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곰은 목을 감춘다
옆집에 늑대 가족이 이사 온 것은 내가 초등학교에 막 입학했을 때였다.
세상 물정을 모르는 능소니였던 내 눈에 새로운 이웃은 매우 이상해 보였다. 옆집 사람들은 부모와 자식 여럿이 함께 살았다. 주말에는 근처에 사는 친척들을 불러 모아 저녁 식사를 했다. 애초에 우리 옆집으로 이사 온 이유도 모두 모여 살기에는 인원이 너무 많아서 분가를 한 거라고 했다.
떠들썩한 소리와 고기 냄새는 우리 집까지 흘러왔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인상을 찌푸리며 창문을 닫았다.
“늑대들은 원래 저래.”
그게 어머니가 내게 들려준 설명의 전부였다. 의문을 해소하기에는 충분하지 않았지만, 그 이상 묻기도 어려운 짧은 한 문장.
옆집 가족 중에는 나와 동갑인 아이도 있었다. 예주라는 이름의 여자아이는 내가 다니는 초등학교로 전학을 왔고, 우리는 등하교를 같이하면서 친해졌다.
아마도 2학년 2학기였을 것이다. 회사 회식에 참석한 어머니의 귀가가 늦어진 적이 있었다. 어머니를 기다리며 놀이터에서 혼자 놀던 나를, 예주가 자신의 집으로 데려갔다. 밖에 있으면 춥지 않냐면서.
이상한 이웃은 나를 진심으로 환영해 주었다. 예주의 가족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내게 달려와 말을 시켰다. 저녁 시간이 되자 나를 식탁 가운데에 앉히고 맛있는 음식을 잔뜩 만들어 먹였다. 그것도 모자라 예의 친척들까지 불러서는 시끌벅적하게 떠들었다.
모두가 나를 반기는데, 정작 나는 긴장을 풀 수 없었다. 많은 사람들 틈바구니에 앉아 저녁을 먹는 상황이 너무나 낯설었다. 가족이라는 이들끼리 친근하게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도 이상했다.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꾸역꾸역 음식을 먹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 배에 든 음식물을 모조리 토했다.
그날, 나는 생애 처음으로 내게 무엇이 결핍되었는지 깨달았다.
나는 어머니를 제외한 가족이 없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생물학적 아버지는 분명 존재했을 것이다. 내가 독립할 때까지 매달 거액의 생활비를 보내 주었으니 어딘가에 살아 있었으리라. 하지만 나는 그와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떤 친척과도 만난 적이 없었다.
내게 가족은 어머니 한 명뿐이었다.
태어난 순간부터 어머니만을 보고 자랐으니 그게 당연한 줄 알았다. 모든 집이 똑같은 가족 구성을 지닌 줄 알았다. 하지만 옆집 사람들과 교류하면서 그게 아님을 깨달았다. 뼈아픈 자각이었다.
뒤늦게 귀가한 어머니는 나를 토닥이며 예전보다 길어진 설명을 들려주었다.
“곰은 독립적인 종이기 때문이란다. 늑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어머니의 말에 따르면, 내 아버지와 어머니는 1년을 같이 보낸 이후 다시 만난 적이 없었다. 법적으로 결혼한 사이도 아니었다. 나는 두 분 사이에 유일하게 남은 접점이었다. 어머니가 아이를 맡아 키우고, 아버지가 양육비를 부담한다는 합의와 함께.
그럼 왜 친척은 없냐는 질문에 어머니는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모든 곰은 성인이 되면 독립을 하거든.”
“독립?”
“그래. 혼자 사는 거야.”
“그럼 나도 성인이 되면 엄마랑 따로 살아야 해?”
“당연하지. 너도 곰이잖니.”
어머니는 평온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 어떤 아쉬움도 내비치지 않는 어머니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나는 망연자실해졌다. 앞으로도 어머니와 함께 살 수 있을 줄 알았는데, 평생을 혼자 살아야 한다니. 곰의 생태는 어린 내가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잔인했다.
나와는 달리 어머니는 참으로 곰다운 분이었다. 내가 성장하는 동안 어머니는 차근차근 이별을 준비했다. 그 덕분에 나는 성인이 되자마자 집에서 쫓겨났다. 새집을 구하고 대학 학비를 충당할 돈을 손에 쥔 채.
독립은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예정되어 있었고, 모든 곰들이 당연하게 겪는 일었다. 그러니 슬프거나 외로운 게 아닐 터였다. 나 또한 어머니의 오랜 훈육을 거쳤으니 그래야 했다. 그게 맞는 거였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내가 능소니였을 때 옆집에 늑대 가족이 이사 온 탓이었을까. 차근차근 단독 행동을 익히고, 독립심을 키우기 전에 다른 형태의 가족을 알게 된 탓이었을까. 아니면 태어나기를 잘못 태어났을까.
나는 어머니가 그리웠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내 가족을 잃어서 괴로웠다.
그리고 옆집 늑대 아이가 부러웠다. 그 시끌벅적한 가족이 너무나도 부러웠다. 자신의 짝과 평생 함께 지낸다는 늑대들이 부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나도 그들처럼 살고 싶었다. 매력적인 상대와 몸을 섞은 뒤 훌쩍 떠나는 것도, 곰들은 다 그렇다는 무책임한 말로 가족을 보내는 것도 싫었다. 내 짝과 가족을 이루어 함께 살고 싶었다.
그러려면 하루라도 빨리 탄탄한 기반을 쌓아야 했다. 어떤 이유에서든 내 가족과 다시는 헤어지지 않도록.
홀로 지내는 시간에 적응한 뒤부터 나는 공부에 매달렸다. 연애도, 인맥 관리도 중요하지 않았다. 갓 독립한 성인 수인을 위한 장학금이 중요했고, 취업에 도움이 될 높은 학점이 중요했다. 학업을 마치고 건실한 회사에 입사하는 날만 기다리면서 3년을 버텼다. 역시 곰이라 우직하다는 비아냥과 곰답지 않게 독하다는 핀잔을 귓등으로 흘리며.
그리고 대학에서 네 번째로 맞이한 새봄. 누구에게나 잘 웃어 주는 토끼를 만나면서 내 인생이 뒤집혔다.
정운이는 누구보다도 빛나는 남자였다. 사람들을 자신의 주위로 끌어들이는 매력을 지녔고, 자신의 매력을 적절하게 이용할 줄도 알았다. 정운이를 만나고 인생이 뒤집힌 사람은 나 혼자가 아니었다. 나는 정운이의 주위를 맴돌며 기회를 엿보는 수많은 사람들 중 한 명에 불과했다.
그래도 싫지 않았다. 함께 있을 수만 있다면 내가 어떤 존재라도 상관없었다. 정운이와 만난 다음 날, 나는 정운이가 속한 등산 동아리에 가입했고 그해 있었던 모든 동아리 모임에 참석했다. 그리고 모든 과목의 시험을 망쳤다. 아슬아슬하게 학사 경고를 피한 학점을 보자 웃음이 나왔다. 허탈해서가 아니었다. 재수강을 핑계로 1년 더 학교를 다닐 수 있어서, 1년 더 정운이의 옆에 있을 수 있어서 기뻤다.
운 좋게도 정운이의 반응은 나쁘지 않았다. 1년의 유예 기간 동안, 정운이는 나를 빤히 관찰하곤 했다. 대놓고 날아오던 시선은 언젠가부터 은근한 미소로 바뀌었다. 정운이도 나에게 흥미가 있는 것 같았다.
남자와는 사귀지 않는다는 정운이가 내게 보내기 시작한 노골적인 유혹을 무시할 수 없었다. 큰마음 먹고 고백하려고 결심한 가을. 갑자기 나타난 호랑이가 내 고백을 훼방 놓았다. 그러곤 미처 손쓸 틈도 없이 정운이를 채갔다.
“선배, 죄송한데 제가 인호랑 사귀기로 해서요.”
뒤에서 무섭게 노려보는 호랑이 놈에게 끌어안긴 채 정운이는 난처한 듯 웃었다. 오래 준비한 고백이 미처 다 끝나기도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상관없었다. 어차피 정운이는 한 달쯤 지나면 애인을 갈아치우기로 유명했으니까. 이번 호랑이도 한 달짜리가 틀림없었다. 연애 감정이 식을 때쯤 내가 고백하면 정운이도 나를 받아 줄 게 뻔했다.
그래서 나는 정운이의 마지막 말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제가 나중에 연락드릴게요. 기다려 주세요.”
정운이는 내게 기다리라고 했다. 나중에 연락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니 괜찮았다. 기다리면 반드시 내게도 기회가 돌아올 것이었다. 정운이의 말을 굳게 믿고 나는 기약 없는 기다림을 택했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고, 대기업 취업에 번번이 실패하고, 그러다 그럭저럭 괜찮은 중견기업에 취직할 때까지 정운이의 연락은 오지 않았다. 연락은커녕 동아리 모임에도 절대 나오지 않았고, 우연히 마주치는 일조차 없었다. 나를 피해 다니는 모양이었다.
정운이의 소식은 동아리 사람들을 통해서 겨우 전해 들을 수 있었다. 놀랍게도 정운이는 그 호랑이 자식과 계속 연애를 하고 있었다.
그래도 언젠가는 헤어지겠지. 정운이는 연애를 오래 하지 않으니까. 헤어지면 내게 연락을 해 주겠지. 차오르는 불안을 무시하려 애썼다. 어쩌면 정운이는 잊어버렸을지도 모르는 약속을 되뇌며 정운이의 연락을 계속 기다렸다.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내 기다림은 6년 만에 끝났다.
“선배. 아무래도 이건 아닌 것 같아요. 안 되겠어요.”
동아리 모임에서 마침내 재회한 정운이는 오랫동안 준비한 내 고백을 거절했다. 내가 담배를 피워서 안 되겠다는, 이해하기 힘든 이유를 대면서.
돌이켜보면 참 놀라운 일이었다. 6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헛된 희망도 다 말라붙은 줄 알았건만. 정운이가 나를 받아 줄 거라고 예상조차 하지 않았건만. 정운이가 내게 건넨 거절의 말을 맨정신으로 받아들이기 힘들었다.
나는 곧장 모임 자리에서 빠져나와 근처 술집으로 들어섰다. 소주를 달라는 말에 직원은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고른 곳이 하필 고급스러운 분위기의 바였기 때문이었다.
술집조차 제대로 못 찾아가는 내 멍청함이 한심했다. 밀려오는 자괴감에 파묻혀서 나는 뭐든 좋으니까 도수가 높은 술을 아무거나 달라고 주문했다. 그리고 직원이 가져온 ‘아무거나’를 안주도 없이 들이켰다. 왜 그 빌어먹을 호랑이보다 먼저 고백하지 않았는지 후회스러워서 한 잔. 기다리라는 정운이의 말을 믿은 내가 멍청해서 한 잔. 어련히 포기할 줄도 모르고 미련스럽게 기다린 시간이 한심해서 한 잔. 그러고서도 아직도 좋아하는 마음을 떨쳐 내지 못한 내가 미친 것 같아서 한 잔.
취할 준비가 되어 있던 몸과 마음에 빠르게 술기운이 돌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무겁게 내리감기는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리며 테이블에 턱을 괴었다. 술을 더 마시고 싶어도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술잔을 엎지 않도록 조심하는 게 고작이었다.
“정운아.”
기다랗고 하얀 귀는 그때 나타났다.
우연히 발견한 토끼 귀는 살랑거리며 나를 유혹했다. 곧바로 정운이를 떠올리는 머릿속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몸도 제어할 수 없었다. 무작정 귀를 향해 걸었다. 정운이를 처음 본 날 뒤를 쫓았던 것처럼, 등산이라곤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정운이가 속한 동아리에 망설임 없이 가입했던 것처럼. 그렇게 쫓아다녔는데도 제대로 밝힌 적 없었던 진심을 이번만큼은 다 말하고 싶었다.
“좋아한다, 정운아.”
긴 기다림에 지쳐 가면서도 놓지 못했던 수많은 말들. 수많은 고백. 한 번도 온전히 전하지 못했던 내 간절한 사랑.
“정운아. 나 계속 너 기다렸다. 기다리면 네가 나한테도 기회를 줄 줄 알고.”
술김이었다. 긴 귀를 품에 끌어안고 나는 온갖 소리를 털어놓았다. 그토록 안고 싶었던 정운이에게는 손끝 하나 대지 못했던 주제에. 가짜가 분명한 토끼 귀를 붙들고서는 오래 묵은 감정을 모두 쏟아 냈다. 그래야만 속이 시원할 것 같았다.
“나는 섹스 파트너라도 괜찮아. 네가 필요할 때만 나를 찾아와도 괜찮아. 나 지금 발정기야. 어떻게 해서든 너 만족시킬게.”
토끼 귀 아래에 있는 사람은 말없이 내 헛소리를 들어 주었다. 내가 말을 멈추면 허리를 토닥거리며 독려했다. 그래서 나는 꼬인 혀를 열심히 놀렸다. 내 말을 듣는 사람이 정운이가 아닌 걸 알면서도, 지금 내뱉는 말들이 정운이에게는 영영 닿지 못할 걸 알면서도 전하고 싶었던 마음을 꾸역꾸역 끄집어냈다.
구역질이나 다름없던 고백은 한참 만에 끝났다. 게워 내듯 속내를 쏟아 낸 탓에 배가 텅 빈 것 같았다. 이제는 여한이 없었다. 마지막으로 부드러운 귀에 코를 문지르곤, 나는 몸을 돌렸다.
힘이 풀린 다리로는 채 한 걸음도 걸을 수 없었다. 균형을 잃은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넘어지지 않기 위해 팔을 뻗었지만 나는 마땅한 곳을 짚지 못했다.
“손님!”
“아, 뭐야!”
와장창. 쨍그랑. 사방에서 쏟아지는 험악한 목소리. 눈앞이 새하얗게 변했다. 몸을 일으키려 허우적거릴수록 욕설은 커졌다.
“죄송합니다.”
신기한 일은 그때 일어났다.
누군가 나를 가로막고 서서는 사람들에게 사과를 건넸다. 내가 해야 할 사과를 왜 저 사람이 하는 걸까. 바닥에 웅크린 채 나는 멍하니 생각했다. 소란이 잦아들었을 때쯤, 그는 나를 부축해 일으켰다. 단단한 품에 기대어서 나는 눈을 깜빡였다. 나를 안은 사람의 머리 위로 두 가지 색의 귀가 흔들거렸다. 새하얗고 길쭉한 귀와, 노랗고 동그란 귀.
역시 가짜였구나.
나는 피식 웃었다. 남자에게는 토끼 귀보다 둥근 귀가 훨씬 잘 어울렸다. 부드러운 귀를 만지작거리며 나는 비틀거렸다. 그리고 잠꼬대 같은 소리를 중얼거리다가 정신을 잃었다. 다음 날 아침, 낯선 이와 말도 안 되는 짓을 벌인 뒤 머리를 쥐어뜯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한 채.
이게 금요일 밤을 거쳐 토요일 아침까지 이어진 대형 사고의 전말이었다.
***
주말 내내 남자와의 일을 잊기 위해 발버둥 쳤다. 남자와 가졌던 관계를 떠올리면 정운이가 생각났고, 정운이를 생각하면 술집에서 내가 벌인 추태가 기억났다. 그러다 보면 다시 남자와 몸을 섞었던 때로 되돌아가기 일쑤였다. 의식의 끝자락에 도돌이표가 걸린 것 같았다.
‘엄밀히 말하면 잔 것도 아니고 서로 빼 준 것뿐이잖아.’
악몽을 꾸었다고 덮으려 해도 그럴 수가 없었다. 남자가 내 몸에 남긴 흔적 때문이었다. 벌겋게 부풀어 오른 잇자국은 월요일이 되어서도 가라앉지 않았다. 보랏빛으로 멍든 목을 셔츠 깃으로 가리면서 나는 한숨을 쉬었다.
그것도 잠시였다. 사람이 꽉꽉 들어찬 출근 버스에 타자 주말에 있었던 일이 쏜살같이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목을 가릴 방법을 찾느라 평소보다 집에서 늦게 나온 게 화근이었다. 버스가 급정거를 할 때마다 키 작은 종들이 내 등에 코를 박았다. 이어폰에서 흘러나오는 영어 강의에 집중할 수가 없었다. 넘어지지 않게 중심을 잡는 게 고작이었다.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안 그래도 발정기 때문에 뜨거운 몸에 사람들의 열기가 더해지자 후끈후끈했다. 등줄기를 흐르는 땀이 부담스러웠다.
간신히 정류장에 내리자 숨통이 트였다. 넥타이의 매듭을 느슨하게 잡아당기며 나는 고개를 저었다. 올해는 꼭 차를 사야지. 이제는 지긋지긋한 만원 버스와 헤어지고 싶었다. 숨 막히는 출근길마다 되풀이하는 헛된 결심은 곧 현실적인 문제와 충돌했다.
‘내가 차 살 돈이 어딨어.’
그래도 내년에 연봉이 오르면 좀 살 만하겠지. 올해까지만 버스로 버텨 보자. 나 자신을 타이르며 셔츠 단추를 두어 개 풀었다.
“좋은 아침.”
그때 누군가 내 등을 툭 쳤다. 뒤돌아보자 강렬한 인상의 미인이 눈에 들어왔다. 입사 동기인 효영이었다.
오늘도 진한 효영의 아이라인을 바라보며 나는 이어폰을 빼냈다. 눈물샘부터 볼까지 이어지는 검은 선 때문에 효영은 언제나 눈 화장에 신경을 쓰는 편이었다.
스스럼없이 옆으로 다가온 효영은 나와 보폭을 맞추어 걸었다.
“얼굴이 벌겋네. 더워?”
“버스에 사람이 많았어.”
“알 만하다. 아, 월요일 진짜 싫어.”
내게 손부채를 부쳐 주며 효영은 계속 재잘거렸다. 듣는 둥 마는 둥 나는 셔츠 자락을 펄럭였다. 바깥 공기가 옷 속으로 들어오자 몸이 좀 식는 듯했다. 아직 7월이니 앞으로 더 더워질 텐데. 다음 주부터는 아예 새벽같이 출근하는 편이 나으려나.
딴생각에 빠진 나를 효영의 한마디가 현실로 불러들였다.
“주말에 뭐 했어?”
“……그냥 집에 있었어.”
“아, 알겠다. 애인 만났구나?”
“애인은 무슨. 아니야.”
“아니긴 뭘 아니야. 목에 잇자국 다 남았어, 너.”
발돋움한 효영이 옷깃 안을 손가락으로 꾹 찔렀다. 나는 흠칫 몸을 굳혔다. 남자의 흔적이 남은 곳을 정확히 짚은 효영의 손가락이 따끔했다.
“아니, 흡.”
급히 숨을 들이마시느라 사레가 들렸다. 쿨럭쿨럭 기침하며 나는 허리를 수그렸다.
“반응 한번 요란하네.”
혀를 찬 효영이 등을 두드려 주었다. 뜨끔한 마음 때문에 몸이 움츠러들었다. 기침이 진정되자마자 나는 서둘러 셔츠의 단추를 잠갔다.
“모기 물렸어. 그런 거 아니야.”
“그래? 요즘 모기는 이빨도 있나 보다?”
“……그러는 너는. 너는 뭐 했는데.”
“나? 나는 한 부장님이 불러서 필드 나갔다 왔어.”
아무렇지 않게 대꾸하며 효영은 꼬리를 휘둘렀다. 말을 돌리기 위해 다급히 꺼낸 질문이었는데, 생각지 못한 대답이었다. 목을 가리는 것도 잊고 나는 효영을 빤히 보았다.
수줍음이 많은 효영은 그리 사교적인 성격이 아니었다. 같은 대학에, 같은 과를 나온 나와도 졸업 후에야 간신히 친해진 사이였다. 애초에 우리는 전공 책을 펼쳐 놓고 혼자 조용히 공부하는 편이 적성에 맞았다. 골프채를 들고 상사들의 비위를 맞추며 싹싹하게 웃는 효영은 상상이 가지 않았다.
“평일에도 야근하면서 주말까지 회사 사람 만나고 싶냐.”
“미리미리 챙겨 두는 거야. 한 부장님 라인 튼튼한 거 알지? 부장님이 이사님이랑 친하잖아.”
갈수록 놀라운 소리였다. 회사 몇 년 다녔다고 이런 소리도 할 줄 아는 애가 되다니. 하긴, 그동안 배운 게 있겠지. 효영의 직속 상사는 사내 인맥을 살뜰하게 챙기는 사람이었다. 속으로 혀를 차며 나는 넥타이를 조였다.
효영이 쓴웃음을 지었다.
“이게 다 진급 준비다. 너도, 나도 올해는 꼭 진급해야지. 언제까지 주임으로 있을 거야.”
“그래서 나도 준비하고 있어.”
“무슨 준비?”
“영어 공부.”
“그걸 왜?”
“과장님이 자격증 따 오래. 가산점 붙는다고.”
하. 코웃음 친 효영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말도 안 되는 소리야, 그거. 몇 점이나 된다고. 그냥 부장님, 이사님한테 잘 보이면 끝이라니까?”
“과장님 말인데 안 들을 수 없잖아.”
“야, 중요한 인사 결정을 누가 내리겠냐. 과장님? 아니야. 과장님이 아무리 힘을 써도 위에서 안 된다고 하면 안 돼. 그러니까 위쪽을 직접 공략해야지.”
그 뒤로도 효영은 지치지도 않고 자신의 비법을 떠들어 댔다. 핀잔이 절반 정도 섞였지만, 함께 잘되자는 뜻임을 알기에 나는 잠자코 효영의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효영은 낯을 많이 가리는 치타였다. 그 대신 한번 친해지면 상대가 어떤 종이건 인연을 소중히 여기는.
회사가 가까워졌을 때야 나는 효영의 말을 잘랐다.
“알았으니까 가서 일해.”
“그래. 너도 힘내라.”
건성으로 응원을 건넨 효영이 손을 흔들었다. 그러고는 긴 다리를 성큼성큼 놀려 회사 건물로 향했다. 키는 나보다 작은데도 훤칠한 뒷모습이었다. 흔들리는 긴 꼬리를 보고 있자니 잠시 잊었던 문제가 떠올랐다.
“……깜빡하고 있었는데.”
나는 공연히 목을 문질렀다. 누가 봐도 모기 자국으로는 보이지 않을 흔적을 들켰다고 생각하니 얼굴이 달아올랐다. 그나마 효영이니 망정이지, 팀원들에게 보였다가는 무슨 난리가 날지 몰랐다.
핸드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출근 시간까지 10분 정도 남아 있었다. 조금 아슬아슬한 타이밍이었다. 망설이던 나는 이내 결심을 굳혔다. 이걸 보이느니 지각이 나았다.
오늘따라 높아 보이는 회사 건물을 한번 올려다본 후, 나는 약국을 찾아 걸음을 옮겼다.
***
입사한 지 몇 년 만에 출근 시간을 넘긴 데다, 목에 커다란 파스를 붙이고 나타난 나를 팀원 모두가 신기하게 여겼다. 하지만 잠을 잘못 자서 담이 왔다는 변명을 하자 모두가 그 이상 관심을 두지 않았다. 각자 시간을 보낼 방법을 궁리하느라 바빠서였다.
마감 시즌을 보내고 오랜만에 돌아온 휴가 같은 시간이었다. 앞자리 동료는 모니터의 밝기를 낮춘 채 영화를 보았고, 또 누군가는 스마트폰을 손에서 내려놓지 않고 만지작거렸다. 나 역시 의자에 몸을 파묻고 인터넷 기사를 읽었다. 그러다 조금 졸았는데도 눈치챈 사람이 없었다.
어영부영 11시를 넘기자 사무실에 활기가 돌아왔다. 점심 메뉴를 정하는 목소리가 오늘따라 신중했다. 11시 반부터는 사람들의 엉덩이가 들썩거렸다. 이리저리 눈치를 보는 팀원들을 살펴보곤 나는 대표로 입을 열었다.
“과장님. 슬슬 식사하러 가시죠.”
“밥 먹으러 가요!”
“거기 늦게 가면 자리도 없잖아요.”
“에헤이. 부장님 보시면 어쩌려고들 이래.”
점잖게 말린 과장님이 시계를 가리켰다.
“40분에 가지.”
“30분이나 40분이나 그게 그거 아닌가요?”
“일찍 안 가면 줄 서야 하는데.”
과장님은 10분 동안 쏟아진 항의를 강단 있게 넘겼다. 부장님이 보면 잔소리할지도 모른다는 걱정 탓이었다.
정작 우리가 식당에 들어서자, 자리를 잡고 앉은 부장님이 손을 들었다.
“기획팀도 벌써 밥 먹으러 왔어?”
“아, 예.”
“점심 맛있게들 먹으라고.”
덕담처럼 건넨 알은척을 끝으로 부장님은 자기 밥그릇에만 관심을 보였다. 그제야 안심한 과장님이 가슴을 쓸어내렸다. 빙긋 웃으며 나는 빈자리에 앉았다.
점심 메뉴는 강된장 보리 비빔밥이었다. 초식종 위주로 구성된 우리 팀 사람들의 입맛이 반영된 선택이었다. 맛은 나쁘지 않았지만 내게는 양이 조금 부족했다. 일찌감치 밥그릇을 비우곤 나는 젓가락을 들었다. 밑반찬이라도 많이 먹어서 배를 채울 생각이었다.
“언어팀 난리던데요.”
“왜?”
“문제 하나 오류 났나 봐요. 아까 보니까 출제자한테 전화하느라 정신없으시던데.”
“그래도 인쇄 넘기기 전에 잡아서 다행이네.”
밥을 먹는 동안 옆 부서의 일이 화제에 올랐다. 입을 우물거리며 나는 귀를 기울였다. 효영이 있는 팀의 이야기였다.
한가하게 시간 보내기에 한창인 우리 팀과는 정반대로, 효영의 언어논리팀은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전국 모의고사 때문에 한창 바쁠 때였다. 특히 실제 시험을 앞에 둔 마지막 모의고사이기에 더 신경을 쏟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바쁘다면서 주말에 골프라니…….’
출근길에 들었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렇다고 효영이 업무를 소홀히 할 성격도 아닌데. 여러모로 참 대단하다 싶어 속으로 혀를 내두를 때였다. 옆자리의 신입이 직원을 불렀다.
“여기 도토리묵 좀 더 주세요.”
신입이 가리킨 것은 내 앞에 놓인 밑반찬 접시였다. 팀원들의 대화를 들으며 묵묵히 먹다가 어느새 다 먹어 치웠는지 바닥이 드러나 있었다. 나는 머쓱해져서 젓가락을 놓았다. 텅 빈 접시를 테이블 가장자리로 치우면서 신입이 종알거렸다.
“김 주임님 도토리묵 좋아하시나 보다.”
“어. 그냥 조금.”
“항상 신기하더라. 김 주임님은 곰인데 이런 거 좋아하시잖아요.”
신입의 곱슬곱슬한 머리카락 사이로 긴 귀가 쫑긋 섰다. 나는 적당히 입꼬리를 올렸다. 올해 초에 입사한 신입은 눈치가 없는 편이었다.
“지희 씨 잘 모르는구나. 원래 곰은 육식보다 채식을 더 많이 해.”
“아, 진짜요? 제가 지인 중에 곰이 없어서 잘 몰랐어요.”
눈치가 없기로는 과장님도 빠지지 않았다. 적당히 넘기려던 내 말을 끊고서는 과장님이 끼어들었다.
“그래도 덩치에 안 어울리긴 하지. 생선 한 마리쯤은 통째로 들고 뜯어야 하는 거 아니야?”
뭐라 맞장구를 칠 수가 없었다. 나는 그냥 예, 하고 대답하곤 입을 다물었다. 성에 차지 않았는지 과장님이 본격적으로 자신의 경험담을 풀기 시작했다.
“나 대학 다닐 때 말이야, 회색곰이랑 같은 과였는데…….”
신이 난 과장님이 말을 할 때마다 갈색 귀가 쫑긋쫑긋 움직였다. 사슴 수인인 과장님은 자신이 어떤 맹수들과 친하게 지냈는지 자랑스럽게 떠벌리는 게 취미였다. 본능적으로 피하고 싶은 상대와도 잘 지냈다고 어필하는, 일종의 자기 자랑이었다.
나는 시선을 내리고 물을 마셨다. 과장님의 너스레에는 소심한 성격과 예민함을 감추려는 의도가 깔려 있었다. 그렇게 해서라도 콤플렉스를 극복하겠다는데, 굳이 끼어들고 싶지 않았다.
“나는 덩치가 큰 사람들은 그렇게 시원시원하게 움직여야 보기 좋더라고. 솔직히 곰들은 생긴 것부터 좀 답답하잖아.”
자신의 콤플렉스 극복 방법으로 내 콤플렉스를 건드린다는 게 문제였지만.
“과장님. 김 주임님도 계신데 그런 말은 좀…….”
동료가 어색하게 웃으며 과장님을 뜯어말렸다. 그제야 자신이 차별용어를 늘어놓았다는 것을 깨달은 과장님이 입을 다물었다. 나를 보는 사슴의 커다란 눈망울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러게요. 곰이 좀 답답한 면이 있죠. 도토리묵 맛있네요.”
“그, 그렇죠. 이 집 반찬 잘하네.”
황급히 화제를 전환하자 과장님은 입을 다물고 밥그릇에 코를 박았다. 삭막해진 분위기를 방치할 수는 없었다. 나는 일부러 주말에 있었던 야구 경기를 끄집어냈다.
“어제 야구 보셨어요? 역전승했던데.”
작전은 잘 먹혀들었다. 언제 주눅이 들었냐는 듯, 과장님은 금세 자신이 좋아하는 팀의 이야기로 달아올랐다. 한마디씩 거들면서 팀원들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적당히 분위기가 바뀌었을 즈음,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식당을 떠날 때까지 도토리묵 접시에 손을 대지 않았다.
***
오후 시간도 오전과 다를 바 없이 흘러갔다. 느릿느릿 지나는 시계를 재촉하고 싶을 정도로 할 일이 없었다. 5시가 되자 오전처럼 사람들이 엉덩이를 들썩거렸다. 이번에도 부장님을 걱정하던 과장님은 퇴근 시간 10분 전이 되었을 때 의자를 뒤로 뺐다.
“더 할 일 없으면 퇴근들 합시다.”
과장님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가방을 챙긴 사람들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이미 꺼져 있었던 모니터를 괜스레 한 번 켰다가 껐다.
귀가하는 동료들을 보낸 뒤, 나는 잠시 옆길로 샜다. 회사로 돌아가 조심스럽게 언어팀 사무실의 문을 열었다. 단 한 명도 자리를 비우지 않은 사무실 안은 바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누구 한 사람도 내 등장을 눈치채지 못하고 모니터만 들여다보았다. 나는 발소리를 죽여 효영에게로 향했다.
어깨를 툭툭 건드리자 효영이 고개를 들었다. 피곤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이었다. 나를 올려다본 효영이 작은 소리로 속삭였다.
“퇴근?”
“응.”
“좋겠다.”
“그러게 골프 칠 시간에 출근해서 일을 했어야지.”
“놀리냐?”
“아니. 힘내라고.”
나는 가방에서 비타민 음료를 꺼내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남들보다 시작은 빨라도 쉽게 지치는 효영을 위해 편의점에서 사 온 것이었다.
“고맙다. 잘 마실게.”
우는 얼굴을 하며 효영이 내 손을 덥석 잡았다. 눈가에서부터 진하게 이어진 치타 특유의 검은 라인이 마치 눈물처럼 보였다.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는데도 시끄러웠는지 사무실 사람들이 하나둘씩 우리를 돌아보며 눈치를 주었다. 나는 효영에게 말없이 눈인사를 건네고 사무실을 나섰다.
회사를 나오니 6시가 넘어 있었다. 버스 정류장으로 직행하기에는 애매한 시각이었다. 지금 가면 버스는 출근길과 마찬가지로 사람이 꽉꽉 들어찼을 터였다. 그걸 타고 가느니 근방에서 저녁을 먹고 한산해진 뒤에 타는 게 낫지 않을까.
걸음을 멈춘 채 나는 눈을 껌뻑였다.
‘밥 뭐 먹지.’
짧은 고민은 뜻밖의 전화로 인해 깨어졌다.
메뉴를 결정하지 못한 나를 재촉하듯이 가방 속에서 벨이 울렸다. 업무용으로 쓰는 스마트폰의 소리였다. 나는 스마트폰을 꺼냈다. 이미 퇴근을 했지만, 급한 일일지도 모르니 받아야 했다.
“네, 김원재입니다.”
─퇴근했어요?
전화를 받자마자 낯선 목소리가 대뜸 퇴근 여부를 물었다. ‘안녕하세요’라거나, ‘여보세요’ 같은 당연한 인사도 없이. 나는 스마트폰을 귀에서 떼어 내고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발신 번호는 주소록에 등록되지 않은 것이었다. 아무리 뜯어보아도 여러 숫자의 조합은 낯설었다. 고개를 갸웃거리며 기계를 귀에 가져다 댔다.
“누구시죠.”
─나 모르겠어요?
“모르겠는데요.”
─아, 서운하네. 그렇게 뜨거운 시간을 보내곤 벌써 잊어버리다니.
뻔뻔하게 지껄이는 소리를 듣자 얼굴이 홧홧하게 달아올랐다. 전화를 건 사람이 누구인지 뒤늦게 짐작이 갔다. 스마트폰을 던져 버리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나는 목소리를 죽였다.
“당신이 왜 나한테 전화를…….”
─못 할 것도 없잖아요.
“저기요. 그날 뒤치다꺼리해 준 건 고마운데 말입니다.”
치근덕거리지 말라는 경고를 하려 했지만, 남자가 먼저 말을 가로챘다.
─고마우면 갚아야죠.
“아니, 나는…….”
─말로만 때우게요? 고맙다면서요. 야박하게 굴면 안 되죠.
“…….”
─안 그래요, 김원재 씨?
불쑥 튀어나온 이름에 말문이 막혔다.
그래, 이 사람 내 이름을 알고 있었지. 번호도 알고.
명함을 흔들며 화사하게 미소 짓던 남자를 떠올리니 속이 갑갑해졌다. 나는 습관처럼 넥타이를 풀다가 손을 멈추었다. 목 부근을 만지자 희미해졌던 파스 냄새가 다시 풍겼다.
꼼꼼히 옷깃을 여미고 나서야 적당한 대답이 떠올랐다.
“뭘 원합니까?”
─저녁 안 먹었죠? 저녁이나 같이 먹읍시다.
“당신은 육식종이니까 나랑은 입맛이 안 맞을 텐데요.”
식성 핑계를 대며 적당히 거절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남자가 더 빨랐다.
─알아요. 잡식종이지만 고기보다 다른 음식을 더 좋아하는 거.
어?
벌린 입을 다물지 못하고 나는 말을 멈추었다. 남자가 웃음기 어린 목소리를 내었다.
─샐러드 어때요?
“…….”
─연어 샐러드 잘하는 집 아는데.
뭐라 답할 수 없었다. 입술을 달싹거리다 말고 나는 입을 다물었다.
─나쁘지 않죠?
재차 묻는 남자의 목소리에 확신이 담겨 있었다. 내가 아무리 머뭇거려도 이미 답을 알고 있다는 듯이.
“……예.”
차마 거짓을 입에 담지 못하고 나는 수긍했다. 남자의 말대로, 나쁘지 않았다.
남자가 정한 식당은 회사에서 걸어서 5분 거리에 있는 곳이었다. 역 이름과 상호를 듣자마자 어디쯤 있는지 바로 감이 잡혔다. 나도 저녁을 먹으러 가끔 들르는 식당이었다. 남자의 말대로 연어 샐러드를 잘하지만, 그렇다고 맛집으로 추천할 만큼 유명하지 않은 평범한 샐러드 전문점.
하필 골라도 거기라니. 우연이라기엔 영 찜찜했다. 물어볼까, 말까. 고민하는 사이에도 나는 눈으로 식당으로 향하는 길을 찾았다.
남자의 선택은 정말로 우연이 아니었다.
─김원재 씨 회사에서도 가까우니까 괜찮을 것 같아서요.
“그건 어떻게 알았어요?”
─어떻게 알긴요. 명함에 회사 주소 적혀 있잖아요.
“……아.”
─거기면 내 회사에서도 그리 멀지 않아요. 금방 갈 테니까 가게 앞에서 기다려요.
이따 봐요. 가볍게 인사를 건넨 남자가 전화를 끊었다.
명함. 그놈의 명함. 빼앗아 왔어야 했는데. 후회해도 소용없는 일이었다. 나는 이마를 감싸 쥐었다. 전봇대를 붙들고 머리를 쿵쿵 부딪치면 속이 편해지지 않을까. 그날의 멍청한 짓도 기억에서 사라지고.
‘그러면 뭘 해. 또 만나자고 약속을 해 버렸는데.’
남자가 떠들게 내버려 두는 게 아니었다. 누구인지 확인했을 때 바로 전화를 끊고 차단했어야 했다. 과거의 실수 위에 새롭게 쌓인 실수가 한심했다.
그렇다고 약속을 무를 수는 없는 일이었다. 이 이상 멍청한 짓을 하지 않도록 정신을 제대로 잡고 있다가 헤어지면 되겠지. 머리카락을 마구 흐트러뜨린 뒤, 나는 발을 옮겼다.
가게 앞에서 기다리라더니, 남자는 내가 마음의 대비를 하기도 전에 나타났다.
“김원재 씨.”
익숙한 샐러드 전문점의 간판 아래에 정장을 빼입은 회사원이 서 있었다. 사방을 살피는 그의 꼬리가 느릿느릿 좌우로 흔들렸다. 어쩐지 불안해 보이는 모습이었다. 그러다 나를 발견하자 남자의 얼굴이 환해졌다. 내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에서 반가움이 뚝뚝 묻어났다.
나는 조금 걸음을 빨리했다. 가게 앞에서 기다리라더니, 남자가 나보다 먼저 도착할 줄은 몰랐다. 정말로 근무처가 이 근처에 있는 모양이었다. 많이 기다리지는 않았겠지. 식당까지 걸어가는 짧은 시간이 초조하게 느껴졌다.
마침내 남자의 앞에 섰을 때, 낯선 현실감이 밀려왔다.
남자는 확실히 멀리서도 눈에 잘 띄는 사람이었다. 비단 큰 키 때문만은 아니었다. 잘 손질된 황금빛 머리카락이 식당가의 네온사인을 받아 형형색색으로 빛났다. 균형 잡힌 몸에 잘 맞는 정장도 보기 좋았다. 미형인 얼굴에 어린 웃음마저 당황스러울 정도로 매력적이었다.
남자는 그날, 침대 위에서 몸을 겹쳤을 때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였다.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었다. 이번이 남자와 나의 두 번째 만남이니까.
나는 말없이 가방을 든 손에 힘을 주었다. 이런 상황에 어울리는 인사가 무엇일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안녕하세요’는 아까 통화할 때 말했어야 했다. ‘오랜만이네요’는 오랜만이 아니니 어울리지 않았다. ‘오래 기다렸습니까?’ 정도가 무난할까.
“나도 방금 왔어요. 들어가죠.”
첫마디를 고른 보람이 없었다. 싱긋 웃은 남자가 식당의 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먼저 들어가지 않고 안을 가리켰다. 익숙하지 않은 에스코트였다. 꾸벅 고개를 숙이고 나는 남자를 지나쳤다.
식당에 들어선 뒤에도 남자는 시선을 끌었다. 주로 초식종인 손님들 사이에서 사자는 신기한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우리에게 쏠리는 시선이 따끔따끔했다. 나는 남자를 구석 자리로 데려갔다.
자리에 앉은 뒤부터 내게 꽂히는 눈이 하나 더 늘어났다. 남자는 뚫어지게 나를 바라보았다. 메뉴판을 밀어 줘도 열어 볼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나를 담은 남자의 노란 눈이 반짝반짝 빛났다.
“잘 지냈어요?”
“우리가 그런 거 물을 사이입니까?”
“와. 야박하네.”
“야박이고 뭐고, 뭐 먹을지 안 고릅니까?”
“김원재 씨가 먹는 거로 먹을게요.”
“그럼 연어 샐러드 대자로 2인분 주문합니다.”
“여기 와 본 적 있어요?”
“저녁 먹으러 종종 옵니다.”
“그렇구나.”
고개를 끄덕인 남자는 내가 주문을 하는 사이에도 눈길을 거두지 않았다. 우리는 고작 두 번째 만나는 사이인데, 오랜 지인과 재회한 것처럼 사근사근하게 구는 이유가 뭘까. 남자의 행동을 이해하기 어려웠다.
다행히 연어 샐러드는 금방 나왔다. 큼직한 샐러드 볼에 잔뜩 담긴 양상추와 각종 채소, 연어를 보자 군침이 돌았다. 특히 앙증맞은 방울토마토가 제일 마음에 들었다. 남자를 앞에 둔 것도 잊어버리고 나는 입맛을 다셨다.
남자가 포크를 건네며 눈웃음을 쳤다.
“맛있게 먹어요.”
이런 친절도 부담스럽기 짝이 없었다. 나는 잠자코 포크를 받아 들었다.
식사를 하는 내내 우걱우걱 풀 씹는 소리만이 울렸다. 남자는 별다른 말을 건네지 않았다. 그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치면 예의 화사한 눈웃음을 쳤다. 시선을 먼저 돌리는 건 항상 내 쪽이었다.
얼마 가지 않아 테이블 위에 불균형이 생겼다. 내 샐러드 볼은 비어 가는데, 남자의 그릇은 여전히 가득 차 있었다. 가만 보니 남자는 샐러드에 거의 손을 대지 않았다. 간간이 연어 조각을 깨작깨작 골라 먹는 게 전부였다.
곧 포크를 내려놓은 남자가 자신의 샐러드 볼을 가리켰다.
“내 것도 먹을래요?”
“그럴 거면 왜 시켰어요?”
“김원재 씨랑 같은 거 먹고 싶어서.”
“…….”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자꾸 친근한 척 다가오는 남자가 불편했다. 좀 더 명확하게 선을 그을 필요가 있었다.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먹어요. 나는 감사 표현을 하러 온 거고, 이걸로 끝입니다.”
“알아요.”
알면 왜 이렇게 치근덕대는데? 튀어나오려는 질문을 욱여넣고 최대한 온건한 경고를 골랐다.
“원래 발정기를 아무하고나 보내지 않습니다. 당신이랑 잔 건 사고였으니까 서로 없던 일로 칩시다.”
아무리 둔한 나라도 눈치챌 정도로 남자의 눈빛은 노골적이었다. 두 번째 만남, 그리고 두 번째 관계를 기대하는 눈빛.
대놓고 쏟아지는 유혹에 기가 막혔다.
‘설마 내가 또 하려고 나온 줄 알았나.’
“아, 내가 눈치가 없었네.”
내 말을 듣는 건지 마는 건지, 남자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더니 주섬주섬 품을 뒤졌다. 검은 지갑을 연 남자가 명함을 꺼내 내밀었다.
“나는 김원재 씨 이름을 알아도 김원재 씨는 내 이름을 모르죠. 통성명이 늦어서 미안합니다. 서은겸입니다.”
“필요 없는데요.”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예요. 받아 둬요.”
남자는 내 손에 명함을 억지로 쥐여 주었다. 가까이 다가온 남자에게서 달콤한 냄새가 밀려왔다. 나는 종이 위에 적힌 글자를 확인하지 않고 바지 주머니 속에 쑤셔 넣었다.
자신의 목적이 드러나자 남자는 아예 식사를 포기했다. 턱을 괴고 나를 바라보면서 계속 말을 걸었다.
“김원재 씨 다니는 회사 거기죠? 로스쿨 입시 전문학원.”
“예.”
“잘나가지 않아요? TV 광고도 많이 하던데.”
“그런가 봅니다.”
“김원재 씨도 강의하고 그래요?”
“아뇨. 그건 강사들이 하는 거고요. 그냥 입시 관련 콘텐츠 기획합니다.”
“멋지네. 콘텐츠 기획.”
이름은 거창한 콘텐츠 기획이어도, 사실 교재 개발과 강사 관리가 업무의 전부지만. 내가 더 대꾸하지 않자 남자는 입을 다물었다. 다른 화젯거리를 찾는지 남자가 이리저리 눈을 굴렸다. 빨리 그릇을 비우고 일어서야겠다는 일념 하나로 나는 포크를 빠르게 놀렸다.
샐러드 볼이 바닥을 드러냈을 때였다. 남자가 손끝으로 테이블을 똑똑 두드렸다.
“김원재 씨는 나한테 궁금한 거 없어요?”
“없습니다.”
“그래도 한 침대에서 섹스한 사이잖아요, 우리.”
“엄밀히 말하면 별거 안 했죠.”
“삽입이 없으면 섹스가 아니다?”
“좀 조용히 말해요.”
지나가는 점원을 곁눈질하며 나는 으르렁거렸다. 남자가 빙긋 웃었다.
“나는 우리가 한 게 섹스라고 보는데요. 삽입하지 않았어도 서로의 몸을 만지고 함께 절정에 닿으면 그게 섹스죠.”
“아, 좀…….”
“삽입이 기준이 아니면 뭐가 문제인데요. 혹시 사랑이 없으면 안 된다고 생각해요?”
“알았어요. 그렇다고 칩시다. 당신이랑 그거 했다고 칠게요.”
“그러니까 우리는 처음 만난 날 섹스까지 한 사이인데. 서로에 관해 궁금해하는 게 당연하지 않아요?”
대화가 원점으로 돌아갔다. 기대하는 눈치인 남자에게는 미안하지만, 딱히 묻고 싶은 게 없었다. 사자에 관해 알고 싶은 점조차도. 나는 쫑긋 세운 남자의 귀를 바라보았다. 저 귀에 들려줄 만한 질문이라.
옅은 황토색 털을 보자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그럼 하나만 물어보죠.”
남자의 얼굴에 생기가 돌았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포크로 연어 토막을 찔렀다.
“그날 밤에 왜 토끼 귀 머리띠를 쓰고 있던 겁니까?”
그것 때문에 말도 안 되는 착각을 한 내가 벌인 짓을 생각하면 남자의 멱살을 쥐고 싶었다. 대체 왜 그런 머리띠를 쓰고 있었을까. 초여름부터 핼러윈 준비를 하는 것도 아닐 텐데.
재깍 날아올 줄 알았던 대답은 뜻밖에도 돌아오지 않았다. 도리어 남자는 내게 되물었다.
“그게 궁금해요?”
“예.”
“……그럼 내가 궁금한 게 아니네.”
“당신 이야기잖아요.”
“아뇨. 결국은 또 토끼인데요. 내가 아니라.”
“무슨 상관입니까. 내가 궁금한 건 그것뿐인데.”
물어보라고 재촉하더니, 정작 질문을 하자 뜸을 들이는 건 또 무슨 경우인가. 대답하지 않겠다면 나도 더 질문할 이유가 없었다. 나는 입을 다물고 우물우물 연어를 씹었다.
남자가 한숨을 쉬었다.
“동생한테 선물 받았어요.”
“그런 걸 선물 받아요?”
“네.”
남자는 그 이상 답하지 않았다. 조금 전까지 시끄럽게 굴던 사람답지 않게 입을 꾹 다물어 버렸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 알 수 없었다. 아니, 솔직히 잘못한 것 같지도 않았다. 조용해진 식탁에 만족하며 나는 묵묵히 그릇을 비웠다.
입가심으로 물을 마시는 동안에도 남자는 자신의 샐러드에 손을 대지 않았다. 턱을 괸 채 벽의 메뉴판을 응시했다. 이 식당의 메뉴가 그렇게 궁금한 것도 아닐 텐데, 남자의 시선은 움직이지 않았다.
온몸으로 실망했다고 티를 내는 남자가 성가셨다. 이대로는 맛있게 먹은 저녁이 얹힐지도 몰랐다. 나는 슬슬 골치가 아파 오는 머리를 쥐어짰다. 뭐라도 한마디 걸어 줘야 할 것 같았다.
“원래 그렇게 아무하고나 자요?”
“예?”
“궁금한 거 물어보라면서요.”
남자가 입맛을 다셨다.
“……그렇지는 않아요. 아무나 안을 수 있는 몸이 아니라서.”
“그게 뭐죠.”
“뭐, 그런 거예요.”
답을 얼버무린 남자가 컵을 들었다.
억지로 만들어 낸 질문은 그럭저럭 쓸모가 있었다. 물을 마시고 난 뒤, 남자는 조금 전의 기세를 회복했다.
“이제 어디 갈까요?”
“나는 저녁 먹으러 온 건데요.”
“저녁만 먹고 헤어지게요?”
“네.”
“그럼 집에 데려다줄까요? 나 차 가지고 왔어요.”
“버스 타고 가면 됩니다.”
“버스? 정류장 어디예요?”
“알아서 갈 테니까 신경 쓰지 마시죠. 이건 내가 계산합니다.”
그 이상 남자가 접근하지 못하게 자리에서 일어났다. 계산을 하는 동안 내 뒤에서 서성이던 남자는 식당 바깥까지 나를 쫓아왔다. 나는 버스 정류장으로 가는 길과는 반대 방향을 가리켰다.
“잘 가요.”
“와. 진짜 가라고요?”
“나는 갚으라는 거 다 갚았습니다.”
설마 진짜로 저녁 식사 뒤에 다른 일이 이어지리라 기대했나. 순진하다고 해야 할지, 자신감이 너무 넘쳤다고 해야 할지.
바보가 아니고서야 두 번씩이나 똑같은 사고를 칠 리가 없지 않은가.
입술을 달싹이던 남자가 이내 피식 웃었다.
“밥 잘 먹었어요, 김원재 씨.”
거의 먹지도 않았으면서.
나는 묵묵히 고개를 까닥였다. 눈인사로 답을 대신한 남자가 몸을 돌렸다. 그의 넓은 어깨가 조금 처져 있는 것도 같았다.
남자를 먼저 보내고 난 뒤 걸음을 옮겼다. 곧장 정류장으로 향하지는 않았다. 남자가 내 뒤를 밟을 것 같아서 신경 쓰였다. 나는 근방을 한 바퀴 돌며 때 아닌 산책을 했다. 그러다 적당히 시간이 지났을 무렵 버스를 타러 갔다.
버스 안에는 아직도 퇴근하는 회사원들이 가득했다. 저녁을 너무 빨리 먹어치운 탓이었다. 사람들 틈에 끼어 손잡이를 붙들고 서자 체온이 다시 올라 더웠다.
버스 안만큼이나 도로 위도 혼잡했다. 앞으로 나아가나 싶다가도 버스는 금방 멈추어 섰다. 흔들리는 차에 실려 가고 있자니 속이 울렁거렸다. 배를 문지르며 나는 한숨을 쉬었다.
“괜히 먹자고 했나.”
연락이 오든 말든 그냥 무시할걸. 시간만 버린 듯했다. 습관처럼 바지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는데 무언가가 손끝에 닿았다. 손을 꺼내자 구겨진 명함이 끌려 나왔다.
필요 없다는데도 억지로 명함을 쥐여 주던 남자가 생각났다. 역시 성가신 존재였다. 헤어지고 난 뒤에도 계속 떠올라 귀찮게 하는 걸 보면.
“그냥 버릴 수는 없지…….”
이대로 쓰레기통에 던져 넣자니, 거기에 적힌 남자의 이름이며 연락처가 신경 쓰였다. 집에 가서 처리하자. 결심하면서 나는 명함을 꾸깃꾸깃 접었다.
더는 내 멍청함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남자와 만나고 싶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