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A. 열여덟, 겨울
선호는 비보다 눈이 좋았다. 폭설이 내리는 날이면 부모님은 차가 막히겠다고 불평하셨지만, 선호에게는 밖으로 놀러 나갈 좋은 기회였다. 자동차에 쌓인 눈을 손바닥으로 쓸어 담는 것도, 그 위에 글자를 적는 것도, 눈을 뭉쳐 공을 만드는 것도, 친구들과 눈싸움하는 것도, 소복한 눈을 처음 밟는 느낌도 모두 좋아했다.
그러니 등교 첫날부터 함박눈이 내리는 건 무척 기분 좋은 신호였다. 그때 하늘을 보며 걸어가던 선호의 배낭을 누가 잡아당겼다. 뒤를 돌아보자 익숙한 얼굴이 장난스럽게 웃고 있었다.
‘난 또 뭐라고. 김경민일 뿐이잖아.’
선호는 속으로 중얼거리며 마주 웃었다.
“야, 한선호! 우리 또 같은 반이더라.”
“초등학교 때부터 이게 몇 년째냐? 그만 좀 따라다녀.”
“누가 할 소릴……. 저기 남재우다. 저 새끼도 같은 반이야.”
펑펑 내리는 눈발 속에서 순한 눈매의 남학생이 달려왔다.
“올해도 잘 부탁한다, 반장!”
“아직 반장 뽑지도 않았거든.”
재우는 핀잔을 줘도 웃는 낯이다. 경민이 그런 그의 어깨를 짓궂게 밀어냈다.
“어우, 질린다 질려. 가까이 오지 마.”
“누가 너한테 인사했냐? 한선호한테 인사했지.”
‘또 이놈들과 함께라니, 올해도 새로울 게 없구나.’
선호는 친구들이 아웅다웅하는 모습을 보며 킥킥 웃어 버렸다.
고2. 머리를 짧게 깎은 남학생들만 득실거리는 남고에서 뭐 그리 재미있는 일이 생길까 싶지만 그래도 예감이 이상하리만치 좋았다. 머리 위로 펑펑 내리는 눈 때문인지도 몰랐다.
그러나 뽀득뽀득하고 깨끗한 눈밭은 교정을 걸을수록 조금씩 질척질척해졌으며 본관에 도착했을 때는 온데간데없었다. 그들은 질퍽한 구정물을 헤치며 신발을 슬리퍼로 갈아 신었다.
“선호, 우리 몇 반이냐?”
“5반.”
“또? 중3 때도 5반 아니었나……. 그러고 보니 나 중1 때도 5반이었던 것 같아.”
재우는 층계를 오르는 내내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는 이야기를 길게 늘어놓았다. 그럴 때면 선호는 못 들은 척하거나 웃고 말았지만 경민은 얌전하게 넘어가는 법이 없었다.
“네가 5랑우탄처럼 멍청하니까 그렇지, 새꺄.”
“뭐 이씨, 말 다 했어?”
초등학생 때부터 패턴이 조금도 변하지 않는 말싸움을 한 귀로 흘리며 선호는 미닫이문을 열었다. 조례 시간까지 20분 정도 남은 시점이라 교실에는 아직 빈자리가 많았다. 새 학기다 보니 분위기는 서먹서먹했지만 서로 안면 있는 아이들은 벌써부터 붙어 앉아 이야기하고 있었다. 아는 얼굴 몇이 선호에게 손을 흔들며 반갑게 인사했다.
모범생 무리는 이미 앞줄에 포진해 있었다. 아직 첫 수업도 시작하지 않았는데 무언가를 꺼내 놓고 공부하는 아이들도 몇 명 보였다. 장난을 좋아하는 까불이들도 눈에 띄었다. 벌써 뭐 재미있는 일 없나 눈을 반짝이는 김경민을 포함해서.
“나 올해는 진짜 공부할 거야.”
재우가 비장한 표정으로 중얼거리더니 비어 있는 2분단 맨 앞자리에 앉았다. 선호와 경민은 동시에 폭소를 터뜨렸다.
“형이 감시해 주마.”
입이 험하기는 해도 경민은 재우의 소꿉친구이고 그를 잘 챙겨 주는 편이었다.
재우와 경민이 둘 다 2분단에 앉는 것을 본 선호는 조금 고민하다가 3분단 네 번째 줄에 앉았다. 작년 담임 선생님이 반장은 눈에 띄는 곳에 있어야 한다며 1년 내내 앉힌, 익숙한 자리였다.
드르륵.
뒷문이 열리자 아이들의 호기심 어린 눈동자가 일제히 그쪽을 향했다. 탁한 하늘색 코트를 헐렁헐렁하게 입은 키 크고 마른 아이가 천천히 걸어 들어왔다. 이어폰을 꽂고 있었고 어깨에 눈이 조금 쌓여 있었다. 쭈뼛거리는 태도인 데다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서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아무도 아는 척하지 않는 걸 보면 이 반에 친구가 없는 모양이었다.
분위기는 금세 다시 시끌시끌해졌고 그 남학생은 고개를 빼고 창가 자리를 기웃거렸다. 꽤 오랫동안.
‘창가에 꼭 앉고 싶나 봐……. 근데 어쩌냐, 다 찼네.’
그리 대단한 장면도 아니건만 선호는 다음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궁금해졌다. 저 애가 누군가에게 자리를 바꿔 달라고 할지, 아니면 포기하고 다른 곳에 앉을지, 지금은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남학생은 작게 한숨을 쉬고서 창가 옆자리, 2분단 셋째 줄에 앉았다. 선호가 앉은 곳에서 그리 멀지 않아서 실망한 옆얼굴이 훤히 보였다.
그 시선을 느꼈는지 그 애가 몸을 오른쪽으로 휙 틀었다. 눈이 마주쳤다. 선호가 살짝 웃어 보이자 동그란 눈이 당황한 듯 동전처럼 커졌다. 뭐가 그렇게 놀라운 걸까, 선호가 의아해하는 사이 그는 다시 고개를 돌리고 빈 책상을 쏘아보았다.
‘사교적인 스타일은 아니구나.’
저 숫기 없는 남자애, 여자애들한테 인기가 많지 않을까 하고 선호는 막연하게 생각했다. 여자들은 저렇게 하얗고 예쁘게 생긴 남자애들을 좋아하니까.
담임 교사는 조례 시간이 6분 지나고서 들어왔다. 그는 아무 말 없이 칠판에 이름을 크게 적었다. ‘김지남’ 선생은 이름보다 별명으로 유명한 교사였다. 몇몇 학생이 웃음을 참기 위해 입술에 힘을 주며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고2가 고3보다 중요한 거 알지? 알아서들 해. 분위기 흐리는 새끼들은 가만 안 둘 거다.”
학생들에게 무관심하고 실적만 신경 쓰는 속물. 익히 들어온 평판답게 그는 돌려 말하지 않았다. 인성이나 우정에 관한 훈계는 없었다. 성의 없는 연설은 오로지 성적을 강조하는 문구들로 채워졌는데 그마저도 길지 않았다. 담임은 얼마 지나지 않아 제 이름을 쓱쓱 지우며 말했다.
“자, 그러면 긴말할 거 없이 반장 선거를 미리 하자.”
원래 일주일 지나고 뽑는 거 아닌가. 아이들이 수군거렸지만 담임은 귀찮다는 얼굴로 후보를 추천받았다. 한동안 침묵만 흐르다 김지남 선생의 지루한 얼굴에 짜증이 깃들기 직전, 경민이 실실 웃으며 손을 번쩍 들었다.
“타의 모범! 우등생! 공부면 공부, 운동이면 운동, 못하는 게 없는 한선호를 추천합니다, 선생님!”
친구가 반장이면 여러모로 편하다며 재우와 경민이 작게 키득거렸다. 선호는 당황하지도 놀라지도 않았다. 그는 반장 선거에 한 번도 출마하지 않았지만 어쩌다 보니 초등학생 때부터 매년 반장을 맡고 있었다.
“네가 선호구나. 일어나서 애들한테 얼굴 보여 주고.”
선호는 자리에서 일어서서 주위를 한 바퀴 둘러보고 다시 앉았다. 칠판에 그의 이름이 적힌 뒤로도 두 명이 손을 들고 자기 자신을, 그리고 한 명이 장난삼아 친구를 후보에 추천했다. 담임은 그들의 이름을 칠판에 적고서 귀찮다는 태도로 투표를 진행했다.
결석 2명, 기권 7명, 유성열 1표, 김준우 1표, 조민준 0표, 그리고 한선호 25표.
올해도 반장이 되었다.
담임은 선호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성의 없는 태도로 물었고, 선호는 뽑아 줘서 고맙다는 요지의 소감을 짧게 발표했다. 건성건성인 박수갈채가 한동안 이어졌다. 담임은 그마저 손짓으로 끊어 버리고, 마치 자신의 본업은 교사가 아니며 다른 중대한 임무로 인해 한시가 급하다는 듯 서둘러 조례를 마무리했다.
“교과서 앞에 있으니 각자 알아서 챙겨 가고, 자리는 지금 그 자리로 변경 없이 학기 말까지 간다. 알겠지?”
자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어떻게 얘랑 1년 내내 옆자리에 앉느냐고, 볼멘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지만 담임은 귀찮다는 표정을 지을 뿐이었다.
“그러게 일찍 왔어야지. 말들이 많다. 자, 해산! 반장은 교무실로 따라와.”
웅성웅성하던 교실은 담임이 나가자마자 불평불만으로 폭발했다. 온갖 욕설의 바다 속에서 선호는 교실 앞쪽으로 걸어가 교과서를 차분하게 챙겼다.
“김치놈, 뒷돈 받게 생기지 않았냐?”
“저 새끼 차별도 존나 심하대.”
“그래도 종례는 빨리 끝내 준댔어.”
선호는 교과서를 사물함에 넣어 놓고 어수선한 교실을 빠져나갔다.
교무실에서는 김지남 선생이 의자에 등을 기댄 채 모니터를 보고 있었다. 등이 구부러진 자세는 선호가 그 앞까지 갔을 때도 바뀌지 않았다.
“선호 왔구나.”
“네, 선생님.”
“선호가 공부도 잘하고 반장 일을 그렇게 싹싹하게 잘한다지? 교무실에 소문 다 났더라. 이번 학기도 기대할게, 응?”
“네.”
담임은 출석부를 집더니 표지를 성의 없이 넘겼다. 그는 표정을 찌푸리며 거들먹거리듯이 말했다.
“김석호, 박기수, 최규일……. 얘네는 기초 수급자야. 부모가 돈 없어서 급식비 못 내주는 애들, 알지?”
선호의 미간이 살짝 좁아졌다. 그러나 출석부에 시선을 고정한 담임은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렇게 알아 두면 되고……. 이병욱, 서영민 얘네는 축구 특기생이라 잘 안 들어올 거야. 그리고 또 전달 사항이…….”
출석부 속 이름을 짚어 내려가던 펜이 명단 중간에 멈추었다. 담임이 씩 웃으며 펜 끝으로 도표를 톡톡 쳤다.
“선호야, 기사 알지? 바둑 두는 사람.”
“네.”
“우리 반 명이가 프로 기사래. 그 나이에 벌써 3단이라나. 말하자면 천재인 거지.”
선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비현실적이라 오히려 감흥이 떨어지는 이야기였다. 그러고 보니 그런 애가 있다는 말을 들어 본 것도 같았다. 학교에는 그 아이 말고도 국회 의원 자녀, 아이돌 연습생, 웹툰 작가처럼 가끔 화제에 오르내리는 유명인이 몇 명 있었다.
그런데 아까 교실에 그렇게 대단해 보이는 애가 있었던가……. 가장 앞줄에 앉아 있던 모범생들 중 하나가 아니었을까 선호는 막연하게 짐작했다.
“연습이랑 대회 출전 때문에 결석이 잦을 텐데, 혹시 문제 삼는 쌤 있으면 나한테 보내. 얘는 대학 안 가니까 야자는 무조건 열외다. 그리고 기흉 수술을 받아서 폐가 약하대. 그러니까 체육도 무조건 열외, 알겠지?”
“네.”
“너 이거 꼭 기억해야 한다, 응? 내가 체육 쌤한테 따로 말해 놓긴 할 건데, 혹시 까먹고 명이 안 혼내시게 네가 책임지고 잘 해야 돼. 알았어?”
“네.”
선호가 건조하게 대답하자, 담임이 의자를 조금 끌어당겨 앉으며 인터넷 창을 틀었다.
포털 사이트에서 ‘이명’을 검색하자 인물 프로필이 나타났다. 마치 연예인처럼 출생 연도와 데뷔 연도 그리고 무슨 대회 우승, 무슨 대회 준우승 따위의 주요 이력이 적혀 있었다. 왼쪽에는 작은 사진도 있었는데 중학교 교복을 입은, 지금보다 훨씬 앳된 모습이었다.
정말 뜻밖에도, 아까 그 예쁘게 생긴 애였다.
“프로 기사들은 거의 초졸, 중졸이야. 부모가 애 학교 다닐 시간에 바둑 한 판이라도 더 두게 하거든. 얘도 자퇴하려는 거, 교장 쌤이 학부모를 간곡하게 설득해서 고등학교까지 다니게 한 거야. 여기에 ‘남산고 졸업’ 한 줄 더 나오게끔.”
담임이 이력의 마지막 줄을 손끝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마치 선호에게 어른들만 아는 세상의 중요하고도 더러운 비밀을 가르쳐 준다는 듯 은밀한 어조였다.
“나중에 힘 있는 사람을 알고 지내는 것도 중요해, 선호야. 그저 그런 애들 말고, 이런 애하고 친하게 지내는 거야. 알았지?”
선호는 약간 오기가 들어서 대답하지 않았다. 담임은 이번에도 그의 작은 반항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이제 가 봐도 되나요, 선생님?”
“그래. 오늘 이야기한 거 꼭 기억하고, 1년 동안 잘 부탁해. 쌤은 신경 쓸 곳이 많으니까 자질구레한 일은 선호만 믿을게.”
“네.”
선호가 교무실에서 나왔을 땐 ‘그저 그런 애들’이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무슨 얘기 하느라 이렇게 늦었어?”
“담임이 뭐래?”
경민과 재우는 층계를 내려가는 내내 꼬치꼬치 캐물었지만 선호는 아무 말도 해 주지 않았다.
“궁금해 죽겠어. 그냥 말해 줘라, 좀!”
“진짜 별 얘기 안 했어. 그냥…… 뻔하고 재미없는 얘기.”
“뭐야, 피방이나 가자.”
“재우 너, 올해는 공부한다며.”
“내가 언제.”
“음……. 한 30분 전에?”
재우는 그 뒤로 PC방에 도착할 때까지 아무 말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