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8. 스물여덟, 봄 (20/21)

18. 스물여덟, 봄

김 편집장은 몇 달째 곤혹스러워하고 있었다. 올해로 창간한 지 15년이 된 월간지 ≪바둑, 오늘≫의 구독자가 점점 줄어들다 못해, 이제 스폰서사와 광고주에게 고개를 못 들 지경이 되었던 것이다. 아무리 출판 시장이 자본의 힘에 움직인다지만 김 편집장은 인터넷 찌라시들이 그렇듯 바둑 기사들의 사생활이나 연봉에 관한 자극적인 기사로 구독자를 늘릴 마음이 조금도 없었다. 그런 그에게 굵직한 스폰서 사장이 ‘사활, 죽이고 살리다’ 코너를 폐지하고 대신에 ‘풍문과 말, 말, 말’을 넣으란 요구를 해 온 게 문제였다.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바둑 신문은 기사들을 음해하는 싸구려 가십이 아닌, 바둑 자체를 다루어야 합니다.’

욕먹을 거라곤 예상했어도 머리로 재떨이가 날아올 줄은 몰랐다. 다음 날 부하 직원을 통해 사과받고 무마되기는 했지만 김 편집장은 이 사건으로 ≪바둑, 오늘≫이 막다른 골목에 몰렸음을 직감했다. 인정하긴 싫어도 과거처럼 정공법으로 사업을 유지할 수 없는 시대가 와 버린 것이다.

―형, 잘 지냈어?

사촌 동생에게 전화가 왔을 때만 해도 김 편집장은 그가 기적 같은 기회를 가져다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명절 때만 보는 데면데면한 사이였던 것이다.

“응. 너는 좀 어떠냐. 일은 할 만하고?”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마냥 성격 좋아 보이는 녀석이지만 어릴 때는 충남에서 손꼽히는 수재였다. 명문대를 졸업하고서 보란 듯이 대기업에 취업해 이모의 제일가는 자랑거리가 되었다.

“그래도 넌 직장이 탄탄하잖냐.”

―형은 뭐 안 그런가?

“나는…… 요즘 힘들어. 이 짓도 관둘 때가 왔는지.”

이런 대화를 할 때마다 진작 공부해서 회사나 들어갈 걸 싶어졌다. 기사가 되겠다는 꿈에 반평생을 매달리다 자신 정도의 범재는 널리고 널렸다는 걸 깨달았을 땐 선택의 여지가 많지 않았다. 그래도 당시 같이 바둑 두던 사람들을 돌아보면, 단신으로 바둑 신문을 차리고도 15년 동안 폐업하지 않은 자신은 대단히 운 좋은 편에 속했다.

―무슨 소리야. 내가 형 자랑을 얼마나 하고 다니는데.

“말만이라도 고맙다.”

―그래서 말인데, 형 누구 인터뷰 좀 해 줄 수 있어?

“인터뷰?”

―응. 옆 팀에 친하게 지내는 직원이 있는데, 프로 기사 친구가 있다고 하거든. 언젠가 인터넷 기사가 잘못 나갔나 봐. 실제론 좋은 사람인데 사람들이 오해한다고 속상해해.

“그런데?”

―내가 예전에 지나가듯이 형 얘기를 했는데, 어제 갑자기 소개해 줄 수 있냐고 물어보더라? 형네 잡지에 인터뷰 나가면 그쪽이나 형이나 윈윈 아닐까 해서, 일단 연락해 보겠다고 했지.

김 편집장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요는 바둑 신문 편집장에게 와서 인터넷 기사발 싸구려 가십이나 해명하란 거다. 아무리 처지가 어렵더라도 품위가 있지. 차라리 다 때려치우는 한이 있더라도 그런 제안을 받아들일 리가 없…….

―아, 깜빡 잊고 말을 안 했네. 그 기사가 누구냐면, 이명 9단이야.

“뭐? 당장 데려와!”

이명 측에서는 오는 주말에 바로 인터뷰를 하고 싶다는 의향을 밝혔다. 기자들과 짤막한 대화조차 거부하기로 유명한 신비주의 기사, 황금 같은 VIP 슈퍼 갑의 말씀인데 따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김 편집장은 업무를 모두 사원들에게 맡겨 놓고 인터뷰를 기획하는 데만 3일을 꼬박 보냈다. 그쪽에서 원하는 건 ≪선데이 투데이≫지에서 왜곡해 놓은 이미지를 바로잡는 거였지만, 김 편집장은 그보다 더 큰 욕심을 갖고 있었다.

수많은 기사를 봐 온 김 편집장은 바둑돌 놓는 모습만 봐도 기풍을 가늠할 만큼 감이 좋았다. 그의 판단으로 세상에는 수재가 널렸어도 진짜배기 천재는 많지 않았다. 그가 인정하는 몇 안 되는 ‘진정한 천재’를 직접 볼 기회가 이렇게 찾아온 이상, 천재의 본질을 파악하고 싶었다. 반쯤은 개인적인 욕망이었다. 기재의 벽을 넘지 못해 중도 포기한 자신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겠지 싶어서.

김 편집장은 회의를 열어 3시간 동안 토의한 끝에 ‘천재란 무엇인가’란 가제를 짓고 특집 지면을 여덟 페이지나 비워 놓았다. 일당이 가장 비싼 사진 기사에게 선금을 송금하고 청소 업체를 불러 사무실을 구석구석 청소했다.

이명은 일요일 오후 2시에 도착했다. 멀끔한 세미 정장 차림이었으며 곁에 경호원처럼 보이는 덩치 큰 남자를 대동하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이명 9단. ≪바둑, 오늘≫ 편집장 김영재입니다.”

“안녕하십니까. 이명입니다.”

김 편집장은 정중하게 악수를 청한 뒤 그를 안으로 모셨다. 이명 9단은 듣던 것보다 훨씬 작고 마른 남자였다. 따지고 보면 자신과 키가 비슷하니 체격이 작은 건 아니었지만, 얼굴이 조막만 해서인지 나이보다 앳되어 보여서인지 전체적으로 소년 같은 인상이었다.

“일요일이라 직원들이 없습니다. 이쪽은 오늘 도와주실 사진 기사분이고요. 그럼 이쪽 회의실로…….”

사진 기사와 이명이 그를 따라 들어왔다. 이명이 깨끗하게 정돈해 놓은 책상 앞에 앉자, 덩치 큰 사내가 당연하다는 듯이 그 곁에 앉았다. 그가 눈앞을 지나니 김 편집장은 잠시 시야가 가려져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김 편집장은 직접 차를 타서 이명과 경호원에게 가져다준 뒤 그들의 건너편에 앉았다.

“12년산 보이찹니다. 입맛에 맞으시면 좋겠군요.”

“감사합니다.”

상대가 상대다 보니 여유를 찾기가 쉽지 않았다. 김 편집장은 모시기 힘든 거물 앞에서 허둥대며 덜덜 떨리는 손으로 보이스 레코더를 켰다. 인터뷰에 관해 몇 가지 지침을 알린 뒤 양손을 깍지 껴 맞잡고 이명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인터뷰가 시작되었다.

“이명 9단은 본래 언론 인터뷰를 안 하기로 유명하시지요. 오늘 이렇게 나오신 이유가 있으십니까?”

기사로서의 이명 9단은 속기파도 장고파도 아니다. 그러나 인간 이명은 지독한 장고파처럼 보였다. 미리 질문지를 주었으니 답변을 대충이라도 생각해 왔을 텐데, 간단한 질문도 바로 대답하지 않고 한참 동안 뜸을 들이는 것이었다. 옆에 앉아 있던 남자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을 때 이명은 입을 겨우 열었다.

“그냥…… 얘기하고 싶은 것들이 있어서요.”

김 편집장은 첫 질문부터 당황하고 말았다. 워낙 다재다능하고 치고 빠지기에 능한 기풍의 소유자라 말재간도 좋을 거라고 막연하게 생각했었다. 그것도 대답이랍시고 한마디 하고 멀뚱멀뚱 앉아 있는 이명을 보며, 정신 안 차리면 인터뷰를 망치겠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자, 그럼 민감한 주제부터 가 보죠. ‘기화생명배 세계 바둑 선수권 대회’에서 준우승하셨습니다. 그때 기분이 어떠셨는지요.”

김 편집장은 지지부진한 질문을 생략하고 중반에 계획해 두었던 질문으로 과감하게 건너뛰며 이명의 표정을 살폈다. 그는 안색이 조금 어두워진 채로 김 편집장의 눈을 마주쳤다.

“져서 속상했습니다. 그 뒤로도 계속…… 그 판에 대해서 끊임없이, 계속 생각했고요. 다시 둬 보고서 대안을 찾았습니다.”

“대안…… 이요? 어떤…….”

“말로 하긴 어려운데요.”

“그럼 혹시 간단하게라도 보여 주실 수 있는지……!”

“네, 그러죠.”

그것은 전혀 기대하지도 않았던 수확이었다.

바둑판은 이미 회의실 책상 한중간에 준비되어 있었다. 김 편집장은 얼른 돌 통을 가져와 이명에게 검은 쪽을 내밀었다. 그가 조금 주저하며 뚜껑을 열었을 때 심장이 한 차례 크게 뛰었다.

‘됐어! 이 인터뷰는 끝났다!’

이명이 ‘기화생명배’ 결승전의 첫수를 착점하는 순간이 카메라에 포착되는 소리가 들렸다. 김 편집장은 얼른 손짓해 사진 기사를 가까이 오게 한 뒤 백돌을 놓았다. 워낙 화제가 된 경기다 보니 기보를 외우고 있었다. 게다가 전날 영상도 다시 돌려 봤으니 어려움이 없었다. 흑돌과 백돌이 번갈아 가며 빠르게 놓였다. 패배의 길을 다시 걷는 이명 9단의 표정은 평온했다. 찰칵 찰칵, 셔터 소리를 배경으로 탁, 탁 돌 놓는 소리가 회의실 천장을 울렸다.

그러다 104수가 되었다. 김 편집장은 긴장해서 덜덜 떨리는 손으로 백돌을 놓고 기다렸다. 이명의 프로 인생 최악의 실수로 꼽히는 105수가 나올 차례였다. 그는 아무 표정도 없이 실제 경기와 다른 곳에 흑돌을 놓았다.

“여기부터 새로 연구하신 겁니까?”

“예.”

김 편집장은 난감했다. 기보를 따라 두는 거야 얼마든지 할 수 있지만 그는 홍랴오치가 아니었다. 다음 수를 둘 자격도 깜냥도 없었다. 그가 주저하자 이명이 백색 돌 통을 제 앞으로 끌어가 돌을 꺼냈다. 그때부터 홀로 두는 숨 막히는 대국이 이어졌다.

김 편집장은 자신의 눈을 믿을 수가 없었다. 한 수도 잊지 않도록 머릿속에 기보를 그리는 중에도 심장이 쿵쿵 뛰었다. 애초에 이렇게 되었어야 했다. 실로 결승에 걸맞은 수준이었다. 이명은 몇 번이고 이 판을 두어 본 사람처럼 막힘없이 바둑판을 채워 나갔다.

‘이것이 천재로구나.’

역시 바둑을 관두길 잘했다. 이런 괴물들의 세계에서 자신 따위는 서 있을 자리가 없었다. 바둑에 관해 모르는 사진 기사조차 분위기를 감지한 듯 셔터를 미친 듯이 눌러 댔다. 숨 막히는 긴장감으로 가득한 회의실 안에서 편안해 보이는 건 경호원뿐이었다. 그는 주인 옆에 앉아 있는 도사견처럼 충실한 모습으로 이명의 옆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거나 가끔 차를 마실 뿐이었다.

“이렇게…… 끝인데요. 이런 식으로 두었더라면, 제게도 승산이 있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이명은 이마를 살짝 훔치며 겸손하게 말했다. 그러나 김 편집장의 눈에는 앳되어 보이는 28세 청년이 제 약점을 먹어 치우고 더욱 성장한 괴물처럼 보였다.

“하지만 후회하는 건 아니에요.”

이명이 조용히 덧붙였다. 그가 흑돌 하나를 손가락 사이에 굴리며 잠깐 뜸을 들였다.

“간절히 바라는 걸 포기해야 할 때가 있고, 아닐 때가 있습니다. 그 시절에 저는 그걸 구분하지 못했을 뿐이고…… 그렇게 어려운 과정이 있었기 때문에 아마.”

이명은 흑석을 돌 통에 부드럽게 돌려놓고 뚜껑을 닫았다. 김 편집장은 그가 왼손 약지에 반지를 꼈다는 걸 그제야 눈치챘다.

“현재가 있다고……. 그런 생각을 한창 했습니다.”

“그로 인해 자신감이 붙으셨다고 봐도 될까요?”

“예. 저는 원체 흠이 많아서, 영원히 완벽해질 수는 없을 겁니다. 하지만, 적어도 이제 같은 실수를 하지 않겠죠.”

이명 9단은 사고가 추상적인 편이군. 김 편집장은 후가공 과정에서 그를 어떻게 포장할지 고민하며 이미 궤도를 이탈해 버린 질문지를 덮었다. 어차피 ‘기화생명배’ 결승의 가상 기보를 손에 넣은 것만으로 이미 부수 확보가 끝난 거나 마찬가지였다.

“그날 이명 9단께선 계시기를 멈춘 뒤 복기하지 않고 나가셨죠. 상대인 홍랴오치 9단에게 무례해 보일 수 있는 행동이었는데요. 이유가 있었습니까?”

김 편집장은 가십을 사랑하는 독자들을 노린 질문을 던졌다. 앞서 더 민감한 질문에 꿈쩍도 하지 않던 이명은 이 질문을 듣자마자 낯빛이 어두워졌다. 경호원이 말없이 그의 등에 손을 얹었다. 이명은 한참 뒤에야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저는…… 저는, 어린 시절 폐병이 있었는데요.”

“아…….”

“치료를 받고 완치되었지만, 그 이후에도 가끔 문제가 생기기도 합니다.”

김 편집장은 금시초문인 이야기에 눈을 크게 떴다.

“그때 하필 그래서…… 숨을 쉬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계시기를 멈추고, 통역사를 불러 복기할 건강 상태가 아니라고 양해를 구하고 싶었지만, 몸이 안 좋다 보니 급히 퇴장했습니다. 생각하시는 것처럼 혈기 때문에 경기를 포기한 것이 아니고, 일부러 무례하게…… 군 것도 아닙니다. 이 기회를 빌어, 오해를 해명하고 싶습니다.”

이명은 때론 힘겨운 듯 말을 멈추었지만, 그만하면 또박또박 대답했다. 경호원은 긴 답변이 끝난 뒤에야 그의 등에서 손을 뗐다.

“세간에서 생각하는 바와 달리 복기를 하지 못할 사정이 있었다는 말씀이군요.”

“예. 사실…… 기회가 있다면 홍랴오치 9단께도 다시 상황을 설명 드리고…… 음, 사과의 말씀도 전하고 싶습니다.”

“그렇군요. 엄청난 대결이었는데, 홍랴오치 9단에 대한 평가는 어떠십니까? 또 대결해 보고 싶으신지요?”

“아……. 네! 경기를 연구하면서 직접 둬 보니 44수가 얼마나 놀라운 묘수인지 알 수 있었습니다. 이어지는 46수, 48수, 그리고 98수, 모두 대단하고, 배우고 싶은 수이고, 그리고…… 존경합니다. 다음에 또 배울 기회가 있었으면 합니다.”

눈을 반짝이며 이야기하는 이명은 분명 달변가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 답변이 그에 대한 세간의 인상을 바꿔 놓을 것임을 김 편집장은 짐작할 수 있었다.

“김석훈 9단에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김석훈 9단은 ‘수도권 바둑 선수권 대회’ 4강전과 ‘기화생명배 세계 바둑 선수권 대회’ 준결승에서 두 번 뵈었습니다. 먼저 악수를…… 청해 주시고, 또 따뜻하게 대해 주셔서…… 삼촌이 생각나기도 하고……. 음. 그랬습니다.”

“기풍은 어떻게 평가하십니까?”

“‘호랑이’라는 별명이 잘 어울리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보다는, ‘어부’가 좋지 않을까요? 그런 생각도 해 봤습니다.”

“‘어부’요?”

“네. 이렇게 그물을 쳤다가…… 가만히 있다가, 나중에 확! 잡아 버리는 그런 거, 있잖아요. 그런 걸 참 잘하신다는 느낌이 들어요.”

“하하, 그럴듯하네요.”

≪바둑, 오늘≫ 183회가 발간되는 날, 김석훈 9단에게 새로운 별명이 생기겠군. 김 편집장은 속으로 웃으며 중얼거렸다.

“‘어부’ 김석훈 9단께서 방송에서 ‘최근 가장 배울 점이 많았던 판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기화생명배’ 준결승을 꼽으셨어요. 특히 145수를 언급하셨는데요.”

김 편집장은 미리 뽑아 둔 기보를 이명에게 넘겼다. 이명 9단이 그 김석훈 9단을 어린아이처럼 다루며 몰아세운 대단한 대국이었다.

“아시는지 모르겠지만 바둑 방송 ‘goTV’에서 ‘올해의 묘수’ 1위로 뽑히기도 했거든요. 이 수를 두셨을 때 무슨 생각을 하셨는지 여쭤보겠습니다.”

“아, 그땐 그냥…… 위쪽으로 돌파하면 좋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이런, 전형적인 천재의 화법이군.’

“김석훈 9단께서는 요즘 각종 방송 활동을 활발히 하고 계신데요. 이명 9단은 향후 엔터테이너로 활동하실 계획이 있으신지요?”

“아니요. 없습니다.”

“그렇습니까. 이제 다른 이야기를 조금 해 보죠. 프로 바둑계에 친분 있는 분들이 있습니까?”

“어……. 바둑 도장에서 임주혁 9단과 김병훈 5단께 사사받았고 현재까지 가깝게 지내고 있습니다. 연구생 동기인 서유진 7단, 조승빈 3단, 박지호 6단과도 알고 지냅니다.”

“그렇군요. 그럼 이명 9단의 바둑 인생에 가장 도움을 준 사람들, 의지가 되는 사람들은 누가 있을까요?”

“일단…… 제 매니저이자 저를 늘 지원해 주시는 엄마가 있고요, 사랑하는 동생, 그리고…… 삼촌과 이모가 많이 격려해 주세요. 앞에 언급했던 임주혁, 김병훈 사범님, 대한 기원의 조정환 원장님……. 그리고…….”

이명의 목소리가 급격하게 작아졌다.

“저, 죄송하지만 마지막이 잘 안 들려서……. 다시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애……얘, 예인……이. 그러니까, 아니, 저기……. 처음부터 말해도 돼요?”

인터뷰 내내 옅은 미소만 띠고 있던 경호원이 돌연 “풉!” 소리를 내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큭큭거리며 웃다가 결국은 상체를 아예 접으며 고개를 숙였다.

“웃지 마……!”

“하하, 아하하하! 미안, 미안. 죄송합니다. 하하하, 계속하세요.”

이명은 그를 흘겨보더니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애인이 있는데요. 가끔은 절 곤란하게 하지만, 그래도…… 늘, 힘이 되어 주는 좋은 사람이에요.”

김 편집장은 그 뒤로도 이명의 신상에 관한 여러 질문을 던졌다. 바둑이 안 풀릴 때 먹는 음식이나 주로 듣는 음악, 바둑을 막 시작하는 아이들에게 주고 싶은 팁 따위였는데 대답이 대체로 시원찮아서 지면에 실을 만한 것이 거의 없었다. 바둑이 안 풀릴 때는 아무것도 안 먹고, 음악은 ‘그냥 아무거나’ 들으며 아이들은 어릴 때 축구를 했으면 좋겠다는 대답을 어느 독자가 좋아하겠는가. 이명 9단은 대단히 흥미로운 인사였지만 재치 있는 인터뷰이는 아니었다.

몇 가지 질문을 더 던지고서 김 편집장은 인터뷰를 마칠 때가 되었다고 판단했다. 어차피 초반에 딴 기보 분석만으로도 여덟 페이지를 채우고 남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음……. 마지막 질문 드릴게요.”

“네.”

“제가 5년 전 ‘한국 기성 대전’에 취재를 갔다가 이명 9단을 뵌 적이 있는데, 오늘 만나 뵈니 인상이 그때보다 밝아지신 것 같습니다. 9단에 오르셔서 생긴 여유일까요? 아니면 그만큼 나이가 들어서일까요?”

“아니요. 저 원래 우울한 사람인데……. 연애하면서 많이 바뀌었어요.”

그놈의 연애, 좋기는 좋은가 보다. 계속 언급하는 걸 보면.

“감사합니다. 인터뷰 마치겠습니다. 고생하셨습니다.”

김 편집장은 보이스 레코더를 끄고 이명에게 다시 악수를 청했다. 옆에 앉아 있던 남자와도 자연스럽게 악수한 뒤 편집 지침을 짤막하게 소개했다. 이명은 가만히 앉아서 듣기는 했지만 별 관심이 없어 보였다.

“아, 그리고 사진은…….”

“사진 미리 볼 수 있을까요?”

갑자기 경호원 남자가 끼어들었다. 저런 데까지 관여하는 걸 보면 평범한 경호 인력은 아닌 모양이었다. 김 편집장은 선뜻 고개를 끄덕이곤 사진 기사를 불러 그동안 찍은 결과물을 모니터에 띄웠다.

“음……. 얼굴이 너무 많이 나온 건 빼 주시길 바랍니다. 이건 괜찮네요.”

경호원은 몹시 까탈스럽게 굴었는데, 이명의 이목구비가 조금이라도 나온 건 전부 쓸 수 없다고 못 박고 기껏해야 그의 손이 찔끔 나온 사진만 사용해도 된다고 허락해 주었다. 한 시간 동안 열심히 셔터를 눌러 댄 사진기사는 허탈하단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건 버리기 아까운데……. 제가 볼 땐 연예인처럼 잘 나왔거든요. 혹시 어떠신지…….”

김 편집장은 간절한 눈빛으로 모니터를 가리켰다. 착수하는 순간에 찍힌 사진 속 이명 9단은 굉장히 이지적으로 보였다. 이번엔 정면도 아니고 옆모습이라 허락해 주려나 싶었지만 남자는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그가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이 말했다.

“기사에 싣기는 조금 그렇고요, 이 사진 혹시…… 프로필 사진으로 사용해도 될까요?”

“프로필이요?”

“네. 이명 9단 포털 프로필을 조만간 업데이트하려고 하거든요. 사진관에 가려고 했는데, 자연스럽게 나온 게 좋을 것 같아요.”

“아? 그럼요. 영광이죠. 보내 드릴게요.”

“가능하시다면 오늘 찍으신 사진 전부 전송 부탁 드릴게요. 용도는 개인 소장용입니다. 제가 이명 9단 팬이라서요.”

남자는 뻔뻔한 얼굴로 종이쪽지에 연락처와 이름을 남겼다.

사무실을 떠나기 전, 그는 이명 9단의 옷을 정성스레 여미고 머리카락을 정리해 준 뒤에야 문을 열었다.

“선호, 우리 저녁 뭐 먹을까?”

“음, 너 좋아하는 보쌈집 갈까?”

“거긴 지난주에 갔잖아. 다른 데 가자.”

사무실이 워낙 조용해서 둘이 속닥거리는 소리가 훤히 들렸다.

‘서로 반말하는 거 보면 경호원이 아닌가…….’

경호원이 아니라면 뭐라고 해야 할까. 보모……? 반평생 글만 써 온 김 편집장이었지만 이상하게도 적절한 표현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는 사진 기사를 퇴근시키고 소중한 음성 파일을 컴퓨터로 옮겼다. 우선은 기보부터 꼼꼼하게 정리한 뒤에 사촌 동생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영재 형!

“이명 9단 인터뷰 끝났다.”

―어땠어?

“끝내줘. 다음 호 부수 열 배수로 뽑을 거다.”

―하하하! 다행이다.

“언제 한번 보자. 고기 사 줄게.”

―푸하, 좋지! 나도 선호 씨한테 밥 한번 사야겠네.

김 팀장은 남자가 남겨 두고 간 쪽지를 힐끔 보았다.

“한선호 씨…… 가 네가 말한 회사 직원이야?”

―응. 왜?

“오늘 이명 9단하고 같이 왔거든. 난 또 경호원인 줄 알았네.”

―체격이 좀 그렇지? 일도 잘하고 싹싹해. 나 벌써 한 라인 탔잖아.

김 팀장은 문득 두 남자를 보고서 느낀 위화감에 관해 생각했다. 그들은 아무리 봐도 친구 사이 같진 않았다. 분위기가 어쩐지 애틋하달까, 방송에서 떠들어 대는 브로맨스 같은 게 떠올랐다. 경호원도 아니고 보모도 아니라면, 혹시…….

“선호 씬 보아하니 인기 많겠어. 반지 끼고 있던데, 만나는 사람 있겠지?”

―우리 한 사원 당연히 애인 있지. 그것도 열세 명이나.

“뭐?”

―전에 전화 온 걸 봤는데 ‘13번 애인님’이라고 돼 있더라고. 그럼 1번부터 12번도 있다는 거 아니겠어? 크, 나의 추리력.

“……어, 그래.”

―아무튼 형, 나 밖이라서. 다음에 고기 사 줄 때 연락해!

“그래. 알았다.”

김 편집장은 전화를 끊고서 헛웃음을 지었다. 가십 따위 질색하는 자신이 아니었나. 대체 무슨 엉뚱한 생각을 하는 것인가. 그는 잡스러운 생각을 몰아내고 녹음 파일을 틀었다.

‘기회가 있다면 홍랴오치 9단께도 다시 상황을 설명 드리고…… 음, 사과의 말씀도 전하고 싶습니다.’

파일 확인차 아무 곳이나 틀었는데, 듣고 나니 머리를 스치는 바가 있었다. 그 사과, 직접 하면 왜 안 된단 말인가? 그 김에 홍랴오치 9단과 친선 경기도 한 번?

‘그걸 우리 유튜브에서 중계하는 거지……!’

새 기획 파일을 작성하는 김 편집장의 손이 바빠졌다. 머릿속에서 마인드맵처럼 퍼져 나가는 아이디어에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었다. 하얀 페이지에 글줄이 더해질수록 일이 점점 커졌다. 그의 계획대로라면 조만간 중국과 일본으로 출장을 가게 될 것이다.

‘실력 있는 통역사가 필요하겠군.’

김 편집장은 ‘천재란 무엇인가’ 2편을 상상하며 키보드를 미친 듯이 두드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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