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 열여덟, 봄 (5/21)

5. 열여덟, 봄

5월은 체육 대회를 준비하느라 빠르게 지나갔다. 몇 반은 담임이 피자를 사 줬다더라, 몇 반은 운동부 애들까지 동원한다더라, 반티에 얼마를 썼다더라, 갖가지 소문이 돌았지만 5반은 반장을 중심으로 묵묵히 준비했다.

담임은 피자는커녕 아이스크림조차 사 주지 않았고 운동부 애들은 비협조적이었다. 반티는 아무도 중요하다고 생각하지 않아서 단순한 디자인으로 정했다.

그러나 그들은 쉬는 시간마다 축구 연습을 할 정도로 열정적이었다. 방과 후에는 운동장에 모여 ‘5’라고 등에 크게 프린트된 흰 티셔츠를 맞춰 입고 계주 시뮬레이션을 했다.

“주성이 어디 갔냐?”

“플래카드 가지러 집에 간 거 아니었어?”

“간 지가 언젠데……. 빨리 오라고 전화해.”

“반장, 반장! 선호! 잠깐 이것 좀 봐 줘.”

“잠깐만. 야, 반티 안 입은 애들 빨리 입어!”

체육 대회 당일은 아수라장이었다. 사라진 응원부장은 알고 보니 급하게 찾아온 장 활동 때문에 화장실에 있었고 계주 에이스는 너무 긴장돼서 잠을 못 잤다며 우는 소리를 해 댔다. 축구팀에서 호흡을 맞췄던 아이 하나는 등굣길에 발가락을 삐었다고 해서–도대체 어떻게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 애의 발가락이 퉁퉁 부은 것은 사실이었으므로-보건실에 보내고 후보 중 그나마 덩치 큰 애를 빈 수비수 자리에 넣었다.

“5반, 5반, 5반…….”

“화이팅!”

비록 응원 구호는 일차원적이었지만 응원부장과 응원팀은 최선을 다했다. 플래카드와 야구장에서 쓰는 플라스틱 응원봉, 흰색 바탕에 검은 붓글씨로 ‘55555’라고 적은 거대 깃발까지 동원한 열정적인 응원으로 다른 반을 압살했던 것이다.

단체 줄넘기 1등, 축구 대회 1등. 응원의 힘인지 팀워크의 힘인지 리더십의 힘인지, 아무튼 5반은 기적적인 기록을 남기며 이제 체육 대회의 하이라이트인 이어달리기 결승만을 남겨 두고 있었다.

“반장, 나 진짜 못 하겠어…….”

“뭐라고?”

반에서 가장 빨라서 마지막 주자를 맡은 계주 에이스가 울상을 지으며 선호의 팔을 붙잡기 전까지만 해도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멘탈 잡아 봐. 우리 이거만 이기면 3관왕이야.”

“어제 결승에서 넘어지는 꿈 꿨는데…… 아무래도 예지몽인 것 같아.”

“뭐? 너 예선에서 한 번도 안 넘어졌잖아. 평소처럼만 해.”

“아니라고! 어제 꿈에서 봤다고! 다리에서 막, 피가 철철 났어.”

그 녀석은 아무리 차분하게 설득해도 요지부동이었는데, 나중에는 겁에 질려 눈가에 눈물마저 그렁그렁 맺혔다.

경기 시작까지는 30분. 선호는 속으로 다른 후보 몇몇을 라인업에 끼워 넣어 보았지만 도무지 승리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그들은 이 말라깽이가 꼭 필요했다. 선호는 그의 어깨를 양손으로 꼭 잡고 천천히 말했다.

“너 꿈에서 몇 번째 순서였어?”

“마지막.”

“지훈아, 있잖아. 그게 진짜 예지몽이라면, 나랑 순서 바꾸면 되지 않을까? 네가 두 번째로 뛰면 꿈 내용 하고 달라지잖아.”

“어……. 그러네. 그럼 마지막 주자는 누가 해? 네가 하게?”

“응. 내가 할게.”

“고마워, 반장!”

녀석은 언제 세상이 무너질 것 같은 표정을 지었냐는 듯 홀가분하게 어디론가 달려갔다.

5반은 본래 1, 2번 순서에 상대와 비등하게 가거나 살짝 차이를 벌릴 수 있는 주자를, 3번에 무난하고 안정적인 주자를, 4번에 몸이 가볍고 발이 빠른 에이스를 투입해 승부를 보는 전략을 세워 두었다. 그러나 에이스가 2번으로 들어가고 선호가 마지막으로 빠지며 변수가 생긴 것이다. 선호는 180cm가 넘는 신장에 이미 고2 학생이라기보단 성인 남성의 체격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달리기가 빠르기는 해도 마지막 스퍼트에 적합한 선수는 아니었다.

“선호, 선호. 괜찮아. 할 수 있어.”

“반장, 힘내!”

부담이 되고 어깨가 무거웠지만 선호는 아무렇지 않게 미소 지었다. 지금 불평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었다.

“선호-오오, 555! 선호-오오, 555! 오! 오!”

“아, 그만해.”

급기야 응원부장은 노래까지 지어 부르기 시작했고 분위기는 다시 화기애애해졌다.

한 자리에 바글바글 모인 5반 아이들과 조금 떨어진 곳에 눈길이 간 게 그때였다. 소년은 등나무 그늘 아래 무릎을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반티가 아닌 체육복 차림이었지만 엄연히 2학년 5반의 일원이었다.

이명.

언제부터 언제까지 결석한다고 했더라. 하도 그런 일이 잦아서 이제는 담임이 제대로 말해 주지도 않았다. 지난 일주일 동안은 일본에서 중요한 대회가 있다고 했는데, 오늘 오는 거였나.

이명은 다리를 모아 팔로 감싼 채 턱을 무릎 위에 대고 있었고 늘 그렇듯이 우울한 표정이었다. 선호는 문득 그가 언제부터 그곳에 앉아 있었는지 궁금해졌다. 계속 자신들을 지켜보고 있었는지도.

체육 대회를 준비하던 나날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단체 줄넘기와 이인삼각, 축구 대회, 이어달리기 선수를 정하던 날도, 반티를 정하던 회의 시간에도 이명은 없었다. 아니, 정확히 기억나지 않으니 아마 없었을 것이다. 그는 자리에 있든 없든 아무도 찾지 않는 아이였다.

이명을 모든 체육 활동에서 제외하라는 담임의 각별한 지시가 있기도 했지만, 그렇지 않았어도 아마 선호는 아마 그를 모든 활동에서 무심코 빼 버렸을 것이다. 이미 선호의 머릿속에서 5반은 축구부 두 명과 이명을 뺀 서른세 명이었고, 그 세 명 중 누구도 제외되었다는 사실에 불만을 품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쓸쓸해 보여. 반티라도 한 장 챙겨 줄 걸 그랬나.’

혼자 체육복 차림으로 앉아 있는 모습이 보기 편치 않았다. 몸이 약한 아이니까 체육 종목에선 빼더라도 응원팀엔 넣어 줄 수 있었는데. 이명을 없는 사람처럼 모든 논의에서 제외한 게 마치 제 탓 같아서 죄책감이 들었다.

“경민, 우리 반티 수량 딱 맞춰서 주문했었나?”

“갑자기 무슨 소리야?”

“M짜리 남는 거 없나 해서.”

“저번에 하나 남은 거 잘라서 걸레로 쓰지 않았나? 그건 왜?”

선호는 등나무 아래에서 공벌레처럼 등을 웅크리고 앉아 있는 남학생을 살짝 턱짓했다. 경민이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쟨 왜 왔지? 아무것도 안 할 거면 집에나 있지.”

“할 짓도 드럽게 없나 보다.”

남학생들은 때로 무관심한 것들에 관해 폭력적일 정도로 잔인했다. 그 문화에 속해 있는 선호 역시 이전까지 크게 불편함을 느끼지 못했으나 이번에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아무래도 ‘지랄하네’ 사건 이후 무언가 달라진 것 같았다.

“어차피 빠져도 담임이 커버 쳐 줄 텐데, 진짜 왜 왔지?”

“뭔 커버를 치냐, 대학도 안 간다는데. 저 새끼 출결 상관없다고.”

“그래? 근데 학교 왜 다녀?”

가령, 아무에게도 보이지 않는 이명이 선호의 눈에만 보인다든지. 그가 왜 저렇게 울적한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것 같은 기분이 든다든지. 그 원인이 자신이 그를 챙기지 않은 탓인 것 같아 죄책감이 든다든지.

“이제 그만해. 학교를 다니든 말든 명이 마음이지.”

“오올, 역시 반장은 착해.”

“아무튼 반티 남은 거 없단 거지?”

“아마도? 그보다 너 몸이나 풀어. 10분 남았다.”

선호는 한숨을 쉬고 일어났다. 기지개를 쭉 켜고 팔을 양옆으로 움직이며 준비 운동을 천천히 했다. 그러자 이전까지 보이지 않았던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등나무에 언제부터 저렇게 꽃이 많이 피었던가. 포도송이처럼 주렁주렁 달린 보랏빛 꽃들이 바람결에 따라 흩날리고 있었다. 그 광경이 비현실적일 정도로 신비로워서 그 아래 파묻혀 있던 소년과 눈이 마주친 건 차라리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이명은 화들짝 놀라거나, 눈을 크게 뜨거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선호는 먼 곳에서 그를 가만히 바라보다 먼저 눈을 다른 곳으로 돌렸다.

“아, 아……. 곧 이어달리기, 이어달리기 결승전이 시작됩니다. 5반과 3반 선수들은 출발선으로 와 주십시오.”

선호는 허리를 굽히고 느슨하게 묶인 신발 끈을 풀었다. 흰색 운동화의 끈을 다시 빡빡하게 맨 뒤 일어서자 다른 세 주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반장, 준비됐어?”

“응.”

“그럼 가자.”

남들의 기대감을 한 몸에 받는 건 선호에게는 매우 익숙한 일이었다. 그는 집에서 애정과 관심을 듬뿍 받는 외아들이었고, 성적이 우수해서 촉망받는 학생이었고, 늘 남들보다 큰 책임을 진 리더였다. 그러나 이번만은 조금 다른 종류의 시선이 느껴졌다. 그게 무엇인지, 아직 그의 등에서 떨어지지 않은 이명의 눈빛이 무슨 뜻인지, 선호는 그 실체를 알지 못했지만.

‘체육 대회의 꽃’이란 별칭답게 아이들이 계주를 구경하러 구름처럼 몰려들었다. 트랙을 둘러싸고 벽을 치며 인간 아레나를 형성했다. 응원부 아이들이 제각각 장비를 들고 가장 앞줄에 앉았다. 그리고 곧 3반과 5반 선수들이 출발선에 섰다. 전교에서 운동을 특히 잘하는 두 반에서 가려 뽑은 에이스들이다 보니 하나하나 존재감이 엄청났다. 주자들이 몸을 풀거나 상대 주자와 눈을 마주치며 기 싸움을 벌이는 동안 구경꾼들은 어느 반이 이길 것 같은지 큰 소리로 떠들었다.

긴장감이 흐르는 분위기 속에서 첫 번째 주자들이 자세를 잡았다. 마이크를 든 학생 주임이 묘하게 느린 속도로 숫자 3부터 역순으로 셌다. 그리고 때가 되자 ‘땅!’ 소리가 울려 퍼지며 주자들이 바통을 쥐고 달려 나갔다.

“오! 오! 오! 5반! 5반! 5반!”

“3반, 3반, 3반이 최고야……!”

걸걸한 목소리로 외치는 응원 소리가 파란 하늘을 뒤흔들었다. 두 선수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대등하게 달렸으나, 곡선 구간을 돌면서 자연스럽게 차이가 2m쯤 벌어졌다. 3반 애들의 함성이 운동장을 가득 메웠다. 바통을 터치하며 격차는 더 늘어났다.

5반의 다음 주자는 원래 마지막으로 뛰기로 되어 있던 지훈이었다. 멘탈이 약하고 소심해서 그렇지 발 하나는 누구보다 빠른 녀석이라, 상대 주자와의 격차를 놀라울 정도로 금세 좁혔다. 그뿐인가, 커브마다 차이를 조금씩 벌리더니 결국 적지 않은 우위를 점하며 트랙을 마쳤다. 그 애는 들어오면서 홀가분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꿈에서처럼 많은 사람들 앞에서 넘어지지 않은 게 못내 기쁜 모양이었다.

5반의 세 번째 주자는 이전 선수의 활약 덕분에 10m 정도 앞서서 시작했다. 그런데 바통을 받은 지 30초도 되지 않아 제 발에 걸려 넘어지는 불상사가 일어났다. 3반 선수가 보란 듯이 역전하자 숨죽이고 경기를 지켜보던 관중이 탄식을 흘렸다. 3반 응원단 측에선 이미 승리한 것처럼 과격한 응원의 함성을 터뜨렸다. 5반 주자는 뒤늦게 일어나서 달렸지만 어느새 반 바퀴까지 벌어진 차이를 좁히기엔 역부족이었다.

출발선에 선 선호는 심호흡을 했다. 친구가 넘어지는 걸 보고 적잖이 낙심했지만 마음을 다잡으려고 애썼다. 곁에 선, 그보다 키가 한 뼘쯤 작은 3반 남학생은 의기양양해 보였다.

곧 그 애가 먼저 바통을 받고서 서두르는 기색 없이 달려 나갔다. 선호는 미리 출발 자세를 취하고 팔을 뒤로 길게 뻗은 채 기다렸다. 미안한 기색이 낯빛에 가득한 친구가 헐레벌떡 들어와 바통을 건네자, 그는 푸른 플라스틱 봉을 왼손에 꼭 쥐고서 땅을 힘차게 박찼다.

몸이 유독 가볍게 느껴지는 날이 있다. 또 인간은 절실할 때 평소보다 훨씬 힘이 난다고 했던가. 운동장을 밀어내는 다리의 힘이, 몸이 위아래로 흔들리며 터져 나오는 호흡이 예사롭지 않았다. 미지근한 공기를 가르고 앞으로 나아가는 몸은 어느 때보다도 강하고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빠르다. 빠르다고 스스로 느낄 수 있을 정도였다.

뜨거운 승부욕이 다리를 조종하고 있었다. 강한 책임감이 순풍처럼 등을 거세게 밀었다. 거리는 조금씩, 그러나 확실하게 좁혀졌다. 승기를 잡았다고 생각한 3반 아이는 자만하고 있었다. 반면에 선호는 시야에 목표물을 두고 절실한 심정으로 달렸다.

악착같이 달리며 조금씩 격차를 줄여 나가다 보니 어느덧 역전을 넘볼 만한 거리가 되었다. 상대편 주자가 뒤돌아보더니 다급히 속도를 올렸다. 1등과의 거리는 더 멀어졌지만, 선호는 포기하지 않고 스피드를 유지했다.

코너를 돌자 멀리 결승선이 보였다. 이대로라면 2등으로 남겠지만 선호는 동요하지 않았다. 상대 소년이 힐끔힐끔 뒤돌아보는 빈도가 점점 늘어났다. 땅을 박차는 발짓이 어딘가 불안정해 보였다. 그럴 때마다 선호는 그의 앞에 놓인 간격을 놓치지 않고 날름 잡아먹었다.

꽉 쥔 주먹에 땀이 차고 살짝 벌어진 입에서 거친 숨이 흘러나왔다. 잔뜩 긴장한 허벅지와 장딴지의 근육이 최고 출력을 냈다. 모래를 헤치고 단단한 땅을 디디며 몸을 힘차게 밀어냈다. 따라잡아야 할 거리는 이제 고작 2m 정도였다.

적은 여유를 잃은 표정이었다. 선호는 그의 불안한 눈빛을 보았고 절박하게 갈라지는 숨결을 들었다. 소년의 공포심을 본능처럼 감지할 수 있었다. 그 감각은 선호로 하여금 승리를 더욱 갈구하게끔 했다. 둘만이 느낄 수 있는 팽팽한 긴장 속에서 선호는 마치 초식 동물을 쫓는 육식 동물처럼, 피에 주린 포식자처럼 사냥감을 맹렬하게 뒤쫓았다.

“윽!”

선두의 무게에 짓눌린, 혹은 방심한 소년이 발을 헛디뎠을 때도 선호는 놀라지 않았다. 다만 은밀한 흥분과 질 나쁜 성취감을 느꼈을 뿐이었다. 마치 자신이 그 가련한 애를 쏘아 맞히기라도 한 것처럼, 그의 목에 이빨을 박아 넣어 숨통을 끊어 놓은 것처럼 야만적인 희열을 온몸에 뒤집어쓰고 달렸다. 앞서 나가던 적이 낙마했으니 남은 건 한가지였다.

한선호는 손을 뻗어 승리를 움켜쥐었다.

파란 바통을 들고 결승선을 통과한 순간, 그전까지 들리지 않았던 함성이 귓속으로 쏟아졌다. 응원 소리는 음소거된 TV를 보다가 실수로 볼륨을 100까지 올린 것처럼 컸다. 온갖 호들갑을 떠는 반 아이들에 둘러싸여, 선호는 그를 잡아당기거나, 들어 올리거나, 껴안으려는 모든 시도를 내버려 두었다.

흥분은 쉽게 잦아들지 않았다. 광포할 정도의 승부욕과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의 집착. 무슨 짓을 해서라도 사냥감을 놓치지 않는 용의주도한 사냥꾼에서 고2짜리 모범생으로 돌아오기 위해 선호는 몇 번이나 숨을 골라야 했다.

그는 먼 곳으로부터 어떤 시선을 느꼈지만 모른 척했다. 실은 그리 먼 곳이 아니었다. 단지 선호가 속한 세계 밖이었을 뿐이지, 소년은 여전히 등나무 아래 앉아 있었으니까.

“반장, 나 진짜 반할 뻔했어.”

“으흐흑, 흑……. 정말, 감동적인 경기였다…….”

선호는 여전히 그 시선의 실체를 알지 못했다. 그것은 이따금 튀어나오는 자신의 동물 같은 면모만큼이나 이질적인 것이었다.

그는 걷잡을 수 없이 떨리는 호흡을 몇 번에 걸쳐서 천천히 내뱉었다.

* * *

체육 대회 이후 들뜬 분위기는 쉽게 잡히지 않았다. 어느 반이나 마찬가지였지만 단체 줄넘기 1등, 축구 대회 1등, 이어달리기 1등으로 눈부신 3관왕을 차지한 5반은 그 정도가 더욱 심할 수밖에 없었다.

“아 쌤, 저희 요즘 운동 너무 열심히 해서 힘들다구요.”

“시험도 끝났고 1등 반이잖아요. 좀 봐주세요.”

교사 중 대다수는 이럴 때 못 이긴 체 넘어가는 것이 현명함을 알고 있었고, 평소에 진지하고 깐깐한 화학 교사도 예외는 아니었다.

“알았다. 오늘은 그럼 특별히 재미있는 영상을 보도록 하자.”

“와아아아아아아악!”

화학 시간에 이토록 대단한 호응이 돌아온 적은 학기가 시작한 이래 처음이었다. 선호는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수업을 듣고 싶은 마음이 조금도 없었으므로 재빨리 일어나 불을 껐다. 창가 쪽 애들이 커튼을 치자 화학실이 암실처럼 어두워졌다. 커튼 틈새로 빛이 희미하게 들어오며 공중에 풀풀 날아다니는 먼지가 반짝거렸다.

어떤 영화일까, 야한 거면 좋겠다. 아이들은 두근두근 설레는 마음으로 화면을 보았다. 그리고 교사가 플레이한 영상은…….

“따라라라, 따라란……. JBS 과학스페셜, 인체의 신비.”

“아, 쌤! 이건 아니죠!”

“이럴 줄 알았다…….”

불만 가득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화학 교사는 버럭 소리쳤을 뿐이다.

“조용히 해, 새끼들아!”

몽둥이를 꺼내 공중에 흔들어도 크게 소용이 없었다. 아이들이 계속해서 구시렁거리자 반장이 불려 나왔다.

“반장, 여기 나와서 떠드는 놈들 이름 적어.”

“……네.”

“잠깐 교무실 다녀올 테니까, 떠드는 소리 밖으로 안 새어 나가게 해.”

“네. 다녀오세요.”

선생이 앞문으로 사라지자 아이들은 한숨을 내뱉었고, 불평을 중얼거렸고, 크게 하품했다. 그러나 선호가 정색하지 않아도 분위기는 금세 조용해졌다. 전 시간이 체육이었던 데다 밥 먹은 지 얼마 안 돼서 잠이 솔솔 오는 시간대였기 때문이다. 영상에 집중하는 녀석은 드물었지만, 그래도 떠들지 않는 게 어딘가.

“사람의 몸을 작은 우주에 비유하듯이…….”

“콜록! 콜록!”

“우리의 신체에는 다양하고 신비로운 화학적 작용들이…….”

“윽, 흑……. 흡, 콜록콜록!”

귀에 거슬리는 소리가 들리기 전까지만 해도 선호는 교사가 남기고 간 종이에 낙서하며 시간을 때우고 있었다.

그것은 숨죽인 기침 소리였다. 평범한 기침이라기엔 무척 괴롭게 들렸고 얼핏 들으면 토악질하는 건가 싶을 정도로 격렬했다. 게다가 입을 틀어막고 있는지 답답하게 들렸다.

“아, 시끄럽네. 쟤 왜 저러냐?”

“존나 기흉이라서.”

소곤거리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커졌다. 그러나 기침 소리는 기다려도 그치지 않고 오히려 조금씩 심해졌다. 반에서 호흡기가 특별히 안 좋다고 알려진 아이는 단 한 명뿐이다. 선호는 그쪽을 굳이 보지 않아도 누구의 목소리인지 알 수 있었다.

“아오, 병신 새끼.”

종이에 의미 없는 모양을 그리던 선호의 손이 멈추었다.

“저러다 뒈지는 거 아냐?”

“1학년 땐 실려 갔다는데.”

그 애는 반의 다른 아이들과 아무런 유대감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아이들은 다른 놈이 그랬으면 아무렇지 않게 웃어넘겼을 행동을 이명이 했다는 이유로 공격하고 있었다. 비겁한 짓이었다.

“야, 떠들면 이름 적는다.”

선호가 크게 소리치자 이명을 조롱하던 애들이 잠시나마 조용해졌다. 그러나 신음을 닮은 기침 소리는 멎을 기미가 없었다. 선호는 펜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명이 보건실에 데려다주고 올게. 대신 애들 좀 봐 줘.”

“어어……. 알았어.”

부반장에게 언질한 뒤 소리가 나는 곳으로 걸었다. 짓궂은 애들이 뭐가 우스운지 작게 낄낄거렸다. 부반장이 조용히 하라고 말하는 소리가 등 뒤에서 들렸다.

이명은 구석 자리에서 새우처럼 웅크리고 있었다. 늘 보았던 무표정하고 차가운 모습은 온데간데없었고 괴롭다는 표정을 짓고 있어서 마치 다른 사람 같았다. 그는 기침하느라, 그리고 기침을 참느라 정신이 없어서 선호가 바로 옆까지 다가왔는데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선호는 이명의 어깨를 붙잡았다. 몸을 숙이며 피가 몰려 새빨개진 귓가에다 속삭였다.

“나가자.”

그래도 이명이 아무 반응 없자, 선호는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넣고 그를 의자에서 일으켰다.

“으윽, 콜록콜록! 흑, 헉, 콜록!”

축 처진 몸은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고 선호가 이끄는 대로 힘없이 끌려왔다. 거친 기침 소리가 찢어진 철 조각처럼 귓가에서 쩔그렁거렸다.

“걸을 수 있겠어?”

이명은 잔뜩 찡그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선호는 그를 품에 안다시피 하며 뒷문으로 끌고 나왔다.

‘얘, 이러다 어떻게 되는 거 아냐?’

이명은 덜컥 걱정이 들 정도로 증세가 심각했다. 계속 의자에만 가만히 앉아 있었을 텐데 마라톤 경주를 마친 사람처럼 호흡이 가빴다. 발작적으로 숨을 들이쉬고 내쉬었으며 장기를 토해 낼 것처럼 격하게 기침했다. 그럴 때마다 마른 몸이 미친 듯이 흔들렸다. 안 그래도 창백하고 약해 보이는 아이인데, 이러다 종잇장처럼 찢어질 것만 같았다.

폐나 호흡기 질환에 관해 잘 모르는 선호가 봐도 단순한 호흡 곤란 같지 않았다. 남들은 편안하게 숨을 쉬는데, 같은 공기를 마시면서도 힘겨워하는 건 분명히 예전에 받았다는 기흉 수술과 관련이 있으리라.

선호는 가만히 서 있는 것조차 힘들어 보이는 그 애를 잠깐 지켜보다가, 왼쪽 손목을 붙잡고 천천히 잡아끌었다. 이명은 비실거리며 천천히 따라왔다.

선호로서도 이 상황이 겁나지 않을 리 없었다. 반장이기도 하고 애들이 욕하는 게 신경 쓰이기도 해서 일단 데리고 나오기는 했지만, 막상 사람이 죽을 것처럼 기침하는 걸 눈앞에서 보니 두려움이 덜컥 들었다. 머릿속에는 이 아이를 빨리 보건 교사에게 보여야 한다는 생각뿐이었다.

선호는 그의 손목을 단단히 붙잡았다. 팔을 최대한 뻗고서 그 거리를 유지하며 한 발짝 한 발짝 걸었다. 신경은 온통 뒤에서 들리는 기침 소리에 쏠렸지만 시선은 앞만 보았다.

복도를 통과해 계단까지 걸어가는 2분이 마치 1시간 같았다. 선호는 교복 셔츠가 땀에 젖은 이명만큼 땀을 심하게 흘리고 있었다.

“명이야!”

그러다 이명이 발을 헛디뎌 무너져 내렸을 때, 선호의 심장도 함께 쿵 떨어졌다. 무의식중에 뻗은 손이 덜덜 떨렸다.

“조금만 더 가면 보건실이야. 일어나.”

워낙 마른 아이라 안아 들고서 어깨에 둘러메는 것도 어렵지 않아 보였지만, 선호는 침착함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며 창백한 손목을 잡아끌었다. 이명은 고개를 푹 숙인 채 기침하면서도 천천히 일어섰다.

“계단 조심해.”

그러고는 느리지만 한 걸음씩 선호가 이끄는 대로 따라왔다. 그나마 말은 알아듣는 것 같아서 마음이 한결 놓였다.

“조금만, 조금만 참아 명이야. 선생님이 도와주실 거야.”

그러나 겨우 도착한 보건실은 비어 있었다. 미닫이문 너머에는 교사도, 학생도, 아무도 없었다.

“아, 보건 쌤 안 계시네…….”

이곳으로 데려오면 교사가 뭐든 해 주리라 생각했었다. 문이 열려 있는 걸 보면 잠시 자리를 비운 것일 테지만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입 안이 바싹 말라 갔다. 선호는 오른쪽을 살폈다가 이명의 상태가 심상치 않은 것을 보았다.

“명이야! 명이야, 괜찮아?”

이명은 오른손으로 유리 장식장의 틀을 쥔 채 바들바들 떨고 있었다. 계단을 내려오면서 조금 진정되었나 싶었는데, 이제는 오히려 처음보다 더 발작적으로 기침하고 있었다. 관절 모양을 따라 꺾인 손은 피가 마지막 한 방울까지 빠져나간 듯 창백했다.

손에 국한되었던 떨림은 팔로, 어깨로 금세 번졌다. 당황한 선호가 아무것도 못 하고 지켜보는 사이 유리 장에 매달려 몸을 지탱하던 소년이 차가운 바닥으로 엎어졌다.

“명이야!”

이름을 불러 봐야 달라지는 건 없었다. 선호는 어쩔 줄 모르고 문밖을 내다보았지만 복도는 조용하기만 했다.

무서웠다. 너무 두려워서 이마에 땀이 맺히고 손이 떨렸다. 선호는 무릎을 꿇고 이명의 곁에 붙어 앉았다.

“괜찮아?”

괜찮을 리가 있나. 아무 의미 없는 물음이었다. 핏기 없는 주먹이, 마지막 희망처럼 땅을 짚은 이명의 팔이 바르르 떨렸다. 이러다 곧 실신할 것 같았고, 그보다 더 안 좋은 일이 일어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어떻게 해야 하지.’

선호는 한순간 보건 교사를 찾으러 갈까 생각했다. 그가 간절히 필요하기도 했지만, 사실은 발작에 가까운 상태를 보이는 소년에게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그러나 이렇게 불안정한 상태의 친구를 혼자 두고 밖에 나가는 건 그에게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보건 선생님이 없는 현재, 이명을 도울 수 있는 건 오직 선호뿐이었다.

“봐 봐.”

선호는 두려움을 억누르고 침착하게 이명의 어깨를 쥐었다. 양 주먹을 바닥에 대고 토악질에 가까운 행위를 하는 그의 몸을 일으켜 세웠다. 그러자 혈액이 몰려 시뻘건 얼굴이 시야에 들어왔다.

선호는 타액이 흥건하게 흐른 이명의 입가로 손을 뻗었다. 질척한 촉감 때문에 본능적인 거부감이 들었지만 사람의 목숨이 걸려 있다고 생각하니 용기가 생겼다. 손바닥으로 그의 입을 막고 시선을 똑바로 마주했다.

“읍…….”

TV에서 방영한 다큐멘터리에서 비슷한 증상을 안정시키는 장면을 본 적이 있었다. 거기선 종이봉투를 사용했는데, 주변에 비슷한 것이 없어서 생각해 낸 방법이었다.

이명은 놀랄 때면 짓는 표정 그대로, 눈을 동그랗게 뜨고만 있었다. 비록 얼굴이 온통 새빨간 데다 땀을 비 오듯이 흘리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 모습을 보니 같은 반에서 공부하는 그 아이가 맞는 것 같아서 선호는 살짝 안심이 되었다.

선호는 이명의 눈을 마주한 채 말했다.

“과호흡일 때 숨을 참으면 좀 낫대.”

“흐윽……! 윽…….”

“진정될 때까지 조금만 참아. 응? 좀 있으면 보건 쌤 오실 거야.”

크게 뜬 눈 안에서 동공이 흔들렸다. 축축한 입술을 짓누른 손바닥이 뜨거웠다. 적막하기 짝이 없는 공간에 둘의 숨소리만 가득했다.

‘이 상황이 이상하겠지만 괜찮아질 때까지만, 조금만 참아.’

선호는 속으로 몇 번이고 중얼거렸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시계를 볼 경황이 없어서 알 수 없었지만 체감상으론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계속 손바닥을 밀어내던 거칠기 짝이 없는 호흡이 천천히 잦아들었다. 발작적인 기침도, 경련을 일으키는 호흡 곤란도, 다행스럽게도 다 지나간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여전히 손이 닿은 이명의 볼은 불에 덴 듯 뜨거웠다.

선호가 손을 떼자 이명이 온몸을 바르르 떨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입에서 흐른 침이 볼과 턱에 묻어 번들거렸다. 그는 지친 얼굴로 눈을 깜빡이며 떨리는 숨소리를 쏟아 냈다.

“미안.”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중얼거리더니, 눈을 스르르 감았다.

이명은 언제 숨넘어갈 것처럼 기침했냐는 듯이 곧 평온하게 잠들었다. 불과 조금 전까지 눈앞에서 괴로워했던 모습과 안정적인 호흡으로 쌕쌕거리는 현재가 너무 달라서, 선호는 넋이 나간 사람처럼 그를 바라보았다.

“응? 무슨 일 있었나?”

보건 교사가 등장한 것이 그때였다. 남자가 부리나케 달려와 벽에 기댄 이명의 얼굴을 여기저기 확인하는 동안 선호는 더듬더듬 말했다.

“저희 반에…… 이명이란, 아인데요, 선생님. 갑자기 수업, 중에…….”

“이명? 기흉 수술을 했다는 그 앤가?”

“네. 화학 시간이었는데…… 먼지가, 좀 많았나 봐요. 애가 갑자기 기침을 하기 시작하더니 안 멈춰서…… 선생님한테 보여 드리려고, 밖으로 나왔는데…… 제가…….”

‘손으로 입을 막았어요. 그리고 괜찮아졌어요.’

목을 타고 열기가 올라왔다. 선호는 문득 견딜 수 없이 부끄러워져서 하려던 말을 속으로만 삼켰다.

잠자코 듣던 교사는 이명의 어깨를 흔들었지만 그는 깨어나지 않았다. 보건 교사가 그의 몸을 땅에서 들어 올리다시피 하며 침대로 옮기는 동안에도 마찬가지였다.

평소라면 먼저 나서서 교사를 도왔을 선호는 그날만은 꼼짝도 할 수 없었다. 어쩐지 이명에게 가까이 가서는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강하게 들었다.

“별로 위험한 상황은 아닌 것 같지만, 일단 쉬게 놔두자.”

이전의 사정을 알지 못하는 교사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선호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격렬하게 흔들리던 머리카락과 붉게 물들었던 볼, 입술 사이에서 흘러나오던 타액……. 모든 것이 꿈인 듯 멀게 느껴졌다. 혹시 그리 심한 증세가 아니었는데 착각했던 걸까.

“여기까지 데려오느라 고생했어. 명이는 쌤이 볼 테니까 반장은 가 봐.”

“네.”

이명은 잠들었고 문제는 해결되었다. 선호는 다시 침착해졌다. 그는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하고 보건실에서 나왔다.

선호는 아무도 없는 복도 위를 걸었다.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간 것처럼 보였지만 빠르게 뛰는 심장만은 아직 그대로였다.

‘착각이 아니었어.’

이명의 입을 틀어막았던 왼손이 무겁게 느껴졌다. 입술이 한참 동안 닿아 있었던 손바닥에 도장을 찍은 것처럼 감촉이 남았다. 그곳에 소년의 타액이 여전히 묻어 있었다. 살짝 묻은 정도가 아니라, 질척거리고 축축한 액이 손끝에서부터 뚝뚝 흐를 정도로 흥건했다.

선호는 불쾌한 촉감을 매개로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회상했다. 건강이 안 좋은 친구를 최선을 다해 도왔다. 그뿐이었다.

그 행위는 순수한 선의였다. 또한, 책임감이었다. 어쩌면 약간의 동정심도 있었으리라. 그런데…….

‘헉, 으헉……! 윽, 흑……. 미안.’

걸음이 느려졌다. 그러나 심장 박동은 느려질 줄을 몰랐다.

귓가에서 하나의 음성이 반복해서 울렸다. 그 목소리는 선호로 하여금 한숨이 저절로 나오게끔 했고, 마른침을 삼키게 했다. 입가에서 미소를 지우고 숨을 턱 막히게 만들며 심장을 쥐어짜는, 아주 위험한 목소리였다.

선호는 어느새 아무도 없는 복도에 우뚝 서 있었다. 그는 중앙 기둥이 드리운 검은 그늘을 뒤집어쓴 채, 가라앉은 눈빛으로 왼손을 내려다보았다.

진득하게 묻은 남의 타액이 손목을 타고 아래로 느릿하게 흘러내리고 있었다. 보기 좋은 광경은 아니었다. 평소였다면 분명히 더럽다고 생각하며 곧바로 화장실에서 비누로 깨끗하게 문질러 씻었을 것이다.

한선호는 손바닥을 얼굴 높이까지 들어 올려 빤히 바라보았다. 문득 그는 입을 벌리고 혓바닥을 내밀었다. 그리고 그의 속에 살고 있는 동물이 타액을 핥아먹는 것을 허락했다.

* * *

이명은 점심시간 때까지 보이지 않다가 5교시가 시작하고서 교실에 등장했다. 담임이 칠판에 ‘자습’이라고 큼지막하게 적고 있던 시점이었다.

미닫이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들어온 이명은 어디 갔다 오냐는 교사의 질문에 보건실이라고 대답했다.

“들어가 앉아.”

자리에 앉는 그는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아파 보이지도 당황스러워 보이지도 않았으며 그저 평소처럼 우울하고 차가워 보였다.

그의 등장에 주목하는 사람은 반에서 선호뿐인 듯했다. 담임은 이명이 지각은커녕 무단결석을 해도 혼내지 않을 것이다. 화학 시간에 그를 욕했던 애들은 몇 시간이 지났다고 급우가 아파서 보건실에 갔다는 사실이나 본인들이 그를 두고 빈정거린 기억을 까맣게 잊은 것 같았다. 그보다 아이들의 마음을 끄는 건 폭우가 쏟아지고 천둥 번개가 치는 바깥 날씨였다.

“떠드는 사람 있으면 반장이 이름 적어. 무슨 일 있으면 교무실로 오고.”

“네.”

담임이 나가자마자 우르릉 꽝, 천둥이 또 한 차례 시끄럽게 울렸다. 선호의 시선이 무의식적으로 왼편으로 향했다.

“담탱이는 맨날 반장한테 다 시키지 않냐?”

“자습하면 우리야 좋지.”

“그래도. 저래 놓고 월급 챙길 거 아냐.”

작게 떠드는 애들 뒤로 늘씬한 남학생이 앉아 있었다. 양팔을 책상 위에 올린 조금 구부정한 자세였다. 들어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새 귀에 이어폰을 꽂고 있었다.

‘헉, 으헉……! 윽, 흑……. 미안.’

머릿속에서 떠날 줄을 모르는 장면이 또다시 재생되었다. 선호는 재빨리 고개를 돌려 책상 모서리를 보았다.

다 끝난 사건이다. 반장으로서 친구를 도왔으니 그거면 된 거다. 모르긴 몰라도 이명은 그 일을 잊고 싶을 것이다. 데면데면한 사람과 그런 식으로 접촉하는 게 좋을 리 없으니까. 그것도 자신의 치부를 보이고 침을 질질 흘리면서.

그런데 왜 자꾸 그 일이 떠오르는 것일까.

“와, 미쳤다.”

“우와, 쩔어!”

“빨리빨리 창문 좀 열어 봐.”

한순간 번개 때문에 교실 전체가 번쩍이는 백색으로 물들었다. 할 일을 하거나 졸던 아이들도 고개를 들어 창밖을 보며 한마디씩 했지만 뒤이은 천둥소리 때문에 말소리가 뭉개져서 들렸다. 선호는 다른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멍청한 표정으로 창문을 보았다.

“우와, 바로 옆에 떨어진 거 아냐?”

“대박, 어디?”

“저기 시커먼 데.”

그러나 그가 보는 것은 바깥 풍경이 아니었다. 그의 시야 중간에는 몇 시간째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소년이 있었다. 빛을 거울처럼 반사하는 널찍한 창을 배경으로 남자아이의 옆모습이 있었다.

교실이 어두운 탓에 그늘진 피부가 은밀한 푸른빛으로 보였다. 콧날과 입술의 부드러운 실루엣이 역광 때문에 도드라졌다. 빛이 조각해 놓은 옆선은 말문이 막힐 정도로 섬세해서 그가 앉아 있는 각도가 우연이라기보단 공들인 연출처럼 보였다.

“비 존나 온다.”

“새꺄, 존나가 뭐냐.”

“꼰대 새끼.”

한동안 그림처럼 가만히 있던 아이는 고개를 뒤로 살짝 꺾더니 귀에 꽂힌 이어폰을 뺐다. 선호는 그 장면에서 어떠한 작은 변화도 놓치고 싶지 않아 눈조차 깜빡이지 않았다. 애들이 떠드는 소리가 천둥소리보다 커졌다는 위기감이 뒤늦게 찾아왔다.

“조용히…… 해.”

선호의 경고는 작은 혼잣말이나 마찬가지여서 누구의 주의도 환기하지 못한 채 소음에 묻혔다. 이러다 담임이 돌아올지도 모른다.

“야! 조용히 해!”

선호는 소리를 버럭 지르면서도 곁눈질로 왼편을 주시했다. 잠깐 한눈판 사이 이명이 사라질 리도 없는데 저절로 시선이 갔다.

이명은 다른 철없는 놈들과 마찬가지로 바깥을 보고 있었지만 전혀 다른 생각에 빠진 사람처럼 보였다. 무겁게 내리는 비 때문일까 번개 때문일까, 그도 아니라면 아무 생각 없을까. 눈을 살짝 크게 뜨고 입을 벌린 표정은 선호가 이제껏 보았던 어떤 얼굴과도 비슷하지 않았으며 이렇게 눅눅한 교실이 아닌 더 특별하고 귀한 장소에 어울릴 것 같았다.

귀가 먹먹했다. 애들이 떠드는 소리도 천둥소리도 까마득히 멀었다. 단지 이 시점의 온도와 습도, 빛, 그리고 공중에 떠다니는 먼지까지도 이 한 장의 그림을 완성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인상만이 강하게 내리꽂혔다.

번쩍.

세상이 또 한 번 새하얘졌다가 다시 본연의 빛깔로 천천히 돌아왔다. 영화의 클라이맥스 같은 순간에 선호는 극한까지 참고 있던 숨을 몰아쉬었다.

다시 교실에 그늘이 깔리며 축축한 배경이 눈에 들어왔다. 그때 이명이 눈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빛이 어지럽게 반사된 눈동자를 완전히 덮었던 눈꺼풀이 올라갔다가 천천히 떨어졌다.

이명은 눈을 반쯤 뜨고서 선호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귓가에 음악이 들렸다. 태어나서 한 번도 들어 본 적이 없는 선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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