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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열여덟, 봄 (4/21)

4. 열여덟, 봄

선호는 바쁘게 지냈다. 날씨가 쌀쌀하든 따뜻하든, 비가 오든 눈이 오든, 그는 공을 차야 했다. 축구는 그와 친구들이 타고난 사명이나 다름없었고 만사를 제치고서라도 이룩해야 할 하루의 중요한 목표였다.

그러면서도 선호는 수업에 적당히 집중하며 공부에 신경 써야 했다. 새로 배우는 사탐 과목들은 따로 인강을 들어 예습했으며 주요 과목은 아무리 열심히 해도 부족하지 않았다. 미래에 목표를 이루기 위해서는 내신과 모의고사, 어느 것도 포기할 수 없었다.

거기다 선호는 작년에 이어 방송부 활동도 해야 했다. 고3 선배들은 보통 전혀 활동하지 않기에 2학년이 일선으로 떠밀렸다. 선호는 방송부장으로서 점심시간마다 교실과 방송부실 사이를 뛰어다니며 편성표를 짰고, 방송을 관리했고, 때로는 점심 방송을 진행하기도 했다.

시간은 걷지도 달리지도 않았다. 시간은 날아갔다.

눈이 온 게 언제 적 얘기인지, 어느새 벚꽃이 피었다. 연약한 꽃잎들이 추위 속에서도 잘 붙어 있다 싶었더니, 폭우 몇 번에 모조리 떨어져 내렸다. 날씨가 언제 이렇게 따뜻해졌지 싶어 춘추복을 옷장에서 꺼냈을 때쯤 중간고사 기간이 끝났다.

“32등? 엄마가 알면 나 뒤졌다.”

“그래도 네 뒤에 네 명이나 더 있네.”

“장난하냐? 두 명은 축구부잖아.”

“너도 축구부 들어가…….”

김지남 선생은 첫 조례 시간에 시사했듯 자신의 천박하고도 뚜렷한 목표를 조금도 숨기려 하지 않았다. 그는 한 명씩 불러서 시험 결과를 알려 주는 대신, 중간고사 성적순으로 점수와 이름을 나열하여 A4도 아닌 A3용지에 뽑아 벽면에 붙여 버렸다.

‘3등, 나쁘지 않은데.’

선호는 이번 시험을 대비해서 공부를 꽤 열심히 했다. 특히 국사 같은 암기 과목에 공을 들였고 그 작전은 잘 먹혔다. 운도 꽤 좋았다. 수학 시험 같은 경우 자신 있는 단원에서 문제가 유독 많이 나왔기 때문이다.

제 성적을 과목별로 훑던 검은 눈동자가 한 계단 위로 올라갔다. 선호는 두 번째 줄에 적힌 이름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와 자신의 평균 점수는 고작 0.3점 차이였고 그래서 더 거슬리는 격차였다.

그곳에 있는지도 모를, 죽은 듯이 조용한 아이. 쉬는 시간에는 늘 어디로 사라지거나 이어폰을 꽂고 있는 남자애. 공부를 그리 열심히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선생님의 질문에 대답하거나 앞에 나와 문제를 풀 때도 평범하게만 보였는데.

“선호, 3등 해 놓고서 표정이 왜 그래?”

“2등 뺏겼냐? 오, 얘 생각보다 공부 잘하네.”

“뺏기긴 뭘 뺏겨. 명이가 나보다 공부를 열심히 했나 보지.”

선호는 아무렇지 않게 대꾸하고 자리로 돌아갔다.

책상 모서리에 한동안 꽂혀 있던 시선이 슬그머니 왼쪽으로, 이틀 전부터 비어 있던 의자로 향했다. 무슨 대회 때문에 빠진다고 했던가. 기억나지 않았고 사실은 외우려고 애쓴 적도 없었다. 어차피 자주 자리를 비우는 아이가 뭘 하고 다니는지 궁금해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니까.

자주 결석하는 게 문제가 아니었다. 체육 시간에 혼자 그늘에 앉아 있어도 마찬가지. 단순히 그런 이유 때문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이명은 이상할 정도로 못 섞이는 아이였다.

눈이 마주치면 피하고 목소리는 일부러 주의를 기울여 들어야 할 만큼 작았다. 원체 말이 없었고 웃는 일은 더더욱 없었다. 그의 이름을 부르는 건 교사들뿐이었다. 애들 사이에서는 거의 언급될 일조차 없었지만, 부를 일이 있다면 이름 대신 ‘기흉 걔’로 통했다.

학기 초반만 해도 그 애의 비범한 재능과 경력은 가십으로 소비되었고 그가 누리는 편애와 특권은 질시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아이들은 금세 무심해져 이제는 그에게 작은 관심도 주지 않았다.

선호는 이명에 관한 소문을 떠들어 본 적도, 본인이 없는 자리에서 그를 비방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그에게 관심이 없다는 점에선 다른 아이들과 다르지 않았다.

‘뭐, 2등이나 3등이나 만족스러운 결과잖아.’

선호는 석차 목록에 위아래로 적혀 있던 두 이름을 머릿속에서 지우며, 가방에서 둘둘 말린 색상지를 꺼냈다.

김지남 선생님께

안녕하세요, 선생님. 2-5 반장 한선호입니다. 스승의 날을 맞이해서 이렇게 편지를 써요.

새 학기가 시작한 지 세 달도 안 됐는데 감사한 일을 짜내야 했다. 매년 그렇지만 올해는 특히 더 쓸 말이 없었다. 선호는 머리를 쥐어짜 어떻게든 다섯 줄을 채웠다.

“야, 이거 돌릴 테니까 모레까지 다 써. 내 거보다 짧으면 절대 안 돼.”

색상지를 높이 들고 크게 말하자 떠들던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선호에게 향했다.

“뭔데, 뭔데? 아, 담탱이? 난 패스.”

“아랍어로 써도 됨?”

“난 이렇게 시작할래. 존나 한심하신 씨발놈에게…….”

‘어휴, 진짜…….’

선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롤링 페이퍼를 1분단 첫째 줄에 앉는 아이에게 넘겼다.

문제의 릴레이 편지는 이틀이 지나 스승의 날 당일에 겨우 완성되었다. 김치놈에겐 할 말 없다는 놈, 글자 쓰는 법을 까먹었다는 놈, 나중에 쓰겠다는 놈, 외국어로 쓰겠다는 놈, 별별 놈들을 어르고 달래 가며 한 줄이라도 쓰게 하고, 행간에 숨겨진 온갖 조롱과 욕설을 검열하고, 눈에 띄게 남은 공백을 교묘하게 잘라 내자 점심시간이 20분밖에 남지 않았다.

선호는 애들한테서 1,000원씩 걷어서 산 롤 케이크과 롤링 페이퍼를 들고 교무실로 향했다. 문에 노크하고 미닫이문을 열었다가 뜻밖의 인물을 보았다.

3일 만에 보는 이명은 여전히 창백하고, 무표정하고, 기운 없어 보였다. 그 곁에 선 중년 여자는 그처럼 마른 체격인 데다 예민해 보이는 눈매가 비슷했다.

담임이 선호가 처음 보는 자애로운 미소를 지으며 이명의 팔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명이, 대회 우승이라니! 쌤이 그럴 줄 알았어. 방송으로 봤는데 정말 잘하더라, 야.”

“신경 써 주셔서 감사드려요, 선생님. 명아, 뭐하니. 어서 인사드려야지.”

이명은 아무 표정 변화 없이 고개만 꾸벅 숙였다. 그러고서 아주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감사합니다.”라고.

“애가 이렇게 숫기가 없어요. 선생님께서 이해해 주세요.”

“기사가 바둑만 잘 두면 되죠, 어머니. 그리고 명이 잘하고 있어요. 이번 중간고사 결과 보셔서 아시겠지만 공부도 너무 잘 따라가고 있고요. 특별히 당부하신 사항을 고려해서 체육 시간에는 부득이하게 열외로 하고 있지만 수업 태도도 그렇고 흠잡을 데 없는 학생입니다.”

“정말 감사드려요, 선생님. 건강 부분은 신경 써 주신다고 믿을게요. 저번에도 말씀드렸지만 그게 워낙 재발하기 쉬운 병이고, 폐가 많이 안 좋다 보니 숨이 차면 힘들어해요. 심하면 응급실에 가야 할 수도 있으니까요……. 선생님만 믿고 아이 맡겨요.”

“걱정 마십시오, 어머니! 제가 체육 교사들한테 다 각별히 당부해 놨답니다. 그치? 힘든 일 하나도 없었지, 명이야?”

이명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주 작게 고개를 끄덕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했다.

선호는 무표정한 옆얼굴을 자세히 뜯어보았다. 몸이 자주 아프다는 걸 알고 봐서인지 뺨이 유독 핏기 없어 보였다. 어딘가 슬퍼 보이는 눈이나 귀염성이 있는 입매는 예쁘장하다는 느낌을 줬는데 전반적으로는 소설에 나올 법한, 커다란 저택에 사는 도련님 같은 인상이었다.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으면 하인에게 찻잔을 집어 던질 것 같은. 그러면서도 체형은 길쭉길쭉해서 제 엄마보다 15cm는 더 커 보였다.

“이거, 별건 아니지만 댁에서 아이들하고 드세요.”

“아이고 어머니! 뭐 이런 걸 다 사 오셨어요. 여기 유명한 제과점이잖아요. 정말 감사합니다. 어유, 명이 덕에 쌤이 이렇게 좋은 것도 다 먹어 본다. 응?”

담임은 입이 찢어지도록 웃으며 몇 번이나 허리를 숙였다. 이명과 그의 엄마가 교무실을 빠져나갈 때 선호는 고개를 까딱거리며 살짝 비켜 주었다. 이명과 잠시 눈이 마주친 것 같았지만 그가 빠르게 나가 버려서 확실하지는 않았다. 고개를 돌렸을 땐 갈색 뒤통수밖에 볼 수 없었다.

선호는 미닫이문을 닫고 담임의 책상 앞까지 갔다. 여전히 웃는 낯이던 그는 선호를 보자 왜 왔냐는 듯 눈썹 한쪽을 올렸다.

“응? 무슨 일이냐, 반장?”

“이거, 저희 반 아이들이 같이 준비했어요.”

편지가 듬성듬성 적힌 색상지와 롤 케이크가 든 종이봉투를 건네자 담임이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으로 선물을 책상 끄트머리에 놓았다.

“그래. 고맙다.”

그는 내용물은 보지도 않고 시선을 모니터로 돌렸다.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선호는 과제를 하나 끝낸 기분으로 교무실에서 나왔다.

* * *

5교시는 체육 시간이었다. 중간고사가 끝난 지 얼마 안 된 시기라, 체육 교사는 달리기만 한번 시키고 애들이 축구를 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반장인 선호는 창고에서 공을 가져오고, 팀을 나누고, 공격수로 뛰며, 분쟁이 생겼을 때는 심판까지 보았다.

5월의 태양은 뜨거웠다. 반바지에 반팔 차림이었는데도 햇살 아래서 쉴 새 없이 뛰다 보니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었다. 결과는 2:1이었고 승리를 결정짓는 마지막 골은 선호가 넣었다.

“와, 역시 반장!”

“나 존나 놀랐음. 한날두인 줄.”

경기가 유독 치열했기 때문에 승리의 기쁨도 컸다. 같은 편이었던 애들은 헹가래라도 칠 기세였고, 반대편에서 뛰었던 아이들도 선호의 어깨를 툭툭 치고 가거나 흥분한 목소리로 마지막 골에 대해 떠들어 댔다.

“크으, 발끝 컨트롤이 무엇보다 중요한 거그든요? 공을 공중으로 한 번 띄우고 거기서 또 밀어 넣어 주는 한선호 선수 피지컬이…….”

“야, 붙지 마. 더워.”

개수대에 다닥다닥 붙어서 누구는 세수를 하고 누구는 체육복을 아예 벗고 등목을 했다. 주변에 물을 뿌리며 장난치는 아이도 있었다. 선호는 얼굴과 머리카락에 찬물을 쏟고 팔과 목을 적셨다. 그러다 보니 체육복 티셔츠가 다 젖었는데도 더위는 쉽게 가시지 않았다.

심지어 반 애들과 함께 우르르 몰려간 교실은 바깥보다 더 더웠다.

“아, 시발……. 이건 찜통이야, 뭐야?”

“에어컨 안 나와?”

창문을 활짝 열고 선풍기를 틀어도 한계가 있었다. 교실에 갇힌 채 빠져나가지 않는 열기 때문에 땀과 물이 뒤섞인 액체가 너나 할 것 없이 목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아이들은 선풍기 밑에 모여 한마디씩 욕을 내뱉었고 선호는 폭동이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를 무마해 보고자 교무실로 향했다.

교무실의 공기는 교실과 달리 시원했지만, 담임의 답변은 그들을 조금도 시원하게 만들어 주지 않았다.

“뭐래, 반장?”

“2시부터 에어컨 틀 수 있대.”

“아, 씨…….”

학생들은 어쩔 수 없이 제각각 자리에 앉아 갖가지 방법으로 땀을 식혔다.

“아, 덥다.”

선호는 선풍기 바람이 닿는 자리에 서서 가장 단순하고도 효과적인 해결책을 시도했는데, 그건 바로 티셔츠를 가슴까지 들어 올리는 방법이었다. 근처에 앉아 있던 재우가 훤히 드러난 선호의 맨 허리를 찰싹 쳤다.

“오올, 반장……. 근육!”

“아, 더러워. 네 손 완전 뜨겁거든?”

재우가 킥킥 웃으며 복근이 자리 잡은 배를 주먹으로 몇 번 더 쳤다.

“뜨겁냐? 이래도?”

“어휴…….”

선호는 그를 무시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 우연히 시선이 한곳에 붙들렸다.

2분단 셋째 줄, 창가 옆자리. 땀에 절어 체온을 어떻게든 낮춰 보려고 애쓰는 애들과 동떨어져, 그 소란과 아무 상관도 없다는 듯 깨끗한 교복 차림인 남학생이 앉아 있었다.

선호는 그를 보고 내심 놀랐다. 점심시간 때 어머니와 잠깐 담임에게 인사하러 왔던 거니까 그러고서 당연히 집에 갔을 줄 알았다.

‘설마 체육 시간에도 있었나.’

이명은 체육 시간에 어떤 활동에도 참여하지 않고 멀찍이 떨어져 앉아 있는 아이였다. 선호는 축구에 정신이 팔려 그에 관한 생각은 아예 잊어버렸다. 체육 교사를 따로 찾아가 사정을 설명하지 않았다면 결석 처리됐을지도 모르는데…….

‘담임이 알아서 하겠지, 뭐.’

설혹 한 과목에서 결석 처리된다고 해도 이명은 아무 피해도 입지 않는다. 어차피 대학에 진학하지 않으니 고등학교 출결이 의미 없기 때문이다.

“명이는 좋겠다.”

속마음이 자연스럽게 입 밖으로 나왔다.

목에 손을 얹고 교과서를 들여다보던 이명이 고개를 들었다. 갑자기 본인이 언급된 것이 당황스러운 듯 놀란 눈을 하고 있었다. 선호는 그와 시선을 마주친 채 덧붙였다.

“안 찝찝해서.”

땀범벅이 되어 헥헥거리는 다른 놈들과 달리 이명은 쾌적해 보였던 것이다. 마치 다른 세계의 사람처럼. 진흙 속의 망둥이들을 바라보는 하얀 학처럼.

“부럽다. 나도 폐에 빵꾸나 낼까.”

“야, 기흉 존나 병신이라 군대도 면제 아니냐?”

재우와 경민이 한마디씩 거들었다. 선호는 티셔츠를 펄럭거리며 흘려듣고 있었지만 어쩌다 경민의 마지막 말을 주워들었다. 지각과 결석을 마음대로 하는 데다 공부 안 해도 되는 건 그렇다 쳐도, 군 면제라니.

“진짜? 아, 완전 부럽다.”

“지랄하네.”

선호는 문득 귀에 꽂힌 음성에 고개를 들었다.

“아, 그럼 배고픈데 어쩌라고.”

“이 씹돼지 새끼!”

주변 애들은 아무것도 듣지 못한 것 같았지만 선호는 분명히 들었다. 들릴 듯 말 듯 작은 목소리였기는 해도 이명은 또렷하게 중얼거렸다. ‘지랄하네’라고.

‘욕도 할 줄 아는 애였나. 그보다, 내 말에 기분이 나빴을까. 나는 정말로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나중에 군대도 가지 않을 네가 부러웠을 뿐인데.’

선호는 교과서로 시선을 돌린 이명을 물끄러미 보다, 친구들처럼 아무것도 못 들은 척 선풍기 바람을 맞았다. 어쩌면 이명이 그가 머릿속으로 조형한, 저 잘난 맛에 사는 도도한 아이가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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