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5. 무언의 계약 성립 (6/13)

05. 무언의 계약 성립

“우리 재문건설 이사님께서 이번 사업 맡으셨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

“하하. 저희들이 잘 보좌하겠습니다. 너무 걱정 마십시오.”

“제 사람들이 있는데 이경 사장님께서 왜 저를 보좌합니까.”

“사업이라는 게 옆에서 잘 받쳐 줘야 또 추진력을 받는 거 아니겠습니까. 물리치지 마십시오.”

입이 찢어져라 웃고 있는 노인네들과 함께 술을 마시자니 입맛이 떨어졌다. 고상한 척하느라 좋아하지도 않는 양고기 스테이크를 먹고 있는 김 사장을 보고 있으니 더 그랬다.

“그럼 저야 감사하고요. 근데 어쩌죠. 제가 약속이 있어서 그만 가 봐야 할 것 같은데.”

“아휴, 바쁘신 분 붙잡고 있는 것도 도리가 아니지요.”

연석은 마지막 와인 잔을 비우고 자리에서 일어섰다. 기다렸다는 듯이 그의 수하들이 연석을 뒤따랐다.

“피곤하십니까?”

“노인네들 얼굴만 봐도 피곤하다.”

“형님께서 후계자라 더 그러는 것이니 너무 노여워하지 마십시오. 이 기회에 한번 비벼 보려는 수작들 아니겠습니까. 노친네들. 어디로 모실까요? 학교로 모실까요?”

“학교는 왜.”

“송나연이 있으니….”

평소답지 않게 성식이 말하기를 고민한다.

“걔 너 보기 싫어해서 너랑은 같이 못 가.”

“예?”

“뭘 충격받아. 실컷 칼 들이댈 땐 언제고. 그리고 오늘 저녁 미팅 있다.”

“아, 카지노 사업 건. 예. 사무실로 모시겠습니다.”

“비서실장이란 새끼가 모시는 상관 스케줄도 몰라?”

“시정하겠습니다.”

“시정 같은 소리 하네.”

연석은 그 앞에서 정차한 차 뒷좌석에 올랐다.

아침에 일어나 그의 옆자리에서 멍한 얼굴로 눈만 끔뻑거리던 나연이 생각났다.

대뜸 여기가 어디냐고 묻더니 답을 주기도 전에 어디인지를 인지하고 사색이 되던 얼굴도 또렷하게 떠올랐다. 너무 또렷해서 문제지.

학교에서 나오면 전화를 하라고 했는데도 연락이 없었다. 아니, 그러고 보면 그랬다. 지난번에 전화번호를 따로 저장해 줬는데도 명함을 달라고 조심스레 말했었다. 그래서 명함까지 하나 새로 줬다. 지난밤에도 새로 준 명함 잘 가지고 있다고 하지 않았는가. 근데 왜 연락 한번이 없었던 거지.

“여하튼 신경 쓰이게 하는 덴 뭐 있지.”

“시정하겠습니다. 형님, 죄송합니다.”

“너 말고.”

쯧, 혀를 차곤 창문을 조금 내렸다. 날은 여느 때처럼 찼다. 시원한 공기가 차 안으로 들어왔다.

사무실 문을 열며 고개를 숙인 성식이 오늘따라 말이 없는 제 형님을 가만히 보았다. 사무실은 늘 먼지 한 올 없이 깨끗하다. 모든 것은 오로지 이 사무실의 주인인 연석의 지시 아래 이루어지는 일이었다.

청소는 그가 나갈 때마다 한다. 옷을 늘 구김 한 점 없이 다려 놓고 대기해야 했다. 회의실까지 모시며 그를 철저히 경호했다. 그는 차기 회장이며 성식은 그를 최측근에서 보호해야 할 막중한 의무가 있었다. 제 모가지가 따인다고 해도 지켜야 할 사람이었다.

연석을 중심으로 한 회의는 세 시간이 지나서야 끝이 났다. 처음 조직에 들어와 재문을 지금까지 올려놓는 데까지 불과 채 몇 년이 걸리지 않았다. 그는 햇수를 다섯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정도로 빠른 시간 안에 재문을 최고까지 키워 놓았다. 그러니 회장이자 조직의 큰형님인 윤 회장이 그를 아끼지 않을 리가 없었다.

성식에게 있어 그는 감히 쳐다도 볼 수 없는 존재와 같았다. 조직 식구들 중 누구에게라도 마찬가지였다.

회의를 마치고 나오는 연석에게 어디로 모실까 물었지만 그는 답 없이 잠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런들 어떠하리. 제 형님이라면 100년도 더 기다릴 수 있다.

성식은 연석이 정차한 차 위로 오를 수 있도록 마지막까지 보좌했다.

“어디로 모실까요?”

“일단 가자.”

일단? 그가 평소에 말하는 방식과는 달랐지만 성식은 그가 시키는 대로 차를 출발시켰다. 차는 송나연이 다니고 있는 대학교로 향했다. 이젠 제법 익숙한 곳이었다.

학교 정문 앞에는 ‘축 졸업’이라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졸업식을 했던 건지 늦은 시간임에도 학교에는 학생들이 많이 보였다. 평소보다 캠퍼스가 좀 소란스럽다 했더니 졸업식 때문인 모양이었다.

성식은 학교 도서관 앞, 벤치에 앉아 있는 나연을 발견했다. 책 한 권을 품에 낀 채 가만히 앉아 있던 그녀가 차를 발견하곤 고개를 들었다. 약간은 상기된 뺨이 평소와는 어쩐지 조금 달라 보였다. 날이 추워 그런 건가.

그러고 보니 송나연은 형님께 감사 인사는 전했나 모르겠다. 지난번, 송태성이 송나연의 신분증과 명의로 온갖 좆같은 짓을 다 해 놓은 걸 막아 준 게 바로 형님이신데. 지금 사지 멀쩡하게 저러고 돌아다니는 것도 다 형님 덕분….

“아.”

성식은 가만히 창문 밖을 바라보다 화들짝 정신을 차리고 나가 뒷좌석 문을 열었다.

“정신 좀 차리자.”

“죄송합니다, 형님.”

연석은 성식을 보며 쯧 혀를 찼다. 검은 구두가 우아하게 바닥을 디뎠다. 차에서 내린 연석은 그를 향해 쭈뼛거리며 다가오는 나연을 향해 다가갔다.

“바쁘신데 제가 전화한 거죠?”

“그래. 공사가 다망한데, 참 일찍도 전화했다.”

“네? 아, 커피, 마실래요? 제가 사 드릴게요.”

“그새 돈이라도 생겼어?”

“그 정도 돈은 있어요. 여기 계세요. 제가 사 올게요.”

“됐어, 성식아, 이리 와 봐라.”

멀찌감치 지키고 서 있던 성식이 가까이로 다가섰다.

“커피 두 잔 사 와.”

“어떤 커피 말씀이십니까?”

“아, 저는 아메리카노랑 이사님은….”

“같은 걸로 두 잔 사 와.”

지갑에서 만 원짜리 한 장을 꺼내 내민 그녀를 지나쳐 성식이 교내 카페로 향했다.

“왜 갑자기 돈지랄이야.”

“이게 돈지랄이에요?”

“없는 돈을 쓰려고 지랄을 하니까 돈지랄이지, 그럼 뭐야.”

“아, 저 마지막 방값 들어왔어요. 그리고 오늘 약사 시험 결과도 나왔고 해서. 더 맛있는 거 사 드릴 수 있는데.”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망설이는 그녀가 졸업장과 함께 쥔 지갑을 까드득까드득 긁으며 어렵사리 입을 뗀다.

“방 알아보고 있는데요. 최대한 빨리 구할게요. 그렇지 않아도 곧 약국에 이력서 낼 거예요.”

“나가겠다고.”

“음, 한 달 내로 무조건….”

“내가 네 스폰서 아니었나?”

“예?”

나연은 그가 하는 말을 가만히 곱씹어 보았다. 갑자기 무슨 소리지. 스폰서? 아, 송태성이 했던 말 때문에….

“그건 오빠가 잘못 알고 헛소리를….”

“…스폰서, 해 줄 거예요?”

“아니. 그런 거 안 좋아해.”

“그러니까 애처롭게 울면서 매달려 보라니까? 질질 울면서 혀라도 빨아 봐. 내 마음이 바뀔지도 모르잖아.”

“봐줬다. 키스부터 해 봐. 보고 결정하게.”

나연은 그와 첫 섹스를 했던 날 밤이 떠올랐다. 도발은 그가 먼저였지만 어쨌건 그에게 입술을 먼저 갖다 댄 건 자신이었다.

성식이 사 온 커피를 내밀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를 건네받은 나연은 그녀를 찌릿 쏘아보는 성식과 눈이 마주쳤다. 그에게 알아서 잘 하라는 눈총이 분명했다. 컵에 입술을 묻으며 시선을 회피했다.

잠깐, 그래서 그와 섹스를 했다고 생각한 걸까. 어젯밤도. 스폰서가 필요하다고 생각해서?

“그래서 이사님이랑 잔 거 아니에요. 어젯밤에도….”

“뭐?”

다급하게 뱉어 낸 말에 그가 쳐다본다. 처음 섹스가 동해서 다리를 벌렸던 날도, 이 향이 났었다. 남자의 향수 냄새. 차연석의 스킨 냄새. 그라서 동한 거지, 절대 조건 때문에 잔 게 아니었다. 송태성이 지껄였던 말도 안 되는 말 때문에 그러는 거라면….

“저는 그냥 이사님이랑 하는 섹스니까… 그래서 잔 거예요. 돈 같은 거, 대가 같은 거 바란 게 아니에요.”

허공에서 눈이 마주쳤다. 그를 진심으로 사랑해서 시작했던 섹스는 아니었지만 오해는 싫었다. 학생들이 간간이 앞을 지나갔다. 그래도 신경 쓰지 못했던 건 이 남자와 함께 있기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

다른 누군가에게 신경 쓸 틈도 주지 않는 남자. 하긴 그래서 한 건설 회사에서 최고 자리에 오른 건지도 모른다. 물론 건설 회사를 가장한 조폭 집단이지만. 고개를 정면으로 돌려 종종걸음으로 걸어가는 학생 하나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던 그가 나직이 말했다.

“알아.”

“네?”

미묘하게 올라가는 입꼬리 끝에 향긋한 커피 향이 돌았다.

“판 깔아 주는 거잖아. 말로 해야 알아들어?”

그날 밤 스폰서를 핑계로 내건 잠자리에 동의했으니 그의 집으로 들어와 살라는 말이었다.

멍청하긴, 꼭 그렇게 말하고 있는 것만 같은 어조였지만 기분 나쁠 틈이 없었다. 그보다도 정면을 향하던 그의 시선이 그녀에게로 나긋이 돌아와 눈이 마주쳤을 때, 뒤늦게 제가 고백 비슷한 것을 했다는 것을 깨닫고 뺨이 화끈거렸다.

“그게… 그러니까….”

주위를 지키고 섰던 성식이 힐끔 쳐다본다. 나연은 간질거리는 이상한 기분에 애꿎은 커피만 홀짝거렸다. 그 고백 비슷한 말에 그런 대답을 했다는 건 그도 자신한테 끌리고 있다는…. 그런…. 미묘한 간질거림에 자꾸 시선이 아래로 향한다.

쥐고 있는 졸업장이 눈에 들어왔다. 졸업식에는 참석하지 않고 졸업장만 받아 왔다. 어차피 함께 축하를 나누며 기껍게 만나고 싶은 사람도 없었다. 한데 뜻밖에도 졸업식 날 함께 있어 주는 유일한 사람이 이 남자라니. 그를 만나기 전까지는 생각지도 못한 상황이었다. 그래도 싫지 않았다.

아니, 이상하게 외롭게 느껴지던 것이 한 번에 가시는 이 기분이 낯설었다. 남들이 죄다 힐끔거릴 만큼 어마어마한 존재감을 가진 그와 함께여서 그런 건가.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만약 제가 거절하겠다면요?”

“내 거 먹을 때 좋아서 침까지 흘려 놓고 거절?”

‘네가? 그럴 수 있을 거 같아?’라고까지 말해 보이는 확신에 찬 그의 콧방귀에 나연은 변명거리를 찾지 못했다.

“…저 지금 끌려가는 거예요?”

“왜, 변태 플레이 같아서 흥분돼?”

웃어야 하는 건가, 말아야 하는 건가. 그와 미묘한 시선을 주고받던 참이었다.

“어, 나연아!”

집으로 가는 길인지 상윤이 손을 흔들며 다가왔다. 옆자리에 앉은 연석을 대놓고 바라보는 그가 의구심 가득한 눈을 했다. 하긴, 처음 그가 이 자리에 앉을 때부터 학생들이 가다 말고 그를 힐끔거렸다.

갖춰 입은 블랙 슈트에 자꾸만 쳐다보게 만드는 화려한 마스크, 누가 봐도 남자는 눈에 띄었다.

나연은 커피를 쥐고 자리에서 일어서 슬쩍 연석을 가리고 섰다.

“선배.”

“집에 가? 가는 길이면 같이 가자.”

“아, 저는… 따로 갈 데가 있어서요.”

“그래?”

“그럼 들어가 보세요.”

“그래….”

상윤이 답을 하고서도 가지 않고 연석을 흘끔거린다. 나연은 마신 커피를 쓰레기통 안으로 넣고 연석의 팔을 붙잡았다.

“이사님, 우리도 가요.”

그녀의 말에는 꿈쩍도 않은 연석의 눈이 상윤과 나연에게 차례로 향했다. 차갑고 냉랭한 눈이다. 피도 눈물도 없을 것처럼 찬기만이 흐르는 눈. 성식이 조금 더 가까이 붙어 섰다.

“커피.”

“네?”

“그때 그 커피구나, 너.”

커피? 나연은 연석이 하는 말뜻을 알아듣지 못하고 눈만 깜빡였다.

“누구세요?”

끝끝내 상윤이 참던 질문을 터트렸다. 벤치 의자에 앉아만 있던 연석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가 입고 있는 검은 캐시미어 코트가 다리 밑으로 길게 떨어진다. 그는 상윤보다 머리 하나가 더 컸다. 어깨가 좁고 마른 편인 상윤에 비하면 덩치 차이도 확연했다.

커피. 아, 그날, 미주에게 커피를 건네줬던 밤을 말하는 거다. 그는.

“누구면.”

“예?”

“알아서 좋은 거 없을 텐데.”

“선배, 어서 가요. 저도 바빠서 가 봐야 해요.”

나연은 서둘러 상윤을 보내려 애썼다.

“어서, 가라구요.”

그녀가 조금 좋지 못한 표정을 하자 상윤은 그때야 걸음을 돌렸다. 나연은 연석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돌아보는 그가 대뜸 물었다.

“대물?”

믿기 힘들다는 어조다.

“대물이요?”

아, 그 대물용 콘돔.

“그거 제 콘돔 아니에요. 옆방에 사는 미주 언니 거예요. 쓴 것도 미주 언니고. 상윤 선배랑은 전혀 그런 사이 아니에요.”

“알아.”

“네?”

“저런 덜떨어진 애랑 어울리지 마라. 물들어. 하긴, 내가 할 말은 아니다만.”

가자. 그는 짧은 말 한마디만을 덧붙이곤 차로 향해 걸었다. 나연은 그의 발을 맞춰 걷다 슬쩍 물었다.

“어떻게 알았어요?”

“뭐, 둘이 안 잔 거?”

“네.”

“안 가르쳐 줘.”

“왜요?”

쫄래쫄래 그를 따라가던 나연은 열어 주는 뒷좌석으로 올라탔다. 말없이 팔짱을 끼는 그가 알게 모르게 웃는다. 차는 캠퍼스를 나가 달렸다.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운 채 피우지 않고 있는 그를 가만 쳐다보던 나연은 스쳐 지나가는 약국을 보며 잠깐 세워 달라 부탁했다.

“약국은 왜.”

“잠깐 살 게 있어요.”

차가 약국 앞에 부드럽게 정차했다. 지갑을 꺼내 여는 그의 손을 눌러 괜찮다는 의사 표시를 하고선 차에서 내렸다. 약국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익숙한 냄새가 났다. 나연에겐 익숙하고 기분 좋은 냄새였다. 약국 냄새.

“신강제약에서 나온 비타민D 알약 제품이랑… 아, 칼슘 함유되어 있는 제품으로 주셔야 해요. 그리고 윤드럭스 제품 좀 다 보여 주실 수 있어요? 사야 할 게 여러 개 있어서요.”

나연은 약 몇 가지를 계산했다. 방값으로 받은 돈 대부분이 나갔지만 그래도 그녀가 그를 위해 뭔가를 해 줄 수 있는 게 이것뿐이었다. 집이 구해지기 전까지 잠깐 머무는 거겠지만, 어쨌거나 그 집에 있는 동안엔 그에게 신세를 지는 셈이었다.

그래, 자신에겐 당분간 머물 곳이 필요하고, 그는 스폰서 관계를 핑계로 손을 내밀어 왔다. 그의 말마따나 깔아 준 판이었다. 당분간이나마 잡고 있어도 되겠지.

또… 만에 하나 태민이 돌아오기라도 한다면 그에게 보란 듯이 보여 줄 마음도 없지 않았다. 자신의 옆에도 너와는 비교도 안 될 만큼 잘난 남자가 있다고.

스스로가 생각해도 웃겼지만 차연석이라면 함께 있어도 안심이 되기도 하니까. 어쨌거나 태성 같은 조무래기 양아치 따위는 감히 건드릴 수도 없는 사람이 아닌가.

차에 탄 나연은 사 온 약국 종이 가방을 그에게 내밀었다.

“이게 뭔데.”

“약국에서 산 건데, 꼭 섭취해야 할 비타민이랑 영양제예요. 아무래도 그 몸… 몸으로 하는 일도 있으시니까 더더욱 필요할 거 같아서요.”

운전대에 앉은 남자도 성식도 황당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게 룸 미러를 통해 보였다. 다리를 꼬고 앉아 어이가 없다는 듯 바라보는 건 연석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가 손가락으로 대강 종이 가방을 열어 들여다본다.

“드시는 게 더 몸 건강에 좋아요.”

“건강 챙기자면 이 일 하면 안 되는데.”

“…그건. 그래도 드시는 게.”

“보니까 네가 먹어야겠더만. 두 번째부턴 목까지 쉬면서 넘어가잖아, 너.”

앞자리에 앉아 있던 두 남자가 조용히 고개를 정면으로 돌린다. 나연은 벌게진 얼굴로 종이 가방을 쥐었다.

“저는… 젊어서 아직 괜찮아요.”

“그래.”

“네?”

“먹겠다고.”

나연은 종이 가방을 옆자리에 놓아두는 그를 보며 슬며시 시트에 몸을 기대어 앉았다.

남자의 집은 한남동에 위치한 펜트하우스였다. 오늘 아침, 잠에서 깨어나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분명 그와 아래가 터지도록 섹스를 하고 잠이 든 건 그녀의 모텔방인데 깨어나 보니 웬 침대 위였다.

자신이 살고 있는 방이자 집이라 할 수 있는 공간보다 그의 방 크기가 더 컸다. 바닥에서 자냐고 그가 물어봤던 것도 이해가 갔다. 침대가 푹신하기 이를 데 없었다.

엘리베이터로 오를 때도 성식과 그의 부하들이 뒤따랐다. 문을 열고 나서야 남자들이 허리를 숙여 인사한다. 무심하게 그만 가 보라 손을 흔들고 들어온 그가 종이 가방을 탁자 위로 올렸다. 나연은 정신이 없어 아침엔 둘러보지 못했던 집을 두리번거리며 살폈다.

“이사님, 원래 이렇게 휑한 곳에서 생활하세요?”

“왜. 좁은 네 방에 있다가 오니까 적응이 안 돼?”

“그것도 그렇지만… 아, 약은 제가 설명해 드릴게요.”

테이블 앞, 소파에 앉는 그에게로 다가가 종이 가방 안에 든 약통을 전부 꺼냈다.

“많이도 샀다.”

“이게 다 우리 몸에 필요한 거예요. 자, 이건 비타민D가 많이 든 거니까 꼭 아침에 드시고요, 요새 현대인들한텐 비타민D가 많이 부족해서 챙기시는 게 좋아요. 그리고 이건 뼈 건강에 도움이 되는 마그네슘인데요. 이사님은 워낙 튼튼하셔서 이런 거 필요 없다 싶으시겠지만 당장은 아니더라도….”

나연은 약통을 하나하나 들어 가며 설명을 하다 그의 시선이 약통은커녕 주절주절 떠들기만 하는 그녀에게만 박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소파에 기대어 앉아 턱을 삐뚜름히 기울인 그는 따분하기 이를 데 없는 얼굴이었다.

“안 드실… 거예요?”

“설명해. 듣고 있으니까.”

청중도 없이 혼자 떠드는 발표는 자신 없었다. 나연은 슬금슬금 쥔 약통을 내려놓았다. 또, 분위기가 이상해진다.

“피곤하다. 그만 자자.”

“그… 욕실이 어디예요?”

“가. 가르쳐 줄 테니까.”

“그냥 말로만 가르쳐 주셔도….”

몸을 일으킨 그가 넥타이와 시계를 풀었다. 목 아래 단추까지 풀어 헤치던 그가 나연의 손목을 꽉 잡고 소파에서 일으켜 세운다. 그에게 쫓기듯 욕실까지 걸음을 옮기던 나연은 제 방보다 넓은 욕실 앞에 도착했다.

“뭐 해, 벗어.”

갇히듯 욕실 안으로 들어왔다. 이 남자 하나로 도주로가 모두 차단당했다. 옷을 벗으라 시키고 욕조에 걸터앉은 그가 담배를 물었다. 빨간 불이 피어오르고 그의 숨이 흩어져 나올 때까지 나연은 차마 벗지 못하고 서 있었다. 단추가 모두 풀려 가슴팍이 파헤쳐진 그는 느긋하게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옷 입고 씻게?”

절대 그의 마음에 들 때까지 이 문밖을 나설 수 없다는 걸 본능처럼 알았다. 나연은 블라우스 단추를 풀고 느리게 바지를 벗었다. 그의 눈이 아직 벗지 못한 속옷 안을 투시라도 하듯 뚫어져라 보고 있었다.

그녀는 손을 등 뒤로 넣어 브래지어를 풀었다. 튕기듯 나온 젖가슴도 그의 시선만으로 어느새 바짝 서 있는 유두도, 그가 물고 씹어 놓아 유륜 전체가 벌겋게 물이 든 것도 신경이 쓰였다. 하나 남은 빨간색 팬티마저 벗으니 무엇 하나 가릴 것이 없었다.

“어제처럼 엎드리고 엉덩이 들어 봐. 부었나 보게.”

부끄러운 주문 따위는 원래 거리낌 없는 사람이었다. 이미 그에게 수없이 보여 준 부위이지만 이렇게 밝은 빛 아래에서 아래를 보여 주려 하니 또 부끄러운 마음이 들었다.

“전 괜찮아요.”

“러그 위로 올라가서 엎드려.”

괜찮다는 거절은 씨알도 먹히지 않는다. 러그 위라면 욕조에 걸터앉은 그의 시선에서 가장 잘 보이는 곳이다. 속살까지 보기에도 무리 없는 각도. 창피함에 뜨뜻한 눈만 끔뻑거리고 있는데 그가 담배를 지져 껐다.

“왜, 쪽팔려? 이것보다 더한 것도 해 놓고 이제 와서 뭐가.”

“…저 정말 괜찮은데.”

“나는 인내심이 그렇게 길지 못해, 나연아.”

화내지 않는 그가 부르는 이름이 더 무서웠다.

결국 걸음을 옮기게 만든 그는 여전히 그 자리에 걸터앉은 채 그녀만 관망하고 있었다. 나연은 꾸물꾸물 러그 위로 팔을 디뎠다. 새삼 욕실에 깔려 있는 러그도 황홀할 만큼 부드러웠다. 그녀는 엎드린 자세로 그가 잘 볼 수 있도록 엉덩이를 치켜들었다. 섹스가 이루어지는 것도 아닌데 혼자 벌거벗고 있자니 새삼 부끄러워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다리 벌려 봐.”

다리를 슬쩍 더 벌리자 찌걱, 하고 속살이 벌어지는 느낌이 고스란히 난다. 분명 어젯밤과 같은데, 왜 오늘은 이토록 부끄러운 걸까. 신경을 온통 음부에 집중하고 있으니 구멍이 오물거리며 벌어졌다 닫히는 감각까지 생생하게 느껴진다. 젖은 질구 주위가 가려웠다. 그의 시선 때문이다.

“손대지 말고, 내가 구멍 안까지 볼 수 있게.”

몸에서 가장 은밀한 안쪽을 모조리 그의 두 눈 앞에 내놓았다. 그의 두 눈이 부끄러운 안쪽까지 집요하게 향하고 있었다. 축축한 것이 느껴질 만큼 애액이 고였다. 나연은 혹시 흘렀을까 무의식중에 손을 내려 입구를 더듬었다. 손가락으로 잔뜩 들러붙는 애액이 기다렸다는 듯 손가락을 휘감는다.

“아….”

“하고 싶은 건 잘 알겠는데 오늘은 부어서 안 되겠다.”

차마 들 수도 없는 얼굴을 러그로 푹 처박는데 단번에 다가온 그가 나연의 배를 안아 일으켰다. 이내 얼굴을 마주 봤다. 그는 표정 변화가 크게 없는 편이었다. 그저 나긋하게 웃고 있는 미소 속에 진심을 숨기고 있는 남자였다.

입꼬리 끝이 올라가 있지만 그 뜻은 항상 달랐다. 대부분 잔혹한 성정을 숨기고 있는 것을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감이 그랬다. 처음 섹스를 할 때처럼 지금의 그는 진심이었다.

은근히 그 미소가 간질거려 고개를 돌렸다. 그가 눈가에 찔끔 매달려 있던 눈물을 스윽 닦았다.

“넌 어째 볼 때마다 다채롭다?”

“씨, 씻을래요.”

재미있다는 듯 턱까지 괴고 웃은 그가 물었다.

“부스 타입? 욕조?”

“…저는 부스가 더 편해요.”

이유도 없이 쉬어 버린 목소리로 말하자 그가 웃음을 참는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건 나랑 같네.”

그가 바지 버클을 풀어 내리며 그녀의 뒤쪽으로 턱짓했다. 처음부터 두 사람을 위해 만들기라도 한 것처럼 샤워 부스는 넓고 컸다.

나연은 나체가 된 그에게 떠밀려 샤워 부스로 들어왔다. 쏴아아, 쏟아지는 물에 머리칼을 쓸어 넘기며 젖은 그를 올려다봤다. 쏟아진 물이 탄탄한 가슴에 부딪혀 그녀에게로 튄다.

저는 아직 지금의 상황이 부끄러워 얼굴이 얼룩덜룩한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샤워를 하고 있는 그를 보자니 신기하기만 하다. 남자와 단둘이 샤워를 하는 건 처음이었다.

나연은 그의 가슴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내 쏟아지는 물줄기 아래 얼굴을 들이밀었다. 그를 따라 물을 맞으며 피로를 풀려는데 두 가슴이 커다란 손에 잡혔다. 젖을 받쳐 든 그가 손끝으로 유두를 누른다. 튀어나온 젖꼭지부터 예민한 유륜까지 치근대며 손을 놀리던 연석이 나연의 귀를 깨물었다.

“흣, 왜요?”

“돌아서 봐.”

눈가를 타고 내리는 물을 닦고 그에게로 돌아섰다. 마주 보자 젖은 그의 얼굴이 보인다.

“목 안아.”

“……?”

“수상한 거 안 하니까 꽉 안아.”

두 팔을 뻗어 그의 목을 끌어안았다. 까치발을 들어야 가까스로 닿았다. 자세를 낮춰 준 그의 상체가 젖가슴에 찰싹 달라붙었다. 그의 얼굴이, 가늘게 찢어진 눈매가, 오뚝한 콧날이, 아랫입술이 좀 더 도톰한 그의 입술이 가까이로 다가왔다.

“…수상한 거 같은데.”

그러자 그의 눈이 나긋하게 휜다.

“이 집에 들어오기 전에 진작 경계했어야지.”

웃는 얼굴로 상대의 무방비함을 지적한 그가 고개를 숙여 키스를 원하는 숨을 흩뿌렸다. 나연은 자동 반사적으로 입을 벌려 침입해 들어오는 혀를 맞이했다.

그의 집으로 들어온 것이 잘한 선택인 걸까. 나연은 문득 스스로에게 던진 질문에 쉽게 답하지 못했다.

***

“이사님, 차는 어떤 것으로 하시겠습니까?”

연석은 손안에서 잘그락거리는 알약들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오늘 점심 챙기면 바로 먹으라고 그의 슈트 재킷 주머니 안에 넣어 둔 알약 케이스를 발견했다. 보나 마나 이 깜찍한 짓의 주인공은 송나연이다.

분명 어제 새벽까지 섹스를 하고 나서 늦게서야 잠이 들었는데 언제 또 이걸 챙겨 둔 건지.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것들이었다. 영양제, 약, 비타민. 어차피 머리에 총알 한번 박히면 끝인 이 바닥에서 비타민이라니.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터지다가도 페니스를 제 안으로 최대한 깊이 욱여넣기 위해 엉덩이를 흔들던 그 몸짓을 생각하면 아래가 꼿꼿하게 섰다. 그러다가도 힘에 부쳐 ‘이사님, 살살 해 주세요’ 하고 울먹이며 안아 달라 손을 벌릴 때면 나약한 그 몸을 으스러지도록 안고 싶은 욕구에 사로잡혔다.

눈이 돌아갈 만큼 기분 좋은 섹스에 충동적으로 드는 감정은 분명 아니었다. 그 정도로 성욕 앞에 쉬운 남자는 아니었으니까.

“뒷구멍이든 앞 구멍이든 딴 놈 앞에서 벌리면 어떻게 한다고 했지.”

“아앙! 앙! 버, 벌준다고. 아!”

“뭐, 딴 놈 좆이 이제 성에 차겠냐마는. 이제 여기론 내 좆만 품는 거야. 뭐라고?”

“여, 연석 씨, 조, 좆만, 아응!”

연석은 손안에서 굴리던 약을 보고서 고개를 들었다.

“그런 무서운 말, 싫, 어, 아!”

“뭐?”

할 거 다 해 놓고 이제 와 얌전 떠는 그녀는 꼬리를 감추고 자신을 숨긴 여우 같았다. 털이 보드라운 짐승. 나연이 땀에 절어 들썩거리면서도 안아 달라고 그의 품을 꼭꼭 파고들었다. 꼭 어미를 잃고 혼자 된 어린 짐승처럼 느껴졌다. 의지할 곳을 찾아 헤매는 그런 짐승.

안아 달라고 손을 뻗는 그녀에게 네가 원하는 만큼 안아 주는 대신 이 가랑이 사이는 제 것이라고 못을 박았다. 그러니 다른 그 어떤 놈에게도 그녀의 털끝 하나 허락하는 걸 용납하지 못한다고, 밤새 그리 주입시켰다. 날 이리 만들었으니 너 역시 그 책임을 져야지.

“차는 됐고 물이나 한 잔 줘.”

“네.”

나연이 챙겨 준 약을 털어 넘기고 빈손을 보았다. 자신이 약대생이라며 겁도 없이 그의 손을 잡아끌어 오던 여자였다. 이 바닥에서 감히 그의 손을 덥석덥석 잡을 수 있는 사람이라곤 윤 회장뿐이었다. 그러니 성식도 그리 호들갑을 떨며 진저리를 친 거다.

실은 그와의 섹스조차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연약한 짐승이면서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대담하던 그 얼굴이 생각났다. 자꾸 그 얼굴이 머릿속을 헤집어 놓는다.

연석은 픽 웃으며 냅킨으로 입을 닦았다. 티타임을 마무리 지으려 할 때였다.

“이사님! 잠시 전화 좀 받아 보셔야 할 것 같습니다.”

그의 수하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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