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째 줄 (1)
6월 초. 본격적인 여름이 오기도 전이건만, 기온은 노상 30도를 찍었다. 얇은 옷을 입지 않으면 열심히 손부채질을 해도 더위를 피하지 못했고, 나무 그늘에 서 있어도 아스팔트에서 올라오는 열기에 뺨이 후끈 달아오르기 일쑤였다.
후덥지근한 바깥에 비해서 실내는 이마에 땀이 맺히지도, 뙤약볕에 살이 타지도 않았다. 불빛이 들어온 에어컨이 온도와 습도를 선선하게 조절했다.
“아르바이트?”
단여명은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커피 한 모금을 입에 물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액체를 넘기니 칼칼했던 목이 한결 편안해졌다.
“네. 그래서 당분간 바빠질 것 같아요.”
커피잔을 건네준 권호영이 이윽고 옆에 앉았다. 단여명은 양 무릎을 세워 그가 앉을 자리를 내줬다. 품이 맞지 않는 티셔츠 하나만 걸친 채라 미끈하게 빠진 맨다리가 드러났다. 가운데로 끌어모은 종아리 사이로 울긋불긋한 허벅지 안쪽 살이 희끗 드러났다가 자취를 감췄다.
“이제 시험 기간이라고… 하지 않았나?”
대화를 나누는 중에도 단여명은 통 가만히 있지 못했다. 인상을 약간 찡그린 채 계속 몸을 뒤척이느라 얘기에 제대로 집중하지 못하는 모습이다. 그가 자세를 바꿔 앉을 때마다 커피잔 안에 든 내용물이 불안하게 찰랑거렸다.
“……앉기 불편해요?”
“아, 응.”
“…….”
“누가 밤새 쑤셔놔서 아직도 똑바로 앉지를 못하겠네.”
단여명은 웃는 얼굴로 대놓고 툴툴거렸다. 그날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오늘, 단여명은 여전히 강제 칩거 생활 중이었다.
컨디션도 쉬이 회복되지 않았지만, 밖에 나가기 제일 꺼려졌던 이유는 목덜미였다. 흉 하나 없이 매끈했던 목덜미는 집착적으로 박아 넣은 울혈 자국으로 넝마가 됐다. 과장이 아니라 10m 밖에서 보면 시뻘건 색밖에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만큼 치밀하고, 빈틈없이도 새겨 놓았다.
후드를 뒤집어쓰고 목도리를 칭칭 둘러 감는 게 아닌 이상 살을 내놓고 다니긴 무리였다. 누가 봐도 찐하게 하룻밤 보냈다고 광고하는 꼴이었으니까. 그런데 날이 더워 꽁꽁 싸매고 다니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죄송해요. 저번엔 제가…….”
반쯤 농담으로 꺼낸 말에 권호영의 얼굴이 눈에 띄게 확 굳었다.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트린 채 뜸 들이던 그는 곧 무거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다신 안 그럴게요.”
진한 밤색 눈동자가 얼굴 부근을 배회했다. 단여명은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는 상대를 가만 응시했다. 일주일이 지났지만, 아직도 권호영이 벌였던 짓이 어젯밤 일처럼 생생했다. 먹어선 안 되는 물로 목을 축이는 소리와 그를 남김없이 받아 마신 뒤 입가를 훔치던 얼굴이.
‘안 일어나길래…… 병원에 데려가려고.’
죽음과도 같은 잠에서 깨자마자 눈에 보인 건 권호영의 얼굴이었다. 발은 허공에 들려 달랑이고 있었고, 몸에 걸친 건 그의 티셔츠뿐이었다. 급히 병원에 데려갈 준비를 하느라 대충 옷을 껴입히고, 그대로 안아 올린 모양새였다.
‘…….’
이런 차림으로 어딜 간다고. 말할 기운도 없어 단여명은 안 된다며 고갯짓만 했다.
‘밤에 열이 났어요.’
조심스레 침대에 몸을 눕혀준 권호영이 뺨에 손등을 댔다.
‘…죄송해요. 제가 심했어요.’
커다란 손이 손등의 힘줄이 불거질 정도로 주먹을 꽉 쥐었다. 머리맡을 지키고 선 얼굴은 어디로 보나 자책하는 표정이었다.
‘형, 제가 잘못…….’
그를 지켜보던 단여명은 권호영에게 가까이 오라고 손짓했다. 그리고 머뭇거리며 다가온 그의 이마 딱밤을 먹였다. 둘은 그렇게 무언의 합의를 봤다.
“됐어. 미안해하라고 한 소리 아니야.”
아직 웃어넘길 정도로 시간이 지나진 않았구나. 달아나려고 할 때마다 제 발목을 우악스레 잡아당겼던 손아귀의 힘을 기억한다. 산중에서 만난 범 같던 사내는 날이 밝자 언제 그랬냐는 듯 순한 강아지로 둔갑했다.
단여명은 또다시 ‘죄…’ 하고 입술을 달싹이려는 권호영에게 고개를 절레절레했다. 죄송하다는 소리는 일주일 동안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눈만 마주치면 온몸을 동원해 사죄하니 화가 나다가도 그를 누그러뜨릴 수밖에 없었다.
‘하여튼 저 얼굴에 약하지.’
은근이 아니라 완전. 특히 저렇게 시무룩해하거나 안절부절못하는 얼굴은 유달리 보기 껄끄러웠다.
그날 밤의 권호영은 분명 이상했다. 순간순간 달라지는 눈빛이 자신만 봐 달라고 절절히 애원하는 것 같아서. 말하는 것도 어딘가 미심쩍었다. 미워하지 말라고 하질 않나, 잠깐 눈 감는 것에조차 자기를 봐 달라며 닦달 아닌 닦달을 해댔다.
처음으로 그가 온전한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랐다는 게 실감 났다. 맞닿은 몸에서 불안한 심리 상태가 느껴졌다. 초조해하다가도 안도했고, 좀 진정한 것 같으면 손바닥 뒤집듯 태도를 바꿨다. 그리 허리를 막 처박다가도 유난스러울 만큼 제 반응에 신경을 집중했다. 목소리가 작아지기라도 하면 약한 곳을 헤집어 억지로 반응을 끌어냈으니.
…혹시 그날 어머니한테 뭐라고 들었나? 엄마와 빈번하게 연락하는 자신과 달리 권호영은 모친과 소원해 보였다. 두 사람이 연락하는 걸 옆에서 본 적이 없었으니까.
“……?”
잠깐 다른 생각에 집중한 그때였다. 무릎 안쪽에 팔이 들어오더니 몸이 위로 쑥 들렸다가 내려갔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유리잔 안에 담긴 커피가 밖으로 넘쳐흐를 듯 찰랑찰랑 물결쳤다.
“이 자세가 편하다고 했잖아요.”
양반다리로 앉은 권호영의 허벅지 위에 옆으로 올라탄 자세였다. 불편함을 느끼던 엉덩이 사이는 그의 다리 사이에 빠져 붕 뜬 상태였다. 인간 도넛 방석이라고 불러도 손색없는 자세였다.
“음…….”
남사스러운 자세에 그의 다리 밖으로 삐져나간 두 무릎이 가운데로 모였다. 단여명은 머쓱하게 웃고는 시선을 돌렸다. 그건 그렇긴 하지만, 키스할 것도 아닌데 너무 가까우니까. 그래서 부담스럽기도 하고… 마음이 간질거려 문제라고나 할까.
사람 몸을 종잇장처럼 드는 건 이제 놀랍지도 않았다. 일상생활 중에 이렇게 지나치게 가까이 붙어 있는 것도 웬만하면 동요하지 않았다.
몸살을 앓았던 일주일 동안 권호영이 화장실을 제외한 모든 일을 수발들었으니까. 정말 괜찮다는 말을 닳도록 해봐도 그는 도통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부기도 많이 가라앉았던데. 혹시 모르니까 이따가 다시 약 발라 줄게요.”
휑하게 드러난 다리에 담요가 덮였다. 일주일 동안 남의 뒷바라지하는 게 많이 익숙해진 모습이었다. 이젠 추위를 느끼지도 않고, 몸에 열이 나지도 않는다. 충분한 휴식을 취해 앉을 때 뒤가 뻐근한 것뿐이지 약 바를 정도는 아닌데…….
‘이제 손대는 것도 싫어요?’
또 기겁하며 싫다고 하면 되레 상처받은 표정으로 그런 말을 할까 봐.
텐션이 오른 상태에서 뒤를 보여주는 건 괜찮았다. 하지만 의사가 환자를 진찰하듯이 엉덩이 사이를 관찰하는 건 아무리 단여명이어도 수치심을 느꼈다.
“그런데 갑자기 아르바이트는 왜?”
단여명은 부러 말을 돌렸다. 알겠다고 대답하면 조금 있다가 연고를 들고 와 바지를 내리려고 할 게 뻔했기에.
“사회생활을 좀 배워 볼까… 해서요.”
“사회생활?”
아직 새파랗게 어린 게 뜬금없이 무슨 사회생활인가 싶었다. 고작 스무 살 먹고 사회에 나갈 준비를 한다는 것이 단여명의 입장에선 강아지가 깡깡 짓는 소리로 들렸다.
보통 아르바이트한다고 하면 금전적인 문제와 직결됐다. 용돈 떨어졌는데 존심 상해서 저렇게 말하나? 단여명은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못한 채 커피를 호로록 들이켰다. 빤히 쳐다보는 눈길에서 속내를 읽었는지 권호영이 변명하듯 말했다.
“돈 문제가 아니고…. 제가 낯가림이 심한 편이잖아요.”
단여명은 침묵하다가 이내 고개를 주억였다. …확실히 처음 만났을 땐 사회성이 좀 없어 보이긴 했지. 말수도 적고, 외관도 칙칙해서 그런 오해를 했다.
한국에 오기 싫었다는 나름의 사정이 있었지만, 타국 생활에 적응을 마친 지금도 권호영은 친구가 몇 없었다. 그의 입에서 민들레와 윤재윤 말고 다른 사람의 이름을 들어본 적이 없었으니까.
“너무 피곤하면 윤재윤 선배네 집에서 잘 것 같아요. 일하게 된 가게가 학교 앞이기도 하고.”
두 사람을 떠올리고 있는데, 때마침 한 사람의 이름이 불렸다.
“아…… 재윤 씨 자취해?”
“네.”
“그런데 왜?”
“네?”
“굳이 그럴 필요가 있나 해서.”
사실 집에 들어오든 말든 권호영의 마음이었다. 그렇지만… 둘 중 하나가 집에 들어오지 않으면 얼굴 볼 시간이 나지 않을 텐데. 제 생각만 한 건 아니었다. 고작 하루 떨어져 있어 놓고 먼저 보고 싶다고 티 낸 쪽은 권호영이었다.
“잠은 여기서 자도 되잖아.”
“새벽에 들어오면 형 깰 것 같고… 저도 그게 편해서요.”
…편하다? 일정 끝내고 여기까지 오는 게 피곤하다는 소리인가? 아니, 버스 타면 금방인데 몇 분 차이 난다고…….
표정이 살짝 굳은 게 티가 난 모양이다. 권호영이 몸을 더욱 당겨 안았다.
“알잖아요. 이제 시험 기간이고…. 과제도 밀려 있어서 과방이나 도서관에 붙어 살 것 같아요.”
그가 말한 얘기 중 특정 단어에 밑줄이 쫙 쳐지는 느낌이었다. …시험 기간. 단여명은 그 말을 속으로 되새겼다.
‘…이해해 줘야 되겠지.’
무엇보다 성적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애니까. 괜히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다’라는 같잖은 소리를 해봤자 평생 하나만 보고 살아온 권호영이 그를 납득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래도 좀 서운한데. 그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거와 별개로 서운한 건 서운한 거였다. 공부하지 말라는 소리도 아니고, 잠만 여기서 자라는 건데. 그게 그렇게 무리한 부탁인가?
단여명은 괜히 딴청을 피웠다. 기분 나쁜 티를 내지 않으려고 부러 입꼬리에 힘을 바짝 주곤 시선을 먼 곳에 뒀다.
일주일 동안 좋다고 옆구리에 끼고 살더니 이제 질리기라도 했나 봐? 기분이 퍽 상해 유치하고 쪼잔하게 그리 묻고 싶어졌다. 그렇지만 어쩐지 지는 기분이 들어 입술을 조개처럼 다물었다.
사귀는 사이도 아니고, 그저 서로에게 호감 정도만……. 아니, 호감이라기엔 거기서 더 단계가 뛰지 않았나? 떡도 치고, 보고 싶다는 말도 했고, 최근엔 데이트 약속을 깨서 사과까지 했다. 서로 좋아한다는 말 빼고 할 거 다 한 것 같은데?
저 말 몇 마디가 뭐라고 마음에 큰 파장이 일었다. 생각해 보니 연애할 생각이 없다고 말했던 것도 이제 와서 열이 받았다. 그럼 지금 나랑 하는 건 가상 연애 프로그램이라도 되나 봐? 맨날 예쁘다 예쁘다 해 주니까 내가 아주 만만해 보이지. 사람 몸을 걸레 쪼가리로 만들어 놓은 것도 너그럽게 용서해 줬건만.
다문 입속에서 이가 바드득 갈렸다. 분한 마음을 어찌어찌 다스리던 중이었다.
쪽.
뺨에 말캉한 무언가가 닿았다가 떨어지는 감촉이 가볍게 느껴졌다. 어수선했던 감정이 수챗구멍에 속에 빨려가듯 사라진 것도 그와 동시였다.
“……?”
단여명은 얼떨떨한 눈으로 시선을 들었다. 커피잔을 쥐지 않은 손은 자연스레 제 뺨을 감쌌다.
권호영은 가끔 그런 얼굴을 보였다. 뽀뽀하고 싶은데, 어떻게든 속으로 꾸역꾸역 삼키는 표정. 음식물을 씹는 입술을 뚫어져라 보거나, 옆에 앉아 제가 무어라 떠들 때 뺨 언저리를 집요하게 눈으로 더듬었다. 원래는 의심만 하던 것이었다. 하지만 일주일 동안 그 주기가 급격히 늘어 확신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행동으로 옮긴 적은 없었는데…….
“잠깐이에요.”
자기가 잠깐이라는 말을 하면서 권호영은 되레 묘한 눈을 했다.
“…잠깐이니까.”
단여명은 그 눈길을 받아내며 생각했다.
‘…왜 또 저런 얼굴이지.’
자기도 떨어지기 싫다는 뜻인가? 속내를 꿰뚫어 볼 요량으로 단여명은 그 시선을 맞받아쳤다. 그런데 눈이 마주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마음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권호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데, 이상하게 설득당하는 기분이었다.
다시 열이 오르기 시작한 몸을 지극정성으로 보살펴 주던 모습과 제가 잠결에 물이라도 찾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물잔을 입에 대주던 모습. 권호영이 스튜를 끓이는데 소질이 있다는 것도 새로 알게 됐다. 정말 병원에 가지 않아도 되겠냐며 옆에 딱 달라붙어 들들 볶는 것은 좀 성가시긴 했지만.
단여명은 그의 얼굴을 눈에 담으며 손에 들린 잔을 만지작댔다. 지금 마시고 있는 커피도 권호영이 타다 준 것이었다.
“그래, 잠깐이니까.”
단여명은 권호영의 가슴팍에 몸을 편히 기대버렸다. 그래, 내가 형이니까. 나중에 차근차근 대화를 나눠 보고 서운하다 싶으면 그때 말해도 늦지 않는다. 지금은 이 분위기를 망치기 싫었다.
“너 종강하면 어디 놀러 갔다 올까?”
섹스할 때 몇 번이나 받은 뽀뽀였다. 그러니까 고작 뽀뽀 한 번에 기분이 좋아진 건 아니다, 이 말이었다.
“여름이니까 바다도 좋을 것 같고…. 계곡물에 수박 담가서 먹는 것도 좋을 것 같은데.”
그리 속으로 꿍얼대 봤자 너른 어깨에 머리칼을 비비며 눈웃음치는 얼굴은 누가 봐도 기분이 풀어진 모습이었다. 위아래로 까딱이는 발목은 가벼운 리듬을 타듯 작게 흔들리고 있었다.
“아니면 호텔에서 편하게 쉬다 오는 것도 좋겠다. 가면 에어컨 틀어놓고 섹스만 할 것 같긴 한데…….”
“전 다 좋아요.”
“놀러 가서 섹스만 하다 오는 건 아깝지 않아? 그건 집에서도 할 수 있잖아. 하지 말자고 약속하고 가도… 불가능할 것 같은데.”
솔직한 마음으로 당분간 섹스는 사양하고 싶었다. 한 한 달 정도는 안 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아직 허리와 엉덩이에 권호영의 손자국대로 남은 멍도 다 빠지지 않은 채다.
“그럼 호텔 빼자. 저번에 가기도 했었고. 물놀이나 하지, 뭐.”
물장구를 치듯 발목을 까딱이던 단여명은 권호영을 슥 돌아보았다. 가느다랗게 접힌 눈 끝엔 장난기가 매달려 있었다.
“우리 호영이, 수영은 좀 해?”
“가르쳐 줄게요.”
“……그거 잘한다는 소리잖아.”
급격히 맥 빠진 목소리로 중얼대니 권호영이 고개를 숙였다. 얼굴 위에 그림자가 지고, 폭신한 입술이 새가 부리로 쪼듯 뺨을 눌렀다. 쪽, 쪽. 귀여운 입맞춤 소리가 간격을 두고 터졌다.
“왜 이래….”
단여명은 키득거리며 어깨를 비틀었다. 입술이 닿는 곳은 볼인데, 엉뚱하게도 가슴 속에 간지럼이 일었다. 괜히 싫은 척하는 걸로 보이겠지만, 좀처럼 몸을 가만두지 못하겠다.
단여명이 반항하는 듯하니 권호영은 그의 허리에 팔을 둘러 몸을 바짝 끌어안았다. 그리고 웃음이 터진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덩달아 웃음을 지었다.
왜 저렇게 빤히 쳐다보면서 웃고 난리야. 사람 심장 떨리게…. 그런 마음에 눈을 살짝 피한 순간 권호영이 재차 뺨에 입술을 붙였다. 쪽, 쪽, 쪽. 연달아 입맞춤을 내리더니 쪼오옵, 하고 민망한 소리가 날 만큼 입술을 길게 눌러 붙였다.
“미쳤, 야, 진짜 간지럽…….”
경악한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빼려고 하니 권호영이 아예 양 뺨을 감싸 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쪽, 입술과 입술을 힘 있게 부딪쳤다.
“…….”
단여명은 양 뺨이 잡힌 채로 눈을 살짝 키웠다. 눈빛, 표정, 숨결, 체온. 그가 만들어낸 모든 것이 가깝고도 손에 잡힐 듯 선명했다. 가을 하늘 아래 낙엽 같은 홍채는 속이 들여다보일 정도로 투명했으며 까만 동공은 끝 모를 심연처럼 깊었다.
‘…이거 연애랑 다를 게 없지 않나?’
무심결에 든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그가 한 발짝 다가옴으로써 애매하게 그어져 있던 선이 완벽히 허물어졌다. 그것이 살갗이 저릿할 정도로 명확하게 느껴졌다.
침대 위에서뿐만이 아니라, 일상 중에 가까이 붙어 앉는 것. 여행 계획을 짜다가 철없이 들뜬 마음에 스스럼없이 입술을 부딪치는 것. 이런 게 연애가 아니면 다른 어떤 걸 연애라고 부를까.
단여명이 생경한 감상에 빠진 와중에도 권호영은 일방적인 입맞춤에 열중했다. 단여명의 뺨을 모아 잡은 채 그의 입술에 몇 번이나 제 입술을 쪽쪽 부딪쳤다. 고개를 들어 오리 주둥이처럼 튀어나온 입술을 확인하고 눈을 살짝 접었다가 다시 입술 도장을 찍어 쪽쪽거리는 소리를 만들어냈다.
제 나름의 혼란을 진정시키던 단여명이 흠칫 반응한 것은 얼마 뒤였다. 가볍게만 느껴졌던 입맞춤에 순간 다른 성질이 섞였다. 권호영이 입술을 맞붙인 채 윗입술을 슬쩍 들추어 올렸기 때문이었다.
“…입술만.”
숨결이 교차할 거리에서 권호영이 조용히 속삭였다. 혀는 넣지 않을 테니 허락해 달라는 소리였다. 가볍게 웃음 지었던 얼굴은 어느새 성적인 긴장감을 풍기며 은근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응.”
짤막한 대답을 끝으로 기다렸다는 듯 입술이 겹쳐졌다. 푹신한 입술이 아랫입술을 가볍게 머금었다가 놓아줬다. 단여명은 그가 입술을 오므리는 것에 따라 합을 맞췄다. 마치 영화나 드라마에서 나올 법한 풋풋한 입맞춤이었다.
단여명의 손에서 커피잔을 가져간 권호영이 소파 앞 테이블 위에 잔을 내려놓았다. 중간에 걸리는 것이 없자 두 사람의 몸이 더욱 밀착됐다. 양손이 자유로워진 단여명은 권호영의 뺨을 감쌌고, 권호영은 단여명의 허리를 바짝 끌어안아 제 품 안에 넣었다.
심장이 쿵쿵 뛰었다. 제 허리를 감싸 안은 손부터 커다란 품속에서 느껴지는 온기까지. 떨리는 숨을 내보내는 입술이 금방이라도 당신을 좋아한다는 소리를 밀어낼 것만 같아서. 그에게 옮은 듯 제 숨까지 떨리듯이 나와 공중에 맥없이 흐트러졌다.
맞붙인 몸에서 시끄럽게 고동치는 심장 소리가 들렸다. 쿵쿵쿵…. 나란히 울리는 소리는 한 쌍이었다.
***
해가 뜨기 직전의 새벽, 권호영은 어스름히 밝아지는 의식에 눈을 떴다.
“…….”
밤중에 선잠을 자 머리가 지끈대며 울렸다. 계속 부동자세를 유지했던 몸도 뻑적지근했다. 고개를 돌리자 제 옆구리에 꼭 달라붙어 잠든, 말간 얼굴이 보였다. 곡선 모양으로 감긴 눈매와 눈꺼풀 가장자리에 촘촘히 박힌 속눈썹에 유달리 눈길이 오래 머물렀다.
‘원래 이렇게 붙어 자지는 않는데…. 네가 잠버릇이 얌전해서 그랬나 봐.’
처음 침대에서 함께 아침을 맞은 날, 단여명이 머쓱하게 웃으며 말했다. 밤중에 몸을 데워 줬던 온기는 잠에서 깨어나자마자 달아나듯 훌쩍 거리를 벌렸다.
권호영은 그날 이후 단여명과 한 침대에서 잠들 때면 미약한 정신을 붙들고 잤다. 잠결에 몸을 뒤척이기라도 하면 잠귀가 예민한 이가 달아나기라도 할까 봐.
처음에 미동 없이 잔 건 우연이었고, 그를 옆자리에 누이고자 ‘저 얌전히 자는 거 알잖아요’라고 말했던 건 거짓이었다. 권호영은 잠버릇이 요란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또 얌전하지도 않았다. 보통 사람처럼 몸을 돌려 눕기도, 팔을 위로 뻗기도 하며 평범하게 잤다.
잠을 충분히 자지 못해 날마다 피로가 더해갔으나, 권호영은 저 잠든 얼굴로 하루를 맞이하는 걸 좋아했다. 맨살이 닿은 곳에서 따끈히 피어오르는 열기도 좋았고, 무방비한 얼굴을 눈치 볼 필요 없이 가까이서 들여다보는 것도 좋아했다.
권호영은 아침 새소리를 들으며 한참을 그렇게 시간을 죽였다. 입술은 어떻게 생겼고, 눈매는 어떻게 빠졌고. 뺨에 난 솜털까지 고루고루 세어 보다가 단여명의 머리를 감싸 위로 들어 올렸다. 팔목을 슬그머니 빼내고, 그 자리에 베개를 놓아줄 때까지도 그는 깨어나지 않았다.
감각이 느껴지지 않는 한쪽 손을 죔죔 하며 권호영은 거실로 나갔다. 그리고 테이블 한편에 올려둔 연고를 집어 들고, 다시 침대에 올랐다.
덮인 이불을 조심스레 젖히니 미끈한 맨다리가 드러났다. 발가락, 발등, 종아리. 하얀 눈밭 같이 새하얀 몸은 허벅지 안쪽만 부자연스럽게 빨갰다. 손가락을 대 보니 부기가 오른 것이 만져졌다.
‘…이럴 줄 알았지.’
괜찮기는 뭐가 괜찮아. 다 끝나고 화장실 갈 때 어정쩡하게 걸어 놓고.
결국 어제 입을 맞추다가 불이 붙어 둘 다 아래를 세웠다. 자연스레 옷을 벗게 됐지만, 삽입은 하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 권호영이 그를 밀어냈다.
단여명은 잠시 고민하다가 등을 돌리고 엎드렸다. ‘여기는 괜찮은데’라고 말하며 허벅지 살집을 벌리는 손짓에 권호영은 홀린 듯 부드러운 살결에다 열을 토해냈다.
‘좀… 진정 좀, 해……!’
그게 뭐가 그리도 좋았는지. 정신을 차렸을 때 자신은 그의 얼굴을 우악스레 붙잡고 있었다. 단여명은 진정하라는 말을 끝으로 모자란 숨을 헉헉 들이마셨다. 계속 키스하다가 참다못한 그가 제 혀를 깨물었던 차였다.
좆을 문댔던 살은 얼룩덜룩했다. 마찰열에 빨갛게 쓸린 피부 위로 정액이 양껏 끼얹어져 있었고, 양 팔뚝엔 가느다란 다리가 안겨 있었다. 힘이 풀려 가운데로 오므리지 못하는 허벅지를 모로 끌어안은 채 그 사이에 염치없이 제 물건을 파묻고 있었다.
“…….”
입술을 꾹 깨문 권호영은 손가락에 연고를 덜었다. 부기가 오른 부위에 손을 올려 조심스레 연고를 펴 발랐다. 붉은 기를 따라가니 더욱 안쪽에 다다랐다. 거듭 성기를 미끄러트렸던 회음부도 선이 짙어 보일 만큼 통통하게 부어 있었다.
“으응…….”
자꾸 건드리는 게 귀찮았는지 단여명이 몸을 뒤척였다. 권호영은 손을 잽싸게 떨어트렸다. 기지개를 살짝 켠 그가 꿈질거리며 엎드려 누웠다.
하얗고 포동포동한 엉덩이가 한눈에 가득 들어찼다. 살짝 흔들린 눈동자는 본의 아니게 더욱 은밀한 비부를 파고들었다. 동그랗게 솟은 둔덕 사이로 제가 몇 번이나 드나들었던 곳이 희끗 모습을 비쳤다.
‘지금이라면…….’
꿀꺽, 마른침을 삼킨 권호영은 뽀얀 엉덩이를 그러잡았다. 상처를 치료하겠다는, 본래의 목적도 잊고, 엉덩잇살을 밀어 그사이를 들여다보았다.
오밀조밀하게 닫힌 주름은 분홍색이었다. 꽃잎이 겹겹이 쌓인 것처럼 아주 예쁘고도 세밀하게 주름 잡혀 있었다. 엉덩잇살을 더욱 잡아 벌리니 구멍이 살짝 옴츠러들었다가 활짝 펴졌다. 살짝 드러난 진분홍색 속살이 시야를 뚫고, 뇌리를 강렬한 색으로 물들였다.
이렇게 밝은 곳에서, 이만큼 노골적으로 관찰한 적은 처음이었다. 저 작은 곳으로 제 것이 들어갔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아침 해가 내려앉은 주름에 은은한 광채가 돌았다. 선홍빛의 안쪽 살은 촉촉한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그것들은 눈으로 지분거릴수록 입안에 침이 고였다.
한번 빨아 보고 싶…….
‘…아.’
또 이런다.
권호영은 재빨리 눈길을 떼어냈다. 정신을 차리려고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곤 엉덩잇살을 얌전히 닫아 주었다.
양심에 찔려 위를 한번 쳐다보니 단여명은 여전히 세상모르게 자는 중이었다. 살짝 벌어진 입술에서 따뜻한 숨이 색색 새어 나왔다. 제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고 저리 방심한 모습이라니. 괜한 심술이 나 뺨을 찌르고 싶었다.
행동으로 옮기지 못할 작은 심술. 분명 아무렇지 않게 넘길, 보잘것없는 감정이었다. 그런데 눈을 뜰 생각을 않는 상대를 보니 돌연 마음이 이상하게 초조해졌다. 감정의 변질은 급물살을 탄 것처럼 갑작스럽고도 격하게 이뤄졌다. 검은 욕망에 잠식된 것은 한순간이었다.
‘깨우고 싶다.’
가지고 싶다.
집 밖에 나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나만 봐 주고 나만 신경 써 줬으면. 그의 모든 감정이 다 제게서 비롯된 것이었으면 좋겠다. 감긴 눈꺼풀 속의 눈동자가 오직 저만을 담았으면.
부드럽게 휘어지는 눈웃음은 언젠가부터 권호영의 가슴속에 콕 박혀 덜어내지지 않았다. 그 웃음을 처음 보았을 땐 온기를 느꼈고, 지금은 뜨거운 화염 속에 갇혔다. 다른 이와 나눠 가졌을 그 웃음을 보며 추잡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그리고 종국엔 환희했다. 내가 자기 몸을 너덜너덜하게 만들었어도, 그리 최악까지 몰아갔어도 저리 변함없이 웃어 주는구나. 그것이 다른 의미로 가슴 속에 불티를 터뜨렸다.
단여명은 웃는 게 예뻤다. 태생부터 자기의 것이라는 듯 반짝반짝 빛이 났다. 어느 순간은 눈에 익어 괜찮게 보다가도 그 호선이 뚜렷하게 시야에 박히는 날이면 가슴이 녹은 아이스크림처럼 흘러내렸다. 흐물흐물 녹은 심장은 형태를 잃고도 시끄럽게 박동했다.
그의 웃는 얼굴이 좋았다. 평소엔 사근사근하다가 간간이 까칠해지는 말투도 좋았다. ‘호영아’ 하며 온기를 불어넣는 목소리도, 결국엔 제게 돌아오는 시선도, 품 안에 쏙 들어오는 몸도. 손끝 발끝 빼놓지 않고 전부 다….
단여명이…… 좋았다.
“…….”
순간 숨이 턱 막혔다. 생물이 자연의 이치를 깨닫듯 어디서 흘러들어 온 건지 모를 깨달음이었다. 그러나 그에 작은 의심조차 품지 못했다. 모든 움직임이 멈추고, 사고 회로가 굳을 정도의 확신이 따라붙었으니까.
아, 나는… 단여명을 좋아하는구나. 좋아하고 있었구나. 언제부터인지 모르나, 그를 좋아하고 있었던 거다.
처음 사랑이란 감정을 깨우친 순간은 미디어에서 접한 것만큼 감격스럽지 않았다.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것처럼 빛이 확 쏟아지거나, 그 사람 주변에 꽃이 피어난다거나. 이름 모를 사랑 노래가 들려오지도 않았다.
사위는 간간이 들리는 새소리 말고는 고요했다. 새로운 감정을 깨닫게 해준 남자는 깊이 잠든 상태였으며 자신은 마음속에서 선뜻 커진 그의 존재감에 넋을 잃고 말았다.
감정이 뒤죽박죽 엉키는 사이, 권호영은 고뇌했다. 이건 사랑인가? 이런 걸 사랑이라고 부르는 게 맞다면, 제가 하고 있는 건 과연 정상적인 사랑인가?
어떻게 막 하고 싶은데, 정확히 뭘 하고 싶은지 모르겠다. 하지만 모든 생각의 중심엔 단여명이 서있었다. 더 닿고 싶고 둘만의 얘기를 속삭이고 싶다. 몸을 마구 깨물어서 아파하는 표정이 보고 싶기도 했고, 정신없는 입맞춤을 내려 웃음을 터트리는 얼굴이 보고 싶기도 했다.
하지만 집 밖에 나가지 않았으면 좋겠다니…….
‘그건 좀 과하지 않나.’
좀처럼 눈을 뜰 생각을 않는 얼굴이 마음을 타들어 가게 만들었다. 조용히 잠든 사람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사람을 그저 바라볼 뿐인데도 이리 많은 감정이 가슴 속에서 소용돌이친다.
한번 깨우친 감정이 너무 무거웠다. 그가 뭣 모르고 흘려준 온기를 매일같이 빨아들였다. 욕심은 더욱 커다랗게 몸집을 불렸고, 만족은 손끝에 닿지 않을 만큼 멀어졌다. …그래서 갈비뼈 안쪽이 시큰거렸다.
“…여명아.”
권호영은 단여명의 얼굴 양옆에 손을 짚었다. 상체를 숙여 뺨을 살짝 맞댔다가 귓가에 입술을 붙였다.
“……단여명.”
모든 일이 정리되고 나면, 나한테도 형이라고 불러 줘. 네가 김선오를 형이라고 불렀던 것처럼. 나는 네 입에서 나오는 그 형 소리마저도 내게 향하지 않으면 질투가 나. 그러니까 네가 그렇게 질색했던 야자 타임, 한 번 더 해야겠어.
넌 아무것도 몰라도 좋으니까 그냥 평소처럼 넘어가 줘. 넌 따뜻한 사람이니까. 나도 최대한 억누르고 살 테니까, 너도 할 수 있는 한 날 좀 받아 줘.
“…….”
귓가에 속삭임을 흘려 넣어도 매정한 단여명은 눈을 뜨지 않았다.
잠귀가 아무리 예민해도 몸이 피곤한 건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어제 졸음에 겨운 사람을 붙잡고, ‘한 번만 더. 한 번만 더 해요, 형’ 하고 조른 건 정작 본인이었다.
그럼에도 좋아한다는 마음을 한번 뚜렷하게 인식하니 기분이 주체할 수 없이 오르내렸다. 마치 누군가를 좋아한다는 마음이 영혼을 송두리째 잡아 휘두르는 것 같았다.
어깨를 마구 흔들어 억지로 눈뜨게 하고 싶다. 잠에 겨워 몽롱한 눈동자를 가까이 두고 흘러넘치는 감정을 되는대로 고백하고 싶었다. 형이 너무 좋아서, 사랑이란 감정이 그리 달갑지는 않다고. 그러니 마냥 달갑지 않은 이 감정이 사랑이 맞는지 형이 알려 줬으면 좋겠다고.
‘절 얼마만큼 좋아해요?’
될 수 있으면 당신의 어머니보다, 그 주변 누구보다 날 더 특별하게 생각해 줘요. 가족이 될 순 없지만 가족처럼 대해 줘요. 사람 한 명 살리는 셈 치고 좀 그래 줘요. 이제 정에 굶주렸던 그때가 까마득한 과거처럼 느껴져요.
형이 처음 알려 준 거니까, 형이 책임져요.
“…….”
권호영은 결국 잠든 사람을 깨우지 못했다. 혼란을 삭이다가 또다시 추저분한 감정을 불태웠고, 혼자 납득하기도 하며 한참을 그리 바라보기만 했다. 그리고 휑하게 드러난 맨몸에 이불을 덮어 준 뒤 조용히 침대에서 내려왔다.
바닥에 떨어진 옷가지를 걸친 권호영은 발소리를 죽이고 서랍장 앞으로 걸어갔다. 칸의 맨 밑 칸, 가장 깊숙한 곳에 손을 넣고 무언가를 꺼냈다.
커다란 손에 들려 나온 것은 액정이 산산조각 난 핸드폰이었다.
***
두 사람이 함께 지내는 공간엔 각자 사용하는 생활용품이 갖춰져 있기 마련이다. 발 사이즈가 다른 신발, 나란히 꽂힌 칫솔, 추구하는 스타일이 달라 보이는 옷가지도 건조대에 널려 살랑살랑 흔들렸다.
늦은 밤, 불이 꺼진 방 안에 조그마한 빛이 들어왔다. 어둠이 내려앉은 침대 위에 둥그렇게 솟은 이불이 꿈틀댔다. 집 안에 정돈된 물건은 두 명분인데, 어째선지 이불 속의 인영은 달랑 한 명뿐이다.
‘진짜 안 들어오네…….’
핸드폰을 뒤집어 놓으니 방 안이 완연한 어둠에 잠겼다. 단여명은 마지막으로 주고받은 메시지를 떠올리다가 입술을 삐죽였다. 권호영이 외박 선언을 한 지 사흘째 되는 밤이었다.
외박하겠다고 말한 첫날은 늦게까지 유사 섹스를 해 같은 이부자리에서 눈을 감았다. 이틀째 되는 날부터 외박의 조짐이 드러났는데, 그는 거의 새벽 2시가 다 돼서 집에 들어왔다.
잠결에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었고, 그리 얕은 잠을 자다가 허리에 팔목이 둘리는 감촉을 느꼈다. 물기를 매단 머리칼이 뒷목을 간질였고, 은은한 비누 냄새가 비강을 적셨다. 몽롱한 정신으로 다녀왔냐는 인사말을 전하고, 따뜻한 품속에서 녹아내리듯 단잠에 빠져들었다.
멀쩡한 정신을 차린 건 아침이었다. 어느 순간 눈을 떠보니 침대 위엔 덩그러니 혼자 남겨진 뒤였다. 핸드폰을 확인해 보니 짤막한 메시지가 남아 있었다. 밥을 거르지 말라는 메시지의 말마따나 식탁 위엔 상이 차려져 있었다.
“…….”
단여명은 이불을 눈 밑까지 바짝 끌어올렸다. 맨정신으로 속궁합을 확인한 이후로 자연스레 함께 잠드는 날이 많아졌다. 그래서 빈자리가 이리도 크게 느껴지는 것일까. 권호영이 엠티를 갔던 때는 영상 통화라도 해서 그나마 나았는데 오늘은 얼굴은커녕, 목소리도 듣지 못했다.
‘…분명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은데.’
시험 기간이라서 예민해졌다기엔 걸리는 부분이 한두 개가 아니었다. 그렇다고 섣부른 물음을 던지자니 괜히 안 좋은 곳을 들추는 것이 아닌지 걱정됐다. 권호영과 아직 무거운 얘기를 나눈 적이 없기도 했고, 단여명은 원체 속 깊은 얘기를 즐겨 하지 않았다.
생각해 보면 권호영도 그런 인간이었다. 단여명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는 걸 일찌감치 눈치챘지만, 제 호기심보다는 상대를 배려하는 쪽을 택했다. 그건 단여명도 비슷한 성격이었다. 미심쩍은 구석을 알아채도 상대가 말하고 싶지 않아 하는 눈치면 굳이 캐묻지 않았다.
으레 사내자식들이라면 구구절절 속마음을 털어놓지 않는다. 친분에 따라서 다르겠지만, 단여명은 대부분 내색하지 않는 쪽이었다. 좋게 말하면 의젓하고, 나쁘게 말하면 속을 알 수 없는 부류.
원래 한 사람이 비밀스러운 성격이면 남은 하나가 무데뽀로 밀어붙여야지 짝짜꿍이 맞는데. 이제 보니 참 조심스러운 사람들끼리 만났다. 단여명은 머릿속에 자신들의 모습을 그려 보았다. 얼굴 합은 괜찮은 것 같은데, 성격은 둘 다 조용조용한 편이었다. 그렇다고 투덕거리지 않는 건 또 아니라 재미가 없진 않았다.
“여명아, 옆에.”
투과과과! 연달아 울린 총소리를 끝으로 화면에 ‘Stage 2!’라는 문구가 떠올랐다. 녹슨 철문이 벌컥 열리고 벌겋게 피 칠갑한 좀비들이 사방에서 쏟아졌다.
“너 총 게임 은근 잘하더라.”
영화관 내 게임장은 평일임에도 불구하고 관람객으로 붐볐다. 여러 게임기에서 나오는 효과음 사이로 곳곳에서 환호성이 터졌다.
“맞추기만 하면 되는데 뭐가 어려워.”
단여명은 무심히 대답하곤 총을 흔들어 장전했다. 바리케이드를 뚫고 넘어온 좀비의 머리통에 조준점을 맞추고, 그대로 방아쇠를 당겼다.
‘그래, 집에 안 들어오는 건 그렇다고 쳐.’
투과과과! 손가락에 빠듯하게 힘을 주니 썩은 머리통이 뒤로 넘어갔다.
‘그런데 연락은 또 왜 이렇게 안 돼?’
단여명은 구김이 간 얼굴로 죄 없는 좀비만 쏴 갈겼다. 저녁 8시가 다 돼가건만, 오전에 보낸 메시지의 답장은 깜깜무소식이었다. 하루 떨어져 있었다고 보고 싶다고 난리 쳤던 사람은 -난리가 아니었다는 의견은 받지 않겠다- 누구인가 싶었다.
갑자기 마음이 변한 건 아닌 것 같고…. 역시 공부 뒤 순위로 밀려난 건가. 중간고사 때는 거의 집에서 공부하더니. 거실 문턱만 지나면 움직임을 뚝 멈췄던 굳은살 박인 손을, 아닌 척 따라붙었던 은근한 시선을 기억한다. 그때 집 지키는 강아지처럼 기다려보니 집중이 잘 안 됐나?
찜찜했다. 뭔가 묘하게 자신을 피하는 눈치여서. 공부만 하던 애가 안 어울리게 아르바이트한다는 것도 의심이 갔다. 그러면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는 공부에 온전한 시간을 투자할 수 없을 텐데.
정말 바빠서 집에 들어오지 않는 것이냐고 묻고 싶었다. 무슨 상관이냐고 되레 묻는다면, 좋아한다는 말을 충동적으로 던지고 싶었다. 우리 둘이 하는 게 연애가 아니면 뭐냐고. 그런 말을 한다면 권호영은 어떤 표정을 지을까.
“아, 죽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에게 제 마음을 밀어붙일 수도 없었다.
“매번 보스 전 가기 전에 죽는단 말이지.”
아직 결말이 나지 않은 둘의 얘기가 남아 있었기에. 제가 주연이라 생각하는 엑스트라의 앞에서 떳떳할 수 없었다.
“너 똑바로 안 해?”
단여명은 아니꼬운 눈초리를 보냈다. 김선오의 손엔 제 손에 쥔 것과 똑같은 플라스틱 총이 들려 있었다.
“여명아, 형 상처받는다. 난 처음부터 똑바로 하고 있었어.”
김선오가 너털웃음을 지었다. 누구의 속마음도 모르고, 그는 아주 속 편한 모습이었다.
“게임 하나 가지고 왜 그렇게 성났어?”
……아. 단여명은 뜨끔 놀라 얼른 인상을 풀었다.
인위적이었던 만남은 날이 지날수록 분위기가 변해갔다. 원래 알고 지냈던 시간과 상대가 자주 보이던 양상들이 마음속의 빈틈을 파고들었다.
친구처럼 노는 일상이 반복되니 이렇게 예전처럼 생각 없이 말이 튀어 나갈 때가 종종 생겼다. …편하게 생각하면 안 되는데. 정리할 사이고, 끝낼 관계인데.
잠깐 시선을 돌린 사이 제가 다루던 캐릭터는 좀비에게 물어뜯기고 있었다. 단여명은 ‘GAME OVER’가 뜬 화면을 불퉁히 바라보았다. 하나가 거슬리니 둘이 싫어졌고, 종국엔 게임이 안 풀리는 것마저 짜증이 났던 모양이다.
“…화 안 냈어.”
“응.”
“한 판 더 해.”
“그래.”
“이번엔 죽지 마.”
“…노력해 볼게.”
김선오가 머쓱하게 웃고는 게임기에 지폐를 넣었다. 커다란 화면에 아까 보았던 스토리 영상이 재생됐다. 인체실험에 실패한 박사가 시설에서 도망치는 장면을 끝으로 군인 캐릭터들이 소환됐다.
그리 총 게임만 몇 판을 연달아 했다. 김선오는 꼭 보스가 나오기 전에 체력이 다해 죽었고 ‘미안’ 하며 옆 사람의 눈치를 살폈다. 그럼 혼자 남겨진 단여명은 보스에게 향하는 골목에서 쏟아지는 좀비를 감당하지 못했다. 깔끔한 연패였다.
“영화 시간 다 됐다. 그만 갈까?”
장난감 총을 거치대에 꽂아 넣은 김선오가 이쪽을 돌아봤다. 단여명은 번쩍거리는 빛을 쏘는 게임기만 쳐다보았다.
‘왜 연락이 없지?’
그냥 찾아가 볼까? 찝찝하면 물어보면 되지. 말하기 싫으면 거짓말하는 티 팍팍 내면서 둘러대거나, 아니면 솔직히 말하거나. 둘 중 하나의 모습을 보일 게 뻔한데.
아니, 뭐가 됐든 신경 쓰여 죽겠네. 대강 그런 생각을 하느라 한눈을 팔던 순간이었다. 계속 게임기만 쳐다보는 눈길을 미련으로 오해했는지 그가 불쑥 손을 가까이했다.
“다음에 다시 오자. 응? 내가 연습해 올게.”
커다란 손이 뒷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살짝 숙인 고개는 다정하게 눈높이를 맞췄고, 부드럽게 풀어진 입가는 미소를 잃을 줄 몰랐다. 남들 보기 부끄럽지도 않은지. 누가 본다면 어린 동생을 달래는 거라고 착각할 성싶었다.
다갈색 눈동자에서 뚝뚝 떨어진 꿀이 얼굴을 끈적하게 적시는 듯했다. 단여명은 새삼스레 그의 마음을 다시금 실감했다. 그렇다고 특별한 감상은 들지 않았다.
‘다음…….’
그 생각만이 불순물처럼 머릿속을 둥둥 떠다녔다.
잠자리에 든 시간은 밤 11시였다. 단여명은 핸드폰을 손에 쥐고 침대에 엎드려 누웠다.
밤 11시. 누군가는 잠들 시간이지만, 누군가가 일하는 대학교 근처 고깃집은 한창 바쁠 시간대였다.
김선오를 만나고 오면 유독 권호영 생각이 많이 났다. 아니, 사실 이건 전화를 걸고 싶은 핑계에 불과했다. 김선오를 만나지 않는 날에도 권호영 생각을 하게 됐다. 시험이 끝나면 같이 어디로 놀러 갈지, 무슨 대화를 나눌지, 무엇을 먹을지.
그리고 김선오를 정리하면, 어떤 말로 그를 깜짝 놀라게 해 줄지.
사실 김선오와 헤어지고 난 후 대뜸 가게 앞으로 찾아갈까, 고민했다. 하지만 단여명은 끝내 마음을 접었다. 떨어져 지낸 지 얼마나 됐다고. 한동안 바빠질 거라는 말까지 했는데, 애처럼 굴기 싫었다.
-여보세요.
그렇지만…… 역시 전화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은가.
“뭐 하고 있었어?”
온종일 그의 답장만 기다리다가 먼저 연락한 참이다. 자존심에 크나큰 스크래치가 났지만, 저 목소리를 들으니 모든 불만이 사그라들었다. 단여명은 실실 나오는 웃음을 꾹 눌러 삼켰다. 그래, 안 바쁘고 더 아쉬운 쪽이 숙이고 들어가는 거지.
-일하죠. 숯불 빼다가 전화 받은 거라서 잠깐 가게 밖이에요.
“운동은 갔다 왔어? 밥은.”
-운동은 시간이 없어서 못 갔고, 밥은 아까 먹었어요.
수화기 너머로 시끌벅적한 소리가 들렸다. 손님들이 만들어내는 소리만으로 가게 안이 얼마나 정신없을지 눈에 그려졌다. 띵동, 하며 직원을 찾는 벨 소리가 10초에 한 번씩 울렸다.
불판을 들고 이리저리 쏘다닐 그를 생각하며 측은한 마음을 느끼던 중이었다. 시끄러운 주변의 소음을 가르고, 권호영이 물음을 던졌다.
-형은요. 밥 먹었어요?
“아, 응. 계란찜 맛있던데.”
-그걸 아직도 먹어요? 이틀 전에 해놓고 간 건데.
“네가 없으니까 반찬이 안 줄어.”
-형이 적게 먹는 거죠. 귀찮다고 아침 거르고. 밥도 조금만 떠서 한참 씹잖아요.
“그러니까 네가 같이 먹어 줘야지.”
-뭐가 다르다고요.
“밥맛이 좋아져서 더 잘 들어가.”
뻔뻔하게 말하니 권호영이 헛웃음을 밀어냈다. 나직이 터진 숨소리가 듣기 좋았다.
-잔소리 피하는 방법이 바뀌었네요.
“넌 눈치가 빨라진 것 같다.”
둘은 동시에 작은 웃음을 터트렸다. 농담 섞인 대화를 주고받으니 그제야 마음이 한시름 놓였다. 단여명은 몸을 빙글 돌려 베개에 머리를 붙였다. 통화를 스피커폰으로 전환해 놓고, 가슴 위에 핸드폰을 올려 편한 자세를 갖췄다.
“일하는 거 힘들지는 않아? 서빙 처음이라면서.”
-할 만해요. 친구랑 같이 하기도 하고.
적막하기만 했던 방 안이 그의 목소리로 채워졌다. 단여명은 깊은 울림을 가진 목소리를 귀담아듣다가 문득 하나의 생각을 떠올렸다.
친구……. 돌이켜 보니 누구랑 같이 일하는지 정확히 묻지 않았다. 그의 입을 통해서 친구라고 들은 사람은 민들레와 윤재윤뿐이었다. 그래서 둘 중 하나일 것이라고 무심결에 생각해 버렸다.
“친구 이름이 뭐라고 했지?”
언제 한번 말해 준 적이 있는 척 그리 묻자 권호영은 별 의심 없이 답했다.
-김지영이요.
“아……. 여자?”
-네.
으음……. 단여명은 대강 알아들은 척하고 곧장 딴생각에 잠겼다.
처음 듣는 이름, 그리고 다른 성별. 남자가 아니라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더 별로라고 해야 할지. 그가 선호하는 스타일을 모르니 어느 쪽이든 찝찝했을 것이다. 다음에 이상형을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하며 단여명은 질문을 계속했다.
“나이는?”
-저랑 같아요.
“친해?”
-아니요. 걔한테 빚진 게 있어서 같이 해 주는 거예요.
동갑내기 여자애한테 빚을 져? 얼굴도 모르는 여자애의 정보가 차곡차곡 쌓일수록 마음 한구석이 꺼림칙해졌다. 손가락으로 침대 위를 툭툭 두드리던 단여명은 몇 번 주저하다가 결국 목소리를 냈다.
“예뻐?”
-뭘 그런 거에 관심을 가져요. 제 친군데.
…응?
단여명은 베개에 붙이고 있던 머리를 번쩍 위로 들었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가슴 위에 올려둔 핸드폰이 스르르 미끄러져 침대를 나뒹굴었다.
‘뭔데 사춘기 온 아들처럼 뾰족한 말투지?’
당황스러워 눈이 빠르게 깜빡거렸다. 쟤가 저렇게 차갑게 말할 줄도 알았나? 처음보다 많이 편해지고, 가까워졌으니 격 없이 말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건 그런 문제가 아니라…….
아니, 당연히 관심을 가지는 게 맞지 않아? 너랑 같이 일하는 사람이라는데? 친구라는데? 여자라는데? 둘이 알콩달콩 하하 호호 하면서 새로운 감정을 싹틔울지 누가 알고? 그러니까 괜히 이상한 오해 안 했으면 좋겠고, 네 친구니까 신경 꺼라, 이 말이야?
남남 사이에 친구는 있어도 남녀 사이엔 친구가 없다. 생각할수록 억울해져 말문이 막혔다. 내가 무슨 큰 관심을 보였다고…. 그냥 네 눈길이 끌릴 정도로 그 사람이 매력적이냐는 말이잖아. 속 좁게 보일까 봐 나름 고민하다가 던진 말인데 그게 싹둑 잘려 나갔다. 속이 쓰렸다.
-형, 저 들어가 봐야 돼서. 이따가 다시 연락할게요.
그는 성격이 순해서 질투나 집착이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제게는 있었다. 그런 질투나 집착.
“이따가 언제?”
기분이 상해 절로 냉랭한 목소리가 튀어 나갔다. 홧김에 쏴붙인 말이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절절매는 느낌이라 마음에 안 들었다. 기분이 틀어진 마당에 연락을 기다리겠다는 티를 팍팍 내는 것 같지 않은가.
아니, 그게 아니라 연락을 하긴 할 거냐고. 말로만 그러는 게 아니냐는 뜻이었는데…. 성질이 나니 말도 반 토막이 났다.
단여명은 어찌 주워 담을지 망설이다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많이 피곤해서 날카롭게 말한 거겠지. 연락도 잘 안 될 정도로 바쁘다는 애한테 별것도 아닌 일로 트집 잡고 싶지 않았다.
“…아니, 그래. 알겠어. 나중에 시간 나면 연락해.”
-형.
그대로 통화를 종료하려던 손이 멈칫했다.
형.
그 별거 아닌 호칭과 옷소매를 잡아채는 목소리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그를 느낀 장본인이 꽤나 주책맞은 반응이라고 생각했을 만큼.
-제가 한국에 오고 싶어서 온 게 아니라고 했던 말, 기억해요?
“…….”
-원해서 온 게 아니라서 하고 싶은 게 아무것도 없었거든요.
뜬금없고도 갑작스러운 얘기를 꺼낸 권호영은 차분한 기색이었다. 그의 내밀한 뒷면을 남몰래 알게 된 단여명만 당황해 눈동자를 굴렸다.
-사실 제 인생은 매번 그랬어요. 뭐가 되고 싶은지도 모르겠고, 뭐 때문에 열심히 사는지도 모르겠고. …그래서 그냥 잘하는 것만 했어요. 계속해 왔던 것만.
떠들썩한 가게의 소음을 넘어 낮은 목소리가 선명히 울렸다. 성대가 떨리고, 공기가 진동한 음이 전파로 바뀌어 고막으로 흘러들었다.
-그런데 이제 알 것 같아요. 뭘 하고 싶은지.
방금까지의 기분도 잊고, 단여명은 그가 만들어낸 목소리에 빨려들었다. 그가 지금 느끼고 있을 감정, 그리고 과거에 느꼈을 혼란. 그 모든 것이 가슴을 스치고 마음에 녹았다.
-보고 싶어요.
그 말을 끝으로 전화는 뚝 끊겼다.
‘보고 싶어요.’
나도.
뒤늦게 그런 메시지를 보낼까, 하다가 결국 관뒀다. 보고 싶으면 잠깐 짬 내서 보러 오면 되지. 어디 멀리 떨어져 사는 것도 아니고. 그런 불만을 피력하고자 메시지를 보내지 않은 것과 별개로 마음은 붕 떠올라 가라앉지 않았다.
‘아주 들었다가 놨다가…….’
선수 다 됐어, 권호영.
단여명은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얘도 이런 기분이었으려나. 있었던 일을 없었던 셈 치다가 아래를 빨아 주겠다고 하고. 먼저 계산하겠다는 핑계로 대뜸 손잡고. 야경이 예쁘다는 호텔 앞에 차를 세우고. 연애 초짜인 권호영은 얼마나 마음을 졸였을지.
[점심은 먹었어요?]
일방적으로 통화가 끊긴 후 사흘이란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먼저 연락이 온 것은 고작 메시지 하나가 전부였다.
전화를 걸어도 열에 여덟은 무시당했으며 정신이 없어서 못 받았다는 메시지가 돌아왔다. 그에 대한 답장을 보내도 반나절이 지나야 겨우겨우 답신을 받을 수 있었다.
[계란찜 다 먹은 지 오래야]
단여명은 메신저 창을 불만 어린 눈으로 내려다보았지만, 순순히 답장을 돌려보냈다.
정말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놈.
그럼 나는. 나보다 큰 사람이 내 끼니를 챙겨 주는 건 신경이 안 쓰일까, 호영아? 어느 누구라도 지속적인 관심을 받으면 호감을 갖는 법이다. 넌 얼마만 한 사랑을 어떻게 받았는지, 그것을 모자라게 받아서 잘 모르는가 본데, 원래 사람이라는 게 다 그런 거다.
호감이 생기면 관심이 가고, 관심이 가면 신경이 쓰이고. 신경이 쓰이면… 가랑비에 옷이 젖듯 어느샌가 그 사람이 가슴속에 떡하니 들어찬다.
‘안 되겠다. 오늘 얼굴 보러 가야지.’
어디 마음대로 해보라지. 바빠 죽겠는데 왜 찾아왔냐고 성내든, 무슨 일 같은 것도 없고 저를 피하는 게 아니라고 변명하든. 김선오에게 붙들린 처지라 그와 얽힌 사정을 말하지도, 좋아한다는 고백으로 환심을 사지도 못하겠지만, 그래도. 얼굴을 보고 얘기하면 속에 든 감정이 여실히 드러나니까. 그걸 좀 확인받고 싶었다, 오늘은.
“여명아, 술?”
10번. 평범한 숫자가 우습다고 생각한 지 10번째.
“아니, 그냥 물 먹을래.”
10번의 횟수를 채운 오늘, 만약 김선오가 영상에 대해 어떤 말도 꺼내지 않으면 연이어 빌을 만날 생각이었다.
그럼 저 또한 시간이 나지 않을 테니까. 둘 다 바빠지면 아예 만나지 못할 테고… 오늘 좀 속상할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섭섭하게 구는 권호영이 어느 때보다 보고 싶어졌다.
“너 여름엔 날음식 안 먹잖아. 슬슬 더워지는데, 지금 많이 먹어두라고. 또 잘못 주워 먹고 탈 나지 말고.”
“내가 개냐. 뭘 잘못 주워 먹게.”
잡담을 나누는 순간마저도 심장이 기분 나쁘게 조여들었다.
“개는 아니던데. 상한 냄새 구별도 잘 못하면서. 어느 집 개가 그렇게 후각이 둔해?”
김선오도 오늘따라 묘하게 표정이 밝지 못했다. 아마 그도 오늘이란 걸 알고 있을 것이다. 자기가 뻔뻔하게 요구했던 10번의 만남이 오늘로써 끝이라는 걸.
“많이 먹어. 회 좋아하잖아.”
그걸 알고 있으니까 사방이 막힌 곳으로 식사 자리를 예약했겠지.
“응.”
접시 위에 가지런히 놓인 모둠회가 시야에 들어왔다. 단여명은 얇게 썰린 회 한 점을 젓가락으로 집어 입안에 넣었다.
“어때. 먹을 만해?”
입안에 든 내용물을 한 입 씹기도 전에 쏜살같은 물음이 던져졌다. 단여명은 고개를 끄덕여 주곤 괜히 물잔에 손을 올렸다.
‘넌 비참하지도 않냐.’
싫다는 사람 붙잡고 전전긍긍하는 거. 전과 비교하지 않아도 느껴지는 것이 있을 텐데. 차마 뱉지 못한 말은 음식물과 함께 목구멍 아래로 넘어갔다. 초장을 찍은 회는 놀랍게도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좌식 테이블 위의 접시는 채워지고 빠지고를 반복했다. 옆구리가 조그맣게 파인 갈치구이가 치워진 자리엔 새우찜이 놓였고, 인원수만큼만 까진 새우 껍질 옆엔 매운탕이 올라갔다.
얼큰하게 간을 낸 매운탕은 보글보글 끓으며 졸아만 갔다. 마주 앉은 두 사람의 앞엔 양이 전혀 줄지 않은 날치 알밥이 놓여 있었다. 침묵이 흐르는 시간은 갈수록 빈번해졌고, 식탁 위를 오가는 젓가락은 바삐 움직이지 않았다. 같은 공간에 앉은 채 서로 다른 생각을 하느라 식사와 대화, 둘 중 무엇도 집중하지 못했다.
횟수를 지정한 만남을 시작한 후로 두 사람은 늘 그랬다. 김선오가 혼자 떠들다시피 하면 단여명이 적당히 맞장구쳐 적막을 메웠다. 그런데 말을 붙이던 사람이 입을 닫아버리니 그대로 무거운 침묵이 깃들었다.
당장이라도 이 공간을 벗어나고 싶었지만, 단여명은 조용히 자리를 지켰다. 보슬보슬한 밥이 혓바닥 위에서 모래알처럼 부서졌다. 불편한 기류에 숨이 턱 막히고 목이 바짝 말랐다. 물을 몇 번이나 넘겨 봤으나, 갈증은 해결되지 않았다.
“숫자는 잘 셌어?”
모든 상을 치우고 후식으로 나올 차를 기다리던 참이었다. 김선오가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씩 웃었다. 오늘 보았던 것 중 제일 자연스러운 웃음이었지만, 단여명은 따라 웃지 못했다.
“오늘이 마지막이잖아. 열 번.”
“……아.”
너무 단도직입적으로 던져진 말에 멍청한 감탄사가 흘러나갔다. 단여명은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다리 위에 얌전히 놓인 주먹이 꽉 옹송그려졌다.
‘우리 사이를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를 달라는 소리야.’
순간 사람의 말소리가 조용히 울리던 카페 안으로 돌아간 기분이었다. 앞에 앉은 얼굴은 그때와 다르지 않은 듯 사뭇 달랐다.
눈과 귀를 막고, 막연히 친구처럼 지내던 관계 속에 위아래가 명확히 갈렸다. 은연중 회피하던 순간이 닥치니 어떻게든 잘 될 거라고 스스로를 다독였던 것이 멍청하게 생각됐다.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었다. 그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몰라 그냥 자리를 박차고 도망치고 싶었다. 오늘이 끝이 아닐 거란 불안한 생각이 머릿속을 번잡하게 채웠다. 하나라고 믿었던 영상이 두 개, 세 개로 늘어날까 봐. 김선오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머리채를 쥐고 흔들었다.
그냥 좀 놔주면 안 되냐고. 그리 추하게 매달리고 싶은 충동에 손끝이 들썩였다. 더 이상 마음속에 짐을 얹고 살기 싫었다. 답지 않게 화를 냈던 권호영의 얼굴이 아직도 눈앞에 선했다. 그러니, 더 이상은…….
“……뭐 하는 거야?”
바로 다른 얘기로 넘어갈 줄 알았던 김선오는 예상 밖의 행동을 보였다. 퇴근 후 바로 왔다는 말마따나 그의 차 뒷좌석엔 서류 가방이 실려 있었다. 그런데 차 안에 두고 온 줄 알았던 서류 가방이 어째선지 그의 손에 들려 있었다.
“오해할까 봐 미리 말해두는데, 의도한 거 아니야.”
가방 안에서 노트북을 꺼낸 김선오는 퍽 사무적인 태도였다. 테이블 위에 노트북을 올린 그는 작은 통을 꺼내더니 그 안에서 무언가를 또 꺼냈다. 평범해 보이는 USB였다.
“일부러 찍은 거 아니라고. 우리 영상.”
노트북에 USB를 연결한 김선오가 화면을 반대편으로 돌렸다. 영상의 길이는 20분. 그가 스페이스 바를 누르자 시간이 흐르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없었던 차 안에 곧 두 명의 남자가 올라탔다. 몇 번 말을 주고받던 그들은 말을 맞춘 듯 동시에 입술을 포갰다. 코끝이 스친 걸 기점으로 입맞춤은 갈수록 깊어졌다. 몇 분 지나지 않아 조수석에 앉아 있던 남자가 다른 남자 위에 올라탔다.
“너랑 그렇게 헤어지고 나서 가벼운 접촉 사고가 났었어.”
곧게 뻗은 손이 방향키를 누르자 영상이 10초씩 건너뛰어졌다. 그들은 같은 자세를 유지한 채 입맞춤에 열중했다. 아니, 손의 위치는 달라졌다. 뺨을 감쌌다가, 뒷목을 끌어안았다가, 허리를 만졌다가. 손을 부산스레 움직이는 중에도 맞붙은 입술은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블박 영상 돌려보다가 너랑 키스했던 장면이 나와서…. 혼자만의 추억으로 남겨두려고 했는데, 예나 지금이나 미련 빼면 시체인 남자라.”
단여명은 넋이 나간 눈으로 노트북 화면을 응시했다. 영상 속에서 생동감 넘치게 움직이는 인물들이 너무도 낯설었다.
여자와 남자가 아닌, 남남. 거울로 보이지 않는 자신의 뒷목과 머리통이, 그를 감싼 손과 자세가 불편한 듯 뒤척이는 움직임이. 친구로 가깝게 두던 이들의 비밀스러운 영상을 훔쳐보는 듯해 상당한 괴리감을 안겨 줬다.
“정말 네가 보고 싶었어.”
영상은 아래에 있는 남자가 고개를 드는 장면으로 끝났다. 위에 올라탄 남자에게 장난스러운 미소를 짓는, 김선오의 얼굴로.
“이러면 공평해지지?”
커다란 손이 테이블 위를 불쑥 가로질렀다. 바로 앞에 뭉툭한 무언가가 놓였다. 김선오가 막 증명해 보인, 자신들의 치부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USB였다.
“…….”
단여명은 창백하게 굳은 얼굴로 어떤 반응도 보이지 못했다.
‘…이렇게 순순히?’
이렇게 허무하게 끝이 난다고?
김선오와 사이가 비틀리기 시작했을 때부터 내심 그리 믿어왔다. 그가 그 정도까지 최악은 아닐 것이라고.
같이 사는 동생에게 멋대로 자신들의 영상을 보여줬을 때도, 그 영상을 빌미로 협박 어린 제안을 들이밀었을 때도. 아무리 그래도 예전에 사귀었던 사람인데. 좋을 때도 있었고, 나쁠 때도 겪어 누구보다 그를 잘 안다고 생각했다. 그를 믿는 족족 보기 좋게 뒤통수 맞았지만.
그런데 늦게라도 이래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겠다. 지금 제 기분이 어떤지. 혼란스러운 감정 속에 안도감이 있었고, 안도감 속엔 배신감이 있었다.
그는 조금이라도 남은 신뢰를 등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기껍게 봐주기엔 김선오가 지금껏 벌인 짓이 있었다. 그래서 그의 영상을 구해 쌍방으로 협박하겠다는, 무식하기 짝이 없는 방법을 택했다. 마지막으로 남긴 동아줄을 잡기엔 소름이 끼치도록 거부감이 들었으니까. 그래서 썩은 동아줄은 뒤로, 아주 맨 뒤로 외면하듯 순서를 밀어뒀다.
차선책을 택했다고 하더라도 지금까지 버틴 시간이 가볍지 않다는 건 아니다. 내가 어떤 심정으로……. 어떤 마음으로 네 얼굴을 봤는데.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맞은편에 보이는 사람은 친숙한 얼굴이었다. 아마 눈을 감고 손으로 얼굴을 더듬어도 이름 석 자를 맞출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리도 많은 감정이 폭풍우처럼 쏟아져 어깨를 적셨다. 고분고분하게 나오는 김선오가 좋은 만큼, 끔찍하게 싫었다.
“이게 무슨 짓…….”
“좋아해.”
힘이 잔뜩 실렸던 주먹이 순간 움찔 떨렸다.
“좋아해, 여명아.”
울분이 가득 찬 얼굴에 미미한 당황이 섞였다. 그를 앞에 두고 김선오는 쓰게 웃었다.
“아직도 네 얼굴만 보면 심장이 뛰어. 거짓말 같지만 그래. 우리가 어떻게 끝나든 아마 늙어서 눈을 감는 순간까지도 네가 생각날 거야.”
“…….”
“첫사랑은 아니지만, 첫사랑처럼 좋아했어.”
조곤조곤 던져지는 말이 마치 꿈결처럼 들렸다. 차분히 가라앉은 맞은편의 얼굴이 현실감각을 까마득히 내던지게 했다.
참 지독히도 싸웠던 자신들이다. 몇 번을 싸우고, 헤어지고, 다시 붙고, 결국 이별을 맞았다. 그런데 앞에 놓인 얼굴은 헤어졌을 때도 보지 못했던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일방적인 사랑에 지친 얼굴.
“돌이켜 보면 잘 헤어진 것 같은데 문득문득 생각이 나더라고. 그래서 먼저 연락했고… 잘 안됐지. 다 끝났는데, 마음이 갈수록 커지는 게 무서워서 어떻게든 널 가져야겠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너랑 가장 가까워 보이는 사람에게 실수했고…. 그만큼 간절했다는 변명은 그만둘게.”
조용히 숨을 들이켠 그가 이윽고 고개를 들었다.
“이제 대답을 듣고 싶어.”
“…….”
“여명아. 나랑 다시 만날 생각 있어?”
잔잔한 목소리가 메아리치듯 고막을 울렸다. 천천히 닿은 눈길에 단여명은 말없이 그를 마주 보았다. 상대의 대답을 기다리는 순간마저도 그는 무섭도록 침착했다. …아니, 무서울 정도로 침착한 척했다. 테이블 아래로 바짓단을 꽉 거머쥔 주먹을 보고야 말았으니까.
머리가 좀 멍했다. 그의 마음은 일찍이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말문이 막힐 정도로 그 마음이 커다랗게 부풀어버린 줄은 꿈에도 몰랐다. 옆에서 내내 지켜보았음에도 그랬다. 아마 어떻게든 숨기려고 아등바등한, 숨죽인 노력이 담겨 있을 테지. 그가 짝사랑하는 상대는 그 마음을 부담스러워할 테니까.
생각이 거기까지 닿자.
“하….”
단여명은 그만 허탈한 웃음을 터트렸다.
김선오. 넌 나에게 옛정이 없느냐고 물었다. 물론 있다. 옛정이 있어 너와 잠깐 멀어지더라도 그 끝은 친구라는 이름표를 걸어두고 싶었다. 제 20대의 한 부분을 나눠 가진 사람을 나쁘게 기억하고 싶지 않았다.
“감동적이긴 한데 물을 걸 물어야지.”
그러나 지금은 알았다. 이젠 지인으로조차 남겨둘 수 없다는 것을. 제가 한때 품었던 것은 멍청한 미련에 불과했다.
“싫어, 개 같은 새끼야.”
머리에 올랐던 열이 싸늘하게 식었다.
“넌 내가 특별할지 몰라도 난 아니야.”
절절하게 전해진 마음을 바닥에 내팽개칠 수 있는 사람이 나여서. 불행 중 그나마 다행이라고 단여명은 생각했다.
“…그렇구나.”
김선오는 예상했던 대답을 들었다는 듯 큰 반응이 없었다. 시선을 내리깐 채 고개를 주억이더니 이내 가볍게 한숨지었다. 다시 얼굴을 들었을 땐 그는 전보다 후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래, 이제야 단여명답네. 그간 내 눈치 보느라 고생했을 텐데.”
“이게 뭐 하는 짓거리야. 그동안 재밌었냐? 성질 죽이고 네 비위 맞추는 거 보면서 재밌었냐고.”
차게 가라앉은 표정과 달리 목소리 끝엔 날이 섰다. 다 알고서 그런 것이다. 제가 본인의 눈치를 보며 설설 길 것을. 일이 다 정리된 것 같으니 아량 넘치는 사람처럼 군다. 그 모습이 주먹을 날리고 싶을 만큼 비열해 보였다.
“재밌었냐고…….”
“…….”
“아니.”
솔직히 재미없지는 않았어. 그런 말로 복장을 뒤집어 놓을 줄 알았던 김선오는 예상외의 답변을 꺼내놓았다.
낯빛을 흐린 그는 똑바로 눈을 마주쳤다. 솔직한 심정을 고백하는 것처럼 잠깐의 흔들림조차 없었다. 단여명은 그에 대적하듯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저게 진짜인지, 거짓인지 의심하는 눈길을 보냈다.
“처음엔 그렇게라도 네가 내 생각을 하면 좋다고 생각했어.”
“…….”
“지금은…….”
김선오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입술을 안쪽으로 말았다. 한동안 침묵하는 게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눈치더니 불현듯 이쪽을 흘깃 살폈다. 그리고 돌연 입 끝이 휘도록 환한 미소를 내걸었다. 금방이라도 어깨를 떨며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낼 법한, 미안한 감정과 거리가 있는 웃음을.
뻔뻔하게도 그는 표정을 숨기려는 일말의 성의도 보이지 않았다. 조롱기가 담긴 웃음은 아니었다. 뭔가… 훈훈한 광경을 보았을 때. 그럴 때 사람들이 자주 짓는 웃음이었다.
왜 갑자기 혼자 실실거리고 지랄이야. 뜬금없고 무슨 생각으로 웃는지 몰라 단여명도 그런 표정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미안, 귀여워서.”
뒤늦게 제 표정을 인식한 김선오가 주먹으로 입가를 가렸다. …뭐? 느닷없는 얘기에 단여명은 한쪽 눈썹을 살며시 찡그렸다. 그게 뭐가 그리 재밌는 반응이라고, 김선오의 웃음기가 더욱 짙어졌다.
“너 귀엽다고.”
놀랍게도 잘못 들은 게 아니었다. 단여명은 눈썹 사이를 확 찡그렸다. 무게란 무게는 있는 대로 잡더니. 이제 다 끝났다고 막 나가는 건가? 없던 정이 다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뭐라는 거야. 분위기 파악해.”
“이렇게 쉽게 끝날지 생각도 못 했다는 얼굴이잖아. 어떻게 웃음이 안 나? 입술도 조그맣게 벌어져서. 심각한 햄스터 같아.”
햄스, 뭐? 단여명은 눈썹을 구기는 걸 넘어서 질색하듯 인상을 찡그렸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허, 하고 웃음이 터질 뻔했다. 지금 저 새끼가 대체 뭐라고 지껄이는 거지? 눈치는 집구석에 던져 놓고 나온 건가?
“아, 속 시원하다. 사실 눈 마주칠 때마다 귀엽다고 말하고 싶었어. 네가 싫어할 것 같아서 꾹 참았는데. 아…… 진짜 귀엽고 예뻐. 너무 좋아.”
단여명이 황당해하든 말든 김선오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떠들었다. 후련해하는 얼굴에서 진심이 느껴졌다. 진짜 저딴 식으로 나오니까 동네에 미쳤다고 파다하게 소문난 놈과 겸상하는 느낌이었다. 제가 화내든 말든 싹 무시하는 게 상당히 기분 더러웠고.
끝까지 네 얘기만, 네 감정만 중요하지. 단여명은 입매를 비틀어 웃곤 단숨에 쏴붙였다.
“개소리도 정도껏 해야 들어주지. 진짜 작작…….”
“여명아. 좋아하는 사람 생겼지?”
그러나 각 잡고 화내기도 전에 김선오가 먼저 치고 들어왔다. 이번에도 단여명은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좋아하는 사람. 그 말을 듣자마자 한 사람의 얼굴이 머릿속을 삭 스쳤기에.
“맞잖아. 좋아하는 사람 생긴 거.”
…그걸 어떻게 알았지? 같이 있다 보니까 그런 것까지 티 났나? 단여명은 맞은편을 노려보다가 대놓고 헛웃음을 쳤다. 부정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는 시간이 아까웠다.
“내가 누굴 좋아하든 네가 무슨 상관이라고?”
일부러 상처받으라고 뱉은 말이었다.
“이제 남이잖아, 우리. 주제 파악해.”
엄연한 사실이기도 했고.
대화 내내 그에게 질질 끌려가는 듯한 느낌이 들어 기분이 좋지 않았다. 영상의 원본을 넘겨주질 않나, 심각하게 표정을 굳혔다가 배실배실 웃질 않나, 난데없이 귀엽다고 말하며 속을 뒤집어 놓질 않나. 종잡을 수 없이 튀는 대화의 흐름이 제 감정을 쥐락펴락해서. 그게 끝까지 사람을 비참하게 했다.
“그래, 상관없지.”
상처받았으면 좋겠다는 바람과 반대로 그는 아무렇지 않은 낯이었다.
“이제 아무런 상관없는 사람들이지, 우린.”
좀 섭섭하다는 듯 눈꼬리를 내렸으나 웃음은 그대로 걸은 채라 심히 가볍게 보였다. 그가 자주 보이던 표정과 말투. 단여명이 잘 알고 있는 김선오.
그게 또 사람 마음을 이상하게 했다. 멍청하게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 가지 덧붙이자면,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어.”
테이블 위에 팔꿈치를 얹은 김선오가 턱을 괴었다. 언젠가 영화의 줄거리를 설명해 줬던 때처럼 그는 태평한 목소리로 떠들었다.
“권호영이 안 나섰어도 이랬을 거라고. 약속은 약속이니까. 영상 지운다는 건 못 미더울 거 아니야. 서로 나눠 갖는 게 더 뒤탈 없는 방법이겠지. 내 얼굴도 같이 나온 영상인데, 어디다가 보여줄 생각을 하겠어. 안 그래?”
“…….”
“지금 너 만나 보니까 알겠더라. 그때는 바람이 아니었고, 이제 나 만나면 바람인 거.”
이가 드러나도록 씩 웃은 김선오가 턱을 살짝 아래로 당겼다.
“권호영한테 그렇게 말한 건… 뭐, 귀여운 심술이라고 생각해. 난 속이 좁아서 좋아하는 애 집에 딴 남자가 사는 게 도저히 용납이 안 되더라고.”
둘이 집에서 깨를 쏟을지 난들 어떻게 알아. 그리 중얼댄 다음엔 과장되게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니까 좀 봐주라. 뭔가 오작교 역할 한 것 같아서 내 기분도 그렇게…….”
“잠깐.”
단여명은 그쯤 일방적으로 쏟아지는 이야기를 가로막았다.
“네가 하는 말 하나도 못 알아듣겠어.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깜빡거리는 눈꺼풀의 움직임이 불안정했다. 이리저리 흔들리는 까만 눈동자 속엔 더 이상 분에 찬 감정이 비치지 않았다.
“여기서 권호영이 왜 나와.”
충격과 혼란에 젖은 얼굴로 단여명이 떨리는 목소리를 토해냈다.
5권에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