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둘째 줄 (5/11)

둘째 줄

고요한 호수 면에 조약돌이 던져졌다. 잔잔히 번져나가는 물결처럼 의식이 차츰 깨어났다. 음…, 하고 만족스러운 숨이 샜다. 꿈도 안 꾸고, 오랜만에 깊은 숙면을 취했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깊은 잠을 잤으면 몸이 개운할 만도 하건만, 어쩐지 전신의 뼈마디가 뒤틀린 느낌이 들었다. 몸의 구석구석이 쑤셨다. 이등병 시절, 유격 훈련 받은 다음 날 기상나팔 소리를 들으며 눈떴을 때 느꼈던 고통과 엇비슷했다. 작게 몸을 뒤척이니 둔통이 두 배로 불어났다. 생각은 빠르게 바뀌었다. 어쩌면 그를 능가하는 고통일 수도 있겠다고.

엎친 데 덮친 격이라고 몸이 불편한 걸 인식하자마자 심각한 두통이 엄습했다. 머릿속에 누군가 손을 집어넣고 된통 뇌를 주물럭대는 느낌이었다. 속도 말이 아니었다. 비유하자면 음식물 쓰레기통에 뜨거운 물을 붓고 정신없이 흔들어 재낀 걸 제 위장에 옮겨낸 듯이 메스꺼웠다.

곧이어 단여명은 눈을 떴고.

‘…저질렀다.’

또렷한 정신을 차리자마자 그런 생각을 했다.

눈동자를 굴려 주변을 살피니 이곳은 자신의 방 안이었다. 익숙한 침구와 가구의 배치가 보였다. 내가 어쩌다가 내 방 침대 위에 누워 있게 됐지. 단여명은 조용히 기억을 되살렸다.

어젯밤, 술을 먹었다. 눈을 감으면 금방 잠들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퍼마셨다. 그리고 그 상태로 섹스를 했다. 제집에 방 한 칸을 내어준 엄마 친구 아들이랑.

“…….”

상황 파악을 마친 단여명은 소리가 나지 않게 옆을 돌아보았다. 제게 등을 지고 곤히 잠들어 있는 한 사람이 보였다. 길게 내려온 뒷머리 기장 때문에 단발의 여자 같기도 했다. 그러나 두터운 뒷목은 여자로 착각하기 힘든 선을 가지고 있었다.

너른 등판엔 붉은 생채기가 남아 있었다. 흡사 살쾡이에게 긁힌 듯한 자국이었다. 붉게 일어난 손톱자국은 그의 어깻죽지부터 날개 뼈 부근까지 날카로운 선을 그렸다. 뜨거웠던 전날 밤의 흔적이었다.

‘…엄마 얼굴을 어떻게 보지.’

기어코, 아주 절망적이게도 건드리면 복잡해질 남자를 건드려버렸다.

사실 차 안에서부터 약간의 심증은 있었다. 김선오랑 무슨 일로 싸웠든, 자신이 게이라는 사실을 알았을 거란 가능성은 지울 수 없다고. 지금껏 지켜본 성격상 어디에 떠들고 다니지는 않을 것 같아서 언급하지 않았다. 어제는 제 성적 지향성이 까발려졌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보다 김선오와의 일에 더 무게를 실었었다.

술을 먹지 않았던 멀쩡한 정신 상태에서도 미묘한 분위기를 읽었다. 그때까지는 착각인 줄 알았다. 그야 서로의 얼굴을 그렇게 확인한 건 처음이었으니까. 호기심에서 비롯된 감정이겠거니 생각했다.

‘친한 동생은 개뿔.’

선을 넘지 않겠다고? 잘도 헛소리를 지껄였다. 분위기에 취해 키스했고, 당황해하며 밀어내는 권호영에게 그리 속삭였다. 입을 벌려 달라고.

정신의 끈을 놓은 틈을 타 귀신같이 사고를 쳤다. 애초에 육체적인 관심이 있었던 남자와 단둘이 술자리를 갖다니. 그것부터가 실수였다. 그래도 좀 친해져서 괜찮을 줄 알았건만. 스스로를 지나치게 신뢰한 게 불찰이었다.

단여명은 천천히 상체를 곧추세웠다. 앓는 소리가 새 나가는 것을 필사적으로 참아내며 침대 아래로 발을 내렸다. 어쨌든 침대 위에서 서로 ‘좋은 아침이야’ 하며 모닝 키스할 분위기는 형성되지 않을 것이다.

권호영도 아마 분위기에 휩쓸린 게 없지 않을 것이다. 더군다나 그는 자신과 가진 술자리가 2차였다. 아무리 주량이 세다고 해도 아주 멀쩡한 정신은 아니었을 테다.

천천히 씻으면서 그가 깨어나면 해 줄 말을 정리해 둬야겠다. 어젯밤의 일이 기억나지 않는다는 건 말이 안 됐다. 정확히 몇 시간인지 모르겠으나, 자신은 마지막에 술이 거의 깼었다. 자괴감에 빠지기엔 끊임없이 그 짓을 해대느라 정신이 완전히 나가 있었다.

그가 기억나지 않는 척 넘어가고 싶다면 그렇게 해 줄 거고, 아니면…….

‘…응?’

쿠당탕, 하며 큰 소리가 난 뒤 보인 것은 맥없이 무너진 다리였다. 몇 걸음 떼지 않아 단여명은 방바닥에 주저앉았다.

순간 등골이 서늘해졌다. 곤히 잠든 사람을 깨울까 봐 그리도 조심했건만. 곧장 일어나 보려고 했지만, 다리가 꼼짝도 하지 않았다. 혼자 당황해하던 그때였다.

“……형?”

부스럭, 이불을 걷어내는 소리가 들렸다. 단여명은 흠칫 놀라 모든 움직임을 멈췄다.

“괜찮아요?”

놀란 목소리는 잔뜩 가라앉아 있었다. 곧 가까워지는 발소리가 들렸다.

“아…….”

단여명은 멍청한 탄식을 흘렸다. 아직 제정신으로 그를 마주할 자신이 없었다. 어떤 말도 생각해 두지 않은 상태인데.

단여명은 서둘러 방바닥에 손을 짚었다. 무릎을 세우는 것까진 성공했으나, 다리는 여전히 엉망으로 떨려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몸을 일으키는 것에 집중하느라 잠깐 방심한 찰나였다. 대비할 새도 없이 구멍 밖으로 무언가 왈칵 새어 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매끈한 허벅지를 타고 흐른 것은 밤새 품고 있던 타인의 정액이었다. 허벅지 안쪽에서 무릎으로 흘러내린 궤적은 깨끗한 방바닥을 기어코 흰 방울로 더럽혔다.

“…….”

“…….”

방 안은 무섭도록 조용했다. 똑… 똑… 수직으로 낙하한 액이 바닥에 부딪치는 소리마저 들릴 것 같았다. 아무리 떡 치는 것에 도가 튼 단여명이라도 이번 건 수치심을 물리칠 수 없었다.

‘…봤겠지.’

다리가 벌어져 있었으니 분명 봤을 것이다. 단여명은 슬쩍 허벅지 사이를 좁혔다. 계속 어정쩡하게 벌리고 있는 편이 더 민망했다.

“제가 닦는다고 닦았는데…….”

미처 거기까진 생각하지 못했다는 말이었다.

“…….”

뭐라 대답하기도 애매한 상황이었다. 그리 숨죽이고만 있는데, 권호영이 가까이 다가오는 기척이 들렸다. 단여명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기운이 달려 입꼬리가 삐거덕거리며 올라갔다. 단여명은 웃음 짓는 걸 포기했다.

“일어설 수 있겠어요?”

권호영과 눈을 마주치기도 전에 무의식중 다른 것에 시선을 빼앗겼다. 단여명은 무심코 눈을 내렸다가 재빨리 눈동자를 원위치시켰다. 볼 장 다 봤다고 생각해서인지 그는 완벽한 전라였다.

“…아니.”

…저런 걸 어제 뒤에 넣었다는 말인가. 소원 성취는 아주 제대로 했다. 반쯤 발기한 성기는 제 팔뚝과 견줄 정도로 아주 징그럽게 컸다. 거시기가 큰 남자는 다리가 세 개와 같다는 우스갯소리를 듣긴 했는데, 그 말이 완벽히 이해되는 날이 올 줄이야.

“좀 도와줄래?”

그러나 위쪽의 사정도 편히 볼 수 없었다. 속에서 북받쳐 오르는 민망함을 삭이듯 권호영의 얼굴은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새파란 멍 자국과 입가의 상처가 합쳐져 낯빛이 얼룩덜룩했다. 표정 관리를 하고자 얼굴은 딱딱하게 굳힌 채였다. 그러나 미세하게 빗겨 난 시선은 제 미간 쪽을 어색하게 맴돌고 있었다.

권호영이 손을 잡아 몸을 일으켜 세워줬다. 그가 힘을 보태주니 그나마 다리에 힘이 들어갔다. 몸을 일으키는 동시에 윽, 하는 소리를 뱉자 그가 손을 놓곤 황급히 이쪽을 살폈다. 허공에 애매하게 띄워놓은 손이 살며시 움츠러들었다.

단여명은 끙, 하며 허리께를 짚었다. 허리와 허벅지 안쪽이 제일 말썽이었다. 그리고 밤새 정성스레 쑤셔졌던 뒷구멍에선 작열감이 가시지 않았다. 얼굴을 찡그리며 얼결에 시선을 내리니 휑하게 드러난 다리 사이가 보였다. 저 역시도 몸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상태였다. 자신과 다르게 권호영은 제 목 밑으로 일절 시선을 내리지 않았지만.

“어디 가시게요?”

마저 걸음을 떼려는데,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발길을 잡아챘다.

“좀 찝찝해서. 씻으려고.”

“…….”

고민하나? 저거 고민하는 표정인데. 부축해 줄지 말지 고민하는 표정이었다. 마음은 고마우나, 그것만은 극구 사양하고 싶었다.

“괜찮아. 혼자 갈 수 있어.”

단여명은 애써 웃으며 그를 지나쳤다. 뒤로 따라붙는 눈길을 모른 척하며 무거운 다리를 움직였다. 욕실의 문을 닫고 나서야 참았던 숨이 한꺼번에 터졌다.

‘…어렵다, 어려워.’

탄식과도 같은 생각이 긴 한숨을 몇 번이나 끌어냈다. 단여명은 샤워기를 틀었다. 곧 욕실 안이 자욱한 수증기로 가득 찼다.

몸을 씻고, 옷을 걸친 뒤 거실로 나가 보니 권호영이 식탁 위에 묵직한 봉투를 내려놓고 있었다. 집 안에 안 보인다 했더니, 해장할 거리를 사러 나갔다 온 모양이었다.

“콩나물국 사 왔어요.”

검은색 후드집업을 벗은 권호영은 그것을 의자 등받이에 걸쳐놨다. 그리고 용기의 뚜껑을 따 큰 그릇에 각자의 것을 옮겨 담았다. 하얀 반팔 티만 걸친 그는 밥그릇에 소복이 흰 쌀밥을 얹었다.

“술 먹은 다음 날엔 맑은 국물이 당긴다고 했잖아요.”

…그랬나. 지나가다 한 소리를 용케 기억하고 있었다. 이미 수저까지 다 세팅해 놔서 도와줄 것도 없어 보였다. 단여명은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

“…….”

비로소 아침이었다. 야릇한 분위기에 휘말리거나, 어둠에 가려질 일 없이 서로의 얼굴이 낱낱이 드러나는 아침.

단여명은 흘끔 앞을 살폈다. 권호영은 흘러내리는 머리칼을 자연스럽게 넘긴 채였다. 이젠 아예 얼굴을 드러내기로 한 것인가. 아니면 대형 사고를 쳐서 얼굴을 가릴 정신이 남아나지 않는 걸지도 몰랐다. 하긴, 어제 서로 별꼴을 다 보였는데. 이제 와서 숨기는 것도 웃겼다.

슬슬 길게 이어지는 침묵이 의식되기 시작했다. 둘 다 음식에 손대지 않은 채 알 수 없는 신경전을 벌이는 중이었다. 같이 사는 사이니 어차피 도망칠 곳은 없었다. 단여명은 조심스레 말문을 텄다.

“어젠…….”

“제가…….”

중간에서 눈길이 딱 맞았다. 권호영도 타이밍을 재고 있었는지 서로의 목소리가 겹쳤다. 어쩐지 어제부터 계획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는 것 같다. 단여명은 쓴웃음을 지은 채 입을 열었다.

“너부터 말해.”

“아니, 형부터 말씀하세요.”

…그렇다면야. 단여명은 티가 나지 않게 심호흡하고, 대화를 이었다.

“어젠 내가 너무 취해서….”

“…….”

“미안해. 많이 놀랐지.”

여기서 없었던 일로 치기에는 엉덩이 사이에서 흐른 액을 봤을 것이다. 불그죽죽했던 그의 얼굴도 어제 일을 고스란히 기억하고 있는 낯빛이었다.

“아니요. 저도…….”

권호영은 말을 매듭짓지 못하고, 슬쩍 눈을 피했다. 말 한마디 한마디가 조심스러웠다. 지금 그가 무슨 생각 중일지 대략 느낌이 왔다. 아마 자신과 같은 마음이겠지. 연관된 사람들이 있어 당장 끊어낼 수 없는 관계였다. 혹시라도 말실수하면 어쩌나, 하고 서로가 서로의 눈치를 보고 있었다.

“너는?”

“…네?”

“하려던 말 있었잖아.”

그 말에 권호영이 슬그머니 시선을 맞췄다. 계속 개 같다, 개 같다, 생각한 탓인지 그가 정말 개처럼 보였다. 몸집도 커다랗고, 생긴 것도 용맹스러운데 하는 짓은 소심한 개. 얼굴을 드러내서 삽살개 쪽은 어울리지 않았다. 한 덩치 해서 앙증맞은 쪽도 아니고…. 굳이 비슷한 걸 붙여 주자면 풀이 죽은 셰퍼드?

“…제가 어제 너무 심하게 한 것 같아서요.”

알긴 아는구나. 단여명은 그의 말을 부정하지 않았다. 햇살이 들이비치는 창창한 아침에, 그것도 콕 집어서 중점을 논하니 껄끄럽긴 했으나,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몸은 어떤지… 궁금해서….”

“아까 넘어진 것 때문에?”

단여명은 가볍게 웃고는 아무렇지 않다는 투로 답했다.

“보기에만 그렇지 괜찮아. 방금도 혼자 씻고 왔는데.”

당연히 듣기 좋으라고 한 소리였다. 사실을 말하자면 씻다가 그대로 기절하는 줄 알았다. 몸을 숙여 다리까지는 닦을 엄두가 안 나서 물만 끼얹고, 대충 정액만 빼낸 뒤 샤워를 마쳤다.

거울을 보고는 뒤로 넘어갈 뻔했다. 특히 목덜미 쪽이 가관이었다. 그는 일을 치르는 도중 몇 번이나 목덜미에 이를 박았다. 그건 입안으로 피부를 빨아들였을 때 남는 울혈 자국이 아니었다. 그의 등판에 선명하게 박힌 손톱자국과 비슷한 흔적이 제 목덜미에 지저분하게 박혀 있었다.

허리엔 미미한 손자국이 남았다. 퉁퉁 부은 뒷구멍은 말할 것도 없었다. 제 몸에 남은 붉은 흔적들을 그가 봤을 거란 생각에 욕실 밖으로 나갈 자신감이 급격히 하락했다. 온몸에 덕지덕지 남겨진 흔적은 어젯밤의 일을 고스란히 증명하는 꼴이었으니까.

“……다행이네요.”

어젯밤, 야차같이 자신을 몰아붙였던 남자는 해가 밝자 눈도 잘 마주치지 못했다. 흡사 저주에서 풀려나 인간의 껍질을 뒤집어쓴 것처럼.

“음식 식겠다. 우리 먹으면서 얘기할까?”

단여명은 애써 숟가락을 들었다. 국을 떠 후후 불자 그걸 본 권호영도 뒤따라 숟가락을 들었다. 웃기게도 그 말을 끝으로 식탁 위엔 아무런 대화가 오가지 않았다.

‘…이러다 그대로 얹히겠네.’

이전 파트너들이랑은 무슨 얘기를 했더라. 밤을 함께 보내고 나서 같이 아침을 먹는 건 암묵적인 절차였다. 단여명은 자신을 거쳤던 사람들을 떠올려 보았다. 머릿속을 속속들이 뒤져 봤지만, 이런 껄끄러운 파트너는 둔 적이 없었다.

단여명은 섹스 파트너를 만들 때면 철저한 비즈니스 관계를 형성했다. 일로 얽힌 사람이라든가, 가까운 지인과 한 다리 걸친 사람은 곁에 두지 않았다.

…허물었던 선을 다시 긋는 게 맞는 것 같은데. 그런 생각과 별개로 기억은 회로를 타고 어제로 거슬러 올랐다.

혀가 끈덕지게 얽히던 감촉, 뒤가 한계까지 열리는 감각, 거부감이 들 만큼 빠듯하게 팽창됐던 배 속.

‘조금만, 조금만 더요….’

숨소리가 섞인 목소리와 혈관의 피를 바싹 불태우는 쾌락, 절정, 절정, 절정…….

“…….”

단여명은 우물거리던 입술을 서서히 멈췄다. 침대 위에서 성격이 달라지는 사람을 몇몇 보았다. 그중 자신의 페이스를 잃지 않되, 완벽히 잃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스타트는 제가 끊었을지 모르나, 끝은 자신이 멈출 수 있는 선이 아니었다. 막판에는……. 그건 성관계보다 포식이라는 행위가 더 걸맞았다. 그는 기어코 제가 기절할 때까지 놓아주지 않았다.

‘과하긴 했어도….’

좋긴 좋았지. 절정에 달하는 타이밍과 체력만 비슷했으면 완벽했을 텐데. 거기다…….

“입에 맞아요?”

…저 얼굴에 그 사이즈라니.

“응. 맛있어.”

솔직히 놓치면 아까울 것 같긴 한데.

“제가 할게요. 형은 가서 쉬세요.”

싱크대 앞에서 손을 걷어붙이자 권호영이 그를 저지하듯이 곁으로 다가왔다. 그럴 순 없다고 속으로나마 생각하기도 전이었다.

“얼굴이 창백해요.”

걱정스럽다는 음성이 재차 말을 걸어왔다.

“죄송해요. 제가 자제를 못 해서…….”

예상치 못한 때에 저돌적인 말을 꺼내놓곤, 그는 눈에 띄게 기가 죽은 모습이었다. 단여명은 자신도 모르게 당황했다. 대답을 생각할 새 없이 목소리가 어물어물 흘러나갔다.

“아니…. 나도 똑같았는데, 뭐.”

“…….”

“…….”

또 한 번 무거운 적막이 잇따랐다. 몇 번째인지 숫자를 헤아리기도 지칠 정도였다. 우리 진짜 어색하다, 지금. 그리 말하기엔 되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널 것 같았다.

“…그럼 부탁할게.”

단여명은 싱크대에 자신의 그릇을 놓고 자리를 비켜줬다. 권호영이 다가와 단여명이 사용한 그릇 위에 그의 그릇을 얹었다. 커다란 국그릇은 국물은 말끔히 비운 채였지만, 파릇한 건더기가 남아 있었다. 그중 콩나물의 숫자가 단연코 많았다.

…이래서 얘 눈치를 보게 된단 말이야. 아마 놓치기 아쉽다는 생각이 없었어도 그를 대하는 데 어려움을 느꼈을 것이다. 저렇게 상대한테 맞추는 것에 도가 튼 애인데.

“어디 가요?”

점퍼를 걸치고 밖을 나서려는 찰나 권호영이 물음을 던졌다. 아직 손끝에 물 한 방울 묻히기도 전이었다. 단여명은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어딜 가는지 모르지 않을 텐데. 어제 일로 사이가 서먹해진 탓인지 그는 사사로운 걸 물었다.

“담배.”

어젯밤부터 한 대도 못 피워서. 검지와 중지를 붙여 손으로 사인을 준 뒤 다시 걸음을 내디디려는 때였다.

“…저도 같이 갈까요?”

다시 돌아온 물음에 단여명은 재차 뒤를 돌아보았다. 아까까지는 등지고 있더니만, 지금은 아예 이쪽을 바라보고 선 채였다. 나서서 뒷정리한다더니 어느새 그건 관심 밖으로 밀려난 모습이었다.

어떻게 생각해 보면 권호영이 걱정하는 게 이상하진 않았다. 눈뜨자마자 방바닥에 엎어져 있는 자신을 보았으니 얼마나 놀랐을까. 거기다 그렇게 만든 장본인이 자기 자신이니 미안한 마음을 느낄 만도 했다.

“네가 언제부터 그런 거에 입을 댔다고.”

그렇지만 과한 걱정은 형이 된 입장에서 맘 편히 받기 힘들었다.

“괜찮으니까 여기 있어. 한 개만 피우고 금방 올 거야.”

단여명은 애써 웃어 보인 후 마저 걸음을 뗐다. 집 밖의 공기를 맡자마자 일정했던 걸음걸이가 빠르게 허물어졌다. 단여명은 어정쩡한 발놀림으로 아래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안에 올라섰다. 발목에 쇠고랑을 찬 것처럼 걸음 한 발 한 발이 무거웠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니 거울에 인영이 보였다. 무심코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을 본 단여명은 돌연 불길한 기운을 느꼈다. 서둘러 주머니 속에 넣어뒀던 담뱃갑을 뒤져 보았다. 담뱃갑 속에 보이는 담배는 단 하나였다. …돛대였다.

생각해 보니 어제 권호영을 데리러 나가는 길에 편의점에 들를 생각을 했었다. 그를 침대에 고이 모셔놓고 나서나, 아니면 조수석에 앉혀놓고 잠시 자리를 비우려고 했었다.

담배 생각이 안 날 만큼 어제 정신이 없긴 했지. 권호영이 많이 취했다는 연락은 놀랄 일도 아니었다. 오히려 사건의 시발점이었지. 삭신이 쑤시는 와중에 편의점에 갈 용기는 생기지 않았다.

단여명은 집 앞에서 하나 남은 담배를 입술 사이에 물었다. 김선오한테 연락도 해봐야 되는데…. 지금 당장 처리해야 할 건 권호영과의 관계 정립이겠지. 뭉게구름같이 피어오르는 연기 속에서 독한 냄새가 풍겼다. 그것을 잠시간 지켜보던 단여명은 발뒤꿈치로 담뱃불을 껐다.

“오늘은 어디 안 나가?”

자리를 비운 건 5분여쯤이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니 권호영이 소파에 멀뚱히 앉아 있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저게 자신을 기다린 건지, 아니면 습관적으로 앉아 있던 것인지 구분이 안 됐다.

권호영은 급한 일이 없으면 주로 거실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건 자신 역시 같았고, 그래서 자연히 같이 보내는 시간이 늘었다. 제가 사 온 간식거리를 나눠 먹으면서 TV를 보았고, 프로그램에 대해 소소한 얘기를 나눴다. 영양가 없는 대화여도 같은 공간에서 노닥거리다 보면 시간은 금세 가곤 했다.

“이따가 조모임이 있어서 잠깐 나갔다 올 것 같아요.”

…그게 언제부터였지. 아마 친하게 지내기 시작한 이후였던 것 같다. 집 안에서 생활하는 사람이 단둘뿐이니 어쩌면 자신들도 모르는 새 서로에게 의지한 걸지도 몰랐다.

“그래?”

조모임. 그것이 권호영의 나이를 다시금 실감시켜 주었다. 단여명은 가슴팍이 마구 따끔거리는 걸 느꼈다. 하지만 지금은 그것을 깔끔히 접어놓기로 했다. 이미 벌어진 일을 돌이킬 방법은 없었다.

“어제 일. 어디까지 기억나?”

단여명은 일인용 소파에 따로 앉았다. 권호영은 제가 건넨 물음에 조용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어긋난 시선은 마주 닿는 일 없이 각자 다른 곳을 배회했다. 그가 말문을 뗀 것은 얼마 지나고 난 후였다.

“…전부 다요.”

역시 그런가. 이미 짐작하고 있던 터라 감정의 변화는 없었다.

“생각보다 술을 잘하네.”

단여명은 부러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은은한 미소를 보이던 얼굴은 점차 웃음기를 지웠다. 자못 사무적으로 들리는 목소리가 잠시 동안 흐르던 침묵을 깼다.

“만약 내가 기억이 안 난다면?”

“…….”

“그럼 어떻게 할래.”

줄곧 시선을 피하던 눈이 똑바로 시선을 부딪쳐 왔다. 고요한 눈동자는 불순물이 섞이지 않은 맑은 호숫물 같았다. 얼굴은 제법 날카롭게 생겼는데, 눈빛은 순하기 그지없었다. 생명체에 비유하자면 사슴 같은 눈망울이랄까. 나무가 울창하게 드리워져 인적이 끊긴 숲속에서 유유자적 살아가는.

“…….”

기분 탓인지 그 눈동자가 서서히 탁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평소랑 달리 얼굴을 가리지 않은 채라 우중충한 인상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그의 낯에 수심이 드리워지는 것처럼 보였다.

단여명은 그 분위기를 읽으며 알 수 없는 거북함을 느꼈다. 저렇게 놔둬선 안 될 것 같은 느낌.

“…농담이야. 분위기가 어색한 것 같아서 장난 좀 쳐 봤어.”

본능적인 감이 이 방법은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다른 모면책이 필요한 것 같아 눈알을 굴리는 도중에 내가 저런 타입에 약했나, 하는 의문이 스쳤다. 그는 물음에 답하지도 않았는데, 이랬다가 저랬다가 혼자 야단법석이었다. 그게 뻘쭘한 감이 있어 단여명은 태연한 체했다.

하여튼 어려워. 차라리 그게 말이 되냐며 되레 따지기라도 하면 덜 껄끄럽지.

“솔직히 나도 민망하긴 해서.”

단여명은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손으로 입가를 쓸었다. 낯을 가리는 사람처럼 겸연쩍어 보이는 미소였다. 왜요? 직시하는 눈길이 그 이유를 묻는 듯해 단여명은 재차 입술을 뗐다.

“호영이 네가 나보다 어리기도 하고…. 어쨌든 내가 먼저 시작했잖아.”

먼저 방아쇠를 당긴 주제에 혼자 몇 번이나 절정에 달하고, 끝엔 맥을 못 추고 나가떨어졌지. 어린애 밑에 깔려서 싸기도 많이 싸고, 울기도 많이 울었다. 아직도 눈 밑이 벌겋게 짓물러서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전 좋았어요.”

“…….”

“…후회 안 해요.”

단여명은 턱을 쓸던 손을 멈칫했다. 기본적으로 민망해하는 것 같은데, 저돌적일 때는 또 저돌적이었다. 그 타이밍이 하나도 예측되지 않아 단여명은 때마다 침음을 삼켰다.

“그럴 만도 해.”

…이렇게 된 거 그냥 철판을 깔자. 어차피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한 건 달라지지 않는다. 이쪽은 아직 이 관계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 결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권호영의 눈치를 보니 당기는 족족 그대로 끌려올 것 같았다. 그렇지만 지금은 가볍게. 최대한 가볍게 말하기로 했다.

“여자랑은 좀 다르지?”

색다른 맛이 있긴 해. 좀 딱딱하고, 목소리도 굵고. 단여명은 시선을 던져 그의 의중을 떠보았다. 남자랑 하는 게 좀 거북하지 않았냐는 소리였다. 그러나 권호영은 보는 사람이 의아하게끔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어제가 처음이라서 잘 모르겠어요.”

“…처음이라니?”

남자만 처음이 아니었나? 보는 이의 시선을 의식해 얼굴 위에 쓰고 있던 가면에 쩍 금이 갔다. 단여명은 언제 웃었냐는 듯 미간을 살며시 찌푸렸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것처럼 바라보니 권호영이 도리어 당황한 사람처럼 주먹을 꾹 말았다.

“말 그대로…. 그런 경험이 처음이어서 비교할 사람이 없다는 말이었어요.”

“아, 그러니까.”

지금 네 말은.

“첫 경험?”

권호영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혀를 내어 입술을 한 번 축일 뿐이었다. 그 모습이 영락없는 시골 총각 같았다. 속세에 찌들지 않아 언제 총각 딱지를 뗄 거냐는 무례한 말을 들어도 무슨 말인지 몰라 고개를 갸웃대는, 그저 밭 가는 일이 세상 중요한 사람 말이다.

“하하.”

단여명은 실소를 흘리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점퍼의 앞섶을 여미는 손에 권호영의 눈길이 따라붙었다. 다른 말은 없었지만, 얘기하다 말고 또 어딜 가냐는 표정이었다.

“아니, 갑자기 담배를 하나 더 피워야 될 것 같은 기분이라서….”

아연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단여명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본심을 자백했다. 간단히 설명하자면, 편의점에 담배를 사러 갈 용기가 급격히 생겨났다, 이 말이었다.

***

어느새 꽃이 지고 완연한 봄 날씨였다. 시험 기간에 돌입한 대학생들은 저마다 전공 책을 품에 안고 대학로를 거닐었다. 대학교 앞에 늘어선 식당들은 점심 장사에 한창이었다. 어느 가게에 들어서도 모자를 눌러 쓴 학생들이 빽빽하게 들어앉아 있었다. 수저를 부딪치는 소리와 재잘대는 말소리가 하나가 되어 식당 안을 혼잡스레 울렸다.

“…그랬지. ……근데… 괜히….”

온갖 소리가 뒤섞인 공간 속 부유하는 정신을 느꼈다. 앞에서 들리는 목소리 또한 같았다. 자신과 그것들이 동떨어져 있는 것처럼 현실감이 아득하니 멀었다.

“…권호영. 야!”

큰 목소리가 귓전을 때린 건 어느 기점이었다. 권호영은 얼굴을 들었다. 층층이 내려온 앞머리 사이로 팔짱을 낀 윤재윤의 모습이 드러났다.

“…네?”

“너 내가 몇 번을 불렀는지 알아?”

“…….”

“먹을 걸 앞에 두고 뭔 생각을 그렇게 하냐.”

두 사람의 앞엔 커다란 전골 판이 놓여 있었다. 파와 청양고추, 양배추를 넣고 자작하게 끓인 양념 닭갈비가 지글지글 소리를 냈다. 매운 음식을 못 먹는 유학생을 배려해 제일 순한 맛으로 주문했는데도 풍겨오는 냄새부터 지독히 알싸했다. 권호영은 부러 시선을 떼어냈다. 벌써 혀끝이 얼얼한 느낌이었다.

“정신을 얻다 두고 다니는 거야. 너 그러다 소매치기당한다?”

“…한국은 그런 거 없다면서요.”

다른 나라에 비해 소매치기가 빈번하지 않다는 얘기는 윤재윤이 해 준 것이었다. 카페 안에 물건을 두고 자리를 비우면 외국인들은 물건을 노리지만, 한국 사람들은 그 빈자리를 노린다고. 반쯤 우스갯소리로 해 준 말이었다.

“아니? 있는데.”

그런데 이제 와서 윤재윤은 그 말을 번복했다. 한쪽 입꼬리를 올린 그가 손가락을 까딱였다. 가까이 오라는 듯 보여 상체를 앞으로 기울였다. 아니, 그거 말고. 반대로 뒤집힌 손이 검지를 곧게 세운 채 시계추처럼 흔들렸다. 무슨 속셈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손을 내미니 윤재윤이 손바닥이 천장을 향하도록 손목을 고쳐 잡았다.

“소매치기!”

호기로운 외침이 터졌다. 난데없이 손목을 얻어맞은 권호영은 눈동자를 굴렸다. 뭔가 반응을 기대하는 얼굴인데, 무슨 뜻인지 이해되지 않으니 어떤 말도 해줄 수 없었다.

“…….”

“…….”

“…아, 그 소매.”

권호영은 한참 뒤에야 이해를 마쳤다. 소매를 때려서 소매치기.

“재밌네요.”

“…그게 더 나빠, 이 새끼야.”

쯧, 하며 윤재윤이 혀를 찼다. 시시한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그는 철통에 꽂혀 있던 나무 주걱을 집어 올렸다. 재료가 골고루 뒤섞이도록 닭갈비를 버무리는 손놀림이 야무졌다.

“뭔데. 진짜 무슨 일 있어?”

묻기 껄끄럽지만 애써 물어봐 준다는 목소리였다. 일? 권호영은 입언저리에 손을 올렸다. 거칠해진 입술 옆에 딱지가 만져졌다. 이제 거의 아물어가는 상처였다. 딱지의 끄트머리를 손끝으로 쓸어 보던 권호영은 무덤덤하게 답했다.

“무슨 일은요. 그런 거 없어요.”

사실 무슨 일이야 엄청나게 많았다. 지나치게 사적인 얘기라서 남에게 털어놓을 수 없는 문제니까 그렇지.

‘처음으로 누군가와 친해지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그 사람의 가장 가까운 사람이 되고 싶었는데, 어쩌다가 섹스를 했어요. 그리고 제가 그 짓에 이성을 잃어 그 사람이 소변을 지릴 때까지…….’

조언을 구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도저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왜 불렀는데요?”

말머리를 돌리자 윤재윤이 와작 인상을 구겼다. 생각만 해도 열이 오른다는 양 그는 거칠게 닭갈비를 들쑤셨다.

“나 조장 한다고 괜히 나선 것 같다고.”

“아…….”

교양과목에서 내준 조별 과제 얘기였다. 두 사람과 같이 다닌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수강 정정 기간이 다가왔고, 필수교양이던 ‘마케팅과 윤리의 이해관계’는 우연히 둘만 수강 중이었다. 이왕 시간표가 겹치는 거 똑같이 맞추자고 조르기에 귀찮다는 티를 냈었다.

권호영이 침묵만 지키고 있으니 두 사람은 그의 양편에 서서 사탕발림했다. 마케팅과 관련된 수업은 조별 과제 점수가 크게 반영된다고. 친구들이 있는 지금이 시기적절한 때가 아니겠냐며 시끄럽게 떠들어대기에 끝내 반 포기 상태로 응했다.

“그러니까 내가 그 자식 말고 딴 사람 끼자고 했지? 처음 인사할 때부터 또라이 같아 보이더라니. 아니, 자기가 무슨 군대 조교야? 길거리에서 빨간 모자만 봐도 혈압이 올라. 지금이 크리스마스 시즌이 아니라서 다행이지.”

까딱 잘못했으면 어린애들의 동심을 짓밟아버릴 뻔했다며 윤재윤이 주먹을 바르르 떨었다. 권호영은 그 말을 듣는 중 내심 놀라워했다. 남의 욕을 할 때 말재간이 더 좋아지는구나. 말이 하도 빠르고 거칠어서 반대쪽 귓구멍으로 그대로 흘러나갔다.

“모이라고 할 때 전화도 안 받다가 뒤늦게 할머니가 편찮다고 하질 않나. 그래 놓고 SNS에는 술 마신 사진 처올려 놨더라? 그리고 다 끝난 얘기는 왜 다시 꺼내는데. 자기만 시험 봐? 갑자기 자료 조사를 맡겠다고 하면 짜증이 나냐고, 안 나냐고. 백퍼 그게 빨리 끝나니까 조별 대충 끝내고, 개인 공부 하겠다는 소리잖아.”

“…….”

“아니, 애초에 조별 과제의 의미를 몰라, 그 새낀. 교수님이 조원과의 단합이 제일 중요하다고 침이 튀도록 설명했는데. 씨발, 빨간 모자…. 잊으려고 해도 잊히지가 않아. 맨 앞자리에 앉아 있던 빨간 모자 그 새끼, 얼굴 닦는 거 분명 내가 봤는데?”

윤재윤이 씩씩거리다가 마른세수를 했다. 그리고 양손으로 얼굴을 파묻은 채 웅얼거리듯 말했다.

“씨발, 안 봐도 뻔하다. 복사 붙여넣기 한 자료 보내서 너나 내가 수습할 게 눈에 훤하다고.”

“…….”

“존나 암울한 내 대학 생활……. 군대 갔다 와도 왜 달라진 게 없지. 그런 새끼들은 하여튼 어딜 가나 꼭 있어요.”

권호영은 전골 판에 걸쳐져 있던 나무 주걱을 집었다. 닭갈비를 한바탕 섞으니 매운 내 나는 연기가 피어올랐다. 희뿌연 연기가 앞을 가로막은 사이 깊은 한숨 소리가 터졌다.

“개인적으로 연락이 온 거예요? 단체 채팅방에는 그런 소리 없던데.”

“어. 자기도 욕먹을 짓인 건 아나 보지.”

“그럼 저한테 남는 역할 주세요. 제가 그거 할 테니까.”

거기서 찡그릴 게 더 남아 있었는지 윤재윤이 오만상을 찌푸렸다. 마치 이상한 사람을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너 자료 조사 하고 싶다고 했잖아.”

권호영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대학 생활 적응에 상당한 노력을 들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어려운 전공 용어가 많아 속성 과외를 받듯 온종일 그를 붙잡고 질문한 적도 있었다. 아직 낯선 한국 표현도 많은데, 그 모든 것을 더해 자신이 손해를 보겠다니. 이해를 못 할 만도 했다.

“나야 좋긴 한데…. 너도 참 너다.”

권호영은 그 말을 그러려니 흘려들었다. 어차피 생각을 돌리려면 공부량이 많은 편이 나았다.

“야. 근데 너 그 같이 산다는 형이랑은…….”

“…….”

“뭐, 별일 없냐?”

윤재윤이 뜸 들이다가 질문을 던졌다. 관심 없는 척 물었지만, 그는 연신 제 눈치를 살피고 있었다.

요즘 머릿속을 차지해 지워지지 않는 사람이 또다시 수면 밖으로 끄집어졌다. 권호영은 눈빛을 달리했다. 머리카락에 가려져 잘 드러나지 않았으나, 의문이 섞인 눈이었다.

그러고 보니 윤재윤은 형과 아는 사이라고 했다. 많은 일이 휘몰아쳤던 날, 윤재윤은 평소답지 않게 말을 더듬거렸다. 아무리 눈치가 없는 사람이라도 바보가 아니라면 그가 당황한 걸 눈치챘을 것이다.

뒤이어 단여명이 매끄러운 설명을 곁들였지만, 의심을 지울 수 없었다. 형은 모르겠고 윤재윤은 수습을 못 하는 눈치였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같이 산다는 형?”

물음을 던지려는 찰나, 쾌활한 목소리가 입을 가로막았다.

“그거 호영이네 오빠 얘기야?”

화장실을 다녀온 민들레가 윤재윤의 옆자리에 앉았다. 그리고 넋이 나간 눈을 보이더니 작게 중얼거렸다.

“잘생겼어….”

시선은 곧 이쪽에 닿았다. 생기가 도는 눈동자엔 이채가 반짝이고 있었다.

“나 진짜 깜짝 놀랐어. 왜 사람들이 잘생쁨에 환호하는 줄 처음 알았다니까.”

“잘생쁨? 그건 또 뭔 말이냐.”

“뭔가 학교에서 남자들보다 여자들이랑 더 친할 상이야.”

여느 때처럼 윤재윤의 말을 가뿐히 무시한 민들레가 주저리주저리 얘기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공감대 형성도 잘하고 얘기도 잘 들어줘서 여자애들끼리 쟤는 친구지, 하면서도 마음 한편에 품고 사는 거지. 알고 보면 같은 반에 짝사랑하는 여자애들도 많고…. 그러다 질투에 눈이 먼 남자애들한테 시비가 걸리는데, 위기의 순간에 등장한 여주랑 이뤄질 상이야. 여주는 차갑지만 당돌해야 돼. 좀 츤츤대는 스타일?”

그러다 친구가 되고, 서로의 마음을 깨닫고……. 아, 벌써 맛있다. 민들레가 헤실헤실 웃으며 젓가락을 손에 쥐었다.

권호영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낯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민들레는 아직 음식을 한 점도 집어먹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거 무슨 드라마 얘기예요?”

“아니. 그냥 그럴 것 같다는 얘기야.”

젓가락으로 감자를 콕 찍어본 민들레가 그걸 앞접시에 옮겼다. 감자를 반으로 가르니 포슬포슬하게 익은 안쪽 면이 드러났다. 민들레는 잘 익은 감자를 숟가락에 올려 후후 입바람을 불었다.

“들레, 잘생긴 남자 좋아하는구나.”

“뭘 새삼스레. 지금 알았어요?”

감자를 입에 쏙 넣은 민들레가 거침없이 답했다. 윤재윤도 그 모습을 보고 전골 판에서 당면을 건져냈다. 탱탱하게 익은 면발이 후루룩, 하고 그의 입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다 익었다고 눈짓하기에 권호영 또한 수저를 들었다.

“왜, 호영이도 인물 좋잖아. 쟤 앞머리 깠던 날 대학 커뮤에 게시물 몇 개 올라왔지? 한구 포차에 있던 남자 어디 과냐고.”

“아, 그거 저도 봤어요.”

민들레가 잔에 물을 따라 그것을 시원히 들이켰다. 그리고 닭갈비를 한입 먹고 인상을 구기고 있던 권호영에게도 눈치껏 물통을 넘겼다.

“그런데 호영이는 제 스타일 아니라서. 전 호리호리한 남자가 좋아요.”

“야, 권호영. 너 들레 스타일 아니란다. 뭐라고 말 좀 해봐.”

“별생각 없어요.”

“그렇다는데요? 평범하기 그지없는 재윤 오빠?”

민들레가 비실비실 웃었다. 놀림이 가득한 어조에 윤재윤이 욱하며 반기를 들었다.

“야! 내가 왜 평범해?”

“냉정하게 말해 줘요?”

“아니…….”

“솔직히 호영이랑 호영이네 오빠에 비하면 평범한 축이죠.”

“…….”

“아니, 평범함 그 이하인가…….”

윤재윤을 위아래로 훑은 민들레가 생긋 미소를 지었다.

“그래도 못생겼다고는 말 안 했어요, 난?”

밝은 목소리가 마지막으로 비수를 꽂았다. 윤재윤은 멍청한 표정으로 그녀를 보다가 ‘쉬잇, 괜찮아’ 하며 자신의 가슴께를 토닥였다. 나름 상처받았다고 시위하는 모습이었지만, 늘 그렇듯 두 사람은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이름이 단여명이랬나? 어떻게 이름도 예쁘지…. 호영이 옆에 붙어 다니면 다시 마주칠 수 있겠죠? 신난다. 그날 복권 사야지.”

콧노래까지 부르는 것이 잔뜩 들뜬 모습이었다. 권호영은 그 허밍 소리를 들으며 닭갈비의 맛에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역시 혀가 쓰리도록 매웠다.

“그래서 여명이 오빠는 왜요? 그 오빠 얘기하고 있었잖아요.”

“아니, 그냥….”

갑작스러운 얘기 전환에 당황했는지 윤재윤이 말을 얼버무렸다. 하던 젓가락질도 멈추고 생각에 빠진 눈치였다. 권호영은 아닌 척 그의 기색을 살폈다.

“아무 얘기도 아니었어. 못 들은 거로 해.”

“뭐예요. 시시하게.”

민들레가 젓가락을 까딱이며 핀잔했다. 윤재윤은 ‘뭐’ 하며 부루퉁하게 답할 뿐 단여명에 대한 얘기는 그 이상 거론하지 않았다.

그렇게 단여명에 대한 얘기가 흐지부지 종결된 후 다시금 빨간 모자가 화두에 올랐다. 닭갈비의 판이 바닥을 드러날 때쯤 이야기가 얼추 정리됐다.

괜히 머리 아프게 입씨름하지 않고, 세 사람은 빨간 모자에게 자료 조사를 맡기기로 했다. 그리고 얘기가 나온 참에 각자의 역할을 분담했다. 민들레는 자료 정리, 권호영은 PPT, 윤재윤은 발표를 맡기로.

“근데 너 집에 컴퓨터나 노트북 있냐? 아니면 주말에도 꼬박꼬박 학교 나와서 하게?”

휴지로 입을 닦아낸 윤재윤이 여상한 투로 물었다. 그는 매번 주말에도 학교에 나오는 권호영을 이해를 못 하는 걸 넘어서 안타깝게 여겼다. 그로선 권호영이 퍽 괴짜로 느껴졌다.

“그래야…….”

그래야겠죠. 자리를 정리하며 그리 대답하려던 권호영은 뇌리를 스친 생각을 잡아뒀다. 여러 가지 가정을 세워 봤지만, 염치가 없는 것을 떠나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행동이었다.

고민이 반복되는 가운데 하나의 생각만큼은 분명했다. 이 관계에 있어서 아쉬운 사람은 자신이라고. 그러니 초조해하고, 애가 타는 마음은 오로지 자신의 것이라고 믿었다.

“노트북?”

거울 속에 비친 눈동자가 시선을 맞췄다. 결 좋은 머리칼이 하얀 손가락 사이에서 사륵, 흐트러져 내렸다. 검은 머리카락과 우윳빛처럼 새하얀 피부. 흑과 백이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는 단여명은 오늘도 어김없이 반짝반짝 빛났다.

“응, 써도 돼. 요즘 작업하러 밖에도 잘 안 나가서.”

권호영은 순간 맥이 탁 풀리는 걸 느꼈다. 결국 말을 꺼냈고, 허락을 받았다. 단여명이 웬만한 일이 아니면 거절하지 않는다는 걸 권호영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노트북을 빌려달라는 별거 아닌 말이었지만, 그에게 뭔가를 부탁한 게 처음이라서 거절할까 봐 내심 마음을 졸이고 있었나 보다.

“아, 지금 갖다줄까?”

그는 정말 순수한 의도로 부탁한 것이라고 여긴 모양이었다. 거울 앞에 서 있던 단여명은 곧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권호영은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시선을 내리깔았다.

‘…일주일.’

그 일이 있고 난 후 벌써 일주일이란 시간이 흘렀다. 짧은 얘기를 나눈 후 단여명은 담배를 피우러 자리를 비웠고, 곧 아무 일도 없던 사람처럼 돌아왔다.

섭섭한 마음을 느끼면서도 권호영은 그의 장단에 맞춰 줄 수밖에 없었다. 나흘에 한 번씩 같이 조깅하던 것도 기약 없이 미뤄지게 됐다. 애초에 자신이 끌고 나가다시피 한 것이었다. 제가 입을 다무니 단여명 또한 언급하지 않았고, 같이 운동을 나갔던 일은 과거가 되었다.

솔직히 권호영도 술김에 휩쓸리지 않았다고 말할 수 없었다. 취기를 빌려 그에게 시선이 간다는, 단편적인 속내를 털어놓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 생각만큼은 지금도 변하지 않았다. 단여명과 더욱 가까워지고 싶었고, 그와 섹스한 걸 후회하지 않았다.

이틀 정도는 서먹함을 지울 수 없었다. 전처럼 거실에서 같이 시간을 보내도 오가는 대화는 예전 같지 않았다. 거기다 각자 할 일도 있으니 접점이 급격히 줄어들었다. 노트북은 구차한 핑곗거리였다. 멀어진 거리를 한시 빨리 좁히기 위한.

“호영아.”

권호영은 퍼뜩 눈길을 올렸다. 충전기와 마우스, 노트북을 든 단여명이 의아한 표정을 짓고 서 있었다.

“왜 넋을 놓고 있어.”

“…….”

“시험 기간이라더니. 많이 피곤해?”

많은 일이 있었던 밤이 지나고, 권호영에겐 새로운 습관이 생겼다. 집 안의 문턱을 밟자마자 거치적거리는 앞머리를 넘기는 일이었다.

“…아니요.”

민들레의 말이 맞았다. 그녀가 단여명을 입이 마르도록 칭찬했던 게 이해가 됐다. 이렇게 가까이서 보는 것만으로도 목이 천천히 죄어드는 기분이었으니까.

“생각할 게 좀 있어서요.”

“교수님들이 못살게 구나 보네.”

단여명이 농담 섞인 말을 건네며 노트북을 내밀었다. 권호영은 그것을 넘겨받았다.

“고마워요. 얼른 쓰고 돌려드릴게요.”

“편할 때 줘. 어차피 안 쓰는 거니까.”

뾰족한 입꼬리가 부드럽게 말렸다. 마치 봄날에 떠오른 구름처럼 포근한 미소였다. 권호영도 그를 따라 입매를 느슨히 풀었다. 비록 그의 웃음을 흉내 내지 못할 테지만, 웃어야 할 타이밍이란 건 알았다.

권호영은 노트북을 들고 소파에 앉았다. 과제 때문이라고 말해뒀으니 그의 앞에서 자판을 두드리는 시늉은 해야 했다. 허벅지 위에 노트북을 내려놓고 전원을 켜니 화면에 빛이 들어왔다.

“형…….”

“아, 비밀번호 걸려 있지?”

비밀번호 창을 확인하고, 물음을 던지려던 때였다. 옷을 갈아입고 나온 단여명이 눈치 빠르게 말했다.

“1023이야.”

숫자를 입력하고 엔터키를 누르자 다음 창으로 넘어갔다. 바탕화면에 보이는 아이콘은 심플하게 구성되어 있었다. 글을 쓸 때 사용하는 한글 프로그램과 인터넷, 기본적으로 깔린 위젯이 전부였다.

…1023. 권호영은 그 네 자리 숫자를 속으로 되뇌다가 눈길을 돌렸다.

“형 생일이에요?”

망설이다가 뱉은 목소리는 생각보다 안정적으로 흘러나갔다. 셔츠의 목깃을 정리하던 손이 아래로 내려갔다. 거울 속에 비친 얼굴은 의중을 알 수 없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흰 셔츠 위에 검푸른 색 재킷을 걸친 단여명이 곧 거리낌 없는 목소리로 답했다.

“아니, 의미 없는 숫자야.”

웃음의 잔상을 눈으로 좇던 순간 그가 고개를 틀었다. 단여명의 다리가 향하는 곳은 현관문 쪽이었다. 권호영은 허벅지 위에 올려놨던 노트북을 옆에 내려놓았다. 단여명이 지났던 길을 똑같이 밟아 그의 뒤를 쫓았다.

“…오늘도 어디 나가요?”

구두에 발을 끼우던 단여명이 고개를 들었다. 그의 눈은 조금 크게 뜨여 있었다. 제가 따라 나올 줄 몰랐는지 놀란 기색이 엿보였다. 하지만 유순한 눈매에 웃음기가 번지니 그 또한 말끔히 걷혔다.

“약속이 있어서.”

요즘 단여명은 매일같이 밖에 나갔다. 창작의 고통에 시달리던 게 바로 일주일 전이었던 것 같은데.

그는 소설가였고, 자택에서 일하는 직업이었다. 어째서 다시 밖을 나가는지 그 이유를 묻고 싶었다. 사람을 만나는 게 아니면 밖에 나갈 일이 없을 테니까.

…그런데 그 이유가 혹시 자신을 피하는 것이라면? 제가 무언가 실수해서 거리를 두고 싶은 거라면 자신은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잘못한 게 없진 않았으니까.

권호영은 말없이 상대의 모습만 눈에 담았다. 더 이상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잘 다녀오라는 인사말밖에 남지 않았고, 그것을 전해야 하는 시간이 다가왔음을 직감했다.

툭툭, 구두코를 치는 소리가 들렸다. 단여명이 정말 나가려는 듯해 무심코 고개를 든 찰나였다.

“…….”

하얀 손이 천천히 눈앞에 가까워졌다. 마치 슬로 모션을 건 것처럼 느리고도 나긋한 손놀림이었다. 서서히 올라온 손은 자신의 광대 부근을 톡, 치고 떨어졌다. 꽃잎에 맺힌 이슬을 털어 주는 것처럼 가벼운 손길이었다.

“…….”

“많이 옅어졌네.”

나른한 웃음소리가 들렸다. 손이 걷히고 보이는 것은 부드럽게 휘어진 눈 끝이었다. 작은 얼굴엔 완연한 기운이 감돌고 있었다. 조금은 장난스럽지만, 걱정스럽다는 마음을 감추지 않는.

“그럼 다녀올게. 아마 저녁 먹고 들어올 거야.”

순간 손끝이 이유 모르게 따끔했다. 권호영은 그 얼굴을 눈에 가득히 담으며 검지를 짧게 들썩였다. 잔잔한 바람이 불어와 얕은 수면이 올랑올랑 물결쳤다. 별거 아닌 접촉에 볼썽사납게 마음이 동요했다. 울렁이는 가슴속에서 자그마한 욕심이 싹텄다.

조금만 더 온기가 닿는 시간이 길어졌으면.

“…네.”

따뜻한 빛을 품은 그 눈이 제게 조금만 더 시간을 들였으면.

문이 닫히고, 발소리가 멀어지는 건 금세였다. 혼자 남겨진 권호영은 그가 떠난 자리에 우두커니 남았다. 한참을 허공을 바라보다가 자신의 뺨을 쓸어 보았다. 온기가 지난 곳은 거뭇한 멍이 사라지고, 이젠 미미한 통증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

어쩌면 단여명의 사람이 되기란 하늘의 별을 따는 것만큼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자신과 보냈던 밤은 그의 무수한 과거로 남을 수도, 그리고 그는 지금도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길일 수도 있다.

단여명은 이런 상황을 유하게 넘기는 게 익숙해 보였다. 단 하룻밤의 실수. 딱 그 정도로 치부하는 듯했다.

서운함을 느낄 새면 숨소리가 뒤섞이던 그 밤이 생각났다. 누구보다 가까웠던 그날은 그의 살냄새가 밴 침대 위에서 밤새도록 온몸을 내던졌다.

처음 느껴 보는 쾌락은 마치 선악과 같았다. 후에 돌아올 여파를 생각하지 못하고, 처음 맛보는 감각에 쉼 없이 허리를 놀렸다. 그의 몸속을 가를 때마다 들려오는 헐떡거림에 제가 다 목이 메었고, 더욱 큰 반응을 끌어내고 싶어 그의 몸 구석구석을 쓸었다.

단 하나뿐인 기억을 되새기고 되새길수록 생에 다시없던 충족감이 차올랐다. 머리가 어떻게 돼버릴 정도로 기분이 좋았던 기억이다. 제가 원하던 상대와 신체적으로 접촉했다는 것에 더해 그의 옆자리를 완벽히 차지한 것만 같은 감각들이 상당한 만족감을 안겨 줬다.

풍선처럼 부푼 마음이 공중에서 일렁일렁 춤을 췄다. 하지만 그도 잠시에 그쳤다. 고무가 터지기도 전에 묶인 입구를 풀어 푸시시, 바람을 빼버리듯 삽시간에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러지 말걸.’

언제 기분이 들떴냐는 양 권호영은 자책감에 빠졌다. 단여명은 자신과 체격부터 차이가 났다. 시트를 힘없이 밀어내던 발은 쾌락과 고통, 그 사이의 어딘가를 몸부림치고 있었다.

마지막엔 싫다며 제 몸을 밀어내는데도 그를 듣는 체도 안 하고 아래를 놀렸다. 아침에 중심을 가누지 못하고 바닥에 넘어져 있던 몸을 봤을 땐 얼마나 놀랐던지. 그 와중에 시선이 자꾸 아래로 내려가려고 해서 당황도 많이 했다.

생각은 끝없이 같은 지점을 찍었고, 그를 따라 감정이 오르락내리락했다. 단여명이 집을 비운 사이 그를 생각하다가 아래가 부풀면 제가 신에게 구제받지 못할 쓰레기처럼 느껴졌다.

형은 그런 생각도 없어 보이는데. 아니, 분명 그런 생각이 없을 것이다. 그렇게 짐승 같은 모습을 보여줬는데. 질릴 만도 하지. 혹시나 징그럽게 느꼈더라면 사과하고 싶었다.

‘그래도…….’

이제 어딜 가냐는 것 정도는 물어볼 수 있지 않을까. 고민하기를 여러 번, 그 역시도 책장을 덮듯 생각을 접어버렸다.

단여명과 자신의 사이엔 거리가 있었다. 사람과의 거리감은 성적표와 달리 눈으로 확인되지 않아 가슴을 졸이게 했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렀고, 여기에 남을 수 있는 기간은 정해져 있었다. 그렇다면…….

‘…지금 이럴 때가 아닌데.’

꺼멓게 죽어 있던 정신에 미약한 불빛이 들어왔다. 권호영은 시선을 돌려 거실 쪽을 바라보았다. 소파 위에 펼쳐진 노트북이 환한 빛을 내뿜고 있었다.

중간고사가 얼마 남지 않았다. 시험이 끝나면 어머니에게 연락이 올 것이다. 한국에서 치르는 첫 시험이었고, 사회에 나가기 위한 발판이니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해야 했다.

단여명을 선물이라고 말하던 찬 목소리가 뇌리에 선명했다. 만약 단여명과 이런 사이가 된 걸 안다면. 그렇다면 그녀는 과연 무슨 반응을 보일까.

힘들게 생각을 돌린 게 소용없이도 이번엔 두 명이 연관돼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무엇 하나 복잡하지 않은 게 없었다. 흡사 생각이라는 괴물에 머리부터 먹혀들어 가는 기분이었다.

투둑, 무언가 뜯겨나가는 소리가 들린 건 어느 기점이었다. 따끔한 고통이 느껴져 권호영은 제 손을 내려다보았다. 딱지가 떨어진 자리에서 흘러나온 핏물이 손을 더럽히고 있었다.

그날, 권호영이 잠든 시각은 새벽 4시가 지나서였다. 캄캄한 거실에 홀로 남아 권호영은 오랜 시간 노트북을 들여다보았다. 빨간 모자와 팀을 이룬 과제 말고도 제출해야 하는 리포트가 두 개 더 있었다. 인터넷에서 관련 자료를 모으다가 시간을 확인했고, 그쯤 제방으로 돌아가 눈을 붙였다.

알람이 울린 시간은 여느 때와 같았다. 오전 8시. 잠을 못 자 눈꺼풀이 쉽게 들리지 않았다. 감긴 눈 속으로 쨍한 빛이 번져오는 와중에 알람이 시끄럽게 울려댔다. 인상을 찌푸린 권호영은 손을 더듬어 알람을 껐다.

눈뜨자마자 오늘의 할 일을 정리하는 것은 버릇 중 하나였다. 기한이 닷새 남은 과제는 거의 마무리 단계였다. 학번과 성명을 제대로 기입했는지 확인하고, 프린트해서 파일 함에 끼워 놓으면 됐다.

수업이 끝나고는 조별 모임이 있었다. 윤재윤이 그리도 욕했던 빨간 모자가 모임에 참석하는 날이었다. 그가 오든, 안 오든 윤재윤이 어떻게 말하고 행동할지 벌써 눈에 그려졌다.

그리고 나선… 아마 시험공부를 하겠지. 경제학 용어는 아무리 뜻을 외워도 뒤돌면 금세 잊혔다. 어머니와 한국어로 소통하며 지냈다고 해도 현지에서 자라지 않아 생경한 언어들이 많았다. 끝도 없는 글자의 행렬을 읽으면 금세 머리의 허용치를 초과하곤 했다.

시간은 어느새 오전 8시 10분을 향해 가고 있었다. 권호영은 반쯤 감긴 눈으로 밤새 쌓인 메시지를 훑다가 핸드폰을 뒤집어 놓았다. 상반신을 추켜세우니 골이 울렸다. 밀려드는 두통을 무시하고, 이불이 걷어낸 순간이었다.

“…죄송해요. 한번 찾아뵀어야 했는데.”

지금껏 인식하지 못했던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어제 새벽, 계속 핸드폰으로 눈길이 가게 만든 사람. 결국 전화를 걸지 못했지만, 만약 번호를 눌렀다면 수화기 너머로 들려왔을 그 목소리였다.

“음…. 제자로서 드릴 말씀은 아니지만 푹 쉬면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아직 생각나는 소재가 없어서요. 일도 이래저래 겹치고. …드라마 쪽으로 나가도 좋죠. 그런데 아직 욕심은 없어요.”

부스럭, 이불깃이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 별거 아닌 소리가 어째선지 거슬린다고 생각하며 권호영은 침대 밑으로 발을 내렸다.

“기고만장……. 그런 거 아니에요, 교수님. 글 쓰는 사람은 자기만의 철학이 있어야 한다고 말씀하셨잖아요.”

장난기가 밴 말투엔 온기가 깃들어 있었다. 친한 사람을 대할 때의 목소리. 그의 어머니를 대할 때의 온도와 비슷하지만, 그보다 조금 더 차분했다.

“그 현수막이 아직도 걸려 있어요?”

-그래. 와서 직접 확인해, 단 작가. 네 책으로 유명 드라마 뽑아낼 때 새로 갈아 끼울 거니까.

방문을 열자 상대편의 말소리까지 선명하게 들렸다. 가장 먼저 시야에 들어온 것은 부엌 싱크대 옆에 등을 기대고 선 남자였다. 그의 손엔 스피커폰으로 전환한 핸드폰이 들려 있었다. 입가에 머문 반대 손은 하얀색 커피잔을 감아쥔 채였다.

-등단했을 때가 엊그제 같은데…. 많이 컸어, 아주. 아주 무서울 정도로 커져서 돈 아쉬워할 줄도 모르고.

인기척을 느낀 그가 입술에 붙이려던 커피잔을 아래로 내렸다. 부옇게 피어오른 김이 공기 중으로 흩어지자 잠기운 없이 총명한 눈동자가 드러났다.

“…아직 부족한 게 많아요.”

안녕. 소리 없이 열고 닫히는 입술이 제게 말을 걸었다. 아침 해가 새어든 한가운데, 단여명이 고유의 눈웃음을 지었다.

“인터뷰 요청은 몇 번 왔었는데… 아니요. 제 쪽에서 거절했어요. 하하, 아니요.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건 상관없는데, 혹시나 하는 마음이죠. 작가 얼굴을 확인하면 몰입이 깨진다는 독자들도 있어서…….”

마주 닿던 시선이 어긋난 건 일순간이었다. 스피커폰을 끈 단여명이 귓가에 핸드폰을 붙였다. 그는 커피잔을 손에 쥔 그대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방문이 닫히자 그의 목소리가 뚝 끊기다시피 사라졌다.

“…….”

권호영은 자리에 가만히 서 있다가 시선을 돌렸다. 그가 떠나고 난 자리에 눈에 익은 무언가가 남아 있었다. 제가 미국에서 챙겨온 머그잔. 그 안에는 뜨거운 김이 폴폴 흩날리는, 갓 내린 커피가 담겨 있었다.

하루는 계획대로 흘러갔다. 시간에 늦지 않게 인문경영관에 도착했고, 강의실 창가 맨 끝자리에 가방을 내려놓았다. 정각에 가까워질 무렵 민들레와 윤재윤이 차례대로 옆자리를 채웠다. 두 사람이 짐을 푸는 사이 나이가 지긋한 교수님이 들어와 수업의 시작을 알렸다.

수업이 시작하고 5분여쯤은 교수님의 사담 시간이었다. 그를 틈 타 윤재윤이 전공 책을 슬그머니 도둑질했다. 페이지의 숫자를 확인한 그는 권호영의 책을 펼쳐 똑같은 장을 펼쳤다. 그걸 본 민들레가 윤재윤의 팔을 쿡쿡 찔렀고, 그녀 또한 합세해 조느라고 놓친 필기를 베꼈다.

가운데에 펼쳐놓은 권호영의 책을 연신 들여다보던 둘은 동시에 숨죽인 웃음을 터트렸다. 뭐냐는 듯 바라보니 윤재윤이 귓가에 손을 대고 속삭였다.

“당연한 거긴 한데, 너 글씨 진짜 못 쓴다고….”

“초등학생이 쓴 것 같아.”

뒤이어 민들레도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맞장구쳤다. 말소리를 죽였지만, 킥킥대는 웃음소리는 불현듯 커지곤 했다.

자신을 놀리는데 신이 나 두 사람은 주변을 신경 쓰지 않았다. 바로 앞에 앉은 남학생이 볼펜을 딸깍거리며 눈치를 주는데도. 그 모든 걸 지켜보던 권호영은 곧 아무 말 않고 시선을 돌렸다.

“그렇지. 이게 한국의 맛이지.”

점심시간에 간 식당은 뚝배기에 담긴 김치찌개의 맛이 칼칼한 것으로 유명했다. 두 사람은 권호영에게 한국 음식 체험을 시켜 주겠다고 밥을 먹을 때마다 다른 메뉴를 골랐다.

윤재윤이 저렇게 한국의 맛이라고 어필할 때면 한 번이라도 좋으니 제 것을 떠먹어 보라는 소리였다. 새빨간 국물을 바라보던 권호영은 못 들은 척 제 앞에 놓인 돈가스를 썰었다.

“난 아아메. 들레는?”

점심을 먹은 다음엔 근방의 카페에 들렀다. 어느새 일과처럼 정해진 루트였다.

“전 아이스 라테요. 시럽 추가해서.”

음료를 고른 두 사람이 너는 어떻게 할 거냐는 눈빛을 보냈다. 카페의 메뉴판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커피잔 일러스트가 그려져 있었다.

“…전 됐어요. 아침에 먹고 와서.”

그림을 한동안 바라보던 권호영은 역시나 관심 없다는 태도로 시선을 갈무리했다.

“그 새끼, 이번엔 어떻게 나오는지 보자.”

“오빠가 참아요. 원래 태생이 뻔뻔한 사람을 누가 이겨요.”

꿀 같은 점심시간이 지나고, 길고 긴 오후 수업까지 끝마치면 윤재윤이 벼르고 있던 시간이 다가왔다.

자극적인 노이즈 마케팅이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 교수는 그에 대해 조별 과제를 내줬고, 이번 미팅의 목적은 저번 만남에 이루지 못한 발표 주제를 고르는 것이었다.

교내 세미나실은 언제나 자리싸움이 치열했기에 경영관 3층 휴게실에서 모이기로 전날 얘기를 마쳐놨다. 빨간 모자의 시간표도 미리 받아놓은 뒤라 빠져나갈 구멍은 없었다. 세 사람은 나란히 휴게실에 도착했고, 약속 시각까지 시간을 죽였다.

“……안 오는데요.”

나타날 기미가 보이지 않던 나머지 조원은 결국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약속 시각으로부터 30분이 지난 시점이었다. 결국 참다못한 윤재윤이 전화를 걸며 밖으로 뛰쳐나갔고.

“아오, 씨….”

씩씩대며 나갔던 모습과 달리 착잡한 낯으로 돌아왔다.

“아니, 이거 내가 이상한 거냐?”

빨간 모자가 말하길, 저번에 쓰러지셨던 할머니의 병문안을 가야 한다고 했더란다. 자신이 아니면 병간호할 사람이 없다며 자초지종 설명하는데, 뭐라 따질 수가 없었다고 윤재윤이 얘기를 마쳤다.

SNS에서 본 사진을 들먹이기엔 그 사진이 올라온 시간이 늦은 밤이었다. 병원에 들렀다가 술자리를 가졌다고 말하면 괜히 자기만 나쁜 사람이 되지 않느냐며 윤재윤이 신경질적으로 뒷머리를 헝클였다.

“어, 오빠. 이 사람이 미안하다는데요?”

민들레가 자신의 핸드폰을 두 사람에게 내보였다. 이번이 두 번째 불참이라서 뒤늦게 마음이 쓰인 걸까. 빨간 모자가 단체 채팅방에 메시지를 띄웠다. 장문의 사과로 구성된 메시지엔 민들레의 계정으로 메일을 보내놨다는 내용도 포함돼 있었다. 그래도 기한은 맞췄다며 안심하던 것도 잠시.

“…이거 몰래카메라지?”

빨간 모자가 보낸 이메일에는 첨부된 파일이 없었다.

“분명 누가 내 인내력 테스트하는 거야….”

하얀 창에는 길고 긴 링크만 몇 줄 걸려 있었다. 그는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는 놈이었다.

“와, 나……. 어이가 없어서. 지금이라도 이 새끼랑 못 해 먹겠다고 교수님한테 말해 볼까? 아니, 그럼 에이 플은 물 건너가는데….”

윤재윤은 예상과 같은 반응을 보였다. 그러나.

“그냥 이 세상에서 없애버리는 편이…….”

제일 싸움을 회피하려던 민들레가 색다른 모습을 보였다는 게 의외라면 의외였다.

“제가 자료 조사도 할게요.”

그쯤 권호영이 나섰다. 어차피 학점 때문에 모든 문제를 끌어안고 갈 생각이었다. 다른 사람이 해놓은 것이 마음에 차지 않으면 어떻게 돌려 말해야 하나, 고민했는데.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그걸 호영이 네가 왜 해?”

“그래, 네가 그걸 왜 하겠다고 해. 하려면 다음 파트 맡은 들레가 해야지.”

민들레가 뾰족한 눈으로 윤재윤을 노려봤다. 안 그래도 짜증 나는데 성질 돋우지 말라는 뜻이었다.

눈물 나는 우정이 돋보이는 대화가 둘 사이를 오갔다. 중간에 낀 권호영은 그 얘기를 듣다가 조용히 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냈다. 브라우저를 열고 검색어를 입력하려는 순간 그 모습을 본 윤재윤이 휴대폰을 빼앗아 들었다.

결국 세 사람은 머리를 맞대고 의견을 정리했다. 각자 자료를 모아오고, 거기서 제일 나은 항목을 뽑기로.

그로부터 시간은 다시 흘렀고.

똑똑.

“권호영.”

어느 순간 책상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집에 안 가? 벌써 8시야.”

오랫동안 펜을 쥐고 있던 손에서 뻐근한 감각이 올라왔다. 침침한 시야를 느끼며 권호영은 창밖을 응시했다.

“…….”

창밖은 어느새 해가 저물어 있었다. 아르바이트가 있다던 민들레는 집으로 돌아간 뒤였다. 윤재윤과 편의점 음식으로 저녁을 때우고 휴게실 구석 자리에 앉아 이 시간까지 공부했다. 평소에는 도서관에서 공부했지만, 윤재윤이 사람도 없으니 여기서 하자며 궁둥이를 붙였기 때문이었다.

프린트도 마쳤고, 조모임도 끝냈다. 시험공부도 얼추 했으니 오늘 할 일은 대강 끝내 놓은 셈이었다.

“가요.”

권호영은 뻐근한 목을 좌우로 돌리곤 가방을 챙겨 들었다.

“어후, 피곤해. 하루가 어떻게 갔는지 모르겠네.”

두 사람은 건물 밖으로 빠져나왔다. 가로등 불빛이 켜진 캠퍼스 안을 거닐며 둘은 어깨를 나란히 했다. 선선한 바람이 등이라도 밀어 주는 듯해 윤재윤은 기지개를 쭉 켰다.

“네 덕분에 중간고사 끝장나게 잘 보겠다. 친구는 끼리끼리라고, 역시 같이 노는 무리가 중요해. 나 새내기 땐 술 퍼마셨던 기억밖에 없는데.”

권호영은 낄낄대는 윤재윤에게 눈길을 짧게 주고 말았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그는 얼굴에 웃음빛을 가득 담은 모습이었다.

“밥은 이미 먹었고. 뭐, 커피라도 대접해 줘?”

카페 옆을 지나던 윤재윤이 불쑥 물음을 던졌다.

“아, 맞다. 너 하루에 커피 두 잔 안 마시지.”

그리고 권호영이 대답할 틈 없이 자문자답했다.

“독한 놈. 몇 살까지 살려고 그러냐?”

맞는 말이라 입을 다물고 있으니 그가 어깨에 팔을 턱 걸쳤다. 성가시다고 생각했지만, 권호영은 그를 쳐내지 않았다.

“오늘 고생했다. 내일 아침에 보자고.”

“네, 들어가세요.”

학교 앞 버스정류장에 도착한 두 사람은 무심히 작별 인사를 했다. 윤재윤이 손을 설설 흔들다가 멀리서 무어라 손짓했다. 손으로 네모를 그렸다가 그것을 쿡쿡 찌르는 걸 보아하니 연락을 제때 확인하라는 뜻 같았다.

윤재윤이 골목으로 사라진 후 버스 시간을 확인한 권호영은 그대로 길을 따라 걸었다. 공부한다고 온종일 앉아 있었더니 몸이 찌뿌둥했다. 버스 도착 시간도 멀었겠다, 운동할 겸 집까지 걸어갈 생각이었다.

30분 정도를 걸으니 익숙한 동네가 드러났다. 권호영은 아침에 걸어갔던 길을 똑같이 되밟아 나갔다. 공동현관 앞, 엘리베이터 안. 그리고… 801호 현관문 앞.

‘…있다.’

없을 줄 알았는데, 거실에 불이 켜져 있었다. 권호영은 조용히 문을 닫고 신발을 벗었다. 의아함과 긴장감, 그리고 실낱같은 기대감. 갖은 감정이 한꺼번에 들이친 심장이 쿵쿵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

반겨 주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에 의문을 가질 때쯤이었다. 거실로 가 보니 불편한 자세로 곤히 잠든 남자가 보였다. 역시나 본인이 애정하는 소파 위에서.

어제 자신이 잠들 시간까지 단여명은 돌아오지 않았다. 아침에 깨 있는 모습을 보고 밖에서 자고 온 것인가 생각했다. 그런데 문소리도 못 듣고, 이리 졸고 있는 것을 보아하니 밤을 새운 모양이었다.

권호영은 발소리가 나지 않게 그의 앞으로 걸어갔다. 편히 누워서 자면 좋으련만, 단여명은 가끔 이런 자세로 쪽잠을 잤다.

작은 뒤통수가 아래로 푹 숙어져 있었다. 배 위에 올려놓은 손과 허벅지 사이에 떨어진 휴대폰이 보였다. 휴대폰을 만지다가 그대로 단잠에 빠져 손에서 미끄러트린 모습이었다.

권호영은 그의 옆자리에 조심히 앉았다. 최대한 인기척을 죽이려고 했지만, 잠귀가 밝은 그의 잠을 깨우긴 충분했던 모양이다. 기다랗게 내리깔려 있던 속눈썹이 움찔 떨리더니 서서히 위로 들렸다.

“…….”

“…….”

졸음이 뚝뚝 묻어나는 눈동자 속에 의아함이 서렸다. 잠에서 깬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상황 파악이 늦어지는 듯 보였다. 권호영은 그를 따라 눈만 깜빡였다. 급한 마음에 어설프게 넘긴 머리카락 몇 올이 눈 아래로 흩어져 내렸다.

“……졸려….”

그가 한참 뒤에 뱉은 말은 그 한마디뿐이었다. 평소의 단여명치고 대단히 짧고, 성의 없는 인사말이었다.

권호영은 얼떨떨한 눈으로 단여명을 응시했다. 항상 어른처럼 느껴졌던 그가 새삼 낯설게 시야에 박혔다. 칭얼거리는 투는 아니었지만, 언뜻 잠투정을 부리는 아이 같았다. 만약 자신과 동갑이었거나 그보다 더 어렸다면. 만약 그랬다면 일상 중에 이렇게 짤막한 말을 대뜸 던지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에 빠져 대답이 늦어진 때였다.

“…형.”

잠에 취한 움직임은 굼떴으나, 그걸 막을 틈은 없었다. 권호영은 경직된 얼굴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제 허벅지 위에 옆으로 머리를 벤 단여명은 곧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요즘 신경에 거슬리는 일이 생겨서…….”

잠을 설쳤거든….

뒷말은 작았다. 청각을 예민하게 곤두세워야지 귀에 잡힐 만큼. 단단한 허벅지에 뺨을 비비던 단여명은 자그마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따뜻하네.”

감긴 눈에 희미한 웃음이 스쳤다. 그 말을 끝으로 그는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

긴장해 잔뜩 굳어진 허벅지 근육에 서서히 힘이 풀렸다. 째깍, 째깍, 째깍…. 시계 초침 소리가 울리는 가운데 규칙적인 숨소리가 났다.

전원이 나간 TV 화면에 비친 인영은 두 사람이었다. 꼿꼿한 자세로 앉아 있는 남자와 그의 다리를 베고 누운 또 다른 남자. 두 사람 다 TV 화면에 얼굴을 정면으로 둔 채였다.

불이 꺼진 화면을 바라보던 권호영은 천천히 눈길을 내렸다. 감긴 눈꺼풀과 오뚝한 콧대. 틈을 보이고 살짝 열린 입술, 불그스름한 틈새에서 곤히 쏟아지는 숨결.

시선은 곧 하얀 얼굴 옆에 얌전히 놓인 손에 닿았다. 권호영은 단여명의 손을 보다가 제 손을 들어 주먹을 쥐어 보았다. 잠에 취해 옹송그리지도 않았는데, 힘껏 쥔 제 주먹보다 그의 손이 훨씬 작았다.

머리를 기댄 몸이 뭘 하는 줄도 모르고, 단여명은 새근새근 잘 잤다. 잠든 얼굴을 내려다보던 권호영은 그 위로 손을 올렸다. 손바닥을 활짝 펴자 하얀 손만큼 조그마한 얼굴이 순식간에 가려졌다.

…만지면 안 되는데. 분명 깰 텐데. 솜털이 난 뺨이 보송보송하고 보드랍게 보여 손이 근질거렸다. 저 뺨에 수없이 입술을 누른 기억이 있다. 폭신한 살결에 입을 맞추면 조금쯤 울음소리가 잦아들었다.

쿵쿵.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권호영은 결국 그 뺨에 손을 올렸다. 힘 조절을 하느라 손이 살짝 떨렸다. 만지나 마나 한 손길로 깨끗한 피부를 살짝 쓸어 보았다. 그럼에도 단여명은 잠에서 깨어나지 않았다.

범행은 조금씩 대담해졌다. 한 번은 두 번이 되고, 두 번은 여러 번이 되었다. 부드러운 살결을 한 번씩 쓰다듬을 때마다 권호영은 연신 상대의 얼굴을 살폈다. 감긴 눈꺼풀은 열릴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뺨을 길게 쓸어 보다가 애매하게 띄워놓은 약지에 귀가 닿았다. 시선이 가는 대로 손이 따라갔다. 별생각 없이 손가락을 갖다 댄 귓불은 생각보다 말랑말랑했다. 아주 미세하게 힘을 실으니 작은 응어리가 만져졌다. 귀를 뚫고 남은 흔적이었다.

좀 더 어렸을 때는 스타일이 달랐던 것일까. 감촉이 좋아 귓불을 엄지와 검지 사이에 끼우고 둥글게 문질러 보는데 단여명이 눈가를 움찔했다. 즉시 손을 떼고 숨죽이고 있으니 그가 다시 편안하게 숨을 골랐다. 아무래도 잠을 설쳤다는 말이 사실인 듯했다.

“…….”

권호영은 슬그머니 다시 손을 뻗었다. 깰 듯 말 듯한 반응을 본 뒤여서 이전처럼 대범하게 만지지는 못했다. 손끝으로 단단한 귓바퀴를 그려보다가 조금 뾰족한 귀 끝을 살포시 눌러 보았다. 흐트러지지 않는 숨소리에 온 신경을 집중하면서.

욕심은 갈수록 커졌다. 제 허벅지를 벤 작은 머리통을 쓰다듬어 보고 싶어졌다. 그렇지만 닿는 면적이 커 아무래도 그가 잠에서 깰 것 같았다. 권호영은 아쉬운 대로 까만 머리카락 끝을 모아 잡고 비벼 보았다. 매일 그가 위로 쓸어 넘겼던 윤기 나는 머리칼은 예상대로 몹시 부드러웠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을 죽였을까. 어느새 권호영은 곤한 숨소리에 맞춰 제 숨을 따라 고르고 있었다. 손에서 사부작거리며 비벼지는 머리칼은 기분 좋은 감촉이었고, 편히 잠든 얼굴은 보는 사람까지 노곤함을 부르게 했다.

‘…자면 안 되는데.’

하루의 피로가 몰아치듯이 차츰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훈기 도는 집 안의 풍경과 적막하기만 했던 곳에 뚜렷한 존재감이 가득 차 긴장이 서서히 풀어졌다.

가물거리는 시야 너머로 보이는 뺨은 여전히 새하얬다. 폴폴 흩날리다가 겨울나무 아래에 갓 쌓인 눈처럼. …단여명. 이름이 참 잘 어울렸다. 그의 피부가 눈처럼 뽀얗다는 것과 이름이 무슨 연관인지 모르겠지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권호영은 그대로 수마에 사로잡혔다. 단여명이 불편한 자세로 잠잔다고 생각했건만, 곤히 잠든 이에게 무릎을 내줘 어느새 그가 처음 취했던 자세로 잠에 빠져든지도 모른 채.

암전되었던 시야가 다시 밝아진 건 어느 순간이었다. 흠칫 정신을 차린 권호영은 곧장 아래를 확인했다. 마치 처음부터 아무것도 없었다는 양 무릎 위는 텅 비어 있었다.

곧장 주위를 살펴보았으나, 제가 찾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실내는 무섭도록 조용했다. 소리 하나 들리지 않는 것이 이상하다고 생각될 만큼.

몸을 움직이려는데, 가슴팍 밑으로 무언가가 흘러내렸다. 잠결에 미처 보지 못한 것.

“…….”

단여명이 거실에서 잠을 청할 때 자주 덮던 잿빛 담요였다.

‘……또.’

또다. 잡은 것 같으면 모래알처럼 다시 빠져나간다.

권호영은 소파에 등을 푹 묻었다. 제 몸을 덮은 담요에선 익숙한 향기가 났다. 자신에게선 늘 진하게 풍기는 섬유유연제 향이 그에게서는 다른 냄새에 뒤덮여 잘 맡아지지 않았다.

그게 어째선지 기분을 더욱 가라앉게 했다.

***

호텔 맨 지하층, 그중 구석으로 빠지면 더욱 깊은 곳으로 통하는 문이 드러난다. 문을 열고 붉은 벨벳 카펫이 깔린 복도를 지나면 가게의 출입구가 나타났다.

비밀스럽게 운영되는 가게의 문 옆엔 ‘Cocktail’이라는 LED 간판만이 덩그러니 걸려있었다. 방문 카드를 확인한 두 명의 가드가 고객을 안에 들이고, 문을 닫으면 안에서 들려오던 소리는 그 속에 먹히듯 사라지곤 했다.

가게의 전등은 조도가 밝지 않아 서로의 얼굴이 간신히 확인될 정도였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이 가면을 쓰고 있어 그것을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간간이 맨얼굴을 드러낸 손님이나 반가면을 쓴 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 얼굴을 가린 채였다.

언뜻 공포스러울 수 있는 분위기 속에서 사람들은 거리낌 없이 술잔을 기울였다. 바에 나란히 앉거나 혹은 오픈 테이블을 잡고 앉아 저마다의 얘기에 집중했다.

하얀색이 눈에 띄는 가운데 검은색 가면을 쓴 남자가 어두운 홀을 가로질렀다. 여기서 남자의 이름은 다양하게 불리었다. 소리 내어 통용되는 이름은 ‘빌’이었고, 바텐더들이 친근하게 부르는 이름은 ‘터줏대감’, 가게의 단골들은.

“뱀 같은 새끼….”

그와 비슷한 별칭을 거론하며 자기들끼리 좋을 대로 숙덕였다.

빌은 그 소리를 못 들은 체했다. 싸움에서 패한 자들은 언제나 말이 많은 법이다. 곁을 지나친 웨이터에게 눈인사한 빌은 다시 먼발치를 바라보았다.

작게 마련된 무대 앞엔 가죽 소파가 놓여 있었다. 소파에 다리를 꼬고 앉아 있는 남자는 자신의 앞에 펼쳐지는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느 때처럼 그의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빌은 급하지 않게 그에게 접근했다.

“지루해 보이시네요.”

가까이 다가가 말을 붙이자 남자가 이쪽으로 눈길을 틀었다.

“요즘 우리 자주 마주치는 것 같은데.”

가면을 쓰고 있어도 예쁘장한 얼굴은 가려지지 않았다. 며칠간 술만 홀짝이고 가더니 오늘은 재미난 구경을 하고 있었다.

“그런가요.”

남자가 시큰둥하게 대꾸했다. 가면 속에서 웃음을 보인 것 같았으나, 전체적인 표정이 드러나지 않으니 감을 잡기 어려웠다. 남자의 얼굴이 다시금 정면을 향했다. 여태 그랬듯 그의 시선은 무대 위를 향하고 있었다.

“여기서 쓸 이름은 정했습니까?”

옆자리에 앉으며 묻자 그가 재차 눈길을 줬다. 싫은 기색은 보이지 않았다. 약간의 흥미, 그리고 호기심. 그런 것들이 까만 눈동자 속에 어렴풋이 드러났다.

“이름을 물어보고 싶은데.”

그리 말하고 나서야 남자는 제게 온전한 관심을 줬다. 빌은 친절한 웃음을 건 채 내심 불타오르는 마음을 느꼈다. 어딜 가도 눈길을 끌었으면 끌었지 외면당한 적은 없는데. 이제 나이가 30줄에 들어선 탓일까, 이런 경험은 꽤 오랜만이었다.

“새벽이라고 불러주세요.”

그렇지만 이쪽도 사람을 아쉬워할 것 같아 보이는 페이스는 아니었다.

“다른 분들처럼 멋진 이름을 갖고 싶었는데, 생각이 나질 않더라고요.”

그래서 넘어트려 보고 싶다면 제 성격이 꼬였기 때문이겠지.

“그렇군요.”

장소에 맞지 않게 참 고상하게 들리는 이름이라고 생각한 때쯤이었다. 남자의 눈이 부드럽게 휘어졌다. 원체 서글서글하게 빠진 눈매에 봄볕 같은 기운이 어렸다. 그에 차게 보이던 인상이 양달에 든 눈처럼 사르르 녹아내렸다.

생각은 금세 바뀌었다. 아무래도 이름 따위는 별 상관 없을 것 같다고.

“좋아요, 새벽 씨. 이름이 멋지지 않은 게 마음에 걸리신다면 미스터 새벽이라고 불러 드릴까요?”

남자가 헛웃음을 뱉었다. 이상한 농담이라도 들었다는 양 어이없어하는 기색이었다.

“재밌으신 분이네요.”

반응이 나쁘진 않았다. 그의 손에는 윗부분이 넓적한 마가리타 잔이 들려 있었다. 잔의 테두리에 둘린 설탕과 얼음이 갈린 액상을 보니 카시스 프라페였다. 키스를 부르는 칵테일. 빌은 그 모습을 눈으로 훑다가 다른 질문을 던졌다.

“그래서 이곳엔 무슨 일이죠? 도련님이 드나들 곳이 못 되는데.”

“아는 분한테 초대받았어요. 들어오기 어렵긴 하더라고요.”

“아무래도 사생활에 예민한 곳이긴 하죠.”

그래서 더욱 추잡한 꼴을 보게 되는 것이고.

“어렵게 들어온 것치곤 보고만 계시네요.”

그 말에 남자가 잔에서 입술을 떼어냈다. 설탕 가루가 묻은 입술을 혀로 한번 축인 그는 고개를 돌렸다. 옆으로 드러난 턱선이 갸름했다.

“거래를 했거든요.”

저기 저 남자랑. 그가 눈짓으로 앞을 가리켰다. 빌은 그를 따라 시선을 돌렸다. 남자와 빌뿐만이 아니라 아까부터 가게 안의 모든 사람의 이목이 쏠리던 곳이었다.

“저걸 끝까지 지켜보는 것. 그게 조건이에요.”

조명이 비추는 무대 위에는 더블베드가 놓여 있었다. 특이 취향을 가진 고객들이 주로 사용하는 공간이었다.

하얀 침대 위에는 두 명의 남자가 몸을 섞고 있었다. 상하의를 완벽히 갖춘 남자는 벨트만 풀어 헤친 채 엎드려 있는 다른 남자를 범했다. 그보다 몸집이 작은 남자는 내리누르는 힘에 얼굴을 처박은 채 숨을 쉬려고 아등바등했다.

“아윽, 아아악…!”

음악이 끊긴 틈을 타 멜섭이 죽는다고 소리쳤다. 저리 괴로워하는 것을 보아하니 물건만 뒤로 문 게 아닌 것 같았다. 장난감인가. 허릿짓이 단순한 걸 보아하니 원래 넣지 말아야 할 것을 넣은 건지도 모르겠다. 예를 들면… 음낭이라든가.

그때 무대 위에 있던 남자가 정확히 이쪽을 주시했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빛은 자신에게서 미세하게 비껴가 있었다. 강렬한 눈길을 보내던 남자는 뒤이어 제 아래에 놓인 머리끄덩이를 거칠게 잡아 올렸다. 아악! 멜섭의 비명이 커다랗게 울려 퍼졌다.

“하하, 이쪽을 무섭게 노려보는데. 바텀이 죽으려고 하는군요.”

대체 무슨 거래를 했을까. 저건 갖지 못하는 것을 탐낼 때 드러내는 소유욕이라기보다는……. 호승심. 거래보다 내기를 건 것에 가까워 보였다.

“…….”

빌은 다시 옆쪽을 곁눈질했다. 그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두 남자가 벌이는 쇼를 지켜볼 뿐이었다. 약점을 잡고 협박할 얼굴은 아닌 것 같은데…….

“이런 쪽에 관심은?”

“아직은 무서워서. 글쎄요.”

“관심은 있다는 얘기로군요.”

남자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그는 곧 긍정의 뜻이었다.

“바닐라입니까?”

“바닐라가… SM 경험이 없다는 뜻인가요?”

그가 눈을 맞추고는 물었다. 언뜻 순진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또렷한 눈동자는 조명의 빛을 머금었음에도 홍채와 동공의 분간 없이 새카맸다.

“그렇다면 맞아요.”

빌은 빙그레한 웃음만 지었다. 질문의 핵심에서 미묘하게 어긋난 대답. 아마 바닐라의 뜻을 정확하게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닳고 닳은 사람은 편리해서 좋다. 알려 줄 것도, 신경 써 줄 것도 없어 귀찮은 일도 적었고, 관계의 맺고 끊음이 확실했다.

하지만 자신 하나만 보도록 길들이는 것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눈앞의 이는 새하얀 도화지였다. 아무도 더럽힌 적 없는 깨끗한 백지.

“그 거래, 나도 흥미가 생겼는데.”

하나부터 열까지 가르치는 재미가 있겠어. 살빛이 하예서 색도 잘 오를 것 같고. 울리면 꽤 구미가 당길 얼굴이었다.

가면 속의 얼굴이 어떻게 일그러질지 벌써부터 기대가 됐다. 자신의 색으로 물들이고, 끝내 그 도화지를 갈기갈기 찢어버리면 어떻게 매달리며 울까.

“어때요? 처음이라면 놀라지 않도록 부드럽게 다뤄 주겠습니다.”

빌은 그에게 몸을 조금 더 가까이 붙였다. 남자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하지만 그도 잠시였다.

“좋아요.”

그가 웃음을 보였다. 보는 사람이 다 이상한 기분을 느낄 만큼 느른한 미소였다. 그에 빌이 무어라 말하려던 순간이었다. 다른 말할 기미가 보이지 않던 남자가 재차 입술을 뗐다.

“대신 몸은 안 팔아요. 주인님이 집에서 기다리고 계시거든요.”

깔끔한 목소리로 말을 마친 그는 전과 똑같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

권호영은 꿈의 한가운데를 헤매고 있었다. 이곳이 꿈이라는 건 일찍이 알아챈 후였다.

‘알렉스, 지금 내가 거짓말을 한다는 거야?’

그야 꿈속이 아니라면 자신이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없을 테니까.

잠깐 새 내렸던 비가 그치고, 습한 공기가 피부 위로 눅눅하게 달라붙었다. 옛날 필름 카메라로 찍은 사진처럼 잿빛의 풍경이 펼쳐지는 가운데 비에 젖은 흙냄새가 맡아졌다.

빗물이 고인 웅덩이에는 두 명의 소년이 비치고 있었다. 백인 소년 앞에는 지금보다 덜 성숙한 자신이 있었다.

‘나는 너의 하나뿐인 친구라고.’

앳된 얼굴엔 일말의 불안감이 감돌고 있었다. 그걸 애써 털어버리려는 듯이 웃자 상대방이 어깨에 팔을 걸쳤다.

‘네가 그렇게 말해 줬잖아?’

주근깨가 잡힌 얼굴이 콧잔등을 구기며 웃었다. 이제 열세 살쯤 됐을까. 소년은 그 나이대에 어울리지 않게 제법 익살스러워 보이는 표정을 꾸몄다.

세인트루이스에서 사귄 첫 친구. 제 인생에서 처음으로 친구라고 부를 수 있었던 아이의 이름은 대니얼이었다. 다른 애들이 동양인의 피가 섞였다는 이유로 은근 깔보았을 때 편견 없이 다가와 준 아이였다.

자신은 그를 보며 안심했고, 아니면 됐다며 고개를 저었다. 두 사람은 발걸음을 계속했다. 이따금 발로 물장구를 치며 집으로 돌아가는 그들은 즐거워 보였다.

하지만 권호영은 그 모습을 마음 편히 지켜볼 수 없었다. 그들의 관계가 어떻게 끝나는지 알고 있었으니까.

‘그래, 맞아. 너희 엄마가 우리 집에 찾아왔었어.’

예상했던 장면이 곧이어 눈앞에 펼쳐졌다. 대니얼은 씩씩대며 손에 들린 것을 꾹 쥐었다. 빗물에 흠뻑 젖은 우산이었다. 연이은 장마철로 도시 전체가 꿉꿉한 습기로 가득 찬 시기였다.

‘처음엔 몰랐어, 그녀가 너희 엄마인 줄. 신께 맹세하건대 정말이야. 지나가다 들른 동양인인 줄로만 알았지.’

두 명의 소년은 자신이 보이지 않는 듯했다. 바로 앞에 서 있는데도 그들은 서로만 눈에 담았다. 권호영은 흥분해 벌겋게 달아오른 대니얼의 얼굴을 지켜보았다.

‘정말 난리도 아니었어. 처음엔 분위기가 괜찮았던 것 같은데, 어느새 우리 엄마랑 너희 엄마가 목소리를 높여 싸우고 있었어. 우리 엄마 말로는 그녀가 나를 비난했다고 그랬어. 네 옆에 있어봤자 방해만 될 머저리래.’

그걸 어찌나 고상하게 말하던지. 마치 그 자리에 있었던 사람처럼 대니얼이 빈정거렸다.

‘그녀는 너한테 무엇보다 중요한 게 있다고 말했어. 그걸 몇 번이나 강조했지. 병적으로 보일 정도로 말이야.’

자신을 대하던 태도가 갑작스레 바뀌었던 대니얼에게 그 이유를 물었었다. 혹시 자신의 어머니를 만난 적이 있냐고. 제 물음에 그는 처음엔 아니라고 부인했고, 나중에는 화를 냈다.

‘그녀는 너를 속박하기를 원해! 그게 정상이라고 생각해?’

그리고 그다음에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답답증을 호소했다.

‘알렉스, 도대체 뭘 두려워하는 거야?’

‘너는 가족이 넷이나 있잖아! 나는, 나는 하나밖에 남지 않았어.’

둘의 목소리는 삽시간에 커졌다. 학교가 끝난 지 이미 1시간이나 지나 인근에 지나다니는 사람은 없었다. 잔뜩 인상을 쓴 대니얼은 주변의 눈치를 보지 않고 언성을 높였다.

‘알렉스, 멍청이처럼 굴지 마! 상황을 똑바로 보라고. 그녀는 우리에게 돈까지 던져 주고 갔어. 집 안을 훑고 우리의 얼굴을 똑바로 쳐다봤지. 그녀의 행동은 우리 가족에 대한 모욕이었다고!’

‘미안해, 대니얼. 그건, 그건 내가 대신 사과할게…. 정말 미안해.’

‘…….’

‘그렇지만 넌 몰라. 아마 영원히 이해 못 하겠지. 어머니가 없으면 난 아무것도 남지 않아.’

‘…….’

‘나도 무섭다고…….’

격양된 목소리로 얘기를 나누던 그들은 결국 합의점을 찾지 못했다. 한 사람이 바뀔 생각이 없다고 말하니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네가 그녀의 의사를 따르겠다면… 그래, 말리지 않을게.’

왜 그런 소문이 돌았는지 알겠어. 너희 가족 좀 이상해. 대니얼이 들으라는 것처럼 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친구, 마지막으로 하나만 묻자.’

분노가 꺼진 눈은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가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조용히 물었다.

‘그렇게 살면 행복해?’

팡. 우산이 펴졌다. 물방울이 덜 여문 뺨에 후두둑 튀었다. 대니얼은 그 말을 끝으로 자리를 떠났다.

혼자 남은 소년은 멀어지는 소년의 뒷모습을 하염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먹구름이 낀 하늘 아래 홀로 서 있는 몸이 참 작고도 위태로워 보였다.

한참 동안 미동도 안 하고 먼 곳을 보던 아이가 불현듯 뒤를 돌았다. 권호영은 작은 얼굴에 시선을 줬다.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그런 짐작과 반대로 어린 자신과 눈이 딱 마주쳤다.

‘…….’

…이상했다. 분명 흐르는 눈물부터 닦아낼 줄 알았던 아이는 울음기 없는 눈으로 자신을 똑바로 응시했다.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 있던 걸 알았다는 것처럼.

비강에 들러붙는 공기는 축축하기 그지없건만, 아이의 눈은 건조하기만 했다. 마치 오랜 가뭄에 바싹 마르기 직전인 땅처럼. 그 아이는 메마른 눈으로 물음을 던졌다.

그러게. 정말 행복해?

“……한데, 별일 없어요. 잠도 잘 자고.”

권호영은 감고 있던 눈을 천천히 떴다. 현관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테이블 위에 붙이고 있던 얼굴을 들자 자판이 눌린 노트북 화면에 빛이 들어왔다. 가파르게 높아지는 가로 그래프 선 안은 퍼센티지 없이 텅 비어 있었다.

시계를 확인하니 눈을 붙인 시간에서 10분밖에 흐르지 않았다. 차츰 현실감이 돌아오기 시작하자 꿈의 내용이 급속도로 흐릿해졌다.

…대니얼. 잊고 살았던 이름인데 오랜만에 떠올려 본다. 꿈속에선 그의 얼굴이 제법 선명하게 보였던 것 같은데, 꿈에서 깨니 가물가물 잊혔다.

권호영은 침침한 눈을 비비고 앞쪽으로 시선을 던졌다. 자신의 잠을 깨운 목소리가 재차 들려왔다.

“목소리? …아, 조금 피곤해서 그런가.”

거실에 들어오던 단여명이 눈인사를 건넸다. 그는 누군가와 통화 중이었다.

“요즘 놀러 다니기 바빠서 그래요. 제 걱정 말고 엄마 건강이나 신경 쓰라니까요. 사람들한테 물어봐요. 어디 20대랑 50대랑 같은지.”

…멀리서 봐야 안다고 했던가.

“응, 다시 전화할게요. …네, 저도요. 정말로.”

단여명은 그의 어머니를 아낀다. 자신이 어머니를 애증으로 생각하는 것과 달리 정말 진심으로. 그녀의 부탁에 싫은 티를 내다가도 그녀가 약한 체를 하면 단여명은 금방 어쩔 줄 몰라 하며 달래기 일쑤였다. 아마 그와 같은 이유로 자신도 이 집에 들였을 테지.

“과제 하고 있었어?”

전화를 끊고, 제게 다가오는 남자를 바라보며 권호영은 어렴풋이 든 생각을 지워냈다.

“네.”

그의 가족이 될 수는 없는데.

“왜, 방에서 안 하고.”

단여명이 제 옆으로 와 노트북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어떻게 된 게 다 숫자네’ 하고 픽 웃어 보인 그는 품에 안고 있던 종이봉투를 건넸다.

“선물.”

권호영은 봉투를 받아 들었다. 안을 열어보니 베이글 샌드위치와 입구를 밀봉한 커피가 담겨 있었다. 샌드위치 속에는 양상추와 토마토, 슬라이스 햄 같은 것들이 들어가 있었고, 커피는 색을 보니 카페라테 같았다.

“이게 뭐예요?”

“그 가게에서만 파는 브런치 세트야. 브런치 먹을 시간은 아니긴 한데, 한번 먹어 보라고. 나도 갈 때 그거밖에 안 먹거든.”

단여명이 소파 위에 털썩 주저앉으며 말했다. 권호영은 눈으로 그 움직임을 좇았다. 거실 바닥에 앉아 소파에 등을 기댄 채라 고개가 자연히 뒤로 돌아갔다.

“…그거 야식 아니다? 너 요즘 새벽에 자잖아. 그럼 잘 때 허기질 거 아니야.”

그 눈길을 무어라 오해했는지 단여명이 지레 찔린 사람처럼 부가적인 말을 얹었다. 어쩐지 조금 다급하게 말한 것 같기도 했다. 자신보다 체구가 훨씬 작은 사람이 제 끼니를 신경 써 줄 때면 기분이 묘해지곤 했다. 권호영은 봉투를 손에 든 채 말했다.

“잘 먹을게요, 형.”

“잘 먹을게요, 형.”

목소리는 달랐지만, 말은 한 치의 더덜이 없이 맞아떨어졌다. 얼떨떨한 눈으로 바라보자 단여명이 가볍게 웃었다.

“딱 맞혔지?”

그러더니 그는 소파에 엎드려 누웠다. 땡볕에 노출된 아이스크림이 녹듯이 흐느적대는 몸놀림이었다.

“아, 진이 다 빠지네….”

소파에 머리통을 비빈 단여명이 작게 혼잣말했다. 그가 지친 한숨을 쏟아내자 알코올 냄새가 물씬 퍼졌다. 권호영은 그 모습을 보다가 샌드위치의 포장을 벗겼다.

“형은 생각보다 술을 좋아하시는 것 같아요.”

“…안 먹을 수가 없는 자리여서.”

자신이 매번 술을 마시러 나갈 때마다 좋을 때네, 하고 흐뭇한 웃음을 보이던 단여명이다. 그런데 요새 자신보다 술을 자주 먹고 들어오니 민망한 듯 보였다.

“왜, 술 냄새 나?”

단여명이 소매에 코를 묻고 킁킁 냄새를 맡았다.

“아, 옷에서 나나? 술을 쏟았거든.”

그러더니 느릿느릿 겉옷을 벗기 시작했다. 윗단추를 한 개만 푼 하얀 셔츠는 복부 쪽에 젖은 흔적이 있었다. 축축하게 젖은 셔츠가 맨살에 착 달라붙어 있었다.

“…….”

젖은 부위는 흰색이 아니었다. 색이 있는 술을 쏟았는지 그 속의 살결이 연분홍빛으로 보였다. 배 밑으로 쏙 패인 배꼽이 흐릿한 음영을 만들어냈다.

권호영은 그를 못 본 척 시선을 돌렸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보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을 받아서였다.

얼마나 대단한 걸 봤다고 심장 소리가 득달같이 커졌다. …과제. 과제를 해야겠다. 권호영은 움직이지 않는 손을 애써 움직였다. 화면에 집중하려고 노력하며 그래프 칸에 숫자를 입력했다. 뒤에선 더 이상 인기척이 들리지 않았다. 피곤해 보이더니 결국 옷을 갈아입고 오는 건 포기한 모양이었다.

마우스가 딸깍이는 소리와 키보드를 두드리는 소리가 연속적으로 울렸다. 10분 정도 흘렀을까. 그제야 포장지만 벗겨놓은 샌드위치가 시야에 들어왔다. 자신을 위해 사 온 것일 텐데, 입도 안 대는 건 예의가 아니었다. 의식의 흐름대로 그것을 집어 들으려는 순간이었다. 뒤쪽에서 또렷한 목소리가 울렸다.

“호영아.”

고개를 돌리자 웃음기가 서린 말간 얼굴이 보였다. 손으로 턱을 괴고 엎드려 누운 그는 편안한 기색이었다.

잠들었거나, 핸드폰을 보고 있을 거란 생각과 달리 단여명은 줄곧 제가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 같다. 눈이 마주치길 기다렸다는 듯이 그는 곧바로 시선을 맞대었다.

“그거 너 줄게.”

…그거?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다는 듯 보자 단여명이 앞쪽을 눈짓했다. 그의 눈길이 닿은 것은 노트북이었다.

“어차피 바꾸려고 했어. 엄청 오래된 거거든.”

“…이 노트북이요?”

단여명이 맞다며 고개를 주억였다. 그에 권호영은 천천히 눈썹을 일그러트렸다. 편한 웃음을 건 상대와 지극히 상반된 표정이었다.

“마음은 감사한데…….”

“감사한데?”

“…그럴 순 없어요.”

거짓말이다. 그는 제가 마음 편히 받았으면 하는 마음에 허울뿐인 말을 하고 있었다. 만약 그의 말처럼 오래된 기종이었으면 이렇게 커서를 누르는 대로 창이 휙휙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대체 뜬금없이 노트북을 왜 주고 싶어졌는지 알 순 없었으나, 마냥 좋은 마음으로 받을 수는 없었다. 오히려 마음이 불편해져 입안에 쓴맛이 돌았으면 돌았지.

“네가 요즘 집안일 다 했잖아.”

단여명이 슬며시 눈썹을 치켜올렸다. 여전히 웃음을 지은 채여서 까칠해 보이기보단 능청스러워 보였다. 그에 무어라 반박하려고 입술을 달싹인 때였다.

“다 나았는데.”

전혀 예상치 못한 얘기가 그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

권호영은 당황해 입술을 살짝 벌렸다. 두뇌 회전이 일시적으로 정지하는 느낌이었다.

함께 밤을 보낸 후 서로 그 일을 입에 올린 적이 없었다. 그런데 지금 그는 그때 얘기를 간접적으로 얘기하고 있었다. 그때 불편했던 몸이 이제 괜찮아졌다고.

어떤 말로 받아쳐야 할지 주저하길 몇 차례.

“……그래도요.”

권호영은 한숨과도 같은 목소리로 말을 마쳤다.

그래, 있었던 일을 없다고 말할 순 없지. 그저 자신들 사이에 지나간 일. 그걸 잠깐 덮어둔 것뿐이었다. 뒤늦게 단순한 의미로 받아들이려고 해봤지만, 아마 당혹한 얼굴은 가감 없이 드러났으리라.

“그럼 늦은 입학 선물이라고 생각해.”

“…….”

“돈이 넘쳐나서 쓸 데가 없네. 막 낭비하고 싶어.”

쩔쩔매는 자신과 달리 단여명의 낯에는 장난기가 배어 있었다. 권호영은 아무 말 않다가 시선을 다시 앞으로 돌렸다.

가벼운 말투, 가벼운 표정.

그를 보며 권호영은 이상하게 속이 울렁대는 것을 느꼈다. 이 감정은 뭘까. 기분이 나쁜 것도 아니고, 좋은 것도 아니다.

그저 무게감을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이 관계에 부족함을 느끼는 것 같았다. 자신은 그 일이 있고 난 후 조금 더 그를 의식하게 됐다면 단여명은 변한 게 없어 보였으니까.

…이러면 안 되는데. 그는 제가 무엇을 얼마나 원하는지 모른다. 틀어질 일 없고, 만약 비틀린다고 해도 절대 부서지지 않을 관계. 완벽하고도 안온한 감정의 교착. 만약 단여명이 제가 원하는 바를 안다고 해도 그가 그걸 들어줄 의무는 없었다. 그리고… 육체적인 욕구도.

“그래도요.”

매출량이 기하급수적으로 상승했다…. 권호영이 마침표를 찍지 못한 문장을 타이핑했다. 뒤에서 계속 느껴지는 시선을 애써 모른 척하면서.

“그럼 뽀뽀라도 해 줄래?”

순간 자판을 두드리던 손이 삐끗했다. ‘ㅣㅣㅣㅣ’라는 오타가 말풍선 속에 길게 늘어졌다. 권호영은 고개를 홱 돌렸다. 여전히 능청스레 웃고 있는 흰 얼굴이 눈에 가득히 들어왔다.

“…네?”

잘못 들은 건가? 권호영은 놀란 얼굴로 눈을 깜빡거렸다. 단여명의 표정이 하도 태연해서 제가 헛소리를 들은 게 아닌지 의심될 정도였다.

…뽀뽀라니. 혹시 제가 미국에 살다 와서, 그래서 다른 나라에서 쓰이는 비쥬와 헷갈린 것인가? 그야 타국 사람의 문화이니 한국인인 그가 착각할 수도 있었다.

아니, 아니다. 거기까지는 너무 멀리 간 추측이었다. 그는 대화 흐름상 감사의 인사를 할 거면 그걸로 받겠다는 뉘앙스를 풍겼다. 하지만… 뽀뽀라니. 그건 일반적인 관계에서 성립할 수 없는 것이었다.

“뭐라고요?”

이상했다. 분명 지나간 일로 넘기려는 눈치였는데…….

“잘못 들은 거 아니야.”

“…….”

“뽀뽀라고 말했는데.”

‘뽀뽀’라고 발음하는 입술이 동그랗게 모였다. 그 붉은 입술에 순간적으로 시선이 꽂혔다. 권호영은 재빨리 상대의 미간에 초점을 맞췄다. 시선을 한곳에 두려고 노력했지만, 당황한 눈동자가 양옆으로 자꾸만 흔들렸다.

“왜 그런 걸… 해요?”

“그냥 받을 순 없다며.”

“…….”

“그렇게 답례가 하고 싶다면 그냥 그거로 받을까 하는데.”

권호영은 의문이 가득 찬 눈으로 상대를 살폈다. 단여명은 금방이라도 터질 듯한 웃음을 누르고 있었다. 그에 감이 잡힐 듯 말 듯 해 더욱 눈썹이 구겨졌다.

“돈으로…….”

“학생은 돈 쓰는 거 아니야.”

“…….”

“이제 집세도 내지 마. 너무 정 없어 보이잖아.”

단여명이 손을 뻗어 권호영의 오른쪽 뺨을 꾹 찔렀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권호영이 한쪽 눈을 움찔 떨었다. 마치 윙크하는 듯한 모양이 되자 그걸 본 단여명이 웃음기를 더욱 짙게 내보였다.

“싫으면 그냥 받고. 집세도, 노트북도.”

“…….”

“아, 또 필요한 거 있어? 옷? 신발?”

긴 눈꼬리가 매끄럽게 접혔다. 애교살이 도톰하게 올라 반절만 드러난 눈동자엔 즐거운 빛이 역력했다. 그제야 권호영은 그의 의중을 완벽하게 파악했다.

“…저 놀리는 거죠.”

“응.”

“…….”

“귀 빨개졌네.”

한 손으로 턱을 받친 단여명이 빙긋 웃었다. 그리고 반대 손을 올려 제 얼굴 옆에 댔다. 아마 얼굴까지 빨개졌다, 이 말인 것 같았다.

“……안 해요.”

잠시 후 부루퉁하게 답한 권호영은 샌드위치를 크게 베어 물었다. 그 모습이 자못 신경질적으로 보였나 보다. 뒤쪽에서 짧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위가 따끔거리는 감각에 단여명은 흐릿한 정신을 차렸다.

요즘 빈속에 거듭 술을 들이부어서 그런지 몸이 종종 말썽을 부렸다. 신경도 날카롭게 곤두서 잠을 자도 한시에 그쳤다. 원체 예민한 체질인데, 일이 이래저래 틀어져 스트레스를 받은 탓이었다.

잠에서 깨어날수록 차츰 감각 세포가 살아났다. 소파에서 시간을 보내다가 그대로 잠든 기억이 났다. 분명 엎드려 누운 자세로 잠에 빠져든 것 같은데, 잠결에 돌아누웠는지 얼굴의 방향이 천장에 가 있는 것이 느껴졌다.

원래 자면서 몸을 뒤척일 때면 곧잘 깨어나곤 했다. 하지만 며칠간 눈을 짧게 붙인 탓인지 이번엔 정신을 차리지 못했나 보다.

…시간이 얼마나 지난 거지. 지금쯤이면 과제를 다 끝냈으려나. 아무리 그래도 아침에 학교에 가야 하는 학생인데, 거의 새벽에 잠드는 걸 보니 마음이 영 좋지 않았다. 그러다 웃기는 생각도 같이 들었다. 집 안에 사람이 단둘뿐인데 둘 다 잠을 푹 이루지 못하네, 하고.

잠결에 흘러가는 대로 생각하던 도중이었다. 어쩐지 입술에서 간지러운 느낌이 올라왔다. 닿을 듯 닿지 않은 채 무언가가 입술 위를 맴돌고 있었다.

…피곤해서 가위라도 눌리나. 피로가 한계까지 쌓이면 간혹 가위를 눌리는 일이 있었다. 손가락을 까딱이려고 했지만, 잠에 취한 몸이 꼼짝도 하지 않았다. 으레 가위를 눌릴 때 느껴지는 압박감은 없었다. 제 몸 위에 어떤 것이 있다는 것만 희미하게 느껴질 뿐.

그에 기분 탓인가 넘기려던 찰나였다. 무언가가 제 입술에 살포시 얹어졌다. 입술에 감촉만 느껴질 정도로 가벼운 무게였지만, 접촉감이 없는 건 아니었다. 단여명은 순간 무섭게 뚜렷해지는 정신을 느꼈다. 놀라서 훅, 터져 나오려는 숨을 가까스로 삼켰다.

‘이 느낌은…….’

감촉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다른 이의 입술. 폭신하고 말랑말랑한 것의 정체는 분명 입술이었다. 뭉그러트리면 뭉그러트리는 대로 어그러지다가 곧바로 제자리를 찾는 탄력 있는 점막.

가만 숨죽이고 있자 상대가 입술을 떼어냈다. 그리고 조심스러운 숨을 고르더니 다시 입술을 살짝 맞붙였다.

농담으로도 성적인 낌새는 느껴지지 않았다. …유치원생들이 할 법한 입맞춤. 왕자가 잠든 공주를 깨울 때도 이것보단 진하게 하지 않았을까. 그런 생각이 들 정도로 아주 유약한 입맞춤이었다.

“…안 한다며?”

단여명은 눈을 감은 채 입술만 달싹였다. 다시 입술을 겹치려고 거리를 좁히던 얼굴이 황급히 떨어졌다. 놀라 바닥에 무릎을 찧었는지 쿵, 소리가 커다랗게 퍼졌다. 단여명은 천천히 눈꺼풀을 들었다. 눈을 커다랗게 뜬 권호영이 뒤로 달아나려는 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이건…….”

순간 소파가 덜컹거리며 크게 진동했다. 단여명은 그의 멱살을 잡아 제 쪽으로 거칠게 끌어당겼다. 몸이 앞으로 쏠린 권호영이 손으로 단여명의 얼굴 옆을 턱 짚었다.

시선이 마주친 건 짧은 새였다. 단여명은 망설이지 않고 그에게 입을 맞췄다. 입술을 포개는 것과 동시에 벌어진 입속으로 혀를 넣었다. 들어 봤자 달라질 것 없는 변명은 굳이 듣지 않기로 했다.

당황해 한껏 움츠러든 혀에 똑같은 살덩이가 닿았다. 그걸 애써 끌어내려는 듯 입 안쪽의 점막을 부드럽게 훑자 권호영이 황급히 제 어깨를 붙잡았다. 멱살이 잡힌 터라 그의 저항은 그것이 한계였다. 어차피 밀어내지도 못할 거.

역시나 그는 어깨를 잡은 채 밀쳐내지 못했다. 어찌할 바를 몰라 하면서도 입을 벌리고, 그 안을 느릿하게 탐하는 혀를 받아내 주었다. 단여명은 그의 옷을 더욱 거칠게 당겼다. 목이 늘어나겠지만, 상관없었다. 옷은 새로 하나 사 주면 그만이니까.

거리를 벌리려고 힘주고 있던 권호영의 팔이 안으로 굽어졌다. 서로의 상체가 빈틈없이 밀착하고, 입맞춤이 더욱 깊어졌다. 도발하듯 혀를 얽으니 그가 참았던 숨을 한꺼번에 터트렸다. 뜨뜻한 콧김이 얼굴을 적시고, 곧 유연한 살덩이가 제 혀에 뱀처럼 휘감겼다.

“으, 음…!”

태세가 바뀌는 건 순식간이었다. 권호영이 제법 힘주어 혀를 문질러대기 시작해 단여명의 혀가 아래쪽으로 밀려났다. 그것도 부족함을 느끼는지 그는 어디 도망가지 못하게 입술을 오므려 단여명의 혀를 빠듯하게 죄었다. 그리고 말랑한 살덩이를 힘 있게 추읍, 쫍, 빨아들였다.

“움, 흐으, 으……!”

단여명은 목구멍을 치고 올라오는 소리를 그대로 뱉었다. 그의 입술이 빨아올리는 대로 혓바닥이 오목하게 조여졌다. 입술을 오므려 움직임을 억압한 채로 그는 입안에 들어온 살덩이를 혀끝으로 진득하게 문질렀다.

전혀 능숙하지도, 부드럽지도 않은 키스였다. 그런데 어째선지 세상이 거꾸로 뒤집히듯 머리가 핑글 돌았다. 단여명은 그의 가슴팍을 밀어 자세를 바꾸길 유도했다.

몸을 움직이는 중에도 맞붙은 입술은 떨어질 줄 몰랐다. 단여명은 권호영의 허벅지 위에 걸터앉았다. 그는 자세가 바뀐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자꾸만 빨대로 내용물을 빨아올리듯 제 혀를 쭙쭙 당겨댔다.

단여명은 혀뿌리가 아리도록 혀를 길게 빼준 채 그의 가슴팍을 지분댔다. 숨을 몰아쉴 때마다 딴딴하게 차오른 가슴 근육이 꿈틀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한참 입맞춤에 열중하던 권호영도 그쯤 제 몸을 더듬대는 손길을 알아차렸다. 어깨를 흠칫 떤 권호영이 우악스레 빨아들이던 혀를 얼결에 놓아주었다.

“형, 잠깐….”

쪽, 소리가 권호영의 말을 중간에 가로막았다. 권호영의 입술에 한번 입을 맞춘 단여명은 얼굴을 내려 그의 목덜미를 입안에 머금었다.

“읏, 아…….”

얇은 피부를 부드럽게 빨아들이자 권호영이 듣기 좋은 소리를 냈다. 목덜미를 빨아올릴수록 샴푸 냄새가 섞인 섬유유연제 향기가 강하게 후각을 자극했다.

깨끗한 이미지가 떠오르는 향기가 야릇하게 느껴질 수 있다니. 자신과 같은 것을 쓰고 있는데도 그랬다. 살냄새가 섞여서 그런가. 목덜미에 울혈 자국이 남은 것을 확인한 단여명은 그의 아래쪽으로 몸을 움직였다.

“잠깐, 잠깐만요.”

심상찮은 기미를 느낀 권호영이 그제야 단여명을 말리기 시작했다.

“왜, 뭐 하려고 무릎을 꿇어요.”

그는 불안한 눈으로 제 앞에 앉은 상대를 내려다보았다. 단여명은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저리 당황해하는 걸 보니 방금까지 기갈난 것처럼 혀를 빨아올렸던 남자는 누구인가 싶었다.

“세웠잖아. 나한테 몰래 뽀뽀했을 때부터.”

단여명은 가운데로 모으려는 무릎을 바깥쪽으로 벌렸다. 혀를 넣기 직전의 순간 그의 하반신이 제 허벅지에 부딪혔었다. 도둑키스를 할 때부터 그는 발기한 상태였다.

“키스도 아니고…….”

고작 뽀뽀로. 귀여워 죽겠네, 진짜. 단칼에 진도를 빼면 놀라 도망갈 것 같고. 시험 기간이라고 피곤해하는 걸 알아서 당장 벗겨 먹을 수도 없는데.

“불이라도 끄면…….”

“뭐 하러?”

단여명이 입꼬리를 길게 휘었다. 움푹 파인 입술 끝은 마르지 않는 우물처럼 깊어 보였다.

“예쁜 걸 왜 가리려고 해. 보여줘야지.”

그리 말하며 무릎의 안쪽을 살살 쓸자 권호영은 망설이는 낌새를 보였다. 쉬이 결정을 내리기 힘들어하는 듯했다.

“아직 준비가…….”

“여긴 준비가 끝났다는데.”

단여명의 시선이 꽂힌 곳은 불룩하게 부푼 앞섶이었다. 얼마나 무섭게 커졌는지 회색 트레이닝복 위로 구렁이의 몸뚱이 같은 윤곽이 비쳤다. 언젠가 그가 물건을 어느 방향으로 수납하는지 궁금해했던 적이 있었다. 그리고 오늘 알았다. 확신의 오른쪽이었다.

“…거기 말고요. 자꾸 그렇게, 벌리지 마세요.”

권호영은 거듭 허벅지를 안쪽으로 좁히려고 했다. 아, 마음의 준비를 말한 건가. 이쪽도 흥분할 대로 흥분한지라 생각이 짧아진 모양이었다.

“…전 형이랑 다시 이럴 줄 몰랐어요.”

혼란스러워 보이는 낯으로 권호영이 말했다. 단여명은 그 얼굴을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이쪽도 그동안 생각이 많았는데, 아마 저쪽이라고 해서 속 편히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호영아.”

단여명은 커다란 손을 끌어당겨 그 손바닥에 뺨을 묻었다. 엷게 달아오른 얼굴로 위를 올려다보니 권호영이 떨리던 눈동자를 바르게 고정했다.

“내가 전에 했던 말 기억해?”

굳은살이 박인 손바닥에 뺨을 비비자 그의 손가락이 짧게 들썩였다.

“네가 싫다면 강제로 할 생각은 없어.”

“…….”

“아닌 것 같으면 언제든지 밀어내도 좋아. 그 말은 계속 유효한 거니까.”

권호영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혼란스러워하는 것이 분명해 보였으나, 역시 마냥 싫은 건 아닌 듯 보였다.

“네가 밀어낸다고 해도 우리 사이가 달라지진 않아. …알지?”

단여명은 권호영의 손바닥에 입을 맞췄다. 권호영은 경직된 표정으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순종적으로 시선을 내리깐 얼굴이 손바닥에 깃털 같은 입맞춤을 내렸다.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권호영이 움직임을 보인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는 엄지로 단여명의 눈 밑을 조심스레 쓸었다. 솜털이 난 방향을 따라 단단한 손끝이 여린 피부를 문질렀다. 그 가벼운 손길에 단여명은 제가 할 수 있는 한 예쁘게 웃어 보였다. 허락의 뜻이었다.

단여명은 그의 중심부에 가볍게 손을 얹었다. 처음에는 트레이닝 바지만 입고 다니는 게 별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젠 생각이 다른 쪽으로 바뀌었다. 이것만큼 벗기기 쉬운 옷도 없었으니까.

프리컴을 매단 좆이 묵직하게 위로 튕겨 올랐다. 잠깐 손에 닿았다가 떨어진 드로어즈의 앞섶에도 미끈한 액이 묻어 있었다. 순간 웃음이 샐 뻔했다. 갈피를 잡지 못하는 마음과 다르게 몸은 참 솔직했다. 그 짓궂은 생각을 그대로 입 밖에 낼 순 없어 단여명은 언제나 그렇듯 표정을 단속했다.

“…예쁘다.”

멀쩡한 정신으로 그의 성기를 목전에 두니 강렬한 희열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네 거, 다시 봐도 정말 예뻐.”

조심스레 좆을 감싸자 기둥이 바윗덩이처럼 더욱 딴딴해졌다. 울퉁불퉁한 힘줄이 선연히 돋아 있었고, 둥글게 고인 쿠퍼액은 핏대를 타고 주르륵 흘렀다. 가까이 놓고 보니 한눈에 다 담기지도 않았다. 여전히 색은 고운데 흉악한 크기는 그대로인 모습이었다.

“왜 자꾸 얼굴을 가려.”

아래만 따로 놓고 보면 엄청 흥분한 것 같은데, 그는 평정심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권호영은 한 손으로 눈을 가린 채 거칠어지려는 숨을 연방 잡아 눌렀다.

“…보면 안 될 것 같아서요.”

허벅지를 오므리지 못하게 하자 그는 다른 방안을 택했다. 그쪽이 편하다면야 말릴 생각은 없었다. 단여명은 손으로 그의 성기를 조물조물 반죽했다. 찰흙으로 손장난을 치듯이 단순한 손놀림이었다.

그런데 거기서 더 커질 게 남아 있는지 커다란 성기는 만지는 족족 부피를 키웠다. 다 커졌나 생각이 들 때쯤엔 한 손으로 주무르기 어려울 정도로 손바닥에 가득 찼다.

단여명은 그 모습을 뚫어져라 보다가 제 팔목을 슬쩍 내려다보았다. 두 개의 굵기를 눈대중해보길 여러 번, 이르게 단념한 뒤 그 위에 혓바닥을 살포시 올려보았다.

“……!”

말랑한 감촉을 느꼈는지 권호영이 눈을 가리고 있던 손을 휙 치워냈다. 그리고 있는 대로 눈을 커다랗게 키웠다. 그의 눈 속에 경악감이 스쳤다. 단여명이 아래에 입을 갖다 댈 줄 생각도 못 했다는 표정이었다.

“뭐…!”

화들짝 놀란 권호영이 반사적으로 단여명을 제 아래에서 떨어트렸다. 이마를 툭 쳐낸 손길에 단여명의 머리가 주춤 밀려났다. 귀두에 올려뒀던 혀도 그와 동시에 떨어져 나갔다.

“아, 아니….”

그리고 뒤늦게 자신이 한 행동을 자각했는지 단여명의 이마를 보호하듯 손으로 감쌌다. 너무 놀라 무심결에 밀어낸 것을 미안해하는 눈치였다.

전혀 강하지 않게 밀쳐내서 아픔은 없었다. 다만 손바닥이 하도 넓어서 이마를 감싸다 못해 시야까지 가려버렸다. 단여명은 어둠 속에서 눈만 깜빡였다.

“거기, 거기에… 왜 입을…….”

너무 놀라 말도 채 나오지 않는 모양이다. 깜깜한 시야 속 망연자실한 목소리가 들렸다. 단여명은 목 안으로 웃음소리를 삼켰다. 비죽 올라가는 입꼬리를 잡아 누르진 못했지만 말이다.

“이렇게 말고.”

하얗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이마를 가린 손에 닿았다. 핏줄이 불거진 손등을 감싸는 것 같더니 그 손을 잡고 옆으로 끌었다. 권호영은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은 손길에 맥없이 끌려갔다.

“이렇게.”

단여명은 제 옆통수를 감쌀 수 있게끔 손의 위치를 잡아 주었다. 언젠가 그 손이 몇 번이나 지분댔던 귀도 손아귀에 함께 들어갔다.

“쓰다듬어 줘. 조금 거칠게 당겨도 괜찮고.”

다른 이의 손을 잡아끄느라 하얗게 바랬던 반달 모양의 손끝이 다시 분홍빛으로 물들었다. 그 분홍색 손끝은 이어 날것 그대로 드러난 생식기를 감아쥐었다. 단여명이 음절 하나하나를 뱉을 때마다 민감한 곳에 더운 숨결이 퍼부어졌다. 그 모습을 황망히 바라보던 권호영은 낮게 탄식했다.

감히 이런 걸 봐도 되는지 진심으로 누군가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윽…!”

단여명은 손으로 성기를 받친 뒤 밑동부터 귀두까지 혀로 단번에 죽 핥아 올렸다. 미끈한 타액을 도포하며 길게 핥으니 손에 잡힌 살덩이가 따로 떨어진 생명체처럼 힘차게 팔딱였다. 요도구가 빠끔거리며 투명한 액을 질금질금 밀어냈다. 단여명은 망설임 없이 귀두를 한입에 머금었다.

“형…….”

좆 머리만 물었는데도 턱이 빠듯하게 당겼다. 묵직한 귀두를 받친 혓바닥이 입안에서 바짝 내리깔렸다. 다물리지 않는 입술을 애써 오므리곤 흡착력을 가해 츄읍, 빨아들이니 입안에 특유의 맛이 퍼졌다. 성기의 빛깔이 예뻐서 그런지 마냥 비릿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귀두만 물기도 벅차, 이걸 목구멍 아래로 넘기는 건 역시 무리로 보였다. 이건 제 힘으로 밀어 넣어서 될 게 아니었다. 그가 허리를 써 억지로 박아 넣는 쪽이라면 모를까.

곧 물기가 통통하게 오른 혓바닥이 미끈한 귀두를 연신 간질이기 시작했다. 빗질해 주듯이 삭삭 핥다가도 맑은 액이 연방 고이는 작은 구멍을 문지르기도 했다. 커다란 성기는 쏟아내는 액의 양도 많았다. 조금이라도 샘물이 고일 때면 단여명은 그곳에 혓바닥을 문질러 입안으로 훔쳐냈다.

“아…….”

그쯤 손도 같이 놀리기 시작하자 권호영의 배가 움푹 꺼졌다가 솟아나길 거듭했다. 귀두와 기둥의 이음매를 혀끝으로 간질이던 단여명이 눈을 가느스름히 뜬 채 물었다.

“기분 좋아?”

아래와 위. 다리를 벌리고 앉은 남자와 그 밑에 앉아 가랑이 사이에 고개를 처박은 남자.

명백히 강자의 포지션을 취한 권호영은 그 위치에 걸맞지 않게 긴장한 표정이었다. 얼굴과 귓바퀴를 물들인 붉은 기는 단여명이 울혈 자국을 만들어 놓은 목덜미까지 넘실넘실 퍼져나갔다.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그는 언제 튀어 나갈지 모를 신음을 필사적으로 참아냈다.

단여명은 그 얼굴을 올려다보며 그의 허벅지 안쪽에 입술을 눌렀다. 성기가 흔들리는 와중에 간지럼을 느끼는지 권호영이 다리를 움찔했다가 바르게 놓았다.

입술에 힘을 주자 얼마 없는 살이 입안으로 끌어 모아졌다. 보통 사람이라면 살집이 몰려 있을 부위였다. 그러나 꾸준한 운동으로 탄탄하게 짜인 허벅지는 이를 박아도 박혀 들어갈 것 같지 않았다.

쾌감으로 섬세하게 뒤틀리는 근육의 결을 느끼며 단여명은 그의 허벅지 살을 힘껏 빨아들였다. 탄탄한 허벅지 안쪽에 혈이 몰린 자국이 불긋하게 남았다.

문질러도 지워지지 않을 자국을 쓸어 보던 단여명은 눈이 가는 대로 손을 뻗었다. 살기둥을 감싼 거죽을 올려 쳐 줄 때마다 그 아래 달린 음낭도 위아래로 흔들렸다. 둥그런 음낭도 성기 못지않게 커다랬고, 여실한 쾌감에 터질 듯이 팽창돼 있었다.

한쪽만 손안에 올렸는데 묵직한 무게감이 전해졌다. 그러다 살결이 제법 보들보들한 걸 알게 되었다. 음낭을 둥글리듯 굴려주니 위에서 하아, 하며 거친 숨이 터졌다.

단여명은 한 손으로 양쪽 음낭을 번갈아 주물러 줬다. 남은 손으로는 버겁게 잡히는 성기를 살뜰히 쓸어 올려 줬다. 앞머리를 물기도 힘들어 입으로는 잔재주를 부릴 수 없었다. 입안에 귀두를 담뿍 문 채 끄트머리를 뽑아낼 듯 쭙쭙 물어 당기니 권호영이 격한 숨을 토해냈다.

“형, 저…….”

머리를 감싸고 있던 손이 움직임을 보였다. 지금까지 가만히 얹어두기만 하고 미동도 안 했던 손이었다. 그런데 지금은 손가락 사이에 머리칼을 얽고 손끝으로 살짝 두피를 긁기까지 했다. 반응을 보아하니 사정이 얼마 남지 않았다.

“진짜… 윽, 진짜 안 돼요.”

권호영이 초조한 음성으로 말했다. 어쩐지 저번보다 사정이 빠른 것 같은데. 그리 생각하면서도 단여명은 성기의 거죽을 손으로 쭉쭉 밀어 올렸다. 쯔걱, 척, 하며 기둥을 타고 오르내리는 겉껍질이 마찰열에 달아올라 더욱 불같은 열기를 뿜어냈다. 손바닥이 홧홧할 정도인데도 단여명은 손을 멈추지 않았다.

“큭, 하아…!”

음낭을 조금 강하게 틀어쥐었을 때 권호영이 얼굴을 사납게 일그러트렸다. 그는 허리를 약간 숙인 채 작은 머리통을 감쌌다. 성기를 더욱 깊은 곳으로 처박으려는, 본능적인 욕망을 막아내는 모양새였다.

단여명은 입술을 커다랗게 벌린 채 정액을 받아냈다. 입천장을 때리며 끈적한 좆물이 입안으로 울컥울컥 쏟아졌다. 입안에 이리저리 튄 점액을 혓바닥 위로 모아 혀를 굴려 보았다. 진하게 농축된 맛. 바빠서 빼낼 시간이 없었는지 진한 수컷의 냄새도 함께 풍겼다.

꿀꺽 목을 넘기자 덩어리진 좆물이 목구멍 점막에 찐득하게 엉겨 붙었다. 다시 한번 침을 삼켜내서야 찐득찐득한 기운이 가시고, 막혔던 목이 편해졌다.

단여명은 정리해 주듯 진분홍빛 선단을 쪼옥, 빨았다가 놓아주었다. 타액으로 흠뻑 젖은 귀두는 번들번들하기만 할 뿐 사정한 흔적 없이 깔끔했다.

‘한 번 더 하고 싶은데.’

그럼 놀라 까무러치겠지. 입을 댄 것조차 소스라치게 반응했는데, 이 이상 진도를 빼는 건 힘들 것 같았다. 몰래 아쉬움을 갈무리하던 와중이었다. 돌연 시야가 위로 쑥 올라갔다.

“그걸 먹었어요?”

권호영이 단여명의 양 뺨을 잡고 다그치듯 물었다. 아직 절정의 여운이 감도는 낯은 온통 불그죽죽했다. 그럼에도 그는 꼭 짚고 넘어가야 할 큰 문제를 맞닥뜨린 사람처럼 진지했다.

“…아.”

습관적으로 그만. 단여명은 눈동자를 굴리다가 머쓱한 웃음을 지었다.

“그걸 더럽게 왜…!”

“…….”

“빨리 뱉어요.”

권호영이 단여명의 턱을 아래로 벌렸다. 단여명은 당황해하다가 입술을 벌렸다. 방금까지 제 샅에 머리를 처박을 생각도 못 하고 우왕좌왕하던 손이었다. 그런데 그것이 우습게도 턱을 벌리는 손아귀의 힘은 입을 다물 수 없이 억척스러웠다.

“아, 자까…….”

단여명의 입안은 깨끗했다. 날카로운 시선이 꽂힌 혀가 눈치를 보듯 슬쩍 안쪽으로 말렸다. 빨갛고 오동통한 살덩이. 저것이 제 귀두에 감겼을 거란 생각에 권호영은 눈앞이 아찔해지는 것만 같았다.

“괜찮아. 너무 빨리 삼켜서 맛도 못 느꼈어.”

“…….”

“……진짜야.”

…말은 그렇게 하고 또 세웠네. 단여명은 그의 물건을 흘긋 내려다보았다. 조금 부피를 줄였던 살덩이가 허공에 주먹질하듯 툭툭 위로 곧추서고 있었다.

“…여기 자국 남았다.”

말을 돌리고자 허벅지 안쪽을 쿡 찌르면서 말하니 권호영의 시선이 따라갔다. 허벅지 안쪽에 덩그러니 남은 붉은 자국. 점점이 뭉친 울혈 자국은 소유의 흔적이었다.

제 아래를 내려다보던 권호영은 그 자국을 슬쩍 문질러 보았다. 그러나 비누칠해도 지워질 리 없는 정사의 흔적은 손끝에 색이 묻어나오지 않았다.

“……이거 어떻게 하는 거예요?”

망설임이 가득한 투였지만, 목소리는 명료했다. 단여명은 그 물음에 조용히 시선을 맞추었다. 지표를 잡지 못하던 마음은 그와 일상적인 시간을 보내는 중에 정했다.

…어차피 둘만 입 다물면 아무도 모르는 일.

모두가 잠든 새벽, 발소리를 죽인 인기척 소리가 났다. 미세한 인기척은 불이 꺼진 거실을 지나 욕실의 문턱을 밟았다. 탁, 불이 켜지는 소리와 함께 문틈 사이로 빛줄기가 새어 나왔다. 욕실의 문이 조용히 닫히자 그 또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환하게 켜진 전등 밑으로 발긋한 얼굴이 드러났다. 단여명은 거울 속에 자신을 지그시 바라보다가 옷깃을 확 옆으로 젖혔다.

‘…더 아래?’

권호영은 제가 알려 준 것을 밤중에 착실히 복습했다. 목덜미에 새겨 넣을 곳이 더 없는 듯해 그리 물으니 권호영은 침묵했다. 마주친 시선이 더 원한다는 뜻을 보여 단여명은 기꺼이 윗옷을 벗었다.

‘재밌어?’

웃음이 섞인 질문에 권호영은 아무 말 없이 눈 맞춤을 했다. 가을 나무에 매달린 낙엽 같은 색의 눈동자는 어둠이 깃들어 평소보다 짙은 빛깔이었다. 밑으로 잡히는 성기를 손으로 살살 쓸어주니 그가 빗장뼈에 입술을 묻었다.

‘…왜 그만하라고 안 해요?’

그가 입술을 댄 주변은 이미 빼곡한 키스 마크가 박혀 있었다. 온통 울긋불긋한 자국 사이에도 빈공간은 있었다. 권호영은 붉은색 사이의 흰 살결을 찾아내 질리지도 않고 입술을 묻었다.

‘좋으니까.’

더 남겨 줘. 네가 남기고 싶은 만큼. 목소리를 죽여 속삭이니 그가 얄팍하게 잡히는 살을 베어 물었다. 맨살을 빨아들이는 젖은 소리가 반복적으로 울렸다.

‘아, 이번 건 좀… 아픈데.’

느껴지는 감각이 조금 억셌지만, 그리 싫진 않아 그런대로 웃음이 나왔다.

“…….”

그렇게 그의 사정을 한 번 더 도와주고, 권호영의 방 침대 위에 나란히 누워 얘기를 나눴다. 오늘 하루는 어땠다거나, 제가 사 온 샌드위치가 무슨 맛이었다거나. 대체적으로 소소한 얘기들이었다.

그러다가 피로에 지친 권호영이 잠에 빠져들었다. 곤한 숨소리를 확인한 후 단여명은 침대에서 빠져나왔다.

거울 속에 울혈 자국으로 넝마가 된 목덜미가 보였다. 그를 눈에 담던 단여명은 웃옷을 벗었다. 욕실 바닥에 옷가지를 떨어트리고 거울 속에 비친 상반신을 길게 훑었다.

그는 절정에 달하기 직전이나 흥분이 거세지면 이를 세우는 못된 습관을 가지고 있었다. 곧장 잘못했다는 것처럼 혀로 핥아왔지만, 양쪽 어깨와 목덜미 중간엔 고른 잇자국이 박힌 채였다.

눈치를 보면서도 자꾸 욕심을 내는 것 같아서 가만히 내버려 뒀다. 그랬더니 상반신 전체를 키스 마크로 도배해 놨다. 앞은 내줬지만, 뒤는 그의 물건을 만져 주기 적합한 자세가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이렇게 등판은 깨끗하고, 앞판만 얼룩덜룩하게 되었다.

첫 경험.

단여명은 그것에 큰 의미를 두고 살아오지 않았다. 제 첫 경험은 어땠더라.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여자애와 했다. 학생 때 연애하다가 물 흐르듯 그렇게 된 것 같다. 뒷동정은 알다시피 좋지 않게 떼였고.

“…내 팔자야.”

단여명은 한숨을 쉬곤 하의와 속옷을 한꺼번에 탈의했다. 그제야 오랜 시간 옷 속에 눌려 있던 성기가 해방감을 토로했다.

도대체 이 상태로 몇 시간을 있었는지 모르겠다. 그에게 혀를 빨릴 때부터 서 있던 것이었다. 끝으로 갈수록 아래가 갑갑하다 못해 묵직하게 아파왔다.

그래도 제가 처음이라는데. 그런 애한테 제 것도 만져 달라고 뻔뻔하게 요구할 수는 없었다. 분위기 자체도 이성을 잃고 서로에게 달려드는 쪽으로 흘러가지 않았다. 처음에는 불타오르나 싶었는데, 이후의 분위기는 뭐랄까…… 좀 고요했다.

끼릭. 샤워기를 틀자 바닥을 때리는 물줄기 소리가 났다. 단여명은 흘러가는 물소리를 들으며 발기한 자지를 손에 쥐었다. 은근한 시선은 거울 속의 몸을 노골적으로 더듬고 있었다.

덕지덕지 남은 울혈 자국은 배꼽 밑에서 자취가 끊겼다. 그를 핥듯이 바라보며 단여명은 천천히 기억을 더듬어나갔다.

진한 자국을 남길 때 가지런한 속눈썹이 만들어내던 밤그림자, 뜨거운 입안으로 빨려 들어간 피부가 질겅이며 씹히던 감촉, 몸 위에 올라탄 남자가 자신을 내려다보며 짓던 표정….

“하아…….”

천천히 자지 기둥을 훑던 단여명은 반대 손을 위로 들었다. 그의 물건을 한참 동안 지분거렸던 오른손. 그중 검지를 내어 입술로 쭉 빨아올려 타액을 묻혔다. 축축하게 젖은 손가락은 곧 엉덩이 사이로 내려갔다.

“음…….”

빗장뼈와 목덜미 사이에 유독 거뭇하게 남은 흔적이 보였다. 아마 닷새가 지나도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단여명은 그것을 뇌리에 선명히 담아 넣으며 밀문에 손가락을 삽입했다.

닫힌 문틈으로 희미한 빛이 새어 나갔다. 미약한 신음성은 세찬 물소리와 뒤섞여 한동안 욕실 안을 울렸다.

3권에 이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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