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표
핸드폰이 부서졌다. 그 말은 즉, 권호영의 번호도 날아갔다, 이 말이었다.
핸드폰이 부서진 게 뭐라고 괜히 사람 마음을 우울하게 했다. 그것마저 의미 부여하게 되는 것이다. 어쩌면 여기까지 하라는 신의 계시일지도 모르지. 모든 생각이 부정적으로 흘렀다.
좆같은 김선오. 미운 권호영. 요즘 단여명이 담배보다 달고 사는 생각이었다.
권호영의 번호는 날아갔지만, 그와 연락할 수단이 사라진 건 아니었다. 메신저 앱을 다운로드 받으면 대화 내용이 복구될 테니까. 그런데도 핸드폰을 새로 살 생각은 들지 않았다.
또 싸우고 말았다. 아니, 싸운 건가? 얘기를 하다가 권호영이 일방적으로 도망쳐 버렸다. 제가 한 말실수 때문에. 이렇게 되기 전에 차라리 조심스럽게나마 물어볼걸. 민감한 부분이라고 생각했던 곳은 예상 이상으로 취약했다. 그런데 그 부분을 무심코 건드려 버렸다.
기분이 나빴을까. 자기는 말한 적도 없는데 다 안다는 듯 떠드는 걸 보며 기분이 좋지는 않았을 것이다. 뒤에서 평가하지 않았다고 말하기엔 그를 가엾게 여겼었다. 권호영은 그 동정심을 과연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일까.
마치 자신들을 연결한 선이 죄다 엉키고, 꼬인 느낌이었다. 어디서부터 풀어가야 할지 몰라 아무 가닥이나 붙잡고 당기다가 더 엉망진창으로 꼬여버렸다. 그래서 이젠 손대는 것조차 엄두가 나지 않았다.
‘차라리 잘됐어요.’
차게 흘러나온 목소리는 가슴속에 가시처럼 박혀 상처를 남겼다. 단여명은 자포자기의 심정으로 단념했다. 그래, 쟤도 잘됐다는데. 더 복잡하게 생각하기 싫었다.
그래봤자 고작 3개월. 처음 동거를 허락했을 때부터 금방 지나갈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지금도 그 생각은 변함이 없었다. 뭘 얼마나 붙어 있었다고. 천년의 사랑처럼 구는 자신이 이해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아, 씨…….’
자동으로 비워지지 않는 쓰레기통을 보면 울컥했으며.
[애정결핍]
틈만 나면 검색창에 이딴 거나 찾아보고 있고.
“그게, 저한테 느끼는 감정이 다른 사람이 느끼는 거랑 좀 다를 거래요…. 그게 무슨 뜻이지?”
지금도 보면, 앞에 빌을 앉혀두고 주절주절 제 얘기나 떠들어대고 있고.
“차라리 잘됐다고 그러는데, 거기서 더 어떻게 붙잡아요. 다 끝난 것처럼 말하는데. 말하기 싫다는 뜻 같고… 완전 벽 치는 것처럼.”
편의점 앞 야외 테이블 근방엔 풀벌레 우는 소리만 들렸다. 평일 새벽 시간대이기도 했고, 편의점 위치가 구석에 박혀 있다시피 해 인적이 드문 것 같았다.
“참 자기 얘기 안 해본 티 나네요. 주어 다 잘라먹고. 알아듣기 힘들어요.”
빌이 어이없다는 듯 작게 웃었다. 그의 손엔 물방울이 맺힌 캔 맥주가 들려 있었다.
“뭘 그렇게 복잡하게 생각해요. 좋으면 만나고, 아니면 헤어지는 거지.”
“헤어지면 남인데?”
“아, 잔정이 많은 편?”
“…….”
“의외네, 그건 또.”
놀리는 투가 역력해 단여명은 시선을 돌려 그를 외면했다. 김선오와 있었던 일을 아는 사람은 빌이 유일했다. 더군다나 권호영의 존재를 ‘주인’으로 알고 있었고, 그 주인과 다퉜다는 사실까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었다. 그래서 답답한 마음에 얘기를 슬쩍 흘려 본다는 것이 감정이 실려 푸념하듯 말해버렸다.
단여명은 할 말이 없어 고집스레 입을 다물었다. 관계를 단절시키지 않고, 멀리라도 남겨놓는 편이 실속 있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나 다른 관점에서 보면 또 그렇게 해석될 수도 있으리란 생각이 미쳤다. …인정하기 싫었지만.
“그 사람이랑 평생 갈 거예요?”
넌지시 던져진 물음에 단여명은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다, 또는 그건 아마 아니지 않을까, 라는 뜻이었다.
“후회할 것 같으면 일단 부딪쳐 봐요. 서로 맞춰 보고 안 맞으면 헤어지는 거지. 연애 처음 해보는 사람처럼 왜 혼자 삽질이에요?”
“그게… 좀 이상하잖아요.”
선뜻 말을 잇지 못하고 머뭇거리자 빌이 ‘뭐가?’라는 눈빛을 보였다.
“그러니까…….”
단여명은 곤욕스러운 표정으로 눈썹 부근을 매만졌다. ‘원래 내가 이렇게 소심한 사람이 아닌데…’ 하고 밑밥을 깔면 더 소심하게 보일 것 같고, ‘걔가 연애 초짜라서 상대하다 보면 나까지 말려들게 돼요’라고 말하면 핀트에 어긋날뿐더러 구구절절 남 탓하는 것 같았다.
그리 몇 번이나 망설였을까. 단여명은 결국 답답함을 이기지 못하고, 입술을 뗐다.
“걔는 제가 만났던 사람이 어땠는지 너무 잘 알아요. 저한테 마음이 있는 상태에서, 아, 그러니까 저는… 있었다고 생각해요. 아마도.”
빌이 야비해 보이는 웃음을 지었다. 알아듣기 힘들게 또 엉망으로 말한다, 이거였다. 어차피 한번 물꼬를 튼 얘기, 단여명은 개의치 않고 말을 이었다.
“그런데 마음이 없었던 때면 몰라. 사귈 거라고 확신이 있는 상태에서 다른 새끼랑 입술 비비는 영상을 봤어요. 그리고 그걸 다시 보기 싫었다고 말했고, 그걸 가지고 제 전남친이랑 타협을 봤고, 다 아는데도 제 손으로 끊어낼 때까지 비밀로…… 하아.”
말로 정리해 보니 일반적이지 않은 관계라는 생각이 더욱 명확해졌다.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내쉰 단여명은 눈을 반쯤 내리깐 채 손등으로 턱을 괴었다.
“그거 말고 다른 것도 있는데……. 아무튼.”
“…….”
“그게 뭔가 사귀면 독이 될 것 같았어요. 커플들이 서로 전에 만났던 사람에 대해 자세히 물어보지는 않잖아요. 알아 봤자 괜히 마음만 찝찝해지지.”
“…….”
“그렇게 만난 사람들이…… 얼마나 가겠어요.”
말하고 나니까 속은 시원했다. 발가벗겨진 것 같아서 눈을 어디에다 둬야 할지 몰랐지만.
침묵을 틈타 단여명은 방금 전에 했던 말을 곱씹었다. 진짜 없어 보인다. 소극적이고, 미련이 철철 넘쳐 보이고, 여유라고는 단 한 톨도 느껴지지 않는다.
이렇게 속 얘기를 터놓을 때면 그 뒤로 찾아올 시간이 견디기 힘들어진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좋았을 얘기로 분위기를 초치는 걸 넘어서 제 손으로 색안경을 내미는 것만 같았다. 저라는 사람이 이렇게나 미련하고 소심하다며 스스로를 낙인찍으라고 떠벌리는 느낌이라 무척이나 찜찜하고 창피했다.
권호영 하나가 뭐라고. 안 지 얼마 안 된 사람한테 자질구레한 얘기나 털어놓게 하고. 막심한 후회가 밀려오는데도 빌의 대답이 기다려지긴 했다. 단여명은 부러 맥주를 넘겼다. 여기서 눈치까지 살피면 간식을 기다리는 개처럼 꼴같잖아 보일 게 분명했다.
“뭐, 복잡하긴 한데…. 고민하는 것도 이해해요.”
얼마 지나지 않아 빌이 서두를 놓았다.
“그런데 해보지 않고서는 모르는 거잖아요?”
그는 맥 빠질 정도로 명쾌하게 정답을 내렸다. 바보같이 뭐 그런 걸로 속을 썩냐고. 매끄러운 웃음을 건 채 그런 눈을 보였다.
“만나서 다시 천천히 얘기해 봐요. 방구석에서 혼자 삽질하지 말고. 피 터지게 싸우다 보면 정이 다 떨어질 수도 있는 거고, 그래도 서로 좋다고 하면 사귀는 거지.”
그 말을 듣고 단여명은 한동안 침묵에 잠겼다. 복잡해 보이는 낯을 쓸다가 결국 담배를 꺼내 물었다.
남의 얘기니까 저렇게 쉽게 말하지. 그 싸움 한 번에 후폭풍이 얼마나 휘몰아치는지 아니까 주저하는 거라고.
자신과 권호영의 매개체는 분명 섹스였다. 권호영을 잃게 되면 그 커다란 아랫도리를 잃게 되는 것이라고 은연중 생각했다. 그러나 그 아랫도리는 이제 부속품에 불과했다. 권호영이란 사람을 이루는 단 하나의 부속품. 장소를 가리지 않고 들끓던 성욕도 그와 싸우고 난 뒤로 잘려 나가다시피 사라졌다.
처음엔 그랬다. 얘 은근 귀여운 구석이 있네. 그러다가 점점 느낌이 달라졌다. 아, 조금 호감이다. 연애도 괜찮을지도? 나 얘 좋아하는 걸지도 몰라. 아니, 좋아하는구나.
‘아.’
그러다가 답지 않게 굴었던 스스로를 돌아보고 불현듯 깨닫는 것이다.
‘…많이 좋아하고 있었구나.’
내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이.
한동안 가벼운 관계만 즐겨와 그 단순한 걸 잊고 살았다. 사람이 사랑이란 감정에 빠지면 대개 그랬다. 스스로도 몰랐던 제 성격을, 사랑을 하며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당당하게 의사를 표시하던 사람도 좋아하는 사람의 앞에선 한없이 의기소침해지고, 원체 소심한 사람도 고백 한 번쯤 용기 있게 밀어붙여 보는 것. 그게 사랑이란, 마법 같은 감정이었다.
돌이켜 보면 자신도 그랬다. 꼴사납게 보이는 걸 그리 싫어하면서 권호영의 앞에서 감정적으로 대처했다. 어린애처럼 울음을 터트리고 혼자 후회하다가 어려워하면서도 타인에게 속풀이를 하고. …어느새 마음이 이렇게 깊어져 버렸다.
손에 잡히는 온기가 없어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낮엔 손님방 문을 열어 보지 못했다. 그래 놓고 밤엔 권호영의 방 침대에 가서 잤다. 사라져가는 냄새가 짜증 나서 소파 위로 잠자리를 옮겼다가 그 냄새마저 아까워 다시 그가 쓰던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럼 책상 위에 덩그러니 남겨진, 주인 잃은 노트북이 보였다.
손님방뿐만이 아니었다. 온 집에 추억이 묻어 있다. 방구석까지 그의 발길이 안 닿은 곳이 없었다. 먼지가 쌓인 곳을 발견해 걸레를 찾으려는데, 찾을 수 없었다. 쓸데없이 부지런한 권호영이 걸레를 쓰고 어디에다가 뒀는지 알려 주고 가지 않았다.
‘나중 문제는 나중에 생각해요.’
빌은 그리 말했다. 사람 마음이 좀 격해지면 모양 빠질 수도 있는 거죠. 더 중요한 걸 우선순위에 둬요. 아주 쉬운 문제 풀이를 면전에 둔 사람처럼.
단여명은 제가 했던 연애를 돌아봤다. 남녀 불문하고, 그들과 참 많은 얘기를 나눴다. 가끔은 속 깊은 이야기를 나눌 때도 있었지만, 언제나 제 밑바닥까지 드러내는 것은 피해왔다. 열등감이나 자잘한 질투, 해답 없는 미래에 대한 두려움 등. 대부분 치졸한 감정이었다.
‘…그래도 다시 얘기해 봐야겠지.’
그런 용기가 생긴 건 사소한 계기였다. 옷을 갈아입으려는데, 제 옷장 속에 포댓자루 같은 커다란 상의가 섞여 있어서.
두 줄짜리 트레이닝복은 그가 처음 이 집에 왔을 때 입었던 옷이었다. 안감이 기모로 된 트레이닝복은 6월에 입기엔 더웠다. 보송보송한 원단을 만지며 단여명은 뜨겁게 달아오른 눈시울을 식혔다. 권호영이 집에 완전히 들어오지 않은 지 나흘째 되는 날이었다.
기말고사가 끝나려면 일주일 정도 더 남았다. 단여명은 권호영이 여름방학을 맞이할 첫날, 그에게 연락해 보기로 마음을 굳혔다. 김선오 일도 그렇고, 저 때문에 시간을 많이 빼앗겼을 테다. 시험 기간 말고 그에게 시간적, 심리적인 여유가 날 때 차근차근 대화하고 싶었다. 그래서 보고 싶다는 욕망은 꾸역꾸역 집어삼켰다.
PC에 깔려 있던 메신저 앱을 통해 연락이 오지 않았는지도 확인했다. 하지만 메시지는 자신이 그의 학교에 찾아갔던 날을 끝으로 뚝 끊겨 있었다. 기대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엄청난 실망감이 폭풍우처럼 몰려와 마음에 비를 뿌렸다. 홧김에 마우스 휠을 휙 올리자 ‘ㅋㅋㅋ’으로 도배된 대화 내용이 나왔다.
[그게 뭐가 웃겨요 전 진지한데]
[너 같아서 웃기다고ㅋㅋㅋㅋㅋㅋ 수업이나 열심히 들어]
[아직 교수님 안 왔어요]
[왜 계속 웃냐고요——]
[——? 많이 컸네 우리 호영이]
[저 같은 게 뭔데요^^? :)]
[웃으면 다 해결되는 줄 아나 봐?^^;]
그걸 보는데 참…… 새삼스럽고 가슴이 시렸다.
“…….”
단여명은 처음부터 끝까지 대화 내용을 훑었다. 6월엔 격 없는 말투를 사용하던 자신들은 3월로 거슬러 올라가자 딱딱하게 용건만 주고받았다.
어떻게 얘기를 시작해야 할지는 여전히 감을 잡지 못한 상태였다. 권호영의 얼굴을 볼 생각에 마냥 좋기도 했고, 또 싸우면 안 되는데, 하는 걱정도 끓었다. 그날이 끝일 수도 있으리란 불안한 생각은 머리에서 지웠다. 빌의 말대로 부딪쳐 보지 않는 이상 혼자 삽질하는 것에 불과했으니.
권호영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은 빠르게 흘렀다.
단여명은 일주일 동안 동면을 준비하는 곰처럼 집 안에 틀어박혀 살았다. 새벽에 잠깐 빌을 만난 후로 사람과 접촉도 하지 않았다. 배가 고프면 우유로 허기를 때웠으며 그마저도 힘들면 배달시켰다. 그리고 음식을 몇 입 먹지도 않고, 그대로 쓰레기통에 버리길 반복했다.
무기력하게 늘어져 있을 때면 권호영 말고도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슬슬 새로운 소설을 쓸 때가 된 것 같다는 생각도 어렴풋이 했다. 하지만 그도 잠시에 그쳤다. 식욕도 돌지 않는 마당에 열정이 샘솟을 리 없었다. 그럼 ‘내 직업이 작가이긴 했었나’ 하고 궁상떠는 시간으로 변질되기도 했다.
그렇게 아무 의미 없는 낮과 밤이 지나고, 새로운 날이 밝았다. 어느새 권호영을 만나기로 혼자 결정한 날이 하루 앞으로 닥쳤다.
‘씻어야 하는데….’
권호영이 막 시험을 끝내고 종강한 오늘, 단여명은 어김없이 소파에 널브러져 무기력과 싸움 중이었다. 그와 제대로 연락하려면 핸드폰을 사야 했으므로 외출해야 했다. 그러면 이리저리 까치집 진 머리에 물을 끼얹고, 사람다운 행색으로 나가야 될 텐데… 몸이 쉬이 따라 주지 않았다.
단여명은 결국 모자를 눌러 쓰고 밖을 나섰다. 씻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탓이었다. 누구를 만나러 가는 것도 아니고, 볼일만 보고 돌아올 생각이었다. 마침 담배도 똑 떨어졌으니 편의점에 들렀다가 눈에 보이는 아무 휴대폰 가게에 들어가면 될 것 같았다.
‘내일은 좀 깔끔하게 나가야겠지.’
이렇게 누추한 차림새 말고. 몸에 비누칠도 좀 하고, 향수도 뿌리고, 제일 아끼는 옷을 입어야겠다. 외관이 그럴듯해 보여야지 눈길이 가는 법이다. 그러다 보면 마음도 따라 돌아설지도 모르지.
오피스텔 단지를 벗어나자 익숙한 동네 길이 나왔다. 뙤약볕이 모자 꼭지를 뜨겁게 달궜다. 하루하루 달라지는 더위를 피부로 체감했지만, 마음은 과거 한자리에 머물러 시간의 흐름을 잊었다.
거칠게 어깨를 붙들었던 손길, 화가 나 떨리던 목소리, 끝을 알리듯 문밖으로 사라지던 뒷모습. 잡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극적인 화해와 최악의 상황이 엎치락뒤치락할 때마다 기분이 오르락내리락 널뛰기했다.
그리 쓸데없는 상념을 날리고자 무심코 눈길을 돌린 찰나였다. 맞은편에서 두 명의 남자가 걸어오고 있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한 남자는 열띤 목소리로 말을 쏴붙이고 있었고, 그걸 듣고 있는 다른 남자는 그를 외면하듯 반대편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고개를 돌린 남자는 유독 키가 컸다.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어도 머리 하나가 불쑥 솟을 만큼. 검은색 면 재킷에 흰 무지 티, 그리고 흑청바지. 특별한 것 없는 복장인데, 체격이 좋은 이가 평범한 옷을 걸치니 모델 같은 오라가 풍겼다. 멀리서 봐도 이목구비가 무섭도록 뚜렷한 것이 정말 모델 같아 보이기도 했다.
‘어…?’
단여명은 우뚝 멈춰 설 뻔한 다리를 가까스로 움직였다.
‘어?’
거리가 가까워질수록 의문이 깊어졌다. 그리고 그 의문 속에 엄청난 혼란이 섞이는 것은 순식간이었다.
생각해 보면 자신들의 접점은 같이 사는 사이라는 게 전부였다. 집 안이 아니면 억지로 봐야 할 상황은 이루어지지 않았고, 그는 대화를 나눌 기회조차 없다는 뜻이었다.
매일 보던 얼굴이니만큼 상실감이 컸다. 그래서 그 인위적인 만남조차 이루어지지 않는 게 그리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차라리 직장이나 학교 같은 데에서 만난 사이였으면 얼굴이라도 볼 수 있지. 그럼 앞일이 조금 덜 막막했을 텐데, 하고 불평도 많이 했다.
‘맞잖아.’
하지만 지금, 저 앞에 걸어오는 사람은 권호영이 맞았다.
그동안 골몰했던 것이 무색하도록 머릿속이 백지장처럼 새하얘졌다. 얼굴을 못 본 지 일주일하고도 반. 누군가는 고작이라 폄하할 수 있는 시간이겠지만, 단여명에겐 짧지 않은 시간이었다. 뇌가 한 사람의 얼굴로 변형되도록 머릿속에 새긴 얼굴이었다. 그새 저 얼굴을 잊었을 리가.
그러나 이런 식으로 동네에서 우연히 재회하는 상황은 수많은 상상에도, 치밀한 계획 속에도 없었다. 그것도 이딴, 모자에 쪼리나 끌고 나온 꾀죄죄한 모습으로.
‘어떡하지.’
평온했던 심장이 북을 치듯이 쿵쾅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무채색이던 거리의 풍경에 다채로운 색이 입혀졌다. 아니, 권호영을 둘러싼 주변에만 스포트라이트가 탁 켜진 듯 빛이 들었다. 마치 제 존재를 모르는 유명 연예인을 맞닥뜨린 기분이었다.
어쩌지. 안 씻은 지 이틀은 더 된 것 같은데. 아니, 저런 옷도 입을 줄 알았나? 순간 못 알아볼 뻔했다. 허구한 날 추리닝만 걸치고 다니더니 오늘은 꽤 성의 있는 옷차림이었다.
아니, 그것보다 잡아야 하나? 아니면 자연스럽게 인사해?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는 중에도 자신들의 거리는 계속 가까워졌다. 단여명은 모자챙을 이용해 얼굴을 가렸다가 앞을 힐긋 곁눈질하길 반복했다.
그리 다섯 걸음 남짓 거리가 좁혀졌을까. 무심결에 고개를 든 찰나, 고동빛 눈동자와 눈이 딱 들어맞았다.
“…….”
시간이 멈춘 듯한 느낌에 사로잡힌 건 잠시뿐이었다. 살짝 커졌던 눈은 금세 동요를 지웠다. 권호영은 잠깐 시선을 주더니 자연스레 눈길을 떼어냈다. 흡사 모르는 사람을 본 것 같은 반응이었다.
단여명은 떨리는 숨을 왈각 집어먹었다. 고개를 옆으로 튼 남자는 무덤덤한 낯이었다. 결 좋은 머리는 적당한 선에서 잘려 바람결에 흔들렸다. 붓으로 곧게 내리그은 듯한 콧대와 혈색 짙은 입술은 매일같이 보던 옆태였다. 하지만 지금은 말 한번 나눠 본 적 없는 낯선 이라도 보는 듯했다.
속이 처참하게 뭉그러졌다. 생각지도 못한 상대의 반응에 자신감이 급하락했다. 저렇게 모르는 척하리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매일 자신만 보면 달려 있지도 않은 꼬리를 흔들며 반기던 모습만 봐와서 충격이 컸다.
그런 와중에도 서로의 거리는 갈수록 좁혀졌다. 이대로 가면 진짜 스쳐 지나가게 될 것 같았다. 아니, 그건 안 된다. 이렇게 끝내기엔 허무하잖아. 지금, 이렇게 놓치면…….
권호영의 손목을 잡아채려고 했는지, 아니면 그의 앞을 막아서려고 했는지. 뭘 어떻게 할 건지 정하지도 못한 채 걸음을 멈춘 찰나였다.
“잠…….”
“어!”
목젖을 치고 나간 목소리는 그보다 더 큰 목소리에 묻혔다.
“안녕하세요! 그때 이후로 처음 뵙는 거죠? 저번에 그, 한구 포차에서.”
무언가가 불쑥 끼어들어 시야를 방해했다. 권호영의 옆에 있던 남자였다. 쾌활하게 인사하며 얼굴을 들이민 남자 때문에 권호영의 얼굴이 그의 뒤에 가려져 보이지 않게 됐다.
“…네?”
“아, 저 재윤이요. 윤재윤. 권호영 친구.”
남자가 붙임성 좋게 웃었다. 단여명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아, 윤재윤. 이제 보니 권호영의 친구 윤재윤이 맞았다. 권호영에게 온 관심을 집중하고 있던 탓에 옆에 사람이 있다는 걸 잠시 잊고 있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인마, 넌 아무리 독립했다고 해도, 같이 살던 형 봤는데 인사 한마디 없이 지나가려고 하냐.”
윤재윤이 권호영의 옆구리를 툭 찌르며 대놓고 면박을 줬다. 제 얘기가 나오자 단여명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바짝 경직시켰다. 하지만 긴장한 의미가 없게도 권호영은 이쪽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큰 반응을 보이지 않는 그의 태도가 익숙한지 윤재윤은 매끄럽게 대화를 전환했다.
“어디 가시던 길이에요?”
“아…… 저 편의점…….”
단여명은 어영부영 대답했다. 시선은 윤재윤에게 가 있었지만, 곁눈으로 보이는 남자에게 모든 신경을 집중한 탓이었다.
그래도 동행이 멈춰 섰다고 같이 걸음을 멈춰 주기는 했다. 대화 참여 의사는 전혀 보이지 않고 있지만, 그가 멈췄다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힘이 쭉 빠졌다. 자신들이 떨어져 있는 거리는 약 세 발자국 정도였다. 조금만 간격을 좁히면 손을 잡을 수도, 몸을 바짝 끌어안을 수도 있는 거리.
그에 무수한 감정이 거세게 밀어닥쳤다. 그리웠던 만큼 반가움이 목울대까지 차올랐고, 반가운 만큼 서운했다. 단절된 태도를 보이는 그가 사뭇 낯설기도, 또 오랜만에 접하는 것이기도 했다. 처음 봤을 때 딱 저런 표정을 짓고는 눈도 마주치려고 하지 않았으니까.
감정 하나하나에 자아라도 생긴 듯 속이 시끄럽게 웅성거렸다. 직접 보고 있지도 않은데 그의 등 뒤에서 비치는 후광 때문에 눈이 부셨다. 왜 저렇게 멀끔하게 입었어. 누구 보기 좋으라고.
“예?”
윤재윤이 동그란 눈을 하고 말을 되물었다. 혼잣말에 가까운 대답에 제가 무슨 말을 했는지 못 알아먹은 듯했다. 단여명은 관심의 대상을 의식적으로 옮겼다. 처음엔 당황해서 그랬다 치고, 여기서 더 엉성하게 대답하면 이상하게 보일 테다.
“편의점 가던 길이었어요. 여기 근처 살거든요.”
“어, 진짜요? 권호영 새로 이사한 집도 여기 근처인데?”
이사를 했어…? 충격적인 얘기가 뒤통수를 후려갈기는 듯했다. 단여명은 무심코 눈길을 돌렸다. 쳐다보는 게 티가 나지 않도록 눈동자만 굴려 권호영의 기색을 살피려는데, 이쪽을 보고 있던 그와 눈이 정통으로 마주치고 말았다.
이번엔 둘 다 동시에 시선을 피했다. 권호영이 고개를 슥 돌리는 것에 맞춰 단여명은 눈동자를 원래 자리에 돌려놨다. 흡사 사춘기 때 아이들이 낯을 가리기라도 하는 듯한 모양새였다.
“아… 그래요?”
눈이 잠깐 마주친 게 뭐라고 심장 박동이 재차 요란스러워졌다. 단여명은 쿵덕거리며 날뛰는 심장을 나무랐다.
그와 눈이 마주쳐서 기뻤고, 놀랐고, 속이 쓰렸다. 그 짧은 새에 이사를 마쳤다니. 짐은 다 제집에 남겨두고 나왔으면서. 그새 마음 정리를 다 끝낸 사람처럼 구는 그의 행동에 목이 꽉 메는 것과 동시에 조바심이 났다. 당장이라도 그의 앞으로 튀어 나가 많은 얘기를 따져 묻고 싶었다.
“저희는 시험 끝나서 밥 먹으러 가던 길이었어요. 저번에 권호영 집에서 자고 간 적이 있거든요. 그런데 눈 뜨니까 아침 8시 반인 거예요.”
아무것도 모르는 윤재윤만 밝은 목소리로 떠들었다.
“다행히 지각은 면했는데, 옷이랑 이어폰이랑 다 쟤네 집에 놓고 왔어요. 알죠. 옷은 그렇다 치고, 밖에서 음악 없이 다니면 엄청 심심한 거. 제가 또 음악 없이 못 사는 부류거든요. 그래서 쟤네 집 들렀다가 밥 먹으러 가려고 버스 타고 여기까지 왔잖아요.”
퍽 오버스럽게 떠드는 윤재윤의 이상함을, 단여명은 의심쩍게 여기지 못했다. 간간이 고갯짓하며 대화에 집중하고 있다는 리액션을 취했지만, 그것도 딱히 성의 있게 보이지 않았다. 머릿속이 ‘이사’라는 단어와 ‘왜?’라는 물음표로 수선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마침 잘됐어요. 이렇게 만난 거, 형님도 같이 가시죠.”
윤재윤이 넉살 좋게 웃으며 말했다. 단여명은 곤란한 표정을 짓고는 ‘아…’ 하며 말끝을 흐렸다.
제안은 고마웠으나, 아직 권호영과 얘기해 봐야겠다는 마음은 변함이 없었다. 여기서 윤재윤이 끼게 되면 권호영과 편하게 얘기를 나눌 수 없었다. 더불어 이 멤버로 속 편히 밥이 넘어갈 것 같지도 않았다. 눈을 마주치는 것조차 꺼리는 한 명과 그의 친구이자 자신과 친하지 않은 한 사람. 환장의 조합이었다.
“저번에 밥 사 주신다고 하셨잖아요. 네?”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미적거리자 윤재윤이 퍽 애교스럽게 조르기 시작했다. 그런 말을 하긴 했는데 말이지…. 단여명은 난감한 웃음만 지었다. 지금은 다른 볼일이 급해 그 약속은 추후로 미루고 싶은 마음이 컸다.
윤재윤에게 미안하지만, 그는 이 자리에서 완벽한 방해꾼이었다. 어떻게 윤재윤과 권호영을 갈라놓고 둘만의 자리를 마련하지. 윤재윤의 앞에서 심상찮은 기미를 흘리며 잠깐 좀 보자고 권호영을 빼돌릴 수 없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망쳐도 되는지 확신이 안 섰으며, 둘이 그렇고 그런 사이라는 게 티 날까 조심스럽기도 했다.
“아…… 제가 눈치가 없었나 봐요.”
그런 고민을 하는 사이, 윤재윤의 낯이 급격히 시무룩해져 갔다.
“네?”
“그냥 한 소리인 줄도 모르고.”
“어, 아니…….”
“동생들이랑 놀면 귀찮기만 하죠.”
…얘가 이런 이미지였나? 단여명은 그제야 살갑게 구는 윤재윤을 낯선 눈으로 보았다.
윤재윤과의 첫 만남은 허투루라도 평범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저번엔 말도 제대로 못 하고 쩔쩔맸던 것 같은데…. 저걸 권호영의 옆에 둬도 되나, 하며 가벼운 경계심을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지금은 내적 친목을 다질 대로 다진 사람처럼 굴었다. 권호영이 그에게 간간이 제 얘기라도 흘린 것일까. 그것도 아주 좋은 방향으로.
“별로 내키지 않으시면 편하게 말씀해 주세요. 저는 정말! 괜찮아요.”
보란 듯이 울상을 지은 윤재윤이 입바른 소리를 했다. ‘정말’이라고 말할 때 돌연 목청을 높여 부담을 한껏 실어 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권호영은 그때까지도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고집스레 이쪽을 보지 않는 모습이 영락없는 투명 인간 취급이었다. 한마디도 거들지 않는 게 이대로 헤어져도 아쉬울 것 없다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고.
그 옆모습을 잠깐 눈으로 훑는데, 슬슬 열이 받았다. …언제는 쉽지 않다면서?
“밥 사 준다고 한 말, 거짓말 아니었어요.”
단여명은 당황을 지우고 매끄럽게 웃었다. 타인에게 늘 보였던, 조금은 여유 있고 인상이 부드러워 보이는 미소였다.
어차피 여기서 둘만 빠지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해 보였다. 대놓고 무시하는 모습을 보니 오기도 좀 생겼고. 계속 피하려고 한다면 피하지 못하게 만들면 된다.
“호영이 친구니까. 언제 한번 대접하고 싶었거든요.”
부러 이름을 언급하자 시선이 잠깐 따라붙는 것이 느껴졌다. 단여명은 그 시선을 느끼지 못한 척 윤재윤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그리고 호기롭게 먼저 앞으로 발을 디뎠다.
“그럼 어디로…….”
갈까요, 라는 말은 급격히 든 불안감에 목 아래로 꿀꺽 넘어갔다. 단여명은 걸음을 멈추고 곧장 바지 주머니를 뒤졌다. 그리고 커다랗게 터질 뻔한 탄식을 어렵사리 삼켰다.
아, 등신. 진짜 정신을 어디에다가…….
“저, 미안한데 여기서 잠깐 기다려 줄래요? 지갑을 두고 나와서.”
“정말 여기로 괜찮겠어요?”
단여명은 멋쩍은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봤다.
“더 좋은 곳으로 가도 괜찮은데.”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이자카야였다. 가게 중앙엔 커다란 벚나무가 연분홍색 꽃을 틔우고 있었고, 나무 아래로는 시냇물이 흐르고 있었다. 둥글게 깎인 조약돌이 수면 아래에서 하얗게 빛났다.
운치는 있다만, 이런 평범한 술집보단 좋은 곳에서 식사를 대접하고 싶었다. 정갈한 한식집이라든가, 아니면 비싼 소고깃집.
“여기가 어떻다고요? 식사 겸 안주도 있고, 메뉴도 다양하고. 대학생들한테는 이만한 뷔페도 없어요.”
그리고 이런 이자카야 은근 가격대 있잖아요…. 윤재윤이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원목 테이블 위에 펼쳐놓은 메뉴판 중 소고기 타다끼를 손으로 콕 집기도 했다.
그 모습이 얼핏 풋풋하게 보여 단여명은 피식 웃었다. 생각해 보니 자신도 새내기 때 분위기 좋은 술집에 가는 걸 부담스러워했다. 다른 술집보다 가격대가 나가기도 했고, 단체로 몰려다닐 때다 보니 조용한 곳보다 시끌벅적한 술집만 골라 다녔다.
“그럼 뷔페식으로 먹고 싶은 거 다 시키세요. 남겨도 괜찮으니까.”
“앗, 그럴 수는…….”
“정말요. 몰골이 이래서 못 뜯어먹겠어요?”
“에이, 몰골이 뭐 어떻다고요. 그렇게 입으시니까 저희랑 또래로 보이십니다.”
언제 쭈그러들었냐는 듯 윤재윤이 싹싹하게 말했다. 위로 치켜든 엄지가 익살스러웠다. 단여명은 싱거운 소리를 들었다는 양 가볍게 웃고 넘겼다.
“어? 왜 그렇게 웃으시지? 빈말 아닌데?”
몰랐는데, 윤재윤은 꽤 활발한 성격이었다. 처음 가게에서 봤을 땐 어리바리한 인상이 강했다. 하지만 대화를 나눠보니 제법 시원시원한 구석이 많았다. 재치 있고, 분위기 띄우는 것도 잘하고, 불편한 얘기를 묻지도 않는 게 사람을 편하게 해주는 재주가 있었다.
괜찮은 친구를 뒀네. 그 생각에 눈길이 슬쩍 옆으로 샜다. 윤재윤의 옆에 앉은 권호영은 인원수대로 모아놓은 물잔에 묵묵히 물을 따르고 있었다.
대놓고 들여다볼 기회가 생기니 아까 못 봤던 것들이 눈에 밟히기 시작했다. 얼마나 지났다고 그새 얼굴이 많이 상해 있었다. 원래도 날렵했던 턱선은 베일 듯 날카롭게 깎여 있었고, 안색도 어두운 것이 피로가 상당해 보였다.
…그동안 마음고생을 안 한 것 같아 보이진 않는데. 단여명은 그를 지켜보다가 애써 시선을 갈무리했다.
이렇게 평온한 시간을 갖는 것도 약 3주 반 만이었다. 그가 집에 못 들어올 것 같다는 얘기를 듣고 마음 상해하고, 김선오 일로 목소리 높여 싸우다가, 울고, 또 싸우고, 그가 집을 나가고.
직접 대화를 나누지 않고 있지만, 같은 자리에 앉은 탓인지 느껴지는 감회가 새로웠다. 어떻게 생각해 보면 지금은 윤재윤 같은 사람이 필요할 때일지도 모른다. 제 지인과 앞에서 계속 떠들면 없는 셈 치고 있는 제가 못 견디게 신경 쓰일 것이다. 윤재윤 덕분에 분위기도 축 처질 틈이 없다. 이 분위기만 잘 유지한다면 둘만 남겨져도 언성을 높여 싸울 것 같지 않았다.
이 술자리가 끝나면 아마 집 가는 방향이 겹칠 테니 그때 미뤄둔 얘기를 나누면 된다. ……그러니 조급해하지 않아도 되겠지.
“스물여섯 살이라고 하셨죠?”
불현듯 던져진 질문에 단여명은 상념에서 깨어났다. 고개를 끄덕이자 윤재윤이 넉살 좋게 웃었다.
“그럼 말씀 편하게 하세요. 전 스물셋이거든요. 족보도 이상하잖아요. 둘 다 동생인데 권호영한테 반말하고, 저한테는 존댓말하고.”
고르라는 메뉴는 안 고르고 윤재윤이 호칭 정리에 나섰다. 척 보니 군 생활도 꽤 잘했을 것 같았다. 권호영의 친구라서 안 그래도 좋게 보고 있던 차다. 단여명은 스스럼없이 답했다.
“그럴까?”
“저도 형이라고 불러도 되죠?”
“응. 그냥 편하게 말 놔도…….”
그 순간 쨍그랑! 하는 소리가 날카롭게 울렸다. 못내 훈훈했던 장면에 금이 간 것도 그와 동시였다.
단여명은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정면을 보니 권호영의 앞에 놓여 있던 물잔 하나가 테이블 위를 나뒹굴고 있었다. 옆으로 엎질러진 유리잔에서 쏟아진 물이 그의 하얀 티를 흥건하게 적셨다.
“야, 너 정신을 어디에다가…! 아씨, 내 옷에도 다 튀었네.”
윤재윤이 기겁하며 손으로 바지를 탁탁 털었다. 단여명은 서둘러 티슈를 뽑았다. 앞으로 내민 손은 끝에 가서 약간 주춤했지만, 그 손길을 거두진 않았다.
젖은 곳을 확인하느라 아래를 향해 있던 눈이 위로 들렸다. 긴 속눈썹이 음영을 지우며 곧게 펴지고, 말간 눈동자가 드러났다. 티슈를 잡은 손에 한 차례 닿은 눈길은 팔목을 타고 얼굴에 도달했다.
“…닦아.”
곧, 눈이 마주쳤다.
“젖었잖아.”
시선이 유난히 오래 맞물린다. 그 시선에 사로잡혀 영영 헤어나지 못할 것처럼. 주변의 소리가 까마득히 멀어지고, 둘만 남겨진 착각에 빠질 때쯤 권호영이 손을 뻗었다.
손끝이 살짝 닿았다가 떨어졌다. 덥석 붙잡고 싶은 충동은 억지로 눌렀다. 휴지 몇 장이 괜스레 야속해지는 순간이다. 얇은 휴지가 겹쳐 체온이나 감촉 같은 것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권호영은 단여명이 준 티슈로 말없이 젖은 옷을 닦았다. 차갑겠다, 괜찮으냐. 단여명은 그런 말을 건넬까, 하다가 집어넣었다.
집에서 싸우고 난 뒤 처음 보는 것이었다. 게다가 윤재윤이 중간에 끼어든 바람에 안부를 물을 타이밍마저 흐지부지 놓친 뒤였다. 지금 와서 괜한 걸 물어봤자 순 가식처럼 느껴질 뿐이다.
“형, 저도 좀….”
윤재윤이 뒤늦게 손을 뻗었다. 단여명은 아차 싶어 그에게도 얼른 휴지를 건넸다. 권호영을 챙긴다고 윤재윤의 옷도 나란히 젖은 걸 그새 까먹고 있었다.
윤재윤은 구시렁대며 젖은 부위를 닦았다. 그는 자신들이 데면데면하게 구는 이유를 묻지 않았다. 권호영이 뭐라 언질이라도 준 걸까. 아니, 뭐라 들은 게 없어도 충분히 알아채고도 남았다. 둘 중 누구를 나무랄 것 없이 싸웠다는 티를 있는 대로 내는 중인데.
“이해하세요. 권호영 저 자식, 요즘 제정신 아니거든요.”
대강 물기를 훔친 윤재윤이 휴지 뭉텅이를 테이블 모서리에 밀어뒀다. 권호영을 언급하는 입술은 짓궂은 장난기를 담고 있었다.
“공부를 그렇게 열심히 하더니 시험도 다 말아먹…….”
“선배.”
지금껏 침묵만 지키던 이가 불쑥 말문을 뗀 것도 그때였다.
“무슨 좋은 얘기라고 말해요.”
…아, 목소리. 오랜만에 듣는다.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듯 낮은 목소리엔 가시가 돋쳐 있었다. 단여명은 그 목소리를 듣고 마음이 들뜨는 것과 동시에 심장을 철렁 떨어트렸다. 제게 향한 적의가 아닌데도, 제가 공격받은 느낌이 들어서였다.
“봐요. 저렇게 까칠하고.”
정작 공격받은 윤재윤은 아무렇지 않은 낯인데.
“알았다. 눈으로 사람 죽이겠네.”
권호영은 아무런 대꾸 없이 윤재윤에게 물잔을 건넸다. 곧 단여명의 앞에도 커다란 손이 가까워졌다가 멀어졌다. 단여명은 권호영이 건네준 물잔에 바로 입술을 댔다. 차갑게 대하지 말라는 의사를 피력하듯.
…원래 그런 거 다 말했으면서. 뭐라 형용할 수 없는 감정에 목이 탔다. 단여명은 권호영이 준 물 한 잔을 깔끔히 비웠다.
“권호영. 너 뭐 먹고 싶은 거 있어?”
“아무거나 괜찮아요.”
잔을 비우자마자 물이 새로 채워졌다. 텅 빈 잔에 찬물을 따라 준 권호영의 시선은 윤재윤에게 가 있었다.
여전히 목이 말랐지만, 단여명은 이번엔 물잔에 쉽사리 손을 올리지 못했다. 신경질적으로 반응했다며 사과한 듯해서. 권호영은 빈 잔에 새로 물을 따라 준 것뿐인데, 이딴 것까지 의미 부여하고 있다.
“아무거나는 뭔 아무거나야. 확 매운 거 시켜버린다. 물에 혓바닥만 담그고 있게.”
권호영에게 말을 툭 쏘아붙인 윤재윤이 다시 눈길을 앞으로 돌렸다.
“형, 간단하게 맥주 괜찮죠?”
단여명은 심란한 기분을 내색하지 않고, 입꼬리를 올렸다. 술은 별로 당기지 않았지만, 이 구성원으론 알코올의 힘이 필요할 것 같았다.
“너희 먹는 거로 통일하지, 뭐.”
“그럼 맥주가 좋겠다. 권호영 너도 괜찮지?”
윤재윤은 중간 통역사의 역할을 능숙하게 소화했다. 아무거나 상관없다는 말을 대변하듯 권호영이 대강 고개를 끄덕였다.
“혹시 술 어느 정도 하세요?”
대화의 중심은 다시 단여명에게 돌아갔다.
“못하지는 않아.”
“에이, 그렇게 말하는 사람들 다 술 못하더라.”
“진짠데. 맥주는 입가심용 아니야? 소주 먹고 쓴맛 날 때.”
“아, 형! 그걸 허세라고 부려요?”
가볍게 던진 농담에 윤재윤이 생각보다 큰 반응을 보였다. 밝게 웃는 얼굴에서 어린 티가 났다. 아니, 어리기는 했다. 23살이라고 했으니 자신보다 3살이나 어렸다.
“아, 남자들 다 똑같다니까. 술 부심 안 부리면 어디 잘못되나?”
그래도 권호영보다는 3살 위 형인데. 권호영은 저렇게 크게 웃지 않지만, 윤재윤의 웃음에서도 특유의 풋내가 났다. 그게 권호영과 겹쳐 보여 좀 귀엽게 느껴졌다.
“글쎄. 재윤이 너 나 못 이길걸.”
단순한 마음에 뱉은 말이었다. 그런데 순간 그를 되돌아보게 할 만큼 강렬한 시선이 안면을 강타했다.
“…….”
권호영은 눈이 마주쳤음에도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지금껏 무표정만 지켰던 그는 눈썹을 살며시 일그러트린 채였다. 얼굴을 뚫어버릴 듯이 직시하는 눈은 뭔 말을 대뜸 쏘아붙일 것 같기도, 이해를 바탕으로 하는 말을 요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단여명은 그 눈빛에 압도돼 무심코 왜, 라는 입 모양을 보일 뻔했다. 앞에서 신난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더라면 말이다.
“그거야 해보지 않고 모르는 거죠! 오늘 확, 날 잡아요?”
단여명은 그 목소리에 이목이 휩쓸린 척 자연스럽게 눈을 피했다.
“난… 좋지. 오늘로 해도.”
연속으로 자꾸 미묘한 기류가 생기니 등에 식은땀이 나는 기분이었다. 좌불안석에 마음은 싱숭생숭하고, 손은 초조하게 바지를 말아 쥐었다. 그러나 복잡한 심경 중 그 어딘가에는 안도감이 자리해 있었다.
눈이 계속 마주치는 이유야 뻔했다. 아닌 척, 서로를 의식하고 있으니까. 이사한 것과 별개로 아직 마음을 완전히 정리한 것 같아 보이진 않았다. 일단 지금은 그것만으로도 안심됐다.
“아, 저 잠깐 전화 좀….”
주문을 넣은 해물 나베가 팔팔 끓을 때쯤 윤재윤이 핸드폰을 들었다. 단여명은 신경 쓰지 말고 편하게 하라는 눈짓을 보냈다.
“왜.”
전화를 받은 윤재윤이 말을 툭 내뱉었다. 통화 상대와 친분이 두터운 듯했다.
“나 상암동.”
“…….”
“어, 권호영이랑…….”
이쪽을 흘깃 쳐다본 윤재윤이 잠시 뜸 들이다가 말을 마쳤다.
“권호영 친한 형이랑.”
그 얘기가 무슨 신호탄이라도 된 것처럼 돌연 상대의 반응이 커졌다. 전화기 밖으로 터져 나오는 목소리가 쩌렁쩌렁했다.
“뭐? 아니, 오지 마. 나 금방 빠질… 그, 우리 간단히 술만 먹고 금방 헤어질 것 같은데.”
어, 응. 아니……. 당혹감이 느껴지던 목소리는 금세 난감함으로 물들었다. 윤재윤은 손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확답을 피하려고 요리조리 빠져나가 보지만, 상대방이 집요하게 캐묻는지 결국 위치를 불었다.
“저…… 형.”
통화를 종료한 윤재윤이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 눈치를 살폈다.
“그, 호영이 친구 민들레 아시죠? 저번에 인사했던.”
“아, 난 상관없어. 원래 그 친구까지 사 주려고 했던 거니까.”
통화 내용으로 대략 유추하고 있던 것이었다. 윤재윤이 권호영의 이름을 개의치 않고 말할 사람, 그리고 여자 목소리. 그 상대란 즉, 민들레였다.
“그게…….”
괜찮다는 듯 말해도 그의 얼굴은 펴질 줄 몰랐다.
“걔 친구들까지, 다 온다고 하는데…….”
윤재윤이 어물어물 말꼬리를 흐리며 답했다. 단여명은 가까스로 웃음을 잃지 않았다. ‘아……’라는 의미 없는 감탄사는 주워 담지 못했지만, 그 뒤에 ‘망했다’ 하고 바짝 따라붙을 뻔한 부언은 어찌어찌 삼킬 수 있었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여기 테이블 좀 붙여도 되죠?”
“여기 앞접시 세 개만 더 주세요!”
민들레의 무리가 도착하자 가게 안은 금세 시끌벅적해졌다.
단여명은 웃는 낯으로 그들을 반기며 사태의 경과를 되짚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됐지. 나는 단지, 권호영과 대화를 나누고 싶었을 뿐인데.
어떻게 된 게 권호영만 관련되면 계획이 다 꼬인다. 생각지도 못한 전개로 일이 틀어지고, 비틀리고, 지면에 닿은 탱탱볼처럼 종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튀고.
앞을 보니 권호영은 새로 합류한 무리와 인사를 나누는 데 한창이었다. 고개를 꾸벅하는 움직임이 바람직하고 융통성 없는 신입사원 같았다. 민들레의 친구들이라고 했으니 그녀를 제외한 두 사람과는 초면일 테다.
“옆에 자리 비었죠? 앉아도 돼요?”
“아, 네. 앉으세요.”
여자 둘, 남자 하나. 그중 앳된 티를 벗지 못한 남자가 옆자리에 앉았다. 그래도 통성명은 하는 게 예의지 싶어, 그에게 말을 걸려고 하는데 돌연 쿵! 소리가 났다.
“와아…….”
손으로 테이블을 내리친 사람은 안면이 있는 얼굴이었다.
“야, 민들레. 너 뭐…….”
“내가 오늘은! 진짜 로또 산다!”
윤재윤의 말을 깔끔히 무시한 민들레는 상체를 앞으로 빼고, 테이블을 짚은 채였다. 로또를 거론하는 그녀의 눈은 어쩐지 제게 빤히 닿아 있었다. 반짝거리는 눈빛에 단여명은 약간 긴장한 낯으로 고개를 뒤로 뺐다. 새빨갛게 익은 사과 같은 얼굴에서 술 냄새가 폴폴 풍겼다.
“오빠, 두 번째 만남에 실례지만, 연예인 할 생각 없어요? 아니면 인터넷 방송이라든가?”
“네?”
“일반인으로 살기 아깝다는 생각은요? 아, 혹시 이상형이 어떻게 돼요? 학교 다닐 때 차갑고, 별명이 얼음 공주인 여자애랑 운명적인 사랑에 빠진 적은?”
“…네?”
빠르게 쏟아지는 얘기도 정신없는데, 영문 모를 소리까지 섞였다. 얼이 빠져 눈을 깜빡이는데, 그녀가 이마를 탁 짚고는 탄식했다.
“무슨 소리인 줄 모르겠다는 반응까지…. 완벽해.”
단여명은 어색한 웃음으로 대답을 무마했다. 좀 괜찮게 생긴 거 안다. 그런데 숫기 없어 보였던 전과 달리 너무 저돌적으로 이거저거 물어봐서 당황스러운 마음이 컸다.
윤재윤이 민들레 무리가 도착하면 꽤 시끄러울 거라고 했는데…. 척 보니까 다들 이미 술이 들어갈 대로 들어간 상태 같았다.
“좋게 봐 주셨다니 기쁜데요.”
예의상 웃으며 그리 대답한 순간 그녀의 뒤에서 불쑥 누군가가 튀어나왔다. 민들레의 등을 퍽 내리친 사람은 초면인 여자애였다.
“야, 민들레. 너 왜 둘이라고 말 안 했어.”
“누구? 아, 쟤?”
가까이 붙어 선 둘은 곧 키득거리며 귓속말을 주고받기 시작했다.
처음 보는 여자애는 간간이 권호영을 곁눈질했다. 둘이라는 사람 중 하나가 아마 권호영을 가리키는 듯했다. 그걸 물끄러미 바라보는데, 그 여자애와 눈이 마주쳤다. 이지민이에요, 하고 싱긋 웃길래 단여명도 마주 웃어 줬다. 단여명이에요, 라는 말을 똑같이 돌려주며.
좀 불쾌해진 마음은 종이를 접듯 마음속에 고이 접어 넣었다. 여자 둘, 남자 넷. 짝이 맞지 않아 소개팅 분위기로 흘러갈 것 같진 않았다. 일방적인 호감에 질투를 느끼는 건 감정 소모였다. 타인의 감정을 제가 뭘 어떻게 할 수 있다고.
“아니, 내가 다 이해해. 안주도 그렇고, 술도 그렇고. 다 좋다고 치자고요.”
자리에 앉자마자 민들레가 기다렸다는 듯 운을 뗐다. 권호영의 옆에 앉은 그녀는 훈화하는 교장 선생님처럼 근엄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여전히 잘 익은 홍당무 같은 낯으로.
“그런데 조합이 영 아니지 않아요? 탕에 맥주가 뭐예요, 맥주가? 안주랑 술 조합이 얼마나 중요한데. 사장님, 여기 메뉴판 좀 갖다주세요!”
민들레가 자리에서 일어나 손을 번쩍 들고 외쳤다. 그녀의 행동에 몇은 웃음을 터트렸지만, 윤재윤은 ‘제발’ 하며 이마를 짚었다.
“우리 뭐 먹을까?”
“사케 먹자, 사케!”
“에이, 술이 따뜻한 게 말이 돼요? 안 그래도 더워 죽겠는데. 그냥 소주 먹어요.”
“재윤 오빠! 안주 모자랄 것 같은데 저희가 알아서 시킬게요? 배 찼죠?”
“어, 아주 네 맘대로 다 해 처먹어라….”
여섯 명이 둘러앉은 자리는 소란이 잦아들 틈이 없었다. 메뉴판이란 먹이가 던져진 직후라 더욱 그랬다.
‘아…… 정신없다.’
사방에서 터지는 목소리에 머리가 지끈댔다. 경미한 두통과 함께 잘 참고 있던 흡연 욕구가 급속도로 올랐다.
그러나 무리가 합류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자리를 비우기가 좀 그랬다. 옆에 앉은 남자애도 담배를 피우는 눈치였다. 그가 옆에 앉자마자 희미하게 풍기는 담배 냄새를 맡았다. 좀 친했으면 눈치 안 보고 그냥 나갔다가 오는 건데. 여기서 둘 이상이 빠지면 시작하기도 전에 흐름이 끊길 게 분명했다.
단여명은 주의를 환기하고자 맞은편에 앉은 두 사람을 살폈다. 윤재윤은 급격히 피곤해진 낯으로 마른세수했고, 권호영은 관심 없다는 얼굴로 조용히 맥주를 마시는 중이었다.
그러던 중, 윤재윤과 우연히 눈이 마주쳤다. 그는 손으로 원을 그리곤 사과를 쪼개는 듯한 모션을 취했다. 인원이 많아졌으니 술값을 N 분의 1 하자는 소리로 보였다. 단여명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렇게 할 거였으면 애초에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다.
“아니, 아니지! 안 취할 거면 술을 왜 마시는데! 도수가 약한 게 술이야?”
곧 술의 종류를 정하는 열띤 토론이 벌어졌다. 단여명은 여자애들의 눈길이 쏠릴 때마다 다 좋다는 듯 선량하게 웃었다. 머릿속으론 그와 반대되는 생각을 하며.
술…… 솔직히 좀 지겹다. 김선오와 다시 만나기 시작했을 때부터 일주일에 근 세 번은 마셨다. 권호영과 대판 싸운 뒤에는 매일같이 마셨고.
담배를 끊지 못하면 술이라도 덜 마셔야 하는데. 누구 말대로 안 좋은 병에 일찍 걸리게 생겼다.
‘쟤만 납치해서 빼돌릴 수도 없고.’
단여명은 그 누구의 얼굴을 훔쳐봤다. 권호영은 윤재윤과 무어라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사람이 많아져 아까처럼 눈 마주칠 기회는 물 건너간 거라고 봐도 좋았다.
단여명은 눈을 지그시 감고는 가벼운 한숨을 내쉬었다. 동생들 사이에 껴서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었다. 권호영의 손을 붙잡고 도망치고 싶은데, 그러기엔 보는 눈이 많았다. 그가 제 손을 순순히 잡아 줄지도 의문이었고.
“죄송해요. 저희가 좀 취해서. 목소리가 좀 크죠?”
멍하니 생각하던 도중 옆에 앉아 있던 남자애가 말을 붙였다. 자신의 옆모습에서 약간의 피로를 읽은 모양이었다. 잠시 숨 돌릴 틈이 없다. 단여명은 아니라며 애써 고개를 저었다.
“활기차고 좋은데요. 저도 이런 분위기는 오랜만이라서 반갑고 그래요.”
“처음부터 그랬던 건 아니고, 여기 온다고 했을 때부터 텐션이 확 변했어요. 저 둘이.”
남자애가 대각선과 옆쪽을 차례로 눈짓했다. 여전히 술의 종류로 옥신각신하는 중인 여자애들이 앉은 자리였다.
“근데 와 보니까 번쩍번쩍한 남자가 둘이네. 강제로 쩌리 되는 사람 섭섭하게.”
그리 투덜대는 남자도 제법 호감형의 얼굴이었다. 아직 애티가 났지만, 입매가 시원스럽게 트여 호쾌한 인상을 줬다.
“아, 전 강민준이라고 해요. 형이라고 불러도 돼요?”
“아, 네. 편하게 부르세요.”
“말 놓으세요, 형. 제가 훨씬 어린데. 얼굴은 이래도 파릇파릇한 스무 살이거든요.”
단여명은 알았다며 대강 고갯짓했다. 오늘만 말을 놓기로 한 사람이 벌써 두 명째였다. 그에 옅은 피로감이 또다시 뒷골을 조였다. 누군가 제 뒤통수에 빨대를 꽂고 생기를 쭉쭉 빨아먹는 기분이었다.
“야, 권호영. 이제 보니까 아주 건방져. 누나가 왔는데 왜 뜨뜻미지근한 반응이야?”
주문을 마친 민들레가 권호영에게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게 그쯤이었다. 작은 손이 핏줄이 오른 탄탄한 팔목을 감쌌다. 그에 시선이 절로 따라붙은 것은 불가항력이었다.
“그러게 왜 왔어요. 집에 가지.”
단여명은 내심 놀란 눈으로 권호영을 바라보았다. 저런 말도 할 줄 아는구나. 새삼 그가 낯설게 보였다. 제 앞에선 편하게 말해도 저런 식으로 말하지 않았다. 가끔 오기가 발동해 서로를 도발할 때도 있었지만, 그도 잠시에 그쳤다.
눈치를 살피고, 부끄러움을 꾹 눌러 삭이고, 어렴풋한 웃음을 짓고. 봄을 닮은 말투와 행동에 제 마음에도 살랑살랑 바람이 일고는 했다.
“우리 호영이! 요즘 우울해 보이길래 누나가 달래 주려고 왔지!”
매정한 투에 굴하지 않은 민들레가 권호영의 볼을 손으로 콱 집었다.
“볼도 핼쑥하고, 눈 밑도 퀭하고. 속상해서 내 속이 남아나질 않아.”
“놔요. 술 냄새 나요.”
권호영은 싫은 소리만 했지, 그 손을 쳐내지 않았다. 흡사 취객을 상대하는 직원 같은 태도였다.
생각보다 많이 친하구나. 그런 생각이 드는 한편,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저 뺨은 제가 손가락으로 자주 건드리던 곳이었다. 그럼 권호영은 하던 말을 멈추고, 몸을 딱딱하게 경직시켰다. 귓바퀴를 붉히고, 눈동자를 떨었다. 입술의 틈새가 얼마나 벌어졌는지도 아직까지 똑똑히 기억한다.
“아, 얘는 권호영. 스무 살. 화난 거 아니고, 원래 좀 과묵한 편이야.”
볼을 꼬집던 손은 이제 권호영의 어깨에 올라가 있었다. 굳이 만질 필요는 없을 텐데. 권호영이 입이 없는 것도 아니고, 나서서 대신 소개해 줄 필요도 없을 텐데.
“어? 나랑 동갑? 에라이, 형 누나 관심 좀 독차지하나 했는…….”
“둘이 엄청 친한가 봐요.”
민들레가 동그란 눈으로 ‘네?’ 하고 반문했다. 강민준과 대화하던 도중 갑작스레 끼어들어 당황한 눈치였다. 단여명은 웃는 얼굴로 매끄럽게 설명했다.
“아니, 스킨십에 격이 없다 싶어서요. 저랑 같이 살 땐 그렇지 않았거든요.”
맞은편에서 뚫을 듯한 시선을 보내오는 것이 느껴졌다. 그에 굳이 눈길을 주진 않았다.
“형이라서 그런가. 좀 서운한데.”
열은 손끝에서부터 번졌다. 고무줄로 칭칭 동여매 피가 통하지 않듯 열 손가락 끝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머리가 과하게 흥분했다는 신호를 보냈다. 그러나 몸은 냉정한 판단에 따라 주지 않았다. 급상승한 심박수가 눈앞에 아지랑이를 피웠다.
쳐내는 시늉이라도 해야지, 호영아. 하다못해 불편해하는 티라도 내야지. 다른 때면 몰라도 지금은 내가 네 앞에 있잖아.
“에이, 오빠! 이상한 오해 하는 거 아니죠? 권호영 얘가 좀 막냇동생 같잖아요. 귀염성이라곤 하나도 없지만.”
“알죠. 막냇동생 같은 거.”
단여명은 테이블 위에 올린 팔꿈치를 끌어와 팔짱을 꼈다.
“그래서 많이 챙겨 줬고.”
안 그러면 몸의 중심이 무너질 것 같았다.
“애초에 얘 여자한테 관심도 없어요. 완전 범생이 스타일. 아마 직장 다니면 일 중독으로 회사에 정평이 날걸요?”
밝은 목소리로 떠드는 민들레는 순진한 낯이었다. 아무런 악의도, 흑심도 없는 얼굴.
“아, 여자 하니까 생각난 건데, 웃긴 썰 말해 줄까요?”
그래서 그런 것일까. 그녀는 곧 알고 싶지 않았던 얘기를 떠들었다.
“얘가 인상이 막 순하지는 않잖아요. 그래서 저희 과 사람들도 말 붙이기 좀 어려워한단 말이죠?”
“…누나.”
그쯤 권호영이 민들레를 저지했다. 제 심기가 좋지 않다는 걸 알아챈 건지, 아니면 여자 얘기에 지레 뜨끔한 건지 모를 반응이었다.
“그런데 저번에 얘한테 완전 들이댔던 여자애가 있었어요. 머리끈 가지고 그랬나?”
민들레는 그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 같았다. 윤재윤처럼 막 대하는 사이는 아닌지 권호영은 그녀의 팔목을 손으로 잡기만 했다. 그걸 지켜보는 사람의 속이 더욱 까맣게 타들어 가는 줄도 모르고.
“막 말도 안 되는 걸로 같이 밥 먹자고 하는데 얘가 하나도 눈치 못 채고, ‘하나 사 줄게’ 이러더라니까요? 옆에서 보는 사람은 그런 재미난 구경도 없죠.”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어떻게 웃는지도 모르고 그냥 웃었다. 하나도 궁금하지 않은 얘기를 묻는 입술이 제 것 같지 않았다.
쓸데없는 감정 소모. 타인의 감정은 타인의 것. 그리 되뇌어 봤지만, 혈류를 타고 온몸에 퍼진 열기는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알바도 같이 했다던데, 들리는 얘기가 없는 걸 보니까 그대로 쫑 났나 봐요. 귀여운 커플이 탄생하나 했는데.”
귀여운 커플. 그 얘기를 듣자마자 머릿속에 한 폭의 그림이 펼쳐졌다.
“개인적으로 좀 아쉬워요. 둘이 잘 어울릴 것 같았는데.”
행복하게 웃는 권호영. 그리고 그 옆에 선 사람은 제가 아니라, 얼굴 모르는 여자였다.
“……그러게요.”
한동안 침묵하던 단여명은 겨우 그 한마디를 입 밖으로 밀어냈다. 노력에 비해 조촐한 대답이 아닐 수 없지만, 그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차라리 그랬으면 둘 다 어려운 상황을 겪지 않아도 됐을까. 그 생각에 목이 꽉 멨다.
“어! 음식 나왔다!”
지금껏 권호영이 저 하나밖에 모르는 듯 굴어서 착각하고 있었다.
“자, 인증샷 타임 있겠습니다. 다들 길을 열어 주세요.”
집이라는 공간 속, 둘만의 세계에 빠져 살아서 너무 당연한 사실을 자각하지 못했다.
“뭐야, 강민준. 안 그런 척하더니, 가만 보면 인그램 제일 열심히 해.”
권호영은 제 것이 아니다. 남의 것이 될 수도 있다. 모르는 여자애가 관심을 보일 수도, 다른 사람과 스킨십할 수도 있다. 그에 그가 제 눈치를 덜 살필 수도 있다. 그야 어느 연인들이 흔하게 할, 좋아한다는 얘기조차 한번 오간 적이 없었으니까.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권호영과 같이 아르바이트한다는 여자애의 얘기를 들었을 때도 그랬다. 주고받은 눈빛과 애정 어린 입맞춤, 목소리를 타고 전해지는 것이 있었다. 그러니 불안하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은… 그 고백 한번 듣지 못한 게, 고작 한 번을 말해 주지 못한 게 크나큰 설움이 됐다. 그 좋아한다는 말 한마디가 뭐라고 자신들 사이에 경계선을 명확히 긋는 것 같았다. 그래서 누군가가 관심을 보이고, 누군가와 가볍게 신체를 접촉했다는, 별거 아닌 일마저 견딜 수 없이 불안해졌다.
짜증이 났다. 혼자 이런 생각 하는 게 삽질하는 것과 다름없다는 것쯤은 알았다. 그런데, 정말 기분이…….
“형, 어디 가시게요?”
지금 음식 나왔는데. 강민준이 의아한 눈을 보였다.
“잠깐 화장실 좀. 금방 올게.”
자리에서 일어난 단여명은 뒤를 돌아 걸었다. 직원에게 화장실의 위치를 묻고, 밖으로 통하는 문을 열었다.
화장실은 건물 복도 끝에 있었다. 코너를 돌자 화장실의 푯말이 보였다. 피부를 감싼 공기는 선선했고, 손바닥으로 잡은 화장실의 문고리는 차가웠다. 그럼에도 명료한 정신이 되찾아지지 않았다.
“…….”
단여명은 문고리를 잡은 채 그대로 제자리에 못 박혔다. 다리가, 손이,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강렬한 충동이 머릿속을 뒤흔들었다.
뒤돌아서 뛰어. 남들 눈치 보지 말고 데리고 나와. 그게 뭐가 어렵다고, 그게 뭐가 그렇게 힘들다고 질질 끌어.
단여명은 본능을 따랐다. 바닥을 박차고, 걸어왔던 길을 뛰어서 되돌아갔다. 어두컴컴한 벤치에 우두커니 남았을 뒷모습이 잔상처럼 망막에 맺혔다. 벌겋게 충혈된 눈이, 밤새 받지 않는 전화를 발신했을 손이, 거칠어진 피부와 메마른 뺨이 불붙은 심지처럼 뇌리 곳곳을 타고 번졌다.
복도를 내달려 코너를 돌던 순간, 무언가와 몸이 세게 부딪쳤다. 그 무언가가 사람이라고 인식할 새는 없었다. 뒤로 튕겨 나갈 뻔한 몸이 불쑥 앞으로 당겨졌다. 어깨와 허리가 강한 힘으로 붙들렸다. 흔들린 시야를 바로잡자 바로 눈앞에 사람의 얼굴이 보였다.
“…….”
“…….”
…권호영이었다.
둘은 놀란 얼굴로 서로를 보았다. 두 사람 다 급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씨근덕대는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권호영의 옷은 엉망이 돼 있었다. 상을 박차고 나왔는지 하얬던 티는 빨간 국물과 노란 맥주로 군데군데 물들어 있었다.
그는 많은 말을 쏟아낼 것 같은 얼굴이었지만, 쉽사리 입을 떼지 못했다. 입술을 닫았다가 여는 사이에도 시선은 한곳에 머물렀다. 밤색 눈동자에 비친 상대도 그와 비슷한 표정이었다. 간신히 눌러 삼키고 있던 감정이 밖으로 출렁출렁 넘쳐흘렀다.
잠시 망설이던 권호영이 단여명의 몸을 살며시 놓아주었다. 단여명은 멀어지는 손을 덥석 붙잡았다.
“가자.”
본능이 이끈 행동은 곧 말로 직결됐다.
“나랑 같이 나가자.”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그럼에도 일직선으로 뻗어나간 눈길은 잠깐의 흔들림조차 없었다. 깊은 우물물 같은 눈동자 속에 수선한 얼굴이 담겼다. 어두컴컴한 한밤에 작게 떠오른 얼굴은 곧 입가에 움푹한 힘을 실었다.
“…가요.”
권호영이 손목을 돌려 단여명의 손을 굳게 마주 잡았다.
***
한 사람과 한 사람이 갈라섰다고 해서 세상은 무너지지 않는다. 그러나 한 사람이 삶의 전부였던 사람은 그 사람의 빈자리를 체감하는 것만으로도 무너진 세상을 보기에 충분했다.
근 일주일 반 동안 권호영의 기억은 대부분 정확하지 않았다. 뭘 먹었는지 쉽게 기억하지 못했고, 칫솔을 들고 있을 때노라면 방금 양치질을 했는지, 하려던 참이었는지조차 구분하지 못했다. 스스로도 심각하다고 생각했지만, 그를 바로잡을 방법을 몰랐다. 눈은 어둠을 담았고, 귀는 바깥 소리를 차단했다. 손은 뭘 잡고 있는지 분간하지 못했고, 발은 기억된 장소로 움직였다.
한 번 소중한 사람에게 내쳐졌을 때보다 후폭풍이 거셌다. 아마 그건 애증이 아닌, 순수한 사랑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난 단여명이라고 해.’
소중한 것은 어느새 더 소중한 것에 묻혀버렸다.
‘아, 이름이 호영이야?’
여자 목소리였던 환청은 남자의 것으로 바뀌어 있었다.
‘발음 귀엽다. 호영이. 둥글둥글… 하고.’
그 목소리는 끊임없이 자신을 괴롭혔으며.
‘그냥 보고 싶다고 해.’
밤이면 베갯잇을 적시게 했다.
윤재윤에게 더는 폐 끼치기 싫어 급하게 방을 구했다. 아무 방이나 구한 거라며 속으로 변명했지만, 결국 단여명이 사는 오피스텔 근처였다. 창문을 열어놓고, 그 방향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노라면 좋았던 기억이 떠오르기도 했고, 마지막 순간이 눈에 밟히기도 했다.
차라리 잘됐다. 그렇게 쉼 없이 자기 위로를 했다. 단여명이 병든 가지를 잘라내기 전에, 지겹다는 얼굴로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쉬기 전에. 네가 그런 부모 밑에서 자라 거머리처럼 구는구나. 그런 말을 뱉기 전에.
권호영은 자신이 애착이 심한 편이란 걸 알았다. 한번 정을 붙인 상대의 눈에 들기 위해선 무슨 짓이라도 할 수 있었다. 노력은 배신하지 않는다. 뭐든 공들이면 좋은 결과가 따라오기 마련이다.
그런데 이번엔 진짜 사랑이라서 그런 걸까. 감정이란 아무리 노력해도 입안의 혀처럼 뜻대로 따라주지 않았다. 생각을 깊게 하지 못하게 만들었고, 충동적으로 몸을 움직이게 했으며 눈앞을 꺼멓게 죽게 했다.
그에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밤새 전화를 걸었고, 김선오를 얼마나 끔찍하게 생각하는 줄 알면서 그의 이름을 거론했다. 제가 넘긴 기회가 혹여나 미련으로 탈바꿈했을까 봐. 밤새 혼자 마음을 졸였다는, 일방적이고 이기적인 이유로.
아픈 곳을 찔린 권호영은 꼴사납게 도망쳤다. 그리고 비로소 혼자 남겨진 뒤에야 단여명의 말을 뼛속 깊이 이해했다. 제가 제 입으로 말했어야 했다고 호소하던 목소리가 가슴을 아프게 두들겼다.
누구에게 귀띔받았는지야 뻔했다. 그의 어머니겠지.
단여명이 어디까지 아는지, 그 얘기를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무서워 권호영은 듣지 않는 것을 택했다. 단여명이 무슨 반응을 보일지 몰라 두려웠고, 밝히고 싶지 않았던 부분이 타의에 의해 까발려져 창피했다.
김선오에게 붙들려 있던 걸 왜 말하지 않았느냐고 물었었다. 돌이켜 보면 자신은 그를 탓할 자격조차 없었다. 평생을 소극적인 태도로 움츠러들어 있었으니까. 어머니에게 꼼짝을 못하고 살았고, 그 사실을 줄곧 단여명에게 말하지 않았다.
단여명이 절실하게 필요했음에도 권호영은 그를 찾아가지 못했다. 제 입으로 자신의 결함을 고백할 용기가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버지란 사람은 자식을 버리고 사업을 택했다고. 그런 아버지에게 어머니는 돈을 쥐여 주고, 제게 만남이란 보상을 내렸다고.
성적이 조금이라도 삐끗한 날엔 어머니의 눈길 한번 받을 수 없었으며 혼자 상을 차리고, 혼자 상을 치웠다고. 억울한 마음에 한 번 반박했다가 눈밭에서 한참 잘못을 빌었다고. 버려질까 봐 무서워하면서도 계속 애정을 갈구하며 살았다고.
그리고 그게 이젠 당신이 된 것 같다고. 내가 조금 덜떨어진 인간일 수 있지만, 잘할 테니, 제발 받아 주면 안 되냐고.
‘…말이 되나.’
단여명의 앞에서 긴 얘기를 주절주절 늘어놓을 걸 상상할 때마다 권호영은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차라리 몰랐을 때면 말하기 수월했을 것이다. 좀 더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 자신이 하자가 있는 인간이란 걸 밝혔을 테다. 그런데 남의 입을 통해 제 얘기를 들었다고 생각하니 겁부터 났다.
‘좀 시간을 두고, 네가 무슨 마음인지, 그게 어떤 감정인지 천천히 생각해 보라고.’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 것 같아서.
단여명은 그만하자는 얘기를 쉽게 했다. 그가 직접 쉽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권호영은 상상도 못 할, 홧김이라도 뱉지 못할 말을 아주 쉽게 말이다. 그게 자신의 가치가 딱 그 정도까지 라는 걸 보여주는 듯했다. 그 상태에서 과거의 일을 말해 봤자 좋게 봐줄 것 같지 않았다.
불쌍하긴 한데, 너 좀 이상한 건 알지? 긴 얘기 끝에 그런 말을 할까 봐. 마음이 약한 단여명이 차마 입으로 내뱉진 못해도, 속으로나마 그런 생각을 할까 봐.
‘나는… 확신이 있으면 그러지 않았을 것 같거든.’
단여명은 모르겠지만, 권호영에겐 확신이 있었다. 이건 사랑이 맞았다. 그게 아니라면 지금껏 지켜왔던 삶의 전부가 무너지지도, 매일 밤 그가 보고 싶어서 문을 박차고 나갔다가 들어오길 반복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사랑이란 감정은 틀릴 게 없다. 그런데 그 사랑을 느끼는 사람이 문제가 됐다. 권호영이란 하자가 있는 사람이 사랑이란 감정을 깨달아버려서 하자가 있는 사랑으로 상대를 지치게 할까 봐. 그리고 끝내 그 사람을 영원히 잃을까 봐.
모든 걸 고백한다고 치자. 그래도 자신은 똑같이 불안해할 것이고, 단여명이 만나는 사람 하나하나에 예민하게 반응할 것이다. 끊임없이 단여명을 시험할 것이고, 계속 사랑을 확인받고 싶어 할 것이다.
그러니 자연히 그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자신은 단여명이 곁에 있어서 행복하다. 그럼 반대로 권호영의 곁에 남을 단여명은 과연 행복할까?
홀로 서지 못하는 스스로가 싫어 단여명이 없었던 때로 돌아가 보려는 노력도 해봤다. 집 안에선 비루할지 몰라도 밖에선 깔끔하게 다니려고 노력했다. 옷도 새로 샀다. 언뜻 미국에 있을 때와 비슷해진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약간이라도 만족했느냐면, 대답은 ‘아니오’였다.
처음엔 본래 모습을 되찾은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국 모든 것은 단여명에 대한 미련이었다.
내면이 썩어 문드러졌으면 내세울 게 외관밖에 없었으니까. 언제 한번 김선오의 겉모습을 떠올리다가 머리를 정리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처럼. 어머니의 관심을 받고자 완벽을 유지했던 것처럼 언젠가 재회의 순간이 올 때 단여명의 눈길을 한 번 더 이끌기 위한 발악이었다.
이러면 형이 좀 더 좋아해 줬을까. 자신을 버리겠다는 말을 쉽게 하지 못했을까. 제가 좀 더 멋지고, 의연하고, 버팀목이 되는 사람이었다면 좀 달라졌을까.
방에서 담배 냄새가 난다는 민원이 들어왔다. 권호영은 집으로 찾아온 집주인에게 고개 숙여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전날에 사과해 놓고, 다음 날이면 또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하고.
사랑이라는 감정이 참 야속했다. 건강한 사랑을 하는 사람은 어떻게 말하고 행동하는지 본보기가 있으면 그를 베끼고 싶었다. 제 인생은 어떻게 죄다 이 꼴인가, 하며 자괴감에 시달렸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김선오를 때려눕히고, 그냥 다 망쳐버릴 걸 그랬다는 후회도 삼켰다.
그런 상태로 권호영은 기말고사를 치렀다. 시험지에 뭐라 끄적였던 것 같은데 잘 생각이 안 났다. 평생 성적에 연연하며 살았는데 이젠 다 무슨 소용인가 싶었다. 단여명이 옆에 없는데.
어머니의 말대로 한국에 와서 깨달은 점이 많았다. 어머니를 버리고 사랑을 배웠고, 그에 대한 아픔 때문에 미래에 대한 집념을 버렸다. 그래서 뭐가 남았나. 스스로에게 그런 물음을 던져 봤지만, 나오는 해답은 없었다. 해답이라고 생각한 사람이 옆에 남지 않았기에.
전화는 딱 한 번 걸어 봤다. 단여명도 자신처럼 잠을 못 이루지 않을까. 일상생활이 제대로 안 되지 않을까. 그래도 가까웠던 사이니, 제 빈자리로 자신처럼 아파하지 않을까.
그러나 단여명의 전화기는 꺼져 있었다. 차라리 연결음이 가던 때가 나았다. 전화를 걸자마자 희망이라는 싹이 잘려 나갔으니까.
그리고 전화를 건 다음 날, 단여명을 보았다. 이렇게 버티다가 대뜸 그의 집으로 찾아가 무작정 잘못을 빌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떨치지 못하던 차였다.
멀리서도 알아볼 수 있었다. 모자를 푹 눌러 쓰고, 평소 외출할 때와 달리 남의 눈을 전혀 의식하지 않은 차림새였으나, 분명 단여명이 맞았다. 걸음걸이와 체구, 특유의 분위기가 단여명이 맞다는 확신에 힘을 실어줬다.
거리가 가까워지고 고개를 돌린 순간 눈이 마주쳤다. 서로를 알아봤다는 직감이 섬뜩하도록 느껴졌다. 전기가 통한 것처럼 온몸이 찌릿 달아오름과 동시에 권호영은 서둘러 시선을 갈무리했다.
같은 동네에 사니 우연이라도 마주쳤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매일같이 품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를 마주치니 온갖 부정적인 생각이 밀려와 겁부터 났다. 좋았던 때로 돌아가려면 하지 못한 얘기를 그의 앞에서 풀어가야 했다. 그에 대해 여전히 자신이 없었으며 그 과정에서 또 싸움이 번질까, 주저됐다. 더는 단여명과 싸우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차라리 잘됐다며 스스로 문을 박차고 나온 것치곤 이사한 집이 그의 집 근처였다. 말과 행동이 과히 모순적이어서 당당하게 눈을 마주칠 수 없었다. 다 끝난 사이에 몰래 스토킹한 것과 동격이었다. 그걸 안 단여명이 기분 나빠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도 끓었다.
‘잡아서 뭐라고 말할 건데.’
권호영은 두 주먹을 말았다. 그를 붙잡고 싶었으나, 여기서 잡아 봤자 구차하게 매달리는 방법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떼를 쓰듯 넘어가면 안 될 일이란 걸 알았다. 그럼에도 무작정 빌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그리 다섯 발짝 남짓 거리가 좁혀졌을까.
‘잡아야 돼.’
충동적인 생각이 빨라진 맥박 소리에 맞춰 머리를 쿵쿵 울렸다. 앞일은 생각하지 말고 일단 잡아야 한다. 지금 여기서 놓치면 또 언제 볼 수 있을지 모른다. 숨 좀 쉴 수 있게, 살아갈 수 있게 해 달라고 매달려야 한다.
그렇게 우뚝 걸음을 멈춘 찰나.
“어!”
윤재윤이 앞을 막아섰다.
“아…… 저 편의점…….”
…좋았다.
“편의점 가던 길이었어요. 여기 근처 살거든요.”
자신들 사이에 풀어야 할 얘기는 고사하고, 그냥 단여명이 눈앞에 있는 게 너무 좋았다. 윤재윤이 끼어들어 말 걸기 애매해졌다는 것도 그냥 다 괜찮았다.
창피하게도 눈시울이 시큰거렸다. 진짜 형이다. 진짜 단여명이다. 그런 생각에 숨이 가빠졌다. 안고 싶고, 키스하고 싶고, 보고 싶었다는 얘기를 되는대로 쏟아내고 싶었다.
그러나 권호영은 안간힘을 써 욕망을 눌렀다. 도망친 주제에 빤히 쳐다보면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곁눈질로만 훔쳐봤다. 이사 얘기가 나왔을 때 눈이 정통으로 부딪혔지만, 권호영은 또 한 번의 위기를 가까스로 모면했다.
이상하게 보이면 안 돼. 멀쩡한 사람처럼 보여야 해. 지금 달려들었다간 남의 눈을 신경 쓰는 단여명이 분명 싫어할 거야. 그런 말을 속으로 되새김질하며.
그러다 보니 얼결에 정말 모르는 체하게 됐다. 단여명을 만난 내내 윤재윤은 쉬지 않고 입을 놀려 그에게 말 걸 타이밍을 주지 않았다.
“그럼 뷔페식으로 먹고 싶은 거 다 시키세요. 남겨도 괜찮으니까.”
단여명은 까만 캡 모자를 쓰고 있었다. 까만색 티에 허벅지 중간까지 오는 까만 반바지, 그리고 하얀 발가락이 도드라지는 까만 쪼리.
권호영은 단여명의 시선이 딴 곳을 향할 때마다 그를 집요하게 관찰했다. 저렇게 입으니까 자신들과 똑같이 시험을 치르고 나온 대학생 같았다.
“정말요. 몰골이 이래서 못 뜯어먹겠어요?”
권호영은 말갛게 웃는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그냥 다 잘못했다고 말하면 받아 주지 않을까. 단여명은 자신이 무르게 굴면 똑같이 물러지고는 했다. 일단 받아달라고 사정한 뒤에 뒷일은 그때 가서 생각할까.
단여명이 애 취급하던 걸 그리 싫어해 놓고 애처럼 생각하고 있었다. 장난감을 사 달라고 떼쓰는 어린아이와 다를 게 없었다.
“저도 형이라고 불러도 되죠?”
그리고 어느 순간 들린 윤재윤의 목소리에 물을 쏟아버렸다. 고의가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잘 생각해 보면 고의가 맞았다.
“…닦아. 젖었잖아.”
싫었다.
“무슨 좋은 얘기라고 말해요.”
그가 또 쓸데없는 걱정을 할까 봐 윤재윤을 말리려는데, 기분이 참을 수 없이 불쾌해져 그만 뾰족한 말을 던지고 말았다.
“글쎄. 재윤이 너 나 못 이길걸.”
자신을 부르던 호칭으로 남을 부르는 게 싫었고.
“오빠, 두 번째 만남에 실례지만, 연예인 할 생각 없어요?”
단여명이 다른 사람의 관심을 받는 것도 싫었으며.
“아, 전 강민준이라고 해요. 형이라고 불러도 돼요?”
나는 형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단 한 사람인데, 그는 형이라고 부르는 사람이 많아서 싫었다.
자리를 지키는 내내 신경이 뾰족하게 곤두섰다. 단여명이 눈에 보이는 곳에 있어서 좋았다. 물 밖으로 건져진 사람처럼 드디어 숨통이 트이는 듯했다.
그렇지만 그의 눈이 제게서 떨어지는 건 견디기 힘들었다. 뺨을 붙잡고 대뜸 입을 맞추고 싶었다. 단여명의 관심을 제게 끌어오는 것과 동시에 그에게 향하는 모든 이목을 차단하고 싶었다.
단여명은 동석한 이후로 아닌 척 자신의 눈치를 살폈다. 그런데 다른 이가 말을 걸 때면 그런 기색이 거짓말처럼 씻겨 나갔다. 남에게 잘 웃어 줬고, 농담을 잘 받아 줬으며 별거 아닌 말도 특별한 얘기를 듣는 것처럼 귀 기울였다.
그 모습을 보는 것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고 싶을 만큼 힘들었지만, 단여명이 자리를 뜨지 않았기에 자신 역시도 참았다.
“둘이 엄청 친한가 봐요.”
그 뒤로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아니, 스킨십에 격이 없다 싶어서요. 저랑 같이 살 땐 그렇지 않았거든요.”
대화 중간에 불쑥 끼어든 목소리는 서늘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민들레의 말을 적당히 받아 주던 때였다.
권호영은 단여명을 뚫을 듯이 직시했다. 저게 무슨 말인가 싶었다. 민들레를 갖다 붙이지 못할 만큼 자신들은 특별한 시간을 보냈다. 같은 이부자리에서 살을 맞댄 채 밤을 보내고 아침을 맞았다. 저 몸 어디를 만져야지 달뜬 숨을 내쉬는지, 저 몸에서 나온 체액이 어떤 맛이 나는지. 남들이 알지 못할 비밀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다.
“에이, 오빠! 이상한 오해 하는 거 아니죠? 권호영 얘가 좀 막냇동생 같잖아요. 귀염성이라곤 하나도 없지만.”
“알죠. 막냇동생 같은 거.”
정석적인 웃음을 짓고 있지만, 단여명의 표정은 좋지 못했다.
“그래서 많이 챙겨 줬고.”
그땐 그의 표정 변화에 이상함을 느끼지 못했다. 막냇동생 같았다는 이유로 챙겨 줬다는 말이 귀에 뾰족이 박혀 심장이 쿵 떨어졌다.
딱 그뿐이었다는 걸 모르지 않았는데. 과거의 일이 현재 자신들의 상황과 겹쳐 생각됐다. 너는 딱 거기까지였다고. 네가 혼자 착각하고, 일방적으로 기대한 것이라고.
“아, 여자 하니까 생각난 건데, 웃긴 썰 말해 줄까요?”
아마 민들레가 대화를 이끌지 않았다면 계속 그렇게 착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저번에 얘한테 완전 들이댔던 여자애가 있었어요. 머리끈 가지고 그랬나?”
처음엔 그녀를 말렸다. 기분이 가라앉아 보이는 단여명을 더는 자극하지 않았으면 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권호영은 알았다. 단여명은 정말 기분이 좋을 때면 저렇게 웃지 않는다. 지금 보면, 입은 웃고 있어도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막 말도 안 되는 걸로 같이 밥 먹자고 하는데 얘가 하나도 눈치 못 채고, ‘하나 사 줄게’ 이러더라니까요?”
그런데 계속 보다 보니 하나둘씩 이상한 게 보였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형……. 혹시 질투해요?
“알바도 같이 했다는데, 들리는 얘기가 없는 걸 보니까 그대로 쫑 났나 봐요.”
형, 지금 질투하잖아. 맞죠.
“……그러게요.”
곧 혼잣말과 비슷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단여명의 낯엔 심란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좌절감과 불안함, 그리고 손에 쥐고 있던 무언가를 갑작스레 놓친 사람처럼 묘한 허탈감도 엿보였다.
그에 권호영은 기민하게 눈치챘다. 단여명은 누군가가 제게 관심을 보였다는 이유로 불쾌해하는 중이라고.
그러면 안 되는데도 권호영은 그 얼굴을 보며 기뻐했다. 시무룩해진 단여명이 바보 같고 좀 귀여워 보였다. 제가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 줄 알면 절대 그런 생각은 하지 못할 텐데. 내가 이 자리에서 관심 있는 건 오로지 당신밖에 없는데.
“잠깐 화장실 좀. 금방 올게.”
이윽고 단여명이 옆 사람에게 귀띔했다. 그리고 의자를 뒤로 끌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권호영은 방금까지의 기쁨이 거짓말처럼 당황 어린 눈을 보였다. 단여명은 남들의 시선을 중요시했다. 예의 차리는 것도 중요하게 여겼다. 그래서 흡연 욕구가 들어 간간이 손끝을 까딱였어도 분위기가 깨질까, 저어하여 섣불리 자리를 비우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그는 모든 걸 저버리고, 황급히 밖으로 나가려는 낌새를 보였다.
권호영은 단여명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단여명은 수심이 짙은 얼굴이었다. 습관적으로 보이던 미소도 지운 채 속눈썹을 내리깐 채였다. 그리고 이쪽에 눈길 한번 주지 않고, 그대로 밖으로 나가버렸다.
단여명이 눈앞에서 사라지니 극도의 불안감이 차올랐다. 스스로도 놀랄 정도로 빠른 감정 변화였다.
단여명이 자신 때문에 기분이 상했다는 것에 들떠 단순한 원리를 잊고 있었다. 단여명은 권호영을 쉽게 버릴 수 있었고, 권호영은 단여명을 절대 버리지 못한다.
형이 이대로 집에 가버린다면? 지금은 불쾌하지만, 이 감정은 잠시뿐이고, 저를 다른 사람에게 넘겨줘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면? 저 얘기를 듣고 마음을 접어버리면…….
“꺅!”
“야, 씨! 권호영!”
무릎에 치인 테이블이 덜컥이며 흔들렸다. 앞접시와 맥주잔이 엎어져 옷이 얼룩덜룩하게 젖었다. 윤재윤이 큰소리로 고함쳤으며 몇은 놀란 듯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하지만 권호영은 그 어떤 것도 안중에 두지 않았다.
“죄송해요. 좀 취해서.”
잡아야 한다. 그가 집에 가기 전에, 더 늦기 전에. 여기서 더 멀어지기 전에.
“저 잠깐, 바람 좀 쐬고 올게요.”
권호영은 자리를 박차고 급히 단여명을 뒤쫓았다. 당겨야 될 문을 밀어 유리가 덜컹거리며 부서질 것처럼 흔들렸다. 손을 허둥대던 권호영은 문을 거칠게 열어 당겼다.
다시 만난 뒤부터 줄곧 모르는 척했다. 일부러 말 한마디도 붙이지 않았다. 그랬으면 이젠 정말 남이라는 뜻으로 곡해해도 이상할 게 없었다.
그게 아닌데. 얘기하다가 책임감 없이 도망친 게 창피했고, 선입견을 품고 있을 게 뻔한 상태에서 과거사를 말할 용기가 생기지 않았다. 순서가 잘못된 걸 아는데도 그에게 말을 걸면 보고 싶었다는 말이 먼저 튀어 나갈 것 같았다. 남들이 보든 말든 그리웠던 몸을 끌어안고, 형 없이 살아갈 자신이 없다며 그에게 부담을 안겨 줄 것 같았다.
그러면 안 되니까 꾹 참았다. 단여명에게 철부지가 아니라 의지가 될 수 있는, 멋진 어른처럼 보이고 싶었으니까.
얼마 뛰지도 않았는데 마음이 급해 숨이 헐떡이며 터졌다. 코너를 도는데 무언가 몸에 쿵 부딪혔다. 권호영은 누군지도 모르고 제게 부딪친 몸을 덥석 끌어안았다. 그리고 손에 감긴 감촉만으로 상대가 누군지 알아챘다.
밭은 숨을 몰아쉬고 있는 단여명의 얼굴이 보였다. 숨을 헐떡이고 있는 건 자신 역시도 같았다. 둘 다 어디론가 황급히 뛰어가던 모습이었다.
“…….”
권호영은 입술을 달싹였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서 되레 목이 막혔다.
보고 싶었어요. 형이 정말 보고 싶었어요. 형이 없는 삶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매일 밤 울었어요. 나이를 이만큼 먹고도 눈물이 났어요. 형이 애 취급 하는 걸 그렇게 싫어했는데 전 아직 어린 게 맞나 봐요. 이렇게 대책 없이 매달리고만 싶어요.
좋아해요. 정말 좋아해요. 제가 뭘 어떻게 해야지 당신이랑 완벽히 맞물릴 수 있을까요. 제가 어떻게 해야지 당신이 날 쉽게 놓지 못하게 만들까요….
“가자.”
전하지 못한 말이 혓바닥 위를 분별없이 나돌던 순간, 덥석 손이 붙잡혔다.
“나랑 같이 나가자.”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시선이 올곧이 부딪쳤다. 떨림이 섞인 목소리와 달리 단여명의 얼굴은 단단해 보였다.
그 얼굴이, 곧게 뻗은 눈길이 깜깜한 어둠 속에 내리비친 빛줄기처럼 느껴졌다. 문이 없는 독방에 갇혀 벽을 쾅쾅 두드리던 꿈의 한 장면이 스쳤다. 빛 한 줄기가 거둬지고, 또 다른 한 줄기의 빛이 들이비친다면, 그건 아마 가던 길을 되돌아온 모친이 아니라 단여명일 것이다.
턱이 잘게 떨렸다. 속에서 형언하지 못할 감정이 매섭도록 회오리쳐 시야가 양옆으로 흔들리는 느낌이었다. 모든 사물이 무너지는 듯한 착란 속에서 단여명의 얼굴만 뚜렷한 형태로 남아 있었다.
“…가요.”
권호영은 망설임 없이 단여명의 손을 맞잡았다. 그리고 그의 손을 이끌고 밖으로 나아갔다.
목적지를 정한 것도 아닌데 둘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집으로 가는 방향으로 걸었다. 조금 걷다가 권호영이 손을 놔줬고, 단여명은 그가 놔준 손을 자연스레 몸 옆에 뒀다. 맞은편에서 사람들이 떼거리로 몰려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조금 격정적이었던 분위기는 인파에 섞이자 약간 숙연해졌다. 권호영은 앞만 보며 걷다가도 힐긋 단여명을 살폈다. 그럼 단여명은 그와 어색하게 눈 맞춤하고 먼 곳을 쳐다봤다. 어디를 보는지 모를 시선 처리는 부자연스럽기 그지없었다.
뒤늦게 민망해져 단여명은 마른침만 넘겼다. 대뜸 한 말이 나랑 같이 나가자니. 무슨 드라마를 찍는 것도 아니고……. 머릿속에서 아까의 상황이 퍽 낭만적으로 각색돼 뺨에 열이 올랐다.
그리 말없이 어깨를 나란히 한 채 걷기만 하던 도중이었다. 권호영이 길가에 멈춰 서더니 잠깐 기다려달라고 얘기했다. 언젠가 그와 함께 들렀던 편의점 앞이었다.
“……이게 뭐야?”
까만 봉지가 부스럭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편의점에서 나온 권호영이 대뜸 앞에 내민 것이었다.
“…술 마셨잖아요.”
권호영의 얼굴은 약간 경직돼 있었다. 마주친 눈동자에서 미미한 긴장감이 읽혔다. 은은한 취기 때문인지 양 뺨엔 엷은 홍조가 번져 있었다. 그 모습이 퍽 부끄럼을 타는 사춘기 소년처럼 비쳤다.
단여명은 봉지를 받아 들었다. 그 안엔 아이스크림 하나가 담겨 있었다.
“바닐라 맛이네.”
뭐 대단한 걸 받은 것도 아닌데, 웃음이 났다.
“저번엔 못 먹었는데.”
지나가듯 흘렸던 얘기를 용케 기억하고 있구나, 해서.
권호영과 친해진 지 얼마 안 됐을 때였다. 그리 내켜 하지 않던 권호영에게 대뜸 아이스크림을 먹자고 제안했었다. 술을 마신 다음에는 필수로 먹어 줘야 한다면서.
그리고 봉지가 하얘서 바닐라 맛을 산다는 게 그만 요거트 맛을 샀다. 그때 권호영에게 잘못 샀다고 투덜댔더니 그는 아이스크림을 야금야금 베어 먹기만 했다. 맛만 좋은데요? 그리 말하는 듯한 표정으로.
그땐 자신들이 이런 사이가 될 줄 전혀 몰랐는데. 같이 걸었던 그 날 밤처럼 농담 따먹기나 하며 계속 사이좋게 지낼 줄 알았다. 그런데 그사이에 별의별 일이 다 있었다.
“네 건?”
봉지 안에 든 아이스크림은 하나였고, 권호영의 양손은 비어 있었다. 그게 마음에 걸려 물음을 건네니 권호영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자기는 괜찮다, 혹은 제 것은 챙길 생각은 못 했다는 눈치였다.
이번엔 단여명이 그에게 잠깐 기다리라고 말했다. 그리고 편의점에 들어가 권호영의 것을 사서 그의 손에 들려 줬다. 단여명의 것과 똑같은 바닐라 맛 아이스크림이었다.
둘은 아이스크림 봉지를 까 나란히 쓰레기통에 버렸다. 전에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귀가하던 밤처럼 분위기가 마냥 밝지는 못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할지 모를 얘기에 서로 말문을 쉬이 열지 못했고, 그렇다 보니 침묵만 쌓여갔다.
그렇지만 모든 감정 속에 기쁨이 가장 커다랗게 존재했다. 둘 다 삐걱삐걱 소리가 날 만큼 어색한 걸음을 옮겼지만, 함께 있다는 것만으로도 그간의 상실감이 말끔히 증발했다. 옆 사람의 존재가 시야에 뚜렷이 박힐 때마다 가슴이 불규칙적으로 뛰었다.
단여명은 아이스크림을 먹는 내내 옆을 훔쳐보았다. 권호영은 자기가 뭘 먹고 있는지 모르는 얼굴이었다. 그건 단여명도 같았다. 혀로 부드러운 단맛을 느끼는데, 눈으로 느껴지는 단맛이 더 강했다. 그래서 아이스크림의 맛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잘 지냈어?”
사람이 지나다니지 않는 길목에 접어들었을 때쯤, 단여명이 넌지시 물었다. 그 말이 뭐 별거라고, 권호영은 한참을 뜸 들였다.
그는 무언가 꾸역꾸역 억누르는 기색이었다. 음식을 잘못 먹어 당장이라도 뱉고 싶은데, 남의 눈을 의식해 입안에 두고 열심히 참아내는 사람처럼.
“…아니요.”
한참 뒤 권호영은 고작 한마디만 밀어냈다. 어렵사리 한 대답치고 다분히 짧았고, 더 긴 얘기가 나오진 않았지만, 기다림에 대한 허무는 없었다. 형이 없어서 잘 못 지냈다고. 긴장감이 여실히 도는 눈빛이, 뻣뻣한 표정과 말투가 그리 소리 없이 첨언했다.
“형은… 잘 지냈어요?”
목울대를 조심스레 울렁인 권호영이 되물었다.
“나도. 잘 못 지냈어.”
단여명이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을 돌려줬다. 그리고 권호영의 손에 손을 뻗었다. 손끝에 닿은 권호영의 손이 살짝 움츠러들었다. 단여명은 그를 힐끔 올려다보고 그의 손에서 다 먹은 아이스크림 막대기를 가져갔다. 그리고 길가에 있는 쓰레기통에 제 것과 함께 아이스크림 막대를 버렸다.
“…관심 없어요.”
그때 등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단여명은 고개를 돌렸다. 기다렸다는 듯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권호영과 눈이 딱 마주쳤다.
“그 여자애한테 관심 없다고요.”
못 알아들은 기미를 보이자 권호영이 좀 더 명확하게 말했다. 그에 단여명은 아까 전의 일을 복기했다. 민들레가 그에게 대시했다던, 여자애 얘기를 꺼냈던 때였다.
권호영의 낯엔 언뜻 결연한 빛이 떠올라 있었다. 아마 그때 자신의 표정이 안 좋았던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그렇게 표정 관리가 안 됐나. 그래도 웃는다고 열심히 웃었던 것 같은데.
“알아. 들레가 다 말해 주던데, 뭘.”
“그 누나랑도 안 친해요.”
“그건 아닌 것 같던데.”
단여명은 부러 장난스럽게 답했다. 기분 나빴던 건 맞는데 지금은 다 괜찮아졌다. 이렇게 같이 나와 줬으니까.
“네 입으로 친하다고 그랬잖아. 예전에.”
뭐라 더 변명하려던 권호영은 그 말에 입을 꾹 다물었다. 눈동자를 부자연스레 굴리는 모습이 거기까진 미처 생각 못 했다는 얼굴이었다. 단여명은 싱겁게 웃고 말았다. 제 기분이 상했다고 나름 수습하려는 모습이 귀엽게 느껴졌다. 그러나 지금 분위기에서 불쑥 귀엽다고 말하기엔 적절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대로 잠깐 침묵이 흘렀다. 적막 속에서 서로가 가진 복잡한 생각이 읽히는 듯했다. 좋았던 때로 돌아가려면 넘어야 할 산이 있다. 그걸 둘 다 자각하고 있어 대화가 계속 드문드문 끊겼다.
“이사했다며.”
작게 심호흡한 단여명이 차분한 음성으로 침묵을 깼다. 제 입으로 사실을 확인하려니 입맛이 썼다. 그래도 말은 하고 넘어가는 게 맞을 것 같았다.
시선을 돌리니 권호영은 뭐에 찔린 것처럼 뜨끔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부정하지 않는 걸 보아하니 이사한 게 정말 사실인 듯했다. 단여명은 괜찮다는 듯 웃었다. 이대로 가면 좋게 화해할 듯싶었으니. 그럼 나중에 다시 합치든 하면 될 문제였다.
“짐은 안 가져가?”
“…….”
“네가 나가고 싶다면 막을 권리는 없는데, 짐은 가지러 와.”
길 한복판에서 얘기를 나누기엔 누가 엿들을 위험성이 있다. 그러니 짐을 챙길 겸 잠깐 집에 올라가서 얘기 좀 하자고. 자연스러운 상황을 유도하고자 그리 밑밥을 깔았다.
하지만 권호영은 그 말을 달리 받아들였다. 손을 잡고 나랑 같이 가자고 할 땐 언제고 단여명은 이대로 각자 헤어질 사람처럼 말했다. 왜 이사했는지 묻지도 않았다. 언제 한번 들러서 편할 때 가지러 오라고. 언뜻 가벼워 보이는 표정을 짓고, 미련이 없는 투로 그리 말했다.
그 얼굴이 잠시 사그라들었던 불안감에 기름을 끼얹었다. 같이 나가자던 그의 손길에 마음을 놓은 게 방금 전이다. 아이스크림을 건네고, 아이스크림을 돌려받았고, 잘 지내지 못했다는 말에 똑같은 대답을 돌려받았다.
그러나 차곡차곡 쌓아놨던 안도감은 사소한 말 몇 마디에 단번에 부스러졌다. 직접적으로 헤어지자는 얘기도 아닌, 그런 기미가 느껴지는 말에.
여전히 불안정한 상태이던 권호영은 조그마한 자극에도 취약부가 찔린 듯 지레 겁먹었다. 마음이 급해졌다. 이대로 헤어지기 싫었다. 일단 붙잡아야 한다는 생각이 강렬하게 솟구쳤다.
“다 버릴 거 아니잖…….”
“형.”
권호영은 앞서 걷고 있던 단여명의 손을 덜컥 붙들어 당겼다.
“…제가 잘못했어요.”
갑작스러운 힘에 몸을 살짝 휘청인 단여명이 얼떨떨한 눈빛을 보였다.
“뭘… 잘못했는데?”
깜짝이야. 너무 놀라서 심장이 벌렁거렸다. 그는 잘 얘기하다가 순식간에 돌변한 태도를 보였다. 그것도 핀트가 맞지 않는 얘기를 하며.
권호영은 단여명이 잘 아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밤새워 그 짓을 하다가 골병이 났을 적, 머리맡을 지키던 얼굴이 딱 저랬다. …아니, 그때보다 좀 더 심각한 축인가.
“얘기하다 말고 도망친 거? 아니면 나한테 말도 없이 이사한 거?”
“…….”
“그것도 아니면 만났을 때 모르는 척한 거려나.”
무거워진 분위기를 덜고자 반쯤 농담으로 던진 말이었는데, 권호영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 갑자기 뭐 때문에 심각하게 구는지 모르나, 여유를 잃어 말투에 담긴 농담기를 읽지 못한 것 같았다.
단여명은 주위를 둘러봤다. 자신들이 멈춰 선 곳은 빛이 들지 않는 놀이터 인근이었다. 그리 늦은 시간이 아니라 사람이 다닐 만도 한데, 주변은 다른 소음 없이 고요하기만 했다.
어차피 집에 올라가서 얘기하는 건 분위기상 그른 것 같다. 지금 말이 나왔으니 여기서 결판 짓는 게 맞겠지.
“우리가 남한테 터놓고 사는 성격은 아니지.”
한숨을 내쉰 단여명이 등을 돌려 그를 마주 보았다.
“그래서 말이 자꾸 옆으로 새나. 자기 얘기 하는 게 서툴러서.”
그전까진 나름 원만하게 지냈던 것 같은데, 최근엔 그간 싸우지 않았던 걸 몰아서 해치우듯 참 많이도 싸웠다. 그러니 이번엔 언성을 높이지 않고, 좀 도란도란 대화하고 싶었다.
“난 우리가 그렇게 특별한 사이는 아니었다고 생각해.”
조심스럽지만, 단호한 어투로 단여명이 말했다.
“3개월이 그렇게 긴 시간도 아니고. 서로 몸 정 들어서 눈 맞게 된 거고.”
냉정하게 정리해 보자면 그랬다. 조금 친하게 지내다가 술김에 일을 치르고, 그 뒤로 사이좋게 지내며 쭉 붙어먹었다. 끝으로 갈수록 서로 좋아하는 낌새를 흘렸지만, 정작 지금까지 말로 정해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도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전혀 괜찮지 않아졌다. 시작과 끝이 흐지부지했어 사이가 조금 삐끗하니 관계의 신뢰성마저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스물하고도 여섯. 적은 나이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아직 어른스러운 연애를 하려면 한참 먼 것 같았다. 그 좋아한다는 말이 뭐라고 조바심이 났다.
그러니 이젠 시작을 정확히 명시할 때인 것 같다.
“…왜 그렇게 말해요?”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짚고 넘어가고자 했을 뿐인데, 권호영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보였다. 정말 저의를 묻는 것도 같았는데, 화가 난 사람처럼 인상을 약하게 씰그러트린 채였다.
손목뼈가 살짝 조여들었다가 풀렸다. 단여명은 갈팡질팡하는 손아귀의 힘을 느끼며 의아한 눈을 보였다. 단둘이 자리를 빠져나온 게 방금 전의 일이다. 아이스크림도 나눠 먹고, 잘 지내지 못했다는 얘기도 해 서로의 마음을 다시금 확인했다.
그래서 제가 말하고자 하는 요지를 당연히 알 거라고 생각했는데…….
“내 말이 틀려?”
“틀려요.”
“뭐가?”
“몰라요.”
그는 사실을 따져보지도 않고, 무작정 부인했다. 얼굴을 마주 보지 못하고, 이리저리 방황하는 눈동자엔 혼란이 가득했다. 마치 부모의 손을 놓쳐 사람 틈바구니에 내던져진 어린애 같은 모습이었다.
“그냥…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것처럼 말하지 마요……. 네?”
권호영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단여명은 그제야 일이 뭔가 잘못 돌아간다는 느낌을 받았다. 방금까지 분위기가 괜찮았던 것 같은데, 제가 가볍게 던진 말이 그의 어떤 부분을 자극해 커다란 폭탄이라도 터트린 듯했다.
친한 친구조차 없었던 권호영은 남에게 속 얘기를 터놓기는커녕, 사람과 싸워 본 적도, 그를 잘 풀어 본 경험도 없었다. 반복된 다툼과 그리움에 목말라 심신이 피폐해진 상태여서 단여명이 옆에 있대도 마음을 완전히 놓지 못했다.
사람의 마음이란 아무리 가까이 있대도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게 좋아하는 사람이다 보니 상대가 해결해 줄 수 없는 선까지 욕심은 거대하게 부풀어 버린 뒤였다.
이런 경험이 처음인 권호영은 경미한 힘에도 움푹 뭉그러지는 순두부와 같은 상태였다. 그가 이런 관계에 있어 얼마나 서투르고 연약한지, 그의 몸속을 차지한 불안이 얼마나 큰지 단여명은 미처 알지 못했다.
아마 단여명이 그가 어떤 사람인지 알았다면 좀 더 조심했을 것이다. 하지만 둘은 아직 서로를 전부 이해하기에 충분한 과정을 거치지 않았고, 그리하여 불상사가 일어났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었다는 말이…….”
“제가, 제가 다 잘못했어요.”
단여명이 뭐라 부연하기도 전이었다. 권호영이 양팔을 붙잡아 몸을 덥석 당기더니 다그치듯 말하기 시작했다.
“형이랑 김선오 사이에 끼어든 것도, 거짓말했다고 나쁘게 몰아세운 것도 다 제 생각이 짧았어요. 형이 힘들어했을 거 생각 못 하고 제 감정만 앞세웠어요.”
“호영아, 아직 내 얘기…….”
“전에 누구를 만났는지, 전 다 괜찮아요. 제 문제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 저 참는 거 잘해요. 티도 잘 안 내요. 그러니까 형은 형 좋을 대로 하세요.”
당황을 띠던 단여명의 얼굴이 점차 딱딱하게 굳어갔다. 권호영. 서늘한 목소리가 그만하라는 듯 이름을 불렀다. 하지만 초조함이 극에 달한 권호영은 그 말을 듣지 않았다.
“제 몸만 원한다고 해도 상관없어요. 이제 형 아프게 하는, 그런 실수 안 해요.”
“그만해.”
“제가 잘할게요.”
권호영이 매달리듯 단여명의 양팔을 꽉 붙들었다.
“그래도, 제 몸은 좋아했잖아요…….”
작게 흘러나온 목소리에 단여명의 얼굴이 더할 나위 없이 싸늘하게 굳었다. 감정이 북받친 권호영은 그를 알아채지 못했다. 간절한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고 있음에도 시야가 붉게 일그러져 상황 판단력이 떨어졌다.
“더 욕심 안 내요. 저 좀, 그냥 옆에만 있게…….”
“내가 뭐라고 그렇게 자존심도 없이 빌어!”
그 순간 커다란 목소리가 사위를 갈랐다. 단여명이 팔을 휘둘러 권호영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씩씩대며 터지는 호흡이 거칠었다. 얼굴을 찌푸리다 못해 콧잔등까지 구긴 단여명은 머리끝까지 화난 얼굴이었다.
“네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 섹스할 마음 없던 애한테 입 맞추고, 살살 꼬드긴 거 처음부터 나였어. 김선오랑 놀아나다가 덜미 잡힌 것도 다 나라고. 넌 내 옆에 있다가 피만 봤는데, 왜 그런 태도야.”
“…….”
“차라리 화를 내, 호영아. 보기 힘들어. 내 생각 해서라도 제발 그렇게 말하지 마. 네가 왜 그렇게 말해…….”
분노로 얼룩졌던 얼굴은 금세 상대 못지않게 처참해졌다. 단여명은 시선을 바닥에 떨어트린 채 피가 나도록 입안의 살을 씹었다. 나는 누구한테 저렇게 절절히 매달려 본 적이 있나. 권호영의 마음이 어떨지 가늠조차 되지 않아서 속이 갈려 나가는 듯했다.
“네 몸만 좋아했으면 여기까지 오지도 않았어. 알아? 네 앞에서 질질 짤 이유도, 잘 생각해 보라고 길게 말할 필요도……. 그냥 아무것도 없었다고.”
일의 순서란 게 있다. 자신은 그저 이야기의 절차를 밟고자 했던 것이었다. 계단을 하나씩 밟아 위로 올라가듯 차근차근. 그런데 그가 저렇게 자존감이 곤두박질친 사람처럼 처절하게 애원할 줄 몰랐다. 마지막 순간에 제가 내쳐진 거였지, 권호영이 내쳐진 게 아니었으니까.
“…….”
권호영은 조금 놀란 얼굴이었다. 단여명이 뿌리치지 않은 손은 여전히 그의 한쪽 팔을 붙든 채였다. 붉은 입술이 틈을 보이고 열렸다가 닫혔다. 한참 할 말을 찾으며 망설이던 권호영은 단여명의 팔을 붙든 손에서 힘을 뺐다.
“화, 화낸 거 아니야.”
단여명은 제게서 떨어지려는 손을 황급히 붙잡았다. 마음이 앞서 말까지 더듬었다. 그게 꼴사납다고 자책할 시간은 없었다. 단여명이 권호영의 눈치를 살피며 허둥지둥 말하기 시작했다.
“뭔가 오해한 것 같은데, 내 말은, 좀 객관적으로 보면 그렇다는 얘기야. 같이 술 먹었던 날을 기점으로 우리 사이가 좀 달라졌잖아. 아니야? 전에는 친하게만 지냈지 그런 기미는 없었잖아. 더 가까워진 게 술김에 그, 관계하고 난 뒤잖아.”
“…….”
“네가 다르게, 나랑 다르게 느꼈다면 미안해. 그런데 누가 봐도 그렇잖아. 난, 그냥 우리한테 있었던 일을 정리하고 넘어가야겠다 싶어서…….”
자신 없이 말끝을 흐린 단여명은 결국 문장에 마침표를 찍지 못했다. 제가 생각해도 얘기를 되는대로 쏟아내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말하면 납득이 갈 리가. 그냥 본론으로 넘어가는 게 백번 나을 판이다. 한숨을 삭인 단여명은 한결 침착해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내 얘기 시작도 안 했어. 좀…… 들어주라.”
단여명은 권호영의 손을 꽉 붙잡았다. 움켜쥐면 빠져나가는 모래알을 득달같이 붙잡듯이. 일부러 그렇게 쥐었다. 그가 조금은 안심할 수 있도록.
“딱 한 번만 말할게. 너 아무 잘못도 안 했어.”
“……그럼요.”
“…….”
“제가 뭘 어떻게…….”
“…….”
“뭘 어떻게 해야 되는데요…?”
권호영은 정답을 알려 달라는 눈이었다. 단여명은 본의 아니게 잠시 침묵했다. 알 리가 없다. 그동안 모든 인간관계를 통틀어 이렇게 어렵고 복잡한 사람은 없었다.
지금까지 단여명의 연애는 그랬다. 마음이 통하면 사귀고, 좀 틀어진다 싶으면 헤어지고.
사람과 싸우고 화해하는 과정도 단순했다. 이만큼은 네 잘못, 그리고 이만큼은 내 잘못. 깃발을 꽂은 모래성이 무너지지 않도록 모래를 끌어오듯이 잘잘못을 나누었고, 서로 사과하며 좋게 끝냈다. 만약 그럴 가치가 없는 사람이면 그런 노력을 들이지 않고 적당히 멀어졌고.
권호영은 우선 관계를 회복하고 싶어 안달 난 눈치였다. 단여명은 그게 옳지 않다는 것을 알았다. 없었던 일로 치고 넘기기엔 너무 멀리 와버렸다.
그렇다고 논리정연하게 대화를 주도하자니 단여명도 자신을 솔직히 드러내는 것에 서툰 인간이었다. 권호영이 문을 박차고 도망치게 한, 그의 아픈 부분을 대담하게 들추지도 못했다. 그에게 민감한 부분인 걸 알았고, 사사건건 캐묻는 게 여전히 무례한 짓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만약 자신들 사이에 김선오가 끼어들지 않았다면 이렇게 감정 낭비할 필요 없이 원만하게 사귀었을지도 모른다. 그럼 자연스레 서로를 이해하고, 알아가는 과정을 천천히 밟았을 수도 있겠지.
그러나 중간에 많은 일이 한꺼번에 밀어닥쳐 그런 과정을 헤쳤다. 그래서 둘 다 어쩔 줄 몰라 하며 감정의 풍랑을 맞닥뜨린 것 같다.
“…네가 뭘 어떻게 하라는 얘기가 아니라, 내가 거기까지인 사람인 거야.”
그래도 앞으로 나아가야 함은 틀림이 없었다. 눈앞에 보이는 얼굴이, 자존심을 내던지고 절절하게 매달렸던 목소리가 폭풍 속에 하나 남은 나침반처럼 올바른 방향을 가리키는 듯했다.
“내가 처음이라서 특별하게 생각하는 거 알아. 그런데 난 너랑 달라. 영상 봤던 것처럼… 경험도, 나이도, 그냥 사람 자체가 다른 거야.”
작게 숨을 들이켠 단여명은 결심을 굳힌 사람처럼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그리고 중간에 숨 한번 고르지 않고 말을 우다다 쏟아내기 시작했다.
“누구한테 속마음 얘기 잘 못해. 약한 모습 보여주는 거 싫어해. 무거운 얘기 하면 분위기도 무거워져서 신경 쓰여. 남한테 기대는 거 싫고, 나 혼자 마음 정리하고, 괜찮아질 때 얘기하고 싶어. 겉으로 보이는 거 엄청 중요하게 생각해서 좀, 솔직하지 못해. 남한테 민폐 끼치는 것도 싫어하고.”
목소리가 과하게 컸다. 언뜻 들으면 윽박을 지르는 것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권호영은 눈을 살짝 키우고 멍하니 눈을 깜빡이는 중이었다. 면전에 폭격처럼 쏟아지는 얘기가 얼떨떨한 모습이었다. 단여명은 그를 보며 약간의 수치심과 후회를 느꼈지만, 입을 멈추지 않았다.
“그래서, 그래서 네가 김선오 만났다고 했을 때 화났어. 걱정도 됐는데, 네가 나 때문에 피해 본 게 많은 것 같아서 속상했어. 그래서 솔직히, 너한테 고마운지는… 아직까지 모르겠어. 고맙기는 한데, 고마워하고 싶지 않아. 쓸데없는 자존심 부리는 거 맞아. ……그런데 나는 그래. 내가 그런 인간이야.”
“…….”
“겉으론 그럴듯하게 보일지 몰라도 까 보면 별거 없어. 너한테 보인 것도 다 가식이야. 그냥 너보다 나이 많다고 우쭐댄 거라고. 좀 소심한 면도 있고… 사실 네가 아는 것보다 엄청 밝히는데 티 안 낸 거고…….”
얘기가 길어질수록 단여명의 낯빛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자기가 떠들고 있으면서 어디까지 말해야 하는지 적정선을 찾아 헤매는 모습이다.
“사실, 사실 김선오 때문에 힘들었을 때 너랑 자면서 스트레스 풀었고, 위로받았어. 아니, 너랑 친해지기 전부터… 한편으로는 그런 마음 갖고 있었어. 나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엄청 가볍고 줏대 없을지도 몰라.”
깜빡거리는 눈꺼풀의 움직임이 정신 사나웠다. 속눈썹을 파르르 떤 단여명은 결국 권호영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지금 이렇게 말할 수 있는 것도…… 내가 처음이니까. 그래서 쉽게 놓지 못할 거 아니까 또 이용하는 걸지도 몰라.”
시선을 땅바닥에 처박은 단여명이 권호영의 손을 재차 꽉 붙들었다. 손등의 핏줄이 솟을 정도의 힘에 권호영의 손가락이 하얗게 질렸다.
“미안해. 하나부터 열까지 이기적이라서. 방금 몸 정 들었다고 한 얘기도… 상처 주려던 건 아니었어. 또 싸울까 봐 감정 섞지 않는다는 게 조심성 없이 말했나 봐. 잠깐 분위기 좋은 것 같아서… 내가 경솔하게 말했어. 미안해.”
“…….”
“내가 미안해. 그러니까 다 네 잘못이라고 하지 마.”
목울대를 울렁인 단여명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을 마쳤다.
“…나 오늘은 울기 싫어.”
그 뒤로 잠깐의 정적이 내려앉았다. 체한 속을 게워내듯 많은 얘기를 끊임없이 토해냈기에 단여명은 그 적막을 숨 막히게 받아들였다.
언뜻 명료한 정신을 되찾으니 숨을 작게 헐떡이고 있었다. 왜 숨이 차는지는 모르겠고, 쥐구멍이 있다면 숨고 싶은 마음뿐이다. 마지막으로 뱉은 말이 가관 중의 가관이어서 눈물이 찔끔 나올 것만 같았다.
그리 입술을 잘근거리며 혼란을 삭이고 있던 도중이다. 권호영이 조심스레 목소리를 냈다.
“…형.”
“그동안 속인 게 많아서 믿어 달라는 말은 못 하겠다.”
단여명은 황급히 그의 말을 가로챘다.
“그러니까 이번엔 부탁할게.”
무슨 대답이 돌아올지 몰라 듣기 무서웠던 이유도 있고, 아직 대답을 들을 타이밍이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단여명은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웃는 건지, 찡그린 건지 모를 표정을 짓고 있을 테지만, 평온을 가장할 여유는 여전히 없었다.
“믿기 어렵겠지만, 나도 이런 적 처음이야. 누구한테 내가 숨기고 싶어 하는 면, 내 입으로 다 까발린 거 처음이라고.”
“…….”
“이렇게 솔직하게 부딪친 적 한 번도 없어.”
“…….”
“너한테 더 이상 거짓말하기 싫어.”
권호영의 시선은 처음부터 끝까지 단여명에게 가 있었다. 그를 이룬 선 하나하나에 가닥이 얽혀 각막 위에 또 다른 막을 형성했다. 머뭇거리면서도 계속 달싹이는 입술이, 까만 모자 아래로 붉어진 얼굴과 그보다 더욱 빨개진 귓바퀴가 안막을 넘어 뇌리에 뚜렷한 형태로 자리 잡았다.
“아, 그러니까…… 내 말은…….”
말없이 눈길이 부딪치는 시간이 길어지자 단여명은 뒤늦게 깨달았다. 선전포고 같은 말을 날려놓고, 결론이 난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걸.
또 되는대로 말했다는 생각에 다시금 당황이 차올랐다. 세찬 바람을 맞은 갈대처럼 까만 눈동자가 경황없이 흔들렸다. 단여명은 혀끝을 살짝 깨물었다. 말주변이 이만큼 최악이라곤 생각 못 했는데. 차라리 빌의 앞에서 떠들었을 때가 양반이었다.
시간을 돌이킬 방법 따위가 있을 리 만무했다. 작게 심호흡한 단여명은 다시 더듬더듬 말하기 시작했다.
“나도 있는 그대로의 권호영을 알고 싶어. 전과 비교할 수 없이, 특별해질 수 있게.”
권호영의 표정에 미세한 변화가 일기 시작한 것도 그때쯤이었다.
“다른 사람이랑 다르다는 그 감정이 뭔지 알고 싶고, 영상 보고 느낀 네 문제점이 뭔지 알고 싶어. 내가 도울 수 있는 문제라면 나도 노력할게.”
“…….”
“시작은 술김이었을지 몰라도… 우리 분명 뭔가 했었잖아. 그니까, 좀 다르면 맞춰 갈 수 있는 거고…….”
“…….”
“네가 말할 용기가 안 난다면 기다릴 수 있어.”
눈이 길게 마주쳤다. 하나로 결속된 시선에 영원토록 묶이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안 그래도 진정할 새 없었던 심장이 더욱 격하게 박동하기 시작했다. 머뭇거리던 입술이 열렸다. 긴 서론 끝에 도달한 결론이 먹먹한 숨을 타고 입술 사이로 빠져나갔다.
“우리 만나 볼래?”
살랑 불어온 바람이 귓가를 지나쳐 권호영의 앞머리를 흩트려놓았다. 그를 보며 단여명은 서먹하게 웃었다.
좀 더 자연스러운 웃음을 짓고 싶었지만, 그게 잘 안 됐다. 심장 소리가 하도 요란해 눈앞이 어지러웠다. 금방이라도 뒤로 넘어질 것처럼 몸의 중심이 위태롭게 잡혔다. 이 말을 하기까지 이렇게 오래 걸릴 줄 몰랐는데. 그 생각에 토할 것처럼 가슴이 울렁거렸다.
“네 생각보다 이기적이고, 까 보면 별 볼 일 없는 사람인데…….”
고백한 경험도 몇 번 없고, 석고대죄하듯이 마음을 밀어붙인 것도 난생처음이지만, 아무렴 어떤가 싶었다.
“네가 받아 준다면…….”
자신 때문에 자존심을 내버린 권호영의 앞에서라면 자신도 기꺼이 망가질 수 있었다.
“네가 괜찮다면 난 그렇게 하고 싶어.”
김선오를 마지막으로 만나러 가는 길에 권호영 생각만 하면서 버텼다. 이 순간이 오기를 내내 바랐다. 그러니 남이 볼 수 있는 길거리에서 이러고 있는 것까지 다 괜찮았다.
“…….”
권호영은 충격을 받은 사람처럼 딱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멍하게 벌린 입술을 다물 생각도 못 했다. 언뜻 보면 고백이 아니라 심각한 얘기를 들은 사람처럼 보일 정도였다.
단여명은 직격으로 꽂힌 눈을 피하지 않고 똑바로 되받아쳤다. 밤색 눈동자는 엷은 어둠을 머금었음에도 맑게 빛났다. 잔잔한 물결에 비친 달그림자처럼 가로등의 주홍 불빛이 가뭇한 홍채 안에서 일렁였다.
“…만나자는 게 정확히 무슨 뜻인데요.”
곧이어 권호영이 숨죽인 음성으로 물었다. 여전히 험악하게 굳힌 낯은 풀지 않은 채였다.
“사귀자고.”
“…….”
정면 돌파 격으로 날린 말에도 그는 어쩐지 대답이 없었다.
“…좋아해?”
제 말을 못 알아들었나 싶어 단여명은 슬그머니 다른 말을 덧붙였다. 의아하고도 답답한 마음에 말끝이 살짝 올라갔다. 그러고 나니 시간차를 두고 멋없게 고백하는 것 같아 굉장히 수치스러웠다.
이런 식의 고백이 세상에 존재하리라곤 상상도 못 했는데. 아마 제 연애 역사상 오래도록 길이 남을, 엉망진창의 순간일 것이다.
단여명은 마른침을 삼키며 연신 상대의 눈치만 살폈다. 싫은가? 제 얘기를 듣고 정이 다 떨어졌나? 그도 아니면 아직도 연애할 생각이 없는 건가.
짧은 시간에 희비가 여러 번 교차했다. 연애 한 번 하는 게 이렇게 어려웠던 적이 없는데. 권호영만 관련되면 모든 게 어려워진다.
결국 인내심이 한계에 달했다. 그럼 강요해서라도 억지로 사귀어야겠다는 괴팍한 생각이 들었다. 제 본모습을 실토한 게 아까워서라도, 여기까지 온 게 억울해서라도 한 번은 만나 봐야겠다.
“…장난치는 거 아니죠.”
권호영의 의사는 무시하자. 그런 이기적인 결론에 도달했을 때쯤 그가 경직된 목소리로 말문을 뗐다.
“이런 말까지 가볍게 할 정도로 쓰레기는 아니야.”
단여명이 찡그린 듯 웃음을 지은 얼굴로 대답했다. 마지막에 좋아한다는 말을 의문문으로 말해, 본의 아닌 오해를 산 모양이었다.
“…날 좋아해요?”
미간을 찌푸린 권호영이 믿기지 않는다는 눈을 보였다.
“아직도… 내가 좋아요?”
아직도. 그 안에 많은 말이 생략된 게 느껴졌다.
자신들이 부딪쳐온 과정 속에서 서로에게 상처를 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그렇지만 좋아하는 마음은 어디 깨어진 곳 없이 단단한 결정체처럼 남아 있었다.
만약 상처가 남았대도 본인의 손으로 내 놓은 거라면, 다시 본인이 고쳐 줘야 마땅했다. 그건 단여명도 같았다. 만약 권호영의 마음이 무너졌다면 자신의 손으로 주워 담아 주고 싶었다. 제가 첫발을 뗀 관계니 책임지는 것과 함께 그에 맞는 최선을 다하고 싶었다.
맞잡은 손에 끈적한 땀이 고였다. 단여명은 그 손에 거리낌 없이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원래 하나였던 것처럼 다른 모양의 손가락끼리 얽혔다. 서로의 손가락 틈새까지 땀이 찬 것을 느끼며 단여명은 확신 어린 음성으로 답했다.
“좋아해.”
그리 소리 내어 말하니 눈치 없는 웃음이 실실 새어 나왔다. 입술을 안으로 말아 참아 보려고 했지만, 웃음이 감춰지지 않았다.
“권호영, 네가 좋아.”
머리로 생각하는 것과 소리로 뱉어내는 것엔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목소리는 아래위를 찍으며 우스꽝스럽게 떨리고,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꼴이지만, 어떤 것도 신경 쓰이지 않았다. 가슴만 졸이던 때와 가장 큰 차별점이 바로 눈앞에 확인됐으니.
권호영은 뭐라 설명하기 애매한 표정이었다. 턱이 살짝 떨리더니 도톰하게 모양 잡힌 입술이 굳게 다물렸다. 입안에서 이를 세게 악물었는지 양 뺨에 오목한 골이 패었다. 내내 마주 닿던 눈동자가 아래쪽을 향하고 다시 위를 맴돌았다.
“한 번만…….”
표정을 허물어트린 권호영이 곧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한 번만, 안아 봐도 돼요?”
그의 얼굴은 여전히 고백을 들은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단여명은 개의치 않고 환히 웃었다. 승낙의 의미는 확실히 전해졌으니까.
“이제 네 건데 뭘 물어봐.”
단여명이 깍지 낀 손을 살짝 끌어당겼다. 그리 세게 잡아당기지도 않았는데, 권호영은 무력한 이처럼 맥없이 끌려왔다. 가까이서 두 눈이 마주쳤다. 권호영은 울렁이는 눈으로 단여명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돌연 과격하게 앞으로 튀어 나갔다.
퍽! 우악스러운 파격음이 났다. 상대의 몸에 치인 까만 캡 모자가 바닥을 나뒹굴었다. 커다랗고 단단한 몸에 밀려나 단여명은 몇 발짝 걸음을 뒤로 물렸다. 저도 모르게 억, 소리를 내곤 곧바로 턱을 부여잡았다. 눈앞이 번쩍하더니 갈비뼈에서 한번, 턱에서 한번 강렬한 고통이 올라왔다.
예상치 못한 때 과격한 돌진을 받아낸 몸이 징징거리며 울렸다. 위치가 잘못됐더라면 이가 나갈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에 뭐라 따끔하게 한마디 하려던 순간이었다.
“제가, 형,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뜨겁게 터진 숨이 어깨를 적셨다. 어깨에 얼굴을 묻은 권호영이 손으로 날개뼈를 쓸어 담듯이 단여명의 등을 끌어안았다.
“정말 많았는데……. 지금은 그게 잘… 안 돼요.”
그가 떨림이 가득한 목소리로 힘겹게 말을 마쳤다. 어깨 뒤쪽에 얼굴을 파묻듯이 누르고 있어 발음도 부정확하게 흘렀다. 숨이 모자란 것처럼 낮게 헐떡인 권호영이 재차 웅얼거리듯 말했다.
“우리 다시는…….”
“…….”
“다시는 헤어지지 마요.”
그리고 숨이 쉬어지지 않을 만큼 단여명의 몸을 절박하게 껴안았다.
“…버리지 마세요.”
권호영이 어깨에 뺨을 미약하게 비볐다. 단여명은 뭐라 하려다가 결국 한숨을 내쉬어 버렸다. 아픔이 가시지 않은 와중에도 입꼬리가 비실비실 올라갔다.
어이없고, 웃기고, 또 황당하기도 하고…. 감격에 차 이리 달려들었다고 생각하니 뭐라 쓴소리도 못 하겠다.
“응.”
단여명은 권호영의 등에 손을 올렸다.
“우리 서로 버리지 말자.”
그리고 권호영 못지않게 팔에 힘을 가득 줘 그의 몸을 세게 끌어안았다.
“하고 싶은 말은 나중에 해도 돼. 이제 어디 안 갈 테니까.”
쿵, 쿵 쿵…. 맞붙은 가슴팍에서 커다란 울림이 느껴졌다. 두 개의 심장이 경쟁이라도 붙은 듯 앞다퉈 시끄럽게 박동했다.
기분이 몽글몽글했다. 드디어 화해했다. 먼 길을 돌아온 것 같지만, 어쨌든 속은 후련했다. 이제 자신들 사이에 방해꾼은 없었다. 마음에 뭐 걸리는 것 없이 좋아한다고 질리도록 말할 수 있다. 매일같이 귓가에 속삭여 줄 테다. 귀가 새빨개진 권호영이 이제 그만하라고 질색하며 도망쳐도 끝까지 따라붙어 말해 줄 테다.
“있잖아. 그럼…….”
우리 이제 진짜 사귀는 거냐고. 아까 왜 모르는 척한 거고, 이럴 거면 왜 말도 없이 이사한 거냐고. 짓궂은 마음이 들어 놀림의 시동을 걸던 단여명은 불현듯 입을 다물었다.
“…….”
권호영의 몸이 떨리고 있었다. 그가 얼굴을 묻고 있는 어깨 뒤쪽에 뜨거운 물기가 번졌다. 권호영이 까만 티셔츠를 구기며 단여명의 몸을 꽉 붙들어 안았다. 소리 없이 샌 눈물이 금세 단여명의 옷을 흠뻑 적셨다.
어, 어…? 단여명은 숨도 쉬지 못할 만큼 놀라 어정쩡하게 굳어버렸다. 손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모르고 당황해하다가 저보다 커다란 등을 약하게 두드리기 시작했다.
…눈물을 참아내느라고 계속 표정이 안 좋았구나. 그것도 모르고 혼자만 신나 했다는 생각에 들떴던 마음이 조금 숙연해졌다.
권호영은 한참을 그리 숨죽여 울었다. 담배 냄새와 음식 냄새에 절어 있을 티셔츠에 서러운 눈물방울을 쏟아냈다. 가끔씩 윽, 하고 억제하지 못한 울음소리를 흘리기도 했다. 그게 아니면 ‘보고 싶었어요’라는 말을 앵무새같이 반복해 읊조렸다.
단여명은 말없이 그를 달랬다. 애가 어른스러워서 가끔 잊는데, 아직 어리긴 했다. 아니, 둘 다 똑같이 어린 건가. 저번엔 제가 울음을 터트렸고, 이번엔 권호영이 눈물을 보였다. 차례대로 눈물 바람이 휩쓸고 갔으니 누가 어리다고 나눠 봤자 도긴개긴이었다. 그러다가 쌍으로 뭐 하는 짓인가, 싶어 작게 웃음이 나기도 했다.
“…형.”
그렇게 얼마의 시간을 보냈을까. 훌쩍이는 소리가 차차 멎을 때쯤 권호영이 입을 열었다. 어깨에 묻고 있던 얼굴은 목덜미 쪽으로 약간 돌린 채였다. 곧 뜨거운 숨이 목덜미를 간질였다.
“저번에 소원 들어주기로 약속했잖아요. 형이 들어줄 수 있는 거면 다 들어주겠다고…….”
울음기가 역력한 목소리가 뜬금없는 얘기를 꺼냈다. 저번에 데이트 약속을 깼을 때의 일을 말하는 것 같았다. 그때 약속을 깨서 미안하다는 뜻으로 소원을 하나 들어주기로 약속했었다.
“그랬지.”
“…그거 지금 말해도 돼요?”
“그래.”
지금 상황에서 뭔들 못 들어줄까. 단여명은 얼른 말해보라는 듯 그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였다.
권호영이 한동안 숨기고 있던 얼굴을 느릿하게 위로 들었다. 서로를 부둥켜안은 팔은 풀지 않은 채라 가까운 거리에서 눈이 마주쳤다.
권호영의 얼굴은 눈물이 휩쓸고 간 여파를 고스란히 담고 있었다. 눈꼬리와 눈 밑에 유난히 새빨간 물이 들었다. 매끈하게 속쌍꺼풀 지던 눈은 눈두덩이가 퉁퉁 부어올라 쌍꺼풀이 아예 사라져 있었다.
막 자고 일어났을 때도 부기가 거의 없던 얼굴인데. 아마 제 어깨에 눈을 압박하다시피 붙이고 있던 탓 같았다. 콩깍지가 씌지 않았어도 귀엽다고 생각할 만한 얼굴이었다. 이목구비는 시원시원하게 빠져서 눈만 통통하게 부었으니.
귀여운 찐빵 같다. 그런 생각을 하며 웃음을 삼킨 순간이었을까.
“우리 결혼해요.”
한바탕 눈물을 쏟아낸 얼굴이 결연한 목소리로 선언했다.
“……?”
그와 동시에 다정하게 등을 토닥이던 손길이 거짓말처럼 뚝 멈췄다.
“어?”
멍청하게 되묻는 목소리에 삑사리가 난 건, 정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
자질구레한 옷가지가 널린 어두운 원룸 방, 속삭이다시피 하는 목소리가 울렸다.
“네. 그래서 계속 같이 살 것 같아요.”
비닐에 둘러싸인 매트리스는 작은 움직임에도 바스락 소리가 났다. 단여명은 핸드폰을 귓가에 붙인 채 불편한 자세를 조심스레 고쳐 앉았다.
“엄마 말대로 집에 사람이 있으니까 좋은 점이 많더라고요. 나이 먹어서 그런가. 갈수록 외로움만 느네.”
목소리를 죽여 말하니 상대편에서 커다란 웃음을 터트렸다. 단여명은 그녀를 따라 소리 없는 미소를 지었다.
“나중에 봐서 둘이 같이 올라가든지 할게요. 비행기 탈 용기는 아직 없기는 한데, 호영이 있으니까.”
핸드폰을 잡지 않은 손에 부드러운 머리칼이 걸렸다. 손가락 사이로 미끄럽게 빠져나가는 감촉을 느끼다가 동그란 머리통 살살 어루만졌다.
“그럼 괜찮을 것 같아요.”
엄마는 당장 일정을 잡으라며 닦달 아닌 닦달을 했다. 단여명은 당장은 어렵다며 확답을 미뤘다. 그리 장난스럽게 말씨름하다가 근황을 주고받았고, 엄마가 이만 출근 준비해야겠다는 말을 꺼냈다. 이쪽이 한밤이니 아마 저쪽은 분주한 아침 시간대일 것이다.
“네. 그럼 나중에 다시 연락할게요.”
통화 시간은 10분 남짓이었다. 단여명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주위를 둘러봤다. 불이 꺼진 방 안은 어렴풋이 보이는 형상만으로도 엉망이었다. 정리한다고 허둥지둥 먼저 들어가더니 이게 최선이었나. 그럼 정리하기 전엔 얼마나 더 최악이었다는 거지.
‘그렇게 깔끔 떨던 녀석이.’
방 안을 훑던 단여명은 이내 시선을 내렸다. 제 허리를 꼭 끌어안고 잠든 권호영의 얼굴이 보였다.
왜 갑자기 결혼 얘기가 나오느냐고 물으니 그는 황당한 답변을 내놓았다. 연애는 언제 깨질지 몰라 불안하다는 것이었다.
연애할 생각이 없다고 말했던 게 그런 이유였던가. 아무리 그래도 순서란 게 있는 건데. 머릿속이 물음표로 차오른 가운데 하나의 추측이 자리 잡혔다. 그는 줄곧 연애와 결혼이란 두 마리의 토끼를 사로잡을, 지금 같은 기회를 노리던 걸지도 모르겠다고.
어처구니가 없어 ‘이혼하는 사람도 많은데?’라고 말하니까 제법 논리적인 반박이 나왔다. 법정 공방으로 넘어가면 매달릴 수 있는 시간을 벌 수 있다나.
왜 자기가 무작정 매달릴 거라고 생각하는지. 어이가 없어 웃기만 하는데, 권호영은 혼자서 진지했다. 여기 한국인 건 알지? 그리 물으니 이민을 가잔다.
고백에 대한 대답을 이런 식으로 돌려받을 줄이야. 한술 더 뜨는 걸 넘어서 밥숟갈로 집안을 풍비박산을 내놓은 격이었다.
따박따박 말대꾸하는 게 귀엽고, 그만큼 진심이란 것도 알았지만, 단여명의 입장에선 뜬구름 잡는 소리로 들렸다. 실실 웃는 얼굴에서 진지성을 느끼지 못했는지 권호영이 소원이라는 월권을 행사했다. 울음기 짙은 얼굴로 우격다짐으로 밀어붙이는 통에 단여명은 결국 결혼을 약속해 버렸다.
그리고 나선 잠깐 입씨름했다. 단여명이 술자리로 다시 돌아가야 한다는 의견을 내세웠기 때문이었다.
차례대로 자리를 이탈하고, 그대로 둘만 사라지는 것은 이상한 오해를 사기 딱 좋았다. 더군다나 제가 술값을 내기로 약속하고 만들어진 자리였다. 체면이란 게 있으니 책임감 없이 빠질 수 없었다.
제 말에 얌전히 따를 줄 알았던 권호영은 노골적으로 싫다는 티를 냈다. 눈물 콧물을 다 쏟아낸 김에 대놓고 어리광 부릴 작정인지 단둘이 있고 싶다며 걸음을 떼려고 하지 않았다.
울음이 멎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때였기에 단여명은 그를 살살 꼬드기듯 달랬다. 뭔 말을 해도 들어먹지 않아 ‘뽀뽀 백 번 해 줄게’라는 필살기를 사용했다. 입술을 움찔한 권호영은 그제야 다리를 움직였다.
둘은 가게로 돌아가는 길에 편의점에 들러 인원수에 맞춰 아이스크림을 샀다. 연달아 세 번째 방문이었다. 편의점 아르바이트생이 ‘살 거면 한 번에 사지’ 따위의 눈빛을 쏘았고, 두 사람은 모른 척 그를 외면했다.
그리고 문제의 술값은 권호영이 계산했다. 단여명이 자리에 아이스크림을 돌리는 틈에 벌어진 일이었다. 카운터 앞에 선 직원이 저분이 계산했다며 친절하게 손으로 콕 집어 주기까지 했다. 왜 그랬냐고 묻자 권호영은 ‘형이 아무한테나 돈 쓰는 거 싫어요’라고 딱 잘라서 대답했다.
단여명은 그때 어렴풋이 느꼈다. 독점욕이 어마어마하구나. 사귀기로 하니 갑자기 이러는 것인지, 아니면 지금까지 잘 숨긴 건지 알 길은 없었다.
‘둘이 같이 나갔다 들어오더니 사이가 엄청 좋아진 것 같아요.’
그렇게 애들의 입에 아이스크림을 물려 주고, 다 같이 가게 밖으로 나온 때쯤이었다. 민들레가 벌게진 낯으로 헤실헤실 웃으며 말했다. 권호영은 윤재윤과 뭔가를 얘기하느라 뒤로 빠져있던 차였다.
‘사실 저희가 조금 다퉜었거든요. 이렇게 만난 김에 잘 풀었어요.’
어? 싸워요? 왜요? 둘이 뭐 때문에 싸워요? 단여명을 둘러싼 세 사람이 아기 새처럼 입을 모아 물었다.
‘큰일은 아니고, 제가 말실수를 좀 해서…….’
‘형.’
그 순간 뒤에서 커다란 손이 뻗어 나왔다. 상체를 가로지른 손은 어깨를 감싸더니 본인 쪽으로 부드럽게 잡아당겼다.
‘그만하고 집에 가요.’
윤재윤과 얘기를 끝마치고 돌아온 권호영이었다. 거의 끌어안은 것으로 봐도 무방한 자세로 권호영이 귓가에 속삭임을 흘렸다. 아니, 속삭이는 행동으로만 보였을 테다. 다 들으라는 양 큰 소리로 말해서 그가 뭐라고 말했는지 다 알아들은 눈치였으니까.
‘아, 음…. 집에서 같이 게임을 하기로 해서.’
당황한 건 역시나 단여명 혼자뿐이었다.
‘제가 레벨이 높아서 그, 캐리라는 걸 해 주기로 했거든요.’
‘어, 형! 게임 해요? 무슨 게임?’
취미도 아닌 걸 들먹이며 횡설수설하는데, 강민준이 눈치 없는 물음을 던졌고.
‘집에 가요. 네?’
혼자 열심히 사태를 수습하는 중에도 권호영은 일방적인 얘기를 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원망스러운 눈초리를 보내니 눈 끝을 살짝 휘면서 웃었다. 일은 자기가 다 벌려놓고, 태평하기 다름없는 낯이었다.
그러나 오랜만에 보는 웃는 얼굴이 심장에 치명타를 날려 단여명은 그를 밀어내지 못했다. 괜히 ‘얘가 취하면 애교가 많아져요’ 하며 얼렁뚱땅 넘기려는데, 민들레가 권호영에겐 그런 주사가 없다며 나섰다. 해맑은 얼굴로 ‘그냥 오빠가 좋은 거 같은데?’라고 말해 단여명은 남몰래 식은땀을 흘려야 했다.
“…….”
단여명은 매끈한 뺨을 검지로 살짝 찔렀다. 아까는 그렇게 집에 가자고 사람을 들들 볶더니. 권호영이 집에 오자마자 보인 행동이란, 밀린 잠 자기였다.
열정적인 키스라도 하나 기대했건만, 약속했던 뽀뽀도 한 번을 못 해봤다. 그가 이사했다는 집에 첫발을 들이자마자 권호영은 제 몸을 끌어안고 놔주려 하지 않았다. 그러다 보니 슬슬 체취가 신경 쓰이기 시작해 욕실을 빌려 썼다.
씻고 나와 보니 권호영은 고개를 꾸벅이며 졸고 있었다. 침대에 앉아 벽에 등을 기댄 자세였다. 많이 고단했는지 그는 가까이서 얼굴을 들여다봐도 눈을 뜨지 않았다. 단여명은 방의 불을 끄고 조용히 침대에 올랐다. 매트리스의 비닐을 제거하고 싶었지만, 권호영이 침대를 차지하고 있어 마땅한 방법이 없었다.
침대에 머리를 대주려고 그의 어깨에 살짝 손을 올린 순간이었다. 권호영이 스르르 눈을 뜨더니 단여명의 허리를 덥석 끌어안았다. 그리고 단여명의 허벅지 옆에 이마를 붙인 채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그래서 단여명은 지금껏 앉은 것도, 누운 것도 아닌 애매모호한 자세로 보디 필로우의 역할을 소화 중이었다.
‘스무 살한테 프러포즈를 받는 날이 올 줄이야.’
그것도 머리가 우스꽝스럽게 눌리고, 며칠간 씻지 않은 행색으로. 다시 생각해도 어이없었다.
단여명은 웃음을 머금은 채 권호영의 뺨을 살짝 꼬집었다. 겉보기엔 좀 거칠어진 것 같은데 속은 여전히 갓 구운 빵처럼 말랑말랑했다. 나도 스무 살 때 피부가 이랬으려나. 그런 생각을 하며 볼살을 주물럭대는데, 그의 눈꺼풀이 움찔 떨렸다. 어둠 속에서 몽롱한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미안. 내가 만져서 깼어?”
“……아니요.”
졸음에 겨운 눈꺼풀이 느릿하게 깜빡거렸다. 단여명은 그의 머리를 살살 쓰다듬었다. 눈치를 보아하니 다시 잠들 것 같았다.
그 후 잠깐의 시간이 흘렀다. 어두운 방 안엔 규칙적인 숨소리만 들렸다. 그가 다시 단잠에 빠져든 것 같아서 단여명은 머리를 어루만지던 손길을 멈췄다. 그리 부드러운 머리칼에서 손끝을 거둬들인 때였다.
“…저희 어머니는요.”
그대로 잠든 줄 알았던 권호영이 느릿하게 입술을 뗐다.
“제가 완벽하길 바랐어요. 누구보다 더.”
그는 단여명의 허리를 좀 더 당겨 안아 허벅지 바깥쪽에 얼굴을 묻었다. 이불이 부스럭 소리를 내며 둘 사이에서 구겨졌다.
“개가 재주를 부리면 간식을 던져 주잖아요. …잘했다고. 예쁘다고.”
“…….”
“생각해 보면 전 그렇게 자랐던 것 같아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는 무덤덤했다. 그가 얼굴을 묻은 허벅지에서 물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단여명은 떨어트렸던 손을 다시 그의 머리 위에 가만히 올렸다. 그리고 머리카락이 난 방향대로 권호영의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권호영은 그 손길을 받으며 자신이 거쳐왔던 시간을 얘기했다. 여러 나라를 순회했던 어린 시절과 아버지의 부재, 눈발이 흩날렸던 날과 어머니의 통화를 엿들었던 한겨울 밤의 얘기가 건조한 목소리를 타고 흘러나왔다.
권호영은 끝으로 가서 그런 말을 덧붙였다. 아마 어머니가 제 앞날에 집착했던 것은 홀로 자식을 키운 본인의 체면을 구기지 않기 위해서. 그리고 자식이 자신과 똑같은 삶을 살기를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 가혹했던 것이라고 말이다.
그래도 사랑이었다고 믿고 싶다는 말에 단여명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엄마를 통해 들은 얘기가 새 발의 피였다는 걸 깨달은 차였으니까. 제게 비굴해 보일 정도로 잘못을 빌었던 그의 모습이 뇌리에 스쳤다. 가슴이 묵직하게 저리다가 따끔거리며 쑤시길 반복했다.
“…힘들었어?”
긴 침묵 끝에 단여명이 물음을 던졌고.
“…아니요.”
권호영은 조용히 대답했다.
“이제 다 괜찮아요.”
허벅지에 얼굴을 묻고 있던 그가 고개를 옆으로 틀었다. 눈길이 부드럽게 교착했다. 단여명은 그를 내려다보다가 권호영의 눈 밑을 쓸어 보았다. 벌겋게 부었던 눈은 어느새 눈물의 흔적 없이 보송보송했다.
“…내가 예전에 우물 안의 개구리를 말한 적 있지.”
이윽고 단여명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나는 네가 바깥에 나왔을 때 가장 가까운 곳에 있던 호수였던 거야. 그게 처음 보는 것이라 바다인 줄 알았던 거고.”
잠잠하게 가라앉은 공기가 조곤조곤한 목소리를 실어 날랐다. 맞닿은 시선은 궤도를 잃지 않았다. 속눈썹의 날갯짓이 기척 없는 바람을 일으켜 둘 사이에 부딪쳤다.
“내가 특별한 게 아니야. 우연히 같이 살게 된 거고, 동생이라서 좀 챙겨 준 거고. …어느 누구라도 그 정도라면 했을 거야.”
마음은 불편하지만, 언젠가 했어야 할 얘기였다. 단여명은 눈가를 쓸던 손으로 권호영의 뺨을 감쌌다. 알아듣기 쉽게 말하는 건 성공했지만, 좋지 않은 표정은 들킨 모양이다. 곧 뺨을 감싸고 있던 손 위로 커다란 손이 겹쳐졌다.
“저 형이 쓴 책을 읽은 적이 있어요.”
불완전한 잔해라고. 엷게 드리워진 어둠 속에서 권호영이 눈을 지그시 감고는 얘기했다. 자신의 뺨을 감싼 손이 시원한 그늘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는 편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부럽더라고요. 좀 신기하기도 하고. 전 어려서부터 여유 없이 살아서 누굴 좋아해 본 적이 없어요. 다른 사람의 행복을 바라 본 적도요.”
그게 설령 가족이더라도. 작게 흘러나온 목소리가 뒤이어 공허한 방 안을 울렸다.
“같이 술 먹었던 날, 형은 기억 못 할 수도 있지만 그때 그런 걸 물어봤어요. 좋아하는 사람을 갑작스럽게 떠나보내야 하면 어쩔 거냐고.”
“그거…….”
“맞아요. 그 책에서 본 내용이에요.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궁금했거든요.”
그는 상대를 떠봤다는 얘기를 담담하게 고백했다. 엄마에게 귀띔받아 그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걸 물었는지 대강 짐작하고 있었다. 단여명은 잠자코 침묵을 지켰다.
“책 속에서 사랑에 빠진 형은 반짝반짝 빛나 보였어요.”
그냥 글자일 뿐인데. 자기가 말해놓고 우습다는 양 권호영이 미약한 바람을 풍기며 웃었다.
“그리고 그때도 그랬어요. 얼굴은 엄청 빨갛고, 발음은 엉망에 고개도 잘 못 가누는데…….”
“…….”
“왠지 빛이 나는 것처럼 보였어요.”
감겨 있던 눈꺼풀이 스르르 열렸다. 더 이상 잠기가 묻어나지 않는 두 눈에 잔잔한 빛이 아롱졌다.
“솔직히 그전까진 좀 꼬인 생각을 했거든요. 사람들이 구매하는 책이니까 보여주기식으로 꽃을 사다 바치겠다. 그렇게 말한 거라고 생각했는데……. 거기서 더한 대답이 나올 줄은 몰랐죠.”
그 말을 들은 순간 단여명은 과거의 한 장면을 되살렸다. 술에 취해 감성에 젖어서 권호영에게 그런 말을 했었다. 영원한 사랑이 나타나면 같이 죽어도 괜찮을 것 같다고. 낯이 급격히 후끈거렸다. 단여명은 허둥지둥 변명했다.
“아, 아니. 그거는…….”
“진심이었잖아요.”
“…….”
“책은 낭만적으로 각색한 거고, 제 앞에서 말했던 게 진심이잖아요.”
고요한 목소리엔 확신이 담겨 있었다. 단여명은 입을 꾹 다물었다. 제 입으로 제가 보는 눈을 의식하는 편이라고 실토한 게 아까 전이었다. 뭐라 더 반박할 거리가 없었다.
그야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죽고 싶다고 말하면 과하게 보일 테니까. 사랑에 정신 나간 사람처럼 보이고, 그 사람 없이 살아갈 자신이 없다는, 연약하고 미련한 사람처럼 비칠 게 틀림없었다. 그게 창피하고 싫어서 자기 보호 본능을 일으켰다.
속으로 하지 못할 말을 구시렁대고 있는데, 손에서 보들보들한 감촉이 느껴졌다. 손바닥에 뺨을 문지른 권호영은 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간파한 것처럼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그래서 욕심이 생겼던 것 같아요. 의지도 하고 싶었고…….”
“…….”
“나중엔 한 번도 가져 본 적 없는 꿈이 생겼어요.”
권호영이 눈을 살며시 내리깔았다. 손끝에 기다란 속눈썹이 스쳤다. 간지러운 감촉에 손가락을 움찔한 순간이었다.
“행복해지고 싶었어요. 형이랑 그렇게 살면서.”
커다란 손이 급하지 않게 손을 잡아끌었다. 단여명은 그가 이끄는 방향대로 홀린 듯 손을 내어줬다.
“형이 제 옆에 있어서 행복하지 않다고 해도….”
손바닥에 부드러운 입술이 닿을 듯 말 듯이 스쳤다. 그 감촉이 어떠한 신호라도 된 듯 지난날의 목소리를 불러일으켰다.
“아마 그걸 알았다 해도 놓지 못했을 거예요.”
보고 싶어요. 그 말을 끝으로 전화가 뚝 끊겼던 밤, 그는 이제 뭘 하고 싶은지 알 것 같다고 말했다.
“형만 이기적인 게 아니에요. 형이 생각하는 것만큼, 저 그렇게 순진하지도 않고요.”
살짝 움츠러든 엄지에 매끈한 콧방울이 닿았다. 달싹이는 입술이 손안에서 느린 왈츠를 추듯 살아 움직였다.
“저 원래 욕심 없는 사람이에요. 처음 우물 밖으로 나와서 호수가 바다라고 착각하는 걸 수도 있어요.”
“…….”
“그런데… 그게 잘못된 건 아니잖아요.”
단여명은 자신의 손에 입술을 묻은 남자를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눈썹의 미세한 움직임과 간간이 빗나가는 눈길, 일렁이다가 종내 자신을 담는 눈동자가 귀에 들리지 않는 소리를 만들어내 정신을 현혹시켰다.
“형은 제가 처음 느낀 봄이에요.”
가슴 깊은 곳에 묻어놨던 마음이 기도를 타고 바깥바람을 맞았다.
“새로운 시작이고, 구원이에요.”
떨림이 섞인 목소리 안에 떨림을 숨긴 고백이 담겼다. 막힌 공간을 메아리친 목소리가 고막을 두드리고, 심장을 격타했다. 맥박 뛰는 살덩어리를 연결한 핏줄이 삽시간에 끊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제 모든 걸 드릴게요. 그러니까 형의 마지막 사람은 제가 되게 해 주세요.”
더운 숨이 샘물처럼 고인 손바닥에 보드라운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경건한 얼굴로 단여명의 손에 입을 맞춘 권호영이 낮게 속삭였다.
“영원한 사랑이 될 수 있도록 노력할게요.”
영원한 사랑. 그 말은 즉, 두 번째 청혼이었다.
“좋아해요.”
“…….”
“결혼 얘기보다 이 말을 먼저 했어야 했는데. …너무 오래 걸렸죠.”
권호영은 모든 얘기를 담담하게 털어놓고 뒤늦게 감정을 추슬렀다. 단여명이 그랬던 것처럼 말을 더듬거나, 허둥지둥 뒷수습하는 모습을 보이진 않았다. 그러나 조금은 부끄럽고, 무슨 대답이 돌아올지 몰라 약간 긴장한 낌새가 엿보였다.
단여명은 한동안 침묵에 잠겼다. 권호영이 자신의 말을 듣고 숨을 헐떡였던 게 왜 그랬는지 알 것 같았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데, 무슨 말을 먼저 해야 할지 몰라 호흡이 가빠졌다.
문밖으로 도망쳤던 뒷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 그래서 숨김없이 드러낸 진심이, 감정의 심층이 느껴지는 목소리가 그만큼 소중하고, 애틋하게 다가왔다.
길게 잡아야 고작 30초. 긴 세월 속 찰나의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 짧은 새에 많은 것이 바뀌었다. 여기서 더 좋아할 수 없다고 생각했는데, 온몸의 힘이 쭉 빠질 정도로 탈진감을 닮은 감정이 전신을 장악했다. 사랑이란 감정이 온몸의 구멍을 다 틀어막아 익사 직전처럼 무력감마저 들었다.
단여명은 대답을 망설였다. 가슴이 뜨겁게 끓는 것과 동시에 제가 섣불리 꺼낸 말이 이 시간을 망쳐버릴까 봐 겁이 났다. 말을 깎아내고, 쳐내고, 아무리 다듬어 봐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권호영은 그 속내를 꿰뚫어 본 사람처럼 순종적으로 대답을 기다렸다. 길게 맞물린 시선 끝에 단여명의 입이 열렸다.
“…안 늦었어. 충분해.”
단여명은 손바닥을 돌려 그의 손을 마주 잡았다. 줄곧 입술이 닿았던 손바닥에 그보다 더 커다란 손바닥이 포개졌다.
“네가 어떤 사람이라도 괜찮아. 네가 못났다고 생각하는 부분까지 사랑하게 될 테니까.”
내가 단단히 홀렸지. 내가 쟤한테 단단히 돌아서…….
“내가 바다가 될게. 넌 물살을 가르면서 앞으로만 나아가.”
맨정신으로 하지 못할 얘기를 아무렇지 않게 하지.
단여명은 권호영이 그랬던 것처럼 그의 손등에 입술을 눌렀다. 왠지 눈물이 울컥 나올 것 같아 눈을 내리깔았다.
나는 그리 멋진 사람이 아닌데. 책임감도 부족하고, 포용력이 넓은 사람도 아닌데. 권호영이 진심으로 부딪쳐 오니까 그 마음에 필사적으로 부응하게 된다.
권호영은 다른 말이 없었다. 한순간의 신기루를 본 것처럼 눈도 깜빡이지 않고, 이쪽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낭만으로 점철된 얘기를 한 게 약간 멋쩍어졌다. 단여명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둘러 말을 돌리려고 했다.
“영원이라는 시간에 비하면 3개월은 덧없는 시간이잖아. 그러니까 우리 천천히…….”
미흡하게 들릴 얘기를 주절대던 찰나였다. 난데없는 쿵! 소리가 나더니 순식간에 시야가 거꾸로 뒤집혔다.
“……!”
매트리스에 튕긴 머리가 얼얼한 고통을 호소했다. 밀쳐진 어깨 앞판이 시큰거리더니 정면에 빙글빙글 돌아가는 천장이 보였다. 권호영이 예측하지 못한 순간에 달려든 탓이었다.
“너, 갑자기, 또 무슨……!”
“형.”
차가운 손이 불쑥 상의 속을 파고들었다. 헉…! 깜짝 놀란 단여명이 어깨를 안으로 말았다. 다리를 바르작댈수록 서로의 몸이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옷 속에 무례하게 침입한 손은 척추뼈를 지분대다가 등허리를 크게 쓸었다.
“형…….”
맨살을 더듬는 손길에서 성적인 기미는 느껴지지 않았다. 단지 판판한 피부와 그 아래에 있는 단단한 뼈의 감촉을 느끼기 급급해 보였다.
“좋아해요.”
뜨거운 숨이 귓가에 뭉텅이 채 퍼부어졌다. 서로의 다리가 꾸물거리며 뒤엉켰다. 툭 튀어나온 날개 뼈의 형태를 매만지던 손은 그를 손안에 가두듯 완전히 등을 끌어안았다.
“형이 너무 좋아서 죽고 싶어요…….”
단여명의 목덜미에 얼굴을 처박은 권호영이 달뜬 목소리를 토해냈다. 단여명은 거구의 밑에 깔려 놀란 숨만 할딱였다. 도깨비의 홀림에서 삽시간에 풀려난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러는 중에도 권호영은 몸 구석구석을 어루만졌다. 형이 좋아요. 지금 당장 죽어도 좋을 만큼 형이 좋아요. 정말 많이 좋아해요…. 그동안 참았던 걸 한꺼번에 터트리기라도 하듯 애정이 짙은 말을 중얼거리며.
단여명은 눈알을 굴리며 상황 파악하다가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감정이 격해져서 또 몸부터 들이박았나 보다. 난 또 맨살을 더듬기에……. 잠깐 엉큼한 상상을 한 게 미안할 정도였다.
“나도. 정말 많이 사랑해.”
놀란 심장을 진정시킨 단여명이 그의 등을 다독였다. 죽고 싶다는 건 좀 과격한 표현이지만, 그만큼 진심이라는 뜻이니까. 듣기 좋은 세레나데로 완곡히 들렸다.
등허리를 옹송그려 단여명의 몸을 꽉 껴안은 권호영이 다시 말해 달라고 말했다. 단여명이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재차 입술을 달싹였다.
“사랑해.”
그러자 몸을 감싸 안은 힘이 더욱 격해졌다. 단여명은 윽, 하고 목이 졸린 소리를 냈지만, 얌전히 품을 내어줬다.
그 후에도 권호영은 몇 번이나 다시 말해 달라고 보챘다. 단여명은 그때마다 사랑한다는 말을 되풀이하여 들려줬다. 똑같은 말을 끊임없이 반복했지만, 그게 싫증이 나진 않았다. 권호영이 때마다 다른 반응을 돌려줬기 때문이었다.
그리 서로를 끌어안은 채 얼마의 시간을 보냈을까. 문득 찾아온 적막에 단여명이 습관처럼 농담을 던졌다.
“그런데 있잖아, 호영아. 네가 매번 이렇게 달려들면 내 갈비뼈가 언젠가 부서지지 않을까?”
권호영은 화들짝 놀란 얼굴로 몸을 떨어트렸다. 그렇게 세게 달려든 줄 몰랐단다. 곧장 갈비뼈를 확인하려고 분주해진 손길에 단여명은 참았던 웃음을 터트렸다.
그 뒤로 두 사람은 정말 잘 준비를 서둘렀다. 권호영이 샤워하러 간 사이 단여명은 매트리스의 비닐을 벗겼다. 부엌 선반을 뒤지다가 나온 쇼핑백 안에 그의 옷가지를 차곡차곡 정리해 넣었다.
다시 불을 끄고 나란히 침대에 누웠을 땐 새벽 1시 경이었다. 많은 일이 있었던 날이니만큼 두 사람은 쉬이 잠들지 못했다. 졸린 눈을 비비면서도 두런두런한 말소리는 끊기지 않았다.
우연히 길에서 마주쳤을 때 둘 다 붙잡으려 했다는 걸 알고 가벼운 웃음을 터트렸고, 술자리에서 서로 질투심을 느꼈다는 사실엔 작은 목소리로 말다툼했다. 권호영의 방 안, 맨 밑 칸 서랍에 숨겨진 비밀도 알게 됐다. 그 서랍은 김선오의 핸드폰이 들어 있던 자리이자 단여명이 출간한 책들을 숨겨놓았던 곳이었다.
권호영은 ‘불완전한 잔해’를 읽고 나서 틈틈이 후속작을 사들였다고 밝혔다. 단여명이 김선오 일 때문에 그에게 시간을 내주지 못하던 때, 단여명의 빈자리를 대신해 책을 읽었다고 말이다.
권호영은 ‘불완전한 잔해’가 제일 인상 깊었다고 말했다. 단여명은 그럴 만도 하다며 고개를 주억였다. 맨 처음 출간한 책엔 자신이 과거에 생각했던 사랑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두 번째 작품부터는 사족을 깔끔히 지웠다. 사랑이 이렇다고 정의하기엔, 모두가 생각하는 사랑이 각기 달랐다. 독자들이 자유롭게 생각할 의지를 거세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서랍 얘기로 대화가 물올랐을 때 대미를 장식한 건 콘돔이었다. 권호영이 콘돔을 사놓고 사용하지 않았다고 어렵게 양심고백 했기 때문이었다.
실소를 터뜨린 단여명은 ‘너 생각보다 속이 시커멓다’라고 말했다. 그에 권호영은 쩔쩔매며 변명했다. 침대 밖에서 형을 더 만지고 싶어서 그랬다고. 안에 사정하는 게 싫으면 앞으론 콘돔을 사용하겠다는 말을 덧붙였다.
단여명은 싫지 않다고 부드럽게 대답하며 속으로 생각했다. 사람은 끼리끼리라더니. 속이 시꺼먼 것도, 그동안 비밀을 많이 만들어뒀던 것도 어떻게 이렇게 겹치나 싶었다.
그를 증명하듯 권호영이 곧장 다른 질문을 던졌다. 처음 만났을 땐 꼴이 엉망이었는데, 뭐를 보고 성적인 흥미를 느꼈냐고.
단여명은 올 것이 왔다고 서늘하게 직감했다. 시간을 질질 끌다가 음절을 띄엄띄엄 뱉으며 힘겹게 본심을 고백했다. 권호영이 술에 취해 뻗어 있던 날, 속옷 속에 발기한 물건을 보았다고.
권호영은 눈살을 찡그리더니 입을 닫았다.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단여명을 아래위로 훑다가 ‘…제 속이 뭐 어떻다고요?’라고 물었다. 그에 단여명은 아무런 말도 꺼내지 못했다.
서로 몰랐던 얘기에 소란이 잦은 밤이다. 둘은 상기된 낯으로 대화를 나누다가도 눈이 마주치면 자연스레 입술을 가까이 했다. 입술이 닿는 곳은 무분별했다. 입술이나 뺨, 콧잔등처럼 얼굴일 때도 있었고, 목이나 어깨 부근으로 내려갈 때도 있었다.
결국 그 밤엔 누가 먼저 잠들었는지 서로 기억하지 못했다. 해가 어렴풋이 뜰 때쯤 목소리가 끊겼고, 삽시간에 방 안이 적막에 잠겼다.
뙤약볕이 뜨겁게 내리쬐는 여름 방학의 첫날. 그를 기념하듯 둘은 작은 단칸방에서 나란히 늦잠을 자고 일어났다.
다사다난했던 날로부터 일주일이 지났다.
둘은 다시 한집에 뭉쳤다. 말로 합의한 것처럼 둘 다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했다. 단여명이 쇼핑백 안에 옷가지를 챙겨 넣은 걸 보고 권호영은 군말 없이 그 위에 남은 짐을 보탰다. 단출한 이삿짐은 쇼핑백 하나에 다 담겼다.
일주일 반 동안 생활했던 원룸은 그렇게 매트리스만 덩그러니 놓인 채 텅 비었다. 아마 새로운 세입자가 들어오기 전까지 그 방에 불이 켜지는 일은 요원할 것이다.
요즘 들어 단여명은 종종 예전을 상기했다. 언젠가 권호영이 현관문 앞까지 마중을 나왔던 때 신혼부부 같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했었다. 그래서 그에게 충동적으로 입을 맞췄다. 그땐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둘 다 허둥거리고, 부끄러워했다.
또 그런 일도 있었다. 권호영이 허벅지 위에 자신을 앉혀놓고 볼에 입을 맞췄던 날. 전보다 허물없어졌다지만, 그는 그때도 약간 조심스럽게 행동했다. 눈을 맞추고, 살짝 웃음을 지은 다음 입술이 닿았다. 그래서 그가 다음으로 보일 행동을 예측할 수 있었다.
그래서 권호영과 사귀면 전과 비슷하리라 생각했다. 단여명이 생각하는 권호영은 대담한 성격이 못 되었다. 침대 밖에서 먼저 뽀뽀한 것도 그때 딱 한 번뿐이었다.
그리고 단여명은 그 추측이 완전히 산산조각이 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
이른 새벽. 단여명은 오늘도 어김없이 해 뜨기 직전에 눈을 떴다.
최근 권호영에게 하나의 잠버릇이 생겼다. 단여명의 팬티 속에 손을 집어넣고, 엉덩이 한쪽을 움켜쥐고 자는 것이었다.
서로의 다리도 뱀의 몸뚱이처럼 하나로 엉킨 채였다. 엉덩이를 잡지 않은 한쪽 팔은 단여명의 뒷목을 받치고 있었다. 턱은 단여명의 이마에 붙이고, 코는 정수리에 파묻다시피 한 권호영은 불편하지도 않은지 새근거리며 잠든 상태였다.
잠귀가 예민한 단여명은 새벽마다 잠에서 깰 수밖에 없었다. 불편해…. 이러면 돌아눕지도 못하는데. 속으로 구시렁대면서도 단여명은 권호영의 몸에 바짝 밀착했다. 허리를 끌어안으며 품에 안기니 권호영이 잠든 와중에 엉덩이를 토닥였다. 단여명이 새벽마다 잠깐씩 깨는 걸 알아서였다.
무풍으로 가동 중인 에어컨 덕에 살을 붙이고 있어도 덥지 않았다. 단여명은 몸을 살짝 뒤척이곤 눈을 감았다. 엉덩이를 토닥이는 손길이 멎어갈 때쯤 다시 스르르 잠에 빠져들었다.
“형.”
그리고 아침 8시. 운동을 다녀온 권호영이 침대에 오르는 것으로 본격적인 하루가 시작된다.
“아침이에요.”
침대 매트리스에 커다란 진동이 일었다. 그에 희미한 정신이 든 찰나 덥석 양 뺨이 붙잡혔다. 쪽, 쪽, 쪽. 얼굴 곳곳에 정신없는 입맞춤이 내려앉았다.
“저 씻고 올 때까지 잠 좀 깨고 있어요. 응?”
커다란 손이 머리카락을 위로 쓸어 올려 쓱쓱 빗질해 줬다. 응, 응…. 단여명은 눈도 뜨지 못하고 건성으로 대답했다.
웬만하면 잘 때 깨우지 않던 녀석이 사귀고 난 뒤엔 아침마다 모닝콜의 역할을 자처했다. 권호영은 아침잠이 없는 편이었다. 알림이 울리기 전에 일어나거나, 알람이 울리는 것과 동시에 칼같이 기상했다.
하지만 아침잠이 많고, 알람이 필요 없던 삶을 누리던 단여명은 아침에 쉬이 눈을 뜨지 못했다. 권호영이 침대를 떠나는 기척을 느끼자마자 단여명은 다시 잠들었다. 멀리서 바닥을 때리는 물줄기 소리가 들리더니 곧 까무룩 멀어졌다.
그리 달콤한 꿈속의 세계를 얼마나 유영했을까.
“아, 차갑…….”
얼굴에 물방울이 하나둘씩 떨어져 단여명은 다시 현실로 소환됐다. 인상을 찌푸리고 실낱같이 눈을 떠보니 제 몸 위에 올라탄 권호영의 얼굴이 보였다.
그의 머리엔 젖은 수건이 얹어져 있었다. 물기를 촉촉하게 머금은 머리칼은 눈 밑까지 내려와 청량하게 흐트러져 있었고, 갓 씻고 나온 피부에선 반짝반짝 윤이 돌았다. 매끈한 목덜미 아래로 탄탄하게 굴곡 잡힌 삼각근이 드러났다. 척 보니 샤워 후 바지만 꿰입고 곧장 침대로 달려온 모습이었다.
야성미가 뚝뚝 넘쳐흐르는 모습으로 그는 장난기를 삭이고 있었다. 웃음을 참느라 양 뺨에 보조개가 오목하게 들어가니 육감적으로 보이던 이미지에 싱그러운 풋내가 끼쳤다. 그는 잠든 얼굴이 눈을 뜨길 고대하던 얼굴이었다.
“일어나요.”
눈이 마주치자 권호영이 얼굴을 가까이 들이댔다. 폭신한 입술이 도장 찍듯이 볼살을 꾹 눌렀다. 향긋한 샴푸 냄새가 물씬 퍼져 코끝을 휘감았다. 음……. 단여명은 눈썹을 찡그리며 그의 어깨를 힘없이 밀었다. 어느새 눈꺼풀은 다시 감긴 뒤였다.
눈 돌아가게 멋진 남자가, 그것도 자신의 애인이란 사람이 반나체로 몸을 덮친 상태였다. 하지만 지금은 귀찮다는 생각만 역력했다. 그의 머리카락 끝에서 떨어진 물이 베개며 얼굴이며 다 적셨다. 보송보송한 청정 지역에 난데없는 비가 내린 격이라 그리 달갑지 않았다.
권호영이 입술과 손으로 번갈아 뺨을 조몰락댔다. 그럼에도 단여명은 철통같이 잠을 자겠다는 태도를 지켰다. 권호영을 따라 규칙적인 생활 습관을 기르면 여러 방면으로 좋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당장의 졸음이 급선무였다.
“형?”
졸린 와중에 대답을 할 수 있을 리 만무했다. 단여명은 그 목소리를 못 들은 척 눈을 감고만 있었다. 내친김에 숨소리도 색색 내쉬었다. 네가 뭘 어떻게 하든 계속 드러누워 자겠다는 뜻이었다.
잠깐의 정적이 지났다. 뺨을 가만히 문지르던 입술이 조그마한 틈을 벌렸다. 그에 무슨 예감을 느끼기도 전이다. 그대로 뺨이 왕! 깨물렸다.
“아, 아파! 일어났어, 진짜 일어났어…!”
단여명은 화들짝 놀라 눈을 번쩍 떴다. 놀란 마음에 손을 허우적대니 권호영이 몸을 이불째 끌어안고 낮은 웃음을 터트렸다. 원망스러운 눈초리를 보내도 권호영은 뭐가 그리 좋은지 실실 웃었다.
“너 진짜……. 나 어제 늦게 잠들어서…….”
단여명은 권호영의 손에 이끌려 화장실 앞으로 걸어갔다. 비몽사몽 투덜대도 권호영은 들은 체 만 체하며 단여명을 욕실 안에 몰아넣었다.
권호영이 씻고 나간 욕실엔 보디 워시 향기가 자욱하게 퍼져 있었다. 단여명은 그 향기를 온몸으로 느끼며 세수하고 양치했다. 같은 제품으로 씻는데 왜 쟤한테서 더 좋은 냄새가 나는 것 같지. 싱거운 생각을 하며 씻다 보니 어느새 마지막 양칫물을 뱉고 있었다.
그리고 단여명은 화장실의 문을 열자마자 그 앞에서 대기 타던 권호영의 품에 덥석 붙잡혔다. 그가 뒤에서 허리를 끌어안은 채 몸을 들어 올렸다. 다리를 움직인 적도 없는데, 몸이 거실에 도착해 있었다. 소파 위에 앉은 권호영이 다리 사이에 단여명을 앉혔다.
갑자기 이렇게 번쩍번쩍 들지 말라니까. 이제 뭐라 하기도 지쳤다. 허리 나간다고 말해 봤자 ‘형 갈비뼈보다는 제 허리가 나가는 게 낫지 않을까요’ 따위의 대답이 돌아올 게 훤했으니. 둘이 나란히 걸어가는 게 정답이건만, 권호영은 사랑스러운 오답만을 얘기했다.
“아침에 먹는 사과가 금이래요.”
나른하게 하품하는데, 눈앞에 불쑥 무언가가 내밀어졌다. 어젯밤에 같이 장 보러 가 권호영이 장바구니에 넣었던 사과였다. 단여명은 그가 내민 사과를 받아 들고, 겉모양을 요리조리 뜯어보았다.
‘……토끼.’
어젯밤만 해도 멀쩡했던 사과는 예쁜 토끼 모양으로 바뀌어 있었다. 갈수록 요리 스킬이 능란해졌다. 대놓고 애정 공세를 하는 그의 행동을 따라가는 것처럼.
“대충 깎지. 손 다치면 어쩌려고.”
“마음에 안 들어요?”
“아니, 귀여워. 권호영이 여러 마리 있네.”
“토끼 닮았다는 소리는 처음 듣는데…….”
가볍게 웃은 권호영이 어깨에 턱을 괴더니 뺨에 쪽 입을 맞췄다. 티셔츠 안쪽을 자연스레 파고든 손은 배를 지분대는 중이었다. 뭐 잡히는 것도 없는데, 그는 바지런히 맨살을 만지작댔다.
“닳겠다…….”
사과를 씹는 중에도 쪽쪽대는 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우물거리는 볼에 시선이 끌린 탓인지 그는 집중적으로 뺨에만 뽀뽀를 퍼부었다.
“이쪽으로 사과를 못 씹겠어.”
단여명이 성가시다고 내색하며 한쪽 뺨을 가렸다. 권호영은 개의치 않고, 뺨을 가린 손등에도 입술을 쪽쪽 눌렀다.
아침에 막 일어난 단여명은 무방비했다. 자유분방하게 헝클어진 머리와 졸음이 뚝뚝 묻어나는 얼굴은 없던 장난기도 샘솟게 했다. 심지어 갓 잠에서 깬 단여명은 따뜻하고, 부드럽고, 말랑말랑했다. 그래서 손을 가만두지 못하고 계속 입술을 쪼게 됐다.
“얼굴 부었어요. 입술도.”
지금껏 귀찮게 군 적이 없어서 몰랐는데, 그는 귀찮아하는 모습도 사랑스러웠다. 계속 괴롭히면 쓰읍, 하면서 하지 말라고 손을 휙휙 내젓는데, 그 손짓마저 맥없고, 전혀 위협적이지 않았다. 거기서 더 가면 되레 제 볼을 꼬집으며 ‘하지 말랬지’ 하고 눈을 가느스름하게 좁혔다.
아마 단여명은 모를 것이다. 뺨을 꼬집는 걸 넘어서 뺨 한 대는 맞아야지 괴롭히는 상대가 제정신을 차릴 거란 것을.
“네가 하도 주물럭대니까 그렇지.”
전엔 이 얼굴을 앞에 두고 어떻게 참았지. 지금으로선 상상도 못 할 일이었다. 권호영은 단여명의 볼에 입술을 깊이 파묻었다. 쪽, 쪼옥, 쪽, 쪽…. 흡사 쭈쭈바를 빨아 먹을 때 같은 소리가 민망스레 울렸다.
“너 아침에만 뽀뽀 백 번은 한 것 같아….”
단여명은 쉴 새 없는 애정 표현에 그새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처음 연애해 보는 스무 살짜리의 마음을 가볍게 치부했던 탓이었다.
입술이 아프지도 않은가. 심지어 이른 아침인데. 애정 표현으로 절대 밀리지 않을 거라고 자부했는데, 시작하기도 전에 진 기분이다. 애초에 체력부터 밀렸다. 단여명은 아침에 커피를 마시며 느릿느릿 잠을 깨는 스타일이었다. 새벽 6시부터 펄펄 날아다니는 권호영과 비교 자체가 불가했다.
“근데 왜 돌아오는 게 없어요?”
“그걸 말이라고 해? 네가 그럴 시간을 안 주잖아.”
진심으로 욱한 단여명이 억울하다는 눈빛을 보냈다. 그를 본 권호영이 제 입술을 가까이 들이댔다. 단여명은 그의 입술에 가볍게 입술을 부딪쳤다. 사과의 단맛이 묻었는지 그가 입술을 날름 핥았다. 그리고 가까이서 단여명의 얼굴을 뚫어져라 쳐다보기 시작했다.
눈빛이 묘했다. 뽀뽀를 받은 게 좋긴 좋은데, 마음에 뭔가 걸리는 게 있는 사람처럼. 그에 단여명이 왜 그러냐는 물음을 던지기도 전이다.
“노트북 비밀번호 누구 생일이에요?”
…시작됐다. 태연한 표정으로 궁금한 거 캐묻기. 뜬금없이 묻는 것이 어떻게 된 게 다 전 애인과 관련된 것들이었다. 뒤통수에 무슨 레이더라도 달렸는지 권호영은 그런 쪽으로 촉이 좋았다.
“…바꿀까?”
슬그머니 물은 단여명이 얼른 말을 고쳐 말했다.
“바꿀게. 네 생일로.”
“좋아요.”
권호영이 상체를 당겨 품속에 집어넣듯이 끌어안았다. 배를 더듬던 손이 물 흐르듯 옆구리로 향했다. 허리를 살살 쓸며 그가 은근히 시선을 맞췄다. 그에 잠깐 안심한 찰나였다.
“그래서 누구 생일인데요?”
그가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집요한 물음을 이어갔다.
“이 사과 진짜 달다. 완전 아삭아삭….”
“말 돌리지 말고요.”
어떻게든 빠져나가 보려는데, 바로 꼬리가 잡혀버렸다. 단여명은 ‘아닌데…’ 하며 눈동자를 반대로 굴렸다. 곤란해하는 게 보일 텐데도 권호영은 의지를 꺾지 않았다.
“연인 사이에는 숨기는 게 없어야 된다고 했어요.”
“…….”
“약속했잖아요. 이제 거짓말하지 않기로.”
굳은살 박인 손이 허리의 살결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왜 하필 물어도 그런 걸…. 단여명은 속으로 투덜대면서도 권호영의 눈치를 살폈다. 저리 시무룩한 목소리로 말하니 더는 오리발 내밀 수 없었다.
“전에 만났던 사람인데, 진짜 별로였어.”
몇 번 취조당한 경험으로 단여명은 권호영을 납득시키기 위한 최단 루트를 꿰고 있었다. 첫말과 함께 결론짓기. 괜한 말로 시간을 끌어 봤자 자신만 손해였다.
“귀찮아서 그냥 쓰고 있던 거지 별 뜻 없어. 얼굴도 내 취향 아니고, 성격도 안 좋았어. 한 3개월 사귀었나? 하도 짧게 만나서 기억도 잘 안 나네.”
“그런데 뭐가 좋아서 만났어요?”
“그때 눈이 삐었던 거지.”
“그럼 지금도 눈이 삔 거예요?”
태연한 표정이지만, 말투에서 진심이 담긴 게 느껴졌다. 정답이 정해진 질문이란 걸 모르지 않을 텐데. 단여명은 생긋 눈웃음쳤다.
“지금 눈 삔 건 아마 평생 갈 것 같은데.”
능청스럽게 대답하니 권호영의 입꼬리가 삐죽 올라갔다. 눈빛도 한결 부드럽게 풀렸다. 마치 뜨거운 목욕물에 몸을 담근 사람처럼 노곤해 보이기까지 했다. 귀엽긴. 단여명은 그의 턱을 손으로 가볍게 긁어 줬다. 가만 보면 단순하다니…….
“그래서 정확히, 어디가 좋았어요?”
……까. 턱을 긁던 손이 이내 멈칫했다. 단여명은 조용히 마른침을 넘겼다. 오늘따라 연하의 남자 친구님께서 많이 달콤 살벌하시다.
“……진짜 기억 안 난다니까.”
권호영은 자신의 전남친인 김선오와 있었던 일을 알았다. 그래서 자신이 과거에 만났던 사람들에게 털을 곤두세울 건 짐작하고 있었다. 그것 때문에 그와 만나는 걸 주저했고.
막상 사귀어 보니 싸움으로 번지진 않았지만, 이럴 때마다 곤혹스럽긴 했다. 권호영은 자신이 첫사랑이었고, 자신은 전에 만났던 사람들이 차고 넘쳤다. 그게 둘의 관계에 있어 어떠한 죄목으로 작용했다.
분명 그들의 흔적이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권호영은 예리하게 빈틈을 파고들었다. 그 예로 그는 며칠 전 귓불에 난 흔적에 대해 호기심을 보였다. 누구랑 같이 귀를 뚫으러 갔었느냐고. 그때도 단여명은 은근슬쩍 말을 돌리느라 진땀을 뺐다.
“잘 떠올려 봐요. 참고하려고 그런 거니까.”
부드러운 머리칼이 목덜미를 간질이듯 비벼졌다. 허리를 끌어안지 않은 손은 상체를 가로질러 어깨를 감싸고 있었다. 완전히 포박하듯 끌어안긴 형세였지만, 단여명은 답답함을 느끼지 못했다. 그새 많이 익숙해진 탓이었다.
“그냥 너니까 좋은 거야.”
한숨을 내쉰 단여명이 졌다는 투로 얘기했다. 그리고 못 말린다는 듯 웃으며 반쯤 남은 사과를 권호영의 입에 대줬다.
“참고해 봤자라고. 멍청아.”
예전엔 몰랐는데 권호영은 질투가 심했다. 첫사랑은 누구였냐, 첫 경험은 어땠냐, 그 사람과 왜 사귀고 왜 헤어졌느냐. 괜한 걸 물어 긁어 부스럼 만들고, 쓸데없는 열의를 불태웠다.
아침에 거하게 차린 상이 부담스러워 과일로 대체하자고 말한 게 어제였다. 그런데 지금 보면 그 과일마저 정성을 다해 깎아 왔다. 제게 잘 보이고 싶어 안달하는 게 귀엽고, 보는 맛이 쏠쏠하긴 했다. 하지만 혼자 하는 사랑이 아니니 그가 덜 노력했으면 싶었다.
“왜 사서 걱정이야? 어차피 내 마지막은 네 거라며.”
그리 말하며 사과로 입술을 툭툭 두드리니 권호영이 얌전히 입을 벌렸다. 귓가에 아삭아삭 사과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렸다. 표정을 보니 어느 정도 마음을 놓은 것 같았다. 단여명은 그를 향해 씩 웃었다.
“그러니까 얼른 준비해. 면허시험 한 번에 붙어야지.”
최근 권호영은 운전면허 학원에 등록했다.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단여명은 그가 면허를 따겠다고 결심한 이유가 아마 저와 관련된 것이리라고 추측했다. 운전면허 학원에 등록했다는 말을 꺼냈을 때 그는 제 손을 만지작대며 기분 좋은 웃음을 그렸다.
애인을 만들면 옆자리에 태우고 싶은 로망이라도 있었나 보지. 단여명은 그리 생각하고 넘겼다. 언젠가 인사불성이 되도록 술에 취해 집에 들어온 날, 권호영이 자신을 보며 다짐했던 목표를 이루어가는 중인지도 모르고.
“가기 싫어요.”
“그래도 가야지. 바다 갈 때 네가 운전한다며. 목숨 내놓을 각오로 옆에 타겠다는 건데, 열심히 해야지.”
“형도 같이 가면 안 돼요?”
단여명은 짤막한 웃음을 내뱉었다. 운전면허를 두 번 딸 수도 없는 노릇이고, 제게 할 일이 있다는 것도 알 텐데. 요새 다 받아 줘서 그런지 어리광이 부쩍 늘었다.
“안 되는 거 알잖아. 얼른 준비해.”
딱 잘라 말해도 권호영은 좀처럼 떨어지려고 하지 않았다. 그는 접시에 놓여 있던 사과를 집어 단여명의 손에 쥐여 줬다. 애써 관심을 돌리려는 수작이 뻔히 보였다.
“아직 여유 있어요.”
조금만. 형 사과 다 먹을 때까지만. 권호영은 목덜미에 뺨을 치대며 조그맣게 속삭였다. 단여명은 사과를 손에 든 채 시계를 확인했다. 9시 10분에 나가야 한다고 했으니… 아직 30분 정도 여유가 있기는 했다.
“그래. 또 한쪽으로 씹지, 뭐.”
그 말에 권호영의 얼굴에 눈에 띄게 화색이 돌았다. 계속 껴안고 뽀뽀해도 된다는 허락인 걸 알아들은 눈치였다. 단여명은 그를 보며 가볍게 웃었다. 아마 보조개가 움푹 들어가도록 환히 웃는 얼굴을 볼 날이 그리 머지않은 것 같다.
“형.”
쪽, 쪽, 쪽. 사과를 한입 씹기도 전에 곧바로 입맞춤이 퍼부어졌다. 분명 한쪽 뺨만 내주겠다고 협의했는데, 그는 양 뺨을 감싸 본격적으로 입 맞출 자세를 잡았다.
입술과 입술이 가볍게 부딪쳤다가 떨어졌다. 이러면 뭘 입에 넣고 씹기도 힘들어진다. 아마 남은 사과는 권호영이 밖에 나간 뒤에야 먹을 수 있을 것 같다.
“여명아.”
애정이 섞인 목소리가 재차 귓가를 울렸다. 요새 권호영의 취미였다. 틈만 나면 이름으로 부르기.
내가 아는 권호영은 이렇게 적극적인 성격이 아니었는데…. 어쩐지 사기당한 기분을 느끼며 단여명은 눈을 가늘게 휘었다. 저 호칭에 어쩔 줄 몰라 하던 시절은 옛적에 지났다.
“왜, 애기야.”
도발하듯 목소리를 그윽하게 내리까니 권호영의 얼굴에 금이 갔다. 타격받은 티를 내듯 안면 근육을 움찔한 그는 곧 한쪽 눈썹을 슬며시 치켜들었다. 반응해 줘서 좋기는 한데, ‘애기’라는 애칭이 엄청나게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이었다.
곧 표정을 정돈한 그가 이를 보이며 씩 웃었다. 열은 받는데 애써 그를 내색하지 않는 미소였다. 표정 관리라는 의도와 다르게 나쁜 꿍꿍이를 품은 악당처럼 조금 독해 보였다.
아, 저 표정은 좀 섹시한데. 그리 엉뚱하게 생각한 순간.
“좋아서. 자기야.”
폭탄 같은 말이 던져졌다.
“미친, 진짜 미쳤어?”
낮은 목소리가 귓가의 솜털을 끈적하게 적셨다. 단여명은 경기하듯 어깨를 떨고는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경악스러운 마음에 손에서 미끄러진 사과가 소파 위를 뒹굴었다.
“너 저리 가. 닭살 돋아.”
품을 벗어나려고 다리를 버둥거려 보았지만, 권호영이 허리를 세게 끌어안고 놔주지 않았다. 그는 단여명의 귓가에 입술을 딱 붙인 채 말을 흘리듯이 내뱉었다. 단여명이 그랬던 것처럼 목소리를 음습하게 내리깔고.
“자기야.”
“아, 내가 졌다고! 그만해. 진짜 적응 안 돼.”
참다못한 단여명이 권호영의 얼굴을 손으로 쭉 밀어냈다. 싫다고 투덕거리지만, 권호영을 밀어낸 얼굴은 웃음을 한가득 머금고 있었다. 그건 단여명의 손바닥에 가려진 얼굴도 마찬가지였다. 손 틈새로 미처 숨기지 못한 웃음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솔직히 말해. 너 예전부터 그렇게 부르고 싶었지. 엠티 가서 전화했을 때 자기 어쩌고 그랬잖아. 그때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그럼 애기라고 부르지 마요.”
“너나 이름으로 부르지 마. 운전면허도 없는 게.”
뺨을 모아 잡고 반박하니 권호영의 표정이 약간 뾰로통해졌다. 붕어 입술이 된 우스꽝스러운 얼굴로 권호영이 지지 않고 맞섰다.
“윤재윤 선배한테는 말 놓으라고 했잖아요.”
다 들었는데. 볼록 튀어나온 입술을 오물거리며 그가 불만을 피력했다.
“네가 하는 건 심장에 안 좋아.”
“왜?”
왜겠어? 단여명은 눈으로 대답했다.
“알겠어.”
“…….”
“…요.”
눈빛으로 압박을 가하니 권호영이 시간차를 두고 ‘요’ 자를 붙였다. 잘했다는 듯 뺨을 꾹 모아 잡았다가 놔주는데, 되레 손목이 턱 붙잡혔다. 단여명의 손목을 돌려 잡은 권호영은 킁킁 손 냄새를 맡았다.
“사과 냄새.”
“너, 또 깨물지, 아프다고!”
단여명은 이번에야말로 도망에 성공했다. 말씨름하느라 권호영이 잠깐 방심한 찰나였다.
“안 할게요.”
“싫어. 너 오늘만 두 번째야.”
“진짜 안 할게요.”
둘은 거실에서 적정 거리를 두고 대치했다. 단여명은 잇자국이 난 손가락을 부여잡고 정면을 노려보았고, 권호영은 자리에 앉아 입바른 소리로 그를 살살 구슬렸다. 남들이 보면 혀를 끌끌 찰 만큼 유치찬란한 싸움이었다. 그러나 한창 좋을 때인 당사자들만 그 사실을 몰랐다.
“외로워요.”
권호영이 이리 오라는 듯 앉은 자리를 손으로 톡톡 두드렸다. 단여명은 미심쩍은 눈길을 보냈다. 내가 쟤를 귀염성도 없고, 애교도 없다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는데. 지금은 오래전에 꾼 꿈속의 일처럼 희미하게 느껴졌다.
“봐. 손에 잇자국 낫잖아. 좀 살살 깨물든가.”
단여명은 제 발로 도망쳐놓고, 다시 제 발로 그의 품에 안겼다. 품에 들어오는 것에 맞춰 권호영이 자연스레 단여명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
“미안해요. 예뻐서 그랬어요. 귀여워서. 응?”
상체가 겹치자마자 권호영이 귓불에 콧방울을 문질렀다. 뺨, 입술 다음으로 그가 좋아하는 신체 부위였다. 날렵한 콧대로 귓불을 간질이던 그는 이를 세우지 않고, 입술로만 말랑한 살점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야, 간지럽……!”
귓불이 약하게 깨물리는 것에 더해 뜨거운 숨이 귓구멍 속으로 된통 밀려들어 왔다. 간지럼을 느낀 단여명이 몸부림쳤고, 권호영이 그를 놓지 않는 바람에 두 사람은 나란히 소파 위로 넘어졌다.
“아, 그만, 그만!”
커다란 등 너머로 쪽쪽 소리와 큭큭대는 웃음소리가 터졌다. 권호영의 밑에 깔린 단여명은 한참 그렇게 입맞춤 세례를 받았다. 입술을 바삐 쪼면서 갈비뼈를 만지작대는 손길은 멎을 줄 몰랐다. 갈빗대를 일렬로 쓸어 반응을 확인하더니 나중엔 피아노의 건반을 두드리듯 고의를 가지고 간지럼을 태웠다.
간지럼이 극에 달한 단여명이 나중엔 그만하라며 애원하는 지경까지 이르렀다. 헐떡이는 가슴팍과 벌겋게 물든 얼굴이 어쩐지 야릇한 기분을 촉진했다. 눈물이 맺힌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던 권호영은 그만 충동을 참지 못하고 귓불을 깨물었고, 단여명에게 머리를 꿍 얻어맞는 것으로 상황은 종결됐다.
“가기 싫어요.”
현관문 앞에 선 권호영이 불만이 가득한 얼굴로 말했다. 저 말만 열한 번째였다. 한숨을 내쉰 단여명은 자못 산뜻한 목소리로 입술을 뗐다.
“그럼 가지 마.”
그에 언뜻 권호영의 표정이 밝아진 찰나였다.
“둘밖에 없는 가정, 형이 다 책임지지, 뭐.”
“…….”
“결혼반지도 내가 살게. 넌 손가락만 내밀어.”
“……다녀올게요.”
급격히 표정이 썩은 권호영이 미련 없이 문밖을 나섰다. 단여명은 맨발로 그를 뒤따라 나갔다. 현관문 밖으로 얼굴만 내민 채 멀어지는 뒷모습을 지켜보는데, 권호영이 문득 뒤를 돌아보았다. 단여명은 웃는 얼굴로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불만스러운 기색이 역력했지만, 권호영도 손을 마주 흔들어 줬다.
권호영이 엘리베이터를 타는 것까지 지켜보고, 단여명은 집 안으로 들어왔다. 저 커다란 녀석이 앙증맞은 곰 인형처럼 보이면 문제가 있는 건데. 바람직한 걸음걸이에서 삑삑 소리가 날 것 같다면, 남들 보기 부끄러운 주책이겠지.
연하가 귀엽긴 귀엽구나. 지금껏 동갑이나 연상만 만나온 탓에 이 좋은 걸 지금 알았다. 단여명은 방으로 걸어가 침대에 방치돼 있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좀 삐친 것 같으니 잘 다녀오라고 메시지라도 보내놔야겠다.
그러다 점점 엉뚱한 방향으로 생각이 튀었다. 멀쩡한 이성을 탑재한 단여명이였다면, 평소에 하지 않았을 발상이었다.
‘안 되는데….’
난 이렇게 충동적인 사람이 아닌데. 잘못하면 동네에 이상한 소문이 돌지도 모르는데. 그렇게 장난기가 심한 편도 아닌데. 그럼에도 걸음은 점점 빨라졌다. 어느새 손은 발코니의 문을 벌컥 열어젖히고 있었다.
연애 초잖아. 연애 초 때는 서로에게 살짝 미쳐 있어도 합법이었다. 미친 짓 해도 예쁘게 보일 시기가 지금 말고 또 언제 있다고. 단여명은 환히 웃는 얼굴로 창문을 활짝 열었다.
“권호영!”
더운 바깥 공기가 안면을 감싸자마자 단여명은 냅다 소리를 질렀다. 커다란 목소리에 마침 건물을 빠져나가던 권호영이 위를 올려다봤다. 멀고 먼 8층 높이에서 두 사람의 눈이 기적처럼 마주쳤다.
“우리 애기! 모르는 사람 따라가면 안 돼! 알았지?”
알았지, 지, 지…?! 오피스텔 단지 내에 커다란 목소리가 쩌렁쩌렁 메아리쳤다.
권호영의 움직임이 부자연스럽게 정지했다. 앞으로 걸어가던 다리는 누구에게 덜컥 붙들린 것처럼 멈췄고, 손 역시도 어정쩡한 위치에 띄워져 부동자세를 취했다.
멀리서도 그가 오만상을 쓴 게 눈에 훤히 보였다. 금방이라도 달려올 것처럼 위를 노려보던 권호영이 서둘러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이 웅- 진동했다. 도착한 메시지엔 갔다 와서 보자는 으름장이 담겨 있었다.
[갔다 오면 네가 뭐 어쩔 건데]
단여명은 발코니에 쭈그려 앉아 한참 배를 잡고 웃었다. 조금만 아프다 소리 하면 어쩔 줄 몰라 하는 녀석이. 끽해 봤자 진수성찬이나 차려놓고 팍팍 좀 뜨라고 잔소리나 하겠지. 네가 해봤자 뭘 하겠어.
몸으로 혼내 주겠다는 클리셰적인 흐름이 있지만, 아직 거기까진 잘 모를 것이다. 끊어먹을 것처럼 조인다, 생수병 하나를 다 채웠겠다, 하며 직설적인 얘기는 했지만, 고일 대로 고인 단여명의 입장에선 더티 토크의 발끝에도 못 미치는 소리로 들렸다.
권호영은 성기를 칭할 때 ‘아래’라고 말했지 한 번도 ‘자지’나 ‘좆’으로 부른 적이 없었다. 그것만 봐도 각이 나왔다.
‘아…… 귀여워 죽겠네.’
확 잡아먹을 수도 없고. 아무리 그래도 6년 더 산 짬이 있는데. 형 이겨먹으려면 한참 멀었지.
얼굴을 자세히 확인하지 못한 게 천추의 한이었다. 처음 봤을 땐 무표정하던 녀석이 요즘은 표정이 다양해졌다. 언제쯤 환히 웃는 얼굴을 볼 수 있으려나. 예쁜 입술에서 커다란 웃음이라도 터지는 날엔 돌잔치라도 열 듯 케이크 촛불이라도 불어야겠다.
그럼 권호영은 또 무슨 반응을 보일까. 아마 그때 가선 정말 몸으로 혼내 주겠다며 버클을 풀어헤칠지도 모르겠다. 권호영은 배움이 빠르니까.
널어놓은 빨래에서 좋은 냄새가 하늘하늘 풍겼다. 담배 냄새에 묻혀 자신에게선 미약한 향만 풍기지만, 권호영은 늘 달고 다니는 섬유유연제 냄새였다. 공기 중에 퍼진 향긋한 냄새처럼 기분이 둥실둥실 떠올라 공중걸음을 디뎠다.
발걸음 가볍게 거실로 들어온 단여명은 사과가 담긴 접시를 들어 올렸다. 한 손엔 갓 내린 커피를, 한 손엔 사과 접시를 들고, 책상 앞에 앉았다.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켜니 컴퓨터 화면에 빛이 들어왔다. 단여명은 어제까지 작성해 놓은 내용을 눈으로 훑고 키보드에 손을 올렸다.
여기 돌아오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
최근 권호영은 배움으로 가득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행복이란 게 무엇인지, 왜 연애만 하면 사람들이 귀에 입이 걸리도록 웃는지, 온종일 한 사람만 생각해도 왜 질리지를 않는지. 눈에 넣어도 안 아플 사람을 관찰하며 연애란 무엇인가, 하는 고찰에 빠졌다. 풀리지 않는 의혹이 떠오를 때면 단여명이라서 그렇다는 억지스러운 정답을 도출하며.
사귀기 전엔 그의 앞에서 조심성 있게 행동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억지로 받아낸 허락이래도 자신들은 결혼을 약속한 사이였다. 그 말인즉슨, 그렇게 바랐던 그의 가족이 된다는 소리였다.
눈물을 보이며 결혼 얘기를 꺼낸 게 지금 생각해도 창피하긴 했다. 그래서 지금처럼 지내다가 대학을 졸업하면 정식으로 프러포즈할 생각이었다. 이별은 없었다. 지금도 그렇고, 앞으로도 그러지 않게 만들 거니까.
실체를 까발린 단여명은 여전히 다정다감했다. 제 물건을 훔쳐보고 호감을 느꼈대도 상관없었다. 아니, 오히려 신께 감사했다. 헬스장 샤워장에서 성가신 눈길을 받는 신체적 특성에 불과했는데. 제 아랫도리가 도움이 되는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사귀기 전에도 따뜻했던 단여명은 교제를 약속한 후에도 웬만한 일은 너그럽게 이해했다. 귀찮게 잠을 깨워도, 뺨을 아프게 깨물어도, 전에 만났던 사람들에 대해 집요하게 캐물어도 심장이 흘러내리도록 부드럽게 웃어 줬다.
거기다 외적인 요소를 보태 보자면 얼굴도 잘생겼다. 몸도 늘씬하고, 키도 품에 쏙 들어올 정도로 적당히 크고, 말씨도 나긋나긋했다. 돈이 많은 것치고는 사치에 관심이 없고, 그를 과시하는 성격도 아니었다.
분명 애인으로서 흠잡을 곳이 없었다. 남들에게 제 것이라고 떠벌리고 싶을 만큼 잘나서 어디 내놓기 불안하기까지 했다.
다만 최근에 불만 아닌 불만이 한 가지 생겼다면.
“형.”
단여명이 지독한 워커홀릭이 됐다는 것이었다.
“저 들어갈게요.”
똑똑. 단여명의 방문을 노크한 권호영은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모니터 앞에 앉은 단여명이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보았다. 눈 밑이 퀭했다. 저녁을 먹고 쭉 저러고 있었으니 키보드를 두드린 지 어언 7시간째였다.
“안 피곤해요? 새벽 두 시인데.”
단여명의 집으로 돌아온 다음 날, 그는 차기 작품을 계약한 출판사 측에서 연락이 왔다고 말했다. 그는 한 작품을 끝내면 3개월간 휴식기를 가졌고, 그를 담당한 편집장은 그 패턴을 알아서 그간 연락을 취하지 않았다고 했다.
마침 쓰고 싶은 내용도 생각났는데 잘됐다며 단여명은 예쁘게도 웃었다. 그게 권호영에겐 불운인 줄도 모르고. 왜 하필 3개월이란 기간이 지금 끝난 건지. 많은 수난을 거쳐 드디어 현재였다. 끌어안고만 있어도 모자란 시간인데, 사귀자마자 다른 복병이 생긴 격이었다.
“아… 몰랐어. 그렇게 된지.”
단여명이 하품하며 기지개를 쭉 켰다. 그리곤 문틀에 몸을 기대고 있던 권호영에게 양팔을 벌렸다. 권호영은 단여명의 앞으로 걸어가 피로에 지친 몸을 껴안았다.
“가만히 앉아 있는 내가 얼마나 피곤하겠어. 이곳저곳 다니는 네가 더 피곤하지….”
단여명이 어깨에 턱을 받친 채 느른한 웃음을 흘렸다. 말은 저렇게 해도 목소리는 녹녹한 피로에 젖어 있었다.
이렇게 일에 집중하는 모습을 볼 때면 낯선 감정이 가장 크게 느껴졌다. 그동안 단여명은 집에 있을 때면 대부분 늘어져 있었다. 움직이는 반경도 그리 넓지 않았다. 소파 위에서 낮잠을 자거나, 책을 읽으며 커피를 마시거나, TV를 보거나. 보기보다 게으르다는 편견을 가지게 된 게 다 거기서 나온 것이었다.
하지만 일을 시작한 단여명은 퍽 부지런하게 살았다. 남는 시간은 다 제게 내줬지만, 작업할 때는 가차 없이 일에만 몰두했다. 화장실을 갈 때나 담배를 피우러 나갈 때 제게 돌아와 뭐 하고 있었냐며 옆구리에 꼭 달라붙기는 했다. 하지만 그 외엔 방에 틀어박혀 나오지 않았다.
그러니 불만 아닌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이제 그만 하고 자요. 눈도 반쯤 감겼는데.”
“음…. 아직 끝내기 애매한 구간인데…….”
온종일 글만 썼으면서 아직 쓸 게 더 남아 있나 보다. 권호영은 눈으로 반대의 시그널을 강력히 쏘아 보냈다.
최근 단여명은 툭하면 밥을 거르겠다고 야단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간식으로 끼니를 때우던 식습관도 고쳐놔야겠다고 생각하던 차인데, 작업에 열중하니 거기서 더했다. 조금만 더 하고. 여기까지만 하고. 아까 이것저것 주워 먹어서 배 안 고픈데. 그리 말하며 권호영의 속을 썩이기 일쑤였다.
창작에 골몰하는 단여명은 순수하게 즐거워 보였다. 글쓰기에 대한 열정은 이해하지만, 건강이 상할 게 뻔해 가만두고 볼 수 없었다. 권호영은 최대한 단여명과 같이 무병장수할 생각이었다.
“먼저 자. 형 조금만 더 하고 갈게.”
고민을 마친 단여명이 권호영의 엉덩이를 툭툭 두드리며 말했다. 이제 그만 접으라는 신호는 접속 불량으로 돌아간 모습이었다.
단여명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서 권호영도 그가 일할 때면 나름 제 할 일을 했다. 행복하고 평탄한 미래를 위해 운전면허와 더불어 자격증 시험을 준비 중이었다. 대학생의 신분인지라 단여명처럼 돈을 벌 수는 없지만, 나중에 번듯한 직장을 잡고 그보다 많은 돈을 버는 게 새로 수립한 목표였다.
그러나 권호영은 잠시 마음을 고쳐먹었다. 지금은 방해가 필요한 시점인 것 같다고.
“형이 없으니까 못 자고 있는 거잖아요.”
불퉁하게 말하니 단여명이 앙증맞은 토끼처럼 눈을 동그랗게 키웠다. 그리고 나선 어이가 없다는 듯 짤막한 웃음을 터트렸다.
“진짜 뻔뻔하고 귀엽다, 너.”
“그만해요. 밤새우는 거 몸 상하는 지름길이에요.”
“알겠어. 간다, 가.”
재촉을 못 이긴 단여명이 곧 자리를 정리했다. 장시간 빛을 쏘던 모니터의 전원이 꺼졌다. 단여명이 마우스 선을 정리하고, 권호영이 키보드 위에 커버를 씌우는 것을 마지막으로 방의 불이 꺼졌다.
“치약이 없어.”
단여명이 칫솔을 들고 욕실 안을 두리번댔다. 권호영은 그를 등 뒤에서 끌어안은 채 거울 속에 비치는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하얗고 말간 얼굴은 피로에 젖었어도 잘 닦은 조약돌처럼 매끈하게 빛났다.
“아까 제가 다 써서 버렸어요.”
그 말을 들은 단여명이 욕실 서랍에 손을 뻗었다. 생활 물품 관리를 포함해 전체적인 집안일은 권호영이 거의 전담하고 있었다. 단여명이 엉뚱한 칸을 열기에 권호영이 ‘거기 말고요’ 하고 그를 따라 손을 위로 뻗었다. 상체가 바짝 밀착하고, 단여명의 머리에 권호영의 턱이 닿았다. 맨 위 칸을 열어 새 치약을 꺼낸 권호영은 그것을 단여명의 손에 들려줬다.
“이 치약 맛있는 것 같아.”
거울 속에서 둘의 눈이 마주쳤다. 단여명이 칫솔을 입에 문 채 배시시 웃었다. 새로 뜯은 치약은 벌꿀 맛이 가미되어 있었다. 맛이 어떨지 궁금하다며 단여명이 마트에 갔을 적 장바구니 안에 끼워 넣은 것이었다.
“맛있어요?”
그리 물으며 권호영은 단여명의 턱을 돌려 잡았다. 거울 속에서 마주치던 시선이 근접한 거리에서 맞닿았다.
“응. 진짜 꿀 맛 나. 너도 내일…….”
무방비하게 웃던 얼굴이 흠칫 굳어졌다. 권호영이 입술에 묻은 치약 거품을 혀로 훔친 탓이었다.
“좀 단 것 같기도 하고….”
“…….”
“그냥 치약 맛인데?”
작게 입맛을 다신 권호영이 아무렇지 않게 평가를 내렸다. 단여명은 바지런히 하던 칫솔질도 멈추고, 얼음처럼 굳어버렸다. 말랑하고 따뜻한 게 입술을……. 사고를 정리하는 눈동자가 바삐 굴러갔다. 곧 까만 눈동자 속에 경악의 빛이 번졌다.
“야, 씨, 너, 더럽게…!”
소스라치게 놀란 단여명이 벼락같이 소리쳤다. 순식간에 잠이 달아난 얼굴로 그는 곧장 권호영에게 달려들었다.
“누가 그렇게 먹으래? 너 강아지야? 무슨 우유 거품 핥아먹듯이…!”
혀로 치약 거품을 훔쳐 가는 과정에 권호영의 입술에 거품이 묻어버렸다. 단여명은 권호영의 입가를 손으로 벅벅 문질렀다. 권호영은 단여명에게 멱살을 붙들린 채 가까이 놓인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백옥처럼 하얬던 얼굴에 불그스름한 물이 번지기 시작했다.
“됐고, 빨리 입 헹궈.”
권호영의 입가를 닦아 준 단여명은 급히 양치 컵에 물을 받았다. 더한 것도 먹었는데 이게 더러울까. 권호영은 소란을 피우는 그를 말없이 지켜보았다. 거울을 한 번 쳐다봤다가 사슴처럼 뻗은 뒷목에 눈길을 보냈다. 엷은 꽃물을 들인 것처럼 발갛게 물들어 있었다.
많이 당황했구나. 그 생각에 가느다란 허리를 부둥켜안은 손힘이 한결 강해졌다.
“요즘 왜 이렇게 사고를 쳐? 전엔 안 그랬으면서. 가만 보면 그것도 다 내숭이었지.”
그야 놀리는 재미를 알아버렸으니까. 요즘 자신들은 먹이를 노리는 하이에나처럼 서로 돌아가며 놀려먹기 바빴다. 저번엔 단여명이 동네가 떠나가라 소리를 질러서 자신을 곤란하게 했다. 그리고 단여명의 반응을 보아하니 이번엔 제 차례인 것 같았다.
“형은 제 거 매일 받아 마셨잖아요.”
“차라리 정액이 더 깨끗하지. 이건 이 닦던 거품이잖아. 오염된 거라고.”
“오염된 것치고는 맛 좋던데. 그럼 형 아래에서 나온 오줌 같은…….”
“그만 나불대고 입 헹궈.”
단여명이 제법 무서운 눈을 하고 입술에 양치 컵을 대줬다. 나불……. 단어 선택이 격했다. 권호영은 웃음이 완연한 얼굴로 그가 넘겨주는 물을 얌전히 입안에 머금었다.
정액을 삼킨 단여명이 제게 끌려와 강제로 양치했던 때 왜 그리 실실 웃었는지 알겠다. 허둥지둥하는 상대의 모습을 보는 재미가 톡톡했다. 그래서 그가 뭐라 욕하든 귀여운 투정으로 오역돼 귓구멍이 간질간질했다.
“내일 영화 보러 갈까?”
온 방의 불을 끄고, 침대에 누운 찰나 단여명이 말문을 뗐다.
“정말요?”
권호영의 얼굴이 어둠 속에서 환히 밝아졌다. 단여명은 그의 옆구리에 파고들며 부드러운 미소를 띠었다. 작업 외의 시간은 그에게 할애했다지만, 그동안 섭섭하긴 했을 것이다. 양치할 때도 찰싹 달라붙어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했으니.
“응. 오늘 시놉시스 정리해서 출판사 쪽에 보냈거든. 그거 검토할 동안 잠깐 여유 날 것 같아.”
“좋아요.”
“아, 너 자격증 시험 뭐 본다고 하지 않았어? 전산…….”
“전산 회계?”
“응, 그거.”
“그거 아직 이 주 남았어요.”
권호영이 뒷목에 팔을 대주며 말했다. 단여명은 단단한 팔목에 머리를 기대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내일 4시에 침대 온다고 했으니까… 그거 받고 저녁쯤 나가면 되겠다.”
아래에서 터진 체액으로 밤새 물난리가 났던 밤, 단여명의 방 침대는 그날부로 폐기처분이 됐다. 매트리스까지 흠뻑 젖어 계속 사용하기 찝찝했던 탓이었다.
권호영은 괜찮다고 했으나 단여명은 괜찮지 않았다. 그래서 현재 집 안에 있는 침대는 권호영의 방에 놓인 게 전부였다. 어차피 둘이 같은 침대에서 자니 불편함은 없었다. 내일 더블 침대가 도착하면 현재 사용 중인 침대도 정리하고 넓은 이부자리를 만끽할 생각이었다.
“너 공포영화 잘 봐? 아니면 액션 쪽이 나으려나?”
단여명이 핸드폰을 꺼내 들고 인터넷 서핑에 나섰다. 권호영에게 화면이 보이도록 핸드폰을 기울이고, 개봉 중인 영화의 목록을 훑었다.
“전 다 좋아요.”
…대답이 묘하게 빨랐다. 단여명은 미심쩍은 마음에 옆을 슥 돌아보았다. 권호영의 시선은 핸드폰이 아니라 제게 올곧이 박혀 있었다.
“내 얼굴만 보지 말고 영화를…….”
작은 목소리로 핀잔을 주는 순간 하나의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단여명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좁히고, 그를 마주 보았다.
“너 영화관 가서도 이러려고 그러지. 그래서 다 좋다고 그런 거지.”
권호영은 말없이 단여명의 허리를 꼭 끌어안았다. 아마 안 그러려고 노력해도 그렇게 될 테다. 버터 냄새가 나는 팝콘을 씹는 입술이나, 번쩍이는 스크린을 응시할 두 눈이나. 영화보다 흥미로운 얼굴이 눈앞에서 펼쳐지는데 무슨 수로 시선을 돌릴까. 아마 영화관 밖으로 나올 때 단여명은 영화에 대해 평가할 테고, 권호영은 그를 보며 다른 걸 평가할 것이다.
영화관에서의 형은 이런 모습이구나. 깜짝 놀라는 장면이 나오면 움찔 경련할 어깨나, 영화에 집중해 틈을 자그마하게 내보일 입술이나. 그 속에 살짝 엿보일 새하얀 앞니 같은 것들을 머릿속에 아로새기며 영화보다 가치 높은 평을 내릴 테다.
“아, 나간 김에 재윤이랑 들레도 부를까? 같이 저녁 먹게.”
잠시 딴생각에 빠졌던 권호영은 급하게 현실로 복귀했다.
“저번에 내가 밥 사 주기로 한 거 네가 계산…….”
“아니요.”
권호영이 단칼에 대답했다. 어떻게 생긴 기회인데. 아무리 둘밖에 없는 친구라도 끼워 줄 수 없었다.
“둘 다 바쁘다고 그랬어요. 연락도 잘 안 돼요.”
“……그래?”
…연락 잘만 되던데. 단여명은 최근 윤재윤과 주고받은 메시지를 떠올렸다. ‘권호영 얘 연락이 아예 안 되는데요? 혹시 죽었어요?’나, ‘형 권호영 얘 좀 무서워요 만나면 형 얘기밖에 안 해요 무슨 사이비 교주인 줄;’이라든가.
무리에 다시 합류했을 때 윤재윤과 권호영은 잠시 자리를 이탈해서 대화를 나눴다. 그때 윤재윤은 자신들이 무슨 사이인지 안다는 얘기를 권호영에게 털어놓았다고 한다.
어디서 의심을 샀을지 짚이는 곳이 너무 많았다. 권호영의 친구인지 몰랐던 때 그와의 첫 만남도 그렇고, 떨어져 지냈을 당시 제가 보지 못했을 권호영의 모습도 그랬다. 방의 꼬락서니를 미루어 보았을 때 반쯤 정신을 놓고 산 것 같으니.
그래서 친하지도 않은 자신에게 밥을 사 달라며 잔망을 떨었나 보다. 자신들을 빨리 화해시키기 위해서. 결과적으론 윤재윤이 나서지 않았더라면 더 빨리 화해했겠지만, 신경을 써 준 게 고맙기는 했다. 권호영을 친구로서 위하는 마음이 제가 다 고맙기도 했고.
메시지로 감사 인사는 전한 뒤였으나, 아무래도 마음이 쓰였다. 텍스트로 말할 얘기는 아닌 것 같아서.
“같이 밖에 나가는 거 오랜만이잖아요.”
그래서 윤재윤의 얼굴을 보고 정식으로 인사하고 싶었는데…….
“데이트해요. 단둘이.”
저런 얼굴로 저런 말을 속삭이니 다른 사람을 부르기가 힘들었다.
“그래, 그러자.”
단여명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그의 등허리를 감싸 안았다. 어둠이 드리워진 방 안, 권호영이 손에 잡힐 듯 선명한 미소를 지었다. 곧 뺨에 손이 닿았다.
“좋아해요.”
둥그런 엄지가 자잘한 솜털을 하나하나 고르듯 눈 밑을 부드럽게 쓸었다.
“나도. 정말 많이 좋아해.”
단여명은 커다란 손바닥에 뺨을 문지르며 나직이 속삭였다. 그에 권호영의 웃음기가 더욱 농밀해졌다.
“침대 빨리 왔으면 좋겠다.”
“왜요. 침대 넓어져도 이렇게 꼭 붙어 잘 건데.”
“전엔 침대가 좁아서 몸부림치기 불편했거든.”
섹스만 하면 둘 다 요란해지는 편이니까. 점잔을 떠는 평소와 달리 행동이 180도로 바뀌었다. 침대를 부서트릴 듯 허리를 놀리는 권호영이나, 시트가 다 구겨지도록 침대 위를 허우적대는 단여명이나.
“몸부림?”
권호영이 의아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형 잘 때 얌전한데요?”
단여명은 인자한 웃음만 내보였다. 우리 애기, 아직 많이 순수하구나. 우리 소꿉장난하는 거 아니고 다 큰 성인들끼리 연애하는 건데. 침대 하면 단번에 어떤 행위를 연상해야지. 둘 다 갑자기 바빠진 탓에 몸의 대화를 안 한 지 어언 한 달이 넘어간다. 그래서 그쪽 방면으로 생각을 못 하는 것 같다.
“아니야. 얼른 자자.”
단여명은 눈을 감고는 그의 머리를 토닥였다. 고개를 한 번 갸웃한 권호영이 뒤따라 얌전히 눈을 감았다. 이윽고 정적이 찾아왔다. 눈을 감고 조용히 숨을 고르던 권호영이 불식간에 머리를 번쩍 위로 들었다.
“……형.”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음습한 기운이 어렸다. 잘 때 얌전하다고 떠들던 아까의 목소리와 딴판이었다.
저거 지금 이해했구먼. 단여명은 권호영의 머리를 도로 베개 위에 붙여 줬다. 아래로 꾹 누르는 손길에 얌전히 순응했지만, 그는 눈을 감지 않았다.
“얼른 자.”
“잠깐만요.”
“나 졸려서 더는 못 떠들어.”
“…….”
“남은 얘기는 내일 하자. 응?”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얘기하니 들으라는 듯 큰 한숨 소리가 터졌다. 단여명은 눈을 감은 채 피식 웃고는 나긋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랑해.”
“…저도요.”
많이.
불만스럽지만, 착하게 대답한 권호영이 꾸물거리며 잠들 자세를 갖췄다. 단여명의 허벅지 사이에 다리를 끼워 넣고, 정수리에 코를 파묻었다. 소란스러웠던 게 거짓말처럼 둘 사이에 고요가 깃들었다. 머리에 따뜻하게 번지는 숨결을 느끼며 단여명은 하루의 끝을 맞이했다.
그리고 시간이 많이 지난 뒤 둘은 나무 그늘 밑에 앉아 그런 얘기를 나누게 된다. 수없이 함께한 나날 속 그날이 가장 별 탈 없이 보낸 하루였노라고.
***
새싹이 움트고, 싱그러운 녹음이 빛을 발하는 여름이 오면 그를 저버리는 계절도 찾아온다. 쌀쌀해진 날씨에 몸에 걸친 외투가 두꺼워지고, 뱉는 숨에 입김이 어린다. 매서운 추위에 저마다 옷깃을 단단히 여민 사람들은 언 땅을 밟으며 거리를 걸었다.
기온이 영하로 떨어진 바깥 날씨와 달리 카페 안은 훈기가 가득했다. 크리스마스 캐럴의 리듬에 맞춰 꼬마전구가 번쩍이며 일정하게 빛났다. 주문대 앞에 놓인 커다란 트리와 곳곳에 배치된 크리스마스 소품들이 성탄절의 분위기를 물씬 자아냈다.
“그 난리를 떤 지도 벌써 반년이 지났네.”
창밖은 금방이라도 눈이 내릴 듯 먹구름이 껴 있었다. 그를 바라보던 윤재윤은 고개를 돌려 정면을 응시했다.
“형은 잘 지내냐? 얼굴 못 본 지 한 달은 된 것 같은데.”
회색 목폴라에 검은색 롱코트를 입은 권호영이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학점도 내팽개치고, 나사 여러 개 빠진 것처럼 굴었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무더운 여름이 가고 해가 바뀌는 계절이 도래했다.
“이거나 받아요.”
권호영이 심드렁한 얼굴로 커다란 쇼핑백을 내밀었다. 2학기를 마치자마자 권호영은 단여명과 해외여행을 다녀왔다고 했다. 여행지에서 선물을 사 왔다더니 그 말이 거짓은 아니었나 보다.
윤재윤은 쇼핑백을 건네받으며 그의 얼굴을 요모조모 뜯어보았다. 얼핏 평소와 같이 무감각해 보였으나, 이젠 어느 정도 표정 분간이 됐다. 좋은 마음으로 선물을 주는 것일 텐데, 그는 어딘가 심기가 불편한 사람처럼 찜찜한 기색을 풍겼다.
“이상하다. 이 좋은 날에 왜 썩은 감자 같은 얼굴이지?”
썩은 표정을 지은 권호영은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그에 점차 감이 잡혔다. 어쩐지 대화에 영 집중하지 못하더니.
“형이랑 싸웠냐?”
“…….”
“또 싸웠구먼. 은근 자주 싸운단 말이야, 둘이.”
혀를 쯧쯧 찬 윤재윤은 쇼핑백 안을 들여다보았다. 손에 들 때부터 묵직하다 했더니 생각보다 눈에 보이는 물건이 많았다.
“와, 씨. 뭐가 이렇게 많… 야, 다 비싸 보이는데? 진짜 받아도 돼?”
“네. 형이 갖다주라고 했어요.”
초콜릿, 쿠키, 립밤, 영양제, 그리고 마그네틱 기념품까지. 안을 뒤적일수록 뭐가 끝도 없이 나왔다. 미국에서 유명하다 싶은 물건을 싹 다 긁어온 모양새였다.
“이건 향수 아니야?”
윤재윤은 그중 가장 눈에 띄던 물건을 덥석 집었다. 그림과 영문이 조합된 고급스러운 포장 박스였다.
“와, 이 브랜드 다 30만 원 넘는데…….”
“그리고 이건 제가 산 거요.”
“뭐야, 뭐가 또 있어?”
권호영이 또 다른 쇼핑백을 내밀었다. 윤재윤이 헤벌쭉 웃으며 보란 듯이 쇼핑백을 품에 꼭 끌어안았다.
“고맙다. 너랑 친해지길 잘했어.”
내친김에 쪽 소리가 나도록 쇼핑백에 뽀뽀까지 했다. 나름 고맙다는 성의 표시였는데, 오히려 역효과가 났다. 순간적으로 권호영의 표정이 더욱 썩어들어 갔다.
“민들레 누나는요?”
“너 또 채팅방 확인 안 했지. 걔 남친이랑 다시 붙었대. 그래서 오늘 불참.”
권호영은 성의 없이 고개를 주억이더니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발치엔 쇼핑백이 한 무더기 쌓여 있었다. 아마 얘기를 듣지 못해 민들레의 것도 같이 들고 나온 모양이었다.
“야, 말이 나와서 그런데, 민들레는 아직도 너 같은 과 여자애랑 비밀 연애 하는 줄 안다. 뭐가 어떻게 와전된 건진 모르겠는데…….”
“그럼 그렇게 알게 둬요. 다른 사람이란 거 알면 시끄러워지니까.”
단순명쾌하게 대답한 권호영이 빨대를 물고 커피를 단번에 비웠다. 그리고 짐을 챙겨 들고 곧장 의자에서 일어났다.
“그럼 먼저 가 볼게요.”
“간다고? 어딜?”
만난 지 아직 30분도 안 됐는데. 얼굴만 보고 갈 거라는 얘기는 했지만, 이렇게 빨리 간다고 할 줄 몰랐다.
“크리스마스잖아요.”
권호영이 당연하다는 투로 대답했다. 입 언저리에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은 채.
그를 본 윤재윤은 한 치의 의심 없이 확신했다. 저 느글대는 웃음은 단여명을 생각할 때 자주 보이는 것이었다. 머리 뚜껑 속이 한 사람으로 구성된 권호영은 단여명과 사귄 이후로 부쩍 웃음이 많아졌다.
“싸웠다면서?”
그리 물은 윤재윤은 이내 됐다는 듯 손을 내저었다. 듣지 않았는데도 대강 머릿속에 그림이 잡혔다. 싸웠다는 얘기를 듣고 딱히 걱정하지 않았던 이유도 이 때문이었다. 둘은 싸우기도 많이 싸웠지만, 화해도 속전속결로 했다. 어쩐지 들고 있는 쇼핑백이 많다 싶더니.
“그래, 가라, 가. 아주 간이고 쓸개고 다 빼 주라지.”
“연락할게요.”
“어,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말고 꺼져.”
윤재윤이 가운뎃손가락을 내민 채 손을 흔들었다. 배웅과 욕을 동시에 받은 권호영은 싱겁게 웃었다. 부쩍 늘은 웃음 중에 절친한 친구에게 보이는 웃음이 생겼다는 것을, 그의 애인이란 연막에 가려져 윤재윤은 알지 못했다.
내뱉는 숨에 입김이 뽀얗게 퍼졌다. 담배 연기처럼 나온 연기에선 아무런 냄새도 나지 않았다.
권호영은 버스 정류장에 서서 발밑을 내려다보았다. 끝이 둥근 까만 구두코가 번지르르 윤을 냈다. 해가 바뀌어도 아직 어른이 되려면 한참 멀었나 보다. 구두보다는 아직 운동화가 더 편했다.
그래도 특별한 날이니 이 정도 불편함은 감수할 수 있었다. 권호영은 코트 소매를 걷어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정리해 둔 일정대로 집에 돌아가면 대략 4시쯤 될 것 같았다.
“저기…….”
그러던 중 근처에서 여자 목소리가 들렸다. 권호영은 고개를 들어 옆쪽을 응시했다. 목깃이 양털로 짜인 무스탕에 긴 스커트를 입은 여자가 바로 옆에 서있었다.
“마음에 들어서 그러는데 번호 좀 주실 수 있나요?”
여자가 부끄러운 듯 웃으며 핸드폰을 내밀었다. 권호영은 표정 변화 없이 아, 했다. 잊을 만하면 이런 일이 종종 생긴다.
“죄송합니다. 애인 있어요.”
고개를 꾸벅 숙이는데, 때마침 버스가 도착했다. 권호영은 그녀에게 재차 미안하다고 눈짓하곤 곧바로 버스에 올라탔다.
‘오늘 눈이 오려나.’
창밖의 하늘은 함박눈이 펑펑 쏟아질 것처럼 흐렸다. 첫눈이 온 날엔 둘 다 늦잠을 자버려 아쉽게 놓쳐버렸다. 그러니 오늘은 같이 눈을 맞고 싶은데.
단여명과 만남을 약속한 지 반년이란 시간이 지났다. 그사이 권호영은 단여명에 대해 새로 안 사실이 있었다.
단여명은 권호영이 풀이 죽은 모습에 약했다. 거기에 시무룩한 목소리까지 얹으면 권호영이 뭘 요구하든 껌뻑 죽었다. 하지만 단여명은 안 될 땐 안 된다고 단호하게 쳐낼 줄 알았다. 그를 얕잡아 보던 권호영은 거하게 큰코다쳤고.
단여명은 새로 쓴 원고를 좀처럼 보여주려고 하지 않았다. 처음엔 부끄럽다는 이유로, 나중엔 말하지 못할 어떤 사유로.
조금만 보여주면 안 되냐고 울상을 짓고 꼬드겼지만, 단여명은 웃는 낯으로 단칼에 거절했다. 그리고 권호영은 깨달았다. 안 되는 건 끝까지 안 된다고 말하는구나. 당연한 사실인데, 단여명이 웬만한 건 다 들어줘서 망각하고 있었다.
출간일이 임박해서도 단호박 같은 그의 태도는 변치 않았다. 그에 권호영이 서운하다고 말한 것이 다툼의 시발점이 돼버렸다. 처음엔 조금만 더 기다리라고 좋게 말하던 단여명은 끝으로 가서 ‘너 계속 그래라’ 하고 서늘한 목소리를 냈다.
“…….”
버스에서 내린 권호영은 뒤늦은 후회를 삼켰다. 그냥 조금만 더 기다릴걸. 이런 일로 헤어지지 않을 걸 알았지만, 좋은 날에 찬물을 끼얹은 것 같아 신경이 쓰였다.
망설임은 여느 때처럼 잠시였다. 권호영은 마음을 먹은 즉시 양손에 들고 있던 쇼핑백을 한 손에 옮겼다. 핸드폰을 꺼내 익숙한 수신자명을 찾았다. 연결음이 3번도 채 가기 전에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커피그라인더가 돌아가는 잡음 속에 사람들의 말소리가 섞이고, 곧 ‘여보세요’ 하고 또렷한 목소리가 울렸다.
“어디예요?”
-밖이지. 오늘 친구 만난다고 했잖아.
“천수진 누나?”
-응.
아침에 다퉜던 것이 꿈결처럼 단여명은 상냥한 목소리였다. 크지 않은 일로 싸울 때면 이런 식으로 넘기는 편이었다. 나중에 말이 나오면 뭐가 서운했다고 대화하며 좋게 풀었고.
다행히 기분이 많이 상하지는 않았나 보다. 그리 한시름 덜던 순간 단여명이 대화를 이었다.
-걔네 가게에서 본 거 아니고, 근처 카페에서 만난 거야.
“…저 아무 말도 안 했어요.”
-또 쥐 잡듯이 잡을까 봐 그러지.
“제가 언제 쥐 잡듯이 잡았다고…….”
잠시 침묵하던 단여명이 날짜를 줄줄이 외기 시작했다. 9월 15일, 10월 2일, 11월 21일…. 질투에 이성을 내다 버린 권호영이 단여명을 뼈도 못 추리게 발라먹은 날이었다.
그중 9월 15일은 권호영도 기억하고 있는 날짜였다.
‘여명아… 좋아?’
침대 위에서 야자 타임은 절대 싫다고 고집부리던 단여명이 속수무책으로 함락된 날이었으니.
‘응, 조, 좋아, 흑, 좋아요…! 형, 우으…!’
그러니까, 그만, 제발, 그만……. 눈물로 범벅된 얼굴은 한계를 초과한 쾌락에 정신을 놓기 일보 직전이었다. 입가를 적신 타액은 본인의 것이었고, 붉게 도드라진 유두에 발린 타액은 타인의 것이었다. 불룩 솟았다가 판판하게 변형되는 뱃가죽 위로 맑은 물줄기가 쉼 없이 솟구쳤다.
“…….”
권호영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반성은 못 할망정, 그때를 생각하니 아랫도리가 움찔거리며 부피를 키우려고 했다. 그것도 사람이 지나다니는 길거리 한복판에서.
…지금 이런 생각할 때가 아닌데. 단여명은 일에 관련된 부분에 있어서 계획적이고 예민한 편이었다. 그러니 그가 괜찮아졌더라도 사과해야 했다.
“형, 아침에는 제가…….”
-호영아.
본론을 꺼내기도 전이었다. 뭘 말하려는지 눈치챈 것처럼 단여명이 말을 부드럽게 가로막았다.
-저녁에 레스토랑 예약해 놨어.
권호영은 순간 다리를 멈칫했다. 감미로운 목소리에 난감한 내용이 담겼다. 특별한 날이기에 자신 또한 유명 레스토랑에 예약을 잡아뒀다. 그야 어느 연인들 할 것 없이 행복한 시간을 그리는 날이니까.
-크리스마스잖아. 맛있는 거 먹고 오자.
마음이 통한 것처럼 단여명이 오늘을 강조했다. 잠시 뜸 들이던 권호영은 알겠다고 얌전히 대답했다.
여기서 토를 달았다간 분명 목소리가 커진다. 단여명은 권호영이 돈 쓰는 걸 달가워하지 않았고, 권호영은 그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다. 서로 자신이 예약해 둔 가게로 가자며 고집을 부릴 게 분명했다.
그렇다고 물러설 생각은 절대 없었다. 집에 가서 잘못했다고 사과한 뒤 분위기가 훈훈해지면 들를 곳이 있다며 자연스럽게 에스코트하면 된다. 레스토랑의 다음 목적지는 여의도에 위치한 호텔이었다. 운전면허를 취득한 뒤 운전대는 거의 자신이 잡았으니 계획에 차질은 없을 것이다.
-나 1시간 정도 있다가 갈 것 같아. 집에서 볼까?
“네. 천천히 놀다 와요. 기다리고 있을게요.”
여자는 경계할 대상에서 제외. 어느새 공식처럼 세워진 매뉴얼을 외우며 권호영은 남모르게 웃었다.
…분명 그때까지만 해도 계획에 차질이 없을 줄 알았는데.
“…….”
집으로 돌아온 권호영은 처참한 표정으로 손에 든 종이를 와작 구겨버렸다. 글을 생업으로 삼은 단여명이 하루가 멀다고 이런 심정일까. 어제 쓴 글을 오늘 되돌아보니 엉망도 이런 엉망이 없었다.
이런 걸 줄 수는 없다. 유치원생이 쓴 것처럼 글씨도 삐뚤빼뚤하고, 내용도 감동적이지 않고, 글의 흐름도 정신 산만했다. 결국 사랑한다는 말을 각종 형태별로 늘어놓은 것에 지나지 않지 않나.
대체 한국어 글씨는 왜 발전이 없는 것 같지. 그렇다고 자신이 있는 영어 필기체로 대체하기엔 단여명이 그를 못 알아볼 확률이 높았다. 옆에서 통역해 주기엔 그림도 영 살지 않았다.
권호영은 쇼핑백을 바닥에 내려두고 즉시 방으로 향했다. 서랍을 열어 종이와 펜을 꺼내 들고 거실 테이블에 앉았다.
괜찮다. 아직 단여명이 돌아오기까지 1시간이나 남았으니까. 내용을 손보고, 글씨를 성심성의껏 눌러 쓴 다음에 박스 안에 고이 접어 넣으면…….
-띡띡띡띡.
…되는 거였는데.
도어록 비밀번호를 누르는 소리에 권호영은 의자를 덜커덕 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종이와 펜을 올려둔 식탁을 등 뒤로 숨기고, 급히 현관문 쪽을 응시했다.
“한 시간 뒤에 온다고…….”
역시나 문을 따고 들어온 사람은 단여명이었다. 권호영은 허망한 표정을 갈무리하지 못하고, 바람 냄새를 싣고 온 단여명과 맞닥뜨렸다.
“너랑 약속 있다니까 얼른 꺼지라고 해서…….”
단여명은 자신이 당황한 걸 알아챘는지 의아한 눈을 보였다. 권호영은 바짝 긴장한 사람처럼 목울대를 꿀꺽했다. 그를 이상하다는 듯 쳐다보던 단여명은 이내 다른 곳으로 관심을 돌렸다. 권호영이 미처 숨기지 못한, 그의 발밑에 한가득 쌓여 있던 쇼핑백이었다.
“거기 있는 건 다 뭐야?”
“…….”
“크리스마스 선물?”
털이 보송보송 난 사막여우처럼 단여명의 눈꼬리가 가늘게 휘었다. …눈치가 백 단이었다. 정곡을 찔린 권호영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자 단여명이 쇼핑백 쪽으로 접근했다. 권호영은 얼른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아직 안 돼요.”
왜? 단여명이 눈으로 의문을 표시했다.
“…편지 못 썼어요.”
편지? 고개를 갸웃한 단여명은 곧 환히 웃는 얼굴로 답했다.
“아, 그래서 쓰레기통에 편지지가 그렇게 쌓여 있었구나?”
“…….”
“…그렇게 노려보면 무서운데. 눈에 보인 걸 어떡해.”
단여명이 열어 보지는 않았다며 안심하라고 말했다. 그 위로가 애석하게도 권호영은 전혀 안심하지 못했다. 분명 열어 봤을 거란 생각을 떨치지 못했기 때문에.
“그래서 다 들켰는데 숨기겠다고?”
“…….”
“딱 보니까 옷 같은데.”
권호영은 이럴 때마다 눈치 빠른 단여명이 조금 미웠다. 깜짝 놀라게 해 주고 싶었는데, 그는 선물을 준비한 것도, 편지를 쓸 것도 다 예상하던 모습이었다.
“어차피 오늘 줄 거였잖아. 지금 주면 안 돼?”
단여명이 거절하지 못할 웃음을 보이며 품에 답삭 안겼다. 편지는 나중에 주면 되지. 지금 받으나 나중에 받으나 똑같이 감동일 텐데. 그런 말을 달게 속달대며.
권호영은 마지못해 단여명의 손에 쇼핑백을 들려 주었다. 그의 말대로 지금 와서 다시 숨기는 건 꼴이 우스웠다. 어차피 수습하지 못할 정도로 망한 일, 그가 기뻐하고 있을 때 주는 게 맞을 것 같았다.
목도리, 니트, 바지, 구두. 백화점 브랜드별로 구매한 쇼핑백은 총 4개였다. 단여명은 소파 위에 자리를 잡고 앉아 쇼핑백 안에 든 박스를 하나씩 열어 보았다. 그런데 안에 든 것의 정체를 확인할수록 어쩐지 그의 표정이 찝찝하게 변했다.
“너 이거 가격이… 아르바이트한 돈 다 털어서 샀어?”
“…형.”
“아니, 좋아. 좋긴 좋은데…. 아니, 예쁘다. 고마워. 마음에 쏙 들어.”
급히 말을 바꾼 단여명이 가격표를 도로 뒤집어 놓고, 옷과 신발을 챙겨 들었다.
“가서 입어 보고 올게.”
발돋움해 권호영의 뺨에 입을 맞춘 단여명이 이윽고 방으로 사라졌다. 거실에 혼자 남은 권호영은 폭신한 입술이 닿은 뺨을 만져 보았다. 그리고 야속한 마음에 괜히 식탁 위에 덩그러니 놓인 종이를 노려보았다. 달랑 ‘형’ 자만 쓴 새 편지지는 또다시 쓰레기통 속에 버려졌다.
“어때? 괜찮아?”
새하얀 캐시미어 목도리, 푸른색이 섞인 엷은 먹빛 니트, 그리고 까만 슬림핏 바지와 끝이 둥그렇게 빠진 구두.
“역시 밝은색이 잘 받네요.”
권호영은 새 옷 냄새를 풍기는 단여명을 품 안으로 당겼다. 겨울이 되고 좋은 점이 있다면, 보송보송한 니트를 입은 단여명을 끌어안을 수 있다는 것이었다. 두꺼운 패딩 점퍼 말고, 니트를 입었을 때가 끌어안는 감촉이 폭신폭신했고, 몸이 닿는 느낌도 생생했다.
“예뻐요, 형.”
권호영은 단여명의 이마에 가볍게 입술을 쪼았다. 직전까지 불만스러운 기색을 폴폴 풍겼던 눈은 꿀을 담뿍 채운 꿀통처럼 흘러넘치는 애정을 담고 있었다.
“누가 보면 네가 선물 받은 줄 알겠다.”
권호영은 굉장히 기뻐하는 얼굴이었다.
“심장은 또 왜 이렇게 빨리 뛰어?”
단여명이 앞에서 뭐라 떠들어도 순수하게 기뻐하느라 그를 듣는 체 만 체했다.
“너무 예뻐요. 귀여워요. 누가 훔쳐 갈까 봐 겁나.”
권호영은 자기가 사 준 옷을 훑어보다가 그를 입은 단여명의 얼굴을 확인하고, 입술이나 광대 언저리에 쪽쪽 입 맞추길 반복했다. 심플하게 예쁘다고 말했던 칭찬에도 점점 살이 붙었다. 결국엔 ‘우리 그냥 집에 있을까요?’라는 말까지 발전했다.
단여명은 그를 보며 어이없다는 웃음을 흘렸다. 자기가 선물해 준 옷을 입은 게 엄청나게 마음에 드나 보지. 심장 소리가 하도 요란해서 그 박동을 느끼는 제가 다 정신이 없을 정도였다. 단여명은 그를 흥미롭게 구경하다가 대뜸 말을 던졌다.
“벗기는 건 호영이 네가 해 주는 거야?”
그 말을 하기가 무섭게 권호영의 눈빛이 싹 돌변했다. 허리를 끌어안고 있던 손이 니트의 밑단을 덥석 그러잡았다. 기뻐하는 모습이 귀여워 반쯤 농담으로 던진 말이었는데, 그는 당장이라도 옷을 찢어발길 것처럼 손에 힘을 실었다. 그렇게 황홀해 마지않아 하던 옷을. 기겁한 단여명이 황급히 도리질하며 외쳤다.
“아니, 지금 말고! 밤에!”
“……아.”
권호영이 멋쩍은 표정을 짓곤 옷을 슬그머니 놔줬다. 조금 민망한지 혀로 입술을 축이더니 눈을 살짝 아래로 깔았다. 그새 어디까지 상상했는지 귓바퀴가 붉게 물들어 있었다.
“어제도 그렇게 했는데 내보낼 게 남았어?”
“형이 그런 말을 하니까 그렇죠.”
“그래도 용케 세우지는 않았다.”
“살짝 위험했어요.”
“…그 짧은 사이에?”
내내 웃고 있던 얼굴에 실낱같은 금이 갔다. 단여명은 난감한 미소를 띠었다. 권호영에게 하나 뒤지는 것이 있다면, 단연코 마르지 않는 샘물 같은 정력이었다.
“이러다 말라 죽는 건 아닌지 모르겠어….”
“적당히 짜낼게요.”
“적당히는 무슨. 웃기지 마. 이제 네 말 안 믿어.”
능청만 늘어가지고. 단여명이 힘을 뺀 주먹으로 그의 가슴팍을 툭 쳤다. 솜방망이를 얻어맞은 권호영은 능청이 늘었다는 단여명의 말처럼 웃기만 했다. 그를 마주 보다가 픽 웃어버린 단여명은 그의 뒷목에 손을 감았다.
“나도 줄 거 있는데.”
“……차 키 아니죠?”
이번엔 권호영의 얼굴에 미세한 금이 갔다.
“그건 네가 자존심 상한다고 싫다며.”
“…자존심 상한다고 말한 적 없어요. 경제적인 위치가 좀 동등해질 때 받고 싶다는 얘기지.”
그 말이 그 말 아니야? 그리고 자존심 상하는 것도 맞으면서. 단여명은 뻔히 그런 표정을 내보이며 그의 품을 벗어났다. 권호영에게 줄 선물이 방에 있었다.
“제가 돈이 없지는 않은데, 1억은… 아직 없단 말이에요. 저만 큰 거 받으면 밀리는 기분이라서 싫어요. 초조해진다고요.”
권호영은 뭐가 그리 억울한지 방까지 쫓아 들어와 뒤에서 종알댔다. 1억 어쩌고 하는 걸 보니 저번에 장난식으로 말했던 해외 차 얘기를 여태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나 보다.
어디 쓸 데도 없다니까. 단여명은 속으로 그리 대답하곤 책상 위에 올려둔 것을 들었다.
“이거 말고 더 있는데 이게 제일 소소하니까 먼저 줄게.”
단여명은 종이 포장지로 감싸인 네모난 물건을 권호영의 손에 얹어줬다.
“뜯어봐.”
그리 말하자 권호영이 얌전히 말에 따랐다. 테이프를 뜯자 종이 포장지 속에 감춰져 있던 내용물이 드러났다. 손을 멈칫한 권호영은 물건의 표면을 조심스레 쓸어보았다. 계절의 변화를 나타내는 그러데이션을 따라 손끝이 움직였다. 둥그런 손가락은 하단부에 그려진 동굴 입구에서 멈췄다.
“이거…….”
봄물의 기억. 권호영은 일러스트가 어우러진 책 제목을 뚫어지라 내려다보았다.
“시대가 변해서 이번 작은 전자책으로만 출판했거든. 그건 내가 개인적으로 부탁해서 종이로 엮은 거야.”
“…….”
“종이책은 세상에 그거 하나뿐이다?”
생색내듯 말하자 권호영이 눈을 맞췄다. 그는 조금 놀란 얼굴이었다. 아직 놀라긴 이른데. 단권으로 출간된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권호영을 상징했다. 권호영이란 사람을 알아가며 느낀 점, 그리고 오늘보다 찬란한 내일을 맞이할, 개인적인 소망을 녹여냈으니.
책 속에 등장하는 주인공은 캄캄한 동굴 속에 갇혀 갖은 난항을 겪고, 종내 환한 빛을 맞는다. 동굴 안에서 우연적으로 만난, 사랑하는 이의 손을 붙잡고. 드디어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게 된 두 주인공이 봄볕을 맞으며 환희를 만끽하는 장면으로 이야기는 막을 내린다.
권호영은 자신이 처음 느낀 봄이라고 말해 줬다. 제가 봄이라면 그는 어떤 역경에도 본연의 모습을 찾을 봄물일 것이다. 시린 겨울이 가면 얼어붙은 몸을 가뿐히 씻어내릴 봄물.
“그것도 모르고 안 보여준다고 얼마나…….”
아침에 다퉜던 게 생각나 단여명은 다시금 웃음을 흘렸다. 지금을 위해서 그동안 숨겼던 것인데, 권호영이 눈치 없이 캐물어 무진장 애를 먹었다.
“고마워요. 지금 읽어 볼래요.”
권호영이 몸을 와락 껴안았다가 놔주었다. 서있는 자리에서 바로 책을 펼치려고 하기에 단여명은 얼른 그의 등을 떠밀었다.
“창피하니까 네 방 가서 보고 와.”
“네.”
“다 읽으면 같이 저녁 먹으러 나가자. 돌아오는 길에 케이크도 사서.”
“좋아요.”
대답은 꼬박꼬박 하면서 그는 걷는 도중에 프롤로그를 펼쳐 읽고 있었다. 방에 가서 읽으라고 말했건만, 벌써 책에 정신이 팔린 모양새였다.
단여명은 커다란 등을 떠밀어 손수 그의 방까지 데려다주었다. 권호영을 방에 밀어 넣고, 문을 닫아 주는 것으로 한시적인 고요가 찾아왔다.
거실에 홀로 남은 단여명은 할 일을 찾아 헤매지 않고, 곧장 발코니의 문을 열었다. 권호영 모르게 구석에 숨겨놓은 커다란 상자를 옮겨 거실에 들여놨다.
권호영이 책을 볼 동안 미리 택배를 받아놓은 크리스마스트리를 조립할 생각이었다. 그의 앞에서 조립하겠다고 설치면 본인이 하겠다고 나설 테니까. 그럼 서프라이즈의 의미가 없었다.
손재주가 없는 편이긴 한데, 최대한 전력을 쏟아야겠다. 놀랄 얼굴을 생각하니 조립 설명서를 뜯는 손놀림이 분주해졌다. 방에서 나왔을 때 짠하고 보여주면 좋아하겠지. 처음엔 예쁘다며 감탄할 권호영이 나중에 알게 모르게 손볼 것 같지만, 아무튼 크리스마스니까. 분위기를 좀 내고 싶었다.
흥얼흥얼 흘러나오는 콧노래는 이름 모를 캐럴이었다. 단여명은 바닥에 지지대를 펼쳐놓고 하단의 트리를 꽂았다. 가지를 하나씩 펼치는데, 생각보다 많은 정성이 요구됐다. 가지를 꼼꼼하게 펴 주지 않으면 풍성한 맛이 살지 않았다.
3단으로 이루어진 트리는 성인 남자의 키를 웃돌았다. 다 세워놓고 보니 벌써부터 그럴듯해 뿌듯한 마음이 차올랐다. 단여명은 플라스틱 포장을 뜯어 가지에 미니전구를 감았다. 장식품까지 매달아 전구에 불을 켜면 제법 근사할 것 같았다.
거기까지 완성하는 데 대략 40분 정도가 걸렸다. 전구를 매달고 장식품에 손을 올리는데 달칵,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단여명은 하던 행동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았다.
“벌써 다 봤어?”
아무리 한 권이라지만 읽는 속도가 너무 빠른데. 전구에 불을 켜고, ‘짜잔’ 하며 완성된 모습을 보여주려고 했는데, 어째 그 계획이 틀어진 것 같았다. 그래도 아무렴 어떤가 싶었다. 같이 트리를 장식하며 전구에 불을 켜는 것도 좋겠다 싶어서.
“호영아?”
말을 걸어도 권호영은 어쩐지 반응이 없었다. 단여명은 고개를 기웃하며 의아한 기색을 보였다. 그는 제자리에 우두커니 서 미동 없이 이쪽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거실 한복판에 크리스마스트리가 생긴 것도, 그를 조립하느라 바닥이 어질러진 것도 보이지 않는 듯했다.
분명 눈이 마주친 것 같은데, 묘하게 초점이 흐리멍덩했다. 이상한 조짐을 느낀 단여명이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거리가 좁혀질수록 권호영의 얼굴이 확연하게 보였다.
깊은 가을의 낙엽 같은 눈동자가 그렁그렁했다. 망울진 눈에서 무언가 뚝 떨어져 뺨을 타고 주르륵…….
“너 울어?”
단여명은 화들짝 놀란 얼굴로 그의 앞까지 달려갔다.
“왜 울고 그래. 응?”
서둘러 몸을 안아 주자 권호영이 시선을 내려 단여명을 바라보았다. 눈에 한가득 머금고 있던 눈물을 떨구니 이제야 초점이 제대로 맞았다.
“불공평해요.”
전 편지도 못 썼는데……. 권호영이 굵은 눈물방울을 뚝뚝 떨어트리며 작게 중얼댔다. 그는 울음이 터진 얼굴로 책의 감상을 말하고 있었다.
“편지는 나중에 줘도 된다니까. 안 줘도 괜찮고…….”
단여명은 당황해하며 그의 눈물을 훔쳐 줬다. 새로 산 니트의 소매가 축축이 젖도록 눈물을 훔쳐내도 권호영은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닦으면 또 흠뻑 젖고, 옷소매를 바꿔 다시 닦아 봐도 금세 눈물이 흠뻑 배어났다. 흡사 소리 없는 통곡이었다.
“너 진짜…….”
그러다 보니 단여명은 점점 웃음을 참을 수 없게 됐다. 권호영의 우는 얼굴을 본 건 이번이 두 번째였다. 짠하기는 한데, 귀엽기도 해서 코끝을 깨물며 마구 괴롭히고 싶었다. 감동을 받은 사람치곤 무표정한 얼굴로 눈물만 줄줄 쏟아내니 그 모습을 보는 게 순수하게 웃기기도 했다.
“그럼 저 책도 쓰레기통에 갖다버릴까?”
단여명은 어디로 보나 장난기가 동한 얼굴이었다. 권호영은 그를 보며 직감했다. 적어도 이 일로 일주일간 놀림받을 거란 것을.
“응? 그럼 뚝 그칠…….”
권호영은 고개를 숙여 단여명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입술을 포개는 순간 지그시 감긴 까만 속눈썹 끝에 구슬진 눈물이 툭 떨어졌다.
“사랑해요.”
입술을 떨어트린 권호영이 숨결이 겹칠 거리에서 속삭였다.
“사랑해요, 형.”
절절한 눈빛이 허공을 넘어 망막 속에 맺힌다. 넘겨받은 떨리는 숨결이 기도를 타고 폐부를 따뜻이 적신다.
말없이 눈을 맞대던 권호영이 다시 입술을 맞물렸다. 단여명은 눈을 감았다. 자연의 이치를 따르듯 입술의 틈을 가르고 혀가 밀려들어 왔다.
단단한 손이 뒤통수를 지탱하고 허리를 끌어안았다. 눈물에 젖어 앳된 티가 나는 얼굴에 비해 그가 선사하는 키스는 부드럽고도 능숙했다. 혀가 느릿하게 얽히는 감각에 단여명은 권호영의 뒷목을 끌어안았다. 매끈한 콧방울이 스친 뺨에 뜨거운 물방울이 남았다.
풀썩, 푹신한 곳이 두 개의 몸을 받아내는 소리가 들렸다. 미약하게 끼친 바람에 양측으로 펼쳐진 책의 마지막 페이지가 팔랑 흔들렸다.
[우리 둘이 나오는 영화는 아무에게도 관심받지 못하겠지. 그대로 스러져 묻혀버릴지도 몰라.
그렇지만 내 삶에 담긴 너란 사람이 있기에, 바닥을 드러내도 진흙 구덩이 속을 헤엄칠 너를 잘 알기에 이 사랑이 눈물겹도록 특별해.
견딜 수 없는 파도에 부서지는 한이 있어도 너를 놓지 않을게.
함께 맞는 밤처럼 나란히 눈을 감는 것으로 우리의 영화를 끝내자.
사랑하는 HY에게, 너의 바다가.]
그 작가네 하숙생 완결.
그 작가네 하숙생
저 자 | 초사이언
발 행 처 | BLYNUE 블리뉴
출판신고 | 제2018-000089호
연 락 처 | 문의 및 투고 [email protected]
*이 도서는 관련법에 의하여 보호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 전재, 복제, 전송, 사용 등을 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