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4화 (24/26)

13. 긴 여행의 끝

느리게 흘러가던 시간이 자정에 이르렀을 때, 나는 등 뒤의 은겸에게 말했다.

“생일 축하해.”

“고마워.”

은겸의 답이 욕실을 울렸다. 나른한 목소리에는 조금 전까지 우리가 벌였던 격렬한 정사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따뜻한 물속으로 잠겨 들며 나는 숨을 내뱉었다. 수요일 자정답지 않은 안온한 분위기가 기분 좋았다. 나를 끌어안은 은겸의 품과, 우리가 함께 앉은 넓은 월풀 욕조도. 은겸의 생일을 맞아 일부러 호텔을 예약한 보람이 있었다. 월차를 냈으니 출근 걱정 없이 이대로 느긋하게 새벽을 즐겨도 괜찮았다.

은겸이 손가락으로 내 배꼽 부근을 톡톡 건드렸다. 그래도 내가 반응이 없자 슬그머니 손을 내려 다리 사이를 문질렀다. 자꾸만 파고드는 양심 없는 손을 붙잡고 나는 턱을 뒤로 젖혔다.

“이제 너도 서른넷이네.”

“응?”

“아니. 처음 만났을 땐 서른한 살이었는데. 벌써 30대 중반이 됐나 싶어서.”

“서른넷은 아직 초반 아닌가. 중반은 다섯부터지.”

“그렇다고 치자.”

“너도 금방이야.”

장난스럽게 대꾸한 은겸이 내 귓가에 입을 맞추었다. 꾹꾹 턱을 타고 뽀뽀하던 은겸은 금세 내 입을 찾아들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입술을 벌렸다.

한참 얽힌 혀는 입술도 턱도 축축하게 젖었을 때야 떨어졌다. 다시 뻐근해진 아랫도리를 무시하며 나는 은겸과 손을 겹쳤다. 길쭉한 은겸의 손가락 사이에 손가락을 끼워 넣고 꽉 붙들었다.

은겸이 내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응. 오래 만났다, 우리. 벌써 4년 차야.”

“1년 빼.”

“냉정하네.”

“계산은 정확히 해야지.”

“그럴 거면 정확히 8개월로 계산하셔야죠, 김원재 씨.”

농담처럼 말한 은겸이 귓등을 깨물었다. 따끔한 감각에 복수하듯 손톱을 세우자 은겸이 키득키득 웃었다.

나는 웃음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새삼 시간의 흐름이 느껴졌다. 이제는 헤어져 있었던 기억도 힘들어하지 않고 이야기할 수 있게 되었다. 그간 은겸도 나도 서두르지 않고 새로운 기억을 쌓은 결과였다.

드디어 기다린 때가 찾아온 것 같았다.

은겸의 품에서 벗어나 몸을 돌려 앉았다. 욕조에서 벌거벗은 채로 멋없이 건넬 작정은 아니었지만. 아무래도 지금 말하는 게 제일 나을 듯했다. 은겸의 눈을 바라보며 나는 입을 열었다.

“서은겸.”

“응.”

“우리 이제 다른 약속을 해도 될까.”

은겸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어색한 미소가 뒤를 이었다.

“프러포즈 같네.”

“프러포즈야.”

“…….”

“그때 그 말. 아직도 유효한 게 아니면 좋겠다. 세 번째 결혼은 사자랑 하겠다는 거.”

“…….”

“결혼해 줘.”

은겸이 이마를 짚었다. 그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고 나는 계속 말을 이었다.

“자신 없을 거라는 거 알아. 그랬다가 또 헤어지면 네가 얼마나 힘들어할지도. 당장 답하라는 거 아니니까 천천히 생각해 봐.”

“…….”

“오래 기다려도 나는 괜찮아.”

따뜻한 물속에 잠겨 있어서 다행이었다. 바깥으로 드러난 맨살이 차가웠다. 문득 내가 얼마나 긴장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거절이 두려운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길게 한숨을 쉰 은겸이 고개를 들었다.

“원재야.”

곧바로 답변을 해 줄 줄은 몰랐는데. 나는 허리를 곧게 세웠다. 어떤 답이 돌아와도 실망하지 말자고 몇 번이고 되뇌었다.

여전히 시선은 아래로 떨어뜨린 채 은겸이 입을 열었다.

“우리 동거 시작할 때 커플링 맞춘 거 말이야.”

“응.”

“업그레이드하려고 내가 요새 알아보고 있었거든.”

“응. ……응?”

“결혼반지는 따로 맞추는 게 좋을 거 같아서.”

어? 생각지도 못한 단어가 귀를 울렸다. 나는 눈을 크게 떴다. 은겸이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번 추석 연휴에 우리 아버지 뵈러 같이 가 줄래?”

설마 떠나온 프라이드를 얘기하는 건 아닐 테고. 은겸이 지금도 계속 연락을 하는 아버지라면 한 명이었다.

“주인호네 아버지?”

“응.”

비로소 시선을 올린 은겸이 나를 바라보았다. 부드러운 눈웃음과 마주치자 불안이 녹아내렸다.

“널 내 배우자로서 소개하고 싶어.”

헛웃음이 나왔다. 나만 프러포즈를 준비하고 있던 게 아니었다. 은겸도 나와의 미래를 진지하게 그리고 있었다. 당연한 사실을 깨닫자 안도가 밀려왔다. 긴장이 풀린 몸이 아래로 축 늘어졌다. 은겸의 목에 팔을 두르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첫 결혼도 아니니까 조용하게 하자.”

“난 세 번째지만 너는 처음이잖아. 크게 해.”

“작게 하자. 나 친구도 별로 없고 부를 가족도 없어.”

“나는 많은데. 이전 프라이드 사람들 다 부를 거야. 회사 직원들이랑, 거래처 분들…….”

“알았어. 그래. 크게 하자.”

작게 하든 크게 하든 그게 대수일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와 같은 마음이라는데. 내 청혼을 받아 주겠다는데. 괴로웠던 과거의 기억에서 벗어날 만큼 나를 사랑한다는데.

드디어 나와 가족이 되고 싶다는데.

등 뒤를 돌아 파고든 은겸의 꼬리가 슬그머니 내 허리를 감았다. 내 뺨을 붙든 은겸이 나직이 말했다.

“사랑해.”

“…….”

“사랑한다, 김원재.”

하루에도 몇 번이고 듣는 고백이 오늘따라 두근거렸다. 나는 고개를 까닥였다. 다정하게 뺨을 어루만진 은겸이 내 눈을 들여다보았다.

“결혼해 줄래?”

젖은 머리에서 떨어지는 물방울이 수면 위를 똑똑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나는 가까스로 대답했다.

“내가 먼저 물어봤잖아.”

“이게 내 답이야.”

다시 정적.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를 수 없었다. 나를 살피는 은겸의 눈빛이 선명했다.

“결혼하자. 원재야. 나하고 결혼해 줘.”

“…….”

“내 배우자가 되어 줘. 나와 평생을 약속해 줘.”

“…….”

“우리가 어떤 관계가 되더라도 지금처럼 계속 사랑해 줘.”

결혼 생활의 끝에 자연스럽게 따라왔던 이별을 떠올리기라도 한 것인지, 은겸의 표정이 간절해졌다. 나는 은겸의 손등 위에 내 손을 얹었다.

“서은겸.”

“응.”

“법적으로 가족이라고 인정받는 것뿐이야. 결혼하든 안 하든 우리 관계에서 달라지는 부분은 없어. 미리 걱정하지 마.”

“…….”

“아, 하나 있나.”

손바닥에 감긴 손등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괜찮아. 이제 다 괜찮아. 은겸을 부드럽게 매만지며 나는 중얼거렸다.

“여보 소리 하려면 미리 연습 좀 해야겠…….”

마지막 말은 덮쳐든 은겸의 입 속으로 먹혀들었다. 입술을 비비고 혀를 빨아올리면서 은겸이 목 안쪽에서 그르릉 소리를 냈다. 사랑해. 사랑해. 그가 소리 없이 내뱉는 말을 고스란히 삼키면서 나는 눈을 감았다. 맞닿은 은겸의 가슴에서 빠르게 뛰는 심장 박동이 느껴졌다.

오랜만에 건 전화는 금방 연결되었다.

―원재니?

“네, 어머니.”

잘 지내시냐는 인사가 끝나자 할 말이 떨어졌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숨을 골랐다. 어머니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금세 눈치챘다.

―무슨 일 있니?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힘들어도 이야기해야만 했다. 그러기 위해 건 전화였으니까.

“저 결혼해요.”

―그래?

뜻밖에도 어머니의 반응은 태연했다. 결혼 사실만 전달하고 끊을 수도 있었지만, 나는 조금 더 솔직해지기로 했다. 어쩌면 이번이 마지막 기회가 될 수도 있으니까.

안 오신다고 하더라도 어머니께 꼭 전화하라고 강조하던 은겸을 떠올리면서 말을 이었다.

“이상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저는 어렸을 때부터 평생 같이 살 가족을 가지고 싶었어요. 곰답지 않은 생각이지만 그랬어요.”

―…….

“이루지 못할 꿈인 줄 알았는데. 앞으로 계속 함께 살 사람을 찾았어요. 그래서 결혼해요.”

―그래. 축하한다.

“결혼식에 안 와 주셔도 되니까……. 그냥 그렇다고 알려 드리고 싶어서 전화했어요.”

―그래.

어머니의 반응은 여전히 무덤덤했다. 남이나 다름없는 독립한 자식인데, 괜한 소식을 전한 건가. 입맛이 씁쓸했다. 관심 없으실 텐데 더 귀찮게 해 드리면 안 될 듯했다. 서둘러 통화를 마무리하려 할 때였다.

어머니가 한숨을 쉬었다.

―사자라면서. 괜찮은 사람이니?

“네?”

―그래. 네가 골랐으니 좋은 사람이겠지. 예주도 처음에는 많이 걱정했다더니, 만나고 와서는 생각이 바뀌었다고 하더라만.

“어머니. 예주하고 연락하세요?”

―예주 부모님 아직 여기 사시는 거 몰랐니? 종종 와서 담소 나누다 가신다.

“아…….”

그랬다. 예주는 우리 이웃집에 살던 아이였다. 어머니도 예주 부모님도 아직 그 동네에 살고 계실 줄은 몰랐는데. 그렇다고는 해도 최근까지 내 소식을 계속 전해 들으신 건가? 어머니가? 당황한 내가 말을 멈추자 어머니가 혀를 찼다.

―어릴 때부터 넌 참 곰 같지 않은 애였지. 나는 그게 다 예주네 가족이 너한테 괜한 바람을 불어넣은 탓이라고 생각했다.

“…….”

―그런데 너만큼이나 나도 늑대들한테 물이 든 건지 뭔지. 요새는 네가 그립더구나.

“어머니.”

―예식 날짜와 장소를 알려 다오. 나도 참석하마.

다시금 머릿속에 은겸이 떠올랐다. 어머니께 정식으로 인사할 은겸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이루 형용할 수 없는 감정이 벅차올랐다.

내 가족이 될 사람과 가족이 만난다.

평생 꿈에서나 그릴 줄 알았던 모습을 볼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네가 어릴 적에는 곰답게 행동하라며 참 많이도 혼냈지만. 이제는 좀 생각이 바뀌었다. 곰이니 뭐니 하는 소리에 얽매이지 말고 네가 원하는 모습으로 살려무나.

멋쩍은 듯 헛기침을 한 어머니가 한마디를 건넸다.

―어떤 모습이든 네가 행복하면 되는 거란다.

전화를 끊은 뒤에도 어머니의 마지막 말이 계속해서 귓가에 남았다. 오랫동안 묶여 있었던 매듭이 가슴 속에서 툭, 풀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햇볕이 따스하게 쏟아지는 가을날의 오후. 소박하지만 단아하게 꾸민 넓은 홀. 구석구석을 장식한 예쁜 꽃들.

“곧이어 오늘의 두 주인공이 입장하겠습니다. 하객 여러분은 힘찬 박수로 맞아 주시기 바랍니다.”

기대에 찬 눈으로 우리를 돌아보는 예주와 늑대 식구들. 효영과 과장님, 부장님, 회사 동료들. 오랜만에 보는 대학 동기들. 동아리 사람들. 은겸의 가족들 사이에 섞여 있는 인호와 정운이. 어머니.

그리고 내 옆에서, 똑같은 예복을 갖춰 입고 손을 잡고 선 은겸.

“행복해?”

“응.”

“나도 그래.”

긴장한 듯 내 쪽으로 고개를 기울이곤 속삭이는 나의 사자. 평생을 함께하자고 약속한 나의 배우자. 나의 서은겸.

꿈만 같은 모든 것이 내 앞에 현실로 놓여 있었다.

우리의 기다림은 끝이 났다. 눈앞에 다가온 것은 찬란하게 빛나는 길. 둘이서 함께 쌓아 올릴 긴 시간의 시작이었다.

나는 숨을 들이마셨다.

“갈까?”

“가자.”

발을 뗀 순간 박수와 환호가 쏟아졌다. 새로운 출발을 축복하는 목소리가 우리를 이끌었다. 서로의 눈을 들여다보고 웃은 뒤, 나와 은겸은 걸음을 옮겼다. 맞잡은 손이 풀리지 않도록 힘을 주고 모두의 앞으로 당당하게 걸어 나갔다.

이토록 눈부신 우리의 미래를 향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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