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곰은 밤을 가른다
이번 여름은 유난히 더웠다.
성인이 된 이후로 여름이 덥지 않은 적은 없었다. 발정기와 겹치기 때문이었다. 그래도 올해만큼은 달랐다. 자주 목이 말랐고, 수시로 땀이 흘렀다. 밤에도 가시지 않는 열기 탓에 잠을 설치기 일쑤였다. 에어컨의 온도를 내리고, 하루에 몇 차례씩 샤워를 해도 소용없었다. 나를 괴롭히는 열은 바깥이 아니라 몸 안쪽에서 피어올랐다.
당혹스러운 일도 불시에 시작되었다.
“……하아.”
열기를 재우고 간신히 잠들면 당황스러운 꿈이 나를 찾아왔다. 꿈속에서 나는 누군가의 품에 안겨 있었다. 달콤하면서도 위압적인 향, 뜨거운 체온, 몸을 누르는 묵직함. 모든 것이 익숙한 듯 낯설었다. 꿈의 내용은 시간이 지날수록 농밀하고 대담해졌다. 마침내 내가 기시감의 정체를 알아채고 상대를 밀쳐 내면 퍼뜩 의식이 돌아왔다.
꿈을 벗어나도 끈적거리는 욕망에 사로잡힌 몸은 그대로였다. 나는 아침마다 진저리를 치며 이불을 걷어찼다. 수시로 고개를 드는 욕구는 손으로 진정시키지 않으면 출근이 어려울 정도였다. 채 하루도 입지 못한 젖은 속옷을 벗을 때마다 자괴감에 가까운 감정이 일었다.
혈기왕성했던 첫 발정기 때도 이런 적이 없었다.
다른 건 몰라도 성욕에 관한 한, 나는 담백한 편이었다. 평소에는 물론이고 발정기에도 일상생활이 불가능할 정도로 힘들었던 적이 없었다. 몸에 문제가 생겼나 싶어 병원도 찾아가 보았다. 하지만 1년 전 정기 검진 때보다 건강이 더 좋아졌다는 검사 결과로 만족해야만 했다.
이유가 무엇이건 달뜬 상태를 그대로 내버려 둘 수 없었다. 몸이 힘든 건 물론이고, 예민해진 신경이 작은 일에도 곤두서서 버티기 어려웠다.
업무가 본격적으로 바빠지기 직전인 8월 초. 나는 욕먹을 각오를 하고 여름휴가를 신청했다.
‘휴가’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과장님은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무슨 놈의 휴가야, 뜬금없이.”
다른 회사와는 달리 우리 팀은 여름휴가를 가지 않았다. 7월 말에 치러진 시험 문항을 분석해서 새로운 출제 경향에 맞춘 콘텐츠를 기획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 대신 추석이 지난 이후에 쉬는 게 불문율이었다.
돌려 말하다 오해를 사느니 정공법으로 나가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나는 과장님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몸이 안 좋습니다.”
“어디가 어떻게 안 좋은데.”
“발정이 안 가라앉아요.”
“뭐?”
“며칠 쉬게 해 주시면 어떻게든 처리하고 오겠습니다.”
과장님은 사료를 받아먹는 붕어처럼 입을 뻐끔거렸다. 그날 오후, 내 휴가신청서는 아무 탈 없이 승인되었다.
일주일간 이어진 휴가 동안 나는 집에서 나오지 않았다. 내가 택한 처리 방법은 단순했다. 매일매일 성욕을 해소하며 몸을 혹사시켰고, 그러다 지치면 곧바로 뻗어서 잠들었다. 누군가를 만날 필요는 없었다. 혼자서도 충분했다. 스무 살부터 지금까지 쭉 그래 왔듯이.
터질 듯 들끓던 하반신은 휴가가 끝날 무렵 거짓말처럼 식었다. 9월 초까지 이어지던 발정기가 평소보다 몇 주 이르게 끝난 것 같았다. 열기가 사라지자 몸도 가벼워졌다. 나는 산뜻한 기분으로 업무에 복귀했다.
일주일의 뜨거운 휴가는 산더미 같은 일로 돌아왔다. 점심을 먹으러 나갈 시간도 모자랐다. 야근은 당연한 일이었다. 나는 매일 밤 텅텅 빈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씻고 바로 잠들었다가 눈을 뜨면 또 아침이 와 있었다.
휴가에서 복귀한 뒤 처음으로 맞는 토요일도 출근을 피할 수 없었다. 함께 주말 근무를 택한 팀원들이 돌아간 뒤에도 나는 회사에 남았다. 새 교재와 관련해서 급히 검토할 사항이 있다는 강사의 연락을 기다리기 위해서였다.
강사는 오후 늦게서야 연락을 해 왔다. 그가 요청한 자료를 정리해 메일로 보낸 뒤, 시계를 확인했다. 6시 반. 퇴근하기에는 어정쩡한 시각이었다.
‘저녁이나 먹고 올까.’
시간은 많았다. 강사의 피드백을 받으려면 다시 한참을 기다려야 했다. 주말 출근인데 이 정도 여유를 부려도 되겠지. 크게 기지개를 켜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가 업무에 집중한 사이 다른 쪽에서도 연락이 와 있었다. 개인용 스마트폰을 켜자 수신 알림이 여러 개 보였다. 식당을 향해 걸으면서 채팅창을 확인했다. 광고 몇 개를 제외하곤 전부 예주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공지☆
8월 마지막 주 토요일에 등산 동아리 모임이 있습니다. 참석 여부를 톡 게시판에 투표해 주세요.
등산 동아리는 대학 시절, 산을 좋아하는 늑대 예주가 만든 곳이었다. 요즘 세상에 등산이라니 다들 꺼릴 법도 한데 전혀 그렇지 않았다. 내가 대학에 다닐 때만 해도 동아리실은 항상 사람들로 북적댔다. 하지만 그것도 한때였다. 부장인 예주가 졸업한 뒤부터 동아리는 신입 부원 확보에 어려움을 겪었고, 결국 몇 년 지나지 않아 폐부되었다.
대학 내의 조직은 없어졌어도 구성원들의 친목은 유지되었다. 초대 부장인 예주를 중심으로 한 달에 한 번씩 등산회를 가장한 모임이 꾸준히 진행되었다. 오늘 받은 메시지도 바로 그 건이었다.
그나저나 이번에 간다는 산 이름이 굉장히 익숙했다.
“또 편월산이냐.”
편월산은 산세가 험해 등산에 적합하지 않은 곳이었다. 그럼에도 대학 때부터 등산 동아리는 그곳을 자주 찾았다. 꼭 누구 한 사람은 손가락을 삐거나 발목을 접질리곤 하는데도.
편월산이 모임 장소로 물망에 오르는 이유는 간단했다. 편월산 산자락에는 너구리 수인 집성촌이 있었다. 그리고 동아리에는 일 벌이기 좋아하는 목소리 큰 너구리가 한 명 있었다.
위치 안내 밑으로 일정 안내가 이어졌다. 오전에는 등산, 오후에는 전체 식사 예정. 적혀 있지는 않아도 마지막 일정은 술판일 것이다. 나는 무심히 화면을 훑었다. 어차피 험한 산이든 평탄한 산이든 내게는 큰 차이가 없었다. 오르락내리락하기 귀찮은 건 매한가지였다. 등산 뒤에 이어질 일정이 중요할 뿐이지.
“…….”
그랬다. 등산은 싫었지만, 지난 초여름까지 나는 시간이 될 때마다 꼬박꼬박 모임에 나갔다. 혹시라도 정운이를 만날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버리지 못해서였다.
모든 게 어리석은 짓이었다.
톡 게시판의 참석 여부 투표에는 벌써 여러 명이 표를 던져 놓았다. 한참 망설이다가 투표 참여자 명단을 눌렀다. 정운이의 이름은 밑에서 다섯 번째에 있었다. 정운이가 어디에 투표했을지 뻔했다.
나는 습관처럼 정운이의 이름 위에 손가락을 얹었다. 나정운. 항상 나를 설레게 했던 세 글자. 정운이의 이름을 쓰다듬기 위해 움직인 손톱 끝에 다른 이름이 닿았다. 주인호. 정운이가 6년 넘게 교제 중인 호랑이의 이름이었다.
아무리 미련이 남아도 이래서는 안 되었다.
‘이제 다시는 만날 수 없겠지.’
불참 버튼을 누르고 스마트폰의 화면을 곧장 껐다. 식당으로 향하는 내내 입맛이 썼다.
***
처음에는 잘못 본 줄 알았다.
식당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부터 그는 시선을 사로잡았다. 정가운데 테이블을 차지하고 앉아서는 팔을 번쩍 들고 있었으니까. 누굴 저렇게 열렬히 부르는 걸까. 직원들이 많이 바쁜가. 별생각 없이 시선을 돌려 빈자리를 찾을 때였다.
“김원재 씨. 여기.”
갑자기 튀어나온 내 이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남자가 나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거의 한 달 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반갑지 않은 재회를 피해 모르는 척 구석 자리로 가서 앉았다. 그러자 남자가 가방과 컵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설마 하는 마음에 나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태연히 걸어온 남자가 내 앞자리에 컵을 내려놓았다.
“같이 먹죠.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데.”
“혼자 먹는 게 편한데요.”
“사양하지 말고. 아, 저 여기로 옮깁니다.”
마침 다가온 직원에게 말하곤, 남자는 빈 의자에 걸터앉았다. 내가 직원에게 새우 샐러드를 주문하자 자신도 같은 것을 달라며 싱글거리기까지 했다. 뻔뻔스러운 태도에 한숨이 나왔다. 조용한 저녁 식사는 그른 듯했다.
샐러드가 나올 때까지 남자는 나를 그냥 놓아두지 않았다.
“그동안 잘 지냈어요?”
“네.”
짧게 대답하자마자 남자가 눈웃음을 쳤다.
“아, 잘 지냈구나. 내 연락은 다 씹으면서.”
“언제 연락했는데요?”
찔리는 구석이 있었지만 모르는 척 물었다. 화난 기색을 보이지 않고 남자가 친절히 설명했다.
“전화도 걸었고, 메시지도 보냈어요.”
“모르는 번호로 오는 연락은 다 차단해서요.”
“거래처일 수도 있는데 그래도 됩니까?”
“거래처 번호는 다 저장되어 있거든요.”
“그리고 내 번호가 왜 모르는 번호예요. 전에 통화까지 해 놓고는.”
“번호 저장 안 했으니까요.”
작은 소리로 대답하는데도 주위 사람들이 힐끔힐끔 우리 쪽을 곁눈질했다. 샐러드 가게에 마주 앉은 곰과 사자는 아무래도 눈에 띄게 마련이었다. 빨리 이 사람이 가면 좋을 텐데. 속으로 되뇌며 나는 컵을 들어 물을 마셨다.
타닥,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리드미컬하게 때린 남자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때 준 명함은요. 버렸어요?”
“아뇨.”
“그럼요?”
이번에는 화를 내지 않을까. 걱정하면서도 나는 솔직히 털어놓았다.
“태웠어요.”
내 걱정은 쓸데없는 기우였다. 내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남자는 큰소리로 웃어 버렸다. 우리를 훑던 시선들도 덩달아 또렷해졌다. 나는 미간을 찡그렸다. 이게 웃을 일인가. 자기 명함을 태워 버렸다는데.
정작 당사자인 남자는 이 상황이 재미있는 듯했다. 되묻는 목소리에 유쾌한 감정이 실려 있었다.
“그 정도로 내가 싫었어요?”
“아뇨.”
“그럼 왜요?”
“개인 정보가 적혀 있는데 아무렇게나 버릴 수 없어서요.”
“참 성실한 사람이네요, 김원재 씨.”
키득키득 웃으며 남자는 품에 손을 넣었다. 이전에 본 기억이 있는 검은 지갑이 그의 손에 딸려 나왔다. 설마 명함을 또 주겠다는 건가. 나는 서둘러 거절을 표했다.
“필요 없…….”
“이건 못 태우겠죠.”
남자가 지갑에서 꺼낸 것은 플라스틱 재질의 명함이었다. 내가 받지 않자 남자는 테이블 위에 명함을 놓았다. 단단한 모서리가 탁 소리를 내며 테이블 표면을 때렸다.
나는 한숨을 쉬었다.
“평소에 명함 태우는 사람을 많이 만났나 보네요.”
“설마. 찢은 사람은 있어도 태운 사람은 처음이에요.”
“웃을 일이 아닌 것 같은데요.”
“멘탈이 튼튼한 거라고 해 줄래요?”
의미 없는 대화는 금방 끊겼다. 직원이 돌아와 푸짐하게 채소가 담긴 샐러드 볼을 내밀었다. 그릇을 받아 들며 나는 입맛을 다셨다. 큼직한 새우가 푸성귀 사이에 드문드문 보였다.
나와 똑같은 메뉴를 받아 든 남자는 이번에도 샐러드에 큰 흥미가 없어 보였다. 통통한 새우의 등을 건드리던 그는 얼마 못 가 포크를 내려놓았다. 그러고는 테이블에 턱을 괴었다.
나를 관찰하는 남자의 노란 눈이 반짝거렸다.
“오늘은 궁금한 거 없어요?”
“없는데요.”
“나는 많은데.”
어쩌라고. 한 마디가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입 안에 양상추가 가득 들어 있지 않았다면 내뱉었을지도 몰랐다.
체할 것 같은 속을 달래며 우물우물 샐러드를 씹었다. 남자가 무슨 짓을 하건 나는 저녁을 먹고 회사로 돌아가야 했다. 내가 상대해 주지 않자 남자도 입을 다물었다. 테이블 위에 방치된 명함을 톡톡 두드리며 그는 내 식사를 구경했다. 아무래도 밥을 먹을 생각이 전혀 없는 듯했다.
이러려면 뭐 하러 이걸 시킨 거지.
사실 남자가 샐러드 전문점에 온 것 자체가 이상했다. 남자는 육식종인 사자였고, 여기에는 남자가 배불리 먹을 만한 메뉴가 없었다. 먹지도 않을 음식을 시켜서 앞에 두고 고사를 지내는 게 취향이 아니라면.
나는 브로콜리를 포크로 찔렀다.
“굳이 궁금한 거 하나를 꼽자면.”
“뭔데요?”
“안 먹을 거면서 샐러드는 왜 시켰어요?”
푸릇푸릇한 브로콜리를 눈으로 좇으며 남자가 반대쪽 팔로 턱을 바꿔서 괴었다.
“김원재 씨랑 같이 밥 먹고 싶어서요.”
“……예?”
“이거 거의 손 안 댔는데. 먹을래요?”
태연히 말을 돌린 남자가 자신의 샐러드 볼을 가리켰다. 남자의 말대로 그릇 속의 상태는 처음 서빙되었을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얼떨떨하게 샐러드를 들여다보다가 나는 정신을 차렸다.
“나랑 밥을 왜 같이 먹고 싶은데요.”
“좋아서요.”
“나는 별로 안 좋은데요.”
“왤까.”
빙그레 웃은 남자가 샐러드 볼을 내 앞으로 밀었다.
“나는 생일 선물로 받고 싶을 정도인데.”
너무나도 화사한 그의 표정에 말문이 막혔다. 어처구니가 없었다.
어서 먹으라며 권하는 남자를 뿌리치지 못하고 나는 샐러드를 삼켰다. 남자가 양보한 몫까지 꾸역꾸역 다 먹고 나서야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남자는 내가 모르는 척 놓고 가려던 명함까지 챙겨서 건넸다. 하는 수 없이 명함을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단단한 재질이라 구겨지지도 않았다.
“오늘은 내가 살게요.”
카운터로 걸어가며 남자가 지갑을 꺼냈다. 나는 재빨리 그를 앞질렀다.
“아뇨. 각자 계산합시다.”
“오랜만에 만났는데 밥 정도는 사게 해 줘요.”
“당신이 왜 내 밥을 사는데요?”
“사고 싶으니까요.”
그 이상 언쟁을 벌이기 귀찮았다. 카운터 직원에게 묵례를 건네고 나는 먼저 식당을 나섰다.
떨떠름한 기분으로 문 앞에 섰다. 모르는 척 회사로 돌아가고픈 충동이 들었지만, 남자를 기다렸다. 그가 값을 치른 2인분의 샐러드는 실질적으로 나 혼자 다 먹어치웠다. 즐거운 자리는 아니었어도 저녁을 먹는 동안 심심하지 않았고. 최소한의 예를 차려야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남자는 한참이 지나도 나오지 않았다. 계산은 이미 다 끝났는데, 카운터의 직원과 대화를 나누는 듯했다. 무슨 소리가 오가는지 웃음소리가 바깥까지 들렸다. 희한하게도 기시감이 일었다. 이런 모습을 어디서 본 것일까.
답은 쉽게 나왔다. 오늘이 남자와의 세 번째 만남이니, 첫 번째 아니면 두 번째일 수밖에. 밥만 먹고 헤어졌던 두 번째 만남은 전체를 곱씹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다. 남은 것은 첫 만남이었다. 듬성듬성 남아 있는 장면을 하나하나 넘겨보자 퍼즐 조각처럼 들어맞는 부분이 있었다. 무언가 말하는 남자와, 그의 이야기를 들으며 웃던 바텐더.
기억은 거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지워졌던 대화의 뒷부분이 갑자기 되살아났다.
“아, 정말요?”
“애인이 좋아하는데 뭐든 해 줘야죠.”
“순정파시네요.”
남자는 그날 취하지 않았다. 바텐더와 떠들 때도 또렷한 발음으로 말을 건넸다. 비몽사몽 하던 내 귀에 날아와 박힐 만큼. 거리가 있었기에 모든 대화를 듣지 못했지만, 한마디는 분명히 들었다. 바텐더가 큰 웃음소리를 낸 직후에 목소리를 높여 대꾸하던 한마디.
‘애인이 있다고?’
내가 들었던 말의 의미를 파악하자마자 헛웃음이 터졌다. 무의식의 바닥에 가라앉은 기억을 들추지 않았다면 계속 잊고 있었을 사실이었다. 그럼 내게 추근댄다고 느낀 건 착각이었나. 의문과 거의 동시에 반박이 떠올랐다. 남자는 나와 처음 만난 날 섹스하자고 졸랐고, 결국 손장난까지 함께했다.
‘이게 진짜면 미친놈이잖아.’
불쾌한 결론에 이르렀을 때, 남자가 식당의 출입문을 열었다. 나는 한 걸음 물러서서 그를 피했다.
“잘 먹었어요?”
“…….”
“김원재 씨 잘 먹는 거 보니까 나도 배부르던데.”
실없는 소리를 하면서 남자가 내 쪽으로 다가섰다. 남자가 수작을 건다고 느낀 건 역시 착각이 아니었다. 나는 즉각 몸을 돌렸다.
“이제 헤어집시다.”
“아, 집까지 데려다줄게요. 차 가져왔어요.”
남자가 황급히 나를 따라왔다. 긴 꼬리가 어지럽게 흔들리며 균형을 잡았다. 남자를 떼어 놓기 위해 나는 걸음을 빨리했다.
“회사로 돌아가야 해서요.”
“그럼 회사로 데려다줄게요.”
“걸어가면 됩니다.”
“그래도.”
“차로 가는 게 시간 더 걸려요.”
그 이상 들러붙지 못하고 남자가 걸음을 멈추었다.
“알았어요. 잘 가요, 김원재 씨.”
나는 멈춰 서지 않았다. 남자의 목소리가 멀어졌다.
“만나서 기뻤어요. 오늘은 김원재 씨를 꼭 만나고 싶었거든요.”
또 이상한 소리.
“다음에 또 봐요.”
다음이 있을 리가. 혹시 남자가 따라올까 봐 등 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발을 옮겼다. 나를 쫓는 구두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밥 먹을 때는 그렇게 치근덕거리더니. 꽤 깔끔한 이별이었다.
회사 건물이 가까워졌을 무렵, 나는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냈다. 얇은 플라스틱에 박힌 회사 로고가 낯설었다. 남자의 이름은 그 아래에 직함과 함께 적혀 있었다.
대표 서은겸
“사장님이었네.”
어쩐지 행동거지 하나하나에서 여유가 넘친다 싶었다. 비슷한 나이 같은데 자기 회사를 지녔을 줄이야. 아직 대리 직함도 못 단 내 처지와 비교하자 씁쓸했다. 쓸데없이 노닥거리지 말고 자기 회사나 잘 챙기지. 남자에게 들리지도 않을 충고를 떠올리며 나는 무심코 명함을 뒤집었다.
명함의 뒤편에는 회사 주소가 적혀 있었다. 썩 중요한 정보는 아니기에 눈으로 대강 훑는데, 묘한 위화감이 일었다.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자세히 읽어 보니 남자의 회사는 여기서 차로 20분은 가야 도착하는 벤처 단지 내에 있었다.
‘이게 뭐가 이상하지.’
위화감의 정체는 금방 드러났다. 남자는 이전에 저녁을 같이 먹었던 날, 분명 그렇게 말했다. 자신의 회사에서 멀지 않은 샐러드 맛집을 알고 있다고. 그러니 금방 가겠다고.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차로 20분 거리가 그리 멀지 않다니. 더군다나 남자는 도보로 5분 거리인 나보다 먼저 식당에 도착했다.
‘그러고 보니 그때도 차 가져왔다고 하지 않았나?’
오늘도 남자는 차를 가져왔다고 말했다. 정말 가까운 곳이면 굳이 차를 몰고 올 필요가 없었을 텐데.
빌딩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이 텁텁했다.
회사 건물을 노려보다가 나는 뒤돌아섰다. 이대로 넘기기에는 느낌이 좋지 않았다. 주먹 쥔 손 안의 명함이 살로 파고들었지만 무시하고 다리를 놀렸다. 샐러드 전문점이 가까워졌을 때쯤 나는 거의 뛰고 있었다.
저녁을 먹는 내내 남자는 나와 우연히 마주친 사람처럼 굴었다. 말도 안 되는 짓이었다. 우연히 차로 20분 거리의 식당까지 저녁을 먹으러 와서, 우연히 저녁을 먹으러 온 나와 마주쳤을 턱이 없었다. 이 상황에서 떠올릴 수 있는 가정은 하나뿐인데, 내 추측을 뒷받침할 증거가 필요했다.
문을 열고 들어가자 카운터 직원이 다가와 나를 맞이했다.
“어서 오세요. 한 분이세요?”
빈자리를 안내하려는 직원을 만류하며 나는 말을 꺼냈다.
“그게 아니라, 아까 저랑 같이 있었던 사람 기억하십니까?”
“예?”
“남성 사자 수인이고 회사원인데…….”
직원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빈 테이블을 닦던 다른 직원이 나를 보더니 알은척을 했다.
“어머, 손님 뭐 놓고 가셨어요?”
아까 카운터에서 남자와 대화하던 직원이었다. 나는 질문의 방향을 그에게 돌렸다.
“저랑 같이 있던 사람 말입니다. 사자.”
“아, 그분요.”
“혹시 전에도 여기 오지 않았습니까?”
“네. 요새 계속 오셨는데요.”
“계속 왔었다고요?”
“한 보름쯤 됐나? 그때부터 저녁마다 매일 오셨죠.”
2주 전이면 내가 휴가를 갔을 때였다. 회사에 복귀한 뒤에도 나는 이곳에 저녁을 먹으러 오지 못했다. 계속 배달 음식을 시켜 먹었으니까.
“연어 샐러드를 시켜서 몇 시간이고 앉아 있다가, 음식은 입에도 안 대고 가더라고요. 사자라서 입에 안 맞나 했더니. 기다리는 분이 계시는 줄 모르고.”
직원은 웃으며 덧붙였다.
“앞으로는 미리 약속을 잡고 만나세요. 그 사자 손님 엄청 기뻐하시던데. 벌써 헤어지셨어요?”
머리가 띵해졌다. 직원들에게 적당히 감사 인사를 건네고 식당을 빠져나왔다. 설마 했었는데. 모든 게 확실해졌다.
남자는 나를 만나러 이곳에 온 거였다. 내가 오지 않은 보름 동안 매일.
“여기 와 본 적 있어요?”
“저녁 먹으러 종종 옵니다.”
한 달 전, 내가 무심코 흘린 말을 기억하고서.
거칠어지려는 호흡을 가다듬고 회사로 돌아갔다. 텅 빈 사무실로 들어가 내 자리에 앉자 어느 정도 머릿속이 차분해졌다. 내가 당장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도 정리가 되었다.
나는 책상 위에 남자의 명함을 올려놓았다. 그리고 업무용 스마트폰을 꺼냈다. 명함에 적힌 번호를 하나하나 훑다가 내던졌다. 직접 번호를 누르는 건 싫었다. 그러다 외우기라도 하면 기분이 더러울 것 같았다.
수신 목록에 뜬 남자의 번호를 찾는 건 어렵지 않았다. 저녁 무렵이면 하루에 한 번씩 전화가 왔으니까. 통화 버튼을 누르고 스마트폰을 얼굴에 가져다 댔다. 빠르게 뛰는 심장이 쿵쿵 소리를 내며 귀를 울렸다.
발신음이 몇 번 들리기도 전에 남자는 전화를 받았다.
─네, 서은겸입니다.
“사람 데리고 장난하면 재밌습니까?”
─김원재 씨?
다짜고짜 내뱉은 말에도 남자는 곧장 내가 누구인지 알아챘다. 하긴, 남자의 전화에는 내 번호가 저장되어 있을 테니 당연한 일인가. 한숨을 내뱉고 나는 앞머리를 흐트러뜨렸다.
“앞으로 회사 주변으로 찾아오지 마요. 내 연락처도 지우고.”
─갑자기 왜 그래요?
“나는 당신한테 관심 없습니다. 다시 만나고 싶지도 않고요.”
그래도 양심은 있었나 보다. 내 회사를 알면서도, 가끔 들른다고 했던 식당에서 죽치고 있었던 걸 보면. 그게 아니면, 진짜로 우연을 가장하고 싶었거나.
그렇게 수고로운 우연을 꾸며 낼 이유가 대체 무엇일까.
애인도 있다는 사람이, 고작 두 번 만난 상대에게 진심으로 반해서?
─김원재 씨.
그럴 리가 없다. 어떻게든 유혹해서 다시 침대로 끌어들이려고 하는 거겠지. 가볍디가벼운 사자의 눈에는 곰 정도야 쉬워 보일 테니까. 아니, 어쩌면 나를 자신의 애인 중 하나로 만들려고 시도하는 것일지 모르겠다. 사자들은 한꺼번에 여럿과 교제하니까. 한심함을 넘어서 경멸스러웠다.
발정기가 끝나서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남자에게 넘어가서 또 무슨 사고를 쳤을지 모를 일이었다.
“이 번호 차단할 테니 그렇게 아십시오.”
─김원재 씨.
“끊습니다.”
─잠깐만요, 김원재 씨.
남자는 집요하게 내 이름을 불렀다. 끊어 버리려고 귀에서 스마트폰을 떼어 냈을 때도, 남자의 목소리는 계속 울렸다. 김원재 씨. 김원재 씨, 잠깐만요. 듣고 있어요?
통화 종료 버튼 위에 손가락을 올렸다가, 주먹을 꽉 쥐었다. 나는 남자의 명함을 집어 책상 모서리를 두드렸다. 명함이 우그러질수록 인상도 찌푸려졌다.
순간의 충동으로 스마트폰을 집어 들지 말았어야 했다.
“말해요. 듣고 있으니까.”
남자가 어떤 종류의 유혹을 하건 딱 잘라 거절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남자는 뚱딴지같은 말을 던졌다.
─내 번호 차단할 거라고요?
“예.”
─그럼 지금까지는 차단 안 했단 소리네?
“아.”
무심결에 뱉은 한 음절을 도로 입 안에 주워 담고 싶었다. 기왕이면 그 전에 흘렸던 말까지도. 차단 운운한 건 명확한 말실수였다. 남자를 빨리 떼어 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미처 살피지 못한.
남자는 내 실수를 놓치지 않았다.
─차단도 안 했으면서 왜 내 연락 무시했어요?
“……그건 내 마음이죠. 지금 그게 중요합니까?”
─중요하죠. 오늘 만나기 전까지는 나를 거절할 생각이 100퍼센트가 아니었다는 뜻인데.
“…….”
─솔직히 말해 봐요. 언젠가 내 연락 받으려고 했죠?
나는 다시 입을 다물었다. 대답을 들어야겠다는 일념인지 남자도 침묵을 지켰다. 그대로 정적이 흘렀다. 마른 아랫입술을 적시며 나는 남자의 명함을 노려보았다.
솔직히 말하자면.
정말 솔직히 말하자면.
남자의 연락을 받을 생각은 없었다. 그에게 미안하기 때문이었다.
‘……내가 무슨 낯으로 그 사람을 만나.’
휴가 기간 내내, 나는 남자를 떠올리며 열기를 발산했다. 틈만 나면 남자와 몸을 겹쳤을 때를 떠올리며 손을 놀렸다. 나를 짓누르며 흔들리던 커다란 몸. 잡아먹을 듯 덮쳐오던 대형 맹수의 기세. 생전 처음 느낀 감각은 발정기의 열기와 뒤섞여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남자가 내 목과 가슴에 남긴 흔적은 서서히 흐릿해졌지만, 남자와의 일은 머릿속에서 점점 더 뚜렷해졌다.
여름휴가를 보낸 일주일간, 남자는 내 음란한 망상에 빠지지 않고 등장한 파트너였다.
남자를 가상의 침대 위로 초대한 이유는 하나였다. 아무리 몸이 달아도 정운이를 떠올릴 수 없었다. 이제 더는 떠올리고 싶지도 않았다. 정운이의 빈자리를 채울 대체재가 필요했다.
그래서 남자가 보내는 연락을 받을 수 없었다. 그를 떠올리며 들뜬 몸을 달래는 주제에 태연히 대화할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남자를 아예 차단하기도 힘들었다. 매일 날아오는 연락은 남자가 환상이 아니라는 증거였다. 현실에 존재하는, 잘 알지도 못하는 이와 몸을 섞는 상상. 그 배덕함이 주는 쾌감을 놓을 수 없었다.
발정기가 끝나서 다행이었다. 휴가 내내 망상 속에서 헐떡이며 달려들었던 남자와 아무렇지 않게 대화하고, 미련 없이 보낼 수 있었으니까.
그건 그거고, 현실은 현실이었다. 수없이 끌어안는 상상을 했지만 실제 그와 어떻게 해 보고픈 욕구는 일지 않았다. 남자가 원하는 가벼운 관계에 어울리고 싶지도 않았고. 몸 상태가 진정되었으니 더는 머릿속에서건 현실에서건 그와 관계를 맺을 이유가 없었다.
망상은 망상으로 끝나야 깔끔한 법이었다.
─김원재 씨.
“내 이름 그만 불러요.”
멍하니 있는 사이에도 남자는 나를 계속 불렀다. 남자에게 핀잔을 던지면서 나는 명함을 책상 위에 내려놓았다. 그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가위였다. 펜 통에 꽂힌 가위 두 개 중 연두색을 꺼내 들었다. 최근에 새로 산 가위라서 이쪽이 더 잘 들었다.
하필 플라스틱 명함이라 귀찮게 되었다. 이건 못 태우지 않겠냐며 싱글거리던 남자의 얼굴이 떠오르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웬만하면 참아 보겠는데 이건 좀.’
코가 예민한 수인들 중에서도 곰 수인은 특히 후각이 뛰어나다. 곰으로 태어난 나 또한 냄새를 잘 맡는 편이었다. 종이 재질의 명함을 태웠을 때도 환기를 시키느라 고생했는데, 그보다 훨씬 고약한 플라스틱 냄새가 내 집에 퍼지는 건 용납하기 힘들었다.
태우지 못한다면 잘게 조각내서 버리는 수밖에 없었다.
손톱 크기보다 작게 조각내면 어떻게든 되지 않을까. 누군가 심심풀이 삼아 맞춰 볼 엄두도 못 낼 정도로 잘게. 그래야지 내 죄책감도 깨끗하게 잘려 나갈 것만 같았다.
─나랑 사귈래요?
남자의 헛소리가 튀어나온 건 그때였다. 그의 명함을 총 몇 등분해야 적당할까 고민하면서 들을 만한 소리는 아니었다. 나는 즉각 답했다.
“미쳤어요?”
─그럼 섹스 파트너는 어때요?
“안 해요.”
만약을 위해 한마디 더 덧붙였다.
“당신 같은 스토커와는 친구도 하기 싫습니다.”
─스토커라니. 진짜 너무하네. 엄연한 구애 활동이었는데요? 김원재 씨는 나한테 관심 없어도 나는 김원재 씨한테 관심 있어요.
“그 구애가 실패했다고 지금 말하는 거 아닙니까.”
─잔인하기는.
중얼거린 남자가 또 다른 헛소리를 꺼냈다.
─그럼 술 한 잔만 같이 마셔 줘요.
“내가 왜요?”
─방금 김원재 씨한테 차여서 위로를 받아야 할 것 같거든요.
“사람 놀리지 말라고 했죠.”
─놀리는 거 아닌데.
더는 화를 낼 마음도 들지 않았다. 내가 먼저 끊으면 또 전화할 것 같으니, 알아서 떠들다 제풀에 지치기를 기다리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스마트폰을 내려놓고 가위의 손잡이를 손가락에 끼웠다.
손바닥 안에 들어오는 작은 명함이 오늘따라 커다랗게 느껴졌다. 가위의 날 끝으로 명함 위에 선을 그으며 견적을 뽑았다. 어떻게 가위질을 해야 효과적일까. 네모반듯한 것보다는 지그재그가 낫나.
─오늘 ……일……라서 그래요.
일단 크게 4등분을 한 뒤에 대각선으로 자르는 게 편하겠지.
─진짠데.
조그맣게 자른 플라스틱도 재활용 쓰레기로 넣어야 하나.
─김원재 씨.
아, 이름이나 연락처는 매직으로 덮어씌우는 게 안전할까. 그러려면 자르기 전에 미리 지워야…….
─김원재 씨.
“……제발 그만 좀 불러요.”
남자를 너무 과소평가한 것일까. 지쳐서 끊기는커녕, 남자는 줄기차게 떠들어 댔다. 웅얼거림 속에서도 내 이름만큼은 또렷하게 들렸다. 고민 끝에 나는 가위를 내려놓았다.
스마트폰을 귀에 대자마자 남자가 억울함을 호소했다.
─진짜라니까. 나 오늘 생일이에요.
이건 또 상상치 못한 개수작이었다.
─그래서 오늘은 꼭 만나고 싶었는데. 김원재 씨가 계속 내 연락을 안 받으니까 거기 가서 기다린 거예요. 한 번이라도 마주치지 않을까 싶어서.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시죠. 내가 그걸 어떻게 믿어요.”
─신분증 사진 보내 줄까요?
“…….”
─아, 명함에 핸드폰 번호하고 이메일 주소 있죠. 확인해 봐요. 끝자리가 내 생일이니까.
헛소리하지 말라는 대꾸를 준비하며 나는 명함으로 시선을 던졌다. 연락처와 이메일 주소의 끝부분은 정말로 똑같은 네 자리 숫자였다. 0821. 오늘 날짜의 축약형.
그러고 보니 헤어질 때 남자가 그렇게 말했었다. 오늘은 꼭 만나고 싶었다고. 오늘따라 유난히 기뻐하던 모습도, 나와의 저녁 식사를 생일 선물로 받고 싶다 운운하던 것도 뒤이어 떠올랐다.
‘미리 얘기를 하지.’
나는 뒤통수를 긁었다. 명함과 함께 씻어 내려 했던 죄책감이 더욱 크게 번졌다. 동시에 조금 전까지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짜증이 녹아내렸다.
생일이라고 미리 언질을 주었다면 처음부터 무뚝뚝하게 대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진심이든 아니든 축하한다는 말 정도는 건넬 수 있었다. 어찌 됐건 남자와 나는 두 번 밥을 같이 먹었고, 한 번 침대에서 몸을 겹친 사이니까. 생판 모르는 사람이라고 해도 좋은 일은 축하해 주는 게 사람의 도리 아니던가.
─혼자 마시다가 취하면 다른 곰 끌어안고 목 놓아 울지도 모르는데. ‘원재야, 섹스하자’ 하면서.
“……무슨 그런 끔찍한 소리를…….”
─그러니까 생일에 실연당한 불쌍한 사람 한 번만 위로해 주고 가요. 나도 더 큰 선물은 안 바라요.
설령 상대가 나를 유혹하는 바람둥이라 할지라도.
상상하기도 싫은 가정을 태연히 늘어놓곤 남자는 내 대답을 기다렸다. 나는 뻣뻣해진 목덜미를 주물렀다. 영 내키지 않았다. 또 어영부영 남자의 페이스에 휩쓸린 기분이었다. 그래도 생일이라는 사람에게 이 이상 냉정하게 굴 수 없었다.
저녁 먹을 때처럼 적당히 어울려 주다가 헤어지면 괜찮겠지.
“딱 한 잔만 마실 겁니다.”
─아.
만세라도 부르며 좋아할 줄 알았는데, 남자는 의외로 조용했다. 탄식 같은 감탄사 이후 길게 숨을 내쉬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계속 거절할까 봐 긴장했던 것일까. 괜스레 무안해져서 목소리를 낮추었다.
“10시쯤 퇴근합니다. 어디로 가면 됩니까.”
─글쎄요. 우리 처음 만났던 바?
“거기는 쪽팔려서 다시 못 갑니다. 다른 데로 가죠.”
─그럼 괜찮은 곳으로 찾아보고 연락할게요.
통화를 마친 뒤 나는 남자의 명함을 내려다보았다. 다시 만났을 때 남자가 이 명함의 생사를 묻지 않으리라는 법이 없었다. 한 번 태워 버린 전적이 있으니까. 일단 지금은 내버려 두는 게 나을 듯했다.
무사히 살아남은 명함을 손끝으로 두드렸다. 남자의 이름이 내 손톱 밑에서 톡톡 소리를 냈다.
‘이건 술을 마시고 나서 처리하자.’
나는 명함을 지갑에 끼워 넣었다.
***
정신을 차려 보니 또 그 침대 위에 누워 있었다. 낯선 천장과 낯선 향기, 커튼 사이로 새어 드는 아침 햇빛. 나를 내려다보는 남자의 얼굴과 그의 손에 들린 컵까지 예전 기억 그대로였다.
‘아, 출근.’
시계를 찾아 머리를 돌리자 관자놀이가 욱신욱신 쑤셨다. 나는 베개에 뒤통수를 묻으며 한숨을 쉬었다. 오늘이 일요일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난 뒤에도 두통은 가시지 않았다. 지끈거리는 머리를 누르며 남자를 쏘아보았다.
남자가 한 손을 들어 올려 결백을 나타냈다.
“손 안 댔어요.”
“…….”
“오늘은 옷도 안 벗겼어요. 오해할 것 같아서.”
그의 말대로 나는 잔뜩 구겨진 셔츠와 바지를 입고 있었다. 흰 셔츠의 한복판에는 뭘 엎었는지 벌건 국물이 튀어 있었다. 내 몸에서 희미하게 풍기는 냄새가 매웠다. 찬찬히 살펴보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렴풋이 기억이 났다.
어젯밤, 남자와 함께 포장마차에 가서 닭 모래주머니 볶음과 두부 김치를 안주로 시켰다. 그리고 남자의 페이스에 맞춰서 술을 마시다 취했다.
발단은 애인이 없냐는 질문에 펄쩍 뛰며 부인한 남자의 대답이었다.
“애인? 무슨 애인? 나 애인 없는데요? 애인이 있으면 내가 왜 김원재 씨한테 이러겠어요.”
“진짜로 애인 없어요? 거짓말 아니고? 애인 있는데 나한테 그런 거면 지금 당장 돌아갈 겁니다. 바람피우는 새끼랑은 상종 안 해.”
“없다니까요. 뭐야. 그것 때문에 갑자기 쌀쌀맞게 굴었던 거예요? 밥 잘 먹곤 뒤도 안 돌아보고 가길래 내가 뭐 잘못했나 했더니. 아, 나 그것도 꽤 상처였거든요.”
“그날 내가 분명히 들었는데. 애인 얘기하는 거.”
“언제요.”
“우리 처음 만난 날.”
“잘못 들은 거겠죠. 진짜 없어요. 진짜. 어떻게 하면 믿어 줄래요?”
“당신 같은 사람이 솔로일 리 없어. 이상해. 분명히 들었는데.”
“칭찬은 고마운데요, 김원재 씨. 나 정말로 애인 없어요. 애인 두고 원나잇 할 정도로 뻔뻔하지도 않고요.”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 아니었나.”
“그러니까……. 제발 믿어 줄래요? 나 그런 사람 아니에요.”
“내가 당신을 어떻게 믿어. 진짜 애인 없는 거 맞습니까? 아니면 그 사람한테 죄짓는 거예요.”
“미치겠다. 취하면 똑같은 소리 반복하는 게 김원재 씨 주사였구나. 진짜 귀여워 죽겠네.”
절대 아니라며 고개를 흔드는 남자를 믿기 어려웠다. 한 잔만 마시려던 계획을 잊어버리고 나는 홀짝홀짝 잔을 비우며 남자를 추궁했다. 그러다 테이블 위에 쓰러져 잠들었다. 내 옷에 남은 것은 그때 깔아뭉갠 안주의 잔해였다.
술자리가 끝날 즈음에는 의식이 흐릿했지만 남자의 대답만큼은 선명히 기억에 남았다. 남자는 처음부터 일관되게 애인이 없다고, 내가 잘못 들은 거라고 해명했다.
‘이상한데…….’
아무래도 의심스러웠지만 본인이 극구 부인하니 더 물어볼 수 없었다. 나는 몸을 일으켜 침대 헤드에 기대어 앉았다. 컵을 건넨 남자가 나를 위아래로 훑었다.
“숙취는 어때요?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간이 튼튼한가 보네.”
컵에는 전에 마신 꿀물이 들어 있었다. 냄새가 거의 없는 데다, 너무 차갑지 않아 좋았다. 달콤한 맛이 입 안에 감돌자 두통도 가라앉는 느낌이었다. 나는 입맛을 다시며 꿀꺽꿀꺽 컵을 비웠다.
빈 컵을 받아 든 남자가 한숨을 쉬었다.
“그래서. 내 침대에서 또 자니까 좋았어요?”
“…….”
“그러니까 천천히 마시라고 했잖아요. 나 위로하러 와서 본인이 먼저 뻗는 게 어딨어요.”
민망함에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뜨거워진 볼을 손으로 가리며 나는 항변을 시도했다.
“……당신이 같이 마셔 달라며.”
물론 일이 이렇게 된 건 금방 마시고 돌아가려던 계획을 철회한 내 탓이 제일 컸지만, 나도 할 말이 있었다. 남자가 소주로 병나발을 불어도 멀쩡할 줄 어떻게 알았겠는가. 나는 그저 그가 채워 주는 잔을 한 잔 두 잔 비우다 쓰러졌을 뿐이다.
“차여서 우울한 거 위로해 달라며요. 그럼 당연히 당신이 마시는 속도에 맞춰야죠. 약속은 약속이잖습니까.”
“……김원재 씨 참 성실하다니까.”
침대 가장자리에 걸친 이불을 걷으며 남자가 중얼거렸다.
“그런데 말이죠. 매번 테이블을 엎어서 옆자리 사람들 술값이랑 세탁비를 물어 주게 시킬 바에야, 아예 안 마시는 쪽이 더 성실한 거 같은데요.”
“죄송합니다.”
나는 곧장 백기를 들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팔짱을 지른 남자가 눈을 내리떴다.
“이번에 돌봐 준 건 뭐로 갚을래요?”
“…….”
“부축해서 집까지 데려온 수고비는 청구하지 않을게요. 그 정도는 생일 턱이라고 생각해 두죠.”
끄응. 나는 이마를 짚었다.
“저녁…….”
“아, 밥은 안 돼요. 한 번 먹었으니까.”
“그럼 돈 내겠습니다.”
“사람의 호의를 돈으로 갚겠다고요?”
“그럼 뭘 원합니까.”
되물으면서도 큰 기대는 품지 않았다. 남자가 무엇을 원하는지 대강 감이 잡혔다. 내 예상대로 남자는 뻔뻔스레 답했다.
“나랑 자요.”
“왜 자꾸 그런 이야기가 나오는지 이해를 못 하겠는데요. 다른 종들처럼 발정기에 시달리는 것도 아니면서.”
“사자는 마음에 드는 상대를 발견하면 흥분하거든요.”
자신의 말을 뒷받침하기라도 하듯, 남자가 희미한 체향을 뿜었다.
“특히 상대가 발정기일 때에는.”
“…….”
“우리 전에 했을 때 상성도 제법 괜찮지 않았어요?”
남자가 아랫입술을 핥았다. 반짝거리는 붉은 입술이 야릇해 보였다. 억지로 눈길을 잡아떼며 나는 고개를 저었다.
“상성이고 뭐고, 그때는 어쩌다 보니까 한 겁니다. 나는 원래는 모르는 사람하고 그런 짓 안 합니다.”
“우리가 왜 모르는 사이예요. 서로 이름도 알고 회사도 아는데.”
“…….”
“밥도 같이 먹었고, 술도 마셨죠. 이 정도면 모르는 사이는 아니잖아요?”
말도 안 되는 걸로 우기기는. 남자의 억지를 반박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와 몸을 섞는 꿈을 꾸고, 오만가지 상상을 하며 열기를 식힌 일주일이 불현듯 떠올라서였다. 모르는 사람과는 안 한다고 젠체하는 내가 그랬다는 걸 알면 남자는 어떻게 생각할까. ‘아, 역시 점잖아 보이는 사람들이 혼자 있을 땐 본능에 더 솔직하다니까’ 하면서 놀리지 않을까.
남자의 공격은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김원재 씨 내 침대에서 두 번이나 잤어요.”
“……그거야 취해서.”
“그런 것 치고는 지난밤에는 꽤 익숙하게 침대 찾아 누워서 이불 덮던걸요. 덕분에 나는 거실 소파에서 잤고.”
“그건 미안하지만…….”
“그러니 지금부터 내 침대를 되찾아야겠어요. 같이 자요.”
달칵, 빈 컵을 내려놓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남자가 침대 위로 올라타자 묵직한 무게 때문에 매트리스가 흔들렸다.
내 앞으로 바짝 다가와 앉은 남자가 호박색 눈을 빛냈다.
“아직 발정기 안 끝났죠?”
대답하기도 전에 남자의 손이 가슴 위로 내려앉았다. 급하게 숨을 들이마시며 나는 남자에게 경고했다.
“만지지 마요.”
“걱정하지 말고 맡겨 줘요. 저번처럼 기분 좋게 해 줄게요.”
“분명히 말하는데, 나 이제 안 섭니다.”
“정말?”
“쓸데없는 짓입니다. 지난번에는 발정기라 내가 잠시 미쳤던 거지.”
남자의 눈에 이채가 돌았다. 단호한 부정이 먹혀들었는지 그는 고집을 피우지 않았다. 가슴팍에 얹힌 손을 밀어내자 순순히 치우기까지 했다. 상황이 정리되었나 싶어 내가 한숨 돌리려 했을 때였다.
다리 사이에 이상한 감촉이 느껴졌다. 언제 팔을 내렸는지 남자가 불쑥 내 중심을 쥔 것이었다. 나는 남자를 쏘아보았다.
“만지지 말라고 했죠.”
남자는 대답 없이 손아귀에 든 살덩이를 주물렀다. 물컹한 중심은 좀처럼 단단해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원하는 감촉이 아니었는지 남자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말이네. 그때는 깼을 때부터 서 있었는데.”
“알았으면 비켜요.”
날카롭게 대꾸하면서 나는 다시금 과거의 내 판단에 박수를 보냈다. 따로 휴가를 내서 욕구를 풀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발정기의 열기를 이기지 못하고 또 남자의 손길에 휩쓸려 잠자리를 가지게 되었을 게 뻔했다.
몸 상태도 확인했으니 더 들러붙을 핑계도 없을 터였다. 나는 그가 물러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남자는 포기하지 않았다. 내 다리 사이에서 손을 뗀 뒤에도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럼 내기할래요?”
“무슨 내기요.”
“김원재 씨가 나한테 반응하면 나랑 자는 거로.”
“안 서는데 왜 헛수고를 하려는 겁니까.”
“안 서야 하는데도 발기한다면, 그만큼 육체적인 상성이 좋다는 뜻이잖아요. 그런 상성이면 안 자는 게 더 이상하죠.”
대체 이건 어디서 나오는 자신감인지. 한숨을 내쉬려다가 참았다. 어제도 신세를 졌는데 이 정도는 양보해 주어야지. 아니, 간단한 내기로 빚을 정산할 수 있다면 환영할 일이었다. 부담스러운 저녁 식사나 사고에 가까운 잠자리보다 싸게 먹히는 꼴이니.
침대 헤드에 비스듬히 등을 기대고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진짜 애인 없죠?”
남자가 웃음을 터뜨렸다.
“한 번만 더 물으면 백 번 채우겠네. 없어요.”
“원나잇 상대는요. 사실 여러 명인 거 아닙니까?”
“김원재 씨 외에는 없어요.”
“그러죠, 그럼. 어디 마음대로 해 보든가.”
남자의 안색이 밝아졌다. 당장 달려들려는 그를 팔꿈치를 세워서 막았다.
“대신 시간제한 있습니다. 10분 안에 세워요. 나는 여기 오래 있을 생각 없습니다.”
“그런 걱정은 하지 마요. 어차피 오래 있게 될 거니까.”
내 팔을 끌어 내리며 남자가 속삭였다. 심호흡을 하고 나는 몸에서 힘을 뺐다. 남자의 손가락이 내 볼을 감쌌다.
남자는 고개를 모로 기울이곤 조심스럽게 입술을 겹쳤다. 말캉한 살이 비벼지자 저절로 입이 굳었다. 꾹 다문 입술을 열라고 재촉하듯이 남자가 혀를 내어 틈을 핥았다. 돌기가 도드라진 혓바닥이 입술을 스치는 감각은, 가슴을 빨렸을 때보다 훨씬 자극적이었다. 키스를 받아들이기는커녕 나는 더욱 굳어 버렸다.
코끝을 맞대고 살짝 문지른 남자가 속삭였다.
“입 벌려요.”
“…….”
“내가 세게 핥으면 살갗 벗겨져요. 그 전에 벌려요.”
낮게 깔린 목소리는 다정했지만 위압적이었다. 거부할 수 없는 모종의 압박감이 느껴졌다. 복잡한 심정 탓에 절로 주먹이 쥐어졌다. 두려움과 기대가 반반 섞인, 묘한 감정이 가슴을 부풀렸다. 나는 크게 숨을 들이마시고 입을 열었다.
남자는 안심시키듯 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곧장 안으로 들어온 혀가 입천장을 훑었다. 까끌거리는 돌기가 예민한 곳을 건드리자 등골이 오싹해졌다.
“읏.”
남자의 혀가 스칠 때마다 입 안의 점막이 따끔따끔했다. 아플 정도는 아니지만 무시하기도 어려울 정도로 선명한 감각이었다. 어쩔 줄 모르고 나는 시선을 마구 옮겼다. 그 순간 반쯤 눈을 감고 있던 남자가 눈꺼풀을 들어 올려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길고 촘촘한 속눈썹이 찌를 듯이 가까웠다. 투명한 홍채 속의 까만 동공과 마주했을 때, 나는 질끈 눈을 감고 말았다. 뭘 어떻게 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거의 10년 만에 하는 키스가 낯설었다.
풋, 웃음 친 남자의 숨결이 얼굴을 간지럽혔다. 귀엽네요, 김원재 씨. 남자의 중얼거림을 들은 것 같은 착각이 일었다. 달아오른 얼굴을 떼어 내고 싶어도 허락이 떨어지지 않았다. 뒤로 빠지려는 목을 단단히 붙든 남자는 더욱 깊숙이 내 안을 침범했다.
남자를 막으려 내밀었던 혀가 그의 것과 얽혔다. 내 혀를 빨아들인 남자가 목 안쪽을 그르릉 울렸다. 흥분한 맹수의 체취가 코를 덮었다.
부드러웠던 키스는 금세 질척해졌다. 젖은 살덩이를 겹치느라 숨 쉬는 것조차 잊었다. 헐떡이며 멀어지려 하면 남자가 내 목덜미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헤어 나올 수 없는 늪에 빠진 기분으로 나는 다시 입술을 벌렸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타액이 입가로 흐를 때마다 허리가 부르르 떨렸다.
남자의 허리를 끌어안으려던 찰나, 머리를 스치는 기시감 때문에 나는 머뭇거렸다. 첫 만남 당시 나는 남자에게 입술을 허락하지 않았다. 고로 이번이 남자와 나의 첫 키스였다. 그런데도 나는 이 뒤에 이어질 상황을 알고 있었다. 진한 키스를 나누고, 뜨거운 나신을 어루만지며 전희를 즐기다가, 정신없이 서로를 탐하며 몸을 섞는 흐름.
발정기의 꿈속에서 수도 없이 겪었던 남자와의 섹스였다.
꿈을 떠올리자 하반신이 묵직해졌다. 이성을 압도한 본능이 뒤이어질 애무를 기대하기 시작했다. 이건 내 망상이 아니라고, 현실에서 그럴 일은 없다고 나를 다그치려 해도 소용없었다. 한번 뻐근해진 중심은 부끄러움을 모르고 커졌다.
내 변화는 몸을 겹친 남자에게까지 전해졌다. 문득 입술을 떼어 낸 남자가 중얼거렸다.
“벌써 꼴렸어요? 키스밖에 안 했는데?”
민망해서 목덜미 부근까지 뜨끈뜨끈해졌다. 나는 손등으로 입가를 닦으며 그를 외면했다.
피식 웃은 남자가 다시 고개를 숙였다. 볼을 스친 입술이 이번에는 귓등에 내려앉았다. 나는 남자의 어깨를 붙들었다.
“비켜요.”
“미안하지만 아직 10분 안 됐어요.”
“…….”
“금방 식을지도 모르잖아요. 확실히 세워야죠, 김원재 씨가 발뺌 못 하게.”
“흐읏.”
장난치듯 귓불을 살짝 깨물곤 남자가 손을 아래로 내렸다. 가슴을 쥐고 어루만지는 손이 뜨거웠다. 아까부터 오싹오싹했던 등줄기가 이제는 전기가 통한 듯 찌릿찌릿했다. 밀치려고 얹었던 손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남자의 어깨를 움켜쥐며 나는 숨을 내뱉었다.
기대했던 애무는 이어지지 않았다. 조금 더 직접적인 쾌감이 오기를 원하는데도 남자의 큰 손은 감질나게 민감한 곳을 스칠 뿐이었다. 허벅지를 은근히 문지르다 빠져나가는 손길이 안타까웠다. 골반을 만지작거리던 남자가 가슴을 쥐었다. 자극이 사라지는 게 아쉬워 나도 모르게 허리를 앞으로 내밀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남자의 단단한 허벅다리에 중심을 비비고 있었다.
남자가 몸을 뒤로 뺐다.
“10분 됐어요.”
“…….”
“그만할까요?”
남자의 목소리에서 여유가 묻어났다. 이미 질문의 답을 아는 모양이었다. 보기 좋게 남자의 예상을 깨 버리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나는 슬그머니 남자의 어깨에서 손을 내렸다.
“……그럼 한 번만.”
“난 한 번만 한다는 소리는 안 했어요. 기분 좋게 해 주겠다고 했지.”
빙긋빙긋 웃으며 남자는 손바닥으로 내 가슴팍을 문질렀다. 도드라진 돌기의 끝이 셔츠에 쓸리자 안달이 났다. 하지만 남자는 금방 손을 떼어 냈다. 일부러 뜸 들이는 게 분명했다.
문제는, 이미 발정한 내게는 그런 남자의 태도가 효과적이라는 점이었다. 그것도 치명적으로.
남자에게서 흘러나온 달콤한 체향이 코를 덮어 머리가 어지러웠다. 나는 팔로 눈을 가렸다.
“그렇게 하든가요.”
“어떻게요?”
“……아까 당신이 말한 대로.”
“자세히 말을 해야 알죠.”
“기분 좋게 해 달라고요.”
말이 떨어지자마자 남자의 입술이 덮쳐들었다. 동시에 감질나게 굴었던 큰 손이 내 온몸을 어루만지며 애무했다. 내 허리에 팔을 두르고 자신 쪽으로 끌어당긴 남자가 천천히 나를 밀어 눕혔다. 푹신한 베개가 뒤통수에 닿자 비로소 모든 상황이 실감 났다. 나는 또 남자의 침대에 누워서, 남자와 몸을 섞으려 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싫지 않았다. 도리어 불안을 억누른 기대가 너무 부풀어 올라서 다리 사이가 아플 지경이었다. 셔츠의 단추가 하나씩 풀릴 때마다 숨이 가빠졌다.
“약속 지킬게요.”
“흣.”
“꼭 기분 좋게 해 줄 테니까. 나한테 맡겨요.”
마지막 단추가 잘 풀리지 않자, 남자는 뜯어내듯 셔츠 자락을 양옆으로 활짝 젖혔다. 마침내 드러낸 맨살을 내려다보는 그의 눈이 번뜩이고 있었다. 닥쳐올 쾌감을 기다리며 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
“여전히 크고 귀엽네.”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남자의 숨결이 가슴팍 위에 내려앉았다. 가볍게 살갗을 핥은 남자가 이를 세웠다. 잘근잘근 표식을 남기며 남자는 느릿느릿 이동했다. 만져 주길 바라듯 바짝 선 젖꼭지에 입술이 닿은 순간 신음이 저절로 터져 나왔다.
“흐으…….”
혀를 세워 톡톡 건드리던 남자가 유두를 빨아올렸다. 뾰족한 이로 장난스레 깨물다가 세게 빨아 대며 자극하니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머리카락을 움켜쥐고 헐떡이는 사이 남자가 허리로 손을 옮겼다.
남자는 충실히 약속을 지켰다. 그의 손이 맨살을 스치고 움켜쥐고 주무를 때마다 황홀경에 젖었다. 배꼽 근처를 매만지던 손이 바지 지퍼를 내렸을 무렵, 나는 남자보다 더 강한 체취를 내뿜고 있었다.
“벌써 젖었잖아.”
피식 웃은 남자가 얇은 천 위를 손가락으로 문질렀다. 흐으, 하고 앓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 성기의 끄트머리가 닿은 부분은 남자의 말대로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남자는 바지와 속옷을 한꺼번에 아래로 끌어 내렸다. 불룩한 성기에 걸려 잘 내려가지 않던 속옷은, 꼿꼿해진 중심이 튕기듯 바깥으로 빠져나오자 아래로 미끄러졌다. 첫 만남 때 겪었던 절정을 바라며 나는 허리를 들었다.
하의를 모두 벗겨 낸 남자가 상반신을 숙였다.
“긴장하지 마요.”
내 몸을 덮는 남자의 등 뒤로 전등이 눈부시게 빛났다. 남자의 그림자 아래에 깔리며 나는 눈을 감았다. 심장이 미친 듯이 빠르게 뛰었다.
남자의 손이 옆구리를 타고 뒤로 돌아가지 않았더라면, 달뜬 열기는 그대로 이어졌을 것이다.
엉덩이로 향하는 손은 은근했다. 불길한 예감에 몸이 굳었다. 남자는 멈추지 않았다. 볼기를 쥐더니 안쪽으로 슬금슬금 손을 옮겼다. 거침없는 행동이 의미하는 바는 명확했다. 남자는 삽입 섹스를 원하고 있었다.
뜨거웠던 몸이 한순간에 식었다. 당혹감을 넘어 배신감이 일었다. 발정기의 열기에 시달리던 때조차 남자가 내게 삽입하는 상상은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었다. 꿈속의 남자는 처음 만났던 날처럼 서로의 성기를 쥐고 문지르거나, 내 몸에 성기를 붙이고 비비던 게 전부였다.
나는 당장 남자를 밀쳤다.
“미쳤습니까?”
“왜요?”
되물으면서도 남자는 내 하반신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뻔뻔하기 짝이 없었다.
“뒤쪽 쓴 적 없다고 저번에 말했을 텐데요.”
“그러니까 써 봐야죠. 도전하는 사람이 아름답다는 말도 있잖아요.”
말이 통하지 않으니 더 대화할 이유도 없었다. 나는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그거 꺼내요.”
“마음만 먹으면 그렇게 과감하면서.”
“헛소리하지 말고 당신 거 꺼내라고.”
남자는 순순히 바지를 풀고 제 성기를 끄집어냈다. 비스듬히 늘어진 성기는 반쯤 발기했는데도 크기가 상당했다. 저게 온전히 섰을 때를 떠올리자 오한이 일었다. 턱짓으로 흉기를 가리키며 나는 말했다.
“그게 진짜 들어갈 거라고 생각합니까?”
남자가 눈웃음을 쳤다.
“잘 풀면 충분히 들어가요.”
“넣으면 내가 죽어요.”
“이거 넣는다고 안 죽어요.”
“죽는다고요.”
“괜찮으니까 끝까지 해요.”
남자를 설득하기 위해 빠르게 머리를 굴렸다. 마침 얼마 전에 뉴스에서 보았던 사고 소식이 떠올랐다. 체격 차이가 나는 커플─고래 수인과 족제비 수인이었나─이 섹스 도중 응급실에 실려 갔다는 황당한 에피소드.
진지하게 그 이야기를 전하자 남자가 배를 떨며 웃었다.
“그래서 지금 내가 고래만큼 크다는 얘기예요?”
“그 얘기가 아니라…….”
“그 커플 기사는 나도 봤어요. 체구 차이 때문에 밑에 있던 사람이 질식사할 뻔했던 거잖아요. 성기의 크기가 응급실행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건 아니었어요.”
“하지만…….”
“김원재 씨. 뒤쪽은 안 썼어도 섹스는 해 봤을 거 아니에요.”
“…….”
“첫 경험 때, ‘이게 저런 좁은 곳에 들어갈까?’ 하고 걱정했죠? 그랬는데 들어갔죠? 아무도 안 죽었고?”
말문이 막혔다. 남자의 말이 맞았다. 첫사랑과의 첫 번째 잠자리 때 나는 삽입을 포기하려 했다. 아무리 엉덩이를 벌리고 살펴보아도 넣어야 하는 틈이 너무 좁았다. 판판한 배 속에 내 성기가 들어갈 자리는 없을 것 같았다.
당황한 나와 달리 처음이 아니었던 상대가 괜찮다며 나를 이끌었다. 조심스럽게 밀어 넣은 성기에 뜨거운 점막이 감겼다. 표면을 압박하는 조임은 마냥 좋기만 한 게 아니었다. 나 때문에 상대가 무리하는 건 아닐지, 잘못하면 상처를 입지나 않을지 겁이 났다. 결국 나는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다가 사정했다. 쾌감보다 불안함이 더 큰 섹스였다.
내 눈치를 살피던 남자가 어깨를 으쓱였다.
“거봐요. 그리고 김원재 씨도 큰 편이면서. 양심이 없네.”
머릿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이 척척 말하는 남자가 얄미웠다. 남자를 밀치고 나는 몸을 일으켜 앉았다.
“양심이 없는 건 당신 아닙니까? 그러는 당신은 뒤에 손가락이라도 넣어 봤어요?”
덩달아 내 앞에 앉은 남자가 입을 다물었다. 나는 기세를 몰아 남자를 몰아붙였다.
“그리고 크기로 따지면 당신이 더하잖습니까. 당신 입으로 초심자용 아니라면서요. 처음인 사람한테 강요하고 싶습니까?”
이전에 남자가 한 말을 인용해 반박한 효과가 있었다. 남자는 침묵을 지켰다. 그렇다고 안심할 때는 아니었다. 일단 주도권을 잡았으니 다음은 설득이 필요했다. 나는 여전히 흉흉한 남자의 페니스를 곁눈질하며 말을 이었다.
“나는 처음인 데다 당신은 보통 크기가 아니니, 죽지는 않더라도 위험할 수 있잖아요. 굳이 삽입 섹스를 하고 싶다면 당신 것보다 작은 걸 넣는 편이 안전하겠죠.”
피차 뒤를 써 본 적 없으니 내 두려움을 공감해 달라는 의미였건만. 남자는 내 말을 다르게 받아들였다. 미간을 찌푸린 남자가 귀를 뒤로 젖혔다.
“김원재 씨가 나한테 넣으려고요?”
“아니, 그게 아니고.”
“내가 미처 그 생각을 못 했네. 배려하지 못해서 미안해요.”
남자의 미간에 선 11자 모양의 주름이 진해졌다.
“누가 넣을지 이제라도 정하죠, 그럼.”
이야기가 왜 그쪽으로 흘러가는지 모를 일이었다. 나는 속으로 한숨을 쉬었다. 장난기가 쏙 빠진 채 진지해진 남자의 태도가 부담스러웠다. 설령 자신이 깔리는 한이 있더라도 삽입 섹스를 꼭 해야 직성이 풀린다는 건가.
‘……어느 쪽이든 난감한데.’
박히는 상상을 해 본 적 없듯, 그에게 박는 상상 또한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럴 수밖에. 나는 새삼 남자를 훑어보았다. 미인형인 얼굴과 빛나는 머리카락까지는 그렇다 치더라도 그 밑이 문제였다. 옷 아래로도 잘 보이는 남자의 튼실한 어깨와 두툼한 가슴팍은 나보다 컸다. 그리고 팽팽하게 긴장한 허벅다리 근육, 풀어 헤쳐진 바지 앞으로 튀어나온 페니스까지.
보기 좋다는 생각은 들지언정 내 아래에 눕히고 싶다는 욕구는 전혀 일지 않는 몸이었다.
“나는 당신한테 못 넣을 거 같은데요.”
“그럼 어떻게 할까. 입으로 빨아 줘요?”
“아니, 그냥 전처럼 쥐고…….”
“언제는 삽입이 없으면 섹스 취급도 안 하더니.”
남자는 조금도 물러서지 않았다. 내 손을 쥐고 손등에 입을 댄 남자가 눈만 들어 나를 노려보았다.
“김원재 씨, 나랑 섹스하자는 거 아니었어요?”
날카로운 시선이 내게 날아와 박혔다. 내가 대답하지 않자 남자가 혀를 내어 손등을 핥기 시작했다. 거칠거칠한 감촉에 몸을 떨면서도 나는 남자의 눈을 피하지 않았다.
“김원재 씨는 나한테 못 넣는다면서요. 나는 김원재 씨한테 넣고 싶어요. 넣기 싫은 사람이 넣고 싶은 사람한테 양보해야죠?”
그의 눈 속에 담긴 열기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남자보다 키가 조금 작기는 하지만, 나 또한 그에게 뒤지지 않을 만큼 건장한 체격의 남자였다. 이런 상대에게 삽입하고 싶다는 욕구를 느낀다니. 이상하기 그지없었다.
한참 만에 꺼낸 질문은 내가 들어도 바보 같았다.
“왜 나한테 넣고 싶은데요?”
“김원재 씨 안에서 가고 싶거든요.”
조금도 주저하지 않고 남자는 답했다.
“김원재 씨가 나랑 이어진 채 헐떡거리는 것도 보고 싶고, 내 아래에서 정신없이 흔들리다가 쾌감에 못 이겨서 우는 모습도 보고 싶고.”
“무슨…….”
“짐승처럼 덮치고 싶어. 무작정 내 걸 박아 넣어 내리누르고, 움직이지 못하게 목을 물고 미친 듯이 밀어붙이고 싶다고. 이게 무슨 느낌인지 모르겠어요?”
아니, 모를 수가 없었다. 남자가 묘사하는 감각이 어떤 것인지는 나도 잘 알았다.
“얘기했잖아요. 기분 좋게 해 주겠다고. 그러니까 나랑 자자고.”
남자가 한 마디씩 내뱉을 때마다 그에 반응하듯 아찔한 장면들이 뭉클뭉클 솟아났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마치 꿰뚫리는 것 같았던 이전 잠자리와 누구에게도 털어놓을 수 없는 여름밤의 꿈이 떠올랐다. 현실에서도 몽상에서도 남자의 체취는 거부할 수 없을 만큼 달콤했고, 아래에서 올라오는 열기는 델 것처럼 뜨거웠다.
“아까부터 당신 때문에 발정했거든, 나는.”
그 모든 게 남자가 불을 지핀 발정기의 기억이었다.
“오래 못 참으니까 빨리 결정해요.”
빠르게 내뱉은 남자가 이를 세웠다. 세게 물린 손목에서 통증이 피어올랐다. 나는 무의식중에 다른 손을 올려 목을 만졌다. 이전에 깨물렸던 곳이 욱신거리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그때부터 현재와 과거, 상상과 기억이 천천히 뒤섞였다. 머릿속에서 남자가 무섭게 덮쳐들어 자신의 것을 안에 박아 넣고 정신없이 허리를 흔들었다. 아래에서 올라오는 쾌감은 끝이 없었기에 나는 울면서 몸부림쳤다. 상상의 남자가 내 안의 깊은 곳에서 절정을 맞은 순간 현실의 남자가 살갗을 핥아 올렸다. 남자의 혀가 닿는 곳에서부터 시작된 열기가 온몸으로 퍼져 나갔다. 강한 향이 코를 덮어 어지러웠다.
남자가 내 이름을 불렀을 때에야 나는 퍼뜩 정신을 차렸다.
“김원재 씨.”
여전히 손등을 붙든 채로 남자가 눈을 빛냈다.
“지금 무슨 생각 했어요?”
“…….”
“나한테 박히는 상상, 했죠?”
“아니…….”
“맞잖아. 나한테 박히는 거 상상하면서 꼴렸잖아.”
“……아.”
그러고 보니 하반신이 어째 묵직했다. 황급히 아래를 내려다보자 기세 좋게 꺼덕거리는 성기가 보였다. 남자에게 붙들린 손을 빼내면서 나는 이마를 짚었다.
‘미치겠네, 진짜.’
아무리 흥분했어도 본인 앞에서 망상을 할 줄이야. 게다가 그걸 들키기까지 했다. 발정기를 탓할 일이 아니었다. 머리든 몸이든 솔직해도 너무 솔직한 내 탓이었다. 아니라고 부인하며 다리 사이를 가린다 한들 무슨 소용일까. 발기한 페니스를 나도 남자도 본 뒤인데. 어차피 손으로 다 가려지지 않는 사이즈이기도 하고.
“상상으로만 끝낼 거예요?”
또 남자의 페이스에 휘말린 셈이었다. 한심해도 하는 수 없었다. 기왕 이렇게 된 거, 넘어가 주는 수밖에.
“원하는 대로 하게 해 줄 테니까 일단 비켜요. 씻고 오겠습니다.”
“같이 씻을까요?”
“아뇨.”
선심 써서 뒤는 허락한다고 했지만 거기까지 넘겨줄 마음은 없었다. 나는 미련 없이 침대에서 내려섰다.
***
욕실을 나서자 침대에 걸터앉은 남자가 보였다. 언제 벗었는지 그는 속옷 하나 걸치지 않은 알몸이었다. 옆에 가지런히 놓인 젤과 콘돔을 보며 나는 피식 웃었다. 고뇌하는 것처럼 푹 숙인 고개도, 어쩔 줄을 모르고 깍지를 바꿔 끼는 손도 어쩐지 우스웠다. 연인과의 첫날밤을 기다리며 안달을 내는 사춘기 아이를 보는 것 같았다.
웃음소리를 들은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빨리 와요. 나 이제 여유가 없거든요.”
그의 표정이 전에 없이 심각했다. 거짓말은 아닌지 남자의 복부에는 핏줄이 팽팽하게 도드라져 있었다. 허벅지 위에 놓인 붉은 흉기를 발견하자 웃고 싶은 마음이 싹 사라졌다. 뒤돌아 욕실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나는 침대로 다가섰다.
남자의 옆에 앉은 뒤에도 그를 돌아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이제부터 생전 처음 겪는 섹스를 할 거라고 생각하니 긴장을 풀기 어려웠다. 온 신경이 옆자리로 쏠렸다. 남자의 아래에 깔린 시트가 부스럭거릴 때마다 몸이 바짝 굳었다.
‘하기로 약속했으니 해야지.’
나는 느릿느릿 숨을 골랐다. 심호흡이 끝나자 남자가 내 어깨를 가볍게 끌어당겼다. 내가 준비하기를 기다린 듯했다. 귓가에 입을 맞춘 그가 속삭였다.
“안 아프게 해 줄게요.”
남자의 말을 듣고도 마음이 진정되기는커녕 기분만 더 이상했다. 타인에게 들려주었던 이야기를 내가 듣게 될 줄은 몰랐다. 그의 입술을 피하면서 나는 침대에 누웠다.
“김원재 씨한테 내 냄새가 나네.”
나를 따라 엎드린 남자가 중얼거렸다. 샴푸며 바디 소프가 모두 남자의 것이었으니 그럴 만도 했다. 킁킁거리며 냄새를 맡던 그가 가슴에 얼굴을 바짝 붙였다. 또 깨물 생각인가 싶어 긴장한 순간이었다. 그르릉, 목 울리는 소리가 나더니 남자가 가슴팍에 볼을 문질렀다.
“기분 좋다.”
몇 번이고 뺨을 비비면서 남자는 그릉그릉 소리를 냈다. 좋아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체취를 남기려는 고양이 같았다. 남자가 고개를 움직일 때마다 밀빛 머리카락이 이리저리 흐트러졌다.
‘이렇게 커도 고양잇과 맞구나.’
부담스러웠던 남자가 어쩐지 귀엽게 느껴졌다. 나는 손을 뻗어 남자의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금방 눈을 맞춰 온 남자가 빙긋 웃었다.
“다리 올려 볼래요?”
드디어 올 게 온 듯했다. 나는 무릎을 굽혀 오금을 붙들었다. 훤히 드러난 아래를 빤히 보던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뭘 하려는 건지 추측하기도 전에 젖은 살덩이가 피부에 닿았다.
“윽, 잠깐, 잠깐만요.”
남자의 목표는 내 중심이 아니었다. 회음부를 타고 내려간 혀가 그 아래까지 미끄러져 내려갔다. 남자의 손가락이 아슬아슬하게 스쳤던 곳, 엉덩이 사이였다.
“거기 핥지 마……, 하으!”
깜짝 놀라 팔을 뻗었지만 남자는 내 허벅지를 단단히 틀어쥐고 벌렸다. 까끌까끌한 혓바닥이 구멍 위를 넓게 핥다가 끝을 세워 안쪽까지 들어왔다. 처음 느끼는 감촉에 발가락이 오므라들었다. 동시에 생리적으로 밀려오는 수치심을 이기기 어려웠다. 남자에게 안기겠다는 결심을 했지만, 이런 일을 당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몸을 뒤로 빼며 도망쳐도 남자가 다리를 붙들고 끌어당겼다. 죽 딸려간 몸이 다시 남자에게 밀착되었다. 차마 아래를 볼 수가 없었다. 나는 허리를 틀어 시트에 얼굴을 파묻었다.
싫기만 한 건 아니었다. 신기하게도 남자가 핥는 곳에서 성감이 피어올랐다. 아랫배가 단단해지더니 허벅지가 간헐적으로 떨렸다. 씻으며 수그러들었던 중심에도 서서히 피가 쏠렸다. 그렇다고 마냥 즐길 수 없었다. 다리 사이에 고개를 처박은 남자가 보고 있을 광경이 어떨지 상상만 해도 머리가 터져 버릴 것 같았다. 나는 눈꺼풀 바깥으로 넘칠 것 같은 눈물을 참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민망한 곳을 할짝거리는 소리는 꽤 오랫동안 방 안을 울렸다. 남자의 혀가 떨어졌을 때는 이미 눈가가 젖은 뒤였다.
“싫었어요? 미안.”
따뜻한 손끝이 눈시울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악물었던 입을 벌리자 원망부터 쏟아졌다.
“……왜 그런 데를 핥아요.”
“처음이니까. 앞으로 쓸 곳이 여기라고 인식시켜 주고 싶었어요. 성기로는 써 본 적 없잖아요.”
그제야 실감이 났다. 나는 지금껏 사용한 적 없는 곳으로 섹스할 예정이었다.
잠자리 상대가 내 몸을 구석구석 만진 적은 많았다. 당연히 성기를 핥은 적도 있었고. 하지만 남자가 핥은 곳을 애무받은 경험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내가 그곳을 성감대나 성기로 인식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제 혀로 핥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되게 야한 짓을 할 거예요. 손가락이 들어와서 안을 넓힐 거고, 그 뒤에는 페니스가 삽입되어 움직이다가 사정할 거예요. 끝날 때까지 계속 나한테 당신 뒤를 보여 줘야 할 거고.”
“…….”
“그때마다 김원재 씨가 무서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았으면 해요. 나 혼자 기분 좋자고 말도 안 되는 곳에 억지로 쑤셔 넣고 괴롭히려는 게 아니에요. 알겠죠?”
힘들 정도로 여유가 없다던, 아까부터 내내 발기한 상태인 사람치고는 차분한 설명이었다. 처음인 나를 배려하려고 참는 건가. 나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울려서 미안해요.”
남자가 내 뺨을 감쌌다.
“근데 우니까 섹시하네. 더 울리고 싶게.”
……설마 배려가 아니라 내게 수치심을 주기 위한 플레이였던 건 아니겠지. 의심을 거둘 새도 없이 다음이 이어졌다.
“아프면 꼭 말해요. 다칠 수도 있으니까 힘 빼고.”
엉덩이골에 차가운 젤이 떨어졌다. 콘돔을 뜯어 손가락에 씌운 남자가 다리 사이로 손을 가져갔다. 젤을 펴 바르듯 주름 위를 문지르던 손가락은 어느 순간 안쪽으로 파고들었다. 선명하게 느껴지는 이물감이 생경했다. 나는 인상을 찌푸렸다.
“괜찮아요.”
허벅지를 다독인 남자가 다시 손을 움직였다. 긴 손가락이 느릿하게 왕복운동을 하며 빡빡한 입구를 벌렸다. 타인의 신체가 내 몸속을 휘젓는 기분은 그리 유쾌하지 않았다. 나는 조금 풀이 죽은 성기를 쥐고 흔들었다. 아래를 의식하지 않을 만한 강한 감각이 필요했다.
손가락 하나도 받아들이지 못할 만큼 조였던 뒤가 어느 정도 풀렸을 즈음에는 머릿속도 엉망진창이었다.
그때부터 남자는 단순히 안을 벌리는 데에만 몰두하지 않았다. 내벽을 꾹꾹 누르며 꼼꼼하게 안을 조사했다. 무엇을 찾고 있을지는 뻔했다. 나도 다른 사람과 섹스할 때 했던 짓이니까. 다만, 남자의 손길로 내가 느낄지는 반신반의였다.
‘어느 정도 개발하지 않으면 만져도 별 반응 없지 않나.’
걱정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구부러진 손가락이 어느 한 곳을 세게 누르자 아랫배에 힘이 들어갔다. 나도 모르게 허리를 꿈틀거리며 낮게 신음했다.
“으, 거기 좀…….”
“꽤 깊은 데에 있네.”
중얼거린 남자가 끈질기게 내벽 위를 문질러 댔다. 기묘한 감각은 점점 더 강해졌다.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무시하려 해도 숨만 가빠질 뿐이었다. 참다못한 나는 뒤쪽을 꽉 조였다. 풀려 있던 몸이 경직되며 안에 들어온 손가락의 형태도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곧바로 움직임을 멈춘 남자가 주의를 주었다.
“조이면 다쳐요. 힘 풀어요.”
“거기 문지르지 마요.”
“위치를 익혀 놔야 김원재 씨가 편할 텐데요.”
“됐으니까, 하, 이제 그냥 넣어요.”
뒤 좀 만졌다고 안달하는 꼴을 더 보여 주고 싶지 않았다. 한숨을 쉰 남자가 손가락을 빼냈다. 집요했던 이물감이 젤과 함께 주륵 딸려 나가자 번쩍 정신이 들었다. 손가락이 들어와 있을 때가 차라리 나았다. 이제는 다른 게 들어올 차례였다.
남자가 콘돔을 집으러 허리를 트는 사이 몸을 돌려 엎드렸다. 부스럭거리며 비닐 포장을 뜯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뒤로 하게요? 얼굴 보고 하는 게 좋은데.”
“나는 보고 싶지 않습니다.”
“부끄러워요?”
콘돔을 씌우느라 고개를 숙였는지 남자의 목소리는 조금 눌려 있었다. 나는 남자의 마지막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내가 느끼는 감정에 어떤 이름을 붙여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안심시키듯 남자가 등을 넓게 쓰다듬었다. 허리를 타고 이동한 손은 꼬리를 붙들고 짓궂게 잡아당겼다. 짧아서 만질 것도 없을 텐데, 남자는 좀처럼 꼬리를 놓아주지 않았다. 귀찮아서 꼬리를 휘휘 젓자 남자가 장난스럽게 웃었다.
“뭐 하는…….”
“꼬리 그대로 들고 있어요.”
곧 엉덩이골로 차가운 것이 또 한 번 뚝뚝 떨어졌다. 남자가 자신의 성기에 젤을 바르는 모양이었다. 긴장을 삼키며 하반신을 쳐들자 남자가 한 손으로 내 엉덩이를 쥐었다. 탄탄한 살을 주무르며 뜸 들이던 그는 이내 자리를 잡았다. 조금 전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굵기의 무언가가 구멍에 닿았다.
이내 남자의 중심이 입구를 벌리기 시작했다. 뒤를 누르는 압박감은 장난이 아니었다. 시트를 움켜쥐고 나는 몸을 웅크렸다. 약속이고 뭐고, 도망쳐야 한다는 본능적인 공포 외에는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말도 안 되는 감각이 머릿속을 하얗게 지워 버렸다.
억지로 틈을 벌리려던 시도는 금방 끝났다. 성기를 뒤로 물린 남자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힘 좀 뺄래요?”
최대한 뺐는데 여기서 뭘 더 어떻게 빼라는 것인지. 나는 심호흡을 하고 다리를 벌렸다. 끈적이는 성기를 다시 입구에 맞춘 남자가 힘주어 엉덩잇살을 움켜쥐었다.
“흐읏……!”
단단한 것이 억지로 주름을 벌리며 파고들었다. 나는 숨을 길게 들이마시며 시트를 부여잡았다. 아래에서부터 꿰뚫리는 감각을 버티기 어려웠다.
남자의 목소리에서 난감함이 배어났다.
“어떡하지. 아직 끝도 안 들어갔는데 이렇게 조이면.”
“…….”
“물론 처음이라서 그렇겠지만. 이거 심각한데요.”
말과 동시에 남자가 꾹 선단을 밀어 넣었다. 윽, 하고 신음이 터지며 상반신이 무너졌다. 나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은 채 어깨를 들썩였다. 한계까지 벌어진 뒤가 찢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남자가 가만히 둔부를 어루만졌다.
“그만둘까요?”
말과는 달리 허벅지를 찌르는 그의 성기가 뜨거웠다. 하자고 약속했으니 물러설 생각은 없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남자를 받아들이기에는 아래에서 올라오는 고통이 너무 컸다.
‘이럴 때 어떻게 해 줬더라.’
내 중심의 크기 때문에 괴로워하던 옛 연인과의 섹스를 떠올리니 답이 나왔다. 나는 손짓으로 남자를 물러나게 한 뒤 돌아누웠다.
젤을 힐끗 곁눈질하다가 손을 뻗어 남자의 입술을 매만졌다. 흠칫 놀란 남자가 동그래진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그의 입술 사이로 손가락을 밀어 넣었다.
“제대로 적셔요.”
남자는 내 손목을 쥐고 정성껏 손가락을 핥았다. 거친 혀가 마치 성기를 빨듯 살갗을 핥아 올렸다. 손가락 마디가 날카로운 송곳니에 닿을 때마다 오싹오싹했다. 가빠지는 숨을 고르며 나는 전신에서 힘을 뺐다. 젤 대신 남자의 혀를 택한 보람이 있었다. 미끈한 혀 놀림에 정신이 팔린 사이 아릿했던 아래의 통증이 한층 빠르게 가셨다.
살갗이 적당히 축축해졌을 때 남자의 입에서 손가락을 빼냈다. 마지막까지 손끝을 따라 감기는 혀가 붉었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고, 나는 왼 다리를 최대한 끌어 올려서 남자의 어깨에 얹었다.
젖은 손을 다리 사이로 가져가는 단순한 동작에도 큰 용기가 필요했다. 한 번도 무언가를 넣어 볼 생각을 하지 않았던 곳에 손가락을 댄 채, 심호흡을 했다.
“어떻게든 해 볼 테니 내가 손가락 꺼내면 바로 넣어요.”
고개를 끄덕인 남자가 비장한 표정으로 내 정강이를 붙들었다. 그렇게까지 진지하면 다시 긴장되잖아. 어느새 바짝 마른 입술을 적시면서 나는 손에 힘을 주었다.
조밀한 주름을 벌리며 밀어 넣자 뜨거운 점막이 손가락에 휘감겼다. 이미 한 차례 남자가 풀어 둔 안쪽은 미끈미끈했다. 욱신욱신 쑤시는 입구를 자극하지 않도록 조심하며 손가락을 안팎으로 움직였다.
“읏…….”
내 손가락이 남의 뒤가 아닌, 내 뒤를 오가는 느낌은 무척 생경했다. 안쪽뿐만이 아니었다. 손아귀에 들어찬 음낭도, 팔 안쪽에 비벼지는 기둥도 색다른 자극이었다.
구멍을 문지르며 벌리는 동안, 남자는 자신의 허벅다리 위에 주먹 쥔 손을 얹은 채 미동도 하지 않았다. 시키는 대로 얌전히 앉아서 기다리는 게 좀 귀여운가 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남자는 내 다리 사이에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꿀꺽 침을 삼키는 남자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등 뒤에서는 기다란 꼬리가 정신없이 흔들리며 슥슥 시트를 스쳤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만 봐요.”
“……네?”
남자의 대답은 반 박자 늦게 돌아왔다.
“민망하니까 그만 보라고요. 왜 그렇게 뚫어지게 보는데요.”
“아, 음. 그게. 보는 앞에서 푸는 사람은 처음이라서요. 잠깐 지난 세월을 후회했어요.”
“무슨 소리죠.”
“진작에 이런 걸 시켜 볼걸, 하고.”
“그런 소리 할 정신이 있으면 도와줘…….”
말을 맺기도 전에 허리를 굽힌 남자가 입술을 겹쳤다. 순식간에 파고드는 혀를 막지 못하고 나는 신음을 흘렸다. 말캉한 혀를 받아들이느라 잠시 손을 멈춘 사이, 예상치 못한 침입이 또 한 번 이어졌다. 남자의 손가락이 구멍을 벌리며 들어온 것이었다.
“흐읏, 응, 으읏…….”
남자와의 키스도, 뒤를 푸는 것도 집중할 수 없었다. 긴 손가락은 내벽이 아니라 안에 박힌 내 손가락 위를 문질렀다. 끈질기게 꾹꾹 누르는 그를 피해 도망가려 하면, 까끌거리는 혀 돌기가 볼 안쪽을 세게 긁었다.
위도 아래도 질척거리는 소리를 낼 즈음, 남자의 손이 뒤에서 빠져나갔다. 동시에 멀어지는 입술을 올려다보며 나는 숨을 헐떡거렸다. 허락을 구하듯 남자가 내 손등을 감쌌다. 그가 이끄는 대로 손가락을 빼냈다. 미지근한 젤이 사타구니를 타고 천천히 흘러내렸다.
무릎을 꿇고 앉은 남자가 내 허리를 틀어쥐고 끌어당겼다. 한껏 벌린 다리 밑으로 남자의 허벅다리가 들어왔다. 들어 올려진 엉덩이 밑으로 깔리는 근육이 단단했다. 이리저리 움직이며 자세를 고친 남자가 배에 닿을 정도로 벌떡 서 있는 성기를 쥐고 눕혔다. 아직 벌어진 구멍에 끝이 맞춰졌다.
“넣을게요.”
선언과 함께 선단이 다시 입구를 눌렀다. 직접 푼 보람이 있는지 조금 전보다는 압박감이 덜했다. 나는 허리를 뒤로 젖혔다. 천천히 몸 안으로 파고드는 살덩이가 단단하고 뜨거웠다.
느릿하게 전진하던 귀두는 어느 순간 안으로 쑥 빨려 들어왔다. 손가락이 들어왔을 때보다 몇 배는 선명해진 이물감에 숨을 흡 들이마셨다. 나를 내려다보며 남자가 중얼거렸다.
“내 말이 맞죠?”
“뭐가…….”
“들어가잖아요. 아무도 안 죽고.”
지금도 조금만 거칠게 움직이면 죽을 거 같은데. 나는 속으로 남자에게 반박했다. 어찌어찌 들어오긴 했지만 끝을 문 것만으로도 버거웠다. 남자의 성기는 아무리 오래 집어넣고 있어도 절대 익숙해질 것 같지 않은 굵기였다.
남자는 멈추지 않았다. 뿌리까지 박아 넣겠다는 듯 욕심껏 꾸역꾸역 좁은 틈을 벌렸다. 어째 점점 더 굵어지는 것 같은 기둥이 내 뒤를 한계까지 벌렸다. 아니, 한계에 도달했다고 생각하면, 그 뒤에는 또 다른 한계가 나타났다. 끙끙거리며 나는 힘을 풀려 애썼다.
정작 남자는 나를 배려해서 엄청나게 참는 모양이었다. 아랫입술을 잘근잘근 씹던 그가 툭 말을 내뱉었다.
“미치겠네.”
“뭘, 미치…….”
“좋은데 감질나서 미치겠어.”
존댓말조차 버리고 반말로 대꾸한 남자는 더욱 힘을 주어 자신을 들이밀었다. 몸을 둘로 쪼개는 듯한 통증에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다. 끝도 없이 들어오던 성기가 잠시 멈추자 비로소 가슴이 트였다. 나는 손등으로 눈가를 닦았다. 어느새 맺힌 눈물 탓에 시야가 흐렸다.
“안 아프게 한댔으면서…….”
“미안해요. 나도 이렇게 좁을 줄은 몰랐는데.”
“당신 큰 거 잘 알겠으니까, 일단 좀 멈추, 흑.”
온 신경이 남자가 박아 넣은 페니스에 쏠린 듯했다. 튀어나온 핏줄이며 고동치는 맥박까지 점막을 통해 생생하게 느껴졌다. 내게 조금만 더 유머 감각이 있었다면 남자의 성기에 지옥에서 온 몽둥이나 악마의 대포 같은 별명을 붙여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유머 감각을 발휘할 마음도, 상황도 아니었다. 남자가 힘주어 허리를 쳐올리자 비명이 터졌다.
“그 빌어먹을, 좆, 아, 빼, 아! 윽! 빼라고!”
이 정도면 되었다. 아주 훌륭한 첫 경험이었다. 더 움직이면 내장이 망가질 것 같았다. 본격적인 섹스는 다음 기회로 넘기자고 다짐하며 나는 남자의 배를 밀었다.
대체 어디까지 내 안을 후벼 팔 것인지 모를 정도로 꾸역꾸역 들어오던 페니스가 멈췄다. 그러더니 후진하기 시작했다. 꽉 맞물려 있던 성기는 빠져나가는 것조차 수월하지 않았다. 기둥에 달라붙은 내장이 딸려 나가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나는 남자의 어깨에 손톱을 세웠다.
“흐읏, 빼지 마, 으, 아윽!”
“빼라는 거예요, 박으라는 거예요?”
“그냥 가만히……. 후, 가만히 있어요.”
“고문인데요, 이거.”
“나도 고문, 으, 아, 움직이지, 말라니……, 윽!”
“피차 고문일 바에야 기분 좋은 쪽이 낫겠네.”
중얼거린 남자가 둥글게 허리를 돌렸다. 몽둥이 같은 페니스가 안쪽을 빈틈없이 꽉 누르면서 움직였다. 안이며 성기에 젤을 발라 미끌미끌하게 만들었는데도 버거운 동작이었다.
“우, 움직이지 마…….”
“힘 좀 조금만 더 풀어 볼래요?”
고개를 숙인 남자가 이마에 입을 맞추었다.
“엉덩이 근육이 하도 조여서 터질 거 같아.”
그게 가능하면 이러고 있을 리가 없잖아. 나는 그저 숨을 몰아쉬었다.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이런 걸 넣고 섹스하려 했다니. 남자는 정말로 양심 없는 놈이었고 나는 멍청이였다.
솔직히 말해 보라고, 이걸 집어넣고도 고통 외의 다른 감각을 느낀 사람이 존재하기는 하냐고 물으려 할 때였다. 고민하던 남자가 내 배를 쓰다듬었다.
“아까……, 음. 여기쯤이었나.”
곧 허리를 든 남자가 성기 위쪽으로 배 쪽의 점막을 힘주어 눌렀다. 솟구친 안쪽이 뱃가죽을 들어 올리는 느낌이 들었다. 내 상태를 살피던 그가 내벽을 슬슬 문지르기 시작했다.
슬금슬금 안쪽에 여유가 생겨나자 통증이나 이물감과는 다른 느낌도 고개를 들었다. 남자가 손가락으로 괴롭혔던 곳에 제일 먼저 반응이 왔다. 손가락과는 차원이 다른 압박감과 힘이 가해지자 호흡이 가빠졌다. 남자가 곤란한 듯 웃었다.
“더 조이면 어떡해요.”
“거기 건드리지, 마, 하, 으.”
“아프기만 하면 안 되잖아요.”
반쯤 페니스를 빼낸 남자는 선단으로 그곳을 찔러 댔다. 하필 제일 굵은 곳이 입구에 걸린 데다, 집요하게 찌르는 단단한 것 때문에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움직이지 말라고 남자의 양팔을 붙들었지만, 도리어 남자는 내 골반을 단단히 틀어쥐고 튕기듯 허리를 쳐올렸다. 힘이 들어간 팔뚝에 두드러진 핏줄이 꿈틀거렸다.
뒤에서 올라오는 이상한 느낌은 점차 강해졌다. 더는 안 되겠다 싶어 남자의 어깨를 잡은 순간, 폭발하듯 몰아친 쾌감이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비켜, 아, 가……, 큭……!”
다급히 이를 악무느라 혀를 깨물 뻔했다. 긴 신음을 뱉으며 상체를 뒤로 젖혔다. 후두둑 튄 무언가가 턱을 타고 미끄러져 내렸다. 어느새 질끈 감은 눈을 뜨지 못하고 나는 부르르 몸을 떨었다. 뒤이어 가슴이며 배 위로도 정액이 투둑투둑 쏟아졌다.
사정이 끝난 뒤에도 잔 경련이 계속 이어졌다. 온몸이 굳어 숨도 쉬기 어려웠다. 안쪽으로 오므라든 허벅지를 벌리며 남자가 한숨을 쉬었다. 그 작은 접촉도 견디기 어려워 아랫배가 들썩거렸다.
“겨우 벌려 놨더니 또 좁아졌잖아요.”
“흐읏, 으……, 후…….”
“응, 알았어요. 내가 다시 넓혀 줄게.”
중얼거린 남자가 페니스를 끝까지 빼내더니 예고도 없이 뿌리까지 퍽 박아 넣었다.
“허억!”
채 다물리지 않은 틈을 벌리며 들어온 페니스는 깊숙한 곳을 건드리곤 빠져나갔다. 그러곤 쉴 틈도 주지 않고 다시 불쑥 안으로 파고들었다. 남자가 자신을 깊게 박아 넣을 때마다 안쪽이 꽉꽉 눌려 숨이 막혔다. 상냥하게 미소 지은 남자가 내 중심을 쥐었다. 한 번 절정을 맞아 예민한 기둥을 문지르며 그가 속삭였다.
“기분 좋아요?”
질문에 대답할 틈도 주지 않고 그가 다시 자신을 콱 박아 넣었다. 기분 좋은 곳을 제대로 찔리는 바람에 온몸이 저절로 꿈틀 튕겼다.
“흐으, 으…….”
신음만 토해 내는 나를 내려다보다가, 남자가 속도를 높이기 시작했다. 구멍을 오가는 굵은 페니스가 적나라하게 느껴지는데도 밀쳐 낼 수 없었다. 벌어진 입에서 멍청한 소리만 띄엄띄엄 흘러나왔다.
“무슨, 아, 미친, 악! 하으, 아, 잠깐, 아응!”
“다행이네. 기분 좋구나.”
“아니, 잠, 이상, 흑! 이상해, 아!”
“나 이제 안 참아도 되죠?”
아랫입술을 핥은 남자가 고개를 숙였다. 곧 익숙한 아픔이 목덜미에서 느껴졌다. 이를 세워 나를 꽉 문 남자가 빠른 속도로 허리를 움직였다.
“아, 윽! 흐, 아, 흑!”
그때부터 다른 소리를 낼 수 없었다. 나는 그저 ‘아!’와 ‘윽!’만 반복해서 외쳤다. 나도, 질질 탁액을 흘리는 내 성기도 정신없이 흔들렸다. 위로 쳐올리는 속도며 힘이 장난이 아니었다. 안쪽이 쿵쿵 울려 목이 턱턱 막혔다. 목덜미에 닿는 남자의 거친 숨결마저 자극적이었다.
철떡철떡 살 부딪치는 소리가 빨라졌을 때, 남자가 내 몸을 강하게 끌어안고는 깊은 곳에 자신을 밀어 넣었다. 동시에 끼쳐 오는 진한 체향이 온몸을 짓누르는 듯했다. 눈앞이 새하얘지더니 또 한 번 사정감이 몰려왔다. 남자에게 붙들린 성기에서 묽은 액이 울컥 흘렀다.
“……후으.”
길게 숨을 내뱉은 남자가 느릿하게 두어 번 안쪽을 쳐올렸다. 내 안을 가득 채운 페니스가 벌떡거리며 정액을 쏟아 내는 게 생생하게 전해졌다. 온도가 느껴질 리 없는데도 안쪽이 뜨거워지는 것 같아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길게 숨을 내뱉은 남자가 내 목덜미를 놓아주더니 물고 있던 곳을 느릿느릿 핥았다.
남자는 좀처럼 자신을 꺼내려 하지 않았다. 내벽을 문지르며 꿈틀거리는 중심이 내 안쪽에서 또 다시 단단해지려 했다. 나는 손을 뻗어 남자의 배를 밀었다. 천천히 바깥으로 빠져나간 성기와 함께 젤이 울컥 밀려 나왔다.
드디어 끝났다는 생각이 들자 피로가 밀려왔다. 늘어지는 몸을 침대에 파묻고 나는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남자의 성기는 여전히 검붉었다. 정액이 잔뜩 고인 콘돔의 끝이 아래로 늘어져 있었다. 성기에서 콘돔을 벗겨 낸 남자가 빠르게 처리를 끝내곤 허리를 숙였다. 이마에 가볍게 와 닿는 남자의 입술이 부드러웠다.
눈을 감은 채로 남자의 입술을 즐겼다. 사정의 여운이 사라지고 짧은 후희가 끝나면 곧장 일어나 씻으러 갈 생각이었다. 처음으로 뒤를 쓴 섹스는 예상보다 힘들었지만, 그럭저럭 체력 소모가 크지 않았다. 과격하게 굴 것처럼 표현했던 남자도 의외로 신사적이었으니까.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잊고 있었다. 섹스 전에 남자가 했던 말을.
“한 번 했으니 이제 초심자는 아니네.”
“……예?”
“이다음부터는 중급자 코스로 갈게요.”
나는 다급히 눈을 떴다. 남자가 두 번째 콘돔을 입에 물고 있었다.
“난 한 번만 한다는 소리는 안 했어요. 기분 좋게 해 주겠다고 했지.”
뒤늦게 떠올린 말의 의미를 파악하기도 전, 남자가 나를 끌어당겼다. 지익, 포장이 뜯기는 소리와 함께 지옥에서 온 몽둥이가 다시 고개를 쳐들었다.
***
“이 집을 사길 잘했어.”
천장을 올려다보며 남자가 중얼거렸다.
“특별히 방음 잘된 집으로 고른 보람이 있네.”
“…….”
“꿀물 타 줄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 소리를 질렀는지 목이 쉬어서 입만 벌려도 아팠다.
목구멍만 아픈 게 아니었다. 남자에게 잔뜩 물어뜯긴 목덜미도 쓰라렸다. 안쪽까지 얼얼한 뒤는 어떻고. 어찌나 남자가 격렬하게 몰아붙였는지, 전신 근육이 다 욱신거렸다. 손으로 목 부근을 더듬어 보며 나는 이를 갈았다.
“그럼 조금만 기다려요.”
내 쪽으로 돌아누운 남자가 볼에 짧게 입을 맞추곤 몸을 일으켰다. 나는 말없이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았다. 침대를 벗어나 속옷을 주워 입으면서도 남자는 다리 한 번 후들거리지 않았다. 오히려 처음 침대로 뛰어들었을 때보다 가뿐한 몸짓으로 방문 쪽으로 걸어갔다.
그대로 사라질 줄 알고 내가 이불을 끌어 올릴 때였다. 방문 손잡이를 붙든 남자가 몸을 돌려 뒤를 보았다. 눈이 마주쳐도 그는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표정조차 바꾸지 않은 채로 나를 묵묵히 응시할 뿐이었다.
왜일까. 시종일관 여유롭던 남자에게서 미약한 불안이 엿보였다.
남자의 눈빛은 가라앉아 있었다. 원나잇을 막 마친 상대에게 보내는 애정 어린 눈길은 아니었다. 마치 내가 정말로 침대에 누워서 자신을 기다리는 게 맞는지 확인하려는 것 같았다.
내가 할 수 있는 탐색은 거기까지였다. 남자는 곧 화사한 웃음으로 모든 것을 얼버무리곤 방 밖으로 사라졌다.
나는 시선을 돌려 천장을 올려다보았다. 남자의 저런 모습은 처음이 아니었다. 이전에 같이 밥을 먹었던 날 보았던 축 처진 어깨도, 어제 술자리를 허락했을 때 쏟아졌던 한숨도 이번과 비슷한 결이었다.
허락이든 거절이든, 마지막 판단을 내게 맡기고 자신은 관여하지 않겠다는 듯한 몸사림.
거침없이 다가서면서도 마지막 한 걸음은 내게 양보하는 이유가 궁금했다. 자신감이 부족해서는 아닌 것 같은데 왜 저러는 것일까.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은, 만약 남자가 물러날 곳 없이 밀어붙이기만 했다면 나도 그를 마음 편히 거절했을 것이라는 점이었다.
따끔거리는 목덜미를 만지작거리다가 나는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원래 주말에 수영장을 다녔는데.”
“듣고 있으니까 말해요.”
부엌 쪽에서 남자가 답했다. 꿀을 섞는지 달칵달칵하는 소리가 들렸다.
“당신하고 처음 만난 날 이후부터 못 갔거든요.”
“왜요?”
“당신이 내 몸에 남긴 자국 때문에.”
“아하.”
“앞으로도 한동안 못 갈 것 같은데요. 보상해 줄 겁니까?”
남자는 웃음소리로 답을 대신했다. 보상 운운은 그냥 해 본 말이었지만, 수영장에 못 간다는 이야기는 농담이 아니었다. 오늘도 어찌나 물고 빨고 했는지 목덜미부터 배꼽 근처가 울긋불긋한 자국으로 온통 뒤덮여 있었다. 나는 남자가 남겨 놓은 붉은 흔적을 더듬으며 고개를 내저었다. 보이지는 않지만 아마 허벅지와 엉덩이 쪽도 사정이 비슷할 것이었다.
남자는 금방 돌아왔다. 나는 몸을 일으켜 앉아서 남자가 내미는 컵을 받아 들었다. 전처럼 꿀 냄새가 그리 강하지 않은 물은 마셔 보니 달짝지근했다. 부담스럽지 않아 딱 입에 맞는 단맛이었다.
꿀물을 마시는 나를 보며 남자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럼 다른 운동 추천해 줄게요.”
조금도 생각하지 않고 바로 추천하는 꼴이 수상했다. 설마. 나는 미간을 찡그렸다.
“주말마다 나랑 섹스해요.”
예상과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대답이었다. 남자의 예쁘장한 얼굴을 다시 한번 훑었다. 남자는 태연히 내 시선을 맞받아치며 미소 지었다.
안타깝다. 생긴 건 참 괜찮은데 속은 저런 변태라니.
“농담 아니고 칼로리 소모 꽤 되는데? 섹스도 전신 운동이니까요. 그리고 나랑 같이할 수 있으니까 좋잖아요. 나는 물을 별로 안 좋아해서 수영은 무리거든요.”
나는 묵묵히 꿀물을 들이켰다. 섹스가 전신 운동이라는 점은 인정할 수 있었다. 너덜너덜한 전신이 그 증거였다. 하지만 내가 굳이 남자와 같이 운동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컵을 비우고 나면 해 주고픈 이야기가 차곡차곡 쌓이는데, 남자는 말을 멈추지 않았다.
“게다가 섹스가 수영보다 훨씬 기분 좋을 텐데요. 아니라고 부인은 못 하죠?”
나는 생각을 고쳤다. 괜히 말을 길게 했다가는 남자의 헛소리만 더 들을 게 뻔했다. 입 안의 꿀물을 꿀꺽 삼키고 컵을 내밀었다. 남자는 컵 안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마치 거기에 내 답변이 담겨 있기라도 한 것처럼 진지한 태도였다.
“잘 마셨습니다.”
내가 인사말을 건네자 남자는 관찰을 포기했다. 내 손에서 빈 컵을 받아 든 그가 다시 방을 나섰다. 얼마 안 가 물을 트는 소리가 들렸다. 컵을 헹구는 모양이었다. 나는 큰 소리를 내지 않으려 조심하면서 침대에 다시 누웠다. 앉아 있자니 허리와 엉덩이가 아팠다.
조용해진 방은 적막했다. 이전에도 느꼈다시피, 남자의 집은 희한할 만큼 조용했다. 가전제품이 돌아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릴 정도였다. 넓은 집을 채우는 소리는 남자가 움직일 때 나는 소음뿐이었다.
방 안이 휑하게 느껴지는 이유는 하나 더 있었다. 남자의 침대는 혼자 쓰기에는 지나치게 넓었다. 건장한 남자 둘이 함께 누워서 뒹굴어도 자리가 한참 남을 만큼 큰 사이즈였다.
‘여기서 혼자 자는 걸까.’
옆으로 돌아누워 팔을 뻗어 보았다. 아무리 손을 내밀어도 침대 가장자리까지 닿지 않았다. 몸을 일으키자 비릿한 냄새가 사방에 떠올라 코를 찔렀다. 이불에 배어 있던 정사의 냄새였다.
“참, 생일 선물 잘 받았어요.”
바깥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들린 순간 나는 재빨리 도로 누웠다. 방으로 돌아온 남자는 주저 없이 침대로 다가왔다. 그가 침대 가에 걸터앉자 매트리스가 출렁거렸다.
“태어나서 받은 선물 중에 최고였어요. 진심으로. 좀 과분한 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 김원재 씨 처음을 내가…….”
“앞으로는 받을 일 없을 겁니다.”
“왜요?”
“당신이랑 안 잘 거니까.”
남자의 노란 눈이 가늘어졌다. 고개를 모로 기울여 나를 내려다보던 남자가 이불을 끌어당겼다.
“그럼 또 술 마시러 가자고 해야겠네.”
“…….”
“김원재 씨 술 마시면 취향도 아니고 관심도 없는 남자랑 원나잇 하는 버릇이…….”
나는 서둘러 말을 끊었다.
“그런 거 아닙니다.”
“그런 거 같던데요. 술 마시고 나랑 두 번이나 잤잖아요.”
아니라고 말할 수 없는 내가 원망스러웠다. 나는 남자가 덮어 준 이불을 끌어 올려 코까지 파묻었다. 화끈거리는 얼굴을 숨기고 싶었다.
피식 웃은 남자가 이불 위로 나를 다독거렸다.
“아무튼, 앞으로는 술 마실 때 조심해요. 나처럼 선량한 사람한테만 걸릴 거라는 보장이 없어요.”
“……평소에는 그렇게 안 마십니다.”
“평소에도 그러면 진짜 위험하고. 전처럼 애인이랑 헤어졌어도 필름 끊길 때까지 마시면 안 돼요.”
“애인 아니었어요.”
“어? 그럼 누구?”
“그냥 아는 후배.”
내가 말하고도 웃음이 났다. 그냥 아는 후배 때문에 취하도록 술을 마시고, 처음 보는 사람에게 매달려서 주정을 부리는 사람이 있을 리가.
남자는 그 이상 캐묻지 않았다.
“누가 됐든 너무 미련 남기지 마요. 인연이 아닌 사람은 빨리 잊는 게 좋죠.”
참 쉽게도 말하는구나. 하긴. 남자의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올려다보며 나는 납득했다. 남자는 사자였다. 여럿이서 무리를 이루고 부부 관계를 맺는 사자. 그중에서 한 명과 헤어졌다고 큰 타격은 없겠지. 무리 안의 다른 상대를 찾을 수 있을 테니까.
“당신은 사자니까 그게 간단한 일일지 몰라도…….”
“사자라고 모두 똑같지는 않아요.”
내 말을 끊은 남자가 빙긋 웃었다. 그가 입을 다물자 다시 삭막한 적막이 내려앉았다.
솔직히 실수했다 싶었다. 나도 곰에 관해 이러쿵저러쿵 떠드는 사람들을 싫어하면서, 편견에 젖은 표현을 사용해 버리다니.
어색해진 분위기를 견디기 어려웠는지, 남자는 금방 화제를 돌렸다.
“이렇게 합시다. 언제까지 발정기예요?”
“8월 말에서 9월 초.”
“그럼 한 3주 정도 남았네. 그동안 나랑 자요. 발정기용 섹스 파트너 어때요?”
“그런 거 안 만드는데요.”
“거짓말. 그날 나한테 계속 고백했잖아요? 발정기 때만 만나는 섹스 파트너라도 좋으니까 받아 줘, 섹파라도 하게 해 줘, 하고.”
“내가 언제……!”
언성을 높이자 목 안쪽이 다시 아팠다. 나는 목을 감싸고 입을 다물었다.
얄밉게도 남자가 자신의 말을 정정했다.
“아, 나한테 한 게 아니었죠. 그 정운이라는 토끼한테 한 말일 테니.”
남자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얻어맞은 것처럼 머리가 욱신거렸다. 그날 대체 남자를 붙들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떠들어 댔던 것일까. 과거의 나와 진지하게 상담하고 싶었다. 무슨 배짱으로 그렇게 맛이 갈 때까지 술을 마신 거냐고.
“그건 그냥 주정이었습니다. 취한 사람이 했던 말에 하나하나 의미 두지 마시죠.”
“주정이라기엔 너무 절실했어요.”
“섹파 같은 건 필요 없습니다.”
“필요 없는 몸이 그렇게 반응한다고요?”
나는 입을 다물었다. 잠자리에서 내 반응이 얼마나 열렬했는지는 나도 잘 알았다. 새벽까지 남자와 몸을 섞으며 수없이 소리 높여 신음했고, 남자가 주는 쾌락을 붙들고 놓지 않았다. 그 결과 목과 엉덩이 안쪽은 욱신거렸고, 전신의 근육은 쑤셨다. 몇 번이고 혹사당한 중심도 얼얼했다.
“엄청 쌓였던데 풀어 줘야 하지 않겠어요?”
“이제는 안 쌓…….”
“진짜요?”
장난스럽게 대꾸한 남자가 이마 위에 손을 올렸다. 길쭉한 손가락이 다가오더니 눈썹을 가만히 쓸었다. 가벼운 접촉만으로도 어깨가 흠칫 떨렸다.
“이거 봐요. 어젯밤에 그렇게 많이 해 놓고서는, 또 반응하잖아요.”
“…….”
“이 정도로 밝히면 일상생활도 어려울 것 같은데.”
반박할 말이 선뜻 떠오르지 않았다. 간신히 진정시킨 몸이 또 흥분했으니 앞으로 어떻게 될지 모를 일이었다. 잠잠했던 발정기가 다시 시작된 거라면 어떻게 감당해야 할까. 유별나게 더웠던 8월 초를 떠올리자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때는 일주일간 휴가라도 내서 욕망을 풀었지만, 이제는 바빠서 그럴 수 없었다. 어떻게든 참다가 퇴근 후에 열기를 식히는 수밖에.
“내가 도와줄게요. 김원재 씨는 그냥 몸만 맡기면 돼요. 힘들 거 없어요.”
그런 의미에서 남자의 제안은 유혹적이었다. 어차피 또 꿈을 꾸든, 나 혼자 망상하며 처리하든 그 상대는 남자일 것이었다. 지금의 내 욕망을 모조리 일깨우는 장본인이니까.
그렇다면 그냥 실물을 받아들이는 편이 속 편하지 않을까.
지끈거리는 이마를 만지다가 나는 불쑥 물었다.
“당신 이름 뭐랬죠.”
“서은겸.”
“서은겸 씨.”
이름을 부르자 남자의 눈이 반짝 빛났다. 나는 먹이를 노리는 맹수 같은 눈에서 시선을 돌렸다.
“발정기 끝나면 바로 끝입니다.”
남자의 미소가 진해졌다.
“앞으로 잘 부탁해요, 김원재 씨.”
뭐라고 답해야 할까. 나도 잘 부탁한다고 해야 하나. 하지만 어느 정도는 남자의 억지로 받아들이게 된 관계인데, 굳이 감사 인사를 하는 것 또한 이상한 것 같기도 하고.
고민하고 있을 때 남자가 침대 위로 올라섰다.
“그럼 섹스 파트너가 된 기념으로 한 번 더 할까요?”
내 위에 올라탄 남자가 이불을 끌어 내렸다. 숨길 수 없게 된 얼굴이 더욱 달아오르는 것만 같았다. 손으로 가리려 하자 남자가 내 손목을 붙들고 머리 위로 밀쳤다.
“오늘도 여기서 자고 가요. 집에 들렀다가 출근하기 귀찮잖아요.”
남자는 자신이 목덜미에 남긴 흔적을 길게 핥았다. 거칠거칠한 혓바닥이 상처에 닿을 때마다 등골이 오싹했다. 노곤하게 늘어지는 정신은 남자의 요구를 거절하라고 외쳤지만, 남자가 닿는 곳마다 가신 줄 알았던 열이 깨어났다.
나는 남자의 팔을 붙들었다.
“이번에는 진짜로 한 번만.”
“약속할게요.”
“그리고 아까 그거 미안해요.”
“아까 그거?”
“사자는 어떻다는 얘기. 내가 잘못 말했습니다.”
잊기 전에 남자에게 사과하고 싶었다. 남자가 그다지 신경 쓰지 않더라도 내가 석연치 않아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남자의 노란 눈이 다시 나를 담았다. 방을 나설 때 보냈던 시선과는 전혀 다른, 반짝이는 눈빛이었다. 나를 피하지 않았던 그처럼 나도 남자를 피하지 않았다.
남자의 노란 홍채 속에 박힌 새카만 동공이 슬그머니 커졌다.
“두 번 하게 해 주면 용서해 주죠.”
“약속한 지 1분 만에 깨겠단 소립니까?”
곧바로 정색하고 되묻자 남자가 키득거렸다.
“나는 김원재 씨 그런 면이 참 좋더라.”
손깍지를 끼며 중얼거린 남자는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나는 무릎을 굽혔다. 기대감에 피가 몰린 아랫도리가 욱신거렸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남자의 말이 맞았다.
한번 사그라들었던 발정기에 다시 불을 붙일 정도로 육체적인 상성이 좋은 상대는 평생 한 번 만날까 말까 했다. 남자가 왜 자꾸 내 꿈에 나타났는지, 직접 몸을 섞어 보니 이해가 되었다. 나는 내게 제일 큰 쾌락을 안겨 줄 상대를 본능적으로 알아본 것이었다.
“그럼 두 번 같은 한 번으로.”
“…….”
“싫어요?”
“……그냥 두 번 하든가요.”
그런 사람과 만났는데 안 자는 게 더 이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