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투숙객
나연은 부랴부랴 가방을 챙기고 학교로 향했다. 계절 학기도 이제 종강이었다. 오늘이 마지막 수업인 데다 오후 수업만 있으니 그래도 조금 느긋하게 출발하려나 했는데 방문을 고치느라 오전 내내 수리공이 모텔에 있었다. 며칠 전, 남자들이 다녀간 이후론 혼이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이제 겨울 방학도 끝이 보인다. 이번 겨울 계절 학기가 마지막이었다. 바빠도 여태 휴학 한 번 한 적 없던 나연이었지만 졸업까지 학점이 모자랐다. 아빠가 병원 신세를 져 수강 과목을 줄이다 보니 계절 학기를 면치 못하게 되었다.
낮엔 학교에 가고 저녁으론 병원을 들락거리느라 1년이 금방 갔다. 저번 달, 죽음의 문턱에 있던 아빠가 결국 돌아가셨다. 그래도 열심히 굴러가던 나연의 일상은 변함이 없었다. 여전히 바빴다.
계절 학기는 주로 남자가 많았다. 군대를 다녀오고 부랴부랴 학업으로 뛰어든 남자들, 그렇다 보니 군대를 다녀온 시커먼 복학생이 대부분이었다.
목표는 대학 졸업장이었다. 돌아가신 엄마가 다른 건 몰라도 대학 졸업장 하나만큼은 꼭 따 놓으라고 신신당부를 했다. 훗날 부모가 죽고 모텔 문을 닫게 된다면 대학 졸업장은 꼭 필요할 거라고 귀가 따갑도록 말했다.
허리가 아파 약국을 수시로 드나들며 파스를 달고 살았던 엄마는 우리 딸도 번듯한 약국 하나 차려 약사님 소리 들으면 참 좋을 텐데, 입버릇처럼 그렇게 말했었다. 나연은 고민하지 않고 약대로 진학했다. 그녀에겐 부모님이 세상의 전부였다. 할 수만 있다면 뭐든 해 드리고 싶었다. 애초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그녀의 부모님은 나연을 악착같이 대학에 보내고 없는 살림으로 물심양면 도왔다. 엄마는 자신이 얼마 있지 않아 죽을 거라는 걸 알고 있는 사람처럼, 그렇게 나연을 학교로 보냈다. 알고 있었다. 지금 이 모텔도 그리 오래가지 못할 거라는 걸. 언제까지 여기서 살 순 없는 노릇이었다.
엄마는 언젠간 나연이 이곳을 떠나 좋은 곳에 방을 얻어 살기를 원했다. 아빠가 살아 계실 땐 혹여 아빠가 퇴원을 하게 된다면 머물 곳이 필요해 버텨야 했지만 아빠는 돌아가셨다. 이젠 아니었다.
어차피 곧 졸업이었다.
도서관에 앉아 있었지만 눈꺼풀이 자꾸만 감겼다. 드르륵. 쥐고 있는 핸드폰에 문자가 왔다.
「나연아. 아직 도서관이야? 나 지금 도서관으로 가는 중. 조원들이 기다려.」
같은 수업을 듣는 상윤의 문자였다. 종강 기념으로 간단하게 식사 한 끼 하고 헤어지기로 했더니 늦지 않게 문자가 왔다.
「지금 나갈게요, 선배.」
책을 덮고 열람실을 나왔다. 멀리서 걸어오는 남자가 보였다. 상윤이 대충 지갑을 꺼내 학생증으로 자동문을 열었다.
“나연아, 애들이 빨리 오라고 난리다. 너 시간 돼?”
“네. 저녁 정도는 괜찮아요.”
“오랜만이다. 같이 저녁 먹는 거.”
두 사람은 조원들이 모여 있다는 학교 근처 식당으로 향했다. 그래도 계절 학기를 같이 했다고 마지막으로 밥이나 먹자는데 끝까지 거절할 수가 없었다.
조원이라고 해 봤자 복학한 시커먼 남자들 넷이 다였다. 가볍게 저녁 한 끼 하나 했더니 양곱창집이었다. 당연히 술 한잔이 따라붙었다. 1차로 고기와 술을 먹고 2차까지 달려 보자는 속셈이다.
진즉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평소에는 바쁘다는 핑계로 밥 약속을 거절하다가 마지막 식사라는 핑계에 걸려 왔으니 가지 않겠단 말도 못 하겠고. 나연은 한숨을 쉬었다. 어째 학번이 오래될수록 꼼수만 늘어 가는지 모르겠다.
이미 불판 위로 오른 곱창은 노릇노릇하게 구워지고 있었다. 상윤이 옆자리에 앉은 나연을 챙겼다.
“이제 계절 학기도 끝인데 이렇게 보내려니 섭섭해서 저녁이나 하자고 불렀다. 특히나 나연이 넌 이제 졸업 아니냐.”
“얼마 만에 보는데 나연인 벌써 졸업이네. 약사 시험도 며칠 안 남았지? 바로 다음 준가? 뭐, 우리 나연이는 걱정할 게 없지.”
보통 약사 국가시험은 졸업을 앞두고 준비를 하는 데다 높은 합격률을 보이지만 그래도 긴장이 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녀를 치켜세우는 선배의 말에 나연은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우린 복학하고 정신없었는데, 넌 그간 뭐 했어?”
슬쩍 턱을 괴는 남자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그가 의자를 당겨 앉느라 의자가 바닥에 끌리는 쇳소리가 들렸다. 웃는 얼굴이 고양되어 있다. 오랜만에 만난 그녀의 얼굴이 반가워 웃는 사람치곤 시선이 노골적으로 가슴골로 향해 있었다.
나연은 블라우스 단추 하나가 풀려 있다는 걸 남자의 시선 때문에 알았다. 그녀가 외투를 여미자 아쉬워 입맛을 다신다. 나연이 약대로 편입했을 때 그녀에게 고백했다 나연의 거절로 돌아선 선배였다.
“그냥 공부하고 그랬죠, 뭐. 바빴어요.”
“바빴어도 너랑 비슷한 학번 애들 중엔 일찍 졸업하는 편이야.”
그건 그의 말이 맞다.
나연은 또래 애들보다 졸업이 이른 편이었다. 번듯하게 약사가 되길 원했던 부모님의 소원을 어서 이루고 싶었다.
살아생전 부모님의 소원은 자신의 목표이기도 했었다. 그래서 아빠가 병원에 드러누웠을 때도 쉬지 않고 학교를 다녔다. 돌아가시기 전에 꼭 약사가 된 모습을 보여 드리고 싶었는데.
아빠가 병원에서 생활하기 전까지 함께 살았던 작은 모텔은 다리 한쪽이 불편한 아빠가 평생을 장사할 수 있게 해 준 기반이자 나연에겐 떠날 곳 없는 족쇄와도 같았다.
주머니 안에 넣어 둔 핸드폰이 진동했다. 주머니를 더듬던 나연은 그녀의 옆에서 친절히 콜라를 따라 주는 상윤과 눈이 마주쳤다. 어색하게 웃었다.
알 수 없는 국제 번호였다. 국제 번호. 그 남자가 떠난 곳이 미국이다. 아니겠지. 아닐 거다. 부정하고 싶은 마음과 혹시나 하는 마음이 뒤섞여 핸드폰을 꼭 쥔 나연의 가슴이 요동쳤다.
“나연아, 우리 이거 마시고 2차 갈 건데 너도 가자. 오랜만이잖아.”
“저 잠깐 전화 좀 받고 올게요.”
나연은 쫑알거리는 선배들을 뒤로하고 곱창집을 나왔다. 오전에 내리던 비가 좀 그치는가 했더니 다시 쏟아지기 시작했다. 쏴아아, 차바퀴가 물기를 잔뜩 머금고 지나가는 소리들이 소음처럼 흩어졌다. 통화 버튼을 누르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상대는 말이 없었다.
- …….
숨소리가 거칠게 들려왔다. 쏴아아, 차가 지나갈 때마다 물보라 소리가 커진다. 아니란 거 알고 있는데, 어차피 다 지나간 사람인데, 자신은 무슨 미련이 남아 이 전화를 받았는가.
“…….”
상대는 어떠한 말도 없었지만, 그래서 확신할 순 없지만 어렴풋이 그일 것 같다는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 그녀 또한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쉽사리 입을 뗄 수가 없었다. 한참을 그렇게 핸드폰을 든 채로 빗소리만 듣고 있었다. 한참 후에나 핸드폰을 귓가에서 떼어 내고 액정을 보았다. 끊긴 전화에선 더 이상 어떠한 신호도 오지 않았다.
곧바로 전화 한 통이 걸려 왔다. 미주였다.
“응, 언니.”
- 야, 진작 좀 바꾸지. 문 바꾸니까 죽인다. 얼마 들었어? 너 돈 없잖아. 그 전 문짝 너무 낡아서 솔직히 불안하긴 했어.
쫑알거리는 미주의 말이 빗소리에 흐리게 들렸다. 늘 실없이 웃고 있어도 미주는 정곡을 찌르는 말을 하곤 했다.
“사람은 사람으로 잊는 거야, 바보야. 너 하태민 그놈 자꾸 그렇게 안고 있으면 평생 못 잊는다. 그러고 싶어? 이것저것 자꾸 재고 따지지 말고 그냥 시작해. 뭐든 시작이 중요한 거잖아. 사람은 사람으로, 사랑은 사랑으로. 간단하게 생각해.”
미주의 말을 부정하진 않는다. 그녀 또한 미주의 말에 동감하는 바였다. 하지만 사랑에 상처를 받고 나니 다음 사랑이 힘들다. 일단 시작하면 되는데, 그다음은 쉽다는데. 왜 마음이 선뜻 가지 않는 건지 모르겠다.
그가 마지막 사랑이라고 생각을 해서인가. 꼭 마지막 이별을 한 것처럼 가슴이 미어지는 것이 1년 정도를 갔다. 그리고 그 감각에 적응하는 데 1년이 꼬박 걸렸다. 이제야 겨우 그 남자를 잊어 간다.
사랑이란 게 원래 들어올 땐 모르다가 나갈 땐 있는 대로 상처를 후벼 파 흉터를 남긴다고 했다. 저도 그 사랑이란 것이 남긴 상처에서 벗어날 수 없는 모양이었다.
발신인이 누군지도 모를 이 국제 전화를 왜 받은 걸까. 바보 같은 미련이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결국 핸드폰을 쥐고 있는 자신은 그 사실을 인정해야 했다.
비가 점점 더 많이 쏟아졌다.
- 돈만 좀 더 있었어도 이왕 하는 거 벽지까지 싹 하는 건데. 그치, 나연아. 아무튼 문 진짜 잘 바꿨어.
그러고 보니 그 남자가 처음 나타난 날에도 비가 내렸다. 느닷없이 들이닥쳐 문을 부수고 돈을 버리듯 던지고 간 남자. 조폭이 물건 때려 부수는 건 들어 봤어도 때려 부순 물건 값 배상해 준다는 소리는 듣도 보도 못했다. 대체 그날 밤, 무슨 일이 일어났던 건지, 그 자리에 있던 당사자이지만 종잡을 수가 없었다.
나연은 문득 헛웃음이 났다.
쫑알쫑알 떠드는 미주의 목소리를 듣고 있는데 등 뒤로 곱창집 문이 열렸다.
“나연아, 뭐 해?”
상윤이 가게를 나왔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맞고 있는 그녀를 발견한 그가 서둘러 우산을 폈다.
“아, 언니. 그럼 가서 봐. 끊을게.”
그녀가 놓아둔 가방까지 들고나온 상윤이 우산 안으로 나연을 슬쩍 끌어당겼다.
“쟤들 말이 많아서 넘어가지도 않지? 밥을 먹으러 온 건지, 술을 마시러 온 건지.”
나연이 들으라는 듯 혀를 쯧쯧 찼다. 상윤은 눈치를 보며 먼저 말을 꺼내기를 망설였다.
“피곤하니까 먼저 들어가라고. 쟤들 다 받아 주다간 오늘 밤새워야 해.”
그러면서 가지고 나온 가방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나연은 꾸벅 고개를 숙이고 가방을 받아 들었다. 아까보다 조금 더 굵어진 빗방울은 오늘 밤 내내 내릴 듯, 쉬이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비가 많이 오네. 너 집에 혼자 갈 수 있겠어?”
“그러게요, 비가 많이 오네요.”
비가 더욱 거세진 데다 꿉꿉한 날씨에 몸이 젖은 기분은 유쾌하지 못했다.
“내가 집까지 데려다줄까? 전에 보니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이 많이 위험해 보이던데.”
“혼자 갈 수 있어요. 괜히 저 때문에 고생하지 마시고 들어가 보세요.”
“그러지 말고 같이 가. 어차피 너 우산 없잖아. 가는 길까지 데려다줄게.”
괜찮다고 손을 젓는데도 상윤은 사양하지 말라며 그녀를 잡아끌었다.
“어차피 우리 집도 그쪽이잖아. 가는 길이니까 같이 가자. 우산도 하나잖아.”
우산 위로 빗물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그 고요한 빗소리와 함께 상윤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비 오는 날 밤은 위험하니 데려다주겠다고 기어이 앞장을 섰다. 나연은 결국 그를 뒤따랐다.
저벅저벅, 골목을 걷는 두 개의 발걸음 소리가 고요하게 울렸다. 젖어도 괜찮다니까 한사코 우산을 내어 주는 상윤의 어깨가 젖어 있었다. 미안한 일은 만들고 싶지 않았다. 빗속에서 점멸하는 모텔 간판이 보였다. 그새 만들어진 물웅덩이를 밟으며 모텔 앞까지 도착했다.
“쟤들이 귀찮게 굴어도 이해해. 복학생 아저씨들이지 뭐. 나도 할 말은 없는 건가.”
“괜찮아요. 이제 졸업하면 더 볼 일도 없는데요, 뭐.”
“근데 여기까지 왔는데 커피 한 잔도 안 줘?”
상윤이 가볍게 웃으며 쥐고 있는 우산을 톡톡 두드렸다.
“아… 근데 커피 한잔하기에 그렇게 좋은 곳은 아니라서.”
좁은 모텔방에서 차 한 잔 대접하기가 참 그랬다. 그녀에겐 평생 부모님과 함께 살았던 집이었고 장사를 하는 공간이었지만 타인의 눈에는 그냥 모텔방일 뿐이니까.
모텔방이라고 하면 무슨 생각들을 하는지 알고 있다. 그녀도 딱히 숨기려 들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쉽게 드러내기는 힘들었다. 조심스러워하는데 상윤은 그게 뭐 어떠냐는 듯 웃었다.
당황스러워 눈만 깜빡이고 있자 그가 멋쩍어 뒷머리를 긁는다.
“어두운 밤에 그건 좀 실롄가? 그럼 다음에 한 잔 줘.”
“그런 건 아닌데 아무래도 방이 그렇게 넓진 않고… 대접할 만한 것도 없어서. 그럼 잠깐 들어갔다 가실래요?”
방에 있는 건 미주가 사 준 사과랑 믹스 커피가 다인지라, 초라한 대접이 아무래도 그랬다. 그래도 같은 수업도 여러 번 들었던 과 선밴데.
“커피 마시기에 좋은 곳이 따로 있나, 뭐. 너 곤란하면 안 그래도 돼. 대신 학교 가면 한잔 사 줘. 같이 마시면서 할 얘기도 있고. 그래, 그게 낫겠다. 그럼 또 한 번 볼 수 있고.”
“네?”
싱긋 웃는 상윤이 손을 흔들며 나연에게 들어가라 손짓했다. 처마 밑으로 들어와 비를 피하자 그제야 그가 한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상윤은 기분이 좋아 보였다.
“그럼 들어가.”
“네, 조심해서 가세요.”
“그래.”
손을 흔들며 점점 골목을 걸어 나가는 상윤이 이따금씩 뒤돌아보았다. 그러다가 눈이 마주치면 다시 손을 흔들었다. 어서 들어가라고 멀리서 소리치는 상윤의 뒤통수가 사라졌다.
우산을 썼지만 비를 맞은 어깨 반쪽이 꿉꿉했다. 나연은 상윤이 사라진 골목 끝만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정신이 없네….”
한숨을 쉬며 모텔 유리문을 열었다. 떨어진 쓰레기를 대충 줍고 돌아서는데 어딘가 묵직한 발소리가 들렸다. 뒤를 돌아보았다. 무언가가 지나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착각인가.
나연은 복도 안까지 걸어가 가장 끝 방, 제 방문 앞에 섰다. 열쇠를 돌려 문을 열자마자 나연은 선뜩한 기운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조용히, 해.”
칼을 목덜미에 가져다 대는 남자가 나지막이 속삭였다. 뭐지, 강도인가.
덜덜거리는 손을 다잡으며 놀란 기색을 보이지 않으려 애썼다. 한데 칼을 들이대는 남자의 얼굴이 낯설지 않았다. 반삭 머리, 성 대표의 머리채를 짐짝처럼 끌고 나가 패대기치던 덩치.
어떻게 이 방에 들어온 걸까. 바보 같은 물음이라는 걸 생각과 동시에 알았다. 문 한 짝을 여는 데 채 몇 초도 걸리지 않던 사람들이었다. 이깟 문 하나 따는 건 일도 아닐 것이다.
“애 겁먹잖아. 무식하게 들이대지 말라니까.”
나연은 그제야 화장실에서 쏴아아, 물소리가 들린다는 것을 알았다. 남자 하나가 세면대에서 손을 씻고 있었다. 그 남자였다. 던지듯 수표를 주고 갔던 남자. 세면대를 가득 채웠다 꼴꼴 빠져나가는 물은 핏물이었다. 분명.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이렇게 빠른 시간 내에 식은땀이 흐를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씨발, 빨리 안 들어와?”
반삭 머리가 욕지거리를 올려붙였다. 아차 하면 손으로 뺨이라도 내리칠 기세였다.
“왜, 왜 이러시는… 돈은 다 드릴게요.”
“뒈지고 싶지 않으면 닥치고 조용히 들어와라, 어?”
반삭 머리가 결국 손을 들어 올렸다. 두 눈을 질끈 감는데 다시 익숙한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애 괴롭히지 마, 성식아.”
“예, 형님.”
남자가 잔말 말고 안으로 들어오라고 턱짓을 하고 재차 칼로 위협했다. 나연의 처지 같은 건 알아줄 사람이 없다는 듯 문밖은 쏟아지는 빗소리만이 들릴 뿐이다.
나연은 잔뜩 굳은 채로 방 안으로 들어갔다.
“늦었네?”
세면대 앞에 서 있는 남자는 땀인지 비인지 모를 것들로 젖어 있었다. 이 빗속에서 싸움이라도 있었던 건가. 아직 핏기가 채 가시지 않은 손을 씻은 남자가 천천히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세면대 위엔 피가 묻은 붕대가 놓여 있었다. 셔츠를 벗지 않은 걸로 보아선 손바닥을 감은 붕대처럼 보였지만 자세히 알 길은 없었다.
“만에 하나 딴생각하면, 알지?”
반삭 머리가 틈을 놓치지 않고 협박했다.
빈말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그가 얼마나 성 대표를 험하게 다뤘는지 기억한다. 방 안에 있던 투숙객이라고 봐주지 않았다. 손에 잡히는 대로 마구잡이로 굴던 사람이 아닌가. 그날 이후로 성 대표를 본 적이 없다. 아찔한 예감에 눈이 질끈 감겼다. 생매장이라도 당한 걸까. 그렇다 해도 이상할 게 없어 보였다.
반삭 머리가 쉭쉭 콧김을 내뿜었다. 반삭 머리의 이마부터 뒤통수까지, 상처가 났다 아문 자국이 선연했다. 수없이 그런 일을 겪었을 사람이었다. 온몸으로 자신이 형님이라 부르는 저 남자를 지켰을 테다.
남자가 마른 수건으로 대충 손을 닦고 화장실에서 나왔다. 정면에서 보니 확실히 그때 모텔 문 앞에서 담배를 피우던 남자가 맞았다. 그땐 지금처럼 흰 셔츠가 아닌 검은 셔츠를 입고 있었다. 날카로운 턱선에 키가 크고 나른하게 접힌 눈. 남자의 너른 어깨에 핏물이 조금 물들어 있었다.
“겁먹을 거 없어. 사람 하나만 찾으면 돼.”
남자는 퍽 나긋한 목소리로 목적을 말했다. 그때와 같았다. 처음 그녀와 마주했을 때의 그 목소리와.
“사람이요?”
“그래. 못생긴 남자 하나. 오다가 못 봤어? 아니면 숨을 데라든가.”
못생긴 남자라는 기준은 어떤 기준이지. 그렇게 말을 하면 어떻게 답을 해야 하는 거지.
“좀 더 구체적으로 어떤….”
“팔목에 구멍이 났는데. 피를 흘리고 있었을 거야.”
오싹한 말을 눈 하나 깜짝 않고 말하는 남자는 비에 젖은 듯한 머리칼을 쓸어 올리며 한쪽 눈가를 설핏 일그러뜨렸다.
“이 동네는 뭔데 흔한 CCTV 하나가 없어.”
남자의 말대로 이 동네는 CCTV가 드물어서 범죄자나 빚쟁이를 피해 몸을 숨기는 사람들이 많은 동네기도 했다.
“숨을 데라면 여기 조금만 더 가면 나오는 여인숙이랑 저희 모텔… 아니면 가정집이나 빈 가게 정도요. 좀 괜찮은 모텔도 있긴 한데 여기서는 조금 더 가야 있어요.”
근데 저 남자는 왜 다친 걸까. 지난번 성 대표 때처럼 무슨 일이라도 치른 걸까. 무섭지만 차마 물어볼 수 없었다.
“조금만 잠복하면 찾을 수 있을 거 같습니다, 형님. 이 동네로 숨어든 것도 애들 통해서 확인했습니다. 여인숙은 성훈이 놈이 잘 지키고 있으니 걱정 마십시오. 어차피 이 골목 나가면 죄다 우리 애들입니다. 칼 맞은 몸으로 어디 멀리 가진 못할 겁니다.”
“그 새끼가 확실하긴 한 거야?”
“예, 형님. 확실합니다. 석도파가 푼 새끼. 칼 잘 쓰기로 유명한 놈입니다.”
반삭 머리가 나연에게 들이밀었던 칼을 접어 넣으며 말했다.
나연은 뼛속까지 피가 바짝바짝 마르는 기분이었다.
“형님, 여기는 제가 지키고 있을 테니 너무 걱정 마십시오.”
“네가 있는 게 제일 걱정돼.”
남자가 뒷주머니를 더듬자 문 앞에 서 있던 반삭 머리가 귀신처럼 알아채고 담배를 남자에게 내민 뒤 깍듯하게 불을 붙였다.
나연은 피가 얼룩덜룩 물감처럼 번진 셔츠를 바라봤다.
“저, 괜찮으세요? 피 많이 흘리신 거 같은데.”
분명 피가 많이 묻었는데 그녀에게 고정된 눈매는 그다지 아픈 사람 같지 않아 보였다.
“왜, 죽을 거 같아서?”
웃는 남자 뒤로 반삭 머리가 선을 그었다.
“형님 피 아니니까 허튼 생각 말고 얌전히 있어.”
그럼… 반사적으로 되묻던 나연은 금세 그가 하는 말뜻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이 남자가 여기까지 온 상황이 왠지 그림처럼 그려졌다. 가만히 남자의 손을 바라보던 그녀는 방 안으로 가 서랍을 뒤적였다. 허튼짓이라도 하는가 싶어 문 앞을 지키고 선 반삭 머리의 눈에 쌍심지가 켜졌다. 움찔거리며 서랍을 뒤지던 나연이 약상자를 꺼냈다.
붕대와 연고를 꺼내 주춤거리며 다가가자 남자는 수건을 던지고 대충 붕대를 휙 가져가 손에 감았다. 꽤 익숙해 보였다.
“저….”
“뭐.”
반쯤 인상을 구기고 선 채 붕대를 감던 그의 발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나연이 소심하게 중얼거렸다.
“신발.”
“뭐?”
“여기 제 방이에요.”
비에 젖은 남자의 구둣발 자국이 엉망으로 찍힌 장판을 내려다보았다. 나연의 말에 바닥을 내려다본 남자의 눈이 그녀에게 향했다. 어이가 없다는 듯 웃는 남자는 감던 붕대를 내던지고 의자에 앉았다. 식탁이라고 할 수도 없는 1인용 책상과 구색을 맞춘다고 사다 놓은 작은 철제 의자였다. 남자가 앉자 의자가 삐걱거리며 소음을 냈다.
“너, 이리 와 봐.”
“…네?”
때리려고 그러는 걸까. 선뜻 다가가지 못하고 있는데 문 앞에서 시뻘겋게 날이 선 반삭 머리의 목소리가 돌아왔다.
“어디 감히 형님 말씀하시는데 토를 달아, 어?”
나연은 쭈뼛대며 그에게로 다가갔다. 남자의 눈이 나연의 뒤쪽으로 향하는 것이 느껴졌다.
“문은 고쳐 달았네.”
남자는 새로 달아 놓은 문이 썩 나쁘지 않은지 픽 웃음을 흘렸다.
“아, 문값.”
나연은 서랍 안 깊숙이 숨겨 두었던 지폐를 꺼냈다. 문을 싹 고쳐 달고도 남은 돈이었다. 당연했다. 문을 갈고 남은 돈을 공손하게 내밀었다. 담배 연기를 내뿜으며 나연이 내민 돈다발을 굽어보는 남자는 이 손 떨리는 액수의 돈에 흥미를 잃은 눈이었다.
“까까 사 먹으라니까. 왜.”
“…사 먹고 남은 돈이에요.”
“방값.”
“저 거스름돈 없어요. 그냥 가져가세요.”
“먹고살 만한가 보다?”
“먹고살 만하지 않아도 제 돈은 아니잖아요. 그리고 이렇게 큰돈은….”
“보통 숙박비 얼마나 해.”
“그건 왜… 하루에 5만원이고 대실은 시간별로….”
“장기 투숙객 명단에 올려. 선불.”
말도 안 된다. 이 돈이면 몇 년 치인지 가늠도 힘들다. 못해도 으리으리한 빌딩 몇 채는 껌처럼 가지고 있어 보이는 외관인데.
옷을 입은 것만 봐도 그랬다. 비를 맞아 어깨며 등이 추적추적 젖었지만 분명 남자가 입고 있는 옷은 아주 비싼 브랜드의 셔츠였다. 한정판이나 뭐 그 정도쯤 되겠지. 그 남자만 잡으면 이 낡아 빠진 모텔에 머물 일도 이젠 없을 텐데. 진짜 미친놈인가.
“너 바닥에서 자?”
좁아서 둘러볼 것도 없는 바닥을 내려다보던 남자가 대뜸 물었다.
“침대 있는 모텔은 이 골목 나가면 많아요. 거기 가시는 게….”
아쉬우면 나가라는 말에도 남자는 눈 하나 깜짝 않고 명령했다.
“이불 펴.”
“네?”
“뭐 해. 손님 이불 깔아. 맨바닥에 못 앉아.”
남자가 시키는 대로 하지 않았다간 반삭 머리가 죽일지도 몰랐다. 꿀꺽 침을 삼킨 나연은 그녀의 이불을 펴고 자리를 보았다. 이불을 펴라 해서 폈건만 담배 하나를 끝낸 남자가 무서운 표정을 하고 있었다.
나연은 베개 끄트머리를 손으로 툭툭 털다 말고 눈을 깜빡였다.
“성식아, 큰형님께는 아무 말도 말아라. 괜히 걱정 끼쳐 드리지 말고.”
“네, 형님. 석도파 개새끼들, 큰형님 생신날만 일부러 기다린 게 분명합니다. 케이호텔에서 큰형님 생신 회동 때, 형님께서도 참석하는 걸 아니까 일부러 오늘을 기다렸다가 몰래 사람 푼 겁니다. 우리 애들 갈라서 따돌리고, 형님이 계신 차만 몰아세워서 치려고 한 속셈입니다. 씹새끼들이.”
남자를 간신히 지탱하고 있는 의자가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만 같았다. 살기를 띤 남자의 눈가가 설핏 이지러졌다. 아직 물기가 덜 마른 남자의 머리칼이 아찔하게 흔들렸다. 나연의 등줄기에 오싹한 기운이 일었다.
그때였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어깨에 힘이 들어간 반삭 머리, 성식이 본능적으로 문을 향해 칼을 꺼내 들었다.
“나연아, 나야. 미주.”
문밖에서 미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왔어?”
“우리 모텔에 묵는 투숙객이에요.”
나연은 눈을 치켜뜨는 성식을 향해 조용히 소곤거렸다. 성식이 알아서 해결하라고 눈짓을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녀의 목을 저 칼로 그을 것만 같았다. 그라면 무리도 아니었다.
“그 새끼만 잡으면 우리도 철수하니까 그때까지만 협조해. 조용히 알아서 잘 돌려보내라. 눈치 못 채게.”
그럼 잡지 못하면 여기서 안 나가겠다는 건가.
나연은 죽음 앞에 모가지를 내놓은 어린 양처럼 고개만 끄덕인 뒤 문을 열고 얼굴을 내밀었다.
“미주 언니.”
“와 있었네?”
미주가 유명 커피 전문점 마크가 찍힌 테이크아웃용 컵 캐리어를 들고 서 있었다.
“이게 뭐야?”
“방금까지 여기 앞에 서 있었는데, 웬 남자.”
“남… 자?”
“커피 마시라고 사 왔는데, 네가 전화를 안 받는다고. 대신 전해 주래. 근데, 누구야? 멀끔해 보이던데.”
커피?
“여기까지 왔는데 커피 한 잔도 안 줘?”
“아… 근데 커피 한잔하기에 그렇게 좋은 곳은 아니라서.”
상윤인가 설마. 핸드폰은 진동으로 해 놓은 데다가 받을 정신도 없었다.
“뭐야, 여기까지 같이 와 놓고 떡도 안 치고 그냥 보냈어? 하여튼 송나연, 진짜.”
나연은 등 뒤에서 아차 하면 목을 비틀어 버릴 태세로 서 있는 성식을 의식했다. 천천히 방문을 살짝 열고 나와 미주와 마주 섰다. 긴장으로 침이 꼴깍 넘어갔다. 성식이 성 대표의 머리채를 뜯으며 무지막지하게 폭행하던 장면이 자꾸만 떠올랐다. 침이 바짝바짝 말랐다.
“아냐. 그냥 같이 수업 들었던 과 선배야.”
“야, 세상에 어느 선배가 마음에도 없는 후배한테 이 늦은 시간에 커피를 사 날라. 너는 속일 사람을 속여.”
“언니, 나중에 얘기하면 안 될까? 나 너무 피곤해서 쉬고 싶어.”
잘 긴장하는 성격도 아닌데 며칠 새 머리가 쭈뼛 설 정도로 긴장할 일을 몇 번이나 겪는 건지 모르겠다.
“많이 피곤해? 알았어. 그럼 쉬어. 얼굴이 창백하네.”
미주가 문을 열고 옆방으로 들어갔다. 뒤에서 문이 열렸다.
“뭐 해. 빨리 안 들어오고.”
목덜미가 쥐어 잡히듯 안으로 끌려 들어갔다. 성식이 눈을 부라리며 서 있었다.
이 남자는 밤새 이렇게 서 있기만 할 건가. 정작 위험해 보이는 저 남자는 태연하게 누워서 담배나 피워 대고 있는데.
나연은 따뜻한 커피가 담긴 캐리어를 내려다봤다. 커피가 넘어가게 생겼는가 지금. 피곤한 몸을 누이고 쉬려 한 참에 방까지 들이닥친 이 조폭들 때문에 오늘 날밤을 꼴딱 새우게 생겼는데. 여차하면 쌍심지에 불을 붙일 것 같은 성식에게 커피를 내밀었다.
“커피 드실래요? 찾는 사람 기다리는 동안에 이거라도….”
“장난해? 넌 이게 장난 같지. 우리 형님이 누군지 알아? 차기 재문 회장이야. 네가 지금 어느 분이랑 같이 있는지는 알고 그따위 장난을….”
“성식아, 애 그만 겁주고 너도 좀 앉아라. 쟤 너 무서워해. 내가 그랬잖아, 너 무식하게 생겼다고.”
후, 하고 담배 연기를 뿜어내는 남자의 농담 아닌 농담에도 성식이 꾸벅 고개를 숙인다.
“아닙니다. 그 새끼 잡기 전까지 못 쉽니다. 감히 우리를 뭘로 보고. 어디서 감히 형님 손을, 씨발.”
남자의 손은 붕대가 엉망으로 감겨 있었다. 저런 손으로 담배나 피워 대고 있다니. 제가 미쳐도 단단히 미친 놈한테 걸린 게 분명했다.
나연은 커피 캐리어를 탁자 위에 올려 두고 새 붕대를 뜯었다. 그러고는 바닥에 드러누워 있는 남자에게로 다가가 담배를 쥔 손을 잡았다. 날카로운 남자의 눈매가 대번 그녀에게로 향했다.
“그렇게 대충 감았다간 상처 덧나요. 아직 약사는 아니지만 약학과 학생이니까 이 정도 치료는 맡기셔도 될 거예요. 그리고 저희 모텔은 다친 사람은 안 받아요. …원래는.”
손이 덜덜 떨렸지만 제법 패기 좋게 말했다. 아주 예전에는 이 근방 여인숙에 범죄자들이 숨어든 탓에 시체 치우는 일이 없지 않았다. 굳이 따지자면 범죄자를 받지 말아야 하지만 그렇게 말했다간 여기서 목이 따일 게 분명했다.
“워, 원칙은….”
허리를 일으키던 남자가 별안간 웃었다. 큭큭, 머리를 젖히며 웃느라 남자의 셔츠 앞섶에 담뱃재가 떨어졌다. 그는 뭐가 그렇게 웃긴지 담뱃재에도 개의치 않고 한쪽 눈가를 짚어 가며 웃음을 터트렸다.
“지랄하네. 성 사장 같은 새끼도 손님으로 받아 놓고, 누굴 안 받아?”
패기 좋게 대꾸해 놓고 날아온 한마디에 답할 말이 궁해졌다.
“…성 대표님이 왜요? 그분이 무슨 잘못 했는데요? 대표님 괜찮으세요?”
남자가 허리를 반쯤 일으켜 세워 앉았다. 배트로 얻어맞기라도 했는지 몸을 일으키는 남자가 작게 신음했다.
“그건 네가 알 거 없고.”
나연은 여전히 도끼눈을 뜨고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성식을 힐끔 돌아봤다. 차라리 좀 앉기라도 하면 좋겠는데 문 앞을 저리 철통같이 지키고 있으니 불편하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
“왜, 단골손님 잃어서 슬퍼?”
고개를 저은 나연이 남자의 손바닥을 가져와 붕대를 풀었다. 생각보다 상처가 심했다. 이 정도면 바늘로 꿰매야 할 것 같은데. 모양을 보아하니 칼을 꽉 잡아 쥔 것 같았다.
조직에 있는 사람이라고 하기엔 참 부드러운 손이다. 칼조차 제대로 쥐어 본 적 없을 것처럼 부드럽고 따뜻한 손인데, 날아드는 칼을 한 손으로 잡아 쥐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하긴 그 정도의 담력 정도는 있으니 차기 회장이니 어쩌고니 하는 거겠지.
나연은 서둘러 연고를 덧바르고 붕대를 깨끗하게 감았다.
남자는 대충 손을 뻗어 나연의 가계부 위로 담배를 지져 껐다. 쌕쌕, 지나치게 큰 것만 같은 그녀의 숨소리만 좁은 모텔 안에 들렸다.
아까 차기 재문 회장이라고 했지. 재문… 재문건설을 말하는 건가, 설마?
모를 리 없었다. 소시민들만 북적북적한 이 동네와는 달리 불과 얼마 떨어지지 않은 건너편, 비싼 건물들이 줄줄이 들어서며 동시에 땅값이 천정부지로 올라 단숨에 서울 내 노른자 땅으로 화두에 오른 동네.
그 동네에 빌딩, 호텔, 오피스텔 등을 건설해 일대 전체를 키운 것이 재문건설이었다. 돈 많은 기업으로 유명하기도 했다. 최근에 차기 후계자가 정해졌다고 뉴스 기사로 본 것 같은데, 그 사람이 이 사람인 것 같았다. 먹고사는 게 바빠 뉴스 기사로 한 줄 접한 게 다였지만 그 정도는 들은 적 있었다.
“나연, 나쁘지 않네.”
남자가 곱씹듯 입 밖으로 이름을 뱉어 냈다. 한참을 말없이 붕대를 감는 데 집중하던 나연은 문득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제 이름 어떻게 알았어요?”
“뭘 대단한 이름이라고 그렇게 놀라. 내가 네 뒷조사라도 했겠어?”
물은 게 민망할 정도로 칼 같은 답이었다. 할 말이 없어 입을 다물었다.
“미주 언니가 네 이름 부르면서 아쉬워하던데. 여기까지 와 놓고 떡도 안 치고 보냈다고. 근데, 말이야.”
시답지 않은 얘기를 하듯 픽픽 웃으며 내뱉던 남자가 돌연 진중하게 목소리를 내리깔았다. 나연은 묵직해진 저음에 눈만 끔뻑거릴 뿐이었다.
“뭘 믿고 이렇게 막 잡아, 남자 손을?”
멍하니 남자를 바라보고 있던 나연은 그제야 제가 그의 손을 꽉 잡고 있다는 걸 알았다. 화들짝 놀라 내팽개치듯 손을 놓았다. 설핏 일그러지는 남자의 눈가에 아픔이 보였다.
“저년이! 감히 우리 형님 손을.”
“아… 죄송해요.”
남자는 뭐가 그리 재밌고 즐거운지 큭큭 웃음만 터트려 댔다. 성식의 다그침에 나연은 바짝 허리를 일으켜 세웠다. 시퍼렇게 날이 섰던 칼날을 기억했다.
“가까이 와 봐.”
“네?”
“두 번 묻는 게 취미야? 이리 가까이 와.”
그렇지 않아도 충분히 가까운데, 얼마나 더 가까이를 말하는 거지. 나연은 무릎걸음으로 슬금슬금 다가앉았다.
“더.”
협박과 같은 명령이었다. 그녀가 그의 옆구리까지 다가가 앉기까지 남자는 제법 인내하며 기다려 주었다. 허튼짓하면 가만 안 두겠다고 버티고 선 성식이 신경이 쓰였지만 우선은 눈앞에 있는 이 남자의 말을 듣는 게 더 목숨 줄을 붙여 놓는 길인 듯 보였다.
그가 손을 들었다. 때리는지 알고 본능적으로 손을 올려 얼굴을 가렸다. 그의 손이 나연의 손목을 휘감아 아래로 내렸다. 그가 당기는 힘에 얼굴이 가까워졌다.
아까보다 확연히 가까이에서 마주한 남자의 얼굴이 생각보다 더 잘생겼다. 날카롭게 뻗은 콧날 위에 위치한 매서운 눈매와, 이질적이게도 묘하게 나른해 보이는 눈동자가 그녀를 향해 있었다.
“왜… 요?”
“너 나 본 적 있어?”
“며칠 전에 여기 오셨을 때….”
“말고.”
“없는 거 같아요.”
이렇게 잘생긴 남자를 이전에 봤다면 기억을 못 할 리가 없었다. 나연은 단호하게 답하고는 붙잡힌 손목을 힘겹게 빼내고 뒤로 물러나 앉았다.
“없으면 됐어.”
“…그간 사귄 여자 친구분 중에 닮은 분이 있으신 거 아닐까요.”
“뭐, 그럴지도 모르고.”
피식피식 웃어 대는 남자의 입꼬리가 말려 올라간다. 미묘하게 나긋한 미소, 어쩐지 위험한 분위기.
“그… 그 사람 소식 올 때까지 누, 눈이라도 붙이세요. 제가 저분이랑 같이 보초라도 설 테니까.”
그 분위기에 기가 눌린 걸까. 미친 소리가 뇌를 거치지 않고 막 나갔다.
“너한테 보초 맡기고 하룻밤 사이에 골로 가라고?”
여전히 남자는 잔악한 미소를 띠고 있었다.
“커피, 그냥 보내서 어떡하냐.”
커피? 상윤을 말하는 걸까.
“그럼 저 가도 돼요?”
“아니.”
그럴 거면서 묻긴 뭐 하러 묻는 거야. 나연은 조용히 약상자를 옆으로 밀었다.
남자는 성식이 두고 간 담뱃갑에서 한 개비를 더 꺼내 문 뒤 피식 웃었다. 곧이어 붙은 담뱃불만 멍청하게 보고 있던 나연은 이어 벌어지는 남자의 입술에 정신이 돌아왔다.
“생각보다 다정한 사이였나 봐?”
남자는 가계부 위에 있는 콘돔 박스를 가져와 앞뒤로 돌려 보았다. 흩뿌리는 담배 연기가 콘돔 박스 위로 흩어졌다. 내용물 몇 개가 비어 덜그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박스에 대문짝만하게 적힌 ‘대물용’ 문구에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남자의 낮은 웃음소리가 더 사람을 창피하게 만들었다.
“많이도 썼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미주가 사다 준 것이었다. ‘너 그거 사정 지연 기능까지 있는 콘돔이다. 유통 기한 전에는 꼭 써.’라고 말하며 놓고 갔던 콘돔이었다. 이별은 원래 새 사람으로 잊는 것이라며 얼른 쓰라고 종용했었다. 원래는 한 통 그대로였는데 얼마 전에 급하다고 미주가 몇 개를 홀랑 들고 가 버렸다. 그래서 낱개로 남은 것이다.
“공부도 잘하는데 대물이라. 좋지.”
남자의 손에 있는 콘돔을 빼앗아 왔다.
“주세요.”
괜히 눈 둘 곳이 없어 콘돔 박스를 제자리에 가져다 놓았다.
담배를 무는 남자가 노골적으로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그녀를 응시했다. 빤히 쳐다보는 것뿐인데 괜스레 뺨이 벌게지는 기분이 들었다. 의식하지 말자, 의식하지 말아.
“성 대표가 어떻게 됐는지 궁금하댔지.”
“네?”
“지장까지 찍었던 계약을 불이행했거든. 사업이란 게 신뢰를 바탕으로 하는 건데 말이야. 계약을 불이행했으니 대가를 치르는 게 당연하지 않겠어?”
그래서 한동안 모텔에 숨어 지냈던 건가. 성 대표가 사업을 하느라 머리가 희게 세는 것을 보아 온 나연이었다. 최근 회사가 어려워진 낌새가 보이긴 했지만….
“피곤하다. 눈이나 좀 붙이자. 넌, 네 방이라며.”
“아, 아뇨. 전 별로 안 졸려요.”
목을 따네 마네 하는 남자와 함께 있는데 어떻게 같이 누우란 말인지.
가슴 앞으로 팔짱을 낀 남자는 이내 몸을 누이고 눈을 감았다. 나연은 오도 가도 못하고 좁은 방에 앉아 무릎을 감싸 안았다. 창밖으로는 여전히 비가 쏟아졌다. 정말 도망친 사람이 이쪽으로 올까. 저 남자는 어떻게 저렇게 확신을 하는 걸까. 정말 가정집에라도 들어가 숨어 버리면 못 찾을 텐데. 하지만 누굴 걱정하고 있기엔 나연의 코가 석 자였다.
비 오는 소리만 조용히 듣고 있었다. 번쩍거리며 번개가 치더니 뒤이어 천둥소리가 들려온다. 나연은 무릎을 바짝 끌어안았다. 눈앞에 있는 이 남자보다도 하늘을 찢을 것 같은 천둥소리가 더 무서웠다.
트라우마가 있었다. 천둥 번개가 치던 날 밤, 엄마가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전화를 받았다. 아빠는 병원에 있었다. 그녀는 맨발로 혼자 집을 나와 빗속을 걸었다. 오빠가 어느 날부터 집에 들어오지 않은 것도 천둥소리가 귓전을 때리듯이 치던 날 밤부터였다. 나연으로선 잘된 일이었지만 아빠에겐 전하지 못할 말이었다.
나연은 저도 모르게 누워 있는 남자에게로 몸을 붙였다. 무릎 사이에 얼굴을 파묻고 있던 나연은 나른하게 흩어져 나오는 숨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의외네. 칼은 안 무서워하더니.”
웃음기만 조금 머금고 있는 남자가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연은 불규칙한 숨만 내쉴 뿐이었다.
“형님.”
누군가와 통화를 하던 성식이 남자를 조용히 불렀다.
“놈이 이쪽으로 오고 있답니다.”
찾던 사람이 가까이로 다가오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잠복의 끝은 결국 누구 하나의 죽음이라는 걸 나연도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알고 오는 거야.”
남자가 중얼거렸다. 성식이 남자의 말을 듣지 못하고 바깥의 동태에 귀를 기울이며 통화를 이어 갔다.
“저런 새끼들은 자기가 딸 목만 따라다니거든. 피 냄새는 귀신같이 맡으니까.”
나연은 남자의 말에 소름이 돋았다. 그러니까 지금 이 남자는 사실은 잠복을 가장해 자신을 미끼로 걸어 놓은 거다. 그 남자를 죽이기 위해. 남자가 느긋이 허리를 일으켰다. 나연은 일어서는 남자를 올려다봤다.
“내가 나가면 문단속 잘하고.”
그게 이 사람이 할 말은 아닌 거 같은데. 그렇지만 나연은 고개를 끄덕였다. 입 밖으로 꺼냈다간 함께 목이 따일 것 같았다.
“입이 붙었어? 대답을 해.”
“네, 그럴게요.”
남자가 나연에게 명함 하나를 내밀었다. 그를 멀뚱히 바라만 보던 나연이 그것을 받아 들었다.
“이게 뭐예요?”
“동아줄.”
“네?”
“필요할 때 연락해. 한 번. 그 이상은 안 되고.”
“연락하면 도와주시는 거예요?”
“봐서.”
남자의 미소에 나연은 받아 든 명함을 꾹 쥐었다. 성식이 내내 꼭꼭 잠가 두던 방문을 열었다.
남자가 방을 나가다 말고 나연에게 말했다.
“참, 이 방 내 방이야.”
정말 알 수 없는 남자였다. 미친놈. 나연은 차마 밖으로 내뱉을 수 없는 말을 중얼거렸다.
남자가 나가고 나연은 곧장 시키는 대로 문을 잠갔다. 그제야 명함을 내려다보았다.
재문건설 전무이사. 차연석.
이미 후계자로 작정된 차기 회장.
차기 회장이 생각보다 젊구나. 근데 미친놈이라니. 나연은 그가 빠져나가 버린 이불 시트를 보며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