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곰은 눈을 감는다
사람은 언제 사랑에 빠질까.
이때껏 살면서 겪은 사랑이 모두 같지는 않았다. 나의 첫사랑이자 첫 연인이었던 상대와는 학교 친구로서 천천히 호감을 쌓아 올렸다. 그러다 어느 순간 친구 이상으로 마음이 커졌음을 느끼고 고백했다.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서로에게 이끌렸기에, 특별히 감정을 깨닫는 계기는 따로 없었다.
두 번째로 사랑했던 상대, 정운이에게는 첫눈에 반했다. 처음 본 순간부터 머리가 띵할 정도로 감정이 폭발했다. 몸도 마음도 주체 못 할 만큼 격렬한 충동이었다. 정운이를 떠올릴 때면 언제나 처음 만났던 그날의 기억이 뒤따라왔다. 길고도 쓸쓸하게 이어질 사랑에 빠진 그 순간이.
은겸과의 관계는 둘과는 달랐다. 나는 은겸과 처음 만난 날 한 침대를 썼고, 호감보다 적대감이나 의심이 더 큰 상황에서 만남을 이어 갔다. 모호한 우리의 관계에 연애 감정이 끼어들 틈이 있을지 의문스럽기만 했다. 계속 밀어내기만 하는 나를 은겸은 꾸준히 기다렸다. 그러다가도 내가 먼저 다가가면 뒤로 물러나서 나를 당황시켰다. 조심스러운 듯 대담하게 다가오는, 한 걸음 가까워졌다가도 또 한 걸음 멀어지는 사람. 지금껏 만나 본 적 없는 상대 때문에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은겸과 내가 함께 보낸 시간을 뒤돌아보고서야 깨달은 것이다. 아, 나는 이 사람의 옆에서 걷고 싶었구나. 나란히 찍히는 발자국을 보고 싶었구나, 하고.
외면해 왔던 진심을 눈에 담은 순간, 나는 걷잡을 수 없는 사랑에 빠졌다.
***
밥 친구는 밥만 먹지 않았다.
“어서 와. 오늘도 수고했어.”
은겸은 만날 때마다 꼬박꼬박 스킨십을 했다. 발정기가 끝난 나를 의식한 듯 지나치게 끈적한 애무는 하지 않았다. 그는 언제나 내가 기분 좋을 정도로만 몸을 만지며 키스했다. 그러다 혼자 흥분해서 참지 못할 정도가 되면 나를 내버려 두고 화장실로 들어가 해결하고 왔다.
마냥 지켜만 보기에는 미안했기에 나는 그에게 먼저 제안했다.
“입으로 해 줄까.”
“아냐, 하지 마.”
뜻밖에도 은겸은 내 제안을 거절했다. 뒤이어 밝힌 이유가 가관이었다.
“잘못하면 턱 빠져.”
“…….”
말문이 막혔다. 그렇다고 허세 부리지 말라며 반박할 수는 없었다. 은겸의 무서운 사이즈를 생각하면 농담이 아닐지도 몰랐다.
“오늘은 점심 뭐 먹었어?”
“생선구이.”
“맛있었겠네.”
“그럭저럭 괜찮았어.”
야근이 있는 날이나 은겸이 바쁜 날을 제외하고, 나는 일주일에 닷새 정도 은겸과 만나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금요일 밤에는 아예 은겸의 집으로 퇴근해서 일요일 저녁까지 머물다가 집으로 돌아갔다.
그 일 이후 어색해질 법도 한 관계는 예전처럼 은겸이 이끌어 갔다. 그는 전처럼 내가 먹은 점심 메뉴를 묻고, 회사에서 어땠는지 물었다. 덕분에 은겸과의 만남은 내 하루를 돌아보는 일과가 되었다.
은겸이 내게 묻는 만큼 나도 은겸에 대해 많은 것을 묻고 싶었다. 궁금증을 숨기지 않기로 약속도 했으니까. 무엇보다도 그의 과거에 대해 알고 싶은 게 많았다.
기회는 생각보다 일찍 찾아왔다.
10월의 첫 번째 토요일 아침. 평소처럼 은겸의 침대에서 눈을 떴다. 익숙한 손길이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있었다. 고개를 조금 틀어 옆을 확인했다. 모로 누워 나를 내려다보는 은겸이 시야에 들어왔다. 시선이 마주치자 은겸이 미소를 지었다.
“잘 잤어?”
나는 말없이 턱을 까닥거렸다. 허리를 숙인 은겸이 내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이불 밖의 서늘한 공기가 은겸의 온기에 물들었다. 따뜻한 체온이 마음에 들었다. 나는 손을 뻗어 그를 끌어안았다. 가슴과 가슴이 맞닿자 안정적인 심장 박동이 맨살 위에 퍼졌다.
기분이 좋은지 목을 그릉거리던 은겸이 불쑥 물었다.
“이제 슬슬 네 짐 들여놔도 되지 않아?”
“짐?”
“매번 갖고 다니기 불편하잖아. 방 하나 써도 되니까 네 짐 거기에 둬.”
그건 그랬다. 생필품이야 새로 사면 되었지만, 옷이나 신발 등은 은겸의 것을 빌리거나 내가 직접 가지고 다니는 수밖에 없었다. 특히 평일에 은겸의 집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 날 곧장 출근할 때는 옷차림이 더욱 신경 쓰였다.
집주인이 방을 내준다는데 사양할 필요는 없었다. 아니, 오히려 잘됐다 싶었다. 나는 내내 신경 쓰이던 것을 입에 담았다.
“그럼 저 방 써도 될까.”
“무슨 방?”
“닫혀 있는 방.”
“아. 거기.”
순간 은겸이 머뭇거렸다. 다음 말이 이어지기까지 짧은 침묵이 머물렀다. 당황한 듯했다.
“거긴 좀 곤란한데.”
“왜.”
“열쇠 잃어버려서.”
거짓말이 분명했다. 나는 넓은 어깨를 떠밀어 은겸의 품에서 벗어났다. 은겸을 똑바로 보자 그가 한숨을 쉬었다.
“미안. 거짓말이야. 안 잃어버렸어.”
“그럼 왜…….”
“저 방 열기 싫거든. 그래서 평소에는 되도록 잊고 지내려 해.”
껄끄러워하면서도 은겸은 의외로 순순히 진실을 털어놓았다. 물어본 보람이 있었다. 내친 김에 나는 좀 더 캐묻기로 했다.
“저 방 안에 뭐가 있는지 볼 수 있어?”
“……보여 줄게. 대신에, 안을 본 뒤에는 내 이야기를 들어 줘.”
“응.”
“꽤 길고 재미없을 텐데. 괜찮겠어?”
으름장을 놓으며 은겸이 미간을 좁혔다. 흥미가 사라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궁금해졌다. 내가 물러나지 않자 은겸은 풀이 죽었다. 이불을 젖힌 그가 침대에서 내려섰다.
“따라와.”
서둘러 그의 뒤를 쫓았다. 드디어 은겸의 비밀을 알게 된다는 설렘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거실로 나선 은겸은 서랍장에서 열쇠를 꺼냈다. 어딘가 깊숙이 숨겨 놓은 것도 아니고, 서랍만 열면 바로 보이는 곳이었다.
열쇠를 찾아 돌아오기까지 거침없었던 은겸의 태도는 금세 달라졌다. 닫힌 방문 앞에 서자 은겸은 굳어 버렸다. 미동도 하지 않고 멈춰 선 그의 뒷모습이 평소와는 조금 달랐다. 문을 열지 말지 갈등하는 것 같았다. 나는 은겸의 등 뒤에 서서 그가 움직이기를 기다렸다.
내 생각은 착각이었다. 시간이 흘러도 은겸은 문을 열지 못했다. 털이 빳빳하게 선 은겸의 꼬리가 경직된 채 아래로 곧게 뻗었다. 은겸은 갈등하는 게 아니었다. 문을 열 엄두조차 내지 못하는 것이었다.
몇 번 손을 쥐었다 편 끝에, 나는 조심스럽게 은겸의 어깨를 붙잡았다. 흠칫 놀란 그가 뒤를 돌아보았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힘들면 열지 마.”
내 호기심을 충족시키려고 무리하게 강요하고 싶지는 않았다. 짧게 한숨을 내쉬곤 은겸이 내 손을 툭툭 두드렸다.
“괜찮아. 나도 언젠가 열 생각이었어.”
기운을 차린 은겸이 열쇠를 들어 손잡이에 꽂았다. 곧 달칵 소리가 나며 문이 열렸다.
“들어가 봐.”
한 걸음 물러선 은겸이 내게 길을 양보했다. 나는 그를 스쳐 지나 방 앞에 섰다. 좁은 문틈으로 보이는 안쪽은 조금 어두웠다. 손잡이를 쥐고 밀자 문이 활짝 열렸다.
마침내 드러난 방은 텅 비어 있었다.
그저 휑하다는 감상 외에는 무엇도 느낄 수 없었다. 방은 서재보다 넓어 보였지만 가구 하나, 생활용품 하나 없었다. 특별한 것이라곤 창문에 달린 하늘색 커튼이 전부였다. 바닥에는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오랜 시간 폐쇄된 곳에서 나곤 하는 꿉꿉한 냄새도 풍기지 않았다. 시간이 멈춘 듯 고요한 공간 속에 들어설 용기가 나지 않았다. 나는 은겸을 돌아보았다.
텅 빈 방 한가운데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은겸이 중얼거렸다.
“여긴 내 전 부인들이 쓰던 방이야.”
“…….”
“첫 번째로 결혼했을 때부터 이 집에서 살았어. 이혼 후에 이사했어야 했는데, 그러지를 못해서. 그냥 방만 잠가 둔 거야.”
씁쓸한 미소를 지은 그가 몸을 돌렸다.
“열쇠 꽂아 놨으니까 다 보면 잠가 줘.”
거실로 돌아가는 은겸을 붙잡을 수 없었다. 소파에 앉은 은겸이 이마를 감싸 쥐었다. 괜한 짓을 해서 은겸의 상처를 건드린 게 아닐까. 뒤늦게 후회가 일었다. 나는 텅 빈 방을 마지막으로 둘러보고 문을 닫았다. 뻑뻑한 열쇠를 돌려 잠그는 내내 덜컥거리는 소음이 귀를 울렸다.
새삼 은겸의 집이 크게 다가왔다. 이곳은 혼자 살기에는 지나치게 넓었다. 처음 묵었을 때부터 느꼈던 허전함이, 빈 방 안을 보고 나니 더욱 커졌다. 왜 은겸이 이 방을 잠가 두었는지 그제야 이해할 수 있었다. 두 번의 결혼 생활을 마치고 혼자서 살기 시작하게 되자 이 황량함을 감당할 수 없었으리라. 집 안 구석구석 타인의 흔적이 남아 있기에 더욱 쓸쓸했을 테니.
은겸이 방에 숨겨 둔 것은 전 부인들의 기억이었다.
발소리를 죽여 거실로 갔다. 열려 있는 서랍장에 열쇠를 넣고 닫자 은겸이 중얼거렸다.
“담배 괜찮아?”
“피워.”
담배를 꺼낸 뒤에도 은겸은 베란다로 나가지 않았다. 소파 위에서 그대로 담배를 입에 물었다. 나는 그의 옆자리에 가서 앉았다. 신기하게도 냄새가 거의 나지 않았다. 비흡연자인 나를 배려해서 신상품을 사 온 모양이었다.
새로 꺼낸 장초가 반 토막으로 줄어든 뒤에야 은겸은 약속했던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자는 무리를 짓는 거 알지?”
“프라이드 말이지.”
고등학교 생물 시간에 배웠던, 사자의 무리를 가리키는 단어가 기억났다. 고개를 끄덕인 은겸이 말을 이었다.
“내가 어릴 적에 속해 있었던 프라이드는 아버지가 둘, 어머니가 일곱이었어. 누나와 형은 여덟 명이었고.”
한 번도 사자와 친해져 본 적이 없어서일까. 솔직히 충격적인 발언이었다. 물론 사자가 여럿이서 무리를 짓는다는 것은 알았지만, 두 명의 아버지와 일곱 명의 어머니, 게다가 아홉 명이나 되는 자식으로 이뤄진 가족이라니. 아버지 없이 자랐고, 어머니와도 성인이 된 이후 헤어져 지냈던 내게 은겸이 설명한 가족의 형태는 기이하게까지 느껴졌다. 내 표정에 마음이 드러났는지 은겸이 웃었다.
“이상하지? 사자는 한꺼번에 여러 명과 사귀고, 동시에 여러 사람과 결혼해. 다들 당연하게 여겨. 우리는 사자니까.”
“…….”
“하지만 나는 내 부모들처럼 살고 싶지 않았어. 어릴 때부터 늑대처럼 평생 하나의 짝만 바라보며 살겠다고 마음먹었거든.”
“아. 그건 나도 그래.”
“정말?”
“응. 늑대들 부럽더라.”
예주를 떠올리며 나는 긍정했다. 내 맞장구에 힘을 얻었는지 은겸이 입술을 떼었다.
이어진 설명은 사자의 프라이드에 관한 것이었다. 은겸은 프라이드가 서로에 대한 사랑과 신뢰로 묶인 공동체라는 점을 강조했다. 단순히 파트너의 수가 다른 사람들보다 많을 뿐 다른 가정과 다르지 않다거나, 프라이드 안에서는 모두가 대등한 파트너이며 어머니와 어머니, 아버지와 아버지가 사랑하기도 한다거나, 구성원의 추가나 제외는 전체의 합의를 거쳐야만 한다는 예를 들면서.
“자식들과의 관계도 마찬가지야. 부모님 중, 또는 자식들 중 한 사람에게만 특별히 정을 주지 않도록 교육해. 그래서 아이가 생겨도 생물학적 아버지가 누구인지 가르쳐 주지 않아.”
설명을 들을수록 얼굴이 달아올랐다. 사자들은 난교를 즐기는 문란하고 가벼운 종이라고 여겼던 지난날의 내가 떠올라서였다.
“프라이드 자체에 불만은 없었어. 가족 모두를 사랑하고, 모두에게 사랑받았으니까. 그런데 내 성향이 문제였어.”
“성향?”
“나는 프라이드를 만들 수 없는 사자거든.”
은겸의 입꼬리가 위로 올라갔다.
“나는 이종성애자야.”
“아…….”
무심코 흘린 소리에 은겸이 빙긋 미소를 지었다. 새어 나오려는 숨을 참으며 입술을 깨물었다. 곰인 나와도 무리 없이 잠자리를 가지는 은겸을 보며 동종성애자는 아닐 거라고 예상했지만 이종성애자일 줄은 몰랐다.
수인 사회의 대부분은 동종(同種)성애자다. 다양한 종이 존재하는 사회일수록 더욱 혈통을 지켜야 한다는 순혈주의 때문에 일부러 동종과 연애하는 이들도 존재한다. 이념적인 부분을 차치하더라도 동종성애는 다수에 속한다. 사람은 본능적으로 자신과 비슷한 구석이 있는 이들에게 끌리게 마련이니까.
물론 자신과 다른 이들에게 매력을 느끼는 경우도 많다. 사실 수인의 60% 정도는 다종(多種)성애 성향을 지녔으며 계기만 주어진다면 내면의 성향을 깨닫게 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마치 곰만 만나 왔던 내가 토끼인 정운이에게 강렬하게 이끌리면서 다종성애자임을 자각했던 것처럼.
다종성애자와 이종성애자는 조금 다르다.
“나는 사자에게 그 어떤 연애 감정도 느끼지 못해. 성욕조차도.”
이종(異種)성애자는 자신과 같은 종을 사랑하지 못하는 존재다. 그들은 같은 종과 연인이 되거나 가정을 이루지 못한다. 그래서 대부분의 이종성애자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과 후손을 만들 수 없다. 어렵게 가지더라도 생식 능력을 지니지 못한 아이밖에 태어나지 않는다.
은겸은 싱글거리는 표정을 지우지 않고 계속 말했다.
“정확히 말하면 이과(異科)성애자. 나는 고양잇과에게 끌리지 않아. 호랑이든, 표범이든, 재규어든, 하다못해 소형 고양이 종조차도. 다른 사람들보다 좀 더 까다로운 거겠지.”
“…….”
“곰만 사랑할 수 있어. 곰이 아닌 그 어떤 종에게도 관심이 안 생겨. 아주 어릴 때부터 그랬어.”
“그거…….”
“응. 나는 곰성애자야.”
말문이 막혔다. 차마 은겸을 마주 볼 수 없었기에 나는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자신과는 다른 특정 과나 종만을 사랑하는 이들은 이종성애자 중에서도 극소수다. 전 세계에 존재하는 수인은 150과가 넘으며, 세부 종으로 나누면 6,000여 종에 달한다. 친하지 않은 상대의 종 특성을 정확히 알지 못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세상에는 너무나 다양한 수인 종이 존재한다.
하지만 곰성애자인 은겸에게는 그 수많은 선택지가 없다.
“곰들이 얼마나 독립적인지는 나보다 네가 더 잘 알겠지. 그래서 나는 프라이드를 만들 수 없어. 곰에게 사자의 습성을 강요하면 불행해질 테니까.”
은겸이 긴 꼬리를 느릿하게 흔들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힘들게 하느니 차라리 내가 사자로서 살지 않겠다고 결심했어. 한 사람과 평생을 약속하는 가족을 동경하게 된 계기가 그거야.”
밀려드는 안타까움을 삼키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은겸의 판단이 옳았다. 내 부모가 그랬듯 곰은 발정기가 아닐 때는 홀로 생활한다. 하물며 타인과 배우자를 공유하는 프라이드라니. 이 세상 어떤 곰도 수용하지 못할 것이다. 왜 사자인 은겸이 프라이드가 아닌 일부일처제의 결혼 형태를 선택했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그렇게 진지한 마음으로 결혼에 임했으면서, 왜 헤어졌을까.
미리 예고했던 대로 은겸의 이야기는 다시 길어졌다.
“첫눈에 반한다는 말을 믿어?”
큰 기대가 실리지 않은 목소리로 물으며 은겸이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짧게 답했다.
“믿어. 나도 그랬으니까.”
“나는 매번 첫눈에 반했어.”
은겸이 말하는 ‘매번’이 무엇을 뜻하는지 파악하기란 어렵지 않았다. 결혼 상대에 대한 이야기였다.
“첫 번째 결혼을 스무 살 때 했어. 둘 다 대학생이었을 때.”
“스무 살?”
“응. 어렸지.”
자조적으로 중얼거린 은겸이 숨을 길게 내쉬었다.
“만난 지 3개월 만에 결혼했어.”
“……대단하다.”
“그만큼 사랑하기도 했지만, 빨리 프라이드를 나와서 내가 일반적인 사자와 다르다고 증명하고 싶었어. 가족들도 적극 지원해 주었고. 사자들은 다 자란 자식이 프라이드에 있는 걸 반기지 않으니까. 이 집도 독립 선물 겸 결혼 선물로 받은 거야.”
나는 은겸이 언제나 깔끔하게 유지하는 집을 새삼 둘러보았다. 스무 살이 된 아들에게 주는 독립 선물치고는 과하지 않나 싶어도, 결혼 선물이라면 어느 정도 납득이 갔다. 이 넓은 집을 터전으로 자신만의 가정을 만들었다며 기뻐했을 어린 은겸을 상상하자 입맛이 썼다. 10년 후 그의 옆에는 생일이나 명절을 함께 보낼 사람 한 명 남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서로의 사생활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안방은 함께 쓰는 곳으로, 나머지 두 방은 각자 쓰는 방으로 정했어. 그래도 처음에는 안방에서 계속 함께 생활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 사람이 자기 방에서 나오지 않더라.”
담배를 입에 무는 은겸과 눈을 맞추었다. 시선으로 묻자 은겸이 답했다.
“나와 마주치고 싶지 않았대.”
그가 자조적으로 털어놓은 이야기는 우울했다. 즐거운 내용은 아닐 거라 예상했지만 그보다 더했다.
은겸과 첫 아내의 결혼을 환영한 건 은겸의 프라이드뿐이었다. 은겸의 아내의 주위 사람들은 모두 그 결혼을 반대했다. 은겸이 사자이기 때문이었다. 프라이드를 구성하지 않고 한 사람하고만 평생을 보낼 것이라는 혼인 서약서를 곧이곧대로 믿는 이는 많지 않았다. 조금만 지나면 은겸이 약속을 철회하고 다른 배우자를 데려올지도 모르니 조심하라는 충고가 쏟아졌다.
불같은 사랑이 식자 현실이 눈에 들어왔다. 은겸의 아내는 점차 자신의 남편이 의심스러워졌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은겸은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서글서글한 데다, 모두에게 사랑받는 매력적인 사자였다.
“내가 너무 능숙하니까. 너무 다정하게 대하니까. 도리어 불안했던 거야. 내가 자기를 단 한 명뿐인 배우자로 보는 게 아니라, 프라이드 중 한 명으로 관리하는 것 같아서.”
“…….”
“의심이 쌓이면서 언젠가부터는 얼굴도 보기 싫었대. 그걸 직접 말하는 대신, 그냥 만나는 시간을 줄인 거야. 헤어지기 한 달 전부터는 하루에 한 번 얼굴 보기도 힘들었어.”
안타깝게도 은겸은 이혼 직전까지 자신의 부인이 왜 자신을 피하는지 알지 못했다. 자꾸만 멀어지는 아내를 어떻게 잡아야 할지 몰랐던 그는 자신이 잘하는 것, 그러니까 스킨십으로 관계를 회복하려 했다. 몸으로 계속 애정을 표현하면 달라지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그럴수록 은겸의 아내는 은겸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꾹꾹 참으며 은겸과의 관계를 받아들이던 은겸의 아내는 어느 날 더는 견디지 못하고 터져 버렸다. 자꾸만 다가오는 은겸이 부담스럽고 싫다고, 더는 부부로서 지내고 싶지 않다고 진심을 털어놓았다. 은겸에게는 청천벽력 같은 선언이었다.
“좀 더 일찍 불안하다고 알려 줬다면 결말이 달라졌을까. 글쎄, 그건 솔직히 모르겠어. 사자는 당연히 그럴 거라고 확신을 가진 상대 앞에서는 별수가 없더라. 내가 종을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고.”
회의적으로 중얼거리며 은겸이 재떨이에 재를 털었다.
“그래서 섹스할 때 얼굴이 안 보이는 자세를 싫어해. 상대가 어떻게 느끼는지 알고 싶어. 억지로 참는 건지, 아니면 진짜로 기분 좋은 건지. 확인하지 않으면 또 내가 억지로 밀어붙이는 걸 수도 있으니까.”
그러고 보면 은겸은 나와의 잠자리에서 단 한 번도 뒤에서 덮치는 체위를 취하지 않았다. 그냥 개인적인 취향인 줄 알았는데, 이런 사정이 있었을 거라곤 몰랐다.
어깨를 으쓱인 은겸이 나를 돌아보았다.
“첫 아내 얘기는 그걸로 끝.”
“……응.”
“재미없었지?”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침묵을 지켰다. 일부러 꾸민 듯 가벼운 어조로 은겸이 덧붙였다.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마. 다종 가정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야. 서로의 종 차이를 넘어서지 못하고 이혼하는 거.”
“…….”
“내 아버지는 두 명이라고 했었지. 사실 법적으로는 한 명이야.”
“어…….”
“내가 어렸을 때, 아버지 한 명이 새로운 파트너와 이종 결혼을 했어. 프라이드가 뒤집혔지. 다른 종을 프라이드의 일원으로 받아들이는 것보다 더 큰 문제가 있었거든. 새 파트너분에게 아이가 있었어.”
“그게 왜?”
“사자는 프라이드 바깥에서 태어난 아이를 절대 같은 무리로 인정하지 않아. 그런데도 아버지는 그 애를 자기 자식으로서 돌보겠다고 했어. 나와 내 형제들을 버리고서라도.”
이전에 은겸이 언급했던 ‘복잡한 가정사’라는 표현이 떠올랐다. 나는 그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그래서 어머니들이 결정을 내렸지. 아직 젊었던 아버지가 우리 프라이드의 유일한 성인 남성으로 남고, 그 아버지는 프라이드에서 제명됐어.”
“…….”
“법적으로 남남이 되었지만 그분을 종종 만나러 갔어. 그분이 내 생물학적 아버지일 수도 있으니까. 쉽게 끊을 수가 없더라. 새로 결혼하신 분의 아이도 동생으로 삼고 놀아 주었고.”
“사자가 아니라던 동생?”
“맞아. 같은 종이건 아니건 동생이 생기니까 마냥 좋더라. 프라이드에서는 내가 막내거든. 지금이야 촉진제 심부름이나 시키는 녀석이 됐지만, 예전에는 정말 귀여웠어.”
과거를 회상하는지 은겸의 표정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나는 용기를 내어 그의 손을 붙잡았다. 나를 돌아본 은겸이 눈을 접으며 웃었다.
“다종 가정이 어떤 건지도 그 아버지를 통해 배운 셈이고. 어릴 때는 아버지의 선택이 좋아 보이기만 했는데, 나중에 알았어. 모두가 말리는 결혼을 강행한 뒤에도 이혼을 여러 번 고민하셨다더라. 사랑만으로는 극복할 수 없는 문제가 있었겠지.”
순혈주의가 사회 전반에 퍼져 있던 100여 년 전에는 다종성애자들이 차별을 받았다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생식이 불가능한 종 간·성별 간 커플이 흔해진 요새는 누가 누구를 만나건 개인의 취향이라고 여길 뿐이다. 연령대가 낮을수록 그런 경향은 두드러진다. 내가 정운이를 좋아했을 때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처럼.
그런 사회적 분위기를 반영하듯 수십 년 사이 다종 커플 및 가정의 수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다종 연애 상담소나 가정 지원, 종 관련 기초 교육 같은 기본적인 지원 제도도 마련되었다. 내가 아는 지식도 모두 기본 교육 과정에서 얻은 것들이다.
물론 그러한 지원만으로는 현실적인 문제를 모두 해결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종이 다르면 가치관이나 생활 패턴도 다를 가능성이 크다. 그러니 오래가지 못하고 헤어지는 경우가 많을 수밖에.
“지금은 위기를 극복해서 잘 살고 계셔. 그래도 시간 날 때마다 뵈러 가려고 해. 내 동생이 독립한 뒤부터 두 분만 지내시거든. 프라이드가 없는 사자는 외로우니까.”
한숨 섞인 목소리를 낸 은겸이 재떨이에 꽁초를 비벼 껐다. 새로운 담배를 꺼낼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은겸은 묵묵히 재떨이 안을 들여다보았다.
“아버지한테 미리 경고를 들었는데도 나도 막상 다종 가정이 되니까 힘들더라. 뭐, 그 경험 때문에 내 회사를 만들었으니 전화위복이라고 해야 하나.”
“회사?”
“모르는구나, 내 회사.”
나를 돌아보며 은겸이 피식거렸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은겸의 명함에서 회사 이름을 보기는 했지만, 정확히 무슨 회사인지는 몰랐다. 은겸도 자신이 하는 일에 관해 내게 설명해 준 적이 없었다. 검색해 볼 생각이 아예 없던 건 아니었다. 그러나 은겸이 직접 가르쳐 주지 않았는데 내 멋대로 찾아보는 건 예의가 아닐 것 같아 그만두었다.
그래도 내가 너무 무심했나. 은겸에게 사과할까 망설일 때, 후회하지 말라는 것처럼 은겸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내 회사, 다종 가정을 위한 식단을 만드는 곳이야.”
“식단?”
“응. 고객의 종별로 맞춤형 식단을 짜서 매일 반찬을 제공하는 거야.”
그래서 곰의 식성에 대해서도 빠삭하게 꿰고 있었나. 다른 것도 아니고 점심 메뉴에 유독 관심이 많았던 이유도. 그건 그렇다 치더라도, 학교나 단체도 아닌데 개인별 식단이 얼마나 수요가 있나.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맞춤 식단이 필요한 집이 그렇게 많아? 그냥 잡식, 초식, 육식으로 구분하면 되지 않아?”
“아니지. 예를 들어 같은 잡식종이라도 개는 초콜릿을 못 먹지만 곰은 먹을 수 있잖아.”
“아…….”
“초식종 내에서도 그래. 코알라는 어떨까. 하마는? 식단이나 양이 같지 않지.”
“그러네.”
“다종 가정은 서로의 식성이 달라서 밥상을 두 번 차려야 하는 경우도 많아. 특히 맞벌이 부부는 매일 그러기 쉽지 않으니까 도움이 필요한 거고.”
은겸이 슬그머니 손깍지를 껴 왔다. 나는 힘주어 그의 손을 붙잡았다.
듣고 보니 다종 가정이었던 자신의 경험을 잘 살린 선택 같았다. 타인에게 도움을 주는 방식으로 과거의 상처를 극복하려 하는 발상 자체가 놀라웠다. 막연히 회사를 운영하는 사장님으로만 인식했던 은겸이 다르게 보였다.
“왜 하필 밥인지 궁금하지?”
“응.”
“나는 내 배우자와 매일 밥을 같이 먹는 게 소원이었어. 두 번째 부인과 식사 때문에 헤어졌거든.”
뜻밖의 고백이었다. 고작 밥 때문에 이혼할 수도 있나? 내 의문을 파악했는지 은겸이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꼭 거창한 계기 때문에 사이가 틀어지지만은 않아. 아주 단순하고 사소하지만 일상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더 큰 방해를 할 때도 있어.”
“잘 모르겠는데. 곰성애자라며. 그럼 두 번째 부인도 곰일 거 아냐.”
“맞아. 그 사람도 곰이었어.”
“사자하고 곰의 입맛이 아예 안 맞지는 않잖아.”
육식종인 사자와 잡식종인 곰은 부분적으로 식성이 겹친다. 그러니 은겸이 나와도 함께 식사할 수 있는 것이고.
“응. 보통 곰은 그렇지.”
제법 비장하게 운을 뗀 은겸이 이야기를 시작했다.
첫 결혼 생활에 종지부를 찍은 뒤로 은겸은 한동안 누구와도 만나지 않았다. 그러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직한 곳에서 운명이라고 느낀 사람과 만났다. 이혼한 지 4년 만이었다.
또다시 헤어지고 싶지 않았기에 은겸은 상대와 1년의 교제를 거친 끝에 결혼을 선택했다. 그가 스물다섯 살이었을 때의 일이었다. 하지만 두 번째 결혼 역시 9개월 정도밖에 이어지지 않았다. 은겸과 부인이 너무 많이 달랐기 때문이었다.
“2년 가까이 만나는 동안 한 번도 몸을 섞은 적이 없어. 그 사람의 발정기가 워낙 짧았고, 그 기간에도 귀찮다며 나를 피했어. 그래도 참을 수 있었어. 첫 결혼 때처럼 싫다는 사람에게 스킨십을 강요하고 싶지 않아서. 그런 건 나 혼자 처리하면 되니까.”
어.
“내가 그 사람에게 유일하게 바란 건 매일 식사 시간만이라도 마주 보고 앉아 이야기를 나누는 거였어. 싸우거나 바쁘더라도 함께 보내는 시간은 반드시 필요하니까. 그런데 그게 불가능했지. 고기 냄새가 난다고 싫어하더라. 그 사람은 한 가지 종류의 채소를 주로 먹는 종이었거든.”
은겸이 묘사하는 상대가 무슨 종인지 대강 감이 잡혔다.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혹시 그분 자이언트 판다…….”
은겸이 눈웃음을 지었다.
“응. 맞아. 내 두 번째 부인은 판다였어.”
아. 다시 말문이 막혔다. 하필 곰 중에서도 자이언트 판다라니. 사자인 은겸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힘든 사랑이었을 것이다.
자이언트 판다는 거의 모든 끼니를 대나무만으로 해결한다. 또한 자이언트 판다 여성의 발정기는 1년에 사흘뿐이다. 발정기 동안에도 웬만해서는 누군가와 함께 보내려 하지 않는다. 은겸처럼 성욕이 강한 사람이 거의 2년 가까이 참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였다.
“잠자리를 참는 것처럼 음식도 참으려 노력했어. 고기를 포기하고 대나무를 먹어 보기도 했어. 그게 부담스러웠대. 내가 자기를 위해서 모든 걸 포기하는 게. 이래서는 우리 둘 다 행복해질 수 없다고, 그냥 서로 다른 점을 인정하고 헤어지자고 그 사람이 먼저 이혼 이야기를 꺼내는데.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어.”
“한쪽이 일방적으로 희생하는 관계는 건강하지 않으니까. 절대 오래 갈 수 없어.”
언젠가 은겸이 했던 말이 떠올랐다. 당시 추측했던 대로 그 말은 은겸의 경험담이었다.
고개를 젖힌 은겸이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두 번째로 이혼한 뒤로 한동안 방황했어. 모든 게 곰밖에 사랑할 수 없는 내 잘못 같았지. 이럴 거면 왜 하필 사자로 태어났나 싶었고.”
“자책하지 마.”
“응. 지금은 괜찮아.”
전혀 괜찮지 않은 목소리였다. 전 부인들이 썼던 방을 계속 잠가 둔 것부터 옛 상처가 치유되지 않았다는 증거였다. 나는 은겸을 바라보았다. 그의 감정을 완벽하게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조금은 헤아릴 수 있었다. 나도 한때는 곰이고 싶지 않았다. 곰답지 않은 사고방식을 지녔는데도 곰으로 태어난 내가 잘못된 것만 같았다.
하지만 나 자신을 탓한다고 모든 것이 바뀌지는 않는다. 이렇게 태어난 이상 적응하며 사는 수밖에 없다. 내가 아무리 내 가슴의 흰 무늬를 문질러도 무늬는 지워지지 않는다. 설령 반달이 사라진다 하더라도, 나는 여전히 반달가슴곰이다.
그건 은겸도 마찬가지다.
“힘들 때 나를 도와준 사람들이 바로 프라이드를 나간 아버지의 가족이었어. 여러모로 챙기면서 사업 자금도 지원해 주셨거든. 그래서 지금은 나도 그분들을 도우려 해.”
말을 맺은 은겸이 나를 돌아보았다. 그는 한결 후련해진 얼굴이었다. 조금 전 방문을 열었을 때의 긴장 같은 것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제 지루한 이야기는 진짜로 다 했어. 전부 탈탈 털어서 더 들려줄 것도 없어.”
“…….”
“원재 너랑은 같이 밥을 먹을 수 있어서 정말 기쁘다. 발정기 이후에도 계속 만나 줘서 고맙고.”
한꺼번에 너무 많은 이야기를 들어서일까. 머리가 지끈거렸다. 은겸의 지나간 결혼 생활, 가족, 성향까지. 마구 뒤섞인 문장들을 반추하다가 나는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은겸에게 진심으로 사과해야 할 일이 있었다.
“오해해서 미안.”
“뭐가?”
“처음에 만났을 때 사자니까 아무하고나 가볍게 잘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나한테도 원나잇 제안을 꺼낸 줄 알았고.”
“괜찮아. 다들 사자를 그렇게 생각하는걸.”
아무렇지 않게 내 사과를 받아들인 은겸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네 그런 올곧은 면을 좋아해. 남에게 잘 보이려고 거짓말을 하거나 너를 과대 포장하지 않는 거.”
“난 요령이 없으니까.”
“먼저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는 것도 진짜 강한 사람만 할 수 있어.”
“…….”
“원재야, 너는 진짜 괜찮은 사람이야.”
사과하려다 도리어 칭찬을 받고 말았다. 이러려고 말한 게 아닌데. 멋쩍어져서 나는 말을 돌렸다.
“……너도 멋있어.”
“응?”
“네 회사. 네가 겪은 힘든 시간을 다른 사람들이 겪지 않도록 돕는 거잖아. 아무나 못 하는 일 같아.”
“고맙다. 원재 너한테 인정받으니까 뿌듯한데?”
“나중에 결혼하면 이용하려고 직접 만든 건 아니겠지.”
농담 삼아 던진 말에 은겸이 고개를 저었다.
“글쎄. 세 번째 결혼은 반드시 첫눈에 반한 사자하고 할 생각이라서. 그래야 또 이혼하지 않을 것 같거든.”
첫눈에 반한 사자?
은겸은 멍한 내 얼굴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
“내가 너무 돌려 말했지. 다시는 누구와도 결혼하지 않겠다는 소리야.”
말을 마친 은겸이 내 손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거운 얘기는 여기까지만 하자.”
거실을 벗어난 은겸이 화장실로 향했다. 나는 멀어지는 은겸의 넓은 등을 바라보았다. 방금 들은 이야기의 마무리가 영 찜찜했다. 어쩐지 발 앞에 선이 그인 듯한 느낌이었다. 가만히 손가락을 굽혀 주먹을 쥐었다. 조금 전까지 은겸의 온기가 머물렀던 손안이 허전했다.
은겸이 마지막으로 밝힌 결혼에 관한 결심은 솔직히 놀라웠다. 하지만 두 번이나 이혼을 겪은 당사자가 그러겠다는데, 그건 내가 간섭할 영역이 아니었다. 그보다 은겸이 곰성애자라는 점이 뒤늦게 마음에 걸렸다.
은겸이 나를 챙기고 내 기호에 맞출 수 있었던 이유는 특별히 눈썰미가 뛰어나서가 아니었다. 그가 곰을 좋아하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사자와 친해진 건 처음이라 서툴기만 한 나와 달리 곰성애자인 은겸은 곰을 대하는 것도, 곰과 함께하는 시간도 익숙할 터였다. 언제나 여유로웠던 태도도 그래서 가능했고.
은겸이 내게 품은 감정도 그 정도에 지나지 않는 걸까. 결국 내가 곰이라는 이유 하나로 접근한 것이나 다름없는데. 나를 단순히 ‘곰’으로만 보고 있을까. 그를 스쳐 간 배우자들의 빈자리를 대체할 곰으로.
혼자 찜찜하게 여겨 봐야 결론은 나오지 않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로를 오해하지 않으려면 나도 궁금한 점을 털어놔야 했다. 이제는 그러기로 했으니까.
은겸을 쫓아 화장실 문 앞에 섰다. 솔직하게 묻자고 작정한 것까지는 좋았는데 첫 마디가 입에서 잘 튀어나오지 않았다.
“……그럼.”
칫솔을 입에 문 은겸이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입술을 잘근거리다가 간신히 물었다.
“그럼 나도 그냥 곰이라서 만나는 거야?”
은겸은 내 말을 즉각 반박했다.
“설마. 그럴 리가 없잖아.”
“그래도…….”
“물론 네가 곰이라서 이끌린 건 맞아. 하지만 원재야. 아무리 내가 곰성애자라도 세상의 모든 곰을 좋아하진 않아. 너도 남자라면 무조건 다 좋아하는 거 아니잖아.”
아. 완벽한 비유였다. 괜스레 목덜미를 만지며 고개를 숙였다. 은겸의 나직한 목소리가 화장실을 울렸다.
“그리고 아까 얘기하지 않았나?”
“뭘.”
“나는 매번 첫눈에 반했다고.”
“…….”
“너도 마찬가지야. 처음 본 순간 반했고, 그래서 취한 너를 내 집으로 데려왔던 거야.”
은겸과 처음 만난 날이라면 취해서 난동을 부린 추태밖에 떠오르지 않는데 대체 뭐에 반했다는 말인지. 더 캐물으면 내 무덤을 팔 것 같았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얼굴이 화끈화끈했다.
잠시 대화가 끊기자 은겸은 양치질을 마저 했다. 별달리 할 말도 없었기에 나는 그를 구경했다. 입을 헹구고 수건으로 물기를 닦은 은겸이 거울을 통해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불쑥 제안했다.
“이제 키스할까?”
“갑자기 무슨 소리야.”
“고백할 거 다 털어놨으니 우호를 다지자는 의미로.”
하. 나는 한숨을 쉬었다. 꺼림칙했던 거리감은 어디로 갔는지, 평소의 은겸이 돌아와 있었다. 거울에 비친 은겸이 내게 눈을 찡긋거렸다.
“모든 걸 다 알고 나면 내게 정이 떨어지지 않을까 했는데. 표정을 보니 아닌 것 같네.”
정이 떨어질 내용이 있었던가. 곱씹는 대신 나는 가볍게 턱짓했다.
“할 거면 빨리 해.”
“응?”
“키스한다며.”
말을 마치기도 전에 은겸이 소리 내어 웃었다. 그를 따라 나도 피식 실소했다. 은겸이 바깥으로 걸어 나오기 전, 나는 먼저 걸음을 옮겼다. 문턱을 넘어 화장실 안으로 들어가 은겸의 목을 끌어안았다.
은겸은 망설이지 않았다. 곧바로 내 허리를 안은 은겸이 입술을 겹쳤다. 얽히는 혀에서도, 내 턱을 붙잡은 손에서도 담배의 흔적은 느껴지지 않았다. 키스하자는 말은 그냥 던져 본 싱거운 농담이 아니었다. 이러려고 담배를 끄자마자 곧바로 화장실로 직행해 담배 냄새와 맛을 지워 낸 거였다.
깨달은 순간 더욱 격렬히 은겸의 혀를 빨아들였다. 살짝 얼얼할 정도로 얽히는 혀에서 민트 맛이 났다. 기분 좋은 맛이었다.
***
─오늘도 야근?
“응. 끝나면 전화할게.”
─알았어. 점심은 뭐 먹었어?
“쌀국수.”
─쌀국수집 저번 달에 가지 않았어? 맛없었다며.
“아, 회사 근처에 하나 생겼어. 거긴 괜찮더라.”
자신의 치부라 할 수 있는 과거를 모두 드러낸 이후, 은겸은 분위기가 조금 달라졌다. 변화는 나를 대하는 태도에서부터 티가 났다. 중요한 일에서는 한 걸음 물러나던 거리감이나, 계속 내 존재를 확인하려는 듯한 간절함은 약해졌다. 반면 내 일거수일투족에 집중하려는 모습은 전보다 더 많아졌다. 이전과 비교하면 아주 약간 바뀌었을 뿐인데 무척 편안했다.
“이것도 반달가슴곰 식단 자료로 쓰려고 하는 리서치야?”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은겸에게 품었던 꺼림칙함을 모두 털어 낸 덕분일까. 그에게 가벼운 농담을 던질 수 있을 정도의 여유가 생겼다. 그래 봐야 은겸의 발끝에도 못 미쳤지만.
─아니. 당연히 너랑 저녁 뭐 먹을지 정하려고 묻는 거지. 점심 메뉴랑 겹치면 안 되잖아.
“…….”
─내가 참고하는 건 원재 너뿐이야.
“……응.”
장난의 대가는 낯부끄러운 카운터 어택이었다. 나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짧은 통화를 끝내고 사무실로 돌아갈 무렵만 해도 나는 은겸 생각을 떨쳐 내지 못했다. 야근 때문에 만나지 못한다고 말해 두었지만, 그래도 퇴근 후 잠깐이라도 얼굴을 보고 싶었다. 은겸의 의향을 묻기 위해 메시지 어플을 열면서 사무실 안으로 들어섰다.
생각지도 못한 공지가 날아온 것은 그때였다.
“아, 김 주임. 이따 회식 잡혔어. 무조건 참여해.”
어? 스마트폰에 고정했던 시선을 들어 올렸다. 조용한 사무실 한가운데에 과장님이 서 있었다. 나를 보는 과장님의 둥근 눈망울에 시름이 가득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미리 전달받은 적도 없는데 갑자기 잡힌 일정이 당황스러웠다. 게다가 일이 밀려 오늘도 내일도 야근이 확정된 상황에서 회식이라니. 순순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오늘 야근…….”
“됐으니까 일은 내일 하고 오늘은 회식 가.”
“무슨 일 있습니까?”
아무리 회식을 좋아하는 과장님이라도 일을 마다하고 강요할 분이 아니었다. 조심스럽게 묻자 과장님이 입맛을 다셨다.
“한 부장님이 자리 좀 만들자고 하시네.”
“한 부장님요?”
“우리 부서 한 명도 빠짐없이 오라고 하셨으니까 적당히 비위 좀 맞추다가 해산하자고. 알겠지?”
주최자가 누구인지 듣자 더욱 회식에 참여하기 싫어졌다. 한 부장님은 우리 팀에 큰 관심이 없는 분이었다. 사내에서 기회주의자로 유명한 사람이니 우리 같은 아랫사람이 아니라 위쪽과 친목을 다지는 쪽이 먼저일 텐데. 무언가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했다.
의심스러워도 직접 물어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과장님이 일부러 업무를 방해하려고 날을 잡은 것도 아니고. 알겠다는 말과 함께 내 자리로 돌아갔다. 우리를 지켜보던 팀원들의 뚱한 얼굴들이 모니터 너머로 사라졌다. 혹시라도 내가 회식을 말려 주지 않을까 기대한 모양이었다. 과장님 한 사람이라면 설득할 수 있었겠지만 그 이상은 무리였다. 나는 가볍게 어깨를 주물렀다.
이러나저러나 야근이 불가능하니 급한 일부터 최대한 빠르게 처리해야 했다. 업무용 메일을 띄워 놓고 커리큘럼 파일을 열었다. 은겸에게 만나자는 메시지를 보내지 않은 게 그나마 다행이었다.
퇴근 시간이 올 때까지 커피 한 잔 마실 틈이 없었다. 조금 숨을 돌릴라치면 강사들에게 연락이 날아왔다. 각자 자기 일이 제일 시급하다며 재촉하는 이들에게 시달리는 사이 6시가 다가왔다. 5시 반이 넘자 과장님은 사무실에서 가장 초조한 사람이 되었다. 안절부절못하며 시계만 보던 과장님이 벌떡 일어났다.
“부장님 모시러 갈 테니까 시간 되면 슬슬 정리하고 1층으로 내려와.”
과장님이 사무실 밖으로 나가자마자 여기저기서 원성이 쏟아졌다.
“한가한 시즌 다 놔두고 왜 하필 이 바쁠 때 회식이래. 부장님이 대신 일해 줄 것도 아니면서.”
“한 부장님 밉상인 건 진짜 알아줘야 돼.”
“과장님이 부장님한테 찍힌 거 아닐까요. 부장님 안 그런 척하면서 한번 눈에 벗어나면 집요하게 괴롭힌다면서요. 과장님이 그래서 승진 못 하신다는 얘기가 있던데.”
“그럴 거면 과장님만 불러야지. 우리는 왜 불러내.”
팀원들의 이야기를 적당히 한 귀로 듣고 흘리면서 내일 할 일의 우선순위를 체크했다. 아무래도 일정을 맞추려면 주말 출근을 불사해야 할 듯했다. 이번 주말은 은겸과 함께 보내고 싶었는데. 아쉽지만 어쩔 수 없었다.
“주임님, 가요.”
어느새 퇴근 준비를 마쳤는지 신입이 파티션 너머로 불쑥 솟아올랐다. 나는 서둘러 컴퓨터를 끄고 짐을 챙겼다. 상사들의 앞에서는 털어놓지 못할 불평을 계속 늘어놓는 팀원들의 사이에 섞여 사무실을 나섰다.
다들 일찍 퇴근하는지 복도는 다른 부서 사람들로 웅성거렸다. 그 틈에서 반가운 얼굴이 보였다. 효영이 엘리베이터 앞에 서 있었다. 나를 발견한 효영이 눈짓으로 인사를 보냈다. 나는 별생각 없이 효영에게 다가갔다.
“퇴근?”
심각한 표정으로 효영이 고개를 저었다.
“회식.”
“너희 팀도?”
“아니, 원재 너네 팀이랑 가는 거야.”
“어? 우리 팀 회식에 온다고?”
“한 부장님이 나까지 부르시더라.”
“너를? 왜? 너 술도 약하잖아.”
“알 게 뭐야. 부장님이 가라면 가야지.”
투덜거린 효영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래로 이어진 검은 아이라인 때문에 울상처럼 보여도 눈썹이 사납게 올라가 있었다.
“아무튼 그렇게 됐어. 잘 부탁한다.”
나도 내키지 않는 자리였지만, 다른 팀 회식에 끼어드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효영은 부담이 더할 터였다. 나는 효영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무리해서 마시지 마. 부장님이 권하면 나한테 적당히 넘겨.”
“한 부장님 소문난 주당인 거 모르냐. 너도 대적 못 할걸. 둘이서 나누자.”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하나둘 안으로 들어서던 팀원들이 나를 돌아보았다.
“김 주임님. 안 오고 뭐 하세요.”
“아, 효영이도 회식 같이 간대서요.”
“네?”
팀원들은 당황한 듯 나와 효영을 번갈아 보았다. 효영이 한숨을 푹 쉬었다.
“한 부장님이 부르셨어요.”
“아…….”
사람들의 입에서 동시에 탄식이 흘러나왔다. 진심 어린 반응이었다. 쓴웃음을 짓곤 나는 효영과 함께 엘리베이터에 탔다.
***
술집은 벌써 북적였다. 목요일이라 회식을 진행하는 곳이 많은지 여기저기 회사원으로 보이는 무리가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카운터에 내 이름을 대자 직원이 우리를 예약 테이블로 안내했다. 앞장서서 걷던 과장님과 부장님이 나란히 자리를 잡고 앉을 때까지 팀원들은 머뭇거리며 뒤쪽을 지켰다. 속내를 읽은 과장님이 눈을 부라렸다.
“뭐 해, 다들. 앉지 않고.”
속눈썹이 길게 드리워진 둥그런 사슴의 눈은 아무리 치떠도 위협적이지 않았다. 재빠르게 움직인 사람들은 부장님에게서 제일 먼 자리부터 채웠다. 일행의 맨 뒤에 있던 효영과 내게는 선택권이 없었다. 우리는 상사들과 마주 보는 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부장님 모시고 회식 온 건 처음 같네요.”
“안주 뭐 시킬까요?”
“나는 술이나 마실 테니까 자네들 먹고 싶은 거 시키라고.”
“그래도 저녁은 드셔야죠. 치킨 괜찮으세요?”
처음에는 상사들의 비위를 맞추며 웃던 사람들은 주문한 음식이 나온 뒤부터 자기들끼리 화기애애해졌다. 안주를 기준으로 자리가 나뉜 탓이었다.
우리 팀끼리 회식을 할 때면 과일 안주로 통일하곤 했지만, 이번은 사정이 달랐다. 담비인 한 부장님도, 치타인 효영도 육식종이었다. 어쩔 수 없이 초식종이 먹을 수 있는 과일 안주와 육식종이 먹을 수 있는 고기 안주를 둘 다 시키다 보니 자연스럽게 테이블 위에 보이지 않는 선이 그어졌다. 나와 효영은 상사들의 테이블에 고립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나마 내가 잡식종이라 다행이었다. 과일 안주 쪽이 훨씬 매력적이었지만 효영을 혼자 내버려 둘 수 없었다. 얼음물 한 잔을 주문하고 나는 효영 쪽으로 몸을 틀어 앉았다. 어두웠던 효영의 얼굴이 한결 밝아졌다.
정작 안주를 마음대로 시키라던 부장님은 술자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였다. 맥주부터 시작하자는데도 기어이 소주를 시켜 놓고서는 부장님이 입맛을 다셨다.
“오늘은 회에 매운탕이 당겼는데 말이야.”
“다음에 제가 좋은 곳으로 모시겠습니다.”
“관둬. 신 과장 생선은 먹지도 못하면서. 가서 상추만 꾸역꾸역 씹어 먹을 셈이야?”
과장님에게 핀잔을 준 부장님이 효영을 건너다보았다.
“입맛이 맞아야 술자리도 편하지. 안 그래, 이효영 씨?”
“……예. 그러게요.”
“육식종끼리 언제 또 한 번 뭉치자고.”
부장님이 잔을 들어 올렸다. 마지못해 건배에 응한 효영은 술잔을 살짝 입에 대었다가 뗐다. 나는 효영의 안색을 살폈다. 내가 아는 효영의 주량은 맥주 한 캔이었다. 소주는 써서 제대로 마시지도 못할 텐데, 어쩌자고 무작정 잔을 받았는지. 그저 걱정될 뿐이었다.
부장님이 효영에게 술을 권하기 전에 선수를 치는 편이 나을 듯했다. 나는 먼저 술병을 들었다. 빈 부장님의 잔에 술을 따르자 부장님이 눈을 빛냈다.
“오, 그래. 내가 또 우리 김원재 씨한테 한 잔 받아야지.”
술잔 가득 술을 채우도록 시키면서 부장님이 손을 휘휘 저었다.
“저번에는 내가 김원재 씨한테 실수했어.”
“예?”
“파트너가 있는 줄도 모르고 괜한 소리를 해서 미안하네.”
“아닙니다. 저야말로 죄송합니다.”
무슨 의미인지 못 알아들었는지 효영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회사 안에 소문이 났을 줄 알았더니, 소문내기도 민망한 단어라서 의외로 퍼지지 않았나 보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나는 고개를 숙였다.
얼음물을 가져온 직원 때문에 부장님과의 대화는 잠시 중단되었다. 나는 컵을 받아서 효영에게 내밀었다. 눈짓으로 감사를 표하며 효영이 물을 마셨다. 효영의 잔이 얼마나 비었는지 확인하면서 무심코 시선을 돌리다가 나는 흠칫 몸을 떨었다. 부장님이 우리를 흥미롭게 바라보고 있었다. 황급히 술병으로 손을 뻗었다가 거둬들였다. 부장님의 잔은 아직 가득 차 있었다.
고개를 모로 기울이며 부장님이 나를 빤히 보았다.
“그, 결혼 생각은 있고? 아, 김원재 씨 곰이라서 안 하려나?”
대충 넘어가는 줄 알았는데, 내 사생활에 흥미를 계속 보이는 부장님이 신경 쓰였다. 시선을 피하며 나는 말을 골랐다. 가정을 꾸리는 게 오랜 소원이니 당연히 기회가 되면 결혼하고 싶었다. 하지만 세 번째 결혼은 첫눈에 반한 사자와 하겠다던 은겸을 떠올리자 입맛이 썼다.
“……하고 싶지만 당분간은 생각 없습니다.”
“왜? 나이도 찼겠다. 슬슬 생각해야지.”
“평생을 함께할 상대인데 신중하게 고르고 싶습니다.”
부장님이 혀를 찼다.
“그런 사람이 섹스 파트너나 만들어서 놀고 있으면 쓰나.”
풉. 효영이 마시던 물을 뿜었다. 자신의 행동에 더 놀란 듯 효영은 허둥지둥 휴지를 뽑아 들었다. 부장님의 눈치를 살피며 나는 효영을 도와 테이블을 닦았다. 젖은 휴지를 내려놓은 효영이 나를 돌아보았다.
아예 작정하고 이야기를 꺼낸 것인지 부장님은 거침없었다.
“젊은 사람이 말이야. 너무 노는 데만 집착하지 말라고. 피임은 제대로 하는 건가? 그러다 덜컥 애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이종에 동성이라서 안 생깁니다.”
“아, 그래? 그럼 또 이야기가 달라지지.”
부장님이 히죽 웃었다.
“그거 참 편하겠구먼. 그래서 서로 즐기기로 한 건가?”
“…….”
“요즘 사람들은 말이야. 뭐든 책임질 줄을 몰라. 제대로 자리 잡을 생각도 안 하고, 그저 눈앞의 즐거움에만 급급해서는 먼 미래를 못 본다고.”
큰 소리로 쯧쯧 혀를 찬 담비가 나를 흘겨보았다. 욱하고 올라온 감정을 억누르고자 이를 악물었다. 어쩐지 의심스럽더라니. 효영과의 만남을 거절한 나를 마음에 담아 두었다가 사람들 앞에서 무안을 주려는 게 분명했다.
‘설마 이러려고 효영이까지 불러서 회식을 잡았나.’
당한 만큼 갚아 주겠다며 씩씩대는 어린애도 아니고. 참 치졸한 복수다 싶었다. 때마침 건배를 제안한 과장님 덕분에 부장님의 시선이 옆으로 쏠렸다. 효영이 내게 몸을 기울이곤 소곤거렸다.
“무슨 파트너? 야, 이게 무슨 소리야.”
“있어. 그런 거.”
“애인이 아니었어? 와, 김원재. 순진한 줄 알았더니. 다시 봤다.”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된 거야.”
“둘이서 뭘 그렇게 쑥덕거려. 술이나 마시라고.”
그 짧은 새를 못 참고 부장님이 우리 대화에 끼어들었다. 나와 효영은 기계적으로 술잔을 잡았다. 작은 소주잔끼리 부딪치자 챙챙 하는 맑은 소리가 울렸다. 부장님이 안경 너머로 효영을 지그시 응시했다.
“이효영 씨는 유 대리랑 잘되어 가고?”
이건 또 무슨 소릴까. 답변도 기다리지 않고 부장님은 홀짝 잔을 비웠다. 효영이 어색하게 웃으며 술잔을 내려놓았다.
“네, 뭐. 이야기가 잘 통하는 분이라 좋네요.”
“잘됐네. 이 김에 진지하게 만나 봐.”
“인사팀 유 대리가 아직 미혼이었나 보죠?”
자꾸 우리하고만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부장님을 내버려 둘 수 없었는지, 과장님이 재차 대화에 끼어들었다. 내심 감사를 표하며 나는 효영에게 작은 소리로 물었다.
“너는 무슨 얘기인데. 유 대리님이 누구야.”
“부장님이 인사팀 분 소개해 주셨어.”
“뭐?”
“묻지 마. 나도 복잡하다.”
효영이 한숨을 폭 쉬었다. 하지만 그것뿐이었다. 금세 얼굴빛을 바꾼 효영은 벨을 눌러 직원을 불렀다. 안주라도 추가하나 했더니 아니었다. 빈 병을 한쪽으로 치우며 효영은 새 술을 주문했다. 자신은 마시지도 않으면서 대단한 눈치였다.
“아니, 이효영 씨 잔은 왜 줄지를 않나. 자, 한 잔 마셔야지.”
눈치는 효영만 빠른 것이 아니었다. 빈 잔을 발견한 부장님이 또 다시 효영에게 술을 강요했다. 마지못해 손을 뻗는 효영을 저지하고 나는 술잔을 들었다.
“이 주임은 술이 약합니다. 저하고 건배하시죠.”
“뭐야, 김원재 씨가 이효영 씨 대신 마시는 거야? 아주 우정이 멋지구먼. 그런데, 이효영 씨 몫까지 두 배로 마실 자신은 있나?”
“괜찮습니다.”
나는 담담히 대답했다. 안경을 밀어 올린 담비가 날카롭게 대꾸했다.
“어디 그럼 한번 달려 보자고.”
한 시간 후, 나는 내 행동이 객기임을 인정했다.
부장님이 말술이라는 이야기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저 과장된 소문에 지나지 않을 것이라 여겼다. 중간에서 이야기가 덧붙으면 겉잡을 수 없이 과장되게 마련이니까. 술이 굉장히 센 편은 아닌 내가 효영을 대신하겠다고 나선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설마 실체가 소문을 능가할 줄은 몰랐다.
술병이 쌓여 가는데도 부장님은 멈추지 않았다. 부장님이 권하는 대로 나는 열심히 술잔을 들어 올렸고, 빈 잔을 채웠다. 안주를 집거나 대화를 나눌 새도 없었다. 마치 내게 벌이라도 내리듯이 부장님은 계속해서 건배를 외쳤다.
점점 무거워지는 몸과 꼬여 가는 혀를 정신력으로 붙잡기는 무리였다. 실수로 잔이 넘치도록 술을 따르자 과장님이 내게서 술병을 빼앗았다.
“김 주임 취한 것 같은데 이제 그만 마시지.”
“괜찮, 습니다.”
“괜찮기는 뭐가 괜찮아. 부장님도 계시는데 추태 부릴 거야?”
안 그래도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술잔을 놓았다. 쯧 혀를 찬 부장님이 중얼거렸다.
“그래도 곰이라서 술은 잘 마실 줄 알았더니.”
“자자, 그러지 마시고.”
부장님을 달랜 과장님이 내게 살살 손짓을 했다. 꾸벅 감사 인사를 보내려는 순간, 무거운 머리가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간신히 팔꿈치를 괴고 이마를 짚었다. 상사들 앞에서 예의가 아닌 것은 알지만 그러지 않고서는 목을 세우기 어려웠다.
곧 사방의 기척이 아득하게 멀어졌다. 물에 잠긴 듯 몽롱해진 의식이 깜빡거렸다. 눈꺼풀이 스르륵 감겼다. 들어 올리려고 해도 힘이 없었다. 억지로 버티느니 잠깐 눈을 감고 쉬는 게 나을 듯했다. 어느새 회식 장소라는 것도 잊어버리고 나는 무의식 속으로 빠져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난 것일까. 어깨를 두드리는 손길에 퍼뜩 정신이 돌아왔다.
“원재야. 원재야!”
효영이 나를 부르고 있었다. 나는 미간을 찡그리며 고개를 들었다. 정신이 들어도 띵한 머리와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는 몸은 여전했다. 여전히 시끌벅적한 주위의 소음이 웅웅 귀를 울렸다.
“일어나. 과장님 부장님 다 가셨어.”
“김 주임님 괜찮으세요?”
어느새 회식도 막바지에 이르렀는지 테이블 위가 텅 비었다. 상사들이 앉아 있던 쪽으로 자리를 옮긴 동료들이 나를 걱정스럽게 바라보았다.
“너 이만 집에 가라.”
나를 내려다보며 효영이 혀를 찼다. 동의를 표하기 위해 고개를 까딱이자 멀미가 났다. 한 팔로 테이블을 짚으며 나는 한숨을 쉬었다.
효영의 말처럼 돌아가는 편이 나았다. 더 마실 수 있는 상태도 아니고, 이대로 자리를 차지하다간 회식에 방해만 될 테니. 하지만 집에 돌아가는 길이 까마득했다. 동료들의 도움으로 택시를 잡아탄다고 해도 하차 후에 멀쩡할 것 같지 않았다. 이럴 때 의지할 사람이라곤 단 한 명뿐이었다.
가방 안에 손을 쑤셔 넣고 간신히 핸드폰을 찾아냈다.
“효영아. 전화 좀, 걸어 줄래.”
“누구한테?”
효영에게 건네기 위해 손을 드는 것조차 어려웠다. 힘이 풀린 손가락에서 미끄러진 핸드폰이 아래로 떨어졌다. 땅바닥에 추락할 뻔한 기계를 효영이 놀라운 반사 신경으로 잡아챘다. 띵한 머리를 더 이상 가눌 수가 없었다. 테이블에 엎드리면서 나는 중얼거렸다.
“서은겸.”
“서은겸?”
반문하는 효영에게 답할 정신이 남아 있지 않았다. 최근 통화 목록에 이름이 남아 있으니 찾기 어렵지 않을 터였다. 대강 알아서 처리해 주길 바라며 이마를 테이블에 붙였다. 술기운이 오른 몸이 뜨거웠다.
얼마 안 가 효영의 목소리가 귀에 와 닿았다. 당황한 듯 평소보다 빠른 말투였다.
“저, 서은겸 씨 되시나요? 아, 네. 저는 원재 친구인데요. 네. 안녕하세요. 아뇨. 지금 회식 중인데요. 원재가 많이 취해서…….”
“데리러 오라고, 후, 해 줘.”
“……네. 데리러 오시라네요. 네. 여기가 어디냐면요.”
은겸에게 주소를 알려 주고 전화를 끊은 효영이 테이블 위에 스마트폰을 올려놓았다. 달칵 하는 소리와 함께 생겨난 작은 진동마저도 어지러웠다.
“지금 오신대.”
“응.”
“누구야?”
“응.”
“누구냐니까.”
더 대답하지 않고 나는 눈을 감았다. 그 뒤부터는 기억이 징검다리를 건너듯 퐁당퐁당 이어졌다. 내 옆에서 진지하게 나누는 대화가 들렸다가 사라지고, 누군가 집에 간다며 일어나는 소리가 커졌다가 사그라들었다. 까무룩 얕은 잠에 빠진 것 같았다.
혼란스러운 소리 사이에 새로운 목소리가 얹혔을 때, 어설프게 들었던 잠이 한순간에 날아갔다.
“안녕하세요. 원재 동료분들이신가요?”
소음에도 파묻히지 않고 선명히 귀에 들어오는 낮은 음성은 분명히 은겸의 것이었다. 뒤이어 내 등에 커다란 손이 닿았다. 나는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예상대로 익숙한 인물이 시야에 들어왔다. 걱정 어린 표정의 은겸이 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어두운 술집 조명에서도 예쁘게 빛나는 금색 머리카락과, 취한 와중에도 잘생겼다는 감탄이 나오는 이목구비와 마주하자 적잖이 마음이 놓였다. 나는 피식 웃었다.
“서은겸.”
“괜찮아?”
숙이고 있었던 상체를 들자 어지러웠다. 나는 은겸의 목을 끌어안고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내 등을 토닥이며 은겸이 물었다.
“왜 이렇게 많이 마셨어.”
“어쩌다 보니까.”
“이젠 집에 가야지.”
“응.”
더 가까이 은겸을 끌어당기며 중얼거렸다. 목덜미에 코를 비비자 은겸이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원재가 많이 취했네요. 먼저 데려가겠습니다.”
말과 함께 어깻죽지를 붙든 은겸이 나를 일으켰다. 비틀거리며 그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다리가 휘청거려 중심을 잡기 어려웠다. 은겸에게 온몸을 기대고 나는 숨을 골랐다. 내 허리에 팔을 둘러 부축한 은겸이 가방을 집어 들었다.
동료들이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김 주임님 좀 부탁드릴게요.”
“늦은 시간에 번거로우실 텐데. 어쩌죠.”
“번거롭긴요.”
은겸의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렸다.
“원재는 당연히 제가 챙겨야죠.”
헉. 누군가 소리 내어 숨을 들이마셨다. 이렇게 또 동료들 사이에 두고두고 회자될 이야깃거리를 하나 더 만드는구나. 자각은 있었지만 딱히 말리고 싶지는 않았다. 아니, 반대로 내게도 언제든 나를 챙기러 오는 사람이 있다고 보여 줄 수 있어 뿌듯했다. 상태만 멀쩡하면 사람들에게 은겸이 어떤 사람인지 소개할 수 있었을 텐데 그러지 못해 아쉽기까지 했다.
걸음을 떼기 위해 다리에 힘을 줄 때였다. 누군가 주춤주춤 질문을 던졌다.
“저기, 김 주임님이랑 어떤 사이세요?”
섹스 파트너. 질문을 듣자마자 그 단어가 제일 먼저 떠올랐다.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어 첫 대답을 머릿속에서 지웠다. 우리는 이제 그런 관계가 아니었다.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기로 했으니까. 그런데, 지금 관계가 뭐였더라.
은겸은 주저하지 않고 답했다.
“친구예요.”
“친구요?”
“네. 그냥 밥 같이 먹고, 심심하면 만나서 노는 친구.”
아무렇지 않게 대꾸한 은겸이 나를 추슬러 안았다. 나는 기울어진 머리를 움직여 은겸을 올려다보았다. 날렵한 은겸의 턱이 눈에 닿았다. 턱선을 살짝 덮은 밀빛 머리카락도.
무언가 마음에 들지 않는데, 뭐가 마음에 안 드는 것인지 몰랐다.
밥만 먹는 친구부터 시작하자고 했던 건 분명 나였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 앞에서까지 친구라고 말할 필요가 있나? 아니, 애초에 진짜 친구처럼 지내는 것도 아니면서.
‘친구한테 발정하진 않잖아.’
반박하고 싶어도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다른 수를 쓰는 수밖에. 손을 뻗어 은겸의 뒤통수를 붙들었다. 그리고 본능이 이끄는 대로 그를 끌어당겼다.
멍한 정신으로도 가라앉은 주위의 분위기가 느껴졌다. 뒤에서 수군거리던 소리가 멎었다. 나를 붙든 은겸의 몸도 바짝 굳었다. 그래도 신경 쓰지 않았다. 나는 그저 눈을 감고 내게 닿는 조그만 온기를 찾아서 턱을 들었다.
말캉하고 부드러운 것에 입을 여러 차례 비비자 은겸이 내 뺨을 감싸 쥐었다. 그러곤 내 입술 위로 자신의 입술을 꾹 내리찍었다. 술 냄새가 날 텐데. 소심한 걱정은 각도를 틀어 입을 제대로 포개는 은겸 때문에 휘발되었다. 이제는 허리에도 힘이 제대로 들어가지 않았다. 나는 은겸의 목을 끌어안고서 그에게 기댔다.
입맞춤은 짧았다. 뒤로 물러난 은겸을 쫓아 턱을 들자 그가 손가락으로 내 입술을 꾹 눌렀다. 키스를 기대하며 벌렸던 입술 틈이 아쉬웠다. 혀를 내밀어 손가락을 할짝거리며 나는 눈을 떴다. 나를 내려다보는 은겸의 얼굴에 불빛에 음영이 드리워져 있었다. 한껏 위로 올라간 입꼬리가 기분 좋아 보였다.
“가끔은 이렇게 키스도 하는 친구죠.”
“……아, 네.”
누군가의 얼떨떨한 대답을 끝으로 의식이 다시금 멀어졌다. 은겸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서 나는 정신을 잃었다.
***
눈을 뜨자 낯익은 천장이었다.
“잘 잤어요, 김원재 씨?”
내게 묻는 다정한 목소리와 아래를 내려다보며 빙그레 웃는 표정도 익숙했다. 요 몇 달 사이 취해서 은겸의 침대로 굴러 들어왔다가 깨어난 게 벌써 몇 번째일까. 인상을 찌푸리며 나는 신음을 뱉었다.
“몇 시야.”
“새벽 3시.”
“으.”
“더 자도 돼.”
“씻고 자야…….”
“오늘 같은 날은 그냥 자.”
은겸이 턱 밑까지 이불을 끌어 올렸다. 그가 덮어 주는 대로 따뜻한 이불 아래에 몸을 누였다. 아직 두통과 나른함은 남아 있었지만 현기증이 사라지니 그래도 버틸 만했다. 은겸이 갈아 입혔는지 몸에 걸친 옷도 편한 일상복으로 바뀌어 있었다. 이대로 잠들면 딱 기분 좋을 듯했다.
하지만 나는 눈꺼풀에 힘을 주었다. 그동안 은겸의 침대에서 함께 잠들어 함께 깨어난 적은 많았어도, 오늘 같은 날은 흔하지 않았다. 은겸이 잠든 나를 어떤 식으로 바라보는지 알고 싶었다.
침대 가에 앉아 나를 지켜보는 은겸은 지친 기색이 없었다. 나처럼 무겁고 커다란 취객을 집까지 데려와선 뒤처리를 했으니 힘들었을 법도 한데 전혀 티를 내지 않았다. 도리어 은겸은 사랑스러운 것을 감상하듯 입가에 미소를 띤 채로 나를 주시했다. 따스한 시선이 닿자 볼이 간지러웠다. 마음속까지 포근한 이불에 파묻히는 느낌이었다.
나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였다.
“예전에.”
“응?”
“전에 내가 취해서 여기 누워 있었을 때.”
“응.”
“뭐 했어?”
뭐 그런 걸 묻느냐는 듯 은겸이 어깨를 으쓱였다.
“자는 얼굴 들여다봤어.”
“그것만 했다고?”
“날 뭘로 생각하는 거야. 잘 알지도 못하는 사이였는데.”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 깨자마자 잡아먹었잖아.”
피식 웃은 은겸이 내 가슴께를 토닥토닥 두드렸다.
“정말인데. 보고만 있어도 좋았어.”
“…….”
“내 침대에 네가 누워 있어서 그냥 좋았어. 혼자가 아닌 것 같아서.”
그런 이유였구나.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혼자서 쓰기에는 지나치게 넓은 침대라는 감상은 비단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하긴, 은겸은 몇 년간 이 침대를 직접 써 왔으니 나보다 더 절실하게 느꼈으리라.
잠시라도 은겸의 침대를 채울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존재만으로도 은겸을 위로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그보다 더 큰 기쁨을 안겨 주는 방법도 알고 있기에, 다행이었다. 나는 이불 밖으로 팔을 뻗었다.
“나 취하면 버릇이 있다던데.”
“응?”
“취향도 아니고 관심도 없는 남자랑 원나잇 하는 버릇.”
“아, 그거.”
“오늘도 취했어.”
중얼거리며 탄탄한 허벅다리 위에 손을 올렸다. 그제야 말뜻을 깨달은 은겸이 콧잔등에 주름을 잡았다.
“일단 자고 내일 얘기하자. 내일 출근해야 하잖아.”
“그건 그런데…….”
“그리고 취향도 아니고 관심도 없는 남자, 여기에는 없지 않아?”
은겸의 말에 웃음이 섞여 들었다. 보기 좋은 얼굴을 따라 나도 미소를 지었다.
“그러게. 친구만 있네. 가끔은 키스도 하고, 섹스도 하고 싶은 친구.”
아래로 내려앉는 듯 몸이 나른했다. 따뜻한 체온에 휩싸여 이대로 잠들고 싶었다. 무거운 눈꺼풀을 견디기 어려웠다. 나는 어른어른 시야에 맺히는 은겸의 잔상을 붙들었다.
“서은겸.”
은겸은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자리를 피하지는 않았다. 손등 위로 겹쳐지는 온기가 흐려지는 정신을 일깨웠다. 나는 입술을 달싹였다.
“……같이 맞춰.”
“응?”
“혼자 참지 말고 나랑 맞춰 나가자고.”
술자리에서 상사들에게 들은 잔소리는 대부분 한 귀로 듣고 무시했다. 그러나 딱 하나, 가슴에 박힌 지적이 있었다. 은겸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 나는 한 가지 사실을 간과했다. 나는 크게 관심을 두지 않는 부분이기에 신경 쓰지 않았지만, 아마도 은겸에게는 중요했을 일.
서로 다른 과의 수인이 성교를 통해 아이를 가질 가능성은 0퍼센트다. 그래서 나와 은겸은 부장님에게 말했던 것처럼 관계를 가질 때 피임을 하지 않아도 된다. 비단 같은 성별인 내가 아니라도 마찬가지다. 은겸은 자신을 닮은 아이를 평생 볼 일이 없을 것이다. 사자와 곰은 아이를 가질 수 없으니까.
이전에 우연히 인간과 관련된 이야기를 꺼냈을 때 은겸은 분명 묘한 뉘앙스로 설명했다. 자신의 현실에 끼어들 일 없는 것들에 흥미를 느낀다고. 그리고 몇 달 전, 은겸은 식당에서 마주친 아이를 귀여워했었다. 그때는 그저 흘려 넘겼던 모든 상황이 은겸의 현실과 겹쳐지자 다르게 비쳤다.
어쩌면 은겸은 자신에게 주어질 일이 없는 선물이기 때문에 아이들을 더 예뻐하는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포기하고 시작하는 관계이기 때문에.
그런 식으로 공허한 애정을 나누어 주는 은겸을 더는 보고 싶지 않았다.
“도망치지 않아도 돼.”
“더 자, 원재야.”
은겸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졸음이 밀려왔다. 마치 더 자도 된다고 허락을 받은 것처럼 눈앞이 깜빡거리기 시작했다. 자꾸만 멀어지려 하는 의식을 붙들고 나는 말을 이었다.
“친구 하지 말자, 우리.”
졸음에 먹힌 발음이 점차 뭉개졌다. 짧아지는 단어를 더 길게 이을 수 없었다. 간신히, 하고 싶은 말을 마쳤다.
“다른 거 하자.”
그 말이 마지막 저항이었다. 나는 더 버티지 못하고 파도처럼 덮쳐오는 잠을 받아들였다. 나만 재우지 말고 은겸도 자야 할 텐데. 수면에 퍼지는 잉크처럼 걱정은 차츰 희미해졌다. 나는 천천히 고요한 잠 속으로 가라앉았다.
곤히 내려앉은 무의식의 밑바닥에서도 이마에 와 닿는 입술의 감촉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럴까.”
나직이 울린 은겸의 대답은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 다만 한 가지 분명한 점은.
“그러자, 원재야.”
그것이 꿈이든 현실이든, 은겸이 내 제안을 거절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