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작가네 하숙생 4권-다섯째 줄 (8/11)

그 작가네 하숙생 4권

목차

다섯째 줄

여섯째 줄 (1)

다섯째 줄

“엠티…?”

꾹 감긴 눈 끝에 눈물이 대롱대롱 맺혔다. 권호영 입을 가리고 하품하는 단여명에게 물컵을 건넸다. 하얀 이불에 파묻혀 있던 몸이 부스스 상체를 일으켰다. 정전기가 난 머리카락이 민들레 홀씨처럼 위로 붕 떠올랐다.

“언제?”

목구멍 아래로 물을 넘긴 단여명이 미간을 얕게 찌푸렸다. 나른한 주말 오전, 창 안으로 들이비친 햇빛이 보드라운 살결에 희게 감겼다. 권호영은 창문의 커튼을 반쯤 친 다음 깔끔히 비워진 물컵을 도로 가져갔다.

“다음 주 목요일이요.”

“되게 늦게 가네…. 보통 3월 둘째 주쯤에 가지 않나?”

“윗 학번 때문에 미뤄졌다고 하는데 저도 자세히는 몰라요.”

침대에 걸터앉으며 얘기하자 단여명이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잠에서 깨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아 말투와 행동이 굼떴다. 아직 일어날 생각이 없는지 그는 다시 베개에 얼굴을 폭 묻었다.

“재밌겠네.”

팔을 앞으로 뻗은 단여명이 고양이처럼 기지개를 쭉 켰다. 권호영은 말없이 그를 내려다보았다. 제가 집을 비운다고 하는데, 아무런 생각이 없어 보이는 얼굴을.

“왜 그런 얼굴이야. 친구들이랑 술 마시고 놀면 좋지. 그때 아니면 못 즐기는 건데.”

제가 밤마다 머리를 누이는 베개에 단여명이 뺨을 비볐다. 햇빛에 잘 널은 빨래 향이 공기 중에 둥실둥실 떠다녔다.

어제 세탁한 침구는 손으로만 쓸어도 보드라운 향기가 피어났다. 분명 베개에서 나는 냄새일 텐데. 어쩐지 실없이 터진 그의 웃음에서 기분 좋은 향이 풍겨나는 것만 같았다.

“어디로 가?”

“어디라고 들었는데 기억 안 나요.”

“타지?”

“아마도.”

불확실한 대답에도 그는 그런대로 이해를 마친 것 같았다. 졸음이 걷히지 않은 눈꺼풀을 천천히 깜빡이던 단여명은 곧 다시 잠들 것처럼 눈을 감았다.

“서울 밖으로 나가는 건 처음 아니야?”

좋겠네…. 작은 목소리가 빛이 새어든 방 안을 울렸다. 나른하게 풀어진 얼굴이 자못 편안해 보였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권호영은 결국 모난 마음을 감추지 못해 불투명한 목소리를 냈다.

“저 없는 동안 뭐 할 거예요?”

“뭐 하긴. 독수공방하면서 너나 기다려야지, 뭐….”

독수공방이 무슨 뜻인지 몰랐지만, 자신을 기다리겠다는 말은 정확히 이해했다. 권호영은 잠시 침묵하다가 단여명의 옆에 몸을 누였다. 저 말 한마디가 뭐라고. 좀 전까지의 기분이 우습게도 마음이 봄볕에 눈 녹듯 사르르 풀어졌다.

손으로 머리를 받친 채 모로 누우니 단여명이 자리를 비켜 줬다. 손님방의 침대는 남자 둘이 눕기에 비좁았지만, 둘 다 몸을 옆으로 하니 그런대로 공간이 만들어졌다.

“머리 아파요?”

“조금.”

“속은요?”

“그냥저냥…. 좀 메슥거려.”

단여명이 끙,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눈썹 사이에 주름을 잡더니 가슴을 꺼트리며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그의 말마따나 괴로움을 삭이는 듯한 숨결이었다.

“생각보다 컨디션이 괜찮네. 어제 주량 넘겨서 먹었는데.”

“약이 잘 들었나 봐요.”

“…약?”

감겼던 눈이 살며시 뜨였다. 까만 눈동자 속에 설핏 의아감이 스쳤다.

“무슨 약?”

단여명은 금시초문이라는 표정이었다. 기다란 속눈썹을 너울대며 그가 멍하니 되물었다. 권호영은 그를 마주 본 채 따라 눈을 깜빡였다.

“기억 안 나요?”

“…….”

의미를 알 수 없는 물음에 단여명은 두 눈만 끔뻑거렸다. 아마 전 세계 사람들이 통틀어 공감할 것이다. 술 마신 다음 날, 가장 듣기 두려운 얘기 중 하나가 ‘너, 어제 기억 안 나?’인 것을.

“내가 뭐… 했어?”

“별건 아니고….”

천천히 올라간 시선이 이내 말간 얼굴 위를 맴돌았다. 미묘한 눈빛으로 얼굴을 훑던 권호영이 이내 명료한 목소리로 답했다.

“키스하다가 토할 것 같다고 구역질한 거?”

“……어?”

단여명은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권호영의 목소리가 화살이 되어 귓속에 콕 박히는 것만 같았다. …키스하다가 뭘 했다고? 남 일처럼 들리는 얘기를 미처 다 받아들이기도 전이었다. 권호영이 재차 입을 열었다.

“진짜 기억 안 나나 보네.”

“…….”

“냉장고에 있는 숙취 해소제 갖다줬더니…….”

권호영이 잠시 말을 멈추곤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어딘가 의미심장한 눈빛이어서 불안이 몇 배로 가중됐다.

“그거 많이 써요? 먹기 싫다고 울어서 당황했어요.”

그리 마른침을 넘기던 중 청천벽력 같은 소리가 떨어졌다. 머리를 에돌던 졸음기가 축구공 차듯이 저 반대편 너머로 날아가는 것을 느꼈다. 마치 공기 중에 노출된 알코올이 증발하듯이 빠른 속도였다.

단여명은 눈을 커다랗게 키운 채 입술을 살짝 벌렸다. 내가? 내가 정말 그랬다고? 아닌데. 그럴 리가 없는데…. 현실 부정하는 눈동자가 분주히 굴러갔다. 많은 일이 있었던 어제를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낯이었다.

“현관 앞에서 갑자기 무릎 꿇은 건요?”

“…….”

“집에 들어오자마자 제 거 빨았잖아요.”

그쯤 되자 단여명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충격에 젖었다. 숨은 쉬는 건지 예쁘장한 인형처럼 딱 굳어서 미동도 안 했다. 조용히 생각에 빠진 걸 보아하니 어제의 기억을 차근차근 되짚는 중인 것 같았다.

권호영은 새까만 눈동자 속에 제 얼굴이 비치는 걸 가만 들여다보았다. 제 이목구비가 또렷이 잡히는 모습이 깨끗이 잘 닦은 거울이라도 들여다보는 듯했다. 그걸 더욱 가까이서 보려고 거리를 좁힌 찰나였다. 그 눈이 한 번 감겼다가 뜨였다.

“나…….”

아.

“…나 더 잘래.”

부끄러워한다.

“더 자야겠어.”

경황없는 말소리가 웅얼대듯 흘러나왔다. 이불을 손으로 끌어당긴 단여명이 베개에 얼굴을 폭삭 묻었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쓰고, 다리로 그걸 휘감은 채 그가 몸을 약간 둥그렇게 말았다.

그 모습을 보니 짓궂은 마음이 들었다. 분위기 잡는 걸 그리 신경 쓰던 사람이 대뜸 입부터 갖다 댔으니. 저조차도 놀랐는데, 그걸 안 단여명은 얼마나 창피하려나.

“전 맡겨놓은 줄 알았어요.”

그 마음이 이해될 듯했지만, 입이 간질거려 말썽이었다.

“어떻게 보면 도둑질 아닌가….”

“너도 더 자.”

머리맡에서 속달대는 게 얄밉기라도 했는지 단여명이 머리 위에 이불을 덮어씌웠다. 잠깐 스치듯이 본 얼굴이 엷은 붉은색이었다. 이불 속에서 분한 숨을 삭이느라 양 뺨까지 붉은 기가 번진 모습이었다.

어이가 없어 이불을 벗으려고 하니 단여명이 옆통수를 꾹 눌러 침대 위에 뺨을 붙여 줬다. 그에 권호영은 얌전히 머리를 수그려주는 것과 동시에 픽 하고 작은 웃음을 흘렸다. 제가 정말 잠들기를 바라는 마음이 언뜻 간절하게 느껴져서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나갔다. 섬유유연제 향이 폴폴 흩날리는 이불 속에서 작은 웃음소리가 묻히듯 사라졌다.

이불 밖에서 씩씩대는 숨소리가 들렸다. 기억도 못 하는 일로 놀림받는 게 달갑지 않은데, 할 말이 없으니 분할 만도 하지. 입가가 느슨히 풀린 게 낯설어 웃음기를 삭이던 중이었다. 얇은 천 밖에서 뭐라 중얼대는 목소리가 들렸다.

“뭐라고요?”

손으로 이불을 끌어 내린 권호영이 고개를 들고는 물었다. 이불을 썼다가 벗었다가 하느라 두 사람 다 머리가 엉망으로 헝클어진 채였다.

“변태는, 더 자야겠다고…….”

그를 외면하듯 작은 뒤통수는 반대편으로 돌아가 있었다. 잔뜩 힘준 목소리가 마지막 자존심을 주워 담듯 작게 떨리며 나왔다.

***

스쳐 가는 모든 날이 그렇듯 어느덧 밤이 찾아왔다. 비가 내려 우중충한 하늘에 노을의 빛 한 점 없이 금세 어둠이 드리워졌다. 별 하나 보이지 않는 어두컴컴한 밤하늘이었다.

빗물이 고인 웅덩이에 간판의 조명이 동동 떠다녔다. 거리를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물웅덩이를 밟고 지날 때마다 울렁이며 색이 뒤섞였다. 하나로 합쳐질 듯 일렁이다가 그것들은 금세 수면 위에 자신의 빛을 내걸었다.

호텔 뒷문에 선 단여명은 무지개색 물결을 멀거니 바라봤다. 취기가 도는 중에 담배를 무니 머리가 핑 돌았다. 그게 지겹고도 불쾌해 필터의 가장자리를 질겅였다.

“좆같네….”

혼잣말과 함께 긴 숨을 뱉으니 입술 사이에서 뽀얀 연기가 뭉텅이로 빠져나갔다. 요새 치근덕대는 새끼들이 많아져서 안 그래도 남아나지 않던 뒷골이 다 닳을 지경이었다. 술에 취해 대뜸 손목을 잡거나, 어깨동무하고 자기들이 잡은 룸으로 끌고 들어가려는 일이 다반사였다.

다른 곳보다 폐쇄성이 강한 곳이었다. 애인이 있다는 소문은 이미 돌고도 남았을 텐데, 끈덕진 눈길은 끊길 줄을 몰랐다. 애인이 있다는 말만 하고 당사자가 얼굴을 드러낸 적이 없어서인가. 그럴듯한 이유를 대 보던 단여명은 이내 짜증스럽게 단념했다. 다 떠나서 제가 싫다는데, 왜들 지랄인지 모르겠다고.

이름을 몇 개나 만들어가면서 살았을 때도 현타가 왔었다. 상대를 바꿔가며 원나잇 했던 시기였다. 왜 뒤를 대주는 것 말고 만족을 못 해서 이 사달을 벌이는지. 정체성에 혼란을 겪어 새벽마다 담배를 물었다.

그런데 그때보다 더한 현타를 맛보는 날이 올 줄이야. 그게 지금이었다.

김선오는 이 주째 얼굴을 보지 못했다. 갑자기 출장을 가게 됐다며 서울에 돌아오는 대로 연락하겠다고 메시지를 보냈다. 얼굴을 안 보니 속 편하다가도 그와 멀리 떨어져 있다고 생각하면 마음을 졸이게 됐다. 그가 자신들의 영상을 누군가에게 보여줄까 봐. 그걸 본 이름 모를 누군가가 제 이름 세 글자를 알아챌까 봐.

호텔 지하층의 문을 여는 것도 지겨웠다. 타인의 비위를 맞추는 건 나름대로 터득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번 일을 계기로 크나큰 착각이었다는 걸 마음 깊이 깨달았다. 어울리지 않는 곳에 자신을 욱여넣는 일이란 정신 소모가 상당했다. 그런데 거기서 더해 계속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지니 이젠 울분을 삼키는 것마저 벅찬 지경에 이르렀다.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하지. 모든 것이 불확실해 급격히 자신이 없어졌다. 결국 이 이야기도 어떤 형태로 결말이 날 텐데. 그 끝이 배드 엔딩일까 봐 내심 겁이 났다.

‘……아.’

그리 다섯 번째 연기를 뱉었을 때쯤일까. 이러면 안 된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단여명은 불안정한 생각들로 가득 찬 머리를 비우려고 습관적으로 핸드폰을 꺼냈다. 익숙한 저장명을 찾아 대화창에 손가락을 얹은 순간이었다. 오늘 아침에 있었던 일이 불현듯 머릿속을 치고 지나갔다.

“아, 씨….”

먼저 연락하긴 아직 민망한데…….

단여명은 액정에 손가락을 눌렀다가 떼어내길 반복했다. 그동안 공들여 쌓아놨던 이미지의 절반이 어제부로 날아간 것 같다.

권호영이 얘기해 줘서 그나마 집에 어떻게 들어왔는지 기억해 냈다. 심경이 복잡해서 무드 없이 그의 것을 꺼내 물었고, 그걸 지켜보던 권호영이 키스하자고 말했다. 하지만 이후의 기억은 도마뱀의 꼬리처럼 잘려나간 뒤였다. 조금이라도 기억나면 미화라도 할 텐데,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으니 자기 위로조차 할 수 없었다.

‘…그래, 술 먹고 실수할 수도 있지.’

단여명은 울며 겨자 먹기로 빠르게 체념했다. 안 보고 살 수 없는 사이인 데다가, 안 그래도 복잡한데 권호영까지 마음의 짐으로 얹기 싫었다. 어제의 단여명은 단여명이 아니었던 것 치기로 했다.

[자?]

잠깐 고민하던 단여명은 결국 짤막한 메시지를 완성했다. 아직 잘 시간이 아닌 건 알았다. 그냥 기분이 좆같아서 권호영이 조금 보고 싶어졌을 뿐.

펠라에 거부감을 줄여놓느라고 그동안 얼마나 애먹었는지 모른다. 두 번째로 했을 때 그는 입안에 싸려고 하지 않았다. 소변이 나오는 구멍에서 똑같이 나오는 액이지 않으냐며 그는 불결하다는 듯 입안에 물린 물건을 잡아 뺐다.

그리고 세 번째. 입가에 튄 액을 몰래 핥아먹은 걸 들켰을 땐 욕실로 끌려가 입을 헹궈야 했다. 권호영은 제가 몇 번이나 가글하는 걸 뒤에서 지켜봤다. 물로 입을 헹구고 뒤를 돌아보니 치약을 짠 칫솔을 들려 주기까지 했다. 단여명은 토 달지 않고, 권호영이 지켜보는 곳에서 양치질했다.

‘그래도 많이 의존하면 안 되는데….’

둘 다 좋아서 하는 거긴 한데, 권호영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어쩐지 이용하는 느낌을 지우지 못하겠어서. 어제는 다른 날보다 유독 버거운 날이었다. 그래서 술도 취했겠다, 속이 허한 나머지 그의 것을 꺼내 물었다.

그래도 다짜고짜 그러는 건 예의가 아니지. 냉장고에서 바나나를 꺼내 먹는 것도 아니고…. 앞으로 조심해야겠다고 심란한 마음을 달래며 담배를 반쯤 태웠을 때쯤이었다.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단여명은 주머니에 넣어놨던 핸드폰을 꺼냈다. 권호영에게 답장이 온 줄 알고 화면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 액정 위에 떠 있었다.

“네.”

단여명은 급하게 담배를 비벼 껐다. 전화를 받는 것과 동시에 핸드폰의 음량을 높였다.

“통화 괜찮아요. ……소리? 아, 밖이에요. 요즘 운동을 못 해서 잠깐 집 앞으로 산책 나왔어요.”

사람이 없는 곳을 찾느라 발걸음이 빨라졌다. 주변을 둘러보며 걷던 단여명은 곧 인근에 공원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냈다. 핸드폰을 귀에 붙인 채 얼른 방향을 바꿔 걸었다.

“그때는 피곤해서 그랬던 거고…. 잠 설친 지가 언젠지 기억도 안 나는데.”

-넌 어쩜 어릴 때랑 변한 게 없니. 매번 엄마 걱정만 할 줄 알지. 진짜 잘 지내고 있는 거 맞아?

걱정이 가득한 목소리가 듣기 좋은 쓴소리를 건넸다. 단여명은 어렴풋한 웃음기를 띤 채 말했다.

“걱정 마세요. 진짜 잘 지내요.”

-그런데 왜 이렇게 연락이 뜸해? 일주일에 한 번은 꼭 전화하더니…. 엄마는 안 좋은 일이라도 생긴 줄 알고 걱정했잖아. 저번에 한 통화도 계속 끊으려는 것 같아서…….

“…….”

-여명아, 정말 별일 없지?

정겹고도 따뜻한 목소리가 마음을 흔들어놓았다. 단여명은 입술을 꾹 다물었다. 위액이 역류할 것처럼 목구멍이 뜨거워진 건 잠시뿐이었다.

“……오랜만에 쉬는 거잖아요. 제가 노느라 소홀했나 봐요. 이제 잘할게요.”

늘 그렇듯 눈물은 나지 않았다.

-기억나? 네가 어렸을 때 엄마 우는 거 보자마자 뭐라 말했는지.

그 뒤로는 소소한 얘기가 오갔다. 단여명은 한적한 산책로를 거닐며 전화기 너머로 들려오는 목소리에 집중했다. 몇 번이나 들어 이미 뇌리에 각인된 대답을 꺼내놓으며 입가에 웃음을 머금었다.

“엄마, 왜 울어? 회사가 못살게 굴어?”

-맞아. 어려서도 얼마나 영특하고 어른스러웠는지….

엄마가 작은 중얼거림을 뱉었다. 나지막한 목소리에서 아련한 추억의 향이 묻어 나오는 듯했다.

-조그만 게 엄마 운다고 안아 주는데, 그게 얼마나 위로가 됐는지 몰라. 집에 가는 길에 걱정을 한 보따리 안고 갔거든. 이제 앞으로 어떻게 둘이 살아야 하나, 하고.

단여명은 눈을 내리깐 채 쓴웃음을 지었다. 아마 대여섯 살 때쯤이었을 것이다. 부모님이 이혼을 결정했던 시기가.

먼 옛날이어서 군데군데 공백이 있는 기억이었다. 뭣 모르던 나이에 겪어 어리둥절한 와중에도 눈물로 얼룩졌던 엄마의 얼굴만큼은 뇌리에 생생했다. 엄마는 이제 아빠는 오지 않는다며 미안하다는 말을 끝으로 자신을 끌어안고 펑펑 우셨다. 그때 어렴풋이 깨달았던 것 같다. 이제 엄마의 버팀목은 자신밖에 남지 않았다는 것을.

-그런데 네가 그 고사리 같은 손으로 울지 말라고 토닥여 주는데…… 그때 다 괜찮아졌어. 어떻게든 살아지겠지, 하고. 엄마는 그때 생각하면 아직도 울컥한다?

“언제 적 얘길 해요.”

단여명은 부러 장난스럽게 말했다. 가벼운 웃음소리를 들었을 텐데, 어쩐지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훌쩍거리며 울음을 삼키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우는 것 같지는 않은데…. 왠지 평소보다 감성적인 게 마음에 걸렸다.

“오늘 뭔가 이상한데…. 혹시 술 마셨어요?”

-그래, 와인 한잔했어.

“한 잔 아니고 한 병 같은데.”

-하여튼 우리 아드님은 못 속이겠네. 마침 딱 한 병짼데.

그제야 엄마가 웃음소리를 냈다. 단여명은 따라 웃다가 시선을 내렸다. 발밑으로 가로등의 불빛이 만들어낸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발을 내딛는 대로 흔들리는 밤그림자를 보다가 불쑥 목소리를 냈다.

“무슨 일 있었던 건 엄마 아니에요?”

고민하다가 뱉은 목소리는 생각보다 차분하게 흘러나갔다. …너무 무거운 분위기는 좋지 않은데.

“그런 목소리라서.”

그리 생각하면서도 걱정하는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

그 말에 엄마는 잠자코 침묵을 지켰다. 단여명은 이름 모를 풀벌레가 우는 소리를 귀 너머로 들으며 그녀가 말문을 열기만 기다렸다.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테이블 위에 조용히 와인 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울렸다.

-사실 엄마가 오늘 좀 이상한 얘기를 들었어.

“이상한 얘기요?”

-응. 호영이네 가족 얘긴데…….

단여명은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단조로운 일상이 지겨워 우울하다거나, 회사 사람들과 의견 충돌을 벌여 짜증이 난다는 얘기를 꺼낼 줄 알았다. 그런데 의외의 이름이 나와 약간 당황스러웠다.

그녀의 입에서 ‘호영이’라는 이름을 듣는 것이 낯설지는 않았다. 전화할 때면 항상 권호영의 안부를 묻곤 했으니까. 하지만 그의 가족까지 언급한 적은 없었다. 요즘 둘만 남으면 엉큼한 짓을 하느라 바쁜, 자신보다 6살 어린 애의 가족 말이다.

“호영이네 가족 왜요?”

양심이 따끔거린 건 잠시뿐이었다. 엄마의 기분이 가라앉은 이유가 그의 가족과 관련된 얘기란 것에 초점이 맞춰졌다. 그녀의 목소리가 좋지 않은 것이 심상치 않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호영이네 엄마랑 한인 모임에서 만났다는 얘기는 일전에 말했지?

와인으로 목을 축인 엄마가 잠시 후 말문을 열었다.

-알고 보니까 하는 일도 비슷하고, 남편이랑 이혼한 것도 같아서 얘기를 많이 나누게 됐거든. 그러다 친해져서 호영이도 너희 집에 맡기게 된 거고……. 성격이 조금 찬 편이기는 한데, 공통점이 많아서 잘 맞는 부분도 많았어.

단여명은 가로등 밑을 지나며 그녀의 얘기를 경청했다. 그녀와 통화할 때마다 흘러가듯 간간이 들었던 얘기라 여기까지는 아는 내용이었다.

-엄마들끼리 모이는 자리는 애들 얘기가 나오기 마련이거든. 처음에는 교육관이 다르다고 생각했지. …그런데 계속 듣다 보니까 묘하더라고.

“묘하다고요?”

-음…… 무슨 느낌이었냐면, 자식이 아니라 애완동물 얘기를 하는 것 같았어.

“…….”

앞으로 움직이던 다리가 천천히 멈춰 섰다. 무릇 부모라면 소중하게 여길 자식과 상응하지 않는 비유였다. 그에 말문이 막혀 순간적으로 입이 다물렸다. ‘애완동물’이라고 말한 목소리를 상세히 곱씹어 보았지만, 가볍게 말한 투는 아니었다. 조심스러웠으면 더 조심스러웠지.

“……애완동물?”

권호영은 아버지가 없다. 아니, 단여명과 마찬가지로 아버지라 부를 사람이 없다고 봐야 맞을 것이다. 그건 이미 엄마에게 들어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무슨 말이… 그게 무슨 뜻이에요?”

그래서 막연하게 그리 생각해 왔다. 엄마와 자신처럼 그도 모친과 사이가 좋을 거라고. 가족이라곤 단 둘뿐이니까. 제가 그렇게 컸으니까 권호영도 자신과 같을 거라고 아무 생각 없이 그리 어겨버렸다. 아주 섣부르게도.

-…듣기 조금 불편하지? 물론 그런 식으로 얘기한 건 아니지만, 말하다 보면 느껴지는 게 있잖아. 그냥 느낌이 그랬다는 거야. 애한테 사랑을 주긴 하는데, 그게 통제적이란 느낌이 강해서.

엄마가 뒷수습하듯 찬찬히 얘기를 늘어놓았다. 단여명은 혼란스러워지는 마음에 말없이 입술을 안쪽으로 말았다.

-호영이네 엄마는 남편이랑 갈라서고 다른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더라고. 그쪽은 프리랜서다 보니까 수입이 불안정해서 애 키우는 게 많이 고됐나 봐. 그래서 느낀 게 있었는지… 애 공부 습관 들여놓는 걸 엄청 중요하게 생각하더라. 그래야 나중에 고생하지 않을 수 있다면서.

“…….”

-어딜 가나 성적을 제일 중요하게 생각하는 부모들 있지. 엄마도 그 마음은 알아. 어느 부모가 자식이 고생하는 꼴을 보고 싶겠어?

엄마가 조용히 한숨을 삭였다. 단여명은 그녀의 얘기를 들으며 권호영을 둘러싼 것들을 차근차근 떠올렸다. 펜을 바르게 쥔 손과 노트를 들여다보던 눈. 그리고 취미랄 게 고작 운동뿐인 그의 생활 습관들을.

평온하게만 보였던 그 모습들이 어쩐지 지금은 메마르게 느껴졌다. 알고 보니 순해 빠진 성격도, 서투른 사과를 전하며 자리를 비키던 모습도. 그냥 조금 귀엽고 웃기는 녀석이라고 생각했는데…….

-여기부터는 엄마 생각인데, 성적에만 신경 썼지 제대로 된 친구도 없었던 것 같아. 흘러가는 말로는 자기한테 도움 안 되는 친구는 나중에 알아서 쳐냈다고 하는데. 그전에는…… 모르지. 그것도 관여했을지.

“…그건 조금 과한 생각 아니에요?”

가만히 듣고 있던 단여명이 조심스레 의문을 제기했다. 엄마의 개인적인 견해였지 권호영의 어머니를 통해서 나온 말이 아니었다. 단순한 추측일 수도 있을 거란 생각에 입이 저절로 열렸다. 어쩌면 권호영의 불행이 거기서 더해지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도 내심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젠 독립심을 기를 때가 된 것 같아서 한국으로 가는 걸 권했대.

깊은 한숨이 섞인 목소리가 귓가를 명료히 울렸다.

-엄마는 그 얘기 들으면서 마음이 좀 그랬어. 무슨 프로그램 짜놓은 것도 아니고…….

길게 늘어진 말꼬리를 따라 의식이 흘러가듯 일순간 하나의 장면이 뇌리를 스쳤다. 한국에 오고 싶어서 온 게 아니라고. 같이 차를 타고, 햇빛을 맞으며 대화하던 중 그런 말을 들은 기억이 있었다.

-그 아이가 그걸 원했고, 그렇게 자라면서 행복했을까? 좋게 생각해 보려고 해도 그런 생각이 드는 거 있지. 티는 안 내도 애가 얼마나 정에 목말랐을지…….

단여명은 잠시간 침묵했다. 조여든 목구멍 새를 비집고 뜨거운 숨이 새어나갔다. 화가 났나, 아니면 속상한 감정을 눌러 삭였나. 그 마음을 차분히 되돌아볼 여유는 나지 않았다.

“그래서 뭐라고 말했어요?”

-엄마 성격 알잖아. 돌려서 좋게 말해 봤지. ‘아이가 원했던 걸까요?’ 하고. 그런데 그렇게 말하더라. 세상에 돈으로 살 수 없는 건 아무것도 없다고.

“…….”

-그래, 틀린 말은 아니긴 한데…. 뭘 중요하게 생각하는지도 알겠어. 그런데 그걸 대체 어디서부터 지적해야 할지 모르겠더라. 그렇다고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것도 아니야.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라고 애틋하게 생각하더라고. …그래서 아무 소리 못 했어.

그녀의 목소리는 막 전화를 걸었던 때보다 극명히 가라앉아 있었다. 얘기를 털어놓으니 속이 풀리기는커녕 더 복잡해졌는지 드문드문 내쉬는 한숨이 통화 내용의 절반을 차지했다.

-엄마 생각은 그래. 아무리 자식이라도 꼭두각시처럼 내 마음대로 움직이길 바라는 건 부모의 욕심이야. 좀 엇나갈 수도 있고, 의견 차이로 부딪칠 수도 있는 거잖아. 그런 거 다 경험해 보면서 애랑 부모랑 같이 성장하는 거 아니겠어?

“…….”

-사는 게 힘드니까……. 그래서 자기처럼 살지 않길 바란 마음에 그랬던 거겠지. 머리로는 그렇게 이해하는데, 마음이 영 따라 주지를 않네. 엄마도 지나고 나니까 왜 그랬지, 하고 후회한 적이 많아. 그렇게 좋아하던 놀이동산 한 번 더 데리고 가줄걸. 운동회 때 다른 엄마들처럼 도시락 좀 싸 줄걸. 분명 후회하는 날이 올 텐데. 그런 생각에 마음이 미어져서…….

줄줄이 이어진 말을 듣고야 단여명은 그녀의 마음을 온전히 이해했다. 지금 신경을 쓰는 대상이 권호영뿐만이 아니란 것을.

-여명아. 아빠 없이 자라느라 고생 많았지?

곧 예상했던 질문이 나긋한 목소리를 타고 던져졌다. 어려서부터 일상적으로 듣던 것이었다. 들을 때마다 마음이 먹먹해지는, 밉지만, 싫지는 않은 질문.

“아니요.”

묵직하게 새어나가던 숨이 순간 픽 하고 터졌다. 단여명은 반사적으로 웃었다. 웃어야지 괜찮아 보일 테니까.

“매번 말하잖아요. 전 그릇이 작아서 한 명도 차고 넘치게 느낀다고. 두 명은 부담스러워요.”

-너 따돌림당했을 때 엄마는 아무것도 몰랐어.

애써 웃은 것이 소용없게도 음울한 목소리가 들렸다. 단여명은 곤란한 표정으로 뒷목을 쓸었다. 이러면 달래는 데 한참 걸리는데.

-그때 생각하면 아직도 속상해. 예쁜 얼굴이 퉁퉁 부어서……. 이 빠진 자리에서는 피 나지, 무릎은 다 까졌지, 배랑 다리는 멍투성이지.

그녀의 목소리가 불안정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엄마의 많은 점을 쏙 빼닮았지만, 단 하나 닮지 않은 게 있다면 자신은 눈물이 없다는 것이었다.

-누구한테 맞으면 더 때려 주라고 한 건 또 기가 막히게 말을 잘 들어서.

“그 덕에 젖니 잘 빠졌잖아요. 그래서 지금 치열 예쁜데.”

-너 진짜…….

맥을 끊어내는 얘기가 통한 모양이었다. 어이가 없다는 듯 작게 터진 실소가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다. 단여명은 따라 안도의 웃음을 흘렸다. 이번엔 진짜 웃음이었다.

-여명아.

잠시 뒤 웃음기를 갈무리한 엄마가 진중한 목소리로 운을 떼었다.

-엄마는 너 자라는 거 보면서 형제자매도 없이 얼마나 외로울까…. 그런 생각을 매일 했거든. 그래서 비슷하게 자란 너희 둘이 서로 공감도 하고, 엄마들 욕도 좀 하면서 친하게 지내길 바랐어. 진짜 형제처럼.

단여명은 흐린 미소를 지은 채 그녀의 목소리를 귀에 담았다. 그런 마음으로 권호영을 붙여 준 걸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처음엔 마냥 싫기만 했는데…. 친해지고 나니까 혼자 살 때보다 좋은 영향을 많이 받았다.

-너 한국에 혼자 놓고 온 것도 마음에 걸리고, 그쪽도 자기 아들이 네가 쓴 책을 좋아했다고 그러길래…….

“…책이요?”

얌전히 듣던 단여명은 무언가 이상해 설핏 인상을 썼다.

“무슨 책이요?”

권호영에게 제가 하는 일을 말한 적이 있다. 책을 쓰신다고요? 그리 친하지 않았을 때 그가 차려 준 식탁 앞에서 어색하게 던져진 물음이었다.

자신은 그때 책에 관해서 자세히 말하지 않았다. 그런데 좋아했다니? 지금껏 출간한 작품은 총 세 질이었다. 그중에서 무엇을 좋아했다는 건지, 그리고 왜 모른 척 책의 내용을 물었는지 의아해하던 순간이었다. 머릿속 어디에서 튀어나온 건지 모를 장면이 불쑥 눈앞에 펼쳐졌다.

‘좋아하는 사람을 갑작스럽게 떠나보내야 한다면요.’

술자리가 끝물에 달했을 때쯤 권호영이 그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아.”

읽었구나. 내가 처음 세상에 냈던 소설책을.

자신은 그 말을 듣고 하얀 장미꽃을 든 제 모습을 떠올렸다.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이라고 생각했는데, 세월의 흐름에 잊고 살았다. 지금보다 어렸던 날, 어떤 고민을 하다가 무슨 말을 끝으로 ‘불완전한 잔해’라는 책에 마지막 온점을 찍었는지.

‘어떤 사람이 너무 미운데, 그만큼 좋아해요.’

‘…그럼 어떡하실 거예요?’

충동적인 하룻밤을 벌여 그에 밀려나듯 지워졌던 기억도 하나하나 되살아났다. 술에 취했어도 망설임이 섞였던 목소리, 짧게 흔들리다가 온전히 닿은 눈길. 그때의 공기가 코끝을 스쳐 가듯 잘려 나갔던 기억에 생생히 살이 붙었다.

너무 미운데 그만큼 좋아한다는 사람이…… 본인의 어머니였나?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정에 빨려 들어가 넋을 잃고 있던 때다. 귀에 붙이고 있던 핸드폰에서 짧은 진동이 전해졌다.

[안 자요]

아까 보내놨던 메시지의 답장이었다.

“…….”

단여명은 멍한 눈으로 그것을 들여다보았다. 별 특별할 것 없는 문장에서 어쩐지 시선을 떼어낼 수 없었다. 그의 답장을 기다리던 아까와 달리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생각나지 않았다. 일상적인 대화를 하던 중임도 잊고, 1이 사라졌을 메시지를 멍청하게 바라보던 그 순간이었다.

[언제 와요?]

정적뿐이던 대화창에 새로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오늘 늦게 들어온다더니…….”

현관문 앞으로 배웅을 나온 권호영은 이내 멈칫 몸을 굳혔다.

“…형?”

대뜸 끌어안은 게 얼떨떨한지 그가 어깨를 살짝 짚었다. 단여명은 그것이 느껴지지 않는 척 권호영의 등을 약하게 끌어안았다.

“그냥.”

내가 너를 가여워해도 될까.

“밖이 너무 추웠어.”

나 역시도 인간적인 이유로 호감을 가진 게 아니다. 겉모습만 보고 네가 별나다고 생각했고, 나와 상관없는 사람이라고 여겼다.

“아침에 보고 나왔는데… 왜 오랜만에 만난 것처럼 반갑지.”

처음부터 잘 대해 줄걸. 기억에 잊히지 않게 더 특별하게 맞아 줄걸. 서먹하게 흘려보낸 시간이 이제 와서 아까워졌다.

“저녁은요?”

아무것도 모르는 순진한 얼굴로 권호영이 몸을 살짝 끌어당겼다. 단여명은 그를 올려다보며 빙그레 웃었다. 이 순간이 무탈하게 지나갈 수 있다면 거짓된 웃음이라도 꾸며낼 수 있었다.

“…왜 그렇게 봐요?”

오늘따라 많이 엉겨 붙는데…. 그런데 싫지는 않고 좀 수상하다. 혹시 밖에서 뭔 일 있었나?

“제 얼굴에 뭐 묻었어요?”

무표정 속에서 대충 그런 생각이 엿보였다.

“아니…….”

단여명은 그의 허벅지를 벤 머리를 옆으로 돌렸다. TV를 틀어놓았는데, 엉뚱하게 계속 자기를 올려다보니 의아하게 생각하는 눈치였다.

이상함을 느낄 만도 하지. 평소였으면 ‘어떻게 하면 저 바지를 자연스럽게 벗길 수 있을까’ 하고 궁리하다가 은근슬쩍 배를 쓸었을 것이다. 같이 TV를 보더라도 약간 떨어져 앉았지 이런 자세로 사이좋게 붙어 있진 않았다.

섹스하고 난 다음엔 살끼리 오래 맞닿았지만, 열기가 가라앉으면 다시 거리가 생겼다. 전처럼 서먹한 거리감은 아니었다. 필요 이상의 스킨십을 하지 않는다는 게 적절한 설명일 것이다. 섹스 이후에 자연스레 허용되는 이외의 것들.

권호영은 먼저 주도하는 성격이 아니었다. 뺨을 찌르거나, 뽀뽀해 달라고 말해 묘한 분위기를 조성한 것은 항상 단여명이었다. 하지만 요새 그런 장난을 치지 않았다.

아니, 다른 쪽으로 장난의 수위가 높아졌다고 볼 수 있었다. 권호영의 뺨을 찌르던 손으로 얌전히 잠들어 있는 바지춤을 건드리거나, 그의 입술을 눌렀던 입술로 발기한 하반신을 꺼내 물었다.

하지만 오늘은 한 번 하자는 시그널도 보이지 않았다. TV를 보다가 자세를 바꿀 때도 권호영의 옆구리에 몸을 찰싹 붙이거나, 그의 허벅지 위에 다리를 올렸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다. 그냥…… 신경이 쓰이니까. 그래서 눈길이 가니까 몸이 따라갔나 보다.

머리를 살살 긁어 주는 손길에 기분이 노곤해졌다. 원래 같았으면 졸음이라도 느꼈을 텐데, 오늘은 유독 정신이 말갰다. 단여명은 힐긋 다시 눈길을 올렸다. 뭐가 그리 흥미로운지 권호영은 TV 시청에 푹 빠진 모습이었다.

동서양의 조화가 오묘한 게 뜯어보면 뜯어볼수록 눈을 떼기 힘든 외모였다. 코끝도 날카롭게 빠진 것이 아래에서 올려다봐도 굴욕이 없었다. 하긴, 얼굴의 절반을 가리고 다녔을 때도 잘생겼을 것 같은 이미지였지…. 그를 찬찬히 눈에 그리던 단여명은 불쑥 입을 열었다.

“넌 연애 안 해?”

여자 문제로 속 썩일 것 같지도 않고, 성격도 모나지 않아 질투나 집착도 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 걸 따져 보다가 충동적으로 나간 물음이었다.

“여자…… 아니, 연애에 관심이 없나 해서.”

뒤늦게 성별을 여자로 제한하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같은 성별인 자신과 지금껏 한 짓이 있었다. 그럼 남자도 가능하다는 얘기니까.

“갑자기 그런 건 왜요?”

머리를 만지작대던 손이 이내 천천히 멎었다. 권호영은 속을 알 수 없는 눈으로 아래를 내려다봤다.

“그냥 궁금해서.”

단여명은 올곧이 닿은 그 눈길을 얌전히 받아냈다. 뜬금없는 물음을 들어 궁금해하는 것 같은데, 이내 다른 것이 섞여 눈빛이 한층 깊어졌다.

“아직은 생각 없어요.”

권호영이 곧 입술을 달싹였다. 머리 위에 가만히 얹고 있던 손으로 동그란 두상을 따라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손가락의 마디마다 부드러운 머리칼이 감기듯 타고 내렸다.

“그럴 여유가 없기도 하고….”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린 권호영이 이내 시선을 돌렸다. TV 속에는 철 지난 예능 프로그램이 재방송 중이었다.

단여명은 고개를 주억이곤 그와 같은 곳을 응시했다. 그리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가볍게 듣고 넘긴 것치곤 머릿속에 물음표가 빼곡히 차오르기 시작했다. 원래도 잘 들리지 않던 TV 소리가 곧 귀에 하나도 잡히지 않게 됐다.

‘…원래 관심 있는 사람이 있으면 ‘연애할 생각이 있다’라고 대답하지 않나?’

얘는 우리 사이에 대해 아무런 생각이 없는 건가? 그게 되나? 나만 해도 몇 번이나 연애 생각을 했는데?

그럼 나랑 매일 떡 치는 걸 뭐라고 생각하는 거지? …엔조이? 아니, 물론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자신만 해도 초반엔 그렇게 생각했으니까.

‘……여유가 없다, 라.’

평온한 얼굴을 가장한 채 단여명은 심각하게 고민했다. 연애는 너무 무겁다는 소린가…. 그야 애인이 생기면 그 사람에게 더 신경 써 줘야 하고, 무조건적으로 시간을 뺏기니까.

이내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쁘게 살면 연애할 생각도 들지 않는 법이다. 어머니의 바람을 이루어 주느라 부단히 노력했을 텐데. 단여명이 지금껏 봐온 권호영은 그 기대를 저버리겠다고 집안을 뒤집어엎을 성격은 못됐다.

……물어볼까. 그의 어머니에 관해서. 집에 오는 길에 엄마가 해 줬던 얘기를 곱씹다가 지난날을 돌이켜 봤다. 그러다 문득 하나의 기억을 상기했다. 아이스크림을 나눠 먹으며 함께 집으로 돌아갔던 날, 그의 어머니에 대한 얘기를 꺼냈던 순간이.

아무것도 몰랐던 그때 당시도 권호영의 안색이 좋지 않다고 생각했다. 별생각 없이 넘겼던 그 얼굴이 뒤늦게 눈에 밟혀 지워지지 않았다.

애완동물. 참으로 듣기 거북한 비유다. 원래 오지랖이 넓은 성격이 아닌데, 그 말이 머릿속을 맴돌아 떠나지 않았다. 가정사라서 함부로 꺼내면 안 될 얘기란 건 알았다. 그런데도 계속 타이밍을 재게 됐다. 권호영에게 그에 대한 대답을 듣게 될 순간, 어떤 말을 해 줘야 할지 정하지 못했음에도.

“형은요?”

그러던 순간이었다. 왁자지껄한 TV 소리 사이로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딴생각하느라 그가 뭐라고 말한 걸 놓쳤는가 싶었다. 얼결에 위를 올려다보니 권호영은 여전히 시선을 앞으로 둔 채였다.

“…연애.”

머리를 만지던 손이 이내 눈 밑을 살짝 쓸었다. 옆으로 문지르는 손길을 따라 단여명의 눈이 움츠러들 듯이 살짝 접혔다가 뜨였다.

“하고 싶어요?”

권호영이 고개를 내려 눈을 맞췄다. 아까 물었던 것에 때를 놓친 되물음이었다.

단여명은 눈만 깜빡거렸다. 정석적인 대답은 ‘연애할 생각이 있다’였다. 그런데 섣불리 대답하기가 망설여졌다. 연애 경험이 전무해 보이는 권호영이 그 뜻을 못 알아챘을까 봐.

“글쎄. 나도 아직은….”

자기 말고 다른 사람과 연애할 생각이 없다는 뜻으로 말했을까 봐. 단여명은 그와 똑같은 대답을 뭉뚱그려 흘렸다.

짤막한 대화를 끝으로 두 사람은 다시 TV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단여명은 말없이 앞만 바라보았고, 권호영도 더는 그를 만지지 않고 가만히 무릎을 내줬다.

겉으로 보기엔 일상적으로 보냈던 시간이었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어딘가 부자연스러운 부분이 존재했다.

그 웃기다는 예능 프로그램을 감상하는데도 두 사람은 입꼬리 한 번 들썩이지 않았다. TV에 얘기할 거리가 나오면 간간이 나누던 대화도 삭막하리만큼 오가지 않았다. 둘 다 TV를 보는 척 딴생각에 집중한 채라 뭐가 이상한지 알아차리지 못했다.

단여명은 그 시간 속에서 나름 생각을 정리했다. 동정심을 불쾌하게 받아들이는 이들도 있었다. 권호영이 제 입으로 말하기 전까진 티 내지 말고 평소처럼 대해야지. 그게 맞을 것 같았다.

그리 초점을 똑바로 맞췄을 때 어느새 화면의 배경은 어둡게 바뀐 뒤였다. 해가 질 무렵, TV 속에 출현하는 예능인들은 식사를 받기 위해 대결 구도로 게임을 진행하고 있었다. 웃음을 터트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며 서로를 도발하는 모습이 못내 즐거워 보였다.

“우리도 야자 타임 해볼래?”

분위기를 환기할 겸 단여명이 은근슬쩍 제안을 냈다.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가 어쩐지 이상하게 끊긴 것 같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기 때문이었다.

“야자 타임이요?”

“응. 저기 나오는 거.”

손으로 TV를 가리키자 권호영이 따라 눈길을 옮겼다.

“쉽게 말하자면 우리 둘이 나이를 바꾸는 거야. 네가 26살, 내가 20살인 거지.”

“저 반말 잘 못하는데.”

“왜?”

“존댓말은 계속 써왔는데, 반말은 많이 안 해봤어요. 다 저보다 나이가 많아서 반말할 사람이 없기도 했고…. 그래서 좀 어려워요.”

“뒤에 ‘요’자만 떼면 되는데 뭐가 어려워.”

대수롭지 않게 받아친 단여명은 곧 장난기가 짙어 보이는 웃음을 걸었다. …반말하는 권호영이라. 아무 생각 없이 제안한 것인데, 재밌을 것 같았다.

권호영은 칼같이 존댓말을 했다. 가끔 반말 비슷한 말을 흘렸지만, 그도 한시적이었다. 섹스할 땐 여유가 없어서 끝말을 다 날려 먹곤 했으니까. 그런 이유로 그가 일상 중에 편하게 말하는 모습이 궁금해졌다.

“진지 잡쉈어 같은 거만 아니면…….”

“여명아.”

단여명은 순간 웃고 있던 표정을 희미하게 굳혔다. 농담 섞인 얘기를 하던 것도 뚝 멈추고 눈을 살짝 키웠다.

“…어색하긴 하네요.”

이윽고 가볍게 숨을 밀어내는 소리가 들렸다. 그 떨리듯 나온 숨결은 소리를 죽인 웃음이었다.

머리를 자연스레 흩트린 남자는 편안한 기색이었다. 집 안에서 즐겨 입는 하얀 티셔츠도, 그가 짓고 있는 표정도 그랬다. 반듯한 콧날 아래로 약간 휘어진 입매가 보였다. 마치 몹쓸 농담이라도 들은 사람처럼 그는 조용히 웃음을 그리고 있었다.

매일 보던 얼굴이 순간 다른 사람처럼 낯설게 다가왔다. 그 기분이 너무도 생경해 눈길을 빼앗긴 찰나 미묘하게 어긋났던 시선이 맞물렸다. 그리 방심하던 순간이었다.

‘연애…….’

아까 들었던 생각이 머릿속을 쿵 들이박았다.

“어…….”

점점 기분이 이상해졌다. 먼저 반말해 보라고 말한 건 자신이었지만, 저렇게 선뜻 이름부터 부를 줄 몰랐다. 흥미와 기대감이 섞여 약간 들떠있던 마음이 방금과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술렁이기 시작했다. 마치 수백 명의 사람이 가슴 속에서 시끄럽게 떠들어대는 것만 같았다.

“…진짜 어색하네.”

단여명은 가까스로 그럴듯한 웃음을 내보였다. 얼굴에 열이 오른 것 같기도 했다. 그도 아니면 오싹한 한기가 등줄기를 훑었나.

“마음이 바뀌었어. 그냥 너 존댓말 해.”

아무튼 기분이 정말 이상한 건 변함이 없었다. 형 소리를 달고 살던 애가 저런 목소리로, 그리고 저런 표정으로 이름을 부르니 진짜 뭐라도 된 것 같아서.

“6살이나 차이 나는데 갑자기 말 놓는 건 버릇없지.”

단여명은 곧장 몸을 돌려 누웠다. 여기서 자신까지 그에게 존댓말 하면 정말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아 그를 급히 외면해 버렸다. 이와 상응하는 기분을 알았다. 권호영에게 휘말리기 직전에 느끼던 감정과 엇비슷했다.

“왜 부끄러워해?”

그리 고집스레 시선을 돌리던 중이었다. 권호영이 단여명의 뺨을 살짝 돌려 잡았다.

제 의지와 상관없이 얼굴이 돌아가자 단여명은 얼떨떨한 눈으로 상대를 올려다보았다. 밤하늘 같은 눈동자는 무언가에 충돌한 여파를 그러담은 듯 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에 얽히듯 시선을 맞대는 밤색 눈동자엔 순수한 의아감이 서려 있었다.

지금껏 신경도 안 쓰이던 얼굴 간의 거리가 미친 듯이 의식되기 시작했다. 가까웠다. 너무 가까워서 어지러운 속내를 들킬 것만 같았다. 무어라 말해야 될 것만 같은 기분이 강렬하게 솟구쳤다. 머뭇대던 입술이 달싹이며 움직였다.

“아… 닌데?”

단여명은 제 감정을 돌아보기도 전에 일단 부정했다. 뭐지, 나 부끄러워하는 것처럼 보였나? 아니, 아닌데. 그러니까 이건…… 부끄러운 것보다 황당한 쪽이었다. 왜 부끄러워하냐고 확신하며 물으니까. 갑자기 뺨을 잡아 돌리니까. 그래서 많이도 아니고, 약간 당황한 것뿐이었다.

“뭐가 부끄럽다는…….”

할 말은 많은데 그것이 정리되지 않자 또 이상하게 말끝이 흐려졌다. 당황에 당황의 연속에 머리가 뒤죽박죽 꼬였다. 마구잡이로 변명하고 싶은데 그러면 꼴사나워 보일 게 분명하고, 아니라고 잡아떼기엔 제가 봐도 수상쩍게 반응하고 있었다. 답답해서 가슴이라도 내리치고 싶었다.

“그런데 왜 눈을 못 마주쳐.”

그러나 집요한 시선을 견뎌내는 것조차 힘겨워 미동조차 할 수 없었다.

“말도 더듬고.”

쟤가 저렇게 말하니까 자신이 진짜 이상하게 구는 것 같아서…….

“얼굴도 숨기잖아.”

……표정 관리가 정말, 너무 힘들었다.

권호영이 뺨을 안쪽으로 꾹 모아 잡았다. 짓궂은 손길과 가느다랗게 접힌 눈은 이 상황을 퍽 즐기는 모습이었다. 그에 집 나갔던 정신이 차차 되돌아오는 듯했다. 입술이 튀어나온 모습이 우스꽝스러울 게 뻔해 단여명은 얼른 그의 손을 치워냈다.

“없던 일로 하자니까. 존댓말 해, 너.”

평소답지 않게 말투가 뾰족해졌다. 그것마저 묘하게 자존심 상해 다시 얼굴을 반대편으로 돌렸다. 자꾸 피하려고 하면 더 이상하게 생각할 텐데. 그런 걱정을 하면서도 수런대는 감정을 진정시킬 방법을 몰랐다.

“또 야한 생각 했어?”

마음이 안정될 때까지 절대 보지 않겠다는 포부는 잠시에 그쳤다. 단여명은 쏜살같이 반응할 수밖에 없었다. 그다음으로 들린 말이 과히 충격적이라 반사적으로 고개가 홱 돌아갔다.

뭐……. 굉장히 어처구니없다는 눈으로 그를 응시해도 권호영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눈빛이 심히 맑은 게 비꼬거나 놀리려는 의도 없이 제가 생각한 바를 그대로 물은 것 같아 보였다. 도발이라고 받아들인 쪽이 되레 무안할 정도로.

‘또’라는 말이 굉장히 의미심장했다. 제가 지금껏 어떤 시선으로 봤는지 다 티가 났나 싶어서. 언제부터 제 머릿속을 간파한 것인지 몰라 혼란스러웠다.

야한 생각? 했다. 꾸준히 붙어먹게 된 후로 그를 볼 때마다 시시때때로 했다. 합의된 관계를 약속한 후로 죄책감을 가질 필요도 없으니 아주 속 편히 망상했다. 생각이 자꾸 그쪽으로 튀는 걸 나더러 어떡하라고.

연속타를 먹어서 정신이 얼얼하다 못해 매울 정도였다. 단여명은 권호영의 표정을 샅샅이 뜯어보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방금 놀리는 투였는데. 같이 있으니까 비슷해지나? 제가 계속 놀려 먹어서 이쯤 지나니 놀리는 요령을 터득한 건가? 아무리 그래도 내가 더 나이가 많은데. 내가 형인데?

“너 웃는 거 예뻐서.”

요새 자꾸 전세 역전이 되는 것 같다. 어쩐지 밀리는 기분이 들어 짜증도 좀 났고. 그래서 오기가 생겼다.

“그래서 잠깐 넋 좀 놓고 있었어. 왜.”

단여명은 타격받지 않았다는 듯 그늘 한 점 없이 웃었다. 정신없이 휘몰아친 감정이 양 뺨을 발긋하게 물들여 놓은 줄도 모른 채. 그를 아닌 척 훑는 시선 또한 느끼지 못한 채 환한 미소를 보였다.

“네가 더 예뻐.”

뻔뻔하게 눈을 맞춰도 권호영은 동요하지 않았다.

“나보다 여명이 네가 더 자주 웃잖아.”

단여명처럼 목에 잔뜩 힘을 싣지도, 남몰래 주먹을 꽉 쥐지도 않았다. 그저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하듯 차근한 말씨로 단여명을 뒤흔들어 놓았다.

여명이. 어디서 많이 들어본 호칭이었다.

‘……아.’

그리고 그 순간 단여명은 명료하게 깨달았다.

‘닮아가는구나.’

같이 있는 시간이 길어지니까. 대화를 나누다 보니까 제가 ‘호영이’ 하고 애 취급하며 불렀던 애칭도 그의 입에 붙어버린걸. 답지 않게 유연히 받아치게 될 줄 안 것도, 예쁘다는 칭찬을 서슴없이 돌려주게 된 것도. 제가 다 물들여 놓은 것들이었다.

“순 곰인 줄 알았는데…….”

그거 범죄라니까. 단여명은 티가 나지 않게 눈을 흘겼다. 제 충고를 하나도 새겨듣지 않은 모습이었다. 불만스레 꿍얼대자 권호영이 흘깃 눈길을 줬다. 방금 뭐라 말했느냐고 묻는 눈이었다.

“아니, 서로 좋은 말 해 주고 훈훈해서 좋다고.”

단여명은 태연히 시치미를 뗐다. 그동안 제대로 된 친구를 만들어 본 적이 없어서일까. 이쪽은 연장자니까 말투가 사근사근할지 몰라도 저쪽까지 동조하면 분위기가 이상해진다. 남자 둘끼리 하기에 민망한 대화라는 건 아는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놈.

“둘 다 반말하면 게임의 의미가 있어요?”

평소대로 돌아가자는 기미를 흘리니 역시나 권호영은 아무 의심 없이 그를 덥석 물었다.

“형은 저한테 존댓말 해야 되는 거잖아요.”

“그렇게 듣고 싶으면 떡국 먹고 오든가.”

까칠하게 대답해 버린 걸 알았지만, 그를 수습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단여명은 팔짱을 끼고 그대로 눈을 감아버렸다. 쪽잠을 잘 준비를 하는 모습을 보이면 권호영이 더는 건드리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역시나 커다랗게 울리던 TV의 음량이 점차 줄어들었다.

‘괜히 걱정했어.’

괜히 안쓰러워했고, 괜히 가여워했다. 연애할 생각도 없는 놈이 웃는 건 예뻐서. 사람 헷갈리게.

속으로 그리 투덜대면서도 단여명은 권호영의 배에 얼굴을 묻었다. 그의 허리를 끌어안고 콧속으로 밀려드는 향을 맡았다. 언제부턴가 그에게선 포근한 집 냄새가 났다.

그러나 안정을 취했던 평상시와 달리 마음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아무리 선잠에 빠져들 준비를 해도 잠이 오지 않았다. 제 잠을 깨울까 봐 최대한 조심스럽게 숨을 고르는 권호영의 기척에 온 신경이 쏠렸다. 몸도 마음도 편하지 않았다. 빤히 내려다보는 시선이 느껴져 옆통수가 따끔거렸다.

시간이 지나 약간 마음을 놓을 만하니 다른 곤경이 닥쳤다. 기척을 죽인 손이 가까워지는가 싶더니, 귓불을 살짝 건드렸다. 어디 가지 못해 심심해지기라도 한 건지 그는 난데없는 손장난을 쳤다.

말랑말랑한 촉감을 즐기듯 단단한 손이 둥그렇게 귓불을 문질렀다. 귓바퀴를 지분대던 손은 이내 만지는 부위를 차근차근 넓혀갔다. 처음엔 귀만 소심하게 건드리더니 나중엔 옆으로 드러난 뺨을 살짝 꼬집기까지 했다. 단여명이 완벽하게 잠들었다고 여기는 손길이었다.

부스럭거리며 옷감이 쓸리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가 가깝게 울리면 얼굴을 만지작대는 손의 위치가 달라졌다. 뺨의 살결을 쓸다가 눈썹이 난 방향을 따라 손을 내리긋기도 했다. 귀와 뺨을 한 번에 감싸면 그 손바닥이 얼마나 커다랗고 따뜻한지 느낄 수 있었다.

단여명은 처음부터 끝까지 TV에서 무어라 떠드는지 알지 못했다. 권호영과 이 소파에 나란히 앉았을 때부터 그의 무릎에 기대 잠을 청하는 지금까지 TV 소리가 유난히 멀게 느껴졌다.

결국 권호영이 방에 가서 자라고 어깨를 흔들어 깨울 때까지 단여명은 자는 척해야만 했다.

***

[잘 도착했어?]

메시지가 도착한 시간은 오후 8시쯤이었다. 권호영은 음료가 든 박스를 바닥에 내려놓았다. 아침에 간다고 할 때는 이불에 파묻힌 채 성의 없이 손만 흔들더니…. 밤이 되니까 빈자리를 느끼는 모양이다.

엠티 장소는 학교에서 버스를 타고 3시간, 인근에 바다가 있는 한 리조트였다. 권호영은 멀리 밤바다를 보다가 휴대폰에 사진 한 장을 담았다. 찍힌 사진을 확인해 보니 어두컴컴해서 뭐가 바다고 하늘인지 구별되지 않았다. 그래도 여기까지 왔는데, 사진 한 장이라도 보내는 게 맞는 것 같아 단여명에게 그대로 메시지를 전송했다.

[바다 사진 말고]

[얼굴 나온 거]

예상보다 답장은 일찍 왔다. 저와 똑같이 짐을 나르는 동기들이 곁을 지나쳤으나, 권호영은 핸드폰에 시선을 집중했다.

[단체 사진밖에 없는데]

지금 있는 거라곤 리조트에 도착해서 현수막을 뒤로하고 찍은 단체 사진뿐이었다. 셀카는 원래 잘 찍지 않는 편이었다. 얼굴이 나온 사진이라니. 심각한 낯으로 얼굴 사진을 찍어 보내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였다.

[볼래]

짧은 문장이 담긴 메시지가 휴대폰 알림 창에 떴다. 권호영은 단체 채팅방에 올라온 사진을 내려받았다. 그대로 사진을 전달하자 대화창에 바로 1자가 사라졌다. 의외롭게도 두 번째 답장 역시 빨리 돌아왔다.

[우리 호영이가 제일 애기 같네^^]

“……애기?”

메시지를 유심히 들여다보던 권호영은 이내 눈썹을 치켜들었다. ‘애기’라는 단어 선택도 마땅찮은데, 저 이모티콘을 무슨 의도로 썼는지 몰라 의문이 가중됐다. 그리 해답 모를 문제를 풀고 있을 때였다.

“아오 씨, 무거워….”

어느 때보다 반갑게 들리는 목소리가 귓전을 스쳤다.

“야, 권호영. 너 멀뚱히 서서 뭐 해? 안 들어가?”

“선배, 잠깐.”

권호영은 핸드폰에 눈을 고정한 채로 손을 까딱였다. 가까이 오라고 부르는 손짓에 윤재윤은 뻐근한 어깨를 돌리며 걸음을 옮겼다. 어리둥절해하며 곁에 다가갈 때까지도 권호영의 시선은 한곳에 박혀 떨어지지 않았다.

“이유는 묻지 말고, 한국에서 애기라고 부르는 예시를 다 들어 봐요.”

마치 철천지원수라도 노려보는 것처럼.

[제가 제일 키 커요^^]

“……하.”

단여명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삽살개 같은 애가 중간에 우두커니 서 있기에 반어법으로 말한 건데, 정말 애 같은 답장이 돌아왔다. 저 안 어울리는 이모티콘은 또 뭔지. 제게 지기 싫어 똑같은 수로 응수한 것이 빤히 보였다.

단여명은 권호영이 보내 준 사진을 손가락으로 확대했다. 자식을 소풍 보낸 학부모의 기분이 이러려나. 가서 친구도 좀 많이 사귀고, 맘 편히 놀았으면 좋겠다. 엠티라는 행사가 그리 즐겁진 않겠지만, 나중에 돌이켜보면 좋은 추억이 되기도 한다.

술 먹고 실수만 하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주량이 원체 세니 그런 쪽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것 같다. 옷 벗어 던지는 것도 한 번밖에 못 봤고.

손가락을 좁혔다가 늘릴 때마다 작게 찍힌 얼굴이 커졌다가 작아졌다. 그래도 자기 앞가림은 잘하는 애니까 안심해도…….

“뭘 보길래 혼자 웃고 있어?”

단여명은 놀라지 않은 척 재빨리 핸드폰을 엎어 놓았다. 화장실을 다녀오느라 자리를 비운 상대가 생각보다 일찍 돌아왔다.

“강아지 사진 봤어.”

눈동자를 짧게 경련한 단여명은 매끄럽게 거짓을 뱉었다.

“강아지… 귀엽잖아.”

“그래?”

김선오는 대강 수긍하는 낯이었다. 맞은편에 앉아 의자를 당긴 그가 웃으며 화두를 돌렸다.

“뭐 먹을래? 메뉴는 정했어?”

아. 입술을 멍하게 벌린 단여명은 그제야 메뉴판을 펼쳤다. 영어를 읽지도 않고, 파스타 중에 아무 메뉴나 손가락으로 찍었다. 식사 상대가 바뀌지 않은 이상 무슨 음식을 먹든 소화가 되지 않을 걸 이미 알았다.

“조심히 들어가. 연락할게.”

연락하겠다는 소리는 속이 텅 빈 말.

일곱 번의 만남 끝에 연락한다는 말에 마음을 졸이지 않아도 된다는 걸 깨달았다. 김선오의 배웅 인사는 날마다 달라졌다. 오늘 즐거웠어, 들어가면 연락해, 밤길 어두우니까 집 들어가는 길에 전화해. 그와 반대로 단여명의 인사말은 항상 기계적이었다.

“응, 잘 가.”

손을 흔들어 주니 마주 웃던 김선오가 조수석의 창문을 올렸다. 검은색 세단이 도로 위를 내달리며 시야에서 멀어졌다. 그를 지켜보던 단여명은 미련 없이 등을 돌렸다.

데려다준다는 걸 거절하지 못해 매번 집에서 조금 떨어진 위치에서 내리곤 했다. 저번처럼 권호영의 눈에 띄기라도 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으니까. 그동안의 일을 설명해 주는 걸 떠나서 다시 싸움이 나기라도 하면 큰일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그것을 조심하지 않아도 됐다. 엠티에 간 권호영은 지방으로 내려간 후였다. 그러므로 오늘은 단여명 혼자서 집을 지켜야 했다. 같이 산 이후로 처음 떨어져서 자는 날이었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크게 표시 난다고. 오늘은 어쩔 수 없이 집이 휑하게 느껴질 것 같았다.

그러고 보니 김선오랑 있느라 권호영에게 답장을 보내는 걸 깜빡했다. 휴대폰을 확인하니 키가 제일 크다는 답신을 마지막으로 주고받던 메시지가 뚝 끊겨 있었다. 단여명은 스크롤을 내리다가 화면에 손가락을 얹었다. 전송 버튼을 누르는 손짓이 유독 가벼웠다.

[딩초ㅎ]

인터넷을 그리 즐겨 하는 편은 아니지만, 유행을 탔던 용어라 의미를 알고 있었다. 아마 권호영은 무슨 뜻인지 모르겠지. 안 그래도 어려운 줄임말의 배열을 바꿔서 외국에서 살다 온 그에겐 엄청난 수수께끼로 느껴질 것이다. 제 메시지를 읽으며 고민할 그의 얼굴을 상상하니 입가에 웃음이 번졌다.

아마 답장이 오려면 한참은 지나야겠지. 지금쯤 지옥 같은 랜덤 게임에 빠져 팔을 돌리느라 바쁠 텐데. 그리 단념하며 핸드폰을 집어넣으려던 순간이었다. 어째선지 지금쯤 술독에 빠져있어야 할 사람에게 전화가 오고 있었다.

“…큼.”

단여명은 목을 가다듬었다. 어떻게든 웃음을 삼키려고 입술을 꾹 깨물고는 주먹을 한 번 쥐었다가 폈다. 별일이 없고서야 서로 전화를 걸지 않는데, 오죽 마음이 탔으면 곧장 연락했을까. 그 생각에 깃털이라도 끼워 넣은 양 발가락 사이가 간지러워졌다.

“여보세…….”

-뭐 해요?

요, 자를 완성하기도 전이었다. ‘딩초’가 뭐냐고 곧장 따질 줄 알았는데, 권호영은 다른 걸 쏜살같이 물었다. 이건 또 예상 밖이었다. 그러나 이것도 나쁘지 않아 그런대로 답했다.

“이제 집 가는 길이야.”

-…….

대답을 돌려줬음에도 권호영은 아무 말이 없었다. …통화가 끊겼나? 화면을 확인해 보았지만, 시간은 착실하게 계산되고 있었다. 단여명은 다시 귀에다가 핸드폰을 붙였다. 자세히 귀를 기울여보니 바람 소리가 미세하게 들렸다.

“혹시 취했어?”

-아니요.

취했느냐는 물음엔 대답이 묘하게 빨랐다.

-……뭐 해요?

그리고 금방 전에 했던 질문. 좀 전까지의 기억을 머리에서 지운 듯 권호영이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같은 걸 물어왔다.

“집 간다니까. 왜 똑같은 걸 물어?”

-…….

“취한 거 맞고만. 뭐가 아니래….”

지금 하는 통화 내용을 내일도 기억할 수 있을는지. 단여명은 실낱같이 드는 걱정을 웃음으로 흘려보냈다.

“애들이랑 놀지 왜 전화했어.”

-재미없어요.

“애늙은이 같은 소리 말고.”

딱 잘라 대꾸하니 크게 숨을 몰아쉬는 소리가 들렸다. 언뜻 한숨처럼 들리는 게, 원하는 대답이 아니라 이거였다.

단여명은 소리 없이 웃었다. 대학교 1학년, 첫 엠티. 인생에 단 한 번뿐인 추억이다. 그런데 특별하게 생각하기는커녕, 그는 단여명이 이렇게 말할 때면 불만스럽기 짝이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학구열 잠시 접어두고 지나갈 한때를 원 없이 즐겼으면 하는, 단여명의 마음은 티끌도 모른 채.

가만 웃고 있으니 그대로 잠깐의 침묵이 흘렀다.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수화기 너머로 바람이 스치는 소리가 간간이 들렸다. 어디서 불어오는지 모를 바닷바람은 거세게 휘몰아쳤다가 금세 기세를 꺼트렸다. 그럼 취기를 몰아내고자 고르게 뱉는 숨소리가 귀에 잡혔다.

단여명은 핸드폰 옆면에 손가락을 올렸다. 안 그래도 짤막하게 대답하는 목소리가 주변 소음에 묻힐까 봐 핸드폰의 음량을 높였다.

“바다 근처로 갔다고 했나?”

-네.

“파도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바람 소리 너머로 철썩이며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리는 것도 같았다. 그를 조용히 새겨듣던 중이었다. 엉뚱하게 다른 소리가 섞여 들렸다.

“…누가 너 부르는데?”

-잘못 들은 거예요.

“권호영은 다른 사람 이름인가 봐?”

-저 혼자예요, 여기.

권호영이 대놓고 오리발을 내밀었다. 분명 들었는데. ‘야, 권호영!’ 하고 크게 부르는 목소리를. 그 목소리의 주인도 알아챈 뒤였다. 권호영이 무어라 사인을 줬는지 마지막엔 권호, 까지만 나오다가 뚝 끊겼다. 여전히 윤재윤과 사이가 좋은 듯했다.

-애기 같다는 말…… 그거 무슨 뜻이에요?

대화가 끊긴 건 잠시였다. 권호영이 낮게 잠긴 목소리로 말문을 뗐다.

원래도 애 취급을 내켜 하지 않던 녀석이다. 애기 같다고 말한 것이 계속 마음에 걸렸던 모양인지 그는 아까 보냈던 메시지의 의도를 물었다. 단여명은 어깨를 으쓱이듯 가벼운 투로 말했다.

“말 그대로?”

-BAE, 라고 한 건 아닐 거 아니에요.

“응?”

베이? 갑자기 영문 모를 소리가 나왔다. 권호영은 일상 중에 거의 영어를 쓰지 않았다. 그런데 발음이 영 매끄러운 게 영어를 사용한 것처럼 들렸다. 저게 정말 영어인지, 아니면 제가 모르는 은어인지 홀로 가늠하던 때였다.

-‘자기야’라는 뜻으로 쓴 거냐고요.

단여명은 어정쩡한 자세로 우뚝 걸음을 멈췄다.

“그건…….”

…무슨, 생각이 어디까지 간 거야? ‘자기’라는 애칭은 또 어떻게 아는 거고.

당황한 눈동자가 정처 없이 허공을 맴돌았다. 아니, 상식적으로 그런 뜻으로 쓴 것이 아니란 걸 알 텐데. ‘애기’라는 뜻을 결단코 부정하고 싶어 그런 건지 권호영이 엄청난 폭탄을 던졌다. 듣는 사람이 오해하게끔 정말 스스럼없는 목소리로.

얼결에 발끝을 내려다본 단여명은 제가 움직임을 멈췄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다시 의식적으로 걸음을 내디디며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미안. 아니야.”

머쓱한 기분과 함께 놀란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안 취하기는 무슨…. 단여명은 뒷목을 쓸며 괜히 주변을 둘러봤다. 통화에 오롯이 집중한 채라 눈으로 보아도 보이는 게 없었음에도.

자기라니. 그게 우리 사이에 대뜸 부를 수 있는 호칭인가? 이게 썸인지, 아닌지…. 확신의 썸만 탔던 기억밖에 없어 가끔 자신들의 관계가 어디쯤 걸쳐져 있을지 아리송해졌다. 우리 둘은 대체 뭘 하고 싶은 건지, 얘는 지금 느끼는 감정을 뭐라고 생각하고 있을지.

“원래 이 시간쯤 되면 졸렸는데.”

그런데 지금은 아무래도 상관없어졌다.

“네가 밤마다 괴롭혀서 잠이 잘 왔거든. 근데 오늘은 체력이 남아도네.”

-제가 더 노력해야겠네요.

“거기서 노력할 게 더 남아 있어?”

-같이 러닝도 하고.

“너랑 하는 운동은 하나로 족한데.”

-그게 무슨 운동이에요. 형은 가만히 있는데.

좀 당황할 줄 알았건만, 권호영은 아무 감흥 없는 목소리로 곧장 반박했다.

“…….”

얘가 자신이 많이 편해지긴 했나 보다. 그래, 편해질 때도 됐지. 뚝딱이며 보낸 시간이 얼마인데. 좀 삐친 영향도 있는 것 같다. 술 취한 것도.

-이제 뭐 할 거예요?

“음……. 아마 씻지 않을까?”

-그다음은요?

“자야지.”

-내일은?

“호영아.”

듣자 듣자 하니까 어이가 없어서….

“그냥 보고 싶다고 해.”

단여명은 크게 헛웃음을 뱉었다. 처음 만났을 땐 그리 관심 없더니 지금은 뭐가 그렇게 궁금해서 사사건건 캐묻는지 모를 일이다. 그래 놓고 목소리는 여전히 무뚝뚝한 게 누가 들으면 시비라도 거는 줄 알겠다.

-…….

권호영은 이상하게 반응이 없었다. 드문드문 들리던 바람 소리마저 뚝 끊긴 채였다. 기묘한 정적이 길어질수록 단여명은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 그것이 긴장감이란 걸 인식한 건 침묵이 흐른 지 정확히 5초가 지난 시점이었다.

……너무 자신감 넘치게 단정 지었나? 뒤늦게 아니면 어떡하지, 하고 후회가 막심이 들었다. 그냥 물어본 거일 수도 있는데. 원래 같이 살면 자연스레 일상을 공유하게 되는 법이다. 거기다 자신들은 사이가 좋으니 일정을 묻는 건 그렇게까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아, 젠장. 또 오버한 게 맞는 것 같았다. 왜 맨날 혼자 앞서가는 것 같지? 현관문 앞에서 대뜸 뽀뽀한 것도 그렇고……. 아니, 그때 뽀뽀한 건 그냥 홧김에 그랬던 거다. 잔소리가 듣기 싫어서, 단순한 마음으로, 가벼운 생각으로 그랬던 건데.

그런데 지금은…….

‘아니, 쟤가 자기라니까…!’

그래서 마음이 좀 그랬다. 들떴고, 간지러웠고, 싱숭생숭했다. 안 그러던 녀석이 안 어울리게 저돌적으로 구니까. 지나가는 사람을 붙잡고 쟤가 먼저 시작한 거라고 호소하고 싶을 정도였다. 짧은 순간 갖가지로 고민하던 단여명은 결국 슬그머니 목소리를 흘렸다.

“아니면…… 말고?”

아, 이런 거 한두 번 해보는 애새끼도 아니고…. 나까지 숙맥처럼 이게 뭐야. 차라리 아니라고 나처럼 부정이라도 하지. 왜 아무 말도 안 해서 사람을 또 안절부절못하게 만드는지. 원망스러운 마음을 느끼며 민망한 기분을 희석하던 때쯤이었다.

-보고 싶어요.

귓바퀴를 타고 흘러들어온 목소리가 선명한 울림을 전했다.

-내일 뭐 해요?

일순간 그가 곁에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귓가에 입을 댄 채로 아주 가까이, 떨림이 없는 목소리로 떨리는 진심을 고백하는 것처럼.

순간 맥이 탁 풀렸다. 가볍게 터진 숨이 잇새로 빠져나가자 온몸의 긴장이 한꺼번에 풀렸다. 그다음으로는 일렁이는 감정이 깊숙한 곳부터 차올랐다. 마음속에 한가득, 자칫 몸을 기울이면 금방이라도 넘쳐흐를 것처럼.

‘내일 아침에 뭐 해요?’

언제 한번 비슷한 물음을 들은 적이 있다. 김선오와 다투던 중간에 권호영이 개입했던 날. 그에게 게이 치정극을 들켜 얼렁뚱땅 넘기려던 때 그가 대뜸 그런 걸 물었다. 내일 뭐 하냐고.

그래, 생각해 보니 그때부터 가까워졌다. 예전이랑 변한 게 없다고 생각했는데. 이전의 기억을 떠올리고 나서야 그때랑 목소리가 많이 달라진 걸 알아챘다. 정말…… 뭐라 꼬집지 못할 부분이 그랬다.

단여명은 눈을 내린 채 입가에 짙은 호선을 머금었다. 권호영…. 네가 정말 연애할 생각이 없다고?

“너랑 맛있는 거 먹으려고.”

띵. 위로 향하던 승강기가 8층에서 멈췄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린 단여명은 가벼운 발걸음으로 오피스텔 내 복도를 걸었다.

“영상 통화하자. 얼굴 사진 어색하면 영상으로 보면 되지.”

현관문 앞에 선 단여명은 핸드폰을 정면에 뒀다. 이윽고 열한 자리의 번호가 찍혀 있던 화면이 영상으로 전환됐다.

“야, 안 취하기는 무슨……. 얼굴 엄청 빨간데?”

화면에 담긴 얼굴을 보느라 단여명은 도어록의 번호를 누르는 둥 마는 둥 했다. 결국 비밀번호를 한 번 틀리고 나서야 문고리를 당길 수 있었다.

“어. 누가 고구마 구워 놨네.”

입 밖으로 나직이 새어 나온 웃음이 불이 켜진 복도를 울렸다. 몽실몽실하게 부푼 솜사탕이 바닥에 굴러다니듯 간드러진 웃음소리였다.

그러자 또 다른 목소리가 핸드폰 너머로 울려와 복도를 채우는 소리를 더했다. 숨긴다고 숨겼지만, 가린 것이 허접해 속에 있는 것이 반쯤 드러났다. 조금은 쑥스럽고, 약간은 들뜬 것이 마치 초여름 밤을 닮은 목소리였다.

그리고 달칵, 이내 조용해졌다.

모든 수순을 거친 801호의 현관문은 그렇게 닫혔다.

***

이딴 곳, 다신 안 온다.

“…….”

현재 권호영의 기분은 몹시 좋지 않았다. 간밤에 있었던 일부터 지금까지 모든 게 악몽처럼 느껴졌다.

엠티라는, 다수가 필수로 참여한다는 학교 행사에 혼자 빠질 수 없었다. 일평생 모범생 코스를 밟아온 권호영은 정말, 다른 때보다 심히 내키지 않았음에도 결국 엠티 장소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관심 없는 남들의 춤사위를 보는 것까진 참을 만했다.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과 얘기를 나눠야 하는 것도 귀찮았지만, 그러려니 넘길 수 있었다. 이는 참여 동의서에 이름을 올렸을 때부터 예상했던 것이었다. 그러니 다 이해할 수 있었다.

그런데 소주를 궤짝으로 들고 온 조교가 등장한 때부터 생각이 180도로 바뀌었다. …아니, 그 전이었나.

방마다 하나씩 배치된 밥솥에 소주와 맥주가 콸콸 들이부어졌다. 대량의 소맥을 제조하는 선배들의 얼굴을 흡사 공포의 인간화와 같았다. 그들은 술이 가득 채워진 밥솥을 들고 우정 샷이란 걸 제안했다. 그렇게 동그랗게 둘러앉아 밥솥이 돌려졌고, 맨 끝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은…… 우연찮게도 권호영이었다.

그때부터가 불행의 서막이었다. 그 방에 있던 누군가가 무슨 소문을 퍼트렸는지는 몰랐다. 하지만 권호영이 세상에 다시없을 술꾼이라는 얘기는 학우들의 귀에 속속히 들어갔다.

술자리는 굉장히 정신 사나웠다. 남녀 구분 없이 사람이 나갔다가 채워지며 계속 구성원이 바뀌었다. 북새통 사이에서 권호영도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방을 바꿔가며 자리에 앉혀졌다. 처음에 제지하던 윤재윤도 나중엔 곁을 얼쩡거리며 그를 즐겁게 관망했다. 그쯤 주량이 약한 민들레는 여자 방으로 이송된 후였다.

시간이 지날수록 술기운이 강하게 올랐다. 집중력이 흐트러져 게임에 내리 진 것은 당연한 사실이었다. 권호영은 벌칙으로 보라색 머리끈으로 앞머리가 묶여야 했다. 옆자리에 앉아 있던 여자애가 빌려준 것이었다. 그렇게 사과 머리를 한 권호영의 모습은 사진으로 박제돼 윤재윤의 폰에 남았다.

‘흑기사’라는 소리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킬 지경이 돼서야 권호영은 도망치듯 밖으로 빠져나왔다. 시원한 공기가 온몸을 감싸자마자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이 터졌다. 바닷바람이 거세게 얼굴을 때리니 취기가 달아나는 듯도 했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풍겨오는 담배 냄새에 고개가 돌아간 것이. 시선의 끝엔 남자 한 명이 서있었다. 짝다리를 짚은 채 담배를 피우는 남자는 모르는 얼굴이었다.

술을 먹다가 틈틈이 핸드폰을 확인해 봤지만, 알림 창은 쥐 죽은 듯 조용하기만 했다. 읽었다는 표시가 떴는데, 어째선지 상대는 답장이 없었다. 권호영은 핸드폰을 이리저리 돌렸다. 야외등의 불빛이 반사된 액정이 마치 메시지라도 도착한 듯 잠깐잠깐 빛났다.

피곤했다. 조용히 쉬고 싶었고, 몸속에 흐르는 알코올의 영향으로 몸이 후덥지근한 것마저 불쾌했다. 다시 들어가기가 싫어 그리 핸드폰만 만지작대던 순간이었다. 무음 모드로 돌려놓은 핸드폰의 화면이 일순간 환하게 밝아졌다.

잘못 본 것이 아니었다. 기다리던 상대의 연락에 권호영은 메시지의 내용을 읽지도 않고 전화를 걸었다.

“권호영!”

저녁 8시부터 벌어진 술판은 늦은 새벽에 막을 내렸다. 권호영은 자정이 넘어서 배정된 숙소로 돌아왔다. 술기운 때문인지 모를 두근거림을 느끼며 그대로 눈을 감았다. 그러나 잠깐 좋았던 기분은 급속도로 하향했다.

“호영아아-, 안 들려?”

남들과 부대끼며 자는 것은 생각보다 더 최악이었다. 권호영이 끼고 자던 몸은 항시 좋은 향이 폴폴 났다. 한참 땀이 났을 때도 빗물에 젖은 흙처럼 그 어딘가에 청명한 향이 묻어났다. 그런데 시커먼 사내자식들에겐 불쾌한 냄새뿐이었다. 코골이도 심했고, 잠꼬대도 진상처럼 했다.

“그렇게 뚱하니 있지 말고 이리 와 봐! 사진 찍자.”

“그래, 갑자기 버스에 문제가 생겼다는 걸 어쩌냐.”

일정에 없던 자유 시간이 주어져 학생들은 해변에 나와 추억을 남기는 데 한창이었다. 그 인파 속에 민들레와 윤재윤도 섞여 있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둘 다 죽는다고 구시렁댔는데, 바다를 보니 숙취가 싹 내려가기라도 한 모습이었다.

태양 빛이 내려앉은 바다가 짙푸른 색으로 반짝였다. 오늘 새벽에 해가 떠오르는 걸 보며 드디어 해방이라고 생각했건만. 애석하게도 불행은 아직 끝나지 않은 모양이다. 권호영은 따가운 뙤약볕에 인상을 구기고 있다가 어쩔 수 없이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어, 권호영! 살아 있었네?”

“그러게. 어제 장난 아니게 마시더니. 속은 어때, 괜찮아?”

그리 모래사장을 밟아가는 도중이었다. 어디서 나타났는지 모를 여자애 두 명이 알은척했다. 그들의 손에는 테이크아웃 커피잔이 들려 있었다. 무료한 시간을 죽일 겸 인근의 카페라도 다녀온 듯 보였다.

권호영은 고개를 까딱 숙였다. 어제 통성명을 했던 것 같은데 기억이 흐렸다. 대강 대답해 주고, 이내 등을 돌려 섰다.

“키 좀 낮추라니까. 얼굴이 안 나오잖아.”

윤재윤이 어깨를 손으로 잡아 누르며 핀잔했다. 권호영이 허리를 굽히자 세 사람의 눈높이가 얼추 맞았다. 그대로 셔터 소리가 찰칵이며 몇 차례 울려 퍼졌다.

“뭔 생각을 그렇게 하냐?”

민들레가 사진을 확인하는 사이 윤재윤이 팔꿈치로 옆구리를 찔렀다. 권호영은 파도가 밀려드는 광경을 멀거니 바라보았다.

“택시 잡을지 말지 고민해요.”

머릿속이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다른 쪽으로 사고가 돌아가지 않았다.

“아서라. 여기 은근 촌 동네라 택시 안 잡힐걸.”

고작 하루 떨어져 있었는데. 어제 작은 화면으로 봤던 그 얼굴이 성에 차지 않아서 마음이 급해졌다. 원래 이 정도까진 아니었는데……. 이상함을 느끼다가 문득 이 기분의 시초를 상기했다.

‘어젯밤.’

그래, 이리 조급증이 나는 것은 어젯밤의 분위기가 묘했기 때문이었다. 대화가 잠깐씩 끊어져도 둘 다 전화를 끊지 않았다. 기억이 중간마다 불투명했지만, 통화 시간이 총 1시간 30분을 찍은 것만 봐도 그랬다.

그때의 분위기를 다시 느끼고 싶었다. 단여명을 보자마자 대뜸 끌어안고, 그대로 침대 위를 뒹굴고 싶었다. 그의 살냄새가 밴 이불 속에 나란히 들어가 어제 듣지 못했던 대답을 듣고 싶었다. 그러는 형은 내가 보고 싶었냐고.

권호영에겐 돌아갈 곳이 있었다. 겨우내 얼었던 땅이 녹듯 지친 심신을 달래 주는 장소였다. 그곳엔 자신을 기다리는 사람도, 훈기 도는 식사를 같이할 사람도 있었다. 남들이 그렇게 좋다고 떠들던 집이란 의미성은 어느샌가 소리 소문 없이 마음에 스며들었다.

버스의 결함 사유는 엔진 문제였다. 버스 한 대만 좀처럼 시동이 걸리지 않아 결국 나머지 인원을 실은 6대의 버스만 먼저 서울로 돌아갔다.

남겨진 30여 명은 리조트 측의 배려하에 라운지에 앉아 핸드폰을 하거나, 바다를 거니는 등 저마다 시간을 보냈다. 그사이 조교는 급히 다른 버스 업체에 연락을 돌려 사정을 설명했다. 그리하여 대기 5시간, 이동 3시간, 총 8시간을 소모해 권호영은 가까스로 집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하필 운이 없어도 이렇게 없을 수가. 고장 난 버스 욕은 이미 신물이 나도록 한 뒤였다. 욕할 시간에 다리를 빠르게 움직이는 것이 더 효율적이었다.

현관문의 패스워드를 치고 문을 열자 포근한 향이 먼저 반겨 줬다. 제가 없는 사이 빨래를 돌렸는지 집 안엔 섬유유연제 냄새가 옅게 퍼져 있었다.

문이 닫히고 시선을 앞으로 던진 순간이었다. 돌연 안쪽에서 쿵, 하고 큰소리가 났다. 소리를 낸 범인은 이미 누군지 알고 있었다. 같이 저녁을 먹기로 해 늦어도 9시까지 집에서 보기로 했다. 외출한다고 하긴 했지만, 약속 시간 전까지 다녀온다고 했으니 아마 집에 있을 것이다.

“……호영이 너야?”

역시나 거실 쪽에서 단여명의 목소리가 들렸다. 권호영은 신발을 벗고 안쪽에 발을 디뎠다.

“네.”

“생각보다, 일찍 왔네?”

말을 하는 중간에 딸꾹질이라도 삼킨 듯 그의 목소리가 부자연스럽게 끊겼다. 권호영은 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단여명을 만나자마자 무슨 행동을,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수만 가지를 생각해 놨지만, 지금은 얼굴을 보는 게 우선이었다.

“……왜 그러고 있어요?”

그리 몇 발자국 떼지 않은 순간 권호영은 자리에 멈춰 섰다. 단여명은 어째선지 한쪽 벽에 손을 짚고 서 있었다. 권호영을 외면하듯 등을 돌려선 채로.

고작 하루였다. 하루 떨어져 있었다고 유난스럽게 반겨 주지는 않을 걸 알았지만, 눈도 안 마주치려고 할 줄 몰랐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보고 싶다고…… 아니, 물론 저 혼자 말한 거지만, 그래도. 단여명도 조금은 제 생각을 한 줄 알았다.

혹시 통화하다가 술김에 말실수라도 했나? 움츠러든 뒤태를 자세히 뜯어보는데, 왠지 그런 이유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무언가를 숨기려는 듯 허둥지둥하는 모습이었다. 등을 돌리고 서 있는 자세도 어정쩡했고.

“거기 뭐 있어요?”

“아니…….”

“뭔데 그래요?”

권호영은 단여명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등 뒤로 붙어서니 그가 조용히 한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보고 놀라면 안 돼.”

허리를 똑바르게 편 단여명이 곧 벽을 짚고 있던 손을 떼어냈다. 체념기가 실린 목소리의 말뜻을 미처 이해하기도 전이었다. 그가 몸을 빙글 돌렸다.

“……짠.”

이를 살짝 드러낸 웃음이 언뜻 과장돼 보였다. 자신 없게 흘러나온 감탄사는 채 귀에 담기지도 않았다.

권호영은 단여명과 눈이 마주친 순간 무섭도록 정색했다. 표정이랄 게 없던 얼굴에 기색조차 지워지니 서늘하다 못해 싸늘한 기운이 내려앉았다.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상대를 뚫을 듯이 주시하는 모습은 언뜻 살벌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얼굴…….”

홀린 듯 멍하니 있던 권호영이 단여명의 뺨을 덥석 감쌌다. 그가 어깨를 움찔하며 놀라는 것을 느꼈지만, 반사적으로 손이 먼저 나갔다.

“얼굴이 왜 이래요?”

한쪽 눈썹 아래부터 관자놀이까지 길게 찢어진 상처가 보였다. 상처 주위로는 부기가 올라 있었다. 곧잘 반달 모양으로 부드럽게 접히던 눈매는 웃음 때문이 아닌 상처의 부기로 반쯤 감긴 채였다.

심장이 발밑으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순간 숨 쉬는 것마저 잊을 만큼 놀라 정신이 멍해졌다. 집에 오기까지 그와 만날 순간을 여러 가지 그려봤다. 하지만 이런 얼굴은 단연코 예상 밖이었다.

“이게…….”

뭔가 잘못됐다. 집에 도착하기 전까지 모든 불행을 겪었다고 생각했는데, 제일 큰 불운이 이제야 닥친 것 같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다. 안 좋은 예감이 등 뒤에 바짝 달라붙어 속삭임을 흘려 넣는 기분이었다.

핏기가 싹 가신 얼굴로 권호영은 상대를 잡아먹을 것처럼 노려봤다. 저 얼굴에 저런 상처가 좀처럼 말이 안 돼 눈앞에 보이는 것을 부정하게 됐다. 가까이서 들여다보는 게 부담스러운지 단여명이 눈동자를 옆으로 굴렸다가 다시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에 꽉 막혀 있던 말문이 물이 터진 둑처럼 순식간에 트였다.

“누가 이랬어요?”

“어…….”

“어디 부딪친 거예요?”

“잠깐…….”

“이거 긁힌 자국인데. 사람이에요, 물건이에요?”

“하나씩, 하나씩 물어봐.”

면전에 쏟아지는 질문이 얼떨떨한지 단여명이 웃는 얼굴로 눈살을 찡그렸다. 눈웃음을 지으니 한쪽 눈이 얼마나 부었는지 확실히 부각됐다. 다른 쪽의 눈은 언제나 그렇듯 예쁘게 휘어졌으니까.

“그리고… 좀 아픈데.”

단여명이 붙잡힌 얼굴을 살짝 돌렸다. 권호영은 그제야 손에서 힘을 뺐다. 얼굴을 놓아주자 단여명이 손등으로 뺨을 슥 쓸었다. 눈을 아래로 깐 모습이 시선을 맞추기 어려워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마치 걸리는 구석이라도 있는 듯.

“그 사람 만난 건 아니죠?”

권호영은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을 여과 없이 뱉었다. 부은 눈가를 본 순간 가느다란 손목에 남았던 멍 자국이 연상됐던 까닭이었다.

뺨을 문지르던 손이 이내 천천히 움직임을 멈췄다. 그 사람이라는 게 누구를 지칭한 건지 단번에 알아들은 낌새였다. 단여명은 잠깐 동안 말이 없었다. 판박이 같은 미소는 여느 때와 같아서 속을 쉽사리 짐작할 수 없었다.

“내가 걔를 왜 만나. 이름도 잊고 사는데.”

작게 터진 실소와 함께 바닥에 떨어졌던 시선이 위로 들렸다. 기가 막힌 소리를 들었다는 양 단여명이 희게 웃었다.

“술 취한 사람이랑 어깨가 부딪혔는데 시비가 붙었어. 분위기가 좀 험해져서 몸이 떠밀렸는데, 모서리에 부딪혀서…….”

“…….”

“보는 대로?”

단여명이 장난스럽게 어깨를 들었다가 놓았다. 권호영은 똑바로 부딪치는 눈동자를 길게 주시했다. 민망해서 일부러 저렇게 말하는 것쯤은 알았다. 그렇지만 일말의 진지함도 느껴지지 않아 속이 얹힌 듯 답답해졌다.

“…거짓말 아니야. 뭐 걸어야지 믿어 줄래? 내 차 가질래? 방학 때 운전면허 딴다며.”

아무 말도 하지 않자 단여명이 변명하듯 말을 더했다. 까만 눈동자가 힐긋대며 연신 제 얼굴을 살폈다. 침묵이 길어질수록 자신들을 감싼 공기가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는 것을 느꼈다.

“믿어요.”

권호영은 떨리는 목소리를 애써 가다듬었다. 단여명이 이런 분위기를 불편해하는 걸 알고 있었다.

“믿을게요.”

잇새로 뜨거운 한숨이 쏟아졌다. 다친 이유를 들었지만, 여전히 납득되지 않는 건 매한가지였다. 속이 부글부글 끓는 것이 좀처럼 진정되지 않았다.

“시비 붙었다는 그 사람이 누군데요.”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이야. 잘 얘기하고 좋게 끝냈어.”

“어떻게 좋게 끝냈는데요. 사람 얼굴에 상처 내놓고.”

“그 사람도 홧김에 그런 거래. 나도 잘한 건 없어서 그냥 알겠다고 말하고 합의 봤어.”

홧김? 권호영은 결국 참지 못하고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끓는 속을 진정시키고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떠 봤지만, 나아지는 것은 없었다. 울컥대며 험한 말이 쏟아지려고 해 상처가 난 얼굴에서 일부러 시선을 돌렸다.

권호영도 이미 알고 있었다. 자신이 개입할 새도 없이 끝난 일이다. 상처가 난 얼굴을 전으로 돌릴 수 있는 방법 따위 없다. 제가 할 수 있는 일은 평소처럼 그랬느냐고 듣고 넘기는 것뿐. 이 얘기를 물고 늘어져 봤자 좋을 게 하나도 없었다. 분위기는 더욱 험악해질 테고, 단여명은 계속 곤란해할 것이다.

“저 가방은요.”

그걸 분명 아는데. 마음이 생각처럼 따라 주지 않았다.

“안에 든 게 많아 보이는데.”

눈짓으로 그의 발치에 떨어져 있는 걸 가리키자 단여명 또한 제 발밑을 응시했다. 지퍼가 열린 가방 속에는 옷가지와 칫솔 같은 생필품이 삐져나와 있었다.

“네가 걱정할까 봐…… 부기 좀 가라앉히고 보려고 했지.”

“그래서 집에 안 들어올 생각이었어요?”

“…….”

“생각이 어떻게 그쪽으로 가요? 이게 숨긴다고 해결될 일이에요?”

기어코 격양된 목소리가 터졌다. 무섭게 쏘아붙이는 말에 단여명은 놀란 듯 웃던 표정을 서서히 흐렸다.

“화낼 줄은… 몰랐는데.”

단여명은 권호영이 이러는 모습이 낯설다는 눈이었다. 권호영은 거칠어지는 숨을 의식적으로 잡아 눌렀다. 이러면 안 되는데. 그의 옆에 남기 위해선 최대한 고분고분한 모습만 보여야 했다.

권호영은 홀로 서는 방법 따위 몰랐다. 평생 애정을 갈구하며 살았다. 어머니가 잘했다며 머리를 쓰다듬어 줄 때면 텅 빈 구멍이 충족되는 한편 불안해졌다. 이번엔 잘했지만 다음번엔 못한다면? 아버지를 내친 어머니가 끝내 자신마저 버릴까 봐 무서웠다.

다신 버림받고 싶지 않았다. 때마침 내린 단비 같은 사람에게 내쳐지고 싶지 않았다. 제게 위안이 되지 않아도 좋았다. 구멍이 난 부분은 최대한 드러내지 않을 테니 그의 곁, 가장 가까운 자리에 남을 수만 있으면 괜찮았다.

권호영은 숨죽인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단여명은 특별한 사람이었다. 진짜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이자 제 모든 것을 처음으로 가져간 사람이었다. 서로를 알아간다는 게 무슨 느낌인지, 관계가 진척되는 것이 얼마나 들뜨는 기분인지. 사람과 진정으로 소통하는 방법을 깨우치게 해 준 남자였다.

“화가…….”

특별하니까. 그래서 더 마음이 가고…….

“화가 어떻게 안 나요.”

자신도 모르게 화가 났다.

“숨기려던 건 아니었어. 얼굴이 이래서 보여주기가…….”

권호영은 손을 뻗어 단여명의 눈 밑을 쓸었다. 엄지로 가볍게 문지르니 그가 하던 말을 멈추고 눈길을 들었다. 싫어하거나 거리끼는 눈빛은 아니었다.

“…많이 부었어?”

“네.”

“보기 흉하겠다.”

“보기 안 흉해요.”

부기가 오른 쪽은 만질 생각도 들지 않았다. 그를 잠시간 지켜보던 권호영은 단여명의 손목을 잡아 제 쪽으로 당겼다.

“어, 어디 가려고?”

“병원이요.”

“무슨, 그 정도 아니야.”

그대로 몇 발자국 끌려간 단여명이 얼떨떨하게 눈을 깜빡였다. 당황한 낯이었지만, 붙잡힌 손목을 빼내지 않았다. 그를 확인한 권호영은 그대로 걸음을 앞으로 옮겼다.

“잠깐, 진짜로…….”

앞으로 잡아끄는 움직임에 단여명의 다리가 질질 끌리듯이 움직였다. 등 뒤에서 난감해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권호영은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저 상처를 어떻게든 해야겠다는 생각만이 앞섰다.

“권호영!”

큰 목소리가 터진 것은 현관 앞에 다다를 때쯤이었다. 단여명이 가만히 내주고 있던 손을 불식간에 뿌리쳤다.

“…….”

“…….”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분위기가 삽시간에 가라앉았다. 싸해진 공기 속, 두 사람은 서로를 바라보았다. 고함을 친 단여명도, 그것을 들은 권호영도 과히 놀란 낯이었다.

“제발. 형이…… 병원 갈 힘이 없어서 그래.”

침묵은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실수했다는 듯 눈가를 찌푸리고 있던 얼굴이 곧 울 것처럼 일그러졌다. 단여명은 얼굴이 보이지 않도록 고개를 푹 숙였다. 얼굴을 쓸어 올리는 손길이 자못 혼란스러워 보였다.

“네 마음은 알겠는데…… 집에서 치료하는 걸로 끝내자. 응? 진짜 병원 갈 정도 아니야. 살짝 찢어진 거라서 그렇게 아프지도…….”

“…….”

“…그냥 둘이 있으면 안 돼?”

경황없이 말하던 단여명이 곧 맥없는 목소리를 흘렸다. 대답을 듣고 싶다는 양 푹 숙인 고개가 살며시 들렸다. 흔들리는 목소리와 반대로 까만 눈망울엔 울음기가 비치지 않았다.

그걸 멍하니 바라보는데, 손목에서 가벼운 감촉이 느껴졌다. 권호영의 손목을 살짝 끌어당긴 단여명이 어설픈 미소를 보였다.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 위태로운 웃음이었다.

“…….”

그 모습을 본 권호영이 할 수 있는 것이란 없었다. 권호영은 말없이 단여명 쪽으로 몸을 돌려 섰다.

“여기 어디 뒀던 것 같은데…….”

단여명이 무릎을 꿇고 TV 서랍장 안에 손을 넣었다. 느릿느릿한 손길을 가만 보기 힘들어 권호영은 그를 밀어내고, 제가 서랍장을 뒤졌다.

“너 다쳤을 때랑 비교하면 별것도 아니야. 난 한쪽 눈만 이렇지 넌 그때 얼굴 전체가 그랬잖아.”

구급함을 찾기 여념 없는데, 단여명이 뒤에서 종알종알 말했다. 방금 전에 있었던 일을 없었던 셈 치려는 듯 목소리가 부자연스럽게 밝았다.

“너 아무는 속도 보니까 효과 없을 것 같긴 한데, 네가 호 해주면 싹 나을…….”

무언의 뜻을 담아 옆을 돌아보자 단여명이 입을 꾹 다물었다.

“자꾸 움직이지 마요.”

“아니, 웃겨서 어쩔 수가…. 넌 왜 이런 것도 서툴러?”

바닥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은 작게 말씨름했다. 단여명이 웃으며 얼굴을 빼내려고 할 때마다 권호영의 손이 벌어진 간격만큼 뒤따라갔다. 결국 손이 닿지 않을 거리까지 단여명이 몸을 뒤로 물렸다. 권호영은 연고가 묻지 않은 손으로 그의 발목을 당겨 제 앞으로 끌어왔다.

“많이 바르면 좋은 게……. 얇게 얹어야지. 다 흘러내리잖아.”

약간이라도 조용해질 법하면 단여명이 어김없이 입을 열었다. 권호영은 길게 찢어진 상처를 따라 치덕치덕 연고만 발랐다.

“호영아. 나 눈이 안 떠지는데.”

연고의 뚜껑을 닫을 때쯤 단여명이 한쪽 눈을 감은 채로 말했다. 장난스럽게 꾸민 얼굴 아래로 발간 물이 든 거즈가 굴러다녔다. 그는 상처를 소독하는 중에도 아프다는 기색 한번 드러내지 않았다.

“그런 얼굴로 웃지 마요.”

권호영은 휴지로 까만 속눈썹에 뭉친 연고를 닦아냈다.

“분위기도요. 안 띄워도 되니까 가만히 있어요.”

주변에 늘어놓은 물건을 정리하는 손길이 바지런했다. 그를 내려다보던 단여명은 입술을 안쪽으로 말았다. 숙연해진 분위기 속, 서로의 숨소리만이 들렸다.

“…오늘은 안 해?”

“네.”

“왜? 거의 맨날 했잖아.”

“…….”

“맛있는 것도 안 먹어?”

단여명이 눈치를 보듯 작은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 그런 게 안중에 들 리가. 그를 모르지 않을 텐데 단여명은 자꾸만 얘기를 돌리려고 했다. 제가 걱정하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인 건 알았다. 제 기분을 어떻게든 풀어 주려고 저러는 걸 테지. 그렇지만…… 이건 정말 아니었다.

“이제 집에 있어요.”

마음을 다스릴 새도 없이 불쑥 말이 튀어 나갔다.

“글 쓰는 사람이 왜 매일 밖을 나가요. 작가라는 직업이 언제부터 그렇게 바뀌었어요?”

권호영은 똑바른 눈길을 던졌다. 최대한 조곤조곤하게 말하려고 했지만, 감정이 격해져 말투에 아슬아슬한 날이 섰다.

“형, 한 달 전까진 다음 작품 쓴다고 고민 많이 했잖아요. 갑자기 왜 그러는 건데요. 그사이에 누구한테 신고라도 당했어요? 표절 그런 거로?”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럼 뭐 때문에 그래요. 신경에 거슬린다는 일, 그거 아직 해결 안 된 거죠. 뭐가 문제여서 먹기 싫은 술 먹고, 아침마다 속 쓰리다고 그래요.”

단여명은 말이 없었다. 하고 싶은 말을 꾹 참듯 입가에 힘을 준 채 눈으로 곤란한 웃음만 띠었다. 권호영은 그를 보며 그만 다그쳐야 할 때임을 직감했다. 이리 몰아붙이는 식으로 말하려던 게 아닌데. 생각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어 속이 더 상했다.

“밖에 나가기도 싫잖아요. 형 그렇게 부지런한 사람 아닌 거 알아요.”

“야, 무슨 말을 그렇게…….”

단여명이 어색하게 웃었다. 그 웃음소리를 들은 순간 권호영은 표정을 달리했다. 그게 어떻게 비쳤는지 단여명이 하던 말을 천천히 멈췄다. 가볍게 넘길 분위기가 아니란 걸 받아들인 얼굴이었다.

“더 이상 모른 척해 줄 수가 없어서…….”

“…….”

“그래서 묻는 거예요.”

깊은 한숨과도 같은 목소리가 흘렀다. 권호영은 시선을 피하기 바쁜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낯을 어떻게 일그러트렸는지도 모르고 단여명의 얼굴에만 온 신경을 쏟았다.

“만약 제가 그랬으면… 형은 뭐라고 말했을 건데요.”

“…….”

“무슨 일 있는 거잖아요. 왜 말 안 해 줘요?”

권호영은 꾹 닫힌 입술을 원망스레 노려보았다. 연고로 반들반들하게 빛나는 상처가 너무 아파 보여 꼴도 보기 싫었다. 그럼에도 자꾸만 시선이 가 괴로워 미칠 노릇이었다.

자기가 모르는 새 다치고 온 단여명이 미워졌다가 반대로 제가 싫어졌다. 털어놓을 수 있는 사정이었으면 어련히 알아서 말했겠지. 말하기 싫어하는 사람을 붙잡고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싶었다. 자신이 그를 강제할 권리는 없는데.

“……제가 아직 부족해서 그래요?”

어느새 커진 욕심은 기어이 사사로운 것까지 탐했다.

“형보다 어려서?”

“……그런 거 아니야.”

혈색이 도는 입술이 살짝 열렸다가 도로 다물렸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사람처럼 단여명은 한동안 시간을 끌었다.

“공소시효라는 말 알아?”

그리 망설이기를 몇 차례, 이윽고 그가 무거운 적막을 깼다. 뜻 모를 얘기를 하는 단여명은 어쩐지 조금 후련해하는 얼굴이었다. 그와 반대로 목소리엔 언뜻 체념기가 섞여 있어 의중을 알아채기 더욱 어려웠다.

“일 다 정리되면 얘기해 줄게. 지금은 말할 때가 아니어서 그래.”

“…….”

“…약속할게. 그때 다 말해 주겠다고.”

까만 눈동자가 빛을 머금고 순하게 반짝였다. 잠깐 눈물과도 비슷해 보였던 빛은 그가 고개를 바르게 놓으니 깨끗하게 증발했다.

“나도 너한테 듣고 싶은 말이 있는데…… 그럼 그때 너도 솔직히 말해 주는 걸로 하자.”

단여명이 슬그머니 손을 겹쳐 잡았다. 부드럽게 속삭이는 목소리가 귀 근처의 살을 간질여 놓았다.

“응?”

단여명은 마치 어린 동생을 달래는 듯한 태도였다. 평소보다 말투가 사근사근했고, 목소리도 바람결에 나부낀 버들잎처럼 나긋했다. 저 목소리가 싫으면서도 싫지 않았다. 진심 어린 감정이 담겨 있었으니까.

권호영은 방바닥에 놓인 한 쌍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매일 익숙하게 내려다보던 손등 위에 새하얀 손이 올라가 있었다. 손등 위에 동그랗게 불거진 뼈마저 제 것보다 작은 모양이었다. 그걸 보는데 어쩐지 마음이 쓰렸다.

“……네.”

권호영은 얌전히 대답하는 걸 택했다. 이제 그만 물러나야 할 때인 걸 느꼈다. 묻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의심 가는 게 한둘이 아니었지만, 결국 알았다는 대답을 꺼내놓았다.

“호영아……. 속상해?”

가만히 있으니 단여명이 웃으며 품에 안기듯 들어왔다. 양팔을 뻗어 권호영의 등을 감싸고, 자신보다 큰 몸을 끌어안았다.

“형 괜찮아. 안 아파. 이 정도는 금방 나아.”

재회의 순간은 기대했던 장면과 비슷하지만 다르게 펼쳐졌다. 품에 가득 찬 온기를 느끼면서도 권호영은 막연한 기쁨을 누리지 못했다.

괜찮다고 제 등을 두드리는 손길이 유약하고도 안쓰러워 턱에 힘이 실렸다. 권호영은 말없이 작은 몸을 부서트릴 듯이 꽉 끌어안았다.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향을 들이켰다. 심란한 마음에 연달아 담배를 태웠는지 씁쓸한 담배 향이 진하게 배어났다.

…괜찮다는 말, 듣기 안 좋은 말이었구나. 예전에 단여명이 답답해하며 따져 물었던 걸 권호영은 지금에서야 절절히 이해했다. 정말 괜찮은 사람이라면 저런 목소리를 내지 않을 테니까.

두 사람은 서로를 부둥켜안은 채 긴 시간 동안 온기를 나눴다. 서로가 가진 멍울을 아무 말 없이 어루만져 주는 것도 모른 채 뜨겁게 달아오른 가슴을 맞대었다. 보일러도 틀지 않은 방바닥에서 서투르고도 애틋한 마음이 전해졌다.

찬기는 느껴지지 않았다.

***

[얼굴은 좀 괜찮습니까?]

진동이 울리는 것과 동시에 휴대폰 화면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저장명은 ‘B’. 빌에게서 온 연락이었다.

단여명은 간략하게 정리해 답장을 보냈다. 상처는 거의 다 아물어가니 마음 쓰지 말라고. 그리고 당분간 그 일로 가게가 시끄러울 테니 일주일 뒤쯤에 따로 만나서 얘기하자고.

만나는 사람마다 경악하는 반응을 보였다. 엘리베이터 안에 모르는 사람과 동승하기라도 하면 흘깃대는 시선이 따라붙었다. 얼굴을 본 지인들은 걱정 어린 소리를 빼놓지 않았다. 얼굴이 그게 뭐야, 조심 좀 하지, 그나마 눈은 안 다쳐서 다행이네. 각기 하는 얘기도 달랐다.

“아프겠다…….”

그중 걱정을 받고 싶지 않은 사람에게 걱정을 들어야 하는 상황도 필연적으로 생겼다.

“연락받고 놀랐잖아. 어쩌다가 그렇게 된 건데?”

대략 이주 반만의 재회였다. 김선오는 눈썹을 내려트린 채 제가 다 아프다는 표정을 지었다. 단여명은 머쓱하게 눈 위를 쓸었다. 거즈를 붙여놔 까슬까슬한 감촉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잠결에 침대 모서리에 박았어.”

말을 뱉고 나니 입안에 공연한 쓴맛이 돌았다. 만나는 사람마다 하는 말이 다 다른 게 인생이 거짓부렁이구나. 그런 침울한 생각에 잠길 무렵 딱 한 명의 예외자가 떠올랐다.

비록 다친 것을 얼버무리려는 시도는 수포로 돌아갔지만, 권호영에게 했던 말은 진실이었다. 취객과 어깨가 부딪친 것도, 그에게 몸이 떠밀려 상처가 난 것도. 핵심을 빼고 얘기해서 그렇지 그에게 한 말은 정녕 거짓이 아니었다.

“보기에만 그렇지 진짜 아무렇지도 않아.”

사건의 경위는 금요일 저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권호영과 약속이 있었기에 단여명은 평소보다 일찍 자리를 벗어나려고 했다. 집으로 돌아가려던 참에 마침 빌이 담배를 피우러 간다는 소리를 했고, 밖에서 같이 담배를 피운 다음 헤어지고자 그와 동행했다.

그리 가게 밖으로 나가던 도중 옆을 지나던 남자와 우연히 어깨가 부딪쳤다. 권호영에게 했던 말대로 몸이 부딪쳤다는, 단순한 계기로 다툼이 생긴 건 아니었다. 단여명은 오히려 미안하다며 고개를 숙였고, 남자도 다분히 성의 없지만, 같이 고개를 까딱했다. 그리 별 탈 없이 스쳐 지나가려고 했다.

‘아니…… 이게 누구야?’

자신의 동행인을 알아본 남자가 다짜고짜 말을 붙이지 않았다면.

그러니까 싸움의 원인은 단여명 때문이 아닌, 옆에 있던 빌이 도화선이 됐다. 술에 얼큰히 취한 남자는 대뜸 삿대질하며 애인을 빼앗아 간 새끼라고 가게가 떠나가라 고함쳤다. 빌은 상대하지 않으려고 했지만, 일방적인 도발은 계속됐다.

뭐가 뭔지 몰라 눈을 굴리는 사이 말다툼은 곧 몸싸움으로 번지려고 했다. 격양된 분위기 속 남자는 단여명도 외도한 새끼 중 하나가 아니냐며 대놓고 빈정거렸다. 그러더니 대뜸 손목을 잡고는 자기를 따라오라고 얘기했다. 자기가 더 잘한다면서.

미친 건가. 가만히 있던 나는 왜 걸고넘어지지? 면전에 쏟아진 비난과 사람 몸을 함부로 잡은 것까진 참아 넘길 수 있었다. 단여명에겐 돌아가야 할 곳이 있었고, 여기서 문제 일으켜 봤자 좋을 게 없다는 걸 알았다.

‘씨발, 왜 자꾸 빼는데. 아니면 너 룸 뛰는 놈이냐? 얼굴도 반반해 보이는 게…. 저 새끼한테 얼마 받기로 했는데?’

하지만 얌전히 넘기기엔 그동안 이곳에서 겪었던 무례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받기로 한 금액, 두 배 쳐 줄게. 그러니까 그만 아양 떨고 나랑 가자고.’

가정교육을 어떻게 받았기에 기본적인 예의범절도 박혀 있지 않은 것인지. 강한 의문이 솟구쳐 입이 제멋대로 열렸다.

‘아니요. 제가 비위가 약한 편이라.’

단여명은 남자의 손을 정중히 뿌리쳤다. 진열장에 걸린 상품을 고르는 듯한 그들의 태도에 진절머리가 났다.

‘못 알아들어요? 배 나온 아저씨랑은 얼마를 주든 밥도 같이 못 먹는다고.’

더럽고, 불쾌하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자신이 뭐라고 떠드는지 자각하지 못했다.

그 순간이었다. 질 낮은 욕지거리를 듣는 것과 함께 가슴팍이 뒤로 떠밀렸다. 욱하는 마음에 남자의 정강이를 힘껏 걷어찬 순간 빌이 한쪽 손목을 확 잡아당겼다.

그 딴에는 제가 휘말린 격이라 그만하라며 제지하려고 한 것일 테다. 한쪽 발로 중심을 지탱한 와중이어서 끌어당긴 방향으로 제 몸이 넘어갈 것도, 그리고 그대로 테이블 모서리에 얼굴을 찧을 줄도 정녕 몰랐을 것이다.

[그래요. 당분간 술은 자제하는 게 좋겠습니다.]

유혈 사태가 일어나자마자 상황은 종료됐다. 가드의 개입으로 결국 남자는 가게 밖으로 퇴출당했다. 모두의 수군거림을 들으며 단여명은 상처를 지혈했다.

쓰고 있던 가면이 깨져 살을 찢어놓는 바람에 상처에서 피가 줄줄 흘렀다. 응급차는 부르지 않았다. 일을 시끄럽게 키우기엔 많은 문제가 걸렸기에.

나중에 빌의 얘기를 들어 보니 한참 만나던 파트너가 애인이 있던 사람인 줄 몰랐더란다. 그래서 처음에 주인이 있다던 제게 깔끔히 손을 뗀 모양이었다. 아마 밖으로 쫓겨난 남자와 과거에 지독히 얽혔던 사이겠지.

[미안합니다. 저 때문에 안 좋은 일에 휩쓸리게 하고. 사과의 표시는 하겠습니다.]

단여명은 빛이 들어온 핸드폰에서 눈길을 거뒀다. 잠깐 아래에 시선을 준 사이 차는 한적한 주차장에 들어선 뒤였다. 오늘 어디를 간다고 했던 것 같은데, 제가 아는 곳은 아닌 것 같아 보였다. 낯선 풍경을 돌아보는데 김선오가 뒷좌석으로 손을 뻗었다.

“자.”

그의 손에 들려 나온 것은 새하얀 쇼핑백이었다. 누가 봐도 선물하는 용도의. 단여명은 최대한 껄끄러운 티를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그를 응시했다.

“그게 뭐야?”

“그럼 네가 다쳤다는데 빈손으로 와?”

얼른 받으라는 듯 김선오가 쇼핑백을 흔들었다. 단여명은 마지못해 물건을 받아들었다. 열어 봐도 좋다는 눈짓에 쇼핑백 안에 손을 넣어 보았다. 잡히는 물건이 한두 가지가 아닌 게 벌써부터 마음이 불편해졌다.

“무슨…… 이게 다 뭐야? 영양제는 또 뭐고.”

“비싼 것도 아니고 그냥 받아. 그동안 부담스러워할까 봐 뭐 선물하지도 못했으니까.”

…부담스러워할 거 알면 선물하지 말지. 잠깐 새 흐른 침묵에 그런 속내가 드러난 듯했다.

“너 자취하잖아. 상비약 많을수록 좋은 거 아냐?”

김선오가 자연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하나도 자연스럽지 않은 이유를 대며.

단여명은 쇼핑백 안에 들어 있는 것 중 제일 눈에 띄던 물건을 잡았다. 종이 포장지가 구겨지며 바스락, 하는 소리가 났다.

“그건 그냥 장식품. 약만 들려 주긴 휑해 보여서.”

포장지에 감싸인 작은 꽃다발은 겉보기엔 색이 진한 민들레처럼 보였다. 단여명은 꽃다발에 매어진 라벨을 돌려 보았다. 쾌유를 기원한다는 글귀와 그 아래 꽃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마리골드. 자신들의 관계와 어울리지 않게 퍽 고상한 이름이었다.

“그래.”

단여명은 난감하지만 이내 그를 수용한 사람처럼 웃었다. …이제 두 번.

“고마워, 잘 쓸게.”

두 번이면 끝이다.

***

점심시간이 10여 분 남은 상황, 권호영은 천 근 같은 시간의 흐름을 느끼는 중이었다.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라 자연히 눈은 내리깐 채다. 시선은 한곳에 꽂혀 떨어질 줄 몰랐다. 팔짱을 낀 손으로 팔목을 툭툭 두드려 봐도, 아무리 노려보듯 응시해도 잠잠한 핸드폰은 울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야, 호영아. 이거 봐. 개 웃기지.”

옆에 앉은 민들레가 팔을 툭 쳤다. 그녀의 손엔 영상이 재생되고 있는 휴대폰이 들려 있었다. 권호영은 고개 한번 돌리지 않고 답했다.

“네. 웃겨요.”

“그치! 아, 요즘 깜짝 카메라 진짜 신박하게 한다니까. 어제부터 이 영상만 몇 번을 돌려 봤는지…….”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가 귀 밖으로 흘러나갔다. 분명 1시 전까지 연락을 준다고 했는데……. 깊은 생각에 빠진 권호영은 손가락만 아래위로 두드렸다. 그래서 앞자리에 누가 앉는 기척을 느끼지 못했다.

“권호영, 하이.”

앞에서 울린 말소리에 권호영은 눈동자만 슥 올려 상대를 확인했다. ……누구더라? 어디서 본 얼굴인데, 언제였는지 기억이 날 듯 말 듯 했다.

“이제 내 얼굴 좀 기억하지? 우리 수업도 자주 겹치는데. 내가 엠티 때 머리끈도 빌려줬잖아.”

“……아.”

생각났다. 자신과 같은 1학년, 동갑내기 여자애. 그러므로 반말해야 하는 사람. 머릿속으로 생각 정리를 마친 권호영은 예의상 상체를 조금 앞으로 당겼다.

“미안. 내가 사람 얼굴을 잘 못 외워.”

“그럼 내 이름이 뭔지는 알아?”

“…김지영?”

“반쯤 맞췄는데 아깝네. 난 김수영이라고 해.”

김수영은 시종일관 웃는 낯이었다. 자기 얼굴도, 이름도 기억하지 못한다는데, 기분이 나쁘기는커녕 생글생글 웃는 것이 권호영의 눈엔 퍽 의문스럽게 비쳤다.

“그래서 내 머리끈은 언제 돌려줄 건데? 그거 아주 소중한 물건이어서 없으면 안 되는데.”

“그 보라색 고무줄 말하는 거야?”

“고무줄이라니. 아주 소중한 물건이라니까?”

권호영은 말없이 시선을 딴 곳으로 돌렸다. 그거…… 버렸는데. 밖에 나가자마자 앞머리를 풀었고, 그 뒤로 기억이 없으니 버린 거나 마찬가지였다.

“내가 내일 새로 사다 줄…….”

“가치를 매길 수 없는 거라고.”

“…….”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은 얼굴로 김수영이 무섭게 쏘아붙였다. 권호영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눈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그때 분명 가방 속에 다발로 있는 걸 봤는데…. 술에 취해 착각하기라도 한 건지 김수영은 중요한 문제를 맞닥뜨린 사람처럼 굴었다.

“네가 미안해하는 걸 보니까 그냥 넘기는 건 아닌 것 같고, 정 보답하고 싶다면 밥이나…….”

그 순간 덜컥, 의자를 뒤로 끄는 소리가 났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눈길을 줄 정도로 큰 소음이었다.

“야! 너 어디 가?”

김수영이 황당하다는 낯으로 보았지만, 권호영은 걸음을 돌리지 않았다.

“미안. 전화가 와서.”

핸드폰을 손에 든 채로 권호영은 급히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중요 인물이 빠져버려 자리엔 세 사람만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가운데 자리가 비어 있지만 않았다면, 마치 셋이서 수다라도 떨던 모양새였다.

“……와, 권호영. 대박 눈치 없어.”

흥미진진하게 상황을 관망하던 민들레가 이윽고 작게 혼잣말했다.

“아서라, 수영아.”

그쯤 핸드폰 게임에 열중하던 윤재윤도 한마디 거들었다.

“쟤 과CC 할 생각 없댔어.”

입술을 아래로 쭉 뺀 윤재윤이 책상 위에 놓인 커피를 쪼롭, 빨아들였다. 여전히 가로로 돌린 핸드폰 위에서 손가락을 바삐 놀리는 중이었다.

-미안해. 먼저 빠질 수가 없는 자리여서.

단여명의 특기는 있었던 일을 없던 일 치기다. 툭 치면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보였던 것도 한시에 그쳤다. 눈에 부기가 빠지고, 상처에 딱지가 앉을 때가 돼서도 그는 몸을 부둥켜안고 서로를 달래 주었던 날을 잊은 사람처럼 굴었다.

“언제 들어올 것 같은데요?”

둘 사이엔 새롭게 금기시된 얘기가 생겼다. 권호영의 역할은 언제나 같았다. 단여명이 괜찮아지기만을 기다리기.

-일찍 가도…… 10시는 넘을 것 같은데.

“밤?”

-응.

“지금이 낮 12시인데?”

-응…….

밖에서 밥을 먹자는 약속이 깨진 것도 이번이 세 번째였다. 본인이 먼저 제안해 놓고 계속 약속을 지키지 못해서인지 그가 시무룩한 목소리를 냈다.

“한동안 안 먹더니. 또 술인가 보네요.”

정작 엄청나게 시무룩해진 건 이쪽이었다. 원래 필요할 때가 아니고서야 핸드폰을 쳐다보지 않는다. 그런데 오늘은 점심시간 내내 핸드폰을 손에서 놓지 않고 있었다.

대답을 듣지 못하고 그대로 오후 수업이 시작할까 봐. 그럼 대답은 둘째 치고, 이 목소리를 들을 타이밍을 놓칠까 봐. 그깟 게 뭐라고 그리도 마음을 졸였던지. 아마 단여명은 모를 것이다.

“…어쩔 수 없죠. 오늘만 날도 아니고.”

권호영은 애써 태연한 목소리를 가장했다. 묻고 싶은 얘기는 여태껏 그래왔듯 마음 저편에 묻어뒀다. 자신이 걱정해 주는 걸 부담스럽고, 버겁게 느낄까 봐. 그래서 술은 적당히 먹었으면 좋겠다는, 별거 아닌 잔소리마저 목 안으로 삼켰다.

그래도 이번엔 기다림의 끝을 약속받았다. 사정을 털어놓기 꺼리는, 단여명의 마음이 어느 정도 이해 갔다. 자신만 해도 비겁한 방법으로 그에게 해답을 얻으려고 했다. 그가 과연 자신과 모친과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할지. 취기를 빌려 제 얘기가 아니라는 거짓말까지 하면서 그리 물었었다.

약속이 깨졌대도 어차피 집에 가면 볼 수 있는 사이다. 더군다나 먼저 빠져나올 수 없는 자리라고 사과까지 하지 않았나. 그러니 실망한 티를 내지 말아야 하는데……. 마음이 생각대로 따라 주지 않았다.

둘이 밖에서 시간을 보낸 것도 일전에 고깃집에 갔던 게 마지막이었다. 그때 이후로 눈만 맞으면 그 짓을 하기 바빠 집 안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물론 단여명과 야한 짓을 하는 건 좋았다. 그렇지만 그건 안에서 하는 일이었고, 밖에서 만나는 건 또 다른 얘기였다.

-사과의 의미로 소원 하나 들어줄까?

……소원? 권호영은 비상구 벽에 기대고 있던 등을 떨어트렸다. 그러지 말아야지 되뇌면서도 서운한 감정을 느끼던 참이었다. 그런데 ‘소원’이라는 얘기에 귀가 쫑긋 섰다.

“소원이요?”

-응.

“제가 뭘 말할 줄 알고요.”

-뭘 말하려고 그러는데.

전화기 너머로 가벼운 웃음소리가 흘렸다. 마치 유치원생에게 장난감을 사 주겠다고 약속한 것처럼 긴장감이 일절 느껴지지 않았다.

-일단 생각해 봐. 내가 들어줄 수 있는 거면 다 들어줄 테니까. ……아, 나 친구 왔다. 수업 잘 듣고, 자세한 얘기는 이따가 하자.

뭐라 대꾸할 새는 없었다. 부스럭대는 소리가 나더니 순식간에 전화가 뚝 끊겼다.

“…….”

권호영은 통화가 종료된 휴대폰을 내려다보았다. 오후 12시 59분. 수업 시작하기 전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온 전화는 채 2분도 넘기지 못하고 끊겼다. 천하의 권호영이 지각할 생각으로 부리나케 달려온 줄도 모른 채.

어쩔 수 없이 권호영은 다시 강의실로 돌아갔다. 비상구를 빠져나와 복도를 걷는 발걸음이 느긋했다. 수업 시작이 1분도 남지 않은 학생의 걸음이라기엔 다소 믿기 힘들 만큼.

‘소원…….’

머릿속엔 오직 단 하나의 생각뿐이었다.

단여명이 없는 집에서의 권호영은, 공부할 때가 아니고서야 대부분 엉덩이를 붙이고 있지 않았다. 타고나길 원체 부지런하고 할 일을 미루지 않는 성격 때문이었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온 권호영은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곧장 발코니로 향했다. 건조대에 걸려 있는 이불에 손을 대보고, 면이 보송하게 마른 것을 확인한 다음 단여명의 침대 위에 가지런히 깔았다. 하룻밤만 지나면 다시 세탁해야 했지만, 꼭 거쳐야 하는 절차였다.

저녁을 챙겨 먹는 중에는 핸드폰으로 짧게 인터넷 서핑을 했다. 검색 창에 ‘방수 커버’를 입력하니 금액대가 다양한 물품들이 떴다. 그중 제일 위에 있는 사이트에 접속해 후기 란을 살펴보았다.

[해피가 자꾸 침대에 실례를 해서 구매해 봤어요. 이불은 젖어도 매트리스는 안 젖네요. 강추합니다^^b]

[병원에 갔다 온 뒤로 스트레스를 받아서인지 고양이가 침대 위에 쉬야를 놓더라구요ㅠㅠ 그런데 방수 커버를 씌우니 걱정이 좀 줄었어요! 감사합니다!]

[아주 좋아요~~ 아이들이 자다가 실수할 걱정은 한시름 덜었네요ㅎㅎ]

당연하게도 대부분 애완동물이나, 어린애들 얘기뿐이었다.

‘창피해하려나…….’

이런 걸 몰래 사서 씌워놓으면.

권호영과 단여명은 보통 때와 같은 일상으로 복귀했다. 그 말은 즉, 단여명이 침대로 이끌 작정으로 권호영의 옆구리를 찔러 보는 것도 돌아왔다, 이 말이었다.

그 일이 있고 난 후 이틀까지는 둘 다 얌전히 밤을 넘겼다. 하지만 사흘째 되던 밤, 단여명이 슬쩍 허벅지를 짚어왔다. 아직 그럴 생각이 없던 권호영은 결국 순순히 침대로 이끌려 갔다. 단여명이 그를 원했으니까.

엊그제 밤엔 담요를 깔고 시작했음에도 결국 매트리스까지 젖었다. 담요 밖으로 튄 액을 본 단여명은 벌겋게 달아오른 낯으로 매트리스 위에 미친 듯이 탈취제를 뿌렸다.

리뷰를 둘러보며 진지하게 고민하던 권호영은 이내 핸드폰을 뒤집어 놓았다. 나중에 한번 물어보고 사야겠다고 결론지었다.

상을 치우고 양치질한 다음엔 옷장을 열었다. 가지런히 정리된 운동복 중 한 세트를 꺼내 옷을 갈아입었다. 두꺼운 스포츠 양말까지 챙겨 신은 다음 부엌으로 가 쓰레기통에 끼워진 봉지를 꺼냈다. 운동을 나가는 길에 쓰레기도 같이 내놓을 생각이었다.

그대로 봉지의 매듭을 질끈 동여매려는데, 맨 위에 수북하게 쌓인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권호영은 새하얀 약통을 들어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유통기한이 한참 남은 종합비타민이었다.

쓰레기봉투 안엔 수많은 의료품이 버려져 있었다. 진통제와 영양제뿐만 아니라 붕대와 연고, 파스 같은 것들도 들어가 있었고, 모두 포장도 뜯지 않은 새것이었다.

‘……잘못 버린 건가?’

잠깐 고민하던 권호영은 그중 영양제만 몇 가지 추려 식탁 위에 올려두었다. 실수로 버린 게 아닌지 물어보고 버리든 해야겠다. 그중 영양제만 택한 건 약간의 사심이 섞여 있었다. 연고나 붕대 같은 것들은 이미 제가 서랍장이 꽉 찰 정도로 구비해 둔 뒤였다.

한쪽 어깨엔 더플 백을, 한 손엔 쓰레기봉투를 든 권호영은 시간을 지체하지 않고 곧장 운동화에 발을 끼웠다. 오늘은 단여명이 늦게 돌아오는 날이니 운동의 시간과 강도를 높일 계획이었다.

‘…무슨 몸이 사람 죽일 것처럼 생겼어.’

땀에 젖어 같이 누워 있던 중 단여명이 조용히 읊조렸던 말이었다. 사람을 죽일 것 같은 근육질 몸에 시달리고 난 탓인지 그의 목소리엔 약간 질색하는 기색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조각조각 쪼개진 복근을 어루만지는 손길은 긴밀했다. 움푹 찔러도 들어가지 않는 배를 검지로 꾹 눌러봤다가 갈라진 근육의 결을 따라 손가락을 덧그렸다.

권호영은 그 손길을 느끼고 깨달았다. 말은 저렇게 해도 탄탄한 몸이 취향이구나.

‘소원…….’

승강기에서 내린 권호영은 온종일 했던 생각으로 어김없이 머릿속을 채웠다. 기왕이면 아주 쓸모 있게 쓰고 싶었다. 사소한 거 말고 그를 단박에 사로잡을, 아주 커다란 것 하나.

요즘 가장 궁금한 건 단여명의 마음을 어지럽히는 일이었다. 눈썹 아래에 난 상처에 길게 눈길을 줄 때마다 단여명은 주의를 돌리듯 입을 열었다. 대부분 장난기 섞인 얘기들이었다.

아무리 신경이 쓰인대도 그걸 말해 달라고 소원권을 쓰는 건 아닌 것 같았다. 때가 되면 말해주기로 약속했다. 그에게 들어야 할 말이 있었고, 자신이 해 줘야 할 말이 있었다. 무얼 묻는다는 건진 모르겠으나, 단여명에게라면 뭐든 대답해 줄 마음이 있었다.

분리수거장에 도착한 권호영은 쓰레기 더미 위에 봉투를 올려뒀다. 몸을 움직이느라 성의 없이 넘긴 머리카락이 눈 밑으로 흘러내렸다. 그걸 대강 쓸어 올리고, 이내 발길을 돌렸다. 여전히 머릿속은 갖가지의 생각으로 복잡했다. 그리 오피스텔 단지를 벗어날 무렵이었다.

“거기 잘생긴 형.”

뒤에서 문득 낯선 이의 목소리가 울렸다. 권호영은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돌렸다. 인근에 사람이랄 게 자신밖에 없었기에.

“우리 구면이죠?”

눈이 마주치니 한 남자가 손을 살랑살랑 흔들었다. 반대 손엔 반쯤 태운 담배가 들려 있었다. 팔목까지 걷어붙인 연푸른색 셔츠와 발목에서 떨어지는 정장 바지가 깔끔했다. 검은색 차체에 몸을 기댄 남자는 못내 여유로운 모습이었다.

“…….”

권호영은 몸을 돌려 그에게 시선을 바로 했다. 매번 그 사람이라고 일컫던 남자. 단여명의 전 남자 친구이자 그를 함부로 헐뜯었던 사람이 바로 눈앞에 서 있었다.

“안면을 일찍 튼 것 치고는 통성명이 늦었네요. 김선오라고 합니다.”

음료도 놓이지 않은 원목 테이블 위에 불쑥 손이 디밀어졌다. 김선오는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걸친 채 정면을 응시했다. 눈앞에 정자세로 앉아 있는 남자는 앞에 내밀어진 손이 마치 보이지 않는 것처럼 행동했다.

“권호영입니다.”

아니, 악수를 청한 손을 슥 훑고는 다시 눈길을 위로 했다.

“손잡고 인사할 사이는 아닌 것 같아서. 이해하세요.”

낮게 내리깐 목소리가 서슬 푸른 날붙이 같았다. 칼날같이 얄팍한 느낌은 아니었다. 척 보기에도 범상치 않아 뵈는 게 굵은 통나무를 쩌갤 용도로 제작된 묵직한 도끼날. 어깨가 떡 벌어진 남자는 목소리마저 그런 이미지를 풍겼다. 불쾌감이 섞여 원래도 저음이었던 목소리가 이젠 바닥이라도 찍을 듯했다.

김선오는 머쓱한 웃음과 함께 앞으로 뻗은 손을 집어넣었다. 아예 대놓고 무시고만. 경계하는 건 이해하는데…… 한 가지 묻고 싶어진 게 생겼다.

‘여명아, 이런 놈이 뭐?’

귀여워? 착해? 웃기는 소리. 처음 봤을 때부터 지금까지 귀여운 구석이란 단 한 군데도 없는데. 아무렇지 않은 척 털을 바짝 세운 모습이 고스란히 보였다. 뭐, 그거 하나는 귀엽다고 쳐줄 만한가.

“그때 일을 마음에 담아 두고 계신 줄 몰랐네요.”

김선오는 균열이 가지 않은 낯으로 빙그레 웃었다. 속이 그렇게 좁아서 이 험한 세상 어떻게 살래? 그런 의미를 담은 웃음이었다.

“불쾌하실까 봐 나름 선심 쓴 겁니다. 잘못하면 안 좋은 기억이 날 것 아닙니까.”

권호영 또한 표정 한번 바꾸지 않고 대답했다. 너, 이 손에 먼지 나게 맞았잖아.

“제가 잡기 싫은 이유도 있고요.”

제가 품은 경멸을 있는 대로 드러낸 눈이 똑바로 시선을 부딪쳤다. 적의 섞인 눈동자가 차게 타오르는 불꽃을 닮았다. 조용히 들끓는 분노가 그 속에서 일렁일렁 빛을 발했다.

“권호영 씨도 맞은 걸로 기억하는데?”

김선오는 애석하다는 듯 눈썹을 내리고 웃었다. 농담처럼 흘린 그 말에 권호영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하나 미미한 반응은 있었다.

“…….”

할 테면 해보든가. 마치 그리 경고하듯 그는 눈도 깜빡이지 않고, 이쪽을 무섭도록 주시했다.

싸한 침묵이 내려앉음과 동시에 미묘한 기류가 흘렀다. 주변을 지나는 사람이 힐긋거릴 정도로 둘을 감싼 분위기가 급격히 가라앉았다. 두 사람은 서로를 말없이 응시했다. 둘 중 누구도 먼저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잠시 뒤 먼저 움직임을 보인 쪽은 김선오였다. 이 상황이 퍽 즐겁다는 듯이 웃고는 다리를 꼬아 앉았다. 여유로운 웃음을 가장했지만, 속은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이상하네…….’

몇 달 사이에 마치 딴사람이라도 보는 듯했다. 그때는 사람 손 처음 물어본 개새끼처럼 벌벌 떨기 바빴으면서.

“전보다 얼굴이 많이 피셨습니다.”

갑자기 믿는 구석이라도 생긴 것처럼. 보는 사람 기분 더럽게.

“머리 스타일 때문인가? 아니면 다른 이유?”

“쓸데없는 관심을 보이시네요.”

차분한 낯으로 사람 속을 긁는 게 저것도 재주라면 재주였다. 김선오는 웃음을 잃지 않고 그와 시선을 견줬다. 처음 저 얼굴을 봤을 때 솔직히 좀 놀랐다. 머리카락 속에 숨겨놓은 얼굴이 생각보다 반반해서.

뒤늦게 중2병이 왔거나, 보기 싫은 흉이라도 있어서 가린 줄 알았다. 그런데 저번보다 한층 밝은 곳에서 보니 남다른 외모가 뚜렷이 두드러졌다. 이마도 둥그스름하게 반듯하고, 눈썹도 짙게 잘 빠진 것이 꽤나 준수하게 생겼다.

‘그래서 더 싫어졌고.’

“스무 살이라고요?”

김선오는 비틀린 속내를 감추고 능숙히 웃었다. 얼굴이 봐줄 만하면 뭐 하나. 사내새끼가 머리는 치렁치렁하게 길어서. 어떻게든 이겨먹겠다는 심산이 훤히 내다보이는데.

“아니, 어린 티가 나긴 나는구나 싶어서요. 아, 실례되는 말이었다면 미안합니다.”

“그럼 말 놔도 되나?”

보란 듯이 웃고 있던 김선오는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잠깐의 망설임 없이 치고 나온 목소리가 뒤통수라도 내리친 듯했다.

“어린애랑 말장난하는데 수준이 딱 맞는 것 같아서.”

묘하게 내리뜬 눈이 찬찬히 얼굴을 훑었다. 그 눈길이 뜻하는 요지가 너무도 노골적이어서 순간 허파에 바람이 찼다.

“하.”

저 건방진 새끼가. 김선오는 참지 못하고 헛웃음을 터트렸다. 제법 성깔이 있는 줄 알았지만, 이 정도로 덤벼들 줄은 몰랐다. 솔직히 기대 이상이라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제 얼굴에 주먹질했을 땐 무슨 각별한 사람이라도 패는 양 주저하더니.

얼굴을 얻어맞아 시야가 된통 흔들리는 도중 김선오는 분명 보았다. 분노로 울렁이던 눈동자엔 두려움이란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그땐 혼란한 기색을 채 감추지 못하더니 지금은 영 딴판이었다. 거리낌 없이 말하는 것부터 적대시하는 눈빛까지.

“여명이는 호영 씨가 착하다고 그랬는데…. 이거 원. 걔는 그쪽이 이렇게 말 잘하는 거 알아요? 한 마디를 안 지네.”

“함부로 말하지 마시죠.”

능청스럽게 말하자 권호영이 눈썹을 미세하게 일그러트렸다.

“그 이름, 당신은 입에 올리지도 말아야지.”

일직선으로 꽂힌 눈길이 얼굴을 다 태워먹을 정도로 열렬했다. 방금 전까지는 애들 장난이었다는 양 분위기가 급격히 달라졌다. 미동도 안 하고 쳐다보는 것이 까딱 잘못하면 다시 주먹이라도 꽂을 태세였다.

숨 막히는 정적이 다시금 둘 사이를 휘감았다. 흔들림 없이 쳐다보는 눈동자가 짙은 혐오감을 드러냈다. 마치 땅바닥에 기어 다니는 벌레라도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김선오는 그 눈빛에 마주 응수하며 생각했다. 도발은 여기까지 하는 게 좋겠다고.

“그래요. 권호영 씨 말대로 말장난은 이쯤에서 하고…….”

김선오는 의자 등받이에 기대고 있던 몸을 앞으로 당겼다. 깍지를 낀 손을 테이블 위에 올리곤, 눈빛을 유하게 바꾸었다.

“하고 싶은 말이 있어서 불렀습니다.”

김선오가 눈꼬리를 매끄럽게 접었다. 사이가 좋지 않은 사람에게 건네는 미소라기엔 다분히 상냥하기까지 했다.

“애초에 싸울 생각으로 온 게 아니라고요. 거기서 몇 분을 기다렸는지 알아요?”

“나이 운운하더니….”

돌연 드르륵, 하고 의자를 뒤로 끄는 소리가 났다.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 권호영이 그에게 눈을 맞췄다.

“나이 먹고 배운 거라곤 뻔뻔한 것밖에 없나 봅니다.”

경멸의 빛이 역력한 눈초리가 이내 김선오를 향했다. 목소리 또한 불쾌한 속내를 숨김없이 드러냈다. 글자 한 자 한 자를 짓씹듯이 내뱉는 목소리엔 강한 힘이 실려 있었다.

“염치도 모르는 사람이랑 할 얘기 없습니다. 다시는 이런 식으로 찾아오지 마시죠. 그 말 하려고 여기까지 온 거니까.”

“…….”

“나 말고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눈에 띄지 마세요.”

김선오는 그를 멀뚱히 올려다보았다. 다른 사람이라…. 제 앞에선 이름조차 꺼내기 싫다, 이건가. 단여명의 이름을 말했을 때부터 예민하게 반응하더니.

친분이 두터운 형을 생각하는 눈빛이라기엔 지나치게 스산했다. 독점욕이 좀 있는 타입 같은데…. 그걸 자각하고 있을는지는 모르겠다.

“이유는 아실 거라고 믿습니다.”

이윽고 끝을 알리는 목소리가 느지막이 울렸다. 지은 죄가 있으니 알아서 사리라 이 뜻이었다. 김선오가 아무 대답도 않고 있는 사이 권호영은 자리를 떠나려는 낌새를 보였다. 고개를 까딱이는 인사치레도 없이 그는 곧바로 몸을 돌려 섰다.

“저번에 보여준 영상 얘기인데.”

조용히 입 다물고 있던 김선오가 목소리를 낸 것도 그때쯤이었다.

“…….”

앞으로 잘 나아가던 다리가 제자리에 우뚝 멈춰 섰다. 뒤통수만 보이던 얼굴이 천천히 이쪽으로 틀어졌다. 마주친 눈동자는 섬뜩하리만큼 차분히 가라앉아 있었다. 증오로 불타던 마음에 찬물이라도 끼얹은 것처럼.

“이제야 들을 마음이 생겼습니까?”

어리긴 어리다. 핸드폰이 사라져 그대로 영상도 같이 사라진 줄 알았다고. 딱 그렇게 착각한 얼굴이었으니까.

“영상 보여줬던 날, 제가 술 먹고 말실수를 좀 했습니다.”

권호영이 다시 자리에 앉자마자 김선오는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나도 똑같은 게이 새끼인 거. 그거 말해 준다는 걸 깜빡했어요.”

김선오가 입가에 짙은 미소를 내보였다. 때마침 테이블 위에 올려둔 진동 벨이 징징거리며 울렸다.

***

푹신한 소파 위에 곤히 잠들어 있는 남자가 보였다. 소파 모퉁이는 그의 지정석이었다. 몸이 피로할 때나 부족한 잠을 짧게나마 보충하고자 그는 자주 저기에 머리를 누였다.

조명등만 켜놔 남자의 주변엔 얕은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권호영은 기척을 죽이고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엷은 어둠 속에서도 희게 빛나는 뺨을 내려다보다가 손바닥으로 그를 살며시 감쌌다.

“…어디 갔다 왔어?”

감긴 눈이 움찔하더니 잠긴 목소리가 흘렀다. 뺨을 감싼 커다란 손에 그보다 작은 손이 겹쳐졌다. 살빛이 눈결처럼 희어 매끈한 손등 위로 연푸른 핏줄이 비쳤다.

“네가 나보다 더 늦을 줄은…….”

이윽고 감겼던 눈꺼풀이 뜨였다. 잠에 취해 반쯤 뜨였던 눈이 이내 살짝 커졌다. 놀라움을 담은 눈동자가 얼굴 곳곳에 닿았다. 권호영은 작은 얼굴을 마주 눈에 담았다. 살짝 열린 붉은 입술 새로 새하얗고도 둥그런 치아가 엿보였다.

“…머리 잘랐어?”

단여명이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네.”

권호영은 소리 없는 웃음을 지었다. 웃는 이유는 몰랐다.

“예쁘다.”

그냥 자신을 보며 미소 짓는 얼굴에 뒤따라 웃음이 났다.

권호영은 고개를 숙였다. 단여명의 뺨을 감싼 채 눈을 감고, 그대로 입술을 포갰다.

뜬금없는 입맞춤에 놀랐는지 조그마하게 숨을 집어먹는 소리가 났다. 하지만 그도 잠시였다. 고개를 틀어 폭신한 입술을 가볍게 머금으니 뒷목에 손이 들어왔다. 깜깜한 시야 중 단여명이 눈을 감는 모습이 어렴풋이 그려졌다.

지척에서 달뜬 숨소리가 들렸다. 뜨거운 숨결은 뺨을 간질이고 나아가 몸에 열기를 불어넣었다. 권호영은 맞붙인 입술을 떨어트리고 티셔츠를 벗겼다. 강대한 산맥처럼 갈라진 상반신이 위협적인 굴곡을 드러냈다. 그를 본 단여명도 따라 옷을 벗으려고 상의의 밑단을 손으로 잡았다. 권호영은 단여명의 웃옷을 한 번에 벗겨내 침대 아래로 떨어트렸다.

“그래서… 소원은 정했어?”

하얀 베개 위에 까만 머릿결이 곱게 흐트러졌다. 상반신을 겹치자 열이 오르기 시작한 맨살끼리 틈 없이 맞붙었다. 권호영은 희게 드러난 목덜미에 입술을 눌렀다.

“아직이요.”

쪽, 쪽. 매끄럽게 빠진 목선을 따라 두어 번의 입맞춤이 내려앉았다.

“천천히 생각해 보고 말할게요.”

“천천히 생각할 게, 있나…….”

목덜미 옆쪽에 입을 맞추던 권호영은 단여명의 귓불을 살며시 깨물었다. 입안으로 빨아들여 가볍게 질겅이다가 우묵하게 파인 귓바퀴를 따라 혀를 진득하게 놀렸다.

단여명은 어깨를 움츠린 채 감각에 집중했다. 그의 머리칼이 관자놀이를 간질일 때면 귓가를 울리는 젖은 소리가 더욱 선명해졌다. 입술이 붙었다가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뜨거운 숨이 귓속을 훅, 불어왔다. 축축한 살덩이가 연골에 달라붙었다가 떨어지는 미세한 소리까지 생생하게 들려 뒷목에 소름이 올랐다.

말랑한 혀가 지나는 족족 귀가 축축이 젖었다. 편편한 곳과 오목한 곳을 가리지 않고 미끈한 타액이 발렸다. 꼼꼼히 영역표시라도 하듯 작은 곳에 쏟는 정성이 과했다. …그래서 더 흥분됐고.

“으, 읏….”

귓바퀴를 쓸던 혀가 이내 욕심껏 귓구멍까지 몸뚱이를 디밀었다. 그가 혀로 안쪽을 뒤적일 때마다 한쪽 귀의 소리가 막혔다가 들리길 반복했다. 와중에 뜨겁게 터져 나온 숨은 타액으로 함빡 젖은 솜털을 연신 간질였다.

귓구멍을 핥던 권호영이 돌연 귀의 반절을 한입에 머금었다. 그와 동시에 반바지 안으로 뱀처럼 들어온 손이 중심부를 위아래로 쓸었다.

속옷 안에서 모양을 얼추 갖출 정도로 경직되자 손으로 그러쥐어 그를 능숙히 만졌다. 위로 끌어 올리듯 오므렸다가 펴는 손길에 아랫도리가 반죽처럼 주물렸다. 성기를 발기시키려는 의도가 노골적으로 엿보이는 손길이었다.

“읏, 으응…!”

타인의 아래를 함부로 주무르는 손짓에 맞춰 바지의 중심부가 위로 솟았다가 꺼졌다. 바지 속에 들어온 손이 무엇을 하는 중인지 누가 봐도 알아챌 법한 모양새였다.

한참 똑같은 곳을 주물럭대던 천 밖의 윤곽은 다시 꿈틀거리는 뱀처럼 위아래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속옷 안에 완벽히 형태를 잡은 것을 확인하듯 손바닥으로 크게 슥- 슥- 쓸더니 기둥부터 음낭까지 단번에 끄잡듯이 틀어잡았다.

“아흐, 앗!”

양옆으로 벌어진 종아리에 근육의 선이 섰다. 그쯤 단여명의 허리가 조금씩 비틀리기 시작했다. 안달이 나 무릎을 좁히자 권호영이 귀를 죽죽 빨던 것을 멈췄다. 귓구멍을 틀어막았던 혀가 빠져나가니 주변 소리가 생생하게 들렸다. 그를 인식하자마자 쪽, 하고 입을 맞추는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다.

권호영은 계단을 밟아가는 것처럼 차근차근 입술을 내렸다. 목덜미와 쇄골에 한 번씩 입을 맞추고, 유두를 가볍게 입안에 빨아들였다가 놓아줬다. 갈비뼈의 개수를 세듯 혀를 내어 문지르다가 배꼽에 다다를 때쯤 하의 밴드에 손가락을 걸었다. 단여명은 엉덩이를 들어 탈의를 도왔다. 권호영의 손에 속옷과 반바지가 한꺼번에 벗겨졌다.

골반에 폭신한 것이 쪽, 하고 부딪쳤다. 그다음으론 배에 올라붙은 자지가 굳은살이 박인 손바닥에 감싸였다. 단여명은 그를 가만히 느끼다가 벌떡 상체를 일으켰다. 생각지도 못한 부위에 더운 숨이 퍼부어졌기 때문이었다.

“잠깐….”

단여명은 당황한 눈으로 아래를 바라보았다. 천장을 보고 똑바로 세워진 제 것과 붉은 입술 간의 거리가 지나치게 가까웠다.

“무리하지… 말지?”

곧바로 뒤에 손을 갖다 댈 줄 알았던 권호영은 엉뚱한 곳에 혀를 대려고 했다. 단여명은 망설임이 가득한 투로 말했다. 그만해도 좋다는 듯 권호영의 이마를 슬쩍 손바닥으로 밀어내기까지 했다.

머리가 좋아서 그런가. 단여명이 첫 경험이라던 권호영은 몸을 맞출수록 눈에 띄는 성장세를 보였다. 입술을 묻거나 혀로 핥는 영역도 날이 지날수록 넓어졌다. 자제력을 읽은 건 처음 했을 때에 한했다. 그 이후론 단여명이 힘들어하는 기미를 보이면 곧장 제 욕망을 감추고 물러났다.

그는 상대의 몸을 예열시키는 전희도 진심으로 임했다. 어디가 좋다는 말을 기억해 둔 건지, 순간마다 내보이는 반응을 보고 암기한 건지. 그는 어느새 단여명의 성감대를 속속들이 꿰고 있었고, 섹스할 때마다 반응이 유달라지는 부위를 성심껏 자극했다.

거짓말을 보태 이 몸에 저 입술이 안 닿은 곳이 없었다. 하지만 단 두 곳은 예외였다. 성기와 엉덩이 사이. 두 곳 다 손으로 만졌으면 만졌지 한 번도 입에 댄 적이 없었다.

“거기까진 안 해도 돼.”

단여명은 그에 대해 서운한 감정을 느낀 적이 없었다. 사람에 따라 더럽다고 느낄 수 있는 부위니까. 처음 펠라를 해 줬을 때 권호영은 경악하는 반응을 보였다. 그를 알았으므로 딱히 기분 상하지 않았다.

“무리하는 거 아니에요.”

권호영은 제 이마를 짚은 손을 돌려 잡았다.

“하고 싶어서 하는 거지.”

굵고 단단한 손가락이 하얀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었다. 손가락끼리 얽히니 이내 손바닥도 같이 마주 닿았다. 크기와 모양이 제각기 다른 두 개의 손이 마치 한 쌍처럼 감겼다. 그에 단여명이 잠깐 한눈을 판 찰나였다. 말릴 새도 없이 자지 앞머리가 뜨거운 점막에 덥석 먹혔다.

“아!”

추읍, 살덩이를 빨아올리는 소리가 커다랗게 울렸다. 잘게 흔들리는 눈으로 시선을 내리니 제 다리 사이에 자리 잡은 한 남자가 보였다.

콧대 중앙까지 볏짚처럼 쏟아졌던 머리칼은 눈썹 아래에서 깔끔히 잘려 나가 살랑이고 있었다. 머리칼 사이로 둥그런 이마와 정밀히 다듬은 듯한 눈썹이 시야에 들어왔다. 원래도 날카롭게 빠졌던 뺨은 입에 문 것을 빨아내느라 옅은 음영을 그리며 골이 살짝 패여 있었다.

심히 선정적인 광경이었다. 사춘기 무렵, 처음 포르노 영상을 접했던 때처럼 신선한 충격과 본능적인 이끌림이 그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게 강제했다. 그에 홀린 듯 눈길을 빼앗긴 찰나였다. 그의 입꼬리가 살짝 말리더니 입술이 동그랗게 오므라들었다. 추읍…! 무언가를 강하게 빨아내는 소리가 재차 크게 울려 퍼졌다.

“으, 잠깐, 잠깐!”

허리를 퍼뜩 떤 단여명이 유다른 반응을 보였다. 어쩔 줄 몰라 하며 엉덩이를 들썩이다가 종국엔 권호영의 머리를 밀어내려고 했다.

권호영은 그를 일체 무시했다. 재차 입안에 들어온 성기를 힘을 줘 쭉쭉 빨아 당겼다. 단여명이 지나치게 느낄 때면 몸부림이 심해지는 편이란 걸 알고 있었다.

원래 남자의 것을 물면 이런 느낌인가. 예쁘게 생긴 성기는 생각보다 단단하고 뜨거웠다. 단순히 표현하자면 소시지를 문 느낌이었다. 전자레인지에 돌려 김이 뜨끈뜨끈 피어오르는, 속이 탱탱하게 차오른 소시지. 여려 보이는 겉모습과 다르게 속은 딴딴한 식감이었다. 그대로 이로 베어 물면 잘릴까, 하고 단순하고도 몰상식한 호기심이 일 만큼.

그런데 또 무생물이라기엔 입안에서 자꾸만 발딱거렸다. 느낌이 굉장히 이상야릇했다. 혀로 받치고 있는 귀두는 미끈미끈한 감촉이었다. 단여명이 제 것을 빨 때 거듭 민둥한 면을 혀로 날름거렸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남자가 가장 예민하게 느끼는 부위고, 반대로 즐거움을 주는 감촉 또한 좋아서, 청결이나 맛 따위는…….

“그렇게 빨면 아파!”

생경한 감상에 빠져 성기를 빠는 것에 집중한 순간이었다. 비명과도 같은 외침이 멍한 정신을 일깨웠다.

“진짜로…. 이에 걸려서 아프다고. 좋은 거 없이 순수한 아픔이야.”

권호영은 물고 있던 것을 슬그머니 뱉어냈다. 위를 올려다보니 단여명은 약간 울상을 지은 채였다.

“…….”

권호영은 말없이 단여명의 눈을 바라보았다. 똑바로 부딪치는 눈길이 포기하지 못하겠다는, 확고한 뜻을 내비쳤다. 그를 바라보던 단여명은 졌다는 듯 웃었다. 한숨과도 같은 가벼운 웃음소리가 공기 중에 퍼졌다.

“내가 해 줬던 거 기억해?”

권호영은 그를 유심히 눈에 담았다. 저 특유의 입매 때문일까. 언제 봐도 따뜻한 향이 풍겨 나는 미소였다.

저 웃음이 향했던 사람이 몇이나 될까…. 불식간에 든 생각이 머릿속에 쏜살같이 파고들어 똬리를 틀었다. 다정히 웃는 하얀 얼굴 위로 비릿한 웃음의 잔영이 겹쳤다. 제 앞에서 오만하게 떠들어대던 그의 전 남자 친구, 김선오의 얼굴이.

‘처음 봤을 때부터 좀 묘했단 말이죠. 애인 옆에 두기 느낌이 별로인 사람 있잖아요.’

“입술을 말아서 이를 숨겨야 돼. 여기…… 입 안쪽 살로 부드럽게 빨아올리는 거야.”

‘솔직하게 말씀드리죠. 저 여명이한테 아직 마음 있습니다.’

“이로 긁는 건 살짝만. 아프지 않을 정도로….”

‘돈 대줄 테니까 그 집 나와요. 나가면 되도록 연락 끊고. 그대로 모르는 사이가 되면 더더욱 좋고.’

“응, 금방…… 하아, 잘하네….”

‘그럼 영상 지워 줄게.’

권호영은 이내 눈을 감았다.

‘그 정도는 어렵지 않잖아요. 절친한 형을 진정으로 위한다면.’

김선오를 만나고 온 뒤부터 평정심이 지켜지지 않았다. 엉망으로 엉킨 실타래가 머릿속에 굴러다니는 것만 같았다. 권호영은 두꺼운 실 가닥을 잡아 세심히 만져 보듯 감정의 근본을 더듬어 나갔다. 생각에 생각을 거듭한 끝에 뚜렷한 형태감이 서서히 잡혔다.

‘질투….’

그래, 이건 질투심이다.

노트북의 비밀번호, 남자와 밤을 보내는 것에 익숙한 몸짓, 그리고 김선오의 전 남자 친구인 단여명. 이미 다 알고 있던 것. 그리고 일찍 마음을 정리한 것들이었다. 그런데 김선오의 입을 통해 들으니 실감이라도 난 걸까. 온갖 더러운 감정들이 솟구쳐 머리를 까맣게 물들여 놓았다.

김선오라는 사람이 끔찍하게 싫었다. 살면서 어떤 누군가도 이토록 혐오해 본 적이 없었다. 이미 끝난 사이면서 저를 훼방 놓는 사람 취급하는 게 역겨울 정도였다. 이미 단여명에게 내쳐진 사람이면서 어떻게든 들러붙으려 하는 꼴이 버러지만도 못해 보였다. 영상을 촬영하고, 그걸 아직까지 소지한 것도 모자라 이젠 그걸로 자신을 협박하는 꼴이 믿기 힘들 정도로 추악했다.

어차피 단여명의 곁을 최종적으로 차지하는 사람은 제가 될 텐데. 자만하는 게 아니었다. 비록 자신처럼 특별하지 않을지언정 단여명도 조금은 제게 애정이 있었다. 그의 곁에 있으면 제가 특별한 사람이 된 것처럼 느껴진다. 그의 눈빛이, 따듯한 손길이, 제게 말을 거는 목소리가 그렇게 만들어줬다.

김선오를 만나지 않았다고 말했다. 이름도 잊고 산다는, 단여명의 말을 믿는다. 생각했던 것보다 시간이 더 지체되겠지만, 달라질 건 없다.

단여명은 제 것이 될 것이다. 결론은 그랬다.

‘그런데 왜…….’

이토록 불안하고, 또 불안한지.

권호영은 얼룩진 감정을 지워내고자 고개를 더욱 아래로 수그렸다. 입을 크게 벌려 단단한 살덩이를 깊숙이 물었다.

“읏, 야……!”

축축한 혓바닥에 미끄러지듯 안쪽으로 밀려난 귀두가 목젖을 쿡 찔렀다. 권호영은 와락 인상을 구겼다. 욱, 하고 헛구역질이 나온 것도 동시였다.

단여명은 매번 제 것을 빨아 줄 때 고개를 수그리려고 했다. 처음에는 무얼 하려는지 몰랐으나, 몇 번 지켜보니 깨달았다. 아래를 더욱 깊게 물 작정으로 고개를 숙인 단여명은 중간에 컥컥대며 좆 머리를 뱉어내기 일쑤였다.

제 것보다 단여명의 것이 더 작으니까. 그래서 단여명이 하지 못한 걸 저라면 쉽게 해내리라 생각했다.

“너 요령도 없이…… 그러다 다쳐.”

단여명이 만류하듯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런 건 어디서 배웠어?”

어디서 배웠겠어요. 그 말은 구태여 하지 않았다. 상대의 관심을 돌리려 손깍지를 끼는 것부터 목 안으로 성기를 욱여넣으려는 것까지. 전부 단여명이 한 번씩 보였던 행동이었다.

“무리하지 말라니까. 잘못하면 토할 수도 있어. 고집부리지 말고…… 아!”

한껏 숨을 들이켠 권호영은 다시 고개를 수그렸다. 토악질을 삼키며 목젖에 걸린 귀두를 넘기려고 그의 다리 사이에 머리를 우그려 넣었다.

“너, 진짜, 읏! 왜 이래……!”

생리적인 거부감으로 콧잔등에 주름을 잡고서도 권호영은 억지로 밀어 넣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컥…!, 하고 숨이 터진 것과 동시에 목구멍에 미세하게 힘이 풀린 찰나였다. 꽉 막힌 듯 더는 들어가지 않던 귀두가 좁은 식도를 타고 천천히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읏, 하아…!”

밀려드는 부피만큼 목구멍이 벌어졌다. 식도가 강제로 확장된 감각이 눈살이 찡그려지도록 생생했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거칠게 긁힌 목구멍의 점막에 불이 붙어 얼굴에 열이 올랐다. 그럼에도 권호영은 악착같이 자지를 문 채 고개를 아래로, 더욱 아래로 수그렸다. 단여명이 가르쳐 준 대로 입술을 말아 치아를 숨기고, 성기의 밑동까지 남김없이 해치웠다.

“아, 아…….”

아……. 전부 삼켰다. 그걸 느낀 순간 알 수 없는 희열이 치솟았다.

권호영은 괴로운 듯 눈가를 찌푸린 채 위를 올려다봤다. 단여명도 얼굴을 한껏 일그러트린 상태였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과 초점이 흐릿해진 눈동자가 섹시했다. 저 야릇한 얼굴을 눈에 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배 속이 펄펄 끓었다. 식욕을 닮은 흥분감이 바지춤을 뚫을 듯 성기를 팽팽히 부풀려 놓았다.

권호영은 제 욕망을 표출하는 대신 단여명의 샅에 보란 듯이 코끝을 문질렀다. 조금이라도 고개를 움직일 때면 구역질이 솟았지만, 미쳤는지 그것조차 좋기만 했다. 제 숨통을 틀어막은 살덩이를 오감으로 만끽하다가 얼굴을 뒤로 물려 보았다. 성기를 바깥으로 끄집어내는 중에도 집요한 눈길은 떨어지지 않았다.

“으, 흐앗…!”

깊숙이 파묻혀 있던 성기가 미끈한 점막을 긁으며 밖으로 빠져나갔다. 권호영은 귀두만 입안에 문 채 폐부로 한가득 숨을 빨아들였다. 입 밖으로 뱉어낸 붉은 성기는 공기 중에 갓 노출됐을 때와 달리 타액으로 흠뻑 적셔진 채였다.

숨을 돌린 시간은 일각에 불과했다. 권호영은 공기를 한껏 들이켜고, 다시 고개를 숙였다. 한 번 받아 삼키니 두 번째는 비교적 쉬웠다. 목구멍을 비집고 재차 성기가 빠듯하게 밀려 들어왔다. 기둥을 전부 삼키고 입술을 오물거리며 뿌리를 자극하니 단여명이 눈 밑을 잘게 경련했다. 아, 아아…! 붉어진 입술 새로 열띤 신음이 새어 나왔다.

운동으로 폐활량을 늘려 놓길 잘했다. 숨통이 틀어막힌 채 저 얼굴을 오래 감상할 수 있으니까.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면서도 그는 분명 느끼고 있었다.

남성기로 쾌락을 얻는 방법은 간단했다. 손으로 훑는 것처럼, 그의 뒤를 찌를 때처럼 피스톤질하듯이.

권호영은 납작한 배에 코끝이 뭉개질 만큼 바짝 성기를 물었다가 목구멍 밖으로 꺼내길 거듭했다. 목 안에 성기를 박아 넣는 반복운동을 거듭할수록 단여명의 허리가 앞으로 굽었다. 몇 번 고개를 앞뒤로 움직이며 감을 익히던 권호영은 불현듯 방법을 바꾸었다.

“아, 삼키지! 헉……!”

꿀꺽, 꿀꺽…. 툭 불거진 울대뼈가 흡사 물을 들이켜듯 천천히 위아래로 꿀렁였다. 구토감을 필사적으로 억누르며 권호영은 같은 남자의 물건을 순종적으로 애무했다.

음식물이나 액체와는 다르게 위치가 고정된 성기는 위장으로 넘길 수 없었다. 목구멍 중간에 뿌리를 내린 것처럼 박혀 아래로 넘어가지 않는 감촉이 기묘했다. 생전 처음 느껴보는 감각이 괴로웠으나, 그를 멈출 생각을 들지 않았다.

“아, 윽! 흐으, 읍…!”

뜨거운 점막 사이에 갇힌 성기가 목구멍이 수축하는 것에 맞춰 물컹물컹 주물러졌다. 컥…! 하고 권호영이 숨을 터트리기라도 할 새면 비좁고도 축축한 점막이 왈각 조여들어 발기한 성기를 강하게 씹었다.

아래가 그대로 녹아내리는 듯한 기분에 단여명은 다리를 바들바들 떨었다. 그만하라고 말려야 하는데, 기분이 너무 좋았다. 허리를 마구 들이박고 싶은 걸 참느라 엉덩이가 모양 빠지게 들썩거렸다.

그가 목젖을 꿀렁일 때마다 성기가 비틀리듯 압박됐다. 성기의 밑동을 받친 혓바닥은 목구멍과 연동하여 힘줄이 선 기둥을 더듬었다. 밑동을 문 입술은 점점 꽈악, 오므라들어 우악스러운 힘을 가했다. 숨이 모자라 괴로운지, 빠는 힘이 갈수록 억척스러워져 자지가 통째로 뽑혀 나갈 것 같았다.

귀두는 축축한 점막에 감싸여 기분 좋게 농락되고, 기둥의 뿌리는 강한 힘으로 압박됐다. 동시간에 휘몰아친 감각이 머리에 어지럼증을 일게 만들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촛불처럼 시야가 울렁울렁 흔들렸다. 빠른 속도로 치민 사정감이 발끝을 타고 기어올랐다.

“그, 그만, 쌀 것…! 입 떼!”

단여명이 다급한 손길로 권호영의 머리를 감쌌다. 오늘따라 사정이 빠른데…. 권호영은 그리 생각하고 말았다. 언젠가 단여명이 제 것을 처음 빨아 준 날, 평소보다 이르게 사정했던 걸 까맣게 잊은 채.

시각적인 요소는 인간이 가장 커다랗게 느끼는 자극 중 하나였다. 상대도 같은 이유로 빠르게 항복을 선언한 줄도 모르고, 권호영은 느릿한 애무에 열중했다.

“읏, 하아……!”

커다란 숨소리가 터진 그 순간이었다. 앞머리가 잡혀 얼굴이 위로 쑥 들렸다. 머리채가 잡혀 휘둘린 것보다 목에서 느껴지는 통증이 더 강렬했다. 목구멍 중간에 박혀 있던 자지가 순식간에 거칠게 뽑혀 나갔다. 거센 반동으로 붉게 달아오른 성기가 공중으로 꺼떡이며 튀어 올랐다.

“하아, 흑…! 으윽!”

허리를 움찔 턴 단여명이 급한 숨을 헐떡였다. 자그마한 요도구가 틈새를 빠끔거리더니 하얀 액을 울컥울컥 쏘아냈다. 권호영은 반사적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벌건 성기가 위아래로 꺼떡일 때마다 얼굴 위에 질척한 액이 뿌려졌다. 뜨겁고 비릿한 향이 나는 같은 성별의 체액이었다.

“하아, 하아…….”

하얀 포말처럼 튄 액은 날카로운 이목구비의 곳곳을 적셨다. 가지런히 내리깔린 까만 속눈썹과 우뚝 솟은 콧대, 벌어진 입술 새에 분간 없이 정액이 튀었다. 그린 듯한 얼굴에 결점처럼 튄 액은 깨끗한 살결을 타고 아래로 끈적하게 늘어졌다.

“그러니까, 얼른 빼라고….”

여운을 즐길 틈 없이 단여명은 허둥지둥 몸을 돌렸다. 닦을 것을 찾는 시선이 분주했다. 권호영은 그사이 입안에 퍼진 맛을 음미해 보았다. 혀를 뺨 안쪽에 붙여 느릿하게 굴리다가 천천히 목울대를 넘겨 보았다. 꿀꺽…. 못내 조심스러운 소리가 고요한 방 안을 울렸다.

“……!”

딴 곳을 보고 있던 단여명이 벼락같이 고개를 홱 돌렸다. 권호영은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뺨에 튄 정액을 닦아내고 있었다. 살짝 열려 있던 입술은 일자로 닫힌 후였다.

“너…….”

“…….”

“먹었, 어?”

단여명은 경악스러운 눈으로 그를 응시했다. 입안에서 억지로 빼낸 게 무슨 이유 때문인데…. 대체 무슨 바람이 불어서 이러는지 몰라 황당할 정도였다.

“언제는 더럽다더니…. 내가 그런다고 너는 안 그래도 돼.”

손을 뻗어 두루마리 휴지를 뜯어낸 단여명은 그의 얼굴을 닦아 줬다. 콧등과 입가를 재빠르게 훔친 다음 감긴 눈에 손을 올렸다. 야하긴 엄청 야해서 순식간에 사정하기는 했는데…. 갑작스러운 심경 변화가 신경이 쓰였다.

“안 비려? 맛없을 텐데.”

“너무 빨리 삼켜서 못 느꼈어요.”

단여명은 눈을 살짝 크게 떴다. 너무 빨리 삼켜서 맛도 못 느꼈어. 언젠가 제가 그에게 했던 말이었다. 그에 어떤 표정 변화를 보이기도 전이었다. 턱, 손목이 잡혔다. 정액이 엉긴 속눈썹을 문지르던 손이 다른 손에 잡혀 옆으로 치워졌다.

“형, 한 번 더요.”

감겼던 눈이 뜨였다.

“무슨 맛인지 알려 주세요.”

아래에서 위로 향하는 시선이 긴밀했다. 풀이 죽은 성기를 입술로 들추어 올린 권호영은 상대에게 눈을 맞췄다. 고동색 눈동자에 은은한 빛이 맺혀 아롱졌다. 그 빛나는 눈동자를 담고 있는 눈이 얼핏 웃음을 그렸던 것 같기도 했다.

‘더럽게 야하네…….’

단여명은 오늘 몇 번이나 했는지 모를 생각으로 어김없이 머릿속을 채웠다. 뜨거운 숨을 거듭 몰아쉬느라 벌써 입안이 메말랐다. 정작 제가 한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데.

손끝에서 느껴지는 맨살의 감촉이 낯설었다. 뒷목을 만지는데, 수북하게 잡히는 머리칼이 없자 어색했다. 그리고 어쩐지 야릇하게 느껴지기도 했고.

권호영이 고개를 한껏 숙이면 탄탄하게 각 잡힌 뒷덜미의 선이 드러났다. 그 우직하게 뻗은 부위에 유독 단여명의 시선이 길게 머물렀다. 원래는 머리칼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곳이다. 그런데 지금은 깔끔히 잘린 뒷머리로 인해 남성적인 선이 강하게 드러났다.

내가 남자 목선에 취향이 있었나…. 원래 별생각이 없이 넘겼던 부위였다. 그런데 아래가 빨리며 눈요기하는 덕인지 그를 훔쳐볼 때마다 생각 이상으로 이상야릇한 흥분감이 바짝 올랐다.

“아, 으응, 흐…….”

춥, 추웁, 쭙…. 질척하게 입을 놀리는 소리가 울렸다. 몇 번 목구멍 안에 성기를 박아 넣던 권호영이 이내 기둥을 주르륵, 뱉었다. 천장을 향해 꼿꼿이 선 성기에 뺨을 붙였다가 손으로 잡아 각도를 조금 내리더니 기둥부터 귀두까지 길게 핥았다. 말랑한 혓바닥이 지나는 길을 따라 후끈거리는 열이 달라붙었다.

몸이 달은 단여명이 그의 뒷머리를 살짝 잡아당겼다. 권호영은 혀끝으로 성기의 이음매를 간질이다 말고 그 움직임에 응했다. 막대 사탕 빨듯 귀두를 쭙쭙 빨아주다가 선단을 문 그대로 혀끝만 세워 요도구를 건드렸다.

“아, 아…!”

작은 틈새를 열어젖히려는 양 요도구를 양옆으로 파헤치는 혀 놀림에 쿠퍼액이 흥건히 샜다. 권호영은 그걸 거부감 없이 핥아먹었다. 초짜 주제에 역하지도 않은지 저렇게 선액이 고일 때면 있는 족족 혀로 훔쳐 먹었다.

추읍, 하고 자지 머리를 뱉어낸 권호영이 이번엔 얼굴을 바짝 아래로 내렸다. 음낭을 코로 들추어 올리더니 그대로 입안에 머금었다. 이번엔 한쪽 음낭이 쭉쭉 빨렸다. 음낭에 치아라도 닿을까, 몇 번 긴장하던 것이 지금으로선 무색해졌다. 이번이 몇 번째 반복된 것인지 알 수 없었으니까.

“너, 오늘… 후으, 이상하게, 집요해….”

단여명은 그쯤 불만스러운 마음을 토로했다. 슬슬 가만히 손 놓고 있기 지쳤다.

“대체 몇 분을, 빠는 거야….”

성기는 물론이고 이미 음낭까지 침 범벅이었다. 좋긴 좋은데, 사정에 달하기 부족한 자극만 부여하니 시간이 갈수록 마음이 타들어 갔다.

권호영은 단여명의 목소리가 안 들리는 체했다. 입안에 양껏 문 음낭을 물고 늘어트렸다가 뽁, 소리가 나게 뱉어냈다. 둥그렇게 올라붙은 음낭은 금방이라도 사정액을 쏟아낼 듯 탐스럽게 부풀어 있었다.

권호영은 그를 달래듯 양쪽 음낭을 손으로 번갈아 주물러 줬다. 날카롭게 빠진 콧방울이 힘줄이 선 기둥을 슬쩍 긁었다. 다시 미끈한 귀두가 새빨갛게 부푼 입술 새로 빨려 들어갔다.

“으읏…….”

마주친 눈동자가 어느 때보다 또렷하게 빛났다. 남자는 머리발이라더니…. 아무리 권호영이라도 그를 피해 갈 순 없었던 모양이다. 머리를 깔끔히 정리하니 제 취향에 더욱 부합하는 사내가 됐다. 긴 머리에 분산됐던 시선이 이젠 그의 이목구비에 강제적으로 집중되는 느낌이다.

살벌하도록 잘생긴 남자가 아래를 흉흉히 부풀린 채 제게 순종적으로 정성을 쏟는다. 자기의 욕구보다 상대의 만족이 더 중요하다는 것처럼. 그를 느끼며 아무렇지 않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점점 몸이 닳아 마음이 타다 못해 장이 꼬이는 기분이었다.

“너 일부러, 하아… 이러지. 해 달라는 말 듣고 싶어서.”

“알면 말하면 되죠.”

욱하는 마음에 패기 넘치게 쏘아붙였던 말은 그 한마디에 일축됐다.

단여명은 입술을 삐죽였다. …부정도 안 하네. 그래, 즐기는 것처럼 보여도 실상은 본인도 애가 타겠지. 권호영은 아직 바지도 벗지 않은 채였다. 흥분을 오래 참아서 자기도 힘든 건지, 아니면 귀여운 도발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누가 누구보고 변태래….”

아무튼 어이가 없는 건 마찬가지였다. 자신은 그의 것을 빨 때 아래가 닳도록 물고 빨지는 않았다. 저런 눈으로 사람의 음지를 바라보지도 않는다. 좆이 아니라 마치 소중한 애착 인형이라도 응시하는 듯했다.

“세게 빨아 줘.”

단여명은 도톰하게 부은 입술 사이에 손끝을 올렸다.

“무슨 맛인지 궁금하다며. 이번엔 제대로 싸 줄게.”

그를 자극할 심산으로 부러 대범하게 말했다. 여유를 가장한 얼굴에 이내 상대의 시선이 닿았다.

“허리 박아요. 형이 원하는 만큼.”

빨갛게 부르튼 입술로 권호영이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요즘 눈에 띄게 웃음이 늘었다. 저 얼굴에 저런 웃음을 지으니 자못 시니컬하게 보였다. 표정이며 말투며 이번엔 놀림이 깃든 도발이 맞았다. 묘하게 진 것 같은 기분에 단여명의 표정이 약간 뾰로통해졌다.

“……토해도 모른다.”

단여명은 그의 입술 사이에 귀두를 물렸다. 권호영은 남의 자지가 밥숟가락이라도 되는 양 순하게 받아 물었다. 이미 권호영은 알고 있었다. 말은 저렇게 해도 단여명이 무리해서 자신을 몰아붙이지 않을 거란 사실을.

“좋아요?”

“응…. 좋아.”

단여명은 손으로 기둥을 잡아 눌러 살짝 내밀어진 혓바닥에 귀두를 문질렀다. 축축한 살덩이를 아래위로 탐하던 귀두는 불현듯 옆으로 방향을 바꿔 권호영의 뺨을 볼록하게 부풀렸다.

권호영은 혓바닥을 긁거나 뺨을 찌르는 대로 얌전히 입안을 내줬다. 단여명이 장난치듯 입술 가장자리에 귀두를 대주고만 있으면 혀를 내밀어 그를 가볍게 할짝거렸다.

“무슨 느낌인데요.”

“따뜻하고 축축해. 말랑말랑하고….”

허리를 느릿하게 쓰던 단여명이 곧 권호영의 뒷머리를 잡았다. 그리고 그대로 권호영의 머리를 끌어 제 샅에 눌러 붙였다.

“미끄러워서… 아……. 그대로, 삼켜질 것 같아….”

인간의 생식기가 얼마나 예민한 부위인지 다시금 깨닫는 순간이다. 뜨겁고 축축한 통로는 자지를 밀어 넣는 대로 탄력 있게 휘감겨 율동했다. 미끄덩한 점막은 귀두가 긁는 대로 부드럽게 밀려났다. 처음에 뻑뻑하게 벌어졌던 감촉도 좋았지만, 지금처럼 유연히 그 사이를 가르는 것도 좋았다. 흡사 비눗물에 흠뻑 전 융단에 자지를 끼워 넣고, 수음하는 것만 같았다.

“하아…….”

단여명은 상기된 얼굴로 아래를 관망했다. 권호영은 괴로운 듯 인상을 찌푸리면서도 입을 크게 벌린 채였다. 뜨거운 입안에 남김없이 삼켜져 성기가 뿌리 끝도 보이지 않았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못 했던 장면이다. 그래서 볼 때마다 심장이 쿵쾅거릴 정도로 흥분됐다.

단여명은 권호영의 머리를 잡고, 성기를 살짝 빼냈다가 다시 박아 넣었다. 간을 보는 듯한 움직임에 권호영이 성기를 깊숙이 문 채로 고개를 틀어 눈을 맞췄다. 그리고 보란 듯이 꿀꺽…, 하고 목을 넘겼다.

“읏…! 흐으…! 응!”

몇 번 같은 소리가 울리니 더 빨개질 것이 없다고 생각했던 단여명의 얼굴이 새빨갛게 물들었다. 권호영은 흘깃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하얀 발가락이 안쪽으로 꼿꼿이 말려 있었다.

“아, 나와…!”

사정의 전조는 빨랐다. 권호영은 목구멍 밖으로 재빨리 자지를 꺼냈다. 손으로 자지 기둥을 잘게 쳐 주며 귀두를 힘 있게 쭉쭉 빨아올렸다. 읏, 으으…! 입술을 잘근 깨문 단여명이 몸을 부르르 떨면서 토정했다.

정액은 아까와 달리 밖으로 이리저리 튀지 않았다. 주입구를 타고 흘러 들어가듯 권호영의 혓바닥 위에 흥건히 모였다.

“하하…. 맛있어?”

단여명이 숨을 갈무리하며 권호영의 머리칼을 헤집듯이 쓰다듬었다. 권호영은 말이 없었다. 몽글몽글하고 덩어리진 식감을 음미하듯 조용히 혀를 굴렸다. 잠시 뒤 꿀꺽, 둥그렇게 불거진 울대뼈가 위아래로 움직였다.

“우유 맛 나요.”

권호영이 깔끔히 비워진 입안으로 정확한 발음을 구사했다. 미약한 웃음을 띠던 단여명은 그 말을 듣고 대번 정색했다.

“무슨…. 거짓말 안 해도 돼.”

맛은 더럽게 없다. 권호영에게 차마 말 못 하지만, 어느 남자의 것을 먹든 평가는 똑같을 것이다. 정액은 맛으로 삼키는 게 아니다. 상대의 음심을 동하게 만드는 것과 동시에 본인의 정신적인 충족감을 얻고자 삼키는 것이지.

“오늘은 여기까지 해요.”

입가를 훔친 권호영이 자리에서 일어난 건 잠시 뒤였다. 그는 보는 사람이 다 의문을 가질 만큼 미련이 없는 낯이었다.

“삽입은 하지 말자고요.”

단여명은 멍청하게 눈을 깜빡였다. 황당하고도 갑작스러운 말에 얼이 빠졌다. 밤마다 제 몸 구석구석을 어루만지며 탐구열을 불태우던 사람은 누군지. 마치 모르는 사람을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였다.

“장난하는 거지?”

“형, 저 오늘…….”

자리에 서 있던 권호영이 느릿하게 거리를 좁혔다. 한쪽 어깨가 잡히더니 몸이 뒤로 떠밀렸다. 단여명은 권호영이 밀쳐낸 그대로 침대 위에 눕혀졌다.

“중간에 멈출 자신이 없어요.”

몸 위에 올라탄 권호영이 그림자 진 얼굴로 말했다. 장난을 치는 거라기엔 목소리가 착 가라앉아 있었다.

“형이 울고 때려도 못 멈출 것 같아요.”

스윽, 소리 없이 가까워진 무언가가 허벅지 바깥쪽에 비벼졌다. 바지 속에 들어 있는 것은 똬리를 튼 구렁이의 몸뚱이와 비슷했다. 불룩하게 팽창한 살덩이는 제가 얼마만큼 흥분했는지 가감 없이 드러냈다. 한껏 밀착해 은근히 비벼대는 것이 마치 소리 없는 경고를 내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다치면 안 되잖아요. 손이 생명인 사람인데.”

하의와 속옷, 두 겹의 천을 뚫고 한계까지 발기한 좆이 성난 열기를 내뿜었다. 고작 비비는 것만으로도 허벅지의 살갗이 다 후끈거릴 정도였다.

“…네가 그런 말 하니까 무섭긴 하다.”

망설임은 잠깐이었다. 눈을 동그랗게 뜨고 있던 단여명은 이내 픽 웃어버렸다.

“마침 잘됐어. 매번 참는 것 같아서 마음에 걸렸는데. 너, 한두 번으로 만족 못 하잖아.”

오늘은 특별히 마음을 넓게 써 권호영에게 상을 내리기로 했다. 이렇게까지 참은 게 기특하기도 했고.

“비밀 하나 알려 줄까.”

“…….”

“내가 원래 슬픈 영화 보고도 잘 안 우는 사람인데…. 너랑 있으면 맘 편히 울 수 있어서 좋아.”

어차피 하고 싶은 건 그와 같은 마음이었기에 진심을 다해 면죄부를 내려줬다.

저 말은 사실이었다. 처음엔 어린애 밑에 깔려 우는 게 창피하기만 했는데…. 지금은 왜 마조히스트가 되는지 알 것 같기도 했다. 있는 힘껏 울고 나면 속이 시원해지니까. 기분이 좋다는 핑계로, 절정에 계속 달할 때의 생리적인 반응으로 눈물을 원 없이 쏟아낼 수 있어서.

“머리 자르고 온 거 예쁘기도 하고.”

단여명은 권호영의 코끝을 집어 장난스럽게 흔들었다. 그렇게 의지하지 말자고 되뇌었지만, 언제부턴가 권호영에게 의지하고 있었다. 육체적으로도, 아마 심적으로도.

“그러니까 오늘 내가 싫다고 하는 말은 다 거짓말이야.”

설마 기절이라도 하겠어? 순종적인 권호영의 평소 행실을 떠올리며 그리 안일하게 생각했다.

“네 마음대로 다뤄 줘.”

굶주린 짐승에게 모가지를 들이민 줄도 모르고.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미친 듯이 좆을 처박을 줄 알았던 권호영은 어째선지 다른 때보다 느긋하게 굴었다.

손으로 뒤를 풀어 줄 때도 그랬다. 평소보다 공들여 제가 들어갈 공간을 세심하게 벌렸다. 느끼는 부위를 찔러 줄 만도 하건만, 일부러 피해 가듯 엉뚱한 곳을 누르며.

단여명은 약이 오르는 마음을 느끼면서도 얌전히 다리를 벌렸다. 어차피 권호영의 것이 들어오면 저절로 느끼는 부위가 자극된다. 초조해하지 않아도 펑펑 울게 될 순간은 찾아올 것이다.

“읏, 으응….”

뒤에서 엉덩잇살을 바깥쪽으로 벌리는 감촉이 느껴졌다. 커다란 손이 엉덩이 양쪽을 틀어잡고, 살집을 당겨 그 사이를 들여다보았다. 처음엔 뭣도 몰라서 안에 처넣기만 하더니 지금은 교접부를 감상하는 여유도 부릴 줄 알았다.

단여명은 그가 내려다보고 있을 광경을 함께 머릿속에 그렸다. 사람 팔뚝만 한 성기를 물고 팽팽하게 벌어져 있을 입구와 그 사이를 꿰뚫은, 크기와 걸맞지 않게 노는 예쁜 남성기가.

좀 빨개졌으려나…. 거듭 피스톤질하면 색채가 엷은 좆은 쉬이 빨갛게 달아오른다. 기둥에서 귀두로 올라갈수록 새빨갛게 물든 모습은 항상 단여명의 장난기를 부채질했다. 그래서 섹스가 끝난 뒤 괜히 그의 것을 만지작대다가 연장전을 시작할 때가 왕왕 있었다.

권호영의 것을 자세히 상상할수록 뒤가 근질거렸다. 삽입한 채 미동도 않는 중인데도 몸속을 꿰뚫은 것이 얼마나 커다랗고 두꺼운지 몸소 실감 났다. 저게 움직이면 얼마나 흉포한 쾌락을 선사하는지도 이미 알고 있었고.

“으, 흥….”

야릇한 기대감에 성기를 담뿍 문 구멍이 살짝 오므라들었다. 그 기갈난 조임을 느꼈는지 엉덩잇살을 주무르던 권호영이 등 뒤로 상체를 붙였다. 삽입이 깊어지고, 뜨거운 숨이 뒷목에 느른히 끼쳤다.

“자국 남기고 싶어요.”

귓바퀴 가장자리에 폭신한 것이 닿았다. 낮은 목소리가 등덜미에 찌릿한 전류를 흘러 넣었다. 훅, 귓가에 퍼부어진 숨이 등에 오른 전율을 온몸 구석구석으로 퍼트렸다.

“아, 자국은, 읏, 안 되는…….”

“제 마음대로 해도 된다고 했잖아요.”

물컹한 혓바닥이 귓등을 크게 쓸었다. 즈윽, 젖은 살덩이가 연골을 핥으며 나는 소리가 너무도 자극적으로 들렸다.

“허락 안 받아도 되는 건데, 형이 미워할까 봐 묻는 거예요.”

“아, 으읏…….”

“미워하지 말라고…. 네?”

단단한 이가 응석 부리듯 귓바퀴를 살짝 깨물었다. 단여명은 점점 참기 힘들어지는 마음을 느꼈다. 삽입한 채 움직여 주지 않는 권호영이 야속했다. 자신은 얼른 침대 위에서 마음껏 몸부림치고 싶은데, 그는 나중으로 미뤄도 되는 얘기를 논했다.

“미워하는 문제가…. 정말, 읏, 가릴 수가 없어서… 아!”

그때였다. 구멍을 벌리고만 있던 성기가 돌연 안쪽을 푹, 짓쳐 올렸다. 단단한 귀두가 순간적으로 예민한 지점을 두드리고, 깊은 곳까지 밀어닥쳤다.

“으! 하아…!”

거대한 부피에 짓눌려 내벽이 한계까지 이완됐다. 긁듯이 자극된 쾌락점은 채 멍울을 맺지도 못한 상태였다. 한껏 긴장한 점막의 한 부근이 두근두근 맥동 치듯이 잘게 떨렸다. 그 유약한 지점을 육중한 무게로 짓이긴 채 성기는 깊은 내부를 남김없이 꿰찼다.

“아, 아아으…….”

내부를 뒤섞듯 가볍게 담금질하던 성기가 곧 천천히 밖으로 뽑혀 나갔다. 처마 모양으로 발달한 귀두 갓에 주름이 걸려 입구가 봉긋하게 솟았다. 얕은 내벽을 긁던 귀두는 다시 주름이 융기되게 끄집어 놓은 채 더는 안을 파헤쳐 주지 않았다.

권호영이 원하는 대답을 들으려 수작 부리는 줄도 모르고, 단여명은 혼자 갈팡질팡했다. 정말, 정말 안 되는데…. 이성이 흐려졌다. 사소한 얘깃거리는 대충 넘기고, 본격적인 판에 돌입하고 싶었다.

감질나게 자극된 안쪽에 가려움증이 일어 발가락이 꼼질거렸다. 이미 저게 어떻게 움직이면 어떤 감각이 휘몰아치는지 알고 있었다. 인내심이 사정없이 문댄 지우개 꽁다리처럼 닳아 없어지는 것을 시시각각 느꼈다.

험하게 박아 줬으면 좋겠다. 몸이 마구 흔들려 혀를 깨물 정도로 잔뜩 처박히고 싶었다. 두꺼운 팔목에 다리가 걸쳐져 몸이 반으로 접히길 원했다. 그리 벌어진 엉덩이 사이로 거대한 것이 닥치는 대로 꽂혀 들어왔으면 좋겠다.

“……나, 남겨도 되니까. 빨리…….”

지금으로선 엉덩이 사이에 멍 자국이 남아도 상관없을 심정이었다. 연이은 타격의 여파로 두툼한 음낭의 모양대로 엉덩이 사이가 벌겋게 익고 싶었다.

“좋으니까?”

“으, 응…….”

뭉뚱그린 신음도 대답은 대답이었다. 권호영은 단여명이 말을 마치자마자 귓불 아래의 살을 한 움큼 입안에 물었다. 목까지 올라오는 티를 입어도, 모자를 써도 가려지지 않을 위치였다.

단여명은 그를 느끼지 못했다. 모든 신경이 뒷구멍에 꽂힌 남성기에 쏠리듯이 집중됐다. 그것이 제게 어떤 희열을 줄지 기대돼 뒤를 조이지 않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집중력이 소모됐다.

“하아, 으… 읏!”

얄팍한 피부를 입안에 빨아들이며 권호영이 느릿한 추삽질을 시작했다. 크기가 맞지 않는 곳에 억지로 모양을 내어 순응시키는 일이란 상당한 정성이 요구됐다. 커다란 좆이 앞뒤로 왕복하는 것에 맞춰 내벽이 벌어졌다가 좁아지며 울퉁불퉁한 길이 났다. 미끌미끌한 윤활제를 넘쳐흐를 만큼 쏟아부었음에도 마찰이 좀처럼 수월하지 않았다.

두툼한 허리통이 파도를 타듯 앞으로 유연히 율동할 때마다 탄탄하게 올라붙은 엉덩이 양쪽에 움푹 근육의 골이 잡혔다. 권호영이 허릿심으로 좆을 욱여넣으면 단여명은 내장이 벌컥 젖혀지는 느낌에 침대보를 움켜잡아야 했다.

찔걱, 쩍…. 느릿하게 울리는 마찰음만큼 허릿짓의 세기도 강하지 않았다. 그런데 보통 때보다 느껴지는 감각이 유달랐다.

평소엔 간질간질하게 긁기만 했는데, 지금은 그보다 좀 더 명확히, 전립선이 있는 지점을 직접적으로 문지르는 느낌이었다. 한 번, 두 번, 추삽질이 더해갈수록 위화감이 극심해졌다. 마음은 제자리걸음인데, 감각은 저만치 앞을 겅중겅중 뛰어나갔다.

이렇게 간다면 몇 번 박히지 않고 사정할 게 분명했다. 그것도 땅바닥에 자존심이 곤두박질칠 만큼 이리 굼뜬 속도로.

“아, 나 자세, 읏, 자세 바꿀래….”

단여명은 바짝 낮추고 있던 상체를 일으켰다. 아무래도 자세 때문에 성감대가 자극되는 것 같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권호영은 단여명의 몸을 조심스레 돌려 눕혔다. 구멍 속에서 나사못처럼 돌아간 이물감이 불편했는지 단여명이 으읏, 하며 앓는 소리를 냈다. 권호영은 그를 달래듯 곧장 허리를 놀렸다. 어느새 좆의 형태대로 길들여진 구멍이 연붉은색 살덩이를 숨 가삐 빨아먹었다.

“읏, 흐으, 아…!”

얼굴을 마주 보게 된 둘은 허공에서 시선을 교환했다. 뭔가 이상한데…? 왜 달라진 게 없지? 입을 벌리고 할딱이는 와중에 그런 생각을 하는지 단여명이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당혹감이 오른 눈동자는 벌써 촉촉한 물기를 맺고 있었다. 권호영은 그를 바라보며 귀엽다는 듯 웃음을 흘렸다.

“자세 때문인 줄 알았어요?”

나지막한 목소리가 울린 그 순간이었다. 권호영이 아래에서 위로 퍼 올리듯 허리를 놀렸다. 부드러운 허릿짓에 비해 느껴지는 감각은 뼈마디가 시리도록 섬뜩했다. 두꺼운 귀두가 여린 살벽을 부드득, 밀어 올렸다. 거대한 선단에 쾌락점이 오갈 데 없이 정통으로 짓뭉개졌다. 판판한 점막이 움푹 꺼지다 못해 뱃가죽이 위로 솟을 만큼 엄청난 중량감이었다.

“아, 학…!”

깜짝 놀라 팔을 허우적거렸나. 단여명은 그 짧은 순간 제가 어떤 행동을 취했는지 기억하지 못했다. 머리가 까맣게 죽어가는 중에도 전립선에 딱 달라붙은 귀두는 떨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자지러지는 부근을 작신 밟아 누른 채 위아래로 다림질하듯 즐컥즐컥 비벼댔다.

취약한 지점만 공략하는, 노골적인 움직임이었다. 그에 어떻게 반항할 새는 없었다. 기름 덩이에 성냥불을 던진 것처럼 온몸에 화르륵 화염이 일었다. 그 갑작스러운 열기에 시력을 빼앗긴 듯 돌연 눈앞이 새하얗게 탈색됐다.

“흐으, 헉…—!”

단여명은 허망할 정도로 삽시간에 절정에 달했다. 허리가 움칠! 위로 튕기더니 뱃가죽에 찰싹 달라붙은 자지가 허연 액을 흥건히 쏟았다. 마치 실체를 가진 공포를 맞닥뜨린 사람이 두려움에 실례라도 저지른 모습이었다.

뭐, 뭐…! 속수무책으로 쏟아진 정액을 경악한 눈으로 바라보는데, 권호영이 얼굴을 내렸다. 커다란 상반신에 가려져 정액을 지린 성기가 더는 보이지 않게 됐지만, 수치심이 지워지지도, 안심되지도 않았다.

권호영이 허벅지를 넓게 벌려 허리를 갖다 박기 편한 자세를 취했다. 그가 무릎을 벌리니 우윳빛 엉덩이가 반으로 쪼개진 사과처럼 양쪽으로 쩍 벌어졌다. 공략 부위가 낱낱이 드러난 그 상태로 두꺼운 살몽둥이가 퍽! 박혀 들어왔다.

쯜걱, 척, 퍽! 녹진하게 무르익은 속살이 한 갈래로 뒤쳐지는 소리가 났다. 그 소리가 3번도 채 울리기 전이었다. 외마디의 비명이 날카로이 울려 퍼져 질퍽대는 물소리를 삼켰다.

“아, 학! 아, 안 돼…! 흐, 우으, 아, 아!”

“왜요.”

“아!”

“많이 느끼면… 좋은 거 아닌가.”

하으, 헉…! 단여명이 턱을 치켜든 채 바들바들 떨었다. 몇 번 쑤시지도 않았는데, 다리를 이리저리 좁히더니 삽입을 피할 요령으로 엉덩이를 들썩였다. 구멍의 뒤틀림도 심상치 않았다. 뻑뻑하게 조여들다가 옴찔옴찔 수축하며 좆을 물어 당기길 거듭했다. 안에 침범한 이물을 뱉어내려고 하는 건지, 아니면 더욱 안쪽으로 끌어들이려는지 모를 반응이었다.

권호영은 단여명의 양쪽 어깨를 잡아 침대에 고정하듯 눌렀다. 그리고 내벽의 저항에 반격하듯 좆을 푹! 박아 넣었다. 이제 이쯤은 요령을 익힌 뒤였다. 다리를 좁히든 벌리든 그의 몸이 제 아래에 놓여 있다면 얼마든지 파헤쳐 줄 수 있었다.

“좋아하잖아요. 여기 세게 눌러 주는 거.”

하으, 으으으…! 단여명은 숨넘어가는 교성을 내지르며 미친 듯이 고개를 저었다. 단어 선택이 틀렸다. 누르는 게 아니라 짓뭉개는 거였다.

권호영은 제 성기의 사이즈가 유별나다는 걸 자각하지 못했다. 비상식적인 크기로 쑤셔대는데, 버틸 재간이 있을 리가. 약간 힘을 실어 찌르는 것만으로도 배 속의 팽만감이 말도 못 할 정도였다. 그런데 그 질량으로 성감대만 찍어대니 일찍 우는 소리를 내도 이상할 게 없었다.

“여기 찔러 주면 허리 돌리는 거 아는데.”

대가리를 꼿꼿이 든 성기가 독이 오른 뱀처럼 재차 한 지점을 노렸다. 도도록하게 부풀기 시작한 점막에 귀두가 진득하니 몸뚱이를 갖다 뭉갰다. 딱딱한 것과 푹신한 것이 맞붙었을 때 굴복하는 쪽은 더욱 무른 것이었다. 전립선이 짜부라질 것처럼 강하게 압박됐다.

“아, 흐악…! 아, 아악!”

빨개진 목덜미에 핏줄이 파르라니 섰다. 끝이 첨예하게 깎인 감각은 쾌감으로 수용할 수 없는 범위였다. 충격으로 젖은 눈이 정상적인 초점을 잡지 못했다. 눈앞이 하얘졌다가 시꺼멓게 추락하더니 여러 갈래로 분산됐다. 갈기갈기 흩어진 빛을 분주히 좇으며 단여명은 그쯤 한 가지의 사실을 알아차렸다.

일부러 그런 게 맞구나. 그걸 알았다고 해서 바뀌는 사실은 없었다. 성기는 내벽 사이에 숨겨진 지점을 노련히 찧었다. 구멍 속이 온통 축축하게 젖어 미끄덩하게 마찰되는 중에도 한 치의 오차 없이 그 부위만 집착적으로 올려 쳤다.

몸이 흔들릴 때마다 저릿한 쾌감이 배 속을 곤죽을 내놓았다. 쑤셔지는 건 뒷구멍 하나뿐인데 몸 전체가 함락되는 기분이었다. 어쩌면 머리까지도.

“흐아, 응! 싫, 흑, 아아, 아…!”

순식간에 차오른 눈물이 양 뺨을 흠뻑 적셨다. 물이 터진 것은 위쪽뿐만이 아니었다. 굵직한 살덩이가 뒤를 찌르는 박자를 맞춰 아래에서 묽은 액이 질질 쏟아졌다. 권호영이 적당한 속도로 허리를 박을 때마다 배꼽에 고인 작은 샘물이 찰랑찰랑 물결쳤다.

“아, 안 돼, 흣…! 그냥, 박아… 응? 허으, 으, 나, 이거……!”

단여명은 권호영의 어깨에 다급히 매달렸다. 오늘의 권호영은 정말 매몰찼다. 아무렇게나 박아도 감당하기 벅찼는데, 그 사실을 분명 알고 있을 텐데도, 단여명의 한계를 시험했다.

권호영이 사정할 때까지 이런 쾌감을 감내해야 한다니. 아니,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럴 가능성이 다분했다. 이 기세면 아마 사정과 동시에 다시 시작할 것이다.

할 수 있다면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분명 마음대로 다뤄 달라는 말에 고삐를 내동댕이친 것이다. 그 말을 철회하는 걸 넘어서 침대 밖으로 도망치고 싶었다.

“아, 안 멈, 출…! 응, 이거, 학! 적응, 안 돼서…!”

반달 모양으로 잘린 손톱이 탄탄하게 갈라진 등줄기를 긁었다. 질질 끌어당기는 손길을 따라 땀이 맺힌 등판에 벌건 길이 그려졌다. 핏기가 비칠 듯한 생채기가 남았지만, 권호영은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낯이었다.

“응…. 안 그럴게요.”

착하게 대답한 것과 달리 권호영은 좋을 대로 허리를 놀리길 멈추지 않았다. 일직선으로 박다가 허리를 둥그렇게 돌려 내벽의 전면을 맛보기도 했고, 구멍의 반응이 심심해진다 싶으면 예민한 점막을 콱, 지르껴 올렸다. 취약점이 눌린 구멍이 야단스럽게 반응하면 더한 조임을 강제하듯 그곳을 쿡쿡 찔러 괴롭히길 반복했다.

“아니, 야, 흐으, 으…! 말이 틀리잖……!”

울며불며 매달리는 목소리가 멀게 느껴졌다. 느끼는 지점을 문댈수록 구멍이 발작하듯 성기를 물어 당겼다. 더, 더 매달리고, 제 걸 안에 붙들어 뒀으면. 한번 감을 익히고, 맛을 보니 도저히 벌건 욕정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계속, 흑, 문지르, 고, 하, 아으, 응!”

죽을힘을 다해 뱉은 말이 이내 신음에 묻혀 쓸려갔다. 퍽! 소리와 함께 단여명의 턱이 홱 뒤로 젖혀졌다. 하고 싶은 말이 산더미인데, 하복부를 격타한 쾌감에 혀가 꼬였다. 말과 달리 아무런 뜻도 담기지 않은 비음만이 잇새로 형편없이 쏟아졌다. 이래선 힘들고 괴롭다는 말이 다 전해지지 않을 텐데.

“아으, 응! 시, 싫어어, …아-!”

가운데로 모여 저들끼리 비벼지던 무릎이 불식간에 양쪽으로 확 벌어졌다. 권호영은 단여명의 허벅지를 바짝 밀어 올려 침대 위에서 엉덩이를 떨어트렸다. 엉덩이가 허공에 들렸다는 걸 인식할 틈도 없이 단여명의 머리가 쿵, 흔들렸다.

처음엔 소리부터 들렸다. 퍽, 퍽, 퍽, 퍽-! 떡방아를 찧을 때 날 법한 소리가 들렸다. 그 뒤론 포악한 성질의 쾌락이 뒤꽁무니에 빠르게 올라붙었다. 구멍이 뒤집힐 만큼 권호영이 미친 듯이 스퍼트를 올리기 시작했다.

“흐, 으으, 응, 헉, 우으! 아, 아, 아!”

시야가 된통 흔들렸다. 단여명은 양손으로 얼굴을 감쌌다가 팔을 위로 뻗어 침대 시트를 있는 힘껏 쥐어뜯었다. 머리가 팽팽 돌았다. 줄줄 흐르는 눈물이 커다랗게 열린 입속에 스며들었다. 바짝 마른 입안에서 짠맛이 강하게 올라왔다.

어떤 행동을 취해도 벼락같은 성감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좋아 미칠 것 같다가도 발끝부터 참을 수 없는 괴로움이 번졌다. 아래에서 정액이 픽픽 터져 나가는 것이 실시간으로 느껴졌다. 그릇이 너르지 못한 육체는 순화하기 버거운 쾌락을 마구잡이식으로 방출했다.

“제바알, 흑, 제발…!”

자존심 따위는 내다 버린 지 오래였다. 누구에게 애원하는지도 모르고, 단여명은 요란스러운 흐느낌을 쏟았다. 권호영의 뒷목을 와락 껴안았다가 종국엔 그의 어깨를 때리듯 밀쳐냈다.

잠깐만 멈춰 줬으면 좋겠다. 일말의 시간이라도 좋았다. 침을 삼켜 목을 축일 시간만이라도….

“하아, 밀어내지…. 다쳐요.”

이를 빠득 간 권호영이 제 가슴팍을 밀어내던 손목을 붙들었다. 우악스러운 허릿짓에 비해 다정한 손길이었다. 한 손으로 단여명의 양손을 붙든 권호영은 그의 머리 위에 두 손목을 단단히 포박했다. 그리고 퍽—! 허리를 거세게 갖다 박았다.

“흐, 허억……!”

단여명은 커다랗게 헛숨을 집어먹었다. 간절한 마음이 전해진 걸까. 다시 난폭하게 움직일 줄 알았던 살덩이는 깊은 곳을 파고든 채 돌연 움직임을 멈췄다.

연속적인 충격을 받아냈던 내벽이 지레 겁을 먹고 꽈아악, 오므라들었다. 억센 수축력에 점막 사이에 졸리듯이 압박된 성기에서 무섭도록 쿵쿵 맥이 뛰었다. 그다음엔 후우우…. 열이 섞인 숨을 뱉어내는 소리가 조용히 울렸다.

그 숨소리가 귀에 선명히 박힌 순간이었다. 구멍이 통제를 벗어나 빠르게 개폐운동을 했다.

“아, 아……!”

몸속에 차곡차곡 쌓였던 성감이 잠깐 움직임을 멈춘 새 성난 파도처럼 밀어닥쳤다. 사정한 직후 민감한 곳이 찔려 힘겹게 느껴졌던 감각 또한 쾌락으로 순환돼 한꺼번에 방출됐다. 뒤를 꿰뚫릴 때마다 잘게 치밀던 것과 달리 이번 건 기세부터 압도적이었다. 순도 높은 오르가슴이 발끝을 타고 올라 머리 꼭대기를 찍었다.

“아, 아으으, 흐으…!”

미친 것 같았다. 권호영은 움직이지도 않고 있는데, 감각은 나 홀로 앞서가 정점을 찍었다. 혼자 절정에 달해 민망함을 느끼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숨을 거듭 빨아들이는데 공기가 턱없이 부족했다. 몸은 발끝 하나 빼놓지 않고 벌벌 경련했다. 지나친 쾌락에 몸에 과부하가 걸린 것처럼 떨림이 멎지 않았다.

단여명이 네 번째 절정을 찍은 가운데, 권호영은 한 번도 사정하지 않았다.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듯한 오르가슴에 사로잡힌 중, 단여명은 절망과도 비슷한 사실을 깨달았다. 구멍을 있는 대로 벌려놓은 채 가만히 숨죽인 것은 정액을 토해내지 않고, 진한 열기만 내뿜는 중이었다.

“학, 잠깐, 으, 싸, 쌌어…! 쌌어!”

곧바로 염려했던 상황이 닥쳤다. 권호영이 허리를 뒤로 빼 깊이 묻어놨던 살덩이를 억지로 끄집어냈다.

“형은 가끔… 어디로 간 건지 구별을 못 하는 것 같아요.”

권호영은 눈물로 얼룩진 말간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평소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모습. 어딘가 비틀린 만족감이 마음 깊은 곳에 켜켜이 퍼졌다.

“전 알 것 같은데.”

천천히 시선을 내린 권호영은 그의 손목을 결박하지 않은 손으로 납작한 배를 쓸었다. 급한 호흡을 고르느라 갖은 액으로 뒤덮인 뱃가죽이 빠르게 오르내리고 있었다.

“나온 게 없잖아요.”

배를 쓸던 손이 단단히 경직된 자지를 건드렸다. 손끝으로 귀두를 툭, 들추어 올리자 발갛게 물든 성기가 까딱 위로 들렸다가 복부에 찰싹 달라붙었다.

“으, 제발……. 힘들, 어, 응…?”

“느껴지는 것도 달라요. 이러면….”

뒤로 물러났던 성기가 다시 느릿하게 들어차기 시작했다. 미끄럽게 삽입되던 무쇠 같은 기둥이 중간에 속도를 높여 깊은 곳을 콱 찍었다.

“아—! …컥!”

“제 걸 끊어먹을 것처럼, 조이거든요….”

단여명이 숨을 헐떡이며 몸부림쳤다. 어떻게든 붙잡힌 손목을 빼내고 싶은지 구속된 양팔을 비틀었다. 가느다란 두 개의 손목은 권호영의 한 손에 넉넉히 잡히고도 남았다. 권호영은 손아귀에 더 힘을 주고는 눈물 젖은 뺨에 입술을 눌렀다.

“조금만…. 금방 싸요.”

달래는 듯한 음성에 한시름 덜 새는 없었다.

퍽, 퍽, 퍽, 퍽—! 거센 교접으로 투명한 젤이 추접하게 튀었다. 계속 저들끼리 달라붙으려는 뭉클한 점막을 성기가 매몰차게 두 덩이로 갈라놨다. 굵직한 기둥은 일정 깊이까지 치고 빠지길 반복하며 세찬 불길을 만들어냈다. 제일 깊은 곳으로 통하는 입구가 언제 뚫릴지 모를 불안감에 시달리는 중, 단여명은 혀가 녹을 듯한 쾌락 속에 빠져 허우적댔다.

권호영과 할 때면 매번 예상치 못한 타이밍에 사정하곤 했지만, 이렇게 빠른 주기로 절정에 달한 적은 처음이었다. 매일 모래성을 조금씩 무너뜨리듯 단여명의 자존심을 건드렸던 권호영은 오늘 그를 처참하게 깔아뭉개다시피 했다. 고의가 아닐지라도 말이다.

“하으, 으, 흑, 큭! 응…! 아, 아, 아아!”

단여명은 몸속에서 폭죽이 터지는 듯한 감각을 느끼는 족족 교성을 내질렀다. 잇새로 얼마나 처절하게 들릴 소리를 내고 있는지도 몰랐다.

흥분한 게 여실한 좆은 굵직한 핏대가 덕지덕지 돋아난 상태였다. 벽돌같이 단단한 몸뚱이로 공간이 한정된 배 속을 사정없이 치댈 때면 생각이란 걸 할 수가 없었다. 극심한 작열감이 아랫구멍을 활활 불태웠다. 그 열기에 수분을 빼앗겨 몸이 비쩍 말라버릴 것만 같았다.

권호영도 오래 인내해 여유가 없어진 건지 전립선을 집중적으로 올려 꽂진 않았다. 하지만 분별없이 내벽을 박박 긁는 기둥은 학을 뗄 정도로 커다랗고 두꺼워 아낌없는 자극을 퍼부어 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숨이 끅끅대며 터졌다. 무서웠다. 이러다가 어떻게 될 것 같아서. 머리카락을 쥐어뜯든, 권호영의 몸을 마구 내려치든. 어떻게든 하고 싶어 미칠 노릇인데, 권호영이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그가 허리를 박을 때마다 그 반동으로 성기가 뱃가죽을 찰싹찰싹 두드리는 것마저 엄청난 자극으로 치환됐다. 몸속에 축적되는 성감이 배출구를 찾지 못하고, 체내를 끊임없이 휘돌았다. 머릿속이 줄줄 녹아 흐르는 기분에 입 밖으로 혀를 빼물었던 것 같기도 하다.

“큭…!”

금방 사정하겠다던 권호영은 그나마 약속을 지켰다. 몸이 덜컹! 흔들리는 것과 동시에 구멍 속에 뜨겁고 눅진한 액이 한가득 퍼부어졌다. 순간 목덜미에 단단한 것이 콱 박혔다. 쭙, 쭙…! 피부에 이를 박은 채 빨아들이는 힘이 무식할 만큼 거셌다.

진한 울혈 자국을 새겨 넣을 작정으로 권호영은 가느다란 목에 흡혈귀처럼 달라붙어 땀이 맺힌 살결을 탐했다. 단여명은 양손이 자유로워진 것도, 목덜미의 살이 우악스레 빨리는 것도 느끼지 못했다.

“허억……! 아, 학!”

위로 말려 있던 다리가 천천히 일자로 똑바르게 펴졌다. 허공에 발돋움을 한 채 크게 잘잘 경련하는 모습이 애처로워 보일 정도였다.

“후으, 으으으……!”

너무 크고, 뜨거웠다. 눈물을 쏟아내는 중인데 눈알에서 김이 펄펄 나는 것만 같다. 매일같이 해도 익숙해지지 않는 부피가 배 속을 극한의 범위까지 팽창시켰다. 그게 너무 버거워 온몸의 구멍이란 구멍이 전부 확장됐다.

단여명은 눈을 커다랗게 뜬 채 허공을 응시했다. 천장을 보고 있음에도 눈앞에 보이는 게 없었다. 허억, 헉…! 몇백 미터를 전력 질주한 사람처럼 숨이 가빴다. 삽입한 지 20분도 지나지 않았는데 3시간은 붙어먹은 것처럼 진이 빠졌다.

권호영이 움직임을 멈추니 장기를 비틀어 짜내는 듯한 감각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오싹, 오싹. 오르가슴의 잔열이 종아리를 타고 나아가 등허리를 훑었다. 몸을 혹독하게 괴롭혔던 거짓된 절정감은 아니었던지라 잔열처럼 남은 그 감각이 달게만 느껴졌다.

목덜미에 만족스러운 자국을 박아 넣은 권호영이 천천히 얼굴을 들었다. 단여명의 얼굴을 확인하는 것과 동시에 내벽에 파묻혀 있던 성기를 밖으로 끄집어냈다.

“으읏…!”

쭈븝, 소리와 함께 성기가 완전히 뽑혀 나갔다. 커다란 살 몽둥이에 흠씬 두들김당한 구멍은 채 다물리지 못하고, 붉은 속살을 내보이며 빠르게 개폐했다. 곧 움찔거리는 주름 틈새로 허연 액이 꿀렁꿀렁 터져 나왔다. 자작하게 끓인 스튜처럼 걸쭉한 액은 쏟아부은 양도 많아 주름 밖으로 한참 동안 흘러나왔다.

갈라진 엉덩이골을 타고 두꺼운 성기가 천천히 미끄러졌다. 순간 두 사람의 눈이 짠 것처럼 허공에서 딱 맞았다.

축축하게 젖은 까만 눈망울이 맑은 액을 또륵 흘려보냈다. 투명한 눈물은 발긋하게 상기된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를 빤히 쳐다보던 권호영이 혀를 내어 단여명의 뺨을 길게 핥았다. 흠칫 놀란 단여명이 눈을 깜빡인 순간 권호영이 가느다란 허리에 손을 감았다. 곧장 허리를 처박으려는 듯 단단한 장딴지에 움푹 힘이 실렸다.

“아…!”

빠끔거리며 정액을 게워내던 입구에 뜨겁고 뭉툭한 것이 문질렸다. 여전히 강도를 잃지 않은 성기가 대강 각도를 맞추더니 무르녹은 구멍을 푹 갈랐다.

“허, 으, 자, 잠깐만…!”

원래 사정한 직후엔 누구나 감도가 예민해지는 법이다. 그런데 권호영은 무슨 다음으로 향하는 도약판이라도 밟은 양 지친 기색이 없었다. 곧바로 다시 시작해도 이상할 것 없다는 얼굴에서 무시무시한 살기를 읽었다.

단여명은 커다란 몸에 코알라처럼 찰싹 달라붙었다. 양팔로 그의 목을 끌어안고, 발뒤꿈치로 두꺼운 허리통을 단단히 죄었다. 권호영은 끌어당기는 힘에 이끌려 단여명의 가슴팍에 얼굴을 폭 묻었다. 쿵쿵쿵…. 요란하게 박동하는 심장 소리가 고막을 두드렸다.

“…이러면 못 움직이는데.”

권호영의 말에도 단여명은 꼼짝을 안 했다. 가만히 숨을 고르던 권호영은 조심스레 그를 안아 올렸다. 허벅지 위에 앉히자 단여명이 필사적으로 몸에 달라붙었다. 결합을 풀지 않은 채 서로 마주 보고 앉은 자세였다.

“싫어…. 응? 제발, 흑, 잠깐, 만.”

“…….”

“못 한다고…….”

아무 말 않고 쳐다보는 눈동자가 불안감을 촉진했다. 단여명은 그의 뺨을 양손으로 덥석 붙잡았다. 그리고 권호영의 얼굴에 마구잡이로 입을 맞췄다.

쪽, 쪽, 쪽. 이마와 콧방울, 광대와 입언저리에 간절한 입맞춤이 내려앉았다. 정신이 혼미해 생각했던 위치에 입술을 누르진 못했지만, 어쨌든 입맞춤해 관심을 돌렸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다.

시트를 짚은 무릎이 중심을 지탱하느라 바들바들 떨렸다. 그 커다란 떨림은 침대 매트리스까지 진동을 퍼트렸다. 권호영은 팔목으로 단여명의 엉덩이를 받쳐 줬다. 자세를 안정적으로 잡아 주자 단여명이 두 다리에 힘을 푸는 것이 느껴졌다.

두 사람은 열이 도는 눈으로 조용히 시선을 주고받았다. 키스를 원하는 듯한 눈빛에 단여명은 권호영의 입술에 입술을 얹었다. 권호영이 입을 살짝 열어 주기에 그대로 혀를 밀어 넣었다.

강제로 연달아 절정에 달한 여파로 단여명은 평소처럼 능숙하게 키스하지 못했다. 권호영의 입 안쪽의 살을 어설프게 훑다가 미동도 안 하고 있는 혀를 느릿하게 건드렸다. 서투르게 엉기는 혀를 느끼던 권호영은 말랑말랑한 살덩이를 단번에 휘감아 입안으로 부드럽게 빨아들였다.

“응, 으음….”

아…… 키스. 진짜 많이 늘었네.

입안에 든 사탕처럼 혀를 부드럽게 녹여 먹는 입맞춤에 온몸의 긴장이 점차 풀렸다. 혀를 섞는 것과 더불어 손을 놀리는 것도 능숙해졌다. 엉덩이를 움켜쥔 손은 엉덩잇살을 밀어 올리듯 주무르고 있었고, 다른 손은 옆구리를 은근히 쓸어 올렸다.

입술을 조였다가 풀며 혓바닥을 빨던 권호영이 살짝 이를 세웠다. 끄트머리부터 뿌리까지 혀가 구역별로 나뉘어 잘근잘근 씹혔다. 혀가 깨물리는 대로 뒤가 움씰거리며 경련했다. 내벽이 살짝 수축할 때마다 돌덩이같이 단단한 기둥이 몸뚱이를 꿈틀대며 열을 발산해내고 싶다고 아우성쳤다.

똑같은 살덩이끼리 미끄덩하게 휘감기는 감촉이 질척하고도 야릇했다. 분위기가 다시금 농밀해지니 혀 놀림 또한 강렬해졌다. 좀 진정했던 게 거짓말처럼 그들은 다시금 흥분하기 시작했다.

입술과 입술이 떨어진 틈새로 두 개의 살덩이가 치열하게 엉켰다. 조금 여유를 되찾은 단여명은 권호영의 뒷목을 쓸다가 그의 뒷머리를 움켜쥐었다. 음…. 하고 목을 울린 권호영은 반격하듯 허리를 움직여 성기를 슬쩍 찔러 넣었다.

“으, 응…!”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단단히 얽혀 있던 혀가 떨어졌다. 간격을 둔 입술 사이로 은빛 타액이 길게 늘어졌다. 권호영은 아쉬움을 갈무리하고자 단여명의 입술 안쪽 점막이 위로 까뒤집히도록 혀로 진득하게 핥았다.

“형, 봐요.”

“아, 흐으…!”

“이게 운동이에요? 지금껏 나만 움직였는데.”

입맛을 다신 권호영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뜨곤 물었다. 가까이서 마주친 눈동자엔 어렴풋한 장난기가 실려 있었다. 그는 술에 취해 전화를 걸었던 그날을 언급하고 있었다.

“그럼, 너도, 흑…! 뒷구멍 따여, 보든가…!”

방금 전의 상황을 되새기던 단여명은 되는대로 지껄였다. 자신이 마음대로 하라고 허락한 것이지만, 그가 이 정도로 발정 난 개처럼 날뛸 줄은 몰랐다. 좀 전의 영향으로 몸과 정신이 둘 다 회복되지 않았다. 그 와중에 뒤까지 쑤셔지니 필터를 거칠 여력이 나지 않았다.

“뭘… 따여요?”

자못 상스럽게 들리는 말에 권호영은 눈가를 살짝 찡그렸다. 일상 중에 접해 본 적이 없는 표현이었지만, 단여명이 격하게 말한 것은 알아들었다.

“많이 힘들어요? 평소보다 말하는 게…….”

권호영이 고개를 갸웃했다. 적절한 단어 선택을 고르느라 시간을 끌더니 확실하지 못한 투로 단언했다.

“저렴? 한데.”

단여명은 그를 고스란히 흘려들었다. 짧은 시간에 천국과 지옥 물에 발을 담갔다가 뺐다. 정제되지 않는 감각을 맛봐 이제 뭐가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졌다. 어차피 조금 막말한다고 해서 틀어질 관계도 아니었다.

“몰라, 미친, 헉, 너 움직이지 마. 진짜 날, 죽이려고….”

“이젠 욕도 하네…….”

곧은 손끝이 단여명의 입술을 훑었다. 옆으로 밀어내는 움직임에 따라 불긋하게 부푼 입술이 보동보동하게 밀렸다.

“이 입은 험한 말 못 하는 줄 알았는데.”

짓뭉개진 입술이 살짝 벌어졌다. 아…. 성의 없는 허릿짓에도 쾌락을 느끼는지 반쯤 뜨인 눈꺼풀이 아슬아슬 깜빡였다. 그 아래로 통통 튀어 오르는 성기가 보였다. 허리를 박는 대로 이리저리 흔들리는 성기는 쉼 없이 맑은 액을 지렸다.

단여명이 편안한 쾌감을 누리려면 딱 이 정도가 적당했다. 그를 알았지만, 권호영은 단여명의 골반을 단단히 틀어쥐었다. 오늘 봐주기로 약속했으니까. 욕심을 내 아주 조금만 더, 정해놓은 선을 넘기로 했다.

“……! 아, 학—…!”

푸욱, 딱딱한 좆 끝이 불식간에 깊은 곳을 비집어 올렸다. 억지로 밀어 넣는 힘에 오목하게 좁아지는 점막이 아슬아슬 벌어지다가 이내 활짝 입새를 열었다. 좁은 통로를 익숙하게 열어젖힌 성기가 내장 끝에 좆 머리를 묻었다.

“이번엔 욕 안 해요?”

손으로 짓누른 입술이 벙긋거렸다. 아, 아……! 소리로 형용하지 못한 비명을 지르느라 그는 욕은커녕 눈 한번 깜빡이지 못했다.

“이제 조금만 힘줘도… 하아…. 깊숙이 들어가요.”

새하얀 엉덩이 사이를 연신 들락날락하던 붉은빛 살덩이가 완전히 모습을 감췄다. 그 작은 곳으로 비상식적인 크기의 물건을 삼키고 있을 거란 생각은 누구도 감히 하지 못할 모양새였다.

“여기도 좋아하잖아요.”

꾸욱…. 내장의 끄트머리를 한번 짓궂게 눌러주니 단여명이 진저리치듯 몸을 떨었다. 상반신이 불안정하게 휘청거리더니 권호영의 품에 맥없이 몸을 기댔다. 힉힉대며 갈급히 터진 숨소리를 듣는 것과 동시에 구멍이 빡빡하게 성기를 물었다. 강단 있는 무두질로 인해 흐물흐물하게 풀어진 속살이 제법 힘 있게 기둥을 비틀어 짜냈다.

“몇 번을 했는데. 이제 눈 감고도 맞춰요.”

다시 울음이 터진 얼굴을 내려다보며 권호영은 찡그리듯 웃었다. 약간의 고통과 쾌감이 섞여 웃는 건지 아파하는 건지 모를 표정이었다.

“아프, 아……. 기, 깊, 어…….”

“쉬이, 형. 여기 봐요.”

“흐으……. 으….”

“아프지 않아요. 응…? 금방 괜찮아질 거예요.”

권호영이 뺨을 돌려 잡았다. 단여명은 눈을 꾹 감아 눈물방울을 털어내었다. 권호영이 속눈썹을 손으로 훑어 남아 있던 물기를 닦아내 주었다.

깨끗하게 개인 시야에 뚜렷한 눈동자가 잡혔다. 그 어스름한 눈빛에 집중하며 커다란 품속에 안겨 있으니 그의 말처럼 점차 괜찮아지는 듯도 싶었다. 뱃가죽이 찢어질 듯한 복통이 점차 가시니 이물감이 느껴졌다. 쉬이 무시할 수 없을 만큼 아주 커다랗고 선뜩한 이물감이었지만.

“움직여도 돼요?”

“아직, 아직…….”

“아직….”

단여명의 말을 되새긴 권호영이 입을 벌려 매끈한 목덜미를 빨아들였다. 질겅이듯 빠는 입놀림에서 고의적인 의도가 엿보였다. 아마 내일이면 빼곡한 키스 마크로 뒤덮여 원래의 살빛이 보이지 않으리라.

“형이 움직인다면서요.”

그리 몇 번이나 목덜미를 구석구석 깨물렸을까. 나직한 목소리가 휴전의 끝을 알렸다. 단여명은 넓은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소리 없는 울음만 흘렸다.

더는 무리인 것 같은데… 웃기게도 여기서 그만두고 싶지는 않았다. 배 속 깊숙한 곳이 헤집어지면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했던 극치감이 타올랐다. 숨 막히는 팽만감과 끝을 쾅쾅 두드려대는 묵직한 울림을 좋아했다. 매번 죽을 것처럼 느끼는데 죽지 않는 것이 신기할 만큼.

“…….”

단여명은 침묵만 지켰다. 권호영에게 움직이지 못하겠다는 말은 차마 자존심이 상해서 뱉지 못했다. 권호영은 어깨가 축축이 젖어가는 것을 느끼며 그의 속내를 기민하게 눈치챘다. 자존심이 상해서 말 못 하는구나.

“뺄게요.”

단여명의 귓가에 입을 맞춘 권호영이 양손으로 둥그런 엉덩이를 움켜잡았다. 그 상태로 허리를 물리자 으흡…! 하고 이를 악문 신음이 터졌다.

거센 악력에 손가락 틈새로 엉덩잇살이 봉긋하게 튀어나왔다. 살집을 가득 끌어안은 그 사이로 날것의 생식기가 거대한 위용을 드러냈다. 느릿하게 뽑아내는 움직임을 따라 입구의 주름이 고리 모양으로 통통하게 융기됐다.

내용물을 끄집어내는 통에 뒷구멍이 희멀건 액을 왈칵 게워냈다. 힘줄 붙은 기둥을 타고 정액이 뭉텅이져 줄기줄기 흘러내렸다. 결합부는 물론 구불거리는 음모까지 흠뻑 더럽혀졌지만, 둘 중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다시 넣을 거예요.”

숨죽여 긴장한 기색을 읽으며 권호영은 급하지 않게 성기를 밀어 넣었다. 뻑뻑하게 조이는 틈새에 귀두를 끼워 맞추곤 양옆으로 비비적거리니 결장의 통로가 설설 입새를 열었다. 그를 살며시 걷어 젖히고 굽어진 벽에 귀두를 폭신하게 묻었다.

“사, 흐으, 살살……!”

끈덕진 열이 오목하게 고인 곳에 더욱 뜨겁게 달궈진 귀두가 맞붙어 비벼졌다. 지루할 만큼 끝자락을 천천히 문대 주는 것만으로도 단여명은 힉힉대며 권호영의 목을 와락 끌어안았다. 학습된 쾌락에 힘입어 엉덩이를 흔들다가도 거대한 부피감이 선연히 느껴질 때면 뒤를 퍼뜩 조이며 전신을 경직시켰다.

권호영은 언제나 그렇듯 성급하게 행동하지 않았다. 단여명의 머리가 까딱까딱 넘어가도록 허리를 쳐올리고 싶은 걸 인내하며 굽이진 동굴을 부드럽게 찔러 주었다.

기둥의 중간 넘어서는 어떻게든 받아들이는데, 뿌리까지 전부 넣는 것은 매번 버거워했다. 몸의 반응뿐만 아니라 목소리의 톤부터 달라졌다. 깊이 삽입한 초반에는 쾌감보다 고통을 크게 느껴 성대를 긁는 듯한 신음을 터트렸다. ‘너무 커, 아파, 찢어질 것 같아’와 같은 말도 자주 흘렸다.

권호영은 끈기 있게 좁은 굴속을 녹여냈다. 땅을 파내는 굴착기처럼 비좁아 꽉 끼는 공간을 벌리고, 또 벌려냈다. 내벽에 뜨거운 열을 전도시키며 마사지하듯 막힌 벽을 부드럽게 눌러 주니 깊은 곳 또한 점차 뭉클하게 흐무러지기 시작했다. 마냥 비좁기만 하던 곳이 귀두를 넣고 빼낼 때마다 쫀득하게 달라붙었다 떨어지길 반복했다.

“아파요?”

다 알면서 던져진 물음에 단여명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러니 커다란 손이 어르고 달래듯 엉덩이를 톡톡 두드려줬다. 이제 이쯤은 부끄럽지도 않았다. 형 소리만 달았지 침대 위에선 계급장이 바뀌곤 했다.

“너… 오늘, 헉… 이상해.”

잠깐 움직임이 멈춘 새 단여명이 떨리는 목소리로 토로했다. 아프냐고 걱정스레 묻는 목소리는 분명 권호영이 맞았다. 하지만 오늘따라 모든 행동이 일관적이지 않아 낯선 감정이 밀려왔다.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어?”

“…….”

“말로, 말로 해. 진짜 확확, 바뀌어서…….”

이상한 걸 넘어서 무서울 정도라고……. 시간이 지날수록 기분 탓이 아니란 생각이 강렬하게 들었다. 처음에 그가 펠라를 해 주겠다고 나섰을 땐 뭐가 이상한지 몰랐다.

그런데 점점 그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확실하지 않지만, 뭔가 불안정하다는 느낌을 지우지 못하겠어서…….

“형이 잘못한 건 없어요.”

“…….”

“…제가 잘못된 거죠.”

수려한 입가에 흐릿한 호선이 번졌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그 미소에 잠깐 시선을 빼앗긴 찰나였다.

“……!”

단여명의 몸이 쑥 위로 들렸다가 내려앉았다. 놀란 숨을 터트릴 새도 없었다. 뼈마디가 단단히 올라붙은 주먹으로 배 속을 정통으로 얻어맞은 듯 배꼽 밑부터 방대한 충격감이 일었다.

“으, 힉—!”

몸이 두 동강으로 갈라지는 느낌에 단여명은 무릎을 질질 끌듯이 움직였다. 권호영의 어깨와 목덜미를 황급히 끌어안고, 그를 버팀목 삼아 엉덩이를 들고 일어섰다.

배 속의 압박감이 줄어 잠깐 안도한 순간 땀이 맺힌 무릎이 시트 위에서 주르륵, 미끄러졌다. 단여명은 다리를 허우적거리다가 제자리에 철퍽! 주저앉았다. 아등바등하며 애쓴 게 허무하리만큼 맥 빠지는 움직임이었다.

“……! 허으, 으……!”

어찌어찌 빼낸 게 소용없이 두꺼운 좆이 길이 트인 곳을 따라 줄줄이 쳐들어왔다. 깊게 처박힌 살덩이는 좁아지는 길목을 뚫고 들어가 막힌 살벽을 지르눌렀다. 민둥할 것이 분명한 귀두에 가시라도 돋친 느낌이었다. 깊게 찔린 배 안쪽에서 날카롭고도 시퍼런 섬광이 번쩍번쩍 기세를 뻗쳤다.

배 속이 잘잘잘 경련했다. 아랫배에서 시작된 떨림은 곧 온몸으로 전이됐다. 몸의 떨림이 거세 불안하게 휘청거리는 몸을 권호영이 잡아 줬다. 그게 무슨 신호라도 된 것처럼 이변은 순식간에 발생했다.

“아, 아아아…….”

줄줄줄…. 가랑이 사이에서 투명한 액이 오줌 줄기처럼 뻗어나갔다. 버틸 수 있는 쾌락을 초과할 때만 나오는, 소변과도 비슷하지만, 색이 없는 물줄기였다. 매번 깊은 곳까지 박혀 뿜는 게 습관이 된 건지 이번엔 아무런 전조 없이 분수가 터졌다.

단여명은 물이 터진 성기를 황망하게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도저히 그의 페이스를 따라가지 못하겠다고. 세게 박기 전에 미리 말이라도 해 주지. 마음의 준비를 할 새도 없이 아랫배에서 당황스러운 해방감이 치솟았다.

패기 있게 허리를 처박은 권호영도 놀란 듯 눈을 둥그렇게 뜬 채였다. 고작 한 번 갖다 박은 걸로 이럴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는 사람처럼.

“너, 흑…! 너어……!”

제멋대로 구는 것도 정도가 있지…! 야속한 마음에 눈물방울이 후드득 떨어졌다. 단여명은 벌겋게 물든 눈가를 닦아냈다. 오르가슴의 여운으로 숨이 끅끅 터지는 중이었지만, 지은 표정은 제법 앙칼졌다.

“하….”

순간 헛웃음 소리가 나직이 울려 퍼졌다. 권호영의 눈은 흐느낌을 쏟는 얼굴에 가 있지 않았다. 맹랑하게 물을 쏟아낸 자지를 한입에 씹어 삼킬 듯 노려보고 있었다.

진짜 혼나 볼래, 라는 가벼운 위협조차 뱉지 못했다. 뱉지 못했다는 말보단 그럴 시간이 없었다는 말이 더 맞을 것이다.

“아…!”

몸이 발랑 뒤로 넘어가는 것과 동시에 발목이 잡혀 위로 올라갔다. 한순간에 바뀐 자세가 불길함을 극대화했다. 권호영은 무지막지하게 박아댈 때면 꼭 정상위를 고집했다. 아래에 깔린 몸을 품에 단단히 잡아매고는, 경각심 없이 되는대로 흉기를 막 휘둘렀다.

얼굴 위로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 찰나의 순간, 단여명은 똑똑히 보았다. 제 위에 올라탄 한 쌍의 눈동자가 위험스레 빛나는 것을. 누가 봐도 눈깔이 회까닥 뒤집힌 사람의 눈빛이었다.

“기, 기다…! 웁!”

말을 매듭짓기도 전이었다. 입안으로 손가락 세 개가 쑥 처박혔다. 그와 동시에 퍽—! 하고 묵직한 타격음이 살벌하게 울렸다.

“흐, 우윽-!”

단여명은 반사적으로 입안에 문 것을 우드득, 씹었다. 그제야 권호영이 급히 입안에 손가락을 물려 준 이유를 깨달았다. 갑작스럽고도 억센 허릿짓에 혀를 씹을까 봐. 그런 배려를 하면서도 곧장 시작된 추삽질은 관절이 어그러질 만큼 가차 없었다.

원래 두 사람은 단여명이 분수를 한 번 터트리는 것에 맞춰 자리를 정리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볼품없이 달랑거리는 자지가 분수를 뿜든, 정말 오줌을 지리든 상관없다는 것처럼 우람한 좆이 쾅쾅 들이박혔다.

“하, 학! 흐, 으으, 응, 아, 앗, 아아!”

방을 쩌렁쩌렁 울리며 형편없이 터지는 교성이 타인의 것처럼 낯설었다. 입안에 쳐들어온 손이 혀를 짓누르고 있다는 사실도 모른 채 단여명은 목이 쉬도록 울었다. 혓바닥이 눌리지 않았대도 소리를 내지 않곤 배길 수 없었을 것이다.

불쏘시개 같은 성기가 배 속을 뒤집어놓았다. 그의 것이 이리저리 찌르는 대로 직장이 마구 꼬이는 기분이었다. 정말 다시는 못쓰겠다 싶을 정도로 빠르고 강렬하게 내장이 쑤셔졌다. 좆을 한껏 빼냈다가 철퍽! 들이박는, 한 번의 움직임마저 뼈마디가 어긋날 듯 포악스러웠다.

안쪽을 끄집어냈다가 다시 밀어 넣는 그대로 입구의 주름이 안팎으로 끌려갔다. 그건 안쪽의 상황도 마찬가지였다. 깊고 얕음의 구역을 나눌 필요 없이 육중한 살몽둥이에 내벽이 다짐육처럼 짓이겨졌다.

“흐윽, 헉, 아으, 으, 흐으, 으, 응-!”

터질 것 같았다. 아니, 이미 터지고 있었다. 깊은 곳을 흠씬 두들겨 맞을 때마다 자지 끝에서 물줄기가 뻗쳐올랐다. 촤아, 촤- 하며 강하게 터지다가 수도꼭지를 위로 돌려놓은 듯 졸졸졸 새기도 했다. 제 몸이라고 믿기 힘들 정도였지만, 물을 쏟아낼 때마다 배출감이 느껴지는 것은 분명 제 몸이 맞았다.

“흣, 으으, 아아, 아…! 아, 아, 아아아!”

가혹한 방망이질을 받아내는 몸은 언제부턴가 아랫배의 해방감도 쾌락으로 묶어 치환했다.

이런 거 모른다. 이걸 쾌감이라고, 과연 섹스라고 부를 수 있을까. 스스로가 너무도 변태적으로 생각돼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해일 같은 쾌락이 온몸을 덮쳐들 때마다 비명을 질렀고, 뼈에 사무치는 감각을 고스란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때마다 물줄기는 픽픽 튀어 올라 서로의 맨몸을 적셨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단여명은 결국 양손으로 눈을 가리고 펑펑 울었다. 머리끄덩이가 잡혀 고통과 쾌락의 경계를 수없이 넘나들었다. 벼랑 끝에 내몰린 감각이 혼란스러워 설움이 북받치는 와중에 민감한 곳이 낱낱이 쑤셔져 기분이 끔찍하게 좋았다. 금방 무너질 것 같으면서도 위태롭게 감각이 수용돼 몸이 묵직한 도끼날에 동강동강 끊어지는 기분이었다.

“형, 봐요.”

권호영이 얼굴을 가린 단여명의 손을 치워냈다. 분간 없이 허공에 튀어 오른 물줄기 사이로 벌겋게 상기된 얼굴이 보였다.

“박을 때마다, 계속 나와요.”

믿기 힘들게도 그는 웃고 있었다. 진심으로 기쁘다는 듯이.

처음으로 권호영이 미친 사람처럼 보였다. 그런데… 그게 어째선지 싫지 않았다. 분에 넘치는 쾌락에 두들겨 맞다시피 젖어 어쩌면 사고회로에 누수가 발생한 걸지도 모른다. 아니면 미친놈처럼 구는 권호영에게 자신까지 동화된 걸지도 몰랐고.

“조, 조아, 응, 호여, 흐, 아아…!”

단여명은 그리 바랐던 소원대로 침대 위에서 있는 힘껏 몸부림쳤다. 쾌감에 잔뜩 짓물러진 낯으로, 입속을 커다랗게 벌린 손이 혓바닥을 긁어 주는 대로, 흥흥대는 울음소리를 질질 쏟아냈다.

“저도요.”

저도요, 형. 정말, 정말로…. 권호영은 흔들리는 몸을 달뜬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제가 아껴 마지않는 몸을 입맛대로 휘두르는 것이란 기대 이상으로 짜릿했다. 제 품에서 녹아내리는 제 사람의 얼굴이 사랑스러웠다. 마음이 뜨겁게 벅차올랐다. 허리가 멈추지 않았다. 너무 좋아서 이대로 죽어도 좋을 것 같다.

제가 허리를 박는 족족 물을 쏘아대는 성기가, 금방이라도 펑 터질 듯한 감각을 버텨내느라 침대 위에서 난동을 피우는 몸이 너무 좋았다. 쏟아주는 대로 돌아오는 반응이 다디달았다. 제가 해 주는 대로 열렬히 호응하는 것이 마치 보답하지 못해 안달하는 것처럼 보여서. 독한 약에 취한 것처럼 기분이 붕 떠 가라앉지 않았다.

“흐, 조, 으…! 아, 시, 아니, 으, 응, 하, 그마, 안…!”

권호영은 단여명을 눕힌 후 처음부터 끝까지 거친 추삽질을 강행했다. 약한 부위를 속속들이, 그것도 과감히 자극하는 행위에 단여명은 감각에 혼선을 겪다가 빠르게 나가떨어졌다.

사력을 다한 몸부림에 시트가 맹렬히 구겨졌다. 손이 한 번 잡혀 올라갔음에도 불구하고 단여명은 손목이 꺾이도록 권호영의 어깨를 밀쳐냈다. 살기 위한 무의식적인 행동이었다.

계속 터져 나오던 물줄기도 세기가 약해진 모습이었다. 그를 흘깃 확인한 권호영은 단여명이 손을 휘두르지 못하게 그의 양 손목을 잡아 누르곤, 남은 손으로 덥석 자지를 휘어잡았다.

“으—, 흐! 마, 만지지, 아, 아아—!”

쯜걱, 척, 척! 단단한 손아귀에 잡힌 성기가 타인의 입맛대로 휘둘렸다. 단여명이 울며불며 소리치든 말든, 권호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손을 빠르게 놀렸다.

“더. 하아, 더 싸요. 후—, 응…?”

귀두와 기둥을 틀어잡고, 단번에 쭉쭉 훑어주는 손놀림에 투명한 물줄기가 갈래갈래 튀어 올랐다. 그와 동시에 빨판처럼 달라붙은 내벽이 정액을 갈구하는 양 성기를 힘껏 쥐어짜 냈다.

권호영은 단순하게 놀리던 허릿짓을 바꿨다. 한동안 정신없이 박기만 해 좋은 곳을 찔러 주는 걸 잊었다. 단여명이 힘들어할 거란 생각은 2순위로 밀려난 후였다. 그가 거쳤을 어느 남자보다 강렬하게, 잊을 수 없는 쾌락을 안겨 주는 행위에 집착했다.

권호영은 허리를 아래로 휘어 전립선을 퍼 올리듯 세게 압박했다. 극점을 강하게 짓누른 뒤 주르륵, 미끄러진 성기는 둥그렇게 굽이진 내벽을 퍽! 올려 찍었다. 어느새 비좁기만 했던 결장 벽은 두꺼운 귀두의 모양대로 딱 맞게 무르녹았다.

“컥, 흐으—…!”

단여명의 고개가 휙 위로 쳐들렸다. 손아귀에 틀어 잡혀 벌겋게 피가 몰린 귀두가 때맞춰 따뜻한 물을 주룩 뱉어냈다.

권호영은 단여명의 턱을 잘근잘근 씹다가 그대로 목덜미까지 이로 쭉 긁어내렸다. 사과의 껍질을 벗기는 듯한 입놀림에 벌건 잇자국이 기다랗게 그어졌다.

“시, 흐, 아, 아프…! 흐아, 으, 으아!”

내벽의 수축력이 강해질수록 뒤를 쑤시는 추삽질의 속도가 빨라졌다. 구멍을 묵사발 낼 것처럼 다져대는 겉보기와 다르게 노련함을 겸비한 성기는 민감한 구석이란 구석은 온통 건드리고 들쑤셔댔다.

야차 같은 쾌락이 머리 가죽을 벗겨낼 것처럼 굴든 말든, 몸은 착실히 성감을 축적했고, 그만큼 감도를 높여갔다. 여기가 한계겠지, 생각하면 더한 정상을 찍었고, 자꾸만 그 위로, 그 위로 계단을 올랐다.

“아, 안 돼, 빨리, 싸 주, 호, 호여, 흑, 안, 안에, 으응, 학…! 흐, 우으!”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발길질하던 단여명은 그쯤 모든 것을 체념하고, 울면서 애원하기 시작했다. 권호영도 한계가 온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가 맥없이 분수를 터트렸을 때부터 아래가 터질 것처럼 흥분했다. 제가 저리 만들었다는 사실이 눈에 확실히 보였으니까. 그래서 어떻게 잡아먹어야 할지 계획을 세우기도 전에 단여명의 몸을 뒤로 넘어뜨려 버렸다.

퍽, 퍽, 퍽—! 절정을 향한 우악스러운 피스톤질이 이어졌다. 정성스레 굴착된 구멍은 굵직한 기둥이 어느 방향으로 꽂히든 막힘없이 꿀떡꿀떡 받아 삼켰다. 추접스레 울리는 물소리는 방해물이 되지 못했다. 그 소리를 만들어내는 두 사람 다 그를 듣지 못했으니까.

침대 가운데에 고정된 몸은 커다란 육체가 숨기듯이 가려 보이지 않았다. 단여명은 권호영의 품속에서 목덜미에 핏줄을 세우고,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질렀다. 권호영이 성기를 꽉 쥐고 좋을 대로 주물럭대는 중이라 더 이상의 몸부림은 무의미했다.

이리저리 움직이던 과녁이 더는 움직이지 못하니 목표점을 노리기 더 쉬울 것이다. 권호영의 몸놀림이 그 사실을 증명했다. 성난 귀두가 도도록하게 살이 붙은 부근을 사정없이 올려 찍었다. 여유가 없어 좆을 막 놀려도 전립선 부근을 중심축으로 놓고 영악하게 움직였다. 그렇게 민감한 곳을 할퀴고 올라간 성기는 굽어진 내벽에 머리를 꽂아 배 속에 충격적인 진동을 가했다.

더는, 더는 안 돼. 진짜 죽을 거야…. 전의 상실과도 같은 굴복감을 느낀 그 순간이었다. 한껏 몸뚱이를 부풀린 살덩이가 굽이진 벽을 힘차게 때렸다. 몸속에 배출되는 체액의 열감이 소름 돋게 생생했다. 몸이 후끈거려 죽을 지경인데, 그보다 더 뜨거운 액이 배 속을 남김없이 채웠다.

“아, 아학…….”

권호영이 손목을 놔주자마자 단여명은 힘없이 몸을 늘어트렸다. 단여명이 쏟아낸 액으로 서로의 하반신은 물론이고, 상반신까지 물난리가 난 채였다.

사정하는 순간에도 권호영은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했다. 긴장의 끈을 놓을 틈도 없이 입안에 손가락이 불쑥 쳐들어왔다. 볼 안쪽을 잡아 늘인 엄지가 입안의 공간을 억지로 벌려냈다. 커다랗게 벌어진 입속으로 곧장 두툼한 혀가 쑤셔 박혔다.

단단한 육체와 침대 사이에 낀 몸이 종잇장처럼 구겨졌다. 입안으로 들어온 것들은 따로 떨어져 움직였다. 같은 살덩이를 잡아챈 혀는 격렬히 몸뚱이를 비비적댔고, 손은 축축한 구강 안을 더듬어 나갔다. 뺨 안쪽의 점막을 지문으로 쓸다가 설소대를 긁더니 이내 단여명의 혀를 만지작대며 자기 손가락과 같이 빨아댔다.

좁은 입속에 엄지손가락 한 개와 두 개의 살덩이가 엉망으로 뒤섞였다. 치골을 딱 눌러 붙인 채 키스하던 권호영은 허리를 둥그렇게 뭉그적댔다. 구멍 속의 정액을 고루고루 펴 바르는 몸놀림이었다.

“흐으, 흐으응…….”

단여명은 아래위로 맹렬히 쏟아지는 공세에 감은 눈을 파르르 떨었다. 제발, 제발 진정 좀 해…. 사정했잖아…. 울먹거리는 목소리가 정신없이 뒤쳐지는 입안을 울렸다.

잠시 뒤 열정적으로 키스하던 권호영이 입술을 떼어냈다. 뺨과 콧등, 입술에 쪽쪽 입맞춤을 내리더니 입안을 휘저었던 손을 꺼내 주었다. 단여명은 눈꺼풀을 힘겹게 들어 올렸다.

“형, 한 번 더요.”

붉게 부푼 입술이 달싹이는 움직임을 멍하니 눈으로 좇는데, 몸이 반대로 돌려 눕혀졌다.

맹수의 앞발처럼 묵직한 손이 허리를 아래로 눌렀다. 등 뒤에 딱 달라붙은 권호영이 목덜미부터 뺨까지 길게 핥아 올렸다. 서로의 다리가 엉기고, 허리에 두꺼운 팔목이 감겼다. 욕망이 해소되지 않은 몸은 뜨끈뜨끈한 열기를 뿜어냈다. 사정한 직후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그는 여전히 이성의 끈을 반쯤 놓은 채였다.

단여명은 침대 위에 머리를 누인 채 생각했다.

“…….”

안 된다고 말해도…… 말귀를 알아듣기는 할까.

그 뒤로 대체 얼마나 박혔나.

“아, 흐으, 응……!”

단여명은 점점 시간의 흐름을 잊었다. 권호영이 몸을 뒤집는 대로 뒤집혀 다리를 벌렸다가, 옆으로 돌아누웠다가 엉덩이만 쳐들기도 하며 수치스러운 신음만 냈다. 그가 엉덩잇살을 꼬집듯 세게 그러잡으면 뚜렷한 정신이 드는 듯했지만, 꿈결처럼 몽롱하게 풀어지길 반복했다.

수차례 마른 절정이 닥쳤다. 거짓된 절정감이 거듭 치밀어 투명한 물을 쏟아내게 했다. 인간의 몸은 70%의 수분으로 이루어져 있다더니. 중간중간 권호영이 입안에 물을 흘려 넣어 주긴 했으나, 쏟아낸 양이 과히 많았다. 어디로 굴러도 시트에서 축축한 물기가 느껴졌으니.

“안, 안 나와. 아…….”

침대 위 두 마리의 짐승 중 하나가 낑낑대며 품을 벗어나려고 했다. 하얬던 몸은 잇자국과 울혈 자국이 덕지덕지 박혀 난잡해진 모습이다. 허벅지 쪽에 집중된 하반신에 비해 상반신은 전체적으로 울긋불긋했다. 목덜미와 어깨, 가슴팍과 배꼽 주변에도 입술이 닿은 흔적이 빼곡했다.

“싸기 싫다면서요.”

그를 뒤에서 끌어안고 있는 몸은 비교적 멀쩡했다. 어깨와 등짝에 기다란 손톱자국이 군데군데 박힌 것 말고는, 초반과 다를 게 없었다.

“싸고 싶은데 안 나와요?”

후배위를 하다가 나란히 상체만 곧추세운 자세였다. 단여명은 초점이 풀린 눈으로 아래를 응시했다. 거의 주저앉아 있다시피 한 몸을 권호영이 뒤에서 부둥켜안고 있었다.

가슴팍을 가로지른 손이 통통하게 부은 돌기를 꼬집었다. 양측으로 알갱이를 집고는 조물조물 반죽하더니 바깥으로 쭉 늘어트렸다. 입과 손에 번갈아 괴롭힘을 당한 유두는 앵두만 한 크기로 소담하게 부푼 뒤였다. 위에서 내려다보니 색도 확연히 짙어진 모습이었다. 단단한 손가락 사이에 꼬집혀 세모꼴로 길어진 돌기는 처음보다 훨씬 커다랗고 붉어진 모양이었다.

“으으….”

단여명은 모르겠다는 듯 작게 고개를 저었다. 아랫배가 조금 답답한 것도 같은데, 힘을 줬다가 풀기를 반복해 근육통처럼 뻑적지근한 감각도 느껴졌다. 더는 쏟아낼 것이 없는데 계속 느껴서 그런지, 아니면 지쳐서 이러는 건지. 탈진감이 상당해 별거 아닌 판단마저 내릴 수 없었다.

슬슬 한계였다. 두 번의 토정 후 권호영은 사정감을 느낄 때만 허릿짓을 강렬하게 했다. 그래서 지금까진 어찌어찌 버티는 중인데…… 이 이상은 솔직히 자신 없었다.

싫다거나 그만하라는 말은 수도 없이 한 뒤였다. 하지만 권호영이 그를 들어먹지 않았다. 대답은 ‘네’ 하고 착실하게 하면서도 뒤에서 좆을 빼낼 생각을 안 했다.

그를 뿌리치고 달아나려면 발목이 잡혀 끌려갔다. 중국엔 서러운 울음을 터트리면 성감대를 부드러이 찔러 주며 괜찮다는 속삭임을 흘려 넣었다. 쏟아지는 입맞춤은 다정했고, 눈물을 닦아 주는 손길은 따뜻했다. 그럼 단여명은 또다시 커다란 품에 갇혀 불가항력으로 녹아내릴 수밖에 없었다.

“……?”

멍하니 넋을 놓고 있던 그때였다. 유두를 지분대던 손이 겨드랑이 사이를 지나 앞 어깨를 움켜잡았다. 반대쪽 손은 하복부를 감싸 골반을 단단히 붙들어 맸다.

마치 롤러코스터에 탑승할 때 안전벨트를 맨 것만 같았다. 제자리에 고정시킬 목적으로, 충격으로 몸이 흔들리거나, 불안전한 상황을 막아 줄 요량으로 착용하게 하는 것 말이다.

그에 어떤 예감을 느끼기도 전이었다. 몸속에서 얕게 움직이던 성기가 돌연 깊게 처박혔다. 세게 박힌 것도, 민감한 부근이 긁힌 것도 아니라 으읏, 하고 작은 소리를 냈을 뿐이었다. 정신 나간 투우처럼 깊은 곳을 마구 올려 찧던, 지난 피스톤질에 비하면 가볍게 넘길 만한 자극이었다.

그렇게 찜찜한 잔뇨감을 어김없이 그러안고 있던 중이었다. 권호영이 옴짝달싹 못 하게 상반신을 강하게 껴안았다.

이건 좀 갑갑한데…. 안에 한가득 욱여넣은 성기도 압박감이 상당했던지라 단여명은 그의 팔을 슬쩍 밀어냈다. 말할 힘이 남아 있지 않았지만, 그래도 놔 달라는 말을 해야 알아먹을 테니까.

“……! 아, 아악—…!”

문장을 만들어내려던 입술은 목적을 상실하고, 아무 뜻도 없는 신음을 내질렀다. 뒤로 빠질 줄 알았던 성기가 생각지도 못한 움직임을 보였기 때문이다.

거대한 살몽둥이가 굽이진 내벽을 틀어막은 채 계속, 계속해 힘을 실었다. 꾸즈즉, 즈즉, 하며 막힌 살벽이 짓무른 과육처럼 뭉크러졌다. 더는 남은 공간이 없는데 새로운 길을 개척할 것처럼 커다란 것이 무식하게 몸뚱이를 치댔다.

“허억…! 허으!”

단여명은 팔을 허우적대다가 필사적으로 엉덩이를 앞으로 내밀었다. 남은 힘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위기의식을 느낀 몸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우스꽝스러운 꼴이 될 테지만, 뒤에 또 다른 구멍이 날 것만 같아 도망을 불사할 수밖에 없었다.

잠깐 새 맛본 감각은 꿈이라고 믿고 싶을 만큼 지독했다. 역시나 고통만 존재하지는 않았다. 깊숙한 내부는 원체 취약한 지점이었다. 한참 불이 붙은 중반에 가만히 눌러 주는 것만으로도 잔떨림이 멈추지 않는 곳이다. 강한 힘으로 찍어 누르는 걸 받아낼 내성 따위 없다.

“뭐, 흣, 뭐, 하려고…!”

단여명이 앞으로 허리를 뺀 자세로 아등바등했다. 손을 뒤로 뻗어 권호영의 허벅지를 밀어내기도 했다.

힘이 빠진 손길은 아무런 효과도 내지 못했다. 권호영은 벌어진 거리만큼 따라붙어 말랑한 엉덩이에 치골을 바짝 뭉갰다. 그러나 자세가 불안정한 탓에 더욱 깊숙이 결합하는 것에 한계가 있었다.

“도망치면 안 돼요.”

권호영은 작은 몸을 손쉽게 무너트렸다. 단여명을 포복하듯 엎드리게 하고, 그의 몸 위에 날렵히 올라탔다. 상체를 포박한 손은 풀지 않은 채였다. 평소엔 그를 배려해 체중을 싣지 않았지만, 이번엔 온전한 무게를 실어 작은 몸을 깔아뭉갰다.

“참아야죠. 응? …그래야 나오지.”

잠깐 새 움직이느라 성기가 중간까지 빠져 있었다. 권호영은 허릿심으로 단번에 좆을 전부 꽂아 넣었다.

“으흐, 악…!”

가닥가닥 분산됐던 정신이 번뜩 하나로 합쳐졌다. 굽이진 내장에 불도장을 찍은 성기가 곧장 무지막지한 힘을 가하기 시작했다. 꺾어지는 내벽에 귀두를 꽂은 채 더한 공간을 강제하듯 구멍을 위로, 더욱 위로 밀어붙였다.

잔뜩 겁을 집어먹은 몸이 바들바들 경련했다. 안 돼, 진짜 뚫려…! 뚫린다고! 더는 무리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입 밖으론 힉힉대는 숨만 빠져나갔다.

허윽, 허으으…! 단여명은 손을 뻗어 시트를 와락 쥐었다. 이불보를 잡아당겨 벗어나려고 몸부림쳤지만, 위를 장악한 몸은 무거웠고, 아랫구멍은 커다란 것에 꼼짝없이 꿰인 상태였다. 달아날 방법은 없었다.

허리 아래로 잔학한 행위를 하면서 권호영은 위로는 모순적인 행동을 보였다. 다시 눈물이 줄줄 터진 뺨에 입맞춤을 내리며 정성껏 울음을 달래 주었다. 단여명이 좀처럼 싸지 못하자 허리를 뒤로 물렸다가 다시 푸욱, 하고 있는 힘껏 결장 벽을 압박했다.

좆 끝에서 뭉글한 속살이 짓이겨지는 감촉이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생생했다. 물러 터지기 직전에 홍시처럼 몰씬한데, 생명이 없다기엔 자력을 가지고 움직인다. 불규칙적으로 수축 이완하다가 되레 제 살이 다 터져 나갈 만큼 아주 꽈아악, 아래를 졸라맨다.

“누르니까…… 더 들어가는데.”

먼저 이변을 느낀 건 권호영이었다. 더운 숨이 섞여서 나온 그 말뜻을, 단여명 또한 즉각 알아챘다. 숨이 막힐 정도로 커다란 것이 꺾어진 내벽을 타고 더, 더 깊숙이 밀려들어 오는 느낌이 갈수록 선연해졌다.

단여명은 이를 빠득 악물었다가 종국엔 흐으으, 하고 긴 울음을 토했다. 배가 땅기듯이 아파 발등으로 침대를 팡팡 차다가 발목을 십자로 교차해 꼬았다.

어떻게 발버둥 쳐 봐도 나아지는 것이 없었다. 안으로 느릿하게 침범하는 것을 도저히 막을 방도가 없었다. 유리한 자리를 선점한 권호영은 좆을 올려 꽂은 채 허릿심을 거둬 주지 않았고, 그동안 체내에 고스란히 쏟아진 체액은 삽입을 더욱 수월하게 했다.

마지막 방안으로 죽을힘을 다해 구멍을 조여 봤으나, 밀려드는 존재감은 더더욱 커져만 갔다. 한 번도 벌어진 적 없던 공간이 우람한 부피에 밀려나 점차 통로를 여는 것이 섬뜩할 정도로 체감됐다. 거기서 더 들어갈 공간이 남아 있었다니. 믿기지 않는 사실에 눈이 커다랗게 뜨이고, 이가 잘게 부딪쳤다.

“아, 안, 흐, 호여…….”

관자놀이를 타고 식은땀이 주르륵 흘렀다. 단여명은 손을 더듬어 권호영의 손목을 꽉 붙들었다.

그럼에도 권호영은 단여명의 상체를 끌어안은 채 작게 난 틈을 비집어 여는 것에 온 정성을 기울였다. 다치지 않도록, 아주 세심히. 비좁은 틈에 귀두를 끼워 맞추곤 양옆으로 살살 돌리니 끝과 연결된 내벽이 서서히 좆 머리를 삼키기 시작했다.

“……! ……!”

단여명은 몸서리치듯 전신을 크게 떨기만 했다. 반절? 어쩌면 그 이상인가. 얼마나 삽입됐는지 몰라도 숨조차 함부로 고를 수 없었다. 한계라고 생각했던 곳에 결국 또 다른 구멍이 생겨 버린 것이었다.

닻이 걸린 것처럼 비좁은 틈에 귀두 갓이 턱 걸쳐졌다. 불뚝한 모양대로 공간이 변형됐을 때쯤 성기가 느릿하게 몸뚱이를 끄집어냈다. 그리고 정성 들여 연 비밀스러운 공간이 다시 닫히기라도 할까, 덜 여문 살에 좆 머리를 쿵! 들이박았다. 불에 달군 쇠망치 같은 것이 콰드득, 짓쳐들어왔다.

“흐, 악……! 아아, 아—!”

일순간 끝이 갈라진 목소리가 커다랗게 울려 퍼졌다. 벌어진 엉덩이 사이에 거꾸로 누인 자지가 물을 줄줄이 터트렸다. 바짝 엎드린 자세 탓에 침대 위에 몸뚱이를 딱 붙인 상태였다.

소량으로 나눠서 싸던 전보다 기세도 강하고, 많은 양이었다. 침대 시트를 때리며 쏟아진 물난리에 자지 머리가 닿은 부근이 육안으로 확인될 정도로 흠뻑 젖었다. 소변을 눌 때 날 법한 소리가 이윽고 권호영의 귀에 잡혔다.

“어때, 좀… 하아, 시원해요?”

단여명은 입술을 벙긋거리기만 할 뿐 어떤 대답도 하지 못했다. 권호영이 엉덩잇살이 밀리도록 허리를 툭툭 처박는 대로 추륵, 촤- 하며 자지 물만 싸질렀다.

“형이 오늘 싼 거 합하면….”

“끄으! 하…!”

“생수병 하나는 가득, 채웠겠어요….”

처음 좆을 받은 내벽이 귀두를 아프도록 조물조물 죄었다. 어떻게든 밀어내겠다는 듯 성기를 씹는 개폐운동이 사나웠다. 꺾어 들어가는 구역 넘어서뿐만 아니라 구멍도 발칵 뒤집힌 것처럼 경련했다. 권호영은 미간을 찌푸린 채 백기를 꽂듯 그대로 허연 정액을 내뿜었다.

새로 열린 곳의 감각도 생경한데, 안쪽 살이 벌겋게 익을 정도의 뜨거운 액이 콸콸 들이부어졌다. 히익…! 길게 목을 울린 단여명은 머리를 위로 쳐들었다가 그대로 매트리스에 쿵 박았다. 방금까지 아랫배에 힘이 들어간 줄도 몰랐는데, 힘이 몽땅 풀리고 나서야 알았다. 온몸으로 긴장 상태를 유지하고 있었단 사실을.

“아, 헉, 조, 좋아……. 아… 뜨거…….”

권호영이 허리를 잘게 터는 것에 맞춰 거꾸로 누인 자지 끝에서 물이 조록조록 흘렀다. 장기를 압박한 성기 때문에 숨이 턱없이 모자랐다. 공기를 크게 빨아들이고자 입 밖으로 혀가 삐져나갔다. 방울방울 흐른 타액이 침대보를 동그랗게 적셨다.

배탈이 난 것처럼 아랫배 전역이 부글부글 끓었다. 아, 아파… 좋아…. 더듬더듬 배를 부여잡으려는데, 몸이 침대에 딱 달라붙어 손을 넣을 틈이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해 맥없이 시트를 긁은 순간 몸이 휙 돌려 눕혀졌다.

“다른 사람이랑 할 때도 이랬어요?”

어지럽게 도는 시야 속, 형형한 안광만큼은 또렷하게 빛났다. 한계치를 넘은 삽입은 자세가 바뀌어 결합이 풀렸다. 그러나 여전히 만족을 모르는 탐욕은 끝나지 않았다.

사물을 분간할 새 없이 다시 시야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으, 하아, 응…! 단여명은 동공이 풀린 눈으로 흐느낌만 쏟았다.

“응? 이런 적, 있냐고요.”

침묵을 지키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피스톤질이 점점 격해졌다. 금방 눈이 감길 것 같은데, 팽팽히 당겨진 고무줄처럼 의식의 끈이 아슬아슬 이어졌다. 저릿저릿한 쾌락이 거듭 부유하려는 정신을 채찍질했다. 지쳐 늘어져 있고 싶은데, 생리적인 반응으로 허리가 파들파들 떨렸다.

“이렇게 눈도 제대로 못 뜨고, 하아—, 침대 다 젖을 때까지, 싼 적 있어요?”

몸을 거칠게 잡아 흔드는 와중에도 권호영은 집요한 물음을 멈추지 않았다. 자꾸만 시들려고 하는 자지를 꽉 움켜잡더니 턱을 돌려 억지로 시선을 맞췄다.

그가 원하는 대답이 뭔지 희미한 정신 속에서도 알 수 있었다. 본능적인 감이었다. 다른 사람이 누구를 칭하는지도, 이런 물음을 받았다는 것조차 나중에는 기억하지 못할 테지만, 단여명은 반사적으로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으, 처, 처음, 흐…….”

“…….”

“처음인…….”

거듭 비껴가던 눈동자가 허공에서 맞춘 듯 들어맞았다. 권호영이 허릿짓을 늦추니 점차 눈동자가 정상적인 초점을 잡았다. 단여명은 멍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저런 얼굴은 또 처음 보네…. 그런 생각을 어렴풋이나마 했을까. 권호영이 입술을 포개 상념을 끊어냈다.

“으, 응…….”

언제 멋대로 굴었냐는 듯 추삽질도, 키스도 부드럽게 변했다. 권호영은 반응이 미미한 살덩이를 제 혀로 추슬러 주고는, 땀으로 축축이 젖은 머리를 위로 쓸어 넘겨주었다. 자지를 움켜잡았던 나머지 손은 위로 올라가 단여명의 배를 살살 쓸었다.

허리를 박을 때마다 뱃가죽 밑으로 느껴지는 제 물건을 만족스레 지분대는 손놀림이었다. 의도가 다분한 손길인데, 단여명은 어쩐지 그가 달리 느껴졌다. 이 안에 든 걸 전부 쏟아내게 하겠다는, 무시무시한 위협을 받은 것처럼.

“으, 혀, 씹지, 으음…….”

단여명은 후회했다.

‘도망갈걸.’

두 다리가 성할 때, 의사소통이 원활히 이루어졌을 때. 아니면 그에게 오늘 밤은 마음대로 해도 좋다는 말을 꺼내기 전으로.

‘속았어….’

양의 탈을 뒤집어쓴 권호영에게 정말이지 깜빡 속아 넘어갔다고.

“여기 봐요. 응…? 눈 감지 말고.”

그리 후회해 봐야 이미 늦은 일이다.

거물거물한 어둠이 사위를 에워쌌다. 앞으로 나아가는 것 같은데, 주변이 어두워 어디를 지났는지 이정표도 찾을 수도 없었다. 다리는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았고, 한 걸음 내딛는 것조차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제 존재마저 지워질 것 같은, 미지의 어둠 속이었다. 어디로 눈을 돌려도 시커멓기만 한 것이 마치 다른 차원에 뚝 떨어진 것만 같았다. 주변에 물기란 느껴지지 않는데, 몸이 질퍽질퍽 늘어졌다. 반대로 폐부로 끌어들이는 공기는 코가 시리도록 건조했다.

그 가운데를 얼마나 정처 없이 헤맸을까. 일순간 초롱불이 탁 켜진 것처럼 한 부근이 밝아졌다. 그곳에 정신을 집중한 찰나 미약한 의식이 수면으로 떠올랐다.

‘…….’

이 상태는…… 아마 얕은 잠이 든 것 같았다. 육체와 영혼이 분리된 것 같은 감각이 낯설지가 않았다.

내가 뭐 하다가 잠들었지…. 눈을 감기 전 마지막 기억이 블러 처리된 것처럼 흐렸다. 단여명은 불분명한 의식으로 기억을 더듬어가기 시작했다. 원래 자주 눈을 붙이는 곳은 거실의 소파였다. 잘 떠올려 보니 거기서 권호영을 기다렸던 것 같다. 밤늦은 시간까지 돌아오지 않는 것에 의아해하다가 거기서 잠깐 의식을 놓았다.

그런데 어디 누워 있다기엔 자꾸만 몸이 흔들렸다. 소파에 다리가 달린 것도 아니고. 기분 탓이라기엔 골이 울릴 정도로 진동이 강해지기도 했다. 몸도 억센 밧줄에 죄인 듯 갑갑했다. 손끝을 들썩이기도 귀찮아 전신을 늘어트리고 있지만, 점점 무시하기 힘들어졌다.

그에 몸을 살짝 뒤척인 때였다. 뒤에서 불꽃 같은 작열감이 타올라 몽롱한 정신을 끄집어 올렸다.

‘……!’

몸속에 무언가 들어와 있었다. 기분 탓이 아니었다. 가만히 있는 것도 아니고, 뚫린 구멍을 채웠다가 빠지며 깊은 왕복운동을 하고 있었다. 그에 무언가 이상하다고 생각하기도 전이다. 잃어버린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머릿속에 펼쳐졌다.

‘머리 잘랐어?’

오늘 소파 위에서 눈을 뜬 직후 본 얼굴. 시야를 빼곡하게 채운 그 얼굴은 처음 만났을 때의 모습을 떠올릴 수 없을 정도로 멀끔했다. 그 기억은 정신을 잃기 전, 마지막 장면이 아니었다.

“으…….”

알에서 깨어나듯 깊게 잠겨 있던 의식에 빛이 들어왔다. 희미한 정신을 차리자마자 거친 호흡소리가 들렸다. 독한 몸살감기를 앓는 것처럼 색색 터지는 숨소리는 자신의 것이었다.

입 주변이 축축했다. 의식이 없는 중에도 육체는 오감으로 주입되는 쾌락을 몸 구석구석에 녹여냈다. 입을 벌린 채 신음을 내느라 입 밖으로 타액이 흐른 것 같았다.

단여명은 넋이 나간 눈으로 주변을 살폈다. 얼마나 정신을 놓고 있었는지, 시간이 얼마만큼 지났는지 몰랐다. 그러나 자신들이 취한 자세는 의식을 잃기 전과 똑같았다.

등 뒤로 뜨겁게 맥동 치는 몸체가 느껴졌다. 두꺼운 팔목은 무릎 안쪽을 힘껏 당겨 안은 상태였다. 민망할 정도로 벌어진 가랑이 사이로 결합된 비부가 보였다.

허공에 적나라하게 드러난 두 생식기는 여전히 포식 행위에 전념 중이었다. 자신들끼리 쉼 없이 먹고 먹히느라 둘 중 누구를 나무랄 것 없이 체면이 엉망이었다. 구멍을 파헤치는 성기며 그를 꾸역꾸역 집어삼키는 구멍이며 몽글하게 으깨진 정액 덩어리가 덕지덕지 묻어 있었다.

단여명은 그제야 모든 기억을 되찾았다. 권호영의 몸에 올라타 등져 누운 자세였기에 서로의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제가 기절한 줄도 모르고, 계속 뒤를 쑤시고 있던 모양이다.

“으, 흐읏…….”

의식이 돌아오니 혈류에 뒤섞여 몸속을 순환하는 성감도 선명하게 느껴졌다. 배출할 것을 다 배출했음에도 뒤로 주입되는 쾌락은 체내를 끝없이 불살랐다.

당장이라도 찬물을 뒤집어쓰고 싶었다. 열기가 장시간 지속돼 몸속에 수분 한 톨 남지 않은 느낌이었다. 혀가 비쩍 고부라들 정도의 갈증을 느끼는데, 아래에서 치솟는 쾌락이 침샘을 자극해 입가가 흥건히 젖었다.

꾸직, 쯕…! 외설적으로 터지는 물소리가 먹먹하게 들렸다. 깊은 곳과 전립선을 차례대로 올려 찍는 것을 피하고 싶었지만, 손끝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그대로 마른 절정에 꼼짝없이 사로잡히는 건 예견된 일이었다. 눈앞에 오래된 필름이 덧씌워진 것처럼 시야가 잿빛으로 물들었다.

“흐, 응…! 아……!”

단여명은 등허리를 휘며 힘겹게 절정에 올랐다. 활짝 벌어진 다리 사이의 자지는 몸체만 살짝 튕기고 아무런 액도 뱉어내지 못했다.

그만, 너무 힘들어…. 아무리 내가 허락한 거여도, 이건 정도가 지나치잖아……. 하고 싶은 말이 많았다. 어쩌면 처음으로 권호영에게 욕지거리를 뱉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마음이 무색하게도 목구멍 밖으론 지친 숨만 씩씩 새어나갔다.

흡사 영원한 시간 속에 갇힌 것처럼 느껴졌다. 이 짓에 과연 끝이란 게 찾아올지 포기를 넘어서 알 수 없어졌다. 내가 옷이란 것을 입고, 멀쩡히 거리 위를 활보한 적이 있던가. 현실감각마저 까맣게 멀어졌다.

“하아…. 좋아요.”

아래에 있는 남자가 달뜬 중얼거림을 흘렸다. 그리고 제 위에 올라탄 몸을 힘 있게 당겨 결합을 단단히 했다. 좁은 어귀를 닳도록 지난 좆이 오목한 점막을 막힘없이 꿰뚫고, 구부러진 내벽에 귀두를 꽂았다. 울컥, 울컥…. 몇 번째인지 모를 정액이 막힌 벽을 때리며 안에 한가득 고였다.

“너무 좋아요, 형…….”

쪽, 쪽. 오르가슴의 여운으로 잘게 떨리는 어깨에 입맞춤이 쪼아졌다. 얼마간 같은 부위에 입을 맞추며 후희를 내리던 권호영은 단여명의 몸을 미끄러트려 옆으로 돌려 눕혔다. 나란히 옆으로 누운 자세로 잠깐 움직임이 멎었다.

꿀꺽, 꿀꺽…. 뒤에서 마른 목을 축이는 소리가 들렸다. 텅, 터러렁…. 바닥에 던져진 빈 물통이 요란한 소리를 냈다. 단여명은 방 안을 울리는 소리를 가만히 듣기만 했다. 다음 일이 예측이 가면서도 머리가 이상할 정도로 멍했다. 손상된 비디오테이프처럼 생각이 뚝 끊긴 자리엔 짙은 안개가 꼈다.

조용히 눈을 감고 있는데, 곧 고개가 천천히 돌아갔다. 단여명의 턱을 잡아 입술을 벌린 권호영이 입안에 머금은 물을 흘려보냈다. 단여명은 천천히 쏟아지는 물을 목구멍 아래로 넘겼다. 오랜 가뭄 끝에 내린 단비처럼 쩍쩍 말랐던 입안이 촉촉이 젖었다.

물을 다 흘려 넣어 준 권호영은 열린 입술 안으로 그대로 혀를 밀어 넣었다. 긴 시간 동안 된통 깨물리고 문질린 혀는 미약하게 꿈틀거릴 뿐 반응이 없었다.

권호영은 그에 힘을 불어넣어 주듯 단여명의 혀를 부드럽게 휘감았다. 살덩이끼리 진득하게 문질러 미세하게 돋아난 혀의 돌기를 느끼다가 살덩이의 끝을 문 채 입술에 힘을 줬다. 빨대의 내용물이 빨려 올라가듯 권호영의 입안으로 단여명의 혀가 끌려갔다.

권호영은 단여명의 혀를 빨아 먹으며 그의 허벅지 한쪽을 잡아 벌렸다. 가랑이 사이를 벌려내니 힘을 잃은 성기가 드러났다. 그는 맥을 못 추는 성기를 거리낌 없이 손에 잡았다.

“으, 으응…….”

커다란 손아귀에 잡힌 성기가 부드럽게 농락됐다. 몸뚱이를 주물럭거리며 정성껏 심을 세우더니 손끝으로 귀두를 가볍게 간질이는 손놀림을 더했다. 단여명이 허리를 꿈질거리며 반응하자 불현듯 요도 구멍을 손톱으로 찔렀다. 더는 액을 밀어내지 못하는 구멍을 탓하듯 작은 틈새가 깔짝깔짝 긁혔다.

단여명은 혀를 빨리며 흐으으응…, 하고 길게 울었다. 어떻게든 저지하고 싶은데,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뭉뚝한 손톱이 작은 구멍을 들쑤실 때마다 더는 쏟아낼 게 없는 아랫배에서 시큰거리는 감각이 올랐다.

목소리가 커지는 걸 좋다는 뜻으로 해석했는지 권호영이 손짓을 거세게 했다. 요도구에 엄지를 눌러 붙인 채 앞뒤로 움직였다. 손끝으로 작은 틈새를 비벼 주다가 손톱으로 비집어 올리면 구멍이 빠끔거리며 눈물만큼의 소량의 액을 분비했다.

뒤를 채운 성기도 느릿느릿 피스톤질하기 시작했다. 오랜 시간 자극당한 전립선은 땡땡하게 부풀어 오른 뒤였다. 볼록 솟은 점막 위로 여전히 기세를 잃지 않은 성기가 귀두를 갖다 붙였다. 그대로 쿠욱, 전립선이 강하게 짓눌렸다.

“히… 응!”

발등이 곱고, 엉덩이에 힘이 들어갔다. 그는 여유 있게 허릿짓하다가 반응이 약해진다 싶으면 재차 같은 지점을 찌르길 반복했다. 다시 강한 쾌락이 닥칠까, 마음을 졸이고 있으면 예고 없이 깊은 곳을 열어젖혔다.

“으흐, 응……!”

꾸구국…. 권호영이 허릿심을 주는 대로 단여명의 몸이 위로 밀려 올라갔다. 내벽의 끝까지 욕심껏 꿰차놓고, 더 들어가고 싶다는 양 하반신을 뭉그적대는 것이 불안감을 일게 했다. 자세를 바꿔 이보다 삽입을 깊이 하면 그의 물건이 어디까지 들어오는지 알고 있었다.

아…… 그것만은……. 그것만은 안 되는데….

“움, 으음!”

간당간당하게 붙어 있던 정신이 조금이나마 뿌리를 박은 기분이었다. 이제야 어떻게 일이 돌아가는지 어렴풋이 머리에 잡혔다.

아니, 그것만이 아니라, 정말로. 정말로 더는 무리였다. 복상사라는 게 괜히 있는 말이 아니었다. 이 이상 반복하면 몸이나 정신 둘 중 어디 하나가 망가질 것이 분명했다.

마음이 급해졌다. 말을, 말을 어떻게 했더라. 단여명은 고개를 돌려 입천장을 더듬는 살덩이를 피하려고 했다. 하지만 권호영이 턱을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강한 자극이라도 받은 양 단여명의 혀가 아래쪽으로 밀리도록 열정적으로 키스했다.

깊은 곳을 지르누르던 성기가 힘차게 움직이기 시작한 것도 그와 동시였다. 흐물흐물하게 녹은 내벽이 질은 반죽처럼 뭉그러졌다. 신경이 자글자글 밀집된 곳에 우둘투둘한 성기의 핏대가 거칠게 비벼졌다. 흐, 히으…! 가느다랗게 신음하던 단여명은 결국 그의 혀를 깨물어 입맞춤을 피했다. 그리고 단전에서 힘을 쥐어짜 크게 소리쳤다.

“그마, 헉……!”

형편없이 갈라진 목소리가 목구멍을 날카로이 긁었다. 상태가 나쁜 곳은 목뿐만이 아니다. 찢어지기 직전의 걸레짝처럼 몸의 한 군데도 성한 곳이 없었다.

뒷구멍은 통통하게 부어 정액을 담아내지 못하고, 바깥으로 흘려보냈다. 조이는 힘도 성치 못할 텐데, 열을 꺼트릴 줄 모르는 성기는 닳고 닳은 구멍을 끈질기게 파헤쳤다.

잘 떠올려 보면 권호영의 것은 단여명의 팔뚝과 굵기가 엇비슷했다. 길이 또한 직장의 끝을 쉬이 찍을 정도였다. 그럼 제 팔뚝으로 제 구멍을 쑤신 꼴이니…… 거의 몇 시간 내내 피스트퍽을 한 거나 다름이 없었다.

단여명은 까무룩 감기려는 눈꺼풀을 파들파들 떨었다. 생각해 보니 권호영이 이 집에 오기 전에 그런 걸 바란 적이 있다. 좆의 거죽이 부르트도록, 뒷구멍이 헐도록. 하루를 섹스로 시작해서 섹스로 마무리하고 싶다는 바람을 품은 적이 있었다.

“제, 바알……. 더는, 흐… 못, 싸…….”

내가 그때 미쳤었지. 이런 걸 원했다니. 처음 권호영이랑 했을 때 느꼈던 건데, 다시금 각인되듯 깨달았다. 이건 섹스가 아니다. 이런 걸 섹스라고 부른다면 세상 사람들은 일찍이 다 단명하고 말았을 것이다.

같은 사람의 몸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쉽게 지치지도 않고, 정력도 좋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진짜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인두겁을 뒤집어쓴 네발 달린 짐승 같았다. 한 번도 권호영이 무섭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지금은 공포의 대상으로 다가왔다.

“안, 나온, 흐으, 다, 고오……!”

그만하라고 손이라도 내젓고 싶은데, 옛적에 녹다운된 몸은 축 늘어져 잘게 떨릴 뿐이었다. 눈시울은 빨갛게 충혈되고, 눈가도 벌겋게 짓무른 상태였다. 그럼에도 질리지 않고 눈물은 또다시 흘렀다.

“빼, 빼 줘……. 흑, 응…? 흐으, 읍, 제바알…….”

더는, 더는……. 단여명이 힘없이 도리질했다. 원 없이 안에 배출하더니 이제야 말귀가 트인 것일까. 깊은 곳을 두드리던 좆이 천천히 빠져나갔다. 권호영은 허리를 무르는 것과 동시에 단여명을 정면으로 돌려 눕혔다. 몇 번이나 반복된 건지 모를 정상위였다.

커다란 손이 빨갛게 때 탄 무릎을 짚은 때였다. 어두컴컴했던 방 안에 희미한 빛줄기가 내려앉았다. 얼결에 시선을 내리니 탄탄한 허벅지 사이에 고개를 빳빳이 쳐든 것이 시야에 들어왔다. 여태 힘을 잃지 않은 남성기는 해진 구멍과 마찬가지로 포피가 벌겋게 쓸려 있었다.

“해 떴… 미친…….”

침대 아래에 떨어진 빈 물통들과 멀리 내던져진 베개. 침대 구석에 처박힌 이불과 밤꽃 냄새가 진동하는 시트. 주변을 이룬 광경을 보니 절로 욕이 튀어나왔다.

기어이 동이 튼 것이다.

“…그러게요.”

햇빛이 비쳐 아래에 누운 몸이 보다 환하게 드러났다. 권호영은 근방을 둘러보는 대신 단여명의 몸을 차근차근 훑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차근히 훑는 시선이 신중하다 못해 집요하기까지 했다.

하얀 나신은 겨드랑이 사이마저 빼놓지 않고, 붉은 울혈이 새겨져 있었다. 곳곳에 박힌 잇자국 또한 괄호 모양으로 움푹한 골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언뜻 보면 얼룩덜룩한 누더기를 입은 사람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를 담던 낙엽색 눈동자에 이내 음습한 만족감이 서렸다.

“예뻐요, 형.”

입가를 느슨히 푼 권호영도 단여명만큼이나 엉망이 된 꼴이었다. 얌전히 헝클어진 앞머리에 비해 뒷머리는 단여명이 손으로 쥐어뜯어 붕 떠올라 있었다. 두툼한 가슴팍엔 기다란 생채기가 나 있었다. 아마 손톱으로 마구 긁어댔던 등짝은 더한 꼴일 것이다.

단여명은 땀내와 풋내가 진동하는 몸을 초점이 나간 눈으로 보았다. 권호영은 그 시선에 답하듯 그의 몸 위로 상체를 겹쳤다. 커다란 손에 가느다란 발목이 손쉽게 잡혀 올라갔다. 단여명의 무릎을 팔목에 걸친 권호영은 얼굴을 숙여 짓무른 눈가에 입을 맞췄다.

“아…….”

단여명은 반사적으로 눈을 감았다. 분명 짠맛이 지독히 날 텐데. 눈물에 엉긴 속눈썹을 고루고루 핥아 주는 혀 놀림은 정성스럽기만 했다.

야만적인 행동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정말로 이 지독한 행위에 끝이 보여서. 뒷구멍을 지분거리는 손이 그 끝을 알렸다. 섹스가 끝나면 권호영은 뒤에 손을 넣어 안에 싼 정액을 긁어내 주곤 했다.

단여명은 마음 깊이 안도했다. 극에 다다른 피로감에 늦게서야 졸음이 밀려왔다. 지금은 기운이 없어서 무리고, 내일 자고 일어나서 따끔하게 한 마디 해 줘야겠다. 차라리 죽일 거면 말려 죽이지 말고, 뒷목을 쳐서 한 방에 끝내라고. 행복에 견줄 안도감에 취해 우스운 망상까지 펼쳤다. 그리 편안히 눈을 감고 있을 때쯤이었다.

“아, 흐읍-!”

감겼던 눈이 번쩍 뜨였다. 갑자기 눈을 뜨는 바람에 속눈썹을 쓸던 혀가 눈알을 끈적하게 핥았다. 하지만 단여명은 그를 느끼지 못했다. 뒤에 삽입된 손이 배꼽 부근을 뭉근히 찍어 올렸기 때문이었다.

“왜, 왜……!”

기겁하는 목소리를 듣기나 한 건지. 권호영은 밤톨만 한 크기로 부푼 점막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그리곤 ‘부었네…’ 하고 작게 중얼대곤 손가락을 한 개 더 삽입했다. 밤새 몽둥이찜질 당한 구멍은 뻥 뚫리듯이 벌어져 손가락 두 개쯤은 수월히 받아 삼켰다.

“못 싸겠다면서요.”

단여명의 입술에 쪽 입을 맞춘 권호영이 얼굴을 아래로 내렸다.

“깊게 넣는 건 힘들 테니까. 빨아 줄게요.”

그 말을 끝으로 권호영은 시야에서 사라졌다. 극도의 불안감이 스멀스멀 발끝을 타고 올랐다. 단여명은 충격에 굳은 얼굴로 그의 말을 이해하려고 애썼다. 잘 맞물리지 않은 톱니바퀴처럼 머리가 둔중하게 굴러갔다.

빨아 주겠다니…? 아니, 빨아 준다는 말까지는 그렇다 치는데, 왜 뒤에 넣은 손은 안 빼는 거지? …말도 안 돼. 거짓말이지? 여기서, 여기서 어떻게, 더…….

“아, 아니, 아니……!”

가슴 깊숙이 퍼졌던 안도감이 갑작스러운 돌풍을 맞은 것처럼 쓸려나갔다. 단여명은 소스라치게 놀라 머리를 위로 들었다. 방금까지 죽은 듯이 전신을 늘어트리고 있었는데, 어디서 솟아났는지 모를 힘이었다.

고개를 들고 급히 아래를 내려다보자 제 다리 사이를 차지한 남자가 보였다. 간신히 발기 상태를 유지한 성기와 틈을 보이고 열린 입술이 점점 가까워졌다. 그 모습이 슬로 모션처럼 펼쳐져 뻑뻑한 눈이 누가 손으로 잡아당긴 것처럼 커다랗게 뜨였다.

더러운데…! 갖은 액을 쏟아낸 성기는 입안에 담기 부적합했다. 하지만 그를 말려야겠다는 생각은 일시에 그쳤다.

“아, 안, 빨지…! ……!”

뜨겁고도 축축한 입안이 성기를 쭉—, 빨아올렸다.

권호영은 처음부터 고개를 위아래로 흔들며 자지를 강하게 빨아댔다. 아래로는 내벽을 그러잡고 부드럽게 마사지했다. 회음부를 누른 엄지와 내벽의 위쪽에 붙인 두 손가락이 가운데로 모일 때마다 그 사이에 낀 전립선이 잘록하게 압박됐다.

구멍 속에 짓쳐들어온 손가락은 곧 앞뒤로 추삽질하기 시작했다. 제지할 새도 없이 금세 속도가 붙었다. 팔뚝에 힘줄이 솟을 정도로 권호영은 강한 힘을 가해 뒤를 쑤셨다. 세찬 움직임으로 안에 싸놓은 정액이 사방으로 터지는 가운데 단단한 손가락이 벌어진 틈새를 빠르게 출납했다.

갈고리처럼 구부린 손가락은 가려운 곳을 긁어주듯이 무르녹은 점막을 북북 긁었다. 쩍, 퍽, 퍽! 단단한 손등뼈와 엉덩잇살이 부딪치며 나는 소리가 시원스럽게 울렸다. 그와 반대로 느껴지는 감각은 시원함과 거리가 멀었다.

“흐우아, 아! 흐, 으, 으으으-!”

지독한 열기가 온몸 곳곳으로 사납게 뻗쳐 나갔다. 몸속에서 마구잡이로 튀는 감각이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다는 양 살갗 아래를 두들겼다.

“악, 하우, 흐…! 제, 바알! 아, 안, 돼애, 싫어, 싫! 멈춰, 멈춰, 주…!”

방금 전 느린 속도로 그의 좆에 꿰뚫리던 것과 비교 불가했다. 커다란 성기는 뭉툭하고, 닿는 면적이 넓어 대못처럼 박혔다. 그에 비해 손가락은 끝이 날카롭게 빠진 송곳 같았다. 좁은 면적으로 정확히 자지러지는 지점만 찧어대는데, 허릿심 못지않은 힘도 실려 있었다. 단단한 손가락이 강하게 못질할 때마다 동그랗게 솟은 점막이 움푹움푹 꺼졌다.

인간은 자연재해 앞에서 한없이 무력하다고 했나. 감도가 높아질 대로 높아진 몸은 양쪽으로 휘몰아치는 쾌락을 자연재해로 느꼈다.

어디에 거꾸로 매달린 것처럼 피가 머리꼭지로 쏠리는 기분이었다. 몸이 신경질적으로 예민해져 분명 부드러워야 할 혓바닥이 사포처럼 까슬하게 느껴졌다. 사포가 귀두를 삭삭 문지르는 도중에도 뒤를 들쑤시는 손은 멈추지 않았다. 주먹으로 배를 두들겨 맞는 것 같은 폭력적인 쾌감이었다.

숨이 꺼떡꺼떡 넘어갔다. 머리가 속절없이 녹았다. 타죽을 것 같았다. 차라리 그대로 타올라 잿가루가 되어 흩날리고 싶었다. 다시 기절이라도 하면 좋으련만, 폭격처럼 쏟아지는 쾌락은 의식을 함부로 놓지 못하게 강제했다.

“흐, 사, 살려…! 히, 죽을, 죽으, 것, 헉!”

몸을 꿈틀거리며 허리를 꼬는데, 불쑥 튀어나온 손바닥이 자지를 턱 잡았다. 제가 괴로움을 주는지도 모르고, 권호영은 얼른 괴로움을 해소해 주겠다는 것처럼 행동했다. 기둥을 틀어잡은 즉시 자지의 꺼풀을 빠르게 올려 치기 시작했으니.

앞뒤로 터지는 젖은 소리가 더욱 요란해졌다. 전립선을 맹렬하게 들쑤시는 손, 귀두를 우악스레 압박하는 입술, 요도구를 쑤시는 혀, 그리고 성기를 훑는 손놀림까지. 음낭이 텅 비도록 싸지른 게 거짓말처럼 급속도로 요의가 치밀었다.

단여명은 침대가 삐걱거릴 만큼 온몸을 경련했다. 눈을 부릅떴다가 질끈 감고는 흐어엉, 하고 커다랗게 울었다. 더는 버티지 못하고 권호영의 머리채를 쥐어뜯다시피 잡아당긴 순간이었다. 그동안 버텼던 시간을 부정하듯 아랫배에서 거대한 해방감이 휘몰아쳤다.

“아아, 아아아——!”

심장이 저미는 듯한 오르가슴이었다. 1초, 2초…. 절정이 굽이치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생명 줄이 깎여나가는 것만 같았다. 단여명은 얼굴과 목을 시뻘겋게 물들인 채 사력을 다해 비명을 질렀다. 목구멍 안에서 핏기가 느껴지는데도 발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캄캄한 시야 중 눈이 멀도록 시허연 섬광이 빗발쳤다. 그대로 뇌를 쪼개놓을 듯 커다랗고도 날카로운 섬광이었다. 실제로 버틴 시간은 채 2분도 되지 않았지만, 단여명은 영겁 같은 시간을 느꼈다.

자지 끝에서 졸졸 터진 물줄기는 외부로 튀지 않았다. 꿀꺽, 꿀꺽…. 마치 시원한 물을 들이켜는 듯한 소리가 연속적으로 울렸다. 입천장을 때리며 쏟아진 액을 그대로 받아먹는 소리였다.

“아악, 학, 끄으으—! 아!”

바르작대는 다리를 잡아 누른 손등에 푸른 핏줄이 돋쳤다. 툭 튀어나온 울대뼈는 몇 번이나 꿀렁였고, 한껏 수그러진 뒤통수는 남의 가랑이 사이에 처박혀 들리지 않았다. 입술에 문 것을 우물대며 빨아 당길 때마다 입안에 물이 쏘아졌다. 절정 뒤 끊이지 않는 쾌락에 단여명이 버둥질치건 말건 권호영은 욕심껏 마른 목을 축였다.

“…나오는데.”

혀로 요도 구멍을 쑤석여도 더 나오는 게 없자 권호영은 그제야 얼굴을 들었다. 붉은 아랫입술에 맺혀 있던 물방울이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이것도 단맛 난다고 하면 믿어 줄 거예요?”

권호영이 손등으로 입가를 슥 닦았다. 깜빡, 깜빡. 기다란 속눈썹이 느릿하게 날갯짓했다. 언젠가 사슴 같다고 생각한 눈망울은 여전히 맑게 빛나고 있었다. 본인이 벌인 짓에 맞지 않게 퍽 순해 보일 만큼.

단여명은 침대 위에 널브러져 그 모습을 바라보았다. 몸은 잘게 떨리다가도 크게 움찔! 하며 튀어 올랐다. 오므리지 못하는 다리와 크게 헐떡이는 가슴팍, 거의 감긴 눈이 그가 얼마나 기진맥진했는지 보여주는 듯했다.

곧 단여명의 눈꺼풀이 스르르 닫혔다. 경악스러운 마음과 별개로 구를 대로 구른 몸이 휴식을 강제했다. 의지와 상관없이 눈앞이 캄캄해졌다. ‘형?’ 하고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 또한 물에 잠긴 것처럼 먹먹해졌다.

‘아…….’

강아지인 줄 알았는데, 제가 늑대 새끼를 끼고 있었구나. 인간의 살점을 간단히 찢을, 날카로운 송곳니를 보고도 제 새끼는 그럴 리가 없다며 싸고돈 꼴이었다.

생각해 보니 그랬다. 요즘 섹스 중반에 부쩍 참으니까 봐 달라는 말을 많이 했다. 그리고 그 말을 끝으로 걸신들린 것처럼 키스하며 허리가 부서지라 좆을 놀렸다.

단여명은 오늘에서야 진정으로 깨달았다. 진짜 많이… 정말 많이 참고 있었구나. 그동안 권호영은 제게 봉사한 꼴이었다. 아무것도 몰랐던 자신만 속 편히 욕구 해소한 것이었고.

“짐…….”

짐승 새끼야. 그걸 왜 먹어…. 넌 나한테 변태라고 말할 자격도 없다고. 그리고 당분간 내 몸에 털끝 하나 손대지 말라고.

그리 따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단여명은 음절 하나만 겨우 입 밖으로 밀어내고, 기어코 정신을 잃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