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스물일곱, 겨울
호랑이, 김석훈 9단. 상대가 조금만 약점을 보여도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대마 킬러이자 나이가 들며 기풍이 유연해졌다는 평을 듣는 기사가 대국장에 먼저 자리 잡고 앉았다. 산전수전을 겪으며 단단해진 노장의 낯빛은 일견 평온한 듯 보였으나 손가락을 끊임없이 만지작거리는 모습은 전에 없던 행동이라, 그를 지켜보는 카메라맨들과 기록원, 심판위원 등 대회 관계자들은 흥미와 불안감이 뒤섞인 눈빛을 서로 교환했다.
긴장감의 원천은 그의 상대가 새파랗게 젊은 이명 9단이기 때문이리라. 10대 소년이었던 연구생 시절부터 예민하고 완벽주의적인 기풍으로 알려진 기사였다. 그저 꼼꼼하고 실리를 챙기는 경향이라면 바둑계에서 쌔고 쌨지만 이명의 특이한 점은 그러다가도 정석에서 완전히 탈피한 수를 내던진다는 것이다. 상대가 본인조차 몰랐던 급소를 공격당한 뒤 방어의 수를 부랴부랴 두었을 때는 대개 이미 활로가 끊긴 뒤였다.
어디로 튈지 몰라서 ‘떨어지는 빗물’ 같다는 이명의 바둑은 그런 식이었다. 무모하다 싶을 정도로 변칙적으로 진입하고 돌연 공격을 거두어 버리기도 했다. 중반까지 뱀처럼 땅을 기어 다니다 용처럼 승천해 낙뢰를 뿌리기도 했고, 그 반대인 경우도 종종 있었다. 그래서 이명의 승리는 늘 잔인할 정도로 압도적이었고 이명의 패배는 늘 겸연쩍을 정도로 어처구니가 없었다.
해설자들은 그의 경기를 논리적으로 해설하는 데 난색을 표하곤 했다. 흉내 내기도 응용하기도 어려운 바둑은 그밖에 둘 수 없으며 기재라는 말로밖에 설명할 수 없다고. 그 때문에 이명은 ‘모 아니면 도’라는 질투 섞인 평가를 듣기도 했다. 냉혹한 천장, 고수들이 자웅을 겨루는 무대에서 활약하는 근래의 기세는 누가 봐도 ‘도’보다 ‘모’에 가깝다지만.
대회 시작 30분 전, 대기실에서 대국장으로 통하는 문이 열리자 눈을 감고 명상하던 호랑이가 고개를 번쩍 들고 상대의 자취를 좇았다. 훤칠한 청년이 뚜벅뚜벅 걸어와 그의 건너편 가죽 의자에 앉았다.
본래 천재성이란 외모로 가늠하기 어렵다. 그를 증명하듯 남자는 그리 길지 않은 한평생 동안 바둑만 두었을 것 같은 인상이 아니었으며 눈빛도 특별히 총명해 보이지 않았다. 과격한 말이라곤 한마디도 못 할 것 같은 그 모습은 파괴적일 정도로 공격적인 행마와 어울리지 않았다. 이목구비는 섬세하고 팔다리와 손가락은 가늘고 길었으며, 갈색을 띤 머리카락마저 부드럽고 가느다랬다. 어딘가 예민해 보이기는 하지만 그만하면 말끔하게 잘생긴 얼굴은 TV에 나오는 ‘요즘 것들’ 같은 느낌을 풍겨서 조카아이가 좋아할 것 같았다.
“또 보는구먼, 이명 9단. 마지막으로 봤을 땐 쪼그만 아이였는데.”
김석훈 9단은 키가 가슴까지밖에 오지 않는 중학생에게 당한 쓰라린 패배를 잊은 적이 없었다. 그는 웃음 뒤에 씁쓸함을 숨긴 채 두툼한 손을 내밀었고 이명은 한동안 그 손을 바라보기만 했다.
“안녕하세요.”
이윽고 이명이 느릿하게 말하며 악수에 응했다. 무뚝뚝한 말투와 붙임성 없는 태도. 까마득한 선배가 내민 손을 잡으면서도 어려워하는 기색이 없었다. 그는 밖에 한 번 안 나가 본 것처럼 창백한 손을 뻗어 악수하며 무표정으로 김석훈의 눈을 마주했다.
손은 금세 떨어졌다. 노기사는 이마에서 살짝 땀을 흘리며 백돌을 한 움큼 쥐고 바둑판에 주먹째로 올려놓았다. 새파랗게 어린 후배는 고민하는 기색도 없이 둘째와 셋째 손가락을 이용해 흑돌 한 개를 가볍게 집었다. 손가락부터 기다란 팔, 그리고 목까지 이어지는 선에는 유려한 인상이 있었다. 이를테면 이파리가 가느다라면서도 강인한 난초처럼.
흑돌 하나가 딱 소리를 내며 판 위에 올려졌다. 김석훈 9단이 바둑돌 더미를 가리고 있던 손을 거두었다. 돌은 여덟 개. 짝수이니 간절히 바랐던 대로 흑돌로 선공하게 되었다.
이명은 돌 가리기 같은 변수에 아무 영향도 받지 않았다는 듯 표정이 없었다. 그는 품에서 플라스틱 안경집을 꺼내더니, 테가 가느다랗고 각진 안경을 코끝에 걸쳤다.
“자네, 시력이 안 좋은가?”
“아니요. 바둑 둘 때만 씁니다.”
조금 기다리자 무뚝뚝한 대답이 돌아왔다. 이명은 기민한 행마와 달리 말이 느렸다.
대체 시력이 어느 정도길래, 착점을 잘못할 정도인가, 그러면 평소 생활은 어렵지 않은가, 수많은 대화가 파생될 만한 주제였지만 이곳은 대국장이지 주점이 아니었다. 호랑이는 더 묻지 않고 빗물은 말을 아꼈다.
김석훈 9단은 더 이상 웃지 않았다. 눈앞의 상대는 오만해 보일 정도로 예민하고 퉁명스러운 천재도, 조카사위 삼고 싶을 만큼 잘생긴 청년도 아닌, 꺾어야 할 상대일 뿐이었다.
* * *
“이명 9단! 승리를 축하드립니다! 인터뷰 한 말씀 해 주시죠?”
“소감이 어떠십니까!”
“오늘도 그냥 가실 거예요? 한마디만 해 주세요!”
특별 대국장이 자리한 호텔 앞에는 빅 매치를 취재하기 위해 혈안이 된 기자들이 진을 치고 있었다. 대부분은 당연하게도 승자에게 몰려가 마이크를 들이밀었다.
오늘의 승리자, 기쁘기보단 몹시 피로해 보이는 청년 앞을 아담한 중년 여성이 기다렸다는 듯이 막아섰다. 그녀는 들고 있던 우산을 높이 들어 이명의 머리 위로 씌우며 그의 팔을 잡아끌었다.
“명아, 고생했다. 들어가자.”
이명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거렸고, 기자들은 끝내 천재 기사의 입에서 어떤 언어도 못 듣게 되었다. 여자가 한두 번 해 본 것이 아닌 솜씨로 인파를 헤치며 아들을 흰색 밴으로 데려가는 동안 패배한 호랑이는 허허 웃으며 기자 두 명과 화기애애하게 대화를 나누었다.
불도저처럼 기자들을 밀어내며 아들을 지켜 낸 모친은 미리 열어 둔 문 사이로 그를 밀어 넣고 문을 쾅 닫았다.
“오늘도 축하해요, 이명 9단.”
도넛 박스를 품에 안은 젊은 여자가 시트 위에 널브러진 이명에게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흔들었다. 이명은 그제야 웃으며 바로 앉아 구겨진 옷을 정리했다.
“고맙습니다, 이정 4급.”
“위기는 없었고?”
“음…….”
동생, 정의 질문이 어려웠는지 이명은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정은 잠시 기다렸다가 웃으며 그의 팔을 찰싹 쳤다.
“위기는 없으셨고. 그럼 재미는?”
“꽤 재미있었어.”
운전석 문이 휙 열리더니 엄마가 탔다. 그녀는 문 앞까지 따라온 기자들에게 경고의 눈빛을 보내며 문을 닫고 시동을 걸었다. 늘 있는 일이라, 정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설탕 발린 도넛을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복기는 어땠어?”
“괜찮았어. 많이 가르쳐 주셨어.”
“그래? 그 사람, 경기 전 인터뷰에서 오빠 엄청 경계하던데…….”
이명은 웃으며 새 생수통의 뚜껑을 따서 정에게 내밀었다.
“다 먹고 말해, 정아.”
“응. 땡큐.”
“친절하신 분이야. 나한테 안 좋은 감정이 있는 것 같지 않았어. 악수도 먼저 청해 주셨고.”
운전하던 엄마가 뒤를 힐끔 돌아보았다.
“어른인데 네가 먼저 인사드렸어야지.”
“그러려고 했는데, 제가 앉기도 전에 손을 내미셨어요.”
“그래. 어쨌든 고생했다. 출출하지? 명이도 간식 좀 먹으렴,”
“네.”
이명은 정이 내민 도넛을 받아서 한 입 베어 물었다. 정이 장난꾸러기 같은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이길 줄은 알았는데, 한 집 반이나 차이 날 줄은 몰랐어.”
“응.”
“역시!”
승세는 중반에 기울었지만 김석훈 9단은 기권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2시간 반 내내 끈질기게 희망의 밧줄을 잡고 버티었다. 최대한 격차를 줄여 볼 생각이었던 것 같지만, 그조차 여의치 않았다. 덫에 걸린 호랑이는 빠져나가려고 몸부림을 친 탓에 가장 참혹한 방식으로 숨을 거두었다.
“오빠 요즘 장난 아니다? 어디까지 올라가려고 그래?”
“내가 뭘, 훨씬 잘하는 사람들도 많은데.”
동생이 작정하고 놀려 대도 이명은 무덤덤한 태도였다.
“치, 저래 놓고 맨날 이기지. 불공평해.”
정이 혼잣말처럼 덧붙이자 엄마가 고개를 휙 돌리며 그녀를 쏘아보았다.
“정이 너 말조심해. 말이 씨가 된다.”
“아니 엄마, 그렇잖아요. 오빠는 그렇게 열심히 하는 것 같지도 않은데.”
“우리 명이가 왜 열심히 안 해? 얼마나 노력하고, 또 얼마나 승부욕이 강한데.”
“하긴, 저러다 한번 지기라도 하면…….”
정의 목소리가 작아지다 아예 사라졌다.
이명은 휴대폰 전원을 켜고 인터넷 창을 틀었다. 꽤 화제가 된 경기라 메인 화면에 관련된 기사가 정리되어 있었다. 실시간 검색어 끄트머리에 오르내리는 김석훈 9단과 제 이름도 보였다.
이명은 심호흡을 한 뒤 종합 기사를 틀었다. 자신이 봐도 썩 잘 풀린 경기라, 흐름에 관한 전문가들의 평가를 듣고 싶었다. 그러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난처한 표정으로 이마를 긁적거렸다.
‘너무 과장하는 거 아닌가.’
기자들이 승리한 당사자마저 머쓱하게 만들 정도로 칭찬을 과하게 쓴 탓이었다. 정교하고도 완벽한 제압, 화살처럼 신속한 감각, 몰아치는 광풍, 공격 일변도 장수, 파괴의 신……. 보자 보자 하니까 ‘국수 암살자’까지 나왔다. 누가 이 제목들을 본다면 바둑이 아닌 무술에 관한 기사라고 생각할 것 같았다.
그다음 눈길이 닿은 기사는 이명의 낯빛을 질리게 했다.
[선데이투데이 단독 인터뷰] 자신만만 이명 九단 “라이벌은 없어, 실력 있는 내가 당연히 일등”
기사 공개 일시는 약 2시간 전, 준결승 결과가 발표된 시점이었다.
평소 이명은 공개적인 외부 활동을 기피하는 편이었다. 인터뷰 같은 건 쑥스러워서 싫었고 사람들의 관심도 부담스러워서 숨고만 싶었다. 세계 대회에서 우승한 뒤로는 참가하는 기전마다 기자들이 집요하게 따라붙었으나, 엄마가 단호하게 물리쳐 주어 바둑에만 집중할 수 있었다. 그런 과정에서 도망치는 듯한 태도가 왜곡되어 세간에 ‘싸가지 없다’란 인상이 공공연하게 퍼져 있었다.
그러나 그 끊임없는 거절에도 굴하지 않고 2년 동안 이명을 따라다닌 기자가 있었다. 성격도 살가운 데다 또 얼마나 엄마에게 애교를 부렸는지, 2년 동안 그녀의 마음을 차근차근 사로잡았다. 그 성격 좋아 보이던 기자와 조용한 카페에서 10분 동안 인터뷰한 것이 바로 지난달의 일이었다.
단정적인 말투에 자기애와 확신이 넘치는 젊은이. 이명 九단은 듣던 대로 냉정하고 강인한 기사였다. 젊은 나이에 9단까지 올라오기 위해 얼마나 이를 악물고 노력했는지 인상에서부터 묻어났다.
세간에 이명 9단을 둘러싼 루머가 굉장히 많은데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 처음부터 그런 질문을 하길래, 남의 시선에 크게 신경 쓰지 않지만 하지도 않은 말이 돌아다니는 건 불쾌하다는 식으로 말했었다. 어조가 강하기는 했어도 결코 기사 내용처럼 자기애를 뽐내거나 오만하게 굴지는 않았다.
“김석훈 9단이요? 어릴 때 뵌 적이 있지만 친분이 없어서 잘 모릅니다.” 그는 곧바로 선을 그었다. “이제 나이가 들어서 좀…….” 그 답변에서 젊은이의 패기가 느껴졌다.
휴대폰을 쥔 손이 바르르 떨렸다.
이 또한 왜곡이었다. 처음 김석훈 9단을 만났을 때는 중학생이었는데 지금은 이명 본인이 나이가 들었기 때문에 만나면 어색할 것 같다고 대답했었다. 기자가 마치 이명이 선배를 퇴물 취급한 것처럼 악의적으로 편집한 걸까? 그게 아니라면 자신이 말을 조리 있게 하지 못했던가. 이것도 제 탓일까.
“실력이 있으니까 제가 우승을 했겠죠.” 치기 어린 눈동자 속에서 내가 최고라는 확신이 반짝였다. 과연 이 자신감이 언제까지 이어질 수 있을지, 이명 9단이 어디까지 승승장구할지 지켜봐야 할―.
이명은 기사를 끝까지 읽지 않고 꺼 버렸다.
비가 주룩주룩 내리는 창밖을 노려보고 있은 지 얼마나 되었을까, 아무것도 모르는 정이 밝게 물었다.
“우승도 했겠다 뭐 먹으러 갈까? 내가 쏠게! 감자탕? 냉면?”
“오늘은 혼자 있을래.”
두 여자가 불안한 시선을 교환했다. 이번에는 엄마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래도 저녁은 먹고 가.”
“집에 데려다주세요.”
안 그래도 2시간 반의 경기와 이어진 복기 때문에 녹초가 된 상태였다. 그런 중에 기사를 읽고 나니 남아 있던 흥분과 승리의 기쁨마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심장이 싸늘하게 굳었다.
인터뷰 속 이명 자신은 재능에 도취해 무례한 언행을 일삼는 인간이었다. 그건 사실과 얼마나 가까울까?
손가락이 하얘질 정도로 세게 쥐고 있었던 휴대폰 화면이 돌연 밝아졌다. 이명은 새로운 메시지가 왔다는 알림을 노려보았다.
‘이번엔 또 뭐야…….’
그는 조금 신경질적으로 화면을 터치했다. 그는 연락하는 사람이 가족 외엔 거의 없었다. 메시지가 왔다면 끽해야…….
[남산고 47회 졸업생 동창회]
2학년 5반 친구들아 반갑다! 한번 볼 때도 되지 않았냐? 일일이 연락 돌릴 수 없어서 그냥 반장이랑 둘이 날짜 잡았어.
11/29 (토) 18:00 초원갈비 (링크)
한 놈도 빠지지 말고 꼭 와 새끼들아!!!!! ※담임한테는 연락 안했으니 안심※
- 서기 경민 -
이명은 메시지를 읽고 또 읽었다. 세 번이나 정독한 뒤에도 길 잃은 시선이 행간 사이를 헤맸다.
이런 연락은 난생처음 받아 봐서 황당했다. 졸업한 지 8년 만에 동창회라니……. 그들이야 서로 친했으니 이런 자리를 만드는 것도 이상하지 않지만, 누구와도 친분이 없는 자신을 초대한 건 의아한 일이었다.
‘어디 목록을 보고 전체 문자 돌렸겠지.’
이명은 학창 시절 내내 겉돌았다. 왕따까지는 아니었지만 친구가 없었다. 대부분의 아이들과 아무 접점 없이 지냈고 몇 명과는 사이가 굉장히 껄끄러웠다. 약간 친해져서 친구가 될 뻔한 아이는 한 명 있었지만, 그것도 혼자만의 착각이었을 것이다.
‘친구는 무슨.’
자조적인 한숨이 입술 사이에서 새어 나왔다.
어차피 그들은 친구가 될 수 없었다. 그 애는 누구에게나 잘해 주었다. 이명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누구에게나 친절하게 대하는 사람이었을 뿐이다.
반장이랑 둘이 날짜 잡았어.
이미 몇 번이나 읽은 문장을 다시 한번 샅샅이 훑어보았다. 반장과 경민이란 애가 참석한다는 정보 외엔 하등 가치 없는 문장이었다.
그럼에도 휴대폰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미련 가득한 시선이 장문의 문자에서 날짜를 찾아냈다. 동창회 일자는 하필이면 결승전이 있는 날이었다. 오후 6시면 대국장에서 한창 경기를 치르고 있을 시간이다.
‘잘됐네.’
설혹 집에서 쉬는 날이었더라도 안 갔겠지만, 이렇게 된 이상 가고 싶어도 갈 수 없게 되었다.
“오빠, 표정이 왜 그래? 스팸이야?”
이명은 휴대폰을 재빨리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왜? 뭔데 그래?”
“그냥, 기분 나쁜 문자.”
“응?”
“몰라. 지워 버리려고. 정아, 나 도넛 하나 더 줘.”
정에게 빵을 달라고 해서 일부러 크게 베어 물었다. 아무렇지 않은 척 턱을 움직였지만 떨림은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왜곡된 기사로 인한 분노와 동창회 소식이 불러온 혼란에 어쩐지 숨이 가빠졌다.
* * *
그날 하늘에는 구름이 많았다. 해가 얼굴을 드러내지 않아서 온통 흐렸지만 산책하기엔 나쁘지 않은 날씨였다.
집에서 나오지 않은 열흘 동안 겨울이 찾아왔다. 손을 외투 주머니에 넣지 않으면 손끝이 차가워지는 계절. 숨을 쉴 때마다 뽀얀 구름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나무들이 헐벗어 무채색으로 뒤덮인 공원에는 마침 사람이 없었다.
이명은 주황색과 흰색 잉어들이 돌아다니는 연못을 돌아, 아이들이 배드민턴을 치곤 하는 배드민턴장을 지나쳤다. 머리를 완전히 비운 채로 조약돌 길 위를 한참 걸었다. 툭, 툭. 발끝으로 작은 돌들을 밀어내며 걷는 동안 칼바람에 공격당한 볼이 점점 빨갛게 물들었다.
엄마는 ‘마인드 컨트롤’을 하라고 했지만 이명은 그런 건 할 줄 몰랐다. 거짓말투성이 기사에 관한 기억이 조금씩 희미해져서 컨디션이 나아졌을 뿐이지, 의식적으로 노력한 건 아니었다.
이명은 살면서 수많은 오해를 받아 왔지만 대부분은 해명하는 데 실패했다. 즉, 오해를 사는 재주를 타고났지만 푸는 재주는 지독할 정도로 없었다.
남의 지갑을 훔쳤다는 오해, 째려봤다는 오해, 잘난 척한다는 오해, 뒤에서 누굴 욕하고 다녔다는 오해, 선생의 편애만 믿고 나댄다는 오해, 엄마가 뇌물을 내서 학교를 편하게 다닌다는 오해, 오만하고 건방지다는 오해, 누구누구 기사와 사이가 안 좋다는 오해. 오해, 오해, 오해.
그렇게 숱한 오해를 겪어 왔으나 우습게도 이명은 조금도 발전하지 못했다. 그는 여전히 역경과 고난을 헤쳐 나가는 데 젬병이었다. 소위 ‘멘탈’이 약해서 공격에 취약했으며, 반응이 느렸고, 회복하는 데 놀랍도록 오래 걸렸다.
이명이 모든 의욕을 잃은 채 자취 집에 처박혀 있는 동안 엄마는 주변에 수소문해 변호사에게 자문을 받고 ≪선데이투데이≫ 사옥을 방문했다. 기자는 이명에게 부정적인 이미지를 덧입힐 의도가 없었다고 해명했다. 당당하고 쿨한 이미지로 오히려 득을 보지 않았느냐고 도리어 되묻기까지 했다. 이명 측에서 법적으로 대응하겠다고 나오자 그제야 사과하고서 기사를 수정해 내보냈으나 눈 가리고 아웅이었다. 이미 원본 기사가 어마어마한 조회 수를 기록하여 파생 기사가 줄을 이은 데다, 인터넷상에서는 이명의 어록이 밈화되어 수많은 패러디를 양산하고 있었다. 언론사에선 이로 인해 엄청난 금전적 이득을 봤으며 기사를 쓴 기자는 내년에 승진할 예정이라고도 했다.
엄마는 ≪선데이투데이≫ 기자를 만나고 와서 처음과 의견이 달라졌다.
‘요즘 시대에 자신감 넘치는 이미지도 나쁘지 않다고 봐, 명아. 그 기사가 나고 나서 CF도 두 개나 들어왔잖니. 넌 어차피 안 한다고 하겠지만.’
매니저인 엄마가 무조건 이명의 편이란 건 의심할 여지가 없었으나 그렇다고 늘 두 사람의 의견이 같은 건 아니었다. 가령, 엄마는 이번 사건으로 이명이 하루아침에 얻게 된 화제성을 영향력으로 이해했다. 그러나 이명은 사실이 아닌 내용이 회자되는 것이 싫었다. 또한 바둑이 아닌 무언가로 남들의 입에 오르내리는 게 부담스러웠다.
이명은 피로감을 살짝 느끼며 벤치에 앉았다. 가까운 곳에 비둘기 두 마리가 바닥을 쪼며 돌아다녔다. 중요한 기전을 앞두고 비둘기나 보고 있을 처지는 아니었지만 마음에 돌이 얹힌 듯 답답했다.
“하아…….”
저절로 긴 한숨이 나왔다. 내일 경기를 이기기만 하면 어마어마한 상금과 대중적인 화제성, 명예로운 타이틀을 얻을 수 있다. 어떤 기사들은 국제 대회에서 승리한 뒤에 CF를 찍고 교양이나 예능 프로 등 방송에서 멘토 역할을 하기도 했다. 물론 이명은 그런 것에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 다른 이유로 승리하고 싶었다.
무릎 위에 올려놓은 주먹이 굳게 쥐어졌다. 추위로 빨갛게 된 손가락이 다시 한번 희게 변했다.
이명은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면서 이러쿵저러쿵하는 이들에게 자신이 흔들리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 주고 싶었다. 남들의 입방아가 그에게 아무 영향도 미칠 수 없다는 걸 오로지 승리로 증명하고 싶었다. 바둑돌을 처음 잡았던 9살 때부터 지금까지 한시도 그를 떠난 적이 없는 욕망은 어느 때보다도 강하게 들끓었다.
‘꼭 이기고 싶어.’
생각에 잠겨 있던 그때 차가운 바람이 코트 자락을 들어 올렸다. 이명은 온몸에 소름을 돋게 하는 한기를 느끼며 손을 마주 모아 후후 불었다. 멀리서 비둘기가 사람을 피해 푸드덕 날갯짓하는 소리가 들렸다. 슬쩍 본 곳에선 사람 하나가 조깅하고 있었다.
‘이 날씨에, 대단하네.’
트레이닝복 차림의 남자는 공교롭게도 이명의 벤치 앞으로 지나갔다. 20대 중반쯤 되었을까. 머리를 짧게 깎은 데다 체격이 건장한 사내는 이명으로 하여금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키가 더 컸더라면 그라고 의심했을지도…….’
그러한 생각을 하며 이명은 풋 웃음을 터뜨렸다. 그로 의심된다고 한들 ‘저기요, 혹시 남산고 나오셨어요?’라고 말할 용기가 자신에게 있을 리가.
문득 조각조각 끊어져 있던 기억 위로 색채가 덧입혀졌다. 눈을 감자 햇살의 프리즘을 받은 것처럼 찬란하게 빛나던 한 소년의 모습이 떠올랐다. 자신처럼 27세가 되었을 그가 지금도 여전하게 웃을지 이명은 궁금해졌다.
다시 눈을 떴을 땐 남자가 저 멀리 가 버린 뒤였다.
‘한심하게 그 생각은 왜.’
자조 섞인 미소가 떠오르고, 이명은 이 한심한 생각을 일으킨 원인이 조깅하는 사내보다도 동창회 문자였다는 걸 기억해 냈다. 갑자기 그런 연락이 와서는 사람 마음을 싱숭생숭하게 만든 것이다. 동창회 같은 건 어차피 갈 리도 없는데.
그러나 그는 별수 없이 휴대폰을 꺼내 문자함을 열었다. 아무 목적도 없이 글자의 나열을 읽는 게 몇 번째인지 모른다. 메시지를 세 번째로 다시 읽었을 때, 가까이서 인기척이 들렸다.
“으음, 저기…….”
낙엽을 치우는 용도의 빗자루를 한 손에 쥔 남자가 1m쯤 떨어진 거리에서 이명을 조심스럽게 살피고 있었다.
“네?”
“혹시…… 이명 9단이 아니신지…….”
당황한 이명은 휴대폰을 손에서 떨어뜨리고 말았다. 모서리부터 떨어진 기계가 두어 번 튕기더니 모래에 폭 잠겼다. 이명은 휴대폰을 급하게 주워 주머니에 넣으며 몸을 움츠렸다.
프로가 된 이래로 바깥에서 그를 한눈에 알아보는 사람은 드물었다. 이명은 모든 상황에서 사진 찍기를 거부했기 때문에 단체 사진에서 잘라 낸 조악한 프로필 사진 외의 다른 사진은 인터넷에 돌아다니지 않았다.
“어……. 맞는데요.”
“혹시나 했는데, 역시 맞네! 여기서 기다려요.”
남자는 빗자루를 벤치에 기대 놓고서 어디론가 헐레벌떡 뛰어갔다. 3분이 지나기 전에 돌아온 그의 투박한 손에는 꿀 음료가 들려 있었다.
“자, 급하게 가져왔는데 이거라도 마셔요.”
“……감사합니다.”
이명은 음료수를 받아서 양손으로 감쌌다. 유리병은 따뜻했다.
“사실은 내가 이명 선생님 7년 전부터 팬이에요. 내 아들뻘이긴 하지만, 바둑 잘 두면 다 선생님이지 뭘.”
남자는 한동안 자신이 이명의 바둑을 얼마나 즐겨 보는지 설명했다. 그는 7년 전 이명을 처음 알게 되었다는 국내 대회 8강전 경기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누구와 붙었고 몇 집 차로 승리했는지까지도.
“저 어떻게 아셨어요?”
“응?”
“아, 그러니까……. 저…… 제가 이명인 걸, 어떻게 아셨어요?”
남자는 고개를 뒤로 꺾더니 파하하 웃음을 터뜨렸다.
“얼굴은 긴가민가했는데 이 손이, 맨날 화면에서 나오는 그 손이라서 알았어요. 우리 마누라가 섬섬옥수라고 그랬는데 실제로 보니까 더 길쭉길쭉하고 곱네. 얼굴도 아주 잘생겼고.”
남자는 조금 주저하더니,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앞으로 내밀었다.
“그, 혹시 싸인…… 받을 수 있나요?”
“아……. 그럼요.”
“두 장도 되나요? 집사람 것까지…….”
“네? 네…….”
이명은 그가 내민 꼬깃꼬깃한 라인 노트를 펼쳐서 두 번 서명했다. 그러곤 양손으로 노트와 펜을 함께 내밀었다. 남자는 노트를 받고서 흐뭇한 눈길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전 가 볼게요.”
“아, 안녕히 가세요.”
“내일 꼭 이겨야 하는데…….”
이명은 그가 뒤돌아서 혼잣말처럼 중얼거린 소리를 들었다. 꼭 이겨야 하는데. 그 말에 이명은 잠시 다른 곳에 쏠렸던 신경을 다시금 목표에 집중했다.
‘네. 반드시 이길게요.’
그리고 속으로 힘주어 다짐했다.
* * *
‘기화생명배 세계 바둑 선수권 대회’ 결승전에는 상금 5억 원이 걸려 있었다. 최대 규모의 세계 대회인 데다 내로라하는 고수들이 총출동한 바둑 무대였다. 중국의 창리콴과 류웨이, 일본의 유스케 야마구치와 타마키 타카시, 한국의 김석훈과 유영섭 – 국수 타이틀을 보유한 노기사만 여섯이요 그 외에도 윤수화, 아케미 요시모토, 홍랴오치 같은 중견 초고수에 이명으로 대표되는 신예들까지, 바둑 팬들에게는 그야말로 즐거운 비명이 저절로 나오는 별들의 잔치였다.
명승부가 쏟아져 나오는 와중에 국수 라인업 중 절반을 한 명씩 꺾으며 결승에 발도 못 붙이게 만든 이명은 ‘국수 슬레이어’라는 별명을 얻으며 전성기를 달리고 있었다. 이번 대국까지 승리한다면 ‘세계 기왕전’, ‘세계 바둑 명인전’을 포함한 주요 3대 세계 대회 우승으로 그랜드 슬램을 달성하게 된다.
이번에 이명이 꺾어야 할 상대는 중국의 태산이었다. 한 수 한 수가 마치 번개처럼 기민하다는 아케미 요시모토를 반집 차로 제압하고 결승에 오른 그는 실리를 추구하기보다 시야가 넓고 호방한 기풍의 중견 고수였다. 이명에 비견하자면 방어적이고 신중한 스타일이라 매스컴에서는 창과 방패의 대결이라고 대서특필하고 있었다.
기화 그랜드 호텔에 차려진 대국장 안으로 키가 크고 선이 가는 남자가 들어섰다. 난방이 잘 되어 있는 실내에서도 터틀넥 차림에 대국을 앞둔 사람답게 표정이 무거웠다. 그는 뻣뻣한 걸음걸이로 들어와 검은 가죽 소파에 앉았다. 그리고 초점 없는 눈으로 바둑판 모서리를 가만히 보았다.
홍랴오치 9단은 이명 9단보다 1분 늦게 도착했다. 걸음걸이가 당당하고 표정은 온화했다. 눈이 마주쳐도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포커페이스였다. 그는 자리에 앉아 미소 지으며 묵례했고 이명은 똑같은 방식으로 고개를 까닥거렸다.
아무 말도 오가지 않았지만 두 고수 사이에 숨 막히는 긴장감이 감돌았다. 소파 두 개와 바둑판이 놓인 무대는 거액이 걸린 기전의 결승전답지 않게 조촐했지만, 촬영 준비를 마친 카메라 세 대가 이 대전을 전 세계로 송출할 것이다.
중국 혹은 한국, 중견 혹은 신예, 방어 혹은 공격, 태산 혹은 빗물.
이명 혹은 홍랴오치. 둘 중 하나는 반드시 생존하고 나머지 한 명은 추락하는 무시무시한 대국이었다.
이어지는 돌 가리기가 끝나고 이명은 흑돌을 잡았다. 그는 무표정으로 안경을 꺼내 썼다.
“이명 9단, 흑돌을 잡았죠. 속으로 기뻐하고 있을까요?”
“예. 3% 정도긴 하지만 선공이 승률이 더 높거든요. 좋은 시작이에요.”
대국장 밖 스튜디오에서는 해설자들이 열을 올리고 있었다. 초미의 관심이 쏟아지는 세기의 기전인 데다 국가 대항전인지라 목소리들이 평소보다 한 톤씩 높았다. 아직 경기 시작 전인데도 방송은 이미 최고 시청률을 넘었다. 라이브 채팅방에서는 바둑 팬 수백 명이 모여서 떠들고 있었다. 좋은 대국을 부탁한다는 응원부터 이걸 보기 위해 애들을 처가에 보냈다는 고백까지 다양한 메시지가 쏟아졌지만 이명에게는 닿지 않았다.
그는 외부와 완벽히 단절된 세계에서 태산을 마주하고 있었다. 가로 19줄, 세로 19줄의 선으로 둘러싸인 무한의 세계에 그의 승리, 혹은 패배가 숨겨져 있었다. 상대보다 먼저 승리를 쟁취하지 않으면 패배한다는 걸 바둑돌을 처음 쥐었던 9살 때부터 알고 있었다. 이명은 이 자리에 이기러 왔다.
통 안에 손을 넣고 광택이 돌지 않는 흑돌들이 찰박거리도록 살짝 휘저었다. 손에 집히는 첫 기석에 주문이라도 걸듯 손가락 사이에 꼭 잡고서 바깥으로 꺼냈다. 이명은 팔을 쭉 뻗어 대국의 첫수를 세상으로 내보냈다.
대전이 시작하자 화면 우측에 LIVE란 빨간 글자가 박힌 화면이 송출되었다. 실제와 약간의 시차를 두고 화면 구석에 기다랗고 섬세한 손가락이 나타났다. 검지와 중지 사이에 끼운 검은 돌이 우상 화점에 놓였다. 뒤이어 홍랴오치가 좌하 화점에 백돌을 얹었고, 화점이 차례대로 채워졌다.
“자,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이명 9단의 첫수가 화점이냐 소목이냐, 많은 분들이 궁금해하셨는데, 역시 화점이었네요.”
“신중하게, 그리고 균형 있게 가려는 생각이라고 봐야죠.”
“그렇습니다. 현재 양측 화점정석으로 포석을 올리고 있습니다.”
“아직까지는 진행이 빠르죠?”
“네. 재미있는 점이 있는데, 의외로 홍랴오치 9단이 속기파고 이명 9단 쪽은 기본에 충실한 착수에도 시간을 좀 두는 편입니다. 보통 홍랴오치가 방어, 이명이 공격이라고 보니까 이런 차이도 흥미롭죠?”
“그러네요. 이명 9단, 늘 그렇지만 오늘 행마에서 특히 자신감이 넘쳐 보여요. 아주 좋습니다. 응원하는 우리 대한민국의 팬들을 위해서라도 꼭 이겨야 됩니다! 이명, 파이팅! 대한민국, 파이티잉!”
곧 좌상귀와 좌하귀에서 작은 국지전이 연이어 펼쳐졌다. 하지만 아직 큰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다. 홍랴오치는 좌상 외목에서부터 시작된 세력을 가까스로 지켜 냈고, 이는 앞으로 벌어질 대혈투를 예고하고 있었다.
“이명 9단, 좌변을 본격적으로 파고듭니다. 단수하겠다는 의지가 대단해요.”
“집요하죠? 방금까지와 완전히 다른 사람 같아요. 헐크 변신 뭐 이런 거 있잖습니까.”
“그러고 보니 저희 집 아이들이 보는 만화 중에 주문을 외우면 마법 소녀로 변신하는 내용이 있는데, 그게 생각나네요. 이명 9단, 현재 변신 마쳤고요. 지금 홍랴오치 잡으러 갑니다.”
“아아, 말씀드리는 순간 홍랴오치 9단 눈목자 행마. 역시 녹록하지 않죠? 부랴부랴 방어하기보단 미래를 대비하고 있어요. 대국 수준 보세요. 전설에 남을 경기가 나올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날카로운 침투에 그야말로 태산다운 수가 나왔어요! 숨 막히는 경깁니다. 홍랴오치 9단 지금 경고하고 있죠? 당신이 좌변에 목매는 동안 나는 큰 그림을 그릴 건데, 괜찮겠냐고…….”
좌변에서 벌어진 난전은 백과 흑 양측에 타격을 남겼다. 이명은 바라던 대로 백대마를 잡아 숨통을 끊어 놓았지만, 그 대가로 자신도 피를 흘렸으며 중앙에 세력을 내어 주어야 했다.
대국은 어느덧 중반으로 접어들었다. 그런데도 흑과 백은 여전히 속기로 서로 응수하며 엄청난 집중력을 보이고 있었다.
“수 싸움이 아주 치열합니다.”
“그 말씀처럼 지켜보는 제 손에도 땀이 날 정돕니다. 자, 이명 9단. 지금은 이어 가야죠?”
“그렇죠. 일단은 자존심을 살짝 접어야 합니다. 홍랴오치 9단이 집수로는 밀리고 있지만 사실은 잃은 게 하나도 없거든요. 오히려 전체적인 국세로 봤을 땐 더 좋을 수도 있어요.”
“우리 이명 9단, 집수로는 앞서 나가고 있지만 조금 성급해 보여요. 조바심이 날 만한 상황이지만 그럴수록 더욱 여유 있게 가면 좋겠어요. 오늘의 행마가 평소보다…… 응?”
“저게…… 뭐죠? 아, 이런…….”
“거기다 뒀어요? 왜?”
한순간의 일이었다. 105수 때문에 스튜디오 안에 한동안 얼음장 같은 침묵이 깔렸다. 해설자들은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몸이 굳은 채 서로 눈치만 보았다. 그와 반대로 라이브 채팅창에서는 자충수니 착점 실수니 난리가 났다.
잠시 텀을 두었다가 이어진 수에서 홍랴오치 9단은 이명이 용의주도하게 배치해 둔 흑돌의 대열을 기다렸다는 듯이 곤마로 만들어 버렸다. 해설진은 한숨을 쉬었고 라이브 채팅창에는 분노 가득한 코멘트가 일일이 읽을 수 없을 정도의 엄청난 속도로 쏟아졌다. 별표로 블라인드 처리된 쌍욕이 채팅창을 도배하자 급기야 관리자가 난입했다.
“이명 9단……. 반패를 해소하면서 큰 실수를 했네요. 이럴 때일수록 정신력을 다잡아야죠?”
“지금 4분째 착점이 되지 않고 있는데……. 마음이 적잖이 어렵겠지만, 바둑은 끝날 때까지 어떻게 될지 모르는 거니까요.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앗, 지금 착수하네요. 네. 그래요. 수습해야죠, 이명 9단…….”
대국일수록 졸전이다. 실수를 더 많이 한 쪽이 진다. 바둑은 정신력 싸움이다. 귀에 박히도록 들은 말들이지만 지금의 이명에게는 그것들이 조금도 와닿지 않았다.
악수를 둔 순간에 발밑에 커다랗고 깊은 구덩이가 파인 것 같았다. 이제까지 무수한 대전을 거칠 때마다 실수에 어떻게 대응해 왔는가, 냉정하게 사고하려 노력했지만 이번만은 잘 되지 않았다. 식은땀이 나고 눈앞이 새하얘졌다. 이 이 위기에서 벗어나려면 시간을 되돌리는 방법밖에 없을 것 같았다.
홍랴오치 9단은 보란 듯이 속기로 응수했다. 겨우 어려운 한 수를 떼고 나면 곧바로 옆구리로 칼날이 날아왔다. 막을 곳은 한두 군데가 아니었고 성난 태산을 잠재우려면 제물로 집을 몇 개나 바쳐야 하는지 가늠할 수조차 없었다. 손아귀에 쥐었다고 생각한 승리는 모래처럼 스르륵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리고 패배가 검은 혓바닥을 날름거리며 이명을 아래로 끌어당겼다.
‘자신의 재능에 도취한 오만한 실력자’
일주일 내내 그를 괴롭혔던 인터뷰 구절이 뇌리를 파고들었다. 정말로 재능에 도취해 있었나. 몇 번의 알량한 승리만 믿고 오만하게 굴었던 건 아닌가. 피나는 연습과 가족의 격려로 이룩해 낸 자리가, 여기까지 그를 지탱한 확신이 흔들렸다.
입술을 너무 꽉 깨물었는지 입 안에서 피 맛이 났다. 이명은 돌을 떨어뜨릴 것만 같아 간신히 꼭 집고 손을 바둑판 위로 올렸다. 오른팔이 너무 떨려서 왼손으로 붙잡아야 했다.
‘극도로 예민한 기질이 엿보이는 천재’
독기를 품고 내려놓은 검은 돌은 태산에 아무 흠집도 내지 못했다. 상대는 무표정으로 이명의 혈도를 짚었고 그 한 수로 이명의 포석은 사석이 되었다.
또다시 눈앞이 하얘졌다. 앞을 보려고 애썼지만 절망이 안대처럼 앞을 가리고 있었다.
그리고 조금 전까지 우호적이었던 공기가 적대적으로 변했다. 크게 들이마셨지만 충분하지 않았다. 숨을 마시고 내쉬는 속도가 조금씩 빨라졌다. 이명은 이 빌어먹을 조짐을 지긋지긋할 정도로 잘 알고 있었다.
‘본인이 마땅히 우승하리란 확신’
이명은 덜덜 떨리는 손을 들어 흑돌을 집었다. 손이 반쯤 빈 통에 필요 이상으로 강하게 처박혀 요란한 소리를 냈다. 일부러 거칠게 행동한 것이 아니었지만 홍랴오치 9단이 모욕적인 욕설을 들은 듯 이명을 날카롭게 바라보았다.
이명은 시선을 피했다. 내리깐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고 땀방울이 하얀 뺨을 타고 흘렀다. 호흡을 정돈하려고 노력하며 가까스로 착점했다. 정수도 귀수도 아닌, 더 이상의 출혈을 방지하기 위한 괴로운 수습이었다.
탁.
곧바로 백돌이 다소 큰 소리를 내며 흑의 약점을 찔러 들어왔다. 서릿발 같은 위협. 상대는 흑대마를 절멸시키겠다는 의지를 더는 숨기지 않았다. 이명은 또 무례한 사람으로 오해받았다는 게 제 기석들이 곧 난도질당하리란 예상만큼 괴로웠다.
통역을 불러서 설명하면 이해해 줄까. ‘제가 폐가 안 좋습니다. 당신에게 무례하게 대하려던 것이 아니라 현재 몸이 안 좋아서 그런 것이니 부디 괘념치 마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말하면 될까.
‘기재 특유의 비사회성 혹은 비사교성’
“헉, 헉…….”
숨이 점점 거칠어지자 이명은 소리가 남들에게 들리지 않도록 입가를 손바닥으로 틀어막았다. 9년 동안 한 번도 겪지 않은 증상이 하필 이날 나타날 건 왜일까.
심리적인 요인이란 걸 잘 알고 있었다. 산소가 모자라다거나 공기가 희박하단 건 착각이고, 실제로는 단지 정신이 불안정해서 호흡이 가빠진다는 걸. 그러나 몸은 말을 듣지 않았다.
곧이어 기침이 시작되었다. 몸을 뒤흔들고 모든 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기침이. 기침이란 아주 오래전부터 그에게 도무지 멈출 수도 없고 숨길 수도 없는 재앙이자 절망이었다.
이명은 무언가를 이성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그저 이 상황을 멈추고만 싶었다. 고통스러운 와중에도 한 가지만은 확실했다. 경기가 중계되는 상황에 병원에 실려 가기라도 한다면, 이에 관해서 기사가 한 줄이라도 난다면…….
‘병신이라고 불리며 환자 취급당하는 건 학창 시절로 족해.’
이명은 손을 들어 계시원을 불렀다.
“계시기, 멈춰 주세요……!”
바둑 대국에서 계시기를 멈춘다는 건 패배를 인정한다는 뜻이었다. 계시원은 이명이 벌써 기권한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홍랴오치 9단은 불계승을 앞두고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통역사가 그에게 말을 전하는 것이 보였다.
“죄, 죄송…… 콜록, 죄송합니다.”
상황을 설명해야 하는데……. 건강이 안 좋아서 복기를 못 하겠다고 말해야 하는데……. 공기가 모자라서, 숨이 쉬어지지 않아서 한마디도 더 할 수가 없었다.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고 있는 그에게 스태프 중 한 명이 다가왔다.
“혹시 어디 안 좋으신가요? 의료 요원을 불러 드릴까요?”
이명은 고개를 거칠게 젓고서, 아무도 자신의 얼굴을 볼 수 없도록 뒤돌았다. 그는 최대한 아무렇지 않아 보이려 애쓰며 대기실로 걸어가 문을 거칠게 열었다.
그는 널찍한 방에 들어오자마자 문을 잠갔다. 벽 가장자리에 웅크려 앉아 손바닥으로 입을 압박하고 숨을 참았다.
똑똑.
“괜찮으십니까, 이명 9단?”
“……괜, 찮습니다.”
“바깥에 의료진 대기 중이에요. 말씀만 하시면…….”
“괜찮아요.”
그는 겨우 내뱉고서 바닥에 주저앉았다.
하아, 하아.
하, 하아, 하아.
하아.
하아…….
1분, 2분, 5분, 그리고 10분……. 시간은 폐부를 콕콕 찌르면서 느릿하게 흘러갔다. 그리고 얼마나 지났을까, 거칠었던 숨이 안정되며 자신을 둘러싼 싸늘한 현실이 보이기 시작했다.
‘……하.’
이명은 차가운 눈으로 제 오른손을 내려다보았다. 승리하는 순간까지 바둑판에 흑석을 내려놓아야 하는 손이었다. 그러나 모든 것을 망쳐 버린 그 손에는 침이 고이다 못해 징그럽게 흐르고 있었다.
이명은 혐오스러운 광경으로부터 고개를 돌리며 뒤통수를 벽에 쾅 찧었다. 고개를 뒤로 꺾고 눈을 감자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반드시 이기고 싶었던 경기였다. 이날을 얼마나 피나게 대비했던가. 상대의 기풍에 맞춰 얼마나 다양한 전략을 준비해 놓았던가. 제 손으로 대결을 끝내 버렸다는 걸 도저히 믿을 수 없었다. 아니, 백번 양보해서 지더라도, 이런 식으로 한심하게 패배하리라곤 상상조차 못 했다.
이명은 자신을 벗어날 수 없는 구덩이로 몰아넣었던 105수를 떠올렸다. 그러나 뭐가 문제였는지, 왜 패배했는지 파악할 기력은 남아 있지 않았다.
‘한심하군.’
차가운 벽에 멍하니 기대 있는 사이 30분이 더 지났다.
이명은 덜덜 떨리는 왼손으로 휴대폰을 찾아 전원을 켰다. 화면이 뜨자마자 부재중 전화와 메시지 알림이 화면을 가득 채웠지만, 모두 무시하고 인터넷 브라우저를 열었다. ‘한국’이 ‘기화생명배 세계 바둑 선수권 대회’에서 패했다는 기사가 벌써부터 포털 메인을 장식하고 있었다. 실시간 검색어 1위는 ‘이명 인성’이었다.
<승리 자신하던 이명, 기화생명배 세계 바둑 선수권 대회 결승전에서 홍랴오치에 참패>
<中언론, ‘날 무딘 창이 철의 방패에 박살’, ‘당연한 결과’>
<이명 九단, 패배의 설움에 자리 박차고 나가, 복기 걸러 인성 논란>
<홍랴오치, ‘젊은 친구들은 원래 혈기왕성해’ 대인배 인품 재조명>
타이틀만 봐도 사람들이 뭐라고 떠들고 있는지 알 만했다. 전날까지만 해도 이명을 대한민국의 대표로 제멋대로 추어올리던 사람들이 이제는 한마음으로 그를 공격하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파르르 떨리는 입술을 깨물어 보았지만 떨림은 쉽게 잦아들지 않았다.
그때 정에게서 전화가 왔다. 사랑하는 동생이지만 지금만은 보고 싶지 않았다. 이명은 전화를 끊어 버렸다.
[정이: 오빠 괜찮은 거야? 혼자 있을래?] 19:04
[나: 응] 19:05
답장을 보내고서 휴대폰을 집어넣으려고 했다. 그런데 엄마와 정의 메시지 아래, 모르는 번호로 왔던 문자에 버릇처럼 눈길이 갔다.
[남산고 47회 졸업생 동창회]
2학년 5반 친구들아 반갑다! 한번 볼 때도 되지 않았냐? 일일이 연락 돌릴 수 없어서 그냥 반장이랑 둘이 날짜 잡았어.
11/29 (토) 18:00 초원갈비 (링크)
한 놈도 빠지지 말고 꼭 와 새끼들아!!!!! ※담임한테는 연락 안했으니 안심※
- 서기 경민 -
전문을 읽어 내리자 노이즈가 잔뜩 낀 까마득한 기억 속에서 어떤 목소리가 웅웅 울렸다.
‘과호흡일 때 숨을 참으면 좀 낫대.’
깊은 과거에서 끌어 올린 음성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다정하고 나지막했다. 이명은 눈물이 핑 돌 것 같은 향수를 느끼다 피식 웃었다. 일부러 그런 건 아니었지만, 조금 전에 9년 전 그 목소리의 주인공이 가르쳐 준 방법을 사용했었다. 그의 해법은 우습게도 어떤 의사의 충고보다도 잘 들었다. 그 시절이나 오늘이나 동일하게.
이명은 전원이 나간 로봇처럼 한동안 꼼짝 않고 가만히 있었다. 머릿속에 말도 안 되는 생각이 스치자마자 벌떡 일어나서 외투를 걸쳤다. 화장실에서 손을 씻고서 문을 박차고 나가 대회 관계자들을 무시하고 미친 사람처럼 앞으로 걸었다. 출구는 아직도 기자들로 붐비고 있었다. 그는 리셉션에 물어 호텔 로비를 뒷문으로 빠져나갔다.
찬바람이 쌩쌩 부는 거리에 서서 처음 오는 택시를 잡아탔다. 목적지를 말하며 문을 닫았다.
‘나, 지금 뭐 하는 거지.’
차가 출발하는 소리에 정신이 덜컥 들었다. 본능적으로 손이 문손잡이로 향했지만, 택시는 이미 차도로 진입한 뒤였다. 이명은 운전수의 뒤통수를 보며 입술을 달싹거렸다. 그러고서 입을 벌렸으나, ‘잠깐, 멈춰 주세요.’ 하는 말은 차마 나오지 않았다.
이명은 어쩔 수 없이 등을 시트에 기댔다. 여유를 찾고자 팔짱을 꼈지만 불안한 마음에 손끝이 떨렸다. 그는 충동을 제어하는 데 실패하는 중이었다. 달리 말하자면 사고를 치러 가는 도중이었다.
아무런 대책도 없었다. 커리어에 가장 반짝이는 별을 달 기회를 망쳐 놓고서 동창회에 가겠다고? 복기도 하지 않고 기보도 작성하지 않은 채로 회피하겠다고? 그를 가장 걱정하고 있을 엄마와 동생을 외면한 채로 이명은 도망치고 있었다.
‘그보다, 대체 거기에 가서 뭘 하려고.’
이명은 ‘동창’들이 자신을 기억할지조차 확신이 없었다. 만일 기억하더라도 좋은 그림일 리가 없지 않은가. 친구 없는 이명, 혼자 급식 먹던 이명, 맨날 기침해서 민폐 끼치던 이명, 체육 시간에 열외였던 이명.
냉소로 입술이 비뚤어졌다. 분명 이명은 감정에 휘둘리는 구석이 있었고 그의 충동적인 사고방식은 바둑에서 치명적인 단점인 동시에 강력한 강점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그것도 어느 정도지, 사석이 될 것이 분명한 자리에 돌을 놓는 기사는 없다. 가서 득 될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걸 알면서도 왜 그곳으로 향하는가.
먼지로 지저분한 창문에 도시의 불빛이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이명은 창에 이마를 기댄 채 휙휙 바뀌는 검은 풍경을 보았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눈에 담고 있지 않았다.
‘보고 싶어.’
초점 없는 눈에 미련한 그리움이 비쳤다. 부질없고도 근본적인 충동은 사려와 불안, 그리고 이성을 물리치기에 충분했다.
이명은 한동안 빨갛고 노란빛이 차창에 다닥다닥 붙었다가 이리저리 번지며 미끄러지는 걸 지켜보았다. 달의 테두리를 따라 손가락으로 작은 동그라미를 그리고 있었을 때, 차가 서서히 감속했다.
“다 왔는데, 어디에 내려 드릴까요, 손님?”
“아……. 여기서 내릴게요.”
얼결에 계산하고 내리니 갈빗집 간판이 보였다. 시계를 보니 약속 시각에서 이미 1시간 반이 지난 뒤였다.
이명은 발이 땅에 박힌 듯 꿈쩍도 하지 않고 간판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막상 약속 장소에 와 보니 머릿속으로만 생각하던 때와 달리 몸이 움츠러들었다.
‘이건, 좀 아니지 않나…….’
저녁 시간이 한참 지났으니 동창들은 아마 자리를 옮겼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더라도 아무도 저를 알아보지 못할 테다. 들어갔다가 망신이나 당할 게 뻔하지 않은가. 순간의 일탈로 여기까지 오기는 했지만 지금이라도 관두면 된다. 차라리 그냥 집에 가서 술이나 몇 잔 마시고 잠드는 편이 낫지 않을까?
복잡한 심경으로 간판을 보고 서 있는데 문이 휙 열렸다. 그런데 비틀거리며 나타난 취객의 얼굴이 이상하게 낯익었다. 이명은 황급히 시선을 피했지만 남자가 그의 얼굴에 손가락질을 하며 크게 소리쳤다.
“어! 너 혹시…… 남산고?”
“……응?”
“알겠다, 너 형석이지? 왜 이제 왔어?”
“나 형석이 아닌데…….”
이명은 고개를 저었지만 얼굴이 새빨간 남자는 본 척도 하지 않고 두툼한 손바닥으로 그의 어깨를 내리쳤다. 뼈마디가 아플 정도로 강력한 일격이었다. 이명은 “윽!” 하고 외마디 신음을 냈지만 그는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사람처럼 혼자 떠들며 팔로 이명의 어깨를 감쌌다.
“너 이 새끼, 왜 이제 왔어? 얼른 들어가자!”
“잠깐만. 이거 놔…….”
“에이, 빼긴 왜 빼.”
남자는 몸을 휙 돌리며 문을 힘차게 열어젖혔다. 그러고선 확성기를 댄 것처럼 우렁차게 소리쳤다.
“얘들아, 오형석 왔어!”
그 즐거운 외침에 시끌벅적하던 고깃집 분위기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싸늘해졌다. 5초간 온 세계가 멈춘 것 같았다. 눈 깜빡이는 걸 제외하면 아무도 움직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명은 제 어깨를 쥔 손에서 힘이 조금씩 빠져나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오형석 아닌 것 같은데.”
“걔 그렇게 안 생겼는데…….”
민망한 웅얼거림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자, 남자는 “그래? 아님 말고.”라고 중얼거리며 도로 나가 버렸다.
졸지에 혼자 남은 이명은 눈을 둘 곳이 없었다. 가게에 앉아 있는 모든 사람이 자신을 쳐다보는 것 같았다. 고개를 들고 씩 웃을 수도, 등 돌려 뛰쳐나갈 수도 없는 상황에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그래서 이명은 아무것도 안 하기를 선택했다. 짝 잃은 운동화와 구두 사이에 둘러싸인 채 얼음 조각처럼 가만히 서서 녹아내렸다.
그는 그 시간이 영겁과도 같았다고 체감했지만 시계상으로는 10초 정도였다. 사람이 바글바글한 고깃집은 다시 시끌시끌해졌고 이명은 금세 혼자서 우두커니 서 있는 신세가 되었다.
아무도 자신을 보고 있지 않다는 확신이 서자, 이명은 용기를 내어 앞을 바라보았다.
남산고 동창회는 긴 테이블 두 개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는 그중 한가운데에 앉은 남자를 한눈에 알아보았다. 왜인지 몰라도 남자는 소주잔을 손에 든 채 무덤덤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으니까.
8년이란 세월이 지나 인상이 많이 달라졌다. 번듯한 정장 차림이었고 속을 알 수 없는 표정이었다. 그때는 덩치는 컸어도 얼굴에 순진한 느낌이 있었는데, 어느새 묵직한 머스크 향수 광고 모델이라고 해도 이상할 것 같지 않은 남자로 자란 것이다.
‘고등학교 때나 지금이나…… 너는 빛이 나고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네.’
이명은 뒤늦게 시선을 피하고 목을 긁적거렸다. 무엇 때문에 여기까지 왔는지 그가 눈치채기라도 한 것처럼 쑥스러웠다. 민망함을 못 견디고 몸을 돌려 바깥으로 나가려는 순간, 누군가가 소리쳤다.
“쟤 누구더라?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쟤…… 어, 그래! 혹시 이명 아니야?”
“이명! 맞아!”
“이명 9단! 왜, 그 바둑 있잖아 바둑.”
얼굴을 화끈거리게 만드는 소리가 들려왔다. 제발 그러지 말았으면 하고 속으로 빌었는데, 누군가가 인터넷에서 그의 이름을 검색해 동창들에게 보여 주었다. 이명은 자신이 유독 이상하게 나온 단체 사진에서 잘라 낸 그 프로필 사진이 정말 싫었다.
“우리 동창 중에 유명인이 있었어?”
“야, 누구 펜 없냐? 싸인 받아야겠다.”
이명은 어쩔 수 없이 운동화를 천천히 벗었다. 하얀 신발을 아무렇게나 놓은 뒤 누구의 눈도 마주치지 않고 들어가 가장자리에 앉았다.
“야, 반갑다. 잘 지냈어?”
얼굴을 어렴풋이 아는, 그러나 사실은 전혀 모르는 남자가 말했다.
“한 잔 마시자. 잔 받아.”
오늘 처음 만났지만 어딘가 낯이 익은 남자가 술잔을 내밀었다.
자신의 인생에 작은 족적조차 남기지 않은 사람들인데, 한때 같은 공간에서 지냈다는 이유로 낯이 익다는 게 신기했다. 이명은 이 자리에 있는 동창들의 이름을 대부분 기억해 낼 수 없었지만 고등학생 시절의 얼굴은 대강 떠올릴 수 있었다.
과거 그에게 냉랭했던 남학생들이 얼큰하게 취해 한마디씩 붙이고 어깨를 툭툭 쳤다. 모르긴 몰라도 ‘기흉 기흉’, ‘병신 병신’ 거리며 낄낄거리던 놈들이었을 것이다. 그때는 그런 시절이었다. 이명을 욕하고 손가락질하는 게 대수롭지 않은 놀이였던 시절.
이명은 몹시 불편했지만 온 힘을 다해 감내했다. 묻는 말에 최선을 다해 대답했으며 사인해 달란 요구도 들어주었다. 그들은 대체로 취해 있었고 목소리가 컸다. 그리고 쓸데없는 말을 끝없이 지껄였다. 시끌시끌한 테이블에서 조용한 건 단 한 명, 반장뿐이었다.
“자, 그럼 다 같이 건배!”
“야, 너 왜 이렇게 삭았냐? 동창회가 아니라 환갑잔친 줄 알겠다.”
“아쭈? 이 새끼 시비 거는 건 예나 지금이나…….”
처음에는 반짝 환영받았지만 이명에게 쏟아졌던 스포트라이트는 시간이 조금 지나자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그 뒤로 이명은 조용히 술만 마셨다. 그리고 귀를 쫑긋 세운 채 옆 테이블에 앉은 반장, 한선호의 이야기를 엿들었다.
“뭐? 네가 애인이 없어?”
“응.”
“네가?”
“없대도 그러네.”
반장은 먼저 입을 여는 법이 없었지만 늘 누군가의 질문에 대답하고 있었다. 모두가 그에 관해 궁금해하는 것 같았다. 한선호가 요즘 뭐 하고 사는지, 회사는 어떤지, 그리고 애인이 있는지.
입사한 지는 7개월째라고 했다. 현재는 대규모 행사와 계약 때문에 정신이 없지만 조금 지나면 괜찮아질 거라고, 회사는 다닐 만하며 다들 잘해 주신다고. 그는 왼손 네 번째 손가락에 낀 금반지를 만지작거리며 애인이 없다고 말했다.
“내가 소개시켜 줄까?”
“됐어.”
“왜? 인물도 좋고 돈도 잘 벌고 성격도 좋아.”
“하하, 그런 사람이 어디 있어.”
“진짜 괜찮다니까. 한번 만나 봐.”
‘전개가 왜 이렇게 되어 가는 거지.’
이명은 구석 자리에 앉아 한선호가 미래에 소개받을지도 모르는 여자가 얼마나 예쁘고 성격이 좋은지, 무슨 일을 하는지에 관해 자세히 들었다. 한선호는 한동안 손사래를 치며 소개팅 제안을 거절했지만 상대도 끈질겼다.
“반장, 배가 불렀네. 사진 보면 마음 바뀔 텐데. 기다려 봐.”
“그래? 예뻐?”
이명은 단숨에 비우려고 가슴 높이까지 들었던 소주잔을 탁 내려놓았다. 뭘 바라고 동창회에 참석한 건 아니었지만, 적어도 반장이 소개팅에 솔깃해하는 꼴이나 보려고 온 건 아니었다. 이명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작게 중얼거렸다.
“잠깐 담배 좀 피우고 올게.”
그러나 그 말에 귀 기울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는 듯했다. 주변에 앉은 녀석들은 몸을 아예 한선호 쪽으로 돌리고 있었다.
‘내 주제에 동창회라니, 정말 바보 같은 짓이었어.’
그가 이대로 나가서 돌아오지 않아도 아쉬워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을 것이다. 나중에 TV에서 대문짝만하게 보도하는 인성 논란을 보며 ‘그래, 저 이상한 놈이 우리 동창회에도 왔었지’ 하고 씹을지 모르겠지만.
시끌벅적한 말소리와 가벼운 웃음, 아무렇게나 지껄이는 농담이 그로부터 조금씩 뜯겨 나갔다. 한 번도 섞일 수 없었던 세계로부터 이명은 한 걸음씩 다시 멀어지고 있었다. 천천히, 느릿한 걸음으로.
내심 누군가 잡아 주기를 바랐는지도 모른다. 그래도 너도 우리 반의 일원이 아니었느냐고, 같이 앉아서 이야기하자고. 8년 전에 이러이러한 일이 있지 않았었느냐고. 그러나 그런 것을 기대하기에는, 누구의 기억에도 이명은 존재하지 않는 듯했다.
‘돌아가자.’
이명은 신발장 앞에서 미련을 떨치고 겉옷을 여미었다. 운동화를 눈으로 찾고 있는데 뒤에서 흘려들을 수 없는 소리가 들렸다.
“어? 어디 가, 반장?”
그 순간, 세계가 뒤흔들렸다. 이명은 뒤돌아보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참고 온 신경을 귀에 집중했다. 곧이어 그의 심장을 쿵 떨어지게 하는 음성이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났다.
“한 대만 피우고 올게.”
“반장, 담배 피워?”
“엥? 반장이?”
한동안 굳어 있던 이명은 서둘러 신발에 발을 구겨 넣었다. 그 때문에 멈춰 섰다는 걸, 그 때문에 가슴이 미친 듯이 뛰고 있단 걸 한선호가 알게 하고 싶지 않았다.
“선호야아, 나도 같이 가자……. 우읍.”
“하하하! 누가 얘 화장실 좀 데려가!”
“생긴 건 짝으로 마실 것 같이 생겨 갖곤. 일어나, 새꺄. 여기다 토할 거야?”
어지럽게 뒤섞인 목소리 중 그의 것은 없었다. 이명은 도망치듯이 바깥으로 나왔다.
유리문이 닫히자 소음이 멀어졌다. 차가운 바람이 가차 없이 볼을 때렸다. 터벅터벅, 갈 길 잃은 발이 아무 데로나 움직였다. 그러나 고깃집 앞에는 담배를 피울 만한 곳이 딱히 없었다.
모순적인 마음이 들었다. 한선호가 나오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 그와 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보내고 싶은 마음. 한선호에게서 도망치고 싶은 마음, 그가 자신을 우연히 발견해 주었으면 하는 마음. 그렇게 모호한 심정으로 골목이 아닌 건물 측면으로 도피했다. 꼭꼭 숨겨진 장소가 아닌, 조금만 노력하면 찾을 수 있는 곳으로.
이명은 환풍기 옆에 쪼그려 앉았다. 담배에 불을 붙이고 한 모금 깊이 빨아들였다. 입술 사이로 빠져나온 연기가 그의 심정을 대변하듯 좌우로 흔들리며 하늘로 사라졌다.
곧 뚜벅뚜벅 발소리가 들렸다. 조금씩 가까워졌다. 어느 순간 멈추었다.
이명은 공간을 꽉 채운 남자의 존재감을 느낄 수 있었지만 일부러 환풍기 쪽을 바라보지 않았다. 8년 만에 만난 첫사랑 앞에서 의연해지고 싶었다.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거기서 뭐 해? 궁상맞게.”
‘그냥 갈 걸 그랬나.’
아무렇지 않다는 투의 낮은 목소리를 듣자마자 자신감이 사라졌다. 한선호가 밤하늘을 가리며 이명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원체 장신에 체격이 큰 남자가 그러고 있으니 위압적으로 보였다. 그의 배경으로 펼쳐진 밤하늘은 눈이 시리도록 파랬다.
“자, 앉읍시다.”
“엇…….”
한선호는 넉살 좋게 이명의 오른쪽 어깨를 짚으며 환풍기와 그 사이의 좁은 공간을 파고들었다.
‘그냥 갔으면 큰일 날 뻔했네.’
그 잠깐의 접촉으로 이명은 오늘 이곳에 오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조금 전에 커다란 손이 닿았던 오른쪽 어깨가 왠지 간지러웠다. 손은 금세 떨어졌지만 그 자리에 아직도 그의 무게와 온도가 고스란히 남아 있다는 착각이 들었다.
“담배 한 대만 빌려주라.”
한선호는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마치 어제도 만난 친구처럼.
이명은 굳은 표정으로 반쯤 빈 담뱃갑을 내밀었다. 마치 동네 불량배에게 삥 뜯기는 고딩처럼.
“……자.”
“불도.”
“어?”
담배를 입술 사이에 문 한선호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술 냄새가 살짝 섞인 청량한 송진 향이 정신을 아득한 곳으로 잡아끌려 했지만, 이명은 온 노력을 기울여 평정심을 유지했다.
“불.”
삐죽 튀어나온 흰색 연초가 까딱거렸다. 그들은 아무 사이도 아닌데 한선호는 당연하다는 듯이 요구하고 있었다.
‘취한 거겠지. 그래서 누구랑 말하고 있는지 헷갈리는 거겠지.’
그런 걸 알면서도 심장은 걷잡을 수 없이 두근거렸다.
‘딱 한 대만 피우고 가자.’
제법 강한 바람이 불어와 머리를 헝클였다. 이명은 불이 꺼지지 않도록 손바닥으로 감싸고서 라이터를 조심스럽게 켰다. 한선호가 문 담배 끝이 빨갛게 타들어 가더니 그가 멀어졌다.
이명은 다시 앞을 향해 앉았다. 자동차 헤드라이트와 형형색색의 간판, 가로등의 어지러운 불빛이 눈앞에 어른거렸지만 사실은 그 무엇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앉아 있을 뿐이었고 신경은 온통 오른쪽에 쏠려 있었다.
한선호는 한동안 조용히 있다가 어느 순간에 불쑥 말했다.
“난 네가 담배 피울 줄 몰랐는데.”
무슨 의도로 한 말일까. 이명은 잠깐 고민하다 바보같이 반문했다.
“뭐?”
한선호는 말없이 연초를 빨아들였다가 연기를 내뿜으며, 아무렇지 않게 답했다.
“안 좋았던 거 아냐? 폐?”
이명은 눈을 두 번 깜빡였다. 그는 건강에 이상이 있는 요주의 학생이었고 그 때문에 반장인 한선호에게 몇 번 폐를 끼쳤다. 떠올리기만 해도 부끄러워지는 기억들이었다. 오래전 일이라 그가 당연히 다 잊었을 줄 알았다.
“지금은 괜찮아.”
“아, 그래? 그럼 군대는?”
그 물음에 지독하게 신경 쓰였던 어느 날의 대화가 불현듯 뇌리를 스쳤다. 철없는 놈들이 아무것도 모르면서 떠들어 대던 말. 그땐 그런 것들이 참을 수 없이 싫었다. 지금이라고 좋은 건 아니지만.
“기흉으로 군 면제 안 되거든?”
이명은 의도치 않게 톡 쏘듯 대꾸하고서 입을 다물었다. 괜히 발끈한 것 같아서 머쓱한 기분을 삼키고 있는데 오른쪽에서 풋 웃는 소리가 났다. 한선호의 입이 기분 좋은 호선을 그리고 있었다. 그는 담배를 바라보는 것뿐인데, 왜 그 시선이 제 입술을 만지는 것처럼 느껴지는 걸까. 심장 떨리는 침묵이 한동안 이어지고서 나직한 음성이 들렸다.
“너는 담배 말곤 변한 게 없네.”
어릴 땐 아무 그늘 없는 사람처럼, 그러니까 좀 더 해맑게 웃었던 것 같은데. 지금은 약간 다른 방식으로 웃는다. 그러나 8년이 지나 모종의 신비감이 더해진 미소는 그때와 마찬가지로 이명을 두근거리게 했다.
쿵, 쿵, 쿵. 가슴이 시끄럽게 뛰어 대서 차 소리가 더는 들리지 않았다. 그들이 공유했던 시간이 불현듯 밀려들었다.
샛노란 한여름, 달리는 아이들을 그늘 아래서 지켜봐야 했던 좌절의 기억들이 되살아났다. 이름 모를 풀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이름 모를 나무 아래 흐드러지게 피었던 보라색 꽃의 어질어질할 정도로 진한 냄새, 눈부시게 창공을 밝히는 시끄러운 태양, 손에 잡힐 듯한 축축하고 무거운 습기, 아무리 빼내도 운동화 틈새로 자꾸만 들어오던 텁텁한 모래알들, 창문이 괴상할 정도로 많은 네모난 건물, 툴툴거리는 소리를 내며 불쾌한 먼지를 날리던 낡은 선풍기, 숨이 턱 끝까지 찼던 몇몇 순간들, 그리고…….
아무에게도 말할 수 없을 은밀한 기억. 너는 다 잊었을, 나 혼자 기억하는 시간.
이명은 문득 자신이 멍하니 한선호와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비현실적일 정도로 잘생긴 얼굴이 의아하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앗, 뜨거!”
이명은 문득 손가락 끝에서 느껴진 열기에 몸을 움찔거렸다. 손에 쥐고 있던 담배가 빨간 불꽃을 튀기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바보같이, 필터까지 타들어 가는지조차 몰랐다. 흡연 경력 5년 차인데 이런 실수를 하다니. 한선호의 얼굴을 구경하다가 그렇게 된 것이라 귀가 화끈거렸다.
“괜찮아?”
별일이 아닌데도 한선호는 큰일이라도 벌어진 것처럼 별스럽게 굴었다. 이명은 부끄러워서 고개를 숙였지만 한선호는 그의 손목을 잡고 끌어당겼다. 그의 손이 닿은 곳이 덴 듯이 뜨거웠다.
“봐 봐.”
“아니야. 괜찮아.”
“덴 것 같은데?”
아니라고, 괜찮다고, 정말 별일 아니라고. 똑바로 말해야 하는데 목소리가 사라졌다. 자신조차 알아듣지 못할 소리로 웅얼거리며 이명은 식은땀을 흘렸다. 얼굴에 열기가 몰려드는 것이 원망스러웠다. 아무리 날이 어둡다지만 코앞이라 뺨이 빨갛게 상기된 게 다 보일 텐데.
한선호는 갑자기 말이 없어졌다. 이제 손목을 잡아당기지도, 괜찮으냐고 걱정하지도 않았다. 조금 거칠어진 숨결만이 규칙적으로 들릴 뿐이었다.
이명은 그의 표정이 몹시 궁금했지만 도저히 시선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자신의 수상쩍은 행동에 그가 뭔가 알아챘더라도 이상하지 않았다.
눈앞이 깜깜했다. 겨우 얻은 이야기할 기회마저 이렇게 망치다니, 대단하다고 할 수밖엔.
“이제 들어가 봐야겠다.”
재빨리 일어나 허둥지둥 옷매무새를 정돈했다. 오늘 치 용기는 여기까지인 것 같았다. 아니, 한 달 치, 어쩌면 반년 치 용기를 다 써 버렸는지도 모른다. 이마에서부터 난 땀이 관자놀이 위로 흘러내렸다.
한선호는 계속해서 말이 없었다. 이명은 바보 같은 자신을 자책하며 골목 끝을 향해 성큼성큼 걸었다. 그러다 골목을 빠져나가기 직전…….
“명이야.”
이명은 홀린 듯이 뒤를 돌아보았다. 낮은 음성에는 발을 붙들고 시선을 끌어당기는 신비로운 힘이 있었다.
한선호는 여전히 환풍기 앞에 서 있었다. 뒤돌아선 그의 등이 돌처럼 단단해 보였다. 그는 자신과는 달리 겉도 속도 단단한 사람인 것만 같았다.
“가지 마.”
사고가 멈추었다. 이명은 그 말의 의도를 판단조차 하지 않고, 홀린 듯이 한 발짝씩 한선호에게 다가갔다. 성큼성큼, 이윽고 손 뻗으면 닿을 만한 거리에서 이명은 현실로 돌아왔다.
“야, 반장 어디 갔냐?”
“아까 담배 피우러 간다고 했는데.”
“전화해 봐.”
가게 문 앞에서 무더기로 빠져나온 동창들이 시끄럽게 떠들고 있었다. 코너만 돌면 그들에게 훤히 보일 위치였다. 따지고 보면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죄지은 사람처럼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동요하는 이명과 달리 한선호는 진지한 표정 그대로 손을 내밀 뿐이었다. 네 번째 손가락에 금색 반지가 끼워진 왼손이었다.
“빨리.”
그가 손을 달라는 듯 작게 재촉했다. 이명은 당연히 주저했다. 그러나 머리가 판단을 내리기 전에 몸이 움직였다.
그의 손을 잡는 것이 무슨 의미인지 전혀 알지 못한 채로, 이명은 한선호의 손바닥에 손가락을 조심스럽게 갖다 대었다. 그러자마자 길쭉길쭉한 손가락이 그의 손을 감쌌다. 마법처럼 신비하고 강인하게.
한순간에 몸이 바싹 당겨지는가 싶더니 곧 등에 벽이 부딪혔다. 바깥 공기에 오랫동안 노출되었는데도 열기를 잃지 않은 손가락이 목을 타고 올라왔다. 커다란 손바닥이 귀밑을 감으며 목뒤를 감쌌다.
그 감촉에 소름이 돋는다고 생각하던 찰나, 입술이 뜨거운 온도에 삼켜졌다. 입술보다 더운 혀가 곧바로 밀고 들어오는 키스는 막을 수도 끊어 낼 수도 없었다.
한선호는 이명의 모든 것을 취하겠다는 듯이 그를 빨아들였다. 그리고 그를 엉망으로 만들기로 작정한 듯 안을 휘저었다. 난데없는 키스가 왜 이렇게 열정적인지 이명의 머리는 상황을 따라가지 못했다. 그러나 이명의 몸은 그 키스에 흐물흐물 녹아내리고 있었다. 단단한 혀가 움직일 때마다 몸이 움찔거리며 신음이 새어 나왔다. 숨이 턱 끝까지 차고 다리에 힘이 풀렸다. 그것을 알아채기라도 한 듯, 한선호의 무릎이 이명의 다리 사이로 파고들었다.
“하아, 하아, 다, 다리…… 하지…….”
“쉿, 다 들리겠다.”
한선호는 놀리듯이 중얼거리고선 다시 입술을 맞부딪쳤다. 정신을 차릴 틈 같은 건 주지 않았다. 이명의 어깨와 허리를 더듬던 손이 내려와 엉덩이를 지나 사타구니에 닿았다.
이제 변명의 여지는 없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너의 행동 때문에, 몸이 녹아내리는 키스 때문에 머리끝까지 흥분해 버렸다고 소리 내어 고백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이명은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숨고 싶었다.
“하하, 귀여워.”
한선호가 웃으며 떨어져 나갔다. 그가 손목을 잡아끌며 놀이공원에 가자는 사람처럼 밝게 말했다.
“가자.”
이명은 이번에도 그를 막을 수 없었다. 아니, 막고 싶지 않았다. 몸은 자연스럽게 끌려갔지만 머리로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한선호는 스트레이트가 아니었나. 손가락에는 반지도 있는데 뭘 하자는 걸까. 대체 어디로 가려는 걸까.
그보다 근본적인 문제가 있었다. 한선호는 왜 8년 만에 만난 데면데면한 남자 동창에게 키스한 걸까.
그는 대체 무슨 생각인 걸까.
이명은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완벽하다곤 할 수 없어도 직업상 수 싸움에 약한 타입은 아니다. 하지만 바둑판 밖의 세계는 그에게 늘 혼란스럽고 어렵기만 했다.
그 순간에는 무엇 하나 뚜렷한 것이 없었다. 뭉개진 사람의 말소리와 자동차 엔진 소리, 그리고 희미하게 번져서 윤곽을 구별할 수 없는 빛. 그의 주변을 둘러싼 환경과 마찬가지였다. 아득한 과거의 기억과 미련 섞인 감정, 시간을 거슬러 전혀 알 수 없게 된 미지의 상대까지.
사방이 곤마였다. 이명은 살겠다는 의지도 없이 한선호의 손에 이끌려 엉망진창인 거리를 빠져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