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곰은 숨을 고른다
그 남자는 사자였다. 몽롱한 눈으로도 확실히 구분할 수 있었다. 그는 절대 토끼가 아니었다.
술집은 텅 비어 있었다. 본격적으로 술을 마시기에는 너무 이른 저녁이었다. 처음 들어왔을 때만 해도 나뿐이었던 손님은 시간이 흐른 뒤에도 그리 불어나지 않았다. 내가 앉은 테이블과 근처 두 테이블, 그리고 바 자리만이 차 있었다.
손님이 적어서일까, 가게 안의 에어컨은 시원찮았다. 가만히 앉아 있는데도 더위가 몰려 왔다. 목덜미며 뺨이 뜨끈뜨끈 달아올랐다. 직원을 불러 온도를 내려 달라고 요청해도 마찬가지였다. 시원한 바람 한 줄기가 이마를 스치다가도 금세 몸이 뜨거워졌다. 홀로 열기를 내뿜는 숯이 된 느낌이었다.
아무리 여름이 위험한 계절이라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좀처럼 식지 않는 몸이 갑갑했다. 내가 넥타이 매듭에 손가락을 집어넣고 잡아당길 때였다.
“아, 정말요?”
어디선가 커다란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소리가 나는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소리의 근원지는 바였다. 내게 등을 보이고 앉은 남자가 어깨를 들썩였다. 바텐더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남자의 고개가 살짝 들려 있었다. 그의 손이 허공에서 몇 번 움직이자, 컵을 닦던 바텐더가 큰 소리로 웃었다. 웃음소리는 그가 아니라 바텐더가 흘린 것이었다.
내가 왜 넥타이를 잡아당기고 있었더라.
조금 전의 일인데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나는 손을 내리고 남자를 응시했다.
앉은 채로도 티가 날 만큼 남자는 건장한 체격이었다. 190센티미터를 훌쩍 넘을 듯한 키와 넓은 어깨는 바를 채운 사람들과 비교가 되지 않았다. 그의 옆에 앉은 이들이 하필 쥐이기는 했지만. 키 작은 쥐들 사이로 삐죽 튀어나온 남자의 머리통을 보며 나는 피식 웃었다.
한곳에 시선을 붙이기란 생각보다 어려웠다. 무거운 머리가 자꾸만 아래로 떨어졌다. 남자의 어깨에서 미끄러진 눈길은 등을 타고 밑으로 추락했다. 남자는 그곳에도 있었다. 바닥에 닿을 듯 말 듯 흔들거리는 긴 꼬리가 보였다. 쏟아지는 태양의 빛살을 연상케 하는 밝은 황색 털이 아름다웠다.
나는 턱을 괴고 억지로 눈을 부릅떴다. 시선을 다시 올리자, 이번에는 잘 익은 벼 낟알 같은 색의 머리카락이 눈에 들어왔다. 제법 화려한 색과 길이였다. 그게 무엇을 뜻하는지는 나도 알았다. 나는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갈기네. 사자 갈기.”
그러니까 남자는 사자였다. 누가 봐도 그냥 사자였다. 내 가슴속에서 6년을 뛰어다닌 토끼와는 닮은 구석이 하나도 없었다.
아니, 굳이 꼽자면 딱 하나 있었다. 남자의 머리 위에서 하얗고 길쭉한 귀가 흔들렸다. 사자인 남자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색과 모양이었다.
그 귀가 나를 끌어당겼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그리운 토끼 귀를 향해 홀린 듯이 다가갔다.
취기 때문에 걸음을 곧게 옮기기 힘들었다. 비틀거리는 몸이 근처 테이블을 툭툭 밀쳤다. 사람들의 욕설이 날아왔지만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하얀 귀가 또 내 앞에서 사라지기 전에 붙들어야 했다.
“정운아.”
한참 만에야 남자의 등 뒤에 닿았다. 나는 숨을 골랐다. 바싹 마른 입술을 벌려 언제나 나를 두근거리게 했던 이름을 입에 담았다. 그러고는 손을 뻗었다.
“정운아.”
부드러운 털이 손끝을 스치는 감촉을 마지막으로, 내 기억은 끊겼다.
***
눈을 떠 보니 아침이었다. 술집의 어두운 조명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환한 빛이 눈을 찔렀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고 눈에 힘을 주었다. 희뿌연 배경 속에서 이상한 모습이 어른거렸다. 낯선 남자가 허리를 숙이고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꿈인가.’
나는 눈꺼풀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두어 번 눈을 깜빡였지만 남자의 얼굴은 사라지지 않았다. 도리어 주위 풍경까지 시야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연한 회색 벽지. 민들레 꽃 모양의 장식이 빛나는 천장 등. 반쯤 열린 하얀 문. 키 큰 원목 옷장.
무엇인지는 몰라도 위잉위잉 돌아가는 가전제품의 소리까지 인식하자 상황이 파악되었다. 나는 평범한 가정집의 침대에 누워 있는 것 같았다.
“잘 잤어요?”
남자의 목소리가 마지막까지 남은 잠기운을 흩어 버렸다. 나는 멍하니 남자를 마주 보았다. 마치 예전부터 알던 사람처럼 스스럼없이 건네는 인사가 어색했다. 내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자 남자가 다른 질문을 던졌다.
“속은 좀 괜찮아요?”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이면서 몸을 일으켰다. 이불이 부스럭거리며 미끄러져 내렸다. 살갗을 스치는 천의 감촉이 부드러웠다. 그제야 내가 맨몸이라는 사실을 깨닫자 입 안이 바싹 말랐다. 침대에서 빠져나가려던 계획을 수정하고 나는 침대 헤드에 기대어 앉았다.
되도록 자연스럽게 보이려 애쓰며 이불을 끌어 올리는 사이, 남자가 손에 든 것을 내게 내밀었다. 파란색 민무늬 컵이었다.
“이거라도 마셔요. 속 풀리게.”
“감사합니다.”
반사적으로 인사말을 중얼거리며 나는 컵을 받아 들었다. 매끈한 컵의 가장자리를 쥐는 와중에도 남자에게서 눈을 돌릴 수 없었다.
남자는 당황스러운 상황에서도 넋을 놓고 보게 될 정도로 미남이었다. 투명하게 빛나는 남자의 호박색 눈은 고양잇과 같았다. 짙은 쌍꺼풀과 긴 속눈썹에 아래로 보이는 높은 콧대가 날카로웠다. 오른쪽 볼에 콕 박힌 점은 어쩐지 야릇한 분위기를 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화려한 금빛 머리카락이었다. 구불거리는 머리카락은 귀를 덮는 길이였다.
다른 건 몰라도 남자의 머리카락 색만큼은 눈에 익은 구석이 있었다. 머리카락 사이에 솟은 동그란 귀도 묘하게 신경 쓰였다. 나는 미간을 찌푸렸다.
이 사람이 누군데 나를 자기 집까지 데려와서 재웠지?
고민하며 컵에 입을 가져다 댔다. 내 행동을 흥미 어린 눈으로 지켜보던 남자가 머리를 모로 기울였다.
“어제는 많이 마신 것 같던데. 바 직원들이 걱정했어요.”
가까스로 남자가 누구인지 떠올랐다. 바텐더에게 말을 걸었던 사자였다. 건장한 체격에, 갈기 같은 머리칼을 가진 그 남자.
하지만 남자의 머리 위에서 흔들리던 건 토끼 귀였는데.
되짚은 기억의 끝이 의아했다. 게다가 입 안에 퍼진 물의 맛도 이상했다. 미지근한 물은 어째서인지 달짝지근했다. 숙취 때문에 맛을 잘못 느낀 걸까. 입에서 컵을 떼어 내고 안을 확인했다. 컵 안에는 반쯤 물이 차 있었다. 투명해야 할 물의 색은 약간 노르스름했다.
“꿀물이에요.”
컵과 눈싸움을 하는 내게 남자가 먼저 말을 건넸다. 내가 아무 대답 없이 그를 올려다보자 남자는 어깨를 으쓱였다.
“걱정하지 마요. 물에 꿀만 탔으니까.”
“냄새가 안 나는데…….”
“아, 혹시 몰라서 냄새 없는 거로 골랐어요. 꿀 냄새 역하다고 싫어하는 사람들도 많잖아요.”
답을 마친 남자가 얼른 마시라는 듯 손짓했다. 남자의 호의가 영 의심스러웠지만 나는 순순히 컵을 쥐었다.
내가 꿀물을 다 마실 때까지 남자는 묵묵히 기다렸다. 힐끔거리며 눈치를 살펴도 빙긋 웃기만 했다. 슬쩍 입맛을 다시며 나는 남자에게 컵을 내밀었다.
“잘 마셨습니다.”
빈 컵을 협탁 위에 올려놓고, 남자는 다시 나를 내려다보았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 듯했다. 하지만 남자는 좀처럼 입을 열지 않았다.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로 나를 보기만 할 뿐이었다.
결국 내가 먼저 그에게 말을 건넸다.
“옷은 어디 있죠?”
컵을 들고 마시는 사이 미끄러진 이불은 허리 부근까지 내려갔다. 덕분에 나는 배꼽 근처까지 알몸을 남자에게 내보이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건 하반신에 속옷의 감촉이 느껴진다는 점이었다.
어제 처음 본 남자의 침대 위에, 속옷만 걸치고 앉아 있는 상황이 기껍지 않았다. 특히 아침이라 두둑하게 부풀어 오른 중심을 들킬까 봐 민망했다. 나는 허리 부근의 이불을 끌어모아 다리 사이를 가렸다.
흐음, 소리를 낸 남자가 팔짱을 질렀다.
“불편해 보여서 벗겼어요.”
“지금 당장 입고 싶은데요.”
“아, 지금은 안 돼요. 빨래 돌려서.”
“제 옷을 왜 마음대로 벗기고 빱니까?”
“기억 못 하는구나. 그쪽, 취해서 비틀거리다가 요란하게 술을 엎었어요. 덕분에 다른 사람들 술값까지 내가 다 물어 줬는데 말이죠.”
“……아.”
“건조 다 되려면 조금 더 기다려야 할걸요.”
남자는 내 뒤쪽을 턱짓으로 가리켰다. 아까부터 들리던 소리는 건조기가 돌아가며 내는 소음인 듯했다. 내가 정신없는 사이 뒤치다꺼리를 해 주었다니 고마운 일이기는 한데, 그래도 기분이 찜찜했다.
보통 술자리에서 우연히 만난 취객한테 이렇게까지 해 주나?
나는 침대를 짚은 손에 힘을 주었다.
“아까는 불편해 보여서 벗겼다면서요.”
“뭐, 겸사겸사.”
얼버무린 남자가 말을 돌렸다.
“그나저나 전 애인이 토끼였나 봐요.”
의심으로 가득 찼던 머릿속이 돌연 끓어올랐다. 나는 남자의 말을 막기 위해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러나 남자 쪽이 한발 빨랐다.
“정운이? 그런 이름인 것 같던데.”
낯선 입술에서 튀어나온 이름에 숨이 막혔다. 정운이의 이름은 지금으로서는 제일 듣고 싶지 않은 단어였다. 나는 곧장 시선을 아래로 떨어뜨렸다.
잔인하게도 남자는 말을 계속 이었다.
“나 끌어안고 계속 ‘정운아, 정운아’ 되풀이한 거 기억 안 나요? 너무 애절해서 헤어진 애인의 이름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나? 내 귀도 꽉 붙들고 말했잖아요.”
“…….”
“토끼 귀 머리띠 말이에요. 어제 내가 쓰고 있었던 거.”
아, 그게 머리띠였구나.
헛웃음을 삼키며 나는 눈을 내리깔았다. 내내 이상하게 여겼던 귀의 정체가 고작 그런 것일 줄이야.
내가 잘못 본 게 아니었다. 남자의 머리카락 사이로 튀어나왔던 하얗고 긴 귀는 토끼 귀가 맞았다. 단지 가짜 귀였고, 가짜에 홀린 내가 멍청했을 뿐.
남자가 나를 속인 게 아니라, 내가 스스로 속아 넘어간 것인데도 불쾌함이 밀려왔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더 이상 남자에게 볼일은 없었다. 건조가 덜 된 옷이라도 걸치고 빨리 이 집을 빠져나가고 싶었다.
침대 밖으로 나가기 위해 몸을 틀었을 때였다. 힘이 실린 손이 어깨를 붙들고 뒤로 밀쳤다. 순간 균형을 잃고 나는 뒤로 쓰러졌다. 푹신한 베개가 등 뒤에 깔렸다. 그사이 남자가 침대 위에, 정확히는 내 다리 위에 올라탔다.
순식간에 어깨 양옆을 짚은 남자가 허리를 숙였다. 얼굴을 바짝 붙이고 그는 눈웃음을 쳤다.
“그쪽은 개? 곰?”
“……곰인데, 그게 무슨 상관…….”
“아, 역시. 곰이구나.”
갑자기 덮쳐든 사람답지 않게 시답잖은 질문이었다. 당황스러운 상황이 무슨 의미인지 이해되지 않았다. 남자가 혀를 내어 자신의 아랫입술을 핥았다.
“내가 취한 사람은 안 잡아먹지만, 술에서 깬 사람은 맛있게 먹는 취향이라.”
“무슨 개소립니까.”
“발정기죠, 지금?”
정운이의 이름에 이어 두 번째로 당혹스러운 단어가 튀어나왔다. 나는 아까부터 신경 쓰이던 중심을 황급히 가렸다. 하지만 소용없는 짓이었다.
“그쪽 잘 때 다 봤어요. 아침부터 건강하던데.”
저절로 얼굴이 달아올랐다. 키득키득 웃음을 흘리며 남자가 속삭였다.
“원나잇 해 본 적 있어요?”
그런 걸 해 봤을 리가. 아무렇지 않게 묻는 남자가 어이없었다. 내 침묵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남자의 얼굴이 더욱 가까워졌다.
“그럼 나랑 해요. 아, 지금은 아침이니까 원모닝이려나.”
남자가 입술을 달싹일 때마다 달콤한 냄새가 사방에 풍겼다. 다시 숨이 막혔다. 갈 길 잃은 시선을 이리저리 돌리며 나는 중얼거렸다.
“무슨 말도 안 되는…….”
남자의 눈매가 반원을 그리며 예쁘게 접혔다.
“기분 좋게 해 줄게요. 전 애인은 생각도 안 날 만큼.”
비로소 남자에게서 풍기는 끈적한 향의 정체를 알아챘다. 맹수가 흥분했을 때 내뿜는 체취였다. 점막을 찌르는 듯한 짙은 냄새가 거슬렸다. 코를 막으려다 나는 생각을 바꾸었다.
“개수작 말고 비켜요.”
어깨를 붙들자 남자의 향이 더 짙어졌다. 티셔츠 아래로 느껴지는 몸은 예상보다 단단했다. 손아귀에 악력을 더하면서 나는 남자를 밀쳤다.
남자는 순순히 물러나지 않았다. 도리어 더욱 가까이 몸을 숙였다. 바짝 힘이 들어간 어깨 근육이 내 손안에서 꿈틀거렸다.
“내가 왜 그쪽을 집으로 데려왔을 거 같아요?”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습니까?”
되물으면서도 나 자신의 한심함에 웃음이 나왔다. 아무런 대가를 바라지 않는 호의가 존재할 리 없었다. 심지어 나와 남자는 어젯밤 처음 만난 사이였다.
설마 밤사이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니겠지?
시선이 무의식중에 아래로 떨어졌다. 아까는 맨살을 가리느라 바빴기에 속옷 안을 확인할 정신이 없었다. 이불을 들추고 싶어도 내 위에 올라앉은 남자 때문에 불가능했다.
남자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걱정하지 마요. 아까도 말했지만, 취해서 정신 못 차리는 사람 잡아먹을 정도로 양심 없지는 않으니까.”
“그건 양심의 문제가 아니라 범죄죠.”
“그래서 깰 때까지 기다렸잖아요.”
웃기는 해명이었다. 남자의 행동은 충분히 수상했다. 초면인 취객을 부축하는 척하면서 자신의 집으로 데려온다. 그러고는 마음대로 옷을 벗기고, 상대가 깨어나면 위에 올라타 덮치려고 한다. 뻔한 짓이었다.
사자들은 다 이런 식인가.
남자의 머리칼 사이에서 둥근 귀가 흔들렸다. 화려한 밀빛 머리를 올려다보며 비웃음을 삼켰다. 그래, 만나도 하필 사자였다. 하나의 짝으로 모자라 여럿이 집단을 이루고 난교를 즐기는 이들. 사자에게 낯선 타인과의 하룻밤 정도는 아무것도 아닐 것이다. 그러니 아무렇지 않게 원나잇 제안을 던지겠지.
가볍기 짝이 없는 문란함이 한심했다. 그런 사고방식이 다른 종에게도 통할 줄 아는 거만한 자신감도.
나는 숨을 길게 들이마셨다. 두꺼운 이불 때문인지, 당황해서인지, 혹은 아까부터 맴도는 불쾌감 탓인지 체온이 올라 있었다. 뜨거운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남자와 닿은 살갗이 후끈거렸다.
열기를 식히기 위해서라도 남자를 떨쳐 내야 했다. 말로 해결이 안 되니 몸으로 싸울 수밖에. 승산은 충분히 있었다. 사자가 아무리 힘이 세더라도 내가 작정하고 덤벼들면 만만히 보지 못할 것이다. 성난 곰이란 그런 존재니까.
주먹을 날리기 직전, 마지막 경고를 담아 으르렁거렸다.
“당장 안 비키면 나도 안 참습니다.”
남자는 말없이 나를 내려다보았다. 점처럼 작은 동공이 급격히 커지며 홍채를 밀어냈다. 노란 눈에 비쳐 있었던 나의 인영도 함께 작아졌다. 동시에 남자는 긴 꼬리를 양옆으로 휘두르기 시작했다. 부드러운 털이 이불을 스치면서 사락사락 소리를 냈다. 몸짓 하나하나에서 긴장이 묻어났다.
언제 덮쳐들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사냥 준비를 마친 맹수의 자세였다.
먼저 공격하는 편이 낫겠다. 재빨리 판단을 마치고 나는 힘을 실은 팔을 뒤로 당겼다.
그대로 남자의 턱에 주먹을 날리려는 순간, 남자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먼저 유혹할 때는 언제고.”
“예?”
“섹스하자면서요.”
벌써 몇 번째더라. 이 사람이 내뱉은 말에 머릿속이 멍해지는 게.
남자의 카운터는 제대로 먹혀들었다. 당황해서 멈춰 있는 사이, 남자가 상체를 일으켰다. 어째서인지 억울함이 밴 목소리로 그는 중얼거렸다.
“지금 발정기니까 섹스하자면서요. 얼마나 잘하는지 보여 주겠다고, 분명 나도 만족할 거라고 그랬잖아요. 내가 택시에 태워 보내려고 해도 막무가내로 날 붙잡고 섹스하러 가자고 한 거 그쪽이에요.”
“내가 언제…….”
반박하려고 입을 열자마자 흐릿한 장면 하나가 머릿속을 스쳐 갔다.
“나 지금 발정기야. 어떻게 해서든 너 만족시킬게. 애인 사귈 때 너 그거 중요한 기준으로 삼는 거 나도 알아. 안다고. 그러니까 제발 나한테도 한 번만 기회를 줘. 딱 한 번이라도 좋으니까 나랑 섹스하자. 정운아. 나 진짜로 잘할 수 있어.”
한 줄기 기억은 금세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기억 속의 나는 정운이─로 착각한 하얀 토끼 귀─를 붙들고 온갖 헛소리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집에 가라는 만류에도 불구하고 나는 품에 안은 이를 놓아주지 않았다. 다시는 놓치지 않겠다는 간절한 바람만을 되뇌면서.
움켜쥔 주먹에서 힘이 풀렸다.
멍청한 놈. 멍청한 자식. 아. 멍청한 새끼.
떠오르는 대로 줄줄 쏟아 낸 입을 틀어막고 머리를 쥐어뜯고 싶었다. 아니면 벽이든, 책상이든, 어디든 좋으니 단단한 곳에 이마를 쿵쿵 부딪치거나. 남자에게 보인 추태가 죽고 싶을 만큼 민망했다. 무엇보다도 그를 의심했던 조금 전의 내가 제일 부끄러웠다.
잘 알지도 못하는 이의 문란함을 탓하기 전에, 엉망진창으로 무너졌던 지난밤의 나를 돌이켜봤어야 했다.
“죄송합니다.”
일단은 내가 저지른 추태를 사과하는 것이 먼저였다. 작은 소리로 웅얼거리자 남자가 앞머리를 쓸어 넘겼다. 연한 색의 머리카락이 천장 등의 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왜 사과해요?”
“괜한 소리로 폐를…….”
“아뇨. 미안할 거 없어요. 이제 알려 주면 되죠. 섹스 얼마나 잘하는지.”
“취해서 한 헛소립니다.”
“그거 보려고 아침까지 기다렸는데. 나는 어젯밤부터 엄청 꼴렸거든요. 유혹에 넘어가는 바람에.”
“꼴……, 아니, 뭐라고요?”
말문이 막혔다. 무언가 받아치기 위해 입을 벌려도 헛숨만 튀어나왔다.
내가 말을 잇지 못하자 남자는 은근슬쩍 손을 내렸다. 옆구리를 더듬는 손길이 간지러웠다. 멍청히 있을 때가 아니었다.
“치워요.”
“아, 애무부터 시작하는 거 취향 아닌가.”
“취해서 그런 거라니까요. 아니, 막 만지지 말라고요!”
슬금슬금 올라온 손가락이 가슴을 움켜쥐었다. 다급히 언성을 높이자 남자가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안 한다는 거예요?”
“안 해요. 안 합니다. 술김에 한 말에 의미 부여하지 마요.”
남자에게 쏘아붙이면서 나는 눈썹을 치켜세웠다. 남자가 마지못해 손을 치웠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내 복부에 얹은 엉덩이를 들지 않았다.
“술김이라. 술김. 흐음.”
남자의 묵직한 체중이 갑갑했다. 숨을 트려고 들썩이는데도 좀처럼 틈이 생기지 않았다. 꿈틀거리는 나를 빤히 주시하던 남자가 손가락을 딱 울렸다.
“참, 그렇지. 지금은 술 다 깼죠?”
“그게 뭐…….”
“맨정신인 거 같으니까 말할게요.”
남자가 허리를 숙였다. 어깨를 밀어도 무서운 힘으로 밀어붙이는 남자를 말릴 수 없었다. 서둘러 팔뚝을 들어서 스칠 듯 다가오는 얼굴을 막았다. 덕분에 꼴사납게 입술을 비비는 꼴은 면했지만, 한층 가까워진 상체는 피하지 못했다. 맞닿은 배가 단단했다.
한쪽 팔꿈치로 침대를 짚은 남자가 나와 눈을 맞추었다.
“나랑 섹스해요.”
속삭이는 목소리가 낮게 깔려 있었다. 왠지 모르게 신경이 쭈뼛 곤두섰다. 나는 남자의 노란 눈에서 시선을 돌렸다. 피식 웃는 소리가 들리나 싶더니 남자가 손을 올렸다.
뺨을 덮을 듯 다가온 커다란 손은 귀에서 멈추었다. 귓바퀴를 쓸던 남자가 손가락 사이에 귓불을 끼웠다. 느릿하게 움직이는 손끝이 뜨거웠다.
“기분 좋을 거예요. 나 섹스 잘해요.”
남자가 말캉거리는 살을 어루만질 때마다 등줄기가 오싹했다. 나도 모르게 이를 악물었다. 노골적인 유혹이 당황스러웠다. 그보다 더 곤란한 것은, 자꾸 그에게 반응하는 나였다.
귀를 떠난 손은 턱을 쓰다듬었다. 하지만 그 이상은 전진할 수 없었다. 나는 여전히 주먹을 쥔 채 팔뚝으로 입을 가리고 있었다. 남자의 입꼬리가 위로 솟으며 반원을 그렸다. 달콤한 냄새가 짙어지나 싶더니 남자가 입술을 벌렸다.
축축한 살덩이가 살갗을 스치는 순간, 부르르 몸이 떨렸다.
“읏.”
까끌까끌한 혀가 손목 위를 정성스레 핥았다. 처음 느끼는 까칠한 살덩이의 감촉이 낯설었다. 자꾸만 목을 울리고 싶은 느낌이 들었다.
남자가 눈웃음을 지었다.
“한번 해 보면 분명 만족할걸요. 한 번이라도 괜찮으니까 기회를 줘요. 평생 못 잊을 만큼 기분 좋게 해 줄게요.”
익숙한 멘트가 이어졌다. 어디서 들어 봤나 했더니, 남자는 내가 어젯밤에 했던 유혹을 똑같이 돌려주고 있었다. 어렴풋이 떠오르는 말을 툭툭 던지는 남자의 입을 틀어막고 싶었다. 수치심을 버티지 못하고 나는 이를 악물었다.
“그만…….”
“나는 발정기가 정해져 있지 않지만, 그쪽 때문에 나도 발정했나 봐요.”
뜨거운 것이 배와 허리에 닿았다. 남자의 허벅지를 따라 불룩한 물체의 형태가 느껴졌다. 어느새 발기한 남자의 중심이었다.
가빠진 호흡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나는 애써 숨을 참았다.
“밤새 참았어요. 그쪽이 깨어날 때까지. 정말 이대로 돌아갈 거예요?”
남자가 눈썹을 찡그렸다. 두드러진 목울대가 위아래로 크게 흔들렸다. 아까보다 진해진 냄새가 하반신을 자극했다. 아까부터 부풀어 있었던 성기에 피가 몰려 얼얼했다.
나는 입술을 감쳐물었다. 더는 부정할 수 없었다. 낯선 침대 위에 알몸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누워서, 낯선 이와 몸을 맞대고 서로의 발기한 페니스를 느끼는 상황은 더없이 자극적이었다.
남자는 내 상태를 곧바로 알아챘다. 엉덩이에 힘을 주어 내 중심을 꾹 누르면서 남자가 빙긋 웃었다.
“꼴렸죠?”
“읏.”
민감한 성기에 무게가 가해지자 저절로 신음이 튀어나왔다. 나도 모르게 허리를 흔들 뻔했다. 남자의 미소가 짙어졌다.
“나는 어제 이것보다 열 배는 더 꼴렸어요. 이제 알겠어요?”
“…….”
“싫다면 더 강요 안 할게요. 그러니까 나한테 사과하지 마요. 취한 사람 말을 진지하게 받아들인 내 잘못인걸.”
남자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쏟아져 내린 머리카락에서 부드러운 샴푸 냄새가 났다.
“화장실 써도 돼요. 처리 안 하면 못 나갈 것 같은데.”
말하며 남자는 장난스럽게 다리 사이를 문질렀다. 흐읏, 다시 터져 나오는 신음을 서둘러 삼켰다. 더 큰 자극이 오길 기대한 성기가 욱신거렸다. 뒤이어 샴푸 향을 흩어 버릴 만큼 강렬한 체향이 코를 뒤덮었다. 만약 내가 초식종이었다면 본능적으로 두려움에 떨 만큼 진한 향이었다.
나른하게 내리뜬 노란 눈이 나를 향했다.
“아쉽네. 기대했는데.”
콧속에 아릿한 기운이 퍼졌다.
모든 것이 위험했다. 아마 지금의 나는 남자와 똑같은 향을 풍길 것이다. 흥분한 맹수가 자연스럽게 내뿜는 향을.
인정하기 싫었지만 남자는 충분히 유혹적이었다. 꿈틀거리기 시작한 수인으로서의 본능이 폭발할 듯 부풀었다. 기껏 정운이를 밀어붙이고서는 변변한 입맞춤도, 포옹조차도 하지 못하고 돌려보냈던 어제부터 내 몸은 계속 더웠다. 바에서 남자와 우연히 마주쳤던 순간에도, 낯선 침대에서 눈을 떴을 때에도.
바깥이 아니라 속에서부터 올라오는 열기의 의미는 뚜렷했다. 나는 어느 때보다도 본능에 충실한 시기, 발정기였다.
그리고 눈앞에는 나 때문에 발정한 상대가 앉아 있었다. 허리 위에 올라타서는, 오감을 통해 내 흥분을 느끼는 남자가.
나를 자극하는 체향이 남자의 것인지, 나 자신의 것인지 이제는 구분할 수 없었다.
나는 눈을 꾹 감았다.
남자의 말이 맞았다. 그래, 젠장. 나는 꼴렸다. 이 남자 때문에.
“……정말 잘합니까?”
꼴리면 하는 거지. 뭘 더 따지겠어. 눈앞의 상대가 누구건 중요하지 않았다. 정운이가 아니라면 누구든 다 똑같았다. 몸이 달아오른 김에 그냥 한 번 하고 끝내면 되는 노릇이었다.
“정말 누구도 생각 안 날 만큼 기분 좋게 만들 수 있습니까?”
정운이와의 일을 잊게 해 줄 수만 있다면, 차라리 고마울지도 몰랐다.
남자가 귀를 쫑긋 세웠다.
“당연하죠.”
“그럼 하든가요.”
“진심이에요?”
“딱 한 번입니다. 기회.”
어차피 할 거면 빨리 해치우는 편이 나았다.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남자는 빙긋 웃었다. 무작정 덤벼들 줄 알았건만, 그는 상체를 일으켰다. 마치 처음부터 이럴 줄 알았다는 듯 여유로운 표정으로 남자가 아랫입술을 핥았다.
나는 천천히 팔을 내렸다. 벌겋게 달아올랐을 얼굴을 더 가리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훤히 드러낸 귀도, 목덜미도, 가슴팍까지도 후끈거렸다.
남자의 눈이 내 몸을 위아래로 훑었다.
“뒤쪽 써 본 적 있어요?”
“있을 리가 없잖습니까.”
“왜요? 꽤 인기 있을 거 같은데. 곰 좋아하는 사람들 많잖아요. 물론 나도 좋아하고.”
시선이 쓸고 지나가는 곳마다 맨살 위로 끈적임이 남는 듯했다.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그 이상 말하면 없던 일로 합니다.”
“귀엽다는 뜻이었어요. 화내지 마요. 아무튼 처음이라면 뒤는 안 되겠네.”
그사이 구경을 마친 남자가 혀를 찼다.
“내가 좀 커서. 초심자용이 아니거든요.”
다가온 입술이 뺨에 닿았다. 나는 인상을 찡그렸다. 볼을 건드리는 혀가 까끌까끌했다. 혀에 돋은 돌기 때문이었다.
남자가 빙그레 웃었다.
“고양잇과랑 안 해 봤나 봐요.”
“만날 일이 없어서요.”
“하다 보면 익숙해질 거예요.”
말을 마친 남자가 목을 핥았다. 내가 고양잇과의 혀에 익숙하지 않다는 걸 알고서는 일부러 공들여 핥아 내리는 것 같았다. 간질거리는 애무는 생략하고 바로 본론부터 들어가면 좋을 텐데. 초조해진 나는 갈 곳 잃은 손을 꽉 움켜쥐었다.
살갗을 깨물며 남자는 내 허리께에 뭉쳐 있었던 이불을 끌어 내렸다. 흘러내린 이불이 침대 아래로 떨어지자 입 안이 말랐다. 더는 숨을 방어막이 없었다. 나는 속옷 하나만 걸친 채로 남자의 아래에 깔려 있었다. 다시금 각오가 필요했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는 나를, 남자가 재미있다는 듯 바라보다가 뒤로 물러났다.
“다리 벌려요.”
배와 중심을 묵직하게 누르던 체중이 사라지니 살 것 같았다. 민망함을 무릅쓰고 시키는 대로 자세를 바꾸었다. 내 다리 사이에 자리를 잡으며 남자가 물었다.
“어젯밤부터 궁금했던 건데. 혹시 운동해요?”
“아뇨.”
“몸만 보면 선수 같아요. 격투기 쪽.”
나는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새삼스럽지 않은 감상이었다. 사람들은 대부분 듬직하다는 감탄과 운동하냐는 질문으로 내 몸을 평했다. 웬만한 종보다 큰 키인데도 훤칠하다는 표현은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이왕 운동선수라면 구기 종목이나 수영 쪽도 있을 텐데, 굳이 유도 같은 격투기를 언급하는 것도 흔한 일이었다.
“근데 이거…….”
말을 끝까지 맺지 못하고 남자는 손을 뻗었다. 간질간질한 감촉이 가슴팍에 내려앉았다. 남자가 무엇을 만지는지는 뻔했다. 내 가슴에 하얗게 그려진 무늬였다.
유두 위부터 시작된 무늬는 가슴골을 거쳐 반대쪽 유두 위까지 둥그런 반원을 그리며 이어져 있었다. 마치 가슴에 걸쳐진 하얀 부메랑 같았다. 휘어진 양 끝이 뾰족하지 않고 뭉뚝했기에 더 그랬다.
까무잡잡한 피부 때문에 하얀 무늬는 유독 더 두드러졌다. 어릴 때는 그 자국이 싫어서 일부러 때수건으로 무늬를 문지르기도 하고, 그 부근만 까맣게 태우려고도 해 봤다. 소용없었다. 하얀 무늬는 나이가 들수록 커졌다. 그리고 성장을 마친 뒤부터는 마치 목이 늘어난 티셔츠나 늘어진 목도리처럼 살갗 위에 뚜렷이 새겨졌다.
“일부러 이렇게 태닝한 건 아니죠?”
나는 대답 없이 미간을 찌푸렸다. 내 눈치를 살피던 남자가 손을 펴서 가슴 위에 얹었다.
“반달가슴곰이랑은 처음 자는 거라서 그래요. 너무 귀엽네.”
“흐으응.”
둥글게 문지르는 손바닥에 유두가 쓸리자 이상한 소리가 튀어나왔다. 나는 서둘러 입을 다물었다. 말캉했던 끄트머리가 점차 단단해지는 게 느껴졌다.
“가슴이 커서 쥐기 좋아.”
혼잣말을 중얼거린 남자가 돌연 도드라진 돌기를 꼬집었다.
“여기 색도 예쁘고.”
“잠깐, 읏!”
당황해서 몸을 일으키려 하자 남자가 어깨를 밀었다.
“아무리 급해도 최소한의 애무는 해야죠. 매너잖아요.”
“흣…….”
나도 유별나게 굴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침대 위에 가만히 등을 대고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남자가 유두를 쥐고 비틀 때마다 허리가 꼬였다. 평소에는 신경도 쓰지 않았던 작은 살덩이가 대체 뭐라고, 형용하기 어려운 감각이 거기서부터 퍼졌다. 손길이 잠시 멈췄을 때에야 그 감각에 이름을 붙일 수 있었다. 초조함. 이유 모를 초조함이 뜨거워진 피를 타고 전신을 돌았다.
남자가 키득키득 웃었다.
“색이 연한 걸 보면 손을 많이 안 탄 거 같은데, 되게 예민하네요.”
거칠어진 숨을 삼키며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무런 뜻도 없는 도리질이었다. 어느새 빠르게 뛰기 시작한 심장의 박동 때문에 머리까지 쿵쿵 울렸다.
한참 가슴을 주무르던 남자가 눈을 빛냈다.
“밑도 이래요?”
남자의 손이 배꼽 근처를 문지르다 불쑥 아래로 내려갔다. 뭐라고 대꾸하려던 말이 쑥 들어갔다. 나는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속옷 안으로 파고든 손가락이 단단해진 페니스를 쥐고 끌어 올렸다.
그것으로는 만족하지 못했는지, 남자가 속옷의 밴드 부분을 잡아당겨 들추었다. 틈이 생기자 완전히 발기한 성기가 바깥으로 퉁겨 올랐다. 속옷을 밀쳐 내고 꼿꼿이 선 기둥을 내려다보며 남자가 입꼬리를 올렸다.
“아, 진짜네. 여기도 귀여운 색.”
선단을 비비던 손가락이 귀두를 쥐었다. 선액이 묻은 손이 포피를 잡아당기며 아래로 미끄러졌다. 나는 잠시 숨을 멈췄다. 간질거리는 초조함은 시작에 불과했다. 내가 애타게 기다리던 자극은 바로 이것이었다.
쾌감은 오래 주어지지 않았다. 장난치듯 기둥을 쥐고 훑던 남자가 마저 속옷을 벗겼다. 허벅지에 걸려 잘 내려가지 않자, 직접 내 다리를 올리고는 끌어 내렸다.
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 마침내 남자의 앞에 알몸을 드러냈는데도 신경 쓸 정신이 없었다. 온 신경이 하반신에 몰려 있었다. 피가 쏠린 아래가 끄떡거리는 게 느껴졌다. 아랫배에 닿는 귀두는 이미 젖어 있었다.
남자가 길게 한숨을 쉬었다.
“진짜……, 생각보다 훨씬…….”
남자는 말을 끝까지 맺지 못했다. 생각보다 어떻다는 걸까. 막상 벗겨 보니 섹스할 엄두가 나지 않는 걸까. 눈을 감은 채로 아랫입술을 잘근거렸다. 그럴 법도 했다. 나는 마르거나 선이 가는 체형이 아니니까. 굵은 허벅지나 근육이 뚜렷한 복부, 크게 부풀어 오른 성기를 눈앞에 둔 남자가 성욕을 느끼지 못할 수도 있었다.
싫으면 그만둬도 된다고 말하기 위해 눈을 떴을 때였다. 남자가 허리를 세웠다. 빠른 몸짓으로 셔츠를 벗는 그를, 나는 멍하니 올려다보았다. 두툼한 가슴 근육이 팔의 움직임에 따라 꿈틀거렸다. 어깨와 등을 보고 대충 몸이 좋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실물은 그보다 더했다. 남자는 예쁜 얼굴을 배신하는 근육질이었다.
넓은 어깨부터 잘록하게 빠진 허리까지, 잘 만들어진 역삼각형 상체에서 시선을 내리다가 나는 숨을 급히 들이마셨다. 남자의 바지 한쪽이 터질 듯 튀어나와 있었다. 셔츠를 아무렇게나 집어 던진 남자가 바지와 속옷을 한꺼번에 내렸다.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중심을 보자 그토록 자신만만했던 그의 태도가 이해되었다. 남자의 말은 허세나 과장이 아니었다. 바지 안에서 튀어나온 페니스는 맹세코 내가 지금까지 본 것 중 가장 컸다. 핏줄이 불거진 데다 진한 붉은색이라 흉흉하기까지 했다. 초심자에게 추천했다가는 멱살을 잡히고도 남을 것 같았다.
마음이 급했는지 남자는 허벅지까지만 옷을 내렸다. 그러고는 내 양다리의 오금을 붙들고 위로 밀어 올렸다. 순식간에 V자로 다리를 벌린 채 깔리게 되었다. 민망함에 얼굴이 홧홧해졌다.
훤히 드러난 아래를 남자의 눈이 훑었다.
“하…….”
의미 모를 감탄사를 내뱉은 남자가 한 손으로 자신의 페니스를 쥐었다. 벌어진 다리 사이로 향하는 흉기를 보자 몸이 굳었다. 약속과 달리 덮치려는 것일까?
“뭐 하는…….”
다행히도 남자는 약속을 지켰다. 두툼한 귀두를 갖다 대고 문지를 뿐이었다. 회음부터 천천히 밀고 올라온 선단이 내 음낭을 밀치고 기둥 위로 미끄러졌다. 파고들 틈을 찾듯 이곳저곳을 찌르는 살덩이는 뜨겁고 묵직했다.
서너 번 허리를 들썩인 남자가 몸을 굽히더니 고개를 숙였다. 입술이 스칠 것 같아 서둘러 머리를 돌렸다. 남자의 입술은 귀에 닿았다. 귓바퀴를 잘근거리던 남자가 혀를 세웠다. 까칠까칠한 혓바닥이 닿자 다시 오한이 일었다.
“그거…….”
핥지 말라고 주의를 주려는 찰나, 남자가 먼저 말을 꺼냈다.
“음. 안 되겠다.”
머쓱하게 웃은 남자가 상체를 끌어 올렸다.
“보통은 어깨에 다리를 걸치라고 하거든요. 근데 그쪽은 허벅지가 굵어서 잘 안 접히네. 내가 튕겨 나갈 것 같아.”
“…….”
“아, 그래서 싫다는 건 아니고. 마음에 들어요. 그쪽 몸.”
남자는 오금을 붙든 손을 내려 허벅다리를 움켜쥐었다. 단단한 살을 주무르며 남자가 입맛을 다셨다.
“다리 더 벌리고 내 몸 옆으로 뻗어요. 배를 겹쳐야 같이 쥐죠.”
남자가 원하는 체위가 무엇인지 감이 잡혔다. 올렸던 다리를 내리고 양옆으로 한껏 벌렸다. 무릎을 꿇고 앉은 남자가 내 위로 엎드렸다. 가슴이 맞닿으며 숨이 막혔다. 남자의 성기가 내 성기 옆에 놓이자, 이제는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던 체향이 다시금 훅 끼쳐 왔다.
남자가 내 손을 잡더니 아래로 끌어당겼다. 겹쳐진 아랫배 사이로 억지로 손을 집어넣은 남자는 싱긋 웃었다.
“그쪽한테 맡길게요.”
“뭘요.”
“곰은 손을 잘 쓰잖아요.”
처음부터 이럴 생각이었나. 나는 눈썹을 찡그렸다. 맥박 치듯 꺼떡거리는 페니스는 단단하고 굵었다. 내 것을 함께 쥐려면 한 손으로는 부족했다. 다른 손까지 끌어 내려 두 기둥을 함께 쥐자 손아귀가 꽉 찼다. 잠시 숨을 고르고 나는 손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질척이는 소리가 금세 방을 울렸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선액이 흐르면서 손을 적셨다. 적당히 미끄러지며 마찰하는 느낌이 기분 좋았다. 중심에서 올라오는 쾌감에 몸을 맡긴 채 나는 손을 빠르게 흔들었다.
과정이야 어찌 됐든, 발정기에 취한 몸은 자극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다 좋았다. 남자만 빼면.
눈을 내리뜬 남자는 꼬리를 툭툭 휘두르며 침대를 두드렸다. 입으로는 계속 내 가슴 주변을 핥고 빨았다. 낯선 자극 때문에 좀처럼 아래에 집중이 되지 않았다. 어깨로 남자를 밀치려 했지만 헛수고였다. 도리어 쇄골을 거쳐 위로 올라온 입술이 목덜미에 닿았다.
뜨거운 숨을 내뿜으며 남자가 속삭였다.
“좀 아파도 참아요. 이건 본능이라서.”
귀 바로 밑에서 울리는 낮은 목소리가 야릇했다. 그사이 목덜미에 코를 박은 남자가 슬렁슬렁 허리를 돌리기 시작했다. 뜨거운 페니스가 제멋대로 움직이며 살갗을 문질렀다. 진하다 못해 형체를 지닌 것처럼 끈적끈적한 단내가 코를 덮쳤다. 머리가 아찔했다.
손에 쥔 기둥을 놓치지 않도록 붙들고 나는 눈을 감았다.
내 몸짓을 허락으로 받아들였는지 남자가 침대를 고쳐 짚었다. 그러고는 본격적으로 허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마치 안쪽에 삽입한 것처럼 남자의 페니스가 손안을 빠르게 누볐다. 튀어나온 선단이 배꼽 주변을 쿡쿡 눌렀다.
내가 직접 성기를 쥐고 흔들 때와는 다른 감각이 차올랐다. 손아귀며 배를 사정없이 찌르는 성기에 꿰뚫리고 있는 것만 같았다. 낯선 감각은 점차 생생해졌다. 바짝 근육을 조인 단단한 몸이 샅을 때릴 때마다 나는 신음을 삼켰다. 철썩거리는 살 부딪치는 소리가 상상력을 자극했다. 내 안에 자신을 박아 넣는 데 열중한 남자의 아래에 깔린 듯한 착각이 일었다.
음란한 망상을 부추기기라도 하듯 남자는 점점 더 거세게 페니스를 쳐올렸다. 그러더니 급기야 내 목덜미에 이를 박았다.
“윽, 아, 잠깐만, 아!”
허리를 비틀며 벗어나려 했지만 통하지 않았다. 목을 문 남자가 무서울 만큼 강하게 힘을 주어 나를 내리눌렀다. 나는 순식간에 침대 깊숙이 파묻혔다.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남자는 거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르릉 목을 울리며 계속 힘을 가했다.
“안 도망칠 테니까, 살살, 으, 아파, 아프다고, 윽!”
본능이라 억누르기 힘들다는 건 이해했지만, 이대로는 아파서 집중할 수 없었다. 남자에게 물린 목덜미는 눈물이 핑 돌 정도로 아팠다. 적당히 잘근거리며 빨아올리던 애무와 차원이 달랐다. 신음을 섞어 항의하자 남자의 턱에서 힘이 빠졌다. 하지만 남자는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입을 더 벌리고 어깨를 넓게 물 뿐이었다.
눈치를 살피듯 멈추었던 남자가 허리를 다시 흔들었다. 젖은 기둥에 뜨거운 피부가 비벼지자 잠깐 사그라들었던 흥분이 되살아났다. 남자가 내뱉는 달뜬 숨결이 어깻등을 간지럽혔다.
몸을 뒤덮은 남자가 점차 묵직해졌다. 나는 도로 무게를 실어 누르는 남자를 밀어내지 못하고 헐떡였다. 목에서 느껴지는 통증과 아래에서 올라오는 쾌감 중 무엇이 더 큰지 분간할 수 없었다. 거칠게 밀어붙이는 남자를 따라 어느새 나도 허리를 튕겨 올리고 있었다.
“아, 이제, 흐읏……!”
계속 기다린 몸은 오래 버티지 못했다. 나는 허리를 뒤로 젖히며 손에 쥔 페니스를 정신없이 문질렀다. 헐떡이는 숨소리가 젖은 마찰음에 섞여 들었다. 내 상태를 느꼈는지 목덜미에서 입을 뗀 남자가 어깻죽지를 빨아올렸다. 새롭게 쏟아진 자극을 이길 수 없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으면서 두 페니스를 꽉 움켜쥐었다.
“하으읏, 하…….”
질척한 액체가 손아귀를 적셨다. 오랜만에 내보낸 탓에 끈적끈적한 점액이었다. 페니스가 벌떡일 때마다 허벅지가 저절로 떨리며 오므라들었다. 다리로 남자의 허리를 꽉 끌어안은 채 나는 마저 정액을 쏟아 냈다. 열이 오른 머리가 핑 돌았다.
사정이 끝나자 손에서 힘이 풀렸다. 가쁜 숨을 헐떡이며 나는 눈을 떴다. 번뜩이는 노란 눈이 나를 샅샅이 훑고 있었다.
“배에 뿌릴게요.”
무슨 말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내 손아귀에서 페니스를 빼낸 남자가 상체를 세웠다. 여전히 흉흉하게 곤두선 중심을 쥔 남자가 손을 움직였다. 손아귀를 들락날락하는 붉은 선단의 움직임이 적나라했다. 나는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제 것을 만지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곧 진한 액체가 후두둑 아래로 떨어졌다.
“후…….”
한숨 같은 소리를 내며 남자는 가슴을 크게 들썩였다. 한결 느려진 손이 마치 포피를 벗겨 낼 듯 힘을 주고 기둥을 훑었다. 다시 쏟아진 탁액이 배 위로 점점이 튀었다. 사정할 때마다 남자의 아랫배에 도드라진 힘줄이 꿈틀거렸다.
남자는 번들거리는 기둥을 두어 번 더 문지르다가 놓았다. 느릿느릿 눈을 감았다가 뜬 남자가 입을 열었다.
“이제는 배에도 무늬가 생겼네.”
나는 무심코 턱을 끌어당겨 밑을 훑었다. 남자의 흔적이 가슴팍이며 배 여기저기에 남아 있었다. 남자가 손을 내려 내 배를 짚었다.
“가슴에 달이 있으니까, 이건 은하수.”
“…….”
“미안해요. 좀 유치했죠?”
중얼거리면서 남자는 손바닥으로 살갗을 문질렀다. 흥건히 고여 있던 정액이 사방으로 번졌다. 마치 로션이라도 바르듯 내 배에 정액을 펴 바르곤 남자가 빙긋 웃었다.
변태 같은 놈.
속으로 욕하는 걸 듣기라도 한 것처럼 남자가 내 위로 쓰러졌다. 전신에 얹힌 남자가 무거웠지만 내버려 두고 숨을 골랐다. 밀쳐 낼 기운이 없었다.
이제 끝인 줄 알았건만, 남자는 회복도 빨랐다. 이내 남자는 나를 끌어안고 뺨에 입을 맞추었다.
“좋았죠?”
대답도 듣지 않고 남자는 계속 내게 입맞춤을 퍼부었다. 목을 타고 내려간 입술은 가슴에서 멈추었다. 남자는 그릉그릉 목을 울리며 가슴에 얼굴을 문질렀다. 부스스한 머리칼이 간지러웠다.
밀쳐 내기 위해 팔을 뻗었을 때였다. 조금 전 목덜미를 물었을 때처럼 남자가 이를 세웠다. 순간 흠칫 몸이 굳었다. 피식 웃은 남자가 장난스럽게 유두를 깨물었다.
“읏, 아…….”
밀치려던 것도 잊고 나는 남자의 머리를 끌어안았다. 민감해진 끄트머리를 살살 핥는 혀 놀림에 신음이 튀어나왔다.
한참 돌기를 괴롭히던 남자는 가슴 전체를 집요하게 잘근거렸다. 온 피부에 자신의 흔적을 남기려고 작정한 사람 같았다. 아파서 못 견딜 정도가 되면 입술을 대고 빨아올렸다. 까끌까끌한 혀가 부어오른 피부 위를 스칠 때마다 허리가 덜덜 떨렸다.
아직 꼿꼿한 성기를 제 배로 문지르며 남자가 속삭였다.
“한 번 더?”
남자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고개를 끄덕일 뻔했다. 곧장 튀어나오려는 승낙을 간신히 욱여넣고 나는 숨을 돌렸다.
가까스로 이성을 붙잡기는 했지만 나는 여전히 본능에 사로잡혀 있었다. 가슴팍만이 아니라 전신을 애무당하고 싶었다. 이대로 한 번 더 해도 좋지 않을까. 채 식지 않은 욕망이 뭉글뭉글 피어올랐다.
내 반응을 지켜보던 남자가 은근슬쩍 손을 아래로 내렸다. 엉덩이를 쥐고 주물거리던 손이 안쪽으로 파고들자 퍼뜩 정신이 들었다.
나는 황급히 남자를 밀어냈다.
“비켜요.”
“안 하게요?”
“딱 한 번이라고 말했을 텐데요.”
단호하게 말하면서 몸을 일으켜 앉았다. 더 누워 있다가는 남자가 덮쳐들까 봐 두려웠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남자의 손길에 넘어간 내가 한 번 더 하자고 먼저 제안할 것 같아 불안했다.
다행히도 남자는 순순히 몸을 물렸다.
“그래요. 약속은 약속이니까.”
어째서인지 한숨이 나왔다. 함께 흘러나온 감정이 아쉬움인지, 안도인지 알 수 없었다. 차오르는 미련을 꾹꾹 삼키고 침대에서 내려섰다.
“먼저 씻습니다. 욕실 어딥니까.”
방을 둘러보며 나는 남자에게 물었다. 그러나 되돌아온 것은 대답이 아니라 감탄사였다.
“와. 그런 엉덩이를 가지고 있으면서 안 썼다고요?”
“…….”
“그거 진짜 사치에다 낭비 같은데.”
“그 이상 성희롱하면 고소합니다.”
“성희롱이라니. 섹스 이후에 오고 가는 정당한 필로우 토크 가지고.”
“제발 좀.”
안 그래도 머릿속이 복잡한데 말꼬리를 잡는 남자 때문에 더 답답했다. 뒤돌아보며 미간을 찌푸리자 남자가 키득거리며 손을 내저었다.
“알았어요. 저기 문 보이죠? 저게 욕실이에요. 거기 써요. 나는 바깥에서 씻을 테니까.”
바깥에도 욕실이 하나 더 있는 모양이었다. 혹시라도 씻는 도중에 쳐들어오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다행이었다. 나는 대답 없이 남자가 가리킨 문을 열었다.
샤워기 밑에 서자 또 한 번 한숨이 흘러나왔다. 아직 열기가 남은 몸에는 미지근한 물도 차가웠다. 특히 샤워기의 물줄기조차 자극으로 받아들이는 하반신이 문제였다.
“…….”
침대에서 빨리 도망쳐서 다행이었다. 심호흡을 한 뒤, 나는 찬물을 틀었다. 1부터 50까지 숫자를 세며 차가운 물을 맞았다. 적당히 체온이 식은 뒤에는 몇 번이고 비누칠을 하면서 살갗을 문질렀다. 남자가 뿌린 것들을 깨끗하게 닦아 내고 싶었다.
조금 긴 샤워를 마치고 거울을 보니 기가 막혔다. 가슴과 목덜미에 벌건 잇자국이 가득했다. 남자가 물어뜯은 목은 벌써 퍼렇게 멍이 졌다. 가슴팍에는 하얀 달무늬를 따라 키스 마크가 얼룩덜룩 남아 있었다. 붉은 흔적을 손으로 쓸어 보았지만 당연하게도 사라지지 않았다.
열심히도 물고 빨고 하더라니.
이리저리 몸을 틀면서 거울에 상체를 비추어 보다가 나는 이마를 짚었다. 사정의 여운이 가시자 진한 후회가 밀려왔다.
낯선 이와의 이런 짓이라니. 30년을 살면서 단 한 번도 시도하지 않았던, 시도할 마음조차 없었던 사고를 화려하게도 치고 말았다. 발정기의 열기 때문이라고, 전날 마신 술의 영향 때문이라고 치부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남자가 유혹했을 때 나는 맨정신이었다. 심지어 오늘 아침 남자는 토끼 귀 머리띠조차 쓰지 않았다.
그 어떤 핑계도 댈 수 없었다. 정운이와는 조금도 닮지 않은 사자와 자발적으로 맨살을 겹쳤다. 그게 진실이었다.
‘정운이와는 포옹 한 번 제대로 못 해 봤는데.’
무의식중에 떠오른 생각이 우스웠다. 내가 누구랑 자든 정운이는 관심 없을 터였다. 그런데도 나는 변명을 만들어 내고 있었다. 누구도 듣지 않을, 오로지 나 혼자 안심하기 위한 변명을.
나는 수건을 꺼내 물기를 대강 닦았다. 그리고 눈을 감은 채로 수건에 얼굴을 묻었다.
이제는 포기하기로 했는데도 당연하다는 듯 정운이를 떠올리는 내가 한심했다.
“거기서 잠든 거 아니죠?”
바깥에서 남자가 나를 부를 때까지, 나는 한참 동안 거울 앞에 멍하니 서 있었다.
남자는 일찌감치 샤워를 마친 모양이었다. 젖은 머리카락을 털며 나가자, 헐렁한 일상복으로 갈아입은 남자가 나를 바라보았다. 그의 눈길이 어디에 머무는지 깨달은 순간 목덜미가 뜨끈뜨끈해졌다. 어깨를 주무르는 척하며 나는 팔로 가슴을 가렸다. 그사이 다가온 남자가 내 손에서 젖은 수건을 가져갔다.
“머리 말려 줄까요?”
“사양하겠습니다.”
어차피 짧은 머리라서 금방 마르니 상관없었다. 여름이기도 하고. 흐음, 의미 모를 소리를 낸 남자가 속옷을 내밀었다. 태연한 척 보이려 애쓰며 나는 부리나케 속옷을 걸쳤다.
“내 옷은요.”
남자는 옷장 옆에 세워진 전신 거울을 가리켰다. 무슨 뜻인지 이해하지 못한 내가 눈만 깜빡거리자 직접 거울의 주변을 매만졌다. 놀랍게도 전신 거울인 줄 알았던 그것은 의류 관리기였다. 문이 열리자 그 안에 걸린 내 셔츠와 바지가 보였다.
고개를 까닥여 남자에게 감사 인사를 건네며 나는 옷을 꺼내 들었다. 셔츠와 바지는 깔끔하게 주름이 펴져 있었다. 온기가 남아 따뜻한 셔츠를 걸치고 단추를 채웠다. 삐딱하게 서서 나를 바라보던 남자가 입맛을 다셨다.
“아침 먹고 갈래요?”
“가방도 내놔요.”
“빡빡하네.”
투덜거리며 남자가 바깥을 가리켰다. 방 밖으로 나서자 확 트인 거실이 눈에 들어왔다. 남자의 집은 내 짐작보다 훨씬 넓었다. 내가 누워 있었던 침실 외에도 문이 닫힌 방이 하나, 벽면마다 책장이 놓인 방이 하나 더 있었다. 내 서류 가방은 거실 한쪽 벽을 차지한 4인용 가죽 소파 위에 놓여 있었다.
제일 먼저 지갑부터 확인했다. 속물 같다는 건 알아도 어쩔 수 없었다. 내 지갑은 둘둘 말린 넥타이 아래에 스마트폰과 함께 놓여 있었다. 나는 카드며 현금을 대강 헤아린 뒤 지갑을 가방에 집어넣었다.
짐을 챙기는 동안 남자는 내 옆에 서 있었다. 가방을 닫은 내가 허리를 세우자 남자가 한 걸음 물러섰다. 여태 젖은 수건을 팔에 건 채였다.
“가게요?”
“가야죠.”
“그럼 연락처 줘요.”
“내가 왜요.”
남자의 긴 꼬리가 가볍게 흔들렸다. 샛노란 털에 시선을 뺏기지 않으려 노력하며 뒤돌아섰다. 거실이 어찌나 넓은지 사방을 둘러본 뒤에야 현관을 찾을 수 있었다.
나는 주저 없이 현관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없던 일로 하고 다시는 보지 맙시다.”
“너무 냉정하게 굴지 마요.”
“서로 용건 끝났잖아요. 그리고 원래 원나잇이 그런 거 아닙니까? 다시 만나지 않기로 합의하에…….”
“싫은데요, 김원재 씨.”
“뭐?”
불쑥 튀어나온 이름이 당황스러웠다. 나도 모르게 반말을 내뱉으며 돌아섰다. 삐딱하게 선 남자가 귀를 쫑긋쫑긋 움직였다.
나는 남자를 노려보았다.
“내 이름 어떻게 알았어요?”
남자에게 이름을 알려 준 기억이 없었다. 남자도 줄곧 나를 ‘그쪽’이라는 모호한 대명사로 불렀고. 하지만 남자가 꺼낸 이름은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정확한 내 이름이었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남자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더니 바지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고 작은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어쩐지 낯익은 종이였다.
남자가 달랑달랑 흔드는 내 명함을 보며 나는 이를 갈았다.
“그건 또 언제 빼 갔습니까?”
“아, 이것도 기억 못 하는구나.”
남자는 미소를 지었다.
“어제 김원재 씨가 나한테 줬어요. ‘나 여기 다녀. 연말에 승진하면 연봉도 오를 거야. 너 하나는 얼마든지 먹여 살릴 수 있어, 정운아’ 하면서요.”
“씨발.”
더는 제정신으로 들어 줄 수가 없었다. 나는 욕설을 내뱉었다.
동그랗게 눈을 뜬 남자를 뒤로하고 서둘러 현관으로 뛰어갔다. 구두를 꺾어 신고 도망치듯 현관을 나섰다. 남자는 나를 쫓아오지 않았다. 더는 이름을 부르지도 않고 묵묵히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철컥, 하는 소리와 함께 현관문이 닫히자 비로소 현실로 돌아온 기분이 들었다. 낯선 건물의 복도는 텅 비어 있었다. 지금까지 겪은 모든 일이 내 머릿속 환상이었다는 듯이.
나는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습기 찬 여름 공기가 반가웠다.
악몽에서 깨어난 듯한 안도감도 잠시였다. 어제저녁부터 오늘 아침까지 내가 저지른 실수가 하나둘 되살아났다. 꿈이 아니었다. 부인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었다. 눈앞을 스치는 멍청한 짓 중 하나는 채 1분도 지나지 않은 것이었다.
남자의 손에서 명함을 뺏어 왔어야 했다.
“진짜 돌겠네.”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누르며 나는 엘리베이터를 찾아 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