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하숙생
‘호영이는 내 아들이니까. 잘 할 수 있지?’
어머니가 버릇처럼 속삭이던 말이다. 테스트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던, 생각보다 결과가 실망스럽던. 그녀는 꼭 그렇게 말하곤 했다.
그렇다고 자식에게 폭언을 일삼는 모진 분은 아니셨다. 일에 치여 본인의 자식까지도 돌볼 여유가 없는, 조금 바쁜 어른이었다.
모니터 불빛만이 켜진 어머니의 작업실은 항상 어두컴컴했다. 사무용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은 그녀의 몸은 유독 작아 보였다. 피로가 짙어 보이는 안색, 초점 없이 화면을 응시하는 눈동자. 방에서 풍기던 커피 향과 자세를 바꿔 앉을 때마다 울리던 안경 줄 소리. 그 작업실 문 앞에는 항상 어렸던 자신이 서성이고 있었다.
피로에 지쳐 보이던 어머니가 유난히 화색을 보일 때가 있었다. 학교의 이름이 박힌 상장이나 등급이 매겨진 리포트 카드를 가져오는 날이었다. 그러면 집에 돌아온 아버지까지 합석해 총 세 식구가 단란한 저녁 식사 자리를 가졌다.
아버지는 미국계 이탈리아인이었다. 철야가 잦아 얼굴을 볼 틈이 많이 없었으나, 상냥하신 분이셨다. 제 몸을 번쩍 안아 올리던 너른 품이, 머리통을 쓰다듬어 주던 커다란 손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했다.
나름 화목했던 세 식구는 권호영이 5살이 되던 해에 여러 나라를 순회했다. 어머니는 시기마다 외주를 맡는 프리랜서였고, 아버지는 새로운 사업 준비에 한창이셨다. 용역업체에 다니면서 기술을 배우시던 아버지는 직업 특성상 전근이 잦았다.
그러나 어른들의 사정을 어린 꼬마가 알 턱이 없었다. 권호영의 어릴 적 기억은 대부분 낯선 것들이었다. 생경한 언어와 자신과 판이한 생김새, 매번 바뀌던 집 앞의 풍경과 코끝에 스미는 타국의 냄새. 그에 시가지라도 나가는 날엔 부모님의 품에 얼굴을 묻고 울음을 터트리기 일쑤였다.
언제는 유럽의 큰 도시일 때도 있었고, 형편이 어려워졌을 땐 인적이 드문 중국의 변두리 마을에 머물기도 했다. 해외를 전진하며 권호영의 이름도 다양하게 불렸다. 권호영, 알렉스, 리우. 모두 같은 사람의 이름이었다.
그렇게 11살이 되던 해, 어머니는 자신을 데리고 미국 미주리주에 보금자리를 트셨다. 아버지가 집에 들어오던 빈도가 차츰 줄어들던 시기였다. 아버지의 근황을 물으니 어머니는 한동안 침묵에 잠기셨다.
그녀는 아버지가 많이 바쁘다고 얘기했다. 아버지의 인생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시기라고. 그리고 제가 중학교에 입학할 나이가 되었으니 홈스쿨링을 그만두고, 안정적으로 학업에 전념했으면 좋겠다는 말씀도 더하셨다.
한곳에 정착하는 게 좋겠다는 판단하에 두 분이 상의 끝에 내린 결정이고, 아버지는 멀리 있어도 호영이를 사랑할 거라며 어머니는 작은 몸을 다독여 줬다.
하이스쿨에 다니기 전까진 순진하게 그런 걸 믿었다. 제가 성공해서 돈을 많이 벌어오면 세 식구가 다시 한 지붕 아래에 살 수 있을 거라고. 부모님은 항상 바쁘셨으니 돈이 필요한 것이고, 제가 더 노력하면 형편이 나아질 줄 알았다.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던 이유는 항상 우연처럼 이루어졌다. 노력의 결과물을 보이는 날에 때맞춰 아버지에게 연락이 왔고, 그리 멀지 않아 세 식구는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서 단란한 시간을 보냈다.
그에 권호영은 의식하지 못한 새 점차 눈에 보이는 결과물에 집착하기 시작했다. 성적뿐만이 아니라 원만한 교우관계도, 깔끔한 차림새도, 육안으로 그럴듯해 보이는 것을 긁어모으듯이 행동했다. 그러면 어머니의 관심을 한 번쯤 더 받을 수 있었으니까.
어머니의 화법을 안 것도 그때쯤이었다. 그녀는 내심 자기 자식이 남들보다 잘하길 바랐다. 무리하지 말렴. 언제나 응원하고 있단다. 항상 그리 말씀하시면서도.
‘열심히만 하렴. 결과는 노력에 뒤따라오기 마련이니까.’
어머니는 흘리듯 그런 말을 꼭 뒤에 덧붙이셨다.
상처럼 주어지는 어머니의 웃음에, 그리고 그리웠던 아버지와의 재회에 권호영은 많은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보통 가족과 다르게 결여된 부분이 어떤 건지, 비정상적으로 굴러가는 보상 시스템이 뭐가 이상한 건지.
그저 어른들은 항상 여유가 없구나, 하고 생각할 따름이었다. 부모의 손을 잡고 걷는 친구들의 뒷모습을 보며 시기와 선망을 느꼈던 것도 같다. 하지만 투정이나 불평은 제가 탐낼 수 없는 영역이었다.
‘이번엔 안 돼. Gifted 테스트 결과가 안 좋았거든.’
그렇게 폭설이 내렸던 12살의 겨울이었다. 어머니가 거실에서 누군가와 통화하는 목소리를 들었다. 잠결에 목이 타 비척비척 아래층에 내려가던 도중이었다.
그녀는 간간이 영어와 한국어를 섞어서 말했다. 그때까지도 권호영은 그녀의 지인인 줄로만 알았다. 어머니는 한인 모임 사람들과 자주 연락하곤 했으니까.
‘만나지도 않는데, 무슨 돈?’
그러나 그다음으로 나온 얘기에 걸음이 멈춰 섰다. 잠기운이 명명히 달아나는 느낌을 받았다. 알 수 없는 위화감이 들었다. 저게 무슨 말일까.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가득 채워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좋아하지도 않는 애 만나는 건 그렇다 쳐. 그런데 당신 입에서 돈 얘기만 나오면 소름이 끼쳐! 알아? 진절머리가 난다고!’
잔잔했던 목소리는 곧 악에 받쳐 날카롭게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권호영은 천천히 거실로 나아갔다. 무거운 쇳덩이라도 단 것처럼 다리가 잘 움직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비명을 지르듯 소리치는 어머니가 걱정됐던 탓이었다.
‘애를 버리든 말든 내 마음이지. 당신이라고 버린 애, 나라고 못 버릴까? 왜? 돈줄 끊길까 봐 겁나?’
그리고 다시 우뚝 다리가 멈췄다.
‘나는 내 인생이 더 불쌍해! 자식새끼보다 내 인생이 더! 그건 대체 누가 보상해 주는데!’
문틈 새로 훔쳐본 어머니의 얼굴은 비통에 젖어 있었다. 상냥한 미소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잔뜩 찌푸린 눈썹과 무섭게 일그러뜨린 입술, 그 사이를 가르는 거친 목소리. 그는 어머니가 아니라, 안면이 없는 무서운 어른을 보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거실의 문이 열리고, 어렴풋한 빛이 얼굴에 내려앉았다.
‘…들었니?’
어머니는 거실로 통하는 문턱에 미동 없이 서 있는 자신을 내려다보았다. 귀에 익은 목소리는 고요하기만 했다. 화를 내지도, 어딘가 비틀리지도 않은, 눈발이 흩날리는 그날의 밤처럼 잔잔한 음색이었다.
‘…잊어.’
마치 추위에 노출된 사람처럼 손이 떨렸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곳은 창밖이고, 집 안은 더울 정도로 따뜻했는데도.
‘잊으렴.’
어린 자식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은 그 하나였던 모양이다.
‘어떻게 해도 못 잊겠으면… 한 가지만 기억해.’
제자리에 얼어붙은 자신을 어머니는 부드럽게 안아 줬다. 포근한 향이 났다. 제가 그토록 좋아했던 품 안에서도 권호영은 아무런 행동도 취할 수 없었다.
‘내 아들은, 뭐든 잘해야 해. 어느 누구보다 더.’
어머니가 귀에 조용히 속삭였다. 등을 토닥이는 손짓은 다정했고, 속삭이는 음성은 부드러웠다. 그래서 더욱 눈물이 났던 것 같다.
그 후로 권호영은 제 노력만큼의 욕심을 냈다. 어머니의 눈치를 보며 아버지가 보고 싶다는 말을 뭉뚱그려 흘리지도 않았다. 아버지의 안부 역시도 묻지 않았다.
통화 내용을 엿들은 뒤 일상은 조금씩 변화했다. 점차 소원해지던 아버지와의 연락이 끊겼다. 아버지와 만남이란 보상책이 사라지자 어머니의 관심으로 체제가 바뀌었다. 성적이 조금 삐끗하는 날엔 그녀의 눈길 한번 받을 수 없었다. 혼자 상을 차리고 혼자 상을 치웠다. 서러운 마음에 이불 밑에 들어가 소리 죽여 우는 날도 많았지만, 괜찮았다. 좋은 결과를 받아오면 그녀의 웃음은 다시 제게로 돌아올 테니까.
그러는 사이 권호영은 미들스쿨을 졸업하고, 10학년으로 진급했다.
‘넌 항상 열심히 하는 모습이 보기 좋아.’
그늘 밑에서 책을 들여다보고 있던 제게 데이비드가 말을 걸었다. 해비타트 자원봉사를 나온 와중 교대로 휴식 시간을 가지던 때였다. 땡볕 아래에서 목재를 옮기느라 그의 얼굴은 땀범벅이었다.
‘그렇지만 가끔은 휴식도 필요해, 친구.’
제게 물병을 건네받은 데이비드가 시원한 물을 들이켰다. 입가를 닦아낸 그는 다른 애들처럼 연애도 하고, 주변을 둘러보는 노력도 필요하다며 상냥히 조언했다. 권호영은 충고 고맙다며 형식적으로 대답했다. SAT 시험을 치르기 이틀 전날이었다.
아버지는 떠났지만, 어머니는 제 곁에 남았다. 버림받을 뻔했으나, 때마다 성과를 내보였고 결국엔 버림받지 않았다.
애초에 어린아이가 고를 수 없는 선택지였다. 보호자가 없는 아이는 잘 곳도, 의지할 곳도 없었다. 머리가 좀 컸다고 스스로 손을 뿌리치기엔 가족이란 세상에 하나뿐인 족쇄가 발목을 죄었다.
권호영은 미련하게도 어머니에게 계속 사랑을 갈구했다. 자신만 잘한다면, 그 웃음과 관심은 영원히 자신을 저버리지 않을 테니까. 어렸을 때부터 차곡차곡 학습된 데이터가 그리 생각하게 만들었다.
어느덧 모든 게 습관으로 굳어져 큰 노력이 필요 없었다. 항상 머리 길이를 깔끔히 유지하고, 컨디션 관리를 위해 의무적으로 운동했다. 집 앞에 나가더라도 후줄근하게 입고 다니지 않았다. 동양인이 적은 도시는 작은 해프닝도 파다하게 소문이 나곤 했으니까.
그러나 가슴 한구석에 들러붙은 상실감은 좀먹듯 천천히 몸속에 뿌리내렸다. 무엇이 되고 싶어서 뜀박질을 쉬지 않는지. 그런 의문이 일상 중에 불쑥불쑥 반기를 들었다.
그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은 19살 겨울에 고조되었다.
‘…왜 한국에 가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좀 정착할 만하니까 이젠 한국으로 가라고 한다. 그것도 저 혼자서만. 착실히 쌓아온 모든 숫자가 허망할 정도였다.
‘엄마가 나고 자란 곳인데. 궁금하지 않아?’
어머니는 가만히 커피잔을 들었다. 더한 말은 없었지만,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래서 싫으냐고. 그녀는 조용히 돌려 묻고 있었다.
‘어릴 때 가끔 갔잖아요. 대학도 미국으로 진학하는 쪽이 나을 것 같은데….’
‘많은 건 안 바라. 1년만 채우고 돌아와도 좋아.’
어느 때보다 가혹하게 들리는 말에 권호영은 입을 다물었다. 일평생 들였던 버릇이 차마 싫다는 말을 뱉지 못하게 했다.
‘스무 살….’
‘…….’
‘한국 나이로는 이제 막 스무 살이겠네.’
흐리게 미소를 지은 어머니가 시선을 맞췄다. 갓 내린 커피처럼 따뜻한 진갈색의 눈동자에 무감각한 얼굴이 담겼다.
‘엄마 인생 중 가장 행복했던 나이야.’
‘…….’
‘호영아, 넌 내 분신 같은 존재니까.’
네가 그곳에서 많은 걸 느끼고 왔으면 좋겠어. 어머니는 혼잣말을 읊조리듯 조용히 말씀하셨다.
좋은 엄마였다. 결과물을 중시하여 자식에게 당근과 채찍을 가차 없이 사용했으나, 어머니가 제게 쏟은 건 사랑이었다.
권호영은 그리 믿었다. 어머니는 자신을 사랑했노라고. 삶이 핍박했던 만큼 방법이 조금 비틀렸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녀는 제가 남들보다 잘 되길 바랐고, 어디 가서 기죽지 않기를 바랐다.
권호영도 어머니를 사랑했다. 분명 그랬는데, 갈수록 그 애정이 지쳐갔다. 어머니는 무엇 때문에 열심히 살아야 하는지 알려 주지 않았다.
‘할 수 있는 한, 남들에게 우습게 보이지 말렴.’
그저 힌트를 제공해 주듯 수수께끼의 문장만 흘려 주실 뿐이었다.
어머니가 말씀하시던 그 ‘남들’이, 권호영은 참을 수 없이 부러워졌다. 자유로워지고 싶었다. 일상에 양각된 그 바른 습관들이 어깨를 짓누르는 감각을 받았다. 목표점이 없는 달리기를 잠시라도 멈추고 싶었다.
그 후 권호영은 반쯤 자신을 놓았다. 아무거나 집어 든 옷은 우연하게도 활동성이 좋은 운동복이었다. 자르지 않은 머리칼은 시간이 갈수록 눈을 찔렀다.
어차피 한국으로 가는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었다. 그리 노력했음에도 결국 어머니의 눈 밖에 나게 된 것이다.
그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권호영에겐 어머니란 애증의 존재였다. 드디어 숨통이 트이겠다는 해방감, 그리고 제가 무슨 짓을 해도 그녀의 곁에 남을 수 없다는 허탈감. 가히 상반되는 감정이 그림자처럼 꽁무니를 따라다녔다.
결국 권호영은 한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제 인생의 모든 것이 한 사람이었기에 한국을 도피처 삼아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럼에도 어머니의 말을 얌전히 따르는 것 같아 기분이 좋진 않았다. 무언가 숨겨진 의도가 있지 않을까, 의심스러웠다.
그녀가 한국에 구해 준 집도 그랬다. 정신이 없어서 잊고 있었다며 어머니는 웬 남자랑 같이 살아야 된다고 언질을 줬다. 자신보다 6살 위, 그리고 지인의 아들. 정보도 협소했다. 평소의 어머니 같았으면 그런 실수를 하지 않았을 텐데.
생각이 거기까지 닿았을 때.
“…안녕.”
권호영의 기분은 바닥을 치고 있었다.
“무거워 보이는데. 같이 들어 줄까?”
어머니와 비슷한 말투.
‘…비슷한 옷차림.’
머리를 기르고 나서 특기가 생겼다면 머리카락 너머를 눈대중하는 것이었다. 발목까지 오는 하얀 면바지와 연푸른색 니트가 보였다. 이쪽도 꽤나 외관을 신경 쓰는 타입인가 보지.
“사정은 대충 들었어. 한국말은 할 줄 알아?”
역시나 집 안은 깔끔한 편이었다. 방으로 통하는 문 두 개, 거실에 놓인 사인용 소파와 커다란 TV. 가구는 생활하기 불편하지 않을 정도로 배치되어 있었다. 남자의 취향인지 화이트 톤으로 맞춰져 있었고, 창문을 열어놔 바람 냄새가 진하게 배어 있었다.
“난 단여명이라고 해.”
자신을 단여명이라고 소개한 남자는 어색한 칭찬을 건네더니 말문을 닫았다. 싸한 정적에 휩싸인 건 순식간이었다. 권호영 또한 무거운 침묵을 느꼈지만, 잠자코 자리를 지켰다.
예전 같았으면 먼저 나서서 대화를 주도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얘기해야 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남자가 내준 주스 또한 같았다. 예의를 차린다고 입에 대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어차피 좀 지나면 떠날 곳이었다. 바로 앞에 남자는 그 후로 안 볼 사람이었고. 숨 막히는 정적 속에서 권호영은 기이한 공허함을 느꼈다. 뭘 하고자 이곳에 온 건지 모르겠다. 이 기분을 뭐라고 해야 할까. 타의에 의해 낯선 땅을 밟고, 모르는 사람과 나란히 적막에 빠진, 지금 이 순간을.
“…계란 볶음밥 좋아해?”
남자는 불편한 기색을 풍기더니 대뜸 요리를 해 준다고 나섰다. 이름이 단여명이라고 했던가. 뭘 어떻게 하든 상관없었기에 내버려 뒀다.
남자는 곧 자신을 식탁으로 안내했고, 음식을 내왔다. 자리에 앉아 밥을 한 숟갈을 입안에 넣은 권호영은 슬며시 미간을 찌푸렸다.
‘…간장 맛.’
어느 부분은 짜고, 어느 부분은 심심했다. 다 태워 먹어 색이 칙칙하니 가늠이 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균일하게 볶지 않은 것 같고. 그래도 어떻게든 다 먹으려고 노력했다. 계속 살갑게 구는 타인에게 보일 수 있는 최소한의 성의였다.
“그래도 미국이랑 문화가 다르잖아. 대학 생활 하려면 고생 좀 하겠다.”
그사이 남자는 나름 대화해 보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다. 한국말을 알아듣기 어렵진 않았다. 어머니와 거의 한국어로 대화를 나누곤 했으니까.
“괜찮아요.”
귀찮았다. 눈앞의 남자도, 앞으로의 대학 생활도 전혀 흥미롭지 않았다.
새로운 인간관계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권호영의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눈으로 확인되는 실적이었다. 프롬에 참석해도 적당히 구색만 맞추고 빠져나오곤 했다. 즐거운 기분을 느끼는 게 죄를 짓는 것만 같아서 마음 편히 있을 수가 없었다.
아마 이렇게 흘러가는 대로 살다가 다시 미국으로 가겠지. 머리를 자르지 않는 이유도 그와 비슷했다. 머리를 길러야겠다고 특별히 마음먹은 게 아니었다. 그저 방치해 두니까 그대로 자랐다. 무언가를 해야겠다는 압박감과 그에서 비롯되는 열정이 사라지니 제 몸을 차지한 건 무기력이었다.
어머니를 향한 일종의 반항심이 작용했다면, 이전의 모습과 정반대가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권호영은 자신이 그럴 수 없는 인간이란 걸 알았다. 아마 자신은 한국에서도 펜을 놓지 않을 것이다. 이미 반복한 지 오래된 것들이었다.
한국을 떠날 때가 되면 다시 예전의 모습을 되찾을지도 모르겠다. 어머니의 말대로 무언가를 느끼고, 깨달음을 얻을 수도 있겠지.
그러나 그 순간이 지금은 아니었다. 바다 한가운데에 떠다니는 조각배가 된 기분이었다. 목적지를 잃고, 파도를 따라 넘실넘실 헤엄치기만 하는 조각배.
“이게 뭐야?”
남자가 밥을 다 먹을 때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을 것 같아서 건네준 돈 봉투였다. 왜 제 손으로 직접 전해 주라고 한 건진 모르겠으나, 어쨌거나 어머니의 말에 따랐다.
“집세요.”
“돈은 괜찮아. 잠깐 있다가 가는 건데.”
남자가 상냥하게 대꾸했다. 그에 권호영은 슬슬 밀려드는 짜증을 참기 힘들어졌다. 남자를 상대하기 귀찮은 이유도 컸지만, 그와 어머니가 대체 무슨 관계일지 추측되지 않았던 이유도 한몫했다.
돈 문제는 둘이 협의했을 줄 알았는데. 남자는 처음 듣는다는 목소리였다. 어머니와 비슷해 보이는 사람이라서 그녀와 내통하는 사이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남자가 그녀의 눈을 대신할 감시역일 것이라고.
모르는 척하는 건지, 아니면 진짜 모르는 건지.
“…아니요.”
더 생각하기 피곤했다. 어린놈의 치기라고 여기길 바라며 권호영은 등을 돌렸다. 방문을 닫고, 비로소 혼자 남겨졌음에도 불안은 진정되지 않았다.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
‘나한테 집이 있던가.’
남들이 좋다고 떠드는, 안락한 자신만의 집.
집이란 게 그런 것이라면 권호영에겐 집이 없었다.
개강은 빠르게 다가왔다. 한국의 대학교는 듣던 것보다 자유로운 분위기였다. 학과생의 인원이 많아서 기강을 잡는다고 나서는 선배도 없었고, 같은 학과끼리 얼굴을 모르는 사람들이 태반이었다. 그 덕에 재외국민 특별전형으로 입학한 권호영도 물 흐르듯 그사이에 녹아들 수 있었다.
일상은 무던히도 흘렀다. 생활 한국어는 못 알아들을 게 없었지만, 전공 책 속엔 어려운 말이 한가득했다. 거기다 강의 시간만 되면 동기들과 교수님이 간간이 떠드는 농담 섞인 얘기가 미국과는 유머 코드가 맞지 않아서 받아들이기 난해했다.
그렇다고 소외감이나 초조한 기분은 들지 않았다. 계속 지내다 보면 언젠간 익숙해지겠거니, 하며 별생각 없이 살아갔다. 오히려 새로운 문화에 적응하는 시간이 한편으론 머리를 비우는 것에 도움 되기도 했다.
학교에 나가며 권호영의 생활 루틴도 잡히기 시작했다. 아침에는 학교, 저녁에는 헬스장. 공백 시간은 대부분 도서관에서 보냈다.
미국에서 지낼 때는 주변 애들과 어울리며 여가를 보내기도 했었다. 럭비 경기를 보러 가거나, 해변에 들러 여유로운 한때를 즐기거나.
그렇게 특별한 추억은 아니다. 공부에만 매진하다 보면 시간이 나지 않아 인간관계에 소홀해진다. 겉도는 게 티가 나지 않을 만큼의 친분을 유지하고자 종종 어울린 것이었다.
그런데 이젠 사람을 사귀어야겠다는 의무감조차 사라졌다. 무얼 해야 할지 모르는 상태에서 낯선 곳을 배회하자니 어떤 의지력도 샘솟지 않았다.
“권호영이, 오늘도 일 빠따네?”
그렇다고 친구가 아예 안 생기지는 않았다.
“아, 힘들어. 강의실 멀어서 학교 못 다니겠다. 아침마다 오르막길 오르는 거 개 빡세네.”
수업이 시작하기 5분 전, 옆자리에 가죽 크로스백이 놓였다. 고개를 돌리자 윤재윤이 게으르게 하품하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올해로 23살이라는 윤재윤은 매일같이 피곤에 찌든 모습이었다.
매번 바쁘다고 투덜대는데, 성격상 자신이 가만히 있지 못하는 타입 같았다. 굳이 나서지 않아도 주변 이들의 소식을 물어다 주는 사람도 윤재윤이었다. 교수님의 강의 스타일이라든가, 어려운 용어를 설명해 주는 것도 그의 몫이었다. 그렇다고 그를 옆에 두면 편리해서 같이 어울리는 것은 아니었다.
‘야, 너 이름이 뭐냐?’
윤재윤과 처음 만난 것은 개강총회 때였다.
‘좀 잘생겼을 것 같다.’
술자리 가장자리에 조용히 앉아 있던 제게 취기를 여실히 풍기며 누군가 말을 걸었다.
‘왜 그러고 다녀?’
성가신 질문을 하길래 처음엔 무시했다. 그러자 그는 본격적으로 자리를 잡고 앉아서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적당히 대답해 주다가 호칭이 필요할 것 같기에 뭐라고 부르면 좋을지 물었다.
‘선배님이라고… 불러 줄래?’
그 호칭에 무슨 로망이라도 있는지 윤재윤은 부끄러워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이 껄끄럽고도 불쾌해 권호영은 오늘날까지도 되도록 호칭을 입에 올리지 않았다.
“…술 냄새 나요.”
멀리 떨어져서 앉으면 좋으련만, 윤재윤은 옆자리에 궁둥이를 붙인 뒤였다. 권호영은 의자를 옆으로 끌어 거리를 벌렸다. 윤재윤은 눈치채지 못한 얼굴이었다.
“엉, 그렇게 됐다. 알바까지 겹쳐서 죽겠어. …아, 알바라는 말은 아냐?”
“알아요. 아르바이트 줄임말이잖아요.”
“미국에서 살다 왔다는 거 거짓말이지. 한국 문명을 너무 잘 아는데.”
“술자리에서 배웠어요.”
살면서 처음 마셔 본 것과 동시에 죽도록 퍼마신 그 술.
권호영이 살던 곳은 만 21세가 되어야 음주가 가능했다. 어른들의 눈을 피해 술을 빼돌리는 애들도 있었으나, 틀에 맞춘 모범생이었던 권호영은 한국에 와서 처음 술이란 걸 접했다. 쓴맛밖에 안 나는 액체를 사람들은 잘도 넘겼다.
한국의 술자리는 즐기는 것보다 겨루기에 가까워 보였다. 취하는 행위에 중점을 둔 느낌이랄까. 취하기 위한 노래도 가지각색이었다. 호영이가 좋아하는 랜덤 게임, 아, 마시면서 배우는 술 게임, 안주 먹을 시간이 없어요…. 그 전투적인 노랫말만 생각해도 속이 울렁댔다.
“오빠, 안녕하세요. 호영이도 안녕.”
뒤이어 윤재윤의 옆자리에 누군가가 앉았다. 목소리를 들으니 낯익은 사람이었다. 민들레. 이름이 특이해서 얼굴을 금방 외운 여자애였다.
“오, 들레. 오늘 머리 묶었네.”
“네. 아니, 오늘 덥지 않아요? 벌써 여름인가 봐.”
“난 춥던데. 봐봐, 이 옷 양털 달렸어.”
“에이, 오빠. 그래도 봄에 털옷은 아니지 않아요? 추위 타는 거 나이 들어서 그렇대요.”
“…야, 복학생 마음 찢어진다.”
민들레, 윤재윤, 권호영.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이 조합은 술자리에서 처음 조우했고, 이후로 수업이 겹쳐 얼결에 같이 어울리게 됐다. 민들레는 윤재윤의 말에 웃더니 이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호영이는 오늘도 달라진 게 없네. 집에 추리닝이 대체 몇 개야?”
호영이. 원래 한 사람만 부르던 이름이었는데, 요새 많이 들리는 이름이었다. 다른 사람이 그 이름을 부를 때면 어색한 기분이 엄습했다. 특히 집 안에서 들을 때면 위화감이 더욱 짙어지곤 했다.
‘호영아, 저녁 먹었어? 초밥 사 왔는데.’
‘오늘은 일찍 왔네. 아, 몽블랑 좋아해? 아는 분한테 선물 받았어.’
‘여기. 커피도 사 왔으니까 같이 먹어.’
단여명.
“…….”
먹을 걸 어디서 자꾸 들고 오는지. 제가 아기 새도 아니고, 먹을 걸 꼬박꼬박 갖다 나른다. 역시나 요리는 취미가 아니었는지 그는 다음날부터 바깥 음식을 사 와 같이 먹자고 권했다. 쳐내는 게 티가 날 텐데도 움츠러드는 기색 하나 없다.
그렇다고 상대방이 불편하도록 무턱대고 들이대는 성격은 아니었다. 그저 자기가 세운 철칙이라도 있는지 끼니에 관해서만 유달리 신경을 썼다.
권호영도 몇 번은 괜찮다며 사양했지만, 계속 권유하니 여간 마음이 불편해지는 게 아니었다. 그렇다 보니 얼결에 식사를 같이할 때도 생겼다. 대화를 많이 나누진 않아 적정 거리는 좁혀지는 법이 없었지만. 눈치를 보아하니 아마 그는 제가 말이 없는 것에 반포기한 상태 같았다.
“이 자식, 은근 범생이라니까. 누가 봐도 아싸일 것 같이 생겨서 개총 왔을 때부터 알아봤어.”
모든 수업을 끝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윤재윤이 놀리듯 입을 열었다. …그건 문자 내역에 필참이라는 단어 때문에 하는 수 없이 간 거였다. 필히 참석해야 한다는데, 몸이 어디 아픈 것도 아니고 어떻게 안 갈 수가 있을까.
권호영은 불만을 누르고 앞만 보고 걸었다. 눈치껏 빠질 수 있는 자리란 걸 뒤늦게 알았지만, 아마 알았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었을 것이다. 어쨌든 같은 학과 사람들끼리 처음 모이는 자리 아닌가.
권호영은 이럴 때마다 필요 이상으로 성실한 자신이 싫었다. 특히 아무런 소득이 없을 게 훤히 보이는데도 불응하지 못하고, 순순히 남의 말을 따를 때 혐오감은 더욱 깊어지곤 했다.
“봐봐. 이렇게 볼 꼬집어도 가만히 있는다.”
“애가 까칠하게 생겨서 은근 순해요.”
“내친김에 앞머리도 까 보자. 하루에 한 번씩 빛을 쏘여 줘야 돼. 이거 시력에 안 좋다니까?”
“아, 잠깐, 저 가방에 머리끈 있는데….”
“…그만해요.”
거뭇했던 시야가 환해지자 잡념이 개는 듯했다. 권호영은 제각기 자신의 뺨을 꼬집은 손과 앞머리를 넘긴 손을 옆으로 치워냈다. 그러니 옆에 있던 민들레가 장난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너 참 보기 드문 캐릭터인 것 같아. 대체로 아무 생각 없어 보인단 말이지. 근데 또 수업은 열심히 듣고…. 은근 성실해.”
“그래, 이제 와서 하는 말인데 나 처음에 너 컨셉충인 줄 알았다.”
윤재윤 또한 웃으며 얘기를 거들었다. 컨셉충? 무슨 말인지 몰라 잠자코 있으니 윤재윤이 말끝을 흐렸다.
“아, 컨셉충이란 말은…. 야, 뭐라고 설명해야 되지? 컨셉 잡는 사람?”
한국인이 영어를 발음할 때 억양이 달라지곤 했기에 한 번에 알아듣기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거기다 한국어와 영어가 합쳐진 합성어라면 그 뜻은 더욱 의미 불명하게 들렸다. 결국 두 사람이 녹색 창까지 동원해서야 권호영은 의문을 해소할 수 있었다.
“틀리지는 않네요.”
거의 방치하다시피 내버려 둬 이렇게 변한 거였지만, 아예 아니라고 부인하긴 어려웠다. 자세히 설명하긴 귀찮아 권호영은 두루뭉술하게 답했다.
“그래서 그 모습은 무슨 컨셉인데. 너드남인 줄 알았던 내 동기가 알고 보니 도도한 훈남?!”
“으, 오빠…. 인터넷 좀 그만해요.”
민들레가 질색하는 눈빛을 보냈다. 그에 윤재윤이 길길이 날뛰었다. 자신은 워낙 바쁜 사람이라서 인터넷을 할 시간이 없다나. 두 사람의 얘기에 조금쯤 웃을 만도 하건만, 권호영은 여느 때와 같이 무표정했다.
잡담을 잇던 세 사람은 버스 정류장 앞에서 헤어졌다. 민들레는 반대편에서 버스를 탔고, 윤재윤은 학교 근처 원룸에서 자취했다. 혼자 남겨진 권호영은 익숙해진 번호판을 확인하고, 녹색 버스에 몸을 실었다. 집과 학교는 대중교통을 타고 15분 거리였다.
집으로 돌아온 권호영은 실내를 짧게 훑었다. 인기척이 들리지 않는 것이 역시나 집주인은 오늘도 외출한 모양이었다. 무슨 일을 하는 것 같진 않던데, 어떤 이유에선지 남자는 외박이 잦았다.
어쨌거나 그가 없으면 마음이 편했기에 권호영으로선 나쁜 일은 아니었다. 집안일의 순번을 정하자고 제안한 것도 남자와 부딪치는 상황을 최소화하기 위해서였다. 되도록 그의 눈에 띄고 싶지 않았다.
가방을 내려놓은 권호영은 곧장 욕실로 향했다. 웃옷과 바지를 차례대로 벗고 거울 속의 제 모습을 들여다보았다. 머리를 넘기니 최근 들어 낯설어진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슬쩍 미간을 찌푸린 권호영은 거듭 머릿속에 걸리던 생각을 이었다.
‘…완전히 똑같지는 않지.’
처음엔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같이 살다 보니 남자는 모친과 다른 모습을 보였다.
일단 단여명이란 사람은 천성이 게을러 보였다. 남의 밥은 유난스럽게 챙기면서 그는 식사할 거리가 없으면 우유에 시리얼을 말아 허기를 채웠다. 첫날에 보았던 멀끔했던 모습도 집 안에서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방금 일어나 이리저리 헝클어진 머리, 습관처럼 손에 쥐고 있는 커피잔, 무기력하게 소파 위에 늘어진 몸. 그리고 밤만 되면 밖을 떠도는, 알 수 없는 남자였다.
…어머니와 아는 사이가 아닌가? 이쯤 지나면 의구심이 들 만도 했다. 그는 자신을 감시하려 들지도 않았고, 철저하게 크로스 라인을 지켰다. 첫날을 제외하고 사적인 질문도 하지 않았고, 같이 지내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배려했다.
그럼 이 집으로 오게 된 게 단순한 우연이었다고? 아니, 그건 말이 안 됐다. 평상시 시간 계산에조차 철저한 어머니다. 그런 실수를 할 리가 없을 텐데.
권호영은 샤워기의 물줄기를 맞으며 상념에 잠겼다. 단여명에 대해 더 아는 것이 있었나. 친분이랄 게 없어서 그럴듯한 무언가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러다 보디 워시 펌프를 누른 순간 향긋한 냄새가 수증기에 섞여 뭉게뭉게 피어올랐다.
‘냄새.’
그에게는 항상 향수 냄새가 섞인 담배 냄새가 풍겼다. 가끔 밖에 나갔다가 들어오는 걸 보면 흡연자인 것 같았다. 나가는 텀을 계산해 봤을 때 평범한 흡연자도 아니고, 상당한 애연가.
몸가짐은 부잣집 도련님 같은데, 그렇게 깔끔 떠는 성격도 아니었다. 같이 지내다 보니 알 수 있었다. 그는 가끔씩 빵부스러기를 흘리거나 사용한 물컵을 씻어 놓지 않았다. 그런 자잘한 실수를 할 때마다 군말 없이 뒷정리하는 사람은 권호영이었다.
그래도 그렇게 나쁜 사람은 아니었다. 전체적인 평은 그랬다. 제가 단절된 태도를 보이든 말든 그는 항상 우호적이었다. 그 탓에 가끔 불편한 기분을 자아내게 했지만, 기본적으로 선한 남자였다.
어머니의 지인이 계속 친절하게 대해 줘서일까. 날이 갈수록 단여명에 대해 생각하는 시간이 길어졌다.
어떻게 보면 한국에서 가장 친해질 법도 한 사이였다. 한 지붕 아래에서 같은 공간을 사용하는 사이니까. 그런데도 눈에 보이지 않는 거리감은 가까워질 줄 몰랐다. 순전히 한 사람 때문이었고, 그게 본인이라는 걸 권호영도 알고 있었다.
계속 말을 거는 게 뻔뻔하다고 해야 할지, 붙임성이 좋다고 해야 할지…. 권호영은 욕실 문을 여는 것과 동시에 모든 상념을 지웠다. 자신에겐 아직 해야 할 일이 있었고, 잠들기까지 아직 시간이 남았다. 생각 외로 그에게 많은 시간을 할애했으니 오늘만큼은 그 이상 접점이 없을 줄 알았다.
-네가 호영이구나?
저녁에서 밤으로 넘어가는 시각,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오지 않았으면 말이다.
-난 여명이 엄마 되는 사람이야. 호영이 엄마 친구.
도르르르…. 손에 쥐고 있던 펜이 책상 위를 굴렀다. 의식하지 못한 새 등이 곧게 펴지고, 자세가 딱딱하게 굳었다. 무심코 스탠드 등을 껐다가 방이 어두컴컴해지자 당황이 배가 됐다. 다급함을 숨기지 못한 손짓으로 다시 불을 켜니 금세 주위가 환해졌다.
“…네. 안녕하세요.”
단여명과 비슷하게 부드러운 목소리였다. 친구. 어머니는 분명 지인이라고 했는데. 두 사람이 서로를 정의하는 관계가 달랐다. 그마저 제 어머니 같다고 생각하며 권호영은 말소리에 집중했다.
-그래. 아줌마가 연락하는 게 늦었지? 둘이 어떻게 지내나 궁금해서 여명이한테 물어봤는데, 통 믿을 수가 있어야지.
권호영은 순간 점차적으로 밀려드는 긴장감을 인식했다. 손바닥에 끈적한 땀이 고이는 것만 같았다. 신경 쓰지 않으려고 해봐도 한 사람에게 생각이 쏠렸다. 단여명이라는 사람으로 시작해 그의 어머니를 거슬러 올라 마지막으로 닿은 건 하나뿐인 혈연이었다.
그녀에게 흘러 들어갔을 얘기가 안 좋은 방향일까 봐 걱정됐다. 살면서 이미 몇 번이나 실망을 안겨 줬는데도, 그녀를 등지는 것만 같은 순간이 오면 본능적인 거부감이 잇따랐다. 지금은 한집에 살지도 않는데 왜 벗어나지를 못하는 건지. 강렬한 자기혐오가 심장을 갉아 먹는 것만 같아 권호영은 턱에 힘을 주었다.
-지내는 데 불편한 건 없고? 둘이 밥은 거르지 않나 걱정이야.
다행히 단여명의 어머니는 별다른 얘기를 하지 않았다. 식사의 여부를 궁금해하는 건 이 집 식구들 특징인가. 단여명이 버릇처럼 묻던 말이 이제야 이해되는 듯도 싶었다.
“네, 형이… 워낙 잘해 주셔서. 잘 지내고 있습니다. 밥은 거의 같이 먹고요.”
-그렇다니 다행이네. 둘이 워낙 비슷한 환경에서 자라서 마음이 쓰이지 뭐니.
…비슷한 환경? 단여명과 제가 말인가? 어렴풋한 호기심을 가지기도 전에 따뜻한 목소리가 재차 귀를 울렸다.
-짧은 시간이지만 서로 잘 챙겨 주고 의지도 하면서 지내면 좋겠어. 우리 여명이가 형으로서 조금 서툰 부분이 있어도 호영이가 이해해 줬으면 해. 애가 외동이라서 은근 어른스럽지 못하거든. 친구다 생각하고 마음 편히 대하고.
“…아니요. 너무 잘해 주셔서 오히려 제가 매번 죄송하죠.”
-그래도 약간의 불만은 있을 것 같은데?
“아니요, 그런 건….”
할 말을 찾지 못하고 쩔쩔매는 게 티가 났나 보다. 상대편에서 짤막한 웃음소리를 뱉었다.
-못살게 군다 싶으면 이 번호로 귀띔해 줘도 좋고.
그 후로 끊길 듯 끊어지지 않는 통화가 몇 분간 이어졌다. 권호영은 경직된 자세로 묻는 말에 착실히 답했다. 친분이 없다시피 한 사람의 가족 간의 전화는 불편하기도 했고, 생경하기도 했다.
“아니요. 네, 네…. 아닙니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네.”
10분 18초. 전화가 끊어진 핸드폰 화면을 바라보던 권호영은 의자 등받이에 깊숙이 몸을 묻었다. 대략 1시간을 통화한 것처럼 진이 빠졌다. 허탈감과 함께 묘한 감정이 가슴 속에 자욱하니 퍼졌다.
‘…이상한 기분.’
분명 좋지 않은 기분 같은데, 이게 무슨 감정인지 스스로도 판단하지 못했다. 자신의 어머니보다 단여명의 어머니에게 먼저 연락이 온 것도, 친하지 않은 사람의 가족이 자신을 걱정하는 것도. 옳고 그름밖에 모르는 머리가 제동을 일으켰다.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던 권호영은 천천히 눈길을 내렸다. 경제 용어 밑에 밑줄 친 설명란은 빈칸이었고, 그 위로는 빼곡한 필기가 적혀 있었다.
권호영은 곧 펜을 들었다. 어릴 때 낯선 곳이 두려워 부모님의 품속에 얼굴을 묻었던 것처럼 감정을 지워 내듯 기계적으로 펜을 움직였다. 곧 술렁이던 마음은 잔잔히 가라앉았고, 남겨진 것은 사각거리는 볼펜 소리 하나였다.
24학점을 꽉 채워서 듣는 한편 권호영이 관심을 갖게 된 것이 생겼다. 한국 대학교의 동아리. 한국에서 미국으로 편입하는 때가 오면 도움이 되리란 생각이 든 까닭이었다.
GPA 점수도 중요했지만, 미국에서도 학력이라 하면 과외 활동을 배제할 수 없었다. 봉사활동이나 스포츠클럽에서 쌓은 수상 경력 등을 기인하여 입학 사정관은 학생의 자질을 파악했다. 과외 활동은 참여 개수보다 한 활동에 장기적으로 매진하는 쪽이 긍정적인 인상을 주기 쉬웠다.
학교 동아리는 윤재윤이 먼저 꺼낸 얘기였다. 경영학원론 수업이 끝나고, 다른 강의실로 이동하는 길이었다. 윤재윤은 제 뒤에 졸졸 따라붙어 같은 동아리에 들자고 노래를 불렀다. 성가신 기분을 느끼는 와중에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을 어렴풋이 했다.
동아리를 홍보하는 학생들은 틈만 나면 정문 앞에서 팸플릿을 돌렸다. 개강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본격적인 시험 기간도 아니었고, 저녁엔 운동과 공부가 스케줄의 전부였다. 시간은 비는데 이력에 도움이 될 새 활동을 찾은 것 같으니 혹하는 마음이 생겼다.
윤재윤의 눈이 반짝거리는 게 언뜻 진실해 보였다. 불건전한 쪽은 아닐 것 같아 ‘팔도 한마당’이란 동아리에 들었다. 한국적인 특색이 느껴지는 동아리명은 전국 팔도를 돌아다니며 이바지하겠다는 취지를 담았노라고 동아리 회장이 자랑스럽게 밝혔다.
“너… 되게 곰 같다. 곰. 흑곰.”
그게 허울뿐이었다는 것을 권호영은 세 번째 동아리 모임에 참석하고서야 알았다.
“호영아, 어흥 한 번만 해 봐…….”
우히히, 하며 윤재윤이 이상한 웃음소리를 냈다. 권호영은 윤재윤의 몸을 짜증스럽게 추슬러 올렸다. …팔도를 돌아다니며 이바지하기는 무슨.
“저 다신 술 안 먹어요.”
그게 네가 있는 자리면 더더욱. 그러니까 앞으로 나 부르지 마.
메슥거리는 속을 느끼며 그와 비슷한 말을 흘렸다. 어떻게 말했는지까지는 자세히 기억나지 않았다. 영어로 된 욕을 섞었던 것 같기도 했고, 익숙하지 않은 반말로 했던 것 같기도 했다.
“윤재윤…. 야.”
“응…? 으응?”
“너 집이 어디야. 자꾸 눈 감지 말고 똑바로 말해…. 진짜 길바닥에 버리고 가기 전에.”
어차피 두 사람 다 고주망태로 취해서 어떻게 말하고 듣든 상관없었다.
윤재윤의 몸을 그의 자취방까지 옮겨 놓고, 권호영은 밤거리를 홀로 걸었다. 집까지 어떻게 걸어갔는지 기억이 흐렸다. 졸음이 밀려와 눈꺼풀이 감겼지만, 윤재윤의 집에서 잘 생각은 들지 않았다.
일평생 강박적으로 살아온 탓에 몸뚱이마저 바뀐 지 오래였다. 자신이 집으로 정한 곳이 아니면 잠들 수 없었다.
꼬박 30분을 걸었는데도 취기는 가시지 않았다. 현관문의 패스워드를 두 번이나 틀리고 나서야 집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그에 픽 실소가 터졌다. 한 달도 채 안 된 시간에 몸은 벌써 이 집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다음부터는 단편적인 기억만 남았다. 드문드문 생각나는 건 정신이 흐린 와중에 씻긴 씻었는지 희미한 비누 냄새가 풍겼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 주변은 눈이 부시도록 환했다.
“……?”
뭐가 어떻게 된 건지 몰라 머리가 멍했다. 달랑 속옷만 걸친 제 몸을 내려다보는데, 깨질 듯한 두통이 엄습했다. 있는 대로 인상을 찌푸린 권호영은 머리맡에 올려둔 탁상시계를 집어 들었다.
‘오전 8시 40분….’
멍하니 시계를 보다가 머릿속에 토막 난 단어들이 꽂히다시피 생각났다. 학교, 오전 수업. 그리고… 지각.
권호영은 벼락같이 침대에서 일어났다. 지각이라니. 아무리 막 살아도 인생에 남길 수 없는 오점이었다.
갈아입을 옷을 챙겨 욕실로 향하는 도중 그냥 옷만 걸치고 나갈까란 생각을 잠시나마 했다. 그러다 숙취에 찌들어 꾀죄죄한 윤재윤의 얼굴이 뇌리를 스쳤다. 권호영은 빠르게 생각을 접었다. 윤재윤과 똑같은 행색은 단연코 싫었다.
무슨 정신으로 샤워를 한 건지 몰랐다. 머리를 말릴 시간도 없어 대충 수건으로 물기만 털었다. 가방을 챙겨 들고 밖으로 나가려는 찰나 익숙한 인영이 시야에 걸렸다. 언제 집에 들어온 건지 단여명이 소파에 멀뚱히 앉아 있었다.
이 시간에 집에 다 있네. 그런 생각이 잠깐 들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권호영은 대충 고개만 까딱이곤 단여명의 곁을 지나치려고 했다.
“늦은 것 같은데… 태워다 줄까?”
그러나 나직한 목소리가 발걸음을 잡아채었다. 혹여나 상대가 거절하진 않을까, 언뜻 조심스럽기까지 한 물음이었다.
마음은 고마웠지만, 묘한 짜증이 일었다. 잠깐 대답할 시간조차 아까웠으니까. 언제나처럼 괜찮다고 대답하려는 순간이었다. 공연한 망설임이 들어 권호영은 선뜻 걸음을 떼지 못했다.
염치없이 차를 얻어 타기엔 권호영은 그리 뻔뻔한 성격이 아니었다. 더욱이 일방적인 호의를 거듭 받고 있는 지금으로선 부담감이 배가 됐다. 낯선 이에 대한 경계심과 집을 떠난 이후로 찾아온 권태감이 합쳐져 단여명의 호의를 달갑게 받아들이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현재 권호영의 컨디션은 극악이었다. 술이 완전히 깨지 않아 가만히 서 있는 것조차 눈앞이 빙글빙글 도는 기분이었다. 자가용을 타고 간다면 시간도 얼추 맞을 것 같았다.
꺼림칙한 마음과 현실적인 문제가 충돌하길 몇 차례.
“그럼 부탁드릴게요.”
권호영은 경직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도 지각은 면하고 봐야 했다. 불편한 마음은 언젠가 사라질 응어리였고, 출석 체크는 영구적으로 남는 기록이었으니까.
“이름, 불렀어요?”
동그랗게 뜨인 눈이 두어 번 깜빡였다.
“아직.”
민들레가 목소리를 죽여 대답했다. 권호영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민들레의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마에 맺힌 땀을 닦느라 머리를 쓸어 넘기자 그녀가 흥미로운 눈으로 이쪽을 주시했다.
“웬일이야? 네가 지각을 다 하고.”
“어제 동아리 모임에 갔다가….”
권호영은 고개를 저었다. 뒷일은 상상에 맡기겠다는 소리였다. 어젯밤 일을 떠올리기만 해도 속이 울렁대는 느낌이었다.
“아, 그래서 재윤 오빠 안 오는구나?”
“…윤재윤 선배 안 왔어요?”
“응. 전화도 안 받아. 자체 공강 때릴 건가 봐. 어휴, 열심히 살겠다더니 이럴 줄 알았다. 또 에프 받아서 재수강하려고.”
앞을 보니 교수님은 딴소리에 한창이었다. 옆에서 민들레가 본인이 든 사진 동아리도 별반 다를 게 없다며 귓속말했다.
권호영은 주변 소리를 흘려들으며 필기도구를 꺼냈다. 강의실은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수업은커녕, 아직 학생들의 이름도 부르지 않은 듯했다.
거친 호흡이 안정을 되찾을 때쯤 교수님이 출석을 부르기 시작했다. 권호영은 자신의 차례를 귀 기울여 듣다가 좀 전의 상황을 떠올렸다.
‘조심히 다녀와.’
…향수 냄새. 좁은 차내에 은은하게 퍼졌던 향은 낯선 종류였다. 평소에 뿌리던 것보다 무거운 향이었지.
단여명은 차를 타고 가는 도중 어떤 말도 붙이지 않았다. 태워다 준다며 조금이라도 생색낼 줄 알았는데,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분위기가 어색하다고 과장스럽게 행동하는 사람들이 으레 있다. 아마 침묵을 지킨 이유는 배려겠지. 그는 제가 말수가 없다고 여기고 있을 테니까.
본래 성격이 어떨지는 몰라도 단여명은 친화력이 없어 보이진 않았다. 매번 말을 거는 쪽도 그였다. 만약 상황이 극단적으로 치닫지 않았더라면 적당히 친해졌을지도 모른다. 정상적으로 독립해 자신의 의지로 한국 땅을 밟았더라면.
“고맙다고….”
말해야 하나. 별로 내키지 않았음에도 마음이 찝찝했다. 어쨌든 고마운 건 고마운 거긴 한데….
“응? 뭐라고?”
혼잣말을 들었는지 민들레가 물음을 던졌다. 권호영은 고개를 짧게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시선을 다시 앞으로 돌리고 펜을 잡았다. 출석을 부른 교수가 본격적으로 수업의 시작을 알렸다.
[윤재윤: 열ㄹ러분]
[윤재윤: 저 지금 살아났ㄴ어요]
단체 채팅방에 메시지가 떠오른 건 저녁에 가까워졌을 무렵이었다. 초록색 애벌레가 바닥을 기어 다니는 이모티콘이 뒤이어 전송됐다. 꾸물꾸물 기어 다니는 몸짓이 자신의 몸 상태를 표현한 듯했다.
[민들레: ㅋㅋㅋㅋ와 여기까지 술 냄새나]
[민들레: 복학생 버프... 이렇게 사라지나요]
[윤재윤: 들레 어디냐 알바 중?]
[민들레: 넹 손님 없어서 그냥 앉아 있는 중ㅎ]
[윤재윤: 알바 파이팅 하시고]
[윤재윤: ㅅㅂ 뒤질 것 같아 속 오바임]
[윤재윤: 호영인 ㅇㄷ냐 오늘 학교 감?]
[민들레: ㅋㅋㅋ쟤가 오빠예요? 당근 왔죠]
[민들레: 근데 호영이도 오늘 지각할 뻔했어요]
[윤재윤: 오]
[윤재윤: 호영이 짐 해장 ㄱ? 선배님이 사줄겡ㅎ]
권호영은 대화창을 내려다보다가 그대로 핸드폰 화면을 껐다. 윤재윤은 학교에 나와도 강의 시간에 자주 졸곤 했다. 만난 김에 오늘치 필기를 보여 달라고 부탁할 심산인 게 보였다. 아마 자신과 어울리는 이유도 군대를 전역하고 새롭게 살겠다는 그의 포부와 자신의 행동거지가 맞아떨어졌기 때문이겠지.
그렇다고 딱히 불쾌하진 않았다. 자신도 그를 옆에 두니 편하다고 생각했으니까. 실제로 학교생활에 있어서 제일 도움을 주는 사람은 윤재윤이었다.
다만 개인적인 만남을 가져야 할 필요성까지는 느끼지 못했다. 머릿속으로 저녁 스케줄을 다 세운 뒤이기도 했고. 필기는 내일 학교에 가서 보여줄 수 있다.
매일 운동하다 보니 조금만 미뤄도 빨랫감이 산더미처럼 쌓였다. 밀린 빨래를 끝내놓고, 도서관에 들렀다가 가벼운 조깅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면 될 것 같다. 평소처럼 강도 높은 운동을 하기엔 컨디션이 받쳐 주지 않았다. 민들레에게 추천받은 숙취 해소제를 들이켠 후였지만, 여태 머리가 무거웠다.
801호 현관문 앞에 다다라 어느새 손에 익은 패스워드를 눌렀다. 문을 열고 들어가니 웬일로 집 안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거실로 가보니 소파 위에 한 남자가 잠들어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 집의 주인은 소파를 참 좋아했다. 드러누워 있는 게 대부분이었지만, 가끔 저기서 책을 읽거나, 햇빛을 쬐며 커피를 마시기도 했다.
잔잔한 노랫소리는 전원이 들어온 TV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영화를 보다가 잠들었는지 TV 화면 속엔 엔딩크레딧이 올라가고 있었다.
꽤 깊게 잠들었는지 누가 온 줄도 모르는 것 같았다. 매번 소파에서 쪽잠을 자도 제가 온 소리가 들리면 몸을 뒤척이거나, ‘왔어?’ 하며 졸린 목소리로 인사하곤 했다. 그에 잠귀가 밝은 편이구나, 짐작했는데. 오늘은 전날 밤에 피곤한 일이라도 있었는지 쉽게 깨어나지 못했다.
“…….”
그에 권호영은 찜찜하다 못해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을 느꼈다. 피곤한 와중에 차를 태워 준다고 나선 건가? 불퉁한 생각을 하며 단여명의 앞으로 걸어갔다.
그의 머리맡엔 리모컨이 놓여 있었다. 그것을 들어 TV의 전원을 끄자 주위가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괜스레 잠든 상대를 살피니 여전히 깊이 잠든 상태였다.
숨을 고르는 것에 맞춰 판판한 가슴팍이 미약하게 오르내렸다. 거리가 조금 가까워졌다고 그의 냄새가 맡아졌다. 시간이 많이 지나서인지 낯선 향수 냄새는 많이 옅어져 있었다.
TV를 꺼 주고, 권호영은 세탁기를 돌렸다. 여태 가시지 않은 숙취로 입맛이 돌지 않아 편의점에서 사 온 닭가슴살 샌드위치로 간단히 저녁을 때웠다. 세탁기에 넣은 빨래가 다 돌아갈 때까지도 단여명은 일어나지 않았다.
빨래 더미를 손에 든 채 권호영은 발코니의 문을 열었다. 계절이 봄이긴 했지만, 밤이 되면 공기가 쌀쌀해지곤 했다.
찬바람이 열어 놓은 문 틈새로 새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그에 뒤에서 잠든 남자가 괜스레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권호영은 고민하다가 문 사이의 간격을 조금 좁혔다.
그렇게 빨래를 다 널어갈 때쯤이었다. 은근한 시선이 느껴져 무심결에 고개가 뒤로 돌아갔다. 그리고 말똥말똥한 눈동자와 시선이 정통으로 부딪혔다.
“…….”
“…….”
잠이 들었던 자세 그대로 단여명은 이쪽을 멀뚱히 구경하고 있었다. 그와 잠시간 시선을 맞추던 권호영은 다른 말 없이 얼굴을 돌렸다.
잠귀가 예민한 편이니 빨래를 너는 도중에 깰 거라곤 짐작했다. 그런데 막상 그가 눈을 뜬 모습을 보자 급격히 기분이 찜찜해졌다. 차를 얻어 탄 것도 모자라 피곤해서 곯아떨어진 사람을 눈치 없이 깨운 것 같아 양심의 가책이라도 느끼는 모양이었다.
‘이제 와서 고맙다고 말하기는 늦은 것 같고.’
집안일을 하느라 깨워서 미안하다고 말하기엔 자신들의 관계상 분위기가 이상해질 것 같았다. 권호영은 무어라 말할까 하다가 입을 다무는 쪽을 택했다. 어차피 대화도 잘 안 하는 사이인데. 그리 생각하는 중에도 미미한 불쾌감이 가슴팍을 따끔따끔 찔러댔다.
“왜요?”
뒤에선 움직이는 기척이 느껴지지 않았다. 계속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것 같아 목소리가 흘러나갔다.
“계속 쳐다보시길래.”
조금 날카로운 감이 느껴지는 어투였다. 별생각이 말한 것이었는데, 돌이켜보니 약간 후회됐다. 마음만 먹었다면 좀 더 부드럽게 말할 수 있었을 텐데.
학교에서 동기들이랑은 곧잘 말하곤 했다. 하지만 단여명과는 이미 서먹한 사이로 굳어져 갑자기 편하게 대하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완급 조절이 안 됐다.
권호영은 입매를 딱딱하게 굳힌 채 미미하게 차오르는 짜증을 억눌렀다. 불편한 티를 내면 어련히 시선을 돌릴 만도 하건만. 왜 말을 꺼내게 해 제 마음을 더욱 불편하게 만드는지 모르겠다. 자기가 무슨 다리에 엉겨 붙는 고양이도 아니고. 은근히 살갑게 구는 게 여전히 껄끄러웠다.
그가 친근감을 표할 때마다 무언가 말해야 될 것 같은 강제적인 느낌을 받았다. 누군가에게 억지로 등 떠밀리듯이. 평생토록 느껴온 억압감이 넌덜머리가 나 한국으로 도피하듯 온 것인데.
“아니….”
저 사람이 싫은가. 그건 아니었다. 싫기보다는 뒤가 구릴까 봐 못 미더운 쪽이지.
“키가 크다 싶어서.”
그걸 분명 저쪽도 느끼고 있을 테다. 가깝게 지내지 말자는 의사를 대놓고 비치는데도 아랑곳하지 않아서 문제였지만. 적당한 선을 지키면서도 사람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재주가 있다.
“자취방은 어떻게 돼가?”
본 목적은 그거였나 보다. 권호영은 내심 안도했다.
‘불편하겠지.’
혼자 살다가 얼굴도 모르던 타인과 같이 살려니까. 당연한 사실이어서 불쾌하진 않았다. 그에 무어라 대답하려고 한 순간이었다. 단여명이 재차 입을 열었다.
“아, 눈치 주려던 건 아니었어.”
“…….”
“혼자 살면 쓸쓸하잖아.”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말하듯 조용한 목소리가 뒤쪽에서 울렸다.
“같이 사는 사람이 생기니까… 안심이 돼서.”
‘둘이 워낙 비슷한 환경에서 자라서 마음이 쓰이지 뭐니.’
수화기 너머로 들려오던 목소리가 귓전을 스친 것도 그와 동시였다.
“음…. 그냥 그렇다고.”
작게 혼잣말한 단여명은 곧이어 자리를 떠났다. 등 뒤로 현관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권호영은 자리에 우두커니 서서 그 소리를 귀에 담았다.
‘…아.’
왜 저러는 거야.
권호영은 마지막으로 남은 빨래를 거칠게 털었다. 발코니 문을 닫고 실내로 들어오니 역시나 단여명은 눈에 보이지 않았다.
‘속도 없나?’
착한 사람이 짜증 나는 날이 올 줄은 꿈에도 몰랐다. 자리를 비킨 것마저 제가 불편해할까 봐 배려한 것으로 해석됐다. 아니면 대답도 않는 상대 앞에서 혼자 떠들려니 조금 민망해졌거나. 단여명이 어떤 마음으로 그랬든 권호영은 양쪽 다 달갑지 않아서 미칠 노릇이었다.
이쪽의 눈치를 보면서도 하나씩 친절 섞인 말을 건네는 그가 신경에 거슬렸다. 그 와중에 그걸 온전히 외면하지 못해 죄책감을 느끼는 스스로도 싫었다. 이제 나 하나만 생각하며 살아볼 때도 된 것 같은데.
“…어디 나가나 보네?”
밖을 나가려는 문턱에서 단여명과 우연히 마주쳤다. 그에게선 담배 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그는 집 안으로 들어가게 비켜 달라는 낌새를 보였다.
“네.”
그게 눈에 보였음에도 권호영은 땅에 박힌 듯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무슨 할 말 있어?”
제 눈높이보다 낮은 위치에 선 단여명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권호영은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차분하게 생각을 정리했다.
어색한 사이라는 걸 핑계 삼아 어쩌면 자신은 단여명에게 화풀이하는 중일지도 몰랐다. 그가 어머니의 감시역이라는 것은 증거 없는 추측일 뿐이다. 말한 적이 없으니 자신의 사정이 복잡하다는 것도 그가 알 턱이 없었다. 심경에 혼란을 겪고 있는 건 혼자만의 문제였다. 살갑게 구는 단여명에게 화살을 돌릴 게 아니라.
권호영은 약간 어그러진 관계를 뒤늦게라도 바로잡기로 했다. 그냥 단여명이 말하고 행동하는 걸 그대로 돌려주면 되는 문제였다. 자신을 챙겨 주려고 애쓰는 사람을 의심하며 무작정 밀어내는 것은 성격상 외면하기 힘들었다.
끼니를 신경 써 주고, 사소한 것까지 배려하는 사람이 난생처음이어서 낯설고 불편한 감정을 느끼는 것 같았다. 적당히 말을 트고 지내면 껄끄러운 마음도 눈 녹듯 사라질 것이다.
“…사과하고 싶어서요.”
체한 듯 먹먹했던 속이 확 풀리는 것과 동시에 약간 민망해졌다. 대놓고 밀어낼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이런 말을 꺼내려니 어색함에 손이 곱아들었다.
“제가 그동안 예의 없이 굴었잖아요.”
단여명은 말이 없었다. 머리칼이 시야를 가려 얼굴이 자세히 보이진 않았지만, 갑자기 태도를 바꾸니 조금 당황한 것 같았다.
“그쪽…. 형한테 나쁘게 대할 마음은 없었어요.”
“…….”
“…그냥 그렇다고요.”
얘기를 어떻게 마무리해야 할지 몰라 어수룩한 말이 흘러나갔다. 그가 말했을 땐 여유 있게 들렸건만, 제가 말하니 멍청하게 들렸다. 권호영은 곧바로 자리를 피했다. 이 얘기를 어떻게 받아들이든 이후의 판단은 단여명의 몫이었다.
‘그럼, 다음에는 더 잘 할 수 있지?’
여자의 목소리가 등덜미에 달라붙어 작은 속삭임을 흘렸다. 조금이라도 자책할 때마다 존재감을 드러내는, 망령 같은 목소리였다.
마음이 거무죽죽하게 가라앉은 건 삽시간이었다. 멋대로 거슬러 올라가는 기억을 멈추지 못했다. 좋았던 추억과 모질게만 느껴졌던 한시의 감정은 한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라기엔 손에 그러쥐기 벅찰 정도의 질량이었다.
권호영은 바닥으로 시선을 내리깔았다. 발치에 늘어진 그림자가 발걸음에 맞춰 일렁거렸다. 곁을 스치는 풍경은 느리게 감은 테이프처럼 천천히 흘러갔고, 땅을 밟는 다리는 앞으로 나아갔다.
그런데 어째서 나는 똑같은 자리만 빙빙 도는 기분인지.
***
왜 열심히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요.
등급을 낮게 받은 성적표를 조용히 내려다보던 어머니의 앞에서 한 소리였다. 모호하게 흘린 그 말에 어머니는 자신을 집 밖으로 끌고 나갔다.
‘잘못했잖아.’
양쪽 어깨를 거칠게 붙든 어머니가 부릅뜬 눈으로 말했다. 눈보라가 휘몰아치는 한가운데, 모자는 서로를 마주했다.
어렸던 자신은 그녀의 눈을 마주 보지 못했다. 눈밭에 파묻혀 시뻘겋게 언 어머니의 맨발을 하염없이 바라보기만 했다. 그 말이 그렇게 잘못된 건지 조금 억울했던 탓이었다.
벗어나려고 해봐도 어머니는 어깨를 놓아주지 않았다. 뼛속까지 얼어붙는 것만 같은 매서운 추위에 턱이 딱딱 부딪혔다.
‘열심히 하지 않았지?’
입술이 파랗게 질린 건 어머니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울먹한 자신과 다르게 어머니는 무섭도록 무표정했다.
‘엄마, 너무 추워요…. 우리 들어가면…….’
서러웠기 때문인지, 아니면 혹독한 추위에 성대가 말썽을 부리는지.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렸다. 침을 삼키는 것조차 눈치가 보여 자신은 그저 벌벌 떨기만 했다.
‘내가 너한테 많은 걸 바랐어?’
거센 눈발과 함께 긴 머리칼이 나풀나풀 흩날렸다. 그럼에도 똑바른 시선은 얼굴에 못 박혀 떨어지지 않았다. 번뜩이는 눈빛엔 원망이 짙게 너울거리고 있었다.
‘무서, 흑, 무서운….’
눈물이 줄줄 흘렀다. 고양이 앞의 생쥐가 된 것처럼 한없이 위축되는 기분이었다. 항상 따뜻했던 어머니가 저런 모습을 보이니 제가 정말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은 것만 같았다.
그녀는 자식의 우는 얼굴을 오랫동안 지켜보았다. 서릿발 같은 눈초리가 귀를 찢는 바람 소리보다 무서웠다. 무슨 말을 해봐도 침묵으로 일관하여 어린아이는 우는 것 말곤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죽을 만큼 노력하지 않았지?’
한참 뒤에 그녀는 그 한마디만 입에 담았다. 자주 탈이 났던 어머니였다. 미친 사람처럼 구는 그녀가 두렵기도 했지만, 창백하게 질린 안색이 걱정돼 얼결에 잘못을 빌기 시작했다.
‘잘못, 흑, 잘못했어요. 잘못……. 제가, 끅, 추, 추워… 잘못, 했어요……!’
애원은 긴 시간 동안 이루어졌다. 잘못을 말해도 어째선지 어머니는 미동조차 없었다. 그 이유를 깨달았을 땐 뺨을 타고 흐른 눈물이 얼어붙은 뒤였다.
잘못을 비는 중간에 춥다거나, 무섭다거나, 안아 달라는 쓸데없는 소리가 들어가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 그것이 암묵의 규칙이었다.
‘제가 잘못, 헉, 했어요…. 열심히 할게요……. 더, 더 잘 할 수 있어요….’
‘그래…. 그렇지.’
너무 울어 목이 다 갈라졌을 때쯤 그녀는 떨리는 몸을 안아 줬다. 선이 고운 눈꼬리가 살포시 접히고, 저와 똑같이 얼음장처럼 차가운 몸을 느낀 순간이었다. 갑작스레 공간이 뒤바뀌었다.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깜깜한 어둠 속이었다.
떨림이 멎고, 피부가 아릴 정도의 추위도 말끔히 가셨다. 산발이 되었던 어머니의 머리 또한 평소처럼 차분하게 가라앉은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말없이 등을 돌린 어머니는 한 줄기의 빛이 들어오는 곳으로 걸어갔다. 반사적으로 뒤따라가려는데, 그녀가 자신의 어깨를 강하게 밀쳐냈다.
‘엄마는 호영이를 정말 사랑해.’
나지막한 음성과 함께 작은 몸은 어둠에 삼켜졌다.
‘……!’
물밀듯한 공포감이 엄습한 건 순식간이었다. 손바닥을 얼굴에 가까이 들이대 봐도 형태가 잡히지 않았다. 너무 어두웠다. 눈물은 멈출 새도 없이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문고리를 찾으려고 벽면을 더듬거려 봤지만, 판판한 감촉만 느껴졌다. 벽을 손톱으로 긁으며 파헤쳐 봐도 빛줄기는 다시 들이비추지 않았다.
시커먼 암흑은 숨죽인 짐승과도 같았다. 홀로 남겨진 어린 몸의 주위를 어슬렁거리며 그르릉, 그르릉, 목을 울렸다. 내리누를 수 없는 두려움에 막힌 벽을 쾅쾅 두드렸다. 쾅, 쾅, 쾅! 아무리 벽을 두드려도 돌아오는 목소리는 없었다. 손목뼈가 부서질 듯한 고통을 느끼면서도 문을 두드리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제가, 제가 잘못했어요! 버리지 마세요! 엄마, 엄마!’
절 혼자 두지 마세요. 제발, 제발, 제발…….
“허억…!”
쿵쿵거리며 심장이 정신없이 박동했다. 권호영은 황급히 손을 올려 눈앞에 갖다 댔다. 어질어질한 초점이 잡히고, 커다란 손바닥이 한눈에 보였다. 이젠 농담이라도 작다고 말하기 어려운 성인 남성의 손이었다.
‘꿈…….’
권호영은 허공에 올렸던 손을 툭 떨어트렸다. 심장 소리가 안정을 되찾으니 아침을 알리는 새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몇 살 때였던가. 아마 아버지와의 통화 내용을 엿듣기 전이었던 것 같은데.
장소가 바뀌고 난 뒤는 조작된 기억이었다. 어머니는 한 번도 자신을 어두운 독방에 가둔 적이 없었다.
그러나 한겨울에 거친 눈발을 맞은 기억은 있었던 일이다. 잘못을 인정한 후 어머니와 자신은 집 안에 들어왔다. 어머니는 젖은 몸에 담요를 둘러 주고, 따뜻한 코코아를 손에 쥐여 주셨다. 그래도 오래도록 찬바람을 맞은 여파는 피하지 못했다. 자신은 감기로 끝났지만, 어머니는 독한 몸살감기에 걸렸다.
그에 자신은 하염없이 울며 밤새도록 어머니의 곁을 지켰다. 울지 말라고 말하면서도 어머니는 괜찮다는 한마디를 안 하셨다.
어렸던 자신은 어머니가 아픈 게 제 탓이라고 믿었고….
“…….”
너저분한 감정이 몸속에 켜켜이 퍼져나가는 것이 느껴졌다. 밑창에 들러붙은 진흙을 덜어내려다가 무심코 그 속에 섞여 있던 구더기를 발견한 기분이었다. 몇은 으깨지고, 몇은 꿈틀거리는 걸 혐오스럽게 보면서도, 측은한 마음을 느끼는 모순된 감정.
권호영은 그쯤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악몽을 꿨다고 벌벌 떨던 나이는 옛적에 지났다. 지난 일을 생각해서 나아지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날이 밝았으니 움직여야 할 시간이었다.
“어째 옷도 다 칙칙한 색밖에 없냐. 밝은 옷도 좀 입고 다녀. 저기 해 나온 거 봐라, 이런 색이 어울리나. 머리도 좀 정리하고. 어?”
밖에서 점심을 먹고 다음 강의실로 이동하는 길, 윤재윤이 커피잔을 흔들며 말했다. 테이크아웃 잔 안에 든 얼음이 덜그럭거리는 소리를 냈다.
“그러고 다니면 안 불편해?”
“익숙해져서 괜찮아요.”
“머리 긴 남자 여자한테 인기 없다.”
“왜요. 요즘 머리 긴 남자 은근 인기 있는데?”
옆에서 같이 걷던 민들레가 한마디 거들었다.
“호영이가 괜찮다는데 왜 오빠가 난리예요.”
그녀의 손에도 똑같은 테이크아웃 잔이 들려 있었다. 권호영이 필기를 보여준 것에 대한 보답으로 윤재윤이 두 사람의 몫까지 커피를 샀다. 소모적인 말싸움의 전조에 권호영은 말없이 빨대를 입에 물었다.
“아니, 보는 내가 안타까워서 그러지. 들레, 너 딱 봐봐.”
시야에 쨍한 빛이 번졌다. 권호영은 제 앞머리를 넘긴 윤재윤의 손을 고개만 기울여 슬쩍 피했다. 두 사람과 같이 있을 때면 자주 있는 일이었다.
“같은 남자로서 인정하긴 싫은데…. 솔직히 이 얼굴을 가리고 다니는 게 말이 되냐? 뭐가 꿀린다고. 머리도 무슨 옛날 드라마에 나올 스타일이잖아. 앞머리만 까면 훨씬 낫겠구먼.”
“솔직히 아깝긴 하죠.”
“이거 딱 그거라고. 힘을 숨기고 있는 소년 만화 주인공. 봐라, 이게 내 흑염룡이다.”
“으, 오빠…. 인터넷 좀 줄이라니까요.”
민들레가 눈살을 구기자 윤재윤이 질세라 목소리를 높였다. 남들이 들으면 코웃음을 칠 만한 유치한 말싸움이었다. 둘 다 말이 많고, 놀리기를 좋아하는 성격이어서 종종 이런 실랑이를 벌였다.
매번 저러기도 지겹지 않은가.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귀가 따가울 정도였다. 권호영은 가방에서 비닐에 싸인 미니 초콜릿을 꺼내 두 사람에게 보여줬다. 그에 둘 다 동시에 하던 말을 멈추고, ‘오’ 하며 반색했다.
“너 요즘 뭘 자꾸 챙겨 다니냐.”
윤재윤이 날쌔게 초콜릿을 까 입안에 넣었다. 민들레도 옆에서 부스럭거리며 비닐을 뜯었다.
“같이 사는 형이 줬어요.”
“또?”
윤재윤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고개를 끄덕이자 민들레가 웃는 얼굴로 말했다.
“먹을 거 주는 사람은 좋은 사람이랬어.”
“맞지. 그 형 참 좋은 사람이네.”
이어 윤재윤이 맞장구쳤다. 잠시 고민하던 권호영은 얌전히 수긍했다.
“…그렇죠.”
좋은 사람이긴 했다. 이쪽은 뭘 해 준 것도 없는데, 그는 자꾸만 뭘 쥐여 주지 못해서 안달이었으니.
생각해 보면 그 일이 있고 난 후로 자질구레한 먹을거리를 주는 횟수가 잦아졌다. 제가 단여명에게 사과했던 날. 그걸 무어라 생각했는지 그는 최근 들어 더욱 살갑게 굴었다.
말을 거는 목소리의 톤부터 달라진 게 느껴졌다. 더 상냥하고, 나긋나긋해졌다. 자신을 대하는 태도도 미세하게 바뀌었다. 전엔 의식적으로 대화를 나누려는 것 같았다면 최근엔 좀 더 자연스럽게 말을 붙였다.
조금 마음을 터놨다고 거절하기 더 어려워졌다. 그가 싫은 건 아니라고 제 입으로 말한 후였다. 그에 권호영은 단여명이 먹을 걸 쥐여 주는 족족 밀어내지 못하고, 학교에 가져와 두 사람과 나눠 먹곤 했다.
‘조금 말라 보이나.’
권호영은 제 다리를 내려다보았다. 아무리 봐도 옆에서 뭘 챙겨 주고 싶을 정도로 마르진 않은 것 같은데. 오히려 꾸준한 운동으로 다져진 건강한 체격이었다.
키도 작지 않은 편이었다. 남들과 시선을 마주할 때면 항상 턱이 내려가곤 했으니까. 건장한 성인 남자에게 뭘 자꾸 먹이려고 하는 건지 모르겠다.
“너한테 형이라고? 그럼 몇 살이야?”
“야, 민들레, 너 김칫국….”
“잘생겼어?”
민들레가 얼굴을 가까이 들이댔다. 흥미 섞인 눈동자가 그 어느 때보다 반짝반짝했다. 잘생겼나? 생각하고 말고 할 것도 없었다.
“어떻게 생겼는지 잘 몰라요.”
“에이, 네 입으로 평가하기 좀 그래서 그래?”
“진짜로요. 이게 앞을 많이 가려서요.”
권호영은 손가락으로 앞머리를 툭 건드렸다. 윤재윤과 민들레는 머리를 넘기는 장난을 자주 쳤다. 그 탓에 두 사람의 얼굴은 머릿속에 똑바로 박혀 있었다. 그러나 단여명의 얼굴은 어렴풋한 이목구비와 갸름한 얼굴형이 기억의 전부였다.
그의 얼굴을 보지 않으려고 일부러 피한 건 아니었다. 샤워할 때가 거의 이른 아침과 늦은 저녁인데, 단여명은 그 시간에 집을 비웠다.
“너 설마 집에서도 그러고 다녀?”
“…….”
“…….”
“완전체네, 완전체야.”
윤재윤이 조용히 말했다. 권호영은 그 말을 못 들은 척 넘겼다. 무슨 뜻인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얼추 나쁜 말이란 건 알아들을 수 있었다.
“나이는?”
“…26살?”
“뭐야, 왜 의문문인데?”
민들레가 어처구니가 없다는 얼굴로 되물었다. 그야 듣기만 했고, 물어본 적은 없으니까.
“뭐 하는 사람인데?”
“모르는데요.”
“…그 사람이랑 진짜 같이 사는 거 맞아?”
“잠깐 신세 지는 거라…. 그렇게 친하지는 않아요.”
“허어.”
민들레가 들으라는 양 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됐다며 손을 홱홱 내저었다.
그녀가 저렇게 반응하는 게 이상하진 않았다. 아무 생각 없이 사는 것처럼 보일 만했으니까.
미국에 있을 때부터 자르지 않은 머리칼은 뒷목을 덮은 지 오래였다. 주변 사람들에 대한 것도, 자신이 남들에게 어떻게 비칠지에 대한 것도 아무런 생각이 없었다.
어떤 것으로 채워지는지도, 무엇에 끌려가는지도 모른 채 몸만 의무적으로 움직였다. 이처럼 대책 없이 사는 게 처음이라 제가 생각해도 가끔 스스로가 낯설었다. 그렇다고 해서 문제를 개선할 의지는 생기지 않았다. 그저…….
“우리 호영이 사회생활은 잘 할 수 있을지…. 어디 가서 사기라도 당하면 어쩌나.”
“그렇진 않을 것 같은데. 학점 나오면 호영이가 오빠보다 잘 받는다에 내 겨드랑이털 걸게요.”
“…들레야, 그거 상처 되는 말이다. 내 학점이 네 겨드랑이털만 한 가치니.”
지금은 이걸로 됐다.
권호영은 강의실의 문을 열었다. 소란스러운 공간 속에서도 윤재윤과 민들레의 목소리가 제일 큰 것을 느끼며 빈자리로 향했다.
***
어머니에게 연락이 온 것은 한국에 도착한 지 삼 주가 흐른 시점이었다.
-잘 지내고 있는 것 같아서 다행이야.
핸드폰 액정에 뜬 국제 번호를 발견했을 때부터 심장 박동이 빨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생각했던 것보다 감명 깊지는 않았다. 일정을 끝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면 때마침 작업실 문밖을 나서던 어머니와 종종 나누던 대화였다.
-친구들은 사귀었니?
일상을 묻고, 그에 대한 답을 돌려준다. 하루에 있었던 일들이 근황으로 바뀌긴 했지만, 같이 살았을 때와 다름없이 잔잔한 목소리였다.
“네.”
어머니는 변함이 없으셨다. 몸이 멀어졌다고 유난스럽게 굴지도, 갑작스레 애정 섞인 소리가 늘지도 않았다. 그저 같은 자리를 지키듯 정적인 태도였다.
-그래, 어떻든?
그에 긴장한 근육이 이완되는 느낌과 함께 묘한 허탈감이 밀려왔다. 추저분한 감정의 잔여물이 제 몸 어딘가에 축적되는 기분이었다. 권호영은 쓴물을 삼키듯 마른침을 넘겼다.
“…좋은 사람들 같아요. 잘 챙겨 주고, 성격도 밝고.”
-대견하네, 우리 호영이.
어머니가 작은 웃음을 흘렸다. 정말 다행이야. 그리 말하며 말소리를 줄이는 것 같더니 다시 말문을 여셨다.
-다른 건 말 안 해도 알고 있을 거라고 믿어. 이제 다 컸으니까.
‘뭘 하고 싶은지 당장은 몰라도 돼. 다만 뭐든 되어야 할 사람이라면 현재에 충실해야 한단다.’
그녀가 첨언하지 않은 말이 이명이 돼 고막을 울렸다.
’엄마는 호영이가 뭐든 될 사람이라고 믿어.’
어려서부터 계속 듣던 말이었다.
“…네, 걱정하지 마세요.”
권호영은 모범적인 답안을 꺼내놓았다. 어머니가 되짚어 주지 않아도 이미 알고 있는 것이었다. 아마 그녀도 짐작하고 있을 테다. 단지 항상 잊지 말아야 함을 되새겨 주는 것이다. 마치 어린아이가 집 밖을 나설 때 차 조심하라고 일러주듯이.
-그래서 선물은 마음에 드니?
…선물? 권호영은 잠시 말을 골랐다. 무슨 말인지 몰라 대답이 늦어졌다. 제가 물건을 받은 적이 있나. 아무리 생각해도 단여명 앞으로 온 배달 음식만 대신 받은 기억밖에 없었다.
“선물이요?”
-네가 좋아했던 사람이잖니.
“…….”
-왜, 어릴 때 끼고 살았던 책 있잖아.
잠깐의 정적이 이어졌다. 여전히 짐작되지 않는 말에 침묵만 지키자 나긋한 목소리에 웃음기가 실렸다.
-같이 사는 아이랑 많이 친해지진 않았나 보구나.
“…….”
-그 아이가 예전에 책을 썼다고 하더라고.
같이 사는 사람이라면 단여명의 얘기였다. 매일 소파에 늘어져 있거나, 외출하는 모습만 봐서 뭐 하는 사람인가 했더니 소설가인 모양이었다. 생각이 거기까지 달했을 때 어머니가 재차 말을 이었다.
-제목이…. ‘Recall of Name’이었지, 아마?
“…아.”
그 얘기에 하나의 기억이 스쳤다. 어둑한 밤하늘에 도시의 야경이 빛을 발하는 일러스트였다.
그렇게 시간이 많이 지난 일은 아니었다. 아마 17살 여름 방학 때쯤이었던 것 같은데. 바쁜 시간을 쪼개가면서 읽은 소설책이었다. 끊임없이 같은 구절만 읽어 끝 페이지가 너덜너덜하게 닳았던 기억이 난다. 그도 잠시에 그쳤지만.
“그러니까 기분 풀어.”
…자신을 이 집으로 보낸 이유가 그를 위함이었던가. 한 번도 원한 적 없던 선물이건만, 대체 뭐를 위해서.
‘명심해. 감정의 유지 기간은 짧고, 노력의 결과는 오래도록 남는단다.’
그러니 순간의 감정에 치우치지 말고 앞만 보고 나아가렴.
“…풀릴 것도 없어요.”
그렇게 말했던 사람은 어머니였다.
***
영문판으로 발행된 책의 제목은 ‘Recall of Name’이었다. 모종의 사건으로 기억을 잃은 두 남녀가 파리에서 극적으로 재회하고, 다시 사랑에 빠지는 내용이었다.
사랑이라는 감정을 다루는 로맨스 소설책치고는 냉소적인 시점으로 바라보기도 했으며 불꽃처럼 뜨거워지는 장면에서는 한없이 솔직해지기도 했다.
그 극명한 차이가 매력적이어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글자를 내리읽었다. 책 속에 빠져들었다가 변함없는 일상으로 복귀하면 미미한 허탈감이 밀려올 만큼.
[불완전한 잔해]
한국 이름은 이렇구나. 권호영은 책의 뒷면을 살폈다. 서점을 지나다가 스치듯 보았던 소설책이었다. 작가의 첫 작이라는 소설책은 여태 베스트셀러를 지켰다. 그에 서점 앞을 지나치다가 충동적으로 구매했다. 책의 내용도 흥미롭게 읽었지만, 무엇보다 작가의 후기가 가장 기억에 남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반드시 떠나보내야 하는 순간이 온다면 어떨까.]
‘…나는 그 사람을 마지막으로 만나러 가는 길에 꽃집에 들르고 싶다.’
권호영은 속엣말로 줄지어진 글자를 읽어 내렸다.
‘내 사람을 처음 만났을 적에 맡았던 그때의 공기와.’
[처음으로 꽃다발을 선물했을 때의 변치 않은 설렘을 느끼며.]
‘당신은 정말 최고였어요, 라고 속삭여 주고 싶다.’
17살 때 페이지가 닳도록 보았던 구절이었다. 영어로 읊어 보라면 당장이라도 읊어낼 수 있을 만큼 아직도 뇌리에 생생하게 살아 있다.
권호영은 책의 모서리 부분을 살며시 구겼다. 한국어로 보니 느낌이 색다르긴 했지만, 삶이 무미건조한 사람에겐 여전히 이해하기 어려운 말이었다.
대체 어떤 사람을 만나 어떤 사랑을 했기에, 그 사람의 죽음까지도 축복하고 싶다는 바람을 품었을까. 죽은 이의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고 싶어 하는 마음은 남겨진 자의 미련일까. 그도 아니면 허울뿐인 가식일까.
저자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짐작해 보고자 똑같은 구절을 반복해서 읽었다. 결과적으로 남은 것은 깊은 곳에서 우러나는 공감이 아니라, 형태 그대로인 문자였다.
결국 예나 지금이나 동화 속 얘기를 듣는 것 같은 기분은 바뀌지 않았다. 그런데 그땐 한 달 가까이 이 책을 끼고 살았다. 생각날 때마다 틈틈이 책장을 펼쳤고, 머릿속으로 짤막한 문구를 되새겼었다.
…왜 그랬더라. 권호영은 의문을 가지면서도 작가의 후기를 계속해 읽어나갔다. 일자로 배열된 문장을 담는 눈동자가 글자를 따라 옆쪽으로 움직였다.
그렇게 마지막 문장에 다다랐고.
[끝으로 이 책을 읽은 시간만큼 내가 당신의 행복을 샀기를 바란다.]
‘…아.’
그때서야 한때의 감정을 온전한 형태로 추억했다.
“…….”
생각났다. 이 문장을 보고 있으면 아마 기분이 좋아졌던 것 같다. 정말 이 책을 읽은 시간만큼은 행복했던 것 같아서.
아름답게 각색된 얘기는 갑갑한 현실에서 잠시 눈 돌릴 수 있는 시간을 선물했다. 마지막 페이지에 달해 허탈감에 젖었던 이유는 그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가장 가까웠던 사람인 어머니의 행복마저도 바란 적이 없었다. 어머니의 불행은 자신이었고, 자신은 그녀가 불행은 그러안고 사는 한이 있어도 자신을 놓지 않기를 바랐다. 그런 주제에 스스로의 행복을 바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작가가 짤막하게 첨부한, 별거 아닌 메시지가 밤중에 선물 꾸러미를 가득 싣고 찾아온 산타처럼 느껴졌다. 행복은 그리 먼 곳에 있지 않다고 가르쳐 준 듯해서. 평생토록 달고 다닌 공허함을 잠시나마 잊을 수 있었다.
죽음, 그리고 행복. 상대적인 의미를 가진 글자였다. 그런데 그 책 속에선 마치 별 가루라도 떨어트린 것처럼 반짝반짝 빛나 보였다. 남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이 딱딱한 문자 안에 그대로 스며든 것처럼.
조금 재밌게 본 소설책. 단지 그뿐에 불과한데. 제가 하는 사랑이 이만큼 대단하다고 세상에 널리 자랑하고, 마지막까지 읽어 준 독자에게 소소한 행복을 빌어 줬을 뿐인데. 그 독자 중에 한 명이 사랑이란 난제에 빠져 허우적거린 사실도 모르고 있을 텐데.
그 별거 아닌 소설책이, 그 책을 쓴 작가가 어쩐지 좀 궁금했었다.
그리고…….
“아는 동생.”
그런 이에게 사랑받을 사람이 조금은 부러웠던 것 같기도 하고.
“아는 동생이야. 사정이 있어서 우리 집에서 몇 달 지내기로 했어.”
권호영은 어렴풋이 잡히는 옆태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그래?”
그의 지인으로 보이는 남자는 단여명과 상반된 이미지였다. 능구렁이 같은 말투부터 단여명과 지극히 다른 사람이란 걸 보여주는 듯했다.
“반갑습니다. 저는 여명이의 아는 형이에요.”
낯선 이의 손이 앞에 디밀어졌다. 권호영은 희미하게 얼굴을 굳혔다. 친근하게 인사할 생각은 없었는데. 이렇게 나오면 무시하기 어려웠다.
“아는 형 동생끼리 사이좋게 지냅시다.”
“…예.”
떨떠름한 반응을 숨기지 않으며 남자의 손을 맞잡은 순간이었다. 손바닥이 하얗게 질릴 정도로 남자가 맞잡은 손에 힘을 줬다. 잡은 손을 아래위로 흔들어 티가 나지 않게 하는 치밀함도 보였다. 그에 맞서겠다고 똑같이 힘을 주진 않았다. 내가 달갑지 않구나. 딱 그 정도의 감상만 들었다.
두 사람은 밖으로 나가려는 낌새를 보였다. 신발에 발을 끼우는 단여명의 몸짓이 언뜻 다급해 보였다. 아마 그의 머릿속에서도 계획돼 있었던 상황은 아닌 것 같았다.
“호영아, 밥 잘 챙겨 먹고. 형 다녀올게.”
미안.
그리 말하는 입 모양에 불현듯 시선이 박혔다.
“…….”
살짝 붙었다가 떨어지는 입술의 형태가 눈에 가득히 들어왔다. 어떤 소리를 내지 않았음에도 그가 가진 고유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마치 순간적으로 시간이 느리게 흐르는 것처럼 보였다. 끝이 말린 입술이 아주 느릿하고 선명한 모양으로 달싹였다.
문이 닫히고, 곧 두 개의 발소리가 멀어졌다. 현관문 앞에 미동 없이 서 있던 권호영은 걸음을 돌렸다. 예기치 못한 손님의 방문에 방 안에 두고 나온 것이 생각났다.
미처 다 읽지 못한 소설책이 어째선지 마음에 걸렸다.
권호영은 그 밤, 모든 생물이 잠들 시간까지 책을 읽었다. 알고 있는 내용이라서 조금쯤 지루할 줄 알았건만, 본래 한국판으로 출간된 원문을 읽으니 감회가 새로웠다.
주인공들이 서로를 의심하는 구간에선 그들과 똑같이 답답한 기분을 느끼기도 했고, 좋은 구절은 때때로 머릿속에 새겨 넣기도 하며 과거의 기분을 답습했다.
책장을 덮고 난 뒤에는 이른 새벽이었다. 시간을 확인하고 나서야 실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렇게 늦게 잠들면 내일 일정에 지장이 갈 텐데. 조금이라도 빨리 잠들고자 곧바로 불을 끄고 베개에 머리를 댔다.
“…….”
그러나 이러저러한 잡생각으로 잠이 오지 않았다. 과거에 느꼈던 감정을 똑같이 되풀이한 탓인지 마음이 어수선했다. 몸을 뒤척이던 권호영은 애써 눈을 감고 잠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단여명이 쓴 책은 권호영이 처음 접한 로맨스 소설책이었다. 그래서 한때 연애에 대한 환상을 품었던 때도 있었다. 누군가와 같은 감정을 공유하고, 그를 바탕으로 철저한 신뢰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신기했다.
하지만 세상 사는 데 바빴던 권호영은 그것들을 철저히 뒷전으로 밀어두었다. 때때로 누군가가 호감을 드러내기도 했으나, 자신에게 연애는 먼 얘기라고 생각했다.
실제 연애는 만들어낸 이야기만큼 아름답지 않다. 불필요한 요소를 거르고, 비현실적인 아름다움만 드러나도록 각색한 스토리는 보는 이들의 꿈과 희망을 망가트리지 않는 전제하에 이야기가 진행됐다. 언뜻 기만적이라고 느낄 만큼.
아마 자신의 부모님도 불같은 사랑을 나눌 때가 있었을 것이다. 소설의 전개와 다르게 그들은 쓰디쓴 결말을 맞았다.
연애와 같은 감정은 아니지만, 권호영도 그와 비슷한 사랑을 알았다. 한 사람을 향한 증오와 애정이 가슴 깊이 묻어둔 최하부에서 매시간 충돌했다.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않는 그것들은 성질조차 포악해 주변 것들을 건드리며 검은 기운을 뻗쳤다.
새벽이 오면 삶의 무게가 버거워 가슴을 움켜쥐고 끙끙 앓았다. 그러다 또 괜찮아지면 스스로를 다독이며 눈을 감았다. 그리고 똑같은 일상의 반복이었다.
‘미안.’
그 순간 달싹이며 벌어지던 입술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호영아.’
책을 읽는 중간마다 생각나긴 했으나, 이토록 강렬하고 우연적이진 않았다.
‘같이 사는 사람이 생기니까… 안심이 돼서.’
…좋은 사람인 것 같은데.
권호영은 몸을 뒤척여 반대로 누웠다. 민들레와 윤재윤이 그렇게 말하지 않았어도 대략 느끼고 있던 것이었다. 아무 사이도 아닌 자신에게마저 상냥한 남자였다.
작가의 후기를 보는 내내 단여명이란 사람과 그 책의 저자가 완벽히 어우러지는 느낌을 받았다. 책 속에 등장하는 두 주인공마저 그런 성질을 갖고 있었다. 제 사람의 앞에서라면 한없이 다정해지고, 연약해지는.
생각이 꼬리의 꼬리를 물고 늘어졌다. 정신이 몽롱하게 풀어질 때쯤에는 조금 가까워져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어렴풋이 남았다.
권호영의 경계심이 조금 누그러졌다고 해서 일상이 변하지는 않았다. 단여명은 여느 때와 같았고, 권호영도 전과 다름없이 그를 대했다.
그 사이 책에 대한 궁금증은 사그라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단여명이 곁을 지나치기라도 하면 이전에 없던 강한 충동이 일었다. 어떤 사람을 만나 무슨 감정을 느꼈는지, 글자를 한 자 한 자 타이핑하면서 어떤 생각을 했는지. 그런 것들을 뜬금없이 묻고 싶어졌다.
하지만 권호영은 그때마다 모른 척 입을 다물었다. 첫말을 뭐라고 시작해야 할지 감이 안 잡혔기 때문이었다. ‘형이 옛날에 쓴 책을 봤어요’라고 말문을 열기엔 갑작스럽지 않은가.
그렇기에 권호영은 익숙한 쪽을 택했다. 택했다기보다는 단여명이 작가인 것을 모르고 살 때처럼 물 흐르듯 지냈다. 단여명이 무언가를 주면 받고, 그걸 다른 사람들과 나누었다. 곤란해하면서도 답삭답삭 다 받아오는 자신이 멍청이 같다고 생각한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들레. 오늘 좀 꾸몄다? 약속 있어?”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고개가 돌아갔다. 수업이 시작하기 10분 전, 낮은 구두 굽 소리가 가까워졌다. 이제 보니 그 소리의 주인은 민들레였다. 그녀는 약속이 있는지 평소보다 신경을 쓴 차림새였다.
“소개팅 나가거든요.”
“오, 진짜?”
“네. 친구가 다리 놔 줘서 오늘 만나기로 했어요. 파스타 먹기로 했지롱.”
미니 백을 자리에 내려놓은 민들레가 이를 보이며 씩 웃었다. 일상적인 식사 메뉴와 함께 단여명의 어머니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서로 의지하면서 잘 챙겨 주라고 했던 목소리가.
“이거 봐봐. 여기 가기로 했는데 이 집 파네 파스타가 그렇게 유명하대.”
민들레가 들뜬 표정으로 핸드폰 화면을 보여줬다. 권호영은 손으로 턱을 괸 채 화면을 내려다보았다. 오목하게 구워낸 빵 안에 하얀 크림 파스타가 보기 좋게 담겨 있었다.
“맛있어 보이네요.”
권호영은 민들레와 얘기하며 딴생각에 집중했다. 단여명이 처음에 요리해 준 것도 그렇고, 얻어먹은 것도 많으니 이번엔 제가 보답해도 괜찮을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맞벌이하는 부모의 밑에서 자라서 요리를 못하진 않았다. 파스타라면 재료를 볶고 삶은 면에다가 소스를 버무리기만 하면 되는 요리였다.
자주 찾아볼 수 있는 메뉴인 데다가 만들기도 쉬우니 저녁 식탁에 올리기 좋을 것 같았다.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권호영은 민들레의 팔을 쿡 찔렀다. 윤재윤과 얘기하고 있던 민들레가 ‘왜?’ 하며 돌아봤다.
“…이거 한국 가정집에서도 자주 먹는 음식이에요?”
곧 그녀에게 진지한 물음이 던져졌다.
학교를 마친 후 집으로 돌아가니 단여명은 언제나처럼 소파 위에 잠들어 있었다. 이번엔 책을 읽다가 잠들었는지 얼굴 위에 책이 올라가 있었다. 권호영은 부러 인기척을 내며 그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저녁을 함께 먹기 위해선 어차피 깨워야 했다.
단여명이란 사람은 대체로 몸가짐이 단정했다. 얼굴 위에 올린 책은 약간 삐딱했으나, 배 위에 얹은 손은 손가락마저 가지런했다. 가만한 눈길은 창백한 손등을 타고, 가느다란 손목으로 올라갔다.
‘색이 연해졌네.’
무의식적으로 든 생각이었다. 며칠간 그의 손목엔 멍 자국이 있었다. 데면데면한 사이라도 알아볼 수 있었다. 커피를 마실 때면 그의 옷소매가 올라가곤 했는데, 하얀 손목에 울긋불긋한 자국이 남아 자연히 눈길이 갔다.
“형.”
갑자기 손을 대면 놀랄 수도 있으니 권호영은 소파 위를 두드려 소리를 만들어냈다. 단여명은 배 위에 올려두었던 손을 느릿하게 움직였다. 책을 내려 눈만 내놓은 그는 의아한 기색이었다.
“아직 저녁 전이죠?”
“…뭐 사 왔어?”
“냉장고에 뭐가 없어서요. 그냥 이것저것 사 왔어요.”
그리 말하자 단여명이 슬그머니 몸을 일으켰다. 제가 나서서 하겠다는 뜻으로 보였다.
“그래? 그럼 내가 할….”
“제가 할게요.”
음식의 간도 못 맞추는 사람이 파스타 면을 몇 분 삶아야 하는지 알고나 있을까. 요리하는 걸 즐기지도 않고, 좋아하지도 않는다. 제 식사 여부는 꼬박꼬박 물으면서도 그는 하루에 한 번은 군것질로 끼니를 때웠다. 본인의 간식을 사는 김에 제 것도 같이 챙기는 것 같아서 매번 거절하기 더 애매했다.
“요리를 못하진 않아서요.”
그리 못을 박자 단여명은 ‘그래, 그럼’ 하며 순순히 받아들였다. 권호영은 곧장 부엌으로 갔다. 냄비에 물을 올려놓고, 식재료를 차례대로 늘어놓았다.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면 처음 한 요리는 몸살 기운이 있다는 어머니께 만들어준 감자 스튜였다. 나름 잘했다고 생각하며 접시에 옮겨 담는데, 밑바닥을 긁으니 거뭇하게 눌어붙은 자국이 나와 속상했었지.
혼자 밥을 먹는 경험이 숙달되니 자연히 요리 솜씨가 늘었다. 귀찮다고 인스턴트로 배를 채우기엔 어머니가 좋아하지 않을 게 눈에 훤했다. 그래서 반강제적으로 요리에 관심을 갖게 됐다.
“…입은 두 갠데 뭘 이렇게 많이 차렸어.”
그리 말해놓고 단여명은 음식을 한 숟갈 뜨더니 맛있다, 하고 혼잣말했다. 단여명의 반응을 살핀 권호영도 그제야 수저를 들었다.
“어떻게 요리할 생각을 했대.”
“계속 밖에 음식만 먹으니까 물리더라고요.”
“…너 할 거 없으면 요리사 해도 되겠다.”
언뜻 진심으로 들리는 목소리에 조금 안도했다. 혹시나 맛이 별로라고 할까 봐 자신도 모르게 마음을 졸이고 있었나 보다. 권호영도 음식을 한술 떠 입안에 넣었다. 제 입에도 그리 나쁘지 않은 맛이었다.
두 사람은 곧 식사에 집중했다. 권호영이 차린 식탁이란 것을 제외하면 식사 분위기는 평상시와 같았다. 어느새 조용한 분위기가 일상으로 굳어져 그들은 침묵이 감도는 공기를 인지하지 못했다.
“책을 쓰신다고요?”
어느 순간 권호영이 넌지시 질문했다. 묻고 싶은 것이 적지 않았지만, 갑자기 본론을 꺼내면 단여명이 당황해할 것 같았다. 역시나 단여명은 왜 그런 걸 묻는지 의아해하는 눈치였다.
“어머니한테 들었어요.”
“아, 응. 그렇지.”
“무슨 내용이에요?”
단여명은 음식을 씹는 것도 멈추고 잠시 고민했다. 알면 실망할 텐데…. 말꼬리를 늘리더니 곧 시원스럽게 답했다.
“그냥 사람 사는 얘기야.”
권호영은 모르는 척 조용히 고개를 주억였다. 그냥 사람 사는 얘기치고는 많이 팔리지 않았나. 겸손한 건지, 정말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는지. 어떻게 보면 단여명다운 답변이었다. 자기가 쓴 작품을 과시하는 성격은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웅-
“우리 엄마가 아들 자랑이 심해서….”
무시하려고 해봤지만, 결국 그의 핸드폰 쪽으로 시선이 갔다. 단여명이 말하는 도중에도 계속해서 울리는 진동음은 끊이지 않았다. 제삼자가 봐도 좀 집착적이라고 느낄 만큼. 급한 연락인 것 같은데 단여명은 그 소리가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행동했다.
“네가 이해 좀 해 줘.”
권호영은 시선을 아래로 고정한 채 아닌 척 앞자리를 의식했다. 단여명이 휴대폰을 집어 들었는지 식탁을 울리던 진동 소리가 약해졌다. 그는 연락이 온 내역을 훑더니 얼마 지나지 않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호영아, 미안한데… 나 잠깐 나갔다 와야 될 것 같아.”
권호영은 묵묵히 자리를 지켰다. 길게 대화가 이어지지 않을 거란 것도, 중간에 대화의 흐름이 끊길 것도 예상하던 일이었다. 식사 자리 한 번으로 지금까지의 거리감을 좁히긴 어려울 거라고.
“진짜 미안. 10분이면 돼. 신경 쓰지 말고 먼저 먹고 있어.”
외투를 걸친 단여명은 곧 밖으로 나갔다. 혼자 남겨진 권호영은 식사를 재개했다. 제 몫의 그릇을 치울 때까지 단여명은 돌아오지 않았다.
권호영은 차게 식은 식탁을 바라보았다. 상을 치울까 하다가 관뒀다. 얼마 먹지 않았고, 다른 때보다 음식을 맛있게 먹는 것 같았으니 집에 돌아오면 다시 먹지 않을까,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조금 이르지만 권호영은 집 밖을 나서기로 했다. 먹은 걸 소화시킬 겸 학교까지 걸어갈 생각이었다. 아직 단여명의 집보단 책 냄새가 풍기는 도서관이 마음이 더 편했다.
10분이면 된다더니 밥 먹다 말고 어디로 사라진 건지. 집 밖으로 나오니 신경이 조금 더 쓰였다. 혹시 큰일이라도 난 걸까, 하며 돌아오지 않는 상대를 떠올리고 있던 찰나였다.
“사람 살살 약 올리지 말고 대놓고 말하라고, 여우 같은 새끼야.”
골목길 안에서 격양된 목소리가 터졌다. 눈을 돌리니 두 남자가 몸싸움하고 있었다.
자신과 상관없는 일이니 끼어들어 봤자 성가실 뿐이었다. 그렇게 그대로 지나치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남자의 몸에 가려져 미처 보지 못한 것이 그제야 시야에 들어왔다.
‘저거….’
형이 걸치고 나갔던 외투랑 똑같은 색인데.
“…….”
그 사실을 알았다고 해서 발길은 선뜻 떨어지지 않았다. 옆을 지나치지도, 그들에게 다가가지도 못한 채 권호영은 우두커니 서서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너한텐 아무것도 아니었을지 몰라도 난….”
이제 보니 그를 겁박하고 있는 남자는 자신과도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저번에 집 안에서 한 번 인사를 나눴던 단여명의 아는 형이란 놈이었다.
‘말려야 하나….’
인상을 찌푸린 채 그리 고민하면서도 권호영은 섣불리 움직이지 못했다. 자신이 끼어들어도 될 상황인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제가 뭐라고. 같이 사는 사이라지만, 거의 남처럼 지내지 않았나.
“형.”
남자의 몸에 가려져 들리는 거라곤 싸늘한 목소리뿐이었다. 권호영은 잠시 제가 사람을 착각한 게 아닌지 혼돈했다. 밤공기 사이로 또렷하게 울리는 목소리는 단여명의 것이었지만, 단여명의 것이 아니었다.
“진짜 없어 보여, 지금.”
…저런 목소리도 낼 줄 알았나. 자신이 만약 상대방이었다면 상처받았을 것 같다는 우스운 상상이 스쳤다. 집 안에서 보였던 태도가 거짓말처럼 단여명은 차갑게 분노하고 있었다.
둘 사이에 흐르는 분위기는 점점 아슬아슬해졌다. 금방이라도 손을 올릴 것처럼 남자의 태세가 급격히 난폭해졌다.
…아무래도 저건 모른 척하면 위험해질 것 같은데. 생각의 마침표를 찍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권호영은 남자의 뒷덜미를 잡아채 제 쪽으로 끌어당겼다. 권호영의 가슴팍과 남자의 등이 거칠게 부딪쳤다. 남자의 손에서 풀려난 단여명은 고개를 숙이고 마른기침을 뱉었다.
“씨발…. 뭔데, 너.”
시선이 먼저 마주친 쪽은 남자였다. 얼굴 간의 거리가 꽤 가까웠다. 입김이 어리는 날씨였으면 서로의 숨이 겹칠 만큼. 거리가 가까운 탓인지 저번엔 맡지 못했던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이건 누가 봐도….”
독한 술 냄새와 담배 냄새.
“한쪽이 당하는 상황인데.”
그리고 언젠가 단여명에게 맡았던 낯선 향수 냄새. 그것이 남자에게서 진하게 풍기고 있었다.
***
유리 글라스 안에 든 얼음이 저들끼리 달그락 부딪쳤다. 물방울이 맺힌 잔의 테두리를 쓸자 손가락에 물기가 묻어났다.
손에 닿은 감촉을 느끼며 취한 정도를 가늠해 보았다. 아직 차갑다고 느낄 정도니 혼자서 집에 갈 정도는 되었다. 테킬라를 먹을 때면 주량이 약해지곤 했기에 매번 이렇게 자가 테스트를 해보곤 했다. 시선을 마저 앞으로 돌리니 상대방은 아직 열 내는 데 한창이었다.
“그 남자 진짜 쓰레기네. 어디 할 게 없어서 멱살을 잡아?”
천수진은 제가 멱살이라도 잡힌 사람처럼 소매를 걷어붙였다. 술기운이 도는 와중에 열이 뻗치니 더운 듯싶었다.
“너는 선 그었다며. 근데 혼자 뭔 착각을 한 거래?”
“아무래도 전 남자 친구니까…. 다시 생각해 보면 애초에 시작도 하지 말 걸 그랬어.”
단여명은 시선을 반쯤 내리깐 채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차라리 명확히 짚고 넘어가는 편이 나았을까. 잠시간 서로 불편하더라도 아마 그쪽이 더 나았을지도 모른다. 김선오가 언제부터 그런 기미를 보였지. 기억을 곱씹다가 역시나 그편도 우스웠을 것 같다는 생각이 스쳤다.
오랜만에 만난 전 애인한테 다짜고짜 섹스 파트너 그 이상으로 생각하지 말자고 말하라고? 그것도 어찌 보면 김선오가 그리 싫어하던 돌려 말하기 화법 아닌가. ‘혹시 몰라서 얘기하는데, 나 좋아하지 마’라고. 이러나저러나 우습긴 매한가지였다.
“그래, 너도 얌전히 좀 살아라. 다 큰 성인들끼리 뭐 하는 짓이야?”
천수진이 눈을 가느다랗게 좁혔다. 애매하게 군 제 탓도 있다는 거였다. 단여명도 알았다. 상황이 그렇게 흐른 건 자신의 잘못도 있었다. 어떤 여지를 줬기에 김선오가 그렇게 행동한 걸 테지. 그러나 이미 끝난 사이, 하나씩 잘잘못을 따지면 자신만 피곤해졌다.
“난 아무리 화나도 주먹은 안 올려.”
“그럴 힘이 없는 건 아니고?”
“뭐, 아니라곤 말 못 하겠네.”
단여명은 픽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뭐라 반박할까 하다가 역시나 관두었다. 유치하게 주먹싸움이 뭐야. 애들 장난도 아니고. 나이 먹고 몸싸움을 벌여도 이상하지 않은 곳은 법정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 뒤로 어떻게 됐는데? 네 집에 산다는 애. 걔가 중간에 말렸다며.”
“어떻게 되고 할 것도 없어. 잘 끝났으니까.”
그리 얘기를 마치려고 하자 자세히 좀 말해 보라며 천수진이 닦달했다. ‘나 좀 취한 것 같은데’라고 말해 봤지만 그녀는 집요히 물고 늘어졌다. 가벼운 한숨을 뱉은 단여명은 글라스를 기울여 목을 축였다. 긴 얘기를 할 생각에 벌써 입이 마르는 느낌이었다.
“그 뒤로 어떻게 됐냐면…….”
어지러운 시야를 느끼며 단여명은 지난 일을 회상했다.
2권에 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