줄곧 반복될 일상
상쾌한 아침이었다.
저혈압인 윤해신으로서는 드물게도 일찍 눈이 떠졌다. 딱히 전날 일찍 자거나 한 건 아니었는데도 간혹 이런 일이 있다.
이유 없이 이르게 일어나, 잠 부족 같은 건 느끼지 못하고 그저 상쾌하니 잘 잤다, 싶은 마음이 드는 드문 날이다.
시계를 보니 일곱 시가 조금 넘어 있었다. 이 시간이면 정상헌은 조깅을 갔거나 혹은 막 들어와 샤워를 하고 있는 참이겠지. 하지만 물소리가 들리지 않는 걸로 봐선 아무래도 전자인 것 같다. 아직 안 돌아온 듯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이불을 단정하게 개어 놓고 방밖으로 나갔다. 역시 겨울은 겨울인지 거실은 싸늘했다. 몸을 움츠리면서 주위를 둘러보자 조금 어질러져 있다.
다른 때라면 눈살을 찌푸리며 이 녀석 오면 당장……하고 중얼거렸을 테지만, 오늘은 유난히 기분 좋게 일어난 날이다.
윤해신은 픽 웃으며 우선 거실 창부터 열었다. 싸늘한 공기가 새어 들어와 목덜미를 선뜩하게 스치고 지났지만 그조차 나쁘지 않았다.
엊그제까지만 해도 영하였는데 오늘은 한층 낫다. 그러고 보니 주말엔 그 녀석이랑 스키장 가기로 했는데, 날씨――는 뭐 비만 안 오면 상관없겠지.
원래부터 그리 운동을 즐기는 편이 아니라서 윤해신이 할 줄 아는 운동이라는 건 그리 많지 않았다. 학교에서 정규 수업에 배운 단체 운동 외에는 기껏해야 수영이나 유도 약간 정도일까. 다른 사내 녀석들이 기본적으로 하는 정도만 그냥저냥 할 뿐이었다. 그래도 건강을 잃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이고는 있지만.
사실은 새벽, 정상헌이 조깅을 나갈 때 같이 나가서 달리는 것도 괜찮겠다고 생각은 하지만 몸이 따라 주질 않았다.
혈압이 낮아 아침이 힘든 탓도 있고, 무엇보다도 정상헌과는 지금 이 상태로 이미 기초 체력이 다르기 때문에 같이 운동을 하는 건 무리가 있다. 차라리 윤해신이 자전거를 타고 정상헌이 달린다면 모르겠지만.
그런 터라, 스키도 이론적으로만 알고 있을 뿐 직접 타 본 적은 없었다. 사람 많은 곳 따위 좋아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꽤 기대를 하고 있었다.
윤해신은 기지개를 켜며 거실 구석에 벗어던진 옷가지들을 집어 들었다.
양말은 따로 빨고, 셔츠에 바지.
이 셔츠는 이 녀석 벌써 나흘은 입었을 텐데 빨지도 않고 계속 입고 다닌다. 담배 냄새도 자욱이 배어 있었다.
세탁기에 집어넣어 둘까.
옷가지를 들고 세탁기 쪽으로 걸으며 확인삼아 옷주머니에 손을 넣었다. 바지주머니에서 나온 건 영문을 알 수 없는 메모가 쓰인 종이쪽지 하나랑 동전 두어 개. 무슨 메모인지 알 수 없으니 일단 서랍장 옆에 놔두고, 동전은 식탁 한쪽에 놓여 있는, 물욕을 일으키는 돼지에게 넣었다(제법 많아 보이는 돈이 들어 있는 반투명 돼지저금통은 볼 때마다 사람에게 알 수 없는 물욕을 일으킨다고 해서 임의적으로 그렇게 부르고 있었다. 뭐 백 원도 큰돈인 어린애들에게야 몰라도 그들로서는 동전만 들어찬 그 돼지가 그렇게까지 물욕을 자극하지는 않았지만 말이다).
셔츠, 셔츠 주머니에는 담배 따위나 들어 있겠지.
아니나 다를까, 반 이상 비어 있는 구겨진 담뱃갑과 성냥갑이 하나 나왔다.
옷들을 세탁기에 넣고 주머니에서 꺼낸 포획물들을 들고 다시 거실로 오며 윤해신은 한숨을 쉬었다.
저놈도 은근히 골초란 말이야. 슬슬 줄이는 것도 좋을 텐데.
그러면서 몇 개비 남지 않은 담뱃갑을 흔들다가 문득 손을 멈추었다.
지금 보니까, 이 성냥갑.
‘XXX 단란주점’.
안을 들여다보자 나란히 붙어 있는 성냥개비가 셋도 미처 떨어지지 않은, 거의 새 거다.
윤해신은 물끄러미 그걸 들여다보다가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았다. 그제야 공기가 조금 추워지는 것 같았다.
손에 든 잡다한 것들을 tv 위에 아무렇게나 올려놓고―그 성냥갑만 손바닥 안에 남겨두고 만지작거리면서―, 윤해신은 열어 두었던 거실 창을 닫았다. 조금 거칠게, 떵, 하고.
그끄제, 늦게 왔다. 랩에서 콘퍼런스가 있다고 그랬다.
그저께, 늦게 왔다. 늦게까지 대학 후배들 대회 연습 도와야 한다고 그랬다.
어제, 늦게 왔다. 친구 놈이 실연으로 망가져서 거기에 가 봐야 한다고 그랬다.
생각해 보니 어제의 원인은, 아주 오래 전 딴 여자 만나러 갈 때 미리 약속해 뒀던 부잣집 마나님에게 써먹었던 거짓말이랑 흡사하다.
그때 문이 열리면서 어제, 그저께, 그끄제 늦게 들어온 장본인이 소매로 땀을 훔치며 들어왔다.
“어, 해신이 일찍 일어났네. 웬일이냐, 네가 이 시간에. ……어, 구석에 있던 옷, 세탁기에 넣었어? 내가 넣으려 그랬는데.”
쾌활하게 웃으며 다가오는 그를 돌아보았다. 손에는 성냥갑을 쥐고 그냥 말끄러미 쳐다보았다.
응? 하는 얼굴로 다가오던 정상헌은, 시선을 조금 떨어뜨리더니 윤해신이 손에 쥐고 있는 자그마한 성냥갑을 보았다. 순간 멈칫, 걸음이 잠시 멈추었다.
여전히 별 표정 없이 바라보고 있는 윤해신의 얼굴을 재빨리 엿보더니 정상헌은 진지한 얼굴로 얼른 말했다.
“안 갔어! 그냥, 성냥이 떨어져서, 친구가 쓰던 거 받은 거야.”
“……누가 뭐래?”
윤해신은 픽 고개를 돌리며 성냥갑을 tv 위에 던졌다.
부엌 쪽으로 걸음을 옮기는 윤해신의 뒤로 정상헌이 사사삭 다가서며 다시 한 번 진지하게 말했다.
“야, 정말이라니까?”
“나, 아무 말 안 했잖아?”
태연한 얼굴로, 오히려 이상하다는 듯 정상헌을 빤히 쳐다보며 한마디 더 하자 그제야 정상헌은 입을 다물었다. 어딘가 머뭇거리는 눈치로.
……찔리는 구석이 있으니 저렇게 눈치를 보지……라고 잠깐 생각을 했지만 굳이 말하진 않았다.
그 아침은 더 이상 상쾌하지 않았다.
“뭐야, 그래서 싸운 거야, 너네?”
카레를 했다는 소리에 반색을 하며 날아 들어온 카레의 왕자님은 숟가락을 까닥거리며 소리 내어 웃었다.
뭘 먹어도 입가는 휴지 한 번 댈 필요 없이 깔끔하게 잘 먹는 김재영은 이번에도 역시 카레 따위는 입매 더럽히지 않고 손쉽게 먹으며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카레가 입가에 묻는다 해도 상당히 봐줄 만한 외모겠지만, 예전부터 이 녀석은 자기는 완벽하게 먹으면서 애인 입가에 묻은 카레를 살그머니 닦아 주는 자상한 연인 역할에 더 걸맞은 놈이었다.
“설마 그럴 리가 있어.”
윤해신은 냉랭하게 중얼거리며 불쾌한 듯 차를 홀짝였다.
언짢은 일이 있으면 요리에의 의욕은 타오르지만, 정작 본인의 식욕은 그리 왕성해지지 못했다. 만드는 걸로 스트레스를 풀고, 맛을 보아 스스로의 솜씨를 확인하면서 만족해 다시 조금 더 스트레스를 푸는 정도다.
지금도 겨우 대여섯 숟갈 먹고 수저를 놓은 윤해신은 작설차만 들이켜며 씁쓸한 얼굴을 했다.
정상헌은 담배 산다고 조금 전에 나갔다.
여느 때라면 김재영이 집에 찾아오기 무섭게 눈을 부라리며 옆에 딱 붙어 앉아 어서 가라는 염파를 보내며 줄곧 노려보고만 있을 건데, 오늘은 불쾌하다는 표정으로 한참 그를 쳐다만 보다가 휙 나가 버렸다. 담배 사러 갔다 올게, 라는 말만 남기고.
저놈도 단단히 심기가 언짢은 거다.
확실히 눈치가 말도 못하게 빠른 김재영이 아니라도 이내 어라, 할 정도로 집안 분위기는 싸늘했다.
그러니까 이게 벌써 나흘째였던가, 닷새째였던가, 하여간 일주일은 안 되었지만 하루이틀은 아닌 정도의 날수가 지난 것 같다.
여전히 식사 때마다 밥과 찬은 식탁 위에 깔끔하게 정렬되었고, 설거지나 청소, 빨래 따위도 제때 되었고, 집안에는 깨어져 나가는 물건 없이 조용한 공기가 감돌고 있었다.
그러나, 싸늘했다.
심지어는 식사 시간, 수저를 놀리며 묵묵히 밥만 먹는 정상헌의 침묵도, 여느 때라면 그 앞에 앉아 신문장을 넘길 윤해신이 몇 걸음 떨어진 거실 바닥에 앉아 신문을 탐독하는 그 자세도.
그런 가운데 김재영은 카레를 먹겠다고 사뿐히 날아들었던 것이다.
분위기가 싸늘하건 냉랭하건 굴하지 않고 김재영은 카레를 맛있게 먹으며 그렇게 소리 내어 웃었다.
“야, 그럼 도대체 왜 싸운 건데? 너네들, 지난주만 해도 같이 스키를 타러 간다 어쩐다 하면서 둘이 잘만 놀더만. 안 갔다 왔어?”
“……갔다 왔어.”
윤해신의 인상이 한층 싸늘해졌다. 김재영은 고개를 기웃하곤 그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며, 흐응, 하며 말했다.
“잘 놀고 와선 왜 둘 다 성질이야? ……거기서 무슨 일 있었냐?”
그러나 거기에 대답을 한 것은 윤해신이 아니었다.
담배를 사러 갔던 정상헌이 어느새 돌아와 현관에서 신발을 벗으며 소리를 쳤다.
“네놈은 남의 일에 뭐 그리 궁금한 게 많아?! 먹었으면 얼른 꺼져!”
그러나 그 말에 역시 대답을 한 건 김재영이 아니었다.
“남의 친구더러 왜 네 멋대로 가라 마라 그래. 맘에 안 들면 네가 나가지?”
조용히, 그러나 냉랭하게 말하는 윤해신을, 거실 쪽까지 들어온 정상헌이 사나운 눈으로 노려보았다. 그러다가 갑자기 버럭 소리를 질렀다.
“그래, 나간다, 말 안 해도 나가! 그러잖아도 친구 놈들과 저녁 약속 있었는데 잘됐네! 어디 잘 놀아 보시지!”
그러곤, 제 방으로 문 쾅 닫고 들어갔다.
숟가락을 물고 멍하니 정상헌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김재영이 천천히 고개를 돌려 윤해신을 쳐다보았다.
“잘도 싸우고 지내네.”
“싸워? 내가 저런 놈과 싸울 군번이냐?”
서슬 퍼렇게 말하는 윤해신을 보며 김재영은 픽 웃기만 했다.
윤해신은 한숨을 내쉬며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그리고 피곤하다는 투로 중얼거린다.
“맞아, 며칠 전에 안내장 받았다.”
“안내장? 무슨?”
“동창회라며, 오늘. 새해 맞아 처음 하는 고교 동창회라고, 나오라고 적어 놨던데.”
“어? 아, 맞아, 그랬었지. 깜빡 잊고 있었는데.”
김재영은 손가락으로 이마를 가볍게 두어 번 치며 웃었다.
“내가 장소 구해줘 놓곤 잊고 있었네. 이런, 요새는 영 머리가 안 돌아간다니까.”
“……장소? 네가 구했어?”
윤해신이 되물었다.
그러나 그리 놀랄 것도 없다.
어차피 일하는 데가 일하는 데인 만큼, 동창회 같은 걸로 모일 만한 괜찮은 가게를 김재영은 여럿 알고 있었다. 그 외에도 동아리 모임이며 망년회며, 모임의 성격에 따라 어울릴 만한 가게는 이놈에게 물어보면 금세 괜찮은 가게가 몇 군데나 줄줄 나왔다.
올해 새로 동창회 간사가 된 놈이 재영이를 수소문해서 알아봤다고 해서 별 이상할 건 없었다.
김재영이 동성애 취향이라는 건 이미 고교 때부터 유명했던 사실이고, 지금 바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도 알 놈은 다 안다. 그래도 이놈은 워낙 처세에 능해서 사람들과 잘 어울려 살았다. 간혹 사람들이 동성애자라는 것에 대해 조롱하거나 비방해도 천연덕스럽게 농담을 하며 웃어넘겨 상대까지 웃으며 어깨를 움츠리게 만드는 게 이놈이었다. 그래서 적어도 윤해신은 아직껏 김재영의 앞에서건 뒤에서건, 누군가 몰래 그의 험담을 했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이 없었다. 인간적으로 정말 사귈 만한 놈이라고 가끔 생각한다. 아주 가끔.
생각해 보면 김재영과 윤해신이 같은 학급에 속했던 적은 없었다. 그런데도 지금은 일단 친하다고 할 수 있다. 아니 사실은, 아직까지 연락하는 몇 안 되는 학창 시절 친구다.
같은 고교 나온 같은 학년 놈들 중에―그리고 위아래 두 학년 플러스해서―이놈 모르는 인간은 없을 거다. 워낙 발도 넓은 놈이라, 이놈을 모르는 인간도, 이놈이 모르는 인간도 그리 흔치는 않을 터였다.
윤해신은 흐응, 하며, 식탁 구석 물욕을 일으키는 돼지 밑에 깔아 두었던 안내장을 끄집어내어 다시 보았다.
찾기 쉽게 그려진 약도가 아니었더라면, 그냥 말로만 설명 듣는 걸로는 절대 찾아갈 수 없을 만한 골목 안에 위치한 주점이었다. 그나마 약도가 간략하면서도 포인트를 잘 잡아서 그려져 있었기에 찾아갈 수 있을 것 같았지만.
“네놈은 참 이상한 구석에 있는 가게를 다 안단 말야.”
감탄조로 중얼거리자, 카레를 씹으며 아, 그거, 하고 김재영이 입을 열었다.
“민재 형님이 가르쳐 준 데야. 나야 어딜 그렇게 다니겠냐. 그 형님이 워낙 구석구석을 다니니까 그쪽 통해 알게 된 거지. 괜찮아, 거기. 싸고 양 많고 맛있고. 삼박자를 골고루 잘 갖춘 보기 드문 가게라니까. 추천할 만해. 동창회 할 정도의 공간도 되고.”
“흐응.”
“근데 갑자기 동창회라니, 너 가게?”
미심쩍은 눈으로 쳐다보며 김재영이 물었다. 윤해신은 물끄러미 안내장을 들여다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을 뿐 대답은 하지 않았다.
그는 사람 많은 곳은 좋아하지 않았다.
장소와 시간을 막론하고, 심지어는 만나는 대상까지 초월해서, 사람 많은 곳은 싫었다.
설령 가족들만 모이는 종친회라고 해도 가기 싫었다. 사람들 십수 명 이상이 버글거리는 곳에 있으면 꼭 자신의 기운을 그대로 빼앗겨 버리는 것 같은 기분마저 들어 금세 피곤해졌다.
당연히 동창회도 마찬가지다. 거의 간 적이 없었다. 여태껏 간 적이라고 해 봐야 손에 꼽을 정도였다. 두 번이었던가.
일단 예의상 참석했던 고교 졸업 후의 첫 동창회.
그리고 그럭저럭 잘 지냈던 친구 한 놈의 결혼 열흘 정도 전, 결혼 축하 겸해서 모였던 동창회에 한 번.
그 외에는 동창회 같은 건 거의 가지 않고, 때로 넷상의 카페에 가거나 혹은 김재영과 그러는 것처럼 간혹 전화를 하거나 만나서 술을 마시거나 하며 지낼 뿐이다.
그러니 김재영이 의외로운 듯 갈 거냐고 묻는 것도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윤해신이 집게손가락을 턱에 대고 생각에 잠겨 있을 때 문득 방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반사적으로 시선을 돌려서 보니 정상헌이 무뚝뚝한 얼굴로 가죽재킷을 입고 방에서 나오고 있었다.
윤해신을 한 번 노려보고, 이어 김재영을 더 사나운 얼굴로 조금 더 오래 노려본 정상헌은 얼음이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나직이 말했다.
“나간다. 오늘 늦을 거야.”
“맘대로.”
“…….”
“나도 나간다.”
“어디.”
눈을 번뜩이며 정상헌이 당장 물어왔다. 윤해신은 안내장을 그의 코앞에 대고 팔랑이며 중얼거렸다.
“동창회.”
정상헌은 안내장을 볼 생각도 않고 윤해신만 쏘아보았다.
“언제 오는데.”
“너도 늦는다며 웬 신경이야. 갈 길이나 가 보시지.”
“――.”
칫, 하고 내뱉은 정상헌은 갑자기 김재영의 멱살을 콱 틀어쥐더니 식탁 앞에서 일으켜 세웠다. 금세라도 한 방 날릴 기세다.
김치를 집어 들고 있던 김재영은 어, 라고 중얼거리며 눈살을 찌푸렸지만, 정상헌의 팔 너머로 김치를 날름 입에 넣어 씹으며 태연한 얼굴로 천연덕스레 그를 빤히 마주보았다.
“얌전히 밥 잘 먹고 있는 애는 왜 건드려.”
이번에도 역시 소리를 친 쪽은 당사자가 아니라 옆에서 보고 있던 윤해신이었다.
그러나 그 말엔 아랑곳 않고 김재영을 질질 끌어 벽에 세차게 밀어붙인 정상헌은 목이라도 조를 듯 코끝까지 얼굴을 가져가서 나직이 무어라 들릴 듯 말 듯 으르렁거렸다.
대답할 생각은 않고 눈만 조금 크게 뜨고 여전히 밥을 씹고 있는 그를 거칠게 팽개치곤 정상헌은 그대로 현관으로 나섰다.
‘나 화났음’이라고 유세라도 하듯이 거세게 문을 닫고 나가 버리는 그의 뒤로 잠시 정적이 흘렀다.
자리에서 일어났던 윤해신은 이맛살을 찌푸리며 한숨을 쉬었다.
“성질머리도 뭣 같기는. ――김재영, 괜찮아?”
“어, 뭐.”
김재영은 뭐가 그리 재미있는지 싱글거리면서 다시 식탁 앞에 와 앉았다. 그리고 한 숟가락 남은 카레를 마저 뜨면서 피식 웃었다.
“예전에 밸런타인 갖고 너네 집 왔을 때에 비하면 이건 양반이지 뭐.”
장난스레 말하면서 어깨를 으쓱하는 그를 보며 윤해신은 쓰게 웃었다.
그게 벌써 몇 달 전인지 모르겠다.
반 년 정도 되었던가, 조금 더 지났던가.
그때 즈음이었다. 정상헌과 본격적인 동거 생활에 들어갔던 게.
아니 뭐, 동거라고 해도 같이 살던 건 이미 그보다 훨씬 전이지만, 가끔―이라기보다는 종종―저놈이 윤해신의 침대로 난입해 들게 된 거나, 그런 그놈을 말리지 않고 윤해신도 묵묵히 받아들여 주게 된 거나, 그런 게 그때 즈음부터다.
그렇게 된 이후 처음으로 김재영이 놀러왔을 때, 사소한 소란이 일었었다.
그전부터 정상헌이나 김재영이나, 서로에 대해 이야기를 듣거나 그런 인간이 있다는 걸 알고 있거나 스치듯이 얼굴 몇 번 본 적은 있었지만, 제대로 맞닥뜨렸던 것은 바로 직전의 어느 사건에서였다.
윤해신이 스스로 넣었던 로터를 몸속에서 꺼내지 못해 김재영의 도움을 받아 꺼내고 있을 때, M.T.에서 돌아올 예정일은 아직도 멀었는데도 갑자기 돌아와 버린 정상헌과 마주쳤던, 그 일이다.
그 이후 다시 제대로 본 게 그때였다. 김재영이 신혼집 선물이라며 밸런타인 17년산을 들고 찾아왔을 때.
하필이면 정상헌은 마침 잠시 집을 비우고 있었고, 윤해신은 홀로 집에서 느긋하게 독서를 하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손님을 맞아 밸런타인에는 좀 어울리지 않았지만 그래도 일단 간단한 카나페를 만들어서 병을 뜯었다. 그리고 사이좋게 막 한 잔씩 걸쳤을 때, 정상헌이 돌아왔다.
돌아와서, 김재영이 거실에 앉아 있는 걸 본 정상헌은 웃는 얼굴로 들어오던 낯을 싹 바꾸었다. 대낮에 집에 돌아왔더니 빈집털이가 웅크리고 있더라는 상황에 직면했더라도 그런 얼굴은 못할 정도로 서슬 퍼런 얼굴을 하고서 김재영에게 성큼성큼 걸어왔다.
손을 흔들며 헬로, 하고 웃어 보이는 김재영의 멱살을 쥐고 잡아 일으킨 그는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는 속담도 들어먹지 않는지, 그대로 뱃속 깊이 주먹을 질러넣었다.
‘너 이 새끼! 여기 또 뭐하러 왔어!’
다짜고짜 욕설을 퍼부으며 눈을 부라리는 정상헌을 말린 것은 윤해신이었다. 말렸다는 말이 옳은지는 모르겠다.
사람 하나 잡을 듯이 펄펄 뛰면서 무작정 패고 목까지 조르고 있는 그를, 보다 못해 윤해신이 뒤에서 팔꿈치로 등 한복판을 후려갈겨 버렸다.
어윽, 하고 몸을 이상한 자세로 틀면서 손아귀에서 조금 힘을 뺀 사이에 얼른 벗어난 김재영이 벌겋게 손자국이 남은 목을 쓰다듬으며 혀를 찼다.
‘야……이놈 자칫하다간 사람 죽이겠다. 너 이런 놈이랑 여태껏 위험해서 어떻게 살았냐?’
‘……지금은 그렇게 위험하진 않아. 사람에 따라서.’
뭐 그런, 얼빠진 대화가 몇 마디 오갔던 듯하다.
왜 자기 없는 사이에 이런 새끼를 집에 들이냐고 펄펄 뛰는 정상헌이나, 그런 와중에서도 싱글거리며 은근히 정상헌의 염장을 질러 대는 김재영이나, 성질 더러운 건 다 거기서 거기인 터라 그날은 골치 좀 아팠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아까운 밸런타인은 다 거실 바닥 위에 쏟아져 흥건히 고여 있었고 글라스는 구석 어디론가 굴러가 버렸었다.
죽이네 살리네, 저놈 두 번 다시 집에 들이지 말라는 둥 남의 친구한테 무슨 간섭이냐는 둥 한바탕 난리를 친 끝에 결국 넉살좋은 김재영은 그 후로도 집에 가끔 찾아오며 정상헌을 보면 웃으면서 인사까지 해 보였고, 정상헌은 그가 올 때마다 오만상을 찌푸리며 눈을 사납게 치켜떴지만 주먹까지 쓰지는 않고 늘 얼른 돌아가 버리라는 무언의 압력을 넣곤 했다.
그렇게 몇 달이나 되는 시간이 흐른 끝에 오늘에 이르렀다.
오늘도 역시나 김재영에게 고운 시선 한 번 주지 않고 얼른 가, 얼른 가, 하고 염파라도 보내는 듯 노려보고 있던 정상헌이었지만, 결국은 저렇게 성질을 부리고 집에서 나가 버렸던 것이다.
김재영은 빈 카레 접시를 개수대에 담그고 정수기에서 물을 받아 마시며 실실 웃었다.
“근데, 왜 싸운 건데?”
“……저 녀석은 좀 지나치게 무신경한 데가 있어.”
잠시 침묵하다가 불쑥 중얼거리는 윤해신의 말에 김재영은 물컵을 비우고는 아――하곤 대답했다.
“확실히 해신이 네 신경에 비하면 저놈이 좀 무뎌 보이긴 한다.”
“굳이 나에 비하지 않아도, 일반적 기준에서 그래.”
“그러냐? 나야 저놈이랑 안 살아 봤으니 모르지.”
어깨를 으쓱하며 돌아선 김재영은 픽 웃으며 그래서, 라고 물었다.
“저놈이야 네가 기분 상해 하니까 저도 덩달아 삐졌을 가능성이 50% 이상일 테고, 넌 또 뭔 말을 들었기에 그렇게 골이 났어, 윤해신?”
“――동창회, 넌 안 가?”
김재영의 말엔 대답 않고 윤해신은 엉뚱한 걸 물었다.
김재영은 웃음서린 눈으로 잠시 윤해신을 바라보다가 글쎄, 라고 잠시 천장을 쳐다보았다.
“하긴 너, 싸우고 혼자 집에 있어 봐야 기분도 울적할 테니 가 보는 것도 좋겠다, 오랜만에. 글쎄 나는……오늘 기분도 그렇고 해서 안 갈까 했는데, 네가 간다면 그냥 같이 가 볼까. 어차피 저녁엔 일도 없고. 사실은 나도 아침부터 싸우고 나온 참이니 기분도 그렇고.”
“……싸워? 누구랑.”
윤해신은 의아하게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
물론 김재영이라고 싸움을 하지 말란 법은 없지만, 이놈은 어지간해선 싸우는 놈이 아니었다. 상대가 다소 거칠게 나오더라도 적당적당히 웃으면서 넘어가는 걸 선호하는 쪽이다.
“내 고용주.”
“……하아. 한 달에 베이비시터에게 돈 천을 쓴다는 그 부유층?”
“돈 천이라 해 봐야 내 손에 들어오는 거 아냐. 몇십억 대의 빚이나 차곡차곡 깎여 갈 뿐이지.”
“어쨌건.”
잘한다, 고용주랑 싸움이나 하고, 라고 중얼거리며 윤해신은 일어나 반찬을 냉장고에 집어넣었다.
그래, 오늘은 밖에 나가서 술이나 마시고 오자.
동창회 같은 건 바로 어제까지만 해도 갈 생각 없었다. 안내장을 받았을 때에도, 이건 종이 쓰레기로 분류해야겠군, 하고 생각했을 뿐이다.
하지만 가슴이 울컥하고 속이 답답하니, 사람 많은 자리에 가서 술이라도 마시고 풀어 보는 것도 나름대로 한 방편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나 잠깐 다른 데 좀 들렀다 갈게. 나중에 그 가게에서 보자.”
오후로 넘어선 시각을 가리키는 시계를 본 김재영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늘 소소하게 바쁜 녀석이라 알았어, 하고 대답하려니, 그가 갑자기 싱긋 웃으면서 손을 내밀었다. 윤해신은 그 빈손을 의아하게 바라보며 뭐, 라고 하는 눈으로 쳐다보았다.
“카레 좀 싸 주라. 우리 꼬마 아가씨가 카레 좋아하거든. 가서 얼른 저녁 먹이고 나갈게.”
“뭐야, 무슨 볼일인가 했더니, 베이비시터 씨, 애 보러 가는 거냐?”
“글쎄……베이비시터라고 해도 매일 가는 것도 아니고, 오늘은 가는 날도 아냐. 그냥 카레 보니까 생각난 것뿐이지. 말도 못하면서 카레만 보면 눈을 반짝이는 게 되게 좋아하는 모양이더라.”
“말을 못해? 대여섯 살 됐다며?”
찬장을 뒤적여 밀봉 용기를 꺼내며 윤해신이 미심쩍게 김재영을 쳐다보았다. 분명 예전에 그렇게 들은 것 같은데. 다섯 살이라던가 여섯 살이라던가.
김재영은 윤해신이 용기에 카레를 담는 걸 보면서 닭고기랑 호박 많이 넣어 줘, 라고 참견을 하면서 아아, 하고 덧붙인다.
“거의 못해, 말. 실어증이랑 자폐증을 조금 섞어 놓은 것 같은 상태라서 말이지. 심하지는 않지만.”
“……넌 꼭 일을 맡아도 이상한 일만 떠맡더라.”
“왜. 그래도 얼마나 이쁜데, 우리 아가씨.”
“머슴을 해라, 머슴을 해.”
그러자 김재영은 아하하, 하고 소리 내어 웃었다.
“정말 이뻐. 저네 아빠랑은 딴판이야. 담에 보여 줄게.”
“키워서 잡아먹으려고?”
“으응――.”
어쩐지 조금 곤란한 얼굴을 하고 그냥 웃기만 했다.
그러다가 카레를 담고서 비닐 팩으로 두 겹으로 싼 밀봉용기를 받아들곤, 김재영은 땡큐, 라고 하며 웃옷을 챙겨 입었다.
“혹시 가게 못 찾겠거든 전화하고.”
“아아. 애 잘 보고 와라.”
“응, 나중에 보자.”
김재영은 살짝 손을 흔들어 보이곤 가벼운 걸음으로 막 나가려다가 멈칫 발을 멈추었다. 뒤에서 배웅한다고 지켜보고 있던 윤해신에게로 빙글 돌아서며 웃었다.
“야, 그래도 저놈 말이야, 싸워도 귀여운걸. 아까 하는 말이, 너 건드리면 죽여 버리겠다더라. 근데, 그래놓고 휭하니 나가는 심보는 또 뭐냐. 아하하하, 재미있는 녀석을 건졌어, 윤해신.”
윤해신은 한쪽 눈썹만 약간 치켜올렸다.
약간 쑥스럽거나 민망할 때 하는 버릇이라는 걸 알고 있는 김재영은 픽 웃으면서 칼로 물 베어 봐라, 라고 중얼거리곤 나가 버렸다.
팔짱을 낀 채 현관 앞에 서 있던 윤해신은 문이 닫히자 한숨을 쉬며 문을 잠그고 들어왔다.
그러나 문득, 슬슬 부아가 치밀어올랐다.
건드리면 죽여 버려……? 뚫린 입이라고 말은 잘 한다.
노려볼 대상도 없는데 눈을 세모꼴로 뜨고 애꿎은 집안만 노려보다가 윤해신은 언짢은 한숨을 쉬며 소파에 푹 파묻혔다.
사실 싸움이란 게 으레 그렇지만 발단은 아주 사소하다.
같이 살다 보면 설거지나 청소를 안 했다고 싸우는 건 그나마 제대로 된 이유가 있는 거다. 사소한 치약 하나를 두고 싸우게 되는 경우도 있고, 심지어는 나는 치약을 아래에서부터 차곡차곡 짜서 쓰는데 왜 너는 중간부터 그냥 짜 쓰냐는 것으로 싸울 때도 있다(그 정도까지 가면 한동안 조용히 갈라서 사는 걸 권장한다).
윤해신이 정상헌과 삐걱이게 된 건 그런 종류의 일은 아니었지만, 그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사소하다면 사소할 수 있었다.
가끔은 스스로가 바보 같아질 때가 있다.
분명 예전엔 안 그랬는데, 그놈과 만나기 전에 집에서 홀로 유유자적 살아갈 때에는 나름대로 이지적이고 냉철하다는 소리도 들으면서 이성적인 인간으로서의 합리적인 길을 걸었었는데, 저놈과 살면서부터는 생활이 영 흐트러져 버렸다.
남의 말 한마디, 행동 하나에 휘둘려 버리기까지 하는 자신이 때로는 믿어지지 않았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저놈의 페이스에 말려들어 있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는 길게 한숨을 쉬곤 일어섰다.
따끈한 물에 몸을 담가 좀 안정한 다음에 천천히 나가 봐야겠다. 어쩌면 욕실에서 나올 때 즈음엔 나가는 게 몹시도 귀찮아져 있을지도 모르지만, 이왕 나가겠다고 재영이에게도 저놈에게도 말을 한 바니, 나가 볼 수밖에.
* * *
정상헌은 무척이나 즐거운 모양이었다.
고글이며 장갑, 아, 모자는 어딨더라, 라고 중얼거리며 부산스레 집안을 돌아다니는 그에게 시선을 돌려, 거실에 앉아 뉴스를 보고 있던 윤해신은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좋아?’
‘응? 뭐가?’
‘아니, 굉장히 즐거운 것 같아서.’
‘아아, 너랑 1박 2일로 놀러가는 거, 처음이잖아?’
정상헌이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벌써 오랫동안 익숙하게 봐 온 얼굴인데도 그렇게 정면으로 만면 가득 웃어 주는 게 새삼스럽게 느껴져, 윤해신은 어깨를 움츠리며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겨울철에 접어들자마자 정상헌은 스키 타러 가고 싶다고 노래를 불러 댔다. 뭐 윤해신을 졸랐다기보다는 그저 혼잣말에 가까운 것이었지만, 그것도 여섯 번째나 들을 무렵엔 그냥 들어넘기기도 지겨워졌다.
허벅지를 베고 누워 느긋하게 쉬고 있는 정상헌을 지그시 내려다보다가 별 뜻 없이 그럼 갔다 오지, 라고 했더니 그의 얼굴이 확 밝아졌다.
늘상 뒹굴거리며 게으름을 곧잘 부리는 놈이라도 좋아하는 걸 할 때만은 부지런해, 정상헌도 그럼 갈래? 라고 하고는 재빨리 스키장을 알아보고 숙소 예약을 하는 등 일사천리로 준비에 착수했다.
사실은 윤해신으로서는 너 혼자 갔다 와, 라는 의미였지만 주어를 빼고 말한 탓에 정상헌은 완전히 둘이 같이 간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윤해신이 어, 어, 하는 사이에 이미 숙소도 2인실을 잡고, 리조트 이용권이나 리프트권 예매도 그렇게 해 버렸다.
……뭐, 상관없지만.
윤해신은 인도어(in-door)파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나가는 걸 싫어하거나 귀찮아하는 건 아니었다. 정확히 말해 사람이 많은 거리를 걷는 걸 싫어하는 거다. 운동도, 늘상 할 정도로 즐기는 건 아니지만 간단하게 몸을 움직이며 할 수 있는 유희는 좋아했다.
단 문제는 그가 스키를 탈 수 없었다는 데에 있다.
스포츠 경기나 책자 같은 걸 읽으면서 대충 어떤 식의 구조로 돌아가는지는 알고 있었지만 직접 스키를 탄 적은 없었다. 스키장에도 간 적 없다.
예약, 예약, 하며 곳곳에 전화를 하고 컴퓨터를 점거한 녀석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윤해신이 불쑥 그 말을 하자 정상헌은 놀란 얼굴을 했다.
‘어? 스키 못 타?’
‘응. 그러니까 너――.’
……혼자 갔다 와, 라고 하려고 했다.
그러나 윤해신을 멍하니 바라보던 정상헌은 천천히 입가에 웃음을 띠었다. 아주 흐뭇하게.
사람이 스키 못 탄다는데 왜 저리 좋아하나 싶어 약간 눈살을 찌푸리고 그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정상헌은 문득 윤해신의 목 뒷덜미를 잡고 끌어당겼다. 그리고 뽁, 소리 나게 이마에 입을 맞추며 다정하게 말한다.
‘내가 가르쳐 줄게. 나 제법 타거든. 뭐야, 말을 하지 그랬어. 그럼 더 빨리 갔을 텐데.’
‘…….’
윤해신은 좀 머쓱한 얼굴을 하고 말없이 손등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정상헌은 픽 웃으면서 스키 교본이 어디 있었을 건데, 라며 일어섰다.
요즘 들어 저놈이 좀 많이 뻔뻔해졌다. 아니, 넉살이 좋아졌다고 해야 할까.
이런 식으로 기습적으로 사람을 건드려 놓고 은근히 반응을 훔쳐보며 기뻐하는 음흉함이 더 늘었다고 하는 게 옳을지도 모르겠다.
심술맞게, 나 안 가, 라고도 해 볼까 싶었지만, 서로 날짜가 언제 비는지를 열심히 맞춰서 예약을 잡고 저렇게 즐겁게 준비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려니 그런 심술을 부릴 마음도 사라졌다.
확실히, 느긋하고 부드러운 심정을 가지고 같이 살게 되면서 느낀 거지만, 정상헌은 같이 살 인간으로는 썩 괜찮았다.
쓸데없는 행패나 심술을 부리지 않으면 더없이 유쾌하고 매력적이다. 눈꺼풀에 낀 콩깍지의 위력인지는 알 수 없어도 지금은 저 녀석에게 막대한 돈을 들이부으면서 만나고 다니던 여자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스키장에 가기로 한 전날이 되어 눈을 빛내며 장비들을 준비하면서 스키스키거리는 녀석을 보며 윤해신은 푹 웃고 말았다.
꼭 여행을 앞두고 눈을 반짝이는 꼬마애 같다.
하기는 생각해 보면 정상헌은 이런 식으로 가족―이라고 할 수 있을지 아직 다소 의문점이 남아 있었지만―여행을 간 적은 거의 없었을 거다. 그래서 더욱 즐거워하는 건지도.
어렸을 적의 활기차고 잘 까부는 모습이 지금 그의 모습 위로 비쳐 윤해신은 연신 웃었다.
귀여운 놈.
가끔 밉살스러운 짓도 하지만 그가 보기엔 귀여운 면 쪽이 더 컸다. 자기보다 15센티는 더 크고 몸무게도 그만큼은 더 나가는, 객관적인 관점에서 볼 때 우락부락하고 험상궂은 인상의 남자를 보고 귀엽다니, 역시 콩깍지의 위력이다.
그러나 물론 윤해신은 정상헌 역시 그를 바라보면서, 스키도 아직 못 타다니 스키장에서 눈발 속에 몇 번이나 구르면서 울 것 같은 얼굴을 하면 얼마나 귀여울까, 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건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윤해신이 저도 모르게 웃음 띤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적당히 장비를 다 챙긴 모양인지 방문 앞에 짐꾸러미를 하나 내어놓고 도로 거실로 돌아오던 정상헌이 윤해신에게 시선을 주었다. 눈이 마주치자 금세 그의 얼굴에도 웃음기가 번진다.
‘벌써 아홉 시 넘었어. 얼른 자자, 자. 내일 아침 일찍 출발해야 하니까 잠도 일찌감치 자 둬야지.’
그렇게 재촉하며 윤해신의 겨드랑이 아래로 손을 넣어 가볍게 일으킨 정상헌은, 으쌰, 하고 그대로 그를 들어올려 방으로 옮겼다.
번번이 생각하지만 정말로 기운도 좋은 놈이다. 완력이 좋다고 하는 게 옳을지도 모르지만.
한숨을 쉬며 그의 목에 두른 팔에 턱을 괴고 있으려니 살짝 침대가 등에 와 닿았다.
침대에 고이 눕혀 주고 이불도 잘 덮어 주고서야 허리를 펴는 정상헌을 보며, 윤해신은 약간 눈웃음을 지었다. 저렇게 기분 좋아하는 정상헌을 보고 있자니 윤해신도 기분이 좋아진 탓이다.
‘잘 자.’
웃으며 그렇게 속삭였지만, 문득 조금 묘한 얼굴을 하고 윤해신을 내려다보고 있던 정상헌은 잠시 후 낮게 중얼거렸다.
‘역시……같이 자자.’
‘아?’
‘겨울엔 역시 춥거든.’
그대로 이불 덮어 주고 방에서 나가 주는가 싶었더니, 정상헌은 덮어 줬던 이불을 걷어 버리고 냉큼 윤해신의 옆자리로 들어갔다. 남자 둘이 자기에 그리 넉넉하다고는 할 수 없는 침대가 금세 꽉 차 버렸다.
옆으로 돌아누워 윤해신을 폭 끌어안고 그의 이마에 턱을 부비는 정상헌이 팔로 허리를 단단하게 감아왔다.
윤해신은 잠시 침묵하고 있다가 조용히 한마디 했다.
‘수염 깎어. 따가워.’
‘……. 땀냄새만 싫어하는 줄 알았더니.’
‘따가운 것도 싫은 게 당연하잖아. 맨피부에 까끌하게 닿으면 쓰리다구.’
게다가 네놈이 손등이나 팔처럼, 그나마 피부가 단단한 곳에만 대고 입을 갖다 대는 게 아니잖아, 대부분은 약 바르기도 민망할 정도로 살이 연한 곳에만 대고 부비는 주제에.
――라는 말은 물론 못했다.
그러나 정상헌은 낮은 웃음소리를 내면서 윤해신을 끌어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리고 고개를 기울여 뺨을 날름 핥는다. 저도 모르게 어깨를 움츠리는 윤해신에게 낮게 소리 내어 웃으며 속삭였다.
‘야한 생각을 하면 털이 빨리 자란다고 그러더라.’
‘낭설이야.’
‘아냐, 맞는 것 같아. 너랑 있으면서, 수염이 더 빨리 자라기 시작했거든.’
‘……엉뚱한 생각 좀 하지 말고, 매일 깎어!’
알았어 알았어, 라고 중얼거리면서도 정상헌의 손은 슬슬 옷 속으로 파고 들어왔다.
찰싹 들러붙어 있으면서도 옷을 벗겨내는 건 혀를 내두를 정도로 능숙하다. 꼭 뱀이 허물 벗는 것 같다.
제길, 이 녀석 벌써 섰잖아.
입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이미 윤해신의 몸에 대해 구석구석 훤하게 꿰뚫고 있는 손가락이 민감한 곳만 골라서 꼬집고 문질러 대는 통에 윤해신도 슬슬 몸이 달아오르기 시작한 건 마찬가지였다.
‘해도, 되지?’
가끔 이놈 음흉하다고 생각하는 건, 애초에 시작하기 전에 물어보는 법이 없다. 이런 식으로 사람을 반쯤 흥분시켜 놓은 다음에야 은근슬쩍 묻는다. 그리고 나중에 그러는 거다, 네 동의 없이 억지로 한 적은 없어, 라고.
뭐 그 말에 틀린 거야 없다. 늘 윤해신은 이 영악한 놈, 하고 중얼거리면서도 결국은 녀석의 목에 팔을 감고 녀석의 허리에 다리를 감았다. 싫다는 걸 강제로 한 적은 없었다. 싫다는 상황이 못 되게 만들어 버린 다음에 물어보는 게 얄미울 뿐.
윤해신은 이번에도 혀를 차며, 꼭 이렇게 해 놓곤 물어보지? 라고 중얼거리곤 녀석의 목덜미를 세게 깨물었다.
‘내일 일찍 가서 하루 종일 움직여야 하니까, 적당히 해.’
물린 목이 아픈지 아, 하고 낮게 신음 소리를 내면서도 정상헌은 기쁜 듯 웃었다. 그 웃는 얼굴이 괜히 얄미워 반대쪽 목덜미도 더 세게 깨문다.
‘야, 정말 아퍼…….’
‘홍두깨 백 번이랑, 뭐가 더 아프겠어.’
‘……. 음……미안하다.’
정상헌은 식은땀을 한 방울 또로록 흘리면서 그렇게 대답하곤 픽 웃으며 윤해신을 타고 올랐다.
순서대로 입술이 움직였다.
입술에서부터 시작해서 얼굴 전체에 퍼붓는 입맞춤 후에, 애무하듯 천천히 혀로 덧그리며 내려와 더듬는 귓불, 목덜미, 쇄골, 겨드랑이에서 가슴, 허리께.
마치 그의 입술이 심지가 되어, 닿는 곳마다 몸 전체로 번져 불이 붙는 것 같다.
화끈거리며 타오르는 뜨거운 장작이 아랫도리로 모이는 데에는 그리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허벅지 안쪽을 부벼오는 뜨끈한 살덩이가 단단하게 굳는다.
‘역시……몸은 계속 변해 가는 거야.’
갑자기 정상헌이 뜬금없는 소리를 중얼거려, 윤해신은 신음이 새어나오는 입술을 악물며 무슨 소리냐는 듯 그에게로 시선을 떨어뜨렸다. 동시에 정상헌의 입술이 그의 가슴 근처를 덮었다.
‘너 젖꼭지, 예전보다 더 색깔도 진해지고 크기도……아! 아퍼!’
당연히 아플 테지, 머리카락을 한 움큼 쥐어뜯겼으니.
윤해신은 휙 고개를 돌려 버렸다.
정상헌은 낮게 소리 내어 웃으며 쇳소리가 섞여 나오는 거친 숨결과 함께 조금 원망스러운 듯 속삭였다.
‘칭찬이야, 너 요염해졌다는 거라……윽! 야, 아프다니까!’
이번에는 목덜미를 쥐어뜯어 버렸다. 아마 붉은 자욱이 생겨 며칠은 없어지지 않을 거다.
‘세상에 요염하다는 말 듣고 좋아할 사내놈이 어딨어.’
‘왜, 난 좋던데. 섹시하다는 소리 들으면 뿌듯해진다구.’
웃으면서 그렇게 말한 정상헌은 윤해신의 다리 아래로 손을 넣어 약간 힘을 주었다.
‘……다리 좀 벌려 봐, ……그래, 그렇게.’
다리 사이로 들어가 자리를 잡은 정상헌은 윤해신의 한쪽 다리를 어깨에 걸치고 몸을 굽혔다.
엉덩이 사이로 살짝살짝 닿아 오던 질량감이, 가슴끼리 맞닿을 정도로 몸을 굽혔을 때, 몸을 가르고 들어왔다.
반사적으로 나오는 헛숨을 들이켜며 윤해신은 눈살을 찌푸렸다. 코로는 숨을 쉴 수가 없어 입으로 밭은 숨만 몇 번이고 내뱉었다. 이럴 때면 마치 짐승이라도 된 것 같아 머리가 멍해졌다.
질척이는 살덩이가 속살을 후비고 파고드는 이 오싹한 감각은 수없이 거듭해도 영 익숙해지지가 않아 할 때마다 등줄기가 오싹했다.
‘으……, 흐으, 너, ……정말, 죽여준다……, 우와, 눈앞에서, 불꽃이 튀는 것 같…….’
탄성과도 닮은 정상헌의 목소리가 드문드문 윤해신의 귓속을 파고들었다. 어디까지 파고드는 건지, 끝 모르고 몸속으로 밀고 들어오는 물건이 윤해신을 부둥켜안고 그의 입속을 탐해 오는 정상헌 본인만큼이나 뜨거워서, 절로 숨결이 거칠고 급해졌다.
늘 그렇다.
벌써 이렇게 된 지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는데도―적게 잡아 하루에 한 번씩만 했다고 쳐도 벌써 200회는 가뿐히 넘어선다―, 막판에 가서는 도무지 여유가 없어졌다. 급박하고 초조하고, 이성이 우주 저편까지 날아가 버릴 듯 희미해져서, 서로에게 매달리듯 엉기게 된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서도 꼭 잊지 않는 건.
‘윤해신, ……사랑한다, ……응?’
재촉하듯 되물어보며 허리를 찔러올리는 정상헌에게, 윤해신은 밭은 숨을 내쉬며 숨고르기에만도 급급한 호흡을 가다듬으려 안간힘을 쓰며, 한마디 한마디 말하는 것이다.
‘나, 도. ……사, 랑……,’
얼른 말해야 한다.
자칫 말을 못하거나 좀 늦어 버리거나 하면, 이놈 삐진 척하고 밤새도록 사람을 괴롭혀 댄다.
이번에도 윤해신은 다급하게 어서 말문을 열었지만, 허덕이면서 간신히 마지막 글자까지 말했을 때에는 아무래도 타임오버였던 모양이었다.
‘사람……많구나.’
스키장에 도착한 후 처음 입을 연 윤해신이 한 말은 그거였다.
지지난 주부터 약속했었던 대로, 서로 여유 시간이 맞는 주말을 비워 1박 2일로 찾은 스키장에는 확실히 사람이 많았다. 주차장에도 차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고 사람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이 한 방향을 향해 걷고 있었다. 개중에는 이미 부츠를 플레이트에 장착하고 뒤뚱뒤뚱 걷는 사람들도 여럿 있어, 색색깔의 펭귄 행렬이라도 보는 것 같았다.
새벽같이 차를 몰아 떠나와 도착한 것도 그리 늦은 시간은 아니었는데도, 어찌나 부지런한 사람들이 많은지 이미 스키장은 거의 만원 사례였다.
고글을 목에 걸고 장갑을 끼면서 정상헌은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괜찮아, 괜찮아. 저 중 3분의 2 이상은 다 초보자 코스에서 놀걸.’
‘……이봐, 그게 나잖아.’
엇, 그랬었지, 하는 표정을 하면서 정상헌이 머리를 긁적였다.
어쨌거나 그는 아침부터 기분이 좋았다. 운전을 하는 도중에도 노래를 흥얼거리며 끊임없이 말을 걸었다. 오랜만에 스키를 타러 간다고 하니 꽤나 기대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러나 윤해신은 어느 쪽이냐면 정상헌만큼 고기압은 아니었다.
일단 몸이 편안해야 정신도 즐거울 여유가 있는 법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윤해신은 몸 상태가 그리 좋은 편이 아니었고, 그 원인은 순전히―라고만 할 수는 없지만―정상헌에게 있었다.
차문을 열며, 안 내려? 라는 눈으로 윤해신을 바라보는 정상헌에게 조용하고 싸늘한 시선을 돌려주자, 정상헌은 조금 머쓱한 듯 머리를 긁적이다가 픽 웃었다.
‘저기까지, 안고 갈까?’
‘걸을 수 있어.’
그렇게 해 대고 저놈은 멀쩡하다니, 좀 억울하다. 적어도 나른하다거나 피곤하다는 기색을 보여야 될 것 아냐, 이 짐승아.
내심 투덜거리면서 차에서 내렸다. 눈이 내리고 있었지만 바람이 불지 않고 건조한 편이라 그렇게 춥지는 않았다.
‘이 리조트는 눈의 질이 좋다고 평판이 났다구.’
‘눈의 질?’
리조트 본관 쪽으로 걸어가다가 문득 정상헌이 웃으며 말했다. 윤해신은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반문했다.
그야 동계 올림픽 같은 것의 장소를 신중하게 고르는 것도 있고, 물론 겨울 스포츠를 즐기기에 좋은 곳이 있고 그렇지 못한 곳이 있겠지만.
묵묵히 답을 기다리는 윤해신의 앞에서 몸을 웅크려 길옆에 쌓여 있는 눈을 한 움큼 집어든 정상헌은 그것을 꼭 쥐었다가 펴 보였다. 뭉쳐지지 않고 부슬부슬한 눈이 주먹 안에 남았다.
‘습기가 없어서 잘 뭉쳐지지 않을수록 좋은 눈. K리조트 같은 곳은 눈이 안 좋아.’
‘하아.’
윤해신은 고개를 끄덕이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꽤나 고지에 위치해 있는 이 리조트는 말마따나 인기가 있을 법했다.
윤해신이야 눈의 질이 어떻건 알 바 아니었지만, 리조트에서 20분 정도 나간 길목에 작은 온천장이 있다는 건 꽤 맘에 들었다. 나중에 밤에 몸이 뻐근해지면 온천에라도 가서 몸을 풀면 딱 좋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사람들이 우르르 모인 리조트 안에 발을 들여놓았다.
사람은 정말 많았다. 주차장에서 보던 것보다 몇 배는 되어 보이는 사람이 우글거리는 걸 보고 윤해신은 약간 눈살을 찌푸렸다.
‘이렇게 사람이 많아서야 제대로 탈 수나 있겠어?’
‘괜찮대두.’
정상헌은 어깨를 으쓱하면서 웃어 보였다.
그러나 도대체 그 ‘괜찮다’의 기준이 어딘지 알 수 없어 고개를 갸웃하면서 장비를 빌리러 갔다.
사람이 많은 만큼 건물 안도 복잡했지만 그래도 생각보다 시간이 오래 걸리지는 않았다. 사람들 북적거리는 걸로 봐선 한 열댓 시간은 기다려야 하는 게 아닐까 싶었지만 그렇지는 않았다.
정상헌이 골라 주는 대로 적당한 길이의 플레이트와 적당한 부츠, 폴 등을 빌려 나왔을 때에는 점심때가 되기 조금 전이었다.
‘흐음.’
플레이트에 부츠를 장착시킨 채 몇 걸음 발을 디뎌보고 윤해신은 그렇게 중얼거렸다.
제법 재미있을 것 같았다.
발밑이 불안정하긴 하지만 새로운 스포츠에 임하는 데에 두려워하고 움츠러드는 성격은 아니었다.
‘기본은 말이지, 八자야, 八자. V자로 벌리면 안 돼.’
차타고 오는 동안 내도록 말했던 걸 다시 한 번 되새기며 정상헌은 윤해신을 데리고 설원 쪽으로 나갔다.
이것도 나름대로 요령이 있어야 움직이기 쉽겠는걸, 하고 생각하면서도 아직 그 요령이 제대로 잡히지 않아 어색하게 아장거리며 윤해신은 열심히 그의 뒤를 쫓았다.
정상헌이 내심 귀엽다고 손뼉을 치며 웃고 있는 건 모른 채, 진지한 얼굴을 하고서.
윤해신은 몰랐다.
아니, 알고는 있었지만 미처 머릿속에 떠올리지 못하고 있었다.
자기가 잘한다고 해서 남한테도 그걸 잘 가르칠 수 있는 건 아니다. 서투른 사람이라 해도 얼마든지 남이 잘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 줄 수 있는 법이고, 능숙한 사람이라 해도 남에게 뭘 가르쳐주는 건 쥐약인 인간이 있다.
유감스럽게도 정상헌은 후자였다.
아니, 어쩌면 전자인지도 몰랐지만 어쨌건 윤해신이 보기에는 절대적으로 후자였다.
원래 스키는 높은 데에서 천천히 내려오면서 배우는 법이라고, 스키 부츠도 처음 신어 본 인간을 끌고 리프트를 타고 400m 위까지 올라갔을 때부터 그걸 알아차렸어야 했다(물론 그게 가장 효율적인 방법이긴 했지만, 심리적인 부담감과 거부감은 상당했다).
리프트에서 내리면서도 미끌, 하고 넘어질 뻔한 것을 옆에서 정상헌이 붙잡아 줘서 겨우 안 넘어질 수 있었다.
‘자, 가 볼까.’
싱긋 웃으며 전면의 사면을 가리켜 보이는 정상헌의 얼굴을 폴로 후려갈겨 버리고 싶다고, 윤해신은 잠깐이지만 진심으로 생각했다.
아무리 초보자용 400m, 경사도도 완만한 언덕 위라고는 해도, 무조건 다리를 八자로 벌려서 발 안쪽에 힘을 주라고 하면서, 자, 내려가 봐, 라고 해서야 될 리가 없다.
‘영 안 되겠다 싶으면 그냥 눈 위에 굴러 버려.’
여전히 웃는 얼굴로 자, 어서 가봐, 어서, 라고 하는 정상헌을 흘긋 노려본 윤해신은 경사 위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아래에서 보던 때보다 경사가 훨씬 더 가파르게 보인다거나 하는 건 아니지만, 뭐 여차하면 정말로 말마따나 굴러 버리면 멈출 수 있겠지만, 사람들이 좀 많다. 피할 수 없을 것 같은데 부딪히면 어쩌나.
나 다치는 것도 싫지만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이 다쳐서 거기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하는 사태가 더 싫다, 라고 생각하면서 윤해신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정상헌이 등을 쳤다.
‘엉덩이 내밀지 말고.’
그리고 동시에 윤해신은 스스슥 밀려 내려가기 시작했다. 조금 안색이 굳었다.
그걸 의도하고 친 건지 아닌지는 몰라도 뒤에서 정상헌이 소리치는 게 들렸다.
‘어, 야! 八자! 八!! 안쪽 다리에 힘주고, 플레이트 세워!’
……라고 말해 봐야!
점점 가속이 붙기 시작했다.
윤해신은 입속으로 욕설을 투덜거리며 들은 대로 대충 해 봤지만, 역시 요령이란 게 없는 탓인지 혹은 자세가 잘못된 탓인지 속도는 줄어들 기미가 안 보였다. 무서운 기세로 속도는 붙고, 전방에 다가오는 사람의 그림자.
그냥 굴러 버렸다.
‘꺄아아악!!’
‘으……――!!’
입 밖으로 내지르려던 비명을 삼켜 버리고, 눈 딱 감고 그냥 굴렀다.
눈이란 게 생각보다 폭신해 별로 아프진 않았다. 아픔을 느낄 겨를이 없었다고 하는 게 옳을지도 모르겠다.
윤해신은 눈살을 찌푸리며 일어나 앉았다. 반대쪽에 사람이 하나, 다행히 부딪히지는 않은 듯 조금 떨어진 곳에 서서 이쪽을 보고 있었다.
‘괜찮으세요?’
조심스레 묻는 그 사람에게 고개를 끄덕이고 옷 같은 데에 묻은 눈을 털어내는데, 싸악―하고 기분 좋은 소리를 내며 한 사람이 옆에 흘러와 섰다.
‘바보야, 말했잖아, 八자, 안쪽다리에 힘주라고! 그걸 그냥 미끄러져 가냐, 그래.’
‘너, ……밀었겠다……? 아무것도 모르는 인간을 그렇게 마구잡이로 미는 놈이 어딨어?!’
제대로 가르쳐주지도 않은 주제에 바보라고 부르는 밉살스런 놈에게 버럭 소리를 지르자, 그 밉살스런 놈은 적반하장이라고 오히려 눈살을 찌푸리며 혀를 찼다.
‘그러니까 말했잖아, 봐, 다리를 이렇게 벌리고, 여기에 힘을 주고, 자세는 이렇게.’
그렇게 말하며 본인이 시범이라도 보여 주듯 2, 3미터 정도 천천히 일직선으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윤해신은 혀를 차곤 일어났다. 아니,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어.’
순간 당황했다. 부츠를 신은 탓에 발목을 굽힐 수 없어, 일어설 수가 없었다.
당황한 표정으로 윤해신이 멍하니 주저앉은 채 어, 어라, 라고 중얼거리는 걸 정상헌은 옆걸음으로 도로 걸어 올라오며 가만히 구경만 하고 있었다.
옆으로 일어서면 비교적 간단하게 몸을 일으킬 수 있지만, 처음 넘어진 인간들이 곧잘 못 일어선다는 걸 정상헌은 알고 있었다.
손을 내밀 생각은 않고 옆에 가만히 서서 비슬비슬 웃으며 구경만 하는 정상헌을 보고 윤해신은 번쩍 눈에 불을 켰다.
이놈 자식, 어디 도와달라고 하나 봐라.
무릎이 자유로이 굽어지는 방향을 이리저리 가늠하다가 이내 옆으로 손 짚고 일어설 때까지 그리 시간은 걸리지 않았다. 기껏해야 몇 초 정도였을까.
그러나 그동안 정상헌은 웃으며 구경만 하고 있었고 윤해신은 기분이 상해 버렸다.
――가르쳐주는 거 좋아하시네.
윤해신이 일어나 눈을 마저 털어내자, 정상헌은 여전히 빙글거리는 얼굴로 말했다.
‘봐, 다리를 八자로 벌리고 다리 안쪽에 힘을 줘. 플레이트가 안쪽으로 기울어지도록, 날을 세워서. 쉬워. 너 안다리에 힘주는 거 잘하잖아. 나랑 그거 할 때 허벅지로 내 허리를 조이는 것처――.’
폴을 휘둘렀다.
우와, 하고 외마디 소리를 지르며 몸을 뒤로 젖혔지만, 아무래도 정상헌도 그렇게 자유롭지는 못한 탓에 허리께를 얻어맞았다. 폴 자체가 그리 무겁지 않아 별 타격은 없었지만.
‘말할 때는 때와 장소를 가려서 해, 이 멍청아. 몇 번이나 말해야 알겠어.’
부루퉁하게 내뱉자 정상헌은 어깨를 으쓱했다.
‘우선은 그냥 사면에서 일자로 내려가 보라구. 속도를 조절하면서.’
완전히 장난기가 가득 배어 있었다.
처음부터 이럴 작정이었던 거다, 저거.
윤해신은 내심 괜히 왔다, 저 나쁜 놈, 하고 이를 갈면서, 일단 여기까지 왔으니 물러설 수도 없어 폴을 고쳐쥐었다.
제길, 넌 그나마 몸이라도 멀쩡하지, 내가 지금 허리가 욱신거리고 다리에 힘이 없는 게 다 누구 탓인데 저 따위로 혀를 굴리고 있어.
욕을 바가지로 퍼부으면서 묵묵히 입을 다물고 날을 세워 정면으로 섰다. 과연, 천천히 미끄러지기 시작했다. 날을 있는 대로 세우자 멈춘다.
‘좋아, 그럼 방향 바꾸는 거 해 보자.’
정상헌은 좋아라고 옆에서 흐뭇하게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했지만 윤해신은 싸늘한 눈으로 그를 일별할 뿐이었다.
어쨌거나 그리 좋은 선생감은 못 되는 정상헌에게서 그럭저럭 천천히 방향 바꾸는 것도 배울 즈음에는 400m도 거의 다 내려와 있었다.
평지로 내려와 한숨을 쉬는데 정상헌은 빙글 웃으면서 리프트 한 번 더 타고 올라가자, 라고 했다.
이번엔 저기 가운데에 있는 리프트 타자, 가운데 있는 리프트, 라면서 신나게 정상헌이 이끄는 대로 윤해신은 어디 뭘 하나 두고 보자는 심정으로 조용히 따라갔다.
그리고 윤해신은 태어나서 두 번째로 리프트를 타고 오르면서, 조금 전과는 달리 한참 가도 끝이 보이지 않는 그 리프트 아래의 어느 언덕 중턱에 있는 팻말을 읽었다.
‘ 중․상급자용 ← 레인보우 코스 800m 프리 라이드 코스→ 1200m ’
조금 전의 초급자용 사면과는 비교도 안 되는 굴곡에 경사도를 보이는 그 언덕을, 리프트를 타고 올라가며 느긋하게 구경하면서 윤해신은 여기서 이놈을 밀어 떨어뜨리면 어떻게 될까, 사뭇 진지하게 생각했다.
……이 빌어먹을 녀석 같으니!
굴곡 너머로 언뜻언뜻 보이는 저 아래의 평지로 가늠하건대, 반 정도는 내려온 것 같았다.
그 말인즉슨 엉덩이로 600m를 내려왔다는 말이다.
물론 말 그대로 주저앉은 채 줄줄 미끄러져 내려왔다는 뜻은 아니다. 일어서서 조금 타다가 넘어져 주르르 미끄러지고, 다시 일어서서 조금 타다가 또 넘어져 미끄러지고를 반복하면서 내려왔다. 내려온 거리의 반 정도는 일어서서 내려왔을 거다.
이젠 몇 번째인지 셀 수도 없을 정도로 넘어져, 윤해신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아까 정상헌이 했던 말마따나 스키장에 온 사람들의 대다수는 초급자용 코스에 가 있는지 이 코스에는 사람이 그다지 없었다(때로 있다고 해도 그들은 번개처럼 윤해신의 옆을 스쳐갈 뿐 구르고 넘어지며 그의 근처에 머물러 주지는 않았다).
‘아……제길.’
다리 뻗고 주저앉은 채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윤해신은 숫제 누워 버렸다.
아까 도착할 때부터 줄곧 내리고 있던 눈은 끊임없이 흩날리고 있었다. 그다지 눈발이 세어지지도 않고 약해지지도 않으면서 계속계속 내린다.
간혹 사람이 스쳐 미끄러질 때마다 싸악―, 싸악―, 하고 기분 좋은 마찰음이 들린다. 폭신하게 부스러지는 눈발도 기분 좋았다.
아아, 기분 좋다. ……그래, 그놈만 아니면.
인상 험상궂은 남자 하나가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과 동시에 윤해신은 조금 기분이 상했다.
처음, 이 끔찍한 1200m 경사길의 꼭대기 부분에서는 그나마 좀 같이 있는 듯싶더니, 요령은 다 가르쳐주었는지 어느 결엔가 저만치 홀로 내려가 사라져 버렸다.
뭐 다시 리프트를 타고 올라오겠지만, 어쨌거나 괘씸하다.
사실 이렇게 넘어지면서도 스키는 제법 재미있었다. 아마도 내일 아침에는 근육통으로 온몸이 삐그덕거려서 일어나기가 힘들겠지만 지금 당장은 아픔이 느껴지지 않고, 이 차가운 눈발 속에서 미끄러져 내려가는 그 짧은 순간의 쾌감도 마음에 든다.
홀로 이렇게 눈에 파묻힌 정적 속에 누워 있는 것도 좋았다.
……하지만 역시 그런 걸 차치하더라도, 괘씸한 건 괘씸한 거다.
생초보를 뜬금없이 달랑 들어 1200m의 상공에 던져 두고 혼자 내려가는 것도 그렇고, 왜 그것도 못하냐는 식의 말도 그렇고.
사실 윤해신은 운동신경이 그렇게 떨어지는 편은 아니었다. 타인에 비해 월등하게 좋다고도 못하지만 그리 떨어지지도 않았다. 머릿속에 입력시킨 걸 실행에 옮기는 게 무난하게 이루어지는 편이었다.
그런데도 못한다고 닦달을 하는 것이다.
윤해신은 한참 그렇게 누워 있다가 후욱, 길게 한숨을 내쉬곤 다시 일어섰다.
아, 정말 내일은 근육통이 상당하겠구나, 싶다.
그런데 이상하게 이 녀석이 늦다.
아까 아까 내려갔으니까 이미 리프트를 타고 올라와서 여기까지 미끄러져 내려와도 열 번은 더 왔을 걸 아직껏 오지 않고 있다. 설마 누워 있는 사이에 그대로 스쳐서 다시 내려갔을 리도 없고.
혼자서 어디서 신나게 놀고 있는 건지.
윤해신은 천천히 미끄러져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제는 그럭저럭 아까보다 훨씬 무난하게 내려갈 수 있었다.
살짝 벌어진 입술 사이로 낮게 노래도 부르면서 몇 번이고 뒹굴면서도 그럭저럭 기분 좋게 내려갔다.
그럭저럭 엉덩이와 플레이트를 거듭 이용하며 평지가 저만치 보일 만큼 내려갔을 때, 뒤에서 상쾌하게 싸아악, 하는 소리를 내며 내려오는 기척이 들렸다.
어차피 내가 버벅거려도 이 코스를 타고 올 만한 인간이면 알아서 잘 피해가리라는 생각에 뒤도 안 돌아보고 가고 있는 윤해신의 조금 앞에서 눈발을 흩뿌리며 급정지한 그 사람은 조금 전까지 저 밉상, 하고 생각하고 있던 사람이었다.
천천히 멈춰 선 윤해신은 빤히 정상헌을 바라보았다. 신나게 타고 왔는지 날씨 탓인지 벌건 얼굴을 하고서 웃고 서 있었다.
‘좀 탈 만해? 재밌지?’
‘…….’
윤해신은 천천히 폴을 들어올렸다. 정상헌이 흠칫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폴을 내리쳤다. 몇 번이고 거듭, 에잇, 에잇, 하고 중얼거리며.
‘어이, 어이, 야, 왜 때려?’
‘사람을 저 꼭대기에 던져두고 혼자 내려가 버려? 이런 몹쓸 녀석.’
‘그래도 여기까지 잘 내려왔잖아. 이제 초급자 코스에 가면 그럭저럭 무난하게 타고 내려올 수 있을걸, 너도.’
얻어맞으면서도 웃는 그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윤해신은 한숨을 쉬며 손을 멈췄다.
‘응. ……알았다, 이 무식한 놈아. 추우니까 얼른 내려가서 좀 쉬자. ……라고 해도 아직 고지는 멀군.’
한풀 꺾인 목소리로 중얼거리며 다시 플레이트를 미끄러뜨리려 하는데, 문득 정상헌이 슬쩍 자신의 플레이트를 윤해신의 것 아래로 미끄러뜨려 들어올렸다. 일시에 플레이트끼리 얽히고 균형을 잃어 윤해신은 어……라고 소리칠 새도 없이 그대로 옆으로 넘어져 버렸다. 그 옆으로 정상헌도 같이 넘어졌다.
눈앞에 갑자기 하늘이 보여 잠시 멍하니 있다가, 윤해신은 눈살을 찌푸리며 옆을 바라보았다. 바로 옆에서 정상헌이 같이 넘어져 누운 채 싱글거리고 있었다.
‘뭐 하는 거야.’
‘‘대단히 위험한 행동이오니 초보자는 흉내 내지 말아 주시기 바랍니다’’
짐짓 아나운서처럼 딱딱한 어조로 말한 정상헌은 폴을 놓치고 늘어져 있는 윤해신의 손을 잡았다. 두꺼운 장갑 탓에 손의 온기 따위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장갑끼리 부대껴 사각거리는 소리가 청각을 자극한다.
‘사람이 적어서 좋지, 이 코스. 게다가 네가 아무리 서툴러도 이 코스를 내려가는 사람이면 어지간하면 다 널 알아서 잘 피해 줄 거고. ……하지만 역시 가장 큰 장점은 사람이 적다는 걸까.’
갑자기 다리 한쪽씩 플레이트 끝으로 커다란 호를 그리며 천천히 엎드린 정상헌은 상체만 일으켜 윤해신에게로 바싹 다가갔다.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눈동자만 굴려 그를 바라보는 윤해신의 얼굴 위로, 아주 잠깐 정상헌의 얼굴이 다가왔다가 떨어졌다.
차갑고 메마른 입술 위에 맞닿는, 비슷한 감촉의 입술.
그러곤 낮게 웃는 정상헌의 뒤로 얼마 지나지 않아 싸악, 하고 사람 그림자가 하나 더 스쳐갔다.
‘……봤으면 어쩌려고 그래.’
무뚝뚝하게 말하며 장갑등으로 입술을 훔치는 윤해신에게 정상헌은 고개를 옆으로 약간 까닥해 보일 뿐이었다.
‘봤으면 본 거지 뭐.’
천연덕스럽게 대답하며 일어서는 정상헌을 따라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윤해신은 흐응, 하고 중얼거렸다.
쌀쌀한 날씨 탓에 얼굴이 붉어져 있어서 다행이라고, 잠깐 생각했다. ……뭐, 나만 얼굴이 빨간 건 아니지만.
이번에는 먼저 내려가지 않고 윤해신의 옆에서 천천히 보조를 맞추어 내려가는 정상헌에게 윤해신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물었다.
‘근데, 어딜 갔다 온 거야?’
‘응?’
‘여기 다시 오는 거, 꽤 늦었잖아. 다른 코스 타고 온 거야?’
‘응? ――아, 어어.’
어쩐지 조금 어눌한 대답이 돌아왔다.
‘……? 아냐?’
설마 이놈, 혼자서만 따뜻한 데 들어가서 커피나 마시고 노닥거리다가 온 건 아니겠지.
미심쩍은 시선을 주며 물어보자 정상헌은 어깨를 움츠리며 고개를 저었다.
‘아냐, 그냥, 다른 코스도 타고, 뭐 그러다 왔어.’
……혼자 따끈한 데서 놀다 왔군. 치사하게.
윤해신은 내심 픽 웃었다.
한마디 해 주고 싶은 마음도 없잖아 있었지만 뭐 그 정도는 봐줄까 싶었다. 도무지 거짓말을 못하는 놈이다. 예전에 여자들을 달고 다닐 때에는 잘도 능란하게 거짓말을 하는 것 같더니, 어째서인지 지금은 영 티가 많이 난다. 작정하고 속일 때는 완벽하게 속일 수 있지만 안 그럴 때엔 금세 탄로 나는 남자다.
그런 점이 또 정상헌다워서, 윤해신은 웃기만 하고 아무 말 않았다.
그러나 그날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것이 따로 있을 거라곤 그는 생각지 못했다.
몇 번인가 더 사면을 미끄러져 내리는 동안 시계는 어느새 오후 느지막한 시각을 가리키고 있었다.
손끝도 발끝도 감각이 느껴지지 않을 지경이라, 이제 슬슬 장비를 반납하고 숙소로 갈까 하는 데에 두 사람은 의견이 일치해 나란히 뒤뚱뒤뚱 반납소를 향해 걸음을 돌렸다.
‘아――, 오랜만에 좀 논 것 같다.’
팔을 쭉 뻗으며 기분 좋은 목소리로 말하는 정상헌에게 흘끔 시선을 주며 윤해신은 픽 웃었다.
‘재미있었어, 오늘?’
‘어, 무지. 윤해신이가 눈 위를 데굴데굴 구르는 모습도 다 보고. 으흐흐.’
‘……퍽도 재미있었겠다.’
조금 부루퉁하게 말하자 반걸음 정도 앞서가던 정상헌이 웃음기가 고인 눈으로 돌아보았다.
‘이런 식으로 둘이 놀러오는 거 처음이잖아. ……넌 재미없었어?’
‘……. 재미있었어.’
그렇게 진지하게 물어서야, 난 아퍼죽겠다, 라고 쏘아 줄 분위기는 도무지 아니었다.
빙글 웃으며 정상헌은 한쪽만 장갑을 벗은 손을 뻗어 윤해신의 뺨을 손끝으로 가볍게 두드렸다.
‘아마 내일 근육통 좀 있을걸. 숙소에 가면 뜨끈한 물에 몸 풀고 마사지 해 줄게.’
‘……거절하고 싶은데.’
다른 의미로 근육통이 생길 것만 같은 예감이 들어서 말이지, 라는 말은 입안으로 삼켰다.
그러나 금세 알아챈 듯 정상헌은 소리 내어 웃었다.
그때였다.
‘아――, 정말이잖아, 상헌 씨.’
‘그봐, 맞다니까. 아까 주미 너 A코스에서 타고 있을 때, 우리들 조 앞에서 상헌 씨 발견하곤 같이 차 마셨다니까.’
‘어머어머, 어떻게 이런 데서 다 만나니.’
까르륵거리는 밝은 목소리들이 들려온 건 반납소 앞에 네댓이 모여선 이쁘장한 여자들에게서였다.
윤해신은 그 낯선 목소리들에 낯익은 이름이 섞여 들려와, 고개를 들어 의아한 시선을 그녀들에게 던졌다. 설마 했는데 그녀들은 이쪽을 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윤해신의 반걸음 앞에서 걷고 있는 우람한 사내를.
무심결에 그에게로 시선을 돌린 윤해신은 재빠르게도 캐치하고 말았다. 정상헌의 표정이 당황으로 굳어지며 윤해신의 눈치를 흘끔 보는 것을.
……!
순간 뭔가 아주 안 좋은 느낌과 함께, 딱 감이 왔다.
이 녀석, 아까 안 온다 싶었더니 여자들이랑 노닥거리고 있었구나.
하지만 눈치로 봐서는 다른 데서 알고 지냈던 사람들 같은데, 만난 거야 우연히 만나게 되었다고 쳐도, 어디서 알게 된 걸까.
윤해신은 새삼스런 눈으로 찬찬히 그녀들을 바라보았다. 사람의 직업이란 건 어느 정도는 외견에서 드러나는 법이다.
학생――은 아닌 것 같고. 얼핏 인텔리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꾸민 티가 은근히 나고. 무엇보다도 말투며, 사람에게 친근하게 달라붙는 행동들.
조용히 지켜보고만 있자니 그녀들이 먼저 이쪽으로 다가왔다. 그 중 키가 약간 작달막하고 동안인 여자 하나가 도도도 달려오더니 정상헌의 팔을 붙잡고 늘어졌다.
‘하필이면 나 없을 때 쟤네가 상헌 씨 만나서 차 마셨다고 막 자랑하잖아요. 그래서 아까부터 계속 반납소 앞에서 기다렸어요, 정말인가 하고.’
‘아, 에, ……어…….’
정상헌은, 가엾게도 당황한 빛이 역력하게 드러난 눈으로 그녀를 보다가, 흘끔흘끔 윤해신에게 시선을 주었다. 윤해신은 말없이 그들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정상헌의 그 시선을, 팔에 매달린 그녀―뿐 아니라 다른 여자들―도 느낀 모양이었다.
귀엽게 할끔, 윤해신을 본 그녀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런데 이분은, 동행이신 것 같은데.’
정상헌의 속마음이 펄쩍 뛰는 게 눈에 보이는 것 같았다.
윤해신은 조용히 입가에만 웃음 지으면서 나직이 대답했다.
‘예, 같이 왔습니다. 상헌이랑 아시는 분인가 봐요. 이렇게 귀여운 분을 알면서 소개도 안 시켜 주고, 너무한데, 정상헌.’
윤해신의 표정 위로 웃음이 번져 가는 것에 반해, 정상헌의 표정 위로는 낭패했다는 기색이 번져 갔다.
그녀는 곱게 웃음 지고는 짐짓 눈을 흘기며 정상헌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멋진 친구분 있으면 가게에도 좀 같이 오고 그러세요. 우리가 어련히 서비스 잘 안 해 드리겠어요?’
……아하, 가게.
문득 머릿속에 며칠 전 보았던 성냥갑이 스쳐가면서, 윤해신의 머릿속에서는 하나의 공식이 짜임새 좋게 성립되었다.
그리고, 그녀들이 있는 자리에서 그저 조용히 웃으면서 머릿속은 순식간에 사르륵 굳어 갔다.
옆에서 정상헌이 혀를 차며 머리를 긁적이는 것 따위 보지도 않았다.
갑자기 눈발이 더 세어지는 것 같았다.
이놈도 더럽게 재수없구나 싶었다.
설마하니 단란주점의 여자들이 나란히 스키나 타러 올 거라고 어떻게 알았겠는가. 하물며 이 스키장에, 하필이면 이날 출동할 거라고는 생각지도 못했겠지.
정말로 뒤로 엎어져도 코 깨질 정도로 더럽게 재수없는 일이다, 이건.
윤해신은 머릿속의 한부분이 그런 생각을 하는 건 구석에다 던져 두며 조용히 차를 향해 걸었다.
한걸음 뒤에서 정상헌이 따라오고 있었다.
‘……야, 해신아, 그게 아니라,’
‘피곤해. 집에 갈래.’
‘응? ――어, 하지만 숙소 예약―….’
‘난 간다. 있으려면 너 혼자 더 있다 와.’
‘…야……, 해신아.’
진땀을 흘리면서 뒤에서 쫓아오고 있는 그를 보고 싶지가 않았다.
굉장히 화가 났다.
머릿속이 싸늘하게 얼어붙어 아무런 생각도 안 날 정도로, 화가 난다는 생각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화가 났다.
다른 사람과 즐긴 것도 화가 나지만, 그걸 시침 뚝 떼고 모른 척하려고 했다는 게 더욱 화가 났다.
더욱이 아까는, 윤해신과 둘이서 나온 건 처음이라고 그렇게 좋아라 했었다. 마냥 즐거워 죽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으면서, 아까 그 험한 경사면에 혼자 두고서는 윤해신 자신이 힘겨이 조금씩 굴러 내려올 동안 (아무리 우연이라고는 해도) 여자들을 만나서 노닥거리고 있었다는 게 참을 수 없이 화가 났다.
게다가 그 후에 태연한 얼굴로 다가와서는 그런 식으로 입을 맞추거나 다정한 말들을 속삭였다는 게 어이가 없었다.
사람인 이상 사시사철 24시간을 한 사람만 생각하고 살 수는 없다는 건 알고 있다. 한 사람만을 사랑하는 것도 일종의 정신병이라고 하니까, 온 마음 다해 성심성의껏 눈 한 번 팔지 않고 자기만 바라보라고 강요는 안 한다. 사실 윤해신 스스로도 평생 정상헌만 바라보면서 살아갈 수 있을지에 대한 자신은 없기도 했다.
하지만 이건 아니다.
태연하게 다른 상대에게 웃어 보이고 몇 분 지나지 않아 천연덕스런 얼굴로 이쪽에 와서 사랑을 속삭이는 따위의 행위는, 도무지 용납되지가 않았다.
그래서, 멋대로 운전석에 올라타 차를 몰고 집으로 가는 동안, 눈 때문에 도로가 미끄러워 서행을 한 탓에 평소의 몇 배는 걸려서 귀가한 그 몇 시간 동안 내도록, 조수석에 앉은 정상헌이 애걸복걸을 하고 달래는 소리를 한마디도 듣지 않았다. 이럴 때야말로 귀마개가 필요한 건데, 라고 생각하며 일절 시선도 주지 않았다.
해신아, 윤해신, 그게 아니라, 저기 말이지, 절대 그런 게 아니고, 잘못했어, 등등의 단어로 주로 구성되어 있던 그 몇 시간 동안의 말들은 정상헌에게만 허무하게 반사되어 갔을 뿐, 윤해신에게는 들어가지 않았다.
그리고 사람이란 건, 원래 방귀 뀐 놈이 성낸다는 말과 같은 성격도 있는 데다가, 몇 시간이나 사과해도 그게 무(無)로 돌아갈 경우 적반하장이 되는 때가 많다.
하기야 사람 사이의 관계가 무조건 일방적일 수는 없으니 아무리 잘해 줘도 섭섭한 감정은 가지게 되는 거고, 이럴 때에 그런 건 불거져 나오기 쉬웠다.
결국 집에 도착할 때 즈음 정상헌이 조금 거친 어조로 토로하고 있던 말은, 몇 시간 전에 그랬던 것처럼 그게 아니라, 로 시작하는 변명이 아닌, 하지만 너는 어떻고, 로 시작하는 힐난이 되어 있었다.
‘너는, 왜 아직도 그 재영이란 놈을 집에 불러다가 만나고 있는 건데.’라거나, ‘늘 집이 조금만 어질러져 있거나, 내가 좀 있다 해야지, 라고 조금만 일 미뤄 두면 금방 얼굴을 찌푸리잖아, 그럼 난 마음이 안 언짢아지는 줄 알아?’라거나, ‘너 귀찮을 때에는 주위 사람은 둘러보지도 않는 그 성격 좀 어떻게 안 되겠냐.’까지, 다양한 불만들이 토로되었다.
원래 싸움이란 게 그런 거지만, 어떤 이유로 시작되건 도중부터 이상한 방향으로 변질되는 일은 매우 흔하게 있다. 그리고 나중에는 어느 쪽의 잘잘못을 떠나 서로 맘 상하게 마련이다.
그리고 물론 언제 어디서 싸움이 번질지도 알 수 없다.
그렇게 즐겁게 콧노래를 부르며 떠났었는데 이런 식으로 싸늘한 분위기를 피우며 집으로 다시 돌아오게 될 줄은 둘 다 몰랐다.
* * *
조금 늦어 버렸다.
욕실에서 뜨끈한 물에 몸을 담그고 있는 도중에, 아니나 다를까 예상했던 대로 나가는 게 귀찮아져 버려, 갈까 말까 20분간 고민하며 미적거리는 사이에 시간은 흘러갔다.
……원래 안 나오려고 했던 재영이더러는 나오라고 해 놓고 내가 빠지면 좀 그렇겠지.
윤해신은 아까 그놈 왔을 때 괜히 동창회 말 꺼냈다고 내심 후회하면서도, 안 내켜하면서 옷을 챙겨 입고 집에서 나왔다.
집에서 나온 시간이 이미 동창회 안내장에 적혀 있던 모임 시간이었으니 늦은 건 당연지사다.
안내장에 그려져 있는 대로, 복잡한 길이지만 요점만 잘 잡아 그려 놓은 약도를 따라 골목을 꺾어들어 찾아든 가게에는 이미 스무여 명 정도의 낯익은 사람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깔끔하고 단정하긴 했지만 그리 널찍한 가게는 아닌 터라 사람 하나가 들어서도 이내 눈에 띄었다.
발을 젖히고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 오른쪽으로 나 있는 온돌방 안쪽에 테이블 여러 개를 붙여 놓고 익숙한 얼굴들이 자리잡고 있었다.
그 중 누군가가 윤해신을 알아보고 손을 흔든다.
“어이, 중앙고! 중앙고 47기! 이리 오시게나.”
윤해신은 픽 웃고는 그쪽으로 갔다.
벌써 못 본 지 한참 지난 얼굴인데도 낯이 익은 건 비단 윤해신의 기억력이 좋아서가 아니었다. 애초부터 제반지식의 암기력은 꽤 쓸 만하지만 사람을 기억하는 재주는 그리 좋지 않은 윤해신이다.
동창회에 꼬박꼬박 나오는 놈들은 대부분 학교 다닐 때에 앞에서 설치고 다녔던 놈들이 많아 자연히 얼굴 정도는 희미하게나마 낯이 익을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그가 졸업한 학교는 학생 수가 그리 많지 않았던 데다 기숙사가 붙어 있었던 곳이라, 학생들의 교우관계가 타학교에 비해 돈독한 편이었다.
윤해신은 흘긋 자리를 둘러보며 방안으로 들어섰다.
아직 김재영은 오지 않은 모양이었다. 뭐 그 녀석을 만나러 온 건 아니지만, 그래도 만에 하나 그놈이 안 오면 자신이 여기까지 일부러 온 것도 좀 허무해지니까 분하긴 할 것 같다.
그때 윤해신의 눈에 띈 건 아무리 기억력이 좋지 않아도 알아볼 수밖에 없는 동창 하나였다.
문 가까이에 앉아 벌써부터 술을 대여섯 잔은 기울인 얼굴을 하고 있는 그놈은 돈 소문이 좋지 않은 놈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좋지 않다 정도가 아니라, 최악이었다. 돈을 빌리다 빌리다 못해 사채까지 끌어다 쓴다는 소문마저 돌고 있었다.
대체로 소문이라는 건 8할 정도는―그렇지 않다고 해도 최소한 2할은―과장되어 있기에 다른 때였다면 윤해신은 별 신경도 쓰지 않았겠지만, 이 녀석에 한해 그 소문은 진실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이놈 때문에 김재영이 한창 곤욕을 치렀었기 때문이다.
……아니, 생각해 보면 아직껏 베이비시터를 하는 모양이니, 아직도 이놈 때문에 그 고난의 구렁텅이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는 거군. ――강기민. 민폐는 골고루 끼치는 놈.
그런 주제에 책임 회피해서 재영이에게 다 넘기고 도망쳤다가 잡혔었지, 이 뻔뻔한 놈.
윤해신은 내심 그런 생각들을 피워올리면서도 별말 없이 웃옷을 벗어 걸어 놓고 비어 있는 자리―강기민의 옆자리였지만―에 앉았다.
“야, 웬일이야? 윤해신이가 다 오고. 어지간해선 귀찮다고 안 오잖아, 너.”
안쪽 자리에 앉아 있는 놈―아마 저놈이 동창회 간사였었지 싶다―이 웃으면서 말을 걸어 왔다. 윤해신은 딱히 대답하지 않고 그저 웃음만 되돌려주며 점원이 새로이 갖다 주는 잔을 받았다.
몇 년이나 되는 텀을 두고 과거에 알던 사람을 만나면 무어라 말하기 힘든 묘한 감회를 느끼게 된다. 그것은 자신만을 남겨둔 나머지 것들이 변해 간다는 느낌일 수도 있고 혹은 그 반대일 수도 있다.
윤해신의 경우 어느 쪽도 아니었지만, 시간의 흐름만큼은 그 가운데에서 느끼고 있었다.
사람이 스물 가량이나 되면 언제까지고 똑같은 화제로 다함께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는 노릇이다. 자연스레 가까이에 있는 몇 명끼리 이야기를 나누곤 하게 된다.
화제는 최근의 정세에서부터, 과거 학창 시절의 이야기까지 꽤 다양하게 나오게 된다.
그런 가운데 윤해신은 그저 앉아서 조용히 술잔을 기울이며 그들의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은 그 자리에서 멀리 떠 다른 곳에서 헤매고 있었다.
역시 괜히 왔다, 시끄럽고 귀찮아, 따위의 생각들이 머리를 잠식한 생각들의 대부분이었다.
……그놈은 지금 뭘 하고 있으려나.
문득 그 생각이 들었다.
오늘 친구들과 마시러 간댔는데, 지금쯤 고주망태가 되어 있으려나. 하지만 지금은 시간이 이르니까 아직은 아니겠군. 요 며칠 계속 부루퉁해선 말도 제대로 하지 않고.
요 근래 종종 느끼곤 했다.
정말로 이 녀석이랑 같은 공기를 마시면서 살아가고 있는 거구나, 하고.
언제부터인가 아주 당연한 것처럼 옆에서 뒹굴거리면서 일상을 파고들어 있는 그의 존재를, 때로 이유도 없이 문득문득 느꼈다.
굳이 손끝이나 이마에 입을 맞추거나 귓가에 대고 낮은 목소리로 소곤거릴 때가 아니라, 그냥 허벅지를 베고 코를 골며 자는 얼굴이나, 스포츠 신문의 퍼즐 문제를 보며 심각하게 고민하고 있는 얼굴 따위를 볼 때 느껴졌다.
자신의 생활에 녹아들어 있는 인간――같은 것.
어쩌면 가족이라는 느낌이 이런 건지도 모른다.
윤해신에게는 혈연으로 이어진 가족은 아버지밖에 없었고, 정상헌에게서 아버지와 같은 느낌을 가지는 건 아니었다. 그랬더라면 이런 관계가 되는 일 따위, 아니, 애초에 싸우거나 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같이 살고 있는 게 당연하다고 느껴진다는 점에 있어서는 같았다. 지금은 아니지만, 고교 졸업할 때까지 윤해신은 아버지와 사는 게 당연했다. 왜 그 사람과 같이 살아야 하는가를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아마도 대부분 ‘가족’이라는 게 그런 거겠지만.
그런 점에서 정상헌은 비슷했다.
그러나 정상헌은 윤해신의 가족은 아니었고 피도 통하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싸우고 점점 멀어진다고 해도 근원적으로 이어 주는 건 아무것도 없다.
…….
문득 조금 우울해졌다. 그러다가 부아가 난다.
저 망할 놈은 그런 것 따위는 생각지도 않고 있을 거다. 그저, 내가 조금 잘못하긴 했지만 따지고 보면 나만 잘못한 것도 아닌데 저놈 자식이 왜 저렇게 토라져 있나, 같은 생각이나 하면서 화를 내고 있겠지.
꼭 혼자서만 속 썩이고 막다른 골목에 대고 화를 내는 것 같아 기분이 몹시 안 좋았다.
……정상헌, 이 빌어먹을 녀석. 혼자서 몰래 즐기고 거짓말해 놓고는 뭐가 잘났다고 네가 화를 내고 있어.
윤해신은 잔 가득 찰랑찰랑하게 담겨 있는 소주를 단숨에 들이켜며 혀를 찼다.
“정말이지, 주객전도야 주객전도……. 왜 제놈이 화를 내.”
불쑥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러자 옆에서 뭔가 잘못 들었던 모양인지, 강기민이 응? 하고 고개를 돌렸다.
“지금 뭐라고 했어?”
넉살좋게 웃으며 물어오는 그에게 윤해신은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물끄러미 한참을 바라보았다.
세상에는 나쁜 놈들도 참 많지. 상헌이 그놈뿐 아니라 기민이 이놈도 마찬가지다. 그런 주제에 이런 자리에서 이렇게 술이나 마시고 있다니 양심도 없는 놈.
화가 난 데다 술까지 들어간 탓인지, 개연성이 없는 분노가 강기민에게 돌려졌다.
“좀 있으면 재영이 올걸. 오늘 온댔으니까.”
아무렇지 않은 척 중얼거렸다. 그 이름이 나오자 강기민은 흠칫하는 눈치였다.
윤해신은 지그시 그를 바라보면서 조용히 말을 덧붙였다.
“너, 더 이상 재영이한테 손 내밀지 마. 요전에 그 녀석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어? 며칠 사이에 살이 쭉쭉 빠지는 게 눈에 보이는데, 그때 생각으론 내가 너 족치고 싶었어.”
사실 윤해신이 참견할 일은 아니었다.
사정이 어떻게 되었건 그건 김재영과 강기민 사이의 일이고, 아무리 김재영이 그의 친구라고는 해도 그가 참견할 일은 아니다. 그럼에도 그렇게 한마디 던지지 않을 수가 없었다. 당시 괘씸하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새록새록 솟는다.
강기민은, 왜 네놈이 참견하냐고 땡고함을 지를 성격은 못 되는지 멋쩍게 머리를 긁적긁적하면서, 하지만 그리 주눅 들지는 않고 중얼거렸다.
“손 못 내밀어. 아무리 나라도 목숨 중요한 줄은 안다. 지금 또 재영이 건들면 나 죽어.”
녀석의 말에 윤해신은 술잔을 손에 든 채 약간 의아한 시선으로 녀석을 보았다.
한 번 된통 당했다고 해서 김재영이란 놈이 애인이었던 놈을 해코지할 인간은 아닌데.
그러나 재차 묻지는 않고 그저 바라보고만 있자, 강기민이 제풀에 줄줄 말을 쏟아놓았다.
“나 몰랐다구, 재영이 뒤에 있는 게 그렇게 유명한 큰손인 줄은. 그런 악질이 뒤에 있는 줄 알았으면 재영이한테 넘기고 튀는 짓 안 했어.”
뒤에 아무 빽도 없으면 맡기고 튀는 짓, 태연하게 해도 되고……? 라는 빈정거림이 혀끝까지 튀어나왔지만, 그보다 더 신경 쓰인 건 다른 말이다.
재영이 뒤에 있는 유명한 악질 큰손이라니.
윤해신은 멍한 얼굴로 강기민을 바라보았다.
여태껏 그가 김재영과 알아온 게 10여 년이 되지만, 그런 건 금시초문이다. 조직 폭력배 여럿이랑 알고 지내고, 잡다하게 할 줄 아는 것 많고, 발도 넓어서 온 업계에 모르는 사람이 없다는 건 알고 있지만, 뒷세계 큰손이 그놈 뒤를 받쳐 주고 있다는 소리는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물론 김재영이 그런 소리를 일일이 윤해신에게 하는 건 아니라도, 그런 대단한 게 있었더라면 얼핏 스쳐가는 말로라도 들었을 거다.
“큰손……?”
어이없다는 듯 중얼거렸지만 강기민은 들리지도 않는 듯 다소 초조한 얼굴로 술잔을 할짝였다.
“10년도 더 됐다잖아, 알고 지낸 게. 나 잡혔을 때 정말 죽었다 싶었다구.”
“……너 여수에서 잡혔다는 게 그 큰손이라는 사람한테 잡힌 거였어……?”
“어, 그 사람 아랫사람.”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재영이, 네놈 건드리지 않는 대가로 집까지 팔아서 그 사람에게 갖다 바쳤잖아.”
윤해신은 약간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
“어, 그 사람 사채판에서 유명해. 잘못 건드렸다가 피 본 게 한둘이 아니라구.”
조금 전부터 이야기가 자꾸 어긋나고 있었다.
윤해신은 잠시 강기민을 바라보다가, 아무래도 이놈은 인성만 더럽게 생겨먹은 게 아니라 대화의 끈을 풀어나가는 것도 제대로 못하는 모양이라고 혀를 찼다.
뭐가 뭔지 잘은 모르겠지만, 아무래도 베이비시터에게 달 천만 원 주는 배포 좋은 놈이 그 악질이라는 인간인 듯싶다. 그런 놈이랑 10년을 넘게 알고 지냈다니,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었다.
친구에 대한 걸 모두 다 알 수는 없는 노릇이지만 조금 의외이긴 하다. 워낙 이것저것 이야기하길 좋아하는 놈이라 녀석의 주위에 어떤 사람들이 있는지 대충은 안다고 생각했는데.
그때였다.
호랑이도 제 말하면 온다고, 발을 걷으며 가게 안으로 들어온 사람이 “야, 벌써 다 모여 있었네.”라고 하면서 방안으로 들어왔다.
모르는 사람이 없는 마당발 김재영이었다.
“미안, 애를 보다 늦었다. 다 온 거야? 하나, 둘, 셋……, 왜 이리 적어?”
사람을 세는 시늉을 하며 그는 윤해신의 건너편 자리에 비집고 앉았다.
“애를 봐? 김재영 너 애 낳았냐?”
“어, 하지만 너한테 애가 있을 리가 없잖아? 입양했어?”
“왜, 요즘 기술로는 남자도 애 낳을 수 있다고 하던데.”
타고난 분위기 메이커라는 건 있는 모양이라고, 윤해신은 김재영을 볼 때마다 종종 생각하곤 했다.
김재영이 들어와 앉아 웃으면서 입을 떼면 금세 자리의 분위기가 유쾌하게 들떠오른다. 저것도 대단한 재주라고 늘 감탄해 마지않았다.
윤해신은 픽 웃으며 술을 입안에 털어 넣었다.
그러면서 새삼 생각하는 것이었다.
역시 저런 놈을 애인 삼았어야 하는 건데.
사귀는 사람에게 일편단심에, 다정하고 헌신적이고 배려심 깊고, 게다가 저놈은 인물까지 금상첨화가 아닌가. ……라고는 해도, 한번 끊어낼 때면 어찌나 칼같이 자르는지 무서울 정도지만.
……아, 빌어먹을. 또 그 망할 ‘애인’이 생각나 버리고 말았다. 적반하장, 주객전도.
웃었던 게 언제냐고, 순식간에 다시 눈살을 찌푸린 채 빈 술잔을 테이블 위에서 한 바퀴 빙글 돌리는데 테이블 저 너머 편에 앉아 있는 놈들과 큰 목소리로 웃으며 떠들고 있던 김재영이 문득 생각났다는 듯 윤해신에게 고개를 돌렸다.
“아, 맞다, 해신아. 나 오는 길에 네 동생 봤다.”
동생 아니라고 백날 말해야 소용없다는 걸 윤해신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어디서?”
“요 근처. 인상파들이랑 같이 친하게 붙어 있던데. 술집이라도 찾는 모양이―…었…….”
갑자기 김재영이 말을 흐렸다. 동시에 그의 시선이 윤해신의 어깨 너머로 넘어갔다.
“……?”
반사적으로 그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린 윤해신은, 달칵, 손 안에서 굴리고 있던 술잔을 테이블 위로 떨어뜨리고 말았다.
오늘은 왜 이리 호랑이가 많은 건지.
발을 헤치고 들어오는 대여섯 명의 험한 인상들 사이에 그가 서 있었다. 윤해신이 머릿속으로 빌어먹을 놈, 이라고 몇 번 중얼거렸는지 모를 동거인이.
“어, 여기야, 여기 맞어. 민재 형님이 여기 괜찮다고 했었거든, 전에 한 번 왔었어. 제기, 되게 찾기 힘드네.”
앞선 남자가 시끌벅적하게 소리치며 가게 안을 휘 둘러보았다. 대여섯 명이 앉을 만한 빈자리를 찾는 모양이다.
그리 넓지 않지만 손님은 제법 들어찬 가게 안에 그렇게 빈자리는 딱 한 군데 있었다.
동창회 모임의 뒤쪽, 윤해신의 등뒤에 있는 자리다.
……빌어먹을, 그 민재 형님, 참 여러 명한테도 이 가게 소개시켜 줬나 보다. 이 가게랑 무슨 관계있는 건 아닌가 몰라.
윤해신이 내심 욕설을 지껄이는데, 시선을 느꼈는지 혹은 그저 이쪽으로 다가오던 차에 눈에 띈 건지, 정상헌과 눈이 딱 마주쳤다. 순간 정상헌도 눈을 크게 뜨며 멈칫했다.
“…….”
“…….”
잠시 동상처럼 굳어 있던 윤해신은 모른 척 조용히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떨어뜨린 술잔을 도로 잡아 옆에서 술병을 기울이는 강기민의 손아래 갖다 대었다. 그들이 앉아 있던 테이블도, 과연 인상파들이 바로 뒷자리에 우르르 자리잡고 앉자 잠깐이나마 조용해졌다.
윤해신의 등뒤로 그들이 앉는 기척이 났다. 왁자하게 떠드는 목소리들로 판단해서는 아무래도 바로 뒤에 등 맞대고 앉은 게 정상헌인 것 같다.
빌어먹을.
오늘 저녁은 저놈 없는 데에서 속 가라앉히며 술이나 마시려고 일부러 이런 귀찮은 자리에 나왔는데, 이런 데서 마주치다니.
이거야말로 저 녀석이 스키장에서 그 여자들과 마주친 것에 뒤지지 않는 어처구니없는 우연이다. 결코 바라지 않은.
윤해신은 설핏 눈살을 찌푸리며 술잔을 입에 가져다대었다.
건너편 자리에서는 김재영이 모른 척 윤해신의 앞에서 어깨를 으쓱하며 빙글 웃고만 있었다.
윤해신의 뒷테이블은 금세 시끄러워졌고, 기분 탓인지 상대적으로 이쪽 테이블은 조용해진 것만 같았다.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졌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이런 데서 우연히 맞닥뜨렸다고는 해도 서로 모르는 척하고 있는 셈이고, 어차피 냉전 중이기도 하니 신경쓸 것 없지 않나 싶은 생각도 들었다.
윤해신은 짧게 한숨을 쉬곤 등뒤에서 억지로 주의를 돌렸다.
“맞아, 재영이 너, 나 몰래 알고 지내는 사람 있었어?”
아까 강기민에게 들은 말이 떠오르기도 해 주의도 돌릴 겸 해서 묻자 김재영이 응? 하고 눈을 둥그렇게 떴다.
“글쎄? 나도 모르겠는데. 내가 너에 대해 모르는 것만큼 너도 나에 대해 모르지 않겠어?”
어깨를 움츠리며 웃는 김재영에게 윤해신은 조금 더 다가앉았다. ……라고는 해도, 사이에 있는 테이블이 가로막고 있었지만.
“너, 무슨 큰손이랑 아는 사이라며, 10년이나. 그런 사람을 빽으로 두고 있었어?”
그러자 김재영은 약간 고개를 기울이고 잠시 생각에 잠긴 눈치더니, 윤해신의 옆에 앉은 강기민에게 흘끔 시선을 주곤 눈웃음을 쳤다.
“기민이한테 들은 거구나. ――아냐, 그런 거. 빽은 무슨.”
“……이 녀석이랑은 헤어진 거 맞지?”
강기민을 가리키며 미심쩍게 묻자 강기민이 고개를 번쩍 들며 무슨 당연한 소리를 하느냐는 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김재영도 웃었다.
“응, 지금 프리. ……그러고 보니 이번엔 애인이랑 헤어지고 나서 해신이 너한테 위로를 안 받았네.”
윤해신이 눈살을 찌푸리며 뭐라고 하려고 하던 차에, 저쪽 테이블에서 자기네들끼리 이야기를 나누고 있던 동기들이 뭔가 싶어 끼어들었다.
“뭐? 뭐야, 뭐? 재영이가 프리인데 해신이가 위로해 준다고?”
윤해신은 흠칫 얼굴을 찡그렸다.
바로 뒤쪽에 저 망할 놈이 있는데, 엉뚱한 소리를 했다가 성질내면 나만 골치 아프단 말이다.
그러나 잠시 그런 생각을 하다가 이내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지금은 저놈이 성질낼 수 있는 처지가 아니다. 왜 싸웠는지부터 거슬러 올라가면, 그렇다.
그러나 아무래도 그런 말들을 크게 떠들어 대는 건 그리 내키지 않아 윤해신은 꺼림칙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뭐 그런 건 아니――.”
“하긴 해신이랑 재영이, 사이좋았지, 옛날부터.”
“어, 나는 해신이랑 재영이가 사귄 줄 알았어. 되게 사이좋았잖아? 지금도 그렇고.”
따앙―― 하고, 술잔을 세게 테이블에 내려놓는 소리가 뒷테이블에서 들려왔다.
순간 윤해신은 그럴 이유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어째 뒷덜미가 서늘해졌다.
여전히 뒤를 돌아보지 않으며―뒤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아니라고 손을 내젓는다.
“아냐, 인마. 누가 누구랑 사귀어. 재영이 같은 놈이랑 사귀면 몸이 안 남아나. 이놈 성질이 얼마나…….”
“야, 몸이 안 남아난댄다. 몸이. 흐흐흐.”
“그게 아니라――.”
“좀 전에 들어 보니까 뭐, 재영이 애인 없다며. 해신이 넌 있냐?”
순간 윤해신은 입을 다물었다.
타이밍이 안 좋다. 안 좋아도 너무 안 좋다.
있어, 바로 등뒤에――라고 말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하지만.
갑자기, 잊었던 부아가 슬슬 고개를 들었다.
저런 적반하장의 어이없는 놈을 두고, 왜 내가 ‘애인 있어’라고 혼자 절조를 지키는 척해야 하는 걸까.
그놈은 내 속 썩는 것도 모르고 등뒤에서 잘도 떠들며 놀고 있는데.
“――없어.”
두 번 생각지도 않고 대답이 나갔다.
김재영은 테이블에 걸친 손에 턱을 괸 채 재미있다는 듯 눈을 반짝이긴 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싱글 웃으면서 거든다.
“그래, 없지. 윤해신은 애인 없지. ――해신아, 너 나랑 사귈래?”
일순 주변이 조용해졌다.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앉아 있던 동기들은 술에 취해 벌건 얼굴로 그들을 보다가 왁 하고 웃었다.
멋지다, 그래 두 놈 잘 해 봐라, 따위의 말들이 웃음소리와 함께 터져나오는 걸 들으면서, 윤해신은 일순 허를 찔린 얼굴을 했다.
소음에 묻혀 잘 들리진 않았지만, 문득 뒤쪽 테이블에선 다시 한 번 그, 술잔으로 테이블을 내리치는 것 비슷한 소리가 들린 것 같았다. 상관은 없겠지만, 뒷골이 당길 것만 같다.
“야, 야, 농담은 적당히 하고, ――나 화장실 좀.”
어쩐지 이 자리가 몹시도 부담스러워졌다. 아니, 부담스러워졌다기보다는 일단 피하고 싶었다.
어차피 술자리라는 게 잠시만 자리를 비웠다가 돌아와도 화제가 저 멀리 다른 방향으로 가 있기 일쑤라, 잠시 화장실에라도 갔다 오면 뭔가 무난한 화제로 바뀌어 있지 않을까 했던 것이다.
윤해신은 등뒤에 폭탄이라도 둔 것처럼, 가까이 붙어 있는 뒷사람에게 닿지 않도록 신경에 신경을 쓰며 방에서 나왔다.
왁자한 술자리를 빠져나와 화장실로 가서야 겨우 숨을 돌릴 수 있었다.
화장실에서 볼일을 보고 손을 씻으면서 윤해신은 피로라는 두 글자가 뚜렷하게 새겨진 스스로의 얼굴이 비치는 거울을 들여다보며 혀를 찼다.
……제길, 오늘은 왜 이리 일진이 사나운지.
그러지 않아도 싸우고 써늘한 참인데 이런 가게에서 마주쳐서, 것도 바로 등뒤에 앉다니, 정말 빌어먹을 경우다. 재영이 놈은 재미있다고 웃고만 있고.
“빌어먹을.”
입 밖으로 소리 내어 지금의 심경을 그대로 중얼거린 윤해신은 차라리 먼저 자리를 뜨는 게 낫겠다고 생각하며 화장실에서 나섰다.
그래, 몸이 영 안 좋다고 적당히 핑계를 대고 먼저 가게에서 나가자. 이런 골치 아픈 수라장보다 집이 낫다는 건 말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화장실에서 나가 두 걸음도 걷기 전에 그는 발을 멈추었다.
화장실로 이어지는 좁은 길 입구에, 덩치 큰 남자가 팔짱을 낀 채 벽에 기대어 서 있었다. 윤해신에게는 시선도 안 주고 눈앞의 벽만 뚫어지게 노려보는 그는 일부러 그런 것처럼 길을 막듯이 서 있다.
정상헌이었다.
“……길 좀 비켜 주면 좋겠는데.”
내키지 않았지만, 윤해신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얌전히 테이블에 앉아 술이나 마시고 있을 것이지 왜 나와서 길을 막고 있는 건지.
바깥에서 새삼스레 마주치자 다시금 밉살스런 마음이 불쑥 솟구친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이렇게 찬찬히 얼굴을 보고 있으려니 막연하게 부드러운 손이 심장을 어루만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드니, 웃기다.
그러나 복잡스런 윤해신의 심경 이상으로 눈앞의 이 남자는 심사가 언짢은 모양이었다.
단단히 틀어진 목소리로 낮게 중얼거린다.
“애인, 없어?”
일순 숨을 삼켰다.
제기, 그 시끄러운 데에서, 들었구나. 저네 테이블에서 먹고 마시고 놀 것이지 왜 그런 건 다 듣고 그래. 그 술잔 내리치는 소리가 날 때 좀 수상쩍다 싶더니.
“애인, 없다고?”
다시 한 번 물으며 정상헌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없단 말이지……? 라고 한 번 더 중얼거리며 사납게 가라앉은 시선으로 윤해신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윤해신은 말없이 그를 마주보다가 내뱉듯 말했다.
“너한테 애인 여럿 있는 거나 마찬가지로, 나한테 애인이 없다고 해도 이상할 것 없잖아.”
순간 정상헌의 눈빛이 사납게 빛났다. 마치 이글거리는 화를 눌러 참기라도 하는 것 같다.
“나한테 무슨 애인이 여럿 있어!”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시지.”
윤해신은 쌀쌀맞게 중얼거리곤 거칠게 정상헌을 밀치고 나왔다.
화는 나는 모양이지. 웃긴 놈, 저는 여자나 만나며 돌아다니고 나한테 와서 거짓말을 하면서, 그래, 애인이라는 나한테 태연하게 거짓말을 하는 주제에, 내가 애인도 아닌 다른 사람들한테 거짓말하는 게 뭐 그리 큰 잘못이라는 건지.
윤해신이 씨근거리며 방으로 돌아와 자리에 앉자 김재영이 빤히 그를 바라보며 빙글 웃었다.
“화장실 잘 갔다 왔어?”
윤해신은 대답 없이 이놈이 무슨 얘길 하려고 그러나 하는 눈으로 김재영을 마주보았다.
“야, 네 등뒤에 있던 남자, 아무래도 나한테 관심 있는 모양이더라. 너 나간 다음에 날 뚫어져라 바라보던데, 아주 정열적이고 뜨거운 눈빛으로. 거참, 몸 둘 바를 모르겠더만.”
실실 웃으면서 말을 잇는 김재영의 말을 들으며 윤해신은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가끔 이 녀석의 농담에는 따라가기가 힘이 들 때가 있었다. 지금처럼 피곤할 때엔 더 그렇다.
정말로 슬슬 집에나 가야겠다, 라고 생각하며 윤해신이 막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발소리를 거칠게 울리면서 인기척이 다시 등뒤로 다가섰다.
그 순간.
“――아우!”
윤해신의 옆, 문 가까이에 앉아 있던 동기가 갑자기 비명을 질렀다.
무슨 일인가 돌아보니, 왼손을 절레절레 내저으며 오만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마치 뭔가에 왼손을 세게 찍히기라도 한 것처럼.
그리고 그 옆에 정상헌이 사나운 얼굴을 하고 우뚝 서 있었다.
“어으…….”
아파죽겠다는 듯 손을 주무르며, 아무래도 손을 밟힌 것 같은 동기가 흘끔 정상헌을 올려다보았다. 아마 정상헌의 인상이 조금만 더 부드러웠더라면, 왜 남의 손을 밟느냐고 소리소리 질렀을 표정이다.
그러나 정상헌이 워낙 사납게 인상을 쓰고 있어서 차마 그렇게는 못하고, 사과를 바라기만 하는 눈치였다.
윤해신은 약간 눈썹을 치켜올렸지만 자신이 밟힌 것도 아니고, 또 밟은 것도 아니니 이건 자기 일이 아니다. 신경쓰지 말고 얼른 집에나 가자.
그렇게 생각하고, 다시 한 번 가겠다는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한 발 늦었다.
정상헌의 싸늘한 목소리가 먼저 머리 위에서 들려왔다.
“뭐야, 사람 지나다니는데 왜 길목에 손은 두고 그래? 걸려서 넘어질 뻔했잖아, 인마! ――뭐야, 그 눈은. 불만이라도 있어? 엉?!”
손을 밟힌 동기를 사납게 노려보며 그렇게 소리쳤던 것이다.
잠시 주변이 조용해졌다. 대부분이 어이없다는 얼굴로 정상헌을 흘끔거린다.
손을 밟아 놓곤 왜 거기에 손을 두냐니, 이건 누가 들어도 시비 거는 거다.
뭐 이런 놈이 다 있어, 하는 얼굴을 한 동기는, 싸움판을 벌이긴 싫은지 조용히 고개를 돌리고 무시하려 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이 남자는 시비를 걸려고 단단히 작정한 것 같았다.
“왜 대답을 안 해?! 사과를 해야 할 것 아냐, 사과를!”
정상헌이 앉아 있던 테이블의 남자들까지 벙 찐 얼굴로 그를 바라보는 가운데, 손을 밟힌 동기는 정말 어처구니없다는 얼굴을 했다. 그리고 그 옆에서 윤해신은 가겠다는 말을 하는 것도 잊고 입도 다물지 못한 채 정상헌을 올려다보았다.
이놈이 미쳤나, 갑자기 왜 멀쩡히 잘 있는 사람을 갖고 시비야.
어이가 없어 벙하니 바라보고만 있는데, 정상헌은 숫제 시비꾼으로 돌변해 아예 그 동기의 멱살을 틀어쥐고 끌어당겼다.
“사람이 물로 보이냐? 입은 왜 다물고 있어!”
“아니, 이봐요, 지금 무슨――.”
어이없는 얼굴에서 당황스런 얼굴로 표정을 바꾼 동기가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테이블에 앉아 있던 다른 동기들도 일어설 기색을 보인다.
그리고 그 가운데 윤해신은 이를 갈았다.
저놈이 정말로 시비를 걸고 있는 게 저 동기가 아닌 자신이라는 건 불 보듯 뻔하다. 아예 자신의 동창회에 깽판을 놓으려고 작정한 게 틀림없다.
……이 망할 새끼가.
머릿속에서 뚝, 하고 뭔가가 끊기는 것 같았다.
윤해신은 서슴없이 일어서 동기의 멱살을 쥐고 있는 정상헌의 팔을 세게 쥐었다.
“손 놔. 뭐하는 짓이야.”
아까부터 얌전히 술만 마시고 가끔 웃고나 있던 윤해신이 나서자 다른 동기들은 더더욱 영문을 잡을 수 없는 모양이었다.
정상헌은 잘 걸렸다는 듯 순순히 동기의 멱살을 놓았다. 그리고 오호라, 하는 얼굴로 윤해신을 향해 선다.
“왜 방해해. 내가 네놈 손 밟았어? 저놈 손 밟았지, 네놈 손 밟았냐고. 왜 방해야, 방해가!”
“왜 멀쩡히 있는 사람한테 시비야, 너는!”
“뭘 멀쩡히 있어! 저놈 손 때문에 난 걸려 넘어질 뻔했다고!”
“그 육중한 몸이 고작 손 하나 때문에, 잘도 걸려 넘어지겠다!”
가게 안은 삽시간에 시끄러워졌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두 사람이 가게 안을 시끄럽게 만들고 있었다.
정상헌의 일행은 아까부터 계속 어이없다는 얼굴로 보고 있을 뿐이었고, 윤해신의 동기들 역시 얌전히 잘 있던 윤해신이 나서서 날뛰자 눈을 휘둥그레 뜨고 구경만 하고 있었다.
“이 가게에는 왜 와서 이러고 있어.”
“누가 먼저 왔는데 그런 말을 하고 있어, 맘에 안 들면 늦게 온 네놈이 나가야지.”
“아까부터 뒤에 앉아서 시끄럽게 떠드는데, 기분이 좋게 생겼어?!”
“늦게 온 놈이 자리 바꾸라니까 왜 자꾸 헛소리야! 네놈은 한국어도 못 알아들어?!”
“한국어 못하는 한국인이 어딨어? 말도 안 되는 말은 왜 하는데!”
“한국어 못하는 한국인이 왜 없어, 교포들은 다 할 줄 알어? 아니, 너만 해도 국어 제대로 모르잖아, 인마!”
……그리고, 옆에서 넋 잃고 구경하는 사람들도 금세 알 수 있도록 싸움은 점차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손을 밟았다――라는, 그마저 어처구니없는 애초의 이유는 온데간데없고 누가 들어도 온당치 않고 정신없는 이유들만이 나열된 입씨름이 이어지고 있었다.
마치, 둑이 터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여태껏 줄곧 말도 거의 없이 서로 싸늘하게 집안을 왔다갔다 거리다가 간혹 몇 마디 부대낀 정도가 고작이었던 게, 마치 바늘구멍 같은 계기로 둑이 일시에 터진 것 같았다.
그렇지 않으면 이렇게 말도 안 되는 이유로 싸울 리가 없다, 라고, 싸우는 와중에도 어이없이 생각했다.
정상헌은 답답하고 울화가 치미는지 결국은 주먹을 치켜올렸다.
“어이구, 이걸 그냥!”
“세간 일체 갈아치우고 나니까 이제 세간은 부수기 싫지? 그래, 이번엔 사람 쳐서 입원을 시켜 보지 그래, 정상헌!”
차마 휘두르지는 못하고 어깨 부근까지 올린 주먹을 틀어쥐고만 있는 정상헌에게 윤해신은 이를 갈면서 소리쳤다.
그리고 그제야 사람들은 이 급작스럽고 황당스러운 다툼을 벌이는 두 사람이 예전부터 아는 사이라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다.
말려야 하나 말아야 하나 눈치를 보던 사람들이 고개를 갸웃하며 기묘하게 인상을 찌푸리는 가운데, 어느 순간 커다란 웃음소리가 터졌다.
싸움 고함소리를 묻어 버릴 정도로 유쾌하게, 더없이 즐겁다는 듯 터진 웃음소리는 테이블 한쪽에 태연하게 앉아 턱을 괸 채 재미있게 구경하고 있던 김재영이었다.
“이야……, 집안싸움도 구경하니까 재밌다, 윤해신. 같은 공기 마시고 사는 놈들이 그렇게 입씨름만 해서 돼? 주먹도 좀 오가고, 유혈낭자한 광경도 벌어지고 해야 더 긴박해지지.”
천연스레 웃으며 말하는 김재영은 거기까지만 말하곤 본의 아니게 자리에서 일어나야만 했다.
윤해신은 내버려두고 테이블을 밟고 넘어선 정상헌이 김재영의 멱살을 쥐고 일으켜 세웠던 것이다.
“예전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 네놈 자식.”
“어이어이어이, 왜 너네 집안싸움에 날 끌어들이고 그래? 너네 가족끼리 싸워, 너네 가족끼리, 난 타인이라구.”
두 손 들고 어깨를 으쓱하는 김재영을 일언반구 없이 후려갈기려는 정상헌을 막은 건, 윤해신이었다.
“이건 너랑 내 문젠데 왜 남한테 주먹질을 하려 그래, 정상헌!”
버럭 소리를 지르자 정상헌이 멈칫했다. 그리고 천천히 윤해신을 돌아본다.
“남?”
“그럼 남이지, 아냐?”
“그 말은, 너랑 나는 남이 아니란 소리네.”
“그럼 언젠 남이었어!”
소리를 버럭 지르고 나서야 윤해신은 어라, 내가 올바로 대답을 했나, 싶었지만 그런 걸 따질 겨를도 없었다.
정상헌은 잠시 윤해신을 노려보다가 말없이 김재영의 멱살을 쥐고 있던 손을 놓았다. 그리고 테이블을 건너 다시 윤해신의 앞으로 왔다.
“말 잘했다. 너 나랑 남 아닌 사람끼리 얘기 좀 해 보자.”
나직하게 말을 던진 정상헌은 윤해신의 팔뚝을 꽉 잡더니 막무가내로 가게에서 끌고 나가려 했다.
“정상헌, 이거 놔! 인마, 놔!”
“닥치고 따라와, 애인 없다며! 너 애인 없으면, 저 안에 들어앉은 놈들 중에 네 애인 있는 것도 아닐 텐데 뭘 그렇게 저기 붙어 있고 싶어해! 닥치고 따라와!”
“네놈은 여자들한테나 가 볼 것이지 왜 여길 와서 난리를 치고 있어! 놔!”
“못 놔!”
마치 유치원생과 흡사한 수준의 싸움으로 전락해 버린 말다툼을 하면서, 윤해신은 완력으로 자신보다 월등하게 앞서고 있는 정상헌의 손에 의해 가게 밖으로 질질 끌려 나갈 수밖에 없었다.
가게 안에 남은, 두 사람의 나머지 일행들은, 여전히 폭풍이 휩쓸고 간 뒤에 남겨진 것처럼 어이없고 황당한 얼굴로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이었다. 그중 연신 태연하게 웃고만 있던 유일한 한 사람은 그들이 가게에서 모습을 감춘 후에도 한참을 재미있다고 웃고 있다가 슬슬 일어서 윤해신이 두고 간 소지품 따위를 챙기기 시작했다.
“언제까지 끌고 갈 거야, 이것 좀 놔 봐. ――이목이란 걸 좀 생각해 봐, 이 멍청아!”
가게에서 끌려나와, 골목골목을 돌아 나와 큰길로 나선 후에도 팔뚝을 꽉 잡고 놓아줄 생각을 않은 채 성큼성큼 걸어가는 정상헌의 뒤를 따라가다가 이윽고 윤해신이 혀를 차며 말했다.
조금 목소리를 줄이고 말하다가, 그래도 들어먹을 생각을 않아 다시 소리를 높였다.
우뚝, 정상헌이 걸음을 멈추었다. 그리고 고개를 돌렸다.
못마땅한 듯 입을 굳게 다물고 마뜩찮은 눈으로 지그시 윤해신을 내려다보는 게 심사가 단단히 비틀어진 표정이었다.
그래도 가게 밖으로 나와 찬바람을 맞자 조금 제정신이 돌아온 윤해신은, 거기서도 소리소리 지르며 싸울 생각은 요만치도 들지 않아 마찬가지로 입을 다문 채 가만히 그를 마주보았다.
한참 후에야 정상헌이 불쑥 말했다.
“주차장, 저쪽이야.”
윤해신은 혀를 찼다.
“술 마시고 차 운전하게? 그냥 택시 타고 가.”
이번에는 윤해신이 정상헌의 팔을 잡고 질질 끌고 갔다. 그러나 그조차 몇 걸음 가지 않아 발을 멈추었다. 멍하니 앞만 바라보고 있던 윤해신이 얼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제기랄……, 지갑 두고 왔다.”
“멍청이.”
“너 때문이잖아! 네놈이 마구잡이로 끌고 나오는데 지갑 챙길 틈이 어딨어!”
다시 소리가 높아졌다.
무시무시한 눈으로 윤해신은 뚫어져라 정상헌을 노려보았다. 정상헌도 마찬가지였다.
……갑자기 기운이 빠질 것 같았다.
이런 식으로 다투는 감정소모가 얼마나 신경을 피곤하게 하는지 윤해신은 스스로의 몸으로 절실하게 느꼈다.
정상헌의 팔을 놓고 허리를 굽혀 자신의 무릎을 잡으며 후우, 하고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발끝만 보며 숨을 고르고 있는데, 머리 위에서 불쑥, 부루퉁한 목소리가 들렸다.
“가끔 난 내가 바보 같아진다고.”
“…….”
너 바보 맞아, 라고 말하려 했지만 귀찮아서 그만뒀다.
“네놈이랑 같이 살기 전까지만 해도 나 제법 괜찮은 인간이었어. 누구한테 휘둘리는 일도 없고 함부로 화내거나 소리 지르지도 않고, 마이페이스로 충분히 잘 살아가고 있었다고. 그런데.”
불쾌한 듯 한마디 한마디 중얼거리던 정상헌의 목소리가 도중에 끊겼다.
윤해신은 고개를 비스듬히 틀어 그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여전히 입을 꾹 다물고 사나운 표정으로 가만히 윤해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표정이 어두웠다.
“……제길. 그래, 한심해서 말하기 싫었지만, 네놈 말 한마디 손짓 하나에 무참하게 휘둘리고 있잖아. 내가 얼마나 바보 같은지 알아? 심지어는 형님들한테 끌려 술집에를 가도 여자 대신 옆에 너나 앉아 있으면 좋겠다는 따위의 생각이나 하고 있다고! 빌어먹을! 계집애들이 들러붙어 봐야 귀찮기만 한 게 너라면 괜찮은데, 네놈은 그렇게 답삭 안겨 주진 않지, 완전히 지금 내 인생, 너한테 휘둘리다가 볼 장 다 보는 거란 말이다!”
부아가 치민 듯 점점 소리가 커지는 정상헌을, 윤해신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고 그대로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그러다가 천천히 허리를 펴 그 앞에 똑바로 섰다. 시선은 한 번도 떼지 않고.
이윽고 미간에 약간 주름을 잡으며 윤해신이 중얼거렸다.
“말은 잘도 한다, 정상헌. 딴사람이랑 노닥거리다가 내게 와서는 천연덕스럽게 좋아하느니 뭐라느니 하고, 그러고선 또 태연하게 다른 사람에게 가는 주제에 휘둘리긴 뭘 휘둘려.”
“――내가 간 게 아니라, 그쪽에서 온 거라구!”
“단란주점이 너한테 걸어오냐?”
“할 수 없잖아, 형님들이 종종 찾곤 하는 게 거긴데!”
버럭 소리를 지르곤, 정상헌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속이 답답해 견딜 수 없다는 듯 한숨까지 푹 내쉰다.
윤해신은 묘한 눈으로, 고개를 약간 꼰 채 정상헌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사람을 그렇게 멋대로 휘두르는 주제에, 애인은 없다는 따위의 말이나 하고. ……그럼 난 뭔데.”
문득 정상헌은 윤해신을 향해 돌아서며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대답 안 하면 자기도 더 이상 말 안 하겠다는 듯 입을 다물고 시선만 맞추고 있는 그를, 윤해신도 한참 바라본다.
휘둘리는 게 누군데 제가 휘둘린다고 투정을 부리고 있어.
인생 볼 장 다 본 건 또 누군데.
네놈 때문에 나는 내가 정신분열이 아닌가 심각하게 의심하고 있는 중이라고.
나도 너 만나기 전엔 제법 괜찮은 인생이었어.
하고 싶은 말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고, 실제로 마구 쏘아 주고 싶은 마음도 굴뚝같았다.
그런데도 마음속의 무엇인가가 말하지 말라고 영악하게 속삭인다.
한참이나 동상처럼 그렇게 대치한 후에야 윤해신은 어깨를 움츠리며 고개를 돌렸다.
그래, 애인 없어, 난. 여자를 옆에 둔 채 나를 생각한다고 하는 그런 애인 같은 거, 난 없다.
…….
“대체 너, 날 뭐라고 생각하고 있냐구…….”
한참을 기다려도 대답이 없자, 정상헌은 조금 줄어든 목소리로 희미하게 풀죽은 듯 중얼거렸다.
그 목소리를 듣자 윤해신은 또 가슴이 저릿해지고 만다.
그래서야 꼭 내가 어린애를 괴롭히기라도 한 것 같잖아.
윤해신은 이맛살을 찌푸린 채 한참 다시 정상헌을 바라보았다. 정상헌도 고개를 숙인 채 시선만 들어 윤해신을 쳐다본다.
그러는 사이에 점차 추워졌다.
그도 그럴 것이, 코트도 안 입고 가게에서 끌려나와 찬바람만 맞고 있었으니 당연한 일이다.
우선 자리를 옮기고 싶은데, 대답을 안 했다간 이놈 한 걸음도 움직일 것 같지 않고.
윤해신은 잠시 생각하다가 한마디 중얼거렸다.
“……마누라.”
순간 정상헌의 눈이 두 배로 커졌다.
……뭐?
그렇게 되묻는 표정이었다.
그 얼빠진 듯, 멍한 듯, 어이없는 듯, 당황한 듯한 표정이 갑자기 몹시도 마음에 들어, 윤해신은 별 생각 없이 불쑥 말한 스스로의 대답에 만족해버렸다.
“자기는 바깥으로 쉴 새 없이 싸돌아다니는 주제에, 내가 조금만 뭘 할라 치면 금방 눈을 새파랗게 뜨고 바가지 긁는 마누라. ……딱이네.”
그렇게 말하며, 윤해신은 문득, 정말 그럴지도, 라고 생각했다.
바람피우는 것 비스무리하게 돌아다니면서, 말은 번드르르하게 너 아니면 안 돼, 다른 사람이랑 있어도 너밖에 생각이 안 난다고, 같은 말이나 하는 것에 무지무지하게 화가 났었는데, 그래 놓고서 오히려 뭘 잘했다고 제가 땍땍거리는 게 도무지 용서가 안 되었는데, 그게 한바탕 뒤집어엎고 나니까 웃기지도 않을 정도로 어이없이 풀려 버린다.
그렇게 속 썩어가며 끙끙거렸던 게 허무할 정도로.
뭐 싸움은 물 베기라는 게 갑자기 생각났다.
――집안싸움에 왜 남을 끌어들여. 너네 가족 문제는 너네끼리 해결해라.
김재영이 싱글거리면서 중얼거린 말이 떠오른다.
윤해신은 찬바람이 옷깃 사이로 스며들어 더 이상 그 자리에 서 있을 마음이 들지 않아 어깨를 움츠리며 휙 돌아서 버렸다.
도로 가게로 돌아가서 내 지갑을 가지고, 코트를 입고, 집으로 가야겠다.
아, 제기랄, 하지만 그 난리를 피워 놓고 무슨 얼굴로 거길 들어가나.
인상을 찌푸리고 투덜거리며 앞장서 걷는 윤해신의 뒤를 서둘러 따르며, 정상헌은 우물쭈물 중얼거렸다.
“야, 잠깐, 마누라는 좀 그렇고, 차라리 서――.”
“싫으면 아예 관두고. 게다가 너, 아직 제대로 사과 안 했어.”
“――그, …………미안. 야, 근데 역시 마누라보단…….”
“싫으면 관두라니까.”
“……!!!”
짐짓 쌀쌀맞게 중얼거리고 종종걸음으로 가게로 돌아가며, 윤해신은 스스로 끌어안은 몸을 부르르 떨며 한숨을 내쉬었다.
앞으로 몇 번이나 싸우게 될지.
함께 살면서 계속 안 싸우고 살 수는 없는 법이다. 사람이 같이 살면서 다툼이 없다는 건 이미 서로에게 완전히 흥이 떨어졌거나 마주치지도 않는다는 경우밖에 없겠지.
……젠장. 그렇다면 앞으로 줄곧 싸우고 풀고 싸우고 풀고, 그렇게 지내야 한다는 거잖아.
윤해신은 걸음을 늦추고 뒤에서 따라오는 정상헌에게 흘끗 시선을 주었다. 정상헌도 따라 걸음을 늦추며 의아한 시선을 준다.
뭐, 어쩔 수 없겠다. 앞으로 계속 같이 지내게 된다면, 거기에 따르는 부수적인 충돌 정도야 기꺼이 받아들이는 수밖에.
그런 식으로 계속 같은 공간에서 서로의 삶을 함께 영위해 갈 수 있다면.
윤해신은 휙 돌아서 다시 걸음을 옮겼다. 다시 뒤를 쫓아오는 발소리가 들린다.
찬바람이 어쩐지 조금 상쾌하게 느껴져 살짝 웃었다.
“야, 근데 마누라라니―….”
“…….”
“어이……?”
“싫으면 말래두.”
“야……. ……에이 씨……, 알았다, 알았어! 대신 너, 두 번 다시 어디 가서 딴 놈이랑 놀 생각 하기만 했단 봐라!!”
“네 앞가림이나 잘 해…….”
[같은 공기 마시기 完]