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여름꽃
어느새 여름처럼 무더워진 날이었다. 산들산들 부는 바람만으로는 뜨끈뜨끈해진 체온을 식히기 어려웠다. 반소매 셔츠 위에 걸칠까 말까 고민했던 겉옷을 놓고 온 게 다행이었다. 상가 건물이 만든 삐뚤빼뚤한 그늘 속으로 들어서면서 그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약속 장소까지는 5분 정도 더 걸어야 했다. 버스가 막히지만 않았어도 일찍 도착했을 텐데. 평일 낮답지 않게 도로 위는 주말처럼 혼잡했다. 화창한 날씨를 만끽하려는 사람들이 바깥나들이에 나선 듯했다. 차도만이 아니었다. 번화가는 어디를 가도 북적였다. 인파를 헤치며 그는 걸음을 옮겼다. 약속 상대는 한참 전에 도착했다고 연락을 보냈다. 기다리고 있을 이를 위해 서둘러야 했다.
어디서 행사라도 열린 것일까. 지나가는 이들 중 유난히 장미를 든 사람들이 많았다. 다발로, 혹은 한 송이로 사람들의 손에 들린 꽃이 화사했다. 품에 안은 분홍빛 장미처럼 발그레하게 볼을 붉히고 마주 선 염소 커플의 옆을 지나쳤을 때야 그는 비로소 오늘이 무슨 날인지 깨달았다. 연인들이 장미를 주고받으며 사랑을 표현하는 날. 로즈데이였다.
그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보았다.
‘지금이라도 꽃집을 찾아야 하나.’
망설임은 짧았다. 안 그래도 늦었는데 약속 상대를 더 오래 기다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조금이라도 빨리 만나서 전하고 싶은 말이 있었다. 그 때문에 점심도 거르고 회사를 탈출한 차였건만. 기다림을 연장할 수는 없었다. 그는 다시 재게 발을 놀렸다. 약속 장소가 가까워질수록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약속 상대는 멀리서도 눈에 띄었다.
많은 이들이 만남의 장소로 정하곤 하는 카페의 앞에 키 큰 사자가 서 있었다. 곧게 편 허리와 어깨 때문에 팽팽하게 당겨진 하얀 셔츠가 반듯했다. 몸에 잘 맞는 검은 바지는 길고 탄탄한 다리를 더 강조하는 듯했다. 반짝거리며 햇빛을 반사하는 머리카락을 길쭉한 손가락이 쓸어 넘겼다. 다른 손에 들린 붉은 장미 한 다발은 마치 공들여 맞춘 장식품처럼 잘 어울렸다. 느릿하게 흔들리는 긴 꼬리의 동선마저도 우아했다.
누구나 힐끔거리며 돌아보고 가는 눈부신 사자가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눈이 마주친 순간, 은겸이 환한 미소를 지었다.
“원재야.”
그의 이름을 부른 은겸이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는 제자리에 멈춰 섰다. 한두 번 본 것도 아닌데 새삼 숨이 막혔다. 주위의 시선을 문자 그대로 ‘잡아먹는’ 연인이 가까이 다가오자 사람들의 관심이 그에게까지 쏠렸다. 멈칫거리며 굳은 그와는 달리 은겸의 걸음은 점점 빨라졌다.
마침내 그와 마주 선 순간, 은겸의 얼굴에 단순한 반가움을 넘어선 기쁨이 번졌다. 팔을 뻗은 은겸은 망설임 없이 그를 끌어안았다.
“어서 와.”
다정한 인사와 함께 정강이에 부드러운 꼬리가 감겼다. 익숙한 품에 닿자 언제 그랬냐는 듯 마음이 놓였다. 허리를 감싸는 단단한 팔을 느끼며 그는 은겸을 마주 안았다. 타인의 시선은 신경 쓸 것 없었다. 수많은 인파 속에서도 자신만을 찾아내는 연인이 가장 소중하니까. 별다른 말 없이 은겸과 몸을 맞대는 것만으로도 만족감이 느껴졌다. 잠시 포옹을 즐기다가 그는 입을 열었다.
“늦어서 미안. 내가 불렀는데.”
“미안하긴. 그나저나 무슨 일이야. 갑자기 만나자고 해서 좀 놀랐어. 회사는?”
“반차 냈어.”
“왜?”
“그게.”
그는 숨을 들이마셨다. 해야 할 말은 단순한 한 문장이었지만, 어떻게 꺼낼지 고민스러웠다. ‘너는 항상 멋대가리 없이 직구를 던지잖아. 그러지 말고 분위기도 잡고 그래 봐라’. 얼마 전, 친구와 연애 상담을 하며 들었던 핀잔이 아직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키스부터 하면 되나.’
은겸이 알면 놀랄 법한 생각을 하며 그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눈치를 살피던 은겸이 꽃다발을 내밀었다.
“어디 들어가서 얘기할까? 일단 이거 받아.”
“아. 고마워.”
“향이 좋길래. 네 생각 나서 샀어.”
우연히 샀다는 식으로 말을 해도, 사실은 로즈데이라서 일부러 사 온 게 뻔했다. 이런 사소한 기념일도 잊지 않고 챙기는 연인이 고마웠다. 그는 은겸에게서 꽃다발을 받아 들었다. 다발을 채운 큼지막한 봉오리들은 반쯤 벌어져 있었다. 지금도 아름다운데, 활짝 피면 얼마나 화려하게 붉은빛을 뽐낼지 기대되었다. 장미꽃을 내려다보며 그는 고개를 까닥였다.
은겸이 장난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장미 향기는 네가 흥분했을 때 흐르는 체향이랑 비슷하거든.”
“……거짓말하지 마.”
“정말인데. 아닌 것 같아?”
의심을 지우지 못하고 그는 은겸을 바라보았다. 고개를 숙인 은겸이 그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다.
“그럼 이따 같이 확인해 볼까?”
잠자리에서 이름을 부를 때처럼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였다. 등줄기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부르르 몸을 떨며 그는 은겸을 밀쳤다. 키득 웃은 은겸이 그를 놓아주었다.
“농담이야. 발정기도 아닌데.”
민망함과 당황 탓에 열이 오른 전신이 후끈했다. 그는 고개를 돌리고 셔츠의 단추를 하나 풀었다. 겉으로 드러난 맨살의 면적이 넓어지니 열기가 조금 식는 듯했다.
귀여워서 못 견디겠다는 듯 눈빛으로 그를 훑던 은겸이 손을 내밀었다.
“가자. 날도 더운데 시원한 거 마실까?”
자연스럽게 손가락 사이로 파고들어 온 은겸이 손깍지를 꼈다. 은근슬쩍 기대어 오는 은겸의 어깨에 그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장미에 이어 은겸의 어택 때문에 잊어버릴 뻔했다. 그가 오늘 은겸을 만나러 온 이유는 이런 식으로 데이트를 즐기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근처 카페를 가리키며 이끄는 은겸을 붙들고 그는 다리에 힘을 주어 버텼다. 은겸과 그가 가야 할 곳은 따로 있었다.
“왜 그래?”
옆을 돌아보는 은겸은 여전히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채였다. 꿀꺽 침을 삼키곤 그는 말했다.
“확인부터 해.”
“응?”
“올해는 조금 빨리 시작됐어.”
“뭐?”
“발정기 시작됐다고.”
중얼거리면서 그는 손톱을 세워 은겸의 손등을 꾹 눌렀다. 이런 동작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는 아직도 알 수 없었다. 아무튼 그의 친구들이 해 준 충고에 의하면, 직접적인 말뿐만이 아니라 작은 몸동작을 곁들여서 고백하는 편이 훨씬 연인에게 매력적으로 전해진다고 했다. ‘키스나 섹스는 고백 다음이야! 사소한 스킨십 먼저!’ 강조하던 친구들의 외침을 떠올리며 그는 꾸욱꾸욱 손을 눌렀다. 어색하기 짝이 없어도 한 번쯤 시도해 볼 가치는 있었다.
노력에도 불구하고 은겸의 반응은 딱히 없었다. 오히려 평소보다 차분한 목소리로 은겸은 되물었다.
“아직 5월인데? 발정기는 6월부터 아니야?”
“꽃도 날이 따뜻하면 일찍 피잖아.”
준비해 온 말을 건네며 그는 은겸의 반응을 기다렸다. 아무래도 손톱은 아닌가 싶어 손끝으로 손등을 가만가만 쓰다듬었다. 손톱자국이 또렷하게 남은 살가죽을 어루만지는 사이, 어째서인지 은겸이 아닌 그의 아랫배가 단단해지기 시작했다. 이렇게 자연스럽게 들끓는 속은 오랜만이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아랫입술을 핥았다.
변화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찾아왔다. 그의 몸 상태는 어제와 달랐다. 평소보다 올라간 체온이며, 예민해진 감각, 날카로운 신경. 모두가 익숙한 징조였다.
1년에 한 번 찾아오는 환희의 시기. 발정기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퇴근 후에 은겸에게 이야기를 전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오랜 기다림은 그를 내버려 두지 않았다. 마음이 들뜬 나머지 일이 도무지 손에 잡히지 않았다. 결국 그는 점심시간까지도 기다리지 못했다. 반차를 내고 곧바로 은겸과 약속을 잡았다. 전화나 메시지로 전할 수도 있었지만 그건 싫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은겸과 만나서 직접 말하고 싶었다.
그는 맞잡은 손을 풀었다. 꽃다발을 양손으로 쥐고 들어 올리자 은겸의 목울대가 위아래로 크게 흔들렸다. 속으로 피식 웃으며 그는 붉은 봉오리에 코를 가져다 댔다.
“올해 덥다더라. 여름도 길고.”
만개하지 않았는데도 장미는 진한 향기를 내뿜었다. 달콤한 숨을 크게 들이마시곤, 그는 눈을 올려 은겸을 똑바로 보았다.
“오래 기다려 줘서 고마워.”
잘 익은 보리 빛을 머금은 머리카락 위로 쏟아지는 햇살이 한여름 같았다. 투명해진 호박색 눈에 들어차는 새로운 욕망이 뿌듯했다. 기념일을 맞아 장미를 사 오지 않아도 괜찮았다. 은겸은 그가 준비해 온 다른 선물을 훨씬 기쁘게 받아들일 테니까.
“이제 확인하러 가자. 내 체향.”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은겸이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곤 그를 끌어안았다. 무섭게 덮쳐드는 연인에게 입술을 맡기며 그는 눈을 감았다. 유독 빨리 찾아든 계절을 알리듯 장미 향기가 흘러넘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