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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B. 열여덟, 겨울 (9/21)

2B. 열여덟, 겨울

개학식에는 폭설이 왔다.

아빠는 차가 밀리겠다고 불평하며 출근했다. 엄마는 말없이 옷걸이에 목도리를 걸어 놓았다. 이명의 부모가 화해하는 방식은 조용하고 겉으로는 티가 나지 않아서 자세히 살펴봐야만 알아챌 수 있었다.

전날 그들은 심하게 다투었다. 이명은 방에서 이어폰을 귀에 꽂고 있었는데도 고성을 들었다. 엄마와 아빠는 이명이 아니라면 그다지 싸울 일이 없을 것 같은 사람들이었다. 엄마는 화가 나도 흥분하는 법 없이 늘 차분했고 아빠는 과묵하지만 속정이 많은 스타일이었다. 이명이 어린 시절에 기억하는 부모님은 싸우는 일이 드물었다. 그가 바둑을 시작하기 전까지만 해도.

‘아들이 10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천재인데, 그럼 쓸데없는 데다 시간을 버리라고?’

‘당신 인생을 애한테 투영하지 말라니까! 사람 구실을 하려면 고등학교는 나와야 할 거 아냐?’

‘말만 잘하지, 그게 무책임하단 거야. 당신은 내버려 두면 애가 알아서 크는 줄 알아?’

‘당신처럼 애를 쥐 잡듯이 잡는 건 책임감 있는 태도고?’

기원의 조 원장은 이명에게 초등학교까지만 졸업하고 바둑에 전념하라고 충고했었다. 다른 집 애들은 네댓 살부터 바둑돌을 잡는데, 이만하면 아주 늦은 나이에 시작했으니 아무리 기재를 타고났더라도 더 열심히 해야 한다는 거였다. 바둑 도장의 임 사범도 같은 의견이었다. 기사의 학력은 초졸이면 충분하다고, 어차피 중고등학교에서 배우는 것도 없는데 6년씩이나 허비하다가 다른 연구생들에게 실력이 뒤처질 수 있으니 자퇴해야 한다고 강권했다.

당시에 엄마는 꽤 강경하게 말했다.

‘바둑밖에 모르는 아이로 키우고 싶지 않아요. 지금은 애가 좋아하니까 취미 삼아 시키지만,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고…….’

그러나 ‘천재’라는 함정은 그녀의 생각을 서서히 바꿔 놓았다. 기원과 바둑 도장의 모든 선생들이 아드님은 천재 중의 천재라고 입을 모아 말했다. 처음엔 기분 좋은 칭찬에 머물렀지만 이명의 업적이 차차 쌓여 상장과 상금의 형태로 돌아오자 엄마는 결심했다. 아들을 바둑밖에 모르는 아이로 키우겠노라고.

반면에 아빠는 그대로였다. 그는 어떤 이유건 학생이 학교에 가지 않는다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했으며 몇 년씩 도장에 갇혀 숙식을 해결하고 온종일 바둑판만 보는 애들을 그릇된 욕망의 비뚤어진 희생양으로 여겼다. 요는 아이는 아이답게 커야 한다는 것이었다. 좋든 싫든 학교에 가서 운동장에서 뛰놀고, 친구들과 어울리고, 가끔 나쁜 짓을 하더라도 크게 엇나가지만 않으면 된다고. 그것이 아빠가 아이에 관해 가진 불변하는 관념이었다.

이명이 중학교에 입학하던 시점과 두 번의 개학식, 이명이 고등학교에 입학하던 시점과 이번 개학식에 똑같은 논쟁이 벌어졌다. 엄마는 아직 학기가 시작하지 않았으니 지금이라도 애를 자퇴시키자고 아빠를 떠보았고, 아빠는 엄마를 자식을 이용하려 드는 파렴치한 야망가로 취급하며 분노로 응수했다.

이명은 엄마의 사랑을 의심하지 않았다. 엄마의 지칠 줄 모르는 열정은 그녀 자신이 아닌 아들을 위한 것이었다. 오히려 그녀는 아들의 커리어를 서포트하기 위해 본인의 직장을 관두는 희생을 치렀다. 그러나 그녀의 입장은 탐욕스러운 마리오네트 인형사처럼 비치기 너무나 쉬운 자리였고, 언제든 그렇게 변질될 위험성이 있기도 했다.

이명은 아들이 몸과 마음이 건강한 어른으로 자라길 바라는 아빠의 마음 또한 이해했다. 그러나 아빠는 이명이 뛰놀 수 없는 특수한 체질에 남을 불편하게 만드는 기이한 침묵을 가진 아이란 걸 간과하고 있었다. 이명은 그의 말처럼 학교에서 세상의 축소판을 배우고 다양한 애들과 뒤섞여 참된 인생을 배울 처지가 아니었다. 그는 학교에서 소극적이고 정적인 행동거지를 고수했으며 아무것도 습득하지 않았다. 아빠의 바람은 거짓으로 꾸며 낸 학교 홍보 팸플릿 같았다.

결과적으로 늘 이기는 건 아빠였다. 아이에게 다양한 세상을 보여 주어야 한다는 논리와 아이를 제일가는 기사로 만들겠다는 의지. 전자가 후자보다 자식을 사랑하고 위하는 것처럼 보이는 게 당연했으므로.

이명은 가타부타 말을 얹는 대신 조용히 있다가 부모의 결정을 따랐다. 안 그래도 둘이 갈등하는데 자신까지 참전해서 일을 크게 만들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부모를 이혼 직전까지 몰고 갔던 작년의 분위기를 잘 기억하고 있었다. 엄마에게도 아빠에게도, 무엇보다 정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긴 나날이 다시 반복되는 건 원치 않았다. 한 명만 참으면 모두가 평화롭게 지낼 수 있었다.

이명의 고2 개학식은 아빠에게는 또 한 번의 승리 수성이자 엄마에게는 아까운 기회를 눈 뜨고 놓쳐야 하는 아쉬움이었다. 이명에게는 견뎌 내야 할 시련이었다. 다시 말해서, 좋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날은 바람이 꽤 거세서 눈발이 얌전히 떨어지지 않고 미친 듯이 휘날렸다. 구령대에 달린 태극기도 버티기 힘겨워 보였다. 눈을 크게 뜨면 작은 눈 알갱이가 속눈썹에 달라붙거나 눈알에 부딪혀서 황량한 회색빛 학교 건물을 똑바로 볼 수 없었다. 여기는 네가 올 곳이 아니라는 듯이, 그만 돌아가라는 듯이, 강한 바람이 앞을 가로막았다.

이명은 묵묵히 걸었다. 학교가 자신을 밀어내는 듯한 느낌이 한두 해도 아니고, 못 견딜 것도 없었다. 올해도 없는 사람처럼 지낼 것이다. 그러다가 어떤 애들하고는 갈등을 빚고, 조롱받고, 손가락질당하겠지만, 늘 그랬듯이 기억 속에서 차츰차츰 잊혀지리라.

이어폰에서는 여자 보컬의 음성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작년에 생각에 빠져 걷다가 공을 맞을 뻔한 이후로는 의식적으로 주변을 한 번씩 살피면서 걸었다. 주변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서도 이명은 운동장을 꼼꼼하게 훑어보았다.

‘역시 오늘은 없네. 개학식이라 그런가…….’

그럼 없는 게 당연하지, 하고 제 상념을 끊어 냈다. 어떤 미친 사람이 개학식 아침부터 공을 차겠는가. 그것도 이런 날씨에.

짙은 색 코트나 패딩을 입은 아이들은 모두 바람과 맞서 싸우며 한 방향으로 걷고 있었다. 이명은 지나치는 아이들의 옆모습을 힐끔힐끔 보았지만 역시나 아는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바람에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며 겨우 정문까지 왔다. 운동장에 넓게 퍼져 있던 아이들이 깔때기를 댄 것처럼 모여들어 신발을 갈아 신었다.

‘몇 반이었지…….’

기억에 남지 않아서 예전 핸드폰 메시지를 확인해야 했다.

‘5반이구나.’

구관 2층. 1, 2, 3반 중 하나면 동쪽 층계로 올라갈 것이고, 8, 9, 10반 중 하나면 서쪽 층계로 올라갈 텐데. 5반은 어디로 가도 멀었다. 고2가 되는 것이 마음에 들지 않다 보니, 모든 것이 불만스러웠다.

신발을 실내화로 느릿하게 갈아 신고 아주 천천히 층계를 올랐다. 교실이 가까워질수록 가슴을 옥죄는 불쾌함이 커져 갔다. 도착하고 싶지 않은 마음을 품고 ‘2-5’라고 적힌 팻말 아래 섰을 땐 조례가 시작하기 13분 전이었다.

‘들어가기 싫다.’

매년 반복하는 일이지만 기대감을 느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 대신에 모르는 사람을, 그것도 여러 명을 대면해야 한다고 생각하자 싸한 긴장감이 들었다. 이명은 심호흡을 크게 하고서 문을 열었다.

드르륵.

최소한 스무 명은 넘을 이들의 찌르는 듯한 시선이 느껴졌다. 이명은 주목받는 느낌이 싫었다. 이 순간만은 세상에서 사라져 버리고 싶었지만, 의식하지 않는 척 다리를 움직였다. 모든 새 학기 첫날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애들은 이명이 별 볼 일 없다는 걸 알자마자 시선을 돌리고 각자 제 할 일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명은 두 번째 위기를 맞았다. 그가 좋아하는 1분단 창가 자리마다 이미 누가 앉아 있었던 것이다.

어디에 앉을 것인지는 학교의 생활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중요한 요소다. 어차피 첫 조례 시간에 앉은 자리는 임시일 뿐이고 담임이 키나 번호순으로 새로 정해 주기 때문에 지금 좋은 자리를 차지해 봐야 의미 없기는 하지만.

‘아무 데나 앉자.’

속으론 그렇게 중얼거려 놓고 미련이 남아 창가 앞에서 기웃거렸다. 시간을 끌어 봐야 아무것도 나아지지 않는데. 원하는 것을 빠르게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그의 단점 중 하나였다.

‘중요한 일도 아닌데 왜 이렇게까지 고민하는 거야.’

한숨이 나왔다. 이명은 이렇게 생각이 많은 자신을 한심하다고 여기며 비어 있는 창가 옆자리에 앉았다. 누가 쳐다보는 것 같길래 별생각 없이 몸을 오른쪽으로 틀었다가 한 남학생과 눈이 마주쳤다.

‘엇……!’

팔짱을 낀 채 팔꿈치를 책상에 기댄 남학생은 낯이 익었다. 이명은 그를 처음 어디서 보았는지 금세 기억해 냈다. 소년은 아마 기억하지 못할, 해프닝에 가까운 첫 만남을.

잘생긴 아이는 재미있다는 듯 이명을 바라보다가 씩 웃었다. 이명은 당황해서 재빨리 앞 사람의 뒤통수에 시선을 고정했다.

‘이럴 수가, 같은 반이라니…….’

갑자기 숨이 차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이 느껴졌다. 이명은 주먹을 쥐어 입에 대어 보기도 하고 눈을 한동안 감아 보기도 했지만 떨림은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어떡해…….’

무엇보다 계속 미소가 입술을 비집고 나오려 해서 입가에 경련이 일어날 것 같았다. 담임 교사가 들어와서 몇 마디 했을 때까지도 이명의 머릿속은 오른쪽 대각선 뒤의 남학생으로 가득했다. 담임이 반장 선거를 하겠다고 후보를 받기 시작했을 때도 이명은 계속 그에 관해 생각하고 있었다.

“타의 모범! 우등생! 공부면 공부, 운동이면 운동, 못하는 게 없는 한선호를 추천합니다, 선생님!”

그와 같은 분단 두 번째 줄에 앉은 애가 손을 번쩍 들었을 때까지만 해도 이명은 반장 선거에 관심이 없었다.

“네가 선호구나. 일어나서 애들한테 얼굴 보여 주고.”

“네.”

온 신경이 쏠려 있었던 3분단 다섯 번째 자리에서 인기척이 났을 때에야 이명은 자신이 소년을 볼 기회를 얻었음을 깨달았다. 아무 죄책감 없이, 다른 아이들처럼.

일어서서 교실을 둘러보는 남학생에게선 빛이 났다. 새까맣고 짧은 머리카락은 정직한 인상을 주었고 진한 눈썹은 그를 만만해 보이지 않게 했다. 그러면서도 두 눈에서는 서글서글하고 순진한 분위기가 흘렀고 콧날은 높고 또렷했다. 살짝 미소 띤 입매는 여유로우면서 단호해 보였다.

이명은 그를 정신없이 보고 있다가 소년이 다시 자리에 앉고 나서야 고개를 원상태로 돌렸다.

‘혹시 꿈인가?’

이명은 사람이 이렇게 많은 와중에 제 뺨을 꼬집어 볼 용기는 나지 않아, 오늘 일어난 일을 찬찬히 떠올려 보았다. 아빠가 두르고 나갔던 목도리 무늬까지 기억날 정도인데, 꿈이라면 이렇게까지 자세히 기억나지 않을 것이다.

가슴이 울렁거렸다. 이 증상이 더 심해지면 아침에 먹은 걸 토하고 싶어질지도 모른다. 입가에 자꾸 번지는 웃음을 지우려고 혼자만의 전쟁을 한창 치르고 있는데 작은 투표 용지가 책상에 올라왔다.

‘어쩌지…….’

딴생각을 하느라 다른 후보가 누군지조차 보지 못했다. 얼굴만 보고 반장을 뽑아도 되는 건가 진지하게 고민이 되었다. 아니, 얼굴만은 아니다. 그 애는 운동 신경도 뛰어난 것 같고, 성격도 무척 좋아 보이니까…….

‘이렇게 적었다가, 쟤가 알게 되는 건 아니겠지?’

이명은 한참 동안 망설이다 샤프를 굳게 쥐었다. 글씨를 처음 쓰는 사람처럼 긴장한 채 세 글자를 적었다.

‘이름도 예쁘다.’

제 필체로 적힌 그의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비록 손이 떨려서 선이 곧지 않기는 해도.

곧 두 번 접은 종이가 걷히고 가장 앞줄에 앉은 애들 중 하나가 끌려 나가 표를 집계했다.

“한선호, 한선호, 한선호, 한선호, 기권, 한선호…….”

서른네 개의 표는 금세 분류되었다. 결과가 너무 압도적이라 긴장감은 없었다. 반장 선거는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빠르게 지나갔으며 시시하고 단조롭게 끝나 버렸다. 담임은 점심 메뉴를 읊듯이 심드렁한 목소리로 결과를 발표했다.

“스물다섯 표 받은 선호가 오늘부터 반장이다.”

그는 손을 들어 교실 중간을 가리켰다.

“자, 반장. 친구들에게 할 말 있어?”

이명은 제 일이 아닌데도 갑자기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었다.

‘갑자기 저런 걸 시키면 당황스러울 텐데…….’

그는 1학년 때 매달 12일마다 학교에 가기 싫었다. 12번이었던 그에게 문제를 풀거나 책을 읽으라고 시키는 교사가 꼭 한 명씩 있었기 때문이었다. 만일 자신을 갑자기 반장에 선출하고 예고도 없이 소감을 발표하라고 시켰으면 도망치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한선호는 의자를 뒤로 밀며 자리에서 주저 없이 일어났다.

“안녕. 만나서 반가워. 반장으로 뽑아 줘서 고맙고, 도움이 필요한 일 있으면 뭐든 말해 줘. 어……. 그럼 잘 부탁한다, 얘들아.”

짝짝짝. 사방에서 들리는 박수 소리에 둘러싸인 이명은 저도 모르게 함께 손뼉을 치고 있었다.

‘괜한 걱정이었네.’

새삼 소년이 선출된 게 당연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선호는 태어났을 때부터 반장이었다고 해도 믿길 정도로 ‘반장다운’ 아이였으니까. 짝짝짝짝짝. 이명은 소리가 잦아들다 사라지기 직전까지 손뼉을 쳤다.

그는 처음으로 학교가 좋아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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