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작가네 하숙생 5권
목차
여섯째 줄 (2)
마침표
여섯째 줄 (2)
‘감사해요. 뭘 흘리고 다니지는 않는데….’
잠깐 꺼내 본 신분증의 사진처럼 그 애는 말갛게 웃었다. 스스로를 질책하는 웃음조차 그랬다. 작은 얼굴에 쏙 들어간 이목구비에 부드러운 선이 덧씌워졌다.
‘선오 형.’
남자가 저렇게 예쁘게 웃기는 힘든데. 카페에서 만났을 때 느꼈던 첫인상. 그 애의 입에서 나온 제 이름이 생경해서 그 첫인상이 다시금 머릿속에 박혔다.
‘괜찮으면 같이 밥 먹을래요? 지갑 찾아 주신 거 감사하기도 하고… 저도 아직 점심 전이어서.’
조곤조곤 말하는 입술은 동그랗고 작았다. 입술이 마냥 작은 편은 아닌 것 같은데도 평균보다 작아 보였다. 그러다 첫 만남 때 미처 발견하지 못한 점을 하나 발견했다. 아. 입꼬리가 좀 말려 있는 편이어서 입술이 귀여워 보이는구나.
‘바쁘시면 거절해도 괜찮아요.’
그 제안을 듣고, 김선오는 생각했다. 아마 그 식사 자리가 끝나면 자신은 분명 저 아이에게 반해 있을 거라고. 얼빠는 맞아도 심각한 얼빠는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 생각이 맥없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첫 만남 때 호감을 가진 것은 어찌어찌 넘길 수 있었다. 그런데 그게 두 번째, 세 번째가 되고, 그러다 점점 마음이 깊어지면… 그러면 어떡하지.
‘우리가 나중에 헤어지면 어쩌지?’
지갑이 연결해 준 두 번째 만남. 김선오는 자신들의 두 번째 만남을 회상하다가 옆으로 돌아누웠다.
‘헤어져서 모르는 사이가 되면… 그래서 서로를 잊으면 어쩌지.’
이성애자를 짝사랑하게 되면 어쩌나, 마음을 졸인 예전. 그리고 이젠 극적으로 사귀게 된 사람과 헤어지면 어쩌나, 마음을 졸이는 지금. 웃기게도 예나 지금이나 걱정은 늘 존재했다.
‘왜 갑자기 시답잖은 소리야? 내가 아까 심하게 말해서 그래?’
그거 미안하다고 했잖아. 옆에 나란히 누운 단여명이 밉지 않게 꿍얼댔다. 그리곤 긴 속눈썹을 드리우더니 가벼운 한숨을 밀어냈다.
‘어떻게 잊겠어. 성격도 정반대, 취향도 달라, 생각하는 것도 안 맞는데. 싸우기는 좀 싸우나.’
그러게. 알면 알수록 다 다른 사람이, 매번 미운 말만 일삼는 입술이 난 왜 이렇게 좋지.
‘그래도 계속 붙어 다니는 거 재밌지 않아?’
가만 쳐다보는 것이 토라진 것처럼 보였는지 단여명이 웃으며 품에 안겼다. 몸은 저보다 작은 주제에 가슴을 토닥이는 손길은 제법 어른 같았다.
‘서로 잊을 일도 없고, 헤어질 일도 없겠지만….’
‘…….’
‘만약 그렇게 된다 해도 너랑 친구로 남고 싶어.’
까만 눈망울이 얕은 어둠 속에서 조그마한 행성처럼 빛났다. 이렇게 사랑스러운 사람과 아까 왜 그리 다퉜는지. 김선오는 말없이 단여명의 손을 잡았다. 엄지로 그의 손등을 쓸어 보다가 손가락끼리 얽어 깍지를 끼웠다.
‘우리 반지 맞출까?’
깍지 낀 손을 내려다보던 단여명이 갑작스러운 말을 꺼낸 건 그때였다.
‘기념일은 아니지만… 손이 좀 허전해 보여서.’
얘기를 꺼낸 자신조차 갑작스러웠다는 걸 아는 눈치였다. 머쓱한 웃음조차, 말 사이에 잠깐 새어 나온 숨소리마저 예뻐 김선오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손바닥이 겹칠 때 부딪치는 금속음이 좋다고 했다, 단여명은. 솔직히 그때는 퍽 낭만적인 말이라고 생각했다. 마치 밤하늘 아래에 같이 누워서 ‘별이 반짝이는 게 좋아’라는 말을 들은 것 같았다. 그래서 좀 부끄러웠고… 욕지기가 나올 만큼 가슴이 떨려서 그 말이 좀 싫게 느껴졌다.
그런데 왜 그 순간을 잊지 못하겠는지. 아마 뜬금없이 밤하늘이 떠오른 것은 그 애의 눈이 별처럼 예쁘게 반짝였기 때문이겠지. 제 불안함을 달래려 눈으로 보이는 것으로 영원을 약속하는 그 목소리가, 반지 얘기하며 자신의 네 번째 손가락을 매만지던 그 손길이, 별이 우수수 떨어지는 밤하늘처럼 인상 깊었기 때문이겠지.
그 작은 소리가 들리기나 해? 그 소리에 귀 기울일 시간에 차라리 내 손이나 더 꽉 잡아 줘. 새로 살 반지가 뭉그러질 만큼.
차라리 그렇게 솔직하게 말했다면 조금이나마 덜 후회했을까.
‘그래서. 걔 보내고 나면 나 재워 주나?’
사실은 알고 있었다.
‘그래, 나중에.’
사랑에 빠진 단여명은 뭉뚱그려 대답하기보단, 먼저 자세한 미래를 약속한다는 것을.
만약 몸뿐인 관계를 지속했더라면. 내가 너의 마음도 나와 같을 거라고 섣불리 짐작하지 않았더라면. 홧김에 같이 사는 남자를 들먹이지 않았더라면. 그랬다면 우리 사이가 좀 달라졌을까.
“나 참…. 손바닥도 아니고 주먹으로.”
김선오는 벌겋게 달아오른 뺨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처음부터 끝까지 참 매정하다. 좋았던 기억만 붙잡고 살아가는 저에게.
…아니, 그럴 수 있나. 좋아한다는 이유로 몇 번이나 실수를 저질렀으니까. 네 마음이 돌아서지 않는 게 조급해 네게 상처가 될 거란 것을 알고도 그리 행동했다. 잘못된 걸 알았어도 어디부터 수습해야 할지 몰라 멈추지 않았고, 결국 예상했던 결말을 맞았다.
“단여명 손 맵네.”
햄스터 같은 게.
‘우리 다신 보지 말자.’
작가라서 그런가. 무슨 드라마에 나올 법한 얘기를 한다. 아니, 아니지. 네가 있으면 그게 다 드라마의 한 장면처럼 보이지. 내가 그런 인간이지, 뭐.
‘고소하든 말든 좋을 대로 해. 취미잖아. 네 좋을 대로 하는 거.’
단여명은 그 말을 남기고 등을 돌렸다.
김선오는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며 속으로나마 대답했다. 맞다, 취미. 내가 좋을 대로 하는 거.
섹스만 하는 사이가 돼도 괜찮을 것 같았는데 그게 잘 안 됐다. 같이 있을수록 예전으로 돌아가고 싶은 욕망이 강렬해졌다. 그리고 분을 못 참아 네게 손을 올렸을 때 깨달았다.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어도 여전히 난 널 잊지 못했던 거라고.
술김에 네 몸을 떠밀었지만, 그때 손찌검할 마음은 결단코 없었다. 미운 말만 뱉는 입술이 여전히 예뻐 보여서. 그래서 입술을 부딪치려는데, 웬 놈이 끼어들었다.
그리고 그 웬 놈에게 영상을 보여줬던 건 그에게 내리는 경고이자 네가 내 거라고 우리 얼굴에 오줌을 갈기는 영역 표시였다. 아마 여명이 넌 모르겠지만, 이상한 놈은 이상한 놈을 알아보는 법이거든.
집에서 우연히 그놈을 마주치고, 너와 함께 문밖을 나섰을 때. 그때 머리칼 속에 잠깐 엿보인 두 눈은 굶주린 짐승의 것처럼 메말라 있었다. 의처증이 돋아 착각한 거라고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평범한 동생이 같은 사내자식을 보는 눈깔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솔직히 영상을 빌미 삼아 계속 옆에 붙여두고, 살살 꼬드길 작정이었는데. 그럼 어떻게 넘어올 것 같았다는 얘기는 차마 솔직하게 말할 수 없었다. 권호영이 입만 열면 까발려질 이야기는 먼 미래에 대한 보증이었다. 제가 싼 똥은 제 스스로 치워야지 최소한의 이미지를 지킬 수 있을 테니까.
우리는 여기서 끝이 아니다. 나중에 나이를 더 먹어서 지금 일이 까마득히 멀어지면 내가 한 번쯤 그리워질지도 모르고. 내가 ‘잘 지내?’ 하고 연락하면 다시 ‘만날까?’라는 답장이 돌아올지도 모르지.
다시 사귀는 건 바라지도 않는다. 그저 밥 한 번, 연락 한 번이라도…….
“…….”
먼 훗날을 그리던 김선오는 이내 깨달았다. 결국 지금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사실을.
특별한 사랑은 아니었지만, 특별한 사람이었다. 단여명의 머릿속에서 나온 문장 중 제일 기억에 남는 구절이었다. 처음 보았을 땐 그가 쓴 책을 눈앞에 들이대며 놀리기 여념이 없었는데. 부끄러워하며 도망치던 뒷모습을 회상하는 지금에서야 그 구절이 가슴 깊이 스며들었다.
김선오는 오랫동안 혼자 남은 자리를 지켰다. 돌아오지 않을 상대가 앉았던 자리에 길게도 눈길이 머물렀다.
***
샤프가 사각거리는 소리와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합주하듯 실내를 울렸다. 기말이 코앞으로 닥친 만큼 중앙 도서관 안에는 조용히 열의를 불태우는 사람들이 다수였다. 숙연한 공기 속 모두 부동자세로 앉아 펜을 바쁘게 놀렸다.
책상에 빽빽하게 들어앉은 사람 중에는 권호영도 섞여 있었다. 주변 이들과 대비되게도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아 아무것도 하지 않는 중이었지만.
프린트물은 한 시간째 같은 페이지를 전전했다. 권호영은 그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어김없이 눈길을 돌렸다. 시선의 끝이 닿은 곳은 책상 위에 올려둔 휴대폰이었다.
오전에 한 번 부재중이 뜨고, 그 후로 핸드폰엔 어떤 알람도 찍히지 않았다. 단여명의 연락을 피하고 있는 주제에 그가 연락하지 않으면 못내 불안해져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당장 집으로 달려가 저를 머릿속에서 지우지 않았는지 꼬치꼬치 캐묻고 싶었다.
‘와……. 진짜 음침하네.’
비아냥거리는 남자의 목소리가 귓전을 맴돌았다. …음침한가. 권호영은 이내 그럴지도 모르겠다며 쓰게 조소했다.
모질게 몰아붙인 그 밤으로부터 고작 일주일이 지났을 때였다. 삽입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단호하게 밀어낸 것치고 단여명의 제안에 빈말로도 거절하지 않았다. 또다시 이성을 잃고 허겁지겁 달려들었으며 또 한 번 그의 몸에 상처를 내놓았다.
‘나는 짐승인가?’
대체 어디서 솟구치는지 모를 성욕이었다. 첫 경험을 치렀을 때만 자제력을 잃은 것이고, 그 뒤로는 잘 참아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의 전 애인, 김선오를 만난 뒤로부터 조절이 안 됐다.
날 얼마만큼 자신의 사람으로 생각하는지 눈으로 확인받고 싶었다. 김선오는 스쳐 지나간 인연에 불과하고, 자신은 현재의 사람이란 걸 인정받고 싶었다. 그의 웃음이, 용서가 너무 달았다.
결국 사람이라면 한계가 찾아올 텐데. 더는 못 참겠다고 단여명이 밀어낼 순간이 올 게 무서웠다. 그럼에도 그를 자꾸 시험하게 된다. 나중엔 불쌍한 척 입술을 깨무는 게 통하지 않을지도 모르는데.
지쳐 잠든 그의 몸을 씻겨 줄 때도 불순한 생각은 머리 한구석에 달라붙었다. 뒤를 깨끗이 비우려고 안에 몇 번이나 물을 집어넣고 빼내도 희멀건 액이 끝없이 쏟아졌다. 물에 희석된 정액이 떠내려가는 모습을 보며…… 솔직히 반성보다는 아쉬움을 먼저 느꼈다.
그의 몸에서 제 흔적이 사라져 가는 게 아까웠다. 멀쩡한 구석이 없도록 온몸을 씹어놨으면서, 밤새 뜬눈으로 그 짓을 해 자신조차 피로를 느끼는데도 욕심은 바닥을 드러낼 줄 몰랐다.
콘돔을 사용하지 않는 이유도 그랬다. 처음엔 경황이 없어서. 두 번째엔 사이즈가 맞는 콘돔을 구하지 못해서 그에게 사과했다.
그리고 세 번째부터는 고의였다. 단여명도 콘돔을 사용하라는 말을 하지 않았으니까. 그래서 해외에서 구입한 콘돔 박스가 서랍 안에 버젓이 있었지만, 모르는 척 그의 몸속에 질펀하게 사정했다. 나중에 뒤처리를 해 주겠다는 명분으로 같이 욕실에 들어가는 것도 좋았다. 침대 밖에서 그의 몸을 거리낌 없이 만질 수 있는, 유일무이한 기회였다.
후회의 순간은 그 몸에 열이 오른 때에야 찾아왔다. 1분 달리는 것조차 힘에 부쳐 하는 몸이다. 그 연약한 몸을 물어뜯을 때가 어디 있다고. 그제야 온몸을 물들인 울혈 자국이 제 흔적이 아닌 상처로 보였다.
좋아하고 아끼는 사람에게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그건 좀 비정상적인 거잖아. 단여명이 계속 받아 주니까 정도를 모르고 날뛰는 것이다. 그가 내치기 전에 마음을 단단히 잡아야 했다. 속이 시커멓지 않은 척, 조금은 무뚝뚝하고 순진한 권호영으로 남아야 했다.
현재 권호영의 생각은 이러했다. 욕망이 밖으로 튀어 나가지 않도록 제 마음을 재정비할 겸, 단여명이 자기 손으로 직접 김선오를 끊어낼 시간을 주기로. 단여명이 기다림의 끝을 약속했으니 자신은 그의 입에서 나올 얘기를 기다릴 것이다. 김선오를 끊어낼 길은 이미 열어둔 참이다.
눈길을 고정하던 핸드폰에 빛이 들어온 것은 그때였다. 제 머릿속을 꿰뚫어 본 것처럼 발신자명은 단 한 글자였다. …형.
권호영은 전화가 걸려 온 핸드폰을 미동 없이 쳐다봤다. 김선오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인가? 그 생각을 하니 자꾸만 손이 핸드폰으로 쪽으로 가려고 했다.
그의 입에서 김선오의 ‘김’ 자만 나와도 화가 날 것 같았다. 일이 어떻게 돌아간 건지 대강 파악됐다. 단여명이 알아서 정리하고, 스스로 입을 열 때까지 기다려 주고 있지만, 솔직히 화를 안 낼 자신이 없었다. 화내지 않고 그를 달래 줘야 함에도.
왜 제게 말하지 않았는지, 어째서 약속을 어기고 혼자 자리에 나갔는지, 제가 그렇게 믿음직스럽지 못하게 보였는지, 아직도 동생이라고 어리게만 생각하는지….
“…….”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건 전화가 끊기고도 연달아 3번이 다시 걸려 왔을 때였다. 그는 받을 때까지 걸 작정인지 계속 전화를 걸었다.
…이러면 무시하기 힘든데. 이렇게까지 끈질기게 전화한 적이 없었기에 슬슬 안 좋은 일이 생긴 건 아닌지 걱정됐다. 초조하게 입술을 잘근거리는 도중 머릿속에 응급실의 풍경이 스쳤다. 다급히 보호자를 찾는 의료진의 목소리가 이명처럼 울렸다.
권호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제법 큰 소리가 나 이목이 쏠렸지만, 그를 알아채지 못했다. 핸드폰을 챙겨 들고 밖으로 향하는 발놀림이 다급했다. 도서관의 문 앞에 다다른 권호영은 자동문이 열리자마자 전화를 받았다.
-어디야?
여보세요, 라는 말을 하기도 전이었다. 다짜고짜 목적을 묻는 목소리는 모르는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하아…. 우려했던 상황은 아닌 것 같아 권호영은 조용히 가슴을 쓸어내렸다. 잠깐 사이에 별의별 생각을 다 했다.
그는 다른 일 때문에 전화한 건 아닌지 평상시와 같은 목소리였다. 하지만 제가 있는 곳으로 곧장 찾아올 것 같은 기세를 풍겼다. 지금 단여명을 보면 김선오의 얼굴이 겹쳐 보여 괴로웠다. 그러면 안 되는데도 질투심에 눈이 멀어 또 그의 앞에서 실수할 것 같았다. 말이든, 행동이든.
“저… 가게요. 손님이 없어서 잠깐 쉬고 있었어요.”
-…….
대답을 돌려줬음에도 단여명은 말이 없었다. …화났나? 계속 연락은 해왔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전화를 무시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뒤늦게 전화가 온 줄 몰랐다는 메시지를 보냈지만, 이러는 게 반복되니 그의 입장에선 화날 만도 했다.
미안한 감정은 홍수처럼 밀려든 그리움에 묻혔다. 단여명이 보고 싶었다. 일주일 전처럼 그의 몸을 끌어안고, 미세한 표정 변화에 집중하며 화를 풀어 주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그의 얼굴을 보면 감정에 휩쓸려 말실수를 할 것 같았다. 그에게 추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만나서 화를 풀어 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이상한 오해를 하지 않게끔 변명이라도 보태야 했다. 연락을 피한 게 아니라 정말 바빠서 그랬노라고.
“죄송해요. 전화는 일부러 안 받은 게 아니라… 제가 요즘 핸드폰 확인할 정신이 없어서…….”
-나 네가 일한다는 가게 앞인데.
횡설수설 말하던 권호영은 거짓말처럼 입을 딱 다물었다.
-안에 너 없는데.
단여명의 목소리는… 정말이지 평소와 같았다. 카푸치노 위의 우유 거품처럼 부드러운 중저음.
-다시 물어볼게.
그래서 불길한 예감이 더욱 강렬하게 솟구쳤다.
-권호영. 너 어디야?
가로등 불빛이 켜진 교정을 달리며 권호영은 고개를 두리번댔다. 대학교 안은 넓고, 건물도 복잡하게 들어차 있어 처음 온 사람은 곧잘 길을 헤맸다.
사실은 학교 도서관이었다는 말에 단여명은 화내지 않았다. 그저 ‘거기 있어, 갈게’라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권호영은 한동안 제자리에 못 박혀 조용히 생각을 정리했다. 그리고 단여명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위치를 물었다.
‘분명 여기라고 했는데….’
카페 앞, 큰 가로수 나무, 넓은 잔디밭 끝에 조그마한 공연장. 학교 정문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단여명이 말해 준 정보가 종합된 장소이기도 했고.
권호영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주변을 살폈다. 가로등 위에 달린 스피커를 통해 이름 모를 인디밴드 노래가 흘렀다. 커다란 카페 앞을 거니는 사람들은 웃으며 서로를 지나쳤다. 인공 잔디밭에 돗자리를 펴놓고 캔 맥주를 부딪치는 이들도 얼굴에 웃음꽃이 가득했다. 모두 초여름 저녁의 정취를 느끼며 즐거워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그들 중 제가 찾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권호영은 눈을 바삐 움직이며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잔디밭 인근의 조금 어둑한 길로 접어든 찰나였다. 가로등 불빛을 등지고 서 있는 한 남자가 보였다. 그는 구석진 곳에 서서 즐겁게 떠드는 사람들을 보고 있었다. 권호영은 곧장 그에게 다가갔다.
“형.”
뒤를 보고 선 단여명은 불러도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그게 더욱 마음을 초조하게 만들었다. 권호영은 그의 어깨를 잡아 돌려세웠다.
“…….”
단여명은 좀 멍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시선은 이쪽에 닿아 있음에도 두 눈에는 어떤 감정도 비치지 않았다. 권호영은 터져 나오는 숨을 잡아 눌렀다. 오는 길에 할 말을 다 정리해 뒀는데도 그의 얼굴을 보니 목이 꽉 막히고, 머리가 하얘졌다.
그래도 말해야 했다. 나쁜 마음으로 거짓말한 게 아니라고. 정말 속일 마음은 없었다고. 그러나 권호영이 입을 열기 전에 단여명이 먼저 말을 꺼냈다.
“내가 방금 어이없는 얘기를 들었는데…. 그래서 정신이 아직 좀 얼떨떨해.”
그는 어째서 가게에 있다고 거짓말했는지 묻지 않았다. 그보다 더 충격적인 사실을 알아챈 사람처럼.
“너 김선오 만났어?”
곧 염두에 뒀던 질문이 던져졌다. 작지 않은 목소리로 물음을 던진 단여명은 여전히 영혼이 빠져나간 표정이었다.
“그래서 집에 안 들어온 거야? 같은 집에 안 사는 척 눈속임하느라?”
“…….”
“말해. 나 모르게 김선오 만났냐고.”
침묵만 지키니 단여명의 낯에 실낱같은 금이 갔다. 나 모르게…. 그 말을 할 사람이 어째 바뀐 것 같다는 저열한 생각이 들었다.
“…다 알면서 왜 물어봐요.”
선뜻 떼어지지 않던 입술에 감정이 실리니 매끄럽게 열렸다. 긍정에 가까운 말에 단여명은 입술을 살짝 벌렸다.
“하하…….”
한동안 굳어 있던 그는 곧 힘없는 실소를 터트렸다. 어깨를 살짝 떨고, 턱을 내리더니 금세 얼굴을 들었다. 다시 마주친 눈동자엔 수많은 감정이 회오리치고 있었다.
“네가 왜?”
차디찬 목소리가 사위를 갈랐다.
“네가 무슨 상관이라고.”
외면하고 싶을 정도로 낯설었지만, 언젠가 들어 본 적 있는 목소리였다. 골목길에서 어떤 남자와 몸싸움을 벌이는 걸 보았을 때. 그때 형이 저런 목소리를 낼 줄 알았나, 하고 신기해했었다. 그리고 그때 우스운 상상을 펼쳤던 것까지 정확히 기억한다. 만약 그 상대가 나였다면 분명 상처받았을 거라고.
과거의 자신은 그를 잘 몰랐어도 주제 파악은 현명할 정도로 명석했다. 화난 눈빛과 차가운 목소리가 심장에 총알처럼 박혀 커다란 구멍을 뚫었다.
“걔가 집 앞까지 찾아왔다며. 봤어도 못 본 척 따라가지 말았어야지. 얼굴에 손자국이 날 만큼 얻어터지고도 다시 만날 생각을 해?”
단여명은 금세 감정이 북받친 얼굴로 말을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또 싸움이라도 나면 어쩔 뻔했어. 그거 보고 누가 신고해서 빨간 줄 그였으면. 네 앞길에 지장 가는 거 생각 안 해?”
…걱정해서. 그래서 저렇게 격하게 다그치는 걸 알았다. 그는 제가 공부를 열심히 하는 걸 알았다. 한국으로 출국하기 전, 어머니가 했던 말도 가슴속에 새기고 있었다. 뭐가 될지 몰라도, 뭐가 될 사람은 처신을 똑바로 해야 하는 것을.
그럼에도 욱했다. 뻥 뚫린 구멍에 고름이 차오르듯 화가 치밀어 올랐다. 나 혼자 얻어터진 것이 아니라고, 자존심이 상해 그리 없어 보이게 변명하고 싶었다. 그러나 지금 명확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은 따로 있었다.
“그럼 형은요.”
차분히 쏘아붙인 말에 단여명의 얼굴이 움찔 굳어졌다.
“이름도 잊고 산다면서. 그 새끼가 형 눈 위에 상처 난 걸 어떻게 알아요.”
이러면 안 되는데. 어떻게 된 건지 먼저 사정을 설명하고, 침착하게 말해야 하는데.
“저라고 속 편히 있던 줄 알아요?”
그럼에도 입은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저 그 영상 다시 보기 싫었어요.”
평이하게 던져진 말은 시퍼런 날벼락과도 같았다. 단여명은 숨까지 멈추고, 그만 제자리에 얼어붙었다. 걱정했던 모든 일을 통틀어 최악의 상황이 도래했다.
“말 나온 김에 다 얘기해요. 김선오 만나느라 밖에 나갔던 거죠. 그래서 저랑 한 약속 취소하고, 친구 만난다는 핑계로 그 사람 만난 거잖아요.”
“…….”
“눈 찢어진 것도 그 새끼가 그런 거예요? 그래서 상처 난 거였으면 그때 그렇게 안 넘어갔어요. 애초에 김선오 만나러 갈 일 있으면 저랑 같이 가기로 약속한 거였잖아요. 왜 모든 걸 혼자서…….”
“…….”
“그게 저한테 상처가 되는 걸 왜 몰라요.”
권호영의 얼굴은 참담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단여명은 눈도 깜빡이지 못하고 그 모습을 망연자실하게 바라보았다.
권호영이 이 일에 개입하지 않기를 바랐다. 단여명이 아는 권호영은 모범생이며 성실하고 바른 사람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가 자신 때문에 자책하지 않기를, 그가 상처받지 않기를 진심으로 바랐기에 김선오와의 관계를 숨겼다.
“무슨 일 있냐는 말도 속으로 몇 번이나 삼킨 줄 알아요?”
그렇게 노력했는데. 어떻게든 권호영 모르게 혼자 해결해 보려고 했는데. 결국 권호영에게 상처를 줬고 모든 게 엉망으로 꼬여버렸다.
그에게 못 한 얘기가 너무 많아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말한다고 해서 그게 바로잡히기는 할지. 모든 게 다 알 수 없어져 속에서 무언가 와르르 무너져 내렸다.
“형이 저랑 한 약속 중에 거짓말이 아닌 게…!”
순간 격양된 목소리가 뚝 끊겼다. 누군가 중간에 입을 틀어막기라도 한 것처럼 그는 황급히 말을 멈췄다. 입술을 벌린 권호영은 창백하게 질린 낯이었다. 비수같이 꽂히는 얘기에 넋을 잃고 있던 단여명도 알아챌 변화였다.
그의 반응에 어떤 의문을 품기도 전이었다. 뺨을 가르는 물기가 느껴졌다. 시야도 무언가 어지러웠다. 권호영의 얼굴이 똑바로 보였다가 다시 울렁거리며 흐릿해지길 반복했다. 눈을 감았다가 뜨곤 아래를 내려다보니 투명한 물방울이 후드득 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눈물이었다.
“……아.”
단여명은 놀란 얼굴로 황급히 뺨을 훔쳤다. 왜 눈물이, 지금 이 타이밍에서…. 당황해 눈가를 벅벅 닦아 봤지만, 눈물은 또다시 차올라 뺨을 흥건히 적셨다.
“아니, 아니야. 그게 아니라…….”
단여명은 고개를 푹 숙이고 허둥지둥 변명했다. 눈물이 없는 편이라고 말해놓고 지금 질질 짜면 안 운다고 말했던 그 얘기마저 거짓말이 돼버리는 것이다. 아니, 그게 아닌데. 진짜 잘 안 우는데….
잘한 것도 없으면서 피해자인 척하는 것 같아 고개를 들 면목이 없었다. 권호영에게 미안했다. 그의 앞에서 연장자라고 우쭐대 놓고, 약한 면이 다 까발려진 것 같아 창피했다. 자신들의 관계가 속수무책으로 틀어지는 것이 너무도 잘 느껴져 속상했다. 그냥 이 상황이 너무 싫었다.
“……!”
그리 고개를 떨구고 있던 순간이었다. 손목이 덥석 붙들리고, 몸이 넘어질 것처럼 앞으로 기울었다. 눈물로 얼룩진 시야가 순식간에 캄캄해졌다.
“…제가 무섭게 말했어요?”
단여명의 몸을 와락 끌어안은 권호영이 떨리는 목소리를 밀어냈다. 단여명은 숨을 훅 들이마셨다. 머리털이 바짝 설 정도로 놀라 입술이 달싹거리듯 떨렸다.
“잠깐, 이거 놓고… 일단 놓고 말해.”
“그런 거 아니에요. 화 안 냈어요.”
그는 어딘가 겁을 잔뜩 집어먹은 사람처럼 굴었다. 누군가의 품에 정작 제가 숨고 싶다는 듯 상반신을 크게 웅크려 단여명을 껴안았다. 숨 쉴 통로도 주지 않을 작정인지 푹 숙인 얼굴은 단여명의 옆통수에 꽉 눌러 붙인 채였다.
말이 통하지 않자 당황이 배로 불어났다. 단여명은 떨리는 눈동자로 단단한 가슴팍을 강하게 밀쳐냈다. 그의 마음은 이해하지만 여긴 야외였다. 남자 둘이 애틋하게 끌어안고 있는 장면을 보여줄 곳이 아니라, 이 말이었다.
“사람들 보잖아……! 놔!”
어깨를 비틀어 잠깐 옆을 살핀 찰나, 주변을 지나던 이들이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 걸 보았다. 기겁한 단여명이 목소리를 죽여 소리쳐도, 발을 구르며 벗어나려고 해도 권호영은 그를 더욱 강하게 끌어안기만 했다.
결국 서로의 다리가 엇갈릴 만큼 상반신이 빈틈없이 밀착했다. 그에 놀란 마음에 잠시 멈췄던 눈물이 속절없이 흘러내렸다. 동그란 눈물과 씩씩 터지는 숨이 권호영의 옷을 뜨겁고 축축하게 물들여 놓았다.
“권호영. 진짜 안 놓으면 화낼 거야.”
“울음 그치면요.”
“놓으라고.”
“울지 마요, 형. 형이 울면… 제가…….”
눈물이 터진 건 자신인데, 권호영은 되레 패닉이 온 사람처럼 행동했다. 단여명은 그의 옷에 눈물을 훔치며 잠시간 침묵했다. 그리고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지금 안 놓으면 다신 안 봐, 너.”
상반신을 우악스레 붙들었던 힘이 서서히 풀렸다. 갑갑했던 숨이 원활히 통하고, 콧속으로 밀려들던 섬유 유연제 향기가 옅어졌다. 단여명은 권호영이 몸을 놔주자마자 한 발짝 거리를 벌렸다.
주변을 둘러보니 몇몇 사람이 이쪽을 지켜보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자리를 떠나지 않고, 자기들끼리 숙덕거리는 모양새가 싸움 구경이라도 하는 듯했다.
단여명은 마지막으로 남은 상대에게 눈길을 줬다.
“…….”
권호영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느냐는 눈을 보이고 있었다. 불안과 충격, 부정의 빛깔이 짙은 눈동자 속에서 혼탁하게 뒤얽혔다.
“…다른 데서 얘기하자. 보는 눈 많잖아.”
차분한 어조로 말한 단여명이 먼저 걸음을 돌렸다. 부러 눈물은 훔쳐내지 않고, 그대로 흘려보냈다. 거리가 좀 있으면 두 남자 중 한 명이 우는 줄 모를 테니까.
권호영이 다니는 학교 안이었다. 그에 대한 이상한 꼬리표가 붙지 않게 하려면 사랑싸움이 아니라 평범한 말다툼으로 보여야 했다. 그러니 자신만이라도 냉철해져야 하는 시점이었다.
***
‘마음은 정했어요?’
똑같은 카페, 똑같은 자리.
‘생각할 시간은 충분히 준 것 같은데.’
똑같은 장소에서 며칠 만에 본 김선오는 여전한 모습이었다. 빙글빙글 웃는 낯은 혐오스러웠고, 묘하게 흐트러진 자세는 멀끔한 차림새에 비해 건방져 보였다.
‘…그걸 왜 권호영 씨가 가지고 있지?’
전과 달리 그 웃음은 오래가지 못했다. 다른 이의 핸드폰 속에서 재생되는 영상을 목격한 뒤였다. 한 사람만 나오는 8초 분량의 영상이 아니라 20분짜리 편집본. 그가 누구에게도 보여준 적 없는 밀회 영상의 원본이었다.
권호영은 액정이 부서진 핸드폰을 주인에게 돌려줬다. 그는 어이없고, 황당하고, 조금은 화난 표정이었다. 미묘하게 일그러진 얼굴로 자기가 전에 사용했던 폰을 내려다보기만 할 뿐, 그것에 손을 뻗을 생각조차 못했다.
권호영은 무표정 속에서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저 멍청한 얼굴을 보려고 그간의 개소리를 다 들어줬구나. 약간의 통쾌감과 갈래갈래 치뻗은 증오심이 눈길이 되어 그에게 칼을 겨눴다.
‘다 박살 난 핸드폰 주워 와서 사설 업체에 맡긴 건가? 데이터 복구하려고?’
한동안 침묵하던 김선오가 이내 비스듬히 웃었다.
‘와……. 진짜 음침하네.’
그리고 서슴없이 비난했다. 놀라움과 감탄이 섞인 목소리는 대놓고 박수라도 보내고 싶어 하는 기색이었다.
‘우리 영상이 남의 손에 있는 거, 진짜 기분 별로네요. 나는 어디에 퍼트린 적도 없는데, 인터넷에 떠돌아다니는 거 본 느낌이야.’
‘…….’
‘백마 탄 왕자님처럼 구는 것까진 좋아요. 그런데 여명이가 이걸 알면 좋아할까?’
그는 못내 자신 있는 투였다. 잘못을 반성하는 기미 없이, 잘못을 저지른 당사자에게 미안하기는커녕, 그를 아주 잘 알고 있다는 듯 거드름을 피웠다.
‘내 생각은 다른데. 걔 분명 싫어해요. 애가 혼자 자라서 그런가…. 누가 자기 일에 끼어들어서 해결해 주는 거 수치로 생각하거든. 자기 힘든 것도 내색할 줄 모르는 앤데.’
권호영은 김선오의 얘기를 한 자도 빼놓지 않고 머릿속에 담았다. 암기하듯이 외운 문장 속에서 길가에 툭 튀어나온 돌부리처럼 유달리 걸리는 내용이 있었다.
자기 일에 끼어들어서 해결해 주는 거.
그가 무심코 흘린 그 말을 듣고서야 모든 아귀가 맞아떨어졌다.
‘특히 이런 문제면 더 예민하게 반응할걸. 유도리 있는 것 같아 보여도 은근 앞뒤 꽉 막힌 녀석이거든.’
김선오가 뜻 모를 웃음을 보였다. 누굴 생각하며 짓는 웃음인지 속이 다 들여다보였다. 그에 표정이 더욱 서늘하게 굳었다. 어금니가 꽉 맞물렸지만, 가까스로 폭력성을 잠재울 수 있었다.
‘잘해 봐요. 잘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는 그 말을 끝으로 자리를 떴다.
영상을 지워 주겠다는 조건을 내밀며 단여명과 연을 끊으라고 말했으나, 협상으로 내건 영상에 본인의 얼굴도 같이 걸리게 됐다. 막강한 무기는 양날의 검이 됐고, 협상의 탈을 뒤집어쓴 협박은 무효로 돌아갔다.
잘해 봐요. 얘기가 마무리됐음에도 그가 남기고 간 말은 오랫동안 가슴에 남았다. 너는 너대로 해봐. 나는 나대로 할 테니. 그런 뜻이 담긴 것 같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어서. 김선오의 일이 저와는 마무리됐지만, 남은 한 사람과는 아직 유효해 보였기에.
“그러니까 네 말은…….”
오랜 침묵을 깨고 기다리던 목소리가 들렸다. 긴장감이란 점액질이 목구멍에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권호영은 마른침을 삼키곤 옆을 돌아보았다.
“김선오가 쓰던 폰을 가지고 있었다고.”
모든 이야기를 들은 단여명은 혼란스러워하는 낯이었다. 울음은 멈춘 뒤였지만, 눈물이 휩쓸고 간 눈꼬리는 여전히 발간 기운을 띠었다.
대학교 내 컨벤션 센터 근처는 옅은 어둠이 내려 있었다. 특별한 일이 있을 때 말고는 사용되지 않는 건물은 여느 때처럼 전체 소등돼 있었다.
인적이 없는 곳을 찾던 둘은 불이 꺼진 건물의 구석으로 들어갔다. 불빛이 희미하게 닿는 곳엔 벤치 하나가 덩그러니 놓여 있었고, 그곳에 나란히 앉은 참이다.
“걱정이 돼서…….”
권호영은 불안한 눈으로 단여명을 연신 곁눈질했다. 그는 금방이라도 다시 소리 없는 울음을 터트릴 듯한 얼굴이었다. 그 모습이 미친 듯이 신경 쓰여 말이 부정확하게 흘러나갔다.
그러다 방금 제가 한 말이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상 속엔 두 인물이 나왔고, 자신은 그들과 분리된, 완벽한 타인이었다. 남의 걸 주워 온 셈이니 누구 말대로 음침하게 보이기 딱 좋았다.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고…. 김선오랑 싸운 당일엔 그 자리에 두고 왔어요. 그런데 생각할수록 마음에 걸려서…….”
몇 달 전의 일을 한꺼번에 말하려니 얘기가 잘 정리되지 않았다. 권호영은 단여명의 눈치를 살피며 조곤조곤 얘기를 풀어나가기 시작했다. 충격에 젖은 그가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아주 천천히.
“그런 영상을 저한테 함부로 보여줄 사람이면 다른 곳에서도 떠벌리지 않을지 걱정했어요. 그때 핸드폰은 부서졌지만, 클라우드 같은 곳에 원본을 따로 남겨뒀을지도 모르고…. 만약 문제가 생기면 형한테 언젠가 말해야 할 순간이 올지도 모르니까. 말보다는 보여주는 쪽이 이해가 빠를 거라고 생각해서 일단 가지고만 있었어요. …임시방편으로.”
“…….”
“늦게라도 말해야 하나 고민했는데… 제 눈엔 김선오가 일방적으로 매달리는 것처럼 보였거든요. 말해 봤자 좋을 게 없을 것 같고, 폭력적인 사람 같아서… 만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에 비밀로 했어요. 형이 남자 만난 건 김선오랑 집 앞에서 그랬을 때 눈치챘고요.”
“…….”
“지금 생각해 보면 그 영상을 저한테 보여준 이유가 있었어요. 아마 제가 그런 걸 봤다고 말했어도…….”
단여명은 지금처럼 아무것도 못 했을 것이다. 비밀스러운 영상이 찍힌 이상 단여명은 김선오를 만났을 테고, 김선오는 똑같이 협박했을 거다. 그럼 단여명은 그 사실을 제게 털어놓지 못하고, 또 전전긍긍하며 끌려다녔겠지.
김선오는 누구에게도 그 영상을 보여준 적이 없다고 말했다. 어쨌든 단여명과의 만남은 그의 계획대로 돌아갔겠지만, 만약 제가 입이 가벼운 사람이었다면 단여명의 사회적 이미지는 바닥을 찍었을지 모르는 일이다.
그런 의미로 김선오는 변함없는 개새끼였다. 좋아하는 사람을 가지고자 그 사람을 함부로 깎아내린 것이니까.
“김선오가 형한테 무슨 얘기를 어떻게 했는지는 몰라요. 그냥 그 사람이 말하는 거 듣고 저 혼자 짐작한 거예요. 잘 생각해 보니 형이 잠도 설치고, 신경에 거슬리는 일이 생겼다고 말한 게 그때부터인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그 영상 때문에 김선오한테 휘둘리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단여명은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그저 넋이 나간 사람처럼 앞만 바라보았다. 권호영은 반듯한 옆태를 초조한 눈으로 보다가 본심을 반절만큼만 흘렸다.
“…저한테 영상이 있는 걸 보고 당황한 얼굴이었어요.”
그러니 김선오를 믿으면 안 된다는 말이었다. 좋아한다는 이유로 그가 어떻게 사탕발림하든. 분명 제가 나서지 않았다면 끝까지 놓아주지 않았을 것이다. 권호영이 생각하는 김선오는 그러고도 남을 인간이었다.
“…….”
단여명은 그제야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보았다. 뭔가를 눈치챈 사람처럼 까만 눈망울에 묘한 이채가 서렸다. 하지만 그의 얼굴은 여전히 무표정했다. 눈이 시릴 정도로 피부가 하예서 마치 섬세하게 조각한 밀랍 인형을 보는 것만 같았다.
“…이상하네.”
순간 그의 입에서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듣는 이의 맥이 빠질 만큼 공허한 실소였다.
“우리가 그때 그렇게 각별한 사이였나.”
잘했다는 칭찬을 바란 건 아니다. 그러나 그때 자신들의 사이를 쉽게 단정 지어버리는 말에 공연히 섭섭해졌다.
“…형이니까요.”
“왜?”
“…….”
“침대에서 처음 뒹군 놈이라서?”
권호영은 시선을 피하는 것으로 대답을 무마했다. …그렇게 기억됐겠구나. 그 생각에 속에서 신물이 오르는 듯했다. 자신은 어떻게든 그의 눈에 들고 싶어 안절부절못했을 때, 아무것도 몰랐을 단여명은 딱 그렇게만 생각했을 거다.
“순진한 건지, 착한 건지….”
…아니, 둘 다인가. 작게 혼잣말한 단여명이 무거운 한숨을 내뱉었다. 둥그런 어깨가 살짝 들렸다가 내려앉았다.
“……다 말해 주기로 했지.”
“…….”
“네 얘기 맞아. 나 거짓말했어.”
그의 시선은 다시 먼발치로 향했다.
“너 몰래 김선오 만났어. 한 번도 아니고, 열 번이나 만났어. 만나서 친구 겸 애인 노릇 해 줬어. 변명으로 들릴 거 아는데 어쩔 수 없었어. …그래야지 영상을 지워 줄 것 같았거든.”
까만 눈동자에 그보다 더욱 시커먼 어둠이 담겼다. 캄캄한 곳을 응시하는 두 눈은 깊은 심해처럼 빛이 들지 않았다.
권호영은 두 주먹을 꽉 말아 쥐었다. 한바탕 울고 난 뒤라서 그럴까. 그는 모든 기력을 소진한 사람처럼 굴었다. 당황해하며 우는 얼굴도, 이렇게 맥 빠진 모습도 처음 보는 것이라 뭘 어떻게 해 줘야 할지 모르겠다.
감정이 격해져 몰아세우듯 따지고 말았다. 그런 실수는 한 번이면 족했다. 저 눈에서 다시 눈물이 떨어지는 걸 보면 제 피가 다 말라버릴 것이다. 권호영은 말조심하자는 다짐을 가슴속에 새기고 또 새겼다. 그리고 거듭 망설임 끝에 조심스러운 물음을 던졌다.
“……오늘 김선오 만나고 온 거예요?”
“응. 걔가 네 얘기 해 주더라.”
“그럼…….”
“끝냈어. 엄청 최악으로.”
“…….”
“다신 볼 일 없을 거야.”
허공을 바라보는 옆태는 어딘가 쓸쓸해 보이기도, 해탈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에 목구멍 중간에 뜨거운 덩어리가 꽉 박힌 듯 말문이 막혔다. 입술을 열었다가 닫기를 여러 번, 권호영은 조심스레 손을 뻗었다.
단여명은 손등에서 느껴지는 감촉에 반쯤 놓고 있던 정신을 부여잡았다. 천천히 시선을 내리니 제 손등을 덮은 커다랗고도 단단한 손이 보였다.
그 따뜻한 손길에 가슴이 또 울컥했다. 뭐가 어떻게 됐든 잘했다고 달래 주는 것 같아서. 인적이 드문 곳이래도 아직 바깥이었다. 그러니 쳐내는 게 맞을 텐데. …지금은 가만히 내버려 두고 싶었다.
“…그래, 다 그렇다 치자. 김선오랑 따로 만난 것도, 영상 가지고 있던 것도. …다 그렇다 치고 하나만 물어볼게.”
단여명은 고개를 틀어 권호영을 바라보았다. 맞닿은 손을 최대한 신경 쓰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똑바른 눈길을 던졌다.
“걔랑 얘기 끝낸 건 사흘 전이었다며. 그럼 그 뒤론 무슨 이유로 나 피한 건데?”
“피한 거…….”
“피했잖아.”
까만 눈동자에 제법 날카로운 빛이 어렸다. 반사적으로 부정하려고 했던 권호영은 입을 다물었다.
“…생각할 시간이 필요했어요.”
고민하다가 뱉은 그 말에 단여명의 얼굴이 종잇장처럼 확 구겨졌다. 미적지근한 표정만 보였던 방금 전과 상이한 반응이었다.
“왜. 직접 걔랑 얘기해 보니까 내가 좀 달라 보였어? 영상 다시 보니까 남의 손 탄 것 같아서 더럽게 느껴지고 그래?”
“왜 그런 식으로……. 아닌 거 알잖아요.”
“네 태도가 그렇잖아. 연락도 잘 안 되고, 집에도 안 들어오고. 시험 기간에 갑자기 알바 한다는 것도 이상한데. 너라면 그런 생각을 안 하겠냐고.”
“형 때문이 아니라 제 문제예요.”
“무슨 문제.”
“…….”
“아무튼 그 영상 때문인 건 맞다는 소리네.”
권호영은 차마 아니라고 말하지 못했다. 단여명과 자신은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사이였다. 다시 말해 서로의 사소한 변화까지도 기민하게 눈치챌 수 있는 관계라, 이 말이었다. 제가 단여명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긴 걸 알아차린 것처럼, 그도 자신이 이상하게 굴기 시작했을 때부터 내심 의심했을 것이다.
거기다 상황은 이미 갈 때까지 치달아버렸다. 심하게 몰아갔던 그날 밤과 제가 김선오와 접선하기 시작했던 시기가 맞아떨어지는 걸 알았을 테니 그의 추궁을 피할 길이 없었다.
그렇다고 솔직한 속내를 털어놓을 수도 없었다. 질투가 나 형이 누구와도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품었다고. 그리 말하면 이상한 사람 취급받을 게 뻔했으니까.
좀 괜찮아졌던 분위기가 삽시간에 가라앉았다. 권호영은 말을 아꼈고, 단여명은 대답하지 않는 상대를 노려보기만 했다. 그대로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그 짧은 시간에 단여명의 눈시울이 점점 빨갛게 물들기 시작했다. 마음이 급해진 권호영이 그를 달래고자 서둘러 적막을 깼다.
“왜 말 안 했어요. 저한테 말했으면 억지로 만나지…….”
“말하면 뭐가 달라지는데!”
예상치 못한 순간 거친 음성이 터져 나왔다. 권호영은 놀란 눈으로 상대를 바라보았다. 얼굴을 엉망으로 찌푸린 단여명이 굵은 눈물방울을 뚝뚝 떨어트렸다. 눈물에 흠뻑 젖은 눈동자가 수면에 비친 달처럼 울렁이며 흔들렸다.
“나보다 어린 애 붙잡고 힘들다고 징징거리기라도 할까? 그럼 뭐가 해결돼. 갑자기 영상이 공중분해라도 돼? 서로 마음만 불편해지고, 나는 안쓰러운 사람이라 못 박히고. 엉덩이 잘못 놀리고 다녀서 그 꼴이 됐는데, 똑같이 그 짓거리 하고 있는 너한테 그런 일이 있었다고 말하라고?”
“…….”
“나라고 이딴 식으로 끝날지 알았겠어? 대체 둘이 나온 영상을…….”
왜 세 명이서 나눠 갖게 된 건데……. 뺨을 타고 턱 끝에 맺힌 눈물이 바닥을 후드득 적셨다. 단여명은 참혹한 마음을 숨기지 못했다. 가슴이 미어지는 설움에 턱이 바르르 떨렸다.
“막말로 나도 그렇게 잘한 거 없어……. 그리고 애초에 그거 남한테 쉽게 털어놓을 수 없는 얘기잖아…. 응? 너였으면 네가 그런 영상이 찍혀서 억지로 끌려다니고 있다고…. 그렇게 말할 수 있어?”
“…….”
“그런데 왜 말 안 했냐고 하면…… 내가 지금까지 아등바등했던 게, 진짜 허무하고 비참해져서…….”
너무 속상하고 서러워 말하는 중간에 숨이 끅끅대며 터졌다. 분명 꼴사납게 보일 텐데. 설움이 너무도 거세 눈물이고 호흡이고 정돈되지 않았다. 단여명은 한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짠 내가 나는 얼굴을 훑어봐도 격양된 감정은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제가 남이에요?”
그 순간 어깨가 잡혀 반대편으로 휙 돌아갔다.
“형한테…… 제가 남은 아니잖아요.”
손등이 감싸인 손에 손가락이 저릿할 정도로 강한 힘이 들어왔다. 잘게 떨리는 눈동자는 부정의 뜻을 종용했다. 얼른 아니라고 말하라는 듯한 눈빛.
단여명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그를 응시했다. 그리고 곧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맞아. 내가 잘못 말했네.”
“…….”
“너니까 더 못 말했던 거야. 알아들어? 권호영, 너니까.”
잡힐 듯 말 듯 했던 미소는 곧 자조적인 웃음으로 바뀌었다. 단여명은 상대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푹 수그려버렸다. 눈물이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아 그냥 손으로 눈가를 덮어버렸다.
“이 일을 제발 모르길 바랐던 사람이 너였다고……. 말했어도 내가 먼저 말했어야 했어. 김선오 그 새끼한테 듣는 게 아니라 내가 다 해결하고, 내 입으로 말했어야 했다고.”
“…….”
“이건…… 이상하잖아.”
다 엉망이다. 어디서부터 바로잡아야 할지 모를 만큼 모든 게 다 엉망이다.
안 그래도 싫었던 김선오가 더욱 증오스러워졌다. 권호영에게 고마웠지만, 고마워하기 싫었다. 김선오를 더 싫어하게 된 건 상관없었다. 그러나 권호영에게 고마움을 느껴야 하는 상황은 결코 오지 말아야 했다.
만약 권호영이 이 일을 몰랐더라면 역겨운 수를 동원해서라도 김선오에게서 벗어나려고 했다. 그의 방 침대에 다시 올라서라도, 그와 똑같은 범법을 저질러서라도 관계를 끝장낼 작정이었다. 남겨놓았던 썩은 동아줄이란 그런 역겨운 수였다.
이제야 김선오가 영상을 순순히 넘겼던 이유가 이해됐다. 권호영이 원본을 가지게 된 이상 반협박이 통하지 않을 테니까. 권호영이 그 영상을 제게 넘기면 자신들의 만남은 끝나니 감언이설 하며 애걸복걸한 것이다. 이젠 자기가 아쉬운 마당이 됐으니.
권호영이 저와 다른 남자가 키스하는 영상을 봤다는 사실은 예나 지금이나 같았다. 결과만 놓고 보자면 그랬다. 하지만 전과 지금의 마음의 깊이가 너무도 달라서. 그래서 이리도 눈물이 났다.
제가 한 약속 중에 거짓말이 아닌 게 뭐냐고 물었다, 권호영은. 그러나 거짓투성이인 약속 중에서도 나중에 사실을 털어놓겠다고 말한 것은 진심이었다. 연애를 전제로 만나는 사람에게 그런 일을 숨기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에. 그건 무슨 일이 있냐고 걱정해 주는 상대에게 실례였으니까. 정말 솔직히 다 털어놓고, 그에게 마음을 고백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제 옛 애인과 키스한 영상을, 아무 감정이 없었던 전이 아니라 최근에 그 영상을 보게 됐고, 그걸 제 옛 애인과 공유한 사람이 새로운 남자 친구가 된다니……. 그건 좀 이상하지 않나.
권호영은 술김에 몸을 섞은 뒤부터 그랬다. 눈치를 보고, 주인을 기다리던 강아지처럼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그땐 그의 마음이 그만큼 맹목적인지 몰랐다. 하룻밤 실수를 저지른 사람을 과하게 생각해 줄 정도로.
하룻밤 잔 게 뭐 그리 큰 대수라고. 우물 밖으로 나온 권호영은 호수를 보고도 그게 바다인 줄 알았다. 지금껏 펜스를 친 인간관계 속에 절제된 사랑만 받아 와서…….
‘……아.’
순간 오싹한 한기가 등덜미를 훑었다. 그것은 어디서 튀어나온 건지 모를 직감이었다.
권호영은 연애할 생각이 없다고 말했다. 여유가 없다는 이유로. 그땐 그냥 그러려니 넘겼지만, 지금은 깊은 의문을 느꼈다. 연애 비슷한 걸 하는 지금까지도… 왜 별다른 말이 없지?
권호영은 통제적인 사랑을 받아왔다. 그 때문에 사람과 어울리는 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으며 감정 표현에 서툴렀고, 가끔 과하게 자신을 자책했다.
그럼 집 밖에 나와서도 애정이 필요했던 거고, 어쩌다 같이 살게 된 제가 그의 어머니의 대체재가 된 거라면?
과도한 추측이었다. 하지만 사람의 성질은 그리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걸, 단여명은 뼈저리게 알았다. 저만 해도 게이 섹스로 스트레스를 푸는 습성을 버리지 못해 김선오를 만나며 권호영과 놀아났다.
사람을 안식처 삼는 이는 그 사람이 없어지면 다른 사람을 찾는다. 마치 제가 하룻밤마다 남자를 갈아치웠던 것처럼. 그리고, 권호영 또한…….
무섭게 격양됐던 감정이 일순간 차분히 가라앉았다. 만약 그렇다면… 권호영은 어떤 사랑을 하고 있는 거지? 그걸 사랑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건가? 나는… 그걸 받아 줄 그릇이 되나?
“형. 그만 울어요…. 네?”
……모르겠다. 별의별 생각이 다 드는 걸 보니 좀 지친 것 같다.
아마 이 순간이 어찌어찌 지나더라도 권호영은 제 얼굴을 볼 때마다 싫어도 다른 남자 생각이 날 것이다. 괜찮다가도 문득 김선오가 떠오르면 기분이 더러워질 테지. 여기가 할리우드도 아니고. 만약 제가 권호영의 입장이었어도 찝찝했을 것 같다.
그리고 이렇게 싸우는 날이 반복되겠지. 그러다 헤어지면… 남이 되는 건가. 다시 웃는 얼굴로 만날 수도, 이렇게 얘기할 기회조차 사라지는 것이다.
그는 언제부턴가 제 삶의 한 부분이 됐다. 제 전 애인이 어떤 사람인지 너무 잘 알았고, 그 사람의 끝을 저와 같이 장식했다. 그렇기 때문에… 권호영과 더는 안 될 것 같았다.
“여기 잠깐 있어요. 휴지 좀 가져…….”
“호영아.”
단여명은 고개를 들었다. 결론을 명쾌하게 내렸어도 눈물은 멎지 않았다. 단여명은 작게 터진 헐떡거림을 억누르곤 애써 미소 지었다.
“아직도 연애할 생각 없어?”
권호영은 모든 행동을 멈추곤 그 웃음을 눈에 새겼다. 왜 그런 걸 물어봐요, 갑자기. 농담으로도 그런 말을 함부로 꺼낼 수 없었다.
“그럼 우리 그만할까?”
버리겠다는 눈. 자신을 기어코 내치겠다는 그 눈빛에 몸이 쩡쩡하게 얼어붙었다.
“평범한 형 동생 사이로 돌아가자고.”
처연하게 우는 단여명이 이상한 말을 했다. 권호영은 그 말이 잘 이해되지 않았다. 눈으로 하얀 뺨을 흥건히 적신 눈물을 보고, 코로는 진한 짠 내를 맡았다. 살갗으로 느껴지는 공기조차 하나의 뜻을 명확히 가리키는데, 머리가 거부했다.
“…평범?”
…그게 무슨 뜻이지? 의문을 갖기도 전에 강렬한 거부감이 먼저 치솟았다.
“형은 그게… 쉬워요?”
권호영은 단여명의 손을 꽉 붙들었다. 만족할 수 있을 리가. ‘평범’이라는 단어는 자신들을 담기에 한없이 모자랐다. 지금과 같은 사이가 될 수 없을 거란 직감이 머릿속을 불안하게 장악했다.
단여명은 또 거짓말을 했다. 거리를 두자고. 남과 다를 바 없는 사이가 되자고. 좋게 달래듯 말하며 저를 버리겠다는 눈빛을 보였다.
아니지. 아니잖아. 아니잖아요. 계속 그래왔던 것처럼 받아 줄 거잖아요. 권호영은 절박한 눈으로 단여명에게 매달렸다. 속에 든 감정이 밖으로 투영되는 줄도 모르고, 앞에 있는 사람에게 집중하기 급급했다.
“어. 쉬워.”
단두대 같은 말이 사고를 끊어냈다.
“쉬워야 돼.”
핏줄이 비치는 새하얀 손이 제 손을 옆으로 쳐냈다.
“…….”
권호영의 얼굴이 충격으로 완연히 굳어졌다. 눈을 크게 부릅뜨고, 제 손을 치워낸 창백한 손을 멍하게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은 다시 위로 들리지 않았다.
“……미안. 먼저 갈게.”
단여명은 외면하듯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자리에 우두커니 남은 한 사람을 등지고, 똑바른 걸음을 한 발 한 발 내디뎠다. 다리를 움직이는 중에도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손으로 물기를 훔치고 또 훔쳐냈다. 그러다 보니 걸음은 점점 빨라졌고, 나중엔 달아나듯이 아스팔트 위를 박찼다.
걷다가 눈물을 닦고 또다시 걸었다. 그리고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땐 어느 횡단보도 앞이었다. 빨간 불이 들어온 신호등이 시야를 쨍하게 밝혔다. 제 뒤를 쫓아올 것 같던 사람은 한참 멀어진 뒤였다.
그제야 주변을 둘러싼 것들이 차차 인식되기 시작했다. 초여름 밤의 공기가 구슬땀이 밴 이마를 미적지근하게 감쌌다.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는 사람들은 화기애애한 대화를 나누고 있었고, 도로에선 빵빵거리는 경적이 간간이 터졌다.
불어오는 바람에 파릇하게 싹튼 가로수 나뭇잎이 산들산들 흔들렸다. 때를 맞춰 신호등에 파란불이 들어왔다. 일제히 걸음을 뗀 사람들이 하나둘씩 옆을 지나쳤다.
멀어지는 사람들을 뒤쫓아 단여명도 흰색 선을 밟았다. 어디로 가야 할지 정하지 못했지만, 다리를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차마 집으로 돌아갈 순 없었으니.
흔히 사람들은 자신이 특별한 사람이라고 믿는다. 그건 연애도 같았다.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나 자신이 특별한 사람이라고 생각하는 또 하나의 사람을 만든다. 그리고 그와 만남을 지속하면 특별한 연애가 완성된다.
뭐를 시작하자고 정해놓지 않았지만, 권호영과 무언가를 시작했었다. 그건 썸일 수도, 연애일 수도 있다. 연애든, 연애 시작 전에 설레는 기류든, 특별하다고 믿었던 그 관계가 산산조각이 나는 경우는 부지기수로 겪었다.
그러니… 이번에도 괜찮을 것이다.
“미안. 부를 사람이 너밖에 생각 안 나더라.”
가까이 다가온 인영은 낯익은 얼굴이었다. 분별력이 흐려진 시야로도 알 수 있었다. 아주 아니꼽다는 듯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으니까.
“나랑 술 좀 같이 마셔 주라.”
“…….”
“나… 오늘 진짜 힘들었거든.”
단여명은 손으로 턱을 괸 채 살살 눈웃음을 지었다. 테이블에 반쯤 드러누운 자세와 마구 헝클어진 머리는 누가 봐도 만취한 모양새였다.
“두 달 만에 연락해서 보여주는 꼴이 이거야?”
진짜 놀랍다, 놀라워…. 그리 비아냥댄 천수진이 맞은편에 털썩 주저앉았다. 오늘이 휴무라던 그녀는 집에 있다가 막 나온 차림새였다. 위로 질끈 묶은 머리와 집에서 편하게 입는 티셔츠, 삼선 슬리퍼 차림이 퍽 친근하게 느껴졌다.
“이번엔 또 무슨 일인데.”
“똑같지, 뭐…. 좀 잘되던 사람이랑 안 좋게 끝났어.”
“상태를 보니 좀이 아닌데.”
“그런가.”
“그런가는, 개뿔.”
천수진이 지나가던 종업원을 불러 잔 하나를 부탁했다. 앞치마를 두른 직원이 곧 그녀의 앞에 소주잔을 내려놓았다.
가게 안은 손님들로 적당히 붐볐다. 벽에는 커다란 메뉴판이 붙어 있었고, 유행 지난 가요가 사람들 목소리에 섞여 흘러나왔다. 길거리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술집, 적당한 가격대의 안주와 적당히 취할 수 있는 분위기. 대책 없이 걷다가 대책 없이 들어온 곳이었다.
“정신 안 차려? 난 시작도 안 했는데 벌써 뻗으면 죽는다.”
천수진이 앞에 놓인 조개탕을 떠먹으며 핀잔했다. 소주를 한입에 털어 넣는 손짓이 범상치 않았다. 바텐더는 다르다, 이건가. 몇 달 만에 만난 얼굴이 새삼 신기하게 보였다. 그에 기분이 나쁘지 않아 픽 웃는데, 그녀의 눈이 새초롬해졌다.
“……너 설마 울었냐?”
“응.”
“…….”
“아주 세상 떠나가라 펑펑 울었는데.”
환히 웃으며 부정하지 않자 천수진의 눈빛이 묘해졌다. 낯섦과 동정, 그 사이를 걸친 눈이었다.
“뭐… 속은 시원해. 쪽팔리기는 하더라.”
“쪽팔린 건 아나 보네. 왜 안 어울리게 질질 짜고 난리야?”
인상을 잔뜩 구긴 천수진이 잔이 넘치도록 소주를 따라 줬다.
“내 앞에서 울면 버리고 간다.”
단여명은 그녀의 잔에 잔을 부딪치는 것으로 대답했다. 그녀를 골려주고자 한 번 울어줄까 생각했는데…. 아까 평생치의 눈물을 다 쏟아버려서 더 쏟아낼 것이 없을 것 같다.
그리고 그 이후의 기억은 파편처럼 조각났다. 당연한 결과였다. 안주가 나오기도 전에 소주 2병을 비웠고, 그 뒤로도 연거푸 위장에 술을 때려 넣었다. 몇 입 대지도 않은 조개탕은 천수진의 입속으로 모조리 들어갔다.
분명 김선오와 끝장내고 나면 술을 먹지 않을 거란 다짐을 했다. 최근에 종류를 가리지 않고, 간이 닳도록 술을 마셨으니까. 그런데 알고 보니 자신은 술을 꽤 좋아하는 모양이다. 그렇지 않다면 이렇게 달고, 잘 넘어가지 않을 테니까.
“가만 보면, 연애 자주 하는 사람들은 그렇더라?”
어느 순간 또렷하게 들리는 목소리에 몽롱한 정신이 들었다. 단여명은 푹 숙이고 있던 고개를 부스스 들었다.
초록색 술병이 쌓여 있는 테이블 위엔 어째선지 감자튀김과 나초가 올라가 있었다. 분명 조개탕이 있었던 것 같은데…. 눈을 느리게 깜빡인 단여명은 정면으로 눈길을 돌렸다.
“주변에 다 적당히 친한 인간들뿐이야. 만났다 헤어지는 걸 반복하니까 진짜 친구랄 게 남지 않는 거지. 애인 만나기도 바쁘니까.”
가물가물한 시야 너머로 발긋해진 얼굴이 보였다. 천수진도 그새 술기운이 많이 오른 모양이었다. 답지 않게 종알종알 얘기를 늘어놓는 걸 보니.
“그러다 애인이랑 헤어지면 또 다른 사람 만나서 외로움 채우고. 사람이 어, 좀? 애인 말고도 숨 쉴 구멍은 하나 있어야지. 그 사람이랑 영원히 갈 것도 아니고, 혼자 쌓아놓고 살면 속이 남아나나?”
“…….”
“난 너 말고 친한 친구 있어.”
그녀가 제법 비장한 투로 말했다. 언뜻 상처가 될 수 있는 말에 단여명은 실없이 웃고 넘겼다. 그래도 천수진한테는 많이 터놓고 지낸 편이었는데. 그녀는 더욱 깊은 관계를 맺은 사람이 있어 제가 가볍게만 느껴졌던 모양이다.
아니, 가벼운 게 맞았다. 지금도 보면 왜 울었는지에 대해 말하지 않고 있지 않나. 그녀도 제가 이런 사람이란 걸 알아서 깊이 파고들지 않는 것이다. 단여명은 빌어먹을 정도로, 원래 비밀이 많은 사람이니까.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게 결함이라고 생각하니까.
“좀 털어놓고 살아라. 아니면 한 사람한테 정착하든가.”
시니컬하게 쏴붙인 천수진이 곧 화장실에 간다며 자리를 비웠다. 단여명은 그녀의 뒷모습을 좇다가 테이블에 뺨을 붙이고 누웠다. 흡연 욕구가 들었으나, 빠져나올 수 없는 늪에 발을 담근 것처럼 몸이 축 늘어졌다.
혼자 남겨지자마자 생각은 또다시 원점을 찍었다. 그렇게 머리에서 지우려고, 속상한 마음을 덜어내고자 술을 퍼마셨지만 달라진 건 없었다. 인사불성으로 취한 와중에도 이름 세 글자는 뇌리에 선명히 박혔다. 알코올이란 물살에 쓸려 내려가지 않는 게 야속할 만큼.
참 웃기다. 권호영을 생각하면 커다란 아랫도리만 떠오르던 때가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섹스 생각이 하나도 나지 않았다.
언제부터였더라. 아마 그의 어머니에 대한 얘기를 들었던 때였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권호영을 좆이 아니라 사람으로 보기 시작한 게 그때부터였던 것 같았다. 가정사를 들으니 그가 안쓰럽게 느껴져 그날 유난히 신경이 쓰였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권호영이 대뜸 이름을 불러버렸다.
‘여명아’ 하는 저음의 목소리가, 방심한 순간 나직이 웃던 그 얼굴이 순간 뒷머리를 강타하는 듯했다. 그 모습이 너무도 낯설게 느껴져 그와 하는 연애를 상상했었다.
기억은 돌고 돌아 오늘로 거슬러 올랐다. 감정이 앞서 권호영에게 화냈던 순간과 갑작스럽게 울음을 터트렸던 일. 제 몸을 힘 있게 안아 주던 너른 품과 손을 꽉 붙잡아 주던 온기.
왜 그렇게 감정적으로 행동했지. 좀 더 침착하게 말할 수 있었는데. 그렇게 남겨두고 오는 게 아니었나. 다시 손을 잡아 줄 걸 그랬나. 그렇게 충격적이라는 표정을 지으면 저는 어쩌라고.
그러다 단여명은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떴다.
‘상처받았으면 어쩌지?’
내가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거라면? 만약 어머니의 대체재로 자신을 택한 거라면, 그는 정을 붙인 이에게 또 한 번 상처받은 것이다.
제 나름 도움을 주겠다고 노력한 걸 텐데. 다 알면서 모르는 척 눈감아 주는 것도 많이 답답하고 서운했을 텐데.
그는 제 손으로 김선오를 끊어낼 기회를 줬다. 본인의 선에서 해결할 수 있던 문제를 인내심을 가지고 제게 차례를 양보했다. 제가 일이 정리되면 반드시 말해 주겠다고 약속했으니까. 본인이 협박받은 것만 깔끔히 정리하고, 두 사람의 문제는 두 사람에게 넘겨줬다.
그건 아마 제가 힘들어한 걸 옆에서 지켜봤기 때문일 것이다. 제 손으로 정리하고 싶어 한 걸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서 타인이 될 사람이 아닌데, 둘의 문제에선 타인의 자리를 지켰다.
“야… 너 뭐 해?”
권호영은 끝까지 미련하고 착해 빠졌다. 나였으면 그렇게 못 했어. 기다리지 못하고 닦달하듯 물어봤을 거야. 그런데 너는 보기 힘든 영상을 품에 안고, 김선오를 만나러 갔을 때 대체 어떤 심정이었을지…….
“뭐 하냐고. 가만히 서서.”
어깨를 잡아 흔드는 감촉이 미약하게 느껴졌다. 단여명은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언제 의자를 박차고 자리에서 일어난 건지 몰랐다. 당장이라도 어딘가로 튀어 나갈 것처럼 발바닥에 힘을 준 채였지만, 땅에 붙은 듯 다리는 움직이지 않았다.
천수진은 당황한 얼굴이었다. 머저리처럼 구는 상대가 자못 낯설다는 것처럼. 단여명도 알았다. 이건 자신답지 않았다. 이렇게 얼빠진 얼굴이 아니라 좀 더 그럴듯해 보이는 웃음을 짓고…….
“수진아…. 내가 실수한 거면 어쩌지?”
하지만 그 생각은 얼마 가지 못했다. 금방이라도 울 것처럼 무너진 얼굴에 천수진의 눈에 엄청난 당황이 스쳤다.
“근데… 나도 무서웠어. 걔가 날 피하잖아. 신뢰도 다 잃은 마당에……. 내가 더럽다고 생각한 거면 어떡해? 네가 더럽게 보였다고 솔직하게 말할 사람이 얼마나 돼. 안 그래도 심한 말 못하는 앤데……. 한번 그렇게 생각되면… 응? 그게 회복되긴 해? 계속 만나면… 사람이 다시 보이기라도 하나?”
“…….”
“나는… 나는, 아닐 거 같거든.”
“…….”
“그냥 아닌 것 같았어…….”
술집 내부는 여전히 잡다한 소음이 넘쳐났다. 그 중간에 선 두 사람은 그에 섞이지 못한 분위기를 풍겼다. 숙연히 가라앉은 공기 속 천수진은 눈을 끔뻑거리기만 했다. 매번 빙글빙글 웃는 얼굴만 봐 왔던 탓에 도무지 저런 표정이 매치되지 않았다.
“……앉아. 우선 앉고, 마시면서 얘기해.”
천수진은 단여명의 어깨를 잡아 눌러 그를 억지로 자리에 앉혔다. 그리고 자신도 제자리로 돌아가 그와 마주 보고 앉았다.
술을 마시면서 얘기하자고 했는데, 단여명은 그를 하나도 못 알아먹은 눈치였다. 자리에 앉혀진 그대로 넋을 빼고 있는 모양새가 실이 끊긴 인형 같았다. 혼이 빠져나간 얼굴에서 순간마다 여러 감정이 엇갈렸다. 그를 지켜보던 천수진은 손을 들어 직원을 불렀다.
“하여튼, 저 진상….”
똑같기는 무슨. 한 번도 저런 적 없었으면서. 지금까지 잘만 이미지 관리하더니 이번엔 그럴 여유조차 잃은 것 같았다. 급발진도 저런 급발진이 없었다.
식어버린 감자튀김이 치워지고, 새로 주문을 넣은 음식이 나왔다. 따끈따끈한 홍합탕이 오른 술상에 다시 잔이 오갔다.
새벽 2시.
“우욱…!”
전봇대에 손을 짚은 단여명은 구석에 쭈그려 앉은 채 거듭 헛구역질했다. 속이 메슥거려 죽겠는 마당에 나오는 건 없었다. 아까 가게 화장실에서 말간 위액이 나오도록 속을 비웠다. 그 후로 먹은 게 없으니 당연한 것이었다.
결국 토하는 걸 포기한 단여명은 머리를 숙인 자세 그대로 잿빛 아스팔트만 들여다보았다. 들이쉬는 숨에 정신이 위태롭게 흔들렸고, 내쉬는 숨에 눈알이 시큰거렸다. 지독한 술 냄새가 뒤섞인 뜨거운 숨이 화끈거리는 목 안을 긁었다.
무슨 정신으로 여기까지 온 건지 기억나지 않았다. 가게 밖으로 나와서 천수진을 택시 태워 보냈다. 그리고…… 난 어디를 향해 걷고 있었지.
멍하니 상념을 잇던 도중 무언가가 등에 닿았다. 툭, 툭, 툭…. 언제 다가온 건지 모를 누군가는 약하게 등을 두드려줬다. 단단하고 커다란 것은 남자의 손이었다.
‘…권호영?’
퍼뜩 든 생각에 단여명은 얼굴을 들었다.
“주인님한테 버림받았나요?”
미약한 희망의 불씨는 단번에 꺼졌다. 단여명은 급격히 표정을 흐렸다. 누구를 기대한 거지. 멍청하게.
“…눈치가 없는 편인 줄은 몰랐는데.”
“그냥 가기엔 처량 맞아 보여서요.”
제 등 뒤에는 어째선지 빌이 서있었다. 그는 평소와 달리 굉장히 성의 없는 옷차림이었다. 아니, 다른 방면으로 성의가 있었다. 매번 격식 있는 옷차림을 고수하는 그는 잠옷 바람도 브랜드 라벨이 달린 것을 골랐다.
“잠깐 담배 피울 겸 나왔는데, 익숙한 뒤통수가 보이더라고요. 여기가 우리 집이라.”
빌이 근처에 있는 건물을 눈짓하며 말했다. 그리 궁금하지 않았던 단여명은 ‘예에…’ 하고 건성으로 답했다. 몸을 돌려 길가에 난 턱에 걸터앉자 옆에 서있던 빌이 담배를 꺼내 물었다. 칙, 조용한 새벽 거리에 담뱃불 붙이는 소리가 크게 울렸다.
“영상이 필요하다면서?”
연기를 내뿜은 빌이 느지막이 물었다.
“아, 그거…….”
단여명은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제삼자의 싸움에 휘말려 눈가가 찢어진 일을 발단으로 빌은 제게 사과의 표시를 하겠다고 말했다. 그를 위해 친분을 쌓아놨던 단여명은 그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그간 틈틈이 어울려 다녀 친구 비슷한 관계가 된 빌은 비밀리에 운영되는 다른 가게에도 연줄이 있었다. 얘기를 들어보니 그 칵테일 바 사장과 예전에 동업했던 시기가 있었다고 했다. 그래서 그는 그런 가게들의 내부 시스템과 그를 이용하는 고객의 명단을 속속들이 꿰고 있었다. 운이 좋게도 고객의 구린 면을 캐는 데 아주 적합한 인물과 가까워진 것이었다.
단여명은 이름을 밝히지 않고, 빌에게 사정을 털어놨다. 그에 빌은 클럽에 자주 드나드는 사람이라면 어딘가에서 꼬리가 잡힐지도 모른다고 답했다. 그래서 오늘 김선오가 영상 얘기를 꺼내지 않으면 정말 쥐 잡듯이 증거를 찾아 헤매려고 했다.
분명 그랬는데…….
“제가 오늘 문자로 말하지 않았나요?”
술을 먹다가 그에게 잘 해결됐다는 메시지를 보낸 기억이 있다. 그의 도움을 받기로 했으니 어떻게 됐는지 결과를 말해 줘야 했으니까. 오늘 많은 일이 휘몰아쳐 본의 아니게 연락이 좀 늦어졌지만, 분명 메시지를 보낸 기억이 있었다.
“이거 말인가요?”
빌이 핸드폰을 눈앞에 들이밀었다. 말풍선이 떠오른 대화창이었다.
[자ㅏㅎ 해궆ㅅ니다]
……아. 단여명은 탄식을 흘렸다. 술에 절어 잘 완성한 것 같았던 문장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엉망이었다.
“보시는 대로, 상태가 이래서…. 영상은 괜찮아요. 잘 해결된 거 맞으니까.”
단여명은 멋쩍게 웃고는 시선을 돌렸다.
“…이제 다 괜찮아요.”
빌은 담배 연기를 길게 뱉으며 그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어디로 봐도 괜찮아 보이지 않는 어설픈 웃음을.
그 뒤로 얼마간 침묵이 흘렀다. 단여명은 바닥을 내려다보며 생각에 잠겼다. 예상 밖의 사람의 등장으로 술이 반쯤 깼다. 그럼 이만 집으로 돌아가야 할 텐데. 도저히 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집에는 권호영의 물건이 너무 많았다. 집 안 어디에도 그의 손을 타지 않은 곳이 없다. 눈으로 확인되지 않는 추억의 잔재도 집 안 곳곳에 먼지처럼 내려앉아 있었다. 분명 집에 혼자 돌아가면 마음이 괴롭게 흔들릴 것이다.
언뜻 상념에서 깨어난 건 어느 순간이었다. 힐긋 위를 올려다보니 한적한 도로를 응시하는 한 남자가 보였다.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운 담배 끄트머리에서 잿가루가 떨어졌다.
단여명은 그제야 누군가와 같이 있단 사실을 인식했다. 머리가 복잡해서 잠깐 빌의 존재를 잊고 있었다.
…하여튼 제정신은 아니지. 옆에 사람이 있는 걸 까먹고 있었다니. 아무 데나 토할 정도로 술에 취했다는 명분이 없었다면 정신 줄 놓은 티가 단연코 났으리라. 씁쓸하게 웃은 단여명은 길게 이어지던 침묵을 깼다.
“지훈이랑 같이 있는 줄 알았는데요.”
지훈이란 단여명의 지인 중 하나였다. 빌의 환심을 사려고 주변 사람 중 하나를 골라 다리를 놔 줬다. 결과는 꽤 성공적이었다.
“맞아요. 지금 제 침대 위에 잠들어 있어요.”
“하하, 그거 진짜 궁금하지 않은 얘기다….”
“많이 취했으면 올라가서 잠깐 눈이라도 붙이고 가시죠. 할 건 다 끝내놔서 불편할 일은 없을 겁니다. 아침에 얼굴 보면 지훈이도 좋아할 것 같고. 새벽 씨를 많이 따르더군요? 신세 진 게 있다고 하던데.”
빌의 얘기가 길어지자마자 단여명은 그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이번에도 역시나 고의는 아니었다.
술에 취해 속에 든 걸 다 게워냈을 때도 잡생각이 끊이지 않았다. 그런데 술기운이 가시니 더욱 강렬하게 한 사람의 생각이 솟구쳤다. 시간 감각이 까마득히 멀어지고, 머리는 과거의 한 장면을 반복 재생했다.
“지훈이는 은한이 형이라고 부르던데. 그건 진짜 이름입니까?”
“부르면 그게 다 이름이죠.”
“오늘따라 대답이 성의 없는데.”
“다 끝났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래서. 나랑도 끊어내시겠다?”
순간 그의 목소리가 서늘해졌다. 단여명은 조금 놀란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제야 빌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눈에 들어왔다. 그는 부러 놀라게 할 작정이었는지 장난스러운 웃음을 짓고 있었다.
“섭섭합니다. 난 그래도 우리가 좀 친하다고 생각했는데.”
“…….”
“그렇게 꽁꽁 숨기면 더 파고들고 싶어지는 게 인간의 본능이라고요. …아, 이상한 오해 하면 안 됩니다? 이건 인간으로서 호기심을 말한 거니까. 솔직히 처음엔 몹쓸 생각을 하긴 했는데… 새벽 씨랑 친구 놀이 하는 거 나쁘지 않았거든요. 살살 긁으면 진짜 성격 나오는 거 재밌기도 하고.”
“…그건 좀 악질이네요.”
단여명은 힘없이 피식 웃었다.
“끊어내겠다… 뭐 그런 뜻은 아니었어요. 그냥 좀 허무해서 말이 헛나갔나 봐요.”
가볍게 샌 웃음소리는 곧 무거운 한숨 소리로 바뀌었다. 단여명은 명료한 정신을 되찾고자 거칠게 마른세수했다. 복잡한 심경이 자꾸만 밖으로 삐죽삐죽 튀어 나간다. 오늘만 해도 대체 몇 명에게 볼품없는 모습을 보인 건지.
“잘 해결됐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마지막 연기를 내뿜은 빌이 다 타버린 담배를 땅바닥에 버렸다.
“잘 해결한 사람치고 꼴이 말이 아닌데.”
짧게 남은 필터는 발뒤꿈치에 눌려 금세 불씨를 잃었다. 공기 중에 뭉게뭉게 피어오르던 뿌연 연기도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 영상 때문에 주인님이랑 다퉜습니까?”
“…….”
단여명은 얼굴을 쓸어 올리던 손을 멈칫했다. …눈치가 더럽게 빨랐다. 가게 사람들이 괜히 뱀 새끼, 뱀 새끼 하는 게 아니지.
“많이 아끼는 것 같던데? 내가 친구라는 거짓말까지 쳤으면서.”
권호영과 약속을 취소한 날의 얘기였다. 단여명이 선뜻 부정하지 못하자 빌은 감 잡았다는 양 씩 웃었다.
단여명은 입 안쪽 살을 잘근 물었다. 그가 저렇게 말하니 당장 권호영의 얼굴을 봐야 될 것만 같았다. 다시 만나 봤자 이 상태론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우왕좌왕할 게 뻔했다. 집에 가는 것조차 망설이고 있는 판국에.
“…별로. 그다지 아끼지 않았어요.”
“아니, 아낍니다.”
“아니라니까요.”
“왜? 전보다 더 소중해졌으면서.”
강경하게 밀어붙이는 그의 태도에 순간 성질이 욱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단여명은 얼굴을 가린 손을 홱 치우고 위를 노려보았다.
“무슨 증거로 그렇게 단정 지어요?”
“눈이요.”
“…….”
“주인님이라고 말할 때마다 눈빛이 달라지던데요.”
빌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접었다. 놀리는 투가 역력했지만, 단여명은 어떤 반박도, 하다못해 헛웃음 치지도 못했다. 그 찰나의 순간, 낙엽이 가라앉은 호숫물 같은 눈동자가 뇌리를 가득 메웠기 때문이었다.
“봐요. 지금도.”
사람이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은 다양하다. 목소리와 말투, 행동에서 자연히 나오는 것이 있다면 티를 내지 않으려고 아무리 발버둥 쳐도 다 드러나는 것이 있다. 절로 따라붙는 시선, 봄 내가 여실히 감도는 눈빛, 실없이 새는 웃음. 그것들은 숨긴다고 숨겨지지 않는, 지독한 감정이었다.
“한 대 치겠습니다.”
빌은 담뱃갑을 툭 쳐올리며 말했다. 그만 째려보라, 이 뜻이었다.
빽빽하게 꽂힌 담배 중 한 개비만이 삐죽 튀어나온 모습이었다. 단여명은 그를 쳐다보다가 이내 체념한 기색으로 담배를 하나 꺼내 물었다.
한바탕 뒤집어졌던 속이 아직 가라앉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니코틴이 절실했다.
오전 9시.
“아…….”
단여명은 어느 모텔 방에서 눈을 떴다. 깨질 것 같은 머리를 부여잡은 채로.
빌과 잡담을 나누고 헤어진 뒤 아무 모텔에 들어가 방을 잡았다. 침대에 몸을 누이고서도 잠이 오지 않아 거의 6시가 다 돼서 눈을 붙였다. 그런데 쓸데없이 일찍 일어나 버렸다.
술이 완전히 깨고 나니 모든 게 부질없게 느껴졌다. 어젠 저답지 않게 감정적으로 행동했다. 권호영에겐 눈물을 질질 짜며 속에 있는 걸 마구 쏟아냈고, 천수진에게 진상이란 진상은 다 떨었으며 빌에게도 못 보일 모습을 보였다. 어쨌든 김선오란 족쇄를 끊어낸 것은 기뻐할 만한 일인데.
마냥 기뻐하지 못하는 이유야 뻔했다. 이제 권호영 얼굴을 어떻게 보지. 지금도 그런 생각 때문에 눈을 뜨자마자 기분이 울적해졌으니까.
그는 바쁘다는 핑계로 일주일가량 집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제집에 널리고 깔린 그의 물건이 어디로 사라지는 건 아니었다. 그런 일이 있었음에도 어쨌든 같이 사는 사이라는 건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니 앞으로도 권호영의 얼굴을 계속 봐야 했다.
몸을 씻으면서는 그와 관련된 다른 생각을 했다. 잘 되짚어 보면 자신들은 3개월이란 기간을 약속한 사이였다. 그가 처음 집에 들어왔을 때가 3월 초였고, 지금은 6월 중순이었다. 3개월이란 시간은 생각보다 빠르게 흘렀다.
‘그럼 우린 이제 어떻게 되는 거지.’
계속 같이 사는 게 가능하려나. 몸부터 마음까지 맞았던 사이인데.
‘…그래도 다시 얘기는 해봐야겠지.’
어젠 너무 갑작스럽게 그만하자는 말을 했다. 그에 대한 권호영의 생각도 들어 봐야 하니까. 감정적으로 말고, 이성적이고 객관적으로.
그동안 어떤 마음으로 비밀에 부쳐두고 있었는지, 영상을 본 이후 느낀 본인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저 그런 사이로 돌아가는 걸 어떻게 생각하는지. 긴 얘기 끝에 그가 자신이 달리 보인다고 고백해도, 담담하게 받아들여야 했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지금은 심각하게 느껴지는 일도 나중엔 별거 아니게 된다. 그럼 잠깐 서먹한 사이가 돼도 이후엔 다시 아무렇지 않게 볼 수 있다. 그때가 되면 ‘맞아, 내가 얘를 좋아했던 때가 있었지’ 하고 웃으며 넘길 수 있을지도 모르고.
욕실에서 나온 단여명은 잡념을 떨쳐내지 못한 채로 핸드폰을 찾았다. 어제 입었던 옷을 뒤집어 봤지만, USB만 바닥에 짤랑 떨어졌을 뿐, 핸드폰은 보이지 않았다.
‘그냥 새로 사면 그만인 거.’
급격히 무기력해진 단여명은 침대에 풀썩 드러누워 버렸다. 누렇게 곰팡이가 슨 천장을 멍하니 올려다보는데, 번뜩 하나의 생각이 스쳤다.
새로 구입할 핸드폰에는 권호영의 번호가 없었다.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오전 10시 반. 단여명은 가까스로 핸드폰을 되찾았다. 핸드폰을 잃어버린 전말은 역시나 술 때문이었다. 어젯밤, 무지막지하게 취해 술집에 핸드폰을 그대로 두고 나왔다.
사장님한테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인 단여명은 가게 문을 열고 나왔다. 집에 들어가지 않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기에 이제 그만 집에 가기로 마음을 굳힌 뒤였다.
어차피 집에 들어가도 권호영은 없을 게 분명했다. 그는 대학생이었고, 주 5일 오전 수업을 들었다. 만약 어제 집에 들어갔다고 해도 지금 시간이면 학교에 가고 없을 것이다.
‘바보같이.’
권호영의 번호가 없으면 어떻다고. 나중에 다시 번호를 받으면 되는 것을. 진짜 남이 되는 것 같은 기분에 이딴 사소한 것까지 신경을 곤두세운다.
운이 좋게도 근처에 택시가 하나 지나갔다. 단여명은 택시를 잡아타자마자 홀드 키를 눌러 핸드폰의 화면을 켰다. 그리고 곧 눈을 휘둥그렇게 떴다.
“…….”
부재중 253통. 그 모든 연락은 한 사람에게서 온 것이었다.
[어디예요?]
253이라는 숫자에 비해 메시지는 단출하게도 딱 하나뿐이었다.
‘…이게 뭐지?’
표백제라도 뿌린 듯 머릿속이 하얗게 탈색됐다. 눈을 감았다가 떠봐도 ‘253’이라는 숫자는 변함이 없었다.
단여명은 급히 전화 내역을 훑었다. 스크롤을 아무리 내려도 끝이 보이지 않았지만, 집념을 가지고 손가락을 움직였다. 밤 10시부터 시작된 연락은 아침 7시까지 이어졌다. 밤 10시면 천수진을 붙들고 하소연하고 있을 때고, 아침 7시는 핸드폰이 외로이 방치돼 있던 시간이었다.
‘이성적이게’라고 다짐한 것은 금세 물거품이 됐다. 머릿속이 당황과 혼란으로 점철됐다.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술 퍼먹느라 못 봤다고 말하면 아무리 권호영이라도 화낼 것 같은데.
“손님. 도착했는데요.”
택시 기사가 룸미러를 통해 눈길을 줬다. 어느새 택시는 집 앞에 정차해 있었다.
“아, 아, 네. 여기, 카드…….”
얼결에 결제를 마친 단여명은 택시에서 내렸다. 그리고 택시가 떠난 후에도 한참 제자리에 서서 핸드폰만 들여다봤다. 텍스트를 쓰다가 지우기를 여러 번, 간신히 한 마디를 완성해 메시지 전송 버튼을 눌렀다.
[미안]
미안하니까 사과. 알고리즘에서 도출된 결과처럼 사과가 우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만나서 얘기하자고 말해야 할 텐데. 어디서 보자고 말해야 하지? 집? 집 근방 카페? 아니면 권호영네 학교로 또 찾아가?
무슨 정신으로 현관문 앞에 다다른 건지 모르겠다. 내내 핸드폰을 붙잡고 씨름하던 단여명은 일단 집에 들어가서 생각하자며 키패드에 손을 올렸다. 그런데 패스워드를 입력하기도 전에 현관문이 벌컥 열렸다.
단여명은 반사적으로 뒷걸음질 쳤다. 손에서 미끄러진 핸드폰이 바닥을 굴렀고, 하마터면 현관문에 머리를 박을 뻔했지만, 그 어떤 것도 안중에 들어오지 않았다.
“너…….”
놀란 심장이 쿵쿵 뛰었다. 단여명은 눈을 화등잔만 하게 뜨고, 주춤 몸을 물렸다.
“너, 왜 여기에…….”
아니, 학교는? 분명 학교에 가고 없을 시간인데…….
“뭐가 미안한데요.”
사나운 눈빛이 안면에 꽂혔다. 권호영은 어제랑 똑같은 옷차림이었다. 손에는 핸드폰을 부서트릴 듯 쥐고 있었으며 밤을 새웠는지 눈엔 빨간 실핏줄이 곤두서 있었다.
“어, 아니…….”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모르겠다. 사고가 더디게 흐르는 와중에 경악스러운 마음만큼은 커다랗게 번져갔다. 마음이 급해졌다. 뭐라 말해야 할지 정하지 못했지만, 단여명은 서둘러 입을 달싹였다.
네가 그렇게 전화한 줄 몰랐다고. 일부러 안 받은 게 아니라고. 일단 사정을 설명하는 게 먼저였다. 그러나 말문을 떼기도 전에 권호영이 먼저 움직임을 보였다.
“평범한 형 동생 사이면 걱정하는 것도 안 돼요?”
덜컥 양어깨가 붙들렸다. 몸이 살짝 휘청거릴 정도로 우악스러운 손놀림이었다.
“제가 뭘 잘못했어요?”
“어, 어…?”
“제가 그럼 어떻게 했어야 됐냐고요.”
그는 힘 조절을 전혀 하지 않았다. 어깨 근육이 찌그러질 것처럼 구겨져 단여명은 인상을 찌푸렸다. 어제는 제가 이성을 놓고 감정에 몸을 맡겼다. 그리고 오늘은… 권호영이 이성을 잃은 것 같았다.
“호영아, 일단 들어가서…….”
“이제 쓸모없어서 버리는 거예요?”
“뭘, 버려…. 네가 물건도 아니고. 좀, 들어가서 얘기하자니까? 여기 복도라서 다 들린…….”
“그럼? 이제 제가 질렸어요? 그것도 아니면 김선오랑 잘 끝났다고 말해놓고 그 새끼가 다시 좋아지기라도 했어요?”
침착하게, 담담하게, 이성적으로. 오늘 몇 번이나 각오를 다졌던 말이다. 하지만 그를 곱씹을 새도 없이 김선오 얘기가 나오자마자 감정이 욱하고 치밀어 올랐다.
“미쳤어? 내가 걔랑 다시 만나게?”
“그럼요. 내가 뭘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데요.”
“좀 들어가서 얘기하자고. 동네방네 남자끼리 이런다는 거 떠벌릴 일 있어?”
“상관없어요.”
“난 상관있어!”
단여명은 어깨를 움켜쥔 손을 거칠게 쳐냈다.
“제발… 사람 말 좀 들어.”
그리고 피로에 젖은 얼굴을 신경질적으로 쓸었다. 하아…. 손 틈새로 뜨거운 한숨이 무겁게 쏟아졌다.
분명 차근차근 얘기하려고 했는데. 언성이 높아지니 싸움이 재발할 것 같았고, 다시 싸울 생각을 하니 급속도로 피곤해져 아무 얘기도 하기 싫어졌다. 안 그래도 쓰린 속에 구멍이 날 것 같았으며 잠이 부족한 머리는 깨질 듯 울렸다.
잠깐의 정적이 지났다. 가만히 서 있던 권호영이 한 발짝 거리를 벌려 몸을 비켜 줬다. 단여명은 그를 뒤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다. 쾅.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가 커다랗게 났다.
“…형은 쉬울지 몰라도 저는 안 쉬워요.”
소리가 새어 나갈 틈이 막히자 권호영이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이미 다 알아버렸는데 어떻게 몰랐던 때로 돌아가요. 저는 누구랑 그렇게 가깝게 지낸 게, 그냥 형이랑 했던 모든 게 처음이었어요. 그런데 이제 와서…….”
“그래, 처음이니까!”
“…….”
“내가 처음이니까 특별하게 생각할 거 이해해. 그러니까… 좀, 너도 잘 생각해 보라는 얘기잖아.”
답답해서 자꾸만 언성이 높아진다. 왜 또 이렇게 됐지. 화내는 것은 상황을 악화시키기만 한다. 단여명은 후, 하고 숨을 내쉬어 끓는 속을 진정시켰다.
“어젠 내가 감정이 격해져서 앞뒤 잘라 먹고 말했어. 미안해. 네 생각도 들어야 했던 게 맞는데.”
“…….”
“모르는 사이로 지내자는 게 아니야. 급할 게 뭐가 있어. 전에는 그 영상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았겠지. 그런데 지금은 그게 아니니까 내 연락 피한 거잖아. 숨긴 건 미안하게 생각해. 그렇지만 나는… 확신이 있으면 그러지 않았을 것 같거든.”
권호영의 마음을 함부로 단정 짓는 것 같았지만, 어떻게 돌려서 말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지금 상태에서 돌려 말하면 알아듣지 못할 것 같았고. 그래도 마음이 불편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단여명은 곧 횡설수설 말하기 시작했다. 준비해 뒀던 얘기와 권호영에 대한 걱정, 마음속에 품은 혼란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좀 시간을 두고, 네가 무슨 마음인지, 그게 어떤 감정인지 천천히 생각해 보라고. 너한테 제일 중요한 게 성적, 미래 그런 거 아니야? 그런데 지금 봐. 학교도 빠지고. 이런 거 처음이고, 나 때문에 복잡할 거 아는데, 중요한 거 먼저 생각해. 그러다 혼나면 어떡하려고…….”
“누구한테 혼나요?”
얌전히 듣고 있던 권호영이 말을 가로챈 건 그때였다.
“전 그렇게 자세히 말해 주지 않았는데. 제가 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뭘 꺼리는지.”
그는 확 식어버린 표정을 짓고 있었다. 뜨겁게 달군 쇳덩이를 찬물에 집어넣은 것처럼. 뜨거웠다가 차가워진 그의 얼굴은 방어적일 만큼 단단해 보이기까지 했다.
…말실수했다. 단여명은 핏기가 가신 얼굴로 탄식을 삼켰다. 아마 권호영이 이쪽을 보고 있지 않았더라면 아마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이마를 턱 짚었을 것이다.
“언제부터 알았어요?”
“…어?”
“알고서 하는 말이잖아요. 제가 어떻게 자랐는지.”
대답하지 않고 머뭇대자 그가 시선을 휙 피했다. 깜빡, 깜빡. 아래로 내리깔린 속눈썹이 불안정한 신호를 보였다.
“밖에서 잘 필요 없어요. 형이 불편하면 제가 나가면 되니까. 여기 원래 형네 집이잖아요.”
언제 그리 무섭게 다그쳤냐는 양 권호영은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꿨다. 곧장 밖으로 나가려는 모습은 회피하려는 기색이 완연했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아픈 구석을 찔린 권호영은 도망치려고 했다.
아니, 이게 아닌데. 왜 저런 반응이지? 내가 어머니와의 사이를 아는 게 저렇게까지 반응할 일인가? 아니, 그것보다… 이렇게 그냥 가겠다고? 아무것도 해결되지 않았는데?
“잠깐, 잠깐만, 호영아.”
단여명은 옆을 지나치려는 권호영의 손목을 다급히 붙잡았다. 뿌리치고 달아날 것 같았던 기세와 달리 그는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그에 잠시 안도한 순간이었다.
“형이 한 말, 반쯤 맞아요.”
등을 보이고 선 권호영이 얼굴을 보이지 않은 채 말했다.
“제가 형한테 느끼는 감정이… 다른 사람이랑 좀 다를지도 몰라요.”
그리고 손목을 살며시 비틀어 잡힌 손을 빼냈다.
“저조차도 가끔 헷갈리거든요.”
손바닥 안에 있던 손목이, 그의 체온이 빠져나간다. 발걸음 소리가 멀어지고, 커다란 등판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쾅.
문이 닫혔다.
“…….”
단여명은 자리에 우두커니 남겨졌다. 시선은 금방이라도 밖으로 뛰쳐나갈 듯 현관문에 못 박혀 있었다. 그러나 다리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차라리 잘됐어요.
집을 나가기 직전, 그리 읊조린 목소리가 마치 따라오지 말라고 경고하는 듯했기에.
***
권호영이 이상했다.
“자, 그럼 출석 부르겠습니다.”
윤재윤은 옆에 앉은 남자를 대놓고 흘겨봤다. 첫인상부터 좀 독특한 녀석이라고 생각했지만, 저렇게 이상하게 군 적은 여태껏 없었다.
“권호영.”
제 이름이 불리자 멀끔하게 생긴 남자가 손을 들었다가 내린다. 어깨에 닿을락 말락 했던 머리는 깔끔하게 자른 지 오래다.
한번 앞을 가리고 다니더니 이젠 시야에 뭐가 걸리는 게 싫어진 모양이다. 앞머리를 눈썹 밑까지 잘라놓고, 그는 이마를 드러내고 다녔다. 잘생긴 얼굴을 따라 머리도 자아를 가지는 걸까. 손으로 대충 흐트러트린 머리도 자연스레 손질한 것처럼 보였다.
권호영은 체격도 좋았다. 얼마 전, 같이 길을 걷다가 어떤 사람이 ‘혹시 체대는 어느 쪽으로 가야 하나요?’라고 물었다. 그 시선의 끝은 권호영에게 향해 있었다.
아마 행인이 그를 콕 집어서 지목한 이유는 트레이닝복만 고집하는 독특한 옷 스타일도 한몫했을 것이다. 회색 후드티, 남색 후드 집업, 검은색 저지. 체대 남처럼 보이는 옷 종류도 다양했다.
그런데 요즘은 아예 그 옷 스타일도 갖다 버렸다. 흰 티에 검은 면바지. 조금 쌀쌀하다 싶으면 진한 청재킷. 기본만 갖춰 입었는데도 사람이 확 달라 보였다. 아마 저렇게 다닌 게… 일주일 전부터였던가.
“오빠, 호영이 쟤 요즘 이상하지 않아요?”
옆에 앉아 있던 민들레가 교수님의 눈을 피해 귓속말했다. 윤재윤은 그녀에게 감탄의 눈길을 보냈다.
“넌 그걸 지금 알았냐…….”
둔해도 저렇게 둔할 수가.
“지금 아니거든요? 일주일 전부터 애가 확 달라졌잖아요. 옷 입는 것부터.”
오, 제법인데. 그런 뜻으로 입술을 동그랗게 마니 민들레가 장난치지 말라는 듯 눈살을 구겼다. 그리고 귓가에 얼굴을 더욱 바짝 들이대곤 속삭였다.
“그리고 옷 말고도, 좀… 정신이 반쯤 빠져 보이는데.”
윤재윤은 동의의 뜻으로 대놓고 한숨지었다. 그 둔하디둔한 민들레도 알아챌 정도의 변화면 말 다 했다.
일주일 전. 권호영이 수업을 통째로 빼먹은 날. 그리고 급하게 이사를 끝냈다고 말했던 날이었다.
애초에 수업을 빼먹은 것부터 이상했다. 그 권호영이. 천하의 권호영이. 학기 초에 이건 무슨 뜻이에요, 저건 무슨 뜻이에요, 하고 저를 들들 볶았던 놈이. 하루도 빼놓지 않고 의자에 망부석처럼 앉아 공부하던 녀석이.
지금도 보면 그랬다. 눈은 정면을 향해 있지만, 펜을 쥐고서도 필기를 안 했다. 도서관에 공부하러 가서도 마찬가지였다. 펜을 들고 그저 가만히. 시간별로 몸이 기억한 장소를 따라 이동하는 느낌이었다. 어디 하나가 고장 난 로봇처럼.
사실 그 전부터 이상한 조짐이 보이긴 했다. 공부에 집중도 못 하고, 말을 걸어도 좀 멍한 느낌이고. 핸드폰은 또 어찌나 초조하게 붙들고 있던지. 무슨 생각을 그리 하는지 혼자 사색에 잠겼다가 의식적으로 펜을 움직이길 반복했다.
하지만 지금은 펜을 쥐고도 하나의 선조차 긋지 못했다.
“수영이 말 들어보니까 쟤 알바도 잘렸대요.”
“엥? 그건 또 무슨 소리야. 얼마 전에 거기 사장님한테 일 잘한다고 칭찬받았다며.”
“하루 사이에 뚝배기를 10개나 깨먹었대요.”
“…….”
“그것뿐인 줄 알아요? 손님 얼굴 앞에 숯불을 들이댔대요. 불 올리려는 순간 그 손님이 주문하겠다고 말해서 그렇게 됐다고는 하는데… 아무리 그래도, 그건 좀.”
윤재윤의 의심이 확신으로 굳혀지는 순간이었다. 권호영은 확실히, 아주 더할 나위 없이 이상했다.
“야.”
윤재윤은 팔꿈치로 권호영의 옆구리를 툭 찔렀다. 원래 같았으면 수업 시간에 쓸데없는 말을 붙이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은 경우가 달랐다. 수업을 듣지 않는 것이 빤히 보였으니까.
“오늘 술 마실래?”
이쪽을 슥 돌아본 얼굴은 무표정했다. 거기다가 윤재윤은 대뜸 그리 질러버렸다.
“…….”
권호영은 딱히 이렇다 할 반응이 없었다. 그에 윤재윤은 홀로 납득했다. 아. 아무리 그래도 태생은 어디 안 가는구나. 내일모레가 시험인 학생에게 술이라니. 공붓벌레에겐 선을 넘지 말아야 할 일탈로 들릴 수도 있겠다.
혼자 고개를 주억인 윤재윤은 곧 목소리를 죽여 그를 꼬드기기 시작했다.
“뭐, 시험 중요하지. 그런데 멘탈 관리도 수험생한테 엄청 중요한 거거든. 내가 매번 말하잖아. 계속 쌓아두면 정작 실전에서…….”
“그래요.”
장황하게 늘어놓은 말이 무색하게도 승낙이 간단히 떨어졌다. 짤막하게 대답한 권호영은 곧 시선을 다시 앞으로 돌렸다. 그를 바라보던 윤재윤은 입가에 씩 웃음을 지었다.
“까짓거 오늘 노래방도 가자. 너 노래 좀 하냐? 존나 음치일 것 같은데.”
그리고 윤재윤은 이내 깨달았다. 노래방은, 정말 엄청난 꿈이었다는 것을.
“야, 권호영. 일어나.”
어깨를 툭 쳐 봤지만, 테이블에 머리를 박은 남자는 꿈쩍을 안 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컵에 소주를 들이부을 때부터 알아봤다. 민들레는 환호성을 내질렀지만, 윤재윤은 놀란 토끼 눈을 했다. 쟤 진짜 제정신 아니구나…….
“정신 좀 차려 보라고. 어?”
민들레는 정신이 붙어 있어 어찌어찌 택시를 태워 보냈다. 남은 건 이놈 하나였다. 윤재윤은 엄청난 시련에 내던져져 고민했다. 이 커다란 근육 덩어리를 무슨 수로 옮기지.
잘 생각해 보면 변화의 조짐 중 그런 것도 있었다. 권호영은 며칠간 제집에서 잠을 재워 줄 수 있겠느냐는 부탁을 했다. 아르바이트랑 시험 기간이 겹쳐 최대한 시간을 효율적으로 사용하고 싶다는 이유였다.
원룸이었지만, 방이 좁은 편은 아니었던지라 윤재윤은 흔쾌히 허락했다. 권호영과 같이 있으면 공부하기 싫어도 억지로 공부하게 됐다. 그럼 집에서 축구 영상을 볼 시간에 권호영과 함께 시험공부에 전념할 수 있겠거니 생각했다.
그리고 권호영은 밤마다 잠을 설쳤다. 새벽에 화장실에 가거나, 목이 말라 잠에서 깨면 방 한편에 상을 펴놓고 공부 중이던 권호영과 반드시 눈이 마주쳤다. 얘기를 들어 보니 남의 집에선 잠을 잘 못 자는 타입이라고 했다. …그런 자식이 지금은 치킨이 굴러다니는 상 위에서 잘만 퍼질러 잤다.
“와, 씨. 무거워. 미친, 하느님.”
어깨에 팔을 둘러 커다란 몸을 부축하려는데, 되레 제 어깨가 빠질 것 같았다. 어떻게든 일으켜 세우려고 끙끙대는데, 뭔가 이상함을 감지했는지 권호영이 부스스 고개를 들었다. 더워……. 그가 눈을 감은 채로 웅얼댔다.
“야, 눈 떠. 눈 뜨고 똑바로 걸으라고.”
불행 중 다행이라고 권호영은 다리를 움직이긴 했다. 거의 제가 끌고 가는 것과 다름없었으나, 어쨌든 발을 앞으로 내딛기는 했다.
윤재윤은 거구를 등에 지고 치킨집 밖을 나섰다. 얼마나 움직였다고 땀이 뻘뻘 흘렀다. 땀이 흘러 콧등이 간지러운데 그를 긁을 수도 없었다. 양손에 권호영이란 짐을 한가득 떠안고 있었기에.
그리 얼마나 힘겨운 여정을 떠돌았을까. 마침 근처에 택시가 지나갔다. 윤재윤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손을 휘적휘적 흔드니 택시가 바로 앞에 멈춰 섰다. 윤재윤은 커다란 짐을 뒷좌석에 욱여넣다시피 밀어 넣고, 그 옆에 올라탔다.
권호영이 테이블에 머리를 처박기 전에 미리 주소를 받아두길 잘했다. 덕분에 택시는 아무 문제 없이 출발했다. 불길함이 만들어낸 행운이었다.
“형…….”
택시에서 내려 낯선 동네에 발을 내린 때쯤이었다. 제게 몸을 기댄 권호영이 여전히 눈을 감은 얼굴로 중얼거렸다. 윤재윤은 어깨에 두른 그의 팔을 더 세게 당겼다. 술에 꼴은 마당에 그래도 고마움을 느끼는지 호칭이 급격히 친근해졌다.
“오냐.”
“윤재윤 말고요….”
“새끼가. 선배 자는 어디다 갖다 팔아먹었어.”
곧장 타박하니 권호영이 뜨거운 숨을 느릿하게 몰아쉬었다. 깊은 한숨에서 독한 술 냄새가 물씬 풍겨 났다.
“저한테 형은…….”
하나밖에 없어요…. 고개를 푹 숙인 권호영이 어눌한 발음으로 말했다. 동강동강 나뉜 자음과 모음이 귓속으로 흘러 들어와 하나의 문장을 구성했다.
윤재윤은 순간 벙쪘다. 권호영의 팔을 쥐고 있던 손에 힘이 풀렸다. 스르르 미끄러져 내리려는 권호영의 몸을 황급히 붙들고, 그를 묘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허!”
그리고 대차게 비웃었다. 뭔가 그럴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맞았다.
“씨발, 눈물겨워서 못 봐주겠네. 진짜 버리고 갈 수도 없고.”
얼굴도 어떻게 생겼는지 모른다고 했을 땐 언제고? 무관심의 끝판왕을 보여주더니 언제 그렇게 각별한 사이가 됐는지 모를 일이다. 흔해 빠진 호칭을 애칭으로 사용할 정도라니. 기가 막혀 ‘참나’라는 감탄사를 자꾸만 찾게 됐다.
윤재윤은 계속 투덜거리며 권호영을 부축했다. 비밀번호가 필요한 공동현관과 현관문 앞에선 권호영의 뺨을 툭툭 쳐 억지로 눈뜨게 했다. 두어 번 틀리긴 했지만, 권호영은 비밀번호를 맞게 입력했다.
“와, 씨발. 허리야.”
권호영의 집에 들어가자마자 윤재윤은 그를 방바닥에 버리듯이 내팽개쳤다. 바닥에 벌렁 드러눕게 된 권호영은 매정하게 내쳐진 여파로 미약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뭐야, 집 꼬락서니가 왜 이래.”
그러든 말든 윤재윤은 신발을 벗고 성큼 방 안에 들어섰다. 몇 걸음 떼지 않아 발에 옷가지가 치였다. 윤재윤은 발끝으로 하늘색 셔츠를 툭 밀어 공간을 확보했다.
“삭막한 돼지우리는 또 처음 보네. 좀 치우고 살아라.”
권호영이 새로 이사했다던 자취방은 난장판이었다. 아무리 이사한 지 얼마 안 됐다고 하더라도 좀 심했다. 양말과 속옷, 겉옷이 분별없이 방바닥을 나뒹굴었다. 옷만 정리되지 않았으면 돼지우리라는 말을 꺼내지도 않았다.
방 모서리엔 침대 프레임 없이 매트리스만 덜렁 놓여 있었다. 비닐도 제거하지 않은, 쌩 매트리스였다. 그 근처엔 빈 생수통이 굴러다녔고, 그 옆엔 미니 냉장고가 있었다. 사용한 흔적이 보이지 않는 부엌엔 작은 접이식 테이블 하나가 펼쳐져 있었다.
가만 바라보고 있자니 제 기분까지 심란해졌다. 겉만 그럴듯하면 뭐 하나. 집 안이 개판인데. 혀를 끌끌 차고 있으니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손으로 바닥을 짚어 상체를 일으킨 권호영이 팔을 교차해 웃통을 벗었다. 그리고 그대로 그 옷도 방바닥에 버리더니 냉장고 앞으로 비척비척 걸어갔다.
“…뭐 하냐?”
권호영의 손에 들려 나온 것은 소주병이었다. 그는 윤재윤의 말을 일체 무시하고, 접이식 테이블 앞에 주저앉았다. 그리고 시원스러운 손길로 병뚜껑을 돌려 깠다.
“와… 너 매일 이랬냐?”
윤재윤은 경악스러운 눈으로 그가 하는 양을 바라보았다. 하도 집 안이 개판이라 처음에 미처 보지 못한 것이 이제야 눈에 들어왔다. 부엌 한편에 밀어둔 빈 초록색 병은 어림잡아도 10개가 넘어갔다.
어쩐지 매일 희미하게 술 냄새가 맡아진다 했더니. 하라는 이삿짐 정리는 안 하고, 허구한 날 집에서 술만 퍼마셨나 보다.
“담배는 독해서 못 피우겠더라고요.”
종이컵에 소주를 콸콸 들이부은 권호영이 단조로운 투로 말했다.
“뭐가 좋다고 달고 살지, 그걸….”
작게 나온 혼잣말엔 씁쓸한 웃음기가 담겨 있었다. 종이컵에 그대로 입을 대려던 권호영은 돌연 윤재윤을 멀뚱히 쳐다봤다. 윤재윤은 경악의 눈빛을 지우지 못한 채 얼결에 그를 마주 보게 됐다.
“…담배 있어요?”
“…갑자기 뭔 소리야. 나 담배 안 피우잖아.”
으음, 하고 목을 울린 권호영은 곧 종이컵을 탁상 위에 얌전히 내려놓았다. 그리고 대뜸 몸을 일으키더니 밖으로 나가려는 낌새를 보였다.
“야, 야! 너 그 꼴로 어딜 나가려고!”
불길함이 극에 달한 윤재윤이 그 앞을 가로막았다. 다시 강조하자면, 그는 상의 탈의한 채였다.
“담배 사러요.”
“그건 갑자기 왜. 너 담배 피우게?”
“아니요. 그냥 불만 붙여두게요.”
“……그걸 왜?”
윤재윤의 눈빛이 한층 묘해졌다.
“냄새 나라고…….”
눈이 몽롱하게 풀린 권호영이 알 수 없는 얘기를 흘렸다. 분위기상 또 그 사람에 관한 얘기인 것 같았다. 얌전히 진상 부렸던 때는 허, 하고 코웃음을 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진짜 꼴사나워서 못 봐줄 정도였다.
“뭐, 미친 새끼야? 담배가 무슨 향초야? 누가 집 안에서 담배를, 그러다가 불나!”
윤재윤은 그만 참지 못하고, 권호영의 어깨 앞판을 손으로 짝짝 갈겼다. 벌겋게 손자국이 날 만큼 때려대는데도 권호영은 ‘아파요’ 하고 말았다. 그리고 그대로 윤재윤을 지나쳐 현관문의 문고리를 잡으려고 했다.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었다.
“너 또라이야? 씨발, 이 개 또라이 새끼! 옷도 안 입고 어딜 나간다고!”
윤재윤이 그의 어깨를 잡고 뜯어말렸다. 성가시다는 티를 역력히 내던 권호영은 곧 윤재윤의 손에 잡혀 안으로 질질 끌려갔다. 덩치는 윤재윤을 가뿐히 넘길 만큼 커다랬지만, 그동안 체내에 쌓인 알코올이 제대로 된 힘을 쓰지 못하게 했다.
기겁할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떠들어대던 권호영은 윤재윤의 손에 이끌려 얌전히 제자리에 앉혀졌다. 멀뚱히 이쪽을 쳐다보는 얼굴은 온순한 양이 따로 없었다. 반쯤 감긴 눈꺼풀과 멍하게 풀어진 눈동자만 아니었다면 가게에 있던 때와 똑같은 얼굴이었다.
“아, 진짜…. 아오, 진짜…….”
윤재윤은 그와 마주 앉은 채 머리를 마구 흩트렸다. 치킨집에서부터 제정신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그땐 그나마 제정신이었던 것이다. 아니, 애초에 얘가 이렇게 망가져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했다. 그래서 심히 당황스러워 과장을 보태 식은땀이 날 정도였다.
옆에서 지켜본 권호영은 흠잡을 데 없이 반듯한 인간이었다. 단조로운 삶을 사는 만큼 큰 감정의 폭을 느끼는 것 같아 보이지도 않았다. 그런데 이런 유의 사람은 이런 식으로 망가지나 보다. 차분한 성격에 맞게 담담하고, 누군가 알아챌 때쯤이면 이미 곪을 대로 곪아 있는.
뭘 어떻게 싸웠길래…. 이리저리 뻗친 머리로 고개를 들자 권호영은 그새를 못 참고 술을 마시려고 하고 있었다. 눈만 돌리면 사고를 치는 7살짜리 애를 상대하는 기분이었다. 와작 인상을 구긴 윤재윤은 얼른 그의 손에서 소주가 든 종이컵을 가로챘다.
“야, 안 되겠다. 너 그만 마셔. 내가 대신 마실게. 그냥 나 보면서 대리만족해라.”
종이컵에 입을 대고 그대로 고개를 꺾으려는데, 돌연 쿵! 하고 큰소리가 났다. 화들짝 놀란 윤재윤이 손을 크게 떨었다. 종이컵 밖으로 흘러넘친 소주가 바지를 후드득 적셨다.
정면을 바라보니 권호영은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있었다. 1분 1초마다 뭔 일이 터지니 심장이 남아나지 않는 기분이었다.
“와, 진짜. 존나 집 가고 싶…….”
“선배.”
테이블 위에 머리를 처박은 권호영이 대뜸 상대를 불렀다. 윤재윤은 마른침을 삼켰다. 방금과 비교도 안 되게 분위기가 착 가라앉은 게 느껴졌다. 목소리는 땅굴을 파고 들어갈 듯 낮았으며 발음은 고주망태가 된 사람치고 정확했다.
“…선배는 첫사랑 해본 적 있어요?”
…비로소 본론이다. 윤재윤은 큼, 하고 헛기침해 목을 가다듬었다. 그가 부담 없이 털어놓을 수 있도록 최대한 가볍게 듣는 척해야 했다.
“그럼 나도 사람인데. 해봤지.”
“어땠어요?”
“어?”
“그 사람……. 어떤 사람이었냐고요.”
까만 뒤통수가 웅얼대듯 물었다. 윤재윤은 저 못지않게 헝클어진 머리통을 보며 고민했다. 역질문이 돌아올 줄은 몰랐는데…. 어땠더라? 초등학교 4학년 때였던 것 같은데, 시간이 많이 지나 어렴풋한 이목구비만 떠오를 뿐이다. 윤재윤은 대강 둘러댔다.
“그냥 뭐… 예뻤지. 이젠 얼굴도 기억 안 나. 어렸을 때 한 사랑이 뭐 그리 특별했겠냐.”
아무래도 제 얘기는 중요하지 않을 것 같았으니.
“저도 첫사랑 해봤어요. …좀 늦게.”
역시나 권호영은 바로 자기 얘기로 넘어갔다. 어. 존나 그래 보여. 윤재윤은 격렬하게 고갯짓하고 싶은 걸 참고 정면에 시선을 뒀다.
“원래 누구를 좋아하면… 생각대로 되는 게 없어요?”
테이블에 이마를 눌러 붙인 권호영이 긴 숨을 토해냈다. 잇새를 가른 한숨 소리가 묵직하게도 흘렀다.
“화내지 말아야지 다짐해 놓고 금방 화내고…. 감정에 치우쳐서 말했다가 또 뒤돌아서서 후회하고…….”
“…….”
“간절하니까…. 그래서 그동안 잘해왔던 것 같은데…….”
이번엔 간절한 만큼 놓치게 돼요…. 그가 들릴 듯 말 듯이 혼잣말했다. …이번엔? 첫사랑이라고 하지 않았나? 뭐랑 비교하는지 모르겠지만, 그가 이번만큼은 사랑이라고 느꼈다면 사랑이 맞을 것이다. 사랑이란 감정은 다른 무엇과 착각할 수 없을 만큼 존재감이 뚜렷했다.
“원래 다 그런 거야. 처음이니까 좀 서투를 수도 있지.”
윤재윤은 겸연쩍어하면서도 그리 말했다. 막 풋사랑을 치른 권호영은 처음 느껴보는 감정에 혼란스러워하는 중인 것 같았다.
원래 누구를 좋아하면 다 멍청이가 되는 거다. 사소한 거에 의미 부여하고, 그 사람 때문에 화나다가, 또 얼굴을 보면 속없이 웃음이 나고. 좋아 죽겠다가 꼴도 보기 싫어질 때도 있고, 그리 싫다가도 없으면 못 살 것 같고. 바로 앞에 보이는 사람이 적절한 예시일 것이다.
“차라리 몰랐던 때가 더 나았던 것 같아요….”
애써 격려해 봐도 수그린 머리는 들릴 줄 몰랐다.
“…원래도 싫었는데…… 더 싫어졌거든요.”
상념에 잠긴 목소리는 끝으로 갈수록 축 처지듯이 늘어졌다. 항상 널찍하게 보였던 어깨가 오늘따라 유난히 작아 보였다. 저렇게 풀 죽은 모습을 보니까 또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뺨을 멋쩍게 긁적인 윤재윤은 부드러운 목소리를 꾸며냈다.
“좋아하는 사람이 원래 싫어하던 사람이었어?”
“아니. 제가요.”
“…….”
“제 자신이 존나… 싫다고요.”
풀이 죽은 게 아니라… 강렬하게 자기혐오를 하고 있었나 보다. 그것도 다른 의미로 땅굴 파기라 저런 분위기가 나는 것 같았다. 그를 둘러싼 공간만 중력의 작용이 한층 더해진 것처럼 보였다. 머리 위로 그림자가 짙게 드리우고, 공기의 흐름마저 느리게 흐르는 듯한 느낌.
“왜 안 어울리게 욕을 하고 그러냐.”
보다 못한 윤재윤이 손날을 세워 그의 뒷머리를 내리쳤다. 무겁게 흐르는 분위기를 끊어낼 겸 정신 차리라는 뜻이었다. 꽤 아프게 때렸는데, 권호영은 미동조차 안 했다. 방 안이 쥐 죽은 듯 고요해지자 숨을 색색 고르는 소리가 귀에 잡혔다.
…설마 잠들었나?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처럼 술을 그리도 퍼마셨으니 갑자기 잠들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래도 너무 갑작스러운데……. 목소리는 금방 잠들 것처럼 깊게 잠겨 있었지만, 방금 전까지만 해도 잘만 조잘댔다. 윤재윤은 잠든 얼굴을 확인하고자 무릎을 세우고 앉았다. 그리 바닥에서 엉덩이를 살짝 뗀 찰나였다.
“그래서 그냥… 그만할까 싶어요.”
뜻 모를 말을 중얼댄 권호영이 부스스 머리를 들고 일어났다. 상체가 들리니 음영이 진 얼굴선이 드러났다.
“…어차피 다 끝난 거.”
그의 시선은 어느 곳에도 닿아 있지 않았다. 눈이 마주친 것 같은데도 어쩐지 그런 느낌이 들었다. 눈꺼풀이 반쯤 감겨 반원 모양으로 드러난 눈동자엔 어떤 미련도 담기지 않았다. 마치 바다 한가운데에 난 블루홀을 보는 것만 같았다. 너무 깊고도 어두워서 저 속에서 생명체가 살 수 있을까, 하고 의혹을 품게 하는.
윤재윤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상대가 가진 우울이 너무도 잘 느껴져 당황을 넘어서 긴장이 됐다.
축축한 습기를 머금은 두 눈은 동시에 바짝 메말라 보이기도 했다. 마치 모르는 사람을 보는 듯했다. 지금 붙잡지 않으면 어디론가 훌쩍 떠나서 영영 돌아오지 않을 것 같았다. 대학에 와서 친해진 동생에 불과한데. 그럼에도 정도를 모르고 멍청하게 구는 모습을 보니 화가 났다.
“뭘 그만해.”
“…….”
“권호영.”
“…….”
“그거 무슨 뜻이냐고.”
돌아오지 않는 물음을 건넬수록 윤재윤의 낯이 점점 험악하게 구겨졌다. 허, 하고 웃음기 빠진 실소가 터졌다. 진짜 못 봐주겠네. 거친 혼잣말을 읊조린 윤재윤은 곧 눈을 사납게 부라렸다.
“정신 나갔어? 뭘 얼마나 대단한 걸 했길래 이 난리를 떨어. 그래서 어디까지 놓게. 어? 애지중지하던 학점도 포기하고, 집도 개판으로 쓰고. 그다음은 또 뭔데.”
언성을 높여 소리쳐도 권호영은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초점이 나간 눈으로 이쪽을 멀거니 응시하기만 할 뿐. 속이 끓는 듯한 답답증에 윤재윤은 손으로 권호영의 어깨를 퍽 밀쳤다.
“네가 무슨 소리 하는지 알기나 하냐고.”
뒤로 살짝 떠밀린 권호영은 인상 한번 찌푸리지 않았다. 그저 몸이 밀려난 반동으로 시선이 빗나간 눈동자를 바로잡고, 굼뜬 오뚝이처럼 일어나 느릿하게 자세를 고쳐 앉았다.
“몰라요. 무슨 소리 하는지.”
그리고 사람 뒷골이 당길 소리를 태연하게도 지껄였다.
“하아…….”
얼 타고 있던 윤재윤은 곧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앞에 앉은 권호영의 머리칼이 살짝 흔들릴 정도로 커다란 한숨이었다. 머리를 박박 긁고는 재차 정면을 노려보자 권호영은 눈을 내리깐 채 얌전히 속눈썹을 깜빡이고 있었다.
뭐라 반박할 수 없는 게, 그는 정녕 자신이 무슨 소리를 떠드는지 모르는 얼굴이었다. 술에 꼴은 놈을 붙잡고 뭘 하고 있는 건지. 순간 너무 진심 같아 보여서 언행이 과격해졌다.
“……그런 말 하면 부모님한테 미안하지도 않냐?”
“네.”
불퉁한 마음에 툭 뱉은 말에 칼 같은 대답이 돌아왔다. 소가 여물을 씹듯 느릿느릿 말했던 방금 전과 확연히 다른 반응 속도였다.
“이젠 그다지… 생각 안 나는데.”
그러더니 다시 테이블 위에 머리를 쿵 들이박았다.
“그러네요. 평생을… 얽매여 살았는데…….”
“…….”
“별로……. 이제는…….”
테이블 위에 엎어진 권호영이 입속말로 작게 웅얼거렸다. 윤재윤은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곤 그 모습을 지켜봤다. 몸이 축 늘어진 게 다시 일어나 난동을 피울 것 같아 보이지 않았다.
“많이 취했다. 자라.”
하나부터 열까지 뭐라고 떠드는지 알아들을 수가 있어야지. 짜증스레 구시렁댄 윤재윤은 종이컵에 든 소주를 단숨에 넘겼다. 혀가 구부러질 정도의 쓴맛에 인상이 찌푸려졌다. 그런데도 또 술병에 손이 갔다. 아마 정신 사납게 구는 상대의 모습을 보니 제 기분까지 심란해진 탓일 거다.
“씨발, 또라이 새끼. 얌전한 또라이가 제일 무섭다던데. 상 또라이 새끼.”
욱하는 마음에 입 밖으로 욕이 술술 터졌다. 윤재윤은 소주병을 기울여 빈 종이컵을 채웠다. 잔을 채울 때마다 종이컵이 눅눅하게 젖어갔다.
제대로 된 소주잔에 따라 마시고 싶었지만, 이 집엔 플라스틱 컵조차 없었다. 설거지 건조대에 머그잔은커녕 그릇 하나 보이지 않는 게 확인하지 않아도 답이 내다보였다.
연달아 넉 잔을 마실 때까지도 권호영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시계가 없는 방 안은 초침 소리도 울리지 않았다. 커다란 등판이 오르내리는 것에 맞춰 피로에 지친 숨소리만 들릴 뿐. 윤재윤은 그 숨소리를 안주 삼아 술만 넘기다가 불현듯 목소리를 냈다.
“야.”
“…….”
“……자냐?”
안 하던 말을 하려니 입안에 가시가 돋는 느낌이었다. 쓰읍, 하고 혀를 끌어 숨을 크게 들이마신 윤재윤은 더듬더듬 말했다.
“나는… 사랑에 성별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네가 남자를 좋아하든, 여자를 좋아하든. 뭐… 상관없다고.”
어렵사리 꺼낸 말에도 상대는 무안하리만치 조용했다. 숨소리 한번 흐트러지지 않는 것이 언뜻 깊게 잠든 것도 같았다.
…이번엔 진짜 자나? 윤재윤은 엉거주춤 일어났다. 가까이 다가가 테이블 위에 뺨을 붙인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호선으로 감긴 눈 모양과 살짝 벌어진 입술, 테이블에 딱 붙어 위로 살짝 밀려난 볼살.
“…….”
진짜 잔다. 어디로 보나 세상모르게 잠든 얼굴이었다.
한숨을 삭인 윤재윤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근처에 널브러진 외투가 보이기에 맨살이 훤히 드러난 등짝에 대강 덮어 줬다.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해 보니 새벽 1시가 넘어가는 시각이었다.
집에 가려고 했는데 오늘은 여기서 자야겠다. 딱히 권호영이 걱정되는 건 아니었다. 단지 내일 그가 눈뜨자마자 입을 털어야겠다는, 충동적인 생각에서 비롯된 결정이었다. 얼마나 민폐를 끼쳤는지 맨정신으로 좀 들을 필요성이 있다. 옆에 사람이 붙어 있으면, 뭐. 상태도 좀 괜찮아지겠지.
집에 남는 칫솔이 있으려나. 그런 생각을 하며 윤재윤은 화장실로 갔다. 가서 발 뻗고 편하게 자라며 잠든 권호영을 깨우진 않았다. 오늘 고생한 몫이 있으니 침대는 당연히 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