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열여덟, 여름
이명은 자신이 오늘 저지른 짓을 도무지 믿을 수 없었다. 분풀이하듯 이마를 주먹으로 쳤지만 아프기만 할 뿐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미쳤어……!’
그는 이마를 문지르며 천천히 걸었다. 하필이면 날씨도 너무 더웠다. 모래 깔린 운동장이 타들어 가는 사막처럼 느껴질 정도로 목이 턱턱 막히고 힘이 빠졌다. 비라도 내렸으면.
“후…….”
긴 한숨은 후회로 가득했지만 이미 기회를 놓쳐 버렸다.
발걸음이 빨라졌다. 강당에 모인 남학생들의 고함이 운동장까지 울렸지만 이명은 교문으로 향했다. 집으로 걸어가는 대신 버스 정류장에 섰다. 이대로 집에 가면 분이 풀리지 않을 것 같았다.
착각할 만한 사건이 있었다. 한선호는 이명이 휘말린 말다툼을 정리해 주었고, 청소도 도와주었으며, 우연히 하교 시간이 겹쳐서 집에 함께 걸어가던 길에 분식집에 가서 음식도 먹었다. 양이 정말 많았지만 그는 늘 그렇게 먹는 모양이었다. 이명은 그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아 기를 쓰고 먹었다.
반장이 자신에게 친절하게 대해 주는 바람에 이명은 착각하고 말았다. 그들이, 어쩌면…… 아주 살짝 ‘친구’와 비슷한 관계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착각. 그런 생각 때문에 초대권을 주머니에 넣고 일주일 동안 이랬다가, 저랬다가, 백 번, 천 번 고민하다가 인생 최대의 용기를 내서 그에게 줬었는데……. 이렇게 될 거였으면 애초에 주지 말 걸 그랬다.
또다시 왼손이 들려 이마를 때렸다. 유난히 둔탁한 소리가 나는 바람에 옆에 앉아 있던 할머니가 놀란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사실은 안 올 줄 알았어.’
그런데 그는 정말로 나타나 버렸다. 이명이 뺨을 붉힐 수밖에 없는, 싱긋 웃는 친절한 얼굴을 하고서. 그 둘도 없는 기회를, 오랫동안 기다리고 용기 내어 움켜쥔 기회를 날려 버린 건 바로 이명 자신이었다.
‘화가 나서 나가 버린 게 이상하지 않지.’
이명은 오늘만 몇 번째인지 모를 한숨을 내쉬고 버스에 탔다. 손잡이를 잡고 몸이 흔들거리게 놔두며 또 아무 소용도 없는 후회를 반복했다.
세 정거장을 지나 내렸다. 눈 감고도 다닐 골목을 헤집고 들어가 지저분한 유리문을 어깨로 연 뒤 퀴퀴한 냄새가 나는 상가 계단을 두 층 올라가자, 시트지로 ‘대한 기원’이라는 글자를 크게 잘라 붙여 놓은 문이 나왔다. 그 앞에는 배달 음식 그릇이 쌓여 있었다.
띵동.
문을 열고 들어서자 촌스러운 벨소리가 나며 공기에 찌든 담배 냄새가 코를 찔렀다.
평일 오후, 기원에는 바둑 두는 사람이 네 명밖에 없었다. 한 명은 어슬렁거리며 남의 바둑판을 구경하고 있었고, 조정환 원장을 포함한 셋은 소파에 앉아 선풍기 바람을 쐬고 있었다. 그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문가를 바라보았다.
“우리 명이 왔구만. 최 선생, 알지? 이명 3단.”
“모르면 간첩이게? 훤칠하니 잘생겼다. 거 무슨 TV에 나오는 연예인 같네.”
“내가 아홉 살 때부터 1년 동안 가르친 것도 알지?”
“그거 자네 인생의 자랑이잖아. 귀에 딱지 앉겠어, 이 사람아.”
이명은 조 원장과 모르는 남자에게 고개를 꾸벅 숙이고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말없이 검은 가죽 의자에 앉자 조 원장이 머쓱한 듯 웃었다.
“어허허, 원래 좀 숫기가 없어.”
“천재가 그런 기벽이 있어야지 암.”
“승빈아, 뭐 하냐? 형 왔는데.”
조 원장이 발을 공중에 흔들어 슬리퍼를 떨어뜨리더니, 맨발로 조카의 궁둥이를 밀었다. 소파에 앉아서 핸드폰으로 게임하던 소년, 조승빈이 짜증을 내며 일어났다.
“아, 발로 차지 말라고!”
사실 승빈은 조 원장이 조카랍시고 막 대할 만한 애가 아니었다. 조 원장도 기원 1~2급을 오가는 고수라지만 승빈은 올해 입단한 프로 기사였기 때문이다. 삼촌과 조카 사이에는 3점 접바둑을 두어야 할 만큼의 기력 차이가 있었다. 반집으로 승패가 갈리는 꾼들에게 그것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기원의 벽에는 정성스럽게 코팅된 유영섭 9단과 이명 3단의 사인이 나란히 붙어 있었는데, 이번에 조승빈 초단의 사인이 추가되었다. 승빈은 저래 봬도 조 원장의 제일가는 자랑거리였다.
“저 형은 심심하면 맨날 양학하러 오더라.”
녀석이 투덜거리면서도 이명의 반대편 의자에 앉았다. 그는 말도 없이 흑돌을 집더니 좌상, 좌하, 우상, 우하 네 귀에 척척 얹었다.
같은 프로끼리 접바둑이라니, 뻔뻔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이명은 말없이 가방에서 안경집을 꺼냈다. 어차피 대단한 명승부를 벌이러 온 것도 아니고 사실 오늘만큼은 승패에도 관심이 없었다. 단지 마음이 너무 답답해서 바둑을 마음껏 둘 상대가 필요했을 뿐.
안경을 코에 걸치자 15세 소년의 퉁명스러운 얼굴이 주근깨까지 자세히 보였다.
“나 오늘 기분이 안 좋아, 승빈아. 네가 이길 수 있는 기회인 것 같은데.”
“……뭐?”
“오랜만에.”
덧붙인 말에 승빈이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이 형은 어떻게 된 게 안경만 쓰면 재수 없어져.”
승빈은 도발이 잘 통하는 상대였다. 기본적으로 욱하는 성질인 데다 그간의 히스토리가 그의 열등감을 손쉽게 부추겼다. 둘은 같은 해에 바둑을 시작했으나 성장하는 속도가 달랐기 때문이다. 6세의 조승빈은 불세출의 천재 소년으로 통했고 9세의 이명은 도장에서 발에 채는, 바둑을 늦게 시작한 아이 중 하나에 불과했다. 그때는 승빈에게 갖가지 방법으로 지는 게 일상이었다. 그러나 10세의 이명은 7세의 승빈과 제법 대등하게 싸웠으며 11세 이후론 승빈에게 진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오늘은 시시한 내기가 아닌 불꽃 튀는 대전이 필요했다. 그게 아니라면 침울한 기분 속으로 잠겨 들 것 같았다.
이명은 바둑통을 열었다. 손가락을 찔러 넣어 윤기 나는 백돌들을 촤르르르 겹쳐 소리 내고서 한 알을 뽑아 천원에 꽂았다.
“참나.”
승빈은 장난스럽게 중얼거렸지만, 곧이어 미소가 사라지며 진지해졌다. 반드시 이기고 싶어 하는 갈망. 세상에 그게 없는 프로 선수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임 사범은 말한 적이 있었다.
승빈이 취한 화점 옆 삼삼에 백돌을 놓자 그가 얼굴을 찌푸렸다. 프로 경기에서라면 두지 않을 수로 이명은 일관했다.
심사숙고는 사치였다. 순간순간에 단순히 하고 싶은 대로 두었다. 미래를 걱정하지 않고 세력을 넓혔으며, 그러다가도 야금야금 제 살을 뜯어 먹는 상대가 거슬리면 칼을 빼 들고 죽여 버렸다. 대마를 신나게 뒤쫓다가도 주워 먹고 싶은 게 있으면 귀퉁이에서 실리를 취했다.
체계와 목적이 흐릿해진 바둑에 실수란 없었다. 모든 수가 그 자체로 이명의 의지고 자유였다. 버릇처럼 자연스럽게 하는 계가까지 의식적으로 멈춘 채로 속기로 두었다.
이명이 본 적 없는 해괴한 방식으로 나오니 승빈의 얼굴엔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상대가 개차반으로 두는데도 ‘이명이니 무슨 속셈이 있겠거니’ 조심스러워하는 태도로 막는 데 급급했다. 그러면서도 자존심 때문에 차마 장고하지 못하는 바람에 판은 속기 대결로 흘러갔다.
“이거 완전히 꼴통 바둑이네.”
의식하지 못한 새 다른 테이블에서 바둑 두던 사람들까지 와서 구경하고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이 고개를 저으며 혀를 끌끌 찼다. 조 원장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우리 이명 3단 별명이 ‘떨어지는 빗물’ 아닙니까. 워낙 어디로 튈지 몰라요.”
목숨을 위협받던 흑마가 활로로 도망가 버리자 이명은 쉽게 단념해 버렸다. 대신에 그 아래쪽에 있던 승빈이 용의주도하게 형성해 둔 세력에 칼을 들이밀었다.
현실의 이명은 좋아하는 사람에게 고백하기는커녕 작은 종이쪽지 하나 전하지 못해서 일주일 동안 마음 앓이 하던 한심한 소년이다. 그러나 바둑판 위에서라면 무엇이든 될 수 있었다. 그는 무시무시한 도살자였고 피도 눈물도 없는 사형 집행인이었다. 그러다가도 비열한 저격수나 용의주도하게 덫을 놓는 사냥꾼이 되기도 했다. 머리가 터지도록 고민해 놓고서 수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는 현실과는 달리 바둑판 위에서는 무엇이든지 할 수 있었다.
이명은 승빈이 명맥만 이어 놓은 하단의 세력을 위협하고서 그의 얼굴이 흙빛으로 변하는 것을 지켜보았다.
“기분 나빠.”
그가 작게 중얼거렸다. 이명은 백돌을 집어 주저 없이 공격에 박차를 가하며 그의 눈을 마주 보았다. 승빈이 흑돌 두 개를 손안에서 굴렸다.
“형 완전 막 두고 있잖아. 바둑돌 처음 잡은 애처럼. 근데도 밀린다는 게 짜증 나.”
흑돌이 공세를 막아섰다. 피해를 줄이기 위한 처절한 몸짓이었지만 이명은 창끝을 늦추지 않았다. 어떤 손해를 보더라도 저 대마의 목을 베어 버리고 말리라는 의지가 딱 소리를 내며 손끝에서 떨어졌다.
“진짜 유리 멘탈이라니까.”
“……뭐?”
“무슨 일 있었지? 그래서 나한테 분풀이하는 거지?”
바둑 하는 애들은 흔히 조숙하다고들 한다. 어른 흉내를 제법 잘 내는 열다섯 살짜리 프로 기사를 보며 이명은 그 말을 떠올렸다. 기원에 밥 먹듯이 들락거려서인지 말투는 애늙은이 같은 데다 소파에 기댄 자세도 불량했다. 그가 턱을 살짝 들고 그럴듯하게 중얼거렸다.
“다 티 나, 형은. 기분이 좋은지 안 좋은지, 무언가에 동요하고 있는지.”
“…….”
“그리고 걸리는 게 있을 땐 허점이 많아져.”
승빈이 이명이 버려둔 우상귀의 세력을 단수하며 피식 웃었다. 실리와 세력을 동시에 잡는 좋은 수였다. 프로 경기였더라면 평정심을 일순간에 잃을 정도로 뼈아픈 피해였겠지만 이명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고 좌단 대마에 달려들었다.
“와……. 대놓고 샌드백 취급이냐. 이럴 거면 내기 바둑을 하든가, 과자값이라도 벌게.”
승빈이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억울하다는 듯 불만을 쏟아 놓았다. 이명은 팔짱을 끼고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내기 돈 걸면, 입 다물고 둘 거야?”
옆에서 구경하던 남자들이 웅성거렸다. 바둑을 두다 말고 내기 바둑으로 전환하는 것도 웃기지만, 그리고 미성년자끼리 그리하는 게 온당한 일도 아니었지만 그들은 재미를 위해 만 원만 걸라고 부추겼다.
“내기 없이 무슨 재미로 하나.”
“아무리 학생이어도, 만 원만 걸지?”
엄마는 이명이 기원에 가는 것을 탐탁지 않아 했다. 첫째는 담배 냄새가 난다는 이유였고 둘째는 내기 바둑을 배울까 봐서였다. 그녀는 이명에게 내기 바둑을 절대로 두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서 기원에 보내 주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 한 번쯤은 소액을 걸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어차피 조 원장은 이명에게 기료를 한 푼도 받지 않았으니까. 모르긴 몰라도 이제까지 면제해 준 걸 다 합치면 수십만 원쯤 될 것이다.
“잠깐만, 현금 있나 보고.”
이명은 주머니에 손을 넣고 내용물을 꺼내 손바닥을 폈다. 1,000원짜리 몇 장과 영수증이 구겨진 채 뒤섞여 있었다.
“만 원 안 될 것 같은데.”
“에이 기분인데 내가 내준다! 명이는 우리 아들내미나 다름없는데, 뭐.”
조 원장이 지갑에서 꾸깃꾸깃한 만 원짜리 한 장을 꺼내 바둑판 옆에 올려놓았다. 승빈이 어이없다는 듯 삼촌을 올려다보았다.
“대체 누가 조카인지 모르겠네.”
이명은 손에 가득한 종이를 정리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돈만 따로 모으려다 기어이 그것들을 탁자 아래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어쩔 수 없이 의자에서 내려와 쪼그려 앉았다. 한숨을 쉬며 지폐만 골라서 주머니에 다시 넣고, 영수증은 버리려고 집어서 하나하나 구겼다. 그런데…….
“엇…….”
어지럽게 널린 종이 사이에 영수증이 아닌 무언가가 눈에 띄었다. 이명은 바닥에 쪼그린 채 두 번 접힌 네모 종이를 들었다. 조심스럽게 펴자 길쭉길쭉하고 단정한 손 글씨가 나타났다.
방송부 일 때문에 먼저 갈게 ^^
-선호
짧은 쪽지를 읽은 이명은 눈을 크게 뜨고 몇 번 깜빡였다.
친하지도 않은 애가 초대권을 줘서 어쩔 수 없이 가서 억지로 영화를 보았는데, 그 애가 무례하게 의자에 기대 쿨쿨 자길래 화가 나서 나왔다 – 그렇게 상황을 파악하고 있었던 이명은 쪽지를 다시 읽었지만, 아무리 살펴봐도 그 안에서 분노하는 기색을 찾을 수 없었다.
빠르게 뛰던 심장은 서서히 진정되었다. 분명히 자신에게 실망해서 자리를 떠났으리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보다.
이명은 ‘선호’라는 글씨를 뚫어져라 바라보며 그 이름이 소년과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 새삼 생각했다. 작은 웃음 표시는 무슨 뜻으로 적었을까. 그 귀여운 문자 뒤에 귀엽게 웃는 소년의 모습이 보이는 것 같았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기분이 바닥까지 가라앉아 있었는데 한순간에 구름 위로 올라온 것처럼 몽롱해졌다.
“그 밑에서 뭐 해? 아직도 다 안 주웠어?”
탁자 아래로 승빈의 머리가 빼꼼 나타났다. 이명은 쪽지를 서둘러 주머니에 넣고 영수증을 손에 구기며 일어났다.
“내기는 4,000원만 하자. 내가 그것밖에 없어서.”
이명은 돈을 꺼내 바둑판 옆에 올려놓고서 만 원짜리를 조 원장에게 내밀었다.
“감사하지만 괜찮아요.”
조 원장이 이 아이는 어쩜 이렇게 예의마저 바르냐고 칭찬하는 동안 승빈은 탐탁지 않다는 듯 이명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는 1,000원짜리 네 장을 꺼내 이명의 내기 돈 위에 올려놓고서 팔짱을 꼈다.
이명은 손에 쥐고 있던 흰색 기석을 손안에 굴리며 다시 바둑판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에 일어난 사소한 사건 때문에 세상이 달라 보였다.
‘아깐 왜 저렇게 두었지…….’
하나, 둘, 셋, 넷, 머릿속 한구석에선 계가하며 다른 한구석에선 자신의 약점을 파악했다. 승빈의 말대로 처음 바둑을 두는 사람처럼 제멋대로 두었다. 그 결과로 바둑판 한쪽을 시원하게 난도질했지만 손해도 만만치 않았다. 꽤 괜찮은 수도 보였지만 비효율적인 것이 훨씬 많았다.
이제는 수습할 차례였다. 이명은 충분히 고심한 끝에 타개의 수를 놓았다. 지켜보던 남자들이 ‘와’ 하고 감탄을 내뱉었다.
“형이 무슨 만화 주인공이냐?”
지루하다는 듯 팔짱을 끼고 있던 승빈이 허리를 세우고 앉았다. 이명은 바둑판에서 눈을 떼지 않으며 대답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아까랑 기력이 다르잖아.”
흑돌과 백돌이 번갈아 가며 놓였다. 이전처럼 속기로 두지 않았다. 제 페이스를 찾은 이명은 생각이 단순해졌다. 바둑의 본질대로 이기고 싶어서 최선을 다할 뿐, 이제 그 외엔 목적이 없었다.
한동안 적막 속에 돌 놓는 소리만이 간간이 났다. 앉아 있는 사람들이나 서 있는 사람들이나 무섭도록 말이 없었다. 모두가 첨예한 대결 속에서 끊고 끊어지는 흑과 백의 연결에만 집중하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승빈이 상체를 낮추더니 비밀스럽게 속삭였다.
“아까 보던 거, 연애편지였지?”
“응? 아냐.”
이명은 고개를 저으며 121번째 수를 놓았다. 연애편지면 좋겠지만, 아쉽게도 아니니까.
조승민이 흑돌을 들고 고민하는 동안 이명의 생각은 잠시 바둑판을 떠났다.
‘연애가 아니어도 상관없지 않나? 이렇게 기분이 좋은걸.’
별일 일어나지 않아도 한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 기뻤다. 그러다 작은 접촉이라도 생길 때면 설레서 어쩔 줄을 몰랐다. 연애 같은 건 꿈도 꾸지 않는다. 이렇게 멀리서 지켜보고, 머리 아프도록 고민한 끝에 한 발짝 나아가고,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가까워질 수 있었으면.
아무 짓도 하지 않을 테니까. 언감생심 아무것도 바라지 않을 테니까. 늘 그 자리에서 웃어 주었으면.
흑돌이 소나무 판에 닿는 타격음에 이명은 다시 바둑판 위로 돌아왔다. 그가 있어야 할 곳, 361개의 자리와 그보다 훨씬 많은 길이 있는 세계로. 비록 현실처럼 아름답지는 않지만 어디든 갈 수 있는 곳으로.
이명은 손을 뻗어 백돌을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