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12/26)

외전

1. 사자는 곰을 기다린다

내 첫사랑은 유치원 때였다. 같은 반 아이들 중 곰이 한 명 있었다. 처음 만난 순간부터 그 애에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동그란 귀와 꼬리, 언제나 뚱한 표정을 볼 때마다 가슴이 쿵쿵 뛰었다. 친해지고 싶어서 주위를 얼쩡거려 봤지만 곰은 언제나 혼자서 놀았다.

어느 날엔가,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나는 그 애의 옆에 다가가 앉았다. 그러곤 어깨를 툭툭 건드렸다.

“나랑 친구 할래?”

갈색 눈을 깜빡이던 그 애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 그럼 사귈까?”

당황해서 내뱉자 그 애는 나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내 꼬리를 가리켰다.

“너 사자잖아.”

나는 서둘러 꼬리를 등 뒤로 숨겼다. 곰이 중얼거렸다.

“엄마가 사자랑은 사귀지 말랬어.”

“왜?”

“사자는 바람둥이래.”

해명할 틈도 주지 않고 곰은 내게서 등을 돌려 앉았다. 뒤통수 위로 솟은 동그란 귀는 여전히 귀여웠지만, 그 이상 그 애에게 말을 걸 수 없었다. 긴 꼬리를 끌어안고 나는 울상을 지었다. 생애 첫 실연이었다.

가슴 아픈 실연을 겪고 나서도 내 취향은 변하지 않았다.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거치면서 나는 내가 어떤 사람인지 깨달았다. 예쁘고 잘생긴 고양잇과 애들이 치근덕대도 눈에 차지 않았다. 대신 반 구석에서 웅크리고 자는 불곰이 신경 쓰였다. 성격 더럽기로 유명한 체육 교사 흑곰이 귀엽게만 보였다. 열여섯 살의 여름, 누군지도 모르는 곰에게 키스하는 꿈을 꾸며 첫 몽정을 겪었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맞는 발정이었다.

평범한 이종성애도 아니고, 딱 한 종에게만 반응한다는 사실을 깨닫자 혼란스러웠다. 사자인 내가 이러는 게 멀쩡한 건지 종잡을 수 없었다. 고민 끝에 나는 내 성벽을 가족에게 털어놓았다.

아버지와 어머니 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괜찮아, 겸아. 네 프라이드에 곰 한 명 정도 넣는다고 어떻게 되지는 않아.”

“그 곰이 싫어하지 않을까?”

나는 진지하게 되물었다. 그때는 이미 내가 사자라는 이유로 몇 번 차인 뒤였다.

“곰은 프라이드를 안 만들잖아. 내가 배우자를 여럿 두면 싫어할 거야.”

“그럼 어쩔 수 없지. 이해해 주지 않는 사람과는 헤어지면 돼.”

제일 연장자인 어머니가 다가와 내 어깨를 짚었다. 어머니에게서 사자의 체향이 강하게 풍겼다.

“겸아. 세상에 네 짝으로 삼을 상대는 많단다.”

차례로 다가온 어머니와 아버지 들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너에게 맞추지 않는다는 상대에게 굳이 집착할 필요는 없어.”

“주위를 둘러보렴. 너는 사자란다. 굳이 한 사람에게만 매달리지 말고 시야를 넓혀.”

아니야.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내가 원하는 건 그런 게 아니야.

고집스럽게 입을 다물자 부모님들이 곤란한 눈빛을 교환했다. 곧 어머니가 허리를 굽혀 시선을 맞추었다. 나와 같은 노란색 눈이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너도 알잖니. 호랑이와 살겠다고 프라이드를 나간 네 전 아버지가 어떻게 되었는지. 맞지도 않는 상대와 사느라 고생하다가 언젠가 이혼하겠지.”

아니야.

나는 마음속으로 즉각 반박했다. 부모님들 몰래 아버지를 만나러 다녔기에 나는 아버지가 어떻게 사는지 잘 알았다. 어머니의 말은 반만 사실이었다. 서로 다른 성향 때문에 고생한다고, 언제나 행복한 건 아니고 힘들 때도 있다고 아버지는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래도 자기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는 게 아버지의 결론이었다.

프라이드 없이 다른 종과 가정을 꾸린 아버지는 내 롤 모델이었다.

“사자로서의 본능을 거스르지 마. 그럼 모두가 불행해져.”

그리고 아버지를 비난하는 프라이드의 부모님들은 누구보다 사자로서의 삶에 충실한 분들이었다.

그런 게 사자의 본능이라면 사자로서 살지 않겠어. 내 곰을 찾아서 단둘이 행복해질 거야. 입술을 꽉 깨물고 나는 결심했다. 그날의 다짐이 내 인생을 어떻게 바꿔 놓을지는 상상도 하지 못한 채로.

내가 평범한 사자로 살지 않는다고 해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진 않았다.

“넌 사람을 질리게 만들어.”

첫 연애가 끝나던 때, 이별을 선언하며 상대는 그렇게 말했다. 아무런 반박도 하지 못하고 나는 그저 멍하니 되물었다.

“내가?”

“너무 달라붙어서 귀찮다고. 거리를 지켜 달라고 했잖아.”

“하지만…….”

말끝을 흐리며 나는 어깨를 늘어뜨렸다. 좋아하는 사람하고는 계속 같이 있고 싶고, 언제든 보고 싶고, 매일 만나고 싶은데.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나와는 정반대였다.

“서은겸. 난 곰이야. 너처럼 무리 짓는 사자가 아니란 말이야.”

몇 번이고 반복했던 핀잔을 다시 끄집어내며 곰이 한숨을 쉬었다.

“나는 너랑은 달라. 힘들 때는 그냥 혼자 있고 싶어.”

무슨 이야기인지는 알았다. 상대가 왜 내게 화를 내는지도 짐작할 수 있었다. 곰은 얼마 전 시험을 망쳐서 크게 혼났다며 한동안 울적해했다. 그래서 그 애가 좋아하는 오렌지 주스도 가져다주고, 계속 옆에서 보살피려 했다. 내 배려는 오히려 곰의 짜증을 북돋웠다. 냉정하게 말하자면 우리는 싸운 것도 아니었다. 그저 일방적으로 내가 접근을 거절당했을 뿐.

“그럴 땐 혼자보다 같이 있는 게 나을 거 같아서 그랬어. 내가 위로할 수 있으면…….”

“얘기했잖아. 나는 곰이라고.”

짜증스럽게 내뱉은 곰이 뒤통수를 거칠게 긁었다.

“나는 혼자가 편해. 아무도 만나지 않고 푹 쉬면 저절로 괜찮아져. 근데 너는 아니라며. 무슨 일이 생기면 누구랑 같이 보내면서 풀어야 한다며. 차이를 모르겠어?”

“…….”

“너는 내가 이해 안 되지? 나도 너 이해 안 돼. 어쩔 수 없잖아. 나는 곰이고 너는 사자인데.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보고 듣고 배운 게 전혀 다른데. 어떻게 똑같을 수가 있겠어.”

조금만 쉬다 오겠다고,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을 무시한 내 잘못이었다. 아무리 걱정되더라도 기다려야 했는데. 나는 상대의 양손을 붙들었다.

“미안해. 앞으로는 참을게.”

그리고 진심이 전해지길 빌며 눈을 들여다보았다.

“내가 더 잘할게. 너한테 전부 맞출게.”

“그런 면이 질린다는 거야.”

냉정한 목소리로 잘라 말한 곰이 내 손을 떨쳐 냈다.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하는데? 혼란스러워진 나를 버려두고 곰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동안 고마웠어. 안녕.”

첫 연애는 그렇게 허무하게 끝이 났다.

그 뒤로 똑같은 연애가 반복되었다. 누구를 만나든 나는 마지막에는 반드시 차이는 쪽이었다. 두 번의 결혼, 그리고 이혼도 비슷했다. 내 사랑은 독립적인 곰들에게는 너무 무겁고 끈적거렸다. 이런 나를 억지로 감당하다가 지친 곰들은 이별을 택했다. 그래, 모든 이별의 원인은 내게 있었다. 다른 선택지가 있는 상대와는 달리, 곰만을 사랑할 수 있는 내게.

두 번째 결혼 생활이 끝나고 텅 빈 집에 홀로 남겨졌을 때.

나는 누구도 사랑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주인호, 집에 없어?”

아무리 불러도 인호는 대답이 없었다. 낯선 문 앞에 서서 나는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했다.

인호를 찾아간 건 아버지의 부탁 때문이었다. 어릴 적에는 곧잘 나와 놀았던 인호는 스무 살이 되어 독립한 뒤부터 나를 찾지 않았다. 한동안 내가 심적으로 힘들었던 탓도 있었고, 대학생이 된 인호가 바빠진 탓도 있었다. 가끔 안부를 묻는 연락을 주고받는 게 다였다. 자취를 하고 있다는 집도 어딘지 몰랐기에 아버지께 물어봐야만 했다.

미리 연락을 해 둘 테니 그냥 들르면 된다는 아버지의 말과는 다르게 인호는 문을 열지 않았다. 전화를 해도 묵묵부답이었다. 몇 번 벨을 누르다가 포기하고 나는 쇼핑백을 뒤적거렸다. 밑반찬이라고 했는데 여기 두고 가면 상하려나. 경비실에 맡겨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형.”

낮은 목소리와 함께 마침내 현관문이 열렸다. 안에 있었으면서 지금껏 무시했던 것 같았다. 반갑게 인호에게 인사하려다가 나는 헛기침을 했다. 인호는 상의를 벗고 있었다. 얼굴부터 어깨까지 붉게 상기된 피부가 얼룩덜룩했다. 헐렁하게 걸친 바지 가운데는 불룩했다. 뭘 하느라 문을 열지 않았는지 확연히 티가 나는 모습이었다.

“오랜만이다.”

“어.”

건성으로 대답한 인호가 꼬리로 바닥을 탁탁 때렸다.

“그래서 무슨 일인데.”

“별건 아니고 아버지 심부름.”

답하면서 나는 무심코 인호의 뒤로 시선을 주었다. 반쯤 열린 문틈으로 안이 들여다보였다. 소파 쿠션 뒤에 숨어서 이쪽을 흘낏거리는 남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인호가 귀를 뒤로 눕히며 으르렁거렸다.

“어딜 봐.”

“아, 미안하다.”

“나 바쁘니까 나중에 와.”

“아버지가 너한테 이거 전해 주라던데. 그리고…….”

“형. 나 바쁘다고.”

말을 가로챈 인호가 미간에 주름을 세웠다. 동시에 풍겨 오는 맹수의 냄새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번 제대로 발정하면 진정하기 어렵다는 건 나도 잘 알았다.

“30분이면 되지?”

“두 시간.”

“야.”

“내일 오면 더 좋고.”

“장난치지 말고. 이 근처에 있을 테니까 끝나면 연락해. 네 애인한테도 방해해서 미안하다고 전해 주고.”

“안 전할 건데.”

싸늘하게 말한 인호가 턱짓으로 밖을 가리켰다.

“빨리 가기나 해.”

“알았다.”

몸을 돌리자 문 닫히는 소리가 요란했다. 인호의 태도를 봐서는 일찍 끝날 것 같지는 않았다. 차에 가서 앉아 있으려다 생각을 바꿔서 근처 카페로 들어갔다.

한 시간 반이 지나자 인호에게 전화가 왔다.

―올라와.

“끝났어?”

―끝났으니까 형을 부르지.

다시 실수하면 안 되니까 확인차 물어본 거였는데, 인호의 답변은 날카로웠다. 사생활을 방해받아서 단단히 화가 난 모양이었다. 알겠다고 답하고 전화를 끊었다.

문을 열고 나타난 인호는 조금 전과 똑같은 차림이었다. 옷을 걸치지 않은 상반신에는 손톱자국이 길게 남아 있었다. 누가 봐도 방금 섹스를 마친 모습이었다. 못 본 척 눈을 돌리며 나는 집으로 들어섰다.

인호와 달리 집은 깔끔했다. 두 사람이 뒹굴었을 게 분명했을 소파도, 바닥도 깨끗하게 정돈되어 있었다. 그 짧은 시간에 일을 치르고 애인을 보내고 환기까지 시켰는지 창문이 전부 열려 있었다. 내게는 상대의 체취조차 맡게 하고 싶지 않다는 느낌이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쓸어 주려 하자 인호가 내 손을 쳐 냈다.

“만지지 마.”

“왜.”

“애 취급 좀 그만해.”

이제 자기도 어른이라 이건가. 그래 봐야 내 눈엔 여전히 귀여운 호랑이 동생일 뿐인데. 피식 웃자 인호가 나를 노려보았다.

“됐고. 왜 왔는데.”

표정을 수습하면서 나는 인호에게 쇼핑백을 내밀었다.

“아버지가 이거 전해 주라고 하시더라. 그리고 다음 주에 시간 되면 집에 오래.”

“그게 다야?”

“그래. 그러니까 네 애인 가지 말고 그냥 있으라고 하지.”

“형. 내 애인한테 관심 있어?”

돌연 꼬리를 크게 부풀린 인호가 눈을 치켜떴다. 순식간에 분위기가 사나워졌다. 마치 내가 자신의 연인을 빼앗기라도 할 듯 경계하는 인호가 당황스러웠다. 내가 곰성애자인 걸 모르는 것도 아니면서. 안심하라는 의미에서 나는 일부러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네 애인은 곰 아니잖아.”

“당연히 아니지.”

“그럼 됐어. 나는 곰이 세상에서 제일 귀여워.”

“하. 형도 참 답이 없다.”

절레절레 고개를 저은 인호의 얼굴에서 그제야 경계심이 사라졌다. 반찬을 받아 들곤 인호가 몸을 돌렸다.

어쩐지 감회가 새로웠다. 처음 만났을 땐 아장아장 걸으면서 내 뒤를 따라오기 바빴던 인호가 이제는 자기 애인 지키겠답시고 잔뜩 꼬리털을 세우곤 나를 위협하다니. 나와 비슷한 키로 성장했어도 다섯 살이라는 나이 차이 때문에 인호를 항상 어리게만 보았는데, 더는 그러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속으로 웃으면서 나는 장난스럽게 말했다.

“왜. 곰 귀엽잖아.”

“괴악한 취향이야, 진짜.”

“그러니까 너무 날 세우지 마라. 서운하잖아. 나는 네 애인한테 관심 없어.”

“형한텐 미안하지만 나는 모든 사람이 다 경쟁자야. 거기다 형은 딱 내 애인 취향이라고.”

“무슨 소리야. 네 애인한테는 네가 최고일 거야.”

“진짜야. 아까도 내 애인이 형 보고 멋있다고 난리 쳤어. 다시는 우리 앞에 나타나지 마.”

농담이 아닌지 인호의 말투는 진지했다. 냉장고에 반찬을 집어넣는 인호를 나는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인호의 등에는 연인이 남기고 간 자국이 아직도 선명했다.

내가 끼어들 일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인호야. 네가 네 애인을 못 믿으면 누굴 믿어. 무조건 잡아 두는 게 능사는 아니야. 너 그러다 크게 후회한다.”

“형은 이해 못 해. 참견하지 마.”

단호하게 대꾸한 인호는 그 이상 자기 애인에 관해 언급하려 하지 않았다. 고집을 부리는 인호가 걱정스러웠다. 인호는 고등학생 때도 자신의 연애사를 잘 말하지 않는 성격이었다. 특히 스무 살 때부터 사귀기 시작한 연인은 유난히 더 감췄다. 사귄 지 몇 년이 지났는데 내게 소개하기는커녕 상대의 이름도, 종도 알려 주지 않았다. 아까 쿠션 위로 삐죽이 튀어나온 귀를 우연히 보지 않았다면 토끼라는 사실도 몰랐을 터였다.

내가 아무리 걱정을 해도 지금의 인호에게는 잔소리로밖에 들리지 않겠지. 나는 손을 뻗어 인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알았다. 혹시라도 힘든 일 생기면 나한테 말해. 내가 도와줄게.”

“나는 됐으니까 형이나 연애 좀 하고 살아. 누구 소개해 줘?”

“됐어.”

“언제까지 그러고 있을 거야. 혼자 궁상떠는 거 보기 안 좋아.”

“또 누구 만나서 감정 낭비하고 싶지 않아.”

“감정 낭비라니. 연애가 얼마나 좋은데.”

“그래. 너나 잘 사귀어.”

우리의 대화는 거기서 끊겼다. 전할 걸 다 전했으니 남은 용건은 없었다. 나는 인사를 건네고 인호의 집을 빠져나왔다.

내 얘기를 별생각 없이 듣는 것 같더니만, 인호는 계절이 바뀐 뒤부터 나를 찾기 시작했다. 도와주겠다는 약속이 유효하면 자신과 함께 촉진제를 받으러 병원에 가 달라는 것이었다.

살다 살다 동생한테 애인 행세를 해 달라는 말을 들으니 어이가 없었다. 대리 수령하다 걸리면 벌금형에 1년간 촉진제를 못 사게 된다는 건 아느냐고 묻자 인호는 뻔뻔하게도 답했다.

“그럼 그거 하나 먹고 형이랑 하지 뭐. 구입 금지 처분보다는 나을 거 아냐.”

“미쳤냐?”

“걱정하지 마. 나는 사자한테도 세울 수 있어.”

“화낸다, 진짜로.”

으르렁거리며 노려보자 인호는 모르는 척 고개를 돌렸다.

“그러지 말고 나 좀 도와줘. 내 애인이 너무 바빠서 그래.”

아무리 거절해도 인호는 좀처럼 물러서지 않았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나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감쌌다. 좋아하는 사람과 몸을 겹치고 싶은 마음은 모르는 바가 아니었다. 게다가 애인에게 집착하는 인호가 촉진제를 다른 데다 쓸 것 같지도 않고. 어차피 우리는 법적으로나 생물학적으로나 피가 섞이지 않은 형제이니 촉진제를 받아 오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이번 한 번뿐이다.”

결국 나는 인호의 요구를 들어주었다.

한 번이 어려웠지, 두 번째, 세 번째는 금방이었다. 비발정기 내내 인호는 촉진제를 받기 위해 나를 동원했다. 그러다 건강을 해치니 그만하라고 타일러도 말을 듣지 않았다. 애인을 잡아 두려면 비발정기에도 관계를 계속 가져야만 한다는 게 인호의 생각이었다.

같은 부탁을 몇 번 반복하다 보니 제 아무리 뻔뻔한 주인호라도 미안하긴 한 모양이었다. 언젠가부터 인호는 병원에 갈 때마다 같은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언젠가 꼭 형 마음에 들 만한 곰을 소개시켜 줄게.”

“됐어. 아는 곰도 없으면서.”

“그건 그래.”

빈말이었는지 인호는 순순히 수긍했다. 그래도 동생이라고 형을 챙겨 주려는 마음이 기특했다. 인호가 누굴 진짜로 소개해 준다고 해도 만날 마음은 없었지만, 나는 그저 웃어넘겼다.

그래서였다.

―형. 은겸 형.

한낮의 더위가 식지 않은 초여름의 저녁. 억눌린 목소리의 인호가 전화를 걸어왔을 때.

―곰 좀 만나 볼래, 형?

나는 인호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술집에 곰이 있어, 형. 내가 주소를 알려 줄 테니까 지금 당장 거기로 가.

무슨 소리냐는 질문에도 인호는 제대로 답하지 않았다. 짜증이 섞인 웃음소리만 흘릴 뿐이었다.

―형. 내가 부탁이 있는데. 제발 그 곰 좀 만나서 잘 지내봐. 오래 사귀지 않아도 돼. 적당히 시간만 끌어 주면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대체 무슨 소리야?”

―형. 집에 토끼 귀 머리띠나 토끼 꼬리 같은 거 없어? 토끼 장식이나.

“그런 게 있겠냐. 나 곰성애자다.”

―아, 뭐든 좋으니까 좀 가져가. 바니 보이 의상이라도 입으라고.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소리를 중얼거리던 인호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장난을 치는 건 아닌 듯했다. 일단 옷을 챙기면서 나는 인호에게 물었다.

“그 곰이 대체 누군데 그래?”

―그건 알 거 없어. 가게 주소는 메시지로 보내 줄게. 지금 당장 가.

인호는 곧바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의문에 가득 찬 채로 나는 외출 준비를 마쳤고, 인호가 보내 준 주소로 향했다. 토끼 관련 물품을 꼭 가져가라고 신신당부하던 게 떠올라서 여러 상점을 돌아다닌 끝에 토끼 귀 머리띠도 샀다.

빠르게 간다고 갔는데도 내가 바에 도착했을 때는 인호의 전화를 받은 지 두 시간이 흐른 뒤였다.

문을 열면서도 나는 반쯤 포기하고 있었다. 이미 곰이 돌아갔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시각이었다. 만나고 싶지 않으니 차라리 돌아가 주는 편이 다행일지도 몰랐고. 그래도 확인은 하자는 생각에 가게 안으로 들어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 예상과 다르게 곰은 그곳에 있었다.

텅 빈 가게 안에서 곰을 찾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곰은 테이블 하나를 홀로 차지하고 있었다. 듬직한 몸과 동그랗게 튀어나온 귀가 멀리서도 잘 보였다. 나는 숨을 가다듬었다. 인호의 소개니까 인사 정도는 하고 헤어지는 게 나을 것 같았다.

가까이 다가가자 긴 한숨이 들려왔다.

“하아…….”

느리게 고개를 저은 곰이 거의 엎드리다시피 상체를 숙였다. 꽤 취한 것 같았다. 가까스로 잔을 집어 술을 마신 곰이 또 한숨을 푹 내쉬었다. 자기만의 세계에 빠진 듯한 상대에게 말을 걸 엄두가 나지 않았다. 곰을 지나쳐서 나는 바 자리에 앉았다.

‘내가 너무 늦게 왔나.’

설마 인호가 취객을 상대하라고 나를 보내지는 않았을 터였다. 그렇다면 나중에 맨정신일 때 다시 만나는 게 낫지 않을까 싶었다. 아니면 이대로 만남을 없던 일로 하거나.

일단 술을 시키면서 힐끗 뒤를 돌아보았다. 곰은 여전히 느릿느릿 술잔을 비우고 있었다. 누구와 대화할 상태는 분명 아닌 듯했다. 나는 빠르게 위아래로 곰을 훑었다. 고개를 숙인 탓에 곰의 얼굴은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키는 나와 대충 비슷해 보였다. 얇은 여름옷 아래로 드러나는 몸은 근육이 발달해 있었다. 특히 커다란 흉통에 눈길을 주면서 나는 입술을 핥았다. 이 정도면 인호가 가게에 간 증거를 요구할 때 이러이러한 사람이었다고 말할 수 있었다. 머릿속에 곰의 모습을 잘 새겨 두고 고개를 돌렸다.

근데 토끼와 관련된 물건은 왜 가져오라고 한 거지?

“이건 뭐예요?”

나만 궁금한 게 아니었던 듯했다. 술을 시킨 뒤 가방에서 토끼 귀 머리띠를 꺼내자 바텐더가 호기심 어린 눈으로 바라보았다. 딱히 둘러댈 말이 없었기에 나는 머리띠를 머리에 썼다.

“잘 어울리나요?”

바텐더가 웃음을 터뜨렸다.

“사자인 분이 왜 토끼 귀를 쓰세요?”

“사실은 제 애인이 토끼 귀 페티시가 있어서…….”

“아, 정말요?”

“애인이 좋아하는데 뭐든 해 줘야죠.”

“순정파시네요.”

시답잖은 대화를 나누면서 나는 술잔을 집었다. 그때였다. 뒤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지더니, 누군가 나를 와락 껴안았다. 깜짝 놀란 바텐더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헉.”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푹 끼치는 술 냄새와 함께 강한 힘이 몸을 휘감았다. 언제 일어난 것인지 곰이 나를 끌어안고 있었다.

밀어내려 했지만 곰의 힘은 굉장했다. 더욱 세게 나를 안은 곰이 입술을 떼었다.

“정운아.”

곰이 부르는 이름은 낯설었다. 취기에 나를 다른 사람으로 오해한 것 같았다. 곰이 내 머리통에 볼을 비비면서 중얼거렸다.

“정운아. 정운아. 나 한 번만 바라봐 주라. 정운아. 나한테 한 번만 기회를 주면 내가 잘할게.”

당황한 바텐더가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나는 손을 저었다. 곰이 넘어지지 않도록 허리를 감싸자, 위쪽에서 긴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곰을 올려다보았다. 그제야 나를 덥석 끌어안은 이의 얼굴이 보였다.

밝은 빛 아래에서 본 곰은 선이 굵은 인상이었다. 흰 셔츠와 대비되는 가무잡잡한 피부가 건장한 몸과 잘 어울렸다. 꽉 다물린 입술이나 짙은 눈썹은 고집스러워 보였다.

신기하게도 그는 의연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엉망으로 취해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면서도, 어쩔 줄을 모르고 비틀거리면서도. 그는 눈시울을 붉히지 않았다. 그저 입매를 딱딱하게 굳히곤 간절한 어조로 중얼거릴 뿐이었다.

“내가 그 자식보다 못할 수도 있겠지. 나도 알아. 누가 봐도 내가 모자란다는 거. 그래도 나 너한테는 정말 잘할 자신 있다.”

나는 곰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아무래도 곰은 고백을 하는 것 같았다. 그것도 상대 앞에서 제대로 털어놓지 못했을 고백을. 줄줄 쏟아지는 모든 단어 하나하나가 애처로웠다.

“정운아. 정운아. 나 정말 오래 널 기다렸어. 이젠 나 좀 봐 줘.”

듣는 이 없는 고백은 공허하게 울려 퍼졌다. ‘정운’이라는 이름을 계속해서 부르던 목소리도 점차 작아졌다. 그래도 곰은 눈물을 내비치지 않았다. 잔뜩 꼬인 발음과는 달리 그의 눈빛은 또렷했다. 곧은 시선이 향한 곳은 내 머리 위였다. 정확히는 내가 쓴 머리띠에 달린 토끼 귀.

곰이 애타게 찾는 정운이라는 사람은 토끼 같았다.

“아직도 너를 좋아해서 미안하다.”

마침내 모든 고백을 마친 그가 입을 다물었다. 수고했다는 의미로 나는 곰의 등을 가볍게 토닥였다. 내 손길을 어떻게 받아들인 건지 곰이 슬쩍 눈꺼풀을 감았다가 떴다. 그리고 눈을 내리떠 토끼 귀 아래의 나를 내려다보았다.

“사랑해.”

시선이 마주치자 전신에 소름이 돋았다. 곰의 검은 눈은 그때까지도 눈물에 젖지 않았다.

이 사람이다.

허리를 안은 팔에 힘을 주면서 나는 꿀꺽 침을 삼켰다. 순간적으로 떠오른 문장은 뇌리에서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확신과 함께 더욱 선명해지기만 했다.

이 사람이 바로 내가 기다린 곰이다.

확신은 이내 충동을 동반했다. 뜨끈뜨끈한 곰의 체온이 옮겨 온 배 속에서 오래 잠들어 있었던 연애 감정이 끓어올랐다.

실연에 괴로워하면서도, 술에 취해 비틀거리면서도, 허무한 고백을 쏟아 내면서도 눈물 한 방울 보이지 않는 곰. 결코 바닥까지 무너지지 않는 굳건한 이 사람이 나를 원하는 걸 보고 싶다. ‘정운이’를 애타게 부르며 괴로워하는 것처럼, 내 이름을 힘겹게 부르고 간절히 매달리는 모습을 보고 싶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면 이 사람이 ‘정운이’가 아닌 나를 부르지?

어떻게 하면 이만큼 나를 사랑해 주지?

생각할수록 오싹오싹했다. 마침내는 이 사람을 절대 놓치면 안 되겠다는 결심이 섰다.

정작 고백이 끝난 곰은 더 이상 내게 용무가 없는 듯했다. 나를 가볍게 밀어낸 곰이 몸을 돌렸다. 붙잡기 위해 자리에서 일어난 것과 동시에, 곰이 바닥으로 쓰러졌다.

“손님!”

“아, 뭐야!”

요란한 소리와 함께 술잔이 바닥을 나뒹굴었다. 엎어진 안주를 치우며 사람들이 화를 냈다. 나는 서둘러 곰의 앞으로 다가갔다. 사람들에게 사과를 건네고, 대강 자리를 수습한 뒤에 곰을 부축해 일으켰다.

행운은 나의 편이었다. 오늘은 많이 취했으니 다음을 기약하며 택시에 태워 보내려고 해도 곰은 나를 붙들고 놓아주지 않았다.

“딱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나랑 섹스하자. 정운아. 나 진짜로 잘할 수 있어.”

“아니, 저기. 섹스는 나중에 하고 일단 타요.”

“약속하기 전까지 안 보내 줘.”

“알았어요. 합시다. 섹스해요. 일단은 어디든 가죠.”

막무가내로 달라붙는 곰을 달래고 달래서 택시에 밀어 넣었다. 우리를 힐끔거리는 기사의 시선이 따가웠다. 막상 차가 출발하자 곰은 언제 그랬냐는 듯 잠들었다. 이 정도로 인사불성인데 근처 숙박 시설에 던져 놓고 나오자니 마음에 걸렸다. 결국 내 집으로 방향을 틀었다.

어두운 밤거리를 달리는 택시 안에서 나는 계속해서 이건 사심이 아니라고 되뇌었다. 아침에 남자가 술에서 깨면 멀쩡한 정신으로 자기소개를 하면 될 것이었다. 어디까지 기억할지 모르니 밤에 있었던 일도 자세하게 설명해야 할 테고. 앞으로도 만나고 싶다는 말은 수상하게 들리려나. 일단 안심을 시킨 뒤에…….

“……만지지 마요.”

이런저런 계획은 불쑥 건너온 남자의 손 때문에 흐트러졌다. 아무리 치워도 곰은 지치지 않고 내 다리 사이를 더듬었다. 이 사람 주사 참 고약하네. 웃어넘기고 싶었지만 그게 잘 되지 않았다. 결국 곰의 손을 붙잡아 시트에 내리누르고 나는 한숨을 쉬었다. 어느새 반응이 온 아랫도리를 식히려 애를 쓰면서.

그게 내가 기억하는 원재와의 첫 만남이었다.

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