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키스 키스 키스 [배우 AU]
※본편의 몰입을 방해할 수 있으니 주의해 주세요.
“또 곰이네.”
커피 컵을 노려보던 원재가 중얼거렸다. 기계적으로 씹고 있었던 샌드위치를 삼키고 나는 원재 쪽으로 몸을 기울였다.
“뭔데?”
“아, 이거요.”
원재가 가리킨 것은 커피 컵 홀더였다. 갈색 크라프트지 홀더의 가운데에 검은색 곰 모양 로고가 인쇄되어 있었다. 나는 피식 웃었다.
“귀엽네.”
촬영장에 못 보던 커피 차가 왔기에 누가 보낸 건가 했더니, 원재 팬들의 서포트였던 듯했다. 정작 촬영 때는 바빠서 마시지도 못했지만. 잡지 인터뷰를 하러 오는 길에 나도 하나 집어 온다는 게 깜빡했다.
“곰이랑 그만 엮이고 싶어요.”
컵에서 홀더를 벗겨 내면서 원재는 계속 투덜거렸다. 원재가 불만스러워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드라마에서 반달가슴곰 수인 역할을 맡은 원재는 최근 곰 관련 굿즈만 선물 받는다. 곰 로고가 인쇄된 컵 홀더 정도는 귀여운 축에 속한다. 언젠가 촬영장에 원재와 거의 같은 키의 반달가슴곰 인형이 선물로 들어온 적도 있었다. 마냥 귀엽게 볼 수만은 없는 게, 원재는 185센티미터가 넘는 장신이기 때문이다.
“드라마 끝날 때까지는 계속 엮여야 할걸. 봐, 나도 사자야.”
나야 딱히 불만은 없지만, 원재를 위해 일부러 맞장구를 쳐 주었다. 샌드위치 포장지에 붙은 스티커를 보여 주어도 원재의 표정은 어두웠다.
“사자는 멋있잖아요.”
“팬들이 보내 준 건데 곰이건 사자건 잔말 말고 먹어. 고마운 줄 알아야지.”
“네.”
금세 수긍한 원재가 빨대를 입에 물었다. 운동선수 출신이라 선배 대접은 참 잘 해 준다니까. 속으로 피식 웃으며 샌드위치를 마저 베어 물었다.
고등학교 때까지 유도 선수였다던 원재는 부상 때문에 꿈을 접은 뒤 연예계에 들어왔다고 했다. 단편 영화의 단역으로 데뷔한 뒤, 주로 대사가 별로 없는 무뚝뚝한 성격의 캐릭터나 운동선수 역만 맡았다. 원재가 본격적으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건 주인공을 짝사랑하는 조연을 맡으면서였다.
그 역이 지금 원재가 연기하는 곰 수인, ‘김원재’였다. 덩치 좋고 키 크고 선이 굵은 외모가 PD님과 작가님이 원하는 캐릭터와 딱 맞아떨어졌다나. 어찌나 싱크로가 좋았는지 작가님은 등장인물의 이름까지 원재와 똑같이 바꾸며 애정을 보였다. 그리고 마침내는 원재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후속편까지 제작하기에 이르렀다. 바로 우리가 찍는 이 드라마, 《곰은 달을 그린다》 말이다.
원재의 상대역 오디션을 보기 전, 나는 전작을 전부 챙겨 보았다. 원재의 연기력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다. 나도 모델 출신이라 연기 경력이 짧지만 원재는 더 심했다. 섬세한 감정 연기는 고사하고 대사를 뱉을 때의 발음도 발성도 별로였다.
하지만 신기하게 원재가 등장할 때마다 나는 화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애인이 있는 토끼 수인을 짝사랑하는 곰 수인의 서투른 고백이 원재의 어설픈 연기와 만나며 오히려 시너지를 일으킨 탓이었다. 나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닌 듯했다. 그랬으니 PD님이 후속편 제작을 결정했겠지. 귀와 꼬리를 전부 CG로 처리하기 때문에 제작비가 많이 드는 수인물인데도.
“사자라고 다 좋은 건 아니야. 나 이제 닭고기만 봐도 지긋지긋해.”
장난스레 말하자 원재가 피식거렸다.
우리가 찍는 드라마의 배경은 인간이 멸종한 뒤 동물, 정확히 말하자면 포유류가 수인이 된 세계다. 따라서 수인들이 섭취하는 고기는 수인이 되지 못한 어류, 조류 등에 한정되어 있다. 내 배역인 서은겸은 어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사자 수인이기에 내가 극 중에서 먹는 것은 조류뿐이다. 그마저도 광고를 넣은 치킨 업체 때문인지 거의 다 닭고기고.
초반에는 PPL용 샐러드를 그렇게 먹이더니 요새는 스테이크로 바뀌어서 치킨 스테이크만 계속 먹는다. 심지어 팬들의 서포트마저 그릴드 치킨 샌드위치라니. 질릴 수밖에 없다. 나는 일부러 착잡한 표정을 지으며 샌드위치를 마저 삼켰다.
“6개월 동안 닭고기만 먹어야 하는 줄 알았다면 오디션 안 봤을지도 몰라.”
“아, 안 돼요.”
“응?”
“선배님만큼 서은겸 역에 어울리는 배우는 세상에 없습니다.”
“내가? 과찬이네.”
물론 이렇게 귀여운 상대역이 있으니 6개월을 닭만 먹든 오리만 먹든 상관없지만. 농담으로 던진 말에 긴장했는지 원재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컵도 내려놓고 진지하게 나를 보는 모습이 마치 명령을 기다리는 대형견 같았다. 나는 싱긋 웃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그야 선배님은 서은겸처럼 멋있고, 잘생기셨으니까요.”
“그리고?”
“어, 저도 잘 챙겨 주시고요.”
“그리고? 더 없어?”
이 커다란 곰을 멍멍이처럼 길들이기까지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
원재와 편히 대화를 주고받게 된 건 얼마 되지 않았다. 원재는 드라마 제작 초기부터 엄청나게 과묵했다. 카메라가 돌지 않으면 누구와도 말을 섞으려 하지 않았고, 연인 역인 내게도 항상 깍듯한 존댓말을 쓰며 거리를 두었다. 심성이 나쁜 탓은 아니었다. 어렵게 따낸 첫 주연에다 성애 묘사가 들어가는 19금 로맨스물이라 긴장했으리라.
그래도 파트너인데 자꾸 피하니 곤란했다. 삐걱거리는 관계는 커플 연기 때 고스란히 드러났다. 2회에 등장하는 첫 베드 신 촬영에서 원재는 수십 번 NG를 냈다. 덜덜 떠는 몸이 카메라에 다 잡힐 정도였다.
하는 수 없이 촬영을 중단하고 둘이서 감정 좀 잡고 오겠다며 대기실로 원재를 데려갔다. 원재는 나를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그저 ‘죄송합니다’만 반복하며 허리를 숙였다. 원재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그 순간 치솟는 입꼬리를 단속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잔뜩 주눅이 들어서는 어쩔 줄을 모르는 덩치 큰 남자가 왜 그리 귀엽던지.
그날부터 나는 현실에서도, 드라마 속에서도 원재를 졸졸 따라다녔다. 어색해하는 원재를 붙들고 촬영장에서건 대기실에서건 열심히 들이댔다. 명함이 불타도, 그 어떤 거절 멘트를 들어도 포기하지 않고 대시했던 서은겸처럼. 그 덕에 이제는 제법 화기애애하게 대화하는 사이가 되었다.
“속마음이 잘 안 보이는 것도 서은겸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그런 평은 좀 억울하다. 나는 언제나 네 앞에서는 진심인데.”
“잘 모르겠습니다.”
“모르는 거 다 알려 줄 테니까 촬영 끝나고 술이나 한잔하자니까.”
“자꾸 사석에서 만나자고 하시는 이유도 잘 모르겠습니다.”
그렇다고 우리가 친구처럼 가까워진 것은 아니다. 나는 아직도 사적인 만남을 허락받지 못했다. 촬영과 관계없는 대화조차도. 고집스럽게 대꾸한 원재가 나를 외면했다.
대기실은 갑작스레 조용해졌다. 원재도 나도 섣불리 입을 열지 않는 사이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반쯤 녹은 얼음이 컵 안에서 무너져 내리는 소리였다. 나는 컵 홀더로 시선을 옮겼다. 갈색 종이 위에서 검은 곰이 수줍게 웃고 있었다.
“나는 사자보다 곰이 더 좋아. 귀엽잖아. 그래서 너랑 잘 어울려.”
“곰은 귀엽지만 저는 귀엽지 않아요.”
“너도 귀여워.”
“…….”
“내 눈에는 저 곰보다 네가 백배는 더 귀여운데?”
원재가 아랫입술을 잘근거렸다.
“그만하세요.”
“왜?”
나는 원재에게 바짝 붙어 앉았다. 도망치려는 원재의 손을 쥐고 끌어당겼다.
“진심이야.”
“자, 잠깐만요. 선배님.”
“귀여워, 김원재.”
일부러 이름을 부른 효과가 있었다. 원재는 그 이상 달아나지 못하고 얼어붙었다. 원재의 눈을 들여다보면서, 나는 대본 속 서은겸이 그랬듯 붙잡은 손등 위에 입을 맞추었다.
“항상 네가 귀엽다고 생각했어.”
“…….”
원재가 눈을 질끈 감았다. 그 작은 몸짓만으로도 속이 끓었다. 감은 눈꺼풀 위에 입을 맞추고 싶었다. 귀를 만지작거리며 볼을 쓰다듬고 싶었다. 내가 서은겸으로서 원재에게 퍼부었던 온갖 애무들이 떠오르자 아랫도리가 뻐근해졌다.
“지금도 키스하고 싶을 만큼…….”
“선배님.”
딱딱한 목소리가 내 말을 잘랐다.
“하지 마세요.”
“왜?”
“대본에 그런 농담은 없었던 거로 기억합니다.”
“……너야말로 대본에도 없는 철벽이잖아, 그거.”
“배역 몰입도 좋지만, 촬영도 아닌데 그러시는 거 솔직히 부담스럽습니다.”
길게 숨을 내쉰 원재가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갈 곳을 잃고 흔들리던 시선이 내게 고정되었다.
“저도 선배님처럼 이 드라마를 좋아하고, 촬영에도 진지하게 임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선배님은 가끔 카메라가 없는데도 너무…….”
“너무?”
원재는 더 말을 잇지 않았다. 묵묵히 손을 빼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실례하겠습니다.”
짧은 인사와 함께 대기실의 문이 닫혔다. 원재의 온기가 사라진 손안이 허전했다. 나는 멍하니 텅 빈 손바닥을 들여다보았다.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그렇게 도망친 주제에, 막상 인터뷰가 시작되자 원재는 내 옆자리를 지켰다.
“첫 주연이라 떨리고 모르는 것도 많은데 선배님이 잘 이끌어 주셔서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드라마 흥행의 1등 공신으로 나를 추켜세우며 부드럽게 웃기까지 했다. 이래 놓고 단둘이 남겨지면 철벽을 친다 이거지.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인터뷰는 대체적으로 무난했다. 항상 들어오던 질문―과감한 노출이 힘들지 않은지? 제일 재미있었던 촬영장 에피소드가 있다면? 최근 팬들의 서포트가 화제인데 어떻게 생각하는지?―이 똑같이 들어왔다. 덕분에 그다지 머리 굴릴 일 없이 답할 수 있었다.
문제의 그 질문 역시 여러 매체를 통해 줄기차게 들었던 것이었다.
“두 분의 커플 케미도 빼놓을 수 없겠죠. 특히 요새 눈빛 주고받으시는 게 실제 연인 같다는 느낌마저 드는데요.”
“앗, 들켰네요. 제가 워낙에 원재를 좋아해서.”
“실제로도 사이가 좋으세요?”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보이는 것만큼 친합니다’라거나, ‘이젠 촬영장을 벗어나도 파트너 같아요’ 같은 입에 발린 말들. 하지만 이번만큼은 진실을 말하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 원재가 원하는 대로, 내가 배역 몰입을 하지 않는다는 증거를 보여 주겠다고.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아뇨. 사적으로는 연락도 안 하고, 그다지 안 친해요.”
“어머, 정말요?”
“저희 친해 보여도 철저한 비즈니스 관계라서요. 솔직히 안 친하니까 고수위 러브 신도 찍을 수 있어요. 키스 신이나 베드 신에서 감정 들어가면 힘들거든요. 모든 건 다 위대한 입금의 힘입니다.”
“충격 발언인데요.”
“아, 이건 좀 위험하다. 편집해 주실 거죠? 다시 다시. 저희 친해요.”
농담을 던지며 나는 팔을 뻗었다. 친근한 척 원재의 어깨를 끌어안으려던 계획은 보기 좋게 실패했다. 원재는 상체를 옆으로 젖혀서 내 팔을 피했다.
“김원재 씨는 그렇게 생각 안 하셨나 봐요. 상처받으셨나 보다. 빨리 사과하세요.”
“아뇨.”
기자가 우스갯소리를 섞어 분위기를 바꾸려 했지만 소용없었다. 원재는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답했다.
“안 친한 거 맞습니다.”
인터뷰가 끝날 때까지 원재는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다. 그전까지 성실하게 임했던 태도는 온데간데없었다. 오로지 단답형으로만 돌아오는 답변 때문에 기자가 당황할 정도였다.
인터뷰를 마치고 주위를 정리하는 틈을 타 나는 원재에게 다가갔다.
“왜 그래?”
“저는 선배님 같은 분이 정말 싫습니다.”
“뭐?”
“다시는 저한테 친한 척하지 마세요.”
명령을 기다리는 대형견은 어디 갔는지, 시커먼 곰이 나를 사납게 노려보며 으르렁거렸다. 그리 낯설지 않은 감정이 원재의 얼굴에 떠올라 있었다. 원재가 내 어깨를 밀치고 가 버렸을 때야 나는 그 감정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그건 경멸이었다. 첫 만남부터 원나잇을 하자는 제안을 들었을 때, 서은겸에게 애인이 있다고 착각했을 때 원재가 보냈던 경멸의 눈빛.
너는 어디까지 나를 밀어낼 생각일까.
“……너야말로 배역 몰입 좀 그만해, 김원재.”
드라마에서도 현실에서도 사라지지 않는 철벽은 까마득히 높았다. 아무리 발돋움해도 끝에 손이 닿지 않을 만큼.
원재의 철벽은 예상보다 단단했다.
인터뷰 날 이후, 원재는 간단한 인사 외에는 말을 섞으려 하지 않았다. 촬영이 끝나면 도망치듯 돌아갔다. 카메라 앞에서조차 나와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마치 낯을 가리던 초기로 돌아간 것 같았다.
물론 원재가 피하는 사람은 나 혼자였다. 원재는 스태프들과는 거리낌 없이 이야기를 나누었다. 진지한 표정으로 질문을 던지고, 가끔은 쑥스러운 미소를 짓기도 했다.
내게도 그런 얼굴을 보여 달라고 하고 싶었다. 마음만 먹으면 내 힘으로 그렇게 만들 수 있었다. 닫힌 문을 강제로 여는 방법이 있으니까. 내가 가진 위계로 내리누르는 것. 선배한테 그따위 태도를 보일 거냐고 화를 내면 고지식한 원재는 분명 깍듯이 사과하고 내 말을 따를 것이었다.
하지만 그건 싫었다. 나는 원재 스스로 문을 열고 벽 안으로 안내하기를 바랐다.
포기하지 않고 문을 두드리는 사이 야속한 시간은 잘도 흘러갔다. 누구도 우리 둘 사이의 냉랭한 공기를 눈치채지 못했다. 드라마 속 원재의 발정기가 끝나면서 한동안은 베드 신 촬영도 없었다. 원재는 서서히 서은겸에게 마음을 열어 가는 드라마 속 원재의 미묘한 감정을 그럴듯하게 연기했다. 현실에서 내게 철벽을 치는 사람이라곤 보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래서일까. 오랜만에 찍게 된 러브 신이 설레지 않았다.
‘원재 이거 괜찮으려나.’
빈 대기실에 앉아서 몇 번이고 확인한 대본을 넘겨 보았다. 서은겸의 집 세트에서 노닥거리는 두 남자. 몇 마디 대사 이후 키스. 자세를 바꿔 또 한 번 키스. 두 번 다 가벼운 입맞춤이 아니라 전희에 가까운 끈적한 키스였다. 그리고 이어지는 펠라까지.
‘싫어할 텐데.’
대사도 걱정스러웠다. 키스 직전 내가 원재에게 던지는 말이 하필 ‘귀여워’였다. 얼굴을 찌푸릴 원재가 상상되었다. 나야 얼마든지 진심을 다해 말할 수 있지만. 원재는 듣고 싶어 하지 않을 텐데.
“형, 커피 사 왔어요.”
가벼운 노크 소리가 고민을 깨웠다. 대기실로 들어선 매니저가 커피 캐리어를 내밀었다. 고개를 까닥여 고맙다는 인사를 보낸 뒤 컵을 받아 들었다.
시원한 아메리카노를 한 입 마시자 한탄이 절로 튀어나왔다.
“네가 보기에는 나 어떠냐? 별로야?”
“네?”
“나 정도면 잘생겼잖아. 그렇지?”
“형, 그런 소리 하면 망언이라고 욕먹어요. 연기력이나 인지도는 그저 그래도 외모는 연예계 탑급이면서.”
“칭찬이 아니라 비꼬는 거 같은데?”
“헤헤.”
매니저의 뒤통수를 때리는 시늉을 하면서 나는 한 모금 더 커피를 마셨다.
“나 성격도 괜찮잖아.”
“형 정도면 무난하죠. 제가 형 매니저라서 하는 소리는 아니고요. 이 업계에 워낙 또라이가 많잖아요.”
“아, 그러니까 많이 괜찮은 건 아니고 그냥 또라이는 아닌 수준이다?”
“마음대로 생각하세요. 그건 왜 물으시는데요.”
매니저의 평가를 정리하는 데 커피가 한 모금 더 필요했다. 외모 훌륭함. 성격 무난함. 다소 과대평가된 면이 있겠지만, 그래도 평균 이상은 된다는 뜻 아닌가.
그런데. 그런데 왜.
“근데 원재는 왜 나를 안 좋아하지?”
“예?”
“원재 말이야. 이상할 정도로 나를 피해.”
“그냥 낯가림하는 거 아니에요?”
“아냐. 피하는 게 맞아. 날 싫어한댔어.”
“그분이 그런 말을 했다고요?”
“응. 나 같은 사람 싫다더라. 친하게 지내려 해도 부담스럽대.”
“뭐 미움 살 일 하셨어요? 그분 사교적이지는 않아도 막 사람 싫어하고 그럴 분은 아닌 것 같던데.”
“미움 살 일…….”
글쎄. 뭐가 문제였을까. 치근덕대는 게 귀찮았을까. 억지로 따라다닌 것도? 그렇게 치자면 한두 가지가 아닐 것 같은데. 내 딴에는 잘 지내려고 했던 노력이 전부 원재의 미움을 살 일이었을까.
매니저가 눈을 껌뻑거렸다.
“설마 형, 김원재 씨하고 진지하게 뭐 있는 건 아니죠? 형 지금 스캔들 터지면 큰일 나요. 안 그래도 회사에서 이 드라마 싫어하시는데.”
쓸데없이 눈치만 빨라서는. 나는 자못 심각한 얼굴을 하며 대본을 집어 들었다.
“아니야. 스캔들은 무슨. 연기가 걱정되니까 그렇지. 이대로는 오래 못 갈 거야. 오늘 촬영도 지연될 것 같고.”
“그 정도예요?”
“정신력으로 버티는 것도 한계가 있잖아. 아무리 연기라도 싫어하는 사람과 키스하고 한 침대에 누운다고 생각해 봐.”
“와, 끔찍하네요.”
매니저의 입에서 튀어나온 표현이 괜스레 착잡했다. 그래, 원재는 나와의 러브 신이 끔찍하겠지. 한숨을 내쉬어도 갑갑한 가슴이 풀리지 않았다.
“PD님한테는 미안하지만 빨리 끝나면 좋겠어. 그래야 편해질 것 같아.”
“어, 형.”
“나도 원재하고 연기하기 부담스러워. 처음에는 좋았는데, 이제는 서은겸 역할이 그다지 즐겁지도 않고. PD님한테 앞으로 베드 신 빼 달라고 하면 혼날까?”
당장 오늘 할 키스부터 걱정인데 베드 신은 어떻게 연기해야 할지. 몇 번이고 확인한 오늘 분량을 다시 훑었다. 할 수 있을까. 나를 싫어하는 걸 뻔히 아는데. 원재에게 연인으로서 키스할 수 있을까.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서은겸이었다면, 원재도 조금은 편했을까.
“처음부터 미스 캐스팅이었을지도 모르지.”
“형, 형.”
갑자기 대본이 위아래로 요동쳤다. 매니저가 내 팔을 붙잡고 흔들어 댄 탓이었다. 멀미가 날 것 같아서 고개를 들었다.
“왜.”
“저쪽요.”
나는 매니저가 가리킨 곳을 돌아보았다. 반쯤 열린 대기실 문 앞에 원재가 서 있었다. 양손에 커피 컵을 든 채였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도, 꽉 깨문 아랫입술도 괴로워 보였다.
매니저가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안녕하세요.”
“……죄송합니다.”
매니저에게 커피를 내밀고 원재는 황급히 몸을 돌렸다. 커다란 뒷모습이 금세 문밖으로 사라졌다.
“어떡해요, 다 들었나 본데. 아, 이건 또 왜 이래.”
컵 홀더를 벗겨 내며 매니저가 투덜거렸다. 갈색 종이는 흘러넘친 커피로 젖어 있었다. 가운데에 그려진 검은 곰의 눈가에 얼룩이 졌다.
커피가 넘칠 정도로 덜덜 떨면서 내 이야기를 들었을 원재를 떠올리자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잠깐만.”
나는 벌떡 일어나 대기실을 나섰다. 다행히 복도 끝으로 사라지는 원재를 발견할 수 있었다. 걸음을 빨리해 뒤를 쫓았다. 원재가 모습을 감춘 곳은 화장실이었다. 안으로 들어서자 세면대에서 손을 씻던 스태프가 알은체를 해 왔다. 그에게 대충 인사를 건네며 나는 화장실을 둘러보았다. 아예 화장실 칸 안으로 들어갔는지 원재는 보이지 않았다.
하나씩 두드려 볼 필요는 없었다. 닫혀 있는 칸은 하나뿐이었다. 나는 닫힌 문 앞에 가서 섰다.
“원재야.”
“가세요.”
“원재야. 열어 봐.”
“지금은 선배님 보고 싶지 않습니다.”
“열어 보라니까.”
“제발 가시라고요!”
비명처럼 터져 나온 고함이 젖어 있었다. 어느새 다가온 스태프가 소리 없이 입만 벙긋거리며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그의 표정이 심각했다.
일을 더 키울 수 없었다. 조용히 스태프를 내보낸 뒤 숨을 골랐다. 열어 줄 때까지 마냥 기다릴 때가 아니었다. 원재에게 속으로 사과하며 나는 내가 낼 수 있는 마지막 카드를 꺼냈다.
“김원재. 선배 말이 말 같지 않아?”
“…….”
“열어.”
거짓말처럼 문이 열렸다. 나는 얼른 칸 안으로 들어가 문을 잠갔다. 원재는 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있었다. 손가락 아래로 드러난 얼굴이 온통 새빨갰다. 볼에는 급히 닦은 듯한 눈물 자국이 보였다.
“왜 울어.”
굵은 팔을 붙들고 아래로 내리려 했지만 원재는 힘을 주고 버텼다. 다시 선배의 권위를 들먹일까 하다가 내버려 두었다. 그 대신 어깻등을 쓰다듬자 원재가 흠칫 몸을 떨었다.
“……답하기 싫습니다.”
“화났어?”
“…….”
“나 없는 얘기 한 거 아니다. 어디부터 들었는지 모르겠는데, 응. 다 맞는 말이야. 이제는 너하고 촬영하는 거 힘들어. 빨리 종방했으면 좋겠어. 너도 싫어하는 사람하고 같이 연기하는 거 부담스럽잖아.”
반응이 돌아올까 싶어 일부러 직설적으로 말해도 허사였다. 원재는 입을 꾹 다물었다. 말이 통하나 싶더니, 다시 들어선 벽이 답답했다.
“나라고 연인 역한테 미움받는 게 기분 좋을 거 같아?”
“…….”
“나는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다. 김원재. 뭐라도 얘기 좀 해 봐. 날 싫어한다더니, 오늘 같은 태도는 또 뭔데. 친한 척하지 말라면서. 대체 뭐가 불만이야.”
원재는 답하지 않고 입술만 잘근거렸다. 얼굴을 가린 손을 내리지도 않았다. 이젠 말조차 섞기 싫다는 건가. 더 밀어붙이려다가 나는 물러섰다. 좁은 화장실 칸의 벽이 등에 닿자 내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는지가 실감 났다.
내게서 도망쳐 울고 있는 원재와, 강제로 문을 열고 들어와서 대답을 강요하는 나.
이건 내가 몇 번이고 상상했던 최악의 상황이었다.
“알았어.”
나는 한숨을 쉬었다.
“네가 원하는 대로 해 줄게. 다시는 너한테 신경 안 쓸 테니까 걱정하지 마.”
“…….”
“러브 신은 되도록 빼 달라고 내가 PD님한테 얘기해 볼게. 날 싫어하는 건 상관없는데, 촬영에는 지장 없도록 하자. 알았지?”
긴장으로 단단하게 굳은 어깨를 툭툭 치고, 나는 몸을 틀었다.
“먼저 간다.”
“선배님.”
그제야 굳게 다물렸던 입이 열렸다. 문의 잠금장치를 풀자 원재는 나를 붙잡았다.
“선배님. 잠깐만요.”
“할 말 있으면 나중에 얘기하자.”
“선배님.”
“놔.”
“그게 아니에요.”
“뭐가 아니야. 네가 나가라며.”
내 팔을 붙든 원재의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충분히 뿌리치고 나갈 수 있었다. 독한 말로 몰아세우거나 비키라고 명령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나를 붙잡느라 원재가 얼굴을 가린 손을 내렸기 때문이었다.
붉게 물든 눈가를 보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눈시울에 맺힌 눈물을 닦아 주고 싶은 마음이 절반, 우는 모습을 더 감상하고 싶은 마음이 절반이었다. 둘 중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나는 원재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게 아니라. 정말 그런 게 아니고…….”
한참 입술을 달싹거리다가 원재가 말을 이었다.
“선배님은 항상 저한테 잘해 주시잖아요. 그래서 자꾸 착각하게 되는 게 싫었습니다.”
“무슨 착각?”
딱히 추궁한 게 아닌데도, 내 되물음이 무서웠던 걸까. 원재의 눈꼬리에서 새로운 눈물이 맺혔다.
“촬영이 아닐 때도, 저를…… 좋아해 주실 거라고요.”
넓은 어깨를 들썩이며 원재가 울음을 참았다.
“선배님이 귀엽다고 하는 사람은 제가 아닌 드라마 속의 원재일 텐데. 그런데도 두근거리니까 부끄럽고 한심해서, 그래서 싫었어요. 선배님은…… 저와는 비즈니스 관계라고 생각하시는데. ……저를 상대로 배역 연습을 하시는 것뿐이잖아요.”
“…….”
“착각하는 제가 나쁜데 자꾸만 선배님을 원망하게 되니까, 그러니까 그냥, 저 좀 내버려 두세요. 더는 싫습니다. 이런 거 더는 싫, 읍.”
울먹이는 원재를 끌어안고 입을 겹쳤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내게 사랑받고 싶어 우는 남자가 귀여워서, 가만히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어느 촬영보다도 최선을 다했던 긴 키스가 끝난 뒤, 나는 천천히 입술을 떼었다. 원재의 눈에는 여전히 눈물이 고여 있었다. 젖은 눈가를 손가락으로 닦으며 속삭였다.
“이러면 될까?”
“…….”
“촬영이 아닐 때도 네게 이렇게 키스하면 될까? 그러면 나를 믿어 줄래?”
“아니…….”
“원재야.”
나는 양손으로 원재의 볼을 감쌌다.
“너하고 찍는 베드 신이 왜 힘든지 알아?”
인터뷰 때 내 진심을 은근슬쩍 섞었는데도 눈치 없는 이 곰은 아무래도 알아듣지 못했나 보다.
“진짜로 널 안고 싶은데, 카메라 앞이라 그럴 수가 없으니까. 흥분하지 않으려 꾹꾹 참으면서 흥분한 척 연기하기가 힘들어.”
“…….”
“배역 몰입이 아니야. 내가 사심을 담아서 연기했던 거야.”
원재는 몰랐겠지만, 나는 처음부터 원재를 노리고 서은겸 역을 따냈다.
“나는 네 연인이 되고 싶어서 서은겸이 됐어.”
원재가 출연한 전작을 보고 첫눈에 반했다. 화면 속 원재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서투르지만 진지하게 사랑을 고백하는 모습을 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기획사에서 반대하는데도 꿋꿋이 원재의 상대역 오디션을 보러 갔다.
‘고수위 로맨스? 미쳤어? 노출은 어쩌고? 한번 그런 작품 찍으면 이미지 평생 가는 거 몰라?’
합격 통지를 받아 오자 사장님이 길길이 날뛰었지만, 끝까지 내 고집을 꺾지 않았다. 누구에게도 원재의 상대역을 넘길 수 없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기획사에서 말한 그 이유 때문에 캐스팅 제의를 받은 배우들이 전부 거절했다고 한다. 내가 참여한 오디션 역시 보러 온 사람이 적었다. 190센티미터가 넘는 훤칠한 키, 탄탄한 근육을 지닌 몸, 거리를 걸으면 누구나 돌아보게 되는 미형의 얼굴, 그리고 곰처럼 커다란 남자를 진심으로 원하는 열정을 갖춘 이는 흔치 않으니까.
원재가 말한 대로 서은겸 역은 나 아니면 다른 누구도 할 수 없었다. 그건 처음부터 내 자리였다.
아직도 기억한다. 대본 리딩을 하러 가기 전날. 나는 내 첫 번째 대사를 수백 번 연습했다.
잘 잤어요?
부드럽게 원재의 잠을 깨우는 짧은 한마디. 원재와 내가 처음으로 나누는 대화. 이 말을 들으면 원재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놀랄까. 당황할까. 상상만으로도 즐거웠다.
처음 합을 맞춰 보았던 대본 리딩 날, 내내 무표정했던 현실의 원재는 내 대사를 듣고 빙그레 웃었다. 나중에서야 그 이유를 들었다.
“그때는 서은겸과 김원재가 아직 초면인 사이잖아요. 그런데도 그렇게 다정하게 깨워 주면, 사귀고 난 뒤에는 얼마나 달달할까 싶었어요.”
그런 사소한 감동이 좋았다. 서툴러도 자기 배역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좋았고, 항상 선배님이라고 부르면서 파트너 역인 나를 의지하는 것도 좋았다. 그래서 기다렸다. 조금씩 서은겸에게 마음을 열어 가는 드라마 속의 원재처럼, 내가 끈기 있게 기다리면 언젠가 원재도 다가와 줄 거라고 생각했다.
장난 속에 잘 숨겼다고 생각한 사심을 다 들켰다니. 배우 실격이다.
“진지하게 연기하는 너를 모욕하고 싶지 않아서 가벼운 척했어. 그래도 러브 신 촬영에서 이성을 잃지 않으려고, 드라마가 끝날 때까지 손 안 대고 참으려 했는데. 미안하다.”
이번만큼은 진심으로 들리길 바라며 나는 사과했다. 원재가 눈을 내리깔았다.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
“저도 ‘원재’도 서은겸의 마음을 잘 모르겠습니다. 계속 불안해요. 믿어도 되는지, 좋아해도 되는지 갈피를 못 잡겠어요.”
뒷말을 잇지 못하고 원재는 망설였다. 한참 만에야 가슴을 들썩인 원재가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선배님이 알려 주세요. ‘원재’가 어떻게 하면 되는지를.”
미치겠다. 진짜 귀여워 죽겠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이건 10화에 나온 대사다. 취한 원재를 돌보며 뱉었던 서은겸의 대사. 그때의 그에게 깊은 공감을 보내며 나는 원재를 끌어안았다. 주춤거리면서도 원재는 나를 피하지 않았다.
“허리를 꼿꼿이 세워. 배에는 힘을 주고.”
“흐읏.”
굵은 허벅지 사이에 내 다리를 끼워 넣고 몸을 바짝 맞댔다. 맞닿은 하반신이 의식되는지 원재가 신음을 흘렸다. 나는 원재의 턱 끝을 손가락으로 가볍게 들어 올렸다.
“이제 고개를 들어서 나를 봐.”
시키는 대로 턱은 들었어도, 원재는 차마 눈길을 내게 주지 못했다. 이리저리 방황하는 시선을 차분히 기다렸다. 발갛게 부은 눈가에 입을 맞추고 싶어 근질근질했다.
“어때?”
힐끗, 나와 눈을 맞춘 원재가 주먹을 꽉 쥐었다. 우리의 시선 교환은 오래가지 못했다. 눈을 감아 버린 원재가 나지막한 목소리를 냈다.
“선배님과 키스하고 싶어요.”
“나도 그래.”
시야를 가려서 도망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일부러 고개를 숙여 원재의 귀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카메라가 없는 곳에서 너를 만지고 싶어.”
흡, 숨을 크게 들이키는 소리가 들렸다. 원재의 목울대가 크게 흔들렸다. 귀엽기는. 습관처럼 둥그런 귓등을 깨물려다가 간신히 욕망을 욱여넣었다. 이 선까지 넘어 버리면 앞으로 있을 촬영이 엉망이 될 터였다.
하긴, 이미 망했나. 아까 나눈 키스는 두고두고 생각날 것이다. 찝찔한 눈물 맛이 나는 키스.
한 번이나 두 번이나 그게 그거겠지.
“서은겸이 원재를 처음 만난 날, 왜 뒤치다꺼리를 다 해 주고 자기 집에 데려갔는지 알아?”
“…….”
“서은겸은 첫눈에 원재에게 반한 거야.”
오늘은 촬영이 있으니 여기까지만. 나는 잘 익은 문어처럼 벌게진 원재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지금의 너와 나처럼.”
두 번째 키스는 첫 키스보다 훨씬 달콤했다.
《곰은 달을 그린다》 외전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