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과호흡 1권-13. 스물일곱, 겨울 (1/21)

과호흡 1권

<목차>

13. 스물일곱, 겨울

14. 스물일곱, 겨울

2A. 열여덟, 겨울

4. 열여덟, 봄

5. 열여덟, 봄

7. 열여덟, 여름

9A. 열여덟, 여름

13. 스물일곱, 겨울

[6:00AM]

알람이 세 번째로 울리기 직전, 남자 ‘A’가 팔을 기민하게 뻗었다. 시끄러운 소리는 사라졌지만 졸음기가 두텁게 붙은 눈꺼풀은 곧바로 들리지 않았다. 그는 나른한 표정으로 눈을 감은 채 5분이 지나서야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얇은 이불이 흘러내리며 근육질인 나신을 드러냈다. 블라인드 사이로 들어온 빛이 단단한 맨 어깨 위로 떨어졌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운동으로 잘 단련된 광배근에 검은 줄무늬가 구불구불 어른거렸다. A는 길게 하품하며 침실에서 나와 물을 한 잔 마셨다. 화장실에서 턱에 셰이빙 폼을 턱턱 바르고 면도하고 나니 5분이 지나 있었다.

그는 익숙한 손짓으로 선반을 열고 식빵을 토스터에 넣었다. 기다리는 동안 휴대폰으로 일기 예보와 잠든 사이 일어난 사건 사고, 세계 증시를 확인했다. 코스피와 유가를 체크하고 나자 때마침 토스터에서 빵 두 장이 튀어 올랐다. A는 화면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빵을 집어 접시에 올려놓고, 직장 동료가 유럽에서 사다 준 레드 라즈베리 잼을 나이프로 슥슥 발랐다.

같은 시각, 남자 ‘B’는 이불을 목까지 덮어쓴 채 푹 잠들어 있었다.

[6:30AM]

전신 거울 앞에서 옷을 갈아입은 남자 A는 모직 코트를 걸치고 현관으로 나갔다. 그는 일기 예보를 떠올리며 장우산을 집었다. 어깨에 멘 드라이 백에는 전날 미리 챙겨 놓은 수영용품과 향수가 들어 있었다. 오피스텔을 나선 A는 엘리베이터를 통해 지하로 이동해 검은색 SUV에 시동을 걸었다.

수영장에는 강습받는 학생 다섯 명 정도가 준비 운동을 하고 있었다. 그들을 지나쳐 빈 레인 앞에 선 A는 수경을 내리고 수영모를 제대로 쓴 뒤 입수했다. 시작은 언제나 자유형이었다. A는 여유롭게, 천천히 레인을 왕복한 뒤 몸을 돌려 접영으로 바꾸었다.

강사의 설명을 듣던 학생들의 시선이 하나둘 그쪽으로 쏠렸다. 원체 눈에 띄는 체격 조건인 데다가 초보자가 보기에도 A의 영법은 완벽에 가까웠다. ‘아침마다 오시는 남자분’을 보려고 해당 시간에 등록한 학생이 까치발을 든 채 훔쳐보고 있었지만 수영에 골몰한 A는 알지 못했다. 그는 오직 두 팔이 수면을 찢으며 몸을 앞으로 밀어내는 과정에만 집중할 뿐이었다. A는 그 행위에서 늘 쾌감을 느꼈다.

“으음…….”

그 시각, 남자 B가 몸을 크게 뒤척였다. 안 좋은 꿈이라도 꾼 듯 얼굴을 찡그렸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잠에 빠져들었다.

[8:20AM]

엘리베이터가 대경 빌딩 11층에서 멈추며 몇 사람이 내렸다. 뒤이어 자동으로 개폐되는 유리문이 열리고 남자 A가 사무실로 들어섰다.

“안녕하세요, 송 대리님. 안녕하십니까, 김 차장님.”

그는 마주치는 사람들에게 밝게 인사하며 제 자리로 향했다. 옷걸이에 코트와 목도리, 블레이저를 걸어 두고 탕비실에서 커피 머신을 작동하던 그는 문간에서 서성이는 동료 직원을 보았다.

“안녕하세요, 예진 씨.”

“어, 어어……. 아, 안녕하세요, 선호 씨.”

“한 잔 타 드릴까요?”

“아, 네! 그럼…… 부탁드릴게요.”

“하하, 잠깐만요. 제 것만 끝나고요……. 그 머그 컵, 이리 주실래요?”

“네! 네, 네!”

A는 늘 그의 앞에만 서면 허둥대는 윤 사원에게 한 번도 무안을 준 적이 없었으며 오히려 따뜻한 태도를 보였다. 그렇다고 해서 특별히 살갑게 구는 것도 아니었다. A가 윤 사원의 뜨거운 마음을 모르는가, 아니면 모른 척하는가. 그 여부는 반도체 사업부 내 주요 가십거리 중 하나였다.

“여기, 컵 받으시고…….”

“네? 아, 네에……. 매번 진짜 감사합니다!”

“별것도 아닌데요, 뭐. 그럼 수고하세요.”

탕비실에서 빠져나온 A는 커피를 한 모금 입에 머금고 걸었다. 따뜻한 에스프레소로 시작하는 오전은 두 건의 회의에 참석하고 내용을 정리하고 나면 지나가 버릴 예정이었다. A는 자리로 되돌아가며 하루의 계획을 머릿속에서 정리했다.

남자 B는 여전히 잠들어 있었다. 어두운 방이 편안하고 고른 숨소리로 가득했다.

[12:45PM]

남자 A는 식사를 하고서 옥상의 옥외 흡연실에 들렀다. 그곳에는 매일 비슷한 시간에 마주치는 상사가 있었다. 그녀는 다른 부서 소속인데도 그를 챙겨 주는 편이었다.

“안녕하세요, 박 차장님. 오랜만에 뵙네요.”

“그러게, 한 24시간 만인가?”

“하하하. 식사는 맛있게 하셨어요?”

“오늘 반찬 좀 짜던데……. 라이터 필요해요?”

“아뇨, 여기 있어요.”

A는 어깨를 옆으로 돌리고 눈을 내리깔며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는 한동안 연초를 태우면서 탁 트였다고 하긴 어려운 잿빛 스카이라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의 시선이 고층 건물을 타고 떨어져 평일 점심인데도 차량으로 북적이는, 광화문 광장이 갈라놓은 10차선 도로를 눈에 담았다. 그 모습을 힐끔힐끔 보던 박 차장이 재떨이에 담뱃재를 털며 말했다.

“우리 조카, 이번에 대학 병원 외과 레지던트 합격했다?”

“지난번에 졸업했다고 말씀하신 친구죠? 능력 있네요.”

“그러니까. 애가 똑똑한데 성격까지 괜찮아.”

“차장님 닮았나 봐요.”

무표정으로 담배를 피우던 박 차장의 얼굴에 웃음이 환하게 번졌다.

“내가 우리 큰언니한테 맨날 그 말 하는데. 역시 선호 씨, 뭘 좀 안다니까.”

“하하. 저도 아버지보다 삼촌이랑 더 닮았어요.”

“근데 있잖아요, 그냥 얘기가 나와서 하는 말인데…….”

“네. 말씀하세요.”

“우리 조카 한번 만나 볼래요?”

“네?”

“내가 너무 갑자기 들이댔다, 그치.”

A는 난데없는 제안을 받은 것치고 표정이 태연했다. 그는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선 왼손을 올려 넥타이를 고쳐 맸다. 박 차장이 그의 넷째 손가락에서 금색 반지를 발견하곤 민망한 듯 웃었다.

“맞다, 맞다! 선호 씨 누구 있었지, 참. 까먹고 있었네. 미안해요.”

“괜찮습니다.”

“……근데, 애인 누굴까? 말해 줄 수 없는 사람? 혹시, 사내 연앤가? 나한테만 살짝 귀띔해 주지?”

A는 성격이 원만하기로 정평이 난 사원이었다. 그래서 박 차장은 사적인 일인 걸 알면서도 끈질기게 물어보았다.

“설마 윤예진 씨……?”

“아니에요, 차장님. 그쯤 하세요.”

그러나 A는 만만찮은 구석이 있었다. 그는 늘 태도가 부드러웠고 웃는 낯이었지만, 함부로 대할 수 없는 단단한 막으로 둘러싸인 사람 같았다. 박 차장은 원하는 답을 얻지 못하고 물러나는 수밖에 없었다.

“아까워서 그러지. 안 그래도 소개팅 많이 들어오죠?”

A는 대답 없이 입꼬리를 살짝 끌어 올렸다. 그것은 기쁨보다 예의를 표시하는 미소였다. 동시에 마음에 들지 않는 화제를 끊어 내기 위한 방법이기도 했다.

“차장님, 저 오후에는 외근 나가야 해서요. 슬슬 가 봐야겠어요.”

“웬 외근? 혹시 미디콤 미팅?”

그녀의 눈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커졌다. 그 의미를 아는 A는 난처하다는 듯이 웃었다.

“하하, 네.”

“와……. 수출 전시회 때 기획실 눈에 제대로 들었구나? 윗분들이 어지간히 좋게 보신 모양이네. 새파란 사원을 이 정도 빅 바이어 미팅에 대동하는 게 웬 말이야.”

“저야 그냥 서포트 하고 자리 지키는 게 다죠, 뭐.”

“무슨 소리야? 참여하는 자체가 경력이지. 어우, 늦으면 대형 사고 나겠다. 얼른 가 봐요.”

“다음에 또 뵙겠습니다, 차장님.”

A는 고개를 꾸벅 숙이고 몸을 돌렸다.

남자 B는 꿈을 꾸고 있었다. 준결승에서 승리하는 꿈이었다.

[2:30PM]

“음……. 그 농담은 손님들 앞에서 안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남자 A가 조수석을 눈짓하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신 팀장이 2주 동안 고심했다는 유머는 외국에서 온 손님들을 처음 만나는 자리에서 서먹서먹한 분위기를 풀기보다 오히려 경직시킬 것 같았다.

“진짜 별로야? 이거 내 비장의 무긴데, 아까 유 대리도 질색하더라고.”

“……예.”

“에이, 그럼 그냥 안 할래. 선호 씨는 독일어 연습 좀 했어?”

“인사말 정도만요. 이제까지 영어로 소통했으니, 그쪽에서도 크게 기대하진 않을 것 같아서요.”

신 팀장은 고개를 끄덕이고서 답답하다는 듯 넥타이를 풀었다. 먼 갯벌을 바라보는 그의 입술 사이에서 한숨이 흘러나왔다.

“영종 고속 도로는 언제 와도 경치가 좋네.”

이번 대경 테크와 미디콤의 계약 여부는 IT계에서 초미의 관심사였다. 미디콤은 독일 IT가전 시장 점유율이 20%에 달하는 거물 바이어였다. 이번 계약이 성사되기만 한다면 프랑크푸르트 수출 전시회 기획과 현지 주정부에서 개최한 IT포럼 세미나를 주도한 해외영업1팀 구성원들, 특히 리더인 신 팀장 앞에는 레드카펫이 깔린 거나 다름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신 팀장이 중요 바이어를 모시러 가는 자리에 차장, 과장급을 놔두고 입사한 지 반년밖에 안 된 A를 고른 건 다분히 의도적인 행위였다. 말로는 직급이 무슨 상관이냐며, ‘와꾸’가 되니까 여자 바이어가 있을 때 효과가 좋다고 너스레 떨었지만 그가 자신을 유독 좋게 봐주고 신경 써 준다는 걸 A는 알고 있었다.

“이거 잘 끝나면 우리 팀 회식 한 번 끝장나게 하자.”

“네.”

“옥돔, 다금바리 회 놓고 프리미엄 양주 까자고. 누가 우릴 말려. 프랑크푸르트에서 그 고생을 하며 공을 세웠는데, 응?”

“하하하, 그럼요.”

A는 웃으며 액셀을 더욱 세게 밟았다.

‘뭔가 좋은 꿈을 꾼 것 같은데.’

남자 B는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을 정수리에 맞으며 골똘히 생각했다. 반투명 창을 통해 쏟아지는 햇살과 물의 온도가 그를 정신 못 차릴 정도로 나른하게 만들었다. 일어난 지 10분 정도 지났나, 아니 15분쯤 되었나. 냉수를 마시고 샤워를 시작했는데도 눈꺼풀에서 잠이 완전히 떨어지지 않았다.

“명아, 엄마 왔다.”

비누를 꼼꼼히 칠한 몸을 다 헹궜을 때쯤 밖에서 문소리와 인기척이 들렸다. B는 마지막으로 물을 온몸에 뿌리고서 샤워 부스에서 나와 수건으로 몸을 닦았다.

옷을 입고 나갔을 땐 그의 엄마가 검은 비닐봉지에서 스티로폼 그릇을 꺼내 식탁에 내려놓고 있었다.

“오셨어요.”

“너는 전화도 안 받더니 지금 일어난 거야? 밥 안 먹었지?”

“네.”

“그럴 줄 알고 사 왔어. 빨리 먹고 준비해.”

엄마가 오는 날이면 평소와 다르게 집 안에 좋은 음식 냄새가 가득 퍼졌다. B는 ‘잘 먹겠습니다’라고 말하고서 그녀가 양껏 차려 놓은 된장찌개에 숟가락을 담갔다. 식탁 건너편에서 턱을 괴고 그를 바라보던 엄마가 물이 뚝뚝 흘러내리는 머리카락을 가리켰다.

“머리 자르랬더니 안 잘랐네? 덥수룩한 거 봐.”

“어제저녁에 자르려고 나갔는데 미용실이 닫았어요.”

“언제 갔는데?”

“음……. 한 9시?”

으이그. 엄마가 한숨을 쉬며 B에게 날카롭게 눈짓했다. 깔끔한 인상을 주는 것도 좋은 행마만큼 중요하다는 요지의 익히 들어 본 잔소리가 쏟아졌지만 B는 옅게 웃을 뿐이었다.

“제가 연예인은 아니잖아요. 어차피 TV에 나가는 건 손이랑 팔목까지고.”

“기자들하고 관계자들이 보잖아. 다 쌓여서 네 평판이 되는 거야.”

“알았어요. 지금 나가서 자를게요.”

“뭘 지금 자르니? 시간도 없는데. 밥이나 많이 먹어.”

“네.”

B는 숟가락으로 밥을 푹 떠 입 안에 가득 넣었다. 그가 미소를 짓자, 엄마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플라스틱 숟가락을 뜯었다.

“그렇게 맛있어?”

“네. 엄마도 드세요.”

“난 아까 먹었지. 그래도 맛이나 보자.”

엄마가 된장찌개를 한 숟갈 떠 마시고는 또다시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단골 가게이고 늘 먹던 맛인데 뭐가 그리 특별한지 모르겠다는 거다.

B는 대답하지 않았다. 승부에 그런 게 무슨 소용이 있겠냐마는, 오늘은 예감이 아주 좋았다.

[6:50PM]

남자 A는 기지개를 켜고 인터넷 창을 열었다. 동영상 스트리밍을 재생하고 이어폰을 귀에 꽂은 순간, 귀신같이 뒤에서 방해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한 사원, 딱 걸렸어. 일 안 하지요?”

‘아, 이건 좀 억울한데.’

A는 속으로 중얼거렸다. 바이어 픽업과 프레젠테이션 참석, 사무실에 복귀한 뒤에는 PRM 모니터링과 회의 내용 정리 및 유관 부서와 현지 해외영업팀 공유까지, 온종일 일만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바로 직전까지 내년에 예정된 CE마크 개정에 따른 이슈 팔로우 업 리포트를 작성하고 있었다.

그는 웃으며 뒤를 살짝 돌아보았다.

“좀 봐주세요, 대리님.”

“하하하. 언제 퇴근해?”

“보고서만 조금 손보면 돼요. 대리님은요?”

“나도 한 30분? 그나저나 오늘 미디콤이랑 미팅, 썰 좀 풀어 줘요.”

“아까 해 드렸잖아요.”

“바이어 분들이 매너 있고 호의적이시더라, 본사와 다이렉트로 소통하고 싶다고 요청하더라, 이런 거 말고 더 자세히 듣고 싶다고! 신 팀장, 설마 독일어로 아재 개그 친 건 아니죠?”

“그거……. 수정 대리님이랑 같이 겨우 말렸어요.”

최 대리가 고개를 뒤로 젖혀 가며 웃음을 터뜨렸다.

“아, 1팀 부럽다. 누군 상사 잘못 만나서 맨날 뺑이나 치는데……. 선호 씨는 특히 더 그래. 대체 입사 7개월 차에 실세 라인 타는 게 말이 돼요?”

“라인이라뇨, 제가 그런 게 어디 있습니까.”

“신 팀장이 판매총괄팀장님 직곈데, 선호 씨가 그 라인이 아니라고? 회사에서 디시전메이킹 나는 데가 다 그쪽인데, 실세가 아니라고? 어떻게 한 거예요? 나도 비결 좀 알자.”

실없는 푸념에 속을 알 수 없는 미소가 돌아왔다. A는 대경 테크놀로지에서 일한 7개월 동안 인상을 찌푸리는 일이 없었다. 늘 웃는 낯으로 다른 사원을 배려하며 성실하게 일했다. 그런데도 아무도 그를 우습게 여기지 않았다.

“부러워서 그래요, 부러워서. 나도 줄 잘 서는 법 공부를 하든지 해야지, 원.”

최 대리는 하품을 크게 하고서 모니터를 보았다. 문서 파일과 회계 자료 따위를 훑던 시선이 한구석에 작게 줄여 놓은 동영상 화면 위에서 멈추었다. 평소에 A를 ‘바른 생활 사나이’라고 놀려 댔던 그가 건수 잡았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기화생명배 세계 바둑 선수권 대회

동영상 화면 속에서는 가로로 긴 현수막을 배경으로 정장 차림의 해설자 두 명이 차분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이건 뭐야? 난 또 야한 거라도 보는 줄 알았더니.”

“실망시켜 드려 죄송하네요, 대리님.”

“인간미가 없다니까, 인간미가……. 근데, 선호 씨 원래 바둑 좋아해요?”

“가끔 보는 정도예요.”

“내가 또 바둑 하면 할 말 많은데. 우리 외가가 바둑 집안이거든요. 사촌 형이 무슨 바둑 신문 편집장이고 제일 잘하는 사촌 누나가 아마 5단이에요.”

“아마추어 5단도 대단한 거 아니에요?”

“그럼. 나 같은 일반인은 아홉 점을 접어줘도 못 이기지. 하물며 이런 프로들은…….”

마침 화면이 전환되며 좌우에 두 기수의 사진과 경력이 주르르 나타났다. 한 명은 환갑쯤 되어 보이는 남자였다. 반면 그와 대결하는 남자는 아주 젊었다. 단체 샷에서 잘라 낸 듯 조악한 사진 속 얼굴은 앳되어 보였고 표정이 경직되어 있었다.

“김석훈에 이명이라니, 화려하네. 선호 씨는 누가 이길 것 같아요?”

“명이요.”

“응? 명이?”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모니터를 보는 A의 시선이 평소답지 않게 날카로워 보여서 최 대리는 농담할 의욕을 잃었다. 그러나 A의 미간에 옅게 잡혀 있던 주름은 금세 사라졌고 그는 곧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명이랑 고등학교 동창이거든요.”

“오, 그래요? 그거 희한한 인연이네. 이명은 고딩 때 어땠어요?”

“……글쎄요.”

이명 9단은 어떤 고등학생이었나.

A의 머릿속에 여러 단편적인 정보가 스쳐 지나갔다. 대체로 누구나 아는 것들, 그 남자와 같은 공간에 5분만 있어도 알 수 있는 것들이었다. 그러나 무작위로 떠오르는 기억 중에는 절대로 남과 공유하고 싶지 않은 장면도 있었다. A는 모니터 속 사진에 시선을 고정하며 낮게 중얼거렸다.

“저, 사실은 얘 잘 몰라요, 대리님.”

검은 눈동자에 비친 바둑 기사의 프로필 사진이 일그러졌다. 지금은 전혀 모르는 사이라고 해도 무방한 어떤 남자. 하긴, 고등학교 시절이라고 해서 그를 더 잘 알았던 것도 아니었다. 그때는 아무것도 몰랐다. 갖고 싶은 게 있다면 손을 뻗어서 거머쥐어야 한다는 걸, A는 어른이 되고서야 배웠다.

“뭐어? 허우대만 멀쩡하지 실속이 없네. 저런 거물이랑 같은 학교를 다녀 놓고선……. 친하게 지냈어야죠.”

“그땐 저도 어렸으니까요.”

그의 음성이 유독 낮고 거칠었으나 창밖에 정신 팔린 최 대리는 이상한 점을 알아채지 못했다.

“밖에 비 오네요. 하씨, 우산 안 갖고 왔는데.”

“그러네요.”

“날씨도 꿀꿀한데 마무리하고 맥주나 한잔하러 가죠? TV에서 바둑 틀어 주는 데로. 같이 보면서 미팅 썰도 듣게.”

“하하, 네. 그러면 지난번에 대리님 넘어지셨던 그 집으로 갈까요?”

“아니……. 거기만 빼고. 우리 이 과장님도 부를게요. 바둑 좋아하시는 것 같더라고.”

“그러세요. 그럼 저 보고서만 빨리 마무리할게요.”

“넹, 이따 봐요.”

최 대리가 자리로 돌아간 뒤, A는 손을 키보드 위에 얹었다. 그러고도 한동안 움직이지 않다가 어느 순간에 이어폰을 집어 들고 천천히 귀에 꽂았다.

“……파죽지세라고 봐야죠? 그야말로 무패 행진. 기풍이 이 정도로 공격적인 기수가 이렇게 성적에 기복이 없기도 쉽지 않은데요. 김석훈 9단이 사전 인터뷰에서 ‘껄끄러운 상대’라고 몸을 사렸을 만하죠?”

“전성기를 한창 달리고 있다 보니 ‘호랑이’ 김석훈 9단도 긴장이 되는 모양이에요.”

“그 누가 두렵지 않겠습니까……. 이명 9단 별명이 ‘떨어지는 빗물’이잖아요? 솔직히 빗물보다는 폭풍우가 어울리지 않나요?”

“연구생 시절에 행마가 예측불허하다고 붙은 별명이라는데……. 요즘 같아선 사람 두개골을 팍! 깨 놓는 우박이라고 불러야겠네요.”

“하하하, 논란의 여지는 있겠지만 중반 전투력은 국내 역대 기사 중 최강급 기력인 것 같아요. 게다가 아직 20대 젊은 기사다 보니 미래가 정말 기대되는데…….”

A는 문득 고개를 들어 창밖을 바라보았다. 짙푸른 남색 하늘을 배경으로 투명한 빗방울들이 유리 위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투둑투둑, 작은 물소리를 내며.

‘어렵다고 느꼈던 건 내가 그 시절에 어려서였을까, 아니면 네가 어려운 사람이라서였을까.’

A는 지금도 그때와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알지 못했다. 사실은 그의 얼굴조차 잘 기억나지 않았다. 등나무 꽃과 천둥 번개, 무표정하다가도 웃으면 분위기가 정반대로 바뀌는 하얀 얼굴, 아스팔트 위에 아지랑이가 피었던 여름과 눈 아닌 비가 내리던 축축한 겨울. 영화의 스틸 컷처럼 단편적인 여러 장면은 안개 낀 거리와 같이 뿌옇고 희미했다.

‘떨어지는 빗물이라…….’

A는 화면에 가득 찬 화질 나쁜 사진보다도 창밖에 내리는 비가 그 시절의 소년과 닮았다고 막연하게 생각했다.

하얀 밴이 기화 호텔 앞에 섰다. 차창에 투둑투둑 부딪히는 빗물을 보며 남자 B는 미소 지었다. 일하러 갈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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