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당부
“나 여자 좋아해.”
저는 아직도 제 첫 커밍아웃을 기억해요. 중학교 2학년 때였고, 상대는 부모님이나 선생님이 아닌 친구였어요. 네, 바로 원재였죠.
특별한 이유는 없었어요. 원재를 떠보려고 꺼낸 얘기였으니까요. 물론 원재는 제가 어떤 성향을 지녔든 친구로 대해 줄 애였으니까 말했지만요. 딱히 비밀로 둘 생각도 아니었고, 상담이 필요했던 것도 아니었어요. 그보다 저는 원재의 반응을 알고 싶었어요.
원재와는 초등학생 때부터 쭉 친구였어요. 원재의 옆집으로 이사 간 이후로 부모님들도 서로 알고 지냈죠. 원재는 평생 함께하는 가족에 대한 동경 같은 걸 지닌 애였어요. 그걸 알기에 저희 부모님도 원재를 마치 가족처럼 대해 줬고, 저도 평범한 친구보다는 좀 더 가까운 사이로 지냈죠. 남들 눈에는 그게 좀 특별해 보였나 봐요.
“너 김원재랑 사귀어?”
학교 안에서도 밖에서도 붙어 다니는 우리를 두고 자주 소문이 퍼졌어요. 뒤에서 수군거리는 애들도 있었고, 아예 대놓고 물어보는 애들도 있었죠.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곰과 늑대는 먼 친척 관계고, 그래서 찾아보면 의외로 커플이 드물지 않아요. 애들이 오해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죠.
원재는 그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아니라고 해명했어요. 주변 사람들의 오해를 기분 나빠하거나, 반대로 즐기는 것 같지는 않았어요. 그냥 해를 보고 해다, 달을 보고 달이다 하고 말하는 것처럼 덤덤했어요. 그렇다고 저하고 거리를 두려고 하지도 않았고요.
그래서였어요. 제가 여자한테 설레는 사람인 걸 깨닫자마자 원재한테 달려가서 말해 준 거요. 우리가 친구를 넘어선 관계가 될 가능성이 전혀 없다는 이야기에 원재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알고 싶었어요.
원재는 전혀 놀라지 않았어요. 묵묵하게 저를 바라보다가 한마디 한 게 다였죠.
“나는 남자 좋아해.”
그 얘기를 들으니까 말문이 턱 막혔어요. 그때야 사람들이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오해를 했는지, 원재가 왜 그런 말에 신경 쓰지 않았는지 이해가 가더라고요. 조금 허탈해져서 중얼거렸죠.
“그럼 우린 앞으로도 계속 연애는 못 하겠다.”
뜬금없는 제 말이 의아할 수도 있었을 텐데. 원재는 그냥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어요. 그리고 피식 웃었죠.
“대신에 앞으로도 계속 좋은 친구일 수는 있겠지.”
그때였어요. 저보다 훨씬 덩치가 크고 가끔은 미련하게도 느껴지는 원재가 처음으로 귀엽게 보인 게.
원재의 말대로 우리는 계속 좋은 친구로 남았어요. 서로 가치관이 많이 달라서 부딪힐 때도 있었는데 희한하게 한 번도 싸운 적은 없었고요. 대부분 제가 원재에게 잔소리를 하고, 원재는 제 잔소리를 말없이 받아 주다 끝나곤 했죠. 연애에 있어서도 저와 원재는 생각이 많이 달랐어요. 저는 되도록 많은 사람을 만나고 경험해 봐야 한다고 주장하는 편이고, 원재는 운명적으로 자신의 짝을 만날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고 믿었죠.
이러니저러니 해도 각자 자기 인생 사는 거니까 서로의 사생활에 참견하지는 않지만, 솔직히 원재가 걱정이 되지 않는 건 아니거든요. 애가 워낙에 자기 감정 잘 숨길 줄도 모르고, 진지하고 정직하게만 사람을 대하려 하니까요. 누가 작정하고 덤벼들면 속는 줄도 모르고 자기 심장까지 다 내줄 애예요. 혼자서 정운이 짝사랑할 때도 그렇게 그만두라고 말렸는데 말도 안 듣고 고집만 부리고.
그런 애가 갑자기 몇 년간의 짝사랑을 청산하고 연애를 시작했다는데, 게다가 그 사람이랑 동거까지 할 예정이라는데 걱정이 안 될 수가 없잖아요. 게다가……. 정말 죄송하지만, 상대가 사자에다, 이혼 경험까지 있다고 들었을 때요. 원재가 또 속았다는 생각만 들었어요. 가볍게 연애하고 가볍게 헤어지는 사람한테 붙들려서 무겁게 감정을 키우다가 혼자 힘들어하겠구나 하고요.
솔직히 인호 형이신 것도 염려스러웠고요. 네. 저는 인호와 정운이가 속해 있었던 동아리 부장이에요. 아직도 그 둘하고는 연락하고 있어요. 인호가 얼마나 원재를 싫어하는지 모르는 게 아닌데……. 많이 불안했어요. 저한테는 인호도, 정운이도, 원재도 각자 자기 방식대로 사랑하는 사람들로 보이기 때문에 끼어들 생각은 없었지만요. 만약에 인호가 원재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입힌다면, 최악의 경우 그 둘과 인연을 끊을 작정이었고요. 원재는 제 오랜 친구니까요.
저는 그래서 지금 이 자리가 너무나도 다행스러워요.
기억하시려나 모르겠는데, 재작년 추석 때 제가 원재한테 반찬을 갖다준 적이 있어요. 네. 그게 저예요. 그때 원재와 약속을 했었어요. 깊은 사이가 되면 꼭 소개해 주기로. 그때는 금방 애인을 보여 줄 줄 알았는데, 소개받기까지 2년 가까이 걸릴 줄은 몰랐네요.
그동안 어떤 일이 있었는지 원재는 얘기 안 했어요. 저도 묻지 않을 거고요. 중요한 건 앞으로 어떻게 지낼지잖아요. 네. 원재에게 그건 설명 들었어요. 프라이드를 만들지 않고 한 사람만 사랑하시는 사자라고. 오해해서 죄송합니다.
오늘 오기까지 오래 망설였고, 긴장도 많이 했는데 친절하게 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까 음료 가지러 가실 때요. 원재가 가려고 했는데 대신 가겠다고 하시면서 자리에 앉히셨잖아요. 그때 원재 볼에 키스하신 거. 아, 아뇨. 불편했다는 게 아니라요. 제 앞에서 그런 스킨십을 나누시는 걸 보고 속으로 경악했거든요. 근데 원재는 그게 너무 익숙하고 자연스러워 보이는 거예요.
“고마워.”
민망해하기는커녕 말을 건네면서 웃기까지 했죠. 그때 원재 표정이 정말 행복해 보였어요. 원재가 이런 행복을 일상에서 누리고 산다는 게 너무나도 잘 느껴져서, 저도 덩달아 행복해졌고요.
앞으로도 저는 어렸을 때부터 원재를 챙겨 준 이웃이자 친구로 남을 거예요. 명절에는 명절 음식을 가져다줄 거고요. 원재가 힘들 때는 잔소리로 들릴지라도 아낌없이 조언할 거예요. 원재는 제 가족이나 다름없으니까요.
그리고 원재가 아까처럼 행복하게 웃는 걸 앞으로도 계속 보고 싶어요.
서은겸 씨.
원재는 자기와 함께할 연인을 정말 오래 기다렸어요. 서은겸 씨가 정말 그 사람이 맞다면, 기다림이 헛되지 않도록 원재와 행복하게 지내 주세요.
“무슨 얘기를 그렇게 오래 했어?”
“김원재 귀엽다는 얘기.”
“……예주가 그런 소리는 안 했을 것 같은데.”
“별건 아니고, 약속을 하나 했어.”
“무슨 약속?”
“널 오래오래 행복하게 만들어 주겠다는 약속.”
“그걸 왜 예주하고 해. 나하고 해야지.”
“너하고는 따로 약속할 필요 없잖아. 당연한 거니까.”
“…….”
“앞으로도 오랫동안 같이 행복해지자.”
“……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