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그 작가네 하숙생 2권-첫째 줄 (4/11)

그 작가네 하숙생 2권

목차

첫째 줄

둘째 줄

첫째 줄

…설마 다 들었나?

“…….”

단여명은 안면 근육을 딱딱하게 경직시켰다. 권호영에게 고마운 마음보다는 싸한 기분이 앞섰다.

잊고 있었다. 권호영이 매일 외출한다는 것. 그리고 그가 이 광경을 볼 수 있다는 위험성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거기다 자신들의 싸움에 권호영이 휘말리게 될 줄은 더더욱 몰랐고 말이다.

“형 아는 사람이니까 험하게 말하기….”

“네가 험하게 말하면 어쩔 건데.”

제게서 빗겨 난 불같은 눈초리는 이제 권호영에게 꽂혔다. 단여명은 놀란 얼굴로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상황이 이상하게 흐르기 시작했다.

“어? 어쩔 거냐고, 새끼야.”

순간 권호영의 가슴팍이 거칠게 떠밀렸다. 단여명은 헉, 하고 헛숨을 집어먹었다. 생각지도 못한 인물의 등장으로 상황 파악을 마치기도 전이건만, 김선오가 성난 야수같이 덤벼들기 시작했다.

“가만 보니까 네가 뭐라도 된 것처럼 말한다?”

보통 사람 같았으면 우악스러운 힘에 떠밀려 두어 번 뒷걸음질 칠 정도였다. 어깨가 틀어지도록 뒤로 밀쳐졌으니까. 그러나 권호영은 한 발짝 거리를 벌린 다음 돌아간 어깨를 바로 한 게 전부였다. 격하게 보인 손놀림이 얄팍한 눈속임으로 생각될 만큼.

조용히 상대를 응시하는 권호영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차분한 기색이었다. 어린 게 무섭지도 않은지 살벌한 기운을 받아치는 데 스스럼없었다.

“잘만 떠들어댈 때는 언제고 왜 말이 없어. 네가 뭔데 끼어드냐고.”

“잠깐, 잠깐만.”

그쯤 단여명은 얼떨떨한 정신을 부여잡았다. 황급히 손을 뻗어 김선오의 어깨를 잡았다.

“놔.”

하지만 어깨에 손을 올리자마자 김선오가 그를 거세게 뿌리쳤다.

“김선오.”

그는 부름에도 답이 없었다. 화가 나서 시야가 좁아졌는지 권호영만 죽일 듯이 노려봤다. 매일같이 보던 옆얼굴이 마치 사람 손을 물어뜯기 직전의 사냥개와 겹쳐 보였다. 입질하기 전에 주둥이를 들썩거리며 마지막 경고를 가하는 것처럼 그는 위협적인 기세를 뿜었다.

여기서 상황이 더 심각해지면 뒷일이 골치 아파진다. 단여명은 그의 어깨를 잡고, 제 쪽으로 홱 잡아당겼다.

“선오 형.”

무섭게 얼굴을 일그러뜨린 김선오와 시선이 딱 맞았다. 이글거리는 눈동자 속에 흐릿한 인영이 잡혔다.

“진정해. 너 너무 흥분했어.”

피부 아래로 딴딴하게 경직된 근육이 만져졌다. 단여명은 그쯤 하라고 달래듯 그의 어깨를 살짝 주물렀다가 놓았다.

노기가 끓는 시선이 매서웠음에도 단여명은 눈길을 피하지 않았다. 이 순간이 마지막이 될지라도 그가 그런 짓까지 하지 않으리라고 믿었다. 자신을 아웃팅시킬 정도로 최악은 아닐 것이라고.

“…….”

잔뜩 구겨졌던 인상이 천천히 풀어졌다. 눈가를 찌푸린 김선오는 시선을 아래로 떨구었다가 다시 눈을 맞췄다. 이제야 일이 돌아가는 꼴이 보이는 듯했다.

어둠이 드리운 눈동자 속에 여러 감정이 섞갈렸다. 혼란을 겪던 다갈색 눈동자는 종내 무언가 사정하는 듯한 눈빛을 보냈다. 시선이 길게 맞물릴수록 불편한 감정이 차올랐다.

“나중에 술 깨고 얘기하자.”

단여명은 뜨겁게 경직된 어깨에서 손을 거뒀다.

“…연락할게.”

그리고 그대로 걸음을 돌려 권호영의 손목을 붙잡았다. 권호영을 끌고 황급히 골목길을 빠져나가는 길엔 어떤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래도 아직 멀쩡한 정신이 남아 있는지 김선오는 멀어지는 자신들을 붙잡지 않았다.

엘리베이터 앞에 도착하고 나서야 단여명은 권호영의 손목을 잡고 있다는 걸 인식했다. 단여명은 그의 손목을 슬그머니 놓아줬다. 권호영은 말없이 정면만 응시했다. 그 모습을 곁눈질한 단여명도 뒤따라 침묵을 지켰다.

“…….”

“…….”

위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숨이 막히는 정적이 잇따랐다. 단여명은 엘리베이터의 바닥 무늬만 묵묵히 눈에 담았다.

‘이게 뭐지….’

방금 대체 무슨 일이 벌어졌던 건지. 김선오가 눈앞에서 사라진 뒤인데도 얼얼한 정신을 추스르기 힘들었다.

자신들의 얘기를 어디서부터 들은 건지 알 수 없어 권호영에게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감이 안 잡혔다. 말머리를 돌리기엔 지금 분위기에서 적절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렇다고 다른 얘기를 꺼내기엔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만 끌고 있던 때였다.

“다친 곳은요?”

집 안에 들어서자마자 권호영이 불쑥 물음을 던졌다. 고개를 돌리자 평소와 같은 무심한 얼굴이 눈앞에 보였다.

단여명은 애써 태연하게 웃었다. 다치다니. 말 한번 무섭게 한다.

“그렇게 험악한 분위기는…….”

“…….”

“…….”

“…….”

“험악해 보였구나.”

그래, 그러니까 네가 나섰겠지. 단여명은 생각을 고쳐먹었다. 오지랖이 넓은 성격도 아닌 것 같던데. 그가 위험하다고 판단했으니 중간에 끼어든 것일 테다.

어쨌든 저쪽에서 먼저 얘기를 꺼내 줬으니 저로선 땡큐였다. 어떻게 얘기를 시작해야 할지 고민하던 찰나였으니까. 단여명은 고맙다는 말과 함께 사소한 말다툼이었다고 둘러대려고 했다.

“손목에 있던 멍도 저 사람이 한 거예요?”

하지만 권호영이 먼저 선수를 쳤다. 단여명은 선뜻 입을 떼지 못했다.

‘이건… 섹스하다가 남은 건데.’

방금 싸우고 온 저 남자가 남긴 자국이고, 저 녀석 취향이 좀 별나서. 그렇게 대답할 순 없어 머리를 굴렸다.

그건 또 언제 본거지. 자신에게 그렇게 지대한 관심이 있는 줄 몰랐다. 말하고 싶지 않아 눈동자를 슬쩍 옆으로 굴렸다. 그러나 집요한 시선이 대답을 강요하는 듯했다. 말하지 않으면 전에 그랬던 것처럼 몸으로 막아설 태세였다.

손목에 멍들 일이 뭐가 있을까. 그것도 무언가에 묶이거나 죄인 듯 고르게 남은 자국이. 죄를 지어 수갑을 찰 일이 있었다는 것을 제외하고 적당한 명분이 생각나지 않았다.

“넘어져서?”

“하아….”

대놓고 시치미를 떼자 권호영이 들으라는 양 큰 한숨을 내쉬었다.

“왜 그러고…….”

‘살아요’일까, ‘다녀요’일까. 뒷말은 듣지 못했지만, 아마 둘 중 하나였으리라.

오늘 진짜 이상하게 구네. 인사도 받는 둥 마는 둥 하던 녀석이 답지 않게 걱정한다. 하긴, 이번 일은 경우가 좀 다른가. 같이 사는 형이 웬 놈에게 멱살을 잡히고 있는 꼴을 보았으니 적잖이 놀랐을 것이다.

“미안해서 어쩌지. 음식이 다 식었네.”

단여명은 미안한 마음에 화제를 돌렸다. 거짓말할 바엔 차라리 다른 얘기를 하는 게 더 나았다. 그가 자신들의 대화를 어디까지 들었는지 알 순 없었으나, 일반인에게 설명할 수 없는 사정이었다. 친한 친구랑 다퉜다고 하기엔 묘한 분위기가 났을 테니까.

“…….”

권호영은 심한 말을 삼키듯 침묵했다. 지금 그런 게 눈에 들어와요? 꾹 닫힌 입매가 그리 탓하는 듯했다.

단여명은 모르는 척 웃다가 결국 무겁게 한숨지었다. 역시 얼렁뚱땅 넘어가는 건 아닌 것 같았다. 권호영에게 빚진 것도 있었고.

“걱정해 줘서 고마워. 그런데 정말…….”

“내일 아침에 뭐 해요?”

순간 둘의 목소리가 겹쳤다. 끝말을 마무리 지은 쪽은 권호영이었다. 단여명은 당황해 눈을 끔뻑거렸다.

“내일… 아침?”

뜬금없이 내일 일정은 왜 묻나 싶었다. 적어도 김선오와 왜 싸웠는지 물을 줄 알았는데. 전혀 생각지도 못한 얘기를 들어 얼떨떨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저랑 같이 운동 나가요.”

뭔가 데이트 신청할 때 할 법한 말 아닌가…. 상황에 맞지 않게 엉뚱한 생각을 잇던 도중이었다. 산 넘어 산이라고, 더욱 생뚱맞게 들리는 얘기가 권호영의 입에서 튀어나왔다.

“운동?”

단여명은 눈썹을 살짝 찌푸린 채 고개를 갸웃했다. 김선오 일은 묻기 불편해서 넘어간다고 치자. 둘이 뭘 하는 것까지도 좋았다. 같이 사는 사이에 밥을 먹을 수도, 나가서 즐겁게 뭘 하고 올 수도 있다.

그런데 하고많은 것 중에서 왜 하필 운동이지? 갑자기 운동하자니 어딘가 많이 생략된 기분이었다. 이상하다고 생각하면서 단여명은 다른 물음을 던졌다.

“무슨 운동?”

“…….”

권호영은 잠시 침묵했고.

“…걷기?”

자신도 확신하지 못하겠다는 목소리로 대답을 내놓았다. 단여명은 왠지 찜찜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앞머리 속에 숨겨놓은 눈동자로 이쪽의 팔다리를 훑었을 거란 생각 때문에. 저 인간 체력이 어디까지 될까, 하며 조심스레 가늠하는 기색을 분명 엿보았다.

“우리 둘이?”

무심코 뱉은 말이 실례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뒤늦게나마 들었다. 권호영이 뭘 같이 하자고 제안한 게 처음이라서 내심 신기했던 모양이었다. 단여명은 턱을 살짝 내리곤 보다 작아진 목소리로 설명했다.

“아니, 내 말은… 너 학교 가야 되는데 아침에 일찍 일어나면 피곤할 것 같아서.”

“시간만 다르지 매일 하는 거라 괜찮아요.”

권호영은 개의치 않다는 목소리로 답했다. 단여명은 조금 의외라는 듯 눈을 살짝 키웠다.

“운동을 매일 해?”

“네.”

“밖에 나가서 뛰고 걷고…?”

“시간이 안 날 때만 그렇고, 거의 헬스장 가요.”

몰랐던 사실이다. 매일 부지런히 밖을 나다닌다 했더니. 그 이유 중 하나가 운동이었던 모양이다.

단여명은 그러냐며 고개를 주억이는 한편 이걸 어떻게 돌려서 거절할지 고민했다. 그에게는 미안하지만, 솔직히 그렇게 막 끌리지 않았다. 몸을 움직이는 행위는 옛적부터 취미가 없었다. 아니, 다른 운동을 즐겨 하긴 했다. 불건전한 쪽이라는 게 흠이라면 흠이었지만.

“내가 운동한 지 좀 돼서 거치적거릴 텐데….”

“제가 알아서 맞출게요. 첫날은 가볍게 걷기만 해요.”

첫날이라는 소리에 빨간색 별표가 쳐지는 기분이었다. …어째 말이 이상하지 않나? 왜 두 번째, 세 번째도 약속된 것처럼 들리지?

“음…….”

단여명은 눈동자를 굴려 소파 쪽을 바라보았다. 이쯤 되면 거절할 명분도 없었다. 아침에 퍼질러 자는 모습이나 외출을 마치고 돌아오는 모습을 그에게 수차례 보여줬다. 거기다 묵묵히 서 있는 권호영의 얼굴이 마치 ‘싫어요?’라고 묻는 것처럼 보였다.

만약 허물없이 지내는 사이였으면 조금이나마 솔직히 말했을 것이다. 그런데 친하다고 말하기 어려운, 그것도 자신보다 6살 어린 애가 처음으로 뭘 같이 하자고 건넨 제안이라 퇴짜를 놓기 어려웠다. 조금 전, 그에게 도움받은 것도 있었고.

“…그럼 그럴까?”

고민 끝에 단여명은 그 말을 수락했다. 별로 내키지 않았지만, 그가 공통사 삼고 싶은 것이 운동이라면 한 번쯤 어울려 주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 싶었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다가오지 말라는 분위기를 폴폴 풍겼던 녀석이다. 그런데 오늘 제게 안 좋은 일이 있었다고 나름 신경 써 주는 것 같기도 해 기특한 마음도 들었다.

“그럼 내일 6시예요.”

권호영은 그 말을 끝으로 걸음을 옮겼다. 상을 치우려는 듯 보여 단여명도 소매를 걷어붙이고 그의 옆에 섰다. 함께 접시를 옮기려는 제게 권호영은 무슨 말을 하려는 것처럼 빤히 쳐다보았지만, 끝내 입을 열지 않았다.

그렇게 그날은 소강상태에 접어들었다.

이튿날 아침 6시, 단여명은 제시간에 일어나는 것에 성공했다.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권호영이 방문을 두드렸기 때문에 조금 이르게 기상했다. 막상 눈을 떴을 때는 힘들었으나, 생각보다 피로감이 크진 않아 빠르게 이부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거실로 나가자 권호영은 나갈 준비를 끝낸 모습이었다. 단여명도 세수와 양치만 하고 겉옷에 양팔을 끼워 넣었다. 밖을 나서자마자 쌀쌀한 공기에 미약하게 남아 있던 잠기운이 달아났다.

말없이 걷기를 몇 분, 권호영은 ‘생각보다 잘 걷네요’라고 말을 붙였다. 그다음으로 나온 말은 ‘조금 뛰어 볼까요?’였고.

“3분만 버텨 봐요.”

그리고 그다음에 나온 말은 피부를 스치는 칼바람보다 더욱 차디차게 들렸다.

“잠깐… 호영아.”

단여명은 앞서가는 권호영을 불렀다. 처음 달리기를 시작했을 때보다 현저히 느려진 속도로 다리를 움직였다. 턱 끝까지 찬 숨에 하늘을 올려다보았지만, 그리 도움이 되진 않았다.

“이러다가, 형, 후우… 죽겠다.”

결국 걸음이 멈춰 섰다. 허리를 숙이고 밭은 숨을 고르자 권호영이 뒤를 돌아보았다. 서서히 가까워지는 발소리가 들렸다. 다리가 멈춘 것은 결코 제 의지가 아니라고 변명하고 싶었지만, 그럴 힘이 나지 않았다.

‘이게 맞나?’

이게 정말 맞는 선택이었는지 의구심이 솟구쳤다.

단여명은 쓰디쓴 후회를 삼켰다. 매번 주변 이들에게 체력이 약하다는 소리를 장난삼아 얘기했다. 하지만 내심 운동을 안 하는 몸치곤 체력이 나쁜 편은 아니라고 자부해 왔다.

아는 작가랑 등산했던 때, 그는 다음 날 몸살이 났지만, 자신은 멀쩡했었다. 그래서 그 작가 놈을 꽤나 놀려먹었는데, 얘랑 이렇게 차이가 날 줄은…….

“1분도 안 지났어요.”

육상 트랙의 바닥만 보이던 시야에 하얀 운동화가 들어왔다. 단여명은 지친 숨을 내쉬며 눈을 올렸다. 권호영은 뜀박질을 시작한 이후로 숨소리가 조금 흐트러진 것 말고는 믿기 힘들 정도로 멀쩡했다.

“헉, 아니….”

이젠 말도 제대로 안 나왔다. 마른침을 삼킨 단여명은 마저 입술을 뗐다.

“죽어. 죽겠어, 진짜로.”

절로 죽겠다는 소리가 나왔다. 형으로서 체면이 안 서는 건 둘째치고, 생사가 달린 문제였다.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쿵쾅거렸다.

“수명이 단축된 기분이야.”

“엄살 부리지 말고 얼른 가요.”

그 간절한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권호영은 단여명의 손목을 잡아 슬쩍 앞으로 잡아끌었다. 말투만 엄했지 행동은 그의 성격처럼 모질지 못했다.

단여명은 권호영에게 이끌려가다가 제 손목을 붙잡은 커다란 손에 눈길을 줬다.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상상도 못 했던 일이었다. 그의 시선을 느끼거나, 반대로 제가 보는 것마저 죄책감에 시달리곤 했으니까.

그러고 보니 어제는 제 쪽에서 그의 손목을 잡았다. 어제는 그런 걸 느낄 정신이 아니었고, 오늘도… 마찬가지의 상태인가.

사실을 고백하자면 갓 달리기를 시작했을 때 몹쓸 상상을 잠깐 했다. 탄탄한 다리가 땅을 박찰 때마다 커다란 양물이 어떻게 덜렁일지, 위치가 고정되어 있다면 속옷 안에 어느 방향으로 수납되어 있을지… 등등. 놀랍게도 핵폐기물의 상상력은 절망적이리만치 풍부했다.

“조금만 쉬다가…….”

하지만 나중엔 머리가 깨끗이 비워졌다. 아니, 육체적으로 통감하는 직접적인 생각만 남았다. 힘들다, 집에 가고 싶다, 이러다 진짜 죽겠는데…….

“얘기가 다르잖아…. 걷기만 한다며.”

“잘 쫓아오면서 왜 그런 소리예요. 원래 운동할 땐 숨이 조금 차야 돼요.”

“진짜 안 돼. 말도 잘 안 나온다니까?”

“잘하는데? 알아듣기 문제없어요.”

“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

말이 그렇다는 거지, 말이.

한국말을 하도 잘해서 잠깐씩 잊는다. 얘가 외국에서 살다 왔다는 걸. 단여명은 흉곽이 부풀도록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가 내쉬었다. 힘든 와중에 말이 통하지 않자 속이 답답해졌다.

“저 앞까지만 가요. 여기까지 온 게 아깝잖아요.”

“안 아쉬울 것 같아.”

단여명이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권호영은 아랑곳하지 않고 단여명의 등에 손을 올렸다.

“제가 아쉬워서 안 돼요.”

권호영이 등을 밀어 주는 대로 다리가 터덜터덜 움직였다. 단여명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넌지시 닿은 눈길이 운동에 대한 열정을 강요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하하…. 실성한 듯 웃은 단여명은 울며 겨자 먹기로 몸을 움직였다.

“너 체육관 관장님 같아…….”

친하지 않은 사이에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욕을 하며.

“그래도 뛰고 나니까 상쾌하지 않아요?”

야트막한 오름에 오른 권호영이 경치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아침 해를 받은 강 물결이 반짝이며 일렁였다. 하지만 단여명은 그를 살필 여력이 없었다.

“응, 정말… 헉, 그렇네…. 하아….”

상쾌하고 말고는 몸이 좀 진정된 뒤에야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단여명은 풀숲에 앉아 거친 숨을 씨근덕댔다. 올려다본 하늘이 핑글핑글 도는 것만 같아 딱 죽을 맛이었다.

겨우 심장 소리가 줄어들어 고개를 바로 하자 눈앞에 물병이 들이밀어졌다. 단여명은 권호영이 건넨 물병을 받았다. 뚜껑을 돌리는 일이 이렇게 힘겨운 일인 줄 난생처음 알았다. 시원한 물을 들이켜고 도로 물병을 넘기자 권호영도 마른 목을 축였다.

“여기서 자주 운동하나 봐. 동네 사람인 나보다 길을 잘 아네.”

“저기 출발점부터 끝나는 지점까지 30분이면 다 돌아요.”

권호영이 자신들이 걸어온 길을 손으로 가리켰다. 30분…. 똑같은 코스를 밟았음에도 오늘은 1시간이 걸렸다. 기가 막히는 소리에 헛웃음이 나왔다.

“운동선수가 꿈이야?”

농담 반 진담 반으로 건넨 얘기였다. 그러나 권호영은 그를 알아듣지 못한 낌새였다. 아직 이런 장난은 이른 모양이지. 난감한 웃음을 삼킨 단여명은 눈치껏 돌려서 말했다.

“운동하는 거 좋아하는 것 같아서.”

“좋아하기보단….”

권호영은 말끝을 흐리며 물병을 만지작거렸다. 남들보다 키가 한 뼘은 더 큰 권호영은 손도 유달리 컸다. 그의 손에 들어가 있으니 평범한 사이즈의 물병이 작아진 것처럼 보였다. 반듯한 손끝이 뚜껑의 옆면을 가만가만 매만졌다.

원래 손이 크면 끝이 뭉뚝하거나, 투박해 보이기 마련이다. 그런데 권호영의 손은 마디가 불거진 곳 없이 하나하나 잘 빠졌다. 얘는 손도 예쁘네. 무의식중 그런 생각이 스쳤다.

“몸을 움직이면 아무 생각도 안 나잖아요. 그래서 하는 것 같아요.”

플라스틱 물병이 구겨지며 와그작, 소리를 냈다. 그가 손아귀에 힘을 준 그대로 물병에 구김이 갔다.

“그게 좋아하는 거 아니야?”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단여명은 픽 웃음을 지었다.

“뭐…. 정말 아무 생각도 안 나긴 하네.”

어제 더러웠던 기분이 마치 꿈이었다는 듯.

하얀 뭉게구름 사이로 따뜻한 햇살이 내리비쳤다. 구슬땀을 식혀 주던 바람이 귓가를 스치고 나아가 층층이 내려온 머리칼을 흩트려 놓았다. 그에 머리카락 속에 가려져 있던 눈이 살며시 드러났다.

햇빛을 받은 눈동자는 맑은 고동색이었다. 권호영의 눈은 어딘지 모를 먼 곳에 닿아 있었다. 날렵한 콧대가 반듯한 옆선을 그렸다. 운동을 끝낸 뒤라 일자로 다물린 입술은 평소보다 짙은 혈색을 머금고 있었다.

‘…잘생겼을 것 같은데.’

머리만 정리하면 분위기가 확 살아날 얼굴이었다. 어쩐지 제가 다 아쉬워지는 기분에 입맛을 다신 단여명은 그에게 말을 붙였다.

“얼마나 했는데?”

그 말에 권호영이 이쪽으로 시선을 틀었다. 고개를 돌리자 옆으로 헝클어졌던 앞머리가 다시 눈 밑으로 쏟아졌다.

“운동 말이야. 얼마나 했냐고.”

“정확하진 않은데… 한 5년은 된 것 같아요.”

어쩐지. 하루 이틀 한다고 만들어질 몸이 아니었다. 매번 펑퍼짐한 옷만 입어서 태가 덜 나는 것뿐이지 그는 보기보다 탄탄한 체격이었다. 홀로 납득하고 있으니 권호영이 되레 질문했다.

“형은요?”

“나?”

“네. 학교 다닐 때 운동하는 시간 있었을 거 아니에요.”

권호영이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단여명은 나란히 강가 쪽을 향해 있는 운동화 두 켤레를 내려다보며 자신의 학창 시절을 되살렸다. 지난 시절을 자세히 회상하기도 전에 정해진 것처럼 대답이 흘러나갔다.

“난 앉아서 응원하는 거 좋아했어.”

다른 애들이 열심히 축구 할 때 벤치에 앉아서 아이스크림 까 먹는 애. 단여명은 그런 애들 중 하나였다.

“여전하셨네요.”

“여전했지.”

단여명은 피식 웃고는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권호영도 다른 말 없이 같은 방향을 응시했다.

두 사람은 풀밭에 나란히 앉아 한동안 떠밀려 가는 강물을 보았다. 간간이 산책하거나, 그들처럼 러닝하러 나온 사람들이 앞을 지나쳤다. 단여명은 팔을 느릿하게 뻗어 기지개를 켰다. 평온하고도 한적한 풍경에 기분이 나른해졌다.

‘이래서 운동하자고 한 건가.’

기분 전환했으면 좋겠어서? 김선오와 싸운 일로 제 마음이 상했을 거라고 생각해 그 딴에는 위로해 주는 걸지도 몰랐다.

‘그런데 위로라기엔 영….’

오늘 극한의 강도로 운동을 강요했던 권호영이 떠올랐다. 1분 남았어요. 조금만 더 가서 쉬어요. 중간에 쉬면 아무 소용없어요. 정 없는 목소리를 되새기니 생각이 약간 바뀌려고 했다.

‘…혹시 이상한 오해 중인 건 아니겠지?’

내가 맞고 다니는 줄 안다거나…. 그래서 가만 보기 딱해 체력을 증진해 주려는 목적으로 끌고 나온 거라거나.

단여명은 자세를 바꿔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았다. 무릎에 팔을 얹고 슬쩍 옆을 돌아보니 권호영은 여전히 다른 곳을 보는 중이었다.

아마 권호영은 제가 온화한 사람인 줄 알고 있을 테다. 지금껏 그에게 보여준 이미지가 그랬다. 그런 와중에 손목에 멍든 모습과 멱살을 잡히는 꼴을 보였으니 이상한 오해를 할 법도 했다.

보통 사람이 쉽게 떠올릴 만한 것으론 데이트 폭력이 있었다. 하지만 제가 말다툼을 벌였던 상대는 남자였으며 게이는 한국 사회에서 일상적으로 접하기는 어려운 존재였다.

그날, 권호영이 자신들의 대화를 들었는지는 여태 오리무중이었다. 하지만 만약 제가 남자를 만나는 걸 모른다고 해도 어떠한 피해를 당했다고 생각할 순 있었다.

김선오는 말없이 제집에 쳐들어온 적이 있었다. 그리고 눈치가 빠른 사람이라면 자신이 안절부절못하던 걸 느꼈을 테다. 일진과 빵셔틀. 대충 갖다 붙이자면 그런 이미지인가.

“어제 많이 놀랐지?”

목을 가다듬은 단여명은 권호영의 기색을 살피며 서두를 놓았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애가 하도 무뚝뚝하고 말수도 적어서 감정을 읽을 수가 없었다.

“별거 아닌 일이니까 마음에 담아두지 마. 나도 그렇게 신경 안 쓰니까.”

그래도 어느 쪽이든 애가 착해 보이긴 했다. 자신을 걱정하는 마음이 조금쯤 느껴지는 듯해 단여명은 농담 섞은 말을 던졌다.

“너 아니었으면 경찰서에서 조사받고 있었을걸.”

약간 웃을 만도 하건만 권호영은 어떤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무시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의 시선은 여전히 이쪽을 향해 있었으니까.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낌새기에 단여명은 그의 입이 열리길 기다렸다.

“어쩌다 그렇게 된 건지 물어봐도 돼요?”

잠깐의 침묵 뒤 권호영이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말을 꺼내기 전부터 조심스러워하는 기색을 느꼈던지라 직접적인 물음이 당황스럽진 않았다. 어제부터 쭉 염두에 뒀던 질문이기도 했고.

“나한테 감정 상한 게 있었나 봐.”

단여명은 자연스러운 미소를 꾸몄다. 상황이 그렇게 흐른 게 퍽 안타깝다는 웃음이었다.

“한두 살 먹은 어린애들도 아닌데, 같이 그러기도 뭐하고…. 일 크게 벌여 봤자 뭐가 좋겠어.”

“형이 잘못한 거예요?”

“아니라고는 못하지.”

좋게 돌려 말하자 권호영은 얼추 수긍하는 듯했다. 단여명은 대화를 이어 가려다가 잠시 한눈을 팔았다. 인근에서 빨빨거리며 돌아다니던 강아지가 가까이 다가왔기 때문이었다.

하얀 몰티즈는 두 사람이 앉은 자리를 맴돌며 킁킁 냄새를 맡았다. 그리고 단여명이 손을 뻗기도 전에 약 올리듯 멀리 달아났다. 날쌘 몸놀림을 눈으로 좇던 단여명은 입가에 희미한 웃음을 걸쳤다.

“어쨌든… 어제 일은 내가 대신 사과할게.”

꼬리를 흔들며 제 주인의 발치를 빙빙 돌던 강아지는 이젠 다른 사람의 곁을 얼쩡거리기 시작했다. 친화력 한번 좋다고 생각하며 단여명은 조곤조곤 얘기했다.

“걔랑 저번에 인사한 적 있지? 애가 가벼운 것 같아 보여도 욱하는 성격은 아닌데… 어젠 갑자기 그러더라고. 내가 말을 심하게 하기도 했고, 걔도 술 먹고 온 거라 멀쩡한 상태는 아니었을 거야. 나도 그런 모습은 처음 보는 거라서 대처가 늦었어.”

“전 괜찮아요. 어디 다친 것도 아니고.”

한동안 눈을 맞추던 권호영은 이내 멀리 시선을 던졌다. 자신과 같은 생각을 하는 중인지 그의 눈은 사람들 사이를 촐랑이며 뛰어다니는 강아지에게 가 있었다.

“형도 괜찮아 보이니까. …그럼 됐어요.”

조금 전보다 목소리를 죽인 권호영이 혼잣말하듯이 입술을 달싹였다.

…걱정했던 게 맞구나. 그 생각에 급격히 기분이 멋쩍어졌다. 이런 애를 가지고 지금껏 무슨 몹쓸 망상을 한 건지. 쓰디쓴 현타에 단여명은 남몰래 입 안쪽의 살을 깨물었다.

조금쯤 진솔한 얘기를 나눠서일까. 자신들을 감싼 공기가 약간 무거워진 것처럼 느껴졌다. 어쩌면 기분 탓일 수도 있다. 쑥스럽기도 하고, 조금 미안하기도 하고. 그래도 같이 사는 형이라고 선뜻 도움을 자처한 그에게 고맙기도 했다.

“다음 생엔 저 강아지로 태어날까 봐.”

단여명은 어물쩍 말을 돌려 분위기를 환기했다. 권호영과 말을 안 해도 어색하지 않았지만, 어째선지 지금은 대화가 끊기면 안 될 것 같은 느낌을 받아서였다.

“간식을 몇 개째 받아먹는 거야?”

농담조로 그리 말하니 옆에서 바람 빠지는 듯한 소리가 났다.

“…그러게요.”

가볍게 밀어낸 숨소리에 시선을 돌리니 권호영은 여느 때와 같은 낯이었다. 다만 긴 앞머리에 그늘져 보였던 낯엔 밝은 햇살이 내려앉아 있었고, 완고해 보이던 입매는 조금 느슨히 풀어져 있었다.

‘방금 웃은 것 같은데….’

한순간의 신기루처럼 사라진 그 웃음을 되돌릴 방법은 없었다. 은연중 아쉽다고 생각했나. 단여명은 그 생각에 답을 내리지 않고 눈길을 돌렸다.

그 뒤로는 실없는 얘기가 오갔다. 날씨가 좋다느니, 아침밥은 뭐가 좋겠다느니. 그런 대화를 주고받던 두 사람은 얼마 후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밥 얘기를 했더니 배가 고파졌다며 단여명이 운을 띄웠기 때문이었다.

왕왕거리며 짖던 강아지도 어느새 사라진 뒤였다.

***

“뭐야, 얘기가 왜 그렇게 돼?”

이야기를 들은 천수진은 미간을 찌푸렸다. 어떤 포인트에선지 모르겠지만,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기색을 여실히 풍겼다. 단여명은 빈 테킬라 잔을 손끝으로 만지다가 눈을 내렸다. 포크를 내려놓은 앞접시 위에 치즈가 조각조각 부서져 있었다.

“그게 끝이야?”

“음…. 운동 끝나고 집 들어가는 길에 같이 국밥 먹었어.”

“…….”

“요즘도 가끔 운동 가. 다른 사람이랑 같이하니까 할 만하더라.”

찡그려진 미간이 펴질 줄을 몰랐다. 단여명은 어이가 없다는 듯 웃으며 그녀에게 핀잔을 줬다.

“뭐야, 그 얼굴은. 그럼 대체 무슨 전개를 기대한 건데?”

“난 그 친구랑 싸우거나 할 줄 알았지.”

왜? 그런 눈으로 보자 천수진이 되레 왜 당연한 것을 묻느냐는 표정을 지었다.

“걔가 너희 얘기 들은 것 같다며. 걔랑 사정 털어놓고 그럴 사이는 아니라고 했잖아.”

“아…….”

“레퍼토리야 뻔하지, 뭐. 네 성격상 빙빙 돌려 말하다가 상대가 꼬투리 잡으면, 봐. 딱 이런 눈으로.”

천수진이 눈꼬리를 과장되게 위로 휘었다. 언뜻 부드러워 보이는 눈웃음은 비웃음의 끝자락에 걸쳐져 있었다.

“이 새끼는 뭘 그딴 걸 묻지….”

“야, 내가 언제.”

“대가리는 장식으로 달고 다니나….”

“그런 말은 누구한테도 한 기억이 없는데.”

얼굴을 이상하게 찡그렸는지 천수진이 밉살맞게 웃었다. 그 덕에 괴상한 눈웃음이 지워져 시야가 한결 편안해졌다.

“아무튼 그런 눈으로 살살 긁잖아. 그래서 이래저래 해서 싸움 날 줄?”

“넌 진짜…. 날 뭐로 생각하는 거야.”

단여명은 제가 말해놓고 실언했다는 것처럼 손을 내저었다. 엄청난 모함이 섞여 있었지만, 완전히 틀린 얘기는 아니었다. 저기서 태클을 걸어 봤자 저것과 비슷한 말을 늘어놓아 자신을 헐뜯을 게 뻔했다. 그럼 아니라고 부정하는 내 입만 아파지지.

그만 말하라는 양 억지로 술잔을 비우니 천수진이 짧은 웃음을 터트렸다. 진저리 치는 제 속내를 꿰뚫어 본 웃음소리였다.

“아무튼. 그럼 걔는 너 남자 만나는 거 모른다는 소리네?”

천수진이 치즈 한 덩이를 집어 먹으며 물었다. 단여명은 팔짱을 낀 채 의자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그건 나도 잘 모르겠어. 모르는 척해 주는 것 같기도 하고….”

말을 하는 도중 테이블 위에 올려두었던 핸드폰에 시선이 갔다. 무음 모드로 돌려놓은 핸드폰 액정에 빛이 들어와 있었다.

[집이에요?]

“…진짜 모르는 것 같기도 하고.”

단여명은 손을 뻗어 폰을 집어 들었다. 지금쯤이면 학교 도서관이려나. 그리 생각하며 화면에 손가락을 얹었다.

“누군데?”

“호영이.”

“많이 친해졌나 보다?”

“음… 전에 비해선?”

천수진이 눈빛이 의미심장하게 바뀌었다. 하지만 단여명은 답장을 보내느라 그를 눈치채지 못했다.

[아니 잠깐 친구 만나러]

“근데 왜 그렇게 신났어?”

키패드를 두드리는 도중 시선이 위로 향했다. 마주 본 천수진의 얼굴엔 의심이 그득그득 붙어 있었다.

“내가?”

단여명은 과한 농담을 들었다는 듯 피식 웃고는 마저 손가락을 놀렸다. 마지막 텍스트를 작성한 뒤 메시지 전송 버튼을 눌렀다.

[집 들어가는 시간 맞으면 같이 갈까?]

“그런 거 아니라니까. 조금 친해진 거 말곤 달라진 거 없어.”

천수진에게 차마 말 못 하지만, 권호영과 가까워져서 가장 좋은 점이란 쓸데없는 망상이 준 것이었다. 권호영을 만난 이후로 단여명은 지금껏 인생에 다시없을, 뼛속 깊은 자괴감에 시달렸다.

그런데 그와 점차 친해질수록 제 머릿속의 이미지가 한 떨기의 남성기에서 친한 동생으로 바뀌어갔다. 이전엔 매일 생각나던 게 요즘은 어쩌다 한 번 스치듯이 생각났다. 바람직한 징조였다.

[네]

“그냥… 애가 어려서 좀 귀엽기도 하고.”

답장이 온 핸드폰을 바라보던 단여명은 얼굴을 들었다. 취기에 발긋하게 물든 눈꼬리가 가느다란 붓으로 뺀 것처럼 길게 휘어졌다.

“나랑 다른 사람 알아가는 거. 재밌잖아.”

[여명아 선오 형이야]

[차단 풀고 얘기 좀 해 내가 실수했다는 거 인정하고 많이 반성하고 있어]

이젠 하다 하다 다른 번호로 연락질이네. 단여명은 다 타버린 담배를 바닥에 버렸다. 이건 누구 번호이려나. 그리 궁금하지 않은 생각을 잇다가 모르는 번호 역시도 차단했다.

“왔어?”

멀지 않은 곳에서 인기척이 느껴진다 했더니 역시나 권호영이었다. 단여명은 생글생글 웃으며 그를 반겼다. 다 늘어진 추리닝에 긴 앞머리가 정겹게 느껴지는 날이 올 줄이야. 그는 오늘도 참 삽살개 같은 모습이었다.

“술 마셨어요?”

“많이는 아니고 조금.”

권호영이 다니는 학교까지 걸어오는 길에 술기운이 많이 걷혔다. 아까까진 비몽사몽 했는데, 지금은 똑바로 걸을 정도는 되었다.

“넌 시험 기간도 아닌데 무슨 공부를 그렇게 열심히 해.”

“미리 해놓는 게 좋잖아요.”

“그렇긴 한데….”

학교 다닐 때 반에 한 명씩은 꼭 그런 애들이 있었다. 자신과 동떨어진 세계를 사는 것 같은 친구들. 그런 애들은 특유의 오라를 풍겼다. 그들이 지키려는 틀을 절대 깰 수 없는 분위기랄까.

“그래도 쉬엄쉬엄해.”

이젠 벚꽃이 다 진 가로수 길을 둘러보며 단여명이 말했다.

“바람도 쐬고, 가끔 이렇게 풀 냄새도 맡고.”

권호영은 이렇다 말이 없었다. 내심 풍경 사진 좋아하는 아저씨 같았나, 하고 스스로를 되돌아보고 있을 때였다.

“생각해 볼게요.”

고민한 시간치고는 간결한 대답이 나왔다. 기껏 생각한 말이 생각해 볼게요, 라니. 참 이상한 곳에서 솔직했다.

권호영이랑 있으면 가끔 이렇게 싱거운 웃음이 새곤 했다. 얘기할 기회가 없어서 지금껏 몰랐다. 그 나이대 남자애치고는 과묵한데, 속에 없는 소리는 또 잘 못한다는 것을. 가만 보고 있으면 대학교 때 스쳐 지나갔던 인연들도 이랬으려나, 싶어 옛날 생각도 났고.

“아니, 그냥.”

왜 웃느냐는 듯이 바라보기에 단여명은 고개를 저었다. 구태여 말할 거리는 아니라고 생각했다.

두 사람은 권호영이 매일 타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밤 11시에 가까워지는 시간이어서 좌석은 온통 텅 비어 있었다. 단여명은 버스 뒷문에서 가까운 2인용 좌석에 앉았다. 창가 쪽으로 붙어 앉자 권호영이 그 옆에 앉았다. 정차했던 버스가 둔한 엔진소리를 내며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버스가 흔들릴 때마다 서로의 어깨나 팔목이 살짝 부딪쳤다가 떨어졌다. 모든 신경이 괜히 그쪽으로 쏠리는 것 같아 단여명은 창가 쪽으로 슬쩍 몸을 붙였다. 전보다 나아지긴 했다만, 완전히 아무렇지 않은 건 또 아니었다.

“버스 타는 것도 괜찮네. 학생 때 생각나고.”

창밖으로 불이 꺼진 상점가의 풍경이 스쳤다. 고등학교 때 야자 끝내고 돌아가던 하굣길이 딱 이랬는데. 물끄러미 창 너머를 바라보며 중얼대니 옆에서 말소리가 울렸다.

“운전은 잘 안 해요?”

단여명은 눈길을 돌렸다. 거리가 좀 가까워졌다고, 긴 머리카락 속에 숨겨진 눈이 살짝 엿보였다.

저러면 상대방 얼굴이 보이긴 하려나. 다른 사람과 소통하는 걸 떠나서 앞이 잘 보이지 않아 불편할 것 같은데. 익숙해져서 거슬리지 않는 건지 권호영은 태연한 모습이었다.

“그건 왜?”

“며칠째 바닥에 떨어진 차 키가 그 자리 그대로 있더라고요.”

“…….”

“그래서 제가 TV 옆 선반에 올려놨어요.”

…그게 거기 있었구나. 권호영을 학교에 태워다 준 걸 마지막으로 기억에서 잊힌 차 키였다.

“그랬어?”

단여명은 머쓱하게 웃었다. 그때 이후로 찾은 적이 없어서 어디에 뒀는지조차 까먹고 살았다.

“집에만 있다 보니까 차 끌고 나갈 일이 없어서. 밖에 나가도 거의 술 먹고 들어오고.”

최근엔 술 약속이 아니면 김선오를 만났다. 그럼 그가 출근하는 김에 집까지 데려다줘서 자가용이 필요 없었다.

단여명은 무심결에 김선오를 떠올렸다가 얼른 머릿속에서 털어버렸다. 이러나저러나 결국 끝난 사이였다. 속으로 자책하든, 입 밖으로 욕을 씹든. 이전의 기억을 곱씹어 봤자 좋을 게 없었다.

“아, 여기서 내려야 되지?”

잠시 뒤 안내방송에서 내려야 하는 정류장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권호영이 하차 벨을 누르니 버스가 곧 멈춰 섰다. 익숙한 하차장과 익숙한 동네 길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여느 때와 같았다. 두 사람은 나란히 발맞춰 걸으며 시답잖은 얘기를 나눴다. 횡단보도를 건널 땐 잠시 대화가 끊기기도 했고, 일렬로 늘어선 가로등 밑을 지날 땐 언제 그랬냐는 듯 다시 설렁설렁 얘기가 이어졌다.

그렇게 특별할 것 없이 길을 걷던 도중이었다. 편의점의 간판이 환하게 빛을 발하는 모습이 문득 시야에 걸렸다.

“호영아.”

단여명이 걸음을 늦추며 부르니 권호영이 뒤를 돌아보았다.

“우리 아이스크림 먹을래?”

단여명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편의점을 보자 갑자기 달고 시원한 것이 당겼던 탓이었다.

“아이스크림이요?”

그를 미처 눈치채지 못했는지 권호영은 썩 내키지 않는다는 목소리였다. 지금 밤 11시인데…. 머리칼에 가려진 눈이 그런 말을 대신 내보였다. 그를 알았음에도 단여명은 의견을 굽히지 않았다.

“응, 아이스크림.”

안 친할 땐 몰랐는데, 건강에 있어서 은근 칼 같은 녀석이다. 운동을 매일 하는 건 물론, 그는 삼시 세끼도 꼬박꼬박 챙겼다. 늦은 시간엔 물 말고 어떤 먹을거리도 입에 대지 않았다.

“난 술만 먹으면 그렇게 아이스크림이 당기더라.”

단여명은 모르는 척 편의점 앞으로 걸어갔다.

“잘 기억해 둬. 한국 문화 같은 거니까. 아마 나 같은 사람 많을걸.”

자신을 버리고 먼저 집으로 돌아가도 상관없었지만, 권호영의 성격상 그리 모질게 행동하지 못할 것이다. 이제 그쯤은 눈에 보이듯 예측이 갔다.

냉동고의 케이스를 열자 시원한 냉기가 손끝을 감쌌다. 냉동고의 안을 뒤적거린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등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역시나. 단여명은 씩 미소 지었다.

“너도 먹을래?”

고개를 돌리니 자신을 뒤따라온 권호영이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채 서 있었다.

“…네.”

잠깐 뜸 들인 걸 모르는 체해 주며 단여명은 냉동고 안을 뒤적였다.

“무슨 맛?”

그리 물으니 권호영이 등 뒤로 더 붙어 섰다. 제 어깨너머로 보이는 물건을 고르는듯했다.

“형이랑 같은 거요.”

단여명은 고개를 끄덕이곤 하얀색 포장지에 감싸인 아이스크림을 2개 집었다. 결제를 마친 두 사람은 아이스크림을 나란히 손에 든 채 밖으로 나왔다. 아이스크림의 비닐을 벗겨 쓰레기통에 버린 단여명이 먼저 한 입 베어 물었다.

“아, 이거….”

슬쩍 눈썹을 구기자 제 것의 포장지를 벗기던 권호영이 눈길을 줬다.

“요거트 맛이야.”

“그게 왜요?”

“바닐라 맛인 줄 알고 산 건데.”

실망스러운 목소리로 말하니 권호영이 자신의 아이스크림을 한 입 베어 먹었다. 입술을 오물거리는 그는 자신과 음식 취향이 다른지 맛만 좋다는 얼굴이었다.

아이스크림의 단면에 잇자국을 남길 때마다 권호영의 입꼬리가 살짝 말렸다가 제자리를 찾았다. 그를 멀뚱히 쳐다보던 단여명은 대뜸 말을 던졌다.

“그런 의미로 내일 운동은 못 가겠는데.”

은근슬쩍 마음에 품어놨던 본심을 흘리자 권호영이 ‘얼마나 했다고요’라고 불퉁히 답했다. 뜬금없는 말이라고 트집 잡을 줄 알았는데, 의외롭게도 다른 쪽에 핀트를 맞춘 모습이다.

단여명은 입안에 퍼지는 새콤달콤한 맛을 느끼며 서운하다는 양 장난스럽게 웃었다. 장난 반 진담 반으로 던진 말이었는데, 상처만 남았다.

운동의 강도를 줄여 달라는 말에 권호영은 나흘에 한 번은 어떠냐고 넌지시 물었다. 내심 한 번으로 끝날 줄 알았던 단여명은 고민 끝에 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래도 첫날보다 많이 좋아졌어요. 이제 1분은 거뜬하잖아요.”

권호영은 특이한 면이 있었다. 같이 있다 보면 약간이라도 자기 얘기를 할 법한데, 그는 의식적으로 말을 아끼는 것 같았다. 그게 여전히 호기심을 자극한 점, 그리고 머릿속을 어지럽히던 욕망이 잠잠해진 것도 아침 운동에 나가는 이유에 한몫했다.

첫날엔 몰랐다. 그러나 꾸준히 체력을 소모하다 보니 딴생각에 사로잡히는 시간이 많이 줄었다. 아마 김선오에게 한 번 데이다시피 해 색다른 만남에 질린 이유도 있을 것이다.

“관장님 같아.”

무의식중 엉덩이 사이로 손이 내려간다는 것만 빼면, 나름 무탈한 일상의 한가운데였다.

“…저번부터 생각한 건데, 그거 안 좋은 뜻이죠.”

“설마. 자기 관리 하는 거 멋있다는 소린데.”

“목소리가 평소랑 다른데. 지금 좀 신났잖아요.”

“아니라니까. 나도 본받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어.”

의심쩍은 눈초리 앞에서도 단여명은 뻔뻔히 시치미를 뗐다. 집요하게 따라붙는 눈길은 약 올리듯 부러 회피해 버리며.

“네.”

핸드폰에 전화가 걸려 온 것은 집 앞에 거의 다다를 때쯤이었다. 권호영에게 ‘엄마’ 하고 입 모양을 보이니 그가 고개를 주억였다.

“아니요, 바쁘긴. 잠깐 친구 만났다가 이제 집 들어가는 길이에요.”

단여명은 핸드폰을 귀에 붙인 채 엘리베이터에 올라섰다. 권호영이 올라탄 것까지 확인하고, 닫힘 버튼을 눌렀다.

“적당히 마셨어요. 걱정 안 해도 될 만큼. …아니, 만나는 사람은 무슨. 요새 소재 고르기도 정신없다니까요.”

상대편의 말소리에 집중하던 단여명은 흘깃 옆을 돌아보았다.

“호영이? 옆에 있죠.”

제 이름이 나오니 권호영이 이쪽을 돌아봤다. 단여명은 작게 웃으며 ‘호영이도 잘 지내요’라고 말했다.

“…네?”

그리 마주 본 지 얼마나 됐을까. 웃는 모습 그대로 단여명은 설핏 얼굴을 굳혔다. 동그랗게 뜨인 눈은 당황을 여실히 내비쳤다. 마주치던 시선이 일순간 빗나갔다. 한쪽의 시선이 끊긴 이후에도 권호영은 잠자코 그를 지켜보았다.

“둘이 언제요? 아니, 번호는 또 어떻게 알고….”

“…….”

“…그래도 그렇지. 애 부담스러워해요.”

단여명은 통화를 이으며 현관에 들어섰다. 권호영은 그를 얌전히 뒤따랐다. 문이 닫히고 집 안에 불이 켜졌다. 단여명은 겉옷도 벗지 않고, 집 안을 맴돌며 통화에 집중했다.

“너 우리 엄마랑 전화한 적 있어?”

권호영이 제 방에 가방을 두고 나왔을 때 단여명은 소파 위에 앉아 있었다. 예상외의 소리를 들어 얼떨떨하다는 듯 단여명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상기되어 있었다. 권호영은 숨김없이 답했다.

“네.”

“언제?”

“2주 전쯤에요.”

“…….”

“좋은 말씀 많이 해 주셨어요.”

짐짓 걱정하는 것처럼 보여 권호영은 괜한 말을 얹었다. 그에 단여명은 ‘음…….’ 하며 의미심장한 웃음을 띠었다.

“못 미더운데.”

“네?”

“아니, 호영이 네가 못 미덥다는 게 아니라 우리 엄마가.”

무슨 오해라도 할까, 단여명이 변명하듯 말했다. 엄마가 무슨 말을 했을지 뻔히 보이는데, 나름 걱정하지 말라고 위해 주는 게 기특했다. 이 주 전쯤이면 말도 잘 안 했을 때인데. 애가 얼마나 낯을 가렸을까, 하고 딱한 마음이 들기도 했고.

“형이랑 형네 어머님이랑 비슷한 것 같아요.”

“네 앞이라서 그렇지 그거 다 연기야. 얼마나 계획적인 여사님인데. 난 너 온다는 소리도 일주일 전에 들었다니까?”

말도 말라며 단여명은 고개를 내저었다.

“나도 너희 어머님한테 언제 한번 연락드려야 하는 거 아니야?”

실없는 소리를 뱉으며 단여명은 그에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권호영의 손엔 다 먹은 아이스크림 막대기가 들려 있었다. 제 것을 버릴 겸 그의 것까지 버려 주겠다는 뜻이었다.

그런데 권호영은 그 손을 멀거니 쳐다보기만 했다. 단여명은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호영아?”

어째선지 권호영은 조금 이상한 얼굴이었다. 겉보기엔 달라진 게 없어 보였지만, 살갗을 통해 미세한 전조를 느낄 수 있었다. 어쩐지 그의 기분이 묘하게 가라앉은 것 같다고.

뭐랄까…. 마치 외출했는데, 집 안에 두고 온 것을 떠올린 기색이었다. 가스 불을 켜두고 나왔다거나, 현관문 단속을 하지 않았다거나. 적절한 예시가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아주 위급한 문제를 갑작스레 인식한 사람처럼 정체된 분위기를 풍겼다.

“…한 번도 연락한 적 없어요?”

잠깐의 침묵 뒤 권호영이 입을 열었다.

“둘이 아는 사이인 줄 알았는데.”

울림이 깊은 목소리는 끝이 살짝 갈라져 있었다. 단여명은 아닌 척 그의 눈치를 살폈다. …방금 분위기가 가라앉았던 것 같은데. 물증은 없고 심증만 있어 뭐라 묻기도 그랬다.

“그랬으면 더 좋았겠지만… 아무래도 알고 지낼 방법이 없지? 난 너도 한국으로 오게 돼서 처음 알게 된 건데.”

“…….”

“왜? 지금이라도 연락드릴까? 지금 시간이면 그쪽은 낮일 텐데.”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지만, 단여명은 내색하지 않았다. 부러 태연하게 말하자 권호영이 턱을 살짝 아래로 당겼다. 볏짚처럼 내려온 머리칼 사이로 시선이 마주친 것이 느껴졌다.

“…아니요, 그냥.”

“…….”

“제가 연락해서 형도 한 줄 알았어요.”

권호영은 그제야 몸을 느릿하게 움직였다. 조금 거리를 좁히는가 싶더니 그는 앞에 내밀어진 손을 지나쳤다.

“…내가 버려 준다니까.”

잠깐 스치듯이 닿은 손이 차가웠다. 단여명은 그의 손이 닿았던 손가락을 슬그머니 움츠렸다. 그사이 권호영은 단여명이 먹은 아이스크림 막대를 가져가 제 것과 함께 쓰레기통에 버렸다. 단여명이 처음 생각했던 것과 지극히 반대된 그림이었다.

“제가 더 가까워서요.”

단여명을 눈으로 슥 훑은 권호영이 곧바로 등을 돌렸다.

“그럼 전 이만 들어가 볼게요.”

“아, 그래. 피곤하겠다.”

권호영은 이만 들어가 보겠다고 말해놓고 걸음을 떼지 않았다. 속을 짐작할 수 없는 눈으로 이쪽을 물끄러미 바라보기만 할 뿐. 뭐라 말해야 될 것 같은 기분에 단여명은 괜한 인사말을 더했다.

“내일 학교 가야 되잖아. 푹 쉬어.”

습관적인 미소를 보이며 그리 말하니 그제야 권호영은 등을 돌렸다.

“네. 형도 씻고 주무세요.”

한동안 머물러 있던 시선이 떨어졌다. 곧 손님방의 문이 닫히고, 커다란 뒷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거실에 혼자 남은 단여명은 서서히 웃음기를 지웠다. 권호영이 제 방으로 돌아갔으니 자신도 거실에 남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그대로 시선을 거두려던 단여명은 괜스러운 마음에 닫힌 문에 재차 눈길을 줬다.

‘…내가 무슨 말실수라도 했나?’

방금 전의 대화를 되돌려 봤지만, 특별히 걸리는 게 없었다. 그의 어머니와 연락하지 않았다는 이유는 아닌 것 같던데.

찜찜한 기분에 뒷목을 쓸다가 뒷머리를 짧게 만지작거렸다. 죄 없는 문을 아무리 쳐다봐 봤자 답이 나올 리 없었다. 다시 가서 방문을 두드려 볼까, 생각하던 단여명은 이어 단념했다.

‘기분 탓일 수도 있고.’

피곤해서 갑자기 기분이 안 좋아진 걸지도 모른다. 내일도 컨디션이 나빠 보이면 그때 이유를 물어보든 하면 되겠지. 어쨌거나 지금은 서로 다른 내일을 준비하기 위해 꿈나라로 떠날 시간이었다.

단여명은 그쯤 겉옷을 벗고 욕실로 향했다. 따뜻한 물을 맞으니 말끔히 가셨던 술기운이 다시 얼얼하게 올랐다. 단여명은 금세 알딸딸해진 정신을 느끼며 보송보송한 침구에 얼굴을 묻었다.

잠자리에서 눈을 감는 것과 동시에 찜찜했던 마음은 수마에 깨끗이 지워졌다.

***

‘이렇게 살면 놀고먹는 베짱이랑 다를 게 뭔가.’

단여명이 요새 자주 하는 생각이었다. 연애도 하지 않고 섹스도 하지 않는 삶이란 건강한 정신 상태를 유지할지언정, 다분히 무료했다.

매일 다른 번호로 연락을 시도하던 김선오는 번번이 차단이 박히니 포기한 것 같았다. 그를 대신할 사람을 찾는 것도 딱히 끌리지 않았다. 가끔 연애 초의 설렘이 그립기도 했지만, 귀찮은 수고를 들일 만큼 연애가 고프진 않았다.

매번 완고를 넘기면 사람을 끊이지 않고 들였다. 그 탓에 스스로가 이 권태감을 극복할 방법을 찾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렇다면 일에 집중하는 편이 좋을 듯한데. 기가 막힌 소재는 주로 그렇듯 떠오르지 않는 상태였다.

그래서 단여명은 요새 평이 괜찮다 싶은 작품을 긁어모으듯이 봤다. 언제는 드라마가 될 때도 있었고, 서점에서 한가득 책을 사다 읽기도 했다. 그럼 때마침 집에 들어온 권호영과 사이좋게 그것들을 감상했다.

확실히 조금 가까워진 뒤부터 서로의 일상에 부쩍 발을 들인 요즘이다. 권호영이 재학 중인 학과를 뒤늦게 알게 됐을 땐 둘 다 멋쩍은 표정을 보였다. 그가 요리를 그냥 잘하는 게 아니라 아주 잘하는 편이란 것도 알게 되었다.

권호영의 태도도 훨씬 허물없어졌다. 몇 주 전까지만 해도 새벽에 일어나지 못하면 두고 나가더니만, 지금은 손을 끌어서라도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일찍 죽고 싶으냐는 협박은 없었으나, 그는 ‘얼른 씻어요’라고 말하며 욕실에 몰아넣었다. 그럼 단여명은 별수 없이 얼굴에 물을 끼얹었다. 한가롭지만 바쁜 나날의 연속이었다.

“형.”

어깨에서 타인의 온기가 느껴졌다. 깜깜했던 어둠이 걷히고, 시야에 어른거리는 빛줄기가 번졌다. 감긴 눈꺼풀을 찬찬히 들자 허벅지 위에 펼쳐둔 책이 보였다.

“왜 이런 자세로 졸고 있어요.”

“아…….”

“잘 거면 들어가서 편하게 자요.”

단여명은 부스스 고개를 들었다. 자신도 모르게 깜빡 졸았나 보다. 고개를 푹 수그린 채 얼마나 잔 건지 뒷목이 다 뻐근했다.

“아니… 일어나려고 했어.”

요즘 왜 이렇게 잠이 오지…. 단여명은 입을 벌려 커다랗게 하품했다. 원래 잠을 얕게 자는 편이라 집에 있으면 잠깐씩 눈을 붙이곤 했다. 그런데 이처럼 시도 때도 없는 졸음을 느낀 건 오랜만이었다. 책을 끝까지 읽는다고 매일 취침 시간을 바꾼 여파가 오늘에서야 몰아친 모양이다.

“어디 나가?”

시선을 들자 어느새 외출 준비를 마친 권호영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다른 짐이 없는 것으로 보아 친구를 만나러 가는 듯 보였다.

“네. 오늘 늦게 들어올 것 같아요.”

“술 약속인가 보네.”

하긴, 살면서 간을 가장 혹사할 때가 대학에 갓 입학한 때였다. 청춘이네. 이 나이쯤 되면 죽어라 술을 퍼마신 다음 날엔 침대에서 요양해야 했다.

“그럼 다녀올게요.”

“응, 잘 다녀와.”

단여명은 문밖을 나서는 그에게 설렁설렁 손을 흔들어줬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또.’

침침한 시야를 바로잡자 아까와 같은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단여명은 허벅지 위에 올려둔 책을 아예 옆으로 치워버렸다.

붉게 물들었던 하늘은 어느새 어둑하게 바뀌어 있었다. 권호영이 집 밖에 나가는 모습을 보고 잠깐 눈만 감고 있으려고 했는데, 그새 또 깜빡 잠들어 버린 모양이다.

소재를 발굴해내겠다는 명분으로 즐기는 백수의 삶이란 이런 점이 좋았다. 자고 싶을 때 자고, 먹고 싶을 때 먹고, 뒹굴고 싶을 때 뒹굴어도 된다. 눈을 뜨자마자 ‘지금부터 어떻게 시간을 죽이나’ 하고 머리를 굴려야 하는 게 가장 심각한 고민거리였다. 직장을 가진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부러워할 삶이었다.

‘그래, 언제 또 이런 여유가 생긴다고.’

새 작품에 들어갈 때면 방에 틀어박혀 광합성 할 시간도 나지 않는다. 지금은 심심한 기분을 느낄 새라도 있지. 나중엔 이 시간을 그리워할 여유 없이 바빠질 것이다.

몸을 늘어트린 채 단여명은 손으로 옆을 더듬거렸다. 시간을 확인하고자 핸드폰을 집어 든 순간 화면에 부재중 알림이 뜬 것이 눈에 들어왔다. 바로 10분 전에 걸려 온 전화였다.

[호영이 부재중 1통]

…얘가 웬일로 전화를 다 했지? 애초에 같이 사는 사이니 전화상 할 말이 없기도 했고, 떨어져 있더라도 메신저로 소통하곤 했기에 그와 전화 통화한 적이 없었다.

단여명은 곧바로 다시 전화를 걸었다. 신호음이 연달아 울려도 상대는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이어 ‘고객이 전화를 받지 않아…’ 하는 안내 음성이 흘러나왔다. 술자리가 시끄러워서 벨이 울리는 걸 모르나. 부재중을 남겨 놨으니 아마 그것을 보면 다시 전화할 것이다.

단여명은 졸린 눈을 비비며 비척비척 몸을 일으켰다. 오래 자고 일어났더니 목이 말랐다. 정수기에 컵을 받아놓고 그 앞에 서서 끊어질 것 같이 아릿한 뒷목을 주물렀다.

물이 한가득 채워진 컵을 들어 입에 갖다 대려는 순간이었다. 반대 손에 쥐고 있던 핸드폰에서 진동이 왔다.

“응, 호영아.”

생각보다 일찍 휴대폰을 확인했다고 생각하며 단여명은 전화를 받았다. 마른침을 넘겨 잠긴 목을 가다듬고는 말을 이었다.

“형이 잠들어서 폰을 지금 봤네.”

-그, 안녕하세요.

아무 생각 없이 물컵에 입술을 붙이려던 찰나 단여명은 멈칫 굳었다. 고막을 선명히 울리는 목소리는 자신이 알고 있던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

단여명은 핸드폰을 얼굴에서 떨어트렸다. 화면을 확인하니 한 치의 오타 없이 ‘호영이’라는 이름이 박혀 있었다.

…번호는 맞는 것 같은데. 잠기운을 떨쳐내지 못한 머리가 둔중하게 굴러갔다. 혹시 술 먹고 길거리에 폰을 흘렸나? 그래서 누군가 주워 준 걸지도 몰랐다. 취해서 옷도 훌렁훌렁 벗더니 이젠 핸드폰까지 흘리고 다니네. 그와 비슷한 생각을 하며 목소리를 내려던 찰나였다.

-막 잠에서 깨신 와중에 죄송하지만… 호영이 친구입니다.

……친구?

단여명은 물컵을 도로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어쩐지 느낌이 좋지 않았다.

-호영이가 지금 많이 취해서요. 혼자 가기 어려울 것 같은데…. 같이 사는 형님이 있다고 들어서, 네. 늦은 시간에 실례를 무릅쓰고, 이렇게 연락드립니다.

전화를 건 본인도 취했는지 두서가 없었다. 최대한 예의를 차린다고 노력한 것 같았으나, 목소리의 높낮이가 불균형했다.

“아아… 네. 같이 사는 형 맞습니다.”

전화기 너머로 시끌벅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근처에서 누군가가 주정을 부리는지 왁왁하며 귀가 아프도록 고함을 내질렀다.

“일단…… 거기가 어딘지 알 수 있을까요?”

하여튼, 애어른처럼 굴어도 애는 애지.

한숨을 삼킨 단여명은 옷을 갈아입으러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제발 내가 갈 때까지 옷만 벗어 던지지 마라, 하고 생각하면서.

금요일 밤의 대학가는 활기가 넘쳤다. 가지각색의 간판들이 번쩍이며 빛났고, 저마다 일행이 있는 사람들은 웃음을 띤 채 서로의 곁을 지났다.

주차할 곳이 없어서 인근을 한 바퀴 돈 단여명은 갓길에 차를 세웠다. 권호영의 친구가 말해 준 포차 앞은 입구부터 사람들로 북적였다. 담배를 피우는 무리가 포진하듯 가게 앞을 둘러싸고 있었다.

뿌연 연기 사이를 가로지른 단여명은 가게의 문을 밀고 들어갔다. 밖에서 보았던 것보다 가게의 규모가 쾌 컸다. 칸막이를 세워 자리를 나누어놓은 테이블엔 저마다 술잔을 부딪치는 사람들이 앉아 목청 높여 얘기하고 있었다.

시끄러운 노랫소리가 머리를 둔중하게 울렸다. 단여명은 미간을 살짝 찌푸린 채 자리를 빙 둘러보았다. 입구에서 더 먼 자리에 앉은 건지 제가 찾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단여명은 뒷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아무래도 전화를 걸어 어디에 있는지 확인하는 쪽이 빠를 듯했다. 전화번호부의 목록을 뒤지느라 잠깐 앞을 살피지 못한 찰나였다. 묵직한 무언가가 어깨를 툭 치고 지나갔다. 곁을 지나던 사람과 동선이 꼬인 모양이었다.

“아, 죄송…….”

스치듯 부딪힌 것이었기에 아픔은 없었다. 단여명은 취객이려니 생각하고 넘겼다. 옆으로 든 손은 사과의 뜻을 전했으나, 시선은 여전히 아래에 둔 채였다. 그렇게 옆 사람을 그대로 지나치려는 때였다.

“……?”

누군지 모를 사람이 덥석 손목을 붙들었다. 강하지 않은 힘이었으나, 앞서가려던 몸을 잡아 세우기엔 충분한 세기였다.

짧은 순간 불쾌감이 확 올랐다. 이게 무슨 짓이지. 술에 절어 제가 아는 사람인 줄 착각한 건가? 눈썹을 찌푸려 미미한 불쾌감을 내색한 순간이었다.

“형.”

시끄러운 음악 사이로 낮은 목소리가 선명히 울렸다. 특유의 저음은 매일같이 들었던 목소리였다. 단여명은 휙 소리가 나게 뒤를 돌아보았다.

“어디를….”

방황하던 눈이 정착한 곳은 똑바르게 부딪치는 상대의 눈이었다. 맑은 고동빛의 눈동자가 한 치의 어긋남 없이 이쪽을 응시하고 있었다.

“…여긴 무슨 일이에요?”

놀란 마음은 수면에 일은 파문처럼 점차 커다랗게 번져 갔다.

“어…….”

단여명은 입술을 살짝 벌렸다. 한국인이라기엔 묘하게 이국적인 남자였다. 조각칼로 거침없이 깎아낸 듯 뚜렷한 이목구비에 순간적으로 압도되는 느낌을 받았다. 짙은 눈썹은 털 한 올 한 올이 섬세하게 빠져 있었다. 옅게 속 쌍꺼풀진 눈이 두어 번 깜빡였다. 남자가 눈을 감았다가 뜰 때마다 기다란 속눈썹의 그림자가 매끈한 뺨에 어룽졌다.

헝클인 듯 자연스럽게 넘긴 머리가 그의 오묘한 분위기를 한층 더해 줬다. 단여명은 그를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방금까지 시끄럽다고 생각했던 노랫소리가 물속에 잠긴 것처럼 먹먹하게 들렸다. 현실감각이 뒤떨어지는 외모는 실로 오랜만에 접해본다.

‘잘생겼을 줄은 알았는데….’

솔직히 이 정도까지인 줄 몰랐다. 적잖이 놀라서 감탄사가 어물쩍 흘러나왔다. 목소리와 몸에 걸친 옷은 제가 알던 사람이 맞는데, 마치 모르는 사람과 처음 대화를 나누는 기분이었다.

이마와 눈을 드러냈다고 인상이 저렇게까지 바뀔 일인가? 당황스러운 게 한둘이 아니었다. 갖가지의 물음표가 머릿속에 빼곡히 차올랐다. 그래서 가만히 있는 중인데도 몸을 허둥지둥 움직이는 것처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옛날 만화 속에 자주 등장했던 클리셰 중 그런 장면이 있다. 안경을 쓰고 머리를 덥수룩하게 기른 주인공이 스타일에 변화를 주변 사람이 그를 알아보지 못하는 것. 단여명은 예나 지금이나 그것이 과장된 부분이라 생각했고.

“아… 맞구나.”

실제로 겪어 보고 난 뒤에야 그를 완벽히 납득했다.

“…머리를 넘겨서 못 알아봤어.”

많이 취해서 혼자 집에 가기 힘들 것 같다던 권호영은 버젓이 제 발로 걸어 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이곳에서 단여명을 마주친, 굉장한 우연에 대해 당황한 얼굴이었고. 느낌상 그의 친구가 제게 연락을 넣은 줄 모르는 눈치였다.

“아, 집에 있는데 전화가…….”

전후 사정을 모르면 충분히 당황할 만도 했다. 단여명은 사정을 설명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가 천천히 말을 늦췄다. 자신의 얼굴을 뚫을 듯이 관찰하는 상대의 시선은 여전히 인식하지 못한 채로.

“…잠깐, 너 얼굴이 왜 그래?”

단여명은 설핏 얼굴을 굳혔다. 조화로운 외모에 감탄하느라 미처 살피지 못한 것이 지금에서야 눈에 들어왔다.

“누구랑 싸웠어?”

도톰한 입술 옆에 길게 쓸린 상처가 보였다. 만났을 때부터 얼굴빛이 좀 발긋하다 싶었는데, 이제 보니 취기 때문이 아니었다. 한쪽 광대와 눈썹 뼈 부근이 유독 불그스름했다. 아무리 봐도 누구한테 얻어터진 모양새였다.

“아오, 권호영! 이 새끼 또 어디 갔어?”

그쯤 멀지 않은 곳에서 커다란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단여명은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주시했다. 까만 캡 모자를 쓴 남자가 씩씩대며 이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엇, 안녕하세요. 형님! 항상 신세 지고 있습니다!”

제법 합리적이었던 의심은 빠르게 사그라졌다. 남자는 단여명을 본 즉시 쓰고 있던 모자를 벗으며 고개를 숙였다. 저리 살갑게 맞아 주는 것을 보아하니 권호영과 자신이 무슨 사이인지 알고 있는 듯했다. 전화를 건 사람도 아마 저쪽인 듯했고.

“아.”

종종걸음으로 다가오던 남자는 이내 단여명을 보고 멈칫했다. 휘둥그레 뜨인 눈은 누가 봐도 놀란 사람의 얼굴이었다.

‘…아.’

그와 동시에 단여명도 남자와 똑같은 감탄사를 속으로 삼켰다.

‘저 얼굴…….’

어디서 봤나 했더니. 친한 사장님이 운영하는 어덜트 샵의 직원이었다.

“…….”

“…….”

이거 상황이 좀 이상한데. 자신의 성생활을 알고 있는 사람이 권호영의 친구일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단여명은 곁눈으로 옆을 살폈다. 권호영은 어물쩍대는 남자를 의심스럽게 보고 있었다.

남자는 여전히 어색한 미소만 지었다. 가만 지켜보고 있자니 점점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무슨 의도로 저렇게 웃으며 자신들을 번갈아 보는 건지 모르겠다. 숨길 거면 숨기고, 대충 둘러댈 거면 빨리 대답할 것이지.

안 그래도 시끄러운 음악 소리가 거슬려 죽겠는 마당이다. 권호영에게 무슨 일이 있었냐고 묻고 싶은데, 갑작스러운 남자의 등장에 대화도 끊겼다. 빨리 상황을 정리하고 권호영을 데리고 나가고 싶었다. 그런데 남자는 멍청한 웃음을 지은 채 시간만 끌었다.

“둘이 아는 사이예요?”

권호영이 귀신같이 물었다. 저러다 꼬리가 잡힐 줄 알았지. 남자는 보는 사람이 다 민망할 만큼 표정 관리에 형편없었다.

“어쩌다 보니….”

“어쩌다 보니?”

남자가 우물쭈물 답하니 권호영이 눈썹 사이에 주름을 잡았다. 확실히 얼굴이 드러나니 표정 변화가 세세히 보였다. 단여명은 그를 새삼스레 바라보았다. 그러다 반듯한 눈썹 뼈 위로 눈길이 옮겨갔다. 내일이면 그 부근에 검푸른 멍이 들겠다 싶을 만큼 땡땡 부어 있었다.

“나랑 저번에 인사한 적 있어. 내가 아는 분이랑 친분이 있어서.”

단여명은 상황을 빠르게 정리하고자 목소리를 높였다. 이래저래 일이 꼬였지만, 우선 권호영에게 사정을 듣는 것이 먼저였다. 빨리 인사를 마치고 그와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었다.

“호영이랑도 아는 사이인 줄 몰랐네요. 여기서 이렇게 만날 줄은…….”

정말 몰랐다고. 그리 말을 끝내려고 했다. 하나, 그걸 단칼에 가로막듯 다른 이의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오빠, 그 새끼 튀었대요!”

가만히 서 있던 남자의 몸이 돌연 앞으로 기울었다. 그의 등을 밀치고 앞으로 튀어나온 사람은 조그만 여자애였다. 하나를 넘기니 또 하나가 튀어나오네. 단여명은 짜증을 숨기고 판에 박은 듯한 미소를 띠었다.

“호영이 얼굴을 곤죽으로 만들어 놓고…!”

열정적으로 말하던 여자애는 곧 이쪽을 보고 숙연해졌다. 초면인 자신의 앞에서 과장된 행동을 보인 게 부끄러운 듯했다.

“…이분은 누구셔?”

“호영이랑 같이 사는 분이래. 인사드려.”

그러니 여자애가 ‘아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흘깃대는 눈빛엔 흥미가 섞여 있었다. 어쩌면 이성으로서의 호감도.

“얘기 많이 들었어요. 단여명이라고 합니다.”

가볍게 고개를 숙여 인사하자 여자애 또한 서둘러 꾸벅했다. ‘무슨 얘기요?’라는 표정을 짓고 있을 게 훤한 권호영에겐 굳이 시선을 주지 않았다.

“네, 저는 민들레라고…….”

해요. 뒷말은 주변 소리에 묻혀 조그마하게 들렸다. 초면에 낯을 많이 가리는 성격인지 동그란 눈동자가 바삐 굴러갔다.

“그건 그렇고.”

단여명은 형식적인 미소를 유지한 채 세 사람을 둘러보았다. 한 명은 여전히 부끄러워하며 어쩔 줄 몰라 하는 중이었다. 남은 한 명은 경직된 얼굴로 제 목소리를 경청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남은 사람은 하나였다.

“튀었다는 그 새끼가 누군지 저도 알 수 있을까요?”

단여명은 권호영을 향해 빙그레 웃었다. 부기로 울긋불긋해진 얼굴은 이중적으로 화려해 오래도록 눈길을 사로잡았다.

“그럼 저희는 이만 가 보겠습니다.”

얼추 얘기가 정리된 것은 그로부터 20분 뒤였다. 단여명은 권호영을 데리고 가게 옆 골목을 빠져나왔다.

“아, 재윤 씨.”

이름을 부르자 남자가 슬쩍 얼굴을 들었다. 그동안 권호영과 제법 애틋한 사이가 됐는지 아직도 불신이 섞인 눈빛이었다. 저놈을 권호영 옆에 둬도 되나, 하고 못내 가늠하는 눈초리.

“이렇게 만나게 된 것도 인연인데, 나중에 밥 한 끼 해요. 오늘 고맙다는 의미로 제가 살 테니까.”

단여명은 윤재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그의 어깨를 가볍게 주무르며 눈을 맞췄다.

“이렇게 넷이 다시 봐도 좋고.”

그러니 그동안 입단속 잘하는 소리였다. 윤재윤이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단여명은 먼지를 털어 주듯 그의 어깨를 두드린 후 마저 등을 돌렸다.

민들레와 윤재윤과 헤어진 두 사람은 곧 발맞춰 걷기 시작했다. 단여명이 약간 앞장서 걸었고, 권호영은 그를 말없이 뒤따랐다. 길거리를 다니는 사람들은 저들끼리 즐겁게 대화를 나눴다. 그와 반면에 두 사람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한 채 앞만 보고 걸었다.

“…….”

“…….”

달칵, 차 문이 닫혔다. 좁은 공간에 둘만 남겨지자 숨 막히는 분위기가 확실히 부각됐다. 단여명은 소리 없는 한숨을 뱉었다. 권호영이 안전벨트를 당기는 모습을 확인한 후 차에 시동을 걸었다.

‘…어색한가?’

아니, 어색하기보단 무거운 쪽인가….

이 분위기는 아마 무겁다고 봐야지 맞을 것이다. 권호영도 적막한 공기를 느끼고 있을 것이다. 말은 튼 이후로 둘 다 이 정도로 대화를 안 한 적이 없었으니까.

가라앉은 분위기를 느꼈지만, 단여명은 그를 따라 침묵을 지켰다.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을 권호영의 기분이 웬만큼 짐작됐기에. 누군가와 쌈박질을 벌이고 온 뒤였다. 분명 기분이 최저점을 찍고 있을 텐데. 괜히 건드려서 좋을 게 없었다.

사실 단여명의 기분도 그리 좋지 않은 상태였다. 일이 한꺼번에 휘몰아쳐 아직도 정신이 얼떨떨했다. 권호영의 맨얼굴을 처음 보게 된 건 놀랄 일도 아니었다.

그가 다쳤다는 사실에 화나는 것과 동시에 걱정됐다. 제게 농담하는 것도 아직 조심스러워하는 애인데. 그런 순한 애한테 누가 손찌검했나 싶어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그 와중에 어덜트 샵의 직원이 권호영의 친구란 걸 알게 됐다. 그래서 권호영에게 온전히 신경을 쓸 수가 없는 것마저 짜증이 났다. 그에게 꼬치꼬치 캐묻고 싶은 와중에 다른 사람을 상대해야 하니 짜증이 날 수밖에 없었다.

“…괜찮아?”

한동안 지속됐던 침묵은 예상치 못한 순간에 깨졌다. 급브레이크가 걸린 차가 덜컹거리고, 순간적으로 몸이 앞으로 확 쏠렸다. 깜빡이를 켜지 않은 앞차가 갑작스레 끼어들기를 시도했기 때문이었다.

앞차는 뒤의 사정은 나 몰라라 하고 유유히 멀어졌다. 험한 말을 눈으로 대신한 단여명은 옆을 돌아보았다.

“…괜찮아요.”

아래에서 위로 들린 눈길이 조심스레 이쪽을 살폈다. 어둠 속에서 은은히 반짝이는 눈동자와 시선이 얽혔다.

“좀 놀라긴 했는데….”

일상처럼 마주쳤던 눈이다.

“다행이다.”

…그런데 어째서 지금은 묘한 긴장감을 느끼는 것인지.

“내가 놀라서 브레이크를 세게 밟았어.”

정말 모든 것이 짜증이 안 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쓸데없이 잘생겨서….’

단여명은 혀끝을 잘근 깨물었다. 남동생같이 생각하기로 한 애한테, 그것도 속 편히 그의 얼굴에 현혹될 상황이 아닌데도, 무의식중 눈길이 따라붙었다. 지금 그럴 때냐며 속으로 자책해 봐도 곁눈으로 보이는 옆태에 신경이 쏠렸다.

말없이 눈이 부딪치는 시간이 길어지자 단여명은 그제야 자신들이 취한 자세를 인식했다. 자신은 권호영의 가슴팍을 가로막은 상태였고, 그는 자신의 어깨를 단단히 붙잡은 채였다. 누가 봐도 서로를 보호하겠다고 나선 꼴이었다.

“…형은요?”

권호영도 그를 알아챘는지 머쓱하게 손을 떨어트렸다.

“나야, 뭐…. 멀쩡해서 탈이지.”

단여명도 슬며시 웃으며 팔을 거뒀다.

“어….”

아니, 거두려고 했다. 손안에서 무언가가 미끄러지지 않았다면.

‘왜 하필 떨어져도 저쪽에….’

정신을 딴 곳에 두고 있긴 했던 모양이다. 여태껏 차 키를 손에 쥐고 있었는지도 몰랐다. 권호영의 허벅지 위로 떨어진 차 키는 보조석 카 매트 쪽으로 미끄러졌다.

“안 보이는데….”

신호에 걸린 틈을 타 권호영이 허리를 숙였다. 카 매트를 더듬거리던 그는 미세하게 눈살을 찌푸렸다. 떨어진 물건이 좀처럼 손에 잡히지 않는 듯했다. 단여명은 날카로운 턱선을 훔쳐보다가 라이트 버튼 쪽으로 손을 뻗었다.

“불 켜 줄까?”

“아, 제가…….”

일순간 두 사람의 손이 탁, 소리가 나게 부딪쳤다. 둘 다 같은 버튼을 동시에 누르려고 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갈 곳을 잃은 두 개의 손이 허공에서 살짝 움츠러들었다. 타이밍을 맞춘 듯 또다시 눈이 마주쳤다.

“…….”

“…….”

두 사람은 놀란 얼굴로 서로를 응시했다. 한 줄기의 미풍이 끼친 듯 차내에 묘한 기류가 불어오기 시작한 것도 그와 동시였다.

뭐야, 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기엔 권호영은 누가 봐도 당황한 낯이었다. 크게 뜨인 눈과 살짝 열린 입술이 사뭇 가까이서 들여다보였다. 잘게 떨리는 눈동자는 저를 마주 보지 못하고, 정면을 향했다가 다시 옆으로 돌아가길 반복했다.

…지금 이 분위기는 뭐지? 나는 그렇다 치고 쟤는 왜 또 저런 표정인데? 그에게 옮은 것처럼 단여명 또한 이유 모를 당황을 느꼈다. 시선을 둘 곳을 헤매는 눈동자가 초점을 이리 잡았다가 저리 바꾸며 수선을 떨었다.

방금까지 권호영과 대화하지 않아도 어색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이 분위기는 어색했다. 어색한 걸 넘어서 기분이 굉장히 이상했다. 너무 이상해서 뒷머리를 마구 헝클이고 싶은데, 혼란한 시선에 사로잡혀 섣불리 움직일 수 없었다.

“…내가 할게.”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고민하길 몇 차례, 단여명은 용기 내어 입술을 달싹였다. 서먹하게 웃으며 차내 라이트를 켜자 주변이 환하게 밝아졌다. 권호영이 구석에 박혀 있던 차 키를 꺼내 컵홀더 쪽에 올려놓았다.

“…여기 둘게요.”

“응, 그래 줄래?”

그의 시야에서 벗어나자 이유 모를 안도의 숨이 터졌다. 단여명은 무거운 한숨을 조용히 입 밖으로 흘려보냈다.

‘참 혼란하다, 혼란해.’

오늘 마가 낀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일이 이렇게 꼬일 순 없는 거라며 단여명은 연달아 한숨지었다.

“원래 취해도 티가 안 나?”

그래도 방금 전의 해프닝으로 숙연했던 분위기가 어느 정도 완화됐다. 단여명은 핸들을 잡은 채 옆을 살폈다. 권호영의 얼굴도 아까보단 덜 경직돼 있었다.

“많이 취했다고 들었거든.”

“구석에서 잠깐 졸았는데 지금은 거의 깼어요.”

“머리는 어쩌다가 그렇게 된 건데?”

“그냥… 취한 사람들이 만지길래 내버려 뒀어요.”

권호영은 어색한 듯 앞머리를 만졌다. 왁스를 발라놔서 아무래도 씻어야 할 것 같다는 말도 함께 덧붙였다.

안 봐도 비디오였다. 아마 권호영이 조는 사이에 그의 친구들이 멋대로 장난친 것 같았다. 권호영도 대놓고 싫다고 말하진 못했을 것이다. 보기와 다르게 은근 무른 녀석이니까.

그래도 이런 식으로 맨얼굴을 보게 될 줄 몰랐는데. 무슨 특별한 이유로 머리를 기른 건 아닌 것 같았다. 그는 눈을 드러내고도 위축감이 없었다.

“요즘 대학생들은 가방에 왁스도 챙겨 다니나 보네.”

우스갯소리 하자 권호영이 가벼운 웃음소리를 흘렸다. 자기도 모르겠다는 소리로 들렸다.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덧 집 근처에 다다랐다. 차는 매끄럽게 오피스텔 단지 내로 들어섰다.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가자 바로 근처에 빈자리가 보였다. 주차선에 맞춰 차를 세운 뒤 시동을 끄려는 찰나였다.

“형.”

언뜻 묵직하게 들리는 목소리가 조용한 차내를 울렸다.

“…고마워요. 바쁘신데 거기까지 와줘서.”

아닌 척하지만, 그의 모든 신경이 이쪽에 집중된 것이 느껴졌다. 제가 뭐라고 답할지 몰라 긴장한 기색이 은연히 드러났다. 그에 단여명은 자신도 모르게 싱거운 웃음을 뱉었다. 뭔 말을 하려고 저렇게 분위기를 잡나 했더니.

“바빠도 너 데리러 갈 시간은 있어.”

요즘 글 때문에 골머리를 앓는 모습을 보여서 그런지 그는 괜스러운 소리를 했다. 부러 아무렇지 않게 답한 단여명은 마저 시동을 끄고, 차 문을 열었다.

건물 내로 들어가니 이미 다른 사람이 엘리베이터를 잡아놓고 있었다. 두 사람은 그 사람을 따라 엘리베이터 안에 들어섰다. 문이 닫히고, 그대로 위로 순행할 줄 알았던 승강기는 1층에서 멈췄다.

단여명이 구석으로 물러나니 권호영이 곁으로 더 붙어 섰다. 나이가 지긋한 노부부부터 분리수거 통을 든 주민, 강아지를 안은 견주까지 차례대로 올라타자 순식간에 엘리베이터 안이 꽉 찼다.

거리가 가까워지자 향긋한 섬유유연제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넓은 가슴팍이 오르내리는 것에 맞춰 고른 숨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았다.

가슴만 바라보고 있기 뭣해 단여명은 흘끗 눈을 올렸다. 그에 권호영의 눈동자가 어색하게 옆쪽으로 돌아갔다. 서로 마주 본 채 바짝 붙어 선 자세라 둘 다 눈을 둘 곳을 찾지 못하는 모양새였다.

…미치겠네. 차 안에서도 그러더니 또 이런다. 타이밍이 어긋나 회피하듯 서로 눈을 돌리는 순간이 민망하리만치 반복됐다. 마주칠 듯 자꾸 엇나가는 시선을 못 견디겠어 단여명은 부러 말을 걸었다.

“…계속 눈 마주치니까 어색하긴 하다.”

좀 괜찮아질 만하면 이상한 기류가 흐른다. 그를 다 알면서 모르는 체할 바에는, 차라리 정면 돌파하는 쪽이 나았다. 아직 기분이 많이 나아지진 않았는지 권호영도 오늘따라 뻣뻣하게 굴었다.

“이상해요?”

애써 말을 붙이고 나서야 그는 시선을 바로 했다. 맑은 샘물처럼 잔잔한 빛을 머금은 눈동자가 어느 때보다 시야에 가득 찼다. 그 오묘한 빛깔에 잠시 한눈팔려 대답하지 못한 새였다.

“…머리. 보기 안 좋으냐고요.”

주변인을 의식해 낮게 내리깐 목소리가 귓가에 속삭임을 흘려 넣었다. 살짝 틀어진 고개를 따라 날렵한 턱선이 두드러졌다.

권호영의 키가 자신보다 커서 그런지, 아니면 어디서 많이 보던 자세를 취하고 있는 탓인지. 단여명은 왠지 이 상황이 조금 낯간지러워졌다. 평소와 다를 바 없는 시선과 익숙하게 귀에 감기는 목소리인데, 어쩐지 입안이 텁텁하게 말랐다. …원인은 아마 저 얼굴이겠지.

“응.”

단여명은 긴장한 걸 내색하지 않기 위해 부러 장난스럽게 웃었다.

“다 좋은데 흠집 난 게 미스야.”

그의 얼굴 중 부기가 오른 쪽에 시선을 주니 권호영의 입가에 힘이 실렸다. 입 안쪽 살을 깨물었는지 그의 뺨이 살짝 패였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

“왜 그런 걸 물어. 이상해 보일 것 같아?”

“네. 다른 사람 눈엔 엉망일 것 같아서….”

그가 목소리를 낮추고 가까운 거리에서 속삭였다. 반쯤 내리깔렸던 눈동자에 다시금 제 얼굴이 담겼다.

“…만지면 더 이상해질까 봐 참고 있어요.”

살짝 흐트러져 왁스 칠 된 머리, 찢어진 상처와 부기로 얼룩덜룩하게 물든 얼굴. 사정을 모를 주민들의 눈엔 수상쩍게 보일 만한 행색이었다.

…그래서 자꾸 이쪽으로 몸을 기울이나. 다른 사람의 눈을 피해 숨고 싶어서. 부끄러운 마음은 알겠는데 좀 덜 붙어 줬으면 좋겠다. 이쪽은 벽에 찰싹 달라붙어 숨 쉬는 것마저 온 신경을 기울이는 중인데.

“괜찮아. 다른 쪽이 문제지.”

둘은 말소리를 낮추고 소곤소곤 대화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아래층에서 사람이 내렸다. 공간이 확보된 걸 확인한 권호영이 뒤로 걸음을 물렸다. 눈높이가 편히 맞아 그제야 긴장이 풀렸지만, 단여명은 어쩐지 좀 아쉽다고 생각했다.

“아프진 않아? 그대로 두면 흉 지겠다.”

“괜찮아요.”

“가서 연고 바르자. 집에 구급상자 있어.”

“진짜 괜찮은…….”

“괜찮다는 말 좀 그만하고.”

현관문 앞에 도착한 그들은 이윽고 집 안으로 들어갔다. 단여명은 신발을 벗자마자 TV 서랍장 안을 뒤졌다. 이쯤 뒀던 것 같은데, 하며 여러 칸을 뒤지자 찾는 물건이 나왔다. 단여명은 구급상자를 들고 소파 위에 걸터앉았다.

“이리 앉아.”

옆자리를 두드리며 말하니 권호영이 슬금슬금 가까이 왔다. 심히 내키지 않는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그는 지정해 준 자리에 얌전히 앉았다.

“제가 할게요.”

“아니, 내가 해 줄게.”

구급상자의 뚜껑을 연 단여명은 그 안에서 소독약을 찾았다. 뒷면을 보니 사용법이 적혀 있었다. 글자를 눈으로 읽는 것과 동시에 목소리를 냈다. 최대한 태연함을 가장한 목소리를.

“나 때문에 벌어진 일일 텐데. 내가 해야지.”

“…….”

돌아오는 대답이 없었다. 단여명은 천천히 눈길을 올렸다. 앞을 보니 권호영은 얼굴을 무섭도록 굳힌 채였다. 갑작스러운 이야기의 전환에 당황한 것과 동시에 제가 뭘 말하고 있는지 단번에 알아들은 낌새였다. 한숨을 내쉰 단여명은 깨끗한 솜에 소독약을 덜어냈다.

“그 사람이지.”

지금껏 불편한 침묵을 지키고 있던 주제였다. 집에 오기까지 완만한 분위기를 유도한 것은 그의 기분을 배려해 준 것이었다. 하지만 언제까지고 모른 척해 줄 수만은 없었다.

“집 앞에서 나랑 싸웠던 남자. 걔잖아.”

단여명은 반대 손으로 권호영의 턱을 잡았다. 조심스럽게 옆으로 돌리니 바닥에 쓸린 듯한 상처가 드러났다.

상처에서 흐른 핏자국은 날카로운 턱선에서 귀밑까지 점점이 이어져 있었다. 살짝 엄지로 문질러 보니 시간이 지나 말라붙은 상태였다. 단여명은 소독약을 적신 솜으로 핏자국을 닦아냈다. 그래도 이 정도 선에서 그친 게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새로 솜을 적셔 상처 위를 살살 두드리자 권호영이 입가를 움찔했다. 짙은 눈썹은 조금 찡그려진 채였다. 괜찮다고 큰소리치더니만, 아프긴 한 모양이었다.

“호영아.”

“…….”

“애들 얘기 들어 보니까 경찰 부르려고 했다며. 그냥 넘길 일 아니잖아.”

고집스러운 입은 여전히 굳게 다물려 있었다. 단여명은 소독을 마치고 손끝에 연고를 올렸다. 광대와 눈썹 부근을 감싼 붉은 기는 손으로 누르면 푹 들어가겠다 싶을 정도로 퉁퉁 부어 있었다.

“말 안 해 줄 거야?”

입가의 상처에 연고를 펴 바른 뒤 괜히 부기가 오른 곳에도 손을 올렸다. 효과가 있을지 모르겠으나, 그냥 두기엔 딱해 보였다.

권호영은 그때까지도 말이 없었다. 그의 친구들과 다 같이 모여서 말할 때도 권호영은 지금처럼 침묵을 지켰다.

얘기를 듣자 하니 처음 목격자는 윤재윤이라고 했다. 권호영이 한 남자 위에 올라타 있는 모습을 본 윤재윤은 경악하며 그를 뜯어말렸다. 민들레가 난입한 시점은 남자가 자리를 떠난 후였고. 왜 싸웠는지는 그 자리에 있었던 당사자들만 알 테다.

무슨 이유로 주먹이 오갔는지 모르나, 두 사람이 말해 준 인상착의로 김선오란 것을 추측할 수 있었다. 그래도 그때까지는 의심 단계였다. 나 아니면 안면도 없는 두 사람이 뭐 때문에 싸웠겠어. 속이 부글부글 끓는 와중에 한편으로는 그리 부정하고 싶었다.

‘야, 근데 오늘 처음 본 사람 맞아? 모르는 사이라기엔…….’

그러나 윤재윤의 말이 쐐기를 박았다. 권호영이 뭐라 둘러댔는지 윤재윤은 아리송하다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댔다.

“…그 사람 맞아요.”

치료를 마치고 물건을 정리할 때쯤이었다. 권호영이 망설임이 가득한 목소리로 느릿하게 입술을 뗐다.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그는 바른대로 실토하는 것을 택했다. 다른 때 같았으면 좋은 소리를 해 줄 만도 한데, 이번엔 선뜻 말문이 트이지 않았다.

…김선오가 맞았구나. 내심 짐작하던 사실이었다. 그러나 그의 입을 통해 직접 확인하니 느낌이 새로웠다. 조금 진정됐던 마음에 뜨거운 불덩이가 튄 것처럼 가슴에 열이 피어오르는 것이 가히 새롭다면 새로웠다.

“그런데 형이 신경 쓸…….”

권호영이 말을 끝내기도 전이었다. 단여명이 몸을 벌떡 일으켰다. 권호영은 반사적으로 단여명의 손목을 덥석 붙잡았다. 앞으로 튀어 나가려던 몸이 막아서는 힘에 걸려 덜컥, 흔들렸다.

“어디 가요.”

“잠깐 여기 있어.”

“형.”

“잠깐이면 돼.”

권호영은 믿음이 가지 않는다는 낯이었다. 눈가를 찌푸린 그의 얼굴을, 단여명은 가만히 지켜보았다. 잠깐의 정적이 지났다. 어디로 보나 망설이는 기색이 확연한데, 권호영은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오히려 힘을 더 주었으면 주었지.

“저번에도 잠깐이라고 해놓고 안 오셨잖아요.”

“그땐…….”

“…….”

“지금이랑 달라. 이번엔 정말 약속할게.”

차분히 눈을 맞추자 권호영은 시선을 피했다. 가겠다는 사람을 막아설 자신이 없다는 뜻으로 보이기도 했고, 대화하고 싶지 않다는 것처럼 비치기도 했다. 알 수 없는 신경전에 입술이 말랐다. 아무 죄 없는 권호영과 입씨름하고 싶지 않았다.

“…호영아.”

김선오가 맞다고 시인한 걸 후회하고 있으려나. 아무 관련 없는 본인까지 휘말린 셈이니 내심 자신을 원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이라도 일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판단이 섰다. 무슨 이유에서든지 더 이상 권호영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았다. 김선오와 얘기를 해봐야겠다. 그 결말이 구정물 싸움이 될지라도.

“무슨 걱정 하는지 알아. 만나러 간다는 얘기가 아니고, 잠깐…….”

“제가 먼저 그랬어요.”

그러나 끝말은 타의에 의해 삼켜졌다. 권호영이 예상 밖의 말을 꺼냈다. 단여명은 눈만 끔뻑였다. 먼저 그랬다니.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잘되지 않았다.

“…제가 그 사람 얼굴에 핸드폰 집어 던졌어요.”

…핸드폰? 단여명은 이번엔 당황한 낯으로 눈썹을 찡그렸다.

왜 제게 민폐를 끼치느냐며 싫은 소리 하지 못할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저런 소리를, 그리고 저런 표정을 지을 줄 몰랐다.

“……제가 잘못한 거예요.”

그는 생전 처음 보는 낯선 얼굴을 하고 있었다.

“…….”

“…….”

단여명의 손목을 놓아준 권호영이 이윽고 시선을 내렸다. 단여명은 눈만 깜빡거렸다. 서로의 움직임을 멎자 격양됐던 공기가 일순간 차분히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무거운 적막에 휩싸인 건 삽시간이었다.

‘…왜 저런 얼굴이지?’

무심코 그의 치부를 엿본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단여명은 알 수 없는 상황에 눈동자만 굴렸다. 그는 무슨 큰 죄라도 지은 것처럼 심란한 낯이었다. 보는 사람이 다 불편한 감정을 느낄 만큼.

상황이 정리된 후 김선오는 제 다리로 알아서 잘 갔다고 했다. 막말로 송장을 치른 것도 아닌데…. 저렇게 심각해 할 일인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답답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마음이 갈대처럼 흔들렸다. 왜 금방이라도 눈물을 뚝뚝 흘릴 것만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지. 무표정한 건 평소와 같은데, 어딘가 모르게 그런 느낌이 들었다. 그가 어리다고 과잉보호한 기억은 없는 것 같은데.

…저런데 혼자 내버려 두고 갈 수도 없고.

“비 내리겠어.”

단여명은 결국 권호영 쪽으로 몸을 돌려 섰다. 뜬금없는 소리라고 생각했는지 줄곧 바닥에 머물렀던 시선이 천천히 위로 들렸다.

“얼굴이 하도 울상이라 머리 위에서 비 내리겠다고.”

한숨을 내쉰 단여명은 권호영의 옆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소파의 반동으로 권호영의 몸이 짧게 들썩였다.

“들을 얘기가 많은데, 우선 하나만 짚고 넘어가자.”

“…….”

“넌 잘못한 거 없어.”

이윽고 눈이 마주쳤다. 일상처럼 짓는 건조한 표정 속에 언뜻 미약한 우울의 기운이 넘실거렸다. 그렇지만 그의 눈시울은 울음기 없이 깨끗했다.

“이런 분위기랑 잘 어울리는 걸 하나 아는데….”

단여명은 그를 보며 가볍게 웃음을 지었다.

“우리 술 마실까?”

서로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다시 거실로 모인 건 20분이 지난 후였다.

단여명은 테이블 위에 사 온 물건을 늘여놓았다. 소주 7병을 나란히 세워놓은 다음 팩으로 나온 과일 안주의 비닐을 뜯었다.

“너랑 이런 식으로 술 마시게 될 줄 몰랐는데.”

병뚜껑을 돌리자 권호영이 빈 잔을 내밀었다. 꼴꼴거리며 투명한 액체가 유리잔을 채웠다. 그의 잔을 채우고 제 몫까지 채우려고 하자 권호영이 손을 뻗었다. 제가 따라 주겠다는 뜻으로 보여 술병을 건넸다.

TV도 틀어놓지 않은 집 안은 적막한 공기가 흘렀다. 고요함을 벗 삼아 그들은 목구멍 아래로 연방 쓰디쓴 액체만 넘겼다. 그렇게 빈 소주병이 2병이 넘어갈 때쯤이었다.

“그래서.”

탁 소리가 나게 술잔을 내려놓은 단여명이 똑바른 시선을 던졌다. 말없이 잔만 비운 탓에 은은한 취기가 도는 와중이었다.

“김선오랑 싸운 건 맞고. 왜 싸웠는지는 끝까지 비밀이야?”

권호영도 여실한 술기운을 느끼는지 아까보다 초점이 흐릿했다. 그러나 아직 사리 분별은 가능한 모습이었다. 그는 여태껏 그랬듯 침묵으로 답했다.

“그래, 그럼 말하지 않는 거로 하자.”

그가 정말 말하기 싫다면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물을 사람은 권호영 말고도 한 사람 더 남아 있었다.

“뒷일은 내가 알아서 할게. 넌 신경 쓸 거 없어.”

그리 말하자 권호영은 생각에 잠긴 낯으로 잔의 테두리를 쓸었다. 가만가만 매만지는 그의 술잔 역시도 비어 있었다. 손목을 기울여 빈 잔을 가득 채워 주니 소주병이 바닥을 드러냈다.

“…그 사람이랑 더 안 엮이면 좋겠어요.”

새로운 병을 까는 것과 동시였다. 권호영이 낮은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좀 괜찮아진 것 같더니 또 저런 얼굴이다. 우울감이 엷게 서린 얼굴.

“나도 그러고는 싶은데… 상황이 이렇게 돼서.”

“…….”

“아, 네가 잘못했다는 말이 아니고, 그냥 상황이 그렇다는 거야.”

오해할 소지가 있는 듯해 단여명은 얼른 다른 말을 더했다. 멋쩍은 웃음을 지은 채 소주병의 입구를 잔 위에 붙였다.

“걔랑 사이가 틀어진 건 난데, 아무 상관 없는 네가 말려들게 됐잖아. 나이도 훨씬 어린 애한테 그런 거니까 걔도 잘났다고 큰소리치지는 않을 거야.”

병을 기울이는데 손이 삐끗해 잔에 넘치도록 술이 따라졌다. 시야가 흔들리는 것은 진작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벌써부터 실수를 저지르는 걸 보니 평소보다 취기가 빨리 오르는 모양이었다.

닦을 것을 찾아봤지만, 마땅한 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작게 입맛을 다신 단여명은 그냥 새로 따른 술을 입안에 털어 넣어버렸다.

“잘은 모르겠지만, 너네 싸운 이유. 그거 나랑 관련된 거지?”

“…….”

“그거 말고는 접점이 없잖아.”

슬쩍 던져 본 말에 역시나 권호영은 부정하지 않았다. 애가 착해서 거짓말할 성격도 못 되고, 잘하지도 못한다. 거짓말을 할 바엔 차라리 말을 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침묵은 기본적으로 대답을 회피할 때 주로 쓰인다. 그러나 적절한 시기에 그것이 반복되면 강한 긍정이 된다. 그가 본인에 대한 얘기를 말하지 않았던 이유가 조금쯤 이해됐다. 저렇게 속이 훤히 드러나서야.

내심 짐작했던 것들에 점점 확신이 생기니 기분이 묘해졌다. 답답증이 해소돼 속이 시원하면서도 그가 자신을 대신했을 시간을 생각하면 기분이 불쾌해졌다. 위가 쓰린 듯한 느낌에 단여명은 긴 한숨을 억눌렀다.

“우리가 안 지 얼마 안 됐지만, 나는 네가 이유 없이 그랬을 거라고 생각 안 하거든.”

그렇지만 권호영이 한시름 덜었으면 하는 마음은 여전해 대화를 이었다.

“그래도 그동안 본 게 있지. 뭐… 걔가 맞을 짓을 해서 그랬겠지.”

저번처럼 멱살을 잡았거나 자신을 걸고넘어지며 시비를 걸었다면 다툼을 피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단여명은 부러 가벼운 웃음을 보였다. 그의 기분이 한시 빨리 괜찮아지길 바랐다. 고래 싸움에 엉뚱한 권호영의 등이 터진 것 같아 자신의 마음도 편치 못했다.

“그러니까 괜히 이상한 죄책감 가질 필요 없다고. 나도 어차피 한 번은 다시 만날 생각이었어.”

“손부터 나가는 사람이잖아요.”

좋게 달래 보았지만, 권호영은 여전히 마음을 놓지 못하겠다는 눈치였다.

“전 괜찮아요. 그러니까….”

“괜찮다는 말, 그거 습관이야?”

순간 욱하는 마음이 들어 목소리가 뾰족해졌다. 보는 사람이 다 안쓰럽게끔 얼굴은 부어 가지고. 오늘만 대체 몇 번이나 괜찮다는 말을 들은 건지.

“정말 괜찮아서 하는 말 맞느냐고.”

단여명은 뒤늦게 실수한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매 맞을 이는 다른 사람인데, 괜히 그에게 화풀이하는 것 같았다.

“…화낸 거 아니야.”

“…알아요.”

“갑자기 기분이 좀 그래서….”

“네.”

권호영이 소주병을 들어 올렸다. 단여명은 빈 잔을 내밀어 그의 술을 받았다. 뒤이어 소주잔끼리 부딪치며 챙, 하는 맑은소리가 퍼졌다.

‘착해 빠져서.’

억울하지도 않나? 따지고 보면 저 하나 때문에 벌어진 일인데.

단여명은 술을 넘기며 정면에 앉은 남자를 훔쳐보았다. 고개를 꺾어 단숨에 넘긴 술이 독한지 그는 목울대를 움직이는 중에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텅 비어버린 술잔에서 입술을 떼어내려기에 단여명은 모른 척 눈을 돌렸다.

“…형이 무슨 말 하는지 알겠어요.”

술잔을 내려놓은 권호영이 이윽고 말문을 열었다.

“만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변함없지만….”

“…….”

“그래도 다시 만날 생각이라면, 저랑 같이 가요.”

잔잔한 목소리가 실내를 울렸다. 주변의 공기에 섞일 수 있을 정도로 평소보다 낮은 음역대였다.

“그래, 그러자.”

수심이 가득한 얼굴은 어디로 보나 걱정하는 기색이었다. 일단 그를 안심시키는 게 우선이겠지. 이것마저 그럴 수 없다고 대답하면 걱정을 꺼트릴 것 같지 않았다.

“연합 맺은 것 같고 든든하네.”

단여명은 픽 웃으며 자신의 술잔에 술을 따랐다. 권호영의 몫까지 채워 준 뒤 제 잔을 들어 단번에 소주를 넘겼다. 입안을 감도는 쓴맛에 망고를 한 입 깨무니 조금쯤 입가심이 됐다.

권호영은 그때까지도 이쪽을 가만히 지켜볼 뿐이었다. 가볍기만 한 대답이 자못 못 미덥다는 표정이었다.

“왜 그런 얼굴이지. 새끼손가락이라도 걸어 줄까?”

“…놀리지 마세요.”

권호영이 불퉁히 쏘아붙였다. 그리고 단여명이 그랬던 것처럼 단번에 술을 넘겼다. 툭 튀어나온 목울대가 시원하게 꿀렁였다. 단여명은 말없이 소주병을 들었다. 텅 비어버린 그의 잔에 다시금 술을 한가득 부어줬다.

“첫 만남이 색다르긴 하네. 그래서 그 뒤로 같이 다니게 된 거야?”

그 후로는 시시콜콜한 얘기가 이어졌다. 내기한 것도 아닌데, 두 사람은 무섭게 술병을 해치웠다. 안주는 동난 지 오래였고, 테이블 아래에 죽 늘어놓은 빈 병은 2시간도 채 지나지 않아 5병이 됐다.

“네. 처음에는 뭐 이런 사람들이 다 있나 했는데… 계속 어울리다 보니까 적응됐어요. 오늘 술자리도 두 사람 때문에 간 거였고요.”

“잘됐네. 한국에 와서 처음 사귄 친구들이잖아….”

말꼬리가 길게 늘어졌다. 단여명은 빙글빙글 도는 시야를 느끼며 내용물이 반쯤 남은 소주병을 들어 올렸다. 몇 번째인지 모를 빈 잔에 술이 따라졌다.

“둘 다 착해 보이더라.”

반쯤 풀린 눈으로 정면을 응시하자 권호영의 얼굴이 두 개로 나뉘었다가 한 개로 합쳐졌다. 쟤는 얼굴이 두 개로 나뉘어도 잘생겼네. 우스운 생각이 잠깐 스쳤다가 사라졌다.

“정말 취한 티가 하나도 안 나네.”

얘기의 주제는 때마다 바뀌었다.

“보기에만 그렇게 보이는 거예요.”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른 채 두 사람은 은은한 불빛만 켜놓은 거실에서 술잔을 나눴다.

“그래서 어릴 때 옆집 아주머니 밥이 너무 맛있어서 맨날 놀러 가고 그랬어.”

머릿속에 걸리는 대로 뜬금없는 얘기를 불쑥 꺼내기도 하고, 취한 사람이 다 똑같듯 쓸데없는 소리를 줄줄이 늘어놓기도 했다. 주량은 넘겨버린 지 한참이었고, 한계라는 생각은 일찍이 한 뒤였다.

“어머님이 놀라셨겠네요.”

그런데 자신보다 멀쩡해 보이는 상대를 보니 무슨 승부욕이라도 발동한 건지.

“맞아. 엄마는 그것도 모르고 나 찾는다고 온 동네를 돌아다녔대. 옆집에서 전 집어먹고 있는 것도 모르고….”

넉넉히 사 온 술이 어째 전부 동날 듯했다. 내일 아침이 굉장히 힘들 것 같다는 예감이 들자 단여명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어버렸다. 권호영도 취하긴 취했는지 뜬금없이 웃는 자신을 의아하게 여기지 않았다.

“…형, 만… 에요.”

그로부터 얼마나 더 시간이 지났을까.

“아…….”

단여명은 희미하게 들리는 목소리에 전원이 나간 정신을 다잡았다.

…무슨 얘기 중이었지? 잠깐 졸았는지 뺨을 손으로 받치고 있었다. 단여명은 테이블에 거의 기대다시피 늘어트렸던 몸을 부스스 일으켰다.

어느 순간부터 기억이 흐릿했다. 마지막으로 나눈 대화가 생각나지 않았다. 계속 이런 자세로 얘기했던 것 같은데…. 언제부터 눈을 감고 있었던 건지 모르겠다.

“으응…. 뭐라고…?”

단여명은 느릿하게 눈을 깜빡거렸다. 눈앞이 가물거려서 상대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잘 보이지 않았다.

“만약이라는 경우….”

“…….”

“그걸 말했어요.”

마지막으로 남은 소주병이 거의 바닥을 드러낼 무렵이었다. 얼굴이 잘 확인되지 않았지만, 권호영도 멀쩡한 정신은 아닌지 말을 느릿하게 흘려보냈다.

“어떤 사람이 너무 미운데, 그만큼 좋아해요.”

“…….”

“…그럼 어떡하실 거예요?”

그는 자신이 잠깐 졸고 일어난 걸 모르는 눈치였다. 앞선 대화에서 진지한 얘기라도 나누고 있었던 걸까. 어쩐지 심상찮은 느낌의 얘기가 화두에 올랐다.

그렇다고 마냥 당황스럽진 않았다. 진탕 취해 감정이 무뎌지기도 했고, 어느 술자리에 가더라도 그 시간이 끝물에 달하면 이런 얘기가 한 번쯤 나오는 법이다. 누군가에게 털어놓고 싶지만, 일상 중에 묻기엔 낯간지러운 질문. 그러니 상대가 술기운에 흘려들었으면 하고 말하는 것이다. 모든 일에 초월한 듯 보였던 권호영이라고 해서 다르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어려운 질문이네…….”

조금 장난기가 동했지만, 단여명은 마음을 고쳐먹었다. 권호영이 이런 유의 얘기를 꺼내놓은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다시 소라게처럼 숨어들기라도 하면 큰일이지. 소리 없이 웃기만 하다가 머릿속에 자연히 든 물음을 입 밖으로 던졌다.

“얼마나 좋아하는데?”

“…제 얘기 아니에요.”

“알아…. 만일의 경우잖아?”

“…….”

“…짝사랑이야?”

넌지시 던진 물음에 권호영은 잠시 침묵했다. 술기운이 도는 얼굴은 불그스름한 빛이었지만, 곧은 자세는 흐트러지지 않았다.

“…짝사랑은 맞는 것 같고.”

공허한 시선이 빈 술잔을 맴돌기를 여러 번.

“연애 감정은 아니에요.”

언뜻 가라앉은 눈빛으로 그가 말을 마쳤다.

‘…자기 얘기 아니라더니.’

꽤 잘 아는 눈치였다. 그도 아니면 누군가에게 들은 허무맹랑한 소리가 갑자기 궁금해진 걸 수도 있고. 여러모로 아리송해 단여명은 으음…, 하며 목을 울렸다.

너무 미운데, 그만큼 좋아한다라….

아끼는 친구가 돈을 빌리고 갚지 않기라도 하나? 머리를 굴리는데 생각이 엿가락처럼 늘어졌다. 단여명은 몸을 편하게 늘어트렸다. 소파를 등받이 삼아 등을 기대니 조금쯤 걷혔던 졸음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한쪽이 힘들면…….”

대답이 명확하게 떨어지지 않아 말끝이 불분명해졌다. 자세를 고쳐 앉느라 바닥을 짚는데, 손끝에 무언가 걸렸다. 단여명은 바닥에 굴러다니던 병뚜껑을 집어 들었다. 끄트머리에 손가락을 대니 날카로운 감각이 무디게 느껴졌다.

‘뭐…… 그럴 수 있나.’

인간의 감정은 섬세하고, 세상엔 다양한 관계가 있다. 어쩌면 제가 알지 못하는 복잡한 사정이 있을 수도 있고.

머릿속에 여러 가지 가정을 세워 보았다. 자신의 지인과 그들을 둘러싼 사람들, 그리고 과거의 연인까지도. 그러다가 돌연 생각이 뒤집혔다.

“…아니, 아니지.”

한쪽이 손해를 보는데 어떻게 괜찮다고 볼 수 있을까.

“어떤 관계든 그럴 순 없는 거야.”

까만 속눈썹이 느릿하게 너울거렸다. 시선은 아래에 둔 채였다. 하얀 얼굴을 바라보던 권호영은 찬찬히 눈길을 내렸다. 테이블 위엔 꽁다리를 촘촘히 꼬아 놓은 병뚜껑들이 가지런히 정렬돼 있었다.

“언젠가 깨닫는 날이 오겠지. 놓을 수 없어도 놓아 봐야 하는 걸….”

“…….”

“우물 안 개구리는 바다가 넓은 줄 모른다잖아. 난 관계를 맺는 것도 경험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서……. 어쨌든 벗어나야지 그 사람에 대한 감정이 어땠는지 판단할 수 있을 것 같아.”

단여명이 나직한 목소리로 긴 얘기를 흘렸다. 취기가 올라 간간이 숨소리가 섞였지만, 최대한 명확한 발음으로 문장을 구사했다.

“아예 놓을 수 없다면 멀리서라도 보려고 노력해야겠지. 그럼 나중에 그 사람이 내 생각보다 소중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더 싫어질 수도 있고…….”

“…….”

“아무튼 한쪽이 힘든 건 그림이 아름답진 않잖아.”

얘기를 마친 단여명은 테이블 위에 병뚜껑을 올려두었다. 테이블 위에 늘어트려 놓은 것들과 똑같이 꽁다리를 꼬아놓은 모습이었다.

“…그럼요.”

대답이 됐냐는 듯 바라보니 권호영은 다른 질문을 하려고 했다. 또 뜬금없이 무슨 소리를 하려고. 상황만 놓고 보면 수업 시간에 열정적으로 질문하는 학생 같기도 했다.

“좋아하는 사람을 갑작스럽게 떠나보내야 한다면요.”

그러나 그의 표정이 이렇다 못 할 만큼 묘했기에 선뜻 농담을 던질 수 없었다.

“좋아하는 사람……?”

이 시간이 대체 뭐 하는 시간인지 모르겠으나, 그렇게 나쁘진 않았다. 단여명은 소파에 머리를 기대고는 물었다.

“떠나보내야 하는 거면… 정확히 어떤 상황인데? 사고사? 갑자기 누군가에게 살해당하기라도 하나?”

“그런 것까진 생각을 안 해봤는데….”

갑자기 시작된 질문 세례에 권호영은 되레 당황해했다. 전후 사정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는 눈치였다. 아…… 직업병. 별거 아닌 물음에 지나치게 몰입해 버렸다.

“으음……. 글쎄.”

단여명은 팔짱을 끼고 눈을 감았다. 시야를 닫는 것과 동시에 몸이 땅 밑으로 쑥 꺼지는 듯한 어지럼증이 일었다. 머리가 핑핑 도는 느낌이 잦아들길 기다리며 차차 기억을 더듬어나가기 시작했다.

언젠가 깊이 생각해 본 적 있는 난제였다. 그러나 취기 때문에 그게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어렴풋이 생각나는 건 하얀 장미꽃다발을 든 자신의 모습이었다. 머리 한구석에서 어떻게 수면 밖으로 떠오른 건지 모를, 꽤 로맨틱한 장면이었다.

단여명은 평소답지 않게 오랜 시간 생각에 잠겼다. 조금쯤 재촉할 만도 한데, 권호영은 잠자코 자리를 지켰다.

“둘 다 죽는 건 역시 좀 그러려나?”

고민한 시간치고는 무게감 없는 목소리였다. 살며시 눈을 뜬 단여명은 장난스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죽고 못 살 정도로 좋아하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면 어차피 살아도 사는 의미가 없을 텐데. 그 이상 무얼 고민하나 싶었다.

“영원한 사랑은 없다고 믿는 쪽이긴 한데, 언젠가 그런 사람이 나타난다면…….”

“…….”

“뭐, 같이 죽어도 좋을 것 같아. …그 사람이 원했던 결말이 아닐지라도.”

잘 보내주고, 자신 역시 그와 같은 하늘 아래에서 눈 감고 싶다. 과연 그런 사람이 나타날지는 모르겠지만.

“좀 이기적이지?”

단여명은 픽 웃었다. 다른 녀석들 같았으면 ‘형, 완전 사랑꾼이시네요’ 하며 놀려 먹을 만도 한데, 권호영은 어떤 반응도 없었다. 그게 어린애 앞에서 괜히 으스댄 것 같아 조금 부끄러워졌다.

이래서 술이 문제다. 사람이 감정적으로 바뀌게 된다. 평소 같았으면 창피해서 안 했을 말을 줄줄이 실토하게 만든다. 이제 보니 권호영이 은근 고단수처럼 느껴졌다. 그를 달래 줄 겸 김선오의 얘기를 들을 생각이었는데, 정작 자신의 속마음만 꺼내놓은 꼴이었다.

“이제 어떡할까. 소주는 다 마신 것 같은데.”

단여명은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양 뺨을 불그스름하게 물들인 채인데도 따라붙는 눈길이 차분했다. 그걸 보니 아직 자리를 정리하기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무뚝뚝한 애가 뭐가 그리 재밌다고.

선물 받은 양주가 어디 있었던 것 같은데…. 그리 중얼대며 발을 뗀 순간 돌연 몸이 앞으로 기울었다. 헛발을 디딘 단여명은 순간적인 기지를 발휘해 반대 발로 중심을 잡았다.

“아……. 놀랐다.”

그대로 넘어지는 줄 알았는지 권호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채였다. 눈을 커다랗게 뜬 그에게 단여명은 괜찮다는 듯 웃어 보였다.

정말 코가 비뚤어질 정도로 마시긴 한 모양이다. 내려다본 바닥이 웨이브를 타듯이 꿀렁이고 있었다. 기묘한 바닥의 움직임을 보며 다시 한 걸음 내디딘 순간이었다.

“형, 잠깐.”

권호영이 불안이 가득한 목소리로 급하게 불러 세웠다.

“그쪽…….”

그쪽이 아니라고. 아마 그는 그렇게 말하려고 했던 것 같다.

쨍그랑-! 바닥에 늘어놓았던 술병이 발에 치여 볼링 핀처럼 와르르 무너졌다. 순간 손목이 앞으로 당겨져 몸이 휙 돌아갔다. 그러나 뒤로 넘어가는 몸을 잡아 주기엔 상대도 단여명과 똑같은 양의 술을 나눠 마신 뒤였다. 몸의 중심이 무너지는 것과 동시에 쿠당탕! 소리가 났다.

“아…….”

강한 충격이 잇따른 다음엔 머리가 뒤흔들렸다. 깜빡이는 정신을 느끼며 시야를 다잡으니 누군가 제 몸 위에 올라탄 모습이 보였다. 단여명은 깜짝 놀라 권호영의 머리를 감쌌다. 정작 뒤통수를 부딪친 건 자신이고, 그는 멀쩡했는데도.

“야……. 안 다쳤, 너, 그렇게 몸 막 던지면 다쳐.”

놀란 토끼 눈을 하던 단여명은 곧 푸흐흐, 웃음을 터트렸다. 넘어지면 한쪽만 넘어질 것이지. 하나를 막다가 둘이 같이 넘어간 게 우스워 허파에 바람 든 사람처럼 웃음이 나왔다.

“아, 좀 아픈데…. 내일 머리에 혹 나겠다.”

“…….”

“어떡하지…. 넌 이렇게 몸 던져서 받아줬는데, 형이란 사람은 동생 얼굴에 흉 지게 하고…….”

너무 웃어서 눈에 눈물이 고였다. 술기운 때문에 킥킥대며 실없는 웃음이 자꾸만 삐져나갔다. 단여명은 고개를 돌리고, 손등으로 입가를 가렸다. 혼자 오버하는 것 같아 약간 민망해진 탓이었다.

매일 발을 디뎠던 방바닥이 가깝게 보였다. 그러다 문득 자신들의 자세가 의식되기 시작했다. 바닥에 나동그라진 한 사람 위에 다른 사람이 올라탄 자세. 매체에서 고전으로 쓰이는 전개 방식이었다.

그러다 보니 또 웃음이 나왔고.

“아, 근데 이거 영화나 드라마에서 나오는…….”

우스운 생각을 전하려 무심코 눈길을 돌린 순간, 단여명은 설핏 얼굴을 굳혔다.

“…….”

마주한 상대의 얼굴은 이상하게도 웃음기 한 점 없었다.

눈동자의 초점은 멍했고, 틈을 보이고 열린 입술 안쪽은 붉었다. 몇 번이나 거칠게 문지른 것처럼 짙은 혈색이 도는 입술보다 그 안쪽이 더욱 붉은색이었다.

창문으로 새어든 달빛이 날카로운 이목구비에 진한 음영을 덧그렸다. 그에 뭔가에 홀린 것처럼 시선을 뗄 수 없었다.

“…….”

“…….”

폭풍전야의 고요처럼 삽시간에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단여명은 이 공기를 알았다. 은연중 차 안에서 느꼈던 분위기의 연장선이었다. 살갗으로 감기는 무형의 감각에 입안에 타액이 끈적하게 고였다. 누군가 질 낮은 손장난을 치듯 피부 위를 가볍게 훑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상대의 눈빛에 숨통이 천천히 죄는 기분이었다. 금방이라도 숨이 턱 막힐 것 같은데, 그게 내심 길게 이어지길 바랐다. 긴장감이란 쇠사슬이 목을 천천히 조이는 시간에 비례해 기이한 황홀감이 피부를 타고 기어올랐다.

단여명은 집요한 눈길을 견디며 숨만 색색 골랐다. 잠깐 비켜 달라고 말할 수도, 손으로 권호영의 어깨를 밀어낼 수도 없었다. 함부로 행동하면 전으로 돌아갈 수 없을 것만 같은, 강렬한 육감을 느꼈다. 그래서 눈동자를 경련하며 혼란스러운 감정에 녹아들 수밖에 없었다.

오늘의 권호영은 정말 이상했다. 누구한테 얻어터지고 오질 않나, 겉모습이 바뀌질 않나, 자책하는 얼굴을 보이지 않나.

‘그리고 이렇게…….’

사람이 착각할 만한 눈빛을 보이지 않나.

“왜…….”

“…….”

“그렇게… 봐.”

망설이다가 뱉은 말이란 고작 그런 것이었다. 긴장감이 턱 끝까지 차올라 딸꾹질을 삼킨 것처럼 말이 끊어져서 나갔다.

무언가 잘못됐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셨나. 둘 다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알코올에 전 머리가 삐걱대며 둔중한 소음을 냈다.

“…모르겠어요.”

내심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형한테… 시선이 가요.”

속삭이듯 말소리를 죽였지만,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문장을 밀어내는 숨결이 뜨겁게 달아오른 뺨에 달라붙었다.

저게 무슨 뜻인지 미처 다 받아들이기도 전이었다. 잠결에 소금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싸한 기운이 올랐다. 그다음에는 후끈거리는 열기가 치솟았다. 무심결에 손가락이 곱아들 것 같았다.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이 느껴지는데도 무언가에 속박된 것처럼 눈을 피할 수 없었다.

“……그거 좀… 위험하게 들리는데.”

단여명은 애써 장난스럽게 말했다. 동요한 얼굴을 숨기지 못했지만, 이상하게 흐르는 분위기를 끊어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권호영의 낯은 변함이 없었다. 떨리는 눈동자는 단여명의 얼굴 곳곳을 눈에 담았다. 마치 잠시라도 눈 돌리면 사라질 것을 좇듯이 애틋하게 느껴지는 눈빛이었다.

적어도…….

“…….”

단여명이 느끼기엔 그랬다.

단여명은 서서히 웃음기를 잃었다. 숨 막히는 정적이 두 사람을 휘어 감았지만, 누구 하나 먼저 목소리를 내지 않았다.

천천히 올라간 손끝은 입언저리에 남은 상처 위를 맴돌았다. 닿을 듯 말 듯한 손길에 권호영이 입술을 조금 안쪽으로 말았다. 팽팽한 긴장감이 끊어질 것처럼 아슬아슬하게 이어졌다.

“…싫으면 말해.”

단여명은 그의 뺨을 조심스레 감쌌다. 권호영이 놀란 숨을 삼킨 걸 느꼈지만, 움직임을 멈추지 않았다.

“한 대 때려도 좋고.”

가까워지는 얼굴 위로 잠시간 한 사람의 얼굴이 겹쳤다. 그러나 입술을 포개는 것과 동시에 상념은 깨끗이 지워졌다.

***

‘언제부터였지.’

언제부터 그가 일상에 녹아들었는지. 권호영은 제 아래에 놓인 얼굴을 보며 기억을 되감았다.

남자 애인이 있었구나. 아마 그 생각이 일종의 변환점이 됐던 것 같다. 말다툼을 벌이던 두 사람은 평범한 친구 사이라기엔 묘한 분위기를 풍겼다. 돌이켜 보면 왜 더 빨리 눈치 못 챘는지 모를 만큼 뚜렷하게도.

처음엔 그의 어머니가 했던 말을 따르고자 했다. 서로 의지하면서 잘 챙기라고 말씀하셨으니까. 운동하자고 제안한 것도 그와 같은 이유였다. 눈빛은 찼으나, 힘없이 내주고 있던 가느다란 몸이 마음에 걸렸다.

자신의 어머니도 책상 앞에 오래 앉아 있는 직종이었다. 자주 탈이 났던 한 사람과 겹쳐 보였던 점. 그리고 조금쯤 가까워져도 괜찮을 것 같아서. 그래서 충동적으로 같이 운동하자는 말이 튀어 나갔다.

어쩌면 모든 것을 변명 삼아 헛된 꿈을 품었을지도 모른다. 권호영은 추잡한 자신의 이중성을 알았다. 단여명이 쓴 책을 읽고, 그에 대한 환상을 키웠다. 지금껏 지켜본 모습도 줄곧 바랐던 인간상과 일치했으니 혹했던 마음도 없지 않을 것이다.

형은 좋은 사람이니까. 저와 다르게 어른스럽고, 포용력이 넓은 사람이니까. 어쩌면 군데군데 구멍 난 자신까지도 괜찮다고 해 줄 것 같아서. 누군가에게 한 번쯤 기대고 싶어서 그에게 다가가고 싶었던 걸지도 몰랐다.

대화가 많아진 나날이 지속되고, 그에 차차 생각이 굳어졌다. 단여명은 정말 따뜻한 사람이 맞았다. 말을 한마디 해도 사려 깊게 했으며 기본적으로 사람을 배려하는 태도가 배어 있었다. 그게 할 말을 찾느라 매번 뜸을 들이는 자신과 극명히 차이가 났다. 그럼 그게 되레 부끄러워져 괜히 말이 툴툴대며 나갈 때도 있었다.

‘왜? 지금이라도 연락드릴까?’

그렇게 말하던 목소리는 청렴했다. 그와 자신의 어머니가 엄연한 타인이란 걸 알았을 때의 기분이란 말로 형용할 수 없었다.

애써 모른 척하고 있던 불편한 얘기가 끄집어져 기분이 가라앉았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괜한 사람을 의심했다는 죄책감이 들었고 과거의 자신이 미련하게 생각됐다.

모든 게 정상적으로 흘러갔다면 일이 이렇게까지 틀어지지 않았을 텐데. 극단적으로 치우치는 생각이 과하다고 여기면서도 어디서 샘솟는지 모를 감정의 파고에 휩쓸렸다.

그리고 그를 등져 방으로 돌아왔을 땐 안심했다. 어머니가 악연이라도 되는 양 구는 자신을 채찍질하면서도 마음속 깊이 퍼진 것의 존재를 의심치 않았다. 그것은 깊은 안도감이었다.

권호영은 단여명의 집에 얹혀사는 동안 방을 구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말을 따라 3개월이란 시간을 채우고 나갈 생각이었다. 그리 짧지 않은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어째서 그 시간이 짧게 느껴지는지.

매일 저금통에 동전을 모으듯 상대의 목소리를 귀담아들었다. 아침이면 조금 가라앉은 목소리가 제게 말을 걸었다. 나긋한 말씨엔 어떤 악의도 담겨 있지 않았고, 온전히 닿은 눈길엔 따스한 온기가 묻어났다.

권호영은 그 온기를 야금야금 도둑질해 텅 비었던 구멍을 메웠다. 외로움이 깊어지는 밤엔 그 관심의 심도가 깊어지길 바랐다. 달이 지고, 단여명과 시답잖은 대화를 나눌 내일을 그리게 됐다. 처음 한국에 오길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우연이네요. 여기서 또 보고.’

그렇게 과 모임에 참석한 날이었다. 잠깐 눈을 붙이고 정신을 차린 직후 누군가 어깨를 짚어왔다.

‘머리 스타일이 바뀌어서 못 알아볼 뻔했잖아.’

고개를 돌리니 낯익은 얼굴이 보였다. 단여명에게 덤벼들었던 남자는 뻔뻔스럽게 다시 나타났다. 그는 이미 만취한 모습이었다. 술 냄새와 불쾌한 향수 냄새가 난잡하게 뒤섞여 코끝을 찔렀다.

‘잠깐 전화 좀 빌리죠? 여명이가 내 번호는 안 받아서.’

인상을 찌푸려도 남자는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자신과 같은 자리에 앉은 주변 이들을 둘러보며 강제하듯 입꼬리를 길게 늘렸다.

권호영은 순순히 자리를 옮겼다. 정말 전화를 빌려주고자 그와 동행한 건 아니었다. 무슨 이유에서든지 더 이상 도 넘는 행동을 하지 말라고. 그리고 전화를 받지 않는 건 거부의 뜻이니, 그 이상 형에게 치근덕대지 말라고. 그리 차분하게 경고하려고 했다.

‘걔가 어떤 애인지 알려 줄까?’

번호가 없다고 잡아떼니 남자는 무섭게 태도를 바꾸었다. 실실 웃는 낯으로 대뜸 핸드폰을 내밀기에 얼결에 그걸 넘겨받았다. 작은 액정 속에는 영상이 재생되고 있었다.

블랙박스로 보이는 영상은 화질이 좋지 않았다. 좁은 보조석에 앉은 한 남자와 그 위에 올라탄 또 다른 남자가 보였다. 뱀 같은 손이 뒷목을 타고 올라 작은 뒤통수를 감쌌다. 그러자 그것에 자극을 받은 또 다른 남자가 더욱 몸을 붙였다.

잠깐 새 드러난 옆태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단여명이 한 남자의 몸 위에 올라타 열정적인 입맞춤을 퍼붓고 있었다.

‘단여명, 걔 남자 좋아해.’

정말 좋은 사람인데. 그렇게 함부로 말할 사람이 아닌데.

‘게이 새끼라고.’

남자를 좋아하는 게 무슨 큰 오점이 된다고. 그는 오만하게 떠들었다. 악의에 받친 입꼬리가 혐오스럽게 비틀려 있었다.

남자는 비겁하고 멍청하기 짝이 없었다. 한 사람을 깎아내리고자 주변 사람을 이용하는 게 결국 자신의 얼굴을 더럽히는 꼴인 줄 몰랐다.

‘알고 있다고 하잖아.’

하지만 무엇보다 화났던 건 그가 남의 사생활이 담긴 동영상을 허락도 없이 소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피가 거꾸로 솟구치는 기분이었다. 눈앞이 붉게 물들고, 머리의 퓨즈가 끊기는 느낌을 받았을 땐 이미 늦은 뒤였다. 남자의 안면을 가격한 핸드폰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얼굴을 얻어맞은 직후 남자는 불같이 덤벼들었다. 가게 옆 골목에서 엎치락뒤치락하길 몇 차례, 권호영은 주도권을 선점했다. 씩씩대는 남자를 힘으로 찍어 누르니 운동할 때와 다른 아드레날린이 온몸을 휘감는 것이 느껴졌다.

‘씨발 새끼가! 놔! 이거 안 놔?’

처음 사람에게 손을 올렸다. 큰 죄를 범한 것 같아 심장이 쿵쾅거리는 만큼 주먹을 내질렀다. 맞는 것보다 사람을 칠 때 더한 두려움을 느꼈다. 핏물을 뱉은 남자가 표정 한번 볼 만하다고 비꼬았다.

권호영은 남자의 얼굴을 내려다보며 생각했다. 어쩌면 이 모든 게 안정적인 관계를 갈망하는 것에서 비롯된 욕망일 수도 있다고.

이러려고 만든 몸이 아니었고, 더욱이 주먹을 쓰는 요령도 몰랐다. 겁이 많은 개가 위협을 느껴 입질하는 것과 다를 게 없었다. 자신이 과격하게 행동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아는 한편 자세히 생각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공존했다.

어머니를 볼 낯이 없었다. 이 사실을 알면 분명 실망할 텐데. 자신을 한국으로 보낸 것도 모자라 끝내 내칠까 봐 겁이 났다. 그리고 남은 한 사람이 더 있었다. 형에게 이 일을 대체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몰라 가슴이 무거웠다.

그렇게 얼마나 주먹을 휘둘렀을까. 권호영은 곧 타의에 의해 몸이 끌어올려졌다. 남자는 거칠게 옷자락을 턴 뒤 욕지거리를 뱉고 사라졌다. 권호영은 떠나는 뒷모습을 눈으로 좇다가 주인을 잃은 핸드폰을 지르밟았다. 액정에 금이 간 핸드폰이 와자작, 소리를 내며 부서졌다.

자리로 돌아가니 동기들이 어떻게 된 일이냐고 소란을 피웠다. 권호영은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들의 목소리가 귀 밖으로 튕겨 나갔다. 머릿속을 가득 채운 것은 부드러운 목소리와 나직한 웃음소리였다.

지금 있었던 일을 숨기더라도 일단 형의 얼굴을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디서 튀어나온 건지 모를 충동이었지만, 앞뒤 재기도 전에 다리가 앞으로 움직였다. 그리 가게 밖을 나서려던 순간 익숙한 향기가 코끝을 감쌌다. 옆 사람을 잡아챈 건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아… 맞구나.’

동기들이 장난친 탓에 시야가 깨끗하게 트인 상태였다. 형이 왜 여기 있지. 그런 의문은 빠르게 걷혔다.

‘…머리를 넘겨서 못 알아봤어.’

사람이 어떻게 생겼는지에 대해 그리 큰 관심을 두지 않고 살아왔다. 그런데 이 사람은 얼굴도 참 자기처럼 생겼다는 생각이 무의식중 들었다.

‘…잠깐, 너 얼굴이 왜 그래?’

대강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누가 대차게 비웃어도 좋을 만큼, 크나큰 착각이었다.

새하얗고 매끈한 살결에 가장 먼저 시선을 빼앗겼다. 긴 겨울의 끝, 햇빛이 내려앉은 설경처럼 깨끗하고 맑은 색이었다. 그리 밝지 않은 조명 아래로 반듯한 콧날과 도톰한 입술 산의 그림자가 흰 살빛과 대비를 이뤘다.

이런 얼굴로 지금껏 제게 웃어준 것인가. 당연하고도 멍청한 생각이 머릿속을 쿵 울렸다.

‘누구랑 싸웠어?’

저건 아마도 걱정하는 표정이겠지. 유리구슬 같은 눈동자는 자신이 품은 감정을 투명하게 내비쳤다. 반가움, 놀라움, 그리고 분노. 마치 빛의 굴절도에 따라 색채가 달라지는 원석을 보는 것만 같았다.

놀라운 감정이 가시고, 가슴 속을 차지한 것은 왠지 모를 안도감이었다. 가슴을 졸인 지 얼마나 됐다고 마냥 괜찮을 것 같다는 안일한 마음이 들었다. 단여명이라면 무작정 자신을 탓하지는 않을 거라고. 내심 그렇게 믿고 있었던 탓이다.

감정의 격변이 찾아온 것은 한시름 더는 것과 동시다발이었다. 단여명이란 사람을 숙주 삼아 더러운 감정을 걸러내는 제가 거머리처럼 느껴졌다. 괜찮으냐는 말을 듣고 싶었나 보지. 그에게 이 모습을 보이면 분명 걱정해 줄 테니까.

화살의 끝은 아무 죄 없는 그에게 향했다. 당신 때문에 화나서 처음 사람을 팼어. 아무 전조 없이 닥쳐온 변화가 단여명의 잘못처럼 느껴졌다.

‘우리 술 마실까?’

대뜸 술을 마시자고 다정히 웃는 하얀 얼굴이 싫었다.

‘어떤 관계든 그럴 순 없는 거야.’

뜬금없는 물음에도 듣기 좋은 말만 흘려주는 그가 싫었다.

‘아무튼 한쪽이 힘든 건 그림이 아름답진 않잖아.’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사람인 그가, 마치 다 이해한다는 것처럼 떠드는 단여명이 원망스러웠다. 왜 모른 척 기대고 싶을 만큼 따뜻한 사람이어서.

그럼에도 그에게 자꾸만 다가가고 싶어 하는 자신이 있었다. 차 안에서부터 지금까지 줄곧 빛이 나서 눈길이 따라갔다.

지금까지 머리를 방치한 것이 문득 억울해졌다. 그동안 보지 못했을 그의 다양한 표정이 이제 와서 욕심이 났다. 그리 곁눈질을 못 참아 고운 옆태를 훔쳐보면 남자와 입 맞췄던 그의 모습이 불현듯 떠올랐다.

‘뭐, 같이 죽어도 좋을 것 같아. …그 사람이 원했던 결말이 아닐지라도.’

그의 뒤통수를 감쌌던 남자의 손을 기억한다. 만약 차 안에 같이 있던 남자가 나였더라면. 그런 충동과도 같은 생각이 머릿속을 비집었다.

‘어떡하지…. 넌 이렇게 몸 던져서 받아줬는데…….’

육체적인 끌림보다 더욱 복합적인 감정이었다. 영상 속, 그 자리가 탐났다. 단여명을 품 안에 들인, 다른 남자가 앉아 있던 그 좌석이.

뜬금없고, 개연성 없는 생각이란 걸 알았다. 그럼에도 올이 풀린 옷감처럼 줄줄이 이어지는 생각을 끊어낼 수가 없었다.

그와 가장 가까운 사이가 된다면, 누구도 가를 수 없는 관계 속에 자신이 들게 된다면. 그렇다면 제게 어떤 말을 들려주고, 어떤 표정을 보여줄까.

남은 시간은 2개월 남짓. 그 후는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잠시뿐이라도 좋았다. 그에게 속한 사람이 되고 싶었다.

“형한테… 시선이 가요.”

권호영이 처음 느껴 보는 원초적인 욕망이었다.

“…싫으면 말해. 한 대 때려도 좋고.”

엷게 빛나는 까만 눈동자를 보며 홀린 듯 속내를 터놓은 순간이었다.

‘뭐…….’

권호영은 곧바로 헛숨을 집어먹었다.

연방 눈을 감았다 떠 봐도 보이는 게 없었다. 왜 시야가 어두침침한지 자세히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말캉하고 촉촉한 것이 입술 위에 빈틈없이 맞붙었다. 잠깐 새 닿았다가 떨어졌는데도 온몸이 다 후끈거릴 만큼 뜨거웠다. 화한 것을 입에 댄 것처럼 입술이 얼얼했다. 혀로 입술을 축여 그 기운을 없애고 싶었지만, 그럴 정신이 남아나지 않았다.

넋을 놓고 있으니 보드라운 입술이 또 한 번 부딪쳐왔다. 말랑한 과일을 짓이기는 것처럼 모로 누르다가도 보드라운 감촉을 머금듯 아랫입술을 살며시 빨아들였다가 놓아주었다. 건조하기만 했던 입술이 타인의 액으로 축축이 젖었다. 그걸 기껍게 느끼는 양 물기를 머금은 점막이 다시 한번 제 입술을 달게 빨아들였다.

권호영은 눈도 깜빡이지 못했다. 그저 상대가 내주는 감각을 버겁게 받아들일 뿐이었다. 긴장한 숨소리가 지나치게 가까이 들렸다. 단여명이 숨을 고를 때마다 달큰한 술 냄새가 피어올라 정신을 어지럽혔다.

그렇게 퍼뜩 경련하려는 몸을 몇 번이나 잡아 눌렀을까. 다물린 입술에 무언가 살포시 닿았다. 그건 몇 번이나 부딪쳤던 입술의 감촉이 아니었다. 그것보다 더욱 말랑하고, 촉촉한…….

“자, 잠깐….”

권호영은 황급히 단여명의 몸을 밀쳐냈다. 하나로 맞물렸던 입술이 떨어지고, 싸한 정적이 흘렀다.

“그러니까…….”

애달픈 시선을 못 견뎌 변명조가 튀어나왔다. 갑작스러운 전개에 미친 듯이 심장이 쿵쾅거렸다. 권호영은 혼란한 마음을 진정하려 애썼다. 눈을 빠르게 감았다가 뜨니 뒤늦은 취기가 단번에 올랐다.

대답, 대답을 해야 하는데. 시야가 어지러워 생각이 제대로 정리되지 않았다.

“싫은 건… 아닌데.”

“…….”

“…이게 맞나 싶어요.”

마른침을 넘긴 권호영은 가까스로 목소리를 끄집어냈다. 왜 상황이 이런 쪽으로 흘러가는지 당황스러웠다. 왜 그렇게 보냐는 말에 단순한 심정을 고백했을 뿐인데…….

뭔가 오해할 말을 했나? 권호영은 제가 했던 말을 빠르게 돌이켜보았다. 지독한 취기와 난데없는 입맞춤의 여파로 머리가 고장을 일으켰다. 방금 전에 자신이 정확히 뭐라고 떠들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예쁘다? 따뜻하다? 빛이 난다? 뭐가 됐든 그중에 하나였던 것 같은데…. 아무튼 키스하자는 뉘앙스론 말하지 않았다.

솔직히 이런 상상을 안 했다면 거짓말이었다. 그런 동영상을 봤으니 이상한 쪽으로 상상되는 건 불가항력이었다. 제가 모르는 형의 모습이 낯설면서도 그런 모습도 알고 싶다는 욕심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건 잠깐의 상상에 그쳤던 것이었다. 감히 바랐다고 허투루 말할 수 없었다. 아니, 은연중에 생각했다고 하더라도 현실은 그보다 상당히 앞서나가고 있었다.

모든 게 낯설고 생경한 것투성이였다.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어서 무엇 하나 생각이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그리 혼란스러운 와중에 똑바로 보이는 건 발긋하게 열 오른 얼굴이었다. 항상 깨끗했던 눈 밑엔 엷은 꽃물이 들어 있었다. 술기운이라기엔 지독히 야한 모습이었다.

“틀릴 건 또 뭔데.”

처음 들어보는 단여명의 거칠한 목소리였다. 미미하게 찡그려진 눈썹은 흥분을 억누르는 기색이 완연했다. 작게 숨을 들이켠 그는 반쯤 감긴 눈으로 시선을 맞췄다.

“…키스하고 싶어.”

“…….”

“호영아….”

끝을 살짝 늘어트리는 목소리에 온몸의 털이 곤두서는 느낌을 받았다. 오싹, 소름이 돋아 양팔을 끌어안고 마구 비비고 싶었다. 그러나 몸은 묶인 듯 움직이지 않았다.

“입 벌려 줘.”

“…….”

“응……?”

긴 속눈썹이 미세하게 위로 들렸다. 마치 꽃에 앉은 나비가 팔랑이며 날아가는 몸짓처럼 여려 보였다. 하얀 손가락이 입술을 살며시 내리눌렀다. 그에 꾹 닫혀 있던 입술이 틈을 보이고 벌어졌다.

…거부할 수 있을 리가. 다시 뺨을 감싸오는 손길에 권호영은 의식적으로 눈을 감았다.

갓 쪄낸 카스텔라처럼 폭신한 것이 입술을 눌렀다. 그와 동시에 입안으로 말캉한 무언가가 들어왔다. 권호영은 질끈 눈을 감았다. 주춤거리며 안쪽에 숨으려는 혀끝에 축축한 게 닿았다. 미끄러지듯 같은 살덩이끼리 겹쳐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뺨에 둥그런 콧방울이 스쳤다. 얼굴이 뜨거운 터라 권호영은 그게 조금 차갑다고 느꼈다. 단여명이 고개를 옆으로 트니 입맞춤이 더욱 깊어졌다. 권호영은 입술을 연 채 가만히 입안을 내줬다.

직접적인 감각이 뇌리에 속속히 뻗쳐나갔다. 온통 뜨겁고 축축해 온몸의 피가 새로 생성되는 느낌을 받았다. 제 혓바닥에 문질리는 살덩어리의 감촉이 생생히 느껴지는 때면 척추뼈가 저릿 달아올랐다. 가슴속에서 격분과도 같은 것이 북받쳐 올랐다. 그다음엔 쿵쾅거리며 정신없이 박동하는 심장 소리가 들렸다. 마치 누군가가 귓가에 대고 북을 두드리는 것처럼 요란했다.

말랑한 살덩이는 이를 세워 깨물어 보고 싶을 만큼 부드러웠다. 조금이라도 힘을 줘 잘근 씹어버리면 단 과즙이 되직하게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상대도 같은 감각을 느끼고 있을 거란 생각에 몸이 훅 달아올랐다. 권호영은 있는 힘껏 목대에 힘을 줬다. 자칫 잘못하면 창피한 소리가 튀어 나갈 것 같았다.

서로의 뺨에 번지는 숨은 갈수록 뜨거워졌다. 춥, 추읍…. 입술을 맞물린 채 계속해서 혀를 얽으니 젖은 소리가 민망할 만큼 울렸다. 그 소리에 온 신경이 쏠려 바닥을 짚은 손에 자꾸만 힘이 들어갔다.

“숨.”

“하아, 하…….”

“숨 쉬어야지.”

입술을 뗀 단여명이 가까운 거리에서 속삭였다. 권호영은 반쯤 풀린 눈으로 그를 주시했다. 단여명은 희미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뻣뻣하게 구는 상대가 자못 귀엽다는 듯이.

그에 권호영은 알 수 없는 초조감을 느꼈다. 여유로워 보이는 상대를 보고 있으니 방금까지 느꼈던 그 감촉이 꿈결처럼 느껴졌다. 깊은 잠수를 준비하듯 숨을 한껏 들이마신 권호영은 이번엔 제 쪽에서 입술을 포갰다. 무언가에 이끌린 듯한 움직임이었다.

입술과 입술 사이에서 얽히던 살덩이는 끝내 힘 싸움에 밀려 안쪽을 내줬다. 권호영은 벌어진 입속으로 제 혀를 넣었다. 혀끝이 입술의 안쪽 점막을 쓸고 더욱 깊은 곳으로 밀려들어 갔다. 더운 숨이 끓는 열기의 근원지는 어디에 혀를 대도 살 끝에 축축하게 눌어붙었다.

욕심을 내어 혀를 한가득 밀어 넣으니 좁은 공간이 꽉 차는 게 느껴졌다. 입이 작은 단여명은 입 안쪽마저 좁았다. 공간을 넓히듯 혀를 뒤채니 그가 입을 더욱 커다랗게 열어줬다.

권호영은 머리가 좋았고, 그건 배움이 빠르다는 것을 뜻했다. 슬쩍 위쪽을 스친 것만으로도 품에 들인 몸의 호흡이 거칠어졌다. 권호영은 눈을 감은 채 그 반응에 집중했다. 슬슬 간질이며 입천장을 쓸어 주다가 제법 힘 있게 긁어내리니 뺨을 잡고 있던 손이 제 뒷목을 강하게 잡아당겼다.

그 손길이 뭐라고, 마른 장작에 던져진 불씨처럼 흥분이 걷잡을 수 없이 번졌다. 형세가 반전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처음엔 단여명 쪽에서 그의 얼굴을 감쌌다면 이번엔 권호영이 잡아먹을 듯이 상대에게 매달렸다. 단여명의 어깨와 바닥에 가 있던 양손은 어느새 그의 뺨과 아래턱을 붙잡고 있었다.

“으, 음….”

하나로 연결된 입속에서 기어코 희미한 신음이 샜다. 그에 권호영은 당장의 일 하나밖에 모르는 사람처럼 갈급히 키스하기 시작했다. 이래선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은 멀리 날아간 지 오래였다. 섞이는 타액이 달아 그걸 무의식중 급하게 받아넘겼다. 몸이 달아 미칠 것 같았다. 아무리 참아 보려고 해도 자꾸만 숨이 달뜨고, 목이 말랐다.

품 안에서 바르작대던 몸이 꿀꺽, 하고 목울대를 움직였다. 윤활액이 줄어드니 질척대는 소리가 조금 잦아들었다. 그러나 끊임없는 입맞춤에 다시금 젖은 소리가 터지는 건 금세였다. 타액이 입안에 한가득 고이면 미끄덩하게 맞비벼지는 물렁한 감촉, 타액을 삼키면 조금 까끌까끌해지는 감촉마저 모두 자극적이었기에 권호영은 끊임없이 감각만을 뒤쫓았다.

“움, 흡, 으응…!”

귓가를 울리는 신음이 한층 커다랗게 변했다. 입안을 제멋대로 뒤적이는 혀를 버겁게 받아내 주는 소리였다.

단여명 역시도 숨이 모자란지 거듭 으, 흡, 하며 정돈되지 않은 숨을 터트렸다. 권호영은 그의 턱을 더욱 아래로 당기며 혀뿌리가 빠듯하게 당길 만큼 혀를 썼다. 도망칠 곳 없이 품에 가둔 채인데도 그는 자꾸만 상대를 구석으로 몰아갔다.

가지런한 치열을 쓸다가 연한 살을 지분대는 혀 놀림이 노골적이었다. 뿌리를 단단하게 세운 혀끝이 입안 구석구석에 흔적을 남기듯 세밀하게 훑고 지나갔다. 간지러운 감각에 단여명의 혀가 발발 떨리면 권호영은 그새를 못 참고 그걸 부드럽게 휘감아 올렸다. 더욱 닿고 싶어 단여명이 입술 밖으로 혀를 내밀기라도 하면 권호영은 축축한 살덩이를 입술로 쭙 빨아들이다가도 흥분을 못 이겨 재차 혀를 쑤셔 박길 반복했다.

“우, 으흠…!”

순간 누워 있는 단여명의 몸이 위로 쑥 올라갔다. 집착적으로 입을 맞추던 권호영이 허리를 써 하반신을 푹 짓쳐 올렸기 때문이었다. 아래가 무섭도록 부풀어 괴로움을 해소하고자 벌인, 본능적인 허릿짓이었다.

서로의 아랫도리가 강하게 부딪치는 감각에 안구 뒤쪽에 별이 튀었다. 단여명은 허리를 파득 떨었다가 양옆으로 살짝살짝 비틀었다. 데구루루…. 유리병이 나뒹구는 둔탁한 소리가 들렸다. 버둥거리던 단여명의 발에 치인 술병이 바닥을 뒹구는 소리였다.

“윽…!”

키스에 집중하던 권호영은 순간 눈꺼풀을 번쩍 들었다. 불룩해진 하반신에 직접적인 자극이 느껴졌다. 무언가 옷 속에 발기한 성기를 아래에서 위로 진득하게 쓸어 올렸다. 감촉으로 보건대, 그건 사람의 손이었다.

권호영은 깜짝 놀라 혀를 빼냈다. 하아, 하아…. 밭은 숨을 씨근덕거리며 두 사람은 열이 도는 눈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빨갛고 통통해진 입술이 서로의 시야에 한가득 들어왔다. 손끝을 대면 금방이라도 핏물이 툭, 터질 것처럼 두 개의 입술은 불긋하게 팽창돼 있었다.

“…내 방으로 갈래?”

한참 뒤 하나의 입술이 열고 닫혔다. 권호영은 그 모습을 보다가 얼결에 대답을 흘렸다. 스스로가 무어라 대답했는지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였다.

툭, 온기를 품었던 옷이 방바닥으로 떨어졌다. 창밖에서 들어오는 불빛만이 켜진 방 한가운데 눈부시도록 새하얀 살결이 드러났다. 그를 지켜보는 이는 숨죽인 채 시선을 둘 곳을 찾아 헤맸다.

“…남자랑 해본 적 있어?”

한번 흐름이 끊긴 탓일까. 그도 아니면 이제라도 제정신을 되찾은 걸지도 모른다. 권호영은 한껏 경직된 모습이었다.

“……아니요.”

“…….”

“처음이에요.”

눈치를 보듯 잠깐 새 마주쳤던 눈동자가 다시 옆으로 돌아갔다. 단여명은 상의를 탈의한 채 침대에 올랐다. 금방이라도 뒷걸음질 칠 것만 같은 표정인데, 권호영은 얌전히 자리를 지켰다.

“여기.”

허벅지에 가만히 손을 올리자 놀란 근육이 움찔 수축했다. 손끝을 세워 꾹 눌러 보지 않아도 보통 단단한 게 아니란 걸 알 수 있었다.

“…나한테 보여줄 수 있어?”

그가 바짝 긴장한 게 피부로 실감됐다. 권호영은 평소와 다른 무표정을 지키고 있었다. 마치 천국과 지옥으로 향하는 갈림길 앞에서 주저하는 사람 같았다. 그런 것치곤 엷게 달아오른 살빛은 성적인 긴장감을 여실히 풍기고 있었다.

제법 답지 않은 표정을 지은 주제에 손을 대면 잎사귀를 마는 미모사처럼 온몸에 힘을 준 채였다. 그게 꽤 귀여워 단여명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보고 싶은데.”

“…….”

또렷한 목소리로 말을 전하자 권호영은 그제야 눈을 맞췄다. 올곧이 닿은 눈 속엔 망설임이란 감정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단여명은 아무 말 않고 기다렸다. 그만두려면 지금이 적기야. 둘 다 만취 상태였지만, 그런 생각은 어렴풋이 갖고 있었다. 은연한 뜻을 담은 눈빛이 소리로 형용되지 않은 채 둘 사이를 어지러이 맴돌았다.

결심을 마쳤는지 권호영은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조용한 방 안에 옷깃이 스치는 소리만이 들렸다. 바지를 내리는 손은 여느 남자들보다도 큼직했지만,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하의 탈의를 마친 그는 곧 브리프 밴드에 손가락을 걸었다. 다시 망설이는가 싶던 그는 옷자락을 슬며시 끌어 내렸다. 불룩한 형태가 속옷의 안쪽 면을 쓸며 굴곡진 음영을 만들어냈다. 속옷이 거의 골반에 걸쳐졌을 무렵이었다. 예기치 못한 순간에 거대한 살덩이가 허공을 때리며 퉁- 튕겨 올랐다.

“…하.”

단여명은 자신도 모르게 헛웃음을 뱉었다. 아마 소리를 죽여 웃었어도 워낙 몸이 가까이 붙어 있어서 상대에게 고스란히 들렸을 것이다. 역시나 권호영은 한숨 같은 웃음소리를 들은 모양이었다. 가만히 고르던 숨소리가 확 줄어들었다. 하지만 단여명은 그것을 안중에 두지 않았다. 아니, 그쪽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는 쪽이 더 정확했다.

“…되게 예쁘게 생겼어.”

거칠한 음모는 야생적인 수컷의 것이었다. 그 밑에 달린 물건 또한 그와 상응하는 생김새였다. 인간의 것이라는 게 믿기지 않을 만큼 커다랗고 굵직한 살덩이가 빳빳이 고개를 쳐들고 있었다. 그리 흉악스러운 크기를 가져 놓고, 새침을 떼듯 정작 색은 고왔다. 망울진 복사꽃을 닮은 엷은 분홍빛이었다.

한계까지 피가 몰려 끝으로 갈수록 색이 진해지는 모습이었다. 도드라진 핏줄을 따라 눈길을 올리니 옹송그린 주먹만 한 귀두가 보였다. 작게 팬 홈엔 맑은 액이 송골송골 맺혀 있었다. 그 끝을 쭉 빨아올리면 비릿한 내가 아니라 정말 달콤한 풋내라도 풍길 성싶었다.

“…그렇게 자세히… 보지 마세요.”

황홀해 마지않는 눈길을 알아챈 건지 시선을 받은 성기가 위로 꺼떡 튕겨 올랐다. 움찔거리며 배를 때리는 움직임마저 무게감 있었다. 그게 조금 창피했는지 권호영이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누군가 뺨을 찌른 것처럼 볼우물이 얕게 패었다.

“만져 봐도 돼?”

“잠깐, 잠깐만요.”

금방이라도 손을 댈 것처럼 보였는지 권호영이 다급하게 목소리를 냈다.

“심장이… 터질 것 같은데.”

그가 손으로 입가를 가린 채 웅얼대듯 말했다. 미처 손으로 다 가리지 못한 얼굴은 미약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단여명은 천천히 손을 움직였다. 상대가 놀라지 않게끔 그의 왼쪽 가슴팍에 조심히 손끝을 올렸다.

“…정말이네.”

단여명은 닿는 면적을 조금씩 넓혔다. 손끝, 손가락… 그리고 손바닥. 빠른 박동 소리가 손안에 그러잡혔다. 마치 그의 심장이 제 손바닥 안에서 춤을 추는 것만 같았다. 조금 느려지는가 싶다가도 또다시 쿵쾅거리며 정신없이 고동치는 게 피부 아래로 느껴졌다.

긴 시간 동안 시선이 얽혔다. 그게 왜 어색하거나 민망하지 않다고 느끼는지 두 사람은 알았다. 먼저 눈을 피한 사람은 단여명이었다. 눈길이 내려가는 곳을 따라 흰 손가락도 같이 타고 내렸다. 단단한 가슴팍을 타고 호흡에 맞춰 오르내리는 복부를 지난 손은 마지막 목적지에 달했다.

“아…….”

눈에 띄게 눈가를 경련한 권호영이 둔탁한 신음을 뱉었다. 단여명은 손안에서 느껴지는 감촉을 조용히 가늠해 보았다.

심지를 감싸고 있는 거죽은 제법 부드러웠으나, 그 속은 단단한 무언가로 꽉 채운 듯 옹골찼다. 그리고 손바닥의 살갗이 다 화끈거릴 만큼 뜨거운 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접촉 시간이 길어질수록 습한 기운이 후끈한 열기와 섞여 손가락 사이사이를 파고드는 듯했다.

“예쁘게 생겨서 크기는…….”

물건을 잡은 손에 힘을 조금 줘봤지만, 역시나 손끝끼리 맞닿기엔 거리가 영 안 돼 보였다. 커다란 좆은 성인 남자의 손에 다 들어오지 않는 크기였다.

“그런 말 좀…….”

권호영이 눈가를 찌푸린 채 중얼댔다. 참을 수 없는 부끄러움을 느끼는지 귓바퀴를 물들였던 붉은 기가 목덜미까지 스멀스멀 번졌다. 직접적인 말에 면역이 아예 없는 듯 보였다. 단여명은 가닥가닥 풀어지려는 정신을 다잡고자 어금니를 한 번 악물었다. 숫기 없는 그를 위해 입단속을 철저히 해야 할 시점이었다.

엄지로 귀두를 간질이듯 문지르니 딴딴한 허벅지에 발끈 힘이 들어갔다가 풀렸다. 다리가 벌어지려는 것을 필사적으로 잡아 누르는 듯했다. 그건 허벅지 바깥쪽에 둔 손 또한 같았다. 귀두를 문질러 줄 때마다 그의 손이 위로 들렸다가 다시 침대보를 짚기를 반복했다.

단여명은 자꾸만 실소가 터지려는 입꼬리를 잡아 눌렀다. 심장이 터질 것 같다고 말했나. 그건 자신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손바닥을 가득 채우다 못해 넘쳐나는 부피감이 가슴을 콩닥거리게 했다.

역시 제 눈은 틀리지 않았다. 보통 큰 것도 아니고, 비현실적으로 커다란 좆이었다. 크기도 그렇고 굵기도 흔히 말좆이라고 부를 법한 사이즈였다. 과장을 보태면 말보다 더 큰 짐승이 어울릴 듯싶었고.

거기다 이렇게 예쁘다니.

‘뒷일은…….’

모르겠다. 분위기에 휩쓸려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는 중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은 아무 생각도 하기 싫었다. 술에 전 머리가 팽팽 돌아가는 듯하다가도 스타카토처럼 끊어지길 반복했다.

자꾸만 입술이 바짝 타들어 갔다. 김선오와 했던 섹스가 마지막이니 꽤 오래 금욕했다. 당장이라도 그의 샅에 코를 처박고 냄새를 들이켜고 싶었다. 뭉텅이 진 정액을 한 움큼 입안에 머금었다가 목구멍의 점막으로 끈적하게 눌어붙는 점액을 느끼고 싶어서 엉덩이가 들썩거릴 정도였다.

“옆에 서랍 열어 볼래?”

아무래도 답삭 입을 갖다 대면 놀라겠지. 긴장해서 가만히 있는 것밖에 못 하는 애한테 전희를 바라는 건 무리였다. 그리고 이쪽 사정도 꽤 급했고.

“응, 그거.”

권호영이 침대 옆 서랍에서 길쭉한 통을 꺼냈다. 콘돔은 남는 게 있었으나, 그에게 맞는 사이즈가 없을 것 같았다. 평소 위생을 중요시하는 단여명이었지만, 지금은 머릿속 뒤편에 제쳐두었다.

단여명은 그가 서랍에서 젤을 꺼낼 동안 남은 옷을 전부 탈의했다. 그리고 곧바로 그의 몸 위에 올라탔다. 갑작스럽게 몸을 밀착하자 권호영이 놀란 숨을 훅, 들이마시는 것이 느껴졌다.

“넌 가만히 있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그리 속삭이며 단여명은 권호영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단단한 허벅지 바깥쪽에 무릎을 대고, 엉덩이를 허공에 띄웠다. 뒤이어 긴장을 이완하려는 듯 긴 숨소리가 쏟아졌다.

“…….”

뚜껑을 따는 소리 다음으로 질척이는 소리가 터졌다. 권호영은 이 소리의 정체를 알았다. 남자끼리 하는 법은 어렴풋이 깨우치고 있었다. 자세 때문에 잘 보이지 않았지만, 단여명은 자신이 들어갈 공간을 넓히고 있었다.

권호영은 미동도 하지 못하고 그 소리만 귀에 담았다. 이게 정말 맞는 일일까.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드문드문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혀끝을 감도는 단맛과 오동통한 혀를 휘감았던 지난 감각들이 심장을 고동치게 했다. 넘칠 듯 넘치지 않는 위태로운 흥분이 뱃가죽을 뚫을 듯이 꿈틀거렸다. 권호영은 이를 악문 채 단여명에게 손을 뻗고 싶은 욕구를 겨우겨우 참아냈다.

“읏…….”

질컥이는 소리가 유달리 커다랗게 터진 순간 단여명이 비음을 흘렸다. 숨을 천천히 머금었다가 뱉은 단여명은 다시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권호영은 힐긋 눈길을 내렸다. 둥그런 어깨가 발긋한 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런 표정 지으면 마음 약해지는데.”

잠시 뒤 권호영의 어깨에서 얼굴을 든 단여명이 그를 응시했다. 미미한 빛을 받은 얼굴은 겁에 질린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조금 화가 난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끈적한 젤로 축축이 젖은 손끝이 엉덩이 뒤쪽을 찌르던 성기를 건드렸다. 금방이라도 터질 듯 부푼 끝머리를 더듬거리다가 각도를 조금 아래로 당겼다.

“넣을게.”

단여명은 천천히 엉덩이를 내렸다. 숨을 한껏 들이켠 뒤 내쉬는 것에 맞춰 뒤에 힘을 풀었다. 촘촘하게 주름 잡혀 있던 입구가 두꺼운 선단에 밀려 활짝 이완됐다. 젤의 도움을 받아 불뚝 솟은 기둥이 그사이를 느릿하게 파고들기 시작했다.

아……. 두 사람은 동시에 탄식했다. 겉보기엔 구멍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처럼 진입했지만, 실상은 둘 다 빠듯한 감각을 느끼는 중이었다.

“너무…… 큰데.”

단여명은 가쁜 숨을 색색 골랐다. 아직 초입임에도 불구하고 구멍이 찢어질 것처럼 벌어진 것이 느껴졌다. 자칫 잘못해서 뒤를 조이기라도 하면 하얀 시트 위에 피가 낭자하게 될 것만 같았다.

삽입은 지루할 정도로 천천히 이루어졌다. 엉덩이를 띄웠다가 도로 체중을 실어 주저앉는 움직임이 반복됐다. 금세 이마에 식은땀이 맺혔다. 어디까지 넣었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귀두는 넘긴 것 같았다. 배 속에서 느껴지는 압박감이 제법 묵직했다.

맞지도 않는 곳에 거대한 것을 욱여넣는 일이란 생각보다 힘겨웠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고통만 느껴지는 것은 아니었다. 두꺼운 좆은 내장을 압박하다시피 눌러 단순한 움직임만으로도 민감한 지점을 건드렸다. 아릿한 아픔에 온몸이 저려올 만하면 뭉툭하게 발달한 귀두 갓이 그를 달래 주듯 쾌락점을 긁고 지나갔다. 의도치 않게 연달아 그 지점이 슬슬 문질리면 단여명은 소리를 죽인 채 위태로이 세운 무릎을 떨었다.

그토록 바랐던 순간이었고, 더욱 강렬한 쾌락에 사로잡히고 싶었다. 하지만 무식한 크기의 성기를 막상 배 속에 품어 보니 아연한 기분이 몰려왔다. 숙련자면 몰라도 초짜는 시도도 못 해봤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자신도 그 숙련자의 기준에 들지 못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함께였다.

뒤를 더 풀었어야 했는데. 마음이 급해서 섣부르게 행동했다. 단여명은 뒤늦은 후회를 누르며 권호영의 뒷목에 팔을 둘렀다. 자신만큼이나 애를 끓이는지 그의 피부에도 송골송골 땀이 맺혀 있었다.

“하아, 읏…….”

참아 보려고 해봐도 자꾸만 숨이 달떴다. 상대는 느릿한 피스톤질이 성에 안 찰지 몰라도 단여명은 꽤나 아슬아슬한 감각을 느끼는 중이었다. 전립선이 감질나게 문질리는 건 둘째 치고, 아랫배를 꽉 채운 팽만감 자체에 흥분을 느꼈다. 그리고 그토록 바랐던 순간을 이루고 있다는 정신적인 흥분도 이성을 마비시켰다.

다시 한번 용기를 내어 엉덩이를 내린 찰나였다. 좆의 둘레에 맞춰 내벽이 확장되는 것과 동시에 성마른 감각이 전신을 빗발쳤다. 정신없이 도망치는 길에 누군가에게 뒷덜미를 확 붙들린 것처럼 갑작스럽고도 예상치 못한 순간이었다.

“……!”

헉, 하고 급한 숨이 터졌다. 절로 고개가 아래로 푹 숙여졌다. 사정감을 몰아내려고 애써 심호흡하던 때였다. 커다란 손아귀가 허리를 덥석 붙들었다. 쏙 패인 옆구리를 제법 단단히 붙든 손은 그리 크지 않은 힘을 가했지만, 붙들린 몸은 한껏 긴장한 상태였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놀라 무릎이 미끄러지는 건 찰나의 순간이었다.

“아…!”

좆이 조금 깊숙이 박혔다는 생각을 마치기도 전이었다. 눈앞에 보이던 것들이 차츰 뿌옇게 질렸다. 단여명은 정신없이 속눈썹을 깜빡였다. 아무리 눈을 깜빡여도 앞에 보이는 게 없었다. 눈시울이 화끈거리더니 만지지도 않은 성기가 위아래로 꺼떡이며 허연 액을 줄줄이 터트렸다.

“읏, 으으…!”

총천연색의 감각들이 혈류를 타고 머릿속을 색색이 물들여 놓았다. 이를 악물어 보았지만, 앓는 소리가 제멋대로 쏟아졌다. 비대한 살덩이를 빠듯하게 문 내벽이 요란스레 뒤틀렸다. 아직 뒤가 제대로 풀어지지 않아 힘을 주면 찢어질 듯한 감각을 느끼는 중이었다. 그러나 주인의 통제를 벗어난 구멍은 더한 감각을 보채듯 딱딱한 좆기둥을 옴쭉옴쭉 물어 당겼다.

“하아, 흐….”

얼굴에 확 열이 몰렸다. 단여명은 사정을 마친 직후 권호영에게 몸을 더욱 붙였다. 전신에 퍼져나간 붉은 기운은 하얀 손끝과 발끝을 구석구석 물들였다.

“…형.”

“…….”

“배가 축축해요.”

낮은 목소리가 땀이 맺힌 귀 근처의 살을 간질였다. 단여명은 말없이 그의 어깨에 얼굴을 파묻었다. 자신의 얼굴과 토정을 마친 성기가 보이지 않게끔.

‘…미친.’

이걸 뭐라고 생각할까. 웬만한 일로 수치를 느끼지 않는 자신인데, 이번 건 정말 수치스러웠다. 있는 대로 큰소리는 떵떵 쳐놓고, 얼마나 움직였다고 혼자 사정하다니.

“잠깐, 얼굴 좀 보여주세요.”

조심스레 올라간 손이 옆으로 드러난 뺨을 감쌌다. 단여명은 마지못해 얼굴을 들었다. 촉촉하게 젖은 눈시울이 상대의 시야에 들어왔다. 권호영은 조용히 목을 울렸다.

“…제가 할까요?”

“…….”

“제가 할게요.”

그가 엉덩이를 들어 올려 자세를 반전시켰다. 단여명을 침대에 눕힌 권호영은 그의 허벅지 안쪽을 조심스레 잡았다. 다리를 벌려 주자 권호영이 그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천, 천천히….”

뭉툭한 선단이 주름을 쿡 찌르는가 싶더니 입구를 벌리고 들어왔다. 빼놓은 지 얼마나 됐다고 그새 안쪽이 조개처럼 다물린 게 느껴졌다. 두꺼운 좆은 배 속이 홧홧할 만큼 뜨겁고, 쇳덩이처럼 딱딱해 어깨를 움츠러들게 했다. 바닥에 납작 엎드린 초식동물이 된 것 같았다. 포악한 짐승이 송곳니를 보이기도 전에 겁부터 답삭 집어먹은 것처럼 구멍이 잘게 떨렸다.

“많이 아파요?”

단여명은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울잖아요.”

권호영이 눈가를 쓸었다. 그의 손끝에서 물기가 묻어났다. 단여명은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아니야…. 좋아서… 읏, 좋아서 그래.”

넓은 어깨를 잡아당기니 권호영은 순순히 몸을 내줬다. 그는 상반신을 맞붙인 채 허리만 움직여 삽입을 강행했다. 커다란 귀두가 점막의 사이를 비집자 좁은 안쪽이 서서히 열리는 것이 느껴졌다.

“어디, 어디까지….”

“아직 반도, 안 들어갔는데….”

두 사람 다 고통과 쾌락을 동시에 느끼느라 간간이 앓는 소리를 흘렸다. 아직 제대로 된 행위를 하기도 전인데, 둘 다 온몸이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결국 젤 반 통을 들이붓고 나서야 삽입이 조금 더 수월해졌다. 단여명이 허리를 약간 비트는 것만으로도 질척이는 소리가 터졌지만, 두 사람 다 그 소리를 못 들은 체했다.

“더 넣을 수 있을 것 같아요.”

“더, 남았어…?”

“손가락 두 마디 정도….”

권호영이 접합부를 흘깃 내려다보며 답했다. 단여명은 속으로 헛웃음을 흘렸다. 배 속이 더부룩해서 자꾸만 발끝이 굽어질 지경인데, 아직 더 남았다니. 뒤를 제대로 풀지 않은 자신의 잘못도 있었지만, 질릴 정도로 큰 권호영의 죄도 있었다. 계속 꿈꿔왔던 바람이었으나, 삽입만으로 이리 시간이 지체되니 보통 진이 빠지는 게 아니었다. 역시 현실과 상상은 다른…….

“……! 헉…!”

그 순간 상념이 깨끗이 날아갔다. 권호영이 이제까지 없었던 세기로 허리를 푹 쳐올렸다. 불식간에 커다란 몽둥이가 깊은 안쪽을 비집어 올렸다. 아무리 구멍이 흠뻑 젖었어도 사람보다는 짐승의 생식기와 비슷한 것을 한 번에 받아내기란 무리가 있었다.

묵직한 충격에 내벽이 콰악, 수축했다. 거대한 부피를 못 이겨 바르르 떨리다가도 충격의 여파를 견디려는 양 움찔움찔 조여들길 반복했다.

“아, 호영, 아닌, 아닌 것 같아….”

단여명은 급히 그의 가슴팍을 밀어냈다. 의식할 새도 없이 눈물이 왈칵 터졌다. 머릿속에서 위험을 알리는 빨간 불빛이 욍욍 돌아갔다.

“너무 커, 잠깐, 잠깐만…. 윽, 흐….”

“하아….”

더운 숨을 길게 쏟아낸 권호영이 무섭게 미간을 일그러트렸다. 그 역시도 아래가 잘릴 듯한 압박감을 느끼는 듯했다. 훅, 숨을 뱉은 그는 흥분을 가라앉히려고 애쓰는 기색이었다.

“다 안 넣을게요.”

“…….”

“응…? 눈 좀 떠 보세요.”

권호영이 단여명의 뺨을 돌려 잡았다. 구멍 깊숙한 곳에 파묻힌 좆이 핏대를 세운 채 쿵쿵 맥박 뛰는 게 느껴졌다. 그리 흉악하게 아래를 부풀려 놓고, 가까운 거리에서 들리는 목소리는 사뭇 다정했다.

단여명은 눈꺼풀을 천천히 들었다. 시선이 맞은 즉시 권호영이 고개를 숙였다. 그가 상체를 숙이자 그 아래에 깔린 몸이 커다란 육신에 삼켜지듯 사라졌다.

입술 위에 입술이 가볍게 얹어졌다. 그는 입안의 여린 살로 단여명의 입술을 머금었다가 혀끝을 세워 폭신한 입술을 문질렀다. 입맞춤이 깊어질 때면 혀끼리 스치기도 했지만, 권호영은 전처럼 진득하게 키스하지 않았다. 성급히 터진 울음을 달래듯 부드러운 키스였다.

둔탁한 고통이 가시니 그 빈자리에 다시 열기가 차오르기 시작했다. 단여명은 혀를 내어 그의 입술을 쿡 찔러 보았다. 반응은 노골적일 만큼 빨리 왔다. 비좁은 점막 사이에 끼어 옴짝달싹 못 하고 있던 좆이 벌떡거리는 게 느껴졌다.

“…이제 움직여도… 될 것 같아.”

입술을 살며시 떼어낸 단여명이 조용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에 틈을 보이던 입술이 일자로 굳게 다물렸다. 권호영의 눈가에 미세하게 힘이 실린 그 순간이었다.

“아, 흑…! 아아아!”

오랜 시간 한 몸처럼 딱 달라붙어 있던 좆이 생살을 잡아끌며 뒤로 빠져나갔다. 기다란 성기는 뽑아내는 것마저 오랜 시간이 소요됐다. 귀두 갓에 걸려 입구의 주름이 둥그렇게 융기됐을 때 묵직한 성기가 다시 안을 퍽 치고 들어왔다.

“흐으… 허억-!”

배 속에 화르륵 불길이 일었다. 부드러운 움직임이었으나, 비양심적일 만큼 커다란 것을 받아내는 입장에선 달리 느꼈다. 추삽질은 한 번이 되고, 두 번이 됐다. 연방 저들끼리 들러붙으려는 점막을 짓치고 단단한 좆이 매섭게 파고들었다.

찌걱, 쩍, 쩍…! 질 낮은 물소리가 터졌다. 젖은 굴속을 헤집으며 농탕질을 피울 때마다 마찰의 압력에 삐져나온 젤이 서로의 샅을 적셨다. 구멍이 어느 정도 풀린 걸 느끼자마자 권호영이 무섭게 피치를 올리기 시작했다. 그동안의 인내를 한 번에 보상받는 격으로 허리를 푹푹 처박았다.

“읏, 응, 흐으, 으, 읏!”

신음을 참을 방법이 없었다. 그건 몸속을 올려 치는 쾌감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끝이 뭉뚝하게 닳은 낫이 구멍 속을 득득 긁는 것만 같았다. 내벽의 주름 사이마다 새어든 윤활제 덕분에 미끄럽게 마찰됐으나, 느껴지는 감각은 전혀 온순하지 않았다. 심장이 터질 듯한 고양감에 입이 커다랗게 열렸다. 그저 추삽질의 속도가 빨라진 것뿐인데, 무식한 성기는 예민한 부근을 온통 짓누르며 움직였다.

“하으, 응, 후으…! 아! 아, 아아!”

절정에 잡아먹히는 건 순식간이었다. 파드득 몸을 떤 단여명은 턱을 힘껏 위로 쳐들었다. 가련하게 몸뚱이를 떤 자지가 갈라진 복근을 툭툭 두드리며 정액을 쏘아냈다. 단여명은 입을 크게 벌린 채 허리를 비틀었다. 빠르게 닥친 절정이 당황스럽다고 생각하면서도 눈에 힘이 풀렸다.

“잠깐, 헉, 잠깐마, 안…!”

제가 사정한 걸 모르는지 추삽질의 속도가 전혀 늦춰지지 않았다. 다리가 꼬이더니 눈물이 줄줄 새어 나왔다. 절정의 감각이 꺼질 새 없이 강렬한 성감이 덧씌워졌다. 뾰족한 송곳이 사정없이 아랫배를 찌르는 기분이었다. 쾌락과 고통 사이에 걸쳐진, 한 끗 차이의 감각이었다.

“잠, 잠깐… 흑! 응, 호여, 호영아…. 읏, 더, 안 돼……!”

단여명은 상대의 어깨에 절박하게 매달렸다. 모래성이 파도에 씻겨 내려가는 것처럼 단여명은 맥을 못 췄다. 파도는 그저 제 할 일을 하는 것뿐인데, 모래성은 그것에 큰 영향을 받아 속절없이 무너져 내렸다.

“안에… 너무, 부드러워요.”

“흐으……! 헉…!”

“좋아서 미칠 것 같은데…. 원래 이런 거예요?”

작게 중얼거린 권호영이 보드라운 뺨에 입술을 묻었다.

“원래 이렇게, 하아, 좋아요?”

세기는 약해졌으나, 턱턱 치받는 허릿짓은 쉼 없이 계속되는 중이었다. 단단하게 불거진 좆이 구불구불한 속살을 한껏 끌어내리며 빠져나갔다가 다시 짓쳐들어왔다. 잠깐 방심할 만하면 몸속을 꿰뚫는 허릿심이 예고 없이 강해졌다. 그럴 때면 단여명은 몸을 빳빳하게 굳혔다. 아랫구멍이 뻐근하다 못해 배 속의 장기가 다 터져나가는 기분이었다.

“형….”

허리 아래론 제멋대로 굴면서 권호영은 강아지가 애교를 부리는 것처럼 뺨에 입술을 비벼왔다.

“대답해 주세요.”

눈물로 흠뻑 젖은 살결에 입술을 붙인 채인데도 그는 상관없다는 태도였다.

“응, 나도, 읏, 너무, 너무 좋아….”

떨리는 목소리로 답한 단여명은 그에게 엉겨 붙었다. 제 몸을 쳐올릴 때마다 꿈틀거리는 견갑골을 손으로 더듬다가 그의 등을 힘껏 끌어안았다.

“흐으, 응! 흣, 우, 으응, 흐…!”

추삽질에 다시 불이 붙는 건 순식간이었다. 감각이 하향곡선을 그리다가 급물살을 탄 듯 거세게 고조됐다. 계속 벌려내도 자꾸만 좁아지는 내벽을 질책하듯 성기가 여린 속살을 가차 없이 갈랐다. 구멍이 옴츠러들 새도 없이 활짝 이완됐다. 딱딱한 좆 끝이 본의 아니게 전립선을 찌르면 단여명은 허공에 발돋움한 채 소리 없는 비명을 내질렀다.

“하으, 으…!”

위기는 금세 찾아왔다. 단여명은 무의식적으로 두툼한 허리통에 다리를 꽉 감았다. 커다란 성기가 더욱 깊이 들어오는 게 두려우면서도 움직임을 제지하려면 그 방법밖에 없었다. 또다시 혼자 사정하지 않기 위한 발악이었다.

쾌락을 못 견뎌 요란을 떠는 몸뚱이의 사정을 눈치챘는지 권호영이 템포를 조금 늦췄다. 그 또한 연신 흉곽을 크게 부풀리며 씨근덕대는 숨을 토해내는 중이었다. 자꾸만 흐려지려는 이성을 억지로 잡아놓으며 권호영은 얼굴을 내렸다.

땀이 맺힌 피부에 서투른 입맞춤이 쪼아졌다. 의식적인 행동은 아니었으나, 틈틈이 허리를 돌려 서로의 열기가 식지 않게끔 조절했다. 그럼 떨림이 잦아든 단여명이 눈을 맞춰왔고, 권호영은 그와 시선을 얽은 채 허릿짓을 재개했다.

“형, 잠깐…….”

그리 얼마나 서로의 몸을 탐했을까. 권호영도 사정감을 느끼는지 허리를 물려 성기를 빼려고 했다. 단여명은 어설프게 벌리고 있던 허벅지를 그의 허리통에 감았다. 발뒤꿈치에 힘을 줘 그가 허리를 빼지 못하게 끌어당겼다.

“그냥, 그냥 해….”

지금이 좋아. 희미한 목소리가 귀엣말을 흘려 넣었다. 그에 권호영의 낯빛이 한순간에 붉으락푸르락해졌다. 이를 억세게 문 그는 아래턱에 빠듯하게 힘을 실었다. 선이 굵은 목덜미에 새파란 힘줄이 선명하게 돋아났다. 그와 동시에 허릿짓의 속도가 눈에 띄게 빨라졌다.

“흐, 으읏… 응! 흐으, 응, 으, 아아, 아, 아!”

철퍽, 퍽, 퍽, 퍽! 질퍽거리는 정사의 소음이 번잡스레 울려 퍼졌다. 피스톤질이 감당할 수 없이 빨라지는가 싶더니 짐승 같은 숨소리가 터졌다. 권호영은 허리를 활처럼 써 있는 힘껏 접합부를 밀착시켰다. 제 씨를 깊숙이 뿌려 넣기 위한, 본능에 따른 행동이었다.

“으, 끄흐…!”

체급 차이가 나는 몸은 권호영이 밀어붙이는 대로 밀려 허리가 반으로 접혔다. 배가 터질 듯한 압박감에 단여명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어느 때보다 깊이 침범한 좆이 뜨겁게 맥박치더니 걸쭉한 좆물을 여과 없이 토해냈다. 배 속이 흠뻑 젖어 드는 감각에 단여명은 가벼운 절정감을 맛봤다. 아랫배를 치고 든 성감은 오싹오싹 피부를 타고 올라 두피를 간질였다.

흐으, 으……! 단여명은 커다란 품속에 갇혀 전신의 근육을 펄떡거렸다. 사정을 마친 권호영이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뽁, 하고 코르크 마개를 따는 듯한 소리와 함께 육중한 성기가 구멍 밖으로 빠져나갔다.

“흐으, 헉…!”

갑작스레 물건을 빼내선지 아니면 그 별거 아닌 자극에도 느낀 건지. 단여명이 휙 몸을 돌렸다. 당장이라도 무릎걸음으로 기어갈 듯한 자세를 취한 채 여운이 가시지 않은 숨을 갈급히 쏟았다.

흰 엉덩이 사이로 동그랗게 벌어진 구멍이 옴찔옴찔 사이를 좁혔다. 주름 새로 잠깐씩 드러나는 안쪽 살은 마찰열에 한껏 붉어진 채였다. 그건 권호영의 물건도 같았다. 한번 사정했음에도 강도를 잃지 않은 남성기는 처음보다 좀 더 진분홍빛을 띤 채 흠뻑 젖어 있었다.

권호영은 매끄러운 등줄기를 눈에 담으며 천천히 웃옷을 탈의했다. 땀에 전 티셔츠를 침대 아래로 벗어 던지니 위협적이도록 탄탄한 상반신이 드러났다. 넓게 각 잡힌 어깨는 장정 두 사람을 메어칠 듯 딴딴했다. 납작한 아랫배에 쪼개진 근육은 그가 숨을 고를 때마다 깊은 음영을 만들어냈다.

방 안에 빛이라곤 창밖에서 새어드는 달빛밖에 없었다. 그러나 눈앞에 있는 걸 식별할 정도는 됐다. 쏟아지는 달빛처럼 새하얀 몸은 군데군데 도홧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사슴처럼 길게 빠진 목덜미가 보였다. 작은 날개 뼈는 그가 숨을 내쉬는 것에 맞춰 봉긋하게 도드라졌다가 그 안으로 숨어들었다. 둥그렇게 떨어지는 엉덩이의 선을 보던 권호영은 홀린 듯 그사이에 제 것을 꽂아 넣었다.

“아…!”

단여명이 황급히 뒤를 돌아보았다. 놀란 눈이 휘둥그레 뜨여져 있었다. 물막이 어린 눈동자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어트릴 것처럼 촉촉했다.

“아직…….”

곧바로 턱을 돌려 잡고 입을 맞췄기에 권호영은 그의 말을 끝까지 듣지 못했다. 앞선 정사로 아랫구멍은 무르녹아 있었다. 성기를 단번에 깊숙이 넣고 안을 휘젓자 단여명이 신음을 쏟았다. 제 입안에 흘러 고이는 비음은 연약하고도 달았다. 권호영은 상대의 타액을 몰래몰래 도둑질하며 말캉한 살덩이를 부드럽게 녹여 먹었다.

키스하며 성기를 주르륵 뽑아내자 주름 사이로 희뿌연 액이 뭉텅이째 흘렀다. 결합부에서 흐른 체액이 제 허벅지를 적시는데도 권호영은 허릿짓을 멈추지 않았다.

“천천, 으, 흡…!”

잠깐 입술이 떨어진 틈을 타 단여명이 다급히 외쳤다. 위아래를 동시에 유린하는 살덩이를 받아내느라 숨이 딸리는 모양새였다. 전혀 빠르지 않은 피스톤질을 하는 중에도 단여명은 자꾸만 침대로 엎어지려고 했다. 권호영은 단여명의 가슴팍에 팔을 둘러 제 쪽으로 당겼다. 둘 다 무릎으로 침대를 디딘 채 상체를 세운 자세였다.

가슴팍을 지분대니 손가락에 작은 알갱이가 걸렸다. 자그마한 돌기는 말랑하고 보들보들했다. 권호영은 그걸 부드럽게 당겨 보았다.

“음, 흐…!”

단여명이 등허리를 유연하게 구부리곤, 엉덩이를 바들바들 떨었다. 어쩐지 더 만져 달라는 듯 보여 권호영은 손가락 사이에 유두를 잡아 끼웠다. 간을 보듯 살살 굴리다가 제법 강하게 쭉 당기니 입안을 울리는 소리가 격해졌다. 만지는 방법을 바꿀 때마다 신음소리가 달라졌다. 손끝으로 튕기며 괴롭히다가 불식간에 젖꼭지를 꼬집어 올리면 단여명은 어쩔 줄 몰라 하며 허리를 돌렸다.

“아, 만, 만지지…….”

가슴팍을 더듬던 손은 더욱 은밀한 비부를 파고들었다. 단여명은 깜짝 놀라 권호영의 팔뚝을 잡아챘다. 남자는 처음이라던 그가 거부감 없이 앞에 손댈 줄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또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뒤를 쑤시는 것을 겸해 자지까지 만져지면 제정신으로 버틸 자신이 없었다.

“형은 제 거 만져놓고….”

그가 손에 들어온 살덩이를 제법 힘 있게 쥐었다. 압박이 가해진 자지 머리가 더욱 불그스름하게 익었다.

“아…!”

“저는 안 돼요?”

언뜻 부루퉁하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여기 왜 이렇게 젖었어요?”

권호영은 순수한 의도로 물은 것 같았으나, 단여명은 약간의 수치심을 느꼈다. 자신보다 훨씬 경험이 적어 보이는 데다가 6살이나 어린 애한테 쥐락펴락 당하고 있으니 창피함을 느낄 만도 했다.

“만져 준 기억이 없는데….”

뜨거운 숨이 귓가의 솜털을 끈적하게 적셨다. 단여명은 조심스레 눈을 내렸다. 손이 하도 커다란 탓인지 그의 손아귀에 잡힌 성기가 유난히 덜 여물어 보였다.

“형, 진짜…….”

권호영은 뒷말을 끝마치는 대신 움직임을 보였다.

“응, 흐앗…!”

뜨거운 손에 잡힌 성기가 제멋대로 희롱당하기 시작했다. 그는 기둥을 주물럭거리다가 단여명이 그랬던 것을 흉내 내 선단을 문질렀다. 이미 전립선 액을 흥건히 쏟아낸 뒤라 귀두는 미끈미끈하게 젖어 있었다. 손가락을 붙였다가 떼어내니 끈적한 액이 긴 은사처럼 죽 늘어지다가 끊겼다. 그 모습을 어깨 너머로 내려다보던 권호영은 맑은 액을 배출하는 요도구를 부드럽게 파헤쳤다.

“아, 흐으, 흐…!”

민감한 구멍이 갉작갉작 긁히는 자극에 가느다란 목소리가 유달리 높아졌다. 한층 선명해진 신음소리를 따라 자그마한 요도구도 정신 사납게 개폐했다. 곧 정액을 밀어 올릴 듯 구멍을 빠끔거리는데도 사정을 참아내는 기색이 역력했다.

그걸 지켜보던 권호영은 손짓을 달리했다. 끝머리를 괴롭히는 걸 멈추고, 자지 기둥을 휘어잡아 질컥질컥 올려붙이기 시작했다. 보통의 남자라면 쾌감을 느끼는 정석적인 방식이었다.

으응, 흐, 으읏…! 단여명은 커다란 품 안에 갇혀 허리를 배배 꼬았다. 앞에서 느껴지는 쾌감에 집중하다가 부족감을 느껴 스스로 엉덩이를 흔들기도 했다. 그러나 몸이 빈틈없이 맞붙은 채여서 요분질이 용이치 않았다. 배 속을 팽팽하게 부풀려 놓은 성기가 막상 가만히 있으니 애가 달아 미칠 것 같았다.

“아, 갈 것…! 흐, 앞에 말고… 뒤에, 뒤에 움직여, 줘….”

응? 부족해…. 허벅지를 볼품없이 떨면서도 단여명은 그의 치골에 엉덩이를 눌렀다. 까슬까슬했던 음모는 접합부에서 흐른 체액으로 푹 젖어 있었다. 그곳에 엉덩이를 비비적대며 시선을 맞추자 권호영이 앞을 만지던 손을 멈췄다.

“……! 아!”

그가 무어라 대답한 것 같기도 했다. 하지만 단여명은 그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허리를 움켜쥐는 손힘을 느끼는 즉시 퍽! 소리가 커다랗게 울렸다. 뜨거운 살몽둥이가 몸속을 정통으로 가격했다.

“아흐…! 으, 응, 흐으, 으!”

쯜걱, 쩍, 퍽, 퍽! 모양에 맞는 형틀을 찍어내듯 그가 우악스럽게 좆을 처박기 시작했다. 단여명은 고개를 숙인 채 맥없이 흔들렸다. 허리를 받쳐 주는 손아귀의 힘은 강했으나, 올려 치는 몸짓이 더욱 거칠어 눈앞이 어지러이 부서졌다.

흥분이 거세진 권호영이 사과를 베어 먹듯 이를 세워 뒷목의 살갗을 쭉 긁어내렸다. 소름이 끼쳐 단여명은 고개를 획 쳐들었다. 뒷목에 입을 대기 적합하지 않아지자 권호영은 옆으로 드러난 목덜미에 입술을 붙였다.

이를 세워 잘근잘근 씹는 행위는 이갈이하는 강아지가 치는 장난 정도의 세기였다. 그러나 구멍을 된통 들쑤시고 있는 탓에 우연찮게 피부와 치아가 엇갈리듯 긁혔다. 길게 빠진 잇자국은 짐승의 송곳니에 긁힌 양 흰 목덜미에 지저분한 자국을 남겼다.

피하려고 어떻게 고개를 돌려봐도 그가 뺨을 잡아 와 다시 원위치로 돌려놓았다. 단단한 치아가 목덜미의 살을 죽죽 긁어 놓으면 목이 쉬도록 소리를 지를 수밖에 없었다.

“좋, 흑, 으…! 흐, 좋아, 아, 으응, 으!”

단여명은 거듭 눈을 감았다가 떴다. 깜빡거리는 시야 너머로 빨개진 무릎과 온통 흥건히 젖은 침대 시트가 보였다. 통통하게 부푼 자지가 아랫배를 두드렸다. 줄기차게 틀어박히는 좆이 극점을 자극하는 것에 맞춰 자지 끝에서 투명한 액이 질질 쏟아졌다.

몸이 엉망으로 흔들리는 탓에 맑은 액은 호곡선을 그리며 흩뿌려졌다. 둥그런 물 자국은 크기도 모양도 제각각이었다. 그것을 멍청히 보며 긴 목울음을 흘린 순간이었다.

“……! 아, 악!”

퍽—! 커다란 좆이 불식간에 배 속을 수직으로 올려 꽂았다. 그가 한 팔로 아랫배를 압박한 채라 느껴지는 팽만감이 거대했다. 배가 양쪽으로 짓눌렸다. 내장을 넘어 폐가 짜부라지는 듯한 느낌에 모골이 송연해졌다. 단여명은 화들짝 놀라 그의 손을 뿌리치고 침대로 달아났다.

도망치는 하얀 몸에 집요한 눈길이 따라붙었다. 만약 상대의 눈을 보았으면 단여명은 멈추는 것이 아니라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망갔으리라.

“으, 흐으…!”

침대에 엎어진 단여명은 곧장 뒤로 손을 뻗어 뒷구멍을 더듬거렸다. 스스로도 자각하지 못한 행동이었다. 손끝으로 헤벌어진 입구가 미친 듯이 움찔대는 게 느껴졌다. 배 속이 견딜 수 없이 뜨거워서 눈물이 흘렀다. 구멍이 거대한 좆 모양대로 뻥 뚫릴 것 같아 도망을 칠 수밖에 없었다.

작게 바르작대는 몸 위로 짙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커다란 손이 구멍을 가린 손을 잡아 치웠다. 단단한 무릎이 살며시 열린 허벅지를 더욱 바깥쪽으로 밀어냈다.

봉긋한 엉덩이 사이가 상대의 시야에 낱낱이 드러났다. 공포감과 기대감에 한껏 옴츠러든 주름이 곧 불규칙적으로 경련했다. 불투명한 체액으로 범벅이 된 채 물기 도는 붉은빛 속살을 희끗희끗 드러냈다.

“아—!”

연방 벌려냈던 곳을 다시 한번 파고들기란 쉬웠다. 뜨거운 좆이 단숨에 배 속을 갈랐다. 눈시울에 가득 고였던 눈물이 후드득 떨어져 시야가 깨끗해졌다. 그러나 그걸 인식할 틈은 없었다. 또다시 몸이 정신없이 뒤흔들렸다.

철퍽, 퍽, 퍽, 퍽—! 뽀얀 엉덩잇살이 단단한 장골에 부딪혀 거칠게 떠밀리길 반복했다. 격한 허릿짓에 밀려 올라갔다가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는 짧은 새마다 봉긋한 살집이 탱탱하게 흔들렸다. 단여명은 제 회음부를 때리는 묵직한 음낭을 느끼며 권호영이 지금껏 봐주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 흐으, 흥…! 윽, 읍, 아! 아, 아, 아!”

묽은 액이 줄줄 시트를 적시더니 막을 새도 없이 정액이 터져나갔다. 단여명은 눈을 꾹 감은 채 급히 차오른 사정을 견뎌냈다. 순간 주변의 소리가 까마득히 멀어졌다. 몸이 확 불타오르는 것 같더니 머릿속이 곤죽으로 뭉개졌다.

“아, 갔, 갔어, 으, 호, 호여, 응, 아…! 흐읍, 끕, 으으…!”

그러나 단여명의 사정이 어떻든 상대는 아직 열락을 쏟아내는 데 한창이었다. 한껏 성이 나 험악하게 부푼 좆이 무른 점막을 꿰뚫었다. 절정에 달한 내벽이 아무리 좆을 터트릴 듯 조여 물어도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단여명은 한도 끝도 없는 감각을 느끼며 포악한 좆기둥에 작신 쑤셔졌다.

“흐, 안, 안 돼…! 하으, 싫, 으응, 학…!”

사지가 덜덜 떨리고, 손끝 발끝의 피가 다 빠져나가는 기분이었다. 그토록 꿈에 바라던 순간은 생각 이상이었다. 파랗게 힘줄이 돋친 손이 침대 시트를 쥐어뜯었다. 단여명이 울며불며 난리를 치든 말든 권호영은 한결같은 태도를 지켰다.

“조금만, 조금만 더요….”

빨리할게, 조금만 봐주세요. 애절한 목소리로 속삭인 것치곤, 그의 행동은 부드럽지 못했다. 권호영은 커다랗게 열린 입안에 혀를 넣었다. 괴로운 성감을 버텨 내느라 빳빳하게 굳어진 살덩이를 강하게 빨아들이며 악착같이 좆을 쑤셔 넣었다.

계속 바르작거리는 몸을 품에 어른 채 몇 번이나 허리를 올려붙였을까. 철퍽—! 내벽을 강제로 확장하며 좆이 깊숙한 곳에 파묻혔다. 권호영은 접합부를 꾸욱, 맞붙여 삽입을 깊게 했다. 밑으로 찍어 누르는 힘에 기어코 단여명의 다리에 힘이 풀렸다. 두 사람은 완전히 침대 위로 쓰러졌다.

벌게진 회음부에 찰싹 달라붙은 음낭이 꿈틀거리며 용암 같은 체액을 퍼부었다. 두 번째 사정이라기엔 농도가 진했고, 구멍 틈새로 왈칵 넘쳐흐를 만큼 많은 양이었다.

배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읍, 흐으으…! 포개진 입술 새로 큰 울음소리가 터졌다. 커다란 육체 아래에 깔린 몸이 발버둥을 시도했다. 애처로운 몸짓은 살려 달라는 몸부림과 비슷해 보였다.

까무룩 감기려는 눈꺼풀이 아슬아슬하게 들렸다. 가물거리던 초점이 또렷해지고, 제 몸 위에 올라탄 한 남자가 보였다. 그가 체중을 실어 허리를 박자 육중한 좆이 재차 구멍 속을 한가득 메웠다. 배꼽 아래까지 치달은 부피감에 다시 시야가 어질어질 풀렸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몰랐다. 모든 감각기관이 몸을 불 싸지르는 신경계에 집중된 것만 뚜렷하게 느껴졌다. 잠시 움직임을 멈출 때면 그는 상대의 타액을 갈취해 마른 목을 축였다. 단여명 또한 그가 넘겨주는 타액을 달게 받아넘겼다. 끊임없이 나눈 입맞춤에 그들의 입술은 팅팅 부르터 붉게 짓물러 있었다.

“으, 흐….”

내부에 들어찼던 좆이 느릿하게 구멍 밖으로 빠져나갔다. 쭈븝, 소리를 내며 발간 속살이 귀두에 달라붙더니 틈을 보이고 빠끔빠끔 개폐했다. 마개가 없어진 구멍은 잠깐 새를 못 참고 울컥 정액을 게워냈다. 끊임없이 허연 액을 토해내는 뒷구멍은 흠씬 들쑤셔진 탓에 완전히 다물리지 못했다.

허벅지 안쪽을 쓸며 점액질을 묻히던 귀두가 재차 입구를 문질렀다. 주름의 형태를 뭉그러트리듯이 원을 그리며 비비다가 푹, 파고들 것처럼 찔러 들어오더니 입구에 귀두만 넣었다가 뽑아내며 담금질했다.

커다란 성기는 여유를 부리다가도 우악스레 짓쳐들어오곤 했다. 이미 제멋대로인 추삽질에 몇 번이나 당했던지라 겁에 질린 내벽이 방어적으로 꾹 오므라들었다. 그러면 그에 맞춰 구멍 속에 들어온 귀두가 쑥 뽑혀 나갔다. 신랄하게 반응하는 입구의 감촉을 즐기는 듯했다.

쭈븝, 뽁, 쭈븟, 뻑…. 뽑아내는 움직임에 맞춰 안에 남아 있던 정액이 비말처럼 터져 그 주변을 더럽혔다. 추잡한 물소리가 긴밀히 이어지던 그 순간이었다.

“허억…!”

순식간에 거대한 것이 깊은 안쪽을 올려 꽂았다. 역시나 잠시 방심하던 찰나였다. 순간 숨을 잘못 삼킨 단여명이 잔기침을 쏟았다. 콜록, 하며 숨을 가쁘게 넘기자 뒷목에 손이 들어왔다. 단단한 손이 뒷목을 받쳐 숨쉬기 편하도록 고개를 지탱해 줬다. 거칠게 물건을 꽂아 넣은 것치곤 다정한 손길이었다.

기침을 뱉을 때마다 울긋불긋한 목덜미에 핏대가 파르라니 섰다. 권호영은 그곳에 입술을 눌렀다. 두근두근 맥박이 뛰는 피부 위를 혀끝으로 꾹 누르다가 그대로 위로 쓸어 올렸다.

단여명은 잇새로 터지는 숨을 힘겹게 갈무리했다. 오랫동안 정신을 잃고 있던 것처럼 흐리멍덩하던 머릿속에 실 가닥 같은 생각이 희미하게 잡혔다.

‘대체…….’

대체 언제까지 하는 거지. 어느 누구와도 이렇게 길고, 진득하게 섹스해 본 적이 없었다. 이게 느끼는 건지 아니면 버티는 건지 종국엔 알 수 없게 돼버렸다. 권호영은 끝이란 걸 모르는 것처럼 굴었다.

오랜 시간 정사에 매진한 탓에 기억도 군데군데 비어 있었다. 끝으로 갈수록 펑펑 울었던 기억만이 남았다. 권호영이 아무리 손으로 닦아 주고, 입술로 쓸어 줘도 눈물은 계속해서 흘렀다.

“응, 흐…!”

쪽쪽거리는 입맞춤의 소리가 들리더니 몸이 다시 흔들리기 시작했다. 제가 꼬드긴 격이니 차마 그만하라는 말은 하지 못하고, 단여명은 으, 흐, 하며 흐느낌만 쏟았다. 형으로서의 자존심을 챙길 여력은 없었다. 아무리 턱을 악물고 입술을 짓씹어 봐도 소리를 참을 수 없었다.

“형….”

처음 삽입할 때까지만 해도 분명 제가 리드했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부터 권호영이 주도권을 잡았다. 자신은 그의 주도하에 몸을 이리 돌렸다가 엉덩이를 위로 들었다가 하며 끝도 없이 아랫구멍이 파헤쳐졌다.

좋았다. 분명 좋았는데… 너무 힘들었다. 처음엔 버거웠고, 중반엔 버거운 만큼 까무러치게 좋았다. 그동안의 섹스가 쥐불놀이에 그쳤다면 권호영과의 섹스는 밤하늘을 오색빛깔로 물들이는 불꽃놀이 같았다. 인간의 감각이 이만큼 섬세하고, 거대한 쾌락을 수용해내는 줄 처음 알았다.

하지만 생각은 조금씩 바뀌었다. 시트를 잡아끌던 손은 일찍이 침대 위에 너부러진 지 오래였다. 별의별 액을 쏟아내 아랫배에는 하얀 촛농이 흘러 굳은 듯한 흔적이 남은 채였다.

“밑에 엄청 축축해요.”

그건 뒷구멍 또한 같은 형세였다. 배 속이 한가득 채워지면 끝을 모르고 다시 방아질이 시작됐다. 그렇게 짓쳐 드는 움직임으로 구멍 속이 텅 비워질 만하면 또다시 새로운 좆물이 채워졌다. 구멍 깊숙한 곳이 흠뻑 절여지면 커다란 성기가 앞뒤를 오가며 고루고루 정액이 펴 발리도록 내벽을 버무렸다.

“처음엔 움직이기도 힘들었는데…. 이젠 이렇게 넣기만 해도.”

“아…!”

“안으로 빨려 들어가요.”

단여명은 힘겹게 눈을 깜빡였다. 권호영 역시도 처음보다 많이 흐트러진 모습이었다. 깔끔히 넘겼던 머리는 가닥가닥 헝클어져 이마로 내려왔다. 그러나 그는 좀처럼 지친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나가떨어지기 직전인 한쪽이 보기에 경악스럽게도.

“읏, 아아, 응…!”

다시 추삽질의 속도가 붙었다. 온몸의 힘이 없는 상태임에도 감각은 섬뜩하게 느껴졌다. 그의 성기가 뒤를 찌를 때마다 자지가 푸들푸들 떨렸다. 더 이상 정액을 배출해내지 못하는 자지는 꼿꼿하게 서서 묽은 액만 질금질금 흘렸다.

더 쏟아낼 것이 없자 단여명은 마른 절정에 달하기 시작했다. 바윗덩이 같은 성기는 빳빳하게 죄어드는 구멍을 끈기 있게 무두질해 연하게 바꾸어 놓았다. 한없이 뭉개진 내벽은 온통 흐물흐물하게 녹아 제 속을 무례하리만치 파고드는 살기둥에 달라붙지도 못했다. 강한 적군에 함락된 것처럼 안으로 통하는 입구를 벌린 채 그것을 무력하게 받아들일 뿐이었다.

칼로 필요 없는 부분을 도려내어 민둥한 과육을 드러내듯 예민한 지점은 자극당하기 쉽게 부풀어버린 지 오래였다. 쉼 없는 마찰로 도도록하게 살이 오른 전립선은 긁히면 긁힐수록 첨예한 쾌락을 끌어냈다. 그럼 자지가 바르르 떨리고 허울뿐인 절정이 덮쳐 와 뇌리를 시허옇게 물들여 놓았다. 언제 끝날지 모르는 황홀의 구렁텅이이자 악순환의 반복이었다.

“호, 호영아…. 읏…! 나… 술, 흐, 다 깼어…….”

그러니 더는 못하겠다고. 그동안 가죽 주머니 속에 소중히 모아놨던 정액은 일찍이 다 비워낸 지 오래라고. 그리 말하고자 그의 팔뚝에 손을 올린 때였다. 두꺼운 팔목에 힘줄이 불뚝 도드라지는 것 같더니 아래를 쳐올리는 허릿짓이 강해졌다. 철퍽-! 소리와 함께 작은 몸이 둥그렇게 말렸다.

“으……! 헉!”

단여명은 순간 온몸에 힘을 가득 줬다. 높이 들린 하얀 발등이 잘게 떨리더니 안쪽으로 굽어들었다.

“…거의 다 들어갔어요.”

커다란 성기는 자기가 가진 위용을 과시하듯 더욱 깊은 안쪽을 파고들었다. 생리적으로 뱉어내려는 괄약근의 조임을 무시하고, 팔뚝만 한 좆이 빠듯하게 밀려 들어왔다.

“느껴져요…?”

내벽이 간헐적으로 경련하며 일말의 반항을 하는 듯싶더니 무력하게 틈을 벌려줬다. 거듭 정액을 퍼부어 주고, 장벽을 녹여내 준 뒤에야 허락된 곳이었다. 시원하게 뻗은 눈썹이 왈칵 구겨졌다. 억지로 욱여넣은 깊은 굴속은 좆 끄트머리가 아릿할 정도로 비좁았고, 앞선 정사로 습한 열기가 끈덕지게 고여 있었다.

“끝에 엄청… 후우, 달라붙어요.”

온갖 액으로 축축이 젖은 음모가 엉덩이에 거슬거슬 비벼졌다. 얌전히 늘어져 주어지는 쾌락만 느끼던 단여명이 득달같이 반응한 것은 그때였다.

“아, 학……!”

불에 달군 인두가 배 속 깊숙한 곳을 지지는 기분이었다. 그것을 떼어내면 열에 눌어붙은 점막이 즈윽, 하며 살점 채로 떨어져 나갈 것만 같았다.

등골에 확 한기가 퍼부어졌다. 머리털이 쭈뼛 서고, 땀에 젖은 피부에 소름이 올랐다. 추위를 느끼는데도 눈알이 화끈거릴 만큼 더웠다. 생존 본능이 더는 안 된다고 경고했다. 단여명은 넓게 벌어진 다리를 좁히려고 바르작댔다.

“배, 배 아프…! 호, 호영, 읏…! 나, 그만, 그만할래…….”

빼, 빼 줘… 응? 가느다란 애원 조가 커다란 몸 아래에서 흘러나왔다.

“응…. 그만해요.”

권호영이 넋이 나간 목소리로 중얼댔다. 아직도 그의 눈은 초점이 맞지 않는 상태였다. 쾌락에 정신이 나간 눈. 짐승과 다를 것 없는 짙은 눈동자가 먹잇감을 소중하다는 듯이 응시하고 있었다.

단여명이 자꾸 무릎을 좁히려고 하자 권호영은 그를 추켜 안아 자신의 허벅지 위에 앉혔다. 서로 마주 보고 앉은 자세였다. 단여명은 버둥거리다가 그의 성기를 품은 채 맥없이 주저앉을 수밖에 없었다. 엷은 분홍빛의 발뒤꿈치가 힘없이 시트를 밀어냈다.

“그만, 흐으…. 그만한다며…….”

자세를 바꾸느라 삽입이 조금 허술해졌다. 방금 전에 느꼈던 그 감각을 되풀이하고 싶지 않아 단여명은 그의 어깨를 밀어냈다. 그걸 듣기나 한 건지, 권호영은 단여명의 입언저리에 쪽쪽 입맞춤을 퍼부었다.

초반엔 서투르게 입술만 비비더니 단 하룻밤의 정사로 입맞춤이 많이 익숙해진 모양새였다. 단여명이 고개를 돌려 피하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는 마음 가는 대로 입을 맞췄다. 귓가와 목덜미 살이 입술의 열기로 빼곡히 채워졌다.

단여명은 얼굴을 수그린 채 정말 못 한다며 고개를 저었다. 얼핏 보면 나이에 맞지 않게 투정 부리는 듯해 보였다. 연장자로서의 체면은 침대 위에서 무용지물이 되었다. 단둘뿐인 공간에서 단여명은 온전한 피식자였다.

“더는, 아…….”

권호영이 긴장을 풀어 주려는 듯 엉덩이를 잡고 위아래로 흔들었다. 마치 주사를 맞기 전에 엉덩이를 두드려 주는 행위를 연상시켰다. 그가 손아귀에 힘을 가득 주니 손가락 사이로 튀어나온 살집이 더욱 봉긋하게 도드라졌다.

통통하게 부은 내벽을 문지르며 단단한 기둥이 오르내렸다. 으응, 흐…! 단여명은 쉰 목소리로 흐느꼈다. 굵직하게 도드라진 귀두가 볼록 솟은 전립선을 스윽, 스윽 문질렀다. 그것마저 감내하기 고역이었건만, 그는 잔인하리만치 엉덩이를 아래로 푹 내려버렸다.

“……! 아, 악…!”

하아…. 뜨거운 숨결이 귓가에 흘러들어와 기어이 뇌를 망가트리는 것만 같았다. 갑작스러운 취기가 오르듯이 정신이 핑글 돌더니 그대로 끊길 듯 아찔해졌다.

긴장감에 전 심장이 펑 터질 것처럼 쿵쾅거렸다. 요동치는 심장 소리를 느끼며 배탈이 난 것처럼 배꼽 아래가 뻐근히 아파오는 것을 느꼈다. 그다음엔 몸을 가루로 만들어버릴 듯한 화마에 휩싸였다.

“아, 아…—!”

단여명이 급한 헐떡거림을 토해냈다. 판판한 아랫배가 정신없이 오르내릴 때마다 불룩한 윤곽이 잡혔다가 사라지길 반복했다. 배 속에 품은 것이 무엇인지 착각할 수 없을 만큼 선명한 형태였다.

“아, 깊, 누르지, 누르지 마아, 흐, 제발…!”

무언가 내뿜을 듯했다. 그러나 그 아찔한 감각은 먼저 애먼 곳을 건드렸다. 눈물은 질리지도 않고, 또다시 줄줄 새어 나왔다. 하얀 뺨은 물기가 마를 새도 없이 다시 축축이 젖어갔다.

“아, 우윽…! 아아아!”

배꼽 밑까지 찔러 들어온 좆이 약간 꿈틀거리더니 뒤로 서서히 물러났다. 박힌 것을 억지로 뽑듯이 더딘 움직임이었다. 단여명은 숨죽인 채 온몸의 근육을 잘게 떨었다. 더욱 깊은 안쪽으로 통하는 내벽을 한껏 늘려놓으며 귀두가 빠져나가는 감각에조차 단여명은 진땀을 흘렸다.

“허으, 흐…….”

잠깐 숨을 돌릴 시간은 없었다. 안심하기도 전에 단여명은 잊고 있던 사실을 한 가지 떠올렸다. 피스톤질의 원리는 간단했다. 빼냈으면 다시 쑤셔 넣어야 하는 것. 그것 하나밖에 남지 않았다.

싫다고 몸부림치거나 마음을 단단히 먹을 새는 없었다. 권호영의 손에 잡힌 엉덩이가 위로 들렸다. 커다란 성기가 진탕 안쪽 살을 끄집으며 빠져나가더니 다시 깊은 안쪽을 강하게 틀어막았다.

“으, 커헉……!”

처음엔 비좁기만 했던 뒷구멍은 쉼 없는 몽둥이질로 쫀득하게 벌어졌다. 커다란 좆의 모양대로 구멍 안이 활짝 이완됐다. 구불구불했던 내벽은 위로 밀려 올라가 판판하게 펴졌다. 뒷구멍이 아무리 사이를 좁혀 보려고 해도 내벽을 메운 이물은 빠져나가 주질 않았다. 무식한 것을 줄기차게 받아낸 뒤라 조이는 힘도 좀처럼 강하지 못했다. 흐물흐물하게 풀린 점막은 기둥에 엉겨 붙어 잔물결만 일으켰다.

“흐으, 흑, 흐으으…!”

뿌드득, 내벽이 강제로 벌어지더니 굽어진 내장과 귀두가 완전한 형태로 맞물렸다. 불로 달군 무쇠 덩이가 여린 살을 살포시 눌렀다. 입맞춤을 내리듯 막힌 살벽을 쿡쿡 두드리다가 다시 선단을 꾹 눌러 붙여 강하게 비비적거렸을 때 단여명은 있는 대로 눈을 커다랗게 떴다. 남은 힘을 모두 끌어모아 손톱으로 단단한 등을 박박 긁어내렸다. 소리로 형용되지 못한 비명이 터진 건 잠시 뒤였다.

줄줄 새는 물소리가 자신의 몸에서 터진 줄도 모른 채 단여명은 까무룩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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