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5화 (25/26)

14. 달을 그린 곰 [동화 AU]

1.

만물이 자유롭게 교류하던 옛날 옛적, 깊은 산속에 곰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 곰은 오래전부터 토끼를 짝사랑했다. 작고 보드라운 털을 지닌 토끼는 어떤 동물이건 가리지 않고 인연을 맺는 바람둥이였다. 기다리다 보면 자신의 차례가 올 것 같았기에 곰은 묵묵히 토끼의 선택을 기다렸다.

언젠가부터 토끼의 옆에는 호랑이가 따라다녔다. 호랑이는 누구든 토끼에게 가까이 다가오면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며 경고했다. 토끼의 태도도 이전과는 달라졌다. 아무리 기다려도 토끼의 기다란 귀를 핥는 상대는 호랑이에서 바뀌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샘으로 물을 마시러 간 곰은 우연히 혼자 떨어진 토끼를 발견했다. 재빠르게 냄새를 맡아 주변에 호랑이가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 뒤, 곰은 토끼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놀란 토끼가 폴짝폴짝 뛰어 도망쳤지만 곰은 토끼를 놓치지 않았다. 커다란 앞발을 들어 토끼의 목을 누르자 토끼는 얌전해졌다.

“왜, 왜 그러세요.”

아래에서 바르작거리는 토끼의 움직임이 안쓰러웠다. 앞발에서 힘을 조금 빼고 곰은 나직이 말했다.

“사랑한다. 내 짝이 되어 줘.”

처음이자 마지막 고백이었다. 오랜 기다림 끝에 마침내 완성된 말을, 토끼는 그리 반기지 않았다. 이리저리 눈을 굴리던 토끼가 조심스럽게 답했다.

“저 애인이 있는데요.”

“그래도 상관없어. 옆에 있게만 해 줘.”

“곰님도 좋지만 저는 제 애인이 더 좋아요.”

“번식기만이라도 같이 있으면 안 될까.”

하루 이틀 기다린 게 아니었기에 곰은 간절했다. 거절할 방법을 찾지 못한 토끼는 꾀를 냈다.

“그럼 이렇게 해요. 저를 위해 달을 따다 주시면 곰님의 짝이 될게요.”

“달?”

“토끼에게 달이 얼마나 중요한지는 잘 아시죠?”

달에서 살면서 떡도 만들어 먹었던 다른 토끼들의 이야기를 늘어놓으며 토끼는 슬슬 몸을 움직였다. 앞발에서 빠져나가는 토끼를 눈치채지 못하고 곰은 멍하니 생각에 잠겼다.

“다른 달은 필요 없어요. 보름달, 둥그렇게 꽉 찬 달을 가지고 싶어요.”

말을 마친 토끼는 부리나케 다리를 놀려 도망쳤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곰이 주위를 살폈지만 토끼는 이미 수풀 속으로 사라진 뒤였다.

“그걸 따면 밤이 너무 어둡지 않을까.”

듣는 이 없는 질문을 중얼거리며 곰은 비어 있는 앞발을 내렸다. 토끼가 사라진 방향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곰이 이내 몸을 돌렸다. 오래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몇 년을 짝사랑한 토끼가 달을 따 달라고 말했다.

그래서 곰은 달을 따러 여행을 떠났다.

2.

토끼는 미처 몰랐겠지만, 곰은 어디로 가야 달을 딸 수 있는지 알았다.

어린 시절, 곰이 잠들지 못하는 밤이면 어머니가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려주곤 했다. 달의 일과도 그중 하나였다.

“여기서 산을 다섯 개 넘고 강을 여섯 개 건너면 커다란 호수가 나온단다. 밤새 하늘을 가로지른 달이 내려앉는 곳이지.”

어머니의 말에 의하면, 달은 새벽이 되면 호숫물로 지친 몸을 씻고 바닥에 잠겨서 쉰다고 했다. 하늘에 있을 때는 손이 닿지 않을 테니 그때를 노려야 했다. 달이 호수 속으로 들어가기 전에 잘 타일러서 데려가면 될 것 같았다.

어떻게 설득할지는 나중에 고민하기로 하고, 곰은 무작정 호수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조금이라도 빨리 달을 따서 토끼에게 내밀고 싶었다.

밤이 되자 숲 위로 작은 별들이 떠올랐다. 별의 어깨 위에 올라탄 새들이 즐겁게 지저귀기 시작했다. 곰은 나무에 기대어 앉아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검푸른 하늘의 가녘에 달이 조심스레 모습을 나타냈다.

노르스름한 빛을 뿜어내는 달은 아래는 둥글고 위는 편편한 반달이었다. 토끼가 원하는 모양과는 거리가 있었지만, 곰은 놓치지 않고 달의 움직임을 눈으로 좇았다. 달이 어디로 가는지를 알면 호수를 찾아가는 여행도 수월할 터였다.

저렇게 조그마하니 입에 물고 돌아오면 될 것이다. 도망치지 못하게 꽉 물어야지. 달은 원래 우둘투둘하니까 잇자국이 조금 남더라도 토끼가 눈치채지 못할 듯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졸음이 몰려왔다. 스르르 눈을 감고 곰은 잠을 청했다. 곤히 잠든 곰을 내려다보며 별들이 반짝반짝 수다를 떨었다.

3.

산기슭에 도착했을 때, 여러 짐승의 냄새가 멀리서부터 풍겨 왔다. 코를 킁킁거린 곰은 그 자리에 멈춰 섰다. 타닥타닥, 가벼운 발소리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것은 한 무리의 늑대였다. 사냥을 가는 듯 어깨에 잔뜩 힘을 준 늑대들은 곰을 보자 가볍게 눈인사를 건넸다. 곰 역시 가만히 서서 늑대들이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이동하는 무리의 끄트머리에서 늑대 한 마리가 빠져나왔다. 곰이 능소니였을 때부터 알고 지냈던 늑대였다. 서슴없이 곰에게 다가온 늑대는 꼬리를 흔들며 반갑게 물었다.

“어디 가?”

“달을 따러.”

“달은 따서 뭐 하게?”

곰은 대답하지 않았다. 답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따 오라고 하기에 따러 가는 것뿐, 정작 그걸 받은 토끼가 달로 무엇을 할지는 상상하지 않았다. 딱딱해 보이니 먹지는 못할 것 같고. 굴에 장식하기에는 너무 눈부시지 않을까.

어차피 토끼가 달을 무엇에 쓰든지 그것까지는 곰이 간섭할 바가 아니었다. 달을 받아 든 토끼가 환히 웃으며 짝이 되겠다고 말해 준다면 다 좋았다. 곰이 묵묵부답으로 일관하자 늑대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알고?”

“응.”

“혼자 가면 심심하지 않겠어? 위험할 수도 있는데.”

“괜찮아.”

“조심히 가. 아, 요 아래 바위 밑에 사는 구렁이한테는 가지 마. 구렁이의 짝인 너구리가 새끼를 배서 요새 예민해.”

“그럴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던 늑대는 자기 무리를 흘낏 돌아보더니 인사를 건넸다.

“그럼 잘 다녀와.”

“너도 잘 지내.”

눈가를 접어 웃은 늑대가 몸을 돌렸다. 곰은 후다닥 뛰어 무리로 복귀하는 늑대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때까지 참을성 있게 기다려 준 무리가 늑대와 함께 발을 옮겼다.

늑대들이 멀어진 뒤에야 곰은 짧게 한숨을 쉬었다. 언제나 챙겨 주는 늑대가 고맙긴 했다. 하지만 늑대의 배려는 오히려 곰을 더 외롭게 만들었다. 혼자 가도 괜찮냐며 걱정하면서도 늑대는 곰과 동행하겠다고 나서지 않았다. 늑대가 함께할 이들은 곰이 아닌 자신의 무리니까.

‘언젠가는 나도 저들처럼 무리를 지을 수 있겠지.’

갑갑해진 가슴을 꾹 누르고 곰은 걸음을 옮겼다. 한시라도 빨리 달을 따 와야 했다.

4.

산을 벗어나자 평지가 계속 이어졌다. 배가 고프면 열매를 따 먹고, 목이 마르면 시냇물로 목을 축이면서 곰은 계속 여행을 이어 갔다. 밤이면 졸린 눈을 껌뻑거리며 달이 어디로 향하는지 방향을 확인했다.

날이 갈수록 싱그러운 풀과 녹음이 우거진 나무는 모습을 감추었다. 태어난 곳이자 평생을 살아온 산이 보이지 않게 될 즈음, 곰은 한 번도 와 본 적 없는 메마른 땅에 발을 디뎠다.

흉하게 갈라진 틈을 피해 걸으며 곰은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잎을 모두 떨군 나무는 버석거렸고 듬성듬성 돋아난 풀들은 바싹 말라 있었다. 이곳에서는 먹이를 찾기도, 잠자리를 구하기도 어려워 보였다. 무엇보다도 목이 말랐다.

땅에서 피어오르는 열기가 발바닥을 괴롭혔다. 내일을 위해서라도 그늘과 물을 찾아 일찌감치 쉬는 편이 좋을 듯했다. 곰은 코를 쳐들었다. 반가운 물 냄새는 찾을 수 없었지만 다른 짐승의 냄새가 허공에 은은히 번졌다. 도움을 처할 심산으로 곰은 발을 옮겼다.

얼마 지나지 않아 마른 땅에 모로 누운 짐승 한 마리가 모습을 나타냈다. 노란 바탕에 검은 무늬가 얼룩덜룩 그려진 날렵한 짐승이었다.

‘표범이 왜 여기에 있지?’

자신처럼 산에서 내려왔다가 길을 잃은 것일까? 의아해하면서 가까이 다가간 곰은 곧 착각했음을 깨달았다. 짐승은 표범보다 마르고 다리가 길었다. 무엇보다도 눈 주변에 검은 무늬가 길게 흘러내린 것처럼 남아 있었다. 짐승은 표범이 아닌 치타였다.

“저기.”

말을 걸자 치타가 고개를 들었다. 곰을 위아래로 훑어본 치타가 긴 꼬리로 바닥을 두드렸다.

“저쪽으로 가면 물웅덩이가 있어.”

눈치가 빠른 데다 호의적인 상대라 다행이었다. 안심하며 곰은 꾸벅 고개를 숙였다.

“고맙다.”

“못 보던 얼굴인데. 산에 사는 곰 맞지? 초원은 처음이야?”

“응.”

곰이 솔직하게 대답하자 치타가 혀를 찼다.

“어쩌자고 여기까지 온 거야?”

“사정이 있어.”

자세한 내용은 설명하지 않고 곰은 입을 다물었다. 곧 흥미를 잃은 치타가 혀를 내밀어 앞발을 정성스레 핥았다.

“물만 마시고 얼른 튀는 게 좋을 거야. 웅덩이 주변은 사자들의 영역이거든.”

“명심할게.”

“행운을 빈다, 곰.”

다시 나른하게 늘어진 치타와 작별하고 곰은 웅덩이를 찾아 떠났다.

5.

치타가 가리킨 쪽으로 가자 축축이 젖은 물 냄새가 풍기기 시작했다. 두근거리는 가슴으로 달려가던 곰은 문득 코를 킁킁거렸다. 멀리 보이는 누렇게 마른 수풀이 뭔가 수상했다. 풀잎 한 다발이 꾸벅 허리를 굽혔다가 퉁겨 오르곤 했다.

거리가 좁혀지자 수풀의 정체가 드러났다. 땅바닥과 비슷한 색을 지닌 커다란 짐승이 마른풀 사이에 누워 있었다. 앞발로 풀을 툭툭 건드리며 시간을 보내던 짐승은 곰의 발소리를 듣곤 벌떡 몸을 일으켰다. 곰은 저절로 제자리에 멈춰 섰다. 머리와 목을 화려하게 뒤덮은 긴 갈기 털을 보자마자 상대가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사자였다.

꼬리를 길게 휘두른 사자가 노란 눈을 빛냈다.

“안녕.”

“…….”

“여기까진 어쩐 일이야? 길을 잃었어?”

곰은 대답하지 않고 주변을 경계했다. 사자는 무리 지어 사니 근처에 사자의 가족들이 있을지도 몰랐다. 사자들이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곰과 싸우지는 않겠지만, 배가 많이 고프다면 모를 일이었다.

사자는 금방 곰의 경계 태세를 눈치챘다.

“걱정하지 마. 곰은 안 먹어.”

“…….”

“정말인데.”

중얼거린 사자가 입을 쩍 벌리고 하품을 했다. 크고 날카로운 이빨이 주둥이 틈으로 드러났다가 사라졌다.

여전히 사자를 노려보면서 곰은 조심스럽게 코를 쳐들었다. 바람의 방향이 바뀌기를 기다려 사방의 냄새를 맡아 보았다. 근처에는 다른 사자의 흔적이 없었다. 사자의 말이 거짓은 아닌 듯했다. 그사이 아예 땅에 엎드린 사자가 곰을 올려다보았다. 공격 의사가 없다는 표시 같았다.

그렇다면 더는 볼일도 없었다. 곰은 사자를 무시하고 발을 옮겼다. 마른 목부터 축이는 게 우선이었다.

웅덩이는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산속의 맑은 계곡물과는 달리 지저분한 흙탕물에 가까웠지만, 지금은 이거라도 고마웠다. 물가에 자리를 잡은 곰은 고개를 숙였다.

“목말랐구나?”

사자의 목소리가 바로 뒤에서 들렸다. 화들짝 놀란 곰은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쫓아온 사자가 곰의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그러곤 흥미로운 눈으로 곰을 바라보았다.

저리 가라고 말하려던 찰나, 곰은 웅덩이가 사자들의 영역이라던 치타의 말을 떠올렸다. 영역을 침범한 불청객이 물까지 마음대로 마시려 하는 상황이니, 어쩌면 사자가 불쾌할지도 몰랐다. 곰은 정중하게 물었다.

“이거 마셔도 될까.”

“마셔. 얼마든지 마셔.”

어째서인지 사자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물도 마시고, 먹이도 먹고, 낮잠도 자면서 쉬어도 돼.”

“물만 마시러 온 거야.”

사자 무리의 우두머리라도 되는지 사자는 뭐든 허락해 주겠다며 떠들었다. 자신의 목적을 확실히 전하곤 곰은 허겁지겁 물을 마셨다. 미지근한 흙탕물로라도 목을 축이니 살 것 같았다.

곰이 물을 마시는 동안 사자는 뚫어져라 곰을 관찰했다. 초원에서 보기 힘든 낯선 짐승이 신기해서 그렇다기에는 집요한 시선이었다. 갈증이 해결되자 곰은 슬슬 사자가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물 마시다 체할 것 같은데.’

사자는 자기 입으로 곰은 잡아먹지 않는다고 했다. 물을 마셔도 된다고 허락도 해 주었다. 물만 마시고 간다고 했으니 계속 옆을 지킬 이유가 없을 텐데도, 왜 굳이 바라보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젖은 털을 푸르르 털며 곰이 옆을 돌아보았을 때였다.

“잠시만 여기 있어.”

사자가 몸을 일으키더니 어디론가 빠르게 달려갔다. 피어오르는 흙먼지를 보면서 곰은 잠시 고민했다. 갈까. 말까. 용건도 끝마쳤는데 굳이 사자의 말을 들어야 할 필요는 없었다. 아무리 허락을 받았어도 남의 영역에 오래 머무는 것 역시 찜찜했다.

‘그래도 물을 마시게 해 줬으니까.’

물웅덩이를 내려다본 곰은 바닥에 궁둥이를 붙이고 앉았다. 사자의 말을 들어주고 보답한 것으로 치리라.

곧 먼지를 날리며 사자가 돌아왔다. 곰이 사라질까 봐 걱정한 듯, 떠날 때보다도 빠른 걸음이었다. 물가에 앉은 곰을 보고 사자가 속도를 낮추었다.

헐떡거리며 다가온 사자의 입에는 나뭇가지가 물려 있었다. 곰의 앞에 나무를 내려놓고 사자는 곰을 바라보았다.

“곰은 이런 것도 먹지?”

사자가 가져온 나뭇가지에는 작은 다홍색 열매가 여럿 매달려 있었다. 생전 처음 보는 열매였다. 곰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바라보자 사자가 꼬리를 휘둘렀다.

“먹기 싫으면 버릴까? 어차피 나는 못 먹어서.”

“……고마워.”

사자의 호의를 마다하기에는 배가 고팠다. 감사의 표현을 건네곤, 곰은 나뭇가지를 주워 들었다. 열매만 떼어서 우적우적 씹어 먹자 달콤한 맛이 입 안에 감돌았다. 무엇인지는 몰라도 무척 맛이 있었다. 곰은 금세 열매를 따서 먹는 데 집중했다.

곰의 옆에 엎드린 사자가 귀를 쫑긋거렸다.

“그래서 여긴 왜 온 거야? 여행?”

길게 설명하기는 귀찮았기에 곰은 대충 고개를 주억거렸다. 사자의 노란 눈에 이채가 떠올랐다.

“멋있다.”

“그냥 걷기만 하는데.”

“그래도 여행을 떠날 용기를 냈다는 게 중요한 거지. 아예 시작도 하지 않은 것보다는 훨씬 낫잖아. 걷기만 해도 멋있어.”

용기가 아니라 충동이었고, 멋있는 목표가 있는 게 아니라 사심이 담긴 여행이라고 설명하는 대신 곰은 침묵했다. 마지막 열매까지 해치우고 곰은 나뭇가지를 내려놓았다. 텅 빈 나뭇가지를 빤히 보던 사자가 두 앞발로 땅을 짚었다.

“나도 너를 따라갈래.”

허리를 쭉 펴고 기지개를 켠 사자가 곰을 돌아보았다.

“그동안 더 넓은 세상을 돌아보고 싶었어. 혼자서는 용기를 내지 못했는데, 너와 함께라면 갈 수 있을 것 같아.”

“혼자가 편해.”

“둘이 가면 심심하지도 않고 좋을 거야. 같이 가자.”

거절해도 사자는 막무가내였다. 한숨을 내쉰 곰은 물웅덩이를 가리켰다.

“너는 네 무리와 함께 영역을 지켜야지.”

그쯤 말하면 알아들을 줄 알았건만. 사자는 눈을 껌뻑였다.

“무리? 그런 거 없는데?”

“……어?”

“가자. 여긴 사자들의 영역이야.”

“네 영역이 아니라?”

“응.”

나뭇가지를 휙 물어 던진 사자가 화사하게 웃었다.

“나 떠돌이거든. 여기 있는 거 걸리면 쫓겨날 거야.”

“…….”

“많이 얻어맞고 물리기도 하겠지. 나 같은 수사자가 다른 사자의 영역에서 어슬렁거리는 건 도전한다는 뜻이나 마찬가지니까. 운이 나쁘면 죽을지도 몰라.”

“근데 왜 계속 여기에…….”

“네가 물을 마시고 싶어 했잖아.”

태연하게 말한 사자가 눈웃음쳤다.

“너 혼자 있으면 위험할 것 같아서.”

“……빨리 일어나.”

사자의 말을 끊고 곰은 서둘러 몸을 일으켰다. 일단은 사자들의 영역을 벗어나는 게 중요했다. 바쁘게 다리를 놀리는 곰의 옆으로 다가온 사자가 긴 꼬리를 느긋하게 저었다.

“같이 가자니까.”

“영역을 벗어날 때까지만이야.”

그렇게 곰은 동행을 얻었다.

6.

메마른 초원을 벗어난 뒤에도 사자는 곰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사자들의 영역에서 벗어났으니 안전할 텐데도 사자는 막무가내로 따라붙었다.

“나는 혼자 있는 게 편해.”

“위험할지도 모르잖아. 같이 가.”

저리 가라며 쫓아도, 말로 설득해도 사자는 곰의 뒤를 따를 뿐이었다. 슬슬 초원으로 돌아가 주면 좋을 텐데. 사자는 도무지 떠날 생각이 없어 보였다. 더 넓은 세상을 보고 싶다던 사자의 말을 떠올리곤, 곰은 솔직하게 말했다.

“사실 나는 여행을 떠난 게 아니라 달을 찾으러 가는 거야. 그러니까 넓은 세상을 보고 싶다면 따로 다니는 게 낫지 않을까.”

사자는 왜 달을 찾으러 가는지 묻지 않았다. 달이 어디 있는지, 곰이 정확히 아는 게 맞는지도 묻지 않았다. 모든 걸 곰에게 맡기겠다는 듯 사자는 자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나도 달을 찾으러 함께 갈게. 다른 세상은 그 뒤에 봐도 늦지 않으니까.”

“왜 그렇게까지…….”

“답은 네가 직접 생각해.”

다가온 사자가 콧잔등으로 곰을 가볍게 떠밀었다. 마지못해 다시 걸음을 옮기면서도 곰은 사자를 힐끔거렸다.

‘이럴 시간에 자기 무리를 만들어야 하는 거 아닌가.’

곰은 사자를 이해할 수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사자가 헛수고를 하는 것 같았다. 곰이 달을 찾으러 가는 이유는 토끼에게 선물하고 짝이 되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사자는 달이 잠드는 호수에 가도 아무런 소득이 없었다. 넓은 세상을 보고 싶다지만, 그건 제 짝과 함께 보는 게 더 즐겁지 않을까.

그렇다고 들러붙어 떨어지지 않는 사자를 어떻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몰래 떠난다 한들 어차피 금방 들킬 테니까. 골치가 아파진 곰은 사자를 내버려 두었다.

귀찮긴 해도 사자는 꽤 쓸모 있는 동행이었다. 물을 쉽게 찾아냈고, 사냥할 때도 도움이 되었다. 곰이 허탕을 친 날에는 작은 새알이라도 반드시 가져와 곰에게 양보했다.

“네가 먹어.”

“나는 먹고 왔어.”

곰은 사자의 배려가 기쁘지만은 않았다. 왜 사자가 자신에게 이러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곰이 미심쩍어하거나 말거나 사자는 꾸준히 곰의 곁을 지켰다.

사자의 가치는 시간이 지나면서 더 빛을 발했다. 사자는 언제나 곰의 옆에서 뚜벅뚜벅 걸으며 말을 붙였다. 그렇다고 귀찮게 구는 것은 아니었다. 적당히 곰의 기분을 달랠 정도로만 대화를 주고받은 뒤, 사자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밤이 되면 달이 지는 방향도 함께 확인해 주었다.

사자는 산행도 능숙하게 해냈다. 초원 생활에 익숙할 텐데도 산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곳곳에 널린 나뭇가지와 돌을 가뿐히 넘었고, 함께 잠들 곳도 곰보다 먼저 찾아내곤 했다. 사자가 마른 나무를 뒤져 벌집을 찾아냈을 때는 곰도 놀라 제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벌에 안 쏘였어?”

“비어 있었어.”

의기양양하게 말한 사자가 곰에게 벌집을 내밀었다. 곰은 바닥에 엉덩이를 대고 앉아 벌집을 살펴보았다. 사자의 말대로 벌집은 비어 있었다. 벌들이 이사 간 지 오래된 듯 꿀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하지만 안쪽을 열심히 핥으면 달달한 맛이 느껴졌다.

곰은 그 뒤로 며칠 동안 벌집을 물고 돌아다녔다. 잘 때도 꼭 끌어안고 잠들었다. 그런 곰을 보며 사자는 뿌듯해했다. 곰이 잠시 자리를 비울 때면 제 먹이인 것처럼 벌집을 함께 돌봤다.

땅에서 올라오는 한기가 사방에 감돌던 어느 새벽. 무심코 몸을 웅크리던 곰은 품 안에서 들리는 우지직 소리에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껌뻑이며 아래를 내려다보자 조각난 벌집이 보였다. 잠결에 부순 모양이었다.

‘어쩔 수 없지.’

곰은 부서진 벌집을 한쪽으로 밀쳐 냈다. 부스러기를 털어 내고 다시 잠들려는데, 굴 구석에 떨어져서 누운 사자가 눈에 들어왔다.

“……아.”

곰은 조각난 벌집과 사자를 번갈아 보았다. 이미 핥을 대로 핥아서 꿀맛이라곤 남지 않았기에 아쉬움은 그다지 없었다. 하지만 사자에게 받은 선물을 허무하게 망가뜨린 게 마음에 걸렸다. 잠시 고민하다가 곰은 벌집 조각을 입에 물었다. 그러곤 낮에 보았던 계곡으로 향했다.

주위가 깨끗해질 때까지 곰은 부서진 조각을 치웠다. 아침이 되어 사자가 벌집의 행방을 물으면 밤에 배가 고파서 다 먹어치웠다고 답할 생각이었다. 마침내 마지막 조각을 물어 올리다가, 곰은 문득 입에 든 것을 잘근잘근 씹었다. 아직 꿀이 배어 있었는지 희미하게 단맛이 났다.

망설이던 곰은 발을 돌렸다. 잠든 사자에게로 슬며시 다가간 곰은 머리를 숙였다.

“고마워.”

둥근 귀에 대고 속삭이자 사자의 꼬리가 느릿하게 흔들렸다.

“내일은 내가 사냥할게.”

소리 없이 올라간 사자의 입꼬리를 보지 못한 채, 곰은 굴을 나섰다.

7.

달을 찾으러 가는 긴 여정은 계속되었다.

계절이 바뀌도록 달이 잠드는 호수는 나타나지 않았다. 따뜻한 낮이 점점 짧아지면서 밤이 나날이 서늘해졌다. 처음 여행을 떠났을 때처럼 곰은 밤이 되면 달을 바라보았다. 달이 어디로 가는지 방향을 확인하고, 내일 가야 할 길을 정했다.

사자는 언제나 곰이 하자는 대로 따라왔다. 얼마나 남았는지 묻지도 않았고, 힘든 내색을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곰은 서서히 초조해졌다. 곧 가을이 지나가고 겨울이 다가올 터였다. 추운 날씨가 반복되면 곰은 겨울잠을 자야만 했다.

가을이 오면서 평소보다 입맛이 도는 것도 문제였다. 곰은 닥치는 대로 먹이를 주워 먹었다. 그래도 배가 고팠다. 겨울을 나기 위해 살을 찌울 시기이기 때문이었다. 점차 여행보다 먹이 찾기에 열중하게 된 곰을 보면서도 사자는 불평 한마디 하지 않았다. 도리어 부지런히 먹이를 물어다 주면서 곰을 보살폈다.

풍요로운 가을도 어느덧 끄트머리에 이르렀을 즈음, 곰과 사자는 황량한 벌판에 도착했다. 기다랗게 자란 잡초들이 바람을 타고 흔들리는 마른 땅이었다. 고향에 온 듯 사자의 얼굴이 밝아졌다.

“내가 살던 곳과 비슷하네.”

곰은 한숨을 쉬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나무나 굴은 보이지 않았다. 이젠 밤이 되면 추위가 밀려오는데 어디서 자야 하는 걸까. 그간 하지 않았던 걱정이 샘솟았다.

그날 밤, 곰은 몸을 웅크리고 잠을 청했다. 평소라면 눈을 감자마자 바로 잠들었을 테지만, 유난히 차가운 땅바닥 때문에 자꾸만 몸이 으슬으슬 떨렸다. 참다못해 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추위를 피할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다행히도 좋은 방법이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곰은 조금 떨어진 곳에서 얄밉게도 잘 자는 사자를 발견했다. 따뜻한 곳에서만 살았을 텐데, 춥지 않은가. 신기한 것도 잠시, 곰은 홀린 듯이 사자에게로 향했다. 사자는 차가운 벌판의 유일한 온기였다.

‘깨지 않아야 할 텐데.’

사자의 옆에 웅크린 곰은 조심스럽게 몸을 기댔다. 맞닿은 곳마다 따뜻한 기운이 은은히 퍼졌다.

‘같이 자면 따뜻하구나.’

새로운 깨달음이었다. 그간 왜 거리를 두고 잠을 청했던 걸까. 조금 후회하면서 곰은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이튿날 아침, 훈훈하게 몸을 데우는 열기에 곰은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뜬 순간 보이는 건 온통 노란색이었다. 이게 뭘까. 고민할 새도 없이 머리 위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잘 잤어?”

꿈인가. 곰은 멍하니 위를 올려다보았다. 분명 체온을 나누기 위해 옆에서 기대어 잤을 뿐인데. 어느새 곰은 사자의 품에 안겨 있었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곰을 보며 사자가 빙긋 웃었다.

뒤이어 까끌거리는 혓바닥이 코를 핥은 순간, 곰은 저도 모르게 사자의 얼굴에 앞발을 날려 버렸다.

8.

사자는 포기를 몰랐다.

“혼자 자면 춥잖아.”

“안 추워.”

“그럼 내가 추운 걸로 해 두자.”

처음 몸을 겹치고 잠들었던 밤 이후, 사자는 매일 밤 곰을 품에 안고 잤다. 아침이면 싹싹 털을 핥아 잠을 깨웠다. 놀란 곰이 앞발을 날려도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자신의 체온을 나눠 주겠다며 더 꽉 곰을 끌어안곤 했다.

같은 일이 반복되자 곰도 저항을 포기했다. 다른 것도 아니고 그냥 몸을 맞대고 자는 것뿐인데. 긴 여행의 동행이 되어 주었으니 그 정도는 양보해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매일 얻어맞느라 부풀어 가는 사자의 코도 보기 미안했다.

무엇보다도 점차 추워지는 밤의 탓이 컸다. 여느 때면 동면할 굴을 찾아 웅크리고 있었을 시기였다. 언젠가부터 곰은 사자의 품이 아니면 잠들지 못하게 되었다. 곰의 커다란 덩치를 모두 덮지는 못했지만, 사자는 최선을 다해 곰을 끌어안고 제 온기를 주었다.

날이 갈수록 기온이 떨어졌다. 밤이 되면 곰은 먼저 사자의 품에 파고들었다. 그렇게 몸을 맞대고 어찌어찌 새벽을 넘겼다.

문제는 밤에만 찾아드는 것이 아니었다. 어느덧 해가 뜬 낮에도 차가운 바람이 덮쳐들었다. 추위를 피해 짐승들이 몸을 숨긴 벌판은 황량했다. 열매를 따 먹으려 해도 이미 풍성했던 가을의 흔적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잎사귀가 떨어진 마른 나뭇가지만이 앙상하게 흔들렸다. 사자가 벌레며 새알, 작은 들짐승을 물고 왔지만 둘이 나눠 먹기에 부족한 양이었다. 꼬륵꼬륵 울리는 배를 참으면서 사자와 곰은 여행을 계속했다.

산을 넘고 개울을 건너 하늘을 찌를 듯 커다란 나무가 빽빽한 숲을 지나 살얼음이 언 강가에 도착했을 때, 곰은 진지하게 고민했다. 여기서 멈추는 게 낫지 않을까.

강에서 올라온 찬 바람이 몸을 덮치자 콧속까지 시렸다. 정말 오랜 시간을 걸어왔건만, 달이 잠드는 호수까지 얼마나 남았는지는 아직도 알 수 없었다. 어차피 달을 물어다 줘도 토끼가 정말 받아 줄지 알 수 없는 노릇인데. 이대로 여행을 계속하는 것 자체가 멍청한 짓 같았다. 끝이 보이지 않는 고생길에 이 이상 사자를 끌어들이고 싶지도 않았다. 제자리에 멈춰 선 채 곰은 망설였다.

발을 옮기던 사자가 곰을 돌아보았다.

“왜 그래?”

“포기할까 해서.”

“왜?”

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 대신 홀쭉해진 사자의 배를 힐끗 바라보곤, 강으로 첨벙 뛰어들었다. 얼음을 깨고 돌을 들추는 곰의 뒤에서 사자가 안절부절못했다.

“추울 텐데 얼른 나와.”

“물고기 잡아 줄게.”

“안 먹어도 돼. 괜찮아.”

“이거 먹고 우리 그만 가자.”

“그게 무슨 소리야?”

놀란 사자가 되물었다. 수면을 앞발로 내리치며 곰은 담담히 대꾸했다.

“내 욕심 때문에 네가 고생할 필요는 없어.”

“괜찮아. 나도 달을 보고 싶어.”

“그런 게 아니라…….”

곰은 한숨을 쉬었다. 사자에게 아직도 이 여행의 목적, 그러니까 짝사랑 상대가 달을 따 오라고 해서 출발했다는 사실을 솔직히 말하지 못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사자가 한심해할까 봐? 비웃을까 봐? 사자가 그러지 않을 거라는 걸 곰도 잘 알았다. 그런데도 왠지 숨기고 싶었다. 그래서 곰은 진실을 밝히는 날을 계속 뒤로 미뤘다.

이만하면 충분했다. 영문도 모른 채 강행군을 이어 가는 사자에게 더는 무리한 요구를 하고 싶지 않았다.

그 이상 설명하지 않고 곰은 마저 사냥을 계속했다. 자다 깬 물고기들의 움직임은 굼떴다. 금세 통통한 물고기 여러 마리를 물 밖으로 건져 내곤 곰은 사자를 돌아보았다.

“먹어.”

“잠깐만.”

사자는 물고기를 거들떠보지 않았다. 심각한 목소리로 곰을 부르더니 앞발로 땅을 툭툭 때렸다.

“달을 찾으러 간다고 했잖아.”

“응. 그랬지.”

“내가 계속 도와줄게. 끝까지 해 보자.”

“아냐. 이 정도면 할 만큼 했어.”

“나랑 같이 다니는 게 싫어?”

“그래서가 아니야.”

곰은 천천히 땅 위로 올라섰다. 젖은 털을 푸르르 털어 물기를 떨쳐 냈다.

“너한테는 고마워하고 있어. 네가 없었으면 진작 포기하고 돌아갔을 거야.”

“그런데 왜…….”

그러게. 왜일까. 떠날 때만 해도 그렇게 간절했던 달이, 왜 이제는 포기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을까. 그냥 사자한테 폐 끼치기 싫다면 사자를 보내고 혼자서라도 가면 될 텐데. 선뜻 답하지 못하고 곰이 머뭇거릴 때였다.

멀리서 강렬한 짐승의 체취가 끼쳐 왔다. 곰은 코를 번쩍 들고 냄새를 확인했다. 공기 중에 퍼진 것은 익숙한 듯 낯선 짐승의 흔적이었다. 기척을 눈치챈 사자도 바짝 긴장해선 숨을 죽였다. 얼마 안 가 숲속에서 한 무리의 짐승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늑대 떼였다.

곰은 꿀꺽 침을 삼켰다. 눈앞에 나타난 늑대들은 곰의 친구와는 달랐다. 훨씬 더 몸집이 크고 생김새가 사나웠다. 벌어진 아가리에서는 허연 입김이 풀풀 피어올랐다. 늑대들의 시선은 곰이 쌓아 둔 물고기를 향해 있었다. 많이 굶주린 듯했다.

순순히 먹이를 양보하고 도망치기엔 사자도 곰도 너무 오래 굶었다. 게다가 물고기는 고작 서너 마리에 불과했다. 무리 전체가 배불리 먹기에는 부족한 양이니 다 먹어치운 뒤에 어떤 태도를 보일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싸움은 불가피해 보였다. 곰은 몸을 바짝 긴장시켰다.

귀를 뒤로 바짝 눕힌 사자가 곰의 앞으로 나섰다.

“도망쳐.”

“뭐?”

“내가 시간을 끌어볼 테니까 도망치라고.”

곰을 돌아보지 않고 사자가 낮게 중얼거렸다.

“너는 가야 할 곳이 있잖아.”

말을 마친 사자는 이를 드러내고 으르렁거렸다. 아무리 용맹하고 체구가 좋은 사자라도 늑대 무리를 혼자서 감당할 수는 없을 터였다. 다급해진 곰은 사자의 꼬리를 물고 잡아당겼다.

“같이 싸워.”

“가라니까.”

“혼자 비겁하게 도망치진 않아.”

“고집부리기는.”

“너야말로.”

나지막이 아웅다웅하던 곰과 사자는 동시에 피식 웃었다. 금방이라도 덮쳐들 듯한 늑대들을 앞에 놓고도 흐르는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우두머리로 보이는 늑대의 움직임을 주시하면서 사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좋아. 같이 싸워. 그 대신 계속 달을 찾으러 가는 거다.”

“알았어.”

“나랑 같이.”

듬직한 뒷모습을 바라보다 곰은 고개를 끄덕였다. 흔들리던 마음이 비로소 단단해지는 것 같았다. 사자의 옆으로 빠르게 다가간 곰은 두 발로 일어났다.

“그래. 끝까지 같이 가자.”

대답 대신 사자가 긴 꼬리를 휘둘렀다. 사자의 어깨에 슬쩍 제 몸을 문지르곤 곰은 늑대들을 노려보았다.

긴 대치의 끝을 알리듯 곰과 사자가 동시에 포효했다.

9.

곰과 사자의 여행은 그 뒤로도 계속되었다.

늑대 무리를 쫓아낸 게 소문이라도 났던 것일까. 어느 누구도 감히 두 맹수에게 덤벼들 용기를 내지 못했다. 먹이를 놓고 달아나는 짐승들도 있었다. 덕분에 둘의 여행은 조금 순탄해졌다.

겨울이 깊어지면서 시린 눈이 사방에 쌓였다. 차가운 눈을 밟고 걷는 데 곰이 익숙해졌을 무렵. 마침내 그곳이 나타났다.

달이 잠드는 호수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커다란 호수의 수면은 얼어 있지 않았다. 잔물결이 금빛으로 반짝이며 일렁거렸다. 마치 홀로 계절에서 벗어난 것 같은 풍경이었다.

곰은 홀린 듯이 호숫가로 걸어갔다. 호수의 바닥을 들여다보니 맑은 물속 깊은 곳에 가라앉은 초승달이 보였다. 성급히 앞발을 넣어 꺼내려 했지만 닿지 않았다. 호수에 빠져들 듯 집중하는 곰을 말리며 사자가 말했다.

“밤에 달이 뜰 때를 기다리자.”

고개를 끄덕인 곰은 호숫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그리고 물속의 달에서 한순간도 시선을 떼지 않았다.

이윽고 날이 저물면서 밤이 찾아왔다. 그러자 내내 얌전히 잠들어 있었던 달이 둥실 떠오르기 시작했다. 수면 위로 고개를 내민 달은 가볍게 하늘로 날아올랐다. 곰은 서둘러 앞발을 휘둘러 달의 끄트머리를 붙들었다.

그제야 곰과 사자를 알아본 듯 달이 뾰족한 목소리를 냈다.

“뭐야, 너희는?”

달이 도망치지 못하게 단단히 앞발에 힘을 주고 곰은 물었다.

“보름달은 어디 있어?”

“내가 바로 보름달이야.”

“너는 홀쭉하잖아.”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차오르게 되어 있어.”

“믿을 수 없는데.”

“그럼 기다리든가. 근데 보름달은 왜?”

짜증스레 몸을 흔들면서 달이 재차 물었다. 곰은 숨을 깊이 들이마셨다. 무사히 달을 붙잡았으니 이제 데리고 갈 일만 남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정을 설명해야 했다.

“나랑 같이 가 줘야 할 곳이 있어.”

“응?”

당황한 목소리는 달이 아니라 사자에게서 흘러나왔다. 사자가 의아한 표정으로 곰을 돌아보았다. 사자를 마주 볼 낯이 없었다. 곰은 사자를 외면했다.

“사실 나는 달을 따러 온 거야.”

“어?”

“……내가 좋아하는 토끼가 보름달을 따 오라고 했어. 그러면 짝으로 받아 준다고.”

“…….”

“말 안 해서 미안해.”

말하면 말할수록 곰은 사자에게 미안해졌다. 미리 이야기를 했어야 했다. 혼자 행복해지기 위해 지금까지 사자를 이용한 것이나 다름없으니까. 용서를 빌며 곰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 거였구나.”

한참 만에 사자가 중얼거렸다. 적잖이 충격을 받은 듯한 목소리였다. 어떤 대꾸도 하지 못하고 곰은 입을 다물었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살피던 달이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흠, 좋아. 너를 따라가 줄게. 어차피 나도 매일 밤 똑같은 길만 걸어야 하는 게 지겨워졌거든.”

“어?”

곰은 얼떨떨하게 품 안의 달을 바라보았다. 순순히 수락해 줄 거라곤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는데. 달은 뜻밖에도 태연해 보였다. 종알거리면서 달이 하늘을 가리켰다.

“하지만 내가 뜨지 않으면 밤이 너무 어두워질 거야. 세상의 모두가 너를 욕할 텐데 감당할 자신 있어?”

“별을 띄우면 안 될까?”

“별은 너무 작고 희미해서 안 돼. 누군가 나 대신 내 빛을 들고 밤하늘을 가로지른다면 모를까.”

어쩐지 일이 잘 풀린다 싶었더니 생각지 못한 문제가 있었다. 곰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말없이 달과 곰의 대화를 듣기만 하던 사자가 나선 것은 그때였다.

“내가 할게.”

“어?”

“내가 달빛을 들고 네 역할을 대신할게.”

하마터면 달을 놓칠 뻔했다. 곰은 시선을 들어 사자를 바라보았다. 조금도 흐트러짐 없는 눈빛으로 사자가 곰을 마주 보았다. 이미 결심을 굳힌 듯했다. 곰은 말끝을 흐렸다.

“네가 왜…….”

“말했잖아? 더 넓은 세상을 돌아보고 싶다고.”

당당히 답한 사자가 씩 웃었다.

“하늘 위에서 내려다보면 더 잘 보이겠지.”

“그래, 그래. 마침 잘됐네. 네 친구는 멋진 갈기 털을 가지고 있으니까 달빛도 잘 어울릴 거야.”

“하지만…….”

“이미 내가 떠야 할 시각이 지났다고. 결정했으면 빨리 진행하자. 아니면 나 가 버린다.”

재촉하면서 달이 몸을 비틀었다. 곰은 도망치려는 달의 윗부분을 이빨로 꽉 물었다. 그사이 다가온 사자가 머리를 숙였다. 바르르 몸을 턴 달이 사자의 갈기에 반짝이는 금빛 가루를 뿌려 주었다.

“이제 됐어. 가볍게 발을 구르면 몸이 저절로 하늘로 떠오를 거야. 내가 다니는 길은 알아?”

사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곤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사자의 갈기는 달처럼 눈부시게 반짝거렸다. 이 정도면 어두운 밤을 밝힐 수 있을 듯했다.

모든 상황이 완벽한데도 곰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물고 있는 달을 놓지도, 사자에게 인사를 건네지도 못하고 곰은 망설였다. 그런 곰의 심정을 알아채기라도 한 것처럼, 곰에게 다가온 사자가 콧잔등을 맞댔다.

“이걸로 네가 행복해진다면 나도 행복할 거야.”

속삭이는 목소리에는 어떤 원망도 담겨 있지 않았다. 곰은 무심코 숨을 죽였다. 다정하게 코를 비빈 사자가 고개를 들었다.

“꼭 소원을 이뤄.”

말을 마친 사자는 앞발을 굴렀다. 둥실 떠오른 커다란 몸이 밤하늘을 향해 날아갔다.

10.

곰은 달을 물고 터벅터벅 걸었다. 혹독한 겨울의 추위가 덮쳐들었지만 춥지 않았다. 달의 온기 덕분이었다. 달을 가까이 가져다 대면 제아무리 두껍게 쌓인 눈도, 단단한 얼음도 녹아 버렸다.

매일 밤 곰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아득한 먼 곳을 밝히며 하늘을 가로지르는 사자를 바라보았다. 사자가 남기고 가는 빛의 궤적은 한때 곰이 쫓았던 달의 것과 똑같았다. 달과 약속한 대로 대리 역할을 충실히 하는 듯했다.

닿지 못할 것을 알기에, 곰은 마음속으로 사자에게 말을 걸었다.

춥지 않아?

외롭지 않아?

매일 걷는 게 힘들지 않아?

사자의 대답은 들리지 않았다. 조용히 멀어지는 뒷모습을 보면 가슴이 욱신거렸다. 사자가 호수로 사라져 버린 새벽이 되어서야 곰은 달을 꽉 끌어안고 늦은 잠을 청했다.

뭔가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산으로 돌아가는 여정 또한 마찬가지였다.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것뿐인데, 이상하게도 사자와 함께 왔을 때보다 힘들었다. 그리워야 할 산도 유독 멀게 느껴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이제 달을 땄으니 토끼와 행복해질 일만 남았는데. 사랑했던 토끼에게로 돌아가는 길인데. 곰의 머릿속에 토끼의 자리는 없었다. 곰은 계속 사자만 생각했다. 사자와 함께했던 긴 여행을 회상했고, 헤어질 때 주고받았던 대화를 곱씹었다. 그러다 마지막으로 다정하게 코를 맞댔던 그때를 떠올리면 심장이 조여드는 듯 아팠다.

그래도 곰은 부지런히 발을 놀렸다. 사자는 곰이 행복해지면 자신도 행복할 거라고 했다. 사자의 희생을 헛되이 하지 않으려면 곰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어야 했다. 하루라도 빨리 토끼에게 돌아가서 달을 보여 주고 결판을 내야 했다. 토끼가 받아 주지 않더라도 괜찮았다. 아니, 받아 주지 않는 편이 나았다. 그렇다면 달을 원래 자리에 되돌려 놓고 사자를 쉬게 할 수 있으니까.

‘나 때문에 오래 고생해서는 안 돼. 사자를 데려와야 해.’

한시라도 빨리 사자가 땅으로 내려와 자신만의 여행을 떠나게 해 주고 싶었다. 달을 꽉 물고 곰은 부리나케 달려갔다.

쉼 없이 움직인 보람이 있었다. 어느덧 곰은 산기슭에 도착했다. 오랜만에 돌아온 고향은 변한 것 없이 그대로였다. 노을이 지는 늦은 오후, 곰은 평평한 땅에 달을 내려놓았다. 토끼가 원한 것은 보름달이었으니 달이 얼마나 둥그레졌나 살펴야 했다.

그때까지 곰의 입에서 작아졌다 커졌다를 반복했던 달은 다시 초승달로 돌아와 있었다. 이대로는 토끼에게 달을 보여 줄 수 없었다. 서둘러 돌아오려고 노력했건만, 또 기다려야 하다니. 낙담한 곰은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이마에 남은 잇자국을 움직거리면서 달이 심드렁하게 물었다.

“왜 안 가?”

“보름달이어야 해.”

“대체 보름달이 무슨 상관인데?”

“그건 나도 몰라.”

한심하다는 듯 달이 중얼거렸다.

“그걸 네가 모르면 어떡해.”

“안 물어봤으니까.”

“넌 대체 아는 게 뭐야?”

“…….”

“그 토끼가 날 가지고 뭘 하려는지도 모르잖아. 그러면서 무작정 나한테 따라오라고 하는 게 말이나 돼? 만약 그 토끼가 날 잡아먹으면? 발로 밟아 깨트리면? 그땐 어떻게 할 거야?”

맞는 말이었다. 달을 안심시키기 위해 곰은 자신의 계획을 설명했다. 토끼에게는 사실 확인을 위해 달을 보여 주기만 할 거고, 그 뒤에는 원래 위치로 보내 주겠다고 말하자 달이 큰 소리로 혀를 찼다.

“그러니까. 네 짝사랑 상대에게 차이고 나를 제자리에 되돌려 놓겠다고?”

“응.”

“그럼 넌 뭘 위해서 나를 데려가는 거야? 저 위의 네 친구는 뭘 위해서 저렇게 고생하는 거고?”

“……어.”

“약속? 그깟 알량한 약속, 토끼가 기억이나 할 것 같아? 아니, 그 토끼가 정말 나를 데려올 수 있을 거라 믿어서 네게 그런 얘기를 한 것 같아? 좋아. 그래. 토끼가 네 정성에 감동해서 너를 받아 준다고 쳐. 그걸로 네가 정말 행복해질까? 다음엔 토끼가 또 뭘 따 오라고 시킬지 마음 졸이면서 살 게 뻔한데?”

“…….”

“답답한 곰아. 네 진짜 행복은 대체 뭐야?”

곰은 멍해졌다. 곰은 한 번도 자신의 행복이 뭔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사랑하는 상대와 짝이 되고 싶었다. 사랑하는 이가 원한다면 어떤 무리한 요구라도 이루어 주고 싶었다. 그 과정에서 자신의 행복은 알 바가 아니었다. 그래서 무작정 여행을 떠났던 것인데.

그랬는데. 대가를 치른 것은 곰이 아닌 사자였다.

왜였을까.

왜 사자는 모든 걸 포기하고 하늘을 걷겠다고 나섰을까.

의문은 금방 해결되었다. 단지 토끼가 원한다는 이유로 모든 걸 포기하고 달을 따러 여행을 떠났던 곰이기에, 곰은 사자를 이해할 수 있었다. 사자도 곰과 같았다. 사랑하는 이의 소원을 이루어 주고 싶었던 거였다. 자신의 행복을 버리더라도 곰이 행복하기를 바라면서.

곰이 토끼를 위해 달을 따러 간 것처럼, 사자는 곰을 위해 달이 되었다.

곰의 눈치를 보던 달이 다시 종알거렸다.

“만약에 토끼가 나를 안 보내 주면 네 친구는 저기서 영원히 내 대역을 해야 할걸.”

“뭐?”

“그래도 상관없어?”

안 돼.

달의 말을 듣는 순간 덜컥 두려움이 밀려왔다. 곰은 본능적으로 움직였다. 내려놓았던 달을 입에 물고 정신없이 달렸다. 사자를 데려와야 했다. 홀로 춥고 어두운 곳을 걷는 사자를 땅으로 데리고 내려와야만 했다.

끝까지 같이 가자고 했어.

언젠가 사자에게 했던 말을 되뇌며 곰은 산마루를 향해 뛰었다. 쉴 새 없이 뛰는 사이 해가 지고 밤이 찾아왔다. 하늘 끄트머리에서 익숙한 빛이 고개를 내밀었다. 사자였다.

가쁜 숨을 몰아쉬며 곰은 산 정상에 도착했다. 조금이라도 하늘과 가까운 곳을 찾아왔는데 아직 사자가 있는 곳까지는 멀기만 했다. 주위를 둘러본 곰은 나무를 타고 올라갔다.

제일 높은 우듬지에 이르러서도 하늘에 발이 닿지 않았다. 앞발을 휘두르며 고민하던 곰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캄캄한 밤하늘을 향해 하나둘 별이 떠오르고 있었다. 때마침 가까이 다가온 별을 딛고 곰은 위로 뛰어올랐다. 하나둘, 별을 건너뛸 때마다 사자가 가까워졌다.

기세 좋게 하늘로 오르긴 했어도 그다음이 문제였다. 작은 별은 안정적인 디딤돌이 아니었다. 부들부들 떨리는 다리로 균형을 잡으면서 곰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긴 꼬리를 휘두르며 사자가 멀어져 갔다. 바로 아래에 곰이 있다는 것도 모르는 듯했다.

사자를 불러 세워야만 했다. 곰은 무의식중에 입을 열었다. 순간, 꽉 물고 있었던 달이 이빨 틈으로 빠져나왔다. 붙잡을 틈도 없이 달은 두둥실 허공으로 떠올랐다.

“잠깐……!”

놓쳐 버린 달을 붙잡으려 곰은 앞발을 들었다. 그러자 곰의 커다란 몸이 기우뚱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한번 흔들린 균형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졌다. 중심을 잃은 곰은 그만 아래로 떨어져 버렸다.

별이, 달이, 밤하늘이 멀어져 갔다.

금세 멀어진 사자를 올려다보면서 곰은 허우적거렸다. 닿지 못할 사자를 향해 발을 뻗었다. 뒤늦게 후회가 몰려들었다.

미안하다는 말로 끝낼 게 아니었는데. 고맙다고 말할 걸 그랬어. 함께하는 동안 즐거웠다고 말할 걸 그랬어. 이대로 다시는 너와 만나지 못하게 될 줄 알았다면.

추락하는 곰과 달리 달은 점점 더 높이 떠올랐다. 달과 사자가 함께 뜬 하늘은 대낮처럼 밝았다.

밤을 수놓는 찬란한 빛을 올려다보며 곰은 안도했다. 그래도 달을 놓아주었으니 사자는 무사히 땅으로 내려올 수 있을 것이었다. 그거면 상관없었다. 마지막으로 사자의 모습을 눈에 담곤, 곧 온몸에 닥칠 충격을 대비하여 곰은 이를 악물었다.

바로 그때였다. 가까워지는 달빛을 눈치챈 사자가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까마득한 거리였지만 곰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사자가 망설임 없이 하늘에서 뛰어내렸다.

“……아.”

곰은 저도 모르게 감탄사를 내뱉었다. 사자는 혜성처럼 밤하늘을 갈랐다.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갈기에서 떨어진 달빛 조각이 사방에 흩뿌려졌다. 수많은 별똥별을 만들어 내며 날아오는 사자는, 너무나도 아름다웠다.

거리가 좁혀질수록 사자는 조금씩 어두워졌다. 마침내 모든 빛을 털어 낸 사자가 앞다리를 뻗었다. 푹신한 몸에 발이 닿자마자 사자가 곰을 끌어안았다. 익숙한 온기를 찾아 곰도 사자를 안았다.

서로를 붙든 채로 곰과 사자는 사뿐히 땅에 내려앉았다.

다시 한번 눈이 마주쳤을 때, 곰과 사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몸을 맞댔다. 곰의 등과 어깨에 연신 볼을 비비며 사자는 그르렁거렸다. 사자의 털을 핥아 주는 곰 또한 정신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흥분이 진정되기까지는 시간이 꽤 걸렸다.

빛을 잃은 사자의 갈기를 살피면서 곰은 크게 숨을 골랐다.

“어떻게 한 거야?”

“달이 도와줬어. 너를 구하라고.”

그랬구나. 기운이 빠진 곰은 제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고개를 숙인 사자가 곰의 가슴을 이마로 가볍게 밀었다.

“다치진 않았어?”

“응.”

“달은 왜 놓친 거야. 산에 다 갔었잖아.”

사자의 목소리에서 안타까움이 뚝뚝 묻어났다. 하늘 위에서도 곰을 내려다보고 있었던 게 분명했다. 곰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사자는 금방 어조를 바꾸었다.

“다시 달을 따러 가자. 길도 아니까 이번이 더 쉬울 거야. 내가 같이 갈게.”

곰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곤 허리를 수그려 사자와 코를 맞댔다.

“이제 달은 필요 없어.”

“응?”

“네가 있으니까.”

곰은 더 망설이지 않았다. 사자의 노란 눈을 들여다보며 곰은 속삭였다.

“너랑 같이 행복해지려고.”

두 번째 고백은 허무하게 흩어지지 않았다. 잠시 굳었던 사자의 표정이 서서히 허물어졌다. 그러다 마침내 사자가 달빛처럼 웃었을 때. 곰은 자신의 긴 여정이 끝났음을 깨달았다.

11.

옛날 옛적, 깊은 산속에 곰 한 마리가 살고 있었다. 곰은 오랫동안 토끼를 짝사랑해 왔다. 하지만 곰을 받아 줄 생각이 없었던 토끼는 곰에게 달을 따다 달라고 했다. 말도 안 되는 부탁인데도 곰은 토끼를 의심하지 않았다. 모든 것을 버리고 곰은 기꺼이 달을 따러 떠났다.

계절이 바뀌고 해가 바뀌었지만 곰은 돌아오지 않았다. 자취를 감춘 곰을 두고 짐승들은 이러쿵저러쿵 떠들어 댔다. 가다가 길을 잃었을 거라고, 또는 달을 따러 갈 용기가 없어서 도망친 거라고 수군거렸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곰은 갑자기 산으로 돌아왔다. 달을 따러 가겠다더니 곰은 아무것도 가져오지 않았다. 정말로 달을 따러 다녀온 건지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놀랍게도 곰은 혼자가 아니었다. 홀로 훌쩍 떠났을 때와 달리 곰의 옆자리에는 사자가 서 있었다.

“작별 인사를 하러 왔어.”

곰은 길을 알려 주었던 치타를, 오랜 친구인 늑대를, 그리고 달을 따러 가라고 시킨 토끼를 차례로 만났다. 그리고 그들에게 인사를 건넸다.

“더 넓은 세상을 보러 가기로 했어.”

언제 돌아오느냐는 말에 곰은 답하지 않았다. 옆에 선 사자에게 몸을 비빌 뿐이었다.

“혼자 걷는 것보다 함께 걷는 게 더 즐겁다는 걸 배웠어. 추울 때는 함께 누우면 된다는 것도. 달을 따서 사랑을 증명하라는 상대가 아니라, 나를 위해 스스로 달이 되어 주는 상대와 짝을 맺어야 한다는 것도.”

사자를 바라보는 곰은 지금껏 한 번도 지은 적 없었던 벅찬 표정이었다.

“이제는 내가 내 짝의 달이 될 거야.”

작별 인사를 마친 곰은 사자와 함께 새로운 여행을 떠났다. 사자의 꿈이었던 세상 구경을 위하여 정처 없는 길에 올랐다. 서로의 옆자리를 든든히 채우는 두 여행자의 앞을 새초롬한 달이 환히 비춰 주었다.

아주 오래전, 달빛을 머금은 작은 별들이 소곤소곤 속삭이던 때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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