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곰은 달을 그린다
봄 동안 지독한 감기를 달고 살았다.
수시로 어지럽고 열이 올랐다. 쿨럭쿨럭 기침을 하느라 강사들과의 통화도 망치기 일쑤였다. 띵한 머리로 일하다가 퇴근하면 기절하듯 잠들었다.
겨우내 붙었던 살도 계속 빠졌다. 점심은 식욕이 없어서 대충 먹고, 아침과 저녁은 거른 결과였다. 1년 전만 해도 맛있게 먹었던 편의점 도시락이 너무 짜고 매웠다. 샐러드는 밍밍했고 샌드위치는 내용물이 부실했다. 간단히 끼니를 때울 만한 게 없었다.
“김 주임, 괜찮아? 요새 계속 시름시름 앓네.”
과장님의 걱정을 듣고서야 내 상태가 심각하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억지로 기운을 냈다. 이미 다른 이의 요리에 길든 입맛을 억지로 바꾸었고, 감기약을 꾸준히 챙겨 먹었다. 회사에서도 딴생각에 빠지지 않고 일에만 집중하려고 노력했다. 멀쩡하게 잘 지내라고 내가 은겸에게 강요했으니 나도 예전과 다를 바 없는 일상으로 돌아가야 했다.
딱 한 가지, 엄두를 내지 못한 게 있었다. 나는 싸 둔 이삿짐을 풀지 못했다.
봄이 깊어진 4월 초, 새집으로 이사를 했다. 이전에 살던 집은 이미 다음 세입자가 계약되었기에 퇴거를 무를 수 없었다. 급하게 이사할 집을 구하느라 고생을 해야 했다. 비용도 많이 들었고, 회사에서 꽤 먼 곳밖에 찾지 못했다.
새집에 입성한 뒤에도 나는 짐 더미에서 필요한 것들만 꺼냈다. 덕분에 새집도 예전 집처럼 풀지 않은 박스로 가득 찼다. 물건을 정리하지 못한 이유는 단 한 가지였다. 언제든 은겸이 연락하면 돌아가기 위해서였다.
널 떠나려고 했던 게 아니야.
기다릴게. 연락해 줘.
은겸의 집을 떠나면서 마지막으로 보낸 메시지에 몇 달째 답이 오지 않았다. 먼저 연락해 볼까 수없이 고민했다. 하지만 시간을 달라며, 나를 보는 게 힘들다던 은겸의 모습을 떠올리면 차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은겸의 마음이 가라앉을 때까지, 다시 나를 돌아볼 힘을 얻을 때까지 나는 기다려야만 했다. 내가 은겸에게 기다려 달라고 했듯이.
은겸에겐 열흘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이 필요한 듯했다.
내 변화는 회사 사람들에게도 전해졌다. 퇴근길, 이제는 신입이 아니게 된 지희 씨가 내게 머뭇머뭇 물었다.
“주임님, 요새는 점심에 뭐 먹었는지 안 물어보시네요.”
그래도 대놓고 은겸과 헤어졌냐고 묻지 않을 만큼의 눈치는 키워서 다행이었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제 그걸 궁금해하는 사람이 없어서.”
“제가 물어봐 드릴까요?”
“아냐. 괜찮아.”
하나도 괜찮지 않았지만 고개를 저었다. 타인에게 은겸 이야기를 꺼내면서 위로해 달라고 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은겸을 아직 기다리는 중이니 위로받을 이유가 없었다. 기다리다 보면 은겸이 내게 돌아올 것이고, 그럼 내 일상도 예전처럼 회복될 것이었다.
괜찮았다. 은겸이 아무리 늦어져도 혼자 버틸 수 있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도움을 요청할 필요는 없었다. 나 혼자 이러고 사는 건 아니니까. 다들 멀쩡한 모습으로 보여도 괴로운 일 하나쯤은 품고 사니까. 유난스럽게 힘들어하면서 주위를 피곤하게 만들 바에야, 그냥 나 혼자 감당하는 편이 나았다.
효영의 비밀을 들은 날에도 그랬다.
효영은 대리 자리에 잘 적응했다. 누구라도 납득할 만큼 빠르게 일을 익혔고 강사들과도 수월하게 친해졌다. 마치 처음부터 우리 부서에 있었던 사람처럼 완벽하게 적응한 효영을 보며 사람들의 수군거림도 차차 잦아들었다. 서먹했던 시간도 지나고 한 명 더 불어난 우리 팀의 모습이 익숙해진 늦봄 퇴근길, 효영이 나를 따로 불러냈다.
나를 앞에 앉혀 놓은 채 효영은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을 거푸 마셨다. 처음에는 회사 얘기를 꺼내고, 자신의 일상 얘기를 꺼내며 떠들던 그녀는 곧 조용해졌다. 내게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눈치였다. 나는 효영을 말리지 않았다. 묵묵히 안주를 먹으며 효영이 본론을 꺼내기를 기다렸다.
효영은 얼마 안 가 취했다. 혀 꼬인 발음으로 효영은 자꾸만 내 이름을 불렀다.
“원재야. 김원재.”
나는 그녀를 바라보았다. 길게 한숨을 쉰 효영이 고개를 길게 저었다. 눈가에 번진 검은 무늬 위로 진짜 눈물이 떨어져 내렸다.
“미안하다. 내가 미안해.”
“뭐가.”
“전부 다. 너한테 미안한 만큼 잘해야 한다고 생각해서 이 악물고 참았어.”
“…….”
“그래야 네가 덜 억울할 테니까. 실력도 없는 사람 때문에 네 진급이 밀린 거면 화날 거 아니야.”
“효영아.”
“야. 사는 게 뭐 이리 더럽냐, 진짜.”
똑똑 떨어져 내린 눈물이 테이블 위에 동그란 원을 그렸다. 낯을 가리는, 입사 초기까지만 해도 사람들과 어울리는 걸 어려워했던 수줍음 많은 치타가 소리 없이 울었다. 빈 술잔을 붙들곤 어깨를 들썩이며 울었다.
효영이 술기운을 빌려 간신히 털어놓은 이야기는 지난해 승진 과정에서 있었던 일이었다.
“내가 그때 무슨 얘기까지 들었는지 알아? 너랑 내가 둘이 친한 것 같은데 그냥 사귀라더라. 그럼 원재 널 승진시켜도 내가 불만 없지 않냐고 대놓고 말하더라, 높으신 분들이.”
“…….”
“아니면 나이도 찼으니까 결혼하고 퇴사하라고. 집에서 살림이나 하면 되지 않냐고.”
효영이 상사들을 따라다니던 골프 필드에서 어떤 이야기가 오갔을지 상상해 본 적은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대놓고 무시당했을 줄은 몰랐다. 그 소리를 듣고도 효영은 홀로 참고 안으로 삭였으리라. 누구에게도 상담할 수 없는 문제니까.
“죽어도 싫다고 그랬어. 원재 네가 싫어서가 아니라. 나를 누군가에게 딸린 부속품으로 취급하려는 사고방식이 싫어서.”
“그래.”
“나도 일을 하면서 이루고 싶은 게 있고 내 경력이 소중한데. 그걸 아무렇지도 않게 버리라고 하는 사람들이 정말 싫었어. 그래서 너네 팀으로 가라고 했을 때, 그러겠다고 했어. 그게 네 자리인 걸 알면서도.”
효영의 턱을 타고 흐른 눈물이 옷깃을 적셨다.
“미안해.”
“나한테 미안해하지 마.”
“나 혼자 살자고 너한테 미리 얘기 안 한 거, 정말 미안해. 미안해, 원재야.”
휴지를 뽑아 건네자 훌쩍거리며 효영이 눈가를 닦았다. 나는 손을 뻗어 효영의 좁은 어깨를 감쌌다. 우리는 같은 해에 입사한 동기였다. 그리고 작년까지 둘 다 승진을 하지 못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내가 곰이라서 차별을 받은 것처럼, 효영도 차별받고 있었기에.
진급이 간절했던 건 나뿐만이 아니었다.
“너는 앞으로도 잘할 수 있을 거야.”
가늘게 떨리는 어깨를 도닥거렸다. 겁에 질린 것처럼 움찔거리는 효영이 안타까웠다.
“위쪽에서 선택한 건 결국 너잖아. 다 이유가 있으니까 그런 거지.”
“내가 평소에 비위를 맞춰서…….”
“그것도 다 사회생활 스킬 아니야? 네가 그랬으면서.”
언젠가 효영이 했던 말을 돌려주며 나는 한숨을 쉬었다.
“너는 회사에 어울리는 사람이 되려고 네 성격까지 버리고 노력했잖아.”
“…….”
“그러니까 네가 진급한 거야. 나는 너만큼 노력하지 않았어. 그냥 이 정도가 내 수준에 맞아.”
효영의 흐느낌이 커졌다. 그랬다. 억울하고 분했어도 시간이 흐르고 보니 이해할 수 있었다. 효영은 진급할 만한 사람이기에 진급한 것이었다. 비록 그 과정에서 잡음이 있었지만. 아마 나라도, 나와 효영 둘 중 한 사람만 진급시킬 수 있다고 한다면 효영을 골랐을 것이었다.
나는 나직이 말했다.
“앞으로는 이런 일이 있으면 나한테도 얘기해 줄래? 우리 친구잖아. 같이 고민하자.”
“응…….”
한참 만에야 울음을 멈춘 효영이 빨갛게 부은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너도.”
“응?”
“너도 힘든 일 있으면 말해.”
손등으로 눈가를 닦으며 효영이 중얼거렸다.
“너 그 사자랑 어떻게 됐어. 아직도 안 만나?”
나는 입을 다물었다. 효영의 노란 눈이 나를 응시했다.
“헤어졌지?”
“……아직.”
“안 헤어졌는데 만나지는 않아?”
“…….”
“원재야.”
“그 얘기는 하지 말자.”
효영의 말을 잘랐다. 이마를 짚으며 시선을 피하자 효영도 그 이상 내게 묻지 않았다. 타인에게 은겸과의 일을 털어놓고 싶지 않았다. 기다리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렇기에 누구의 조언도 필요하지 않았다.
은겸이 없어도 나는 무너지지 않았다.
그가 없더라도 내 주위에는 많은 것이 남아 있었다. 내게는 번듯한 직장이 있었고, 매일 마주치는 동료들이 있었다. 예주와 효영 같은 친구도 남아 있었다. 애초에 은겸은 내 삶에 잠깐 끼어든 선물 같은 거였다. 그가 궤도를 되찾아 제자리로 돌아갔으니 내 일상도 원래대로 돌아갔다. 내가 무너질 이유는 없었다.
은겸이 없어도 나는 멀쩡했다. 그래야만 했다.
나는 그저, 내가 잘하던 것처럼 오랜 시간을 버티며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
봄이 지나자 새로운 계절이 찾아왔다. 태어나서 처음 겪는 끔찍한 여름이었다.
홀로 보내는 발정기는 전에 없이 길었다. 시도 때도 없이 더워지는 몸을 식히기 어려웠다. 열기뿐만이 아니었다. 배 속에서 성욕이 소용돌이치며 수시로 들끓었다. 밤이 되어도 잠들지 못했다. 베개를 움켜쥐고 마음을 가라앉히려 노력하다가 결국 새벽녘이 되면 화장실로 향했다. 혈기왕성했던 사춘기 때도 성욕 때문에 이렇게 괴로웠던 적은 없었다.
내가 남들보다 성욕이 없다고 느꼈던 건 단순히 제대로 된 쾌감을 맛보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왜 그렇게 발정기 때마다 힘들어하는지, 서른이 넘어서야 깨달았다. 은겸과 보냈던 짧은 발정기를 잊을 수가 없었다. 잊지 못한 몸이 시도 때도 없이 폭주했다.
모든 감각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몸 때문에 신경도 전에 없이 예민했다. 나는 수시로 안절부절못하고 초조해했다. 이러다 안 되겠다 싶어 다시 수영을 시작해서 주말마다 몸을 혹사했다. 과장님에게 사정해서 일주일 휴가도 내 봤지만 허사였다. 휴가가 끝난 이후에도 발정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혼자서 몸을 달래 본들 은겸이 주던 격렬한 자극이 아니면 만족할 수 없었다.
미칠 것만 같았다.
너무 괴롭다 보니 아무나 붙들고 섹스하고 싶은 충동마저 일었다. 그제야, 그제야 이해가 되었다. 섹스 파트너라도 만들고 싶다던 정운이의 심정이. 정운이도 이만큼 괴로웠던 거였다. 누구에게라도 몸을 맡기고 싶을 정도로.
그리고 나는 비겁하게도 그 틈을 파고들려 했다. 불같이 화를 내던 인호의 심정이 어땠을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불안했겠지. 힘들어하는 정운이를 만족시켜 주지 못하는, 발정기가 정해져 있는 자신이 싫었을 테고.
정운이는 그럼에도 참았다. 예전부터 호감이 있었던 내가 섹스 파트너 제안을 하는데도 넘어오지 않고 거절했다. 연인을 배신하지 않고 끝까지 신뢰를 지켰다.
그러니 나도 은겸을 기다려야 했다.
병원을 찾아가 상태를 털어놓고 진정제를 받아왔다. 장기 복용하면 절대 안 되는 약이기에 딱 사흘 치밖에 받지 못했다. 그걸 나누어서 일주일 동안 먹었다. 아슬아슬할 정도로만 몸이 진정되도록.
대신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기 시작했다. 몸이 더워지면 습관적으로 담배를 쥐었다. 담배를 피우다 보면 은겸이 생각나서 놓기가 어려웠다. 그가 나를 위해 선택했던, 냄새가 거의 없는 순한 브랜드만을 샀기 때문이었다. 머릿속을 채우는 옛 기억을 멍하니 바라보며 담배를 피웠다. 흡연 빈도가 늘자 끊기 이전보다도 더 많은 담배가 필요해졌다.
어느 여름 새벽. 더위를 이기지 못하고 나는 일찌감치 잠에서 깼다. 세수라도 하기 위해 화장실로 들어섰다. 열이 오른 몸에 물을 끼얹고 수건으로 닦아 내다가 문득 거울을 보았다. 가슴을 가로지르는 하얀 자국이 눈에 띄었다. 그 위에 은겸이 남겼던 붉은 흔적은 이미 사라진 지 오래였다.
나는 흰 무늬를 손으로 짚었다. 경계선 위를 서투르게 훑으며 거울을 들여다보았다. 아름다운 눈썹달도, 우주를 품은 가슴도 없었다. 잘못 뿌려진 페인트 같은 자국만 있을 뿐.
단지 은겸이 옆에 없는 것뿐인데. 내 달은 다시 빛을 잃었다.
거실로 돌아가 담배를 입에 물었다. 멍하니 피우면서 천장을 바라보았다. 어둠에 잠긴 천장의 윤곽은 흐릿했다. 언젠가 은겸과 함께 올려다본 적이 있었나. 생각하다가 피식 웃었다. 이 집은 은겸과 떨어져 있게 된 이후 이사를 온 곳이었다. 당연히 은겸은 이 집에 온 적이 없었다.
잘 지내고 있을까.
그리운 은겸의 집을 떠올리며 연기를 뱉었다. 아직도 예전처럼 깔끔하게 청소하면서 관리할까. 아직도 그 집 냉장고에는 집주인은 먹지도 않는 꿀이 들어 있을까. 아직도 그 집의 방 한 칸은.
“…….”
예전처럼 텅 빈 채 잠겨 있을까.
가슴이 욱신거렸다. 목이 막혀 담배를 빨 수가 없었다. 나는 반쯤 남은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껐다.
눈꺼풀을 닫자 거짓말처럼 익숙한 방의 풍경이 눈앞에 아로새겨졌다. 침대에 누워 올려다보곤 했던 천장의 연한 회색 벽지. 민들레 모양의 장식이 빛나는 천장등. 반쯤 열린 하얀 문. 키 큰 원목 옷장.
침대에 누운 나를 내려다보던 미소 띤 은겸의 얼굴.
“서은겸.”
듣지 못할 이름을 중얼거려 보았다. 서은겸. 서은겸. 서은겸.
“왜 연락을 안 해.”
벌써 겨울은 끝났고, 봄도 지나갔고, 여름이 되었는데.
“대체 언제까지 기다려야 해.”
우리가 만나 함께 보냈던 시간만큼 떨어져 있었는데. 어느새 그렇게 시간이 흘러 버렸는데.
“보고 싶은데.”
얼마나 더 시간이 필요한 걸까.
손을 들어 이마를 덮었다. 뜨끈뜨끈한 눈가를 꾹 누르며 숨을 참았다. 아직은 울 수 없었다.
내가 강하다고 했던가.
아니. 나는 그냥 참는 데 익숙한 것뿐이었다. 요령을 피울 줄도 모르고, 일탈을 할 줄도 모르고, 머리를 쓸 줄도 모르면서 무조건 버티면 좋은 날이 올 거라고, 내 노력에 대한 대가가 반드시 돌아올 거라고 믿는 데 익숙한 것뿐이었다.
나는 강한 게 아니라 멍청한 거였다.
봐. 지금도 기다리면 언젠가 네가 돌아올 거라고 믿고 있잖아. 나는 강하지 않아. 현실을 바로 보지 못할 만큼 나약한 거야.
네가 돌아오지 않는 현실을.
***
“원재야.”
귓가를 간지럽히는 다정한 목소리. 밀어 올린 눈꺼풀 틈을 채우는 환한 얼굴. 허리를 안은 단단한 팔의 무게. 코끝에 밀려드는 달콤한 체향. 부드럽게 이마에 와 닿는 입술.
“더 잘 거야?”
고개를 저었다. 잠에 취한 의식을 억지로 깨웠다. 이불 아래로 얽힌 따뜻한 몸을 끌어안으며 눈을 껌뻑였다. 그리고 한순간도 놓치기 싫은 이를 바라보았다.
“잘 잤어?”
나를 보는 호박색 눈이 장난스럽게 반짝거렸다. 입가에 떠오른 미소가 예뻐서 나도 모르게 손을 내밀었다. 뺨을 만지작거리자 그의 웃음이 더욱 진해졌다. 자신의 흔적을 남기려는 듯이 내 손바닥에 볼을 비비적대는 몸짓이 익숙했다.
그래서 한참 동안 바라만 보았다. 다시 만난 내 세계의 일부분이 반가워서. 이렇게 눈앞에 두고 끌어안고 있는데도 그가 그리워서. 그립고 그리워서.
“와 줘서 고마워.”
“응?”
은겸의 두 귀가 쫑긋 움직였다. 나는 숨을 골랐다.
“……여기 와 줘서 고마워.”
빙그레 웃은 은겸이 내 등을 토닥였다.
“네가 원하면 어디라도 갈게.”
그런가. 내가 원하기 때문에 와 준 거였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은겸의 품에 얼굴을 파묻었다. 긴 밤이 끝나기 전까지 조금이라도 더 그를 많이 느끼고 싶었다.
아침이 찾아와 그가 사라지기 전까지.
꿈을 꾸었다. 함께 웃으며 서로를 바라보았던 예전의 꿈을. 현실이 아닌 줄 알면서도 은겸을 끌어안았다. 꿈에라도 와 줘서 고맙다고 속삭였다. 그리운 그와 몸을 겹치고 더는 떨어지지 않을 것처럼 서로를 붙들었다.
긴 여름밤이었다.
***
깊어지는 열대야 속에서 나는 매일 밤 은겸을 만났다. 아침이면 끝나는 재회는 허무했다. 잠결의 밀회로는 만족할 수 없었던 몸은 계속 뜨거웠다. 연락을 주지 않는 은겸을 기다리는 시간도 여전했다. 의미 없는 꿈만 점점 더 뚜렷해질 뿐이었다.
희미해졌던 기대는 8월 중순으로 접어들자 다시 부풀어 올랐다. 8월 21일. 내게도 은겸에게도 특별한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날만큼은 내가 먼저 연락해도 괜찮겠지. 부담스럽게 느끼지 않겠지. 작은 희망을 놓고 싶지 않았다.
자정 무렵 메시지를 발송했다.
생일 축하해.
수백 번은 썼다가 지운 듯한 짧은 문장이 화면을 채웠다. 떨리는 손으로 핸드폰을 놓았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아래를 내려다보다가 다시 집었다.
오늘 잠깐이라도 만날 수 있을까.
그날이 지나도록 은겸의 연락은 없었다. 12시가 지나기 전, 나는 내가 보낸 메시지를 다시 확인해 보았다. 두 문장 옆에 뜬 읽음 표시를 보자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읽었구나. 그래도 읽기는 했구나. 최소한 나를 차단하거나 번호를 바꾼 건 아니구나. 내 메시지를 하루도 지나지 않아서 확인했을 정도면, 잘 지내고 있겠지.
그런데 왜 답을 하지 않는 걸까.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아무런 글자도 올라오지 않는 화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새벽이 밝아오고, 마침내 아침이 올 때까지.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서야 깨달았다. 현실의 은겸은 나를 만날 의사가 없다는 걸.
아직 더 기다려야 했다. 은겸이 나를 허락해 줄 때까지.
지독하게 더웠던 계절은 불쾌한 끈적거림을 남기며 지나갔다. 기온이 떨어지면서 서른한 번째 여름이 끝을 고했다. 괴로웠던 나의 발정기도 조용히 끝났다. 8월 22일 이후 들여다보지 않은 대화방도 조용했다.
어느덧 홀로 맞는 가을이 시작되었다.
추석을 앞둔 회식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작년 이맘때의 일이 자꾸만 떠올랐다. 번화가에서도 나를 찾아내 다가와선 함께 연휴를 보내자고 하던 은겸. 함께 보낸 일주일. 처음으로 은겸에게서 나와 비슷한 외로움을 찾아냈던 순간.
성인이 되어 독립한 뒤로는 줄곧 혼자 보냈던 시간에 은겸과의 기억이 섞여들자 괴로웠다. 토요일부터 화요일까지 이어지는 짧은 연휴를 맨정신으로 혼자 보낼 자신이 없었다.
더는 버티기 힘들었다. 누구에게라도 도움을 청하고 싶었다. 핸드폰을 꺼내 주소록의 이름들을 살펴보았다. 제일 먼저 연락을 취한 사람은, 아무래도 가족 같은 이였다.
─어, 원재야.
예주는 어색하게 내 이름을 불렀다. 주인호의 연락처를 전해 받은 뒤로 어쩐지 서먹해져서 연락을 피했던 탓이었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이제 와서 예주를 추궁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다른 부탁이 먼저였다.
“혹시 추석 때 너희 집에 가도 될까.”
예주의 가족이 추석 때는 반드시 모여서 지낸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나를 한 가족처럼 여기면서, 명절에 혼자 있기 싫으면 놀러 오라고 얘기하곤 했으니까. 항상 거절했지만 이번만큼은 빈말이라도 의지하고 싶었다.
─무슨 일 있어?
“그냥.”
─어쩌지. 나 우리 언니랑 여행 가기로 했는데.
진심으로 안타까워하면서 예주가 말했다.
─너 혼자라도 갈래?
예주 없이 예주의 무리에 섞이는 건 끌리지 않았다. 나는 알겠다고 하고 전화를 끊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여기저기 연락을 취해 봤다. 어떻게든 혼자 있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대부분 가족이나 연인과 연휴를 보내기로 이미 약속이 되어 있다는 거절이 돌아왔다. 마지막으로 전화를 건 상대는 정말 오랜만에 연락하는 이였다. 번호가 바뀌었으면 어쩌지 싶었는데. 다행히도 상대는 내 전화를 받았다.
“잘 지내셨어요?”
─네가 웬일이니.
몇 년 만에 듣는 어머니의 목소리는 예전과 다른 게 하나도 없었다. 나는 볼을 긁적였다.
“곧 추석이라서요.”
─그게 왜.
“그냥, 잘 지내시나 하고. 그때 찾아뵈어도 될까요.”
─이번 연휴에는 다른 사람하고 약속이 있는데.
“아, 네.”
─미리 얘기를 하지 그랬니.
어머니의 목소리에서는 조금도 아쉬움이 배어나지 않았다. 내가 성인이 되어 독립한 이상, 어머니에게 나는 더 이상 가족이 아니라 손님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마자 무안해졌다. 이제는 나를 잊고 지내시는 분에게 이게 무슨 어리광인지. 잘 계시라는 말을 끝으로 나는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은겸을 만나기 전에는 언제나 그랬듯, 이번 명절도 혼자 보내야 할 것 같았다.
금요일 퇴근길에 맥주를 여러 캔 샀다. 그리고 연휴 내내 술을 마시다가 잠들었다.
술로 달래지 못한 쓰디쓴 마음은 깨어난 뒤에도 그대로였다. 이튿날 밀려오는 숙취를 피해 냉장고를 열었다가 한참 가슴을 쥐어뜯어야 했다.
“속은 좀 괜찮아? 꿀물 마실래?”
술을 마신 다음 날이면 다정하게 나를 챙기던 은겸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미지근하게 타 주곤 하던 꿀물도, 컵을 내밀던 은겸도 이제는 내 옆에 없었다. 언제 돌아올 거라는 기약조차 없었다.
그 사실을 잊기 위해 나는 술을 마셨다. 사놓은 술이 떨어지면 편의점에 들렀다. 맛없는 편의점 도시락과 함께 술을 마셨다. 그러다 잠들었고, 그러다 깨어나서 욱신거리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한참을 괴로워했다.
차라리 정운이를 기다렸을 때의 내가 그랬듯, 은겸과 내가 함께한 시간이 아예 없었다면. 둘이서 만든 기억 같은 게 없었다면. 그와 보내는 행복을 처음부터 몰랐다면. 그랬다면 나도 기다리기 쉬웠을 텐데.
즐거웠던 추억이 이제 와 가시가 될 줄은 몰랐다. 내 안에 박혀 있는 은겸이 따끔따끔 아팠다. 그래도 차마 그를 빼내지 못한 건, 그보다 더 큰 고통이 따로 있기 때문이었다.
나는 외로웠다.
은겸이 없는 모든 순간이 외로웠다.
***
한동안 잠잠했던 등산 동아리 단톡방에 공지가 뜬 건 10월 초였다.
축 주인호♥나정운 결혼
가을 산 단풍놀이쯤으로 여기고 확인한 공지에는 익숙한 이름들이 적혀 있었다. 10월 말로 예정된 날짜와 함께 장소, 축의금 계좌 등이 아래로 이어졌다. 대강 내용을 훑어보곤 나는 공지를 껐다. 이제는 정운이에게 조금도 미련이 남지 않았기에 그저 싱숭생숭할 뿐이었다. 주인호 자식은 대학 시절부터 그렇게 눈에 불을 켜고 정운이를 지키더니 결국 결혼까지 성공하는구나 싶은 감상 정도. 그렇다고 두 사람의 결혼을 축하해 줄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결혼식 참석도, 축의금 입금도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었다.
‘……아, 주인호.’
그러다 문득, 주인호에게 생각이 닿았다. 주인호. 주인호의 결혼식이면. 어쩌면.
곧장 다시 공지를 열었다. 그리고 예식 날짜와 시간, 장소를 확인했다.
어쩌면. 어쩌면 그날. 법적으로는 남남이라고는 했지만. 주인호에게 크게 화를 낸 이후로는 연락도 받지 않는다고는 했지만. 그래도 형제니까. 동생이라며 주인호를 챙기던 형이니까.
어쩌면 은겸도 오지 않을까.
한번 떠오른 가정은 좀처럼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만약 은겸이 오기만 한다면 부담스럽지 않게 마주칠 수 있는 최적의 기회였다. 대학 선배로서 후배들을 축하하러 왔다고 하면 되니까. 물론 두 사람과 내 관계가 어떤지 아는 이상 은겸이 내 핑계를 믿어 줄 것 같지는 않았지만. 정 안 되겠다 싶으면 분위기를 봐서 동아리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있다가 돌아오면 그만이었다.
은겸과 대화를 하지 않아도 괜찮았다. 은겸이 나를 못 보고 지나가도 괜찮았다. 잘 지내는지 내 눈으로 확인하고 싶었다. 멀리서 얼굴이라도 볼 수 있다면 마음이 놓일 것 같았다.
다른 이유는 없었다. 그저 은겸을 보고 싶었다.
풀지 않았던 옷상자 몇 개를 뒤졌다. 한 해 전, 예주의 결혼식 때 입고 갔었던 정장을 발견했지만 성에 차지 않았다. 급하게 옷을 사러 나섰다. 내가 결혼하는 것도 아닌데 맞춤 정장은 좀 우습지 않을까 싶어서 망설이다가 결심을 굳혔다. 가슴과 허벅지 때문에 평소에도 기성복을 수선해서 입는 편이라, 이번에는 새로 맞추는 것도 괜찮을 듯했다.
무엇보다도 오랜만에 은겸을 볼 수 있는 자리인데. 제대로 차려입어야 했다. 나는 이렇게 잘 지내고 있었다고. 예전 모습 그대로 계속 너를 기다렸다고. 그러니 이제 돌아오기만 하면 된다고, 은겸에게 보여 주고 싶었다.
결혼식 날짜가 다가오는 동안 은겸과의 재회를 수없이 상상했다. 짧게라도 대화할 순간이 주어진다면 무슨 이야기를 할지 고민해 보았다. 잘 지냈어? 보고 싶었어. 우리 잠깐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 다시 만나면 안 될까. 이제 그만 기다리고 싶어. 떠오르는 말이 너무 많아서 어느 하나를 고를 수가 없었다.
고민은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은겸이 오지 않는 결말도 대비해야 했다. 사람들에게 뭐라고 말하고 자리를 뜰지, 만일 나를 알아본 주인호가 은겸에게 내 이야기를 전한다면 어떻게 할지. 내가 자신을 만나려고 굳이 결혼식까지 찾아간 걸 안 은겸이 불쾌해한다면. 그래서 역으로 더 내게서 멀어진다면.
머릿속으로 이런저런 가정만 늘어놔도 소용없었다. 실제로는 어떤 일이 일어날지는 부딪쳐 보기 전까지는 모를 테니까. 버거울 정도로 거대한 긴장감에 짓눌린 채 한 달을 보냈다. 기대와 불안이 뒤섞인 감정 또한 시간이 지날수록 커져만 갔다.
마침내 찾아온 결혼식 당일. 나는 예주나 동아리 사람들에게 알리지 않고 예식 장소인 호텔로 향했다.
예식 시간보다 훨씬 일찍 온 탓인지 로비에는 그리 북적이지 않았다. 드문드문 선 사람들도 일행을 기다리는 듯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이리저리 둘러보아도 아는 얼굴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아직 오지 않았을 동아리 사람들은 그렇다 쳐도, 정운이와 주인호의 가족들도 다른 층에 있는 것 같았다.
만약 은겸이 이 결혼식에 참석했다면 주인호의 가족 사이에 섞여 있을 게 분명했다. 화려한 꽃과 웨딩 포토로 부담스럽게 장식된 홀을 둘러보고 나는 걸음을 옮겼다. 예식이 진행되는 층으로 통하는 엘리베이터는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홀을 가로질러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비어 있던 공간은 이내 다가온 한 무리의 사람들로 꽉 찼다. 밝은 얼굴로 떠드는 이들의 머리 위로 쫑긋 선 토끼 귀의 색이며 형태가 눈에 익었다. 정운이의 친척들인 듯했다.
마냥 기쁜 기색인 토끼들 틈에 섞여 있자니 입맛이 썼다. 이 사람들은 결혼식을 축하하러 왔을 텐데. 다른 목적을 품은 내가 여기 있어도 되는 걸까. 따지고 보면 나는 정식으로 초대받은 하객도 아닌데.
머릿속이 복잡해지자 가슴까지 답답해졌다. 재킷의 단추를 풀기 위해 손을 가슴팍까지 올렸을 때, 누군가 내 등을 툭 쳤다. 벌써 예주가 왔나. 의아해하면서 나는 뒤돌아섰다.
그리고 나보다 조금 높은 곳에서 반짝이는 꿀 색 눈과 마주쳤다.
“김원재 씨.”
구불거리는 금빛 머리카락 사이로 튀어나온 둥근 귀. 하얀 뺨에 콕 박힌 작은 점. 붉은 입술에 어린 부드러운 미소. 익숙한 모습에는 위화감도 깃들어 있었다. 예전에 비해 날카로워진 턱선과 예리해진 눈빛이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뺨을 덮었던 머리카락도 전에 비해 짧아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못 알아볼 정도로 변한 건 아니었다. 내 앞에 서 있는 이는 서은겸이 맞았다.
8개월 동안 꿈에서만 만날 수 있었던 은겸이 나를 보며 웃고 있었다.
“…….”
몇 번이고 반복했던 상상이 아님을 깨닫자마자 온몸이 굳었다. 은겸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고 나는 억지로 입술을 떼려 애썼다. 소용없는 짓이었다. 숨조차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나를 가만히 바라보던 은겸이 긴 꼬리를 슬쩍 흔들었다.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요?”
그는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인사를 마치곤 성큼성큼 걸어와서 내 옆에 섰다.
“후배 결혼식 왔나 봐요? 나도 인호 보러 왔는데.”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나는 은겸의 옆모습을 바라보았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나를 돌아본 은겸이 미소를 지었다. 그의 볼에 있는 작은 점이 위로 움직였다.
“옷 처음 보는 거네. 새로 샀어요?”
“…….”
“잘 어울려요.”
이게 아닌데. 이러려고 온 게 아닌데.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입술을 어떻게든 열고 싶은데. 머릿속이 텅 비어서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내 앞에 선 은겸을 눈에 담는 것 외에는 무엇도 중요하지 않았다. 눈꺼풀 한번 깜빡일 수 없었다. 잠시라도 눈을 떼면 8개월 만에 마주한 그가 사라질 것만 같았다.
어떤 대꾸도 하지 못하는 나를 은겸은 묵묵히 마주 보았다. 그의 입술이 열릴 듯 달싹이다가 닫혔다. 은은하게 퍼지는 바이올린 소리가, 우리를 둘러싼 사람들의 웃음소리가, 엘리베이터의 기계음이 우리 사이의 간격을 메웠다. 불과 한 걸음도 되지 않는 틈에 파고들어 침묵을 지웠다.
영원히 이어질 것만 같았던 순간은 엘리베이터의 벨 소리로 끊겼다. 문이 열리자 은겸이 곁눈질로 안쪽을 가리켰다.
“안 타요?”
“…….”
“그럼 나중에 봐요.”
안 돼.
가지 마.
제발.
그 순간 내가 떠올린 모든 말은 은겸이 내게 한 말이었다. 창백한 얼굴로 내 앞을 가로막으며 나를 붙들던 그의 절규였다.
그래서 나는 그 말들을 단 한 마디도 입 밖에 꺼내지 못했다. 그때 내가 얼마나 냉정하게 은겸의 애원을 무시하고 떠났는지 기억하기에.
내가 짓밟은 애원을, 그에게 똑같이 돌려줄 수 없었기에.
은겸은 입가에 띤 미소를 지우지 않고 눈인사를 보냈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떠나는 그를 차마 계속 바라볼 수 없었다. 문이 닫히는 순간 나는 고개를 숙였다. 언제부터 깨물고 있었던 것인지 아릿한 입술에서 피 맛이 올라왔다.
묵직한 기계음과 함께 엘리베이터가 올라간 순간, 눈앞이 부옇게 흐려졌다. 이내 미지근한 액체가 볼을 타고 흘렀다.
힘주어 꽉 누른 눈꺼풀로는 눈물을 막지 못했다. 새어 나온 눈물방울이 아래로 뚝뚝 떨어져 내렸다. 꽉 쥔 주먹이 바들바들 떨렸다. 울음을 목 안으로 삼켜도 억눌린 신음이 저절로 흘렀다. 터질 듯한 가슴을 부여잡고 나는 고개를 숙였다.
은겸의 앞에서는 달라붙어 있었던 입술이 그제야 열렸다.
“서은, 겸…….”
몇 달 동안 참아 온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걷잡을 수 없이 흘러내려 뺨을 적셨다. 다시 떨어져 나간 그에게 손가락 하나 뻗지 못한 나를 비웃듯이. 말 한 마디 걸지 못한 나를 비난하듯이.
그토록 기다렸던 은겸을 또다시 떠나보내자 잔인한 현실이 온몸에 와닿았다. 모든 것은 진작 결말이 지어져 있었다.
이럴 거면 나중에 연락한다고 하지 말지. 기다리지 말라고 얘기해 주지.
처음부터 이럴 거였으면. 이렇게 아무렇지 않게 가 버릴 거였으면.
이제 더는 의미 없는 뒤늦은 원망. 겨울이 지나고 봄과 여름을 거쳐 또다시 가을이 찾아올 때까지 내가 억지로 외면하고 있었던 진실. 미련하게 버티며 모르는 척했던 것들.
아무리 기다려도 은겸은 돌아오지 않는다. 우리는 이미 오래전에 서로의 손을 놓았으니까.
아아.
긴 기다림이 또 한 번 끝났다.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닦으면서 몸을 돌렸다. 나를 피해 움직이는 사람들의 기척이 느껴졌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무작정 엘리베이터에서 먼 쪽을 향해 걸었다. 내가 대체 무엇을 위해, 뭘 기대하고 여기에 왔는지 알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이 공간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이미 끝난 은겸과의 재회가 머릿속에서 계속 맴돌았다. 누가 봐도 만남을 기대한 티가 나는 내가 얼마나 멍청해 보였을까. 얼마나 한심해 보였을까. 새로 산 옷까지 한눈에 들켰다는 게 너무 수치스러웠다. 은겸은 나를 다시 만날 생각이 없는데. 나를 봐도 아무렇지 않게 웃으면서 말을 건넬 수 있을 정도로 마음을 정리했는데. 대체 나 혼자 이게 다 뭐 하는 짓일까.
모든 것이 끝났으니 나도 이제 미련을 품어서는 안 되었다. 가슴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고통을 속으로 삼킬 필요도 없었다. 그러니까 빨리 집에 돌아가서 실컷 울자. 멀쩡해지는 건 내일부터 하면 된다. 다 잊어버리도록 울자. 울고, 울면서…….
간절히 붙들었던 짧은 행복을 놓아주어야 했다. 더는 은겸을 떠올리지 않도록. 다시는 누구도 기다리지 않도록.
비틀비틀 옮긴 걸음은 몇 발자국 가지 못했다. 부연 시야 탓에 발을 헛디뎠다. 힘이 풀린 다리는 바닥을 제대로 딛지 못했다. 크게 기울어진 몸이 옆으로 고꾸라졌다. 바닥으로 쓰러지는 와중에도 내 머릿속은 텅 비어 있었다.
그때, 다급한 발소리가 내게로 다가왔다. 그러더니 누군가 뒤에서 내 팔을 붙들었다. 강하게 끌어당기는 힘에 이끌려 균형을 되찾았다. 내가 바로 설 때까지 등 뒤의 사람은 자신의 몸으로 나를 지탱해 주었다. 단단한 타인의 신체에 기대어 간신히 몸을 가누곤 나는 숨을 골랐다. 어째서인지 예전에도 지금과 비슷한 일을 겪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기시감의 주인공은 예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김원재 씨.”
익숙한 목소리에 눈물이 왈칵 솟았다. 손등으로 눈을 가린 채 나는 고개를 숙였다. 어깨를 붙들고 나를 돌려세운 은겸이 눈을 크게 떴다.
“왜 울어요.”
“…….”
“사랑하는 후배 결혼식이라 슬퍼서 그래요?”
“…….”
“또 실연을 위로해 주기에는 장소가 좀…….”
다 알면서 왜 그런 잔인한 소리를 하는 거야. 나는 흐느끼며 이를 악물었다. 은겸은 그 이상 시치미를 떼지 않았다. 입을 다문 그가 한숨을 쉬었다.
“그렇게 울 거면 나를 잡지 그랬어요. 한 마디도 안 하길래, 이제 나한테 말 걸기 싫어진 줄 알았는데.”
“…….”
“지금도 말 안 하잖아요.”
“…….”
“그렇게 내가 미워요? 꼴도 보기 싫을 정도로? 나 그냥 갈까요?”
머리를 간신히 저었다. 오늘만은 절대로 말해야 했다. 번번이 전하지 못한 수많은 진심 중 하나라도 제대로 전해야 했다. 억지로 울음을 삼키고 한참 숨을 골랐다. 꽉 막힌 목을 억지로 틔우자 갈라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내가 널 잡으면.”
원하지 않는데 한마디라도 말을 걸어서 너를 귀찮게 하면.
“부담스러워할 것 같아서.”
섣부른 말로 네 마음을 어지럽힐 수는 없으니까. 만약 그랬다가, 이번에는 정말로 내게 질리기라도 한다면.
“그러면, 정말 다시는 연락을 안 할 것 같아서.”
“내 연락을 기다렸어요? 아직도?”
믿을 수 없다는 듯 중얼거리는 은겸을 차마 바라볼 수 없었다. 나는 뒷말을 잇지 못하고 눈을 꾹 감았다. 머리가 욱신욱신 쑤시는데 가슴이 저며서 숨이 모자랐다. 제대로 소리도 내지 못하고 이를 악물었다. 그저 눈물만 하염없이 흘렸다.
긴 손가락이 내 눈가에 와 닿았다.
“원재야.”
다정하게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 무거운 눈꺼풀을 열었다. 웃는 듯 우는 듯한 표정으로 은겸이 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오래전 잃어버린 기억을 되찾은 느낌이었다. 쏟아지는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손을 움직여 눈가를 닦아 내며 은겸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나를 기다렸어?”
“…….”
“내가 오지 않는데도? 이렇게 오래?”
“…….”
“말해 봐, 원재야. 괜찮아.”
그의 손에 뺨을 비비면서 나는 새로운 눈물을 줄줄 흘렸다. 격한 감정이 꽉 차오른 몸속으로 더는 무엇도 삼킬 수가 없었다.
“기다렸어.”
울음과 함께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계속 기다렸어.”
오지 않을 걸 알면서도. 결국 또 혼자가 되리란 걸 알면서도.
“나는 너를 계속 기다렸어.”
뒤이어 터져 버린 오열 때문에 아무 말도 덧붙이지 못했다. 은겸의 팔을 붙들고 한참을 흐느꼈다. 말없이 볼을 쓰다듬던 은겸이 고개를 숙였다.
다음 순간 이마에 느껴지는 부드러운 것 때문에 나는 흠칫 몸을 떨었다. 이제는 꿈에서나 닿을 수 있을 줄 알았던 입술이 이마를 살짝 누르곤 떨어졌다.
나를 끌어안은 은겸이 가만히 손을 움직였다.
“그랬구나.”
등을 쓰다듬는 손의 온기가 비현실적이었다. 눈물샘이 고장 난 것처럼 연신 시야가 흐려졌다. 볼썽사나운 걸 알면서도, 통제할 수 없는 서러움에 잠겨 나는 울었다. 영영 잃어버린 줄 알았던 품에 기대어 소리 없이 눈물만 흘렸다.
끝날 것 같지 않았던 울음이 진정되었을 무렵, 은겸이 긴 한숨을 내쉬었다.
“원재야. 우리 얘기 좀 하자.”
“무슨, 얘기.”
“그러지 말고. 우리 할 얘기 많잖아.”
내 머리를 쓰다듬은 은겸이 손을 붙들었다. 가볍게 손깍지를 끼고 손등을 두드리는 그의 손가락이 예전보다 말라 있었다. 은겸이 나와 떨어져 있던 동안 어떤 시간을 보냈을지 조금은 짐작이 갔다.
은겸이 이끄는 대로 터벅터벅 걸었다. 사방에서 날아와 박히는 사람들의 시선보다, 은겸과 맞닿은 맨살에 모든 신경이 집중되었다. 절대 그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조심스럽게 손아귀에 힘을 주자 은겸이 나를 돌아보았다. 그러더니 내 손에서 자신의 손을 빼냈다.
“……아.”
은겸의 손이 사라지자 손안이 허전했다. 살갗에 미미하게 남았던 체온도 금방 사라졌다. 내가 손을 꽉 잡아서 불쾌했던 건가. 괜히 의식하게 만들어서 그나마 이어져 있던 것마저 놓쳐 버렸다. 욕심내지 말걸. 그냥 가만히 있을걸. 욱신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면서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나를 바라보던 은겸이 꼬리를 길게 휘둘렀다.
“가자.”
이어진 것은 상상도 못 했던 행동이었다. 은겸은 팔을 뻗어 내 허리에 둘렀다. 마치 연인에게 하는 것처럼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나를 끌어당긴 그가 속삭였다. 갑작스럽게 밀착한 자세가 민망했다. 화끈화끈 달아오르는 얼굴을 한 손으로 가리고 나는 은겸과 발을 맞추어 자리를 옮겼다.
은겸의 목적지는 화장실이었다. 세면대 앞으로 나를 데려가서는 얼굴부터 닦아 냈다. 손을 씻던 사람이 나를 보곤 움찔 놀라며 옆으로 피했다. 눈물범벅에 벌겋게 눈이 부은 초라한 몰골을 보이기 싫어 나는 고개를 푹 숙였다.
찬물로 세수를 하자 마음이 좀 가라앉았다. 거울에 비친 나를 외면하면서 은겸이 내미는 손수건으로 물기를 훔쳤다. 비로소 조금 전 내가 벌인 민망한 짓이 인식되었다. 남의 결혼식장에서 펑펑 울고, 은겸의 위로를 받고, 그에게 이끌려 화장실로 들어왔다. 남들 눈에는 얼마나 이상해 보였을까.
당장 가족의 결혼식을 보러 온 은겸에게도 민폐였다. 나는 손수건을 접어 은겸에게 돌려주었다. 손수건을 주머니에 넣은 은겸이 한숨을 쉬었다.
“오늘 안 마주쳤으면 어쩌려고 그랬어.”
“……5년만 더 기다리고 포기하려고 했어.”
하아. 은겸이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 기다린다는 말이 너무 부담스러웠나. 솔직하게 뱉을 게 아니었다. 후회하면서 나는 아랫입술을 잘근거렸다.
내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그가 입을 열었다.
“원재야.”
“……응.”
“보고 싶었어.”
애써 진정시킨 눈물이 다시 솟을 듯 눈가가 뜨거워졌다. 나는 입술을 세게 깨물었다. 복받치는 서러움을 삼키자, 그동안 나를 괴롭혔던 의문을 꺼낼 수 있었다.
“……그럼 왜 연락을 안 했는데.”
수많은 밤을 홀로 보내면서 은겸이 내게 연락하지 않는 이유를 떠올려 보았다. 다시 떠올리기 싫을 만큼 잔인한 가정을 모두 지우자 남는 것은 몇 가지 되지 않았다. 너무 바빠서. 내게 연락하기 싫어서. 아직 마음이 진정되지 않아서.
혹은 우리 관계를 이대로 끝내려고. 얼굴을 보여 주지도, 목소리를 들려주지도 않고, 짧은 메시지로도 통보하지 않은 채. 그와 나의 이야기를 조용히 소멸시키기 위해서.
어떤 것이든 좋으니 대답을 듣고 싶었다. 나는 은겸과 시선을 똑바로 마주쳤다. 그의 노란 눈이 조금 흔들리나 싶더니, 이내 눈꺼풀 뒤로 숨었다. 눈을 감은 은겸이 중얼거렸다.
“할 수가 없었어.”
“왜.”
은겸의 입가에 쓴웃음이 떠올랐다.
“무서웠어.”
“…….”
“네가 경멸 어린 눈으로 나를 보는 게 무서웠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또다시 나를 원망하고 후회하는 모습을 보는 게 너무 두려웠어. 그래서 고개를 돌려 버렸어. 똑같은 일만 반복될 것 같아서. 예전과 전혀 다르지 않은 일들이.”
나직한 목소리가 우리밖에 남지 않은 화장실 안을 울렸다.
“태연하게 널 볼 수 있을 때까지 시간이 필요했어. 지금쯤이면 너도 포기했을 줄 알았는데……. 미안해. 누군가 날 이렇게 오래 기다릴 수도 있다는 생각을 미처 못 했어.”
“…….”
“늦었지만 생일 축하해 줘서 고마워. 나는 올해도 네 생일을 못 챙겼네.”
“……미안해.”
사과는 나도 해야 했다. 약속을 지키지 않아서. 내가 먼저 손을 놓아서. 그를 믿지 않고 상처를 줘서 미안하다고.
“헤어지려던 게 아니었어.”
“알아. 내가 도망친 거야.”
이어질 말을 모두 들은 것처럼 은겸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너는 당분간 떨어져 있자고 했지만, 나는 그 기간을 버틸 자신이 없었어. 네 말을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어서 포기했어. 네가 방을 나간 순간부터. 먼저 끝이라고 판단하고 포기해 버렸어.”
“…….”
“너는 여태 나를 기다려 줬는데.”
“……서은겸.”
점차 자조적으로 변하는 이야기를 계속 들을 수가 없었다. 나는 은겸의 말을 잘랐다. 그리고 손을 뻗었다.
“이런 순간에도 나부터 감싸지 마. 안 그래도 돼.”
“…….”
“잘못은 잘못이야. 사과하게 해 줘. 미안해. 내가 심했어.”
잠시 놓았던 손을 붙들자 은겸이 눈을 떴다. 핏줄이 도드라진 손등을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먼저 그의 곁을 떠났던 내게 자격이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래도 전하고 싶었다. 항상 이별의 원인이 자신이라 생각하며 자책했을 그에게 한 번쯤은 꼭 들려주고 싶었던 이야기를.
“네 탓이 아니야.”
시선에도 감촉이 있다면 분명 부드럽게 내 얼굴을 쓰다듬는 감촉이 느껴졌을 것이다. 한참 동안 나를 바라보던 은겸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이래서 너를 좋아해.”
“…….”
“사과해 줘서 고마워.”
가볍게 힘을 주어 내 손을 맞잡곤 은겸이 천천히 손을 빼냈다. 바깥에서 손을 놓았을 때와는 다른 느낌이었다. 덜컥, 겁이 밀려 왔다. 조금 전까지 서로의 입장을 털어놓으면서 부드러워진 분위기에 안심했는데. 이제는 정말 끝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습관처럼 앞머리를 쓸어 넘긴 그가 말했다.
“나 이제 가 봐야겠다.”
가족의 결혼식이니만큼 오늘은 은겸에게도 중요한 날일 것이고, 내가 언제까지고 이런 곳에 은겸을 붙잡아 둘 수는 없었다. 머리로는 이해가 되는데도 몸이 통제되지 않았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가지 마.”
“원재야.”
“가지 마, 서은겸.”
이번에 놓치면 다시는 은겸을 만나지 못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꿈에서조차 찾아오지 않을 것 같았다. 나는 은겸에게 바짝 다가섰다.
“다시 시작하자.”
“……원재야.”
아이를 타이르듯 내 이름을 부른 은겸이 나직이 중얼거렸다.
“나한테는 연애가 안 맞는 것 같아.”
“서은겸.”
“다시 만나면 우리가 잘 지낼 수 있을까. 과연 예전처럼 사랑할 수 있을까. 어차피 또 헤어지게 되는 거 아닐까. 그런 걸 생각하면 너한테 집중할 자신이 없어.”
그의 입가에 희미한 웃음이 번졌다.
“나는 두려워.”
얼굴을 감싸 쥔 은겸이 천천히 고개를 숙였다. 여태 태연함을 가장했던 그의 여유가 무너지자 그 뒤에 숨어 있었던 약한 모습이 보였다. 예전처럼 나와 마주하고 대화를 나누기에는, 은겸에겐 상처를 추스를 시간이 부족했다.
지금도 그는 힘들어하고 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상처 입히고 싶지 않아. ……그리고 나도 상처 입기 싫어.”
“…….”
“우리 여기까지만 하자, 원재야. 또 같은 일이 생기면…… 나 못 버틸 거야. 꽤 오래 힘들었어. 이제야 좀 괜찮아졌는데. 다시 나락으로 떨어지고 싶지 않아.”
띄엄띄엄 내뱉는 은겸의 목소리에 괴로움이 묻어났다. 하아. 길게 숨을 내쉰 은겸의 어깨가 위아래로 크게 들썩였다.
“잘 지내.”
짧은 인사를 끝으로 은겸이 몸을 돌렸다.
멍하니 그의 등을 보았다. 한 걸음씩 내게서 멀어지는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웠던 내 세계의 일부분이 다시는 닿을 수 없는 곳으로 사라지고 있었다.
저절로 발이 움직였다. 저절로 팔이 튀어 나갔다. 은겸이 문 바깥으로 나서기 전, 나는 그를 뒤쫓아 팔을 붙들었다. 또 아픈 이유로 벽이 생기기 전, 그의 선 안에 발을 들이고 돌려세웠다.
“네가 필요해.”
이제 더는 내 사랑이 은겸에게 행복을 안겨 주지 못할 수도 있다. 더는 내가 은겸에게 큰 의미를 지닌 존재가 아닐지도 모른다. 옆에 있게 해 달라는 부탁이 내 이기심의 발로가 아니라곤 단정할 수 없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은겸을 놓을 수는 없었다. 두 번 다시 하염없이 누군가를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내 마음을 제대로 전하지 못하고, 오지도 않을 연락만 기다리고 싶지 않았다. 나는 말해야 했다. 돌아오지 않을 기회를 놓치지 않고 내 진심을 전해야 했다.
노란 눈에 번지는 난처함을 읽었지만,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연애가 어려우면 섹스 파트너라도 하자.”
“…….”
“내가 잘하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기분 좋게 해 주도록 노력할게. 어떻게 해서든 만족시킬게. 나 진짜로 잘할 수 있어.”
부디 기억하기를. 내가 하는 이야기가 무슨 의미인지 알아채 주기를. 정말로 섹스 파트너가 필요해서 하는 제안이 아님을 눈치채기를.
부디 내가 먼저 그를 붙잡았던 그날의 고백을 잊지 않았기를.
“나는 눈에 띄는 사람도 아니고, 대단한 능력을 가진 사람도 아니야. 올해도 진급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나는 나야. 그냥 평범한 곰이야. 남들한테 무시당할 때도 있고, 오해받을 때도 많아. 나 스스로 내가 한심해서 미칠 것 같은 때도 많아. 대체 왜 이러고 살까 답답할 때도 있어.”
내 입으로 말할수록 한심했다.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았다. 은겸의 손을 끌어다 가슴 위에 얹었다.
“그래도.”
움찔거리는 은겸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큰 손등에 내 손을 겹치고, 그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그래도 상관없어. 빛나지 않더라도 이게 달인 것처럼.”
나는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완벽하지 않더라도 나는 나잖아.”
빠르게 뛰는 심장이 은겸의 손 아래에서 쿵쿵 울렸다.
모든 건 은겸과 함께하며 깨달은 사실이었다. 연인에게 멋있는 모습만 보이고 싶었던 내게, 항상 좋은 면만 보이고 싶어 참아 왔던 내게, 은겸은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알려 주었다. 솔직한 내 모습을 보여도, 바닥까지 드러내도 나를 사랑할 거라는 믿음을 주었다.
그래서 나는 서은겸을 사랑했다.
은겸이 지닌 것들은 처음부터 내 취향이 아니었다. 나와는 다르게 모두의 이목을 사로잡는 화려한 외모와 재력, 신분. 나는 그런 걸 좋아한 게 아니었다. 나는 변함없는 은겸의 태도가 좋았다. 조심스럽게 만져 주는 손길이 좋았다. 처음부터 끝까지 나를 놓치지 않고 주시했던 시선이 좋았다. 언제나 다정하게 나를 감싸는 따스함이 좋았다.
언제나 눈부신 존재이면서도 은겸은 자신의 빛을 내게 비추지 않았다.
태양이 없으면 달은 빛날 수 없다. 달빛은 햇빛의 반사광일 뿐이니까. 하지만 은겸은 강렬한 빛을 내뿜어 나를 덮어씌우지 않았다. 자신에게 맞추라고 강요하지 않았다. 변하라고 요구하지도 않았다. 은겸은 내 힘으로 나를 존재하게 했다. 빛이 없는 달도 달이라고, 내가 나를 인정할 때까지 다독였다.
그래서, 나는 서은겸을 사랑했다.
내게 억지로 빛을 주지 않아서. 나를 억지로 반짝이게 만들지 않아서. 특별하지 않은 나도 사랑하면서 옆에 계속 있어 주어서.
“한 번만 더 기회를 줘. 이런 나라도 너를 사랑할 수 있어. 세상 누구보다도 많이 사랑할 수 있어.”
그러니 말해야만 했다. 이제는 나도 네게 맞추어 발을 옮기겠다고. 감당하지도 못하면서 네 불안을 모두 다 떠안겠다는 공허한 약속을 하지 않겠다고. 모든 게 다 괜찮아질 때까지 그저 조용히 옆에 있겠다고.
은겸이 내게 그랬던 것처럼.
또렷했던 시야가 다시 흐려졌다. 볼을 타고 흐른 눈물이 턱 끝에 매달렸다가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흐느낌을 억누르며 나는 마지막 말을 건넸다.
“언제까지라도 기다릴게.”
눈물로 끝난 고백을 은겸은 대답 없이 듣기만 했다. 아직도 불안한 것일까. 아직도 시간이 더 필요한 것일까. 불안함이 가시지 않았다. 곧 시선을 떨군 그가 고개를 내저었다.
손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이제는 정말 끝이었다. 아무것도 지닌 게 없는 나는, 진심을 고백하는 것 외에는 은겸을 붙잡을 길이 없었다. 나는 은겸의 팔을 놓고 뒤로 물러섰다. 오래 기다려 온 말을 모두 뱉어 낸 가슴속이 텅 빈 듯 허전했다.
은겸은 나를 따라오지 않았다. 나를 두고 나가는 그를 보고 싶지 않았다. 차라리 내가 먼저 가기 위해 걸음을 옮겼을 때였다. 내리깐 눈으로 바닥을 응시하던 은겸이 입을 떼었다.
입술 틈으로 흘러나온 것은 내게도 익숙한 말이었다.
“항상 알고 싶었어. 왜 나는 매번 이런 식인지. 사랑하는 사람한테 오래 사랑받는 방법이 대체 뭔지.”
굳었던 은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익숙한 눈웃음을 보이며 그가 물었다.
“계속 네 옆에 있으면, 알 수 있을까?”
더 참지 못하고 은겸의 목을 끌어안았다. 입술을 겹친 것과 동시에 은겸이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의 손에서 전해지는 가는 떨림을 느끼며 나는 눈물을 쏟았다.
***
은겸과 나는 결혼식에 가지 않았다.
화장실에서 나온 뒤 은겸은 나를 데리고 곧바로 호텔 프런트로 향했다. 방을 안내받는 짧은 순간에도 그는 초조해하며 나를 돌아보았다. 내가 옆에 있는 게 맞는지 확인하려는 듯했다. 우리의 사이가 깊어진 뒤로는 다시 볼 일이 없다고 여겼던 몸짓이었다.
은겸의 손을 붙들고 힘을 주었다. 가느다란 한숨과 함께 은겸이 내게 어깨를 기댔다. 가족에게서 연락이 오는지 그의 핸드폰이 계속 웅웅 진동했다. 아예 전원을 꺼 버리곤 은겸은 나와 함께 객실행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방에 들어가자마자 은겸은 리모컨을 찾아서 창문에 커튼을 쳤다. 나는 어두워진 방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불을 켠 은겸이 나를 돌아보았다. 방 안에는 우리 둘뿐인데도 그의 얼굴에서 불안이 가시지 않았다.
침대에 걸터앉아 옆자리를 두드렸다. 곧 다가온 은겸이 내 옆에 나란히 앉았다. 나는 그가 띄워 놓은 공간에 손을 내려놓았다. 예전 같았으면 바로 나를 끌어안고 눕혔을 텐데. 아직 좁히지 못한 마음의 거리가 겉으로도 드러난 듯했다.
몸짓 하나하나가 조심스럽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어떤 이야기도 꺼내지 못하고 나는 망설였다. 묵묵히 앉아 있던 은겸이 한참 만에 피식 웃었다.
“……너랑 침대 위에 앉아만 있으니까 어색하다.”
“그러게.”
은겸을 따라 나도 웃었다. 긴장으로 날이 섰던 분위기가 누그러지자 숨이 트였다.
한결 가벼워진 목소리로 은겸이 중얼거렸다.
“그랬지. 우리는 처음 만난 날부터 침대 위에서 뒹굴었으니까.”
“응.”
“그게 문제였나 봐. 내가 너무 서둘러서.”
내 손 위로 슬그머니 얹어지는 은겸의 손이 따뜻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너만 서두른 게 아니었잖아.”
은겸을 마음에 품게 된 뒤부터는 나도 똑같았다. 욕심을 부리면서 은겸을 재촉했다. 우리의 연애는 시작이 빨랐던 만큼 진행 속도도 너무 빨랐다. 오로지 사랑을 표현하면서 관계를 진전시키는 데에만 급급했다. 그 과정에서 오해하고, 싸우고, 화해하는 식의, 당연히 겪어 봐야 할 연인 간의 경험은 생략되었다.
그래서 우리는 장애물에 부딪히자마자 바닥을 굴러 버렸다. 서로의 손을 붙들고 발을 맞추어 천천히 걸어갔다면 그 정도는 피할 수 있었을 텐데. 설령 넘어졌다고 해도 금방 일어날 수 있었을 것이고.
“마음만 급했네. 너도, 나도.”
혼잣말처럼 중얼거리자 은겸이 귀를 옆으로 돌려세웠다. 예전보다는 짧아진 금빛 머리칼이 그의 이마 위로 흐트러졌다.
“지금이라도 다시 시작할까?”
“뭘.”
“자기소개부터.”
“……해 보든가.”
허락이 떨어지자 은겸이 까딱 고갯짓으로 인사를 보냈다. 그러더니 정말 할 줄은 몰랐던 자기소개를 늘어놓았다.
“안녕하세요, 김원재 씨. 서은겸이라고 합니다. 앙골라 사자 수인이고 올해 서른둘입니다. 이종성애자, 그중에서도 곰성애자고, 두 번 결혼했다가 이혼한 적이 있어요. 지금은 한 회사의 대표입니다.”
“……별로 매력적인 자기소개는 아닌 것 같은데.”
“그런가?”
키득키득 웃은 은겸이 눈을 빛냈다.
“나에 대해서 더 알고 싶은 거 있어요?”
나는 즉각 고개를 끄덕였다.
“나한테 말 안 하고 숨긴 거.”
“응?”
나는 손을 빼내어 은겸의 손등 위에 겹쳤다. 왼손 네 번째 손가락을 어루만지자 은겸이 흠칫 몸을 떨었다. 금세 굳어 버린 그의 표정이 딱딱했다. 내가 무슨 이야기를 꺼낼지 짐작한 듯했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주인호한테 네 과거를 들었을 때. 솔직히 진짜 충격이었어. 날 아직도 못 믿었구나 싶어서.”
“…….”
“그런 중요한 일을, 하필 그 자식한테 들었던 심정은……. 얘기 안 했을 줄 알았다면서 떠드는데……, 하.”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차던 주인호를 떠올리자 불쾌해졌다.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주인호가 아니니까, 기억을 억지로 밀어 넣고 나는 말을 이었다.
“나는 네 연인이잖아. 나한테 그 정도는 미리 알려 줬어야지. 그래야 나도 충분히 생각하고 조심할 거 아냐. 연애를 두려워하는 건 알아도, 그렇게 힘들어하는지는 몰랐어.”
어느새 조용해진 은겸이 안쓰러웠다. 나는 목에 힘을 주었다.
“그동안 얼마나 참으면서 내 옆에 머무른 건지도.”
단순히 나를 믿지 못한 은겸을 성토하려 꺼낸 이야기가 아니었다. 그보다 근본적인 문제를 짚고 싶었다.
만일 그날, 주인호가 나를 휘두르기 위해 계획적으로 은겸의 과거를 먼저 꺼냈다면 아주 현명한 선택을 한 것이었다. 은겸이 감췄던 비밀이 주인호의 입에서 흘러나온 순간부터 내게 주인호는 ‘나보다 은겸에 대해 잘 아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모르는 과거의 은겸을 보살핀 사람’이자 ‘가장 가까운 가족’이기도 했고. 그래서 나는 주인호가 뒤이어 묘사한 우리의 첫 만남을 그대로 믿을 수밖에 없었다.
은겸이 왜 과거를 덮었는지는 예상할 수 있다. 그는 결국 무서웠던 거였다. 내가 부담스러워하다가 떠날 것 같아서. 그래서 아픈 과거를 자신의 가장 큰 약점이라고 생각하고 묻어 뒀을 것이다. 그렇다고 아예 숨겨 버리면 나도 대비할 방도가 없는데. 만일 이번 일보다 더 큰 문제가 터졌다면, 그리고 은겸의 상처가 얼마나 깊은지 가늠하지 못한 내가 심각한 잘못을 저질렀더라면.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왔을지도 몰랐다.
끊임없이 관계를 진전시키려 했던 내 태도도 마찬가지였다. 은겸에게는 그러한 요구가 큰 부담으로 다가갔을 것이다. 그것도 모르고 나는 은겸의 손을 붙들고 무작정 앞으로 나아가면 된다고 생각했다. 일단 우리의 관계가 확고해지면 은겸도 내가 떠나지 않을 거라 믿고 괜찮아질 줄 알았다. 그러다 결정적인 순간에 손을 놓아 버린 셈이고.
두 번의 이별로 인한 망설임 정도로 여겼던 은겸의 행동은 실은 어마어마하게 큰 상처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은겸이 느끼는 고통은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범주를 넘어서 있었다. 내게는 열흘이면 충분했던 시간이, 그에게는 여덟 달이 넘도록 부족했을 만큼. 실은 지금까지도 ‘이별’에 대한 은겸의 두려움이 어느 정도인지 전부 이해할 수 없었다. 평범한 연애를 거쳤던 나로서는 그저 짐작할 수밖에.
“떠올리기 싫으면 자세히 말해 주지 않아도 돼. 내가 어떻게 주의하면 될지, 어떤 행동이 너를 힘들게 하는지 정도는 알고 싶다. 무조건 나를 따라오라며 끌고 가지 않을 테니까.”
입 안이 바짝 말라 말을 잇기 어려웠다. 어쩌면 이것조차 과도한 요구일지 몰랐다. 은겸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걸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래도 짚고 넘어가고 싶었다. 다시는 똑같은 잘못을 저질러 은겸을 상처 입히기 싫었다. 눈치껏 내가 조심하는 것보다는 확실한 대비가 필요했다.
“내가 지켜야 하는 선을 그어 줘.”
은겸은 한참 말이 없었다. 맞닿은 몸에서 전해지는 온기가 천천히 내게로 퍼졌다. 초조함을 삼키며 나는 그의 답을 기다렸다.
목소리가 조금 가라앉았지만, 은겸의 대답은 걱정했던 것보다는 긍정적이었다.
“그건 조금 더 시간을 줄래? 나중에 전부 말해 줄게. 지금은 정리가 필요해서.”
“응.”
“그러네. 그냥 내 문제라고 생각해서 넘어갔는데 우리 사이와도 관계가 있는 일이었지. 숨겨서 미안해.”
선선히 수긍한 은겸이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나는 고개를 기울여 머리를 그의 어깨에 기대었다. 무거웠던 가슴이 조금은 가벼워진 듯했다.
내 귀를 만지작거리던 은겸이 다시 물었다.
“다른 건? 또 바라는 게 있어?”
“……내가 너한테 많은 걸 바라도 될까.”
“왜 그렇게 소심해졌어.”
간지러운 숨결이 귓가를 스쳤다.
“네가 원하는 건 뭐든지 들어주고 싶은데.”
예전이었다면 설레기만 했을 달콤한 밀어가 이제는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나는 눈을 감았다.
”이런 식으로 나한테 너를 맞추지 않으면 좋겠어.“
부드럽게 귀를 쓸어내리던 손길이 멈추었다.
“나한테 너를 좀 더 드러내면 좋겠어. 귀찮다고 짜증도 내고, 화도 내고, 가끔은 싸우기도 하고, 말도 안 되는 일로 고집도 부리고. 힘든 날은 위로해 달라고 조르기도 하고.”
돌이켜보면 은겸은 언제나 완벽했다. 가끔 과거의 흔적을 드러내던 때를 제외하면 무엇 하나 흠잡을 데 없는 연인이었다. 그가 주는 전폭적인 애정에 빠져 있던 나는 마냥 행복한 연애를 즐겼다.
하지만 모든 것은 은겸의 노력에서 비롯되었다. 내가 은겸과의 관계에서 만족을 느끼는 사이, 은겸은 끊임없이 애쓰고 있었다. 언제 깨어질지 모르는 현재를 유지하기 위해서. 그의 텅 빈 마음을 채우겠다며 접근하는 나 때문에 도리어 두려워하면서.
“나한테 사랑받으려고 너무 노력하지 마.”
더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애쓰면 애쓸수록 불안만 키우는 노력은 허망할 따름이니까. 은겸이 내게 끊임없이 들려주었던 말을, 이제는 내가 되돌려 줄 차례였다.
나는 은겸의 손목을 붙잡고 아래로 끌어 내렸다. 그리고 허리를 틀어 그와 눈을 맞추었다.
“그러지 않아도 사랑해.”
굳어 있던 은겸의 표정이 서서히 부드러워졌다. 나는 그와 이마를 맞댔다.
“나밖에 모르는 사람이 되지 마.”
그리웠던 노란 눈이 나를 담았다. 자그맣게 비친 인영으로는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부디 은겸에게 신뢰를 줄 수 있기를. 완벽한 안도감을 당장 안겨 줄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지금 하는 말이 공허하게 들리지는 않기를. 간절히 바라며 말을 이었다.
“너도 잘 알잖아. 일방적인 희생은 오래가지 못한다는 거.”
두 번의 이별을 겪으며 자책했을 은겸은 나와의 연애에서 무조건적인 양보를 선택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연인에게 다정한 것과 스스로를 억누르는 헌신은 다른 차원의 일이다. 아무리 사랑이 크더라도 나는 내가 아닌 타인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다. 앞으로 또 은겸에게 상처를 낼 수도 있고, 그가 원하지 않는 일을 할 수도 있다. 그건 은겸 또한 마찬가지다. 우리가 서로에게 길게 남긴 상처는 앞으로도 흔적이 남을 것이다.
우리는 서로 다른 존재이기에, 우리를 둘러싼 테두리는 상대방에게 딱 들어맞는 모양이 아니기에. 양보하면서 비슷한 조각을 찾는 수밖에 없다. 자신을 갈아 내면서까지 전 부인들과 맞추려 했던 은겸의 모습을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무조건 참지 말고 버거워질 때 바로 이야기를 해 줘. 내가 잘못하고 있다고 화를 내고 지적해 줘. 나랑 오래 가려면 지치지 마.”
손을 올려 은겸의 뺨을 감쌌다. 예전보다 날카로워진 그의 턱을 어루만지면서 속삭였다.
“오래오래 옆에 있어.”
“……어떡하지.”
혼잣말을 중얼거린 은겸이 눈웃음을 지었다.
“더 반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는데. 볼 때마다 반하니까 싫어질 틈이 없네.”
“…….”
“이래서 안 만나려고 했는데. 만나면 또 반할 게 뻔하니까.”
그런 말은 덧붙이지 말라고 대꾸하려 할 때, 은겸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말캉한 입술이 뺨을, 코끝을, 입술을, 턱을, 귀를 가볍게 누르고 떨어졌다. 입술이 닿는 곳마다 따뜻한 온기가 퍼졌다. 발가락을 오므리며 나는 끝없이 이어지는 입맞춤을 받아들였다.
은겸은 배 속까지 간질간질해졌을 무렵 입술을 떼어 냈다. 어느새 가빠진 호흡을 고르며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는 너는.”
“응?”
“너는 나한테 바라는 거 없어?”
돌아온 대답은 꽤나 장난스러웠다.
“언제든 내 멱살을 잡아 주기.”
“……그게 뭔데.”
농담을 던질 타이밍이 아닐 텐데. 은겸을 빤히 보자 그가 어깨를 으쓱였다. 이리저리 눈을 굴리며 뜸을 들이던 은겸이 미간을 살짝 찡그렸다.
“이것도 사실 비밀이었는데……. 작년 추석 기억해? 우리 같이 지냈을 때. 그때 출장을 가면서 너를 포기하려고 했었어. 다녀오면 네 발정기가 끝날 거라고 짐작했거든.”
“뭐?”
“우리는 처음부터 몸뿐인 관계였으니까. 발정기가 끝난 이후에도 네가 나를 만나려 할 줄은 몰랐어. 아니, 만나려 한다면 더 힘들 것 같았고.”
“…….”
“일주일 가까이 함께 지냈잖아? 그 시간이 행복해서 더 불안해졌었거든. 괜히 시작했다고, 너를 아예 만나지 말았어야 했다고 후회했어. 너무 좋아서. 네가 너무 좋아서. 더 오래 지내면 진짜로 이 사람한테 걷잡을 수 없이 빠지겠구나, 못 놓게 되겠구나, 싶었어.”
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출장 기간 내내 은겸이 점심 메뉴만 물어보고, 내 발정기가 끝났다는 사실을 알자 냉정할 정도로 태도를 바꾸었던 이유도 결국 그거였다. 내가 떠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차라리 섹스 파트너로서 깔끔하게 끝내는 게 낫겠다 싶었어. 그러면 우리가 헤어진 뒤에도 버티기 쉬울 것 같았고. 그랬는데 출장에서 돌아온 날, 네가 내 멱살을 붙들었지.”
벌써 1년 전이 된 그날을 회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오늘과 겹치는 면이 있었으니까. 우리 관계를 깨끗하게 포기하려 한 은겸과, 그를 붙든 나. 은겸도 바로 그 점을 떠올린 듯했다.
“처음 만난 날에도. 그때도. 오늘도. 내가 너를 놓으려 할 때면 네가 달려와서 붙잡았어.”
쪽, 입술을 맞댄 그가 속삭였다.
“그거면 돼.”
소박하지만, 은겸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중요할 부탁이 잔잔한 미소와 함께 흘러나왔다.
“옆에 있어. 내가 손을 놓으려 할 때는 다가와서 붙잡아 줘.”
“…….”
“그리고 사랑한다고 해 줘.”
어려울 것 없는 부탁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원하던 대로 멱살을 잡아 줄까 잠깐 고민하다가, 어깨에 팔을 두르는 것으로 변경했다. 그러곤 코끝을 비비며 말했다.
“사랑해.”
“나를 사랑해?”
“사랑하지 않으면 기다리지도 않았어.”
“나를 사랑해?”
“……응.”
한 번으로는 만족하지 못한 듯, 은겸은 재차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랑해.”
“힘들지 않아?”
“힘들어. 연애가 이렇게 골치 아픈 건 줄 몰랐어.”
솔직한 대답에 은겸의 미소가 더욱 진해졌다. 그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며 나는 덧붙였다.
“그래도 후회는 안 해.”
만족한 듯 은겸이 내 등을 쓸어내렸다. 그의 손가락이 꼬리털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짤막하고 둥근 꼬리를 몇 번이고 움켜쥐는 손길이 간지러웠다. 팔을 뒤로 돌려 손을 떼어 내곤 나는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댔다. 나를 따라 자리를 잡은 은겸이 내 다리를 들어 자신의 허벅지 위에 얹었다. 갑갑한 재킷을 벗어 침대 아래로 내던지자 은겸의 시선이 옷을 따라갔다.
“새로 산 거 아니었어?”
“너한테 보여 주려고 산 거니까…….”
이제는 구겨지든 말든 상관없다는 말은 은겸의 입술 안으로 먹혀들었다. 오랜만에 몸을 바짝 맞대고 하는 키스가 기분 좋았다. 은겸을 끌어안으며 나는 눈을 감았다.
입술을 겹치는 동안 하나하나 셔츠의 단추가 풀려 나갔다. 조심스럽게 나를 어루만지는 은겸에게 몸을 맡기고 한숨을 흘렸다. 맨살에 닿는 은겸의 손은 이미 뜨거웠다. 하필 지금이 발정기가 아니라는 점이 아쉬웠다. 기껏 재회해서 조금도 놓치기 싫은 시간을 보내려는데 제대로 몸을 섞을 수 없다니.
지금이라도 병원에 가는 게 어떠냐고 은겸에게 제안하려 할 때였다.
가슴골에 은겸의 입술이 닿은 순간, 배 속이 묵직하게 가라앉았다. 빠르게 뛰기 시작한 심장이 귀를 쿵쿵 울렸다. 단순한 설렘 때문이 아니었다. 사방에 맴돌기 시작한 은겸의 체향을 맡을수록 열기가 뚜렷해졌다. 10월에 이런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는데. 숨이 차고 더웠다.
한 번 식었던 발정기가 다시 시작되었던 그때처럼. 몸이 뜨거워지고 있었다.
나는 침착하게 은겸을 올려다보았다. 은겸도 내 변화를 눈치챈 듯했다. 조금 커진 눈으로 나를 내려다본 그가 꼬리를 옆으로 휘둘렀다.
“설마 촉진제 먹고 왔어?”
“……그럴 리가 없잖아.”
남의 결혼식에 오는 데다, 은겸을 만날 수 있을지도 알 수 없었는데 그런 걸 준비할 정신은 없었다. 은겸의 다리 사이를 응시하며 나는 대꾸했다.
“너랑 하고 싶어서 그래.”
은겸은 더 망설이지 않고 곧장 나를 밀어붙였다. 양 손목을 붙들고 밀어 올린 그가 아랫입술을 핥았다. 동시에 다른 손이 정강이를 타고 내려갔다. 발목을 지분거리는 은겸의 손이 은근했다.
예민해진 감각을 반기며 나는 눈을 감았다. 다시 내려앉는 은겸의 입술이 조금 전보다 끈적했다. 젖은 소리를 내며 살갗을 빨아올리는 그를 따라 나도 흠칫흠칫 몸을 떨었다. 심장 부근에서부터 시작된 열기가 전신으로 퍼져 나갔다.
고조되는 흥분이 중심으로 몰려들었을 즈음, 나는 이미 은겸의 옷을 정신없이 벗기고 있었다.
“많이 참았어?”
“흐읏, 응.”
“여름은 어떻게 보냈어.”
“미치는 줄, 알았, 하아, 으.”
“미안해.”
고개를 숙인 은겸이 목덜미에 코를 묻었다.
“힘들었을 텐데. 옆에 있어 주지 않아서 미안해.”
“미안하면.”
그의 넓은 등을 그러안으며 나는 뜨거운 숨을 토했다.
“그만큼 많이 안아.”
***
눈을 떴을 때 옆자리부터 확인했다. 곤히 잠들어 있는 은겸을 보고서도 믿기지 않아서 손을 내밀었다. 말간 뺨을 손끝으로 만지자 은겸이 눈썹을 움찔거렸다. 꿈이 아니었구나. 바짝 긴장했던 손끝에서 힘이 풀렸다. 나는 도로 침대에 누우며 안도했다. 나른하게 늘어지는 전신이 만족스러웠다.
이불을 끌어 올리고 은겸의 집도, 내 집도 아닌 방의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푹신푹신한 침대가 마음에 들었다. 앞으로 기념일 같은 특별한 날에는 호텔에서 하룻밤 보내고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아니, 아예 집에다 호텔 침구를 구비해 두자고 할까.
“……하.”
흐르는 실소를 참을 수 없었다. 재회한 지 하루 만에 또 이러다니. 내 마음대로 은겸과 함께 살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의 의사도 묻지 않은 채로. 사람은 참 쉽게 바뀌지 않는구나.
그래도 조금씩 변하면 되겠지. 노력하면 되겠지. 지금 당장 다른 사람이 되지 못하더라도. 천천히 은겸과 앞으로 나아가면 되는 거니까. 우선은 집에 돌아가서 이삿짐 상자부터 푸는 것부터 시작해야 했다. 오래된 짐을 정리하려면 시간이 필요할 듯했다.
은겸과 나 사이의 벽을 다시 허물어 나가는 데에도.
나는 잠든 은겸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눈을 뜨면 웃는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았던 그처럼, 그가 깨어나면 미소 짓는 나를 발견하기를 바라며. 보고 싶었던 그를 눈으로 훑으며 마음속에 묻어 둔 이야기를 소리 없이 털어놓았다.
은겸이 없는 동안 나는 달을 그렸다. 불분명한 흔적을 더듬으며 지난 시간을 곱씹었다. 이전처럼 빛나지 않는 위성의 조각난 테두리를 되짚었다.
나는 수많은 달을 그렸다. 은겸이 내 가슴에 덧그렸던 달을 그렸다. 그와 함께 만들었던 달을 그렸다.
그리고 내가 그린 달을 따라 입 맞추는 은겸을 그렸다.
나는 은겸을 그렸다. 그리운 그를 그리고 또 그렸다.
나는 그를 그리워했다.
은겸을 만나지 못했던 때부터, 은겸과 함께했던 모든 순간, 그리고 그가 나를 떠났던 긴 시간마저.
은겸은 흔하디흔한, 미련한, 멍청한 반달가슴곰에 지나지 않던 나를 세상 누구보다도 특별한 존재로 만들어 주었다. 곰이고 싶지 않았던 내게 곰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행복을 알려 주었다. 내가 곰이라서, 동시에 나라서 사랑스럽다고 언제나 속삭여 주었다. 타인의 눈에 어떻게 비치더라도 나는 곰인 동시에 나라고. 두 가지 사실은 떼어 놓을 수 없는 거라고.
이제 그에게 내 우주를 안겨 주고 싶다. 또 다시 나를 잃을까 봐 두려워하는 다정한 연인에게 끝을 상정하고 시작하지 않아도 되는 관계가 있다는 것을 알려 주고 싶다.
내가 은겸을 사랑하면 그는 행복해질까. 대답은 ‘그렇다’일 수도, ‘아니다’일 수도 있다. 나를 잃을 두려움을 극복하지 못한 은겸에게 내 사랑은 다가올 괴로움의 전조에 지나지 않을 테니까.
지금까지 나는 은겸을 내가 끌어 올릴 수 있다고 여겼다. 너무나도 가볍게 내가 그를 영원히 지탱할 수 있을 거라 믿었다. 하지만 나 자신조차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는, 그와 마찬가지로 미완의 존재인 나는 누군가의 구원자가 될 수 없었다. 내가 할 일은 그게 아니었다. 나는 기다려야 했다. 내 사랑이 그에게 온전한 행복으로 다가갈 때까지 옆에서 그저 기다려야 했다. 오래 기다릴 수 있도록 나부터 단단해져야 했다.
나는 그를 구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의 유일한 버팀목이 되지도 않을 것이다. 나는 그가 내게만 매달리지 않도록, 오롯이 그로서 존재할 수 있도록 옆자리를 지키고, 그의 상처를 묵묵히 돌볼 것이다.
은겸이 내게 그러하듯이. 아직 하나가 되지 못한 이들이 그러하듯이.
마침내 자신의 발로 일어서서 달을 찾아내는 모든 사람들이 그러하듯이.
나는 달을 그린다.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있었지만, 지금껏 한 번도 눈부신 적 없던 달을.
네가 되찾아 준 내 달을.
《곰은 달을 그린다》 마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