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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열여덟, 봄 (11/21)

6. 열여덟, 봄

“이명 3단! 여기야!”

교문 앞에서 길쭉한 인영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이명은 주변 눈치를 보며 그녀를 향해 빠르게 걸었다.

“밖에서 만나자니까, 정아……. 외출증도 썼는데.”

“이 김에 남의 학교도 들어와 보고 신기하네.”

정은 신기하다는 듯 주위를 둘러보며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왔다. 무릎까지 오는 교복 치마를 입은 그녀는 남학생만 바글바글한 운동장에서 몹시 눈에 띄었다. 이명은 누가 그녀를 보는 것도 싫었고 괜히 자신에게 시선이 쏠리는 것도 싫었다. 그래서 정이 빨리 용건을 마치고 가 주길 바랐지만 그녀는 놀러 온 사람처럼 즐거워 보였다.

“맞다. 여기, 교과서.”

어젯밤에 정은 수학 문제를 가르쳐 달란 핑계를 대고 이명의 방에 와서 수다를 떨고 갔다. 나가는 길에 펴지도 않은 제 수학 교과서는 책상에 놓고 이명의 교과서를 실수로 들고 나간 게 문제였다. 학교에 와서야 책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수학 교사는 교과서 안 가져온 놈들에게 무안 주는 것을 인생의 낙으로 삼는 사람이었다. 책상에 교과서가 올라와 있지 않은 학생만 보면 온갖 기괴하고 참신한 방법으로 괴롭혀 댔으니 말이다. 이명은 남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거나, 세숫대야를 머리에 이고 뒤에 서 있거나, 빗자루로 허벅지를 맞거나, 그런 식의 곤욕을 당하기는 싫었으므로 점심시간에 정과 만나기로 약속한 것이다.

이명은 정이 내민 책을 받고서, 팔에 끼고 온 교과서를 그녀 가방에 쏙 집어넣었다.

“고마워. 이제 가.”

“여기까지 왔는데? 남고 구경은 해 보고 가야지.”

정은 운동장 안으로 들어오며 이명을 난처하게 만들었다. 지나다니던 남학생들이 힐끔힐끔 쳐다보았으나 그녀는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듯했다.

“여자 대신 남자가 득실거리는 거 빼면 우리 학교랑 똑같네.”

그녀의 말에 이명은 웃어 버리고 말았다. 그보다 한 살 어린 정은 그보다 훨씬 당차고, 똑똑하고, 착한 아이였다. 이명은 세상의 모든 사람이 정과 같았으면 좋겠다고 가끔 상상해 보곤 했다. 그러면 우울해질 일도 없을 텐데.

“햇볕이 좀 뜨겁네. 그늘에 앉아 있을까?”

“어? 그래.”

이명은 혹시 동생이 불편할까 봐서 서둘러 그늘로 데려갔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닌데, 땅에 궁둥이를 대고 보니 체육 시간마다 늘 앉는 곳이었다. 무의식적으로 무릎을 세우고 앉은 자세까지 여느 수업 때와 똑같았다. 차이라면 교복 차림인 것과 곁에 손님이 있다는 것뿐.

정은 양반다리를 하고서 앉더니 배낭을 무릎에 올려놓았다. 그녀가 위를 올려다보았다.

“예쁘네. 저거 무슨 꽃이지?”

고개를 뒤로 꺾자 시야가 온통 보랏빛으로 가득 찼다. 작은 꽃들이 덩어리로 피어 주렁주렁 늘어진 모습이 포도송이처럼 보였다. 한두 송이가 아니었다. 천장에 포도가 잔뜩 열린 것 같았다. 그 주변으론 싱그러운 넝쿨이 얽혀 있었고 역광을 받은 나뭇잎들이 바람에 살랑거렸다. 여기에 앉아 있었던 적이 한두 번도 아닌데, 그간 자세히 본 적 없다는 게 이름 모를 꽃에게 괜히 미안해졌다.

“그러게.”

“냄새도 좋고.”

“응. 진하다.”

“벌레 안 떨어져? 송충이라든지.”

“안 떨어지던데…….”

이명은 말끝을 흐렸다. 사실은 잘 모른다. 체육 시간이면 운동하는 애들을 구경하느라 바빴기 때문이다. 머리 위로 송충이가 떨어졌대도 아마 알아채지 못했을 것이다.

“꽤 더워졌다. 좀 있으면 하복 입어야겠어.”

“맞아.”

정이 콧노래를 흥얼거리는 소리가 한동안 기분 좋게 들렸다.

“오빠.”

“응?”

“오늘 급식 맛있었어?”

“아니. 너네는?”

“완전 별로였지. 뭐 나왔어?”

“뭐더라, 짜장밥이랑…… 모르겠어. 요구르트밖에 생각이 안 나.”

“오? 우리도 어제 짜장밥 나왔는데. 난 그냥 먹었는데 윤슬기는 헛구역질을 하더라고.”

늘 급식을 혼자 먹는 이명과 달리 정은 친구가 많았다. 그녀는 사랑스러운 사람이라 늘 주변에 사람이 끊이지 않았다.

“진짜 토했어?”

“아니. 근데 그 직전까지는 간 것 같았어.”

“다행이다.”

“걘 자주 그래. 입맛이 고급이거든.”

정은 아무렇지 않게 말해 놓고 제 말이 우습게 느껴졌는지 작게 킥킥거렸다.

바람이 불었다. 촘촘하게 천장을 덮고 있던 나뭇잎이 흔들거리며 틈새로 새어 든 햇빛이 눈을 찔렀다.

“오빠, 위에 봐.”

고개를 든 이명은 대답하는 것을 잊었다. 아름답게 늘어진 보라색 바다가 바람에 따라 출렁이고 있었다. 여린 꽃잎들이 햇살을 한껏 받아 차례대로 돌아가며 동전처럼 반짝였다. 꿀처럼 달콤한 내음을 뒤집어쓴 것처럼 향기가 진하게 풍겼다. 이윽고 보랏빛 소나기가 내렸다. 온몸을 적실 정도로 듬뿍.

“진짜 벌레 안 떨어지는 거 맞지?”

정이 고개를 흔들어 머리 위에 수북하게 쌓인 꽃잎을 털어 냈다. 그러고선 이명의 콧잔등과 속눈썹에 붙은 걸 가리키며 웃었다. 고개를 숙여 봐도 그것들은 잘 떨어지지 않았다. 이명은 한참 동안 꽃잎과 씨름하다가 무심코 운동장을 보았다.

별생각 없이 시선을 둔 곳에서는 한 무리의 남학생들이 축구에 열중하고 있었다. 점심시간에 잠깐 하는 건데도 죽기 살기로 열심이었다. 이명은 공을 향한 그들의 집착과 지치지 않는 체력, 그리고 태클을 걸 때 허벅지와 종아리에 불룩 나타나는 근육 같은 것들이 신기하다고 늘 생각했다. 그에게는 없었으므로.

“축구가 재미있나?”

이명의 시선을 따라간 정이 무심하게 물었다.

“잘 모르겠지만…… 재미있으니까 하는 거 아닐까?”

“오빠도 하고 싶어?”

“응……. 가끔은.”

“그럼 나랑 할래?”

그녀의 스스럼없는 말에 이명은 배시시 웃어 버렸다.

“어떻게 하는지 몰라.”

그는 초등학생 때부터 기사가 되기 위해 철저히 훈련받았다. 결과적으로 목표를 이루었지만, 그러느라고 세상의 반쪽을 배우지 못한 채로 살았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는 그래도 친구가 몇 명 있었는데, 방과 후에 도무지 함께 놀 시간이 없었다. 그때 그 애들과 축구를 했더라면 지금 저 무리에 낄 수 있었을까.

“그냥 공만 차면 되겠지. 별거 있나.”

“그런가.”

“나 왠지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내가 또 한 튼튼 하잖아.”

“네가 나보다 더 잘할 거야. 넌 뭐든 잘하니까.”

실없는 대화를 하면서도 이명의 시선은 한 점을 따라갔다. 운동장에서 그 누구보다도 바쁘게 움직이는 존재. 빠르게 달리며, 공을 골대로 차 넣었다가, 기뻐서 뛰어오르기도 하고, 잘 안 됐을 땐 고개를 저으며 반대편으로 달리는 점은 활활 타오르는 불꽃에 둘러싸인 것처럼 보였다.

“오빠.”

“응?”

“흐음…….”

이명은 정이 생각에 잠겨 조용해진 틈에 마음 놓고 축구 경기를 구경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선수 한 명과 불특정한 애들을.

공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치열하게 오갔다. 그러다 유난히 키가 큰 소년이 상대편으로부터 공을 빼앗아 길게 패스했다. 멀리 떨어진 공은 TV에서 보던 것처럼 정확히 아군의 앞으로 떨어졌으나, 공을 받은 아이가 헛발질을 해서 중요한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상대편 아이는 공을 몰고 골대로 진격했지만 얼마 안 가 주도권을 다시 빼앗겨 버렸다. 어느새 그 지점까지 달려온 소년이 태클로 공을 다시 가져갔기 때문이었다. 발밑에서 공을 지키며 질주하는 모습이 날쌘 동물처럼 보였다. 방해꾼 서너 명이 들러붙었지만 때론 힘으로, 때론 스피드로 그들을 따돌린 소년은 골문 앞에서 그림 같은 골을 넣었다.

저도 모르게 주먹을 꼭 쥐고 있었던 이명은 그제야 긴장을 풀며 안도의 한숨을 작게 쉬었다.

소년은 늘 있는 일이라는 듯 크게 기쁘다는 기색 없이 씩 웃으며 제 포지션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같은 팀 애들이 환호성을 지르며 소년에게 한꺼번에 달려들어 안기고선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저 사람 뭐야? 엄청 잘하네.”

이명은 제 칭찬도 아니건만 기분이 좋아서 슬며시 웃었다.

“축구부야?”

“축구부는 아니야.”

“오빠 아는 사람인가 봐.”

“어? 우리 반인데…….”

“그렇구나.”

속셈이 있는 듯한 어조를 뒤늦게 알아챈 이명이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정은 아무렇지 않은 표정이었다.

“이름은 뭔데?”

“한…….”

이명은 성까지 말하고서 멈추었다. 이름을 말하는 거야 아무렇지 않았지만, 어쩐지 정이 제 속을 들여다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아주 어려서부터 모르는 게 없었고 말하지 않은 것도 척척 알아챘다. 이명은 정을 그래서 좋아하기도 했지만 이번만은 조금 두려웠다.

“잘생기고, 키 크고, 축구 엄청 잘하는 한 씨 오빠.”

“…….”

“누가 싫어하겠어, 저런 사람을.”

“그치?”

정은 그때부터 이명이 곤란해할 만한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교복 얘기, 그녀가 미워하는 선생 얘기, 수업 시간에 졸리면 하는 행동에 관한 얘기……. 이명은 평소와 다름없는 정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녀가 무언가 알아챘을지도 모른다고 어렴풋이 생각했지만 구태여 묻지 않았다.

“어, 시간이 언제 이렇게 됐지?”

“그러게.”

“가야겠다. 몽둥이로 엉덩이 맞지 않으려면.”

이명은 그녀를 따라 일어나려 했지만 정이 손바닥으로 어깨를 꾹 눌렀다. 그녀는 배낭을 메고 일어서며 하늘을 보았다.

“그냥 앉아 있어. 아직 일어나기 싫잖아.”

“…….”

“나 갈게. 집에서 봐, 오빠.”

이명은 빠르게 멀어지는 동생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녀에게 마음을 읽는 능력이 있는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이명은 정이 교문 밖으로 안전하게 빠져나가는 것을 확인하고서 운동장 한가운데로 시선을 옮겼다. 비밀스러운 보라색 꽃이 몸을 숨겨 주는 그늘 아래 웅크려 무릎 위에 턱을 대고서, 남이 보면 티 나지 않을 정도로 작은 미소를 지은 채.

“반장, 패스 패스 패스!”

“야, 쟤 막아!”

그들은 한번 축구를 시작했다 하면 예비종이 치기 전, 마지막 1분까지 멈추지 않았다. 아직 종이 치려면 12분이나 남아서 다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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