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9. 스물여덟, 겨울 (21/21)

19. 스물여덟, 겨울

졸업식 날은 날씨가 우중충했다. 따라서 선호가 마지막 종례를 흘려들으며 창밖을 보는 척하기 좋은 환경이었다. 그가 1년 반 내내 창가를 보는 척하면서 그 앞에 앉는 소년을 주시했다는 걸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다들 그동안 공부하느라 수고가 많았다.”

마지막을 암시하는 말에 선호의 눈빛이 흔들렸다. 종례가 짧은 게 유일한 장점이라고 했나. 이 순간만은 김지남 선생의 장점이 단점처럼 여겨졌다.

이명은 꽃다발을 들고 앉아 있었다. 선호의 자리에서는 늘 45° 정도 각도의 옆모습이 보였다. 이명은 그 자리에서 동복에서 춘추복으로, 춘추복에서 하복으로, 옷만 바뀌었을 뿐 2년 동안 한결같이 앉아 있었다. 뺨이 보여서 그럭저럭 괜찮지만 그 각도의 아쉬운 점이라면 눈을 보기 어렵다는 점이었다.

‘이제는 이마저 볼 수 없겠지.’

듣기 어려운 목소리를 놓칠까 봐 왼쪽에 온통 신경을 집중하던 나날도, 체육 시간에 나무 그늘 아래를 살펴보던 시간들도, 교실에 도착하면 창문부터 열던 습관도 이제 끝이었다.

선호는 뱃속이 울렁거리는 기분에 침을 꿀꺽 삼켰다. 무언가 결핍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지는 오래되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하는지는 1년 반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몰랐다.

“한 번 더 준비하는 사람들은 너무 기죽지 말고. 대학 가는 놈들은…… 어? 안 죽을 정도로만 마셔!”

“에에이이…….”

“자, 반장.”

언제나 반가웠던 저 소리가 이렇게 아쉽게 들린 적이 있었던가. ‘반장’이란 말에 이명이 황송하게도 오른쪽을 봐 주었다. 둘의 눈이 마주친 건 찰나였다. 선호가 곧바로 앞으로 보며 자리에서 일어났으므로.

“차렷.”

마지막을 유예할 수 있다면. 선호는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헛기침을 하며 조금 시간을 끌었다.

“경례!”

“감사합니다!”

그렇게 끝이었다. 첫사랑이 손가락 사이로 스르르 빠져나가고 있었다.

한선호는 소리 없이 깨어났다. 크게 뜬 눈에서 눈물이 떨어져 내렸고 거친 호흡으로 가슴이 위아래로 오르락내리락하고 있었다. 곁에 이명이 잠들어 있다는 걸 확인하고서야 그는 눈을 다시 감았다.

미친 듯이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려고 심호흡을 한 지 얼마나 됐을까, 알람이 울렸다. 한선호는 알람을 얼른 끄고 조심조심 일어났다.

‘수영, 가지 말까.’

오늘은 애인과 종일 붙어 있고 싶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별거 아닌 꿈 때문에 오랜 습관을 어기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한선호는 이명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침실에서 나왔다.

물을 한 잔 마시고 면도했다. 식빵 두 장을 토스터에 넣고, 기다리는 동안 일기 예보와 뉴스, 세계 증시, 코스피와 유가를 확인했다. 빵이 튀어나오자 접시에 올려놓고, 나이프를 들어 딸기 잼을 슥슥 발랐다.

방으로 들어와 옷을 벗으려던 차에 잠들어 있던 애인이 눈을 떴다. 한선호는 웃으며 침대로 다가갔다. 허리를 숙이며 그의 뺨에 입 맞추자 이명이 고개를 뒤로 꺾으며 나른하게 웃었다.

한선호는 그의 곁에 걸터앉아 티셔츠를 벗었다. 이불 위에 아무렇게나 던져 놓고 깨끗한 셔츠를 몸에 걸쳤다. 단추를 하나씩 채우면서, 눈을 비비며 하품하는 이명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왜 그런 꿈을 꿨을까, 넌 이렇게 내 곁에 있는데.’

이명은 하품이 끝나자 몸을 뒤집으며 이불에 몸을 파묻었다.

“선호, 수영 잘 해. 출근 안전하게 하고, 밥 맛있게 먹고, 퇴근하면 얼른 와.”

아직 졸린 목소리였다.

“더 자, 명이야.”

“응…….”

한선호는 이명의 뺨에 키스한 뒤 수영용품을 챙겨 나왔다.

평소와 다름없는 금요일을 시작하면서도 머릿속에서는 졸업식의 기억이 안개처럼 짙게 끼어 있었다. 어느덧 10년이나 지난 일이었다. 이명과 재회하고서는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처음으로 간절히 원하는 것을 떠나보낸 순간은 칼로 새겨 놓은 듯 선명하고 아프게 각인되어 있었다.

한선호는 엘리베이터 앞에 멍하니 서 있다가 버튼조차 누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엘리베이터를 호출했다.

지하에 도착해 차 앞까지 간 한선호는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주머니를 아무리 뒤져 봐도 키가 없었다.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실수에 정신이 얼떨떨했다. 아무래도 그 꿈 때문인가. 한선호는 개운치 않은 기분으로 다시 8층에 올랐다.

도어 록을 해제하고 집 안으로 들어가자 주방 탁자에 올려진 키가 보였다.

“차 키를 놔두고 가서. 요즘 정신이…….”

고개를 든 순간, 그는 전신 거울 앞에 선 이명과 눈이 마주쳤다.

“엇…….”

티셔츠를 막 벗으려던 참인지 그의 상체가 반쯤 드러나 있었다. 그런데…… 그가 전날 흰 티셔츠를 입고 잤던가. 다른 걸 입고 자지 않았던가.

티셔츠의 어깨선이 아래로 한참 내려가 있었다. 그리고 잠옷 바지의 앞부분이 부자연스럽게 툭 튀어나와 있었다. 한선호는 이명의 체구에 맞지 않는 흰 티셔츠가 누구 것인지 그제야 눈치챘다.

“하하…….”

그는 낮게 웃으며 문을 닫았다. 구두도 벗지 않은 채 거실로 성큼성큼 들어섰다. 이명은 얼굴을 붉히며 침대로 도망쳤는데, 그거야말로 한선호가 바라던 바였다. 그는 넥타이를 풀며 침대로 올라갔다.

입술을 먹어 치우며 마른 허리를 감싼 바지를 속옷과 함께 벗겨 냈다. 이명의 성기를 한 손에 쥐며 반대쪽 손은 사이드 테이블에 놓인 콘돔으로 뻗었다.

“내가…… 할게.”

이명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반쯤 서 있던 한선호의 성기에 조심스럽게 손을 갖다 댔다. 서투른 손길에 페니스가 정장 바지를 뚫고 나올 듯이 단단해지며 관자놀이가 지끈거렸다. 머리가 성욕으로 팽팽 돌았지만 한선호는 이명을 부드럽게 안으며 그의 입술을 핥았다.

버클을 열려는 그의 손을 붙잡았다. 입술에 쪽 키스하곤 벌써 땀이 맺히고 상기된 얼굴을 바라보았다.

“음, 아니……. 지퍼만.”

“바지 안 벗고?”

“너만 벗고 있어.”

지퍼를 내리자마자 밖으로 고개를 내민 페니스는 핏줄이 불거진 데다 터질 듯이 부풀어 있었다. 콘돔을 씌우며 이명의 입 안에 혀를 집어넣었다. 입술끼리 포개어지며 타액이 서로 섞였다. 이명의 사타구니는 이미 꼿꼿하게 발기한 성기에서 흘러나온 쿠퍼액으로 축축했다. 쓱 쓸었을 뿐인데 손바닥이 체액으로 흠뻑 젖었다. 한선호는 그 손으로 제 성기 둘레를 훑고서 속삭였다.

“자, 티셔츠 잡아 봐.”

‘내게 졸업식이 쓰라린 기억이라면, 네겐 그 옷이 그렇겠지.’

이명은 유독 9년 전에 옷을 훔친 기억을 부끄러워했다. 이제는 둘이 함께이니 그때와 상황이 전혀 다른데도. 아무것도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는데도. 하긴, 오늘 아침에 울면서 깨어난 사람이 할 말은 아니지 않나.

한선호는 조바심이 나서 그의 허벅지를 위로 살짝 들며 엉덩이를 벌렸다. 그 사이로 귀두를 맞춰 넣자 이명이 소리 죽인 신음을 냈다.

“가끔 눈앞에 있는데도 실감이 안 나.”

“하아, 아……. 뭐?”

‘네게도 현재가 이렇게 꿈같을까.’

한선호는 이명의 허벅지를 움켜쥐고 하체를 밀어붙였다. 뻑뻑한 입구는 그를 쉽게 들여보내 주지 않았지만 언젠가 열리리란 확신이 있었다. 이제까지 늘 그랬으니까. 이명이 괴롭다는 표정으로 눈을 질끈 감았다. 고통을 동반한 아찔한 쾌감이 한선호의 머릿속을 어질어질하게 만들었다.

그는 기둥을 뿌리까지 삽입한 뒤 한동안 이명을 붙잡고 거친 호흡만 내보냈다. 이마와 뺨, 가슴, 어디고 할 것 없이 땀이 맺혀 있었다.

“하아, 하아…….”

“흐, 읏……. 아…….”

눈이 저절로 감기며 잠시 잊고 있었던 꿈이 떠올랐다. 꿈은 중간에서 끊겼지만 결말을 알고 있었다. 마지막은 단둘이 남은 어두컴컴한 교실에서 이명이 떠나가는 장면이었다.

끊임없이 이어질 것 같지만 끝이 있는 복도 너머로 이명의 뒷모습이 사라졌다. 그 당시에는 원하는 게 있다면 손을 뻗어서 잡아야 한다는 걸 몰랐다. 그래서 한선호는 가만히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눈을 뜨자 스물여덟의 이명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무 데도, 안 갈 거지?”

한선호는 간절하게 중얼거렸다. 스물여덟 이명이 눈앞에 있는데도 열아홉 이명의 뒷모습이 그를 괴롭혔다. 꿈속에서는 무슨 짓을 해도 잡을 수 없었던 등이었다.

이명은 한선호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그가 살짝 웃으며 손을 뻗었다. 뺨을 어루만지려나 싶었는데, 한선호의 왼쪽 가슴으로 손을 가져가, 유두를 살짝 비틀어 꼬집었다.

“풋.”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던 한선호는 그만 웃어 버렸다. 이명에게 엉뚱한 구석이 있다는 건 알지만, 생각할수록 황당했다.

“뭐 하는 거야. 하하하, 응?”

그 장난 덕에 한선호는 현실로 돌아왔다. 졸업을 아쉬워하기에는 훌쩍 자라 버린 시간으로. 이명과 함께 살고 있는 그들의 집으로.

한선호는 그가 뻗은 손에 손바닥을 겹치곤, 손가락 사이마다 차례대로 깍지를 끼며 손을 꼭 쥐었다. 네 번째 손가락에 꼭 맞는 반지가 오전의 햇살을 받아 반짝였다.

이명이 눈을 감았다. 한선호는 그의 가슴을 자신의 상체로 덮으며, 살짝 벌어진 그의 입술에 제 것을 포갰다.

상체를 조금 들었다. 성기를 조금 뺐다가 다시 세게 박아 넣었다.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자 이명이 고개를 돌리며 물기 섞인 비음을 흘렸다.

“아, 아아, 아……. 흣, 아……!”

“아파?”

이명의 눈가에 눈물이 살짝 고여 있었다. 그러나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한선호는 한 손으로 그의 뒤통수를 받치며 더욱 몸을 가까이 다가갔다. 이명의 한쪽 가슴을 손으로 잡고 가까이서 눈을 바라보며 박차를 가했다. 몸 어디든 할 것 없이 땀이 나서 덥게 느껴졌다. 어쩌면 수영보다 이편이 더욱 운동이 될지도.

느끼는 곳에 도달할 때마다 이명의 몸이 쾌락에 가늘게 떨렸다. 그 지점을 처음 섹스한 날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그의 몸은 솔직했다. 푹푹 박을 때마다 좁은 내벽이 기둥을 보채듯이 꽉 조이며 달라붙었다. 아무리 세게 쑤셔도 그보다 더 강하게 감싸며 놓아주지 않으려 했다. 한선호는 문득 그 좁은 통로 안에 고개를 처박고 모조리 핥아먹고 싶은 욕망에 휩싸이며 골반을 더 세게 퉁겼다.

햇빛을 받아 투명하게 반짝거리는 갈색 눈동자는 아무것도 모르는 것만 같았다. 그를 통째로 먹어 치우고 싶다고 생각하는 남자의 시커먼 속을 열어 보게 된다면 저렇게 황홀하단 표정을 짓지만은 않을 것 같은데.

그들은 서로 마주 안은 채 호흡을 맞추었다. 사정감이 밀려오자 한선호는 아예 팔로 이명의 어깨를 감싸고 허리를 더 빠르게 처박았다. 한선호의 허벅지를 쥔 손에도 힘이 잔뜩 들어갔다. 이명의 다리가 공중에서 흔들리며 신음이 숨넘어가듯 헐떡거리는 소리로 변했다.

절정에 다다른 성기가 내벽 깊은 곳까지 박힐 때마다 음낭이 둔부에 부딪치는 소리가 귀를 울렸다. 한선호는 이명의 초점 풀린 눈을 바라보며 어깨를 꽉 끌어안았다. 오늘은 같이 끝까지 가고 싶었다. 그래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는 반쯤 빼냈던 성기를 끝까지 밀어 넣었다. 두 몸이 완벽하게 맞물린 동시에 이명이 가는 신음을 뱉었다. 내벽이 돌연 페니스를 쥐어짜듯이 조였을 때, 한선호는 참지 않고 욕망을 밖으로 쏟아 보냈다.

“하아, 하아…….”

숨이 찼다. 한선호는 이명의 가슴 위로 쓰러진 채 숨을 골랐다. 그에게 무게를 온통 싣자 깃털처럼 가벼워진 기분이 들었다. 이렇게 작고 마른 남자의 품이 이토록 넓다는 건 놀라운 일이었다.

“……회사는?”

“하하, 어떻게 하지?”

그들은 서로 껴안은 상태로 몸을 들썩거리며 웃었다.

* * *

한선호가 귀가했을 때 집은 밤처럼 캄캄했다. 그는 익숙한 듯 불을 켜고 난방 장치 온도부터 확인했다. 실내가 따뜻하게 달궈진 것을 확인하고 거실에 들어서 외투를 벗어 옷걸이에 걸어 놓았다.

고양이처럼 의자에 웅크려 앉은 이명은 갑자기 밝아진 조명에 적응하지 못하고 눈살을 찌푸렸다. 보아하니 온종일 바둑만 둔 기색이었고, 옷조차 아침에 입혀 놓고 나간 그대로였다. 그에게 지나치게 큰 흰색 셔츠 아래로 흰 다리가 쭉 뻗어 있었다.

‘내 옷, 입어 보고 싶었던 거 아냐?’

‘……놀리지 마. 그냥, 네 냄새가 나서…… 그런 거야.’

‘그럼 오늘은 종일 이거 입고 있어. 네 냄새 배게.’

반쯤은 농담이었는데 이 시간까지 입고 있을 줄은 몰랐다. 바둑에 정신이 팔려 옷 같은 건 신경 쓰지 못한 거겠지. 사람을 유혹할 작정으로 그렇게 입었대도 눈이 돌아갈 판에, 그럴 의도가 없다는 점이 확실해서 더 안달 나게 만들었다. 하지만 조금이라도 놀리면 다시는 안 입으려고 할 테니, 한선호는 그의 복장을 힐끔힐끔 보면서도 애써 모른 척했다.

냉장고를 열어 본 한선호는 이명이 종일 끼니를 제대로 챙기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에게 다가가 콧등에 입을 맞추자, 이명이 고개를 들며 입술을 위로 쭉 내밀었다. 그 각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자니, 풀어진 셔츠 깃 사이로 뽀얀 가슴이 훤히 보였다. 한선호는 말랑말랑한 입술을 톡톡 부딪친 뒤 제 입술 사이로 부드럽게 빨아들였다.

이명의 손이 한선호의 목뒤를 감으며 그의 얼굴을 아래로 끌어당겼다. 둘의 혀가 얽히며 키스가 한층 정열적으로 변했다. 한선호는 한 손으론 그의 귀를 부드럽게 애무하며 한 손으론 둘레가 남아도는 셔츠 소매 위로 손목을 쥐고 매만졌다.

진득하게 붙어 있던 입술이 떨어진 뒤에도 그들은 한동안 눈을 마주하고 있었다. 한선호는 이명의 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쓸어 넘기며 말했다.

“저녁은?”

“시켜 먹자.”

“또? 수요일에도 시켜 먹었잖아.”

“선호가 일주일에 세 번까지는 괜찮다며…….”

한선호는 어린 시절에 주로 엄마가 해주신 집밥을 먹고 자랐고 외식은 거의 하지 않았다. 반면 이명의 가족은 모두 배달 음식과 외식을 좋아했다. 그에게는 집밥이란 개념이 존재하지 않다시피 했다.

“알았어. 뭐 먹을까?”

이명이 한선호의 팔에 매달리며 그의 상체를 다시 끌어 내렸다. 곧 뺨에 입술이 닿았다가 쪽 하는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오늘따라 애교가 많은 걸 보니 일이 잘 풀리는 모양이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음식 동시에 말해 보자.”

이명의 목소리가 유독 기분 좋고 달콤하게 들렸다. 한선호는 비어져 나오는 웃음을 주체하지 못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명의 손가락이 올라갔다. 하나, 둘…… 셋.

“피자.”

“치…… 자.”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한선호는 재킷을 벗으며 자연스럽게 방으로 향했으나, 뒤통수에 날카로운 지적이 꽂혔다.

“너 치킨이라고 하려고 했지? 다 들었어.”

“아니야. 피자라고 했어.”

그는 옷을 벗어서 정리해 두고 어플을 켜 피자 가게를 검색했다. 페퍼로니 피자에 더블 치즈, 옥수수 추가. 콜라 대신 스프라이트. 그들이 늘 먹는 메뉴에 샐러드를 함께 주문하고서 손발을 씻고 세수했다.

이명은 화장실에 들어가기 전과 똑같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미끈한 한쪽 다리는 쭉 뻗은 채 가볍게 달랑거렸고 반대쪽 다리는 세운 채 그 위에 턱을 얹고 있었다. 한선호는 밤이 내려앉은 창을 배경으로 달랑 셔츠 한 장 걸치고 앉아 있는 남자의 모습을 말없이 감상했다. 매일 보고 싶은 모습이었다. 한선호는 눈을 깜빡이는 시간조차 아깝다고 느꼈다. 어느 순간에 이명이 시선을 알아챈 듯 고개를 휙 돌렸다.

“선호, 뭐 해?”

“어? 그냥, 아무것도.”

“그럼 나 커피 타 줘.”

“조금 있으면 밥 먹을 건데, 커피 마시게?”

“응.”

이명이 바쁠 땐 그의 하인이 되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다. 한선호는 커피 메이커의 전원을 켜며 미소 지었다. 처음 사귈 때는 ‘아무거나’ 좋다고 하던 그였는데. 이명이 원하는 걸 겨우 요구하게 된 건 최근의 일이었다. 거의 1년이란 세월이 걸린 셈이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이명은 두 번의 커다란 패배를 겪었고 처참하게 난파되었으나, 패배를 받아들이고 극복하는 과정에서 더 단단하게 재건되었다. 그는 애정을 주고받는 데도 더욱 자연스러워졌으며 놀라울 정도로 어른스러워졌다.

‘가끔은 아쉬워.’

한선호는 말을 더듬고, 두려워하고, 뭐만 물어보면 눈빛이 흔들리던 연애 초창기를 가끔 떠올렸다. 현재의 이명은 그 무엇보다 사랑스럽지만, 그때의 이명도 만만치 않게 귀여웠다.

꼼짝하지 않고 바둑판을 노려보던 이명은 이번에는 자세를 바꿔 허리를 펴고 다리를 꼬았다. 한선호가 테이블에 엉덩이를 기대자 그가 고개를 들었다. 한선호는 우유와 시럽을 많이 넣고 위에 코코아 가루를 뿌린 카페 라떼를 그의 정수리에 가볍게 얹었다.

“벌써 다 됐어?”

“응.”

“명이 너, 점심도 똑바로 안 먹고 종일 이러고 있었지?”

이명이 그 말을 못 들은 척 머그 컵을 받아 들곤 입술에 갖다 댔다. 살짝 기울여 커피를 마시는 순간 두 눈이 스르르 감기며 커피와 꼭 비슷한 색감의 눈동자가 사라졌다. 그리고 만족스러운 미소가 입가에 번졌다.

“맛 괜찮아?”

“응.”

“피자 올 때까지만이라도 쉬어.”

“이거 해야 되는데…….”

이명은 머릿속에 걸리는 게 있다면 장애물을 돌파할 때까지 몇 날 며칠이고 고민했다. 일에 푹 빠진 애인이 매력적이기는 해도 하루에 30분 정도는 기분 전환을 하는 게 좋지 않나.

한선호는 그런 생각으로 의자를 끌어왔다. 그가 아무렇지 않게 바둑판 반대편에 앉자 이명이 킥 웃었다. 한선호는 거기서 멈추지 않고 흑돌이 반쯤 담긴 통을 제 앞으로 끌어왔다.

“진짜?”

이명이 웃음기 가득한 얼굴로 물었다. 한선호는 제법 진지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바둑판에는 어느 고수들이 언젠가 두었을 판이 반쯤 재연되고 있었다.

‘오늘은 이걸 이어서 해 볼까……?’

한선호는 빈 바둑판에 흑돌을 최소 9개부터 최대 41개까지 깔고서 이명에게 수차례 도전했으나-돌 41개를 깔았던 날 이명은 이런 건 난생처음 본다며 숨넘어가듯이 웃었다-무슨 짓을 해도 이길 수 없었다. 그럴 바에는 고수가 남겨 놓은 자취를 이어 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 같았다.

한선호가 이명의 버릇과 같이 검지와 중지 사이에 돌을 끼우고 방송에서 본 대로 바둑판에 ‘딱’ 소리 나게 내려놓자 이명이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왼손에 들고 있던 기보를 치우고 방으로 향했다.

한선호는 그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돌 통에서 흑돌을 한 움큼 쥐어 여기저기 얹었다. 열 개쯤 놓았을 때 이명이 안경을 들고 돌아왔다.

바둑을 둘 때 안경을 끼는 건 그의 오랜 습관이라고 했다. 먼지처럼 쉽게 짓밟을 수 있는 상대와 대결할 때조차 그는 그렇게 했다. 한선호는 그런 순간마다 바둑을 향한 그의 자세가 보통 진지하지 않다는 걸 깨닫게 됐다.

“이게 뭐야.”

바둑판을 본 이명의 얼굴이 또다시 황당한 웃음으로 물들었다.

“왜, 뭐. 아까랑 똑같은데.”

“으응…….”

분명히 아까 먼저 두어 놓고, 한선호는 모른 척 한 수를 더 두었다. 이명은 웃음을 참으며 그의 행태를 눈감아 주었다. 그러곤 검은색으로 점철된 바둑판 어딘가에 백돌을 놓았는데 한선호로서는 그가 왜 그곳에 착수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음…….”

고민하는 건 크게 의미가 없었다. 프로 9단과 연애한 지도 이제 1년이 다 되어 가지만 한선호의 바둑 실력에는 진전이 없었기 때문이다. 핸드폰에 깔아 놓은 바둑 앱만 일곱 개. 책장에도 기초 행마와 초급 사활 서적이 꽂혀 있는데, 부끄러울 지경이었다.

“명이야, 이 자리에 두는 거 어떻게 생각해?”

“네가 결정해야지, 그걸 왜 나한테 물어?”

한선호는 조금 고민하다가 돌을 놓고 싶은 곳에 놓았다.

“그건 좋지 않은 수였어. 아래쪽이랑 연결이 안 되잖아. 여기에 두는 게 낫지.”

이명이 손끝으로 두 칸 옆을 가리켰다. 한선호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연스럽게 흑돌을 그곳으로 옮겼다. 이미 제 차례를 고민하기 시작한 이명은 뭐가 잘못되었는지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처음부터 협잡으로 시작해 사기로 끝날 게임인데도 그는 백돌을 손안에서 굴리며 진지하게 고민했다.

“아무리 너라도, 이걸 이길 수 있을까?”

“선호가 자멸한다면 승산이 있다고 생각해. 아마 그렇게 되겠지.”

“너무한다.”

한선호의 바둑 실력이 늘지 않는 요인은 두 가지인데 첫 번째는 연습 부족이었다. 애초에 집에서 진득하게 바둑 둘 시간이 많지 않았다. 애인이 곁에 있을 때는 바둑 따위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건 선호가 너무 착해서 그래.’

두 번째는 착해서였다.

‘바둑은 좀 야비해야 되거든, 나처럼.’

유명한 전문가가 그렇다고 했으니 한선호는 그 말을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실력이 그럴지언정 그는 이명과 바둑 두는 것을 즐겼다. 비록 이해하지 못할지라도 가로와 세로, 흑과 백으로 이루어진 그의 세계에 잠시라도 함께 머물러 있는 기분이 좋았다.

“내가 이렇게 포위하면?”

“이렇게 빠져나가면 되지.”

바둑판 앞의 이명은 산신령 같고, 천사 같고, 요정 같고, 고양이 같았다. 뒤의 세 개는 평소에도 생각하는 바이니까, 결국 바둑을 두는 이명이 요술 부리는 산신령 같다는 이야기다.

“잡았다.”

“아래쪽도 신경 써야 할 텐데.”

이전에 왜 그 자리에 놓았는지 이해할 수 없었던 한 수가 한선호에게 거대한 장애물로 다가왔다.

이명과 바둑을 둘 때는 늪에 빠지는 것 같았다. 잘 걷다가 돌연 구덩이에 빠지는 기분. 스케일링하러 치과에 갔다가 발치 당하는 기분. 차원이 달랐다. 대체 기사들이란 머릿속이 어떤 구조로 되어 있길래 다섯 수, 여섯 수 앞을 보는 걸까.

“이게 뭐였지? 환…….”

“환격.”

“그게 뭐였지?”

“그건…… 음. 흑이 백돌을 잡아서 집을 냈잖아? 그러면…… 어, 백이 빈자리에 착점해서? 흑을 딱 되돌려 치는 거야. 어……. 설명이 좀 어려웠나?”

“음…….”

천재들은 자기 분야에 정통하지만 설명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경우가 많다. 특히 이 천재의 경우에는 자신은 숨 쉬듯이 하는 것들을 남에게 이해시키는 재주가 조금도 없었다.

하려는 것마다 가로막히고 정신 차려 보면 내 집이 죄다 철거되어 있는 게임에 흥미를 갖기는 어렵다. 한선호는 눈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명이야, 냉장고 보니 맥주가 한 캔밖에 안 남았던데.”

“내가 아까 하나 먹었어. 미안.”

이명이 한선호가 진작 포기한 판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한선호는 그의 안경을 벗겨 원래 제 것인 양 자연스럽게 썼다.

“산책할 겸 같이 사 올까?”

“나가기 귀찮은데…….”

“요플레도 다 떨어졌던데.”

“……어쩔 수 없지. 가자.”

곧 그들은 따뜻한 외투와 목도리로 빠르게 무장한 채 집을 나섰다. 목적지는 300m 정도 떨어진 마트였다.

그날따라 날씨는 몹시 추웠다. 한선호는 목도리 위로 빨갛게 물든 이명의 볼을 손등으로 쓸어내리곤 팔을 내려 그의 손을 맞잡았다.

“우리도 내년이면 스물아홉이네.”

한동안 말이 없던 이명이 불쑥 내뱉었다.

“그러네.”

“정이는 서른 살 되는 게 무섭대.”

“왜?”

“서른은 왠지 엄청 어른스러워야 할 것 같은데, 아직 어른이 될 자신이 없다나. 아직 2년이나 남았는데, 벌써 걱정하는 게 정이답지?”

“하하, 그러게. 명이 너는 어떤데?”

“나는 기대도 안 해. 솔직히…… 영원히 나잇값 못할 것 같아서.”

“왜?”

“나는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뭐든지 다른 사람들보다 미숙하잖아.”

으레 겸손해 보이려고 하는 말이 아니었다. 이명은 진심으로 자신이 부족하다고 생각했고, 그 뿌리는 한선호를 만나기 훨씬 이전에 형성되었다. 이명과 함께한 시간 동안 한선호는 이럴 때 그저 그를 사랑해 주면 된다는 것을 배웠다.

맞잡은 손에 힘을 주며 이마에 키스하자 이명이 배시시 웃었다. 그가 한선호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너는 어때?”

“난 서른이 기다려져.”

‘분명히 너와 함께일 테니까. 그 이유 하나로 나는 미래가 기대돼.’

“선호라면 그럴 줄 알았어.”

아무것도 모르는 주제에, 이명은 잘난 척하며 어깨를 으쓱거렸다.

그들은 한동안 침묵 속에서 걸었다. 그러다 이명이 쭈뼛거리며 이상한 말을 했다.

“나 막…… 나중에는 주름 생기고 흰머리 날 텐데, 그때도 좋아해 줄 거야?”

“넌 나 주름 생기고 흰머리 나면 싫어하려고 그랬어?”

“……아니. 좋아할 건데.”

“나도 그래.”

가끔 이명은 당연한 것을 물었다. 그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한 계속해서 함께일 텐데, 그게 주름이나 흰머리와 무슨 연관이 있을까.

한선호와 이명은 슈퍼마켓에서 맥주와 과일, 과자, 간식 등을 잔뜩 샀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도 손을 잡고 함께 걸었다.

“그럼 선호는…… 두려운 나이가 있기는 해?”

“두려운 나이라. 글쎄…….”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주제라 대답하기가 쉽지 않았다. 대충 상상해 보았는데 답이 미래에 없다는 건 확실했다. 두려움에 관해 생각하던 한선호는 오늘 아침에 꾸었던 꿈을 떠올렸다.

“난…… 스무 살 때로 돌아갈까 봐 두려워.”

“왜?”

“그땐 네가 곁에 없었잖아.”

이명이 부드럽게 웃으며 한선호의 손가락 사이마다 제 손가락을 하나씩 미끄러뜨렸다.

“번호도 알면서, 전화하면 되지.”

“전화해서 붙잡으면, 또 나 밀어내고 도망가려고?”

“……이번엔 정말 안 그럴게.”

“진짜지? 그럼 네가 전화해. 스무 살이 되면 네 전화만 기다릴 거야.”

잠시간 침묵이 흘렀다. 이명은 한동안 말없이 걷다가, 한참 뒤에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러지 마. 난 못 할 거야.”

“왜?”

“네가 나 같은 걸 좋아할 리 없다고 생각할 테니까.”

이명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자신을 왜곡하여 저평가했다. 하지만 이런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밖으로 꺼낸다는 점은 예전과 달라졌다. 적어도 이제 이명은 한 가지는 확실히 알고 있었다. 그가 생각을 솔직하게 말한다고 해서 애인이 실망하며 사랑을 거두는 일 따위는 없으리라는 것을.

한선호는 걸음을 멈추고 이명을 품에 꼭 안았다. 외투가 두꺼워서 포근한 눈사람 같았다.

“아무 데로도 돌아가지 않았으면 좋겠어. 나는 지금이 좋아.”

가슴께에서 잔뜩 짓눌린 코맹맹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날 사랑하는 선호가 좋고, 그걸 확신하는 나도…… 건방지지만 나쁘진 않은 것 같아.”

작게 내뱉은 고백이 자랑스럽고 사랑스러웠다. 한선호는 그가 ‘꽥!’ 하는 소리를 낼 때까지 힘주어 끌어안았다.

집에 도착했을 즈음 한선호는 이명의 앞머리에 먼지가 붙은 것을 보았다. 그러나 그 먼지는 손을 대자마자 스르르 사라져 버렸다. 고개를 들자 짙은 군청색을 배경으로 하얀 보풀이 느릿하게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이명은 눈을 처음 보는 강아지처럼 고개를 꺾고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가 하늘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소원 빌자.”

그러고 보니 첫눈을 이명과 맞는 건 처음이었다. 작년에는 동창회에서 그를 만나기 전에 이른 첫눈이 왔으니까, 올해가 처음이었다. 선호는 빌 만한 소원이 뭐가 있는지 가만히 생각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명이 그의 소매를 끌어당겼다.

“뭐 빌었어?”

“너는?”

“필요한 게 없어서 선호 소원이 이루어지게 해 달라고 빌었어.”

“뭐?”

“그러니까 우리는 같은 배를 탄 거야. 너 무슨 소원 빌었는지 이제 말해 줘.”

한선호는 웃어 버리고 말았다. 기껏 소원을 빌자길래 대단한 바람이라도 있는 줄 알았더니, 싱겁기는.

“맞혀 봐.”

이명은 눈알을 굴리며 한참 동안 고민했다.

“음……. 잘 모르겠어.”

그는 시무룩하다는 듯이 고개를 떨어뜨리며 중얼거렸다.

“로또…… 일까.”

“내가 로또가 왜 필요해? 너만 있으면 되지.”

“나 기분 좋게 해서 말 돌리려는 거지? 안 속는다.”

한선호는 토라진 체하느라 툭 튀어나온 뺨을 손가락으로 쿡쿡 찌르며 말했다.

“남한테 말하면 소원 날아가지 않아?”

“에이, 선호는 그런 미신을 믿어?”

“응.”

“그래도 궁금한데. 말해 주면 안 돼?”

한선호는 말없이 미소 지으며 손바닥으로 이명의 볼을 감쌌다.

그의 얼굴을 가만히 보고 있자니 소원 같은 건 필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소원이 이루어진다면 ‘역전 앞’이나 ‘동해 바다’처럼 동어 반복이겠지. ‘행복한 이명’이라……. 뭐, 듣기 좋으니까 내버려 둘까.

“비밀이야.”

“치사해, 한선호.”

계속해서 눈꽃 송이가 이명의 콧등에 내려앉았다. 눈이 내리기 시작한 지 얼마 안 됐는데도 벌써 결 좋은 갈색 머리카락에 눈 결정이 잔뜩 달라붙어 있었다.

그의 행동 때문에, 혹은 음성 때문에 사람들은 이명이 겨울처럼 차갑고 눈처럼 연약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보이는 이상으로 따뜻하고 강인한 사람이었다. 한때는 그가 많은 사람들에게 오해받는 게 속상했지만, 한선호는 이명의 내면을 혼자만 아는 게 싫지만은 않았다.

“아무래도 폭설이 올 것 같은데, 내일은 집에 있을까?”

그리 물으며 이마에 쪽 하고 키스했다.

“좋아.”

하얀 이마를 드러낸 채 이명이 웃었다. 눈을 반쯤 뜨고서 입을 벌린 채, 이렇게 평범한 아파트 단지가 아닌 더 특별하고 귀한 장소에 어울릴 것 같은 모습으로. 배경에선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크리스마스 달력을 제작하는 사람들이 찾아 헤매는 그림이 바로 이런 것이리라.

문득 일상을 탈피해 버린 마법 같은 순간에 한선호는 할 말을 잃어버렸다. 10년이 지났어도 똑같은 방식으로 웃는 이명을 바라보며, 그는 갑자기 오래전으로 시간이 되돌아간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귀가 먹먹했다. 시끄럽게 울리던 차 소리와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까마득히 멀어졌다. 그 대신에 입술 사이에서 하얗게 새어 나오는 입김과 눈이 녹는 소리만큼 연약한 숨결이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자 어김없이 음악이 들렸다. 처음 들었던 순간부터 잊지 못했던 멜로디, 한선호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선율이었다.

― 과호흡 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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