. 뒤늦게야 후회하고 붙잡으면 매정하게 칼같이 돌아서 주리라. 분명 방금과 같은 말을 더 독하게 해 주리라 생각했는데.
나연은 두 팔 사이로 식은땀이 흐르는 이마를 묻었다.
하태민과는 대학교 1학년 때 만났다. 학교에서 이미 유명했던 그 남자는 약학과로 편입했던 나연과의 첫 만남에서부터 대시를 했었다. 잘생긴 외모에 알아주는 교수 집안의 외아들. 그녀는 본의 아니게 학교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남자의 관심과 사랑을 독차지했었다.
꼬박 반년을 나연만 따라다닌 그 남자의 손을 잡았지만 그와 만난 지 2년이 될 무렵, 친구에게서 태민이 다른 여자와 학교 근방 모텔에서 나오는 것을 봤다는 얘길 들었다. 믿지 않았다. 아닐 거라, 잘못 본 거라 확신했다.
하지만 하태민은 다음 날 그 여자의 손을 잡고 그녀의 앞에 나타났다. 집안에서 정해 준 약혼자라고 했다. 나연을 만나면서도 집안의 주선으로 그간 그 여자를 만나 왔던 거다.
하태민은 송나연 대신 집안을 택했다. 함께했던 2년의 시간 따위는 종잇장처럼 아무렇지 않게 쓰레기통으로 처넣고 다른 여자의 손을 잡은 채 미래를 위해 미국으로 떠났다.
“나연아, 내가 잘해 줄게. 그러지 말고 좀 봐 주라. 어? 어? 방금 웃은 거지?”
지난 2년을 괴롭혔던 목소리였다.
그럴 거면 처음부터 좋다고 그렇게 매달리질 말았어야지. 이렇게 쉽게 버릴 거면 처음부터 네가 좋아서 미칠 거 같다는 둥 그런 말은 하질 말았어야지. 처음부터 마음 같은 건 주지 말았어야지. 어렵게 마음을 열고 가진 마음을 모조리 긁어내어 주었더니 하태민은 그녀를 떠났다. 너무도 쉽게 자신을 버렸다. 그래 놓고 이제 와서… 이제 와.
미주는 나쁜 새끼를 잊고 보란 듯이 잘 살려면 그 새끼보다 더 악랄해져야 한다고 했다. 더 독해져야 한다고 했다.
나연은 묻고 있던 고개를 들고 다시 약국을 나왔다. 문을 닫고 가만히 유리문을 보며 서 있는데 인기척이 느껴졌다. 어둠 속에서 비척이듯 걸어오는 남자는 차연석, 그 남자였다. 흰 셔츠는 구겨져 있고 그답지 않게 젖어 흐트러진 머리로 천천히 걸어왔다.
“…이사님.”
느리게 눈을 감았다 뜨는 그가 어느덧 코앞에 서 있었다.
“이게 무슨… 어제 안 들어오셔서….”
“걱정?”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나연의 팔을 탁 붙잡았다.
“이, 이사님!”
“시끄러워. 골 울려.”
“어디 다친 거예요? 왜 이렇게….”
아직 잠그지 않은 약국 안으로 들어가는 그를 따라 걸었다. 여전히 팔이 붙잡혀 있었다.
털썩 손님용 의자에 걸터앉는 그의 눈썹이 일그러진다. 작은 신음을 흘리는 그는 피곤해 보였다. 나연은 혹시나 하는 생각에 그의 셔츠 단추를 풀었지만 다행히 자상이나 상처 같은 건 보이지 않았다. 맞은 흔적은 없는 걸로 보아선 다행스럽게도 일방적으로 상대를 손봐 줬거나 그의 부하들이 그를 잘 모셨거나 둘 중 하나겠거니 싶었다. 몸 쓰는 거 하난 타고난 남자니 그나마도 이 정도일 테다.
“오늘 집에 가셔서 반신욕 해요. 근육도 금방 풀어 주고….”
“아….”
허리를 살짝 접으며 그가 눈가를 일그러뜨린다. 나연은 놀라 연석의 어깨를 붙잡았다.
“아파요? 어디가, 어디가 아파요?”
“여기.”
그녀의 손을 가져가 제 성기 위로 가져다 대는 그가 정말 아프기라도 한 것처럼 가늘게 눈을 뜨며 거친 호흡을 했다.
“저, 정말.”
“자지 아파. 만져 주면 괜찮을 거 같은데.”
그가 고개를 조금 숙이고서 그녀의 손목을 살살 문지르더니 찬찬히 고개를 들었다. 씨익 웃고 있는 그의 눈이 잔악무도해 보이기까지 했다. 탁, 하고 그의 어깨를 때리자 키득거리는 그가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놀랐잖아요.”
“진짜 아픈데. 싸면 괜찮을 거 같아.”
대체 언제 발기한 건지 조금 딱딱하게 올라서 있는 성기가 손으로도 느껴져 그게 더 난감했다.
“대체 언제….”
“남자 옷 함부로 벗기는 거 아냐. 나랑 그렇게 붙어먹고도 그걸 몰라?”
“그건 벗긴 게 아니라 진, 진찰….”
변명을 하는 그녀의 말은 듣지도 않고 아예 지퍼를 내리고 나연의 손을 안으로 쑤욱 넣어 준다. 그 힘에 나연이 그의 옆자리에 끌려가 앉았다. 느닷없이 이루어진 행위에 헉 소리가 절로 나왔다.
단단하게 곧추선 페니스는 입으로 조금만 빨아 주면 금방이라도 사정할 것처럼 몸집이 불은 상태였다. 불알 거죽을 슬쩍 만졌다가 기둥 밑동을 비비자 손안에서 성기가 불끈거린다. 제 구멍으로 품어서 수백 수천 번을 쑤셨던….
“아!”
잊고 있던 CCTV의 존재에 재빠르게 손을 뺐다. 오른쪽 가장자리에 붙은 CCTV를 등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너무 위험하다. 눈을 굴리자 보안 카메라의 존재를 단번에 알아챈 그가 위험스럽게 웃었다. 두근두근. 들키면 직장이고 뭐고, 끝이었다.
“뭐 어때, 아픈 손님 물 빼 주는 건데.”
건조해 보이던 눈동자 안은 언제 그랬냐는 듯 퇴폐적인 색기가 장악하고 있다. 재차 눈을 감았다 뜨는 그를 보고 있자니 목구멍으로 침이 넘어간다.
“전 지금 약사 아니에요. 퇴근했고 지금은 그냥 두고 간 물건 찾으러 온, 그냥, 그냥, 그러니까 그렇게 말하지 말아요.”
“어차피 네가 등지고 있어서 뭐 하는지 안 보여. 네가 각도만 잘 조절하면.”
“그래도….”
“빨리 쌀게. 아, 귀두가 딱딱해졌어, 나오겠다. 나연아.”
끙끙거리며 눈시울을 좁히는 그가 대놓고 유혹을 한다. 하아, 부러 쏟아 내는 숨결이 분명했다.
“만져 봐. 진짜야.”
“…….”
급하다고 만져 보라면서도 따라붙는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악랄하다. 그래, 저질이라는 표현이 딱 맞겠다.
나연은 등을 좀 더 돌려 완전히 CCTV를 가리는 각도에 앉았다. 심장이 터질 듯이 뛴다. 발사 직전처럼 치켜 선 성기와는 달리 의자에 기대어 앉은 그는 지나치게 느긋해 보였다.
느긋한 눈과 입술로 이런 태연한 거짓말이나 하고 있다니. 저질인 걸 알면서도 거부하지 못하는 저도 제정신은 아니었다. 나연은 손으로 귀두 아래쪽을 감싸 쥐었다. 습하고 더운 공기가 손끝까지 달라붙는다.
나연은 거머쥔 것을 빠르게 흔들었다. 원한다면 언제라도 정액을 쏘아 댈 것처럼 고환이 불끈거리는 것이 보였다. 지금까지 봐 온 바로는, 저런 움직임을 보이다 곧 질 안, 젖꼭지, 클리토리스, 가리지 않고 원하는 곳에 정액을 뿌려 흔적을 남겨 댔었다.
“귀두도 만져야 쌀 거 같은데.”
키스를 할 것처럼 그의 얼굴이 가까이로 다가왔다. 그렇지만 키스는 없었다. 마주 보고 있는 몸 사이에 거대한 페니스를 감추고 있다는 사실이 미칠 듯한 불안감과 함께 흥분으로 다가온다.
“하아, 큿.”
터지는 그의 신음 소리가 귓가를 어지럽힌다. 나연은 엄지로 요도를 문지르며 그가 원하는 대로 귀두까지 만져 주었다. 기다렸다는 듯 쿠퍼액이 줄줄 샌다. 점액질로 미끈거리는 귀두를 붙당겼다가 피스톤질했다. 쿠퍼액과 빠르게 마찰되는 손가락 사이에서 찰박거리는 소리가 났다.
참으로 기가 막히도록 외설스러운 그 광경을 보고 있는데 그가 축축하게 젖은 음성을 했다.
“왜, 아예 목구멍 안에 끼워서 받아 마시고 싶어?”
“…빨리 싼다면서요, 얼른….”
“음탕하게 말해 줘, 싸 달라고.”
“이사, 아니, 연석 씨.”
“안 그럼 안 쌀 거야. 계속 참고 있어야지, 뭐.”
잔뜩 찌푸린 미간이 그의 의지를 보여 주고 있었다. 하태민이 약국으로 오겠다고 했다. 이대로 있다간 삼자대면이라도 할지도 몰랐다. 문득 그 생각까지 미치자 나연은 식은땀이 나는 기분이었다.
“내 귓가에 대고.”
그녀가 잠시 망설이며 입술을 벙긋거리자 능글거리는 얼굴로 주문한다. 주문 사항도 참 구체적이다.
나연은 쩍쩍 페니스를 흔들며 그의 귓가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싸 주세요.”
“네가 생각해도 앞에 뭐가 붙어야 할 게 빠진 거 같지?”
“…제 손에 많이… 듬뿍 싸 주세요.”
“착하네, 우리 나연이.”
원하는 말을 듣고 나서야 그가 사정했다. 그녀의 손바닥 안을 적시는 것도 모자라 그녀의 카디건까지 더럽힌 정액이 주룩 흐른다. 나연은 제가 사정이라도 한 것처럼 헉헉거리며 손가락 사이사이에 감긴 걸쭉한 정액을 쳐다보고 있었다.
“빨아. 내가 보는 앞에서 손가락 하나하나.”
“…이사님.”
“안 그럼 CCTV 보면서 빨라고 할 거야.”
그의 말에 나연은 다급하게 정액이 듬뿍 묻어 뚝뚝 타고 내리는 손가락을 입에 물었다. CCTV 앞에 이 모습을 보이느니 차라리 그의 앞에서 추태를 보이는 편이 나았다.
나연은 손가락 사이사이 혀를 넣어 진득하게 흐르는 정액을 빨고 그가 보는 앞에서 쭙쭙 제 손가락을 훔쳤다. 날름날름 혀가 손가락 사이를 지나다닐 때마다 진하고 비린 맛이 났다. 그의 입가엔 만족스러운 웃음이 폈다.
잔인해.
“…차연석 바보.”
“집에 가자.”
차 앞으로 다가간 나연은 뒤늦게야 볼을 퉁퉁 불렸다. 고작 하루 못 본 것인데 오랜만에 보는 듯한 성식이 반가웠다. 그녀는 약국 문을 닫고서 익숙한 차에 올라탔다.
“1시간 뒤에 M호텔 회의실에서 저녁 미팅이 있으십니다. 문밖에서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1시간의 짧은 시간이 주어졌다.
집으로 돌아와 침대까지 가기도 전에 현관 앞에서 그와 엎어졌다. 아직 문밖엔 그의 수하들이 돌아가지 않고 집 앞을 지키고 있는 것이 느껴졌지만 이미 머릿속엔 가느다랗게 이어져 있던 퓨즈가 끊겼다.
서둘러 지퍼를 내리고 아까 나연이 만지던 성기를 꺼낸 그가 친절히 그녀의 입에 물려 주었다. 나연은 아까 제 손안에서 격렬하게 정액을 쏘아 보냈던 요도를 혓바닥으로 크게 쓸었다. 손바닥을 지지대 삼아 기둥을 받치고 날름날름, 혓바닥에 심지를 대고 좌우로 굴리며 보란 듯이 예민한 곳을 혀로 지분대자 그의 잇새에서 욕설이 터졌다. 나연은 일부러 슬쩍슬쩍 침을 뱉어 가며 기둥을 감쳐물었다. 그는 그녀가 지저분하게 침을 흘리며 페니스를 빨아 대는 것을 좋아했다. 귀두를 문 채 그와 은근하게 눈을 맞추는 것도 잊지 않았다.
“씨발, 송나연. 너 내가 자지 빨 때….”
하태민에게서 온 전화도 오랜만에 듣는 그의 목소리도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정신 나갈 것 같은 섹스가 필요했다. 제발 더 이상은 나 흔들지 마. 하태민. 제발 이 이상은 다가오지 마. 나연은 절망적으로 뇌까렸다. 제발.
밑동까지 맛있게 훑으며 소리 내어 빨았다. 무게감을 이기지 못해 연신 꺼덕거리는 둔중한 기둥이 입을 오므릴 적마다 입천장이며 혀를 한꺼번에 압박한다. 오럴 성교만으로 벌써 팬티 밑이 축축하게 젖었다.
나연은 빠르게 스커트를 걷고 팬티를 옆으로 밀어젖혔다. 침으로 범벅된 귀두를 보지에 얹고 엉덩이를 요리조리 흔들어 페니스를 깊숙이 꽂아 넣었다. 음경이 질벽에 쩍쩍 차지게 들러붙는, 머리가 쭈뼛 서는 기분. 흐물흐물한 고환 살가죽이 은밀한 구멍 주위로 잔뜩 비벼지는 느낌도 끝내주게 황홀했다.
“아흐, 아!”
아무 생각도 하고 싶지 않았다. 나연은 애액으로 흥건히 젖어 그의 불알 새새틈틈 점액이 덕지덕지 낀 것도 모른 채 엉덩이를 빠르게 미당기며 흔들었다.
아무 생각도 하지 말자. 바보같이 흔들리지 마.
“자지로 깊이 쑤, 쑤셔 주, 보지 기분 좋게, 세게 흔들, 아!”
그와 지난 시간 섹스하며 습득했던 말들을 마구잡이로 더듬어 읊었다.
흐느끼던 나연이 출렁거리는 가슴을 꽉 움켜쥐자 그가 편하게 만지라고 윗옷까지 모조리 벗겨 준다. 나연은 넘실거리는 가슴 한쪽을 주무르며 그의 페니스를 뽑아 먹을 것처럼 정신없이 안으로 꽂아 넣었다.
“후, 송나연, 하루 안 넣어 줬다고 안이 외로웠어? 좆 먹겠다고 구멍 벌어지는 거 봐라.”
“응, 으응. 좋, 아요.”
“손으로 보지 벌리면서 해.”
아무리 젖었어도 상대의 성기는 감당하기가 버거운 사이즈였다. 더구나 질구를 풀지도 않은 상태였다. 나연은 두 손을 아래로 내려 질구를 양쪽으로 벌리면서 삽입 운동에 박차를 가했다.
머릿속이 텅텅 비어 간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을 만큼 짜릿한 육체적 감각만이 그녀를 지배한다.
“약국에서부터 먹고 싶었지, 송 선생. 응?”
섹스를 할 때만큼은 솔직해지는 그녀를 연석은 좋아했다.
“흐응, 응, 먹고, 싶었, 흐아아!”
그는 나연의 허리를 안고 몸을 확 일으켜 세웠다. 여전히 성기는 끼워진 상태였다.
굳게 닫힌 대문에 머리를 기대 숙이게 만든 그가 나연의 엉덩이를 뒤로 쭉 뺐다. 차가운 금속 문에 뺨을 기대었다. 간신히 서 있는 두 다리가 후들거렸다.
“엉덩이 흔들어.”
“이, 이렇게 서서요?”
“너무 앙앙대고 울면 들리니까 요령껏 잘 참아 봐. 쟤들 또 네 신음 소리 듣고 주무를라.”
철제문을 더듬어 짚고서 엉덩이를 들썩들썩 흔들었다. 보기만 해도 오금이 저리던 그 많던 연석의 수하들이 이 철제문 밖을 지키고 섰을 터였다. 나연은 허리 힘을 이용해 꽂은 페니스를 놓고 둥글게 골반을 돌렸다 밀고, 흡착된 귀두를 당겼다 풀었다. 기둥이 빨려 들어가는 질구 주위로 그녀의 침과 섞인 희뿌연 마찰액이 쩍쩍 떨어지는 것도 모르고 삽입에 열중했다.
“흐읏, 응, 하아, 아.”
끝도 없이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찔꺽거리는 소리를 내며 나오는 페니스 힘줄이 더욱 탱탱하게 섰다. 삽입의 힘에 밀려 젖가슴이 금속 문에 턱턱 부딪혔다. 그래도 태초의 벌거벗은 짐승처럼 뒤엉킨 아래쪽은 뜨겁기만 했다.
그의 성기가 맨살 그대로 제 안으로 처박히는 느낌도 좋았다. 하태민과는 피임약을 먹어도 단 한 번도 콘돔 없이 해 본 적 없었는데.
이성마저 박살 내는 남자. 그렇지만 제 입으로는 하지 못할 말이었다. 귀신같은 이 남자는 말하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겠지만.
사람은 사람으로 잊으려 일탈처럼 잡은 남자였으나 그와의 섹스는 그 어떤 것보다 강렬한 올가미이자 덫이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하태민의 생각으로 머리가 혼란스러웠으면서 이 야하디야한 몸은 차연석과의 섹스로 미쳐 날뛰고 있었다. 몸과 마음이 따로 논다. 꼭 바람이라도 피우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흐… 너무, 맛있어, 요.”
“그럼 공손하게 부탁을 해야, 싸 주지.”
“정액, 안에….”
“뭐? 안 들려. 내가 뭐라고 그러라 했어. 머리 좋은 송 선생.”
“보지 안에 듬뿍, 하으아… 싸, 싸 주세…. 아아!”
“더, 더 천박하게 흔들어, 더. 그래야 네가 먹고 싶은 정액이 나오겠지?”
살살 타이르듯 원하는 것을 요구하고 끝내는 받아 내는 남자.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는 전력으로 성기를 처박아 넣었다. 튕기는 속도를 따라갈 수 없는 몸은 울음 섞인 교성만 쏟아 낼 뿐이었다. 아아아! 금속 문에 부딪힌 신음이 현관에 울렸다. 나연은 부르르 쾌감에 전율하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
“3500원입니다.”
나연은 손님에게 거스름돈을 전해 주며 슬쩍 카메라를 올려다봤다.
함께 일하는 동료 약사가 왜 카페로 돌아오지 않았냐고 물었다. 출근한 지 얼마 안 돼 긴장으로 탈이 나서 도저히 갈 수가 없었다고 대충 변명을 하자 되레 귀엽다며 깔깔 웃었다.
“실습해 봤잖아.”
“…실습이랑은 아무래도 다르니까요.”
“실습 때도 잘했으면 걱정할 거 없어.”
나연은 드르륵, 진동이 오는 핸드폰을 들었다. 어젯밤 전화가 왔던 그 전화번호였다. 하태민.
그녀는 오는 전화를 무음으로 바꾸고 다시 주머니 속으로 넣었다.
“소화제 하나 주세요.”
강남, 병원이 줄줄이 들어선 빌딩 안, 목 좋은 곳에 위치한 약국은 오전 타임이고 오후 타임이고 손님이 많은 편이었다.
없는 살림에 학비 뒷바라지까지 하느라 밤낮이고 일하던 부모님 덕분이었다. 약대에 들어간 것도, 약국에서 이렇게 일할 수 있게 된 것도. 열심히 일해서 꼭 내 개인 약국 하나를 차릴 거라고, 눈을 감는 아빠 옆에서 그렇게 다짐했다.
그래, 다른 생각 말고 열심히 일이나 하자.
열심히 일해서 어서 약국도 내고 돈도 벌어야 하니 갈 길이 멀다.
“나연 씨, 오늘 점심 뭐 먹을까?”
“음, 국밥 어떠세요? 어제 진 선생님이 국밥 드시고 싶다고.”
“어머, 맞아. 그랬어. 기억하고 있었네? 송 선생 기억력 좋다.”
나연은 약국에서 함께 일하는 약국장 그리고 약사들과 함께 점심 식사를 하기 위해 빠르게 남은 업무를 끝냈다. 식사를 먼저 마치고 돌아온 약사에게 하던 업무를 맡기고 약국을 나왔다. 어느덧 바람에서 봄의 냄새가 났다.
근처 따끈한 콩나물국밥집으로 들어왔다. 역시 날이 추워지면 콩나물국밥만 한 게 없다며 진 선생이 좋아했다. 콩나물국밥, 하태민과 함께 날만 추워지면 일주일에 한 번은 먹던 것이다.
정신 차려야지. 버리고 떠난 놈 뭐가 좋아서 추억까지 해 주고 있어. 하태민이 좋아했던 노른자가 동동 익은 수란도 보기 싫었다.
나연은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국물만 깨작거리다 식당을 나왔다.
“송 선생, 영 식사를 못 하네. 괜찮아요?”
“네. 요새 소화가 잘 안돼서. 괜찮아요.”
“약사가 제 몸 하나 못 챙겨서야. 소화제 하나 먹어요.”
“괜찮아요.”
밀려들던 손님이 조금 잦아들고 나서야 약국은 한숨 돌리며 브레이크 타임을 가졌다. 커피를 한 잔씩 들며 처방전을 정리하고 있는데 어딘가 모르게 익숙하고도 등허리가 지끈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었다. 손님 대기 좌석에 앉아 팔다리를 꼰 채 그녀를 쳐다보고 있는 연석과 눈이 마주쳤다.
“……!”
어젯밤, 그와 앙큼한 짓을 했던 바로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그는 어제 일 따위는 모른다는 듯 천연덕스러웠다. 늘 그랬듯 깔끔한 슈트 차림의 그는 타인의 눈길을 끌었다. 흠 하나 없어 보이는 옷차림의 남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반짝거렸다. 지나가던 약사가 힐끔, 그를 쳐다보며 조제실로 들어갔다.
오늘 아침 출근하기 전 분명 늦을 거라 했는데. 영문을 몰라 넋 놓은 것처럼 쳐다만 보고 있자 그가 일어나 성큼성큼 걸어온다. 까만 넥타이가 코앞까지 왔다.
“영양제 될 만한 거 아무거나 줘 봐요.”
“네?”
“영양제.”
“영양제라면 집에 많이 사 놨….”
나연은 식은땀이 찔끔 났다. 허튼소리를 할까 입을 꾹 닫아 잠그고 그를 올려다봤다.
“특별히 안 좋은 곳이라도 있으세요?”
“요새 스태미나가 좀 달리는 거 같아서.”
“그거라면 안 먹어도 될 거 같은데.”
그의 반듯한 넥타이를 보며 중얼거리자 그가 키득키득 웃는다. 나연은 가볍게 먹을 수 있는 비타민을 내밀었다. 농담으로 한 얘기일 거라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나연은 진심이었다. 하루 꼬박 집에 들어오지 못했던 남자가 어젯밤 몇 번을 했는지, 시작은 그녀였지만 끝은 그였다.
일이 있어 정사 후 집을 나갔다가 스케줄을 끝내고 돌아온 그는 선잠이 들었던 그녀를 다시 헤집어 놓았다. 끝내 이제 그만하자고 더는 못 한다고 애원해야 했다. 미어터지다 못해 가랑이 사이가 정액 범벅이 되어서야 결국 깊이 박혀 있던 성기가 몸속에서 빠져나갔다.
그의 성기를 밑구멍으로 빨고 입으로 빨고, 하도 부대껴 아래위가 헐어 버린 것 같은데 저리도 쌩쌩한 남자라니.
“…3000원이에요.”
약 한 알을 빠득 씹어 먹으며 십만 원짜리 수표 한 장을 내민 그에게 서둘러 거스름돈을 건넸다.
“뭘 새삼스레.”
잊고 있나 본데 여기 제가 일하는 약국이거든요.
나연은 입 밖으로 터져 나오려는 말을 눌러 참고 그의 손을 가져와 직접 쥐여 주었다. 애초에 지갑에서 돈을 꺼내면서도 그는 자기가 얼마를 꺼내고 있는지 보지도 않았다. 영양제 사 먹으러 왔다는 소리는 순 핑계라는 말이었다.
약국이 한산해서 다행이지. 나연은 슬쩍 좌우 눈치를 보고서 그를 쫓아 약국을 나왔다. 성식과 그의 수하들이 약국 앞을 지키고 있었다. 그와 도로변에 세워진 차까지 걸었다. 자연스레 그의 수하들이 뒤를 따랐다.
“오늘 늦는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저는 아직 퇴근까지 한 시간 남았는데.”
“늦어.”
“잠시 나오신 거예요?”
“퇴근하면 집으로 곧장 들어가고.”
잠깐 얼굴 보러 나온 건가. 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답을 해.”
“네, 그럴게요. 지금 그럼 회사 들어가시는 거예요?”
“어. 회의 있어. 시간 없으니까 빨리 혀 빨아.”
시간이 없으니 빨리 키스를 하라고 재촉한다. 로봇처럼 굳게 서 있는 수하들은 이제 이골이 났다고 하지만 여긴 약국 앞,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도로변이다.
“여기서요?”
“말했잖아, 시간 없다고.”
“아무리 그래도 여기서….”
최대한 편의를 봐주겠다는 듯 그녀의 안면을 훑은 그가 차 뒷좌석으로 올라탔다. 서둘러 달려와 차 문을 열려는 수하들을 애써 무시하고 나연은 그의 뒤를 따라 차 안으로 올라탔다.
“키스하려고 여기까지 온 거예요?”
“아니, 섹스. 근데 시간이 부족하네.”
태연하게 귓불을 만지작거리며 웃는다. 살짝 기울어진 턱선으로 눈길이 절로 옮겨 갔다. 어젯밤 그녀가 혀로 핥고 정신없이 입 맞추었던 날카로운 턱이었다.
“오늘 저녁이나 같이 할까.”
이 대사를 이렇게 섹시하게 할 필요가 있나.
“대시가 너무 노골적이시다.”
“이런 거 좋아해? 노골적이고 적나라한 대시.”
턱을 문지르며 묻는 얼굴은 예스라고 하면 잔뜩 퍼부을 기세였다.
“…아뇨. 그리고 지금도 충분히 노골적이고 적나라하거든요. …저녁에 바쁘시다면서요.”
“노골적이고 적나라한 대시를 위해 특별히 할애할 용의 정도는 있고.”
“아, 정말…. 그리고 이제 약국이든 약국 앞이든, 이 근방에선 키스 이상은 절대 안 돼요. 내가 오늘 얼마나….”
“절대 안 돼서 그렇게 손으로 불알까지 주물러 가며 흔들었어?”
그는 확실히 하태민과는 완전히 다른 타입의 남자다. 늘 따뜻하고 부드러웠던 그 남자와는 정반대인 게 신기했다. 2년을 하태민에게서 벗어나지 못해 힘들어했는데 이 남자와 함께 있으면 거짓말처럼 생각이 사라진다. 뭐, 그뿐만 아니라 어떤 생각도 들지 못하게 하는 데는 타고난 남자라 그런 건가. 정상적인 사고 회로로는 따라잡을 수가 없다.
“난 가끔 네 머릿속이 누구로 채워져 있나 궁금해.”
“네?”
“다른 새끼면 재미없는 거 알지?”
그의 눈을 보고 있자면 정말 궁금해서 물은 것이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나연은 일순 조금 선뜩하게 휘는 그의 눈꼬리를 본 것 같았다.
“뭐 해, 혀 빨러 온 거 아냐?”
천박한 말로 키스를 하라 지껄였지만 벌어지는 남자의 입술은 그 어떤 것보다 우아했다. 그 안에서 그녀를 기다리는 붉은 혀 또한.
나연은 고개를 들고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그의 입술로 향해 다가갔다.
주말이라 술 한잔하겠다고 멀어지는 약사들과 손을 흔들고 약국을 나왔다. 같이 가겠냐는 물음에 선약이 있다고 정중하게 거절했다. 나연은 부쩍 많이 부는 바람에 코트를 여미며 버스 정류장으로 걸었다.
그녀의 앞에 서 있는 하태민과 마주치지 않았다면 나연은 다가오는 버스에 오를 수 있었을 것이다.
너무 오랜만에 보는 얼굴이라 손이 걷잡을 수 없이 떨렸다. 그대로 스쳐 지나가려는데 팔이 붙잡혔다.
“얘기 좀 해.”
“할 얘기 없어.”
“나연아.”
“바빠. 갈 데 있어.”
“그 남자 만나러 가는 거야?”
“뭐?”
“그 이사라는 사람. 네가 전화로 찾았던.”
“…알 거 없어.”
잡힌 팔을 빼고 걷는데 그가 다시 앞을 막아섰다. 그녀를 떠났을 때보다 수척해진 얼굴이었다. 이럴 거면 널 떠날 거라면서 약혼녀를 데리고 오질 말았어야지.
“어제 찾아갔었는데 너 없더라. 그 남자 만났던 거야?”
주눅이 들게도 그의 집안과 어울리는 국회 의원 집안의 여자였다. 그의 입장을 이해하면서도 원망스러웠다. 그래도 그 여자 대신 내 옆에 있어 줬으면 했던 마음이 이기적이었던 것일까. 자신에겐 하태민 하나였는데.
죽은 엄마,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던 아버지, 남보다 못했던 반쪽짜리 오빠. 그런 그녀 곁에 평생 있어 주겠다고 했던 건 그 하나뿐이었다.
자신은 모든 것을 다 버릴 것을 감수하고 그의 손을 잡았는데, 그는 그녀만 가지기엔 잃을 것이 너무도 많았던 거다. 그래서 시작조차 않으려고 했던 자신에게 그렇게 맹세까지 해 가며 매달렸으면서. 결국엔 처음에 염려했던 그 결말을 맞았다. 집안 따위의 이유로 널 버리지 않을 거라던 맹세를 새까맣게 잊은 남자는 나연의 손을 놓았다.
“잠깐 얘기 좀 해. 내가 다 맞아 줄게. 원하는 만큼 때려. 그러니까, 나연아.”
내가 저를 얼마나 좋아했었는데. 돌아가신 아빠가 얼마나 저를 의지했었는데. 그를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던 그 많은 나날을 혼자 내버려 뒀으면서.
그래, 어쩌면 다 자신의 욕심이었을지도 몰랐다. 그래서 그가 이별을 고했던 그날도 그를 붙잡지 못했었다.
늘 그랬듯 아메리카노 두 잔을 사이에 두고 나연과 태민은 마주 앉았다.
“여긴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거야?”
“상윤이가 가르쳐 주더라. 내가 찾아가서 부탁했어.”
태민은 커피가 식을 때까지 한 모금도 마시지 못했다.
“안 가르쳐 주려는 거 빌어서 알아냈어. 네가 많이 힘들었다고 하더라.”
커피 잔을 쥔 손을 달달 떨고 있었다. 처음, 그녀에게 고백할 때도 그랬었다. 아메리카노가 뜨거운 줄도 모르고 컵을 꽉 잡고는 손을 달달 떨었다. 웃겼다. 4년 전의 그때와 같은 모습의 하태민이라니. 그땐 상상도 해 본 적 없었는데.
“너한테도 빌려고 왔어. 안 되면 바짓가랑이라도 잡으려고.”
“약혼녀는 어쩌고 온 거야? 졸업하면 바로 결혼한다고 했잖아.”
“나 파혼했어. 네가 너무 보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어, 나연아.”
그때나 지금이나 이 남자는 말끔하고 단정한 외모를 가졌다. 그땐 사랑해 달라고 빌었는데 지금은 다시 사랑하자고 빌고 있다. 나연아, 하고 마지막에 이름을 불러 가며 애원하던 것도 그때와 같았다.
“나 남자 있어.”
“나연아.”
“잤어.”
창백해진 얼굴이 절망하고 있었다. 그가 떠난 이후 언젠가 한 번은 이렇게 말해 주고 싶었다. 복수, 하고 싶었다. 이상과는 달리 현실은 태민이 없는 하루하루 멍청하게 남은 미련이나 끌어안고 살았지만 해 주고 싶었던 말이었다.
“떠날 때 짐작한 거 아니었어? 내가 그럼 오빠 떠나면 수절이라도 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어?”
하긴, 그게 맞을지도 모르겠다. 그가 떠난 이후 그녀가 한 건 그의 기억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던 것뿐이었다. 공부만 하면서 그가 남기고 떠난 흔적에 괴로워하며 살았으니까. 이제야 겨우 잊어 가는데. 겨우, 좀 살 만해졌는데 나타나는 건 무슨 심보란 말인가.
“네가 말했던 그 이사라는 사람이야? 무슨 회사 다니는 사람인데.”
“알 거 없어.”
“아냐. 넌 그 남자랑 안 잤어. 내가 아닌데 네가 어떻게 그랬겠어.”
“마음대로 생각해. 어차피 이제 난 오빠 여자 아니고, 더 이상 이렇게 만날 일도 없어. 가 봐야겠다. 그 사람 만나기로 했거든.”
“그 남자한테 진심도 아니면서 진심인 척하지 마. 내가 그런다고….”
“어떤 여자를 만나든 잘 살아. 진심이야. 다신 찾아오지 않으면 좋겠어.”
커피는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한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덤덤한 척하고 있었지만 손이 떨리는 건 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것을 감추려 소매 안으로 주먹을 말아 쥐었다.
카페 문을 향해 걸으니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나연은 그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게 머뭇거리던 걸음을 점점 빨리했다. 그녀를 따라 카페를 나오는 소리가 들렸다.
“송나연!”
팔이 붙잡히고 순식간에 돌려 세워졌다.
“나 다 버렸어. 집안도, 약혼녀도. 너만 있으면 돼. 내가 그랬잖아. 내가 네 옆에서 평생 지켜 주겠다고. 이제라도 지키러 돌아왔어. 그러니까 너도 그 남자 버려.”
나연아. 얼마나 불러 주길 바랐던 목소린지 모른다. 너를 잊으려고 별짓을 다 했다. 이제 와 그게 다 무슨 소용이라고, 뒤늦게 나타난 그는 무언가에 홀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초점 잃은 눈으로 중얼거렸다.
“이사든 전무든 사장이든 너도 나처럼 그게 뭐든 다 버려. 그 남자라고 언제까지 널 옆에 둘 거 같아? 아니, 그 남자도 필요 없어지면 너 버릴 거야.”
“그땐 내가 필요 없었다는 말이구나.”
“…그래. 아니라고는 말 못 해. 널 버린 거 부정 안 해. 그래도 돌아왔잖아. 이렇게 나타났잖아.”
“…오빠. 제발 이제 그만해.”
“그래. 오빠야. 오빠 돌아왔어, 나연아.”
“저리 가.”
“너 나 많이 그리워했다며. 그래서 힘들었다며.”
그의 말에 부정하지 못하는 게 더 화가 났다. 하태민은 그녀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한 남자를 2년 동안 잊지 못해 그림자를 끼고 사는 네가 미련스럽다던 민아의 말이 떠올랐다. 그 말이 딱 맞았다.
“그래서 뭐 어쩌자는 거야.”
“다시 시작하자. 그래서 왔어, 나.”
나연은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고 선 태민을 차마 뿌리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