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곰은 생선을 굽는다
세상에는 세 부류의 사람이 있다. 요리를 잘하는 사람, 못하는 사람, 그리고 아예 안 하는 사람.
김원재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제일 마지막 부류에 속하는 사람이었다. 성인이 되자마자 자취를 시작했지만, 요리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의 선택은 편의점 도시락 또는 외식이었다. 회사 동료들과 먹는 점심을 제외하면 어차피 혼자 밥을 먹기 때문이었다. 자기 자신을 위해서 매 끼니 메뉴를 고르고, 장을 보고, 무언가를 만들고, 뒷정리하는 건 번거로운 일이었다. 결국 그는 긴 세월 동안 요리와 담을 쌓았다.
조용했던 식사 시간이 소란스러워진 건 정확히 10년 만이었다. 서른 살이 되던 해, 원재의 인생에 사자 한 명이 갑자기 나타났다. 서은겸이라는 이름을 지닌 사자는 원재와 함께 먹는 밥을 좋아했고, 수시로 맛있는 걸 만들어 주지 못해 안달하곤 했다.
비어 있던 식탁의 건너편이 채워진 날 이후. 원재는 두 번째 부류로 바뀌었다. 가끔 요리를 시도하지만 잘하지는 못하는 사람으로.
저녁 먹고 와?
아니 시간 없어서 그냥 가려고
그럼 같이 먹자.
그래 한 시간 정도 걸릴 거야
여유로운 토요일 오후, 날아온 은겸의 메시지를 읽은 그가 고민에 잠긴 것도 그 탓이었다. 어디서 뭘 먹을까. 고민하며 원재는 턱을 만지작거렸다. 주말답게 근사한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보낸다는 선택지가 제일 먼저 떠올랐지만, 그는 곧장 그 문항을 지워 버렸다. 그도 그럴 게, 은겸은 2박 3일의 출장을 마치고 이제 막 귀가하는 참이었다. 피곤할 텐데 밖에 나가자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럼 배달 음식인가. 그는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같이 먹을 만한 메뉴를 이것저것 떠올리고 있을 때, 은겸의 메시지가 다시 도착했다. 와인 병이 찍힌 사진이었다.
맛있어 보이길래 샀어 같이 마시자
잘은 몰라도 고급스러워 보이는 화이트 와인의 사진을 들여다보며 원재는 피식 웃었다. 은겸은 항상 출장지에서 돌아올 때면 그를 위해 작은 선물을 사 오곤 했다. 지역 특산물에서부터 작은 액세서리까지 품목은 다양했는데, 그중에서도 유독 먹을 것이 많았다. 둘이서 함께 즐길 수 있는 종류를 주로 골라오기 때문이었다. 출장 때문에 떨어져 있던 시간을 보상받고 싶어 하는 마음 탓이라는 걸 알기에 그는 은겸이 무엇을 사 오든 고맙게 받았다. 어디를 가든지 자신을 생각해 주는 게 기쁘기도 했다.
오늘 선물도 지금껏 받았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원재는 잠시 고개를 돌려 와인 냉장고의 상황을 확인했다. 그동안 은겸이 차곡차곡 채워 넣은 냉장고 안에는 자리가 없었다. 사진 아래에 뜬 메시지를 한 번 더 읽고 그는 알겠다는 답을 보냈다. 은겸의 선물은 오늘 저녁에 마시면 될 것 같았다.
‘그럼 스테이크가 좋으려나. 화이트 와인이니까 생선으로…….’
와인과 어울릴 만한 음식을 이것저것 고르다가 그는 입매를 굳혔다. 어떤 음식이든 앞자리에서 웃고 있는 은겸의 얼굴도 함께 떠올랐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간 수시로 다녔던 데이트 덕분에 접했던 음식들이니까. 애당초 와인은 은겸이 좋아하는 술이었다.
‘민망하네.’
보는 사람도 없는데 얼굴이 후끈 달아올랐다. 원재는 괜스레 목덜미를 어루만졌다. 고작 저녁 메뉴를 고르는 사이에도 자연스럽게 은겸과의 추억을 곱씹고 있는 자신이 부끄러웠다. 은겸이 알면 크게 기뻐했겠지만. 어쩌면 은겸은 이런 반응을 노리고 일부러 그의 식생활에 공을 들이는지도 몰랐다. 그렇지 않고서야 육식종인 자신의 식성마저도 제쳐 두고, 모든 메뉴를 원재에게 맞춰 줄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반대로, 은겸이 두고두고 곱씹을 만한 기억을 하나 정도 남겨 주는 것도 좋지 않을까.
생각이 거기에 미치자 비로소 결심이 섰다. 원재는 재빨리 핸드폰을 집어 검색창을 열었다. 생선 스테이크 추천. 한 글자씩 적어 넣는 손가락이 조금 떨렸다. 배달 음식으로는 모자랐다. 뭐라도 좋으니까 은겸에게 직접 만든 음식을 대접하고 싶었다.
제일 먼저 뜬 연어를 넘기고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걸 은겸에게 먹이기는 좀 그랬다― 그는 메뉴를 정했다. 삼치. 비린내도 적고 스테이크를 만들기에도 적당한, 조리가 어렵지 않은 생선이라는 설명을 보자마자 마음이 끌렸다. 제대로 할 줄 아는 요리라곤 라면이나 달걀 프라이가 전부지만, 그래도 생선 토막을 굽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최대한 간단한 레시피를 골라 화면에 띄운 뒤, 원재는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은겸이 돌아오기 전에 재료를 사 와야 했다. 지갑과 열쇠를 챙긴 뒤 그는 서둘러 집을 나섰다.
마트로 향하면서도 그는 몇 번이고 사야 할 식재료를 확인했다. 고작 한 끼를 챙기려는 것뿐인데 거창한 계획이라도 세운 기분이었다. 아니, 사실은 마치 비밀스러운 임무라도 맡은 것처럼 설렜다.
‘맛있게 되면 좋겠는데.’
어쩔 수 없었다. 요리는 원재에게 아직 낯선 영역이었다. 동거를 시작하며 공평하게 가사를 분담했지만, 은겸은 요리만큼은 양보하지 않았다. 자신이 만든 음식을 원재가 먹어 주는 모습을 계속 보고 싶다는 이유에서였다.
‘내 작은 행복을 빼앗지 마.’
장난스럽게 말하던 은겸은 고집을 꺾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요리를 넘겨주는 대신 설거지를 맡겠다며 역할 분담을 마쳤다. 물을 좋아하지 않는 사자 연인을 생각한 제안이었다.
매일 두 사람분의 상을 차리는 은겸이 그래 왔던 것처럼. 오늘은 피곤할 은겸에게 맛있는 것을 만들어 먹이고 싶었다. 기뻐할 연인의 얼굴을 상상하며 그는 슬쩍 미소 지었다.
삼치를 열 마리쯤 사 왔어야 했다.
프라이팬 안에서 심상치 않은 냄새와 함께 연기가 피어올랐을 때, 원재는 뒤늦게 후회했다. 망할 걸 대비해서 재료를 충분히 사 올걸.
급하게 장을 보다 보니 여유분을 챙기지 못했다. 삼치 스테이크 레시피 중 제일 간단한 것을 찾느라 시간을 너무 써 버린 탓이었다. 마트에서 필요한 재료만 사서 재빨리 집에 돌아왔는데도 이미 은겸의 귀가 시간까지는 20분 남짓 남아 있었다. 그는 허둥지둥 주방으로 향했다.
준비한 재료를 조리대 위에 전부 올려놓고 은겸이 요리할 때 쓰는 허리 앞치마까지 꺼내어 두르자 긴장감이 밀려왔다. 레시피에서 시키는 대로 차근차근 하면 돼. 자신을 다독이며 그는 길게 심호흡을 했다.
안타깝게도 문제는 처음부터 일어났다.
구이용으로 손질된 삼치는 따로 손댈 필요가 없었다. 프라이팬에 기름을 두르고 불을 켠 뒤, 그대로 생선 토막을 투척하려다가 원재는 멈칫 손을 멈추었다.
‘이거 물로 안 씻어도 되나?’
레시피를 다시 들여다봤지만 그런 이야기는 적혀 있지 않았다. 화면을 위아래로 스크롤하면서 원재의 마음에 조금씩 불안이 쌓였다. 이상했다. 그가 어깨너머로 은겸에게 배운 바에 의하면 요리는 ‘청결을 최우선으로 두는 작업’이었다. 아무리 튀길 생선이라도 씻는 게 낫지 않을까. 다른 레시피를 찾아야 하나? 그럼 요리 과정도 전부 다 바꿔야 할 텐데. 재료도 달라질지 모르고. 고민하는 사이 가열된 프라이팬에서 열기가 피어올랐다.
그제야 원재는 정신을 차렸다. 이런 사소한 문제에 골몰할 때가 아니었다. 자신의 감을 믿기로 하고 그는 서둘러 삼치를 씻었다. 물기를 닦아 냈는데도 생선을 프라이팬에 올리자마자 기름이 사방으로 튀었다. 한 걸음 뒤로 물러나서 원재는 프라이팬과 시계를 번갈아 확인했다.
‘이거 왜 안 익지.’
이제 맛있게 익어 주기만 하면 될 텐데. 야속한 생선은 좀처럼 익지 않았다. 앞서 쓸데없는 고민에 시간을 너무 소모한 탓이 컸다. 이러다 은겸에게 안 익은 생선을 먹이게 생겼다. 센 불로 하면 더 빨리 익지 않을까. 요리 초보들이 흔히 하는 착각을 자신도 따라가고 있다는 사실도 모르는 채로, 원재는 불을 올렸다.
그 결과가 바로 지금의 망한 삼치 스테이크였다.
비장하게 뒤집개를 손에 들고 원재는 자신이 만들어 낸 무언가를 이리저리 확인했다. 삼치 토막은 요리라고 부르기 민망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바깥 껍질 부분은 까맣게 그을렸는데 안쪽은 익지 않은 속살 그대로였다. 게다가 손을 댈수록 생선 특유의 비린내와 탄 냄새가 진동했다. 그는 허둥지둥 환풍기를 켜고 프라이팬의 뚜껑을 덮었다.
탄 건 발라낸다 치더라도 비린내는 문제였다. 이럴 때 믿을 건 집단 지성뿐. 그는 빠르게 손을 씻고 핸드폰을 집었다.
“비린내 제거……. 어?”
제일 간단한 레시피를 찾아 헤맨 역효과가 그제야 나타났다. 굽기 전에 쌀뜨물에 담그라는 이야기를 보자마자 원재는 굳어 버렸다. 조금 전까지 차근차근 따라 하던 레시피에는 이런 내용이 전혀 없었다. 많은 것이 생략된 조리법이기 때문이었다.
이미 반쯤 익힌 생선을 쌀뜨물에 담글 수는 없는 노릇. 은겸이 돌아올 시간은 점점 다가오는데, 제대로 만든 건 하나도 없었다. 등골에 흐르는 식은땀을 무시하며 그는 다시 손가락을 움직였다. 다 구운 생선의 비린내를 제거하는 방법을 찾아보자 레몬즙을 바르라는 팁이 등장했다. 안도의 한숨도 잠시, 원재의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집에 레몬이 있었나. 아마도 없었던 것 같다.
망했다.
머릿속을 스쳐 가는 한 문장을 부인할 수 없었다. 원재는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이렇게 될 걸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어떤 분야에 소질이 있는지 꽤 객관적으로 파악하는 사람이었다. 당연히 자신의 요리 솜씨에 대해서도 큰 기대가 없었다. 그러니 망하지 않도록 모든 일에 신중을 기하자는 결심을 했을 뿐인데. 어째서인지 그 결심이 제일 큰 방해가 된 셈이었다.
일단 벌여 놓은 일은 수습해야 하니 지금이라도 레몬즙을 사러 가야 했다. 그가 식탁 위에 핸드폰을 내려놓은 순간이었다. 현관 쪽에서 번호키를 누르는 소리가 들리더니 문이 열렸다.
“……어.”
“원재야.”
그리고 언제나 그렇듯 그의 이름을 제일 먼저 부르면서 은겸이 집 안으로 들어섰다.
대답 없는 그를 찾아 이리저리 돌아다니는 은겸의 기척이 오늘따라 두렵게만 느껴졌다. 앞치마를 꽉 붙든 채 원재는 바짝 몸을 긴장시켰다. 마침내 부엌으로 다가온 은겸이 고개를 내밀었을 때, 그는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은겸이 코를 찡긋거렸다.
“요리하고 있었어?”
“어, 어.”
사방을 맴도는 냄새 때문에 이미 무슨 상황인지 파악했을 텐데도, 은겸은 그저 싱긋 웃을 뿐이었다.
“맛있는 거?”
“어, 그게.”
우물우물 답하는 사이, 가벼운 걸음으로 다가온 은겸이 그를 끌어안았다. 은겸을 마주 안지도, 그렇다고 밀쳐 내지도 못하고 원재는 숨을 참았다. 목덜미에 코를 박은 은겸이 살갗을 살짝 깨물었다.
“다 됐어?”
“아직.”
“언제쯤 먹을 수 있는데?”
“……좀 기다려야 해.”
“그래? 그럼 다 될 때까지 다른 거 먼저 먹을까?”
말과 동시에 은겸의 손이 허리께를 더듬었다.
“뭐 하는 거야.”
“김원재 씨 에이프런이 상상보다 섹시해서요.”
“네 거잖아.”
“뭐가. 에이프런? 아니면 너? 아, 이거 좀 바보 같은 질문인가?”
“잘 아…….”
“둘 다 내 거니까.”
싱글싱글 웃는 은겸을 밀어내려다 말고 원재는 한숨을 내쉬었다. 기어코 그의 엉덩이를 더듬으며 입술 위에 키스를 퍼붓고 나서야 은겸은 부엌 쪽을 돌아보았다.
“뭐 구웠어?”
은겸의 장난 때문에 잠시 잊고 있었던 프라이팬 속 대참사가 다시 떠올랐다. 글쎄. 저게 과연 뭘까. 원재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그를 빤히 보던 은겸이 거침없이 인덕션 앞으로 걸어갔다. 그러곤 붙잡을 새도 없이 프라이팬 뚜껑을 열었다. 다시 밀려 나오는 불쾌한 냄새에 원재는 인상을 찡그렸다.
타 버린 생선을 보고도 은겸은 태연했다.
“삼치?”
“……응.”
“좋다. 저녁으로 먹으면 딱이겠네.”
“망해서 다시 만들어야 돼.”
“아, 근데 나는 이걸로 괜찮지만 너는 모자라지 않을까? 뭘 좀 더 곁들이고 싶은데.”
“내가 사 올게. 이건 버려.”
프라이팬 안을 살펴보는 은겸의 목소리에는 꾸밈이 없었다. 연인이 무안할까 봐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은겸에게 망한 요리를 먹일 수는 없는 노릇. 원재는 서둘러 은겸의 어깨를 붙들었다. 이걸 되살릴 방법도 시간도 없으니 아예 다 조리된 음식을 사 오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아냐, 괜찮아.”
서툰 요리에 집중한 나머지 원재가 간과한 점이 두 가지 있었다. 그의 연인은 설령 생선을 숯덩이로 만들어 내놓는다 하더라도 맛있게 먹어 줄 위인이라는 것.
“이거 쓰면 돼.”
“이걸?”
“응. 네가 준비한 건데 버리기는 아깝잖아.”
그리고 바닥을 치는 그의 능력치와는 반대로, 은겸의 요리 실력은 최상급이라는 사실.
어깨를 으쓱인 은겸이 원재를 돌아보았다.
“잠깐만 기다려. 씻고 올 테니까 같이 만들자.”
씻고 나온 은겸은 편한 옷으로 갈아입곤 부엌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때까지 식탁 옆에 서서 기다리던 원재를 끌어안았다. 과감한 포옹에 원재는 흠칫 몸을 떨었다.
“요리한다며.”
“이거 잠깐 받아 갈게.”
짧게 말한 은겸이 원재의 등 뒤로 손을 둘렀다. 손가락이 허리 뒤에서 섬세하게 움직이면서 앞치마의 끈을 풀어냈다. 키스하려는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그는 그제야 긴장을 풀었다. 착각이 민망했다. 마음대로 하라고 고개를 끄덕이자 은겸이 불쑥 고개를 틀었다.
“이것도.”
“…….”
기어코 볼에 입을 맞춘 은겸이 뒤로 물러났다. 그러면 그렇지. 간질간질한 뺨을 손등으로 문지르며 원재는 은겸을 외면했다.
앞치마를 두른 뒤부터는 은겸의 독무대였다. 원재에게 설거지를 맡긴 은겸은 타 버린 껍질을 발라냈다. 그러더니 무언가 이것저것 섞어 소스를 만들곤 삼치를 도로 프라이팬에 넣었다. 물기를 닦은 원재는 바삐 움직이는 은겸의 어깨 너머를 힐끗 바라보았다. 짭조름한 양념 냄새가 퍼지면서 생선 토막이 서서히 익어 갔다. 스테이크에서 조림으로 방향을 바꾼 듯했다. 밑간을 하지 않은 게 천만다행이었다. 원재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사이 은겸이 다시 냉장고를 열었다. 안을 이리저리 살피던 은겸이 꺼낸 것은 양상추와 방울토마토였다. 원재는 서둘러 은겸의 손에서 채소를 뺏어 들었다.
“샐러드?”
“응.”
“내가 할게.”
메인 요리도 결국 은겸의 손에 맡겼는데, 자신이 먹을 샐러드까지 맡길 수는 없었다. 재료를 씻고 채소 탈수기로 물기를 제거하는 동안 그릇을 옆에 놓아둔 은겸이 자리를 떴다.
“와인 마실 거지?”
“응.”
생선 문제가 해결되자 거짓말처럼 모든 게 일사천리였다. 은겸은 마치 자신이 준비한 메뉴인 듯 완벽하게 요리를 끝냈다. 금세 플레이팅을 마친 삼치가 각자의 자리에 놓였다. 은겸이 가져온 화이트 와인까지 갖추자 제법 그럴듯한 저녁 식사가 완성되었다. 마주 보고 앉은 식탁에서 맛있는 냄새가 풍겼다. 비로소 원재는 마음을 놓았다.
출장에서 돌아오자마자 요리를 해야 했는데도 은겸은 피곤한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와인 잔을 들어 올린 은겸이 싱긋 웃었다.
“네 덕분에 맛있는 것도 먹고. 좋다.”
결국은 자신이 직접 만들었으면서 과분한 칭찬이었다. 수고했다는 의미로 맛있는 걸 먹이고 싶었는데 또 대접받다니. 원재는 무심코 흐를 뻔한 한숨을 삼켰다.
“앞으로는 미리 준비해 둘게.”
“다음번엔 좀 더 간단한 걸 만들자. 아, 반조리 식품 같은 건 어때? 우리 회사에서도 이번에 론칭하려 하거든.”
“그런 건 왠지 특별하지가 않은 것 같아서.”
“그럼 특별한 데이트용 메뉴를 개발하면 되겠네. 요리 초심자도 만들기 쉬운 난이도로.”
“사심으로 상품 개발해도 돼?”
“당연하지. 내가 사장인데.”
자신 있게 말한 은겸이 장난스럽게 웃었다. 은겸을 따라 피식 웃음을 흘리며 원재도 잔을 집었다. 가볍게 부딪친 유리잔이 맑은 소리를 내며 울렸다.
언제나 다정한 연인은 이런 순간까지도 마음을 써 준다. 억지로, 무리해서 건네는 소리가 아니란 걸 알고 있다. 실없는 농담 같아도 그의 허락만 떨어지면 곧바로 실행에 옮길 거라는 사실도. 자연스럽게 흘러나온 은겸의 마음이 부드럽게 몸에 감겼다. 한 모금 마신 와인의 맛처럼.
입 안에 감도는 향긋한 액체를 삼키면서 원재는 고개를 까닥였다. 그래. 요리로 진심을 전하지 못했다고 침울해질 필요는 없었다. 직접 소리 내어 전한다는 방법도 있으니까. 게다가 안 그래도 피곤할 은겸을 위로해 주지는 못할망정,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 가라앉은 분위기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
은겸이 잔을 놓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그는 입을 열었다.
“출장 수고했어.”
“수고했지. 너 보고 싶은 거 참느라.”
“이틀밖에 안 지났잖아.”
“목요일 아침에 출발했으니까 이틀 넘었어. 반올림하면 사흘이야. 사흘씩이나 못 본 거지.”
사흘이라는 단어를 강조하며 은겸이 포크를 놀렸다. 크게 썬 생선 살을 입에 넣곤 우물우물 볼을 움직이는 모양새가, 아닌 척해도 배가 많이 고팠던 듯했다. 은겸의 잔이 비기를 기다렸다가 원재는 병을 들어 잔을 채웠다.
“그럼 앞으로는 출장 가지 말든가.”
“그럴까? 다른 사람한테 다 떠넘기고?”
곧장 맞받아치는 은겸은 진심 같지 않았다. 농담인 걸 알기에 원재도 가볍게 대꾸했다.
“아니면 나 데리고 가든가.”
“그건 기각. 휴일은 집에서 쉬어야지.”
“일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 데이트하면 되잖아.”
“안 돼. 무슨 이유든 너 기다리게 하는 건 싫어.”
대화가 오가는 동안에도 은겸은 빠르게 생선 살을 잘라서는 입으로 가져갔다. 은겸의 몫이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원재는 손도 대지 않은 자신의 접시를 앞으로 밀었다.
“이것도 먹어.”
“네 거잖아.”
“나는 샐러드 먹을게.”
“그걸로 배가 차겠어? 안 돼. 배고플 거야.”
예상대로 은겸은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잠시 머리를 굴린 원재가 나이프를 집었다.
“그럼 이렇게 하자.”
깨끗이 반 토막 난 삼치를 가리키며 그는 말했다.
“나는 샐러드를 먹을게. 너는 이쪽을 먹어.”
“남은 반은?”
“이따 배고파지면 먹을게.”
“이따?”
“어차피 안 재울 거잖아.”
그의 말을 듣자마자 은겸의 노란 눈이 반짝 빛났다. 곧장 손을 식탁 아래로 내리고 허리를 꼿꼿이 편 은겸이 귀를 뒤로 젖혔다.
“그럼 나도 나중에 먹을게.”
“너는 지금 먹어.”
“왜?”
“힘써야 하니까.”
은겸의 긴 꼬리가 바닥을 탁탁 두드리기 시작했다. 안 보이고 안 들리는 척 원재는 샐러드 볼을 뒤적거렸다. 촉진제가 없으니 직접적인 관계까지는 무리지만, 은겸이 만족하도록 도와줄 수는 있었다. 비발정기를 하루 이틀 같이 보낸 게 아니라 취향도 대강 알고 있었고.
“뭐 할지 생각이나 해 놔.”
말을 마치기가 무섭게 은겸의 포크가 접시 위를 날아다녔다. 속으로 피식 웃으면서 원재는 샐러드를 묵묵히 먹었다.
식사를 마친 뒤에도 은겸은 계속 원재의 주변을 얼쩡거렸다. 물에 젖는 걸 좋아하지 않는 은겸을 위해 동거 초기부터 설거지는 원재의 담당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언가 도와줄 게 없냐며 서성거리는 은겸의 속셈이란 뻔했다.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원재는 설거지를 마쳤다. 마지막으로 주변 정리를 하기 위해 주방을 돌아보던 그의 시선에 검은 앞치마가 들어왔다.
“그래도 알몸에 에이프런 걸치고 요리해 달라는 소리는 안 하네.”
네모반듯하게 앞치마를 접으며 그가 중얼거리자 은겸이 곧바로 답했다.
“음식 만들 때 그러면 안 되지. 요리는 청결이 기본인데.”
“…….”
“다른 사람도 아니고 네가 먹을 거잖아. 깨끗하게 만들어야 해.”
꽤 상식적인 소리였다. 원재의 안에서 ‘평소에는 멀쩡하지만 잠자리 취향만은 변태’로 낙인찍힌 은겸이 그렇게 답한다는 게 놀라울 정도로. 그러나 그의 놀람은 잠깐이었다. 은겸은 곧바로 몇 마디를 더 덧붙였다.
“아, 플레이용 에이프런을 따로 사다가 침대에서 입어 주는 건 괜찮아.”
“싫진 않다는 소리네.”
“당연하지. 그런 걸 왜 싫어하겠어.”
소리 없이 다가온 은겸이 뒤에서 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이건 허리 아래만 가리잖아. 네가 쓸 건 가슴을 덮는 디자인으로 사야 해.”
“……무슨 차이야.”
“원래 다 보이는 것보다 반쯤 가린 차림이 제일 섹시한 법이야.”
어차피 가슴을 덮건 허리 아래만 가리건, 앞치마만 두른 뒷모습은 휑한 나체일 텐데. 하지만 원재는 그 이상 묻지 않았다. 전라보다 은근슬쩍 드러나는 상반신 노출을 매우 선호하는 은겸의 취향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잘 발달한 가슴 근육을 매일 만지는 애인과 오래 사귀면 그 정도는 묻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알게 되는 법이었다.
그럼 이건 어쩌지. 손에 쥔 앞치마를 내려다보며 원재는 망설였다. 그사이 더는 참지 못한 은겸이 목덜미에 쪽쪽 입을 맞추기 시작했다.
“그건 됐으니까 이제 방으로 가자.”
원재의 손에서 앞치마를 빼앗아 식탁 의자에 걸쳐 놓곤, 은겸이 은근히 허리를 문질러 댔다. 더는 시간을 끌 여유가 없을 듯했다. 끄응, 한숨 같은 소리를 내면서 원재는 팔을 뻗었다.
“새 거는 내일 사다 줄게.”
“응?”
“지금은 이걸로 참아.”
빠르게 흔들리는 긴 꼬리를 무시하고 그는 허리에 앞치마를 둘렀다. 아, 옷을 먼저 벗어야 했나. 은겸이 오기 전에 예행연습이라도 해 볼걸. 삼치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이쪽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고민에 빠질 틈은 없었다. 당장이라도 잡아먹을 듯 눈을 빛내며 은겸이 그에게로 다가왔다.
“원재야. 위쪽은 와이셔츠로 갈아입으면 안 될까?”
“…….”
“다 벗으면 안 되고 셔츠는 단추만 풀자.”
“……그래.”
출장에서 돌아온 은겸에게 맛있는 것을 먹이고 싶었다. 비록 삼치 스테이크는 망한 것 같지만, 준비한 메뉴는 아직 더 남아 있으니까. 그리고 은겸은 언제 어디서든 거부하지 않고 원재가 준비한 ‘맛있는 것’을 덥석 먹어 줄 위인이었다. 그것도 매우 기뻐하면서.
김원재의 요리 실력이 늘지 않는 건 전부 서은겸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