넷째 줄
모르는 번호로 메시지가 온 것은 권호영과 술김에 몸을 섞고 난 다음 날이었다.
“…….”
단여명은 편의점 앞에서 담배를 입에 물었다. 안 그래도 심신이 너덜너덜한 상태인데 어떤 놈이 이상한 영상을 보냈다. 동영상 재생 바가 떠 있는 이미지부터 어두컴컴한 게 여간 찝찝해 보이는 게 아니었다.
별생각 없이 메시지를 그대로 삭제하려던 단여명은 순간 손가락을 멈칫했다. 모르는 번호라고 생각했는데 다시 보니 뒷번호가 낯익었다.
판단을 내리기도 전에 손이 먼저 움직였다. 단여명은 메시지 함에 들어가 동영상 재생 버튼을 눌렀다. 영상은 8초 정도로 짧은 분량이었다. 작은 이미지로 봤을 땐 어둡기만 했던 영상이 전체 화면으로 바뀌니 약간 환해졌다.
영상의 배경은 차 안이었다. 보조석에 앉은 남자와 그 남자 위에 올라탄 남자가 보였다. 카메라의 구도로 보아 차내 녹화 기능이 있는 블랙박스 영상 같았다.
자세만 봐도 두 남자가 무얼 하는 중인지 알 수 있었다. 위에 있는 남자의 머리는 잔뜩 숙어져 있었고, 그 남자의 뒤통수를 감싼 손은 그의 머리를 더욱 아래로 끌어내렸다.
그 순간 위에 있는 남자가 얼굴을 측면으로 돌렸다. 그 짧은 영상이 재생되는 중에도 그렇게 아니라고 부정하던 것이었다.
그 남자는 자기 자신이 맞았다.
“이게…….”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곧 쿵쾅거리는 심장 소리가 귓전을 거칠게 두방망이질했다. 핸드폰을 쥔 손에 삽시간에 땀이 끈적하게 고이더니 몸의 중심이 무너질 듯 흔들렸다.
영상은 위에 있는 남자가 고개를 돌리는 것으로 끝났다. 다시 동영상을 재생해 확인해 보고 싶었으나, 손이 움직이지 않았다. 입에 물고 있던 담배를 바닥에 떨어트린 줄도 모른 채 단여명은 핸드폰 화면을 노려보았다.
‘…김선오.’
모른 척하고 싶어도 모를 척할 수가 없었다. 위에 있는 남자는 자신이었고, 그 아래에 있는 남자는 김선오였다. 그가 자신의 집에 대뜸 찾아온 날. 아마 그날 찍힌 영상 같았다.
단여명은 아연한 기분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이제야 일이 어떻게 돌아간 것인지 완벽하게 이해가 갔다. 권호영과 김선오가 주먹다짐을 했던 이유와 권호영이 제게 그와 왜 싸웠는지 말하지 않았던 이유를.
권호영은 김선오에게 핸드폰을 집어 던졌다고 말했다. 그땐 왜 뜬금없이 핸드폰 얘기가 나오나, 의아해하고 말았는데.
김선오가 이 영상을 권호영에게 보여줬다면. 그래서 권호영이 만약 이 영상을 봤다면 그에게 분개했을 것이다. 김선오가 이 영상을 보여주며 어떤 말을 씨불였는지까지는 모르나, 적당한 친분 정도만 있어도 화낼 법한 일이었다. 그 착한 애가 몸싸움까지 벌인 게 어련히 이해되고도 남았다.
그리고 권호영의 입장에선 제가 그 사실을 알아 봤자 좋을 게 없으니 숨겼을 것이다. 술집에서 만났을 때 왜 그리 기분이 안 좋아 보이나 했더니. 이제야 모든 일이 퍼즐 조각처럼 끼워 맞춰졌다.
‘그래서 키스했을 때도 크게 당황하지 않았구나.’
만약 이 영상을 보았다면 자신이 남자와 교제했던 사실을 알았을 테니까. 권호영은 분명 제가 입을 맞췄던 당시에 당황했다. 그렇지만 상대가 같은 성별인 것보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비중을 둔 당황으로 보였다.
아침에 멍이 든 얼굴은 연신 제 눈치를 살폈다. 얼룩덜룩한 멍 자국은 조각 같은 외모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그렇지만 그 모습을 보며 신경이 안 쓰이진 않았다. 살짝만 건드려도 아픔을 느낄, 검푸른 색이었으니까.
그런데 사정을 전부 알게 되니 신경이 쓰이는 걸 넘어서 마음이 쓰렸다.
‘권호영은 일단 제쳐두고….’
단여명은 정신없이 휘몰아치는 생각의 물결을 다잡았다. 권호영은 이 문제에 있어서 제삼자였다. 더 이상 김선오와 자신의 일에 그를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 영상 말고.’
입술만 비비적거리는 것 말고, 다른 영상도 김선오의 수중에 있다면? 상상만으로 벌써 눈앞이 아찔해지는 기분이었다. 그 짧은 새에 김선오와 난잡한 짓거리란 짓거리는 다 했다.
영상은 화질이 좋지 않았다. 김선오는 제 몸에 가려져 얼굴이 보이지 않았다. 자신의 얼굴 또한 자세히 들여다보는 게 아닌 이상 가까운 지인이라도 몰라볼 듯했다. 그렇지만 ‘만약’이라는 전제가 자꾸만 마음을 뒤흔들었다.
만약 자신의 얼굴이 드러난 섹스 테이프가 온 세상에 퍼진다면…….
“…씨발.”
요새 급격히 줄었던 욕지거리가 무심결에 튀어 나갔다. 불안한 생각들로 뒤엉켜 머릿속이 엉망으로 뭉그러지는 것만 같았다. 단여명은 고개를 수그렸다. 길바닥에 떨어진 담배가 시야에 불분명하게 잡혔다.
…침착하게 생각해야 했다. 제가 아무리 혼자 날뛰어 봤자 닥친 현실은 변하지 않는다.
조용히 심호흡을 고르길 몇 번, 단여명은 꼿꼿하게 펴고 있던 무릎을 굽혔다. 바닥에 떨어진 담배를 주워 그걸 입술 사이에 물었다. 라이터를 찰칵이는 소리에 맞춰 담배 필터가 타들어 가는 소리가 났다.
‘소송?’
아니, 안 될 일이다. 일을 크게 벌여선 안 됐다. 법정 공방까지 가면 일이 해결되기까지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른다.
지금은 놀고먹는 백수지만, 단여명은 자신의 직업을 제법 애틋하게 생각했다. 창작을 업으로 삼은 대부분의 사람이 그러하듯이 무언의 자긍심도 있었다.
어쨌든 소설가라는 직업은 다른 작품을 내야지 더 많은 돈이 들어온다. 사치에 관심이 없는 성격이어서 모아놓은 자금은 넉넉했다. 비용 때문에 소송이 꺼려지진 않았다. 그것보다 타의로 인해 긴 휴식기를 가지고 싶지 않았다. 얼마가 될지 모르는 기간 동안 정신 소모하기도 싫었고.
그리고 또 다른 문제도 있었다. 단여명은 비록 매스컴에 얼굴을 드러내진 않았지만, 유명인이라면 나름 유명인이었다.
세상에 제법 잘 알려진 글쟁이였으나, 사람들은 생각보다 소설가에게 관심이 없었다. 대부분은 작품에 한에서 잘 보았노라고 평을 남겼다. 물론 작가에게 호기심을 갖는 이들도 존재했다. 하지만 작가 본인이 거듭 바깥세상에 얼굴을 드러내는 것을 꺼리니 관심을 갖는다 한들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무엇도 없었다.
단여명은 지금껏 여러 사람을 만났고, 항상 신상이 노출되는 걸 조심해왔다. 섹스 파트너를 만들어도 그들에게 이름을 말하지 않거나 달리 말했고 직업을 속였다.
하지만 그들 중에서도 예외는 있었다. 제법 결속력이 있는 관계에서는 신뢰라는 감정이 형성됐다. 애인이나 가족, 가까운 친구들은 단여명이 무슨 일을 하는지 알았다. 그 사람 중에 전 남자 친구였던 김선오가 포함된 것이 불운이었다.
‘내가 이딴 새끼랑 사귀었다니.’
화가 나서 손이 벌벌 떨렸다. 만일 어떤 방도도 찾지 못해 소송을 건다고 치자. 그렇다고 해도 중간에 이 새끼의 심기가 비틀리면 이 영상이 어떤 곳으로 일파만파 퍼질지 알 수 없다. 거기다가 게이들의 치정 싸움이었다. 만약 소송을 진행한다고 해도 처벌이 제대로 내려질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이딴 새끼 앞에서 자존심을 버리고 빌어야 하는 것인가? 영상을 지워 달라고? 눈치를 보며 다른 영상이 있는지도 물어야 하고?
“하아…….”
단여명은 거칠게 마른세수했다. 필터가 짧게 남은 담배를 길게 빨아들이자 폐부 깊숙이 연기가 차올랐다. 필터가 다 타들어 가 손가락에서 뜨거운 불기운이 느껴졌다. 단여명은 꽁초를 바닥에 버리고 담배를 새로 꺼내 입에 물었다.
…흔들리면 안 된다. 부모님이 이혼했던 날, 엄마가 제 앞에서 눈물을 보였던 어린 시절부터 다짐한 것 아닌가. 마음이 흔들리더라도 절대 드러내선 안 됐다. 견고했던 표면에 금이라도 가는 순간 균열은 소리 없이 시작된다.
단여명은 싸늘하게 가라앉은 눈으로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한참 화면을 노려보며 망설이다가 움직이지 않는 손가락에 힘을 줘 글자를 눌렀다. 메시지 전송 버튼을 누르는 순간에도 시린 겨울바람 같은 눈동자는 하나의 빛깔만 감돌았다.
“왔어?”
뻔뻔한 낯짝은 멍 자국이 생긴 것 말고는, 몇 주 전과 달라진 게 없었다.
“…….”
4층으로 구성된 카페의 맨 꼭대기 층엔 사람이 몇 없었다. 김선오는 그중 제일 구석 자리에 앉아 있었다.
단여명은 어떤 감정도 비치지 않는 눈으로 김선오를 바라보았다. 방금 일을 마치고 돌아온 건지 옷차림이 깔끔했다. 옆자리에 걸쳐놓은 블레이저 재킷 하며 체격에 멋들어지게 맞는 흰 와이셔츠 하며. 알맹이는 어떨지 모르나, 겉보기엔 퍽 잘나가는 직장인 같았다.
“일단 앉아. 앉아서 얘기하자.”
가만히 서 있으니 김선오가 자리를 권했다. 시원하게 트인 이목구비는 전과 같았으나, 매번 장난스러운 웃음을 짓던 얼굴은 어색한 웃음기만 겨우 갖추고 있었다. 아마 그 역시도 좋지 않은 분위기를 읽은 듯했다.
단여명은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앉은 자리에는 얼음이 든 커피가 놓여 있었다.
“내가 알아서 시켜놨는데. 괜찮지?”
“응.”
그리 대답한 것과 달리 단여명은 김선오가 시켜놓은 음료에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시럽을 넣지 않은 아메리카노. 자신이 제일 즐겨 마시던 커피를 그가 알고 있다는 것이 속이 비틀리도록 싫었다.
“오랜만이다, 여명아.”
김선오가 조심스레 눈길을 바로 했다. 단여명은 다른 말 없이 입가를 부드럽게 푸는 것으로 대신 대답했다.
마음 같아선 당장 욕지거리를 뱉고 싶었다. 그렇지만 일단 패를 잡고 있는 쪽은 김선오였고, 그 때문에 그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게 좋을 것 같다는 판단을 내린 뒤였다. 하고 싶은 말이 수없이 많았으나, 단여명은 인내했다. 표정 관리쯤은 일상처럼 해오던 것이었다.
“…이렇게 마주 앉으니까 처음 만났을 때 생각나네.”
김선오의 입언저리에 어렴풋한 웃음이 스쳤다. 시선을 미약하게 내리깐 모습이 먼 기억을 회상하는 낯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무슨 우연인가 싶어. 나도 그렇고 너도 동아리 활동 잘 안 했잖아.”
“…….”
“문창과엔 순 또라이들밖에 없다는 소문이 돌아서 속으로 그런 애일 거라고 엄청 욕하고 있는데, 웬 멀끔한 남자애가 내 앞에 앉는 거야.”
단여명도 그때를 기억했다. 새내기 때 뭣 모르고 들었던 동아리였다. 시골에 사는 주민들을 돕는 봉사 동아리 중 하나였는데, 머리가 복잡할 때 푸른 녹음을 보고 오면 속이 풀릴까 하여 가입했다가 그대로 잊고 살았다.
그러던 중 모임에 참석하라는 문자를 받았고, 같은 동아리를 든 친구 녀석과 우연히 동아리방에 들렀다. 오랜만에 간 동방엔 타이밍이 좋지 않게 동아리 회장이 있었고, 그대로 그에게 붙들려 떠밀리듯 제비뽑기하게 됐다.
현지 조사를 위해 마을 답사를 떠날, 각 조원을 짝지어 주는 제비뽑기였다. 모든 인원이 한자리에서 제비를 뽑은 게 아니라 훗날 메시지로 같은 조원들의 이름을 통보받았다. 단여명은 연락을 확인했지만, 사는 데 바빠 동아리 일을 까맣게 잊고 살았다.
그리고 약속 당일. 회장에게 연락처를 받았다며 연락을 취해온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제가 모르는 새 다들 이러저러한 핑계를 대고 모임에서 빠져나간 뒤였다. 그리하여 원래 다섯 명이었던 답사 모임은 단 두 명이 남았다.
메시지에는 왜 오지 않느냐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정중하지만, 화가 난 것을 적당히 티 내는 딱딱한 말투였다. 이미 지각한 마당에 못 나가겠다는 말을 할 수가 없어 억지로 약속 장소에 나갔었다.
“그날 카페 들렀다가 답사 끝내고 네가 내 차에 지갑 놓고 갔잖아. 그래서 내가 다음 날 전해줬고.”
그때 같은 조원이 된 게 김선오였다.
“…….”
단여명은 그를 가만히 바라보며 기억을 정리했다. 그래, 생각해 보니 그랬었지. 그때 자신은 분명 그의 차 안에 지갑을 흘리고 갔다. 그땐 의도적으로 그랬으나, 지금은 멍청한 실수로 생각될 따름이었다.
“생긴 거랑 다르게 은근 덤벙대는 것 같아서 의외라고 생각했는데….”
“김선오.”
단여명은 그의 말을 강하지 않은 목소리로 저지했다. 옛날얘기는 이쯤 해 줬으면 싶었다. ‘맞아, 그때 그랬지’ 하며 시시덕댈 사이는 아니지 않은가.
“번호 바꾼 것 같던데. 뒷자리는 똑같아서 너인 거 알았어.”
“…….”
“나한테 영상 보낸 거, 너지?”
단여명은 올곧은 눈길을 던졌다. 김선오는 그 말에 시선을 어물쩍 회피했다. 찔리는 구석이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는 듯도 했다. 그는 웃음기를 지운 낯으로 침묵하더니 한참 뒤에 입을 열었다.
“맞아.”
“…그래서 하고 싶은 얘기가 뭐야?”
단여명이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 그를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속이 뒤틀릴 정도였지만, 애써 의연한 표정을 갖추고 시선을 던졌다.
김선오는 그를 지켜보다가 자세를 약간 고쳐 앉았다. 밝은 고동색 눈동자 속에 담긴 전등의 불빛이 물결이 일렁이듯 미세하게 움직였다.
“…사과하고 싶었어.”
어처구니없게도 김선오는 본인이 저지른 잘못을 전부 알고 있다는 얼굴이었다. 정말 용서를 구하는 사람처럼 성대를 긁는 목소리도 조금쯤 가라앉아 있었다.
“나한테 많이 실망했지?”
어쩐지 이상하게 침착하다 싶었는데…. 이건 또 예상 밖의 말이었다. 조곤조곤한 말투부터 낯선 표정까지 제가 어떻게 나올지 간 보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저토록 신중한 눈빛을 보이니 저게 진심으로 하는 말인지 순간 혼동됐다.
“너한테 말 안 했지만 우리가 만나지 않았던 시간에 많은 일이 있었어. 네가 알던 나는 철없는 대학생이었고 지금은…… 알잖아.”
“…….”
“회사 생활 하다 보니까 술버릇이 험해져서 술만 먹으면 개가 돼. 그래서 그날 술 먹고 너희 집 앞에서 안 좋게 몰아붙였어. 내가 감정조절 못 해서 앞뒤 분간 못 하고 실수한 거 맞아. 차분히 말했어야 했던 게 맞는데.”
김선오는 씁쓸하게 웃더니 표정을 흐렸다. 무표정과 같은 얼굴은 언뜻 진정성 있게 입매를 굳혔다.
“그 일은 많이 반성하고 있어. 너랑 같이 사는 친구도…. 다시 만날 수 있다면 그 애한테도 사과하고 싶어.”
같이 사는 친구. 아마 권호영과 다툼을 벌인 일을 말하는 듯했다. 같이 사는 중이니 권호영과 쌈박질한 대상이 본인이란 걸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그때 권호영과 무슨 대화를 나누었는지까지는 말하기 조심스러워하는 것 같았고.
권호영이 말해 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저 자신이 있었던 일을 토대로 대략적인 추측을 세운 것일 뿐. 이쯤 되니 권호영과 술김에 같은 침대에서 뒹군 게 잘된 일로 생각됐다.
시작은 제가 했을지 모르나, 중반부턴 둘이 함께 저질러 공범이 된 격이니까. 남의 얘기를 함부로 떠들고 다닐 애가 아닌 걸 알았다. 그렇지만 냉정하게 생각했을 때 권호영도 일단은 타인이었다.
김선오의 얘기를 들으니 극히 일부지만 그의 입장이 언뜻 이해가 가는 듯도 싶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저지른 실수를 용납할 수 있다는 얘기는 아니었다.
어떻게 술버릇이 나쁘면 남의 사생활을 까발리는 것도 모자라 아웃팅을 시킬까. 조심해 달라고 그렇게나 말했는데. 만약 권호영이 입이 가벼운 녀석이었으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상상도 하기 싫었다.
거기서 더해 영상을 빌미잡아 제게 무언의 협박까지 하고 있다. 아마 권호영에게 그런 영상을 보여준 것은 본인이 의심하던 대상이었기 때문이겠지. 그 영상을 보여줬을 때 권호영의 반응을 살피고, 모종의 판단을 내리고 싶었을 것이다. 본인이 남을 의심한 쓰레기였는지, 아니면 바람피운 상대가 정말 쓰레기만도 못한 새끼였는지.
“…….”
제가 입을 열 차례란 걸 알았으나, 단여명은 침묵을 지켰다. 이미 깨진 신뢰다. 도대체 김선오가 제게 무얼 바라는지 모르겠어 선뜻 입이 열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이 자리를 벗어날 수도 없었다. 그는 세상의 빛을 받는 일 없이 그대로 땅에 묻혀야 할, 제 치부를 쥐고 있었으니까.
“그때는…….”
이 순간만큼은 눈치가 빠른 자신이 싫었다. 이 타이밍에서 어떤 말을 꺼내야 하는지 알고 있어서.
“나도 화나서 신경질적으로 말했어.”
단여명은 짧은 틈에 마른침을 넘겼다. 분명 집 앞에서 싸운 날엔 자신도 필요 이상으로 비꼬아서 말했다. 그런데 지금 상황에서 그에게 사과하려니 쉽사리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건 나도 미안하게 생각해.”
입안의 살을 약하게 깨문 단여명은 결국 사과의 말을 꺼냈다. 김선오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대화를 받아칠 상대가 침묵하니 그대로 무거운 적막이 내려앉았다. 단여명은 눈을 반쯤 내리깔고 그가 말문을 열기만 기다렸다. 대화가 끊긴 틈에도 양쪽 다 음료에 손을 대지 않았다.
“…여명아.”
김선오가 목소리를 낸 것은 잠시 뒤였다. 그는 잠잠한 눈빛으로 시선을 맞췄다.
“지금도 나랑 다시 만날 생각 없어?”
단여명은 김선오의 얼굴을 응시한 채 눈만 깜빡였다. 갑작스러운 얘기에 당황했고, 그만큼 황당했다. 그리고 그다음엔 제가 헛말을 들은 게 아닌지 혼자 의문을 가졌다.
“…….”
“…….”
“…그거 협박이야?”
이 타이밍에서 저런 말을 꺼낸 의도는 단 하나밖에 없으리란 생각이 미쳤다. 더 이상 그에게 실망할 일이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육성으로 듣는 것은 또 달랐던 모양이었다. 예측한 상황 중 하나였으나, 자신도 모르게 엄청난 실망감이 마음속에 휘몰아치는 것을 느꼈다.
아무리 과거에 만났다지만, 그가 이 정도까지 변한 줄 몰랐다. 집 앞에서 싸웠을 당시에도 그랬다. 권호영의 손목을 잡고 그를 등졌던 순간 그가 커밍아웃시킬 정도로 최악은 아니라고 믿었다. 그러나 그는 권호영에게 오해할 여지가 없는 영상을 보여줬다. 이번에도 그는, 그때만큼이나 자신을 실망시켰다.
“협박이라니…….”
김선오는 그 물음에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무얼 빌미 삼아 협박이라고 생각한 건지 알아챈 얼굴이었다.
“그 영상은 너랑 다시 만날 구실 같은 거였어. 그렇게까지 하지 않으면 네가 만나 주지 않을 테니까. 그걸로 너한테 뭘 요구할 생각은 없어. 내가 너한테 못 보일 모습을 많이 보였지만, 그 정도로 틀려먹은 새끼는 아니야. …믿어 줘.”
“…….”
“여명아, 난 그냥…….”
그는 되레 상처를 받은 사람처럼 눈썹을 일그러트렸다.
“우리 사이를 바로잡을 수 있는 기회를 달라는 소리야. 그만큼 네가 나한테 간절하다는 소리기도 하고.”
“…….”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아직 너 많이 좋아해.”
그의 눈동자에서 수많은 감정이 회오리쳤다. 목소리 또한 미약하게 떨렸다. 금방이라도 손을 포갤 것처럼 애절한 눈빛과 무릎을 꿇고 사정할 듯 절절한 목소리.
‘여명아, 제발….’
불현듯 과거의 잔상이 망막에 맺혔다. 저 얼굴을 본 적이 있었다.
‘우리가 왜 헤어져야 하는데.’
자신의 손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던 목소리도.
“…자존심 다 버리고 말할게. 열 번만 나랑 다시 만나 주면 안 될까.”
잠시 넋을 놓고 있던 단여명은 얼결에 정신을 차렸다. 그 말을 듣고 이해를 마친 순간 자신도 모르게 실소를 터뜨릴 뻔했다. 단여명은 입속말로 작게 중얼댔다.
“열 번…….”
무엇이 너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그래도 예전엔 나에게 멋진 형이던 때가 있었는데. 닮고 싶은 면도 있었고, 존경하는 부분도 있었다. …분명 그랬다.
“열 번 다 만나도. 그래도 달라지는 게 없다면?”
단여명은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음을 던졌다.
“너 기분 상하라고 한 소리 아니야. …사람 마음이 그렇게 쉽게 달라지진 않잖아.”
“…….”
“내 말은… 우리가 오해해서 또 싸우게 될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지금 솔직하게 말하고 싶어. 네 말처럼 내가 솔직하지 않아서 벌어진 일이기도 하니까.”
서로 마음을 터놓고 얘기하는 중에도 경계심이 누그러지지 않았다. 남에게 보일 수 없는 영상을 그가 가지고 있다는 사실은 달라지지 않으니까. 단여명은 아닌 척 상대의 눈치를 살폈다. 김선오는 가만히 경청하는 태도였다.
단여명이 아는 김선오는 앞뒷면이 같은 사람이었다. 솔직하며 꾸밈이 없고, 성격이 급하다. 같이 영화를 볼 때도 전개가 느리다 싶으면 답답증을 호소했고, 호기심에 죽는 사람이 있다면 자신이 될 것이라고 우스갯소리로 말하곤 했다.
그는 단여명과 다른 인간이었다. 단여명은 남들의 평판과 원만한 인간관계를 위해 쉽게 관계를 끊어내지 않았다. 차선책을 택해 거리를 뒀고, 나중에 우연히 마주치면 웃으면서 인사할 수 있을 만큼의 관계를 유지했다. 그편이 더 실속이 있었으니까.
솔직함과 무례함은 한 끗 차이라고 생각하는 단여명과 반대로 김선오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마주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었다. 상황이 안 좋게 흐르더라도 볼 장 다 보고 후련하게 등을 돌리는 쪽을 선호했다.
단여명은 김선오의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내심 그를 이해하지 못했다. 솔직한 속내를 듣고 화를 안 낼 것도 아니면서. 왜 사서 감정 낭비하는 건지 몰랐다. 모르는 게 약이라는 말이 괜히 있는 것도 아닐 텐데.
본심을 곧이곧대로 드러내는 것이 나쁘다는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우회적으로 말해 상황을 유연히 넘기는 것도 일종의 스킬이었다.
서로 다툼을 벌이다가 상황이 격해지면 서로에게 날 선 말을 던지기 쉽고, 감정에 지배될 수 있다. 그런 상황일수록 서로의 마음을 드러내는 것에 조심해야 했다. 결국 같은 상황이 반복돼 싸움이 밑바닥까지 치달으면 서로의 얼굴에 먹칠하는 꼴밖에 되지 않았다.
“…저번엔 얘기를 다 못 했지.”
그렇지만 지금은 조금 솔직해져야 할 때인 것 같았다. 분하지만 이쪽이 수그리고 들어가야 하는 입장이기도 했고, 그때 미처 다 하지 못했던 이야기에 마침표를 찍고 싶기도 했다.
“나는 우리가 가볍게 만나는 사이라고 생각했어. 다시 만났던 날 그러기도 했고, 나는 연애했을 때랑 분위기가 다르다고 느꼈거든. 우리가 성격이 안 맞기도 했고, 생각하는 것도 많이 달랐잖아. 그래서 다시 만나는 것까진 생각을 못 했어.”
“…….”
“연애 생각이 들 만큼 같이 보낸 시간이 충분하지 않기도 했고…. 다시 사귀어도 똑같은 문제로 헤어질 것 같았어. 내가 너한테 맞춰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니란 거 알고 있잖아. …그래서 시간을 갖고 싶었어. 서로 마음이 같지 않는 한 우리가 어떻게 끝날지 보였으니까.”
단여명은 차근차근 얘기를 늘어놓았다. 중간중간 그의 얼굴을 살폈지만, 별다른 기색은 눈에 띄지 않았다.
“넌 아직도 이해 못 하는 것 같기는 한데… 알잖아, 내 방식. 난 적어도 우리가 같이 보냈던 시간을 좋은 기억으로 남기고 싶었어. 우리가 예전에 좋게 헤어져서 나중에 다시 만날 수 있었던 것처럼.”
단여명은 조용히 한숨을 삭였다. 줄곧 이런 상황을 피해왔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 직면하지 않기 위해서 시간을 갖는 게 맞다고 판단했었고.
“나도 너랑 그렇게 끝내는 건 아니라고 생각했어. 그동안 연락을 피했던 이유는… 그날 내가 알고 있던 네가 아닌 것 같아서. 그래서 낯설고 좀 무서웠나 봐.”
정확히 예전과 다른 모습에 정이 떨어져서 연락을 끊은 것이었지만, 대략 듣기 좋게 포장하면 그랬다. 김선오는 술을 먹고 과격하게 행동했고, 그를 말리려 한 권호영에게 시비를 걸었다. 그런 사람이랑 어떻게 다시 사이좋게 지낼 수 있을까. 주변에 남겨둘 수 있는 도를 넘었다.
만약 자신이 김선오였으면 차분히 대화했을 것이다. 지금 불리한 입장인 자신이 그의 눈치를 보는 것처럼.
“선오야.”
단여명은 부드럽게 그의 이름을 불렀다. 평상시에 입에 올리지 않았던 이름이었고, 일전엔 그를 도발하려고 불렀던 이름이었다. 김선오는 약간 놀란 듯했지만, 차분히 대답했다.
“응.”
“…….”
“…….”
단여명은 입술을 달싹이기만 할 뿐 본론을 꺼내지 못했다. 미뤄놨던 얘기는 얼추 마무리됐다. 그 이후에 꺼낼 얘기는 영상밖에 남지 않았는데, 그걸 어떻게 지워 달라고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게 됐다. 김선오는 제 얘기를 듣고 납득한 낌새였으나, 영상을 지우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
부정하고 싶지만, 지금 느끼는 감정은 두려움이었다. 그 말을 꺼내면 그의 심기가 비틀릴까 봐 자신은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가 요구하는 바를 들어줄 수 없다는 의사를 비쳤다. 김선오가 원하는 건 자신들의 재결합이었고, 자신은 그럴 수 없다고 답했다.
“무슨 걱정 하는지 알아. 우리 영상 때문이지?”
김선오가 짓고 있는 표정으로 생각을 읽었는지 먼저 운을 떼었다. 그리고 줄곧 손대지 않았던 커피 잔을 들어 올렸다.
“네가 그렇게 말 안 해도 지울 거야. …만약 열 번의 기회 끝에 네가 나랑 다시 만날 생각이 없다고 해도.”
김선오는 그 이후로 다른 말을 꺼내지 않았다. 제 얘기를 이해한 것과 별개로 미련은 버리지 못하겠다는 낌새였다.
…열 번. 코웃음이 나올 정도로 우스운 숫자였다. 그 의미 없는 숫자를 다 채워야지 영상을 지워 주겠다는 건가.
“…….”
속이 참담하게 뭉그러지는 듯해 단여명은 어떤 움직임도 보일 수 없었다. 자신은 계속 불안해하면서 그와 만나야 하는 것이다. 그의 눈치를 보고, 비위를 맞추고, 말실수하지 않으려고 온갖 신경을 곤두세워야겠지.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변함없지만…….’
그 순간 자신을 걱정하던 목소리가 공연히 떠올랐다.
‘그래도 다시 만날 생각이라면, 저랑 같이 가요.’
정작 그리 말하던 얼굴은 그 사람이 만든 멍을 달고 있었다. 입가에 찢긴 상처는 몹시 아파 보였고, 울긋불긋한 부기로 눈가가 부어 있었다.
‘…놀리지 마세요.’
그를 다시 직면할 두려움 따위는 드러내지 않은 채.
단여명은 머릿속에 떠오른 얼굴을 곧바로 지워냈다. 이제야 멍 자국이 옅어진 얼굴이었다. 권호영에게 이 일을 말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남에게 의지해 봤자 결국 혼자 끌어안고 가야 할 일이었다. 세상사가 그랬다. 감기몸살에 걸려 병간호를 받는다고 해도 병은 낫지 않는다. 오히려 바이러스가 옮을 가능성만 커질 뿐.
“…그래, 알겠어.”
단여명은 김선오를 따라 제 앞에 놓인 커피 잔을 쥐었다. 알았다고 대답하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단여명은 그 후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마음속을 어지럽히는 것들이 일상생활에 지장을 줬다. 매일 골몰하던 차기작도, 권호영과 있었던 일도 반강제적으로 머릿속에서 밀려났다.
해답 없는 불안감에 시달리다가 좀 단념할 만하면 다시 오만가지 생각들로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뜬눈으로 지새우는 밤이 많아졌다. 그러다 체력적인 한계에 달해 까무룩 잠드는 날도 있었고, 쪽잠을 자 두통만 해소하는 날도 있었다.
이미 다 끝난 관계다. 억지로 김선오를 만나야 하는 것도, 몇 시간 내내 그의 기분을 맞춰 주며 붙어 있어야 하는 것도 싫었다. 그렇다고 해서 만남을 거부하기엔 제가 그럴 수 있는 입장이 아니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그에게 끌려다니는 것밖에 없는 것 같아 비참했다. 김선오의 기분을 상하게 할까 봐 차마 다른 영상이 있는지에 대해서도 묻지 못했다.
만약 열 번의 횟수를 다 채운다고 치자. 그래도 문제는 있었다. 그 후에 김선오가 말을 바꾸면 그에게 꼼짝없이 붙들리게 되는 꼴이 아닌가.
영상을 지워 준다고. 그 약속을 온전히 신뢰할 수 있을 정도로 자신은 순진하지 않았다. 이번만 넘겨서 될 게 아닌 것 같은데. 그 해결책이 보이지 않아 속이 갑갑했다.
그렇게 김선오를 떠올리면 예전의 모습들이 상기됐다. 분명 과거에 좋아했던 사람이 맞는데, 낯선 사람을 대면하는 느낌이었다.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는데…. 어디서부터 일이 잘못된 건지 몰라 씁쓸한 감정이 밀려왔다.
‘좋아한다고 말한 건 아마 진심이겠지.’
그게 어떤 종류의 사랑인진 모르나, 그가 그걸 사랑이라고 생각한다면 아마 사랑일 것이다. 하지만 비틀린 사랑을 받아줄 만큼 자신은 아량 넘치는 사람이 아니었고, 그를 그만큼 좋아하지도 않았다.
그리고 자신을 좋아한다는 사람이 어떻게 그런 행동을 보이는지 근본적으로 이해할 수 없었다. 협박이 아니라고? 그 영상을 약점 잡아 무언가를 요구할 생각이 없다고? 갑을 관계가 명확하게 보이는 상황에 그는 기회를 달라고 말했다. 그 상황에서 자신을 만나 달라는 얘기는 약자의 입장에서 강요로 들릴 뿐이었다.
수만 가지의 생각을 거듭한 끝에 결론은 내려졌다.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이 상황을 피할 길이 보이지 않았다. 당분간 그가 요구한 바를 들어주는 게 제일 좋은 방안일 것 같았다.
그럼에도 고민은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정말 열 번만 만나주면 지긋지긋한 관계가 끝나지 않을까. 아마 김선오도 자신들이 어떤 결말을 맞을지 알고 있을 것이다. 떠나려는 이의 바짓가랑이를 붙든 사람만 지칠 테지. 그 순간을 직감하면 놓아주지 않고 못 견딜 것이다.
잠도 자지 않고 혼자 고민하는 게 나흘쯤 반복되니 심신이 피폐해졌다. 현실에서 도피하고 싶었다. 잠이 오지 않아 천장만 올려다보기도, 침대 위에서 몸을 뒤척이기도 지쳤다.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훌쩍 여행을 떠나고 싶었다. 지금껏 습관 들인 게 있어 쾌락에 취해 머리를 비우고 싶기도 했다. 직업성 스트레스만 섹스로 푼다고 생각했는데. 지금껏 평탄하게 살아서 착각했나 보다.
“형.”
그렇다고 아무나 골라잡고 찔러볼 마음은 생기지 않았다.
“…어디 나가세요?”
다름이 아니고, 이 녀석 때문에.
“아……. 밖에 볼일이 생겨서.”
단여명은 두루뭉술하게 말해 대답을 피했다. 권호영의 입가엔 딱지가 앉아 있었다. 푸르스름했던 멍 자국도 연노란색으로 변한 게 많이 회복된 모습이었다. 권호영은 그런대로 이해했는지 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기다리지 말고 먼저 저녁 먹고 있어.”
그에게 한 번 웃어 보인 단여명은 그대로 현관문 밖으로 나섰다. 집 밖으로 나오고 나서야 참았던 한숨이 한꺼번에 쏟아졌다.
‘…불편하겠지.’
섹스한 날을 기점으로 권호영은 아닌 척 자신을 은근히 의식했다. 어색해진 기류를 단여명 또한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렇지 않게 다시 거실에 앉아 노닥거리기엔 지난 일이 있었다. 있었던 일을 모른 척 넘기려니 단여명도 시시때때로 입안이 마르곤 했다.
솔직히 근래엔 권호영까지 생각할 여유가 나지 않았다. 온 신경이 김선오에게 집중되다시피 해 권호영을 어떻게 대하면 좋을지에 대한 결정이 늦어지는 중이었다.
권호영은 자신이 첫 경험이라고 말했다. 거기다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그 얘기는 자신과의 섹스가 만족스러웠다는 소리로 들렸다.
단여명도 그날 밤 차고 넘치게 만족했다. 권호영과 뜻이 맞는다면 다시 합을 맞추고 싶었다. 아랫도리 사이즈는 말하나 마나 합격이었고, 그는 입도 무거워 보였다. 몸도 탄탄하고, 힘도 세고, 정력도 좋은 게 꽤나 마음에 들었다.
연관된 사람들이 있지만… 거사를 치른 두 사람이 입단속만 잘한다면 들킬 걱정은 없다. 한 번이든, 여러 번이든 어쨌든 했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아주 뻔뻔하게도 초반과는 많이 달라진 생각이었다.
그렇다고 그를 당장 침대 위에 자빠트리고 싶다는 얘기는 아니었다. 섹스하고 싶은 마음이 들긴 했지만, 닥친 상황이 있어 격렬한 욕구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그저 현실에서 도망치고 싶은 회피성에 불과했지.
그리고 어째선지 권호영은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다. 일회성으로 소비해도 될 사람이 아니기도 했고.
애가 하도 순해 빠져서 그런가. 생긴 거랑 어울리지 않게 자꾸 이쪽 눈치를 살피니 자신도 굽히고 들어가게 된다. 이런 쪽의 인간을 접해 본 경험이 없어 자신 또한 그를 대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 것 같다.
권호영과 다시 섹스하는 것까진 좋았다. 그렇지만 그 전에 적어도 그의 의사를 확인하고, 정식적인 절차를 거치는 게 올바른 방향일 것 같았다. 이를테면… 데이트라든가.
‘연애는…….’
무심코 든 생각에 단여명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너무 갔지.’
겨우 하룻밤 보냈다고 연애까지 생각이 닿다니. 연애 상대로 보기엔 권호영은 너무 어리다. 가르쳐 줘야 할 것도 많아 보였고, 감정을 표현하는 것도 서툴렀다.
게다가 그런 지속적인 관계를 약속하면 관계의 골이 더욱 깊어진다. 지금도 엄마의 얼굴을 떠올렸을 때 껄끄럽지 않은 건 아니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에 대해 온전히 생각할 수 있는 여유가 없었다. 현재로선 너무 멀리 간 생각이었다.
일단은 육체적인 욕구를 해소하는 관계까지만 염두에 둬야겠다. 서먹해진 거리를 다시 좁힐 시간도 필요할 것이다. 권호영도 생각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 테고.
단여명은 그쯤 생각을 끊어냈다.
“…….”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리고 있었다.
“데이트하자.”
김선오가 만나서 처음 건넨 말이었다.
그는 저번보다 상태가 괜찮아 보였다. 무겁기만 했던 분위기도 일상적인 대화를 나누니 차차 누그러졌다. 그는 묻지 않았음에도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했다. 그동안 해왔던 프로젝트가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다며 보는 사람이 다 유쾌할 만한 웃음을 보였다.
사실 둘만 남겨졌을 때 스킨십을 조금이라도 시도할 줄 알았는데, 그는 손조차 잡지 않았다. 마치 과거로 돌아가 평범한 데이트를 하는 것만 같았다. 서로를 조심히 알아가던 때처럼 간질간질한 기분은 들지 않았지만, 겉보기엔 그 시절과 다를 게 없었다.
“먹고 싶은 거 있어?”
그 평탄한 기류는 세 번째 만남까지 지속됐다.
“탕은 저번에 먹었고. 면도 먹은 지 얼마 안 돼서 생각나는 메뉴가 없네.”
…기회를 달라는 말이 거짓은 아니었던 모양이지. 단여명은 그의 말에 대강 대답해 주곤 차창 밖으로 시선을 던졌다.
같은 공간에 있는 것조차 불쾌했다. 그렇다고 대놓고 시선을 피하거나 불편한 감정을 드러낼 수 없었다. 그가 말을 걸 때마다 그에 맞는 표정을 보여야 했으며 성의 없는 맞장구라도 쳐야 했다.
그러다 또 웃으며 눈을 맞추는 김선오의 얼굴을 보면 묘한 감회가 들었다. 권호영의 얼굴이 차츰 나아지는 것처럼 김선오도 뺨의 부기가 많이 빠진 모습이었다. 예전이랑 다를 게 없는데. 분명 그런데 순간마다 낯선 사람을 보는 것처럼 위화감이 느껴졌다.
제가 알고 있던 사람의 얼굴로 자신이 남자와 키스하는 영상을 보여주고, 그 영상을 본 사람과 주먹다짐을 벌였다. 그 영상을 자신에게 전송해 만남을 주선했고, 끝난 사이를 억지로 매듭짓고 있었다. 옛날의 모습과 지금의 행동이 물과 기름처럼 조화되지 않아 잠깐씩 혼란스러워졌다.
“……하는 거야. 이제 막 들어온 신입이라도 회사 사람이긴 하니까 함부로 대하지도 못하겠고. 거기서 혼자 정색해 봤자 예민한 사람 취급받을 게 뻔한데.”
…설마 조금 잘해 줬다고 흔들리나? 아니, 그건 아니다. 아마 그를 이렇게까지 싫어하게 된 것이 아직 얼떨떨한 것 같았다. 집 앞에서 다툼을 벌였을 때와 지금 상황은 질적으로 달랐으니까.
늦은 밤, 이불을 덮고 누워 생각에 잠길 무렵이면 증오심에 사로잡혔다. 살면서 어떤 이도 이토록 싫어해 본 적이 없었다. 김선오의 속내가 궁금했고, 그걸 물어보지 못해 쩔쩔매는 자신이 머저리 같았으며 끝끝내는 처한 상황 자체를 부정하게 됐다.
그런데 막상 그를 마주하고 대화를 나누면 기분이 이상해지곤 했다.
“그래서 웃어넘기고 말았어. 나중에 한 번 더 그러면 따로 말하든가 해야지. 애가 눈치가 없어서 알아들을지는 모르겠는데…….”
김선오는 제게 잘해 줬다. 신체적인 접촉도, 협박성의 말도 하지 않았다. 그가 바라는 것은 정말 하나로 보였다. 열 번의 만남, 무너진 신뢰를 회복할 기회.
‘…혹시 협박당하고 있다고 혼자 착각하는 중인가?’
김선오는 정말 그 영상을 지울 생각이고, 혼자 땅굴 파고 있는 거라면? 솔직하게 말하면 들어주지 않을까? 김선오의 말처럼 술버릇이 개 같아져 술김에 실수한 것이고, 그가 진심으로 잘못을 뉘우치고 있다면 지금이라도 영상을 지워 줄지 모른다.
그래, 그렇게까지 나쁜 사람은 아니었는데…. 그래도 옛날엔 지금과 같은 모습이지 않았나. 말해 보지 않고선 모르는 일이다.
‘아니, 그래도 섣불리 말했다가…….’
단여명은 조용히 입술을 감쳐물었다.
차마 저 입에서 그래 줄 수 없다는 말이 나올까 봐. 그렇게 된다면 자신이 약자의 입장으로 못 박히게 된다. 그러면 얼마의 시간 동안 그에게 휘둘릴지 알 수 없어진다.
잠이 부족한 머리가 지끈대며 울렸다. 어쩌면 지금처럼 입을 다물고 있는 편이 나을지도 모른다. 괜히 영상 얘기를 꺼냈다가 그의 기분이 틀어지면 그때부터 어떤 요구를 해올지 알 수 없었다.
만약 키스하는 것보다 수위가 높은 다른 영상을 가지고 있다면, 자신은 그의 말을 거스를 수 없게 된다. 그렇게 되는 것보단 차라리 동등해 보이는 관계를 억지로라도 꾸며낸 지금이 숨 쉴 구멍이라도 열려 있다.
“여명아.”
순간 귓가에 또렷한 목소리가 울렸다.
“…….”
단여명은 약간 엇나가 있던 초점을 제대로 맞췄다. 일본 가정집처럼 꾸며진 음식점은 저녁 식사 하러 온 손님들로 부산했다. 그런데 까만 눈동자는 마치 주변의 것들이 보이지 않는 것처럼 짙게 가라앉아 있었다. 김선오는 의아하다는 듯 응시하다가 곧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어디 아파?”
“…….”
“안색이 안 좋은데. 얘기에 집중도 못 하고.”
단여명은 아차 싶어 억지웃음을 지었다. 솔직히 여기까지 오는 길에 무슨 대화를 나눴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티를 내지 않으려고 했는데 정신이 딴 곳에 팔려 있던 것이 다 드러난 모양이다.
“…새벽에 작업한다고 잠을 좀 설쳤거든. 그래서 그런가 봐.”
때마침 주문을 넣은 음식이 나왔다. 맑은장국과 샐러드가 담긴 그릇 앞에 길쭉한 도자기 접시가 놓였다. 잎새 모양으로 끝이 뾰족하게 빠진 접시 위엔 각가지의 초밥이 정갈하게 담겨 있었다. 노릇노릇하게 튀긴 모둠 튀김과 간장 종지를 내려놓고 간 직원이 곧바로 자리를 비켰다.
김선오의 눈은 그때까지도 맞은편에 박혀 움직이지 않았다. 단여명은 모른 척 눈길을 피하고 젓가락을 손에 쥐었다. 아까까지만 해도 배가 고프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는 음식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 걱정해 주는 마음이 부담스럽고도 불쾌해 시선이 아래로 내려갔다.
“피곤하면 오늘은 그만 집에 가서 쉴래?”
“아…….”
…그래도 되나? 그런 걸 결정하는 건 김선오의 권한이었다. 겉보기엔 동등한 위치처럼 보일지 몰라도 실상은 그가 위였다. 눈치를 보기 싫어도 계속 눈치가 보였다. 말끝을 흐리자 김선오가 금방이라도 자리에서 일어날 것처럼 테이블에 올려뒀던 차 키를 쥐었다.
“가자. 데려다줄게.”
“아니야. 괜찮아, 정말로. 머리가 멍하긴 한데 몸은 멀쩡해.”
손을 내어 만류하니 김선오는 다른 말 없이 무언가 재 보는 눈빛을 보였다. 그리고선 차 키를 내려놓더니 손을 앞으로 뻗었다. 단여명은 뒤로 주춤 물러나려는 고개를 억지로 잡아뒀다.
“열은 없는데…….”
타인의 손바닥이 이마를 짚었다. 단여명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그를 응시했다. 어떻게 봐도 걱정하는 게 분명해 보이는 얼굴을.
“정 안 좋으면 말해. 난 신경 쓰지 말고.”
“…….”
“컨디션 안 좋으면 미리 말하지. 그럼 오늘 말고 다른 날 보자고 했을 텐데. …그런 줄도 모르고 나만 신나 했잖아.”
이마를 덮었던 손이 이윽고 떨어졌다. 김선오는 쓰게 웃고는 테이블에 팔꿈치를 올려 팔짱을 꼈다.
“탓하는 거 아니야. 걱정돼서.”
“…….”
“너 자주 탈 났잖아. 끙끙 앓으면서 매번 괜찮다는 말만 잘하지.”
자신을 잘 알고 있다는 양 말하는 얼굴에 일순간 과거의 잔상이 덮였다. 김선오와 교제하던 당시 감기가 한 달 동안 떨어지지 않았던 적이 있었다. 그때 김선오가 죽을 싸 들고 집에 찾아왔었다.
많이 아픈 게 아니라더니 말만 번지르르하게 한다며 서운한 감정을 비쳤다가 뺨이 홀쭉해졌다고 몸을 감싸 안았다. 딱 앞에 보이는 저런 표정을 짓고.
그 후엔 직접 밥을 먹여 주겠다며 제멋대로 침대에 앉혔었지. 죽을 떠 올린 숟가락으로 비행기를 태우듯 장난치다가 음식물을 이불에 다 흘려버렸다. 그래서 짜증을 내다가 별거 아닌 일로 말다툼하는 자신들이 웃겨 결국 웃음을 터트렸었다.
“내가 그랬나….”
단여명은 기억이 안 나는 척 흐릿하게 웃었다.
또 이런 기분이다. 이렇게까지 치달은 자신들의 관계에 대한 회의감이 좋았던 옛 기억을 난도질하는 기분이었다. 예전과 극명히 반대되는 현재의 감정들이 얽히고설켜 손끝에 피가 돌지 않는 것만 같았다.
“그럼 안 그런 적이 있었어?”
상대의 속도 모르고 김선오는 장난기가 밴 웃음을 보였다. 살짝 접힌 눈 끝은 부드러운 선을 그렸고, 명도가 낮은 눈동자 속엔 선연한 빛이 담겨 있었다.
단여명은 순간 그의 눈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사람이 저런 눈을 보이는 순간을 알았다. 달콤한 꿀을 버무려놓은 것처럼 반짝반짝하고, 생기가 도는 눈빛. 단여명은 그 눈을 보며 직감했다.
“…….”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만은 없겠다고.
***
김선오가 단여명에 대해서 아는 만큼 단여명도 김선오에 관해서 이것저것 알고 있었다. 알고 지냈던 시간과 사귄 시간까지 합하면 거의 1년에 달했다. 누구보다 가까웠던 사이니 서로의 과거사나 부모님이 무슨 일을 하는지까지도 꿰고 있었다.
단여명은 기억력이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타인의 호감을 쉽게 살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기억력에 관련된 것도 있었다. 그 사람에 대한 것을 기억해 놓았다가 나중에 약간 신경을 써 주면 긍정적인 인상을 심어 주기 쉬웠다. 세심한 사람을 부정적으로 받아들일 이는 거의 없으니까.
그러니까 요지는 이랬다. 고소는 보복 가능성이 커 안 되겠고, 약점이 잡혀 끌려다니는 것 역시도 불안했다. 그렇다면 김선오와 동등한 위치에 올라 그에게 대적할 무언가를 손에 넣어야 했다. 김선오보다 더 강력한 무언가를.
그날, 김선오와 헤어지고 난 후 단여명은 그와 보냈던 시간을 차근차근 되짚었다. 잠을 이루지 못하니 생각에 잠길 시간은 충분했다. 그러다 발밑에 툭 치인 돌멩이처럼 불식간에 어느 기억이 되살아났다.
단여명도 얌전하게 살았다고 말 못 하지만, 김선오도 단여명 만큼이나 방탕하게 놀았다. 사귀고 첫날 밤은 여느 연인처럼 평범하게 보냈다. 그러다 점점 엉덩이를 때리는 둥 섹스가 과격해지기에 그에게 성적 지향성을 물어봤었다.
김선오는 그때도 아주 솔직했고, 몇 번 집요하게 캐물으니 사실을 털어놓았다. 본인이 가학적인 행위를 가하며 쾌감을 얻는, 사디스트인 것을.
자신은 끽해 봐야 게이들이 모이는 술집을 드나든 게 경험의 전부였다. 그래서 특이 취향을 가진 게이들의 클럽에 대해 호기심이 있었다. 화내지 않을 테니 그곳에 대해 말해 달라며 살살 구슬리니 김선오는 미적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그의 입을 통해 나온 얘기는 인터넷상에서나 존재할 법한 것들이었다. 공개적인 장소에서 섹스하거나, 심하면 집단 난교까지 벌어진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홀린 듯 듣다가 약속했던 것이 우스워지게끔 점점 기분이 나빠졌다. 김선오는 표정이 안 좋아진 자신의 눈치를 살피다가 결국 다신 안 가겠다며 손가락을 걸고 약속했었다. 지금 생각하면 기가 차는 추억이었다.
그쪽 세계에 발을 담근 적은 없지만, 김선오가 해 준 얘기 말고도 오가며 들은 얘기가 있었다. 영상을 찍는 것에 흥분하는 사람들은 종종 피사체가 되는 걸 즐긴다고. 클럽 내부에서 벌어지는 일을 도촬했다가 가드에게 쫓겨난 사람도 몇 있다고 했다.
김선오가 예전에 다녔던 클럽은 삼성동 어느 호텔 안에 숨겨진 곳이라고 했다. 가게의 이름도 심플해서 기억이 났다. 가능성은 희박하나, 잘하면 과거에 그가 찍힌 사진이나 영상을 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영상…….’
김선오와 똑같이 더러운 수법을 쓰는 게 맞는 선택일까. 불쑥 든 생각이 뾰족한 창날이 되어 심장을 마구 찌르는 것만 같았다. 누가 들어도 도덕적인 선택지로는 들리지 않을 것이다. 피해자의 입장을 벗어나고자 그와 똑같은 방법으로 응수하겠다는 소리인데.
처음 뒤통수를 맞은 건 이쪽이지만, 그것이 아프다고 똑같이 상대의 뒤통수를 가격하면 폭력을 저지른 사람이 둘이 된다. 그렇게 욕한 김선오와 별반 다를 게 없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김선오가 약속했던 것도 있었다. 정말 열 번을 만나면 영상을 지워 줄지 아직 모르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괜히 그의 뒤를 캐고 다니게 되는 꼴이다. 촬영본을 어떻게 구해야 할지 감도 잡지 못한 상태에서. 그쪽 세계에 지식이 전무한 제가 무작정 들쑤시고 다닌다고 무얼 하나 건질 수 있을까. 가 보지 않고서 모를 일이지만, 현재로선 앞일이 막막할 따름이었다.
그렇지만 그 약속에 안주하며 살기엔 불안한 요소들이 너무 많았다. 김선오가 정말 자신을 좋아하는 듯해서. 집 앞에서 싸웠을 때도 지금과 같았다. 그때의 상황을 간추리자면 너와 만날 생각이 없으니 싫다고 밀어낸 것이었다. 놔줄 생각이었으면 그때 놔줄 수 있었을 텐데.
단여명은 그 후로 몸도 뒤척이지 않고 오랜 시간 사색에 빠졌다. 어둠에 익숙해진 눈으로 허공을 더듬으며 잠이 부족해 흐릿한 정신을 느꼈다. 어느 순간은 수명이 다한 로봇처럼 생각을 끊은 채 숨만 골랐다. 끝없는 적막에 삼켜질 때쯤 재차 수많은 잡념이 머릿속을 에워싸 살아 있음을 느끼게 했다.
‘……아침.’
그렇게 정신을 차렸을 땐 동이 터 있었다.
창밖으로 들어온 햇빛을 받으며 단여명은 조용히 숨만 골랐다. 얼마간 기척을 죽이고 있자 밖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권호영이 학교에 갈 준비를 하는 소리였다.
눈이 뻑뻑했다. 머리는 대못이 박힌 것처럼 아팠으며 알코올 도수가 높은 술에 취한 것처럼 정신이 몽롱했다.
금방이라도 눈을 감으면 잠이 들 듯한데,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았다. 단여명은 오랫동안 움직이지 않았던 손을 허공에 들어 올렸다. 아무 생각 없이 손바닥을 올려다보는데, 손끝이 잘게 경련하고 있었다.
“…….”
그 모습을 보자 복잡했던 마음이 일순간 차분하게 가라앉는 듯했다. 들쭉날쭉 튀던 생각을 단번에 손아귀에 가둔 것처럼 머리가 말끔히 개었다.
잠도 못 자고 불안해하며 일상을 피폐하게 보낼 바에는 차라리 뭐든 하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이쪽도 패를 가지고 있어야 심란한 마음이 그나마 진정될 것 같았다. 김선오가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이 싸움은 좋으나 싫으나 장기전이 될 테다.
서로를 과거의 인연으로 깔끔하게 추억할지, 아니면 그와 똑같은 방법으로 응수해 지긋지긋한 관계를 억지로 끊어낼지. 아마 그 순간은 마지막 만남이 될 것이다. 그때가 되면 모든 게 끝이 나겠지.
아니, 그때가 되지 않는대도 상관없었다. 어쨌든 계속 살아가다 보면 언젠가 이 또한 결말을 맺을 테니까.
단여명은 핸드폰을 집었다. 메신저 창을 열어 쌓인 연락을 쭉 훑었다. 스크롤을 아래로 내릴수록 메시지는 과거로 거슬러 올랐다. 한 달 전에 도착한 메시지 중에 적당해 보이는 사람의 이름이 눈에 들어왔다. 단여명은 메시지 창에 들어가 화면에 손가락을 얹었다.
답장은 그로부터 10분이 지나지 않아 도착했다.
***
비록 김선오는 미련하다고 생각하는 눈치지만, 인연을 끊어내지 않고 적당한 위치에 남겨놓으면 여러 면에서 도움이 된다. 듣고 싶은 말을 듣기 위해 남의 비위를 맞추는 건 언제나 피로감을 동반했다. 그렇지만 얻는 게 있어 손해 보는 장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주문하신 카시스 프라페 나왔습니다. 여기에 올려두면 될까요?”
그런 인연 덕분에 이곳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이고.
“네, 거기 놔주세요. 감사합니다.”
가면에 가려 보이지 않겠지만, 단여명은 습관적인 웃음을 지었다. 까만 정장을 차려입은 웨이터가 즐거운 시간 보내시라며 고개를 숙였다. 단여명은 마주 인사해 준 뒤 칵테일 잔에 손을 올렸다.
매일 다른 종류의 술을 마셔도 영 질리는 느낌이었다. 어쩐지 천수진이 말아 주는 것이 더 맛 좋게 느껴지기도 했고. 그래도 정이 있다고 혀가 차별이라도 두는 모양이다.
‘…그래도 저런 건 도무지 적응이 안 되네.’
단여명은 먼 곳을 응시했다. 후카의 연기가 자욱하게 깔린 구석지에 두 남자가 욕망을 표출하느라 성화였다. 서로의 하반신을 비비적거리는 몸짓이 꽤나 격렬했다. 얼마간 그들을 지켜보다가 둘 중 한 사람이 지퍼를 내리려고 하기에 얼른 시선을 거두었다.
김선오가 예전에 다녔다는 클럽은 생각보다 난잡하지 않았다. 며칠간 발 도장을 찍으며 주변을 관찰한 결과 경악하며 도망쳐 나올 정도는 아니었다. 흐르는 음악도 퍽 고상했고, 조용히 대화를 나누는 사람도 눈에 띄었다. 언뜻 보면 평범한 칵테일 바 같았다.
세월이 흘러 분위기가 바뀐 걸까. 머릿속에 ‘집단 난교’라는 행위가 박힌 탓에 나름 무난하게 생각됐다. 이 웃기는 가면과 오글거리는 가명은 도통 적응되지 않았지만.
“처음 보는 얼굴인데. 혼자 오셨나 봐요?”
여느 때처럼 주변만 구경하던 도중 한 남자가 말을 걸어왔다. 어디 특출난 곳 없어 보이는 남자는 본인보다 몸집이 작은 남자를 옆구리에 끼고 있었다. 파트너 사이 같았다.
얼결에 합석해 대화를 나눠 보니 두 사람은 이곳에 드나든 지 5년 정도 됐다고 말했다. 이런 식으로 얘기를 나누게 된 사람이 몇 있어 단여명도 이곳에 대해 몇 가지 알아낸 것이 있었다. 돈을 굴리는 재벌들이 꽤나 있었고, 회원제로 운영되는 만큼 고일 대로 고인 곳이라 이곳을 이용하는 고객들은 서로 안면이 있는 사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제게 말을 건 남자는 이 주점이 처음 개업했던 시기에 웨이터로 일했다고 얘기했다. 그러다 성적 취향을 깨닫고, 일하다가 친해진 사람도 있겠다, 그대로 눌러앉게 되었다고.
김선오가 드나들었던 때는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그때와 노는 문화도 달라졌고, 고객도 대거 빠져나간 듯했다. 남자는 그에 대한 얘기를 할 때마다 눈에 띄게 발끈하는 기색을 보였다. 에둘러 말했지만, 어쨌든 이곳이 아직 죽지 않았다는 소리였다.
“예전엔 다 같이 어울려서 놀기도 했다는데, 생각보다 평범해서 놀랐어요.”
“평범하다니요. 그래도 나름 역사가 깊은 곳인데. SM에 흥미가 생겨서 찾아온 거라고 말했죠? 이런 쪽의 가게를 몇 번 다니다 보면 알겠지만, 입문자들한텐 여기만 한 곳도 없어요.”
“그래요?”
“네. 오는 사람만 오다 보니까 말이 새어나갈 일은 없다고 봐도 되죠. 그리고 다들 얼마나 겁이 없는지…….”
“담력이 세 보이는 사람은 본 기억이 없는데.”
“요즘 일은 아니고, 예전에요. 뭐 때문이었지…. 아무튼 신고를 받고 경찰이 왔었는데, 다들 짠 것처럼 입을 맞춰서 문제없이 넘어갔던 적이 있어요. 옛날엔 돈을 받고 몸을 팔던 선수들도 있었거든요.”
“경찰이라니. 생각만 해도 아찔하네요.”
“지금은 지난 일이라 웃으면서 얘기하지만 그땐 분위기가 엄청 심각했거든요. 그때 단합력 죽였는데. 제가 그래서 그날 모든 테이블에 양주를 돌렸어요. 로얄 샬루트 아시죠? 술에 취하기도 취했고, 친구 놈이 하도 졸라서 쐈던 거였는데 지금 생각해도 돈이 아깝지가 않아요.”
대화가 진행될수록 남자의 눈이 게슴츠레 풀렸다. 말을 붙였을 때부터 술 냄새를 폴폴 풍기더니. 거나하게 취하기 일보 직전 같았다.
단여명은 남자의 모습을 훑으며 얘기를 경청했다. 사람과 말을 주고받다 보면 그 사람의 성향이 어떤지 대략 유추할 수 있다. 자랑하는 걸 좋아하고, 말수도 많다. 그리고 이 가게에 상당히 애착이 있는 듯 보였다. 이곳을 오래 애용했다고 하니 강한 소속감을 가질 만도 했다.
“글쎄요…. 요즘은 또 다른가 봐요. 저 위에 스테이지를 사용하는 사람도 본 적 없고.”
흘리듯 뱉은 말에 남자의 표정이 미묘하게 바뀌었다. 단여명은 그의 표정 변화에 놀란 척 자세를 바르게 고쳐 앉았다.
“아, 혹시 기분이 상하신 건 아니죠? 개인적인 감상이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제가 너무 많은 기대를 갖고 왔나 봐요.”
살살 달래듯 말해 봤지만, 남자는 마치 본인이 욕을 얻어먹은 것처럼 아니꼬워하는 기색이었다.
“아, 으, 허억…!”
그 후로는, 뭐. 예상했던 대로.
‘미움을 산 것 같네.’
남자의 허릿짓 한 번에 아래에 있는 다른 남자의 골반이 갈려 나갈 듯했다. 재밌는 걸 보여주겠다기에 비용을 지불해야 하느냐고 물었던 것이 화근이었다.
그래도 옆에 있던 남자는 돈을 원하는 눈치던데. 나쁜 마음을 가지고 물은 건 아니었다. 제가 보일 수 있는 건 금전적인 부분밖에 없었고, 공개적인 곳에서 쇼를 벌이는 것이니 응당한 대가가 필요하리라 생각했다. 자신도 이런 쪽의 문화는 처음이라 어떤 게 적절한 성의 표시인지는 경험 밖이었다.
“아, 아악! 으, 읍…!”
뭐, 어찌 됐든 상관없었다. 남자를 도발한 것은 시선을 끌기 위함이었으니.
공개적인 장소에서 타인의 성교를 지켜보는 건 생각보다 별 감흥이 들지 않았다. 어쨌든 자극적인 광경이니 아래가 근질거릴 줄 알았는데, 놀랍도록 하반신이 잠잠했다. 살짝 드러나는 남자의 고추가 밤톨만 해 마음이 차게 식기도 했고.
눈에 차지 않는 크기를 계속 보다 보니 자연스레 한 사람이 떠올랐다. 한 번뿐의 기억임에도 뇌리에서 절대 지워지지 않을, 커다랗고 예쁜 남성기가.
‘지금쯤 뭐 하고 있으려나….’
처음엔 내키지 않았는데, 그래도 집 안에 사람이 있으니 좋은 점도 있었다. 오늘은 잠기운에 취해 권호영의 무릎을 베고 잠들었다. 심신이 쇠약해져 그렇게라도 사람의 온기가 필요했던 모양이다. 잠에서 깨고 얼마나 놀랐던지. 자신을 밀쳐내지 못해 그대로 잠든 권호영에게 미안한 마음도 들었다.
특정인을 골라잡아 위로를 요하는 사람을 개인적으로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솔직하게 말하면 좋아하지 않는 걸 넘어서 싫어했다. 나이를 먹다 보면 자연히 터득하게 된다. 누구나 똑같이 힘든 일을 겪고, 외로움을 탄다는 것을.
사람을 우울의 배출구로 사용하는 것은 안정을 되찾기에 참으로 간편한 방법이었다. 그 때문에 그런 사람들이 더욱 이기적으로 보였고, 무슨 일이 생겨도 혼자 버티며 살아왔기에 그런 이들이 곱게 보이지 않았다.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기에 권호영에게 김선오와 있었던 일을 털어놓지 않은 것이기도 했고.
‘계속 보니까 또 묘한 것 같기도 하고….’
딴생각하는 도중에도 눈앞에서 펼쳐지는 살색의 향연은 계속됐다. 아래에 깔린 남자의 몸부림이 언뜻 처절해 보여 순간적으로 눈길이 꽂혔다. 침대보를 꽉 붙든 손이 몇 주 전의 밤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끄으, 헉…!”
나도 딱 저런 꼴로 깔렸겠지, 싶었다. 한번 그런 생각이 드니 자신도 저 남자같이 침대 위를 구르고 싶어졌다. 그러니까 저 새끼손가락만 한 남자 말고, 집에 얌전히 있을 다른 남자와.
오늘 가서 모른 척 덮칠까. 그럼 넘어올 것 같던데. 잠깐 상상한 것만으로도 입술이 타들어 가는 듯해 단여명은 칵테일을 입안에 머금었다.
오늘은 비교적 잠을 괜찮게 자 머리가 개운했다. 김선오와의 일로 심란했던 마음도 조금쯤 가라앉았다. 아직 물증을 찾지는 못했지만, 나름의 해결안을 찾아서인 것 같았다. 가게에 올 때면 매번 새로운 사람들을 상대하느라 혼자 삽질할 여력이 생기지 않기도 했고.
김선오에게서 벗어날 임시방편을 찾았다는 것만으로도 일단은 전보다 안심됐다. 계속 여기저기 들쑤시고 다니다 보면 뭐든 하나 건지리라 생각했다. 전과 같은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으면 돈이 얼마나 깨지든 상관없었다.
그래서 권호영에게 생각의 지분을 내줄 틈이 생겼다. 지난 시간이 있다 보니 막 일을 치렀던 때보다 어색함은 줄었다. 하지만 은근히 서로를 의식하는 건 그날 이후로 변하지 않았다.
‘…아니, 아니지.’
그래도 야한 걸 보고 왔다고 갑자기 달려드는 건 권호영을 이용해 먹는 느낌이라 내키지 않았다. 다른 사람이면 모를까. 대형 사고를 쳤다지만 어쨌든 엄마의 주변인이었다. 거기다 요즘 시험 기간이라고 바빠 보이던데…….
“지루해 보이시네요.”
머릿속의 상념을 가위질 치듯이 누군가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요즘 우리 자주 마주치는 것 같은데.”
묵직한 울림을 가진 음성이었다. 특유의 목소리에 무게 있는 어투까지 더해지니 꽤나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그런가요.”
가까이서 남자를 본 순간 느낌이 왔다. 지인이 귀띔해 줬던 사람이 이 남자라는 것을.
“이런 쪽에 관심은?”
단여명이 이곳에서 보여야 할 이미지는 세상 물정 모르는 도련님이었다. 그래야 접근하기 쉬울 테고, 대화 주제도 손쉽게 떠오를 테니까.
자고로 남자란 동물은 가르치는 행위를 좋아했다. 그들의 만족감을 채워 줘 호감을 살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장단 맞춰 줄 수 있었다.
“어때요? 처음이라면 놀라지 않도록 부드럽게 다뤄 주겠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염두에 뒀던 분위기가 형성됐다. 원래 이런 곳이 다 그런 곳이었다. 잠깐의 욕망을 해소하기 위해 가벼운 만남을 추구하는 이들이 판을 치는 곳.
“좋아요.”
단여명도 이와 같은 만남을 즐겼었다. 밤이 좀 혹독할지 몰라도 예전 같았으면 남자의 제안에 응했을 것이다. 지금은 대가를 치러서라도 손에 넣고 싶어 하는 것이 있었으니까.
“대신 몸은 안 팔아요.”
그런데 어째선지 거부감이 들었다.
“주인님이 집에서 기다리고 계시거든요.”
왜 애인을 두고 바람피우는 사람처럼 입안이 텁텁한지.
‘…아무튼 지금은 상황이 다르니까.’
권호영이 있으니까.
잘 생각해 보면 그는 제가 그렇게 바랐던 남성상이었다. 고추 크고, 정력 좋고, 몸 좋고, 기타 등등.
주인님이라고 말해놓고 실제론 권호영과 아무 사이도 아닌 게 뒤늦게 약간 민망해졌다. 권호영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을 텐데. 따지고 보면 그와 함께 밤을 보낸 것도 단 한 번뿐이었다.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르는데. 혼자 김칫국 마시는 것과 다를 게 없지 않나.
“그렇군요.”
그렇지만… 제가 처음이라고 말했으니까. 자신과 한 걸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했으니까. 그러니 저 역시도…….
“임자 있는 사람은 건드리지 않습니다. 그럼 좀 복잡해져서.”
남자는 어깨를 으쓱이곤 가벼운 웃음을 지었다. 약간 아쉬워하는 것 같았으나, 싫다는 상대를 붙잡고 무리하게 요구할 생각은 없어 보였다.
“이렇게 된 거 얘기나 더 나누죠.”
소파 등받이에 몸을 깊숙이 묻은 남자가 곧 편한 자세를 잡았다.
“술은 잘하는 편?”
“못하지는 않습니다.”
“주량이 어떻게 됩니까?”
“글쎄요. 세어 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는데….”
그 말에 남자가 어이가 없다는 듯 헛웃음을 쳤다. 귀여운 허세를 부린다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아마 그쪽보다 먼저 죽지는 않을 겁니다.”
단여명은 개의치 않고 웃는 낯으로 말했다. 귀엽게 보이려는 수작은 반쯤 맞았지만, 허세에 찬 말은 아니었다. 술고래가 아닌 이상, 다른 이와의 주량 싸움에서 거의 밀려 본 적이 없다.
“재밌네요. 기대해 보겠습니다.”
자신을 ‘빌’이라고 소개한 남자가 칵테일 잔을 살짝 기울였다. 건배를 제안하는 손길이었다. 단여명은 빌의 손을 내려다보다가 그의 잔에 자신의 잔을 가볍게 부딪쳤다.
김선오와 만나는 날을 제외하고, 단여명은 호텔 지하층에 숨겨진 칵테일 바에 매일 얼굴을 비쳤다.
빌이라는 남자는 생각보다 정중했고, 선을 넘는 농담도 던지지 않았다. 한번 안면을 트고 나니 가게 안에서 마주칠 때마다 자연스레 어울리게 됐고, 그 덕에 여러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빌은 그곳에서 유명하다면 유명했다. 그를 적대시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그와 막역하게 지내는 사람도 있었다. 같이 술을 마시다 보면 모르는 사람들이 인사차 곁으로 다가왔다. 그래서 둘만 노는 때가 있는가 하면 다른 사람과 무리를 짓는 경우도 생겼다.
그곳 사람들은 단여명에게 한 번씩 똑같은 질문을 했다. 같이 있는 걸 보고 뭐라 오해했는지 그의 새로운 애인이라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그도 아니면 새로 들인 고양이쯤 되려나.
빌이랑은 연락처를 교환하는 것까지 사이가 진척됐다. 생각 외로 대화가 잘 통하는 면도, 제법 젠틀한 성격인 것도 어울리기 수월했다.
일단은 빌과 개인적인 친분을 쌓는 게 우선이었다. 원하는 걸 얻기 위해선 자신도 그가 요구하는 바를 내놓아야 할 텐데…. 자신은 내밀 수 있는 게 끽해 봐야 통장에 고이 모셔놓은 돈밖에 없었다.
대화를 나눠 보니 금전적으로 궁색한 형편은 아닌 것 같았다. 그렇다고 처음 제안받은 것처럼 그와 자고 싶은 마음은 여전히 없었다. ‘어차피 권호영보다 작을 거…’라는 안일한 생각은 둘째치고, 빌은 김선오와 비등하게 취향이 고상했다. 엉덩이에 팔뚝을 꽂아 넣고 싶진 않았다.
빌은 가게의 관리자와도 친분이 있어 보였다. 내부 촬영이 불가하다고 해도 가게 특성상 보안용 CCTV는 돌아가고 있을 것이다. 영상이 백업되지 않고 있다면 큰 불운이겠지만, 일단 적당히 친구라고 부를 정도의 사이가 되면 슬쩍 말을 흘려 볼 생각이었다. 최악의 방법을 고려하기엔 아직 이른 시기였다.
지금 당장 떠오르는 것은 동정표를 사는 쪽이었다. 사람한테 막 퍼 주는 스타일은 아닌 것 같던데. 그래도 곁을 내준 사람에겐 정에 인색한 편이 아니기만을 바랐다.
“무슨 좋은 일 있었어?”
단여명은 옆자리에 앉은 사람을 돌아보았다. 김선오가 핸들에 손을 얹은 채 이쪽을 쳐다보고 있었다.
“오늘은 기분이 좋아 보이네.”
오늘로써 네 번째 만남. 김선오는 여전히 얌전한 태도를 지켰다. 오가는 대화나 마주치는 눈빛도 특별할 게 없었다. 마치 친한 친구와 만나서 노는 거라고 착각될 만큼.
“그래?”
기분이야 나쁠 것 없었다. 무식하고 무모하기 짝이 없는 방법을 택했음에도 마음은 전보다 한결 가벼웠다. 무력하게 늘어져 벌벌 떠는 것보다 정신없이 사는 지금이 훨씬 속 편했다.
“날씨가 좋아서 그런가.”
“날씨가 좋은 것 치곤 덥게 입었는데.”
김선오가 상체 쪽에 힐긋 눈길을 줬다.
“지금 날씨에 목 폴라는 심하지 않아?”
그 말에 단여명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흰색 밑단을 손으로 잡고 만지작거리니 보드라운 감촉이 느껴졌다.
초여름에 가까운 후덥지근한 날씨에 캐시미어 니트라니. 제가 봐도 아니긴 했다. 그렇지만 이게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런가…….”
누가 살을 씹어놓은 게 다 아물지 않아서.
“밖에 돌아다니면 좀 추울 것 같아서 껴입었어.”
단여명은 예의상 웃고는 창밖으로 눈길을 던졌다. 이 옷 속에 자국을 남겨놓은 남자를 머릿속으로 생각하며.
‘왜, 뭐 하려고 무릎을 꿇어요.’
당황해 한껏 찡그려진 눈썹.
‘…전 형이랑 다시 이럴 줄 몰랐어요.’
의기소침하던 목소리와…….
‘그걸 먹었어요?’
경악하며 제 입을 벌리던 우악스러운 손길.
기억을 더듬을수록 흡족한 마음이 번져갔다. 다양한 모습을 보았던 며칠 전의 밤을 떠올렸을 때 단여명의 입장은 이러했다.
정말이지…… 귀여워서 참을 수 없었다고.
소파에 누워 권호영이 과제 하는 걸 지켜보던 때 괜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아직 공부하는 학생이면서 잘도 자신들의 일에 끼어들었다고. 자신을 대신해 김선오에게 화내 준 것이 고마웠고, 그의 낯판에 멍 자국을 달아놓은 것이 뒤늦게 속 시원해졌다.
그래서 그랬나…. 뭘 해 주려고 해도 자꾸 밀어내기에 충동적으로 자신들 사이에 금기시하던 밤을 언급했다.
뽀뽀해 달라고 말했던 거나, 뺨을 찌르며 장난친 것은 하도 당황해하는 권호영의 반응이 재밌어서였다. 그런 말을 던졌을 때 그의 반응이 어떤지 살필 겸. 탕수육을 소스에 찍어 맛보듯 그가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부분적인 속마음이라도 알아내고 싶었다.
그러니까 변명을 더 해보자면, 그전까진 정말 건드리지 않을 생각이었다, 이 말이었다. 밖에서 아무리 자극적인 걸 보고 오든, 누구와도 하지 않아서 뒤가 근질거리든, 말든. 김선오가 얽힌 미해결된 일도 일이었고, 당분간은 권호영과 하고 싶은, 일편단심의 마음이었던지라 그의 의사를 존중해 주려고 했다. 그런데…….
‘자는 틈에 몰래 뽀뽀하는 건 반칙이지.’
그런 걸 가만 넘기는 건 부처가 아니고서야 힘들었다. 권호영이 A4 용지라도 됐으면 마구마구 구겨버리고 싶을 정도로 깜찍한 행동이었다. 사람이길 다행이지. 하마터면 제 손에 구겨질 뻔하지 않았나.
“왜, 보기 좀 그래?”
덕분에 우울한 감정이 조금쯤 걷혔다. 괜찮아졌다가도 혼자 발 벗고 뛰어다닐 게 간혹 막막해졌다. 끝없는 번뇌에 빠져봤자 땅굴만 파지, 나아지는 건 아무것도 없는데. 최대한 가볍게 생각하자고 스스로를 다독여도 괜찮지 않을 때가 생겼다. 권호영에게 도움 아닌 도움을 받아버린 셈이었다.
“이상한 걸 묻네.”
혼자만 엉큼한 상상을 하는 줄 알았는데, 가만 보면 권호영도 꽤나 애가 탔던 모양이다. 원래 몸에 자국을 남기는 걸 좋아하지 않는데 봐주기도 많이 봐줬다.
시험 끝나는 날이 언제라고 했지…. 일주일은 더 남았던 것 같은데. 요새 바빠서 단둘이 시간을 보낸 지도 한참 됐다.
시험 준비한다고 고생하는 것 같던데. 그날 맛있는 거 먹여야지. 부담스러워할 권호영의 얼굴을 생각하니 벌써 마음 한구석이 뿌듯해졌다. 골려 주고 싶어 안달하는 제 속내를 알면 무슨 말을 하려나.
“너도 네가 귀여운 거 알고 있잖아.”
단여명은 순간 제 귀를 의심했다. 기분이 땅바닥으로 추락하고 나서야 방금까지 자신의 기분이 좋은 축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지랄한다.’
“아닌데…….”
겉과 속이 상이한 대답을 내놓은 단여명은 얼른 눈을 돌렸다. 사랑스럽다는 듯 응시하는 눈동자를 마주하기엔, 욕을 뱉지 않고 참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언제 큰일이 닥쳤냐는 양 일상은 순탄하게 흘렀다.
일주일에 한 번씩 김선오를 만났고, 때마다 데이트 코스가 바뀌었다. 봄옷을 골라 달라는 그의 손에 이끌려 백화점에 갈 때도 있었고, 카페테라스에 앉아 햇빛을 맞으며 커피를 마시기도 했다.
같이 있으면 때때로 우연찮은 침묵이 흘렀다. 처음엔 김선오와 똑같이 입을 다물고 있음에도 혼자 안절부절못해져 눈치를 살폈다. 하지만 다섯 번쯤 만나니 침묵을 의식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김선오는 제가 옆에 있다는 것 말고는 무엇도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런 점이 과거의 모습과 겹쳐 보여 여전히 ‘지랄’이라는 생각은 달라지지 않았다.
김선오와 약속을 잡지 않은 날엔 칵테일 바를 찾았다. 그곳 사람들과 어울리며 얘기를 나누고, 대화 내용을 귀 기울여 들었다. 이야기가 한참 물오른 와중에 자기들끼리 키스하거나 중심부를 더듬는 건 여전히 거부감이 들었지만, 무리가 한정되어 있다 보니 금세 친해질 수 있었다.
단여명은 시기적절한 타이밍을 노려 예전의 모습이 궁금하다는 말을 흘렸다. 그럼 가게 내부를 촬영한 사진이나 영상을 몰래 얻어 보게 될 때가 생겼다. 확실히 지금은 예전에 비하면 수위가 조절된 모습이었다. 살빛이 이리저리 엉긴 틈을 자세히 살펴보았으나, 제가 찾는 사람은 눈에 보이지 않았다.
단여명은 그것을 슬쩍 훑고는 좋은 구경 잘했다며 물 흐르듯 대화 주제를 바꿨다. 특정 인물을 언급하며 그 사람이 나온 영상을 찾고 있다는 말을 꺼내기엔, 아직 이들을 신뢰할 수 없었다. 그건 빌 역시도 마찬가지였고.
“영화 잘못 골랐다.”
그리하여 일상은 여전했다. 권호영과 잠깐의 일탈을 즐기고 왔대도 여전히 김선오에게 붙잡혀 있는 처지였으니.
“저 얼굴을 클로즈업…… 아, 심한데.”
차들이 줄지어 맞춰선 자동차 극장엔 공포 영화가 상영 중이었다. 전면 유리 너머로 보이는 커다란 스크린엔 눈이 까맣게 타들어 간 여자가 정면을 주시하고 있었다. 주파수를 맞춰놓은 라디오에선 손빗으로 머리칼을 빗는 듯한 배경음악이 음산하게 흘러나왔다.
“지나갔어?”
김선오가 양손으로 눈을 가린 채 물었다. 단여명은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테이크아웃 잔에 꽂힌 빨대를 입에 물었다. 정면을 보니 스크린을 꽉 채운 여자가 아직도 정신 사나운 혼잣말을 중얼대고 있었다.
“음… 아니, 아직.”
사람 마음이란 게 참 간사했다. 그가 미친 듯이 싫다가도 변한 게 없어 보이는 모습이 눈에 밟히면 안일한 희망을 품게 된다. 어쩌면 잘 해결되지 않을까, 하는 그른 마음이. 잠깐 새 흐르는 침묵이 불편해지지 않은 것처럼 자신들의 문제 또한 모른 척 넘기고 있는 것뿐인데.
카페에서 만나 지난 일에 관해 얘기한 지도 한 달이 지났다. 그 후로 평범한 시간뿐이니 위기의식이 줄은 건 사실이었다. 인정하기 싫지만 그랬다. 안심하면 안 된다고 매번 스스로를 타이르고 있긴 했다. 심적으론 지금이 편할지 몰라도 훗날엔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으니까.
“지금은?”
“아니, 아직도.”
“지금도?”
얌전히 대답해 주고 있지만, 슬슬 짜증이 났다. 단여명은 미간을 살짝 찌푸리곤 옆을 돌아보았다. 두 손으로 눈을 가린 김선오는 뭐가 보이기라도 하는 양 얼굴을 정면에 둔 채였다.
“…응. 손 떼지 마.”
귀신이 나올 때만 저러면 이해라도 한다. 그런데 분위기가 약간 고조될 때마다 저런 꼴로 계속 질문하니 영화에 집중은커녕, 혼자 생각하는 것조차 제대로 할 수 없다.
단여명은 커피를 쭉 빨아올리곤 무덤덤한 눈으로 스크린을 응시했다. 그래도 예의상 영화 내용이 어땠더라고 나중에 떠들긴 해야 했다. 영화표를 구매한 김선오는 잔뜩 겁먹어 내용을 하나도 기억하지 못할 것 같았으니까. 그래서 딴생각은 이쯤에서 접어두고 정말 영화에 집중하려고 했다.
“…지금은?”
그리 마음먹은 지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김선오가 똑같은 질문을 되풀이하지 않았으면 말이다.
“너 진짜….”
약간 질린다는 눈빛을 보인 단여명은 순간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뱉었다. 이럴 거면 왜 보러오자고 한 건지.
“저게 뭐가 무서워. 만들어진 건데. 다 우리 같은 사람이 분장한 거야.”
“내가 잠깐 까먹고 있었네. 단여명 무서운 거에 눈 하나 깜짝 안 하는 거. 너 생긴 거랑 진짜 따로 노는 거 알아?”
여전히 손으로 눈을 가린 김선오가 당당한 목소리로 쏘아붙였다. 자신은 찔리는 게 없다는 태도였다.
“방금 팔뚝에 닭살 돋았어. 네가 쌀쌀맞게 말해서 주위 온도가 내려간 거야.”
뭐라는 거야, 입만 살아 가지고. 단여명은 아니꼬운 눈초리로 그를 훑었다. 되레 잘났다고 큰소리치는 걸 보니 지금껏 잘 참고 있던 것이 무색하도록 입이 열렸다.
“그럼 가만히 좀 있든가. 네가 옆에서 계속 부스럭대니까 그렇지. 너 때문에 영화 내용 하나도 생각 안 나.”
뾰족하게 대꾸하니 김선오가 입을 꾹 다물었다. 오리 주둥이처럼 입술을 위로 살짝 끌어모은 것이 이제야 잘못을 깨달았다는 얼굴이었다.
단여명은 한숨을 쉬고 고개를 돌렸다. 저깟 게 뭐가 무섭다고. 다 큰 남자가 귀신이 무섭다고 손으로 눈을 가리질 않나, 반성한다는 표정으로 그만 몰아붙이라고 사정하질 않나. 꼴이 우스워서 더 상대하기 싫었다.
“어떻게 옛날보다 더 못 보는…….”
머리를 거치지 않고 흘러나간 말에 단여명은 어물쩍 목소리를 죽였다. 어느새 입가엔 희미한 웃음이 걸쳐져 있었다. 그걸 인식하자마자 얼른 표정을 지워냈다. 길 가다가 진흙탕에 발이 빠진 것처럼 괜찮았던 기분이 차츰 더러워졌다.
‘차라리 시작도 안 하고 친구로 지냈으면 좋았을걸.’
그럼 이런 작은 일에 자괴감을 느끼지 않아도 됐을 텐데. 무심중에 자연스러운 표정을 짓는 것조차 현실 자각도 못하는 멍청이가 된 기분이었다.
“…나중에 비하인드 영상 찾아봐. 아마 그 영상은 분위기 좋을걸? 배우들도 그렇고 스태프도 저 촬영 씬 끝내고 웃으면서 정리했을 거야.”
애써 생각을 돌린 단여명은 조곤조곤하게 말했다. 그걸 듣는 건지, 마는 건지 김선오는 굳은 자세로 눈을 가린 손을 치우지 않았다. 스산한 음악을 듣는 것조차 온몸에 소름이 돋는다는 양 어깨를 살짝 움츠리기까지 했다.
“이럴 거면 딴 거 보지. 왜 사서 고생이야?”
“너 공포 영화 좋아했잖아.”
“…….”
“그래서 좋아할 줄 알았어.”
그리 말하는 목소리는 별다른 기색이 없었다. 저녁 메뉴를 묻던 때처럼 평온하기 그지없는 목소리.
단여명은 할 말을 잃어 입을 닫았다. 예나 지금이나 특별히 무서운 걸 즐기는 편은 아니었다. 그땐 난리란 난리는 다 떠는 네 모습을 보는 걸 좋아했다. 무섭다며 손을 잡거나 목덜미에 얼굴을 파묻는 모습이 꽤 귀여웠으니까.
“…이제 손 떼도 돼.”
급박한 장면이 지나간 스크린 속에는 눈이 시리도록 푸른 겨울 바다가 펼쳐지고 있었다. 카메라는 바다 근처에 홀로 떨어진 집 한 채를 천천히 클로즈업했다. 장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듯한 연출에 단여명은 영화에 집중하려고 앞만 바라보았다. 옆에서 김선오가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을 치우는 기척이 들렸다.
영화는 점차 막바지를 향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생명체를 피하고자 주인공들은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숲속에서 고군분투했다. 거미줄처럼 실핏줄이 돋친 눈은 분주하게 움직였고, 서걱거리며 눈밭을 밟는 소리가 분위기를 더욱 음산하게 만들었다.
김선오는 간간이 손으로 눈을 가리긴 했지만, 기척을 죽이고 움직였다. 옆 사람을 의식한 조심스러운 움직임이 못내 거슬렸으나 단여명은 말없이 스크린만 응시했다.
“끝나가는 것 같지?”
“응.”
“결국 두 사람 다 죽나 보네.”
단여명은 빨대를 물고 있다가 컵홀더에 커피잔을 내려놓았다. 한동안 입에 물고 있던 커피가 바닥을 드러냈다.
“나중에 반전 있다고 들었는데….”
잠시 몸을 뒤척이던 김선오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단여명은 옆을 흘깃 확인하고 물음을 던졌다.
“몇 시야?”
“7시 40분. 영화 끝나려면 30분 정도 남았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영화가 끝나면 8시가 넘어가는 시각이었다.
“남은 시간 보면 저렇게 끝날 것 같진 않은데…. 앞에 나온 수도승이 구해 주기라도 하나?”
단여명은 ‘그러게…’ 하며 대강 맞장구쳐 주곤 시선을 앞에 뒀다. 하얀 눈밭에 벌건 핏방울이 어지러이 흩뿌려졌다. 숨죽인 흐느낌 소리가 라디오를 타고 흘러나왔다.
주인공들의 생사를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장면이었다. 그런데 시간을 확인한 탓일까, 엉뚱한 쪽으로 생각이 틀어져 바로잡히지 않았다.
‘같이 마트 가기로 했는데.’
운동 갔다 와서 지금쯤 씻고 있으려나? 시간이 얼추 맞았으면 좋겠는데. 대충 시간을 계산해봤을 때 권호영이 조금 더 기다려야 할 것 같았다.
기억은 비교적 최근으로 거슬러 올라갔다. 같이 고깃집에 갔던, 그날의 청명한 공기와 카운터 앞에서 서로 계산하겠다며 투덕거리던 자신들의 모습이 머릿속에 펼쳐졌다. 그리고 부드럽게 키스하며 제 옷을 벗기던, 조금 서늘했던 손바닥의 온도까지도.
‘공부했어요, 라니….’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지? 피식 웃음이 새어 나올 뻔해 단여명은 의식적으로 입가를 굳혔다.
부끄러워하며 솔직히 고백하던 목소리는 떨림이 있었다. 긴장한 숨소리를 뱉으며 조용히 속삭이던 얼굴을 상기하니 참아보려고 해도 입꼬리에 자꾸만 경련이 왔다.
첫 경험이라고 말하기 부끄러워 허세를 부리는 이들이 종종 있었다. 자신만 해도 그렇게 솔직히 말하지 못했을 것이다. 초짜라는 티는 있는 대로 내는 줄도 모르고 그냥 제게 맡기라며 어설프게 상황을 모면하려고 했겠지.
애가 어려서 그런가. 알면 알수록 귀여운 맛이 있다. 손잡는 게 무슨 큰 대수라고 눈에 띄게 뻣뻣하게 굴질 않나, 그거에 정신 팔려 계산을 못 했다고 불만스러운 티를 팍팍 내질 않나. 손잡은 거에 넋 놓고 있다가 계산할 순서를 놓친 건 자기면서. 웃기는 녀석이었다.
섹스하자고 그렇게 눈치를 줬는데도 못 알아먹더니. 그래도 막판에는 제법 대범하게 입술을 겹쳤다. 공부했다고 말했으니 권호영도 내심 그날을 기대하고 있던 것이다. 그렇게 세상사에 무관심한 얼굴로. 시험 준비하느라 바쁜 와중에 일부러 짬을 내서 말이다.
이래서 자꾸 찔러 보게 되나. 이리저리 건드릴 때마다 색다른 모습을 보이니까. 오늘은 홧김에 뽀뽀했더니 한 번 더 해 달라며 손목을 잡아 왔다. 그래도 세 번이나 야한 짓을 했다고 제가 먼저 요구할 줄 알게 됐다.
‘아, 씨.’
기억을 되감던 단여명은 불현듯 눈살을 좁혔다. 시선은 여전히 스크린에 둔 채다.
‘왜 그랬지.’
다시 생각해 봐도 오늘 뽀뽀한 건 확실히 오버한 게 맞았다. 너무 의식의 흐름대로, 생각 없이 행동했다. 변명한 꼴만 봐도 그랬다. 입술이 예쁘, 까지 말했다가 뭐가 묻었다고 허둥지둥 주워 담지 않았나. 그러다 진짜 뭐가 묻었나, 하고 입술을 손등으로 쓱 훔치던 권호영이 생각났다.
‘바보 같아.’
애써 내렸던 입꼬리가 다시 슬금슬금 올라갔다. 앞에 그런 액션을 취해놓고, 다시 뽀뽀해 달라는 말을 돌려 말하니 저도 순간적으로 헷갈렸다. 얼결에 다시 입을 맞춰 주니 그는 기분 좋은 고양이처럼 입매를 느슨하게 풀었다.
입술이 부딪치던 감촉과 그가 지었던 표정이 뇌리에 뭉게뭉게 피어났다. 그를 얼마간 생각하던 단여명은 작게 헛기침했다. 아무튼 앞으로 조심해야지. 그런 장난도 좀 줄여야겠다. 권호영은 매번 가만히 있는데, 어쩐지 자신만 안달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호영이라는 애랑 아직도 같이 살아?”
순간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정신이 번뜩 깼다. 머릿속으로 무슨 생각 중이었는지 정확히 간파한 것 같은 질문이었다. 단여명은 웃고 있던 표정을 서늘하게 굳혔다.
“…그건 왜?”
“여명아.”
“…….”
“너 표정이 너무 안 좋다. …내가 지금 말실수한 거야?”
심상찮은 기미를 느꼈는지 김선오 또한 얼굴을 굳혔다. 창 너머의 스크린이 환해지고 어두워질 때마다 그의 얼굴에 빛이 서렸다가 잔잔히 스러졌다.
“걔랑 아무 사이도 아닌 거 알아. 그냥 내가 아는 사람이고, 너랑 친하게 지내는 애니까 근황 물을 겸 물어본 거야.”
김선오가 변명조로 설명했다. 괜한 오해 하지 말라는 것처럼 눈썹은 미미하게 찌푸린 채였다.
단여명은 그를 바라보다가 말없이 시선을 내렸다. 자신과 친한 사람의 근황을 묻는 것까진 좋다. …그런데 네 입에서 걔 이름이 나오면 안 되는 거잖아.
“그때는… 질투가 나서 참을 수가 없었어. 어쨌든 같이 살면 편한 모습을 많이 보여줄 수밖에 없잖아. 너는 우리 집에 와도 잠깐 자고 가버렸으니까.”
“…….”
“널 의심한 건 아니야. 우리 싸우기 전에 자주 만났잖아. 나 만날 시간도 부족했던 거 아는데, 갑자기 연락도 잘 안 되고… 그래서 많이 불안했어. 그때 우리 관계가 불확실했고, 네가 갑자기 변할 이유가 하나밖에 없다고 생각해서…….”
가만히 듣고 있자니 약간 신기해졌다. 자기가 얼마나 치졸한 사람인지 구구절절 설명하는 게 가감 없어서.
“그땐 내가 너무 내 감정만 앞세웠던 것 같아. 우리가 예전에 사귀었으니까 이번에도 당연히 그럴 거라고 생각했어.”
작게 한숨을 내쉰 김선오가 쓴웃음을 지었다. 줄곧 앞을 향해 있던 그의 무릎은 어느새 이쪽으로 돌아가 있었다.
“우리가 성격이 많이 다르긴 하지. 너는 항상 네 속마음 말하는 거 어려워했는데. 나랑 다른 사람이라는 거 알아. 그런데 내가 마음이 조급해서 거기까지 생각을 못 했어. 미안해.”
“…….”
“변명으로 들릴 거 알지만… 계속 말하고 싶었어.”
반쯤 시선을 내렸던 김선오가 다시 눈을 맞췄다. 언뜻 무게감이 실린 그의 얼굴에 다시 화면의 빛이 내려앉았다. 단여명은 김선오의 얼굴을 바라보며 입술을 살짝 열었다가 도로 닫았다. 무어라 대답해야 할 것 같은데, 해 줄 수 있는 말이 없었다.
“네 앞에서 괜찮은 모습만 보여주고 싶은데…. 이렇게 말하면 내가 괜찮지 않은 인간이라는 걸 인정하는 거잖아. 그래서 그동안 말하기 어려웠던 것 같아.”
어설픈 웃음을 지은 김선오가 천천히 어깨를 잡았다. 단여명은 움찔 튀려는 몸을 잡아 눌렀다. 상대가 놀라지 않도록 느릿하게 올라간 손길이었다. 어깨에 닿은 느낌조차 들지 않는데, 반사적으로 몸이 뒤로 빠지려고 했다.
“…너 없는 동안 후회 많이 되더라. 그동안 어떻게 안 보고 살았는지 모를 정도로.”
김선오가 어깨를 살짝 잡아당겼다. 서로의 얼굴이 보이지 않게 되고, 익숙한 향기가 콧속으로 밀려들어 왔다.
“…형이라고 불러 줘.”
상체가 아슬아슬하게 닿지 않게끔 자신을 끌어안은 김선오가 조용히 속삭였다.
“…형.”
“응.”
희미하게 느껴지는 온기가 멀고도 가까웠다. 단여명은 허공을 응시하다가 창문에 비친 스크린을 보았다.
커다란 화면엔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있었다. 한 사람을 희생해 살아남은 단 한 명의 생존자가 그를 끌어안고 울부짖고 있었다.
“이번 한 번만 말할게. 못 들은 척 넘겨.”
귓가를 울리는 목소리가 애달팠다. 손바닥으로 등허리를 감싸 안은 그가 떨리는 숨을 뱉어냈다.
“…좋아해, 여명아.”
조금쯤 이입될 만한 상황인데.
“정말 많이.”
어째서인지 집에 가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이상하네….’
스트레스를 해소할 목적으로 아랫도리 생각이 주로 났는데, 오늘 김선오를 만났을 땐 어쩐지 권호영의 얼굴이 생각났다. 김선오를 상대하기 피곤해서 집에 가고 싶다고 생각한 게 아니었다. 자신은 그때 이 얼굴을 보고 싶어 했다.
“봐요. 알겠다고 그래 놓고 저 몰래 또 저런 거 넣었잖아요.”
권호영의 눈이 이내 한 곳을 가리켰다. 마주 앉아 있는 식탁 위엔 ‘몸 튼튼 오곡 시리얼’이라는 시리얼 박스가 놓여 있었다. 오늘 같이 마트에 가 권호영이 한눈을 파는 틈에 장바구니에 끼워 넣은 것이었다.
“몸이 튼튼해진다잖아.”
단여명은 눈을 내리깐 채 뜨거운 커피를 호로록 들이켰다. 조금 진지해 보이는 권호영을 놀리고 싶은 마음 반. 그리고 성의 있게 대답해 봤자 기각당할 게 뻔해 대충 넘기고 싶은 마음 반. 어쨌거나 신중하게 들리는 답변은 아니었을 것이다.
“무섭게. 왜 그런 표정이야.”
눈길을 올린 단여명은 아무 저항 없이 픽 웃어버렸다. 남자는 머리발이라고 하던데. 아무렇게나 넘긴 머리도 멋들어지게 잘 어울리는 얼굴은 퍽 곱지 않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한껏 찡그려진 눈썹이 마치 ‘농담이죠?’라고 말하는 듯했다.
“자꾸 입맛 없다고 과자 같은 거로 배 채우면 건강 상해요. 형 운동도 안 하는데 커피도 자주 먹잖아요. 카페인 중독되면 나중에 끊기 어렵대요.”
권호영이 성가신 얘기를 길게 늘어놓았다. 단여명은 그 얼굴을 새삼스럽게 바라보며 생각했다.
‘저 얼굴이 왜 보고 싶었을까….’
한집에 살며 친해진 이후 드문드문 생각나긴 했지만, 딱 거기까지였는데. 종종 숙맥 같아서 귀엽다고 생각하긴 했다. 그런데 저렇게 말할 때면 귀염성이란 걸 찾아볼 수 없었다. 가까이 붙어 치근덕댈 때만 색다른 모습을 보이지 그는 대체로 무뚝뚝했다. 저래선 처음 만났을 때보다 말수만 늘은 모습인데.
‘아, 그건가?’
그러다 단여명은 문득 깨달았다.
“그리고 담배도요. 몸 생각해서 조금이라도 줄이려고 노력해 봐요.”
권호영은 무해했다. 바깥에서 직면하는 것들에 비해 그는 정제된 이미지였다. 이제 겨우 스물이었고, 나이가 어린 만큼 세상일에 때 묻지 않았다. 하는 거라곤 공부랑 운동뿐이고, 사람한테 그다지 관심도 없다. 밖에서 접하는 사람들과 달리 나쁜 마음일랑 모르는 듯 굴었다.
집이란 곳이 원체 마음이 편해지는 장소다. 집에 들어온 것만으로도 어깨가 축 늘어지는데, 권호영이 갖고 있는 성질이 집 안의 분위기를 더욱 편안하게 바꿔놓는 듯했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집안일도 알아서 척척 잘해놓고. 어디 다녀온다고 해도 꼬치꼬치 캐묻지도 않고. 집에 돌아오면 순한 강아지처럼 꼬리만 살랑살랑 흔드니.
뭐랄까……. 애가 얌전하기도 하고, 하는 짓도 예뻐서 보고 있으면 힐링된다고 해야 하나? 잔잔한 브이로그를 보거나 ASMR을 들으면 기분이 나른해지곤 한다는데, 잘 생각해 보니 그런 것과 비슷한 것 같기도 했다. 실제로 권호영이 과제 하는 걸 옆에서 구경하다가 까무룩 잠든 적도 있었다.
자신도 모르는 새 무슨 위안이라도 받았나 싶었다. 같이 살다 보니 전보다 허물없어진 것도 있고, 하는 짓도 거슬리지 않아서 같이 있으면 비교적 마음이 놓였다. 어쨌든 온기를 가진 사람과 같이 살다 보니 혼자일 때보다 선한 영향을 많이 받는 듯싶었다.
‘그나저나 요즘 잔소리가 늘은 것 같은데…….’
기분 탓인가? 걱정 어린 소리를 듣는 게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기분보다는 다른 쪽이 탈이었지.
“제 말 듣고 있어요?”
그가 말할 때마다 풋사과 향이 진동하는 느낌이었다. 해가 지고, 비로소 단둘뿐이다. 오랜만에 집에 일찍 돌아왔는데, 잔소리할 생각밖에 들질 않나? 저래 가지고 먼저 덤벼드는 날이 오기는 할지.
“나중에 안 좋은 병이라도 생겨서 고생하면 어쩌려고…….”
잘 말하던 권호영이 플러그를 뽑은 라디오처럼 얘기를 뚝 멈췄다.
“…….”
“…….”
잠시 흔들리던 눈동자가 제 바지춤으로 내려갔다. 단여명은 발끝에 조금 더 힘을 실었다. 안 그래도 묵직했던 것이 조금 힘을 줘 밟았다고 금세 부피를 키웠다.
단여명은 그를 보며 은근한 미소를 지었다. 반응 하나는 참 빠르다고 생각하며.
젖은 살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연속적으로 울려 퍼졌다. 넓게 트인 거실의 황량감을 지울 만큼 커다랗게 울리는 타격음 사이로 급박한 신음이 터졌다.
“아, 헉…! 자, 잠깐, 응, 흐…!”
단여명은 소파의 표면을 손으로 부드득 긁었다. 방금까지 제 걱정을 해 준 사람이라고 믿기 힘들 만큼 권호영은 가차 없이 아래를 놀렸다.
“처, 천천히…! 흐으, 아, 아!”
“가만히 좀….”
이리저리 비틀리던 엉덩이가 커다란 손아귀에 콱 쥐어 잡혔다. 성감이 물오른 몸이 파득 놀라 소파 위에 머리를 처박았다. 무릎으로 바닥을 디딘 채 소파 위에 상체를 뉜 단여명은 힉힉대며 울음소리를 뱉었다.
“아, 흡, 빨라, 으으…….”
“하나도 안 빠른데….”
무른 속살을 끄집어내며 중간까지 빠졌던 좆이 재차 안쪽으로 쑥 박혔다. 세기는 전보다 약해졌으나, 크기와 굵기는 여전히 줄지 않은 채이다. 구멍에 커다란 빨랫방망이를 쑤셔 넣은 것만 같아 단여명은 턱을 아래로 바짝 당겼다.
“허억……!”
“얼마나 더 천천히 해요?”
권호영은 불만스러운 눈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땀으로 촉촉하게 젖은 뒷목은 발긋한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매끈한 목덜미 아래로 미처 벗겨내지 못한 남색 셔츠가 보였다. 무릎께에 걸쳐진 바지는 교접부에서 흘러내린 젤로 흥건하게 젖어 있었다. 허리를 다시 찔러 넣으니 하얀 양말을 신은 발이 질질 끌듯이 바닥을 밀어냈다.
“응, 흐으, 흐…!”
이런 모습을 하고 천천히 해 달라니. 고통에 몸부림치는 반응은 아니었다. 안쪽의 떨림을 보니 사정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은데…. 권호영은 죄 없는 엉덩이만 강하게 주물럭댔다.
“벌써 우는소리 하면 어떡해요. 먼저 꼬셔놓고.”
억울하다는 듯한 목소리엔 탓하는 기색이 담겨 있었다. 단여명은 눈물 젖은 얼굴로 고개만 저었다. 또 쌀 것 같은데 어떡하라고….
단여명이 두 번이나 절정에 달하는 동안 권호영은 혼자 굳건했다. 그의 것이 안에서 약간 움직이기라도 하면 정점을 찍을 듯 말 듯 한 쾌감이 세차게 용솟음쳤다. 흡사 쾌락이라는 전깃줄이 온몸을 숨 쉴 틈도 없이 옥죄는 느낌이었다. 미세하게 흐르는 전류가 살갗을 긴밀히 간질이다가 종국엔 말초신경을 파고들었다. 온몸의 근육이 의지와 상반되게 퍼뜩퍼뜩 경련했다.
“그건, 읏…! 네가…….”
발로 하반신을 건드린 순간 권호영은 빠르게 이성을 내팽개쳤다. 직전까지 얌전했던 녀석이 입술을 부딪치자마자 바지부터 확 끌어 내리는데, 그것에 순간 머리에 훅 열이 올랐다. 위로는 다급히 키스하면서 구멍을 푸는 손길은 퍽 조심스러웠다. 본격적으로 성기를 삽입하니 그도 얼마 가지 않았지만.
“으응… 흐! 아, 나, 또, 읏…! 쌀 것 같아…….”
변명의 시간은 길게 주어지지 않았다. 구멍에 묵직한 울림이 가해질 때마다 민감한 부근이 자극됐다. 앞서 끈질긴 손길을 받고, 두꺼운 좆으로 몇 번이나 문질린 곳이었다. 자극으로 살이 붙은 부근을 뭉뚝한 것으로 사정없이 긁어대니 버틸 재간이 없었다.
가고 싶어 허리가 비틀리면서도 한편으론 이 아슬아슬한 쾌락을 오래 즐기고 싶었다. 갈증에 허덕이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물을 받아마셨을 때의 황홀은 달아진다. 애써 참고 있는 상대를 자극해 봐야 좋을 것이 하나 없는데, 기대감에 구멍이 제멋대로 조여들었다. 그의 것을 양껏 문 채 뒤를 벌름대는 것이 창피했으나, 조절해 보려고 해봐도 잘 되지 않았다.
“형은 가만 보면 항상 그런 식으로 말 끊어요. 손잡고, 뽀뽀하고….”
“으, 흑, 흐으! 으응… 아, 아!”
“발로 그러는 건, 어디서 배웠어요?”
권호영이 허릿짓의 속도를 높였다. 단여명은 사정감을 억누르려고 발끝에 힘만 주었다. 권호영이 뭐라 말하는 것 같은데 그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밖으로 넘쳐흐를 듯한 쾌감이 머리끝까지 차올라 위태롭게 넘실거렸다. 귓구멍에 물이 들어간 것처럼 주변의 소리가 먹먹하게 들렸다.
“너무 익숙해 보이니까…….”
작게 중얼댄 권호영이 갑자기 추삽질을 멈췄다. 구멍을 드나들었던 성기가 밖으로 빠져나더니 돌연 몸이 뒤집혔다. 소파에 머리를 박고 있어 어둡기만 했던 시야에 환한 빛이 들어왔다. 정신을 차렸을 땐 거실의 천장이 눈에 보이고 있었다.
“왜, 왜…….”
방금 좋았는데……. 긴장감 넘치는 쾌락이 끊어져 애가 닳는 만큼 급박한 호흡이 터졌다. 마개를 잃은 구멍이 젖은 속살을 내보이며 빠끔빠끔 개폐했다. 애가 탄 단여명이 권호영에게 손을 뻗었다. 권호영은 그의 어깨를 감싸 안으며 상반신을 맞댔다.
“아침에 해 줬던 거 해 주세요.”
“뭐를……?”
“입술에요.”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 없었다. 권호영이 입술을 가까이하기에 단여명은 그대로 입을 맞췄다. 그래도 얼굴을 치우지 않기에 몇 번 더 같은 자리에 입을 맞춰줬다.
“…부족한데.”
권호영은 눈살을 찡그리더니 턱을 돌려 잡았다. 입술이 겹치기도 전에 혀부터 밀려 들어왔다. 입안을 가득 채우며 유연하게 들어온 살덩이가 제 혀에 척 들러붙더니 미끄덩한 단면을 비비적댔다. 혓바닥에 돋아난 미세한 돌기가 느껴질 만큼 야릇하고, 질척한 키스였다.
“으, 흐음….”
권호영은 고개를 수그려 그에게 키스하는 것과 동시에 단여명의 발목을 어깨에 걸쳤다. 밀가루떡 같은 엉덩이가 위로 들리고 뒷구멍이 허공에 적나라하게 노출됐다. 꾹 다물렸다가 동그랗게 벌어지며 물을 질금질금 뱉어내던 입구에 곧 새빨갛게 익은 귀두가 닿았다. 이물이 닿은 감촉에 반사적으로 분홍빛 주름이 꾹 오그라들었다.
“흐… 응!”
금방이라도 입구를 푹 찌르고 들어올 것처럼 주름을 질컥질컥 비벼대던 귀두는 그대로 위로 미끄러져 단여명의 음낭을 찔렀다. 탱탱하게 올라붙은 가죽 주머니에 제 좆을 욕심껏 치대더니 다시 회음부로 성기를 미끄러트렸다.
“응, 흐…… 으응…!”
흥분으로 단단하게 응축된 것이 몇 번이나 다리 사이를 오갔다. 흐물흐물하게 풀린 주름을 쑤석이다가 회음부의 선을 가르듯이 문지르고 종내 음낭을 푹 들쑤셨다. 커다란 선단이 음낭을 들추어 올릴 때마다 배꼽 안쪽이 따끔거렸다.
“아, 아아…….”
천천히 해 달라고 말했던 것이 무색하게도 흥분이 미친 듯이 끓어올랐다. 어떻게 해소할 방법을 몰라 무작정 권호영의 어깨를 잡아당기니 그가 입술을 추웁, 빨아들였다가 놓아주었다.
“넣고 싶어….”
역시나 잠깐 방심하던 찰나였다. 움찔거리는 주름 사이를 비집고 뜨거운 귀두가 푹 박혀 들었다. 깜짝 놀라 확 오그라드는 점막의 감촉을 느끼던 귀두는 헉 소리를 뱉기도 전에 재차 밖으로 빠져나갔다.
“으, 흐으…!”
귀두가 뽑혀 나가는 것에 맞춰 안에 한가득 쏟아부었던 젤이 밖으로 왈칵 흘러넘쳤다. 두 사람은 소파가 더러워지는 줄도 모른 채 더운 열을 토해냈다.
“아래가, 음…. 터질 것 같아요.”
권호영은 말하는 것과 입술을 빨아올리는 것 중 단 하나도 포기하지 못했다. 단여명의 아랫입술을 입술 사이에 문 채 권호영은 구멍의 초입만 쑤셨다가 뽑아내기를 반복했다. 제 손으로 정성스레 쏟아부어 줬던 윤활제를 밖으로 끄집어내는 줄도 모르고.
“흐읏…! 으으… 으응!”
오밀조밀한 주름이 활짝 펴졌다가 오므라들 새면 다시 두꺼운 귀두가 푹 박혔다. 적정한 깊이까지 치고 빠지던 것이 조금 더 깊게 박힌 순간이었다. 뒤를 조여 단단한 것을 붙들 새도 없이 다시 뽁, 하는 소리와 함께 귀두가 빠져나갔다.
“……아!”
위로 비스듬히 뽑혀 나간 귀두가 입구를 세게 짓쳐 누른 순간 힘껏 오므라든 주름이 투명한 물을 픽픽 쏟아냈다. 물줄기 모양으로 터진 액이 근접해 있던 진분홍빛 귀두를 적셨다. 흠뻑 젖어 있던 것은 그의 물건도 같았던지라 둘 중 아무도 신경 쓰지 않았다.
“이제 괜찮다고, 하아, 말해 줘요…. 네?”
권호영이 거친 숨을 씨근덕대며 속삭였다. 귓가로 흘러들어오는 목소리가 머릿속을 마구 헤집어놓았다. 그의 몸에서 뿜어지는 열기가 얼마나 자신을 원하는지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듯했다. 직접적인 자극은 하등 없었는데도, 오르가슴의 전조 증상처럼 눈앞이 핑 돌았다.
“응, 괜찮아. 해 줘. 넣어 줘….”
입술을 질겅이는 그의 뺨을 감싸며 말하자 구멍 주위를 문지르던 것이 곧장 각도를 맞췄다. 그대로 뒤가 뚫린 건 한순간이었다.
“으, 학……!”
푸욱! 커다랗고 굵직한 것이 구멍 속을 매섭게 파고들었다. 권호영은 뜨거운 숨을 몰아쉬며 인상을 구겼다. 삽입의 쾌감에 순간적으로 단여명의 입술을 잘근 깨물자 입술이 아프게 씹힌 단여명이 턱을 파르르 떨었다. 권호영은 제가 잇자국을 내놓은 입술을 정성스레 빨아올려 주었다.
두꺼운 살덩이를 한 번에 받아낸 구멍이 삽입의 여파로 옴찔옴찔 수축했다. 커다란 부피에 적응하고자 반동하는 것을 재촉이라 여겼는지 그의 것이 내벽을 뭉그러뜨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응, 흐, 흐으…!”
소양감이 들끓던 곳에 뜨거운 것이 앞뒤로 마찰을 가했다. 흥분이 가라앉길 바랐던 게 우습게도 열기가 수십 배로 불어났다. 이게 정말 괜찮아진 건지 판단하기도 전에 권호영이 허릿짓의 속도를 무섭게 높였다.
“천, 천히, 읏…! 한, 다며…!”
“천천히 하려고… 노력은 하는데.”
권호영은 정작 자신이 괴롭다는 표정이었다. 뜨거운 한숨을 참아낸 그는 단여명의 뺨에 입술을 눌렀다.
“아프면 말해요.”
살벌하고도 달콤한 목소리로 권호영이 속삭였다. 단여명이 듣기엔 그랬다. 저 말은 곧 본인의 인내심이 한계에 달했으니 무지막지하게 박아대겠다는 소리였으니까.
“아!”
허벅지를 바깥으로 활짝 벌려내는 것과 동시에 권호영이 퍽! 아래를 처박았다. 고개가 까딱 넘어갔다. 엉덩이뼈가 징징거리는 아픔은 잠깐이었다. 곧 그의 것이 미친 듯이 쑤셔 들어왔다.
“흐, 으, 응, 흑…! 아, 아 아! 아아-!”
잘 참아냈던 눈물이 팍 터져 나온 것도 동시였다. 정점을 찍기 위해 좁은 곳에 열을 퍼부어 대는 행위는 눈물샘을 자극할 만큼 거칠었다.
성감이 올라 구멍이 화끈거려 미칠 지경인데, 그보다 더욱 뜨겁게 달궈진 좆이 내벽과 한 치의 틈 없이 맞물려 농탕질을 부렸다. 뜨거운 것들이 한대 엉켜 비비고 문질러지니 작열감이 극치로 타올랐다.
뭉클한 내벽이 수없이 갈고 닦이는 중에 단단한 귀두가 격차를 두고 전립선을 짓눌렀다. 감질나 미칠 것 같으면서도 좋아 죽겠어 엉덩이가 흔들렸다. 더욱 깊게 닿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어렴풋이나마 한 순간이었다. 삽시간에 몸집을 불린 화마가 단번에 전신을 집어삼켰다.
“흐으! 흐아, 아…!”
아랫배를 때리며 아래위로 흔들리던 자지가 외로이 정액을 싸냈다. 단여명은 권호영의 등을 와락 끌어안았다. 절정의 영향으로 힘껏 다물리는 내벽의 저항을 무르고 커다란 좆이 무식하게 찔러 들어왔다. 황홀한 감각에 도취하는 시간은 얼마 가지 않았다.
“아, 빨리, 흑, 빨리……!”
단여명은 꿈틀거리는 등 근육의 줄기를 손으로 잡아끌었다. 거센 소낙비에 씻겨 내려가듯 순수한 쾌락이 가시고, 폭력적인 성감이 밖으로 나가고 싶다는 듯 몸속을 두들겼다.
몸이 펑 터질 것만 같았다. 방금 오르가슴에 달했고, 나오는 것이라곤 없는데, 정액이 끝도 없이 뿜어져 나오는 느낌이었다. 쾌감인지 고통인지 모를 것들에게 음낭이 엉망으로 주물러졌다. 아랫배에 불씨를 품은 듯 배 속이 못 견디게 뜨거워지더니 절로 손끝이 곱아들었다.
“응, 흐, 빨리, 학, 싸, 호영, 응, 흐으, 아, 아!”
단여명은 비명을 내지르며 엉덩이 사이를 바짝 조였다. 그런다고 삽입이 멈춰질 리는 없겠지만, 적어도 권호영이 사정에 달하는 시간을 줄일 수 있을 거란 안일한 희망에 취했다.
흥분을 과도하게 참아낸 탓일까. 다행히 권호영의 사정은 빨랐다. 입술이 맞물린 순간 배 속 깊숙이 파고든 좆이 크게 꿈틀거리는 느낌을 받았다. 더욱 깊숙한 곳으로 통하는 입구에 대가리를 물린 성기가 꺼떡거리며 질척한 액을 남김없이 토해냈다.
배꼽 아래가 뜨겁게 적셔지는 감각에 더할 나위 없는 충족감이 차올랐다. 더위에 지친 개처럼 혀를 밖으로 살짝 빼어 문 채 단여명은 뜨거운 숨을 헉헉 몰아쉬었다.
먹기 좋게 물오른 살덩이가 과일의 속살처럼 붉었다. 반지르르 윤이 도는 혀끝이 잘게 경련했다. 그 모습을 가까이서 지켜보던 권호영은 홀린 듯 작은 살덩이를 한입에 빨아올렸다. 그의 뺨이 홀쭉하게 패는 것과 함께 막힌 신음이 커다랗게 구강 안을 울렸다.
“후, 으음…!”
사정의 여운을 갈무리하는 중에도 뒤엉킨 혀는 떨어질 줄 몰랐다. 미끈거리는 타액을 윤활제 삼아 한 쌍의 살덩이가 진득하게 엉켰다. 몸을 뒤척일 때면 잠시 입술이 떨어지기도 했지만, 서로를 숨 가삐 탐하는 살덩이는 떨어진 입술 틈에서도 맞붙어 붉은색을 드러냈다.
격정적이었던 키스는 맞닿은 심장 박동이 서서히 소리를 줄일 때쯤 부드럽게 변했다. 여유를 되찾은 권호영이 혀끝을 세심히 써 입안을 샅샅이 훑었다. 단여명의 열기가 식지 않게끔 부드럽게 키스하고, 땀이 맺힌 허벅지의 안쪽을 손으로 쓸었다.
단여명은 치열을 훑는 그의 혀를 느끼며 멍하니 생각했다. 처음보다 키스가 많이 늘었다고. 아직 서툰 감이 있지만, 때에 따라 완급조절을 할 줄 알게 됐다. 제가 입천장이 약한 건 일찍이 안 눈치였지만, 전엔 노골적으로 긁어대기만 했다. 그런데 지금은 은근히 쓸었다가 살짝 눌렀다가 떼어내기도 하는 게…….
“응…!”
구멍을 얌전히 벌리고만 있던 성기가 뒤로 슬쩍 물러났다가 앞으로 찔러 들어왔다. 깜짝 놀라 뭉뚝한 신음을 낸 순간 권호영이 입속에서 혀를 빼냈다.
“아, 목에는…….”
“목에…… 하아… 왜요?”
고개를 꺾어 목덜미를 핥아 올린 권호영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단여명은 그의 머리칼에 손가락을 얽은 채 말했다.
“사람들이, 이상하게 볼 것 같아.”
추읍, 살을 약하게 빨아올리는 소리가 났다. 치아가 살짝 닿은 느낌에 단여명이 어깨를 움츠렸다.
“이제 날씨가 더워져서… 응… 가리고, 다닐 수가…….”
그 말에 권호영이 입안에 힘을 뺐다. 제가 빨아올렸던 피부를 가볍게 머금었다가 뱉어낸 그는 같은 자리에 입술을 비볐다. 이제 자국을 남기는데 조심하겠다는 뜻 같았다. 순종적으로 내리깐 속눈썹이 가지런했다.
“…이쪽은 괜찮아.”
그 모습을 보는데 왜 마음이 쓰이는지. 단여명은 권호영의 손을 끌어 제 가슴에 얹어 줬다. 그의 손가락에 바짝 선 돌기가 스치듯이 닿았다. 그게 무슨 신호라도 된 것처럼 그가 불식간에 유두를 강하게 꼬집어 올렸다.
“아……!”
더욱 아래로 내려간 권호영이 반대쪽 가슴을 단숨에 물어 삼켰다. 그는 조그마한 알갱이를 길게 늘려놓으려는 양 손끝으로 유두를 집어 이리저리 돌렸다. 그런 반면에 반대쪽 유두는 입안에 머금은 채 부드러이 빨아 주었다. 양립된 감각에 쾌감이 불똥처럼 들쭉날쭉 튀었다. 더한 자극을 노골적으로 요구하듯 가슴팍이 위로 들렸다.
“좋아, 응… 씹어 줘….”
“깨무는 게 좋아요?”
권호영이 유두를 크게 핥아 올리며 눈길을 위로 했다. 직접적인 물음에 단여명은 어물쩍 시선을 피했다. 어느 정도의 고통은 쾌락으로 느낄 줄 아는 몸뚱이였다. 숨김없이 그렇다고 답하기엔 너무 닳고 닳은 인간처럼 보일 것 같았다.
“아파하는 줄 알았는데…….”
권호영이 이를 세워 유두를 살짝 긁어내렸다. 치아에 걸려 아래로 밀려나던 돌기가 다시 위로 톡, 솟아올랐다. 빳빳하게 선 돌기를 몇 번이나 앞니로 갉작이던 그는 치아 사이에 돌기를 끼워 넣고 자근자근 깨물었다.
“안이 떨려요.”
“하으, 으윽…!”
“좋아요?”
이리저리 씹힌 돌기는 잇자국이 덕지덕지 박힌 채 더욱 뾰족하게 곤두섰다. 권호영은 처음보다 부어오른 알갱이를 혀로 살짝 밀어 올렸다. 한참 씹히던 곳에 말랑한 살덩이가 닿자 단여명이 어깨를 파르르 떨었다. 마치 가벼운 전류가 끼친 듯한 몸놀림이다.
“깨물다가 핥아 주는 게…….”
“응.”
“아팠다가 좋아서… 아!”
단여명이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권호영이 손길을 바꿨다. 손가락 사이에 끼워 세모꼴로 솟아오른 유두의 끄트머리에 그는 사포질하듯이 손가락을 문댔다. 아팠다가 부드럽게 하는 것이 좋다고 말하니 반대쪽 유두에도 고통을 가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응, 흐으, 끕…!”
연약한 유두가 단단한 손가락에 거세게 마찰됐다. 원래 같았으면 만지는 족족 밀려났을 탄력 있는 알갱이는 손가락 사이에 집혀 어디 도망가지 못했다. 허공에 뾰족하게 두드러진 끄트머리만 괴롭히는 손길이 집요하고도 달았다.
“아, 손 그만, 흐으, 으…!”
마찰열 때문에 반대쪽 유두가 점점 참을 수 없이 뜨거워졌다. 손으로 괴롭히지 않는 유두는 여전히 뜨거운 입안이란 착유기 속에 쭉쭉 빨려 올라가는 중이었다. 배 속 깊은 곳에서 덩어리진 쾌감이 울컥울컥 차올랐다. 종국엔 무언가 토해낼 것처럼 목구멍이 이상하게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그거 말고, 아…! 빨아, 빨아 줘…!”
기묘한 성감에 허리를 앞뒤로 흔드니 즐컥, 하며 삽입부에서 젖은 소리가 터졌다. 잠깐 빠졌다가 제자리를 되찾은 성기가 내벽 사이에 끼어 더욱 두껍게 몸집을 불렸다.
“응, 흐으, 아…!”
권호영은 단여명의 말에 착실하게 따랐다. 손으로 자극해 새빨갛게 부은 유두가 뜨거운 입안에 먹혀들어 갔다.
젖부리 채 가슴살을 문 권호영은 유륜과 유두를 통째로 입안에 넣고 쭉쭉 빨아올렸다. 애가 타 자꾸만 허리를 비트는 단여명의 옆구리를 손으로 쥐었다가 제 성을 못 이겨 불식간에 이를 콱 세웠다.
“아읏, 흐!”
힘 조절을 하느라 턱이 떨리는 중인데도 단여명은 그를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이를 세운 채로 얄팍한 살을 빨아올리던 권호영은 입안에 담뿍 빨아들인 그대로 고개를 천천히 뒤로 뺐다.
“아, 아! 아파, 으, 흐으윽…!”
유륜이며 유두며 할 것 없이 단단한 치아에 드드득 긁히며 바깥으로 딸려 나갔다. 끝이 탱탱하게 부은 유두를 두어 번 할짝거린 권호영은 재차 입을 크게 벌려 가슴살을 물었다. 고개까지 이리저리 꺾어가며 입안에 얄팍하게 들어차는 살을 우물거리며 맛보다가 입술에 힘을 줘 뽁, 하고 뱉어냈다.
권호영의 입안에 몇 번 들어갔다 나온 살은 온통 불그죽죽하게 물들어 있었다. 손으로 돌기의 끄트머리만 문지르고, 이로 긁어댔던 유두가 조금 더 빨갛고 통통했다. 권호영은 더 새빨간 쪽의 유두에 입을 쪽쪽 맞춰 주곤 단여명의 몸을 들어 올렸다.
“아…!”
좆이 배 속을 몇 번 잘게 쑤시자 자세가 바뀌어 있었다. 바지가 언제 벗겨진 건지 모른 채 단여명은 주위를 살폈다. 소파에 등을 기대고 앉은 권호영의 허벅지 위에 제가 마주 보고 앉은 자세였다.
그걸 알아차리자마자 단여명은 발끝에 힘을 줘 무릎을 세우려고 했다. 체중이 실리는 자세라 자칫 미끄러지면 저번처럼 혼자 사정하는 불상사가 벌어질지도 몰랐다. 그리 발끝을 돋우려 안간힘을 쓰고 있던 순간이었다.
“끝까지 넣고 싶어요.”
권호영이 귓가에 입술을 딱 붙인 채 목소리를 흘려 넣었다. 중력이 작용하는 자세 때문에 가슴 위까지 올라갔던 셔츠는 골반까지 내려가 찰랑이고 있었다. 얇은 셔츠 위로 도톰하게 불거진 유두의 실루엣이 비쳤다.
“형….”
대답을 재촉하듯 권호영이 그 위를 엄지로 꾹 눌렀다. 단여명이 곧바로 ‘으응…!’ 하며 권호영의 상체에 몸을 밀착했다.
“응, 넣어, 넣어도 돼….”
단여명은 권호영의 뺨에 자신의 뺨을 붙였다. 부드러운 살결끼리 맞닿은 느낌이 좋아 무의식중 뺨을 비비자 권호영이 손으로 뒷머리를 감쌌다.
“긴장하지 말고…. 한 번 해봤잖아요.”
넣어도 된다는 말과 모순되게 하얀 양말에 감싸인 발은 엉덩이를 내리지 않으려고 안간힘이었다.
“아, 무서워서… 잘 안 돼…….”
가파르게 세운 무릎이 달달 떨렸다. 뒤에서 들이받는 힘을 받아냈던 터라 그의 무릎은 벌겋게 물든 상태였다. 그걸 곁눈으로 내려다본 권호영은 단여명의 중심부에 손가락을 감았다.
“흣! 아아, 응…!”
“만지니까 더 조이는데….”
손바닥으로 성기를 감싼 채 엄지로 가볍게 귀두를 문지르자 작은 구멍이 빠끔거리며 맑은 액을 밀어냈다. 권호영은 미끈한 액을 손가락에 훔쳐 귀두에 펴 발랐다.
“한 번 쌀래요?”
단여명이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많이 무서워요?”
그 역시도 단여명은 고개를 내저었다. 무서운 건 맞지만, 결국 해 달라는 뜻이었다.
권호영은 단여명의 양쪽 엉덩이를 움켜쥐었다. 그 별거 아닌 접촉에도 두렵다는 양 아래를 문 뒷구멍이 꽉 다물렸다. 질척하게 엉겨 붙는 점막을 젖히고 성기를 가득 밀어 넣자 어깨가 금방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아, 으으…….”
“울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제가 나쁜 짓 하는 것 같잖아요.”
이윽고 더욱 깊은 곳으로 통하는 입구와 뜨거운 귀두가 진득하게 비벼졌다. 금방이라도 그 사이를 뚫을 듯 움푹 좁아지는 점막에 힘을 싣던 귀두가 곧 장벽을 이끌며 뒤로 빠져나갔다.
“형도 여기까지 넣는 거 허락해 준 거죠?”
권호영은 단여명의 엉덩이를 움켜쥔 채 허리를 느릿하게 움직였다. 쯜걱, 척, 하며 무른 입구와 좆 머리가 닿았다가 떨어지길 반복했다. 긴장을 풀어 줄 요량으로 입맞춤이라도 내리는 듯한 움직임이었다.
“읏, 흐응…! 흐으… 아!”
“응?”
짧은 물음이 던져진 것과 동시였다. 권호영이 중간까지 빼냈던 것을 다시 안으로 푹, 짓쳐 올렸다.
“아—, 헉!”
순간적으로 방향을 달리한 귀두가 복부의 한 지점을 부드득 긁었다. 강하게 짓찧는 힘에 밀려난 전립선이 움푹 어그러졌다. 커다란 성기에 짓눌린 속살이 어떻게 뭉그러졌을지 눈앞에 생생히 그려지는 것만 같았다. 숨이 찬다는 걸 인지할 틈 없이 시야가 희뜩 날아갔다.
“싫, 아, 흐! 거기…! 누르, 누르지, 흐으, 아-!”
당황해 다리를 버둥거린 순간 엉덩이가 비틀려 더욱 정통으로 극점이 문질렸다. 무릎을 세우고 있던 몸에 급격히 힘이 빠졌다. 그가 강제적인 힘을 가해 내린 것도 아닌데, 엉덩이가 밑으로 질질 끌려 내려갔다.
“으, 으으으……!”
다리에 힘이 풀려 삽입이 더욱 깊어지려고 했다. 위기감이 턱 끝까지 차올라 식은땀이 줄줄 솟아나는 듯했다. 단여명은 있는 힘껏 허리를 앞으로 내밀었다. 잔재주를 부려 안을 가득 채운 것을 빼내려니 복부 언저리에 닿아 있던 귀두가 재차 같은 부위를 잔인하리만치 짓뭉갰다. 진퇴양난의 상황에 몰려 입을 크게 벌린 채 몸을 경직시키고 있을 때였다. 권호영이 허리를 툭 쳐올렸다.
“허억…!”
성의 없는 허릿짓에도 벼랑 끝에 내몰린 몸뚱이는 과민반응을 보였다. 시퍼렇게 날 선 사정감이 살갗을 긁어내렸다. 소름 끼치는 감각이 등줄기에 찬기를 퍼부었다. 단여명은 달아나듯 엉덩이를 앞으로 당겼다. 구멍 속에 깊게 삽입돼 있던 좆이 밖으로 쑥 뽑혀 나갔다.
“응, 흐으! 으……!”
외부로 튕겨 나간 묵직한 살덩이가 반동으로 흰 엉덩이 살을 철퍽, 때렸다. 한순간에 제 짝을 잃은 뒷구멍이 허망함에 빠르게 개폐했다. 정액이 뒤섞인 불투명한 액이 주름이 조이고 풀릴 때마다 밖으로 픽픽 터져 나갔다.
민망한 상황이 연출된 것도 모른 채 단여명은 까무룩 넘어가려는 정신을 다잡기 급급했다. 입안에 침이 잔뜩 고이더니 이가 딱딱 부딪쳤다. 짧은 시간 안에 민감한 곳이 연달아 자극돼 정신을 차리기 힘들었다. 마치 끔찍한 공포를 맛본 사람처럼 온몸이 진저리 치듯 경련했다.
분명 정액을 뿜지 않았는데, 절정과도 비슷한 쾌락이 아랫배를 격타했다. 너무 뜨겁고 자극적이라서 달아날 수밖에 없었다. 그대로 있다간 타 죽을 것만 같았다. 뒷구멍에 올라붙은 열이 제 숨까지 태워버릴까 봐 겁이 났다.
혼자만 난리를 떨고 있다는 사실을 자각하지 못하고, 단여명은 너른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하반신을 비비적댔다. 단순히 박는 것밖에 모르는 권호영이 고의로 그랬을 리가 없었다. 그 증거로 그는 흐물흐물하게 풀린 주름에 젖은 살덩이를 가만히 문지르는 중이었다. 상대가 진정하기를 기다리는 눈치였다.
“아, 아아…….”
한참 흥분을 가라앉히느라 정신이 팔려 있던 중이었다. 움씰거리는 주름에 무언가가 닿았다. 어느새 양쪽 엉덩이를 움켜쥐고 있던 커다란 손은 각기 다른 위치에 가 있었다. 그것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흐으, 으….”
엉덩이 살집을 밖으로 벌려낸 그가 벌어진 입구를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동그랗게 모양 잡힌 주름의 결을 하나하나 골라내듯 손끝으로 갉작이더니 빠르게 개폐하는 곳에 손가락을 딱 붙였다. 녹진하게 풀린 뒷주름이 그의 손에 뽀뽀하듯 조여들었다가 풀어지길 반복했다. 그것이 제게도 너무 잘 느껴져 미친 듯이 창피했으나, 뒤가 제멋대로 오물대는 것을 제어할 수는 없었다.
“으응…!”
입구를 문지르던 손이 이윽고 안쪽으로 조금 파고들었다. 단여명은 자신도 모르게 뒤를 꽉 조였다. 방금까지 커다란 것을 물고 있던 구멍이 더한 것을 갈구하는 양 그의 손가락을 오물오물 씹었다.
아주 얕게 삽입된 손가락은 그 기갈난 조임을 느끼면서도 제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마치 고양이의 턱을 어루만져 줄 때처럼 관절을 살짝 굽혀 얕은 내벽을 뭉근하게 쓰다듬어 줄 뿐.
“아…!”
더욱 안쪽으로 들어오나 싶었던 손가락은 곧 느릿하게 밖으로 빠져나갔다. 구멍을 위로 잡아 끌어올리듯 권호영이 천천히 손을 빼냈다.
구멍의 주름이 위로 딸려 올라가다가 금세 제자리를 되찾았다. 뽁, 하며 낯부끄러운 소리가 난 것과 동시에 구멍 위에서 떨어진 검지에 긴 액이 죽 늘어지다가 끊겼다. 엉덩이를 들썩이며 안절부절못하던 단여명이 다급한 목소리를 낸 것도 그때였다.
“맞, 맞으니까……. 헉!”
말을 끝마치기도 전에 뜨거운 귀두가 입구에 맞춰졌다. 그대로 몸이 끌려 내려간 것은 순식간이었다.
“힘 빼고…….”
“아으, 흐으……!”
“제 목에 손 감아요. 아프게 안 해요.”
기다랗고 굵은 성기는 제가 점찍어 놓은 위치까지 우악스레 머리를 디밀었다. 관자놀이에 폭신한 입술이 닿은 찰나였다. 흐느낌을 뱉을 새도 없이 엉덩이가 더욱 아래로 붙잡혀 내려갔다.
“아아악…!”
날카로운 비명이 터졌다. 볼깃살을 터트릴 듯 쥔 권호영도 지저분한 숨소리를 터트렸다. 빠득, 가까이서 이를 가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하나 단여명은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아, 못, 못해…! 호영아, 으으……!”
“다… 들어갔어요.”
“흐으, 끅……!”
“저번보다, 하아… 쉽게 들어간 것 같은데…….”
오목하게 좁아지는 점막을 사방으로 벌려낸 귀두가 둥그렇게 구부러진 굴에 안착했다. 커다란 선단의 모양으로 빠듯하게 변형된 결장이 이물을 밀어내고자 발작적으로 경련했다. 아무리 사납게 씹어대도 뭉그러질 리 없는 단단한 살덩이는 핏줄을 우둘투둘 부풀린 채 여린 살벽에 좆 머리를 문댔다.
덜 여문 내벽에 성난 열기가 퍼부어졌다. 굽어든 내장에 제 몸뚱이를 꽉 끼워 맞춘 귀두는 막힌 벽을 두드리기만 할 뿐 가혹한 망치질을 하지는 않았다. 쿠퍼액을 찐득하게 묻히며 인내하는 것이 구멍이 순응하기를 기다렸다가 한꺼번에 녹여 먹으려고 준비라도 하는 모양새였다.
“아, 아파…. 나, 가슴……. 으응!”
단여명이 요구의 말을 다 전하기도 전이었다. 권호영이 셔츠 아래로 머리를 집어넣어 젖부리를 함빡 베어 물었다. 탱탱하게 부풀어 입안에 찰싹 달라붙은 살결에서 짠맛이 났다. 그게 어쩐지 정신이 나갈 것처럼 야릇해 권호영은 아래가 잘릴 듯한 고통도 잠시 잊고 그를 달게 빨아들였다.
“으응, 아, 흣, 좋아…!”
꼿꼿하게 세운 혀끝이 유두를 간질일 때마다 단여명은 몸을 뒤틀었다. 그 움직임에 굽이진 내벽을 틀어막은 좆이 사방으로 공간을 벌려냈다. 배 속이 한계까지 열려 숨이 힉힉 달릴 지경인데, 땡땡하게 부어오른 가슴이 너무도 부드럽게 빨려 눈물이 왈칵 샜다.
단단한 이에 거세게 긁힌 돌기는 밋밋했던 초반이 우습게도 도톰하게 부풀어 있었다. 아픈 게 좋다고 했지만, 이렇게까지 아픈 걸 말한 게 아니었는데…. 섹스 한정으로 제멋대로 구는 권호영은 이젠 제 유두를 뽑아낼 작정인 것 같았다. 점점 젖꼭지를 빨아내는 힘이 우악스러워졌다.
흥분에 눈이 멀어 고통의 역치를 잘못 계산한 걸까. 씹어 달라는 말이 살살 깨물어 달라는 말이었지, 사과를 베어 먹듯 이로 긁으라는 말이 아니었는데. 내일이면 젖꼭지가 퉁퉁 부어 얇은 셔츠를 입고 다닐 수 없을 것 같았다.
“더 세게… 응? 아아, 제발…….”
그런데도 입이 제멋대로 열렸다. 위며 아래며 아프지 않은 곳이 없는데, 그 어딘가에 선명한 쾌락이 있었다. 통통하게 솟아오른 유두는 바람만 끼쳐도 어깨가 움츠러들 정도로 예민해진 상태였다. 그런데 그걸 입에 물고 놓아주지 않는 상대를 보니 자꾸만 뒤가 움찔거리며 액을 쏟았다.
배 속 깊은 곳을 틀어막은 채 움직이지 않는 것이 점차 의식되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혀가 젖꼭지에 감기면 아래에 힘이 들어갔다. 커다랗게 부푼 그의 양물이 몸속에서 쿵쿵 맥박 뛰었다. 그게 몸서리쳐지도록 생생히 느껴져 입안에 침이 고였다.
“그만, 응…! 아래, 아래, 움직여, 주면…….”
미친 것 같았다. 그가 허리를 미친 듯이 써 제 안을 망가트려 줬으면 좋겠다. 정신이 나갈 것 같은 쾌락에 흠뻑 빠져 영영 돌아오고 싶지 않았다.
“아…!”
시야를 가리는 셔츠가 거슬렸는지 권호영이 단여명을 소파 위에 눕혔다. 자세를 바꾸는 도중에도 그는 젖부리의 살을 입에 물고 놓아주지 않았다. 가느다란 종아리를 휙 들어 올려 허리를 박기 좋은 자세를 잡자마자 깊은 곳에 묻어놨던 성기를 느릿하게 끄집어냈다.
“아! 흐아, 아…!”
내장이 통째로 뽑혀 나가는 듯한 감각에 단여명이 권호영의 뒤통수를 손으로 눌렀다. 밑으로 누르는 힘에 단단한 이가 말랑한 살에 쿡 박혀 들어갔다. 그것에 선뜩 놀랄 새도 없이 중간까지 빠져나갔던 좆이 재차 막힌 벽에 머리를 묻었다. 상냥하고도 느릿한 피스톤질이었다. 그런데 느껴지는 감각은 울퉁불퉁한 주먹이라도 받은 양 섬뜩하기만 했다.
“흐, 으으으……!”
좆이 치고 빠지는 길을 따라 걷잡을 수 없는 불이 번졌다. 시야가 희뿌옇게 질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뜨겁지 않은 곳이 없어 속수무책으로 눈물이 흘렀다. 흐느끼는 소리가 강해지자 심상찮은 걸 감지한 권호영이 얼굴을 위로 들었다. 뺨을 돌려 잡는 손길이 다정했다.
“형….”
“아아, 으…….”
“이렇게 울면… 좋은 건지 싫은 건지 헷갈려요.”
그가 손으로 눈물을 닦아 줬다. 단여명은 속눈썹을 깜빡여 눈물방울을 털어냈다. 후두둑 떨어진 짠 내 나는 방울이 그의 손가락을 적셨다.
“응…? 숨넘어가겠어요.”
권호영이 손바닥으로 벌겋게 달아오른 뺨을 감쌌다. 단여명은 그 손바닥에 뺨을 문지르며 열을 식혔다.
“아냐, 흐…. 괜찮은…… 악!”
어느새 뒤로 물러났던 좆이 다시 우묵하게 좁아지는 틈을 비집어 올렸다. 이미 길이 난 곳이 내부로 침범하는 걸 막아내기란 무리였다. 입을 빠듯하게 벌려 힘겨운 걸 담아내듯 더욱 깊은 곳으로 통하는 내벽이 한계까지 열렸다. 내벽을 진탕 뭉그러트리며 통로를 지난 귀두가 가장 깊은 지점까지 미끄러지듯 쑤셔 박혔다.
“허억…!”
회음부에 흠뻑 젖은 음모가 까슬하게 비벼진 순간이었다. 신물이 나올 정도의 포만감이 아랫배를 부풀렸다. 의식하지 못한 새 허벅지가 활짝 벌어지고, 허리가 벌벌 떨리더니 그대로 위로 휘어졌다.
“으으, 흣…!”
부드럽게 치민 오르가슴의 전율이 맨살을 저몄다. 분명 눈을 커다랗게 뜬 채인데, 시야가 깜빡깜빡 죽었다.
…나 지금 싼 건가? 쾌락에 흠뻑 녹아내린 얼굴에 일순간 황망감이 스쳤다. 단여명은 가슴팍을 헐떡이며 복부를 더듬었다. 다른 쪽에 감각이 쏠려 손끝의 감촉이 둔하게 느껴졌다. 아까 싼 것 때문에 배가 축축한 건지, 아니면 지금 사정해서 질척한 액이 흠뻑 묻어나오는 건지. 둘 중 어느 쪽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좋은 거구나.”
권호영이 무어라 작게 혼잣말했다. 잘게 떨리는 하얀 손가락이 배를 더럽힌 정액을 살갗에 도포했다. 권호영도 그를 따라 단여명의 배에 손가락을 얹었다.
“색도 하얗고, 냄새도 똑같은데….”
하얀 액을 주욱, 끌며 살결을 문지르던 손가락이 불식간에 쏙 패인 배꼽을 찔렀다.
“아…!”
“……왜지.”
제 것에서 나오는 거랑 다를 게 없는데, 어째서 야하게 느껴지는 건지.
권호영은 열기가 자욱한 눈으로 제 아래에 놓인 몸을 보았다. 이런 곳까지 느끼는지 배꼽을 살짝 긁어 줄 때마다 뒷구멍이 움씰거리며 성기를 물어 당겼다. 절정감을 채 몰아내지 못한 아랫배가 달뜬 숨을 고르느라 빠르게 오르내렸다. 아래위로 씨근덕대는 뱃가죽 위로 희미한 좆 모양이 잡혔다.
“아, 아직…!”
다리가 위로 쳐들린 단여명이 다급히 소리쳤다. 아직 때가 아니라고 고개를 내저을 새는 없었다. 깊은 곳에 박혀 있던 좆이 느릿하게 머리를 뽑아냈다. 기둥에 찰싹 달라붙어 있던 여린 살을 끌어당기며 거대한 살몽둥이가 중간까지 빠졌다.
“이렇게 깊숙이 넣을 때마다.”
“아, 으으…!”
“배 위로 제 거가 튀어나오는데…. 알아요?”
퍽! 눈앞이 혼란의 빛으로 물드는 것과 동시에 아랫구멍에 시뻘건 열이 화르르 번졌다.
“……! 아, 학—…!”
구불구불하게 주름이 잡혀 있던 내벽이 좆 모양대로 매끈하게 펼쳐졌다. 단번에 속을 짓쳐든 귀두가 막힌 내벽을 꾸즈즉, 문질렀다. 무른 속살에서 진물이 터져 나올 정도로 모진 세기였다. 모양도 나지 않은 평평한 바닥에 무식하게 나사부터 박는 것과 같았다. 비좁게 꺾어 들어가는 살벽이 커다란 귀두의 형태대로 불룩하게 이완됐다.
“좀 이상한데… 형이 너무 좋아하니까.”
“흐아, 끄…! 으으!”
“…괜찮은 것 같기도 하고.”
끝벽을 뭉그적거리며 불도장을 찍던 귀두가 곧 얕은 곳과 깊은 곳을 가릴 것 없이 빠르게 들락날락하기 시작했다. 거듭 열어젖혔다가 뽑아내고, 윤이 나도록 닦아내니 힘겹게 사이를 벌리던 통로도 점차 뭉글하게 녹아내렸다. 깨끗한 선홍빛이 돌던 굽어진 내벽 또한 얕은 곳과 같이 정액의 빛깔로 혼탁하게 젖었다.
앞서 싸놨던 정액은 압력 차에 의해 깊은 곳으로 밀려나 두 생식기가 더욱 미끄럽게 마찰될 수 있도록 도왔다. 그도 아니면 바깥으로 터져 나가는 양이 태반이었다.
매끈하게 펼쳐진 주름 새를 비집고 불투명한 액이 꾸직꾸직 흘러나갔다. 접합부에서 흘러넘친 정액은 곧 매끈한 엉덩이골을 타고, 봉긋한 살집을 연신 때려대는 음낭에 척척 눌어붙었다가 끊겼다.
“아, 조, 좋아, 아! 미칠, 아으, 흐…!”
“어디가.”
커다랗게 번지는 정사의 소음 사이로 낮은 목소리가 울렸다.
“어디가, 좋아요?”
터져 나오는 숨을 급하게 삼킨 권호영이 눈썹 사이에 주름을 잡았다. 단여명은 눈물이 가득 차 울렁이는 시야로 자신을 노려보는 눈빛을 보았다.
“배 속이… 아! 터질 것, 같아서……!”
자신을 뼈째 씹어 삼킬 듯 욕정으로 절절 끓는 눈동자를.
“아아….”
작게 감탄사를 흘린 권호영이 불식간에 좆을 세게 처박았다. 삐그덕-! 소파의 다리가 방바닥을 거세게 긁은 것과 동시였다. 커다란 품 안에 갇혀 허리가 반으로 접힌 몸이 위쪽으로 쑥 밀려 올라갔다.
“컥, 허억……!”
“배 속이 다 터질 만큼… 좋아요?”
“응…! 흐으, 으……!”
“어떻게 말하는 게, 다 하나같이….”
“아아, 아…! 흣, 아, 아, 아아!”
“그런 식이지?”
철퍽, 퍽, 퍽, 퍽—! 올려 치는 힘에 가느다란 몸이 맥없이 흔들렸다. 허리를 동그랗게 말은 채 충격을 버텨내던 단여명은 어느 순간 고개를 홱 옆으로 꺾었다. 사정에 달했다는 것을 알아차릴 틈 없이 자지 끝에서 추르륵-, 정액이 뿜어졌다. 짙은 색이었던 초반과 달리 쾌락의 농축액은 투명할 정도로 묽었다.
“저도요.”
“흐아, 아…! 흐, 응, 읏, 으으, 아!”
“저도 좋아서 미치겠어요.”
권호영이 손으로 단여명의 입술을 뭉그러트렸다. 권호영도 사정이 가까워지는지 모든 행동이 과격했다. 입술의 형태를 뭉개는 손아귀의 힘도, 뱃가죽을 뚫을 듯이 내리꽂는 추삽질도. 떨림이 섞인 목소리는 권호영이 맞는데, 마치 딴사람이 된 것처럼 몸놀림이 포악했다.
권호영이 얼굴을 점점 가까이했다. 저번에 그랬던 것처럼 혀를 얽은 채 절정에 달하려는 심산 같았다.
“잠까, 흐, 잠까, 만…!”
단여명은 권호영의 손목을 절박하게 붙들었다. 폭격이라도 맞듯 심장이 터질 것 같은 감각을 느끼는 와중에 저번과 같은 위기감이 엄습했다. 오르가슴에 달한 직후 깊은 곳을 얻어맞듯이 쑤셔지면 이상한 물이 터진다. 희미하지만, 그런 전조 증상이 벌써부터 느껴졌다.
배꼽을 들쑤시는 요의에 굴복해 분수를 터트리면 아랫배가 시원해지긴 했으나, 그 물을 쏟아내기 직전까지 폭력적인 쾌감에 굴려졌다. 쾌락이라고 다 좋은 것만은 아니었다.
“흐으, 응, 힛…! 나, 나와! 그마, 흐, 으으…!”
철퍽거리며 살이 들러붙는 소리는 갈수록 격렬해졌다. 권호영은 지루에 가까울 정도로 사정이 느렸고, 그는 단여명이 분수를 터트릴 때까지 박힐 거란 것이 기정사실화되는 것이었다.
“진짜, 다른, 거, 응, 싼다, 고…!”
단여명은 위로 들린 발목을 내리려고 아등바등했다. 안 된다고 고갯짓하며 입을 벌리는 그의 손을 피했다. 일찍 체념하고, 시원하게 분수를 터트리기엔 그런 경험이 몇 번 없어 창피했다.
“응, 흐으, 싫…! 놔, 놔 줘, 어…!”
뒤꿈치로 소파를 박박 긁어도 허리를 강하게 붙든 손이 도망을 허락하지 않았다. 바동거리는 중에도 일직선으로 파고드는 성기는 제가 자리를 넓혀놓은 곳까지 정확히 꽂혀 들어왔다.
“헉, 아, 안…!”
“봐주세요.”
기껏 내린 다리가 다시 위로 잡혀 올라갔다. 단여명의 뺨을 돌려 잡은 권호영이 엄지로 그의 아래턱을 벌려냈다. 뜨거운 숨이 터지는 한가운데, 꿈틀거리며 발버둥 치는 혓바닥이 새빨간 빛을 내보였다.
“저 많이 참았어요. 생각하는 거 이상으로….”
오동통하게 물기 도는 살덩이가 시야에 가득 들어찼다. 그것을 뚫을 듯이 직시하던 권호영은 고개를 옆으로 꺾었다.
“기분 좋아서 싸는 거라고, 형이 그랬잖아요.”
날카롭게 빠진 콧방울이 열이 오른뺨을 칼질하듯이 긁었다.
“뭘 싸든, 후우… 응? 괜찮으니까….”
축축한 혀가 윗입술을 훑고 지나갔다. 축축한 살덩이가 입안에 꽉 들어차는 것은 한순간이었다.
“으, 음, 읍, 흐으…!”
혀가 닿자마자 피스톤질의 속도가 미친 듯이 빨라졌다. 이가 다각이며 부딪치는데도, 권호영은 단여명의 혀를 감고 놓아주지 않았다.
단여명은 발가락을 안쪽으로 꽉 만 채 온몸에 메다 꽂히는 성감을 견뎠다. 못질하듯 머리가 쿵쿵 울리더니 적응하지 못할 쾌락의 전율이 벼락같이 내리쳤다. 형언할 수 없는 감각들이 진탕 뒤섞이다가 이내 하나로 뭉텅이졌다. 고통과 쾌락이 뒤범벅된, 날 선 성감이었다.
괴로운 쾌락에 내벽이 힘껏 오므라들었다. 구멍이 어떻게 힘을 주든 무섭도록 발기한 좆은 굽어진 내벽과 예민한 지점을 차례대로 짓찧으며 성난 열을 퍼부어 댔다. 커다란 살기둥이 주름에 귀두를 걸쳤다가 꺾어지는 내벽까지 단숨에 머리를 꽂았다. 연약한 옷감을 이리저리 잡아 늘이다가 종국엔 그것을 찢어낼 듯 굵직한 살덩이가 극점을 아래위로 긁어댔다.
“수, 음…! 헉! 나, 흐으, 숨, 막…!”
모든 것이 벅차 정신이 나갈 지경인데,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점점 숨이 막혀왔다. 배뇨감을 막아내는 것보다 숨이 모자란 감각이 순간적으로 목젖을 탁 쳤다. 고개를 비틀어 어떻게든 말하려고 하자 말캉한 혀가 이에 같이 씹혔다.
“허억, 흡, 아, 하악…!”
형편없이 쏟아낸 말이 어떻게 전달됐는지 모르지만, 알아듣긴 한 모양이었다. 권호영이 유예 시간을 주듯 잠시 혀를 물렀다.
그는 치솟는 열기를 어떻게 해소해야 하는지 모르는 사람처럼 굴었다. 숨 쉴 시간을 주느라 키스하지 않는 중에도 그는 좀처럼 가만히 있지 못했다. 격렬한 허릿짓을 계속하면서 단여명의 뺨에 입술을 눌렀다가 볼살이 밀리도록 혀로 크게 핥은 뒤 이를 세워 살짝 깨물기까지 했다.
뺨이 깨물린 아픔에 단여명이 어떤 소리를 내기도 전이었다. 몇 번 숨을 들이쉬지도 않았는데, 다시 두꺼운 혀가 한가득 밀려들었다. 제 혀를 옭아맨 살덩이에서 눈물 맛이 났다.
“흐으, 흥, 음, 흑! 으, 웅, 끄으…!”
즐퍽! 퍽, 퍽—! 격한 추삽질에 골이 울려댔다. 배꼽 밑을 쿵쿵 때려대는 묵직한 허릿심에 몸이 조각조각 나뉘는 듯했다. 단단한 손목을 붙잡고 있던 손은 지체 없이 떨려 그의 살갗만 미약하게 긁어내렸다.
아래위로 제 것이 아닌 살덩이들이 가득 들어차 안쪽을 샅샅이 탐했다. 좋고 싫음이 극명하게 갈리는 쾌락이 엎치락뒤치락하며 몸을 쉼 없이 채찍질했다. 그것이 반복되니 강제적인 감각에 굴복하듯 자포자기하게 됐다.
그만…, 이라는 생각조차 더 이상 들지 않았다. 입이 막힌 채 지금 어떤 소리를 내는지, 무슨 자세를 취했는지 인지하지 못했다. 흐린 정신을 느끼며 단여명은 아랫배에 잔뜩 힘을 준 채 간당간당하게 넘치려는 요의만 필사적으로 참아냈다.
삽시간에 맺힌 식은땀이 허벅지 안쪽을 주르륵 타고 내렸다. 야차 같은 성감이 빗발쳐 온몸이 끈적하게 젖었다. 타액이 정신없이 뒤섞이는 소리와 철퍽거리는 정사의 소음이 더는 들리지 않게 됐다. 아무것도 없는 황량한 공간에 던져진 듯 주변의 소리가 까마득 멀어졌다.
몸이 허공에 붕 뜨는 것처럼 허리가 들리다가 발끝부터 머리꼭지까지 불이 번졌다. 어느 때보다 사납게 일은 불길을 꺼트릴 방도를 몰랐다. 어찌할 바를 몰라 손을 허우적대다가 전신의 근육을 딱딱하게 경직시킨 순간이었다. 철퍽—! 곤장을 맞을 때와 비슷하게 들리는 소리가 귓구멍을 묵직하게 파고들었다.
“흐, 으으으……!”
권호영이 치골을 힘껏 눌러 결합을 깊이 했다. 하얀 엉덩이에 찰싹 달라붙은 음낭이 움찔거리며 사정액을 토해냈다. 무른 장벽에 좆 머리를 딱 붙인 채 울컥울컥 좆물이 터졌다.
용암 같은 액체를 받아낸 아랫배가 깜짝 놀라 아래로 홀쭉 꺼졌다. 배 속에 품은 두꺼운 윤곽을 내보이며 뱃심을 단단히 쥐더니 이내 안절부절못하듯 바들바들 떨렸다. 힉힉대며 간헐적으로 터지는 숨을 따라 움푹 들어갔던 배가 조금씩 위로 솟았다. 줄줄줄…. 흐르는 물소리가 터진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하아, 하…….”
권호영이 입을 벌려 단여명의 입속에서 혀를 꺼냈다. 침을 삼켜낼 새도 없이 혀를 섞으며 급하게 허리를 놀린지라 혓바닥이 타액에 푹 절어 있었다.
혀끝에 맺혀 있던 타액이 한 방울 뚝, 떨어져 살짝 내밀려 있던 다른 이의 혓바닥 위에 떨어졌다. 거듭 몸부림치던 단여명의 이에 긁히기라도 한 건지. 그의 혓바닥 위에 떨어진 자신의 타액은 핏빛이었다.
“흐으, 흣…. 으으…….”
고통과 쾌락의 구렁 속에서 한참을 허우적댄 몸뚱이는 탈력감에 젖어 좀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새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은 온통 눈물범벅이었다. 목 밑까지 올라간 남색 셔츠는 하얀 정액과 쏟아진 물난리로 얼룩덜룩했고, 발목을 감쌌던 하얀 양말은 난리 통에 발등 중간까지 말려 내려가 있었다.
활짝 벌린 다리를 오므릴 생각도 못 하고, 단여명은 거듭 허리를 떨며 투명한 물줄기를 뿜어냈다. 포물선을 그리며 주르륵 쏟아져 나오는 것이 정말 오줌이라도 지리는 모양새였다.
“…형.”
권호영은 얼얼한 혀를 내어 마른 입술을 축였다.
“한 번만 더 해요.”
시선은 한 곳에서 못 박혀 떨어지지 않았다.
***
“……뭐냐?”
분주한 아침 수업 전,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렸다.
“머리. 뭐냐고.”
강의실 문턱을 밟은 윤재윤은 낯을 미세하게 일그러뜨린 채였다. 제자리에 서서 가만 바라보는 게 괴상한 걸 목격했다는 표정이었다.
“…아.”
어쩐지 눈앞이 깨끗하다 했더니. 권호영은 그에게 왔냐는 듯 흘깃 눈짓 주고 말았다. 아침에 정신이 팔려서 준비를 대충 하고 나왔다. 개털을 말리듯이 드라이를 되는대로 한 탓에 앞머리가 뒤로 넘어가 있었다.
학교 오는 길에 새삼 하늘이 맑게 보였다. 그냥 기분이 좋은 탓이겠거니 생각했는데. 집 안에서 계속 이러고 다녀 위화감을 느끼지 못했나 보다.
“뭐… 훨씬 낫기는 하네.”
윤재윤이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눈이 보이니까 사람이 좀 됨됨이 있어 보여.”
그가 손으로 브이 자를 만들어 눈앞에 대고 까딱 손짓했다. 됨됨이…. 그 말을 잠시간 곱씹던 권호영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애기들이 하는 죔죔은 알아도 됨됨이란 말은 처음 들어보는 단어였다. 한국인과 대화할 때면 종종 모르는 단어가 튀어나왔다. 매번 무슨 뜻이냐고 묻기도 그래 이럴 때면 대강 납득하며 한 귀로 듣고 흘렸다.
“이제야 이쪽 세상 사람 같네. 그전에는 좀…… 빨간 모자처럼.”
별생각 없이 준 눈길을 뭐라 오해했는지 윤재윤이 눈을 가느다랗게 좁혔다.
“욕 아니다? 그냥 인상이 비슷해 보였다는 거지. 사람이 독특할 것 같고. 엉? 그런 느낌 있잖냐.”
그는 큼 목을 가다듬더니 크로스백의 끈을 당겼다. 가방을 앞으로 해 지퍼를 내리고 손으로 가방 안을 휘적거렸다. 안에 든 것 없이 가죽이 헐렁해 보이더니 역시나 필기구를 가져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윤재윤은 책상 위에 놓여 있던 권호영의 필통을 자연스레 제 앞으로 끌어갔다.
“이참에 그냥 자르지?”
윤재윤이 볼펜을 꺼내며 넌지시 물었다. 권호영은 그를 응시하다가 그의 어깨 너머로 시선을 던졌다. 강의실 창문에 자신의 모습이 비쳤다.
뒷목을 덮은 머리카락을 보니 밖에서 항상 단정하게 다니는 남자가 생각났다. 그리고 그의 옆에 있던 다른 남자 또한.
단여명의 아는 형이라고 말한 남자는 사회의 기준에 부합하는 깔끔한 차림새였다. 그의 겉모습을 하나하나 뜯어보듯 되짚어 보다가 아직 아물지 않은 혀를 살짝 깨물어 보았다. 핏기 도는 맛이 금세 입안에 배어났다. 물결치던 마음이 잔잔히 가라앉은 것도 그와 동시였다.
“그럴까요.”
권호영은 치열한 경쟁 끝에 우위를 쟁취하는 데 자신이 있었다. 일평생 그리 살아왔다. 맞지 않는 옷을 걸친 채 그것이 자신의 것이라는 양 행세했다. 공부도, 주위를 감싼 인간관계도, 무턱대고 시작했던 운동도. 처음에만 힘들지 나중에 요령을 터득하면 억지로 껴입은 옷도 체격에 맞게 늘어나기 마련이다.
단여명은 남자와 몸을 맞추는 것이 익숙해 보였다. 섹스하기 위해 그럴듯한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도, 과하지 않게 상대를 자극하는 것도 손안에 있는 것을 주무르듯 쉬워 보였다.
처음엔 손잡는 것도 그저 기쁘기만 했는데…. 욕심은 갈수록 커져갔다. 단여명은 자기 자신을 표현하는 데 솔직한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딱 하나 예외가 있었다. 그는 섹스할 때만 자기가 원하는 바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것을 보며 뒷덜미가 뜨끈뜨끈해지는 한편 그를 거쳐 간 사람들이 궁금해졌다. 동시에 그를 알고 싶지 않은 마음도 공존했다. 노트북 비밀번호가 어떤 이의 생일인 것 같다는 생각은 여태 지워지지 않는 중이었다.
초조함을 달래는 와중에도 마음은 비쩍 말라가지 않았다. 아니, 그와 반대로 이렇게 기분이 좋았던 적은 난생처음이었다.
주는 대로 돌아오는 관심이 이리도 가슴이 뛰는 일일 줄이야. 그중 알 수 없는 자만심도 섞여 있었다. 다분히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는 한, 단여명이 자신을 밀어내지 않을 거란 출처 모를 확신이었다.
단여명은 자신이 성적 흥분으로 눈이 돌아간 모습을 좋아한다. 입천장을 살살 긁어 주면 어깨를 움츠리다가도 다급히 뺨을 감싼다. 부드럽게 어루만지는 것보단 엉덩이를 터트릴 듯 움켜쥐는 것에 허리를 흔든다. 흥분한 걸 노골적으로 드러내면 자신도 애가 탄다는 양 단 숨을 터트렸다.
과연 어디까지 받아 줄까……. 요즘 권호영의 최대 관심사였다.
세 번쯤 하니 어디를 찌르면 그 몸이 파득 튀어 오르는지 알게 됐다. 뒤로 느끼는 지점은 최대한 조심스럽게 접근하고 있다. 자극에 취약한 몸은 몇 번 안 돼서 금방 나가떨어졌기에. 엉뚱한 곳을 찔러도 그는 안 된다며 눈물을 흩뿌리곤 했다. 그래서 사정 시간이 맞지 않는 것은…… 아직 방법을 찾지 못했다.
“…진짜?”
이게 올바른 방향인지 더는 고민하지 않았다. 자신이 그에게 스며든 것처럼 자연스러운 과정이 아니어도 좋았다. 제가 단여명에게 맞춰 그 역시도 제게 스며들게 하면 된다.
“진짜로 자른다고?”
1순위가 아니어도 좋다. 아직까지는.
“무슨 바람이 불어서?”
권호영은 창문에서 시선을 거두고, 윤재윤에게 초점을 맞췄다. 머리를 자른다고 말하면 좋아할 줄 알았더니. 그는 되레 의심쩍다는 눈빛을 보냈다.
“관심이 뭐 그렇게 많아요.”
“따뜻한 관심이니까 곱게 들어. 관심 없었으면 물어보지도 않았다.”
윤재윤이 핀잔을 놓듯 말했다. 어찌 보면 맞는 말이었기에 권호영은 조용히 수긍했다.
“요즘 기분도 괜찮아 보이고. 혼자 염병 떨던 건 끝났나 봐?”
“네.”
손에 쥐고 있던 펜을 반 바퀴 돌린 권호영이 고개를 옆쪽으로 틀었다. 강의실을 둘러보던 눈동자가 이윽고 한곳에 닿았다.
“요즘 기분도 좋고.”
색채가 뚜렷한 밤색 눈동자에 희미한 이채가 서렸다.
“혼자 염병 떨던 것도 괜찮아졌어요.”
시원스럽게 빠진 눈매가 약간 가느다랗게 접힌 것도 그와 동시였다. 그 눈 모양이 윤재윤의 시선을 오래 잡아끌었다. 길게 빠진 눈꼬리가 마치 웃는 얼굴과도 비슷해 보여 순간 엄청난 이질감을 받았다.
“…야, 취소. 너 그런 말 하지 마. 안 어울린다. 애한테 안 좋은 거 가르치는 거 같아서 내 기분이 좀 그래.”
곧 윤재윤의 얼굴이 이상하게 구겨졌다. 권호영은 그러냐며 무심히 눈길을 돌렸다. 시험 기간에 매일 페이지를 구기며 ‘씨발’을 달고 살았던 누구 덕택에 한국어 욕은 거의 ‘씨’ 자로 시작하는 걸 알게 됐다. 그러면서 제가 하는 건 안 된다니. 또 한국의 나이 차에 관련된 모순인가 싶었다.
“뭐예요.”
다시 책으로 시선을 돌리는데, 책장이 휙 덮였다. 권호영은 책 사이에 그대로 끼어버린 손을 빼냈다. 눈을 돌리니 윤재윤은 여전히 미간을 구긴 채였다.
“넌 시험도 끝났는데 어째 더 빡빡하게 사는 것 같냐.”
크게 한숨지은 그는 볼펜 끝으로 책을 저만치 밀어버렸다.
“그래서 술은 언제 먹자고.”
“……아.”
“너 까먹고 있었지? 어째 미안해하는 기색이 없다 했다.”
권호영은 잠시 고민하는 척했다. 너무도 정곡이라 변명할 거리가 없었다. 그리고 바로 거절해야 했기 때문에 티가 나더라도 잠시 고민하는 체하는, 약간의 성의라도 보여야 했다.
“죄송해요. 당분간은 시간이 안 될 것 같은데.”
권호영의 하루 계획표에 새로 추가된 것이 있다. 그 일정은 저녁에서 새벽 중 어느 시간대가 걸릴지 부정확했다. 그 시간은 서로의 방 침대가 주가 됐다. 같이 TV를 보다가 소파를 침대 삼아 열을 꺼트릴 때도 있었고, 저번엔 어쩌다 보니 욕실에서 일을 치렀다.
“뭐 하는데?”
한번 시작하면 언제 끝날지 시간이 정해져 있지 않았기에 남는 시간을 잘 활용해야 했다. 거기다 그 시간이 끝난다고 일정이 전부 마무리되는 게 아니었다.
“일이 있어서요.”
땀에 젖은 살결도 쓸어 봐야 했고, 안에 든 것을 빼내 주겠다며 말씨름도 해야 했다. 그리고 제 방에서 자려고 슬그머니 빠져나가려는 몸을 약한 체하며 잡아둬야 했다. 그는 무른 사람에게 더 말랑말랑해지곤 했으니까.
“맨날 하는 건 아니잖아.”
“거의 맨날 해요.”
“그것도 공부야?”
“공부라면…….”
“…….”
“공부일걸요.”
인체 탐구……. 그쯤 이름을 걸어두면 되지 않을까, 권호영은 생각했다.
“공부라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질리지도 않냐? 하기 싫은 거 계속 붙잡고 있으면 스트레스만 쌓인다.”
“제가 하고 싶어서 하는 거라….”
권호영은 생각에 빠져 바닥에 떨어트리고 있던 시선을 위로 들었다.
“질릴 일도 없을 것 같고.”
올곧게 뻗어나간 눈길이 윤재윤을 향했다. 한국은 보수적인 나라였다. 남자 둘이 관계를 가진다는 얘기를 가벼이 털어놓을 수 없었다.
“……그래. 한참 재미 볼 때지.”
윤재윤이 혼잣말하듯 작게 말했다. 이해한다는 것처럼 대답해 놓고 그는 뒷머리를 손으로 짧게 털었다. 묘하게 짜증을 억누르는 눈치라 권호영은 아닌 척 그를 살폈다. 그래도 한국에서 친구라 부를 수 있는 사람 중 한 명인데. 두 사람에게 신경을 쓰는 게 늦어진 것 같아 입을 열었다.
“시간 낼게요. 선배는 언제가 괜찮은데요?”
“아니…….”
“어, 권호영! 머리!”
소란스러운 주변의 소리를 가르고, 큰 목소리가 터졌다. 서로의 얼굴을 쳐다보고 있던 두 사람은 강의실 문 쪽으로 눈길을 틀었다.
“와, 눈 마주쳤어!”
눈을 화등잔만 하게 뜬 민들레가 입을 틀어막으며 호들갑을 떨었다.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어…….
권호영은 귀에 붙이고 있던 핸드폰을 떼어냈다. 통화를 종료하고, 곧바로 전화를 다시 걸자 뚜르르……, 하고 기계적인 소리만 울렸다.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어…….
불이 꺼진 거실을 벗어나 현관문 밖으로 나가는 중에도 상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통화 신호음만 연결되다가 안내음이 흘러나오는 것도 이번이 세 번째였다. 답답한 마음에 엘리베이터를 잡는 손길이 급해졌다.
오피스텔 건물을 벗어나니 선선한 공기가 피부를 감쌌다. 어렴풋이 풍기는 늦봄의 잔향을 맡으며 공동현관에서 몇 발자국 떼지 않은 순간이었다. 곁눈으로 누군가의 인영이 시야에 들어왔다.
“형.”
권호영은 목구멍을 턱 치고 나오려는 한숨을 억눌렀다. 익숙한 뒤통수가 화단 턱에 걸터앉아 있었다.
“응…?”
옆으로 다가가자 남자가 가로등에 기대고 있던 머리를 느릿하게 들어 올렸다. 감고 있던 눈이 반쯤 뜨이니 까만 눈동자가 드러났다. 초점이 잘 잡히지 않는지 그는 눈살을 찌푸렸다.
“어디서 많이 본 얼굴인데…….”
자신을 알아본 하얀 얼굴이 금세 느릿한 웃음을 흘렸다. 가느다란 손가락 사이에 걸쳐 있는 담배가 길었다. 필터를 깨문 흔적도 없는 게 불을 붙인 다음 그대로 손에 들고만 있었나 보다.
“취했다는 말만 하고 끊으면 어떡해요.”
권호영은 단여명의 손에서 담배를 빼앗았다. 불이 붙은 끄트머리에서 하얀 연기가 피어오르는 걸 보다가 단여명을 대신해 바닥에 담배를 비벼 껐다.
“술은 또 왜 이렇게 많이 마셨어요?”
“으음…….”
불분명한 대답을 흘린 단여명은 무릎 위에 팔꿈치를 올려 턱을 괴었다. 그리고 다시 눈을 감더니 인상을 찌푸렸다가 얼굴을 편안히 풀었다. 저로선 정신을 차리려고 노력하는 것 같았다. 권호영이 보기엔 그마저도 상당히 불안하게 보였지만.
“정신 좀 차려 봐요.”
이렇게 취한 건 두 번째로 본다. …아니, 처음인가. 자신과 술을 먹었을 땐 중심을 못 잡았을지언정, 몸을 가누긴 했다. 매번 알딸딸한 정도로만 먹고 들어오더니 언젠간 이럴 줄 알았지. 권호영은 무릎을 굽혀 그와 눈높이를 맞췄다.
“핸드폰은요?”
“주머니…….”
단여명이 눈을 감은 채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중얼댔다. 권호영은 단여명의 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한쪽 주머니 안에 잡히는 것이 없어 반대쪽을 뒤져 보려던 참이었다. 그의 발밑에 무언가 떨어져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권호영은 다른 말 없이 단여명의 핸드폰을 주워 들었다.
“움직일 수 있겠어요?”
“한…….”
“…….”
“…….”
“…….”
“…10분 뒤에는?”
긴 침묵 끝에 못내 자신 없게 들리는 목소리가 나왔다. 단여명이 눈치를 보듯 한쪽 눈만 떠 이쪽을 쳐다보았다. 상황에 맞지 않게 장난이라도 치는 듯한 표정이었다.
“마음 같아선 업히고 싶은데…. 업어 달라고 하면 업어 줄래?”
그가 입가에 흐릿한 미소를 걸쳤다. 반달 모양으로 접힌 눈매를 보며 권호영은 대놓고 한숨지었다. 고개도 못 가누면서. 저래 가지고 제 목에 잘 매달릴 수 있을는지.
섹스를 할 때면 장소를 바꿀 때가 종종 생겼다. 단여명이 등이 배긴다거나, 무릎이 또 까지겠다는 말을 꺼낼 때였다. 그럼 그 잠깐조차 빼기 싫어 삽입한 상태로 그의 몸을 침대 위로 옮겼다.
하지만 그를 등에 업어 본 적은 없었다. …아무래도 불안한데. 등에 업었다가 저지할 새도 없이 머리가 뒤로 넘어가면 위험할 것 같았다.
잠깐 생각하는 중에도 단여명은 다시 눈을 감아버린 뒤였다. 손바닥에 밀려난 볼살이 부둥하고도 발긋했다. 고른 숨소리에서 독한 술 냄새가 같이 풍겨 나왔다. 그를 바라보던 권호영은 단여명의 팔을 어깨에 걸쳐 그를 일으켜 세웠다. 차라리 안아서 옮기는 게 나을 성싶었다.
“잠깐, 장난, 장난이었어….”
엉덩이에 손을 대고 그대로 짊어지려고 하니 단여명이 어깨를 밀어냈다. 밀어내는 손길에서 힘이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게 들면…… 토해.”
대체 얼마나 마신 건지. 입술을 달싹인 단여명이 곧 맥없이 얼굴을 푹 숙였다. 다리를 휘청거리며 주저앉으려고 하기에 권호영이 얼른 그를 부축했다.
“그리고 그건 업는 게 아니라… 둘러메는 거잖아.”
한쪽 어깨에 팔을 두르게 하고 허리를 감싸자 단여명이 몸을 기대는 것과 동시에 아래로 축 늘어트렸다. 권호영은 계속 밑으로 내려가려는 몸을 한 번 추슬러 올렸다.
“응? 짐짝처럼. 내가 짐짝도 아니고….”
한 걸음 앞으로 발을 내디디니 단여명이 뒤따라 느릿하게 다리를 움직였다. 그래도 걸을 정도의 정신은 남아 있는 모양이다.
“내가 짐짝 같아?”
푹 숙인 뒤통수가 힘없는 목소리를 밀어냈다.
“막 짐짝처럼 느껴져?”
엘리베이터에 올라선 순간까지도 들으나 마나인 질문은 그치지 않았다.
“다음부터 집에 오기 전에 전화해요. 밖에 앉아 있지 말고…….”
801호 앞에 도착한 권호영은 단여명의 허리를 부둥켜안았다. 물먹은 솜처럼 밑으로 흘러내리는 몸을 옆구리에 끼듯이 고정하고, 한 손으로 현관문의 패스워드를 눌렀다. 손에 익은 비밀번호를 빠르게 친 권호영은 단여명을 이끌고 집 안에 들어갔다.
“어디 가는지 말해 주면 좀 좋아요.”
언제 집에 도착했는지 모르겠다는 듯 단여명이 멍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봤다. 그에 권호영은 재차 목구멍을 치고 나오는 한숨을 억눌렀다.
이럴 때 운전할 줄 알면 좀 나으려나. 어디 간다고 하면 태워다 주고, 데리러 가면 걱정도 덜 되고 편할 텐데.
그렇다면 운전면허부터 따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차는 단여명의 것을 잠깐 빌리든, 장기 렌트를 하든 방법이야 많았다. 그리 머지않은 미래를 그려보던 권호영은 문득 든 생각이 기묘하다고 생각했다.
운전면허야 어른이 돼가는 과정에서 필요한 것이었다. 그래서 언젠간 따야겠거니 막연히 생각해 왔다. 그런데 무엇을 동기로 직접적인 마음을 먹은 건 낯선 경험이었다.
길게 내리깔린 속눈썹이 나풀거리다가 이내 감겼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권호영은 울렁거리는 마음을 조용히 삭였다.
“저번에 일이 생겼다고 했잖아요. …그것 때문에 잠도 설치고 그랬던 것 같은데.”
권호영은 어깨에 두르고 있던 단여명의 팔을 놓아줬다. 신발을 벗을 생각도 못 하고, 그는 제자리에 멍하니 서 있었다.
“그건 아직 안 끝난 거…….”
궁금한 걸 묻는 것과 동시에 그의 신발을 벗기려고 허리를 굽힌 순간이었다. 권호영은 얼떨떨한 눈으로 제 앞에 무릎 꿇은 상대를 내려다봤다. 허공에 뜬 손이 약간 움츠러드는 것을 보았음에도 단여명은 묵묵히 바지 지퍼를 내렸다.
“…하.”
권호영은 뒤늦게 놀란 숨을 뱉어냈다. 그는 눈으로 보는 즐거움을 의식해 바지춤에 뺨을 비비거나, 손으로 그 위를 은근히 쓴 다음에 펠라티오를 했다. 그런데 오늘은 그런 준비조차 없었다.
어떤 기미도 풍기지 않았고, 그럴만한 분위기도 읽지 못했다. 그런데 약속이라도 한 사람처럼 그는 망설임 없이 바지춤을 헤쳤다.
그걸 보니 복합적인 감정이 들었다. 좀 어이가 없기도 하고……. 자신과 이러는 게 습관이 된 것 같아 약간 기분이 좋기도 했다. 그리고 항상 이런 식으로 상황을 모면하려는 게 좀 괘씸하다고나 할까.
“매번 이런 식으로 말 끊는데 이거 그만 말하라는 뜻이에요?”
“음…….”
“…….”
“아닐걸?”
“걸?”
두루뭉술하게 흘러나온 대답에 권호영은 눈썹을 찌푸렸다.
“대답이 뭐 그래요.”
“그럼 내가 그러든 말든 신경 안 쓰면 되잖아.”
반쯤 감긴 눈이 위쪽을 응시했다. 어느새 드로어즈 속에 잘 정돈해 놨던 성기를 능숙하게 꺼내든 채였다. 꼭 붙들고 놓지 않는 게 마치 제 것이라도 쥔 모습이었다.
“하던 말 계속해.”
그러더니 그는 혀를 내어 힘이 들어가지 않은 살덩이를 길게 핥아 올렸다. 붉은 혀가 지나는 궤적을 따라 성기가 축축이 젖었다.
그에 아랫배에 묵직한 열기가 고이기 시작했다. 성기가 슬금슬금 몸뚱이를 두툼하게 부풀렸다. 기둥을 잡고 있는 손가락 사이가 점점 커지는 두께감에 밀려나 멀찍이 벌어졌다.
“이러는데 무슨 말을 하라고….”
불퉁하게 말해도 단여명은 듣는 척도 안 했다. 눈을 감고 혀로 기둥을 곧추세우는 모습이 나는 해야겠으니 너는 떠들라는 식이었다.
“취해서 잘 걷지도 못하더니….”
“…….”
“남자 물건 꺼내는 건 눈 감고도 하네요.”
…듣는 척도 안 하는 게 아니라 안 들리는 거구나. 불만스러운 마음에 툭 뱉은 말에도 단여명은 반응이 없었다.
짜증스러운 기분에 권호영은 허리를 슬쩍 앞으로 찔렀다. 말랑한 혓바닥에서 빗겨나간 귀두가 단여명의 한쪽 뺨을 볼록하게 부풀려 놓았다. 그 모습마저 못마땅하게 내려다보던 권호영은 곧 눈살을 움찔 떨었다. 뺨 한쪽에 귀두를 두둑이 밀어 넣은 채로 단여명이 주름이 진 이음매를 혀로 할짝거렸다.
아래에서 치미는 감각에 귓바퀴에 열이 올랐다. 제 성기를 정성스레 핥는 저 혓바닥의 감촉을 알았다. 어떻게 빨아들이고 맛보아도 매번 자신을 안달복달하게 하는 맛이었다. 제가 이렇게까지 거친 인간이었는지, 인내심이 이토록 바닥을 기는지 처음 깨닫게 해 준 맛이기도 했다.
“…야해요.”
권호영은 단여명의 머리에 손을 올렸다.
“밝히고.”
머리칼을 쓸던 손은 이내 말랑한 귓불을 손가락 사이에 넣고 만지작댔다.
“변태 같아….”
“변… 뭐?”
앞머리를 우물거리던 단여명이 성기에서 입술을 떼어냈다. 게슴츠레 감겼던 눈은 어느새 커다랗게 뜨인 채였다.
“…너 그런 말도 할 줄 알아?”
……아.
권호영은 아차 싶어 눈동자를 굴렸다. 제 목소리가 안 들리는 것 같아서 홧김에 솔직하게 말해 버렸다. 어떻게 수습할지 고민하던 권호영은 살짝 벌어진 입술에 다시 귀두를 물려 줬다. 술에 취해 사고회로가 단순해진 탓인지 다행히 단여명은 입을 벌려 순하게 받아 물었다.
곧 춥춥대며 젖은 소리가 울렸다. 양손으로 기둥을 꼭 붙든 단여명은 입술을 모아 선단을 빨아올렸다. 권호영은 엄지로 그의 눈가를 쓸었다. 상황이 조금 야하게 돌아간다 싶으면 이렇게 눈꼬리부터 빨개지곤 했다.
“오늘도 삼키고 싶어요?”
“응.”
“끝나면 바로 양치해요.”
“응….”
단여명이 묻는 대로 착하게 대답했다. 술김에 잘못 들었다고 믿는지 그는 다시 성기를 빠는 것에 집중했다.
축축한 혓바닥이 귀두의 옆면을 훑고 지나갔다. 잠깐 새 드러난 자그마한 살덩이는 타액에 젖어 반들반들 빛나고 있었다. 고양이가 털을 정리하듯 귀두를 성심껏 핥으니 붉은색 혀가 약 올리듯 모습을 드러냈다가 감췄다. 눈을 가느다랗게 좁힌 채 아래를 노려보던 권호영은 불쑥 목소리를 꺼냈다.
“…양치하고 키스해도 돼요?”
진지하게 물은 것이었는데, 단여명은 마치 가벼운 농담을 들었다는 반응이었다. 그가 위를 올려다보며 눈웃음을 쳤다. 여전히 귀두에 혀를 감은 채로.
“자꾸 눈 감지 말고….”
권호영은 단여명의 뒤통수에 손을 올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빨아올리는 힘이 약해지기에 허리를 살짝 찔러 정신을 차리게 했다.
“졸면 안 돼요.”
4권에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