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곰은 몸을 가눈다
도시락 코너는 평소보다 휑했다. 6시 칼퇴근에 실패해서 편의점에 늦게 도착한 결과였다. 즐겨 먹었던 메뉴는 찾아볼 수 없었고, 남은 것이라곤 고추장 오리 불고기 도시락과 치킨 삼총사 도시락이 다였다.
나는 위쪽 매대를 살펴보았다. 진열된 김밥의 종류도 썩 성에 차지 않았다. 그렇다고 라면이나 샌드위치를 먹자니 만족스럽게 배를 채우기 어려울 것 같았다.
번거롭더라도 회사 근처 식당에서 저녁을 먹고 올걸. 조금 후회하면서 다시 도시락을 눈으로 훑었다. 매운 건 싫으니 남은 선택지는 치킨뿐이었다.
‘점심에도 닭 먹었는데…….’
효영과 만나서 먹은 삼계탕을 떠올리며 입맛을 다셨다. 다른 편의점에 가 볼까. 아니면 그냥 이걸 먹을까. 고민은 길지 않았다. 고작 저녁 메뉴 때문에 퇴근 후의 피곤한 몸을 이끌고 원정을 떠나기 귀찮았다.
도시락을 집어 들기 위해 허리를 숙였을 때였다. 작지만 또렷한 소음이 귀에 닿았다. 스마트폰의 진동음이었다. 나는 가방을 뒤져 스마트폰을 꺼냈다. 까맣게 꺼진 화면을 켜기도 전에 웅웅거리는 소리가 다시 들렸다. 손에 쥔 핸드폰이 아니라 가방 안쪽에서 소리가 울렸다. 퇴근하면서 바닥에 처박아 두었던 업무용 스마트폰에 누군가 전화를 건 듯했다.
‘이 시간에 누구지.’
두 번째 스마트폰을 꺼내어 발신자를 확인했다. 화면에 떠오른 열한 자리 숫자는 주소록에 저장된 번호가 아니었다. 스팸인가 싶어도 뒤쪽 네 자리가 어쩐지 눈에 익었다. 0821. 이거 무슨 기념일 같은 거 아니었나.
‘말복은 아니고. 저번 주에 무슨 날이 있었더라.’
긴가민가하며 나는 통화를 수락했다.
“네, 김원재입니다.”
─퇴근했어요?
스마트폰 너머에서 건너온 목소리는 제법 익숙했다. 상대의 정체를 확인한 순간 목 뒤가 뻣뻣해졌다. 어쩐지 수상한 날짜다 했더니. 8월 21일은 서은겸의 생일이었다. 더불어 내가 그에게 온몸으로 생일 선물을 안겨 준 날이기도 했고.
가방을 잠그며 나는 짧게 답했다.
“예.”
─저녁 먹었어요?
“지금 사려고 하는데요.”
─메뉴는요.
“그냥, 있는 거 아무거나.”
─설마 편의점에서 도시락 고르는 건 아니죠?
막 뻗었던 손이 무안할 만큼 정확한 추측이었다. 괜스레 뜨끔해서 팔을 거두었다. 혹시 어딘가에서 은겸이 보고 있는 건 아닐까 싶어 주위도 슬쩍 둘러보았다. 그가 내 집 주소까지 알 턱이 없는데도, 회사 근처 식당에서 죽치고 기다렸던 전적 탓인지 도무지 안심이 되지 않았다.
은겸이 한숨을 쉬었다.
─편의점 도시락만 먹으면 몸 상해요.
“무슨 상관입니까.”
─무슨 상관이라뇨. 내 파트너 건강 내가 챙기겠다는데.
“내 건강은 내가 알아서…….”
─김원재 씨는 할 때는 참 살가운데, 침대만 벗어나면 냉정하더라.
“…….”
─그러지 말고 같이 저녁 먹어요. 내가 살 테니까.
“피곤한데요.”
─차로 데리러 갔다가 데려다줄게요.
반드시 저녁을 같이 먹고 싶은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 은겸은 끈질겼다. 이 이상 은겸의 제안을 거절할 핑계가 없었다. 솔직히 치킨 삼총사 도시락이 끌리지 않기도 했고. 망설이다가 나는 몸을 틀었다.
“그건 알아서 하겠습니다. 어디로 가면 됩니까.”
─아, 나한테 집 위치 알려 주기 싫어서요?
“예.”
순순히 답하자 은겸이 웃음을 터뜨렸다.
─알았어요. 나 같은 스토커에게 주소까지 들키면 큰일 나겠죠. 위치 보내 줄게요.
이미 식당을 골라 놓았던 듯, 은겸은 전화를 끊자마자 곧바로 식당의 상호와 위치를 전달했다. 그가 찍어 보낸 메뉴판 사진을 대강 훑어보며 걸음을 옮겼다.
출입구 쪽으로 다가가자 카운터 직원이 나를 힐끔거렸다. 내가 상품을 들고 올 줄 알고 기다린 모양이었다. 도시락 코너에서 워낙 오래 서성였던지라 빈손으로 나가기도 뭐했다. 나는 발을 멈추고 카운터 근처에 놓인 초콜릿을 집어 들었다. 두 개가 함께 포장된 동그란 초콜릿이었다.
계산을 마치고 별생각 없이 초콜릿 하나를 까서 입에 넣었다. 단맛이 돌자 몸에서 힘이 쭉 빠졌다. 느슨해진 어깨를 추스르다가 숨을 들이마셨다.
‘……아.’
내가 긴장하고 있었구나. 뒤늦게 깨달은 사실이 조금 부끄러웠다. 아까 목소리가 이상하지는 않았나. 엉뚱한 말을 하지도 않았겠지. 짧았던 통화를 몇 번이고 곱씹으며 편의점을 나섰다.
은겸과 주고받은 것은 고작 몇 마디였다. 게다가 우리의 관계는 예전과 달랐다. 은겸과 나는 두 번 술자리를 같이했고, 두 번 저녁을 먹었고, 두 번 몸을 섞었다. 그리고 당분간 주말마다 침대를 함께 쓸 사이였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은겸과의 대화가 어색했다.
***
“엄마, 사자. 사자 있어.”
“쉿, 그러면 안 돼.”
“나 사자 만질래. 엄마아.”
뒷자리에 앉은 아이가 칭얼거리며 손을 뻗었다. 대여섯 살 정도 되었을까 싶은 작은 캥거루였다. 놀란 가족이 말리는데도 아이는 떼를 쓰며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은겸의 꼬리를 붙들고 싶은 눈치였다.
뒤를 힐끗 돌아본 은겸이 꼬리를 들었다. 길게 뻗어 나간 꼬리는 아이의 손 앞에서 살랑거렸다. 부숭부숭한 털이 돋아난 끝부분을 붙잡고 아이가 헤실 웃었다.
“죄송합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사과하는 아이의 가족에게 은겸이 고개를 까닥였다. 가식이나 위선으로는 느껴지지 않는 몸짓이었다. 꼬리를 만지작거리며 좋아하는 아이를 지켜보는 그의 노란 눈이 부드러웠다.
아이의 가족이 먼저 식당을 떠난 뒤, 은겸이 입을 열었다.
“아이들은 참 귀엽죠. 솔직하고.”
“그러게요.”
“김원재 씨 닮은 아이도 귀여울 것 같은데. 자녀 계획 있어요?”
“없습니다.”
솔직히 말하자 은겸이 피식거렸다. 내가 너무 감흥 없이 대답한 모양이었다.
“그럴 줄 알았어요.”
애초에 내 호응을 끌어낼 의도가 아니었는지, 은겸은 별다른 말을 덧붙이지 않았다. 반도 먹지 않은 음식에서 손을 떼고 그는 턱을 괴었다. 그러고는 느릿느릿 꼬리를 흔들며 허공에 시선을 던졌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의 입가에 간간이 미소가 번졌다.
나는 말없이 오렌지 껍질을 벗겼다. 은겸이 실망해도 어쩔 수 없었다. 아이는 내게 낯선 주제였다.
마지막으로 아이에 관해 생각해 본 적이 언제였더라. 적어도 최근 몇 년간은 아니었다. 내 짝과 가정을 만들어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살겠다는 계획은 내가 같은 성별을 사랑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오래전 봄날에 이미 끝났다. 만약 운 좋게 연인과 가정을 이룬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아이를 가질 수 없었다.
그래도 상관없다고, 사랑하는 사람 외에는 무엇도 필요하지 않다고 느꼈던 그때. 나는 내가 어떤 삶을 원하는지 알게 되었다. 내가 바라는 인생에서 제일 중요한 조건은 사랑하는 이와 함께하는 것이었다.
‘저 사람은 자기 아이도 예뻐하겠지.’
여전히 공상에 빠진 은겸을 곁눈질하며 오렌지를 삼켰다. 은겸이 어떤 인생관을 지녔는지 몰라도, 최소한 나보다는 아이를 잘 돌볼 것 같았다. 만일 자기 자식을 원한다면 고양잇과 여성 중에서 교제 상대를 찾는 편이 나을 텐데. 나처럼 동성에 이종(異種)인 파트너가 아니라.
그러고 보면 이 사람도 슬슬 가족계획을 세울 만한 나이 아닌가. 집도 있고, 번듯한 직업도 있고, 나이도 찬 사람이 왜 술집에서 만난 남자와 섹스 파트너 같은 걸 하려는 거지? 나는 새삼스럽게 은겸을 훑어보았다. 시선을 느꼈는지 은겸이 나를 마주 보았다.
“다 먹었어요?”
“예.”
“그럼 가죠.”
은겸은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릇 위에 가득 남은 음식에는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는 태도였다. 나는 머뭇거리며 그를 따라 일어섰다.
“남은 거 포장이라도…….”
“괜찮으니까 그냥 가요.”
은겸의 대답은 상냥하지만 단호했다. 앞서서 카운터로 걸어간 은겸이 지갑을 꺼냈다. 내 몫까지 계산하는 그의 뒷모습을 떨떠름한 심정으로 바라보았다.
이 사람은 왜 항상 밥을 같이 먹자고 제안해 놓고는 내가 먹는 모습만 구경하다가 돌아가는 걸까.
그 이유는 금방 밝혀졌다. 계산을 마친 은겸에게 잘 먹었다는 인사를 건네고 식당을 빠져나오자, 나를 따라온 은겸이 주차장을 가리켰다.
“알아서 갈게요.”
“그거 말고. 내 집에 들렀다 가요.”
그의 초대가 뭘 의미하는지는 뻔했다. 나는 한쪽 눈썹을 치켜세웠다.
“이러려고 불렀습니까?”
“섹스 파트너끼리 만났으니 해야 할 일을 해야죠.”
“오늘 목요일입니다.”
“평일에는 안 하는 주의예요? 다음 날 출근 못 할까 봐?”
“나는 우리가 주말에만 자는 관계라고 알고 있었는데요. 수영 대용이니까요.”
은겸이 짓궂게 웃었다.
“그럼 많이 못 하잖아요.”
“…….”
“어차피 기간 한정인 관계인데, 가능한 한 자주 해야죠.”
그제야 은겸의 태도가 이해되었다. 마음이 콩밭에 가 있으니 음식이 잘 넘어갈 리 있나. 나를 구경한다고 느낀 것도 사실은 빨리 먹고 일어나라고 재촉하는 눈빛을 오해한 것 아니었을까.
얻어먹은 게 있으니 밥값은 해야겠지.
나는 묵묵히 주차장을 향해 발을 옮겼다.
***
지난 두 번의 잠자리에서 그랬듯, 은겸은 관계가 끝날 때까지 서로 마주 보는 자세를 유지했다. 끈적한 스킨십도 끊임없이 퍼부었다. 그리고 내 가슴팍에 길게 남은 하얀 자국에서 좀처럼 입을 떼려 하지 않았다.
“반달이라고 부르기에는 배가 홀쭉한데. 초승달일까, 그믐달일까.”
무늬를 따라 쪽쪽 입을 맞추면서 은겸이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 눈썹달로 치면 되겠다.”
“……대체 왜 그렇게 가슴 무늬에 집착하는 겁니까.”
가슴 주변을 하도 깨물린 탓에 입술이 스치기만 해도 얼얼했다. 은겸의 머리를 밀어내며 질문을 던졌다. 몸 무늬 페티시가 있다거나, 무언갈 엎지른 것 같아서 핥고 싶다는 식의 야한 농담이 돌아올 줄 알았는데 은겸의 대답은 의외로 진지했다.
“멋있으니까 그렇죠. 흔한 무늬가 아니라 달이잖아요.”
“흔한 거 맞는데요. 반달가슴곰이면 누구나 지닌 무늬고, 달도 딱히 거창한 상징은 아니고.”
“아니라니까. 그런 얘기가 있어요. 북두칠성 모양의 점을 지닌 인물이 큰 위인이 되었다는 전설.”
“…….”
“그러니 눈썹달을 좀 더 아껴 주는 게 어때요? 나라면 다른 사람들한테 자랑하고 다닐걸요. ‘나는 몸에 우주를 품었다’고.”
‘몸에 우주를 품었다’라. 나는 고개를 저었다. 그 정도로 과장된 표현은 태어나서 처음 들었다. 너무 터무니없다 보니 역으로 부담스럽지도 않았다.
“내 무늬는 찌그러져서 달처럼 보이지도 않아요. 그리고 북두칠성 모양의 점 이야기는 인간들 얘기잖습니까. 우리랑은 상관도 없는.”
“어? 인간들 전설인 거 어떻게 알았어요?”
반짝, 눈을 빛낸 은겸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설명을 기대하는 눈치였지만 나는 잠자코 입을 다물었다. 딱히 인간에 관심이 있어서 아는 건 아니었다. 인간과 관련된 시시콜콜한 정보는 시험에서 지문으로 자주 인용되는 단골 소재였다. 은겸이 꺼낸 전설도 기출 문제집에 실렸던 것이었다.
나야 업무 때문에 알게 되었지만, 은겸은 다를 터였다. 정규 교육에서 다루는 인간 이야기는 그리 풍부하지 않았다. 수인의 기원과 맞물리는 역사 및 멸종 원인 파트가 끝나면 인간이라는 단어는 교과서에서 사라졌다. 그보다 더 자세한 내용은 인간학 전공 서적에나 실려 있었다. 애초에 인간 관련 정보가 시험에 자주 등장하는 이유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낯설어하기 때문이었다.
남들은 잘 알지도 못하는, 멸종한 종의 전설을 평범하디 평범한 내 가슴 무늬에 갖다 붙이다니. 참 희한한 사람이었다.
내 침묵을 어떻게 판단한 것인지 은겸이 빙긋 웃었다. 제멋대로 팔을 뻗은 그가 나를 끌어안고 품에 가두었다.
“김원재 씨가 그 전설을 안다니 기쁘네. 나 그런 거 좋아해요.”
뒤이어 은겸은 ‘그런 거’가 무엇인지 부연했다. 이제는 멸종한 종의 유적. 황당무계한 옛이야기. 어둡고 먼 우주. 종잡을 수 없이 널뛰는 주제 사이에 공통점이 있었다. 그가 말을 멈추기를 기다렸다가 내 감상을 들려주었다.
“비현실적인 걸 좋아하나 봅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현실과 단절된 것들에 흥미를 느끼죠. 골치 아프게 얽힐 일이 없으니 안전하거든요.”
어라.
가볍게 되받아치려던 생각이 목 안으로 기어들어 갔다. 은겸의 말에 뼈가 있었다. 단순한 취향 고백이라기에는 이유 모를 위화감이 느껴졌다. 나는 은겸의 눈치를 살폈다.
빙긋 웃은 은겸이 화제를 돌렸다.
“참, 오늘은 점심에 뭐 먹었어요?”
“삼계탕 먹었습니다.”
“맛있었겠네요. 회사는 바빴어요?”
“그냥저냥.”
“그렇구나.”
넉살 좋게 맞장구를 치면서 은겸이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머리칼 사이로 파고드는 손가락이 따뜻했다. 대화 도중에 식었던 온기가 되살아나는 기분이었다. 애무에 담긴 다정함이 어떤 뜻인지 비교적 쉽게 추측할 수 있었다. 회피. 민감한 주제에서 도망치려는 의도였다.
피하겠다는데 굳이 붙들지는 말아야지. 나는 슬며시 눈을 감았다. 그릉그릉, 은겸이 목 안쪽을 울렸다.
미묘했던 분위기는 금세 노곤해졌다. 그의 손길을 즐기고 있을 때, 은겸이 다시 입을 열었다.
“김원재 씨는 나한테 묻고 싶은 거 없어요?”
이마를 타고 내려온 손가락이 미간을 간지럽혔다. 눈썹을 움찔거리며 나는 생각에 잠겼다. 글쎄. 은겸에게 묻고 싶은 점은 딱히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아는 그의 정보만으로도 이미 충분했다. 방이 세 개인 집에서 혼자 사는 사람. 자기 회사와 차를 지닌 사람. 그리고 술집에서 만난 사람을 아무렇지도 않게 자기 집으로 데려와 하룻밤 유희를 즐기고, 또 만나고 싶다며 계속 쫓아다니고, 섹스 파트너 제안까지 하는 사람.
그보다 더 자세한 부분은 내 관심 범위 바깥이었다. 겉으로 보여 주는 모습보다 깊이 파고들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은겸의 사생활에 괜한 호기심을 가지기 싫었다.
“궁금해도 물어보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네?”
“무례한 행동인 것 같아서요.”
“내가 물을 때마다 무례하다고 느껴요?”
무례할 만큼 사적인 질문을 받은 적은 없는 것 같았다. 눈을 감은 채로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지만.”
“나도 아니에요. 오히려 김원재 씨가 나를 궁금하게 여기면 기쁠 것 같은데.”
본인이 괜찮다니 할 말이 없었다. 그렇다고 망설임이 한순간에 사라지지는 않았다. 섹스 파트너에 불과한 내가 정말로 개인 영역을 침범해도 되는 걸까. 머릿속으로 여러 가지 질문을 만들어 보다가, 나는 머뭇머뭇 답했다.
“……궁금한 거 생기면 물어보겠습니다. 큰 기대는 하지 마요.”
“빨리 궁금해해요. 해 주고 싶은 이야기가 많으니까.”
은겸의 입술이 콧등에 와 닿았다. 간질간질하게 느껴지는 숨결이 너무 가까웠다. 보이지는 않아도 은겸의 얼굴이 얼마나 가까이 와 있을지 알 수 있었다. 차마 눈을 뜨지 못하고 숨을 죽였다.
콧잔등에 입을 맞춘 은겸이 웅얼거렸다.
“그래도 나이 정도는 서로 알아야 하지 않을까요. 나 올해 서른하나인데. 김원재 씨는요?”
“서른입니다.”
“아, 말 편하게 해도 돼요?”
“그럴 사이 아닌데요.”
“너무 빡빡하게 굴지 말고.”
숨결이 멀어지나 싶더니 따끔한 감각이 볼을 엄습했다. 은겸이 이를 세워 깨문 듯했다. 나는 뺨을 잘근거리는 은겸의 머리를 밀어냈다.
“마음대로 하시죠.”
“그럼 김원재 씨도 말 놓기.”
“싫습니다.”
“원재야.”
대뜸 들려온 이름에 말문이 막혔다. 생각해 보면 은겸은 항상 이런 식이었다. 예상치 못한 순간에 불쑥 선수를 쳐 나를 흔들기 일쑤였다. 그에게 대응하려면 나도 뻔뻔해질 필요가 있었다. 속으로 셋을 센 뒤, 나는 눈꺼풀을 열었다.
“왜.”
은겸이 싱글거리며 나를 내려다보았다.
“반말 싫다면서 잘만 놓네.”
“당신이 먼저 반말을 썼으니까.”
“당신 당신 하지 말고 나도 이름으로 불러 줄래?”
“싫어.”
“내가 연상이라 신경 쓰여?”
“…….”
억지로 가장한 태연함은 오래가지 못했다. 나는 도로 입을 다물었다. 하필 정곡을 찔릴 줄이야.
말을 놓는 것까지는 좋다고 치더라도 호칭이 문제였다. 연상인 걸 아는데 이름으로 부를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그렇다고 가까운 사이도 아닌데 형이라고 부르기는 싫었다. ‘은겸 씨’는 더더욱 어색할 것 같고. 이런 관계는 호칭을 어떻게 정리해야 맞을까.
은겸은 곤란해진 나를 보는 게 즐거운 듯했다. 항상 웃는 상인 그의 입꼬리가 더 높이 위로 치솟았다.
“괜찮아. 그냥 편히 불러. 고작 한 살 차이인데. 너라고 해도 돼.”
“너무 개방적인데요.”
“뭐 어때.”
“그래도 좀.”
“내가 괜찮다는데 뭐가 문제야.”
장난스럽게 키득거린 은겸이 내 귓불을 어루만졌다. 이러다가는 또 분위기에 휩쓸릴 것 같았다. 은겸을 밀어내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욕실 씁니다.”
“반말하라니까.”
“나중에요.”
대꾸하면서 침대를 벗어났다. 바닥에 떨어진 옷을 챙겨 드는 동안 허리를 여러 번 굽혀야 했다. 어찌나 급하게 벗으며 침실로 향했던지 방에서 거실까지 너부러진 옷으로 길이 생겨 있었다.
거실 한복판에 내던져진 가방에 닿았을 때 나는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하도 정신없이 덮쳐드는 은겸에게 떠밀려 급하게 몸을 섞다 보니 잊어버린 게 있었다.
가방을 열고 뒤적이자 스마트폰 밑에 눌린 초콜릿이 보였다. 비닐 포장은 볼썽사납게 구겨졌지만, 그 안에 든 내용물은 뭉개지지 않은 것 같았다. 먹어도 괜찮을지 훑어보고 나서 나는 방으로 돌아갔다.
“먹어요.”
은겸은 휙 날아든 초콜릿을 손쉽게 잡아챘다. 손바닥 안의 물체를 확인한 그가 고개를 들었다. 나는 어깨를 주물렀다.
“하나 남아서요.”
“…….”
“아까 저녁밥 거의 안 먹었잖습니까. 그거라도 먹어요.”
은겸이 남겨 놓고 온 음식이 내내 마음에 걸리던 차였다. 게다가 침대에서 뒹구느라 체력까지 써 버렸으니. 멀쩡해 보여도 배가 고플 것 같았다.
그답지 않게 은겸은 즉각 답하지 않았다. 그저 물끄러미 손안을 들여다볼 뿐이었다. 초콜릿 안 좋아하나. 괜한 선심을 썼다 싶었다. 무안해져서 나는 팔을 내렸다.
“먹기 싫으면…….”
그제야 정신을 차린 것처럼 은겸이 초콜릿의 포장을 벗겼다. 동그란 초콜릿을 가리키며 그가 눈을 빛냈다.
“반반 나눠 먹자.”
“그냥 먹으라니까요.”
“너랑 같이 먹고 싶어서 그래.”
몸을 일으켜 앉은 은겸이 내게 손짓했다. 저 고집을 꺾느니 적당히 응하는 게 빠를 듯했다. 포기하고 나는 은겸에게 다가갔다.
은겸의 공격은 이번에도 내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날아왔다. 내가 그의 앞에 서자 씩 웃은 은겸이 초콜릿을 입에 물었다. 같이 먹자더니 혼자 먹으려는 건가? 의아해하는 사이 날아온 손이 내 팔을 붙들고 끌어당겼다. 갑작스러운 힘에 균형을 잃고 나는 앞으로 고꾸라졌다. 넘어질 것 같아서 침대를 짚자, 은겸이 허리를 세웠다.
순식간에 입술이 덮쳐들었다.
“읏…….”
이러면 반으로 못 나누잖아. 소리 내어 항의하자니 입가에 걸쳐진 초콜릿이 떨어질 것 같아서 불안했다. 한숨을 삼키며 입을 벌리자 입술 틈으로 초콜릿이 쏙 굴러 들어왔다. 사르르 녹아내리는 표면이 달았다. 나는 은겸의 어깨에 팔을 둘렀다.
혀 위를 굴러다니던 초콜릿이 사라진 뒤에도 달콤한 키스는 끝나지 않았다.
***
난생처음 섹스 파트너와 보내는 여름은 예상보다 쾌적했다. 은겸과 잠자리 계약을 맺기로 하고 처음으로 맞은 주말, 나는 그 사실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은겸은 내게 불편함이 없도록 배려했다. 차를 가지고 와서 나를 태웠고, 내 입맛에 맞는 식당을 골라 저녁을 먹었다. 그 뒤에는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몸을 섞었다.
후처리도 깔끔했다. 자고 가라는 제안을 거절하자 은겸은 그 이상 달라붙지 않았다. 내 집을 알려 달라고 고집을 부리지도 않았다. 버스 정류장에 나를 내려 준 뒤 그는 곧바로 돌아갔다.
애초에 짧으면 2주, 길면 3주만 이어질 관계이니 이 정도면 부담이 없었다. 식사도 섹스도 만족스러운 하루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는 길, 나는 서은겸이라는 파트너에게 합격점을 매겼다.
은겸이 잠재운 열기는 며칠 지나지 않아 다시 고개를 들었다. 내 발정은 그대로인데 어느덧 가을을 여는 새로운 달이 찾아왔다.
9월의 버스는 8월보다 훨씬 북적였다.
새로운 얼굴들은 정류장에서부터 드문드문 보였다. 개강한 대학생들이었다. 친구들과 웃으며 떠들거나 스마트폰을 들고 손가락을 빠르게 놀리는 이들은 피곤한 기색의 회사원들과는 표정부터 달랐다. 삭막한 출근길 풍경도 조금은 밝아진 느낌이었다.
그것도 한순간이었다. 사람으로 꽉 찬 버스 안에서는 학생이건 회사원이건 다들 지쳐 보였다. 평소 다니던 때와 비슷한 시간대인데도 차 안은 사람으로 붐볐다. 키 작은 이들을 넘어뜨리지 않게 조심하며 나는 사람들을 헤치고 안쪽으로 들어갔다. 간신히 자리를 잡고 서자 한숨이 나왔다.
‘연말에 승진하면 차를 사자. 꼭 사자.’
몇 번째인지 모를 결심을 되뇌면서 손잡이를 힘주어 붙들었다. 버스가 흔들릴 때마다 옆자리 사람이 팔에 감은 긴 꼬리와, 뒷자리 사람이 등에 멘 백팩이 나를 눌러 댔다. 나는 몸을 웅크렸다. 내가 불편한 만큼, 주위 사람들도 내 덩치를 갑갑하게 느끼고 있을 터였다.
은겸의 전화는 내릴 정류장이 가까워졌을 무렵 걸려 왔다. 번화가 사거리에서 한 무리의 대학생들이 하차하며 자리가 생겼다. 숨이 트이는 동시에 웅웅거리는 소리도 들렸다. 꽤 예전부터 울렸던 것인지, 옆자리 사람이 차가운 눈으로 나를 힐끔거렸다.
서둘러 스마트폰을 꺼냈다. 일단 끊고 하차한 뒤 다시 걸 생각이었는데, 습관처럼 반대쪽으로 손가락을 놀려 통화를 수락해 버렸다. 스마트폰을 귀에 대자 헐떡이는 숨소리가 날아왔다.
─하아, 하아.
“…….”
─원재야, 하아. 후우.
이런 미친.
순간적으로 스마트폰을 떨어뜨릴 뻔했다. 화끈거리는 얼굴을 무시하며 잽싸게 통화 볼륨을 줄였다. 차마 옆을 돌아볼 수가 없었다. 다들 귀 좋은 수인인데 들었겠지.
─원재야. 듣고 있어?
그사이에도 은겸은 계속 내 이름을 부르고 있었다. 나는 손으로 입을 가리고 나직이 윽박질렀다.
“끊어요. 경찰에 신고합니다.”
─어? 경찰?
“성희롱…….”
─아, 아니, 아니야. 러닝 뛰느라 숨차서 그래. 끊지 마.
아침부터 무슨 변태 짓인가 했더니, 아니었구나. 안도하며 나는 시선을 들어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도 나를 보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람들의 빼곡한 머리통 위로 안내판이 눈에 들어왔다. 다음 정류장의 이름과 8시 27분이라는 시각이 붉은색으로 빛났다.
‘남들은 출근하는 시간에 이 사람은 헬스장에 간 건가.’
하긴, 은겸은 일개 사원이 아니라 자신의 회사를 지닌 사장이었다. 자고로 사장 정도 되는 사람들은 늦게 출근해서 일찍 퇴근해야 아랫사람들이 편한 법이다. 아무튼 사람도 많은데 오래 핸드폰을 붙들고 있기 곤란했다. 나는 소리를 죽여 물었다.
“그래서 왜요. 버스 안이라 길게 통화 못 합니다.”
─오늘 시간 있어?
“아뇨. 바쁩니다.”
─그럼 내일은 어때?
“내일은 회식할 것 같은데요.”
─토요일은?
“토요일…….”
토요일은 딱히 핑계 댈 일이 없었다. 애초에 은겸과 주말마다 만나기로 약속하기도 했고. 나는 마지못해 답했다.
“토요일은 됩니다.”
─그럼 데이트하자.
“데이트요?”
말을 뱉자마자 주위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 꽂혔다. 나도 모르게 언성을 높인 탓이었다. 눈짓으로 사과하면서 나는 스마트폰을 고쳐 쥐었다. 은겸과 내가 언제부터 데이트라고 불릴 만한 활동을 함께하는 사이였나. 혼란스러웠다.
나만큼은 아니지만, 은겸도 당황한 듯했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그가 자신의 발언을 정정했다.
─알았어. 내가 잘못 말했네. 저녁 먹고 하룻밤 자고 가.
“……예.”
─그리고 반말 쓰라니까.
“…….”
─안 쓰면 안 끊는다?
“끊어.”
짧게 답하자 키득키득 웃은 은겸이 곧장 전화를 끊었다.
은겸과의 짧은 통화는 한동안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슬슬 발정이 시작될 텐데 오늘 시간을 내서 만나는 편이 나았을까. 한번 몸 안의 열기를 의식하자 탁한 공기까지 더해져 속이 갑갑했다. 나는 느슨하게 넥타이를 풀었다. 이미 잡은 약속을 번복하기 귀찮았다. 주말까지는 어찌어찌 버틸 수 있을 것도 같고.
일단 중요한 건 출근이었다. 은겸과의 약속을 곱씹다 하마터면 내릴 정류장을 놓칠 뻔했다. 나는 서둘러 사람들 틈바구니를 헤치고 버스에서 탈출했다.
정류장을 나서자 곧바로 효영이 보였다. 앞서 출발한 버스에서 내린 듯했다. 평소답지 않게 효영은 느릿느릿 걷고 있었다. 무슨 생각을 골똘히 하는지 등 뒤에 다가갔을 때까지도 효영은 나를 눈치채지 못했다. 조용히 따라가는 것도 이상할 것 같았다. 나는 효영의 이름을 부르며 어깨를 툭 쳤다.
“효영아.”
내 손이 닿은 순간 효영이 빳빳하게 꼬리털을 부풀리며 휙 돌아섰다. 머리칼 틈으로 나온 귀도 바짝 곤두서 있었다. 격한 반응에 놀라 나는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혹시나 내가 꼬리를 밟았나 싶어 발을 내려다볼 때였다. 효영이 한숨을 내쉬었다.
“아, 깜짝이야.”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냐.”
“아니야. 아무것도.”
어째서인지 효영은 나를 경계하는 기색이었다. 회사를 향해 걷는 내내 말 한 마디 꺼내지 않았다. 자꾸만 뒤처지기 일쑤인 효영을 위해 나는 몇 번이고 걸음을 멈춰 기다려야 했다. 천천히 발을 옮기는 효영의 옆얼굴이 지쳐 보였다.
“괜찮아?”
“그냥 좀. 생각할 게 많다.”
“버스에 사람 많더라. 내일부터는 좀 일찍 다녀야겠어.”
“그러게.”
“요새는 골프 치러 안 다녀?”
“어. 바빠서.”
“바빠?”
“응.”
대답을 얼버무린 효영이 한숨을 쉬었다.
“원재야, 내가 좀 피곤한데.”
더 대화하기 싫은 눈치였다. 출근 시간부터 저렇게 기운이 없으면 어떡하나. 그냥 보낼 수는 없었다. 두리번거리다가 나는 근처 카페를 가리켰다.
“커피 마실래? 내가 살게.”
효영은 말없이 눈을 치켜떴다. 눈가에 그린 아이라인이 오늘따라 더 진하게 보였다. 눈물이 번진 듯 아래로 흘러내린 검은 자국 때문에 효영의 표정은 좀처럼 읽어 내기 어려웠다. 그 안에 어린 수많은 감정의 이름도.
효영의 진의를 알아내는 대신, 나는 내 진심을 전달하는 쪽을 택했다.
“일 바쁘다며. 그거라도 마시고 기운 내야지.”
나를 꿰뚫듯 탐색하던 효영이 한참 만에 입꼬리를 올렸다.
“그래. 이러니저러니 해도 너는 너지.”
“어?”
“마시자, 커피.”
어깨를 툭 친 효영은 평소 같은 태도로 걸음을 빨리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안심이었다. 나는 효영을 따라 방향을 틀었다.
‘과장님이 아메리카노, 다른 사람들은 전부 녹차였지.’
내 것만 가지고 출근할 수는 없으니 사는 김에 팀원들의 음료도 같이 사야 했다. 기억을 되짚는 사이 벌써 카페의 문을 연 효영이 빨리 오라며 내게 손짓했다. 아무튼 성격 급하기는. 피식 웃고 나는 발을 옮겼다.
***
은겸은 약속 장소에 미리 와 있었다.
그는 멀리서도 눈에 띄는 존재였다. 큰 키며 화려한 머리카락, 긴 꼬리가 시야에 들어오자마자 은겸임을 알아볼 수 있었다. 일이라도 다녀왔는지 정장에 검은 서류 가방, 손목에서 반짝거리는 시계까지 완벽했다.
대충 티셔츠에 청바지를 걸치고 온 내 차림새가 부끄러웠다. 지금이라도 돌아가서 다른 옷으로 갈아입고 올까. 답이 정해져 있는 고민을 하면서 나는 미적미적 걸음을 옮겼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손가락을 움직이던 은겸은 내가 가까이 다가가자 번쩍 고개를 들었다.
“원재야.”
까닥 고갯짓으로 인사를 대신하며 나는 그의 앞에 섰다.
“어서 와.”
눈웃음을 친 은겸이 팔을 내밀더니 나를 끌어안았다. 등을 토닥이며 그가 다정하게 중얼거렸다.
“이번 주도 수고 많았어.”
“…….”
“피곤할 텐데 시간 내 줘서 고마워.”
“아뇨, 딱히…….”
감사를 받을 만한 일은 아닌 것 같은데. 어차피 주말에 만나기로 하고 시작한 관계였고. 머쓱해져서 나는 은겸의 어깨를 떠밀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신경 쓰였다.
하지만 은겸의 손은 내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등을 타고 내려간 손이 허리를 더듬거렸다. 질색하며 떼어 내려 하는데도 은겸은 기어코 허리와 엉덩이 사이의 움푹 팬 공간에 손을 얹었다.
아래에 신경 쓰느라 미처 방어하지 못했던 입술이 볼에 와 닿았다.
“그리고 나한테 반말해야지, 원재야.”
“…….”
“반말 안 하면 안 놓아줄 거야.”
협박은 포옹과 짧은 키스만이 아니었다. 말을 마친 은겸이 내 볼을 깨물었다. 보는 눈도 많은 데서 이게 무슨 짓이람.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놔.”
“이름도 불러.”
“놔, 서은겸.”
“그래, 착하다.”
중얼거린 은겸이 팔을 끌렀다. 그 이상 나를 붙들지 않고 은겸이 한쪽을 가리켰다.
“그럼 갈까?”
은겸이 예약했다는 식당은 가까이에 있었다. 데리러 오겠다는 그를 만류하고 대중교통을 이용해 여기까지 온 보람이 있었다. 차는 주차장에 세워 놨으니, 이따 자신의 집으로 갈 때는 반드시 태워 가겠다는 소리를 하던 은겸이 나를 돌아보았다.
“슬슬 개인 번호 줄 생각 없어?”
“없는데요.”
“언제까지 업무용 폰에 전화하게 할 거야. 영업직도 아니면서 왜 스마트폰을 두 개나 가지고 있어?”
“영업은 안 해도 강사들하고 연락할 일이 많아서요. 그 사람들은 주말에도 연락하고 그러니까. 사적인 시간은 일과 분리하고 싶고.”
“아, 그럼 회사에서 지급한 게 아니고?”
“개인적으로 산 겁니다.”
“또 존댓말 쓰네.”
내 말투를 지적한 은겸이 눈을 빛냈다.
“앞으로는 존댓말 할 때마다 키스한다.”
그럼 아무 말도 안 해야겠다. 결심하며 입을 꾹 다물자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은겸이 실소를 흘렸다. 웃음기가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그가 말했다.
“가자.”
잡아 달라는 듯 손을 내미는 은겸을 무시하고 나는 은겸과의 거리를 반걸음 정도 띄웠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내 선택을 후회했다. 반걸음이 아니라 한 걸음을 유지했어야 했다.
은겸과 주말 오후의 번화가를 함께 걷는 건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은겸은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당겨 흡수하는 블랙홀 같았다. 이전에 저녁을 같이 먹었을 때 느낀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길을 가던 사람들도, 건물 안에 들어가 있던 사람들도, 차를 타고 가던 사람들도 모두 은겸을 바라보았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눈길을 잡아끄는 존재와의 동행은 꽤 신경 쓰이는 일이었다.
은겸이 안내한 스테이크 전문점에 들어서서 자리를 잡을 때까지도 사람들의 시선은 떨어질 줄 몰랐다. 단순히 그가 사자라서 쳐다보는 게 아니었다. 매력적인 상대에게 본능적으로 이끌리는 것이었다.
은겸은 그런 일이 꽤 익숙한 듯했다.
“미안. 한가한 곳으로 고를 걸 그랬네.”
관심을 부담스러워하기는커녕 내 눈치를 살피는 여유까지 보였다. 나는 고개를 저었다. 고의로 만든 상황도 아닌데 은겸이 미안해할 필요는 없었다.
“주문이나 하자.”
메뉴판을 펼치며 답하자 은겸이 환히 웃었다.
“잘하네, 반말.”
“…….”
그래, 아무리 눈에 띄는 화려한 외모라도 이런 거에나 집착하는 이상한 사람이었지. 한결 편안해진 마음으로 나는 메뉴판을 훑었다.
메뉴판에는 생각보다 다양한 스테이크가 실려 있었다. 스테이크 하면 흔히 떠올릴 법한 육식종 전용 음식만이 아니라 나 같은 잡식종이나 초식종이 즐길 수 있는 메뉴도 상당히 많았다. 내 식성을 신경 써서 고른 티가 나는 곳이었다.
주문을 마치고 나서 나는 새삼 은겸을 바라보았다. 그가 눈웃음을 쳤다.
“왜?”
“그냥. 신기합……, 신기해.”
튀어나오던 존댓말을 억지로 욱여넣었다. 못 들은 척 은겸이 되물었다.
“뭐가?”
“육식종인데. 잡식종 챙기는 데 익숙한 것 같아서.”
“아, 그거. 그럴 수밖에 없는 게…….”
말을 잇던 은겸이 미간을 찌푸렸다.
“잠시만.”
가방을 뒤적인 그가 꺼낸 것은 스마트폰이었다.
“아, 또냐.”
화면을 들여다본 그가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목소리에 짜증이 어려 있었다. 내 앞에서는 항상 여유를 잃지 않던 사람이 갑자기 무슨 일일까. 처음 보는 모습이 낯설기보다는 신기했다.
그사이에도 은겸의 손 안에서는 핸드폰이 웅웅거리며 진동했다. 은겸이 눈썹을 찡그렸다.
“미안한데, 지금 안 받으면 계속 걸 것 같아서.”
“그냥 통화해.”
“미안.”
눈인사를 보낸 은겸이 바로 통화를 수락했다. 소리를 죽여 대화하는 그를 위해 나는 고개를 돌려 주위를 구경했다.
식당 안의 분위기는 조용한 편이었다. 은은히 내려앉는 조명이나 깔끔한 인테리어도 괜찮았다. 특히 환기 설비가 좋은지 다른 테이블의 냄새가 흘러들어오지 않는 점이 제일 마음에 들었다. 데이트를 즐기기에 나쁘지 않은 식당이었다. 나만 그렇게 생각한 게 아닌 듯, 주변의 2인용 테이블은 대부분 커플들이 차지하고 있었다. 주로 육식종, 잡식종 수인에, 간간이 초식종도 보였다.
음식만 맛있으면 완벽하겠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허리를 곧게 폈을 때였다.
“그거 자주 먹으면 나중에 안 서는 거 몰라?”
내내 소곤거리던 은겸이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솔직히 네가 촉진제 쓰는 거 마음에 안 든다. 그러다 부작용 생기면…….”
무슨 이야기인가 했더니, 성욕 촉진제 이야기였다. 자극적인 단어가 튀어나오자 신경이 온통 그쪽에 쏠렸다.
“곧 발정기잖아. 그때까지 좀 참으면 안 되겠어?”
은겸이 길게 한숨을 쉬었다. 촉진제도 모자라 발정기라니. 지극히 사적인 주제였다. 이 이상 엿들으면 정말 무례한 짓일 텐데, 쫑긋 선 귀를 억지로 틀어막을 수는 없었다. 나는 입술을 잘근거리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예 자리를 피하는 편이 낫겠다 싶었다.
핸드폰을 귀에 댄 채 은겸이 눈빛으로 질문을 던졌다.
“잠깐…….”
“알았어. 같이 가 줄 테니까 병원 예약하면 알려 줘. 끊는다.”
통화를 마무리하며 던진 은겸의 한마디가 의미심장했다. 채 말을 끝맺지 못하고 나는 제자리에 도로 앉았다. 화장실에 다녀오겠다는 얄팍한 핑계가 머릿속에서 녹아내렸다.
때마침 다가온 직원이 테이블 위에 음식을 세팅했다.
“맛있게 드세요.”
의례적인 인사를 건넨 직원이 돌아간 뒤에도 나는 테이블보만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가만히 있는 내가 이상했는지 은겸이 말을 걸었다.
“썰어 줄까?”
“아니.”
“왜 그래? 속 안 좋아?”
“괜찮으니까 먼저 먹어.”
이리저리 나를 훑던 은겸이 나이프를 쥐었다. 곧 길쭉한 손가락이 보기 좋게 움직이며 치킨 스테이크를 썰었다.
테이블에 머물었던 시선이 은겸의 손으로 옮겨 갔다. 그동안 눈여겨볼 일이 없어서 몰랐는데, 은겸의 왼손에는 눈에 띄는 점이 있었다. 네 번째 손가락의 뿌리 부근 마디에 남은 하얀 자국이었다. 무슨 흔적인지는 뻔했다. 반지를 오래 껴서 남은 자국이었다.
저기 끼웠던 반지는 커플링일까, 결혼반지일까.
내 앞에서 스테이크를 써는 이가 새삼 멀게 느껴졌다. 어딜 가든 사람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남을 잘 배려하며, 처음 보는 이에게도 서글서글하게 말을 거는 미인. 나는 이 사람을 얼마나 알고 있을까.
조금 전 들었던 통화 내용이 불쑥 되살아났다.
은겸이 언급한 성욕 촉진제는 발정기가 겹치지 않는 커플의 밤을 위한 약이었다. 말 그대로 비발정기인 사람의 성욕을 촉진하는 작용 외에는 다른 게 없었고, 약효도 몇 시간밖에 지속되지 않았다. 하지만 나쁜 용도로 쓰일 위험이 있고 장기 복용 또는 과다 복용을 하면 몸에 좋지 않기에 구입 절차가 꽤 까다로웠다.
우선 비발정기인 당사자가 아니면 약을 살 수 없었다. 의사의 비발정 진단서도 필수 서류였다. 또한 현재 발정기인 파트너가 함께 병원에 가서 각서를 써야만 했다. 섹스는 공동 책임이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촉진제는 아무하고 같이 받으러 갈 수 없었다. 누군가와 촉진제를 사러 간다는 것은 곧 그 사람과 잠자리를 함께하는 사이임을 의미했다.
내가 대화의 맥락을 잘못 이해했을까.
아니면 은겸과 반지를 나눠 낀 상대가 아직도 그의 주변에 있는 것일까.
나이프를 집어 참치 스테이크를 조각내었다. 맛있는 냄새가 솔솔 올라오는데 구미가 당기지 않았다. 물만 마셔도 얹힐 것 같았다.
추궁하는 것처럼 들리지 않기를 바라며 입술을 떼었다.
“궁금한 게 있는데.”
“뭔데?”
포크를 내려놓은 은겸이 나를 똑바로 보았다. 조금 전에 통화하며 언뜻 내비쳤던 불쾌함은 온데간데없었다. 나는 시선을 내렸다.
“결혼했어?”
은겸이 즉답했다.
“했지. 두 번.”
내용에 비해 지나치게 산뜻한 말투였다.
차마 눈을 들 수 없어 뭉그러진 스테이크의 단면을 바라보았다. 반지 자국을 보고 기혼자라는 사실은 예상했지만, 두 번이라니. 방이 세 개나 되던 은겸의 집과, 혼자 잠들기에는 지나치게 넓은 침대가 불현듯 떠올랐다.
나는 왜 은겸이 지금껏 그곳에서 혼자 생활했다고 믿었을까.
“원재야.”
다정한 목소리에 퍼뜩 시선을 들었다. 은겸이 여전히 나를 보고 있었다.
“이혼했냐고는 안 물어?”
“…….”
“그것도 했어. 두 번.”
왼손을 들어 보이며 은겸은 미소 지었다.
“그래서 손가락이 비어 있는 거야.”
아까부터 손을 힐끔거렸던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설마, 내가 유부남인 줄 알았어? 너랑 만날 때는 반지를 빼고?”
“…….”
“나 그 정도로 파렴치한 사람 아니야. 결혼했는데 어떻게 섹스 파트너를 만들어. 모두를 배신하는 짓인데.”
의외로 상식적인 발언을 하며 은겸이 스테이크 조각을 포크로 찔렀다. 애먼 의심을 받았는데도 기분 나쁜 기색이라곤 보이지 않았. 조금 마음이 놓였지만 아직 완전히 안심할 수 없었다. 은겸이 음식물을 삼키기를 기다렸다가 나는 조심스럽게 물었다.
“아까 통화…….”
내 질문을 듣지 못했는지 은겸이 말을 돌렸다.
“참, 어제 점심은 뭐 먹었어?”
“어.”
순간적으로 어제의 기억을 되짚느라 내가 물으려 했던 것을 잊어버렸다. 나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바빠서 배달시켰던 것 같은데.”
“어떤 거?”
“짜장면.”
“맛있었겠네.”
“……그런 건 왜 물어보는데.”
“궁금해서. 네가 뭘 먹고 뭘 하면서 하루를 보냈을지.”
“그게 궁금해?”
“당연히 궁금하지. 내가 모르는 네 일상이니까.”
아무렇지 않게 대꾸한 은겸이 스테이크 조각을 입으로 가져갔다.
식사를 마칠 때까지 은겸은 내게 지난 며칠에 관해 질문을 던졌다. 아주 사소해서 기억에 잘 남지 않은 자질구레한 것 위주였다. 그것들을 억지로 떠올리며 답하는 사이 식사가 끝났다.
오늘도 계산은 은겸의 몫이었다. 조금이라도 내야 마음이 편할 것 같다고 주장해 보았지만, 은겸은 그럼 다음에 사라는 말로 내 고집을 꺾었다. 다음번에도 먼저 카드를 꺼낼 거면서. 항상 밥값을 치를 기회를 주지 않는 그에게 항의하며 주차장으로 향했다. 웃으며 답하던 은겸이 문득 발을 멈추고 나를 돌아보았다.
“잠깐 담배 피우고 가도 될까?”
그가 가리킨 곳은 건물 사이의 흡연 공간이었다.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같이 피울래?”
“끊었어.”
“건강 생각해서? 좋네.”
중얼거린 은겸이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냈다.
“냄새 싫으면 차에 먼저 가 있어.”
“괜찮아.”
은겸에게서 사각 라이터를 건네받아 불을 붙여 주었다. 눈짓으로 감사 인사를 보낸 은겸이 연기를 토해 냈다. 집에서도, 몸에서도 냄새가 나지 않았기에 은겸이 흡연자라는 사실을 지금껏 눈치채지 못했는데. 알고 보니 후각이 예민한 종을 위한 브랜드를 피운 덕분이었다.
옆에서 풍겨 오는 냄새가 반갑지 않은 연상 작용을 일으켰다. 나는 발끝을 내려다보았다. 아직도 지워지지 않는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선배, 담배 피워요?”
일생일대의 고백을 한 여름날, 정운이에게 들은 말이었다.
그날 나는 멍청한 짓을 수없이 했다. 그중 하나는 정운이에게 애인이 있다는 사실을 알면서 섹스 파트너라도 되게 해 달라고 간청한 것이었다. 차오르는 자기혐오를 꾹꾹 누르면서도 붙들고 싶을 만큼 좋아한 탓이었다.
내 몸에 담배 냄새가 배어 있었던 것일까. 나를 받아 줄 듯 망설이며 무방비하게 서 있던 정운이는 불쑥 담배를 피우냐며 물었다. 피운다는 내 대답을 듣자 직전까지 유지된 좋은 분위기를 깨고 나를 밀쳤다.
“선배. 아무래도 이건 아닌 것 같아요. 안 되겠어요.”
거절의 이유는 그게 다였다. 정운이는 자기가 담배를 끊었다는 말 외에 아무런 설명도 하지 않았다.
너무나 당황스러운 이유였기에 당장 담배를 끊겠다고 약속하지 못했다. 무엇이든 할 수 있으니 제발 받아 달라고 무릎을 꿇지도 못했다. 멀어지는 정운이를 바라보며 나는 멍청히 한 문장만 되뇌었다.
진작 담배를 끊었어야 했는데.
그렇게 정운이를 보낸 것이 한으로 남았기에 그날 이후 한 번도 담배를 피우지 않았다. 담배꽁초를 보면 나를 거절하던 순간의 정운이가 떠올라서 괴로웠다.
아직은 잊기 힘든 실연의 상처 위로 은겸의 향이 쌓였다.
희미하게 번지는 냄새를 들이마시며 나는 발끝으로 땅을 찼다. 미련이 덕지덕지 달라붙은 마음을 접은 지 고작 두 달 정도 지났는데, 그때가 먼 옛날처럼 느껴졌다. 정운이를 추억할 때마다 욱신거리던 가슴도 오늘은 잠잠했다. 정운이보다 더 신경 쓰이는 일이 있기 때문이었다.
나와 있을 때 단 한 번도 담배를 피우지 않았던 은겸이 왜 갑자기 흡연 욕구를 느낀 것인지 궁금했다.
나는 고개를 들었다. 담배를 피우는 은겸의 낯빛이 전에 없이 어두웠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그는 금방 표정을 고쳤다.
식사하는 내내 묻지 못했던 질문을 꺼낼 차례였다.
“아까 전화한 사람. 누군지 물어봐도 될까.”
“으응?”
말끝을 끌며 은겸이 담배를 빨았다. 꽁초 끝에서 작은 불씨가 빨갛게 빛났다.
정말 묻고 싶은 내용을 꺼내기까지 용기가 필요했다.
“촉진제 이야기하는 것 같던데.”
“아. 미안. 오해할 만했네.”
고개를 옆으로 돌려 연기를 뱉은 은겸이 나를 돌아보았다. 그의 얼굴에 여유가 되돌아와 있었다.
“내 남동생이야.”
“동생?”
“가끔 촉진제 사러 같이 가 달라고 조르거든. 동생 애인하고 발정기가 안 맞는데, 애인이 워낙 바빠서 병원에 같이 가기 힘들다고.”
“그거 대리 수령이잖아. 걸리면 병원에서 다시는 약을 못 받을 텐데?”
은겸이 손가락을 가볍게 흔들어 담뱃재를 털었다.
“웬만하면 나도 거절하는데, 하도 간절하게 부탁해서. 이종 연애가 얼마나 힘든지는 나도 잘 아니까 마음이 약해질 수밖에 없어. 아, 진짜로 걔가 쓰려고 사는 거니까 안심해. 그건 보장할 수 있어.”
“……잠깐만.”
은겸의 말에 모순이 있었다. 성욕 촉진제는 비발정 당사자가 진단서를 가지고 가야만 받을 수 있는 약이다. 하지만 사자에게는 비발정기가 없다. 게다가 친형제가 연인 관계로 공식적인 기록을 남긴다고?
“형제인 사자 둘이 가는데 어떻게 촉진제를 받아?”
가방에서 휴대용 재떨이를 꺼낸 은겸이 담배를 비벼 껐다. 그의 표정이 도로 굳어 있었다.
“내 동생은 사자가 아니거든.”
“…….”
“서로 피가 섞인 것도 아니고. 지금은 법적으로 남남이야. 내가 가정사가 좀 복잡해서.”
반쯤 남은 담배를 미련 없이 재떨이에 밀어 넣고 은겸이 나를 돌아보았다.
“알고 싶어?”
말에서 풍기는 뉘앙스가 미묘했다. 마치 질문의 형태를 띤 경고를 들은 것 같았다. 이 이상 묻지 말고, 깊이 관여하지도 말라는 경고.
나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내 발은 은겸과 나 사이에 그어진 선 위에 놓여 있었다. 은겸의 공간에 들여놓았던 발을 뒤로 빼내며 중얼거렸다.
“불륜이 아니면 됐어.”
“진짜 아무 사이 아니라니까.”
은겸의 눈매가 예쁜 반원을 그리며 접혔다. 내 손을 붙든 은겸이 손깍지를 꼈다.
“불안하면 맹세할게. 지금 나한테는 배우자도, 연인도 없어. 관심 가는 사람도 없고.”
달싹거리는 입술이 손등을 스쳤다.
“원재 너 외엔 누구와도 섹스하지 않아.”
소유욕 때문에 질투하는 연인에게 확신을 심어 주려는 듯한 말투였다. 나는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담배 냄새 난다.”
“아, 미안.”
손을 놓은 은겸이 내 옆에서 물러났다.
차를 타고 가는 내내 은겸은 창문을 열어 놓고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그에게서 풍기는 담배 냄새가 그리 거슬리지 않았지만 나 역시 그를 내버려 두었다.
가족에 관해 더 물어봐야 했던 것일까?
어쩌면 내가 너무 예민하게 반응했을지도 모른다. 분명 은겸은 자신을 궁금하게 여겨 달라고 했다. 처음부터 선이 보이지 않는 사람처럼 굴면서 불쑥불쑥 내 영역을 넘나들었다. 자신의 손만 잡으면 아무런 걱정이 없다는 듯이.
하지만 미미한 불안이 나를 잡아 세웠다. 내가 물으면 은겸은 정말 무엇이든 답할까.
내가 정말 은겸을 궁금해해도 될까.
***
내가 처음으로 사적인 일에 관심을 보여서 기뻤는지, 은겸은 유난히도 키스에 집착하며 몸을 섞었다. 숨이 모자란 내가 그의 가슴을 떠밀어야만 입술을 떼었다. 잠자리를 가진 뒤에도 은겸은 좀처럼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베개 대신 자신의 팔을 베라며 팔베개까지 강요했다. 하는 수 없이 나는 그의 품에 안겼다.
아이를 재우듯 은겸이 가만가만 내 등을 토닥였다.
“원재야.”
“응.”
“뭐 하나 물어봐도 돼?”
언제는 허락을 받고 물은 것처럼 굴기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은겸의 손가락이 척추를 따라 아래로 내려갔다. 엉덩이 위에 손을 올린 그가 중얼거렸다.
“첫사랑 얘기 해 줘.”
“그건 왜.”
“네가 어떤 사람을 사랑하는지 궁금해서.”
나야말로 은겸에게 묻고 싶었다. 이런 식으로 착각할 만한 말을 태연하게 늘어놓는 저의가 대체 무엇인지.
우리 관계는 섹스 파트너에 불과하다고 꼬집는 대신, 나는 침묵을 지켰다. 내가 답하지 않자 은겸은 재촉하는 것처럼 내 볼에 입을 맞추었다. 얼굴 여기저기에 입술을 꾹꾹 누르는 그를 피해 몸을 젖혔다. 그래 봐야 은겸의 품 안에서 꿈지럭거리는 것뿐이었다. 팔에 힘을 준 은겸이 나를 끌어당겼다. 오래 버티지 못하고 나는 은겸의 코앞까지 끌려갔다. 헬스 다닌다더니 진짜 열심히 운동하나 보다. 잠깐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열아홉 살 때.”
“열아홉? 꽤 늦었네.”
연인은 신중하게 골라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평생을 함께할 가족이 될지도 모르는데, 잠깐 만났다가 헤어질 생각으로 가볍게 인연을 맺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설명을 덧붙이지 않았다. 잠시 내 말을 기다리던 은겸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어떤 애였어?”
“말레이곰.”
“여자?”
“남자.”
“잘생겼어?”
“귀여웠어.”
내 첫사랑은 쾌활하고 활동적이며 나서기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작은 체구에 사랑스러운 외모를 지녀 친구들 사이에서도 인기가 많았다. 하지만 내가 결정적으로 그에게 반한 계기는 가슴 무늬였다.
다른 말레이곰들처럼 내 첫사랑도 가슴에 무늬를 지니고 있었다. 둥글고 굵은 반원 모양의, 선명한 주황색 무늬였다. 그는 자신의 무늬를 가리켜 태양이라고 설명하곤 했다.
“이게 바로 말레이곰이 태양곰으로 불리는 이유지.”
무늬를 감추려 했던 나와 달리 그는 탈의실에서건 샤워실에서건 언제나 당당히 자신의 무늬를 내보였다. 그런 태도가 더없이 매력적이었다. 자신의 종을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는 여유로움. 내가 첫사랑에 빠진 이유였다.
“연애는?”
“6개월 정도 했어.”
“첫 경험도 그 사람이랑?”
“응.”
“왜 헤어졌어?”
나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얼마나 진실하게 털어놓아야 적당할까. 은겸은 어디까지 알고 싶어서 묻는 것일까. 감이 잡히지 않았다. 내 선택은 적당히 두루뭉술한 답이었다.
“두근거리거나 설레는 마음이 사라져서.”
은겸에게는 밝히지 않았지만, 첫사랑과의 연애를 포기한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의 가치관 차이였다. 평생 함께 지낼 짝을 원했던 나와 달리, 그는 우리의 미래를 진지하게 그리지 않았다. 현재를 즐겁게 보내면 됐지, 왜 아직 다가오지도 않은 먼 훗날까지 고려해야 하냐면서.
나는 내 첫사랑의 가벼운 연애관이 서운했고, 내 첫사랑은 나의 진지한 연애관이 부담스러웠다. 서로의 생각이 그렇게 다른데 오래가기란 힘든 노릇이었다. 그렇게 이별을 결심하면서 한 가지를 깨달았다. 누군가를 오래도록 사랑하려면 상대의 화려한 면만 보고 좋아하면 안 된다는 걸.
“처음처럼 좋아하지 않는데 계속 사귀는 건 실례니까. 고등학교 졸업하면서 헤어지자고 했어.”
“뺨 맞았지?”
“맞기는 했는데. 그때 말고 나중에.”
“나중에 왜?”
“헤어지고 난 뒤에 걔가 많이 힘들어했어. 다시 사귀자고 했더니 자길 무시하냐고 주먹을 날렸고.”
“잔인하시네요, 김원재 씨. 이별을 통보해 놓고는 다시 사귀자고 했다니.”
장난스럽게 말한 은겸이 내 가슴팍에 손을 얹었다. 부드럽게 주무르는 손길을 무시하며 나는 해명했다.
“그래도 한때 좋아했던 사람인데. 힘들어하는 거 보고 싶지 않았어.”
“그게 잔인한 거야. 헤어졌으면 깨끗하게 끝내야지, 어영부영 옆에 남으려고 욕심내면 상대만 더 상처받아.”
“그런가.”
“그런 거야.”
가슴팍이 간질간질했다. 은겸이 하얀 무늬의 테두리를 따라 손가락을 움직이고 있었다.
“네가 먼저 헤어지자고 한 이상, 상대한테 좋은 사람으로 남을 수는 없어.”
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래, 그럴지도 몰랐다. 내 입장에서만 생각했으니 더 상처를 주었겠지. 이별을 선언한 순간부터 나는 더 이상 상대에게 위로를 건넬 수 없는 사람이었을 텐데. 끝까지 다정하고 싶었던 내 욕심이었다.
“괜찮아. 첫사랑은 다들 어설프니까. 사소한 일로 상처받고, 나도 모르게 상처 주고.”
가볍게 덧붙인 은겸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정운이라는 사람은?”
첫사랑을 추억하느라 아련해졌던 기분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첫 연애의 교훈에도 불구하고 나는 정운이에게 첫눈에 반했다. 두 번 다시 눈부신 이들에게 이끌리지 말자고, 그런 사람들과 나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홀로 술을 마시며 결심하게 될 줄 알면서도. 빛을 향해 뛰어드는 날벌레처럼 정운이의 주위를 맴돌았다. 그때의 일을 떠올리면 모든 게 다 바보 같았다.
급변한 내 분위기를 보며 은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말하기 어려워?”
“…….”
“아직도 그 정도로 좋아하는구나.”
그건 아니었다. 정운이에 대한 미련은 버리기로 결심했고, 이제는 어느 정도 상처도 아물었다. 그렇게 오래 좋아했으면서, 나조차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감정이 정리되었다. 은겸과 얽힌 이후 정운이를 떠올릴 정신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만일 그날 밤 술집에서 은겸과 만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아직도 정운이와의 일을 곱씹으며 후회할지도 모른다. 좋든 싫든 은겸에게 휩쓸린 것이 정운이를 잊는 데 도움이 된 점은 부인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래도 가벼운 마음으로 정운이를 추억하는 건 아직 무리였다.
“얘기하기 싫으면 됐어.”
내 정수리를 쓰다듬은 은겸이 턱 밑에서 팔을 빼냈다. 나는 마른침을 삼켰다. 이제는 내 차례였다. 은겸이 내 연애담을 물었으니, 나도 은겸에게 전 부인이 어떤 사람이었는지, 왜 이혼했는지 물어도 될 것 같았다. 부담스럽거나 밝히기 힘든 이야기라면 내가 정운이 얘기를 피했듯 은겸도 알아서 입을 다물 터였다.
“그럼…….”
“미안한데, 담배 한 대만 피우고 들어도 될까.”
“아, 응.”
“고마워.”
짧게 답한 은겸이 몸을 일으켰다. 전신을 감싸고 있었던 체온이 사라지자 허전했다. 나는 이불을 끌어 올렸다. 바지를 주워 입은 은겸이 방 밖으로 나갔다.
일부러 허락을 구하기에 옆에서 피우려는 줄 알았는데, 은겸은 방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한참 그를 기다리다가 나는 침대에서 내려섰다. 돌아오기를 계속 기다리느니, 그냥 담배를 피우는 은겸 옆에서 대화를 잇는 편이 차라리 빠를 듯했다.
거실로 나서자 은겸의 모습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은겸은 베란다에 서 있었다. 침실에서 나간 모습 그대로 바지만 입은 채였다. 9월 초라도 밤공기는 제법 서늘할 텐데. 거실을 등진 그의 뒷모습이 휑해 보였다.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마침 소파 위에 담요가 놓여 있었다.
베란다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섰다. 나를 돌아본 은겸이 눈웃음을 쳤다. 그의 손가락 사이에 위태롭게 놓인 담배꽁초가 길었다. 하나를 다 피우고 새로운 개비를 꺼낸 듯했다.
“감기 걸려.”
나는 은겸의 어깨에 담요를 걸쳐 주었다. 은겸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너는.”
“나는 됐으니까 혼자 덮어.”
“고맙다.”
짧은 감사 인사 후, 은겸은 다시 베란다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평소라면 더 요란하게 기쁨을 과장했을 텐데 무슨 일일까. 포옹 정도는 할 줄 알고 대비하고 있었건만. 어쩐지 무안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은겸의 옆에 가서 섰다.
은겸이 보는 것은 밤이 내려앉은 바깥 풍경이었다. 방충망 구멍 모양으로 조각난 세상은 흐릿하고 어두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바깥 구경에 흥미를 잃었다. 침묵을 깨고 말을 걸 분위기는 분명 아닌데, 은겸을 내버려 두고 들어가기도 뭐했다.
할 일이 없으니 머릿속에 잡생각만 뭉클뭉클 솟았다. 수인용 담배가 아무리 순해도 후각이 예민한 종이면 옆집 베란다에서 피우는 냄새를 맡을 수 있다. 윗집이나 옆집에서 담배 냄새 난다고 항의하지 않을까. 집주인도 아니면서 쓸데없는 걱정을 하다가 은겸의 집이 꼭대기 층이고, 한 층에 두 집밖에 없는 구조라는 것을 떠올렸을 때였다.
은겸이 불쑥 말을 꺼냈다.
“내 동생 말이야. 초식종이랑 사귀거든.”
동생이라면, 촉진제를 대리 수령해 달라고 졸랐다는 그 사람 이야기 같았다. 입에 담배를 문 은겸이 불분명한 발음으로 말을 이었다.
“걔네 집에 가서 평생 풀만 먹어도 좋다고 선언하고 결혼 약속 받아 냈다더라.”
육식종이 풀만 먹겠다는 선언이라니. 연인을 위해 굶어죽겠다는 말이나 다름없었다. 속으로 감탄하며 난간에 손을 얹었다. 만약 정운이가 나를 받아 줬다면 나도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나 자신을 버리면서까지 상대에게 모든 것을 맞추는 연애라. 솔직히 자신이 없었다.
은겸이 흐릿한 연기를 뱉었다.
“멋있어 보일지도 모르지만 사실 그건 좋은 게 아니야.”
말하는 와중에도 그의 시선은 창밖 먼 곳에 고정되어 있었다. 무언가를 찾는 사람처럼 가늘게 눈을 뜨며 은겸이 중얼거렸다.
“한쪽이 일방적으로 희생하는 관계는 건강하지 않으니까. 절대 오래갈 수 없어.”
조용히 들으려 했는데, 불쑥 질문이 튀어나왔다.
“그건 네 경험담이야?”
“글쎄.”
애매하게 답한 은겸이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껐다. 나는 재떨이에 담긴 꽁초 두 개를 묵묵히 내려다보았다. 내가 오지 않았다면 거기에 세 번째 꽁초도 담겼을 거라는 생각을 지우기 어려웠다.
은겸이 베란다의 창을 닫았다.
“들어가자. 춥겠다.”
“별로 안 추워.”
“그래?”
“원래 발정기 때는 체온이 올라서 평소보다 더위를 많이 타.”
은겸에게 담요를 양보한 것도 고상한 배려심 같은 게 아니었다. 그냥 나는 별로 안 추우니까 그랬던 것뿐.
은겸의 노란 눈이 별처럼 빛났다. 주머니에 재떨이를 집어넣곤 그가 내 손을 덥석 붙잡았다.
“정말이네. 따듯하다.”
수없이 내 몸에 손을 댄 사람답지 않은 새삼스러운 반응이었다. 나는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싱긋 웃은 은겸이 허리를 굽혔다.
“아까는 잘난 척해서 미안. 네게 사랑받은 사람들은 행복했을 거야.”
나직이 중얼거린 그가 정중한 인사를 건네듯 내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부드러운 입술이 살갗 위를 스쳤다.
“그 사람들이 부럽다.”
들릴 듯 말 듯한 작은 목소리가 손등을 타고 전해졌다. 말을 마친 은겸은 혀를 내밀어 천천히 손등을 핥아 올렸다. 그의 입술이, 혀가, 숨결이 간지러웠다. 나는 숨을 죽이고 은겸을 내려다보았다. 내가 건넨 담요를 어깨에 두른 사자가 정성스럽게 내 손등을 애무하고 있었다.
은겸은 한참 만에 허리를 바로 세웠다.
“담배 피운 직후라서 입에는 못 하겠다.”
장난스럽게 덧붙인 그가 거실 쪽을 가리켰다.
“이제 들어가자.”
“먼저 가.”
“원재 너도 담배 피우게?”
“아니. 조금만 있다가 갈게.”
나는 은겸의 손에서 내 손을 빼냈다. 고개를 갸웃거린 은겸은 별말 없이 혼자 거실로 들어갔다. 은겸의 긴 꼬리가 침실 문틈으로 사라지는 것까지 확인하고 나는 뒤돌아섰다. 그 짧은 사이에 해가 떴을 리도 없건만, 창밖의 색이 아까보다 흐릿했다. 창문에 손을 짚고 나는 눈을 감았다.
조금 전, 은겸과의 문답에서 일부러 빼놓은 사실이 하나 더 있었다.
내 첫사랑과 정운이는 공통점을 하나 지녔다. 그 둘은 준수한 외모에 자존감과 자기애가 넘치는 남자였다. 언제나 주변 사람들의 호의 속에서 살았기에, 두 사람에게 있어 누군가에게 사랑받는 건 그리 특별한 일이 아니었다. 내가 그들에게 품은 감정도 마찬가지였다. 내 첫사랑과 정운이는, 내가 자신을 사랑한다는 사실에 특별한 감흥을 느끼지 못했다.
겉보기에는 은겸도 그들과 다르지 않았다. 화려한 외모며 언제나 자신감 넘치고 여유로운 성격까지 두 사람을 빼닮았다. 그래서 나는 그에게 호감을 느끼지 않으려 했다. 은겸은 내 이상형이 아니었다. 오래 이어지지 못할 관계는 내게 있어 아무런 의미가 없으니까.
그런데 누구보다도 빛나는 사람이, 내가 어떤 사랑을 하는지 궁금하다고 했다. 내 지난 사랑들을 부럽다고 했다. 마치 내게 사랑받고 싶어 안달 난 사람처럼. 내 사랑을 애타게 갈구하는 사람처럼.
몸에 우주를 품었다는 칭찬만큼이나 얼떨떨했다.
나는 가만히 주먹을 쥐었다가 폈다. 은겸의 입술이 닿았던 곳이 뜨거웠다. 손등에서 시작된 열이 손가락 끝까지 퍼진 것 같았다.
‘너는 내게 사랑받으면 행복해할까?’
침실로 돌아가 건넬 질문을 고르기가 어려웠다. 어렵게 준비했던 문장을 누르고 새로운 질문이 떠올랐다. 차마 입 밖에 내기 어려운 궁금증이 빙글빙글 맴돌자 더 참기 어려웠다. 아무것도 묻지 않기로 다짐하고 나는 몸을 돌렸다.
손이 식기 전에 은겸에게 돌아가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