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곰은 발을 거둔다 (상)
어린 시절, 아직은 어머니와 함께 살던 무렵. 그때만 해도 서른 살은 까마득히 먼 미래 같았다. 막연하게 상상한 서른 살의 나는 반짝반짝 빛나는 어른이었다. 그쯤이면 사회에서도 인정받는 경력을 쌓고, 사랑하는 짝과 가정을 이루었을 줄 알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나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잘 알 거라 믿었다. 어떤 일에도 흔들리지 않고 나로서 살아가는, 바닥에 단단하게 뿌리를 내린 어른.
막상 그 나이가 되어 보니 모든 것이 상상과 달랐다. 서른 살의 나는 올해만큼은 대리로 진급해야겠다며 영어 공부에 매달리는 평범한 회사원이었다. 6년간 짝사랑만 하다가 차이는 바람에 사랑하는 짝과의 가정 같은 건 내심 기대하지도 못했다.
누구나 그렇듯 나이 앞자리가 바뀐다고 멋지게 변하는 인생 같은 건 없었다. 서른 살의 일상은 딱 스물아홉 살의 것과 똑같았다. 출퇴근길은 피곤하고 회사 일은 재미없고 지인들과의 교류는 드물어졌다. 그래도 딱 한 가지, 작년의 나에게 자랑할 만한 사건이 있기는 했다.
정운이를 기다리며 비워 두었던 내 옆으로 눈부신 사자가 슬그머니 다가오더니 제멋대로 그 자리에 눌러앉았다. 그가 입을 열 때마다 나는 낯선 존재가 되었다. 성실하고, 귀엽고, 매력적이고, 가슴에 우주를 품었고, 사랑하는 상대를 행복하게 만드는 사람으로 탈바꿈했다.
그게 좋았다. 나는 은겸의 눈에 비친 내가 좋았다. 나를 그렇게 바라보는 은겸이 좋았다. 은겸과 함께 있으면 나도 반짝거릴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은겸이 내 일상에 서서히 스며들도록 내버려 두었다.
***
9월 중순으로 접어들자 기온이 뚝 떨어졌다. 긴소매 상의만으로는 쌀쌀한 날씨였다. 카디건 같은 얇은 외투를 걸친 사람들 사이에서 나는 홀로 반소매 옷을 고수했다. 가을옷을 입기에는 몸이 여전히 뜨거웠다. 평범한 체온은 아니었다. 발정기의 열기가 식지 않은 탓이었다.
주기적으로 잠자리를 가지는 사람이 있어서일까. 올해 발정기는 유난히 길게 이어졌다. 늦어도 9월 초면 사그라들었던 전과 달리,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예전보다 훨씬 뜨거운 체온과 자꾸 들끓는 성욕 또한 그대로였다.
은겸이 없었다면 곤란했을 터였다.
은겸과 몸을 섞고 나면 거짓말처럼 열기도 성욕도 식었다. 그런 상태는 사나흘 정도밖에 지속되지 않았다. 안정적인 생활을 위해 나는 거의 사흘에 한 번꼴로 은겸을 만났다. 물론 은겸은 쌍수 들고 환영하며 주말에만 만나자는 약속을 깼다.
열여덟 살 때 첫 발정기를 맞이하고 열아홉 살, 두 번째 발정기를 첫사랑과 보낸 뒤로 나는 누구와도 발정기를 보낸 적이 없었다. 서른 살의 발정기는 고등학생 때 겪은 발정기만큼이나 뜨거웠다. 왜 지금껏 내 발정기가 밍숭맹숭했는지, 그러다 왜 은겸을 만난 뒤부터 걷잡을 수 없는 성욕에 사로잡혔는지 대강 답이 나왔다. 내가 진짜 담백해서가 아니었다. 그동안 나를 뒤흔들 상대를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정운이는 짝사랑이었고, 차마 손댈 수 없어 그냥 바라만 보았으니까.
매력적인 잠자리 상대와 함께 보내는 초가을은 조금 번거로웠지만, 한편으로는 조금 즐겁기도 했다.
그런 마음이 겉으로도 드러난 것일까.
“김 주임님, 요새 연애하세요?”
연애 이야기가 처음 튀어나온 건 회사 근처 술집에서 열린 회식 자리였다. 예상보다 적을 거라는 명절 상여금 소식에 다 함께 회사를 욕하며 술을 마실 때였다. 홀짝홀짝 맥주를 마시던 신입이 불쑥 내게 물었다. 나는 허둥지둥 목부터 가렸다. 은겸에게 깨물린 목덜미 자국이 보였을지도 몰랐다.
“연애는 아니고. 그냥.”
“어, 만나는 사람 있기는 한가 보네.”
눈치 없이 정곡을 찌른 과장님이 내게 빈 술잔을 보였다. 나는 서둘러 과장님의 잔에 술을 따랐다. 그사이에도 동료들은 나를 안주 삼아 술을 홀짝였다.
“아쉽다. 좋은 남자는 꼭 누가 다 데려가 버린다니까.”
“원재 씨 정도면 지금까지 연애 안 한 게 신기한 거지.”
“맞아요. 저도 김 주임님 같은 남자가 좋더라고요.”
“왜? 키 크고 몸 좋아서?”
“아뇨. 한번 마음 주면 배신하지 않으실 것 같아서요.”
“아니, 그럼 지희 씨가 대시해 보지 그랬어?”
“저는 동종성애자라서요. 양 아니면 연애 안 해요. 죄송합니다, 김 주임님.”
새초롬하게 입을 내민 신입이 사과를 건넸다. 나 역시 그녀에게 별 감정이 없는데 마치 차인 느낌이었다. 우습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그냥 웃고 말았다.
“그나저나, 요새 한 부장님 좀 이상하지 않아요?”
“왜?”
“윗분들한테 자주 불려 다니더라고.”
내 이야기는 다른 화제에 파묻혀 금세 흘러갔다. 나는 눈치껏 비어 있는 잔에 술을 따르고, 모자란 안주를 더 시켰다.
술자리는 9시가 넘었을 때 끝났다. 가게 밖으로 나오니 벌써 어둠이 내려앉아 있었다. 술을 마셔서 열기가 오른 몸에 밤공기는 조금 차가웠다. 나는 습관처럼 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손끝에 닿는 스마트폰의 테두리를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돌연 진동이 느껴졌다. 꺼내어 확인한 화면에는 은겸의 이름이 떠올라 있었다.
동료들의 눈치를 살피며 나는 슬그머니 전화를 받았다.
“나 아직 회식 안 끝났어.”
─혹시 지금 댕댕치킨 앞에 있어?
대뜸 건너온 말이 당황스러웠다. 주위를 둘러보니 은겸이 말한 치킨집이 있기는 했다. 그렇다고 대답해 주려 할 때였다.
“원재야.”
어디선가 나타난 은겸이 내 어깨를 가볍게 건드렸다. 생각지도 못한 등장이었다. 뭐라 대꾸할 말도 잊어버리고 나는 그 자리에 굳었다. 눈웃음을 치며 은겸이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놀랐어? 이번엔 진짜 우연이야.”
“아니, 왜 여기에…….”
“김 주임님, 뭐 하세요?”
앞서 걷던 동료들이 나를 불렀다. 당황한 나는 은겸과 동료들을 번갈아 보았다. 재빠르게 상황을 파악한 은겸이 싱긋 웃었다. 그러더니 성큼성큼 동료들에게 다가갔다.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나는 다급히 그의 뒤를 쫓았다.
“안녕하세요, 원재 친구입니다.”
고개를 꾸벅 숙이며 은겸이 자기소개를 했다. 동료들의 반응은 다양했다. 멀뚱멀뚱 은겸을 보는 이가 있는가 하면, 웃으며 마주 인사를 하는 이도 있었다. 특히 신입의 반응이 열렬했다. 자신보다 까마득히 키가 큰 은겸을 올려다보며 신입은 손으로 입을 가렸다. 발그레하게 달아오른 볼을 본 사람들이 키득키득 웃었다.
“지희 씨 동종성애자라더니?”
“아니, 제가 뭘요.”
“뭐기는. 얼굴 빨개졌어.”
“김 주임님 아는 분이라서 그런 거예요.”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나는 동료들처럼 신입을 놀릴 정신이 아니었다. 은겸이 허튼소리를 하거나 말실수를 할 사람이 아님을 알면서도, 그저 초조하게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 와중에도 동료들과 한 명씩 눈을 맞추며 인사를 마친 은겸이 내 어깨를 끌어안았다.
“회식 중이신 것 같은데, 죄송하지만 원재는 제가 먼저 데려가겠습니다.”
“어머나.”
“원재한테 볼일이 있어서요.”
동료들이 의미심장한 눈빛을 교환했다. 나를 붙잡거나 아쉬워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어서 데려가라는 듯 은근히 은겸을 훑어보며 그들은 나를 보냈다. 먼저 실례하겠다고 인사를 건넨 뒤 나는 은겸과 함께 뒤돌아섰다. 딱히 갈 곳이 있는 건 아니었지만 되도록 빠르게 그 자리에서 멀어지고 싶었다.
동료들에게서 적당히 떨어졌을 때에야 입이 떨어졌다.
“무슨 일이야.”
“아, 근처에서 거래처 미팅이 있었거든. 너 회식한다기에, 어쩌면 만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이쪽으로 와 봤지.”
“결국 우연은 아니네.”
“이 정도면 우연이지.”
스쳐 가는 사람들을 가리키며 은겸이 빙그레 웃었다. 나는 가만히 한숨을 쉬었다. 은겸의 말대로 완벽한 우연은 아닐 테지만, 번화가를 메운 회사원들 사이에서 나를 찾아낸 게 용하다 싶었다.
“술 많이 마셨어? 우리끼리 2차 갈까?”
“배불러.”
“그럼 집에 데려다줄게. 차 가져왔어.”
머뭇거리다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집 주소 정도는 알려 줘도 상관없겠지. 아니면 근처 사거리에서 내려 달라고 하거나.
주차장을 향해 걷는 길도 번화가처럼 북적거렸다. 늦은 저녁을 먹거나 술을 마신 이들이 삼삼오오 무리를 지어 걸음을 옮겼다. 길 가운데를 점령한 이들을 피하다 보니 저절로 은겸의 옆에 바짝 붙게 되었다.
“추석 때 뭐 해?”
주위의 소음을 의식한 듯, 평소보다 조금 큰 소리로 은겸이 물었다. 나는 가만히 어깨를 추슬렀다.
“그냥 집에 있으려고.”
“왜? 모처럼 긴 연휴인데. 아, 혹시 중간에 낀 날 안 쉬어?”
추석 연휴는 다음 주 화요일부터 목요일까지였다. 팀원들 중 절반은 월요일에, 나머지 절반은 금요일에 연차를 써서 긴 휴가를 만들었다. 나는 금요일 휴가파였다. 그렇다고 딱히 찾아갈 친척 집이 있는 것도 아니라 그냥 집에서 뒹굴뒹굴 놀 생각이었다.
“징검다리 아니고 쭉 쉬기는 하는데. 평소하고 다를 거 없어서.”
“그럼 나랑 같이 보낼래?”
툭 말을 던진 은겸이 내 손을 붙잡았다. 나는 얼떨결에 그를 돌아보았다. 아예 걸음까지 멈춘 은겸이 나와 시선을 맞추었다.
“명절에 혼자 있는 거 외롭잖아. 같이 있자.”
“…….”
“부담스러우면 추석 당일에만 있다가 가도 되고.”
은겸의 긴 손가락이 마디 사이를 파고들었다. 손깍지를 낀 그가 내 눈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어떻게 할래?”
나는 시선을 내리깔았다. 답은 정해져 있었다.
“……갈게.”
“정말?”
“응.”
“언제쯤 올 거야? 청소도 미리 해 놓고 너 맞을 준비를 해야 하니까.”
월요일에 퇴근하고 바로 가겠다고 말하려다가 정신을 차렸다.
“화요일 저녁에 갈게.”
“알았어. 아, 기대된다. 벌써 즐거워.”
환한 얼굴로 은겸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나는 그의 옆에서 함께 걸었다. 엿새면 짐을 얼마나 챙겨 가야 하나. 칫솔 같은 건 새로 사는 게 나으려나. 이것저것 따져 보다가 민망함에 생각을 그만두었다. 일찍 돌아갈 것이지, 일요일까지 은겸의 집에 있으려 하다니.
‘명절을 혼자 보내기 싫으니까.’
은겸이 아닌 다른 지인, 이를테면 효영이나 예주가 제안했더라도 분명 받아들였을 것이다. 나는 가까스로 합리화를 마쳤다. 술기운이 뒤늦게 올랐는지 목덜미가 화끈화끈했다.
***
결국 내가 은겸의 집에 도착한 때는 화요일 오전이었다.
발단은 아침 일찍 걸려 온 은겸의 전화였다. 들뜬 목소리를 감출 생각도 하지 않고 은겸은 물었다.
─언제쯤 올 수 있어? 짐은 많아?
“……일찍 일어났네. 휴일인데.”
9시가 되기 전인 시계를 바라보며 나는 대꾸했다. 은겸이 피식거렸다.
─잠이 영 안 오더라. 너 보고 싶어서. 한숨도 못 잤어.
“…….”
─짐 많으면 내가 데리러 갈게.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나는 거실 한가운데에 세워 놓은 캐리어를 바라보았다. 안 그래도 버스를 타기에는 가방이 너무 큰 듯해 전날 밤부터 고민하던 차였다. 옷이며 생필품으로 가득 채웠더니 무게도 상당했다.
“택시 타고 갈게.”
─짐 많구나.
“……캐리어 하나 정도.”
─내가 차 가지고 갈게. 몇 시쯤 괜찮아?
“지금 와도 돼.”
─너무 이르지 않아? 아침은? 만나서 같이 먹을까?
“지금 먹고 있어.”
두유에 동동 떠 있는 시리얼 부스러기를 건지며 나는 답했다. 실은 전화가 걸려 오기 전부터 갈 준비는 끝낸 상태였다. 은겸이 올 때까지 양치질과 설거지만 마치면 끝이었다.
전화기 건너편이 잠시 조용해졌다.
─너도 일찍 일어났나 보네. 휴일인데.
“……아니야.”
─나 보고 싶었어?
“…….”
짐을 풀었다 쌌다 하느라 신경 쓰여서 못 잔 것뿐이라고, 원래 출근하지 않는 날도 일찍 일어나는 편이라고 항의하고 싶어도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소풍 전날처럼 들떠서 잠을 설친 건 나도 마찬가지였다.
한숨도 못 잤다더니, 은겸은 평소보다 훨씬 쌩쌩해 보이는 모습으로 도착했다. 졸음운전이라도 하면 어쩌나 걱정한 내가 바보 같을 정도였다. 일주일 가까이 이어질 공동생활을 상상하며 제대로 정신을 못 차린 건 나 혼자인 게 분명했다. 캐리어를 끌고 건물 입구를 나서자 은겸이 크게 웃었다.
“며칠이나 있으려고 그래?”
웃음소리를 듣자 얼굴이 달아올랐다. 장거리 여행을 갈 때나 쓸 법한 28인치 캐리어를 가지고 왔으니 그럴 법도 했다. 하지만 처음부터 이럴 생각은 아니었다. 남의 집에서 오래 머무는 건 처음이라 뭘 가져가야 할지 몰라서 이것저것 챙겨 넣다 보니 짐이 불어난 것뿐이었다.
아무래도 외투를 세 벌이나 넣을 필요는 없었던 것 같았다. 책도 좀 빼는 게 나을 테고. 나는 캐리어 손잡이를 쥐고 몸을 돌렸다.
“작은 가방으로 바꿔 올게.”
“아냐, 농담이야. 원재 너라면 오래 있어도 돼.”
“바꿔 온다고.”
“미안해, 미안해. 하룻밤 정도 있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라니 기뻐서 그랬어.”
“누가 오래 있는다고 그랬는데.”
“미안하다니까.”
캐리어 손잡이를 붙든 은겸이 다른 손으로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오래오래 같이 있어 줘.”
작게 속삭인 은겸이 귓등에 입을 맞추었다. 은겸의 트렌치코트가 구겨지며 부스럭부스럭 소리를 냈다. 사방에 피어오르는 달콤한 체향을 들이마시다가 나는 은겸을 밀어냈다. 빠르게 뛰는 심장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트렁크에 꾸역꾸역 캐리어를 밀어 넣고 은겸의 집으로 향했다. 한두 번 간 곳도 아니고, 주말에는 종종 하룻밤 묵고 오곤 했는데도 그의 집이 가까워지자 긴장이 몰려왔다. 안전띠마저 갑갑하게 느껴졌다.
곁눈질로 나를 돌아본 은겸이 말을 걸었다.
“어제 점심에는 뭐 먹었어?”
“그냥 백반.”
“반찬은 뭐 나왔어?”
“어, 아욱국이랑 북어포무침이랑……. 이거저거 밑반찬 나왔던 거 같아.”
아무렇지 않은 척 말하면서도 나는 은겸의 눈치를 살폈다. 만나면 물어볼 것 같아서 일부러 핸드폰에 적어 둔 게 티가 나지 않았을까. 다행히도 은겸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창밖을 가리켰다.
“집 근처 마트 중에서 저기가 제일 크거든. 추석 당일에만 쉰다니까 모레쯤 같이 장 보러 가자.”
“응.”
“아, 저 북카페 알아? 전에 드라마에 나왔는데.”
“처음 봐.”
“저기 커피 괜찮았어. 다음에 같이 가자.”
사소해서 집중할 필요 없는 대화를 나누는 사이 긴장은 조금씩 흐릿해졌다. 은겸이 사는 건물에 도착해, 주차를 마치고 엘리베이터를 타자 다시금 초조함이 고개를 들었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내 손을 쥔 은겸이 나를 돌아보며 웃었다.
“집에 가면 놀랄걸. 주말 내내 청소하느라 힘들었어.”
“잘했어.”
“아, 근데 까만 머리카락은 치우기 아깝더라. 네 거잖아.”
“…….”
“이번에도 많이 남기고 가 줘.”
“변태 같은 소리 좀 하지 마.”
마침내 들어선 은겸의 집은 이전과 다를 것이 없어 보였다. 은겸이 워낙 평소에도 깔끔하게 정돈해 놓고 산 탓이었다. 나를 위해 주말 내내 청소했다며 너스레를 떤 은겸이 떠올라 웃음이 났다. 캐리어를 거실에 눕혀 놓고 나는 집을 둘러보았다.
아무리 일주일을 함께 보낸다고 해도 은겸의 침실에 짐을 풀고 싶지는 않았다. 나머지 방 두 개 중 한 곳을 쓰면 좋을 것 같았다. 서재에서 자기는 좀 그럴 것 같고. 남은 선택지는 하나였다. 나는 문이 닫힌 방 앞으로 다가갔다.
“이 방 써도 돼?”
그나저나 이 방은 대체 무슨 방일까. 은겸의 집에 꽤 여러 번 방문했는데, 그동안 문이 열린 모습을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옷은 침실에 있는 게 다인 듯한데. 창고인가. 별생각 없이 나는 방문 손잡이를 잡았다.
“무슨 방?”
순간, 조금 날카로운 목소리가 날아왔다. 은겸이 내 뒤에 바짝 붙어 서 있었다.
“여기 이 방.”
“아, 거기도 있었지.”
이상한 화법이었다. 마치 집에 방이 있었다는 사실을 잊어버린 것처럼 감탄사를 내뱉은 은겸이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거기 말고, 저쪽 방 써.”
은겸이 가리킨 방은 서재였다. 가볍게 나를 떠밀며 은겸은 자리를 피하려 했다. 은겸을 따라 걸음을 옮기려다가 나는 닫힌 방문을 물끄러미 보았다.
이 방은 왜 항상 닫혀 있을까?
미련을 못 버린 나를 돌아본 은겸이 꼬리를 길게 휘둘렀다.
“이 방은 못 열어.”
“응?”
“열쇠를 잃어버렸어. 오래전에.”
가볍게 덧붙인 말이 수상했다. 하지만 억지로 끌어당기는 힘을 더 거절할 수는 없었다. 나는 은겸이 이끄는 대로 발을 옮겼다.
“서재 치워 뒀어. 그리고 잠은 나랑 같이 자면 되니까.”
“……서재에 이불 깔고 따로 자면 안 될까.”
“무슨 소리야. 침대도 넓은데.”
서재로 향하는 줄 알았던 걸음은 어느새 침실로 향하고 있었다. 짐도 안 풀고 벌써 그것부터냐.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너 오래 있을 것 같아서 콘돔 많이 사 놨어.”
싱글싱글 웃으며 은겸이 말했다. 나도 사 왔다는 말은 차마 할 수 없었다. 캐리어 바닥에 넣어 온 콘돔을 들키지 않기만 바라며 나는 묵묵히 침실로 들어섰다.
침실의 문턱을 넘자마자 은겸은 돌변했다. 나를 끌어안은 그가 거침없이 입술을 겹쳤다. 동시에 상의를 밀어 올린 손이 가슴을 움켜쥐었다. 나는 뜨거운 숨을 토했다. 창문으로 쏟아져 들어오는 햇빛이 밝았다. 아직 정오도 되지 않은 시각인데. 거실에 버려두고 온 캐리어도 풀지 못했는데. 이럴 때가 아님을 아는데도 몸은 정반대로 움직였다. 나는 은겸의 목에 팔을 두르고 입술을 벌렸다. 진한 체향이 아찔하게 코를 찔렀다.
은겸은 조금 아플 정도로 입 안을 괴롭혔다. 그의 혀 돌기가 입천장을 긁을 때마다 허리가 꼬였다. 흔들리는 내 몸을 단단히 붙든 은겸이 허벅지 사이로 다리를 끼워 넣고 중심을 문질렀다. 허벅다리에 닿는 은겸의 것이 이미 뜨거웠다.
내 상의를 기어이 끌어 올려 벗긴 은겸이 나를 바라보았다. 할 거냐는 질문도, 허락의 말도 필요 없었다. 묵묵히 손을 놀려 은겸의 셔츠를 벗겨 내자 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본격적으로 몸을 얽고 서로의 맨살을 만지기 시작했을 때였다. 밖에서 벨 소리가 울렸다. 거실에 두고 온 내 스마트폰 소리였다.
목덜미를 깨문 채로 은겸이 웅얼거렸다.
“받지 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달아오른 분위기를 깨고 싶지 않았다. 내 대답에 만족했는지 은겸이 살갗을 세게 빨아올렸다. 작게 신음하며 나는 은겸의 머리카락 사이로 손가락을 넣었다. 부드러운 머리칼을 쓰다듬자 은겸이 목덜미에 코를 문질렀다.
달콤한 애무에만 집중해도 모자라건만. 거실에서 들려오는 소음이 우리를 방해했다. 내버려 두면 끊길 줄 알았던 벨 소리는 연이어 울려 퍼졌다. 포기한 은겸이 고개를 들었다. 나는 그의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끄고 올게.”
사과의 의미로 이마에 입을 맞추자 은겸의 눈이 둥근 반원을 그렸다. 다시 한번 그에게 입 맞추고 나는 빠른 걸음으로 거실로 나갔다.
방에서 기다리는 은겸에게 미안하게도, 나는 스마트폰을 바로 끄지 못했다. 화면에 떠오른 발신인이 예주였기 때문이었다. 통화를 수락하자 곧장 예주의 커다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원재야. 집에 없어?
“아, 나 지금 밖이야.”
가쁜 숨을 들키지 않도록 조심하며 답했다. 예주가 끄응 하고 앓는 소리를 냈다.
─엄마가 너 반찬 갖다주래서 왔는데. 어쩌지?
“집 앞에 놔 줘. 내가 나중에 가지러 갈게.”
그러고 보니 예주의 방문을 깜빡하고 있었다. 어릴 적, 온 가족과 함께하는 저녁 식사에 나를 초대했던 늑대 가족은 그 뒤로도 나를 꾸준히 챙겼다. 특히 내가 성인이 되어 독립한 뒤부터는 명절 때마다 잊지 않고 명절 음식을 보내 주었다. 함께 명절을 보내지 못하는 가족 구성원에게는 명절 음식이라도 먹여야 한다는 게 예주네 집안의 규칙이었다. 그 다정한 규칙은 가족이 아닌 나에게도 적용되었다.
─오래 두면 상할지도 모르는데. 어디 멀리 갔어? 내일은? 내일도 집에 없어?
“어, 아마도.”
─여행 간 거야?
그런 이유로 예주는 스무 살 때부터 내가 명절 때마다 집에서 혼자 지낸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았다. 나는 뒤통수를 긁적였다.
“그런 건 아니고.”
금방 끊으려던 통화가 길어지자 목이 탔다. 비단 나만 조바심이 나는 건 아닌 듯했다. 어느새 거실로 나온 은겸이 나를 뒤에서 끌어안았다. 벗은 상반신을 내 등에 밀착하며 은겸은 장난스럽게 유두를 꼬집었다. 엉덩이골에 딱딱한 것이 문질러졌다. 조금 가라앉았던 숨이 다시 거칠어지기 시작했다.
“잠깐, 통화 안 끝났…….”
“빨리 끊어.”
“잠깐만.”
“오래 참기 싫어.”
뻔뻔스레 중얼거리는 은겸의 입을 틀어막고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예주가 듣고 있으니 길게 실랑이를 벌일 수 없었다. 팔꿈치로 은겸을 찌르면서 스마트폰을 다시 귀에 댔다.
내 노력에도 불구하고 예주는 모든 대화를 들은 듯했다.
─누구랑 같이 있어?
“어, 어쩌다 보니.”
─잘됐네. 즐겁게 놀다 와. 반찬은 나중에 줄 테니까 집에 오면 나한테 연락하고.
“응, 미안하다.”
추석 잘 보내라는 인사를 주고받은 뒤 나는 전화를 끊었다. 쪽쪽 목을 빨아올리던 은겸이 눈을 빛냈다.
“여자 친구?”
“그냥 친구.”
“수상하네.”
“잠깐, 읏. 예주는 결혼했, 흣.”
“나한테는 까칠하게 굴면서, 그 사람이랑 통화할 때는 세상 친절한 남자던데요. 김원재 씨.”
“그냥 평범하, 흐읏, 아무 사이, 도 아니, 아.”
해명하려 해도 틈이 없었다. 내 턱을 쥔 은겸이 입술로 입을 틀어막았다. 질척하게 섞이는 혀가 가라앉았던 열기를 이끌어 냈다. 허리춤 아래로 미끄러진 손이 단단해진 중심을 쓸어 올렸다. 숨 막히는 키스 세례에 호흡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나는 간신히 목 안을 울렸다. 짐도 안 풀었는데. 아직 아침인데. 오늘이 고작 첫날인데. 머릿속을 맴돌던 문장들은 은겸의 손길이 닿을 때마다 사라졌다.
무섭게 부풀어 오른 본능이 이성을 집어삼켰을 때, 나는 은겸에게 몸을 맡겼다.
까무룩 잠들었다가 눈을 뜨니 저녁이었다. 어느새 옷을 챙겨 입은 은겸이 침대 가에 앉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일어났어?”
“응.”
“몸은 괜찮고?”
다정하게 물으며 은겸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나는 가만히 팔다리를 움직여 보았다. 은겸에게 깨물린 목이며 가슴팍이 따끔거렸고, 도망치지 못하게 붙들려 혹사당한 하반신은 나른했다. 그래도 그럭저럭 상태가 괜찮았다.
“멀쩡해.”
“그럼 앞으로는 더 오래 해도 되겠네. 열 번 못 채워서 아쉬웠는데.”
“…….”
“농담이야.”
재미있는 것을 보는 듯한 표정을 지은 은겸이 고개를 숙였다.
“씻고 와. 저녁 먹자.”
말캉한 입술이 이마에 살짝 닿았다가 떨어졌다. 가까워진 은겸에게서 신선한 과일과 채소의 냄새가 풍겼다. 그와는 어울리지 않는 냄새를 맡고 있자니 배가 꼬르륵거렸다. 점심도 거르면서 은겸과 몸을 섞은 후유증이었다.
그렇다고 곧장 저녁을 먹으러 갈 수는 없었다. 욕실에 들어서 몸을 확인하자 한숨이 나왔다.
“열심히도 깨물었네.”
가슴과 목덜미뿐만이 아니라 어깨, 배꼽 근처, 허벅지 안쪽까지 은겸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허리를 비틀어 확인한 등줄기에도 벌건 잇자국이 보였다. 그래도 양심은 있었는지 여기저기 맨살을 질척하게 적셨던 것들은 사라져 있었다. 내가 잠든 사이 은겸이 닦아 낸 듯했다.
같이 뒹굴다가 눈을 붙였는데 먼저 일어나서 나를 챙기고 식사까지 준비하다니. 새삼 대단한 체력이다 싶었다.
‘나도 다시 운동을 다녀야 하나…….’
뒤처리를 모두 맡기는 것도 한두 번이지, 계속 이런 식이니 미안했다. 은겸을 따라잡지는 못하더라도 비슷하게나마 체력을 올리는 편이 서로 편하지 않을까. 그만두었던 수영을 다시 시작해 볼까. 유독 잇자국이 선명하게 남은 가슴팍을 문지르며 나는 잠깐 고민에 빠졌다.
앞으로 몇 번이나 더 할 줄 알고.
우습게도, 내 이성을 일깨운 것은 본능이었다. 발정이 가라앉지 않아 따끈따끈한 몸을 만지다 보니 은겸과의 약속이 떠올랐다. 우리의 관계는 내 발정기가 끝날 때까지만 지속되는 시한부였다. 지금부터 운동을 다니더라도 체력을 더 기르기 전에 관계를 정리하게 될 터였다.
나는 차가운 물을 얼굴에 뿌렸다. 몸속부터 은은하게 퍼지는 열기를 식히고 싶었다. 마치 앞으로도 계속될 것처럼 나를 속이는 발정기도.
은겸은 내 예상보다도 훨씬 일찍 일어난 듯했다. 옷을 걸치고 거실로 나서자 이미 준비가 끝난 식탁이 보였다. 빵과 올리브, 연어 세비체, 오믈렛이 먹음직스럽게 플레이팅되어 있었다. 메인으로 따로 준비된 명란 파스타를 바라보며 나는 입을 열었다.
“이게 다 뭐야.”
“뭐긴.”
빈자리를 가리킨 은겸이 싱긋 웃었다.
“추석 선물.”
“…….”
“와 줘서 고마워.”
이렇게 거창하게 감사받을 일은 하지 않았는데. 나는 괜스레 손목을 만지작거렸다. 어차피 연휴 동안 할 일도 없었고, 그동안 주말이면 은겸의 집에서 하룻밤 묵고 돌아가곤 했으니까. 함께 보냈던 시간의 연장선이라고 여겼을 뿐, 나는 이번 연휴에 거창한 의미를 두지 않았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두고 싶지 않았다.
은겸은 나와 생각이 달랐던 모양이었다.
“이혼한 뒤로 이런 날에는 항상 혼자였거든. 너랑 같이 있으니까 참 좋다.”
은겸의 환한 얼굴 위에 기억 하나가 겹쳤다. 생일을 같이 보내고 싶었다고, 계속 나를 보러 왔다고, 함께 밥을 먹어서 정말 기뻤다고 말하던 과거의 은겸이었다.
은겸의 행동을 스토킹으로 여겼기에 화만 났던 그때는 깨닫지 못한 이상한 점 한 가지가 이제야 보였다. 은겸은 자신의 생일에 먹지도 않는 샐러드를 시켜 놓고, 올지 안 올지 확실하지 않은 나를 몇 시간씩 기다렸다. 그리고 다시는 연락하지 않겠다는 내게 술 한 잔만 같이 마셔 달라고 졸랐다.
내가 아닌 다른 사람과 만나는 쪽이 훨씬 빠르고 편했을 텐데. 고작 세 번 만난 사람에게 매달릴 정도로, 좋은 날을 같이 맞을 상대가 없었던 걸까.
나는 별다른 말 없이 의자를 빼서 앉았다. 반대편 의자 등받이에 팔을 걸치고 선 은겸이 식탁 위를 눈으로 훑었다.
“네 입맛에 맞을지는 모르겠다.”
“직접 만든 거야?”
“당연하지.”
조금 뜻밖이었다. 그동안 토스트 같은 간단한 아침 식사를 대접받은 적은 있었지만, 이런 본격적인 요리를 할 줄 아는지는 몰랐다. 어디서 배웠냐고 묻자 은겸이 쓴웃음을 지었다.
“첫 번째로 결혼했을 때 배웠어. 집안일 분담하려고.”
“……잘 먹을게.”
괜히 물어봤다가 아픈 데를 찌른 셈이었다. 재빨리 인사를 건네고 포크를 들었다.
은겸의 음식 솜씨는 내 기대치를 뛰어넘었다. 입에 대는 음식마다 맛있었다. 맛이 별로여도 성의를 생각해 칭찬하려 했건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정말 맛있었으니까. 추석과는 어울리지 않는 메뉴라서 망설였던 마음마저도 금방 사라졌다.
“맛있다.”
“그래?”
“응. 맛있어.”
순수한 감탄사를 내뱉으며 나는 포크를 놀렸다. 은겸이 차려 놓은 음식을 하나도 빠짐없이 맛보고 싶었다. 폭신한 오믈렛의 표면을 반으로 가르는 데 집중할 때, 은겸이 중얼거렸다.
“천천히 먹어. 항상 생각하는 건데 밥을 빨리 먹는 편이네.”
“아. 과장님이 빨리 드셔서.”
포크의 날을 따라 갈라진 달걀 사이로 오믈렛의 붉은 속이 드러났다. 따끈한 온기와 함께 토마토의 상큼한 냄새가 번졌다. 절로 입에 군침이 고였다. 입맛을 다시며 나는 은겸의 말에 답했다.
“대학 때까지만 해도 느리게 먹는 편이었어.”
“그랬는데 과장님한테 맞추느라 빨라진 거야?”
“점심을 같이 먹으니까. 그래서 우리 팀 사람들 다 빨라.”
입사했을 때만 해도 혼자 느릿느릿 먹던 신입이 요새는 제일 먼저 숟가락을 놓는다고 덧붙이자 은겸이 키득키득 웃었다.
“내 앞에서는 안 그래도 되지 않아?”
“……그건 그렇지만.”
“나는 너한테 속도를 맞출게. 천천히 먹어.”
별생각 없었는데 갑자기 그런 말을 들으니 은겸이 의식되었다. 나는 파프리카를 씹으며 시선을 내렸다. 그러고 보니 식탁 위에 차려진 음식은 대부분 내게 맞춘 메뉴였다. 은겸이 좋아할 법한 고기 종류는 보이지 않았다. 기본적인 커트러리조차 내가 쓰는 것 한 벌이 다였다.
심지어 은겸은 의자에 앉지도 않고, 서서 내가 먹는 모습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나는 입에 든 음식물을 삼키곤 앞자리를 가리켰다.
“네 것도 가져와서 같이 먹어.”
“난 너 먹는 거 볼래.”
“그걸 왜 보는데.”
“네가 맛있게 먹으면 나까지 배가 부르는 것 같아.”
“이상한 소리 하지 말고.”
은겸이 눈을 둥글게 휘었다.
“나도 채소가 맛있으면 참 좋을 텐데. 무리더라고.”
“…….”
“나 대신 맛있게 먹어 줘.”
그의 눈웃음이 어쩐지 쓸쓸해 보였다. 나는 은겸의 등 뒤에서 느릿하게 흔들리는 긴 꼬리의 궤적을 눈으로 좇았다. 은겸의 말에도 일리가 있었다. 육식종인 은겸과, 잡식종이지만 채식을 더 많이 하는 나의 식성은 겹치는 부분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렇다고 은겸이 식사를 포기할 정도로 우리가 동떨어진 입맛을 지닌 것 또한 아니었다. 나는 세비체를 뒤져서 연어 살을 찾아냈다.
“이거라도 먹어.”
두툼한 토막을 포크로 찍어 내밀자 은겸이 귀를 뒤로 젖혔다. 그의 노란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말했다.
“나 혼자 먹으면 미안하잖아. 명절에는 원래 혼자 밥 먹는 거 아니야.”
10년간 혼자 연휴를 보내 온 주제에,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내뱉는다는 자각은 있었다. 하지만 나는 내민 손을 거두지 않았다.
은겸은 한참 만에야 미소를 지었다.
“그러게. 추석이지, 참.”
한 손으로 머리칼을 쓸어 넘긴 은겸이 허리를 숙였다. 그는 내 손을 붙들곤 연어를 받아먹었다. 붉은 입술이 연어를 삼키는 동안 나는 손목 위에 겹쳐진 은겸의 왼손을 응시했다. 네 번째 손가락의 뿌리 쪽 마디에 여전히 얇은 띠 같은 자국이 남아 있었다.
포크가 빈 뒤에도 은겸의 손은 떨어지지 않았다. 은겸은 내 손목 안쪽을 핥으면서 나를 빤히 보았다. 까끌거리는 혀가 살갗을 세게 문지르자 허리께가 오싹했다.
“그럼 같이 먹을까?”
“……뭘.”
본능적으로 불안을 느끼고 은겸을 노려보았다. 은겸이 살풋 눈을 접으며 살갗 위로 이를 세웠다. 살짝 아플 만큼만 잘근잘근 깨물어 대는 은겸의 의도가 무엇인지야 뻔했다.
“……아까까지 했잖아.”
“부족해.”
“그렇게 하고도…….”
“응. 그렇게 하고도 아직 많이 부족해, 원재야. 더 먹고 싶어.”
중얼거린 은겸이 손바닥을 핥아 올렸다.
“널 전부 삼켜 버리고 싶어.”
아까부터 은은하게 맴돌던 은겸의 체향이 순간적으로 진해졌다. 끈적한 체취가 주위의 모든 냄새를 덮었다. 탁, 탁, 은겸의 꼬리가 빠르게 흔들리며 벽을 때렸다. 본능적으로 밀려오는 긴장감에 몸이 움츠러들었다. 흥분한 맹수를 앞에 두었을 때 누구나 느낄 법한 감정이었다.
금방이라도 달려들 듯 눈을 번뜩이던 은겸은 이내 내 손을 놓아주었다.
“미안.”
짧은 사과에 많은 감정이 억눌려 있었다. 그답지 않게 꼬리를 내린 은겸이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내가 방해했지. 맛있게 먹어.”
나는 그릇마다 절반도 넘게 남은 음식을 바라보았다. 은겸이 신경 써서 만들어 주었으니 깨끗이 비울 작정이었는데. 아쉽지만 그보다 급한 게 따로 있었다. 포크를 내려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러든가.”
“응?”
“같이 먹자고.”
은겸의 노란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았다. 결코 은겸의 기세에 떠밀려서 이러는 게 아님을 증명하고 싶었다. 나는 네 욕망을 버티지 못할 정도로 나약하지 않다고. 덮쳐드는 너를 언제든지 감당할 수 있다고.
“식사는 같이해야지. 좋은 날인데.”
그러니까 나에게 맞추겠다면서 지레 포기할 필요는 없다고.
은겸의 눈이 커졌다.
더는 따질 것이 없었다. 성큼성큼 다가오는 은겸을 끌어당겨 키스했다. 무작정 옷을 벗어 던진 은겸이 나를 끌어안고 거실로 향했다.
우리는 거실 소파가 푹 젖도록 몸을 겹쳤다. 관계는 한 번으로 끝나지 않았다. 헐떡이며 숨을 고르다가 다시 불이 붙어서 침실로 자리를 옮겼다.
정사가 끝난 뒤에도 은겸은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내가 도망칠까 봐 두려워하는 것처럼, 힘주어 나를 끌어안고 억지로 품에 얼굴을 묻게 했다. 마치 내가 그의 옆에 존재한다는 확신을 찾아 헤매는 것 같았다.
나는 눈을 감고 단단한 품에 이마를 댔다. 내가 잠든 줄 알았는지 등을 가만가만 쓸면서 은겸이 중얼거렸다.
“오래오래 같이 있어 줘.”
자신 외에는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커다란 집. 하얗게 반지 자국이 남은 손가락. 혼자라는 증거와 매일 마주치는 일상. 그 위에 타인의 온기가 덮어씌워졌을 때의 기쁨이 얼마나 큰지는 나도 잘 알았다.
‘연휴가 끝날 때까지 여기 있자.’
천천히 숨을 내뱉으며 결심했다. 동정이 아닌 동질감 때문이었다.
나 역시, 누군가와 함께 보내는 명절은 10년 만이었다.
혼자 보내는 시간에 익숙하지만, 사실은 외톨이가 되고 싶지 않은 마음. 그게 내가 첫 번째로 발견한 은겸과 나의 공통점이었다.
***
“그 남자는 누구야?”
얼굴을 마주하자마자 예주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를 보냈다. 인사조차 생략한 채였다. 나는 대답 없이 예주가 들고 있는 쇼핑백을 내려다보았다. 바깥에서도 보일 정도로 반찬통이 차곡차곡 쌓인 쇼핑백은 곧 터질 듯 빵빵했다. 무거울 것 같아 손을 내밀자 예주가 쇼핑백을 뒤로 물렸다. 그러고는 답하지 않으면 주지 않겠다는 것처럼 턱을 치켜들었다. 안 통할 줄은 알지만 시치미를 떼는 수밖에 없었다.
“누구.”
“며칠 전에 너랑 노닥거리던 남자.”
“아무도 아니야.”
“아무도 아닌데 연휴에 만나서 연애질을 해?”
“연애질은 무슨.”
“나 그때 다 들었다. 둘이 꿀 떨어지던 거.”
머리 위를 가리키며 예주가 눈을 빛냈다. 회색 털이 풍성한 늑대의 귀가 이것 보라는 듯 까딱거렸다. 나는 예주를 외면했다.
이 자리에 은겸을 데려오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화요일부터 이어진 추석 연휴 사흘을 은겸과 함께 보낸 뒤, 나는 금요일 아침에 예주에게 연락했다. 신경 써서 챙겨 주는 사람을 오래 기다리게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이왕이면 은겸의 집에 있을 때 명절 음식을 받아다 함께 먹는 것도 좋겠다 싶었다. 다행히도 집에 있었던 듯 예주는 그러마고 내 제안을 수락했다.
잠시 나갔다 오겠다는 말에 은겸은 귀를 옆으로 눕혔다.
“집에 가게?”
“아니, 전에 전화했던 친구. 반찬 좀 받아 올게.”
“그럼 내가 차로 데려다줄까?”
“그냥 갈게.”
“왜. 나한테는 보여 주기 싫은 사람이야? 아니면 나랑 같이 가기 부끄러워?”
“무슨…….”
“아니면 네 주위 사람들한테 나를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 몰라서?”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얼마 전 회식 자리에 은겸이 불쑥 나타났을 때 막연히 느꼈던 초조함의 정체를 들킨 기분이었다. 확실히 일상의 범주에 속하는 이들에게 은겸을 소개하기는 어려웠다. 은겸은 이를테면 일상과 비일상을 가르는 선 위에 발을 걸친 존재였다. 바깥에 있다고도, 안쪽으로 넘어왔다고도 할 수 없었다.
긴 연휴에 한정된 일탈로서 함께 시간을 보낼 수는 있지만, 반복되는 소소한 일상을 공유하자며 내어 주기는 꺼려지는 상대. 내가 인식하는 은겸은 그런 사람이었다.
과묵해진 나를 보며 은겸이 씩 웃었다.
“농담이야. 갔다 와.”
그래서 은겸을 집에 두고 혼자서 예주를 만나러 왔다. 반찬을 받는 것 외에 별다른 목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은겸에게 일찍 돌아가겠다고 말하고 나왔는데도 어쩐지 찜찜했다. 어디까지 장난이고 어디까지 진심인지 알기 힘든 은겸의 태도가 마음에 걸린 탓이었다.
뇌리에서 맴도는 은겸을 몰아내면서 나는 고개를 저었다.
“별 사이 아니야, 진짜로.”
“그 사람이랑 여행 간 거 아니었어?”
“아니라니까.”
거짓말은 아니었다. 딱히 여행을 떠난 게 아니라 은겸의 집에서 숙박하니까. 물론 사 놓고 단 한 번도 쓰지 않았던 커다란 캐리어를 끌고 갔다거나, 일주일 가까이 집에 돌아가지 않고 머물 거라는 사실은 예주에게 털어놓지 않는 편이 좋을 듯했다.
예주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혹시 나중에 깊은 사이가 되면 꼭 나한테도 소개해 줘.”
깊은 사이고 뭐고, 은겸과는 그런 관계가 아니고 장래에도 그렇게 발전될 가능성이 없다고 잡아떼야만 했다. 하지만 나는 차마 입을 떼지 못했다. 요리조리 눈치를 살피던 예주가 코를 찡긋거렸다.
“원재야. 너는 잔정이 많잖아. 그래서 항상 걱정이야. 또 나쁜 사람한테 걸릴까 봐.”
예주는 그때까지 들고 있던 쇼핑백을 내 손에 쥐여 주었다.
“사람은 비슷한 부류끼리 만나야 서로 마음이 편해. 근데 너는 항상 너와는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줬다가 힘들어하잖아.”
나는 묵묵히 쇼핑백의 손잡이를 쥐었다. 예상대로 쇼핑백은 가득 담긴 반찬 때문에 꽤 무거웠다.
“다른 일에는 단호하고 결단력도 있으면서 그놈의 정 때문에 쉽게 감정을 포기 못 하는 거, 내 눈에는 되게 미련해 보이는데 말야. 그게 너고 네 성격이니까 어쩔 수 없지. 다만 나는 네가 또 상처받지 않기만을 바라.”
“…….”
“지금은 네가 아니라니까 그냥 넘어가지만, 나중에 누구인지 꼭 알려 줘. 너 힘들게 하면 내가 가만두지 않겠다고 전하고.”
“……그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예주가 나를 걱정해 주는 건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나를 자기 무리에 소속된 것처럼 여겼으니까.
연애에 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예주는 지난 6년간, 정운이는 나와 어울리는 상대가 아니니 포기하라고 구박한 유일한 사람이었다. 짝사랑을 이어 갈 때만 해도 예주의 말은 가슴을 날카롭게 찌르는 잔소리에 불과했다. 하지만 정운이에게 차이고 나서 돌이켜 보니 그 말은 지극히 현실적인 충고였다. 모두에게 사랑받는 게 익숙하기에 누구와도 사랑할 수 있는 정운이는 나처럼 무겁게 감정을 쌓는 사람과 어울리지 않았다.
그렇다면 은겸은 어떨까.
예주가 은겸과 만나면 그를 어떻게 판단할지는 대강 감이 잡혔다. 겉으로 보기에 은겸은 내가 지금까지 사랑했던 화려한 이들과 다를 바가 전혀 없었으니까. 하지만 은겸이 실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면 예주도 다르게 생각하지 않을까. 내가 차근차근 나와 은겸 사이의 공통점을 찾아낸다면. 우리가 그리 다르지 않은 존재임을 알게 된다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한번 은겸을 떠올린 머릿속은 좀처럼 그를 몰아내지 못했다. 어지간히 걱정스러운지 꼬리를 둥글게 만 예주에게는 미안하게도, 나는 노란 예주의 눈에 은겸의 호박색 눈을 겹쳐 보고 있었다.
말이 없는 나를 지켜보던 예주가 이내 한숨을 쉬었다.
“반찬 맛있게 먹고, 모자라면 말해. 그리고 엄마가 너 보고 싶다더라.”
“고맙다. 시간 되면 뵈러 갈게.”
“네 애인한테도 맛있게 먹으라고 전해.”
“애인 아니라니까.”
피식 웃은 예주가 손을 흔들었다.
쇼핑백을 들고 은겸의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 유난히 멀었다. 묵직한 짐을 추스르며 나는 느릿느릿 걸었다.
은겸과 나는 무슨 관계일까.
나는 왜 예주에게 은겸을 인정받고 싶어 했던 걸까.
“어서 와.”
현관문을 열며 반갑게 나를 반기는 은겸도, 그에게 반찬통을 내미는 나도, 서로를 무엇이라고 여기기에 이런 행동을 하는 걸까.
모르겠다. 종잡을 수 없었다. 발정기 때만 만나는 섹스 파트너라기에는 서로에 관해 너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고 연인이라기에는 아직 은겸이 낯설었다. 무엇보다도 그가 섹스 파트너 다음 단계를 원하는지도 알 수 없었고.
그럼 나는 이다음 단계를 원하는 건가?
어느 질문에도 답하지 못한 채 시간은 흘러갔다.
함께 지내는 동안 은겸은 의외로 얌전했다. 시도 때도 없이 달라붙을 줄 알았는데 제법 신사적이었다. 때와 장소를 가릴 줄 알았고, 언제나 내게 먼저 의사를 물었다. 물론 섹스가 시작되면 변태가 되었지만.
나는 그를 거부하지 않았다. 애초에 은겸의 집에 머물기로 했을 때부터 어느 정도 각오한 일이었다. 발정기의 열은 이제 미미했기에 은겸과 계속 몸을 겹쳐야 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나는 순순히 은겸을 받아들였고 넓은 은겸의 집 곳곳에서 그와 정사를 벌였다.
연휴의 마지막 날인 일요일 대낮에도 우리는 엉켜 있었다.
저녁에 마실 와인을 사야 한다는 은겸을 따라 장을 보러 간 게 실수였다.
“두 분 정말 잘 어울리세요. 신혼이신가 보다.”
함께 좋은 시간을 보낼 때 마실 만한 와인을 찾는다는 말에, 직원이 립서비스가 분명한 칭찬을 건넸다. 어째서인지 그 빈말을 듣곤 은겸의 스위치가 눌려 버렸다. 직원이 권하는 대로 내 월급보다 비싼 와인을 덥석 구입한 은겸은 집에 돌아오자마자 나를 데리고 침실로 향했다. 그러고는 나를 끌어안고 숨 가쁘게 입술을 겹쳤다.
그야말로 덮쳐들듯 입 안을 탐하고도 은겸은 만족하지 못했다. 키스하는 내내 그의 손이 내 가슴을 움켜쥐고 주물렀다. 입술을 뗄 무렵 내 호흡은 가빠져 있었다. 타액이 흐른 입술을 핥으며 그가 말했다.
“괜찮아?”
구태여 물을 필요가 없는 질문이었다. 나는 묵묵히 바지 버클을 풀었다. 피식 웃은 은겸이 서둘러 자신의 윗옷을 끌어 올렸다. 그가 양팔을 교차하면서 티셔츠를 벗자 커다란 상체가 시야를 덮었다. 보기 좋게 움직이는 두툼한 가슴 근육을 응시하며 나는 숨을 삼켰다.
“수영을 많이 좋아했나 봐.”
윗옷에서 머리를 빼낸 은겸이 가볍게 고개를 흔들었다. 그의 긴 머리카락이 형광등 불빛을 반사하며 반짝였다. 시선을 떼지 못하고 나는 손을 움직였다. 바지 지퍼가 벌써 불룩해진 중심에 걸려 잘 움직이지 않았다.
“왜.”
“수영 대신이잖아, 나랑 하는 거.”
휙 손을 움직이며 은겸이 내게 바짝 다가섰다. 멀리 날아간 티셔츠가 바닥에 떨어졌다.
“이렇게 하고도 안 질리는 거 보면, 수영 마니아였겠네.”
“…….”
“아니면 나랑 하는 게 좋아?”
“발정기 때문이야.”
서둘러 나는 잘라 말했다. 발정기도 슬슬 마무리 단계라 은겸의 도움이 없어도 괜찮다는 사실은 일부러 무시했다. 은겸이 씩 웃었다.
“나는 좋아하는데.”
“…….”
“원재 너와 하는 섹스가 좋아.”
그의 말을 못 들은 척 허리를 굽혔다. 최대한 천천히 하의를 끌어 내리면서 표정을 수습했다. 자연스럽게 대답을 회피할 방법이 남아 있어서 다행이었다.
하마터면 나를 좋아하냐고 물을 뻔했다.
“너도 그렇게 느끼면 좋겠다.”
수그린 등줄기 위에 은겸의 손가락이 닿았다. 척추를 타고 미끄러져 내려가는 손가락의 감촉이 간지러웠다. 나는 작게 몸을 떨었다. 긴 선을 그리듯 움직이던 은겸의 손은 꼬리 뿌리에서 멈춰 섰다.
“네 꼬리는 정말 야한 거 같아.”
가늘고 길게 뻗은 다른 종들의 우아한 꼬리와 달리, 내 꼬리는 손바닥 정도밖에 안 되는 길이에 뭉툭하고 둥근 모양이었다. 엉덩이골의 반도 덮지 못하는 짧은 꼬리가 뭐가 야하다는 걸까.
“짧아서 옆으로 못 치우잖아.”
“그게 왜.”
“너한테 넣을 때 꼬리 끝이 닿는데…….”
잠시 말을 멈춘 은겸이 긴 한숨을 쉬었다.
“안에서는 뜨겁게 달라붙고, 입구에서는 빈틈없이 조이고, 밖에서는 부드럽게 훑거든.”
“…….”
“그래서 미칠 것 같아.”
다리 사이로 불쑥 파고든 은겸의 긴 꼬리가 허벅지에 휘감겼다. 맨살에 닿는 감촉이 부드러웠다. 털이 풍성한 꼬리의 끝부분이 회음을 거쳐 입구에 닿자 나는 은겸의 허리를 붙들었다.
“하지 마, 읏.”
은겸이 꼬리를 움직일 때마다 신음이 터져 나왔다. 꼬리털 한 올 한 올이 주름을 찌르고 쓰다듬는 감각이 생생했다. 누군가가 입구를 세필 붓으로 쓸어 올리며 희롱하는 것 같았다. 간지러워서 몸을 움찔거리면 은겸이 긴 꼬리 전체를 움직여 허벅다리를 문질렀다.
진해진 체향을 흘리면서 은겸이 속삭였다.
“넣고 싶어.”
힘이 풀린 다리가 제멋대로 꺾였다. 나는 제자리에 주저앉았다. 피가 몰린 코 안쪽이 아릿했다. 벌게졌을 게 분명한 얼굴을 한 손으로 가리며 숨을 진정하려 애썼다. 걷잡을 수 없게 번진 흥분 때문에 다리 사이가 욱신거렸다.
꼬리가 아니라 다른 것을 안에 넣고 싶었다.
은겸도 나만큼이나 여유가 없었다. 팔을 붙잡아 나를 일으켜 세우곤 곧장 침대에 눕혔다. 초점이 풀린 눈으로 나를 훑은 그가 전희조차 생략한 채 내 다리를 벌렸다.
“풀어야 해?”
“내가 할게.”
은겸이 콘돔을 뜯어 성기에 씌우는 동안 나는 젤을 집어 직접 입구를 풀었다. 더는 기다릴 수 없었다. 다행히도 연휴 내내 은겸을 받아들였던 안은 녹진녹진하게 풀려 있었다. 손가락을 빼내자마자 교대하듯 은겸이 성기를 들이밀었다. 커다란 선단이 좁은 틈을 열고 들어오는 느낌이 반가웠다. 수월하게 안쪽까지 삽입한 은겸이 내 목덜미를 깨물었다. 나는 그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몸을 섞는 내내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지금껏 몇 번이고 섹스를 해 왔는데도 유달리 몸이 예민했다. 은겸의 말 때문이었다. 내가 ‘안에서는 뜨겁게 달라붙고, 입구에서는 빈틈없이 조이고, 밖에서는 부드럽게 훑는다’는 은겸의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이러라고 일부러 알려 주었던 것일까. 나 자신의 반응이 전부 의식되어 미칠 것 같았다.
내가 어떻게 은겸을 휘감는지, 무의식중에 그를 얼마나 붙드는지 알게 되자 은겸이 내게 떠안기는 쾌감에 오롯이 집중할 수 없었다. 전신의 감각이 새로 깨어난 것만 같았다. 나는 계속 은겸을 붙잡았다가 놓았고, 허리를 비틀며 도망치다가 뒤를 조였다.
자꾸만 이어지는 움직임이 방해가 되었던 듯, 은겸은 이내 내가 도망치지 못하게 어깨를 내리눌렀다. 그러더니 자신의 체중을 실어 위에서부터 내리찍었다.
“흐윽!”
절로 신음이 터져 나왔다. 아래에서 침대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은겸의 팔을 붙들고 버티려 해도 소용없었다. 안쪽이 징징 울려서 쾌감인지 고통인지도 판단하기 어려웠다. 위아래로 꺼떡거리던 성기가 정액을 뿜었을 때, 나는 어느새 울고 있었다.
상체를 숙인 은겸이 내 가슴을 핥았다.
“원재야.”
대답할 상황이 아니었기에 나는 시트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은겸은 정액이 점점이 뿌려진 가슴을 꼼꼼하게도 핥았다. 까끌거리는 혀가 닿을 때마다 사정의 여운이 가시지 않은 몸이 흠칫흠칫 떨렸다.
“안에 뿌리고 싶어.”
“읏…….”
아직 도달하지 못한 은겸의 페니스가 입구를, 정확히는 안쪽 살을 아래로 세게 눌렀다. 이어져 있는 상태로도 구멍이 늘어나는 느낌이 들었다.
“해도 돼?”
농담이 아닌지 은겸이 성기를 슬금슬금 돌렸다. 내벽을 문지르는 움직임이 민감한 몸을 자극했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씻기, 귀찮, 으, 하, 귀찮아.”
“씻겨 줄게.”
은겸의 말을 믿을 수 없었다. 그야 씻겨 주기는 할 터였다. 나를 챙기기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하지만 얌전히 씻길 리가 만무했다. 안쪽에 고인 정액을 빼내야 한다는 핑계로 손가락을 넣고 휘저으며 괴롭힐 게 뻔했다. 그러다 꼴리면 또 넣고.
“넌 까무잡잡해서……. 어디에 뿌려도 잘 보이거든. 안쪽은 붉으니까 거기도 잘 어울릴 거야.”
아랫입술을 핥은 은겸이 눈을 빛냈다. 나는 계속 고개를 저었다. 평소에는 다정한 은겸이 침대 위에서는 얼마나 뻔뻔하고 집요한 변태인지 이제는 잘 알았다. 마음대로 하라고 내버려 두면 폭주한다는 것도.
“빼, 서은겸.”
“콘돔 빼라고?”
“네 좆 빼라고.”
단호한 말을 못 들은 척, 은겸이 내 가슴팍에 코를 문질렀다. 마치 내게 자신의 냄새를 덧입히려는 것처럼 체향도 함께 내뿜었다. 한참 얼굴을 비비며 시간을 끌던 은겸은 마침내 꾸물꾸물 자신의 것을 끄집어냈다. 커다란 성기가 빠져나가자 한계까지 벌어져 있던 입구가 뻐끔거리며 닫혔다. 갑갑했던 배가 허전했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내 안에서 빠져나온 뒤에도 은겸의 페니스는 기세 좋게 솟아 있었다. 허리를 세운 은겸이 팽팽한 붉은 기둥을 손으로 쥐고 흔들다가 콘돔을 벗겼다. 힘차게 쏘아진 액체가 내 가슴 위로 쏟아졌다. 일부러 그쪽에 겨냥한 듯했다.
가슴골에 흥건히 고여 흐를 정도로 정액을 내보낸 뒤 은겸은 배와 가슴을 크게 들썩이며 천천히 숨을 골랐다. 사정을 마치고 난 그의 눈가가 평소보다 붉었다. 볼에 콕 박힌 점이나 붉어진 눈가, 위로 올라간 입꼬리가 야릇하게 예뻤다. 얼굴만은 여전히 화려한 인상의 미남이었다. 물론 그 아래로 보이는 몸이나 성기를 보면 전혀 다른 감상이 떠올랐지만.
나는 티슈를 뽑아 그에게 건넸다.
“고마워.”
은겸이 자신의 손과 성기를 닦았다. 내가 뒤쪽과 가슴팍을 대강 닦아 내는 사이 그가 내 위로 쓰러졌다.
“한 번 더 할까?”
은겸의 무게에 못 이긴 침대가 크게 출렁거렸다. 은겸과 맨살이 닿자 열기가 남은 하반신이 또 반응할 것만 같았다. 할 때 하더라도 잠시 쉬고 싶었다. 나는 대답 없이 몸을 일으켰다.
나를 붙들지 않고 순순히 비켜 준 은겸이 팔을 위로 치켜들었다.
“하루 종일 침대에 누워서 살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천장을 만지려는 것처럼 쭉 뻗은 손을 올려다보며 은겸이 중얼거렸다. 속옷을 주워 입으면서 나는 대꾸했다.
“그러면서 회사는 어떻게 다녀.”
“그러게. 가기 귀찮아 죽겠어.”
“사장이 그러면 어떡해.”
“사장이든 직원이든 출근이 싫은 건 마찬가지야.”
장난스럽게 말하는 은겸을 뒤로하고 나는 부엌으로 향했다.
몇 번의 섹스를 거치며 알게 된 사실이 하나 더 있었다. 은겸은 섹스 후 침대에서 뒹구는 것을 좋아했다. 나를 끌어안고 가벼운 후희를 나누거나, 등을 토닥거리다가 잠들곤 했다. 섹스 후 내게 꿀물을 타 주던 건 욕구를 엄청나게 억누른 자기희생의 결과였다. 그 사실을 알게 된 이후부터 나는 직접 물을 떠다 마셨다.
은겸의 집 구조는 이제 익숙했다. 나는 냉장고에서 꿀과 생수를 꺼내고 컵을 찾았다. 긴 스틱으로 꿀이 섞여 들도록 저으면서 무심코 시선을 돌렸다. 넓은 거실에 이어진 문을 하나하나 세다 보니, 언제나 닫혀 있는 마지막 방문에 시선이 닿았다.
내가 캐리어를 끌고 온 날 이후, 은겸은 실수로라도 그 방 앞에 멈춰 서지 않았다. 마치 문이 아니라 벽을 보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지나쳤다. 열쇠를 잃어버렸다더니 찾으려는 마음도 없는 듯했다. 당연히 방문이 열린 모습 역시 본 적이 없었다.
저기는 대체 무슨 방일까.
아무 이유 없이 문을 잠갔을 리가 없었다. 은겸이 방 안에 무언가를 숨겨 놨을 거라는 예감이 강하게 일었다. 호기심을 이기지 못하고 나는 무심코 방문 앞으로 다가섰다.
“네 명함에 말이야.”
뒤에서 들려온 은겸의 목소리가 어깨를 잡아챘다. 나는 황급히 뒤로 물러섰다. 침대에 누운 은겸에게는 내 행동이 보이지 않았을 테지만, 당황스러웠다.
“명함?”
“응. 직함이 콘텐츠기획팀 연구원이라고 적혀 있잖아. 그래서 처음에는 뭔가 연구하는 학자인 줄 알았어.”
“……이쪽 업계에서는 직원을 그냥 연구원이라고 불러.”
“그게 참 멋있더라고.”
“멋있기는 무슨.”
많이 생각하지 않고 답할 수 있는 화제라 다행이었다. 태연함을 가장해 대꾸하며 나는 침실로 돌아갔다.
은겸은 내가 방을 떠났을 때와 똑같은 자세로 팔을 뻗고 있었다. 나는 문가에 기대어 서서 그를 바라보았다. 홀짝홀짝 꿀물을 마시자 나를 쳐다보지 않고 은겸이 물었다.
“오늘도 꿀물?”
“응.”
“꿀물 맛있어?”
“응.”
나는 입술에서 컵을 떼었다. 한 번도 은겸이 꿀물을 마시는 모습을 본 적이 없어서 내 것만 챙겼는데, 생각해 보니 이기적이었던 듯했다. 입 안에 남은 꿀물을 삼키고 그에게 컵을 내밀었다.
“마실래?”
“아니. 난 꿀 안 먹어.”
“안 먹는다고?”
“나한테는 안 맞아. 냄새도 별로고.”
“안 먹을 거면서 왜 사 놨는데?”
여전히 나를 보지 않은 채로 은겸이 중얼거렸다.
“꿀 좋아하는 사람들한테 먹이려고.”
“…….”
“내가 아는 곰들도 꿀을 좋아했거든.”
은겸이 덧붙인 말이 조금 껄끄러웠다. 나는 컵 가장자리를 만지작거렸다. 하기야, 곰은 대부분 꿀을 좋아한다. 물론 나도 꿀을 좋아하고. 하지만 종 정보를 바탕으로 내 취향을 간파당한 기분은 썩 좋지 않았다.
어쩐지 쓴웃음이 났다. 솔직히 잘 모르겠다. 내가 곰이라서 꿀을 좋아하는 건지. 그냥 입맛에 맞아서 좋아하는 건지. 어릴 때부터 자주 먹어서 익숙한 것뿐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냄새조차 별로라는 은겸과, 처음 꿀을 접했을 때부터 자연스럽게 끌렸던 내가 같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래서 냄새 없는 꿀을 샀던 거구나.’
처음 만났던 날, 은겸이 말했던 ‘꿀 냄새가 역해서 싫어하는 사람들’은 자기 이야기였겠지. 나는 컵을 들어 한입에 비웠다. 입 안에 감도는 달콤함이 괜스레 느끼했다.
내가 입을 다물자 비로소 고개를 돌린 은겸이 나를 보았다.
“이따 바래다줄 테니까 저녁 먹고 가.”
컵을 쥔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 오늘이 연휴 마지막 날은 맞았지만, 은겸이 내게 돌아가라고 할 줄은 몰랐다. 하루 더 있다 가라거나, 아예 오래 머물라고 붙잡을 줄 알았는데. 어쩐지 허를 찔린 느낌이었다.
나는 입술을 잘근거렸다. 꿀이 남은 살갗이 끈적거렸다. 망설임 끝에 털어놓은 진심은 제법 부끄러웠다.
“……며칠 더 있다가 가면 안 될까.”
은겸과의 짧은 동거는 상상 이상으로 기분 좋았다. 누군가와 함께 일상을 보내는 게 오랜만이었기에 마찰이 생기거나 불편할 법도 한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끊임없이 내게 맞춰 주고 배려한 은겸 덕분이었다. 언제 또 이럴 기회가 올지 모르는데, 며칠이라도 더 은겸의 옆에 남아서 희미해지는 발정기의 열을 붙들고 싶었다.
귀를 옆으로 눕힌 은겸이 눈썹 머리를 세웠다.
“미안. 오늘 밤은 좀 바빠서.”
“오늘 일요일이잖아.”
“내일부터 출장이거든. 미리 준비해야 돼.”
“뭐?”
“짐도 싸고, 서류도 챙겨야지.”
그런 이야기를 왜 이제야 하는 걸까. 당연히 은겸도 평소처럼 내일 출근할 줄 알았는데. 그런 줄 알았다면 일찍 돌아갈 것을, 괜히 미적거리다가 은겸의 시간을 빼앗은 듯했다.
은겸이 빙긋 웃었다.
“신경 쓸 것 같아서 일부러 얘기 안 했어. 가기 전에 마음 편히 같이 있고 싶었거든.”
“그래도…….”
“일주일이나 너 없이 있어야 하는데. 잔뜩 충전해서 가야지.”
“멀리 가나 보네.”
“응. 외국에 잠깐.”
“그러면서 무슨 출근하기 싫다느니, 침대에 누워만 있고 싶다느니…….”
“사장은 그러면 안 되나. 가면 해야 하는 일도 많은데.”
장난스럽게 말하며 은겸이 몸을 일으켰다. 이불 아래에서 나타난 탄탄한 나신이 보기 좋게 꿈틀거렸다.
“내일부터 연락이 잘 안 될 거야. 회사가 좀 작아서 내가 영업 사원이나 다름없어. 거래처 분들도 내 얼굴 보고 거래해 주는 거라서.”
“그래.”
“너 보고 싶어서 어떡하지.”
“일이나 제대로 하고 와.”
내게 가까이 다가온 은겸이 고개를 숙였다. 이마를 맞댄 그가 씩 웃었다.
“그동안 잘 지내. 갔다 와서 보자.”
내 손에서 빈 컵을 빼앗아 들곤, 은겸이 나를 스쳐 지나갔다.
나는 비어 버린 큰 침대를 응시했다. 조금 전까지 은겸이 누웠던 자리에는 구겨진 이불만 나뒹굴었다. 뒤돌아서면 거기에 은겸이 있을 텐데, 어쩐지 집 안 전체가 휑해진 기분이었다. 팔을 쓸어내리며 나는 어깨를 움츠렸다.
일주일 뒤면 9월도 끝물이었다. 그쯤이면 내 발정기도 끝났을 시기였다.
이야기할까. 말까.
출장이 끝날 때쯤에는 우리가 만날 명분도 사라진다고. 어쩌면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고.
오늘 헤어지면 다시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고.
“……고작 이거로 일주일을 버틸 수 있어?”
“응?”
컵을 씻는 물소리에 은겸의 대답이 섞여 들렸다. 뒤를 돌아보지 않고 나는 침대로 걸어갔다.
“한 번 더 해.”
“뭐?”
“안에다 뿌리고 싶다며.”
“…….”
“출장 가서 후회하지 말고 하든가.”
솔직한 말은 속으로 삼키고 나는 침대에 엎드렸다. 그리고 은겸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며 베개에 얼굴을 파묻었다. 어떤 표정으로 그와 마주 보아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애초에 은겸과 나는 발정기가 끝날 때까지만 만나자는 조건으로 시작된 사이였다. 은겸이 제시한 조건을 받아들일 때 나는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잘라 말했다.
“발정기 끝나면 바로 끝입니다.”
그런데 왜일까. 끝이 다가온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곰은 달을 그린다》 2권에서 계속
곰은 달을 그린다
2
당수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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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곰은 발을 거둔다 (하)
은겸은 만나지 못하는 동안에도 나를 귀찮게 했다.
귀찮을 정도로 연락을 많이 한 건 아니었다.
오늘은 점심 뭐 먹었어?
은겸의 메시지는 정해진 시각에만 날아들었다. 오후 1시 반, 점심 식사를 마치고 업무에 복귀했을 즈음이었다. 내용은 단순했다. 평소처럼 뭘 먹었냐고 묻는 문자였다. 보고 싶다거나 힘들다는 엄살이 날아올 줄 알았는데. 그게 다였다. 은겸은 꼬박꼬박 점심 메뉴만 물어보곤 그 이상 연락하지 않았다.
대체 내가 점심으로 뭘 먹었는지가 왜 그렇게 중요한 걸까.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아보카도 파니니랑 바나나 주스.
모자라지 않았어?
배고프면 간식 챙겨 먹어.
그럴게.
하루 한 차례 짧게 이어지는 점심 메뉴 보고가 끝나면 나는 대화를 끝냈다. 내가 먼저 은겸에게 메시지를 보내지는 않았다. 그가 가 있는 나라와 시차가 몇 시간인지도 모르고, 한창 출장 때문에 바쁠 텐데 방해할 수는 없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추석 연휴 전까지만 해도, 은겸과 나는 하루 또는 이틀에 한 번 정도 연락을 하는 사이였다. 섹스하기 위해 만날 약속을 잡는 것 외에는 용건이 없었으니까.
그러니까 내가 은겸의 뜸한 연락에 휘둘리는 이유는, 오로지 일주일 가까이 이어진 기간 한정 동거 때문에 판단력이 흐려진 탓이었다.
‘왜 연락을 안 하지.’
한때는 귀찮을 정도로 전화를 걸었으면서. 잠잠한 스마트폰을 내려다보며 나는 입술을 잘근잘근 씹었다. 오히려 계속 메시지가 오면 무심하게 넘겨 버릴 텐데. 뚝 끊긴 연락이 신경 쓰여서 견딜 수 없었다. 함께 시간을 보낼 때보다, 계속 연락이 이어질 때보다. 멀리 떨어져서 메시지도 뜸해진 지금이 훨씬 더 귀찮았다. 은겸은 억울해할지도 모르겠지만.
며칠이나 떨어져 있었다고 안달을 내는 나 자신이 조금 우습기도 했다. 이런 내 모습을 보면 은겸이 어떻게 생각할지도 가늠이 되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철저히 은겸의 질문에만 답변했다. 초조해하는 나를 들키고 싶지 않았다.
수요일 오후 1시 반. 알람이라도 맞춘 것처럼 스마트폰에 메시지가 떠올랐다.
오늘 점심 뭐 먹었어?
화면을 내려다보다가 나는 옆자리 파티션에 대고 물었다.
“우리 오늘 점심에 뭐 먹었지?”
“오늘요? 어……, 아, 그거다, 그거. 칼국수.”
그의 말을 들으니 점심이 생각났다. 초식종인 다른 팀원들은 채수를 베이스로 한 칼국수로 통일했고, 나 혼자 바지락 칼국수를 시켜 먹었다.
“고마워.”
“근데 원재 씨, 요새 그건 왜 물어봐요?”
목소리가 등 뒤 가까운 데서 들려왔다. 스마트폰을 감추며 나는 뒤를 돌아보았다. 옆자리 팀원이 어깨 너머로 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아. 누가 자꾸 물어봐서요.”
“점심 메뉴를 꼬박꼬박 물어보는 사람이 있다고?”
우리의 목소리가 조금 컸는지 과장님까지 대화에 끼어들었다. 나는 황급히 서랍을 열어 스마트폰을 집어넣었다. 긴장한 탓에 서랍이 잘 닫히지 않았다. 억지로 밀어 넣자 덜커덕 소리가 울렸다.
저번 회식 때처럼 또 연애하냐는 이야기가 나올지도 몰랐다. 심지어 그날, 팀원들 앞에 은겸이 나타나 나를 데려가기까지 했으니까. 은겸과는 수상한 관계가 아니라고 잡아떼기로 마음먹고 나는 이어질 추궁을 기다렸다.
무슨 바람이 불었는지 변명을 던진 사람은 내가 아니라 신입이었다.
“김 주임님, 어머니하고 사이가 좋으신가 봐요.”
“아, 응.”
“귀한 아들 밥은 잘 먹고 다니는지 걱정되셨나 보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대강 긍정했다. 어머니와 연락이 끊긴 지 10년은 되었다는 사실을 팀원들이 알 리 없었다.
“저 고등학교 다닐 때도 엄마가 그러시더라고요. 매일 점심이랑 석식 식판 사진을 찍어서 보내라고요.”
“그건 급식비 빼돌리지 않았나 확인하신 거 아니야?”
“엇, 어떻게 아셨어요. 그거 맞아요.”
한번 시작된 수다는 그칠 줄을 몰랐다. 다들 어지간히 일하기 싫었는지 하나둘 쓸데없는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나는 대화에 끼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러다 또 내 연애 이야기가 나올지 모르니 조용히 도망치는 게 상책이었다.
점심시간이 지난 지 얼마 안 된 탓일까, 옥상은 텅 비어 있었다. 황량한 공간을 둘러보며 나는 기지개를 켰다. 지금처럼 아무도 없는 시간대는 흔치 않았다. 흡연실이 따로 없는 건물이다 보니 보통은 담배를 피우는 이들이 두서넛은 있게 마련이었다. 나야 담배를 끊은 이후 이곳에도 발길을 끊었지만.
옥상 벽에 칠해진 연분홍색 페인트와 바닥에 칠해진 초록색 방수 페인트의 어색한 조합 때문에 눈이 아팠다. 비라도 올 듯 흐린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나는 발을 옮겼다. 구석에 놓인 쓰레기통을 목표로 삼고 걸었다. 대충 시간을 보내다가 사무실로 돌아가면 될 듯했다. 그때쯤이면 다들 업무에 복귀했으리라.
“어, 김원재?”
쓰레기통까지 세 발자국 정도 남았을까. 예상치 못한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돌아보지 않아도 누구인지 알 수 있을 만큼 익숙한 음성이었다. 나는 몸을 틀었다. 효영이 옥상 문 앞에 서 있었다.
“담배?”
“응. 너도?”
“난 됐어.”
짧은 대화를 나누는 사이 효영은 성큼성큼 가까워졌다. 가까이에서 본 효영의 안색이 좋지 않았다. 묵묵히 스쳐 지나가는 효영의 뒤를 따라 쓰레기통으로 향했다. 이번에는 목표 지점에 도착할 때까지 누구도 나를 불러 세우지 않았다.
효영이 담배를 꺼내는 사이 나는 그녀의 라이터를 받아 들었다. 끄트머리에 불을 붙여 주자 효영은 까닥 눈인사를 보냈다. 빨간 불씨가 반짝거리며 타들어 갔다.
복잡한 표정으로 한 모금을 빨아들인 효영이 나를 돌아보았다.
“진짜 담배 끊었어?”
“어쩌다 보니.”
“애인이 흡연자는 싫대?”
“뭐?”
효영의 눈매가 둥글게 휘었다.
“회사에 소문 다 났어. 우직하게 일만 하던 기획팀 김원재 씨가 요새 연애하느라 정신없다고.”
“무슨 말도 안 되는…….”
“우리 팀에도 너 노리던 사람들 있는 거 알아? 나한테 진짜냐고 물어보라더라. 마침 잘 만났다. 진짜야, 너?”
아무래도 회식 때 나왔던 이야기가 와전된 것 같았다. 어쩌다 효영의 팀까지 전해졌을까. 손을 내저으려다가 나는 그만 입가를 가렸다. 조금 전 사무실에서의 상황이 떠올랐다.
설마 다들 알면서 모르는 척했던 건가?
목덜미가 후끈후끈했다. 입을 가린 채로 나는 부인했다.
“아니야.”
“아니라고?”
효영이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나를 보았다.
“너 전에 목에 키스 마크…….”
“야.”
허둥지둥 손을 내려 목을 가렸다. 아, 저 말에 반응하면 안 되는 거였는데. 뜨뜻한 목을 부여잡고 나서야 후회가 몰려왔다. 피식 웃은 효영이 담배를 입에 가져갔다.
효영은 그 이상 추궁하지 않았다. 다시금 굳은 얼굴로 중얼거렸을 뿐이었다.
“그러지 말고 애인 있다고 인정해.”
“없는 애인을 어떻게 있다고 해.”
“없어도 그냥 있다고 하는 게 속 편하잖아.”
“뭐?”
“사귀는 사람 없으면 덜떨어진 사람 취급이나 받으니까. 뭔가 부족한 점이 있을 거라고 지레짐작당하고.”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효영이 하는 이야기는 이미 내 연애에 관한 농담이 아닌 듯했다. 설마 요새 계속 표정이 안 좋은 것과 관계가 있는 걸까.
“누가 너한테 뭐라고 그래?”
“어, 그런 게 좀 있어.”
말을 얼버무린 효영이 얼마 피우지도 않은 담배를 비벼 껐다. 쓰레기통에 꽁초를 던져 넣곤, 효영은 나를 돌아보았다.
“슬슬 우리도 좋은 사람 만날 나이이기는 하잖아? 연애하면서 안 풀리는 거 있으면 상담해. 누나가 다 알려 줄게.”
시답잖은 농담을 던지며 노란 눈을 빛내는 효영은 내가 아는 예전의 모습이었다. 힘들어하는 모습보다 태연한 척하는 그 모습이 더 걱정스러웠다. 상담은 내가 아니라 효영한테 더 필요하지 않을까.
“너 요새…….”
“아, 나 2시에 회의 있는데 깜빡하고 왔어. 가야겠다.”
말도 안 되는 핑계를 대며 효영은 내게 손을 내밀었다. 효영의 긴 꼬리가 살랑살랑 흔들렸다.
나는 한숨을 삼켰다.
“누가 누나야.”
“내가 너보다 생일 두 달 빠르거든?”
“알았어. 알았으니까. 너도 힘든 일 있으면 나한테 말해, 꼭.”
펼쳐진 손바닥 위에 라이터를 올려놓았다. 가만히 손바닥을 내려다보던 효영이 주먹을 쥐었다. 나는 손가락 아래에 가려진 라이터의 흔적을 눈으로 좇았다.
이내 눈웃음을 친 효영이 몸을 돌렸다.
“연애 초기면 궁금한 것도 많지 않아? 마냥 좋기만 해?”
“연애 아니라고 몇 번을…….”
“오늘은 인심 써서 공짜로 상담해 줄 테니까 뭐든 말해 봐. 응?”
“유료 상담이었어?”
“그럼 남의 연애사 뭐가 좋다고 내가 공짜로 들어 주겠어?”
별 의미 없는 말에 대꾸하며 효영의 뒤를 따랐다. 본인에게 고충을 털어놓을 의사가 없다면 내가 강제로 끄집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부디 좋은 방향으로 해결되기를 바라는 수밖에.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는 동안 효영은 다시 침묵을 지켰다. 무언가 분위기를 바꿀 만한 괜찮은 화제가 없을까. 곰곰이 생각하다가 나는 입을 열었다.
“이건 그냥 물어보는 건데.”
“오, 뭐가 있긴 한가 보네.”
“혼자 사는 사람 집의 방 하나가 항상 잠겨 있거든. 그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효영의 두 귀가 쫑긋 섰다.
“그거 뭐야? 심리테스트?”
“아니, 그냥…….”
은겸의 방은 내내 신경 쓰이던 것이었다. 열쇠를 잃어버렸다던 은겸의 말은 믿기 어려웠다. 정말 열쇠를 잃어버렸다면 진작 집을 뒤져서 찾으려 했을 텐데. 은겸에게는 방문을 열 의지가 없어 보였다.
왜 그 방은 계속 닫혀 있어야만 하는 걸까?
“안에다 야한 거 숨겨놓았나? 아니면 청소를 안 해서 그런 거 아닐까?”
“그럴 사람은 아니야.”
“아, 잠깐만. 나 비슷한 이야기 어디서 읽었는데.”
잠깐 기다려 보라며 스마트폰을 만지던 효영이 기기를 내 눈높이로 들어 올렸다.
“그래, 이거 말이야.”
효영이 내민 화면에는 글자가 빼곡하게 들어차 있었다. 화면을 가리키며 효영이 자신 있게 말했다.
“푸른 수염 이야기잖아.”
“그게 뭔데?”
“인간들이 만든 동화.”
스마트폰을 받아 들고 화면에 떠오른 글을 찬찬히 읽었다. 동화의 내용은 다소 기괴했다. 수많은 여성과 결혼한 것으로 유명한 사내가 새 아내를 맞이한다. 사내는 아내에게 잠겨 있는 방의 열쇠를 주면서 절대로 열지 말라고 당부한다. 하지만 호기심을 이기지 못한 아내는 잠긴 문을 열어 보고 경악한다. 그곳에는 사내의 전 부인들의 시체가 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끝까지 읽지 못하고 나는 스마트폰을 옆으로 밀었다. 상상만으로도 온몸이 섬찟했다. 나를 살피던 효영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진짜 싫은 이야기지?”
“이게 동화라고? 아이들이 이런 잔혹한 이야기를 읽었단 소리야?”
“인간들에겐 동족 살해 정도야 아무것도 아니었던 모양이지.”
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은겸의 방 안에 무엇이 있을까 상상해 본 적은 있었다. 하지만 전 부인의 시체라니. 생각하기도 싫은 가설이었다. 특히 인간에게 흥미가 많다던 은겸의 말이 방금 읽은 그로테스크한 이야기에 겹쳐지자 더욱 불쾌해졌다.
내 눈치를 살피던 효영이 꼬리를 내렸다.
“그렇다고 네 애인이 살인마라는 소리는 아니고. 그냥 이런 이야기도 있다고.”
“……애인 아니라니까.”
“정 궁금하면 혼자 끙끙대지 말고 직접 물어봐. 의외로 별거 아닐지도 모르지.”
“…….”
“아니면, 그 사람을 못 믿어서 그래?”
효영의 말과 동시에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렸다. 내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곤, 효영은 사무실로 걸어가 버렸다.
이번에는 효영의 뒤를 따라가지 못했다. 문이 자동으로 닫힐 때까지 나는 엘리베이터 안에 우두커니 서 있었다. 효영이 해 주고 간 이야기가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나는 은겸을 못 믿는 걸까.
그의 방에 전 부인의 시체가 있지 않을 거라는 정도는 믿는다. 아무런 이유 없이 방문을 잠그지 않았을 거라는 사실도 믿는다. 그렇다고 그의 상냥함은 가짜가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나? 내게 순순히 방문을 열어서 보여 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나?
내가 아는 서은겸은 어떤 사람일까.
어차피 우리가 헤어질 사이라면 그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으려 했다. 호기심도 지니지 않으려 했다. 나에게 바짝 다가선 그를 피해 그동안 느릿느릿 발을 옮겼다. 도망치다 보니 피니시 라인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나는 어느새 우리의 관계가 끝나는 지점에 서 있었다.
마지막이나 다름없는 곳에 서서 외쳐도 될까. 그 방 안에는 무엇이 들어 있냐고. 내게 무엇을 감추고 있냐고. 과연 내가 너를 믿어도 되냐고.
‘……아니, 어차피 서은겸도 나한테 점심 메뉴 따위나 묻고 있잖아.’
은연중에 떠올린 불평이 당황스러웠다. 나는 부글거리는 속내를 가라앉히려 애썼다. 하지만 혼잣말은 끊이지 않았다. 마치 내가 마음속에 귀를 기울이기만 기다렸다는 듯, 뒤이어 불만이 쏟아졌다.
‘처음에는 지겨울 정도로 물어봤으면서. 이제는 나한테는 궁금한 게 하나도 없다는 건가. 아직 말해 주지 않은 게 더 많은데. 아직 보여 주고 싶은 게 더 많…….’
“아니, 아니야.”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무심코 손으로 짚은 엘리베이터의 벽이 차가웠다. 전신에 후끈하게 열이 오른 탓이었다. 버튼을 눌러 엘리베이터의 문을 열었다. 이대로 사무실로 돌아갈 엄두는 나지 않았다. 서둘러 화장실로 발을 옮기며 나는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이 와중에도 사무실에 놓고 온 핸드폰에 혹시라도 은겸이 연락을 남기지 않았을까 신경을 곤두세운 나 자신이 한심하기 짝이 없었다.
그랬다. 나는 은겸의 연락을 바랐다. 은겸이 내게 점심 메뉴가 아닌 다른 걸 물어보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정작 나는 방 안에 무엇이 있느냐는 질문조차 못 건네는 주제에. 은겸이 나를 계속 궁금해하기를 바라고 있었다. 은겸에게 건네지 못한 수많은 질문 대신, 그의 질문에 되돌려 줄 답변을 준비하고서.
***
오늘은 점심 뭐 먹었어?
도토리묵밥.
맛있었겠네.
오후 업무도 힘내.
응.
나흘째 똑같은 대화가 이어졌다. 목요일 오후, 또 점심 메뉴를 물은 은겸이 인사를 건넸다. 일부러 짧은 대답으로 대화를 끝내곤 나는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연휴 내내 함께하며 좋았던 분위기는 대체 어디로 간 것일까. 대체 점심 메뉴가 뭐라고 그것만 묻는지 알 길이 없었다. 하다못해 전화를 해서 목소리를 들려준다거나, 빈말이라도 보고 싶다고 할 수도 있을 텐데. 은겸은 아직 발정기가 끝나지 않은 내 몸 상태조차 묻지 않았다. 어째서인지 내게 거리를 둔다는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내가 먼저 그가 필요하다고 재촉할 상황은 아니었다. 우려했던 발정은 그리 심하지 않았다. 끝날 때가 다가오는지, 미열과 약한 성욕만이 몸속에서 맴돌았다. 주말까지 참다가 나 혼자 처리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
은겸과 함께 보냈던 시간이 전부 꿈인 듯 멀게 느껴졌다.
아직도 생생한 건 몸뿐이었다. 출근 준비를 하며 거울을 볼 때마다 울긋불긋한 색이 눈에 들어왔다. 목덜미며 가슴의 흰 무늬 주변에 은겸이 남긴 잇자국이 어지럽게 남아 있었다. 마지막으로 몸을 섞은 지 제법 시간이 지났는데 은겸의 흔적은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 덕분에 회사에서도 다른 사람에게 들키지 않도록 셔츠 단추를 끝까지 채우고 있어야만 했다.
잠잠한 스마트폰 화면을 내려다보며 나는 무심코 넥타이 아래를 손으로 매만졌다. 내 가슴 무늬가 눈썹달이라며 웃던 은겸이 떠올랐다. 아쉽다며 끈질기게 주변을 깨물어 대던 그도.
‘좀 더 남겨 주고 가지.’
나도 모르게 든 생각에 깜짝 놀랐다. 서둘러 가슴에서 손을 떼었다. 귀찮을 정도로 만났던 이와 갑자기 떨어져 있다 보니 내가 넋이 나간 모양이었다. 손바닥으로 뺨을 가볍게 두드리고, 나는 모니터로 시선을 돌렸다.
정신을 차리려고 해도 이상 행동은 계속 이어졌다.
한창 졸음이 밀려오는 오후 3시. 노크도 없이 사무실의 문이 불쑥 열렸다. 모두의 시선을 받으며 안으로 들어선 사람은 키 작은 담비였다. 콧등에 걸친 안경을 밀어 올리는 중년 사내를 보자마자 과장님이 벌떡 일어났다.
“부장님.”
“나 신경 쓰지 말고 일들 해요.”
“어쩐 일로……, 지희 씨, 뭐 해. 부장님 오셨잖아.”
탕비실을 가리키며 과장님이 신입을 재촉했다. 눈이 휘둥그레진 신입이 튀어 오르듯 제자리에서 일어섰다. 깜빡 졸았는지 얼이 빠진 얼굴이었다. 저러다 사고라도 칠 것 같았기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울상을 지은 신입의 어깨를 눌러 자리에 앉히곤 부장님에게 꾸벅 인사를 했다.
“커피 괜찮으십니까.”
“어허. 신경 쓰지 말라니까. 그냥 기획팀 잘 지내나 싶어서 오가다 들른 것뿐이야.”
“그럼 녹차로 드리겠습니다.”
“응, 그래. 녹차 좋지.”
내가 탕비실로 향하는 사이 부장님은 공연히 사무실을 한 바퀴 둘러보았다. 말은 그렇게 해도 뻔히 다른 목적이 있는 눈빛이었다. 예리한 시선에 움츠러든 팀원들이 모니터 아래로 고개를 숙였다. 빨리 녹차라도 건네는 편이 나을 듯했다.
티백을 컵에 집어넣고 뜨거운 물을 부을 때였다.
“김원재 씨가 언어팀 이효영 씨하고 동문이었던가?”
등 뒤에서 질문이 날아들었다. 나는 정수기에서 손을 떼고 부장님을 돌아보았다. 코를 찡긋거리는 부장님의 콧등 위에서 안경이 위아래로 흔들렸다. 나는 고개를 조금 숙이고 답했다.
“네. 대학 동기입니다.”
“같은 과였고?”
“예.”
“그럼 대학 때부터 친했겠네?”
“그렇지도 않습니다.”
“나이는? 동갑?”
“동갑입니다.”
왜 갑자기 이런 조사를 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일단 묻는 대로 꼬박꼬박 답을 했다. 부장님이 희한한 웃음을 지었다.
“둘이 연애는 안 하나?”
“예?”
“선남선녀끼리 만났잖아. 좋은 인연인데 말이야.”
전혀 예상치 못한 당황스러운 질문이었다. 그건 효영도 마찬가지일 터였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생각 없습니다.”
“왜? 애인 있어? 아니면 동종성애자라서?”
“그런 건 아닙니다만.”
“그럼 상관없지 않나? 김원재 씨도 슬슬 자리 잡아야지.”
말끝에 힘을 주면서 부장님이 예리하게 눈을 빛냈다. 퍼뜩 부장님이 왜 뜬금없이 사무실에 쳐들어와서 이런 이야기를 하는지 감이 잡혔다. 평소에는 관심도 없었던 내게 갑자기 덕담을 해 주고 싶어서 왔을 리가 없었다. 진급. 12월에 있을 진급을 위해 나를 떠보는 거였다.
“나이도 찼겠다, 솔로들끼리 어떻게 잘…….”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나는 빠르게 머리를 돌렸다. 효영은 어떨지 몰라도, 나는 효영을 한 번도 연애 대상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아마 앞으로도 좋은 친구로만 인식할 테고. 하지만 부장님이 적극 만남을 주선하려 하니, 여기서는 그냥 ‘네, 그럼 한번 생각해 보겠습니다’ 하고 고개를 숙이는 게 나았다.
나중에 효영에게 이야기해 보겠다는 말로 수습하려 할 때였다. 머릿속에 효영이 아닌 다른 이의 인영이 스쳐 지나갔다. 만날 때마다 몸을 섞는 상대. 내가 무언가를 먹을 때마다 흐뭇하게 바라보는 사람.
“불안하면 맹세할게. 지금 나한테는 배우자도, 연인도 없어. 관심 가는 사람도 없고. 너 외엔 누구와도 섹스하지 않아.”
내 손등에 입을 맞추며 나밖에 없다고 맹세한 남자.
왜 하필 은겸이 스쳐 지나갔는지는 나도 알 수 없었다. 하지만 미소 짓는 은겸을 떠올리자, 도저히 다른 대답을 꺼낼 수가 없었다. 입술을 잘근거리다가 나는 말을 고쳤다.
“애인은 없지만 발정기를 같이 보내는 사람은 있습니다.”
“애인이 아니면 뭔데?”
“섹스…… 파트너요.”
태연하게 말을 이으려 해도 잘되지 않았다. 빠르게 피가 돈 전신이 후끈거렸다. 내 대답이 끝나자 사무실 안에 정적이 흘렀다. 키보드를 두드리거나 마우스를 딸깍거리는 소리조차 사그라들었다.
한참 만에 부장님이 헛기침을 했다.
“그러면 그렇다고 말을 하지.”
“죄송합니다.”
“흠. 그래요. 일들 열심히 하고. 나는 이만 가 봐야겠어.”
“어, 녹차…….”
“김원재 씨가 마셔.”
휘휘 손짓한 부장님은 털이 풍성한 꼬리를 흔들며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부장님이 사라진 후에도 사무실 안은 고요했다. 누구도 무거운 정적을 깨지 못했다. 나는 주인을 잃은 컵을 내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빠르게 화장실로 도망쳤다.
차가운 물로 세수를 하자 정신이 돌아왔다.
‘미친 건가?’
상사한테 섹스 파트너 어쩌고 하는 소리를 하다니. 게다가 대놓고 주선하던 효영과의 만남도 딱 잘라 거절했다. 부장님의 입장에서는 부하가 무안을 주었다고 느낄지 몰랐다. 누가 봐도 멍청한 짓을 해 버렸다.
고개를 들어 거울 속의 나를 바라보았다. 동그랗게 튀어나온 두 귀와 검은 머리카락, 까무잡잡한 피부를 지닌 곰이 나를 마주 보았다. 젖은 앞머리에서 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끄트머리가 젖은 셔츠 깃을 멍하니 응시했다. 얇은 셔츠 아래에는 은겸이 남겨 주고 간 키스 마크가 남아 있었다. 가린다고 해서 사라지지 않을 은겸의 흔적.
‘어쩔 수 없었어.’
조금 전 상황을 곱씹을수록 후회보다는 후련한 마음만 들었다. 비록 지금은 은겸이 내 옆에 없고 우리의 기간 한정 만남도 끝나가지만, 그는 엄연히 내 발정기 파트너였다. 그를 두고 다른 이와 연애를 전제로 한 만남을 약속하고 싶지는 않았다. 은겸은 자신과 성적으로 엮인 이가 없다고 내게 맹세까지 했는데.
‘없는 사람 취급하고 싶지 않았어. 내게는 서은겸이라는 사람이 있다고 밝히고 싶었어.’
한번 은겸을 의식하자 생각은 걷잡을 수 없이 커졌다. 은겸을 만나고 싶었다. 그와 얼굴을 마주하고 서서 내 감정이 무엇인지 확실히 하고 싶었다. 끝나가는 발정기 이후에는 우리의 관계를 어떻게 할 것인지 진지하게 상의하고 싶었다. 이왕이면, 은겸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물어보고.
그러려면 일단 은겸이 돌아올 때까지 이 이상 사고를 치지 않고서 기다려야 했다.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에 다시 물을 끼얹으며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남은 업무 시간 동안 사무실 안은 매우 조용했다.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으려 주의하며 나는 초조하게 퇴근 시간을 기다렸다. 그리고 6시가 되자마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퇴근하겠습니다.”
“으응, 그래. 김 주임 수고 많았어.”
떨떠름하게 답하는 과장님에게 꾸벅 인사하고 나는 사무실을 탈출했다. 회사 건물에서 벗어나자 비로소 숨이 트였다.
퇴근길에도 복잡한 생각은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버스에 실려 흔들거리다가 나는 충동적으로 스마트폰을 꺼내 들었다.
보고 싶
딱 세 글자를 썼다가 손가락을 멈췄다. 한참 화면을 노려보면서 갈등했다. 이 문장을 완성해도 될까. 아니면 실수인 것처럼 스마트폰을 집어넣을까. 얼마 안 가 나는 내가 쓴 글자를 전부 지워 버렸다. 하지만 스마트폰을 손에서 놓지는 않았다.
고르고 골라 적은 문장은 짧았다.
언제 돌아와?
답변은 오지 않았다. 거래처 사람들을 만나느라 바쁜 모양이었다. 스마트폰을 가방에 쑤셔 넣고 나는 손잡이를 양손으로 붙들었다. 별달리 한 것도 없는데 피로가 밀려왔다.
집에 돌아온 뒤에도, 저녁을 먹고 씻고 나온 뒤에도 은겸의 답은 없었다. 아예 내 메시지를 확인하지 못한 건 아닌 듯했다. 메시지 옆에 읽음 표시가 떠올라 있었다. 실망은 뜻밖에도 컸다. 스마트폰을 쥐고 나는 침대에 누웠다.
오늘따라 인터넷 뉴스는 재미없는 기사만이 가득했다. 스마트폰에 설치한 어플을 하나하나 눌러 보며 업데이트를 확인했다. 이것저것 만지작거리면서도 기다리는 건 단 하나뿐이었다. 메시지 알림이 꺼져 있나 싶어서 알림 설정도 다시 하고, 대답이 없는 대화창을 다시 띄워도 보고, 스마트폰을 껐다가 켜 보기도 했다. 여전히 은겸의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한 시간 정도 꾸물꾸물 기다리다가 나는 스마트폰을 놓고 이불을 덮었다.
왜일까. 항상 혼자 잠들었던 침대가 휑하게 느껴졌다. 몸에 이불을 둘둘 말아도 허전함은 여전했다. 이리저리 뒤척이다가 결국 나는 손을 뻗어 스마트폰을 다시 쥐었다.
기다릴게.
은겸에게 한 번 더 문자를 보내고 나서야 마음이 놓였다. 이불을 머리끝까지 덮어쓰고 잠을 청했다.
잠은 길게 이어지지 않았다. 새벽 무렵, 스산한 바람이 몸을 엄습했다. 동시에 밀려드는 추위를 이기지 못하고 나는 눈을 떴다. 새벽 공기가 싸늘하게 전신을 덮었다. 몸을 웅크리며 체온을 높이려 해도 허사였다. 손가락부터 발끝까지 시렸다.
얇은 여름 이불만으로는 도저히 추위를 이길 수 없었다. 하는 수 없이 덜덜 떨며 자리에서 일어나 보일러를 켰다. 긴소매 티와 바지를 꺼내서 속옷만 입은 몸 위에 걸쳤다. 그리고 장롱을 열어서 겨울 이불을 한 채 끄집어냈다. 침대 위에 두 겹의 이불을 펼치고 나서야 안심이 되었다. 나는 이불 밑으로 파고들었다.
차갑게 식은 몸은 좀처럼 훈훈해지지 않았다. 이불을 덮고 따뜻해지기를 기다리면서 나는 눈을 꾹 감았다. 문득, 이런 밤이 참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긴긴 여름을 겪는 동안은 이러지 않았으니까. 동시에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 자각이 일었다.
어젯밤까지도 나는 더위를 참지 못하고 속옷과 얇은 여름 이불만 걸친 채 잠들곤 했다. 하룻밤 사이에 기온이 뚝 떨어졌을 리는 만무했다. 그렇다면 이 추위는 내가 달라졌기 때문이다.
9월 말의 서늘한 밤공기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뜨거웠던 몸이 저절로 식었다. 이유는 단 하나였다.
길던 발정기가 끝났다.
***
언제 까무룩 잠들었던 것일까. 익숙한 알람 소리가 정신을 깨웠다. 나는 더듬더듬 손을 뻗어 알람을 껐다. 어느새 아침이었다. 핸드폰을 침대에 던지고 기지개를 켰다. 새벽 내내 추위에 시달린 탓인지 몸이 영 찌뿌둥했다.
따뜻한 물로 샤워를 하자 멍했던 머릿속이 진정되었다. 아침 뭐 먹지. 두유는 다 떨어졌을 텐데. 주말에는 식료품 배달을 시켜야겠다. 출근 전이면 빠지곤 하는 이런저런 생각의 끝에, 잠들기 전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가 따라붙었다. 순식간에 찬물을 맞은 것처럼 정신이 번쩍 들었다. 서둘러 비눗물을 씻어 내고 나는 욕실 밖으로 뛰쳐나왔다.
오늘따라 스마트폰의 행방을 찾기가 어려웠다. 항상 올려놓고 잤던 침대 옆 협탁에는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갔을까. 가방을 뒤지고, 외투 주머니를 뒤지고, 화장실로 돌아가서 세면대 근처를 확인했다. 빙글빙글 집 안을 돌다가 나는 다시 침대로 돌아갔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이불을 들추자 그 안에 파묻힌 핸드폰이 보였다. 그제야 고작 30분 전, 내가 침대 위에 스마트폰을 던졌던 것이 기억났다. 아무래도 제정신이 아닌 모양이었다.
홈 버튼을 누르자 검게 꺼져 있었던 화면이 밝아졌다. 알람을 끌 때는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던 알림창이 그제야 보였다. 작은 메시지 표시가 떠올라 있었다. 발신자가 누구인지는 짐작이 갔다. 내가 잠들어 있었던 동안, 은겸이 답장을 보낸 것이었다. 나는 서둘러 메시지를 확인했다.
오늘 오후.
은겸의 답은 딱 두 단어였다. 이게 무슨 뜻일까. 고민하다가 대화를 올려 위쪽의 메시지를 확인했다. 어제 저녁, 고민하면서 보냈던 문장이 화면에 떠올랐다.
언제 돌아와?
그러니까 은겸의 메시지는 내 질문의 답이었다.
키패드를 누르는 손가락이 떨려서 자꾸만 오타가 났다. 열 번 넘게 문장을 수정한 뒤에야 회신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럼 오늘 만날 수 있을까.
출장을 마치고 귀국한다는 사람에게 너무 무리한 요구가 아닐까, 뒤늦게 걱정이 일었다. 서둘러 한마디를 덧붙였다.
많이 피곤하면 나중에 보고.
오늘 밤에 보자.
스마트폰을 보고 있던 건지 은겸의 대답은 곧장 날아왔다. 나는 숨을 삼켰다.
나도 널 만나고 싶어.
짧은 문장이 눈에 박혀 들었다. 잠시 시선을 떼고 한 글자씩 되뇌었다. 만, 나, 고, 싶, 어. 만나고 싶어. 곱씹고, 곱씹다가 나는 다시 스마트폰을 들여다보았다. 1분도 되지 않는 사이, 내가 읽은 문장이 변하지 않았을지, 아니면 다른 답이 덧붙여져 있지 않았을지 불안했다.
추가된 메시지는 없었다. 화면은 여전히 내가 마지막으로 확인한 문장으로 끝나 있었다. 멍하니 스마트폰을 보고 있다가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지각하지 않으려면 출근 준비를 서둘러야 했다.
업무 시간 내내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은겸과 만날 때까지 한나절이 넘게 남았는데도 마음이 들떠 가라앉질 않았다. 억지로 은겸을 뇌리에서 지우려고 해도 허사였다. 나는 은겸과 만나서 어떤 표정을 지으면서 무슨 말을 할지 계속 고민했다.
발정기가 끝났다는 사실을 알려야 할까. 발정기가 끝난 것을 알면 은겸은 실망할까. 이제 더 헤어지자며 가 버릴까. 내가 계속 만나자고 하면 받아들일까? 아무리 상상해도 결말은 그다지 희망적이지 않았다. 은겸이 내게 손을 대면 다시 발정기가 시작될지도 모른다는, 솔직히 나로서도 믿기 힘든 가정을 억지로 끄집어내고 나서야 마음이 조금 진정되었다.
도무지 일에 집중하지 못하는 내 모습이 과장님을 비롯한 사무실 동료들의 눈에는 다르게 비친 듯했다. 점심시간이 되자 과장님이 손짓으로 나를 따로 불러냈다. 팀원들과도 미리 이야기가 된 일인지 아무도 우리를 붙잡지 않았다. 나를 옥상으로 데려간 과장님은 한참 뜸을 들이더니 큼큼 목을 골랐다.
“김 주임. 오늘 많이 힘들었지?”
이건 또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나는 말없이 눈을 껌뻑였다. 내 어깨를 붙든 과장님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그러게 왜 그랬어. 뭐, 젊은 사람들이 그 정도 놀 수는 있다 쳐도. 그걸 굳이 회사에서 밝힐 필요는 없잖아.”
“……네?”
“이 사람 참. 어제 일 말이야.”
어제 일? 나는 멍하니 과장님을 바라보았다. 오로지 은겸에게만 신경을 쏟은 탓에 어제 무슨 일이 있었는지도 기억에서 사라졌다. 내가 어리둥절해하자 과장님은 당황한 눈치였다. 내 눈치를 살피며 과장님이 물었다.
“어, 그, 어제 부장님한테 말한 거 말이야. 그거 신경 쓰는 거 아니었어? 오전 시간 내내 안절부절못하길래.”
“아…….”
그제야 어제 부장님에게 섹스 파트너 운운했던 게 떠올랐다. 평소라면 며칠이고 머리를 쥐어뜯었을 법한 대형 사고였는데 깨끗하게 잊은 게 신기할 지경이었다. 어쩐지, 오늘 팀원들과 마주칠 때마다 과장되게 밝은 목소리로 말을 걸더라니. 다들 나를 걱정해서 그랬을 줄이야.
나는 과장님에게 고개를 꾸벅 숙였다.
“걱정 끼쳐서 죄송합니다.”
“알았으면 됐어. 지나간 일이니까 넘어가야지, 뭐 어쩌겠어. 이러다 혹시라도 손 놓을까 봐 그랬지.”
“주의하겠습니다.”
“그러게 적당히 부장님 비위 좀 맞추지. 사내 커플 맞선 주선하는 게 유일한 낙인 양반이잖아. 김 주임은 다 좋은데 눈치가 없는 게 탈이야. 쓸데없이 솔직해서는.”
“죄송합니다.”
“아니야, 나한테 죄송할 건 없지. 언제 한 부장님이랑 자리 한번 마련할 테니까 그때 만회하라고.”
그제야 얼굴이 밝아진 과장님이 내 어깨를 두드렸다.
“괜찮으면 이제 점심 먹으러 가지.”
순간 억지로 지웠던 은겸이 또 떠올랐다. 점심. 점심을 먹어야 하지, 참. 오늘 점심 메뉴가 뭔지 외워 두었다가, 은겸이 묻기 전에 먼저 말해 줘야지. 놀랄 그를 생각하니 저절로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다시 당황한 기색으로 나를 훑어보던 과장님이 먼저 걸음을 옮겼다. 과장님의 뒤를 따르면서 나는 억지로 표정을 굳혔다.
만나고 싶다. 그건 비단 은겸만의 감정이 아니었다.
나도 그를 만나고 싶었다.
***
그릴드 치킨 샌드위치. 그릴드 치킨 샌드위치. 계속 되뇌었던 점심 메뉴는 문을 열고 들어선 은겸의 얼굴을 보자마자 깨끗하게 날아갔다. 카페 안을 둘러보던 은겸이 나를 발견하곤 환히 웃었다.
“원재야.”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였다. 나를 향해 조금 빠른 걸음으로 걸어오는 그를 나는 멍하니 바라보았다. 은겸은 조금도 변하지 않았다. 한 손에 쇼핑백을 들고 외투를 걸친 모습이며, 꼿꼿하게 등을 세우고 걷는 자세며, 주위의 시선을 사로잡는 화려한 외모까지. 내가 잘 아는 은겸이 맞았다.
홀린 듯이 엉덩이를 반쯤 들어 올렸다가 다시 자리에 앉았다. 은겸이 가까워질수록 전에 없이 긴장이 밀려왔다. 티를 내지 않으려 애써도 경직된 어깨가 뻣뻣했다. 그와 반대로 입매는 자꾸만 풀어졌다. 은겸이 사람들로 꽉 찬 카페 안에서 바로 나를 찾아냈다는 것도, 내게 건넨 첫 마디가 내 이름이라는 사실도 그저 좋았다.
사람들을 피해 걸어오면서도 은겸은 내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마침내 테이블 앞에 도착한 은겸이 허리를 숙였다.
“잘 지냈어?”
내 눈을 들여다보며 묻곤, 은겸이 볼에 입을 맞추었다. 입술이 닿은 곳이 간지러웠지만 긁을 수 없었다. 머리에서 아무리 명령을 내려도 굳어 버린 전신이 내 마음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내가 대답하지 않자 은겸은 내 앞자리 의자를 빼내어 앉았다. 마취가 풀리듯 그제야 몸이 움직였다. 은겸의 입술이 닿았던 볼을 가리며 나는 심호흡을 했다. 주위를 의식한 듯 가볍게 끝난 키스가 아쉬웠다.
“참, 이거.”
인사에 이어 은겸은 들고 온 쇼핑백을 내밀었다. 이게 뭘까. 무심결에 건네받아 안을 들여다보았다. 안에는 커다란 종이 상자가 들어 있었다.
“꺼내 봐.”
고갯짓하는 은겸의 말을 따라 상자를 꺼냈다. 상자의 겉면에는 특이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상반신은 사자, 하반신은 물고기 모양을 한 동물의 그림. 내 기억이 맞다면 이건 싱가포르의 상징물, 머라이언이었다.
은겸이 빙그레 미소 지었다.
“쿠키야. 먹으면서 내 생각 하라고.”
“……고마워.”
“더 좋은 거 사다 주고 싶었는데. 급하게 오느라 이런 거밖에 못 샀어. 미안.”
“급하게?”
“아.”
말실수였는지 은겸이 입을 다물었다. 선물을 제대로 못 고를 정도로 급하게 돌아왔다고? 그러고 보니 은겸은 애초에 일주일이 걸리는 출장이라고 내게 말했었다. 그랬는데 오늘 오후 비행기로 돌아왔으니, 실질적으로 닷새도 채우지 못하고 온 셈이었다.
내가 물끄러미 바라보자 은겸이 어깨를 으쓱였다.
“빨리 만나고 싶어서.”
설마. 설마, 나를 보려고 일정을 조정해서 급히 귀국했다는 뜻일까?
“너도 나를 보고 싶어 하는 것 같았고. 오래 기다리게 하면 미안하잖아. 급한 일정은 다 마치고 왔어. 괜찮아.”
이어진 은겸의 말에 확신이 들었다. 나 때문이었다. 내가 기다린다는 문자를 그에게 보내서, 은겸이 예정보다 일찍 돌아온 거였다.
쇼핑백 안에 쿠키 박스를 도로 집어넣으면서 고개를 숙였다. 당황스러웠다. 부담스러워야 할 은겸의 말이 기쁘게만 다가왔다. 뭐라도 대답을 해야 할 텐데, 머릿속이 텅 비어 어떤 말도 떠오르지 않았다. 쇼핑백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고마워.”
단순한 한마디를 꺼내는데도 얼굴이 화끈거렸다. 머라이언 쿠키가 고마운 건지, 나를 위해 일찍 돌아와 준 은겸이 고마운 건지 확실히 하고 싶었지만 온갖 감정이 뒤섞여 혼란스러웠다.
벌게진 나를 보고 마음이 동한 듯, 은겸의 체향이 은은하게 주위를 맴돌았다. 부드러운 달콤한 냄새가 배 속을 간지럽혔다. 민망함 때문에 체온이 오른 몸과 은겸의 체향이 합쳐지자 마치 발정기가 돌아온 것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켰다.
어쩌면, 괜찮지 않을까. 은겸이 만지면 잠시 끝났던 발정기가 예전처럼 되살아나지 않을까. 내 발정기가 끝난 지 이제 고작 이틀이 지났을 뿐이었다. 어쩌면, 우리의 약속을 연장할 수 있지 않을까.
더 시간을 끌 수 없었다. 조금이라도 빨리 은겸과 닿아서 확인하고 싶었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은겸이 물었다.
“벌써 가게?”
“네 집에 가고 싶은데.”
“지금은 지저분한데. 아직 짐을 덜 풀었어. 시간도 늦었고.”
“상관없어.”
뒤로 젖혀진 은겸의 두 귀를 내려다보며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둘이서만 있고 싶어.”
“…….”
“안 될까.”
나를 응시하던 호박색 눈이 요동쳤다. 은겸의 목울대가 크게 흔들렸다.
“진심이야?”
나는 묵묵히 은겸에게 손을 내밀었다. 눈을 빛낸 은겸이 당장 자리에서 일어나 내 손을 잡았다. 그러곤 성큼성큼 카페 밖으로 걸어 나갔다.
대로변까지 걸어간 은겸은 택시를 잡았다. 자기 차를 가져온 줄 알았더니 정말로 카페에서 잠깐 만날 생각이었던 것 같았다. 뒷자리에 나란히 앉은 은겸이 목적지를 말했다. 옆에서 느껴지는 은겸의 온기와 체향이 오늘따라 옅었다. 발정기가 끝나서 감각이 둔해진 느낌이었다. 아니, 어쩌면 은겸이 완전히 흥분하지 않은 것일지도 몰랐다. 어느 쪽이든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였다.
은겸은 안절부절못하는 나를 빤히 보았다. 손을 뻗은 그가 내 볼을 감쌌다.
“괜찮아?”
나는 눈꺼풀을 감았다.
“아니.”
“무슨 일 있어?”
솔직하게 답하지 않고 나는 은겸에게로 몸을 숙였다. 숨결이 닿을 정도로 가까워졌을 때, 소리를 낮춰 답했다.
“하고 싶어.”
체면도 버리고 털어놓은 고백이었다. 적잖이 당황했는지 은겸의 손끝이 가늘게 떨렸다.
“……오래 참았어? 네가 먼저 그런 말 하는 건 처음인데.”
가까웠던 숨결이 다시 멀어졌다. 당장 키스해 줄 알았는데 도리어 은겸은 나를 피했다. 볼을 감쌌던 큰 손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아래로 내려섰다. 나는 가만히 눈을 떴다. 내가 다가간 만큼 은겸이 몸을 뒤로 젖히고 물러나 있었다.
가벼운 거절에도 불안함은 커져만 갔다. 실망을 억누르지 못하고 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그 순간, 나를 달래기라도 하듯 은겸이 내 무릎에 손을 올렸다. 다리를 쓰다듬던 손길이 안쪽으로 향했다. 가만히 허벅지를 어루만지며 은겸이 상체를 내 쪽으로 기울였다. 귓가에 다가온 입술이 가볍게 달싹였다.
“이다음은 둘이서만 있게 되면.”
속삭임이 끝남과 동시에 귓등에 입술이 닿았다가 떨어졌다. 도로 몸을 무른 은겸이 자신의 자리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하지만 택시가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그의 손은 내 다리에서 떠나지 않았다. 긴장 때문에 입이 바짝바짝 말랐다.
택시 안에서는 제법 여유롭게 굴던 은겸은 현관문이 닫히는 순간 돌변했다. 신발을 벗자마자 나를 끌어안은 은겸이 무작정 입을 겹쳤다. 뜨겁게 덮쳐드는 입술을 반기며 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정신없이 흔들리는 긴 꼬리가 허공을 갈랐다.
꼼꼼히 입 안을 맛보고 나서야 은겸은 입을 떼었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타액으로 젖은 혀가 내 입술을 슬쩍 핥고는 물러났다. 아쉬움에 턱을 치켜들자 은겸이 미소를 지었다.
“보고 싶었어.”
“……그러면서 왜.”
“왜?”
“왜 항상 점심 메뉴만…….”
키득거린 은겸이 내 손을 붙들어 올렸다.
“그래서 서러웠어?”
그렇다고 긍정할 수도, 아니라고 잡아뗄 수도 없었다. 함부로 불평을 늘어놓다가는 연락은 왜 뜸했느냐며 다른 것까지 따져 묻게 될 것 같았다. 은겸과 내가 그럴 사이도 아니고, 따지고 보면 우리가 떨어져 있던 날은 고작 닷새였다. 하지만 내가 느꼈던 감정을 아예 없던 것으로 치부하고 싶지도 않았다. 나는 애매하게 고개를 까닥거렸다.
들어 올린 손등에 대고 은겸이 정중히 입을 맞추었다.
“얘기하지 그랬어. 그랬으면 좀 더 일찍 왔을 텐데.”
“출장을 방해할 수는 없잖아.”
“방해할 수준인 건 아는구나. 응. 방해되더라. 계속 네가 떠올라서 일에 집중할 수 없었어.”
“…….”
“혼자서 잘 지내고 있을지. 내가 없다고 힘들어하는 건 아닌지. 그러다 다른 파트너를 찾으면…….”
“그럴 일은 없어.”
나는 단호하게 은겸의 말허리를 잘랐다. 조금 놀란 듯 은겸이 입을 다물었다. 그의 눈이 흔들리나 싶더니, 이내 내게 고정되었다.
투명한 노란 눈을 들여다볼수록 확신이 생겼다. 나는 숨을 들이마셨다. 진하게 풍기는 은겸의 체향에 코가 아렸지만, 달콤함이 몸속까지 전해지도록 더 깊이 삼켰다.
가슴 가득 은겸의 향이 퍼졌다고 느껴졌을 때, 나는 입을 열었다.
“지금 내 발정기 파트너는 너뿐이야.”
준비해 왔던 말이 많았건만, 그 이상 잇지 못했다. 끓어오르는 듯한 눈빛으로 나를 보던 은겸이 손목을 살짝 깨물었다. 뾰족한 송곳니가 따끔하게 피부를 찔렀다. 내가 몸을 떨자 은겸은 혀를 내어 깨문 곳 위를 핥았다. 까끌거리는 혀가 살갗을 간지럽혔다. 팔을 타고 내려가는 혀 놀림에 허리가 움찔거렸다. 동시에 허벅다리 사이로 파고든 은겸의 다리가 내 중심을 은근히 문질렀다.
“원재야.”
가라앉은 목소리로 은겸이 나를 불렀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은겸도 대답을 바라지 않는 듯했다. 팔에 닿는 은겸의 숨결이 뜨거웠다. 시간이 멈춘 듯 사방이 고요해졌다. 또렷하게 귀에 닿는 소리는 온통 젖어 있었다. 살갗을 빨아올리는 입술의 마찰음, 가빠진 호흡, 그리고.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은겸의 정성스러운 애무가 전혀 흥분되지 않았다.
몸의 움찔거림은 갑작스러운 접촉에 대한 반사 작용에 불과했다. 중요한 하반신에는 반응이 없었다. 은겸과 성적인 접촉을 하면 돌아올 줄 알았던 발정은 몸속 깊은 곳에 가라앉은 채였다. 은겸이 아무리 나를 만져도, 발정기가 끝난 몸은 좀처럼 달아오를 줄을 몰랐다.
이래서는 곤란했다. 허리를 비틀며 은겸이 주는 자극에 정신을 집중하려 애썼다. 그러나 허사였다. 누군가 머리를 쓰다듬어 줄 때의 기분 좋은 감각 외에는 그 어떤 욕망도 고개를 들지 않았다.
오랫동안 팔을 잘근거리며 겹쳐진 하체를 비비적대던 은겸이 입을 뗐다. 여전히 힘이 없는 다리 사이를 누르다가 그는 뒤로 물러섰다. 나는 서둘러 그의 팔을 붙들었다. 어느새 은겸의 향이 옅어져 있었다.
나를 바라보며 은겸이 눈웃음을 지었다.
“발정기 끝났구나.”
“……그냥 해.”
벌써 불룩해진 은겸의 다리 사이를 바라보며 나는 말했다. 은겸이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너는 못 느끼잖아.”
“하다 보면 괜찮아질지도 몰라.”
“무리하지 마.”
아쉬운 기색을 감추며 은겸이 흐트러진 숨을 골랐다. 하얀 그의 피부에 은은하게 퍼진 혈색이 보기 좋았다. 나는 은겸의 팔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오랜만에 만났고 분위기도 괜찮았는데. 이대로 끝내기는 싫었다. 무엇보다도 잔뜩 기대한 듯한 은겸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 한 번만 더 키스하자고 그에게 부탁하려 할 때였다.
은겸이 내 손을 밀어냈다.
“이제 우리 관계도 끝이네.”
“……어?”
“발정기 끝날 때까지만 만나기로 한 거였잖아.”
아무렇지 않게 툭 던진 은겸이 몸을 돌렸다.
한쪽 팔에 외투를 걸치고 방으로 들어가는 그를 붙잡지 못했다. 무슨 이야기도 꺼낼 수 없었다. 내가 들은 말이 정확한 걸까. 제대로 이해한 게 맞는 걸까. 은겸이 없는 닷새 동안 수많은 재회를 상상했지만, 이건 그중에서도 최악이라 여기며 억지로 지워 버렸던 것이었다.
그동안 먼저 내게 다가와 주었던 은겸이 먼저 돌아서려 하고 있었다.
섣불리 판단하지 말자. 은겸의 말에 다른 의미가 있을지도 모른다. 빠르게 뛰는 심장을 애써 진정시키며 은겸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렸다. 은겸은 거실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는 나를 보곤 빙긋 웃었다.
“기왕 왔으니까 밥이나 먹고 가.”
다정한 목소리가 가슴을 후벼팠다. 나는 아랫입술을 꽉 깨물었다. 보고 싶다는 말을 대신했던 점심 메뉴 질문이 아릿하게 떠올랐다. 이제야 알았다. 그건 다정한 관심이 아니었다. 내게 허용된 범위는 여기까지라고 선을 긋는 행위나 다름없었다. 이러느니 차라리 차가운 작별 인사를 듣는 편이 나을지도 몰랐다.
나는 씹어뱉듯 답했다.
“밥 먹으려고 온 거 아니야.”
정적이 흘렀다. 은겸이 한참 만에 긴 한숨을 쉬었다.
“어차피 못 하잖아.”
“나는 못 느껴도 괜찮으니까…….”
“나 혼자 기분 좋으려고 너를 이용할 수는 없어.”
날아온 말투가 날카로웠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두 귀를 양옆으로 젖힌 은겸이 한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미안한데 그만 가 줄래? 피곤하다.”
“……그럼 내일.”
“뭐?”
“내일 만나서 이야기하면 돼?”
“무슨 이야기를?”
“앞으로 어떻게 할지 정해야 할 거 아니야.”
이마를 문지르던 손이 멈추었다. 감춘 얼굴을 드러낸 은겸이 묘한 표정을 지었다.
“원재야.”
낮은 목소리가 불길했다. 나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고 은겸을 마주 보았다.
이어진 것은 최악 중에서도 최악인 질문이었다.
“우리가 앞으로도 계속 만나야 하는 이유가 있어?”
하. 터져 나온 소리는 금세 끊겼다. 나는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처음부터 그런 약속 아니었어? 네 발정기에 맞추어 섹스 파트너로 지내기로.”
그가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이제는 섹스라는 목적도 없는데, 더 이어지면 부담스럽지 않겠어? 가능한 선에서 깔끔하게 끝내는 게 낫지 않을까?”
너는 나를 만나지 못해도 괜찮아?
울컥 치솟은 열기가 머리끝까지 후끈후끈 달궜다. 이름을 알 수 없는 감정이 부풀어 올라 목을 막았다. 가슴이 갑갑하게 조여들었을 때야 내가 숨쉬기를 멈추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나는 처음으로 호흡법을 배운 사람처럼 온몸을 크게 들썩이며 공기를 들이마셨다가 내뱉었다.
오래오래 같이 있어 달라고 했던 사람이 이렇게 간단히 끝을 말할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묻고 싶었다. 언제나 나를 붙잡았던 은겸이 어째서 마지막 앞에 이리도 태연할 수 있는지. 동시에 묻고 싶지 않았다. 은겸의 입에서 어떤 대답이 튀어나올지 몰라서 두려웠다.
잠깐 즐기려고 나를 만난 걸까. 정말 나를 섹스 파트너로만 대한 걸까. 이제 발정기가 겹치는 다른 사람을 만나러 갈 생각인가. 섹스를 할 수 없는 나는 은겸에게 무의미한 존재인 걸까.
머릿속에 뒤엉킨 질문은 나 혼자의 힘으로는 풀 수 없었다. 하나씩 뱉어 내서 실마리를 찾기 위해 입을 열려는 순간, 질문들이 내게로 되돌아왔다.
나는 잠깐 즐기려고 은겸을 만난 걸까. 은겸을 섹스 파트너로만 대했나? 발정기에만 잠깐 만나 열기를 식히려고?
섹스를 하지 않는 은겸은 내게 무의미한 존재인가?
오래 고민하지 않아도 답은 나와 있었다. 나는 앞으로도 은겸과 계속 만나고 싶었다. 그래서 발정기가 끝났는데도, 한번 끝난 것이 다시 시작될 리 없다는 걸 알면서도 은겸을 찾아왔다. 그가 나와 똑같은 마음일 것이라고 여기면서.
약속을 지키려는 것뿐인 은겸에게 상처받을 정도로, 나는 내 일상에 스며든 그에게 익숙해져 있었다.
나 혼자 그렇게 느낀 건 아닐 터였다.
애초에 계속 함께 있어 달라고 요청한 건 내가 아니라 은겸이었다. 우리가 공유한 시간은 결코 일방적이지 않았다. 섹스 파트너로서는 끝난다 하더라도 아예 끝은 아닐 것이다. 물론 내 발정기가 끝났으니 지금까지 해 온 것과는 조금 달라지겠지만, 섹스 외에도 감정을 나눌 방법은 얼마든지 있다. 우리 사이에 육체적인 교류가 사라지더라도 관계를 정리할 필요는 없다.
두서없었던 머릿속이 정리되자 들끓었던 감정도 가까스로 가라앉았다.
“그래. 약속대로 끝내자, 섹스 파트너.”
은겸을 노려보며 나는 말했다.
“대신 앞으로는 다른 관계로 만나.”
거실이 다시 조용해졌다. 어디선가 우웅 하는 기계음이 들렸다. 삭막하기까지 한 정적이었다. 느릿하게 눈을 감았다가 뜬 은겸이 나를 보았을 때, 나는 이를 악물었다. 은겸의 얼굴에는 그 어떤 동요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어느 때보다도 차분한 목소리로 은겸이 말했다.
“어떤 관계?”
“친구든 그 이상이든 상관없어.”
은겸은 고개를 저었다.
“그 관계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 끝내려면 지금이 제일 나을 텐데.”
“그래. 그러니까 섹스 파트너 노릇은 끝내자고.”
“원재야.”
타이르듯 말하는 은겸의 목소리에 화가 치밀었다. 그만 만나자는 소리는 나를 떠보기 위해 던진 말이나 충동적으로 꺼낸 제안이 아니었다. 은겸은 정말로 끝을 준비해 온 것 같았다.
그의 태도 변화를 이해할 수 없었다.
“이제 와서 다 끝낼 거면 왜 시작했는데?”
은겸은 침묵으로 답변했다. 손바닥에 박히는 손톱이 아팠다.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올리지 않도록 힘을 주며 나는 그를 쏘아보았다.
“그럴 거면 처음부터 나한테 왜 접근했냐고. 지금까지는 계속 달라붙었으면서 왜 이제야…….”
옆에 없으면 불안해지게 만들어 놓고. 왜 이제야 발을 빼려는 거냐고.
은겸이 시선을 한쪽으로 피했다.
“예전에 내가 사귀자고 했을 때 기억해? 그때 넌 미쳤냐고 되물었지.”
“……그때는…….”
“지금은 어떨까. 내 감정과 네 감정이 같아졌을까? 솔직히 아닐 것 같은데.”
말하는 내내 은겸은 나와 눈을 맞추려 하지 않았다. 조금 억울했다. 그가 언급한 고백은 우리가 몇 번 만나지 않았을 때 있었던 일이었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에게 사귀자는 제안을 받는다고 순순히 승낙할 사람이 몇이나 있을까. 게다가 그 당시의 나는 은겸에게 애인이 있다고 오해했었으니 미쳤냐는 되물음은 당연한 것이었다.
은겸이 꺼내 든 ‘감정’도 그랬다. 은겸은 그 감정의 정확한 이름을 단 한 번도 내게 가르쳐 주지 않았다. 마지막을 거론하는 지금까지도. 그러면서 내가 그와 같은 감정을 가지지 않았을 거라고 단언하다니.
내 핑계를 대고 도망치려 하는 그가 비겁했다.
“왜 그때랑 지금이 똑같을 거라고 생각해?”
“글쎄. 아니라는 보장이 있나?”
“같이 보낸 시간이 다 무의미했다는 소리야?”
“원재야. 우리가 섹스 파트너로 지낸 건 고작 한 달 반이야.”
은겸이 피식거렸다.
“그 짧은 기간에 생각이 그렇게 많이 변했어? 김원재 씨. 두 달 전에만 해도 나 엄청 싫어했잖아요. 내 명함 태우고 연락 안 받았던 거 기억 안 나요?”
“그건 잘 몰랐으니까. 서은겸이라는 사람이 누구인지.”
“그래서 지금은? 내가 누구인지 알 것 같아?”
은겸이 이끌어 내려 하는 답이 무엇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나는 그저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했다.
“아니. 여전히 모르겠어. 너는 여전히 이상하고 알 수 없는 사람이야.”
“…….”
“그래도 계속 만나고 싶어. 섹스 같은 거 안 해도 만나고 싶다고. 계속.”
“왜?”
“네가 없는 하루를 생각할 수 없게 됐으니까.”
“왜 그렇게 됐을까.”
기운 없이 혼잣말을 중얼거리며 은겸이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더는 참을 수 없었다. 은겸이 물러난 것보다 한 발자국 더 나아갔다. 은겸을 쫓아 바짝 다가서자 은겸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 순간, 굳건히 버티고 있었던 이성이 끊어졌다. 나는 은겸의 멱살을 쥐었다.
“말 돌리지 말고 하고 싶은 얘기가 있으면 그냥 해!”
절로 높아진 언성이 거실을 울렸다. 멱살을 단단히 붙들었는데도 은겸은 나를 바라보지 않았다.
“나랑 못 자니까 이제는 내가 필요 없어? 그래서 그만두려는 거야?”
“원재야. 처음부터 그런 약속이었어.”
“됐다고 하잖아. 계속 만나겠다고. 안 해도 상관없다고!”
“나는 상관있어.”
“아. 그래? 처음부터 내 몸만 목적이었어?”
“…….”
“그게 아니면 뭔데. 막상 만나 보니까 내가 별로였어? 발정기 끝나면 다신 볼 생각도 안 들 만큼?”
은겸이 고개를 저었다.
“그래서가 아니라……. 섹스 파트너가 아니면 너한테 더 많은 걸 바라게 될 테니까.”
“상관없다니까!”
“그러다 너한테 더 빠져들면, 영영 못 놓는다고 귀찮게 할지도 모르는데?”
“지금보다 더 귀찮아지지는 않겠지.”
내 대꾸에 은겸이 피식 웃었다. 금방 얼굴을 굳힌 그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원재야, 나는 두렵다. 너한테 너무 빠져드는 것 같아서 두려워.”
“…….”
“내가 지금보다 너를 더 욕심내면 너는 지치겠지. 언젠가 나를 원망하면서 후회할 거고.”
“그걸 왜 네가 걱정해. 선택은 내가 하니까 후회해도 내가 해.”
“아니, 내가 싫어. 나는 후회하는 너를 보고 싶지 않아.”
은겸이 눈을 내리깔았다.
“……너는 얼마나 오래 나를 사랑할 수 있을까.”
이상한 화법이었다. 현재의 감정을 확인하는 게 아니라 가능성을 점치는 말투.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마지막 순간을 가늠하려는 의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은겸을 내 쪽으로 끌어당겼다. 순순히 끌려온 은겸이 나와 눈을 맞추었다.
어둡게 가라앉은 은겸의 호박색 눈이 낯익었다. 투명하게 빛나며 나를 담는 모습만 보았다고 생각했는데. 언제 이런 눈빛과 마주쳤을까. 내가, 나라는 사람이 눈앞에 정말 존재하는지 믿지 못하는 듯 불안을 머금은 눈빛과.
기억을 헤집는 대신 현재를 택했다. 부디 내가 찌르는 것이 정곡이기를 바라며 나는 옷깃을 붙든 손에 힘을 쥐었다.
잇새로 새어 나온 목소리는 으르렁거림에 가까웠다.
“나한테 네 과거를 겹쳐 보지 마.”
흔들리던 은겸의 눈이 멈췄다. 얇은 옷 아래로 거세게 뛰는 맥박이 느껴졌다. 은겸의 얼굴에서 핏기가 서서히 가셨다. 정곡이 아니라 심장을 찔린 듯한 반응이었다.
다시 입을 떼기까지 긴 침묵과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서은겸 네가 지금껏 어떤 일을 겪었는지는 몰라. 안 물어봐서 미안해. 그런데 너도 말하지 않았잖아. 궁금하면 도망가지 말고 너를 다 보여 줘. 섹스를 제외한 모든 걸.”
무언가 말하려는 듯 은겸이 입술을 달싹였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먼저 전해야 할 말이 있었다. 이 상황에는 지금껏 은겸에게 감정을 제대로 표현하지 않았던 내 망설임도 한몫했다.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기회가 온 이상 말해야 했다. 앞으로도 관계를 이어 가겠다고 마음먹었으니 더 거리낄 게 없었다.
“나도 앞으로는 다 물어볼게. 좀 더 솔직하게 궁금해하겠다고.”
은겸을 막기 위해 세웠던 벽은 어느새 무너졌다.
“그러니까 나한테 오래 사랑받고 싶으면 계속 내 옆에 있어.”
이제는 내가 문을 열고 은겸을 부를 차례였다.
나는 멱살을 놓았다. 어찌나 힘을 주고 잡았는지 셔츠 자락이 엉망진창으로 구겨져 있었다. 대강 주름을 펴 주곤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어떤 대답도 하지 않고서 은겸이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은겸과 나의 사이로 침묵이 파고들었다. 두렵고 민망했지만 묵묵히 기다렸다. 은겸에게도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할 것이었다.
한참 만에야 은겸은 내게 다시 시선을 보냈다. 투명한 꿀색 홍채 속 까만 동공이 이전보다 커다랬다. 그가 숨을 크게 들이마시자 가슴이 부풀었다가 가라앉았다.
혈색이 옅어진 은겸의 뺨에 미소가 떠올랐다. 금방이라도 사라질 듯 희미한 표정이었다.
“나를 사랑해?”
은겸이 꺼낸 단어가 어색했다. 조금 전, 내가 먼저 꺼냈을 때는 의식하지 못했는데. 그렇다고 모르는 척 잡아떼기에는 은겸의 미소가 슬퍼 보였다. 나는 대답을 얼버무렸다.
“……아직은 아니야.”
“아직은?”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니까.”
“방금 내 멱살 잡고 고백했잖아.”
“아니야.”
“박력 넘치는 고백이라서 두근거렸는데?”
“그건 고백 같은 게 아니고……. 아니, 고백은 맞는데 그런 고백이 아니라.”
문답이 길어질수록 바보 같은 말만 오갔다. 나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닌지 은겸이 빙긋 웃었다.
“그럼 우리 오늘부터 사귀는 건가?”
“아니. 밥만 먹는 친구부터.”
잠깐 사이 은겸의 안색이 다시 좋아졌다. 서둘러 친구라고 선을 그었는데도 은겸은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그의 허리 뒤에서 흔들리는 꼬리가 잔잔한 바람을 일으켰다.
“그래. 친구 하자. 밥 친구 좋네.”
말을 마친 은겸이 성큼성큼 내게로 다가왔다. 그러곤 팔을 벌려 나를 끌어안았다. 조금만 몸을 뒤틀면 벗어날 수 있을 만큼 조심스러운 포옹이었다.
나는 은겸을 밀쳐 내지 않았다.
나를 안은 이는 예전의 은겸이었다. 몸을 감싸는 온기도, 허리에 얹힌 팔의 무게도, 가슴에 닿는 감촉도 그대로였다. 그만두자며 돌아서려던 냉정한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은겸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뒤이어 무심코 내쉰 한숨에 안도감이 실렸다. 긴장이 풀린 몸이 무겁게 늘어졌다.
은겸이 내 목덜미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었다.
“고마워.”
무엇이 고맙다는 것인지 차마 물을 수 없었다. 아니, 묻고 싶지 않았다.
잠시라도 은겸이 나와의 관계를 끝내려고 마음먹었다는 사실을 떠올리면 아팠다. 은겸의 태도가 상처로 다가온 이유는 어렴풋하면서도 뚜렷했다. 은겸과 더 오래 함께 있고 싶다. 서로를 더 많이 알아 가고 싶고, 일상을 공유하고 싶다. 이 감정을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은겸의 말대로 우리의 관계에 새로운 이름을 붙이기 전에 헤어지는 편이 깔끔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미래가 설령 어떤 방향으로 흘러간다 해도, 언젠가 오늘의 선택을 후회하게 될지라도. 나는 내 눈앞에 선 은겸의 손을 놓고 싶지 않았다.
은겸도 같은 마음인 줄 알았는데, 나만 그랬다는 게 억울하고 분했다.
혼자 발을 빼려 했던 배신자를 노려보다가 입을 맞추었다. 물어뜯듯이 입술을 깨물자 눈썹을 찡그린 은겸이 내 허리를 끌어안았다. 손을 아래로 내려 은겸의 것을 만지면서 나는 눈을 감았다. 혀를 빨아들이고, 입술을 잘근거리며 사나운 키스를 이어 가자 은겸이 곤란한 듯 눈웃음을 쳤다.
“왜 그렇게 화가 났어.”
“모르는 척하지 마.”
그러게 누가 화나게 하래. 성난 곰에게서 도망칠 수 있을 줄 알았나. 속으로 으르렁거리며 나는 은겸이 도망치지 못하게 목에 팔을 둘렀다. 그리고 분이 풀릴 때까지 키스를 계속했다.
거친 키스 때문일까, 계속 다리 사이를 지분댄 내 손길 때문일까. 은겸은 얼마 못 가 홀로 숨이 거칠어졌다. 손아귀 안의 것이 단단해지기 시작했을 때, 나는 은겸의 어깨를 밀쳤다.
“갈게.”
“…….”
“피곤하다며.”
한숨을 쉰 은겸이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알았어. 자고 가.”
한 대 치려다 이 정도로 참았다는 것도 모르겠지. 손톱자국이 남은 손바닥을 숨기며 외투를 벗었다. 겉옷을 받아 든 은겸이 공손하게 허리를 굽혔다.
“앞으로 잘 부탁해.”
“발로 차 버리고 싶으니까 비켜.”
“섹스 파트너 끝나더니 과격해졌네.”
“난 친구한테는 원래 이래.”
“그럼 빨리 연애를 해야겠다. 아, 원재한테 사랑받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이제는 몸으로 유혹하지도 못하는데.”
중얼거린 은겸이 나를 향해 화사하게 웃었다. 더 참을 수가 없었다. 나는 그의 어깨를 주먹으로 후려쳤다. 입가의 웃음기를 지우지도 않고서 은겸이 엄살을 부렸다.
“아파, 원재야. 진짜 아파.”
“아프라고 때린 거야. 다음엔 이걸로 안 넘어가.”
“알았어. 내가 앞으로 잘할게.”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부글대던 속도 완전히 가라앉았다. 난리 통에 내팽개쳤던 쿠키 박스를 집어 들고 나는 소파에 앉았다. 나를 보며 피식거린 은겸이 안방으로 사라졌다.
“네 코트 걸어 둔다.”
“응.”
상자 안에 든 쿠키는 사자 머리에 긴 인어 꼬리를 말고 있는 머라이언 모양이었다. 내 입맛에 맞춰 챙겨 왔는지 고소한 아몬드 맛이 좋았다. 일부러 사자 머리만 오독오독 깨물어 먹으면서 나는 은겸을 기다렸다. 돌아온 은겸에게는 남아 있는 하반신을 내밀었다. 별다른 의심 없이 쿠키를 받아 든 은겸이 싱긋 웃었다.
“맛있어?”
“응.”
“다행이다.”
은겸은 내 옆에 털썩 앉았다. 그러곤 내가 반으로 갈라 주는 쿠키를 아무 말 없이 입에 넣었다.
밤이 깊도록 은겸과 나는 머라이언 쿠키를 묵묵히 씹어 먹었다. 섹스 파트너에 밥 친구로 변한 사이를 달콤한 디저트로 기념하듯이.
그날이 우리 관계의 시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