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6. 스물일곱, 겨울 (17/21)

16. 스물일곱, 겨울

이명은 잠에서 깼다.

머릿속이 복잡하고 눈꺼풀이 무거웠다. 본래 꿈을 잘 꾸는 편이 아닌 그에게 밤이 소낙비처럼 쏟아 놓은 기억의 파편은 낯설고 어지럽기만 했다.

“으음…….”

감각은 천천히 돌아왔다. 척추에 날카로운 통증이 느껴지며 미간이 찌푸려졌다. 곧 이명은 손끝에 만져지는 이불의 감촉이 익숙지 않다는 걸 알아챘다. 이윽고 따뜻하다 못해 더운 체온이 몸을 완전히 감싸고 있다는 걸 느꼈다. 그게 무엇인지 정체를 짐작할 만큼 정신이 깨어났다. 전날의 기억이 밀어닥치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눈을 뜨자마자 블라인드 사이로 들어온 빛이 각막을 찔렀다. 그보다 당혹스러운 건 제 어깨를 안은, 검고 흰 줄무늬 문양이 비친 팔이었다. 햇살을 한껏 받았는데도 붉은 기가 감도는 단단한 팔은 이명을 연인이라도 된다는 양 다정하게 안고 있었다.

이명은 눈을 감은 남자의 얼굴을 가까이서 살폈다. 짧고 숱 많은 속눈썹이 얌전하게 아래로 내리깔린 모양을, 조각처럼 솟아오른 콧날과 부드럽게 떨어지는 콧방울을, 이제 어린 느낌보다 위압감을 풍기는 눈매와 살짝 벌어진 입술을. 그러나 여전히 입매만큼은 어딘가 아이처럼 순진해 보이는 인상이 남아 있는 것도 같았다.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한선호의 입술로 가져갔다가 의식적으로 멈추었다.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짧게 흔들었다.

‘너, 나 좋아하잖아.’

과거엔 그랬지. 너를 처음 본 순간부터 고등학교 시절 내내 좋아했어. 가장 바보 같은 방식으로 짝사랑을 했지. 하지만 지금은 달라.

‘동창회도 나 보러 왔잖아. 친구도 없는 주제에.’

맞아. 다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미련이 남아 있었나 봐. 네가 알아챘을 정도면 얼빠진 사람처럼 너만 보고 있었나 보지. 네가 손을 내밀길래 잡고서 하룻밤을 즐겼어. 그래서 뭘 어쨌다는 거야?

이명은 눈을 번쩍 뜨고서 남자의 가슴이 고르게 오르내리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러는 동안 그의 눈매에 서려 있던 독기가 흩어졌다. 의식적으로 천장으로 눈길을 돌렸다. 한선호를 계속해서 보고 있어선 안 될 것 같았다.

이명은 상대방의 의중을 읽도록 훈련받았으며 계산을 숨 쉬듯이 편하게 할 줄 아는 사람이었다. 잠에서 깨어난 한선호가 자신을 보고서 얼마나 무관심한 표정으로 어떤 식의 독설을 내뱉을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런 것을 자연스럽게 넘기거나 보기 좋게 받아칠 자신은 없었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 때문에 마음이 쓰라렸다.

기사가 아니더라도 누구든 손쉽게 알 만큼 뻔한 일이었다. 반지를 낀 남자가 잘 알지도 못하는 동창과 밤을 함께 보냈다고 한들 그게 무슨 대단한 의미겠는가. 환상과 같은 잠깐의 안락함과 머지않은 미래에 반드시 닥쳐올 곤경. 둘 중 어느 것이 더 무거운지 저울질하는 것 자체가 어리석은 일이었다.

깨어나지 않은 척, 마치 연인인 양 품에 안겨 있고 싶은 욕심이 들었지만 이명은 한선호의 팔을 조심스럽게 들어 올렸다. 몸을 꼼지락거리며 그의 품으로부터 빠져나오는 동안 한선호는 크게 뒤척일 뿐 깨어나지 않았다.

큰 소리가 날까 봐 샤워는 꿈도 못 꾸고 세면대에서 간단하게 씻었다. 어차피 몸은 정사의 흔적이 남지 않았을 정도로 깨끗했다. 전날 기절하듯이 잠든 것 같은데 머리카락에서는 모르는 샴푸 냄새가 났고 아무렇게나 벗어 놨던 옷은 탁자 위에 곱게 개어져 있었다. 그래서 더욱 꿈결처럼 느껴졌다.

이명은 가장 위에 놓인 터틀넥을 거칠게 당겨 머리 위로 입었다. 옷을 하나하나 걸치면서도 시선은 자꾸 침대로 향했다.

‘이런 식의 관계가 어지간히 익숙한가 보다.’

스스럼없이 모텔로 데려갔을 때부터 알아봤어야 했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성기로 손이 가는 것도 상당히 자연스러웠지. 상대가 누구든 상관없다는 듯 몰아붙이는 행위, 그리고 못 버티고 기절한 파트너에게 베푸는 깔끔한 마무리까지.

“하하, 하룻밤 상대에게 하는 것치고 서비스가 좋네…….”

여유로운 척 중얼거려 봤지만 이명은 이미 지나간 일들 때문에 고통을 느꼈다. 또한, 앞으로 다가올 일들이 두려워 견딜 수가 없었다.

침대에 눈길을 주지 않은 채 문을 밀고 밖으로 나섰다. 정신없이 들어오느라 기억에 조금도 남지 않은 침침한 복도를 비틀비틀 지나쳐, 작은 엘리베이터에 몸을 실었다. 죄인처럼 몸을 수그리며 바깥으로 나가자 공명정대한 햇살이 무자비하게 내리쳤다. 지난밤에 대해 추궁당하고 채찍질 당하는 것 같아서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이명은 한기를 느끼며 한 걸음 한 걸음을 힘겹게 내디뎠다.

특별한 무언가를 기대하지 않았다. 기대해서는 안 됐다. 그전까지는 기대감이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술자리에서 반지를 본 순간부터 희망이 사라졌단 걸 알았다.

‘반지, 빼.’

자조적인 웃음이 입가에 떠오르며 자신을 해쳤다.

그깟 반지를 빼면 뭐가 달라진다고 그런 말을 했을까. 반지를 뺀다고 그를 잠시나마 가질 수 있다고 착각이라도 한 건가. 끝까지 왜 그렇게 순진하고 바보 같았을까. 버릇과도 같은 복기는 이명을 더욱 비참하게 만들었다.

흰 돌, 검은 돌, 흰 돌, 검은 돌. 곱씹을수록 한선호의 손바닥 위에서 끌려다니기만 했다. 대충만 셈해 봐도 빼앗긴 집 수가 따낸 집 수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잃은 것은 여럿인 데 반해 얻은 것은 한 가지도 없었으니까.

스물일곱 살 한선호는 이명의 첫사랑이란 대마를 죽였다. 실제와 괴리된 채 환상 속에서 애지중지 키워 온 아름다운 말을 포위해 숨통을 끊었다. 검은 밤하늘처럼 서늘한 표정의 사내가 페인트처럼 덧칠된 바람에 환하게 웃고 있는 완벽한 소년의 모습을 떠올릴 수 없었다. 그것은 이명이 힘들 때마다 떠올렸던, 무엇보다도 소중한 기억이었다. 이제 그는 돌아갈 곳이 없었다.

‘그래선 안 됐는데.’

후회해 봤자 소용없는 일이야. 이명은 불쑥 들린 마음의 소리를 일축했다.

‘욕심이 났어.’

장발장은 배가 고파서 빵을 훔쳤지. 선악과를 딴 이브는 뱀이 부추겼다지. 네겐 아무 핑곗거리도 없잖아.

‘그래도 내게 관심을 보여 줬을 땐 기뻤어.’

그야 그랬지만, 그런 건 제대로 된 관심이라고 할 수 없어.

‘결국 자서 좋았잖아. 그거면 된 거 아니겠어?’

급기야 그 불쾌한 소리는 치부를 건드리고 말았다. 한선호가 자신을 하룻밤 사이 갖고 놀 만한 장난감 취급하는 걸 알면서도 그의 손길에 황홀해하지 않았던가. 거친 행위를 힘들어하면서도 그가 멈추지 않기를 바라지 않았나. 외면한다고 해서 없던 일이 되지는 않는다. 그가 이명의 몸에 새겨 놓은 쾌감은 그림처럼 생생하고 조각처럼 뚜렷했다. 그렇게 생각하면 딴 집이 한 개라도 있다고 봐야 하나.

“최악이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아무렇게나 움직이는 다리에는 힘이 없었다. 정처 없이 걷던 이명은 어깨를 세게 치는 무언가 때문에 고개를 들었다.

“앞 좀 보고 다녀요!”

뒤를 돌아보았지만 신경질적으로 소리친 여자의 뒷모습은 이미 멀어진 뒤였다. 정신을 차려 보니 층계 한중간이었다. 이명은 주변을 둘러보고서야 자신이 지하철 역사로 들어왔다는 걸 알게 되었다.

‘정말 대책 없다.’

주머니 속을 더듬자 손끝에 전원을 꺼 둔 핸드폰과 신용 카드가 만져졌다. 기화 호텔에서 발급해 주었는데 미처 반납하지 못한, 두꺼운 플라스틱 출입증도 있었다. 그제야 까맣게 잊고 있던 전날의 대국이 떠올랐다.

세계 대회의 결승에서 흔치 않은 실수로 패배했다. 그건 술김에 동창과 몸을 섞은 것보다 훨씬 심각한 문제였다. 이명의 인생 전체를 놓고 보았을 때 더 큰 영향을 미칠 텐데, 그런데도 전자는 아무렇지도 않고 후자에만 신경이 쓰이는 게 우스웠다.

‘그냥 택시 탈 걸 그랬어.’

어슬렁어슬렁 느린 걸음으로 개찰구를 통과했다. 계단을 다시 지나갈 자신이 없어서 그냥 들어왔지만, 이곳에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이명은 간절하게 혼자 있고 싶었다.

지하철 열차가 그의 주변으로 더욱 많은 사람을 쏟아 냈다. 어떤 남자가 어깨를 밀치고 가는 바람에 하마터면 넘어질 뻔했다. 무례한 뒷모습을 쏘아보고 있다가 다시 허리를 펴며 일어났을 땐 열차가 플랫폼을 떠난 뒤였다.

‘되는 게 하나도 없어’

어쩔 수 없이 대기선 앞에 서자 수많은 얼굴이 이명의 곁을 지나갔다.

어릴 땐 사람들의 얼굴이 다 다르게 생겼다는 게 신기했다. 현실이 바둑판과 확연히 다르다는 걸 알게 된 건 훨씬 나중의 일이었다. 이명은 모두 똑같이 생긴 기석을 꽤 잘 다뤘지만 사람 사이의 일에 관해서는 젬병이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사연을 갖고 있고 저마다 다른 곳으로 흘러갔다. 이명 또한 살아가면서 우연히 사정이 비슷한 사람을 마주쳤고 잠시 동안 누군가와 같은 길을 걸어간 적도 있었다. 그러나 대부분 이명을 이해하지 못했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였다. 서로 다른 상황 때문에, 살아가는 세계가 달라서, 이기심 때문에, 혹은 겁이 나서 이명은 늘 흐름 뒤로 한 발짝 물러섰다. 결과적으로 그에게는 가족 외엔 아무도 남지 않았다.

아무것도 아닌 인연, 과거와 달라진 모습.

한선호까지 갈 것도 없이 동창회에서 본 얼굴들은 얼마나 변해 있었던가. 모두 어디론가 움직이고 있었다. 정체되어 있던 건 바둑판 안에서 살아온 자신뿐인 것만 같았다.

‘한심하네.’

플랫폼 위로 해가 떠오르며 머리 위로 쨍한 빛이 쏟아졌다. 이명은 눈을 반쯤 감으며 열차가 곧 들어온다는 안내 신호를 가만히 들었다. 눈을 내리깔고 빛으로 양분화된 선로를 바라보았다. 한쪽은 환하게 드러난 반면 반쪽은 검은 그늘에 잠식되어 있었다.

부드러운 키스와 손가락의 반지.

뜨거운 숨결과 차가운 표정.

다정한 손길과 거친 몸짓.

18세의 한선호와 27세의 한선호.

“부질없다.”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 법이라고 했다. 8년 동안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간직해 온 어리석음의 종착역이 여기였다. 이명은 이번에야말로 한선호를 제 인생에서 스쳐 보낼 때라고 생각했다. 다른 사람들처럼 아무것도 아닌 인연으로. 아무 영향도 미칠 수 없는 기억으로.

‘머리 아파.’

왼손을 들어 이마를 짚었다. 그런데 시야 한구석에 이질적인 무언가가 보였다. 이명의 손가락에 무언가 끼워져 있었다. 금속 테두리에 빛이 반사되며 반짝 눈을 찔렀다.

해를 등지고서 열차가 들어오고 있었다. 덜컹거리는 소리가 귀를 울리며 진동이 돌바닥을 통해 살짝 전해졌다.

처음에는 잘못 보았나 싶었는데 눈을 몇 번을 깜빡여도 금색 고리는 사라지지 않았다. 이명은 태어나서 반지를 한 번도 껴 본 적이 없었다. 게다가 그 반지는 그의 손가락 둘레보다 커서 한참 겉돌았다.

왼손이 눈높이로 서서히 내려왔다. 플랫폼 뒤에서 비추던 햇빛이 열차에 가려졌다가 차창을 통해 쏟아지기를 반복했다. 그래서 은은하게 윤이 나는 반지 표면 위를 환한 빛이 1초마다 찬란하게 장식했다.

반짝반짝. 반짝반짝. 반짝반짝.

이명은 멍한 표정으로 제 손등을 바라보았다.

“……!”

국면은 조금 전과 판이해졌다. 상대의 의도를 파악할 만한 강력한 근거가 손에 들어왔기 때문이다. 흐릿하고 모호했던 무언가는 어느새 감정이 아닌 논리의 영역에서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되어 있었다. 한 가지 가설을 가능한 한 모든 기억에 적용해 보자, 심장이 점점 더 빠르게 뛰었다.

또 한 번 열차가 사람을 쏟아 내고 새로운 승객을 잔뜩 태웠다. 이명은 지하철에 승차하지 않고 천천히 닫히는 문을 바라보았다. 그는 스크린 도어가 닫히기 전에 몸을 반대 방향으로 휙 돌렸다.

낡은 러닝화가 돌바닥을 힘차게 밟으며 몸을 앞으로 밀어냈다. 모르는 얼굴들을 헤치고 누구보다 빠르게 앞으로 나아갔다. 계단과 복도를 지나, 개찰구를 통과해 아스팔트 길을 만나도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손끝이 얼 정도로 추운 날이었다. 이명은 제가 입에서 뱉어 내는 숨의 색을 볼 수 있었다. 구름 모양의 흰색 입김이 점점 흐트러져도, 숨이 조금씩 차올라도 그는 멈추지 않았다.

‘명이야, 너 무슨 음악 좋아해?’

‘명이야, 괜찮아?’

‘명이 너, 집 어디야?’

‘명이야, 출출한데 뭐 먹을래?’

뒤죽박죽 두서없는 기억의 고리가 열차처럼 밀려들었다. 한선호가 단지 반장으로서 다른 아이들에게도 보이는 친절을 자신에게도 동등하게 베풀었다고 생각했다. 만약에, 만약에 그 가정이 틀렸다면…….

느릿하게 걷는 사람들을 스쳐 달렸다. 칼바람이 머리카락을 가르고 외투 안으로 들어왔지만 도리어 몸에서 열이 나는 것 같았다. 아직 셔터를 올리지 않은 회색빛 상가 건물들이 휙휙 지나갔다. 학생 때 이후론 달려 본 적이 없어서 들어 본 적도 없는 종류의 숨소리가 귓가에 웅웅거렸다.

‘그래도 담배 말고는 변한 게 없네.’

8년이 지난 지금까지 무엇이 변했고 무엇이 변하지 않았는지 전부 기억하고,

‘다 봤는데, 술 마시면서 나만 보는 거.’

계속 나를 지켜보고 있었을까.

‘나 좋아하잖아.’

너도…… 날 좋아하는 걸까.

“헉, 허억, 헉, 헉…….”

폐가 찢어질 듯 아팠다. 그러나 이명은 그 순간만은 가슴이 터져도, 몸이 부서져도 상관없었다. 늘 달려가는 그의 뒷모습을 지켜봐 왔다. 이번에는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기 위해 달려 나가고 싶었다. 단 한 번만이라도.

이명은 앞을 가로막는 막을 뚫고 달렸다. 좌절의 기억을, 모르는 사람들의 조롱을, 무관심한 말소리를, 아무도 앉고 싶어 하지 않는 그의 옆자리를, 그를 뒤로 잡아끌던 엄마의 걱정을, 100m 출발선과 결승선을, 그를 병신이라고 손가락질하던 모든 음성을.

나약한 이명, 자신감 없고 숫기 없는 이명,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이명. 자신이 그와 어울리지 않는다는 자조를 뒤에 버려둔 채, 가슴이 터지도록 달렸다.

“헉, 헉……!”

익숙한 거리가 눈에 들어왔을 때 이명은 걸음을 늦추었다. 결승선이었다. 성취감을 느끼기 이전에 폐가 호흡하느라 바빴다. 귀가 제 들숨과 날숨 소리로 시끄러웠다.

이명은 무릎에 손을 얹고 숨을 골랐다. 고개를 다시 들 힘을 비축하기 위해선 한참 동안 그러고 있어야 했다. 거칠었던 호흡은 조금씩 안정되었고 그러고 나니 흐릿했던 시야가 천천히 초점을 되찾았다.

전날 색정적인 불빛으로 뒤덮여 있던 거리는 평범하고 조용해 보였다. 눈에 익은 건물 앞에 한 남자가 그림처럼 서 있었다. 검은 코트 주머니에 한 손을 찔러 넣은 모습이었다. 이명은 용감하게 달려온 게 무색하게도 그를 보자마자 몸이 경직되어 버렸다.

이명을 발견한 한선호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이명은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뜨리고서 아직 반지를 빼지 않은 왼손을 오른손으로 꽉 붙잡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막상 그를 보니 자신감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불현듯 다른 생각이 치밀었다. 혹시 계산이 틀렸던 건 아닐까. 아니, 애초에 제대로 계산하기는 한 걸까. 여기까지 확신을 하고 달려왔으나 그 믿음에 얼마나 구멍이 많은지.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입술이 덜덜 떨렸다. 모든 것이 불완전한 한 가지 가설에서 시작되었다. 반지, 그놈의 반지 때문이다. 왜 남의 손가락에 반지를 끼워 놓아서…….

‘나는 왜 이렇게 대책이 없을까.’

입술을 꽉 깨물어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상대에겐 하룻밤의 유희였을지도 모르는데, 감 하나만 믿고 달려와서 그를 곤란하게 만드는 건 아닐까. 하지만, 그렇다면 반지는 왜…….

“명이야.”

부드러운 목소리는 이명을 더 헷갈리게 했다. 안절부절못하며 제 신발만 보고 있는데 먼 곳에서 인기척이 났다.

화났을까? 다시 찾아온 게 문제일까? 그렇게 말도 없이 가 버린 게 문제였을까? 내가 없는 방에서 깨어나서 언짢았을까?

한선호는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전혀 모르겠다.

이윽고 침착한 구두 소리가 들렸다. 뚜벅 뚜벅 뚜벅. 그가 코앞에 올 때까지 도무지 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이명은 겁에 질려 있다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들었다.

그 순간에 건물 그늘, 어둠 속에 묻혀 있던 실루엣이 환한 햇살 아래로 걸어 나왔다.

“가 버린 줄 알았잖아.”

햇살을 한껏 받은 한선호가 눈꼬리를 내리며 웃고 있었다. 10년 전, 그를 처음 보았던 날처럼.

이명은 그물에 꽁꽁 묶인 사람처럼 움직일 수가 없었다. 목과 귀에 열이 뜨겁게 올랐다.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몰라서 우왕좌왕하다가 고개를 돌렸다. 왜 여기까지 다시 왔는지 설명해야 하는데 몸이 굳어서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반지, 반지 때문…….”

더듬거리는 동안 한선호가 한달음에 가까워졌다. 바로 앞까지 성큼 다가오더니 이명의 어깨를 와락 당겨 안았다. 반지 같은 것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다는 듯이,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시선은 신경 쓸 거리도 아니라는 듯이 그를 품에 꼭 안았다.

단단한 가슴에 뺨이 닿았다. 그 순간, 머릿속으로 떠올렸던 수많은 생각이 무색해졌다. 이명은 애써 구축했던, 그러나 별 소용없었던 울타리가 일시에 허물어지는 것을 느꼈다. 눈물이 날 것 같은 기분으로 한선호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한선호는 이명을 품에 더욱 깊이 안더니 그의 어깨에 코를 비볐다. 오해할 여지가 없는 표정으로 그를 내려다보고서 이마에 입을 맞추어 쪽 소리를 냈다.

그러자 머릿속을 떠돌던 수많은 의문들 중 하나가 확실하게 풀렸다. 해답은 지금, 여기에 있었다. 제 몸을 뒤덮은 남자의 뜨거운 체온이 말해 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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