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작가네 하숙생 3권
목차
셋째 줄
넷째 줄
셋째 줄
‘호영아.’
호영아.
‘너 시험 끝나면… 우리 술 마실래?’
술 마실래? 술 마실래? 술 마실래…?
“…미치겠네.”
머릿속에서 목소리가 떠나지 않았다. 권호영은 거칠게 머리를 쓸어 넘겼다. 시야를 훤히 드러내봤자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이미 몇 번이나 해봐서 알았다.
“야, 진짜 정신 사납게…. 그만 좀 해라.”
앞자리에서 공부하던 윤재윤이 얼굴을 구겼다. 그의 옆에 앉은 민들레는 시선조차 주지 않았다. 그녀의 귀엔 블루투스 이어폰이 꽂혀 있었다.
“오늘 진짜 왜 그러냐? 한동안 이상하더니 어째 더 이상해졌어.”
조모임을 계기로 이 휴게실에 처음 온 날, 세 사람은 이곳에 사람이 많이 드나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아무리 본관이라도 구석에 박혀 있으니 다들 이런 곳이 있는 줄 모르는 듯했다.
그에 세 사람은 이 휴게실에서 날이 저물 때까지 시험 대비에 전념했다. 민들레는 시험공부를 하면서도 여전히 아르바이트를 나갔고, 윤재윤은 사정을 말하고 이 주 정도 스케줄을 비웠다.
“…선배.”
“어?”
윤재윤이 못 들을 소리를 들었다는 양 눈을 휘둥그레 떴다.
“야, 네가 웬일로 선배 소리를…….”
“저희 시험 얼마나 남았죠?”
어……, 하며 눈을 끔뻑인 윤재윤이 가방 속에 넣어뒀던 핸드폰을 꺼냈다. 캘린더 앱으로 날짜를 확인한 그가 무심한 투로 답했다.
“이제 일주일. 왜.”
일주일……. 권호영은 머릿속으로 그 시간을 가늠해 보았다. 과목마다 시험을 치르는 날짜가 달랐다. 처음 보는 시험을 기준으로 삼은 거니 시험이 끝나려면 그보다 한참 더 남았다.
‘점수 잘 받아 오면 돼요?’
시험이 끝나면 술을 먹자고. 그 말에 어둠 속에 나란히 누워 있다가 건넨 물음이었다.
‘뭘 그렇게까지 해.’
‘…….’
‘적당히 해, 적당히. 몸 안 상하게. 응?’
단여명의 얼굴은 흉터 없이 매끈했다. 피부 결이 고와 엷은 화장을 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 밑으로는 제가 집착적으로 새겨 넣은 흔적으로 너저분했다. 그런데도 그는 참 말갛게 웃었다.
어쩌면 자신은 아직 약삭빠르지 못할 나이일 수도 있다.
“……집중이 안 돼서요.”
그렇지만 술을 먹자는, 그 말의 의미를 모를 정도로 순진하진 않았다.
뽀뽀라도 해 줄 거냐는 장난기 어린 단여명의 말을 무시했다. 하지만 결국 충동적으로 그가 자는 틈에 몰래 입을 맞췄다. 이전에 계속 만지작거려도 깨어나지 않았기에 이번에도 그럴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는 눈을 떴고 제 옷을 끌어당겼다. 입맞춤하는 걸 들켰을 땐 정말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단여명은 제게 키스했고, 서슴없이 아래에… 입을 댔다.
그런 건 정말 자극적인 영상에서밖에 보지 못했던 것이었다. 남의 체액을 먹는 것도 그랬다. 비위생적인 행위라고 줄곧 생각했던 것이었다. 그런데 막상 단여명이 하니 다르게 느껴졌다. 조금… 아니, 매우 외설적인 행위라는 걸 처음 깨달았다.
그러니까… 이건 방향성의 문제였다. 단여명과 가까워지는 건 좋았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육체적인 관계보다 더욱 가까워 보이는 행위도 없었다.
그런데 그게 과연 올바른 쪽인지 거듭 의문이 들었다. 단여명에겐 별거 아닐지라도 자신에겐 엄청난 별거였다. 그럼에도 싫다는 소리는 나가지 않았다. 싫을 리가. 오히려 공통점이 생긴 것 같아서 조금 기뻤다. 그리고… 지난 일이 있었기에 약속한 날이 기다려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제가 막무가내로 안은 것에 대해서도 언급하지 않았다. 혹시 술김에 해서 자세히 기억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제게 기회가 다시 생긴 걸지도 몰랐다.
“네가 그럴 때도 있냐.”
…그래서 문제였다. 아무리 마음이 흔들렸던 때도 생각을 비우려고 항상 펜을 잡았다. 하지만 오늘은 그마저도 되지 않았다. 부드러운 살결을 머금던 감촉을 떠올리면 입안이 말랐다. 네가 남기고 싶은 만큼 남기라며, 머리를 쓰다듬고 성기를 어루만지던 손길이 지나치게 뇌리에 생생했다.
“바람이라도 쐬고 오든가.”
……정말 집중이 하나도 안 됐다.
영원히 오지 않을 것만 같았던 일주일은 생각보다 정신없이 흘러갔다. 아무리 마음이 심란하다고 하더라도 코앞에 닥친 일은 그걸 기다려 주지 않았다.
휴게실에 모여 시험공부를 하는 내내 권호영은 몇 번이나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황급히 자리를 비우는 얼굴은 홍당무처럼 붉을 때도 있었고, 낯빛이 괜찮을 만하면 눈썹이 한껏 구겨져 있었다. 이상하게 여기던 두 사람도 워낙 그런 일이 잦아지니 나중엔 그러려니 받아들였다.
다사다난했던 조별 과제도 순탄하게 마무리됐다. PPT에 오탈자가 없는지 확인하고, 학번과 이름을 다시 체크할 때쯤 빨간 모자의 이름을 넣는 것이 맞을지에 대한 갑론을박이 빚어졌다. 결국 권호영이 이름 삭제만큼은 안 된다고 강력히 반대했고, 프레젠테이션 첫 장엔 조원 4명의 이름이 정직하게 올라갔다.
발표일은 시험 주 중반에 걸쳐져 있었다. 빨간 모자는 그날 수업에 나오지 않았다. 윤재윤은 초반에 약간 말을 더듬긴 했으나 끝까지 발표를 마쳤고 학생들의 질문에도 침착하게 대처했다.
하지만 교수의 평가는 냉담했다. 자신들이 미처 고려하지 못했던 부분을 꼬집고, 일어날 법한 가정을 세워 질문 세례를 던졌다. 혹평을 받았다고 생각하며 자리로 들어가려는데, 윤재윤이 어깨를 툭 쳤다. 피드백할 가치도 없는 건 저리 말하지도 않는다며 나쁘지 않은 점수가 나올 거라고 그는 씩 웃었다.
그러는 동안에도 단여명은 어김없이 밖으로 나갔다. 잠도 계속 설치는 것 같았다. 집 안에서 핸드폰을 들여다볼 때가 많아졌으며 대개 표정이 좋지 않았다. 신경에 거슬리는 일이 생겼다더니 아직 해결되지 않은 듯 보였다.
원래 잠귀가 예민하고, 잠을 깊게 못 자는 편이라는 건 알았다. 그런데 최근 들어 정도가 심해졌다. 엊그제에는 아침을 차린 식탁 앞에서 꾸벅꾸벅 졸더니 어제는 좀 괜찮게 잤다며 웃어 보였다.
그런 컨디션으로 그는 자신에게 초콜릿을 줬다. 편의점에 들른 김에 생각나서 샀다며. 시험 잘 보라고 어깨를 두드려 줬다.
그런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냥 모른 척하기 힘들어졌다. 걱정하는 티를 내면 그는 장난스럽게 상황을 넘겨버렸다. 그래도 마음에 걸려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자면 걱정해 주는 거냐며 뺨을 여기저기 찔러왔다.
괜찮으냐는 말을 하기 전에 그는 먼저 괜찮다고 말했다. 자신들 사이에 절대 무거운 공기가 돌지 않게끔 가볍게 넘겨버리기 일쑤였다. 그럼 권호영은 어쩔 수 없이 묻고 싶은 말을 삼켰다.
“이야, 드디어 끝이다!”
강의실의 문을 열고 나온 윤재윤이 만세 하듯이 양팔을 번쩍 들었다. 바깥에서 그를 기다리던 민들레와 권호영의 눈이 일시에 강의실 쪽으로 향했다.
“오빠, 안에 아직 시험 보는 중인데… 조용히 말해요.”
그 말에 윤재윤이 너무 좋아서 그랬다며 머쓱하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그리더니 금방 권호영의 등을 퍽 내리치며 호쾌하게 웃었다.
“이 자식은 무슨 보는 시험마다 일빠로 제출하고 나가냐.”
시험이 끝난 게 그리도 좋은지 윤재윤의 표정이 시시각각 달라졌다. 권호영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모든 걸 머리에 욱여넣듯이 무식하게 암기했으니까. 아무리 중간에 집중력이 흐트러졌다고 해도 학기 초부터 꾸준히 공부해 왔다. 시험을 망치는 것은 가정조차 해 두지 않았다.
“아, 그 새끼 자퇴한다더라?”
건물의 계단을 오르는 도중 빨간 모자의 얘기가 다시금 화제에 올랐다. 윤재윤의 말에 민들레가 고개를 휙 돌렸다.
“누구요? 김성연?”
“어. 과사 갔다가 우연히 듣게 됐어. 그래서 조별도 개떡같이 하고 수업도 안 나왔나? 어차피 자퇴할 거니까.”
“헐, 자퇴라니. 진짜 생각도 못 했어요. 전 그냥 학점에 신경 안 쓰는 애인 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조에 형, 누나가 둘인데.”
걔도 참……. 윤재윤이 쯧, 하며 혀를 찼다.
“됐어요, 이미 끝난 일. 액땜했다고 치죠, 뭐.”
민들레가 더는 생각하기도 싫다며 손을 휘휘 내저었다. 질색하는 목소리였지만, 그녀의 표정 역시도 밝았다. 어찌 됐든 시험이 끝났으니 기분이 좋은 듯 보였다.
밖에는 아직 해가 떠 있었다. 점심은 지났고 저녁이 오기까지 그리 머지않은 시간이었다. 매일 아웅다웅하던 두 사람도 오늘은 선뜻 언성을 높이지 않았다. 민들레가 도돌이표처럼 시험이 끝나서 좋다고 말하면 윤재윤은 가방이 가벼워진 것도 좋다며 장단을 맞췄다.
“아무튼 시험도 끝났겠다 술 조지러 가야지. 소주? 맥주? 1차는 가볍게 맥주만 조질까?”
“맥주 좋아요. 날도 더워졌는데 딱이다.”
민들레가 고개를 틀어 이쪽을 바라보았다. 그들의 말을 흘려듣고 있던 권호영은 뒤늦게 그 시선을 의식했다. 왜 그러냐는 듯 응시하니 민들레가 낭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호영이 너도 시간 되지? 우리랑 가는 거다?”
그녀는 이미 자신이 따라올 것이라고 생각하는 눈치였다. 윤재윤은 이미 인근의 맥줏집을 핸드폰으로 검색 중이었고. 권호영은 그들을 눈으로 훑다가 무심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저 약속 있어요.”
“뭐?”
“어?”
그 말에 두 사람의 시선이 단박에 이쪽에 꽂혔다. 둘 다 비등비등하게 놀란 토끼 눈이었다. 권호영은 왜 두 사람이 저런 반응인지 되레 의아해졌다. 그것에 대한 이유를 묻기도 전이었다.
“너 친구 우리밖에 없잖아.”
“…….”
“……너무 정곡이었나?”
윤재윤이 민들레의 팔을 툭 치곤 소리를 죽여 물었다. 민들레는 그를 보며 표정으로 대꾸했다. …조금?
“그래서 지금 매정하게 가겠다고? 진짜? 축하주도 안 먹고?”
“그래, 야. 서운하다. 우리 다 같이 고생했잖아.”
두 사람은 여느 때처럼 권호영을 가운데에 놓고 조르기 시작했다. 윤재윤은 그에게 어깨동무하고 귀에다가 연방 쫑알거렸고, 민들레는 소매를 잡고 이리저리 당겼다. 이렇게 귀찮게 굴면 권호영이 넘어와 준다는 걸 알고 있어서였다.
“…죄송해요. 제가 나중에 연락할게요.”
하지만 오늘의 권호영은 달랐다. 그는 몸을 뒤로 빼 둘 사이를 빠져나왔다. 미안해하면서도 앞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망설임이 없었다. 두 사람은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서로를 마주 보았다. 먼저 목소리를 키운 쪽은 윤재윤이었다.
“와, 권호영…. 애비는 너 그렇게 안 키웠다!”
“놔둬요. 진짜 중요한 약속인가 보지.”
등 뒤로 둘의 목소리가 차례대로 들려왔다. 권호영은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처럼 앞만 보고 걸었다. 머릿속에 안개가 자욱이 낀 듯이 한 사람의 얼굴이 그려졌다.
‘오늘이 시험 마지막 날이지?’
아침에 짧게 마주쳤던 얼굴은 나른한 빛에 감겨 있었다.
‘조심히 다녀와.’
…그래도 오늘은 푹 잔 것 같던데.
덜컹덜컹. 발밑으로 커다란 진동이 느껴졌다. 버스의 손잡이를 잡고 선 권호영은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대화창은 술김에 몸을 섞은 날을 끝으로 뚝 끊겨 있었다. 단여명이 집에서 같이 보자고 보내 준, 영화 정보가 담긴 사이트가 마지막 메시지였다.
그 전엔 가끔 메시지를 주고받았는데, 그날을 기점으로 둘 다 서로에게 연락하지 않았다. 권호영은 메시지 입력창에 손을 올렸다가 결국 핸드폰 화면을 껐다. 어디에 있는지는 집에 가 보면 알게 될 테다.
버스에서 내린 뒤 걸음이 점차 빨라졌다. 옆으로 휙휙 풍경이 지나쳤다. 어느새 뛰듯이 걷고 있는 줄도 모르고, 권호영은 서둘러 집으로 향했다.
익숙한 오피스텔 단지 내로 들어서는 건 금방이었다. 층수의 버튼을 누른 승강기는 8층에서 멈췄다. 손에 익은 패스워드를 누르고 도어록이 해제되는 소리를 듣자마자 문고리를 당겼다.
“…호영아.”
집 안에 있는 인영을 보고 걸음을 멈춘 순간이었다.
“숨을 왜 그렇게 거칠게 쉬어.”
권호영은 흠칫 제 몸 상태를 점검했다. 정말 입에서 가쁜 숨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다.
“뛰어왔어?”
바로 앞으로 다가온 단여명이 바람을 맞아 흐트러져 있던 앞머리를 뒤로 넘겨줬다. 너 땀났다. 그리 말하며 오물거리는 입술은 엷은 붉은색이었다.
단여명은 외출복을 입고 있었다. 짙은 회색 니트 카디건 속에 흰색 티셔츠, 그리고 검은색 면바지. 간편하지만, 단정해 보이는 차림새였다.
“…….”
하얀 얼굴을 내려다보며 권호영은 뒤늦게 민망함을 느꼈다. 그의 말대로 뭐가 급하다고 뛰어왔는지 모르겠다. 어차피 오늘 약속을 잡은 것은 변하지 않는데.
흉곽을 크게 부풀려 숨을 들이쉬자 숨소리가 한층 안정적으로 다잡혔다. 그를 지켜보던 단여명이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했다.
“우리 맛있는 거 먹으러 갈까?”
“소고기 좋아해? 구워 먹는 거.”
운전석에 몸을 실은 단여명이 차 문을 닫았다. 뒤따라 조수석에 올라탄 권호영도 안전벨트에 손을 올렸다.
“저 다 잘 먹어요.”
“다 잘 먹는다고?”
단여명이 안전벨트를 당기다가 말고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눈썹을 약간 내려트린 것이 어이없다는 표정 같았다. …생각해 보니 다 잘 먹는다고 말하기엔 그에게 못 먹는 음식을 많이 보여줬다. 콩나물, 시금치 무침, 김치. 그리고 갖가지의 매운 음식들.
“…너무 한국적인 음식만 아니면 돼요. 닭발 같은 거.”
“그래.”
그는 그제야 납득한 얼굴로 안전벨트를 맸다. 시동이 걸린 차가 오피스텔 단지를 벗어났다. 그러는 중에도 단여명은 입가에 실은 가느다란 미소를 지우지 않았다.
똑같은 차량 속에 섞여 도로를 달리던 차는 신호에 걸려 멈췄다. 창 안으로 들어온 해가 운전석까지 길게 드리워졌다. 눈부신 듯 눈살을 얕게 찡그린 단여명이 여전히 시선을 앞에 둔 채 말을 붙였다.
“혹시 몰라서 사람 없는 곳으로 예약해 뒀어.”
갸름한 턱이 살짝 옆으로 틀어졌다. 햇빛이 내려앉은 뺨이 눈결처럼 희게 빛났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좀 오지랖이 넓잖아.”
권호영은 그의 말뜻을 한 박자 늦게 이해했다. 길게 늘어트린 머리는 이제 귀밑까지 왔다. 그에 사람들은 자신의 머리에 대해 한 번씩 호기심을 보였다.
왜 머리를 기르고 다녀? 얼굴에 흉터가 있어? 그러고 다니면 안 불편해? 그 외 등등. 불편하고 성가신 관심들이었다.
“이제 한 달 됐나? 한국에서 지내보니까 어때. 미국이랑 많이 다르지.”
“많이 다르기는 해요. 아직 어려운 것도 많고.”
단여명은 제 말에 고개를 주억이나 싶더니 피식 웃었다. 왜 웃느냐는 듯 바라보니 그가 웃음을 갈무리하지 못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생각해 보니까 전에도 비슷한 걸 물어봤던 게 기억나서.”
비슷한 거? 기억을 곰곰이 되짚어 보다가 하나의 장면이 뇌리를 스쳤다. 식탁에 마주 앉아 같이 간장 볶음밥을 먹은 날. 그는 두 나라의 문화가 달라 대학 생활이 힘들지 않겠느냐고 물었었다. 그에 자신은 ‘괜찮아요’라고 답했다. 굉장히 성의 없는 목소리로.
“그때 너 엄청 낯가렸는데.”
핸들을 잡은 손이 부드럽게 커브를 돌렸다. 운전하는 것도 참 단여명 같다고 생각하며 권호영은 느릿하게 입술을 뗐다.
“그때는… 사정이 있었어요. 한국에 오고 싶어서 온 게 아니었거든요.”
작게 연 창 틈새로 선선한 바람이 살랑살랑 들어왔다. 창밖엔 따뜻한 날씨를 맞아 가벼운 옷차림으로 밖을 나선 사람들이 거리를 거닐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에서 선뜻 무거운 얘기를 꺼낼 수는 없었다.
“그래서 조금 비뚤어져 있었나?”
단여명은 언제나처럼 가볍게 웃었다. 더는 그에 대해 캐묻지도, 호기심을 비치지도 않았다. 권호영은 그게 가끔 고마웠다. 그래서 이번에도 표정이 이상하게 바뀌었나 보다.
“미안해하라고 한 소리 아니야. 그때보다 많이 친해졌구나 싶어서. 신기하기도 하고.”
“…….”
“난 네가 처음에 나 안 좋아하는 줄 알았거든.”
제 얼굴을 살핀 그가 나직한 목소리로 설명했다. 권호영은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한 번도 싫어한 적 없어요. …좀 불편한 쪽이었지.”
“불편했다고?”
단여명의 눈이 약간 크게 뜨였다. 예상외의 소리를 들었다는 반응은 아니었다. 어느 부분이 불편했는지 흥미를 드러내는 쪽이었지.
불편했던 이유야 많았다. 권호영은 처음에 단여명과 친하게 지낼 생각이 없었다. 집 앞에서 우연히 이웃 사람을 마주칠 때 그러하듯이 인사만 주고받는 사이로 지낼 생각이었다. 그러다 3개월이 지나 집에서 나가면 서로의 기억에서 잊히겠거니 했다.
단여명이 친하지 않은 사람을 대할 때 어느 정도의 호의를 보이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권호영은 그와 같이 살가운 사람이 아니었다.
어릴 때 이곳저곳 떠돌이 생활을 하느라 가까운 사람이라곤 오로지 가족뿐이었다. 처음 정착한 곳에서 친구가 된 대니얼과 사이가 틀어진 후 자신이 이해받지 못할 사람이란 걸 깨우쳤다.
어차피 한 가지 일에 치중하다 보면 친구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그에 언제부턴가 사람을 사귀어도 잠깐 어울렸다가 떠날 사람이라고 은연중 생각했고, 남들의 눈에 겉돌게 보이지 않을 만큼만 신경을 썼다.
생각보다 사람들은 타인에게 관심이 없었다. 권호영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단여명은 조금 달랐다. 일방적으로 밀어내든 말든 그는 사소한 안부를 묻고, 거듭 말을 붙였다. 부담스럽다고 쳐내지 못할 선에서 계속 신경을 써 주니 마음이 가면서도 껄끄러운 감정을 느꼈다.
원체 다정한 사람이니 그에겐 사소한 일일 수도 있었다. 같이 사는 사람과 적절한 친분을 유지하고자 약간의 노력을 기울인 걸지도 몰랐다.
“내가 불편하게 했어?”
…그래, 아마 그는 모를 것이다. 제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주변인에게 어떤 식으로 감정을 배제하며 지냈는지에 대해서.
그 사소한 호의를 외면하면서 마음이 흔들렸다. 도둑질하듯 훔쳐본 그의 책 속에서 소중한 사람을 생각하는 마음의 온도를 엿보았다. 결국 그것들이 제게 어떤 환상을 갖게 했는지.
“그런 건 아니고….”
단여명은 까마득히 모를 사실이었다.
“저보다 작은 사람이 먹을 걸 챙겨 주니까. 그래서 그랬나 봐요.”
그래서 권호영은 제일 표면적으로 드러났던 그의 행동을 언급했다. 단여명 역시도 그러려니 여길 거라고 생각하면서.
“음…….”
그러나 예상외로 단여명은 짧게 말을 흐렸다.
“…작나?”
혼잣말하더니 제게 한 번 눈을 맞췄고.
“그래, 작지. 너보다는.”
시선을 다시 정면으로 돌리며 어렴풋한 미소를 지었다. 그 웃음이 사실을 인정하는 듯하면서도 어딘가 씁쓸하게 보였다면 제 눈이 잘못된 걸까.
뺨을 쓸던 손등이 턱에 가만히 얹어졌다. 똑바른 눈길은 빨간불이 들어온 신호등에 머물렀다.
권호영은 단여명이 하는 양을 지켜보았다. 의도한 건 아니었지만, 제가 뱉은 말이 연장자로서의 어떤 자존심을 건드린 듯했다. 단여명은 자기가 더 나이가 많다고 강조할 때마다 딱 저렇게 난감해하는 표정을 지었다.
권호영은 다른 말을 덧붙일까 하다가 그만뒀다. 제가 나이는 더 어릴지 몰라도 단여명은 자신보다 체구도 작고, 손도 작고, 귀도 작았으니까. 권호영은 거짓말하는 것에 소질이 없었고, 작은 걸 보고 크다고 허투루 말하지 못했다.
30분가량을 달린 차가 정차한 곳은 어느 한옥 앞이었다. 산 중턱에 걸친 곳이어서 차 문을 열자마자 맑게 지저귀는 새소리가 들렸다.
가게 앞엔 커다란 느티나무가 들어서 있었다. 빽빽한 나뭇가지와 새파랗게 움튼 잎새 사이로 햇빛이 가늘게 들이비치고, 나부끼는 바람결을 따라 나무 그늘이 한들한들 춤췄다. 주차된 차량도 몇 없어 전체적으로 고즈넉한 분위기가 흐르는 곳이었다.
두 사람은 돌길을 밟아 기와를 얹은 토담을 지났다. 대청마루를 지나던 직원이 둘을 발견하고 친절하게 반겨 줬다. 단여명이 예약자 성명을 말하자 직원이 곧바로 하나의 방으로 안내했다.
천장에 굵직한 나무의 뼈대가 드러난 방 안엔 좌식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이미 밑반찬과 수저가 세팅돼 있었다. 커다랗게 트인 창밖에선 물소리가 들려왔다. 인근에 계곡물이 흐르는 듯했다.
직원은 불을 올리고 나가는 듯하더니 금방 고기를 올린 접시를 내왔다. 접시는 권호영 앞에 놓였다. 권호영은 거리낌 없이 집게를 들어 올렸다.
“고기 구워 본 적 있어?”
아니면 제가 하겠다는 소리였다. 권호영은 불의 세기를 확인했다. 그리고 선홍빛이 도는 소고기를 불판 위에 한 덩이 올렸다.
“삼겹살은 몇 번 구워 봤어요.”
“그래?”
저 표정을 보아하니 제가 다 태워 먹어도 상관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에 권호영은 열심히 고기를 구웠고.
“질겨서 더 맛있는 것 같아.”
“…….”
역시나 놀림받았다.
반짝거리는 눈동자엔 즐거운 빛이 여실했다. 저런 식으로 말할 걸 예상했던지라 권호영은 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말없이 그의 앞접시에 많이 익히지 않은 고기를 하나 놓아줄 뿐이었다.
보기와는 다르게 단여명은 은근 장난기가 많았다. 뺨을 찌르면 제가 당황해하는 걸 알고, 요즘 틈만 나면 뺨 여기저기를 건드리기 일쑤였다. 그때마다 권호영은 당황하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면서도 그 수작에 걸려들었다. 당황하지 않기에는 바로 앞에 보이는 얼굴이 너무…….
“…너무 질기면 뱉어요.”
고기를 입에 넣은 지 한참이 지났는데, 단여명은 입술을 오물거리기만 할 뿐 내용물을 삼키지 않았다. 그게 신경 쓰여 말을 꺼내니 그제야 꿀꺽 목울대를 움직인다. 아닌 척하지만, 여전히 자신을 놀리는 데 한창인 모습이다.
권호영은 말없이 티슈를 뽑아 단여명의 앞에 깔아 줬다. 애써 먹지 말고 거기다가 뱉으라는 뜻이었다.
“그러고 보니까 너 영어로 말하는 걸 한 번도 못 들어봤네.”
고기를 추가로 주문한 차에 단여명이 뜬금없는 말을 꺼냈다. 방금 한국어로 주문을 넣어 갑자기 그런 것이 궁금해진 모양이었다.
“아무튼 한국에 왔으니까…. 되도록 영어를 안 쓰려고 했어요. 한국인 사이에서 튀기도 싫고, 그편이 적응하기도 더 빠를 것 같아서.”
“집에선 한국어로 말했다고 했지?”
“네.”
“어머님이랑?”
그리 말하는 목소리는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얘기하듯 여상했다. 권호영은 얼굴을 들어 정면을 응시했다. 창 너머를 구경하던 단여명이 시선을 느끼고 눈을 맞춰왔다.
“나도 같아서. 우리 부모님 이혼했거든.”
까만 눈동자 속에 천연스러운 빛이 아롱졌다. 권호영은 그를 조용히 들여다보기만 했다. 일찍 짐작하고 있던 것이었기 때문이었다.
단여명은 같이 지내는 중에 본인의 아버지에 대한 얘기를 일절 꺼내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어머니가 해 줬던 얘기도 있었다. 자신들이 비슷한 환경에서 자랐다고. 그에 어쩌면 단여명도 아버지란 존재를 잊고 사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지금은 꽤 흔하게 보이는 것 같은데, 내가 어렸을 땐 이혼한 가정이 별로 없었어. 그래서 어릴 때 얼마나 괴롭힘받았는데. 아빠 없는 자식이라고.”
“…….”
“지금은 괜찮아졌으니까 하는 얘기야.”
단여명이 포슬포슬하게 잘 익은 계란찜을 한술 떠 올렸다. 작게 벌어진 입속으로 연노란색 계란찜이 쏙 들어갔다. 고기를 씹을 때와 달리 그는 입안에 있던 것을 금방 삼켰다.
“그래서 어떻게 했어요?”
권호영 또한 비슷한 경험이 있었다. 부모님이 이혼한 것보다 인종이 다른 것에 더 무게가 실렸지만.
서양인의 피가 섞였지만, 권호영은 피부가 하얗지 않았고 굵게 쌍꺼풀진 눈도 아니었다. 백인들과 체격만 비슷할 뿐 외모는 확연히 달랐기에 그들과 같이 있으면 그중 단연 튀었다.
동양인은 물론 흑인들도 몇 없던 도시였다. 그곳 사람들은 권호영을 은근 자신의 밑으로 생각했다. 대놓고 말하진 않았지만, 그런 인식을 가진 게 티가 났다. 그를 노골적으로 드러내며 시비를 걸었던 사람도 있었고.
“음…….”
언뜻 호기심이 섞인 목소리로 물으니 그가 눈동자를 슬쩍 옆으로 굴렸다. 대답하기 난처해하는가 싶더니 곧 장난스러운 웃음을 띠었다.
“적당히 혼내 줬어.”
단여명이 어깨를 으쓱이는 것과 동시에 노크 소리가 울렸다. 잠깐 실례한다는 말을 전한 직원이 문을 열고 들어와 고기를 올린 접시를 내려놓았다. 육질이 부드러워 보이는 소고기가 매끈하게 빛났다. 이번엔 단여명이 집게를 들었다. 불판 위에 올려진 선홍빛 고기가 지글거리는 소리를 냈다.
“너랑 이런 얘기 하는 건 처음이네. 혹시 불편했어?”
어렸던 그는 당시에 어떤 감정을 느꼈을까. 지금은 앳된 티가 나지 않는 얼굴은 태연자약하기만 했다. 그건 목소리 또한 같았다. 일시적인 떨림조차 없었고, 어떤 감정도 서려 있지 않았다.
“아니요.”
권호영은 고개를 저었다. 사실 이런 얘기가 나오면 내심 불편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생각보다 별다른 느낌이 들지 않았다. 이제 잊혀가는 아버지의 얼굴이 그립지도, 이미 떠나보낸 것들에 대한 미련도 생기지 않았다.
단지 지나온 과거를 회상하는 목소리. 그 평온한 목소리를 귀담아듣자니 자신 또한 그것에 동화되는 것만 같았다. 한때 아파했을 그의 과거와 어쩌면 자신의 과거 역시도.
“내가 산다니까.”
……분명 거기까지 분위기가 괜찮았던 것 같은데.
“제가 낼게요.”
권호영은 잠시나마 든 생각을 제치고, 닥친 상황에 집중했다. 절대 물러설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니 단여명도 지지 않고 철통같은 웃음을 보였다.
“학생이 무슨 돈이 있어.”
식사를 마치고 나온 두 사람은 계산대 앞에서 실랑이했다. 직원의 귀를 의식해 목소리를 죽였으나, 둘 다 손에서 카드를 놓지 않았다.
“모아놓은 돈 있어요.”
단여명은 그 말을 듣곤 한쪽 눈썹을 슬며시 치켜올렸다. 웃는 얼굴은 그대로 유지한 채였다. 그렇게 말해도 안 된다고. 얌전히 제 말을 들으라는 뜻으로 보였지만, 권호영도 이번만큼은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고기 네가 구웠잖아.”
“형이 운전했잖아요.”
“너 오늘 시험 끝났잖아. 축하한다는 의미로 산다는 건데?”
“…그래도요. 너무 많이 나왔어요. 이 정도 긁는다고 줄어들 돈 아니에요.”
“너무 많이 나왔다며. 그럼 호영이 너도 같은 입장 아니야?”
직원은 여전히 곤란한 웃음을 짓고는 자신들을 번갈아 보는 중이었다. 슬슬 어떻게 할지 정해 줬으면 하는 눈치였다.
“평소에 자주 사 줬잖아요. 이번엔 제가…….”
그 순간 카드를 쥔 손에 온기가 끼쳤다. 권호영은 말을 하다 말고 휙 소리가 나게 시선을 내렸다. 손등뼈만 간질이던 타인의 체온은 점차 영역을 넓혀 핏줄이 도드라진 손등을 감쌌다.
손등에 얹어진 하얀 손에는 어떤 힘도 실려 있지 않았다. 그러나 손가락 사이를 파고들듯이 맨살을 살짝 긁었다. 카운터 앞에 서 있는 직원에겐 보이지 않을 위치였다.
“…….”
순간 말문이 턱 막혔다. 어째서 술을 먹자던, 어느 밤의 목소리가 생각났는지 몰랐다. 가만히 있으니 단여명이 슬그머니 깍지를 잡아 끼웠다. 카드를 쥐고 있어 두 손이 완벽하게 맞물리진 않았으나, 다섯 손가락 사이사이로 그의 손가락이 파고들었다.
모든 감각이 한곳에 쏠리다시피 집중됐다. 그 손을 쳐내지도, 제 손을 빼내지도 못한 채 권호영은 멍하니 상대를 쳐다보았다. 매끄럽게 웃은 단여명이 고개를 돌려 앞을 응시했다.
“이 친구가 저보다 동생이라. 이해하시죠?”
그 말을 듣고 난 후에야 집 나간 정신이 되돌아오는 듯했다. 권호영은 얼빠진 표정을 가다듬었다.
“제 카드로 결제 부탁드려요.”
재빨리 앞을 살폈지만, 이미 늦은 후였다. 직원의 손엔 단여명의 카드가 들려 있었다.
“네, 하하….”
우애가 참 좋으시네요. 권호영의 표정을 애써 못 본 척한 직원이 단말기에 신용카드를 꽂으며 중얼댔다. 띠딕- 결제가 완료됐다는 기계음이 울리고, 단여명이 카드와 영수증을 함께 받아 들었다. 직원에게 감사 인사를 전하는 그의 목소리가 어떤 때보다 호쾌했다.
“호영아.”
“…….”
“삐쳤어?”
식당 앞, 느티나무 아래에 선 단여명은 연신 빙글빙글 웃었다. 손가락 사이에 담배를 끼운 그의 뒤로 물이 흐르는 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시원한 바람이 부니 하얀 초승달 같은 얼굴 위에 드리워진 나무 그늘이 일렁일렁 움직였다.
한가로운 모습을 보며 권호영은 불만스레 눈썹을 구겼다. 단여명과 열 걸음 정도 떨어진 벤치에 앉아서. 담배 냄새가 배니 여기 있으라며 그가 직접 지정해 준 자리였다.
“…그런 거 아니에요.”
평소에는 은근히 그러더니 이번엔 대놓고 애 취급이었다. 윤재윤도 제가 가장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이것저것 사 주곤 했다. 안 그러면 가오가 안 선다나. 권호영은 나이를 중시하는 한국 사회에 잠시 불만을 가졌다.
“그래도 형은 너랑 맛있는 거 먹어서 좋았는데.”
말다툼도 해보고. 그가 반대편으로 연기를 길게 뱉으며 말했다. 일직선으로 퍼져나간 담배 연기가 바람을 따라 흩날렸다.
‘…자기가 아쉬울 때만 형 소리.’
차마 뱉지 못할 말을 삼킨 권호영은 그가 유유자적하게 담배를 피우는 모습만 지켜보았다.
여기서 어떤 말을 해도 투정으로밖에 들리지 않을 걸 알았다. 자신은 그보다 어렸고, 그는 제가 어리다는 걸 아주 중요하게 생각했다. 말하는 투며 간혹 보이는 행동들이 정말 귀여운 동생이라도 대하는 듯했다.
그런 관심이 싫지는 않았다. 그렇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격차는 싫었다. 어떻게 해도 제가 쫓아가지 못할 것들. 금전적인 문제라든가, 자신을 대할 때의 여유라든가. …서로가 서로에게 보이는 관심의 정도라든가.
“나중에 취업하면 더 맛있는 거 사 줘.”
마지막 연기를 내뿜은 단여명이 발뒤꿈치로 담뱃불을 꺼트렸다. 천천히 제 앞으로 다가온 그가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여기보다 비싼 곳에서.”
그러더니 손가락으로 제 뺨을 꾹 찔렀다. 요즘 자주 치는 장난이었다. 조금 전에 손을 잡은 것보다 놀랄 일은 아니었다. 눈가를 살짝 움찔한 것 말고 별 반응을 보이지 않았는데도 그는 웃음을 거두지 않았다.
“그만 갈까?”
단여명이 한 걸음 앞으로 내디뎠다. 권호영은 느릿하게 벤치에서 일어섰다. 차를 주차해놓은 곳은 여기서 그리 멀지 않았다. 그렇게 나란히 발을 맞춰 걸으려던 중이었다.
“…….”
손바닥에 따스한 온기가 가득 들어찼다. 아까는 일부에 불가했다면 이번엔 손아귀 안에 온전히 잡혔다.
“아쉬워하는 것 같길래.”
대뜸 자신의 손을 잡은 단여명은 기분이 좋아 보이는 얼굴이었다. 권호영은 조용히 시선을 내렸다. 커다란 손 하나와 그보다 작은 손 하나가 겹쳐져 있었다. 핸들을 부드럽게 돌리거나, 보기 좋게 젓가락질을 하던 가느다랗고 하얀 손.
그를 보자 이상하게 가슴이 간지러워졌다. 마치 민들레 홀씨가 어지럽게 흩어져 마구 굴러다니는 것처럼. 간질간질한 홀씨는 기어코 크기를 부풀려 가슴 안쪽을 두드렸다. 쿵, 쿵, 쿵…. 평소에 모르고 살았던 심장의 펌프질이 온몸으로 느껴졌다. 여기 살아 숨 쉬고 있다는 듯 체내를 울리는 고동 소리가 급박해졌다.
적당한 말을 찾는 건 실패했지만, 아쉬웠던 건 맞았기에 권호영은 그 손을 더욱 세게 잡았다. 어느새 불만스러웠던 마음은 까마득히 잊은 채로.
저녁을 먹고 나오니 차츰 날이 어슴푸레해지기 시작했다. 차는 그로부터 30분은 더 도로 위를 내달렸다. 권호영은 가로등이 켜진 창밖의 풍경을 바라보다가 유리창에 비친 옆태를 보았다.
단여명은 앞으로 나아갈 생각을 않는 앞차를 바라보며 핸들을 톡톡 두드리고 있었다. 권호영은 그 반복적인 손짓을 지켜보다가 그에게 말을 걸었다.
“어디 가는 거예요?”
권호영은 길눈이 어두운 편이 아니었다. 처음엔 퇴근 시간대라 차가 막혀서 그렇겠거니 생각했다. 하지만 산을 빠져나온 뒤로 낯선 풍경만 눈에 들어왔다. 아마 예측건대 이 길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아니었다.
“우리 술 마시기로 했잖아.”
“…….”
“거기 야경이 엄청 예쁘거든.”
그가 말을 마치는 것과 동시에 앞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옅은 어둠 속 어렴풋이 웃던 얼굴이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권호영은 그의 시야 밖에서 고개를 주억이고 말았다. 겉으로는 아무렇지 않은 체했지만, 마음은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술을 마시자고 한 것이 정말 말 그대로의 의미였나? 하지만 그땐 전혀 그런 의미로 느껴지지 않았는데. 그날 이런저런 짓을 한 뒤에 말한 것이었다. 분위기라는 게 있으니 야릇한 착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 오늘 손도 잡았고…. 권호영은 티가 나지 않게 줄곧 노려보던 하얀 손에서 시선을 떼어냈다. 생각해 보니 그때 이후로 뺨을 찌르거나, 손을 잡은 것 말고는 사소한 스킨십이 전부였다.
물론 그와 야한 짓을 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오늘 같이 시간을 보낸 것만으로도 좋았으니까. 그렇지만 아주 만약에 그게 자신만의 착각이었다면…….
“…여기가 맞아요?”
권호영의 상념은 그리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미심쩍다는 듯 묻는 목소리에도 단여명은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응.”
“…….”
“안 내릴래?”
차가 정차한 곳은 어느 호텔의 앞이었다. 단여명은 얼떨떨한 반응을 보이는 권호영을 보며 웃음을 참는 표정을 지었다. 여기에 오기까지 제가 뭘 생각했는지 속을 꿰뚫어 본 사람처럼. 눈을 가느다랗게 좁힌 권호영은 다른 말 없이 차에서 내렸다.
호텔 출입구를 통과하자 사방이 널찍하게 트인 로비가 드러났다. 프런트에서 키를 받아 든 두 사람은 나란히 엘리베이터에 올라섰다. 단여명이 키의 번호를 확인하고, 층수의 버튼을 눌렀다. 곧 승강기가 흔들림 없이 고층으로 향하기 시작했다.
“호영아.”
옆 사람의 마음이 어떤지도 모르고, 단여명은 태연한 얼굴이었다.
“밑에 봐봐.”
단여명이 뒤쪽을 눈짓했다. 승강기의 사면이 유리창이어서 밖이 훤히 내다보였다. 권호영은 점점 작아지는 불빛들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정말 야경이 예쁘긴 할 것 같다고.
도착한 객실은 원룸이었지만, 패밀리 룸 못지않게 넓었다. 방의 측면엔 킹사이즈 침대가 놓여 있었고 한편에 마련된 부엌에는 2인용 식탁과 냉장고, 와인 셀러가 있었다. 커다란 TV 맞은편엔 패브릭 소파가, 그 옆으론 한 벽면이 유리로 된 창문이 보였다. 리넨 커튼 사이로 반짝이는 도시의 정경이 내려다보였다.
“먼저 씻을래?”
카디건을 벗어 소파에 내려놓은 단여명이 스스럼없이 물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권호영은 그 목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자기 집에 돌아온 사람처럼 어색함이 없었다.
“…형부터 씻으세요.”
알겠다고 대답한 단여명은 곧 욕실로 들어갔다. 뒤이어 흐르는 물소리가 들렸다. 권호영은 그가 옷을 벗어놓은 소파 위에 앉아 그 소리를 들었다. 벌써부터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 같아 뺨을 쓸어보았다. 예상대로 뜨끈뜨끈했다.
“호영아.”
몸을 씻고 나가 보니 단여명은 식탁에 앉아 있었다. 그의 양손엔 와인 두 병이 들려 있었다. 라벨을 들여다보고 있던 단여명이 인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돌렸다. 권호영은 천천히 그의 앞으로 다가갔다. 미처 닦지 못한 물기가 방바닥에 떨어져 발이 닿는 대로 동그란 궤적을 남겼다.
“너 술 어떤 거…….”
권호영은 고개를 숙여 단여명에게 입을 맞췄다.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놀랐는지 단여명이 입술을 살짝 안쪽으로 말았다.
입술을 붙인 채라 그가 눈을 깜빡이는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기다란 속눈썹이 제 속눈썹에 엉켜 간지럼을 태웠다. 권호영은 가만히 입술을 눌렀다가 떨어트렸다.
“…….”
“…….”
단여명은 조금 놀란 얼굴이었다. 이럴 줄 모르지 않았을 텐데.
아마 이렇게 되더라도 다른 것을 하다가 자리를 옮길 생각이었을 것이다. 술을 마시면서 같이 야경을 보고, 분위기에 취할 때쯤 자신을 침대로 이끌었을 꿍꿍이가 어렵지 않게 머리에 그려졌다.
하지만 권호영은 이미 이 입술이 무슨 감촉인지 알았다. 무슨 정신으로 씻었는지 기억도 불분명했다.
분명 단여명과 자극적인 걸 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단여명이 계속 야속하게 구니 참기 힘들어졌다. 은근한 의미를 던져 주면서도 모른 척 시치미를 떼니 애가 탔다. 그 의미를 해석하면서 혼자 초조해하고, 제가 틀렸다고 생각할 때쯤 아무렇지 않게 다시 손을 내밀어 준다.
가까이서 보이는 얼굴은 점점 발긋한 색으로 물드는 중이었다. 술 한 잔 먹지 않았는데 은은한 취기가 오른 것처럼 눈가와 뺨 부근이 유난히 불그스름했다.
이제야 보이는 것 같았다. 술을 먹자고 말하고, 오늘 이런 곳으로 데려온 이유가 무엇 때문인지. 지금에서야 명확하게 보였다.
“…야경은?”
눈치를 살피듯 까만 눈동자가 옆을 흘깃했다. 창문이 있는 방향이었다. 권호영은 고개를 살짝 틀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안 봐도 될 것 같아요.”
단여명의 눈동자가 다시 정면을 향했다. 권호영은 그와 똑바로 시선을 얽었다. 단여명이 눈을 피할 때도 줄곧 틀어지지 않았던 눈길이었다.
“…그래, 그럼.”
작은 목소리로 대답한 단여명이 뒷목에 손을 감았다. 권호영은 끌어당기는 힘에 얌전히 고개를 숙여 줬다. 다시 입술이 맞물렸다.
좁은 입속에서 한 쌍의 살덩이가 이리저리 뒤엉켰다. 미끈한 혀는 어떻게 비비고 문질러도 전면을 탐할 수 없었다. 제 혀가 움직일 만하면 단면에 착 들러붙어 축축한 몸뚱이를 비볐다. 자꾸 도망치듯 자극해오는 그의 혓바닥을 통째로 입안에 빨아들여 잘근잘근 씹고 싶었다. 오동통한 살덩이를 온전히 맛보고 싶은 붉은 욕망에 가슴이 절절 끓었다.
권호영은 애타는 감촉을 느끼면서도 급하게 굴지 말자고 끝없이 되뇌었다. 등골이 짜릿하게 달아오르다가 피부에 전율이 오르면 이성이 끊겼다. 뒤늦게 정신을 차리면 항상 그의 혀를 게걸스럽게 빨아대고 있었다. 그럼 단여명은 입을 크게 벌린 채 모자란 숨을 깔딱깔딱 들이마셨다.
권호영은 그의 혀를 부드럽게 얼러 주며 단여명을 침대 위에 눕혔다. 키스를 하면서 어설프게 매어져 있던 가운의 끈을 풀었다. 가운 사이로 손을 넣어 그 안을 쓰다듬으니 물기가 남은 보드라운 살결이 만져졌다. 응…, 하고 단여명이 입이 막힌 신음을 흘렸다.
그가 입안에서 혀를 움츠려 끈적하게 얽혀 있던 교접이 허물어졌다. 권호영은 입술을 떼어내곤 곧장 부드러운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얇은 살을 빨아들이며 옆구리부터 늑골까지 길게 쓸어 올리자 그가 어깨를 안쪽으로 말았다.
“간지러워….”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한 단여명이 권호영의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권호영은 목덜미의 살을 빨아들였다가 놓아줬다. 침대맡에 켜둔 불빛만이 주변을 밝히는 가운데 울긋불긋한 자국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권호영은 손바닥으로 갈비뼈를 쓸다가 엄지에 닿은 유두를 슬쩍 위로 밀어 올렸다. 위로 미는 움직임에 따라 돌기가 뾰족하게 도드라졌다. 그대로 둥글게 굴리니 조그마한 알갱이가 약간 단단해졌다. 단여명이 간지럽다는 말을 재차 뱉었다. 권호영은 유두를 아프지 않게 자극해 주며 시선을 더욱 아래로 내렸다.
단여명은 가운 안에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았다. 반쯤 선 성기가 그의 다리 사이에서 존재를 드러냈다.
…제 것이 예쁘다고 그랬었나. 권호영은 그 말을 상대에게 똑같이 되돌려주고 싶은 마음을 느꼈다. 같은 성별의 생식기를 입에 담을 생각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단여명의 것이라면 한 번쯤은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너도 벗어.”
뚫어져라 쳐다보는 시선이 부끄러운지 그가 슬쩍 허벅지를 좁혔다. 권호영은 잠시 망설이다가 팔을 교차해 웃옷을 벗었다.
한 번도 남의 앞에서 가운 차림을 보여준 적이 없었다. 그래서 가운을 걸치고 나온 단여명과 달리 자신은 안에 받쳐 입었던 반팔 티와 바지를 입고 욕실 밖을 나갔다. 옷을 전부 벗는 것 역시도 아직 많이 민망하여 손이 굼뜨게 움직였다.
권호영이 드로어즈만 남겨놓고 탈의하는 사이 단여명이 침대 옆 서랍을 뒤졌다. 다시 눈길을 올렸을 때 단여명의 손엔 투명한 용기가 들려 있었다. 미리 준비해 놓은 건지, 원래 저곳에 물건이 있다는 걸 알고 있는 건지. 권호영은 단여명의 손에서 투명한 용기를 가져갔다.
“오늘은 제가 하게 해 주세요.”
단여명이 의아한 눈을 보였다. 못 미더운 기색은 아니었다. 저번에 그에게 경험이 없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전엔 가만히 있더니 이번에 어째서 나서서 하겠다는 건지 궁금해하는 눈빛이었다.
권호영은 곤란한 표정을 숨기면서 적당히 둘러댈 말을 생각했다. 어떻게 말해야 할지 고민하길 몇 차례, 어떻게 말해도 미숙하게 들릴 것 같아 그냥 솔직하게 말하기로 했다.
“…공부했어요.”
“…….”
“…….”
짧은 적막이 자리했다. 단여명은 눈을 깜빡거리기만 할 뿐 대답이 없었다. 당황한 것 같기도 했고, 대답을 생각하는 중인 것 같기도 했다.
“응?”
의중을 알 수 없는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단여명이 곧 푸흐, 하고 커다란 웃음을 터트렸다. 웃음기만 띠고 있던 그의 눈꼬리가 시원스럽게 휘어졌다.
“공부?”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겠는지 단여명이 손등으로 입가를 가렸다. 한 손으로 가느다란 허리를 감싼 채여서 웃으면서 생기는 몸의 떨림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권호영은 조용히 용기의 뚜껑을 열었다. 질척한 젤을 손에 듬뿍 짜냈다.
“아, 미안. 왜 자꾸 웃음이….”
그러는 중에도 단여명은 웃기 바빴다. 권호영은 불만스러운 눈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어쩐지 분위기고 뭐고 다 망한 것 같다고 생각하며.
“아…. 아니, 무슨 공부?”
무릎에 손을 얹으니 그가 다리를 바깥쪽으로 벌려 줬다. 권호영은 그의 엉덩이 사이로 손을 내렸다. 오밀조밀하게 주름진 입구를 쓸어 보다가 손가락에 조금 힘을 줬다. 손가락 한 개까진 수월하게 삽입됐다. 한참을 웃던 단여명이 읏…, 하는 소리를 냈다.
“…아파요?”
단여명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그리고선.
“어디서?”
역시나 하던 질문을 계속했다. 삽입을 준비하는 중에도 긴장감이 일절 없어 보였다.
“뭘 보고 공부했는데? 형한테도 보여주면 안 돼?”
이쯤 지나면 놀림의 연장선이란 걸 알 수 있었다. 권호영은 그 말을 일체 무시하고 안을 조심히 더듬어나갔다. 뜨겁고 말랑거리는 점막이 손가락이 움직이는 족족 차지게 달라붙었다. 손가락을 살짝 빼냈다가 집어넣으니 무른 속살이 틈을 벌리다가도 속을 꽉 다물었다.
아랫도리가 뻐근히 저려와 권호영은 미약하게 인상을 썼다. 만져지는 건 상대방인데, 어째서 자꾸만 제 숨이 달뜨는지 모르겠다. 권호영은 머릿속에 넣어둔 정보를 차곡차곡 꺼냈다. 구멍 속에 삽입한 손가락을 배꼽 쪽으로 겨냥한 채 꾹꾹 눌러 보기 시작했다.
“아니…. 나쁜 뜻은 없었어.”
그런 권호영과 달리 단여명은 여전히 행위에 집중하지 못했다.
“혹시 잘못 알고 있으면 아니라고 말해 주려고 그러지.”
언뜻 신이 난 목소리로 그는 종알종알 말을 늘어놨다. 권호영은 대답하지 않았다. 의학 사이트까지 꼼꼼하게 뒤진 걸 그가 알 리 없을 테니까.
“…형.”
그런데 계속 듣고 있자니 약간 심기가 비틀렸다. 처음 몸을 겹쳤던 날, 그가 제 아래에서 어떻게 울면서 느꼈는지 단 한시도 잊지 않았다. 심지어 전부 삽입하기도 전에 그는 한 번 사정했다. 정작 자신은 성기가 두 동강이 날 듯한 고통을 느끼는 중이었는데도.
몇 번 움직이지 않았을 때도 그는 또 절정에 달했다. 그때는 좋아서 울기 바빴으면서 지금은 웃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게 어떤 심리를 자극했는지 모르나, 조금 분해졌다.
“저 사실 그날 안 자고 있었어요.”
다른 건 몰라도 권호영은 하나의 사실만큼은 알았다. 항상 여유가 넘치는 그를 침대 위에서라면 무너트릴 수 있다는 걸.
“…그날?”
예사롭지 않은 얘기에 단여명은 웃음을 멈추고 시선을 내렸다. 권호영의 눈은 동그란 엉덩이 사이에 꽂혀 있었다. 내벽의 위쪽을 누를 때마다 반사적으로 사이를 꾹 오므렸다가 흐물흐물 풀어지는 주름의 형태를 눈으로 집요히 더듬고 있었다.
“형이 어디를 가는 것 같아서 따라갔는데….”
“…….”
“소리를 들었어요.”
권호영이 시선을 들었다. 두 사람의 눈이 한 치의 오차 없이 공중에서 들어맞았다. 곧 숨죽인 목소리가 물음을 던졌다.
“…그 안에서 무슨 상상 했어요?”
단여명은 무언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뒤이어 눈을 커다랗게 떴다. 이번엔 정말 놀란 눈이 맞았다. 어쩌면 충격을 받은 것에 가까워 보이기도 했고.
권호영은 말없이 그의 표정 변화를 지켜봤다. 제게 상반신을 내준 그날, 단여명은 이후에 조용히 자리를 비웠다. 그동안 추측에 가까웠던 것이었다. 그렇지만 권호영은 그 눈을 보며 확신했다. 화장실 안에 들어가 자신을 생각하며 자위한 게 맞구나.
“너 자는 척……!”
권호영은 경악하는 목소리를 들으며 속으로 대답했다. 형이 옆에 있는데 어떻게 편히 잠들 수 있겠어요.
“…아!”
어김없이 배꼽 부근의 어딘가를 눌렀을 때였다. 손가락을 문 내벽이 순간적으로 콱 조여들었다. 수축과 이완을 간헐적으로 반복하더니 손가락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취약점을 잘못 찔린 사람처럼 단여명이 무릎을 퍼뜩 안쪽으로 접었다.
단여명은 눈을 휘둥그레 뜬 채 속눈썹을 파르르 떨었다. 얼떨떨해 보이는 기색이었지만, 좀 전까지와 확연히 다른 반응이었다. …여긴가? 권호영은 방금 자극을 가했던 점막을 꾹 누르다가 손가락을 딱 붙인 채 지그시 비벼 올렸다. 언젠가 가느다란 손이 자신이 태우던 담뱃불을 비벼 껐을 때처럼.
“아, 으읍…!”
단여명은 단번에 웃음기를 잃었다. 웃음을 가리려던 손은 이제 소리를 참으려고 입가를 틀어막았다. 반쯤 발기했던 성기가 더욱 뚜렷한 모양을 갖췄다. 슬금슬금 기둥을 곧추세우더니 힘줄도 제법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자신과 똑같은 남성의 생식기인데도 제 것과 크기도 모양도 많이 달랐다.
권호영은 건반을 두드리듯 그 지점을 눌러 주며 상대의 반응을 세밀히 관찰했다. 평온했던 숨소리가 가쁘게 변하더니 피부색이 전체적으로 붉은빛을 띠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하나하나 뇌리에 담을 때마다 권호영 역시도 흥분이 급격히 고조되는 것을 느꼈다. 손가락을 전부 넣고 그 지점만 두드려 주면 구멍이 자연히 사이를 벌름거리면서 공간을 넓혔다. 단순히 손가락을 삽입하고 느끼는 지점을 눌러 주는 것보다 피스톤질하면서 긁듯이 찔러 주는 게 반응이 더욱 열렬했다.
권호영은 그의 뒤를 넓히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자꾸만 손길이 난폭해지려고 했다. 구멍을 쑤셔 줄 때마다 움찔거리는 하얀 몸을 보고 있노라면, 그의 몸속을 쉼 없이 탐했던 밤이 생각나 하반신에 피가 몰렸다. 권호영은 검지 옆에 중지를 붙여 구멍 속으로 조심히 밀어 넣었다. 조금 버거워하는가 싶던 구멍이 곧 두 손가락을 저항 없이 집어삼켰다.
그렇게 세 개쯤 넣었을까.
“아, 그만, 그만 넣어 줘…. 응?”
단여명이 엉덩이를 들썩이며 보챘다. 자지에서 흐른 전립선액이 배꼽 안에 흥건히 고여 그가 바르작댈 때마다 넘칠 듯 찰랑댔다. 맑은 물이 고인 작은 웅덩이를 노려보듯 응시하던 권호영은 이성을 붙들고자 억지로 시선을 떼어냈다.
“저번에 아파서 울었잖아요.”
…미치겠네. 제가 어떻게 참고 있는지 안다면 그는 저런 말을 해선 안 됐다. 정작 이쪽은 아무런 자극도 받지 않았는데, 열이 올라 눈알이 터질 지경이었다. 권호영은 몇 번째인지 모를 심호흡을 하고는 차분히 말했다.
“아래를 잘 풀어줘야 된다고 했어요.”
“윽, 으으…….”
그 말에 단여명은 고개를 저었다. 부족하다는 듯이 구멍을 넓히느라 바쁜 권호영의 손을 잡아끌기도 했다. 권호영은 그 손에 깍지를 끼워 주고는 다시 느릿한 피스톤질을 재개했다. 간간이 좋은 곳을 찔러 주는 것도 잊지 않으며.
“아, 아아…!”
단여명의 신음이 유독 커질 때면 권호영은 엉뚱한 곳을 찌르며 뒷구멍을 벌렸다. 권호영 나름에선 나중에 힘들어할까 봐 배려해 주는 것이었다. 그는 아무 배려 없이 성기를 박아도 정액을 픽픽 쌌고, 종국엔 쌀 게 없어서 침대에 실례까지 저질렀었다.
하지만 그 행동이 반복되니 자극을 당하는 입장으로선 여간 애타는 것이 아니었다. 절정에 달할 만하면 뚝 끊기는 쾌락에 단여명은 엉덩이를 시트에 비볐다가 허리를 공중에 띄우며 혼자 난리를 피웠다.
느린 추삽질이 머리꼭지까지 차오른 흥분에 따라가지 못했다. 처음 몇 번은 참을 만했지만, 거듭 쾌락에 녹아나게 하다가 야멸차게 자극을 거두니 악의적인 행동으로 의심될 정도였다. 전신이 공중으로 붕 뜨는 것 같다가 다시 침대 위로 추락하길 반복했다. 애끓는 마음에 벌써 눈물이 나려고 했다.
“형, 조금만 참아요.”
권호영은 엉덩이를 두드려 주며 단여명을 달랬다. 단여명은 그런 권호영이 야속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냐, 흣, 세게 해 줘, 세게 박아 줘….”
“…세게?”
“으응….”
“얼마나?”
단여명은 대답이 없었다. 아마 좋을 대로 해 달라는 뜻 같았다.
…저번에도 시작 전에 한 번 쌌으니까 괜찮겠지. 권호영은 깊은 한숨을 누르고, 깍지를 끼웠던 손을 놓았다. 늘씬한 허벅지를 위로 바짝 밀어 올려 뒤를 격렬하게 쑤셔 줄 준비를 마쳤다. 세 개의 손가락을 문 진분홍색 주름도 공격받을 채비를 마쳤다는 양 연신 발름거렸다.
“아프면 말해 줘야 돼요.”
쯜걱, 척, 쩍. 부드럽게 왕복하던 피스톤질의 속도가 점차 빨라졌다. 점성이 높은 젤이 점막 사이마다 고루 펴 발려 안을 긁듯이 자극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다. 몇 번 내벽 사이를 강하게 벌리니 손가락이 미끄러지듯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흐으, 읍! 응…! 아, 아, 아아!”
권호영은 팔뚝에 힘줄이 두껍게 솟아오를 정도로 안쪽을 격하게 쑤셨다. 손가락이 빠르게 출납할 때마다 투명한 젤이 사방으로 분산돼 시트를 더럽혔다.
단여명의 얼굴엔 고통의 기미가 엿보이지 않았다. 눈썹이 약간 찡그려져 있었지만, 뺨이며 귓가며 새빨갛게 물들어 있었다. 쾌감이 혈관을 타고 온몸에 속속히 뻗쳐가는지 전신 자체가 붉은빛을 띠기 시작했다. 무릎 안쪽에 고인 구슬진 땀이 뽀얀 허벅지의 안쪽을 타고 흘러내렸다.
권호영은 눈살을 찡그렸다. 쾌감에 흐무러져가는 얼굴은 지독히도 야했다. 질끈 감겼다가 힘겹게 뜨이는 눈꺼풀이 파들파들 경련했다. 물기가 도는 먹색 눈동자와 촘촘한 속눈썹의 날갯짓이 몹시도 자극적이었다. 권호영은 뭉뚝하게 내벽을 긁기만 하던 손놀림을 바꿨다. 세 손가락을 뾰족하게 모아 내벽의 한 부근을 겨냥해 힘껏 찔러 넣었다.
“……! 헉…!”
내벽이 움푹 파일 정도의 세기로 민감한 지점이 짓눌렸다. 단여명의 가슴팍이 퍼뜩 위로 솟았다. 와락 제 성기를 움켜쥔 그는 후으, 흐…! 하며 밭은 숨을 몰아쉬었다. 벌벌 떨리는 허벅지 사이로 악력에 의해 더욱 새빨갛게 피가 쏠린 성기가 보였다. 옴칠대던 조그마한 구멍이 울컥 전립선액을 게워냈다. 맑은 액이 기둥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려 흰 손가락을 적셨다.
…사정할 뻔한 건가. 권호영은 일련의 행동을 관찰했다. 눈으론 그의 반응을 살피며 손으론 전립선을 압박한 상태 그대로 둥그렇게 문질러 보았다.
“으응, 핫…! 아으응!”
말캉한 점막은 손끝에 힘을 주는 대로 차진 반죽처럼 밀려났다. 손가락을 오물오물 씹던 구멍에 잔물결이 일었다. 허리를 배배 꼬던 단여명이 다급히 손을 아래로 뻗으려고 허우적댔다. 쾌감이 너무 극심해서 말리려는 행동인지, 아니면 더 해 달라는 건지 모를 손짓이었다.
하지만 제게 닿고 싶다는 움직임은 명확해 보였다. 그 별거 아닌 손짓에 권호영은 순간 점멸하는 정신을 느꼈다. 권호영은 곧장 상체를 수그려 단여명의 입안에 혀를 밀어 넣었다. 키스하지 않고는 참지 못할 것 같았다.
“우음, 흐…! 우, 읏, 으응!”
혀를 섞는 도중에도 뒤를 쑤시는 행위는 계속됐다. 구멍에 손가락을 빠르게 넣었다가 빼고 별안간 깊게 쑤셔 박은 채 안을 휘저어줬다. 휘핑크림을 치듯 내벽을 빠르게 쳐주자 그가 ‘응, 하악…!’ 하고 엉덩이를 바르작댔다.
만지는 족족 반응을 돌려주니 자극을 주는 행위에 더욱 전념하게 됐다. 느끼는 지점에 손가락을 딱 붙이고 손목을 털어 진동을 가해 주니 구멍이 되새김질하듯이 손가락을 꾹 물어 당겼다가 잘근잘근 깨물었다.
쾌락에 약한 몸은 아래에서 느껴지는 자극이 강해질 때면 키스에 집중하지 못했다. 제 혓바닥에 어설프게 혀를 비비다가도 자지러지는 곳을 찔러 주면 신음을 토해내기 바빴다. 권호영은 제 입안을 울리는 콧소리를 들으며 내벽의 한 부근만 집요히 괴롭혔다. 다시 전립선을 강하게 압박한 채 구둣발로 지르밟듯 꾹 비벼 올렸을 때였다. 품속에 들인 몸이 침대에 파묻힐 것처럼 동그랗게 말렸다.
“으! 흐으, 응…!”
단여명이 허리를 안쪽으로 굽혔다가 위로 휘더니 전신을 파득파득 경련했다. 맞닿은 상체에 걸쭉한 액체가 튀었다. 권호영은 제 복부에 번진 따뜻한 정액을 느끼곤 단여명의 아랫입술을 쭉 물어 당겼다가 놓아줬다. 그리고 자연스러운 수순처럼 그의 귓불을 입안에 머금었다. 그때까지도 단여명은 호흡을 가다듬기 여념이 없었다.
권호영은 그가 여운을 가라앉히기를 기다리며 보드라운 귓불을 질겅였다. 말랑한 살점에 아프지 않게 이를 박으며 자신의 흥분 또한 가라앉혔다. 연신 손가락을 물어 당기던 괄약근이 서서히 수축력을 줄였다. 권호영은 구멍에 힘이 빠진 틈을 타 손가락을 하나 더 밀어 넣었다.
아래를 넓히는 작업은 그 후에도 지루하리만치 지속됐다. 단여명이 절정의 여파를 꺼트리고, 다시 발기를 마쳤을 때까지 길고 긴 전희는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얼마나… 읏, 넣었어…?”
단여명이 약간 진이 빠진 목소리로 물었다. 권호영은 귓바퀴의 선을 따라 혀끝을 문지르다가 한 박자 늦게 대답했다.
“이제 네 개요.”
그리고 단여명의 귀에 입술을 비비곤 상체를 일으켜 세웠다.
“아직 덜 풀린 것 같은데. 하나만 더 넣을게요.”
“응…?”
단여명이 그 말을 미처 이해하기도 전이었다. 네 개의 손가락을 삼키고 있던 뒷구멍이 더욱 빠듯하게 벌어졌다. 허억…! 단여명은 턱을 아래로 당긴 채 헛숨을 토해냈다. 그의 손이 장시간 드나든 탓에 뻑뻑한 감은 없었지만, 부담감은 있었다. 권호영의 손은 어지간한 성인 남자의 손보다 더욱 커다랬다.
“누가 손가락을… 다섯 개까지, 넣어….”
단여명이 체념이 섞인 목소리를 잇새로 흘렸다. 이제 그만 넣어 줬으면 좋겠다고 생각한 게 수십 번째였다. 그런데 그는 아직도 물건을 넣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러다 머릿속에 혹여나 하는 불길한 생각이 떠올랐다. 설마 주먹을 넣겠다고 하진 않겠지…? 손가락 다섯 개를 넣고도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면 그다음 단계로 넘어간다고 할까 봐 불안했다. 권호영은 성적 지식이 거의 전무해 보였고, 일반적인 섹스에서 그쳐야 할 선을 모를 가능성이 다분했다. 손가락 전부를 넣은 다음에 남는 건 주먹밖에 없었다.
“충분히, 읏, 풀렸어…. 그만, 그만 넣어 줘….”
대체 언제까지 손장난만 친다는 건지 모르겠어 단여명은 불안감을 느끼는 한편 애를 끓였다. 애타는 마음도 몰라주고 권호영은 다섯 손가락으로 내벽을 문지르기 시작했다. 구멍이 손가락 다섯 개를 매끄럽게 받아들일 때쯤 그는 봉긋한 엉덩이가 천장을 향하도록 허리를 위로 밀어 올렸다. 그리고 손을 깊이 삽입한 채 손가락 사이를 벌려 좁은 틈새를 활짝 벌렸다.
“으, 앗……!”
딸깍, 용기의 뚜껑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뒷구멍 속으로 차가운 젤이 줄줄 쏟아졌다. 허공에서 수직으로 떨어진 투명한 윤활제가 선홍빛 속살 위를 도포하듯이 도톰하게 퍼부어졌다. 깜짝 놀란 구멍이 열린 틈을 좁히겠다고 벌름댔다. 그러나 개구기처럼 구멍을 벌리고 있는 단단한 손가락 때문에 차가운 액을 고스란히 안쪽에 담을 수밖에 없었다.
“아, 잠깐…!”
“차가웠어요?”
깜짝 놀란 단여명이 허공에 뜬 다리를 버둥거리자 권호영이 엉덩이를 도닥여 줬다.
“…미안해요. 이게 더 잘 들어갈 것 같아서.”
젤이 깊은 안쪽까지 들어간 걸 확인한 권호영은 손가락 사이를 좁혀 구멍을 닫았다. 그리고 손을 깊숙하게 넣었다가 빼며 한곳에 뭉쳐 있던 젤을 점막 사이마다 고루고루 펴 발랐다. 안팎으로 젤이 발린 구멍은 반들반들하게 젖은 채 두꺼운 손가락을 미끄럽게 받아 삼켰다.
“아, 으…!”
“이렇게 하면 계속 밖으로 새어 나가니까….”
손가락을 뽑아내는 움직임에 맞춰 얇게 펼쳐진 주름 사이로 끈적한 젤이 뭉텅이로 흘러나왔다. 권호영은 젤이 새어나가지 않게 그의 엉덩이를 더욱 위로 치켜세워 준 뒤에 몇 번이나 손을 깊숙하게 파묻었다. 피스톤질할 때마다 손등에 돋은 관절이 입구에 턱턱 부딪치길 반복했다.
“으, 흐…….”
단여명은 약간 지쳐 보였다. 좋았다가 말았다가 하는 애무를 오래 지속했으니 진이 빠질 만도 했다. 권호영은 일직선으로 찌르던 손놀림을 바꿔 배꼽 부근을 더듬었다. 계속 비비고 문질렀던 부위가 소담하게 부어오른 것이 손끝에서 만져졌다.
젖꼭지나 성기가 솟아오른 것처럼 끊임없는 자극으로 인해 부푼 걸 테지만, 그게 괜스레 그의 흥분치를 나타내는 것만 같았다. 그걸 공 굴리듯 둥그렇게 굴리자 단여명이 급한 숨을 헐떡거렸다.
“아! 그만, 흑, 그만…!”
그만, 넣어……. 울음기가 섞인 목소리가 애달프게 말했다. 울긋불긋한 몸은 땀으로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한 번 토정을 마쳤음에도 다시 빳빳하게 기립한 자지가 얄팍한 뱃가죽을 통통 두드렸다.
권호영은 그를 눈으로 훑다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구멍 깊숙한 곳을 들쑤시는 제 손이며 매끄럽게 빠진 둔덕의 골이며 죄다 미끄러운 젤로 번들번들 빛나고 있었다.
…이쯤 하면 괜찮겠지. 권호영은 조심히 손가락을 뽑아냈다. 뜨거운 탕에 오랫동안 손이라도 담근 것처럼 지문이 퉁퉁 불어 있었다.
옷이 부스럭대는 소리에 단여명이 눈을 내렸다. 권호영이 몸에 걸치고 있던 마지막 옷가지를 벗었다. 그가 드로어즈를 허벅지에 걸치자 묵직한 살덩이가 허공에 퉁- 튕겨 올랐다.
거대한 성기는 약간의 자극이라도 받으면 금세 허연 좆물을 터트릴 듯 팽팽하게 부풀어 있었다. 한계까지 피가 몰려 평소보다 벌그죽죽한 빛깔이었다. 그곳에서 뿜어 나오는 열기에 공기 중에 아지랑이라도 피어오를 성싶었다.
“넣을게요.”
눅진하게 풀린 입구에 귀두를 맞춘 권호영이 천천히 성기를 삽입했다. 뜨겁고 축축한 점막이 좆에 미끄덩하게 휘감겼다. 티가 나지 않게 어금니를 깨문 권호영은 손으로 단여명의 허리를 감쌌다. 땀이 맺힌 피부를 부드럽게 쓸며 더욱 안쪽으로 성기를 밀어 넣었다.
손가락으로 넓힌 부근까진 수월하게 들어가는 것 같았으나, 더욱 깊게 결합하려면 허릿심으로 욱여넣어야 할 듯싶었다. 좆 끄트머리가 점점 빠듯하게 죄이는 느낌에 권호영은 눈길을 올려 상대를 살폈다.
“아파요?”
“아니…. 더, 더 들어와도 돼.”
오랫동안 공들인 탓인지 단여명은 마냥 아파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아래를 조이는 힘도 저번처럼 억세지 않았다. 권호영은 허리를 써 성기를 조금 더 밀어 넣었다. 비좁았던 내부가 거대한 부피에 짓눌리다시피 벌어지며 천천히 길을 트기 시작했다.
“너 진짜… 하으. 너무 커….”
기둥의 반절을 삽입했을 때쯤 단여명의 입에서 앓는 소리가 터졌다. 고통을 느끼는지 더 들어오면 안 된다는 양 허벅지를 좁혔다가 애써 의식하고 활짝 벌리기를 반복했다.
“…죄송해요.”
권호영은 고개를 숙여 단여명의 뺨에 입술을 묻었다. 등줄기를 타고 땀이 흐르는 감촉이 간지러웠다. 자꾸만 숨이 가빠지고 머릿속이 텅 비워지려고 했다.
커다란 성기에 짓눌려 반강제적으로 기둥에 찰싹 달라붙은 내벽이 숨을 갈구하는 것처럼 빠르게 개폐했다. 그 속살의 감촉이 너무 무르고도 연약해 아무 생각 없이 허리를 처박고 싶었다. 권호영은 몇 번째인지 모를 강렬한 욕망을 참아내며 보드라운 뺨에 입술을 눌렀다.
“천천히 움직일게요.”
성기를 빼냈다가 조금씩 밀어 넣는 더딘 피스톤질이 반복됐다. 벌어지지 않을 것 같았던 안쪽이 커다란 부피에 밀려나 차근차근 통로를 열었다.
권호영은 내벽의 잔떨림이 느껴질 때마다 성기를 더욱 깊숙이 삽입했다. 젤을 아낌없이 사용한 덕에 한번 자리를 터놓으면 귀두가 공간을 넓혀놓은 곳까지 미끄러지듯 파묻혔다. 단여명은 간혹 헛숨을 들이키긴 했지만, 그만하라는 말은 하지 않았다.
손가락 두 마디 정도를 남겨놓고, 좆을 전부 삽입했을 때쯤 권호영은 허리를 앞뒤로 움직였다. 공들여 수작업하듯이 단단한 좆 끝으로 내벽을 부드러이 갈고 닦았다.
육중한 부피에 짓눌려 바짝 굳어 있기만 하던 구멍이 얼러 주는 듯한 추삽질에 녹진하게 풀리기 시작했다. 성기가 안쪽을 가득 치고 빠질 때마다 그마저 버겁다는 양 젤을 질금질금 뱉었지만, 제법 안정적으로 좆을 받아 물게 되었다.
“아, 너무 커서… 안에, 읏…! 눌려….”
단여명이 어깨를 바짝 움츠린 채 말했다. 권호영은 허리를 숙여 서로의 상체를 맞댔다. 한 손으론 둥그런 어깨를 잡고 반대 손으론 그의 몸에 체중을 싣지 않도록 침대보를 짚었다. 얼굴 간의 거리가 가까워지니 서로에게서 터지는 더운 숨결이 한층 뜨겁게 피부를 간질였다.
“…어디가요.”
“아…! 으읏!”
“제가 손으로, 후우… 눌러 줬던, 곳이요?”
길을 터놓은 곳까지 단번에 성기를 박자 단여명이 추위를 타는 사람처럼 턱을 바르르 떨었다. 그리고 제 눈을 보며 느릿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까만 눈망울엔 벌써 눈물이 고여 있었다. 권호영은 그를 보며 속으로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천천히, 급하지 않게….
“아, 좋아. 호영아…. 나 소리, 응, 못 참겠어….”
권호영의 뒷목을 와락 끌어안은 단여명이 그의 귓가에 목소리를 흘렸다. 온통 흥분한 숨소리가 뒤섞여 정갈하지 못한 목소리였다. 제 목덜미에 비벼진 귓바퀴에서 뜨끈뜨끈한 체열이 느껴졌다.
“참지 말고, 내요.”
권호영은 품속에 안겨오는 몸을 마주 끌어안아 줬다. 둥그런 엉덩이에 치골이 부딪치게끔 허리를 계속해서 놀렸다.
“아, 흐! 으응, 아…!”
“나도 소리, 하아… 못 참을 것 같으니까….”
한참을 내달린 사람처럼 숨이 모자랐다. 권호영은 틈틈이 입술을 짓씹어 멀어지려는 이성을 붙잡았다. 단여명의 몸속은 몇 번이나 부딪쳤던 그의 입술보다 말랑했다. 일자로 박아 넣거나 둥글게 휘젓는 그대로 쫀득한 점막이 성기 전면에 달라붙었다.
차진 밀가루 반죽처럼 끈끈한데 물기가 많아 아래를 놀릴 때마다 치덕치덕 소리가 났다. 그 추접스러운 소리가 귀에 잡힐 때면 구멍이 아래를 물어 당겨 더한 움직임을 재촉했다.
땀 냄새가 섞인 달큼한 살 내음이 후각을 자극했다. 권호영은 허릿짓의 속도를 높였다. 빳빳한 깃털이 등골을 훑는 것만 같았다. 깃털로 피부를 간질이다가 깃가지가 세게 박히면 정전기와도 같은 감각이 튀어 땀이 흐르는 등줄기를 지졌다.
“아! 아흐, 응…! 으, 흐으, 아, 아!”
연이어 성기를 처박기 여러 번, 단여명이 정신없이 헐떡거리더니 숨넘어가는 소리를 뱉었다. 구멍 속에서만 느껴지던 떨림이 삽시간에 그의 전신을 장악했다. 뒤를 쑤실 때마다 맨살에 비벼지던 단여명의 성기가 흰 정액을 쏘아냈다.
“하아, 후….”
권호영은 천천히 추삽질의 속도를 늦췄다. 절정의 여파로 저들끼리 엉겨 붙으려는 점막을 성기로 부드럽게 갈라 주며 줄곧 시야에 들어오던 유두를 한입에 머금었다.
제법 힘 있게 빠는데도 단여명은 아파하지 않았다. 흑, 흐으아…!, 하고 비명을 닮은 신음을 내지르더니 권호영의 뒤통수를 눌러 가슴팍에 더욱 붙였다. 날카로운 선을 자랑하던 코끝이 내리누르는 힘에 뭉개졌다.
무어라 욕하는 거친 목소리가 귓전을 스친 것도 같았다. 하지만 단여명은 그 소리를 듣지 못했다. 권호영이 이를 세워 젖부리를 콱 물어뜯었기 때문이었다.
“힉! 으응, 으…!”
쭙, 춥, 추읍. 유륜을 한 뭉텅이 문 권호영은 얄팍하게 잡히는 살점을 강하게 빨아올렸다. 젖부리를 치아로 잘근잘근 물어뜯다가 이에 씹혀 도도록하게 솟은 유두를 혀끝으로 세게 뭉그러트렸다. 단여명의 가슴팍에 뜨뜻한 콧김이 연달아 퍼부어졌다. 그 숨결이 심장 박동을 더욱 빠르게 재촉하는 것만 같아 단여명은 턱을 젖힌 채 흐느꼈다.
한참 씨근덕거리며 가슴을 빨던 권호영이 허리를 한 번 푹! 쳐올렸다. 절정의 여진과 유두를 질겅이는 쾌락이 분간 없이 합쳐진 내벽이 성기를 콱 물어뜯었다가 손빨래하듯 주물거리길 반복했다. 연동하는 내벽의 뒤틀림만으로 권호영은 첫 번째 사정에 달했다.
“아, 으으…!”
갓 데워 김이 펄펄 끓는 스튜처럼 눅진한 좆물이 배 속에 퍼부어졌다. 열기만 가득 고여 허했던 구멍 속이 질척하게 눌어붙는 액으로 흠뻑 젖었다.
단여명은 반사적으로 엉덩이를 바짝 조였다. 구멍이 더한 허기를 채우겠다고 굵은 살기둥을 쭉쭉 빨아댔다. 부드러운 속살에 파묻힌 성기는 쥐어짜 내는 움직임에 맞춰 한참을 토정했다. 힘줄을 꿈틀거리며 한 방울도 남기지 않고, 내밀한 안쪽에 고스란히 싸 주었다.
“좋아…! 으응, 헉…! 너무, 좋아….”
두꺼운 허리통에 허벅지를 감으니 권호영이 잇자국이 박힌 유두를 혀로 유순하게 핥아 주었다. 새끼를 핥아 주는 짐승과도 같은 혀 놀림이었다. 그런데 어째선지 흥분이 꺼지질 않았다. 치솟는 열기에 그대로 녹아내릴 것만 같아 단여명은 발바닥을 시트에 비비며 열을 분산시키려고 노력했다.
가벼운 허릿짓이 느릿하게 이어졌다. 구멍 속이 더욱 미끄럽게 젖도록 정액을 뒤섞는 움직임이었다. 그 별거 아닌 자극에도 두 사람은 서로의 몸을 끌어안은 채 씨근거렸다. 다시 날뛰려고 재시동 거는 흥분감 때문에 둘 다 뜨거운 숨을 여과 없이 쏟아냈다.
“앗…! 으응, 흐, 으!”
오르가슴의 여운이 가시자마자 단여명은 재차 덜컥거리는 시야를 느꼈다. 황홀한 절정감은 사그라졌지만, 흥분의 잔열은 배출할 곳 없이 여전히 몸속을 에도는 중이었다. 빈자리를 메우듯 곧장 차오르기 시작하는 쾌감이 참을 만한 것 같다가도 딱딱한 성기가 얼결에 전립선을 정통으로 찌르면 등허리가 퍼뜩 휘었다.
“형… 미안, 저 조금만, 세게 할게요.”
“아, 아, 응, 흐으…!”
“힘들면 제 어깨… 하아, 잡아요.”
이를 악문 채 말해 낮은 목소리가 뭉뚝하게 흘러나갔다. 권호영은 그를 다시 말할 생각도 못 하고 급하게 피치를 올리기 시작했다. 거친 숨소리와 곧장 난폭해지는 허릿짓이 그가 얼마나 흥분했는지 알 수 있게 했다.
“아윽, 흑! 응, 으, 으응…!”
단여명은 그의 어깨로 더듬더듬 손을 뻗었다.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으로 단단한 어깨를 움켜쥐자 권호영이 뺨에 입술을 댔다.
마개처럼 꽂힌 좆이 한정적인 공간을 벌려내며 거듭 안쪽에 열을 퍼부어 댔다. 뒷구멍을 채운 채 한시도 밖으로 빠져나가 주질 않으니 끈적한 열기는 거둬낼 수 없는 퇴적물처럼 깊은 안쪽에 쌓여갔다.
몸이 너무 뜨거워서 뼈마디가 흐무러지는 것만 같았다. 권호영이 계속 뺨에 입을 맞추는지도 모르고 단여명은 쾌감에 허물어졌다. 초점이 흐릿하게 풀리고, 입안에 침이 마르도록 더운 숨을 토해냈다. 반대로 눈에선 눈물이 퐁퐁 샘솟아 시야를 어지럽혔다. 자신이 우는지도 모른 채 단여명은 입을 커다랗게 벌리고 목이 쉬어라 신음했다.
“아, 호영, 아, 나 또, 응…!”
무릎의 안쪽이 간질거리더니 뇌리를 시허옇게 물들이는 전율이 빗발쳤다. 얼마나 지났다고 다시 사정감이 휘몰아치는 것이 느껴졌다. 권호영의 것이 하도 커다랗고 두꺼운 탓에 무차별적인 추삽질에도 느끼는 지점이 눌렸다. 템포가 빨라진 것에 비례하게 전립선이 자극되고, 그만큼 성감이 감당할 수 없이 빠르게 치밀었다.
“싸, 쌀, 것 같아…. 잠깐, 만, 흑, 아아!”
단여명이 다리를 오므리려고 아등바등했다. 구멍의 수축력에 턱턱 걸리던 성기는 어느새 제게 딱 맞는 집을 찾은 양 구멍 속으로 쑥쑥 박혀 들어갔다. 뭉뚝한 좆이 느끼는 지점을 간혹 세게 긁어 주면 부싯돌을 친 듯이 배 속에 불덩이가 튀었다. 그러면 육중한 성기가 내벽을 진득하게 문질러 기다란 불길을 만들어냈다. 도저히 밀려드는 사정을 참을 수가 없었다.
“싸도 돼요, 괜찮으니까….”
권호영이 뺨에 입술을 비비며 달래듯 속삭였다. 그리고 단여명이 허벅지를 모으지 못하게 그의 발목을 어깨에 올리고, 서로의 몸을 더욱 밀착시켰다. 귀가 발목에 닿을 만큼 단여명의 몸이 반으로 접혔다. 아주 본격적으로 박아대겠다는 자세였다.
쯜퍽, 퍽, 퍽, 퍽! 젖은 살이 맞부딪치는 소리가 커다랗게 울렸다. 한계까지 이완된 주름 사이로 두꺼운 기둥이 줄기차게 드나들었다. 얼룩덜룩한 체액으로 범벅이 된 두 생식기가 엎치락뒤치락하며 서로를 잡아먹길 반복했다.
“아, 흐으…! 으, 으응, 아, 아, 아!”
묵직한 음낭이 엉덩이골을 철썩이며 매질하는 감각조차 쾌락으로 치환됐다. 배 속을 사정없이 긁어대는 쾌락이 점점 버틸 수 없이 강렬해졌다. 머리가 이상하게 뭉그러지더니 감은 눈 속에 색색의 불빛이 터졌다. 단여명은 커다란 품 안에 갇혀 허리를 꼬다가 결국 허연 액을 줄줄 터트렸다.
“아….”
권호영이 콧잔등을 사납게 구겼다. 절정에 달한 구멍이 성기를 꽉 문 채 불규칙적으로 수축했다. 아래를 뻑뻑하게 물어 당기다가도 완급을 조절하듯 틈을 두고 빨아대니 허릿짓이 힘들 정도였다.
“너무, 조이는데….”
자극적인 감각에 순간 눈앞이 붉게 이지러지는 것만 같았다. 권호영은 눈을 질끈 감았다가 떴다. 이마에서 흐른 땀이 눈에 들어가 눈알이 따끔거렸지만, 허리를 물리는 걸 멈추지 않았다.
단여명은 숨을 헐떡이며 호흡을 고르기 여념이 없었다. 권호영은 욕정이 들끓는 눈으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아직 움직이면 안 될 때란 걸 알았다. 그렇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아-!”
퍽—! 입구의 주름에 귀두 갓을 건 성기가 안을 강하게 치고 들었다. 그리고 별안간 두 사람 다 온몸의 근육을 뻣뻣하게 경직시켰다. 뒷구멍에 긴장이 풀린 찰나 좆 머리가 이전에 없던 깊이로 박힌 탓이었다.
굽이진 곳으로 통하는 입구가 두꺼운 둘레에 맞춰 강제로 이완됐다. 커다란 선단은 빠듯하게 죄이는 힘에 더는 진입하지 못하고, 좁은 통로에 꽉 낀 채 멈췄다. 덜 여문 입구를 허릿심으로 꿰뚫은 권호영은 제가 다 당황해했다. 이 정도까지 넣을 생각은 없었는데…….
“흐, 아악…!”
숨이 넘어가는 비명이 터진 건 삽시간이었다. 권호영은 급히 접합부를 살폈다. 거의 뿌리 끝만 남겨놓고 구멍 속에 박힌 제 성기가 보였다. 얇게 펴진 주름이 생수병만 한 좆 뿌리를 아슬아슬하게 문 채 잘게 경련하고 있었다. 커다란 이물에 막혀 사이를 좁히지도 못하고 가련하게 떨리는 모양새가 못내 가여워 보였다.
“이상해, 아! 으, 호, 호영아…!”
단여명이 곧 발버둥 치기 시작했다. 방울진 눈물이 금세 하얀 뺨을 흥건히 적셨다. 권호영은 재빨리 성기를 빼내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우묵한 모양으로 좁아지는 내벽이 귀두를 물고 놓아주지 않았다. 거짓말을 좀 보태서 앞머리가 뽑힐 정도의 세기였다. 억지로 빼내면 가능하겠지만, 그럼 여린 점막에 상처가 날 것 같았다.
“기, 깊어, 흐으으…! 나…!”
“형, 잠깐, 윽…! 움직이지…….”
단여명이 몸부림치는 여파가 내벽까지 전해졌다. 오목한 내벽이 민감한 귀두에 찰싹 엉겨 붙어 옴찔옴찔 수축해 허리가 녹아내리는 쾌락을 부추겼다.
목덜미에 핏줄을 세운 채 사정을 참던 권호영은 결국 헛숨과도 같은 신음을 터트렸다. 비좁은 통로에 귀두의 중간까지만 삽입한 상태로 그는 속수무책으로 사정했다.
“아, 으으응…!”
구부려진 내장 속에 뜨거운 정액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두 번째 토정이었지만, 역시나 배출하는 양이 많아 정액이 아니라 오줌을 받는 것처럼 느껴졌다.
기세 좋게 쏘아진 좆물이 막힌 살벽을 때리고, 그 안을 끈적하게 적셨다. 배꼽 안쪽이 타들어 가는 듯한 느낌에 단여명은 힉힉대는 울음소리를 뱉었다.
느낌이 이상했다. 좆을 받기 전에 좆물부터 받아서 그런지 깊은 안쪽이 예열되는 것처럼 기이한 열기가 고였다. 뜨끈한 액만 퍼부어지고 정작 중요한 건 들어오지 않으니 부족한 것 같기도 했고, 간지러워진 것 같기도 했다. 이게 아픈 건지, 좋은 건지 감각을 분간하기도 전에 애꿎은 눈물이 흘러나와 판단력을 흐렸다.
“괜찮아요, 형. 쉬이…. 괜찮아요. 빼 줄게요.”
권호영은 사정의 여운에 흉곽을 부풀리면서도 곧장 단여명을 달랬다. 아무리 손으로 닦아내 줘도 보드라운 뺨은 마를 새 없이 축축해졌다. 권호영은 단여명의 뺨에 입을 맞춰 주며 그가 진정하길 기다렸다.
“으, 흐으으….”
“뒤에 잠깐만… 후우, 힘 풀어요. 응…? 그렇게 힘주면 다치니까….”
계속해서 더운 숨을 불어넣어 주자 단여명이 몸에서 서서히 힘을 뺐다. 겁먹은 듯 움츠리고 있던 어깨와 한껏 접었던 무릎도 똑바르게 폈다. 긴 흐느낌이 잦아진 찰나 권호영은 느리게 성기를 뽑아냈다.
“악, 아으흐으…….”
움푹 좁아지는 점막이 귀두에 쭈욱—, 엉겨 붙었다가 떨어졌다. 앞머리를 뽑아먹을 듯한 압박감이 가시고 그동안의 추삽질로 길을 다져놨던 내벽이 폭신하게 귀두에 감겼다.
권호영은 성기를 약간 빼냈다가 다시 안쪽으로 밀어 넣었다. 깊이 삽입하니 좆 끝에서 급격히 비좁아지는 내벽의 감촉이 느껴졌다. 방금 전 꿰뚫었던 그곳은 약간의 틈만 벌어졌을 뿐 여전히 빡빡하기 그지없었다.
권호영은 잠시간 그 깊이감을 되새겼다. 그리고 눈도 뜨지 못하고 떨고만 있는 단여명에게 작은 목소리로 귀엣말했다.
“놀랐죠…. 미안, 제가 힘 조절을 못 했어요.”
“허억, 아…! 흐으….”
“많이 아팠어요? 미안해요. 끝까지 안 넣을게요. 몸에… 힘 풀어도 돼요. 이렇게, 얕은 곳만 찔러 줄게요.”
권호영이 멈췄던 허리를 움직였다. 굵다란 성기가 구멍 속을 가득 메우고 빠져나가길 반복했다. 제법 깊이 들어올 때도 있었지만, 뭉뚝한 귀두는 덜 다물린 안쪽의 입구를 쿡쿡 두드리기만 할 뿐 그 이상을 욕심내지 않았다.
그러나 단여명은 통 눈물을 그치지 못했다. 독한 열 감기에 걸린 사람처럼 거듭 뜨거운 숨을 몰아쉬고 자꾸 권호영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권호영은 그에게 몸을 내준 채 허리만 움직였다. 부드럽게 내벽을 문질러 주며 참을성 있게 구멍을 녹여냈다. 그가 아까와 같은 쾌락을 느끼길 바랐다.
그런데도 단여명은 연신 안절부절못하는 낌새였다. 뒤를 찔러 줄 때마다 허리를 튕기는 걸 보면 느끼는 것 같은데, 행위에 영 집중하지 못했다. 그에 권호영이 이상하다고 생각할 때쯤이었다.
“나, 안이, 으응… 흑! 가, 간지러… 운, 것, 같…….”
단여명이 헐떡이며 어설픈 몸짓으로 품에 안겨왔다. 눈물에 젖은 뺨을 권호영의 목덜미에 비비며 그는 서러운 울음을 터트렸다. 숨을 깔딱깔딱 들이쉬며 말해 발음도 온통 뭉개져서 나왔다. 평소라면 생각지도 못할 모습이었다.
“형, 천천히…. 천천히 숨 쉬면서 말해요.”
그는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는지 제 몸에 세게 매달리지도 못했다. 권호영은 그 몸을 추슬러 안고, 등을 쓸어줬다. 서로의 몸이 빈틈없이 맞붙고, 결합이 한껏 깊어졌다. 불에 달군 돌덩이 같은 귀두가 한 번 꿰뚫었던 입구를 진득하게 문질렀다. 그것만으로도 두려움을 느끼는 양 구멍이 잘게 물결쳤다.
“아, 아흐, 으…!”
…저번에도 이 정도로 느꼈나? 숨을 쉬기 벅차하고, 말도 잘 못할 만큼? 단여명과 처음 했을 때 자신은 중반부터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다. 토막이 난 기억의 끝에선 제 품에서 벗어나려던 몸부림만 드문드문 남았다. 이렇게 가까이서 그의 반응을 세세히 살핀 건 처음이라 당황스러웠다.
“끝까지, 흐… 넣어 줘. 배 속에, 가득…. 응? 아까처럼…….”
단여명이 엉망이 된 목소리를 추스르곤 말했다. 북받치는 울음을 삼키듯 애달픈 음색이었다.
“그런 말을….”
권호영은 말을 마치지 못하고 입술을 다물었다. 자극적인 말에 머릿속이 확 비워지는 듯싶다가 아연한 기분이 몰려와 미약한 정신이 되잡혔다.
“…그렇게 서럽게 울면서 말하면 제가 어떻게 해 줘야 돼요.”
단여명은 도리질을 쳤다. 해 줘…, 하며 말꼬리를 길게 늘어트리더니 권호영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목덜미를 치대는 그의 얼굴에서 온통 축축한 물기가 묻어났다.
권호영은 눈썹을 일그러트렸다. 망설임이 가득한 마음과 상반되게 기대감을 품은 심장이 터질 것처럼 쿵쾅댔다. 뜨거운 몸속에 파묻힌 성기 또한 힘줄을 두껍게 부풀리며 무섭게 맥동했다. 저렇게 자신을 원한다는, 노골적인 말을 하며 안겨오는데 흥분하지 않고 배길 사람이 몇이나 될까.
뜨거운 한숨을 내쉰 권호영은 양손을 단여명의 겨드랑이 사이에 끼워 넣어 그의 어깻죽지를 꽉 붙들었다. 무릎을 바깥으로 벌리니 단여명의 다리도 따라 더욱 활짝 벌어졌다. 깊은 삽입을 준비하는 자세였다.
“살살… 살살, 호영아…….”
짓무른 눈가에 입을 맞추는 것으로 대답한 권호영은 기억해 둔 지점까지 내벽을 파헤치고 들어갔다. 그리고 허리에 힘을 주어 좁은 통로를 천천히 밀어젖혔다.
“아아… 학!”
뜨겁고 말캉말캉한 막에 막힌 듯 올라가지 않던 귀두가 꾸드득, 하며 좁은 틈새를 억지로 비집었다. 오목하게 좁아지는 점막을 뭉개다시피 진입한 선단이 내장의 끄트머리까지 공간을 확장했다. 둥그렇게 불거진 귀두가 구부러진 내장을 틀어막듯이 조심히 안착했다.
권호영은 아랫니가 시릴 정도로 턱을 악물었다. 억지로 뚫고 들어간 깊숙한 내부는 비좁았다. 앞서 정액으로 적셔 줬다지만, 안이 하도 좁아 마찰은커녕 다시 빼내기도 힘들 정도였다. 거기다 감각세포가 밀집된 귀두를 빠듯하게 조여 감촉이 대단히 생생하게 느껴졌다.
그가 입술을 조여 귀두를 빨아 줬을 때보다 느껴지는 흡착력이 강했다. 그리고 그의 입안보다 더욱 뜨겁고 습했다. 귀두로 막힌 벽을 푹 찍어 올리면 무르녹은 과실이 과육을 터트리듯 질척한 액을 뿜어낼 것만 같았다.
“흐으으, 으…. 아파아…….”
조금 잦아드는가 싶던 울음이 또다시 터졌다. 열에 달뜬 얼굴은 온통 눈물범벅이었다.
“괜찮아요. 응? 울지 마요. 금방 적응될 거예요.”
권호영은 그의 얼굴 곳곳에 입술을 눌렀다. 단여명이 느끼고 있을 아픔과 눈물을 덜어내 줄 방도를 몰라 입을 맞춰주는 것밖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단여명의 눈가는 벌겠다. 연붉은빛 물감으로 몇 번이나 눈 주위를 덧칠한 것처럼 진한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얼굴만 봐선 지독한 열병이라도 앓는 사람처럼 보일 정도였다. 평소에 여유로운 미소를 머금었던 얼굴도 찾아볼 수 없었다. 잔뜩 흐트러진 표정 하며 눈물에 얼룩진 얼굴이 정말 가까운 사람만 볼 수 있는 그의 민낯을 낱낱이 지켜보는 기분이었다.
기이한 충족감이 차오르는 걸 애써 몰아낸 권호영은 단여명의 배에 손을 올렸다. 배 속이 빈 공간 없이 꽉 찬 게 괴로운지 단여명이 배를 부풀렸다 꺼트리며 헉헉댔기 때문이었다.
권호영은 그의 배를 손으로 살살 쓸어줬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흠칫 손을 떼어냈다. 만지는 곳에서 이상한 감촉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이거…….’
…내 건가? 손바닥 밑으로 불룩하게 부푼 양감이 느껴졌다. 권호영은 단여명의 얼굴을 살피며 떨어트렸던 손을 다시 배 위에 살포시 올려 보았다.
손바닥으로 전체적인 모양을 가늠해 보다가 굵직한 테두리를 따라 손끝을 더듬었다. 복부를 눌러 확인해 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으나, 그럼 단여명이 아파할 것 같았다.
“형…….”
이게 정말 괜찮은 건지 확신이 안 섰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권호영이 상체를 뒤로 물렸다. 그 몸짓을 무어라 오해했는지 단여명이 곧바로 상반신에 찰싹 엉겨 붙었다.
“빼지, 빼지 마….”
“…….”
“아, 나 기분이…….”
단여명은 독한 술에 취한 것처럼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눈을 깜빡이는 것도 불안정했고, 눈동자의 초점도 먼 곳을 응시하는 듯 넋이 나가 있었다. 모든 감각을 쾌락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은 아니었다. 고통과 쾌감이 점철된 얼굴. 온갖 감각이 뒤얽혀 그를 느끼는 본인조차도 혼란스러워하는 듯했다.
권호영은 작은 몸의 떨림이 잦아들 때까지 기다렸다. 순간마다 그의 몸속을 마구잡이로 탐하고 싶은 흉악한 충동이 일었지만, 인내했다. 단여명이 정상적으로 눈을 맞춘 때 그와 시선을 얽어 눈빛으로 의중을 확인했다. 오가는 말은 없었지만, 알 수 있었다. 그가 눈으로 허락의 뜻을 내보였다.
“아, 아으으, 으…!”
안에 파묻혀 있던 귀두를 느릿하게 끄집어내자 단여명이 사지를 경직시켰다. 권호영 역시도 관자놀이에 힘줄이 불거질 정도로 전신에 힘을 줬다. 뽑아내는 것도 밀어 넣는 것만큼이나 허리에 힘을 실어야 했다.
움푹 조이는 통로에서 성기를 빼내니 좆 끄트머리에서 피가 원활히 도는 느낌이 났다. 하도 억세게 엉겨 붙어 있던 내벽에 한동안 파묻혀 있던 탓이었다. 그러나 그 감각 속에 분명 쾌락이 있었다. 얼얼한 감각이 가시니 다시 좁은 굴속에 파고들고 싶다며 성기가 몸뚱이를 흉악히 부풀렸다.
권호영은 뜨거운 숨을 훅, 몰아쉬었다. 자칫 정신을 놓으면 난폭한 몽둥이질로 피를 보게 할 것만 같아 다시금 평정심을 다잡았다. 과도한 흥분을 참아내느라 손끝이 잘게 떨렸다. 권호영은 단여명의 양어깨를 붙잡아 손의 경련을 숨기고, 허리를 앞으로 움직였다.
중간까지 빠져나갔던 좆이 다시 결장으로 통하는 입구에 밀착했다. 귀두가 좁은 틈새를 꾸직꾸직 비집자 그 사이가 어렵사리 벌어졌다. 커다란 귀두가 굽이진 벽을 살포시 짓누른 채 공간을 벌리려는 양 양옆으로 비비적댔다.
“헉…! 아아, 아!”
단여명은 머리를 위로 휙 치켜들고, 폐부로 숨을 급히 끌어왔다. 배 속 끝까지 커다란 것을 받았다는 충만감과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의 포만감이 한꺼번에 밀어닥쳐 괴상한 황홀감을 선사했다. 교접부를 비비적대는 별거 아닌 허릿짓인데도 뒷머리를 내리치는 쾌락이 강렬했다. 그가 안에서 좆을 뭉그적댈 때마다 기둥에 짓눌린 전립선과 배 속 깊은 곳이 공평히 자극됐다.
“으, 흐…! 으윽!”
한동안 굽어진 내벽에 머리만 문지르던 좆이 다시 바깥으로 빠져나갔다. 좆기둥에 딱 달라붙어 있다시피 했던 무른 속살이 뒤로 빠지는 움직임에 맞춰 줄줄이 끌려갔다. 결장으로 통하는 입구의 점막이 귀두부에 죽 들러붙었다가 떨어진 즉시 다시금 단단한 선단이 그 안을 푹 짓쳐 들었다.
허억…! 단여명의 턱이 다시 까딱 위로 들렸다. 가쁜 숨소리가 들리는 와중에 보드라워 보이는 목덜미가 권호영의 시야에 한가득 잡혔다. 그는 단여명의 목덜미에 입술을 묻었다. 목덜미의 살을 부드럽게 빨아들이다가 잘근잘근 씹기도 하며 느릿한 추삽질을 반복했다.
쿨쩍, 쩍, 척…. 끈적한 정사의 소음이 외설스럽게 울려 퍼졌다. 처음 뒤에 길을 냈을 때처럼 거듭 성기로 안쪽을 찍어 주니 배 속 깊은 곳도 좆 모양대로 부드럽게 연화되기 시작했다.
중간에 꽉 막히는 부분 없이 성기가 쑥쑥 파고들 때쯤 제법 속도가 붙었다. 턱턱 치받는 허릿짓은 전보다 빨라졌지만, 안을 꿰뚫는 세기는 여전히 부드럽기만 했다. 구멍 속을 깊이 가르고 들어온 굵직한 성기는 막힌 벽을 쿡쿡 두드리기만 할 뿐 그 안을 세게 올려 찧지 않았다.
“하아, 형….”
권호영은 점점 인내심이 한계에 달하는 것을 느꼈다. 이미 두 번이나 사정했는데 마치 처음 하는 것처럼 성욕이 미친 듯이 끓어올랐다.
“저 허리가, 안 멈추는데.”
시야가 좁아지고, 주변의 소리가 점차 들리지 않게 되었다. 오직 제가 품 안에 들인 몸과 아래를 물어 당기는 구멍만이 남은 걸 오감으로 느꼈다.
“못 버티겠으면, 헉, 그냥 발로, 차요…. 주먹으로, 때려도 좋으니까….”
단여명이 그 목소리를 들었는지 확인할 겨를은 없었다. 곧바로 눈앞이 벌그죽죽하게 물들고, 사나운 충동이 뇌리를 빼곡히 장악했다. 권호영은 그대로 이성의 끈을 놓쳤다.
“……! 아, 아악…!”
퍽—! 살이 거세게 맞부딪치는 소리가 커다랗게 울렸다. 과격한 허릿짓에 단여명의 몸이 단숨에 침대 헤드 쪽으로 밀려 올라갔다. 갑작스러운 태세 전환에 놀란 단여명이 날카로운 비명을 내질렀다. 권호영은 단여명의 몸을 구속하듯 양팔로 끌어안았다. 격한 허릿짓에 더는 밀려 올라가지 않도록 몸을 고정하고, 허리를 빠르게 놀리기 시작했다.
철퍽, 철퍽, 퍽—! 활짝 벌어진 엉덩이 사이로 주먹질하듯 두꺼운 살덩이가 꽂혀들었다. 팔뚝만 한 성기를 받아내는데도 뒷구멍은 탄력 있게 벌어져 육중한 충격을 감내했다. 이미 길을 닦아내는 과정을 수차례 반복한지라 반항을 한다고 해도 무효했다. 좆이 짓쳐들어왔다가 빠져나가는 모양대로 무르녹은 내벽이 다물릴 새 없이 이리저리 어그러졌다.
“아, 빠, 빨라, 아-! 호영, 아, 아, 흐, 아아!”
묵직한 음낭이 연달아 부딪치는 소리와 비명이 뒤섞여 실내를 혼잡스레 울렸다. 하얀 엉덩이 사이는 손찌검을 여러 대라도 맞은 듯 금세 새빨갛게 물들었다.
뭉툭하게 발달한 귀두는 전립선을 성의 없게 긁어 주다가도 어느 순간 강하게 찔러 머리를 녹였다. 우악스러운 추삽질을 반복하는 중에도 뿌리 끝까지 파고든 성기는 막힌 벽을 두드리며 묵직한 울림을 가했다.
권호영이 어떻게 박아도 쾌감이 느껴져 단여명은 뒤가 파헤쳐지는 대로 날것 그대로의 비명을 질렀다. 멀미할 정도로 눈앞이 흔들리더니 급격히 오른 사정감이 아랫배를 격타했다. 미처 대비할 새도, 아마 대비한다고 해도 당혹감을 지워낼 수 없을 것이다.
빠르고, 갑작스럽고, 피할 수 없을 만큼 강렬하다. 마치 절정을 강요당하는 기분이라 때마다 당황스러웠다. 그는 얼마 박지도 않았는데 혼자만 계속 싸는 게 창피하기도 했고, 잦은 빈도로 절정에 달해 쾌락을 견디기 버겁기도 했다.
“아, 흐, 안, 으, 잠, 깐만…! 흐, 응, 아, 아, 아!”
단여명이 어떤 소리를 내든 사납게 발기한 성기는 벌어진 구멍 속을 노련히 파고들었다. 전립선이 뭉그러지도록 내벽을 짓누르고, 배 속 깊숙한 곳을 쉼 없이 망치질했다.
“아흐, 흐…!”
날카로운 섬광이 번쩍이더니 시야가 까맣게 죽었다. 바들바들 경련하던 단여명의 성기가 공중으로 픽픽 정액을 싸질렀다. 상대가 절정에 달했으면 멈춰 줄 만도 하건만, 권호영은 사정 봐주지 않고 쉼 없이 허리를 처박았다. 그동안의 배려는 찾아볼 수 없는 몸짓이었다.
“아, 안 돼, 아, 흐…! 싫, 우, 흐으, 갔어…! 아, 아, 아아-!”
단여명은 커다란 몸 아래에 깔려 싫다는 고갯짓만 반복했다. 그걸 반항이라고 생각해서 거슬린 건지, 아니면 그것에 더 자극을 받은 것인지. 권호영이 갸름한 턱을 돌려 잡고, 허겁지겁 입술을 포갰다. 입을 맞추는 것과 동시에 두꺼운 혀가 한가득 밀려들어 왔다.
“우, 음…! 윽! 응, 으, 흐!”
두 사람을 받친 침대가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 거칠게 덜컹거렸다. 권호영은 단여명의 입안에서 혀를 끌어와 입술을 오므려 움직임을 속박했다. 그리고 입술에 힘을 주어 그의 혓바닥을 무식하게 쭉쭉 빨아올렸다.
말랑한 살덩이를 원 없이 빨아올리며 그동안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틈에도 권호영은 허릿짓을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추삽질의 속도를 더욱 높여 흥분이 거세진 걸 노골적으로 표출했다. 그는 단여명이 사정한 줄도, 제 몸을 밀어내고 있는 줄도 몰랐다. 무의식중 단여명의 모든 움직임을 억압한 채로 그의 혓바닥에 제 혀를 진득하게 얽으며 열을 발산해 내는 행위에 열중했다.
그걸 받아내는 단여명으로선 딱 죽을 맛이었다. 한계점을 넘은 과도한 쾌락에 당장이라도 몸이 펑 터질 것만 같았다. 그가 혀를 끌어가 막무가내로 빨아올리는 탓에 혀뿌리가 뽑힐 듯이 당겼으며 안 그래도 모자랐던 숨이 더욱 막혀 타액이 입 밖으로 흘러나갔다.
그 와중에 배 속의 장기가 재배치되는 것만 같은 충격감이 잇따랐다. 더 들어갈 곳이 없는데도 흉포한 열기를 뿜어대는 성기는 끝없이 욕심을 냈다. 더 들어갈 곳을 내놓으라는 듯 굽어진 내장의 끝을 쾅쾅 때려댔다.
단여명은 죽을 듯한 쾌락의 진창 속에서 몸부림쳤다. 그리 버텨낸 지 얼마 지나지 않은 순간이었다. 갑작스레 등골에 찬기가 퍼부어지는 느낌이 엄습했다. 난동을 부리듯 뒤를 파고드는 성기는 어떻게 움직여도 예민한 지점을 자극했다. 전립선이 눌리는 통에 어디도 잘못 눌린 모양인지 불길한 느낌이 점차 강해졌다.
처음엔 발끝만 간질이던 감각은 불이 붙은 심지처럼 점차 온몸으로 퍼졌다. 매일 아침마다 느껴지는 감각.
지금 느껴져선 안 될 요의였다.
“흐…! 으으, 음! 으, 끅, 흐으…!”
커다란 육체 아래에 깔린 몸은 겉으로 봐선 맥없이 흔들리는 종아리밖에 보이지 않았다. 단여명은 그 품 안에 갇혀 젖 먹던 힘을 짜내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이미 여러 차례 시도해 봐서 통하지 않을 걸 알았지만, 육안으로 확인되지 않는 위기가 반사적으로 몸을 움직이게 했다.
단단한 어깨는 손으로 아무리 때리고 밀쳐도 밀리지 않았다. 다리는 바깥으로 펼쳐져 도망갈 수 없었으며 혀를 입 밖으로 길게 빼낸 채라 지금 이를 세웠다간 제 혀를 씹는 꼴이었다.
엉덩이를 사방으로 비틀어 봤지만, 줄기찬 삽입을 도저히 피할 방도가 없었다. 뒤를 힘껏 조여 피스톤질이 용이치 않게 하는 것이 최대한의 방어였다. 하지만 핏줄을 우둘투둘 부풀린 성기는 막바지에 달해 모든 것을 자극으로 치부했다.
“으, 흐, 응, 흐으! 흐, 으으…!”
제발, 제발, 안 돼, 여기선…! 초조한 마음과 치사량에 가까운 쾌락에 생리적인 반응으로 눈물이 쏟아졌다. 몸속을 불 싸지르던 열기가 다시금 강해지더니 강렬한 성감이 스타카토처럼 오싹오싹 치달았다. 마치 숨통이 타들어 가는 것만 같아 단여명은 막힌 입안에서 힉힉대는 울음소리를 냈다.
몸이 이상했다. 오르가슴에 도달했을 때와 비슷한 절정감이 시차를 두고 짧게 이어지다가 끊기길 반복했다. 폭력적인 쾌감이 머리끄덩이를 잡아 흔드는 와중에 터질 듯한 요의가 성큼성큼 간격을 좁혔다. 단여명은 간절함에 손톱을 세워 그의 등가죽을 박박 긁었다.
권호영은 그를 느끼지 못하고, 좆을 처박는 데만 몰두했다. 단여명의 발버둥이 심해질수록 구멍의 수축력이 성기를 끊어먹을 것처럼 강해졌다. 권호영은 허릿심으로 계속 밀려 올라가려는 몸을 힘껏 끌어안은 채 허리를 마구 처박았다. 녹진녹진하게 녹은 내벽에 거듭 단단하게 발기한 성기를 문대고, 비벼대며 그 안을 남김없이 탐했다.
단여명은 제 배 속을 때릴 때마다 꿈틀거리는 등줄기를 긁다가 손톱을 강하게 박아 넣었다. 그리고 눈을 꾹 감고 권호영이 제발 빨리 사정하기만을 빌었다. 발가락을 힘껏 만 채 요의를 참아내던 순간 그가 훅, 거친 숨을 토해냈다.
퍽—! 단여명의 몸이 덜컹 흔들렸다. 강하게 허릿짓한 권호영이 막힌 장벽에 귀두를 때려 넣듯 꿰맞췄다. 허리를 있는 대로 앞으로 휘어 결속을 단단히 한 뒤 그는 참았던 쾌락을 한꺼번에 터트렸다. 뜨거운 정액이 짓무른 속살을 때리며 질척하게 안을 적셨다.
“으, 흐, 으으…!”
벌벌 떨리던 단여명의 허벅지가 꾹 오그라들었다가 활짝 벌어졌다. 배 속 깊은 곳에 퍼부어지는 홧홧한 체액에 아랫배 전역이 펄펄 끓어오르는 듯했다.
그가 드디어 사정했다는 안도감에 취할 틈은 없었다. 단여명 또한 권호영이 사정하는 것과 동시에 미세한 전류가 끼친 듯 가벼운 절정감에 휩싸였다. 깊숙하게 침범한 거대한 성기가 구멍을 한계까지 이완시켰다. 배 속을 빠듯하게 채운 것이 그의 성기인지 그가 배출해 낸 정액인지 순간 혼동될 정도로 사고회로가 정지했다.
단여명이 멍멍한 감각을 느끼던 그 순간이었다. 퍽! 권호영이 남은 정액을 뿌리듯 거세게 허리를 한 번 털었다. 그리고 후희를 즐기듯 입술로 조여 물고만 있던 단여명의 혀를 이로 잘근잘근 씹었다. 아프지 않은 세기였지만, 어느 곳보다 무르고 연약한 기관이라 위협을 느끼긴 충분했다.
“우으, 으……!”
겨우겨우 참아내다가 방심하던 찰나 위아래로 자극이 퍼부어졌다. 커다란 성기가 순간적으로 배 속의 꺾여 들어가는 지점까지 들어와 막힌 벽을 때렸다. 위로는 길게 빼낸 혓바닥이 씹히고 빨렸다. 그에 반사적으로 엉덩이가 콱 조여들면서, 줄곧 긴장하고 있던 배에 기어코 힘이 풀렸다.
“흐, 으으으…….”
까만 눈동자가 초점 없이 혼탁하게 풀렸다. 아래에서 따뜻한 물줄기가 터졌다. 정액처럼 점성이 있는 액체가 아니었다. 줄줄 쏟아진 투명한 물줄기는 두 사람의 상반신을 적시는 걸 넘어서 침대 시트까지 얼룩을 만들어냈다. 침대에 물을 한가득 엎은 것처럼 두 사람의 주변이 축축하게 젖어갔다.
“하아, 하아…….”
서로의 몸이 미세하게 부딪칠 때마다 찰박거리는 물소리가 났다. 이상함을 감지한 권호영이 먼저 입술을 떼어냈다. 한 번의 사정으로 이성을 되찾은 얼굴이었지만, 눈동자는 절정의 여운으로 유난히 멍했다.
권호영은 맞닿은 상체를 조심스럽게 떨어트렸다. 그리고 무심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가 그대로 얼굴을 굳혔다.
서로의 상체는 단여명의 성기가 쏘아낸 맑은 액으로 흠뻑 젖은 상태였다. 쪼르륵…. 노골적인 시선을 받은 성기가 부끄럽다는 양 요도구를 빠끔거리며 소량의 물줄기를 배출해냈다. 권호영의 성기는 구멍 깊은 곳을 틀어막은 채 미동조차 안 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엷은 빛의 성기는 거듭 자극이라도 느끼는 것처럼 몸체를 꺼떡이며 투명한 물줄기를 졸졸졸 쏟아냈다.
단여명도 뒤늦게 정신을 추스르고, 권호영의 눈길이 닿은 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그리고 참담한 심정에 입술을 자그마하게 벌렸다.
자신에게서 터져 나온 물줄기는 소변과 같은 빛깔이 아니었다. 그보다 투명하고 맑았지만, 수치심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오르가슴의 탈력이고 뭐고 곧바로 얼굴이 터질 것처럼 열이 올랐다. 단여명은 슬그머니 권호영의 얼굴을 살폈다. 권호영은 초점이 미세하게 나간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그와 눈이 마주치니 무어라 변명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에 입술을 달싹거린 순간이었다. 권호영이 단여명의 입술에 가볍게 입술을 눌렀다. 깃털 같은 접촉감에 단여명은 어깨를 살짝 떨었다.
“형.”
“…….”
“괜찮아요.”
권호영은 차분한 눈으로 단여명을 바라보았다. 가까운 거리에서 괜찮다고 속삭여도 연달아 입맞춤해 줘도 단여명은 좀처럼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권호영은 살짝 벌어진 입속에 자신의 혀를 밀어 넣었다. 물을 쏟아낸 본인도 정말 많이 놀란 모양이었다. 혀끝을 문질러 줘도 단여명의 혀는 빳빳이 굳어 움직이지 않았다.
권호영은 반응을 보이지 않는 살덩이에 거듭 제 혀를 얽었다. 단여명의 혀가 제 혀를 옭아맬 때까지 부드러운 입맞춤을 지속하며 그를 달랬다.
똑, 똑…. 욕실 천장에 맺힌 물방울이 떨어져 수면에 파문이 일었다. 뜨거운 물을 받은 욕조 안에서 솟아오른 김이 욕실 안을 자욱하게 채웠다.
단여명은 수증기가 피어오르는 형상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따뜻한 물에 몸을 담그니 전신이 노곤하게 늘어졌다. 계속 긴장해 있던 온몸의 근육도 점차 부드럽게 풀어졌다.
그렇게 나른한 기분에 취해 있던 도중이었다. 억지로 내몬 것이 소용없게도 방금 전의 기억이 다시금 머릿속을 장악했다.
“진짜 미친…….”
미친 거 아니야…….
단여명은 젖은 손으로 얼굴을 닦아냈다. 문제의 기억을 곱씹고 곱씹을수록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뜨거운 욕조 물 때문이 아닌, 민망한 기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침구는 흠뻑 젖어 뒷수습이 불가했다. 두 사람은 프런트에 말을 넣기로 얘기를 마치고, 침대를 벗어났다. 둘 다 땀으로 온몸이 끈적이는 상태라 다시 샤워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침대 아래로 발을 내린 단여명은 다리를 후들거리며 중심을 못 잡았다. 권호영이 허리를 부둥켜안듯이 잡아주고 나서야 안정적으로 걸음을 뗄 수 있었다. 그 와중에 안에 싸놓은 정액까지 밖으로 흘러나와 말썽을 일으켰다.
그 모습을 본 권호영이 자신이 뒤처리해 주겠다고 나섰다. 안에 싼 것을 빼내지 않으면 배탈이 난다며 걱정을 비쳤고, 한국에 맞는 사이즈가 없어 콘돔을 사용하지 못했다는 양심고백도 함께 전했다.
맞는 사이즈가 없을 만도 했다. 직전에 그의 물건을 뿌리 끝까지 받았던 몸이다. 겉으로 보는 것보다 몸으로 실감하는 쪽이 확실히 납득됐다.
단여명은 괜찮다는 듯 선량한 미소를 보이면서도 뒤처리는 자신이 하겠다며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거동이 불편하기만 할 뿐 몸은 움직여졌다. 제가 비실대는 모습을 보인 탓인지 그는 과하게 걱정했다.
‘차라리 전처럼 기절했으면 더 나았을 텐데…….’
그럼 마음이라도 편했지. 깊은 한숨을 내쉬자 수면에 잔물결이 퍼졌다. 물 위에 비친 얼굴이 일렁일렁 춤을 췄다.
남자도 분수가 가능한 건 익히 알고 있었다. 그렇지만 제가 그런 남자에 속하게 될 줄은 결단코 생각지도 못했다.
권호영의 것이 너무 커서 어디를 잘못 찔렸나…. 아니면 제가 과하게 느낀 걸지도 몰랐다. 이유가 뭐가 됐든 어느 누구와도 이런 적이 없어 심히 당황스러웠다.
몸을 불태우는 쾌락에 목이 쉬어라 펑펑 운 적도, 그 쾌락에 놀아나다가 오줌 비슷한 걸 지린 적도. 그 상대가 자신보다 한참 어린애라 섹스가 끝나면 참을 수 없이 민망해지는 게 흠이라면 흠이었다.
아무튼 오줌이 아니라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거듭 밀려드는 한숨을 내쉰 순간 욕실의 문이 열렸다. 침대 정리를 끝마치고 온 권호영이었다.
“…와… 큼.”
단여명은 목을 가다듬었다. 침대에서 죽도록 소리를 지른 여파가 지금에서야 왔다. 잠깐 입 다물고 있었다고 그새 목소리가 쉬어 있었다.
“…왔어?”
단여명은 몸을 앞으로 당겨 그가 앉을 자리를 내줬다. 각자 욕실에 들어가 몸을 씻고 나오기엔 방금까지 한 게 있었다. 볼일 끝났다고 거리를 두는 것 같기도 하고…. 호텔에 왔으니 욕조 물을 받는 게 맞을 것 같아 미리 준비해 뒀다.
욕조 안은 성인 남자 세 명이 들어앉아도 될 만큼 널찍했다. 권호영이 뒤에 앉으니 욕조 물이 바깥으로 촤르륵, 흘러넘쳤다. 단여명은 엉덩이를 살짝 앞으로 당겨 그와 몸이 닿지 않게끔 했다. 몇 분 전까지 한 침대에서 살을 맞댄 것이 무색하게도.
“이리 더 와요. 여기 자리 넓은데.”
“어? 아니…….”
뭐라 말하기도 전이었다. 권호영이 허리를 잡아 본인 쪽으로 당겼다. 부력에 가벼워진 몸이 손쉽게 뒤로 딸려갔다. 엉덩이가 잠깐 들렸다가 내려앉으니 어느새 그의 앞에 바짝 옮겨져 있었다. 단여명은 당황해 눈을 깜빡이다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은데….”
“불편해 보여서요.”
등 뒤로 물기가 밴 가슴팍이 살짝 닿았다가 떨어졌다. 자세는 훨씬 자연스럽고 편해졌다만, 기분은 전에 비할 수 없이 민망해져 온몸 곳곳에 붉은 기운이 번지는 느낌이었다.
“…프런트에선 뭐래?”
“이불이랑 침대보만 필요하다고 말씀드렸더니 여분을 갖다준대요. 그래서 문 앞에 두고 가 달라고 부탁드렸어요.”
“…….”
“물을 쏟았다고 말해서… 변상은 괜찮대요.”
단여명은 ‘그래…?’ 하고 어물쩍 대답하고 말았다. 시선은 애써 먼 곳에 뒀다. 욕실의 천장엔 뜨거운 수증기가 만들어낸 물방울이 방울방울 매달려 있었다.
또다시 어김없는 침묵이 흘렀다. 고요한 적막 속, 단여명은 어색해 몸부림치고 싶은 심정을 느꼈다. 아마 이 어색한 분위기는 자신만 느끼고 있을 것이다. 제가 침대를 더럽힌 거지, 권호영이 더럽힌 게 아니었으니까.
그냥 각자 샤워하고 나오자고 말할걸. 뒤늦게 후회해 봐야 이미 같은 물에 몸을 담근 처지였다. 무슨 말을 어떻게 잘해야 제가 싼 것이 오줌이 아니라는 얘기를 매끄럽게 전달할 수 있을까. 그에 대해 대책을 강구하는 도중이었다. 무언가 허리를 감싸는 감촉이 느껴졌다.
단여명은 무심결에 뒤를 돌아보았다. 고개를 돌리자마자 뒤에 있던 남자와 눈이 정통으로 마주쳤다. 잔머리 없이 시원하게 드러낸 이마가 흠잡을 데 없이 번듯했다. 매끈한 뺨에 어룽진 투명한 물방울이 살결을 따라 도톰한 아랫입술에 맺혔다.
권호영은 잠시간 시선을 맞추더니 허리를 좀 더 당겨 안았다. 가까이서 마주치는 시선에 어쩐지 조금 밀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그에 얼굴을 슬쩍 피한 순간 어깨에 무언가 얹어졌다. 조금 각진 느낌이 드는 게 아마 턱을 괸 것 같았다.
“……그거 오줌 아니야.”
자신과 다르게 아무렇지 않아 보이는 얼굴을 보니 괜히 찔린 모양이었다. 목소리가 심통 난 애처럼 툴툴거리며 나갔다.
아니, 이게 아닌데. 이것보다 좀 더 잘 말할 수 있었는데……. 후회해 봤자 이미 뱉은 말이었다. 눈치를 보듯 다시 뒤를 살피니 욕조 물에 훈기가 오른 얼굴이 시선을 맞대었다.
“네.”
“…….”
“아니에요.”
어깨에 턱을 괸 권호영이 고개를 약간 틀었다. 귓속말을 흘려 넣는 듯한 얼굴의 각도 탓에 목덜미에 폭신한 입술이 살짝 스쳤다. 순간적으로 닿은 느낌이 좋았는지 그는 옆 목덜미에 좀 더 얼굴을 밀착했다. 그리고 그곳에 입술을 지그시 눌렀다. 도장을 찍듯이, 그저 가만히.
느낌상 뭔가 학습하는 중인 것 같았다. 맨정신으로 맨살에 입술을 누르면 무슨 느낌인지. 물론 단여명은 그를 온전히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아니, 정말로…….”
다른 어떤 말을 해주면 이쪽의 마음이 편해지련만. 그 말에 꼬투리 하나 잡지 않는 게 상대의 마음을 더욱 안절부절못하게 한다는 걸 그는 모르는 듯했다.
“창피해서 하는 소리가 아니라…….”
쪽.
“…정말인데.”
쪽.
“남자도 너무 기분 좋으면 그런 게 나와.”
쪽.
“왜 자꾸 목에다가…. 대답을 해. 응?”
뒤를 돈 단여명이 검지로 그의 입술을 밀어냈다. 권호영의 뺨을 찌르며 장난쳤던 때와 똑같은 손 모양이었다.
“뽀뽀해 달라고 했을 땐 죽어도 안 한다더니….”
권호영은 행동을 멈춘 채 슬쩍 눈길을 올렸다.
“…….”
그리고 하얀 손가락을 입술 사이에 가볍게 물었다.
손가락을 입에 담은 순간에도 눈 맞춤은 비켜나지 않았다. 그때랑 지금이랑 상황이 다르잖아요. 깨끗한 밤색의 눈동자가 그와 비슷한 말을 대변했다. 왜 뻔한 것을 묻느냐는 표정.
솔직히 부정할 수 없었다. 뽀뽀해 달라고 말했을 땐 자신들이 다시 한 침대에서 뒹굴게 될지 몰랐으니까. 거기다 그땐 장난조로 말해 진담처럼 들리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의미를 함축한 얼굴이 얄미워할 수도 없이 부드럽게 풀려 있어서. 어떤 이유보다 그 얼굴이 눈에 가득 차게 들어와 단여명은 다른 말을 얹지 못했다.
…저런 얼굴은 또 초면이다. 원래 몸을 격하게 섞고 난 뒤엔 부쩍 가까워진 것 같은 친밀감을 느끼는 법이다. 상대가 전보다 소중해진 것 같은 애틋한 감정 말이다. 거기다 제가 처음이라고 했으니 특별한 감상을 느낄 법도 했다.
단여명은 결국 몸에 힘을 빼고 권호영에게 등을 기댔다. 그가 후희를 나누고 싶어 하는 눈치기에 가만히 내버려 뒀다. 조금 성가시긴 했지만, 한 번 더 하자는 추파는 없었다. 그저 눈을 돌릴 때마다 시야에 걸리는 곳곳에 가볍게 입술을 얹을 뿐이었다.
두 사람은 물이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유유자적한 시간을 보냈다. 단여명이 무안감을 가라앉히고, 손으로 물장난을 치다가 전신을 축 늘어트릴 때쯤 이상함을 감지한 권호영이 살갗에 문지르던 입술을 떼어냈다.
“형.”
“…….”
“졸려요?”
단여명은 거의 감고 있던 눈을 슬며시 들어 올렸다.
“……아니?”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밀려오는 졸음에 눈꺼풀이 차츰 감기던 차였다. 몸을 한껏 밀착한 상태이니 권호영이 그를 모를 리 없었다.
살갗이 후끈거릴 정도로 뜨거웠던 목욕물은 어느새 미지근하게 식은 뒤였다. 창피해서 도망치고 싶던 감정도 시간의 흐름을 따라 차차 사그라졌다. 아니, 온몸을 덮은 수마와의 자리싸움에서 밀려났다고 봐도 무방했다.
땅 밑으로 푹 꺼질 듯한 잠기운에 눈꺼풀이 무거웠다. 그렇지만 아직 정신이 말짱해 보이는 그의 앞에서 무기력한 모습을 보일 순 없었기에 단여명은 몽롱한 정신을 붙들었다.
권호영이 고개를 앞으로 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왜 그러냐는 듯 곧장 눈을 똑바로 떴지만, 아무래도 제대로 되지 않은 연기가 의심을 확신으로 굳어지게 한 모양이었다. 권호영이 미심쩍다는 양 인상을 썼다.
“졸린 얼굴인데…. 몸도 계속 밑으로 내려가잖아요. 그러다 물 먹겠어요.”
권호영은 부력에 가벼워진 몸을 다시금 위로 추슬러 안았다.
“네가 계속 잡아주면 되지.”
단여명은 귀찮은 마음에 되는대로 답했다. 그의 가슴팍에 머리칼을 비비며 본격적으로 졸 준비를 마쳤다.
근래에 잠을 들쭉날쭉 자기도 했고, 다사다난한 하루를 보냈더니 몸이 천근만근 무거웠다. 욕조 밖으로 나가 몸을 씻고, 젖은 몸을 닦은 뒤 침대로 가야 할 모든 일이 까마득하게 느껴졌다.
“그만 일어나요. 가서 편히 자게.”
단여명은 그 소리를 못 들은 척 눈을 감았다. 그러자 권호영이 ‘형?’ 하고 불렀다. 그 역시도 귀 밖으로 흘리자 권호영이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끼웠다. 움직이지 않으면 그대로 안아 올릴 태세기에 단여명은 그쯤 알겠다며 대답하곤 물 밖으로 몸을 일으켰다.
두 사람은 몸을 깨끗이 씻고 보송보송한 타월로 젖은 몸을 닦았다. 단여명이 머리를 말리는 사이 권호영이 새 이불을 반듯하게 깔았다. 잘 준비를 마친 단여명이 먼저 이불 속을 파고들었다. 온 방의 불을 끄고 온 권호영도 뒤이어 이불을 젖히고 침대 안으로 들어왔다.
단여명은 어둠 속에서 권호영이 옆자리에 눕는 기척을 느꼈다. 그가 편한 자세를 잡자 침대의 흔들림이 점차 멎었다. 그리고 잠깐의 적막이 지났다.
‘……이거 조금 이상한데.’
쥐 죽은 듯 흐르는 침묵에 단여명은 점차 불편해지는 마음을 느꼈다. 곁눈으로 옆을 살피니 손을 뻗으면 닿을 거리에 누워 있는 권호영이 보였다. 제가 바로 잠들 거라고 생각해선지 그는 별다른 말을 걸지 않았다.
침대는 하나뿐이었고, 두 사람은 같은 침대 위에서 함께 잠든 적이 없었다. 단여명은 뻣뻣하게 누운 자신들의 자세가 은근히 의식되기 시작했다. 침대에서부터 욕실까지 쭉 붙어 있었는데, 같은 침대에서 잔다고 갑자기 내외하는 느낌이었다.
단여명은 어둠이 드리워진 천장을 보며 고민했다. 멀찍이 떨어져 부동자세로 자는 건… 뭔가 흐름상 어색하지 않나? 한번 그런 생각이 드니 자신들의 거리가 더 부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그냥 자연스럽게 품에 파고들어 봐? 아니면 팔베개? 손잡고 자는 건 더 어색할 것 같고…. 그렇게 갖은 선택지를 떠올리고 있던 도중.
“…좋은 냄새.”
코끝을 스치는 향기에 불현듯 입이 열렸다.
맨살에 감기는 폭신한 침구와 이불 안을 감도는 따뜻한 체열. 그리고 코끝을 살랑살랑 간질이는 향긋한 비누 향기. 그의 살냄새가 섞인 보드라운 향이 후각을 기분 좋게 자극했다.
다른 사람과 같이 잠자리에 들 때면 곧잘 잠을 설쳤다. 그렇지만 오늘 밤은 잠이 솔솔 잘 올 것 같다는 생각이 어렴풋이 들었다. 피곤하기도 피곤했고, 자신을 감싼 것들에게서 깨끗한 향이 났다.
작게 낸 목소리에 권호영이 이쪽으로 얼굴을 돌렸다. 단여명 또한 고개를 돌려 그를 가만히 마주 보았다. 어둠 속에서 보이는 눈동자가 잠기운 없이 말갰다.
“남자랑 하는 거에 거부감은 없었어?”
목소리를 죽인 단여명은 전부터 궁금했던 것을 물었다. 아직 말똥말똥해 보이는 상대를 남겨두고 속 편히 잠이 들 정도로 자신은 매정한 성격은 못 되었다.
“아무리 술에 취했다지만…. 나였으면 많이 놀랐을 것 같은데.”
어둠이 내려앉은 긴 속눈썹이 느릿하게 깜빡거렸다. 단여명은 그 모습을 보다가 권호영 쪽으로 몸을 돌려 누웠다. 머리에 팔을 베자 서로의 몸이 닿을 듯 닿지 않는 거리까지 좁혀졌다.
“솔직히 놀라긴 했어요.”
권호영도 몸을 약간 틀어 누웠다. 미약하게 잡히기만 했던 온기가 이불 속에서 한결 가깝게 느껴졌다.
“사실은 그럴 생각이 없었는데…….”
“어?”
단여명은 가만히 듣다가 멍청하게 눈을 깜빡였다. 이런 분위기에서 나올 거라고 생각지도 못한 대답을 들어 일순간 머리가 멍해졌다.
권호영은 이상한 부분에서 솔직한 면이 있었다. 속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 처음엔 자신과 같은 부류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권호영은 간간이 솔직할 때가 있었다. 그게 의외면서도 재밌는 구석이 있어 종종 실없는 웃음이 새곤 했다.
“…그럴 생각이 없었다고?”
그렇지만 이번만큼은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권호영은 제 반응에 의아해하는 것 같았으나, 말을 바꾸지 않았다.
“네.”
“전혀?”
“전혀는 아닌데… 거기까지 생각을 못 했어요.”
“거기까지?”
“그…….”
“…….”
“섹스요.”
고작 ‘섹스’라는 짤막한 영어 단어를 소리 내어 말하는데 발음이 외국인처럼 매끄러웠다. …미국에서 살다 온 티가 나긴 나는구나. 혀에서 미끄러지는 듯한 발음에 어쩐지 기분이 이상야릇해졌다.
단여명은 무의식중 그 목소리를 되새기다가 엉뚱한 곳으로 튄 생각을 바로잡았다. 지금 중요한 건 이게 아니었다.
“왜?”
반문하는 목소리가 조금 멍청하게 들려 단여명은 미심결에 눈썹을 약간 찡그렸다. 권호영은 어둠에 가려 그 미세한 표정 변화를 알아채지 못했다. 그저 지나치게 간결한 물음을 듣고 조금 어리둥절해졌다.
사귀는 사이가 아니더라도 섹스를 할 순 있었다. 권호영의 주변에도 그런 친구들이 있었다. 성별을 가리지 않고 하룻밤을 보내거나, 그런 짓을 할 목적으로 앱을 통해 FWB(Friend With Benefit)를 만드는 애들이.
그렇지만 자신은 한 번도 그런 적이 없었거니와 제가 그때 당시에 느꼈던 분위기는 그런 쪽이 아니었다. 그와 가까워지고 싶다는, 막연한 충동에 사로잡혀 마음이 주체하지 못할 만큼 흔들렸었다.
“…형?”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딱 하나 기민하게 눈치챈 것이 있었다. 불러도 반응이 없는 상대를 가만 바라보던 권호영은 단여명에게 좀 더 붙어 누웠다. 뭔가 당황한 듯한데, 어둠에 가려 표정이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럼 왜 그렇게…….”
단여명은 권호영이 바짝 다가온 줄도 모른 채 혼란스러워하기 바빴다.
그럼 왜 그런 눈으로 쳐다봤는데. 차마 묻지 못할 말이 목구멍 중간에 턱 걸렸다. 제가 느꼈던 오묘한 분위기와 수선했던 그날의 공기가 자신만의 착각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거짓말처럼 잠이 싹 달아났다.
권호영은 알다가도 모를 녀석이었다. 초반에는 자신이 분명 리드줄을 단단히 쥐고 있다고 생각되게 한다. 그런데 끝으로 갈수록 어쩐지 녀석에게 휘말리는 기분이었다. 권호영은 의도한 바가 아닌 것 같은데도 그랬다.
술김에 섹스한 다음 날, 제가 처음이라고 고백했을 때도 그랬다. 그는 곧바로 후회하지 않았다는 말을 덧붙여 배로 불어난 당혹감을 안겨줬다.
그리고… 섹스할 때도. 처음엔 온순히 끌려가다가 예측할 수 없는 순간에 짐승의 거죽을 뒤집어썼다. 거듭 묵직한 체중을 받아냈던 허리가 아직도 징징 울렸다.
지금도 역시나 같은 상황이었다. 내가 생각했던 분위기는 이런 쪽이 아니었는데…. 연인처럼 꽁냥꽁냥한 분위기는 바라지도 않았다. 그럴 사이가 아니기도 했고.
그저 이건 단순히 흐름상의 문제였다. 만족스러운 밤을 보내고 같은 이부자리에서 잠들기 전, 평상시와 다른 대화를 나눌 수도 있지 않은가. 조금 가까이 붙어 누운 채 서로에게 궁금했던 걸 물으며 전보다 가까워진 것만 같은 분위기에 취하는 건 무언의 절차였다.
물론 생략 가능한 것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섹스가 끝난 뒤에도 여기저기 입맞춤하던 것으로 보아 권호영도 싫어할 것 같지 않았기 때문에 유도한 상황이었다.
“형, 더워요?”
그런데 아무래도 괜한 걸 물어본 것 같다.
“얼굴이 뜨거운데.”
제가 제 무덤을 파게 된 꼴이니까.
권호영이 단여명의 뺨에 손등을 댔다. 단여명은 침묵으로 답했다. 오늘 창피한 일이 연달아 생겨 체면이 말이 아니었다.
그의 물건을 위로해 준 날, 혼자 욕실에 들어가 자위한 것을 들켰다. 그 일의 뒷사정이 궁금했지만, 일부러 묻지 않는 중이다. 아무리 소리를 죽였대도 그가 욕실 가까이에 왔으면 고스란히 다 들렸을 것이다. 극한의 수치심이 들 것이 뻔해 쓸데없는 호기심을 억눌렀다.
게다가 또다시 그에게 펑펑 울면서 안겼다. 정작 힘을 쓴 사람은 권호영인데, 가만히 누워 있던 제 다리만 형편없이 떨렸다. 배에 힘이 풀려 소변 비슷한 액을 쏟아 침구까지 새로 갈았다. …이렇게 세세히 따져 보니 더 낯을 들 면목이 없었다.
“아니, 한 방 먹은 기분이라서…….”
단여명은 제 뺨에 닿은 손을 피하고자 얼굴을 아래로 내렸다. 언제 이렇게 가까워졌는지 코끝에 그의 목덜미가 스쳤다. 스리슬쩍 다가온 손은 제 허리에 살포시 얹어진 채였고, 서로의 다리는 체온이 느껴질 만큼 살짝 맞닿아 있었다.
“지금까지 너 놀린 거 벌 받는 기분이야.”
단여명은 권호영의 가슴팍에 그냥 얼굴을 묻어버렸다. 등을 돌리거나, 침대 밖으로 달아나면 제가 부끄러워하고 있다는 게 티 날 테니까. 언제 끌어안은 듯한 자세가 된 건지 경위를 따질 겨를은 없었다. 일단 얼굴을 숨기고 봐야겠다는 생각이 가장 먼저 들었다.
“너 어디 가서 그런 눈으로 쳐다보면 안 돼. 그거 범죄야. 다른 사람들이 오해한다고….”
“네?”
“누가 네 앞에서 넘어지면 그냥 구경만 해. 차라리 잘 넘어졌다고 손뼉을 치든가.”
권호영은 얼굴을 가리려는 단여명을 의문스럽게 바라보았다. 어디로 보나 창피해하는 것 같은데, 그 이유를 알 수 없어 침묵을 택했다.
이곳저곳 헤매던 권호영의 눈동자가 이내 한 곳에 닿았다. 작은 불씨를 품은 것처럼 빨개진 귀 끄트머리가 보였다. 주변이 캄캄해 아주 자세히 들여다보고 나서야 알아챈 것이었다.
계속 관찰하다 보니까 색이 점점 진해졌다. 잘못 본 것인가 했는데, 역시 빨갛게 달아오른 것이 맞아 보였다. 권호영은 귀 끝을 톡 건드렸다. 그러자 단여명이 숨이 쉬어질까 걱정될 정도로 품속으로 파고들었다.
권호영은 단여명이 했던 말을 머릿속으로 정리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깨달았다. 서로의 입장이 달랐던 모양이라고. 아마 단여명은 그때 자신이 보였던 눈빛을 성적인 메시지로 오해했나 보다.
솔직히 키스까지 상상해 보긴 했는데……. 어쩐지 말해 주기 싫었다.
“제가 그런 경험이 처음이어서 눈치가 없었나 봐요.”
자신을 놀리던 단여명이 아마 이런 기분이었을까. 어쩐지 웃음이 샐 것 같아 품 안에 들어온 몸을 살짝 끌어안아 보았다. 예상대로 아주 따끈따끈한 체온이 몸을 기분 좋게 덥혔다.
“저희 사이에 계속 유효한 말이 있다고 했죠.”
“…….”
“싫지 않았어요. 저는 남자랑… 형이랑 한 거 후회 안 해요. …아마 몇 번이나 한다고 해도 달라지지 않을 거예요.”
‘…그야 지금은 사이가 좋으니까.’
단여명은 창피한 마음에 괜히 속으로 구시렁댔다. 나중에 관계가 틀어지거나, 견디기 힘들 정도로 양심에 찔리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서로의 어머니를 아무렇지 않게 대면할 정도로 단여명이 생각하는 권호영은 철면피가 아니었다.
거기다 후회하지 않는다고 말하기엔 이제껏 자신들이 뭘 한 게 없었다. 그의 성기를 빨아 준 것까지 친대도 이번이 고작 세 번째였으니까.
권호영이 한 것이라곤 그저 있는 그대로의 물건 크기로 순수하게 제 뒤를 죽사발을 낸 것밖에 없다. 서로의 성적 취향이라든가, 선호하는 체위라든가. 그보다 더 나아가 성격 차이라든가…. 아직 서로에 관해 모르는 게 많았다.
“오늘 좋았어요.”
단여명은 그 말을 듣고 권호영의 마음을 대략 짐작했다. 권호영도 자신만큼이나 자신들의 속궁합이 끝내주게 잘 맞는다고 생각하나 보더라고.
“고마워요, 형.”
“…응.”
“…….”
“나도.”
단여명이 들릴 듯 말 듯 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고맙다는 말을 들으니 기분이 이상해졌다. 제가 뭘 했다고 고맙다는 건지…. 몸을 겹친 채 저런 목소리로 속삭이니 자신들이 무슨 애틋한 사이라도 된 것 같았다. 약간 쑥스럽기도 하고……. 하여간 묘했다.
그 뒤로 자연스럽게 대화가 끊겼다. 단여명은 커다란 품속에 얼굴을 묻은 채 눈을 감았다. 조금 답답한 기분이 들 만하면 향긋한 비누 향이 비강을 감쌌다. 따뜻한 비누거품욕에 몸을 푹 담근 것처럼 몸이 늘어지더니 점차 손쓸 수 없는 수마가 몰려왔다.
푹신한 이불이 한 겹, 그리고 뜨끈뜨끈한 체열과 적당한 팔의 무게감까지 몸 위에 두 겹이나 쌓인 따뜻한 것들이 잠을 불렀다. 그렇게 차츰 의식이 멀어지던 찰나였다.
“…은… 한 사람… 요.”
지금껏 말이 없어 잠든 줄 알았던 권호영이 어떤 말을 흘렸다.
…저게 무슨 말이지. 흐린 의식 속에서 얼마의 시간이 지났는지 모르겠다. 단여명은 잠에 취해 거북이걸음 같은 생각을 이었다. 생각이 드문드문 끊기길 반복하면서도 차분히 유추한 끝에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알아냈다.
형은 따뜻한 사람이에요.
‘…싱겁기는.’
그럼 사람 몸이 따뜻하지 차가울까…. 누구랑 같이 자 본 적이 없어서일까. 낯간지러운 소리를 잘도 한다.
진짜 입 밖으로 웃음을 흘렸는지, 아니면 상상 속에서 그친 것인지 모르겠다. 단여명은 따뜻한 품 안에서 그대로 의식을 놓아버렸다.
***
갓 중간고사를 끝낸 학생이라면 잠깐의 자유를 만끽할 만도 하건만, 권호영은 전과 같은 일상으로 돌아왔다. 시험공부를 하느라 바짝 조였던 스케줄을 다시 운동에 배분하고, 밤마다 틈틈이 강의 자료를 복습했다.
다만 한국 땅을 막 밟았던, 학기 초와 달라진 부분이 있다면 귀가 시간이 빨라졌다는 것이다. 예전엔 집에 잠시 들렀다가 늦은 시간까지 도서관에 있었지만, 요즘은 일찍 집에 들어가 옷을 갈아입고, 운동을 다녀온 뒤에 집에서 공부했다.
남의 집이라고 생각해 마냥 불편하기만 했던 곳이 요샌 그리 불편하지 않았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면 자신을 맞아 주는 사람이 있었다. 매일같이 외출하는 집주인과 자연히 마주치려면 일찍 귀가할 수밖에 없었다.
“아마 오늘은 일찍 들어올 거야. 한 8시쯤?”
단여명의 일상도 크게 바뀐 것이 없었다. 매일 달라지는 기상 시간에 눈을 떴고, 대충 정신을 차린 뒤엔 느릿느릿 집안일을 했다. 소파에 늘어져 책을 보고 있노라면 권호영이 돌아왔고, 외출을 마치고 돌아온 그를 반겼다.
그리고 여느 때처럼 오늘도 나갈 준비에 서두르는 중이었다.
“넌 운동 갔다 올 거지? 저녁 늦게 먹을 거면 같이 먹을까?”
단여명은 남색 셔츠의 밑단을 아이보리색 바지 속에 잘 정돈해 넣었다. 거울을 보며 주름이 잡힌 부분이 없는지 체크하고 뒤돌자 권호영의 뒤태가 시야에 잡혔다. 그는 주방 한편에 서서 흰색 더플 백에 물통을 챙겨 넣고 있었다.
“네. 뭐 먹고 싶은 거 있어요?”
“음…….”
아침에 단 걸 주워 먹어 입맛이 돌지 않았다. 아마 저녁을 먹기로 한 시간이 된대도 달라지지 않을 것 같았다. 가볍게 배를 채울 만한 음식이 좋을 것 같아 단여명은 그가 일전에 간식으로 만들어 줬던 음식을 말했다.
“저번에 만들어 줬던 거. 계란 넣은 샌드위치.”
“그게 먹고 싶어요?”
“응.”
그걸로 끼니가 되나…. 대강 그런 생각을 하는 중인지 권호영이 고민하는 낌새를 보였다. 그리고 알겠다며 고개를 주억였다. 눈치를 보아하니 아마 샌드위치 말고도 다른 음식을 만들어놓을 테다. 그가 만든 음식은 대개 맛이 좋았기에 아무거나 식탁에 올려도 상관없었다.
“그럼 다녀올게. 메시지로 뭐 사야 되는지 보내 줘. 내가 재료 사 올 테니까.”
“혼자 들고 오기 무거울 텐데….”
현관문까지 따라 나온 권호영은 무언가 생각하는 얼굴을 보였다.
“그냥 집 들어오는 길에 연락해요, 같이 가게. 냉장고도 비었고, 생필품도 떨어져서 살 게 많아질 것 같아요.”
단여명은 발뒤꿈치를 신발 뒤축에 끼우다 말고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권호영은 어느 순간부터 냉장고에 식료품이 얼마나 남았는지 꿰고 있었다. 그리고 최근 들어선 집 안의 생활용품도 둘이 같이 전담하게 되었다. 예전엔 먼저 필요하다고 인식한 사람이 눈치껏 채워 넣곤 했으니까.
‘…이런 얘기 하니까 꼭 신혼부부 같네.’
같이 사는 사람과 육체적인 관계를 맺은 적도, 그리고 그런 사람과 좁혀진 거리만큼 가까운 대화를 나눈 적도 처음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생뚱맞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이번엔 시리얼 사지 마요. 그런 거 먹으면 몸에 안 좋기만…….”
모양 좋은 입술이 예쁘게도 달싹거렸다. 단여명은 긴 잔소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그 입술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러니까 몸 생각해서라도…….”
막힘없이 얘기하던 권호영이 어느 순간 말을 뚝 멈추었다. 단여명은 그의 입술에 가볍게 눌렀던 입술을 흠칫 떼어냈다.
‘아.’
미친.
‘오버했다.’
엉뚱한 생각이 들어서. 그리고 잔소리를 듣기 싫은 마음에 충동적으로 입을 맞춰버렸다. 틈만 나면 그의 뺨을 찌르던 것과 비슷한 장난이었다.
이번에도 권호영은 얼빠진 얼굴이었다. 가림막처럼 내려왔던 앞머리는 뒤로 헝클이듯 넘겨 당혹한 얼굴을 감춰 주지 못했다. 언뜻 화난 것처럼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실상은 달랐다. 단여명은 그를 아주 잘 알고 있었고 말이다.
“어…….”
그렇지만 이번엔 단여명도 당황했다. 이렇게 할 생각까지는… 아니, 생각이 있었나? 모르겠다. 아무튼 이번 것은 도를 넘은 게 맞았다. 여기가 침대 위도 아니고. 단여명은 어물쩍 변명을 시도했다.
“입술이 예쁘…… 아니, 그….”
“…….”
“…입술에, 뭐가 묻었길래.”
틈을 보이고 벌어져 있던 입술이 곧 일자로 다물렸다. 권호영이 손등으로 입술을 슥 닦고는 뭐가 묻었는지 확인했다. …그걸 믿나? 허술한 변명이 통해서 기뻐해야 할지. 아무튼 상황을 모면하고자 한 것은 반쯤 성공한 것 같았다.
“나 진짜 갈게.”
단여명은 도망치듯 곧장 등을 돌려 현관문의 문고리를 잡았다.
“왜, 왜?”
얼마 안 가 반대쪽 손목이 턱 붙잡혔지만.
“지워졌어요?”
“…어?”
“입술에 묻은 거. 지워졌냐고요.”
단여명의 손목을 잡은 권호영이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꾸며낸 채 말했다.
“…한 번으론 안 지워질 것 같은데.”
저런 얼굴로 말하니 제법 뻔뻔해 보이기까지 했다. 처음 만났을 땐 저 무표정한 얼굴에 깜빡 속았다. 사실 지금도 가끔 헷갈릴 때가 있었지만, 저렇게 확실히 의사 표현을 할 때면 오해할 일이 생기지 않았다.
곧 권호영이 허리를 살짝 굽혀줬다. 노골적인 자세와 ‘다시 해요’라고 종용하는 듯한 눈빛에 단여명은 얼결에 ‘아, 응’ 하고 그의 뺨을 감싸 잡았다.
얼떨떨한 표정은 언뜻 멍청하게 보이기까지 했다. 단여명은 그런 얼굴로 그의 입술에 한 번 더 입술을 눌렀다. 그러고 나니 급격히 민망해져 진짜 뭐가 묻은 척 그의 입술을 손으로 살짝 문질렀다.
“조심히 다녀와요.”
마지막으로 권호영에게 손을 흔들어 준 단여명은 이윽고 현관문을 나섰다. 집 밖에 나왔어도 발걸음은 선뜻 떨어지지 않았다. ‘뭐지’ 하고 혼잣말했다가 뒷머리를 긁적이곤 고개까지 갸웃하고 나서야 다리가 움직여졌다.
봄날의 끝물이라 눈이 부실 정도로 날씨가 청명했다. 햇빛이 쨍하게 비쳐 조금 후덥지근해진 기온을 느낄 만하면 선선한 바람이 불어와 더위를 식혀줬다.
길을 따라 10분 정도를 걷자 큰 사거리가 나왔다. 단여명은 프랜차이즈 카페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유동 인구가 많은 곳이라 길거리도 그렇고 차도도 붐비는 모습이었다. 그러나 주위를 아무리 둘러봐도 제가 만나기로 약속한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담배라도 피우고 있을까….’
단여명은 주머니 속에 넣어뒀던 담뱃갑을 꺼냈다. 담뱃갑을 열었다가 닫으며 자리를 떠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던 찰나였다.
“여명아.”
불현듯 누군가의 손이 한쪽 어깨를 감쌌다. 익숙한 목소리였고, 예상했던 사람이었기에 놀라진 않았다.
“많이 기다렸어?”
여전히 남성적인 선이 두드러지는 얼굴. 남자는 짓궂은 사내아이처럼 장난스러운 미소를 걸친 채였다.
“아니, 나도 방금 왔어.”
단여명은 김선오에게 자신이 가장 잘하는 것을 보였다. 자연스러운 미소를 짓자 김선오가 웃음기를 더욱 짙게 내보였다.
둘은 잠시간 시선을 교환했다. 그리고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카페 안으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