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곰은 꿈을 거닌다
은겸의 차는 지하 주차장 입구에 있었다. 함께 내려온 동료에게 인사를 건네고 나는 은겸의 차로 다가갔다. 조수석의 문을 열자 은겸이 코를 찡긋거리며 웃었다.
“어서 와.”
주변을 의식한 듯 짧은 인사말 외에는 어떤 스킨십도 건너오지 않았다. 우리 쪽을 힐끔거리면서 지나가는 동료의 시선을 피하며 나는 안전벨트를 맸다. 차가 주차장을 빠져나가고 나서야 은겸이 다시 입을 열었다.
“오늘도 수고 많았어.”
“너도.”
은겸이 퇴근 시간에 맞춰서 나를 데리러 오기 시작한 지도 벌써 일주일이 넘었다. 회식 다음 날, 숙취 때문에 힘들어하는 나를 버스에 태울 수 없다며 출퇴근을 도운 이후로 계속 이어지는 일이었다. 야근 때문에 늦을 거라고 거절해도, 바쁘게 일한 날일수록 더욱 편안하게 퇴근해야 덜 지치지 않냐며 은겸은 고집을 부렸다.
동료들과 마주치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던 나도 몇 번 은겸을 들키고 난 뒤로는 덤덤해졌다. 이상하게도 회사 사람들 중 누구도 은겸이 나와 무슨 사이인지 묻지 않았다. 그 이유는 효영이 알려 주었다.
“기억 안 나? 너 회식 때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그 사자분이랑 키스했잖아.”
“내가 그런 미친 짓을 했다고?”
“그래. 차라리 기억 못 하는 게 나아.”
효영의 귀띔으로는 ‘연애에 관심 없어 보이던 기획팀 김원재 씨도 애인에게는 굉장히 과감한 사람’이라고 사내에 여기저기 소문이 퍼진 듯했다. 어쩐지 그날 이후 다른 팀 사람들이 나를 보며 의미심장한 표정을 짓더라니. 잠시 퇴사를 고민해 보았지만 포기했다. 뒤늦게 도망쳐도 그게 무슨 의미가 있겠나 싶었다.
며칠 만에 정시 퇴근을 한 탓에 도로 위는 혼잡했다. 빽빽이 늘어선 차들의 줄이 차창 너머를 메웠다. 신호가 붉은빛으로 바뀌자 은겸이 나를 돌아보았다.
“점심은 뭐 먹었어?”
“삶은 계란하고 고구마.”
“그게 뭐야. 다이어트해?”
나는 군소리 없이 재킷을 벗었다. 은겸이 숨을 들이마셨다.
“유혹하는 건 반가운데 장소가 좀…….”
“그게 아니라.”
팽팽하게 당겨진 셔츠 앞판을 가리키며 나는 한숨을 쉬었다.
“저녁 먹으러 다니다가 살찐 거 같아.”
그냥 하는 농담이 아니었다. 정말로 몸무게가 늘었다.
요즘 들어 몸이 무겁고 둔해졌다는 느낌은 있었지만, 옷이 작아지자 비로소 심각성을 깨달았다. 봄까지만 해도 딱 맞았던 셔츠의 가슴 부분이 너무 조여서 갑갑했다. 어깨를 쭉 펴면 단추가 떨어져 나갈 것 같았다. 예전에는 그나마 은겸과 몸을 섞었는데 이제는 그럴 일도 없으니 운동량이 부족해진 듯했다.
은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별로 티 안 나는데? 그리고 원래 곰은 이맘때쯤 살찌잖아.”
곰성애자다운 지식이었다.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매년 가을부터 겨울까지 5킬로그램 정도 체중이 느는 건 예삿일이었다. 지금은 사라진 ‘곰’, 그러니까 곰 수인들의 선조인 동물이 동면을 위해 살을 찌웠던 시기이기 때문이었다. 가을에 찐 살은 겨울을 나고 봄을 맞이하면 신기하게도 전부 빠졌다. 봄에는 조금 초췌할 정도로 살이 내리는 편이었다.
하지만 올해는 몸이 변하는 속도가 빨랐다. 아직 10월이 끝나지 않았건만 벌써 3킬로그램이나 늘었다. 11월 말까지는 계속 살이 찔 텐데, 이러다 문제가 생길 게 뻔했다.
“그래도 신경 쓰여. 당분간 저녁은 거르려고. 배고프면 너만 먹든가.”
선택권을 떠넘기자 은겸이 볼을 긁적였다.
“나 사실 저녁은 잘 안 먹어. 적당히 관리해야지. 내가 무거워지면 네가 힘들잖아.”
“내가 왜 힘들……, 아니. 됐다. 그러면서 왜 매번 저녁 먹으러 가자고 해.”
“원재 너하고 같이 밥 먹고 싶어서.”
“…….”
“너 밥 먹는 것만 봐도 나는 배불러.”
하긴. 같이 식사를 할 때면 은겸은 자신의 몫을 먹기보다 내가 먹는 모습을 흐뭇한 얼굴로 보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쏟았다. 사자치고는 소식하는 편이기도 했고. 그래도 퇴근 후에 운전기사 노릇까지 해 주는데, 나 때문에 굶으라고 하기는 미안했다. 오늘 하루만 저녁을 먹을까. 고민하는 나를 은겸이 힐끗거렸다.
“신경 쓰이면 내가 좀 봐 줄까?”
“뭘.”
“살이 얼마나 붙었는지 확인할게. 구석구석.”
“무슨……. 손 떼, 서은겸.”
핸들을 놓은 은겸이 내게 손을 뻗었다. 그러고는 어깨며 가슴을 주물럭거렸다. 슬금슬금 내려간 손이 배꼽 위에 얹힌 순간, 나는 은겸의 손등을 사정없이 때렸다. 기어코 내 허벅다리까지 주무른 뒤에야 은겸은 손을 치웠다.
“에이, 살찐 건 아니네. 그냥 가슴만 커졌어. 걱정하지 마. 군살 없이 탱탱해서 딱 좋아. 내가 얼마나 너를 많이 만졌는데 그것도 모를 리가 없잖아.”
“알았으니까 그만해.”
“가슴은 계속 만져 주면 커진다는 소리도 있고.”
“말도 안 되는 소리 그만하라고.”
초록색으로 변한 신호를 가리키면서 나는 으르렁거렸다. 싱글거리며 은겸이 차를 출발시켰다.
“왜 그렇게 웃어.”
“말해도 돼?”
룸미러에 비친 은겸의 눈은 둥글게 휘어 있었다. 동시에 차 안에 은은한 향이 퍼졌다. 체향만으로도 무슨 의미인지 감이 잡혔다. 참으로 은겸다운 답변이었다.
이어진 말 역시 예상에서 크게 어긋나지 않았다.
“다이어트할 거면 미리 말하지. 키스도 칼로리가 꽤 소모된대. 나랑 그걸로 다이어트하자.”
“됐어. 그냥 주말에 다시 수영 다니려고.”
“나도 같이 갈까?”
“물 싫어한다며.”
“그건 그렇지만 주말 정도는 같이 보내고 싶어서. 그리고 수영장에서는 마음껏 볼 수 있으니까.”
“……뭘?”
“네 몸.”
한 번이라도 점잖은 척을 하면 안 될까. 나는 고개를 내젓고 팔짱을 질렀다. 양 팔뚝으로 가슴을 원천봉쇄하자 은겸의 웃음이 더 커졌다.
“그러고 있으면 가슴 근육이 모여서 더 커 보이는 건 알지?”
“……옷 속까지 투시하는 것처럼 말하지 마.”
“필사적으로 버티는 단추가 불쌍해서 그래.”
내가 졌다. 패배를 인정하고 재킷을 여며 가슴을 덮어 버렸다. 아쉬운 듯 혀를 찬 은겸이 전방을 주시했다.
“샤부샤부 먹으려고 하는데, 괜찮아?”
“응.”
“오늘까지만 먹고 내일부터 다이어트하자.”
미리 보고 온 식당이 있는지 은겸은 검색 없이 차를 몰았다. 도로 위의 정체가 풀리자 음식점까지는 금방이었다. 은겸이 운전에 집중하는 동안 나는 그가 한 말을 곱씹었다. 진지하게 받아들여도 되는지 모를 이야기가 자꾸 머릿속에 맴돌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헛소리였다.
뭐, 그래도 한 번 정도 시험해 볼 가치는 있을 듯했다.
주차장에 차를 세운 은겸이 시동을 껐을 때, 나는 은겸의 넥타이를 쥐고 끌어당겼다. 입술을 겹치자 놀란 듯 커졌던 은겸의 눈이 도로 가늘어졌다. 곧 내 뒷덜미를 단단히 붙든 은겸이 본격적으로 혀를 얽었다. 이제는 익숙해진, 까끌거리는 혀를 휘감으며 나는 낮게 신음했다.
얼마 안 가 차 안의 공기가 갑갑해질 정도로 은겸의 흥분이 고조되었다. 나는 손을 내밀어 은겸의 어깨를 가볍게 밀쳤다. 아쉬움이 뚝뚝 흐르는 얼굴로 은겸이 나를 보았다.
“그만하게?”
“다이어트하자며. 식전 운동이야.”
“…….”
“내려. 저녁 먹어야지.”
답을 기다리지 않고 나는 차에서 내렸다. 연하게 선팅된 차창 너머로 핸들 위로 엎드린 은겸이 보였다. 너무 자극했나. 기웃거리다가 먼저 음식점으로 향했다.
자리에 앉아 메뉴판을 살펴보니 왜 은겸이 이 식당을 골랐는지 알 수 있었다. 다양한 식성을 고려한 것인지 오리고기와 해산물이 함께 제공되는 모듬 메뉴가 따로 있었다. 뒤늦게 식당으로 들어온 은겸에게 의견을 묻고 메뉴를 주문했다. 곧 직원이 와서 테이블 위를 빠르게 세팅해 주었다.
식사량을 조절하려던 마음은 샤부샤부 냄비에 퐁당 빠져 녹아 버렸다. 점심을 적게 먹은 탓인지 허기가 졌다. 나는 고기를 전부 은겸에게 양보하고, 채소와 해산물을 열심히 건져 먹었다.
나와는 달리 은겸은 입맛이 없는 듯했다. 고기를 몇 점 건져 먹다 말고 젓가락을 놓더니 한숨을 푹 쉬었다. 시선으로 묻자 은겸이 컵에 든 물을 홀짝 마셨다.
“힘들다.”
“뭐가.”
“널 안고 싶어서.”
“…….”
“이해해 줘. 나 오래 참은 거 알잖아.”
“내 발정기 끝난 지 한 달밖에 안 됐어.”
“1년은 된 것 같은데.”
“거짓말하지 마.”
“진심이야.”
아예 저녁을 먹을 생각이 사라졌는지 은겸이 식탁에 팔꿈치를 괴었다.
“만날 때마다 섹스했던 기억이 사라지질 않나 봐. 너만 보면 몸이 반응해.”
“……내년 6월까지만 참아.”
“끔찍하다. 왜 지금은 10월일까. 원재야.”
귀를 뒤로 젖힌 은겸이 푸념을 늘어놓았다. 과장된 신세 한탄이 어이없었지만, 그냥 내버려 두기 뭐했다. 나는 오리고기를 집어 냄비 안에 집어넣었다.
“꼭 내 발정기를 기다릴 필요는 없잖아.”
“너 아닌 다른 사람하고 안 한다니까.”
“그게 아니라.”
뜨거운 육수 속에서 휘휘 젓자 고기의 핏기가 사라졌다. 잘 익은 고기를 꺼내 은겸의 접시 위에 내려놓고 나는 그를 바라보았다.
“내가 못 느끼는 게 싫어서 참는 거면, 삽입만 안 하면 되잖아.”
“…….”
“손이나 입으로 해 줄게.”
“원재야.”
“턱 안 빠지게 조심할게. 나도 하고 싶어서 그래. 그러니까 얼른 먹어.”
“왜 그렇게 상냥해?”
“상냥한 게 아니라…….”
내버려 두면 더 귀찮아질 것 같으니까 먼저 양보하는 거지. 끝까지 대답하지 않고 나는 턱짓을 했다.
“고기나 먹어.”
은겸의 노란 눈이 반짝 빛났다. 젓가락을 집은 그가 씩 웃었다.
“그럼 약속이다. 손이나 입으로 해 주기.”
“……응.”
햇빛을 닮은 머리칼 위로 은겸의 둥근 두 귀가 흔들렸다. 배추를 집으며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어쩐지 당한 기분이었다.
내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식당을 나서자마자 은겸은 식후 운동을 해야겠다며 나를 벽에 밀치고 달라붙었다. 집에 가서, 아니면 최소한 차 안에서 하자며 밀어내도 막무가내로 목덜미를 잘근잘근 깨물어 댔다. 나는 아무리 밀어도 절대 밀리지 않는 단단한 어깨에 손톱을 세웠다.
“사람들, 본, 흡, 사람들.”
“보라고 해.”
“내가 싫, 윽, 아파.”
“응. 소리 더 내.”
이런 데서 발정하지 말라고 화를 내기에는 차에서 도발한 내 잘못이 컸다. 제대로 흥분했는지 은겸은 무서운 기세로 끈적한 체향을 내뿜었다. 아래에 닿는 은겸의 것도 점차 단단해지기 시작했다. 이러다가는 정신을 못 차리고 사고라도 치지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어쩔 수 없었다. 무릎으로 중심을 찍기 위해 다리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은겸의 이성을 돌려놓은 것은 내가 아니었다.
“은겸 형?”
당황한 목소리가 은겸을 불렀다. 나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은겸의 등 뒤에 키 큰 남자가 서 있었다. 뒤를 돌아본 은겸의 팔에서 힘이 풀렸다. 나를 품에서 놓아준 그가 방해꾼을 보며 미소 지었다.
“아, 인호야.”
뜨거웠던 머릿속이 차갑게 식었다. 언제나 당당하고 건방진 태도를 유지하는 호랑이. 그리고 내 눈앞에서 정운이를 채 가서 끝내 놓아주지 않은 정운이의 애인. 주인호가 우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미묘한 표정으로 주인호가 물었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뭐긴. 데이트지.”
태연하게 받아친 은겸이 입꼬리를 올렸다.
잠시 비었던 머릿속에 두 사람의 대화가 박혀 들었다. 은겸은 주인호와 친분이 있는 것 같았다. 단순히 이름만 아는 게 아니라, 이런 상황에서도 반가워할 정도로 가까운 사이. 나는 따끔거리는 목덜미를 손으로 쓸었다.
“데이트? 형하고 저 사람이? 왜?”
은겸과는 다른 느낌의 노란 눈이 나를 주시했다. 당혹감이 가시자 불쾌함이 몰려왔다. 왜 하필 이 상황에, 그리고 왜 하필 저 건방진 호랑이일까. 다른 누가 방해했어도 찜찜했을 텐데, 또 주인호였다.
그제야 나를 돌아본 은겸이 내 어깨를 감쌌다.
“아, 미안. 내 동생이야. 그리고 이쪽은…….”
“설명 안 해도 돼.”
말허리를 자른 주인호가 인상을 찡그렸다. 저 새끼가. 나는 은겸의 손을 뿌리치고 주인호를 노려보았다. 점차 사나워지는 눈빛을 주체할 수 없었다.
고개를 갸웃거린 은겸이 다시 주인호에게 시선을 돌렸다. 할 말이 많은 얼굴로 쳐다보던 주인호가 떨떠름하게 답했다.
“대학 다닐 때 같은 동아리였어.”
“뭐?”
“동아리 선배라고.”
놀란 듯 은겸이 눈썹을 치켜세웠다. 신입생 환영회 이후 동아리 활동을 거의 하지 않았고 나를 선배로 대하지도 않은 놈이 꺼낸 호칭이 거슬렸다. 아무 사이 아니라고 정정하기 위해 나는 입술을 뗐다. 그 순간, 주인호가 재빠르게 선수를 쳤다.
“형, 나 약속 늦겠다. 먼저 가 볼게.”
대답을 듣는 둥 마는 둥 주인호는 빠르게 사라졌다. 내게는 인사조차 없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인사를 건넸더라도 내가 먼저 무시했을 테니까. 멀어지는 호랑이의 뒷모습을 보며 은겸이 중얼거렸다.
“왜 저러지?”
은겸에게는 미안하게도 그의 의문을 풀어 줄 여유가 없었다. 나는 은겸의 팔을 붙들고 내 쪽으로 돌려세웠다.
“설명해.”
“뭘?”
“주인호가 어떻게 네 동생이 돼. 호랑이잖아.”
날 선 반응을 보이지 않도록 감정을 억눌렀지만 참기 힘들었다. 무뚝뚝하게 튀어나온 질문에도 은겸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피가 섞인 동생은 아니야. 아버지가 재혼한 분의 아들이니까.”
“…….”
“전에 말했지? 다른 종이랑 결혼하려고 프라이드를 나간 아버지가 있다고. 재혼하신 분이 호랑이였고, 인호는 그분 아들. 법적으로는 아무것도 아닌 사이지만 형 동생 하면서 지내.”
단순한 우연으로 치부하기에는 너무나 기막힌 소리였다. 그 자식과 이런 식으로 얽힐 줄이야. 다시는 내 인생에 끼어들 일이 없으리라 생각했던 놈인데.
‘왜 하필 하고많은 호랑이 중에서 주인호냐고.’
나는 은겸을 붙든 팔에 힘을 주었다. 악문 잇새로 으르렁거리는 목소리가 새어 나갔다.
“서은겸. 똑바로 말해. 주인호한테 내 얘기 들은 거 없어?”
“응?”
“나에 대해 몰랐던 거 맞냐고.”
아무리 생각해도 이건 정당한 추궁이었다. 은겸은 가족의 이야기를 털어놓으면서도 전 아버지의 재혼 상대가 호랑이라는 점은 말하지 않았다. 촉진제를 받으러 간다는 동생의 연인도 ‘발정기가 정해지지 않은 초식종’이란 표현이 다였다. 만약 은겸의 동생이 토끼와 교제하는 호랑이임을 알았다면, 나도 한 번쯤은 의심해 보았을 것이다. 혹시 그 호랑이가 주인호는 아닐까 하고.
설마 은겸이 일부러 숨겼던 건 아닐까.
“아, 나한테 네 험담 했을까 봐 그래?”
내 안에서 소용돌이치는 불안과 분노를 감지하지 못했는지, 은겸은 빙긋 웃었다.
“걱정하지 마. 지인 중에 곰이 있다는 얘기도 들은 적 없어.”
지인이라고 할 것도 없는 관계라고 설명하자니 치가 떨렸다. 은겸의 팔을 놓고 나는 몸을 돌렸다. 주차장 쪽으로 걸음을 옮기자 은겸이 서둘러 나를 쫓아왔다.
“둘이 싸웠어? 왜 그래?”
왜 그러냐고?
은겸에게는 죄가 없으니 이러면 안 되는 일이었다. 머리로는 알아도 자꾸만 난폭한 대꾸가 튀어나오려 했다. 은겸을 돌아보며 나는 씹어뱉듯이 답했다.
“주인호 애인이 정운이야.”
“네가 기다렸던 그 토끼?”
“그래.”
욕지거리를 씹어 삼키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진짜 몰랐어?”
은겸은 잠시 침묵을 지키면서 한 박자 뜸을 들였다. 어렵게 꺼낸 답도 명확하지 않은 뉘앙스였다.
“인호 애인이 토끼인 건 알았는데…….”
“토끼인 줄은 알았는데, 정운이인 건 몰랐다고?”
“성인이 되자마자 바로 독립한 애야. 인호가 대학교에 들어간 이후에는 만날 일이 그렇게 많지 않았어.”
“친하다며. 촉진제까지 받아다 준다며.”
은겸이 고개를 저었다
“인호는 나한테 애인 얘기를 별로 안 해. 차마 못 하겠지.”
“…….”
“연애는 사생활이잖아. 나도 묻지 않았어.”
나는 비어 있는 은겸의 왼손을 바라보았다. 그래도 자기 가족 앞에서는 알량한 배려심을 갖추었나 보네.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몸을 돌려 도로 주차장으로 향했다. 옆에 나란히 선 은겸이 나와 보폭을 맞추었다.
“정 믿기 어려우면 인호 불러올까?”
“됐어.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아.”
호랑이는 사자와 달리 독립적이니 은겸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다. 법적으로 남남인 동생의 애인 이름까지 외우는 사람이 그리 흔치는 않겠지. 그렇게 믿어야 했다. 아니, 믿고 싶었다. 모든 것은 우연일 뿐이며 은겸과 주인호 사이에 내가 모르는 무언가가 존재하지는 않는다고. 서은겸이 나를 속일 리가 없다고.
“그 정도로 싫어? 인호가 그렇게 나쁜 애는 아닌데.”
은겸의 심정도 복잡할 터였다. 갑자기 나타난 동생과 내가 아는 사이로 밝혀진 데다, 내가 대놓고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니까.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주인호는 형인 은겸에게 괜찮은 동생일지 몰라도 내게는 절대 좋은 놈이 아니었다.
“그 새끼 때문에 6년을 기다렸어.”
정운이는 자신에게 고백하는 사람을 누구나 받아주는 남자였다. 워낙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았기에 대부분 3개월을 넘기지 않는 연애였지만, 그래도 모두에게 공평하게 기회를 주었다. 그랬던 정운이가 어느 날부턴가 눈에 띄게 호감을 나타내며 내게 다가왔다. 그래서 나도 마음을 전할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주인호가 나타난 건 그 시점이었다. 나와 정운이의 사이에 갑자기 끼어들어 내 고백을 방해하더니 곧장 정운이를 낚아챘다. 만일 그날 주인호가 나타나지 않았더라면, 정운이와 나는 연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래도 기다릴 수 있었다. 예전처럼 3개월만 지나면 정운이가 주인호를 차 버릴 것이라고 믿었다. 기다려 달라는 정운이의 말을 믿은 이유도 그래서였다. 하지만 인내의 시간은 속절없이 길었다. 두 사람이 맺어진 이후 나는 몇 년간 정운이를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 이유는 나중에 예주에게 들었다. 정운이와 내가 만나지 못하게 주인호가 원천 봉쇄한 탓이었다. 어찌나 잘 피해 다녔는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정운이는커녕 주인호와도 교내에서조차 마주친 적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오랫동안 곁을 맴돌며 바라만 보았던 정운이에게 제대로 고백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그 망할 호랑이 때문에.
“나는 그 자식 평생 용서 못 해.”
착잡한 표정으로 은겸이 입을 다물었다.
한번 깨진 분위기는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차에 함께 탄 뒤에도 은겸은 말없이 운전에 집중했다. 나는 묵묵히 창밖만 내다보았다. 어두워진 바깥 풍경이 우중충했다.
막 저녁을 먹고 나왔을 때만 해도 괜찮았는데. 이게 다 뭘까.
맛있게 먹었던 낙지가 빨판을 세워 달라붙은 듯 속이 갑갑했다. 셔츠 단추를 하나 풀며 한숨을 쉬었다. 룸미러로 나를 힐끗 확인한 은겸이 창문을 내렸다. 싸늘한 바깥 공기가 스며들자 조금 가슴이 트였다. 나는 의자에 몸을 기대면서 눈을 감았다. 딱히 한 것도 없는데 피로감이 몰려들었다.
은겸이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집에 들렀다 갈 거지?”
“그냥 갈게.”
“미안.”
“네가 미안할 게 뭐 있어. 일부러 주인호를 데려온 것도 아니고.”
“그거야 그렇지만. 오늘 일은 그냥 내가 다 미안해. 얼른 데려다줄 테니까 가서 쉬어.”
자기 탓이 아닌데도 자책하는 은겸의 반응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언제까지 그가 내 눈치를 보게 할 수는 없었다. 머릿속을 채운 주인호를 억지로 몰아내면서 나는 눈을 떠 옆을 바라보았다
“출퇴근 말이야.”
“응?”
“내년부터는 안 도와줘도 돼.”
“왜?”
“연말에 진급하면 차 살 거야.”
자차 구입은 내 오랜 꿈이었다. 집에서 회사까지의 짧지 않은 거리를 버스로 출퇴근한 지도 벌써 몇 년째였다. 내년에는 꼭 사야겠다는 다짐은 대리 진급 시 자축의 의미로 지르겠다는 결심으로 자리 잡았다. 연봉이 오르면 할부금을 내기도 수월할 터였다.
바뀐 화제가 마음에 들었는지 은겸의 음성이 밝아졌다.
“승진할 것 같아?”
“아마도. 과장님이 확언했으니까……. 오래 다녔기도 하고.”
“발표 나면 승진턱 쏴.”
장난스럽게 대꾸한 은겸이 좌회전 차선으로 끼어들었다. 앞차에 반사된 방향 지시등이 깜빡깜빡 빛났다. 나는 주홍색 불빛에 시선을 던졌다.
“승진턱은 무슨. 진급해도 겨우 대리야.”
“좋네. 김 대리님.”
“너는 사장이잖아.”
“아니지. 사장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거야. 자기 회사 만들면 되는데 뭐.”
회사를 만들고 운영한다는 것 자체가 보통 일은 아닐 텐데. 은겸은 아무렇지 않게 덧붙였다.
“그에 비해 승진은 회사 안에서 네 가치를 인정받았다는 뜻 아냐? 그동안 노력한 것에 대한 보상 같은 거.”
“…….”
“그러니까 당연히 축하해야지. 발표 나면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좌회전 신호는 앞차에서 끊겼다. 은겸은 무리하지 않고 정지선 앞에서 차를 멈춰 세웠다. 신호를 기다리는 동안 우리의 대화도 멈췄다. 나는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차창 밖으로 온갖 현란한 불빛이 번쩍거렸다. 저녁을 가로지르는 사람들이 만드는 수많은 빛. 바깥에서 본다면 나와 은겸이 탄 차도 그중 하나일 것이었다.
대리 직함 정도는 당연히 받아야 하는 것처럼 생각하고 있었는데. 은겸의 말을 들으니 괜스레 기뻤다.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은겸은 반달가슴곰이라면 누구나 지니는 가슴 무늬를 보고 감탄했고, 그저 이름뿐인 연구원 직함을 멋지다고 말했다. 곰을 사랑하는 곰성애자이면서도 나만은 다른 존재인 것처럼 첫눈에 반했다고 고백했다.
빈말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부끄러울 때도 있지만, 그래도 좋았다. 은겸의 앞에서라면 평범하디 평범한 나도 특별해지는 기분이었다.
내 진심이 전해지기를 바라며 나는 답했다.
“고맙다.”
씩 웃은 은겸이 나를 돌아보았다.
“고마우면 집에 들렀다가 가. 아까 한 약속도 지키고.”
“약속?”
은겸의 눈웃음이 더욱 깊어졌다. 능글거리는 표정을 보자 주인호의 등장 때문에 잊었던 약속이 떠올랐다. 손이나 입으로 해 줄게. 심지어 내가 먼저 꺼낸 소리였다.
“……왜 얘기가 거기로 가는데.”
“내가 제일 받고 싶은 감사 인사니까 그렇지.”
신호를 확인하곤 은겸이 차를 출발시켰다. 차가 부드럽게 커브를 돌자 몸이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고개를 저으며 나는 의자 등받이에 몸을 파묻었다. 번화가를 가로지르는 탓일까. 어둠이 내려앉은 바깥이 아까보다 밝아 보였다.
***
키스의 운동 효과는 그다지 없었다.
은겸과 나는 거의 매일 만나 최소 10분, 길게는 한 시간씩 키스했다. 단순히 입술만 맞댄 건 아니었다. 전신을 움직여야 더 효과적이지 않겠느냐는 은겸의 개수작에 못 이기는 척 그를 끌어안고 애무했다. 혀를 섞는 동안 은겸은 달아오른 하반신을 내게 문지르며 안달을 냈다. 은겸이 흥분을 터뜨릴 때까지 나는 그의 맨살을 어루만졌다. 발정이 끝난 터라 같은 기분이 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은겸의 체온을 느끼는 시간이 좋았다.
당연한 일이지만 아무리 키스해도 살이 빠지기는커녕 입술만 부을 뿐이었다. 특히 은겸의 혀 돌기가 너무 세게 스친 입천장은 살갗이 까져 쓰라렸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어서 나는 키스 다이어트 중단을 선언했다.
그렇다고 수영장에 갈 수는 없었다. 주말을 같이 보내고 싶다며 은겸이 직접 말하기까지 했는데 무시하기 어려웠다. 은겸이 다닌다는 피트니스 센터에 등록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어 물어보았지만, 회원권의 가격을 알고 난 뒤론 그럴 마음이 싹 사라졌다. 피트니스 센터의 회원이 되려면 연회비 외에도 내 연봉과 맞먹는 거금을 보증금으로 내야 했다.
돈만 낸다고 다 되는 게 아니었다.
“나도 부모님 덕분에 가입 심사 통과한 거라서. 지금 직업만으로는 클럽에 들어가기 어려워.”
스무 살 때 고급 아파트를 선물 받았다는 이야기에서 대강 눈치는 챘지만, 은겸이 본래 속해 있었던 프라이드는 상당한 재력가 집안인 듯했다. 은겸의 설명을 들으며 나는 ‘은겸과 함께 피트니스 센터를 다니는 일상’을 깔끔하게 포기했다. 한 사업체의 사장인 은겸도 안 된다는데, 고작 평범한 회사원인 내가 도전할 곳이 아니었다.
은겸과도 상의하면서 고민한 끝에 조깅을 선택했다. 금요일 저녁, 은겸의 집으로 퇴근해서 토요일과 일요일 아침에 근처 공원을 함께 달렸다. 운동이 끝난 뒤에는 집으로 돌아와 씻고 아침을 먹었다. 나머지 시간은 자유롭게 하고 싶은 일을 했다. TV를 보거나 책을 읽기도 했고, 같이 외출해서 영화를 보기도 했다. 제법 한가로운 주말이었다.
따사로운 가을 햇살이 내리쬐며 빨래하기 좋은 나날이 이어졌다. 이제는 내 집처럼 편해진 소파에 앉아 빨래를 개킬 때였다. 설거지를 마친 은겸이 다가왔다.
“내버려 둬. 내가 할게.”
“내 옷도 있어.”
“그럼 같이 정리하자.”
은겸은 한쪽에 쌓인 옷을 피해 내 옆에 털썩 앉았다. 나는 발치에 놓아 둔 빨래 바구니를 은겸 쪽으로 밀었다. 허리를 굽혀 수건을 꺼내 든 은겸이 TV를 바라보았다. 내가 틀어 놓은 채널에서는 수영선수권 대회가 생중계되고 있었다. 화면을 빤히 보다가 은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재밌어?”
“볼 거 없어서.”
“다른 데 볼까?”
“그냥 놔둬.”
앞을 몇 초 응시하던 은겸이 부르르 몸을 떨었다.
“퍼렇고 물만 가득해서 별론데. 저런 게 재밌어?”
“응. 나야 수영 좋아하니까. 좋아하는 선수도 나오고.”
“좋아하는 선수?”
설명을 바라는 눈치기에 화면을 가리켰다.
“저기 3번 레인.”
마침 진행되는 경기는 돌고래 수인들의 자유형 경기였다. 내가 눈여겨보았던 선수는 2등으로 물살을 가르고 있었다. 나는 은겸의 손에서 수건을 빼앗아 네 귀퉁이를 맞추어 착착 접었다.
“저 사람이 내가 좋아하는 선수.”
“잘해?”
“응. 성적도 좋은데, 폼이 깨끗해서 보고 있으면 기분 좋거든.”
화면을 빤히 보던 은겸이 꼬리를 길게 휘둘렀다.
“나도 수영 배울까?”
“물 싫어하잖아.”
“하면 의외로 잘할지도 몰라.”
꾸준히 관리한 덕분에 운동신경이 나쁘지 않다, 물과 친해지면 얼마든지 깊은 곳에도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 넘치는 주장이 뒤를 이었다. 은겸을 바라보다가 나는 웃어 버렸다. 말과는 달리 은겸은 여태 TV 화면에서 시선을 피한 채였다.
“질투해?”
“응.”
순순히 인정한 은겸이 내 어깨를 짚고 뒤로 밀었다. 떠미는 힘을 이기지 못하고 나는 소파에 누웠다. 기껏 개켜 놓은 수건이 등 뒤에 깔려 불편했다. 날렵하게 내 몸 위로 올라탄 은겸이 고개를 숙였다.
“내 앞에서 다른 남자 알몸 보면서 좋아하지 마.”
“수영 선수잖아. 무슨 알몸이야.”
“저 정도면 충분히 알몸이지. 중요 부위만 가렸는데.”
“스포츠를 그렇게 불순한 눈으로 보는 거 선수들에게 실례야.”
더 말을 잇지 못했다. 혀를 내민 은겸이 입술을 길게 핥았다. 오돌토돌한 돌기에 입술 거죽이 쓸리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입을 열자마자 은겸이 거침없이 안으로 들어섰다. 치열을 훑은 혀가 은근슬쩍 넘어와 입천장을 건드렸다. 벌써 흥분했는지 달큼한 체취가 사방에 맴돌았다. 또 뭐에 버튼이 눌렸는지 도무지 모를 일이었다.
느릿하지만 집요하게 혀를 따라다니며 장난치던 은겸이 한참 만에 입을 뗐다.
“섹스도 운동이니까 스포츠지?”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같이 운동할까, 원재야?”
빙긋 웃은 은겸이 내 윗옷을 턱 밑까지 끌어 올렸다. 그러고는 드러난 내 상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은겸의 앞에서 수십 번, 아니, 수백 번을 보인 몸이건만 나 혼자 벗은 채로 관찰당하자 민망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크게 이동하는 그의 시선이 무엇을 훑는지 뻔히 보여서 더했다.
양손을 내려 가슴 위에 얹은 은겸이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요새 딱 좋아.”
“…….”
“손에 닿는 감촉이나 무게감이 완벽해졌어.”
“변태 같은 소리 좀 그만해.”
“진심인데.”
은겸이 손끝에 힘을 꽉 주었다.
“봐. 진짜 야해.”
뭐가 야하다는 것일까. 시선을 내리고 턱을 끌어당겨도 보이는 거라곤 은겸의 손가락 사이로 튀어나온 내 맨가슴이었다. 움켜쥔 가슴을 주무르며 그가 중얼거렸다.
“하루 종일 만지고 싶어.”
동시에 은겸이 내게 하반신을 문질렀다. 몸에 닿는 은겸의 중심은 이미 달아올라 있었다. 단단한 것이 다리에 비벼지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지금의 내게는 성욕이 없지만, 은겸이 어떤 마음으로 내게 이러는지 모르지 않았다.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는 연인에게 홀로 흥분해서 치대는 마음이 얼마나 막막한지도.
은겸과 한 약속을 지킬 때가 온 것 같았다. 나는 손을 아래로 뻗어 바지와 속옷을 함께 끌어 내렸다. 뻣뻣하게 선 은겸의 페니스가 옷 위로 퉁 튕겨 올랐다. 오랜만에 보는 흉기였다. 그리 반갑지만은 않은 커다란 성기를 손아귀에 넣자 은겸이 길게 숨을 내뱉었다.
“해 주게?”
“응.”
호기롭게 붙잡은 것까지는 좋았는데, 어찌나 굵은지 한 손으로는 둘레가 모자랐다. 기왕 시작한 거 끝을 봐야겠지. 다른 손을 마저 내려 뜨거운 기둥을 양손으로 겹쳐 쥐었다. 불거진 핏줄이 손을 통해 선명하게 느껴졌다.
우선은 느릿하게 위아래로 문지르며 은겸의 반응을 살폈다. 양 팔꿈치로 소파를 짚은 은겸이 팔 사이에 나를 가두었다. 그러곤 허리를 수그려 내 상체에 얼굴을 파묻었다. 크게 숨을 들이마시며 가슴골에 코를 문지르는 그가 간지러웠다. 허리를 흠칫 떨자 은겸은 곧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은겸의 관심사는 멀리 가지 않았다. 하얀 무늬를 따라 쪽쪽 입을 맞추며 이동하던 입술이 유두에서 멈춰 섰다.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어 끝에 입을 맞춘 은겸이 씩 웃었다.
“오늘은 얌전하네.”
은겸의 말대로였다. 발정기에는 조금만 자극해도 튀어나왔던 돌기는 말캉거리기만 했다. 그 느낌이 마음에 들었는지 은겸이 혀를 넓게 쓰면서 돌기를 핥았다. 까끌거리는 감촉 때문에 내가 신음하면 세게 빨아올리고, 너무 빨려서 얼얼하다 싶을 무렵에는 이를 세워 잘근거렸다.
도와주겠다고 나서놓고 나만 애무받을 수는 없었다. 나는 손가락에 힘을 주고 뜨거운 기둥을 매만졌다. 선단에 벌써 맺힌 미끈미끈한 액체를 기둥 전체에 펴 바르며 손을 쓰자 은겸이 그르렁 목을 울렸다. 그럴 리 없는데도 위아래로 흔들수록 페니스가 더 부풀어 오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얼마 안 가 방울지며 흐르는 액체가 손을 적셨다. 엄지손가락으로 요도구를 막고 힘주어 문지르자 은겸이 허리를 떨었다. 반응이 귀여워 아예 손바닥으로 귀두 끝을 빙글빙글 돌리며 문질러 보았다. 내 몸 위로 타고 앉은 허벅다리가 움찔거렸다.
기분 좋냐고 물을 필요는 없었다. 고개를 들어 올린 은겸이 나와 눈을 맞추었다. 코앞까지 다가온 노란 눈은 금방이라도 빛을 뿜을 것처럼 사나웠다. 심약한 이라면 움츠러들거나 물러설 법한 서슬 퍼런 기세였다.
하지만 나는 도망치지 않았다. 은겸과 눈을 계속 맞추며 손을 움직였다. 미간을 찌푸린 은겸이 내 목덜미에 고개를 파묻었다. 이어질 통증을 예상하며 이를 악물었다. 마음에 드는 자리를 찾는 듯 그르렁거리며 여기저기 입을 대 보던 은겸이 내 목덜미에 이를 세웠다.
“아프, 읏.”
“후…….”
귀 바로 아래에서 신음이 들리나 싶더니 내 목을 문 은겸이 스스로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거세게 올려치는 힘 때문에 그만 손아귀 안에서 페니스가 빠져 버렸다. 은겸은 중단을 용납하지 않았다. 곧장 성기를 쥐게 하곤 내 손등을 단단히 붙잡았다. 손바닥에 닿는 성기만큼이나 은겸의 손도 뜨거웠다.
한참 허리를 치대던 은겸은 손아귀가 얼얼해졌을 때쯤 내 목을 물어뜯을 기세로 턱에 힘을 주었다. 그와 함께 은겸의 성기가 꺼떡거리며 울컥울컥 정액을 토해 냈다. 손바닥에 한 차례 쏟아 낸 뒤에도 사정은 멈추지 않았다. 멈추었나 싶으면 은겸이 크게 허리를 쳐올리며 다시 끈적이는 액체를 쏘아 냈다. 마침내 은겸이 숨을 고르며 내 목을 놓아주었을 때, 나도 기둥에서 손을 떼어 냈다. 물린 채 흔들린 목이 욱신거렸다.
그동안 오래 참았는지 은겸의 것이 토해 낸 정액은 끈적끈적했다. 손가락 틈을 벌리며 길게 늘어지는 탁액을 보고 있자 은겸이 몸을 일으켰다. 개다 만 수건을 집어 든 그가 내 손을 붙들었다. 빨래를 한 보람이 없을 텐데. 질척한 손바닥을 내려다보다가 나는 손을 빼냈다.
“왜, 읏.”
아직 들뜬 은겸의 목소리는 내 손길이 중심에 닿자 끊겼다. 나는 정액이 흥건한 손으로 그의 페니스를 만졌다. 젖은 손아귀 안에서 기둥이 미끄럽게 오갔다. 핏줄이 도드라진 붉은 성기는 다시 봐도 흉흉했다. 이런 게 내 뒤에 들어갔었구나. 그러니 힘들 수밖에 없지. 주물거리며 생각에 잠긴 사이 은겸의 표정이 점차 일그러졌다.
“원재야.”
마침내 더 견딜 수 없었던 듯, 초조한 목소리로 은겸이 나를 불렀다. 그 정도 자극했으니 충분했다. 나는 몸을 돌려 소파 위에 엎드렸다.
“허벅지 빌려줄게.”
“…….”
“한 번으로 못 참잖아.”
좋다고 흉기부터 갖다 댈 줄 알았는데, 은겸은 나를 도로 돌아 눕혔다.
“뒤에서 하고 싶지 않아.”
“왜?”
“얼굴 안 보이는 거 싫으니까.”
“그럼 옆으로.”
“…….”
급하기는 했는지 은겸은 그 이상 거절하지 않았다. 내 바지를 끌어 내리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한 은겸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다리를 들어 올려 틈을 만들어 주자 당장 뜨거운 것이 안으로 파고들었다. 내 허벅지 사이에 기둥을 끼운 은겸이 몸을 수그리고 내 턱을 붙들었다. 나는 허리를 틀어 그와 입술을 맞댔다. 까끌까끌한 혀를 빨아들이며 키스하는 사이, 굵은 기둥이 허벅지 사이를 오가기 시작했다. 내가 펴 바른 정액 때문에 미끈거리는 페니스의 감촉이 생경했다.
“너무 힘주지 마.”
나도 모르게 근육에 힘을 주었는지 억눌린 목소리로 은겸이 말했다. 안 그래도 굵은 다리 틈을 벌리고 오가느라 힘들 텐데. 나는 한쪽 다리를 약간 들어 올려 간격을 벌렸다. 그제야 은겸의 큼지막한 페니스가 수월하게 다리 사이를 출입했다.
얼마 안 가 은겸은 무섭게 허리를 흔들었다. 엉덩이와 다리를 두드리는 단단한 몸이 마치 섹스할 때와 비슷하게 몰아쳤다. 그의 힘에 못 이겨 나는 차츰 위로 밀려 올라갔다. 은겸이 다리 사이에 깊숙이 자신을 박아 넣을 때마다 소파 팔걸이에 머리를 쿵쿵 박았다. 소리가 크게 울리자 은겸이 소파와 내 정수리 사이에 손을 비집어 넣었다.
“미안하다.”
“뭐가.”
“혼자 기분, 후, 좋아서.”
“나도 기분 좋아.”
은겸이 움직이는 대로 정신없이 흔들리면서 나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거짓말이 아니었다. 처음 경험하는 형태의 충족감이 가슴을 채웠다. 나를 원하는 은겸의 눈빛과, 흔들리는 몸, 뜨겁게 겹쳐진 체온은 우리가 섹스할 때의 것과 똑같았다. 비록 욕정을 공유할 수는 없지만, 은겸과 몸을 겹친다는 감각은 충분했다.
“원재야.”
무엇보다도 나를 안으며 기분 좋아하는 은겸을 보는 게 좋았다. 간절히 나를 부르는 은겸이, 절정의 끝까지 시야에 나를 담으려고 애쓰는 은겸이 좋았다. 할 수만 있다면 더 기분 좋게 만들어 주고 싶었다. 나는 절정으로 치닫는 은겸을 전부 눈에 담으며 땀이 맺힌 은겸의 등을 쓸어내렸다. 힘이 바짝 들어간 은겸의 엉덩이가 단단했다. 움푹 팬 옆을 손으로 어루만져 주자 은겸이 길게 신음했다.
“흐읏…….”
페니스가 조금 전과는 다른 느낌으로 꿈틀거리더니 다리 사이에 질척한 게 뿌려졌다. 나는 허벅다리 위까지 올라온 선단을 손으로 쥐었다. 손아귀 안이 끈적끈적했다. 막 사정을 마친 붉은 귀두를 쥐어 짜내듯 문지르자 은겸이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그만.”
여유라곤 찾아볼 수 없는 목소리였다. 더 괴롭혀 주려던 마음을 버리고 다리를 들었다. 무거운 허벅지에 눌려 있었던 새빨간 성기가 벌떡거리며 솟았다. 그 바람에 날아오른 흰 액체가 투둑투둑 내 배 위로 떨어졌다.
숨을 고른 은겸이 내 위에 엎드렸다. 은겸의 넓은 가슴이 거세게 들썩거렸다. 무겁고 갑갑했지만 그의 귀를 만지작거리며 기다렸다. 한참 만에 여운이 가셨는지 은겸이 중얼거렸다.
“수영은 같이 못 하겠다.”
“왜.”
“수영장 갈 때마다 이렇게 흥분하면 곤란해.”
“……안 그럴 거라고 해도 못 믿겠다.”
“그렇지?”
키득 웃은 은겸이 몸을 들어 올렸다. 수건을 집은 그가 온통 자신의 정액 범벅인 내 손을 꼼꼼히 닦았다. 허벅지에 흐른 정액도 끈적거리기는 마찬가지였다. 은겸이 손을 놓아주었을 때 나는 다리를 벌렸다.
“여기도.”
하지만 은겸은 내 다리 사이를 바라보기만 했다. 노란 눈이 점차 노골적인 욕망을 담았다. 내가 걸친 드로어즈의 안까지 꿰뚫어 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민망해져서 벌렸던 다리를 오므렸다.
“그냥 수건 주면 내가…….”
“한 번만 더.”
“뭐?”
“한 번만 더 하자.”
“이번에는 또 왜.”
“엉덩이에 문지르고 싶어.”
중얼거린 은겸이 혀를 내어 아랫입술을 핥았다. 수그러든 줄 알았던 은겸의 중심도 아래에서 도로 고개를 들었다. 그간 어떻게 참았던 것일까. 나는 한숨을 쉬며 그를 밀쳤다.
“나머지는 침대에서.”
“왜.”
“빨래 다 구겨졌어.”
허리를 들어 아래에 깔린 옷가지를 보여 주자 은겸이 고개를 끄덕였다.
“침대로 가자.”
이대로 상대해 주면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것 같다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은겸의 손을 붙잡고 몸을 일으켰다. 모처럼 진하게 번진 은겸의 체향이 반가웠다. 내일 출근하는 날도 아닌데 까짓거 몇 번 더 도와줘도 되겠지. 몸이 닳는 것도 아니고.
“아, 수건 챙겨 가야지.”
침대로 향하는 내내 은겸은 어린애처럼 들떠서 싱글거렸다. 자위 몇 번 도와준다고 이렇게 좋아할 일인가. 잠시 들었던 의문은 빠르게 해소되었다. 파트너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참아야만 했던 과거 때문이리라.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손을 빌려줄걸.’
임시방편으로 이러지 말고 내 비발정기에 어떻게 성욕을 처리할지 규칙을 정해 두면 좋을 듯했다. 모자란 부분은 적어 두었다가 발정기 때 풀면 될 테고.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묻기 위해 은겸을 부르려다 발을 멈췄다. 어느새 나는 이번 비발정기, 그리고 내년에 찾아올 다음 발정기도 은겸과 보낼 거라고 믿고 있었다. 나도 모르게 생긴 확신이었다.
언제부터 은겸과 함께하는 일상이 당연해졌을까.
반년 전의 내가 어떻게 주말을 보냈는지 떠올리자 아득했다. 독립한 이후 10년 가까이 반복했던 나날인데도 꿈에서나 있었던 일 같았다. 집에서 홀로 보냈던 평일 저녁과 주말의 기억을 찬찬히 되짚어 보았다. 두 번째로 치민 감정은 놀랍게도 거부감이었다.
나는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무심결에 은겸의 옷자락을 붙들었다. 뒤를 돌아본 그에게 아무런 설명도 할 수가 없었다. 어린아이들이나 할 법한 짓이었다. 커다란 내가 이러면 귀엽기는커녕 잡아당긴 옷만 늘어날 거란 걸 알면서도 놓을 수가 없었다. 걸음을 멈춘 은겸이 다정하게 물었다.
“왜 그래?”
“같이 걸어.”
“응?”
“……옆에서 같이 걷자고.”
나와 방문을 번갈아 본 은겸이 미소 지었다.
“우리 둘이 나란히 서면 어깨가 걸려서 못 들어가지 않을까?”
“그럼 문 앞에서 하면 되잖아.”
갑자기 얘가 왜 이러나 하는 표정으로 은겸이 나를 보았다. 길게 따지지 않고 나는 무작정 은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바지 안으로 불쑥 손을 집어넣자 은겸이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예상대로 그는 나를 밀쳐 내지 않았다.
“침대가 편할 텐데.”
“거기서도 해.”
“그래도 돼?”
“한 번만 할 거 아니잖아.”
“아, 들켰네.”
멋쩍게 웃은 은겸의 호흡이 천천히 거칠어졌다. 등 뒤에서 빠르게 움직이는 긴 꼬리가 마치 사냥감을 노리는 짐승의 것 같았다. 속으로 안도하면서 나는 손아귀에 가득 차는 은겸의 중심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이제 더는 은겸 없이 혼자 지내고 싶지 않았다.
***
가을이 깊어지자 기온이 뚝 떨어졌다. 나날이 추워지는 날씨에 대비하여 나는 겨울옷을 미리 꺼냈다. 옷을 새로 살 필요는 없었다. 걱정했던 체중 문제는 얼마 못 가 자연히 해결되었다. 각 학교의 면접 일정이 다가오면서 회사도 덩달아 바빠진 탓이었다. 파이널 강좌의 교재 제작부터 시작해서 커리큘럼 관리, 홍보 카피 교정 같은 업무에 이르기까지 우리 팀이 도맡았다. 모든 일정은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강사들에게 수시로 연락해서 조정해야 했다.
그 탓에 평일은 물론이고 주말에도 따로 시간을 내기 어려워졌다. 내 사정을 들은 은겸은 퇴근길 기사 역할을 자처했다. 그때라도 얼굴을 봐야겠다는 것이었다. 나 역시 아쉽기는 마찬가지였기에 은겸이 운전하는 차에 꼬박꼬박 올라탔다.
내가 집으로 들어가기 직전, 은겸은 빼놓지 않고 내게 키스했다. 아무리 오래 입술을 겹쳐도 아쉬웠다. 시간도 잊고 이어지던 키스는 호흡이 거칠어진 은겸이 물러날 때야 끝났다. 자신의 냄새를 묻히려는 것처럼 목덜미에 얼굴을 비비적대곤 은겸은 나를 보내 주었다.
만나지 못하는 동안에도 은겸은 꼬박꼬박 내게 메시지를 남겼다. 물론, 전처럼 점심 메뉴만 묻는 삭막한 문구는 아니었다.
나 지금 퇴근하니까 전화할 수 있을 때 해 줘.
알았어.
보고 싶다 원재야.
응.
내 사진 보고 힘내.
구구절절 보고 싶다며 되풀이하던 은겸은 내가 시원찮게 반응하자 사진 한 장을 보내곤 조용해졌다. 그가 보낸 사진은 정장을 차려입은 상반신 컷이었다. 한껏 멋을 낸 은겸과 배경에 보이는 자잘한 소품들이 잘 어울렸다. 평범한 장소에서 찍은 셀카는 아니고 카페나 스튜디오에서 전문적으로 촬영한 사진 같았다.
‘대체 이런 건 언제 찍은 거야.’
나는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피식피식 웃었다. 은겸의 사진은 연예인들의 프로필 사진처럼 눈부셨지만, 그렇기에 더욱 웃음이 났다. 야근하는 내내 생각날 때마다 스마트폰을 켜서 사진을 보았다. 은겸의 말대로 정말 기운이 나는 것도 같았다.
사진의 정체는 며칠 뒤에 알 수 있었다. 배차 시간이 꼬였는지 버스를 놓치는 바람에 평소보다 늦게 출근한 날이었다. 사무실의 문을 열자 한곳에 몰려 서 있던 동료들이 내게 달려들었다.
“원재 씨!”
“김 주임님! 왜 이제야 오세요!”
내가 없는 동안 무슨 일이라도 터졌나. 설마 강사가 사고라도 친 건 아니겠지? 당황해선 동료들을 둘러보았다. 둥그렇게 나를 둘러싼 사람들 사이에서 신입이 대뜸 핸드폰을 내밀었다.
“이거 주임님 친구분 아니에요?”
신입이 치켜든 스마트폰의 화면 안에 익숙한 사람이 보였다.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살짝 기울인 은겸이었다. 놀랍게도 은겸의 사진은 며칠 전 내가 받은 것과 똑같았다. 이 사진을 어떻게 가지고 있는 걸까. 놀라 눈으로 묻자 옆에서 동료가 부연 설명했다.
“인터넷 뉴스에 떴더라.”
“이분 사장님이라곤 말 안 했잖아요! 어쩐지 멋있더라니!”
“어쩌다가 알게 되신 거예요?”
사람들의 감탄을 무시하며 빠르게 기사를 읽었다. 타이틀을 확인해 보니 다양성의 날을 맞아 다종 가정을 지원하는 은겸의 기업이 조명을 받은 듯했다. 인터뷰 기사에는 은겸이 이종성애자이고, 두 번의 이혼으로 인해 좌절했지만 그걸 계기로 창업을 선택해 지금에 이르렀다는 스토리가 요약되어 있었다. 회사 경영과 관련된 내용을 제외하면 대부분 다 아는 내용이었다. 나중에 따로 확인할 생각으로 슥슥 스크롤을 넘겼다.
옆에서 기다리던 신입이 돌연 한 문단을 가리켰다.
“김 주임님, 이거요! 이거 읽어 보세요!”
신입이 가리킨 것은 기사의 끄트머리에 적힌 문답이었다.
Q. 앞으로의 계획이 있다면?
A. 지금처럼 회사를 운영하는 것. 그리고 제 옆의 소중한 사람에게 전념하는 것. 이번만큼은 놓치지 않으려고 해요.
“밑에 적힌 거 김 주임님 얘기 맞죠?”
호기심을 숨김없이 드러내며 신입이 내 눈치를 살폈다.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서 은겸의 대답을 다시 읽었다. 제 옆의 소중한 사람에게 전념. 이번만큼은 놓치지 않으려고. 신입의 말이 맞았다. 이건 아무리 봐도 내 얘기였다. 은겸에게는 현재 나 외의 다른 상대가 없으니까. 나일 수밖에 없었다.
“이 정도면 그냥 애인 아니에요?”
애인이라.
어떤 의도로 이런 소리를 했는지는 당사자인 은겸만이 알 뿐이었다. 나나 동료들이 무슨 가설을 내놓건 그건 그냥 추측에 지나지 않았다. 아마 은겸은 내가 이 기사를 보게 될 줄도 몰랐을 것이다.
하지만 은겸의 답변에 내포된 뉘앙스를 무시하기는 어려웠다. 아무리 보아도 ‘자신의 옆에 있는 소중한 사람’은 친구를 상대로 하는 표현이 아니었다. 공개된 지면에 실리는 인터뷰에서 당당하게 밝힐 만큼 은겸은 나를 연인과 다름없는 존재로 여기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는 어떨까. 은겸이 생각하는 관계와 내가 생각하는 관계는 같을까? 사람들 앞에서 은겸을 ‘소중한 사람’이라고 밝힐 수 있을까?
못 할 것도 없었다. 아니, 그러지 말아야 하는 이유를 찾기가 더 어려웠다. 은겸이 긍정한 관계를 부정하면서까지 지키고 싶은 건 없었다.
나는 카메라를 똑바로 바라보는 은겸의 눈에서 시선을 들어 올렸다.
“애인이야.”
“아, 정말요?”
“그러면서 왜 부장님 앞에서는 그런 말을…….”
“그땐 아니었나 보지.”
“김 주임님, 축하드려요. 좋은 분 같던데.”
“만난 지 얼마나 됐어요?”
한마디를 했을 뿐인데 사람들의 말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머쓱하게 뒤통수를 긁으면서 내 자리로 향했다. 뒤를 따라온 팀원들이 계속 질문 세례를 퍼부었다.
“어디서 어떻게 만난 거야? 얘기 좀 해 봐.”
“결혼 전제로 사귀시는 거예요?”
“나중에 얘기할 테니까 일부터 하면 안 됩니까.”
과장님에게 SOS를 쳤지만 소용없었다. 팔짱을 지른 과장님이 흠흠 헛기침을 했다.
“오늘은 9시 30분부터 업무 시작하지.”
“과장님.”
“궁금하니까 얼른 얘기해 봐, 김 주임. 섹스 파트너라더니 언제 그렇게 진전된 거야? 응?”
정말이지. 한숨을 쉬곤 나는 자세를 고쳐 앉았다.
“술집에서 우연히 마주쳐서 발정기를 같이 보내다가 얼마 전부터 새로운 관계가 되었고, 아직 결혼 생각은 없습니다.”
“그래서요?”
“끝입니다.”
“아, 더 얘기해 주세요! 감질나게 그게 뭐예요!”
간략한 설명을 마치고 몸을 돌리자 팀원들의 야유가 쏟아졌다. 시끄러운 원성을 무시하고 나는 책상 위에 고개를 처박았다. 섹스 파트너가 있다고 밝히기도 했던 만큼, 은겸과 내가 연인 사이라고 공표하는 일은 별거 아닐 줄 알았는데. 의외로 제법 민망했다. 서류를 집어 부채질을 해도 후끈거리는 얼굴이 좀처럼 식지 않았다.
오전 내내 팀원들은 나를 괴롭혔다. 입사한 이래 단 한 번도 누굴 만나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내가 은겸처럼 화려한 이와 연애한다니 신기한 모양이었다. 그럴 만도 했다. 나도 내가 신기했다.
야 너 진짜 연애해?
점심시간이 지나자 효영에게서 메시지가 날아왔다. 그새 다른 팀까지 소문이 번진 듯했다. 나는 일부러 짧게 답했다.
응.
그때 그 사자분 맞아?
응.
와…… 김원재 대단한데?
뭐가.
지금까지 얌전한 척하더니 상대가 무려 사자라고?
설마 너 그 사람 프라이드에 들어가는 건 아니지?
그런 거 아니야. 나중에 얘기하자.
일도 바쁜데 이러다간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았다. 대화를 일방적으로 끊고 스마트폰을 놓았다. 꺼지지 않은 화면에 메시지 알림이 다시 떠올랐다. 효영인가 싶어 무시하려다, 그래도 예의상 시선을 내렸다.
오늘 거래처하고 회식 잡혀서 데리러 못 갈 것 같아.
예상과는 전혀 다른 내용이 눈에 들어왔다. 은겸이 보낸 연락이었다. 내가 메시지를 확인하자마자 우는 사자 이모티콘이 연이어 나타났다. 피식 웃으면서 나는 손가락을 놀렸다.
알았어. 조심해서 마셔.
너도 수고하고 내일 봐.
응.
짧은 대화를 나누는 와중에도 입꼬리가 자꾸 근질거렸다. 전화가 아닌 문자라 티가 나지 않아 다행이었다.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나는 서둘러 손으로 입을 가렸다. 채신없이 히죽거리는 모습을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다.
업무 시간 내내 신입이 보여 줬던 기사를 바탕화면에 깔아 놓고 수시로 보았다. 다른 부분도 여러 번 읽었지만, 내가 제일 많이 반복한 것은 마지막 단락이었다.
‘소중한 사람에게 전념…….’
이 말을 하면서 은겸은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자신감 넘치는 웃음? 근심 어린 표정? 어쩌면 나를 떠올리면서 미소 지었을지도 모르겠다. 어떤 얼굴이든 좋았다. 누군가의 앞에서 나를 소중한 사람이라고 표현한 것도, 기사로 실릴 걸 알면서 내 존재를 밝혔다는 것도 뿌듯했다.
기사를 보았다고 은겸에게 밝히고 싶었다. 이거 내 이야기가 맞냐고 확인하고 싶었다. 만약 은겸이 긍정하면 그 길로 달려가 우리 사이를 재정의하고도 싶었다. 하지만 오늘 당장 은겸을 만나기는 무리였다.
그렇다면 내일은 어떨까. 어떤 표정으로 만날까. 넌지시 먼저 운을 뗄까. 아니면 대놓고 물어볼까. 생각만 해도 입가에 웃음이 번지고 가슴이 두근두근 뛰었다.
이상 증세는 야근을 하는 동안 계속 이어졌다. 자꾸만 벌게지는 목덜미나 위로 치솟는 입꼬리를 감추기 위해 몇 번이고 모니터 앞에 고개를 처박아야 했다. 내 나름대로 고군분투한 하루를 끝내고 퇴근길 버스에 오르는 순간마저 내 상태는 변함없었다.
늦은 시각이라 버스 안은 한산했다. 주위에 사람이 없는 걸 확인하곤, 나는 스마트폰으로 은겸의 기사를 열었다. 잘생긴 사자 수인 한 명이 미소짓는, 오늘 벌써 수십 번은 족히 보았을 사진이 나를 반겼다.
‘사진보다 실물이 나은 것 같은데…….’
요리조리 뜯어보며 익숙한 모습과 비교할 때였다. 은겸의 사진 위로 전화 수신 화면이 떠올랐다. 나는 서둘러 발신자의 이름을 확인했다. 은겸인 줄 알았더니 예주였다. 실망감을 감추며 나는 통화를 수락했다.
전화를 받자 예주는 다짜고짜 말했다.
─다음 달에 설산 등반 갈 예정이거든. 너 안 올래?
“어, 미안. 회사가 좀 바빠서.”
─웬만하면 와라. 이번에 인원이 많이 부족해서 그래. 저기, 그, 정운이랑 인호 안 오니까 걱정하지 말고.
조심스럽게 정운이와 주인호의 이름을 꺼낸 예주가 잠시 침묵했다. 나는 담담히 예주의 말을 들었다. 민감했던 두 사람의 이름이 예전처럼 껄끄럽지 않았다. 솔직히 모임에 정운이가 오든 말든 크게 상관없었다. 지난 몇 년간은 상상도 못 했던 차분한 마음으로 정운이의 앞에 설 수 있을 것 같았다.
오히려 지금 신경 쓰이는 건 주인호였다. 설산 등반을 기대한 예주에게는 미안하지만, 나는 다른 것을 물었다.
“너는 주인호한테 형이 있는 거 알고 있었어?”
─인호네 형? 유명하잖아?
“그래?”
─그 사자분 말하는 거 아니야?
은겸이 그렇게 유명한 사람이었나. 나는 귀를 긁적거렸다. 두다다 쏟아 내듯 예주가 말을 빠르게 이었다.
─너 몰랐어? 그분 회사가 1인 가구 식단도 제공하잖아. 자취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는 엄청 유명해.
“그래?”
─어떻게 모를 수가 있냐. 너도 혼자 살면서.
“나야 편의점 도시락이나 라면 먹었으니까. 아니면 밖에서 먹고 들어갔고.”
─너도 참 너다.
전화기 너머에서 예주가 혀를 찼다.
─그분은 왜?
“그냥. 어쩌다 마주쳤거든.”
─너 인호한테는 진짜 관심 없었구나.
“있었을 리가 없잖아.”
관심이 있었어도 사적인 정보를 알 겨를이 없었지.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주인호는 내가 5학년을 다닐 때 갓 입학한 새내기였다. 정운이와 사귀게 된 이후부터는 나를 피해 다녔기에 실질적으로 마주칠 일이 전혀 없었다. 게다가 은겸이 자신의 회사를 만든 건 내가 학교를 졸업한 뒤의 일이니 은겸이 주인호의 형으로 유명했다 한들 시간대가 겹치지도 않았다.
예주가 화제를 돌렸다.
─그러나저러나 네 애인은 언제 소개해 줄 거야?
“지금 바쁘다니까. 나중에.”
─나중에 꼭이다.
회사 사람들이나 예주나 내 연애에 왜 이리 관심이 많은 걸까.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알았어.”
─이제 애인 아니라고는 안 하네?
“응.”
─어, 진짜야? 원재야, 이젠 그 사람 애인으로 인정한 거야?
한번 애인이라고 인정했더니 거리낄 게 없었다. 나는 순순히 답했다.
“그런 거 같아.”
─그런 거 같아는 또 뭐야. 애인이면 애인이고 아니면 아니지.
“아직 사귀자는 말을 안 해서.”
─뭐? 당장 해. 좋아한다고, 사귀자고! 뭐 해, 나랑 전화 끊고 빨리 그 사람한테 가서 말하라고!
“상황 봐서 할게.”
─아우, 김원재 이 곰탱이. 그러다 그 사람 놓치면 너 평생 후회할 거다!
“누군지도 모르면서 후회한다고 장담하냐.”
─누군지 알 게 뭐야! 중요한 건 네가 그 사람을 좋아한다는 거잖아! 아니야?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누굴 만날 김원재가 아닌데?
“……예주야. 나 버스 안이라서. 끊을게.”
─잠깐만. 나 한마디만 더 하자. 너 이번에는 짝사랑 아니지? 응? 이상한 사람 좋아하는 거 아니지? 내가 진짜 너 걱정돼서 그래. 원재야. 김원재. 듣고 있어?
“끊는다.”
더 시끄러워지기 전에 끊는 게 나을 것 같았다. 예주의 잔소리를 적당히 중간에서 차단하고 나는 전화를 끊었다.
집까지 가려면 아직도 다섯 정거장 넘게 남아 있었다. 창밖에 시선을 고정하면서 나는 예주와 나눈 대화를 반추했다. 애인. 오늘 벌써 두 번이나 은겸을 애인이라고 인정해 버렸다.
“좋아해. 사귀자.”
중학생이나 할 법한 고백을 입속말로 중얼거렸다. 벌써 몇 개월 전이 되었던 여름, 은겸도 이렇게 말했었다. 내가 마음에 드니 사귀자고.
그때는 매몰차게 거절했으면서, 이제야 그러자고 승낙하면 은겸은 기뻐할까?
‘……기뻐하겠지.’
오래 생각할 것도 없었다. 은겸이라면 너무 늦은 대답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좋아할 것 같았다. 나는 빙긋 웃었다. 은겸이 기뻐하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환히 웃는 은겸을 보면 나도 기쁠 것 같았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는 나도 잘 알았다.
좋아한다. 서은겸을 좋아한다.
소리 없이 마음속으로 속삭여 보았다. 반박은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은겸과 보내는 하루하루가 즐거웠다. 요새는 매일 꿈속을 헤매는 것 같았다. 잠시 떨어지면 보고 싶고, 함께 있어도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다. 정해진 기한 없이 앞으로도 은겸과 함께 지내고 싶다. 이 감정에 다른 어떤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
사랑이 아니고서야, 모든 변화를 설명할 수 없었다.
나는 서은겸을 사랑한다. 그를 나의 연인으로 여긴다.
버스가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똑같은 문장을 반복했다. 새로이 자각한 감정은 그 이름을 되풀이할수록 점점 더 크게 부풀었다. 두근거리는 심장을 주체할 수 없었다. 지금 당장 은겸에게 내 감정을 전하지 않으면 벅찬 가슴이 뻥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다가 충동적으로 은겸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보고 싶어.
지웠다 썼다 고민했던 예전과는 달랐다. 이제는 망설이지 않아도 괜찮았다. 우리는 더 이상 섹스 파트너도, 단순한 친구도 아니니까. 보고 싶은 마음은 발정기에 치솟는 욕망만큼이나 자연스러웠다. 은겸의 답을 기다리지 않고 나는 스마트폰을 가방에 집어넣었다. 흔들리는 버스에 몸을 맡기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지친 하루의 마지막 한 시간이 더없이 달콤했다.
버스에서 내려서자 쌀쌀한 밤공기가 온몸에 휘감겼다. 나는 걸음을 빨리했다. 이대로 은겸을 떠올리며 잠들면 좋은 꿈을 꿀 것만 같았다. 조용한 주택가를 가로질러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오늘따라 유난히 길었다.
그 길의 끝에 아직 끝나지 않은 마법이 기다릴 것이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장신의 남자가 건물 입구에 기대어 서 있었다. 머리카락 위로 솟은 둥근 귀와 끝 부분의 털이 풍성한 긴 꼬리를 확인한 순간, 나는 걸음을 멈추었다. 남자가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았다. 평소보다 느슨한 넥타이나 조금 흐트러진 머리카락이 낯설었지만 그는 내가 아는 사람이 맞았다. 나는 남자의 이름을 중얼거렸다.
“……서은겸.”
“늦게 퇴근하네요, 김원재 씨.”
“여기서 뭐 해?”
“내가 보고 싶다며.”
싱긋 웃은 은겸이 허리를 굽혔다.
“그래서 내 곰님 모시러 왔지.”
“……누가 네 곰이야.”
핀잔을 주어도 은겸은 싱글거릴 뿐이었다. 장난기가 떠오른 그의 코끝과 뺨이 발갰다. 내 메시지를 받고 달려왔다기보다는, 먼저 와서 나를 기다리다가 메시지를 본 것 같았다. 나는 서둘러 그에게 다가갔다.
“올 거면 연락하지.”
“조금 전에 왔어. 신경 쓰지 마.”
“회식은 어쩌고.”
“다 끝내고 온 거야. 아, 거래처 사장님이 잘 드시더라. 상대하느라 힘들었어. 대리 불러서 여기까지 오는데 뒤늦게 멀미가 나더라고.”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늘어놓는 은겸의 목소리가 평소보다 조금 높았다. 아무래도 취한 것 같았다. 주량도 상당한 사람이 대체 얼마나 마셨기에 이렇게 된 거지. 바깥에 서서 한가하게 떠들 때가 아니었다. 내일도 출근할 텐데, 어서 한숨 재워서 돌려보내야 했다. 나는 그의 팔을 붙들었다.
“들어가자.”
“원재야.”
나를 부른 은겸이 고개를 숙였다. 마주친 시선은 뜻밖에도 또렷했다.
“많이 피곤해?”
“아니, 괜찮아.
“그럼 조금 걸을까, 우리?”
“지금?”
“응. 찬바람 맞으면서 술도 깰 겸.”
그러다 감기라도 들면 어쩌려고. 망설임은 나를 들여다보는 은겸의 눈웃음에 흩어졌다.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은겸이 가방을 쥔 내 손 위로 자신의 손을 겹쳤다. 설마 이 밤중에 손잡고 걷자는 건가 싶어 당황했는데 아니었다. 손등을 쓸어내린 은겸이 손가락을 끄르더니 가방을 가져갔다. 나는 잠자코 그의 옆에 섰다.
자정이 가까워진 주택가는 조용했다. 간간이 마주친 이들은 빠른 걸음으로 늦은 귀가를 서둘렀다. 은겸과 나처럼 한가롭게 밤 산책을 즐기는 이들은 없을 듯했다. 시간도 시간이거니와, 겨울 못지않은 찬바람도 문제였다. 빈 거리를 비추는 가로등의 불빛이 서늘했다.
다음 가로등의 빛이 닿기까지 이어지는 짧은 어둠 속으로 은겸이 먼저 발을 옮겼다. 나는 어깨를 움츠리며 걸음을 늦추었다. 싸늘한 공기가 외투 안으로 파고들었다. 고작 한 걸음 떨어졌을 뿐인데, 은겸은 우리 사이의 거리를 곧장 눈치챘다. 나를 돌아본 그가 성큼 내게 다가왔다. 그러곤 아무것도 묻지 않고 코트를 벗었다.
“아니, 그럴 것까지는…….”
“괜찮아. 술 마셨더니 별로 안 추워.”
싱긋 웃으며 은겸은 내 어깨에 코트를 걸쳐 주었다. 더 거절하기도 미안했기에 고개를 까닥여 감사를 표했다. 은은히 남은 은겸의 체취와 온기에 둘러싸이자 그의 품에 안긴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내가 옆에 서기를 기다린 은겸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만나면 하려던 말이 많았는데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가슴이 두근거렸다. 우리가 한두 번 만난 사이도 아닌데. 은겸과 함께 익숙한 밤거리를 거니는 게 마냥 좋았다.
“오늘 점심은 콩나물국밥이었어.”
문득 떠오른 걸 말하자 은겸이 키득거렸다.
“이제는 내가 안 물어봐도 먼저 이야기하네.”
“……궁금할까 봐.”
“그래.”
빙긋 웃은 은겸이 내게 손을 뻗었다.
“나는 항상 네가 궁금해.”
은겸의 손이 닿은 곳은 코트의 옷깃이었다. 대강 걸친 코트의 앞자락을 꼼꼼히 여며 주는 그에게 가로등의 주홍색 불빛이 쏟아졌다. 반짝거리며 부서지는 빛은 은겸의 팔을 타고 내게도 흘러왔다. 나는 잠시 숨을 멈추었다. 은겸이 몸을 물릴 때까지 호흡하는 법을 잊어버린 듯 굳었다.
추위 때문에 내가 얼었다고 생각했는지 은겸이 걱정스레 물었다.
“돌아갈까?”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더 걷자.”
“안 춥겠어?”
“괜찮아.”
지금이 아니면 돌아오지 않을 것만 같은 특별한 시간을 연장하고 싶었다. 선선히 물러난 은겸이 앞장섰다.
“그럼 가자.”
주택가를 빠져나올 때까지 우리는 아무런 대화도 주고받지 않았다. 큰길로 나가는 길목에 이르자 사람이 많아졌다. 드문드문 불이 켜진 상점도 보였다. 은겸이 편의점을 가리켰다.
“잠깐 들렀다 가자.”
“살 거 있어?”
“술 마시면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어지거든.”
이 날씨에 아이스크림이라니. 감기 걸리기 딱 좋은 취향이다 싶었다. 앞장선 은겸의 뒤를 따라 편의점 안으로 들어섰다. 냉동고 앞에서 꼬리를 살랑거리는 은겸을 지나쳐서 나는 음료 코너로 향했다.
고양잇과 수인용 음료는 진열대의 중간쯤에 있었다. 여기저기 진열된 개박하 맛 음료수 사이에서 간신히 숙취 해소제를 찾아냈다. 혹시나 싶어 성분 표기를 확인해 보니 숙취 해소제에도 개박하 성분이 함유되어 있었다. 개박하가 고양잇과의 합법 마약인 건 알지만, 너무 똑같은 맛만 만드는 것 아닌가. 사자인 은겸도 똑같이 느끼는지 물어보려고 몸을 돌릴 때였다.
“아, 원재야. 잠깐만.”
아이스크림 두 개를 든 은겸이 내게 손짓했다. 그는 어느새 카운터 너머 담배 진열대를 보고 있었다.
“혹시 싫어하는 브랜드 있어?”
“그냥 다 비슷한데.”
“그래? 그럼 냄새 제일 약한 거로 주세요. 네, 그거.”
은겸이 고른 것은 진열대에서도 가장 밑에 놓인 담배였다. 잘 팔리지 않아 구석에 둔 브랜드가 분명했다. 나는 숙취 해소제를 카운터 위에 올려놓았다.
“그거 순해서 맛도 제대로 안 느껴지지 않아?”
“키스할 사람이 비흡연자인데 이 정도 배려는 해야지.”
뻔뻔하게 답한 은겸이 눈을 찡긋거렸다. 다른 사람 앞에서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얼굴이 달아올랐다. 나와 은겸을 번갈아 힐끗거린 편의점 직원이 입을 열었다.
“같이 계산하세요?”
“아, 네.”
빠르게 손을 움직인 직원이 아이스크림과 담배, 숙취 해소제의 바코드를 찍었다. 나는 무심코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은겸보다 먼저 카드를 내밀 작정이었는데. 당황스럽게도 주머니는 비어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내 가방을 은겸이 들고 있었다. 씩 웃은 은겸이 자신의 지갑을 꺼냈다.
“내가 사려고 했는데.”
“응, 고마워. 잘 마실게.”
자신이 계산해 놓고도 내게 고맙다고 하는데, 뭐라 대꾸할 말이 없었다. 계산한 물건을 집어 든 은겸이 내게 아이스크림을 내밀었다. 편의점을 나서는 우리의 등 뒤로 안녕히 가시라는 무덤덤한 인사가 건너왔다.
은겸과 나는 다시 거리를 걸었다. 숙취 해소제를 단숨에 비운 은겸은 아이스크림의 포장을 뜯었다. 정말 먹고 싶었는지 맛있게도 한 입씩 베어 무는 그를 보다가 나도 아이스크림을 입에 물었다. 달콤한 배 맛과 서늘한 감각이 입 안에 퍼졌다. 차가워진 입술이 얼얼했다.
입이 가득 차자 대화도 끊겼다. 나무 막대만 남을 때까지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무작정 발을 옮겼다. 은겸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등지고 걷는 나를 말리지 않았다. 그렇다고 어디를 가자고 제안하지도 않았다. 은겸도 나도 그저 발이 닿는 대로, 우리 앞에 놓인 길을 따라 걸었다. 별다른 목적 없이 함께 걷는 한가로운 시간이 영원히 이어질 것처럼.
아이스크림 막대를 깨물던 은겸이 검은 밤하늘을 가리켰다.
“달 떴다.”
반짝이는 별 사이로 작은 달이 떠올라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
“네 무늬랑 비슷하네. 눈썹달.”
“응.”
“원재 네 달이 훨씬 예쁘지만.”
“어딜 봐서…….”
“진심인데.”
소리 내어 웃은 은겸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눈짓으로 길옆의 쓰레기통을 가리키는 그를 보곤 막대를 비닐 안에 잘 넣고 포장지를 둘둘 말았다. 조금이라도 은겸의 손을 더럽히고 싶지 않았다. 건네받은 쓰레기를 들고 은겸이 몸을 돌렸다.
쓰레기를 버리고 돌아온 은겸은 달이 떴다고 하던 것과 비슷한 어조로 말을 꺼냈다.
“오늘 회식에서 말이야.”
“응.”
“거래처 사장님이 아는 분 따님을 소개해 주겠다고 하더라.”
“뭐?”
“내가 곰성애자라는 걸 알았나 봐. 북극곰 지인이 있다고 자꾸 권하시는데 거절하느라 혼났어.”
안도감에 가슴을 쓸어내렸다. 설마 은겸이 수락했을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말을 듣는 순간 심장이 덜컹거렸다. 은겸이 나를 지나쳐 걸었다.
“왜 안 되냐고, 진짜 괜찮은 사람이라고 한사코 붙드시더라. 그래서 애인이 있다고 했어. 어쩌면 거짓말일지도 모르겠지만 또 이런 상황이 일어나지 말란 법이 없어서.”
“…….”
“그랬더니 네가 보고 싶어졌어.”
동료들 앞에서 섹스 파트너가 있다고 밝혔던 때가 떠올랐다. 어떻게 행동해야 유리한지 알면서도 나는 은겸의 존재를 숨김없이 드러냈다. 감출 수 없었다. 나를 자꾸만 뒤흔들며 일상에 자리 잡는 사람을 보이지 않는 척 덮어 두기 싫었다. 은겸이 볼 수 없는 곳이라 하더라도 그의 존재를 부정하면서 그와 나 모두를 속이고 싶지 않았다.
은겸도 그때의 나와 같은 마음이었을까. 나는 은겸의 등을 바라보았다. 고작 두어 걸음 앞서 걷는 것뿐인데도 그가 멀게 느껴졌다.
“처음 있는 일은 아니야. 두 번째로 이혼한 뒤로 아무도 만나지 않았으니까.”
나지막한 목소리가 등 뒤의 내게 날아왔다. 은겸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보고 싶었다. 나는 걸음을 빨리했다.
“정말 많이들 참견하거든. 언제까지 혼자 있을 거냐, 벌써 몇 년이 지난 줄 아냐, 좋은 사람 만나 봐라. 그때마다 더는 누굴 만나기 귀찮다, 감정을 소모하기도 지친다는 핑계를 댔어.”
발소리를 들은 은겸이 뒤를 돌아보았다. 음영이 드리워진 은겸의 얼굴이 어두웠다.
“사실은 그게 아니었지. 나는 두려웠어. 또 누군가에게 반하고 함께 추억을 쌓는 게 불안했어. 그러다 한순간에 모든 걸 잃어버리고, 행복했던 시간마저 퇴색될 거라 상상하면 괴로우니까.”
멈추지 않고 은겸의 옆으로 다가갔다.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속도를 맞추었다. 더는 뒤처지고 싶지 않았다.
흔들리던 손등이 스친 순간, 은겸이 내 손을 붙들었다.
“그랬는데. 그런데 원재야.”
차갑게 식은 손가락이 내 손등 위에 슬며시 걸쳐졌다. 느슨하게 손깍지를 낀 은겸이 나를 바라보았다.
“지금처럼 너하고 함께 있는 시간이 너무 좋다. 그래서 멈출 수가 없어.”
술기운이 오른 탓일까. 은겸은 예의 장난스러운 어조가 아니었다. 더없이 진지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나와 눈을 맞추었다. 동시에 조심스럽게 힘이 들어가는 손가락이 간지러웠다. 은겸이 망설이지 않도록 나는 그의 손을 꽉 붙들었다. 흠칫 몸을 떤 그가 이내 똑같은 힘으로 내 손을 맞잡았다.
은겸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어렸다.
“네게 너무 빠져서 헤어나질 못하겠어. 그만큼 불안한데, 그래서 더 간절해.”
“…….”
“이대로 아침까지 같이 걷고 싶다면 믿어 줄래?”
나지막한 고백이 하나하나 내 안으로 스며들었다. 그리고 오늘 하루 나를 들뜨게 만들었던 감정과 뒤섞였다. 부풀어 오른 마음은 목을 틀어막고 가슴을 틀어막았다. 다시 숨이 막혔다. 지금 당장 은겸에게 전하지 않으면, 보여 주지 않으면. 빠르게 뛰는 심장이 버티지 못할 것만 같았다.
나는 입을 열었다.
“그럴까.”
“응?”
“아침까지 계속 같이 걸을까.”
“……원재야.”
“서은겸.”
어깨에 걸쳐진 코트. 꽉 붙든 손에서 느껴지는 고동. 듣기 좋게 울리는 낮은 목소리. 고요한 거리를 가로지르는 나란한 발걸음. 어제와 다를 것 없는 가을밤을 특별한 기억으로 덧입히는 순간순간.
마법 같기만 한 모든 것을 선사한 사람이 내 한 마디에 숨을 죽였다. 나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부족해진 숨을 길게 들이마시고 걸음을 멈추었다.
“너한테 나는 소중한 사람이야?”
그리고 줄곧 묻고 싶었던 표현을 조심스럽게 입에 담았다.
“아. 기사 봤어?”
“응.”
“그게 실릴 줄은 몰랐는데.”
은겸의 얼굴이 붉어졌다. 매사에 여유로운 은겸답지 않은 반응이었다. 헛기침을 한 그가 내 시선을 피했다.
“자꾸 이혼한 아내들 얘기를 물어보길래. 지나간 일은 언급하고 싶지 않다, 중요한 건 지금 내 옆에 있는 소중한 사람에게 전념하는 거다, 그렇게 둘러댔거든. 이제는 남남인데 공개된 자리에서 세세히 이야기할 수는 없으니까.”
“그거 말고.”
“너한테도 무례한 짓인 건 알아. 미안. 그래도 일부러 어떤 사람이라고 묘사하지는 않았어. 너인 줄 모를 거야. 부담스럽게 여기지 않으면 좋겠다.”
“내 말에 먼저 대답해 줘.”
그런 변명을 듣기 위해 꺼낸 이야기가 아니었다. 당황한 듯 길어지는 은겸의 말을 자르자 사방이 조용해졌다. 나는 다시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길게 내뱉었다.
“내가 소중해?”
은겸은 더 도망치지 않았다. 눈을 감은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소중해.”
“…….”
“네가 상상하지 못할 만큼 소중해.”
내가 너를 사랑하면, 너는 행복해질까.
오래된 의문이 떠올랐다. 우리가 아직 발정기를 함께 보내는 섹스 파트너였을 때 은겸은 그렇게 말했다. 내게 사랑받은 사람들은 행복했을 거라고. 그 사람들이 부럽다고. 그때는 은겸에게 솔직하게 묻지 않았다. 우리는 섹스 파트너였으니까. 발정기에만 만나 성욕을 채워 주면 그만인 관계.
함께하기로 약속했던 기한이 끝나며 우리의 관계도 바뀌었다. 대충 둘러댄 친구로는 부족했다. 앞으로도 함께하기를 바라며 서로를 원하도록 한 걸음 나아가야 했다. 새로운 관계를 만들 기반으로 다른 감정을 선택할 수는 없었다. 나는, 은겸은, 미뤄 둔 진심을 인정해야 했다.
내 사랑은 은겸에게 행복을 나눠 줄 수 있을까. 만약 그렇다면. 내 감정을 솔직하게 전달해서 은겸의 빈 마음을 채울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은겸을 행복하게 만들고 싶었다.
이제 은겸에게 내 사랑을 바라는지 물을 차례만 남았다.
어쩌면 누군가는 비웃을지도 모르겠다. 특별한 기념일에 멋진 장소를 빌려서 고백하지 않는다고. 막 날짜가 바뀐 한밤중에 거리에 서서 멋없이 마음을 전하려 한다고. 둘 사이에 제일 중요한 말을 건네는데 분위기조차 제대로 잡을 줄 모르냐고.
상관없었다. 나는 지금 내 마음을 전해야만 한다.
은겸이 물러서지 못하도록 붙든 손에 힘을 주고, 외면하지 못하도록 시선을 고정하고서.
“그걸로는 모자라. 더 말해.”
그가 얼마나 나를 가슴 깊이 담아 왔는지. 내가 얼마나 그에게 마음을 빼앗겼는지. 서로가 품은 단어를 솔직하게 교환해야 한다. 우리의 시작은 사고 같은 것이었으나 앞으로는 우리가 원하는 대로, 표현하는 대로 흘러갈 것이라고. 그러니 더는 두리뭉실한 언어 뒤에 숨지 말고 확실한 이야기를 하자고.
“내가 알아들을 수 있게 말해, 서은겸.”
은겸이 우는 듯 웃는 듯 흐릿한 표정을 머금었다.
“말해 줘.”
망설이는 입술을 응시하며 부탁했다. 더는 두려워하지 않기를. 나를 믿어 주기를. 부디 용기를 내 주기를 바라며 은겸의 답을 기다렸다.
은겸은 내 바람을 외면하지 않았다.
“너만은 잃고 싶지 않아.”
하얀 숨결과 함께 은겸의 고백이 허공에 흩어졌다. 나는 한 걸음 더 그에게 다가섰다. 한순간도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한층 가까워진 나를 보며 은겸이 아랫입술을 축였다.
“사랑해, 원재야.”
처음 만난 순간부터 수없이 접근하고, 수없이 호감을 표현했으면서도. 단 한 번도 밝히지 않은 진심.
“세상 누구보다도 사랑해.”
그 감정의 정체가 마침내 은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고백을 마친 은겸이 눈꺼풀을 감았다. 가는 떨림이 맞닿은 손을 통해 전해지자 가슴이 조여들였다.
은겸은 나약한 자신을 솔직하게 밝혔다. 두 번의 이별을 겪으면서 또 누군가를 사랑하는 게 두려워졌다고. 그런데도 놓지 못할 만큼 나를 소중히 여기게 되었다고. 두 번 다시 되돌릴 수 없는 고백을 했다. 그러니 나도 그에게 확신을 주어야 했다.
나는 네게 이전과 같은 고통을 안기지 않을 것이다. 나는 언제나 옆자리를 지키면서 묵묵히 너를 기다릴 것이다. 기다림은 내가 가장 자신 있는 분야니까. 지금도, 그리고 앞으로도 내가 곁을 내어 줄 사람은 너뿐이니까. 나는 여기 있으니까, 더는 내가 네 옆에 존재하는 게 맞는지 확인하지 않아도 된다.
“나도 그래.”
그러니 더는 다른 곳을 바라보면서 헤매지 않기를. 바로 옆에 서 있는 나를 마주 보기를.
“서은겸. 우리 제대로 연애하자.”
나는 맞잡은 손을 끌어 올렸다. 그리고 은겸의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입을 맞추었다. 텅 비어 있는 마디에 입술을 눌러 쓸쓸한 흔적을 덮었다.
언제나 감흥 없이 지나쳤던 가로등이 이토록 아름다운 이유. 차갑게만 느껴졌던 밤공기가 이토록 은은한 이유. 어두운 하늘 끝의 손톱만 한 작은 달이 이토록 반가운 이유. 피곤한 하루의 끝이 이토록 눈부신 이유.
“사랑해.”
그 모든 이유가 나를 끌어안았다.
허물어지듯 몸을 숙인 은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손가락을 세워 쥐어뜯듯 내 등을 붙들곤 크게 숨을 내쉬었다. 나는 흔들리는 그의 어깨를 가만히 쓰다듬었다. 들썩이는 커다란 몸을 다독이며 조용히 속삭였다.
“사랑해. 사랑한다. 사랑해, 서은겸.”
비로소 제대로 전한 고백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나는 자꾸만 가슴속을 울리는 단어를 되풀이했다. 입에 담을수록 감정의 형태는 또렷해졌다. 계속해서 들려주려던 욕심은 얼마 못 가 은겸에게 먹혔다. 으스러질 듯 나를 끌어안은 은겸이 입술을 비볐다. 그의 눈가가 조금 붉었다.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처럼 나는 눈을 감았다. 오랜 기다림 끝에 비로소 찾아낸 연인을 품에 안고 요동치는 맥박에 귀를 기울였다. 젖어 드는 입술을 겹치며 숨결을 나누었다. 새하얀 눈썹달이 푸르스름한 밤하늘을 가로질러 사라질 때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