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호흡 3권
<목차>
17. 스물일곱, 겨울
18. 스물여덟, 봄
19. 스물여덟, 겨울
17. 스물일곱, 겨울
“……치명적인 자충수 이후 17수 만에 불계패를 선언하였습니다. 대한민국의 선전을 바라던 바둑 팬들에게는 참 실망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는데요. 국내에선 경기 중 기사의 판단을 존중해야 한다는 의견과 그래도 끝까지 책임을 다하며 스포츠맨십을 보였어야 한다는 여론이 팽팽하게 맞서는 가운데, 홍랴오치 9단이 경기 직후의 인터뷰에서 이 대국에 관해…….”
이명은 택시에서 흘러나오는 라디오를 흘려듣고 있었다. 평소였다면 분명히 속상했을 내용이 알쏭달쏭한 외국어처럼 들렸다. 그는 휙휙 흘러가는 시가지의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며 손가락을 만지작거렸다.
한동안 생각에 잠긴 듯 조용하던 한선호가 옆을 돌아보았다. 시선이 마주치자, 무표정하던 눈매가 가늘어지며 그가 미소를 지었다. 이명은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 몰라서 눈을 깜빡거렸다. ‘저거 네 얘기지?’ 하고 순진하게 묻는 건가, 아니면 놀리는 건가. 어쩌면 라디오를 듣지 않았는데 그냥 웃은 걸까.
아무 반응도 보이지 않자 그가 ‘다 왔어’ 하고 입 모양으로 말했다. 이명은 고개를 여러 번 끄덕이고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자신의 모든 행동이 자연스럽기를 간절히 바랐지만 확신이 없었다. 눈치 보는 게 티 나지 않을까, 자신감 없어 보이지 않을까. 숫기 없고 서툴러 보이겠지. 말주변도 없고 분위기를 처지게 하겠지. 어쩌면 한선호는 벌써부터 후회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남자를 선택한 것을…….
‘선택이라고?’
하룻밤을 함께 보내고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준 건 사실이지만, 서로 마음을 확인하고 포옹한 것도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해서 ‘선택’처럼 거창한 말을 붙이기는 일렀다.
소리 없는 한숨이 나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기뻤는데, 흥분이 조금 가라앉고 나니 냉정해졌고, 두려워졌고, 자신감이 사라졌다. 기화생명배 결승전을 치를 때만 해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일어난 모든 일이 현실과 동떨어진 꿈같았다.
이명은 왼쪽 주머니 속에서 네 번째 손가락에 끼워진 반지를 만지작거렸다. 한선호의 마음을 확인하는 계기가 된 증표. 이 덕에 그에게 무작정 다시 달려왔지만, 이 관계가 어디로 향해 갈지는 미지수였다. 그는 이런 식으로 연애를 시작해 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돌려줘야 할까…….’
크기가 커서 겉도는 반지를 손끝에 걸치고 슬쩍 내려다보았다. 손톱 주변에서 달그락거리는 반지를 엄지로 살살 돌리던 중에 무언가가 어깨를 톡 쳤다. 깜짝 놀라 어깨를 움츠리는 바람에 반지가 다시 약지에 쑥 끼워졌다.
“우리 집 다 왔어.”
고개를 들자 한선호가 팔을 내리며 흠잡을 데 없는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서 복합적인 감정이 들었다. 속을 옥죄는 기분은 토할 것처럼 긴장했다는 증거였다. 목을 타고 올라와 뺨을 달구는 열기가 무엇인지 이명은 잘 알고 있었다. 그 이면에는 의아함이 있었다.
‘왜 저렇게 웃는 거지……. 잘 모르겠어.’
의아함은 금세 두려움으로 진화했다. 한선호가 카드로 택시 요금을 계산하는 사이 이명의 머릿속에는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가득했다. 그러나 현실의 그는 자연스럽게 손을 붙잡은 한선호에게 끌려가듯이 택시에서 빠져나오고 있었다.
찬 공기가 기다렸다는 듯이 노출된 피부를 갈겨 댔다. 구매하고서 오늘 처음으로 제 취지대로 사용되었던 러닝화가 땅을 밟았다. 이명은 고개를 꺾고 고층 오피스텔에 둘러싸인 풍경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그러나 한 바퀴 둘러보기도 전에 그를 단단하게 붙잡은 따뜻한 손이 몸을 끌어당겼다.
정말 자연스러웠다. 마치 이 나라에선 남자 둘이서 손을 잡고 걷는 게 당연하다는 태도였고, 어제 만난 사람이 아니라 오래 알고 지낸 친구라도 되는 듯한 당당함이었다. 친구끼리 손을 잡고 다니지는 않겠지만…….
이명이 어물쩍거리는 사이 그들은 한쪽 벽이 은빛으로 빛나는 커다란 건물 앞까지 왔다. 한선호가 주머니에서 열쇠고리가 달린 카드를 꺼내 센서에 갖다 대자 ‘삑’ 소리가 났다. 넋을 놓고 있던 이명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러다, 설마 또 어제처럼 되는 거 아니야?’
정신을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5분 뒤엔 침대에 누워 있을지도 모른다. 오늘은 그럴 만한 몸 상태도 아니고 지금은 그럴 기분도 아니었다. 짧은 시간 동안 너무 많은 일이 일어났으니까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이명은 우뚝 서서, 한선호의 손아귀를 비집고 제 손을 빼냈다. 약지에 걸린 금속이 거슬렸다. 제 것이 아니니 돌려줘야 했다.
이명이 결심이라도 한 듯 반지를 빼는 동안 한선호는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금색 반지는 손가락에서 쉽게 분리되어 손바닥에 톡 떨어졌다. 이명은 반지가 든 주먹을 앞으로 내밀었다.
“나…… 가 볼게.”
“어딜 가려고?”
차가운 어조에 어깨가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자신 있게 내민 손이 우물쭈물하다, 기에 눌려 주머니 속으로 슬금슬금 기어들어 갔다.
‘혹시 화났나…….’
한선호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다시 카드를 집어 들었다. 드르륵. 미닫이문이 열리고 그의 뒷모습이 시야를 채웠다.
잠시 후, 그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엘리베이터에 나란히 서 있었다. 층 버튼의 8자 모양 음각을 따라 흰색 불이 번들거렸다. 이명은 자신의 곁에, 그러나 너무 가깝지 않게 선 한선호의 존재감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미친 사람처럼 가슴이 뛰었지만 아무렇지 않은 척 문 위에 난 네모난 전광판으로 시선을 옮겼다. 4…… 5…… 6…… 7…… 빠르게 올라가던 숫자가 8에서 멈추더니 ‘띵’ 소리가 났다. 그리고 이명은 본의 아니게 한선호의 집 앞에 서 있었다.
‘……어쩌다 여기까지 왔지?’
아무것도 설명해 주지 않는 한선호는 고등학생 시절만큼 말이 없었다. 전날엔 그가 다른 사람처럼 변했다고 생각했지만, 다시 보니 8년 전과 그대로인 점들이 눈에 띄었다. 불필요한 말을 하지 않는 거나, 꾸밈없는 눈으로 사람을 빤히 쳐다보는 거나, 심장을 덜컥하게 하는 미소 같은 것들이.
“뭐 해, 명이야?”
“어, 어? 미안.”
이명은 그가 가리키는 문 사이로 몸을 비집고 들어갔다. 일견 깔끔해 보이는 현관에는 슬리퍼와 운동화 두 켤레가 놓여 있었다. 뒤에서 덜컥 난 문 닫히는 소리가 마치 다시는 이전으로, 한선호를 평화롭게 짝사랑하던 시절로 돌아갈 수 없다는 신호처럼 들렸다.
이명은 마른침을 삼키며 러닝화를 천천히 벗었다. 자세를 낮추어 뒤꿈치에 손가락을 넣으면서 시선을 들어 내부를 엿보았다.
직선 구조의 오피스텔은 모던한 디자인의 가구로 채워져 있었다. 수입이 어느 정도 보장된 직장인이 혼자 살 만한, 모델 하우스 같은 느낌이 나는 집이었다. 왼쪽으로 슬쩍 보이는 주방에는 철제 테이블과 의자를 놓았고 길게 트인 거실에는 검은색 소파를 배치했다. 그 뒤로는 창이 넓게 나 있었다. 바닥은 회색빛이 도는 원목, 천장은 같은 재질의 원목 프레임과 깨끗한 미색이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현대적이고 깔끔한 것은 인테리어뿐 살림살이는 너저분한 감이 있었다.
먼저 구두를 벗고 안으로 걸어 들어간 한선호가 바닥에 떨어진 물건들을 주우며 집 안을 정리하기 시작했다.
‘……의외로 깔끔하진 않구나.’
소파 테이블 위에 있던 맥주 캔 두 개가 눈 깜짝할 새 제거되었다. 소파 위에 널브러진 검은 티셔츠를 널찍한 등이 가리는 듯하더니, 잠시 뒤에는 그 자리에 아무것도 없었다. 그 외에도 속옷인지 뭔지, 검은 천 쪼가리와 양말로 보이던 흰색 무언가가 자세히 보기도 전에 주인의 급한 손길에 의해 치워졌다.
‘급하게 외출했나 봐.’
이명은 맨발로 거실에 들어서며 작게 웃었다.
바닥에는 훈기가 전혀 없었다. 원래 이렇게 춥게 해 놓고 사는 건가, 아니면 집을 비워서 이렇게 된 건가. 잠깐 서 있었는데도 싸늘한 냉기가 얇은 양말을 뚫고 발바닥에 전해졌다. 조금 차가운 정도가 아니라 마치 빙하 위에 맨발로 서 있는 것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명은 어쩔 줄 모르고 발을 동동 구르기 시작했다.
“너 왜 웃었어?”
한선호의 목소리와 함께 등에 묵직한 무게감이 느껴진 게 그때였다. 그가 뒤에서 몸을 완전히 감싸 안는 바람에 이명은 굳어 버렸다.
‘왜 웃었냐고…….’
네가 보이는 것처럼 빈틈없지 않아서. 집을 어질러 놓은 모습이 의외이기도 하고, 귀엽기도 해서. 그런 생각을 하는데 가슴 위에서 교차했던 한선호의 팔이 허리로 내려왔다. 돌연 몸이 뒤로 꽉 당겨지더니 발이 땅에서 떨어졌다.
“엇……! 뭐 하는 거야?”
발이 차갑기는 했지만 못 견딜 정도는 아니었는데……. 그냥 슬리퍼를 빌려주거나 앉아 있을 곳을 알려 주면 되는데…….
한선호는 살짝 당황한 이명을 물건처럼 집어 든 채 거실을 가로질렀다.
조금 전까지는 조금 춥다고 느꼈는데 지금은 감각이 무뎌진 것 같았다. 그의 품에 안겨 있는 시간이 길어질수록 뺨이 점차 달아오르다, 살짝 어둑한 침실에 들어왔을 땐 얼굴이 화끈거려서 집 안이 추운지조차 모를 지경이 되었다.
한선호의 침실은 거실보다도 간소했다. 무늬 없는 짙은 색 이불이 조금 흐트러진 채 2인용처럼 보이는 침대 위를 덮고 있었다. 그 외엔 사이드 테이블과 붙박이장이 다였고 다른 가구나 잡동사니는 없었다. 넓은 창문에는 블라인드가 반쯤 쳐져 있었다.
한선호는 아무런 힘도 들이지 않고 이명을 침대 위에 털썩 내려놓았다. 어쩌다 보니 이불 위에 엎드린 자세였다. 이명은 민망한 기분에 양손으로 침대를 짚고 몸을 뒤집었다.
“어…….”
그러나 고개를 돌리자마자 이렇게 가까이서 한선호를 마주칠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 얼굴에 그늘이 비스듬히 진 남자는 기분 좋은 미소를 띠고 있었다.
그의 얼굴이 점점 다가왔다. 이명은 황급히 뒤통수를 이불에 눌렀지만 둘 사이의 거리는 바라는 만큼 벌어지지 않았고 머리카락만 이마 위로 어지럽게 흩어졌을 뿐이다. 눈을 질끈 감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거친 키스도, 비웃음도, 예상 범위에 있었던 행동 중 아무것도. 이명은 눈을 살짝 떠 그대로 자신을 내려다보는 한선호와 시선을 마주했다.
‘바보 같아.’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놀라고, 겁먹고, 지레짐작하고. 정말로 그러고 싶지 않은데. 첫사랑이라 조심스럽고 떨려서 그렇다는 건 고등학교 시절에나 통할 핑계였다. 한선호의 아무렇지 않은 태도와 제 것을 비교하자니 얼굴이 더욱 화끈거렸다.
‘너는 이렇게 어른스러운데, 나만 그대로야.’
속에 있는 용기란 용기는 모조리 끌어내 그의 눈을 바라본 지 얼마나 되었을까, 한선호의 손이 천천히 다가왔다. 이명은 몸을 움찔거렸지만 햇볕에 그을린 손가락은 이마 위를 천천히 맴돌다 머리카락을 조심스럽게 만질 뿐이었다. 머리카락 몇 올일 뿐인데, 마치 함부로 대해선 안 될 여리고 연약한 무언가를 대하는 듯한 태도였다.
“왜 도망갔어?”
한선호가 이명의 눈을 보며 말했다.
“……어?”
“아침에 말이야.”
“아침?”
“응. 아침에. 이런 풍경을 상상하면서 일어났는데, 네가 도망가고 없었잖아.”
바보 같은 대화가 오가고서야 이명은 자신이 추궁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비록 심문관은 한없이 따스한 눈빛을 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한마디로 대답할 수 없는 골치 아픈 질문이었다. 표면상으로는, 네가 결혼했거나 진지하게 만나는 사람이 있는 줄 알았다고 말하면 그만이지만 그 이면에는 훨씬 복잡한 감정이 뒤엉켜 있었다.
네가 왜 나 같은 사람과 몸을 섞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고. 아침에 네 곁에서 깨어나는 사람이 나일 리 없다 생각했다고. 괜히 기대했다가 절망 속으로 추락하고 싶지 않았다고. 너라는 불꽃에 매혹되어 날개를 태우고 마는 날벌레는 정말이지 되고 싶지 않았다고. 나는 다치고 싶지 않았다고. 여러 가지 방아쇠가 연쇄적으로 당겨져서 이명은 도망쳤다.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모르겠어.’
게다가 지금 한선호와 함께 있다고는 해도, 아침에 이명을 괴롭혔던 고민들은 거의 다 변함없이 그대로였다. 모텔로 달려가서 그를 만났을 때는 머릿속이 단순했는데, 현실로 돌아오자 모든 것이 도로 복잡해진 것이다.
그가 자신에게 호감을 느낀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그러나 그 같은 남자가 왜 자신을 좋아하는지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한선호 곁에 나란히 서 있는 사람이 이명인 것은 아무래도 이상하지 않은가. 그와 더 잘 어울릴 만한, 어른스럽고 아름답고 강한 사람이라면 몰라도…….
이명은 침을 꿀꺽 삼키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남자의 눈을 바라보았다.
“저기, 나 집에 가야 해.”
뜻밖의 말을 들었다는 듯 한선호의 눈썹이 살짝 꿈틀거렸다.
“집?”
이번에야말로 화가 난 것 같아서 이명은 그늘이 진 사내의 얼굴 근육을 샅샅이 살폈다. 한선호는 이명의 머리카락을 손끝으로 정리해 넘기고서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가족들하고 같이 살아?”
“어, 음……. 혼자 살기는 하는데, 엄마 집에서 지낼 때도 많고……. 일주일에 반쯤은 가 있는 것 같은…… 데…….”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도 아니었건만 횡설수설하게 되었다. 이명은 막 생각났다는 듯이 덧붙였다.
“경기가 끝나고……. 아, 어제 기전, 그러니까 상금이 걸린…… 바둑 경기가 있었거든…….”
“알아.”
“알아? 어……. 보통 끝나고서 가족들이랑 집에 가는데, 나는…… 어제 그냥 빠져나오는 바람에……. 집에 연락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걱정할 테니까……. 너무 오랫동안 이렇게…… 연락을 안 하면.”
‘정말 바보 같다.’
비록 달변이었던 적은 없다지만, 언제부터 문장 하나 제대로 완성하지 못하는 사람이었나.
“헤어지기 싫은데, 꼭 지금 가야 돼?”
그런 이명의 속도 모르고 한선호는 그의 결심을 흩어 놓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던졌다.
‘나라고 너와 헤어지고 싶을 리 없잖아.’
이명은 8년 만에 기적처럼 만난 첫사랑을 앞에 두고 걱정과 의심의 장벽을 치는 스스로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설레고 기뻐하기에도 모자랄 판에 왜 이렇게 뒷걸음질을 치는 걸까.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마음속에는 여유가 부족했다.
한선호는 벌거벗겨지는 기분이 들게 하는 시선으로 이명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며 멀어졌다. 침대에 걸터앉은 그가 품에서 가죽 지갑을 꺼냈다. 조금 뒤, 그의 손에는 빳빳한 명함이 들려 있었다.
이명은 얼결에 명함을 받았다. 세상 물정에 어두운 그조차 한눈에 알아볼 수 있는 글로벌 기업의 로고에는 홀로그램이 씌워져 있어서 옅은 무지갯빛 광택이 반들거렸다.
반도체 사업부
해외영업1팀
사원 한선호
‘좋은 데 취직했구나.’
대학생들이 취업하고 싶어서 국가고시처럼 준비하는 기업이라고 주워들었는데. 정치 외교학과 나와서 굶어 죽기 딱 좋다며 실없는 소리를 하던 졸업식 날의 한선호가 문득 떠올랐다.
사실은 내내 궁금했다. 그가 8년이란 세월 동안 무엇을 했는지, 뭘 하고 있을지, 무엇이 되었을지, 어떤 어른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지금도 그 모든 것이 너무나 궁금하지만 이명은 그의 소속과 직책 외엔 더 이상의 정보를 뱉어 내지 않는 명함을 붙들고서 활자를 읽고 또 읽을 뿐이었다.
“이거 네 번호, 맞아?”
한선호가 침묵을 깨며 핸드폰을 눈앞에 들이밀었다. ‘13번 이 명’이라는 이름 아래, 고등학교 시절부터 바꾸지 않은 제 전화번호가 저장되어 있었다. 이명은 고개를 살짝 끄덕였다.
“8년 동안 번호 안 바꿨구나.”
“그러는 너도…… 마찬가지잖아.”
그가 의아하다는 듯 눈썹을 올렸다.
“여기, 번호.”
이명은 손끝으로 명함을 가리켰다. 반듯한 글씨로 인쇄된 연락처는 고2 수학여행 때 암기했던 열한 자리 숫자와 동일했다. 그제야 한선호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맞아. 그러고 보니 나도 안 바꿨네.”
반 아이들의 전화번호 목록을 그대로 저장해 놓았던 반장 한선호, 유사시를 대비해 반장의 전화번호를 암기해 두었던 이명. 전화번호를 교환할 만큼 친하지도 않았던 그들이 서로의 연락처를 지금까지 기억하고 있다는 게 신기하게 느껴졌다.
이명은 명함을 주머니에 넣으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잠시 잊고 있었던 차가운 공기와 아이스 링크 같은 바닥을 헤치고 현관을 향해 재빨리 걸었다. 상체를 웅크리고 운동화를 다시 신는 동안 그를 따라잡은 한선호가 발끝을 구두에 넣었다.
“집 앞까지 데려다줄게.”
거절하고 싶은데 그럴 만한 구실이 없었다. 그들은 말없이 집에서 나와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문이 열리고, 그들이 타고서 문이 다시 닫혔다. 밀폐된 공간 속 어색한 분위기에 어깨가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하는데 머릿속이 텅 빈 것처럼 아무 화제도 떠오르지 않았다.
‘남들은 이럴 때 무슨 말을 하지…….’
고민하는 사이에 LED 전광판의 숫자는 하나씩 줄어들었고 엘리베이터는 지하 1층에 도착했다. 복잡한 머릿속 때문에 걸음걸이가 축축 처진 이명과 달리 한선호는 아무 걱정도 없어 보였다. 그가 무거운 회색 철문을 열자 주차장이 나타났다. 그리고 문이 다시 닫히기도 전에 그의 손이 아무렇게나 흔들리던 이명의 손을 감쌌다.
“엇…….”
따뜻하고 단단한 손길은 확신에 차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이명은 그의 보폭에 맞춰 걸으며 작아지는 기분을 느꼈다. 나는 재미없고 말주변도 없는데, 외롭고 불안정한 사람인데, 너는 알고서 이 손을 잡은 걸까.
“손이 왜 이렇게 차?”
한선호가 두툼한 손가락을 옮겨 이명의 손가락 사이를 깍지 껴 잡더니, 자연스럽게 팔을 올려 입가로 가져갔다. 장난스럽게 숨을 불자 따뜻한 입김이 경직된 손가락에 닿았다. 한선호는 씩 웃었지만 이명은 너무 긴장한 나머지 마주 웃을 수 없었다.
“안 잡아먹으니까 그런 표정 짓지 마.”
“……내가 뭘.”
한선호는 그런 그를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다가, 오른손을 주머니에 넣어 차 키를 꺼냈다. 삐빅, 바로 옆에 주차된 SUV의 주행등이 켜졌다. 크고, 검고, 멋있고. 한선호와 잘 어울리는 차량이라고 이명은 막연하게 생각했다.
“집은 어디야?”
“영산동…….”
“이사 안 갔어?”
“응.”
차에 타서 시동을 건 뒤, 한선호는 내비게이션에 ‘영산동 한솔 아파트’를 입력했다.
‘아파트를 다 기억하네.’
반 애들 주소를 아직까지 외우고 있다니, 역시 반장은 대단하다고 이명은 속으로 감탄했다.
잠시 후 차는 주차장을 부드럽게 빠져나갔다. 볼륨이 작게 맞춰진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는 마음을 편안하게 했고 은은한 방향제 향기는 기분 좋았다. 한선호는 꼭 그와 어울리는 스타일로 자동차를 운전했다. 여유롭고, 안정적이며, 능숙하게.
차에 탄 뒤로 무릎만 보고 있던 이명은 용기를 내 한선호의 옆모습을 힐끔 엿보았다. 무표정한 미남의 얼굴은 도무지 오늘 아침에 모텔에서 나온 사람 같지가 않았다. 짙은 색 코트가 넓은 어깨와 길게 뻗은 팔을 완벽하게 감싸고 있었다. 운전하는 자세는 반듯했고 옆얼굴은 근사했다. 한마디로 말하자면 그에게선 자동차 광고에 나올 법한 엘리트의 분위기가 흘렀다.
요란하지도, 과시적이지도 않은데 한선호에게서는 은은한 자신감이 느껴졌다. 늘 호의적인 환경에 둘러싸여 있기 때문에 불신하거나 성급하게 굴 필요가 없는 사람의 여유였다. 이명으로서는 한 번도 가져 본 적이 없어서 그저 상상할 수밖에 없는.
그는 걸음걸이도, 말투도, 눈빛도, 자신감 있고 당당했다. 그리고 섹스할 때도…… 그의 말과 손짓 하나하나에 반응한 건 자신이었지, 그는 처음부터 끝까지 능숙하기만 했다.
다시 무릎으로 시선을 내려 한선호에 대해 곱씹고 있는데, 문득 옆얼굴에 시선이 느껴졌다. 이명은 무심코 왼쪽을 보았다가 운전대 위에 팔목을 얹고서 알 수 없는 눈빛을 하고 있는 한선호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는 환자를 관찰하는 의사처럼 이명을 면밀히 바라보았고 이명은 속마음을 들킬까 봐 숨을 참고 눈을 크게 떴다. 한선호는 할 말이 있는 사람 같기도, 아닌 것 같기도 했다.
“명이야.”
좌회전 신호가 들어온 것과 동시에 그가 다시 앞을 보며 말했다.
“……응?”
사륜차가 그의 음성처럼 부드럽게 움직였다.
“아니야.”
200m 정도 직진하다 골목에 들어서면 집이었다. 내비게이션 화면의 경로가 빠르게 짧아지다가 점에 가까워졌다. 이명은 한선호와 헤어지는 것이 아쉬운 동시에 기꺼웠다. 이미 그와 대면하느라 기력을 다 썼기 때문이었다.
아파트 단지 안까지 들어선 차량이 서서히 느려지다 정차했다.
“몇 동이야?”
“102동…….”
“다 왔네.”
한선호의 목소리는 아쉬워하는 것 같기도 아무렇지 않아 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이명은 침을 꿀꺽 삼키고서 안전벨트를 풀었다.
“고마워, 데려다줘서.”
손가락을 문손잡이에 갖다 댄 순간 낮은 음성이 어깨를 잡았다.
“그냥 가려고?”
고개를 돌려 본 왼쪽에는 조금 전과 마찬가지로 흠잡을 데 없는 모습인 한선호가 반듯하게 앉아 있었다.
“키스도 안 해 주고 갈 거야?”
“……어?”
그의 음성은 평온했으나 거역할 수 없는 힘이 있었다. 이명은 제 의지가 아니라 끌려가는 것처럼 한선호에게 천천히 다가갔다. 민망한 기분으로 콘솔 박스를 손으로 짚었을 때, 한 뼘 정도 되는 거리에 있던 입술이 움찔 움직였다.
곧 입술이 닿을 거리인데도 한선호는 침착한 모습 그대로 눈을 뜨고 있었다. 이명은 약간 오기가 들어 그의 코트 깃을 붙잡고 끌어당겼다. 두 눈을 감으며 입술을 갖다 댔는데도 한선호는 입을 꾹 닫고만 있었다.
‘키스하라더니, 뭐지…….’
아무래도 가벼운 뽀뽀로 끝내야 할 것 같았다. 이명은 자신을 놀리듯이 가만히 있는 상대의 입술 사이에 혀를 밀어 넣을 용기 따위는 없었으니까.
쪽. 원래 그러려고 했다는 듯 산뜻하게 입을 맞추었다.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 할 순간이었다. 그런데 그때, 일순간 강한 힘이 목뒤를 감더니 이명을 다시 끌어당겼다. 그리고 어느새 입술이 벌어진 한선호의 입 안으로 이명의 혀가 부드럽게 빨려 들어갔다. 두툼하고 뜨거운 혀가 당연하다는 듯이 치아 사이를 비집고 들어왔다.
이명의 몸이 움찔거렸고 눈이 번쩍 뜨였다. 숙맥처럼 군 걸 부끄럽게 하려고 작정하기라도 한 듯, 한선호는 침착하게 눈을 감은 채 영화에서처럼 고개를 틀어 입술을 완전하게 맞추었다. 목뒤에 머물렀던 손이 등을 쓸어내리며 허리까지 내려오자 이명은 재빨리 눈을 다시 감았다. 뻗지도 숨기지도 못하고 모호하게 들고 있던 손이 한선호의 가슴에 닿았다. 그것이 기폭제라도 된 듯, 치열 안쪽의 연한 살을 느릿하게 쓸던 혀가 더욱 깊숙이 들어와 이명의 혀뿌리에 얽혔다.
분명히 행동 하나하나가 다정한데도 이명에게는 버거웠다. 커다랗고 강한 신체가, 거대한 존재감이, 그와 키스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감당하기 어려웠다. 엮이고 포개어지는 움직임에 숨이 금세 찼다. 코로 숨을 쉴 새 없이 들이마시는데도 한참 모자랐다.
‘왜 너랑 있으면 숨 막히는 일이 생기는 걸까.’
한선호는 이명이 호흡 곤란으로 그를 밀어내기 직전에 떨어졌다. 눈을 감은 채로 이명의 입술에 묻은 타액을 느릿하게 핥았다. 그리고 마침내 천천히 눈을 떴다.
차 안이 이렇게 더웠던가. 부끄러운 열기가 뺨을 달구었다. 한선호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이명의 눈을 한동안 빤히 바라보다가 쪽 쪽 소리를 내며 입술을 살짝 맞댔다. 이런 게 TV에서 말하는 ‘선수’인가 보다. 이명은 당황한 티를 내지 않으려 애쓰며 자리로 되돌아갔지만 심장은 과격하게 박동하고 있었다.
‘큰일이다.’
아무래도 이명은 한선호를 한 단계 더 좋아하게 된 것 같았다. 빠르게 심호흡을 하고서,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 말을 내뱉었다.
“나, 갈게. 안녕.”
차에서 쫓겨나듯이 내리자 차가운 공기가 몰아치며 정신을 번뜩 들게 했다. 차 문을 본의 아니게 조금 거칠게 닫고서 빠르게 걸었다.
‘……너무 차갑게 말했나.’
걸음은 조금씩 느려졌다. 아무리 오해받는 데 익숙해도 한선호에게는 오해받고 싶지 않았다. 비록 내가 너무 떨려서 마음 같지 않은 행동을 많이 했을지도 모르지만 사실은 널 좋아한다고, 다음에 또 만나고 싶다고 말해 주고 싶었다. 그러나 이명은 고개를 살짝 저으며 다시 빠르게 걸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한선호는 매사에 너무 능숙했던 것이다. 그는 아주 잠깐 몇 마디 하는 것부터 잠자리에서까지 이명을 원하는 대로 쥐락펴락했다. 이명은 매 순간 긴장해야 하는 반면 한선호는 늘 여유로웠다.
조금 억울하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기력이 훨씬 뛰어난 사람과 바둑을 둘 때 느끼는 감각과도 비슷했다.
아파트 출입구 앞에서 호수를 입력하고 호출 버튼을 누르자 조금은 급한 듯한 엄마의 목소리가 들렸다.
“명이, 명이니?”
“네.”
“너는…….”
그녀가 한숨을 쉬었다.
“빨리 들어와.”
잠시 후 유리로 된 미닫이문이 스르륵 열렸다.
이명은 안으로 들어서기 전에 뒤를 슬쩍 돌아보았다. 차량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그러나 햇빛이 번들거리는 창문은 운전자의 표정을 보여 주지 않았다.
* * *
본가에 돌아온 후로 이명은 틈만 나면 잠자고 무언가를 먹어야 할 때만 일어나는 단조로운 나날을 보냈다. 집이란 기묘한 곳이어서, 발만 들였다 하면 아무것도 안 하는데도 시간이 쏜살같이 지나갔다.
이명이 종일 침대나 소파에 웅크려 시간을 보내는 데도 엄마는 그를 내버려 두었다. 평소처럼 잔소리하지 않았고 결승에 관한 화제를 피하는 등 이명을 배려했다.
그녀는 아들이 패배의 후유증을 겪는다고 짐작했겠지만, 실은 이명은 어느 때보다도 바둑에 무관심했다. 그의 머릿속은 다른 것으로 꽉 차 있었고, 생각할 것이 너무 많아서 오히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꽉 차 버리니 역설적이게도 텅 빈 거나 마찬가지였다.
“오빠, 오는 길에 귤 좀.”
화장실에서 막 나온 이명은 귤 바구니를 집어 들고 거실로 향했다. 엄마와 정은 이미 소파에 자리 잡고 있었다. 올해 졸업반인 정은 취업 준비 때문에 바빴지만 집에서는 주로 누워 있었다. 이명은 정의 발을 피해 소파 끄트머리에 앉았다. 테이블에 바구니를 올려놓자 그녀가 귤을 가져가서 껍질을 벗기기 시작했다.
“정아, 일어나서 먹어라.”
“귀찮아요.”
“너 밥 먹자마자 그렇게 누우면 소 된다.”
“음메에.”
지나치게 사실적인 동물 흉내에 엄마가 당혹스럽다는 듯 웃어 버렸다.
TV 화면 속에서는 작은 아이가 뒤뚱뒤뚱 걸어 다니고 있었다. 자막에선 귀엽다는데, 이명의 눈에는 다른 애들과 특별히 달라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봐도 아이들은 다 똑같이 생긴 것 같았다.
그의 표정을 힐끔 본 정이 물었다.
“오빠, 쟤 안 귀여워?”
“어, 음…….”
“어린애 별로 안 좋아하지, 참.”
“쟤보다 너 어릴 때가 더 귀여웠어.”
두 번째 귤을 까던 정이 웃음을 터뜨렸다.
“참 나, 내가 애기였을 땐 오빠도 애기였거든?”
“그래도 다 기억나.”
보통 연년생 남매는 싸운다는데, 어린 시절 정은 이명의 가장 소중한 보물이었다. 이명은 늘 그녀의 손을 꼭 잡고 다녔으며 그녀가 없으면 아무 데도 가지 않으려 했다.
“맞아. 정이 네가 쟤보다 훨씬 예뻤어.”
“오, 엄마까지?”
“명품으로 낳아 놨는데 다 크니까 소가 돼 버렸네?”
정의 웃음소리 때문에 한동안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녀가 음메, 음메 몇 번 더 하자 엄마가 질색하며 이제 그만하라고 했다. 그러는 동안 TV 속 가족은 소풍 준비에 한창이었다. 유명한 여자 배우가 유모차를 챙기는 동안 그녀 남편인 모델이 아이를 품에 안아 들었다. 아이가 그렇게 작지도 않은데, 전혀 힘들이지 않고 한 손으로 들어 올리는 모습이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남자는 어깨가 넓은 역삼각형 체형이었다. 몸에 붙는 옷을 입어서 가슴과 배의 근육이 두드러져 보였다. 어쩐지 몸매도 비슷한 것 같았다. 키는 그가 좀 더 큰가…….
이명은 괜히 부끄러워져서 TV로부터 눈을 돌렸다.
“여자는 연속극에서 많이 봤는데 남자는 누군지 모르겠다, 야.”
“잘나가는 모델이에요. 둘이 진짜 잘 어울리지 않아요?”
잘 어울리는 커플, 선남선녀. 안 그래도 복잡하던 머릿속을 비집고 의구심 하나가 끼어들었다. 사람들은 어떨 때 두 사람이 잘 어울린다고 말하는 걸까. 성격이 잘 맞거나, 외모가 서로 닮아야 할까. 적어도, 한쪽이 다른 쪽보다 명백하게 보잘것없는 경우는 아니겠지.
“딴 데 틀면 안 되니? 남의 애들 재롱부리는 거 봐서 뭐 해.”
“왜, 예쁘잖아요.”
“애기가 그렇게 예쁘면 너도 빨리 낳아.”
“무슨 스물여섯짜리 딸한테 그런 말을 해요?”
“엄마가 딸한테 그런 말도 못 해?”
이명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끼고 몸을 슬며시 일으켜 세웠다. 다른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 대화가 난처한 방향으로 흘러가 버린 것이다.
“아직 생각 없으니까 그러죠! 엄마는 맨날…….”
“알았어, 알았어. 말 나온 김에, 명이 넌 여자 친구 없니?”
기어이 불똥이 엉뚱한 곳으로 튀었다. 이명은 할 말이 없어서 눈만 깜빡였다. 왜인지 모르게 정의 얼굴이 빨개졌다. 그녀가 급하게 리모컨을 쥐고 채널을 바꿨다.
“어! 뉴스 보자, 뉴스. 산불 났대.”
이명을 취조하는 시선으로 바라보던 엄마가 TV로 고개를 휙 돌렸다. 그러나 이런 주제가 나왔을 때 그녀의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기란 쉽지가 않았다.
“몰래 연애도 좀 하고 그래. 저렇게 신부님처럼 살다가 언제 장가가려고 그러나 몰라.”
난감한 상황에 이명을 구한 건 난데없는 전화벨 소리였다.
엄마의 베토벤 소나타 벨 소리도, 시도 때도 없이 울리는 정의 벨 소리도 아닌, 여간해선 울리지 않아 모두에게 낯선 벨 소리였다. 순간적으로 정적이 감돌며 모두가 소리 나는 곳을 보았다. 그곳이 제 방이란 걸 깨달은 이명은 정지 사진 같은 구도를 깨뜨리곤 방을 향해 달렸다.
‘핸드폰, 어디다 뒀더라?’
방을 마구잡이로 뒤지던 손이 점점 바빠졌다. 소리는 분명히 가까이에서 나는데, 이불 속에도 가방 속에도 아무것도 없었다. 전화가 곧 끊길 것 같다고 생각한 순간, 이명은 마지막으로 입었던 외투 속에서 휴대 전화를 찾았다.
“여보, 여보…….”
숨이 차서 그 짤막한 문장조차 완성할 수가 없었다.
―여보라니, 듣기 좋은데.
발신자는 예상했던 그대로였다. 이명은 민망한 기분으로 호흡을 골랐다. 한동안 불안한 침묵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이명이 입을 연 순간,
“왜.”
―명이야.
동시에 한선호가 그를 불렀다. 5초 정도의 적막이 지나가고, 이명이 용기 내어 먼저 말했다.
“……왜?”
―뭐 하고 있었어?
정말 어색한 대화였다. 이런 걸 대화라고 할 수 있다면. 이명은 이불을 손으로 꼭 쥐며 대답했다.
“저녁 먹고…… 가족들하고 TV 보는데.”
―그래? 그럼 잠깐 만날래?
지금? 당장? 어디서? 너 어딘데? 머릿속이 순식간에 물음표로 가득 찼다.
―너희 집 앞이야.
한선호가 그런 이명의 머릿속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태연하게 말했다.
“뭐라고?”
―잠깐 나올래?
이명은 침대에서 벌떡 일어났다. 창문에 코를 대고 유심히 보았지만 밖이 캄캄해서 형태를 구분하기가 쉽지 않았다. 놀이터 앞에 언뜻 보이는 검은 덩어리와 불빛을 보고 그의 차겠거니 짐작할 뿐이었다.
이명은 침묵이 길어지는 것이 두려워서 무작정 입을 열었다.
“알았어.”
―커피 마실래? 뭐 좋아해?
“아무거나 괜찮은데.”
―아메리카노 괜찮아?
“아무거나 괜찮아. 그럼 끊을게.”
이명은 핸드폰을 내려놓자마자 입고 있던 티셔츠를 벗었다. 옷장에서 깨끗한 옷을 꺼내 몸에 걸치면서 화장실로 달려가 칫솔에 치약을 짰다.
“명아, 어디 가?”
“잠깐 나갔다 올게요……!”
“어디 가는데?”
“친구…… 만나러요.”
그딴 핑계, 아들에게 친구 따위 없다는 걸 잘 아는 엄마에게 통하지 않겠지. 하지만 한선호를 달리 설명할 말도 없었다. 동창회에서 만나 어쩌다 인연이 이어지게 된 사이라고 해야 할까. 그들이 무슨 사이인지는 이명 본인조차 정의 내릴 수 없었다.
양치와 세수를 하고, 옷을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을 때는 아주 오랜 시간이 흐른 것처럼 느껴졌다. 이명은 벌써 지쳐 있었다.
‘어디 있지? 여기에 정차한 줄 알았는데…….’
길가에 서서 아무리 두리번거려도 검은색 SUV는 보이지 않았다. 어두워서 그런가 싶어서 눈을 부릅떠 보아도 마찬가지였다.
“하…….”
한숨을 깊이 내쉬자 더운 입김이 공중으로 흩어졌다. 외투를 걸치고 목도리까지 두르고 나왔는데도 바깥은 아주 추웠다.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자마자 손가락 끝이 얼어붙는 것 같았다.
‘전화를 하면 좀 그런가.’
그는 최근 통화 목록에서 저장되어 있지 않은 번호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기다리다가 지쳐서 돌아갔다면 지금 운전하는 중일 텐데, 전화하면 분명히 방해가 될 것이다.
주저하던 손가락이 배경 화면에서 메시지 애플리케이션을 찾았다. 이명은 정이 그저께 보낸 메시지를 확인하고 광고 몇 개를 지웠다. 그리고 가장 최근 목록, 모르는 번호로 온 내용을 확인했다.
[010-****-****: 뭐 해?] 1일 전
[010-****-****: 잘 잤어?] 09:24
[010-****-****: 명이야] 15:33
화면을 뚫어지도록 쳐다보고 있는데,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돌아보려는 순간에 무언가 따뜻한 것이 볼에 닿았다.
“……엇.”
이명은 별안간 시야에 들어찬 테이크아웃 컵을 멀뚱멀뚱 바라보았다.
“명이야.”
작은 속삭임과 함께 귓가에 뜨거운 입김이 부딪쳤다. 전에도 맡아 본 적 있는 시원한 발삼 향과 함께. 이명은 고개를 작게 끄덕거렸다.
“밤엔 잘 잤어?”
“어? 응…….”
“어젠 뭐 했어?”
“그냥, 아무것도 안 했는데.”
종이컵을 두 손으로 받아들자 온기가 전해졌다. 이명은 몸을 돌려 그의 바로 뒤에 서 있던 한선호를 올려다보았다.
“고마워.”
잘생긴 얼굴에 그림 같은 미소가 번졌다. 달을 등진 한선호는 창백하게 빚은 조각상처럼 보였다. 그를 다시 만난 지금도, 이명에게는 맑게 웃던 소년이 더 익숙했다. 그대로 자란 건 아니어도 소년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얼굴은 이명의 가슴속에 수많은 생각을 불꽃처럼 피워 냈다. 이명은 그의 눈을 피하며 빠르게 말했다.
“커피 말이야. 잘 마실게.”
“응. 춥지?”
큼지막한 손이 목으로 다가와 목도리를 여몄다. 이명의 얼굴 전체를 가릴 만큼 크고, 닿는 곳마다 온기를 전하는 손이었다. 그의 손가락이 목을 스친 순간에, 이명은 저도 모르게 움찔거리며 눈을 감았다. 그러자 부드러운 웃음소리가 귓가에 닿았다.
“좀 걸을까?”
한선호는 이명의 외투 지퍼를 끝까지 올린 뒤에 그렇게 말했고 이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말없이 걸었다.
어둠이 비친 놀이터를 지나고 불법 주차 차량이 줄지어 점거한 골목을 통과했다. 큰길로 나오자 셔터 내린 몇몇 가게와 편의점이 보였다.
이명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서 다시 양손으로 쥐었다. 그는 평소에 커피를 달게 마시는 편이지만 이상하게도 이 순간만은 쓴맛이 조금도 거슬리지 않았다.
이상한 건 그뿐만이 아니었다. 어릴 때부터 살았던 아파트 단지에서는 솔잎 향이 났고, 때 이른 크리스마스 장식이 눈에 들어왔다. 큰길의 보도블록 중 몇 개가 갈색인 걸 알아채는 등 한 번도 관심 가져 본 적 없던 것들이 감각의 범위 안으로 성큼 들어섰다. 늘 지나다니던 흔한 거리일 뿐인데, 한선호가 곁에서 걷고 있다는 이유로 특별하게 느껴졌다.
‘정말 이상하다. 이제는 춥지도 않아.’
양손으로 소중하게 들고 다니던 컵을 입술에 갖다 대자 진한 커피 향기가 났다. 한선호가 직접 사다 주었다는 이유로 특별해진 커피였다. 이명은 컵을 기울여 입술을 살짝 축였다. 그러면서 왼손을 내리자 손끝이 자연스럽게 한선호의 손아귀로 쏙 들어갔다.
‘뭐지……?’
대체 어떻게 했는지 모를 정도로 귀신같은 솜씨였다. 옆으로 고개를 돌리자 한선호가 평온한 표정으로 눈을 마주쳤다. 그에게는 의외로 뻔뻔한 면이 있었다. 이명은 입술을 비집고 나오려는 미소를 숨기려고 노력하며 마찬가지로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다행히 거리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지나가는 사람이 몇몇 있기는 했지만 갈 길이 바쁜지, 손을 잡고 느릿하게 걷는 두 남자에게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명의 시선이 맞닿은 손에서부터 팔을 따라, 한선호의 어깨로 올라갔다. 떡 벌어진 어깨 위로 며칠 전에 팔을 감았던 두툼한 목이 자리 잡고 있었다. 힘줄 돋은 목선 위로 툭 튀어나온 목젖이 눈에 띄었다. 소년기에도 또래보다 덩치가 훨씬 크기는 했지만 그때는 천진하고 귀여운 인상이 있었다. 예전에는 뒤에서 남몰래 바라보던 어린 표범이 이토록 강인하고 멋진 모습으로 자라났다는 것을 믿기 어려웠다. 그런 그와 손을 잡고 나란히 걷고 있는 게 자신이란 건 더더욱.
‘……좋다.’
이런 순간을 늘 꿈꿔 왔다는 걸 너는 알까. 고2 때도 이 길을, 비록 반대 방향을 향해서였지만 함께 걸었던 적이 있었는데 너는 기억할까. 그날 내가 얼마나 긴장했는지, 그리고 지금도 얼마나 긴장한 상태인지 너는 꿈에도 모르겠지.
“소방관들은 힘들겠다.”
앞을 보고 걷던 한선호가 뜬금없이 말했다.
“응?”
그가 눈을 마주치며 엄지로 길 건너편을 가리켰다. 늦은 시간인데도 소방서엔 조명이 환하게 들어와 있었다.
“초등학생 땐 소방관이 되고 싶었어.”
이명은 고개를 끄덕였다. ‘너라면 좋은 소방관이 됐을 거야’와 ‘정말 잘 어울렸을 것 같아’란 대답이 심사대에 올라와 있었다. 그는 잠시 고민하다, 그 말이 한선호의 현재 직업을 폄훼하는 것처럼 들릴까 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근데 소방관이 3교대랬나……. 난 야간 근무 때문에 힘들 것 같아. 잠이 많거든.”
‘나도 그래.’
이명은 소리 없이 대답했다. 마주 잡은 손이 부드럽게 흔들렸다.
“하긴, 별로 진지한 꿈은 아니었어. 그땐 반 애들 장래 희망이 대통령, 연예인, 소방관 셋 중 하나였으니까.”
“난 아니었는데.”
“넌 뭐였는데? 기사?”
장래 희망이라……. 사실 그의 장래 희망은 기사가 아니었다. 이명은 단지 바둑을 좋아했을 뿐이다. 기사가 되고 싶어서 되었다기보다는,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다는 게 올바른 표현이었다. 어쨌든 대통령이나 연예인, 소방관이 되고 싶지 않았던 건 확실했다.
“장래희망 같은 거 없었어. 난 다 별로야. 특히 대통령.”
누가 시켜 준다고나 했나, 자조하는 말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아니나 다를까, 옆에서 풋 하고 바람 빠지는 소리가 났다.
“기호 1번, 귀엽당 소속 이명.”
“……나도 안 어울리는 거 알아. 놀리지 마.”
한선호는 한동안 웃음을 멈추지 않았다. 무척 기분 좋은 웃음소리였다. 그 소리는 이명의 얼굴을 빨개지게 하는 한편, 가슴을 빠르게 뛰게 했다.
“연예인은 어때?”
한선호가 웃음기 남은 목소리로 물었다. 연예인, 당연히 싫다. 그보단 불가능하다는 말이 맞겠지만.
“노래도 못 하고 춤도 못 춰서 안 돼.”
“얼굴엔 자신 있는 거지?”
“……아니야.”
한선호의 농담거리가 되는 건 이상하게도 기분이 조금도 나쁘지 않았다. 그저 유쾌하고 두근거릴 뿐이었다. 그와 조금은 친한 사이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착각이 들 만큼.
“너 연예인도 잘 어울릴 텐데.”
“왜?”
“예쁘니까.”
“…….”
그러는 넌 대통령, 연예인, 소방관 다 어울려. 이명은 머릿속으로만 생각하고 입 밖으로 말하지 않았다.
걸은 지 너무 오래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덜컥 든 건 그때였다.
‘직장인들은 일 끝나면 피곤해서 쉬어야 하지 않나.’
이명은 직장을 가져 본 적이 없어서 상상하기 어려웠지만, 그 또한 긴 경기를 마치고 나면 피로해서 빨리 집에 가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던가.
“저기…….”
이명은 돌연 맞잡은 손을 빼려고 했다. 그러나 한선호는 손을 놓기는커녕 더 꼭 잡으며 걸음을 천천히 늦추었을 뿐이다.
“그만 돌아가자.”
한선호는 이명이 해석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무표정한 얼굴일 때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무지 알기가 어려웠다.
한동안 입 다물고 있던 그가 조용히 말했다.
“난 예전부터 저 소방서가 싫었어.”
이명은 불안한 눈빛으로 커다란 건물을 바라보았다. 미리 알았으면 이 길을 피해서 걸었을 것이다.
이명이 생각하느라 바빠진 동안 한선호가 손을 놓았다. 뜨거운 손바닥이 감싸고 있던 살갗에 차가운 공기가 닿으며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반대쪽 손.”
한선호가 손바닥을 내밀며 말했다. 이명은 복종하지 않으면 먹이를 먹을 수 없는 개가 된 기분으로 손을 순순히 내밀었다. 한선호는 빈 종이컵을 빼앗아 휴지통에 버리고 그 자리를 차지했다. 동시에 그의 미소도 돌아왔다. 다행스럽게도.
돌아가는 길은 한층 더 짧게 느껴졌다. 말은 거의 오가지 않았다. 한선호가 몇 시쯤에 자느냐고 물어봐서 잘 모르겠다고 대답한 게 다였다.
대화는 쉽게 이어지지 않았다. 하고 싶은 말이 머릿속에 맴돌았지만 목구멍이 막힌 것처럼 말이 나오지 않았던 탓이다.
그가 언제 자는지, 몇 시에 일어나는지, 야근은 잦은지, 어디 사는지, 그의 집 근처에도 소방서가 있는지, 남는 시간엔 뭘 하는지, 취미는 무엇인지, 커피는 달게 마시는지, 야식은 자주 먹는지, 무슨 음식을 좋아하는지. 물어보고 싶은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이명은 조용히 흘려보냈다.
그들은 침묵했다. 침묵은 보통 분위기를 불편하게 만들지만, 이 경우에는 조금 달라서 긴장감 사이에 기묘한 편안함이 깃들어 있었다. 이 손을 잡고 발맞추어 걸을 수만 있다면 어디든 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너도 기분이 이렇게 좋을까.’
이명은 깎아 놓은 것처럼 반듯한 한선호의 옆모습을 힐끔힐끔 훔쳐보았지만 대답을 얻기란 쉽지 않았다. 그의 얼굴은 미소 짓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무표정인 것처럼 보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한선호는 이명이 이제껏 만나 본 사람 중에 가장 불가사의하고 난해한 기풍의 상대였다.
모든 바둑 경기가 유한하듯이 이 여정 또한 뚜렷한 끝이 있었다. 걸어온 길을 모두 되돌아가자 헤어질 때가 되었다.
이명은 한선호와 떨어지게 되어 아쉬웠지만 한편으로는 기뻤다. 그의 손을 잡고 어디든 갈 수 있다고 생각한 게 불과 몇 분 전이었지만, 이제는 빨리 그 손을 놓고 싶었다.
102동 앞에서 이명은 몸을 돌리며 걸음을 멈추었다.
“집 다 왔는데.”
“그러네.”
“차는?”
“저쪽에 세워 놨어.”
“너 가야지.”
“응.”
한선호는 대답까지 해 놓고서 멀뚱멀뚱 서 있을 뿐, 갈 기미가 없었다. 한동안 그와 민망한 눈싸움을 계속하던 이명은 문득 한선호가 이틀 전에 무엇을 요구했는지 기억해 냈다.
‘반장은 서양식이구나.’
키스를 받고 잠에서 깨어나는 공주 이야기는 들어 봤어도 키스를 받아야 집에 돌아가는 왕자 이야기는 들어 본 적이 없었다. 어쨌거나 한국적인 스타일은 아니지 않나. 이명은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했다.
눈을 감으며 발뒤꿈치를 들었을 때, 몸이 기울어지며 가슴이 한선호의 품에 파묻혔다. 그의 따스한 손바닥이 양 뺨을 감싸며 몸이 끌어 올려졌다. 눈을 다시 뜨자마자 입술이 한선호의 입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겉으로는 차분해 보였는데, 그는 이명이 깜짝 놀랄 정도로 격정적으로 키스했다.
짧은 입맞춤은 이명에게 남아 있던 냉기와 에너지를 빼앗아 갔다. 한선호가 천천히 입술을 뗐을 때 이명에게는 서 있을 힘도 남아 있지 않았다. 다리가 풀려 휘청거리는 이명의 팔을 잡아 주며, 한선호는 한참 모자란다는 듯이 입맛을 다셨다.
“이번 주는 야근이 많을 것 같은데.”
그는 타는 듯한 눈빛으로 이명을 바라보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이명은 숨을 고르느라 아무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시간 내 볼게, 오늘처럼.”
“……괜찮은데.”
한선호는 그가 겨우 짜낸 말을 못 들은 척했다.
“그럼 연락할게, 명이야.”
“잘 가.”
이명은 얼버무리듯이 내뱉고서 102동을 향해 빠르게 걸었다. 이명은 집 호수를 호출하고서 유리문이 열리기만을 기다렸다가 아파트 안으로 뛰어들어 갔다. 더 이상 바깥이 보이지 않는 캄캄한 복도에 들어서서야 등을 벽에 대고 미끄러져 내렸다.
‘엄청난 데이트였어.’
엘리베이터 위에 붙은 시계가 10시 반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명은 한선호에게 최대한 피해가 없기를, 그가 내일 출근하는 데 지장이 없기만을 바라며 숨을 몰아쉬었다.
* * *
“읏……! 헉, 헉, 흣…….”
단단한 어깨를 쥔 핏기 없는 손이 파르르 떨렸다. 어떻게든 오므려 보려고 애쓰던 허벅지는 올라탄 남자의 가슴팍을 향해 활짝 벌어져 있었다. 그의 신체는 이명이 감당하기에 너무 무겁고, 뜨겁고, 단단했다. 두 손목은 한선호가 감아쥐어 벗어날 수 없었고, 그의 상체에 깔린 몸은 미동조차 할 수 없었다. 이명이 할 수 있는 건 견디는 것뿐이었지만, 그조차 쉽지 않았다.
“으윽, 잠…… 깐. 아!”
쥐어짜듯이 겨우 소리를 낸 순간에 검붉은 기둥이 하얀 엉덩이 사이를 들쑤셨다. 뿌리까지 박을 듯이 빠르게 들락날락하자 살갗이 마찰하는 소리가 크게 났다. 장시간의 섹스에 지치지 않는 남성을 받아 낼 때마다 구멍에서 흰 점액이 허벅지 안쪽으로 삐질삐질 흘러내렸다. 그것은 한선호가 젤 대신 사용했던 이명의 체액이었다.
힘줄이 무섭게 돋은 페니스는 주름을 벌리고 내벽을 밀어내며 끊임없이 들락거렸지만 사정하는 기색이 없었다. 한선호는 고른 속도로 피스톤질을 했다. 이따금 귀에 닿는 숨결이 거칠어지거나 갑자기 키스할 때가 있었는데 그럴 때면 이명의 몸이 뒤흔들릴 정도로 거칠게 삽입한 뒤에 다시 움직였다.
“흑, 으흑……. 읏……!”
“왜, 명이야. 네가 또 넣어 달라고, 했잖아.”
낮은 속삭임이 뜨거운 입김과 함께 귓가에 부딪쳤다. 마주 보는 자세가 민망해 적응이 되지 않았다. 눈을 뜨면 욕망에 젖어 자신을 똑바로 바라보는 눈동자가 보였고, 시선을 조금 내리면 굵은 근육이 조각처럼 잡힌 목이 보였다.
몇 번인지 모를 사정으로 흠뻑 젖은 이명의 페니스는 한선호가 무게를 실으며 아랫배 안쪽을 올려칠 때마다 쿡쿡 고개를 들었다. 게다가 아무리 이를 악물고 참아 봐도 입이 저절로 열리며 제 음성이라곤 믿을 수 없는 신음이 났다. 자신이 그에게 어떻게 보일지 고려하거나 민망해할 경황조차 없었다. 이명은 이불보를 꽉 쥐고, 고통을 줄이기 위해 하체에 힘을 풀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반복했는데 접합부는 헐거워지지도 않는지, 어떻게 된 게 한 번 한 번이 모두 버거웠다. 첫 관계 때와 무언가 달라질 거라 생각했는데, 한선호가 밀고 들어올 때마다 몸이 부서지고 쪼개지는 기분은 그때와 똑같았다. 그는 이명의 상태를 고려하는 기색이 없이, 힘없이 바르르 떨리는 허리를 손으로 꽉 잡은 채 골반을 쳐올릴 뿐이었다. 한선호가 낮게 숨을 내뱉을 때마다 등허리에 소름이 돋아났다.
“명, 이야.”
“응, 으응……!”
“그저께, 왜 그랬어.”
왜 그렇게 일찍 들어가려고 했냐고, 바쁜 일이 있었냐고, 자기와 산책하기가 싫었냐고, 한선호는 이명의 귀에 입술을 바싹 붙인 채로, 이틀이나 지난 이야기를 캐물었다. 이명은 아무 생각도 할 수가 없어서 떠오르는 대로 뱉어 냈다.
“아, 아! 네가, 네가 피, 피곤할……! 으응!”
“나 그날, 하나도, 안 피곤했어.”
한선호는 태연하게 “명이야” 하고 덧붙이며 이명의 입술 사이에 혀를 넣었다. 한참을 휘저은 뒤, 그가 이명의 입술을 살짝 문 채로 중얼거렸다.
“사실은…… 흣, 너랑 더, 걷고 싶었어.”
“으, 흐윽, 미안, 미안……!”
“사과할 것까진 없고.”
허리 놀림이 점점 빨라지며 행위를 받아 내는 게 갈수록 버거워졌다. 그때쯤 가지런하던 한선호의 숨소리도 제법 거칠어졌다. 쪽, 하고 그가 볼에 입을 맞추더니, 그대로 목선을 따라 입술을 미끄러뜨렸다. 뺨에 열기가 느껴졌고, 짧은 머리카락이 닿은 곳이 까끌거렸다. 이명은 그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황홀함을 느꼈다.
자신을 안은 팔에 힘이 들어간다 싶었는데, 한선호가 아예 무게를 실으며 빠르게 박아 대기 시작했다. 도저히 견디기 어려운 무게였고 자극이었다.
“아, 흣…….”
“으읏, 응……! 응, 아! 아아!”
절정을 향해 내달리며 이명은 눈앞에 보이는 한선호의 어깨를 물고서 애원하듯 울부짖었다. 그와 살갗이 닿은 곳은 어디든 뜨거웠고, 찢기는 것 같았다. 그러다 도저히 참을 수 없게 된 순간, 이명은 눈을 질끈 감았다. 온몸에 힘이 잔뜩 들어갔다가 모든 긴장이 일시에 풀렸을 때, 격렬했던 움직임도 멈추었다. 한선호는 이명의 안에 페니스를 깊이 박아 넣고서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하아, 하아…….”
“윽, 흐윽, 으……. 흐으…….”
이명은 흐느끼듯 신음을 흘리며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폭풍 같던 쾌감이 휩쓸고 지나가자, 그제야 민망함이 몰려들었다.
‘……정말 엉망이다.’
첫 관계야 이미 지나갔으니 어쩔 수 없지만 이번에는 잘해 보고 싶었다. 한선호 정도로 능숙할 순 없더라도, 의연하고 차분하게 그의 눈을 들여다보며 사랑을 나누고 싶었다. 난생처음 섹스했던 순간에도 이명은 이토록 허둥대지 않았다. 왜 한선호 앞에서는 뭐든지 초보처럼 행동하게 되는 걸까.
불쑥 허리가 들리며 한선호가 그를 안고 옆으로 돌아누웠다. 한선호의 팔이 자연스럽게 이명을 감싸며 손끝이 배에 닿았다. 정액으로 얼룩져 더러운 배였다. 이명은 그가 그것을 만지지 못하도록 그의 손을 팔로 밀었다.
아직 빠져나가지 않은 페니스가 내장을 제 모양대로 짓누르고 있었다. 이명은 불편함에 몸을 조금 비틀었다.
“하아, 하아, 저기…….”
“응?”
“나, 눌렸어……. 잠깐…….”
팔꿈치로 기어 그와 거리를 벌렸다. 길쭉한 성기가 빠져나오기까지는 한참이 걸렸다. 이명은 그제야 공기를 폐에 가득 담으며 호흡할 수 있게 되었다. 엎드려 헐떡거리는 사이, 옆으로 누운 한선호가 그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어둠 속에서도 근육 잡힌 가슴이, 그 사이로 땀이 흘러내리는 것이 보였다.
“명이야, 괜찮아?”
이명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이번에도 자연히 비교 심리가 고개를 들었다. 건드리는 족족 사정하고 행위 내내 발버둥 치면서 비명을 지르는 자신을 보며 한선호가 무슨 생각을 했을지 궁금했다. 지금도, 땀 흘리고 가슴이 오르내리는 정도인 그에 비하면 자신은 어디서 얻어맞고 온 사람처럼 초토화되어 힘없이 늘어져 있지 않은가.
한선호는 그런 이명의 심정도 모르고 환하게 웃었다. 그가 다가와 입술을 부드럽게 빨아들이자, 잠시 동안 마음에 머물렀던 속상한 감정이 일시에 날아가 버렸다.
‘네가 좋아.’
민망해서 말로는 못 꺼내겠지만 정말로 그래. 이명은 뜨거운 입술이 제 것을 핥는 것을 느끼며 눈을 감았다.
격렬했던 섹스와 달리 부드럽고 다정한 키스가 끝나고, 한선호는 이명의 뒤통수를 끌어당겨 품에 껴안았다. 허벅지에 닿은 성기가 여전히 단단해서 당황하기는 했지만-이명은 더 이상 뭘 할 힘이 남아 있지 않았다-포옹은 무척 기분이 좋았다.
‘커다란 개 같아.’
커다란 몸집이, 뜨거운 체온이, 지치지 않는 체력이, 무엇보다 행복감이 가득한 눈빛이 그런 연상을 하게끔 했다.
한선호는 평소에 젠틀한 남자가 잠자리에서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 보여 주는 표본 같았다. 섹스 버릇이 나쁘다거나 일부러 거칠게 구는 스타일은 분명히 아니었다. 다만 그의 기준에서 아무렇지 않은 모든 것이 이명에게 힘겨울 뿐이었다.
문득 이명은 창밖이 캄캄하다는 걸 알아챘다. 고개를 휙 돌려 시계를 보고서 눈이 크게 떠졌다.
‘언제 11시가 됐어?’
이명은 한선호의 어깨를 밀어냈다. 아니, 밀려고 애썼으나 불가능했고 그가 스스로 몸을 일으킬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왜 그래?”
“벌써 11시야. 너 가야지.”
“명이는 내가 불편한가 봐.”
“뭐?”
“맨날 가래.”
결국 오해받았다.
이명은 난처했으나, 이것은 꼭 필요한 오해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리 있게 말하는 능력이 부족한 자신이 한선호가 집에 가야 하는 이유를–즉, 이번 주에 야근이 많다던 그가 주중의 한중간인 수요일에 무리해서 찾아온 것부터가 문제인데 오늘 너무 늦게 들어가면 내일 업무에 지장이 생길 테고, 그러면 야근을 더 많이 해야 하고, 그가 불행해지는 건 싫기 때문에 반대한다고-정확히 설명하려면 분명히 얘기가 길어질 텐데, 그들은 그렇게 오래 이야기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가. 욕실 써도 돼.”
“같이 씻을까?”
“아니. 난 너 간 다음에 씻을 거야.”
이명은 단호하게 말하곤 이불에 몸을 숨겼다. 어쩌다 이런 사이가 되었다지만 그가 환한 불빛 아래서 자신의 볼품없는 몸을 보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한선호는 이명을 한동안 빤히 바라보다, 한숨을 작게 내쉬곤 침대에서 일어났다. 그는 이명과 달리 제 몸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듯했다. 그래서 이명은 그의 엉덩이와 허리 사이에 조각처럼 파인 홈과 헬스 잡지 사진에나 나올 것처럼 근사하게 잡힌 등 근육을 곁눈질로 엿볼 수 있었다.
한선호가 샤워하는 동안 이명은 이불 안에 숨은 채 물소리를 가만히 들었다. 그러는 동안 떠오른 하나의 의문은 아무리 골똘히 생각해도 풀 수 없을 불가사의였다.
‘한선호는 나를 왜 좋아하는 거지.’
외모는 평범하고 늘 주눅 들어 있다. 성격은 어둡고 말주변도 없었다. 스스로가 보기에도 자신은 어디 하나 호감 생길 만한 구석이 없었다.
물소리가 그쳤을 때, 이명은 재빨리 눈을 감고 자는 척을 했다. 이런 기분으로 한선호를 배웅했다간 더 자신 없는 모습만 보이게 될 것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소리가 나며 인기척이 가까워졌다.
“명이야.”
이명은 이불 속에서 몸을 웅크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곧 따뜻한 손끝이 그의 앞머리를 쓸어내리더니, 입술에 부드러운 것이 와 닿았다가 쪽 소리와 함께 떨어졌다.
“빨리도 잠들었네.”
재미있어하는 말투였다. 그가 현관문을 열고 나갈 거란 이명의 예상과는 달리, 매트리스가 다시 출렁였다. 한선호가 옆에 누운 것이다. 곧 온몸에 소름을 돋게 하는 나지막한 속삭임이 귓가에 들렸다.
“명이야, 씻겨 줄까?”
‘……이런.’
그러고 보니 동창회 다음 날, 깨어나 보니 온몸이 깨끗하지 않았나. 이명은 자신이 이미 수치감으로 너덜너덜해졌다고 생각했지만 놀랍게도 더 수치스러울 여지가 남아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눈을 떴다.
“싫어……. 너 간 다음에 씻을 거라고 했잖아.”
“왜 자꾸 가라고 해?”
“그건…….”
“가지 말라고 네 눈빛에 써 있는데.”
온몸이 합심해서 한선호를 집에 보내야 하는 이 중요한 순간에 눈빛이 배신을 한 모양이다. 이명은 그 말을 무시하고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한선호가 한숨을 쉬며 침대에서 일어났다.
옷을 다시 입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는 보고 싶었다고 속삭이며 이명을 침대 위로 밀었던 몇 시간 전처럼 훤칠한 정장 차림으로 돌아왔다. 그를 보며 이명의 마음에는 또 예의 의문이 떠올라 속을 콕콕 찔러 댔다.
이명은 멀뚱멀뚱 서 있는 한선호를 한동안 바라보다, 그가 무엇을 원하는지 뒤늦게 알아챘다.
“이쪽으로.”
손짓하자 한선호가 뚜벅뚜벅 침대를 향해 걸어왔다. 이명은 이불에서 팔을 꺼내 길게 뻗고, 코트의 깃을 붙잡아 그를 끌어 내렸다.
작별의 키스. 한선호는 한 손으론 베개 옆을 짚고 다른 한 손으론 이명의 볼을 감쌌다.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동요하고 싶지 않았지만 달콤한 키스에 머릿속이 텅 비어 버렸다. 이명은 한선호의 목을 끌어당겨 혀를 깊숙이 섞었다.
서로의 입술이 떨어지는 순간이 아쉬운 듯, 몇 번을 다시 가볍게 붙였다 뗐다. 한선호가 이명의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나직이 말했다.
“거봐. 나 가는 거 싫잖아.”
“아니거든.”
거짓말에도 기술이 필요한 법이다. 이명은 어릴 때부터 바둑에 매진하느라 그런 기술을 배우지 못했다.
한선호는 속아 넘어가 준다는 표정을 지으며 돌아섰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자신이 멀리 밀어냈던 의자를 도로 식탁 아래 넣어 두고 바닥에 떨어져 있던 목도리를 주워서 둘렀다.
“주말에는 자고 가도 되지?”
“……응.”
“그때까진 어떻게든 살아 있어야겠네.”
한선호는 답지 않게 농담을 중얼거렸다. 이명은 그를 보고 싶은 마음에 이불을 망토처럼 두르고 일어섰다. 그러면서도 한선호가 제 몸을 볼 수 없도록 꼼꼼하게 가렸다. 다리가 후들후들 떨렸지만 벽에 기대니 좀 나아졌다.
현관 앞에 서 있던 한선호가 그 모습을 보고 웃었다. 갑자기 걸어와서 이명을 깜짝 놀라게 하더니, 몸을 터뜨릴 것처럼 꽉 안았다.
“무슨 인내심 테스트도 아니고 말이야…….”
그는 그런 말을 남기고 다시 현관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잘 자, 명이야.”
“너도, 잘 자.”
한선호가 사라지고 문이 닫힌 후에야 이명은 침대 위로 풀썩 쓰러졌다. 그의 심장은 섹스가 끝났을 때처럼 강하게 뛰고 있었다.
“미쳤어…….”
갑자기 걸려 온 전화, 그리고 도착하자마자 말도 없이 의자를 밀치고 키스를 쏟아붓던 한선호의 모습을 회상하자 뺨이 뜨거워졌다. 이 관계가 뭘까, 하루하루가 이렇게 심장 떨리는데 이런 걸 어디까지 버틸 수 있을까.
수많은 의문이 머릿속에 쓰였다가 지워졌다. 마지막으로 남은 건 가장 뿌리 깊은 한 가지였다. 이명을 우울하고 기분 나쁘게 만들지만, 해결하기 전까지는 없앨 수 없는 질문이었다.
‘한선호는 왜 이명을 좋아하는 걸까.’
이명은 울적한 기분으로 이불 속에서 빠져나와, 맨몸으로 욕실 문을 열었다.
* * *
목요일과 금요일은 고작 이틀일 뿐인데 놀라울 정도로 느리게 지나갔다. 이명은 밥을 먹을 때도, 샤워할 때도, 침대에 누워 있을 때도 한선호를 생각했다. 뭘 하고 있을지, 일이 많은지, 잠은 충분히 자고 있을지 등 수많은 가벼운 의문이 생겨났다 사라졌다.
그는 이틀 동안 바둑판을 치워 놓고 그들의 관계를 복기했다. 자신이 어디에 서 있고 어떤 식으로 포위되어 있는지, 어떻게 하면 사석을 늘리지 않을 수 있는지, 상대의 세력을 어떻게 단수할 수 있는지, 즉 ‘어떻게 주도권을 가져올 수 있는지’에 매달렸다.
두 번의 잠자리도 지나고 보니 분석할 대상일 따름이었다. 섹스에 있어서도 이명은 기력이 훨씬 떨어지는 약체였다. 체격, 완력, 체력 어느 것도 한선호의 발치에도 못 미치니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손 놓고 누워 있을 순 없었다.
‘더 잘할 수 있는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후회가 들며 이제까지 했던 모든 행동이 실수처럼 느껴졌다. 상상 속에서라면 뭐든지 매끄럽게 바로잡을 수 있지만, 막상 현실에선 그러한 생각이 바로바로 떠오르지 않았다. 왜 좋은 생각은 꼭 시간이 한참 지나고 과거를 곱씹을 때 떠오르곤 하는 걸까.
그래도 이번에는 시간이 이틀이나 있어서 다음 경기를 대비할 여유가 충분했다.
이명은 상영 중인 영화 목록을 파악하고 외출용 옷을 고심해서 골라 놓았다. 서울 시내에 산책할 만한 곳을 찾고 맛집도 검색했다. 토요일 점심을 함께 먹고서 데이트한 후 밤을 함께 보내고, 일요일 날 점심을 함께 먹고 헤어지면 될 것 같았다.
그렇게 이번에는 숙맥처럼 굴지 않고 자연스러운 모습만 보이리라 다짐했는데…….
“하, 아윽, 하아, 하아…….”
“명이야, 뭐라고?”
“바, 밖에……. 헉, 흣, 읏……!”
“응? 밖에 나가고 싶어?”
“으, 으읏, 아!”
한선호가 집에 들어선 지 5분도 안 되어 이명은 또다시 침대 위에 엎드려 있었다. 밝은 햇살이 창을 통해 쏟아지는 토요일 낮이었다.
“커, 커튼, 읏, 커튼 쳐……!”
“응. 괜찮아.”
한선호는 커튼에는 손도 대지 않았다. 그의 한 손은 끈적이는 젤에 젖은 채 이명의 엉덩이 사이로 미끄러지고 있었다. 다른 손은 그가 이불에 고개를 묻을 수 없도록 턱을 단단히 쥔 채였다.
“으, 으…….”
한선호의 손가락은 그의 몸의 다른 부위들처럼 길쭉하고 두꺼웠다. 하나는 견딜 만했으나 곧 안에서 구부러지며 두 번째가 안을 비집고 들어왔다. 한선호는 이명의 고개를 제 쪽으로 돌려 입술을 가볍게 물었다. 두꺼운 혀가 입 안으로 들어온 동시에 손가락이 비좁은 틈을 천천히 벌렸다. 빠져나가는가 하더니 더 푹 들어와 질척거리는 소리를 내며 예민한 점막을 부드럽게 눌렀다.
무릎에 힘이 빠져 누가 허리를 아래로 끌어당기는 것처럼 척추가 휘어졌다. 하얗게 핏기 가신 팔꿈치가 바들바들 떨렸다. 지난번처럼 일방적으로 흘러가게 둘 수 없단 생각에 이명은 팔 한쪽을 휙 빼서 한선호를 향해 뻗었다. 하지만 그 때문에 휘청이며 자세가 옆으로 무너졌다.
“윽……! 헉, 헉…….”
눈을 질끈 감은 순간, 등이 부드럽게 받쳐지며 자연스럽게 침대에 누운 꼴이 되었다. 이명은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잘생긴 얼굴이 당혹스러워 고개를 돌렸지만 한선호가 턱을 쥐며 다시 저를 보게 했다.
밝은 대낮에 이런 짓을 하는 게 조금도 부끄럽지 않다는 듯, 그는 이명의 허벅지를 누르며 벌렸다. 손가락이 성기처럼 푹푹 처박힐 때마다 이명은 허리를 움찔거렸다. 저는 실오라기 하나 안 걸치고 있는데, 한선호는 상의를 갖춰 입고 있다는 게 못 견디게 수치스러웠다.
“너도, 헉, 너도 벗어……!”
“알았어.”
“빨…… 리이, 흑, 으윽.”
한선호가 후, 하고 숨을 낮게 내뱉더니 이명의 가슴께에 머물던 손으로 배를 쓸어내렸다. 흰 허벅지를 부드럽게 타고 내려가던 손이 발목에서 멈추더니 복숭아뼈 아래를 잡고 휙 들어 올렸다.
“아, 읏, 뭐, 뭐 하는……!”
한선호는 이명을 내려다보며 입술을 복숭아뼈에 갖다 댔다. 그리고 이로 살짝 물더니, 움푹 들어간 부분을 혀로 긁었다. 그 온도와 눈빛이 타는 듯이 뜨겁게 느껴졌다.
그의 입술이 쭙, 쭙 소리를 내며 발목을 한 바퀴 돌고서 종아리를 타고 오금까지 올라왔다. 한 번도 남의 손이 닿은 적 없는 곳 위로 뜨거운 혀가 미끄러지자 몸이 움찔거렸다. 한선호는 이명의 다리를 꽉 잡아 고정시키고 허벅지 안쪽의 여린 살갗을 잘근잘근 깨물었다.
그의 입술이 계속해서 안쪽으로 들어오자 이명은 마음이 다급해졌다. 온 힘을 다해 다리를 오므렸지만 어느새 그의 안에서 빠져나온 한선호의 젖은 손가락이 반대쪽 허벅지를 쥐고서 움직이지 못하게 했다.
“으, 흣, 그만……! 그만.”
허벅지 안쪽을 넓게 쓸어 올리던 혓바닥이 사타구니 쪽으로 올라갔을 땐 차라리 기절이라도 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한선호는 한쪽 음낭을 입 안 가득 넣고 굴리더니 혀끝으로 성기 밑동을 간질였다.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서는 기분과 수치심이 함께 밀려들었다. 이명은 정신없는 와중에도 그의 팔을 쥐고 끌어당겼다.
“더, 러워. 하지, 마…….”
한선호는 멈추기는커녕 이명의 엉덩이를 위로 밀며 하체를 조금 들어 올렸다. 이명은 넓게 벌어진 제 허벅지 사이로 한선호의 얼굴을 볼 수 있었다. 밝은 대낮인데도 그의 위로만 그늘이 져 있었다. 목울대의 목젖이 어둠 속에서 꿈틀거렸다. 한선호는 기묘한 욕망으로 번들거리는 시선을 들어 이명을 바라보았다. 그는 혀를 내밀며 고개를 그대로 숙였다.
“안, 돼……!”
한선호의 입술이 회음부에 닿았다. 이명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가 제 은밀한 곳을 보는 것도 싫은데 입을 대다니……! 안간힘을 써서 겨우 다리를 모았지만 이번에는 한선호가 한 손으로 양 발목을 한꺼번에 잡아 올렸다. 그리고 뱀 같은 혀끝이 조금 전에 손으로 헤집어 놔서 살짝 벌어진 구멍 둘레를 날름거렸다.
“아읏, 윽! 제발, 흣, 그만……!”
주름 하나하나를 어루만지듯 핥던 혀가 조금 머뭇거리는 듯하더니 안으로 파고들었다. 이명은 난생처음 느껴 보는 수치심과 부인할 수 없는 묘한 쾌감에 몸을 발작하듯이 비틀었다. 그가 당장 이 행위를 멈추고 어디로 사라져 버렸으면 했다. 그런 동시에 한선호가 당장 제 안으로 들어오기를, 거칠게 쾌락을 쏟아 주며 이 간지러움을 몰아내 주기를 이명은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한선호가 입을 아래에 묻은 채 손을 뻗어 이명의 손을 맞잡았다. 날카롭게 세운 그의 혀가 더 깊이 들어와 안쪽을 꾹 눌렀을 때 이명은 사정하고 말았다.
잠시 멈칫했던 한선호가 고개를 들었다.
“하지, 말라고…… 했…….”
한선호가 그런 짓을 했다는 것을 믿을 수가 없었다. 그 쾌감에 절정까지 다다른 자신을 숨기고 싶은데, 그럴 수가 없어서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그늘진 곳에서 그런 이명을 올려다보는 한선호의 눈빛은 축축하게 젖어 있었다. 이렇게 음란한 자신에게 실망했을까, 하는 걱정이 덜컥 든 순간에 뺨 위로 눈물이 흘렀다.
한선호는 그렇게 엉망인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이명의 페니스를 손으로 움켜쥐었다. 그 주변에 흐른 정액을 손에 듬뿍 묻히더니 제 성기 둘레에 발랐다. 이명이 울던 것조차 잊고 눈을 깜빡거리고 있을 때, 그가 갑작스레 몸을 겹쳤다.
“헉, 자……잠깐……!”
조금 전까지만 해도 멀었던 얼굴이 코앞에 있었다. 엉망진창인 자신과 달리 여전히 멀끔한 모습으로 그가 눈을 가만히 맞추었다. 그리고 각오했던 것보다 훨씬 큰 성기가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 * *
이명은 눈을 뜨며 인상을 살짝 썼다. 잠기운이 덜어지지 않은 상태에서도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눈을 깜빡이고 바로 눕자 심한 고통이 허리에서부터 척추를 타고 올라왔다. 고개만 돌려 왼쪽을 보자 심장이 쿵 떨어졌다.
드리워진 커튼 아래 진한 그림자 속에서 한선호가 열여덟 소년처럼 순진한 표정으로 잠들어 있었다. 맨어깨를 드러낸 채 옆으로 누워 이불을 덮고 있는 모습은 처음이 아닌, 두 번째로 보는 거였다.
이명은 고개를 뒤로 꺾으며 손바닥으로 얼굴을 가렸다. 그가 자신을 엎어 놓고 세 번째로 삽입했던 순간까지는 기억이 희미하게나마 있었지만 그 뒤는 암전이었다. 이번엔 정말 잘해 보려고 했는데, 또 기절해 버릴 줄이야. 얼마나 한심해 보였을까.
킁킁, 무의식적으로 공기를 빨아들이자 손목에서 한선호의 청량한 향수 냄새와 뒤섞인 비누 냄새가 옅게 났다. 혹시나 싶어 앞머리를 끌어당겨 보았는데, 이번에는 진한 샴푸 향기가 났다. 감은 지 오래되지 않았을 때만 나는 냄새였다.
이명은 한동안 입을 꾹 다물고 부끄러움을 집어삼켰다. 뺨에 머물던 열기가 귀까지 옮아갔을 때쯤, ‘후’ 하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미 일어난 일은 바꿀 수 없고 다음 수를 생각해야 한다. 그것은 그가 기사로서 받아들여야 했던 제1원칙이었다. 기력이 훨씬 뛰어난 사람과 바둑을 두고 있더라도 마찬가지다.
몸을 돌리자 잘 차려 놓은 정찬처럼 나무랄 데 없는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이명은 옆으로 누운 채 코가 닿지 않을 정도로만 한선호에게 다가갔다.
불과 지난주 동창회에선 그의 속눈썹과 콧날, 입술을 관찰하면서도 제 것이 아니란 생각에 우울했었다. 지금 가슴에 넘실거리는 행복감은 한선호를 가졌기 때문일까. 그렇다면 나머지 반을 채운 불안감은 그를 언제든 잃을 수 있기 때문일까.
‘난 아직도 너를 몰라.’
누군가를 잘 알지도 못하면서 이렇게 가깝게 느껴도 되는 걸까. 모든 생각의 결론에서 이명은 주저하고 말았다.
고등학교 시절 그를 향한 감정은 동경에서 비롯된 짝사랑이었다. 이명은 한선호처럼 되고 싶었고, 급기야는 그를 갖고 싶어졌다. 그렇다면 지금의 감정은 무엇일까.
‘잘 모르겠어.’
고등학교 시절처럼 한선호에게 매혹당했다는 것만은, 물리적인 끈에 묶인 것처럼 그에게 이끌리고 있다는 것만은 확실했지만, 이명은 자신의 감정이 진지한 이름표를 붙일 만한 것이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이를테면 ‘사랑’ 같은.
그러나 한선호에게는 무언가 있는 게 분명했다. 자신에게 없기 때문에 끝없이 갈구하게 되는 무언가를 갖고 있어서 이렇게 계속 보고 싶어지는 것이리라.
그의 얼굴을 향해 손을 뻗은 건 의식적인 행동이 아니었다. 손끝이 한선호의 코에 닿았을 때는 이명 본인이 더 놀랐다. 그 때문에 한선호의 눈꺼풀이 꿈틀거렸을 때는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이윽고 한선호가 눈을 떴다. 무감정하던 눈이 몇 번 깜빡이더니 상냥한 웃음을 지었다. 한선호는 나른하게 눈을 감고 팔을 이명의 어깨에 턱 얹었다. 다음 순간, 이명은 그에게 끌려가 품 안에 갇혀 버렸다.
‘……숨 막혀.’
무게가 상당했지만 제 목보다도 두꺼운 팔뚝은 밀어낼 엄두조차 나지 않았다. 머리 위에서 알아들을 수 없는 낮은 웅얼거림이 들리다 서서히 고른 숨소리로 변했다. 이명은 그런 그가 귀여워서 숨죽여 웃었다.
한선호가 다시 깨어났을 때는 정오가 다 되어 가는 시각이었다. 그동안 이명은 잠들었다 깼다가 그의 얼굴을 관찰하기를 반복하고 있었는데, 마침 그때는 깨어 있었다. 그들은 눈이 마주치자마자 진한 입맞춤을 오랫동안 나누었다.
침대에서 나와 세수하고 옷을 입었을 땐 1시가 넘었다.
“약속이 있다고?”
셔츠를 몸에 걸치며 한선호가 물었다. 그의 어투가 조금 차갑게 들려서 이명은 덜컥 긴장해 버렸다.
“응…….”
“선약이면 어쩔 수 없지. 어디 가는데? 나가는 길에 데려다줄게.”
“괜찮아.”
“약속 장소가 어디야, 명이야.”
그 말이 왜 그렇게 무섭게 들렸을까. 한선호의 얼굴을 살펴보았지만 다행히 화난 기색은 없었다. 이명은 더듬더듬 대답했다.
“대한 기원. 그리고…… 안 데려다줘도 돼.”
“기원? 바둑 두러 가는 거야?”
“큰 대회가 끝나면……. 기원이랑 도장이랑…… 그러니까 어릴 때 사범님이랑, 가르쳐 주셨던 분들……. 인사드리러 가는데. 오늘은 기원만.”
한선호는 한동안 생각에 잠긴 것처럼 입을 다물고 있었다. 이후에 그가 보여 준 모범적인 미소에 가슴을 옥죄게 했던 긴장감이 사르르 녹아내렸다.
“너 거기 가면 바둑도 둬?”
“응, 보통은.”
“나도 같이 가면 안 될까? 구경하고 싶은데.”
한선호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이명은 이런 상황은 상상도 못 했기 때문에 깜짝 놀랐으나 생각해 보니 안 될 건 없었다. 기원이 나쁜 곳도 아닌 데다, 오늘 만날 이들도 친절한 사람들이다. 다만…….
“재미없을 텐데.”
한선호는 이명의 말을 못 들은 것처럼 외투에 팔을 끼웠다.
그들은 기원에 가기 전에 기원 맞은편에 있는 백반집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이번에는 이명이 운전했다. 정이나 엄마가 아닌 타인을 조수석에 태운 건 오래간만이었다. 늘 혼자 타고 다니는 차량 옆자리에 누군가가 있다는 게 낯설었다.
한선호는 모범적인 운전자였듯 모범적인 승객이었다. 안전벨트를 매고 단정하게 앉아 있는 모습은 공익 광고의 한 장면 같았다. 주로 정면을 주시했지만 가끔 휴대폰을 들여다보거나 측면 유리창을 통해 바깥을 보기도 했다.
그날따라 들어서는 길마다 정지 신호에 걸렸고 가는 길도 유난히 지루하게 느껴졌다. 이명은 끊임없이 옆자리를 곁눈질하며 한선호의 눈치를 보았다. 차가 그에게 비좁을 수도 있고, 괜히 따라왔다는 후회가 들 수도 있지 않은가.
사설 주차장에 차를 주차하고 내렸을 때는 고민거리가 사라지기는커녕 더 불어나 있었다. 아무거나 잘 먹는다길래 별생각 없이 자주 가는 음식점에 가자고 했는데, 입맛에 맞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이명은 잔뜩 긴장한 채 백반집으로 들어섰다. 그가 초등학교 때부터 들락거렸던 작은 음식점은 TV에 나온 유명한 맛집도 프랜차이즈도 아니었다. 그저 아주 오랫동안 같은 자리에 존재해 온 식당일 뿐이었다.
문을 열자 딸랑거리는 소리가 났다. 머리를 쓱 숙이며 문을 통과하는 한선호는 어딜 가나 그러한 행동을 해야 해서 익숙해진 사람처럼 보였다. 식당에는 사람이 별로 없어서 그들은 2인용 좌석 중 하나를 골라 앉았다.
“여긴 뭐가 맛있어, 명이야?”
한선호가 벽에 붙은 메뉴판을 보며 물었다.
“다 먹어 봤는데 다 괜찮아.”
“넌 뭘 좋아하는데?”
“다 좋아하는데.”
“오늘은 뭐 먹을 거야?”
“오늘은…… 갈비탕 먹을래.”
“그럼 나도.”
주문하려고 손을 들자 사장이 플라스틱 물통을 들고 다가왔다.
“오랜만에 오셨네요.”
“갈비탕 두 개 주세요.”
기다리는 동안 이명은 불안감이 더 커져 갔다. 한선호가 어딘가 불편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는 주변을 자주 둘러보았고 식당에 몇 없는 손님이 돌아다닐 때마다 호의적이지만은 않은 시선으로 그들을 좇았다.
음식이 나오고서 그들은 말없이 수저만 움직였다. 한선호는 국물에 입김을 불어서 식혀 먹는 습관이 있었다. 이명은 그런 그를 보고서 9년 전의 어떤 기억을 떠올리며 몰래 미소 지었다.
“명이야, 이거 먹고 기원 갈 거지?”
“응.”
“선생님 뵈러 간다고 했나?”
“응. 조정환 원장님.”
이명은 아홉 살 때 바둑돌을 처음 쥐었다. 부모가 맞벌이라 학교가 끝나면 정과 둘이서 삼촌의 손을 잡고 외갓집으로 하교하던 시절이었다. 아이들과 몸으로 놀아 주다 지친 삼촌은 퍼즐과 동화책, 온갖 블록과 인형을 동원했지만 그마저 질려 하자 할아버지의 오래된 바둑판을 꺼냈다. 이명은 기이할 정도로 반들거리던 백돌을 처음으로 손에 쥐어 보았던 날의 흥분을 어제처럼 기억하고 있었다.
‘누나, 누나, 누나누나누나! 우리 명이가, 아무래도 천재인 것 같아!’
전화기에 대고 고래고래 소리치던 삼촌의 목소리 또한.
“삼촌 대학 선배인데, 아홉 살 때부터 바둑을 가르쳐 주셨어.”
“바둑 일찍부터 시작했구나.”
“늦은 건데.”
이명이 아는 또래 기사들은 대개 대여섯 살 때부터 돌을 잡았고, 서너 살 때 시작했다는 사람도 종종 보았다.
“기원하고 바둑 도장하고 달라?”
“응.”
이명은 1년간 조 원장이 운영하는 대한 기원을 놀이터처럼 드나들며 바둑의 기초를 배웠고, 조 원장이 이명을 전문적인 시설에 보내야 한다고 엄마를 설득한 이후부터 임주혁 바둑 도장에 등원했다.
“도장은 학교 같은 느낌이야. 기원은…… 가 보면 알 거야.”
그들은 그릇을 비우고 일어났다. 이명은 한선호가 계산대에 도착하기 전에 재빨리 계산하고서 아버지뻘 되는 남자 두 명에게 사인을 해 주고 식당에서 나왔다.
“잘 먹었어, 명이야.”
“저번에 네가 커피 샀잖아.”
한선호가 뭐라고 말하려고 한 순간, 누군가 이명의 어깨에 손을 턱 얹었다.
“이명 9단, 이제 오십니까?”
휙 돌아보자 머리카락이 부스스한, 흐트러진 차림의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대한 기원 조 원장의 조카, 조승빈은 이명과는 아홉 살 때부터 알고 지낸 동생이자 열다섯에 입단해 지금껏 왕성하게 활동하는 프로 기사였다.
승빈이 이명을 훑어보더니 빈정거리듯이 말했다.
“뭐야, 빈손이야?”
“이제 사러 갈 건데?”
“2등 상금 거 얼마나 된다고. 무리하지 마, 형.”
“비싼 거 안 살 테니까 걱정 마.”
이명은 장난 반 진담 반, 퉁명스럽게 내뱉었다. ‘기화생명배’에서 1등 못 했다고 대놓고 비꼬는데도 어릴 때부터 봐 온 동생이라 그런지 밉지 않았다.
“이분은…… 누구셔?”
그제야 한선호를 발견한 승빈이 그를 수상하다는 듯 올려다보았다. 승빈도 남자치고 작은 키는 아니었으나 한선호는 워낙 평균 규격을 훌쩍 넘어서는 체격이었다.
“어……. 친, 구야.”
친구. 발음해 본 적이 별로 없는 그 두 글자가 낯설었다. 이명은 한선호를 보지 않으며 말을 이었다.
“얘는 승빈이야. 조승빈 3단.”
한선호는 승빈을 특유의 속을 알 수 없는 무표정으로 바라보며 고개를 까딱거렸다. 승빈이 그런 그를 신기하다는 듯이 바라보며 깐족거리기 시작했다.
“아핫, 이 형이 친구도 있는지 몰랐네요. 키 엄청 크시다.”
“너 가서 마실 거나 사 와.”
이명은 승빈이 더 이상한 말을 하기 전에 그에게 카드를 내밀었다. 한선호와 떼어 놓으려는 속셈이었는데, 승빈이 맨발에 신은 슬리퍼를 질질 끌고 자연스럽게 한선호를 데리고 가면서 그 계획은 실패했다.
‘……쓸데없는 소릴 하진 않겠지.’
불안한 마음으로 슈퍼를 향해 빠르게 걸었다. 네가 진짜 내 친구였다면, 당당하게 소개할 수 있었다면 좋을 텐데. 이렇게 이도 저도 아닌, 모호한 감정 하나로 연결된 실낱같은 사이가 아니었다면.
고개를 푹 숙인 채 진열대 사이를 돌아다녔다. 어느 대회에서든 1등을 하면 고기를 사 가는 것이 조 원장과 이명 사이의 관례였지만, 이번에는 결승에서 미끄러졌으니 간단한 간식이면 충분했다. 이명은 귤 한 박스를 사 들고 슈퍼에서 나왔다.
골목에서 담배를 피우며 기다리자 테이크아웃 컵을 든 승빈과 한선호가 카페에서 나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새 친해졌는지 웃으며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럼 명이 형이랑은 고등학교 때부터 친구셨던 거예요?”
“네. 고2 때 같은 반이었어요.”
“근데, 무슨…… 운동하시죠?”
“운동 좋아하긴 하죠.”
“아, 진짜요? 몸이 좋으셔서 당연히 유도나 그런 쪽 선수이신 줄…….”
역시나 쓸데없는 소리를 늘어놓고 있었다. 이명이 반쯤 태운 담배를 꺼 버리고 최대한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자 승빈이 종이 캐리어에서 종이컵 하나를 꺼내 내밀었다.
“선호 형님이 사셨어.”
“……뭐?”
“내가 다른 데 보는 사이 결제해 버리셔서, 하하.”
승빈은 장난스럽게 웃었지만 한선호는 웃고 있지 않았다.
‘관심도 없는 장소에 끌고 가는 것도 모자라 돈까지 쓰게 하다니.’
승빈이 이명에게 카드를 돌려주고서 당연하다는 듯 귤 상자를 손에서 빼앗아 들었다. 왜 자기가 안 좋아하는 과일을 샀느냐며 한참 동안 구시렁거렸지만 이명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뒤에서 느껴지는 한선호의 존재감에 신경이 온통 쏠려 있어서 승빈에게 핀잔을 줄 여유조차 없었다.
그들은 기원의 층계를 올라 2층에 도착했다. 금방 식사를 마쳤는지 기원 건물 안에는 음식 냄새와 담배 냄새가 뒤섞여 있었다. 불쾌하지만 익숙한 냄새를 맡으며 문을 열자 열 명 남짓한 이들의 얼굴이 밝아졌다.
“우리 명이 왔구먼. 다들 알지? 우리 이명 9단.”
돌연 처음 보는 중년 남자 한 명이 부리나케 달려오더니 이명의 손을 붙잡고 위아래로 흔들었다. 손을 가까스로 빼내자 다른 한 명이 종이를 내밀며 사인해 달라고 했다.
“거 다들 줄을 서요, 줄을.”
여기 출입하는 사람이라 봐야 뻔하지 않나. 재작년에 조 원장의 부탁으로 회원 명부에 있는 모든 이름으로 사인해서 준 적도 있었는데, 이렇게 꾸준히 새로운 사람이 보이는 게 신기했다. 이사라도 오는 건가.
“짜식이, 결승에서 왜 그랬어. 응? 좀 잘하지!”
세 번째로 사인해 준 남자가 이명의 등을 툭 치며 말했다.
‘……보태 준 거라도 있나.’
저럴 줄 알았으면 사인을 안 해 줬을 텐데. 이명의 표정을 본 조 원장이 잽싸게 끼어들었다.
“심 사장은 국가의 영웅한테 무슨 말을 그렇게 하시나, 응?”
“우승을 했어야 국가의 영웅이지! 졌는데 무슨? 안 그래? 어?”
“이 사람, 씁! 아까 빼갈을 까더니 취했네, 취했어.”
“게다가 인마가 거 누구냐, 홍랴오치 형님한테 싸가지 없이 굴…….”
“승빈아, 사장님 모셔다 드려라아아! 댁에 들어가셔야지.”
조 원장의 지령에 승빈이 남자를 끌고 나갔다. 이명은 대회에 관해 한마디씩 하려는 사내들에게 다시 둘러싸였다.
슬쩍 뒤돌아보니 한선호는 문 앞에 멀뚱멀뚱 서 있었다. 그는 살짝 혼란스러운 얼굴이었다. 하긴, 요즘 시대에 실내에서 담배를 뻑뻑 피울 수 있는 곳은 없으니까. 게다가 오늘따라 분위기가 어수선한 것도 사실이었다.
‘나야 이런 게 익숙하지만……. 반장은 정말 싫겠다.’
이명은 인사만 하고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그가 입을 열려는 찰나에 심 사장을 처리하고 돌아온 승빈이 귤 박스를 높이 들며 큰 소리로 외쳤다.
“여러분! 이거 이명 9단이 사 온 겁니다. 하나씩 드시죠?”
“나 줘! 나부터 줘!”
“아냐, 나야! 나야!”
공짜 과일을 받을 수 있다는 소리에 자리에 점잖게 앉아 바둑을 두던 사람들까지 죄다 일어나서 이명을 우르르 둘러싸며 손을 뻗었다.
가장 먼저 귤을 꺼내 여유롭게 까먹던 조 원장이 문득 말했다.
“근데…… 저분은 누구?”
“명이 형 고등학교 친구시래.”
그전까지 무표정하게 서 있던 한선호는 자기 얘기가 나오자 곧바로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그는 조 원장에게 꾸벅 고개 숙여 인사하며 그가 내민 손을 공손하게 맞잡았다.
“명이 친구면 내 조카나 마찬가지지. 어서 와요, 어서 와.”
처음 보는 사람에게도 친근하게 대하는 재주가 있는 조 원장은 팔을 뻗어 한선호의 등을 감쌌는데, 덩치 차이가 너무 많이 나서 마치 어른과 청소년처럼 보였다.
“어유, 인상 좋다. 아주 잘생겼고 탤런트 같아.”
“하하, 감사합니다.”
“친구는 바둑 좀 두시나?”
“아뇨. 보는 것만 좋아합니다.”
“잘됐다. 오늘 우리 이명 9단 바둑 두는 거 보고 가.”
“안 그래도 그러려고 왔습니다.”
조 원장은 당연하다는 듯이 이명을 링 위로 밀었고 한선호는 웃으며 이명을 바라보았다. 진퇴양난이었다. 평소처럼 한판 두자니 한선호가 지루해할까 봐 신경 쓰이고, 그냥 가자니 그가 아쉬워할 것 같았다.
‘빨리 끝내자.’
“그럼 한 판만 두고 갈게요.”
이명이 그리 말하며 빈자리에 앉았다. 승빈이 바로 옆에 의자 두 개를 끌어와 하나는 저가 쓰고 하나에는 한선호를 앉혔다.
“오늘은 내가 우리 이명 9단한테 한 수 배우고 싶은데 말이야.”
중학교 도덕 선생님이라는 점잖은 사내가 상대로 나섰다. 얼굴이 눈에 익은 기원의 단골로, 오가면서 몇 번 밥을 같이 먹어 본 적이 있긴 해도 기력이 어느 정도인지는 몰랐다. 하지만 상대가 누구든 상관없이 이명은 빠르게 끝낼 생각이었다.
“좋습니다.”
“우와, 서 선생 계 탔네, 계 탔어!”
보통 사람들은 프로 기사에게 함부로 덤비지 않는다. 그러나 가끔 예외도 있는 법이다.
“우리 서 선생 대단한 은둔 고수시지. 인터넷 바둑이 뭐, 8단이시라고?”
“그럼요. 내가 실전 바둑에 강한 편입니다.”
서 선생은 자리에 앉더니 이명에게 악수를 청했다.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보이며 바둑판에 흑돌 일곱 개를 차근차근 깔았다.
“아저씨, 그냥 다 깔아요. 그래 갖곤 절대 못 이겨요.”
“9점 접바둑을 하라고?”
서 선생이 승빈의 말에 발끈하며 그를 돌아보았다.
“난 그런 건 둬 본 적이 없네! 거의 150집을 덤으로 받는데 어떻게 그런 짓을.”
“……7점은 참도 정정당당하시고요.”
그는 아무래도 자존심이 강한 타입인 것 같았다. 이명은 구태여 반대할 생각이 없었다. 아홉 점 깔 것을 일곱 점만 깐다면 판이 훨씬 일찍 끝날 것이다.
“자, 당신이 고수니까 내가 먼저 두겠습니다.”
서 선생이 눈을 반짝이며 말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명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외투 안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안경집에서 안경을 꺼내 얼굴에 걸쳤다. 그리고 엉덩이를 조금 빼고 의자에 걸터앉았다.
한선호가 곁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그 사실이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는 불쾌한 긴장감을 불러일으키며 손끝을 굳게 했다. 이명은 진지한 표정으로 첫 백돌을 바둑판 상단에 내려놓았다.
대결이 시작된 즉시 어수선하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중요한 정식 경기도 아니고 고작 아마추어와 프로가 재미 삼아 두는 7점 접바둑일 뿐인데, 바둑판을 에워싸고 선 사람들의 표정에는 기대감이 가득했다.
서 선생은 어드밴티지를 적극적으로 이용하며 초장부터 방어하는 데 사활을 걸었다. 좌변의 세력을 공고히 하려는 전략이었겠지만 이명은 우상귀에 침입하며 그를 불러들였다. 수성을 고수하는 적을 끌어낼 때는 무모해 보이는 수를 던지고, 당근에 눈이 먼 말이 달려들 때 목을 친다. 살을 내어주고 뼈를 취하는 후절수는 이명의 특기 중 하나였다.
“무섭다, 무서워.”
“저게 프로구나.”
축을 쫓다가 세력 열세 점을 한 번에 잃게 생긴 서 선생의 안색이 흙빛으로 변했다. 이미 가망이 없는데도 그는 미련이 남은 듯 백의 성 테두리에 흑돌을 얹었다.
“그걸 두고 ‘죽은 자식 고추 만지기’라고 하죠. 그거 버리고 밑으로 빠져요, 아저씨.”
승빈의 훈수에 진지하게 구경하던 이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명은 그 틈을 타 옆을 슬쩍 보았다가, 저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는 한선호와 눈이 마주쳤다. 너무 일방적이라 긴장감도 재미도 없는 대결을 그가 어떻게 보고 있을지 신경이 쓰여 견딜 수가 없었다.
이명은 조바심이 나서 받쳐 줄 세력이 전혀 없는 중앙에 백석을 박았다. 서 선생은 기회라는 듯이 외로운 돌을 잡으러 왔지만 좌변을 공고히 하는 것이 나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흑돌, 백돌, 흑돌, 백돌, 속기가 계속되다 이명은 백 세력을 상단으로 이으며 어렵지 않게 적의 벌집을 일망타진해 버렸다.
“안 봐주네.”
“좀 살살해요.”
서 선생은 이제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흑이 초반에 집적거리다 버려둔 좌하귀를 백이 파호하자 그가 “하” 하는 한숨과 함께 손끝으로 이마를 짚었다.
애초부터 양 날개가 제한된 형국으로 시작한 게임이지만 기력 차이는 그 이상이었다. 더군다나 이명은 프로가 된 이후에 온갖 기괴한 패널티를 받으며 바둑을 두어 보았다. 초등학생 연구생과 붙었을 때는 한 수 놓을 때마다 제자리에서 한 바퀴 돌아 달라는 요구도 받아 보았는데. 이렇게 평범한 접바둑이라면 셀 수 없이 두어 보았던 것이다.
‘빨리 끝내야 해. 분명히 지루할 거야.’
마음이 급해지면서 행마는 이전보다 더욱 공격적으로 변했다. 차분하게 생각할 여유가 없어, 널리 알려진 관용구대로 ‘축과 장문만 아니면 끊어 버리는 수’가 계속되었다.
“무슨 바둑이 이렇게 상도덕이 없어. 솔직히 낚시꾼들도 치어는 놔준다고요.”
서 선생의 마지막 희망은 좌변에 있었다. 그는 몸부림치며 반항했지만 이명은 모자를 씌우며 흑 세력을 차근차근 삭감해 나갔다. 그 과정에서 구경하던 사람들의 반이 떠나갔다. 이제 더 볼 필요도 없다는 거였다.
“다들 이제 아시겠죠? 제가 맨날 저 사람한테 밟혀서 3단에서 못 올라가는 겁니다.”
승빈의 질투 섞인 코멘트는 이명에게 아무 영향도 미치지 않았다. 그는 서 선생이 돌을 던질 때까지 그의 뼈와 살을 살뜰하게 발라냈을 뿐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제 손아귀에 남은 건 유골뿐이란 걸 깨달은 서 선생이 빨개진 얼굴로 말했다.
“그만하겠습니다. 프로는 차원이 다르군요.”
“수고하셨습니다.”
이명은 고개를 까딱 숙여 인사했다.
‘끝났다. 너무 오래 걸리지 않아서 다행이야.’
마지막까지 게임을 지켜보던 몇몇 회원이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격려했다. 유리병에 든 음료수를 사다 주는 이도 있었다. 이명은 그들이 모두 각자 자리로 돌아갈 때까지 한동안 붙잡혀 있었다. 주변이 조용해졌을 때 이명은 조심스럽게 옆을 보았다. 한선호는 승빈과 이야기하고 있었다. 살짝 미소 띤 표정이었으며 언짢은 기색은 없었다.
‘괜찮은 것 같기도……. 다행이다.’
하지만 이제 가는 것이 좋겠다. 평소라면 시간을 신경 쓰지 않고 더 머물렀겠지만 오늘은 그래선 안 될 것 같았다.
“원장님, 저 가 볼게요.”
“그래? 벌써? 바쁜가 보다. 임 사범은 만나 봤고?”
“아니요. 어차피 교류회 때 뵐 거니까요.”
멀지 않은 거리에 앉아 있던 승빈이 고개를 휙 돌렸다.
“형, 다음 주에 양양 가지? 몇 박이야?”
“2박 3일.”
“누구누구 가?”
“사범님이랑 둘이 가는데.”
“왜? 유진이 누나는?”
“요즘 바빠서 스케줄 맞추기가 어렵대.”
“뭐래. 그저께 PC방 가던데.”
이명은 두 발로 일어서며 한선호를 보았다. 시선이 그의 옆모습에 잠시 머물렀을 뿐인데, 한선호가 마찬가지로 일어서며 이명을 마주 보았다. 둘의 눈이 마주친 시간은 길지 않았다. 그러나 그 짧은 시간 동안 온 세상에 그림자가 드리운 것 같았다. 이명은 그가 웃어 주지 않는 모든 시간이 두려웠다.
“미안, 너무 오래 걸렸지?”
“괜찮아.”
한선호는 부드럽게 답했지만 이명은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을 수 없었다. 정말로 괜찮다면, 그의 눈빛이 눈에 띄게 날카로워졌던 순간들은 무엇이었을까.
역시 관심도 없는 기원에 데려온 것이 실수였다.
* * *
“선호 씨, 요즘 좋은 일 있어요?”
“제가 그래 보여요?”
“응. 요즘 맨날 야근하면서 왜 이렇게 행복해 보일까? 좋은 사람이라도 생긴 거야?”
“하하하, 네.”
“뭐어어어? 진짜야? 뭐야, 누구야? 축하해!”
하루가 멀다 하고 주변 사람들이 요즘 좋은 일이 있느냐고 물어봤다. 회사 사람들은 물론이고 아파트 경비원과 늘 담배를 사는 편의점의 아르바이트생도 그렇게 말했다. 요즘 기분이 좋아 보인다고.
한선호는 기분이 안 좋을 이유가 없었다. 스스로 보아도 불가사의할 정도로 잘 풀리는 나날이었으니까.
일, 탄탄대로였다. 취직하자마자 투입되었던 해외 전자 제품 박람회에서부터 공들인 본사 직계약이 더할 나위 없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 때문에 최근에 야근을 달고 살기는 했지만 고생하는 만큼 보람도 보상도 크게 돌아올 노동이었다.
주식도 호재였다. 보유 주식 중 부진하던 몇 가지가 상승세로 돌아선 것도 반가운데, 몇 년 전에 뭘 잘 모를 때 샀다가 묵혀 놓았던 종목이 상한가를 쳐서 뜻밖의 부수입을 얻었다. 술자리에서 재우에게 슬쩍 말했을 뿐인데 온 동네에 소문이 나서 친구들이 밥 사라고 난리였다.
[올리브나무] 축하드립니다. 명함 추첨 이벤트에 당첨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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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연말,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하세요!
심지어는 이탈리아 레스토랑에서 하는 이벤트에 당첨되어서 어리둥절했다. 지난달에 식사하고 퇴장하면서 별생각 없이 응모함에 명함을 넣기는 했는데, 워낙 유명한 식당이고 이미 명함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어서 뽑힐 거라곤 기대도 하지 않았다.
소소하지만 기분 좋은 일이었다. 연애를 시작하고서 원래도 평탄했던 일상에 각종 행운이 쏟아지고 있었다. 같은 팀의 송 대리가 함께 야근하는 날 쓰자고 부추겼으나, 한선호는 좋게 거절했다. 상품권을 받자마자 머릿속에 떠오른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가만, 명이가 이런 데를 좋아하려나.’
한선호는 추첨 문자를 가만히 들여다보며 전날 둘이 함께 갔던 식당의 메뉴를 떠올렸다. 우거지 선지국, 추어탕, 소머리 해장국, 도가니탕…… 이었던가.
‘다 먹어 봤는데 다 괜찮아.’
이명의 음식 취향은 평범함과는 거리가 먼 듯했다. 한선호는 이명이 해장국 스타일의 음식을 선호하리라곤 상상도 못 했다.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었지만 그저 막연하게…… 이보다 덜 향토적인, 이름 어려운 외국 음식을 좋아할 줄 알았다. 게다가, 사람들은 보통 첫 데이트에선 무난한 메뉴를 고르지 않나.
한선호는 이명에게 선약이 있을 줄 모르고 일요일 점심에 오성급 호텔 출신 쉐프가 운영하는 일식집을 예약했었다. 그뿐 아니라 근처 영화관들의 상영 목록과 상영 시간을 조사했으며 저녁때 갈 만한 와인 바를 회사 동료에게서 추천받아 놓은 상태였다. 그것이 어렴풋이 상상했던 첫 데이트의 밑그림이었는데, 현실은 전혀 다르게 흘러갔다.
‘저저, 이명 9단이여, 이명 9단.’
‘그래? 둘 중에 누구?’
‘기생오라비같이 생긴 쪽 말이여. 이따 사인 받아.’
해장국집에 들어서자마자 사람들이 이명을 알아보고 수군거렸다. 식당 벽에는 그의 사인이 미술관에서나 볼 법한 금색 액자에 든 채 정중앙에 걸려 있었다. 식탁에 턱을 괴고 앉아 있던, 사장으로 보이는 남자는 이명을 보자마자 총알처럼 튀어 올랐는데, 테이블에 물을 가져다주며 볼에 홍조를 띠었다.
아무렇지 않은 표정으로 밥을 갈비탕에 마는 이명은 자신을 둘러싼 관심에 너무 익숙한 나머지 신경조차 쓰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니까…… 명이는 이 세계의 아이돌 같은 거구나.’
애인이 바둑계 유명 인사란 건 진작 알고 있었지만 실상을 마주하니 기분이 묘했다. 놀랍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하고, 뭐라고 단정 지을 수 없는 감정이 들었다. 꼬집어 말하자면 기분 나쁜 것에 가까웠다. 한선호는 식사하는 내내 이명에게 집중된 시선이 신경 쓰였고, 앞치마에서 응원봉을 꺼내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은 사장의 표정이나 아저씨들이 수저를 놓고 일어나 사인 받으러 오는 것도 불쾌하게 느껴졌다. 사인만 받으면 됐지, 악수는 왜 청하며 어깨는 왜 두드린단 말인가.
밥을 먹고 나오자마자 길에서 이명이 아는 기사를 마주쳤다. 애인이 어릴 때부터 알고 지냈다던 지인은 수다스러운 스타일이었으며 한선호와 초등학생 때부터 친했던 친구, 경민을 떠올리게끔 하는 구석이 있었다.
한선호는 조승빈과 인사하고서 그가 음료를 사러 갔을 때는 따라가서 말동무를 해 주었다. 이명과 가까운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궁금했다. 이 조승빈이라는 기사도, 이명의 은사라는 조정환 원장과 임주혁 사범도, 이명의 친구들, 가족과 친지, 그를 예쁘게 키워 주신 부모님도 전부 궁금했다. 그런데…….
‘따뜻한 아메리카노 세 잔이랑요, 카페 라떼 한 잔 우유 많이, 시럽 많이 넣어 주시고 시나몬 대신 코코아 가루 뿌려 주세요.’
‘…….’
‘입맛 까다로운 거 알아줘야 돼요. 그쵸?’
조승빈이 카페에서 주문하는 걸 듣고서 한선호는 머리를 띵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이명이 까다롭다고? 며칠 전에 좋아하는 음료 있느냐고 물어봤을 땐 ‘아무거나’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래도 이번엔 웬일로 일찍 극복했네. 아시죠? 1등 못 하면 집에만 틀어박혀 있는 거. 그거 정말 안 좋은 버릇인데.’
‘……아.’
‘맞다, 혹시 형한테 결승전 얘기 들으신 거 있어요?’
‘아뇨. 그런 얘기는 안 해 봐서.’
‘친구한테도 일 얘기는 안 하는구나. 솔직히 명이 형이 빡돈다고 돌 던지고 복기도 안 하고 나갈 사람은 아니잖아요. 근데 기사에는 그렇게 써 있고, 댓글창은 악플 천지고, 답답해요.’
‘…….’
‘그런 쪽에 워낙 예민하니까 물어보지도 못하고……. 제가 물어보면 그냥 홱 째려보고 말걸요.’
조승빈은 이명과 지나치게 가까웠다. 심하게 말하자면 이명에 관해 뭐든 아는 것 같았다.
1등 못 하면 집에 틀어박히는 이명, 아무리 화가 나도 복기는 꼭 하고 퇴장하는 이명, 주변에 일 얘기를 터놓지 않는 이명, 경쟁과 순위에 무척 예민한 이명. 자신이 모르는 이명의 모습을 다른 사람이 잘 알고 있다는 데 질투가 났고, 그에 관해 모르는 자신에게도 화가 났다.
그토록 자존심과 승부욕이 강한 기사였던가. 이명이 중요한 대회 1등을 놓친 뒤 어떤 심정으로 동창회에 왔을지, 대국 이후 열흘도 지나지 않은 현재 어떤 상태인지 한선호는 짐작해 본 적이 없었다. 사실은, 마음속에서 은밀하게 그가 기화생명배 결승에서 패배한 걸 다행으로 여겼다. 승리했다면 동창회에 오지 않았을지도 모르니까.
복잡한 심정으로 다시 만난 이명은 기원이 있는 골목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확실하게 손에 넣었다고 생각한 남자가 다르게 보였다. 고개를 살짝 뒤로 꺾고 하늘로 연기를 내보내는 그가 누구인지 잘 모르겠다고 한선호는 생각했다.
독일제 은색 투도어 카를 타고, 운전할 때 참을성이 별로 없으며, 해장국을 좋아하고, 타르가 8.0mg 든 독한 담배를 피운다는 걸 알게 된 것처럼, 앞으로 차차 알아 가면 되겠지.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하고 입장한 기원은 충격 그 자체였다. 미세 먼지가 ‘매우 나쁨’ 수치일 때의 하늘을 재현해 놓은 것 같은 공기나 지저분한 실내는 둘째 치고, 이명 9단을 향한 열광적인 반응이란. 줄 서서 사인받을 때까지는 그러려니 했는데, 이명이 사 온 과일을 나눠 준다고 하니까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난리가 났다. ‘기를 받겠다’라면서 서로 손을 뻗는 통에 여기저기서 바둑판이 엎어지고 사람들이 서로 이마를 박고 쓰러졌다. 선호의 눈에는 그저 시설이 안 좋은 곳에서 하는 팬 미팅으로만 보였다. 그것도 아이돌의 몸에 손대는 사람이 열에 아홉 명이나 있는 저질 팬 미팅.
그래도 고집부려서 기원에 따라간 보람이 있었다.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이명이 바둑 두는 모습을 눈앞에서 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방송으로 경기를 본 적이야 있었지만 사각형 화면에는 하얗고 길쭉한 손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전까지 무심한 표정으로 서 있던 이명은 바둑판 앞에 앉는 순간에 다른 사람으로 변했다. 눈빛도 자세도 그대로인데 그를 둘러싼 공기가 달라졌다. 평소에 순진한 소년 같던 남자는 프로 기사가 아닐 리 없는 아우라를 내뿜고 있었다.
‘명이 멋있다…….’
저런 아이돌이라면 팬클럽이 있는 것도 당연하지 않나. 한선호는 비록 경기 내용을 거의 이해할 수 없었지만 홀딱 빠져들어 보았다.
‘솔직히 저 형은 바둑 스타일이 좀 뭐랄까……. 잔인해요. 폭력적이고. 그렇지 않아요?’
이명을 18년째 알고 지내는 조승빈이 부러웠다. 꼬마였던 시절부터 이명과 친했던 것도, 같은 세계를 공유하는 동료란 것도, 그의 시시콜콜한 입맛이나 버릇을 속속들이 아는 것도, 이명이 편하게 대하는 대상이란 것도 전부 샘이 났다.
그러나 이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고서 위기감은 정점에 올랐다.
‘형, 다음 주에 양양 간다며? 몇 박이야?’
‘2박 3일.’
‘누구누구 가?’
‘사범님이랑 둘이 가는데.’
며칠 동안 지방에 간다는 것도 충격적인데, 이명이 한선호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과 단둘이 며칠간 지낸다고 생각하니 피가 마르는 기분이었다.
기원에서 나왔을 때 이명은 컨디션이 몹시 나빠 보였다. 피곤한지 자꾸 벽에 기대려고 했으며-늘 그렇기는 하지만-눈치를 심하게 보았고 우물거리듯이 말했다. 전날에도 무리하지 않았던가. 이명에게 한마디 하려던 한선호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조승빈의 말투에서 짐작하건대 ‘교류회’라는 것은 정기적이고도 공개적이며 사제지간이 함께 가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은 행사 같았다. 게다가 이 일은 그들이 재회하기 전에, 그러니까 한선호와 이명이 아무 접점도 없었던 시절에 계획되었다. 그 뼈아픈 사실이 한선호로 하여금 물러서게 했다.
아무리 그렇더라도,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었다.
‘명이야, 다음 주에 양양 간다고 했지?’
‘응.’
‘언제 가?’
‘수요일에 갔다가 금요일에 와…….’
이명은 피곤했는지 몹시 의기소침한 태도로 운전했다.
‘임주혁 사범님하고 가는 거지?’
‘응.’
‘혹시 같은 방 써?’
‘아니. 사범님 예민해서 방 혼자 쓰셔.’
‘…….’
그럼 예민하지 않다면, 다 큰 남자 둘이서 한 방을 쓰겠다는 건가. 수요일 몇 시에 갔다가 금요일 몇 시에 온다는 건가. 바둑만 두겠다는 건가, 종일 붙어 있겠다는 건가. 묻고 싶은 게 산더미 같았지만 한선호는 입을 다물었다. 가뜩이나 이명이 자신을 극도로 조심스러워하는 상황에서 부담을 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명의 집에 도착했을 때, 한선호는 그를 따라 올라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꾹 눌러 참았다. 이명은 새파랗게 질린 얼굴로 달콤한 키스를 선사했고, 그들은 헤어졌다.
그때는 그거면 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하루가 지난 오늘까지 한선호는 조 원장이나 조승빈 3단, 임주혁 사범, 기원에 상주하는 팬클럽 회원들, 그리고 아직 만난 적이 없는 이명의 지인들을 문득문득 떠올렸다. 이명이 아무 경계 없이–가령 누가 어깨나 등에 손을 대도 아무런 문제점도 느끼지 못한 채-그들과 어울리는 게 발톱에 박힌 가시처럼 신경 쓰였다. 친한 사람들과 있을 땐 스스럼없이 말하고, 긴장하지 않고, 눈치 보지 않고, 깜짝깜짝 놀라지도 않았다.
곱씹을수록 이명은 자신과 함께 있을 때만 굳는 것 같았다. 자신에게는 종일 메시지 한 통 보내지 않는 이명이 그들에게 다정하게 연락하는 상상을 하니 억장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억울해…….’
한선호는 고개를 빠르게 저었다. 부정적인 생각을 몰아내고 냉정하게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이명이 교류회차 며칠 여행 가는 것도, 이미 친밀한 관계인 사람들이 잔뜩 있는 것도 바꿀 수 없는 일이며 바꾸려 해서도 안 된다. 일의 일환인 행사인 데다 지인들은 죄다 자신을 만나기도 전에 알던 사람들이 아닌가. 특히 이명의 은사는 그를 지금의 자리에 있게 해 준 은인이니 질투가 아닌 존경의 대상이어야 한다. 게다가…….
‘괜찮아. 명이는 내 거니까.’
신경 쓰이는 부분이 조금 있을 뿐이지 한선호는 불안하지 않았다. 그의 확신은 금속처럼 단단했고 아주 작은 틈도 없었다.
* * *
“선호 씨, 법무팀이랑 얘기한 거 어떻게 됐어요?”
“13조 b항과 보증 조항 재컨펌 받고 방금 차장님 메일로 보내 드렸습니다. 리스크 관련 전달 사항과 운송비 체크 리스트도 함께 첨부했으니 검토 부탁드립니다.”
“오케이, 확인해 볼게요. MOU 건은?”
“계약서 관련해서 법무팀 답신 기다리고 있습니다.”
“좋아요. 어우 정신없다……. 연말에 일복 터지고 좋네.”
미디콤 계약 건 확정과 해외대학 산학협력 양해각서 체결이란 겹경사를 맞은 해외영업1팀은 인력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본래 해외 계약은 현지 지부에 넘어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미디콤에서 독일 법인이 아닌 본사 직계약을 요구해서 수출전시회를 진행했던 해외영업1팀의 손발이 바빠졌다. 법무팀 과장 한 명이 11층에 상주하며 모든 회의에 참관하고 있었고 인턴 두 명이 지원 업무로 투입되어 태스크 포스 같은 느낌이 날 정도였다.
그 기동성의 중심에는 한선호가 있었다. 매일 답변해야 하는 메일 수는 스무 통을 웃돌았고 하루에도 몇 번씩 엘리베이터에 올라타 부서 회의에 불려 다니며 팀장과 차장의 발이 되어야 했다.
‘그게 다 인사 고과지. HR에서 요즘 해외영업1팀만 본다는 소문이 있어.’
10시, 11시가 넘어서야 녹초가 되어 퇴근하는 그들을 다른 부서에서는 부러운 눈길로 보았다. 반도체 물량 결정권을 가진 판매총괄팀장이 자잘한 실무까지 꼬박꼬박 포워딩받는 업무였다. 한선호는 이 과업무의 끝에 어떤 보상이 올지 선배들의 말을 들어서 아는 데다 업무 자체에 보람을 느끼기도 했지만, 한편으론 열 시간쯤 침대에 파묻혀 있을 수 있는 늦잠이 그리웠다. 여유로운 아침 수영과 일찍 퇴근해서 친구들과 함께하는 술자리도 그리웠다. 주말에 게임을 하거나 야구장에 가던 나날도 그리웠다. 하지만 무엇보다 하고 싶은 것은 따로 있었다.
한선호는 아무 알림도 오지 않은 핸드폰을 괜히 만지작거리다, 어떤 대화 창을 열었다.
[나: 명이야] 6일 전
[13번 애인님: 왜?] 4일 전
[나: 지금 일어났어? (이모티콘)] 4일 전
[나: 출발할게] 3일 전
[나: 명이야 나 집에 잘 들어왔어. 잘 자] 이틀 전
[나: 점심 맛있게 먹어^^] 어제
[13번 애인님: 너도.] 19:43
서른두 시간이 지나고 답장이 왔는데 이걸 대화라고 할 수 있을까? 그런데도 한선호의 입가에는 옅은 미소가 머물렀다. 이명이 메시지 확인을 잘 안 한다는 걸 알지만, 정말 바쁠 때는 어쩔 수 없이 메시지를 보내 놓고 그의 답장을 기대하게 됐다.
한선호는 탁상 달력을 확인하고 다시 핸드폰 화면을 보았다. 이명이 교류회차 서울을 떠나는 날이 바로 내일이었다. 며칠 동안 멀리 떨어진다고 생각하니 잠깐이라도 얼굴을 보고 싶었지만, 남은 업무를 모두 끝내고서 그의 집에 찾아가면 자정이 넘을 것이다.
‘명이 보고 싶다.’
한선호는 자리에서 기지개를 켠 뒤 메일과 메신저를 마지막으로 확인했다. 그리고 안쪽에 커피 자국이 말라붙은 머그잔과 핸드폰을 들고 슬그머니 일어났다.
탕비실에 도착하자마자 최근 통화 목록을 열었다. 메시지는 답신율이 20%에 수렴하지만 전화는 그래도 반반이다. 안 받을 때도 있지만, 받은 적도 그만큼 있었던 것이다.
뚜……. 뚜……. 뚜…….
한동안 긴장되는 신호음이 울렸지만 통화는 가슴을 졸인 보람도 없이 무심하게 끊어졌다. 한선호는 통화가 종료되었다는 표시를 가만히 보다가 전화를 다시 걸었다.
뚜……. 뚜……. 뚜……. 뚜……. 뚜…….
이번에도 글렀나 보다 싶었던 순간에 신호음이 끊어지고 가쁜 숨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귓속으로 흘러들었다.
―하아, 하아, 여보세요.
일자로 다물려 있던 입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명이야, 나야.”
―……근데, 왜?
퉁명스러운 말씨에 속지 않았다. 부끄러운 듯 속삭이는 음성에서는 전화가 와 기쁘다는 티가 꿀처럼 뚝뚝 떨어졌으니까. 한선호는 그런 이명에게 회사 앞까지 자신을 보러 오라고 조를 참이었다. 그러려고 바쁜 중에 짬을 내서 나와 있었다. 그는 할 말을 조심스럽게 골랐다.
“내일 교류회 가지? 언제 출발해?”
―새벽 4시.
“4시?”
상상도 못 했던 대답이었다. 양양까지 차로 두 시간이면 충분할 텐데, 왜 그렇게 일찍 출발하는 걸까. 한선호는 10시 반을 가리키는 벽시계를 힐끔 올려다보았다.
“내일 일찍 일어나려면 얼른 자야겠네.”
―알아. 안 그래도 자려고 그랬어.
“그래?”
아쉬움이 물밀 듯 몰려왔지만 지금은 그의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입에서 저절로 한숨이 났다. 한선호는 혼잣말처럼 낮게 읊조렸다.
“보고 싶을 거야.”
―……무슨. 3일 지나면 다시 올 텐데.
“그동안 못 보잖아.”
이명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주말에 만나. 끊을게.
통화 종료
03:31
한선호는 커피 메이커 필터에 가루를 퍼 넣으며 생각에 잠겼다. 이명이 임주혁 사범의 차량 조수석에 앉아 있는 그림이 떠올랐지만 의식적으로 끊어 냈다. 어차피 내일까지는 일찍 퇴근할 가망이 없었다. 별일 없다면 수요일에 미디콤 계약 건에 도장이 찍힐 테니, 금요일에는 정시 퇴근도 가능하겠지.
‘이번 주말엔 데이트할 수 있겠다.’
한선호는 물이 끓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커피를 잔 가득 담고 자리로 돌아갔다.
“선호 씨! 자리에 없었구나? 빨리 메신저 확인해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자리 비운 지 10분도 안 됐는데……. 투덜거릴 여유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한선호는 머그 컵을 책상에 놓고, 자리에 앉으면서 메신저를 열었다.
* * *
[나: 잘 도착했어?] 어제
[나: 강원도 공기는 어때~] 어제
[나: (이모티콘)] 어제
[나: 명이야] 12:04
이명과 연락이 끊겼다. 핸드폰은 꺼져 있고 메시지는 읽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었다. 한선호는 몇 달 동안 매달린 계약이 공식적으로 문서화된 것보다 강원도에 일하러 간 남자 친구가 마흔다섯 시간 동안 연락 두절이란 사실이 훨씬 신경 쓰였다.
“선호 씨! 오늘 저녁에 인턴들이랑 한잔 어때요? 회식까진 아니고 간단하게 뒤풀이 정도?”
“대리님, 저는 걸리는 일이 좀 있어서 들어가 봐야 할 것 같아요.”
“왜? 집에 무슨 일 있어요?”
“그건 아니지만……. 애인한테 가 보려고요.”
“맞네, 최근엔 데이트도 못 했겠네. 그러게. 오늘 일찍 들어가고 내일은 반차라도 써요.”
“감사합니다.”
한선호는 종일 핸드폰을 들여다보며 퇴근만 기다리고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이명이 단순히 핸드폰을 안 보고 있겠지, 너무 바빠서 답장할 시간이 없었겠지, 애써 변호하며 걱정하지 않으려 했다. 그런데 교류회 이틀째인 오늘 점심에 전화해 보니 핸드폰 전원이 꺼져 있었던 것이다.
보통은 여행 중 일과가 아무리 바쁘더라도 숙소에서 핸드폰을 충전하지 않나. 시간이 지날수록 마음속에서 불안감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연락이 끊긴 지 30시간이 지나면서는 실종, 사고, 납치 같은 불길한 단어들이 머릿속을 침투했으며, 이명이 의자에 묶여 있는 그림 같은 게 자꾸만 떠올랐다.
그러다 퇴근 시간이 되었다. 한선호는 해야 할 일을 모두 마친 데다 퇴근 준비를 진작 끝냈지만 야근하는 이들을 생각해서 30분 정도 참았다. 그러는 동안 각종 포털에 강원도에서 발생한 행방불명, 유괴, 살인, 강도, 고속도로 자동차 사고 기록 등을 뒤졌지만 관련이 있어 보이는 사건은 없었다. 또한 그는 이명이 참석한다는 교류회를 검색했고 임주혁 9단의 블로그를 찾아냈다. 그러나 교류회는 두 달 전 기사에서 스치듯 언급된 게 다였고 임 사범의 블로그는 마지막 업데이트 시기가 반년 전인 데다가 바둑 칼럼만 잔뜩 있었다.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팀장님.”
“선호 씨, 고생 많았어! 곧 회식 한번 거하게 하지.”
“예. 수고하십시오.”
팀에서 가장 먼저 퇴근하는 날이 올 줄이야. 평소였다면 몇 시간쯤 더 남아서 다른 사람들을 지원했겠지만, 오늘만은 걱정 때문에 가슴이 옥죄여서 태평하게 앉아 있을 수 없었다.
그는 주차장으로 향하며 온갖 부정적인 생각을 했고, 또 어떻게든 이명을 붙잡을걸, 하고 후회했다. 만일 교류회 전날 그의 집으로 찾아갔다면, 떠나지 말라고 설득할 수 있었을까. 그런 말을 꺼낼 수나 있었을까.
차마 말리지 못했더라도 스케줄 정도는 알려 달라고 할 수 있었겠지. 어느 호텔에 묵는지, 어떤 행사에 참가하는지, 종일 무슨 일을 하는지……. 하다못해 비상 연락처라도 알았다면 이렇게 답답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들의 관계가 핸드폰이 꺼지면 연락이 끊어지는 가느다란 실처럼 느껴져서 한선호는 속이 쓰렸다.
평소에도 혼잡한 올림픽대로는 퇴근하는 차량으로 가득했다. 일주일이 넘도록 매일 야근하다가 퇴근 시간에 맞춰 집에 가려니 적응이 안 됐다. 마음 같아서는 이명이 있을 양양으로 당장 달려가고 싶은데 차는 막히고, 답답할 뿐이었다.
우선 이명의 자취 집을 찾아갔다. 창문을 통해 불이 꺼져 있는 걸 확인하고서 경비원에게 그가 나가는 걸 보았느냐고 물어보았다.
“501호는 집에 없을 때가 워낙 많아서 잘 모르겠네.”
요는 그게 다였고 나머지는 모친이 자주 오는데 연말마다 선물도 챙겨 주고 좋은 분이라는 둥 한선호에게는 도움이 안 되는 소리뿐이었다. 한선호는 감사하다고 인사하고서 주머니 속에서 차 키를 만지작거렸다.
가 볼 만한 곳이 한 군데 더 있었다. 여기서도 이명의 행방을 알 수 없다면 어떻게 해야 하나 눈앞이 깜깜했다. 한선호는 경찰서로 갈지 양양에 가 보는 게 나을지 고민하다 일단은 모두 보류했다. 마침 회사 일이 한창 바쁜 시기는 지나가서 내일 하루 정도는 뺄 수 있다는 게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곧 한솔 아파트 단지 안으로 차량을 몰았다. 아는 정보라곤 이명의 가족이 102동에 산다는 것뿐이었다.
한선호는 차를 길가에 세워 두고 경비실을 찾았다. 사무실에는 파란 유니폼을 입은 남자 한 명이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그는 일부러 발소리를 내며 탁자로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어이쿠, 깜짝이야.”
남자는 민망한 표정을 지으며 소매로 입가를 슥 닦았다. 그가 앉은 채로 한선호를 올려다보았다.
“102동에 이명이란 사람 찾아왔는데요. 제 고등학교 친구거든요.”
“인터폰에 호출하세요.”
“저……. 호수를 모릅니다. 바둑 두는 기사이고 뉴스에도 나오는 유명한 사람인데, 혹시 아십니까?”
“아, 바둑! 그 집이라면 알지. 근데 호수가 기억이 안 나네. 가만있자, 102동……. 잠깐만 기다리세요.”
경비원은 한선호가 대답할 새도 없이 양철 문을 밀며 바깥으로 나갔다.
호수를 알아낸다고 해도 곤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늦은 시간에 무턱대고 남의 집 초인종을 누르기도 난감하니까. 하지만 만일 이명에게 나쁜 일이 생겼다면, 약간의 민망함이나 부끄러움은 고민거리조차 못 된다. 한선호는 이명 부모의 낯을 보며 명이가 연락이 안 되어서 걱정되어 왔노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할 자신이 있었다.
기다리는 사이 벽에 붙어 있는 여러 명단을 샅샅이 살폈지만 찾는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경비원이 나간 지 5분 정도가 지났을 때, 안절부절못하던 한선호의 눈에 사무실 한구석에 모아 둔 택배 상자 더미가 눈에 띄었다. 그는 그쪽으로 다가가 상자를 하나씩 살피기 시작했다.
수령자가 102동 주민인 소포와 우편만 추려 내고 그중 이 씨 성을 가진 사람들의 이름을 자세히 보았다. 1203호 이동명 씨가 이명의 아버지일 수도 있고 901호 이재혁 씨가 형이나 남동생일 수도 있으니까.
상자를 하나씩 체크하던 한선호의 손이 가장 커다란 상자에 닿았을 때 문이 벌컥 열렸다. 그는 곧바로 고개를 들었지만 젊은 여자가 손에 입김을 호호 불며 들어섰을 뿐이다. 한선호는 시선을 다시 택배 상자로 돌렸다.
102동 702호 이정
그러고는 운송장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정’이란 사람과 ‘이명’이란 사람이 같은 동에 살면서 혈연관계가 아닐 확률이 몇이나 될까? 쪼그려 앉아 있던 한선호는 약간 흥분한 상태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제야 익숙하지 않은 시선이 느껴졌다. 조금 전에 경비실에 들어왔던 여자가 경계하는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택배 도둑으로 봤으려나, 변태로 봤으려나. 평생에 한 번도 받아 본 적 없던 유의 오해라 당혹스러웠다. 여자가 차가운 표정으로 다가왔다.
“저기요.”
“네?”
“그거 제 택배인데요.”
조금 당황한 채 여자의 얼굴을 본 한선호의 입이 천천히 벌어졌다. 그녀의 모습이 그가 아는 누군가와 놀랍도록 흡사했기 때문이다. 여자는 마른 체형에 장신이었다. 결 좋은 연갈색 머리카락이 핏기 없는 하얀 얼굴 주위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다만 생소한 것은 눈매였는데, 그녀가 이명보다 크고 감정 표현이 풍부해 보이는 눈을 갖고 있었다.
“그거 제 택배라니까요. 주세요.”
이명과 혈연관계가 아닐 리 없는 여자가 눈에 힘을 주며 손을 내밀었다. 그들은 말투마저 어딘가 비슷했다. 이정 쪽이 목소리가 훨씬 크기는 했지만.
한선호는 말없이 그녀에게 상자를 내밀었는데, 그때 마침 문이 열리며 경비원 두 명이 들어왔다.
“아까 바둑 기사 있는 집 호수 물어보셨죠? 그 동은 이분 소관이에요.”
“응? 저 아가씨가 그 집 사는데, 뭘 나한테 물어봐.”
이정의 고개가 휙 돌아갔다. 그녀가 눈을 크게 뜬 채 경비원과 한선호를 번갈아 가며 보았다.
“일단 나가시죠. 설명해 드릴게요.”
한선호는 경비원들에게 꾸벅 인사한 뒤, 커다란 택배 상자를 든 채 경비실을 빠져나왔다.
“저희 오빠는 왜 찾으시는데요?”
바깥에 나오자마자 이정이 한선호의 품에서 상자를 빼앗아 들었다.
“명이 고등학교 친굽니다.”
한선호는 지갑에서 제 명함을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 이정은 여전히 수상함을 떨치지 못한 시선으로 명함을 받았다.
“명이가 그저께부터 연락이 안 되는데. 교류회로 양양에 갔다는 건 알고 있지만, 혹시 무슨 일이 생겼나 걱정도 되고…….”
한선호는 말을 끊고서 소리 없는 한숨을 내보냈다. 이명과 닮은 사람을 앞에 두니 긴장이 풀려 쓸데없는 말까지 하게 될 것 같아서였다.
“가족분들은 뭘 아실까 해서요.”
이정은 오랫동안 명함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어느새 누그러진 표정은 처음처럼 날카롭지 않았다.
“명이 오빠 친구시라고요?”
그녀가 고개를 들어 한선호의 얼굴을 빤히 보았다. 당신이 믿을 만한 사람인지 살피겠다는 의도를 숨길 의지가 조금도 없어 보였다.
“네.”
“그럼 연락 안 되는 거 익숙하실 것 같은데.”
“그렇긴 하지만, 이렇게 아예 끊긴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이정이 눈을 아래로 내리깔며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오빠 잘 있어요.”
그 말을 들은 순간에 왜 다리가 풀렸는지 모르겠다. 한선호는 건물 벽면에 등을 기대며 고개를 꺾어 하늘을 보았다. 온종일 애태웠던 보상인지 가슴에 안도감이 물감처럼 진하게 번졌다.
“걱정하셨나 봐요.”
“하하하, 네. 양양이라고 해 봤자 두 시간 거린데 연락이 아예 안 되니까 이상한 생각도 들고…….”
“두…… 시간이요?”
한선호는 이정의 말투에서 무언가 이상하단 것을 알아채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녀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하더니 손이 올라와 입가를 가렸다. 그녀는 숨죽여 웃고 있었다.
“그…… 강원도 양양이 아니고, 중국 양양시예요. 아마 본토 발음으론 샹양일 거예요.”
“……네?”
“오빠, 중국 갔어요.”
한선호는 머리를 얻어맞은 것 같은 충격에 대답하지 못했다. 그를 한동안 바라보던 이정이 웃음기가 가신 표정으로 이어 말했다.
“원래 1년에 한두 번? 그쯤 가요. 그쪽에서 올 때도 있고요. 오빠 은사님하고 시립대학 교수님하고 친분이 있거든요.”
“……아.”
“애제자 중에서도 명이 오빠가 제일 잘하니까 꼭 데려가려고 하세요. 오빤 원체 거절을 못 하고요.”
이정이 혼잣말처럼 빠르게 말하는 동안 한선호는 듣고만 있었다.
“핸드폰 꺼져 있는 건 사범님이랑 있어서 그런 거예요. 워낙 아날로그식이라서요. 우리 초등학교 때도 집중력 흩어진다고, 도장에 아예 전자 기기를 못 들고 들어오게 하셨어요.”
“그래도 숙소에선 쓸 수 있잖아요.”
“그렇죠. 근데 오빠 성격이…… 꺼져 있으면 그런가 보다 하고 신경을 안 써요. 답답하긴 하지만, 타고난 성격이 그런 걸 뭐 어쩌겠어요.”
이정이 핸드백을 뒤적거리더니 장지갑을 꺼냈다. 곧 그녀가 명함을 한 장 내밀었다.
“임 사범님 연락처예요. 혹시 오빠한테 하실 말씀 있으시면 여기 번호로 전화해서 바꿔 달라고 하세요. 저희도 필요하면 그렇게 해요.”
“……고맙습니다.”
한선호가 명함을 받자 이정이 고개를 꾸벅 숙였다.
“그럼 가 볼게요.”
“들어가세요.”
그녀가 등을 돌린 뒤에도 한선호는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는 내용의 반 이상이 한자인 명함을 보며 복잡한 심경에 휩싸였다.
‘무사하다니 다행이야.’
온종일 그로 하여금 쥐어 짜이는 기분을 느끼게 했던 걱정은 어느새 멀어져 있었다. 이명에게 나쁜 일이 일어날까 봐 얼마나 불안에 떨었던가. 그게 기우였다는 걸 알게 되자마자 간사하게도, 그 빈자리를 불쾌한 감정이 채우려 들었다.
이명은 마음먹으면 차를 타고 갈 수 있는 거리가 아닌, 한선호가 이름조차 들어 본 적 없는 해외 지역에 있었다. 그가 이 순간에도 임주혁 사범과 함께하리란 사실이 한선호를 괴롭혔다.
“아, 저기요!”
아파트 단지 쪽으로 걸어가던 이정이 큰 소리로 외쳤다. 한선호는 고개를 들고 그녀의 말을 기다렸다.
“죄송한데 혹시……. 고2 때, 그러니까 봄쯤에 운동장에서 축구하신 적 있어요?”
“매일 했죠.”
“아, 그렇구나. 감사합니다! 들어가세요.”
“……네.”
이명의 동생이 이상한 것을 묻는 바람에 상념은 흩어졌다.
온종일 이명에 관해 생각했던 한선호는 이 순간에야말로 그의 목소리가 간절하게 듣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들고 있던 명함을 주머니 속에 넣었다. 손아귀에 힘을 준 탓에 빳빳한 종이가 구겨져 있었다.
* * *
한선호는 이정을 만난 뒤 샹양시의 공항과 항공편을 파악했다. 지역 공항에서 인천까지 직항은 하루에 한 대뿐이었는데 금요일 도착 예정 시간이 오후 2시였다. 그 비행기가 내일 바람을 타고 이명을 싣고 올 것이다.
한선호를 온갖 번뇌 속으로 몰아넣었던 교류회도 다음 날이면 끝이었다. 고작 2박 3일 동안 연락이 끊겼을 뿐인데 이렇게까지 힘들어하는 게 정상은 아니다 싶어도 그것이 현실이었다. 한선호는 그날도 이명을 그리워하고 그가 곁에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상상하며 잠들었다.
다음 날, 한선호는 출근하자마자 반차를 신청했고 30분도 지나지 않아 결재받았다. 신 팀장은 그를 불러서 푹 쉬라고 격려해 주었고, 다른 팀원들도 지나가면서 고생했다며 어깨를 두드렸다.
도무지 집중이 안 돼서 어영부영 앉아 있던 그는 포털에 이명의 이름을 검색하며 시간을 보냈다.
[단독] 이명 九단 샹양시립대학 방문, 패배의 쓰라린 기억 떨칠 수 있을까?
지난 ‘기화생명배 세계 바둑 선수권 대회’ 결승전에서 태도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이명 9단(27)이 어제인 10일(목) 중국의 샹양시립대학을 방문했다.
◇샹양시립대학 캠퍼스. 사진 제공=샹양시립대학
이명은 어제 오전에 바둑학과 학생들을 만나 질의응답을 받았다. 이후 현지 시간으로 11:00(한국 시간 12:00)에 허마오핑 9단(49)과 친선 대결을 벌인 뒤 바둑 애호가로 알려진 총장 장샤오징(65)과 오찬을 함께했다. 이명과 허마오핑의 대결은 샹양시립대학 홈페이지(링크)에 공개될 예정이다.
◇2012년 세계기왕전 직후 대국장을 떠나는 허마오핑 9단의 모습. 사진 제공=중국 기원
허마오핑 9단은 2012년 바둑계에서 은퇴한 뒤 샹양시립대학에서 후학 양성에 집중하고 있다. 세계 랭킹 10위권 안에 들었던 전적이 있으며 수성 위주의 기풍으로 ‘수문장’이란 별명이 있다. 과연 이명 9단이 ‘기화생명배’ 결승의 쓴맛을 극복하고 허마오핑을 상대로 폭우를 쏟아 냈을지 바둑 팬들의 관심이 집중될 것으로 보인다.
오늘 오전에 등록된 기사에는 아무도 알려 주지 않은 애인의 행보가 자세히 나와 있었다. 비록 그의 사진 한 장 수록되어 있지 않았지만 한선호에게는 이 정보조차 소중했다. 게다가 친선 경기 영상을 올려 준다니, 적어도 손목까지는 볼 수 있으리라.
[댓글 115개]
sjw***: 져놓고 어딜 놀러다니냐~~ 자숙이나 해라~!!!
jkl***: 이명9단 · 응원합니다고맙습니다^,^
ask***: 대한민국을 빛내시는 이명님 진심으로 응원합니다♥
woo***: 두유노킹명?
ttk***: 재수없어서 비호감
qwe***: 이번엔 국가망신시키지 말길 ㅋ
han***: 오 사장 몰래 봐야지 ㄱㅅㄱㅅ
댓글 창의 반쯤은 조롱조거나 악플이었다. 한선호는 포털에 로그인해서 부정적인 의견마다 비공감 버튼을 꾹꾹 눌렀다.
시간은 금세 지나갔다. 점심시간이 되어 사람들이 일어날 때 한선호는 외투를 갖춰 입고 함께 일어났다. 다만 무리 지어 식사하러 가는 사람들과 달리 그는 상사들에게 인사하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정오의 퇴근길은 설렜지만 알 수 없는 불안감이 끼어 있었다. 한선호는 이명의 본가 앞에 차를 세우면서도, 잠깐 나가서 샌드위치와 커피를 포장해 차로 돌아오면서도, 정체 모를 불안감에 시달렸다.
차에 타서 확인해 보니 샹양시립대학 홈페이지에 기다리던 영상이 올라와 있었다. 페이지 번역을 하지 않아도 ‘李明’이란 글자 정도는 알아볼 수 있었다. ‘밝을 명’ 자가 그와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며 로딩 시간을 기다렸다.
곧 영상이 시작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귀족처럼 길쭉한 손가락이 모서리에서 나타나 나무판에 흑돌을 내려놓고 사라졌다. 작은 화면의 프레임 밖에 그가 있었다. 한선호는 비밀스러운 취미를 즐기는 사람처럼 숨을 죽이며, 조심스러운 손길로 핸드폰을 거치대에 올렸다.
알아들을 수 없는 외국어 해설을 뒤로한 채 이명의 손을 하염없이 보았다. 한 수, 두 수, 세 수, 바둑판이 희고 검은 돌로 차근차근 채워졌다. 그동안 돌을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운 새하얀 손가락이 나와 돌을 놓고 돌아가기를 반복했다.
손을 뻗자 뭉툭한 손끝이 평면에 갇힌 손등에 잠시 닿았다. 한선호는 내심 놀라며 화면으로부터 손을 뗐다. 이명을 걱정하고 기다리다가 정신이 어떻게 된 건가. 손의 주인은 그가 있는 곳으로부터 1,000km는 족히 떨어진 곳에 있는데. 아니, 이건 어제 자 영상이니 지금은 어디서 뭘 하는지 알 수조차 없지 않은가
“후…….”
이명은 왜 3일 동안 한 번 연락하지 않았을까.
때늦은 의문이 확신의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좋아하는 사람이 곁에 없으면 목소리라도 듣고 싶지 않을까. 나는 이렇게 보고 싶은데, 너는 내가 보고 싶지 않은 걸까.
그것은 단순하지만 명료한 의심이었다. 그리고 한선호가 아무리 변호하려고 애써도 시원하게 지워 낼 수 없는 의문이었다.
이제 바둑판에는 흑돌과 백돌이 어지럽게 놓여 있었다. 한선호는 바둑을 잘 모른다. 세상이 바둑처럼 뚜렷하다면 그도 바둑을 기꺼이 배울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짙은 안개에 뒤덮인 산처럼 불확실하고 모호하지 않은가. 한선호가 흑돌로 이명의 주변을 에워싼다고 해서 그의 마음이란 백돌을 꺼내 쥘 수 없는 것처럼.
이명이 판에 바둑돌을 놓을 때마다 섭섭함이 쌓여 갔다. 바둑판에 얌전히 놓여 있는 돌과는 비교가 되지 않는 섭섭함이었다. 그것은 이명과 멀어진 거리만큼, 그리고 그의 침묵의 밀도만큼 무거웠다. 한선호는 경기 내용에 관해 아무것도 모른 채 영상을 끝까지 보았다.
영상의 마지막 프레임에서 집수가 집계되고서야 한선호는 이명이 이겼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축하해, 명이야.’
방송이 끊긴 뒤에도 그는 무표정으로 검은 화면을 한참 동안 바라보았다.
기다림은 계속되었다. 공항 도착 예정 시간이 2시쯤이고 곧바로 모친의 집으로 왔다면 이명은 진작 도착했어야 한다. 그런데 예상 시간인 3시 반이 훌쩍 지나고서도 아파트 단지는 조용하기만 했다. 그렇다고 해서 차량 시동을 끄고 운전석에 앉아 잠복근무하듯 몇 시간째 아파트 입구만 주시했던 한선호가 그를 놓쳤을 리도 없었다.
‘생각을 잘못했나.’
이명이 당연히 자취 집이 아닌 본가로 오리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는 두 가지였는데, 첫째는 ‘기화생명배’ 결승 다음 날도 이곳으로 왔기 때문이다. 둘째는 며칠 동안 가족을 못 봤으니 저녁을 함께 먹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예상이었다.
‘어차피 여기로 온다는 것도 추측이지.’
몇 시간 동안 미동조차 없었던 입매에 자조적인 실소가 번졌다. 자신이 이명에 관해 제대로 아는 게 하나라도 있던가. 그가 무슨 커피를 좋아하는지, 중요한 경기에서 진 후에는 무엇을 하는지, 바둑은 어떤 식으로 두는지, 전부 다 남이 알려 주었다.
혹시나 해서 전화를 걸었지만 이번에도 “전화기의 전원이 꺼져 있사오니……”로 시작하는 지겨운 음성 메시지가 흘러나왔다. 그 목소리는 이번에도 한선호의 자신감을 흩어 버렸다.
어쩌면 비행기가 연착되지는 않았을까. 편명을 조회해 봤지만 인천 공항에 정상적으로 착륙했다는 것만이 확인됐다.
변수는 무궁무진했다. 공항에 도착한 뒤 집에 오는 대신 임 사범과 뒤풀이를 하러 갔을 수도 있고, 임 사범의 집에 놀러 갔을 수도 있고, 임 사범과 저녁을 먹으러 갔을 수도 있고, 임 사범과…….
‘그만하자.’
한선호는 차량의 전자시계가 19:00로 변한 순간에 시동을 걸었다. 마지막으로 놀이터와 단지 입구를 살펴보았지만 기대도 하지 않았다. 잿빛 도로를 비추는 헤드라이트의 색이 그날따라 침울해 보였다.
집으로 돌아가기 전, 한선호는 이명이 자취하는 아파트에 들렀다. 교류회에서 돌아온 뒤 집에 갔을 수도 있으니까.
“501호 오늘도 집에 없어요. 거봐요, 잘 안 들어온다니까요.”
한선호가 초소 앞에 차를 정차하자마자 지난번에 안면을 튼 경비원이 말했다. 한선호는 불이 꺼진 5층 라인의 창을 눈으로 확인하고서 차를 돌렸다.
어둑한 거리는 서울 시내답지 않게 뻥뻥 뚫려 있었다. 그러나 정지 신호에 한 번도 안 걸리고 집으로 달리는 동안에도 기분은 점점 가라앉았다.
동창회에서 이명을 봤을 땐 눈을 의심했다. 그가 자신을 힐끔힐끔 훔쳐보며 모든 대화를 듣고 있음을 눈치채고서는 오랫동안 바라온 소망이 이루어졌다고 생각했다. 이명이 홀로 나갈 때 따라 나가서 그를 손에 넣었다. 그러나 그것은 착각이었다.
인생에서 가장 어려웠던 일을 떠올릴 때 사람들은 으레 대입이나 취업을 언급하고 군필자라면 혹한기와 유격 훈련을 꼽기도 한다. 한선호에게는 고등학교 시절의 짝사랑이 그것들을 모두 합친 것만큼 힘들었다. 그리고 현재의 연애도 만만치 않게 어려웠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늘 알 것 같다고 여긴 세상이 이명과 관련되기만 하면 수수께끼로 변해 버리는 건. 한선호는 근 3일 동안 미궁에 빠진 기분이었다.
오전 근무만 하고 오후에는 차에 앉아 있기만 했는데도 몹시 피곤했다. 지하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내렸다. 몸이 찌뿌둥해 팔을 크게 돌려 보았지만 조금도 개운하지 않았다. 한선호는 축 처진 걸음걸이로 끌려가듯이 걸었다.
지갑을 열고 카드 키를 빼냈다. 카드 키를 기계에 인식하자 삐 소리와 함께 유리문이 스르륵 열렸다. 그날따라 텅 빈 상자처럼 느껴지는 엘리베이터가 지하 1층에 도착해 한선호를 싣고 위로 올라갔다.
엘리베이터가 8층에 서고 문이 열릴 때까지만 해도 한선호는 아무 기대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엘리베이터 앞에 누가 서 있다는 사실에 더욱 놀랐다.
모르는 사람이겠거니 하고 지나가려던 그의 시선이 낯익은 운동화에 붙들렸다. 한선호는 하얀 러닝화를 정말이지 한참 동안, 질긴 표면이 뚫어지겠다 싶을 정도로 진득하게 바라보았다. 그러다 그의 시선이 발목을 감싼 양말과 청바지를 타고 올라가, 더플코트에 감긴 남자의 얼굴에서 멈추었다.
이명의 표정을 본 순간에는 어떤 변호도 변명도 필요하지 않았다. 잠시 흐릿해졌던 확신이 의심의 균열을 채우며 다시 콘크리트처럼 굳어졌을 뿐이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알 수 없으나 무언가를 골똘히 생각하고 있다는 건 분명했다. 눈동자가 열심히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불법 침입…… 같은 건 아니고. 밑에서 기다리는데 누가 들어가길래, 따라 들어왔어. 이 오피스텔, 보안에 문제가 있는 것 같아. 도둑이, 이렇게…… 막 들어올 수도 있는 거잖아.”
이상한 말을 주절주절 늘어놓더니 볼을 붉게 물들였다.
“야근…… 해서 힘들지?”
“…….”
“원래 주말에 만나기로 했지만……. 그런데……. 그게, 아, 이거 주려고 왔어.”
이명이 한선호의 가슴을 향해 쇼핑백을 당당하게 내밀었다. 빳빳한 종이 재질 위에서 붉은 붓글씨로 휘갈겨 쓴 한자 로고가 반질거렸다.
“너 피곤할 테니까, 이거만 주고 갈…….”
한선호는 그의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어깨를 끌어당겨 품에 가둬 버렸다.
이명의 목덜미에서는 좋은 냄새가 났다. 어떤 향수나 꽃향기와도 달랐다. 우유처럼 부드러우며 은은한 크림빛이 날 법한 향기였다.
조금 전까지 섭섭한 감정 때문에 우울하지 않았던가. 머리로는 기억하는데, 가슴 속에는 그러한 감정이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 * *
이명은 한선호와 금요일과 토요일에 종일 붙어 있었다. 그리고 그들은 토요일 밤에 처음으로 크게 싸웠다.
발단은 고작 옷장 깊숙이 박혀 있던 티셔츠 한 장이었다. 이명과 수건을 하체에 두른 한선호가 베란다에서 나란히 서서 담배를 피우고 난 뒤에 그 끔찍한 일이 일어났다.
“명이야, 옷장 열어 봐도 돼?”
“상관은 없지만, 너한테 맞는 거 없을 텐데.”
그가 옷장을 열 때만 해도 이명은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단지 섹스의 여운으로 노곤해서 빨리 잠들고 싶을 뿐이었다. 한선호가 옷장에서 무언가 꺼냈을 때 이명은 침대에 웅크린 채 반쯤 잠들어 있었다.
“이거 커 보이는데…….”
옆으로 누워 눈만 겨우 깜빡이던 이명은 한선호가 들고서 탁탁 펴기 시작한 티셔츠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안 돼!”
그는 잠이 확 깨 침대에서 튀어 나갔다. 무작정 팔을 뻗어 한선호의 손에서 티셔츠를 빼앗았다. 그가 볼 수 없도록 옷감을 공 모양으로 구기고, 어찌할 줄을 몰라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급한 대로 등 뒤에 숨겼다.
“하아, 하아……. 미안. 중요한…… 거라서.”
그 티셔츠는 아주 오랫동안 이명을 어떤 감정과 연결해 줬던 끈이자 잊을 만하면 꺼내 보았던 추억거리였다. 동시에 이명의 우울하고 비참했던 학창 시절을 상징하는 물건이나 다름없었다.
무엇보다 한선호에게는 죽어도 보일 수 없었다. 특히 그와 연애하고 있는 지금, 그런 짓은 약점을 활짝 드러내는 거나 다름없는 행위였다.
“중요한 거?”
한선호는 작게 내뱉더니 아주 오랫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 그러는 동안 놀란 얼굴은 차분해졌고, 차분해지다 못해 딱딱하게 굳어 갔다.
“누구 건데?”
그리 묻는 목소리는 평소처럼 다정한 구석이 조금도 없이 싸늘했다. 그가 뭘 오해했는지 대충 짐작한 이명은 덜컥 겁이 났지만 사실대로 말할 용기가 없었다.
“너한테 말해야 돼?”
“왜…… 못 말해 주는데?”
“말하기 싫으니까.”
한선호의 입매, 음성, 눈빛, 그리고 눈썹 한 올까지도 그가 기분이 안 좋다는 것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명은 손이 덜덜 떨려서 주먹을 꽉 쥐었고, 입술이 떨려서 이 사이로 억지로 밀어 넣었다. 머릿속은 온통 후회로 가득했다. 저걸 왜 진작 치우지 않았을까. 그러면 한선호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일도 없었을 텐데.
이명은 웃음기가 조금도 없는 한선호의 얼굴 때문에 겁에 질려 있었다. 꾹 다물린 입에서 너 같은 건 그만 만나겠다는 선언이 금방이라도 튀어나오기라도 할 것처럼. 사실은 언제 그런 일이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다만 오늘만은 아니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지금은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으니까.
한선호와 헤어진다는 생각을 잠깐 하는 것만으로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최악이다. 바보 멍청이, 이러니 언제 차여도 이상할 것이 없지. 이명은 한선호가 보기 전에 얼른 눈가를 훔치고 눈을 부릅떴다.
한선호는 이명을 등진 채 한동안 침대에 앉아 있었다. 심장을 덜컥 내려앉게 하는 긴 한숨을 내뱉고서 입고 왔던 청바지와 셔츠를 다시 걸쳤다. 이명은 그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뒤를 살짝 돌아보는 눈빛이 상처 입은 짐승처럼 보였다. 제깟 게 뭐라고, 그를 속상하게 만들었다.
이명은 현관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뒷모습을 끌어안고 싶었지만 동시에 그를 잡을 자격이 없다는 걸 알았다. 죄책감과 미안함, 좌절 섞인 절망감. 온갖 부정적인 감정이 뒤섞여 소용돌이치며 가슴을 콕콕 찔렀다.
현관에서 한선호는 손바닥을 이마에 얹고 한숨을 길게 내쉬었다.
“이명.”
“네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냐.”
“지금은 아무 얘기도 하지 않는 게 좋겠어. 잘 자.”
차가운 문이 그의 뒷모습을 가리며 쾅 닫힌 뒤에도 이명은 오랫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일어난 일을 복기하면 할수록 기가 막혔다. 그깟 티셔츠 한 장 때문에 한 침대 위에서 이틀간 붙어 있었던 사이가 틀어지다니.
갈등의 표면적 원인은 자신이 침묵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기저에는 바닥을 메울 수 없는 무저갱이 있었다. 이명의 열등함과 한선호의 우월함으로 이루어진 깊은 구덩이.
한선호는 이명을 오해하고 있었지만 그것은 근본적인 문제가 아니었다. 그들 관계에는 태생적인 한계가 있었다. 빛이 아무리 강해도 걷어 낼 수 없을 어둠. 그 어떤 뜨거운 온기로도 녹일 수 없는 냉기. 그것이 한선호와 이명의 간극이었다.
‘내가 잘못했어. 한 번만 용서해 줘.’
이명은 한선호의 앞에 무릎 꿇고 사과하는 자신을 떠올렸다. 과연 한 번으로 될까. 두 번, 세 번, 계속, 바보 같은 짓을 반복할 텐데. 나는 네게 사랑받을 자격이 조금도 없는 사람인데, 너는 언제쯤 진실을 알게 될까.
이명은 문득 모든 걸 포기하고 싶어졌지만, 아직 돌을 던지기엔 일렀다. 숨 쉬듯이 집을 빼앗기고 있다곤 해도 경기는 아직 초반이 아닌가.
다음 날 저녁,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으로 빼입고 집 앞에 찾아온 한선호는 그답지 않게 핼쑥한 모습이었다. 그가 잠을 잘 못 잔 것 같아서 이명은 걱정이 되었다.
“급하게 출장 일정이 잡혔어.”
“…….”
“사수가 오늘 부친상을 당해서 내가 대타로 가야 해.”
“언제부터 언제까지…….”
“일주일 내내. 토요일에 귀국할 거야.”
내내 고개를 숙이고 있던 한선호는 그제야 얼굴을 보여 주었다. 그와 잠깐 눈이 마주쳤을 뿐인데 이명의 가슴은 진동 버튼이라도 눌린 것처럼 요란하게 뛰기 시작했다. 이명의 눈을 한참 동안 마주하고 있던 한선호가 피식 웃으며 시선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넌 아쉬워하는 기색도 없는데, 왜 난 벌써 너를 용서했을까.”
“……난 아쉬워할 짓도, 용서받을 짓도 하지 않았어.”
한선호의 얼굴에 괴롭다는 듯한 미소가 번졌다. 이내 그의 표정이 마법처럼 풀어졌다.
“알아. 네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도, 거짓말 따위 못한다는 것도. 너는 그저 변명하지 않을 뿐이잖아. 그렇지?”
“…….”
“네가 과거에 누굴 만났든 상관 안 해. 지금은 내 거니까.”
낯간지러운 말도 한선호가 하니까 어쩐지 중요한 격언처럼 느껴졌다. 이명은 그의 눈을 들여다보며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월요일 오전에 독일로 출국한 한선호는 가끔 메시지와 사진을 보냈다. 그러나 워낙 일정이 바쁜 듯했고 시차까지 있다 보니 소통이 원활하지 않았다.
이명은 시시때때로 노트북 앞에 웅크려 앉았다. 한 번도 유럽에 가 본 적이 없는 그는 인터넷 창에 서울과 프랑크푸르트의 시차를 띄워 놓았지만 그들이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는지는 실감이 나지 않았다.
서로 다른 시각을 가리키는 두 나라의 시계 초침이 한 칸씩 넘어가는 걸 보고 있자니 한선호와 보냈던 시간이 뒤죽박죽 떠올랐다. 가장 인상에 깊이 박힌 모습은 마지막으로 보았던 핏기 가신 얼굴이었다. 그 모습은 죄책감과 불안감을 동시에 일으키며 이명을 괴롭혔다. 문득 그가 그리워졌지만 이명은 차라리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한선호가 없는 5일은 연애에 지쳐 있던 자신에게 생각을 정리할 수 있는 기회가 될 테니까.
이명은 온종일 집에서 한선호에 관해 생각했다. 그리고 그와 어울리지 않는 자신에 관해 생각했다. 또한, 그간 의도적으로 잊고 있었던 기화생명배 결승에 관해 생각했다.
‘패배 원인은 분석했니?’
‘……아니요.’
‘네가 초단 때도 안 하던 실수를 한 건 나도 충격이었다만, 아무리 멍청한 잘못에서도 배울 게 있어. 복기를 영영 하지 않을 생각은 아니겠지?’
샹양으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임 사범은 특유의 냉엄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동안 연애 때문에 들떠 있던 이명을 단번에 지상으로 끌어내리고서 그는 검은 안대로 눈을 덮었다.
‘네가 미래에도 같은 실수를 또 한다면 제법 실망스러울 거란다, 명아.’
임 사범의 차분한 목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그는 말수가 적은 남자였지만 입을 열었을 때는 틀린 말을 하는 일이 없었다. 이제까지 임 사범이 엄한 얼굴로 충고를 했을 때마다 이명은 수렁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고 그가 가리킨 손은 늘 출구를 가리켰다.
‘사범님 말이 맞아. 언제까지고 피할 수는 없어.’
이명은 바닥에 덩그러니 놓인 바둑판 앞에 털썩 앉았다. 항아리 모양 나무통의 뚜껑을 들어내고 차가운 돌이 손가락 사이에서 달그락거리게 몇 차례 휘저었다. 그는 한동안 바둑판 중앙을 노려보기만 했다. 흑석을 놓을 곳은 진작부터 정해져 있었지만 돌을 그 자리에 쉽사리 놓을 수가 없었다. 손이 그러기 싫다는 듯이 저항했기 때문이다.
이명은 몇 번이나 주저한 끝에 눈을 딱 감고 좌상 화점에 검은 돌을 놓았다. 다 잊은 줄 알았는데, 기석이 나무에 맞닿는 감촉이 손끝을 통해 전해지자마자 기화 호텔에서 첫수를 놓은 순간이 살아났다. 3주나 지났건만 모든 것이 소름 끼치게 생생했다. 이명은 대국장의 공기와 조명의 빛깔, 반대편에 앉은 홍랴오치 9단의 무덤덤한 눈빛과 입가의 비뚜름한 미소를 그대로 떠올릴 수 있었다.
그는 백돌을 꺼내 ‘태산’이 차지했던 화점에 그대로 놓았다. 기억하고 싶지 않은 패배를 그대로 답습해 가는 손가락이 불쾌한 감각으로 꿈틀거렸다. 이명은 마음을 다잡고서 그날 그리했듯 좌변으로 빠르게 눈을 돌렸다. 백은 깊이 파고드는 흑의 칼날을 몸을 비틀어 빠져나갔다. 뒤이어 흑이 들이치고 백이 되받는 구도가 계속되었다. 실리를 얻겠다는 목표를 숨기지 않으며 흑은 좌하귀를 집요하게 공격했다. 조금 엉뚱해 보이는 수로 일관하는 백은 집이 불타고 있는데도 모른 체하는 주인처럼 보였다.
이명은 백색 기석을 판에 올려놓으며 식은땀을 흘렸다. 그날도 이 수 때문에 위험하다는 생각이 직감적으로 스쳤었다. 그러나 한 수 때문에 모든 것이 연쇄적으로 무너져 내릴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그럴 위치나 시점이 아니라고 판단했으니까.
‘모르겠어. 여기서 다르게 두었더라면 결과가 달라졌을까…….’
흑돌을 쥔 손이 바둑판 위에서 어지럽게 흔들렸다. 잘한 것도 없지만, 딱히 잘못한 것도 없었다. 제 페이스대로 두었을 뿐이다. 그를 나락으로 끌어내린 105수까지는 이제 세 수밖에 남지 않았다. 그 사실을 떠올리고서 이명은 문득 숨을 쉬기가 어려워졌다고 느꼈다.
103수와 104수를 연달아 놓았을 때, 이전까지 쌓아 올린 모든 것이 모래성처럼 쏟아지는 환각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아니, 이미 일어난 일이니 환각이 아니었다. 그의 앞으로 이미 나 있는 길의 종착점은 파멸이었다.
이명은 손바닥으로 입을 막았지만 그날처럼 숨이 급격하게 가빠졌다.
“윽, 흡…….”
괴로움에 눈이 감겼다. 이명은 공처럼 몸을 웅크리고 입을 할 수 있는 한 가장 세게 틀어막았다. 신음이 새어 나오는 것도, 손목을 타고 침이 줄줄 흐르는 것도 죄다 혐오스럽기만 했다.
“못 하겠어…….”
이명은 괴로운 표정으로 돌을 바닥에 내려놓았다. 폐를 찌르던 고통은 복기를 멈추자마자 멎었다. 이명은 거실이 아주 어두워질 때까지 소파에 웅크리고 있었다.
그러다 전화벨이 울렸을 때, 그는 소리가 끊어질 때까지 가만히 있었다. 그러나 방이 다시 조용해지고 나니 문득 떠오르는 기억이 있었다.
‘아, 흑, 으윽! 잠깐…… 잠깐……!’
‘연락도 안 되고, 얼마나…… 읏, 걱정했는 줄, 알아?’
‘으, 응, 하, 흐윽, 미……안, 미안해……!’
뺨이 달아올랐다. 이명은 벌떡 일어나 핸드폰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쓸모없는 기계는 집을 10분 동안 뒤진 끝에 신발장 밑에서 나왔다.
부재중 전화가 세 통 와 있었다. 하나는 엄마였고, 하나는 광고처럼 보이는 여덟 자리 번호였고, 방금 받지 못한 건 임주혁 사범에게서 온 전화였다.
[반장: 보고 싶다] 어제
‘나도, 보고 싶어.’
이명은 네 글자로 이루어진 메시지를 확인한 뒤 활자를 몇 번이고 눈으로 쓸어내렸다. 그러다 문득 냉정한 자각이 벼락처럼 뇌리를 스쳤다.
‘정말로 내가 보고 싶은 걸까.’
이명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가 중국에서 돌아온 날에 한선호는 이명을 보자마자 침대로 데려갔다. 다섯 시간 동안 문 앞에서 기다리며 기념품이 그의 마음에 들까 조마조마했었는데. 한선호는 이명이 임 사범의 타박을 들으면서 고심해서 고른 과자와 술을 열어 보지도 않았다.
하긴 항상 그랬지. 그와 섹스가 아닌 다른 걸 해 본 적이 있었던가. 밥을 함께 먹고 기원에 간 날 그는 기분이 안 좋아 보였다. 뭔가 다른 걸 시도했던 게 잘못이었다. 그가 식사보다도 섹스를 즐긴다는 건 바보라도 알 수 있을 텐데. 단 한 번이었지만 손잡고 산책했을 때는 정말 좋았는데……. 그런데, 그도 그만큼 좋았을까.
이명은 다시 핸드폰 화면을 봤다. 그러자 ‘보고 싶다’라는 말이 조금 달라 보였다.
‘나랑 자고 싶다는 거겠지.’
섹스가 나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었다. 한선호와의 관계……. 동경하는 사람과 사랑을 나누는 게 싫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싫지 않다 뿐인가, 이렇게 이명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정신 차릴 수 없게 하는 사람은 이제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그것은 한쪽의 입장일 뿐이다.
한선호와 관계하고 난 뒤면 이명은 죄인이 됐다. 섹스의 쾌감이 미처 사라지기도 전에 ‘나만 만족한 건 아닐까’하는 걱정이 들었다. 그의 힘이나 체력을 따라가지 못하고 중간에 뻗기 일쑤라 미안하다 못해 죄송하고 황송했다. 기절이라도 하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씻겨 놓는 것도 부담되고 눈치 보였다.
잘하고 싶었다. 한선호를 만족시키고, 매혹하고, 그를 사로잡고 싶었다. 하지만 적극적으로 움직여 보려고 해도, 그가 손만 대도 몸이 딱딱하게 굳으며 말을 듣지 않았다.
그의 과거 애인들은 얼마나 아름답고 매력적인 사람들이었을까. 분명히 섹스도 좋았겠지. 그들은 길고 진득한 섹스를 즐기는 한선호를 분명히 만족시켰을 것이다.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이명은 답장을 하지 않고 핸드폰을 화면을 잠갔다. 눈을 감자 눈꺼풀이 바르르 떨렸다.
그때 다시 전화벨이 울렸다. 이명은 다시 눈을 뜨고서 차가운 표정으로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이번에는 전화를 늦지 않게 받을 수 있었다.
“네, 사범님.”
축 가라앉은 음성은 제가 듣기에도 낯설었다. 그 때문인지 임 사범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잘못 건 건가 싶었을 때 그가 불쑥 물었다.
―집이야?
“네.”
또다시 침묵이 감돌았다. 이명은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는 휴대폰을 들고 있는 자신이 바보처럼 느껴졌다. 임 사범은 실컷 적막을 즐긴 뒤에 말했다.
―네가 뭘 하고 있는지 알 것 같은데……. 내가 도와줘도 되겠니?
임주혁 사범은 낚시하는 법을 알려 주기보다는 물고기를 잡을 때까지 옆에서 지켜봐 주는 스승에 가까웠다. 이명은 그가 무엇을 해결해 줄 수 있으리라곤 기대하지 않았지만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네.”
―대강 1시간 뒤에 도착할 것 같구나.
전화를 끊자 자연히 104수에서 멈춘 바둑판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명은 흑돌을 주먹에 가둔 채 교차점을 노려보았다. 발을 잘못 디딘 그를 추락하게 한 지점이었다. 저 끝없이 아득한 구멍으로부터 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그 구덩이가 문득 한선호처럼 보였다. 단지 매혹되었다는 이유로 발을 들이지 말아야 했던 위험한 덫. 그날 멍청하게 저 자리에 착점하지 않았더라면 경기는 그토록 빨리 끝나지 않았을 것이다. 동창회 따위 가지 않았을 테고, 이명은 이토록 괴로워할 필요 없이 온전하게 자신으로 남아 있을 수 있었으리라. 적적하지만 평온한 삶, 한선호가 없는 삶.
상상 속에서 한선호를 품는 것은 쉽고 달콤했다. 그러나 현실의 이명은 그렇게 품이 넓지 않았다. 그의 마음은 너무 작고 까끌까끌해서 타인을, 이토록 온전히 사랑받아 마땅한 사람조차 안을 수 없었다.
모르는 사람들과 자신을 비교하고, 타인의 일거수일투족에 눈치 보고, 과거의 부끄러웠던 일들을 끄집어내고, 자신의 가장 실망스러운 약점을 낱낱이 마주했다.
결정적인 한 수가 갇혀 있는 주먹이 부르르 떨렸다. 이명은 답답한 마음에 돌을 아무 데나 놓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또한 그는 의식적으로 한선호에 관해 생각하지 않으려 애썼다. 하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한선호의 존재감이 그의 안에서 더욱 커져 가며 자신을 잠식하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이명은 돌연 분노가 치밀어서 쥐고 있던 흑돌을 바둑판 위로 던졌다. 돌들끼리 날카롭게 부딪히며 가지런하던 대열이 흩어졌다. 이명은 두꺼운 바둑판 아래로 쏟아져 내리는 바둑돌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것은 망쳐 버린 하나의 경기가 아닌 자신의 바닥처럼 보였다. 초라한 겉모습마저 걷어 내고 아무것도 남지 않은 밑바닥, 어둡고 보잘것없는 그의 본질이었다.
임주혁 사범은 1시간이 조금 되기 전에 아파트 앞에 도착했다. 1층에서 누가 호출할 때 나는, 귀 째지는 왈츠 소리는 이명이 버튼을 누르자 사라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띵동, 하는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안녕하세요.”
이명은 문을 열며 고개를 꾸벅 숙였다. 집 꼴이 엉망이었지만 그런 것이 신경 쓰일 만한 사이는 아니었다. 임 사범은 엄마가 전해 달라고 부탁했을, 식사가 담긴 비닐봉지를 식탁에 놓고서 거실 불을 켰다. 어둠에 익숙해져 있던 이명은 눈을 찡그렸다.
임 사범은 말없이 바둑판 앞에 앉고선, 검고 흰 돌이 엉망으로 흐트러진 꼴을 보고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곤 반대편에 앉은 이명의 얼굴을 뜯어보았다.
이명은 스승이 느릿하게 돌을 정리하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었다. 희고 검은 돌을 깨끗하게 분리하고서 임 사범은 검은 돌 통을 이명의 앞으로 밀었다. 이명은 그 안에 담긴 패배의 씨앗들을 노려보다가, 마지못해 하나를 집어 들었다.
임 사범은 자연스럽게 홍랴오치 9단의 역을 자처했다. 그날의 중압감과 흥분은 비록 존재하지 않았지만, 그 대신에 이명은 긴장감과 묘한 짜증을 느꼈다.
임 사범은 이명을 재촉하지도 않았고 힐난하지도 않았지만 그를 끊임없이 다음 수로 밀어냈다. 이명은 불쾌한 방파제에 조금씩 가까워지는 파도 같은 신세였다. 숨 막히는 승부를 답습하는 마음속에는 이제 두려움만이 가득했다. 방향을 바꿀 수 있다는 기대 따위 없이 이명은 인형처럼 눈앞에 펼쳐진 사지로 한 걸음씩 걸어 들어갔다.
“내 눈엔 간단한 문제로 보이는데…….”
임 사범이 102번째 수를 판에 놓으며 평온하게 말했다.
“유감스럽게도 넌 조금도 이해를 못 하고 있는 것 같구나.”
이명은 수수께끼 같은 말을 무시하고 103번째 수를 두었다. 임 사범은 곧바로 백돌을 내려놓지 않았다. 이명은 제 얼굴에 내리꽂히는 그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네가 처음 도장에 왔을 때 내가 해 주었던 말, 기억나니?”
임 사범은 더 이상은 아무 가치가 없다는 듯 돌 통의 뚜껑을 닫았다. 이명은 그의 눈을 보지 않으며 작게 대답했다.
“바둑판에는 두 마리 토끼가 있고, 애를 쓰면 그중 한 마리만 가질 수 있다고 하셨죠.”
“그래. 나는 포기하는 법부터 가르치는 편이지. 네가 그걸 기억하고 있다니 그나마 안심이 되는구나.”
바둑의 본질은 ‘선택’에 있다. 그것은 이제 와서 곱씹기도 민망한 개념이었다. 이명은 임 사범이 갑자기 왜 그렇게 기본적인 원리를 끄집어내는지 의아했지만 조용히 있었다.
“넌 내가 가르친 학생 중에 가장 골치 아프고 종잡을 수 없는 아이였단다, 명아.”
“……네.”
“네 기력이 외부적인 요인에 따라 고무줄같이 변하는 것도 이제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번에는 정말이지 심하구나.”
임 사범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양옆으로 저었다. 무거운 침묵이 둘 사이에 내려앉았다.
“욕심나는 걸 모두 가질 수 없다는 점에서 인생과 바둑은 크게 다르지 않아. 네가 요즘 얼마나 대단한 일에 정신이 팔렸는지는 모르겠지만…….”
“…….”
“너를 이렇게까지 흔드는 일이라면 차라리 관두는 게 나아. 그게 아무리 매혹적이어도, 너 자신을 희생할 가치가 있는지 생각해 봐.”
이명은 괜히 뜨끔해서 고개를 들었다.
“정신 차리란 말이다, 이명.”
안경 너머 날카로운 두 눈이 이명을 쏘듯이 바라보았다.
그것은 임 사범이 이전에도 종종 했던 충고와 맥락이 비슷했다. 이명이 슬럼프에 빠질 때마다 그는 바둑에 관해 적절한 조언을 해 주곤 했다. 바둑에 집중해라, 너를 서포트하는 엄마를 생각해라 등등 일반적인 말과 함께. 아마 이번에도 그런 뜻으로 한 말일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명에게는 다른 의미로 들렸다.
임 사범은 이명을 가만히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하고 싶은 말을 다 했는지 문을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밥 잘 챙겨 먹고.”
그는 엄마의 걱정을 남겨 두고 떠났다.
이명은 그가 사 온 밥에는 손도 대지 않고 다시 바둑판 앞에 앉았다.
그 뒤로도 교착 상태는 계속되었다. 이명은 완전히 지쳐 버린 채 잠들었고 한참 뒤에 일어났다. 낮인지 밤인지, 무슨 요일인지 알지 못했고 관심도 없었다.
싸늘한 바닥에 꼼짝 않고 앉아 있는 동안 창밖이 까매졌다가 다시 하얘졌다. 그는 기절하듯이 쓰러져 잠이 들었다가 다시 눈을 떴다. 그런 것이 몇 번 반복된 것도 같았다.
언젠가 침대에서 깨어났을 땐 햇살이 창을 통해 들어오고 있었다. 이명은 눈을 부릅뜨고 해를 똑바로 바라보려 했지만 곧 눈을 찡그리며 커튼을 쳐야 했다. 그 작은 행위가 왜인지 모르게 기분 나빴다.
하지만 그 단순한 행위에서 그는 하나의 길을 깨달았다. 빛이 강하다면 커튼을 치면 되는 것이 아닌가.
“……!”
이명은 바둑판 앞으로 달려가, 바닥에 놓여 있던 흑돌을 주워 들었다. 굳은 표정으로 흑과 백의 진영을 바라보던 그는 숨을 몰아쉬며 이전까지 생각하지도 않았던 곳에 돌을 내려놓았다. 그 자리는 승리하는 수가 아니었다. 다만 절대로 패배하지 않는 수였다.
손이 바빠졌다. 하얗고 검은 기석이 차례대로 놓였다. 빠르게, 그리고 촘촘하게 빈자리를 채워 갔다. 탁, 탁, 탁, 탁, 숨소리만 가득한 방에 규칙적인 타격음이 났다. 땀 한 줄기가 창백한 뺨을 타고 내려오다 야윈 입술을 적셨다. 이명은 땀을 닦을 생각조차 하지 않고 돌을 놓았다.
승부를 결정짓는 마지막 흑돌을 놓은 뒤, 그는 뒤로 풀썩 쓰러졌다. 난방을 켜지 않은 차가운 바닥 위로 머리카락이 흩어졌다. 이명은 달리기를 한 사람처럼 숨을 몰아쉬고 있었으나 텅 비어 있던 눈동자는 전에 없던 오기로 가득했다.
‘애초에 둘 다 잡을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어.’
며칠 전에 임주혁 사범이 했던 말을 이명은 뒤늦게 이해했다. 그가 서 있던 갈림길은 선택을 강요하고 있었다. 실리와 세력, 둘 중에 하나를 포기해야 함은 바둑의 원칙이고 아무리 욕심나는 결승이라고 해도 그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이명은 한 발 올라선 기분이었다. 이제 자신의 실수가 무엇이었는지, 왜 발견하기 그리 어려웠는지를 완벽히 이해할 수 있었다. 마음속에서 답답하던 응어리가 풀리며 지적인 쾌감이 느껴졌지만 자만심은 조금도 들지 않았다. 그는 다만 비참했고, 3주 전 자신의 결정이 한심하기만 했다.
‘욕심나는 걸 모두 가질 수 없다는 점에서 인생과 바둑은 크게 다르지 않아.’
이명은 들고 있던 흑돌을 떨어뜨렸다. 그의 사고는 임 사범이 놓은 다리를 따라, 바둑판에서 현실 세계로 확장되었다.
그날 임 사범은 이명이 바둑이 아닌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겼다는 것을 꿰뚫어 보았다. 세상 그 누구보다 가까워지고 싶었던 사람. 이명을 매혹시켜 모든 것을 기꺼이 바치게 한 남자. 자신을 방어하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바리케이드를 무시하고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오는 한선호.
이명은 그의 연인이었던 짧은 시간 동안에 그 지위를 얼마나 힘겹게 유지했는지를 떠올렸다. 단지 사고일 뿐인데도 한선호에 관해 생각하는 것은 이명의 가슴을 옥죄었다. 이명은 눈을 감고 임 사범의 충고를 곱씹었다.
‘아무리 매혹적인 선택이라도 그 때문에 나의 근간이 위협받는다면.’
자신을 파멸시킬 가능성이 있는 길은 애초에 들지 않는 것이 상책이다. 하지만 이미 접어든 상태라면 멈추고 되돌아가는 게 중책 정도는 된다. 모든 손해를 감수하며 끝까지 걸어가는 용감한 수도 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러한 전략을 하책이며 악수라고 부른다.
이명의 자아와 사랑은 첨예하게 충돌하고 있었다. 그처럼 품이 작은 사람에게 둘을 동시에 갖는 것은 애초에 과한 욕심이고, 불가능한 일이었다.
이명은 바닥에 놓여 있던 핸드폰을 집어 화면을 밝혔다. 여러 메시지와 전화가 수신되었다는 알림을 무시하고 날짜를 보았다.
토요일, 한선호가 출장을 마치고 귀국하는 날이었다.
* * *
‘헤어지자.’
이명이 말했다. 12월 19일 토요일 오후 3시, 그와 재회한 지 22일 만의 일이었다.
‘넌 나와 어울리지 않아. 네가 날 왜 좋아하는지도 모르겠고, 무엇보다…… 너랑 있으면 내가, 내가 너무, 비참해지고…… 존재 자체가 흔들려.’
처음에 담담하게 내뱉었던 이명은 입술을 바르르 떨며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갈 곳 잃은 그의 시선이 카페 테이블 위를 방황했다.
‘그냥 난…… 널 멀리서 좋아하는 게 어울렸던 것 같아. 미안.’
한선호는 굳게 결심한 듯 할 말만 쏟아 내고 떠나 버린 이명을 잡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김이 모락모락 나던 커피 두 잔이 차갑게 식을 때까지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전까지 시차 때문에 얼떨떨한 상태였는데 갑자기 머리 위에 찬물이 쏟아진 기분이었다. 웬일로 먼저 만나자고 하길래 좋아하며 갔는데, 이런 거였다니. 몸은 바싹 각성했으나 이상하게 사고가 멈춰서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나 때문에 비참…… 했다고.’
다른 게 아닌 그 구절만 머릿속에 반복해서 울렸다. 대체 언제 그를 비참하게 만들고, 존재를 흔들리게 했던 걸까. 미리 알았더라면 그런 짓은 절대로 안 했을 텐데.
한선호는 이명이 건너편에 놓고 간 반지를 집어 들었다. 그는 그것을 손가락에 끼우지 않고 주머니에 넣은 채 카페를 떠났다.
어쩌면 이명에게는 시간이 조금 필요할지도 몰랐다. 부끄러움이 많고 신중한 사람이니까 연애가 부담스러웠을 수도 있겠지. 한선호는 5일 치 짐이 담긴 여행 가방을 끌고 택시를 잡았다. 집까지 도착하는 동안 눈을 붙이고 있었더니 피로가 조금 가셨다.
그는 집 앞 마트에서 주말 동안 필요한 먹거리를 사서 집으로 들어왔다. 거의 일주일 동안 비어 있었던 집은 차가웠다. 늘 이렇게 살았고 그게 이상하다고 생각해 본 적 없었다. 이명을 만나기 전까지는.
이명이 집에 오는 날, 혹은 올지도 모르는 날 한선호는 난방을 26°C로 맞춰 놓았다. 냉장고에는 과일과 간식을 잔뜩 쟁여 놓고 최소 1시간은 환기한 뒤 침대 시트를 새로 갈아 놓았다. 이명은 별일 하지 않고 침대에 누워 있거나, 앉아서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거나, 집 안을 어슬렁거릴 뿐이었다. 그런데도 그가 곁에 있다는 이유로 한선호에게는 믿기 어려운 행복감이 찾아왔다.
특히 눈을 떴을 때 곁에 이명이 있는 걸 발견한 순간은 행복의 절정이었다. 햇빛이 유리알 같은 갈색 눈동자 표면 위로 반질거리며 흐를 때 한선호는 감각에 혼란을 느끼곤 했다. 매번 너무 비현실적이어서 차라리 꿈이 아닐까 생각했다.
한선호는 현실적인 사람이었고, 그런 그에게 사랑은 날개 달린 꿈을 좇는 행위였다. 성적도, 학점도, 인사 고과도 사격 과녁처럼 맞힐 줄 아는 그는 사랑의 정중앙만은 어떻게 쏘아 맞히는지 알지 못해서 놓쳤었다. 그 뒤론 남들이 뭐라고 하든지 관심 두지 않고 살았다. 오직 하나뿐이었던 그의 꿈이 품 안으로 날아 들어오기 전까지는. 그날 한선호는 그저 손만 뻗어서 이명을 움켜쥐면 되었다. 돌이켜 보면 기적 같은 일이었다.
‘그렇게 쉬울 리가 없지.’
이명은 감정이 얼굴에 쓰여 있는 사람이다. 그가 부끄러워하는지, 수치스러워하는지, 기분이 좋은지, 궁금하다면 눈을 보기만 하면 되었다.
그러나 이명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알 수 없는 사람이었다. 기사들은 몇 수씩 앞서 본다지. 보통 사람인 한선호는 그의 사고를 도무지 좇아갈 수 없었다.
이명은 한선호를 좋아한다. 이것은 감정이므로 그의 눈을 보며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명이 이별을 결심한 계기는 이해하기 어려웠다.
하긴, 가지 말라는 눈빛을 하고선 입으로는 끊임없이 가라고 하지 않았던가. 행위 중에도 쾌락에 눈이 풀려서는 제발 그만하라고 말하지 않던가.
그것은 한선호가 이해하기 어려운 이명의 특징 중 하나였다. 좋으면 함께 있고 싫으면 떨어지고 싶은 게 인간 아니었나. A라고 느끼면서 B란 판단을 내리기까지의 간극은 한선호에게 풀리지 않는 미스터리였다.
‘너랑 있으면 내가, 내가 너무, 비참해지고…… 존재 자체가 흔들려.’
다만, 그 말에만은 모순이 보이지 않았고, 그 사실은 한선호를 괴롭혔다. 이명은 진심이었다. 그가 진정으로 비참해하고 있단 걸 한선호는 알 수 있었고, 그 때문에 그의 눈빛이 가슴에 남겨 놓은 자국이 열려 있는 상처처럼 따끔따끔 쓰라렸다. 너는 왜 그렇게 아픈 얼굴을 하고 있었을까.
‘혹시 그 티셔츠와 관련이 있을까.’
한선호의 입매가 딱딱하게 굳어 갔다. 그는 떠올리기만 해도 불쾌해져서 애써 외면했던 사건을 기억 속에서 끄집어 올렸다.
이명은 정말이지 요령이 없었다. 집에서만 입는 큰 티셔츠라고 하면 될 것을, 얼굴을 시뻘겋게 물들이며 중요한 물건이라고 기를 쓰고 숨기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선호는 더욱 화가 났다.
이명에게 집에 드나들 정도로 친밀하게 사귀었던 사람이 몇 명 있었다고 한들-대단히 불쾌하기는 해도-이상하지 않았다. 그러나 현재까지 남의 옷을 고이 간직하고 있다는 사실은 문제가 있었다. 그것으로도 부족해 바들바들 떨면서 만지지도 못하게 하는 건 불쾌감에 불을 지르고 부채질하는 꼴이었다.
표정이 마음대로 되지 않자 한선호는 이명의 집에서 나왔다. 기분 좋은 모습만 보여 주고 싶은 그에게 부정적인 낯을 보이기 싫었다.
그러나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이성이 흐릿해졌을 때조차 한선호는 이명이 바람을 피웠다거나 다른 사람을 동시에 만나고 있을 거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지나치게 정직해서 문제라면 모를까 거짓말에 소질이 없는 스타일인 데다, 켕기는 게 있으면 표정에 다 드러나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한선호는 지금 이 순간에도 이명이 자신을 사랑한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티셔츠 따위, 몰래 불태워 버리지 뭐.’
이명이 이별을 선언한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한선호는 그를 놓아줄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가 제 발로 돌아올 때까지 며칠 정도는 기다려 주겠지만, 결과적으로 한선호는 반드시 이명을 되찾을 것이었다.
‘미안하지만 이번 부탁은 들어줄 수 없겠어, 명이야.’
옷을 간소하게 갈아입고서 소파 위로 쓰러졌다. TV를 틀자 스포츠 채널에서 축구 중계가 한창이었다. 좋아하는 선수가 있는 팀이라 틀어 놨지만 집중이 안 됐다. 한선호는 무표정한 얼굴로 TV 화면을 보다가 잠들었다.
* * *
토요일과 일요일이 조용히 지나갔다. 토요일에는 송년회가 있었으나 시차를 핑계로 가지 않았고 이명을 만나려고 빼 둔 일요일에는 예전에 주문해 둔 반지를 찾으러 귀금속 가게에 다녀왔다.
이별한 지도 2일 차였다. 체감상 12일 정도 흐른 것 같았지만 고작 이틀밖에 지나지 않았다.
한선호는 야근을 매일 하던 시절에 그토록 바랐던 ‘하루를 어영부영 보낼 자유’를 얻었지만 상상처럼 좋지가 않았다. TV가 이렇게 재미없었던가. 영화 보면서 맥주를 홀짝이던 게 취미이던 시절도 있었는데, 이제는 뭘 보든지 감흥이 없었다.
월요일에는 회사에 복귀했다. 원래 한선호 대신 출장 갔어야 했던 송 대리는 그에게 고맙다는 말과 미안하다는 말을 못 해도 열 번씩은 했다. 지원 업무라 어렵지 않았다고 답하면서도 한선호는 속으로 그때 서울에 있었더라면 이명을 잡을 수 있었을까 생각했다. 송 대리가 저녁 약속이 없으면 밥을 사겠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지난주까지만 해도 퇴근하고 달려갈 장소가 있었지만 지금은 없었으니까.
퇴근하고서 송 대리는 한선호를 중식집으로 데려갔다. 작은 접시에 샥스핀이니 조개관자니 고급 재료들로 만든 요리가 코스별로 나오는 식당이었다. 그는 35만 원짜리 전통주를 시켜 놓고서, 술기운이 조금 들자 아버지를 그리워하며 눈물 흘렸다. 한선호는 운전을 해야 해서 술을 한 방울도 마시지 않았지만 절망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주를 성의껏 위로해 주었다.
송 대리를 택시 태워 집에 보낸 뒤, 화려한 무늬의 술병을 든 채 차에 타며 한선호는 이명이 사 왔던 고량주를 떠올렸다. 과자는 독일에 가져가서 틈틈이 맛있게 먹었지만 술은 아까워서 뜯지도 못하고 몇 번 쓰다듬다 찬장에 넣어 뒀다.
일상에서 이명을 떠올리게 하는 소재가 원래 이렇게 널려 있었나. 한선호는 난데없이 공격이라도 당한 기분이었다. 표지판에 영산동이란 글자가 나오자마자 차선을 변경했다. 내비게이션에서는 끊임없이 U턴을 하라고 지시했지만 반대 방향으로 나아갔다. 정신 차려 보니 이명의 아파트 입구로 진입하고 있었다.
‘제정신이 아니군.’
저녁 9시 반, 노동의 피로도 잊은 채 헤어진 애인의 집 앞에 찾아온 남자가 여기에 있었다. 한선호는 라이트를 모두 끄고 불 켜진 5층 창문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베란다 앞에는 커튼이 쳐져 있어서 안쪽은 실루엣조차 보이지 않았다. 한때 이명과 함께 서서 담배를 피운 적이 있는 베란다였다.
‘여기서 담배 피우면 민원 들어오지 않아?’
‘아니. 아래층 위층 다 피우거든…….’
그래서 내가 금연을 못 해. 배시시 웃으며 말하는 이명은 사랑스러웠다. 그는 머리에서부터 발끝까지 사랑스럽지 않은 구석이 없었다.
한선호는 자정이 될 때까지 꼼짝 않고 앉아 있다가, 501호에 불이 꺼지는 것을 보고 차에 시동을 걸었다.
이별 4일 차부터 상황은 급격히 견디기 어려워졌다. 얼굴에서도 티가 나는지 회사 사람들이 무슨 일 있느냐고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묻기 시작했다. 일은 손에 잡히지 않았고 멍하니 앉아 있는 시간이 늘어났다.
한선호는 시간과 싸워서 이명을 어떻게든 되찾을 자신이 있었다. 어떻게 손에 넣었는데, 이렇게 쉽게 빠져나가는 게 말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흘이 지난 지금, 그들은 성격이 맞지 않아서 조금 사귀다 깨져 버린 수많은 연인 중 하나가 되었을 뿐이다.
함께였던 짧은 시간이 꿈같았다. 떠올려 보려고 해도 몇 가지 장면만 생각날 뿐 그때의 감정이 심장까지 닿지 않았다.
그날도 한선호는 퇴근 후에 이명의 집 앞으로 갔다. 어두운 그늘에 차를 세워 두고 라이트를 끈 채 불이 켜진 베란다 창문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8시쯤, 검은 세단이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서더니 정차했다. 안경을 쓴 중년 남성이 인터폰에 대고 한참 동안 뭐라고 말한 뒤 501호의 불이 꺼졌다.
한선호는 남자가 누군가와 통화하는 걸 조용히 지켜보았다. 잠시 후, 미닫이 유리문이 스르륵 열리며 이명이 나왔다. 동창회 때 입고 있었던 외투 차림이었고 얼굴이 반쪽이 되어 있었다. 이마를 덮은 머리카락은 한 번도 본 적 없이 부스스했고 품이 큰 외투를 입었는데도 몸이 깡마른 티가 났다.
남자가 음식이 든 것으로 보이는 비닐봉지를 건네고 어깨에 손을 얹은 채 뭐라고 말하는 동안 이명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허공을 보았다.
그를 향해 달려 나가지 않을 수 있는 건 오로지 온 힘을 다해 이성의 끈을 붙잡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명의 얼굴을 본 순간에 눈물이 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뺨 위로 흘러내렸다. 이제까지 자신만만하게 생각했던 게, 그를 기다려 준답시고 참았던 게 모두 무용해졌다. 한선호는 그저 극도로 불안하고 괴로울 뿐이었다.
남자는 5분 정도 끊임없이 이야기했고 이명은 텅 빈 눈빛으로 다른 곳을 보았다. 그가 무성의한 태도로 고개를 꾸벅 숙이고 들어간 뒤에도 한선호는 곧바로 차를 출발시키지 않았다. 그는 5층에 불이 다시 들어왔다가 한참 후에 다시 꺼지는 것을 확인하고서야 집으로 돌아갔다.
이별 5일 차, 한선호는 어느 때보다도 멍한 상태로 출근했다. 전날 꼴사납게 울면서 안에서 무언가 빠져나간 느낌이었다. 출근 시간에 맞춰 자리에 앉아 업무를 시작하는 자신이 인형 같다고 한선호는 생각했다.
아침까지만 해도 이런 생활은 하루도 더 견딜 수 없다고 여겼다. 하지만 메일로 요청받은 파일을 무표정으로 작성하는 그가 있었다. 그는 이명이 절실히 필요했고 그 외에는 아무것도 고려할 가치가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이명이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지도 몰랐다.
이제는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다. 이 터널 끝에 뭐가 있는지, 이것이 이별이란 결말인지, 연애의 과정인지. 원래는 짤막한 터널 끝에 빛이 기다리고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마찬가지로 작은 갈등은 연애란 롤러코스터의 굴곡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5일 동안 그가 갖고 있었던 한 가지 확신–이명은 나를 사랑한다–은 형체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옅어지고 뭉개져 버렸다. 한선호는 그런 것이 과거에 그 자리에 있었다는 정도로만 그 기억했다.
“선호 씨, 바빠요?”
그런대로 친하게 지내는 2팀의 최 대리가 한 손에 커피를 들고 자리에 찾아왔을 때도 한선호는 이명을 생각하고 있었다.
“한바탕 지나갔으니까 괜찮죠?”
“네. 나름대로 한가합니다.”
“듣던 대로 안색이 안 좋네. 무슨 일 있어요?”
한선호는 노력해 보았으나 걱정스러워하는 얼굴을 향해 예의상으로라도 웃을 수 없었다. 그저 모든 것이 짜증스러울 뿐이었다.
“모르지, 이거 들으면 기분 좋아질지도. 내가 인사팀 사람한테 정보 좀 얻어 왔는데, 잠깐 담배 타임?”
최 대리가 목소리를 낮추며 사무실 출구를 엄지로 살짝 가리켰다. 한선호는 비록 아무 관심도 생기지 않았지만 그에게 무례하게 굴 수는 없어서, 어쩔 수 없이 담뱃갑을 챙겼다.
빌딩 엘리베이터에는 어느 시간대든 간에 사람이 두세 명씩은 타 있었다. 그래서 최 대리는 옥외 흡연실까지 올라가는 동안 입을 꾹 다물고 있었으나 무언가를 빨리 털어놓고 싶다고 얼굴에 적혀 있었다.
이윽고 흡연실 구석까지 한선호를 끌고 간 최 대리는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하고서 조금 신난 어조로 물었다.
“선호 씨, 지난주에 프랑크푸르트 출장 가서 그쪽을 아주 홀려 놓고 온 모양이던데?”
한선호는 그 말에 대답하지 않고, 고개를 숙여 담배에 불을 붙였다. 이어 최 대리가 담배를 꺼내는 것을 보고 그에게도 불을 붙여 주었다.
“아니, 사람이 지원 업무로 가 놓고 말이야. 그것도 땜빵이었다며. 서포트를 얼마나 하드하게 했으면 그쪽에서 그렇게 안달이냐고.”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연기로 폐 속을 가득 채웠지만 기대했던 흡연의 효과는 조금도 들지 않았고 비참한 기분은 그대로였다. 최 대리가 웃는 낯으로 재떨이에 담배를 털었다.
“콕 집어서 한선호 씨 주재원으로 보내 달라고 요청이 세 번 들어왔대요. 마지막은 법인장 계정으로 왔다는 썰이 있어.”
“그런가요.”
“‘그런가요’는 무슨! 그렇게 무덤덤하게 들을 일이 아니에요, 이 사람아. 미디콤 건 실무 진행에 인력 부족하다고 구구절절. 진짜라니까. 위에서 검토 들어갔대.”
“……아.”
“일단 신 팀장한테 가서 물어보겠지. 절대 안 준다고 하겠지만, 저쪽 입김도 장난 아니니까. 결국은 HR에서 선호 씨 의향 물을 거예요. 그러니까 미리 생각해 놔요.”
최 대리가 칭찬받고 싶은 아이처럼 뿌듯하단 표정을 지었다.
유럽 주재원이라. 한선호는 생각해 본 적도 없는 가능성으로 눈을 돌렸지만 어쩐지 남 일처럼 느껴졌다.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그렇게 되면 원거리 연애를 해야 할 테니 불가능하다’는 거였다. 그다음으로 떠오른 생각은 그 연애가 지난주에 끝났다는 것이었다.
자신이 어디에 있든 그 사실이 이명에게 아무 영향도 미치지 못하리란 인식은 나약한 희망을 무참히 부숴 버렸다. 한선호가 미련하게 붙들고 있던, 관계를 어떻게든 이어 갈 것이란 희망이었다.
그의 표정을 본 최 대리가 난처하다는 듯이 담배를 껐다.
“하하, 하하하……. 기분 좋아지라고 알려 준 건데. 거긴 미세 먼지도 없고, 소시지도 맛있고, 실수령액도 확 뛸 텐데…….”
“…….”
“아유, 쌀쌀하네. 이제 들어갑시다, 들어가.”
한선호는 최 대리와 함께 다시 실내로 들어왔다. 곧 점심을 먹었고 오후에는 팀 회의가 있었지만 한선호의 머리는 반밖에 돌아가지 않는 것 같았다. 나머지 반은 이명 외의 것은 생각할 수가 없었다.
최 대리가 알려 준 소식은 한선호에게 새로운 가능성, 즉 이명과의 관계가 이대로 영영 끊어질 수도 있다는 생각을 심어 놓았다. 위기감은 한선호를 각성 상태로 만들었고, 그는 머릿속에서 이명을 잡아 둘 여러 가지 방법을 고려했다.
가장 기본적인 방법은 이명을 찾아가는 것이지만, 만약 그가 냉담하게 밀어낸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모범적인 방법부터 사회적 인간이라면 고르지 않아야 할 방도까지, 수많은 옵션이 널려 있었다. 한선호는 두려웠다. 이명의 마음을 영영 잃어버렸을까 봐, 자신이 회까닥 돌아서 하지 않아야 할 짓을 저지를까 봐, 이명에게 상처를 줄까 봐, 모든 것이 두려웠다.
퇴근이 30분 남았을 때, 메시지가 왔다.
[010-****-****: 이정입니다. 이야기 좀 할 수 있을까요?]
한선호는 알림을 보자마자 핸드폰을 들고 사무실에서 뛰쳐나갔다.
―여보세요?
“이정 씨? 한선호입니다.”
―아, 네……. 갑자기 연락 드려서 죄송합니다. 잠시 통화 가능하신가요?
“네. 괜찮습니다.”
한동안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침묵만 감돌았다. 이정은 선뜻 말하기가 곤란한지 한참 동안 뜸을 들였다.
―저희 오빠…… 혹시 지금 어떤 상태인지 아세요?
이번엔 한선호가 입을 다물 차례였다. 잘 모르는 사람에게 전화해서 다짜고짜 묻기에는 적절치 않은 물음인 데다 질문의 의도도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이정이 오빠를 도우려 한다는 것이 직감적으로 느껴졌다. 한선호는 조금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명이, 힘들어하고 있습니까?”
―네. 잘 아시네요.
이정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아니요, 사실은 아무것도 모르실 거예요.
그녀가 돌연 빠르게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오빠, 많이 힘들어해요. 나사 빠진 사람처럼 굴고, 밥도 안 먹고, 내년 경기 두 개도 마음대로 취소했어요. 저나 엄마 말은 듣지도 않고, 사범님이 찾아갔을 때도 미친 사람 같았다고 해요.
자연스럽게 펴져 있던 손바닥이 저절로 말렸다. 한선호는 주먹을 꽉 쥔 채 잠자코 들었다.
―종종 슬럼프를 겪기는 하지만, 이제까지 이렇게 무섭게 무너진 적은 없었어요. 저러다, 저러다가 혹시 나쁜 마음이라도…….
말이 끊어졌다. 이정은 심호흡을 몇 번 했고, 그녀 숨결이 걷잡을 수 없이 떨리고 있다는 게 수화기를 통해 전해졌다. 이정이 차분하게 들리려고 애쓰는 음성으로 말했다.
―갑자기 당황스러우셨죠? 제가 한선호 씨한테 무턱대고 전화해서 이런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그건…….
의기소침한 목소리가 또다시 사라졌다. 한선호는 그녀가 차마 완성하지 못한 뒷말을 어느 정도 예상할 수 있었다. 이정은 오빠가 죽어 가고 있다고 말했다. 한선호는 이제 아무것도 숨기고 싶지 않았다.
“계속 말씀하세요. 저, 5일 전까지 명이와 만나는 사이였습니다.”
―…….
“지금은, 아니지만요.”
그는 얼굴을 찡그렸다. 그 사실을 소리 내어 꺼내자 날카로운 무언가에 찔린 것처럼 고통이 밀려왔다.
―그런 것 같았어요. 오빠가 차인 거겠죠.
한동안 침묵을 지키던 이정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이건 두 사람의 연애고, 제삼자가 끼어들 일이 아닌 건 알아요. 하지만 그 바보 같은 성격에, 이대로 두면 정말로 어떻게 될 것 같아서 민망함을 무릅쓰고 전화 드렸어요.
“괜찮아요. 편하게 말씀하세요.”
―오빠는 아무리 힘들어도 먼저 남을 붙잡을 사람이 아니에요. 참을 때까지 참다가 말라죽었으면 죽었지, 절대 떠나지 말라고 매달리지 못할 거예요. 겉으로 냉정한 말을 해도, 진심이 아닐 수 있다는 걸 알아주셨으면 해요.
“…….”
―얼마 전까지만 해도 오빠 걱정하셨잖아요. 그때까지만 해도 저희 오빠 좋아하셨잖아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이번 한 번만…… 져 주시면 안 될까요?
다다다다 이어지던 뜨거운 목소리가 돌연 끊겼다. 이정은 자신이 내뱉은 말에 크게 당황한 눈치였다.
―제가 정말, 주제넘었네요.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죄송해요.
한선호가 뭐라고 말하기도 전에 통화가 끊겼다.
그는 핸드폰을 그대로 든 채로 한참 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충격받은 머리가 느릿하게 돌아갔다. 이정이 한 말을 하나하나 곱씹어 볼수록 모든 정황이 한곳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명의 마음이 아직 자신을 향하고 있다. 그 사실 하나로 한선호의 심장이 빠르게 뛰고 가슴이 뜨거워졌다. 그 대화는 그의 계획에 힘을 실어 주었다. 이명이 자신을 밀어내면 어떻게 해야 할지, 이제는 조금도 고민할 필요가 없어진 것이다.
자리로 돌아온 한선호는 하던 일을 마무리하고 빠르게 퇴근 준비를 했다. 6시가 되자 퇴근하는 무리에 섞여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차에 타며 한선호는 이명에게 할 말을 골랐다. 이 일을 더 쉽게 만들 요령 같은 건 상상할 수 없었으므로 있는 그대로 쏟아 낼 생각이었다. 그를 만나 얼마나 행복했는지, 그가 없는 동안 얼마나 불안하고 불행했는지, 티셔츠를 보고 들었던 생각들, 그리고 임 사범을 비롯한 이명의 지인들을 향한 질투, 그럼에도 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한선호는 남김없이 이명에게 보여 줄 작정이었다.
아파트 입구의 경비 초소에 다다르자 경비원이 그를 알아보고서 손 인사를 해 보였다. 한선호는 지상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거울에 제 얼굴을 비춰 보았다. 머리를 정리하고 옷매무새를 확인한 뒤 차에서 내렸다. 웬 우연의 일치인지 이명의 차가 바로 옆에 세워져 있었다.
우중충한 하늘은 막 어두워지고 있었다. 한겨울의 바람이 코트 자락 안으로 서늘하게 파고들었지만 머릿속이 온통 다른 생각으로 가득하다 보니 춥다고 느끼지 못했다. 한선호는 양 주머니에 손을 찔러 넣고 아파트를 향해 걸었다.
놀이터를 끼고 방향을 꺾었을 때 건너편에서 누군가 걸어오는 것이 얼핏 보였다. 거리가 멀었지만 한선호는 어떤 예감에서인지 고개를 휙 돌렸다.
그리고 입에서 준비되었던 것처럼 한숨이 흘러나왔다.
한선호는 부드럽게 발을 돌려 남자의 뒤를 쫓았다. 폐인이 다 되었다더니, 모습이 말끔하기만 했다. 비록 며칠 사이에 말 그대로 얼굴이 반쪽이 되기는 했지만 사랑스러운 건 여전했다.
이명은 제 차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다가 돌연 멈추었다. 바로 옆에 주차된 검은 SUV를 보고 굳어 버린 듯 가만히 있다가, 한선호가 있는 방향으로 날카롭게 뒤돌았다.
둘은 한달음에 좁히기 어려운 거리를 두고 서로를 바라보았다.
이명의 무표정하던 얼굴에 놀라움이 번졌고 이내 꼭 다물린 입술 라인이 구겨지며 울상으로 변했다. 그는 당장에라도 한선호의 품으로 달려올 것 같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 자리에 한참 동안 서 있었다.
한선호는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이명이 자신을 향해 한 걸음씩 걸어올 때까지. 아주 가까이 다가올 때까지.
시간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느릿하게 흐르는 동안 이명은 조금씩, 조금씩 가까워졌다. 핼쑥한 볼과 메마른 입술이 보이는 거리가 되자 그가 걸음을 멈추며 눈을 피했다.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이었다. 그러나 갈색 눈동자 안에서는 모종의 의지가 반짝이고 있었다. 이명은 시선을 떨어뜨려 한동안 제 발끝을 보다가, 어느 순간 눈을 질끈 감았다.
“내가, 내가 졌어.”
무슨 말을 하려나 궁금했는데, 정말이지 상상도 못 했던 게 튀어나왔다. 한선호는 황당함에 눈만 깜빡였다.
“저번에 말했듯이 우리는 어울리지 않아. 나는 너한테 폐만 끼치고, 네가 실망할 만한 짓만 잔뜩 했지만……. 널 속상하게 하고, 답답하게 만들었고……. 그 때문에 내가 너무 한심하고, 괴로워서……. 자꾸 나 자신이 무너지는 것 같아서, 방어해야 한다고 생각했어. 그래서 그만하려고 했는데. 정말 그만두고 싶었는데…….”
이명은 중간중간 멈추기는 했지만 그치고는 빠르게 말을 내뱉었다. 여전히 눈을 꼭 감은 채였다.
“못 하겠어.”
그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너를 놓치는 게 너무 두려워서, 네가 너무 좋아서…… 나, 뭐든 포기할 수 있을 것 같아.”
주먹을 꼭 쥔 손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이기적인 건 알지만…… 나, 더 노력할 테니까, 한 번만, 이번 한 번만…….”
이명은 가만히 내버려 두면 무릎을 꿇을 기세였다. 한선호는 그의 애원을 끝까지 듣지 않고, 그의 왼손을 제 손으로 감싸며 코트 주머니 안으로 끌어당겼다.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아도 돼, 명이야.”
이명이 눈을 번쩍 뜨며 고개를 치켜들었다.
“날 밀어내지만 마.”
핏기 없이 창백한 낯빛에 당혹스러운 기색이 번졌다. 그는 미소를 띠고 있는 한선호의 얼굴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들여다보며 입을 멍하게 벌렸다. 입술을 몇 번 달싹였지만 말을 내뱉지 못했다.
한선호 또한 마찬가지였다. 하고 싶은 말이 많았는데, 너무 많아서 골라내고 정제해야 할 정도였는데, 지금은 머릿속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들은 눈을 마주하고 있었고, 차갑지만 맥박이 흐르는 이명의 손이 제 주머니 속에 있었다. 그거면 되었다고 한선호는 생각했다.
그는 주머니 속에서 손가락을 더듬어, 귀금속 가게에서 받아 온 이래 내내 갖고 다니던 장신구를 본디 그것이 있어야 할 자리에 천천히 끼웠다. 이명이 눈을 몇 번 깜빡이다 한선호의 주머니에서 왼손을 꺼냈다. 넷째 손가락 둘레에서 반짝이는 반지는 이전과 달리 그의 손가락에 꼭 맞았다. 이명의 눈가에 눈물이 고이는 것을 보고 한선호는 그를 안아 버렸다. 품에 가둬 버리고 입술이 닿는 곳마다 입을 맞추었다. 처음 몇 번은 몸을 움찔거리며 당혹스러워하던 이명이 웃으며 눈을 감을 때까지 그는 멈추지 않았다.
이 상황에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어떤 말로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표현할 수 있을까. 한선호의 머릿속은 텅 비어 있었다. 반면에 가슴은 기쁨으로 가득했다. 한선호가 끊임없이 눈두덩과 볼, 목 등에 키스하자 이명이 그를 살짝 밀어냈다.
“……이제 그만해. 사람들이 보겠어.”
한선호는 그의 콧등과 이마, 정수리에 키스하고서야 다시 허리를 폈다. 아까는 하늘이 우중충하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보니 아름다운 군청색이었다.
“배고프지?”
“……응? 응.”
“제일 먹고 싶은 게 뭐야?”
“아무거나 괜찮은데…….”
한선호는 일부러 표정을 굳히고 그를 노려보는 척했다. 이명의 미간이 걱정으로 좁아지더니 그가 무작정 입을 벌렸다.
“엇…….”
“엇, 뭐?”
“사, 삼겹살…… 이랑 소주.”
한선호는 눈이 동그래진 남자의 볼에 마지막으로 키스하고서 손을 잡아끌었다.
“그럼 기원 갔던 날…… 나한테 실망한 거 아니었어?”
“기분이 좋았다곤 할 수 없지만, 너한테 실망하진 않았어. 네가 잘못한 것도 아니고.”
한선호는 빈 술잔을 채우고서 술병을 내려놓았다. 이명은 다행이라는 듯이 한숨을 작게 내쉬었지만, 그러고 나서도 여전히 고개를 푹 숙인 채 시선을 술잔에 고정하고 있었다.
“그날, 왜 기분이 안 좋았어?”
“그건…….”
그 사람들이 네 몸에 손대는 게 보기 싫었어.
“기원에 계신 분들이……. 너한테 너무 가까이 다가가시더라고.”
“그런가……. 괜찮은 분들인데.”
역시 이명은 아무것도 몰랐다. 한선호는 고기를 뒤집으며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골똘히 고민했다. 불그스름한 생고기가 불판에 닿아 치익 소리가 났다. 한선호는 집게를 놓고서 가만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
“명이야.”
“응?”
“난 네가 다른 사람하고 몸이 닿는 게 싫어.”
“악수 같은 것도?”
“응.”
한선호는 최대한 순진해 보이는 표정을 지으며 고기 판으로 눈을 돌렸다. 이명이 혼란스러워하는 동안 그는 다음 문제를 어떻게 설명해야 하는지 고민에 빠졌다.
“명이야, 그리고…….”
“응?”
“하루에 한 번씩은 연락이 되었으면 해.”
한선호는 완벽하게 익힌 돼지고기를 쌈에 싸서 곤혹스러워 보이는 입술로 갖다 댔다. 이명은 주변 눈치를 보면서도 마지못해 입을 벌렸다. 쌈을 한가득 입에 넣고 씹더니, 꿀꺽 넘긴 뒤에야 작게 답했다.
“노력할게.”
“난 회사에 있을 때도, 우리가 떨어져 있는 다른 순간에도 네가 잘 있는지 알고 싶어.”
“알…… 았어.”
“말 나온 김에, 너 핸드폰 줘 봐.”
순진한 이명은 아무 경계심도 없이 핸드폰을 내밀었다. 출시된 지 5년은 지난 것처럼 보이는 기기에는 생체 인식은커녕 그 흔한 패턴 잠금조차 걸려 있지 않았다. 한선호는 배경 화면을 보고 무의식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설치된 모든 앱의 귀퉁이에 빨간색으로 미확인 알림이 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아무것도 확인을 안 하는 모양이군.’
메시지 앱을 누르자 시뻘건 숫자 목록이 화면에 꽉 찼다. 그중 확인한 건은 자신이 보낸 것뿐이라 한선호는 내심 흐뭇한 기분이 들었다.
“이거…… 봐도 돼?”
“응.”
한선호는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최상단에 위치한, 조승빈이 보낸 메시지를 눌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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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화를 쭉 내려 본 한선호는 헛웃음을 지었다. 둘 사이에는 놀라울 정도로 사적인 대화가 오가지 않았기 때문이다. 조승빈은 단지 이명을 게임 초대용 계정으로 이용해 먹고 있었다.
이명은 화면을 보더니 무덤덤한 얼굴로 고기를 집어 먹었다.
“또 보냈네……. 게임 같은 거 못 한다고 전에 얘기했는데.”
한선호는 집게로 적당하게 익은 고기를 집어 이명의 밥그릇 뚜껑에 수북이 올렸다. 배가 고프기는 했는지, 그는 정말 잘 먹었다. 한선호는 입 안 가득 고기를 넣고 씹는 이명을 흐뭇하게 보다가, 조금 긴장한 상태로 가장 신경 쓰이는 대화방을 확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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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청와대-
“……임 사범님은 보안에 관심이 많으신가 봐.”
“응. 의심이 좀 많으셔.”
대화를 쭉쭉 내려 보았는데 내용이 일관적이었다. 임 사범은 수많은 보이스 피싱과 사기 사례를 이명에게 전했고, 이명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고 나니 나머지 대화방은 볼 필요도 없을 것 같았다.
한선호는 이명에게 핸드폰을 돌려주고 삼겹살을 쌈에 싸 먹었다. 핸드폰까지 확인하고 나니 자신의 오해와 그동안의 의심이 더 멀게 느껴졌다. 누구나 겪는 시행착오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깃털처럼 가벼웠다.
한선호는 피식 웃으며 입을 열었다.
“명이야.”
“응?”
“사실 나…… 임주혁 사범님 질투했다?”
이명은 그 말을 듣자마자 마시던 물을 뱉었다.
“엇, 미안. 미안.”
그는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는 표정으로 휴지를 몇 장 뽑아 제 입가와 물이 튄 옷가지를 닦았다.
“괜찮아.”
“……근데, 질투라고 했어?”
“응. 너 임 사범님이랑 둘이 여행 가는 것도 그렇고, 나는 너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는데 그분은 널 어릴 때부터 봤으니까……. 너한테 특별한 사람일 것 같아서.”
“감사한 분인 건 맞지만…….”
이명은 난감하다는 듯이 눈알을 굴렸다. 그러고선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소주잔을 비웠다.
“임 사범님……. 우리 엄마랑 사귀시는데.”
“……아.”
한선호는 놀란 표정을 짓기도 좀 그렇고 더더욱 웃을 수는 없어서 괜히 소주를 벌컥 마셨다. 그러나 속으로는 속절없이 웃음이 나왔다. 이 황당한 경로로 인해 한선호의 마음속에 남아 있던 마지막 찝찝함까지 깨끗하게 사라져 버렸다.
여전히 충격받은 표정인 이명이 한선호의 눈치를 보았다.
“남자 친구네 집이 이혼 가정인 건…… 좀 그래?”
“어? 아니. 아니, 전혀 상관없어…….”
이명은 얼굴이 빨개진 채 핸드폰을 들고 사진첩에서 그의 모친과 동생, 임 사범이 함께 있는 사진을 보여 주었다.
“아, 이건 사범님네 강아지, 똘똘이……. 귀엽지?”
얼마나 터무니없는 오해를 했던 것인가. 한선호는 오늘 ‘진실’에게 몇 대 얻어맞는 기분이었다. 하지만 기분 좋은 린치였다. 그런 게 가능하다면 말이지만.
한선호는 기분 좋게 웃으며 사진을 넘겨 보았다. 이명의 사진첩에는 사진이 몇 장 없었다. 똘똘이란 개 사진 몇 장과 이정이 자는 모습을 찍은 사진, 흔들린 야경 사진 몇 장이 다였다. 그럼에도 한선호에게는 한 장 한 장이 흥미로웠다.
‘너에 대해 더 알고 싶어.’
고개를 들자 5일 동안 꿈에 그리던 남자가 눈앞에 있었다. 입 안에 고기를 잔뜩 넣고서 우물우물 먹는 모습이 예뻤다. 술을 계속 마시는데도 뺨조차 빨개지지 않는 것도 신기하고, 눈이 어떻게 된 건 아닐지 그의 모든 게 좋았다. 하긴, 이명이 술을 잘 마신다는 건 진작 알고 있었다. 고2 수학여행 때 술자리에서 취하지 않은 건 한 명뿐이었으니까.
문득 9년 동안 빛바랜 기억이 천장으로 올라가는 연기처럼 꿈틀거렸다. 한선호는 눈을 느릿하게 깜빡거렸다.
“이명.”
이름을 나직하게 부르자 이명이 입을 움직이다 말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서 시선을 마주쳤다.
“진실 게임 할래?”
이명은 얼굴을 조금 붉혔다. 이내 입에 든 것을 삼키더니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어떻게 하는지 기억나?”
“음…….”
“너 그때, 잘 몰라서 뒤에서 구경했잖아.”
“아니거든. 이건 처음부터 했거든.”
이명은 톡 쏘더니 테이블을 치워 공간을 만들고 빈 소주병을 눕혔다. 그는 우물쭈물하며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허락을 맡듯이 한선호의 눈을 보았다.
“어떻게 하는지 안다며.”
“알아.”
이명은 단호하게 대답한 뒤 소주병을 돌렸다. 빙그르르 돌던 녹색 병 주둥이는 그들 사이 어딘가를 가리키며 멈추었다. 굳이 따지자면 이명 쪽에 가까웠다. 한선호가 눈썹을 으쓱해 보이자 이명이 눈을 가늘게 뜨며 상체를 조금 앞으로 내밀었다.
“첫 경험, 언제였어?”
수학여행에서 안 좋은 것만 배운 모양이지. 그의 표정은 어쩐지 비장하고 절실해 보였는데, 왜 그런지 한선호는 조금도 짐작할 수 없었다.
“27세, 겨울.”
아무렇지 않은 대답에 이명의 표정이 기묘하게 변했다. 복잡한 사칙 연산 문제를 암산으로 풀어야 하는 학생 같은 얼굴이었다. 한선호는 팔을 뻗어 소주병을 세차게 돌렸다.
병은 한동안 양철 테이블 위에서 쉭쉭 소리를 내며 돌았다. 이명은 모종의 간절함을 눈에 담고 병을 바라보고 있었다. 회전이 느려지며 소주병의 주둥이가 제 쪽을 가리켰을 때, 한선호는 손가락으로 쓱 밀어 이명을 향하게 했다. 이명이 얼빠진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자, 질문해야지.”
한선호는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 이명은 한참 머뭇거리다가 조용히 물었다.
“그럼…… 누구랑?”
“이명.”
“뭐……?”
그렇게 놀랄 일인가. 이명은 눈알이 빠질 것처럼 눈을 크게 뜨고 입을 가렸다. 한선호는 말없이 소주병을 또 돌렸다. 병은 아슬아슬하게 이명을 가리켰다.
“그럼 첫 연애는?”
아직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처럼 보이는 이명이 기다렸다는 듯이 물었다.
“27세, 겨울.”
“…….”
“상대는 동갑, 내년에 스물여덟이 되는 토끼.”
이명은 왜인지 모르게 울 것 같은 표정이었다. 그들은 한참 동안 서로 눈을 마주치지 않고 조용히 앉아 있었다. 탄내가 코끝을 찌른 건 그때였다. 한선호는 어떤 회식 자리에서도 이런 실수를 한 적이 없었다.
한동안 불판을 갈고 고기를 다른 종류로 더 주문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한차례 소란이 지나간 뒤, 다시 소주병이 돌아갔다. 이게 뭐라고 긴장이 됐다. 한선호는 이번에는 진심으로 질문할 기회가 왔으면 했지만, 불행히도 이번에도 병목이 이명을 향했다.
‘불공평하네, 나도 물어볼 거 많은데.’
이명은 곧바로 질문하지 않고 잠시간 시간을 끌며 쭈뼛거렸다. 그는 부끄러운 듯 고개를 들더니 아주 작게 물었다.
“첫사랑은…… 언제였어?”
시간을 거슬러 가며 의문을 하나씩 지워 나가는 소거법인가. 꽤 좋은 전략처럼 보였다.
“18세, 여름.”
한선호는 부드러운 색감의 갈색 눈을 똑바로 들여다보며 말했다. 소주를 한 잔 마시고, 손가락으로 소주병을 한 바퀴 돌려서 다시 이명을 가리키게 했다.
“13번, 이명.”
“…….”
“너 말고 누가 있었겠어.”
이명은 한참 동안, 불판에 새로 올린 고기가 모두 익을 때까지 고개를 푹 숙이고 앉아 있었다. 뭐가 그렇게 뜻밖일까. 첫사랑을 영원히 못 잊는 사람은 셀 수 없이 많지 않나. 한선호는 애인의 반응이 더 신기했다.
새로 구운 소갈비를 잔뜩 넣고 쌈을 싸서 진작부터 벌어져 있던 이명의 입에 억지로 밀어 넣었다. 이명은 얌전하게 입을 움직였지만 흔들리는 눈동자는 그대로였다.
“자, 나 돌린다.”
‘이번에도 걸리면 개인 정보 다 털리게 생겼다.’
한선호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병을 톡 쳤다. 이번엔 예감이 좋았다. 병은 그의 예감대로 두 바퀴를 꽉 채워 돌고 180° 더 돌아갔다. 이명이 놀란 듯 고개를 들었다. 한선호는 씩 웃으며 그를 바라보았지만 막상 질문하려니 궁금한 게 너무 많아서 생각을 좀 해야 했다.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한선호는 자신을 가장 괴롭혔던 문제를 과감하게 대면하기로 했다.
“명이야.”
“응.”
“그 티셔츠 주인하고 무슨 사이였어?”
“……애인.”
역시, 짐작이 맞았다. 속 시원해야 할 상황에 구름 위에 둥둥 떠 있는 것만 같던 기분이 바닥으로 곤두박질쳤다. 한선호는 이명을 난처하게 하고 싶지 않았지만 표정을 펴기가 쉽지 않았다. 그는 괜히 불판을 보며 익지도 않은 고기를 뒤적거렸다.
한동안 가만히 있던 이명이 말없이 소주병을 돌렸다. 병은 빠르게 돌다가 서서히 속도를 줄이며 이명을 가리켰다. 한선호는 어깨를 으쓱거리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이명이 손가락으로 병을 슬쩍 밀었다. 한선호는 이제 자신을 가리키는 병 모가지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누군지, 물어봐.”
이명이 웃음기 없는 표정으로 자신을 진지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한선호는 길을 잃은 기분이었다. 전 남친 이름을 물어보라니. 대체 무슨 생각일까.
“그런 걸 알아서 뭐 해.”
“얼른…… 물어봐.”
한선호는 이명이 아직까지 소중하게 여기는 예전 남자의 이름 따윈 궁금하지 않았다. 그보다는 언제 사귀었는지, 얼마나 특별한 관계였는지, 지금도 연락하고 지내는지가 궁금했다. 그러나 이명이 하라고 하니, 속는 셈 치고 그의 말을 들어 주었다.
“누군데?”
이명은 눈을 살짝 감고 깊은 한숨을 길게 쏟아 내더니, 소중한 것이 들어 있기라도 한 것처럼 오늘 내내 옆에 끼고 다니던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그것은 한선호가 상상 속에서 몇 번이나 불태웠던 흰색 티셔츠였다. 솔직히 꼴도 보기 싫었다. 그래서 고개를 돌렸건만, 이명이 손에 억지로 쥐여 주었다.
“자세히 봐. 거기 써 있으니까.”
“그게 무슨…….”
한선호는 구겨진 티셔츠를 쥔 채 굳어 있다가, 문득 어떤 생각이 들어서 살며시 펴 보았다. 양손으로 어깨선을 집어 들자 낡은 옷감이 펴지며 네크라인이 드러났다.
‘설마……!’
상품 태그에 흐릿한 흔적이 있었다. ‘XL’이란 글자 아래에 남아 있었지만 자세히 보지 않으면 알 수 없는, 아주 오래되어 보이는 자국이었다. 한선호는 눈을 깜빡였다. 아무리 선명하지 않더라도 제 글씨를 알아보지 못할 리 없었다.
“수학여행 때였어. 계획적으로 훔친 건 절대 아니고, 어쩌다 보니…….”
얼굴이 새빨갛다 못해 터질 것 같은 이명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의 표정을 보아하니 큰 용기를 갖고 밝힌 것 같았다. 한선호는 놀랍기도 하고 황당하기도 해서 그의 얼굴만 바라보았다. 이명은 불안한 표정으로 입술을 깨물었다.
“지난주에…… 사실대로 말 못 해서 미안해.”
“그것도 모르고 난, 예전 애인 거라고 오해했는데.”
“알아. 아는데, 그래도 말하기 싫었어.”
“…….”
“나 같은 게 널 좋아해서 음습하게 옷까지 훔쳤다는 걸, 네가 아는 게 죽기보다 싫었어.”
“뭐?”
“휴, 차라리 말해 버리니까 속 시원하다. 그래, 나 변태야. 너 안 됐다. 애인이 변태라서.”
이명은 속사포처럼 쏟아 내더니 소주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그걸로도 모자랐는지 한 잔을 꽉 채워 곧바로 비웠다. 그는 손등으로 입가를 닦고 여전히 새빨간 얼굴로 다른 곳을 보았다.
뒤늦게 모든 것을 이해한 한선호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졌다. 그는 9년 만에 되찾은 제 옷으로 얼굴을 가린 채 소리 없이 웃었다. 이제까지의 모든 해프닝이 우습게 느껴졌다. 그와 이명을 가로막고 있다고 생각한 뾰족한 장애물들은 사실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한선호 앞에는 이명과의 해피 엔딩만이 끝없는 들판처럼 펼쳐져 있었다.
티셔츠를 내리자 곤혹스러워 보이는 이명과 눈이 마주쳤다.
“명이가 진짜 음습한 게 뭔지 모르는구나.”
“응? 그게 뭔데?”
“고2 때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면 너 깜짝 놀랄걸.”
“엇……. 진실 게임 마저 하자.”
한선호는 이명의 표정이 집착적인 궁금증으로 물드는 것을 지켜보며 소주잔을 비웠다. 곧 이명의 손에 초록색 병이 힘차게 돌아갔다.
‘대체 그걸 어떻게 설명해야 덜 변태처럼 보이려나.’
한선호는 실실 웃으면서도 한편으론 골치 아픈 고민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