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작가
내가 어쩌다가 이렇게 밝히는 인간이 되었나. 이번엔 그에 대한 고찰을 한번 다뤄 볼까 한다.
창의성을 중시하는 작가, 그것도 사랑을 다루는 소설가라면 지식과 경험이 합일화되어야 했다. 단여명의 인생에서 연애란 에너지를 공급하고자 하는 식사와 같았다. 그만큼 밥 먹듯이 만남과 이별을 반복했다.
초장부터 로맨스 소설 작가가 되고자 식견을 넓히려던 건 아니었다. 그저 새로운 사람을 만나 그 사람을 알아가는 게 재밌었다. 순간의 감정에 휩쓸리는 것도 꽤 나쁘지 않았고.
처음엔 보통 남자와 다를 것 없이 여자와 연애도, 섹스도 했다. 하늘에 감사하게도 얼굴 복을 타고나 상대를 만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꼬꼬마 시절에 편지를 주고받던 게 시초인, 나름 역사 깊은 연애사였다.
그렇게 중학생 때쯤이었나. 체육 선생에게 눈길이 갔던 적이 있다. 준비 운동을 하며 살짝 비틀어지는 허리통이, 너희끼리 놀라며 공을 차주는 탄탄한 허벅지에 시선이 끌렸던 것 같다.
바로 앞에 헤테로인 것처럼 밑밥을 깔아놓고 선생에게 흑심을 품다니. 누가 듣는다면 싹부터 그른 자식이 입놀림은 그럴싸하다며 혀를 내두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 자리를 빌려 확실히 말하건대 그땐 같은 남자로서 드는 경외심과 호기심, 그 언저리였다. 단단해 보이는 근육질의 몸이 야외 활동을 혐오하다시피 했던 자신과 극히 반대였기에 흥미를 느꼈다. 딱 그뿐이었다.
큰 굴곡 없이 졸업장을 따내고, 시간은 순탄히도 흘렀다. 하지만 마음만큼은 순탄하지 못했던 시기가 있었다. 입시를 치렀던 수험생 시절보다 더 험난했었노라고 감히 단언해 본다.
모두가 꿈과 희망에 부푼 대학교 새내기 시절, 자신은 미래의 방향성에 대해 혼란스러워 했었다. 일희일비한 마음으로 과 엠티에 참석했다가 거기서 일이 터졌다.
처음 만난 위 학번 선배에게 고민을 털어놓았다. 그 선배의 인상이 좋아서였나, 제가 어린 마음에 서러워서 그랬었나. 뭔 말을 길게 씨불였던 것도 같은데, 아직까지 기억나지 않았다. 그리도 술을 퍼마셨으니 어쩌면 다음 일은 예견된 결과였을지도 모른다.
예상대로 필름이 끊겼고, 눈을 떠보니 허름한 모텔 방 안이었다. 같은 침대에 누운 사람은 같은 성별, 밤중에 코가 비뚤어지도록 전우애를 다졌던 문제의 그 선배였다.
끝이 좋지 않은 기억이다. 그 선배는 정신을 차리자마자 실수였다고 횡설수설하더니 제게 욕을 퍼부었다. 그런 얼굴로 실실 웃으니 자신이 착각할 수밖에 없었다며 말도 안 되는 궤변을 늘어놓았다.
면전에 쏟아지는 비난이 얼떨떨하기도 했고, 화가 나기도 했다. 가만히 들어주고 있기엔 저도 부처는 아니었던지라 딱 한 마디 했다.
‘그렇게 안 봤는데. 선배, 호모였어요?’
그 선배는 얼굴이 시뻘게져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자리를 떠났다. 잘 꺼지라며 손수건을 흔들어 주었을지언정, 바짓가랑이를 붙잡진 않았다. 아쉬울 게 뭐가 있다고. 말 그대로 하룻밤의 실수 아닌가.
그러나 그 선배가 남기고 간 오점은 지울 수 없는 낙인이 되었다. 뜨문뜨문 끊긴 기억 중 하나의 감각만큼은 뇌리에 선명했다. 빠듯한 아픔 속, 그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쾌락이었다.
그때부터였다. 직업성 스트레스를 게이 섹스로 푼 게. 처음엔 부정했다. 게이란 타이틀을 달고 싶지 않아 잠시뿐인 것이라고 자위했다. 같은 거 달린 남자에게 깔리는 것도 모자라 뒤를 대주다니. 그건 좀 비정상적인 범주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누군가 그랬던가. 처음만 어렵지 두 번째는 쉽다고. 과장을 보태서 이리도 자극적이고, 욕망에 충실한 행위도 없었다.
뒤로 느끼는 쾌락은 끔찍할 정도로 황홀했고, 순간적인 일탈은 짜릿했다. 솔직한 욕구를 드러내는 행위는 흡사 인간의 탈을 벗어 던지는 것과 같았다. 몸 구석구석에 쾌감이 퍼져 손끝 발끝이 다 저릿해지면 머릿속에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마치 구멍가게에서 사탕을 훔치는 철모르는 어린애가 된 것만 같았다.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옷소매 속으로 사탕을 하나둘씩 집어넣었다. 그리 빼돌린 사탕은 혀가 아릴 정도로 다디달았다.
시간은 속절없이 흘러 남자를 애인으로 들이는 지경까지 갔다. 그때 처음으로 게이들도 보통 연인과 다름없이 평범하게 연애하는구나, 그런 당연하고도 무례한 감상을 느꼈다. 남자를 이성으로 본다는 괴리감은 빠르게 일상에 녹아들었다.
‘선배, 잘 지내요?’
단여명은 가끔가다 이 사태의 시발점인 선배에게 안부를 묻곤 했다. 나 어쩌다 보니 호모가 됐어요.
“매정한 자기네. 우리 번호도 모르는데.”
남자는 그냥 헤어지기 섭섭하다는 눈치였다. 손목을 붙든 채 말하니 발길을 돌리지도 못하겠다.
이걸 어떻게 둘러대지. 네 자지가 상한 오이 같아서 별로야. 그리 말하기엔 단여명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지성인이었다.
“우연히 만나는 게 더 낭만적이잖아.”
“난 그쪽 꽤 맘에 드는데.”
에둘러 거절한 게 소용없이 남자가 쐐기를 박았다. 해가 쨍쨍한 대낮에 모텔 앞에서 실랑이를 벌이는 두 남자라. 이쯤 되면 머리를 굴리기도 귀찮았다. 대충 되는대로 지껄이기로 했다.
“내가 다음 달에 유학을 가서.”
“글 쓰러 유학까지 가? 대단하네.”
아, 맞다. 얘한테 내 직업 말했지. 잠깐 잊고 있었다. 다른 파트너들에게 대학생이라고 떠들고 다녔던 습관이 초래한 허술함이었다.
“그렇게 됐네.”
단여명은 은은한 미소를 띤 채 긍정했다. 이렇게 된 거 뻔뻔하게 나가기로 했다. 내가 유학 간다는데 네가 뭐 어쩔 건데.
“알겠어. 더 안 붙잡을게.”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남자는 순순히 물러났다. 그럼 이것 좀 놓지. 그런 의미를 담아 붙잡힌 손목을 슬쩍 비틀었다. 남자는 손을 놔주는 듯하더니 뜬금없이 지갑을 뒤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생각 있으면 연락 줘.”
남자가 손에 무언가를 쥐여 줬다. 손바닥을 펴보니 네모난 명함이 보였다. 남자는 알아주는 대기업의 대리였다. 또래인 줄 알았는데 저보다 4살이나 더 많았다. 관리를 잘했는지 얼굴은 제법 동안이었다.
“난 언제든지 좋으니까.”
그럼 뭐 해. 아래가 제구실을 못 하는걸.
“그래, 조심히 가.”
환히 웃어 보인 단여명은 발걸음을 뗐다.
그래, 우리 다신 보지 말자. 물렁물렁한 자지 23호.
동네 마트에 들러 간단하게 장을 보고 집으로 향했다. 부스럭대는 까만 봉지 속엔 대파와 양파, 청양고추와 같은 기초적인 요리 재료가 담겨 있었다.
언제까지고 배달 음식을 시켜 먹을 순 없는 노릇이다. 일상에 변화를 줄 겸 가벼운 기분 전환이었다. 과연 이 충동적인 마음이 언제까지 유효할진 모르겠다. 이번엔 제발 냉장고 안에서 썩어 그대로 버리지만 않았으면 좋겠는데.
주말 대낮의 거리는 한산했다. 화창한 봄날이니 다들 꽃놀이라도 간 모양이었다. 발밑에 흐드러진 목련은 하얬고, 울타리 주변에 만발한 개나리는 샛노랬다. 여실한 봄날의 풍경은 눈이 부시도록 푸르렀다.
그렇게 익숙한 길거리를 걷던 와중이었다. 바지 주머니에서 진동이 느껴졌다. 발신인은 익숙한 이름이었다.
-이 시간에 전화를 다 받네?
제가 전화를 걸어놓고 의외롭다는 목소리였다. 하긴, 평상시였으면 한창 자고 있을 시간대긴 하지.
“밖이거든.”
-그럴 줄 알았다. 이번엔 언놈이야?
“몰라. 왜 전화했는데?”
겉치레할 것도 없겠다, 단여명은 귀찮다는 티를 역력히 냈다. 제가 한두 번 상대를 갈아 치우는 것도 아니고, 괜한 걸 묻는다.
-아니, 요즘 뜸하다 싶어서.
“언제부터 그런 걸 신경 썼다고. 답지 않게 왜 이래, 천수진.”
천수진. 그녀와는 이런저런 얘기를 다 한 사이였다. 예전에 단골이었던 칵테일 바의 바텐더였던 그녀와는 지금까지도 개인적인 친분을 유지 중이었다.
그녀가 이직한 곳은 작은 칵테일 바였는데, 그곳은 암묵적인 게이들의 집합소였다. 시간이나 때울 겸 놀러 오는 사람도 있는가 하면, 하룻밤 상대를 물색하러 오는 이들도 존재했다. 아마 그녀가 그 칵테일 바로 이직한 연유 중 제 영향이 없진 않을 것이다.
-우리 가게에 딱 네 취향인 손님이 왔거든? 말 붙여 보니까 아직 간 보는 중인 것 같더라. 느낌이 와. 아직 새삥이야.
다른 놈이 침 바르기 전에 네가 채 가. 한껏 신난 목소리는 마치 경매장에 신품이 올라온 것처럼 떠들었다. 역시 목적은 따로 있었다. 자신도 그렇지만 천수진도 서로가 보고 싶다고 수선 떠는 타입은 아니었다.
천수진은 남의 얘기를, 그것도 게이들의 성생활을 즐겨 들었는데, 자신과 동떨어진 세계에 대한 호기심으로 보였다. 천수진은 붙임성이 좋았고, 스몰토크도 잘하는 편이었다. 단골 바에 처음 방문했을 때 넉살 좋게 먼저 말을 붙인 사람도 그녀였다. 이렇게 모아 보니 바텐더가 천직이었다.
“당분간은 안 갈 것 같은데. 그 손님은 모르겠고, 다음에 술이나 먹으러 갈게.”
-왜? 너 마감 친 지 얼마 안 됐잖아.
천수진이 의아하다는 듯 물었다. 의문을 가질 만도 했다. 그녀는 제가 한 작품을 완결 내면 방탕하게 산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냥.”
이걸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집 앞에 다다라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문 단여명은 잠시 사색에 잠겼다. 담뱃불을 붙이고 필터를 빨아들이는 중에도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이것보단 좀 더 상위적인 표현인데. 찜찜한 마음을 뒤로하고 결국 단조롭게 말했다.
“좀 지겹네.”
권태로움, 따분함, 지루함. 지금의 기분을 부분적으로 추려 봤을 때 설명할 수 있는 감정이었다.
공들여 쓴 작품을 끝내면 후련함과 공허함이 동시에 휘몰아치곤 했다. 그럼 새로운 사람을 만나 모든 감정을 토해내듯이 배출하곤 했는데, 요즘은 그 누구에게도 색다른 자극을 느끼지 못했다.
쾌락은 손쉬운 배출구였다. 그러나 요새는 사정해도 거의 한 번에 그쳤다. 눈앞이 까맣게 멀고, 발가락이 하얗게 곱아들 정도의 환열을 느껴 본 게 언제였는지도 까마득했다.
인생의 낙이 섹스였던 사람에게 너무 가혹한 시련 아닌가. 스트레스를 해소하고자 시작한 짓인데, 이 짓을 하면서 또 다른 스트레스를 받는다. 욕구불만. 저와 과히 어울리지 않는 병명이었다.
새 작품을 쓰려면 영감을 얻어야 하긴 하는데. 속궁합이 맞는 파트너를 찾기도 어려운 마당에 연애는 더욱 먼 얘기였다. 하나가 안 풀리니 다른 것은 안중에도 들어오지 않았다. 방 안에 처박혀 자판을 두드리는 일도 지겹고, 술을 마시기도 싫었다.
딱 한 놈만 걸리면 어떻게 잘 풀릴 것 같은데. 그 한 놈이 과연 이 땅에 존재할까 싶었다. 쓸데없이 눈만 높아져선. 아예 남자 좆 하나만 보고 외국으로 날라? 이딴 일에 심각하게 고민하는 스스로에게 기가 찰 지경이었다.
-허, 살 만한가 봐?
천수진 역시도 저와 비슷한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그녀가 저렇게 반응하는 게 이상하진 않았다. 한참 상태가 안 좋았을 땐 관심을 보이는 남자가 나타났다 하면 앞뒤 재지 않고 룸부터 잡았으니까.
“그런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그래 놓곤 내일 밤엔 다른 놈이랑 떡 치고 있겠지.
“그럴 수도 있고.”
픽, 웃음이 샜다. 저를 너무 잘 알아서 문제였다. 단칼에 끊기엔 밤놀이가 이미 습관으로 굳어진 지 오래였다. 일종의 징크스였다. 희비를 거듭 맛보면 어떻게 될지 또 모를 일이지만, 당장 밤놀이를 끊는다는 건 허황된 꿈이었다.
뿌연 연기가 바람결을 따라서 흩어졌다. 발밑에 담배를 비벼 끄고 공동현관의 비밀번호를 눌렀다. 천수진은 간만의 통화에 들뜬 낌새였다. 엘리베이터에 올라서는 짧은 순간에도 대화의 주제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현관문을 열고 신발을 벗었다. 부엌에 비닐봉지를 내려놓고 식자재를 차례대로 늘어놓았다. 처음부터 거창한 요리를 할 생각은 없었다. 그럼 쉽게 질릴 테니까. 냉장고를 열어 보니 달걀 두 알이 나왔다. 계란 볶음밥. 아침 메뉴는 단순히 정해졌다.
핸드폰을 어깨와 얼굴 사이에 끼고 도마와 식칼을 꺼내 들었다. 파를 먹기 좋은 크기로 송송 썰고 양파 껍질을 까는데,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화면을 보니 다른 이에게 전화가 오고 있었다.
“얘기 중에 미안한데 나 가 봐야 될 것 같아.”
-여기가 제일 심오한 포인트인데 이렇게 끊는다고? 그 늙은이 머리가 잘 붙어 있었을지 궁금하지 않아? 야, 내가 다 아쉬운데?
천수진이 따발총처럼 입을 놀렸다. 그녀의 말마따나 아쉬움이 듬뿍 묻어나는 목소리였지만, 상대가 상대인지라 이 이상 시간을 끌 수 없었다.
“괜찮아.”
-아니, 결말만 듣고 가. 나 지금 말해야 될 기분이란….
“내가 나중에 다시 연락할게.”
도통 끊을 타이밍을 주지 않기에 단여명은 단호히 통화를 종료했다. 나중에 정 없는 새끼다, 싹퉁머리 없는 놈이다 별별 소리를 다 듣겠지만, 그건 먼 훗날의 일이었다. 천수진의 전화를 끊고 통화를 전환하자마자 나긋한 목소리가 울렸다.
-우리 아들, 뭐 해?
언제 들어도 가슴이 따뜻해지는 목소리였다. 어제까지 웬 모르는 놈이랑 떡 치고 왔지만, 이제 와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기엔 먼 길을 돌아왔다. 단여명은 웃음기 서린 얼굴로 입을 열었다.
“이제 밥 먹으려고요. 엄마는 밥 먹었어요?”
-시간이 몇 신데. 아까 먹었지.
단여명은 탁상에 놓인 시계를 확인했다. 오전 10시 40분에 시차가 14시간이 나니까…….
“그렇겠네요. 그쪽은 지금 밤이죠?”
단여명의 모친은 그가 성인이 되자마자 해외로 나갔다. 그녀는 건물 도면을 설계하는 캐드원이자 지독한 워커홀릭이었다. 그 덕에 전문가들 사이에서 나름 입소문을 탄 그녀는 해외 협력사에 스카우트 제의를 받아 현재까지도 미국 세인트루이스에서 거주 중이다.
-그래서 요즘 글은 잘 써지고?
“저야 늘 똑같죠.”
-어휴, 난 우리 아들 못 보니까 사는 맛이 안 나.
“됐어요, 말은. 도면이랑 사귀는 사람한테 뭘 바라요.”
그 말에 엄마가 아이 같은 웃음을 터트렸다. 단여명도 따라 피식 웃으며 껍질이 덜 까인 양파를 만지작댔다. 그리운 목소리에 요리는 뒷전으로 밀려난 지 오래였다.
-그러지 말고 한번 놀러 오라니까. 엄마 안 보고 싶어?
“언제 한번 가긴 갈 건데…….”
말꼬리를 늘리는 사이 단여명은 얕은 숨을 들이켰다. 그리고 한숨과도 같은 목소리로 토로하듯 말했다.
“알잖아요. 저 멀미 심한 거. 마음 단단히 먹고 가야 돼요.”
-그럼, 알지.
비행기만 탔다 하면 변기 붙잡는 거. 똑같은 기억을 회상하는지 두 사람 다 가벼운 웃음을 터트렸다. 그대로 훈훈한 분위기가 지속될 줄 알았건만, 생각했던 것보다 빠르게 침묵이 도래했다. 웃음기를 갈무리한 엄마는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눈치였다.
“왜요. 무슨 일 있어요?”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럼 이 어색한 정적은 뭐지.”
부러 장난스럽게 말하니 엄마가 짧게 웃음소리를 냈다. 잠시 할 말을 정리하듯 숨을 고른 그녀는 언뜻 진중하게 들리는 목소리로 본론을 꺼냈다.
-사실은 엄마가 부탁이 있어서 전화했어.
조심스레 열린 말문이었다. 그럼에도 단여명은 대수롭지 않게 받아쳤다.
“얼마나 대단한 부탁이길래 무게를 잡으실까.”
그녀는 걱정 어린 안부를 자주 묻고는 했다. 시차도 다르니 점점 연락하는 텀도 길어졌다. 부탁이라고 해봤자 평상시처럼 건강을 최우선으로, 담배는 끊을 수 있으면 되도록 끊고. 그런 잔소리일 것이라고 치부했다.
-애 하나만 맡아 줄래?
그러나 그다음으로 나온 말에 단여명은 웃고 있던 표정을 서서히 흐렸다. 연이은 지인들과의 통화로 들떠 있던 정신이 정수리에 똑바로 박히는 기분이었다. 이런 기상천외한 부탁은 예상 밖이었다. 잠깐의 정적 속 여러 시나리오가 뇌리를 스쳤다.
“…애요?”
-응, 한 3개월만. 엄마 친구 아들인데 자취방을 못 구했대.
엄마 친구 아들, 그리고 자취방. 혹시나 하던 노파심이 빠르게 몸집을 줄였다. 그래도 확인차 또 다른 물음을 던졌다.
“그 애가 몇 살인데요?”
-올해로 스무 살이라고 하던데?
“엄마, 스무 살이 무슨 애예요. 깜짝 놀랐네.”
무심코 상상의 나래를 펼쳐 버렸다. 엄마와 떨어져 산 기간도 어느덧 5년이 넘었다. 혹시 저 모르게 눈 맞은 남자가 생겨 자식이라도 생겼나 섣불리 짐작했다.
이혼가정에서 자란 단여명은 그녀가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는 과정을 지켜봤다. 그녀는 본인이 다른 남자를 만나는 것에 자식이 상처받지 않을까, 하고 언제나 노심초사했다.
하지만 그녀의 걱정과 달리 단여명은 개의치 않았다. 그건 엄마의 인생이겠거니, 하고 별 탈 없이 지냈다. 어쩌면 그 엄마에 그 아들이라고, 자신의 개방적인 사고방식이 그녀를 쏙 빼닮은 게 아닐까 종종 생각할 정도였다.
-스무 살이면 아직 애기지. 엄마 눈엔 너도 아직 아기 같은걸?
듣기 낯간지러운 말에 단여명은 웃음으로 대답을 얼버무렸다. 어디 사는 아기가 혼자 장 보고, 부엌에서 요리를 해 먹을까. 자식이 없는 저로선 평생 이해하지 못할 성싶었다.
-너희 집에 남는 방 하나 있잖아. 이번에 작품도 완결 냈다고 하지 않았어? 애가 예의도 바르고, 얌전해서 부딪힐 일도 없을 거야.
“너무 갑작스러운데…….”
-같은 남자인데 뭐 어때?
같은 남자라서 문제가 될 수도. 썩어 빠진 속내를 엄마가 알 리 만무했다.
“그래도 누구랑 같이 산 적은 없어서요. 생각해 볼게요.”
단여명은 가볍게 답했다. 타인과 같은 침대에 몸을 누인 적은 수많았으나, 생활공간을 공유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일단 생각해 보겠다는 말로 답변을 미뤄놓고, 나중에 거절할 생각이었다.
-어머, 어쩌지…. 이미 알겠다고 말해뒀는데.
그러나 곤란해하는 목소리가 그 계획을 완전히 틀어놓았다. 단여명은 멍해지는 정신을 붙잡았다. 제가 사는 집에 자신의 허락도 없이, 그것도 얼굴도 모르는 사람을 들이겠다고 허락한 것인가?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방금까지의 기분이 거짓말처럼 차분히 가라앉았다.
“…엄마, 저한테 상의도 없이 그러면 어떡해요.”
난처한 기색을 띤 목소리였으나, 그 속에서 감출 수 없는 짜증이 배어났다. 뒤늦게 아차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한번 엎지른 물을 주워 담을 순 없었다.
여러 사람을 거쳤음에도 단여명에겐 바뀌지 않는 철칙이 있었다. 거의 동거하다시피 서로의 집을 드나들지언정, 진짜 동거는 하지 않았다. 혈연도 아니고, 생판 모르는 남과 같이 산다는 건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성향이 다른 두 사람이 서로 맞춰가는 과정은 상당한 정신력을 요구했다. 연인 사이엔 사랑이나 정이라도 있지 이 관계는 뭣도 없었다.
혼자 쓰는 공간이 아니니 사소한 거 하나도 배려해야 했으며, 만약 상대방이 서로 간의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좋든 싫든 분란이 일어날 게 뻔했다. 생각만 해도 벌써 골치가 아팠다. 분명 신경 쓸 게 한둘이 아닐 텐데.
-나는 네가 된다고 할 줄 알았지. 너 사람 좋아하잖아. 언제는 나한테 혼자 살기 외롭다며?
“그건 술김에 장난삼아 했던 얘기고…. 사람 좋아하는 거랑 같이 사는 게 어떻게 같아요.”
무거운 한숨을 삼킨 단여명은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방금까지 신경도 쓰이지 않던 앞머리가 괜스레 거슬렸던 탓이었다.
“그리고 저 잠귀 예민한 거 아시잖아요.”
단여명이 누구와의 동거도 원치 않았던 데에는 남들보다 약간 예민한 성격과 생활 패턴 때문도 있었다. 작업량이 많아질 때면 거의 밤을 지새우는 자신과 생활 루틴이 맞을 사람이 몇이나 될까. 피로에 지쳐 눈을 붙이는데, 룸메이트가 큰 소리라도 내면 싫은 소리를 참지 못할 거다.
-개강이 일주일 뒤라는데 길바닥에서 재울 순 없잖아. 마침 너희 집이랑 학교도 가깝지 뭐니.
“그래도 제가 불편해서요. 다시 어려울 것 같다고 말씀드리면 안 돼요?”
-어쩌지. 한 달 전에 얘기했던 거라서…….
잠시 뜸 들이던 그녀는 곤란한 음색으로 말을 마쳤다.
-그쪽은 이미 너희 집에서 지내는 거로 알고 있을 텐데.
“……엄마.”
단여명은 딱딱한 목소리로 그녀를 불렀다. 개강이 코앞이라는 것도 그렇고, 한 달 전에 했던 얘기면 되돌릴 방법도 없었다. 아마 이 연락도 상당히 늦게 준 걸 테지. 제가 본인에게 무른 걸 알아 이리 무턱대고 밀어붙이는 것이다. 그 속내가 훤히 들여다보여서 짜증이 안 날 수가 없었다.
-미안해. 엄마가 미리 말해 준다는 걸 깜빡했어.
“…….”
-많이 어려울까? 자취방 구하면 바로 나간다는데….
시무룩하게 말끝을 흐리는 목소리가 불편한 심기를 탓하는 것만 같았다. 그에 단여명은 아무 소리도 낼 수 없었다.
-우리랑 사정이 비슷하더라고. 그쪽 집안도 애가 아빠 없이 컸대. 미국에서 자라서 한국엔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텐데, 혼자 유학을 간다잖아.
“…….”
-그 얘기를 듣는데 네 생각 나서 차마 모른 척할 수가 없었어. 나는 둘이 의지하고 지내면 좋을 것 같아서…….
그렇게 괜찮다고 말해 봐도 엄마는 자신의 어린 시절을 애틋하게 생각했다. 짐작건대 아빠 없이 자랐고, 본인도 일하랴, 연애하랴 바쁘게 지냈으니 보호자로서 돌봐 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일 터였다.
-엄마가 항상 아들한테 미안한 거 알지?
단여명은 그녀가 이런 유의 말을 흘릴 때마다 되레 죄책감을 느꼈다. 실제로 아버지의 빈자리를 크게 실감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런 말 하지 말라니까요.”
큰소리도 못 치고 바로 꼬리 내릴 거면 왜 다그치듯이 불렀는지. 제가 생각해도 어이없었지만, 괜히 불효를 저지르는 것 같아 마음 한구석이 찝찝해졌다. 엄마가 저렇게 말하는데 자식이 된 입장에서 어떻게 더 성낼까.
피곤해질 앞날이 훤해서 짜증은 치미는데 당사자에게 화는 못 내겠고, 그 짜증을 삭일 길은 보이지 않았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멀쩡했던 뒷목이 급격히 뻐근해지는 기분이었다.
“허락한 거 아니에요. 일단 얘기나 좀 해보고요.”
-그래.
“며칠 지내보고, 성격 맞는 것 같으면 그때….”
-그럼.
“…….”
따박따박 돌아오는 맞장구가 칼 같았다. 얼핏 심통이 난 아이를 달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단여명은 달싹거리던 입을 다물었다. 역시나 엄마한테 말리는 느낌을 지우지 못하겠다.
“그래서…. 그 스무 살짜리 애가 언제 온다고요?”
그래 봤자 한 사람 한정으로 마음 약한 단여명이 반기를 드는 일은 전무했다.
***
이른 아침, 단여명은 겨우겨우 눈을 떴다. 여느 때와 다른 기상 시간에 핸드폰 알람을 세 번이나 끈 뒤에야 이부자리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칫솔을 입에 물고 핸드폰 시계로 시간을 가늠했다. 공항에 8시 도착이라고 했으니… 지금쯤 여기로 오는 중이려나.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더니.’
이게 무슨 날벼락인지. 맘 놓고 살다가 갑자기 얼굴도 모르는 하숙생을 받게 생겼다. 얘기를 들은 후로 나흘이란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얼떨떨했다. 오랫동안 혼자 살아서 그런지 오늘부로 누구랑 같이 산다는 게 실감 나지 않았다. 그러나 몇 번을 다시 보아도 달력에 표시된 날짜는 오늘이 맞았다.
정말 내키지 않았음에도 엄마의 지인이라는 연유 때문에 몸이 기계적으로 움직였다. 환기를 위해 창문부터 열고, 재떨이에 쌓인 담배꽁초를 버렸다. 담배 냄새가 풍기지 않게 쓰레기봉투를 꽉 동여매 한쪽으로 치워둔 다음엔 청소기를 돌렸다. 사정이 어찌 됐든 초면의 사람이니 대충이라도 성의를 보이는 게 맞았다.
미국에서 살던 애가 여기까지 잘 찾아올 순 있을까. 잠시나마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곧바로 머릿속에서 지워냈다.
어련히 알아서 하겠지. 제가 보호자나 선생님도 아니고. 안 그래도 심란해 죽겠는데 거기까지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차분히 정리해 보면, 엄마의 말대로 3개월이란 그리 긴 시간이 아니었다. 서로 데면데면하게 지내다가 그대로 모르는 사이가 될 미래가 어렵지 않게 그려졌다. 같이 살다가 말이 안 통한다 싶으면 돈을 쥐여 줘서라도 내쫓아야겠다. 궁색한 형편은 아니니 근처 호텔 방이라도 구해 주면 알아서 잘 살겠지.
스무 살이면 그렇게 어린 나이도 아니다. 노력해 봤음에도 도저히 성격이 안 맞아서 어쩔 수 없었다고. 그렇게 설명하면 엄마도 그러려니 이해해 줄 것이다.
밀대로 방바닥을 닦는데 때마침 초인종이 울렸다. 시간은 10시가 되기 직전이었다. 훅, 하고 숨을 뱉으니 앞머리가 위로 들렸다가 차분히 내려앉았다. 대망의 주인공 등장이었다.
문을 열어 주러 가는 도중에 단여명은 전신 거울에 시선을 줬다. 소라색 니트와 흰 면바지를 입은 남자의 모습이 보였다. 정신없이 움직이느라 뺨이 상기되고 머리가 좀 흐트러지긴 했다만, 이 정도면 첫 만남에 손색없다.
확인을 마친 단여명은 망설임 없이 현관문을 열었고.
“…….”
“…….”
아주 조금, 당황했다.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후줄근한 검은색 운동복 상의였다. 그 아래로는 상의와 세트로 보이는 바지와 맨발에 끼운 슬리퍼가 보였다. 여행객이 북적이는 공항이 아니라 집 앞 편의점에 다녀온 것처럼 단출한 차림새였다.
“…안녕.”
눈에 띄는 장신, 널따란 어깨에 걸쳐진 큰 배낭, 28인치 캐리어. 눈 아래까지 내려오는 긴 앞머리와 뒷목을 덮는 머리.
새로 들인 하숙생이자 한창 반짝반짝할 새내기의 첫인상은 딱 그거였다. 덩치 큰 삽살개. 눈을 가린 앞머리가 자칫 음울한 인상을 줄 만도 하건만, 골격이 큰 탓에 위압적인 느낌이 더 강했다. 껌껌한 밤중에 골목에서 마주치면 같은 남자라도 흠칫 놀랄 만큼.
“무거워 보이는데. 같이 들어 줄까?”
첫인상은 어디까지나 첫인상이고. 단여명은 머릿속에 떠오른 상념을 일단락 짓고, 사람 좋은 미소를 건넸다.
아무튼 세 다리 건너 아는 사람이었고, 일이 이렇게 된 건 엄마의 과실이지 그의 탓으로 돌릴 수 없었다. 커튼처럼 내려온 앞머리 때문에 그가 어디를 보는지 알 수 없었지만, 일단은 웃었다.
“…….”
이름 모를 남자는 말없이 캐리어를 들어 올렸다. 혼자 들 수 있다는 뜻으로 보여 몸을 비켜 주자 그가 성큼성큼 집 안으로 들어왔다. 슬리퍼를 가지런히 벗어놓고, 거실 한가운데에 짐을 내려놓은 그는 주위를 두리번댔다.
“목마르지? 거기 잠깐 앉아 있어. 마실 것 좀 줄게.”
단여명은 소파 쪽을 손짓하고 부엌으로 향했다. 냉장고를 열어 보니 유통기한이 내일까지인 매실 주스가 나왔다. 유리컵에 주스를 따라 거실로 돌아가자 그는 반듯한 자세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 단여명은 유리 테이블에 잔을 내려놓곤 우측의 일인용 소파에 따로 앉았다.
“사정은 대충 들었어. 한국말은 할 줄 알아?”
“네.”
짧은 대답이었지만, 그럴싸한 발음이었다. 고개를 끄덕인 단여명은 이어서 입술을 뗐다.
“난 단여명이라고 해.”
“권호영입니다.”
“아, 이름이 호영이야? 발음 귀엽다.”
“…….”
“호영이. 둥글둥글… 하고.”
“…….”
애써 칭찬한 게 소용없이 숨 막히는 정적이 닥쳤다. 단여명은 민망한 기분에 눈길을 슥 돌리곤 속으로 생각했다.
‘진짜 숫기 없네.’
말수도 적은 편인 것 같고. 진작부터 느끼던 감상은 말을 텄다고 재평가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올해 스무 살이라고 했으니 자신과 6살 차이가 났다. 제가 스무 살이었던 때를 돌아보면 이성에게 관심이 많고, 사람들과 자주 어울릴 풋풋할 나이였다.
그런데 뻣뻣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눈앞의 새내기는 이성을 떠나서 사람에게 관심이 없어 보였다. 남의 눈을 조금도 의식하지 않은 그의 겉모습이 대신 설명해 줬다.
슬슬 입꼬리가 아파왔지만, 단여명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이쪽도 그리 말이 많은 편은 아닌데. 이 삭막한 분위기를 어떻게 헤쳐나가면 좋을지 적당한 대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파트너를 종종 집 안에 들이곤 했기에 손님 자체가 어색하진 않았다. 그런데 얜 유독 어색했다. 엄마의 부탁이었고, 그녀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일단 받아주긴 했다만…. 애가 독특해 보여 선뜻 아무 말이나 붙이기 조심스러워졌다.
“…….”
“…….”
“…계란 볶음밥 좋아해?”
한참 뒤에 건넨 말은 고민한 시간이 무색하게도 생뚱맞기 그지없었다. 어색한 기류에 주위를 둘러보다가 마침 얻어걸린 화젯거리였다.
“입에 맞을지 모르겠네.”
그릇 두 개만 놓인 식탁은 밑반찬도 없이 휑했다. 짙게 그을린 볶음밥은 파와 양파, 계란을 넣고 간장을 곁들인 요리였다.
어쩌다 보니 나흘 전에 사 온 요리 재료를 지금에서야 꺼내게 됐다. 장을 본 당일, 엄마와의 통화가 길어져 요리해야겠다는 열정이 사라졌다. 그렇게 냉장고에 식자재를 정리해 두고 잊고 살았는데, 때마침 권호영을 보니 그것이 떠올랐다. 그래도 명색의 손님인데 라면을 끓여 대접할 순 없었다.
단여명은 한술 떠 보라며 눈짓했다. 그제야 맞은편에 앉아 있던 권호영이 숟가락을 들었다. 식기가 부딪치며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치렁치렁한 앞머리가 불편하지도 않은지 권호영은 잘도 숟가락질했다. 겉모습만 보면 밥을 푹푹 퍼먹을 것 같은데 의외로 먹는 모습이 얌전했다. 단여명도 뒤이어 숟가락을 들었다. 잘게 부서지는 볶음밥을 오목한 숟가락에 얹어 입안으로 넣었다.
‘음….’
간이 조금 밍밍하긴 했지만,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이 정도면 오랜만에 요리한 것치곤 합격점이었다.
사실 단여명의 요리 실력은 형편없었다. 요리를 못하는 여타 사람들이 그렇듯 불의 세기는 무조건 강하게, 재료는 전부 때려 넣고 한꺼번에 볶았다. 인스턴트 쌀밥을 전자레인지에 돌릴 동안 팬 위의 재료가 거뭇하게 탈 거란 시간 계산도 전혀 하지 못했다. 그래도 양심상 까맣게 탄 부분은 제 밥그릇에 옮겨 담았다.
“한국은 이번이 처음이야?”
긴 침묵을 의식한 단여명이 먼저 화두를 꺼냈다. 사실 침묵이 이어져도 별 상관 없었지만, 엄마 친구 아들이라는 관계성과 제가 더 나이가 많다는 사명감에 선심 쓰듯 뱉은 말이었다.
“…어릴 때 몇 번 와 봤어요.”
말소리에 슬쩍 고개를 든 권호영이 크지 않은 목소리로 답했다.
“한국말은 잘하는 것 같던데.”
“어머니 쪽이 한국인이어서요.”
“그래도 미국이랑 문화가 다르잖아. 대학 생활 하려면 고생 좀 하겠다.”
소리 없이 음식을 씹던 권호영은 한참이 지나서야 대답했다.
“…괜찮아요.”
단여명은 ‘그래?’ 하고 심심하게 답했다. 몇 년 만에 재회한 전 애인과도 이것보단 대화가 길게 이어질 것 같은데. 차마 내색하지 못할 불만이 슬며시 고개를 들었다. 제가 취재진도 아니고 계속 물음을 던지는 것도 웃겼다. 일방적인 관심을 표하는 것만큼 민망한 일도 없으니까.
낯을 심하게 가리는지, 아니면 벌써 미움을 산 건지. 긴 앞머리가 눈을 가려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권호영은 시종일관 무심한 태도였다.
그 후로 단여명은 그에게 사적인 질문을 하지 않았다. 그저 권호영이 어느 방을 쓰면 되는지, 빨래는 어디에다 내놓고, 쓰레기는 어디에다가 버리면 되는지. 교통정리를 하듯 짧게나마 공동생활의 규칙을 설명해 줬다.
단여명의 말에 권호영은 고개를 끄덕이거나, 멈췄던 수저질을 다시 잇고는 했다. 거의 무시에 가까운 반응이었지만 단여명은 괘념치 않았다. 그에게 큰 반응을 기대하는 것은 이미 반쯤 체념한 뒤였다.
누구와 같이 사는 건 처음이라 불편한 점은 서로 맞춰가자는 것으로 얘기가 마무리됐다. 필요한 말만 하고, 음식에만 집중한 탓에 식사 시간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권호영은 음식에 대한 어떤 평도 하지 않았다. 그저 깔끔히 비운 그릇으로 음식이 그럭저럭 입에 맞았겠거니 짐작할 뿐이었다.
단여명은 권호영이 숟가락을 내려놓은 후에도 묵묵히 식사를 이었다. 혼자 떠들다시피 한 것도 있고, 원체 밥 먹는 속도가 느렸기 때문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권호영이 돌연 몸을 일으켰다. 의아한 눈으로 바라보는데, 자리로 돌아온 그가 눈앞에 무언가를 불쑥 내밀었다.
“이게 뭐야?”
커다란 손엔 하얀 봉투가 들려 있었다. 그 안에 든 것의 정체가 어렵지 않게 추측됐지만, 예의상 물었다.
“집세요.”
“돈은 괜찮아. 잠깐 있다가 가는 건데.”
별거 아니란 듯 단여명은 친절하게 웃었다. 그냥 쥐 죽은 듯이 지내주면 돼. 있는 듯 없는 듯 그렇게. 뒷말은 속으로 삼켰다.
“…아니요.”
긴 침묵을 깨고, 권호영이 한 말은 그 한마디뿐이었다. 뭐가 아니라는 건지 이해가 어렵진 않았다.
돈 봉투를 식탁 위에 반듯하게 내려놓은 그는 곧장 등을 돌렸다. 얘기를 듣는 둥 마는 둥 해서 몰랐는데, 본인이 쓸 방이 저쪽이라는 소리를 귀담아듣긴 했나 보다. 그는 짐을 챙겨 들곤 정확히 여명이 사용하지 않는 손님방으로 사라졌으니까.
‘아.’
단여명은 아까부터 뻐근함이 느껴지던 뒷목을 주물렀다. 어쩐지 앞날이 그리 순탄하진 않을 것 같다고 생각하며.
객식구가 늘어난 집안은 살림살이도 인원수대로 늘어났다. 나란히 꽂힌 칫솔도 두 개, 현관에 벗어놓은 사이즈 다른 신발도 두 종류, 개수대에 꺼내놓은 컵도 두 개가 됐다.
앞날이 첩첩산중일 거란 예상을 깨고, 권호영은 정말 얌전히 지냈다. 생활 소음도 필요 이상으로 내지 않았고, 걸음도 소리 없이 걸었다. 덩치는 산만 한데 다니는 건 고양이가 따로 없었다.
애가 워낙 살가운 맛이 없어 약간의 불만을 가졌던 단여명도 동거 생활에 무난히 적응할 수 있었다. 권호영은 부엌을 써도 깔끔히 사용했으며, 냉장고에 든 먹을거리도 제 것이 아닌 이상 건들지 않았다.
단여명도 혼자 살 때보다 많은 부분에 신경을 썼다. 가끔 집 안에서 태우던 담배도 밖에 나가 처리했다. 제 방은 돼지우리일지언정, 권호영과 행동반경이 겹치는 곳은 되도록 청결을 유지했다.
쓰레기 배출과 청소는 돌아가면서, 같이 밥을 먹을 때가 아니면 설거지는 각자. 첫날에 허술하게 세워졌던 규칙도 자리를 찾아갔다.
단여명은 남에게 민폐 끼치는 걸 싫어하는 성격이었고, 권호영은 바른생활의 모범을 보여주듯 행동했다. 이렇듯 서로 부딪힐 만한 상황이 발생하질 않으니 일상은 평화롭게 흘러갔다.
다만 불편한 점을 꼽자면.
“…일찍 왔네.”
관계가 이렇다 할 진전 없이 여전히 서먹하다는 것이었다.
모닝 아닌 모닝커피를 내리던 단여명은 집 안으로 들어오던 권호영과 우연히 마주쳤다. 이런 상황이 닥치면 어색한 분위기가 더욱 두드러지곤 했다.
한낮인데도 방금 일어난 것을 증명하듯 머리가 삐친 한 사람, 그리고 막 외출을 마치고 돌아온 한 사람. 생활 방식이 극과 극의 두 사람이 친해지기란 요원해 보였다.
“오늘은 오전 수업만 있다고 했나?”
“네.”
오늘의 권호영은 남색 트레이닝복을 걸치고 있었다. 얼굴을 가리는 더벅머리는 개강을 했대도 달라진 게 없었다.
그래도 학교에 다닌다고 양말에 운동화는 챙겨 신은 모습이었다. 세트로 트레이닝복을 입지 않을 때도 있었지만, 그는 하의만큼은 꼭 운동복을 고집했다. 단여명이 보기엔 꽤 독특한 취향이었다.
“점심은?”
“밖에서 먹고 왔어요.”
고개를 꾸벅 숙인 권호영은 곧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단여명은 굳게 닫힌 방문을 바라보다가 커피잔에 입술을 댔다. 뻣뻣한 하숙생님과 동거를 시작한 지도 어느덧 일주일째였다.
권호영과의 대화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식사 시간대가 겹치거나 거실에서 우연히 마주치면 형식적인 안부를 주고받다가 둘 다 말문을 닫았다.
먼저 말꼬를 트는 쪽은 대부분 단여명이었다. 물론 권호영이 먼저 말을 걸어올 때도 있었다. 그는 단여명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부분을 잘도 캐치했다. 청소 당번을 정하게 된 것도 그가 먼저 제안한 것이었다.
단여명은 적당히 살면 알아서 집안이 굴러간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이 공동책임을 져야 하는 동거 생활을 안일하게 생각한 건 아니었다. 자신보다 나이가 훨씬 어린 권호영에게 집안일로 부담 주고 싶지 않았던 이유가 가장 컸다. 제집이니까 당연히 자신이 관리해야 한다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한 것도 있었다.
권호영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느라 바빠 보였다. 그와 반대로 자신은 현재 놀고먹는 백수였으니 비교적 시간적인 여유가 있었다. 굳이 왈가왈부하며 가사를 분담하자고 말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권호영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다. 남의 집에 얹혀산다고 생각해서인지 그는 역할을 분담하고 싶다는 의사를 보였다. 어떻게 보면 일종의 배려 같기도 했고, 엄연한 타인을 대하듯 선을 긋는 것 같아 보이기도 했다.
그런 얘기가 아니고서야 권호영은 형식상 알은체만 할 뿐, 심드렁하기 그지없었다. 무슨 말을 붙여봐도 항상 토막 난 대답만 돌아오니 얘깃거리가 빠르게 동났다. 어린놈이 귀여운 맛이라곤 하나 없었다.
‘…하긴.’
그가 애교를 떠는 것도 이상할 것 같긴 했다. 권호영은 함부로 다가갈 수 없는 분위기를 풍겼다. 누구라도 그리 느낄 것이다. 그늘처럼 드리워진 앞머리도 그렇고. 덩치가 커 어딘가 투박한 느낌도 났다.
놀랍게도 단여명은 여태껏 그의 맨얼굴을 본 적이 없었다. 단여명이 느지막이 점심나절쯤에 일어나면 권호영은 철두철미하게 얼굴을 가린 후였다.
그래서 단여명은 종종 그의 얼굴이 궁금해졌다. 인간으로서 어쩔 수 없는 호기심이었다. 같은 식탁에서 밥을 먹을 때면 마주 앉을 수밖에 없었는데, 보이는 거라곤 조용히 음식을 씹는 입술뿐이었다.
도톰한 입술은 입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가 있었다. 음식물을 삼키면 입가에 힘이 들어가 입꼬리의 음영이 더욱 짙어지곤 했다.
콧대도 오뚝하고 입술 모양도 예쁜데 왜 가리고 다니지? 뒷머리는 그렇다 쳐도 천막 같은 앞머리는 보는 사람이 다 답답증을 호소할 정도였다. 앞머리만 정리해도 훨씬 깔끔해 보일 텐데.
그러나 단여명은 모든 말을 목구멍 아래로 삼켰다. 어느 정도 친분이 있는 사이라면 가볍게 물어볼 수라도 있겠다. 하지만 권호영과 단여명의 사이는 지구에서 달까지의 거리만큼 멀었다. 이러다 권호영이 머리를 자르는 날이 오기라도 하면 공연히 제가 낯을 가릴 것 같기도 하고.
“호영아.”
똑똑. 외출 준비를 마친 단여명은 권호영의 방문을 노크했다.
“나 오늘 늦게 들어올 것 같은데. 냉장고에 반찬거리 사다 놨으니까 저녁 잘 챙겨 먹어.”
대답을 한 것 같기도 하고, 안 한 것 같기도 했다. 딱히 상관은 없었다. 그저 제 할 말만 전하면 볼일은 끝이었으니.
***
이른 저녁의 칵테일 바는 손님이 적었다. 오래된 전구의 불빛처럼 조도 낮은 백열등이 어둑한 실내를 밝혔다. 낡은 목제 테이블과 철제 의자가 어우러진 술집은 유럽의 이름 모를 펍을 연상시켰다. 부드러운 재즈 음악의 선율을 타고 두런두런한 말소리가 울렸다.
“어때?”
남자는 멀지 않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두툼한 가슴팍과 단단하게 각진 턱선이 제 취향이기는 했다. 분명 그렇긴 한데…….
“잘 모르겠어.”
“별로란 소리네.”
긍정의 웃음을 보인 단여명은 과실 향이 감도는 와인을 입안에 머금었다. 서로 떠보는 듯한 대화를 주고받다가 옷을 벗어 던지기까지의 모든 과정이 귀찮아졌다. 공들여 침대에 넘어트리고 아랫도리를 까 봤는데 별로면? 그 시간과 정성은 누가 보상해 줄까.
“너 되게 웃긴다. 엄청 우울해 보여.”
그깟 섹스가 뭐라고. 흰 와이셔츠에 검은색 앞치마를 두른 천수진은 이 상황이 퍽 재밌다는 얼굴이었다. 단여명은 쓰게 웃었다. 그녀는 아마 모를 것이다. 제가 얼마나 글러 먹은 인간인지.
배 속 깊숙한 곳에 정액을 받고 싶어 목이 바짝바짝 탔다. 거대한 물건의 중압감에 짓눌려 상대의 발밑에서 빌빌 기고 싶었다. 손으로 뒤를 벌리고, 천박하게 허리를 돌리고 싶었다.
“…….”
욕구불만이 극에 달한 모양인지 어느 때보다 망상의 수위가 높았다. 추잡스러운 상상에 입안이 바짝 말라 단여명은 연거푸 글라스를 기울였다.
천수진은 물론 단여명의 주변 사람은 까맣게 모를 속내였다. 단여명은 자신을 포장하는 데 능숙했다. 사적인 얘기를 할 때도 적당한 선을 지켰으며 성생활이 관련된 얘기면 본심의 6할 정도만 드러냈다.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모든 것을 사실대로 말하기 꺼려졌다. 솔직하게 말했다가는 미친놈 취급받기 십상이었다.
헤테로 섹스도 아니고, 다름 아닌 게이 섹스였다. 사회에선 남자끼리 붙어먹는 짓을 저급하다고 평가했다.
거기다 단여명은 제 얼굴이 어떻게 생겼는지 잘 알고 있었다. 자신과 어울리게끔 옷차림도 단정하고 깔끔한 스타일을 선호했다. 만약 침대에서 본색을 전부 드러내면 백이면 백 당황할 것이다. 기겁하며 달아나지만 않으면 다행이지.
일주일간 수절했더니 응어리진 불씨를 품은 듯 단전이 절절 끓어올랐다. 그래서 천수진이 말한 남자라도 볼까 싶어 그녀가 일하는 가게에 들른 참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끌리지 않았다. 요즘 마음에 차는 물건을 찾지 못한 탓일까. 실망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이젠 넌덜머리가 났다. 저번엔 말씨름하기 귀찮아서 장단을 맞춰 줬지만, 지금은 연기할 열정도 샘솟지 않았다.
“그럼 일 끝나고 나랑 놀자. 오랜만에 너희 집에서 맥주 한잔할까?”
“그럴까?”
별생각 없이 받아친 단여명은 곧 잊고 있었던 사실을 상기했다.
“아, 당분간 우리 집은 안 돼.”
“왜?”
천수진이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 자신도 아직 얼떨떨하다는 듯 단여명은 곤란한 미소를 지었다.
“손님이 왔어.”
“손님? 섹파 아니고?”
“아니. 엄마 친구 아들인데 잠깐 신세 진다고 해서….”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 가볍게 어깨를 으쓱인 단여명은 모든 설명을 축약해 말했다. 그에 천수진이 눈을 가느스름하게 떴다. 말없이 아래위로 훑는 눈초리가 영락없는 시정잡배 취급이었다.
“쓰레기 새끼야.”
역시나 그녀는 비난을 서슴지 않았다. 그래, 이상한 오해를 받을 줄 알았다. 바로 직전에 제 취향인 남자가 별로라고 말했으니 어찌 보면 합리적인 의심이었다.
아마 그녀는 제가 같이 살게 된 룸메이트에게 음습한 마음을 품을 줄로 알 테다. 순진한 샌님을 침대로 끌어들이기 위해 수작 부리는 중이라고 말이다.
일이 이렇게 된 건 어쩔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 천수진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단여명은 엄마를 애틋하게 생각했다. 갑작스러운 동거를 수락한 것도, 무뚝뚝한 권호영에게 나름 살갑게 대해 주는 것도 다 엄마의 체면을 위해서였다. 하지만 위와 같은 사정은 굳이 밝히지 않아도 좋을 이야기였다.
“다짜고짜 욕이냐, 넌. 그런 거 아니야. 내가 미쳤다고….”
솔직히 아예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었다. 가슴이 조금 뜨끔했지만, 단여명은 장난스러운 투로 말을 마쳤다.
“엄마 친구 아드님이라니까.”
그 말은 사실이었다. 속이 시커먼 생각은 권호영을 보지 못했을 때의 일시적인 망상으로 그쳤다.
만약 흑심을 품었을지라도 티가 나지 않게 단단히 억눌렀을 것이다. 다행히 권호영은 단여명에게 그런 생각이 들지 않게끔 행동했다. 그는 연애는커녕, 사람한테 일절 흥미가 없어 보였으니까.
“그런데 애가 좀 특이해.”
잠시간 권호영을 생각하던 단여명은 입가에 웃음기를 띠었다. 호감인 사람을 떠올릴 때처럼 훈훈한 기색보단, 어이가 없어 터진 실소에 가까웠다.
“왜?”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단여명은 핸드폰을 꺼냈다. 말보단 사진으로 보여주는 쪽이 이해가 빠를 듯싶었다. 키워드를 검색하자 무수한 사진이 화면에 띄워졌다. 스크롤을 내리니 천수진이 가까이 다가왔다.
“딱 이런 스타일이야.”
단여명은 손끝으로 액정을 두드렸다. 옛날에 유행했던 시트콤에 출현한 남자 배우의 사진이었다.
눈이 보일 듯 말 듯한 앞머리가 인상적인 그는 검은색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었다. 이 사람처럼 헤실헤실 웃고 다니는 편은 아니지만, 전체적인 이미지는 권호영과 비슷했다.
“진짜? 진짜 이렇다고?”
천수진이 흥미롭다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그녀가 좋아라 할 얘기였다. 좋아하라고 꺼낸 얘기이기도 하고.
“칠공팔공 세대도 아니고. 요즘 보기 힘든 스타일인데.”
근데 이거 앞은 보이나? 화면을 유심히 들여다보던 천수진이 작은 목소리로 혼잣말했다.
“모르겠어. 일상 생활하는 데 딱히 불편하지도 않아 보여. 무슨 사정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왜, 한번 물어보지?”
단여명은 곤란한 미소만 지었다. 물어볼 수 있었으면 진작 물어봤다. 아마 제가 아니더라도 일반적인 사람이면 엄두도 내지 못할 것이다.
단여명은 권호영이 좋지도 싫지도 않았다. 잠깐 있다가 떠날 사람이니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는 쪽이 더 정확했다. 그러나 그와 집 안에서 마주칠 때면 불현듯 호기심이 들곤 했다. 권호영은 대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지.
권호영은 항상 목석같은 태도를 지켰다. 낯선 사람을 경계한다기엔 무신경해 보였고, 무감각한 성격이라기엔 일부러 그러는 느낌.
“그게… 날 안 좋아하는 것 같아.”
총평은 그랬다.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해 봐도 무관심 또는 비호감이었다.
“저번엔 나보고 ‘저기요’라고 했어.”
“뭐?”
순간 거나한 웃음소리가 터졌다. 천수진이 끅끅대며 웃다가 ‘연하?’라고 물었다. 단여명이 고개를 끄덕이자 웃음소리가 더욱 호탕해졌다. ‘저기요’라고 불린 순간 황당하지만 담담한 척했을 제가 생각만 해도 웃긴다며 그녀는 손뼉까지 쳤다.
“아…, 진짜 웃긴다, 걔. 그 정도면 불러 주는 것만으로도 황송해야겠는데.”
손끝으로 눈가를 훔친 천수진이 농담조로 말했다. 그래, 네가 웃기다니 됐다. 잔뜩 비웃음을 당한 단여명은 허허롭게 웃었다.
“같이 지내보니까 어때? 너 누구랑 같이 사는 거 처음 봐.”
“생각보다 괜찮아. 엄청 조용해서 가끔 있는 것도 까먹어.”
그게 아니었으면 싸움이라도 나지 않았을까. 그러나 권호영의 이미지가 하도 강하게 자리 잡은 탓에 화내며 고함치는 그가 상상되질 않았다. 차분히 쏘아붙이는 쪽이면 몰라도. 애초에 길게 대화를 나눠 본 적도 없어서 부질없는 상상이긴 했다.
“아, 잠깐만.”
천수진은 실실 웃다가 급하게 자리를 떴다. 멀지 않은 곳에 앉아 있던 손님이 계산을 요청했기 때문이었다.
계산대 앞에 서 있는 남자는 심란한 낯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 중인지 대략 감이 잡혔다. 옹달샘에 세수하러 온 토끼도 아니고. 오늘도 남자는 물만 먹고 가려는 모양새였다.
천수진이 자리를 비운 사이 단여명은 빈 글라스를 만지작댔다. 취기가 오르는지 뺨이 홧홧했다.
여기서 더 마시는 건 아닌 것 같고. 그렇다고 천수진이 퇴근하기까지 기다리는 건 영 지루했다. 끌리는 상대도 나타나질 않으니 지루함을 숨길 방법이 없었다.
진열장에 놓인 술병의 개수를 멍하니 세어 보는데, 테이블에 올려두었던 핸드폰에 빛이 들어왔다. 무심코 화면을 들여다본 단여명은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잘 지내?]
저장되지 않은 번호였지만, 한 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눈에 익다 못해 뇌리에 박힌 번호였으니까. 의외란 생각과 함께 단여명은 메시지를 보낸 상대방을 떠올렸다. 꽤나 구체적이고 이러저러한 것들을.
[만날까?]
고민의 시간은 짧았다. 답신을 보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초록색 창 옆에 바로 읽음 표시가 떴다. 상대는 빠르게 답신을 돌려보냈다. 회색과 초록색의 메시지 창이 번갈아 화면을 채웠다. 마지막 메시지를 보낸 단여명은 옆자리에 걸쳐 놓았던 재킷을 들어 올렸다.
“간다.”
남자가 카운터를 떠난 뒤 그 빈자리를 단여명이 대신했다. 2시간이나 죽치고 있었으니 미련은 없었다. 단여명이 계산대 앞에서 카드를 내밀자 천수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벌써 집에 가려고?”
우리 놀기로 했잖아. 나는? 너무하다는 듯 곧바로 울상 짓는 표정이 자못 처량 맞아 보였다.
“미안. 갑자기 볼일이 생겨서.”
카드를 돌려받은 단여명은 자신 역시 아쉽다는 표정을 꾸몄다. 종이 영수증을 접어 쓰레기통에 버린 뒤 나지막한 목소리로 마지막 말을 전했다.
“일 끝나고 전화하지 마.”
그에 천수진이 대번 정색했다. 무슨 뜻인지 단번에 알아들은 얼굴이었다. 예상대로 걸쭉한 욕지거리가 등 뒤로 한 바가지 쏟아졌다.
어차피 직장에 묶인 몸, 무서울 건 없었다. 단여명은 환한 웃음으로 대답을 돌려줬다. 문밖을 나서는 발걸음이 가뿐했다.
검은색 세단이 매끄럽게 갓길에 멈춰 섰다. 차 번호를 확인한 단여명은 조수석의 차 문을 열었다. 차에 올라타니 익숙한 듯 낯선 향수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짙푸른 바다가 생각나는 묵직한 머스크 향이었다.
“오랜만이다.”
남자의 얼굴엔 장난스러운 미소가 걸려 있었다. 향수 취향도 그렇고 가벼운 웃음을 짓는 습관도 달라진 게 없어 보였다.
“변한 게 하나도 없네.”
“그래?”
아마 상대도 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단여명은 안전벨트를 당기며 엷게 웃었다.
김선오는 반년간 교제했던 전 남자 친구였다. 이 남자에 대해서 짧게 설명하자면 우선 자지가 큰 편에 속했다. 메시지를 받자마자 1순위로 떠오른 것이기도 했다.
성격이 안 맞기도 했고, 섹스 취향이 갈수록 저급해지기에 이별을 택했었다. 그러나 지금은 물불을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설마 오랜만에 만난 전 남자 친구한테 수갑을 들이댈까.
“그동안 뭐 하고 지냈어?”
“딱히 달라진 건 없는데. 졸업하고 글 쓰면서 지냈어. 너는?”
“나야 뭐 달랐겠어. 회사 다니느라 바빴지.”
김선오가 허심탄회하게 말했다. 한숨이 섞인 목소리가 가벼운 투정을 부리는 듯했다.
“저녁은?”
“아직.”
“잘하는 고깃집 아는데. 거기로 갈까? 반찬도 깔끔하게 나와.”
고개를 끄덕이자 김선오가 내비게이션에 위치를 찍었다. 경로 안내를 시작한다는 음성이 나오고 차가 부드럽게 속력을 냈다.
“왜, 대학 다닐 때 뿔테 안경 쓰고 다니던 형 있잖아. 교양 수업 때 나랑 같은 조 했던.”
“아, 생각났다. 너랑 친했던 사람?”
“어, 그 사람. 오랜만에 연락이 닿았는데, 들어보니까 대학원 때려치웠다고 하더라고.”
짧은 대화가 오갔다. 마치 이별의 순간이 없었던 사람들처럼 차내는 편안한 분위기였다. 마주 닿는 눈빛은 부드러웠으며 목소리엔 훈기가 섞였다. 서로의 얘기에 가벼운 웃음을 터트리기도 하며 차는 순탄하게 목적지로 향했다.
한참을 달리던 차는 한강 다리에서 신호에 걸려 멈춰 섰다. 해가 저물어가는 강변은 온통 진홍빛이었다. 작게 흘러나오는 라디오 소리를 한쪽 귀로 흘리며 노을 진 풍경에 시선을 빼앗긴 찰나였다. 귓불에서 간지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귀 뚫었어?”
무심결에 고개를 돌리자 밝은 고동색의 눈동자와 시선이 부딪혔다. 그는 놀라게 할 마음은 없었다는 듯 미미한 웃음을 보였다.
“여기 못 보던 자국이 보여서.”
“아, 전에 한 번.”
김선오와 헤어지고 나서 만났던 전 애인의 취미가 귀를 뚫는 것이었다. 제가 귀를 뚫은 모습이 궁금하다며 귀걸이를 선물하기에 한동안 양쪽 귀에 구멍을 내고 다녔다. 물론 귀걸이는 그 남자와 헤어지고 난 뒤 빠르게 관심 밖으로 밀려났다. 이유 없는 장신구는 거추장스러울 뿐이다.
“이쪽은 피어싱 자국 같은데.”
귓불을 만졌던 손이 이내 귓바퀴를 조심스럽게 쓸었다. 오묘한 스킨십은 가까운 듯 거리감이 느껴졌다.
생각해 보니 연애 당시 그의 손을 참 좋아했다. 김선오라는 사람이 만들어내는 특유의 분위기와 그의 말투와 행동을 사랑했던 시간이 있었다. 지금은 마음보다 몸이 더욱 달아올라서 문제였지만. 단연코 술기운은 아니었다.
“지금은 왜 안 하고?”
그는 미련 없이 손을 거뒀다. 쾌활한 표정은 허튼 꿍꿍이가 없어 보였다. 아마 김선오는 자신을 괜찮은 음식점에 데려가 진지한 얘기를 나눌 생각일 것이다. 좋았던 옛 기억을 회상하든, 인간적인 정을 추억하든. 하지만 안타깝게도 단여명의 속셈은 그와 달랐다.
“귀찮아서. 한 곳만 빼고 다 빼버렸어.”
“한 곳?”
김선오가 의아한 눈빛을 보냈다. 단여명의 양쪽 귀는 장신구 없이 깨끗했기 때문이었다.
“내 눈엔 안 보이는데.”
말장난이라고 받아들였는지 김선오가 픽 웃었다. 단여명도 따라 은은한 미소를 그렸다.
“일반적인 위치는 아니라서.”
“…….”
순간 기묘한 정적이 닥쳤다. 매끄러운 웃음을 짓고 있던 김선오의 입언저리가 굳어졌다. 어색하게 경직된 얼굴은 짐짓 당황한 낌새였다.
다갈색 눈동자는 정확히 단여명의 가슴팍을 응시했다. 의미심장한 눈길은 상체를 타고, 더욱 아래쪽으로 옮겨갔다. 물 흐르듯 자연스러운 움직임이었지만, 옷 속에 숨겨진 형태를 가늠하는 집요함이 느껴졌다.
황급히 시선을 갈무리해 봐도 때는 이미 늦었다. 얼굴색은 변함이 없었으나, 마주친 그의 눈동자는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단여명은 생각했다. 낚싯줄이 팽팽하게 당겨지는 순간은 언제가 됐든 짜릿하다고.
“…궁금해?”
넌지시 묻는 목소리가 먹물을 섞은 물빛처럼 탁했다. 내리깔린 눈길은 은근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었다.
쿵, 뒤통수가 벽에 부딪혔다. 서로에게서 터지는 숨결은 고스란히 상대의 입안에 먹혀들어 갔다. 타액이 섞이고, 혀를 얽는 행위가 갈급했다. 아래가 근질거리는 감각에 하반신을 밀착하니 허리에 손이 감겼다.
저녁 식사를 위한 만남은 빠르게 목적을 상실했다. 차려진 밥상은 서로가 되었고, 혀로 맛보는 것은 조리되지 않은 날 음식이었다. 육류이니 어쨌든 같지 않나, 하며 단여명은 안일하게 생각했다. 당장은 아래쪽의 허기가 더 급했다.
젖은 소리가 청각적인 흥분을 돋웠다. 뒷목에 손을 두르자 허리를 움켜쥔 손아귀의 힘이 강해졌다. 조잡한 유혹이 그의 상상력을 알맞게 자극한 것 같았다. 초장부터 행위가 거칠었다.
이런 분위기도 오랜만이었다. 확실히 서로 알고 지냈던 쪽이 구미가 당기는 면이 있었다.
“…술 먹었어?”
입술을 떼어낸 김선오가 숨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눈살을 찡그리는 모습에 흥분을 억누르려는 기색이 여실했다.
“단맛이 나는데.”
셔츠의 단추가 하나하나 풀렸다. 연푸른색 셔츠를 확 젖히자 매끈한 목덜미가 드러났다. 김선오는 곧장 부드러운 살결에 입술을 눌렀다.
“조금.”
단여명은 김선오의 뒷머리에 손을 넣었다. 두피를 간질이는 손길에 자극받았는지 김선오가 목덜미를 아프지 않게 물었다. 따끔거리는 감각이 기분 좋은 쾌락을 끌어냈다. 담배 연기 뱉듯이 뜨거운 숨을 느릿하게 쏟아내니 김선오가 시선을 맞췄다.
“술김에 이러는 거야?”
아래를 빳빳이 세운 와중에도 그게 중요한 모양이었다. 넌지시 묻는 것처럼 들렸지만, 그의 목소리에서 의구심이 느껴졌다.
하긴, 이런 경우까지는 예상하지 못했겠지. 저속한 상상을 했어도 당장 오늘 거사를 치를지 몰랐을 것이다. 모든 일엔 절차가 있는 법이니까.
“그 정도로 취하진 않았어.”
단여명은 그의 뺨을 잡고 입을 맞췄다. 말캉한 입술끼리 붙고, 입안이 묵직하게 차는 감각을 달게 느꼈다. 빳빳한 재질의 바지춤을 틀어잡자 불뚝한 모양이 생생하게 잡혔다. 여전히 위엄을 잃지 않은 부피감에 절로 입꼬리가 올라갔다.
행위를 보채듯 김선오가 아랫입술을 살며시 물어 당겼다. 단여명은 지분대던 손길을 바꿔 손가락을 세웠다. 지이익…. 바지 지퍼가 내려가는 금속음이 젖은 소리가 울리는 공간 사이를 비집었다.
깜깜한 어둠 속 시야가 어지럽게 흔들렸다. 거친 숨소리와 살이 부딪치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몰아치는 쾌락이 몸속의 수분을 앗아가는 것만 같았다.
“형, 읏…! 나… 이거 풀어줘.”
단여명이 손으로 눈가를 더듬었다. 눈을 가리고 있는 것은 김선오의 넥타이였다. 시야가 차단되어 모든 감각이 지나치게 선명히 느껴졌다. 저릿저릿한 쾌락이 발끝까지 퍼지는 와중에 앞이 보이지 않으니 이유 모를 초조감이 들었다.
“왜. 후우… 그만할까?”
김선오가 고개를 돌려 잡고 물었다. 입술을 뭉개듯 문지르기에 혀를 내어 그의 손가락을 핥았다. 고개를 한 번 끄덕이자 질척한 시선이 열린 입속을 주시하는 것이 느껴졌다. 곧 뭉툭한 무언가가 입안에 들어와 혓바닥을 짓눌렀다.
한바탕 입안을 휘젓던 손가락이 빠져나간 건 잠시 후였다. 입을 다물 새도 없이 커다란 손아귀에 발기한 성기가 잡혔다. 힘껏 쥐어짜 내는 악력에 뻣뻣하게 기립한 자지는 맥을 못 추고 금세 탁액을 쏟았다. 머리가 하얗게 비워지는 감각에 단여명은 허리를 떨며 사정했다.
시야에 빛이 들어온 것도 동시다발적이었다. 초점을 잡으려고 눈을 깜빡이는데 걸쭉한 체액이 얼굴에 들이부어졌다. 딴딴한 살코기 같은 것이 입술을 찌르기에 반사적으로 입을 벌렸다. 둥그런 귀두를 쭉 빨아들였다가 놓아주니 진한 수컷의 냄새가 비강을 적셨다.
“예쁘네.”
혼잣말에 가까운 중얼거림이 들렸다. 보지 않아도 김선오의 얼굴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입꼬리를 올리고 있겠지.
단여명은 눈을 감은 채 밭은 숨을 골랐다. 도합 세 번은 싼 것 같다. 최근에 비하면 원 없이 배출한 횟수였다. 마치 옛날 전성기 때로 돌아간 것처럼.
그런데 어딘가 모자랐다. 속 시원했고, 충분히 느끼긴 했는데, 기대치에 비해 그리 특별하지 않았다는 점이….
“…….”
머릿속에 떠오른 상념을 인식하자마자 허탈함이 몰아쳤다.
날마다 과식을 하면 위가 늘어난다고 했던가. 어쩌면 제 뒷구멍도 이젠 갱생의 여지가 없는 걸 수도 있겠다. 이럴 줄 알았으면 단계별로 크기를 늘려가 영생의 쾌락을 누렸을 텐데. 작은 청양고추부터 시작해 팔뚝만 한 바게트 사이즈로 차근차근 늘려갈걸.
김선오와 하는 섹스는 분명 좋았다. 그런데 부족하다는 감상을 채 버리지 못했다. 배 속이 더부룩할 정도로 꽉 차는 거근을 받고 싶다는 생각은 달라진 게 없었다. 손끝이 축 늘어질 정도로 지친 상태인데도 그런 생각이 들었다.
김선오와의 섹스는 다른 의미로 생각의 전환점이 되었다. 이젠 평범한 크기로 만족할 수 없다는, 뼈아픈 선고였다.
“…눈 따가워. 닦을 것 좀 줘.”
그래도 이게 어디냐. 급한 볼일은 해결한 것 같아 시원한 감은 있었다. 불분명한 시야 너머로 김선오가 타월을 건네는 모습이 보였다.
“씻을래?”
“지금은 이대로 있을래.”
단여명은 타월로 얼굴을 닦곤 이불을 당겼다. 그래도 싸긴 쌌다고 탈력감이 들긴 했다. 마치 몸살감기의 끝물 때처럼 불유쾌한 잔열감이 몸속을 휘돌았다. 가만히 눈을 감고 있으니 등 뒤에서 인기척이 났다. 허리에 팔목이 감기고, 불식간에 몸이 뒤쪽으로 끌려갔다.
“난 틀림없이 여기일 줄 알았는데.”
등 뒤로 몸을 밀착한 김선오가 가슴팍을 쿡 찔렀다. 그가 정사 내내 괴롭힌 탓에 자그마한 돌기는 약간 붉어진 채였다.
“그게 거짓말일 줄은…….”
픽, 하고 터진 숨이 뒷덜미를 간질였다. 다시 생각해도 어이가 없다는 듯 그는 헛웃음을 뱉었다.
“진짜 끝까지 없나 싶어서 아래까지 만져 봤잖아. 못 본 시간에 더 약아 빠진 것 같아.”
“피어싱이 있는 쪽이 좋았어?”
“글쎄, 섹시할 것 같긴 한데…….”
그건 그거대로 불쾌하네. 잠깐의 침묵 뒤 김선오가 한결 깊어진 목소리로 대답했다.
단여명은 내심 코웃음 쳤다. 넥타이로 눈을 가린 건 그새 까먹은 건가? 거짓말한 걸 꼬투리 잡아 본인의 사리사욕은 다 채웠으면서. 뒤늦게 불쾌할 건 또 뭔지.
그러거나 말거나 김선오는 이제 단여명의 유두를 쭉 잡아당기며 갖고 놀고 있었다. 손끝으로 돌기를 집더니 손톱을 세워 양쪽으로 쿡 찌르는 게 무슨 생각 중인지 빤히 보였다. 아파, 하고 싫은 소리를 하니 손을 떼고는 이번엔 머리 위에 턱을 얹었다.
“땀났는데….”
그러니 너무 붙지 말라는 소리였다. 그러나 김선오는 반항하듯 제 몸을 바짝 끌어안았다.
“나도 똑같은데, 뭐.”
“그래도.”
“이렇게 안아 주는 거 좋아했잖아.”
“…….”
그 말을 듣자 급격히 할 말이 없어졌다. 단여명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대략 1년 전의 일이었다. 가까웠던 관계만큼 서로에 대해 아는 것들이 많았다. 좋아하는 음식, 자주 보이던 습관, 애정이 묻어나는 스킨십. 사소하다 싶은 것들도 특별하게 추억된 시간이었다.
“네 마음대로 해.”
조금 찜찜해지는 마음을 뒤로하고 단여명은 대수롭지 않게 답했다. 몸을 뒤척여 편한 자세를 잡자 그가 팔꿈치로 상체를 지탱하고는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볼일 끝나니까 바로 너야?”
못내 서운하다는 목소리에 고개가 돌아갔다. 눈이 마주치자 스탠드 불빛에 어룽진 얼굴이 시원한 웃음을 보였다. 정사의 여운이 가시지 않아 발긋하게 물든 얼굴은 전과 다름없이 남성적인 선을 그리고 있었다.
“누가 형 소리만 하면 발정해서.”
뭐라 발끈할 줄 알았건만, 김선오는 어쩐지 대답이 없었다. 묘한 눈으로 이쪽을 훑더니 돌연 이불을 들추고 몸 위에 올라탔다. 단여명이 왜 이러냐는 눈으로 쳐다봐도 그는 시치미를 떼듯 능청스레 웃었다.
“발정뿐이야? 난 옛날에도 네가 형이라고 부르는 거 좋아했어.”
“…….”
“형, 하면 입 모양이 이렇게 된단 말이지.”
김선오가 손으로 단여명의 입술을 모아 잡았다. 입술 사이를 좁혔다가 넓히는 얼굴은 은연중 꽤나 집중한 듯 보였다. 많이 빨개졌네, 하며 입술 안쪽의 점막을 살짝 까뒤집어 보기도 했다. 까딱 잘못하면 다시 키스할 것만 같은 분위기에 단여명은 목에 힘을 빼고 말했다.
“더 못 해.”
“안 해.”
바람 빠지는 웃음을 흘린 김선오가 입술에서 손을 거뒀다. 그리고 있는 힘껏 단여명의 몸을 끌어안았다. 서로의 상체가 맞닿고, 아래에 깔린 몸에 체중이 실렸다.
“무거워, 김선오. …야.”
단여명은 그의 어깨를 탁탁 두드렸다. 안 그래도 힘든데 진짜 귀찮게 하네. 차마 밀어내진 못하고, 그런 목소리로 성가시다는 티를 냈다.
“조금 있다가 같이 씻자. 지금은 좀 더 이렇게 있고.”
그러거나 말거나 김선오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꾹 밀어도 꼼짝하지 않자 단여명은 빠르게 포기했다. 제가 얌전하게 구니 김선오는 큭큭대며 숨죽인 웃음을 터트렸다. 상체를 한껏 밀착한 채라 그가 웃으면서 생기는 몸의 떨림이 그대로 전해졌다.
***
단여명의 외박이 잦아졌다. 김선오가 야근하는 날을 제외하고, 두 사람은 매일같이 만남을 가졌다. 식사하거나 때론 영화를 함께 보기도 했지만, 마지막 목적지만큼은 아무도 드나들 수 없는 밀폐된 공간이 되었다. 그곳은 김선오의 집일 때도 있었고, 밤늦게 운영하는 모텔 방이 되기도 했다.
밤새 방아질하고 날이 밝으면 단여명은 집으로 돌아갔다. 김선오는 더 자다 가도 된다며 말하곤 했지만, 단여명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도 넘지 말아야 할 선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이 이상 접점을 늘릴 수 없었다.
목요일 아침 8시, 오늘도 어김없이 집 앞에 다다른 단여명은 담배 한 개비를 꺼내 물었다. 김선오가 출근할 시간에 함께 밖을 나서다 보니 얼결에 밤낮이 바뀌었다.
저마다 곁을 지나치는 사람들은 바쁜 모습이었다. 부산스러운 아침 풍경을 바라보며 담배 연기를 머금은 단여명은 마저 시선을 내렸다.
실리콘 기둥에 붙은 연갈색의 힘줄이 울퉁불퉁했다. 굵기는 어림잡아 제 손목 두께만 했다. 상세 사이즈를 살피니 길이가 15cm나 되었다.
“…….”
아무리 눈에 뵈는 게 없다고 해도… 무생물은 좀 그렇지. 담배 연기를 한숨처럼 내뿜은 단여명은 핸드폰 화면의 전원을 껐다. 짐승 새끼도 아니고, 제가 생각해도 볼썽사나웠다.
단여명은 꿩 대신 닭이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 마음이라는 게 어디 자기 뜻대로 되던가. 김선오와 만남을 이어 가는 것은 불가항력이었다. 이래서 습관이라는 게 참 무서운 거였다. 한동안 잃었던 안온감을 얻으니 어수선했던 마음이 진정되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뒤로 쾌락을 처음 맛봤을 때처럼 생경한 자극은 느끼지 못했다. 더한 것을 갈망하는 마음은 여태 제자리였다.
밑 빠진 항아리에 물을 붓는 것과 같았다. 맑은 물이 솟구치는 호스로 그 안을 한바탕 적셔 주면 철철 넘쳐흐를 텐데. 호스는커녕, 물을 부어 주는 바가지가 강아지 물그릇만 하니 부족함을 느끼는 게 당연했다.
‘…진탕 취하고 싶네.’
단여명은 몇 입 대지 않은 담배를 땅바닥에 튕기듯 버렸다. 색에 미쳐 아침부터 술이 고프다니. 제정신이 아니었다. 다리를 밖으로 펼쳤다, 허리를 반으로 접었다 해서 삭신이 쑤시는 와중인데도 그랬다.
한창때인 10대는 지난 지 오래인데. 어디서 끓어오르는지 모를 성욕이었다. 나이를 더 먹으면 체력이 부족해서 달라지려나. 사실 당장의 욕구는 매일 해소하고 있어 허기에 비쩍 말라가는 상태는 아니었다. 그저 마음 한편에 똬리를 튼 허망함이 시시때때로 짜증을 유발했다.
선택지는 두 가지였다. 김선오와 어울리며 이대로 욕망이 가라앉기를 바라거나, 정말 비행기 티켓을 끊거나.
“……?”
집으로 들어온 단여명은 신발을 벗다가 멈칫했다. 평상시와 다르게 집 안의 풍경이 어수선했던 탓이었다.
현관문 앞에는 옷가지가 널려 있었다. 하얀색 양말, 검은색 트레이닝 바지, 회색 후드티. 옷의 행렬이 끝난 곳은 반쯤 열린 방문 앞이었다.
‘술버릇은 그리 곱진 않나 보네.’
옷에 술을 엎지른 건지, 인사불성이 되도록 술을 퍼마신 건지. 집 안에서 술 냄새가 진동했다. 방금까지 술을 먹고 싶다고 생각했건만, 냄새를 맡으니 되레 입맛이 싹 달아날 정도였다.
단여명은 옷을 하나하나 주워서 빨래통에 넣었다. 신입생 환영회다, 친목 도모회다 하며 한참 술을 퍼마실 시기긴 했다. 그래도 흔적을 보아하니 집에 곱게 들어오긴 한 모양이다.
뒷정리를 마친 단여명은 잠이나 더 잘까 생각하며 제 방으로 향했다. 별생각 없이 문고리를 잡은 순간이었다. 시선이 이끌리듯 반쯤 열린 문 틈새로 눈길이 향했다. 방 안은 사람이 없는 것처럼 잠잠했다.
권호영은 꽤 성실한 녀석이었다. 주 5일 내내 오전 수업을 들었고, 주말에도 책가방을 싸 들고 밖으로 나갔다. 어쨌거나 그가 아침마다 어딜 간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선잠이 든 상태에서 열렸다가 닫히는 문소리를 매차 들었다.
단여명은 권호영의 방문 앞으로 다가갔다. 며칠 전에 연락을 주고받은 엄마는 권호영과 어떻게 지내는지 궁금해했다. 단여명은 사이좋게 지내고 있다며 둘러대곤 속으로 생각했다. 어떻게 지내긴요. 거의 남처럼 지내지.
괜한 오지랖인가 싶어 발걸음이 느려졌다. 시계를 보니 시간은 오전 8시 40분경을 향해가고 있었다.
…그래도 같이 사는 사이에 깨워줄 순 있지. 성격을 봤을 때 늦장을 부리는 타입은 아닌 것 같던데. 어젯밤에 과음해 날이 밝은 줄도 모르고 늦잠을 자는 것 같았다.
똑똑. 잠시 고민하던 단여명은 방문을 두 번 노크했다. 요즘 밖을 나다니느라 그에게 무신경했다. 적어도 식사는 종종 같이하곤 했는데, 근래에는 통 얼굴을 마주칠 시간이 나지 않았다. 명색이 집주인인데 딴 곳에 정신이 팔려 집안 관리를 소홀히 했다.
방 안에선 아무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잠결에 뒤척이는 소리나, 미세한 숨소리조차도. 혹시 집에 없는 건가? 헨젤과 그레텔 속에 나오는 빵가루처럼 옷을 흘려 놨길래 집에 있는 줄 알았는데.
단여명은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안에 한 발짝 들어서자마자 독한 알코올 냄새가 코를 찔렀다. 미약하게 인상을 찌푸린 단여명은 곧이어 눈을 휘둥그레 떴다. 주위를 둘러볼 필요 없이 정면에 한 사람이 시야에 떡하니 들어찼다. 흐트러진 자세로 침대에 누워 있는 살빛의 남자가.
당황해 눈동자가 흔들리는 와중 시선이 꽂히다시피 한 것이 있었다. 탄탄한 허벅지 사이에 위용을 과시하듯 불뚝 선 무언가가.
“…….”
달칵.
한참의 정적이 지나고, 단여명은 조용히 방문을 닫고 나왔다. 단잠에 빠진 남자의 어깨를 흔들지도, 하다못해 목소리를 내지도 못했다. 홀린 듯 거실로 걸어가 소파에 걸터앉았다. 침착하자고 되뇌어 봤지만, 심장은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얼굴을 본 것 같은데….’
흐릿한 이목구비만 잡힐 뿐 어땠는지 생각나지 않았다. 단여명의 머릿속을 꽉 채운 것은 그동안 호기심을 품었던 얼굴이 아니었다. 그것보다 더욱 충격적인 광경을 목도해 강제로 잊혔다는 사실이 더 정확했다.
‘저거.’
크다. 백 프로야.
그동안 숙달시킨 감이 말해줬다. 저건 이백 퍼센트의 확률로 크다고.
검은색 브리프 속, 무섭도록 텐트를 친 물건은 외국 포르노에서나 접했던 크기였다. 당장이라도 얇은 천을 찢고 나올 듯 팽창해 그를 억지로 눌러 잡은 속옷이 가여워 보일 정도였다. 찢어질 듯 늘어난 옷감 아래로는 두툼한 앞머리의 윤곽이 잡혔다. 너무 노골적이고 세세하게 드러나서 보는 이의 낯이 화끈거릴 만큼.
‘혼혈이라고….’
혼혈이면 한국인보다 크겠지? 그럼 얼마나? 김선오보다 클까? 아침에 보았던 그 장난감보다 더?
‘아니, 쟤한테 이런 생각을 하는 것 자체가….’
천수진이 말한 대로 쓰레기가 맞는 것 같은데…….
단여명은 급격히 혼란스러워지는 마음을 느꼈다. 마른세수하듯 얼굴을 쓸어 봐도 범상치 않은 크기가 머릿속에서 씻겨 내려가지 않았다.
고작 스무 살. 아무리 성인이라도 애티를 벗지 못할 나이다. 민증에 잉크도 안 마른 어린애한테 무슨 망측한 생각을. 먹구름처럼 몰려드는 죄책감에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런 와중에도 넋이 나간 얼굴은 온통 물음표를 띄우고 있었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그렇게 얼마간 깊은 사색에 잠긴 무렵, 우당탕하며 큰 소리가 났다. 쿵! 방문을 박차고 나온 권호영은 단여명을 보고도 아는 체하지 않았다. 아니, 보았는지 어쨌는지 단여명도 알 수 없었다. 그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욕실로 향했으니까.
떨어지는 물소리가 들렸다. 역시나 권호영은 늦잠을 잔 사람처럼 준비에 서둘렀다. 단여명은 멍한 정신을 추스르지 못하고 눈만 깜빡였다. 권호영이 물기가 밴 머리를 대충 털고 나올 때까지 주변의 소리만 귀에 담았다.
“…….”
어깨에 크로스백을 걸친 권호영은 그제야 멀뚱히 앉아 있던 단여명을 인식했다. 그는 정신이 없는 도중에도 의아한 기색을 보였다. 이 시간에 깨어 있을 줄 몰랐다는 눈치였다.
아까까지만 해도 시원하게 넘어갔던 앞머리는 길게 드리워진 후였다. 여느 때처럼 우중충한 차림새로 고개를 까딱한 권호영은 단여명의 옆을 지나쳤다.
“늦은 것 같은데.”
불식간에 목소리가 입 밖으로 튀어 나갔다. 스스로도 의식하지 못한 순간이었다. 제가 말하고도 제가 놀라서 단여명은 목을 움츠렸다. 이미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순 없었다.
“…태워다 줄까?”
그러니까…… 이건 단순한 호의였다. 아무런 사심이 없는, 순수한 호의. 절대 자신이 그의 어딘가에 혹해서가 아니라 단순히 연장자로서 베푸는 친절이었다.
“…….”
일자로 닫힌 입술이 완고해 보였다. 싫다고 거절해도 이상하지 않을 모습이었다.
며칠간 코빼기도 안 비치더니 갑자기 친한 척한다고 생각하려나. 괜한 말을 한 것 같았지만, 웃기게 들리진 않을 것이다. 친하지 않은 사이에도 충분히 건넬 수 있는 의례적인 말이었으니까.
그런데도 그가 침묵을 지키니 공연히 마음이 타들어 갔다. 진짜 웃기게 들렸나 싶고. 단여명은 마른침을 삼키고 스스로에게 변명하듯 괜한 말을 내붙였다.
“아니, 버스 타고 가는 것보단 자가용이…….”
“그럼 부탁드릴게요.”
‘더 빠를 테니까…’라는 뒷말은 불퉁한 목소리에 먹혀들었다.
무뚝뚝한 얼굴이 어울리지 않는 말을 전했다. 단여명은 얼떨떨한 낯으로 눈을 깜빡였다. …솔직히 한 번은 거절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운 마음에 그를 멀뚱히 쳐다보는데, 어서 나오라는 것처럼 권호영이 몸을 돌려 섰다.
생각을 정리할 틈은 없었다. 급해 보이는 권호영의 발놀림에 단여명도 따라 서둘러 움직였다. 서랍장을 뒤지는 손은 잠시 주춤했지만, 종국엔 그 안에 있던 차 키를 그러쥐었다.
톡톡. 손가락으로 핸들을 두드리는 소리가 적막한 공간의 유일한 소음이었다. 단여명은 빨간불이 들어온 신호등에 시선을 고정했다. 잠시라도 고개를 돌리면 옆자리에 앉은 남자의 바지춤을 면밀히 살필 것만 같았던 게 그 이유였다. 앞 차체에 범퍼를 들이박지 않으려면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앞만 본다고 해도 곁눈으로 들어오는 게 있었다. 생각보다 몸이 좋은 건 이미 알고 있었다. 포댓자루 같은 옷을 걸쳐놔도 타고난 몸 선은 두드러지기 마련이니까.
편한 자세를 잡고 있는 저 허벅지가 제 몸에 올라타면 어떤 모양으로 벌어질지. 허릿심으로 밀려 올라가는 제 몸을 고정시킬 저 팔뚝이 얼마나 단단할지. 가방 위에 얌전히 올려둔 저 손이…….
망할.
“조심히 다녀와.”
두 사람을 실은 차는 한국 대학교 경영학관 건물 앞에서 멈췄다. 9시 정각이 다 돼가는 시간이었다. 권호영은 바퀴가 멈춰 선 즉시 안전벨트를 풀었다.
“네.”
탁. 짧은 대답과 함께 차 문이 닫혔다. 권호영은 빠른 걸음으로 시야에서 멀어졌다. 뛰듯이 걷는 폼이 영락없이 강의에 지각한 대학생이었다.
‘미친 게 아니고서야.’
단여명은 권호영의 모습이 사라진 즉시 웃음기를 지웠다. 부르릉, 급출발하는 시동 소리는 차가 정차한 때와 달리 신경질적이었다. 차를 모는 주인의 얼굴도 군데군데 금이 가 있었다.
다시 집으로 향하려던 단여명은 급하게 차선을 변경했다. 뒤차가 빵빵대며 클랙슨을 울렸지만, 눈길도 주지 않고 내비게이션에 손을 올렸다. 주소록에 저장된 이름을 찾아 손가락을 눌렀다. 긴 신호음 끝에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사장님, 저예요.”
단여명은 룸미러를 확인하곤 핸들을 돌렸다. 새끼가 더럽게 빵빵거리네. 험악한 생각이 티라도 날까, 고저 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오늘 가게 몇 시에 오픈하시죠?”
***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을 참을 길이 없다. 다만 주변을 의식해 조용히 내뱉는 것이 일개미의 덕목이었다. 어젯밤에 죽자고 퍼마신 술이 속에서 탈이라도 일으켰는지 가벼운 체기가 느껴졌다.
사실 몸이 안 좋더라도 이렇게 태평하게 있을 때가 아니었다. 예측건대, 교수님은 본인의 소중한 제자들을 압살시킬 계략을 꾸미는 중일 것이다. 학기 초부터 밀어닥치는 과제량이 산더미 같았다.
어디 과제뿐이랴. 자격증과 대외활동, 날마다 잡히는 술 약속에 갈수록 피부가 푸석해졌다. 아침에 확인한 거울 속의 얼굴이 일개미의 마음을 더욱 서글프게 했다.
한숨만 푹푹 내쉬고 있는 그의 이름은 윤재윤. 올해 막 군대를 제대한 복학생이었다.
‘오후 4시…….’
오픈 1시간 전, 윤재윤은 여전한 자세로 하염없이 가게 문만 바라보았다. 약속 시간이 가까워졌건만, 기다리는 사람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서울 한복판에 위치한 어덜트 샵은 넓은 규모를 자랑했다. 성인용품점 주제에 3층 높이였고, 외관도 깔끔해 지나가는 사람마다 호기심을 보였다.
언뜻 보면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 같았고, 예쁘게 차려놓은 커피숍 같기도 했다. 어두운 밤이 되면 스카시 간판이 은은한 빛을 발했다. 은밀한 거래를 위한 VIP룸까지 마련돼 있으니 얼마나 시설이 좋은지 두말하면 잔소리였다.
윤재윤이 이곳, ‘플로스 페리(Flos Ferri)’에서 일하는 이유는 최저보다 높은 시급, 그리고 자취방에서 도보 10분 거리라는 메리트 때문이었다. 그 때문에 쓰린 속을 부여잡고 부랴부랴 출근했지만.
그렇게 얼마나 시간을 죽였을까. 큰 시곗바늘이 정확히 숫자 4에 맞물린 순간, 움직일 것 같지 않던 가게 문이 열렸다.
“어서 오세요. 즐거움을 전하는 플로스 페리입니다.”
윤재윤은 문을 열고 들어온 손님에게 깍듯이 인사했다. 사장님의 친구분이라는 게 저 사람인 것 같았다. ‘CLOSE’ 팻말이 걸려 있는 가게 문을 그는 언질이라도 들은 양 자연스레 밀고 들어왔다.
“네, 안녕하세요.”
인상이 차분한 남자였다. 그는 어두운 회색 재킷과 그와 같은 색의 슬림핏 바지를 입고 있었다. 가는 발목 아래로 검은색 구두가 보였다. 세팅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흘러내리도록 둔 머리가 자칫 딱딱하게 보일 수 있는 분위기를 부드럽게 완화했다.
“사장님은 아직 안 오셨나 보네요.”
저런 걸 하객 룩이라고 부르던가. 성인용품점이 아니라 당장 결혼식에 참석해도 위화감이 없을 차림새였다. 넥타이만 매지 않았지 뒷모습만 본다면 강남에 직장을 둔 회사원으로 착각할 듯싶었다.
“차가 밀린다고 하네요. 천천히 둘러보고 계시죠. 곧 오실 겁니다.”
윤재윤은 비즈니스 미소를 장착했다. ‘그렇군요’라고 답한 남자가 그린 듯한 웃음을 내보였다. 그리고 느지막이 등을 돌려 진열된 상품 쪽으로 걸어갔다. 걸음걸이마저 군더더기 없는 게 늘씬한 뒤태와 맞아떨어졌다.
얼마간 성의 없이 물건을 둘러보던 남자는 곧 한자리에 멈춰 섰다. 가게 정중앙에 전시된 바이브레이터의 앞이었다.
독특한 모양 때문에 가끔 저렇게 흥미를 보이는 손님들이 있었다. 듣기로는 무슨 괴물 영화에 영감을 받아서 제작됐다고 하던데. 영화 제목까지는 굳이 떠올리기 싫었다.
상상 속 괴물의 성기를 본떠 만든 물건은 이름값을 톡톡히 했다. 푸르죽죽한 기둥에 울룩불룩한 핏줄이 돋친 괴기스러운 형체였다. 건장한 남성의 주먹만 한 귀두는 쾌락을 이끌어내는 도구가 아니라 누군가를 살해할 흉기로 보였다. 이곳에서 두 달째 일하는 중인 윤재윤도 가끔가다 인상을 찌푸릴 정도였다.
“…….”
그런데 어째서인지 남자는 물건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미술관에 걸린 예술 작품을 감상하듯 그 주변을 찬찬히 맴돌기도 했다. 겉모습이 그럴듯해서 브랜드 관에서 시계를 고르는 도련님처럼 품격 있어 보이기까지 했다. 참으로 쓸데없이.
“이 상품을 고려하시는 중인가요?”
멀리서 그를 지켜보던 윤재윤은 남자에게 접근했다. 가만히 놀기엔 눈치가 보였던 게 그 이유였다. 사장님이 올 때까지 손님의 말벗이 되어 주는 것도 직원이 할 일 중 하나였다.
“어떨 것 같나요?”
남자는 되레 자신에게 물음을 던졌다. 은근한 눈빛 속에 언뜻 짓궂은 기색이 담겨 있었다.
윤재윤은 입꼬리를 올린 채 생각했다. 어떻긴 뭘 어때. 저거를 넣으면… 아무래도 찢어지겠지. 애인에게 선물했다가는 귀싸대기를 맞고 이별 통보를 받을지도 모르고.
“혹시 전시 목적으로 구매하시려는 건가요?”
“아니요.”
“그렇다면 좀 더 작은 사이즈가 적합할 것 같은데. 어떠실까요?”
남자는 속을 알 수 없는 웃음을 보였다. 멀리서 볼 때부터 남다르다 싶었는데, 걸친 옷뿐만이 아니라 얼굴도 고급지게 생겼다. 아니, 고급스럽기보다는 청순한 미인상인가. 윤재윤은 잠시간 씁쓸해지는 기분을 느꼈다. 역시나 세상은 불공평했다.
“강한 자극을 원해서요.”
남자가 나직한 음성으로 대꾸했다. ‘그러시군요.’ 하고 살갑게 맞장구치며 윤재윤은 표정 관리에 힘썼다. 아무래도 그는 자신을 놀리는 중인 것 같았다. 그도 아니면 애인 되는 사람의 그릇이 태평양처럼 넓거나.
아무리 그래도 이건 그쪽 팔목보다 두꺼운 것 같은데…. 생긴 것도 꺼림칙하게 생기지 않았나. 살인 청부 업체를 잘못 찾은 게 아니라면 이걸 고르게 둬선 안 됐다.
“그렇다면 이쪽은 어떠실까요? 자극에 무딘 손님들이 자주 찾으시는 상품입니다.”
다른 물건으로 안내하려고 하자 남자는 웃는 얼굴로 단호히 말했다.
“아니요. 애널용을 찾고 있어서요.”
“…….”
그는 노골적인 단어를 언급하면서도 망설이는 낌새가 없었다. 윤재윤은 틈을 보이고 벌어지려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지금 저 입에서 ‘애널’이라는 소리가 나온 건가? 세상 청초하게 생겨서 그런 말이라면 질색할 것 같은데.
아니, 그보다… 여자가 아니고 남자 애인? 잘 되짚어 보니 제가 편협한 생각을 한 것 같았다. 요즘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초보자용이 아니어도 괜찮고요.”
…그게 아니면 혹시 본인이 사용할 목적인가?
컨디션이 좋지 않아서인지, 아니면 농담 따먹기식으로 던져지는 스무고개에 몰입한 건지. 아무튼 정신을 놓고 있긴 했나 보다. 고객을 응대하는 직원으로서 가장 기본적인 것을 묻지 않았다.
상품을 사용하실 분이 누구인지 질문하려던 순간이었다. 인기척을 느낀 남자가 뒤를 돌아보았다.
“바쁘신데 굳이 오실 필요 없다니까요.”
높은 구두 굽 소리가 실내를 울렸다. 풍성한 곱슬머리에 새빨간 립스틱을 바른 사장은 여느 때처럼 화려한 옷차림이었다. 여유로운 미소에선 부잣집 외동딸처럼 귀티가 흘렀다. 그러나 수틀리면 단칼에 표정을 바꿀 고압적인 사람이란 걸 윤재윤은 이미 알고 있었다.
“어떻게 안 와 봐. 올려 준 매출이 얼마인데.”
사장이 뒤쪽으로 눈짓했다. 자리를 비켜 달라는 사인에 윤재윤은 걸음을 물렀다.
“여명 씨라면 버선발로 나가 반겨야지.”
사장이 환한 미소를 보였다. 친한 사람에게나 보일 법한 웃음이었다. 윤재윤은 뒷짐을 진 채 두 사람을 지켜봤다.
“그래서 이번엔 또 뭐가 문제인데?”
“문제는요. 오랜만에 물건 구경할 겸 사장님 생각나서 들렀어요.”
남자가 손에 들고 있던 쇼핑백을 사장에게 건넸다. 케이크 모양이 그려진 걸로 보아 쇼핑백 안에 든 건 디저트 종류 같았다.
“어머, 이런 거 사 올 필요 없다니까.”
그리 말한 것이 무색하게도 사장의 얼굴에 완연한 꽃이 피었다. 쇼핑백 안을 한번 들여다보더니 얼굴에 내건 꽃이 더욱 활짝 만개했다.
“입바른 소리 하지 말고 사실대로 불지? 그런 것치곤 너무 이른 아침에 연락했잖아. 그 입은 술이 들어가야 열리지?”
그대로 짧은 대화가 오갔다. 얘기를 나누는 두 사람의 앞엔 괴물의 생식기가 전시돼 있었다. 윤재윤이 보기엔 퍽 괴란한 풍경이었지만, 두 사람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정말인데….”
선물을 받아 들고도 사장의 추궁은 끊이지 않았다. 물 흐르듯 대화 주제를 바꿔도 원점으로 돌아가니 남자는 곤란한 기색을 띠었다.
“제가 뭔 일 있을 때만 연락드리진 않잖아요. 봐주세요.”
자못 서운하다는 표정은 보는 사람을 의식해 꾸며낸 것처럼 보였다. 하나 인위적이지도, 그렇다고 과장돼 보이지도 않았다. 그저 원래 자기의 것이라는 듯 남자와 잘 어우러졌다.
잠깐 본 것만으로도 사장이 왜 그를 좋아하는지 알 것 같았다. 나긋한 목소리와 차분한 말씨는 누구라도 호감을 느낄 법했다.
그 뒤로 두 사람은 긴 시간 동안 대화를 주고받았다. 꽤나 구체적이고 적나라한 얘기가 남자의 입에서 흘러나왔을 때 윤재윤은 잠깐 제 귀를 의심했다. 진짜 생긴 거랑 따로 노시네. 그런 생각 때문일까, 계속 남자에게 눈길이 갔다.
“재윤 씨?”
끝내 뒤를 돌아본 사람은 남자가 아닌 사장이었다. 턱을 까딱하는 모양새가 후딱 튀어가서 손님을 모시라는 뜻이었다. 윤재윤은 날쌔게 움직였다.
“쇼핑백에 담아 드릴까요?”
카운터에 놓인 물건은 갖가지였다. 무선조종이 되는 로터, 매끄러운 곡선이 들어간 아네로스, 열쇠가 달린 정조대. 콘돔을 골라도 돌기가 돋친 것을 택했다. 강한 자극을 원한다더니 어디로 보나 보통 성벽은 아닌 것 같았다.
“예쁘게 부탁해요. 다른 사람한테 선물할 거라.”
하얀 손가락이 카드를 내밀었다. 윤재윤은 서비스까지 꼼꼼하게 챙겨 넣은 뒤 박스에 리본을 묶었다.
“고마워요.”
쇼핑백을 받아 든 남자가 생긋 눈웃음을 지었다. 눈이 마주친 건 찰나였다. 사장과 인사를 나눈 그는 이어 가게 밖으로 사라졌다. 딸랑, 문이 닫히고 내부엔 조용한 클래식 음악만이 흘렀다.
‘계속 보니까 묘하게 생긴 것 같기도 하고….’
선물용이라고 말했으니 역시 괴롭히는 쪽이려나. 어쨌거나 가게의 손님이었고, 자신과 관련 없는 사람이었다. 쓸데없는 잡념이라며 고개를 돌린 순간 사장과 눈이 정통으로 마주쳤다. 호랑이 같은 눈이 이쪽을 똑바로 응시했다. 윤재윤은 지레 놀라 어깨를 살짝 움츠렸다.
“재윤 씨, 일찍 나온 거 아깝지 않아?”
청소나 하고 가지? 치켜 올라간 눈매가 반달 모양으로 접혔다. 어색하게 웃으며 마른걸레를 집자 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잘하고 있다는 칭찬이었다.
그에 윤재윤은 비로소 어젯밤의 피로가 한꺼번에 몰아치는 것을 느꼈다. 오늘도 서글픈 일개미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
마지막 장에 온점을 찍고, 끝없는 퇴고의 늪에서 헤어나면 작가의 비수기가 시작됐다. 한 작품에 돌입하면 쉴 틈 없이 작업에 매진하곤 했기에 단여명은 적어도 3개월의 휴식기를 가졌다.
다른 작가들은 영감을 얻는다고 부지런히 답사를 다니거나 책을 들여다본다고 하던데, 그게 단여명의 경우는 아니었다. 활활 타오르던 장작에 재만 남듯이 모든 기력이 소진되는 것을 느꼈다. 홀연히 쌓인 잿더미를 빗자루질해 주는 것은 남자의 양물이었다. 그렇게 어언 몇 년간은 별 탈 없이 지냈다.
‘…그게 오늘로써 한 달째던가.’
성 기능에 문제가 생겨 꿈에 그리는 남성기를 찾아다닌 게. 단여명은 침대에 늘어져 멍하니 생각했다. 눈을 감자 가게에 두고 온 모조 성기가 눈앞에 아른거렸다.
괴물의 생식기를 모티브로 제작했다는 바이브레이터는 듣던 대로 기백이 넘쳤다. 물건의 곁을 서성이는 자신을 직원은 수상쩍게 여겼다. 구매하고 싶다는 의사를 비치자 ‘이 새끼 진심인가’ 하는 눈빛을 보내기도 했다.
남들이면 진저리 칠 물건을 앞에 두고 단여명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저걸 가지면 잡생각이 사라질까. 앞머리를 넣는 순간 제 역량을 과신했다고 생각을 고쳐먹을 수도 있겠지. 벼랑 끝에 내몰린 이의 심정이 과연 이럴 것이라고 단언해 본다.
그래, 이건 제정신이 아니다. 천수진한테 그렇게 아니라고 잡아뗄 땐 언제고, 감히 엄마 친구 아드님께 흑심을 품다니.
인정한다. 목석같은 권호영에게 흥미가 생겼다. 정확히는 그의 아랫도리 사정에 관심이 갔다. 얼굴이고 뭐고 천 밖으로 윤곽이 잡히던 물건이 어떻게 생겼을지 궁금해서 돌아버릴 지경이다.
기왕이면 컸으면 좋겠고, 크다 못해 거대했으면 좋겠다. 사실 이건 거의 확신에 가까웠다. 그동안 잡아먹은 남자가 몇 명인데. 충분히 예측할 수 있는 범위였다.
여기까진 그럴 수 있다. 저는 글러 먹다 못해 재기 불가한 짐승 새끼였으니까. 망상까지는 그럴 수 있다고 자기 위로 할 수 있었다. 자고로 글쟁이란 상상력을 빼면 시체인 법이니까.
그런데 그를 옆자리에 앉혀두고 허벅지가 꼬이는 건 비정상적이지 않은가.
조용한 차내는 작은 소리도 유난스럽게 들렸다. 규칙적인 숨소리를 뱉으며 차분히 오르내리는 가슴팍이 의식됐다. 뜨거운 숨결을 고르면 얼마나 거칠게 펌프질할지, 단단한 가슴팍에 얼굴을 묻으면 심장이 어떻게 쿵쿵대며 박동할지. 난잡한 방향으로 생각이 틀어질수록 아랫구멍이 근질거리다 못해 따끔거렸다.
망상의 희생양이 된 권호영은 아마 까마득히 모를 사실이었다. 우연히 보게 된 것도 실례인데, 그걸 호시탐탐 노리다니. 심지어 그는 엄마의 지인이었다. 거기다 6살이나 어린애이지 않은가. 아무리 색을 밝히는 미친 작자여도 상도덕은 지켜야지. 발정기 때 짐승도 아니고, 인간으로 태어났으면 최소한의 도리는….
“…….”
자책을 이어 가던 단여명은 방구석에 처박아 둔 쇼핑백을 보았다. 하얀 백화점 쇼핑백 사이에 연분홍빛 쇼핑백이 삐져나와 있었다. 아침부터 머리를 비우고자 오랜만에 백화점을 돌았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으로 들른 곳은 평소 자주 찾던 어덜트 샵이었다.
오늘 밤에 만나서 전해 주든가 해야겠다. 김선오의 취향에 맞춰 물건을 사들였으니 분명 기뻐할 것이다. 단기간으로 들인 주인님께 달려가 눈물 콧물 쏙 빠지게 혼나면 잡념이 사라질 것이다. 가만히 있던 김선오에게 떡고물이 떨어진 격이었다.
단여명은 그쯤 몸을 일으켰다. 김선오가 퇴근할 때까지 시간이나 죽일 겸 거실로 나와 소파에 드러누웠다. TV를 틀자 조용했던 집 안에 활기찬 소리가 울려 퍼졌다.
채널을 돌리다가 멈추게 된 프로는 한때 유명세를 탔던 좀비 영화였다. 창문을 깨부수고, 인간들의 머리통도 같이 깨부수는 잔인한 내용이었다. 노랗게 뜬 눈알하며 밖으로 쏟아진 장기가 꽤 현실감 넘쳤다. 여자 주인공은 좀비 떼를 피해 안색이 퍼레져라 도망치고 있었다.
단여명은 무료한 눈으로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다음엔 저런 유의 작품이나 써볼까. 인간들의 감정이 주가 아닌, 스릴 넘치는 액션 영화 같은 거. 세세한 감정선을 표현하려면 작가 본인이 느끼는 것이 있어야 했다. 연애든, 섹스든 흥미가 떨어진 이유가 장르를 바꾸라는 신의 뜻일 수도.
괜한 생각에 시시각각 바뀌는 화면을 예의주시하는데, 눈치 없이 졸음이 쏟아졌다. 벌건 혈흔이 스크린을 물들일 때쯤 눈앞이 가물거리는 것을 느꼈다. 의식이 흐려진 건 순식간이었다.
마치 꿈의 조각을 훔쳐보듯 여러 장면이 머릿속을 스쳤다. 어디선가 보았던 풍경과 한 번도 보지 못했던 장면이 반죽처럼 뭉개지기를 반복했다.
잠을 자는 중에도 TV 소리가 거슬린다는 생각이 떨쳐지지 않았다. 몸은 수마에 덮쳐지고 정신은 흐릿하게 깨어 있는 반수면 상태였다. 눈을 떠 TV를 끄고 싶었으나, 졸음에 취해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그로부터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일순간 시끄럽던 소음이 일제히 뚝 끊겼다. 걸음을 옮기며 바지 끝자락이 스치는 소리, 조용히 방문이 열고 닫히는 소리. 작은 인기척 소리가 수중을 헤엄치던 의식을 건져 올렸다.
눈을 떠 보니 TV의 전원은 나가 있었다. 발치까지 길게 들이비친 붉은 햇살이 저녁에 가까워진 시각을 알렸다. 문제의 인기척은 손님방 쪽에서 나고 있었다.
…3시간 정도 잤나. 요즘 생활 리듬을 갑작스럽게 바꾸어 몸이 적응을 마치지 못했나 보다. 천천히 눈을 깜빡이던 단여명은 번뜩 한 사람을 떠올렸다.
[김선오: 오늘 만나기 어려울 것 같아]
[김선오: 신입이 문제 일으켜서 뒷수습하는 중]
휴대폰 화면을 켜자마자 알림 창에 뜬 메시지의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
[김선오: 형 밥도 못 먹었어ㅠ^ㅠ]
…저 삐죽한 건 입술 모양을 표현한 건가. 만나지 않았던 시간에 애교가 많이 늘었다.
인간의 성격은 크든 작든 주변 사람의 영향을 받는다. 전 애인의 영향을 받은 건지, 아니면 나이를 먹은 탓인지 김선오는 전에 비해 능청맞은 구석을 보였다.
대강 답장해 주고, 단여명은 다시 눈을 감았다. 그럼 오늘 밤은 얌전히 자야겠네. 밖에 나가 봤자 김선오만한 자지를 찾기도 어려웠으니까. 어차피 내일이면 질리도록 쏟아낼 거, 정력을 비축해 놓는다고 생각하면 하루쯤은 인내할 수 있었다.
선잠을 잔 탓인지 뒤늦게 머리가 지끈댔다. 일에 미쳐 잠을 자지 못했을 때도 골이 울려대더니 체력 소모가 없는 지금은 뭐가 불만이라고. 제 몸뚱이지만 참 극성맞았다. 관자놀이를 문지르던 단여명은 그쯤 몸을 움직이고자 상체를 세웠다.
“…….”
아니, 세우려고 했다. 돌연 손님방의 문이 열리지 않았더라면 아마 그랬을 것이다. 단여명은 허공에 띄워놨던 뒤통수를 원상 복구시켰다. 눈을 꾹 감자 속눈썹이 파르르 경련했다.
‘내가 왜 자는 척을….’
의문을 가질 필요도 없이 곧장 정답이 떠올랐다. 왜긴 왜겠어. 괜히 찔려서 혼자 난리 떠는 거지.
괴물의 생식기를 보면서 누구의 하반신을 떠올렸는지. 그 물음의 해답은 속에서 신물이 올라올 정도로 뚜렷했다.
권호영의 얼굴을 보기가 미안했다. 시커먼 속내를 들킬까 조마조마했다. 제가 온종일 상상했던 걸 그가 안다면 멱살잡이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이건 자위만 안 했지, 그를 반찬거리로 삼은 게 아닌가. 권호영의 신체 부위마다 성적으로 치환하는 제가 구제받지 못할 쓰레기처럼 느껴졌다.
단여명이 죄책감에 시달리는 와중에도 권호영은 바지런히 움직였다. 소리를 죽인 발소리가 근방을 지나쳤다. 발코니의 문을 여는 소리, 그리고 그다음으론 무언가를 터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 찬바람이 끼쳐 앞 머리칼을 흐트러뜨렸다. 이마가 간질거리는 감각에 단여명은 감은 눈꺼풀을 살며시 들어 올렸다.
어둑해지는 밤하늘 사이로 남자치고 긴 머리가 시야에 들어왔다. 핏줄이 불거진 손은 건조대에 빨래를 널고 있었다. 주름이 잡히지 않게 옷가지를 탁탁 터는 손짓이 다부졌다. 동기들과 어울리랴, 공부하랴 바쁠 텐데 부지런하기도 했다.
‘…옷도 하나같이 시커먼 색밖에 없네.’
꼭 자기같이. 그동안 어떻게 집안일을 하는지 모르고 살았는데 기분이 묘해졌다. 그래도 얘랑 같이 살고 있긴 하구나. 엉뚱한 생각을 잇는데, 열렬한 시선을 느꼈는지 권호영이 뒤를 돌아보았다.
“…….”
“…….”
깜빡, 눈이 한 번 감겼다가 뜨였다. 시선이 마주쳤는지 모르겠다. 이쪽을 쳐다본 것도 같은데, 역시나 긴 앞머리 때문에 그가 어딜 보는지 알 수 없었다. 들킨 것 같으니 단여명은 뻔뻔하게 계속 쳐다보기로 했다. 뒤늦게 딴청을 피우는 쪽이 더 어색해 보일 테니까.
긴 시간이 지나지 않아 권호영은 다시 앞쪽으로 눈길을 돌렸다. 바구니에 쌓인 옷가지를 집어 든 손이 힘 있게 빨래를 털었다.
“왜요?”
단여명은 멍청히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어?’ 하고 되물었다. 제게 말을 건 게 맞나 싶어 얼떨떨했다.
“계속 쳐다보시길래.”
고개를 앞으로 고정한 채 권호영이 말했다. 딱딱한 목소리는 굳건한 그의 뒤태와 같았다.
“아니….”
단여명은 말끝을 흐리다가 별거 아니란 투로 답했다.
“키가 크다 싶어서.”
키가 크면 아래도 크다고 하던데. 자연히 꼬리를 물고 튀어나온 생각에 눈앞이 아찔해졌다. 단여명은 소리가 나지 않게 이를 으득 갈았다.
짤막한 침묵이 깃든 틈을 타 단여명은 내심 억울해지는 마음을 느꼈다. 왜 하필 엄마랑 아는 사람이어서. 그것만 아니었어도 한번 찔러나 보는 건데.
뼈테로면 몰라도 중간에 걸쳐져 있으면 어떻게 구슬려서 넘어올지 몰랐다. 왜, 자신도 하룻밤의 실수로 참된 맛을 깨닫지 않았나. 이건 그에게도 다시없을 기회라고 자부할 수 있었다.
…아니, 아니다. 엄마의 지인이 아니었으면 애초에 만나지도 못했겠지. 그냥 처음부터 안 될 인연이었던 것이다. 그의 몸에 손도 대지 못했는데, 괜스레 차인 기분이 들었다.
“자취방은 어떻게 돼가?”
생각을 돌리려고 꺼낸 말이 뒤늦게 실례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단여명은 아차 싶어 다른 말을 덧붙였다.
“아, 눈치 주려던 건 아니었어.”
“…….”
“혼자 살면 쓸쓸하잖아.”
눈치 주려던 게 아니었다고. 딱 거기까지가 모범적인 대답이었다. 그런데 그의 하반신이 호감형인 탓일까, 입이 제멋대로 열렸다. 마음에 드는 남자가 생기면 으레 던지던 습관적 플러팅이었다.
제발 주둥이 다물어, 단여명. 그리 되뇌어 봤자 이미 엎어진 물이었다.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몰라 뜸을 들이는 와중에도 시간은 야속히 흘렀다. 단여명은 동요 없는 목소리를 꾸며냈다.
“같이 사는 사람이 생기니까… 안심이 돼서.”
“…….”
“음…. 그냥 그렇다고.”
그리 어색하게 말을 마친 단여명은 소파 아래로 다리를 내렸다. 황급해 보이진 않았으나, 앞으로 향하는 발놀림은 단호했다. 현관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 단여명은 곧장 엘리베이터에 올라섰다.
권호영이 급히 자리를 뜨는 자신을 돌아봤는지 어쨌는지 되짚어 볼 여유가 없었다. 단여명은 손가락으로 1층 버튼을 누른 뒤 닫힘 버튼을 연타했다. 엘리베이터의 문이 닫히고, 벽에 쾅! 머리를 갖다 박았다.
그 어느 때보다 담배 한 개비가 절실했다.
“801호 학생 아니야?”
집 앞에 나와 담배를 입에 물자마자 옆에서 말소리가 들렸다. 예전에 형광등을 갈아준 적이 있는 9층 집 아주머니였다. 대학생이던 때 연이 닿아 아주머니는 아직도 자신을 학생이라고 불렀다. 단여명은 담배를 등 뒤로 숨기곤 고개를 숙였다.
“쓰레기 버리러 나온 거야? 어휴, 얇게 입어서 감기 들겠어. 뭐라도 걸치고 나오지.”
아주머니가 걱정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에요. 저 보기보다 튼튼해요.”
걱정하지 마세요. 겉으론 그런 웃음을 지으며 단여명은 속이 뒤틀리는 것을 느꼈다. 튼튼하긴 개뿔. 밖으로 나온 지 1분도 채 되지 않아서 살이 에이는 추위를 체감하는 중이다. 그 증거로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책상에 앉아서 자판만 두드리는 인간이 허세 한번 죽여줬다.
“그래도 날씨가 아직 쌀쌀해. 반팔 티만 입고 다니기엔 아직 이르지 않아? 아, 맞아. 전에 가르쳐 준 대로 전등 갈아 봤는데 그렇게 어렵지 않더라고. 다 학생 덕분이야. 왜, 애들이 밖에 나가서 사니까 남편이랑 같이…….”
예, 그렇죠. 많이 적적하시겠어요. 살갑게 맞장구치면서도 단여명의 정신은 딴 곳에 가 있었다. 아주머니의 목소리가 귀 밖으로 튕겨 나가는 듯했다.
‘씨발, 제정신이야?’
머리와 마음이 따로 놀았다. 어쩌면 혀도. 종잡을 수 없이 튀어 나가는 수작질은 단연코 제 의지가 아니었다.
군대 전역한 남자 새끼가, 뭐? 안심이 된다고? 기가 차서 헛웃음이 나왔다. 그래서 혼자 살기 무섭다고 징징대는 거야, 뭐야. 나잇살 먹고 가관도 이런 가관이 없었다.
“어머, 내 정신 좀 봐. 이러다 모임에 늦겠네.”
가슴에 새기고 새겨야 했다. 권호영은 갓 걸음마를 뗀 아기다. 하물며 엄마 친구 아드님이다. 그와 절대 그렇고 그런 관계가 될 수 없다. 이것은 제 욕심이고, 자신은 짐승만도 못한 벌레 새끼다.
“그럼 학생, 조심히 들어가. 얘기 들어줘서 고맙고.”
“고맙기는요. 저도 심심했던 참인데. 나중에 또 말씀 나눴으면 좋겠어요.”
3개월 동안 그와 아무 일도 없어야 했다.
‘아무 일도.’
단여명은 거울 속의 남자를 보았다. 입꼬리를 당기니 무슨 일이 있었냐는 양 태연한 얼굴이 되었다.
착한 룸메이트 형. 그리 정체성을 잡자 착잡했던 마음이 어느 정도 정리되는 것 같았다. 정확히 두 개비 반의 담배를 태우고 다시 위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안이었다.
착하다. 사회적으로 나무랄 데 없는 성격이지. 외출이 잦기까지 하니 이 얼마나 완벽한 동거인인가. 같이 지내는 중에 실수만 하지 않으면 계획은 완벽했다.
각오를 다진 단여명은 현관문의 패스워드를 눌렀다. 경쾌한 기계음이 울린 뒤 도어록이 해제됐다. 단여명은 지체 없이 문고리를 당겼다.
“…….”
“…….”
“…어디 나가나 보네?”
그러나 문 앞에 떡 버티고 서 있는 남자 때문에 안으로 들어갈 수 없었다. 놀라서 걸음이 주춤대는 걸 발바닥에 힘을 실었다.
“네.”
권호영의 턱이 아래로 내려갔다. 느릿하게 미동한 눈길이 얼굴에 닿은 것이 느껴졌다. 바로 앞에 서 있으니 그의 키가 확실히 크다는 게 실감됐다. 어깨선의 위치와 서로의 눈높이 차이에 포부가 가득했던 마음이 얼기설기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조금 붙어 섰다는 이유 탓일까, 소름을 닮은 흥분감이 살갗을 타고 기어올랐다.
그렇구나. 그럼 좀 비켜 줬으면 좋겠다. 그런 의미를 담아 단여명은 입꼬리에 힘을 줬다. 억지웃음이 티가 나지 않기를 바라며 상대를 올려다봤다.
“…무슨 할 말 있어?”
끝까지 무시하고 싶었으나, 권호영은 쉬이 보내주지 않겠다는 낌새를 풍겼다. 몸을 옆으로 돌려 지나가기엔 커다란 덩치에 제 몸이 턱 걸릴 것 같았다.
단여명은 별말 아니리라 생각했다. 권호영이 제게 할 말이 있다고 해봤자 제가 깜빡하고 집 안에 제 물건을 흘리고 다녔거나, 오늘 차를 태워다 준 일이 고맙다거나. 그런 유일 것이라고 짐작했다.
“…사과하고 싶어서요.”
그러나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 귓가를 울렸다.
“응?”
단여명은 당황을 숨기지 못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대체 뭐가 미안해서? 지금 이 상황에 그가 사과하고 싶다니까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다. 좀 전엔 작은 바늘이었다면 지금은 커다란 쇠꼬챙이가 가슴을 후벼 파는 것 같았다.
“제가 그동안 예의 없이 굴었잖아요.”
“…….”
“그쪽….”
입을 다문 권호영은 잠시 뜸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형한테 나쁘게 대할 마음은 없었어요.”
권호영이 한 발짝 앞으로 걸음을 디뎠다. 단여명은 옆으로 몸을 비켜 주었다. 그가 거리를 좁히기에 반사적으로 취한 행동이었다.
“…그냥 그렇다고요.”
말을 끝마친 권호영은 볼일이 끝났다는 듯 옆을 지나쳤다. 그냥 그렇다고. 아까 도망치듯이 문을 박차고 나왔을 때 제가 했던 말이었다.
‘…저거 말장난 친 건가?’
무의식적으로 뒤를 향하려는 눈동자를 애써 앞으로 고정했다.
곁을 지나친 그에게선 자신과 똑같은 섬유유연제 냄새가 났다.
***
단여명은 인생이 가끔 게임 같다고 생각했다. 평소에 오락을 즐기진 않지만, 어릴 적에 놀러 갔던 게임장의 노란빛 풍경이, 코끝을 스치던 쇳내가 기억에 남았다.
시금치를 먹고 원래보다 세진다거나, 남들보다 먼저 히든 플레이스를 알아내면 희열을 느낀다거나. 인생도 그와 비슷했다. 무료한 일상에 갑작스러운 이벤트가 발생하면 누구라도 조금쯤 들뜰 것이다. 그게 가령 요즘과 같지 않을까, 단여명은 생각했다.
“아주머니, 붕어빵 6개만 주세요.”
집 앞 편의점에 들렀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 우연히 붕어빵 가게를 발견했다. 빨간색 앞치마를 두른 아주머니가 붕어빵 기계에 반죽을 짜 넣고 있었다.
“무슨 맛으로 드릴까?”
“반반 섞어서 주세요. 현금만 받으시죠?”
지갑에서 지폐를 꺼내자 아주머니가 손을 내밀었다. 거뭇하게 탄 자국이 남은 목장갑이 돈을 받아 들었다. 그것을 유심히 바라보던 단여명은 웃는 얼굴로 말을 붙였다.
“아직 날이 추운데 고생이 많으시네요.”
“뭘, 먹고살려면 다 하는 거지….”
아주머니는 눈도 마주치지 않고 무심히 답했다. 진열된 붕어빵을 종이봉투에 옮겨 담는 손길엔 각이 잡혀 있었다.
“그래도요. 지금은 몰라도 한겨울엔 많이 추울 텐데.”
“아녀…. 손주 자식들 용돈 챙겨 주려면 열심히 벌어야지.”
“손주분들이 있으신가 보네요.”
그리 말하자 아주머니가 슬그머니 눈을 맞췄다. ‘어디, 사진이라도 볼 텨?’라고 묻기에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총각이 훤칠하게 생겨서 내가 하나 더 넣었어.”
단여명이 포장마차 밖으로 나온 건 그로부터 10분이 지난 뒤였다. 아주머니가 미미한 웃음을 띤 채 종이봉투를 건넸다. 처음 얘기를 시작했을 때보다 판이하게 밝아진 표정이었다. 단여명은 마주 웃으며 감사 인사를 전했다.
단여명은 제 강점을 잘 알았다. 마음만 먹으면 어떤 사람에게도 잘 스며들 수 있는 성격을 가졌다. 웃으면 부드러워 보인다는 말을 수없이 들었다. 장단만 잘 맞춰주면 백에 구십구는 제게 호감을 가졌고, 사람의 환심을 사는 데 자신이 있었다.
“이게 뭐예요?”
그럼에도 여전히 낯을 가리는 한 사람이 있었지만.
“뭘 계속…….”
한숨 섞인 목소리는 곤란하다는 투였다. 단여명은 순수한 미소를 보이며 대답했다.
“집 앞에 붕어빵을 팔더라고.”
“…….”
종이봉투를 건네자 권호영이 망설이는 낌새를 보였다. 같이 사는 내내 자신이 종종 먹을거리를 가져다주면 매차 보이던 모습이었다. 익숙해질 때도 됐건만, 매번 조금이라도 저렇게 경계하곤 했다.
“…잘 먹을게요, 형.”
다만 전과 달라진 게 있다면 아마 저거겠지. 권호영이 하는 형 소리는 단여명의 입매를 느슨하게 만들었다. 그가 뜬금없이 사과한 날이 모든 일의 시초였다.
‘안 어울리게 귀여웠단 말이지.’
답지 않게 말장난이나 치고.
마치 밥을 챙겨 주던 길고양이가 처음으로 손길을 허락한 것만 같았다. 그도 아니면 무뚝뚝한 단골 카페 사장님이 말없이 서비스 쿠키를 챙겨 줬을 때의 기분이랄까. 사소하지만, 삶이 윤택해지는 유쾌한 감정들 말이다.
처음 그에게 사과받았을 땐 얼떨떨하기만 했다. 그러나 그때의 상황을 돌이켜 볼수록 실없는 웃음이 나왔다.
서투르게 전한 진심에선 풋내가 났다. 제게 만약 무뚝뚝한 남동생이 있으면 딱 저럴 것 같기도 하고…. 겉모습은 세상 풍파를 다 겪은 모습인데, 말하는 건 표현이 서툰 그 나이대의 남자애였다.
그러다 보니 권호영이란 사람이 좀 궁금해졌다. 나쁘게 대할 마음이 없었다면서 왜 그리 퉁명스러웠는지. 허물없는 사이가 되면 진짜 성격이 어떨지 호기심이 생겼다. 뭘 가져다줄 때마다 아닌 척 난감해하는 모습을 보는 게 재밌기도 했고.
남녀 사이에 친구는 없어도 남남 사이에는 친구가 있다. 약간의 사심, 그리고 인간적인 호감. 단여명은 권호영에게 향하는 자신의 감정을 그리 결론지었다.
인간의 감정은 원체 복잡한 법이다. 아마 성적인 흥미가 있어 무의식중 관심이 가는 까닭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단여명은 이 관계를 바꿀 마음이 없었다. 육체적으로도, 그리고 심적으로도.
어차피 권호영은 이성에게 관심이 없어 보였다. 아마 남자도 포함해서. 제가 먼저 선을 넘지 않으면 이 관계는 변함없이 유지될 것이다.
[김선오: 집이야?]
그 증거로 단여명은 김선오와의 만남을 이어 가는 중이었다. 권호영과 개미만큼 친해져 부작용이 생겼다면 친밀감이 쌓이는 것과 비례적으로 죄악감이 더해 간다는 사실이었다. 그와 눈이 마주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면 정신이 번뜩 깨는 것 같으면서도 저릿한 흥분감이 발바닥을 간질였다.
그래서 단여명은 김선오를 만날 때 모든 정력을 쏟아내고 왔다. 김선오를 이용하는 게 아닌가 미안한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어차피 서로가 그런 이용관계였다.
[응 어디쯤이야?]
단여명은 5분 전에 도착한 메시지에 답장을 보냈다. 오늘은 일찍 퇴근했나 보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슬슬 나갈 준비에 서둘렀다.
[김선오: 집 비번 안 바뀌었지?]
머리를 말리느라 연락을 뒤늦게 확인한 단여명은 눈썹을 구겼다. …비밀번호? 혹시나 하는 노파심이 든 찰나, 또렷한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이 집엔 이제 자기 혼자만이 아니란 것. 그리고 김선오는 그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아니 잠까]
문장을 다 완성하기도 전이었다. 타이밍을 맞춘 듯 초인종 소리가 커다랗게 울렸다.
집 안으로 들어오기 전에 초인종을 누르는 행위는 김선오의 습관이었다. 초인종을 울리는 심산이 집 안에 사람이 들어왔음을 알리는 건지, 아니면 주인이 왔으니 꼬리를 흔들라는 뜻인지 알 순 없었지만.
“이건 또 뭐야?”
급히 거실로 나간 단여명은 얼굴을 미세하게 굳혔다. 현관문 앞에 서 있는 사람은 두 명이었다. 흥미롭다는 듯 웃고 있는 김선오. 그리고 그의 앞에는 한 치의 반전 없이 권호영이 서 있었다.
권호영에게 내준 손님방은 현관문 쪽에 더 가까이 위치해 있었다. 웬 놈이 손수 문을 열고 들어오니 당황할 만도 한데, 권호영은 이런 상황에서도 참으로 그답게 대처했다. 보통 사람이라면 놀랄 법한 상황인데도 각진 어깨는 위축감이 없었다.
대치하듯 그의 맞은편에 선 김선오는 단단히 오해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슬며시 비틀린 입매가 상황이 재밌게 돌아간다는 눈치였다.
“여명아. 몰랐는데, 그새 취향이….”
“아는 동생.”
급하게 말허리를 자른 단여명은 간결한 어투로 설명했다.
“아는 동생이야. 사정이 있어서 우리 집에서 몇 달 지내기로 했어.”
허튼소리하면 죽는다. 온화한 얼굴은 그리 경고하고 있었다.
“그래?”
그를 알아들었는지 김선오는 눈썹을 까딱 들어 올렸다. 씩 웃는 얼굴이 못된 계략을 꾸미는 악당 같았다.
“택배인 줄 알았어요.”
제 옆에 선 권호영이 김선오를 바라보다가 이쪽에 시선을 줬다. 단여명은 어색하게 웃고는 그랬느냐며 고개를 주억였다.
짧은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던 김선오는 대뜸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그의 손은 권호영 앞에 가 있었다. 단여명은 눈으로 간당간당한 웃음을 유지한 채 말했다.
“야, 너 뭐 하려고.”
“내가 뭘.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인사는 해야지.”
김선오가 앞에 내민 손을 오므렸다가 펼쳤다. 뻔뻔하게도 얼른 잡아 달라는 손짓이었다.
“반갑습니다. 저는 여명이의 아는 형이에요.”
능청맞은 표정이 살가워 보였다. …저게 진짜. 단여명이 속으로 무슨 욕을 퍼붓는지도 모르고 김선오는 권호영에게 악수를 청했다.
“아는 형 동생끼리 사이좋게 지냅시다.”
권호영은 그 손을 묵묵히 내려다보았다. 친근히 구는 낯선 남자가 떨떠름하다는 기색이었다.
“…예.”
뜨뜻미지근하게 답한 권호영이 마지못해 그 손을 잡았다. 심히 내키지 않는다는 태도 앞에서도 김선오는 맞잡은 손을 보란 듯이 두어 번 흔들었다. 일방적인 움직임에 따라 권호영의 손도 함께 위아래로 움직였다.
“나중에 식사라도 같이하시죠. 나눌 얘기가 많을 것 같은데.”
김선오가 생글생글 웃으며 말했다. 웃기지도 않는 작태를 가만 지켜보던 단여명은 그쯤 둘 사이를 은근슬쩍 갈라놓았다. 김선오가 왜 이러냐는 듯 쳐다봤지만, 눈도 마주치지 않고 그의 등을 떠밀었다.
“호영아, 밥 잘 챙겨 먹고. 형 다녀올게.”
미안. 소리 없는 입 모양을 전한 단여명은 마저 등을 돌렸다. 쾅, 현관문이 닫히고 두 사람은 집 밖으로 나왔다. 단여명이 김선오의 손목을 잡아끌며 앞장섰다.
“죽고 싶지.”
1층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단여명이 길게 흐르던 침묵을 깼다. 평소의 단여명보다 낮은 목소리였다. 위협하듯이 노려봐도 김선오는 태연자약했다.
“내가 뭘 했다고?”
“처음 만난 사람 앞에서 취향이 어쨌다는 얘기를 왜 꺼내? 쟤 아무것도 모르는 애야. 들키고 싶어서 환장했어?”
김선오는 어깨를 으쓱했다. 집 안에 머슴 같은 남자가 들어앉아 있으니 그가 세컨인 줄 알았다는 눈치다. 단여명이 생각해도 오해할 만한 상황이긴 했다. 그러나 설령 그렇다 한들 김선오가 섣불리 입을 턴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아마 집 안에 들인 남자가 세컨이든 아니든 제가 곤란해하는 모습이 보고 싶었던 거겠지. 김선오의 속내가 훤히 내다보였다.
‘이래서 도미넌트들은….’
얕은 한숨을 쉬자 김선오가 빙글빙글 웃는 낯으로 말을 붙였다.
“쟤한테는 네가 형인가 봐? 안 어울려. 어리광만 피우는 울보가 어디 가서 형 노릇을 해.”
“내가 언제 어리광을 피웠다고.”
“어젯밤만 해도 뒷구멍이 헐도록 박아 달라고 울었잖아. 관장액을 넣었더니 아랫배를 붙잡고 내 발밑에서 엉엉 울었지.”
“…….”
“그새 잊은 거야? 섭섭한데.”
어깨를 잡은 김선오가 그늘진 목소리로 속삭였다. 단여명은 흘기듯 그를 노려봤다.
“악취미.”
“별말씀을.”
“…….”
“키스하고 싶다.”
띵, 엘리베이터의 문이 양쪽으로 열렸다. 먼저 앞으로 다리를 뻗으니 김선오가 뒤를 쫓아왔다.
“여명아.”
보채듯 부르는 목소리도 함께였다.
“…가. 차에 가서 해.”
그리 말하며 손목을 당기자 김선오가 걸음을 맞췄다. 어깨를 나란히 한 채 걷는 두 사람의 표정은 상극이었다.
단여명은 아까의 상황을 복기했다. 만약 권호영이 제가 게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아마 엄마에게까지도…. 끔찍한 상상이 현실이 될까 단여명은 털듯이 그 생각을 날렸다.
옆 사람의 마음도 모르고 흥얼대는 콧노래는 여유가 흘러넘쳤다.
“너 때문에 요즘 내 입술이 남아나질 않아.”
툴툴대는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매일같이 물고 빨아대니 요즘 립밤을 달고 산다는 말도 함께 얹었다. 그러면서도 연방 입술에 도장 찍듯이 누르는 입맞춤은 끊임이 없었다.
공간이 협소한 탓일까. 서로에게 피어나는 열기도, 끈적한 입맞춤 소리도 유난히 크게 느껴졌다. 입언저리에 닿던 입술은 목덜미를 타고 빗장뼈를 눌렀다. 짙어지는 스킨십에 단여명은 김선오의 어깨를 밀어냈다.
“여기서는 이제….”
김선오의 허벅지 위에서 내려가려고 하자 그가 불쑥 허리를 붙들어 당겼다. 그 반동에 단여명의 몸이 더욱 김선오의 상체에 밀착됐다.
“왜. 스릴 있고 좋은데, 난.”
단여명은 눈을 새초롬하게 떴다. 마주친 눈동자는 욕정이 넘실댔으나, 짓궂은 장난기가 뒤섞여 있었다.
“그렇겠지. 너희 집 앞이 아니니까.”
아마 김선오와 권호영의 조우가 없었다면 더 구김 없이 대답했을 것이다. 그러나 켕기는 구석이 생겨 이 이상 귀엽게 봐주기 힘들었다.
거기다 위치도 위치다. 집 앞 주차장의 구석은 인적이 없는 편이었지만, 혹시라도 누군가가 이 모습을 보게 된다면 동네에 이상한 소문이 돌지도 몰랐다. 호모 새끼를 몰아내자며 대자보라도 붙지 않으면 다행이지. 아무리 제가 섹스에 환장한 파렴치한이라도 도 넘는 스릴까진 즐기지 않았다.
“말은 까칠하게 하면서.”
“아…!”
“참 잘 세워, 내 강아지는.”
불룩해진 하반신이 타인의 손아귀에 잡혔다. 김선오는 옷 안에 갇힌 자지를 떡 주무르듯 조물조물 만져댔다. 조금 힘이 들어갔던 살덩이가 자극을 받아 더욱 단단한 형태를 갖췄다. 적당히 하라며 눈을 흘기자 김선오가 너스레웃음을 터트렸다.
“빨아 줄까?”
옆구리를 쓰는 손놀림이 다정했다. 능글맞게 성기를 주물렀던 손짓과 딴판이게도.
“또 전처럼 이 세우려고….”
단여명이 못 미더운 눈초리를 보내자 김선오는 그의 눈언저리를 가볍게 쓸었다.
“여명이 눈물이 좀 비싸야지.”
“…….”
“그때는 우는 얼굴이 보고 싶었고.”
눈가를 지분대던 손은 아래로 내려가 마찰열로 붉어진 입술을 눌렀다. 까뒤집듯 아래로 내리니 촉촉한 점막이 여린 속살을 드러냈다. 감촉이 좋다며 김선오가 몇 번이고 혀를 집어넣고 뒤적였던 부근이었다.
“오늘은 느끼는 얼굴이 보고 싶어.”
뒤 쑤셔 주면서 안 아프게 빨아 줄게. 속달대는 음성은 봄바람처럼 살랑였지만, 나아가 거친 풍랑이 되어 고막에 선명히 파고들었다.
저열한 말에 단여명은 눈썹을 있는 대로 찌푸리곤 그를 노려보았다. 뺨이 조금 후끈거린다 싶을 때부터 불안하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낯이 더욱 붉어진 모양이었다. 아직 어떤 대답도 하지 않았는데, 김선오가 승리의 웃음을 짓고 있었다.
똑, 입으로 장난질 치는 듯한 소리와 함께 모양 좋은 입술이 제자리를 찾았다. 하얗게 질렸다가 되돌아온 입술의 혈색은 무르익은 과실처럼 붉었다.
***
김선오는 사디스트이자 도미넌트였다. 파트너에게 고통을 주는 행위에 희열을 느꼈고, 자신이 한 사람을 온전히 지배하길 원했다. 성관계를 떠나서 일상생활에도 직접 개입하길 소망했고, 일상뿐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속박도 욕망했다.
그는 단여명과 비슷하다면 비슷한 기로를 헤매는 중이었다. 제 집착을 순애의 증표로 여겨 줄 사람. 고통을 쾌락으로 치환할 줄 알고, 누군가에게 정신적, 육체적으로 결박당하면 황홀경을 느끼는 이를 추구했다.
그러나 마음도 맞고 몸도 맞는 상대는 쉬이 나타나지 않았다. 나타난다고 해도 여러 복잡한 사정이 생기기 마련이고.
“으응…!”
그러니까 이렇게 제 취향인 남자가 흥흥거리면서 울면 그 충동을 누르기가 어려워진다.
머리채를 틀어잡고, 좁은 입속에 억지로 성기를 욱여넣고 싶었다. 숨쉬기가 버거워 귀엽게 꿈틀거리는 혓바닥에 무례하리만치 귀두를 비비다가 그대로 숨통을 틀어막고 싶었다. 목구멍에 좆질 하듯 가차 없이 허리를 내다 박고, 숨이 꺽꺽 넘어가는 상대를 즐거이 관망하다가….
“여명아. 좋아 죽겠는 건 알겠는데, 형 숨은 쉬어야지.”
그러나 김선오는 언제나 그렇듯 모든 욕망을 쓰게 삼켰다.
“아…!”
짜악! 허벅지 안쪽을 매질하자 하얀 나신이 풀썩 침대 위로 엎어졌다. 으, 흐으응…. 작게 신음을 뱉더니 다리 사이를 꾹 조였다. 숨 좀 쉬자고 때린 건데, 오히려 숨쉬기가 더 힘들어졌다. 우습게도 제 망상이 역전된 꼴이었다.
버릇없이 몸 위에 올리는 게 아니었는데. 오랜만에 당황한 상대의 얼굴을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서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 약속을 해버린 게 지금 상황의 요인이었다.
“아, 나 무릎, 흐으…!”
꿀쩍, 꿀쩍, 쩍. 진흙이 가득 찬 굴속을 헤집는 소리가 울렸다. 실상은 좁은 구멍 속을 추잡스레 벌리는 소리였다. 손을 빠르게 놀리자 느끼는 와중에 자세가 불편한지 단여명이 목울음 소리를 냈다. 그러거나 말거나 김선오는 손가락 관절이 입구에 턱턱 걸리도록 강하게 추삽질했다. 허리를 튕기느라 목젖을 찌르는 자지 머리를 부드럽게 조여 주며.
그냥 단여명이라서 그런가. 제가 나서지 않았어도 얘가 먼저 부탁했으면 들어줬을 것 같기도 했다. 사람을 홀리는 여우 같은 녀석이었다. 매번 엉덩이께를 더듬어 봐도 꼬리 하나 잡히지 않는 게 의문일 만큼.
나른한 눈빛은 관능적이었고, 나긋한 말씨는 음욕을 동하게 했다. 본격적으로 입술을 부딪치면 특유의 분위기는 고혹적인 향이 퍼지듯 더욱 짙어졌다.
그리고 그중 가장 마음에 드는 점을 꼽자면…….
“아, 좋아…! 으응, 흣, 형…!”
빙빙 돌려 말하는 화법을 고수하는 단여명이 제일 솔직해지는 시간이라는 것이었다.
쿨쩍, 쿨쩍. 집요한 손길이 계속됐다. 끈적한 젤이 바깥으로 튀다 못해 뼈가 불거진 손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팔목의 살갗을 긁으며 타고 내린 투명한 액은 마찰열에 의해 뜨겁게 달궈져 있었다.
팔꿈치에 다다른 액체는 손목이 움직이는 반동에 따라 한 방울, 두 방울씩 아래로 떨어졌다. 구멍 깊숙이 손가락을 처넣고 한바탕 뒤섞듯 휘저으면 김선오의 복부에 작은 웅덩이가 고였다.
“형, 읏, 나 쌀 것 같아….”
울먹한 목소리가 급한 숨을 들이켜며 말했다. 김선오는 한동안 입안에서 굴리던 자지를 뱉어냈다. 쭈욱 빨았다가 놓아주니 타액에 흠뻑 젖은 성기가 위로 튕겨 올라 코끝을 때렸다. 그것마저 자극으로 느끼는지 머리 바깥쪽에 놓인 다리가 한 차례 들썩였다.
눈을 내리자 좀 전에 매질했던 허벅지에 붉은 기운이 토실토실 오른 것이 보였다. 피부가 약해서 이렇게 조금만 세게 때려도 부어오르곤 했다.
하얀 허벅지 면을 덮은 제 흔적이 마음에 들었다. 허벅지뿐만이 아니라 아예 이 몸을 붉은색으로 덧칠하고픈 충동이 일었다. 자지고 뒷구멍이고 할 것 없이 모든 부위에 봉선화 물을 들이고 싶었다. 손이어도 좋고, 가늘거나 두꺼운 회초리여도 좋고.
“일어나 보자.”
엉덩이를 두드리니 단여명이 엎어져 있던 상체를 일으켰다. 김선오의 가슴팍에 올라타 무릎으로 중심을 지탱한 자세였기에 가느다란 몸이 불안정하게 흔들렸다. 김선오는 단여명의 골반을 잡아 안정적인 자세를 취해 줬다.
“뭐 해? 잡고 흔들어야지.”
냉정하게 말하니 까만 눈동자 속에 실망감이 스쳤다. 자지를 달게 빨아 주다가 제 손으로 직접 흔들라니까 아쉬움이 남는 모양이었다.
김선오는 그를 보채듯 말캉한 점막을 더듬었다. 손가락의 지문이 퉁퉁 불 정도로 헤집은 뒤였지만, 지루하진 않았다. 만질수록 차지게 달라붙는 구멍은 예뻐해 주는 보람이 있게도 오물거리며 착실히 반응했다.
“안에, 흣, 더….”
“이렇게?”
어느 남자라도 손가락을 깊이 넣으면 닿을 위치. 느끼는 지점도 꼭 제 주인을 닮았다. 힘을 가하지 않고 스치듯 쓸어 줬을 뿐인데, 아랫구멍이 손가락을 콱 조여 물었다.
“앗, 으응…!”
몸의 주인도 좋다고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고양이의 턱을 쓸어 주듯이 자근자근 문질러 주니 판판했던 복부가 움푹 꺼졌다가 숨 가쁘게 오르내렸다. 읏, 흐으…!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더니 제 흥분을 못 이겨 손을 앞으로 뻗는다.
도홧빛으로 물든 살기둥에 하얀 손가락이 감겼다. 제가 무얼 보고 싶어 하는지 그제야 눈치챘는지 단여명은 직접 성기를 잡고 설설 흔들기 시작했다. 김선오도 느리게 했던 템포를 빠르게 바꿨다.
“읏…. 아!”
손톱으로 찍듯이 누르는 건 쾌감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고.
“아, 아니, 싫, 흐으…! 아, 아아, 아!”
느끼는 지점을 빠르게 찍어대는 건 역시 벅차하는 쪽이려나.
“오늘따라 눈물이 헤프네.”
김선오는 제 뺨에 튄 정액을 아무렇지 않게 닦아냈다. 헉, 흐으…. 거친 숨을 쏟아내던 하얀 나신이 기우뚱했다. 김선오는 앞으로 쓰러지려는 몸을 받쳐 침대에 눕혔다.
“부족하잖아.”
턱을 돌려 눈을 맞추자 긴 속눈썹이 나풀거렸다. 한 번, 두 번 감기는 눈꺼풀의 날갯짓마저 은밀한 의미가 담겨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김선오가 좋아하는 순간이었다. 발긋하게 열 오른 눈가, 그리고 그보다 더욱 붉은 입술과 뾰족한 입술 산. 그것들만 보면 조선 시대의 춘화 집을 따다 만든 것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절제된 것 같으면서도 부끄러움도 모르고 하릴없이 내비치는 것.
그러나 정사의 여향을 풍기는 이목구비는 찬기가 흘렀다. 그 모든 것의 조화가 평소에 차분해 보이는 단여명의 모습과 상반되어 추잡스러운 욕구를 불타게 했다. 이를테면 주변 사람들은 얘가 이러는 걸 알라나, 하는 지저분한 정복욕.
“엉덩이 벌려 보자. 얼마나 잘 풀렸는지 보여줘야지.”
까만 속눈썹에 엉겨 붙은 눈물을 닦아주며 김선오는 부드럽게 웃었다.
밤늦은 시간의 주택가엔 정취가 흘렀다. 열어놓은 문 사이로 새어든 밤바람이 커튼 자락을 흔들었다. 잔디가 푸릇하게 돋아난 테라스에선 말소리가 울렸다.
“요즘 마음이 허해?”
로터를 처넣어도 좋다고 하고, 괴롭혀 달라고 제 손으로 직접 선물까지 사 오고. 심경에 어떤 변화가 왔길래 이리 예쁘게 굴지. 기분 좋은 노곤함을 느끼며 김선오는 옆을 돌아보았다.
“뭐….”
“…….”
“가끔 이러는 것도 괜찮을 것 같아서.”
의심쩍게 구는 것치고 심심한 대답이 흘러나왔다. 김선오는 더는 캐묻지 않고, 말머리를 돌리는 것을 택했다. 아까 전의 상황을 되새기니 아랫도리가 다시 뻑적지근해지는 기분이 들었던 탓이었다.
“그래서 그 남자는 뭐 하는 사람이야?”
담뱃재를 툭 털자 필터의 반절이 넘게 사라졌다. 흥미가 사라져 그대로 담뱃불을 꺼버렸다.
“네 집에 신세 진다는 걔.”
“아, 호영이?”
“이름이 호영이야?”
그리 물으며 김선오는 상대를 눈에 담았다. 손가락 사이에 아슬아슬하게 끼운 담배. 그리고 듣는 사람이 다 나른해지는 말투.
얘 졸려 하네. 아까 그렇게 싸더니. 필터가 다 타들어 간지도 모르고 멍하니 넋을 놓고 있는 꼴이 볼 만했다.
“손.”
그리 말하자 단여명이 아, 한다. 보는 사람이 다 불안하게 굴기에 담배를 빼앗아 들었다. 타액으로 축축이 젖은 필터에 입술을 붙이고 폐부 깊숙이 연기를 빨아들였다. 분명 같은 종류의 담배를 태웠는데, 어쩐지 담배 맛이 달라진 것처럼 느껴졌다.
김선오는 단여명이 피우던 담배를 제가 한 번 빨고 재떨이에 비벼 껐다. 단여명은 그때까지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야.”
섹스를 한 다음이라서 그런가, 아까보다 태도가 한층 사근사근했다. 죽고 싶지, 하며 눈을 부라리던 모습이 아직도 눈앞에 선했다. 남자랑 붙어먹는 사실을 들킬까, 여간 마음을 졸인 게 아니었나 보지. 그에 필사적으로 웃음을 삼켰다는 걸 알면 단여명은 과연 화를 냈을까.
김선오는 의심하지 않았다는 양 픽 웃고 말았다. 혹시 자신 모르게 간통이라도 한 걸까, 떠본 건 맞았다.
그래, 한눈팔 시간이 없긴 하지. 매일같이 만나도 시간이 모자란 게 요즘이지 않은가.
“남동생 같아. 좀 귀엽기도 하고.”
“귀엽… 걔가?”
예상치 못한 소리에 절로 되묻는 소리가 나갔다. 문득 맨살이 드러난 어깨가 시야에 밟혀 테라스 의자에 비치해 놨던 카디건을 걸쳐 주었다. 단여명은 고맙다는 듯이 웃으며 옷깃을 여몄다.
“너 외동이잖아. 갑자기 웬 남동생?”
“그냥 있으면 그럴 것 같단 얘기지. 형제끼리도 성격 반대인 사람들 많잖아.”
어렸을 때 소원이었거든. 남동생 갖는 거. 그리 말하는 옆태 위로 다른 사람의 얼굴이 겹쳤다.
“……글쎄. 그런 이미지는 아니던데.”
단여명의 집에서 잠깐 새 보았던 남자는 독특한 스타일이었다. 만일 거기서 머리가 곱슬거리고, 기장이 더 길었다면 사극에 출연하는 산적을 빼다 박았을 것이다. 덩치도 장난 아니게 커서 산적 무리에서도 우두머리를 맡고 있을 것만 같은 느낌이랄까.
“마당 쓰는 돌쇠면 몰라도.”
아주 좋게 봐줘야 마당쇠 정도였다. 그런데 거기다 대고 귀여운 남동생이라니. 그게 도통 조화되지 않아 자연히 미간이 좁아졌다.
“욕이지, 그거.”
“설마. 몸이 좋아서 그렇게 느껴졌다는 거지.”
김선오는 재빨리 미소를 걸쳤다. 하여간 쓸데없이 눈치는 빨랐다.
“낯을 심하게 가리긴 하는데, 나쁜 애는 아니야. 집도 깔끔히 쓰고, 성실하고, 착하고….”
그새 제법 친해졌는지 감싸고돈다. 뭘 그렇게 예민하게 반응할까. 패션 감각 더럽게 없던데, 뭘. 요즘 아싸들도 그러고는 안 다니겠다며 김선오는 속으로 혀를 찼다.
“어쩌다가 같이 살 게 된 건데?”
“아는 사람한테 부탁을 받아서…. 정신 차리니까 같이 살고 있던데.”
“그래?”
거짓말하는 것 같진 않았다. 게이는 아니라고 했으니 친해 봤자 형 동생 사이겠지. 김선오는 일말의 가능성을 꺼트렸다.
게이들 사이엔 암묵적인 룰이 있다. 이성애자 남자와는 눈도 마주치지 말아야 한다는 것. 그들을 마음에 품지 말아야 한다는 법칙은 우스갯소리로도 소비되는 얘기였다.
상대 남성은 순간뿐의 일탈일지 모르나, 게이들의 입장은 달랐다. 바늘 끝에 찔리고 나서야 아프다는 감각을 깨우치는 사람은 어리석다. 어디 사람 마음이 자기 뜻대로 되겠냐마는, 다칠 걸 알고서 시도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인간이라 불러도 마땅했다.
“같이 산 지 얼마 안 돼서 좀 서먹하긴 해. 하루에 열 마디 정도 나누나.”
이 바닥에 몸을 담고 있으면 으레 들리는 속설이니 아마 단여명도 그를 모르진 않을 테다.
“그러니까 무턱대고 찾아오는 건 안 그랬으면 좋겠어.”
웃는 얼굴로 제법 단호하게 말한 단여명이 이쪽에 눈길을 줬다. 호영인가 뭔가를 맡긴 사람이 꽤 가까운 지인인 듯했다.
“알겠다니까. 조심할게.”
김선오는 모르는 척 단여명의 어깨에 턱을 괴었다. 분위기를 환기할 겸 말을 돌리기 위함이었다. 자신보다 체구가 작은 몸을 끌어안으니 맞춘 것처럼 품에 쏙 들어왔다.
“그래서. 걔 보내고 나면 나 재워 주나?”
예전엔 자주 그랬잖아. 작게 귀엣말하며 허리에 손을 두르곤 몸을 뒤뚱거렸다. 그에 단여명의 걸음도 따라 다리가 짧은 펭귄처럼 기우뚱댔다. 자신들의 모습이 우스웠는지 단여명은 놓으라고 투덜대다가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그래, 나중에.”
다음을 기약하는 목소리가 듣기 좋았다. 옆으로 살며시 보이는 뺨이 입술을 누르기 알맞아 보였다.
김선오는 망설이지 않고 보드라운 뺨에 입맞춤했다. 내친김에 두 번 더 입술 도장을 찍자 ‘갑자기 왜 이래’ 하며 단여명이 찡그리듯 웃었다. 그리 툴툴대면서도 그는 순순히 입맞춤을 받아줬다. 김선오는 괜스러운 웃음으로 대답을 무마했다.
***
[델리사의 화단에 푸른색 장미꽃 한 송이가 피어났다. 붉은색 사이에 아직 채 피우지 못한 파란 꽃봉오리에 마음을 빼앗긴 건 한순간이었다. 델리사는 하루에도 몇 번씩 창문을 통해 그 꽃을 내다보았다.
꽃봉오리가 터질 듯이 부푼 날엔 제 마음도 펑 터질 것만 같이 부풀었고, 갓 개화를 마쳤을 땐 함께 달빛을 맞으며 샴페인을 기울였다. 부슬비가 내리면 혹여나 빗방울이 무거울까, 꽃잎을 쓸어주어 무게를 덜어줬다. 인사하듯 줄기를 흔들면 싱그러운 향기가 물씬 피어올랐다. 그 꽃내음이 마치 장미꽃이 제게 인사를 건네는 것만 같아 손끝이 간지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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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은 내게 푸른색 장미꽃이었다. 누구보다 특별했던 만큼 정애를 쏟아부었다. 그러나 갖은 노력 끝에도 극복할 수 없는 한계에 부딪혔다. 푸른색 장미꽃은 시리도록 아프고, 지독히도 아름다웠다.
아낌없이 대했음에도 후회가 남는 것은 그 사람에 대한 좋은 추억이 남아서이다. 작중의 화자는 부디 그 소원한 관계를 온전히 보존했으면 한다. 그때의 자신들이 부족함 없이 사랑했음을 아로새기고, 미련의 조각은 모래사장 속 깊이 묻어두길 소원한다.]
단여명은 하얀 페이지를 보다가 그대로 얼굴 위에 책을 얹었다. 머릿속이 복잡한 와중에 글자를 읽으니 옅은 피로감이 밀려왔다. 차라리 한 가지 일에 집중하는 편이 나을 듯싶었다.
…그래, 좋은 추억으로 남기는 게 서로에게 좋겠지. 예전과 같은 관계로 돌아간다고 해도 똑같은 문제로 충돌할 게 뻔한데.
‘거리를 두는 게 맞겠지.’
요즘 김선오는 이상했다. 필요 이상으로 다정히 말하질 않나, 뜬금없이 혼자 웃음 짓질 않나. 보는 사람이 다 간지럽게 굴었다. 개새끼 취급은 대강 맞춰 줄 수 있지만, 그게 침대 밖에서라면 받아주기 힘들었다.
그와 처음 재회했던 날도 그랬다. 김선오는 이전에 자신들만 알던 습관을 추억 삼아 얘기했다. 가볍게 언급한 축이었으나, 그 말속에 숨겨진 의미를 모를 정도로 단여명은 순진하지 않았다.
거기서 더해 그는 자신과 권호영의 관계를 의심했다. 같이 사는 사이니 혹여나 정분나진 않을까, 경계하는 태세를 보였다. 그전까진 제발 오해이길 바랐지만, 그에게선 묘한 적대감이 풍겼다. 그 화살은 권호영에게 향하고 있었다.
의심은 곧 확신이 됐다. 같이 있는 내내 그의 마음이 느껴졌다. 모르는 게 이상했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부터가 달라졌으니까. 섹스 파트너를 그런 눈으로 바라보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더 이상 섹스 파트너로 정의할 수 없었다.
미묘한 기류가 흐를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는데. 더 이상 눈감아 주기 힘들었다. 김선오는 자신들이 전과 같은 관계로 돌아가기를 원했다.
물론 단여명은 그와 반대였다. 뒤탈 없이 순간에만 충실하고 싶었다. 어차피 다시 사귄다고 해도 똑같은 문제로 헤어질 게 눈에 그려졌다. 어떻게 노력한들 결과가 바뀔 것 같아 보이지도 않았고.
단여명은 자신들 사이에 보이지 않는 벽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확실히 전 남자 친구와 시간을 보내니 묘한 감회가 들긴 했다. 김선오의 말대로 좋았던 한때가 하나둘씩 생각나기도 했다.
하나, 딱 거기까지였다. 단여명은 이런저런 연애를 해왔다. 상대방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준 적도 있었고, 감정이 격해져 주먹질까지도 해봤다. 그를 바탕으로 하나 깨달은 것이 있었다. 한번 파투 난 관계는 절대 예전처럼 돌아갈 수 없다.
거리를 두다가 다시 뜻이 맞으면 살을 섞는 사이로 돌아가도 괜찮고. 그게 아니면 이대로 애매하게 멀어지는 쪽도 괜찮았다. 앞일이 어떻게 되든 간에 지금은 각자의 시간이 필요한 건 맞았다. 좋았던 기억에 구정물을 끼얹지 않으려면 말이다.
김선오와 거리를 두는 것을 제외하고, 일상은 변함없이 흘렀다. 최근엔 고등학교 동창들을 만나 술을 먹었다. 세상 돌아가는 얘기도 하고, 각자의 고충도 가벼운 푸념 조로 털어놓았다. 오늘은 틈틈이 자판을 두드려 조각 글도 썼다. 세상에 내보일지 모르는, 제목 없는 글이었지만.
밤이 되면 한 사람의 빈자리가 체감되곤 했다. 하지만 마음도 없는데 괜히 여지 주기 싫었다. 단여명은 제 아랫도리 사정이 급하다고 사람 마음을 갖고 노는 부류는 아니었다. 김선오에게 나쁜 사람으로 기억되기도 싫었고.
정리하는 것까지는 아직 이르다. 갑자기 연락을 끊으면 상대가 당황스러워할 테니까. 시간을 두고 천천히 멀어지는 게 맞을 것 같은데…. 김선오가 그걸 받아들일지가 문제였다.
그렇게 깜깜한 시야 속, 생각을 정리하고 있던 도중이었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패스워드를 누르고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집 안에 있을 때면 단여명은 시간개념을 잊고 살았다. 어느새 권호영이 집으로 돌아올 시간이 다 되었나 보다.
단여명은 얼굴에 책을 덮은 그대로 미동 없이 누워 있었다. 알은체하기 귀찮았던 이유가 10%의 지분을 차지했다. 그리고 알 수 없는 긴장감이 불쾌해서. 그 불쾌감이 90%를 독차지했다.
사람은 지성의 동물이었다. 머리로는 권호영을 의식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았다. 그러나 우연히 보았던 그의 하반신이 뇌리에 뚜렷이 박혀서 잊히지 않았다.
아직도 예상치 못한 순간에 그가 나타나면 몸이 빳빳하게 굳고, 숨을 뱉는 것 하나하나가 부자연스러워졌다. 물론 단여명은 그런 순간마다 끊임없이 자책했고, 그게 오늘이라고 해서 달라지지 않았다.
그래도 초반보다는 양반이었다. 옆에 있다는 이유만으로 아랫도리에 피가 몰리진 않았으니까. 그를 남성기로 보지 않고, 사람으로 보려고 연습 중인 요즘이었다.
“형.”
톡톡. 소파 위를 손가락으로 두드리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그에 옆으로 흘러가던 정신이 제자리에 박혔다. 그는 제가 잠들었다고 생각했는지 깨우려는 행동을 보였다.
…얘가 웬일로 먼저 말을 걸지. 단여명은 얼굴을 가리고 있던 책을 내려 눈만 내놓았다. 갑자기 닥친 빛에 눈살이 얕게 찡그려졌다. 초점이 또렷이 잡힌 뒤에야 상대의 모습이 눈에 담겼다. 오늘도 시골집 토종개같이 덥수룩한 머리를 한 권호영이 제 앞에 서 있었다.
“아직 저녁 전이죠?”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려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권호영의 손엔 하얀색 비닐봉지가 들려 있었다. 장을 보고 왔는지 봉지엔 대형 마트의 상호가 박혀 있었다.
집밥을 먹겠다고 호언장담했던 단여명의 패기는 알다시피 첫날에 막을 내렸다. 그다음 날부턴 평소처럼 배달시키거나, 바깥 음식을 포장해 와서 끼니를 때웠다. 권호영과 함께 집에 있는 날엔 그와 음식을 나눠 먹었고, 남는 음식은 냉장고에 보관해 놨다가 다음 날 먹거나 아니면 버리거나. 그런 식이었다.
그런 단여명과 달리 권호영은 가끔가다 부엌을 썼다. 사용한 흔적도 없이 깔끔하게 정리해 놔서 냉장고를 열 때만 어렴풋이 눈치채곤 했다. 제가 사 오지 않았던 반찬이라든가, 낯선 음식들이 냉장고의 한편을 차지하고 있었다.
저녁은 주로 바깥에서 해결하는 것 같던데. 식자재가 담긴 장바구니를 보아 오늘 저녁은 집에서 해결할 요량인 듯했다.
“…뭐 사 왔어?”
“냉장고에 뭐가 없어서요. 그냥 이것저것 사 왔어요.”
아아, 하며 단여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눈치 없이 계속 누워 있기는 그래, 상체를 살짝 세우니 권호영이 다시 입을 열었다.
“계속 받기만 하긴 그래서.”
무덤덤한 목소리부터 그 목소리에 담긴 내용까지 참 권호영답다 싶었다. 단여명은 소파 아래로 발을 내렸다. 재료는 그가 사 왔으니 요리는 자신이 하는 게 수지타산에 맞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래? 그럼 내가 할….”
“제가 할게요.”
일어서려는 몸을 도로 눕히는 듯한 목소리였다. 얼핏 단호하게도 들려서 단여명은 의아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요리를 못하진 않아서요.”
…조금 다급해 보이는 것도 같고.
계속 받기만 해서 제게 뭘 해 줘야 된다는 부채 의식을 느끼나? 하긴, 괜찮다고 했음에도 집세를 냈던 권호영이다. 단여명은 알겠다며 대수롭지 않게 수긍했다. 그쪽이 마음이 편하다면야 뭘 어떻게 하든지 상관없었다.
그리고 잠시 뒤, 단여명은 얼떨떨한 눈으로 식탁 위를 바라보았다.
“…입은 두 갠데 뭘 이렇게 많이 차렸어.”
오일 파스타에서 따끈한 김이 피어올랐다. 그 앞의 접시엔 토마토소스를 넣고 끓인 에그 인 헬과 두껍게 썬 바게트가 놓였다. 거기까지도 양이 많다고 생각했는데, 권호영은 또 다른 접시를 식탁에 내려놓았다. 빛깔이 어두운 걸 빼면 리소토처럼 생긴 요리였다.
너무 본격적이라서 의외를 넘어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그만큼 부담감을 느꼈었나, 싶기도 하고.
‘…어쩌지.’
어울리는 듯 어울리지 않는 그의 모습에 순간 웃음이 나올 뻔했다. 도마질하는 소리를 들었을 때부터 부엌일을 많이 해봤나, 생각했는데. 요리 경험이 풍부한 게 맞았나 보다.
만약 단여명이 여자였다면 오해하고도 남을 상황이었다. 정성스럽고도 분위기 있는 식탁이었으니까. 그러나 레스토랑의 한 장면을 본떠 만들어낸 듯한 권호영은 정작 태평한 낯이었다.
저기다 새하얀 앞치마만 맸다면 완벽했을 텐데. 요새 미디어에서 저런 남자가 인기지 않은가. 시댁 식구들이 팔 벌려 환영하는, 곰 같은 새신랑으로 제격이었다.
“손이 크네.”
“……? 손이요?”
권호영은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은 눈치였다. 이 손? 그는 제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그게 조금 생뚱맞아 보여 단여명은 결국 짤막한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리 한국말을 잘한다고 해도 외국에서 살다 온 애였다. 그에겐 너무 어려운 말이었나 보다. 뜻을 설명해 줄까 하다가 단여명은 아무것도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다. 실생활에서 자주 쓰는 표현도 아닌데, 괜히 참견질했다가 그가 또 털을 세우면 곤란했다.
“맛있다.”
자신이 첫날 요리라고 내민 볶음밥이 민망할 만큼.
“진짜 맛있는데?”
단여명은 포크로 파스타 면을 말아 재차 입안으로 넣었다. 남자 둘이 먹기엔 껄끄러운 인상이 강한 음식이었다. 그러나 두 사람의 사이가 워낙 건조한 탓일까, 식탁에는 어떤 기류도 흐르지 않았다.
“어떻게 요리할 생각을 했대.”
“계속 밖에 음식만 먹으니까 물리더라고요.”
권호영이 별거 아니란 투로 답했다. 그리고 그는 절대 양이 많다고 생각하지 않는 눈치였다. 잘 먹는 편이란 걸 알았지만, 이 정도까지인 줄 몰랐다. 밖에서 스트레스 받을 일이라도 있었나 보지. 단여명은 그리 생각하고 넘겼다.
“…너 할 거 없으면 요리사 해도 되겠다.”
배가 고픈 것도 아니었는데, 음식이 절로 들어갔다. 특히 바게트 위에 소스가 묻은 수란을 얹어 먹는 게 환상이었다. 단여명은 곧 말없이 식사에 몰두하기 시작했다. 음식이 혓바닥 위에서 부드럽게 녹았다.
“책을 쓰신다고요?”
낮은 목소리가 울린 건 어느 순간이었다. 단여명은 입술을 오물거리며 눈을 끔뻑였다. …얘가 오늘 진짜 왜 이래? 밥을 차려 주질 않나, 자신에 대해서 궁금해하질 않나. 다른 사람이었으면 단순히 넘길 만했으나, 권호영이라서 의문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어머니한테 들었어요.”
“아, 응. 그렇지.”
“무슨 내용이에요?”
단여명은 조용히 음식을 씹으며 생각했다. 제가 무슨 책을 썼는지 굳이 떠벌릴 필요는 없겠지. 감성적인 문구를 자주 인용해 민망하기도 했고.
“알면 실망할 텐데….”
웃음기를 띤 순간, 휴대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화면을 확인한 단여명은 핸드폰을 뒤집어 놓고, 다시 시선을 앞으로 했다.
“그냥 사람 사는 얘기야.”
웅- 웅- 두 번의 진동음이 연달아 울렸다. 단여명은 개의치 않고 웃는 낯으로 말했다.
“우리 엄마가 아들 자랑이 심해서….”
웅- 웅- 웅-. 핸드폰이 계속해서 진동했다. 이번엔 전화인 것 같았다.
“네가 이해 좀 해줘.”
하아, 기어코 짜증스러운 한숨이 샜다. 아차 싶은 마음에 앞을 슬쩍 살폈지만, 다행히 권호영은 식사에 한창인 모습이었다.
단여명은 결국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문자 15통, 부재중 전화 3통. 쓸데없이 끈질기기도 했다. 단여명은 부재중이 뜬 액정을 보다가 메신저 내용을 확인했다.
[김선오: 오늘 밤엔 뭐 하는데]
[김선오: 나 회식 끝나면 만날까?]
[김선오: 여명아]
[김선오: 너 일할 때도 이렇게 연락 안 된 적 없었어]
[김선오: 형이 불안해서 그래]
읽음 표시가 뜨자마자 또 다른 메시지가 무섭게 도착했다. 마지막으로 온 메시지에 단박에 시선이 꽂혔다. 슬며시 눈썹을 구긴 단여명은 표정 관리를 해야겠다는 생각도 못 하고 사색에 잠겼다.
고민의 시간은 짧았다. 갑작스레 의자를 끄는 소음이 나자 권호영이 고개를 들었다.
“호영아. 미안한데… 나 잠깐 나갔다 와야 될 것 같아.”
드디어 얘랑 대화다운 대화 좀 나누나 싶었는데. 불청객은 언제나 유쾌하지 않지만, 이번만큼은 더욱 불쾌했다. 그것도 이처럼 갑작스러운 방문이면 더더욱. 하지만 정리할 게 남아 있는 사이니, 이참에 확실히 말해두는 편이 나을 것 같다는 판단이 섰다.
“진짜 미안. 10분이면 돼. 신경 쓰지 말고 먼저 먹고 있어.”
밥맛도 뚝 떨어진 참이었으니 망설일 건 없었다. 권호영은 어떻게 하든 상관없다는 눈치였다. 단여명은 미안하다고 의례적인 미소를 짓곤 겉옷을 걸쳤다. 현관문을 열자 찬바람이 피부를 감쌌다. 훈기가 돌던 집 안과 사뭇 다른 온도였다.
“갑자기 찾아오지 말랬잖아.”
집 앞, 구석진 골목이었다. 좁은 골목 어귀에 한 발짝 들어서자 발끝부터 어둠에 삼켜졌다. 전구가 나간 가로등 밑에 쭈그려 앉은 남자는 밤그림자에 가려져 있었다.
“…왜 연락 피하는데?”
김선오가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거리가 조금 가까워졌을 뿐인데, 담배 냄새와 독한 술 냄새가 함께 뒤섞여 풍겼다.
“갑자기 이러는 거 이상하잖아.”
훅, 마지막 연기를 내뿜은 그가 담배꽁초를 발밑에 버렸다. 사람 당황스럽게 바로 본론을 꺼낸다. 단여명은 잠시 침묵했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냈다.
“…바빴어.”
그쯤 연락을 피하면 알아들을 만도 한데. 눈치가 없는 건지, 아니면 알고서 이러는 건지. 사이좋게 담배나 피우면서 얘기하려고 했는데, 그는 자신을 기다리면서 다 피운 모양이었다.
단여명은 담뱃갑을 툭 쳐올려 담배 한 개비를 입에 물었다. 라이터를 꺼내 담뱃불을 붙이려던 순간 김선오가 돌연 탁! 소리가 나게 손을 쳐냈다. 꽤 거친 손놀림이었다. 손끼리 스치고 죄 없는 라이터가 발밑을 뒹굴었다. 예기치 못한 그의 행동에 어안이 벙벙해졌다. 뭐 하냐는 듯이 응시하자 형형한 눈동자가 이쪽을 노려봤다.
“일주일 내내 밤낮없이 바쁘셨다고.”
연락도 잘 안 될 만큼? 그리 묻는 목소리가 제법 날카로웠다. 습관적인 미소는 온데간데없이 그의 얼굴엔 살벌한 기운이 넘실댔다.
“…비꼬지 말지.”
단여명은 한층 가라앉은 눈으로 김선오를 직시했다. 술이 들어간 영향인지 평소보다 감정이 격해진 모습이다. 깊은 한숨을 내쉰 단여명은 최대한 조곤조곤하게 말했다.
“너야말로 갑자기 이러는 거 좀 당황스럽다. 내가 잠수 탄 것도 아니고, 왜 그렇게 화내는데.”
말 그대로였다. 일주일 전보다 연락의 빈도가 줄었고, 만남의 횟수가 적어진 것뿐이다. 마지막으로 연락했던 것도 불과 7시간 전이었다. 극단적으로 연을 끊은 것도 아닌데, 김선오는 과민반응을 보였다.
마지막 메시지에서 그는 만나 주지 않으면 집 안으로 쳐들어가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저와 연락이 닿지 않아 불안해하는 건 백번 양보해서 이해했다. 그러나 협박성이 느껴지는 메시지는 이해를 못 하는 걸 넘어서 열이 받았다.
권호영과 김선오가 마주쳤던 날, 자신은 같이 사는 사람이 생겼으니 집에 멋대로 찾아오지 말라고 당부했다. 권호영이 가까운 사람의 지인이니 조심해 달라고, 그 때문에 아웃팅의 위험이 있으니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도 이해해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지금, 김선오는 자기가 불안하다는 이유로 상대의 취약점을 이용해 먹었다.
“그래도 매일 만나던 사람한테 바빴다는 한마디로 때우는 건 예의가 아니지.”
“…….”
“넌 어떻게… 사람 쳐내는 방법도 달라진 게 없다.”
비뚜름한 웃음을 지은 김선오는 단여명에게 한 발 가까이 붙어 섰다. 단여명은 물러서지 않고 그저 바라보기만 했다. 술기운 때문일까, 짙은 눈동자가 해일에 휩쓸린 난파선처럼 울렁이듯 보였다.
“우리 좀 솔직해지자.”
“…….”
“너한테 마음 있는 거, 진작 눈치챘잖아.”
단여명은 슬며시 그 눈을 피했다. 기어코 저 말이 나오고 말았다. 그와 공방전을 벌일 게 벌써부터 피곤했다.
옛말에 고장난명이라고, 외손뼉은 소리를 울릴 수 없다는 말이 있다. 제가 아니라는데, 혼자서 뭘 더 하겠다고 이 난리를 피우는지 모르겠다. 교제했을 때와 다른 분위기를 분명 느꼈을 텐데. 솔직히 한편으로는 어처구니없기도 했다. 자기가 아쉬운 마당에 고개를 숙이지 못할망정 무섭게 따지고 드니.
“나랑 다시 만날 생각은 있어?”
단여명은 침묵으로 답했다. 그에 김선오의 눈빛이 한층 험악해졌다. 당장이라도 어깨를 붙들 것처럼 그는 거친 숨을 씨근덕거렸다.
“그럼 왜 애매하게 받아줬는데.”
그야 처음엔 저도 긴가민가했으니까. 권호영을 적대시하는 걸 느낀 뒤에서야 깊어진 마음을 알아챘다.
단여명은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태도로 임했다. 섹스 파트너. 그보다 진지한 관계로 발전할 생각이 없었으니까. 지금의 싸움 요인이 그를 대변했다. 뭔가 이상하게 흘러간다 싶어 이제라도 거리를 둬야겠다는 판단을 내렸다.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김선오의 마음이 더욱 깊어지기 전에, 그가 덜 상처받게끔 밀어낸 것이었다.
일방적인 관심을 드러낸 건 김선오였다. 옛 기억을 불러일으킨 것도 저쪽이었고. 자신은 먼저 보내온 연락에 조미료를 쳤을 뿐이고, 사적인 영역에 얽히지 않으려고 최소한의 노력이라도 보였다. 김선오는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모르겠지만.
“네가 어지간히 밝히는 건 알았는데,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사람 갖고 노니까 재밌어?”
“…뭐?”
“아니면 대체할 남자라도 생긴 건가?”
…듣자 듣자 하니까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어이가 없어 헛웃음이 터졌다. 밝힌다는 둥 갖고 놀았다는 둥 좋을 대로 떠드는 건 너그러이 받아줄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뒤를 바짝 따라붙은 얘기가 신경을 건드렸다.
김선오를 대체할 남자라. 자세한 언급은 없었지만 알 수 있었다. 김선오는 권호영을 말하고 있었다.
슬슬 험한 말을 참기가 힘들어졌다. 그렇다면 네가 무슨 상관이냐고 되레 따져 묻고 싶었다. 생각 머리 없이 구는 건 그에게 미안한 감정이 있어서 참아 줬다. 제가 남자 좆이 고파서 잘못 처신한 걸지도 몰랐다. 근데 이젠 말도 생각 머리 없이 하네.
“선오야.”
그리 부르니 김선오가 미간을 찌푸렸다. 평소엔 입에 담지 않았던 이름이다. 그런데 지금 상황에서 그의 이름을 부르니 낯설고 불안한 눈치였다.
“내가 한 번이라도 너랑 다시 만나고 싶다고 말한 적 있어?”
“…….”
“무슨 오해를 한 건지 모르겠는데….”
단여명은 가볍게 웃었다. 김선오가 농담할 때 자주 비치던 웃음이었고, 그가 꽤나 좋아하던 얼굴이었다.
“난 우리가 같은 마음인 줄 알았지.”
정말 유감이야. 그리 첨언하자 김선오가 베일 듯 날카롭게 조소했다. 차갑게 지은 그 웃음이 관계의 종지부를 알리는 것만 같았다. 씁쓸한 기분을 느낄 새는 없었다.
“목적은 내 몸이었다, 이거네. 쓰레기 같은 새끼가.”
비수 같은 목소리가 칼바람이 되어 귓전을 스쳤다. …이젠 욕까지 하네. 단여명은 내심 밀려드는 실망을 느꼈다. 볼 장 다 봤다고 생각해서인지, 술 처먹고 정작 자기가 개새끼가 된 건지.
“내가 침대에서 같이 뒹굴었던 놈은 딴 사람이었나 봐. 이제 와서 그렇게 말하긴 민망하지 않아?”
뭐, 지금으로선 둘 다 크게 상관없을 것 같았다.
“처음 만나자고 연락했을 때부터 정말 몰랐어?”
“단여명.”
“네가 솔직해지자며.”
그렇게 솔직한 거 좋아하더니 왜 꿀 먹은 벙어리가 됐어. 일일이 따지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단여명은 차분히 말을 늘어놓았다.
“알고 있었잖아, 너. 내가 한 번 자자고 불러낸 거.”
“…….”
“알면서 나온 건 너야. 그거 좋다고 덥석 문 것도 너고.”
성난 눈초리는 상대를 단번에 집어삼킬 것처럼 흉흉했다. 부들부들 경련하는 안면 근육이 정말 머리끝까지 화가 난 모양새였다.
“아, 잘 지내냐고 먼저 연락한 것도 선오였지, 아마?”
그러거나 말거나 단여명은 태연하게 입을 놀렸다. 말을 끝냄과 동시에 김선오가 작은 웃음을 터뜨렸다. 기어이 실성이라도 했는지 그는 머리를 쓸어 넘기며 웃었다. 그가 무슨 반응을 보이든 상관없었다. 단여명은 제 할 말을 이었다.
“그래, 뭐…. 만나자고 먼저 말한 쪽은 나니까. 그건 내 잘못이라고 치자.”
어차피 오늘 아니면 볼 사이도 아닌데.
“떡 치면서 생긴 일방적인 관심도 내 책임이라고 말할 거야?”
단여명은 부드러이 눈웃음쳤다. 나중에 억울하지나 않으려면 이 시간을 알차게 사용해야지. 김선오가 마련한 자리 아닌가. 정말 밥숟가락 내려놓고 달려온 가치가 있었다. 제가 순진한 치를 꼬여내 몸만 먹고 버린 개새끼가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모를 뻔했다.
김선오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조용히 분을 삭이듯 주위는 씨근거리는 숨소리만 울렸다. 단여명은 얌전히 상대의 말을 기다렸다.
“…너한텐 옛정이고 뭐고 없어?”
떨리는 숨을 들이켠 김선오가 가라앉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고작 한다는 말이 저건가. 단여명은 가볍게 대꾸했다.
“옛정이 있어서 뒹굴었겠지. 그렇게 정 없는 사람 아니야, 나.”
그 순간 거칠게 멱살이 붙잡혔다. 쿵! 담벼락에 뒤통수가 강하게 부딪히고 발끝이 아슬아슬하게 들렸다. 큭, 목이 졸린 듯 지저분한 신음이 입 밖으로 터졌다.
“씨발, 그냥 솔직하게 말해.”
난폭한 맹수 같은 눈이 가까이서 시선을 부딪쳤다. 으르렁대듯 성대를 긁는 목소리도 함께였다.
“사람 살살 약 올리지 말고 대놓고 말하라고, 여우 같은 새끼야.”
단여명은 보란 듯이 비웃음을 흘렸다. 대놓고 말했으면 과연 상처받지 않았을까? 지금도 갖은 지랄은 다 떨면서. 아예 썸으로 갈 때 ‘우리 썸 타러 갈래?’라고 묻지, 왜.
김선오는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분명히 넘었다. 판이 좁은 이쪽에서 몸뿐인 관계가 널리고 깔린 걸 모르지 않을 텐데. 대체 무슨 착각을 해서 혼자 마음을 키운 건지 모르겠다.
그걸 우회적으로 밀어내니 이제 와서 성을 낸다. 고작 일주일밖에 지나지 않은 이 시점에서. 옛날에 사귀었다는 관계성 탓일까, 이쪽도 같은 마음이로라 착각했을 그가 미련하고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너한텐 아무것도 아니었을지 몰라도 난….”
제가 이리 말한 것이 고통스러운 사람처럼 김선오는 도리어 안면을 일그러뜨렸다. 미친놈. 애절하게 읍소하는 것치곤 행동이 과격했다. 단여명은 서늘한 시선으로 상대를 눈에 담았다. 배려심도 없고, 성격도 급하고. 대책 없이 밀어붙이는 것도 예전이랑 똑같네.
그래, 이 사람의 이런 점을 싫어했다. 애초에 자신과 성격부터 성향까지 안 맞는 사람이었다. 솔직함을 핑계 삼아 상대의 밑바닥까지 들추려고 하는 그의 무례함이 싫었다. 솔직하게 말하면 화를 안 낼 것도 아니면서.
그건 헤어질 때도 마찬가지였다. 오색 포장지를 둘러 아름다운 이별로 각색하려는 자신과 정반대인 사람이었다. 떠나려는 제 몸을 붙잡고 그는 모든 것을 실토하게 만들었다. 네가 내 모든 걸 까발리려 드는 게 싫어. 무례하고 불쾌해. 그리 말하면 싸움이 날 게 뻔했으니 성벽이 안 맞는 걸 핑계 대고 이별을 고했다. 넌 변하지 않는구나. 구질구질한 사람.
부딪치는 눈동자에서 온갖 감정이 들끓었다. 그 시선을 피할 이유는 없었다. 한 대 칠 거면 치라지. 아예 경찰서까지 가면 그런 눈물겨운 사랑도 없겠네. 애초에 좋아하는 사람을 이리 험하게 다루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그가 남몰래 키운 사랑이 진정으로 가소로웠다.
“형.”
피식 실소를 뱉은 단여명이 낮게 뇌까렸다.
“진짜 없어 보여, 지금.”
순간 김선오의 눈가에 힘이 실렸다. 짓부릅뜬 눈에 벌건 실핏줄이 선연했다. 단여명은 티가 나지 않게 이를 악물었다. 그는 금방이라도 주먹을 날릴 태세였다.
찰나의 순간이었다. 얼굴에 그림자가 지는 것 같아서 반사적으로 속눈썹을 파르르 떠는데, 목을 조르던 손이 뜬금없이 떨어져 나갔다.
“컥…!”
단여명은 순간 숨통이 탁 트이는 감각에 마른기침을 뱉었다. 잠깐 새 멱살이 잡혔다고 시야가 다 어질어질했다.
“씨발…. 뭔데, 너.”
눈길을 드니 김선오가 욕을 씹으며 뒤를 주시하고 있었다. 단여명의 시선도 곧 같은 방향을 향했다. 목소리를 듣기 전까진 지나가는 사람이라고 착각했다.
“이건 누가 봐도….”
그러나 특유의 저음도.
“한쪽이 당하는 상황인데.”
김선오의 뒷덜미를 잡고 있는 어두컴컴한 인영도 차마 착각할 수가 없는 사람이었다. 남자는 밤중에 찾아온 저승사자처럼 김선오의 뒤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
권호영.
단여명은 소리 없이 그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단여명의 집에 하숙 중인 남자의 이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