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 열일곱, 여름 (18/21)

1. 열일곱, 여름

두 시간 전에 들은 말이 아직까지 머릿속을 맴돌았다. 뒤에서 욕하는 걸 흘려들은 적은 많았지만 누가 얼굴을 보며 그 단어를 똑똑히 말한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너무 화가 나다 보니 머릿속이 새하얘지고 입술이 덜덜 떨렸다. 말을 한마디라도 했다가는 눈물이 날 것 같아서 그 녀석을 노려보기만 했다. 결국 반격조차 못 한 게 상처로 남았다.

‘난 바본가.’

체력장을 한다길래 달리기 종목에서 빼 달라고 반장에게 미리 말했다. 지난달에 쓰러진 이후로 그전보다 기침도 자주 나고 체력이 약해졌기 때문이었다. 학교라면 꼴도 보기 싫었지만 엄마와 아빠가 싸우는 게 싫어서 억지로 얼굴만 내비치고 있었다. 출석도 겨우 하는 마당에 1,000m 달리기 같은 걸 할 처지는 아니었던 것이다.

반장은 알겠다고 말해 놓고서 당일에 이명을 아무렇지 않게 출발선 앞에 세웠다. 이명은 그가 잊어버렸겠지 싶어서 같은 말을 한 번 더 반복했다. 뛸 수 없다고. 그러자 반장은 짜증을 냈다.

‘존나 어이없네. 병신인 게 뭐 자랑이라고.’

날 선 대화가 몇 차례 오가다가 들은 말이 저거였다.

‘정말 짜증 나.’

지금이라면 똑똑히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건강 상태가 안 좋아서 숨이 차도록 달릴 수 없다고 미리 네게 말했다고. 내가 몸이 안 좋은 게 문제가 아니라 이 간단한 전달 사항을 선생에게 똑바로 전하지 않은 네 무능함이 문제라고.

하지만 늦어도 너무 늦었다. 내일 학교에서 다시 따져 물어봤자 그 애는 이 사건을 기억조차 못 할 것이다.

애들은 늘 그런 식이다. 뭐든지 함부로 말하고 잘 몰라도 일단 지껄이고 본다. 그러고 나서는 금세 잊어버리지. 아, 그런 일이 있었던가? 응? 누구? 이…… 명? 기억이 안 나네. 그게 누구더라? 모르겠고 매점이나 가자.

곱씹을수록 화가 났다. 무심코 던진 돌에 맞았다고? 돌이 아니라 바위겠지. 사람을 열 받고 슬프게 해서 죽일 수도 있는 바위. 그 자리에 사람이 있는지 없는지, 있다면 네가 별생각 없이 내뱉은 말을 듣고 무슨 생각을 할지 전혀 생각이 안 미치는 거야? 앞을 보고 있어도 눈 감은 거나 마찬가지인 네게는 애초에 무리인 거야? 과연 우리 둘 중에 누가 정상인이지? 내가 볼 때 너는 기억력이 떨어지거나 성격이 나쁘거나 둘 중 하나인 것 같은데, 이래도 내가 병신이야? 내가 병신이라면, 아무 생각도 없는 돌머리나 다름없는 넌 대체 뭔데?

퍼석퍼석한 모래 위로 운동화가 신경질적으로 박혔다. 모래가 잔뜩 들어와 발밑에 겉돌았다.

‘정말 짜증 난다.’

운동장에 굳이 모래를 깔아 놔야 했을까, 이명은 자연스럽게 불만을 품었다. 사춘기가 시작된 이래 그는 세상과 치열하게 대치하고 있었다. 불행히도 그보다 압도적으로 힘이 센 세상은 늘 좌절을 안겨 주었지만.

핸드폰을 꺼내 음악 음량을 끝까지 높였다. 이어폰이 쏟아 내는 소리는 불쾌할 정도로 시끄러웠지만 듣고 있자니 답답한 속이 약간 풀리는 것 같았다.

‘다 싫어. 특히 학교, 정말 싫어.’

이명은 아무것도 없는 바닥을 세게 찼다. 거칠게 튄 모래가 햇빛을 받아 반짝거렸다. 쓸데없이.

‘아빠만 아니면 안 다녀도 될 텐데. 진짜 싫다.’

볼륨을 최대치로 해 놨는데도 왼편에서 시끄러운 소음이 이어폰을 뚫고 들어왔다. 머리가 텅텅 빈, 시끄러운 놈들이 끼치는 민폐였다.

‘축구하는 애들, 세상에서 제일 싫어.’

하나같이 멍청할 게 분명할 애들이 땀을 뻘뻘 흘리며 공을 차고 있었다. 비슷한 나이 또래 애들은 대체로 이명을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중 특히 건강한 애들은 이명을 막 대해도 상관없다고 착각하는 경향이 있었다. 아무 노력 없이 활력 넘치는 신체를 타고난 것뿐이면서, 자신들이 선천적으로 폐가 안 좋았던 이명보다 우월한 인간이라고 믿는 것 같았다.

‘나도 이렇게 태어나고 싶지는 않았어.’

남들 하는 거 다 하면서 살고 싶었다. 햇살 아래서 땀 흘리고, 공도 차 보고, 무엇보다 숨이 턱 끝까지 차오를 정도로 뛰어 보고 싶었다. 저 골 빈 놈들처럼 아무 생각 없이.

울분을 느끼며 걷고 있던 그때 축구하던 무리가 이명에게 빠르게 다가왔다. 어떤 멍청한 녀석이 그쪽으로 패스하는 바람에 핑그르르 회전하는 공이 시야 한가운데 들어찼다.

피하려고 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공은 빠른 속도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명은 곧 머리에 공을 맞겠구나 직감했다. 본능적으로 몸이 경직되고 눈이 질끈 감겼다.

순간, 가까이에서 땀 냄새가 훅 나며 팔꿈치가 누군가의 탄탄한 팔에 부딪혔다. 잔뜩 움츠린 몸이 강한 힘에 밀리며 이명은 눈을 떴다.

그를 밀친 남자아이는 조금 전까지 이명의 머리가 있던 곳으로 날아온 공을 가슴과 한 손으로 받았다. 그러고서 반대편 손으로 비틀거리는 이명의 팔을 잡아끌었다.

“미안, 안 다쳤지?”

소년이 씩 웃으며 말했다. 이명은 온몸이 굳은 나머지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저 눈을 크게 뜨고 그를 바라보았을 뿐이다. 소년이 의아하다는 듯이 눈을 몇 번 깜빡이자, 이명은 그제야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그는 다치지 않았다. 그리고 만약 다쳤더라도 사실대로 말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소년은 절대로 실망시켜선 안 될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행이다.”

그는 이명의 손목을 놓았다. 공을 살짝 던지고 공중에서 뻥 차더니 그쪽으로 달려 나갔다. 금세 멀리 가 버린 소년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른 아이들과 뒤섞였고, 이명은 우두커니 서서, 바보가 된 기분으로 어느새 작아진 실루엣을 바라보았다.

정말 이상한 아이였다. 어깨도 넓고 키도 웬만한 어른보다 큰데, 얼굴은 아이처럼 귀여웠다. 이명이 아는 한 세상에서 그보다 청량하게 웃는 사람은 없었다.

조금 전의 상황으로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한 떼의 시끄러운 애들이 먼지를 일으키며 공을 차다가 사소한 일로 잠시 멈추었고, 그 무가치한 시합이 재개되었을 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다른 애들은 흐릿해 보이고 소년이 돌아다니는 모습만이 또렷하게 보였다.

‘정말 이상한 일이었어. 뭐가 이상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이명은 뒤늦게 자신이 굉장히 기분 나쁜 상태로 하교하던 중이란 사실을 기억해 냈다. 억지로 발걸음을 옮기자 다리가 왜인지 어색하게 느껴졌다. 조금 전에 귀에서 떨어졌던 이어폰 두 쪽이 모래 위에서 질질 끌리고 있었다. 선을 끌어당겨 살펴보자 음악이 흘러나오는 구멍마다 모래가 박혀 있었다.

이명은 이어폰을 손바닥에 대고 털며 운동장에 모래가 깔려 있는 게 역시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바닷가도 아닌데 왜 하필 모래일까. 대안은 없는 걸까.

어느새 조금 전까지 그를 사로잡았던 분노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에 알 수 없는 훈기가, 간지러운 바람을 닮은 미소가 어깨를 움츠러들게 했다.

이명은 남몰래 웃고서 정말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무엇이 이상한지는 잘 모르겠지만.

― 3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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