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B. 열여덟, 여름
“야, 나 체육복 좀.”
이명은 제 자리 앞에 와서 체육복을 맡겨 놓기라도 한 듯 요구하는 남학생을 올려다보았다. 눈이 쭉 찢어지고 입술이 두꺼운 아이였다. 평소에 말을 섞어 본 적이 한 번도 없는.
“나 입어야 되는데.”
“오늘 체력장이래. 니 어차피 안 뛰잖아.”
빌리러 온 주제에 퉁명스럽게도 내뱉는다. 너 같은 것에게 체육복이 무슨 소용이냐는 듯.
맞는 말이기는 했다. 이명은 체육 시간마다 그늘에 앉아 있는 게 다였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체육복을 입지 않아도 되는 건 아니었다. 체육 교사는 체육복을 입고 오지 않는 학생들을 엎어 놓은 채 엉덩이를 열 대씩 때리고, 그것으로도 모자라 1시간 내내 손을 들고 있게 했다.
“미안. 나도 입어야 해서.”
이명은 가방에서 체육복을 꺼내 한 손에 들고 일어섰다. 교실 뒤편에 다다랐을 때 뒤에서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 새끼 때문에 나 오늘 뒤졌다.”
이명의 발길이 한순간 멈칫했으나 그 소리를 못 들은 척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화장실에서는 늘 오물의 악취와 걸레 썩는 냄새가 났다. 모르는 남학생 두 명이 소변기 앞에 나란히 서 있었다. 이명은 그들을 지나쳐 마지막 칸 문을 열고 들어갔다. 체육복을 옷걸이에 얹어 두고 와이셔츠 단추를 푸는 과정이 제법 매끄러웠다. 이명은 늘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어서 꽤 능숙하게 할 줄 알았다.
중학생 때까지는 단순히 누가 가슴과 옆구리 사이에 남은 수술 자국을 볼까 봐 그랬다. 아주 자세히 보지 않으면 티 나지 않는데도 그때는 그게 그렇게 신경 쓰였다. 현재는 조금 더 복잡한 문제였다. 그는 누가 자신의 허여멀겋고 빈약한 몸을 보는 게 싫었고 반대로 동갑내기 아이들의 건강한 신체를 보고 싶지도 않았다. 비단 자신과 비교되어서는 아니라, 남자아이를 좋아하게 된 이후로는 남자의 벗은 몸을 보는 것이 못 견디게 불편해진 탓이었다.
좁은 화장실 칸에서 옷을 모두 갈아입고서 교실로 돌아왔을 땐 애들이 교실 벽면에 모여들어 웅성거리고 있었다.
“오, 나 2등 올랐다.”
“어디? 네 이름, 대체 어디까지 내려가야 하냐…….”
모두 중간고사 얘기로 바쁜 가운데, 이명은 혼자 자리에 앉아 체력장에 관해 생각했다. 이전에는 체력장을 제대로 받아 본 적이 없었다. 엄마가 무리하지 말라고 당부하기도 했지만, 작년까지는 몸이 정말 안 좋았다.
‘오늘 체력장이래. 니 어차피 안 뛰잖아.’
오늘은 다른 아이들처럼 뛰고 싶다는 오기가 들었다. 오래달리기 같은 건 무리겠지만 100m 달리기 정도는 괜찮을지도. 올해는 기침이 심하게 난 적 한두 번을 제외한다면 꽤 멀쩡하게 지내고 있었으니까. 아무도 신경 쓰지 않겠지만, 만약 완주할 수 있다면 무척 의미 깊은 일이 될 것 같았다.
곧 체육복을 갈아입은 애들이 교실에서 우르르 빠져나갔다. 이명은 교복을 책상 위에 접어 놓고 행렬의 끄트머리를 따라갔다.
그날은 평범하게 무더운 여름날이었다. 햇빛이 등을 억누르고 습기가 팔다리를 모래 밑으로 끌어들이는 느낌이 드는, 그토록 발걸음이 무거운 날에 이명은 달리기로 결심한 것이다. 가슴이 조금 두근거렸다.
“너희 작년에 100m 몇 초 나옴?”
“나 13초 초반.”
“12초.”
“나나 11초!”
“씨발, 다들 자메이카인들이세요?”
다른 아이들의 대화를 엿들어 보니 15초 안으로만 들어가도 ‘선방’한 것이라고들 했다. 이명은 한 번도 기록을 재 본 적이 없어서 겁이 났다.
‘이러다 나만 20초 넘으면 어떡하지? 그럼 다 쳐다볼 텐데. 그냥 빠질까…….’
운동화 앞코에 꽂혀 있던 시선이 갈 곳을 잃고 흔들렸다. 눈앞이 캄캄해지고 식은땀이 났다. 이대로라면 달라지는 게 아무것도 없지 않은가.
담임에게 특별 취급받는 이명, 무슨 짓을 해도 혼나지 않는 이명, 언제나 예외인 이명, 아프고 약한 이명, 늘 도와줘야 하는 이명, 불쌍한 이명.
‘명이는 좋겠다.’
다시는 그런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다. 소년과 동등한 입장에서 서고 싶었다. 단 한 번만이라도.
이명은 눈에 힘을 주고 고개를 들었다.
그때 계시처럼 호루라기가 삑 울렸다. 육안으로 보기에도 멀리 떨어진 곳에 체육 교사가 서 있었다. 반장이 1, 2번을 부르자 남학생 두 명이 긴장한 표정으로 출발선 앞에 서서 준비 자세를 잡았다.
이명은 까치발을 들고 눈썹 위에 손바닥을 대어 햇빛을 가렸다. 눈으로 따라가 본 100m 트랙은 까마득히 길어 보였다. 달리다가 중간도 넘기지 못하고 쓰러지는 자신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었다.
“6번, 7번 나와.”
아이들이 차례대로 모래바람을 일으키며 달려 나갔다. 호루라기 소리가 나면 당연하다는 듯이 출발했다. 체력장을 처음 해 보는 사람도, 이런 체계에 익숙하지 않아서 가슴 졸이는 사람도 자신 단 한 명뿐인 것 같았다. 저마다 조금 더 빠르고 느리고의 차이는 있었지만 이명처럼 완주할 수 있을지를 걱정하는 녀석은 아무도 없어 보였다.
“11번, 12번.”
그의 앞에 길게 이어졌던 줄은 서서히 줄어들더니 이제 아무도 없었다. 선두에 선 이명은 전쟁을 앞둔 병사 같은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끝까지 뛰기만 한다면 기록이 느려도 상관없어.’
그의 눈빛에 의욕이 감돌았다. 피가 빠르게 도는 것 같은 느낌이 들며 가슴이 묵직하게 쿵쿵거렸다. 반장이 ‘아, 너구나? 기흉. 빠져야지, 왜 거기 있어?’ 하고 저지하지만 않는다면,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달리게 될 것이다.
한선호는 이명을 보고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참 동안 가만히 서 있는 바람에 결승선에 서 있는 체육 교사가 호루라기를 신경질적으로 불었다.
“13번 뛸 차례, 맞지?”
이명은 그에게 물으며 첫 번째 트랙 앞에 섰다. 문장은 의문문의 형태였지만 확인받기보다는 선언하겠다는 목적을 띠고 있었다. 지금이 내 차례이며 나는 뛸 것이라고. 비록 아무도 관심 갖지 않겠지만 이명에게는 중요한 일이었다.
“야, 반장! 너 뭐 하고 자빠졌어? 빠릿빠릿하게 다음 놈 준비 안 시켜?”
선생이 멀리서 신경질을 냈다. 한선호가 다음 사람을 부르지 않아서 두 번째 트랙이 아직 비어 있었다. 14번은 학교에 오는 일이 거의 없는, 이명처럼 ‘특수한’ 학생이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15번과 나란히 뛰게 되겠구나.’
이명은 살짝 뒤돌아 같이 뛸 아이의 얼굴을 확인했다. 그러나 막상 그의 오른쪽에 선 건 15번이 아닌 32번 한선호였다.
“……!”
순식간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이런 일은 조금도 예상하지 못했다. 반장과 함께 달리게 되다니……. 조금 전까지만 해도 차분하게 있었는데 갑자기 너무 떨려서 서 있기가 버거웠다.
‘어쩌지, 어쩌지.’
그전까지 손을 어디에다 두고 있었는지가 헷갈리고 숨 쉬는 게 의식되었다. 너무 많은 일이 동시에 일어나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출발도 하지 않았는데 벌써 숨이 찬 기분이었다.
삐익!
붕 떠 있다가 날카로운 호루라기 소리에 현실로 돌아왔다. 준비 자세를 취하고 있던 한선호는 곧바로 달려 나갔고 시작하자마자 등을 보였다. 이명은 결승선에 시선을 고정시키고서 살짝 뒤늦게 출발했다.
첫걸음은 놀랍도록 상쾌했다. 공중으로 몸을 박차는 느낌이 생각보다 더 좋아서 나도 뛸 수 있구나 하는 자신감에 벅차올랐다. 그러나 발은 곧바로 퍼석퍼석한 모래 위로 떨어졌고 억지로 다리를 뻗어야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괜찮았지만 이윽고 한 걸음 한 걸음 뗄 때마다 조금씩 버거워졌다. 아주 어릴 때 이후로 한 번도 뛰지 않았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러나 이명은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눈앞에 보이는 소년의 널찍한 등이 그를 달리게 했다. 늘 어두운 곳에서 몰래 바라보았던 등이었다. 불가항력적으로 그를 바라보게 하는 존재와 나란히 뛰고 있다는 사실이 이명을 고무시켰다. 달리는 행위가 숭고하게 느껴졌다. 그것은 아무도 막을 수 없는, 이명만이 할 수 있는 비밀스러운 고백이었다.
보답 받으리란 기대는 애초부터 없었다. 그가 동경하는 한선호는 늘 앞을 보고 있었다. 애초에 뒤돌아봐 주기를 바라지 않았고 그럴 필요도 없었다. 그와 나란히 달릴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했다.
한선호와의 거리는 자연히 벌어지다, 트랙의 반을 지났을 땐 육상 선수가 와도 좁힐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이명은 이 경주가 시작한 순간부터 패자였지만 개의치 않았다. 뛰기 전에 머릿속에 있었던 모든 고민과 20초니 뭐니 하는 수치 따위는 날아가 버린 지 오래였다.
한선호가 달리기를 마친 뒤에도 이명의 레이스는 계속되었다. 숨이 차고 땀이 비 오듯 흘렀지만 결승선을 보며 다리를 계속 움직였다. 속도는 처음보다 훨씬 느려져 있었다. 체육 교사와 다른 아이들의 시선이 따갑게 느껴졌다.
결승선에 근접했을 땐 뛰는 것보다 걷는 것에 가까웠다. 호흡이 가빠서, 숨을 들이쉬자마자 폐가 공기를 내뱉도록 종용해서 도무지 달릴 수가 없었다. 익숙하지 않은 운동에 팔다리가 후들거렸다. 땀이 속눈썹에 고여 뚝뚝 떨어졌고 찌르는 햇빛 때문에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눈을 깜빡거리자 결승선이 희미하게 보였다. 5m 정도밖에 남지 않았다. 체육 교사가 지루하다는 듯이 손짓했다. “빨리 들어와, 이 새끼야.” 하는 소리를 들은 것도 같았다. 조금만 더 가면 된다. 조금만 더…….
이명은 어떻게든 이 경주를 끝내겠다는 신념 하나로 비틀거리면서도 앞으로 나아갔다. 그런 그때 무언가를 밟으며 발목이 꺾였다. 날카로운 통증이 가해지며 몸뚱이가 옆으로 기울어졌다.
‘아, 안 되는데……!’
야속한 중력이 몸을 끌어당겼다. 눈을 질끈 감은 순간에 맨 팔이 거친 모래에 쓸렸다. 좌절감 때문에 고통을 느낄 수조차 없었다. 다시 일어나려고 손바닥으로 땅을 짚었으나 팔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다. 너무 부끄러워서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런 거 하나 똑바로 못 하는 자신이 너무 한심해서, 기껏 같이 달릴 기회를 얻었는데 완주하지 못한 자신이 증오스러워서 화가 났다.
웅성거리는 소리를 무시하기 어려워 눈을 떴을 땐 얼굴이 하얗게 질린 한선호가 코앞까지 와 있었다. 그가 팔을 끌어당겨 상체를 일으켜 줬다. 조금 전까지 들리던 소리가 한순간에 사라지고 그의 입술이 열렸다 닫히는 것만이 느릿하게 보였다.
한선호가 이명의 팔을 제 목에 두르더니 교사를 향해 뭐라고 소리쳤다. 핏줄 불거진 목의 울대가 말할 때마다 움직였다. 이명은 그의 땀 냄새를 아주 가까이서 맡을 수 있었다. 그리고 머리카락과 관자놀이에 맺힌 땀방울이 흐르는 모양도 볼 수 있었다.
땀방울이 뚝 떨어지는가 싶더니 몸이 쑥 일으켜졌다. 이명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가 캑캑거리자 아래쪽 허벅지에 뜨거운 살갗이 넓게 닿으며 몸이 아예 공중으로 들렸다. 한선호는 말릴 새도 없이 달리기 시작했다.
그가 설명할 틈도 주지 않은 탓에 이명은 몹시 당혹스러웠다. 키도 크고 어깨도 넓다는 건 알았지만 자신을 단번에 안아 들 수 있을 줄은 몰랐던 데다가, 한쪽 팔로는 제 등을 감싸고 다른 한쪽 팔로는 허벅지 안쪽을 안은 자세가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 식으로 사람을 안고 뛰다 보니 이명의 어깨는 그의 가슴에, 허벅지는 그의 배에 계속해서 부딪치는 것이었다.
가장 참을 수 없는 건 한선호가 오해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이명은 아프지 않았다. 발목이 조금 삐기는 했지만 심한 정도는 아니었고 체력이 떨어져서 몸을 가누기 어려웠을 뿐이다. 그는 무언가 착각하고 있었다.
한선호에게 안겨 있는 건 기쁘기보다 수치스러웠다. 이런 결말을 바란 게 아니었다. 이명은 단지 그와 함께 달리고 싶었던 것뿐이다. 그게 과한 욕심이었나 보다.
강한 팔은 아무리 당겨도 미동도 없었다. 한선호는 이명을 조금도 보지 않았고 미친 사람처럼 뛰기만 했다. 본관에 도착하고서는 신발도 갈아 신지 않고 곧바로 안으로 뛰어들어 가 보건실 미닫이문을 거칠게 밀었다.
“선생님, 선생님!”
안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자 목에서 낮게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났다.
“대체 왜 맨날 자리에 없는 거야!”
그가 그렇게 화내는 건 처음 보았다. 팔꿈치에 맞닿은 가슴이 크게 오르내렸고 입에선 더운 날숨이 쏟아져 나왔다. 숨뿐만이 아니었다. 그와 닿은 곳은 어디든 불에 덴 듯 뜨거웠다. 이명은 차마 어떤 말도 하지 못하고 그의 팔을 잡아당기기만 했다. 한선호는 그제야 이명을 발견한 듯 눈을 크게 떴다. 이명은 재빨리 그에게서 떨어져 뜨거워진 볼을 손등으로 눌렀다.
한동안 끔찍한 침묵이 흘렀다. 이명은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지만, 그 전에 변명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다.
“나…… 괜찮아. 그냥 다리를 삐끗해서……. 나 정말 괜찮아. 놀라게 해서 미안.”
그 짧은 문장을 완성하면서도 숨을 몇 번이나 들이마셨는지 모른다. 한선호가 황당하다는 듯 이마를 짚는 모습을 보며, 이명은 주제넘은 짓을 했던 것이 죽을 정도로 후회되었다.
같은 반 애가 숨을 못 쉬어서 문제가 생길까 봐 보건실까지 뛰어온 반장, 책임감 넘치는 소년이 한동안 숨을 고르더니 낮게 말했다.
“내가 너무 오버했네. 담임 선생님이, 너 뛰면 안 된다고 하셔서…….”
“그러게, 그냥 빠질걸. 내 주제에 괜히 뛰었나 봐. 너무 한심하다. 끝까지 뛰지도 못하고 넘어지고…….”
주저리주저리 늘어놓고 있자니 눈물이 날 것 같았다.
“미안해, 명이야. 나 때문에……. 지금 가서 재시험 치자.”
왜 별것도 아닌 일로 여기까지 뛰어오게 했느냐고, 네가 처음부터 나대지 않았으면 모든 게 평화로웠을 거 아니냐고 화내도 모자랄 판에 한선호는 도리어 사과를 했다. 잘못한 것도 없으면서. 그의 말에 눈시울이 더욱 뜨거워졌다.
“괜찮아. 나 체력장 점수 필요도 없는데, 뭐.”
이명은 그렇게 말하고서 몸을 돌렸다. 한선호를 등지자마자 볼 위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담담하게 걸었다. 다행히 한선호는 따라오지 않았다.
잘 해 보려고 했던 일이 마음처럼 안 된 경험은 누구에게나 있을 것이다. 고등학생 정도면 그깟 일로 울 나이는 아니다. 특히나 수도 없는 승패와 부침을 겪어 온 승부사라면 더더욱.
그러나 이런 건 남들에게 아무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이명을 괴롭혔다. 기껏 100m 달리는 것에 대단한 결심이라도 한 듯 들떠 있었던 감정이나 그 거리마저 완주하지 못하고 남들 앞에서 추한 꼴을 보인 점, 그 때문에 좋아하는 사람에게 민폐를 끼쳤다는 사실까지, 비밀스럽고 작은 마음을 짓누르다 못해 터뜨리기에 충분했다.
가장 가까운 화장실 팻말이 흐릿하게 보였을 때쯤 이미 이명의 얼굴은 눈물범벅이었다. 그는 마지막 칸으로 숨어들어 커버가 덮인 변기 위에 앉아 소리 내어 울었다.
“여기서 이상한 소리 나지 않았냐?”
“뭐야, 존나 무섭네.”
남학생 두 명이 문을 몇 번씩 쾅쾅 두드리고 가고서 한참 뒤에야 이명은 화장실에서 빠져나와 세수를 했다. 아직 수업 시간이라 학생들은 거의 다 교실과 운동장에 있었다. 이명은 2학년 교무실에 가서 담임에게 조퇴하겠다고 이야기한 뒤, 아무도 마주칠 일이 없는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집에 도착했을 때는 2시 반이었다. 아빠와 정은 집에 없었고 엄마는 거실 컴퓨터 앞에 앉아 재택근무를 하고 있었다. 프리랜서인 그녀는 일할 때만 안경을 썼다. 이명은 그 습관을 그대로 배웠다.
“명이 왔어?”
엄마가 안경을 벗으며 뒤를 돌아보았다.
“네.”
“왜 이렇게 일찍 왔어?”
“기분이 안 좋아서요.”
엄마가 핏 웃었다.
“늦게 오는 사춘기가 무섭다더니. 선생님께서 뭐라고 안 하셨어?”
“이거 주시던데요.”
이명은 가방을 열어 반으로 접힌 흰 종이를 엄마에게 건넸다. 엄마는 지난 기말고사보다 평균 10점 이상이 떨어진 시험지를 쓱 보고 책상에 내려놓았다. 그녀는 이명의 학교 성적에 관심이 없었다.
“이게 문제가 아니고…….”
예감이 안 좋았다. 심각한 화제를 앞둔 사람 특유의 비장한 말투였다.
“아까 임 사범님한테 전화 왔는데 말이야.”
아니나 다를까, 엄마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이명은 듣지 않아도 무슨 얘기인지 알 수 있었다. 그는 프로에 입단한 뒤에도 한 달에 두세 번씩은 도장에 찾아가 임 사범과 바둑을 두었다. 어제 임 사범은 이명에게 집중력이 떨어졌다면서, 무슨 일이 있냐고 물어보았다.
“별거 아니에요. 요 며칠 좀 피곤해서 그랬어요.”
이명은 엄마의 잔소리가 시작되기 전에 미리 선수를 쳤다. 그러나 엄마의 불만스러운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사범님 말씀으로는 너 정신이 아주 다른 데 가 있다던데?”
“…….”
“후……. 그래, 사춘기 누구나 겪지. 너 작년부터 힘들어했던 것도 다 알아. 근데 올해 들어 괜찮았잖아. 갑자기 또 뭐가 문제야, 응?”
요즘은 기분이 하루에도 몇 번씩 변하곤 하니 어쩔 수 없었다. 그 아이와 한마디라도 하는 날이면 구름에 둥둥 떠 있는 것 같아서 진정이 되지 않았다. 반대로 오늘 같은 날은 바둑돌 같은 건 쳐다보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런 걸 엄마한테 설명할 순 없다. 아무리 몸이 약해서 부모를 실망시키기만 하는 아들이라도, 같은 반의 남자아이를 좋아한다고 당당하게 말할 순 없었다.
“그건, 사범님이…… 뭘, 뭘 몰라서 그러시는 거예요. 연습 경기는…… 원래 스트레스 풀려고, 막, 막 둘 때도 있는 건데.”
“그래? 정말이야?”
“네.”
엄마가 음울한 한숨을 뱉어 냈다.
“아무래도 수학여행을 취소하는 게 낫겠다.”
“……갑자기 그건 왜요?”
그녀의 말은 안 그래도 쓰라린 상처에 소금을 친 효과를 냈다. 이명은 너무 속상해서 또 눈물이 왈칵 날 것 같았다.
“네가 하도 졸라서 허락해 주기는 했다만……. 그때쯤 내년 기전 스케줄 뽑아서 준비할 시기기도 하고 랭킹도 슬슬 신경 써야 하는데, 너 그런 데 가서 2박 3일씩이나 시간 버리는 거 마음에 안 들어. 게다가 제주도까지 간다니 마음도 안 놓이고.”
“……주세요.”
“응?”
“보내 주세요……. 진짜, 열심히 할게요.”
엄마가 입을 열었다가 다시 다물었다. 그녀는 이명의 눈을 가만히 보더니 한숨을 길게 쉬었다.
“마지막이라서 아쉬워?”
“그냥…… 한 번만 가 보고 싶어요.”
내내 굳은 표정이던 엄마가 살짝 웃었다.
“너도 애는 애구나.”
“수학여행, 가도…… 돼요?”
엄마가 엄한 표정으로 그에게 눈짓하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우울하기만 하던 이명의 눈동자에 희망이 떠올랐다.
이명은 방에 들어가 문을 잠갔다. 그러곤 교복을 갈아입지도 않은 채 침대 위로 쓰러졌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고선 기분이 하루에 열 번씩은 변하는 것 같다.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모를 기분으로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